성의 변증법
[1]"알찬 책이다. ...《성 정치학》 보다 더 강력하고, 더 반박할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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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메인 그리어(G.Greer), 《여성, 거세당하다》 의 저자
1. 소개 및 출간 배경
본서는 '''여성 억압 문제를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숙명에서 찾고, 여기에 기초한 가부장제를 철폐하고 이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래디컬 페미니즘의 대표작'''이다. 본서가 출판되던 1970년에는 저메인 그리어의 《여성, 거세당하다》, 케이트 밀렛(K.Millett)의 《성 정치학》 이 함께 출간되었으며, 이들 모두 래디컬 페미니즘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3대장 취급을 하기도 한다. 물론 세 권의 책들은 모두 포인트가 제각기 다르다. 그리어가 자신의 책에서 여성들의 성적 에너지가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받는다고 주장하고, 밀렛이 그 억압의 주체인 가부장제는 무슨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이 아니며 남/여성성은 충분히 철폐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파이어스톤은 본서에서 가부장제를 철폐한 이후 과연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를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제시했다는 차이가 있다.
본서는 그 어떤 논자들보다도 훨씬 더 "래디컬" 하면서도, 다른 래디컬 페미니즘의 주요 주장들과 '''사뭇 달라지는 지점들'''도 존재한다. 우선, 다른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신명나게 비판을 가한 반면, 파이어스톤은 의외로(?) 정신분석학이 꽤나 그럴듯한 설명의 체계이며, 단지 정신분석학자들이 여성억압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론이 불필요하게 복잡해지고 성차별적으로 오도된 것이라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다른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젠더에 대해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본 반면, 파이어스톤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물학적 역할을 지목함으로써 자의로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essentialism)의 편에 섰다는 것. 그 외에도 어린이라는 개념과 공교육에 대한 파이어스톤의 관점은... 후술하겠지만 현대의 가장 극단적이라는 페미니스트들도 "아직 인류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고 느끼며 혀를 내두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과격하다. 아무튼 본서가 "래디컬" 하기는 하지만, 그 주요 주장들이 래디컬 페미니즘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은 아니므로 유의.'''
국내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대중적으로는 흔히 밸러리 솔라나스나 SCUM 선언문 같은 난폭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이고, 실제로 당시의 여러 페미니스트들이 그런 활동을 두둔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 이 과격했다면, 파이어스톤은 '사상' 이 과격했기에 래디컬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본서에서 제시하는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보면 '''"위험한 생각들" 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가문과 족보와 핵가족과 결혼이 완전히 사라져서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사회. 누가 누구의 엄마 아빠고 누구의 아들 딸이라는 개념도 없는 공동육아의 사회. 남녀 모두 어떠한 전통적 금기도 없이 보노보처럼 자연스럽게 즐기는 성생활. 아이를 갖고 싶으면 무조건 체외수정해서 인큐베이터로 길러내는 남녀들. 학교도 공교육도 없고 어린이라는 개념도 없어서 어릴 때부터 각 분야 종사자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도제식 직업교육과 아동 노동(!). 심지어 어린이들에게도 전격적으로 장려되는 성생활(!!).[2] 만인에게 있어서의 성생활이라는 개념 자체의 해체까지... 본서에서 "사이버네틱 코뮤니즘" 이라고 이름붙인 이 래디컬 페미니즘의 이상향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성이건 뭐건 억압적인 것은 가부장제의 잔재니까 전부 없애버려라"''' 라고 할 수 있겠다. 남성들 전부 잡아 죽이려고 들어서 래디컬한 게 아니라,[3] 그 생각이 너무 위험해서 (점잖게 말해) 래디컬하다는 수식어가 붙은 것. 한국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래디컬 페미니즘의 이미지와는 꽤나 다른 셈이다.[4]
이쯤되면 이 파이어스톤이라는 양반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할 수도 있는데, 출판사 및 역자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이 인물은 정통파 유대인 혈통으로서 강성 래디컬 노선을 따르는 "New York Radical Women", "The Redstockings", "New York Radical Feminists" 조직의 창설자이자, 마찬가지로 래디컬 페미니즘 저널인 《Notes》 의 편집자 이력을 지녔다. 또한 저자는 시카고미술대 회화 전공자로, 불과 '''25세의 나이에''' 본서를 저술함으로써 단숨에 페미니즘 제2물결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다. 파이어스톤은 또한 미스 아메리카 대회 반대운동을 하면서 "전통적 아름다움을 매장하라" 구호를 외쳤고, 자신이 창설한 조직을 소집단화하여 권력위계를 제거하려 했으나, 여기서도 갈등이 발생하여 결국 조직을 떠났다고 한다.[5] 그러나 이후 저자는 편집증적 조현병(paranoid schizophrenia)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그 원인으로는 친오빠의 자살 사건, 그리고 부모와의 가치관 차이로 인한 다툼 끝에 결국 절연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1990년대 중엽에 잠시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지만,[6] 세기가 넘어가며 다시 병세가 악화되다가, 결국 2012년에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가족들끼리 조용히 정통 유대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나, 한 달 후에 페미니스트들끼리 모여서 작은 추모식을 열고 저자가 생전에 거주하던 아파트를 작은 기념관처럼 꾸몄다고.
재미있게도 파이어스톤의 일대기를 보다보면 대중매체와 서브컬처에서 통용되곤 하는 '''이해받지 못해 미쳐버린 천재(…)'''의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 따라가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가족들뿐만 아니라 세상이 쫓아갈 수 없을 만큼 혼자 저 멀리 치고나간 사상, 그리고 이로 인해 벌어지는 갈등과 고립,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는 소외감, 그 와중에도 거침없는 필치로 써내려 간 역작의 발표,[7]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 정신병원에의 입원,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순간순간 드러나는 지성,[8] 그리고 자살로 의심되지만 이유는 알 수 없는 찜찜한 마지막까지... 하여간 이런 흥미진진한(?) 뒷얘기 때문인지, 파이어스톤의 사후에 저 《백래시》 의 저자로 유명한 언론인 수전 팔루디(S.Faludi)가 《New Yorker》 에 기고문을 써서 파이어스톤의 생애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원서는 2003년에 한 차례 개정판이 나왔으며, 당초 "결론" 부분을 10장으로 바꾸고 내용을 수정 및 보강했다. 그리고 역서의 경우 1983년에 풀빛출판사에서 한번 번역한 뒤 절판되었다가, 2016년에 꾸리에북스에서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그 당시 서슬퍼런 시대상을 고려하면, 본서가 번역되어 나오는 데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경이로울 정도.
