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등장인물/3부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3부의 등장인물들.
2. 대한(大韓)
1, 2부에서 역사가 너무 많이 바뀌었기 때문인지 2부에 비해 대다수가 가상인물이 되었다.
2.1. 재석의 가족
- 순비 소씨(올렝카)
폴수국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사생아. 1666년생. 외가는 벨라루스계 하급 귀족이다. 작가에 의하면 외모의 모델은 마리나 본다코로 금발벽안의 굉장한 미인이며 키도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크고 성격이 매우 순수하다. 재석 각성 전날 성친왕이 꼬셔서 관계를 가진 상태였고, 재석은 외모와 성격이 마음에 들어 그대로 데리고 다닌다. 이후 잠시 헤어졌다가 재석이 폴수국에서 마상창시합을 승리하고 빈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자 얀 3세 소비에스키에게 올렝카를 정부로 삼는 것을 인정받고 공식적으로 첩으로 삼게 된다. 미주 이주 후 대한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성친왕의 후궁으로 인정받아 '유주부인 소씨'라는 작위를 받는다. 측실과 본부인 관계임에도 상희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다.[1] 14년간 꾸준히 관계를 가짐에도 임신이 되지 않은 반면 상희는 재석과 만나자마자 임신해서 불임이 아닌가 의심되었으나 불임은 아니고 난임이었고, 상희가 구해준 보약을 먹고 14년만에 딸 명주를 낳는다. 명주를 임신했을 때 성친왕이 태황이 되는 태몽을 꾼다.
대한에서는 올렝카를 만난 직후 성친왕이 개과천선했기에 올렝카 덕분에 성친왕을 변했다고 생각하여 좋게 평하고 있다. 또한 올렝카의 외모가 뛰어나고 성친왕과 만나게 되는 과정이 전형적인 로맨스 판타지 플롯과 같기에 본국에서 올렝카를 소재로 하는 로망스와 야설도 많이 나오게 된다.[2] 재석은 올렝카를 사랑하지만 당연히 본부인인 상희만큼은 아닌데, 예왕파에서는 당연히 십여년을 더 오래 함께 지낸 올렝카가 사실상의 본부인이고 성친왕에게 더 총애받고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 순비(順妃)가 된다. 유럽에 있었다면 상상도 못할 지위에 오른 것에 행복해하며, 2부에서 상희를 괴롭혔던 후궁은 자식에게 엄마라고 불릴 수 없다는 법도는 대한에서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폴란드어로 루시아에게 엄마 소리를 듣기 때문에 올렝카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다. 이후 둘째딸 향주를 낳는다. 궁 내에선 한복이 아닌 유럽식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고 한다.
대한에서는 올렝카를 만난 직후 성친왕이 개과천선했기에 올렝카 덕분에 성친왕을 변했다고 생각하여 좋게 평하고 있다. 또한 올렝카의 외모가 뛰어나고 성친왕과 만나게 되는 과정이 전형적인 로맨스 판타지 플롯과 같기에 본국에서 올렝카를 소재로 하는 로망스와 야설도 많이 나오게 된다.[2] 재석은 올렝카를 사랑하지만 당연히 본부인인 상희만큼은 아닌데, 예왕파에서는 당연히 십여년을 더 오래 함께 지낸 올렝카가 사실상의 본부인이고 성친왕에게 더 총애받고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 순비(順妃)가 된다. 유럽에 있었다면 상상도 못할 지위에 오른 것에 행복해하며, 2부에서 상희를 괴롭혔던 후궁은 자식에게 엄마라고 불릴 수 없다는 법도는 대한에서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을 폴란드어로 루시아에게 엄마 소리를 듣기 때문에 올렝카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다. 이후 둘째딸 향주를 낳는다. 궁 내에선 한복이 아닌 유럽식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고 한다.
- 황태자 이은(李訢)
재석과 상희의 장남. 1692년생. 올렝카는 아르장(銀)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돌잡이에서 활과 법전을 잡았다.[3] 재석과 상희는 이은이 태황이 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유롭게 키웠기에 학문은 별로 가르치지 않았지만 대신 현대인 부모다운 사랑으로 키워서 순수한 성격을 가졌으며,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현대 아이들이 하는 것처럼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른다.[4] 귀국하던 중 바다에서 고래를 보려하다 바다에 빠져 죽을 뻔 했고, 카자크 6형제의 자식들과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서 신분 차이에도 격식없는 친구 사이이다.
성친왕이 태제로 책봉된 후 태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인 강서원이 설치되는데, 온화하게 가르치던 이형준과 다라미츠와는 달리 엄한 스승들에게 하루종일 힘든 교육을 받는데다 부모님도 바빠져 같이 놀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한다. 태자가 된 후에는 다라미츠가 가르치는 시간에는 그나마 좀 놀수 있다고 한다. 1700년 봄에 황태자 책봉을 받아서 동궁에 들어갔고, 궁 생활에도 적응해서 상당히 의젓해졌다. 대한에 유학 온 표트르의 아들 알렉세이와는 법도 때문에 예전처럼 격 없이 대할 수만은 없게 된 카자크 자녀들을 대신해 서로 평대할 정도의 대등한 친구가 된다. 성품은 여전히 순수하고 활달해서 부황인 재석과 눈싸움을 하며 눈뭉치를 던지다 할머니인 진성태황태후에게 걸려서 혼났다.
성친왕이 태제로 책봉된 후 태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기관인 강서원이 설치되는데, 온화하게 가르치던 이형준과 다라미츠와는 달리 엄한 스승들에게 하루종일 힘든 교육을 받는데다 부모님도 바빠져 같이 놀지 못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한다. 태자가 된 후에는 다라미츠가 가르치는 시간에는 그나마 좀 놀수 있다고 한다. 1700년 봄에 황태자 책봉을 받아서 동궁에 들어갔고, 궁 생활에도 적응해서 상당히 의젓해졌다. 대한에 유학 온 표트르의 아들 알렉세이와는 법도 때문에 예전처럼 격 없이 대할 수만은 없게 된 카자크 자녀들을 대신해 서로 평대할 정도의 대등한 친구가 된다. 성품은 여전히 순수하고 활달해서 부황인 재석과 눈싸움을 하며 눈뭉치를 던지다 할머니인 진성태황태후에게 걸려서 혼났다.
- 친왕 이준(李鎨)
재석과 상희의 차남. 양력 1696년 4월 생.
- 친왕 이권(李淃)
재석과 상희의 삼남. 양력 1700년 하반기 생.[5] 재석의 자식들 중 처음으로 대한에서 태어났다.
- 친왕 이○
재석과 상희의 사남. 양력 1702년 11월 8일 생. 이로써 상희는 세종대왕 이래로 적통 황자를 4명 낳은 두번째 중전이 되었다.
- 군왕 이○
재석과 숙빈 홍씨의 장남. 양력 1702년 12월 11일 생.
- 옹주 이명주(李明珠, 루시아)
재석과 올렝카의 장녀. 양력 1696년 11월 18일 생. 엄마의 외모를 많이 물려받아 머리도 갈색(어릴땐 금발이었다)[6] 이고 백인의 외모에 가깝다. 법도에 따라 올렝카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한에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는 폴란드어로 올렝카를 엄마라고 부른다. 재석은 이명주가 공식적으론 어쩔 수 없이 적서 차별을 받는 것이 안쓰러워서 결혼이라도 해외에 보내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해주려 한다.
- 옹주 이향주(李香珠, 율리아)
재석과 올렝카의 차녀. 양력 1700년 12월 2x일[7] 생.
- 정빈 김씨
진성태황태후가 간택해온 후궁. 1685년생. 경주 김씨. 조부는 대제학, 부친은 이부대신을 지냈다. 얌전하고 소극적인 성격. 어릴 적 많은 동년배 소녀들처럼 로망스 소설로 성친왕의 이야기를 접한 후 계속 환상을 품고 살아왔고 운이 좋게도 그 꿈을 이루었다.
- 희빈 박씨
진성태황태후가 간택해온 후궁. 1685년생. 밀양 박씨. 조부는 우참찬, 부친은 경남감사를 지냈다. 활당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상희에게도 친근하게 굴고 의료봉사에도 따라가서 조수 노릇을 하는 등 상희에게 잘 보이고 있다.
- 숙빈 홍씨
진성태황태후가 간택해온 후궁. 1685년생. 남양 홍씨. 홍가신[8] 의 고손녀이며 부친과 조부는 관직은 없으나 이름 높은 재야 학자로 성리학 뿐 아니라 양명학, 수학, 서학에 능통하다. 학자 집안 출신답게 박식하고 토론도 잘 한다. 세 후궁들 중 처음으로 임신했다.
- 비수백[9] 이진서(沸水伯 李秦誓, 디에고)
서반아 장군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딸 이사벨 마리아 안나와 재석 빙의 전 성친왕의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어난 사생아. 1682년 11월 23일생. 13살까지 아버지의 정체를 모르고 살았다. 연인 도로테아와 결혼하려 했으나 도로테아의 부친인 칼레아 후작이 재산도 작위도 없는 사생아인 디에고와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고, 홍희동전의 서반아판을 읽고 자신도 홍희동처럼 대한으로 가서 지위를 인정받으면 도로테아와의 결혼을 인정받을 수 있다 생각하여 대한으로 온다. 모친 이사벨의 16세 시절 초상화를 가져와서 건흥제의 친자임이 인정되었으며 재석은 비록 디에고에게 애정은 없지만[10] 내칠 경우 친자식도 내버리는 모진 아버지라고 여겨질 것을 고려해 친자임을 인정하고 이진서라는 이름을 내린다. 하지만 사생아이기에 정식 서자와는 다르게 군왕이 아닌 비수백 작위를 내렸으며 황위 계승권도 없다고 못박았다. 재석은 서반아로 귀국할 것을 권하나 디에고는 아버지를 돕겠다며 대한에 정착하기로 한다.
작위를 받은 후엔 도로테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도성과 양주에 저택도 하사받는다. 결혼식 이후에는 결혼식을 도운 현왕 일가와 권훤 일가와 친해지며, 외가에서 의외로 교육을 충실히 시켜서 무예가 뛰어나다는 것도 드러난다. 재석은 일단 가신인 박수원과 조경신을 시켜서 한국어와 기본 교양을 가르친 후, 종학에 넣든 독선생을 붙이든 해서 제대로 교육시켜서 종친으로서 필요한 교양을 갖추게 할 계획이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이 임박하자 참전을 청원하나, 재석은 정치적 이유와 동양은 관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한국어엔 능숙해져서 수신독본을 읽을 정도가 된다.
작위를 받은 후엔 도로테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 도성과 양주에 저택도 하사받는다. 결혼식 이후에는 결혼식을 도운 현왕 일가와 권훤 일가와 친해지며, 외가에서 의외로 교육을 충실히 시켜서 무예가 뛰어나다는 것도 드러난다. 재석은 일단 가신인 박수원과 조경신을 시켜서 한국어와 기본 교양을 가르친 후, 종학에 넣든 독선생을 붙이든 해서 제대로 교육시켜서 종친으로서 필요한 교양을 갖추게 할 계획이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이 임박하자 참전을 청원하나, 재석은 정치적 이유와 동양은 관습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한국어엔 능숙해져서 수신독본을 읽을 정도가 된다.
- 비수백부인 도로테아
칼레아 후작의 고명딸. 디에고의 연인인 금발녹안의 미녀. 부친 칼레아 후작이 디에고와의 결혼을 불허하자 남장을 하고 빠져나와 디에고와 함께 대한으로 사랑의 도피를 한다.[11] 디에고가 작위를 받고 결혼도 하면서 모든걸 이루게 되었다.
권훤의 처가는 롤리타를 떠올리게 하는 도로테아의 친정 노릇을 하고 권훤의 아내 이마리는 도로테아를 의동생 삼는다.[12] 정호찬의 첩 이사벨라, 상희와도 친한 사이가 되나 도로테아가 디에고의 감시자로 따라온게 아니냐는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고,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이 임박하자 처지가 다소 곤혹스러워졌다.
권훤의 처가는 롤리타를 떠올리게 하는 도로테아의 친정 노릇을 하고 권훤의 아내 이마리는 도로테아를 의동생 삼는다.[12] 정호찬의 첩 이사벨라, 상희와도 친한 사이가 되나 도로테아가 디에고의 감시자로 따라온게 아니냐는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고,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이 임박하자 처지가 다소 곤혹스러워졌다.
2.2. 황실
- 숙조 건복제 이윤
3부 초반 대한의 태황이자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 이현의 동복형. 1659~1699. 연호인 건복은 신라 진평왕이 사용한 연호다.
독자들의 평가는 '몸 약한 태종'. 정치적, 외교적 감각도 좋고 결단력도 있는 등 훌륭한 통치력에,[13] 경연을 벌이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로 학식도 뛰어나고 대한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명군.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상희는 '컴퓨터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현대인처럼 하늘의 뜻 따위를 믿지 않고 현실적 손익만을 따져 행동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14] 친동생을 어린 나이에 국외 추방하는 등 냉혹해보이는 면모도 있었으나[15] 이후 태자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거나 순진무구한 이은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는 등 인간미도 보이기도 한다. 타고난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흡연자이기까지[16] 해서 재위 내내 골골댔으며 결국 만 40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17]
재석 빙의 2년 전 동생 성친왕이 자신과 달리 모후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온갖 패악을 부리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성친왕을 견서사라는 명목으로 영구추방했다. 그러나 재석이 빙의한 후 성친왕이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이자 성친왕을 어느정도 용서하여 동변관리사라는 벼슬도 내리고 저택도 지어주는 등 나름 대우를 해줬고, 태자 이원이 사망하며 후계 구도가 불안해지자 귀국을 허가한다.
한동안 후계 구도에 대해 확언 없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한양대화재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화병으로 쓰러진다. 한양대화재 이후 재석이 진압과 인명 구조를 잘 이끄는 것을 본 뒤 성친왕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사실상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이후 무인지변 발생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화병으로 혼절한다.[18] 하루만에 정신을 차리고 예왕을 역적으로 선포하여 무인지변 진압을 도운 뒤, 성친왕을 공식적으로 황태제로 책봉하고 군권, 인사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
무인지변을 수습하고 예왕이 사사된 이후 심리적 충격 때문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재석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자리만 보전하다가 1699년 3월 27일 붕어한다. 죽기 6일 전 재석에게서 '미래인이 천녀에게 소원을 빌고 무종, 장조, 성친왕에게 차례로 빙의했다'[19] 는 사실상의 고백을 들었지만 동생의 재담이라 생각해 웃어넘긴다.[20] 사후 을병대기근을 이겨낸 공으로 숙조라는 묘호를 받는다.
독자들의 평가는 '몸 약한 태종'. 정치적, 외교적 감각도 좋고 결단력도 있는 등 훌륭한 통치력에,[13] 경연을 벌이면 경연관들의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로 학식도 뛰어나고 대한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가진 명군. 속내를 알 수 없어서 상희는 '컴퓨터같은 사람'이라고 평했다. 현대인처럼 하늘의 뜻 따위를 믿지 않고 현실적 손익만을 따져 행동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14] 친동생을 어린 나이에 국외 추방하는 등 냉혹해보이는 면모도 있었으나[15] 이후 태자의 죽음 앞에서 비통해하거나 순진무구한 이은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는 등 인간미도 보이기도 한다. 타고난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은데 흡연자이기까지[16] 해서 재위 내내 골골댔으며 결국 만 40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한다.[17]
재석 빙의 2년 전 동생 성친왕이 자신과 달리 모후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온갖 패악을 부리는 것을 응징하기 위해 성친왕을 견서사라는 명목으로 영구추방했다. 그러나 재석이 빙의한 후 성친왕이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이자 성친왕을 어느정도 용서하여 동변관리사라는 벼슬도 내리고 저택도 지어주는 등 나름 대우를 해줬고, 태자 이원이 사망하며 후계 구도가 불안해지자 귀국을 허가한다.
한동안 후계 구도에 대해 확언 없이 애매한 태도를 취하다가 한양대화재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화병으로 쓰러진다. 한양대화재 이후 재석이 진압과 인명 구조를 잘 이끄는 것을 본 뒤 성친왕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사실상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이후 무인지변 발생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화병으로 혼절한다.[18] 하루만에 정신을 차리고 예왕을 역적으로 선포하여 무인지변 진압을 도운 뒤, 성친왕을 공식적으로 황태제로 책봉하고 군권, 인사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넘겨준다.
무인지변을 수습하고 예왕이 사사된 이후 심리적 충격 때문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재석에게 모든 권한을 넘기고 자리만 보전하다가 1699년 3월 27일 붕어한다. 죽기 6일 전 재석에게서 '미래인이 천녀에게 소원을 빌고 무종, 장조, 성친왕에게 차례로 빙의했다'[19] 는 사실상의 고백을 들었지만 동생의 재담이라 생각해 웃어넘긴다.[20] 사후 을병대기근을 이겨낸 공으로 숙조라는 묘호를 받는다.
- 순현황후 → 순현황태후 양씨
건복제의 황후. 1657년생. 건복제보다 2살 연상. 태자, 경친왕과 딸 하나를 낳았다. 친정은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선황 연가제가 외척을 경계한데다 양씨의 성품과 미모가 뛰어나 간택되었다고 한다. 남편 건복제의 차가운 성격과 시어머니인 황태후 이씨가 태자비로 점찍고 있던 민지영(상희)을 성친왕의 새 친왕비로 간택한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지만 그 외에는 큰 갈등 없이 원만한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숙조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자식인 영선공주와 새로운 황자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달라는 유언을 듣는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하면서 명칭 논란이 잠시 있었는데 재석은 원역사에서 인종-명종, 경종-영조 형제 계승 때의 조선 사례를 떠올리고 황태후로 격을 높인다. 디에고가 대한을 찾아왔을 때는 하늘이 내린 부자의 인연을 불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칠 수 없다며 받아들일 것을 권한다. 이후 디에고를 만났을 땐 예의바른 태도와 성실함에 만족해한다.
시동생 성친왕에게도 처음부터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21] 외국으로 보내진 성친왕이 개과천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로 패물도 받다 보니[22] 호의적으로 보는 동시에 성친왕의 첩이 된 올렝카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10년간 성친왕의 옆에서 내조한 현모양처라 생각하고 있다. 남편 건복제와 두 친아들인 태자와 경친왕을 모두 먼저 떠나보내는 큰 아픔을 겪는다.
특이한 점이라면 태황태후 이씨와 고부관계가 매우 좋다는 것인데, 건복제가 살아있을 때 냉혹한 성격을 못마땅해한 이씨와 양씨가 뒷담화를 나누면서 사이가 돈독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건복제 사후에도 변하지 않아서,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황실의 큰어른이자 조언자로 대부분 같은 목소리를 낸다.
시동생 성친왕에게도 처음부터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21] 외국으로 보내진 성친왕이 개과천선했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로 패물도 받다 보니[22] 호의적으로 보는 동시에 성친왕의 첩이 된 올렝카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10년간 성친왕의 옆에서 내조한 현모양처라 생각하고 있다. 남편 건복제와 두 친아들인 태자와 경친왕을 모두 먼저 떠나보내는 큰 아픔을 겪는다.
특이한 점이라면 태황태후 이씨와 고부관계가 매우 좋다는 것인데, 건복제가 살아있을 때 냉혹한 성격을 못마땅해한 이씨와 양씨가 뒷담화를 나누면서 사이가 돈독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건복제 사후에도 변하지 않아서,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황실의 큰어른이자 조언자로 대부분 같은 목소리를 낸다.
- 효장태자 이원
건복제의 황태자. 1676년생. 아버지를 닮아 몸이 좋지 않은 듯하다.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 인자하고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 을병대기근이 닥치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나만 편할소냐며 변복하고 구호소에 나가 살펴보는 등 명군의 자질이 충분하나 안타깝게도 미행을 나갔을때 누가 봐도 태자라는 생각을 못하고 병든 난민으로만 생각할 정도로 몸이 병약하다. 모범을 보이겠다며 단식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같은 이유로 치료조차 한동안 거부해서 1697년 6월 3일(음력 4월 15일) 동궁인 창덕궁 낙선당에서 훙서한다. 죽기 전 유언으로 숙부인 성친왕의 귀국을 요청하고 건복제가 이를 받아들여 재석이 귀국하게 된다. 자녀는 없었다.
- 덕비 허씨
황태자 이원의 부인. 건복제 초기에 내각승상을 지내고 물러난 곡성후 허적[23] 의 손녀로 성품이 순하고 착하며 체구도 크고 건강하다고 한다. 조부의 배경 뿐만 아니라 모친이 다산하였다[24] 는 점도 고려되어 황태자비가 되었다. 하지만 남편의 몸이 워낙 약해 결국 자식을 낳지도 못하고 과부가 되고 만다.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태자가 죽은 해 1월에 천주교에 귀의하고 태자 사후 매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후 덕비(德妃)라는 칭호를 받았다. 태황은 며느리를 안쓰러워해서 동궁에서 계속 지내게 해주었고, 엄동설한에 내보낼 수 없다며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는 성친왕도 일단 가태제로 책봉할 정도로 신경써주었다. 무인지변 후에는 자신이 동궁에 계속 있어서 성친왕 일가가 변을 당했다며 자책하고 스스로 동궁을 나가 친정으로 돌아간다.
- 김 선시, 홍 숙녀
황태자 이원의 후궁들. 황태자비처럼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되어버렸다.
- 영선공주
건복제와 황후 양씨 사이의 외동딸, 1677년생. 사실 고명딸인데 오빠와 남동생이 모두 요절해서 외동딸이 되었다. 혼인을 하고 자식도 낳았다는 언급을 보면, 태황의 약한 체질을 물려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복제의 딸 셋 중 유일한 적통이라 건복제의 적통 후손은 모두 영선공주의 자식들이 되었다. 예왕의 반란 때 남편은 성친왕의 편을 들고 탈출한다.
- 경친왕
건복제의 둘째 아들. 1679년생. 1685년 마진(홍역)에 걸려 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 귀비 박씨
건복제의 후궁. 딸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출산 중 죽었다고 한다.
- 진빈 홍씨
건복제의 후궁. 자식으로 의현옹주가 있다.
- 미인 백씨
건복제의 후궁. 자식은 없다.
- 진성황태후 → 진성태황태후 이씨
열조의 황후이자 건복제와 성친왕의 모후.[26] 이순신의 장남 이회의 손녀. 1636년생. 자녀 일곱을 두었으나 그 중 셋이 어릴 적에 죽었다. 때문에 겨우 얻은 황태자(건복제)를 매우 엄히 키웠고, 반대급부로 막내 성친왕을 귀여워하며 오냐오냐 키웠다.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성친왕이 양녕대군 수준의 패악을 부리는 데다 성친왕과 반대로 엄하게 자란 건복제에게 성친왕이 밉보여서 결과적으로 성친왕이 견서사로 국외추방당하는 원인을 간접적으로 제공하고 말았다. 이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론 나가서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로 건복제가 성친왕을 견서사로 추방할 때 개입하지 않았다.[27]
재석이 동변관리사가 된 후 사망한 강씨를 대신할 새 친왕비로 미색과 총명함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한 민지영(3부 상희)를 새 성친왕비로 간택해 미주로 보내준다. 무인지변 당시 건복제가 의식불명에 빠져 혼란한 상황에서 황실 큰어른으로서 상황을 정리하며 반란 진압에도 일조한다. 숙조가 붕어한 후 재석이 원역사의 조선에서 영조가 형인 경종의 왕세제로 즉위하면서 했던 것[28] 을 떠올려 칭호를 태황태후로 높인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하자 이전과 태도가 달라졌는데, 제왕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어서 숙조를 엄격하게 대하고 성친왕은 오냐오냐 하면서 키워서 상술한 사단이 났는데도 재석이 태황이 되자 과거 숙조를 대했던대로 재석을 대한다.[29] 그리고 태후까지 합세해서 재석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강하게 주장해서 결국 3명의 후궁을 들이도록 한다. 아무래도 아들 넷을 낳았지만 셋을 잃은 경험, 그리고 순비 올렝카는 난임인지라 후계 구도가 불안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1, 2부 때와 달리 황실 큰어른이 정정하게 살아 있으니 재석은 잠자리도 자기 원하는대로 못 드는 안습한 처지에 놓인다. 디에고가 대한에 찾아왔을 때는 분노해서 매우 질책하긴 했지만, 황실의 핏줄을 버릴순 없다며 종친으로 살게 해줄 것을 권한다. 이후 디에고를 만났을 땐 누가 봐도 성친왕의 아들인데다가 예의바른 태도와 성실함에 만족해한다.
황태후로서의 정치적 입장보다는 두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성애 강한 어머니이다. 성친왕이 건복제에게 찍혀있던 때에는 지나치게 냉혹한 건복제와 망나니가 된 성친왕을 보며 두 아들을 다 잘못 키웠다고 자책했다. 3부 들어서 막 나가는 경향이 생긴 재석 때문에 마음고생을 자주 한다. 성친왕이 돌궐과의 전쟁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이 아들을 다그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생존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눈물로 시간을 보냈고, 재석이 귀국한 뒤에도 무인지변에서 직접 반군과의 전투에 창을 들고 참전하자 또다시 기겁한다. 원각사와 회엄사를 자주 방문했다는 것을 보면 불교도인 듯 하다.
