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환/선수 경력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였던 안정환의 선수시절 경력을 설명하는 문서.
2. 클럽 경력
2.1. 부산 대우 로얄즈/부산 아이콘스
아주대 졸업 후 부산 대우 로얄즈로 입단하였다. [1] 다만 IMF 시절이라 다른 선수들에 비해 계약금, 연봉 모두 적었다고 한다. 당시 한 달에 약 100만 원 정도 받았다 한다. 1998년에 데뷔하자마자 그해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뽑혔고[2] , 1999년에는 K리그 24경기 14골[3] 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초로 비우승팀 MVP에 오르게 된다. 1998년에는 미드필더, 1999년에는 포워드로 뛰었는데, 이는 사샤 드라쿨리치가 부산에서 수원으로 이적한 여파로 보인다.
안정환은 리그 MVP 혹은 득점왕을 달성하면 유럽으로 진출을 추진한다는 계약을 대우 로얄즈와 맺고 있었는데, 1999년에 대우가 파산하고 구단이 현대 산업개발로 넘어가면서 구단은 부산 아이콘스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시 현대산업개발(현산)은 K리그 최고의 스타인 안정환의 가치를 포함해서 대우 로얄즈를 인수한 것이기 때문에 안정환이 리그 MVP가 되자 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결국 안정환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은퇴를 하겠다는 초강수를 두었고, 현산은 반 시즌을 더 뛰는 대신 유럽 이적을 추진하기로 합의를 본다. 이후 안정환은 2000년에 반 시즌 동안 총 20경기 10골을 넣는 활약을 한 뒤, 해외 진출을 추진한다.
흔히 알려지기를 안정환의 해외 진출은 국책 사업의 일부로서 현산 측의 지원 사격에 의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고 일본에서도 그런 식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 시기 설기현의 진출은 국책 사업의 일환이었다. '''안정환의 진출도 국책 사업의 일환이 맞다. 왜냐면 공군으로 돌아와 복무를 해야 했던 차범근의 사례나 거의 병역 특례 안 받으면 그냥 군대 안 가고 말지에 가깝던 박주영의 사례처럼, 그 전까지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선수는 해외진출을 못했기 때문이다.''' 설기현처럼 이동국이나 안정환이 이 시기 해외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2002년 성적을 내기 위해 너희들이 성장해라, 그리고 너희들이 성장해서 16강이라는 성적을 내면 병역 특례를 주겠지만 못 하면 돌아오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4]
안정환의 경우 나카타 히데토시로 재미를 본 AC 페루자 칼초가 안정환을 영입했기 때문에 해외진출이 가능했던 것이고, 설기현은 국책 사업이 아닌 축구협회 프로젝트로 벨기에에 진출한 케이스이다. 이때 축구협회 프로젝트로 해외 진출한 선수들이 설기현을 포함에 몇몇이 있었지만 전부 실패했다.
어쨌든 국책 사업의 일환으로 해외 진출을 하게 된 안정환은 라 리가의 라싱 산탄데르와 계약을 추진했고 사인까지 48시간을 남겨두고 있었지만, AC 페루자 칼초가 중간에 안정환을 낚아챈다. 이 사태를 레알 라싱은 분노하면서 부산에 항의하고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결국 안정환은 페루자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이 행보가 안정환의 커리어를 결정적으로 망가트리게 된다.
안정환의 팬들은 이를 많이 안타까워하는데, 대우가 도산하지 않았다면 안정환은 00 시즌을 반년 뛰지 않고 바로 해외 진출을 했을 것이고, 임대라는 불안정한 신분이 아니라 완전 이적으로 이적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우 김우중 회장은 축구 선수의 해외 진출을 지원 사격할 정도로 적극적일 뿐만 아니라, 선수 계약금 외에도 5천만 원을 주고 대우 라노스 광고에 안정환을 출연시킬 정도였기 때문이다. 또 안정환이 처음 레알 라싱과 페루자의 계약을 거절한 이유가 바로 임대 신분이었고, 안정환의 목표가 명문 구단 혹은 최고의 환경 같은 게 아니라 유럽의 큰 무대에서 뛴다는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구단이 조건만 절충하여 잘 협상한다면 얼마든지 원하는 조건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팬들은 생각하고 있다.
안정환은 은퇴 직전 한 인터뷰를 통해 현역 시절 해외를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던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밝히기도 했다. 안정환 인터뷰 기사
역대 K리그 단일시즌 최고의 선수 5명
2.1.1. AC 페루자 칼초 (임대)
안정환은 우여곡절 끝에 세리에 A에 임대 생활을 하게 된다. 부산 아이콘스에서 페루자로 이적 당시 셀타비고와도 협상을 진행했지만 안정환은 세계최고리그였던 세리에A를 선택했다.
임대료는 당시 돈으로 40만 달러다. 안정환은 첫 경기에서 원래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로 첫 경기를 뛰었지만 결과는 영 아니었고, 둘째 경기는 잠깐 뛰고 끝났다. 이후 10경기가량을 벤치만 달구게 된다. AC 페루자는 안정환이 입단하기 전에 일본의 나카타 히데토시를 2년 임대로 쓴 적이 있었다. 이때 나카타의 마케팅 효과가 상당했던 걸로 알려져 있는데, 경기날에는 일본인 수백 명이 관전을 하러 왔고, 유니폼과 관련 상품도 많이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축구 구단주들에게서는 종종 보이는 인물상이긴 하지만 페루자의 가우치 구단장은 기행과 돈독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한국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축구 팬에도 관련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다.
가우치 구단장은 처음 안정환을 임대할 때 그의 상품성에 주목한 걸로 알려져 있다. 얼굴도 잘생겼고[5] 축구도 잘 해서 구름 관중을 몰고 다닌 K리그 최고의 스타였다.[6] 한국의 경제력도 있고,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대우자동차의 스폰서까지 생각하면 임대선수로서 채산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헌데 한국은 당시 IMF 관리체제이며 모기업 대우그룹은 도산한데다, 스폰서 업체인 대우자동차는 채권단 관리 속에서 해외매각설과 이에 따른 노사분규로 힘들어했다. 일본과는 달리 아직 한국 축구팬들은 위성방송과 해외 축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서형욱 같은 직업적 축구전문가가 아닌 이상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관광까지 간다는 문화 자체도 생소했으며, 축구 상품을 산다는 개념 자체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관련 상품도 팔리지 않았다. 중계방송이래봤자 SBS축구채널(현 SBS Plus)이 방송한 코파 이탈리아 32강전 뿐이었으며, 대다수 경기는 네티즌들이 해외 정보를 일일이 번역한 후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문자중계를 해야 했다.[7] 이걸 보고 빡친 가우치는 안정환을 쓰지 말라고 코스미 감독에게 지시를 했고, 결국 부상자로 자리가 날 때까지 안정환을 쓰지 않은 걸로 알려져 있다.
이 내용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안정환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안정환을 마케팅 보고 데리고 온 것도 맞고, 나카타를 보러 일본에서는 수백 명이 오는데 한국인은 한 명도 오지 않는다고 갈군 것도 사실이고, # 유니폼이 안 팔린다고 갈군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 안정환이 출전을 많이 하지 못한 이유는 임대계약사항중 해당경기출전에 도달하면 이적할 수 있는 완전이적조항의 이적료때문이었다. 아마 페루자의 계획은 임대선수로서 적당히쓰면서 완전이적을 싸게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워낙 이탈리아 구단주 중에 별종이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내뱉었다 철회하는 게 일상이라 그냥 빡쳐서 한마디 했다 일주일 정도 지나고 농담이라고 넘겼을 가능성도 있다. 페루자에서 실제로 안정환을 완전이적시키려 했기 때문에, 별 중요하지 않은 말일 가능성이 99퍼센트를 넘어간다.
더구나 안정환은 완전히 이적을 한 게 아니라 임대를 온 상태였고, 미필 상태였다. 이탈리아에서 한국은 북한으로 혼동될 정도로 인지도가 떨어졌었고, 인종 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안정환은 인종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고,[8] 이에 대한 에피소드도 여럿 남아있다.
페루자가 굳이 이적이 아닌 임대를 진행한 것은 부산아이콘스의 이적료욕심 때문이었다. 페루자은 첫시즌후 완전이적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무산됐고 안정환의 경기활약에 비해 출전을 하지 못한 부분은 출전시 대한 추가 임대료 지급조항이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당시 코스미 감독은 "안정환은 대단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재능을 지닌 선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기회를 많이 줄 수 없어 안타깝다."라고 말했다.[9] [10]
14라운드에 드디어 교체 출전한 안정환은 이후로도 계속 출전 시간을 늘려갔다. 코스미 감독은 안정환을 포워드로 쓸 생각이었지만, 안정환은 K리그에서도 미드필더였고, 2선에서 치고 올라가는 플레이를 했지 1선에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공미로 다시 돌리자 성적이 괜찮아졌고, 리그 후반에는 투톱 아래의 1 공미로 좋은 활약을 보이며 4골과 1번의 어시스트, 3번의 MotM, 2번의 주간 베스트 11에 선정된다.
그리고 다음 해, 안정환은 임대 신분에도 불구하고 등번호 10번을 달게 된다. 당시 등번호 10번이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팀의 에이스가 주로 다는 번호로, 안정환의 처음 등번호인 8번도 처지는 번호가 아닌 걸 생각하면 코스미 감독의 구상에서는 안정환이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페루자에서는 등번호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팀인 것처럼 보이고 그런 팀들이 세계 리그에 적지 않기 때문에 너무 큰 의미는 없다. 어쨌든 2001년 6월, 페루자는 안정환의 완전 이적을 현대에 요청한다. 이적료 1백만 달러에 연봉 70만 달러. 선지불한 임대료 40만 달러에 세금 등을 감안하면 2백만 달러를 웃돌게 된다. 안정환도 이 요청을 환영한다. 애매한 임대 입장에서 완전 이적이 된다면 첫해 후반에는 거의 주전으로 자리잡았기에 유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적은 무산이 되고, 안정환은 다시 임대 신분으로 남게 된다. 결국 2년차에도 1~4라운드까지만 어정쩡하게 출장하고 한참을 벤치만 달구다가 18분, 8분, 33분, 11분, 1분 생색내기 수준으로 출전을 했다. 이때 17라운드 1분 출전한 이후 다시 2경기 벤치를 달군 안정환은 절치부심이라도 했는지 20라운드와 21라운드에 폭풍 활약을 하여 2연속 경기 MotM에 뽑히게 된다. 하지만 그 다음 라운드부터 다시 벤치에 앉게 된 안정환은 교체 출장을 이어나가다 2002년 월드컵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페루자는 이미 안정환을 라치오로 보내기로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11] 참고로 01~02 시즌의 라치오는 6위로, 페루자는 8위였다. 2002년 월드컵에 히딩크호에 승선한 안정환은 히딩크의 주문인 활동량과 체력을 키웠고, 당시 오노 사건으로 국민 감정이 고조된 미국과의 경기에서 헤딩 동점골을 넣더니 마침내 16강에서 당시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이탈리아를 골든골로 침몰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는...
회술하길, 안정환과 주변 사람은 이 활약으로 모든 고생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스쿼드는 역대 최강 수준이었고, 그 이탈리아 세리에 A에서 뛰는 안정환이 카테나치오를 뚫고 말디니를 상대로 헤딩을 따내 부폰에게서 골든 골을 넣었으니, 당연히 이탈리아로 돌아가면 크게 평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12]
안정환의 골든 골로 이탈리아가 16강에서 탈락하자, 가우치 구단주와 코스미 감독, 페루자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축구계가 공황에 빠진다. 절정을 달리던 이탈리아의 전력도 전력이거니와 한국이 역사적으로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축구를 한국보다 훨씬 사랑하고 가까이 하는 나라인 데다가 리그 수준도 천양지차인 만큼 커다란 충격을 입고 자존심이 상할 만한 상황인 것도 맞는다.
