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반응과 여파
1. 개요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한 9.11 테러에 대한 각계의 반응과 그 여파에 대하여 다루는 문서이다."9월 11일(한국시각) 밤늦게 벌어진 '미국 여객기 자살테러'는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일이 아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주가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태평양 건너 서울 시내까지 마치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분위기로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미국의 힘을 실감나게 하지만 미국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계 역사의 흐름이 뒤바뀔지도 모를 사태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걸프전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걸프전보다는 차라리 진주만 공격에 비유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1941년 12월 7일 이전과 이후의 미국은 전혀 다르고 심하게 말하면 진주만 공습 이전의 미국은 그날로 사라졌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9시 이후의 미국도 그 이전의 미국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초강대국이다.
바뀐 미국은 결국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월간 플래툰 2001년 10월호. 특집기사 "테러의 뒷모습" 기자 김진영
에릭 홉스봄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력을 두고 '20세기는 1914년에 시작하였다'라고 표현한 것과 같이, 21세기는 9.11 테러로 인해 시작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이 테러는 인류 전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9.11 테러로 인해 순차적으로 이라크 전쟁, 대침체, 정치적 극단주의의 부흥 등이 차례로 일어났으니, 사실상 21세기 들어 가장 영향력 있는 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2. 정치
9.11 테러의 여파로 미국은 "PATRIOT Act"[1] 등을 통과시키며, '국가위기사태'라는 명목 하에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연방정부의 관료주의의 벽으로 인해 정보 공유가 안 된 점이 사태를 막지 못한 원인이라 보고 국토안보부와 같은 최고 국가기관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기 드문 제약이 가해졌다.
또한, 팔레스타인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테러단체 회원들과 주민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열어 환호했다고 한다'''. 이는 얼마 안가 공포 분위기로 돌변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가 계획적으로 PLO를 도발해서 화해무드를 박살내고 언론이 잠잠한 틈을 타 팔레스타인에 폭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에게 한 방 먹이고자 했던 알 카에다의 작전이 오히려 미국의 역린을 건드리는 바람에,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동족들이 그 대가로 학살의 참상에 놓이게 된 것이다.[2] 설상가상으로 아리엘 샤론은 테러단체와의 협상은 무효라며 오슬로 협정을 무시하고 PLO의 수장 야세르 아라파트의 집무실을 공격해 파괴하고 아라파트가 촛불에 의존하여 집무를 보게 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연출함으로써 분노한 팔레스타인 대중들이 이스라엘과의 대화의 길을 선택하는 대신 하마스 류의 극렬 무장 투쟁단체를 지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어 가자지구에서 또 다시 피를 흘리는 유혈사태의 단초를 제공했다.
한편 2004년 10월, 오사마 빈 라덴은 인터넷을 통해 "왜 9.11 테러를 계획하게 되었는가?"를 비로소 밝혔다. 1982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의 무자비한 폭격(레바논 내전)으로 붕괴되는 베이루트 고층 빌딩과 무고한 희생자들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이를 갈았던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미국의 건물을 공격해서 그대로 되갚아줄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번역본 그리고 20년 뒤, 빈 라덴과 휘하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이 그랬듯이 미국인들에게 끔찍한 결과를 안겨주었고, 그것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다시 피와 증오의 악순환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미국 내와 전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게 만들었고, 사건 이후 미국에서만 1년 동안 400여 명의 무슬림들이 증오범죄를 당했다고 한다. 알카에다의 테러 때문에 애꿎은 무슬림들까지 피해를 본 셈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9.11 테러 이후, '테러리스트'라는 아랍인들을 칭하는 인종차별적 표현이 하나 더 생겼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슬로건인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테러와의 전쟁은 끝이 없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2.1. 진주만 공습과의 차이점
정확히 60년 전에 발생한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차이점도 크다. 진주만 공습은 단지 예상을 못했던 기습일 뿐, 군용기가 군사 항구를 폭격한 전형적인 군사작전이었다. 게다가 진주만은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때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는 그 피해와 위협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비해 9.11은 테러리스트들이 민간 항공기를 납치하여 미국 '''본토'''에 있는 민간 건물, 그것도 미국의 심장부인 대도시 뉴욕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을 공격하는 테러였다. 게다가 비행기가 고층 건물에 자살 돌격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눈 앞에서 목격한 사건이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준 충격과 두려움은 진주만 공습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도 9.11을 진주만 공습보다 더 심각한 사태로 인식했다. 예를 들어 럼스펠드 당시 미 국방장관은 펜타곤에 있다가 항공기 테러로 죽을뻔했고, 승객들의 저항으로 목표물에 충돌하기 전에 추락한 유나이티드 93(훗날 영화 플라이트 93으로 만들어졌다.)의 목표도 백악관 아니면 미국 국회의사당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부시 대통령과 미국 국회의원들도 그로 인한 위협을 매우 크게 받았던 것이다.
3. 경제
사건이 일어난 것이 미국 주식시장 개장 전이었기 때문에, 미국 정부는 긴급히 1주일동안 주식 시장을 열지 않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3] 그러나 테러 장면이 여과 없이 생중계로 전 세계에 전파되면서, 세계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폭삭 무너져버렸다.