재석이 동변관리사가 된 후 사망한 강씨를 대신할 새 친왕비로 미색과 총명함을 겸비한 것으로 유명한 민지영(3부 상희)를 새 성친왕비로 간택해 미주로 보내준다. 무인지변 당시 건복제가 의식불명에 빠져 혼란한 상황에서 황실 큰어른으로서 상황을 정리하며 반란 진압에도 일조한다. 숙조가 붕어한 후 재석이 원역사의 조선에서 영조가 형인 경종의 왕세제로 즉위하면서 했던 것[28] 을 떠올려 칭호를 태황태후로 높인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하자 이전과 태도가 달라졌는데, 제왕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어서 숙조를 엄격하게 대하고 성친왕은 오냐오냐 하면서 키워서 상술한 사단이 났는데도 재석이 태황이 되자 과거 숙조를 대했던대로 재석을 대한다.[29] 그리고 태후까지 합세해서 재석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강하게 주장해서 결국 3명의 후궁을 들이도록 한다. 아무래도 아들 넷을 낳았지만 셋을 잃은 경험, 그리고 순비 올렝카는 난임인지라 후계 구도가 불안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1, 2부 때와 달리 황실 큰어른이 정정하게 살아 있으니 재석은 잠자리도 자기 원하는대로 못 드는 안습한 처지에 놓인다. 디에고가 대한에 찾아왔을 때는 분노해서 매우 질책하긴 했지만, 황실의 핏줄을 버릴순 없다며 종친으로 살게 해줄 것을 권한다. 이후 디에고를 만났을 땐 누가 봐도 성친왕의 아들인데다가 예의바른 태도와 성실함에 만족해한다.
황태후로서의 정치적 입장보다는 두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성애 강한 어머니이다. 성친왕이 건복제에게 찍혀있던 때에는 지나치게 냉혹한 건복제와 망나니가 된 성친왕을 보며 두 아들을 다 잘못 키웠다고 자책했다. 3부 들어서 막 나가는 경향이 생긴 재석 때문에 마음고생을 자주 한다. 성친왕이 돌궐과의 전쟁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이 아들을 다그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며 생존 소식이 들려올 때까지 눈물로 시간을 보냈고, 재석이 귀국한 뒤에도 무인지변에서 직접 반군과의 전투에 창을 들고 참전하자 또다시 기겁한다. 원각사와 회엄사를 자주 방문했다는 것을 보면 불교도인 듯 하다.
- 성친왕비 → 인선황후 강씨
성친왕 이현의 아내. 금천 강씨[30] 인 호부대신 강기석의 여식이라고 한다. 빙의한 재석은 당연히 본 적도 없다. 이현이 견서사로 쫓겨나기 1달 전에 혼례를 치뤘으며 절망한 성친왕이 계속 술을 퍼먹어 첫날밤도 갖지 못해서 아이도 안 생겼다.[31] 호부대신 강기석이 건복제의 최측근이라 가능했던 혼사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딸을 그런 곳에 시집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한다. 성친왕 이현이 사실상 영구추방된 이상 남은 인생을 친왕비라는 허울 속에서 처녀과부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해서 시집 오기 전 즐기던 정원 가꾸기도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성친왕의 선물을 받고 잠시 회복했다가 성친왕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급격히 악화되어 사망했다. 죽고 겨우 한 시진 후에 성친왕이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어와서 더욱 안타깝게 되었다. 죽으면서도 성친왕이 보낸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재석은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내 잘못은 아니지만 안타깝다며 올렝카와 3달 간 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 예를 표하며, 후일 귀국한 후에는 1년에 4번씩 꼬박꼬박 강씨의 묘에 성묘하고 제사도 올려준다.[32] 성친왕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 황후로 추존되고, 묘도 격에 맞게 능으로 격상된다. 시호는 인선(仁宣), 능호는 원릉(原陵).
마음고생이 심해서 시집 오기 전 즐기던 정원 가꾸기도 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성친왕의 선물을 받고 잠시 회복했다가 성친왕이 참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급격히 악화되어 사망했다. 죽고 겨우 한 시진 후에 성친왕이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어와서 더욱 안타깝게 되었다. 죽으면서도 성친왕이 보낸 목걸이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고 한다. 재석은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내 잘못은 아니지만 안타깝다며 올렝카와 3달 간 관계를 갖지 않는 것으로 예를 표하며, 후일 귀국한 후에는 1년에 4번씩 꼬박꼬박 강씨의 묘에 성묘하고 제사도 올려준다.[32] 성친왕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 황후로 추존되고, 묘도 격에 맞게 능으로 격상된다. 시호는 인선(仁宣), 능호는 원릉(原陵).
- 현왕 이종(顯王 李腙)
열조의 서장자. 1653년생.[33] 열조가 동궁 시절 궁녀를 통해 낳았다. 열조의 장남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천해서 적자가 태어나자마자 총애를 잃었으며 이현과는 12살이나 차이나서 서로 무관심했다고 한다. 다만 열조가 그래도 장남이라고 재산을 챙겨주긴 했는지 어느정도 재력은 있다.
모친은 이미 사망했고, 본인도 궁궐에 출입도 잘 안 하고 대신들과도 말을 섞지 않는 등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정치적 야심도 배경도 전혀 없으며 기근이 오건 말건 사냥이나 다니는 한량의 삶을 살고 있다. 사냥을 많이 즐기는 탓에 무예 하나는 뛰어나고,[34]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는 인기가 많다고 하며, 빙의 전 성친왕은 서자라는 이유로 반말을 일삼았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친왕에게 계속 호의적인 것을 보면 성격이 매우 좋은 호인인 듯 하다.[35] 아들들에 대해서 남자라면 풍류를 다양하게 즐길줄 알아야 하는데 한명이 한가지만 파고 있어서 걱정된다고 농담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이나, 아들들이 대민범죄를 저지른다는 얘기는 없고 무인지변 때 다 성친왕군에 합류한 것을 보면 자식농사에 마냥 실패하지도 않았다.
무인지변 때 예왕이 그도 살해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를 척살했어야 할 장희재의 호위청이 오히려 성친왕 편으로 돌아서서 군사를 보내 보호하고, 아들 영해공과 그를 지지하는 족친위 1백여명[36] 이 반란군으로 돌아선 동료들과 싸워서 이탈하고, 그와 아들들을 모두 구출해 성친왕 진영에 합류했다. 이를 보면 종친들 사이에선 인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 중에는 자기까지 일선에 나설 필요가 있냐며 지휘대에만 머물러 있었다.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관계는 변치 않아서, 재석은 가끔 누군가에 기대고 싶은 소망에, 그리고 무인지변 때 자신을 전폭적으로 편 들어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부른다. 디에고의 결혼식 때 법도 때문에 참석하기 어려운 재석을 대신해서 신랑 가족 자격으로 참석해준다. 이후 일가가 다 디에고와 친해진다.
모친은 이미 사망했고, 본인도 궁궐에 출입도 잘 안 하고 대신들과도 말을 섞지 않는 등 권력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정치적 야심도 배경도 전혀 없으며 기근이 오건 말건 사냥이나 다니는 한량의 삶을 살고 있다. 사냥을 많이 즐기는 탓에 무예 하나는 뛰어나고,[34]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는 인기가 많다고 하며, 빙의 전 성친왕은 서자라는 이유로 반말을 일삼았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친왕에게 계속 호의적인 것을 보면 성격이 매우 좋은 호인인 듯 하다.[35] 아들들에 대해서 남자라면 풍류를 다양하게 즐길줄 알아야 하는데 한명이 한가지만 파고 있어서 걱정된다고 농담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이나, 아들들이 대민범죄를 저지른다는 얘기는 없고 무인지변 때 다 성친왕군에 합류한 것을 보면 자식농사에 마냥 실패하지도 않았다.
무인지변 때 예왕이 그도 살해 대상으로 삼았지만, 그를 척살했어야 할 장희재의 호위청이 오히려 성친왕 편으로 돌아서서 군사를 보내 보호하고, 아들 영해공과 그를 지지하는 족친위 1백여명[36] 이 반란군으로 돌아선 동료들과 싸워서 이탈하고, 그와 아들들을 모두 구출해 성친왕 진영에 합류했다. 이를 보면 종친들 사이에선 인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 중에는 자기까지 일선에 나설 필요가 있냐며 지휘대에만 머물러 있었다.
재석이 즉위한 후에도 관계는 변치 않아서, 재석은 가끔 누군가에 기대고 싶은 소망에, 그리고 무인지변 때 자신을 전폭적으로 편 들어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사석에서는 '형님'이라고 부른다. 디에고의 결혼식 때 법도 때문에 참석하기 어려운 재석을 대신해서 신랑 가족 자격으로 참석해준다. 이후 일가가 다 디에고와 친해진다.
- 영해공 이철
현왕 이종의 장남. 1670년생. 아버지와 함께 사냥이나 다니는 한량. 붙임성이 좋고, 성친왕이 한 유흥 한다는걸 들어서인지 귀국 후 재석에게 자주 놀러온다. 어찌나 사냥을 많이 다녔는지 활쏘기 솜씨가 재석과 거의 동급이고, 후술할 무인지변에서 3배나 되는 적을 뚫고 도주에 성공한 것을 보면 무예도 뛰어난 듯 하다.[37]
난이 일어나자 김희준이 족친위를 장악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혈투 끝에 탈출해서 성친왕 군영에 합류했으며, 기세가 잔뜩 올라서 예왕의 사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패주하는 반란군을 추격하는 전투에도 직접 참전한다. 이를 보면서 재석은 공을 세웠다고 더 천방지축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평난 3등공신에 책봉된다.
난이 일어나자 김희준이 족친위를 장악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혈투 끝에 탈출해서 성친왕 군영에 합류했으며, 기세가 잔뜩 올라서 예왕의 사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패주하는 반란군을 추격하는 전투에도 직접 참전한다. 이를 보면서 재석은 공을 세웠다고 더 천방지축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평난 3등공신에 책봉된다.
- 강녕공 이고
현왕 이종의 차남. 1673년생. 공부를 멀리 하고 반촌다점과 주점에 죽치고 앉아있는 한량. 형과 비슷한 성격에 재석에게 자주 놀러오는데 어찌나 많이 놀았는지 사패 솜씨가 거의 타짜 수준이다.
- 삼성공 이순
현왕 이종의 삼남. 성친왕이 객사할 경우 양자로 들어갈 유력한 후보. 1678년생. 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샌님은 아니고 건강하다. 효장태자와 나이대가 비슷하고 학구적인 성격도 비슷해서 친한 사이였다. 이런 성향 때문에 효장태자 훙서 후 두 형과 달리 건복제의 양자로 입적될 가능성이 잠시 거론되었다. 하지만 부친의 정치적 배경이 전무하고 두 형의 행실 문제도 있어 사실상 배제된다. 수줍음이 많은지 재석의 귀국 후에 술 한잔 따르고 바로 자리로 돌아간다.
- 정현장공주, 정선장공주
열조와 황태후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건복제와 성친왕의 동복 누나들. 어머니와 올케랑은 친하지만 동복동생인데도 남동생들과는 딱히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라고 한다. 예왕의 반란 때 족친위인 남편들은 탈출해 성친왕에게 가담했다.
- 회령후 이홍진
진왕(진안군)의 손자이자 성도공 이창의 장남. 반촌그룹, 장조와 상빈 이씨에게 물려받은 전답, 진왕의 소설 판권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도성 종친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이다. 몸 관리는 안 하는지 안경을 쓰며 상당한 비만이다. 무인지변 때 반군이 지른 불로 반촌그룹이 모두 불타버리지만 평소에 보험을 들어뒀기에 보험금을 왕창 타서 큰 손해는 보지 않았고 이후 반촌 다점, 주점, 극장을 모두 벽돌로 재건한다.
2.3. 성친왕파
재석이 황태제로 책봉되고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대한을 통치하기 이전부터 성친왕 계열이었던 인물들.
2.3.1. 8차 견서사
8차 견서사는 정사 성친왕 포함 총 11명으로 정사 성친왕, 부사 이형준, 서장관 정호찬, 아르망 다라미츠 신부, 의관 이진원, 익위사 무관 2명(홍상훈, 김종건), 통변 이홍석, 시종 3명(박종선, 지말복, 오돌천)이다. 이 중 성친왕을 감시하는 금위사와 예왕이 따로 심어둔 첩자가 각각 하나 이상 있으며 재석도 분명 그러리라고 생각해서 신뢰하지 못한다.
- 이형준
부사 → 미주 권학사 → 성균관 동지관사 → 좌참찬 → 우승상. 1625년생,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 본국에 본처와 1남 2녀가 있다.[38] 재석 빙의 전 성친왕의 서연관이었고 서연관 중 유일하게 망나니였던 성친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다가[39] 성친왕이 견서사로 추방될 때 견서사의 부사가 되어 함께 추방된다.[40][41] 꼬장꼬장하고 투덜대는 노인이었지만 재석이 성친왕에 빙의한 후 개과천선하자 사이가 좋아진다. 1658년 7차 견서사에 말단 서기관으로 참여해 루스국에 다녀왔던 적이 있다. 당시 바셴카라는 20살 연하의 14살 소녀와 관계하다가 그 아버지에게 들켜서 구타당하고 쫓겨난 일이 있는데 바셴카는 그 일로 임신해서 자신도 모르던 사생아 보리스를 낳은 상태였다. 루스국에서 보리스, 바셴카와 재회한 후 보리스와 그 의형제들을 데리고 다니게 되며 그들에게 아버지로 대우받는다. 미주 이주 후에는 수신독본이란 책을 집필하고 권학사가 되어 강연을 다닌다. 재석이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하여 성균관 동지관사 관직을 받고, 재석은 일단 대리청정 중 경력을 쌓게 하기 위해 좌참찬에 임명했다가 자신이 즉위한 후 우승상으로 승진시킨다.[42] 보리스가 장옥정과 재혼하는 것은 마뜩치 않아 했으나, 재석이 제위를 승계하게 되니까 줄을 대는 사람들도 꼴보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라 본인 의사에 맡기기로 했다. 국구(國舅)라 자기 의견을 내는걸 절제하는 좌승상 민성윤 대신 조정에서 토론을 이끌어가는 등 군기반장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은근히 입체적인 캐릭터로 얼핏 보면 80년 전 스타일 그대로의 정통 한복을 입고 인종 문제에도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는 등 1, 2부 사림파 꼰대같이 보이지만 현실적, 패권주의적, 실리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유주 문물도 즐기고,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이 말을 잘 듣자 상투도 다시 틀고 조선옷도 입게 설득하고 성리학 진도도 나가려고 하지만 아카데미를 참관해서 서학을 공부하는 것도 공부를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데다가, 졸지에 생긴 혼혈 서자와 5명의 의형제들도 의붓아들로 받아들이고 교육을 충실히 시키는[43] 개방적인 모습도 있다. 2부 이후 70여년간 변화한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캐릭터.
은근히 입체적인 캐릭터로 얼핏 보면 80년 전 스타일 그대로의 정통 한복을 입고 인종 문제에도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는 등 1, 2부 사림파 꼰대같이 보이지만 현실적, 패권주의적, 실리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졌다. 유주 문물도 즐기고,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이 말을 잘 듣자 상투도 다시 틀고 조선옷도 입게 설득하고 성리학 진도도 나가려고 하지만 아카데미를 참관해서 서학을 공부하는 것도 공부를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데다가, 졸지에 생긴 혼혈 서자와 5명의 의형제들도 의붓아들로 받아들이고 교육을 충실히 시키는[43] 개방적인 모습도 있다. 2부 이후 70여년간 변화한 사대부들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캐릭터.
- 정호찬[44]
서장관 → 총융청 연대장 → 총융청 총관. 1650년생. 1부의 정호찬과는 동명이인.[45] 본국에 2살 연하의 본처와 본처 소생 3남[46] 이 있으며 미주 시절 23살 연하의 양첩 이사벨라를 들인다.[47] 본래 성친왕 이현의 익위사였고[48] 그 중 성친왕과 가장 친해서 황태후의 요청으로 서장관이 되었으며 여전히 무관 노릇도 하고 있다. 익위사가 되기 전에 강무관을 수료하고 북방에서 실전도 겪은 뒤 훈련도감에서 복무하다가 열조가 성친왕의 익위사로 꽂아줬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런 인재에게 무예만 있으면 되는 익위사를 시켰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강무관 경험 덕분에 무예뿐 아니라 병학에도 조예가 깊다. 1부 정호찬은 과묵하고 진중한 성격이고, 딸만 셋이며, 아내와 함께 자고 첩을 들이지 않는 반면 3부 정호찬은 유쾌하고 수다스러운 성격에, 아들만 셋이고, 미주에 있는동안 양첩을 들이는 등 재석에 대한 충성심 빼고는 반대되는 캐릭터이다. 재석은 절친했던 옛 정호찬과 이름이 같고 유쾌한 성격 때문에 첫인상부터 신뢰감을 느끼며 1부 정호찬과 동일시하고 있다. 재석과 함께 빈 전투에 참전해서 활로 재석을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미주에서는 대평원 원주민들을 회유하는 사신으로 떠나 미시시피 강 유역과 오대호 지역 누벨프랑스까지 다녀오는 대 여정을 거의 피해없이 잘 수행하고 2년여만에 귀환한다. 재석이 귀국할때 함께 귀국하여(현지처 이사벨라도 데리고 온다) 참장 계급으로 승진, 총융청 2연대장을 맡는다.
한양대화재가 발생할 때 마침 도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런던 체류시 심심해서 봐둔 런던 대화재 당시 문서를 참고해서 민관을 가리지 않고 건물들을 폭파해서 방화대를 만들어서 궁궐에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화재복구를 위해 원각사 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난이 일어나자 바로 성친왕을 구원하러 나서고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호위청 총관 장희재를 설득해서 성친왕 편에 서게 하는 위엄을 보여준다.[49] 계획대로 예왕군의 배후를 들이쳐서 동대문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다. 그 공로로 평난 2등공신에 책봉되고 재석이 즉위한 후 총융청 총관이 되며, 그의 집은 1부와 같이 측근들과 밀담을 나누는 장소가 된다.
한양대화재가 발생할 때 마침 도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런던 체류시 심심해서 봐둔 런던 대화재 당시 문서를 참고해서 민관을 가리지 않고 건물들을 폭파해서 방화대를 만들어서 궁궐에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화재복구를 위해 원각사 터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난이 일어나자 바로 성친왕을 구원하러 나서고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호위청 총관 장희재를 설득해서 성친왕 편에 서게 하는 위엄을 보여준다.[49] 계획대로 예왕군의 배후를 들이쳐서 동대문 전투에서 결정적인 공훈을 세운다. 그 공로로 평난 2등공신에 책봉되고 재석이 즉위한 후 총융청 총관이 되며, 그의 집은 1부와 같이 측근들과 밀담을 나누는 장소가 된다.
- 아르망 다라미츠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1642년생. 조선식 이름은 알망주. 대한에 7년간 거주해 조선어와 한문에 능숙하다고 하며 이현에게 어학과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8차 견서사와 동행했다. 루이 14세의 총사대에 근무했으나 프랑스가 같은 천주교 국가들을 배신하고 이교도 오스만과 동맹을 맺은 사실에 염증을 느껴 27세에 성직자가 되었다고 한다.[50] 이름은 다라미츠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만 재석은 아라미츠라고 부르는데, 이는 귀족 칭호인 de를 빼먹고 부르는 것이므로 원래 큰 실례지만 다라미츠는 성직자가 되어 속세의 지위는 상관 없다며 신경쓰지 않는다. 본래 성직자가 되어 검을 놓았음에도 재석을 호위하고 혹시라도 전사할 경우 세례를 해줘야 한다며 제2차 빈 공방전에 재석과 함께 참전한다. 미주에서도 재석과 함께 지내다가 대한으로 함께 귀국한 뒤 자혜원에서 지낸다. 무인지변 후 성친왕에게 예왕의 딸들을 마포 대성당에 유배 보내달라는 부탁을 하고 수락되는데,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재석이 즉위한 후 시강원이 정식으로 열리자 이은의 스승 중 하나가 되어 라틴어, 프랑스어, 검술, 승마를 가르치는데, 은이가 편하게 여기는 스승이라 힘든 태자 교육에서 잠시 숨쉴 틈을 주고 몸을 움직일 시간을 줄 의도였다.
- 이홍석
역관. 1649년생.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한다. 본래는 몰랐으나 루스국과 잉글국 체류 중 루스어와 잉글어를 조금씩 배운다. 장조가 죽은 뒤 상빈 이씨가 세운 고아원인 자혜원 출신으로, 자혜원의 멸칭인 이태원[51] 이라는 말만 들어도 화를 낸다고 한다. 프랑스 체류 시에는 재석 본인이 프랑스어 구사가 가능해서 별 활약이 없다가 독일에 가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한다.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기계처럼 감정없이 통역만 하는 강심장의 소유자[52] . 글을 모르는 시종 셋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역할도 맡는다. 성친왕이 동변관리사로 취임하여 견서사 임무가 해제되자 미주에서는 대유주 언어들의 통역이 필요 없고 미주 토인 말은 할 줄 모르기에 본국으로 돌아간다. 귀국 후 루스어를 익혔다는 이유로 북변으로 파견되어 루스인들과의 통역을 맡는다. 북변에서 돌아온 뒤에는 어학훈도가 되어 자혜원의 아이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친다. 통변이기에 대부분의 대화를 직접 듣게 되므로 금위사일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고, 무인지변 이후 실제로 건복제가 심어둔 금위사 탐보꾼이었음이 밝혀진다. 다만 암살시도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문책되어 잠시 직책에서 해임당한다.[53] 이후 루스국 사절이 오자 프랑스어와 루스어를 모두 구사한다는 이유로 알렉세이의 개인 교사를 맡는다.
- 이진원
의관. 1636년생. 장조 때 설립된 의학교에서 외과술을 배우고 군의로 10년간 복무한 뒤 견서사에 참가했다. 견서사에 선정된 이유는 어차피 동양 약제를 구하기 어려운 대유주에서 한의학은 별 쓸모가 없어서 외과술에 능한 인물을 뽑은 것. 다리 절단 수술[54] 도 성공적으로 집도하는 상당한 실력자이다. 상빈 이씨(2부 상희)의 큰오빠의 장남의 아들, 즉 상빈 이씨의 조카손자로 여전히 가문 대대로 이가의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실력이 뛰어나지만 많은 환자를 봐야한다는 가훈에 따라 내의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성친왕을 포함한 사절단의 누구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절대 쌓지 않으려는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상빈 이씨와 같은 가문인 것에 대해 대화한 이후로 재석과 친분을 쌓기 시작한다. 병균학에 대해서는 적극 지지하며 병균이 발견되지 않은 질병은 병균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김종건을 이은 두번째 암살자였다.[55] 거절할 경우 일가는 물론 이가의원의 직원들과 환자들까지 모두 죽을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고 돈도 탐이 났으며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는 망나니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수락했다. 그러나 재석이 성친왕에 빙의한 후 개과천선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으며 상희 또한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자 마음이 돌아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재석의 귀국명령에 따라 암살지령이 내려지면서 재석에게 독약을 올렸으나 낌새를 챈 재석이[56] 짐짓 독약을 마시는 척 하자 독약 그릇을 뺏어 깨트리고 협박에 못이겨 그랬다고 용서를 빈다. 재석은 그를 용서하고, 대미주에서 실종되었다고 헛소문을 내서[57] 예왕이 가족에게 보복하는 것을 막고 '원가'라는 미주 이주민 2세로 위장신분을 주어 본국에 몰래 데려온다. 존재가 발각되어서 무인지변의 도화선이 됐던 김종건과 달리 예왕 일파는 죄를 덜기 위해서 이진원의 존재는 비밀에 부쳤으며 재석 또한 이진원이 기군망상으로 처벌받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에 부쳤는데, 건복제 사후 미주에서 조문 사절단이 방문할 때 서류를 조작해서 사실 실종된 이진원은 살아있었고 건강을 회복한 뒤 조문단과 함께 귀국했다는 것으로 처리되어 가족에게 돌아온다. 칠순 가까운 나이임에도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군의로 참전한다.
사실 김종건을 이은 두번째 암살자였다.[55] 거절할 경우 일가는 물론 이가의원의 직원들과 환자들까지 모두 죽을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고 돈도 탐이 났으며 황실의 명예를 더럽히는 망나니가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에 수락했다. 그러나 재석이 성친왕에 빙의한 후 개과천선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으며 상희 또한 자신을 가족처럼 대하자 마음이 돌아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재석의 귀국명령에 따라 암살지령이 내려지면서 재석에게 독약을 올렸으나 낌새를 챈 재석이[56] 짐짓 독약을 마시는 척 하자 독약 그릇을 뺏어 깨트리고 협박에 못이겨 그랬다고 용서를 빈다. 재석은 그를 용서하고, 대미주에서 실종되었다고 헛소문을 내서[57] 예왕이 가족에게 보복하는 것을 막고 '원가'라는 미주 이주민 2세로 위장신분을 주어 본국에 몰래 데려온다. 존재가 발각되어서 무인지변의 도화선이 됐던 김종건과 달리 예왕 일파는 죄를 덜기 위해서 이진원의 존재는 비밀에 부쳤으며 재석 또한 이진원이 기군망상으로 처벌받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에 부쳤는데, 건복제 사후 미주에서 조문 사절단이 방문할 때 서류를 조작해서 사실 실종된 이진원은 살아있었고 건강을 회복한 뒤 조문단과 함께 귀국했다는 것으로 처리되어 가족에게 돌아온다. 칠순 가까운 나이임에도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군의로 참전한다.
- 홍상훈
익위사 무관 → 용호청 대대장 → 용호청 연대장. 1643년생. 무기는 잘 다루지만 행동이 다소 둔하고 미련하다고 한다[58] . 유란드 경에게 기병 훈련을 받고 제2차 빈 공방전에 재석과 함께 참전한다. 이때 크라쿠프 대장간에서 주문제작한 편곤을 사용한다. 하와이 정벌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아파치 원정 후 새로 얻은 영토 성채를 지키는 군사들을 지휘하게 된다. 재석이 귀국할때 함께 귀국하여 용호청 대대장 보직을 받는다. 권훤과 함께 예왕에게 붙으려던 용호청 총관을 설득하여 재석 편으로 돌려놓는다. 총관이 마뜩치 않아서인지 선임대대장으로서 용호청을 지휘하는데, 정호찬과 협의 하에 적절한 기만책으로 마치 판세가 결정된 이후에 참전할 것처럼 예왕군을 속이고 측면을 들이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공로로 평난 2등공신에 책봉되고, 용호청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참전한다.
