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생애
1. 출생부터 즉위 초반까지
연산군 이융은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새벽 1시 경(3경 5점) 경복궁 교태전에서 성종 이혈과 왕비 윤씨 사이에서 적장자로 태어났다.[1] 단종 이후 오랜만에 나온 적장자 출신 임금이다. 역대 조선의 임금들 중 정통성이 확고한 임금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연산군은 정통성이 확고한 국왕 중 한 명이라 부를 만하다. 국왕이 첫 번째로 얻은 자식, 그것도 아들인데다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가 아닌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왕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연산군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 왕위 계승자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 승지였던 현석규와 임사홍이 궁궐에서 왕위 계승자가 태어난 것은 처음이라고[2] 성종에게 축하를 보낸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재위 초반 넓게보면 초중반에는 안정적이게 정국을 운영했던 국왕이었다.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였고 별시 문과를 실시하여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여 문신들에게 학풍을 장려했다 또 빈민(貧民)을 구제한 기록이 있다. 신하들이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라고 하는 특이한 존호를 올렸지만, 연산군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물리친 적이 있었다. 성종 말기의 느슨함을 휘어잡을 만큼 정치에 의욕도 있었고, 3명의 대비(할머니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왕대비, 작은할머니이자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계모인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들을 극진히 모셨으며,[3] 자기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경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서, 왕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근데 의아하게도 이 시절부터 이미 연산군에겐 폭군의 자질이 싹트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긴 하다. 조선조 내내 군왕의 공식 업무들 중 굉장히 중요한 업무에 속했던 '경연(經筵)'을 점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 주요 근거이다. 당시 '경연'은 사전적 의미대로면 능력 / 덕망 있는 관리나 선비를 모시고 스승으로 삼아, 왕과 신료들이 경전을 공부하는 일종의 과외 수업이었는데, 실제로는 일종의 '국무 회의'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을 이미 즉위 초부터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나가지 않기 시작했으니, 이미 '연산군의 폭군 시작'이라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경연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연산군이 폭군의 기미를 보였다고 주장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명군이든 폭군이든 암군이든 관계없이 역대 조선 국왕들 대다수는 경연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세종대왕이나 영조, 정조 같은 공부벌레형 군주를 제외하면 대부분 싫어했다. 경연 자체가 기본적으로 공부차원이기도 하거니와, 그냥 공부인 걸 넘어서 상당히 심적으로도 힘든 공부였기 때문이다. 당장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부터가 경연을 싫어했다. 즉위 1년차부터 '''"내가 나이도 많으니 경연을 들을 필요는 없겠구나!"'''하다가 신하들에게 까이고 경연에 나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4] 태종 이방원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빠지는 경우가 많았고[5] , 세조는 아예 폐지시켜 버린 전적이 있다.[6] 광해군은 정말로 경연을 싫어했다. 경연을 좋아했던 왕은 열 손가락에 꼽을 수준이다. 뭐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대 신하들에 비해 넘사벽급 지식을 지녔던 세종대왕과 영조, 정조는 경연장을 자신이 배우는 자리가 아닌 신하들에게 강의를 하는 자리로 변화시켜버렸긴 한데, 이건 상당히 특이한 경우고.[7]
즉 연산군이 경연을 자주 하지 않은 게 칭찬 받을 일은 아니긴 해도,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 경연이 오로지 실무를 논하는 자리라면 문제가 됐겠지만, 경연은 유교적 가르침이나 역사 등을 논하며 배우는 자리로 실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고, 신하들이 임금을 가르치는 자리였기 때문에 고사(故事)나 경전의 훈시 등을 들며 임금의 행동을 은근히 비판하거나 압박하는 것도 가능한 자리였다.[8] 온갖 회의와 알현, 상소에 시달리면서 따로 잔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셈이니 조선 시대 임금들의 고질병이 스트레스성 질환 종기와 등창이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고, 연산군이 경연을 싫어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덤으로 사실 신하들이라고 모두 경연을 좋아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경연을 싫어한 신하들이 상당히 많았다. 신하들 입장에서도 정치와 맡은 업무 하기도 바쁜 마당에 시간 쪼개서 공부를 해야 되고, 임금 앞에서 하는 거라 대충 할 수도 없으니 은근히 피곤한 자리였다.
그리고 횟수로만 따지면, 연산군은 경연을 갑자사화 바로 전 해인 연산 9년에 자그마치 122회나 열었다. 물론 이게 많이 줄인 것이긴 하고 갑자사화 후로는 폐지해 버렸지만 말이다. # 그리고 병을 핑계 삼아 경연을 안 했던 적이 잦았던 것 뿐, 일단 나오면 열심이었다고 한다. 실제 연산군이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진짜 아파서 경연을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실제로 연산군은 한시를 제법 잘 지었다고 한다.[9] 실제로도 세자 시절 연산의 시를 본 신하들은 경탄을 했다고 한다. 또 신하들과 논쟁할때 경전을 적절히 인용하여 자기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물론 꾀병을 부리고 놀자판을 벌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연산 3년에는 사간원에서 "아니, 눈병이 나셨다며 경연 빼먹으신 분이 연회는 왜 나가셨습니까?"라고 아뢰자, "연회 나가면 눈으로 먹냐?"라고 받아쳤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10] 《연산군 일기》 22권, 연산 3년 3월 9일 신해 3번째 기사, 《연산군 일기》 권22 3년 3월 11일 계축 2번째 기사
어쨌든 경연 관련한 일화 외에도 평상시의 언행을 보면 기존 연산군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꽤 괜찮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금과 노역을 피해 도첩[11] 도 없이 무단으로 승려가 되려 하는 자들을 공역에 배치해 정리하면서도 "백성들이 중이 되는 게 어찌 그들이 거친 밥과 나물국을 즐기기 때문이겠는가? 나라에서 1명도 빠짐없이 노역을 시켜 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출가하는 것이니, 농사에 전력하게 하여 생계를 넉넉하게 만들 방법을 찾으라"고 명했고, 이번 기회에 다른 승려들도 도첩 없는 사람 없는지 전수조사를 하자는 신하들에게 "내가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중들도 사람인데 그런 식으로 막 대해서야 쓰겠냐? 법을 너무 빡빡하게 적용해도 세상이 오히려 각박해진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백성들의 삶에 아주 무관심하지는 않았다는 것.
일본에서 원숭이를 선물로 받은 일에 대해서도 '선왕(성종) 때 앵무새를 보낸 적이 있는데, 비용만 많이 들고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구리나 철과 같이 꼭 필요한 물건도 값을 대기 힘들어서 무역을 금지했는데 하물며 이런 동물은 오죽하겠는가? 도로 돌려보내고 잘 타이르도록 하라.'라는 개념있는 발언을 남긴 적도 있다. (연산군일기 47권, 연산 8년 11월 14일 계미 1번째 기사)
평범한 것을 넘어 비범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연산군 2년, 초계군수 유인홍의 첩이 남자 종과 간통을 하다가 전처 소생의 딸에게 발각되어 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연산군은 직접 딸의 죽음을 자살이라 주장하는 유인홍에 대한 취조를 지시하고 심문 내용을 하달하는 등 조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심문 내용을 보고받고 단박에 허점을 찾아내는 등의 예리함을 보이며,#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명백한 타살이라는 점과 유인홍이 첩을 보호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입을 맞추고 위증을 하려 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수사에 있어 탁월한 면모를 보여 주기도 했다.[12]
대체적으로 '''여기까지는 좋았다.''' 연산군은 즉위 후 최소 4년까지는 큰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사가독서(賜暇讀書)[13] 를 실시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왜구와 야인의 침략에 대비해 병기를 증축하며, 악한 관리들을 색출해 벌주는 등 왕으로서의 본분은 지켰다. 다만 어전 회의에서 '''위를 능멸하는 풍습은 고쳐야 한다'''는 명에 유달리 집착하는 등 이때부터 슬슬 싹수가 보이긴 했지만…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의 이 발언이 언급되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치하 아래 불어닥칠 피바람의 복선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연산군 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1번째 기사, 《연산군 일기》 권2 1년 1월 30일 갑인 3번째 기사
재위 초~중반까지의 연산은 대간과는 대립각을 세웠으나 주요 국정은 경험 풍부한 노신들의 자문을 존중하면서 큰 무리 없이 이끌어나갔고, 민생에도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종조부터 만개한 조선 중기의 전성기는 연산군 재위 중반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공적인 국정 운영이 그럭저럭 정상적이었다는 거지, 사적으로 가면 멋대로 사냥 가고 지방에서 미녀 뽑아 방에 들이고[14] 먹고 싶은 거 다 구해다 먹고 비싼 거 사들이고 하면서 마음대로 놀아 댔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한 나라의 군주다 보니, 왕으로서 할 일 제대로 하고 선만 넘지 않는다면 노는 것 자체는 문제삼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는 조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는 재위 중반기까지는 국정에 딱히 영향을 끼치는 수준도 아니었고, 대신들이 슬슬 아껴 쓰라는 상소를 올리는 타이밍도 무오사화 뒤였다.