가우치 구단주는 그 충격에 헤어나오질 못한 채 이탈리아 공영 방송에서 안정환에 대해 국민감정까지 빌어 "입단 당시 그는 샌드위치 사 먹을 돈도 없는 길 잃은 염소 신세"라며 "팀에선 하는 일 없이 이젠 돈방석에 앉았으며 월드컵에선 이탈리아 축구를 망쳤다"라 하여 엄청난 인신 모독을 퍼부었고, 당장 안정환을 방출할 것이며 그러한 배신자에게 결코 급여를 지불할 생각이 없다고 거품을 물었다. 구단에선 안정환에게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마라, 오면 이탈리아 훌리건 마피아에게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할 정도였으며[13] , 안정환이 현지 적응을 위한[14] 수단으로, 1년 연봉을 퍼부어 구입한 고급차는 이탈리아 훌리건에게 완전히 박살나고, 이탈리아에서 짐을 정리할 때도 아내가 대신 가야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안정환의 몸값이 10배[15] 가 뛰었다는 소식이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일본 등의 언론에 나자, 아들 알레산드로 단장이 해외축구 사이트 사커리지와 SBS 뉴스 특파원과의 인터뷰에서 직접 사과와 해명을 했다. 코스미 감독도 충격에서 벗어나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안정환은 화도 났고 두렵기도 한 상태였다. 더구나 안정환의 에이전트인 이플레이어의 안종복이 안정환에게 이빨을 까며, 페루자는 놔두고 자기들끼리 이적을 진행하자고 말한다. 이런 사고가 가능했던 건, 안정환은 원래 페루자에 임대가 되어 있었고 임대 기간이 곧 끝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선 협상권은 계약할 때부터 페루자에 있었던 데다, 페루자는 냉정을 찾자마자 바로 거래 조약에 있는 완전 이적금을 부산 대우에 보내 안정환을 완전 이적시켰다. 물론 부산 아이콘스 측은 이미 기간이 지났다며 생깠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씨알도 먹힐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안정환이 이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 아이콘스와 안종복은 페루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안정환이 자기 선수라며 절대 복귀시킬 수 없다고 말했고, 안정환은 안종복만 믿고 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훌리건의 난동 등으로 완전 충공깽에 빠진 상태라 어떻게든 이탈리아에서 탈출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물론 페루자도 그럼 세리에 A가 아니라 EPL에 이적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안종복은 이를 씹고 프리미어 리그의 블랙번과 단독으로 협상을 진행한다. 한편 페루자도 런던으로 사람을 보내 안정환과 접선하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안정환을 만날 수 없었고, 빡친 가우치는 이탈리아 축구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여 제소에 들어간다. 또한 이적 기간이 끝나기 전에 안정환을 이적시키기 위해 볼튼과 협상을 진행한다.
결국 영국에선 같은 날에 안정환의 이적 확정 뉴스가 2개가 뜬다. 하나는 안종복이 진행한 블랙번 행이고, 또 하나는 페루자가 진행한 볼튼 행이었다. 결국 2002년 월드컵으로 EPL은 물론이고 파리 생제르맹 FC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 세계 유수 클럽의 이적 제의가 있던 안정환의 상품 신뢰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블랙번조차 페루자가 부담스러워 히딩크의 추천서에도 불구하고 워크퍼밋이 안 나왔다는 말로 안정환의 이적을 무산시킨다.[16] 결국 이적 시장 데드라인이 끝나고, 안정환을 파는 데 실패한 가우치는 분노하여 FIFA에 국제 소송을 제소한다. 결국 FIFA는 일주일 만에 페루자의 손을 들어주는데, 더 가관인 건 부산 아이콘스와 대한축구협회는 그 일주일 동안 안정환을 도와주기는커녕 손가락이나 빨며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애당초 질 줄 뻔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부산 아이콘스 측에서는 일본 스포츠 매니지먼트 업체인 프로페셔널 매니지먼트(PM)에[17] 안정환의 소유권을 고작 150만 달러에 훌러덩 넘겨 버렸다.
이 사건으로 안정환은 한국 돈으로 36억 원의 빚을 지게 되고, 안종복은 에이전트 자격 영구 박탈만 받고 입을 쓱 닦는다. 결국 순식간에 국제 미아에 36억 원의 빚쟁이가 된 안정환은 PM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PM은 부산 아이콘스와 페루자에 추가로 돈을 더 주고 36억 원의 빚을 청산한 다음 안정환의 소유권을 완전히 사서 3년 동안 J리그로 임대 보낸다. 이 계약에는 시미즈로의 임대는 물론이고 광고 수익과 예능 출연 등의 수입을 모두 갖기로 한 계약이었다. PM은 이 3년을 통해 100억 원의 이익을 창출했다고 한다.
안정환은 훗날 이 사건을 굉장히 후회한다고 술회하며, 페루자로 돌아갔어야 했다고 말했고, 이 사건은 안정환의 순진함과 임대 기간 종료의 절묘한 시간 차이, 세리에A 임대 선수가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든골이라는 드라마와 가우치 구단주의 멘붕, 갑작스러운 몸값 상승을 두고 페루자와 부산 아이콘스의 이적료를 둘러싼 진흙탕 싸움, 그리고 안종복의 무책임이 빚어낸 촌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으로 가우치 구단주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으며, 외국에서도 이 사건을 Ahn-gate(안느-게이트)라고 부르면서 가우치하면 안정환 방출 사건이 꼭 따라오게 된다.[18]
하지만 이탈리아 여론이 꼭 안정환에게 적대적이었던 건 아니다. 축구에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만큼 역대급 스쿼드를 상대로 골을 넣은 안정환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많았으며, 결국 안정환은 이 사건으로 이탈리아에 학을 떼서 끝끝내 이탈리아로 가지 않았지만 안정환이 이적할 때면 늘 세리에 A 명문 구단의 오퍼가 들어오게 된다.[19] [20]
더불어 안정환을 쫒아낸 루치아노 가우치 구단주는 이전 시기인 1999년부터 남자 프로팀에 세계 최초로 여자 감독을 앉히거나 여성 선수를 기용하겠다고 땡깡을 부리는가 하면[21]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22] 의 아들인 알 사디 카다피를 영입시켰다가 방출되버리는 등 [23] 수많은 기행을 저질러대서 안그래도 미친 구단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2005년 이후엔 파산 사기 및 탈세 혐의로 아들 알레산드로, 리카르도와 같이 범죄자가 되어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피하는 추태를 보이다가 결국 부자가 사이좋게 수감당하는 완벽한 국제 범죄자로 2020년 2월 2일에 사망해버리면서 최후까지 페루자A에 지워지지 않을 흑역사를 새겨버린지라 안정환이 미친 범죄자놈에게 휘말려 인생을 망쳤다는 여론이 조성된 것도 크다.
이러한지라 훗날 이탈리아의 언론과 몇몇 감독들도 '''상품성 때문에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방출당해 외국의 하위 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가 있다.'''며 안정환을 언급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라는 얘기를 넌지시 했다.
2.1.1.1. 세리에 A 시절의 평가
[기록출처] Rai sport , La Gazzetta dello sport , Kataweb , Lega Calcio
(00/01)SEASON 선발=9 교체=6 명단=25 제외=9
1R-선발출전 10R-명단포함 19R-명단제외 28R-선발출전
2R-교체출전 11R-명단제외 20R-명단제외 29R-선발출전
3R-명단포함 12R-명단제외 21R-명단포함 30R-선발출전
4R-명단제외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선발출전
5R-명단제외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선발출전
6R-명단제외 15R-선발출전 24R-명단포함 33R-교체출전
7R-명단제외 16R-교체출전 25R-선발출전 34R-선발출전
8R-명단제외 17R-명단포함 26R-명단포함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교체출전 =(15P/4G/1A)
2R-교체출전 11R-명단제외 20R-명단제외 29R-선발출전
3R-명단포함 12R-명단제외 21R-명단포함 30R-선발출전
4R-명단제외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선발출전
5R-명단제외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선발출전
6R-명단제외 15R-선발출전 24R-명단포함 33R-교체출전
7R-명단제외 16R-교체출전 25R-선발출전 34R-선발출전
8R-명단제외 17R-명단포함 26R-명단포함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교체출전 =(15P/4G/1A)
[출전경기 평점 및 기록] ㅡ 라이/가제타/카타웹 순
1R -- (무) 레체[H] 5 / 5 / 5.5 = 54분
2R -- (패) 라치오[A] - / - /- = 18분
14R - (패) 브레시아[H] - / - / - = 8분
15R - (패) 유벤투스[H] 6 / 6.5 / 6.5 = 풀타임
16R - (승) 레지나[A] 6 / 6 / 6 = 26분
23R - (무) 나폴리[A] 6 / 6 / 6 = 22분
25R - (패) 볼로냐[A] 5.5 / 6 / 5.5 = 60분
27R - (무) 아탈란타[H] 6.5 / 7 / 7 = 48분/1G/MOM
28R - (승) 바리[A] 7.5/7.5/7.5 = 풀타임/1G/1A/MOM
29R - (승) 밀란[H] 6 /6.5 / 6 = 70분
30R - (무) 우디네세[A] 7 / 7 / 7 = 81분/2G/MOM
31R - (무) 브레시아[H] 6 / 6.5 / 6.5 = 풀타임
32R - (패) 유벤투스[A] 5.5 / 6 /6 = 풀타임
33R - (무) 레지나[H] 6 /6 / 6 = 37분
34R - (패) 베로나[A] 6 /6.5 /6 = 76분
2R -- (패) 라치오[A] - / - /- = 18분
14R - (패) 브레시아[H] - / - / - = 8분
15R - (패) 유벤투스[H] 6 / 6.5 / 6.5 = 풀타임
16R - (승) 레지나[A] 6 / 6 / 6 = 26분
23R - (무) 나폴리[A] 6 / 6 / 6 = 22분
25R - (패) 볼로냐[A] 5.5 / 6 / 5.5 = 60분
27R - (무) 아탈란타[H] 6.5 / 7 / 7 = 48분/1G/MOM
28R - (승) 바리[A] 7.5/7.5/7.5 = 풀타임/1G/1A/MOM
29R - (승) 밀란[H] 6 /6.5 / 6 = 70분
30R - (무) 우디네세[A] 7 / 7 / 7 = 81분/2G/MOM
31R - (무) 브레시아[H] 6 / 6.5 / 6.5 = 풀타임
32R - (패) 유벤투스[A] 5.5 / 6 /6 = 풀타임
33R - (무) 레지나[H] 6 /6 / 6 = 37분
34R - (패) 베로나[A] 6 /6.5 /6 = 76분
※ 통계 평균평점 6.230 (라이 6.076, 가제타 6.346, 카타웹 6.269합산)
※ 총 860분 소화, 경기 MVP 3회, 풀타임소화 4회, 시즌통계 유효슛팅률 3위 (43%), 시간대비 득점률 2위(1위는 솁첸코), 28R 주간베스트11 선정, 30R 주간 베스트11 선정
※ 비고 (명단제외 사유)
11R~12R : 국가대표팀 차출 (한일전) 및 약혼식일정 때문에 방한