안 그래도 IT버블 붕괴로 인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코스피 시장과 버블 붕괴로 인해 이미 아작나버린 코스닥 시장은 '''"종목 89.7%'''[4] '''가 하한가, 종목 98%'''[5] '''가 하락"'''이라는 진기록[6] 을 세우며 폭락했다.[7]
어쨌거나 한국증시와 일본증시가 폭락하자, 인도증시, 중동증시 등이 '''싹쓸이로 폭락'''하고, 결국 유럽증시까지 싸그리 폭락하는 등 도미노 폭락 사태가 1주일 간 지속되었다.주가가 이정도로 폭락하고 미국의 성장률도 0%에 근접하자 연준은 경기부양을 위해 911테러가 발생한 시점부터 2001년 말까지 기준금리를 4차례 인하했다.이에 따라 2000년 말에 6.5%였던 미국 금리가 2001년 말에는 1.75%로 급락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월드컵이라든가 이라크 전쟁[8] 이 터지면서 세계 증시는 상승 추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결국 이런 사건이…
4. 국제사회
- 북아메리카
- 미국: 피해 당사국. 미국은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당시 미국의 분노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쩌면 미국이 아니고서는 함부로 할 수도 없을듯한 전형적인 흑백논리를 내세우면서까지 주도국에 대해 차원이 다른 보복을 예고했다. 가령 위의 삽화와 같이 "우리 편이 아닌 국가는 전부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전 세계를 향해 초강대국의 영향력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테러에 조금이라도 연관된 국가까지 모조리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듯한 미국의 반응에 미국과 심각하게 대립각을 세웠던 나라들도 모두 조의를 표하며 바짝 엎드렸다. 이전에도 아랍 국가들에 대해 그리 인식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로 인해 미국 국민들은 아랍 국가들에 대해서 몹시 큰 반감을 갖게 되었으며 미국 정부 역시 알 카에다를 완전히 멸망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절대다수였다. 그러나 정작 알 카에다는 멸망시키지 못하고, 엉뚱한 이라크를 잡았다. 그 뒤 DEVGRU의 투입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처단하여 복수를 어느 정도 끝낸 뒤에는 이슬람권에 한해서 개입을 줄여나가고 있다.
- 동아시아
- 대한민국: 그야말로 초비상사태였다.[10] 2002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국으로서도 중대한 사태였다. 더구나 대한항공 085편의 납치라는 잘못된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때 다시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경찰은 주한미국대사관을 통제하고 주한미군도 1급 비상경계령을 내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담화했다. 공식 희생자 1명(재미교포 포함시 28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11] 을 낸 한국은 9월 13일, 당월 14일을 전국적으로 추모일로 정하고 5분간 묵념 시간을 가졌으며, 비인도적인 테러에 대해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하는 성명서를 내고 국회도 규탄 결의안을 냈다. 알 카에다가 한국에서도 미국 국적 여객기를 납치해서 주한미군 기지에도 테러하려고 했었다고 한 사실에 한국 정부는 알 카에다에 격분하기도 했다.
국가정보원은 그해 11월에 기존의 테러대응 방침만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을 명분으로 테러방지법을 국회에 발의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권력이 강화된다는 점을 들어 제 2의 국가보안법이 아니냐는 여러 시민단체 및 언론 등의 반발 및 동년 설립된 독립국가기관 국가인권위원회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었다. 2003년 참여정부 시기에 여러 수정안을 거쳐 다시 발의되었으나, 통과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2016년 3월 2일 제19대 국회에서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이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안을 통과시켜 테러방지법이 발효되었다. - 일본: 이 참사는 우방국이자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국 입장으로서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사건 다음날 아침부터 일본 정부는 북한 선박침투 사건 이후 2년 만에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어 미국에 긴급지원팀을 파견할 것을 검토했고, WTC에 입주한 자국 기업 주재원 생사확인에 주력했다. 아울러 재미 일본인 후송을 위해 홋카이도에 있던 정부 전용기 2대를 하네다공항에 파견토록 했으며 경찰측도 주일미대사관 및 총영사관, 이스라엘 대사관 등지에 경비를 강화했다. 방송사들 역시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특보를 거듭 내보냈다. 더 나아가 정부측은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그동안 준비한 '유사법제 3법' 통과에 박차를 가해 2003년에 최종 통과시켰다.
- 중국: 중국에서는 당시, 1999년 코소보 전쟁 중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과 테러 몇 달 전 하이난 섬 정찰기 충돌 사건,[12] 대만으로 이지스함 판매 논란 등으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위한 영공통과를 강요받고 있던 파키스탄의 후견국이었으나 오히려 파키스탄에게 영공통과 허가를 권유해야만 했다. 일단 중국 정부는 장쩌민 국가주석이 직접 미국 정부에게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 성명을 내긴 했지만 당시 반미 감정이 팽배해있던 터라, 일부 중국인들은 속보를 듣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중국도 극단 이슬람 세력의 테러에 맞은 경력이 있어서 지금은 그런 거 없고 이슬람 테러리스트 세력에 관한 문제만큼은 미국과 뜻을 함께하고 있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 9.11 테러는 천운이었는데, 앞서 말한 하이난 섬 정찰기 사건으로 인해 존 볼턴을 필두로 한 미국 지도부가 하나의 중국 원칙 따위 깨부수고 대만과 재수교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11로 인해 중국이 미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저자세로 나왔고, 이 덕분에 미국과의 단교를 면한 것.
- 북한: 미국을 그 누구보다 싫어하고 미국에 무슨 부정적인 일만 일어나면 미제 침략자들이 하늘의 천벌을 받았네 어쩌네 하며 항상 죽어라 비난하던 그 북한도 이번엔 이례적으로 사건이 터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테러 규탄 및 희생자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평소처럼 미 제국주의 침략자 같은 소리로 꼭지가 돌아버린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지구 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체감한 것이고,[13] 당시 테러지원국 지정 및 경수로 지원 약속 파행으로 굳어버린 북미관계의 개선을 원하고 있었던 참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당시 테러 행위에 대해서 비난을 가하였고 반미 프로파간다 활동도 잠정 중단했었다. 미북관계의 개선을 원했던 당시 북한의 상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해서 2001년 11월 3일에는 반테러국제협약에 전격적인 가입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2002년 1월에 부시 대통령에게 '악의 축'으로 지목되면서 북미관계가 더 틀어졌고, 이는 하반기 영변 핵 파동으로도 이어졌다.
- 대한민국: 그야말로 초비상사태였다.[10] 2002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국으로서도 중대한 사태였다. 더구나 대한항공 085편의 납치라는 잘못된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때 다시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경찰은 주한미국대사관을 통제하고 주한미군도 1급 비상경계령을 내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반드시 위기를 극복하겠다"고 담화했다. 공식 희생자 1명(재미교포 포함시 28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11] 을 낸 한국은 9월 13일, 당월 14일을 전국적으로 추모일로 정하고 5분간 묵념 시간을 가졌으며, 비인도적인 테러에 대해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하는 성명서를 내고 국회도 규탄 결의안을 냈다. 알 카에다가 한국에서도 미국 국적 여객기를 납치해서 주한미군 기지에도 테러하려고 했었다고 한 사실에 한국 정부는 알 카에다에 격분하기도 했다.