2. 목차 및 주요 내용
- 1장: 성의 변증법
- 2장: 미국의 페미니즘
- 3장: 프로이트주의: 오도된 페미니즘
- 4장: 아동기를 없애자
- 5장: 인종차별주의: 남성가족의 성차별주의
- 6장: 사랑
- 7장: 로맨스 문화
- 8장: (남성)문화
- 9장: 문화사의 변증법
- 10장: 궁극의 혁명: 요구와 사변
- 변증법적 유물론의 아이디어를 확장시켜서 양성관계와 과학사회학에 함께 적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 경제, 문화의 미래를 검약적 이론으로 예측할 수 있다.
- 보수주의적 페미니즘과 오도된 정신분석학, 여성을 망각한 흑인 인권운동, 로맨스를 노래하는 대중매체들은 여성들의 생물학적 억압을 전복시키지 못한다.
- 그러나 마침내 페미니즘 혁명이 성공할 때, 생물학적 핵가족제, 아동기, 공교육, 임신과 출산은 모두 해체될 것이고, 사이버네틱 코뮤니즘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2.1. 챕터별 내용 정리
각 챕터의 내용들을 각각 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하단에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우선 파이어스톤이 채택한 방법론으로서 변증법이 어떻게 논의되는지 살펴보고, 다음으로 파이어스톤이 어째서 정신분석학에 대해 호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한 뒤, 이성 간의 사랑과 로맨스가 래디컬한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되는지 짚어보고, 마지막으로 파이어스톤이 가부장제의 타도를 위해서 제안하고 있는 과격한 설명들을 소개하겠다.
- 1. 성의 변증법
- 2. 미국의 페미니즘
- 3. 프로이트주의: 오도된 페미니즘
- 4. 아동기를 없애자
- 5. 인종차별주의: 남성가족의 성차별주의
- 6. 사랑
- 7. 로맨스 문화
- 8. (남성)문화
- 9. 문화사의 변증법
- 10. 궁극의 혁명: 요구와 사변
2.2. 성과 문화의 미래: 변증법의 채택
본서가 다른 유사한 책들과는 달리 "미래에는 우리는 이 길을 지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다!" 라는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자신의 접근 방법론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의 변증법적 관점'''을 채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역사적 유물론을 "성의 변증법 안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의 궁극적 원인과 가장 큰 원동력을 찾는 역사의 과정을 보는 방식"(p.27)이라고 정의하고, 세계는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힘들의 대립적 작용 및 반작용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마르크스주의가 통찰력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부분적 현실일 뿐이라고 여기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기존에는 설명하지 못했던 것을 설명해 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저자는 성별 계급(sex class), 즉 '''남녀 간의 계급투쟁'''의 문제를 꺼내든다. 분석에 있어서 생산수단(the means of production)뿐만 아니라 생식수단(the means of reproduction)까지도 고려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남녀 간의 노동분업이 계급 간의 노동분업보다 역사적으로 뿌리깊은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종속적인 계급으로 밀려나게 된 이유는 어디까지나 '''"남녀는 아예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르다"''' 는 성별분화(sexual division)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의 논지는 거의 오컴의 면도날을 연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제2의 성" 의 지위로 밀려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서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도입했지만, 그 결과 쓸데없이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이 되고 말았다. 저자 왈, 그 이유는 보부아르가 철학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많아서라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역시 성별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파악했지만 성적 억압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놓침으로써 자꾸 에로스니 타나토스니 하는 불필요한 선험적 논리들을 애드혹으로 덧붙여야 했다. 그러나 계급적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간명하고 명쾌하며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다. '''"애초에 양성의 신체 자체가 서로 다르잖아? 그럼 여기서 성차별이 시작됐다고 보는 게 가장 깔끔하지 않음?"'''
이처럼 생물학적으로 남녀가 서로 다른 조건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가부장제가 생겨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가부장제가 제 아무리 "타고 태어나는 몸" 에 근거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힘은 자연의 한계를 충분히 넘어서서 "합"'''(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 물론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여성들 본인들이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게 파이어스톤의 요청이다. 이렇게 본다면 페미니즘이 임하는 성별 계급투쟁의 전쟁터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제적 계급투쟁의 전쟁터와 닮은 것이 꽤나 많다.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계급의 철폐를 위해 노동자들의 봉기에 더하여 생산수단점유를 제시하듯이, 저자도 성별계급의 철폐를 위해 '''여성들의 봉기'''에 더하여 (기술적 진보를 바탕으로 하는) '''생식수단점유'''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목표로서 계급특권 철폐 외에도 계급구분 철폐를 제시하듯이, 페미니즘 혁명도 그 최종목표로서 '''성별특권 철폐'''와 함께 '''성별구분 철폐'''의 이상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구분이 의미 없는 사회를 꿈꾸듯이, 페미니스트들도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의미 없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저자는 빈부격차를 계급적 관계로 설명하는 것에 빗대어 성차별 역시 계급적 관계로서 설명한 뒤, (그리고 성차별은 생물학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훨씬 뿌리깊은 것이라고 주장한 뒤) 본서의 한참 뒤편에서 이번에는 문화의 발전 역시 변증법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저자는 '''문화의 발전양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문과와 이과를 두 대립항으로 선정한다.''' 더욱 흥미로운 (어쩌면 기막힌) 것은, 저자는 내친김에 아예 '''문과=여성, 이과=남성'''의 등식까지 세웠다는 것. 우선 저자가 문화사를 고찰하기 위해 정의한 바에 따르면, 문화란 "생각할 수 있는 것(the conceivable)을 가능한 것(the possible)으로 실현하려는 인간의 시도"(p.249)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하는 것, 즉 '''의식하고 상상하는 것'''은 인간의 예술성 내지는 문과적인 측면을 의미하며, 현실화가 당장은 불가능할지라도 상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9] 그리고 이 상상을 현실화하는 수단 중 하나가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이과적인 측면, 즉 "테크놀로지" 가 되는 것이다.[10] 이처럼, 관념과 현실 사이에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개 전자가 후자를 앞질러 간다. 그리고 '''후자(현실)로 하여금 전자(관념)를 따라잡게 만들려는 힘이 바로 문화다.'''
'''관념으로서의 문화적 반응'''이 시, 그림, 철학, 신학, 음악 등을 통해 현실로부터 가상의 이상세계로 넘어가는 미학을 추구하고, '''과학으로서의 문화적 반응'''이 그 현실의 작용을 지배하여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을 추구한다면, 그 중 어떤 하나가 무조건 더 낫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인가? 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변증법적인 관점에서, '''두 문화적 반응들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남녀가 범주적으로 분리되고 여성들이 억압 받듯이, 인간 문화에서도 문과적인 측면과 이과적인 측면이 범주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인문학의 위기" 가 찾아왔다.[11]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남성들이 가부장적 특권을 누리듯이, 현대의 과학기술은 길어봤자 수백 년의 역사 속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어냈다.[12] 이런 현실 속에서, 저자는 "다음 문화적 혁명에서 우리가 가질 것은 남성(테크놀로지 양식)과 여성(미학 양식)의 재통합"(p.276)이라고 말하면서 '''이 둘을 합쳐야 한다'''고 제안한다. (상기했듯이, 특권집단을 "때려잡자" 거나 특권을 "빼앗아오자" 가 아닌, 양쪽을 서로 합쳐서 특권적 구조를 없애버리자는 주장을 하는 걸 볼 수 있다.)