19R~20R : 국가대표팀 차출 (UAE 두바이컵 - 덴마크전)
※ 총 860분 소화, 경기 MVP 3회, 풀타임소화 4회, 시즌통계 유효슛팅률 3위 (43%), 시간대비 득점률 2위(1위는 솁첸코), 28R 주간베스트11 선정, 30R 주간 베스트11 선정
※ 비고 (명단제외 사유)
11R~12R : 국가대표팀 차출 (한일전) 및 약혼식일정 때문에 방한
19R~20R : 국가대표팀 차출 (UAE 두바이컵 - 덴마크전)
(01/02)SEASON 선발=4 교체=11 명단=28 제외=6
1R-교체출전 10R-교체출전 19R-명단포함 28R-명단포함
2R-선발출전 11R-명단제외 20R-교체출전 29R-명단포함
3R-선발출전 12R-교체출전 21R-선발출전 30R-교체출전
4R-교체출전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명단포함
5R-명단포함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명단제외
6R-명단포함 15R-교체출전 24R-선발출전 33R-명단제외
7R-명단포함 16R-명단포함 25R-명단포함 34R-명단제외
8R-명단제외 17R-교체출전 26R-교체출전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명단제외 =(15P/1G/1A)
2R-선발출전 11R-명단제외 20R-교체출전 29R-명단포함
3R-선발출전 12R-교체출전 21R-선발출전 30R-교체출전
4R-교체출전 13R-명단포함 22R-명단포함 31R-명단포함
5R-명단포함 14R-교체출전 23R-교체출전 32R-명단제외
6R-명단포함 15R-교체출전 24R-선발출전 33R-명단제외
7R-명단포함 16R-명단포함 25R-명단포함 34R-명단제외
8R-명단제외 17R-교체출전 26R-교체출전
9R-명단포함 18R-명단포함 27R-명단제외 =(15P/1G/1A)
[출전경기 평점 및 기록] ㅡ 라이/가제타/카타웹 순
1R -- (패) 인테르[A] 6 / 6 / 6 = 18분
2R -- (무) 라치오[H] 6 /6.5 / 6.5= 풀타임
3R -- (무) 베로나[A] 6 / 6 / 6 = 77분/1A
4R -- (패) 우디네세[H] - /- / - = 12분
10R - (패) 파르마[A] 6 / 6 / 6 = 18분
12R - (패) 키에보[A] - / - / - = 8분
14R - (승) 베네치아[H] 6 /6.5 /6.5 = 33분
15R - (패) 볼로냐[A] - /- /- = 11분
17R - (승) 피오렌티나[A] - / - /- = 1분
20R - (승) 베로나[H] 7 /7.5 / 7 = 40분/1G/MOM
21R - (무) 우디네세[A] 6.5 / 6.5 / 7 = 풀타임/MOM
23R - (승) 레체[H] - / - / - = 15분
24R - (패) 로마[A] 5.5 /5 / 5.5 = 67분
26R - (패) 피아첸자[A] - /- / - = 14분
30R - (패) 유벤투스[H] 6 / 6 /6 = 16분
2R -- (무) 라치오[H] 6 /6.5 / 6.5= 풀타임
3R -- (무) 베로나[A] 6 / 6 / 6 = 77분/1A
4R -- (패) 우디네세[H] - /- / - = 12분
10R - (패) 파르마[A] 6 / 6 / 6 = 18분
12R - (패) 키에보[A] - / - / - = 8분
14R - (승) 베네치아[H] 6 /6.5 /6.5 = 33분
15R - (패) 볼로냐[A] - /- /- = 11분
17R - (승) 피오렌티나[A] - / - /- = 1분
20R - (승) 베로나[H] 7 /7.5 / 7 = 40분/1G/MOM
21R - (무) 우디네세[A] 6.5 / 6.5 / 7 = 풀타임/MOM
23R - (승) 레체[H] - / - / - = 15분
24R - (패) 로마[A] 5.5 /5 / 5.5 = 67분
26R - (패) 피아첸자[A] - /- / - = 14분
30R - (패) 유벤투스[H] 6 / 6 /6 = 16분
※ 통계 평균평점 6.210 (라이 6.120, 가제타 6.230, 카타웹 6.280합산)
※ 총 511분 소화, 경기 MVP 2회, 풀타임소화 2회, 20R 주간 베스트11 선정, 20R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선정(RAI UNO), 20R 월간 베스트골 3위기록(1월), 평균평점 용병 150명중 9위기록(용병랭킹)
※ 비고 (명단제외 사유)
11R : 국가대표팀 차출 (세네갈 평가전, 크로아티아 평가전)
27R~29R : 국가대표팀 스페인전지훈련 합류 (튀니지 평가전, 핀란드 평가전)
31R~34R : 월드컵대표팀 독일전지훈련 합류 (코스타리카 평가전, 스코틀랜드 평가전, 잉글랜드 평가전)
※ 총 511분 소화, 경기 MVP 2회, 풀타임소화 2회, 20R 주간 베스트11 선정, 20R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선정(RAI UNO), 20R 월간 베스트골 3위기록(1월), 평균평점 용병 150명중 9위기록(용병랭킹)
※ 비고 (명단제외 사유)
11R : 국가대표팀 차출 (세네갈 평가전, 크로아티아 평가전)
27R~29R : 국가대표팀 스페인전지훈련 합류 (튀니지 평가전, 핀란드 평가전)
31R~34R : 월드컵대표팀 독일전지훈련 합류 (코스타리카 평가전, 스코틀랜드 평가전, 잉글랜드 평가전)
※ 이탈리아웹 평점
2000-01 시즌 : 5 - - 6.5 6 6 5.5 7 7.5 6.5 7 6.5 6 6
2001-02 시즌 : 6 6 6 - 6 - 6 - - 7 6.5 - 5.5 6
출장했던 30경기 중 포워드로 올라가서 뛴 경기는 단 6경기, 나머지 경기는 모두 투톱 밑에서 중앙 공격형미드필더로 뛰었다.2000-01 시즌 : 5 - - 6.5 6 6 5.5 7 7.5 6.5 7 6.5 6 6
2001-02 시즌 : 6 6 6 - 6 - 6 - - 7 6.5 - 5.5 6
안정환 빅리그 시절 serie"A 현지 평점 통계
축구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는 게 안정환의 세리에 A 성적과 실력이다.
안정환이 대한민국 축구계의 레전드인 건 사실이지만, 2002년의 골든 골 이후 커리어가 내리막을 치달았다. 때문에 이를 두고 안정환의 실력이 부족한 건지 그냥 운이 나쁜 건지에 관해 의론이 분분했다.
안정환은 페루자에서 2000-01 시즌 15경기 4골 1어시, 2001-02 시즌 15경기 1골 1어시의 성적을 거두었다. 언뜻 보기에 이 성적은 평범해 보이지만, 안정환은 세리에A에서 3-4-1-2의 1에 해당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혹은 3-5-2의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플레이했는데, 안정환이 세리에A에서 뛴 경기는 총 30경기로, 이 중에 6경기만 포워드로 뛰고 나머지 24경기는 공미로 뛰었다. 그리고 교체 출장 기록도 많아서 30경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렵다. 안정환의 경기당 출장시간은 2000-01 시즌 평균 55분, 2001-02 시즌 평균 33분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안정환의 당시 평가는 골과 어시스트와 같은 단순한 스탯적인 측면에서 생각할 수 없다. 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평점인데, 안정환은 대단히 높은 수준의 평점을 받았다. 2000-01 시즌과 2001-02 시즌에서 모두 평균 6점대의 평점을 기록했는데, 세리에A에서 평균 6점대의 선수는 상위 25%에 해당한다. 2001-02 시즌의 안정환의 평균 평점은 150명의 용병 중의 9위인데, 그럼 안정환은 '''세계 최고의 리그의 용병들 가운데 10손가락 안에 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시즌 밀란, 유벤투스, 인테르에서 알 만한 용병들의 이름만 나열해도 안정환이 이 정도 평가를 받는 것이 엄청나기도 하지만 뭔가 이상한 면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이름은 이반 코르도바, 하비에르 사네티, 세르지우 콘세이상, 호나우두, 클라렌스 세도르프, 아드리아누, 다리오 시미치, 하칸 쉬퀴르, 알바로 레코바, 안드리 솁첸코, 후이 코스타, 페르난도 레돈도, 파올로 몬테로, 이고르 투도르, 파벨 네드베드, 다비드 트레제게, 에드가 다비즈, 릴리앙 튀랑 등이다. 심지어 한국에 덜 유명한 준척급들은 상당히 많이 제외했는데도 이 정도다.[24] 안정환의 용병 평균 평점이 9위를 기록했다는 것만으로 안정환을 평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25] 신뢰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느 정도 높았으면 안정환이 괜찮은 활약을 했다고 이탈리아에서 평가한 바 아니냐는 물음에 신뢰성이 생겼겠지만 150여 명 가운데 9위는 '''월드클래스급 선수만 받을 수 있는''' 지나치게 높은 순위라 신뢰도가 크게 금이 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정환이 MOM을 몇 차례 받고 7점 이상의 평점을 받았기도 했으므로, 최소한 이와 같은 경기들에선 안정환이 부정의 여지 없이 좋은 활약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2000-01 시즌 안정환은 시간대비 득점률로 '''리그 2위'''였는데 이것은 상당히 좋은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안정환 팬들은 2000-01 시즌에 페루자에서 가장 골을 많이 넣은 선수가 Z. 브리자스와 비교해, 그가 36경기를 뛰었고 2번 교체를 뛰었으며 총 9골을 넣었기에 단순히 수치적인 측면으로도 브리자스에게 밀릴 것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브리자스는 그리스 유로 우승멤버고 활동량이 뛰어나고 성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차이가 있다.
안정환은 월드컵이 시작하기 2주 전에 이미 라치오로 이적할 가계약이 된 상태였다. 라치오는 세리에의 전통적인 중상위권 강호이므로 안정환에게 있어서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고 상당한 성과로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계약이고, 페루자가 그냥 무시해 버렸듯이 언제든지 어그러질 수 있는 가능성도 분명 있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는 있다. 연봉 협상이건, 군대 미필에 대해서 갑자기 인지하고 트집을 잡았건[26] , 혹은 다른 선수로 선회해 버렸다던가 하는 이유 등.
안정환은 분명 리그 레벨에서는 크게 밀리지 않은건 사실이다. 하지만 팬들은 이와 동시에 안정환이 기회를 줬는데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아니며, 기회를 받아 필드 위에서 뛸 때는 좋은 선수였다. 안정환이 한 두 경기 정도 뛰었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안정환은 2년간 출장 시간은 모자라도 어쨌든 30경기를 뛰긴 뛰었다. 그리고 뛸 때마다 필드에서 좋은 선수였다는 진술이 참이라면 이런 선수가 리그에서 주전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히 무언가 이상한 모순이다.
또 페루자의 사무 국장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구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라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당장 2001-02 시즌 페루자 최다 출장 선수는 당대 인외마경이었던 브라질 대표팀에서 25경기나 출장한 제 마리아였으며 반대편인 왼쪽은 훗날 세계 최고급의 풀백이 되는 파비오 그로소였기 때문에 립서비스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안정환의 포지션인 공격형 미드필더는 원래 기술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뛰는 자리이다.
어쨌든 안정환은 페루자에서의 활약을 통해 페루자 이외에도 세리에 A에서 흥미를 보이는 팀이 있었으며, 그 팀들의 위상 역시 우디네세, 라치오 등 상당히 뛰어났다.