- 김종건
익위사 무관 → 무위영 대대장. 1647년생. 유란드 경에게 기병 훈련을 받고 제2차 빈 공방전에 성친왕과 함께 참전한다. 전투 중 낙마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재석이 구해줘서 목숨을 건지고 크게 감동한다. 사실은 황금 50냥을 받고 성친왕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았던 예왕의 첩자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에 돌아가면 얻을 재물 생각에 싸움을 피하려 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재석이 목숨을 구해주자 감동하여 그 사실을 고백하고 재석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재석은 역공작을 위해 이후 암살의뢰가 오면 의뢰를 수행하는 것 처럼 행동하라고 명한다. 하와이 정벌에도 참여한다. 미주에 와서 암살 의뢰한 것을 확인하는 연락을 받는데 아직도 그 배후를 캐지 못하고 있다. 재석이 귀국령을 받고 귀국할때 김종건 노모가 보낸 편지로 가장한 암살지령이 왔으나 재석에게 바로 보고하고 거짓으로 실행하겠다는 답을 보냈다. 재석은 이진원과 함께 대미주에서 실종된 것으로 위장하고 '종가'라는 미주 이주민 2세로 위장신분을 주어 본국에 몰래 데려와 자기 집에 숨겨둔다. 한양대화재 때 화재가 가족이 있는 남촌으로 번지자 무단이탈하여 가족을 찾으러 간다. 자혜원으로 피난해 무사했던 가족을 만나지만, 신세를 편 홍상훈과 달리 거지꼴로 나타나서 성친왕에게 찍혀서 쫓겨난 걸로 오해받고 아내에게 구박당했다. 게다가 최진원이 그의 가족들을 감시하기 위해 포섭한 이웃집 아낙네에게 목격당해 예왕 측에서 김종건이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예왕이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버린다. 발각된 것을 모르며[59] 재석이에게 모든 걸 보고하였고 재석도 말로만 꾸짖고 성친왕저에만 있도록 했다. 무인지변 이후 예왕이 그에 대한 내용을 실토하며 생존이 밝혀졌다. 건복제에게 암살 시도 사실을 밝히지 않고 죽음을 위장한 것은 기군망상에 해당하기에 홍상훈보다 급이 낮은 무위영 대대장이 된다. 대신 재석이 현금 보상을 따로 챙겨줬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참전한다.
- 양주댁 박씨
김종건의 아내. 슬하에 시집간 딸들과 김만식이라는 아들이 있다. 남편 없이 지낸 17년간 채소가게를 하며 홀로 지냈다. 재석은 양주댁을 비롯한 김종건 일가를 집에 들여 보호하려고 했으나, 양주댁이 폐를 끼치기 싫다며 거절했고 사실을 설명할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남촌에 계속 살게 놔둔다. 한양대화재 중 간신히 목숨을 건져 자혜원에 잠시 피난했다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김종건과 재회한다. 그러나 미주에서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김종건이 거지 꼴이 되어 나타나자 성친왕에게 죄를 짓고 찍혀서 추방이라도 당했다고 오해해서 큰소리로 싸운다. 17년간 혼자 생계를 꾸리고, 성친왕의 도움을 받는 것도 거부하며,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왔는데도 바가지를 긁는 것을 보면 억센 성격인듯. 이 부부싸움으로 인해 최신원에게 포섭되어 감시를 하던 이웃이 김종건이 살아돌아온 것을 목격, 예왕과 최신원이 무인지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이후 김종건은 복권되었으나 홍상훈보다 급이 낮은 무위영 대대장이 되었는데, 대신 재석이 현금으로 보상을 줘서 불만을 무마했다.
- 박종선
이현의 전담 시종. 1638년생. 본래 내수사 궁노비였다가 성친왕이 혼인하면서 하사받았고 견서사에 따라가면 보수로 은 500냥을 준다고 해서 지원했다고 한다. 재석 빙의 전의 이현과는 거의 인간관계가 없었으나 재석이 빙의한 후 믿을 수 있는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 친분을 쌓기 시작하여 어느새 동네 형님같은 수준으로 친해진다. 노총각으로 오래 노모를 모시고 살아서 요리를 잘 하며 대유주에 온 뒤 불랑국 요리까지 배웠다. 하지만 다른 업무가 많기에 일행이 앙투안이란 요리사를 고용하면서 요리 일은 맡지 않게 된다. 카자크 6형제의 합류 후 그들에게 윗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다. 대한령 미주로 이동한 후 그동안의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노모를 미주로 모시고 와서 함께 면천받고 과부와 결혼도 한다. 결혼한 후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으며 노모는 미주에서 사망한다. 재석이 귀국할때 함께 돌아온다. 성친왕저의 집사로 외출도 잦기 때문에 시중의 소문을 모아오는 역할도 한다. 난이 일어날 땐 성친왕의 재산 문서들을 들고 무사히 탈출했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에는 재석이 하사받았지만 빈 집인 예왕저를 관리하며 한가하게 지냈다가, 디에고의 집과 하인들을 관리하게 된다.
- 지말복
이형준과 정호찬 전담 시종. 1657년생. 박종선과 달리 자원하지 않고 임의로 뽑혀왔다. 박종선과 달리 성친왕의 소유가 아니라 면천은 받지 못하지만 결혼은 하도록 허락받는다. 성친왕이 동변관리사로 취임하여 견서사 임무가 해제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 오돌천
의관, 통변, 무관 담당 시종. 1643년생. 박종선과 달리 자원하지 않고 임의로 뽑혀왔다. 본처가 대유주 체류 중 죽었는데 박종선과 달리 성친왕의 소유가 아니라 면천은 받지 못하지만 재혼은 하도록 허락받는다. 성친왕이 동변관리사로 취임하여 견서사 임무가 해제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2.3.2. 측근
- 장 마리 드 포르토
아르망 다라미츠의 총사대 시절 친구. 총사대를 나온 후 법률가가 되어 파리 고등법원에서 일한다. 고문단이 되어 대한으로 갈 예정으로 재석이 대미주로 갈때 데리고 간다. 미주에는 법률 전공을 살릴 일이 없어 미주 속오군 훈련을 맡는다. 재석과 함께 대한 본국에 입국하고, 성균관 강의를 제안 받는다. 이후 포도청을 개혁하는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 로베르 다토스
아르망 다라미츠의 총사대 시절 친구. 총사대를 나온 후 공병이 되었다.[60] 고문단이 되어 대한으로 갈 예정으로 재석이 대미주로 갈때 데리고 간다. 지선성을 방어하는 성채를 쌓는 일을 맡는다. 재석과 함께 대한 본국에 입국하고, 강무관 강의를 제안 받는다. 이후 훈련도감 예하 공병영을 훈련시켰다.
- 보리스(이진용)
이형준이 바셴카와 관계해 낳은 사생아. 1659년생. 카자크들 사이에서 자랐으며 카자크들 중 가장 덩치가 크다. 항상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해 이형준이 오지 않았으면 스스로 대한으로 찾아갈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형준을 만난 후 예상과 달리 강하지 않아 보여 실망했지만 그래도 따라가기로 하자 재석이 근위병으로 삼는다. 이형준이 항렬자를 따라 이진용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잘 쓰지 않는다. 이형준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그동안 쭉 썼을 루스어조차 못 읽을 정도로 평생 공부와 담쌓고 살았던지라 결국 삼강오륜과 국문으로 자기 이름 쓰는 법 정도만 익혔고 한문은 못 익힌다. 미주 아파치족 토벌을 위해 본국에서 온 오도리 기병들과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 주먹다짐, 술 대결에서 이겨 오도리들에게 형님 대접을 받는다. 재석과 함께 대한에 귀국했고, 이형준의 적자는 이미 50세에 사망했기에 이복형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한다. 이형준의 적자 소생 조카들과 서로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형준의 집으로 가지 않고 계속 재석과 함께 산다. 의형제들과 더불어서 예왕으로부터 유사시 재석이 동원할 수 있는 주요 전력의 한 축이라고 평가받았다. 무인지변이 일어나자 뛰어난 피지컬에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포위망을 뚫고,[61] 정호찬이 있는 총융청으로 구원을 전하고, 총융청이 예왕군을 급습하면서 동대문 전투에서 활약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내 이리나를 유탄에 잃었고, 법 때문에 복수하지도 못하고, 한 달을 술에 절어 지낼 정도로 괴로워한다. 무인지변 후 2등 평난공신이 되었고 육군 참위로 내금위에 특채되어 재석의 호위를 계속 맡으며, 장옥정과 재혼을 제의받는다. 공신이 되어서 계급도 참령이 되었고, 결국 장희재 주선 하에 장옥정과 혼인했다. 무관이라는 공식 신분이 생기자 집도 새로 얻었다.
- 이리나
보리스의 부인. 보리스와의 사이에서 아이 셋을 낳는다. 적당히 미주에서 처를 구한 다섯 친구들과 달리 이형준이 직접 나름 괜찮은 집안 처자를 구해와서 학식도 나름 있어서 상희의 말동무 겸 간호사 노릇을 했다. 다른 카자크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본명은 따로 있으나 남편인 보리스와 동료들은 발음이 힘들어 이리나라는 러시아식 애칭으로 부른다. 무인지변 중 성친왕저를 습격한 반군이 쏜 유탄에 맞아 사망한다. 보리스의 아이들은 다른 카자크 부인이 돌봐준다.
- 장옥정 [62]
1675년생. 원 역사보다 16년 늦게 서반아계 혼혈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오빠 장희재의 부인인 올케의 젖을 먹고 자랐다. 외고조부가 2부의 스페인 용병대 기록관 세바스티안 데 라 로카로, 서반아계 혼혈이라 그런지 도성 전체를 술렁이게 할 정도의 엄청난 미녀라고 한다. 군자 행세를 하던 예왕이 정치적 고려 없이 오로지 미모에 반해 첩으로 들이는데 오히려 이렇게 미인에게 반하는 모습 때문에 인간미 있어 보인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예왕의 야심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술김에 하는 농담으로 알았으나 진심인 것을 알게 된 후 귀비 자리를 넘어 황후 자리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난이 일어나자 장희재에게 난에 가담하면 장씨 일가가 제일가가 될 수 있다며 설득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장희재가 예왕에게 가담하지 않고 성친왕 편에 붙어서 난이 실패할 것이 확실시되자 괜히 황후라는 되도않을 꿈을 꿨다며 죽거나 노비가 될 것에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오빠가 공을 세운 덕에 살아남았고, 딸도 데려올 수 있었다.[63] 장희재는 무인지변 중 아내를 잃은 보리스와 그녀를 재혼시킬 것을 청하고 고민 끝에 보리스가 승낙하여 재혼한다.[64]
- 이고르(이영선), 바실리(배실이), 안드레이(안대호), 탈라스(단나수), 이반(이반영)[65]
보리스의 카자크 친구들, 부와 명예도 죽음도 함께하기로 했다 하니 단순한 친구 이상의 의형제에 가까운 사이로 보인다. 다들 카렐린이나 효도르 같은 인상의 180cm가 넘는 거구들이다. 보리스를 따라가기로 해 다같이 재석의 근위병이 된다. 보리스의 아버지인 이형준을 역시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보리스나 이들이나 사냥이나 전투할 땐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는데 정작 일상생활에선 평범한 대화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울리고 실내에서도 쿵쾅대며 걷는 마초 중의 상마초. 손님 접대할 때 무희 대신 흥겨운 코사크 답무를 추는 모양이다. 이형준에게 교육을 받았지만 이들도 역시 루스어조차 못 읽고 평생 공부와 담쌓고 산 사람들이라 결국 삼강오륜과 국문으로 자기 이름 쓰는 법 정도만 익혔다. 미주 아파치족 토벌을 위해 본국에서 온 오도리 기병들과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 주먹다짐, 술 대결에서 이겨 오도리들에게 형님 대접을 받는다. 파이우트족을 상대할 때 아녀자와 어린애들을 죽인 것이 아니냐는 성친왕의 의심에 투르크인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재석이를 벙찌게 만들었다. 대한에 귀국한 후 계속 재석과 함께 지낸다. 무인지변 때 이고르는 보리스와 함께 총융청으로 구원을 청하러 가고 나머지 4명은 올렝카와 재석의 세 아이들을 각각 하나씩 맡아 탈출시킨다. 무인지변 이후 이고르는 2등 공신, 나머지 넷은 3등 공신이 되고 전원 내금위에 들어와 재석의 경호를 계속한다. 보리스가 장옥정과 재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자 누군가는 내 여편네가 그 총알을 맞았어야 했는데라고 하고, 뭘 망설이냐며 수락하라고 만담을 연출한다. 범인의 처는 정황상 엘레나라는 러시아식 애칭을 가진듯. 공신이 된 후로 이고르는 참령, 나머지는 정위가 되었는데 재석은 장희재의 건의대로 벼슬이 좀 올라가면 2명씩 외금위, 겸사복에 배치해서 금군을 더 확고하게 휘어잡을 계획이다. 무관이라는 공식 신분이 생기자 모두 집을 얻어서 따로 살게 되었는데, 다른 집이래봤자 바로 옆집이라 예전 성친왕저에 함께 살 때와 별 차이는 없다고.
- 카자크 6형제의 자식들
카자크 6형제는 미주에서 각자 결혼을 해서 자식을 둔다. 신분 차이에도 어려서부터 이은과 함께 자랐기에 친한 친구가 되었고 장성하면 남자는 이은의 경호를 맡고 여자 중 일부는 이은이나 이준의 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중 마리아와 세묜이 이은과 가장 친한 듯. 무인지변 때에도 모두 살아남는다. 어려서 죽은 아이들, 젖먹이들을 빼고도 15명이나 되며, 이 중 안드레이의 왈가닥 딸 올가와 미하일이 친해서 장난삼아 혼담이 오가는 등 카자크 자식들 끼리도 혼인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은이 황태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친하긴 하나, 동궁에 들어가고 같이 눈싸움을 할 때 이고르의 맏아들이 이은의 얼굴에 눈뭉치를 명중시켜서 논란이 되는 등 신분 차이로 인해 소원해질 가능성이 생겼다.
- 야니냐, 헬렌
올렝카가 폴수국에서부터 데려온 시녀들. 올렝카가 순비로 봉해지자 본방나인으로 함께 입궁한다.
- 앙투안
재석이 내달국에서 고용한 프랑스인 요리사. 두부를 잘 만들어서 박종선을 대신해 재석의 식사를 책임진다. 미주를 거쳐 본국까지 따라왔으며 사치와 미식을 많이 즐겨본 예왕조차 거금을 주고 영입하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요리 솜씨가 뛰어나다.
- 알렉상드르
재석이 고용한 조선공. 재석을 따라 대한이 아닌 미주로 가게 되자 실망하는데 증기선의 소문을 듣고 그 비밀을 캐내려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소 경영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성친왕이 미주에 건설한 조선소의 경영을 맡는다. 배에 미친 덕후로, 프랑스에서도 그 때문에 결혼생활에 실패했고, 미주에서도 결혼은 했지만 재석이 귀국 후에 3개월 동안 집에 안 들어갔더니 아내가 도망가버렸다. 조선에 온 후에는 프랑스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하며, 재석은 아산에 새로 건설할 조선소의 소장으로 임명한다.
- 헨드릭 피터슨
주인공이 네덜란드에서 고용한 회계사. 대미주에서 주인공이 시작한 조선소, 해운업, 광산업의 회계를 맡는다. 재석은 데리고 오고 싶었으나 이들을 대체할 인물이 없고, 알렉상드르와 달리 돈만 주면 계속 고용할 수 있는지라 계속 일하게 한다.
- 레이프 에릭손, 안데르스 다니엘손
재석이 수배국에서 고용한 광산기술자들. 재석의 명으로 광산을 탐색하여 미억대령 너머의 태호[66] 근처에서 은광[67] 을 발견하고, 이후 광산 경영을 맡는다. 피터슨과 같은 이유로 계속 미주에 남기기로 했다.
- 성시균
건복제가 성친왕에게 미주 이동을 명령하러 보낸 칙사. 예부 소속 정4품 관리. 1646년생. 독실한 천주교도로 대유주에 오는 김에 로마를 들를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성친왕이 잉글국에 있어 실망한다. 원칙을 중시하는 성격이라 재석이 로마로 잠시 다녀오라고 허락했음에도 공무 중 다른 일을 할 수 없다며 거절한다. 성친왕의 개과천선한 모습에 크게 호감을 가져 귀국 후에 형황에게도 좋게 보고하고 조보에도 성친왕이 유럽에서 쌓은 업적들에 대해 기고문을 써주는 등 주인공의 편이 되어 준다. 태후가 간택한 새 성친왕비(상희)를 모시는 칙사가 되어 대미주를 찾는다. 본인도 성친왕이 받은 동변관리사를 보좌하고 감시하는 동변감리사 직위를 받아 성친왕 곁에 있게 된다.
숙조의 최측근으로서 성친왕이 진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언해준 은인으로, 재석 역시 그 호의를 이용하지 않고 그의 직책을 존중하며, 월권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권한 행사는 일일이 묻고 일을 진행할 정도로 처신을 잘 했다. 그렇지만 대기근 와중 본국을 다녀오고 나서는 왠지 모르게 더 깐깐하게 월권 여부를 따지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있어 성친왕에게 귀국령이 떨어지고 후임 동변관리사가 되었다.[68] 재석이 태황이 된 후 이종덕을 귀국시키면서 후임 미주대총관이 되었으며, 1년 후 재석이 지선성에 두고 간 짐을 다 갖고 귀국했다.재석은 일단 중추원 자리를 주고 유급휴가라고 할 수 있는 사가독서를 명했고, 비선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숙조의 최측근으로서 성친왕이 진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증언해준 은인으로, 재석 역시 그 호의를 이용하지 않고 그의 직책을 존중하며, 월권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권한 행사는 일일이 묻고 일을 진행할 정도로 처신을 잘 했다. 그렇지만 대기근 와중 본국을 다녀오고 나서는 왠지 모르게 더 깐깐하게 월권 여부를 따지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있어 성친왕에게 귀국령이 떨어지고 후임 동변관리사가 되었다.[68] 재석이 태황이 된 후 이종덕을 귀국시키면서 후임 미주대총관이 되었으며, 1년 후 재석이 지선성에 두고 간 짐을 다 갖고 귀국했다.재석은 일단 중추원 자리를 주고 유급휴가라고 할 수 있는 사가독서를 명했고, 비선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동현 호의 선장 장 바르가 사직하면서 추천한 후임 선장. 수군 정위 출신 사관으로 능력이 출중하여, 자유롭게 바다를 누비기 위해 수군을 전역하고 동현 호에 타게 되었다. 집안 대대로 수군에 복무했으며 고향은 주산군도이다.
- 유봉석
재석의 2번째 배인 상춘 호의 선장. 안용복과 달리 상인 출신이다.
- 권훤(權萱)
예왕이 성친왕에게 역모 누명을 씌우기 위해 성친왕의 부하로 보낸 인물. 1671년생. 안동 권씨 집안 장자로 권익경의 현손이며[70] 부인 이씨는 이덕형과 롤리타의 아들이었던 이여수의 증손녀이다. 이렇게 좋은 집안 사람이 미주로 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하는데 본국에는 전란이 없어서 군공을 세우기 어려우니 싸움이 끊이질 않는 미주로 왔다며 성친왕의 전령으로 채용된다. 재석은 이름이 견훤과 비슷해서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뒷조사를 해봤지만 예왕과 연관이 없어보여 안심한다. 실제로도 본인이 예왕에게 직접 포섭된 것은 아니고, 군공에 목말라 있는 성격을 간파한 예왕과 최신원이 권훤이 미주에서 뭔가 사고를 크게 치고 그 책임이 성친왕에게 씌워지는 것을 기대하고 제3자를 통해 부추겨서 보낸 것으로 보인다. 아파치 원정에서 척후장으로 활약한다. 군공에 목말라 있어 재석에게 미주 대평원을 침공하자고 조르지만 재석에게 거절당한다. 재석이 귀국할때 얘를 놔두고 가면 정말 미주에서 사고를 칠까봐 강권해서 데리고 온다.[71] 그나마 미주에서 세운 공적이 인정되어 종7품 참위 벼슬을 받고 한양대화재 중 용호청 동대문 수문장으로 근무하다 적절한 판단으로 동대문을 개방하여 인명피해를 줄이는 공을 세운다.[72] 무인지변이 일어났을 때는 재석을 훈련도감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후위를 자처하는 등 완전한 재석의 사람이 되었다. 태후가 상황을 수습하러 보낸 선전관과 함께 조정 중신들 앞에서 난의 전모를 밝히는데, 이때 김세룡의 장남 김희권의 제보를 공공연하게 언급하는 센스를 보이기도 했다. 그 공로로 평난 2등공신이 되고,[73] 벼슬이 5단계나 올라서 부령이 된데다가 강무관에서 교육도 받는 등 희망한대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후 재석도 권훤이 미주에 간게 예왕의 음모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아무 조치가 없었던 것을 보면 독자들의 추측대로 예왕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었던 것으로 보닌다. 디에고의 결혼식 때 장인어른이 신부 측 아버지 역할을 맡으면서 친분을 쌓게 된다. 이후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에 참전하며, 스페인군의 야간 기습을 간파하고 잘 대비하여 격퇴하는 공을 또 세우게 된다.
군공에 목말라서 다소 성급한 성격이긴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용기를 보여줬기 때문에, 향후에도 재석의 측근으로 계속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군공에 목말라서 다소 성급한 성격이긴 하지만 뛰어난 능력과 용기를 보여줬기 때문에, 향후에도 재석의 측근으로 계속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 이마리
이덕형과 롤리타의 현손녀. 권훤의 아내로 롤리타를 꼭 빼닮은 미녀이다. 본인과 상의도 없이 미주로 간 권훤을 잡으러 미주로 쫓아오는걸 보면 롤리타의 과감함을 닮은 것 같다. 상희와는 본국에서부터 언니동생 할 정도로 친한 사이다. 천주교 신자로 남편이 천주교에 입교하길 바란다. 디에고의 결혼식을 전폭적으로 도왔고, 이후 일가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 양소목(작은 나무)
재석이 고용한 이은 전담 시종. 미주야인 혼혈인으로 이은에게 대자연을 숭배하는 미주야인의 종교관을 가르치고 수영도 가르친다. 이은이 바다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구하는 공을 세운다. 이은이 황태자가 된 뒤에도 익위사 관원으로 채용해서 곁에서 보필하게 한다. 그러나 내시는 아니라서 하루종일 함께할 수는 없다.
- 박수원
재석이 미주에 있는 동안 올렝카를 소재로 한 음담패설이 돌고 있다는 말을 듣고 범인들에게 인실좆을 시전해주기 위해 정호찬을 통해 고용한 대송인. 정호찬과 10살 차이나는 친한 형으로, 수년간의 소송 끝에 상당한 배상금을 받아냄과 함께 범인들을 일가와 함께 시베리아 추방형에 처하게 했으며, 재석은 박수원의 실력이 쓸만한 것 같으니 보상으로 받아낸 배상금을 박수원에게 다 주고 계속 잘 활용하려 한다. 재석이 귀국한 후 월 은화 100냥에 계약을 맺고 재석의 전속 대송인이 된다.[74] 상희는 재석과 둘이 있을때는 현대처럼 '박변'이라고 부른다. 재석이 태황으로 즉위한 후에도 여전히 전속 대송인이며, 디에고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다.
- 조경신
재석이 본국 귀국 후 고용한 서기. 서얼 출신. 무인지변에서 성친왕 일가와 함께 탈출에 성공했는데, 서생임에도 의외로 활솜씨가 좋은 것으로 묘사된다. 디에고의 집을 관리하고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다.
- 혜련
한양대화재 때 재석이 진화작업을 하다가 폐허에서 구한 여자 갓난아기. 부모가 아이를 안고 사망하면서 열기를 막아서 생존할 수 있었고, 재석은 건복제와 상희의 허락을 구해서 키우기로 한다. 신분 차이 때문에 공식 입양을 한 것은 아니다. 원래는 수양딸처럼 키우다가 좋은데 시집 보내거나 의원이 되고 싶어하면 공부도 시켜줄 생각이었는데, 재석이 태황이 되어버려서 결국 4세에 애기나인 신분이 된다. 재석은 혜련의 인생을 자기가 제약해버린 셈이 되어서, 그리고 루시아가 여동생처럼 아꼈는데 이제 신분의 선이 그어져서 안타까워하고 있다. 4살 밖에 안 됐지만 재석이 혹시나 이은과 이준 형제가 혜련을 두고 다투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예쁘다.
2.4. 예왕파
- 이환( 李瓛)
열조의 서자, 건복제의 이복동생이자 이현의 이복형. 1662년생, 열조가 총애하던 중국계 후궁 혜비 진씨 소생. 3부 전반부의 메인 빌런. 생모를 닮아 굉장한 미남이며, 물려받은 재산도 많아 형제들 중 가장 부유하고 학식 또한 뛰어나다. 대외적으로는 구휼을 많이 하고 음주도 안 하는 등 군자의 표상이라 불릴 정도로 철저하게 모범적인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탐하는 야심가로, 병약한 건복제와 그 황자들이 죽으면 성친왕을 제치고 제위를 차지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십여년이 흘러 나이가 많아지자 직접 제위를 차지하는 대신 아들 경평공을 건복제의 양자로 입적시켜 대원왕이 되기로 계획을 바꾸지만 권세를 탐한다는 점은 똑같다. 또한 모범적인 겉모습과 다르게 집안에서는 음주와 사치를 즐기며[75] 폭력적인 면모도 보이는[76] 이중적인 성격이다.