저자는 문화를 "인간의 시도" 로 정의하였으므로, 둘을 합치자는 것은 곧 모든 '''생각하는 것을 별도의 노력 없이 완벽하게 실현으로 옮길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에 해당한다. 즉, 이상세계에서는 여성적인 측면(문과)이 상상한 것을 남성적인 측면(이과)이 실현함으로써,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성취되었으므로, 문화라는 대리물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지게 된다. 문화가 소멸된 사회에서는 더 이상 자아가 본능을 통제하고 지연시킬 필요 없이, 존재 자체, 행동 자체, 경험 자체로부터 본능적 만족과 기쁨이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다. 보다시피 파이어스톤이 말하는 기술이 상상을 따라잡는 사회, 혹은 "아무리 상상의 날개를 펼쳐도 기술이 그 날아오르는 상상을 앞질러가는 사회" 는 (물론 서로 같지는 않지만) 현대의 일부 지식인들이 설파하는 소위 기술적 특이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덜 거창하게(?) 저자의 생각을 다시 풀어본다면, 문화의 여성적 측면과 남성적 측면을 융합시킨다는 말은, 곧 인문계와 여성적 측면이 연결되지 않고 이공계와 남성적 측면 역시 연결되지 않게 한다는 정도의 의미도 될 수 있다. 과학자들은 흔히 권위적이고 둔감하며 위압적인 등 남성적으로 형용되고, 예술가들은 신경질적이고 불안하며 편집증적인 등 여성적으로 형용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예술적인 과학자들' 과 '과학적인 예술가' 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자의 요점은 무턱대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찬양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예술과 과학기술이 서로 구분될 수 없는 형태로서 발전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2.3. 프로이트는 은유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 에서 포문을 열고, 케이트 밀렛이 《성 정치학》 에서 십자포화를 퍼붓고, 베티 프리댄이 《여성의 신비》 에서 지원사격을 하는 동안, 정신분석학은 페미니즘 세력의 파상공세에 의하여 "반동적 사상", "여성억압과 성차별주의의 온상" 이라는 엄청난 악평에 시달렸다. 실제로 남근 선망(penis envy)과 같은 이론들은 여성들에게 공정하지 않다고 여겨져서 현대에는 후학들에 의해 다양한 개선과 수정이 모색되어 왔지만, 적어도 1960년대에 대해서라면 정신분석학은 정말로 엄청난 대중적 인기와 학술적 영향을 끼친, 그야말로 시대정신과도 같은 학문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페미니스트들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공격 역시 격렬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정신분석학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어떤 '''통찰의 힌트'''를 얻기도 했고, 나중에 이들은 들뢰즈와 가타리, 라캉, 크리스테바 등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조류를 따라서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의 인식론을 연결해 갔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 파이어스톤도 정신분석학이 섹슈얼리티를 의제화했다는 점에서 호평하는 인물 중 하나였다."프로이트는 전 대륙과 문명의 상상력을 선의로 사로잡았다. 비록 표면상 일관성이 없고 비논리적이거나 '빗나갔지만', 그의 계승자들은 신중한 논리와 실험, 수정을 함에도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프로이트주의는 무척이나 비난할 만하지만, 프로이트가 현대 삶의 핵심적인 문제인 섹슈얼리티를 파악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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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70 (강조표시는 원서에 존재)
저자는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이 실상은 '''같은 시대적 배경과 뿌리를 갖고,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저자는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이 공유하는 "토양" 으로서 빅토리아 시대를 꼽고 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만들기 시작하던 당시의 사회문화 속에는 페미니즘이 이제 막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시절의 문학작품들에서도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여성상들이 종종 나타났는데, 이는 그 당시에 페미니즘이 정말로 중요한 의제로 여겨졌기 때문임을 의미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페미니즘은 사회적 동요를 일으키는 사상으로 취급되었으며,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페미니즘이 일으킨 사회적 동요의 문화적 산물'''에 가깝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같은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기에 페미니즘의 편에 섰고, 어떤 이들은 저렇게 생각했기에 정신분석학의 편에 섰을 뿐이지, '''동시대성이라는 역사적 조건'''만큼은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다양한 이론체계 역시, 저자는 그것이 "순수한 과학" 으로 자칭했기에 오해받을 뿐이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만한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 은유의 한 종류로 다시 읽어보면 '''의외로 통찰력이 있는''' 지점들이 꽤 있다고 본다.[1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자. 무조건적인 부성애와 무조건적인 모성애 사이에서 아들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생물학적 핵가족이라는 제도 속에서 가족간에 존재하는 권력의 위계가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걸 굳이 초자아가 어떻고 하면서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이번에는 '''남근 선망'''을 보자. 어린 소녀는 아직 2차 성징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의 굴곡 있는 성인 여성으로서의 몸에 대해 이질감을 느낀다. 오히려 이들은 또래의 어린 소년들의 밋밋한 몸이 (어머니의 몸에 비해) 자신과 훨씬 비슷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걸 굳이 소녀들이 남근을 부러워한다면서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근친상간 금기'''를 보자. 누구나 자신보다 권력이 강한 자를 지배하고 싶은 생각은 한번쯤 하게 마련이다. 정말로 그렇게 하면 권력구조가 무너지기에 금지될 뿐이다. 그걸 굳이 부모에 대한 리비도적 욕망으로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런저런 복잡한 이론들 다 배제하고 이렇게 은유적으로만 읽는다면, '''의외로 그 설명이 전보다 훨씬 페미니즘에 가까워지는 걸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새로운 질문이 떠오른다. 정말로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이 그렇게나 서로 비슷하다면, 어째서 정신분석학은 그 시대의 대중과 전문가들 모두에게 환영받았던 반면,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거북하고 불쾌한 "위험한 사상" 의 취급을 받게 된 것인가? 파이어스톤은 프로이트 역시 처음에는 거부당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쉽게 말해, "성(性)을 연구한다고? 그것도 다섯 살도 안 된 갓난쟁이 어린애들의 성욕을? 이런 미친 변태 소아성애자 같으니!" 취급을 한때 받기도 했다는 것. 그러나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 여성들은 분명 섹슈얼리티에 관련하여 무언가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고, 이들에게 '''누군가는 적절한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수요'''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은 여기서 페미니즘과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이 당신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라면서 '''사회전복적인 메시지'''를 보내어 세간에 위협을 가한 반면, 정신분석학은 "자신의 성적인 에너지를 기존의 성 역할에 최대한 맞추세요" 라면서 '''사회순응적인 메시지'''를 보내어 세간을 안정시켰다는 것이다. 불만의 원인을 사회에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리니, 억압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단비 같은 진단'''을 내리면서도 '''우리 사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뿌듯함'''까지 동시에 주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신분석학의 이러한 측면을 "페미니즘이 갖지 못한 안전장치"(p.106)라고 말하며, 바로 이 차이 때문에 페미니즘은 당시 사람들에게 불편한 기분을 주었고 정신분석학은 당시 사람들에게 적극 환영받았다고 진단한다.