2.2. 시미즈 S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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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에서 패소하고 빚쟁이가 된''' 안정환은, 결국 돈의 흐름에 따라 가장 많은 돈을 제시한 J리그의 '''시미즈 S펄스'''로 이적한다.[27] 이 당시 일의 대해 안정환은 훗날인 2012년 은퇴 기자회견에서 블랙번 로버스와 계약을 체결했지만, 소유권 문제로 워크퍼밋이 발급되지 않았고, 그때 체결한 계약서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유는 그때 블랙번으로 이적했다면, 자신의 축구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두고 "계약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거니 재능이나 축구 인생이야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이라고만 보기에는 구단주의 병크가 너무 심각했다. 더군다나 이미 현지에 있던 집에 폭도들이 난입해서 물건들을 부수며 난리를 치고 가족살해 협박까지 하는데 누가 페루자로 돌아가고 싶어했겠는가?"란 측의 의견도 있고, "구단주의 병크가 심각한 거야 심각한 거고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안정환의 이적 당사자인 페루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블랙번으로 가야될 이유도 없었다. 그냥 다른 데 가면 될 일이지, 굳이 본인이 가고 싶은 블랙번을 택한 건 안정환이다. 자업자득이라고까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안정환만 구단주의 강짜에 억울하게 희생된 재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라고 하는 쪽도 있다. 물른 안정환의 축구 인생을 불쌍하다 여기고 페루자와 부산을 비판하는 쪽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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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시미즈와 반 년간의 계약이 끝난 안정환은 다시 해외진출을 모색한다. 그러나 조건적인 문제 탓이었는지 별로 흥미를 드러내는 구단이 없어서 시미즈에 잔류하게 된다. 팀은 16팀 중 11위를 차지하지만, 안정환은 11골로 구단 최고 득점자를 차지하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3. 요코하마 F. 마리노스
좋은 활약을 인정받았는지 안정환은 이듬해 2004년, 우승팀인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하게 된다. 팀은 전기리그에서 우승을 한 뒤, J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우라와 레즈를 꺾고 2003년 우승에 이어서 2연패를 달성한다. 이 때 안정환은 25경기 출전, 12골을 넣으며 팀내 최다 득점자를 차지하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며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J리그 우승에 기여하였다.
사실, 요코하마 F. 마리노스는 안정환과 함께한 시절 이후, 디시 리그우승을 할 때까지 15년이 걸렸으나 어차피 안정환이 오기 전 해에도 우승한 팀이었고, 10골씩 넣은 차점자들도 두 명씩 있으며 안정환도 전반기에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가 후반기 골절로 인해 페이스가 떨어지게 되면서 우승을 이끌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준수한 활약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후 반년 간 더 요코하마에서 뛰다가 안정환은 일본 생활을 끝내게 된다.
2.4. FC 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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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몫으로 남겨진 이적료를 모두 갚은 후''' 계약이 끝난 2005년 여름에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28] 프랑스 르샹피오나의 '''FC 메스'''로 이적하였으나 안습한 팀 전력으로 인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이때 메츠의 경기를 보면 9-0-1 포메이션이 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당시 메스가 얼마나 막장이었냐하면, 16라운드 시점에서 1승 6무 9패(....)로 리그 19위였다. 그 시점에서 안정환은 6번 선발 출장에 3번 교체 출전을 했고, 1골만 넣은 상태였다. 프랑스 축구 전문지조차 팀이 막장이고 출장 시간도 적으니, 빨리 팀을 나가 반 시즌이라도 임대하려는 팀에 이적하는 게 훨씬 낫다고 조언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팀에는 안정환보다는 지동원과 같은 공격수가 훨씬 어울린다.[29] 때문에 팬들은 실패한 이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메츠에서의 계약은 1년이었는데, 원래 구단은 2년짜리 계약을 추진했다. 하지만 안정환은 1년 계약을 원했는데, 프랑스에 계약한 것 자체가 독일 월드컵 문제로 현지 적응을 미리 꾀했기 때문이다. 1년 계약이 끝나면 영국으로 갈 생각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다.
2.5. MSV 뒤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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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초, 독일 분데스리가의 '''MSV 뒤스부르크'''로 이적하나 몸상태가 워낙 좋지 못해 출전을 많이 하지 못하였다. 10년 뒤 마리텔에서 밝힌 바로는 안정환 자신은 분데스리가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이적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대표팀 수석코치인 핌 베어벡이 월드컵이 독일에서 열리니 독일에서 현지적응을 하고 있으면 월드컵 엔트리에 뽑아 주겠다는 얘기를 했고, 안정환이 수락해서 이적한 것이라고 한다.
이걸 보면 안정환은 월드컵 출전에 목을 걸었던 걸 알 수 있는데, 메츠로 이적한 것부터 시작해서 뒤스부르크에 가기까지의 2년을 전부 독일 월드컵을 고려해서 이적하였다. 상식적으로 본인에게 안 맞는 리그인 분데스리가를 월드컵 보내준다는 이유로 간 것이 단순히 생각하기엔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안정환에게 있어서 국대는 클럽보다 훨씬 중요했던 걸로 보인다. 마리텔에서도 안정환은 '''나라를 위해서 뛰었다'''라는 말을 자주하고, 일본에서도 안정환이 '''애국심이 굉장히 강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가치 평가 기준이 국대에 맞춰 있을 정도다.
당시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 체력적인 문제가 심각했다.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안정환은 이제 국가대표에서도 풀타임 못 뛴다, 후반기 조커다 등의 운운을 했고 실제 딕 아드보카트 감독도 안정환을 한 방을 노리는 공격수로 썼고, 2010년 월드컵 때는 더욱 더 심해져서 허정무 감독이 안정환은 중~후반 20분 정도 남겨놓을 때나 쓸 수 있다고 언급할 정도.
하지만 세간의 시선과는 다르게 2006 FIFA월드컵에서는 '''토고전에 후반 역전 중거리 슛을 넣는 등[30][31] '''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이후 에이전트사의 미숙한 일처리로 인해 6개월 동안 무적신세가 되었고, 이후 블랙번이나 매우 적극적이었던 스코틀랜드의 허츠 구단 같은 곳에서 오퍼가 있었음에도, 나이가 30줄이 되고 기량도 하락하면서 유럽 생활을 고집하기보다는 가족과의 생활을 더 중시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며 2007년 K리그로 복귀하여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입단했다.
안정환은 프랑스 리그 1에서 2005년 7월 29일 첫 경기부터 2006년 1월 29일까지 총 24경기에서 17경기 출장했고, 10번 선발 출장했으며 5번 풀타임으로 뛰고, 골은 PSG와의 경기에서 1골, FC 소쇼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었다. 출전 시간은 총 1007분.
분데스리가에서는 2006년 1월 28일 첫 경기부터 2006년 5월 13일의 마지막까지 총 15경기에서 12경기 출장했고, 3번 선발 출장에 1번 풀타임으로 뛰며 총 420분을 뛰었다. 기록은 2골 1도움으로,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1도움, 베르더 브레멘과 빌레펠트와의 경기에서 각각 1골을 넣었다.
사실 안정환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뛸때 부상 등의 문제를 계속 겪었기 때문에 저 정도의 출장시간은 주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 하기도 어렵다. 공격포인트 또한 약팀인 걸 생각해 보면 썩 나쁘지는 않긴 하나 당시 뒤스부르크나 메스의 팬들조차 몇 년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어버릴 정도의 기록이기는 하다. 위의 기록에서 프랑스 리그1과 분데스리가의 시간이 겹치는 2006년 1월 28일에 이미 안정환은 분데스리가에서 첫 번째 경기에 나갔고, 2006년 1월 29일의 프랑스 리그1 마지막 경기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2.6. 수원 삼성 블루윙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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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삼성 블루윙즈 입단 초기에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부활의 기미가 보였으나, 노쇠한 기미를 드러내며 주춤했다. 2군에서 연습경기를 하던 도중 FC 서울 서포터에게 가족에 대한 인신공격을[32] 당한 후, 경기장을 빠져나와서 항의를 하다가 퇴장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안정환은 벌금 1천만 원 징계를 받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안정환을 깠지만, 사정을 다 안 팬들은 그 FC 서울 서포터들을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깠다고... 그런데 FC 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들은 안정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33] 특히,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수호신의 간부로 활동한 적이 있어 반응이 더 안 좋아졌다.
이로 인해 전국의 수많은 안느빠들을 적으로 돌리게 됨은 물론이고, 가뜩이나 연고이전으로 욕을 먹는 FC서울의 서포터인 수호신은 덩달아 전국의 서포터들에게 그야말로 쌍욕을 쳐먹게 되었다. 또한, 수원의 서포터 그랑블루를 포함한 다른 팀의 서포터들도 '''"북패서포터 주제에 감히 한국축구의 영웅인 안정환을 까다니!"'''라고 말하며 공공의 적 이미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후 수원의 서포터인 그랑블루는 안정환을 위로하기 위해서 신문에 안정환을 응원하는 광고를 냈다. 참고로, SBS 뉴스도 가루가 되도록 까였는데, 안정환이 욕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안정환의 항의를 '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안정환은 해당 건을 부인에게는 경기 중의 시비문제로 벌금을 받은 것처럼 이야기했고,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인은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사실, 부인과 연애하던 시절에 안정환은 좀 더 데이트를 하고 싶다고 훈련을 무단이탈했다 벌금징계를 받았던 전적이 있었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가족, 더 나아가 아내를 가지고 성적인 모욕과 패드립을 던졌으니 그 화가 오죽했을까.
여담으로, FC 서울의 클럽송을 제작한 바 있는 가수 신해철은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북패'''라는 신랄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강하게 비판했고, 인연이 있어서 서울을 응원했으나 앞으로는 절대로 응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그 정도로 축구계를 넘어 전 사회적으로 파장이 심대했던 사건이었다.
수원에서 기록한 성적은 25경기 5골. 수원이 안정환에게 몸값으로 지불한 액수가 10억가량으로 추정되는 만큼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결국 차범근 감독은 안정환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마침 2008년 부산 아이파크에 황선홍 감독이 부임하면서 안정환에게 친정팀 복귀를 권유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몸값 때문에 협상이 지지부진했다. 부산은 최대 4억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안정환 측은 10억을 요구하면서 다시 해외진출설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안정환은 6억, 계약기간 1년에 친정팀 부산으로 이적을 하게 된다.
2.7. 부산 아이파크
[image]
친정팀인 부산 아이파크에서는 경기력이 매우 좋아졌으며 주로 4-2-3-1 포메이션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이 때 부산의 골 결정력은 안습 그 자체였는데, 안정환이 찔러준 킬패스로 인한 골키퍼 1:1 찬스를 잘 살렸으면 안정환이 08년 K리그 도움왕이 됐을 거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팀 상황이 좋지도 않은데 더럽게 공 끌고 접어댄다는 의견도 있었다. 후반기에 팀 전력 보강이 됐을 때에는 연이은 부상으로 몇 경기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부산은 10년 전 로얄즈 왕조 시절의 팀이 아니었다. 계약이 끝난 2009년 안정환과 재계약을 천명했으나 부산이 연봉으로 제시한 2억5천을 거부하면서 수차례 협상이 모두 결렬되었다. 이 액수를 놓고 넷상에서도 말이 많았다. 안정환 네임밸류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낮다는 측과 부산 살림살이에 저 정도면 최고 대접이란 측이 팽팽히 맞섰다.[34]
이때 안정환은 좀 미묘한 상태였는데, 수원에서 부산으로 이적할 때는 '''이적료'''가 발생했다. 때문에 부산은 안정환을 데려오기 위해 수원에 안영학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해야했다. 반면 부산에서는 '''FA신분'''을 획득했기 때문에 자칫 부산은 다른 팀 좋은 일만 하고 끝날 가능성이 다분했는데...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안정환은 팀을 이탈하고 중국 슈퍼 리그, 일본 J리그, 중동클럽으로부터 오퍼를 받았으나 안정환은 J리그의 오퍼를 거절하고 다롄 스더(중국)로 이적한다.