경쟁자인 성친왕을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인 애송이로 봤지만 만약의 경우 제거하기 위해 김종건과 이진원을 암살자로 심어둔다. 본래의 성친왕이었다면 암살까지 갈 것도 없이 제위는 예왕에게 넘어왔겠지만, 성친왕에 재석이 빙의한 뒤 성친왕의 행실이 좋아지고 대유주와 미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가자 곤란하게 된다. 이후 성친왕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도 시도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야심가 권훤을 성친왕 아래로 보내는 등 여러 수단을 썼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성친왕의 귀국을 막지 못한다. 후계 경쟁에서 정통성과 공적에서 밀려 패색이 짙어졌고[77] ,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과 대화해본 뒤 성친왕이 실제로 변한 것 같으니 제위를 포기하고 성친왕과 화해할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한양대화재가 일어나 이를 계기로 성친왕이 사실상 황태제로 가책봉되고 자신이 심어뒀다가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암살자 김종건이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성친왕이 즉위하면 이를 빌미로 자신을 숙청할 것이라 생각하여 조급하게 난을 일으킨다. 한양대화재의 책임을 져야하는 일부 지휘관과 관료들을 부추겨 병력을 만여명 정도 모으기는 했으나 부족한 지휘 경험과 급조된 반군이라는 한계가 금방 드러났고, 결국 반란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다. 마포나루의 증기선을 타고 목숨이라도 건져 대유주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한강에 투신한다.[78] 하지만 자살에 실패하고 붙잡혀 진노한 형황에게 친국을 당한다. 동지 전날인 양력 12월 20일, 재석은 그의 자식들은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마지막 팥죽 한 그릇을 대접하고 예왕은 눈물을 흘리며[79] 팥죽을 먹은 뒤 사사된다. 시신은 야산에 아무렇게나 묻혔고 재산은 몰수되어 한양대화재 복구비로 사용되며, 예왕저는 집을 잃은 카자크 6형제 등 재석의 가솔들에게 임시로 주어졌고, 이후 재석의 둘째 아들 준이의 사저가 될 예정이다.
경쟁자인 성친왕을 자신보다 한 수 아래인 애송이로 봤지만 만약의 경우 제거하기 위해 김종건과 이진원을 암살자로 심어둔다. 본래의 성친왕이었다면 암살까지 갈 것도 없이 제위는 예왕에게 넘어왔겠지만, 성친왕에 재석이 빙의한 뒤 성친왕의 행실이 좋아지고 대유주와 미주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가자 곤란하게 된다. 이후 성친왕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도 시도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야심가 권훤을 성친왕 아래로 보내는 등 여러 수단을 썼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 성친왕의 귀국을 막지 못한다. 후계 경쟁에서 정통성과 공적에서 밀려 패색이 짙어졌고[77] , 재석이 빙의한 성친왕과 대화해본 뒤 성친왕이 실제로 변한 것 같으니 제위를 포기하고 성친왕과 화해할지를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던 중 한양대화재가 일어나 이를 계기로 성친왕이 사실상 황태제로 가책봉되고 자신이 심어뒀다가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암살자 김종건이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성친왕이 즉위하면 이를 빌미로 자신을 숙청할 것이라 생각하여 조급하게 난을 일으킨다. 한양대화재의 책임을 져야하는 일부 지휘관과 관료들을 부추겨 병력을 만여명 정도 모으기는 했으나 부족한 지휘 경험과 급조된 반군이라는 한계가 금방 드러났고, 결국 반란은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다. 마포나루의 증기선을 타고 목숨이라도 건져 대유주로 탈출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한강에 투신한다.[78] 하지만 자살에 실패하고 붙잡혀 진노한 형황에게 친국을 당한다. 동지 전날인 양력 12월 20일, 재석은 그의 자식들은 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며 마지막 팥죽 한 그릇을 대접하고 예왕은 눈물을 흘리며[79] 팥죽을 먹은 뒤 사사된다. 시신은 야산에 아무렇게나 묻혔고 재산은 몰수되어 한양대화재 복구비로 사용되며, 예왕저는 집을 잃은 카자크 6형제 등 재석의 가솔들에게 임시로 주어졌고, 이후 재석의 둘째 아들 준이의 사저가 될 예정이다.
- 김씨
김세룡의 딸로 예왕의 정실부인. 1665년생. 남편의 야심을 잘 알고 아비와 함께 동조하며, 궁궐에 자주 들어가 태후, 황후에게 지극정성으로 대하면서 남편 예왕의 입지를 굳히는 공작을 했다. 황후 자리도 욕심이 나고 안동 김씨를[80] 대한 제일의 가문으로 만들겠다는 것을 보면 예왕이 보위에 오를 경우 세도 정치를 실현시킬 듯 하다. 최종보스치고는 허당스럽고 싸구려 악당같은 면모를 많이 보인 예왕보다 더 침착하고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성과를 낸 것은 없고,[81] 결국 예왕과 함께 체포된다. 김세룡과 김희권의 전향 덕에 목숨은 건지고 폐서인되어 친정에 연금된다.
- 이종
예왕의 장남, 1682년생. 예왕이 거금을 들여서 비싼 강사들에게 교육받았기에 종친이 아니었으면 대과에도 붙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나다. 무인지변이 진압된 후 결혼한지 110일 밖에 안 된 아내와 이혼 당하고,[82] 하와이로 보내져 진주만에서 말단 군졸로 평생 복무하게 된다. 건복제의 자비로 목숨은 건졌으나 가문을 잇기 위해 혼인을 할 자격은 없다.
- 이연수
예왕의 장녀, 1686년생. 부모를 닮아 미모가 뛰어나다. 무인지변 이후 마포 성당으로 보내져 아라미츠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공식적으로 출가하여 수녀가 된 것은 아니다. 기도와 성서 읽기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나이가 차면 아라미츠가 대유주로 보낼 계획이다. 마포 성당을 드나들던 6살 연하의 알렉세이가 이연수를 보고 첫 눈에 반해서 재석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재석은 이연수를 알렉세이와 정략결혼시켜서 루스국으로 보내는 대신 어머니 김씨의 처우를 약간 개선하고, 이종과 이청에게 혼인하여 가문을 이을 수 있도록 허가해줄 것을 고려한다.[83]
- 이청
예왕의 차남, 1689년생. 형과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 이연우
예왕의 차녀, 1691년생. 부모를 닮아 미모가 뛰어나다. 무인지변 이후 마포 성당으로 보내져 아라미츠와 함께 지내게 되는데 공식적으로 출가하여 수녀가 된 것은 아니다. 기도와 성서 읽기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나이가 차면 아라미츠가 대유주로 보낼 계획이다.
- 혜비 진씨
열조가 총애하던 후궁. 1645년생. 2부에서 조선에 정착한 명나라 장수 유정이 조선에서 재혼하여 얻은 딸의 후손으로, 열조가 대명묘에 들렀을 때 그 미모가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예왕 이환을 낳았다. 40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미인이고, 1698년에도 4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동안. 사적인 대화는 전부 중국어(북경방언)로 하고 아직도 명의 멸망을 슬퍼하는 등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 매일 원각사에 가는 독실한 불교도인 듯. 정치적인 욕심은 전혀 없어 아들의 야심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 그러나 예왕이 뜬금없이 난을 일으킨 뒤 실패하여 역적이 되자 충격을 받는다.[84] 마포나루에서 아들을 잡으려는 포도청 군관의 앞을 가로막아서 예왕은 한강에 투신했지만 결국 건져져서 다 끌려갔다. 난에 대해서는 몰랐기에 처벌은 받지 않았고, 세상에 절망해서 대명동에 있는 대명사란 절로 들어갔고, 천 냥 수입의 전답 하나만 남겨졌다.
- 최신원
예왕 이환의 문객. 예왕의 측근이자 모사. 권신이 되고 싶어서 예왕의 보위 찬탈 계획을 부추겨온 인물. 김종건과 이진원을 암살자로 포섭하는 등 예왕의 뒷공작들을 직접적으로 전담한다. 성친왕이 귀국한 후 한양대화재를 계기로 사실상 태제가 되는 것이 확정되고 김종건의 생존 사실까지 알게 되자 예왕을 부추겨 무인지변을 일으키도록 한다. 하지만 이후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난이 사실상 실패하자 예왕과 함께 마포나루로 탈출하던 중 붙잡힌다. 난을 주동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지위도 낮기 때문에 심영준, 박정호 등은 최신원에게 모든 죄를 떠넘겼고 결국 다른 역도들이 참수형을 당한 것과 달리 거열형으로 사망한다.[85]
- 김희준
김세룡의 차남. 족친위 제3연대장으로 무인지변에서 병력 동원을 맡게 되었다. 족친위 병력을 장악해 창덕궁을 습격, 오군대총관 한지권을 살해하고 창덕궁을 봉쇄하지만 본대의 패배 소식을 듣고 본대와 합류한다. 아버지와 형이 역모를 고변한 줄은 전혀 모르고 이제 집안이 다 멸문되게 생겼으니 잃을게 없다고 생각하여, 족친위 기병들을 이끌고 성친왕을 죽이러 나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태황의 칙명까지 떨어지자 남대문으로 도망치는 군사들을 막으려다가 군사들에게 짓밟혀 압사한다. 사후 부관참시 당했다. 여담이지만 예왕은 김희준이 죽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숙조는 추국할 때 그가 살아서 진술한 것처럼 속여서 예왕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 김성권
본국에서 온 미주 총관부 형부 부장. 노골적으로 예왕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직계황족인 성친왕을 깔아뭉개는 망언을 하고 성친왕과 대놓고 싸우자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성친왕이 문제를 삼았으면 파직은 물론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심각한 사안이었지만 당사자인 재석 본인이 문제삼을 생각이 없었고, 공론화할 경우 미주대총관에게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인지 총관부에서는 2개월 감봉이란 가벼운 징계를 내렸다. 무인지변 후 재석에게 보복성 숙청을 당할까봐 두려웠는지 사직을 청했으나 반려당하고 재석은 최소 5년은 임지에서 일하게 할 생각이다.
- 심영준
한양대화재 당시 한성판윤. 성친왕이 한양대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호에 큰 공을 세운 것은 숨기고 한성부 판관 김정균을 폭행한 것만 부풀려 태황에게 모함하나 태황이 성친왕을 불러 자초지종을 듣고 성친왕을 칭찬하는 바람에 닭쫒던 개 신세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성 내에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차라리 고자질을 안 한 것만 못하게 되었다. 화재의 책임으로 처벌받게 될것이 확실하자 휘하 한성부 인원들을 동원해 무인지변에 가담한다. 공만 탐하고 지휘관에 협조하지 않아 패배에 일조했고 다른 역도 수뇌부들과 함께 체포된다. 최신원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지만 결국 참수형에 처해진다.
- 유진승
한양대화재 당시 대사헌, 성친왕의 대리청정에 반대 의견을 내나 건복제에게 핀잔만 듣는다.
- 서이혁
수어청 총관, 한양대화재 때 남대문 개방을 안 해서 많은 사망자를 낸 책임으로 백의종군하게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무인지변에 가담했다. 고지식하고 견실한 장수로, 지리멸렬 그 자체인 반군 수뇌부 중 유일하게 전술적 식견이 있었고[86] 현실적인 의견을 내지만, 예왕 본인과 다른 수뇌부들이 모두 군무에 문외한이기에 그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다.[87] 거사가 사실상 실패한 후 부하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투항을 주장하며 끝까지 싸움을 주장하던 김희권과 대립한다. 결국 역도 수뇌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남탓을 하며 끝까지 추태를 부린 심영준, 박정호 등과 달리 담담하게 죄를 인정했고 참수형으로 처형된다.
- 박정호
금화도감 제조. 한양대화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처벌을 받기 싫어 휘하의 금화군 인원들을 동원해 무인지변에 가담했다. 공을 탐하고 지휘관에게 협조하지 않아 패배에 일조한다. 패주 후 책임소재를 놓고 심영준과 다투는 추태를 보인다. 반란 막바지에 전략 견해 차이로 다른 지도부와 다투다 그대로 관군에 생포된다. 친국에서 심영준과 똑같이 겁을 잔뜩 먹고 태황에게 목숨만 구걸한다.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다.
- 차병헌
수어청 2대대장으로서, 성친왕저 방화, 금군 살해, 민간인 살해의 책임을 지고 다른 반란군 연대장, 대대장들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것과 달리 거열형[88] 을 당하게 되었다. 2대대 병사들도 연대책임으로 다른 반란군 하급장교들은 인도 파견, 병사들은 불명예제대 및 화재복구 노역형만 받은 것과 달리 장 100대를 맞고 북변에서 3년간 노역에 처하였고, 인도 파병 자원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2.5. 조정
황실과 다르게 조정에는 실존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는 편이다. 그러나 대한이 원역사의 조선과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든 만큼, 실존 인물들 다수가 운명이 뒤바뀌었다.
2.5.1. 삼승상
- 김세룡★[89]
예왕의 장인. 안동 김씨 가문으로 김자점의 손자. 이부대신 → 우승상 → 내각승상. 장남 김희권은 형부 국장, 차남은 족친위 대대장이다. 예왕의 계획을 잘 알고 전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며 조정에서 예왕의 인맥을 넓히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원래는 예왕의 의도대로 미주에서 성친왕에게 더 큰 권한을 주어서 사고를 치게 하려고 하나 송시열의 반대에 부딪혀서 무산된다. 성친왕이 살아서 귀국한 다음에는 일단 성친왕이 태제가 되는 것부터 막은 뒤 성친왕을 미주왕에 봉해 미주로 아예 쫓아내버리고[90] 태자가 된 이은은 적절하게 처리한 다음 예왕의 아들을 옹립하기로 계획을 바꾸고 성친왕의 아들이 보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몰아간다. 그러나 성친왕이 한양대화재를 계기로 대리청정을 맡으며 입지를 더 확실히 굳히게 되자, 재석도 의아해할 정도로 성친왕의 국정 능력을 극찬하고, 한편으로는 예왕에게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한다.[91] 그러나 예왕이 조급해져서 성공 가능성이 낮은 난을 일으킨 것을 뒤늦게 알고 예왕을 손절하고 성친왕에게 장남 김희권을 보내 고변했다. 재석은 양다리를 걸친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김세룡은 난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서 빨리 고변하려 뛰어가다 계단에서 굴러서 부상을 입었으며, 다친 몸으로도 내관에게 업혀서 기다시피 태후전을 찾아 직접 난을 고변할 정도로 진심으로 난을 막고자 했다. 난이 끝난 후에는 조정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죄로 전원 사직을 청하나 태황이 난의 수습 이후로 미룬다. 고변한 공로로 평난 1등공신에 책봉되고, 숙조가 붕어할 때 고명대신으로 유언까지 들었다. 사실 예왕은 김세룡이 음모에 가담했다고 진술했으나, 금위사 관원들을 포섭해둬서 증거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했을 뿐, 이후에도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기 때문에 재석이 태황이 된 후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후세에는 국가를 위해 혈육을 버린 멸사봉공의 대표적 인물 또는 줄타기의 달인이란 엇갈린 평가를 받을 듯.
- 김희권
김세룡의 장남. 형부 협판. 예왕파로 활동했으나 예왕, 최신원, 김희준 등이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에야 알게 된 아버지 김세룡과 함께 전향해서 재석에게 역모가 있음을 알린다. 재석이 적에게 포위된 성친왕저를 탈출할때 훈련도감에 데리고 가 훈련대장 등 증인들 앞에서 증언을 기록하여 권훤을 통해 태후와 조정 대신들에게 보고한다. 평난 3등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아버지와 함께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했다.
- 강기석
호부대신 → 좌승상. 작위는 귀주백 . 건복제의 총신이자 성친왕의 장인. 자신의 딸을 생과부가 될 것을 알면서도 성친왕에게 시집보냈지만 딸이 마음고생 끝에 사망하자 슬퍼한다. 이후 제2차 빈 공방전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고, 성친왕에 대한 처우 문제가 나오고 현왕이 이를 치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적으로는 사위이지만 명백한 사전죄라며 과거 이기빈을 백의종군에 처한 예를 들어 반박했다. 사실 이 때 딸인 성친왕비가 막 죽은 직후인데다, 그 사인이 성친왕의 전쟁 참전 소식에 충격받고 중병에 걸린 것, 즉 원인제공자가 성친왕인지라 성친왕을 좋게 볼 리도 만무했다. 이후에도 성친왕과 관련해서 조정에 분쟁이 벌어질 때 대체로는 그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서거나, 이후 장인인 대제학 민성윤과 함께 중립을 지킨다.
이후 병을 이후로 현직에서 물러났으나, 태황이 중추원 판사로 봉해서 여전히 국정을 의논한다. 세월이 지나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도 희석되어서인지 성친왕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황태자 이원 사망 후의 후계 구도를 논할 때에는 예왕의 편을 든다.[92]
좌승상으로 복귀한 다음에는 아무리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이 희석되어도 성친왕이 태황이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는지, 예왕파의 의견을 따르며 예왕파와도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인지변이 일어나서 반란군이 창덕궁을 포위할 때 삼정승 중 유일하게 궐내에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태황이 예왕 토벌 명령을 내리려다가 쓰러지자, '성친왕이 태황이 되면 폭군이 될게 뻔한데 차라리 잘됐다며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일단 궁을 봉쇄하고 아침까지 상황을 기다리자는 방향으로 몰아갔다가 아침이 되어 성친왕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태후가 상황을 수습하러 나오자 사라졌다. 이후 대전 외진 곳에서 비상을 먹고 자결한 것이 발견되었다. 따로 남긴 유언이나 유서는 없지만 자결한 시점이 조정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직후로 보인다는 점에서 최소한 예왕파의 행동을 막으려는 의도는 확실해 보인다.[93] 태황 역시 이렇게 생각했는지 궁에서 자살한 불경죄만 물어서 귀주후를 박탈하는 것으로 지방관으로 있는 두 아들들을 포함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기로 했으며, 재석도 딸 강씨를 황후로 추존한다.
이후 병을 이후로 현직에서 물러났으나, 태황이 중추원 판사로 봉해서 여전히 국정을 의논한다. 세월이 지나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도 희석되어서인지 성친왕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황태자 이원 사망 후의 후계 구도를 논할 때에는 예왕의 편을 든다.[92]
좌승상으로 복귀한 다음에는 아무리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이 희석되어도 성친왕이 태황이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는지, 예왕파의 의견을 따르며 예왕파와도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인지변이 일어나서 반란군이 창덕궁을 포위할 때 삼정승 중 유일하게 궐내에 있었는데, 이에 분노한 태황이 예왕 토벌 명령을 내리려다가 쓰러지자, '성친왕이 태황이 되면 폭군이 될게 뻔한데 차라리 잘됐다며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일단 궁을 봉쇄하고 아침까지 상황을 기다리자는 방향으로 몰아갔다가 아침이 되어 성친왕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태후가 상황을 수습하러 나오자 사라졌다. 이후 대전 외진 곳에서 비상을 먹고 자결한 것이 발견되었다. 따로 남긴 유언이나 유서는 없지만 자결한 시점이 조정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직후로 보인다는 점에서 최소한 예왕파의 행동을 막으려는 의도는 확실해 보인다.[93] 태황 역시 이렇게 생각했는지 궁에서 자살한 불경죄만 물어서 귀주후를 박탈하는 것으로 지방관으로 있는 두 아들들을 포함 어떠한 처벌도 하지 않기로 했으며, 재석도 딸 강씨를 황후로 추존한다.
- 조복형
3부 초기 내각승상. 선제인 열조 때부터 조정 고위직에 있었던 노신이다.
- 김주원
조복형의 후임 내각승상. 하와이 복속 문제에서 김세룡의 편을 든다.
- 민성윤
대제학 → 우승상 → 좌승상. 1635년생. 상희가 빙의한 성친왕비 민씨의 부친으로, 영창대군의 외손자. 작위는 양화백(楊花伯) → 양화후. 성친왕의 스승 이형준과는 과거시험, 성균관, 집현전까지 함께 한 절친으로 현재도 자주 서신을 왕래하고 있다. 재석이가 하와이에서 보내온 카우이 일행에게 책임지고 조선인으로서의 예법을 가르쳤다. 사위가 벌인 사업이기도 하고, 그게 유자로서 마땅히 져야 할 짐이라는 제국주의 시대스러운 사고를 드러내기도 했다.
송시열의 제자였음이 드러났고, 그가 사망한 후 관직을 잠시 내려놓았다. 태자가 병사한 후 태황의 건강도 악화한 상황이 되자, 아들들과 논의 끝에 사위를 밀어준다는 오해를 사더라도 스승이 그랬듯이, 동복동생인 성친왕이 보위를 이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행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예왕파의 세력을 알고 반발을 예측함에도 선비의 의기를 보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예왕은 보위에 부적격하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태황이 자신의 후계 문제를 더이상 논하지 못하게 한 회의에서 태황이 성친왕을 태제로 봉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제대로 읽어냈도, 결국 성친왕은 태제가 되었다. 난이 일어났을 때 마침 집에 가 있었는데, 예왕에게 민성윤 일가를 몰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장희재가 오히려 성친왕 편을 들면서 호위병력을 보내줘 무사했고, 태후가 보낸 선전관, 권훤과 함께 조정에 복귀했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당분간 반려되고 평란 1등공신에 책봉[94] 된다. 성친왕이 태황으로 즉위하면서 국구(國舅)가 되었고, 무인지변 후 내각에서 유일하게 유임되고 좌승상에 기용된다. 재석은 외척과 총신에 의존하는 정치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짜피 나이들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송시열의 제자였음이 드러났고, 그가 사망한 후 관직을 잠시 내려놓았다. 태자가 병사한 후 태황의 건강도 악화한 상황이 되자, 아들들과 논의 끝에 사위를 밀어준다는 오해를 사더라도 스승이 그랬듯이, 동복동생인 성친왕이 보위를 이어야 한다는 원칙대로 행해야 한다고 결정한다. 예왕파의 세력을 알고 반발을 예측함에도 선비의 의기를 보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을 보면, 예왕은 보위에 부적격하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태황이 자신의 후계 문제를 더이상 논하지 못하게 한 회의에서 태황이 성친왕을 태제로 봉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제대로 읽어냈도, 결국 성친왕은 태제가 되었다. 난이 일어났을 때 마침 집에 가 있었는데, 예왕에게 민성윤 일가를 몰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장희재가 오히려 성친왕 편을 들면서 호위병력을 보내줘 무사했고, 태후가 보낸 선전관, 권훤과 함께 조정에 복귀했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당분간 반려되고 평란 1등공신에 책봉[94] 된다. 성친왕이 태황으로 즉위하면서 국구(國舅)가 되었고, 무인지변 후 내각에서 유일하게 유임되고 좌승상에 기용된다. 재석은 외척과 총신에 의존하는 정치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짜피 나이들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 민지훈
민성윤의 장남으로 상희의 첫째 오빠. 형부 참의. 건복제 사후 예왕이나 예왕의 아들이 태황이 될 경우 우환을 없애려는 예왕파에 의해 성친왕 일가는 물론 외척인 민씨 가문도 숙청당할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친왕이 태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민지상
이 생애에서 상희의 둘째 오빠. 1660년생. 대 아파치 원정을 위해 형황이 보내준 1차 원군 2천명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황실, 이순신, 신립, 이장곤, 고다지의 피를 모두 받은 집안 사람답게 15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34세의 나이에 벌써 정 4품 정령 계급이며 능력도 뛰어나다. 한양대화재 직전에 귀국하여 훈련도감 중군(부사령관)에 부임하며, 무인지변때 피신한 재석 일행을 보호하고 반란군 진압에 나선 공로로 평란 2등 공신에 책봉되며, 수어청을 해편한 무위영 총관으로 승진한다.
- 민지원
상희의 막내 오빠. 1663년생. 한림원 학사. 큰형과 달리 정치권력의 생리를 아직 모르는지 예왕이 태황이 될 경우 불어닥칠 숙청과 성친왕의 아들이 태황이 될 경우 버팀목이 되어줘야 할 외척인 태후와 황후와 자신들 가문이 힘이 없어 금방 예왕파에게 밀려날 거란 위기감을 못 느끼는 안일한 모습을 보인다.
- 남구만★
중추원 영사 → 좌승상 → 내각승상. 내각이 다 사표를 낸 상황이라 친국 후 태황을 접견하는데 동행한다. 중추원에 있는 것을 보면 실존인물과 똑같은 명신으로 보인다. 과거 좌승상을 지냈으며, 좌승상이 공석이라 재석이 대리청정 중 좌승상으로 올렸고, 태황이 된 후에는 내각승상이 되었다.