아무래도 연산군의 이미지에 비해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아서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이때를 생략하나, 《왕과 나》에서 나온 연산군은 드물게 이 시기를 조명해 주었다. 덕분에 연산군을 즉위하자마자 12년 내내 막장 짓거리만 하고 다닌 망나니 왕으로 알고 있었는데 재위 초중반 까지는 정상적인 군주였다는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역덕후들과 전공자들이 그의 이러한 행적 때문에 연산군을 많이 아쉬워하는 편. 초기의 그 치세만 계속 유지했더라면 탕아적 기질이 있긴 했지만 공사는 철저히 가려 비교적 정국을 균형 있게 운영한, 나름 인간미도 있으면서 유능한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고, 이후의 조선이 가는 방향 역시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성종과 비교했을 때, 성종이 너무 대간에 꽉 잡혀서 반박도 못하고 왕으로서 스스로 결정을 하지 못한 것에 비하면, 이때의 연산군은 말빨도 좋아 신하들이 상소하면 말빨로 다 이겨버리며 맞말로 받아쳐서 상대방이 더 이상 반박도 못하게 하고 젊어서 좀 거친 면이 있긴 했었으나 냉철하고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성종과 다르게 본인의 결정을 밀고 가는 뚝심도 있었기에 성종과 차별화된 또 다른 임금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
2. 연산군에게 주어진 막중한 시대의 책임
사실 연산군은 조선의 미래, 조선의 앞으로 나아갈 길 그 자체를 다듬어야 할, 굉장히 중요한 기로에 선 임금이었다. 태조대에서부터 이어져 와 세종~세조대에 정점을 이룬 조선의 부국강병 기조는 성종대에 문치주의로 접어들면서 시들해졌다. 사림과 훈구대신의 경쟁으로 인해 조정은 양분되어 갔으며 이를 조율할 중재자로서 임금의 안목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이에 대비되어 성종기에는 규모 있는 외침도 가뭄도 없었기 때문에 연산 중반까지 국고는 상태가 좋았고, 뿐만 아니라 사림의 집권으로 이루어진 문치주의가 이룬 세련된 정치문화[15] 가 왕권의 약화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이에 대한 반동으로 궁의 귀와 눈이 열리고 정보망은 넓어졌다. 세조기 이시애의 난을 거치면서 모든 지역에 조선의 중앙관리가 파견되며 중앙집권이 막강해졌으며 이를 통제하는 것 역시 임금의 몫이었다.
명군이 되어보세라는 소설에서 연산군을 소재로 삼는 것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만약 연산군이 잘했더라면 '''조선은 일약 강대국으로 이어지는 길을 밟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나오겠지만, 당시 연산군이 가장 문제삼던 것은 약해진 왕권이었는데, 문제는 이 왕권을 강화하려면 대부분의 임금들은 유교적인 견제장치를 무시하거나 파괴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비현실적인 수준으로까지 어이없는 비판을 이어가던 사림은 조의제문을 통해 '''불충'''이라는 강력한 '''유교적''' 명분, 오래되어 썩을 대로 썩은 대신 집단 훈구세력은 폐비 윤씨의 사건으로부터 이어지는 '''효'''라는 천하무적의 '''유교적''' 명분으로 휘어잡을 수 있었다.[16]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술하겠지만, 연산군은 '''휘어잡는''' 정도가 아니고 '''때려잡아서''' 문제였다.
3. 두 차례의 숙청,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아버지인 성종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고작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따라서 성종의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에는 성종이 아닌 한명회로 대표되는 노회한 훈구 대신들이 국정을 총괄해 왔다.
그러다가 성종도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나이가 되었고 자기가 국정을 이끌려고 해보니 이미 훈구 대신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버린 탓에 자기 힘으로 이 정국을 타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성종이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선택한 게 바로 삼사#s-1.2(또는 대간(臺諫))의 힘을 키우는 것이었다.
성종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삼사는 정권을 잡고 있었던 훈구 대신들의 치부를 하나하나 들춰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판을 이어갔다. 그리고 성종의 계산대로 삼사의 줄기찬 비판 덕분에 훈구 대신들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한명회 같은 최고위 훈구 대신들도 세월을 거스르지 못하고 하나 둘 세상을 뜨면서 훈구 대신들 쪽에 쏠려 있던 권력의 중심추가 다시 평형을 되찾는 듯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착시였다. 실제로는 삼사의 힘이 성종의 통제권 바깥으로 나갈 만큼 커버린 것이다. 그래서 성종은 치세 기간 내내 훈구 대신 쪽이 더 강해진다 싶으면 삼사 쪽에 힘을 싣고, 삼사 쪽이 더 강해진다 싶으면 훈구 대신들에게 힘을 싣는 방식으로 견제하면서 나라를 이끌었다. 이렇게 성종 시대 조선의 국정 운영은 국왕과 훈구 대신, 삼사[17] 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이뤄졌다.
반대로 연산군은 왕세자 시절부터 삼사를 좋게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말하자면 '임금의 뜻에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것들' 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말로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산군과 삼사는 지리한 대립을 이어갔으며 나중에는 훈구 대신들도 연산군의 편에 서서 삼사와 대치하는 정국이 펼쳐졌다.
그러한 와중에 터진 게 바로 조선 역사상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연산군은 대신들인 이극돈, 유자광 등의 말을 듣고[18] 사관 김일손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가지고 성종의 할아버지이자 연산군의 증조 할아버지인 세조의 명예를 더럽힐 만한 내용을 사초(史草)에 실었다는 보고를 받게 됐다. 무오사화의 '사'자를 '선비 사(士)'자 대신 '역사 사(史)'자를 쓰기도 하는데,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 때문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손을 국문하던 도중 김일손의 스승이기도 한 김종직[19] 이 쓴 조의제문 등이 적발됐는데, 유자광은 주도적으로 이 조의제문이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글인 것처럼 해석하여 연산군에게 보고를 했고 이는 왕실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되기까지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연산군은 이 사태를 삼사를 약화시키는데 아주 요긴하게 이용해 먹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가 터지기 전까지는 삼사와 아주 감정적인 대립을 이어왔지만 그래도 직접적인 처벌에 손을 대지는 않았었다. 아버지인 성종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국왕에게 반대 의견을 내라고 만든 조직이 삼사인데 자기 본분에 너무 충실하다고(?) 직접적인 처벌을 내리기에는 명분도 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일손을 비롯한 김종직의 제자들을 반역자로 여겨 엄벌에 처하려고 했던 연산군과 훈구 대신들의 방침에 삼사가 이보다 온건한 쪽의 처벌을 주장하며 반대 의견을 내놓자 연산군은 이를 삼사를 손 봐 줄 더 없이 좋은 명분으로 삼았다. '삼사가 김종직 일파를 감싸고 도는 것은 그들의 역심을 옹호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삼사에게 직접적인 숙청을 감행한 것이다. 그리고 연산군의 의도대로 그간 성종의 비호 아래 무럭무럭 커 나갔던 삼사는 처음으로 겪어보는 숙청에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됐으며 반대로 국왕의 왕권은 그만큼 강화되었다.
성종이 균형을 애써 유교적인 방식으로 맞추려했다면, 연산군은 그냥 칼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이는 성공을 거둬, 성종 말기 사적인 주관을 개입시켜 대신들을 탄핵하는 폐단이 드러나며 왕의 인사권마저 간섭하기에 이른 삼사#s-1.2를 찍어누르는 데 성공했다. 그 덕에 대신과 왕의 권세는 강해졌으나 성종 시대의 유교적 유산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무오사화로 삼사를 제압한 지 얼마 후엔 삼사를 이루는 사림파에게도 온건하게 대하고, 훈구 대신들의 의견도 크게 수용하는 등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작새 깃털, 산호나 후추와 같은 진귀한 물품을 들일 것을 명하는 등 이때부터 연산군의 낭비벽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연산 9년, 대신들이 씀씀이를 줄일 것을 권고했고, 이에 대해 연산군은 대응하지 않거나 부정하고 넘어갔다.