종합적으로 보아, 저자는 정신분석학이 그 이전까지는 금기시되던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공의 논의의 장으로 끌어올렸고, 은유적인 수준에서 가부장적 핵가족제 내부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권력 문제들을 내비쳐 보였기 때문에, '''그 담론적 의의까지 물리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의 문제는, 프로이트와 그 후학들이 끝내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는 분석에 반영하기를 거부하고 '순수한 과학' 의 환상만을 쫓았다는 점, 그리고 그 학문적 논리가 현실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곪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책임을 개인의 성생활에 돌린 채 숨기기 급급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한계점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물론 온당하지만, 저자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분석학이 페미니즘 혁명을 방해하는 도구로 오도되었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것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2.4. 남녀가 연애하는 법
저자가 가족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면, 저자는 결국 그 가족을 이루어내는 부부 간의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도 갈등론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실제로 7장에서 저자는 오늘날 대중매체와 일반인들의 연애에서 흔히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다.[14] 정확히 말하면, '''남녀의 로맨스와 데이트, 연애는 양쪽 모두에게 비극이 되는데, 그 이유는 권력의 불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게 파이어스톤의 생각이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수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의 소위 "튕기기" 내지 "밀당", "어장관리" 에 대해 불평하는 것, "여자들은 밥사달라 옷사달라, 데이트 비용은 전부 남자가 내라, 결혼할 거면 집도 남자가 사라고 요구한다" 면서 비판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될지도 모르겠다. 즉, 여성들이 실제로 그러는 경향이 있는 건 맞는데, 그 이유는 가부장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가부장제가 남녀 모두에게 '''억지스러운 연기를 시키고 있고, 결과적으로 어설픈 이 연기 때문에 양쪽 모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여성과 사랑은 기본 토대이기 때문에, 그들을 검토한다는 것은 문화의 구조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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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83
우선, 남성 쪽에서 연애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보자.[15]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은 '''연애를 마치 소유와 지배인 것처럼 이해하고, 일체의 헌신을 지지 않으려 한다.''' 상대방 여성에 대해서 "이 여자는 이제 나만의 것,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여자 때문에 얽매이고 싶진 않다" 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성들은 상대방에게 헌신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며,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든 확인 받고 싶어한다.[16] 여성들은 남친이 자신을 "특별한 사람" 으로 대우해 준다고 굳게 믿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남성들은 자기 여친이 그런 믿음을 지닐 수 있도록 거짓으로 연기할 뿐이다. 남성들이 가장 원하는 여성은, 자신이 몸과 마음을 바쳐 소중히 여길 만한 여성이 아니라, 자신이 그녀를 조금도 소중히 여기지 않더라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럼 여성들은 선량하고 무고한 피해자라고 저자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사실, 여성 쪽에서 연애에 임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저자는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저자는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빌붙어서 경제적인 안정을 획득하고 싶어하며 거짓으로 남성들을 붙잡아 두고 있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여친이 자꾸 나한테 핸드백 사달라고 조르고 돈 모자랄 때만 우는 소리 한다!" 는 일부 남성들의 하소연에 대해, 저자는 "당연하지, 여자들은 원래 그래!" 라고 쿨하게 인정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금전관념의 개인차에 대해서는 차치한다면) '''자신에게 헌신하지 않으려 하는 남성을 붙잡아두고 가능한 한 많은 헌신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 이를 두고 저자는 "매달리기" 라고 이름붙였다.[17] 여성의 입장에서 이는 단순히 금전적 욕망에 그치는 것이 아닌,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의 생존전략이다. 가부장제는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남성에게 '기생하는' 위치에 있다고 잘못 가르치고 있으며, 여성들도 이를 받아들여서 남친을 붙잡아두고 "헌신할 만한 여자" 라는 존재가치의 승인을 받기 위해 억지로 남성에게 매달린다는 것이다. 즉, "가부장제" 라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자기가치감의 확인을 위해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그 결과 남성의 경제력에 기생하면서 밥사달라 옷사달라 하면서 강제로 헌신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헌신이 강요된다는 시점에서 남성들이 그것을 갈취라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일부 남성들은 경제적 여유가 충분하기에, 혹은 그녀를 충분히 사랑하기에 정말로 크고 작은 헌신의 요구를 전부 들어줄 수도 있다. 그리고 일부 커플들은 그러다가 결혼에 골인하기도 한다. 이때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자기 자신이 정말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흔히 허니문이라고 여겨지는 기간 동안조차도, 남녀 두 사람은 서로의 진정한 본모습을 공유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남편은 아내를 위해 이상적인 남편 연기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이상적인 아내 연기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 '''결혼하면 끝날 줄 알았던 연기는 이제 2막을 시작했을 뿐인 것이다.''' 남성이 마련한 연극 무대에서 이제 여성은 어머니, 가정부, 요리사, 상담사, 보모 등의 다양한 연기를 하면서 "가장 다재다능한 여배우로 지명"(p.205)된 셈이며, 남성이 그 여성을 아내로서 간택한 이유는 단지 "삶의 빈 공간을 채우려고 그녀를 샀다"(p.206)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성은 결혼 후 사랑과 인정을 얻은 것이 아니라 단지 소유물 자격(possessorship)과 통제된 삶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진심이 아닌, 남편만을 위하여 언제든 다양한 직업을 연기해야 하는, 일종의 직업체험물(?)의 주인공을 24시간 연기하는 삶에 처한 것. 아직도 여성들은 '''자신의 가치를 남성에게 확인받기 위해 희생해야 할 역할'''이 남은 것이다.