2.5.2. 6부 대신
- 송시열★
예부대신. 3부에서 처음 등장한 한인 실존인물이다. 원역사처럼 집현전을 거치지 않은 재야 성리학자들인 산당의 영수로 능력은 뛰어나지만 말이 거칠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원역사보다 더 오래 살아서 86세인데도 꼬장꼬장하고 힘이 넘치며, 태황도 노대신을 존중해서인지 그가 발언할 때는 무슨 말이든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준다. 논란이 생길 때마다 성친왕을 벌하자고 주장하긴 하는데 1, 2부의 사림파처럼 무작정 성리학적 명분론만 들먹이는게 아니라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합리적인 명분을 내세우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예왕에게 동조해서 성친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게 권한을 주려는 김세룡의 음모를 막는 등 도움을 주고 있다.[95] 그 때문에 만일 재석과 예왕이 보위를 두고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할 때까지 산다면 성친왕의 편이 설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을병대기근이 발생한 시점에서는 노환을 이유로 관직을 내려놓고, 이 늙은이가 축낼 곡식으로 백성을 살리라며 스스로 곡기를 끊어 1696년 향년 90세로 사망한다.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원역사에서도 오래 살긴 했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더 살고 죽음도 자의로 택했으며, 당쟁이 없어 정적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지도 않았고, 죽음도 백성을 위한 희생이었으므로 실제 역사보다 더 추앙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의 제자들인 이형준은 건흥제의 스승이자 우승상, 민성윤은 국구(國舅)이자 좌승상이 된데다가 한때 악동이었던 성친왕이 황제에 걸맞는 학식을 갖추게 된게 이들 덕이라고 대외적으로 알려졌으니, 건흥제가 뛰어난 업적을 세운다면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 이인엽
성친왕이 하와이를 정복한 시점의 호부대신. 송시열의 하와이 복속 비판을 비난하면서 적당한 물품만 하사하고 명목상 백성으로 두기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심석정
연가제 시절 좌승상까지 지낸 심기원[96] 의 3자이자 이부대신을 역임했고 현재는 중추원 참의. 예왕의 장남 경평공에게 딸을 시집보내서 확실한 예왕파로 자리매김해서 원역사의 가해자의 후손과 피해자의 후손이 손을 잡는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난에 대해서는 몰랐기 때문에 딸은 혼인한지 110일 만에 이혼을 명령받고 친정으로 돌려보내졌다.
- 이완[97]
성친왕이 하와이를 정복한 시점의 병부대신. 군사적인 관점에서 하와이 점유가 이익이 된다[98] 고 주장하면서 하와이에 설치할 수군진만큼은 병부 관할에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경하는 선배인 이원기의 청도 있고, 성친왕이 아파치 토벌전에서 보여준 신중한 용병술을 보고 성친왕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지지하고 있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중추원에 들어갔으며, 성시균의 후임 동변관리사로 임명되었다.
- 장성준
공부대신. 3부 시점에선 국가적 사업인 대규모 토목 사업이 거의 끝난 상태라 뭔가 공을 세울 거리가 없나 혈안이 되있다. 그런 조바심에서 나온 게 개량된 증기선과 증기기관차. 바람 걱정 안하고 움직일 수 있는 증기선을 만들고 궤도마차가 운용 중이니 소형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차를 만들면 미주에서 식량 들여오기 쉬워져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며 개발할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당장 현실성은 없다는 다른 신하들 반대에 부딪히긴 하지만 재석도 혼자만 생각하고 있는 걸 벌써 실체화하려는 위엄을 보여준다.
예왕파로 밝혀지나, 그냥 선비로서 예왕이 더 낫다고 생각한 정도라 무인지변 이후에도 박종훈이나 남지원처럼 적극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기술관료라 재석의 명령에는 잘 따른다. 다만 한양대화재 후 도시를 재개발하려는 재석의 구상을 이해하지 못해서 되묻긴 한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되지만, 도성 복구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완전한 재석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래도 다들 사직을 청했는데 자신만 예외일 수 없다며 관직은 내려놓지만, 재석은 그를 중추원에 보냈고 처음 증기기관차를 주장한 인물인 만큼 열기창 도제조로 임명한다.
예왕파로 밝혀지나, 그냥 선비로서 예왕이 더 낫다고 생각한 정도라 무인지변 이후에도 박종훈이나 남지원처럼 적극 무죄를 주장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기술관료라 재석의 명령에는 잘 따른다. 다만 한양대화재 후 도시를 재개발하려는 재석의 구상을 이해하지 못해서 되묻긴 한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되지만, 도성 복구 과정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완전한 재석의 최측근이 되었다. 그래도 다들 사직을 청했는데 자신만 예외일 수 없다며 관직은 내려놓지만, 재석은 그를 중추원에 보냈고 처음 증기기관차를 주장한 인물인 만큼 열기창 도제조로 임명한다.
- 이맹전
호부대신. 을병대기근으로 인해 조정에서 원미주 개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는데, 성친왕이 이에 반대하는 장계를 올리면서 조정에서 논쟁이 일어나자 성친왕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에 강력하게 반대해서 결국 태황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에 더해서, 태황이 이제까지 반대해왔던 성친왕의 귀국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이제 대한이 농사만 짓고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닌 만큼, 유주와 미주 사정을 잘 알고 나라를 위해 잘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성친왕이 보위를 물려받길 바라고 있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중추원에 들어갔으며, 이종덕 후임 미주대총관이 되었다.
- 박종훈
예부대신. 예왕파이며, 성친왕이 미주에 머물며 원미주를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폈다. 성친왕 귀국 후 수행원이었던 이형준, 정호찬, 홍상훈을 새로 발령 보내야 하는데 정황상 이를 태업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이들은 5개월 만에 보직을 받았다. 재석이 대리청정을 하게 된 이후로 낭패감에 휩싸여 있으며, 어짜피 화재복구에서 예부가 할 일도 없는지라 문서 정리 정도를 시켰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되고, 상술한 잘못이 있어서인지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찧으며 자신은 난에 대해 몰랐다며 무죄를 호소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사임해서 중추원에 들어갔고, 전력 때문에 앞으로 벼슬길은 사실상 막혔다.
- 남지원
이부대신. 예왕파이며, 성친왕이 미주에 머물며 원미주를 장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폈다. 재석이 대리청정을 하게 된 이후로 낭패감에 휩싸여 있으며, 어짜피 화재복구에서 이부가 할 일도 없는지라 문서 정리 정도를 시켰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되고, 자신은 난에 대해 몰랐다며 무죄를 호소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사임해서 중추원에 들어갔고, 전력 때문에 앞으로 벼슬길은 사실상 막혔다.
- 권정구
형부대신. 성친왕과 예왕 중 편을 정한 것 같진 않으나, 전과자가 또 죄를 짓는 꼴을 한두번 본게 아니여서 그런지 성친왕이 진짜 개심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심하고 있다. 난 이후에는 다 함께 사직을 청하나 일단은 반려된다. 재석의 태황 즉위 후 관직을 내려놓고 중추원에 들어간다.
- 최석정★
재석이 태황이 된 후 첫 공부대신이자 최명길의 손자. 무인지변 후 재석의 총신이 된 장성준이 내각이 다 사직하는데 혼자만 유임될 수 없다며 대신 후임으로 추천했다. 원역사의 인물처럼 수학에 능해서 산학원 수학 교수를 하고 있었고, 뛰어난 능력에 다 전임자의 공으로 돌리는 겸손한 성품을 갖고 있다. 다만 영의정까지 했던 원역사보다 관운은 좋지 않았는지 그 전까지 관직은 지방 군수 정도를 한게 고작이었다.
- 윤시현
건흥제 즉위 후 첫 예부대신. 서, 준가르, 벵골까지 포함해서 후송만 빼고 모든 주변국에 가본 베테랑 외교관이다. 외교 업무 뿐만 아니라 교육, 보건, 예술, 제례가 다 예부 소관이라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 송재권
건흥제 즉위 후 첫 병부대신. 작중 조선의 학사장교라고 할 수 있는 향도로 군복무하고 그대로 군대에 눌러앉아서 병부 문관으로 재직했어서, 2부의 김명원 같이 후방지원에 더 적합한 인물이다. 하와진첨사가 하와이에서 대규모로 일어난 반란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재석이 어사를 보내기로 했는데, 다른 해외 주둔지에도 보내서 전반적인 군 기강 확립을 건의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다. 후송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염초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고 경험을 쌓은 선원들이 많아져서 해군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우려를 표했지만, 사절단이 다녀와서 이미 염초는 엄청난 양을 자급자족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전자에 대해서는 우려를 접고 교역에 찬성한다.
- 황재선
건흥제 즉위 후 첫 호부대신. 6부를 두루 경험했고, 학식도 풍부한 노신이다. 다만 66세나 되어서 재석도 징검다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후송에 사절단이 다녀온 후 '이미 후송은 교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으니 봉쇄는 무의미하다'는 논리로 교역을 찬성하고, 더 나아가 어짜피 각국이 증기기관을 만들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고 대한이 쌓은 기술과 경험을 단숨에 능가할 수는 없으니 증기선을 보내서 교역을 하자는, 의외로 현실적이고 개방적인 면모를 보인다.
- 김희중
건흥제 즉위 후 첫 이부대신. 새로 찍어내는 화폐의 이름을 '건흥통보'로 하지 않는 것에 아쉬움을 표하며 처음 등장한다.
- 김회정
건흥제 즉위 후 첫 형부대신, 말 그대로 대쪽같은 사람이다.
2.5.3. 금위사장
- 박중현
3부 초기 시점 금위사장. 유능하지만 업무에만 충실할 뿐 개인적인 의견 제시는 하지 않는다. 예왕의 평소 행실이 지나치게 완벽한 것 때문에 의심한다. 유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15년이나 장기 재직하면 조직이 타성에 젖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황태자 이원 사망 이후 해임되며 호성후에 봉해진다. 건복제의 예상대로, 박중현 본인도 예왕의 처신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었고 건복제가 직접 금위사의 감시망이 허술해질 수도 있다며 암시를 줬음에도 예왕에게 깔아놓은 첩보망이 무력화되었다는 것 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99]
- 김창균
박중현 후임 금위사장. 의금부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수사관 출신으로, 의도적으로 조직 쇄신을 위해 금위사 외부 출신 인사를 기용했다. 부임하자마자 금위사의 많은 문제점들을 개선했고, 특히 예왕을 감시하는 금위사 정보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도 알아내고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로 예왕이 장옥정에게 귀비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아낸다.[100] 전임 박중현과 달리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내는 성격이다. 예왕에 대한 금위사 감시망이 구멍이 뚫린 것을 알았고, 예왕을 명백한 위험요소로 파악하고 대책을 건의했던 것을 보면 분명 유능한 인물이긴 하나, 가족에 대한 정이 남다른 태황이 이를 반려했고 설상가상으로 한양대화재로 인해 금위사가 전소되어서 무인지변을 막는데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금위사장으로서는 난을 못 막는 죽을죄를 저질렀으니 참형에 처해져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상술한 사정이 참작되어서인지 해임 및 유구국 파견이라는 가벼운 문책을 당한다.
- 박헌종
건흥제 즉위 후 첫 금위사장. 전임자와 달리 포도청 출신으로, 김창균이 금위사장일 때 부장이었고 해임 후엔 금위사장 대리였다가 정식으로 임명했다.
2.5.4. 익문사장
- 양대식
해외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익문사의 수장. 3부는 조선이 신경써야 할 외국들이 더 늘어난 관계로, 등장이 잦을 것으로 보인다.
2.5.5. 외관(外官)
- 조기철
건복제 때의 골가타 총관. 견서사로 추방되는 성친왕 일행이 천축국에 들렀을 때 막대한 양의 보석, 미희, 명주를 바쳤는데 이를 알게 된 건복제가 진노하여 감찰을 실시한 결과 막대한 양의 부정축재를 한 것이 들켜서 파직되고 북방으로 귀양간다. 관례대로 묵인되던 재물까지 몰수당했다는 이례적인 조치임이 감안돼서인지 골가타에서 모은 재물만 몰수당했고, 본인만 정배되었다.
- 이연성
건흥제 때의 골가타 총관. 조기철과는 정반대로 청렴하고 강직하며 무굴 황실과의 관계도 좋은 유능한 외교관. 현지에 파견될 파천군의 지휘도 맡게 되었다.
- 신창훈
대남주 도독. 필리핀의 서반아 총독부가 벌인 학살을 피해 피신온 난민들을 보호하고 이들의 증언을 취합해서 보고했으며, 이후 직접 진상조사를 하러 온 남국순변사 김만중을 맞이한다.
2.5.6. 기타 대신
- 김만중★
1697년[101] 시점의 예부협판으로 건복제의 명을 받아 용산 강가에서 성친왕을 마중했다. 이형준과 친분이 있는 사이. 인기 소설 구운몽의 작가로 유명한데 원역사의 구운몽과는 내용이 달라지고 스케일이 커지며, 정치 상황이 변했으니 사씨남정기는 쓰지 않았다.[102] 스페인에서 필리핀 거주 대한인들을 학살한 사건이 터지자 남국순변사로 임명되어서 피난민들이 모인 대남도에 가서 성실하게 조사를 하고, 더 정확한 진상 규명을 위해 필리핀으로 직접 떠난다. 드 에체바리 총독을 만나서 보름에 걸친 치열한 논쟁 끝에 한인들을 화형에 처하고 사당을 불태워서 임금을 모독했다는 명분을 확보하고, 억류되어 있던 관료들과 상인들을 송환받게 된다.
- 김정균
한양대화재 당시 한성부 판관. 화재로 혼란한 틈을 타 도둑질을 하는 자들을 잡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인명구조를 하던 성친왕 일행과 마주치고 도적으로 오해해서 체포하려 했다가 재석에게 폭행당한다. 예왕파인지 아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본의 아니게 황자들 간의 난을 일으키게 되는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 우진기
건흥제 시기의 첫 한성판윤. 도성 복구 현장을 순행하는 재석을 수행한다.
- 고인선
전 병부협판. 후송 선박들을 출항세만 받고 통과시켜둔 뒤 해적으로 위장한 전선으로 모두 털어버리자는, 즉 사략선을 운용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그 자리에서 파직당한다.
- 이세홍
건흥제 즉위 후 처음 등장한 대사헌. 성리학 외에 서학과 산학에도 능숙하고 라틴어와 스페인어에도 능통하지만 재석이 무종 때 겪은 사림들이 성리학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런 사람들이란걸 깨닫게 해준, 매우 꼬장꼬장한 원칙주의자이다. 성친왕의 사생아라고 주장하는 디에고를 바로 추방하고 이에 관한 논의를 금할 것을 주장하며, 종2품임에도 진짜 아들이라면 천륜을 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1품 우승상 이형준도 공격하고, 이미 소문이 퍼졌다는 말에 익문사도 공격하는 패기를 보인다 .
- 이종근
중추원 첨사이자 권훤의 장인어른으로, 이덕형과 롤리타 부부의 증손자이다. 혈혈단신으로 온 도로테아의 아버지 노릇을 해서 결혼식을 도왔다.
2.6. 군부
- 장희재 [103]
장옥정의 동복오빠. 1651년생. 역시 스페인계 혼혈로 대단한 미남이다. 형황이 미주 아파치 토벌을 위해 보내는 원미군 본대를 이끄는 장수. 실제 역사처럼 부계는 역관 집안 출신이나 외가가 세바스티안 데 라 로카의 후손이라 그런지 무재가 뛰어나 군인이 되었고, 대남도 토인의 난, 청나라 한족 민란 진압 등의 공을 세워 육군 부장에 속말주 병마절도사를 지내다가 원미군 지휘권을 받았다. 예왕은 정치적 고려 따위 없이 장옥정의 미모만 보고 첩으로 삼았고, 원역사보다 한참 늦게 태어나 예왕의 첩이 된지 2년도 안되었기 때문에 예왕과의 친분도 없고 군 경력도 요직이지만 변방만 떠돌았지만 재석이 보기에도 훌륭한 장수이다. 한양대화재 직전에 귀국하여 호위청 총관으로 부임한다.
무인지변 때 재석은 장희재는 믿으나 장옥정을 통해 무슨 수작을 부려놨을지 모르니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실제로 장희재는 난에 가담하면 장씨 가문이 제일의 가문이 될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는 장옥정의 편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지만,[104] 정호찬에게 성친왕이 무사하다는 밀서를 받고 나서 일단은 두고 보자고 대기명령만 내렸는데, 사실 이때 이미 성친왕을 돕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대문 전투 승리 후 재석은 장희재가 공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패주한 예왕은 마지막 희망으로 호위청에 합류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미 밤중에 군사를 보내 예왕의 척살 목표였던 현왕과 민성윤의 신변을 보호하고, 창덕궁을 구원하려고 시도하다가 족친위 반란군과 교전을 벌였다. 예왕의 사자가 도착했을땐 이미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준비를 마친지라 바로 사자를 체포했으며, 재석의 사자가 도착했을땐 이미 명례방의 예왕군에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다. 결국 무인지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어떤 선택을 할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던 장희재가 사적 인연보다 대한과 황실에 더 충성하는 참군인임이 드러난게 반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재가 뛰어나다는 것도 드러나는데, 예왕군이 호위청을 사실상 아군으로 여기고 있다는 심리적 허점을 노려서 급습하고 이어서 일제사격과 순차사격을 반복해서 진영을 허물고 일부는 돌격시켜서 큰 피해 없이 호위청 단독으로 더 숫자가 많은 예왕군을 패퇴시켰고, 성친왕의 품성을 본지라 지나친 살육도 자제하게 한다. 예왕은 무재가 없다고 경멸조의 독백을 한 것을 보면 무재를 군주의 중요한 자질로 생각한 것 같고, 이 때문에 아파치 토벌전을 같이 하면서 뛰어난 용병술을 보인 재석에게 호의를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난이 진압된 후 평난 1등공신에 신임 오군대총관이 되어서 군부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고, 장옥정은 여전히 아끼는지 보리스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제의해서 재석과의 관계도 더 돈독히 하려고 한다.[105] 결국 보리스와 장옥정의 재혼을 성사시킨다.[106] 의외로 육군임에도 이형준이 제안한 육군부/수군부 분리에 찬성한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이 벌어지자 남정대장군으로 임명되어서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다.
무인지변 때 재석은 장희재는 믿으나 장옥정을 통해 무슨 수작을 부려놨을지 모르니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실제로 장희재는 난에 가담하면 장씨 가문이 제일의 가문이 될 수 있을거라고 설득하는 장옥정의 편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지만,[104] 정호찬에게 성친왕이 무사하다는 밀서를 받고 나서 일단은 두고 보자고 대기명령만 내렸는데, 사실 이때 이미 성친왕을 돕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대문 전투 승리 후 재석은 장희재가 공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패주한 예왕은 마지막 희망으로 호위청에 합류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미 밤중에 군사를 보내 예왕의 척살 목표였던 현왕과 민성윤의 신변을 보호하고, 창덕궁을 구원하려고 시도하다가 족친위 반란군과 교전을 벌였다. 예왕의 사자가 도착했을땐 이미 난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준비를 마친지라 바로 사자를 체포했으며, 재석의 사자가 도착했을땐 이미 명례방의 예왕군에 공격을 개시한 상황이었다. 결국 무인지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어떤 선택을 할지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던 장희재가 사적 인연보다 대한과 황실에 더 충성하는 참군인임이 드러난게 반전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재가 뛰어나다는 것도 드러나는데, 예왕군이 호위청을 사실상 아군으로 여기고 있다는 심리적 허점을 노려서 급습하고 이어서 일제사격과 순차사격을 반복해서 진영을 허물고 일부는 돌격시켜서 큰 피해 없이 호위청 단독으로 더 숫자가 많은 예왕군을 패퇴시켰고, 성친왕의 품성을 본지라 지나친 살육도 자제하게 한다. 예왕은 무재가 없다고 경멸조의 독백을 한 것을 보면 무재를 군주의 중요한 자질로 생각한 것 같고, 이 때문에 아파치 토벌전을 같이 하면서 뛰어난 용병술을 보인 재석에게 호의를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난이 진압된 후 평난 1등공신에 신임 오군대총관이 되어서 군부 실력자로 자리매김하고, 장옥정은 여전히 아끼는지 보리스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제의해서 재석과의 관계도 더 돈독히 하려고 한다.[105] 결국 보리스와 장옥정의 재혼을 성사시킨다.[106] 의외로 육군임에도 이형준이 제안한 육군부/수군부 분리에 찬성한다.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이 벌어지자 남정대장군으로 임명되어서 전쟁을 총지휘하게 된다.
- 이원기
태후의 오라비이며 건복제와 건흥제의 외숙부.[107] 이순신의 후손답게 무과에 응시, 강무관도 졸업하며 여러 벼슬도 역임하고 남도수군통제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노장. 엄격한 교육으로 변하기 전의 태황의 모습을 기억한다는 것을 보면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빙의 전 성친왕도 자신을 언제나 감싸주는 모후의 오빠라 그런지 무도하게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누이인 태후가 지금이라도 건복제가 후사를 얻고 귀국하는 성친왕이 아군이 되어준다는 구상을 언급하자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차라리 처음부터 성친왕을 태제로 책봉해 보위를 물려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재석에게 직접 보위에 욕심이 있냐고 물어본다.
다른 대신들과 달리 성친왕이 진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재석에게 조언을 해준다. 은퇴한 무장이라 현실적인 영향력은 없지만, 이순신의 후손인 만큼 군부에 연줄이 많다. 무인지변에서 예왕군에 가담하려던 용호청 총관 윤승묵을 주저앉힌 것에도 한 몫을 했다.
다른 대신들과 달리 성친왕이 진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재석에게 조언을 해준다. 은퇴한 무장이라 현실적인 영향력은 없지만, 이순신의 후손인 만큼 군부에 연줄이 많다. 무인지변에서 예왕군에 가담하려던 용호청 총관 윤승묵을 주저앉힌 것에도 한 몫을 했다.
- 김용상
훈련도감 대장. 피신한 성친왕을 열렬히 환영해주고 도와서 예왕군 진압에 나선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는 훈련도감이 이제까지 방어하는 전투만 해서인지 공을 더 세우기 위해 선봉에 나서려고 한다. 평란 2등공신에 책봉되고 삼군부 도총사로 승진하나, 병 때문에 금방 자리를 내려놓았고, 관전무관단 단장으로 청나라의 보복전을 참관한다.
- 윤승묵
용호청 총관. 성친왕을 좋아하지 않아서 예왕의 격문을 받고 난에 참가할 뻔했지만, 이원기가 설득하고 성친왕과 견서사를 함께 한 측근인 홍상훈이 대대장이었으며 휘하 장수들이 설득해서 성친왕 편에 서기로 한다. 이런 사정이 있으니 재석도 용호청은 동촌 화재 진압부터 보냈다. 전투할 때 선임대대장인 홍상훈에게 지휘를 위임했다는 것을 보면 끝까지 성친왕을 마뜩치 않게 본 듯 하다. 재석도 이게 못마땅했는지 전투 동안 벼르고 있다가 승리 후 윤승묵을 따로 불러 치하 한다. 무려 반란의 합류를 결심했다가 부하들의 설득에 마음을 돌린걸 보면 꽤나 유유부단한 성격 같은데, 그 성격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평난 3등공신까지 되게 해준다.
- 이민호
총융청 총관. 성친왕에 호의적인 장수지만, 북한산성에 있는 본영에 있어서 무인지변에서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총융청은 화재 후 복구를 위해 원각사 터에 주둔해 있던 정호찬 지휘 하에 2연대만 성친왕군에 합류했다. 그래서 평난 공신에 책봉되지도 못했다. 정호찬이 총융청 총관이 된 것을 보면 다른 자리로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 박중원
족친위장. 김희준이 난을 일으키면서 현왕파 병력을 제압하고 족친위로 장악하면서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난에는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 한지권
무인지변 당시의 오군대총관. 난이 일어날 때 창덕궁 안에 있었으며, 상황을 파악한다고 나갔다가 김희준이 장악한 족친위에게 살해당한다. 오군대총관이 죽었으니 조정은 더한 혼란이 휩싸이게 되고, 누가 했는지도 모르지만 오군대총관을 살해했으니 예왕군은 영락없는 반란군이 되어버렸다. 사후 평난 2등공신에 추증된다.
- 김진식
마포나루 경비를 맡은 포도청 정위. 성친왕 일가가 귀국했을 때 맞이했던 군관이었고, 난 때도 계속 그 곳에 근무하고 있었다. 증기선을 타고 도망치려던 예왕 일가를 붙잡고, 자살을 시도하려던 예왕을 구해내는 공을 세워 평난 3등공신이 된다.
- 김원중
삼군부 도총사. 야전 경험이 풍부한 노련한 장수.
- 한종련
북병을 지휘하는 대한북병사. 육군부/수군부 분리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한다.
- 민함
대한수군통제사. 당연히 육군부/수군부 분리에 찬성하나, 아무리 육군인 장희재가 의외로 적극 찬성하고 있으니 거드는게 모양새가 더 좋다지만 자기 일을 남 일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여서 재석에게 찍혔다. 결국 재석이 눈치를 줘서 병을 핑계로 관직을 내려놓았다.
- 서인혁
외금위 부위로, 펠리페 2세 때 조선에 온 스페인 고문관의 후손이다. 앙헬(Ángel)이란 스페인식 이름을 갖고 있다. 대한 황실을 찾아온 디에고를 심문한다.
- 이세진
남도수군통제사였다가 대한수군통제사로 승진한, 풍부한 실전경험에 전략적 사고를 갖춘 유능한 장수.
- 이홍권
해성공 이기빈과 셀린 부부의 증손자로 계급은 부장. 서도수군통제사였다가 정남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 전쟁에서 증기선의 첫 실전투입을 포함, 43척의 함선을 이끄는 중임을 맡게 되었다.
- 홍하명
대남수사로 계급은 참장. 필리핀 원정군의 선발대인 대남도 병력을 싣고 루손 섬에 상륙, 전쟁을 시작한다. 스페인 해군과의 첫 해전에서 적함 1척을 격침하고 2척을 나포, 적함에 실려있던 군자금 은 10만냥을 탈취하는 대승을 거둬 '자응장 훈2등'을 수여받는다.
2.7. 대한령 미주
- 이종덕
미주대총관. 진성대군의 6대손. 대한령 미주의 총책임자로서 형식상으로는 동변관리사 성친왕의 상관이지만, 권위에서는 황족인 성친왕의 발끝에 못 미치니 주인공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본국에 책을 잡히지 않을 정도의 적절한 관계를 설정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 매우 양심적이고 성실한 관료이나 적극성은 떨어지는 성격으로, 본국의 대기근 소식을 듣자 재석이 원래는 전량 본국 호부에 보내야 할 금을 이용해서 식량을 사자고 하자[108] 소극적으로 대응했는데, 이후 본국에서 진짜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진심으로 탄복하며 예를 바쳐서 재석을 기겁하게 했다. 재석이 태황이 되고 나서야 10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다.