2.8. 다롄 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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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시즌 다롄 스더에서 처음에 3개월 단기 계약으로 뛰다가 이후 계약을 연장하여 2009년도 시즌을 끝낸 상태에서 2010년 말까지 계약을 연장하게 된다. 이때 활약은 절정의 회춘모드로, 현지에서 별명이 '''다롄의 왕(大連的王)'''. 09 시즌 단기 계약에는 6골 2도움이라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2010 시즌에는 2009시즌 이상의 활약을 펼치며 미드필더로 활약 하면서도 두자리수 골 기록인 10골 4도움을 갱신하며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준다. 이런 활약 속에 다롄은 시즌 3위까지 올라가서 아시안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기대해볼만했으나 안정환이 상대 수비의 태클로 무릎에 부상을 입어 이후 경기들을 쉬었는데 다롄이 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결국 리그 6위로 마무리해야했다. 거기다가 리그 최고 용병 1위에 선정되는 포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2010년, 다롄과의 계약이 만료된 상태에서 당연히 다롄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았으며 재계약 K리그 복귀 혹은 스페인 진출을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다롄과 1년 더 재계약을 채결하였다.
무엇보다 안정환 본인이 마음 편히[35] 축구할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한 듯 싶다. 이때 쉬밍 구단주도 안정환을 좋아해서 자기 돈으로 최고급 저택을 사서 안정환에게 선물로 줬을 정도. 현지에서의 인기도 매우 높아서,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길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도 다 언론에서 보도할 정도였다고 언급했다.
2.9. 현역 은퇴
2012년 1월 19일, 성남 일화 천마의 유니폼 발표회 때 당시 성남 감독이었던 신태용 감독이 2002년의 무직인 국가대표 삼인방(안정환, 김남일, 송종국) 중 한 명을 영입하겠다고 말했는데 이 한 명이 안정환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발언 이전에도 안정환 영입과 관련한 물밑접촉이 있었던 듯.
...하지만 1월 26일, 안정환의 에이전트사에서 안정환의 은퇴 결정을 발표하면서 팬들의 기대는 안타까운 마무리를 지었다. 1월 31일 공식적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펼치면서 한국 축구의 한 역사를 그린 공격수의[36] 여정은 13년을 끝으로 그렇게 막을 내렸다.[37]
3. 국가대표 경력
1997년에 있었던 중국과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되며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다음 해의 프랑스 월드컵 최종 명단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1999년 코리아컵 멕시코전에서 A매치 첫 득점을 성공했다.[38]
3.1. 히딩크호 시절
2001년 거스 히딩크가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 직전에 있었던 2000년 12월 일본과의 친선 경기에서 안정환은 한국의 공격을 이끌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월드컵 체제에 들어서면서 히딩크는 안정환을 일종의 밀고 당기기와 길들이기를 거쳐서 히딩크호에 적응시켰다. 훗날 히딩크가 자서전에 언급한 바로는 자존심을 건드리면 반응하는게 꼭 호마리우와 비슷하다고. 또한 히딩크는 당시 안정환을 스타 의식에 젖은 선수로 판단하여 처음에는 일부러 외면했다고 한다.[39]
그러면서 안정환은 히딩크호에 완벽하게 녹아들면서 대표팀 공격의 중심으로 자리잡았고, 2002 FIFA 한일 월드컵 직전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날카로운 중거리 슛과 1대1 상황에서 감각적인 칩샷으로 2득점과 1도움을 하면서 한국의 4-1 대승을 이끌었다.[40]동영상 이 때,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손꼽혔던 윤정환과의 콤비 플레이는 일명 "투정환 전술"이라고 불리면서 지금도 축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41]
3.1.1.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2 FIFA 한일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전에서는 후반에 황선홍과 교체돼서 들어가서 크루이프 턴으로 수비수를 따돌리며 슛을 하고 두 번의 묵직한 슛을 리버풀의 주전 골키퍼인 예지 두덱이 가까스로 막아내는 등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조별리그 2차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헤딩으로 동점골을 득점하며 국민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김동성을 연기하면서 펼친 오노 세레머니는 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포르투갈전에선 선발로는 처음으로 나와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후반 역습상황에서의 1대1 찬스를 넣지 못했다는 게 다소 아쉬웠지만 상관없이 한국은 1-0으로 승리,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16강전'''인 이탈리아전에서는 골든 골을 성공 시켰다. 대한민국 축구의 역사를 바꾼 골이자 FIFA 월드컵의 이변으로서 거의 반드시 꼽히기도 하며 안정환 커리어에서 가장 역사적인 골이기도 하다. 전반전에 힘들게 얻어낸 페널티 킥을 실축했지만[42][43][44] 설기현의 천금 같은 동점골로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고[45] , 연장전 후반 종료 직전 극적인 골든 골을 넣으며 대한민국의 최초 월드컵 8강 진출을 견인했다.
'''준준결승전(8강전)'''인 스페인전에서도 선발로 나와서 풀타임+연장전까지 소화했다. 승부차기에서는 네번째 킥커로 나와서 골을 성공시켰다. 16강 전에서 페널티 킥을 실축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중앙'''을 노려서 넣었는데[46] , 꽤 대단한 담력이라고 할수 있다.
'''준결승전(4강전)'''인 독일전에선 후반 교체로 들어가서 독일 수비진을 괴롭혔지만 팀은 안타깝게 패배, 결승진출에 실패한다.
'''3·4위 결정전'''이었던 터키전에서는 선발로 나와서 득점까지 했으나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인정되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기준이였고 현재 오프사이드 룰 기준이었다면 인정되었을 골이었다![47] 경기 내내 중거리슛을 여러번 날리며 공격진들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보였으나 뤼슈튀 레츠베르 골키퍼의 신들린 선방 덕분에 골을 넣는 데는 실패하고 팀은 3-2로 패배, 4위로 만족해야 했다.
히딩크호의 번외편과 같았던 2002년 11월 브라질과의 친선경기에서는 1골 1도움을 기록했다.[48]
3.2. 코엘류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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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5월 한일전 원정에서 결승골을 넣은 후 세레머니를 하는 장면. 한 달 전 홈에서 일본을 상대로 1-0으로 패배한 우리 대표팀은 안정환의 이 골에 힘입어 원정에서 1-0으로 이기며 복수에 성공했다.
코엘류호는 2003년 출범 직후 경기력은 좋았지만 심각한 득점력 부진에 시달렸다. 위에 언급된 안정환의 득점이 코엘류호 출범 후 3경기 만에 나온 득점이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안정환은 대표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하였고, 코엘류 감독 또한 안정환의 능력을 매우 신뢰하여 부임 기간 동안 안정환을 주전 공격수로 낙점했다. 코엘류호 출범 후 4번째 경기이자 2002 한일 월드컵 1주년 기념 경기인 우루과이전에서 0-2로 패하자 아르헨티나와의 친선전을 앞두고 당시 육군 훈련소에서 월드컵 병역 특례로 인해 군사 훈련 중이던 안정환을 차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고, 결국 사상 초유의 군사 훈련병이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는 일이 발생한다. 비록 교체 카드를 다써서 안정환이 투입되는 일은 없었고 팀도 졌지만 이는 코엘류호의 안습함과 안정환의 위엄을 동시에 나타내는 에피소드이다.[49][50]
코엘류감독은 안정환을 포르투갈의 루이코스타와 비교 했고 "박지성과 안정환 중 공격형미드필더자리의 선수를 선택한다면 당연히 안정환" 이라며 말한것은 안정환을 매우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3.3. 본프레레호 시절
본프레레 감독은 주로 피지컬이 좋은 선수들을 중용하여 기술은 있으나 신체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선수들은 대표팀에서 점차 밀려나면서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부임 이후 한동안 대표팀과 멀어져있던 이동국을 주전 원톱으로 중용하면서 안정환은 후반 조커로 주로 기용되었다. 초반에 이동국과의 투톱도 사용했으나 생각만큼의 시너지 효과가 없자 다시 원톱으로 회귀했다. 그리고 본프레레호 이후부터 안정환은 대표팀 주전 공격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3.3.1.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2004 AFC 아시안컵 중국에서는 조별리그 2차전과 3차전인 UAE와 쿠웨이트전에서 각각 한 골씩을 넣었다. 안정환의 아시안컵 참가는 이 대회가 유일했는데, 국대 커리어 내내 여러 사정이 작용하여 아시안컵과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51]
3.4. 아드보카트호 시절
3.4.1. 2006 FIFA 월드컵 독일
2006 FIFA 독일 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 토고전에서 역전 중거리슛 결승골을 득점하며 첫 원정 월드컵 승리를 이끌었다. 동영상 이어 '''조별예선 2차전''' 프랑스전에서는 후반 교체로 나와서 경기 내내 밀리던 팀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히딩크 감독의 평가대로 그야말로 5단 기어 같은 활약. 박지성의 동점골 과정도 사실 중원에서 안정환의 감각적인 원터치 윙패스부터 시작되었다. 토고전이나 프랑스전은 누가 봐도 안정환 투입 전후가 다른게 눈에 보일정도였다. 안정환이 투입되자 공이 돌기 시작하면서 팀의 공격력도 올라갔다. 아드보카트 감독도 이 점을 높이 사서 스위스전에 안정환을 선발로 출전시키려 했다. 현재 박지성,손흥민과 함께 월드컵 통산 3골로 대한민국 역대 국가대표 선수들 중 가장 득점을 많이 한 선수.
아드보카트 감독은 안정환을 조커로 교체출전 시키는 전술의 이유와 안정환의 체력등 몸상태의 대해 묻자 "어차피 승부를 걸거라면 안정환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당시 대표팀은 안정환이 선발 출장해서 고립되게 되면 공격을 풀어나가기 어려울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안정환을 후반 승부를 거는 조커로 쓰는 전술을 썼다.
3.5. 베어백호 시절
월드컵 이후 대만과의 아시안컵 예선에서 후반 결승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후 소속팀을 구하지 못해 6개월을 FA로 지내면서 경기 감각이 저하되어 이후에는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2007년 아시안컵 최종 명단에도 탈락했는데, 당시 베어백 감독은 안정환이 클럽에서 꾸준한 폼을 보이지 못했다면서 선발 제외 배경을 설명했다.
3.6. 허정무호 2기 시절
2008년 5월, 2010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 요르단과의 경기(31일)에 참가하는 국가대표팀 소집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2006년 대만전 이후 21개월 만에 대표팀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2008년 6월 22일 2010 남아공 월드컵 3차 예선 북한과의 경기 이후 다시 대표팀과는 멀어졌지만, 허정무 감독은 안정환의 경험과 능력을 외면하지 않았고, 2010년 3월 코트디부아르와의 유럽 원정에서 다시 발탁하면서 1년 9개월만에 돌아왔다. 후반 이동국과 교체되어 출전하였고 득점은 없었다.
3.6.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2010 FIFA 남아공 월드컵 최종 명단에 선발되었으나, 감독의 판단에 의해서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뛰게 하려고 데려간 게 아니라 베테랑으로서 팀 내 기강 및 후배 선수들의 독려 등을 해주라는 목적이었던 걸로 보인다.[52] 안정환 본인은 훗날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느낌이 좋았기에 교체 출전으로의 기대도 했었다고 말했는데, 허정무 감독의 선택은 이동국이었다. 남아공 월드컵을 끝으로 안정환의 국가대표 경력은 마무리되었다.
팬들은 끝까지 월드컵의 영웅이었던 안정환을 교체 출전시키지 않았던것에 허정무 감독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만큼 안정환이라면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고,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이동국에 대한 아쉬움이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허정무 감독은 2020년 인터뷰에서 안정환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몸상태를 체크했지만 경기에 내보낼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이동국을 투입했다고 말했다.[53] 컨디션이 좋았다면 내보낼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다만 만약 안정환을 내보냈다면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3.7. 국가대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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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29일에 있었던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시아 3차 예선 최종전 쿠웨이트전에서 국가대표 은퇴식을 가졌다. 이날 경기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쿠웨이트를 상대로 이동국과 이근호의 연속골에 힘입어 2-0으로 승리를 거뒀다. 여담으로 안정환은 친선 경기가 아닌, 월드컵 예선전에서 은퇴식을 가진 첫 사례가 되었다.