남녀가 이렇게 "왜곡된" 가면을 쓴 채로 억지스럽게 '''이성애적 로맨스라는 무대에 올라 거짓 연기를 했으니, 연극이 끝나고 현실을 깨닫는 순간 양쪽 모두 불행해진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여성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라는 생각과 동시에 자신이 남성의 소유물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고, 30대를 넘어가기 전에 이미 "나는 이용당했고, 남자들은 늑대고, 사기꾼들이다"(p.207)라고 독백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남편들은 자신의 아내가 동화 속의 '새신부' 가 아니라 어느 순간 '마누라' 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곤혹스러워한다. 하지만 그것은 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남성의 판타지를 위한 거짓 치장과 연기를 끝내고 '''자신의 가장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허니문은 끝났고, 이제 결혼생활의 "현실" 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남편과 아내 중 어느 한쪽만의 책임이 있다고 쉽게 비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가부장적 핵가족제 하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 사랑과 헌신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접근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결론은, 이를 고치고 싶다면, 차라리 결혼과 핵가족이라는 종래의 삶 자체를 바꾸는 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
2.5. 가부장제의 대안
본서가 정말로 사람들을 뜨악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본서가 제시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정체였다'''(…). 물론 가부장제를 혁파하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것은 가부장제 이외에 다른 삶의 양식이 대안으로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었고, 밀렛 역시 가부장제를 비판하면서 이 점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파이어스톤이 제시하는 대안적 사회라는 것이 1970년 당시의 어지간한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힘든 것이었고, 오늘날에도 그 중 상당수는 실현되지 않았거나 실현되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안들이라는 것.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을 번식(?)시킬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저자는 우선 임신을 없애버리고, 출산도 없애버리고, 육아도 없애버리고, 남녀의 구분도 없애버리고, 어린이와 어른의 구분도 없애버리고, 학교와 공교육 시스템도 없애버리고, 예술과 과학의 구분도 없애버리고, 아예 성적 규범과 금기도 전부 없애버리자고 제안했다. 즉, 누가 누구를 구분해서 보호하고 지켜주고 금지하고 하는 모든 것들이 전부 '''실상은 억압일 뿐'''이므로 없애는 게 옳다는 것이다.
2.5.1. 기술개발로 임신과 출산을 없애자?
오늘날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애 낳는 기계' 가 되어버린 가부장적 사회 속의 여성의 지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해서 심지어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여자들이 페미니즘 한다고 설치니까 애를 안 낳는다, 여자들을 대학교에 보내니까 그런 거다" 라는 식으로까지 불평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덩달아서, 여성이 임신과 출산이라는 주박에 구속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도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논의되어 왔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파이어스톤의 논리는 단연 시선을 잡아끈다. 파이어스톤이 정말로 진지한 태도로 제시한, 여성들에게 애 낳는 역할을 강요하면 안 되는 이유는 정말 그 누구보다도 담백(혹은 솔직)하다(…). '''"그야 아프니까! 애 낳는 거 힘들다고! 아픈 걸 왜 구태여 견뎌야 됨?"'''"남자는 땀 흘려 일하고 여자는 고통과 산고를 참아야 하는 이중의 저주는 처음으로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통해 해소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운동은 20세기의 인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인 새로운 생태학적 균형을 받아들이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중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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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293
이 직설적인 (혹은 뭇 사람들의 원초적인 심금을 울리는) 논변은 본서의 288페이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드러나는데, 특히 저자가 제시한 가상의 대화가 제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대화에서 저자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서, 출산을 마치 "커다란 호박을 누는 것"(shitting a pumpkin)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즉, 임신과 출산은 막상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견뎌내야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심지어 '''인간성을 상실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든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종의 출산파업을 하자거나 아예 다같이 애를 낳지 말고 인류 모두 절멸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어머니가 되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자녀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대안으로서 '''인공생식과 인공자궁, 인큐베이터''' 기술을 통해서 '''재생식의 문제가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답게 만들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배 아파서 애 낳는 숙명은 기술이 부족할 때는 마치 인간 본성처럼 여겨졌지만,[18] 실상은 오히려 인간 본성을 크게 해치는 저주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저 기술력이 없어서 견뎌내 왔던 것일 뿐.
물론 인간이 자신들의 자궁이라는 생물학적 조건에 의지하지 않고 재생식을 한다는 건 당장 달성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조건은 그리 쉽게 기계와 장치들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기술의 진보로부터 희망을 발견한다.''' 본서 1장과 10장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미래 기술에 대한 낙관주의와 함께, 저자는 인류가 자연을 초월하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 이상 한낱 동물이 아니기 때문" 에, 그리고 "자연계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아니" 기 때문에(이상 p.23) 자신이 제시하는 이상이 언젠가는 반드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그런 기술적 밑바탕이 확보된다면, 그때부터 인공생식의 도입을 반대해야 할 모든 논증은 그 정당성을 잃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녀를 가지지 않겠다는 결정이나 자녀를 인공적인 수단으로 가지겠다는 결정이 전통적인 자녀 출산만큼 정당한 것이 될 때까지, 여성은 여성의 역할을 강요받는 것이나 다름없다"(p.289). 물론 이런 기술적 수단들이 권력자들의 손에 쥐여져 있게 된다면 그것은 악몽 같은 디스토피아가 되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기술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의 문제이지, 기술발전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이와 같은 저자의 관점은 전반적인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사에 비하면 굉장히 이질적이고 독특한 것이어서, 즉각 열렬한 환영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런 논리는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여성이 자신의 몸과 그 생물학적 조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임신과 출산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지, 기술의 발전이 페미니스트들에게 기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위협이 될 것인지 등에 대한 많은 논의들을 이끌었다. 하술하겠지만, 오늘날에도 인공자궁을 통해 여성들의 "애 낳는 기계" 로서의 속박을 끊자는 식의 제안은 '''테크노 페미니즘'''(techno-feminism)과 같은 분파로 이어졌고, 남녀의 구분 자체를 없애버리자는 주장과 결합되어 심지어 '''포스트젠더리즘'''으로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컨대 컬처럴 및 에코 페미니즘과 같은 다른 분파들에서는 임신이나 출산과 같은 여성의 모성이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 위협 받고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이는 이쪽 진영에게는 없애야 할 생물학적 쇠사슬이 아니라 도리어 지켜내야 할 소중한 여성의 영역이 된다. 하지만 어쨌거나 파이어스톤이 제시한 페미니즘 유토피아에 있어서, 임신과 출산의 의무를 기계에 아웃소싱(?)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2.5.2. '어린이' 개념과 공교육을 없애자?