- 이슬람권
- 아프가니스탄: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는 미국의 요구에 탈레반은 거절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전혀 상관없다고 발뺌을 했지만[14]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탈레반의 현대문물 탄압으로 미국에 테러가 있는지도 몰랐던 수많은 아프간 주민들은 뜬금없이 갑자기 미국과 전쟁이 났다는 소식만 전해 들어야 했다.
- 파키스탄: 탈레반 정권의 후원자였으나, 당장 길을 비키라는 미국의 요구에 조용히 길을 비켰다. 명실상부 핵보유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파키스탄이 영공통과를 거부했으나, 미국의 리처드 리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의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협력하지 않겠다면 (영공을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폭격 당할 준비나 하시오. 석기시대로 돌아가게 될 테니"라는 말을 듣고 바로 비켜주었다.[15] 당연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외교적 결례인 동시에 영공 침략이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간, 분노와 복수심에 미쳐 꼭지가 돌아버린 미국이 국제법이고 나발이고 전부 무시하고 파키스탄부터 박살 낸 다음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나아갈 의지가 명확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은 이에 대한 항의를 할 수 없었다.[16] 그래서 당시 테러세력은 물론이고 테러세력을 지원하는 자들도 싸그리 부숴버리겠다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알 카에다를 숨겨주는 아프가니스탄은 당연히 공격 목표였고, 그 아프가니스탄을 감싸는 파키스탄도 연쇄적인 공격 목표로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결국 미국의 외교압력에 굴복한 무샤라프 대통령은 대신 영공통과에 대한 최소한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파키스탄이 지고 있는 300억 달러 정도의 부채를 미국이 갚는 것을 도와주면서, UN의 지지를 얻고 인도와 이스라엘을 전쟁에 개입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그 돈으로 경제 재건을 해서 간신히 살아났다. 사실 파키스탄이 세계 최빈국에서 그나마 먹고 사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빈국으로 바뀐 때가 역설적으로 9.11 테러 이후였다.
- 이라크: 이 상황에서도 이라크 정부는, 정확히 말하자면 사담 후세인은 ‘9.11 테러는 신의 응징’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2년 뒤 결국 후세인 정권은 미국의 응징을 받아 처참히 붕괴되었고 후세인은 목이 매달렸다.
더욱 한심한 점은, 후세인 자신은 텔레비전을 통해선 큰소리를 쳐놓고는, 부총리이자 외무장관인 타리크 아지즈를 시켜서 미국에게 알 카에다 소탕을 돕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우리도 테러리즘에 시달리는데 공조합시다."라는 의사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지고 부시는 천조국 황상 앞에서는 기만책으로밖에 안 보였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 따위 짓거리에 전미(全美)가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니, 사담 후세인이 한심한 선택, 아니 본인이 자살을 하러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위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자. 당시 미국과 양국관계가 좋지 않았던 중국은 물론 그 반미 막장국가이자 미국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이를 가는 북한까지도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과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의 내용을 담은 성명을 냈는데 가뜩이나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해 무고한 국민들이 희생당하는 참사를 겪어 눈이 돌아있는 상태였던 미국을 국가가, 그것도 이슬람권 국가가 공식적, 공개적으로 도발하는 짓을 한 것이다. 외교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17] 어리석고 미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상술되어 있다시피 후세인의 이 선택이 죄없는 자기 나라 민간인들까지 희생시킨 이라크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18] 다만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매달리면서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봤고 정작 이후엔 ISIL이라는 희대의 악마들이 나오는 바람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10년 넘게 현지인은 물론 자국민에게도 피해를 줘놓고 큰 돈까지 버리며 뭐했냐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 팔레스타인: 사건 초기에 이들이 일으킨 일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알려지자, 즉시 부정하며 테러에 대한 애도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신문에서는 "우리의 피는 싸구려가 아니다!"라는 기사를 썼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매일 죽어나가는 데엔 무관심하면서, 미국인이 죽는 것은 대서특필을 하는 것에 항의 한 것이다.
- 아프가니스탄: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는 미국의 요구에 탈레반은 거절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전혀 상관없다고 발뺌을 했지만[14]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탈레반의 현대문물 탄압으로 미국에 테러가 있는지도 몰랐던 수많은 아프간 주민들은 뜬금없이 갑자기 미국과 전쟁이 났다는 소식만 전해 들어야 했다.
- 유럽
-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 당시 온 유럽도 이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충격에 빠졌으며 자본주의 진영이자 서방세계의 대표적인 나라들인만큼 전반적으로 미국과 입장이 같았다. 각국 정상들은 직접 미국 정부에게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 성명을 냈다.
- 러시아: 러시아 정부는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직접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 성명을 냈으며, 국제연합에 테러 대책 기구 신설을 제안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까지의 푸틴 대통령은 친미, 친서방파로 평가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돌아선 뒤에도 9.11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이다. 오히려 푸틴은 중동 지역의 안정화를 위해 바샤르 알 아사드를 도와야 하고, 그래야 9.11의 원수인 알 카에다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 9.11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도 체첸을 필두로 한 캅카스 지역의 이슬람 반군에 시달리고 있으며[19] 매년 특수부대와 계약병[20] 부대들을 보내 매년 수천 명씩 반군을 소탕하며 심지어 테러단원의 시신을 헬기 갈고리에 매달고 순회공연을 하기도 한다. 이 곳 반군은 자살테러정도는 일상이고 포로로 잡은 군인들을 모조리 참수하는걸로 유명해서 러시아도 테러에는 학을 뗀다.
-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유럽 국가: 당시 온 유럽도 이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충격에 빠졌으며 자본주의 진영이자 서방세계의 대표적인 나라들인만큼 전반적으로 미국과 입장이 같았다. 각국 정상들은 직접 미국 정부에게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 성명을 냈다.