4. 기록
4.1. 부산 아이파크
- K리그 준우승 : 1999
- 리그컵 우승 : 1998
- 리그컵 준우승 : 1999
4.2. 요코하마 F. 마리노스
- J리그 디비전 1 우승 : 2004
- 제록스 슈퍼컵 우승 : 2004, 2005
- A3 챔피언스컵 준우승 : 2004
4.3. 국가대표
-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 2003
- FIFA 월드컵 4위 : 2002
- FIFA 월드컵 16강[54] : 2010
5. 통산 성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주요 개인 수상
- K리그 MVP : 1999
- K리그 베스트 XI : 1998, 1999
- K리그 브론즈슈 : 1999
- 올해의 키카골상 : 1999
- 체육훈장 맹호장 : 2002
- 자황컵 체육대상 남자 최우수상 : 2002
- K리그 대상 공로상 : 2012
- SBS 연예대상 베스트 챌린지상 : 2013
- MBC 방송연예대상 버라이어티부문 특별상 : 2014
- 제23회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스포츠스타공로상 : 2015
5.3.1. 표로 보기
6. 플레이 스타일
안정환은 한마디로 판타지스타라고 할 수 있다. 양발잡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양발을 완벽하게 다루는 선수이며,[57] 전형적인 9.5번. 트레콰르티스타 스타일이라고도 한다.
주된 포지션을 세컨드 스트라이커라고 하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1선에서부터 1.5선까지의 플레이에 능한 선수가 아니라, 2선에서부터 1.5선까지의 플레이에 능한 선수였다. 뛰어난 볼 컨트롤과 퍼스트 터치[58] 및 개인기, 수준급의 민첩성과 주력[59] 을 바탕으로 한 드리블 능력, 수비수를 앞에 두고도 유효 슈팅을 만들어내는 슈팅 기술[60] 에 기반한 뛰어난 온 더 볼과 박지성 급은 아니지만 준수한 오프 더 볼 무브먼트, 넓은 시야와 준수한 패싱력[61] 등 한국에서는 다시 나오기 어려운 유형의 선수였다.[62] 이탈리아 시절에는 미드필더로 뛰면서 골을 넣지 않고도 MOM이 되거나 이달의 플레이메이커에 뽑히는 등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다.[63] 단, 전형적인 플레이메이커가 아닌 세컨드 스트라이커나 마찬가지인 프리롤 공격형 미드필더 스타일이기 때문에, 2:1 패스나 중앙에서 측면으로 열어주는 윙패스, 전방에서 본인의 볼 소유로 수비를 끌어들이며 동료에게 공간을 만들며 뿌려주는 킬패스는 날카로웠지만 지공상황에서 후방에서부터 풀어나가는 빌드업은 그렇게까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64]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은 3-4-1-2나 4-2-3-1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뛰었을 때다.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능력이 탁월했으나, 박스 내에서의 공간 창출 능력과 뛰어난 슈팅 기술 때문에 종종 포워드로 기용되었다. 부족한 피지컬과 저조한 수비 경합능력[65] 때문에 2톱 기준으로 세컨드를 뛰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2002년 이후로는 원톱에 적합한 선수라는 오해를 많이 사게 된다. 이는 2002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 약팀하고 싸울 때는 안정환보다는 최용수가 더 적합하지만,[66] 강팀하고의 대결에서는 개인능력으로 돌파도 가능하고 패스도 더 원활하게 뿌릴 수 있는 안정환이 훨씬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67] 어쨌든 02년 임팩트가 너무나 강해 끊임없이 각종 스포츠 프로그램은 물론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안정환의 골장면이 재방송된 나머지, 안정환에 대한 팬들의 기대도는 굉장했다. 또 안정환도 국대 팬들의 기대에 부응한 편이다.[68]
가장 큰 약점은 피지컬이다. 비슷한 세대나 한세대 이전의 테크니션인 윤정환, 최문식 같이 세계 수준에서 피지컬 때문에 아예 경기에 뛰지 못할 정도로 피지컬이 약하지는 않았지만, 피지컬적으로 강한 상대와 매치업이 되면 자주 지워지곤 했다. 이란과 같은 국가와의 대진에서 이 특징이 크게 나타났다.[69] 피지컬적인 약점은 건장함뿐만이 아니라, 제공권[70] 이나 활동량의 부족 또한 뼈아프게 다가온다. 또, 공을 오래 끈다는 것, 이와 더불어 패스 능력도 있고 결정력이 최상급은 아닌데도 혼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한편 1.5선에서 2선으로 치고 들어가는 플레이를 주로 한 것은, 피지컬 때문에 몸싸움이 안 됐기 때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슈팅 기술과 온 더 볼 기술 때문에 경기당 0.5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할 수 있었다.[71]
한국 축구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평가에 어울리게 다양한 기술에 능했고,[72] 이를 실전에서 적용해서 쓸 정도의 재치도 있었다. 마르세유 턴이나 라보나 킥을 리그 경기에서 유효하게 사용한 적도 있고, 양발잡이 답게 라 크로케타도 익숙하게 사용하는 등 대부분의 축구 기술을 언제든지 실전에 써먹을 수 있었지만, 가장 뛰어난 시그니쳐 기술은 힐찹과 크루이프 턴을 결합하여 자기 식으로 해석한 안느 턴[73] 이다. 그 외 킥 페인팅, 바운드 슈팅도 굉장히 자주 사용하고 능숙했다.
2000년 코리아컵 멕시코 전에서는 개구리 점프로 수비수를 농락하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폴란드, 미국, 터키의 수비진을 헤집고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플레이도 자주 보여주었으며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퍼스트 터치와 바디 페이크만으로 스페인 수비 셋을 한번에 뚫기도 했다. 이영표는 안정환을 축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작을 선보이며 그러한 선수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평했고, 당시 세계 최고 리그인 세리에 A의 중위권 팀인 페루자에서도 사무국장이 구단 역사상 가장 기술이 뛰어난 선수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안정환이 뛰었던 모든 유럽 리그에서 안정환의 기술은 항상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탈리아에 가서 기술이 더 좋아졌다는 소리도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토탈 사커라는 새로운 개념에 맞추는 과정에서 한국 시절만큼의 기술이 사라져, 언젠가는 잃어버린 기술을 되찾고 싶다는 인터뷰를 이탈리아의 한국 취재진에게 말하기도 했다.
월드컵에서의 좋은 활약[74] 을 바탕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큰 경기에 강한 선수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안정환의 경우 2002년 미국전에서의 동점골, 이탈리아전에서의 골든골, 2006 월드컵 토고전에서의 결승골을 성공했으므로 이 경기와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팬들은 일본 시절에는 아챔에서 10경기 10골을 넣었으니 큰 경기에 강하다고 하지만 주로 타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팀들을 혼내주다 한국이나 중국 팀에 밀려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큰 경기에 정말로 강한지 약한지는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안정환의 정말 큰 장점은 강한 정신력과 투쟁심이다. 기술적인 선수는 이따금 기술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경우가 있으나 안정환은 기술을 이용해 상대에게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도전하곤 했다. 이런 특색을 바탕으로, 안정환은 조커로 나왔을 때도 강하게 도전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본인은 더티 플레이를 잘 하지 않지만, 상대방이 더티 플레이를 해도 흔들리지 않는데, 중국 시절에는 상대방이 거친 태클을 하자 다투다 벤치의 유리벽을 부술 정도로 터프하고, 터키전에서는 남들 모두가 4위는 했다고 좋아할 때 혼자서 라커에서 씩씩거리며 화를 낼 정도로 승부욕도 대단하다.
크랙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피지컬과 수비력이 딸리고 혼자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에 이를 메워줄 만한 전술과 동료들과 함께할 때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저조한 활약을 보인 것은 몸 상태 문제도 있었지만, 팀이 강등권일 정도로 전력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대우 로얄즈 시절에는 앞뒤옆에 샤샤, 뚜레, 마니치라는 역대급 외인들이 함께 했고, 페루자 시절에는 중위권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팀의 전력이 평균 수준은 됐으며, 요코하마나 다롄 시절에는 팀이 우승권에 있을 정도로 전력이 좋았기 때문에 이러한 팀들에 속할 때는 모두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가장 유사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선수로는 한세대 앞선 로베르토 바조와 동시대의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그리고 이후 세대에서는 파울로 디발라. 모두 공격형 미드필더로도 훌륭하지만 전형적인 플레이메이커는 아니며, 골도 잘 넣을 수 있는 선수들이다.
7. 총평
와싯의 파스타툰. 꼬레아노 Ahn[75]
'''잘생긴 외모와 아름다운 플레이 스타일, 천재성, 성실성, 뛰어난 멘탈 등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2002년 월드컵 이후의 불운으로 커리어가 바닥을 치고만 비운의 판타지스타'''
하지만 이는 사실 프랑스와 독일, 수원에 이르는 2년 동안의 저조한 활약 때문으로, 사실 부산 대우 로얄즈에서는 리그 MVP에 등극하고, 페루자 시절에는 2년차 반년 임대 갱신 때문에 경기를 제대로 뛰지 못했으나 1년차 후반에는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2년차에도 땜빵으로밖에 못 뛰었지만 출전할 때마다 기대가 되는 활약을 했으며, 2002년 월드컵에는 월드컵 10대 스타에 꼽힐 정도의 플레이를 보이고, 요코하마에서는 우승을 했으며, 2006년 월드컵에서는 원정 첫 승의 결승골을 날리고, 부산 아이파크는 저조한 팀을 견인했고, 다롄에서도 우승을 하는 등 커리어가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하지만 페루자 방출 사건 이후로 전성기를 일본에서 날리는 바람에 유럽무대에서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기에, 많은 축구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페루자와 부산의 소유권 소송사건의 영향으로 6개월, 일본계약종료시점에서 유럽진출을 모색하다 또 6개월 총 1년의 무적생활등 사실상 유럽진출의 시기를 놓쳐버린 것등은 그를 비운의 선수라고 말 할 수있다.
