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정계 활동
1. 초·재선 의원
추미애는 광주고등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던 1995년, 당시 야당 총재이던 김대중 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부터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다. 이후 판사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8월 27일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정계에 입문하였다. 당시 김대중 총재는 “제가 대구 며느리를 얻었다”면서 “세탁소집 둘째 딸이 부정부패한 정치판을 세탁하러 왔다”고 말했다.# ‘대구’ 출신의 ‘현직’ ‘여성’ ‘판사’가 합류한다는 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엄청난 힘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현직 판검사 출신은 주로 여당을 택했고, 특히나 영남 출신은 소위 'DJ 당'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1995년 8월, 김대중 총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추미애는 “이왕 정치를 시작할 거면 지역구 선거에 도전하고 싶다”라는 뜻밖의 제안을 내놓았다. 당시 여성 신인들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구 대신 전국구(현 비례대표)를 선호하곤 했는데, 전국구 상위 순번이 확실시되던 추미애가 먼저 지역구 도전을 선언한 것이다.[1] 김대중 총재는 물론이고 동료 선후배들이 일제히 ‘대단하다’며 칭찬했고, 그렇게 시작한 지역구 도전은 이후 추미애를‘여성 최초의 지역구 5선 의원’으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6년에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구 지역에 출마해 당선되어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로써 6공화국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서울 지역의 첫 여성 지역구 의원[2] 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1996년 문민정부 시절, 초선 의원이던 추미애는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한총련 연세대 사태 진압과정에서의 여대생 인권 유린을 폭로하였다.# 당시 사건은 최초엔 인권단체와 여성단체에 의해 1996년 9월 13일 기자회견 형태로 폭로되었다. 하지만 당시 한겨레신문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이후 국무총리와 내무부 장관 등에게 '공권력에 의한 여학생 성추행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관한 건의문'도 발송했지만 이 역시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단체 내에선 "이제 곧 10월이라 국정감사가 시작되니 이 문제를 서울경찰청 국정감사에서 다뤄줄 국회의원을 찾아보자"는 제안이 나왔고, 이에 당시 다른 여성 의원들에게 먼저 제안이 갔으나 선뜻 나서는 의원이 없자 추미애가 맡았다. 그리하여 1996년 10월 9일, 서울경찰청 국정감사장에서 경찰이 여대생들에 가한 욕설, 성희롱 등의 폭언을 그대로 읽으며 폭로했다. 그러자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현 국민의힘 전신) 국회의원들은 위원장에게 추미애 의원의 질의를 당장 멈추게 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법으로 보장된 국회의원의 질의 시간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여당 의원들은 "더 이상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며 집단 퇴장을 했다. 그러면서 추미애에게 "국회의원으로서 품위 좀 지키라"라고 말했다. 이에 추미애는 "듣기 싫으시면 나가세요"라고 대꾸한 후 욕설을 끝까지 읽었다. 폭로한 욕설 내용은 이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
1997년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당시 후보의 유세단장으로 일했으며, 정동영·천정배·신기남·정세균 등 15대 국회 초선 동기들과 함께 ‘DJ 특보단’을 꾸려 정권교체를 위한 전국 버스 투어에 나섰다. 대선 20여 일을 앞두고는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 선거 운동을 하기로 하였는데, 당시엔 지역주의가 매우 극심했던 터라 대구 사람이 호남 사람인 김대중의 선거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고향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기도 했던 시기였다. 당시 대구에서 유세단을 만들려고 하자 김대중의 외곽 그룹이었던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 대구 지역 인사가 “큰일 납니더. 우리 당 간판 들고 유세하고 돌아댕기다가 돌 맞아 죽십니더!”라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추미애는 “지역감정의 악령으로부터 대구를 구하는 잔 다르크가 되겠다”는 의미로 유세단 이름을 ‘잔 다르크 유세단’이라고 지으며 활동하였고. 이로 인해 ‘추 다르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98년 초선 의원이던 시절, 새정치국민회의의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의 부위원장직을 맡았다. 추미애는 정부기록보존소의 창고를 뒤져가며 군법회의 수형인 3,000여 명에 대한 기록을 최초로 발굴하였다. 추미애는 <제주 4.3 특별법(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을 대표 발의하였는데 공청회 당시 야유와 고함이 쏟아지고, 여러 반대 의견에 부딪혔으나#, 1999년 12월 결국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고, 2000년 1월 공포되었다.# 추미애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아 제주도의회로부터 감사패와 명예제주도민증을 수여 받았다.
2000년에 치러진 제16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구 을에 새천년민주당 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당시 득표율은 57.35%.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펼쳐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 초기부터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경선 초기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낮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이후 다른 당 후보에 비해 지지율이 낮다는 이유로 당내에서 후보 교체를 위한 후보단일화 압박이 있을 때(소위 후단협 사태)도 노무현을 지지했다.# 후단협은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며 주가가 상승한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요구했다. 노 후보는 당시 최고위원이던 추 대표의 의원회관 방에 불쑥 찾아와 “추 최고, 나 좀 도와주소”라고 했다. 추 대표는 “민주당 당원인 이상 우리 당 후보를 도울 겁니다. 노무현이라서가 아니라 민주당 후보이기 때문입니다”고 답했다.# 당시 추미애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뽑은 후보를 버리자는 것은 민주당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이고, 국민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추미애는 "그때 내 반대 논리는 ‘지면 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당원과 국민이 뽑은 후보를 버릴 권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때 정말 회의에서 거칠게 싸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후보 교체론이라는 우여곡절까지 겪은 노무현은 결국 제16대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가 되었지만, 선대위가 출범하고도 당에서 선거자금을 한 푼도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무현 당시 후보가 추미애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에게 “돼지 저금통을 들고 국민에게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데, 추 최고가 좀 도와주시겠어요?”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추미애는 노무현 후보 캠프의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희망돼지저금통 사업을 이끌며 50여억 원의 국민 성금을 모았다. 이때 돼지엄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 당시만 해도 노무현이 추미애를 정치적 동지로 여겼고, 항간에는 노 전 대통령이 그녀를 후계자 중 한 명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 가령 노무현은 16대 대통령 선거 운동 마지막 날인 12월 18일 저녁 서울 종로2가 유세장에서 노무현 당시 후보는 후보 단일화를 이룬 당시 국민통합21의 정몽준 대표와 함께 단상에 올랐는데, “다음 대통령은 정몽준”이라는 일부 시민의 연호가 들리자 “속도 위반하지 말라”며 “대찬 여자 추미애 의원이 여기 있다. 제가 새로운 정치 안 하고 어물어물하면 멱살을 잡아 흔들 우리의 여성 지도자 추미애입니다. 또 국민경선을 끝까지 지켜주고 제 등을 받쳐준 정동영 최고위원도 어떻습니까?"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3] # # 그리고 2003년 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 추미애는 당선자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 때[4] , 추미애는 개혁을 하더라도 민주당 안에서 해야지 당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분당에 반대하여 민주당에 남은데 반해,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당 내에서 개혁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여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추 의원으로서는 참여정부가 출범한지 단 몇 달만에 여당 의원에서 야당 의원으로 신분이 바뀌게 된 것이다.
당시 추미애는 한 라디오 시사 프로와의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국정을 이끌어 온지 9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그동안 정치방식이라든지 국정운영에 대해 평가를 하신다면 몇점이나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추미애는 "제가 점수를 매길 입장은 아닙니다. 왜냐면 대선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구요. 지지 세력에게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제가 직접 발로 뛰고 돼지 저금통을 들고 다니면서 정말 코 묻은 돈, 눈물 흘린 돈을 모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서고금 역사에 전례가 없이, 지지해 준 정당을 탈당하고 지지 세력을 반 개혁 세력으로 몰아붙이고 분열시켰습니다. 더구나 측근 세력이 부패에 연루된 이런 상황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재신임 국민투표로 또다시 지지자들과 국민들을 압박하는 또 헌법 질서를 파괴하는 이런 상황으로 빠뜨리는 것을 보면서, 제가 정말 오히려 죄송하다. 뭣 모르고, 본체를, 본질을 모르고 대선 운동에 앞장서서 지지를 호소했던 것이 참 염치없고 할말이 없다 이런 입장이지 제가 점수를 매길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참고로 당시 분당 및 신당 창당을 이끌었고, 이후 참여정부 시절 정부와 여당에서 요직을 맡으며 잘 나갔던 김한길, 정동영, 천정배 등은 훗날 (친노 중의 친노이자, 노사모 등 노무현 대통령 지지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문재인에 반대하는 이른바 반문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2015년 말 ~ 2016년 초 당시 문재인이 당 대표로 있던 새정치민주연합의 분당 및 신당(국민의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에 가담한다. 반면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이었던 추미애는 이때도 이들 분당파를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였고, 최고위원회의에서 연일 온갖 공격을 받던 문재인 당시 대표를 엄호하며[5]#, 친문이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펼쳐진다.[6] 이처럼 추미애는 2003년과 2015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분당 사태에서 항상 분당에 반대하는 입장이고, 두 번의 분당사태에서 항상 분당파에 합류했던 김한길, 정동영, 천정배 등과는 그때마다 다른 선택을 하였다.