소련의 붕괴 이후 한동안 국제사회는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는 냉전의 위기감에서 벗어난 것과 더불어 미국의 국제문제 개입도 많이 줄어들면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매우 낙관적이고 낙천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뤘다. 냉전이 종식되고 나서 각 국가간 정치적, 경제적으로 긴밀한 유대[21] 가 이루어지며 세계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의 위협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으며 러시아나 중국이 다시 힘을 추스르고 미국이 이에 제동을 걸려 하면서 잠깐의 충돌이나 위기감이 돌긴 하였으나 미국이 워낙 초강대국이었고 러시아는 냉전 시절만큼의 정치적, 군사적 무력을 가지지 못했으며 중국 역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으므로 이 분위기를 깨지는 못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10여 년간 미국이 다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휘두르면서, 이러한 낙관적인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당장 9.11 이전에 나온 90년대 세계 국가들과 역사, 미래를 전망한 책들과 9.11 이후를 포함하는 세계와 역사, 미래를 예측하는 내용을 다룬 책들만 봐도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그나마 9.11의 영향이 약간 사그라들었다고 하지만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세계적인 공황을 불러오면서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아래서 인류의 영원한 번영을 외치던 낙관주의는 사라져버렸다.
이탈리아의 기자인 오리아나 팔라치는 9.11 테러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펜을 들어, 9.11을 '이슬람이 미국을 침공한 역 십자군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알 카에다와 이슬람 세력을 맹비난해서, 만년에 파시스트란 오명을 얻었다. 이슬람 단체들의 고소에도 팔라치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후속편까지 썼다. 물론 그녀가 미국이나 유럽, 기독교도 엄청 비난했던 걸 보면 이건 섣부른 오명이다.
5. 건축
당시 용융된 금속이 밖으로 흘러내리는 모습.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라는 떡밥의 좋은 불쏘시개이지만, 사실 이는 비행기 동체의 알루미늄이 녹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행기가 건축물을 들이받은 사례는 테러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훈련 중이던 B-25 중형 폭격기 1대가 안개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빌딩을 들이받아버린 것. 승무원을 비롯한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고 92층과 93층이 박살났으나, 건물이 무너지는 정도의 큰 피해는 없었다. 이로 인해, 쌍둥이 빌딩 또한 60년대 설계 당시로서는 가장 큰 비행기인 보잉 707이 건물에 충돌해도 버틸수 있게 설계되었다.[22] 이로 인해 디스커버리의 특집에서 나온 건설업계 사람들의 인터뷰에서는 모두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충돌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기껏해야 몇 층이 부서질 정도의 피해를 생각했으며, 건물이 무너졌을 때에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의견을 들려주었다.
비행기가 충돌하면서 엄청난 크기의 충격이 가해지긴 했지만, 어찌됐든 항공기 충돌에도 바로 붕괴하진 않아 한동안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여객기에 적재되어 있던 4만 리터에 달하는 항공유가 발화하면서 고열이 발생, 그로인해 철골이 약해졌다는 것. 쌍둥이 빌딩에 사용된 공법은 튜브 프레임 구조라는 것으로, 대부분의 건물 하중을 건물 최심부의 엘리베이터 코어와 건물의 철제 외벽으로 지탱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하중을 지탱하는 기둥과 내력벽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건물 내부의 공간 확보에는 유용한 공법이었다. 그러나, 항공유가 탑재된 항공기가 충돌한 후 내벽이 적은 구조를 타고 층 전체에 연료가 퍼져 동시다발적인 화재가 발생했고, 화재의 열기는 철골이 버틸 수 있는 온도를 넘어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라는 음모론이 나왔다. 단순히 당시 환경에서 발생했을 온도와 철의 녹는점만 비교하여, 건물의 붕괴에는 화재가 아닌 다른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철의 녹는점은 1500도가 넘지만, 강철의 특성이 변하여 물러지기 시작하는 온도, 특히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온도는 480도에서 530도 언저리밖에 안 된다. 대장장이가 쇠를 불에 달궈서 모양을 내는 것과 대형 제철소의 섭씨 수천 도에 달하는 용광로를 비교해서 생각하면 쉽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중의 상당 부분을 지탱하던 외벽이 충돌로 인해 크게 파손된 데다가 코어 또한 충격으로 손상된 상태였다. 여기에 고열로 인해 철골이 힘을 더더욱 잃게 되자 더 이상 상층부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붕괴가 시작되고 말았다. 훗날 빈 라덴과 알 카에다는 자신들도 건물이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기대 이상'''이었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이후, 세계무역센터에서 사용된 공법은 이후 건축계에서 기피대상이 되었다.[23]
이후 대학의 건축학과를 가서 고층건물의 철골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교수들이 9.11을 언급하며 안 된다고 말한다.
자세한 사항은 세계무역센터 붕괴 문서 참고.
6. 항공
제트엔진 시대의 도래 이후 세계 항공업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이 사건 이후 전 세계 항공업계는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다. 대형 여객기를 뉴욕 한복판의 랜드마크에 들이받는 초유의 사건이 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비행기에 대한 공포가 퍼지고 승객수가 급감하면서 여러 항공사들이 도산하였는데, 대표적인 회사들이 사베나(SABENA) 벨기에 항공[24] , 스위스에어[25] , 안셋 오스트레일리아 항공 등이다. 그리고 미국의 메이저 항공사들도 결국 2000년대, 차례차례 파산 보호 신청을 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2015년 현재 델타,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사우스웨스트의 대형 4개사로 반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상태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현재 전 세계의 민항기들은 반드시 조종실 문을 철저히 잠가야 하며,[26] 조종사 교대, 승무원들의 용무, 극히 제한적인 일부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문을 열지 않는다. 과거에는 이것이 의무가 아니어서 쉽게 조종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 국내선의 경우, 커튼 한 장으로 조종실이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고, 설령 잠겨 있어도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는 경우까지 있었을 정도였다.[27] 심지어 러시아에서는 조종실을 구경한다고 기장의 아들이 들어왔다가 비행기를 추락하게 만든 적도 있는데, 이 사건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도 방영되었다.