무오사화는 하도 세가 드세져 다소 오만해지기까지 한 삼사 숙청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훈구 대신이나 조정 분위기도 다소 '그동안 대간이 너무 나대긴 했다.' 정도의 여론이었으나, 이보다 더 잔혹한 사화가 뒤이어 터지게 되는데 이게 바로 갑자사화다.
연산군은 절대 권력을 추구하던 국왕이었고 자신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능상(윗 사람을 능멸하다)'으로 규정하며 용납하지 않았다. 무오사화로 삼사(대간들)을 엿 먹인 후 견제 세력이 사라진 대신들의 권세가 강해지니, 이제는 이들도 토사구팽하면서 밟아놓을 필요가 생긴 것이다. 또는 그동안 줄기차게 삼사가 반대를 하는 바람에 자기 하고 싶은대로 왕권을 누리지 못했던 연산군이 삼사가 약해지자 지나친 사치, 방탕, 정무 태만 등을 일삼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삼사 손봐주기에 동참했던 훈구 대신들도 삼사와 손을 잡고 연산군의 행보를 막아서기 시작하자 연산군이 삼사와 훈구 대신 모두를 쓸어버리기 위해 일으킨 게 갑자사화라는 해석도 있다.
자세한 전개는 갑자사화 문서 참조. 정리하면,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건을 빌미로 훈구파, 사림파를 막론하고 모두 억누르고, 수많은 신하들을 숙청해 신권을 완전히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아들이므로 왕으로서 어머니를 신원(伸冤)시킬 권리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처벌이 유례가 없을 만큼 '''잔인하고 과도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 희생자 중에 유독 표연말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표연말이 무슨 송시열 급으로 드센 인물인 것도 아니고 타고난 공부 벌레일 뿐이라 성정도 순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연산군이 표연말을 패죽여버린 셈'''이라는 말도 나오고, 조선왕조오백년에서는 연산군의 악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연산군이 표연말을 관복도 안 벗기고 그냥 기둥에 묶어놓은 뒤 연산군 본인이 직접 작대기로 때려서 죽여버리는 것으로 나온다는 소리도 있으나, 이것은 무오사화 당시 김일손의 사초와 연관되어 벌어진 일로 갑자사화의 잔혹함과는 별 관련이 없다. 실제 표연말은 대표적인 김종직의 문인으로, 조정 내 김종직 일파를 대표하는 중견 관료였다. 게다가 표연말이 정말 공부밖에 모르고 성정도 순한 사람이었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성종-연산군 초반까지 사림의 우두머리로 왕과 대립각을 세워왔던 인물로, 연산 초기 불사 문제 등으로 연산과 대간들이 대립할때도 대간의 선두에 있었다. 게다가 노사신에게 '나라를 망칠 간신'이라는 극언까지 퍼부으며 탄핵한 게 바로 표연말이다. 특히 연산이 노사신이 간신이 아니라며 옹호하자 표연말은 연산군에게 '''"신은 전하께 실망을 금치 못하겠습니다"'''라는 발언까지 했다(연산군일기 7권, 연산1년 7월 20일). 이쯤되면 표연말에 대한 연산군의 원한이 크기에 그가 무오사화 때 곤장 100대에 유배로 끝난 게 더 신기한 노릇이다.
후배 대간들이 조의제문과 세조에 대한 스캔들성 기사를 실록에 실은 죄로 죽었다면, 표연말과 다른 중견파들은 이를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죄로 쓸려나갔다. 이 과정에서도 연산군은 윤필상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을 시켜서 죄 줄 것을 청하게 하고 자신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절차를 거쳐서 숙청했다.
두 번의 사화를 거친 이후, 삼사와 훈구 대신들 모두 유명무실한 존재들로 전락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자신을 가로막을 수 없게 되자 연산군의 문제있는 행동은 더 심각해졌다. 연산군일기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를 기점으로 개인적인 관심사이자 취미였던 예술과 사냥을 비롯하여, 호색한 기질이 다분했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엽색 행각이 최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래 연산군은 처용무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해서 사람들을 울릴 정도였으며, 시가 문학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예술가 기질이 있었던 것. 여러모로 로마 제국의 황제, 네로나 송휘종을 닮은 인물. 하지만, 연산군은 이러한 부류의 군왕들에게 나타나는 지적 그대로 '''보통 사람이 아니고 나라를 다스려야 할 왕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조의제문》으로 사림 대간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폐비 윤씨 사건으로 훈구 대신들을 모두 날려버린 이후 절대 권력을 손아귀에 쥔 연산군은 '''막강해진 절대 권력으로 하라는 나랏일은 할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놀아제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의 정치와 경제는 그 후 2년간 막장일로를 겪었다. [20]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연산군을 명나라의 창건자 홍무제 주원장과 비교하면서 대차게 깠다. 연산군과 홍무제 모두 신하들한테는 가혹하리만치 숙청과 피바람을 일으키면서 매섭게 대했지만 두 군주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홍무제는 그 강해진 권력을 건설적인 분야에 활용했던 반면, 연산군은 그저 자기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썼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연산군은 강해진 권력을 악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는 데 앞장선 것이다.
4. 폐비 윤씨와 갑자사화
연산군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바로 폐비 윤씨와 관련된 부분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고, 뒤에 나오는 피 묻은 적삼 이야기도 얽혀 아주 요지경이다.어제 사묘에 나아가 어머니를 뵙고(昨趨思廟拜慈親 작추사묘배자친)
술잔 올리며 눈물로 흠뻑 적셨네(奠爵難收淚滿茵 전작난수루만인)
간절한 정회는 그 끝이 없으니(懇迫情懷難紀極 간박정회난기극)
영령도 응당 이 정성을 돌보시리라(英靈應有顧誠眞 영령응유고성진).
ㅡ 연산군이 쓴 "所懷(소회)"라는 시 #연산군의 다른 시
연산군은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처형하고, 이미 세상을 떠난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했다. 갑자사화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미복을 입고 임사홍의 집에 들러 친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말을 듣게 된다. 이 부분의 기록은 없으나, 임사홍은 성종 대에 윤씨의 폐비 조치에 열렬히 반대했던 인물인 만큼, 임사홍의 설명은 주로 자신과 윤씨의 변호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연산군은 이를 알게 된 날, 바로 자기 손으로 아버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살해하여 산야에 버렸다. 또한 폐비 윤씨가 폐비되는 데에 일조한 조모 인수대비의 궁에 칼을 들고 뛰어 들어가 결국 쇼크사 하도록 한다.
흔히 박치기로 들이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야사이다. 실록에는 대신 처용탈을 쓰고 칼을 휘둘러 인수대비가 충격받아 병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갑자사화 즈음 칼을 들고 와서 인수대비더러,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물어, 인수대비가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라고 한다.[21] 사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에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에게 뛰어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때는 중전 신씨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소혜왕후(昭惠王后)가 늘 왕의 행동이 무도(無道)함을 근심하니, 왕이 하루는 얼굴에 처용 탈[處容假面]을 쓰고 처용의 옷차림으로 칼을 휘두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앞으로 갔다. 그러자 소혜왕후는 크게 놀랐는데, 그 후 왕후가 병들어 앓게 되니 왕은 미리 상기(喪期)를 짧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였고, 승하에 이르러서도 슬퍼하는 빛도 없었으며, 상례ㆍ장례 등 모든 일을 또한 모두 강쇄(降殺)해서 행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을축(1505년) 10월 9일(경신)
4.1. 어머니의 죽음을 안 시점
사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에 친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이 "백 년 동안 이 일을 입에도 꺼내지 말라!"고 신하들에게 신신당부했지만, 연산군이 세자로서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에 참여할 때, 간간이 폐비 윤씨의 이야기가 낮게나마 거론된 적이 있었으며, 윤씨가 사사당했을 시 만 7세였으니, 어쩌면 어렸을 때도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22]
실록에 의하면, 즉위 후 성종의 《행장록(行狀錄)》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왕이 승하하면, 왕의 삶과 가족 관계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한 행장을 명나라로 보내야 했다. 당연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문서이자, 개인적으로는 아버지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므로 연산군은 이를 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의 장인 중 한 명으로 윤기견이란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자순대비의 아버지인) 윤호를 잘못 적은 것이 아니냐?"라고 물었다.