저자의 주장들 중에서 읽는 이로 하여금 "아 이건 좀..." 이라며 아연해지게 하는 "래디컬" 한 주장들 중 하나는, 현대사회에서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방식들 중 하나가 바로 '''아동기 숭배'''(cult of childhood)라는 것이다. 어린이는 그저 덩치가 작은 어른처럼 대우해서는 안 되고, 특별한 보호와 관리가 필요하며, 어린이 특유의 순진하고 천진난만하며 깨끗한 심성을 가능한 한 지켜주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생각들부터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마치 여성들을 연약하고 부서질 것 같은 귀한 존재로 여기며 보호해주는 것이 하나의 억압이 될 수 있듯이, 어린이들을 마찬가지로 아껴주려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억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어린이들 본인들부터가 이런 "보호" 를 싫어하지만 어른이라는 '강자' 들에게 표현하지 못할 뿐이라고 주장한다.[19] 실제로 어린이들이 느끼는 것은 어른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불충분함, 의존성, 통제받음, 수치심, 끊임없이 경험하는 무지의 한계, 모욕감 등등 때문에 "아이들은 깨어있는 매 순간 억압당한다, '''아동기는 지옥이다'''"(p.151)라고까지 저자는 강변한다."아이를 '기르는 것' 은 자신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기르는 최선의 방법은 (기르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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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133 (강조표시는 원서에 존재)
저자에 따르면, 인류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늘 그렇게 "어린이는 보호받아야 할 약자" 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저자는 '''중세시대의 어린이들의 삶으로 회귀할 것을 제시한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P.Aries)의 《Centuries of Childhood》 라는 도서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중세에는 가족 개념이 단지 법적인 상속권으로만 이해되었고, 가족의 범위도 시종들, 가신들, 음악가들, 동물들, 방문객들이 뒤엉키면서 그 경계가 매우 희박했으며, 근대적인 의미의 명확한 핵가족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인 삶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이런 환경에서 중세의 어린이들도 다를 바는 없었다. '''중세의 어린이들은 어른의 축소판'''으로서 특별히 지칭되는 용어조차 없었고, 향후 가능한 한 빨리 어른이 될 때까지의 도제생활을 하는 기간으로 이해되었으며, 부모와의 유대는 약했으며 거의 친척 수준으로 멀었다고 한다.[20] 즉 이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개인의 생애주기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
그러다가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변화가 시작되어 간신히 아기나 어린이답다는 표현들이 만들어졌고, 어린이용 장난감도 17세기 말에 대중화되었으며, 예술작품에도 흔히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함께 등장하는 구도가 확산되면서 모성애와 부모자녀 간 유대감이 문화적으로 "발견" 되었다고 한다. 특히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사상가들은 어린이들의 순수함과 순진무구함에 주목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했으며, '세상의 악' 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분리와 감시, 독립성의 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유년시절을 "좋았던 그때" 로 회상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믿게 되었다. 다시 말해, 부모들의 대의명분은 '''"한 번밖에 없는 아동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 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어른들의 도덕적 만족감을 채워주는 것에 불과하며, 그 개인들이 이후로 평생 겪게 될 억압과 부조리와 모순을 아동기의 추억에 의지한 채 감내하도록 한다는 게 저자의 비판이다.
저자는 가부장적 사회가 이를 위해서 '''근대적 공교육 제도를 형성'''했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무성적(asexual)이고 성적 유희는 비정상적인 것이며, 교육 현장에서 어린이들의 모든 성애적 표현들은 금지되어야 하고, 아이들은 특수한 대우가 필요하고, 같은 나이끼리 특수한 공간에 같이 모여야 하며, 사회적으로는 순수하다고 여겨지고, 중요한 논의에서 배제되고, 의복을 통해 구분되고, 어른들보다 이해력이 떨어진다고 여겨지고, 특수한 예절을 교육받고, 연약함을 드러낼 때 귀여움을 받고, 불가해한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이런 모든 제도는 '''가부장적 억압을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학교는 사회적 입문의 관문이 되도록, 진정한 남성을 만들어주기 위해 정립된 사회화 제도이며, 실제로 도움이 되는 지식의 전수보다는 훈육과 감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학교는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한 기관이지만, 도리어 어린이들이 무지할 것이라는 근대적 믿음으로 인해 '''그들의 가능성을 제한한다.'''[21] 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손해를 보고 속상한 것은 천재적이거나 조숙한 아이들이다.[22] 이들은 심도 있는 지식과 기술에 대해 소화할 역량을 지녔지만, 유치원과 학교의 선생님으로부터 어울리지도 않는 '유치한' 대접을 받아야 하기 때문. 이는 전문성의 계발이 체계적으로 억압되는 여성들의 처지와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를 보호하지 말자니, 그럼 저 산업혁명 시절의 끔찍한 노동과 착취의 운명으로 그들을 몰아넣자는 것인가? 빅토리아 시대의 가혹한 채찍질과 매질을 겪게 하자는 것인가?" 라고 반발할 수 있으며 저자도 이를 의식하고 있다.[23] 하지만 저자는 이것을 페미니즘의 서프러제트에 비유한다. 마치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이후로 도리어 상업주의의 물결에 휩쓸렸듯이, 어린이들도 빅토리아 시대의 회초리가 사라지고 더 이상 탄광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긴 했지만 그 한편으로 이들은 '''유례없이 철저한 공적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놀이터와 시민공원이 분리됨으로써 이들은 어른들과 대등하고 평등하게 교류할 기회를 잃었고, 복잡한 진학과 졸업 체계로 인하여 연령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손윗사람이나 아랫사람과 함께 어울릴 기회도 잃어버렸다. 더 이상, 어른들이 어린이들과 자연스럽고 대등하게 만나서 친밀한 관계와 직업적 관계를 맺을 기회는 거의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어린이들이 하루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학교조차도 좋은 곳이 아니다. 학교는 가장 자연스러운 흥미와 놀이마저도 감시되고 통제되는 '''감옥 같은 곳'''이며, 그 구조적 정의에 따라 볼 때 억압을 실행하기 위해 존재하고, 어린이 개개인의 호기심과 삶의 방식을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학교의 학생들은 자신이 할 활동이 미리 정해지고, 자신이 갖고 놀 물건도 정해지고, 놀 장소도 정해지고, 어울릴 친구도 정해지고, 즐길 문화도 미리 다 정해진다. 심지어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더라도 사회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이들이 대등한 '어른' 이 되는 것을 최대한 지연시킨다. 예컨대, 청소년의 섹슈얼리티가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게 되면 성년기로의 이행을 가속화하므로, 이들의 자유로운 성생활을 저지하는 것은 이들을 억압의 자리에 억눌러 두겠다는 문화적인 의지인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학교와 공교육에 대해서 '''극단적인 갈등론적 해석'''을 내놓고 있으며, 특히 그 대안으로서 자신의 이상사회에서는 반드시 '''일체의 학교와 교육시스템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저자는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더 이상 "억압자들에게 자신의 억압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 고 말한다. 어린이들도 (마치 여성에게 기사도가 그러하듯) 자신이 어른들에게 보호받는다고 느낄 때 이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른들이 귀여워해 주고 아껴주는 듯할 때 어린이들은 흔히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게 마련인데,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거짓 웃음으로 반응하지 말라" 고 말한다. 이름하여 '''"스마일 보이콧"'''(smile boycott). 