현재 여객기들의 조종실 출입문은 굉장히 튼튼하게 제작되며 잠금장치를 훼손하거나 물리적으로 문을 여는것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조종실에서 문 밖의 상황을 볼 수 있는 CCTV도 설치되어있으며 실수로 조작되어 문이 열리는 일이 없도록 조종사가 특정 스위치를 누르고 있을 때에만 조종실 문의 잠금장치를 조작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작동된다. 만약 정해진 절차를 거치지않고 조종실에 출입하려는 시도가 벌어지면 (대표적으로 노크) 조종사는 즉시 차단 스위치를 설정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조종실 문은 일정 시간동안 완전히 봉쇄되며, 조종실 안에서도 문을 열 수 없게된다. 하지만 조종실 문을 잠가야 한다는 철저한 규정과 항공기 설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저먼윙스 9525편 추락 사고라는 또 다른 비극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28]
이후로 미국 항공기에서는 보안검색이 매우 엄격해져서, 손톱깎이 하나도 휴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기내식에도 칼로 썰어먹는 요리가 사라지고 미리 잘게 잘라 칼을 사용할 필요가 없도록 했다. 또한, 독극물 음식 테러로 기장과 부기장이 동시에 사망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액체류 반입도 엄격하게 제한하여 물도 함부로 마시지 못하게 했으며, 기장과 부기장이 식사를 하는 시간도 서로 다르게 설정하고 식사 메뉴도 서로 다르게 제공한다고 한다.[29]
또한, 공군과 민간항공의 항공 관제 용어 차이가 초동대응에 혼선을 불렀다는 지적이 나왔고 이후 군과 민간의 항공용어가 통일되었다. 기존의 공군과 항공국의 대응 체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이외에도 공항 내의 안전수칙과 보안이 강화되었으나 여전히 내부평가에서 많은 평가요원들이 칼을 비롯한 흉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총(!)'''까지 들키지 않고 통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로도 비행기 폭탄 테러 시도가 계속 일어나는 등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미국 교통안정청은 늘 새로운 수칙을 도입하고 보안강화를 한다 하지만, TSA직원의 불법 무기 및 마약 밀수[30] , 신체 스캐너 실험 과정 중 흉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등 사건이 자꾸 터지는 바람에 미국 언론에서 심심할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까는 부서가 되어 버렸다.
미국은 9.11 테러 이후로 항공 보안을 강화했으며[31] 각종 논문과 전문가들이 CAPPS II나 SecureFlight의 실용성과 그 성능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면서도 미국이 끝끝내 프로파일링 시스템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CAPPS I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유효성은 9.11 테러 이전까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9.11 테러로 인해 제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9.11 테러 직후나 지금이나 그 효과가 의심받는 건 여전하다. 그러나 몇몇 입장은 달리 말하는데 이런 시스템이 테러 시도를 어렵게 할 수 있고 항공기 테러를 단념시키는 데에도 한몫할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다. 문제는 CAPPS나 SecureFlight 같은 시스템의 효과를 어떻게 알기가 힘들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스템을 거쳐가는 승객들 중 몇명이 범죄자나 잠재적 범죄자인지 우린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인권 단체들은 사람들을 대놓고 프로파일링 하고 특정 인종[32] 을 주시하는 시스템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는 헌법을 위반하는 위헌적 시스템이며 이는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사법계에서는 이것이 위헌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TSA에서도 특정 인종을 목표로 프로파일링을 실시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었듯 TSA의 정확도가 의심 받고[33]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정확도가 의심받으며 이를 없애라는 주장은 여전히 나오는게 현실이다.
공항의 보안이 한층 상승하면서 미국 국적의 항공기에도 보안 요원이 탑승하게 되었다. 이를 Federal Air Marshal(연방 항공 보안 요원)이라 하는데 여긴 아예 총을 소지하고 승객으로 위장하여 항공기에 탑승한다. 요지는 테러리스트가 날뛰면 요원이 나서서 테러리스트를 제압한다는 것. 그러나 TSA와 프로파일링 시스템처럼 매맞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다. 일단 근무를 하기보단 잠을 자는건 워낙에 잘 알려진 사실이고(...) 2001년에는 아예 항공기 화장실에 '''.357 구경 권총을 놓고(!) 자리로 돌아와 이후 화장실에 들어온 십대 소년이 이를 발견, 승무원에게 이를 건내주는 사건도 있었다.(...)'''# 그 와중에 동료 보안 요원은 그 소년과 승무원이 대화하는게 조금 심각해보여 끼어들었다가 별거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하게 2004년에는 공항 화장실에 권총을 두고 나오는 사례도 있었다고.# 그리고 항공 보안 요원의 정확도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34]
항공 업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자면 당시 안 좋은 방면에서 포화상태였던[35] 미국의 항공업계를 리셋시킨 것도 9.11 테러가 한몫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항공 업계는 인프라가 포화 상태라 모든 게 뻑뻑하게 돌아갔는데, 9.11 테러가 일어나 모든 항공기가 착륙한데다 며칠간은 항공기 운항이 금지된 바람에 포화 상태의 업계에 한숨 돌리고 모든 것을 재정비 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외 당시 민항 산업의 불투명한 미래로 인해 각종 시위를 벌이던 항공사들의 노동조합들은 9.11 테러 이후 항공사와 회유하려는 자세로 돌입하고 승객들은 서비스의 질 보다는 안전을 우선시 하며 항공 산업의 새로운 판도를 짜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36] 한마디로 9.11 테러 이후 항공 업계가 침체된것을 9.11 테러에서만 그 이유를 찾을 게 아니라는 뜻. 다만 전 세계 항공기 승객 수는 2004년 중순이 돼서야 9.11 테러 이전의 수와 엇비슷해진 건 사실이다.