2004년 3월에는, 새천년민주당 조순형 대표가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추미애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은 ‘3불가론’을 내세우며 탄핵에 반대하였다. # 당시 추미애의 3불가론은 ① 탄핵 대신 개혁으로 지지층의 동요를 막고 ② 탄핵 찬성은 한나라당 지지층이 주도하고 있으니 현혹되면 안 되며 ③ 그래도 탄핵을 강행하면 역풍을 맞아 총선에 참패할 것이란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추미애의 의견에 동조한 이는 단 1명[7] 뿐 이었다.#. 민주당 지도부는 추미애에게 “당내 2인자가 당론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고 쏘아붙였다. “너 혼자 잘났느냐”는 비난도 쏟아졌다.# 그래도 추미애가 말을 듣지 않자 민주당은 구치소에 수감된 의원 2명에게 달려갔다. 그들의 서명까지 추가해 탄핵을 밀어붙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추미애는 "감옥 간 분들 표까지 긁어모아 탄핵을 한다면 말이 안 된다. 숯댕이(범죄 혐의로 수감된 의원)가 검댕이(노무현 대통령)를 나무랄 순 없다. 민주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차라리) 내가 기꺼이 표를 드리겠다." 며 결국 당론에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탄핵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탄핵소추 발의에도 동참하지 않았던 추미애는 국회의 본회의 표결을 앞두고 찬성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후 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그리고 나흘 뒤, 추미애는 당직자 회의에서 "탄핵 이후 국정불안을 우려해 탄핵 소추를 반대했을 뿐 탄핵 사유가 틀려서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탄핵 사유는 줄이고 줄여도 책자로 만들 정도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선거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 탄핵 발의에 동참하지 않았던 내가 탄핵 찬성론자들을 말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노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보고 재신임을 스스로 평가하겠다며 대국민 협박을 한 것을 보고 탄핵하지 말자고 할 수가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닌 정치꾼" 이라며 비난하기도 했다.# 애초 탄핵에 반대했던 추미애가 탄핵안 가결 직후 이러한 강경 발언을 한 것은 당시 17대 총선을 코 앞에 둔 시점에서 민주당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들끓는 탄핵 반대 여론 속에서 흔들리는 민주당 지지세력의 결집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반면 당시 노 대통령 및 열린우리당 지지자들로부터는 지탄을 받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결국 이때의 강경 발언들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아직도 추미애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기도 하다.[8] 또한 노무현 탄핵 건은 훗날 추미애가 출마한 2016년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경선에서 경쟁자들 및 경쟁자 지지자들이 그녀를 공격하는 주 레파토리가 된다.# 한편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추미애가 당초 탄핵에 반대하며 주장한 '3불가론'에서 예측했던 대로 탄핵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것도 17대 총선을 앞둔 상태에서.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곧이어 실시된 2004년 17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은 선거운동기간 동안 당의 얼굴을 담당하게 되는 선거대책위원장직을 추미애에게 맡겼다. 선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추미애는 선거운동과정에서 탄핵 반대 여론의 거센 역풍을 직시하고, 민주당이 탄핵에 동참한 것에 대해 사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9] 그리고 곧이어 추미애는 사과의 의미에서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5·18 망월동 묘역까지 15㎞에 달하는 3보 1배를 하였다. 당시 무릎이 상해 지금까지 높은 구두를 신지 못한다고 한다.# 3보 1배를 마친 후 2004년 4월 10일 모란시장 유세에서 추미애 선대위원장은 "이제 그만 민주당을 용서해달라"며 "열린우리당은 재벌공조당이지만, 민주당은 가다가 실수는 했을지언정 문을 닫아서는 안될 정당이다"고 했다. 또한 "열린우리당 후보들 면면을 보면 찍을 인물이 없다. 탄핵역풍에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될 것 같으니 별의별 사람들이 몰렸다.", "사과 한마디를 그렇게 요구했는데도 노 대통령이 응하지 않아 지금과 같은 파국을 초래했다. 노 대통령에게도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하였다.# 또한 광주유세에서 민주세력을 둘로 나눈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을 표로 심판해야 한다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결국 탄핵 반대 여론의 역풍으로 민주당은 17대 총선에서 단 9석의 의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로 인해 민주당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추미애 본인도 낙선하였다.[10]
정계 입문 이후 1999년 홍콩에서 발간되는 시사주간지 <ASIAWEEK>에서 ‘아시아 정치 지도자 20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2000년에는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여성, 21세기를 빛낼 여성’에 선정되었다. 또한 한국유권자연맹으로부터 ‘국회의정활동 최우수상’과 최근에는 전국 NGO 단체연대로부터 '올해의 닮고 싶은 인물상’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시사저널>이 시민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차세대 지도자감 1위’로 뽑혔고, 2004년에는 ‘국민이 뽑은 정당의 최고 정치지도자 1위’(<월간중앙>-ANR 공동 여론조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2. 야인 시기
2004년에 실시된 제17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로 유학(방문 교수)을 떠났다.
추미애는 당시에 대해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수면 아래로 잠수#s.2타려고 떠나 버린 것이었다"며 "미국으로 공부한다고 가면서 가는 차 안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 형님인 노건평 씨로부터 전화 받았는데 '제가 멀리 간다. 언제 올지 모르겠는데 대통령님의 성공이 대한민국의 성공이고 국민이 바라는 것이다'하고 떠났다"고 말했다. #
이 시기 노무현 대통령은 (추미애가 탄핵에 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시절에 세 번씩이나 추미애에게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추미애는 이를 고사했다.# #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추미애에게 '무릎 아프지 않냐, 괜찮냐.[11] (미국에서) 언제 돌아올 거냐.[12] '라며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 당시 추미애에 대한 노 대통령의 입각 제안은 김한길 의원이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노무현 대통령이 환경부 장관으로 쓰고 싶어 한다”며 노 대통령의 뜻을 추미애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당시 일에 대해 추미애는 “개인적으로는 제안을 받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노 대통령 처지에서는 ‘당을 쪼개더니 사람도 빼갔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는 상황이라 덥석 받을 수 없었다. 노 대통령께 ‘인간적으로 고맙다는 말만 전해달라’ 하고 거절했다”고 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 한 추미애는 한 동안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8월,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재결합하면서 대통합민주신당이 탄생하였고, 곧이어 실시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추미애는 대통합민주신당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3. 3선·4선 의원
2008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광진구 을에 재도전하였고, 51.3%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국회에 복귀[13] 하였다.[14]
제18대 국회에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이 기피한다는# # 환경노동위원회의 위원장직을 상반기(2008년 ~ 2010년)에 맡았다.[15] 그리고 2009년 7월, 정부와 여당(한나라당)은 '비정규직 2년 이상 사용금지 법[16] ' 의 시행이 유예되지 않으면 100만 실업(해고) 대란이 날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며, 야당과 추미애 위원장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은 오히려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4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으로 법을 개정하려 하였다. 하지만 추미애는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5자 합의’가 나오지 않으면 상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정부·여당의 법 개정 시도를 막아냈다.# 당시 추 위원장은 한나라당 소속 한노위원들이 '위원장의 사회 기피 또는 거부' 운운하며 사회권 접수를 시도할까봐, 사회권 거부로 해석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계속 위원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화장실 가는 것도 이석했다고 할까봐, 한나라당 소속 위원들이 회의장을 떠난 것을 확인하고 갔다.# 이후 정부의 엄포와 달리 100만 대란설은 실태조사를 통해 허구임이 입증됐고##, 2년 이상 사용금지 법 시행 이후 2달 만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율이 63%에 달하였다는 통계가 나왔다.# 이에 추미애 위원장은 "정부 여당이 주장하던 100만 해고대란설은 거짓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용기간 연장을 추진하는 대신 정규직 전환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당초 노동부가 비정규직 사용시한 4년 연장의 전제로 주장했던 100만 대량 해고는 일어나지 않았다"며 "한나라당과 노동부는 그동안의 가설 자체가 허구였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비정규직법 무력화를 포기하고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 상임위원장단 간 청와대 회동에서 추미애는 이 대통령에게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과 관련하여 "이념갈등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 된다"며 비판했다. 이날 이 대통령에게 했던 발언에 대해 며칠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사건건 대립각으로 몰고 간다는 점을 지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이 닮았다는 말을 하던데,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 노 전 대통령도 초기에는 이념적 편가르기에 몰입했고, 이 대통령도 방식만 다를 뿐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극단으로 가는 것에 대해 국민들은 지쳤다. 국민 인식은 이미 다양한 스펙트럼 속에서 성숙해 있다."고 했다.#