이는 여성들과 어린이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억압자가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피억압자의 미소' 를 더는 보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굳이 연결짓자면 파이어스톤의 이 제안은 국내에서도 한국여성민우회가 실시했던 "안웃겨요 캠페인" 과 같은 동향과도 연결될 수 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억지웃음은 그만두고, 정말 자신이 웃고 싶을 때만 웃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학교와 같은 방안으로 적당히 타협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10장에서 저자는 영국의 유명한 대안학교를 하나 거론하면서, 한계점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교육자 알렉산더 닐(A.S.Neill)의 '''서머힐 스쿨'''(Summerhill school)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는 학생들이 자기조절과 자기규율을 통해 성장하며, 의무교육과 권위주의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해 건립하였다는 좋은 취지가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곳조차도 많은 한계점들이 보인다고 말한다. 설립자 닐이 급진파 교육자가 아니라 온건 진보 교육자라는 것(…), 성적 자유를 추구하긴 하지만 성 역할이 여전히 잔존하고 교내에서 성적 접촉을 하면 처벌받는다는 것, 자녀들이 법적으로 여전히 부모의 양육권 하에 있다는 것, 학부모들이 늘 학교의 '갑' 으로서 자신의 자녀가 적절하게 "보호받을"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이 학교에 대해서 '''정서불안 어린이들을 위한 연중무휴 캠핑장이 되어 버렸다'''고 비관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가장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파이어스톤의 생각에 대해서 선뜻 긍정하기란 쉽지 않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페미니즘 내부에서 "어린이의 해방" 을 다시 요구하는 움직임은 거의 관찰되지 않고 있고, 직접적인 타깃이 되었던 교육학이나 아동가족학 등에서도 (적어도 국내에서는) 파이어스톤의 사상을 고찰한 논문이 한 건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냥 개인적인 유토피아의 청사진 정도로 치부하고 넘기는 것일 수도 있다. 소아과 의사들이나 발달심리학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실제로 어린이는 '생물/심리학적으로' 어른들과 달라진다"''' 고 반론을 펼치는 것이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시절의 어린이에 대한 관념도 그들이 더 바람직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어린이의 생물학적 및 심리학적 발달의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린이가 단순히 덩치만 작은 어른이고 끝인 게 아니라면, 동심파괴물이나 19금 장면에 대해 어린이의 눈을 가려주는 등의 배려도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또한 어린이들이 '어린애 취급' 을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성장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지, 굳이 보호받기를 거부하는 정치적 항의(?)는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요약한다면, '''현대인의 관점에서 아동기를 없애자는 저자의 주장은 터무니없게 느껴질 정도이다.'''
좀 더 중립적인 관점을 취하자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정통파 유대인 집안에서 자랐는데, 이들은 외부의 시선에서는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지지만, 오히려 근대적 교육제도가 없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는 아동기라는 개념이 고스란히 나타나지 않는다. 즉 여기서는 다섯 살도 안 된 어린이들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며, 그 결과 그 어린 나이에 탈무드와 토라를 줄줄 외고, 유대교 율법에 대해 랍비와 토론을 하는 어린이들도 매우 많다는 것이다.[24] 하지만 서구의 근대적 아동교육은 어린이들이 그만큼 조숙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함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 그렇다면 이 장의 내용은 근대적 공교육에 대해 저자가 '''외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에''' 나왔던 독특한 관점일 수 있다.
2.5.3. 다형도착에 기초한 사회주의 공동체?
마지막으로 본서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부분을 조금 더 언급하자면, 저자의 이상적 섹슈얼리티는 '''다형도착'''(polymorphous perversity)에 근거하는 범성애(pansexuality)가 이성애중심적 규범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 다형도착이라는 개념은 원래 정신분석학에서 가져온 것인데, 정신분석학자들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규범의 밖에서 성적인 쾌감을 얻을 목적으로 수행되는 다양한 성적 행동들을 할 능력을 다형도착이라고 불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변태라고 생각할 법한 모든 행동들'''이 자신의 유토피아에서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금지하는 것 자체가 가부장적 핵가족제의 질서를 유지하는 억압의 방식이기 때문(…).
저자가 이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예시로 드는 것이 근친상간의 금기다. 저자의 관점에서 근친상간은 가족질서를 뒤흔드는 행위에 속하는데, 핵가족이 사라진 사회에서라면 이제 그것은 금지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유토피아에서 나타날 성적인 접촉은 페니스의 질내삽입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적인 섹슈얼리티 양식을 따르지도 않으니, 부모자식 간에 자유롭게 성적인 접촉을 한다고 해서 발생할 문제점도 없어지는 셈이다. 10장에서 저자는 여성들과 어린이들에게 성적인 자유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성적으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은 취향 맞는 타인과 함께 일체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성적 욕구들과 성생활을 영위하려는 본성이 있고, 이것을 전부 허용하는 것이 다형도착인 것이다.
물론 저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신나는 섹스 파티"(…)에 흠뻑 빠지자고 선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신난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규범이 존재함을 인식하기 때문인 것이다. 저자는 어떠한 사람들과의 어떠한 성적인 접촉이든 간에 그것을 '막아야 할 이유가 없는' 분위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예컨대, 저자의 유토피아에서 이제 사람들은 (서로의 성별에 무관하게) 2명 이상의 다수의 개인들이 성적 동반자로서의 합의된 기간에 돌입하는 느슨한 연결관계로서 함께 살아갈 것이다. 물론 이 생활에는 "언제쯤 아기를 갖자" 는 '''생식적 의무도 없고,''' "돈은 누가 벌지?" 와 같은 '''경제적 의존관계도 고려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게 될 사람들은, 이제는 자녀를 가지라는 일체의 사회적 압박이 없는 상태에서 정말 진심으로 "순수하게 자녀를 원하는" 사람들만이 제한적으로 모이면서 가구를 형성할 것이다. 설령 자녀를 갖기로 결정하더라도 이는 전적으로 '''인공생식과 인공자궁'''을 통해 달성될 것이며, 가정은 성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도움을 주기 위해 '''7~10년 정도'''만의 양육기간만이 보장될 것이고, 그나마도 앞집 아저씨와 옆집 아줌마가 뒷집 아기를 돌볼 것이다. 태어난 어린이는 즉시 어른들과 대등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가사노동은 12~15명 정도로 모여서 공동으로 처리한다. 교육시스템은 어른들과 어린이들이 섞여 앉아서 자신에게 필요한 기술, 지식, 취미를 배우는 제도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남녀노소가 서로에게 애정을 표현할 때 스스럼없이 다양한 성적 접촉을 즐길 수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그리고 저자도 인정하듯이 이는 유토피아를 묘사할 때 흔히 동원되는 '''사회주의적이고 완전하게 평등주의적인 공동체'''의 양상을 띤다. 어찌 보면 성인 버전의 스머프(?) 세상, 혹은 보노보들이 즐기는 평화로운 일상의 장면이 아닐까 싶을 정도. 저자는 본서를 저술할 당시에 핫하던 키워드인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개념을 빌려와서,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대해서 '''"사이버네틱 코뮤니즘"'''(cybernetic communis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0장에서 자신이 제시한 대안을 이해만 하는 것과 실제로 그 대안을 따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까지 못박았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제시한 이상향을 단순히 인지하기만 하고 그것의 도래를 위해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페미니즘 혁명에 대한 공격과도 같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말했던 것은, 본서를 저술할 당시에 이런 세계가 '곧바로' 도래할 것이라고 크게 낙관했기 때문인 것도 일부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이, '''이런 사회는 향후 50년이 되도록 도래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서 저술 직후 저자는 은둔하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하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어째서 자신의 과감한 예측이 빗나갔는지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3. 반응