신하 중 한 명이 "윤기견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 답하자 폐비 윤씨에 대해 어찌되었냐 되물었다. 이때 사사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친어머니가 따로 있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더 자세한 걸 들으려고 질문했거나, 혹은 사사당했다는 것까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설령 폐비 윤씨와의 추억이 없다고 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인지라,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어머니가 사사당했단 말을 들은 연산군의 기분이 좋았을 리는 없다. 기록에 보면 '''왕이 그 날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이 아닌 왕이 굶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요즘처럼 현대 의학이 발달하고, 모든 음식에 영양소가 풍부하던 때를 생각하면 안 된다. 옛날에는 조금 굶어도 픽픽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물론 왕족이므로 평상시에 일반 백성들보다는 건강히 먹었겠지만, 사회 풍조가 '굶는다'에 대해 그런 인식이 있는데 왕이 그러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왕들이 굶는 것을 내세워 시위하곤 했는데, 이는 조정을 크게 뒤흔드는 무기였다.[23]
며칠 뒤 연산군은 폐비 윤씨의 초라한 무덤을 손질하고 비석이나 세워주라 말한다. 이것이 회묘(懷墓)다. 그리고 외할머니 신씨와 외삼촌 윤구를 유배지에서 풀어준다. 나중에 추숭(追崇)을 하려 하자 대간들이 많이 반대했는데,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관련자에 대한 처벌은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갔던 이세좌가 오히려 무덤 복원의 임무를 맡았다. 이때까진 폐비 윤씨가 성종에게 죄를 지어 사사당했다는 식으로만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연산군과는 약간 경우가 다르지만, 정비 소생이 아닌 왕자가 왕이 된 후에 자신의 생모를 추숭(追崇)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4.2. 패륜(悖倫)
기일(忌日)에 성관계를 한다든가 말들이 성관계를 하는 걸 보고 즐겼다는 류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연산군을 최악의 인물로 각인시킨 행위는 바로 적삼사건 이후에 벌인 행각들이다.
사실 효자 연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패악질에 대해서는 그냥 복수 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많은데, 조선 시대의 윤리로는 아버지와 결혼한 서모(庶母), 즉 계모[24] 에 대해서도 친모와 동일한 기준으로 대한 것을 보면, 연산군의 경우는 존속 살해에 해당하는 패륜을 벌였다. 물론 계모가 연산군을 사람 취급 안 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무슨 팥쥐 엄마 같은 나쁜 인간이었다면 모르지만, 그랬으면 조선왕조실록에 그 기록이 남았을 텐데, 그렇지도 않다. 더군다나 조모인 인수대비에 대해서는…
일단 야밤에 폐비 윤씨를 모함했던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잡아서 고문한 후, 그들의 소생, 즉 연산군 자신의 이복 동생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와서, 결박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들의 어머니인 귀인 정씨(귀인 엄씨는 아들이 없었다)라는 것을 숨긴 채 '죄인을 매질하라'고 명했다.[25] 그리고 다시 두 귀인을 매질로 살해하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서 유명한 패륜의 구절을 했다.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대사만 보면 별반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문제는 연산군이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고 저런 말을 한 것이다.'''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은 명백한 야사이다. 인수대비는 실제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긴 했으나, 지나친 충격으로 인해서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보통 극화에서는, 머리로 받는 장면보다는, 두 후궁의 아들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다든가, 윤씨의 죽음에 대해서 항의한다든가, 다들 보는 앞에서 후궁들을 손수 때려잡는다든가, 칼을 들고 대전에 난입한다든가 하는 장면 등으로 바꾸어서 나온다. 다만 2015년에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는, 정말로 인수대비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받아서 뒤쪽 벽에 처박는 장면이 나오고, 모 드라마에서는 '''탁자를 가슴에 던지는 장면'''으로 묘사된다.[26]
이후 안양군에게 독촉을 해서 대비에게 권하니 대비가 부득이 허락을 해주었고, 이때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은 없습니까?"라고 말하니 대비가 놀라서 베 2필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는 참으로 불손한 말을 한다. 그 뒤,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서 산야(山野)에 버렸다고 한다.[27] 어미를 친 왕자는 말을 선물로 주었고, 둘 다 귀양을 보내어 사사했다. 하나는 패륜아니까 사형당하는 게 당연하고, 하나는 왕의 명을 거역했으니 역시 입장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패륜의 극단이자 동생들에 대한 친모 폭행 강요라는 측면에서 아예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고우영의 만화, 영화 《왕의 남자》나 이대근 주연작 《연산군》, 드라마 《임꺽정》에서는 분노한 연산군이 '''"손수 철퇴를 휘둘러 두 후궁을 박살내었다"'''고 처리하는데, 위의 이야기 자체가 '''실록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성인 대상 극화라도, 수위가 너무 높아서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이다.
잔혹함 때문에 창작물에서 그대로 내보내기도 어려웠던지 유인촌이 나온 《연산일기》에서는 곤장 강요로 대신하고 있고,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입을 틀어막고 불을 끄고 마구 치게 하는 것으로만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선 왕조 실록》의 기록에 나름대로 충실했지만, 그래도 장면이 장면인지라 나중에 다른 군졸의 고문으로 사망한 걸로 그렸다.
신봉승의 《조선왕조 5백년》 원작에서는 두 아들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마구 때리고, 그나마 한 아들은 직접 살해한다. 그리고 바로 연산이 손수 병사들에게 현장에서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나체로 만들게 하고는, 시체를 갈기갈기 형체도 없게 찢어 발겨버린다. 드라마 판에서는 차마 표현하기가 난감했는지, 그냥 잡혀가는 장면과 사망했다는 대사로만 처리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강요로 한 대 때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사실 연산군은 패륜 짓을 한 적이 없었으며,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는 자결했고 인수대비는 평안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견강부회에 가깝다. 심지어 이런 논리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연산군의 사치는 '''권력자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애당초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 굶주리면 식사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 장치가 많았다. 그렇기에 쓰레기가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고, 500년간이나 왕조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4.3. 효자 연산?
일단 갑자사화는 어머니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한마디로 어머니의 원통함을 풀어드리기 위해 일으켰으니 친모에겐 효자라는 생각이 들 수 있으나, 애당초 연산군이 친어머니 폐비 윤씨와 헤어졌을 때는 3살이었다. 헤어진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남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다. 더군다나 왕실 법도상 왕자는 왕비가 직접 안고 업고 기르지도 않고, 봉보부인(奉保夫人)이라고 하는 유모에 의해 길러진다. 그것도 모자라 잔병이 잦았던 연산군은 궁 밖 강희맹의 집에서 피접(避接) 생활을 했다.
이후 진실을 알게 된 후에 밥을 굶는다든가, 묘를 복원한다든가, 어머니의 지위를 다시 복권시키는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실록에 따르면, 자기 어머니 기일에도 검열삭제를 하는 패륜 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28] 이런 점에서, 연산에게 효심이 진짜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상당히 애매모호하게 되었다. 말년에 들어서는 일관성 없이 즉흥적으로 이랬다 저랬다 했던 것을 보면, 진심으로 우러나온 효심이라기보다는 반대 신료들을 숙청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과 어머니에 대한 일시적인 그리움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나타났다는 해석이 있다.[29]
4.4. 새로운 가설
근래는 연산군이 대간과 대신 모두를 숙청하여 절대 권력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는 설도 나온다. 아버지 성종이 신하들의 간언을 즐겨들었던 왕으로 호평받았지만 그 이면엔 신하들의 말에 꼼짝 못하는 듯한 모습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후계자 입장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리라는 것. 정사에서 실제로 폐비 윤씨에 대해 거론한 적은 많지 않으므로, 어디까지나 숙청의 빌미나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늘 자신과 성종을 쪼아댔던 삼사(三司)가 유독 그때만큼은 성종에게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화가 났던 것일 수도 있다. 연산군은 즉위하기 전, 너무 세력이 커져 왕마저 괴롭히는 삼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즉위 직후부터 삼사의 권한을 억누르려 했다. 실제 연산군은 미친 듯이 아무나 숙청한 게 아니라, 우선 사약을 직접 나른 이세좌를 숙청한 뒤, 그 후로 이세좌의 가문인 광주 이씨와 그와 연관 있는 대신 가문을 숙청하고, 그 다음에 대간들을 찍어 누르면서, 조정의 세력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에는 연산군에 대한 긍정적 기사도 제법 있기 때문에, 연산군이 벌인 온갖 패륜이 모조리 거짓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많다. 또 연산군이 절대 권력을 손에 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이후에 국정을 내팽겨친채 기행을 일삼고 지나치게 사치를 부리며 국고를 바닥내고, 절대왕권을 무분별하게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여 조선의 내정에 타격을 입힌것을 보면... 고로 연산군의 최후까지를 "왕권과 신권의 대립"으로 해석하면서 '연산군은 신권 세력에게 왜곡되었다'고 떠드는 것은 심히 곤란하다. 게다가 이러한 가설을 제시한 임용한 교수도, '''결과적으로 절대 권력을 장악한 연산군이 이를 이용해 제멋대로 놀았다'''고 결론짓고 있다.[30]
4.5. 연산군의 광증(狂症)
연산군은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던 나머지 폭정을 휘둘렀다는 말이 여러 번 제기되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설이기도 하다.