2009년 5월,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개혁정책인 뉴민주당 플랜에 대해 "뉴 민주당 플랜은 그 자체가 노무현 프레임에 갇혀 있고,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의 아류와도 같다"고 주장했다.#또한 프레시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추미애는 전주 우석대 강연에서 뉴민주당플랜과 노무현 정부에 대해 직접적이고 원색적으로 비판하였는데, "뉴 민주당 플랜이 한나라당의 정책과 무슨 차별성이 있으며 좌회전 깜박이 넣고 우회전 정책을 추진한 노무현 프레임과 무슨 차이점이 있겠느냐"며, "민주당이 외면 받는 이유는 입으로는 중산층·서민을 말하면서도 정책으로는 비정규직 증가, 양극화 심화, 그리고 시장에 권력이 넘어갔다고 하면서 대기업과 금융에 대한 규제 포기, 한미 FTA 등 신자유주의를 무분별하게 도입한 데 있다"고 하였다.#
2009년 12월에는 노조법 개정이 이슈였는데, 합의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추미애 위원장은 여야와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8인 연석회의’를 마련했고, 이를 토대로 여야 및 노총의 주장을 종합한 ‘추미애 중재안’을 만들었다. 이후 당내 반발을 무릅쓰고 소신에 따라 환노위 전체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야당 의원들은 토론을 거부하며 퇴장하였다. 결국 여당 의원들만 남아 있는 가운데 노조법 개정안은 환노위를 통과했다.[17] 이후 추미애는 "마치 십자가를 진 사람처럼 무거운 마음이고, 또 외로운 마음"이라고 하였다.# 한편 야당 의원의 회의장 출입이 봉쇄된 것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는데#, 추 위원장은 "출입이 봉쇄된 적도, 저지된 적도 없다.", "회의장을 봉쇄하라고 지시한 바 없다. 수석전문위원에게 환노위원들만 입장하도록 지시했다[18] ."고 하였다.# 이 일로 인해 추 의원은 당시 회의 진행에 강하게 항의하던 민노당 등에 의해 국회 윤리위에 제소되었고, 당내에서는 2개월 당원 자격정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추 위원장은 "같은 상황이 와도 선택엔 변함이 없다"고 하였다.# 한편 해당 법안은 이후 본회의를 통과되어 법률로 확정되었는데, 이 법에 대해서는 평가가 갈린다. 노동계 내에서도 비판적 의견을 가진 언론이 있는가 하면#, 전교조나 한국노총처럼 추 위원장에게 고마움과 지지를 표한 곳도 있다.#
2011년에는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선출을 위한 민주당 경선에 출마하였다. 이 경선에서는 같은 당의 박영선 의원이 추미애 의원 등을 꺾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당시 재야에 있던 박원순이 최종적으로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고, 이후 본 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에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55.2%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선거 캠프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그 이전에는 민주통합당의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2013년에는 저서 <물러서지 않는 진심>을 냈다. 이 책에서 추미애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대선운동을 해냈고 같이 부둥켜안고 승리를 기뻐했던 대통령과 인간적인 해후를 하지 못한 채 영영 작별했다”면서 “사과의 타이밍을 놓친 것을 무척 후회했다”고 했다.#
2015년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2.8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문재인에 의해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돼 문재인 지도부에 합류하였다. 한편 2015년 4월 7일,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고문이 "당 운영을 할 때 주류는 60%, 비주류는 40%를 맡는 게 관행"이라는 발언#을 하며 문재인 당시 대표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는데, 권 전 고문의 문제의 발언이 나온 다음 날인 2015년 4월 8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추미애는 "지지 세력을 받들고 챙기라는 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언이지, 지분을 챙기라는 게 그분의 뜻은 아닐 거다"라며 동교동계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당시 주승용 등 비노계 최고위원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문재인 당시 대표의 사퇴를 주장하며 문 대표를 흔들어댔고, 결국 안철수가 주축이 되어 비노계의 연쇄 탈당 사태가 일어났다.# 하지만 당시 최고위원이던 추미애는 탈당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노’와 비주류의 공세로부터 문재인 대표를 적극 방어했다. 2015년 12월, 안철수가 혁신전당대회를 요구하며 문재인 대표의 사퇴를 압박하고, 당 지도부 안에서도 비노계의 반발이 거세질 당시 추미애는 “각자 목소리를 내서 파편조각처럼 내뱉는 말이 멋지게 들릴 수는 있어도 문제 해결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등 문재인 대표를 적극 옹호했다.#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 때도 분열에 반대했고, 새정치민주연합 시절의 분당 사태 때도 역시 분당에 반대하고 문재인 대표를 지키며 소속 정당 충실했던 성향은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표 선거에 도전할 때 긍정적인 평가로 돌아오게 된다.# # 실제 추미애는 1995년, 정계입문하면서 민주당에 들어온 뒤, 한 번도 탈당을 한 적이 없다.# 소속 당이 당명을 변경해서 당적이 바뀐 적은 있어도, 스스로 당적을 바꾼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안철수와 소위 동교동계가 문재인 당시 대표를 비판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여 신당(국민의당)을 창당하려는 분당 사태가 일어난 2016년 초, 추미애는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저는 1995년 여름에 제 일생 입당원서라고 한 번 써봤다. 쓸 때 무척 손이 떨렸다. 그때 제 마음은 내가 정치호적을 지금 작성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며 "호적을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도 참여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법이다."라고 연설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합의 타결에 대한 반발로 더불어민주당에서 만든 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광진구 을에서 새누리당 후보와 국민의당 후보의 3파전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극복해내고 43,980표(득표율 48.5%)를 얻어 당선돼 여성 정치인으로서는 헌정 사상 최초로 지역구 5선 국회의원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19] 그것도 여론조사에서는 오차범위 안의 접전이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여유롭게 승리했다. 국민의당 후보의 출마로 야권 표가 분산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역구에서 인기나 인지도는 탄탄한 모양이다.
4. 5선 의원·더불어민주당 대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이 됨으로써, 박순천, 박근혜, 이미경에 이어 대한민국 역대 여성 최다선(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런데 앞선 3명의 여성 정치인의 선수(選數)에는 비례대표 경력이 포함되어 있어, 지역구 선수(選數)로만 따지면 대한민국 역대 여성 지역구 최다선(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20]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전당대회 개최를 머뭇거리며 대표직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김종인 당시 비대위 대표를 비판하며, 조기 전당대회 개최를 주장하였고, 2016년 8.27 전당대회에서 실시되는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선 초기에는 인천시장을 지냈던 송영길 후보와 양강 체제로 경선이 진행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송영길 의원이 예상 밖의 예선 탈락을 하면서, 이종걸 의원과 김상곤 전 경기도 교육감을 상대로 경쟁을 펼쳤다. 이 당시 상대 후보들은 추미애에게 노무현 탄핵 경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고, 추미애는 “내 정치 인생 중 가장 큰 실수이자 과오가 탄핵에 찬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 전당대회 2주 전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과의 인터뷰에서는 "지지세력의 서로를 향한 분노와 분열의 상처 아직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번 기회에 온 몸을 바쳐 통합으로 갚아야 될 강한 책무를 느낍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2016년 8월 27일 열린 전당대회 선거에서 54.03%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시 전당대회장 연설에서 추미애는 “오늘, 참 운명 같은 날입니다. 21년 전, 1995년 8월 27일 광주에서 판사를 하다 김대중(DJ) 대통령을 만나 입당원서 쓴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고 말했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 당 대표가 돼 대선 승리로 갚겠다”고 했다.#
당시 추미애 후보는 대의원 51.53% + 권리당원 61.66% + 일반 당원 55.15% + 일반 국민 여론조사 45.5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21] 특히, 친문 진영이 대거 몰려있다고 평가되는 권리당원 투표에서 61.66%의 압도적 득표율을 올렸다.# 그리고 전통적인 호남 출신 당원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대의원 투표에서도 51.53%의 득표율로 과반 지지를 넘겼고, 당원 여론조사 55.15%, 국민 여론조사 45.52%를 기록하면서 더불어민주당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인 친문 & 호남의 지지를 모두 받아 탄탄한 정통성을 거머쥐게 됐다. 언론에선 '당선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압승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참조 기사: 추미애, '친문결집+호남공략'으로 당권 잡았다, 참조 기사: `친문` 지지 얻은 추미애…더민주 당대표 등극
친문 성향의 사람들 중에는 동시에 친노 성향인 이들이 많은데,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당시 추미애가 탄핵 찬성표를 던진 것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추미애를 고깝게 보는 경우가 꽤 있다. 따라서 추미애가 친문 성향의 유권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은 것이 의외의 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이던 시절 추미애에게 같이 일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추미애는 이를 수락하며 문 대표 체재내에서 지명직 최고위원직을 맡은 바 있다. 지도부에서 문 대표와 같이 일하는 동안, 당내에선 문 대표의 사퇴를 촉구하는 등 혼란스러운 사태가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추미애는 문 대표를 흔들어 대던 세력들을 최고위원회에서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후 결국 동교동계 등 비문계가 당을 떠나며 분당을 일으켰을 때도, DJ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그들을 비판하고 당을 지켰다. 관련 칼럼: '노무현 탄핵' 했던 추미애가 '친노 친문'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이유, 2016.08.29, 관련 기사: 노무현 얘기에 울컥하던 당원들 집권 위해 '탄핵' 추미애도 끌어안다, 오마이뉴스, 2016.08.27 또한 본인 스스로가 탄핵 사태 시절을 흑역사로 생각하고 있다. "내 정치 인생 중 가장 큰 실수이자 과오다."