여담으로 9.11 테러가 일어난 지 정확히 두 달 하고도 하루가 지난 2001년 11월 12일, 뉴욕 상공에서 존 F. 케네디 공항을 이륙한 AA587편이 뉴욕 퀸즈 주택가에 추락하는 대형참사가 터졌다. 원인은 잘못된 비행 규정으로 밝혀졌으나,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9.11 테러 당시처럼 모든 항공기가 강제로 착륙하고 출입이 통제되는 등 큰 혼란에 빠졌다.
9.11 테러 이후 항공기 관련 범죄에 대한 국제여론은 그야말로 바닥까지 추락했다. 9.11보다 10여년 전에 발생한 전원 사망했던 에어 인디아 182편 폭파 사건같은 경우, 배후가 시크교였지만 제노포비아가 별로 없었던것에 비해, 땅콩 회항때는 사상자가 없음에도 국제여론이 매우 싸늘했다.
7. 스포츠
참사 여파는 스포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MLB, NBA, NFL, NHL, PGA, LPGA 등 주요 스포츠 대회들도 경기를 취소하거나 경기 중 유니폼에 추모 패치를 달도록 했다. 특히 NBA 측은 2001/02 시즌 동안 전 구단 유니폼에 리본 모양 추모패치를 달도록 했으며, 프로레슬링 단체 WWF측도 스맥다운 9월 13일 방영분을 추모 특집으로 개편하고, 1997년부터 사용해오던 브랜드 이름인 'RAW is WAR'를 10월 1일 방영분부터 'RAW'로 되돌렸다. 9월 26일 개최 예정이던 뉴욕 세계 레슬링 선수권대회도, 10월 7일 개최되려던 '뉴욕장사씨름대회'도 다음해로 각각 연기되었다. 2002 한일 월드컵 준비를 앞두던 한일 양국도 경비를 강화했다.
마침 2001년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 에서 뉴욕을 연고로 하는 뉴욕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 올라갔지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7차전 명승부 끝에 지고 만다.
또한 바로 이듬해에 열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이곳 현장에서 발견된 성조기를 들고 와서 미국의 애국주의가 대폭발하는 대회가 되었다.
8. 학계
9.11 테러의 여파는 학계, 특히 문명 및 역사학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1996년 발간된 새뮤얼 헌팅턴의 저서 <문명의 충돌>이 갑자기 날개 돋친 듯 팔려 '문명 충돌론'이 크게 힘을 얻었다. 이에 에드워드 사이드는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을 내며 끈질기게 반박했다.
9. 대중매체
독일이 나치 독일에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을 금기로 삼다시피, 미국에서는 9.11 테러에 관련된 것들을 대중 매체에서 거의 금기로 삼는 암묵의 룰이 있다. 9.11 관련된 고인드립이나 농담은 물론이고 세계무역센터나 자살테러를 묘사하는것조차 미국 내에서는 거의 금기로 받아들여진다.
세계무역센터가 들어가는 미디어 매체가 대부분 수정되었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스파이더맨이 세계무역센터 사이에 친 거미줄로 은행강도를 붙잡는 장면이 있었으나, 장면을 수정했고 개봉도 늦어졌다.[37] 또한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 유리의 복수》에서 연합군의 해리어 전투기가 유리군의 핵발전소에 부딪치는 장면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덤으로 세계무역센터 관련 캠페인을 제거했다고 한다. 《메탈기어 솔리드 2》에서도 아스널 기어가 맨하탄을 들이받는 장면[38] 이 아예 없어졌고, 바로 주인공과 최종 보스가 페더럴 홀(미국 의회 옛 의사당 건물) 위에서 대치하고 있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시리즈는 2002년 버젼부터 WTC나 일부 마천루들이 삭제되어 출시하였다. 이후 2020년에 발매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에 와서야 Bing지도 기반 위성정밀지도가 기본으로 딸려오면서 마천루들이 부활하게 되었다.
《GTA 3》에서는 LCPD의 경찰차량의 디자인이 NYPD에 가까운 디자인에서 LAPD와 유사한 디자인으로 변경되었고, 비행기가 고층 빌딩 근처로 날지 않도록 비행경로도 수정되었다.[39] 결정적으로 북미판 박스 아트가 변경되었는데[40] GTA 시리즈는 지금도 이 박스 아트의 전통을 물려받고 있다.
《GTA 4》역시 뉴욕을 배경으로 한 게임이다보니 9.11 테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게임 중 하나이다. 작중에는 리버티 시티라는 가상의 도시로 뉴욕이 등장하지만 배경은 뉴욕과 비슷하다 못해 거의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41] 문제는 바로 이 배경에 있는데, 초기 버전에는 9.11테러를 당한 WTC 쌍둥이 빌딩도 재현되어 있었다. 하지만 논란이 불거지자 락스타 게임즈에서는 맵을 수정하여 쌍둥이 빌딩을 지우고 가상의 빌딩을 세워 대체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심지어 이를 뒷받침해주는 확실한 증거가 GTA 4에서는 탑승하여 조종할 수 있는 항공 교통수단이 헬기 이외에는 없다는 점이다.[42] 또, 기관총이 달린 헬기로 고층 빌딩을 난사하면 지명수배가 걸리도록 설정되어 있다.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드림 시어터의 뉴욕 공연을 수록한 5집 라이브 앨범이 '''불타는 세계 무역 센터'''가 그려진 앨범 커버로 '''9월 11일''' 발매되었으나, 테러로 인해 급히 물량을 회수하고 수정된 커버를 사용해야 했다.[43]
게임 《데이어스 엑스》에서는 시스템 자원 사용의 한계와 최적화 문제로, 뉴욕의 거대한 건물이었던 세계무역센터를 게임 배경으로 집어넣을 수 없게 되었다. 뉴욕 시의 상징과도 같았던 세계무역센터가 사양 문제로 게임에서 등장할 수 없게 되는 바람에, 게임 제작자들은 이를 보완할 게임 설정을 추가했는데, 그 설정의 내용이 '''"세계무역센터는 테러로 붕괴되었다."''' 그리고 게임이 출시된 지 1년 뒤 실제로 일어났다.