- 홍주원
미주 총관부 판관으로 미주 대법원장에 해당한다. 본국에서 건너온 명문가 남양 홍씨 출신 엘리트.
- 김주마(달리는 금빛 말)★
미억족 전사추장. 조선과 접촉한 후 미억족이 큰 피해를 봤기에 대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다. 미억대령(시에라네바다 산맥) 너머를 탐험하려는 성친왕과 동행하기로 한다. 건복제 사후 조문 사절이 되어 본국을 찾아온다.
- 김대송(세상에서 가장 큰 금빛 소나무)
올로내족 대추장. 대한에 충성하는 대신 총과 군마 등 각종 무기를 얻어 이웃 소부족들을 복속시키고, 남쪽 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와의 국경을 경비하고 있다. 건복제 사후 나이가 많아 본국에 오지는 못한다.
- 홍한선
미주에 있는 내달상단 지사의 간부, 즉 네덜란드계 한인으로 네덜란드식 이름은 한스이다.
- 송기환
북미주 지사. 북미주 근무가 4년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
- 원준
원사웅의 증손자. 신욱족의 피가 많이 섞여 외모가 한인보다는 미주 토인에 가깝게 생겼다. 원사웅이 북미주에 쌓은 기반 덕분에 10만석지기 대부호로 살고 있지만, 반역자인 조상 원균의 죄를 갚겠다는 생각에 본국에 가서 무과를 보고 강무관에 들어간다.[109] 그러나 반역자 원균의 후손이라는 점과 인종적 차이 때문에 강무관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강무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오군영으로 가는 대신 미주로 돌아와서 덕진성에서 무관으로 20년간 복무한다. 성친왕의 하와이 원정 계획을 듣고 신욱족 전사들 중 자원병을 모집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건복제 사후 조문 사절이 되어 본국을 찾아온다.
- 오소리 발톱
태호 근처에 거주하던 파이우트족 추장. 처음에는 재석과 광산 채굴권을 적당한 값에 매매하는 호의적인 관계로 시작했으나, 아파치 토벌 때 부족의 겨울 양식을 거덜내고, 부녀자 폭행을 저지른 조영균과 그 수하를 함정에 빠뜨리고, 조영균과 휘하 300명을 죽인다. 범죄자만 죽였으면 재석도 좋게 좋게 마무리하려 했으나 300명이나 죽인 바람에 본인은 옆 부족 추장과 지선성까지 끌려가 교수형 당하고, 일곱여개의 피아우트 부족 마을도 초토화된다.
- 조영균
본국 출신의 남미주 군관. 원군이 올 때 까지 태호성을 지키라는 성친왕의 요청을 무시하고 파이우트족에게 행패를 부려서 아파치 토벌에 나선다. 원군에 묻히지 않고 공을 세워 귀국할 생각에 파이우트족에게 숙소와 식량을 고압적으로 요구하고, 부녀자 폭행과 약탈을 저지르는 수하 처벌을 하지 않아 분노한 파이우트족의 매복에 걸려 본인과 수하 300명의 목숨을 잃는다.
- 조성칠
20년 전 미주대령 동쪽으로 도망쳐서 토인들과 섞여 살다가 대한군이 아파치를 토벌하기 시작하자 투항해서 길잡이를 자처한 인물. 도망친 사연에 대해서 살인죄를 저질러 도망쳤다고도 하고 빚 때문에 도망쳤다고도 한다. 토인들 틈에서 뭘 하고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증언이 계속 바뀌어서 사냥꾼, 장사꾼, 의원 노릇을 했다고도 하고 대한이 미주 전체를 정복할테니 여러 부족이 연합해야한다고 선동해왔다고도 한다. 재석은 거짓 투항한 첩자로 의심되기도 하고 계속 증언이 바뀌어서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처벌까지는 하지 않고 아파치 토벌이 끝난 후엔 통역 겸 길잡이로 쓰고 있으며, 이후 정호찬이 대평원의 인디언 연합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 떠날 때도 대동한다.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면 첩자는 아니었던 듯.
2.8. 상인
- 이만덕
송방에 속한 송동상단의 서기. 풍년으로 미주 이민이 줄자 투덜거린다.
- 김원석
이만덕의 동료 서기.
- 김가
이만덕 밑에서 일하는 사환 소년, 외할아버지가 장조 때 이기빈이 데려온 흑인이어서 피부가 검다.
2.9. 종교인
2.9.1. 천주교
- 앙투안 토마스
조선 교구 주교. 플랑드르 출신 예수회원. 조선 주교로 1683년 부임했다.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사망한 뒤 위령미사를 3차례 올린다.
- 마르티네스
자혜원장.
2.9.2. 불교
- 현광
- 묵천
승병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총섭. 천민 출신이며, 일흔이이 넘은 나이에 걸맞게 진중한 고승이지만 재석이 비하르 지방의 불교 성지순례를 시행하면서 승병들을 호송단으로 쓸 구상을 밝히자 체면 불구하고 매우 흥분한다.
2.10. 기타
- 성친왕저 집사
동촌 연화방, 현재의 현대그룹 계동사옥 자리에 위치한 성친왕 사저의 집사. 성친왕비 강씨가 사망한 이후 성친왕저는 빈 집이 되었고, 이 자는 성친왕이 국외추방되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에 횡령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집의 노비들은 돈을 받고 다른 집에 빌려주고, 농토에서 들어오는 수입의 3/4를 자기 앞으로 빼돌렸으며 일꾼들이 머무는 행랑채를 제외하고는 집을 관리하지 않아 성친왕저는 겉만 그럴싸하게 유지해놓고 내부는 완전히 폐가가 되어 있었다. 성친왕이 온다는 보고를 도착 반나절 전에 뒤늦게 받고 수습할 시간도 없이 성친왕 일행이 들이닥쳐 모든 행적이 들켜버렸고, 보리스와 이고르에게 붙잡혀 참교육을 당한다. 결국 빼돌린 돈 6만냥을 돌려주고 북변으로 전가사변당한다.
3. 청
- 아이신기오로 나락혼[111]
아이신기오로 낙명의 4자. 청의 5대 황제로 23년간 재위하다 1695년 음력 4월에 사망한다. 무리한 남정 대신 국력을 비축하는 정책을 선택하고 한족 신사 계급을 회유하는 유화정책을 펴 청을 안정시킨 명군이었다. 황후는 친척인 후금 현종 석새의 딸이다.
- 아이신기오로 바스하(파사합)
청의 6대 황제. 1668년생. 1695년 음력 4월, 28세의 젊은 나이에 황제로 즉위한다. 태자 시절 대한에 입조했을 때 건복제가 증조부 청 태종(다이샨)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평한 것을 볼때 능력이 뛰어나고 야심가인 것으로 보인다. 즉위 직후 을병대기근이 와서 후금과 연합해 기병 12만으로 후송을 침공한다. 후송 재침공을 준비한다는것을 보면 초기 패전에 상당히 이가 갈렸던듯.
- 아이신기오로 늑이금
파사합의 재당숙. 후송의 침공 때 방어군 총사령관을 맡으나 기만책에 휘말려서 해하 전투에서 1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고 홍정원에게 대패한다.
- 아이신기오로 복전
청나라의 유친왕. 1702년 벌어진 청-후금 연합군의 후송 재침공 사령관을 맡아 후송이 대비하지 않던 호북성 방면으로 청군 8만, 후금군 5만을 이끌고 침공, 후송의 방어거점인 신양성을 점령하고 후송군 15만을 섬멸하여 사수 이북을 빼앗는 대승을 올린 명장이다.
- 오응웅★
숙조 사후 파견된 조문 사절의 부사. 오삼계의 아들.
- 오세번★
오응웅의 아들, 후송의 침공 때 숙주성 수비대장이었으며, 청 본군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숙주성을 맹공하는 후송군을 상대로 3개월간의 처절한 공방전을 통해 성을 굳게 지켜 결국 후송군이 철수하게 만든다.
4. 후금
- 아이신기오로 와극달
후금의 5대 대칸. 1668년생. 혼인동맹에 의해 청 황제 파사합의 고모부이자 외삼촌이다.
5. 일본
- 도쿠가와 이에카츠
도쿠가와 막부의 5대 정이대장군. 대한 사람들은 관행적으로 일본 국왕으로 부른다고 한다.
- 도쿠가와 이에노부
도쿠가와 막부의 6대 정이대장군. 1676년생. 1690년 15세의 나이로 후사없이 요절해서 직계혈통이 끊긴다.
-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막부의 7대 정이대장군. 1670년생. 이에노부의 9촌 조카로 첫 방계 출신 쇼군. 외가는 아민의 후손인 군마 마쓰다이라씨. 대한과 교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히로시마 번주 출신으로 친한 성향이다. 을병대기근때 대한에 많은 식량을 제공하는데 영향을 준다.
6. 유구
- 쇼테이(상정)★
유구의 11대 국왕. 성친왕이 미주에서 귀국길에 식량과 식수를 보급하기 위해 들렀을 때 그의 신분을 알고 초청해서 식사를 하고 미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태황과 조정에서는 성친왕이 유구를 배후로 일을 꾸밀까 경계했는데, 유구 국왕의 친서, 성친왕의 보고, 익문사 관원의 첩보가 다 일치하는 것을 알고 성친왕의 정직함에 만족스러워한다.
- 쇼준(상순)★[112]
유구의 세자로 대한에 입조한다. 유구에 대한수군 저탄소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한다. 술에 취해서 유구가 대한을 무척 두려워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칭신하면 대한에서 유구왕을 갈아치울까봐 칭신을 하지 않는 것이라는 속내를 재석에게 밝혔는데, 진짜 취해서인지 취한척한 것인지는 불명.
7. 서
- 장형운
서의 2대 황제. 1641년생. 형들과 달리 파촉인 후궁 소생 4남이라 후계 구도에서 배제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오히려 군사들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15세 때 후송 원정에 동행하던 중 장헌충이 사망하자 사천 출신이라는 점을 이용해 군사들에게 되도않는 중원일통 따위 집어치우고 집이나 지키자고 선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형들을 제거한 뒤 황제로 즉위한다. 이후 서는 중원과는 언어도 문화도 다른 별개의 국가이니 중원을 노릴 필요도 없다고 선언하며 확장정책을 중단하고 대한과 관계를 회복한다.
- 정지룡(정종훈)[113]
대중성주 정준석의 차남, 즉 무종의 현손이다. 원래 이름은 정종훈. 1641년 대남도의 호족이 된 정준석의 위세를 억누르기 위해 선조가 대중성주 직책을 회수할 때 이를 받아들인 아버지 정준석, 형 정영훈과 달리 반발해 11척의 배와 2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탈주, 해적이 되었다. 이후 이름을 정지룡으로 바꾼 뒤 적두도를 점령해 난공불락의 요새 를 쌓고 자신의 해적단인 정가군의 본거지로 삼았다. 30년이 지난 3부 시점에는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했고 그 부하가 1만명에 이른다. 세력이 워낙 강대해 서나라에서 수군대도독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회유했다고 한다. 단순 해적을 넘어서 광동과 해남도 일대 해안선 전역을 영지로 하는 군벌과 같은 위치로 대놓고 세금과 통과세를 거두고 있다. 주로 터는 대상은 후송 배들이며 그래도 대한 출신이라고 대한 배는 노리지 않는다고 한다.[114] 대한 측에서는 정지룡이 서나라의 관군으로 대우받고 있기에 서와의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며 정지룡이 대한 배를 노리지는 않으니 정가군을 토벌하지는 않는다. 대한 출신 본처 외에도 중국인, 일본인, 안남인, 양인, 흑인 등 온갖 인종의 처첩을 수십이나 거느렸다. 60년간 정가군을 이끌다가 1701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너무 장수해서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세력을 물려준다.
- 정명완
정지룡의 손자로 1701년 조부 정지룡으로부터 정가군을 물려받았고 서 조정에서 수군대도독 벼슬 세습도 인정받았다. 정지룡의 대한 출신 본처의 아들과 일본계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수적으로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국계 숙부들 때문에 장악력이 불안정했는데, 대한과 서반아의 전쟁에서 대한 조정의 요청으로 서반아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하자 이를 계기로 반란을 일으킨 숙부들에 의해 적두도에서 쫓겨난다.
- 왕대수
광서를 근거지로 한 해적단 왕가군의 대두목. 여성이며 암호랑이(모대충)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똑같이 서나라의 벼슬을 받은 해적 군벌이며 정가군과 적대 관계. 정명완이 축출되면서 정가군의 내분이 벌어지자 이 틈을 타서 정가군 지부들을 뺏으면서 세력을 확장한다.
8. 후송
- 조형서
후송의 4대 황제. 1680년생으로 선황 조광훈이 요절하여 겨우 4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너무 어리기에 모후 진씨가 섭정을 했으나 1695년 건주의 침공을 계기로 친정을 시작한다.[의문] 청에게 보복전을 준비하며 군비를 확장하고 있으며, 숙조가 사망하자 송정경을 조문 사절로 보내서 청을 불안하게 만든다. 1년 후 또 송정경을 보내 국교를 정상화하고 후송 상선이 대한 수군에 통행세를 내는 대신 자유항해를 보장해 줄 것을 제의한다. 아직 등장은 없었지만, 대한 조정에서 젊은 군주라 쉽게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예측한 것과 달리 창업군주의 잘못까지 인정하며 전쟁을 위한 사전 외교공작을 벌이는 것을 보면, 나이에 비해 신중하고 유능한 인물이거나 유능한 신하들의 보좌를 받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한에서 침공을 늦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신들을 붙잡아놓자, 참지 못하고 원정을 감행했다. 원정에서 청에게 큰 타격을 입히자 만족하고, 대한과의 국교 수립도 1702년 타결되나 청의 보복 침공으로 사수 이북 영토와 후송군 15만, 백성 4만을 잃는 큰 피해를 당한다.
- 후송 공주
조형서의 친누이동생. 1684년생. 모후를 닮은 천하절색이라 청과 후금은 화번공주로 건흥제의 첩으로 바쳐져서 관계 개선을 도모할까 의심하고 있었으나 재석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대한-후송 수교가 미뤄지면서 결국 홍정원의 아들에게 시집간다.
- 황태후 진씨
조형서의 모후. 어린 조형서를 대신해 섭정에 있었으나 군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건주의 침공을 계기로 섭정에서 물러났다.
- 송정경
외교관. 한국어에 능통하다. 숙조가 사망한 후 조문 사절로 찾아와서 자기네 건국 시조인 조승복의 잘못까지 언급해가며 대한과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히고 6일만에 귀국한다. 이후 1700년 국교 수립 요청 사절로 다시 대한을 방문한다.
- 위국공 홍정원
홍승주의 손자로, 후송 침공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청의 허를 찌르는 양동작전을 벌여 해하 전투에서 청 주력군을 격파하나, 숙주성을 굳게 지키는 오삼계의 손자 오세번의 철벽방어에 막혀 3개월간의 공방전을 벌이다가 청의 구원군이 오자 어쩔수 없이 철수한다. 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조형서의 신임도 두텁다.
9. 천축국
무굴 제국 바드샤. 친이슬람 정책으로 무굴 제국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10. 하와국
- 마우이(하마위)
성친왕 함대가 하와이(하와이 제도)에서 맨 처음 도착한 하와도(빅 아일랜드)의 와가촌(와이아케아)의 추장. 성친왕의 빛나는 서양식 갑옷과 군사들의 총포 사격을 보고 성친왕을 전쟁신 '쿠'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고, 쿠의 힘을 빌려 주변 부족들을 쓸어버리고 하와이를 통일하려고 한다. 하와도 여왕 케아케알라니와하네의 봉신인 쿠아후이아의 봉신으로 하와도 전체는 커녕 마을 하나를 통치하는 대유주식으로 치면 왕과 공작 아래의 백작 정도의 위치였으나 성친왕에게 자신이 하와도 전체의 왕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성친왕 함대가 떠난 후 하와도에 잔류한 대한 병사들을 동원해서 쿠아후이아의 편에 붙어 케아케알라니와하네를 타도하는 내전을 일으켰고 케아케알라니와하네를 퇴위시킨 뒤 왕으로 즉위하려던 쿠아후이아와 그 아들들도 제거해버리고 쿠아후이아의 딸과 결혼하며 사위라는 명분으로 자신이 하와이의 왕위에 오르고 건복제에게 하씨 성을 받고 하와이 국왕으로 책봉까지 받는다. 번왕으로서 사조룡을 수놓은 녹색 곤룡포를 입는다. 재석은 친한파 마우이가 왕이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것이기는 하나 속았다는 사실에 불쾌해한다. 아들인 하정위에게 부인 가비를 NTR 당하고 가비에게 독살 시도까지 당하는 충격적인 상황을 겪었지만 의식을 되찾았고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
- 카우이(하가위)
와이아케아의 추장 마우이의 8남. 동현 호를 발견한 뒤 동료 둘과 함께 용감하게 맨 처음으로 동현에 오른다. 성친왕을 보고 빛의 신 '카네'라고 생각한다. 이후 처음 동현에 오른 둘과 함께 통역 역할로 뽑혀 동현 호에 타고 성친왕 함대와 동행한다. 통역을 하면서 사실은 잠시 피신했던 하와도 여왕 케아케알라니와하네가 성친왕에게 항복한 것으로 사기를 친다. 성친왕 함대의 부하들 중 전사자가 생기는 것을 보고 이들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깨닫고 신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인간이라면 자신도 그걸 배워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와이 정벌이 끝난 후 상춘 호에 타고 건복제를 알현하러 대한으로 간다. 대한으로 가는동안 성친왕이 딸려준 대한 관리에게 주입식 교육을 받고 건복제를 알현하고, 하가위라는 대한 이름을 받고 4년동안 민성윤의 집에서 기숙하며 대한의 문물을 배워 돌아간다. 아버지 마우이가 하와이의 왕이 되었으나 형제도 많고 쿠아후이아의 피를 물려받을 이복동생보다 정통성고 밀리니 왕위 계승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나 하정위의 난에서 기존 세자를 포함한 형제 대다수가 사망했고 본인도 공을 세우며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아진다.
- 하정위
마우이의 4남. 부왕 마우이의 부인, 즉 자신의 새어머니 격인 가비와 사통하며 왕위 찬탈을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한 때 하와국 영토의 절반 가량을 점령했지만 결국 진압되었고 상어밥으로 던져져서 처형된다.
- 칼레오하노(갈래오)
동현에 처음 오른 카우이의 두 부하 중 하나. 상춘 호와 동행한다.
- 푸알리
동현에 처음 오른 카우이의 두 부하 중 하나. 동현 호와 동행한다.
- 카훌루이 추장
카훌루이의 추장. 성친왕 함대의 소문을 듣고 기습공격을 준비했다가 장창으로 급습해서 성친왕 함대에서 13명의 전사자를 낸다. 이후 성친왕 함대의 보복 공격으로 마을 주민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거의 전멸당했고 본인도 그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훌루이에서 벌인 학살의 소문 때문에 이후 성친왕 함대에 저항하는 이는 없었다.
- 칼라니
호눌룰루 추장. 성친왕 함대의 소문을 듣고 잠시 도망쳤다가 대한에 입조한다. 진주만을 대한에 바치라는 성친왕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건복제에게 공작 작위를 받는다.
- 카마카코아(가와공)
카우아이 추장. 칼라니와 달리 도망치지 않고 대한에 입조한다. 와이아케아처럼 자기 부족에서도 자기 아들을 포함한 세 사람을 대한으로 보내기로 한다. 건복제에게 '가와공' 공작 작위를 받는다.
- 아우가테(가우성)
카마카코아 추장의 장남으로 카우이처럼 대한으로 향한다. 카우이에게 경쟁심을 갖고 있다. 건복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자기 아버지가 마우이보다 더 강하니 벼슬을 내려달라고 외치는 무례를 범하지만 건복제는 문제삼지 않는다. 가우성이라는 대한 이름을 받는다. 가와공의 작위를 물려받을 확실한 후계자이기에 왕위 세습 여부도 불확실한 카우이를 바웃는다.
하와도 발견 시점 하와도의 여왕. 성친왕 함대 방문 시에는 잠시 피신했다가 돌아왔고 성친왕 함대가 떠난 뒤 쿠아후이아에게 하와도에 잔류한 한인들을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한인들의 힘을 빌려 반란을 일으킨 쿠아후이아에게 패배하고 퇴위당한다.
- 쿠아후이아★
케아케알라니와하네의 봉신이자 마우이의 주군이자 장인. 주군인 케아케알라니와하네와 맞먹는 권세를 지녀서 케아케알라니와하네 즉위 당시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이 끝난 다음에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하와도에 잔류한 한인들을 잡아오라는 케아케알라니와하네의 명령을 무시하고 한인들의 힘을 빌려 케아케알라니와하네에 맞서는 반란을 일으킨다. 한인들이 투창 사거리 밖에서 활과 총으로 지휘관만 골라서 저격하는 방식으로 내전은 손쉽게 이겼으나 케아케알라니와하네를 퇴위시키고 본인이 즉위식을 하기 전날 급사한다. 정황상 마우이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쿠아후이아의 아들들은 모두 실종되어버렸고 딸은 마우이의 부인이 되어 결국 왕위는 마우이에게 넘어간다.
- 가비
쿠아후이아의 딸이자 마우이의 부인. 하와국의 왕비가 되긴 했으나 사실상 아버지와 남자 형제들의 원수인 마우이의 아내가 된 것이기네 원한을 품었던 듯 하다. 그래서 자신의 양아들 격인 마우이의 4왕자 하정위와 사통을 했고, 마우이를 독살하려 시도한다. 하지만 독살이 실패하고 반란이 진압되자 화산에 뛰어들어서 자살한다. 많고 많은 자살 방법 중에 하필 화산에 뛰어들어서 고통스럽게 죽은 것을 보면 어지간히 원한이 뼈에 사무쳤던 것으로 보인다.
11. 대유주
11.1. 불랑국
3부 시작 시점의 프랑스 국왕. 매일 저녁 6시부터 아침 8시까지 파티를 즐기면서 국정 수행도 딱딱 해내는 강철체력의 소유자다. 성친왕을 막 완공한 베르사유 궁전에 묵게 해주고 연회에도 거듭 초청하며 대화 중 중국 고사를 인용하기도 하는 등 대한과 아시아에 상당히 호의적이다. 재석이 성친왕에 빙의한 후 프랑스어 억양이 달라졌다고 지적하기도 하며[116] 프랑스어와 궁중 예절을 가르칠 가정교사 샤를을 붙여준다. 성친왕에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예고하며 대한이 프랑스와 동맹해 필리핀과 대미주에서 스페인 식민지를 위협해주면 필리핀을 대한에 넘기겠다고 제안한다. 주인공 재석이 성친왕의 몸에 빙의한 것이 딱 루이 14세와 만난 시점과 비슷하기에 재석은 망나니였던 성친왕이 개과천선한 것에 대한 설명으로 '명군 루이 14세를 보고 감명받아 태도를 고치기로 했다'고 핑계를 대는데, 견서사들이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정도로 한인들이 보기에도 루이 14세는 훌륭해보였던 듯 하다. 재석과 헤어진 이후 원역사대로 돌팔이에게 속아 이를 몽땅 뽑아버리고 관장을 하여 악취를 풍기고 항상 설사를 싸는 더러운 모습이 되었다고 하며 재석은 그와의 추억을 망가트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 깨끗하던 모습으로 기억하기로 한다. 이후 원역사처럼 과도한 전쟁으로 나라에 망조가 들게 하여 한때 그를 존경했던 재석에게도 비난을 받는다.
루이 14세의 아들. 1661년생. 재석과 동년배이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잘 어울려 지내게 된다. 원역사에서는 왕이 되지 못하고 천연두로 사망했는데, 예수회를 통해 이미 종두를 맞았고 자녀들도 종두를 맞힐 계획이라고 하므로 살아서 왕위를 잇게 될 듯 하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재석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고 권유한다.
루이 14세의 동생.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한 명장이자 유능한 외교관이다. 여성적인 복장을 하고 다니며 항상 주변에 미청년 애인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남색가이기도 하며 성친왕에게 종종 묘한 시선을 보낸다고 한다.
프랑스의 재무대신 겸 해군대신. 재석이 원 역사에서 표트르 1세가 네덜란드에서 선박건조 실습한 것을 흉내내어 프랑스 군함 조선소에서 실습을 한 것에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쩔뻔 했냐고 학을 뗀다.
루이 14세의 육군장관, 루부아 후작. 재석과 대화하며 장 바티스트 콜베르를 은근히 깎아내린다.
- 샤를 드 샤티옹
루이 14세가 재석에게 붙여준 가정교사. 재석에게 프랑스어, 유럽 궁중 예법, 춤을 가르친다. 조부가 1642년 대한에 사절로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 앙드레
베르사유 궁전의 시종.
- 타베르니에[117]
보석상. 재석에게 선물로 사용될 보석을 판매한다.
- 장 바르★
재석이 범선 동현 호를 주문한 후 고용한 프랑스인 선장. 1650년생. 덩케르크 출신이며 사략선장 경력이 있다. 제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건복제의 명으로 동현을 몰고 태평양 항로에서 운송 일이나 좀 하다가 본국에 전쟁이 나자 귀국해버린다.
- 루이 블랑샤르
벽란도에 주재하는 프랑스 동인도회사 상관장. 평민 출신이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출세했다.