또한 호남 유권자들의 표를 많이 끌어모은 데는, 추미애가 대구광역시 출신이긴 하지만 시가는 호남(전라북도 정읍시)라는 점[22][23] , 판사 시절에 호남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다는 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영입 인사라는 점,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추미애에게 "호남 사람인 제가 대구(출신)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는 점 등이 나름의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즉 이러한 인연 덕에 호남에서도 안정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추미애는 당선 수락연설을 통해 당선 수락연설을 통해 "온 국민을 힘들게 했던 찜통더위가 사라지고 '추풍(秋風)'이 불기 시작했다. 오늘 우리 당에도 분열주의·지역주의·패배주의라는 악령을 없앨 '추풍'이 왔다"며 "저에게 모아주신 한 표 한 표가 공정한 대선 경선으로 승리하는 후보를 만들어 2017년 반드시 정권교체를 해내라는 명령으로 알고 받들겠다"고 밝혔다. 또한 분열·패배주의·낡은 정치 세 가지와 결별하겠다며, "강력한 통합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당원 추미애가 걸어왔던 길이고 당대표가 당원 동지들과 앞으로 책임지고 가야할 길"이라고 했다.#
한편 당 대표에 당선됨으로써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최초의 TK 출신 당 대표가 되었다.[24] 한편 참고로 앞선 9일에는 새누리당에서 사상 처음으로 호남 출신인 이정현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당 대표 취임 후,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이승만 · 박정희 · 김영삼 ·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했다. 민주당의 당 대표 자격으로 이승만 ·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을 참배한 것은 문재인 · 김종인 전 대표에 이어 세 번째였다. 참고로 문재인 전 대표가 최초로 참배하기 전까진 야당에선 이승만, 박정희 묘소 참배를 꺼리는 분위기였다. 두 사람 다 독재자들이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추미애는 이승만, 박정희 묘역까지 포함한 전직 대통령 묘역 참배 후,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 "박 대통령은 3년 연속 불참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과 이명박 정부 · 박근혜 정부가 8년간 한 번도 안 간 제주 4·3 기념식에 가라"고 촉구했다. 한편 2016년 9월 8일에는, 당 대표 취임 인사차 전임대통령을 차례로 방문하는 차원에서 전두환을 예방하려 했다가 당내 반발로 취소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무리 통합 차원이라 해도, 군부 독재자 출신에다가 5.18의 원흉이기도 한 전두환을 만나 무슨 소리를 하겠다는 거냐는 반발이었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지지 기반 중 하나인 호남에서 일어난 가장 끔찍한 사건 중의 하나인 5.18 민주화운동 때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주도 인물 중 한 명이 전두환이라 반대가 특히 더 심한 편이었다. 결국 예방은 무산됐다.
2016년 8월 31일에는 전당대회에서 당선된 최고위원들과 함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고 부인 권양숙 여사를 예방했다. 이날 추 대표는 너럭바위 앞에서 묵념하기에 앞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추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묘역 앞에서 "이제 함께 힘을 합쳐서 민생의 등불이 되고 희망이 되는, 지지세력을 통합해 민생을 살리고 정권교체를 해내겠다. 힘을 달라"고 말했다. 이어 방명록에는 "이제 온전히 하나 돼 민생을 위한 정권교체를 해내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힘주십시오"라고 썼다.# 추 대표와 최고위원들 묘역 참배를 마친 뒤 사저로 이동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권양숙 여사는 "8월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당선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생전에 노 대통령도 추 대표를 높이 평가했고 늘 공부하고 책을 가까이 하는 부분을 치하했다"고 말했다.#
2016년 10월 JTBC의 태블릿 PC 보도로 인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발발하고, 곧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논의되기 시작할 무렵 새누리당은 최순실의 부역자라며, 탄핵을 위해 새누리당에게 구걸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추미애가 당 대표가 되면 헛발질이나 똥볼을 많이 찰 줄 알았다"는 식으로 비아냥을 하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탄핵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있기 전에 새누리당 비박계 측에서 민주당 측에 탄핵과 개헌을 딜하자는 제의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추미애 대표는 그러한 거래 제안을 거부하며 "탄핵을 구걸하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었다. 반면, 추 대표를 비난했던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탄핵 정국 속에서 '제3지대론'을 주창하며 새누리당 비박계와 개헌을 고리로 연대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당초 합의된 2일 탄핵 발의에 동참하지 않았고, 야권 지지자들 중에서 새누리당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층으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2016년 11월 14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한창 우리나라를 불태우고 있을 때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표 자격으로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게 단독 영수 회담을 제의해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다른 야당들은 대통령의 퇴진을 당론으로 정해 요구하고 있었으나, 민주당만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지 아니하던 상태였고, 심지어 당내 인사들의 의견이 제각기 달랐으므로 "당론조차 통일되기 이전인데 대체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야 이야기를 꺼낼 거면 민주당 혼자 가는 것보다 야권이 같이 가는 것이 위협적일 텐데 왜 야권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혼자 가려하느냐" 등의 비판 의견이 있었다. 그에 반해 "원내 제1야당의 수장으로서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당시까지 공식적 당론은 퇴진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고 최후통첩을 날린 뒤 당론을 바꿀 명분쌓기용이 될 것이다,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해야 하는 것이며 북한의 김정은과도 대화하라고 하는 야권에서 대화의 형식에 얽매여 대화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모순이다"라는등의 찬성 의견(가령 썰전에서 유시민 등) 이 있었다.
한편 국민의당과 정의당은 반발했다. 결국 같은 날 소집된 당내 의원총회를 거쳐, 다음날로 예정되었던 영수 회담은 취소했으며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일을 계기로 당론을 대통령 2선 후퇴에서 퇴진으로 변경, 이로써 모든 야당이 당론을 같이 하게 되었다. 다음날 추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민의 뜻을 전달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영수 회담 제안을 했다고 설명하며 야당과 국민에게 사과를 전했다.# 영수 회담을 일방적으로 철회함으로써, 그래도 현직인 대통령에게 무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일부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썰전 193화에서 전원책과 유시민이 세게 비판했다. 유시민 작가는 그래도 제 1야당 대표가 가기로했으면 당에서 밀어줘야지 무슨 당이 이런 당이 있냐며 저 당이 저렇게 순탄하게 가는 당이 아니라고 디스했다. 전원책 변호사는 공당으로서 품위없는 행동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자존심을 무참히 무너뜨린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실제로 몇 개월 전만해도 이런 식의 일방적인 약속 취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과 권위가 너무나도 심각하게 손상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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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9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와 우상호 당시 원내대표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앞두고 국회에서 열린 비상 의원총회에서 논의를 하고 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는데, 이로써 대한민국 헌정 사상 2번 있었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있어서 2번 모두 야당 지도부의 일원(노무현 대통령 때는 당 최고위원[25] , 박근혜 대통령 때는 당 대표)으로서 참여했다는 특이한 이력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2번의 탄핵 소추를 모두 현직 국회의원으로 겪은 의원은 20명이 넘고, 2번 모두 찬성표를 던진 의원도 김무성, 심재철, 정병국, 심재권 등 최소 4명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26] 하지만 2번 모두 야당 지도부에 있던 사람은 추미애 의원이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탄핵소추미애', '킹슬레이어' 등 새로운 별명이 따라붙었다. 다만, 해당 별명의 배경엔 다소 간의 오해도 있다. 사실 노무현 탄핵을 주도한 자는 최병렬(당시 한나라당 대표)과 조순형(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표)이었고, 추미애는 오히려 당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탄핵 반대를 강하게 주장하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2명[27] 중 한 명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탄핵을 추진하던 민주당의 골칫거리 중 한 명이 바로 추미애였다. 그러나 이후 '왜 당론을 따르지 않느냐', '너 혼자 잘 났냐'는 당내의 거센 비난 등 여차저차한 사정[28] 으로 인해 결국 당론에 따르기로 하고, 탄핵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추미애 역시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에 기여를 하였지만, 앞장서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추미애는 탄핵소추안 발의[29] 때도 탄핵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당 대표에 취임하기 이전부터 THAAD(사드) 한반도 배치에 반대하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북핵은 생명을 위협하지만, 사드는 정치·외교·경제 위협하는 일"이라는 발언을 했었다.#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서 웬디 셔먼 전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에게 “사드는 중국을 겨냥한 것인가요, 북한을 겨냥한 것인가요?” 라는 질문을 건네기도 하였다. # 그러나 사드 배치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한다는 입장은 아닌지 더민주의 사드 배치에 대한 정확한 당론 결정을 연기했다고 하며#, 과거 김종인 전 대표가 취했던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이름의 신중론을 그대로 이어받아 밀고 나가는 듯하다. 하지만 2017년 7월 경 추궈홍 주한 중국 대사와 회동에서 "사드의 효과가 과장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사드배치 찬성 입장인 바른정당은 지금 상황에서 할 만한 발언은 아니라며 비판 논평을 냈다. #