왕자 시절 계모인 정현왕후 윤씨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 진성대군 (후일의 중종)이 태어난 후엔 친아들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 상대적으로 홀대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성종의 첫 아들이라고는 하나, 미워했던 며느리의 아들이니 인수대비의 냉대도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추측이다. 무엇보다도 성종은 연산군의 재능을 총애하고 신경을 많이 써서 특별한 나쁜 기사는 딱히 없다. 오히려 자신에 의해 엄마 없이 자라는 아들을 애틋하게 여겼는지 연산군이 세자시절 수업을 종종 빼먹었음에도 ‘이 더운날에 공부하다 내 아들 쓰러진다.’며 연산군의 스승들을 나무랐을 정도로 애지중지 했다. 실록에 나오는 아버지의 사슴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기사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31]
아이가 없었기에 조카인 연산군을 자기 아이처럼 돌봐줬을 가능성이 높은 월산대군 부인 박씨[32] 대한 야사 등을 비롯하여 유부녀들을 적지 않게 탐했다는 이야기와 장녹수가 연산군을 어린애 다루듯이 꾸짖고 나무라면 오히려 기뻐하고 좋아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로 인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있다. 갑자사화 이후로는 강박관념 등에 시달린 게 아닌가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연산군은 적어도 갑자사화 전까지는 이렇다 할 광증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정사도 나름대로 잘하고, 백성들도 성종 대와 다르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연산군의 행동을 어릴 적의 울분의 분출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다만 갑자사화 이후에는 그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산군 자체가 상당히 감성적이고 예술적 기질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광증은 앞서말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때문에 일어난 산물로 보는 견해도 많다. 피묻은 적삼이 등장하는 <금삼의 피>나 <장녹수>에서 볼 수 있듯이 극적 재미를 위한 요소 중 하나로 연산군의 광증을 짐짓 지어냈다는 것. 사실 관객들에게 흥미를 돋우는 것 중 하나가 스토리의 급작스러운 전환이니만큼 역사 소설가나 대하 드라마 작가 같은 입장에서는 이를 부각시키는 것이 자연스럽다. 연출의 측면에 있어서도 엄한 아버지의 훈육 속에서 자라던 유년기에 대한 보상 심리로 서서히 타락해가는 왕보다는 친모의 죽음으로 미쳐버리는 인물이 더욱 매력 있어 보이는 것도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4.6. 종합해석
폐비 윤씨의 일은 숙청을 단행하기 위한 빌미로 철저한 계획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 이전의 행동들은 모두 왕권이 약했던 시기였다.[33] 이렇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을 처음 안 척 행동 → 어머니를 추숭 → 날뛰는 대간 잡기(무오사화)[34] → 수년간 눈치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림 → 갑자사화''' 이 단계 모두가 권력과 정통성을 강화하는 책략이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자기가 나름대로 철저하게 계획세워 계산적인 행동을 한것이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연산군의 폭정이 실제보다 어느 정도 과장됐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연산군 일기에 즉위 기간 내내 폭정이 적힌 것도 아니며 즉위 초반 국정을 돌본 기록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재위 후반 폭정을 저지른 건 엄연히 사실로 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이후 최초로 신하들이 주도한 쿠데타였다는 걸 생각해보자.'''
광해군과는 달리 연산군이 오늘날까지도 폭군이라고 욕먹으면서 재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광해군도 이런저런 과오(지나친 궁궐 증축, 옥사 남발, 패륜)가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어도 연산군 만큼의 막장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광해군은 자신의 계모인 인목왕후를 폐하고,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 보낸 후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영향을 끼쳐서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저질렀지만, 대신들의 아내를 빼앗고, 선왕의 후궁들의 시신을 갈가리 찢은 연산군이 저지른 패륜과 비교하면, 적어도 최소한의 실드를 쳐줄 건덕지는 있는 편이다.
5. 그가 벌인 패악질
의외로 간과되는 요소인데, '''연산군의 폭정이 조선에 끼친 악영향과 후폭풍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상당히 크다'''.
정도전이 만들어둔 조선의 군신관계 행정 시스템을 마구 붕괴시키면서 연산군은 황제급 권력을 얻었으나, 자신이 그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는 민정을 보살피지 않고, 오직 지 노는데만 모조리 소비하여 낭비하였다. 사화를 연속해서 벌인 후 나사가 빠져버린 연산군의 폭정으로, 백성들은 극도로 높은 세율 때문에 1년 내내 농사지은 수확물을 모두 착취당하는 수준이라 산에 있는 나물과 풀로 간신히 연명했다.
심지어 그렇게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까지 위협당했다. 산나물이 몸에 좋다는 말을 들은 연산군은 전국에 있는 산나물까지 채취하도록 하였는데, '''백성들이 산나물이나 풀로 연명하는 것도 중지시키면서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이 산나물을 다 먹은 것도 아니라서 궁으로 가는 산나물과 약초 수십 가마니가 사용되지도 못하고 썩는 동안에 많은 백성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굶어죽었다고 하니, 그 막장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런 군주이다보니 연산군은 백성들에게조차 철저하게 증오받았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몰락하여 폐위되고 유배길에 오를 때 '''백성들이 앞다투어 손가락질하고 욕까지 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이렇다 보니 기묘사화때 중종이 남곤 등에게 밀지를 내려 '그들(조광조 등)이 '''연산을 폐한 죄'''를 논한다면 그대들이(정국공신, 남곤 등) 먼저 어육 신세가 될 것이고 다음엔 과인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라고 하였지만 중종 39년 내내 연산군 폐위를 두고 시빗거리로 삼은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대가로 인해 연산군은 남은 조선왕조 존속기간 내내 폭군의 대명사로 꼽혔다.
똑같이 반정으로 박살난 후손 광해군은 그래도 잘한 일은 있다고 재평가라도 받는 반면 이 양반은 그런 거 없다.
연산군의 폭정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폭정의 대부분이 갑자사화부터 폐위까지의 1년간에 집중된 경우가 많은 점일 것이다. 그 이전에도 무오사화 이후 몇 년간의 기간에서 연산군의 잔치와 사치가 늘어나서 대신과 대간들이 만류하는 일이 있기는 했으나 후대에도 예산을 낭비하며 잔치를 벌인 임금들에게 하는 수준을 벗어났다 보기엔 어려웠다. 다만 이 사이에 궐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바깥으로 새어나가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5.1. 흥청망청(興淸亡淸)
전국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해서 방탕한 향락에 빠졌다.[35] 이 중에서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하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이 '''"흥청망청(興淸亡淸)"'''의 어원이 된다. 워낙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던 왕인지라 흥청의 규모는 2,000명이었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여자를 뽑으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에, 얼굴이 예쁘장하면 무조건 뽑았다.[36]
번외로 흥청만 있는것이 아니라 운평또한 있었다. 흥청이 1급으로 노래와 춤을 주로 담당했다면 운평은 2급으로 왕과 같이 자는 것을 주로 하였다. 흥청에서 운평으로 내려가면 후술되어있는 상당부분의 특권들이 사라진다. 화장을 잘못하면 운평으로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까지 벌을 준다.[37]
다만 성종 5년에 만들어진 '경국대전'에는 ‘여성 기생 150명, 춤추는 기생인 '연화대' 10명 등을 매 3년마다 각 고을의 관비 중에서 어리고 총민한 자들로 뽑아 올리도록 한다’는 조항이 있으며, * 연산군 사후인 영조 때 고쳐진 '속대전'에도 “왕실 연회 때에는 각 지방 고을에서 여성 기생 52명을 뽑아 올린다”는 조항이 있다. * 즉 조선의 국왕이 조선의 여성 기생들을 한양으로 데려오는 건 연산군 시대에만 있었던 특별한 사례는 아니었다. 그 규모나 막장성이 특별했을 뿐...