[1] 마치 로베르토 바조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인 말총머리로 대표되는 시절로, KBS 예능프로에서 밝히길 미용실 갈 시간이 없고 귀찮아서 기른 머리라고 한다. 나중에 자르려니 구단에서 기를 쓰고 반대했다고. 이미 트레이드 마크가 된 상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2] K리그 17경기 5골 / 컵 대회 포함 총 33경기 13골[3] 컵 대회까지 포함할 시 총 35경기 21골[4] 야구의 박찬호와 같은 사례는 잘 모르겠으나 이 당시 젊은 선수들의 해외진출과 병역이 얽혀 있었다는 것은 당시의 일간지에서도 언급하곤 했던 사실이다.[5] 영국에서 뽑은 월드컵 미남 축구 선수 3위였다. 1위는 베컴, 2위는 피구. 호주에서는 4위로 뽑혔다. http://news.joins.com/article/1869189[6] 황선홍, 홍명보, 유상철 등은 J리그에서 뛰고 있었다[7] 축구해설가 서형욱의 저서 <유럽축구여행>에 따르면 저자는 2001년 2월 라치오전 당시 현지 토박이 노신사로부터 "요새 경기장에 잘 안와서 선수 이름을 다 모른다"느니, "나카타 넘버 원" 등을 들으며 일본인으로 오해받았고, 동네 꼬마들로부터 '원숭이'라고 멸시당하며 돌을 맞을 뻔했다고 한다.[8] 그나마 얼굴이 잘생겨서 다행이었을 것이다.[9] 이는 출전경기에 따른 임대료지급 때문 일 것이다. [10] 이동국 항목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동국의 독일 진출도 비슷한 난항을 겪으며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동국은 부상 회복기에 6개월 임대됐을 뿐이라 팀에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했고 안정환과 달리 독일 선수들과 어울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내년의 구상에도 포함하는 등 안정환처럼 나름대로 코치진에서는 좋게 봤던 듯하나 이동국은 안정환과 달리 해외에서 성공해야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부족해서 본인이 그냥 돌아오게 된다.[11] 2연속 MotM을 받고도 출전 시간이 줄어든 건 이와 연관이 없진 않을 것이다...라는데 페루자는 이런 장난질을 부리기에는 유에파컵 진출이 충분히 가능한 순위권이었다. 팬들의 망상이다.[12] 안정환이 골을 넣고 운 건 단순히 골든골을 넣어서가 아니라, 임대 생활과 인종차별의 설움을 딛고 드디어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월드컵이고 그것도 자국에서 열리는 데다가 8강 진출이니만큼 그 정도까지 추측하는 건 오버가 아닐까 싶다. 안정환이 자주 술회하는 것처럼 페널티 킥을 실축해서 죽었다 싶었는데 골든골을 넣어서가 아닐까.[13] 이게 단순한 협박인지 진지한 충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안정환은 구단에서 직접 온 얘기였기 때문에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인 걸로 보인다.[14]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의 한국의 인지도는 진짜 듣보잡이라 한국 영상이 나올 때는 북한 영상이 대신 나올 정도였다. 안정환이 때빼고 광을 내는 데 돈을 많이 쓴 건, 비슷한 급으로 놀아야 동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정환은 동료들이 패스를 안 하고 인종차별을 하는 등 적응기에는 마음 고생이 굉장히 심했다고 말한다.[15] 안정환이 처음 페루자에 임대올 때 40만 달러였으며 한 시즌을 뛰고 완전 이적에 이적료 100만 달러와 연봉 70만 달러 제안이, 그리고 다시 한 시즌이 지나려는 2002년에 블랙번과 350만 계약을 맺고 FIFA의 벌금이 400만 달러였으니 안정환은 정말 2년 만에 몸값을 10배는 불린 게 된다.[16] 안정환의 소속이 불분명해서 영국 노동청이 워크퍼밋 발행을 거절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2013년에 안정환이 김현회와의 칼럼에서 말하길 진짜 이적 실패 이유는 블랙번이 페루자의 행보를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17] 파칭코 판매업체 필즈(주)의 자회사로, 2005년 토탈 워크아웃 및 J.사카자키 마케팅을 합병하여 '재팬 스포츠 마케팅'이 됐다가 2011년에 피트니스클럽 사업부문을 신규법인 토탈 워크아웃 프리미엄 매니지먼트로 양수한 후 청산됐다.[18] 해외 일간지에서도 '''한국 축구 영웅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넣었다고 해고 당해(sacked, perugia as korea's goal hero as italy blames fifa conspiracy for shock exit)'''라는 문구가 1면에 실렸다. 안정환의 골든골도 해외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월드컵 20대 충격골(20 Goals That Shook the World)에 나온다.[19] 대표적으로 FC 메스로 이적할 때 우디네세와 리보르노의 오퍼가 들어왔었다. 그 중에 우디네세는 당시의 감독이 안정환의 페루자 시절 감독이었던 코스미였던 지라 특히나 영입을 원하는 편이었다. 다만 안정환 항목의 멘탈왕&대인배 목차를 보면 알겠지만 우디네세와 리보르노와 협상 차 이탈리아에 가있을 때 직접 국경을 넘어 8시간 운전해온 메츠 구단주의 정성에 감동먹어서 메츠로 이적했기에 둘 다 결렬되긴 했지만.[20] 사실 판정 논란 때문에 한국과 심판에 안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과 별개로 '''정당하게 골을 넣은 선수를 자국팀을 상대로 골 넣었다고 박대하는 행위 자체가 나라 망신이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디에고 마라도나나 그와 같이 이탈리아를 상대할 수 있는 월드컵 진출팀 국가대표급 선수도 언제든지 방출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선수들이 이탈리아로 갈 리가 있겠는가? 거기다 구단주가 인종차별성 발언까지 했는데 이런 논리대로라면 나카타 히데토시같이 실력과 상품성이 확실한 선수도 이탈리아로 가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손해고 나라 망신이다. 판정 논란과는 별개로 안정환에 대한 얘기를 하면 이탈리아 사람들이 조심스러워지는 이유가 괜한 게 아니다.[21] 그 선수는 독일의 전설적인 여자축구 선수 비르기트 프린츠이다. 여축에서는 펠레 수준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선수. 그러나 어쨌든 여자 선수의 신체적 한계가 남성 프로 선수를 넘을 수 없는 건 자명할 뿐더러, 여자 선수들도 남자 팀에서 뛰라는 제의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는 게 현실이다.(이런 제안에는 여성부를 독립된 리그로 보는 게 아니라 남자부 리그의 하위 리그로 보는 시선이 담겨있다고 여기기 때문.) 당장 여자축구를 검색하면 나오듯이 세계 랭킹 5위이던 호주 여자 국대팀이 호주 중고교 팀에게 7-2로 대패한다든지 한국 여자 국대팀도 같은 나이 성인 실업팀도 아닌 고교팀이랑 연습경기를 해도 압도하질 못할 수준이다... 당연히 프린츠는 이 제안을 거절했고 이 일은 지금도 유럽축구 사상 역대급 기행 중 하나로 남아있다.[22] 그가 이탈리아 축구팬인지라 이탈리아 축구계에선 유명하다. 그는 유벤투스팬으로 알아주기에 유벤투스가 리비아로 가서 친선경기도 벌이는가하면, 아예 유벤투스를 살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다. 여하튼 유벤투스에 돈을 많이 줘서인지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2002년 세리에 A 슈퍼컵을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기까지 했다.[23] 평가는 3부리그 수준이라는 평까지 받았다. 오죽하면 카다피 돈이 많이 들어온 유벤투스조차도 테스트하곤 영입을 포기했을까? 거기에 약물 도핑까지 걸려 출전 정지당했다 '아무도 막지 못한 선수'로 유명했는데, 아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막강해서? 아니다. '''아예 막아 볼 기회조차 없었다.'''[24] 하칸 쉬퀴르나 파올로 몬테로, 이고르 투도르 등이 조금 생소할 수 있어도 월드컵에서 활약하고 세리에 빅클럽에서 활약한 자국 슈퍼스타들이다.[25] 평점이 높은 것은 앞서 열거한 선수들에 비해 안정환의 출전시간이 매우 짧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워낙 짧은 시간동안 교체로만 주로 출전해서 크게 낮은 평점을 받기가 힘들고 그와중에 mom도 몇번 먹었기 때문에 평점이 급상승 한것으로 판단된다.[26] 군대 문제에 관해선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이 시기 한국 축구 선수들의 유럽 진출담 중에서는 군대 얘기를 해도 괜찮아 괜찮아 하다가 갑자기 괜찮은 줄 알았던 군대 얘기를 하면서 틀어졌다는 경험담이 있다.[27] 정확하게는 PM이 소유권을 구입해서 시미즈에 임대 형식으로 보낸 것. 이적 후 빚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외향적인 성격이 아님에도 PM과의 계약 때문에 일본 쇼프로에도 자주 출연했다. 물론 빚을 다 갚고는 안 나갔지만.[28] 추정되는 팀은 나고야 그램퍼스로 연봉 30억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유럽에서 뛰고 싶다는 이유로 8억을 받고 프랑스 리그로 갔다.[29] 지동원의 경우 활동반경이 좌우측으로 굉장히 넓고 측면을 파고 들어서 크로스하는 것도 가능하며 체격을 통해서 받은 후 동료들에게 쉽게 다시 뿌려주거나 헤딩으로 연결해주는 플레이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해 주고 있다. 그러나 안정환의 경우 피지컬적인 약점이 있어서 약팀에서 최전방을 맡아 공격의 활로를 혼자서 뚫어줄 정도는 아니다. 02년 한국은 수비에 치중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의 생각보다는 강팀이고.[30] 토고의 골키퍼가 메스에서 동료였던 아가사였다.[31] 이 골로 대한민국 월드컵 최다 득점자가 된다. 2010년 박지성이 2018년 손흥민이 타이를 이룸[32] 일명 권오크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친과 부인, 특히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이었다. 부인에 대한 성적인 모욕은 네티즌에 지목당한 여자 서포터가 아니라 술먹고 깽판치던 아저씨들이 했다는 소문도 있지만, tvn에서 방영하는 용감한 기자들이라는 프로에서 해당 상황의 녹화가 방송된 적이 있는데 명확하게 여자 목소리다.(하지만 욕설 부분은 삐 처리되어서 들을 수 없다.) '''참고로, 이때 부인과 가족들이 관전을 하고 있었다!'''[33] 사과를 하긴 했는데 대상이 안정환이 아니었다.[34] 이후로도 부산은 쪼들리는 형편 탓에 쓸만한 선수는 계속 팔아치우고 풋사과만 끌어모아 어렵사리 선수단을 구성했다.[35] 페루쟈 임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에선 일개용병에 불과했으며 골을 못 넣는다고 감독에게 질책까지 들어야했다. K리그 복귀 후에는 연봉만 많이 먹는 폼이 떨어진 노땅에 불과했다. 근 10년 마음고생 하다가 팀의 에이스로 대접을 받는 것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36] 트레콰르티스타라는 말이 거의 쉐도우 스트라이커 수준으로 공격에 치중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뜻한다. 국대에선 원톱으로 주로 나왔지만 리그에서의 안정환은 주로 트레콰르티스타였다.[37] 여담으로 성남 이적이 무산된 이후 신태용 감독은 나름 아쉬워하면서, 나랑 밥 먹을 때는 100% 올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은퇴했다면서 투덜되었다.[38] 여담으로 이 대회는 마지막으로 열린 코리아컵 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전년도에 있었던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 1-3 역전패 이후 리턴 매치이기도 했다.[39] 당시 안정환은 어떻게든 현지 적응을 하려고 파스타를 먹고 명품을 이월상품으로 걸치며 겉으로 때빼고 광내던 시기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완전 스타지만, 사실 당시의 안정환은 부산의 완전 이적 거부와 가우치 단장의 로스터 관여 등으로 제대로 뛰지 못하고 있던 때라 속이 시꺼멓게 타고 있었다. 참고로 머리 스타일이 장발에서 뽀글이(..)로 바뀐 건 히딩크 감독 부임 이후이다.[40] 한국 축구 역사에 손꼽히는 매우 아름다운 골이다. 직접 보자.[41] 다만 안타깝게도 윤정환은 패싱력에 비해 활동량과 체력이 부족한 탓에 히딩크 감독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월드컵 승선에 실패했다. 대표팀이 16강전과 8강전에서 연이어 연장전 혈투를 벌인 점을 볼 때 히딩크의 판단이 옳긴 했지만.