당 대표에 취임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터진 전대미문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정국 속에서 민주당은 역사상 전례 없는, 무려 50%에 육박하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였다. 곧이어 실시된 조기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을 민주당 후보로 선출하였고, 추미애는 문재인의 요청으로 민주당 국민주권선거대책위원회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2017년 5월 9일,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민주당은 9여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내면서 집권여당이 되었다. 그리고, 추미애 본인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집권여당의 여성 당 대표가 되었다.[30]
2017년 6월 16일, 추미애 대표는 기자들과 함께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관람했다. 당시 동석했던 기자의 표현에 의하면 '영화를 관람한 추 대표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 다른 기자의 말에 의하면 추 대표는 영화 도중 노 전 대통령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을 때는 함께 웃었고, 노 전 대통령을 추억하는 장면에서는 하늘색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으며,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에 앉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장면을 지켜봤다고 한다. 이후 기자들과 티타임을 가진 추 대표는 여전히 목이 메인 채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고. # 티타임에서 추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나에게 '노무현의 시대가 올까요?'라고 물어서 '파도가 목적지까지 다 못 가겠지만 그 다음에 오고 또 오고 하면 괜찮겠지 않나'라고 얘기했다"는 유시민 전 장관의 인터뷰 장면을 거론했다. 그러면서 "유 장관의 표현은 멋졌다"며 "노무현 대통령을 몰랐던 분들, 돌아가셨을 때 대통령의 묘소에 아이들 손을 잡고 가던 그 마음이, 그런 시대를 염원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추 대표는 이어 "그 말은"이라고 하고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또한 "3기 정부가 됐다. 참 무겁고,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책무감이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노무현 시대'를 불평등 문제를 이해하고 바꿔나가는 시대였다고 표현하며, "노무현의 분노가 희망으로 반전되면서, 우리 사회 구조적 모순을 하나하나 자각하면서 바꿔야한다는 생각이 시작됐던 시대다"며 "이미 신자유주의 한 가운데에 이미 편입되면서 그 때는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 시대에 해야 할 과제를 막상 놓쳤다. 갈수록 사람들이 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이 많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이 터진 후, 2017년 7월 6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국민의당 자체 조사발표에 대해 '꼬리 자르기가 아닌 머리 자르기'라고 했다.# 참고로 해당 발언은 한겨레 신문 만평에 나온 표현을 인용한 것이었다.# 이 발언에 대해 썰전의 두 패널은 비판하였다.# 반면 문대통령 지지자들 및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체적으로 박수와 지지를 보냈다. 《‘썰전’ 유시민은 모른다, 추미애와 문 지지자의 속내》, 미디어스, 2017.07.14., 《문재인 팬들은 왜 추미애를 응원했나》, 노컷뉴스, 2017.07.19. 여권 성향 팟캐스트들도 추대표의 발언에 박수를 보냈다. 가령 대표적 친문성향 팟캐스트인 '정치신세계'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이여, 추미애 대표를 엄호하라!'는 제목의 방송을 하였으며[31] , 해당 팟캐스트 진행자인 권순욱 기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역할'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여당과 청와대가 각자 역할을 나누어 맡았고, 추대표는 충분히 할말을 잘한 것이라고 하였다.# 문대통령 지지자인 깁갑수 평론가도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추대표는 자기정치를 한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정치를 포기한 것'이라고 평하며, 추대표가 잘했다고 하였다.# 또한 친문 정치인으로 꼽히는 박범계 의원 역시 "당 대표로서 이 엄중한 사건에 대해서 그에 걸 맞는 평가를 내리고, 그것을 당원들에게 호소하고 상대 당에게 무엇인가의 정치적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온당한 태도"라고 하였다.#
2017년 8월, 소위 '삼성 장충기 문자 사건'이 터졌지만, 국가기간통신사인 연합뉴스는 침묵했다. 이에 추 대표는 같은 달 12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이 사건으로 드러난 언론과 재벌의 유착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그 자리에서 추 대표는 "특히 충격적인 것은 매년 혈세 수백억을 받는 연합뉴스 핵심 보직 인사가 대단히 노골적인 방식으로 삼성에 사역했다는 점"이라며, "무엇을 위해 이렇게 모든 것을 내팽개쳤나. 노조가 진상을 규명하자고 요구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관련자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연합뉴스는 이러한 추대표의 발언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원내 주요 정당 대표, 그것도 여당 대표가 최고위원회에서 한 공개 발언을 국가기간통신사인 연합뉴스가 보도하지 않은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2017년 8월 27일, 더불어민주당의 당 대표에 취임한지 1년이 되었고, 이보다 앞선 10일에는 여당 대표가 된지 100일이 되었다. 한편 취임 1주년이 되는 날에는 전 당원들에게 감사의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며, 취임 1주년 기자회견을 가졌다.
2017년 10월 13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 지도부·시도당위원장들의 만찬에서 추대표는 “당원이 83만명으로 증가했고, 얼마 안 있으면 100만 당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도 추대표는 100만 권리 당원 확보가 민주당의 목표 중의 하나라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2017년 11월 14일부터 4박 6일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해 미국 조야의 인사들과 북한 문제 등 현안을 논의하였다. 같은 달 30일부터는 3박 4일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해 베이징에서 열리는 '세계 정당 고위급 회의'에 참석하였다.#
2017년 11월 28일,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감사원법, 국가재정법, 국정원법, 국회법, 예산회계에 관한 특례법 등 5개 법률 개정안을 한꺼번에 발의해 국정원 특활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당시는 박근혜 정부 국정원의 특활비 청와대 상납 논란이 불거진 상황이었다. 추 대표는 "국민의 세금을 영수증 없이 '묻지마 사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특수활동비의 정직하고 투명한 사용과 국가 안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여당 대표가 임기 중 현안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2017년 12월 11일부터 18일까지 6박 8일 일정으로 한.러의원외교협의회장 자격으로, 6박8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해당 방문은 러시아의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공식 초청으로 성사됐다. 방러단에는 추 대표 등 여야 국회의원 7명이 포함됐다. 민주당에서는 박범계·박재호·백혜련·김병관 의원, 자유한국당 김정훈 의원, 국민의당 신용현 의원이 함께 했다.#
2017년 12월 27일,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추미애 대표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의 검토결과 보고서 발표와 관련하여 "일본이 엿 바꿔먹듯 말을 바꾸는 행태에 대해 분명히 사과하고 그 사과와 사죄가 불가역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다시 한 번 밝힌다"고 말했다.#
2018년 새해 처음으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추미애 대표는 "적폐청산이 산이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고, 건너야 할 강이라면 반드시 건너겠다는 각오로 국민과 함께해낼 것"이라며, "우리 당은 '마부정제'(馬不停蹄: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난 성과에 안주하지 말고 더욱 발전해 나가자는 취지)의 각오로 우리에게 주어진 적폐청산의 소명과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를 위해 끊임없이 경주할 것"이라고 신년에 임하는 각오를 밝혔다.# 그리고 사흘 뒤 본인의 SNS에 올린 글을 통해,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작업과 관련해 피로감이 생길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해당 글에서 추 대표는 일제시대 독립투사에게 '독립운동 36년째라 피로감이 있으니 이제 일본 제국주의를 승인하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친일세력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적폐 청산의 피로감이라고 쓰고, 적폐세력의 필요함이라고 읽는다고 덧붙였다. #
2018년 1월 30일, 당내 인터넷 방송에 출연해 2018년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에서의 격전지를 꼽아달라는 물음에 "여전히 수도권일 것"이라며 "서울은 수성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어 민주당의 불모지로 꼽히는 PK(부산·경남)과 TK(대구·경북)지역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곳이 부산·울산·경남(부·울·경)이다. 부·울·경을 바꿔보는 것이 이번 선거의 관전 포인트일 수 있다"면서 "대구광역시, 경북은 우리가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 2월 1일, 추미애 대표는 문재인 정부의 주요 과제인 혁신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혁신성장추진위원회를 민주당 내에 출범시키고, 본인이 직접 위원장을 맡았다. 추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첫 회의에서 "혁신 성장을 보다 신속하게 이행하기 위해 혁신성장추진위를 구성했다"며 "당 대표인 제가 이례적으로 나서, 당이 총력을 기울여 뒷받침하겠다"고 했다. 또한 "우리 위원회에서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의 사각 지대를 발굴해 제도 개선에 반영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라며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우리 산업 경제가 갖고있는 문제점을 진단하겠다"고 했다. 이어 "현장의 아이디어를 접목하고 정부를 움직이게 하는 중간 매개 역할을 해낼 것"이라며 "혁신성장 생태계 기반을 조성하고 입법이나 예산을 지원할 수 있는 노력을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추미애 의원은 평소 검찰 개혁을 위해 공수처 설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는데,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와 관련하여 춘천지검장과 국회 법사위원장이 수사를 무마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이 때문에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내용의 검찰 내부 폭로가 나오자, 추 대표는 2018년 2월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사태와 관련한 글을 올려 "견제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이 안에서부터 썩어 무너지고 있다"며 "그 결과 사법정의는 훼손되고 공정한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국민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같은 문제는 "공수처 설치 등 검찰개혁이 정답"이라고 강조했다. #