이 많은 흥청들에게는 모두 집이 제공될 뿐더러, 가족의 납세와 노역도 면제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흥청들의 숙소로 사용된 건물은 놀랍게도 '''집현전'''이었다. 게다가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다가 선왕인 세조의 호불 정책으로 중건한 절을 아예 기생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절이 바로 '''증조부 세조 시절 증건되었고, 현 국보 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던 원각사'''였다. 현재의 탑골공원이 원각사가 있던 자리다.[38]
지금으로 비교하면, 대통령이 무력으로 오랫동안 지켜온 헌법을 뒤엎고 스스로 독재자가 된 다음에 대덕연구단지와 명동성당, 조계사 등을 유흥가로 만들어 버린 꼴이다. 그만큼 연산군이 학자들과 승려를 우습게 보았다는 증거다.
또 최측근이자 궁궐 내관이었던 김처선이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선왕 중에서 연산군만큼 풍기문란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는 임금은 없었다는 간언을 올리자, 분노하여 김처선의 양 팔을 칼로 '''직접''' 베어 죽였다.[39] 그 후 '처(處)'라는 글자의 사용까지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처서(處暑)'를 '조서'로, 처용무[40] 는 '풍두무(豊豆舞)'라고 고쳐 부르게 했다.
5.2. 성균관을 사냥터로 만들다
과거 세종대왕이 즐겨 했던, 시국을 논하고 정쟁에 대한 토론도 하는 경연을 없애서 학문을 멀리하고, 성균관을 폐쇄한 뒤 학생들을 모두 몰아낸 다음 그곳을 놀당, 즉 놀이터로 삼았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학교를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 골프장으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간원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연산군의 패악질은 극에 달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끼친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경기도 일대에 금산(禁山), 지금으로 치면 "그린벨트"와 비슷한 것을 정한 후, 그 안에 있는 민가를 쓸어버리고 사냥터를 만들게 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백성들은 연산군을 더욱 증오하였고 그가 왕위에서 쫓겨나자 통쾌하게 여겼다.
물론, 조선 시대 초기부터 금산은 자주 있었다. 개국 초기나 연산군 시절처럼, 왜구가 출몰하는 시기에는 배를 만드는 데 쓰는 소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금산을 시행하여 무분별한 벌목을 막았다. 하지만 연산군이 금산을 지정한 게 문제되는 것이 이런 금산 조치가 적어도 국방 등 국가 경영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위해서 시행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연산군 개인의 유흥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산에 출입 금지를 시키는 금산이 아닌 거주민들을 전부 쫓아내고 그들의 집과 땅을 빼앗는 짓을 한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막장스럽기 짝이 없다.
시도때도 없이 연산군은 사냥하는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국왕이 한번 사냥을 나가기만 해도, 몰이꾼들의 식량부터 해서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므로 국가 재정은 충분히 거덜났다.
사실 조선의 왕들은 전 시대들의 왕들과 다르게 사냥을 나가고 싶어도, 이러한 경제적 비효율 문제와 이럴 시간에 백성의 상소를 더 읽으라는 민본주의 정치 이념 때문에 제대로 사냥을 하지 못했다. 태종 이방원도 사냥을 좋아했지만, 신하들에게 간언 을 많이 들어서 눈치를 항상 살펴야만 했다. 여담으로, 태종은 상왕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사냥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때의 태종은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년이기에, 세종과 신하들이 눈감아준 것도 있었다.
5.3. 극심한 사치
여기에다 서총대(瑞葱臺)를 비롯한 토목 공사를 벌였고, 생일에는 '혀 요리' 같은[41][42] 진미를 동원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놀아 제끼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돈도 한 푼 안 주면서 뻔뻔하게 이런 무리한 명령을 했다는 것. 덕분에, 연산군 초기만 해도 살 만했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나 뭐로나 헬게이트가 열리면서 완전히 죽을 맛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서총대를 비롯한 연산의 토목 공사는 사실 그리 큰 토목 공사도 아니었고, 백성들에 대한 세수 증가는 이미 세조 이후 성종 치세부터 꾸준히 진행되어 왔으며, 재정 악화 역시 딱히 연산군이 막장으로 놀지 않았더라도, 훈구파들의 세력 확대로 인해 성종 때부터 진행되어왔다는 견해다.
또한 연산군은 금표(禁標)를 지정해 농토를 마구 뺏었는데, 이는 대부분 훈구 대신들의 사유지를 연산군 자신의 사유지로 만든 것이라 백성들의 생활과는 큰 관련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즉 민생 자체에 딱히 심한 타격을 초래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막장이 된 뒤 2년 동안 연산군이 마음대로 놀아 제끼면서 재정을 악화시킨 점은 있었으나, 성종이나 중종과 비교해볼 때 딱히 심각한 지출이나 징세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왕실의 방만한 재정 운용은 무오사화 이후 심화되어, 연산군 10년 내수사(內需司) 직계제를 통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수탈하는 제도가 확립된다. 애초부터 재정의 남용에 따른 부족분을 다음해, 그 다음해에 필요로 하는 공물을 앞당겨 조달하는 인납(引納), 무납(貿納) 등 공납 제도가 크게 어지러워진 것은 연산군 때부터의 일이며, 연산군 7년에 이를 현실화한다는 미명 하에 실시된 공안 상정(신유공안)으로 인해, 백성들에게 부담되는 공납의 부담은 크게 증가했다.
이미 16세기 들어 조세 제도에서 공납의 비중이 커져만 가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가 백성들에게 심각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란 건 당연지사다. 예를 들어, 경기도에서 1년에 진상해야 할 물고기 7,518마리 중 4,800마리가 이러한 별진상으로 늘어난 품목들이었다. 선조 시대의 율곡 이이가 만언봉사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공물 추가 분정은 바로 연산군의 이러한 깽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경기도는 얼마나 금표가 남발되었으면 충청도에서 평택, 직산, 진천, 아산 4개 현을 떼어다 벌충해줘야 했을 지경이었다. 역으로 말하자면 4개 현에 맞먹는 규모의 토지와 인구, 그것도 명백히 국세를 납부하는 '공전'이 이 금표의 영향권 아래 들어 세입이 날아갔다는 소리다.
연산군 일기연산군 11년 11월 15일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적자 장부는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5.4. 직언을 차단
신하들 단속에 매우 난리를 쳤는데,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愼言牌)[43] 를 차게 하고, 총애하는 흥청의 나들이나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데 신하들을 동원시켰다.[44] 폐위 몇 달 전부터는 아예 사모 앞뒤로 "충", "성"을 수놓게 하였다.
5.5. 언문 사용 금지
한번은 연산군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그것이 언문, 즉 한글로 쓰여있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웠다. 문제는 이게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심각한 자승자박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을 창조한 세종대왕은 연산군의 고조부이다. 게다가 자신이 존경하던 증조부이자 세종대왕의 아들인 세조 또한 훈민정음을 더 정교하고 간단하게 만드는 표기법을 즉위 1년만에 만들었고 널리 보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런 직계 조상이 만든 언문 구결을 모조리 불태웠다는 것은 선대왕의 업적을 부정하는, 패륜 차원을 넘어서 조선 왕조가 무의미한 짓을 했다고 후손이 스스로 인정해버리는 심각한 정통성 문제를 야기할 위험한 행위였다. [45]
하지만 정작 뒤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언문, 즉 한글로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연산군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에게도 한글 사용이 제대로 정착된 현실과 상기한 왕실의 권위 문제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므로 "한글의 암흑기"까지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언문이 지식인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상대로한 글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연산군에 대한 반감이 백성들에게까지 퍼졌거나, 백성들까지 끌어들여서 반(反) 연산군 활동을 하려는 세력이 나타났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한 국가의 임금이라는 사람이 개인의 감정으로 고조부의 업적을 제대로 능욕한 꼴이 되고 말았으니 까여도 할 말이 없다.
5.6. 방탕한 여색살이
왕의 음탕이 날로 심하여, 매양 족친 및 선왕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가 아끼는 궁인에게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이어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하며 낮에도 그랬다.'