SNK가 2008년에 출시한 KOF 98 UM의 미국 스테이지에서도 세계무역센터가 삭제되었다. 1998년에 출시된 KOF 98땐 있었으나 리메이크 버전인 98UM을 내면서 그 사이에 사라진 세계무역센터를 지웠다.
노토리어스 B.I.G.의 1집 앨범 Ready to Die의 10번 트랙 Juicy에는 '''blow up like the World Trade'''라는 가사가 나오는데[44] 이를 따온 JAY-Z의 The Blueprint 2: The Gift & The Curse[45] 의 A Dream에서는 묵음처리가 되어서 나온다.
SCP 재단에서도 이를 소재로 한 SCP-4911이 존재한다. 여담으로, 이 글의 작성자인 djkaktus의 아버지가 테러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북미에서 기동전사 건담, 즉 우주세기 건담이 크게 흥하지 못하는 이유로 꼽히기도 하다. 사실 북미에서 건담, 특히 우주세기 건담이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토미노 특유의 작품 분위기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것도 있고 79년도 작품인데 2001년이라는 뒤늦은 세월에 방영한것도 컸지만 건담을 비롯한 전쟁 관련 프로그램이 전부 방영 중단 크리를 맞으면서 결과적으로 이전 방영작인 신기동전기 건담 W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기동전사 건담에는 우주도시인 콜로니가 지온에 의해 '''낙하해서 호주를 박살내는 장면까지 있었다.'''
그리고 세계무역센터와는 관계없지만, '''비행기가 건물을 들이받거나 고층건물에 구멍이 난다거나 하는 관련의 연출조차 NG.''' 이 때문에 건블레이드 NY의 Wii이식판에서는 이지 코스 3스테이지에서 건물이 뻥 터지는 연출이 아예 안 나오게 되었고, 아예 대놓고 건물에 구멍내면서 진행하는 구성이 일본면 2스테이지에 있는 캐리어 에어 윙은 절대 캡콤 클래식 시리즈로 이식해주지 못하고 있는것.
또한 제작자들의 가치관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요코오 타로는 드래그 온 드라군 제작 이래로 게임에서의 '폭력'에 대해 고민하던 와중 9.11 테러와 이어진 이라크 전쟁이 자신의 생각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후속작인 니어 레플리칸트에 그 영향이 들어가 있다고 술회한다.
[1] 정식명칭은 Uniting and Strengthening America by Providing Appropriate Tools Required to Intercept and Obstruct Terrorism Act. 하지만 약자가 USA PATRIOT Act인지라 그냥 '애국자법'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2] 다만 아랍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그냥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같은 아랍인이라는 동족의식 같은 게 존재하지는 않는다.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도 어떤 부족 출신이냐에 따라 유혈사태가 끊이지 않는 동네가 중동인데, 외국은 말할 것도 없다.[3] 테러가 일어난 지역이 바로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 시장이 있는 월 스트리트를 비롯한 온갖 금융거래사들이 모여 있는 금융행정구(Financial District)였던 이유도 있었다. 이 지역에 있는 모든 시민들을 대피시키느라 주식 시장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것.[4] 591개. 이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5] 646개. 7년 뒤에 하락종목 최다 기록은 무려 '''941개'''라는 기록으로 깨졌다.[6] 당시 뉴스[7] 다만 당시 풋옵션은 엄청난 수익률을 자랑했다.[8] 대체로 전쟁은 자국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조건 하에 주식시장에서는 '''호재'''로 분류된다.[9] 대문자로 쓴 US는 '우리(us)'를 가리키는 동시에 '미국('''U'''nited '''S'''tates)'의 이니셜을 가리킨다. 정의롭고 미국의 상징인 흰머리수리와 함께 싸우든가, 아니면 열 받을 대로 열받은 독수리에게 맞서 싸우다가 물어 뜯기는 신세가 되든가 선택하라는 뜻이다. 첫 컷은 흰머리수리, 마지막 컷은 독수리. 나머지 컷은 모습이 바뀌는 과정이다.[10] 혹여 그쪽에서 일으킨 일이었다면 최소 제 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것은 뻔했으니...[11] 구본석 LG화재 뉴욕지점장(향년 42세). 그 외에도 항공기 승객으로 탑승했던 재미교포 1명도 사망했다. LG화재 지점장은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다. 대신 사고현장에서 그의 ID카드만 찾아냈고, 유족들은 뉴욕시로부터 사고현장에서 채취한 흙을 받아 귀국했다.[12] 중국 영공에 근접하여 초계비행하던 미국 해군 전자첩보기 EP-3C가, 요격을 위해 출동한 중국 F-8 전투기와 충돌해 하이난 섬에 비상착륙한 사건. 사고 경위와 기체, 승무원 반환을 놓고 양국 간에 감정싸움이 벌어졌으나, 일단 승무원과 기체는 무사히 미국으로 송환됐다.[13] 특히 북한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25년 전에 미국을 잘못 건드렸다가 나라가 망할 뻔 했었다.[14] 테러 2일 전, 탈레반의 숙적이자 북부 동맹의 리더였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알 카에다가 암살해주는 대가로 알 카에다를 아프가니스탄에 숨겨주기로 되어 있었다. 탈레반은 내부적으로는 9.11을 저지른 걸 알고 분개했지만 그래도 빈 라덴을 숨겨주자고 했다가 결국 미국의 분노로 탈탈 털렸다. 그나마 9.11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는 게 밝혀져서 알 카에다처럼 아예 말살 대상 수준으로 분류되지는 않고 협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15] 여담으로 후견국인 중국의 존재를 믿고 영공통과를 거절한 부분도 있는데 이를 전해들은 중국은 매우 깜짝 놀라서 바로 영공통과를 허용하라고 파키스탄에 권유하였다.[16] 당시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었다. 그것도 10기도 안 가지고 있는 북한과는 다르게 100기가 넘는 제대로 된 핵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앞에서 벌벌 떨어야 했으니 그만큼 미국이 눈이 돌아갔다는 증거다.[17] 신의 응징 운운하는 것부터가 테러로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고인능욕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걸 국가 공식 입장이랍시고 내놨으니, 당시 옆에 있었던 참모진들은 왜 말리지 않고 있었던 건가 싶을 정도다.