2018년 2월 7일, 민주평화당의 초대 당 대표인 조배숙과 취임 예방 인사차 만난 자리에서 추 대표는 "(조 대표의) 결의와 각오가 남다르다"며 "앞으로 협치의 중심에 서줄 것"을 당부했다. 이어 "조 대표께서 국회 스스로 자정능력을 회복해 잘못된 부분을 과감히 도려내고 돌파하는 데 힘을 합쳐달라"고 주문했다.# 한편 민주평화당 소속 의원들 상당수는 과거에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으로서 현 더불어민주당과 뿌리가 같은 터라, 정치권에서는 민평당이 6월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민주당에 합류할 것이라는 설이 나돈다.# 하지만 추 대표는 "(국민의당 탈당 의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당 대표인 제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어려운 숙제는 제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민주당을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물어보도록 하겠다"며,"'우리 정당의 정체성에 반한다, 물을 흐릴 수 있다, 민주당과 맞지 않는다'고 하면 당원들이 반대할 수 있다"다고 했다.# 조배숙 민평당 대표 역시 추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다당제로 전환하는 것이 이런 개혁이나 국민 삶을 살피는데 필요한 체제"라며 "야당의 본분을 잊지 않겠다"고 말하며, 무조건적인 협력에 선을 그으며, 민주당에 흡수되는 것을 경계했다. #
2018년 2월 15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제54차 뮌헨안보회의' 참석을 위해 4박 6일간의 일정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뮌헨안보회의는 범세계적인 안보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1963년에 창설된 유럽 최대 규모의 연례 국제안보회의로, 2018년도 회의에서는 핵 안보와 테러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집권당 대표가 이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추미애 대표의 참석이 처음이었다. 추미애 대표는 2월 17일 '핵 안보'를 주제로 하는 토론에 5인 패널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또한 독일에서 푸잉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외사위원회 주임과 양자 회동을 가졌으며, 볼프강 이싱거 뮌헨안보회의 의장 등이 참여하는 아고라전략연구소 초청 경제인 간담회에 참석했다. #
2018년 4월 3일 같은 당의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함께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주 4·3사건’ 추념식에 참석하였다. 이날 추념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하여,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바른미래당 박주선 공동대표, 민주평화당 조배숙 대표, 정의당의 이정미 대표. 노회찬 원내대표가 참석하였다.#
2018년 4월 16일 조현민(기업인)#s-3.2 대한항공 전무의 갑질 의혹과 관련하여 "책임감 대신 천박함을 일관한다면 국가경제를 위해서라도 분명한 페널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양호 일가의 세 자녀는 전부 물의를 일으켰다. 반복되는 재벌 2-3세의 갑질 행태는 재벌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만 높일 뿐"이라고 지적하며, "이번 사건은 개인의 인성 문제로 그칠 사안이 아니다. 좋은 나무에 나쁜 과실이 열리지 않는 법이다. 금수저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경영능력과 윤리의식이 부족한데도 경영권을 무임승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8년 재보궐선거가 더민주의 초유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당대표로 치른 모든 선거에서 전승하였다. 2018년 8월로 임기가 만료되며, 그 경우 민주당계 정당 최초로 임기를 끝까지 마친 대표가 된다. 2018년 6월 18일 김현정의 뉴스쇼에서는 당대표 연임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대해 가능성을 0%로 못 박았다.
2018년 6월 29일, '2018 한반도평화 심포지엄'에 참석해 북핵문제와 관련, "'CD'(완전한 비핵화)라는 것은 목표이고 'VI'(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는 절차에 관한 것"이라면서 "핵물질이나 핵무기의 종류, 수량에 따라 어떤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할 것인가, 국제사회와 국제원자력기구와 함께할 수 있는지 등은 협상 과정에서 풀어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 체제 보장을 합의했다는 것 자체가 통 큰 결단이자 합의였고, 문재인 대통령 평화외교의 성공"이라며 "지금은 많은 말 보태기보다, 부정적 전망보다, 축구 강국인 독일에 맞서 2 대 0으로 이겨낸 민족의 끈기처럼 '하면 된다'는 믿음 속에서 여러 방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체제 보장은 군사적 의미의 체제 보장일 수 있으나, 진정한 체제 보장은 내부에서의 더불어 잘사는 사회 건설"이라면서 "외침이 아니라 내부 폭발로 무너지지 않으려면 공존·상생·번영을 가져오는 목적의식이 있는 평화여야 한다. 우리가 축적한 민주주의, 시장경제, 자유와 같은 가치와 경험을 북녘 동포들도 함께할 수 있는 세상으로 (가기 위해) 꾸준히 만나서 설득하고 교류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고 했다.#
2018년 7월 18일, 추미애 대표는 일본 정부가 독도 왜곡 교육 의무화시기를 3년 앞당겨 시행하기로 고시한 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고질적인 우경화 교육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추 대표는 이날 민주당 최고위에서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이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초중등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침략을 미화시키고 식민사관을 정당화 하려는 일본 정부의 교육 방침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이어 "일본의 자의적 역사 인식이야말로 일본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국제사회의 질타를 야기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면서 "대한민국은 역사적으로나 실효적으로나 우리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도발을 용납할 수 없으며 좌시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2018년 8월 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끝으로 당 대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이후 2019년에 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
4.1. 계엄령 발언 관련
2016년 11월 18일, "박근혜 대통령이 계엄령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무책임한 정치적 선동”이라며 “더 이상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발언은 자제해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도 “제1야당 대표가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를 공식적으로 퍼뜨리고 있다”며 “분명하게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박근혜의 팬클럽인 박사모에서는 추미애를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추미애 대표는 훗날 인터뷰에서 '계엄령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있었으나, 정보를 미리 풀어버리면 실행을 할 수 없을테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말하였다'고 하였다.# 실제로 제1차 촛불집회 때 수도방위사령부의 비상대기령이 떨어진 점#, 한민구 국방장관이 비상대기한 점 등은 '그러한 정보가 돌았다'는 주장 및 '그러한 정보 자체의 신뢰성'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반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더라도 헌법77조에 의해 국회의원 과반의 요구가 있을 경우 해제가 가능하므로, 여소야대인 20대 국회 상황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은 사실상 어렵다는 얘기도 있었다.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헌법은 국회의원 과반수가 요구하면 대통령은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고 77조에 못 박고 있다”며 “판사 출신인 추 대표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데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반면 지금껏 박근혜의 행동이 이미 상식적인 선을 벗어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이마저도 알 수 없다는 반론도 있었다.
추 대표의 발언이 있은 뒤 1달이 지난 2016년 12월 22일에 열린 최순실 5차 청문회에서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하나회’의 뒤를 이은 신흥 군내 사조직 알자회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계엄령 발언이 다시 주목받았고, 해당 발언의 신빙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
한편 추 대표는 시간이 지나 2017년에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정보 입수 때 미리 쳤다고 했다. 추 대표는 먼저 '계엄령에 대한 정보가 있었나'라는 사회자 김용민의 질문에 "있죠. 있는데, 그 정보를 까버리면 안 되니까…"라면서 "제1야당의 대표로선 시민이 위협받는다고 그러면 가감 없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감지되는 몇 군데 소스를 갖고 먼저 사전에 쳐준(차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친위쿠데타를 우려한 건데 정보가 있었나'라고 재차 묻자, 이에 대해 추 대표는 "있는 거죠. 그 후에도 그건 밝혀졌고…"라면서 "(실제 움직임에 대한 정보가)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정보의 시대이고, 그 정보를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이다. 5·18을 저지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라는 것을 미리 선수를 쳐서 일깨워 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2018년 3월 9일, 추 대표의 발언을 떠올리게 하는 두 건의 제보가 보도됐다.'''