연산군은 색(色)도 밝혔는데 이게 중증이라, 후궁들과 기생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아내까지 은밀히 불러다가 간음했다.''' 실록에서도 연산군에게 아내를 바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50] 거기다가 이복 누이와 근친상간까지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51] 심지어 갑자사화 후 친모(폐비 윤씨)의 상중에도 성관계, 심심하면 말의 등에서도 성관계를 하는 등, 하드코어의 극치를 달렸다.왕이 박씨[46]
[47] 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48]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으로 승평부 대부인이란 도장을 만들어 주었다.[49] 어느 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쇠막대기를 만들어 월산대군의 묘 가운데 꽂게 하였는데 우레(천둥)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ㅡ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2년(1506년) 6월 6일.
연산군은 정말 많은이들과 관계를 맺을려고, 정력에 좋다하는것은 다먹고 그 정력을 유지했다 한다.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식재료인 장어에 마늘을 넣고 백숙을 만들어 즐겨먹었으며,[52] 거기에 그치지 않아 약을 엄청나게 복용했다고 전해진다.
육체적인 성욕의 해소보다는 정신적 공허 때문에 성적 자극에 집착하는 일종의 정신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저 시점에선 정신 의학이란 개념 자체가 지구상에 없던 시기인 관계로, 후대의 인물인 사도세자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질환이 있다는 걸 알고 고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령 이 당시에 연산군의 잦은 여색이 정신병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이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연산군의 방탕한 색정증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태생적인 기질에,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음으로써 생긴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심리적 의존증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그 증거로, 장녹수를 비롯해 연산군이 홀딱 빠져있던 여성상을 보면 죄다 여왕님 기질이 있는 연상의 여성이었으며, 장녹수 역시 연산군을 아이 다루듯 꾸짖거나 혼을 내는 등 전형적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죽은 폐비 윤씨를 도로 되살릴 수도 없는 일이니, 연산군의 색정증도 폐비 윤씨가 사사된 순간부터 이미 고칠 가능성이 없는 병이지 않았을싶다.
물론 실제로 그런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해도 하다 못해 왕비 혹은 후궁들, 궁녀들, 기생들과 해결하는 등의 합법적인 방법도 존재하는데 뒷처리도 안 하면서 궁 밖에 멀쩡히 사는 신하의 부인들을 일부러 불러들여 겁탈한다는 것은 왕으로서 선을 넘어버렸다.[53]
그리고 각 군주 당 평균 600명 ~ 700명 가량 되던 궁녀의 수가, 이 시기에만 유일하게 1,000명을 돌파했다고 한다.[54] 물론, 궁녀들 대부분은 노비였으니[55] 궁녀를 뽑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궁녀 유지비는 그 자체로 백성들 등골을 빼먹는 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연산군의 엽색 행각을 기록한 연산군일기의 기록이나 전해 내려오는 야사를 보면 구체적인 증언이나 정황을 적은 것도 있지만 '이런 소문이 있었다' 또는 그러한 상황을 연상케 하는 문구를 적어두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듯한 서술, 그리고 직접 보고 들은 것만 기록해야 하는 사관이 알 수 없는 내용도 보이기 때문에 읽을 때 주의를 요하는 기록도 있다. 무엇보다도 연산군 본인이 자신의 사생활과 관계된 부분은 사관들이 기록을 못하도록 재위 말년에는 직접 막기 때문에 사관이 직접 보고 적은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전해듣고 기록한 것인지 정확히 구분이 어려운 내용이 있다.
앞서 '패륜' 문단에서 설명했지만,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의 누나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연산군이 겁탈해 임신시키는 바람에 박씨가 음독 자살했다는 야사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연산군과 중종처럼 당시 왕자들이 10대의 나이에 혼인했고 배우자의 나이도 대개 또래였다는 점, 월산대군 또한 박씨와 결혼할 때의 나이가 13세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박씨의 나이도 동갑내기이거나 한 살 연상 정도였을 것이다. 즉 연산군일기에서 명시하고 있는 시간을 감안해 보면 당시 박씨의 나이는 약 50대 정도로 추정되는데 과연 연산군이 50대의 여성에게 혹했을까 하는 의문도 있을 뿐더러 이 나이대의 여성은 대개 아이를 갖기 어려운 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무엇보다도 정사(正史)에서는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 기록되었을 뿐 자살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저 '사람들이 연산군과 그렇고 그런 관계로 지내다 애를 갖자 자살했다고 수군거렸다'는 후문이 달렸을 뿐이다. 그리고 연산군과 박씨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기록은 위의 연산군일기 12년 6월 6일 기사와 중종실록의 박원종 졸기가 유이하다. 그런데 월산대군 무덤에 긴 쇠막대기를 꽂았을 뿐인데 천둥 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났다는 비현실적인 구절에서부터 이 기사의 서술을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연산군이 박씨와 동침했는데 꿈에 월산대군을 봤다는 부분 역시 사관이 연산군의 꿈 속에 들어갔다 나왔거나 연산군이 자기 입으로 사관에게 말해줬다는 수준의 명확한 출처가 나오지 않는 이상 실제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박원종의 졸기에서는 "박원종의 맏누나인 (박씨)는 월산대군 이정의 아내로, 폐주(연산군)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이라는 품계로 올려 주니(이를 '가자'라고 한다) 박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나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 하였다."라고 직접 명시했다. 음독 자살설은 아마도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연산군 정권의 핵심 인사였다는 전력이 있는 박원종에 대한 변호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구절이라는 해석이 있다.
쉽게 말해, 연산군이 왕위에 있었던 기간 동안 그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려온 사람이었던 박원종이 자기를 각별히 신임했던 임금을 배신하고 폐위시킨 것에 대한 논리적인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연산군이 박원종의 누나를 겁탈하고 박원종한테는 마치 그에 대한 '특별 대우'라도 하듯 승진을 시켜줬는데, 박원종은 자기 친누나한테 죽으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이를 부끄럽게 여겼다'는 일종의 해명 또는 변명을 붙였다는 것이다. * 실제로 박원종 졸기의 문맥도 이러한 점 때문에 박원종이 중종반정을 결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러니까 결론을 두고 보자면, 연산군이 색을 밝힌 것은 사실이나 진위여부에 관해서는 조심스럽다는 이야기다. 당시 연산군 일기를 작성한 것은 연산군의 사초를 작성하던 사관, 이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신료들이기때문에 연산군의 폭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러 추문들을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며 연산군이 폭군임은 변치않는다.
6. 중종반정과 폭군의 몰락
숙청할 대상이 전부 숙청되어 더 이상 숙청할 대상이 없어진 연산군은, 급기야 어느 정도는 자신의 향락을 말리던 박원종과 서자 출신으로 연산군을 배신할 이유가 없었던 유자광에게까지 이유 없는 짜증과 협박을 가했다. 이에 토사구팽의 위험을 느낀 두 사람과 주위 인물들이 반정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사실 연산군은 갑자사화 당시, 무오사화와는 달리 무자비한 연좌제를 적용하여 많은 무고한 이들을 죽였다. 그 결과 박원종이 문제가 아니라, 박원종과 가까웠던 사람들이거나 박원종에게 명함이라도 전한 사람들에게는 앉아서 죽느냐, 서서 살 길을 찾느냐의 선택 외에는 없었다.
다만, 공포정치를 그만둘 수 없었던 연산군은 점차 일이 터졌을때 주동자는 강하게 처벌하고 단순 가담자는 매우 가벼운 처벌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왕과 신하들 사이에서 주동자는 죽은 사람으로 해버리고 나머지는 빠져나가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결국 당시 대신들은 그때 이후로 일이 터졌을 때, '''"전 단순 가담자일 뿐이고, 주동자는 (이미 사화로 인해 희생당한) 그 사람입니다!!"'''라고 발뺌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연산군도 '모든 일의 주동자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니 이게 말이되느냐'는 식으로 한번 지적은 했으나, 자신이 의도한 바여서 그런지 언급만 하고 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쨌든 연산군이 마음을 바꿔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으므로, 위의 내용은 박원종에게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민심이 매우 좋지 못했던 것도 문제였다. 당시 백성들은 비록 신하들처럼 무고하게 끌려나가 잔인하게 죽거나 무덤이 파헤쳐져 뼈가 부숴지는 일은 당하지 않았으나, 높은 세금과 각종 진상품 등을 대느라 허덕이고 있었고 금표 제도 등으로 민심이 크게 흉흉한 상황이었다. 즉 누가 일어서든 백성들은 손쉽게 거기에 동조할듯한 분위기였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연산군의 측근이었던 박원종과 주변 신하들은 '반정 공신'이 아니라 '폭군에게 빌붙어먹던 일족들'이 되어 처형당할 판이었다. 연산군의 몰락이 시간문제라고 본 신하들은 연산군을 등지고 선수를 치기로 한다.