오늘날에도 파이어스톤은 고스란히 전수되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거리들을 남겼다고 평가되고 있다. 본서는 2017년에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에서 《몸의 미래, 인간의 몸》 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 때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며, 한편으로 대나 해러웨이(D.Haraway)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다. 이나영(2009)의 문헌에서는[25] 결혼제도에 대한 본서의 논리가 훗날 게일 루빈(G.Rubin)과 같은 사람들의 논의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고정갑희(2012)의 문헌에서는[26] 본서가 계급분석이 여성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던 시기에 새롭게 성 담론을 추가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파이어스톤의 "래디컬" 함에 대해 사람들이 기함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지식인으로 통하는 인물인 하비 맨스필드(H.C.Mansfield)는 훗날 자신의 저서 《남자다움에 관하여》 에서, 페미니즘의 대의를 위해 여성들에게 어떠한 제약도 정의하기를 거부한 나머지 다형도착 개념을 통해 여성들의 도덕성을 밑바닥까지 떨어뜨리는 방종을 저질렀다고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을 비판하기도 했다.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해 리뷰하는 김보명(2018)의 문헌에서는,[27] 우선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 "가부장제 대신에 우리가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사회의 성 관념 자체를 억압의 영역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성적 차이를 인정하거나 여성성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예 개념적으로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독특성을 보인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김보명(2018)이 본서를 포함하여 전반적인 래디컬 페미니즘의 논리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성을 운동의 토대로 보지만 결과적으로 여성을 해체의 대상으로 보는 모순적인 논리'''를 주장함으로써, 래디컬 페미니즘의 동력이 빠르게 소진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즉, 여성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기 위해, 먼저 여성이라는 개념을 부각시키고, 그들의 삶을 일반화시켜서 정치적 동력을 끌어모아야 한다는 괴상한(…)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결과적으로, 김보명(2018)은 파이어스톤의 철학과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이상은 '''많은 한계를 노출'''했으며, 그것이 빠르게 붕괴되고 이후 80년대에 이르러 그 빈 자리를 컬처럴 페미니즘이 차지하게 만들었다고 정리한다. 더 이상 "여성의 해체, 성별 없는 사회, 양성적 인간, 탈이성애적 관계" 는 실현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고, 그 대신에 가부장제로부터 여성들을 지켜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인 "여성 전용, 안전 공간, 여성공동체,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남녀의 분리, 여성성의 보호" 와 같은 컬처럴 계통의 '''제약된 문화적 실천의 의제가 대신 각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은 그만 제쳐두고, 그나마 현실의 한귀퉁이에서라도 여성들끼리 안전과 평화를 알콩달콩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자는 노선으로 선회했다고 보면 될 듯하다.
한편 본서가 촉발시킨, 인공자궁과 같은 기술개발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한 문제를 다룬 문헌도 존재한다. 최하영(2017)은[28] 본서에 대해서 과거 올더스 헉슬리(A.L.Huxley)가 만들어 놓은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의 인공자궁 개념을 전복시켰다고 말하면서, 당시에는 조산한 양을 인큐베이터에 넣어 기르려 하거나, 에마뉴엘 그린버그(E.M.Greenberg) 같은 사람들이 인공자궁에 특허를 출원하던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파이어스톤 역시 이때의 걸음마 수준의 인큐베이터 기술을 보고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 하지만 인공자궁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세 가지의 쟁점이 있다고 제시한다. '''첫째,''' 인공자궁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출산 후 육아문제, 즉 "독박육아" 문제와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 '''둘째,''' 인공자궁 이슈는 낙태 이슈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29] '''셋째,''' 인공자궁 기술이 남성에 의해 독점될 가능성이 있다.[30] 이런 문제들을 떼어놓고 본다면 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로는 여성들에게 중립적인 일이 된다고.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서평이 있는데, 마광수(1996)의 문헌에서는[31] 본서가 수구적이고 금욕적인 유교적 교육문화가 팽배하여 청소년들의 섹슈얼리티가 억압 받는 한국사회에도 의의가 있는 책이라면서 아주 속시원해하는 반응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국내 페미니스트들은 서구의 추세도 모르고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나 《즐거운 사라》 에 대해 퇴폐적이고 음란하다며 공격하여 저자를 절망하게 했다느니 어쩌느니 하며, 서평의 뒤쪽으로 갈수록 점점 자기 한탄으로 넘어가는 것이 인상적(…). 마광수(1996)는 파이어스톤이 추구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유로운 담론의 사회는 자신이 지향하는 것과도 일치한다고 찬사를 늘어놓았으며, 자신의 서평을 다음과 같이 끝냈다.
본서가 지닌 이런저런 한계점들에 대해 지금껏 다양한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제부터 살펴볼 서평은 특히나 격하게 비판적이다. 해외의 마르크스주의 서평을[32] 국내에 번역한 한 문헌에서,[33] 저자 매들라인 요한슨(M.Johansson)은 본서가 '''방법론과 결론에 심각한 약점이 존재한다'''고 평가 절하한다. 물론 장점도 있는데, "부모의 의무는 자녀에게 행복한 황금시대로서의 유년기 기억을 남겨주는 것" 이라는 대목은 특히 자본주의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양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분석과도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34] 하지만 본서에는 여러 종류의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첫째,''' 역사적 유물론의 방법론을 취하고자 했지만, 그 논지는 역사적으로나 유물론적으로나 상충된다.[35] '''둘째,''' 생물학적 결정론을 선택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각각 한계지었다.[36] '''셋째,''' 여성운동의 역사를 개관할 때 참정권 운동은 잘 설명했지만, 그 이면에 존재했던 여성 노동계급의 노력은 거론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정신분석학은 성차별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가족 내의 양육경험으로 환원하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종합적으로 말해서, 본서는 '''성별분업과 계급분업 중 전자가 후자보다 선행했다고 제시함으로써 몰역사적인 관점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는 게 요한슨(2015)의 생각이며,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측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발이기도 하다."신사임당 상(賞)이나 제정하며 조선조식 부덕의 숭고성에, 그리고 아직도 병적으로 성 알레르기 증상을 갖고 있는 한국의 모든 도덕주의자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내가 성에 대해 쓴 글은 우습게 보면서도 서양인이 쓴 글이라면 성에 관한 것이든 뭐든 무조건 깜빡 죽는 한심한 사대주의자들이 바로 이 땅의 '지성인' 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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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광수(1996), p.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