첫번째 제보는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되기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것인데, 박근혜 퇴진 촛불 시위 인원이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던 2016년 11월 12일, 당국은 시위대가 청와대로 진입할 경우에 대비해 특전사를 비롯한 군 병력을 투입하는 계획을 검토했었다고 군 고위관계자가 밝혔다. 실제로 집회 당일 오전부터 합참 상황실에는 군 수뇌부들이 모여 도심 상황을 예의주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특전사를 시위 진압에 동원하려면, '계엄령'이나 '위수령'이 발동돼야 하기 때문에, 이런 방안까지 검토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두번째 제보는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되고, 헌재에서 재판 중이던 때의 일에 대한 것인데,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될 경우 반발 시위가 커질 것에 대비해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군 투입 방안을 논의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고 군인권센터가 밝혔다. 이상의 제보에 대해 국방부는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
다만 이때까지 추 대표의 계엄령 발언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나온 건 일부 군인들의 소행뿐이고, 청와대에서 직접 계엄령을 준비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나오지 않았는데,, 2018년 3월 20일, 위수령을 국방부 차원에서 검토한 흔적이 담긴 문건이 발견됐다고 JTBC 뉴스룸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문건은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 지시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국방부는 다음 날 해당 보도를 부인하며, 수방사 차원에서의 검토만 있었고 수방사 문건에 예비대 증원과 총기 사용 수칙이 포함돼 있어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인식을 줄 수도 있었다고 판단했다. 위수령은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또 반전이 생겼다. JTBC의 위수령 보도에 대해 SBS가 2018년 3월 23일자 보도를 통해 JTBC가 중요한 전제를 빠뜨렸다고 한 것이다. 문제가 된 병력 동원 문건이 이철희 의원이 보낸 ‘위수령 질의’에 대한 답변 자료이므로, 위수령 검토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던 것. 이후 3월24일부터 26일까지 JTBC와 SBS는 상대의 보도가 잘못됐다고 각각 보도했다. 이후 해당 건은 JTBC에 의해 언론중재위원회에 재소됐고, 두 언론사의 공방은 잠잠해졌다. 그러다 2018년 4월 17일 한 주간지에 이철희 의원의 인터뷰가 실렸다. 해당 인터뷰에서 이철희 의원은 SBS 보도를 반박하며, "이 문건(병력 동원 문건)은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제의 초점이 잘못됐다”며, 국방부에서 자신의 질의와는 별개로 촛불집회 당시 군 병력 출동의 법적 근거를 검토했다고 주장했다. 즉, 국방부가 병력 동원을 검토하면서 위수령 검토를 했는데, 그게 우연히 이철희 의원의 질의와 겹쳤고, 2018년 3월 이에 대한 이슈가 터져 나오자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하여 당시 군 병력 동원을 검토했던 관계자들이 별개의 두 흐름을 엮어서 빠져 나가려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위수령 보도 논란을 참조.
그런데 또 다른 증거가 나왔다. JTBC에서 2018년 7월 5일자 보도로 기무사령부에서 촛불집회 당시 군 출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긴 문건을 보도한 것이다. # 그리고 2018년 7월 6일, 이철희 의원이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추미애 대표에게 제보한 사람은 현역 영관급 장교였다는 말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2017년 계엄령 모의 사건 문서 참조.
5. 법무부장관
2019년 11월 30일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낙점되었다는 기사가 뜨고 닷새만인 12월 5일,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차기 법무부 장관으로 공식 지명되었다. 조국 전 장관의 사임 이후 두 달여 만에 이루어진 후임 지명이다. 여당대표까지 지냈고, 5선 의원이라 의전서열상 여당대표(국가의전서열 6위)보다 위인 국무총리(4위)나 국회의장(2위)을 해야 할 중량감이 있음에도[32] 법무부장관(20위) 지명을 수락한 것에 대해서 의외라는 게 중론이다. 전임 박근혜정부에서도 전 여당대표 출신의 황우여가 교육부 장관을 맡은 사례가 있으나, 교육부 장관은 사회부총리(11위)이므로 의전 서열상 크게 하락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반응에 "역사적인 요구와 또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 개인적인 입장을 비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히며 "시대적 요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다만 의전서열은 형식적인 것일 뿐이고 실제로는 법무부 장관의 위상이 교육부 장관보다 못할 것이 없다. 추미애의 판사 경력상 오히려 법무부가 더 어울리기도 한다. 특히 문재인 정부와 임명 당시의 특수성을 고려해보면 오히려 법무부 장관의 위상이 훨씬 높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명 당시 조국 사태로 인해 검찰 개혁 자체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대단히 커졌고, 이 개혁의 주체가 될 법무부 장관에 대한 관심 역시 커졌다. 즉 추미애는 법무부 장관에 올라서 검찰 개혁의 주체로 활동하는 것이 본인의 향후 정치 인생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란 것을 알고 장관직에 올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윤석열 검찰총장[33] 과의 관계 등 주요 현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시대적 소명인 검찰 개혁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임명된다면 2003년 강금실 전 장관 이후 무려 16년만에 탄생한 여성 법무부 장관이 된다.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법사위에서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간사와 자유한국당 김도읍 간사의 합의로 12월 30일, 추미애 장관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30일 개최된 인사청문회는 큰 지적사항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됐지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관련 여야 대치로 청문경과보고서 채택은 무산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에 1월 1일까지 청문보고서 송부를 다시 요청했다. 지금까지 최소 사흘의 기간을 주던 문재인 정부의 전례를 생각해볼때 이례적으로 기한이 촉박한 편이라 임명 강행 의지를 보인 것이란 의견이 많다.##
결국 여야간 합의 무산으로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지만 2020년 1월 2일 오전 7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안을 재가하면서 제67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상기한 바와 달리 장관 임명이 해를 넘기면서 여성 법무부 장관으로는 강금실 이후 17년만이 되었다. 다음 날인 3일에는 추미애 신임 법무부 장관의 취임식이 있었다.취임식 영상
그리고 1월 8일 2020년 첫 검사장급 검찰인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총 32명의 검사장급 인사가 단행된 가운데 강남일 대검 차장검사, 배성범 서울 중앙지검장, 이두봉 대검과학수사부장, 한동훈 반부패강력부장, 박찬호 공공수사부장[34] 등 이른바 윤석열 사단이라 불리는 주요 참모진[35] 을 머리인 윤석열 빼고 산산조각내는 수준의 인사발표로 검찰 내부가 뒤집어졌다. ###. 이 과정에서 검찰총장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 항의했으며 자유한국당은 추미애 장관 탄핵안을 제출했다.###. 보수 시민단체는 추미애 장관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다. 취임 고작 9일만이다. 추미애 장관은 2차 차장검사 이하 인사에서도 1차 인사급의 대규모 교체를 예고했다.
2020년 2월 18일, 알앤써치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추미애 장관의 수사 기소 분리 주장에 대해 반대 여론이 48.7%로 찬성 여론 41.7%보다 높았다.
법무부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여 5월 29일자로 국회의원 임기가 만료되었다.[36]
채널A 검언유착 의혹 사건에서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 전문자문단 심의를 두고 충돌하자, "수사가 계속 중인 상황에서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전문자문단 심의를 통해 성급히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진상 규명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며 심의 절차 중단을 지시, 지휘권을 발동하였다. 또한 윤석열 총장이 해당사건에서 손을 떼고 수사 결과만 보고 받으라고 지시하였다. # 하지만 서울중앙지검의 한동훈에 대한 수사 실패로 인해 용두사미로 끝났다.
한국갤럽 7월 1주차 조사에서도 윤석열 검찰총장은 잘하고 있다 43% VS 잘못하고 있다 38%로 긍정적인 평가가 5%p 더 많았지만,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잘하고 있다 40% VS 잘못하고 있다 45%로 부정적인 평가가 5%p 더 많았다. #
2020년 7월 20일, 미래통합당과 국민의당, 일부 무소속 의원들은 추미애 장관 탄핵안을 제출했다. # 다음날인 7월 21일 추미애는 국회에 출석해서 자신의 탄핵안 보고를 들었는데, 어이가 없어하는 듯이 웃음 짓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윤석열 검찰총장의 아내 및 장모 관련 수사 자료를 읽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 한편 7월 22일 대정부질문에 국무위원 자격으로 출석해서 김태흠 등 야당 의원들과 격렬한 설전을 벌였다.MBC 뉴스데스크
7월 23일, 본회의에서 추미애 장관 탄핵소추안에 대한 투표 결과 총원 292명 중 가 109표, 부 179표, 무효 4표가 나와 탄핵안이 부결되었다. 대통령을 제외하고 고위 공직자에 대한 탄핵 소추 표결이 이루어진 것은 1999년 국민의 정부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 이후 처음이다. 당시에도 탄핵안은 부결된 바 있다.#
그러나 190석은 범여권, 110석은 범야권으로 분류되는데 미래통합당 소속 하태경·박형수 의원과 무소속 윤상현 의원이 불참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여권에서 이탈표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
2020년 8월 12일 발표된 쿠키뉴스·데이터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정부의 성공적인 국정수행을 위해 물러나야 할 인물 1위(32.7%)로 추미애가 꼽혔다. 2위(19.3%)는 김현미.[37] 그래도 김현미와 달리 추미애는 친문 지지층들의 강한 지지로 인해 국정수행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 1위(20.9%)로도 꼽혔다. #
2020년 12월 16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징계위 결정과 문재인 대통령의 재가와 동시에 사의를 표명했다. 이는 내년 개각에 반영될 예정이다.#
2020년 12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은 추미애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 후임으로 박범계 의원을 내정했다.