[18] 안 그래도 뿔난 미국의 입장에서 자국이 당했는데 되려 테러를 옹호하는 입장을 내놓는다는 얘기는, 한마디로 후세인이 테러범들과 관련이 있다고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예를 들자면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것이 말레이시아와 같은 나라들을 건드릴 의도는 없는데도 말레이시아 정부는 규탄 성명을 내곤 한다. 이유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우리는 북한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만약에 어느 나라가, 그것도 정부 명의로 핵실험을 환영하는 성명을 내놓는다면, 되려 북한의 핵실험 지원 의혹을 받으면서 같이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후세인의 망언이 얼마나 바보 같은 자살행위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9] 사실 이곳의 과격파들이 중동으로 가서 풍부한 전투경험으로 테러단체의 정예 전투원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체첸 반군 출신이라는건 그 러시아의 토벌에서 살아남은걸로 모자라 타국까지 숨어서 기어들어올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걸 반증하기 때문에 특히 더 위험분자로 취급되는 것.[20] 일종의 용병으로 높은 급료를 받는 대신 고위험지역에 투입된다. 특히 대다수의 계약병들은 이런저런 행정적 처리를 통해 PMC처럼 정규군 취급을 받지 않아서 정규군을 투입하기 힘든 작전이나 전장에 투입되기도 하고 공식적인 사상자 목록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PMC와 다른 점은 계약주체가 기업이 아닌 개인이며, 온갖 출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보내는 PMC와 다르게 이 계약병들은 모두 한때 러시아 정규군 소속이였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21] 모든 국가가 상호간 투자와 협력을 하면 전쟁을 일으키는게 모두에게 손해이므로 전쟁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 여기엔 한때 냉전의 축이였던 러시아도 포함되었을 정도다. 당시 모스크바에 문을 연 맥도날드 매장은 냉전이후 찾아온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다.[22] 다만 항공유로 인한 2차 피해는 고려하지 않았다.[23] 한국에서 1995년 이후로 무량판 공법이 기피대상이 된 것과 비슷하다. 철골 자체 또는 철골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같은 공법이란 이유로 기피대상이 된 것.[24] 다만, 이쪽은 이미 수십 년째 적자를 내고 있었다.[25] 한때는 스위스라는 국가 브랜드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최고의 항공사였으나, 90년대 말, 위의 사베나와 같이 이 회사 저 회사 인수하더니 9.11로 결국 망했어요. 이후, 자회사인 크로스에어가 이 파산한 회사를 인수하여 스위스 국제항공이 되었다.[26] 북한의 계속되는 민항기 납치에 이골이 났던 대한민국 정부는 9.11 테러 이전부터 이를 의무사항으로 규정한 바 있다.[27] 하지만 생각보다 이 조항이 아직 잘 안 지켜지는 경우가 있다. 선진국의 항공사에서는 메이저, 저가항공 할 것 없이 칼 같이 지켜지나, 개도국의 경우 자국에서 나름 유명한 항공사에서조차 똑똑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는 건 예사요, 아예 조종실 문을 열어놓고 운행하는 경우도 다반사이다.[28] 이 사고 이후로 조종사 한명이 자리를 비울 때에는 무조건 그를 대신할 다른 조종사나 승무원이 조종실에 들어가 조종실에 조종사 한 명만 남는 상황을 원천 방지하는 조항이 보편화 되었다.[29] 다만 그 이전부터 식사는 다르게 줬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장과 부기장이 둘 다 식중독에 걸리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9.11 이후에도 일부 국가에선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30] 2015년 3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TSA 직원들이 마약 밀수를 도운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다.[31] 사실, 그 이전에도 팬암 103편 폭파 사건 이후로 보안이 나름 강화되긴 했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으로.[32] 아랍계통 인종들[33] 2004년과 2005년 시행된 실험에서 TSA는 70%의 실패율을 보였다.# 다만, 기사에 따르면 이후 시정되긴 했다는 모양.[34]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가 여러 명이고 요원은 한 명일 때, 테러리스트 한 명이 설쳐서 요원이 정체를 드러내고 나머지 테러리스트들이 요원을 제압한다거나. 그런 이유로 요원을 2명 태우는 경우가 많다고는 하지만...[35] 예를 들어 공항 크기 대비 취항 항공기 수[36] 두 주장은 Belobaba, P., Odoni, A., & Barnhart, C. (2015). The global airline industry. John Wiley & Sons. p. 6과 p. 7에서 따왔음.[37] 예고편에는 있었다.#[38] 게임 파일 내에는 맨하탄을 들이받은 아스널 기어의 모습이 담긴 사진 자료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39] 전에 서술되어 있던 것은 항간에 떠돌던 소문일 뿐이고, 실은 GTA 3의 게임 엔진에 비행 메커니즘이 구현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보면 애당초 비행기를 추가할 계획이 없었으며, 도도는 개발진 측에서 재미로 넣어놓은 것이고 실제로 날리라고 만든 비행기가 아니라고 한다.[40] 오리지널 박스 아트에는 고층 빌딩이 그려져 있었다.[41]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물론이고 크라이슬러 빌딩, 타임스퀘어에 심지어는 브루클린 다리와 맨해튼 다리까지 그대로 재현해놓았다.[42] 비행기로 9.11 테러를 재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배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돼서 그런지 경비행기라도 줬던 3편과 다르게 탑승할 수 있는 비행기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43] 드림씨어터는 또 다른 면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바로 다음해 발매되는 6집 앨범 중 줄기세포에 대한 논란을 다룬 곡인 "Conflict at Ground Zero(그라운드 제로에서의 충돌)"이 있었으나 Ground Zero가 거의 고유명사화되면서 제목을 바꿔 "The Great Debate(대토론)"로 발매되었다.[44] 1993년의 테러를 언급하는 가사인데, 이 사건을 몰라서 비기가 9.11를 예언했다느니 오해하는 사람이 좀 많다.[45] 9.11 테러 이후인 2002년에 발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