11.2. 폴수국
폴수국 국왕. 크라쿠프에서 견서사 일행을 처음 만난다. 조선인은 사실 백인의 후예라는 헛소문을 반쯤 믿는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견서사가 루스국과 동맹하여 폴수국을 정탐하러 온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등 첫 만남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재석이 마상창시합 승리로 그의 정적 차르니에츠키에게 모욕을 주자 신뢰하게 된 듯 하다. 빈 전투 이후 재석에게 올렝카를 데려가도록 해주고 지참금으로 카라 무스타파의 금은보화를 비롯해 상당의 전리품을 나눠준다. 재석, 올렝카가 미주에 정착한 후 6년간은 편지를 단 한 번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지만 이명주가 태어난 후 오랜만에 연락을 보내기로 한다. 그러나 원역사 대로 1696년 6월 17일 사망하여 손녀의 탄생을 알지 못하고 죽었으며, 대한에는 그 소식이 2년 후에야 전해져 올렝카가 위령미사를 드린다.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적녀. 1672년생. 원역사에서는 4살에 사망했으나 작중에서는 폴란드에서 활동 중인 예수회의 영향으로 종두를 맞아 살아남았다. 1682년 베르사유 궁전에 잠시 머물다가 귀국한다.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적녀. 1676년생. 1682년 베르사유 궁전에 잠시 머물다가 귀국한다.
폴란드 귀족으로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정적. 국왕이 성친왕에게 작전회의 참석을 허락하자 국왕에게 망신을 주려고 재석을 도발하며 자신의 휘하 기사 한 사람과 마상창시합을 벌이도록 한다. 일부러 모욕을 주기 위해 경험 없는 초짜를 내보냈으나 실상은 승마 경험만 40년이던 재석에게 그 기사가 패배하며 자존심을 구긴다. 하지만 패배한 후 군말없이 약속을 지켜 재석에게 자기 정예 후사르 300기를 넘겨주는 상남자이기도 하다. 재석이 빌린 병사들을 챙기고 아끼는 모습을 보이자 이에 감탄해 재석에게 호감을 보인다.
- 즈비슈코[119]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부하 기사. 독일어를 구사해서 통역 역할을 맡는다. 빈 전투에 참전한다. 이후 견서사 일행을 따라 루스국까지 동행하며 스몰렌스크를 뺏어간 루스국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 유란드
카르니에츠키의 부관. 재석에게 기병 전술과 간단한 폴란드어를 가르친다. 재석이 빌린 병사들을 잘 챙기는 모습을 보고 감탄해서 폴란드의 귀족으로 눌러앉으라고 권유한다.
11.3. 도이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의 대선제후. 견서사 일행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도이치 영토를 조용히 통과하던 중 우연히 소문을 듣게 되어 베를린 궁전으로 초청한다. 대화 중 과거 이괄이 유주대란 중 도이치에서 약탈을 벌였음을 알려준다. 조선의 군사동원능력을 부러워하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자신을 위로하고 격려해준 재석에게 호감을 느낀다. 이런 심경의 변화인지 아니면 선물한 홍삼 때문인지 원역사와 다르게 빈 포위전에 3000명의 병력을 파견한다. 그러나 빈 해방 후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전리품 분배 과정에 불만을 품고 철수한다.
11.4. 루스국
루스국의 실권자. 대한 측에서는 수령을 무시하고 아녀자가 실권을 잡은 것이 당나라 태평공주가 연상되어 나쁘게 보고 있다. 재석을 폴수국이 만든 가짜 왕자로 의심하거나 다른 대유주 국가들과 달리 친서를 가져오지 않고 홀대하는 것에 불쾌해하지만 예우는 정중하게 해준다. 직접 연극 극본을 쓰거나 조보에 글을 싣는 등의 취미가 있다고 한다. 작고 뚱뚱하긴 하지만 유명한 초상화에서처럼 못생기진 않았다고 한다.[120] 귀국한 표트르에게 실권을 넘기기를 거절하자 표트르를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수도원에 감금된다.
소피아의 측근, 재상이자 애인. 부패한 인물은 아니며 루스국을 서유럽처럼 개혁하려 한다. 재석에게 설득되어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 여행을 추진한다. 그러나 의도는 좋아도 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국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폴란드와 동맹하여 오스만 원정을 추진하고 친정했으나[121] 청야전술에 휘말려 참패한다.[122] 이후로도 실정만 반복하다가 표트르가 권력을 잡자 시베리아로 쫓겨난다.[123]
루스국 차르. 재석과 만난 시점에 12세로 실권은 없으며 대포까지 동원한 전쟁놀이를 벌이는 밀덕 소년이다. 엄청난 거구로 12세에도 키가 170cm를 넘었고 16세에는 190cm를 넘긴다. 견서사를 처음 보고 타타르인으로 오해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재석이 그의 밀덕 성향에 딱 맞는 선물들[124] 을 가져갔고 빈 전투 참전 썰을 풀어서 금세 친해진다. 재석이 표트르와 친해지려는 이유는 어린 표트르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면 대한과 루스국이 충돌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석이 대한이 서유럽과 교류로 발전했음을 설명하며 바람을 넣어 견서사를 따라 '피터 알렉세이예프'란 가명으로 시종인 척 하고 스웨덴, 네덜란드, 잉글랜드를 여행한다. 하지만 원역사처럼 너무 소문이 널리 퍼져서 시종인 척 하는 위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3년이나 같이 다니며 재석과는 친한 형 정도의 사이가 되었고, 한국말도 의사소통이 될 만큼은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5살 때부터 재석에게 술을 배웠고 16살 때 암스테르담 하숙집 딸 마르타와 첫경험을 가지고 애인으로 삼는다. 어린 나이인데도 재석보다 술이 몇 배나 센 술고래에다, 한국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영어, 러시아어를 섞어서 골리친과 소피아를 몇시간이나 욕하는 투 머치 토커다. 소피아는 수행원들이 표트르와 가까워질까봐 수행원들을 자주 교체하지만 오히려 명군의 자질을 보이는 표트르에게 호감을 품는 이들만 늘어나게 된다. 막수구파에 대화재가 나서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소피아와 골리친의 실정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3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며 루스 귀족 딸과 결혼한다. 이후 자신이 17살이 되었다며 친정을 요구했으나 소피아가 거절하자 누군가 자신에게 총격을 가한 것을 계기로 소피아를 암살미수범으로 지목하고 축출해낸다. 정황상 표트르의 자작극으로 보인다.
재석과 헤어진 후에도 재석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써서 대한으로 보냈으며 미주에 있는 재석이 이에 답장을 못 했지만 몇 년이나 장문의 편지를 꾸준히 보낸다. 재석에게 들은 대한의 사례를 바탕으로[125] 루스국을 개혁하고 잉글국의 도움을 받아 해군도 건설하고 있다. 재석에게는 여전히 친한 동생처럼 굴지만 반대하는 신하를 직접 처형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면 쇠꼬챙이로 코를 찢어버리는 등 완전한 폭군이 되었다. 재석이 귀국한 것을 알자 대한에 300명 규모의 사절을 보내 개혁에 필요한 도움들을 요청하며[126] 아들 알렉세이를 5년간 유학보낸다.
3년이나 같이 다니며 재석과는 친한 형 정도의 사이가 되었고, 한국말도 의사소통이 될 만큼은 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5살 때부터 재석에게 술을 배웠고 16살 때 암스테르담 하숙집 딸 마르타와 첫경험을 가지고 애인으로 삼는다. 어린 나이인데도 재석보다 술이 몇 배나 센 술고래에다, 한국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영어, 러시아어를 섞어서 골리친과 소피아를 몇시간이나 욕하는 투 머치 토커다. 소피아는 수행원들이 표트르와 가까워질까봐 수행원들을 자주 교체하지만 오히려 명군의 자질을 보이는 표트르에게 호감을 품는 이들만 늘어나게 된다. 막수구파에 대화재가 나서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소피아와 골리친의 실정을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3년간의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며 루스 귀족 딸과 결혼한다. 이후 자신이 17살이 되었다며 친정을 요구했으나 소피아가 거절하자 누군가 자신에게 총격을 가한 것을 계기로 소피아를 암살미수범으로 지목하고 축출해낸다. 정황상 표트르의 자작극으로 보인다.
재석과 헤어진 후에도 재석에게 정기적으로 편지를 써서 대한으로 보냈으며 미주에 있는 재석이 이에 답장을 못 했지만 몇 년이나 장문의 편지를 꾸준히 보낸다. 재석에게 들은 대한의 사례를 바탕으로[125] 루스국을 개혁하고 잉글국의 도움을 받아 해군도 건설하고 있다. 재석에게는 여전히 친한 동생처럼 굴지만 반대하는 신하를 직접 처형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말을 하면 쇠꼬챙이로 코를 찢어버리는 등 완전한 폭군이 되었다. 재석이 귀국한 것을 알자 대한에 300명 규모의 사절을 보내 개혁에 필요한 도움들을 요청하며[126] 아들 알렉세이를 5년간 유학보낸다.
원역사의 알렉세이보다 2년 늦게 태어났다.[127] 1700년 8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친서를 직접 들고 사절단의 정사 겸 5년간의 유학을 위해 대한을 방문했다. 아버지와 다르게 체구가 작고 유약한 성격이다. 재석은 알렉세이를 잘 교육시키는 한편 동갑인 이은과 친구가 되게 하고 가능하면 대한에서 결혼까지 시켜서 개혁군주 겸 친한파[128] 로 만들 계획이다. 이 계획대로면 원역사와 다르게 표트르에게 찍혀 처형당하는 대신 제위를 이을 듯 하다.[129] 재석의 계획대로 이은이 알렉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서로 평대할 정도로 동격의 격의없는 친구가 되었다. 성당에서 마주친 예왕의 장녀 이연수를 짝사랑한다.
- 마르타[130]
암스테르담에서 표트르가 묵었던 하숙집 딸로 표트르가 16살 때 동정을 떼준 첫경험 상대. 이후 애인이 되어 표트르를 따라 루스국까지 간다. 표트르는 모후가 지어준 짝과 결혼했지만 마르타를 더 아꼈다.[131] 한동안 정부로 지냈지만 표트르가 황후를 수도원으로 유폐시키면서 황후 자리를 차지할 듯 하다.
본작에서 등장한 세계사 변화의 큰 분기점1이다. 원역사에서 동명이인이 이후 로마노프 왕조의 조상인 만큼, 원역사와 달리 알렉세이가 제위를 계승하든 본작의 마르타가 계승하든 러시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본작에서 등장한 세계사 변화의 큰 분기점1이다. 원역사에서 동명이인이 이후 로마노프 왕조의 조상인 만큼, 원역사와 달리 알렉세이가 제위를 계승하든 본작의 마르타가 계승하든 러시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의 두번째 황후이자 표트르 1세의 어머니. 7세 때 7차 견서사를 만난 적이 있어 재석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표트르가 여행을 떠나려 하자 통곡하며 말리지만 표트르의 결심을 꺾지 못한다.
- 프랑수아 달레
프랑스 출신 루스국 군사고문. 계급은 중령 → 대령. 성친왕에게 뇌물을 받고 표트르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표트르의 서유럽 여행에 호위 역으로 동행한다. 15년 후 재석이 건흥제로 즉위한 후 대한에 보내는 사절단에 부사로 파견되어서 재회하게 되었다. 이후 알렉세이의 수행원으로 대한에 체류하게 된다. 위그노 출신으로, 자신이 러시아로 떠나게 만든 루이 14세와 카톨릭 교도들을 극도로 증오해서 한양의 프랑스인 커뮤니티나 재석의 측근인 삼총사들과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이다.
- 바셴카
7차 견서사 당시의 이형준이 루스국에서 동침했던 연인. 당시 14살로 이형준보다 무려 20살 연하였다. 보로네시 지방 보야르의 딸로 아버지가 모스크바에 갈때 데리고 갔다가 이형준과 만나 눈이 맞았다. 이형준과 침대에서 뒹굴다가 아버지에게 걸렸는데 아버지는 이형준에게 바셴카를 정식 부인으로 맞아들일건지 물었으나 이형준이 대답을 못하자 두들겨패서 쫒아내고 바셴카도 두들겨패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사이 임신한 이형준의 아이 보리스를 낳았고 세묜이라는 카자크 남자에게 시집가서 살았다고 한다. 조선 대공인 성친왕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동네 총각 대하듯 편하게 얘기하고, 이형준에게 한을 품기는 커녕 자기 아들을 맡기고 뒤도 안 보고 떠나는 대범하고 쿨한 성격이다. 작가가 언급한 외모 모델. 주인공이 자신이 왕으로 산 인생은 물론이고 재석일 때 현대에서도 저런 여성은 못 봤다고 하고 감탄하고, 정호찬은 조선 어디에도 저런 여성은 없을 것이라고 혀를 내두를 정도. 평범한 러시아 아줌마보다 더 건장한 체격이고 14살 때에도 덩치는 컸다고 하는데 얼굴에는 젊을 적의 미모가 남아있다. 이형준이 붙여준 한국어 이름은 곱분이. 대한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된 드미트리의 말로는 여전히 정정해서 허벅지만한 통나무를 나르고, 날뛰는 말을 붙잡아 세울 수 있다고 하며, 드미트리에게 보리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니 죽었다면 미사 드리게 죽은 날짜를 알아오라고 하는등 성격은 여전하다.
- 드미트리
바셴카와 카자크 세묜의 아들, 즉 보리스의 이부동생. 이부형 보리스를 배웅하고 모친을 집에 모셔오기 위해 모스크바 여행에 동참한다. 표트르의 대한행 사절단의 일원으로 방문하여 15년 만에 이부형과 재회했다.
- 오스타프
바셴카와 카자크 세묜의 아들로 보리스의 이부동생이자 드미트리의 친동생. 큰형을 찾으러 간 둘째형을 대신해 모친을 봉양하고 집안일을 챙긴다.
11.5. 잉글국
견서사 일행 방문 시점 잉글국왕. 도움만 된다면 이교도의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는다며 종두를 맞았지만 독실한 신교도인 앤 공주가 본인이 안 맞는 것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종두를 맞히지 않아서 손녀들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곧 태어날 자신의 아들 밑에서 신교도와 가톨릭교도가 평화롭게 융합하기를 바라고 있다. 재석은 그가 곧 명예혁명으로 쫓겨나는 것을 알지만 몇 번 대화해본 뒤 그의 이상주의적 성향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132] 명예혁명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고 결국 명예혁명으로 퇴위당한다. 해군 제독의 경험으로 인해 조기 경보망의 중요성을 잘 알아 조선에서 열기구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 제임스★
제임스 2세가 1688년 득남한 아들. 재석은 이 득남 때문에 제임스 2세가 퇴위당하는 것을 알기에 안타까워하면서 겉으로는 축하를 해준다.
재석 방문 시점의 왕립확회 회장.
케임브릿지 대학교 교수. 뉴턴 이전에 유럽에도 조선에서 전래된 미적분학을 비롯한 레이디 이(상빈 이씨)의 수학적 업적들을 모두 받아들였지만 증명 없이 결과물만 전해졌는데, 뉴턴은 이에 대한 증명을 모두 해낸다. 대유주에서는 결과물만 내놓은 레이디 이보다 늦었지만 증명을 해낸 뉴턴이 더 뛰어난 학자라고 여긴다[133] .
존 번의 전임 왕립학회 회장이자 해군 관료. 재석은 현대 시절에 유명한 그의 일기를 읽어본 것으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재석과 표트르에게 해군 육성 방안에 대해 강의한다.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왕립학회원. 75~76년 주기로 돌아오는 혜성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재석이 조선에서도 핼리 혜성이 관측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알려줘서 근거를 보탬해준다.[134] 이 혜성에 대한 대화를 계기로 왕립학회에서 재석과 가장 친한 사이가 된다.
런던 시장.
- 존 처칠★
원역사대로 명예 혁명에서 제임스 2세를 배신한다.
- 로버트 헌팅턴
벽란도에 주재하는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상관장. 숙조의 장례 후 연회에서 국상 기간에 건배를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본국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 편을 들고 있는 만큼 대한이 필리핀과 전쟁을 결정하자 중재자를 자처하고, 첫 승전을 거둔 후에도 끝까지 중재를 자처하지만 재석이 필리핀을 점령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내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상관을 폐쇄하기로 한다.
원역사와 똑같이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다. 사실 종두를 맞아 살 수도 있었으나, 예수회에 대한 적대감과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고집을 부려 종두를 거부하는 바람에 죽음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11.6. 내달국
네덜란드의 국가원수인 총독, 장인인 제임스 2세가 결국 의회에게 밀려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야심을 보인다. 대한과의 우호관계는 계속 유지하며 양국의 공존공영을 바란다. 명예혁명 결과 원 역사대로 영국 국왕에 오른다.
- 다니엘 판 헴스케르크
벽란도에 주재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관장. 본국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 편을 들고 있는 만큼 대한이 필리핀과 전쟁을 결정하자 중재자를 자처하고, 첫 승전을 거둔 후에도 끝까지 중재를 자처하지만 재석이 필리핀을 점령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내자,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상관을 폐쇄하기로 한다.
11.7. 서반아
11.7.1. 본국
바보왕으로 유명한 서반아 국왕. 직접 등장은 없었고 재석 빙의 이전의 성친왕이 만났다. 원역사에서처럼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원역사대로 1700년 사망하지만 자신이 원하던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있었다.
원역사에서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천연두로 죽었던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종두법으로 인해 살아남아 호세 페르난도 1세라는 이름으로 서반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본작에서 등장한 세계사 변화의 큰 분기점2로, 단순히 왕 한명이 바뀐 것이 아니라 보르본 왕조가 아닌 바비에르 왕조가 스페인을 다스리게 되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전개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본작에서 등장한 세계사 변화의 큰 분기점2로, 단순히 왕 한명이 바뀐 것이 아니라 보르본 왕조가 아닌 바비에르 왕조가 스페인을 다스리게 되었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전개도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 이사벨 마리아 안나
빌라다리아스 후작의 딸.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의 미녀. 재석 빙의 이전 성친왕이 열흘간 끈질기게 구애하여 관계를 가졌고,[135] 1682년 사생아 디에고를 낳았다. 하지만 견서사 일행이 아직 대유주 내에 있었음에도 연락해서 디에고의 출생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본인은 추방된 망나니 황자의 정부가 되느니 시골 백작의 아내가 되는게 낫다고 생각했고, 부친인 발라다리아스 후작은 유럽을 떠도는 성친왕이 아이를 제대로 돌볼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사생아를 낳았음에도 이후 마드리드에서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성격은 바셴카처럼 쿨한 것으로 보이며 재석이 초상화를 보자마자 이사벨을 떠오른 것을 보면 빙의 전 성친왕에게도 기억에 남을만한 외모였던 것으로 보이며, 20년 넘은 일이라 기억하지 못 한 이형준, 정호찬도 초상화를 보고 기억해낸 것을 보면 성친왕의 행각으로 인해 곤혹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7.2. 신서반아
겔베 백작. 신서반아 부왕. 재석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와병으로 귀국한다.
겔베 백작의 후임 신서반아 부왕, 아즈텍 제국 마지막 황제의 후손인 목테수마 여백작의 부군. 재석에게 대한에 식량을 제공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로 카를 대공을 지지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해임당하고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알부케르케 공작.[136] 드 발라드레스 이후 부임한 신서반아 부왕. 오르테가 주교가 필리핀의 한인 불법거주자들을 모조리 처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고 대경하고 이를 취소하고 현상유지를 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미초아칸 주교. 겔베 백작이 귀국하자 신서반아 부왕 대리를 맡는다. 대한 황실이 개종하지 않은 것과 예수회만 받아들이는 것 때문에 악감정을 품어서 대한에 을병대기근이 닥친 것은 황실이 개종하지 않고 자유로운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폭언을 하고, 식량과 수송선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곧이어 부임한 호세 사르미엔토 드 발라다레스가 사과 서한을 보냈고 대한 입장에서도 신서반아와 대립해서 좋을 것이 없기에 문제삼지 않는다. 1701년 드 발라다레스가 해임되자 다시 신서반아 부왕대리 직을 맡았다. 이후 대한이 적국인 프랑스와 가까운 관계기 때문에 불안요소가 되어버린 필리핀의 대한 불법 이주민들을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서반아 총독부 행정망에 편입해야 한다고 독단적으로 필리핀에 명령하여 결국 대한-스페인 전쟁의 명분을 주고 만다.
11.7.3. 서반아령 필리핀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 임기는 1690년부터. 을병대기근 때 곡물을 수출한다. 군인 출신이지만 행정가 경력이 더 길고 대한과 우호 관계를 유지한다.
- 도밍고 자발부루 드 에체바리★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 파우스토 크루자트 이 곤고라의 후임으로 군인 출신이며 필리핀 남부의 이슬람 토착 왕국들을 정복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신서반아 부왕대리 몬타네스 주교가 한인 마을을 총독부 휘하로 편입시킨다는 결정을 따른다. 군인답게 정치적 고려 따윈 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나, 한인 불법체류자들의 잠재적 위험은 충분히 인지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던 차에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한인 마을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대군을 편성하고, 여차하면 인질로 쓸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한인들을 따로 모아놓고, 대한의 역습을 대비해서 부족한 전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충하려는 치밀한 모습을 보인다. 진상조사를 위해서 마닐라를 찾은 김만중에 맞서서 밀리지 않는 정치력과 노련함을 보이지만, 결국 논리에 밀려서 "한인들을 화형에 처하게 방조했고, 위폐를 불태워서 황실을 모독했다"는 명분을 내주게 된다. 대한이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인으로 위장한 첩자들을 데려가자, 마닐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대한군에 호응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개종한 이들을 제외하고 수만명을 모두 학살해버리는 잔인한 면모를 보인다. 이미 대한의 침공이 시작되었는데 후임 신서반아 부왕 알부케르케 공작이 한인 불법체류자들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취소하는 명령이 늦게 도착하자 아연실색한다. 대한의 침공이 시작되자 상륙한 대한군에 야간 기습을 감행한다.
- 고메스
서반아령 필리핀 소속 대위. 스페인인, 필리핀 원주민, 일본인 혼성 부대로 한인 불법체류자 마을 하나를 습격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습격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적을 잔혹하게 대하는데에는 주저하지 않는 군인이지만, 포로들을 다 화형에 처한다는 방침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대한 본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거라고 우려하는 넓은 시각을 갖고 있다.
- 가르시아
2부의 광신도 가르시아와 이름만 같은 도미니코회 수사. 2부의 동명이인에 못지 않은 광신도로, 한인 마을에 개종을 요구하러 찾아갔다 돌과 소금을 맞고 쫓겨난 원한으로 마을 습격에 동참한다. 포로들을 마닐라로 끌고 가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원래 방침이었으나, 이교도들은 재판을 받을 권리가 없다며, 남자들은 다 화형시키고 여자와 아이들에게만 개종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해서 이를 관철시킨다. 그래도 광신도인 만큼 신념은 확고한지, 아니면 성직자의 양심은 있는건지 대한군의 침공 시 피난을 거부하고 원주민 천주교도들과 함께 있다가 대한군에 잡혔다. 참수형을 당하고 수급은 대남도 토인병의 전리품이 되며 나머지 시신은 강물에 던져질 예정이다.