조국 후임자로 장관에 내정됐을 때부터 윤석열과의 정쟁은 시작한거나 마찬가지였다. 추미애는 민주당 당대표 시절 박근혜를 탄핵시키는데 앞장서고, 문재인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혁혁한 공이 있기에, 거의 총리급 인사로 분류된 거물급 정치인이였다. 이낙연 다음 총리로 내정되는게 오히려 자연스로운 수순이었으나,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조국이 사실상 낙마한 자리에 추미애를 보냈다는 것은, 검찰을 힘으로 눌러보겠다는 청와대의 의지가 내빚혀졌다. 그러나 추미애도 검찰을 장악하는데 실패하였다. 무리하게 밀어붙인 윤석열 징계 건이 역풍을 불러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로 추락하고 검찰의 친정부 세력이 고립되며 검찰에 대한 장악력도 잃었고, 법원에서도 패배하면서 불명예스럽게 장관직을 내려 놓게 됐다. 정치 생명에도 치명타라는 평가가 강하다.
한편 2020년 11~12월 서울동부구치소에서 700명 이상의 수용자와 교도관 등이 코로나19에 대규모로 감염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추미애 책임론이 제기되었고, 추미애는 대국민사과는커녕 별다른 입장 표명조차 없었다가 2021년 새해 첫날이 되어서야 사과했다.
2021년 1월 27일, "검찰개혁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라며 "역사에 남을 검찰개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하며 391일만에 법무부장관에서 물러났다.#
[1] 이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개념이 아니다. 일단 주요 정당들은 '비례대표로 당선된 사람이 다음 선거에 다시 비례대표로 출마할 수 없다'는 룰을 갖고 있다. 그러니 비례대표 의원이 재선 의사가 있으면 당연히 지역구 공천을 노릴 수밖에 없다. 또한 비례대표 안정권 자리는 당연히 지역구 험지보다 선호된다. 공천받으면 당선이 확실한 곳이라면 지역구가 선호되고.[2] 엄밀히 소선거구제하에서 서울 지역 첫 여성 지역구 의원은 제2대 국회 때 종로구 갑에서 당선된 박순천 의원이 있다. 박순천의원은 비례대표를 역임했지만 대한민국 최초 여성 5선 의원이자, 당대표라는 만만찮은 이력을 갖고 있다. 물론 이걸 추미애 의원이 그대로(더군다나 전부 지역구로) 이어 받았지만.[3] 한편 이 발언은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다만 지지철회의 공식적 이유로는 다른 것을 내세웠다.[4] 새천년민주당 내에서 신주류와 구주류의 갈등이 폭발한 후, 신주류가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당시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분당이 되었다.[5] 노무현 및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때 당시 추미애가 보여준 모습에 주목하였고, 결국 이들은 (지난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훗날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추미애를 적극 지지하는 강력한 지원군이 된다.#[6]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참여정부에서 잘 나갔던 김한길, 정동영, 천정배 등은 친노에서 반문이 되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노무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하였던 추미애는 반노에서 친문이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7] 그 1명은 설훈 의원이다. 참고로 이낙연 당시 민주당 의원은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본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졌으나, 처음에는 탄핵에 찬성하였고, 탄핵소추발의안에도 이름을 올렸었다.[8] 대표적으로 인터넷 논객 드루킹과 그의 추종자들[9] 다만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골수 지지자들 중에서는 사과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탄핵의 정당성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해야 한다며 추미애의 결정에 대해 못 마땅해하는 자들도 꽤 있었다.[10] 참고로 당시 추미애는 3보 1배를 하며 돌아다닌 까닭에 본인 지역구에서의 유세는 거의 하지 못하였다.[11] 3보 1배 때문에 무릎 건강을 크게 해쳤다고 한다. 추미애는 지금도 그 후유증 때문에 높은 신발을 못 신는다고 한다.[12] 추미애는 17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었다.[13] 3선[14] 당시 한나라당이 대선 직후 치뤄진 총선에서 서울 지역을 휩쓸다시피 했음에도 의석을 획득한 몇 안되는 서울 지역구 여성 의원이다. 서울 지역에서 총 세명의 여성의원이 당선되었는데 이미경 의원과 박영선 의원, 추미애 의원이다.[15] 참고로 17대 때는, 한나라당 홍준표와 이경재가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다.[16] 2년 이상 사용하려면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규정[17] 환노위를 통과한 개정안은 '추미애 중재안'을 일부 수정한 것이었다.[18]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지자 추 위원장은 환노위와 노동부, 국회사무처 관계자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회의장에서 내보내는 질서유지권을 발동했었다.[19] 물론, 그 이전 19대 총선에서 이미경 의원과 박근혜 당시 의원이 5선을 달성하였고, 훨씬 전에는 박순천 의원이 5선을 달성한 바도 있으나 이 세 사람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최소 1번 이상은 거친 것이거나 재보선 당선과 사퇴 등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한 경우이다. 반면, 추미애 의원은 단 한 차례도 비례대표를 거치지 않고 순수하게 지역구로만 5선을 달성한 것이니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20] 제21대 국회에서도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21] 김상곤 후보는 22.08%, 이종걸 후보는 23.89%를 얻는데 그쳤다.[22] 그래서 본인도 민주당 당원이 가장 많은 호남에 어필하려고 '호남의 며느리'라는 것을 당 대표 경선 때 특히 더 강조했다. 그리고 추 의원이 당 대표로 선출되자 정읍시에서는 '정읍의 며느리 추미애 의원 더불어민주당 대표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현수막이 곳곳에 붙었다고 한다.[23] 부계적 전통이 남아있는 한국에서는 (잘쳐야 백년 손님인)사위와 달리 며느리는 우리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추미애가 호남 사람들에게 별 이질감 없이 다가 설 수 있던 아주 절묘한 포인트.[24] 추미애 이전에 경북 울진 출신의 김중권이 새천년민주당의 당 대표를 역임한 적 있지만, 선출직이 아니라 임명직이었다.# 즉, 당시엔 당 대표 위에 당 대표 임명권을 가진 총재가 있었다.[25] 참고로 당시 당 대표는 조순형이었다.[26] 추정이라고 쓴 이유는 탄핵소추안에 대한 투표는 비밀투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27] 추미애와 설훈 의원이다. 참고로 이낙연 당시 민주당 의원은 이때까지만 해도 탄핵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탄핵소추발의안에 이름도 올렸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본회의에서 반대표를 던진 케이스다.[28] 구체적 내용은 이 문서의 위 "정계 활동" 문단 중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 민주당 상황의 설명 참조바람.[29] 국회에서 법안 발의는 의원 10인 이상의 찬성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 원칙이나,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경우에는 재적 의원 과반수의 찬성 서명이 필요하다.[30] 참고로, 이명박 정부 시절에 박근혜는 집권당 대표가 아닌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었다.[31] 2017. 7. 9자 방송[32] 경력만 보면 이낙연 총리 후임으로 내정되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33] 나이는 58년생인 추 장관이 빠른 61년생인 윤 총장보다 2살 위고, 사법연수원 기수는 추 장관(14기)이 윤 총장(23기)보다 9기수 선배다. 다만 윤 총장은 나이에 비해 사시 합격이 매우매우 늦은 편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34] 과거에 '''공안부장'''으로 불리던 자리다.[35] 후술한 이두봉,한동훈,박찬호가 과거 윤석열이 서울중앙지검장에 있을때 1,2,3차장을 맡았었다. 이들은 19년 7월 윤석열 검찰총장 취임과 함께 핵심 수사권을 가진 자리로 승진했었다.[36] 만약 이번 총선에서도 광진구 을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면 헌정 사상 최초의 6선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21대 국회 최다선인 6선 의원이 박병석 의원 한명이기 때문에, 만약 당선되었다면 박 의원이 지금처럼 전반기 의장으로 취임했더라도 자동으로 후반기 의장에 추대되어 사상 첫 여성 국회의장이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다만 추미애 대표는 정치경력이 꽤 됨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이 매우 강한 정치인인지라, 중재파가 주로 당선되는 국회의장에는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도 꽤 있다. [37] 3위부터는 김상조, 홍남기, 이인영, 노영민 순으로 꼽혔는데, 응답 비율에 큰 차이가 없어 거기서 거기인 것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