[42] 안정환 본인은 이 코스 선택을 자신의 판단 미스라고 술회했다. 부폰은 키도 크고 팔도 길고 반사신경도 좋은 선수였기 때문에 막힐 가능성을 고려해서 아예 구석 높은 곳으로 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실제로 페널티 킥 잘차기로 소문난 호날두도 평상시에는 왼쪽 하단 구석으로 깔아차는 페널티 킥을 주로 차지만 부폰을 상대로 할 때에는 왼쪽 상단 부분으로 차거나 가운데로 찼다. 사실 안정환의 킥이 완벽한 것도 아니었고, 전반전이었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로 킥에 문제가 있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무릇 모든 페널티킥은 잘 차면 골키퍼가 못 막는 것이기에, 안정환이 잘 찼는데 못 막고 뭐 그런 건 없다.[43] 원래 PK 키커단이 아니었으나 이탈리아 무대 경험을 살려 특별지명된 듯 보인다.대회 당시 1번 박지성 2번 이을용 3번 황선홍 4번 홍명보로 알려져 있다.[44] 이후 저 실축은 예능에서 놀림거리로 쓰이기도 하며 본인도 뭉찬 감독 때 가족 앞에서 PK를 실축한 모태범에게 아직 몇번 더 놓쳐봐야 체육인이 된다라는 진담섞인 드립을 쳤다.[45] 설기현의 동점골이 터지는 순간 안정환은 다른 선수들처럼 설기현에게 달려가 함께 세레모니를 하지 않고, 제자리에 쓰러져 엎드렸다. 페널티 킥 실축에 대한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장면[46] 스페인의 주전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을 보고 중앙을 노렸다.[47] 안정환에게 패스가 갈 때 이천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어서 오프사이드로 판정됐었다. 허나 이 당시 이천수의 포지셔닝은 안정환이 패스를 받는 데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현재 개정된 오프사이드 기준으로는 문제가 없다.[48] 정확히는 히딩크호 멤버들의 마지막 경기. 경기는 김호곤 감독이 지휘했고 이날을 끝으로 황선홍, 홍명보는 은퇴했다.[49] 2019년 지금 같은 시대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잘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2003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환경은 그렇지 않았다. 우루과이전 당시 한국은 월드컵 4강 신화의 국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2002년의 영웅들에게는 다른 이들과의 같은 형평성도 없어 크고 작은 특혜들이 있었다. 게다가 운동 선수들은 훈련소에 입소하여 각종 군사 훈련을 받게 되면 운동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몸이 급격하게 망가져 상무 자대 배치 이후 다시 몸을 만들어 이전과 같은 컨디션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이다.[50] 결국 안정환의 대표팀 차출은 해서는 안 될 결정이었다. 그러나 워낙에 절대다수의 여론이 안정환의 차출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축구협회로써는 이를 거스를 수 없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왜 코엘류 감독이 안정환을 경기에 투입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51] 1996년 당시에는 너무 어렸고, 2000년에는 페루자에 갓 이적한 후 경기에 자주 나오지 못해서 뽑히지 않았다. 2007년에는 수원에서 그야말로 최악의 시즌을 보냈던 시절이라 베어백 감독의 고려대상이 아니였고, 2011년에는 은퇴 직전이라 이미 국대와는 멀어진 뒤였다.[52] 왜 굳이 선수 1명의 자리를 낭비했냐는 평가도 없었던 게, 우선 안정환은 외모, 실력, 명예 삼박자를 이미 다 갖춰놓은 선수여서 쓸 수 있다면 엔트리에 뽑혀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 또한 안정환처럼 팀 내 기강을 잡을 대선배가 없던 조광래호나 홍명보호의 박살나다시피한 팀 케미스트리를 본 팬들은 허정무 감독이 안정환을 데려갈 만했다며 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딱히 논쟁거리가 될 것도 없는게 거의 모든 국가대표팀들은 국제 대회에 나설 때 기강과 경험 많은 고참급이나 미래를 위한 차원에서 유망주들을 꼭 넣곤 한다. 1994년 풋사과던 호나우두, 2002년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한 카카 등이 그런 예다.[53] 월드컵 개막 직전에 펼쳐진 스페인과의 친선 경기에서 교체 출전했는데 생각보다 몸상태가 별로였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최종 명단 발표 이후 훈련 중 한 번은 담이 올라와 국내에서의 월드컵 출정식과 일본 원정에도 출전하지 못했다.[54] 15위[55] 리그와 컵대회를 포함한 시즌 총 경기 수[56] 리그와 컵대회를 포함한 시즌 총 득점 수[57] 오른발잡이고 오른발 골 비율이 높기는 하지만, 슈팅과 드리블, 패스, 심지어 데드볼 상황인 코너킥과 프리킥까지 페널티킥만 빼고 왼발을 쓰는게 유리한 상황이면 언제든지 왼발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유명한 스코틀랜드전의 칩샷은 왼발로 찬 거고, 특유의 킥 페인팅 이후의 반대발로 슛, 힐찹, 안느턴까지 드리블에서의 완벽한 양발 사용이 매서운 온 더 볼 능력을 한층 강화시켰다.[58] 안정환이 하는 접기 강의를 보면, 공을 '''수비수가 태클을 걸고 싶지만 자신이 언제든지 볼을 회수할 수 있는 애매한 위치'''에 놓는다고 하는데, 여기는 굉장히 좁은 영역이기 때문에 안정환 급의 퍼스트 터치가 없으면 안정환 같은 접기를 할 수 없다.[59] 2004년 무릎 부상 이후로 주력이 느려져서 상대를 테크닉이나 민첩한 움직임으로 제치고도 곧 따라잡히는 경우가 많았다.[60] 요한 크루이프는 안정환의 유연함과 슈팅 기술은 남미 기준으로도 수준급이라고 평했다.[61] 패스가 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의도적인 스핀이 걸려 있어서, 현역 시절 직관 후기로 '축구공으로 당구를 친다'는 얘기가 종종 나왔다.[62] 안정환이 축구를 배우던 시기에는 한국에 토털 사커의 개념조차 없을 정도였고, 유소년 시스템은 당연히 없었고 학교에서 축구를 배워야 했다. 더구나 잔디도 없는 맨땅에서 축구를 해야했고, 안정환은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는 노가다를 뛰고, 대학 1년 동안은 축구를 포기할 정도였다. 안정환의 어려운 집안 사정은 '''빈민층'''(밥 먹기도 어려운 수준) 수준이며, 한국의 열악한 축구 환경 때문에 남미의 빈민층 축구 스타들보다 더 고된 환경에서 축구를 해야했다. 즉, 소위 말하는 '''천재'''에 해당하는 선수다. 참고로 이영표도 어려운 환경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보약은 지어 먹을 수준은 됐다. 안정환은 그 보약도 이영표에게 얻어 먹을 정도로 어려웠고, 한때 철가방을 했던 이을용도 안정환보다는 사정이 나았다.[63] 대표적으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이 이탈리아전 연장 전반의 역습 상황으로, 차두리에게서 패스를 받은 안정환은 프란체스코 코코를 안느턴으로 속이고 가랑이 사이로 황선홍에게 패스, 파올로 말디니를 등지며 버티던 황선홍이 다시 안정환에게 백패스, 우측 측면 공간으로 엄청난 스피드로 뛰어가는 차두리에게 왼발로 로빙 스루 패스를 찔러줘 크로스를 올리게 한다.[64] 빌드업이 뛰어났으면 프랑스나 독일 시절 밑에 내려가서 뛰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65] 이영표에 의하면 수비 가담은 2002년 전까지는 아예 안했지만 히딩크 이후에는 공격수 또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수비적으로 해야 하는 역할은 완벽히 해줬다고.[66] 적은 기회에도 확실하게 골을 넣는 것은 안정환이라는 식의 서술이 있었으나 그런 부분에서는 최용수가 더 낫다. 한국 국대는 아무래도 아시아와의 싸움이 많고 안정환 시절의 아시아는 지금에 비해서는 상당히 수준이 낮았는데, 02~06년 국대에서 공격수로 많이 뛴 안정환의 득점 기록은 좋은 편이 아니다.[67] 2006 월드컵 프랑스전에서도 안정환이 들어가자 그 이전보다 미드필더에서 볼이 훨씬 잘 돌고 공격 전개가 가능해졌으며, 박지성의 동점골도 안정환의 패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설기현의 크로스에 이은 조재진의 헤더 패스를 받으러 들어간 것도 박지성과 안정환 둘이었다. 물론 안정환이 들어간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나아졌을 뿐, 경기력에서 계속 열세였던 것은 맞다.[68] 하지만 정작 안정환이 찔러주는 킬 패스를 주워먹을 수 있는 선수가 국내에 거의 없었다. 안정환의 킬 패스는 윤정환과는 다른 개념인데, 윤정환은 누구나 받기 쉽게 좋은 패스를 찔러주었지만, 안정환은 상대편 수비진의 헛점을 찌르는 다소 모험적이지만 송곳같은 패스를 찔러주었다. 이는 패스의 대상이 되는 '''선수가 받아서 처리할 수만 있다면''' 완벽한 골 찬스를 얻을 정도로 예리했지만, 정작 국내에는 그걸 제대로 받을 정도로 빠르거나, 받아서 한 번에 슛으로 연결할 정도로 퍼스트 터치가 좋은 공격수가 국대에 '''없었다'''. 안정환과 차두리의 조합이 좋았다는 평을 들은 건, 차두리가 안정환의 킬 패스를 받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반면 네덜란드 유소년 교육에서 패스에 대해 가지는 관점은 한국과는 다르게, 그와 같이 패스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못 받은 선수가 잘못하는 게 아니라 주는 선수가 잘못 준 게 무조건 더 크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적절한 공간으로 누구나 받을 수 있게 혹은 공간으로 들어가는 동료의 움직임에 맞춰서 적절하게 주는 게 중요하지 패스를 주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축구관으로 축구를 보기 때문이라고. 네덜란드가 다 옳은 건 아니고 축구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안정환 본인도 동시대의 지단처럼 피지컬과 테크닉으로 다 부수고 받기도 쉽게 주는 거 아니다.[69] 비슷한 플레이스타일을 가진 델피에로도 2002년 이탈리아전 당시 피지컬이 뛰어난 송종국만 만나면 공을 뺏겼고, 후반에 잠그기 겸 가투소로 교체된다.[70] 점프력과 방향을 트는 헤딩 기술은 좋았지만 피지컬이 밀려서 경합이 잘 안된다.[71] 그래서 안정환의 팬들은 안정환의 집안이 좋았다면 피지컬적으로도 더 좋은 조건이 갖춰졌을 것이기 때문에 대성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안정환이 그 테크닉에다 피지컬이 좀 더 보강되어 있었더라면 당연히 더 어렸을 때부터 성인무대나 청소년 무대에서 월반하는 식으로 두각을 나타내었을 것이고, 이동국 버금가는 혹사를 당해 3년에 한 번 정도 부상과 혹사에 져버린 비운의 미남 천재 현재 대학 무대에서 지도자 생활.. 하는 식으로 네이버 기사에나 올라오는 정도로 커리어가 완전히 끝장났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동국보다 나이는 형이지만 포항 데뷔 동기인 백승철의 경우 데뷔시즌에 케이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공격수였지만 부상을 입었음에도 무리하게 혹사당하면서 1998년, 1999년까지 축구를 하고 접어야만 했다. 안정환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72] 박지성, 이영표, 이천수 등 대표팀 동료들과 팬들이 주로 이런 평가를 한다. 반면 90년대 이전부터의 축구팬들이나 전문가들은 안정환이 뛰어나고 아름답다는 것은 다 동의하나 한국 축구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안정환을 꼽지 않는 사람도 꽤 있다. 대부분 이런 경우 최문식을 꼽는다. 단, 안정환 이전의 테크니션들은 국내나 아시아권에서밖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안정환은 유럽 리그와 국제 대회에서 세계 최상위 팀들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서도 본인의 기술을 유효하게 써먹었다는 큰 차이가 있다.[73] 맥기디 스핀과 거의 동일하다. 당연히 76년생인 안정환이 86년생인 맥기디보다 훨씬 먼저 썼다. 티에리 앙리는 안느 턴에 대하여 매우 아름다운 기술이라며 안정환에게 직접 배우고 싶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74] 2번의 결승골, 1번의 동점골, MOM 2회.[75] 온갖 패러디와 약빤듯한 발언으로 가득 찬 와싯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진지한 내용으로 구성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