[1] 애초에 올렝카가 받은 작위도 상희가 건복제에게 요청해서 내려진 거였다. 상희는 2부에서 후궁으로 살며 측실의 설움을 잘 알고 있고, 어차피 수십년을 함께한 자신에 비하면 재석의 총애를 겨룰만한 경쟁자조차 되지 않으니 올렝카에게 못되게 굴 이유가 없다.[2] 하지만 올렝카 야설을 쓰던 자들은 재석에게 고소당하고 시베리아로 전가사변되는 인실좆을 당한다.[3] 재석은 파이우트족 토벌로 자리를 비워 돌잔치를 같이하지 못했다. 돌잡이 결과를 듣고 재석은 군법무관이 될 것으로, 상희는 왕족이라 족친위에서 복무하고 공부를 할 것으로 해석했다.[4] 건복제 앞에서도 이러는 바람에 일부 대신들의 비웃음을 샀지만 건복제에게는 좋은 인상을 준다.[5] 작중 날짜가 정확히 나온 7월 11일 이후 출생이다.[6] 금발 백인과 한국 황인의 자식이 금발로 자라날 확률은 아주 낮다. 대부분 아기라서 머리 숱이 적기 때문에 옅은 색으로 보이는 것으로 자라면서 엄마가 금발 백인인 축구선수 박주호 딸 나은이처럼 갈색 머리로 바뀐다.[7] 12월 30일에서 며칠 전.[8] 실존 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의 친구이자 사돈이다. 홍가신의 아들인 홍비가 이순신의 딸과 혼인했다.[9] 졸본천 옆의 지명에서 나온 말로, 고주몽이 나라를 세운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찾아온 디에고와 비슷한 주몽과 연관 있는 지역에, 디에고의 출신지인 비스카야 지방에서 따왔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10] 자신이 빙의하기 이전의 성친왕이 임신시킨 아들이라 재석 입장에서는 쾌락 없는 책임이고, 2부의 이성처럼 오래 만나면서 정이 든 것도 아니니 애정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11] 디에고의 원래 계획은 대한까지 가서 태황의 아들임을 인정받은 뒤 그 지위를 바탕으로 칼레아 후작에게 결혼을 인정받는 것이었으나 왕복 3년이나 걸리는 시간동안 칼레아 후작이 도로테아를 미혼 상태로 남겨둘 리 없으니 그냥 데려가기로 한다.[12] 상희 입장에서는 친한 언니의 의동생이 의붓며느리가 되는 요상한 관계가 되었다.[A] A B 작중 묘사 없음. 원 역사 숙종에 대응해서 추정.[B] A B 작중 묘사 없음. 추정.[13] 자신의 후계 문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카리스마는 압권이다.[14] 이 면모는 마치 현대인 같은데, 주인공이 빙의한 장조의 언행의 영향 아닐까 싶기도 하다.[15] 그러나 이후 성친왕의 빙의 전 패악질이 알려지자 오히려 자비롭다고 할 정도로 평가가 바뀌었다. 실제로 이후 묘사를 보면 예왕을 죽이고 나서 스스로도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는 등, 냉혹하긴 커녕 가족에 대한 애정은 오히려 커녕 남다른 편. 당장 재석이 빈 공방전에 참전했을때 싸늘한 반응을 보였고, 귀국하자마자 수 년 전 말도 없이 전장에 나간 일부터 책망했는데, 당시엔 냉혹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 역시 되돌아보면 실제로 가족이었던 성친왕을 내심으로 많이 걱정해서 심란했던 것으로 보인다.[16] 생각을 정리할 때마다 한대씩 태우는 정도였는데, 무인지변 이후 친국을 시작하기 전에는 3부 시작 이래로 처음으로 줄담배를 피웠다. 그만큼 혈육을 처벌하는데 심적으로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17] 그런 몸으로 21년이나 재위한 것을 보면 자기 관리는 철저했던 듯 하다.[18] 건복제가 이미 화병으로 쓰러진 적이 있는 것을 아는 반군 측에서 건복제가 화병으로 쓰러지리라는 것을 기대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서 조정이 한동안 마비된다.[19] 혹시나 싶어서 상희 얘기는 빼고 말한다.[20] 재석 입장에서는 어차피 건복제는 믿지 않을 것이고, 설사 믿는다 해도 오늘내일하고 있었기에 건복제가 이 이야기를 퍼트려도 주변에서는 헛소리를 한다고 여길 것이라는 계산까지 하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건복제가 금위사 보고와 성친왕의 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성친왕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고, '무종대왕의 전설'을 떠올린 것을 보면 정말 믿고 안심하고 편히 갔을 수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21] 어차피 남편이 조정과 군대를 모두 장악하고 있으니 보위를 노리고 난동을 일으킬 수 없다고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22] 이 때문에 민씨를 며느리로 삼고 싶었으면서도 끝까지 고집 부릴 수 없었다고 한다.[23] 해당 인물은 1680년에 사사(賜死) 당했다. 실제 생몰년으로도 타임라인이 얼추 맞고, 작중 조선의 정치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안정됐으니 더 오래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4] 건강한 아들딸들을 무려 11명이나 낳았다고 한다.[25] 작중 묘사 없음. 충무대왕 이순신 생가 추정.[26] 재석은 2부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꿈을 꿔서 울면서 상희에게 토로할 정도로 '나도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며 어머니의 부재를 슬퍼했는데 3부에서 소망이 이루어진 셈이다.[27] 대신 건복제에게 부탁하여 성친왕의 측근인 이형준과 정호찬을 겨우 견서사에 동행시켰다.[28] 경종비로 영조의 형수인 선의왕후를 왕대비로, 숙종비로 영조의 계모인 인원왕후를 대왕대비로[29] 그렇지만 평소와 같이 대하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본인도 어떤게 맞는지 번민하고 있는 듯 하다.[30] 금천 강씨 집안은 현재 진주 강씨 인헌공파로, 조상 중 유명인으로 강감찬이 있다. 그리고 명군 세계관이 아닌 실제 역사의 조선 중기 조선 왕실과 혼인한 적이 있는데 그 유명한 민회빈 강씨다.[31] 재석은 예왕이 수작질을 부린게 아닐까 의심했지만, 3부 79화를 보면 건복제는 성친왕 본인이 실의에 빠져 술을 퍼먹어서 첫날밤을 치루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귀국 후에 알아보니 성친왕 스스로 술을 쳐먹은게 맞았다.[32] 커뮤니티에서는 성친왕비 강씨가 상희일 거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빠르게 퇴장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밖에 죽었다가 바로 상희가 빙의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댓글에 달렸으나 작가가 그러기엔 강씨 나이가 많지 않겠냐며 부정적으로 답했다. 이를 보면 상희는 무조건 10살 전후의 여자아이에게 빙의하는 것으로 설정한 듯. 이후 상희는 새로 간택된 성친왕비로 등장했다.[33] 처음에는 1643년생이라고 나와서 그럼 열조는 9살때 첫 아들을 낳은 것이냐며 잠시 논란이 되었으나 작가가 오타였다며 1653년생으로 정정했다. [34] 대기근 와중에도 사냥을 할 정도이다. 그나마 백성들의 토지를 침범하지 않고 잡은 사냥감은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면 황족으로서의 보신책일 뿐이지 작중에서나 현실 역사에서나의 막장 대군까진 아닌 것 같다.[35] 황실의 일원인 만큼 예왕이 제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의 가족들이 살아나기 어렵다고 보고 성친왕을 미는 보신책일 수도 있다.[36] 선황 및 현황의 부마들 포함, 그나마 족친위들 중 제대로 된 종친들[37] 재석은 활보다 총을 주로 쏘긴 했지만 그래도 무려 3번의 인생동안 활쏘기를 연습했는데 겨우 20여년 연습한 영해공이 재석과 실력이 비슷한 것이다.[38] 적자는 50세에 이형준보다 일찍 사망한다. 당시 기준으로 딱히 단명한 것은 아니고 70대가 넘도록 살아있는 이형준이 장수한 것이다. 본처는 드센 성격이라 이형준은 계집질을 좋아하지만 첩은 들이지 못했다. 서자 보리스를 데리고 귀국한 후에는 본처에게 참교육 당해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됐는지 원래 쓰던 안경 대신 자수정으로 만든 선글라스를 끼고 나온다.[39] 재석이도 처음엔 이형준이 꼰대라고 생각해서 정치적 방패막으로 쓸 생각이었는데 그의 진면모를 알고 자신은 벼락맞아 죽어야 한다고 자책할 정도의 참스승이다. 후일 밝혀진 빙의 전 성친왕의 망나니짓들을 보면 거의 성인 수준이다.[40] 성친왕을 잘못 교육시킨 것을 책임지라는 의미도 있었고, 황후의 부탁으로 성친왕과 친한 사람을 넣어준 것이기도 하다.[41] 여담이지만 서자 보리스와 카자크 의형제 5인이 원체 공부와 담을 쌓아서 한국어와 자기 이름 쓰는 법, 삼강오륜만 간신히 배우게 했다지만 이들은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무인지변 때 자신의 가족들보다 주군인 성친왕의 가족들의 안위를 우선시한다. 이걸 보면 교육자로서의 능력은 탁월한 것으로 보인다.[42] 재석이 태제 책봉 이후 경연에 참석해서 경연관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자 세간에선 견서사 파견 중에 망나니 성친왕의 학식이 풍부해졌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이런 급격한 승진에도 반발이 없었다.[43] 원체 공부와 담을 쌓아서 높은 수준의 교육까진 못 시켰지만, 유학의 가르침은 의외로 잘 받아들여서 무인지변 때 흔쾌히 자신의 가족들보다 재석의 가족들을 챙겨서 공을 세운다.[44] 정호찬이라는 이름은 슈타인호프 작가의 지인의 이름으로, 슈타인호프 작가의 모든 대체역사 소설에는 정호찬이라는 이름의 가상인물 캐릭터가 보너스로 등장한다. [45] 경주 정씨인 1부 정호찬과 달리 연일 정씨로 정몽주의 직계 후손도 아니다.[46] 각각 1669, 1670, 1672년생.[47] 이사벨라는 정호찬의 막내아들보다도 나이가 어리다. 본처는 키가 150cm 정도로 작지만 관대한 성격이라서 양첩을 들인 것을 비난하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은 본처와 이사벨라는 각각 오다 마코와 셀린 패러크를 모델로 할거라고(...)[48] 본래 왕세자에게만 붙여줬지만 칭제한 후에는 다른 황자들에게도 붙여주는 것으로 바뀌었다.[49] 묘사를 보면 한 편이 되달라고 부탁하거나 반란군에 가담하지 말아달라는 협박도 아닌 성친왕은 살아있고, 구하러 가니 막지 말라는 한줄 뿐이었는데, 장희재에게는 마음을 흔들어 놓는 편지였다고 한다.[50] 성(D' Aramitz)이 삼총사의 아라미스와 비슷해서 재석은 혹시 아라미스의 모델이 된 실존인물인가 싶어 루이 13세 때 총사대에서 근무한 적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그러나 삼총사의 아라미스의 모델이 된 인물은 앙리 다라미츠이며 3부 시점에 이미 고인. 친인척일 수는 있다.[51] 자혜원이 이태원(梨泰院)에 위치해있어서 같은 음을 가진 이태원(異胎院)이 자혜원의 멸칭이 되었다. 즉 다른 배에서 났다는 뜻의 모욕에 가까운 멸칭이다.[52] 그런 그도 재석이 마상창시합 결투를 승낙하자 처음으로 동요를 드러낸다.[53] 재석이 열심히 변호했고 다른 문책을 내리기 전에 건복제가 사망해서 여기서 그친다. 그가 견서사에서 한 보고 덕에 재석의 이미지가 개선됐으니 재석에게도 은인이었다.[54] 다리의 상처가 감염된 아파치 포로를 살리기 위해 다리를 잘랐는데, 당사자는 자신을 전사가 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며 대한에 증오를 품게 된다.[55] 모든 사람을 멀리했던 의심스러운 태도와 예왕과 최신원의 대화에서 독약을 쓸 수도 있다는 언급이 복선이었다.[56] 4회차 인생인 재석이 아니더라도 너무 어설픈 태도라 의심을 안할 수 없었다. 외과 전문가가 뜬금없이 벌벌 떨면서 한 번도 올린 적 없는 보약을 대령하니 뭐...[57] 암살 시도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공론화해봤자 예왕을 그것만으로 범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고, 황실의 명예가 실추됨은 물론 김종건과 이진원이 처벌받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미주에서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내서, 예왕으로 하여금 암살시도를 눈치챈 성친왕이 공론화를 막고 조용하게 둘을 처리해버렸다고 믿게 만드려는 것이다.[58] 남정네만 수백명이 드글대는 곳에 자기 첩을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는 등.[59] 작가의 말에 의하면 난을 일으킨 이상 승리한다면 김종건의 생존여부는 아무 상관 없고, 패배한다면 성친왕 암살교사 혐의 정도가 추가되는 것쯤이야 아무 상관이 없어지기 때문에 김종건을 응징하지 않았다고 한다.[60] 포르토와 다토스는 대놓고 삼총사를 노린 캐릭터인 듯 하다. 2부의 임꺽정, 서림과 비슷한 설정인 듯. 달타냥의 모델인 실존인물 샤를 드 달타냥 백작에 대한 언급도 짧게 나온다.[61] 이때 재석이 자기 가족들만 챙긴다며 미안해 하자, 아버지 이형준에게 배웠다며 "주군은 부모와 같으니 머리와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는 유학 구절을 읊으며 괜찮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재석이 장조 시절 북방에 친정을 갔을 때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를 선동해서 난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수감된 사관들이 자살하면서 유서에 남긴 말이기도 하다. 이형준은 불충분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그가 시킨 교육은 빛을 발했다.[62] 모친이 서반아인이고 출생 시기도 다르므로 원 역사의 희빈 장씨와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로 봐야한다.[63] 두돌도 안된 아기인데다 서녀이기 때문에 건복제가 봐줬다고.[64] 장희재의 말로는 본인이 속죄의 의미로 혼인을 청했다고 하나, 재석은 만일 사실이라면 장옥정이 현실 역사의 그 사람보다 훨씬 영리한 것이고, 장희재의 뜻이라면 정치적 감각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65] 처음엔 이고르까지만 한국식 이름이 알려져서 나머지 카자흐들도 이형준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만큼 다 이씨 성을 받은 것으로 보였으나, 다른 이름들을 보면 그냥 본명에서 음차한 이름들을 쓴 듯.[66] 현실의 타호 호수.[67] 현실의 콤스톤 은광[68] 태도 변화의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성시균이 본국을 다녀올 때 이미 태자가 앓아 누웠고, 이로 인해 보위의 행방을 두고 정쟁이 벌어질거라고 예측하고 자신이 호의를 가진 성친왕이 불리해지지 않도록 거리를 두고 권한 행사를 더 엄격하게 하도록 유도한 것일 수 있으며, 재석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69] 실존인물 안용복은 부산 출신에 수군에 복무했다는 것 말고 별 정보가 없어서 재석도 이 안용복이 그 안용복이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출생지도 확실히 다르고, 장희빈 남매와 마찬가지로 실제 인물을 모티프로한 가상 캐릭터라고 봐야할듯.[70] 형식상으로 권율의 5대손이지만 권익경은 권율의 양자이므로 유전적으로 직계는 아니다.[71] 재석이도 자신의 전생에서 각별한 인연이었던 권율의 후손인 그가 곤경에 빠지길 원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72] 반면 남대문 수문장은 우물쭈물하다 남대문을 늦게 개방하는 바람에 4백명 이상의 압사자가 발생한다.[73] 여담이지만 2등 공신들 중 제일 젊고 제일 벼슬이 낮다. 재석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데다가 한양대화재 때 수많은 인명을 구한 것까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74] 이렇게 전속 대송인을 두는 사례가 없었고 성친왕의 악명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세간에서는 성친왕은 대체 얼마나 사고를 칠 생각이길래 전속 대송인을 두는건지 우려한다.[75] 다만 구휼을 워낙 많이 하기에 세간에서는 좋은 마차를 쓰는 등의 사치스러운 면모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본다.[76] 금위사 첩자들을 잡아 고문할때 직접 참관하며 은근히 즐겼다고 한다.[77] 다만 이 시점까지는 성친왕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과거의 악행 문제 때문에 예왕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78] 예왕은 성친왕이 여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는걸 못 믿어서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하기 끔찍해서 자살을 시도한건데, 재석은 그런 깡이 있을줄 몰랐다고 감탄했다.[79] 그제서야 성친왕이 정말 옛날의 성친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80] 세도정치로 유명한 신 안동 김씨가 아닌 구 안동 김씨다.[81] 상희에게 '성친왕이 새 사람이 된 건 오직 올렝카 덕'이라는 의심암귀를 심어주려고 하지만 인생 4회차인 상희에겐 그저 귀여워보일 뿐이었다(...)[82] 원래는 분가했으니 연좌의 대상이 아닌데 그의 경우에는 난이 성공했으면 황태자가 되었을테니 절대 용서할 수 없어서 연좌를 시키기 위해서 강제 이혼을 시킨 것으로 보인다.[83] 물론 표트르가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어린 소년의 한때 짝사랑일 수 있어서, 일단은 러시아인들이 갈 때는 그녀를 방에서 못 나오게 하도록 지시한다.[84] 엄청난 동안 미녀 였는데, 30살은 더 먹은 것 같은 얼굴이 됐다고.[85] 과거 재석이 하던 거열형과 달리 소를 이용해 찢어죽이는 것이 아닌 머리와 사지를 잘라 죽이는 것이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참수부터 한 뒤에 팔다리를 자르는데 최신원은 산 채로 팔다리부터 자르고 머리를 자른다. 그나마 임해군처럼 형을 집행하기 전에 죽는걸 막기 위해서 아편을 복용해서 고통은 덜한 상태로 처형당했다.[86] 시가전에서는 몇번 못 쏠 총포를 지닌 수어청 병사들보다는 냉병기를 장비한 한성부 병사들이 더 낫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훈련도감군은 총포를 쏘니 대부분 오군영 공병대 출신들인데다가 화재와 싸우는데 익숙한 금화군 병사들에게 전투력 약한 한성부 병사들의 무기와 장비를 들려서 양익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대문 전투 전 항복 제의는 송양지인이 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87] 결국 그가 우려했던 부분들은 다 현실이 되어서 예왕군의 패배에 일조했다. 다만 본인도 실책을 저질렀는데, 훈련도감군과 싸우는데 수적 우위를 살리려면 야밤에 기습해야 했는데 아군의 피해가 우려되어서 아침에 정면승부를 건 것이었다.[88] 3부 시점에서는 머리를 자른 다음 팔다리를 자르는, 사실상 참수형이다.[89] 원역사에서는 효명옹주의 남편, 즉 인조의 부마였고 조부 김자점이 몰락할 때 함께 처형된다.[90] 태황의 친부가 살아서 대원왕에 봉해져서 혼란이 발생하려는 미증유의 상황을 막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붙일 셈이었다.[91] 성친왕이 결국 빙의 전의 본색을 드러내서 폐태제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휴 일어난 일을 보면, 어짜피 김세룡은 작중 역사에선 명신 김자점의 후손이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각승상이니 비상한 결단까지 해서 사위를 태황에 올릴 절박함이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에 그냥 살기로 했을 수도 있다.[92] 비록 성친왕이 개과천선했다는 것은 알아도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이 씻길 정도는 아닐 수 있고,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성친왕은 철부지였을테니 편견이 여전히 있을 수 있으며, 정치적 고려 없이 예왕의 아들이 나이도 적절하고 인품과 학식도 훌륭하니 예왕의 편을 들었을 수도 있고, 모든게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93] 딸의 죽음으로 인한 원한은 잊을 수 없어서 성친왕 편을 들 수도 없지만 태황을 배신할 수도 없기에, 예왕파가 다수인 조정에서 경거망동하지 못 하게 자신이 편을 드는척 하면서 다 주저앉히고 자신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진 것으로 보인다.[94] 민성윤이 한 것은 없으나, 정치적 배경에 더해서 둘째아들이 공을 세운 공으로 보인다. 실제로 원로나 고위 대신이 한 것 없으면서도 정치적 배경으로 공신이 되는 건 흔히 있던 일이다. 해당 문서 참조.[95] 물론 김세룡 뜻대로 되었더라도 성친왕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 애초에 안 될 일이었다.[96] 원역사에서는 모반 혐의로 김자점에게 처형당한 그 인물로 보인다.[97] 작가에 의하면 실존인물 이완과는 다르다고 한다.[98] 만약 대한에 적대적인 세력이 하와이를 차지한다면, 이를 근거지로 삼아 북대동양 전체를 뒤흔들수 있으니 다른 세력이 차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점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99]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김세룡의 은인이 되었다. 김세룡은 예왕의 음모에 깊게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금위사 감시망이 무력화 되었으니 난이 일어나기 전 김세룡이 했던 언행들은 다 증언이 불가능해져 버렸고, 그 결과 김세룡은 예왕을 손절하고 장남을 시켜 무인지변을 고변한 것 만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가문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100] 자기 첩을 귀비라고 부르는 것은 태황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살벌했던 무종 시기였다면 이것 하나만으로 예왕은 의금부에서 손톱이 뽑혔을 것이다. 하지만 건복제는 술에 취해서 아끼는 첩에게 애정표현이 과했다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고, 성친왕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예왕을 숙청하는 것은 후계 구도를 불안정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기로 한다.[101] 원역사의 김만중은 1692년 사망했지만 귀양생활을 하지 않아서인지 수명이 늘어났다. 현재 기준으로도 83세까지 장수한 원역사의 송시열이 훨씬 평탄한 정치인생을 겪은 작중 역사에선 더 장수해서 90세까지 살고 자의로 목숨을 끊었을 정도이니 충분히 가능하다.[102] 대한과 서반아령 필리핀 총독부와의 전쟁이 임박한 지금, 제목만 같고 내용은 완전히 다른 '사씨남정(南征)기'를 쓰는게 아니냐는 독자들의 드립이 있다.[103] 여동생 장옥정과 마찬가지로 현실의 장희재와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104] 그러나 장옥정이 그다지 총명하지 않다는걸 알아서 이 편지도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친왕을 직접 곁에서 본데다가, 어짜피 태제로 가책봉됐는데 난을 일으킬리 없다며 예왕으로부터 온 격문은 믿지도 않았다.[105] 아무리 자신이 공신이 되었다지만 한미한 집안에 '역적의 첩'이란 오명까지 쓰게 되었으니 장옥정이 좋은 혼처를 구하기는 틀렸다고 보고, 공신인데다가 태제의 최측근이라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데다가 대한의 관습은 신경쓰지 않을 보리스에게 재혼을 권한 것으로 보인다.[106] 이때 초혼도 아니니까 당사자들이 서로를 알아야 한다며 직접 마주보고 얘기를 나누고 결정하게 했다. 재석은 중인 집안이라 이런 면에서 개방적인가 하고 내심 놀란다.[107] 원 역사에서 이순신의 장남 이회는 이지백, 이지절 두 아들이 있었고 둘째 이지절은 아들이 없던 이회의 동생 이예에게 입적한다. 이순신의 장손 이지백은 아들이 없어 이지절의 장자 이광윤이 이지백에게 입적하므로, 이원기와 여동생인 태후 이씨는 가상인물이다.[108] 일단 허락이 난다고 가정을 하고 일을 준비하자는 제안이었다.[109] 이때 아직 살아있던 원사웅은 네가 조국에 가봐야 실망만 할 것이라고 가지 말라고 했다.[110] 작중에서는 선조 때 신설된 직위이며, 불교계의 캔터베리 대주교에 해당한다.[111] 묘호 언급 안됨[112] 실제 역사에서는 부왕보다 먼저 1707년 사망하여 그의 아들 쇼에키가 세손으로 왕위를 계승한다.[113] 실존인물 정지룡과는 이름만 같은 가상인물이다. 작가의 언급에 의하면 실존인물 정지룡은 역사의 변동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114] 사실 출신 문제보다는 강대한 범선 전력을 가진 대한을 자극하면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이 주된 이유일 듯 하다.[의문] 10.5장 1화에 의하면 조형서는 4살에 즉위하여 건주가 침공한 1695년까지 13년간 섭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13장 4화에 의하면 조형서는 1680년생으로 4살에 즉위하여 14년간 섭정을 받았다고 한다. 연도가 미묘하게 어긋나는데 설정이 꼬인 것으로 보인다.[115] 원역사의 카메하메하 1세의 고조할머니. 하지만 작중에서는 퇴위당했으니 카메하메하 1세는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116] 재석이 2부 시점에 익혀둔 프랑스어는 3부 시점 기준으로 74년 전 말투이다. 젊은 외국인 황자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80대 노인같은 말투를 쓰기 시작하니 프랑스인인 루이 14세에겐 엄청나게 어색했을 것이다.[117] 유명한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 본인은 아니고 그 아들 혹은 조카 정도로 설정했다고 한다.[118] 원역사에서는 카를 7세의 어머니가 된다.[119] 이름은 쿠오 바디스의 작가로 유명한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십자군의 기사에서 따왔다.[120] 그 초상화는 19세기에 일리야 레핀이 그린 상상화다.[121] 군 경험이 전무한 골리친이 친정을 한 이유는 워낙 반대가 많은 전쟁이라 귀족들이 지휘를 맡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122] 전투는 한 번도 하지 않고 행군만 하다가 돌아왔는데 10만 병력 중 4만 5천을 손실했으며 이래놓고 이겼다고 허위보고를 했다가 걸린다. 실제 역사에는 이 패전 때문에 소피아와 골리친에 대한 귀족들의 지지가 떨어진 틈을 타 표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소피아를 숙청하고 친정 체제를 세운다.[123] 그래도 표트르는 그가 자신의 유럽행을 찬성한데다가, 무능하지만 애국자라는 것은 인정하고 재산 약간은 갖고 갈 수 있게 해준다.[124] 유세도, 프랑스제 엽총, 조립식 3인용 배, 나침반, 사분의 등.[125] 표트르는 대한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유가 서반아와 접촉하면서 '동양적'인 면을 버리고 서양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루스국도 마찬가지로 동양적인 면을 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126] 과거 조선이 유럽으로부터 받았던 것처럼 인력, 기술, 물자들을 요청했는데 개중에는 곤란하거나 들어줄 수 없는 것도 있었다.[127] 작가의 말에 의하면 표트르가 마르타에게 너무 빠졌기 때문이라고.[128] 개혁군주 하나 더 늘어난다고 루스국의 국력이 압도적으로 강해질 가능성은 별로 없고 오히려 알렉세이가 친한파이자 차기 태황의 친우가 되어 루스국의 진출 방향이 서쪽이 되는 것이 대한 입장에서 더 좋은 상황이다.[129] 원역사의 알렉세이가 표트르에게 처형당한 이유는 반동적 성향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교육을 받아서 알렉세이 또한 반개혁 성향이 되었기 때문이다. 작중의 표트르가 굳이 알렉세이를 대한으로 보낸 이유도 루스국 내에서는 신식 교육을 해줄 사람이 딱히 없기 때문인 듯.[130] 예카테리나 1세와 이름은 동일하지만 이름만 같을 뿐 출신 국적도 출신 성분도 전혀 다르다. 예카테리나 1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민 혹은 공무원의 딸이었는데 작중의 마르타는 네덜란드 여관집 딸이기 때문.[131] 알렉세이가 2년 늦게 태어난 것은 마르타의 영향이라고 한다.[132] 명예혁명을 돕는 것은 남의 나라 반란에 명분도 없이 참여한 것이니 형황에게 찍힐 일이고 제임스 2세를 도와서 명예혁명을 막으려다가는 잉글국 귀족들에게 죽을 수도 있다.[133] 실제 역사에서도 미분은 피에르 드 페르마가, 적분은 요하네스 케플러가 처음으로 완성했지만, 이를 최초로 증명해낸 아이작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가 수학계에선 더 고평가받는다.[134] 재석은 2부 장조 시절 1607년의 핼리 혜성을 눈으로 목격했으나 사망하기 1년 전 시점이라 눈이 침침했고 당시 조선에는 구름이 많아서 제대로 관측하지 못했다. 또한 당시의 조선은 재석이 자신의 죽음의 원인이 된 기우제를 고려해야 했을 정도로 기후가 좋지 않았기에 이 1607년의 혜성은 나쁜 징조로 여겨졌다고 한다. 1682년의 핼리 혜성은 3부 성친왕의 몸으로 프랑스 체류 중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목격한다.[135] 하지만 성친왕은 이사벨과 관계 후 바로 거리를 두고, 얼마 뒤 이탈리아로 튀었다.[136] 실제 역사에서 미국의 앨버커키 시가 이 사람의 작위에서 이름을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