유자광의 경우,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이유로 임사홍의 아들이 옥사한 후, 임사홍이 의도적으로 유자광을 배척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유가 되었다. 여진족 토벌과 이시애의 난 진압 등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유자광과 고위급 무관인 박원종의 반정 합류는 반정 성공에 큰 힘이 되었다. 이후, 성희안[56] , 박원종, 유순정, 신윤무, 유자광 등이 '''조선 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에 올렸다.
일반적으로 조야(朝野)는 중종반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으나, 그래도 반발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당장 성종 대부터 조정의 고관을 역임하고 중종반정의 공신 중의 하나였고, 당시 '조선 제일의 학식을 갖춘 이'라 칭해지면서 사림 / 훈구 가리지 않고 존경받던 채수는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저술했는데, 여기서는 중종반정을 가열차게 비판하고 있다. 때문에 채수는 탄핵당해 말년에 목이 날아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연산군을 옹호하는 여론이 많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연산군은 이미 그 당시에도 조야를 막론하고 폭군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중종반정에 대해 반발하는 여론은, 연산군 본인에 대한 동정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힘으로 군왕을 폐하는 반정 자체에 대한 반발이었다. 《설공찬전》을 통해 조선 사회에 핵폭탄을 날린 채수만 해도, 연산군을 동정했다기보다는 성종의 유신(遺臣)으로서 연산군이 폐위당하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 강했다고 보고 있다. 당장 최측근이자 처남이었던 신수근조차도 연산군은 막장이지만 세자 이황이 총명하니 기다리자고 말했을 정도이다.
왕(王)에서 군(君)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57] 유배를 가서 몇 달 만에 그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야말로 절대 왕권으로 흥청망청 놀고 먹으면서 제멋대로 즐기던 양반이, 한순간에 몰락하고 초라한 유배 생활을 해야 하는 본인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병 즉 화병을 얻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적인 피폐함에 안락한 궁궐에서 살며 음주가무와 과도한 음행으로 자신의 몸도 막 다뤄 왔으니 갑작스러운 생활환경의 변화 등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중종반정 후 연산군의 어린 자식들도 대부분 사사되거나 비참한 미래를 맞이해야 했다. 이 사실이 연산군에게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다면 그에 대한 정신적 충격 또한 사망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반정 세력은 명나라에 보내는 조서에 사실대로 적지 않고 "연산군이 병으로 동생 중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희대의 사기를 펼쳤다. 그 직후 연산군이 급사했기에 독살설이 나돈 것이다. 가끔씩 명나라 사신들이 "연산군에게 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요청하여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일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연산군이 사람 기척만 들려도 발작을 해서 도무지 뵐 수 없다"고 사기를 쳤다. 다만, 하다못해 조선에 오가는 상인 몇명한테만 알아보고 오라고 시켜도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정도로 조선 팔도 백성들에겐 그렇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가 알고도 모른척 해준거라는 주장도 있다.[58]
중종은 끝까지 연산군이 살아있다고 하기로 했는지, 연산군이 세상을 떠난 지 장장 30년이나 지난 중종 30년에도, '''"사신이 오면 '연산군이 지금은 창덕궁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가?"'''라는 기록이 나온다. 연산군이 쫓겨난 것은 그렇다치고 죽고난 다음에는 죽었다고 통보를 하는 것이 옳은데 하필 연산군이 교동으로 간지 얼마 안되어 금방 죽어버리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 실록에도 이를 지적하는 내용이 있다.
일단 중국의 실록인 명사(明史)엔 이렇게 적혀 있다.
[image]정덕(正德) 2년 융(㦕)이 세자 황(𩔇)이 어린 나이로 죽은 것을[59]
몹시 슬퍼하다가 병을 얻었으므로 국사를 아우인 이역(李懌)에게 넘겨주겠다고 주청해 왔고,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이역(懌, 중종의 이름)을 왕으로 봉하여 주기를 주청해 왔다.예부에서 이를 의논하여 역에게 국사만을 맡게 하고, 융이 졸하기를 기다렸다가 국왕으로 봉해주기로 하였다. 앞서 배신(陪臣)[60]
노공필(盧公弼) 등이 조공하기 위해 수도(경사 / 京師)에 와서 역을 봉해주기를 거듭 주청하였었는데 조정의 의논으로 윤허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12월에 융의 대비(母妃)가 "역은 나이도 들었고 현명하니 중임을 맡겨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주하였다.이에 예부에서, “융은 고질병(痼疾)으로 왕위를 사퇴하였고, 역은 친동생으로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 이미 명백한 사실이니, 우애를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그 나라의 모든 신민들도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황제는 이에 융의 선위를 윤허하고, 내관을 파견하여 국왕 책봉의 칙명과 아울러 그 비 윤씨(장경왕후)의 고명을 내렸다.
《명사》 권320, 열전제208 外國一 朝鮮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폐위된 군주라서, 능의 형식이 아니라 그냥 조촐한 묘로 되어있다. 살아서는 최강의 권력을 누렸지만, 죽어서는 가장 초라한 묘에 안장된 셈이다. 자세한 사항은 연산군묘 문서를 참조.
조선 왕조 최초로 폭군으로 전락하여 폐위된 임금이었기 때문에, 재위를 했던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묘 신위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모셔지지 않았다. 결국 광해군과 함께, 종묘 신위 명단에서 제외되어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한 두 명 뿐인 임금으로 남았다.
폐위되면서 왕자 시절 군호로 격하된 광해군과 달리, 연산군은 원자 – 세자의 정통을 밟아 왕위에 오른 경우이므로, 폐위 이전까지는 연산이라는 호칭 자체가 없었고, 폐위된 이후에야 연산군으로 봉해진다. 간혹 사극에서 폐위되기도 전에 연산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명백한 고증 오류이다.
6.1. 독살 의혹
실록에 연산군이 유배지에서 11월에 역질(전염병)에 걸려 유배된지 두달만에 31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이 역질이라는 전염병은 봄, 여름, 가을 3계절에 발생한다. 근데 연산군은 음력 11월이면 날씨가 쌀쌀하고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역질에 사망했다는 점과 전염병인데 유배되있었던 연산군을 보필하고 함께 연산군과 생활했었던 나인들과 유배지를 지키고 있었던 군졸들 중 의아하게도 한 명이라도 전염됐었던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독살 의혹도 제기된다.[61]
6.2. 월산대군 부인(큰어머니)과의 관계
가족과 종친, 신하들을 통틀어서 연산군이 유일하게 패륜을 저지르지 않고 잘 대해준 사람이 큰아버지인 월산대군, 큰어머니인 승평부대부인 박씨, 그리고 박씨의 남동생인 박원종 또 당질 제안대군 뿐이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 양어머니인 정현왕후, 이복동생 진성대군에게는 형식적으로 대해줬을 뿐 정을 주면서 친하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이들에게는 전혀 패륜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예우해 줬는데 박원종은 직접적인 인척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박씨의 남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젊은 나이에 승진을 여러 번 하며 높은 벼슬로 승승장구했고 연산군에게 직언을 해도 피해 입지 않은 유일한 신하였다. 연산군은 수많은 패륜을 저질러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잘 해주었다.
중종반정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부인 승평부대부인 박씨(큰어머니)를 범해 아이를 잉태하게 하여 그녀가 자살했다는 사건은 진짜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이 낮다고 한다. 일단 정사엔 저 기록이 없다. 연산군의 온갖 패드립을 다 적어놓은 연산군일기에서도 박씨가 그냥 죽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으며, 다만 사람들이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라고 덧붙여 놨다. 당시에도 일종의카더라 취급을 받은 이야기인듯하다. 아무튼 박씨가 연산군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치욕스럽게 여겨 자살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야사 관련 문헌들에서만 전해 내려올 뿐 실제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박원종의 첫째 누님이며 사망할 당시 51세로 할머니뻘 고령의 나이였다. 그 나이에 임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그녀는 남편인 월산대군과 금술이 좋았음에도 평생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었는데 월산대군의 외아들인 덕풍군은 박씨 소생이 아니라 대군의 측실인 원주김씨의 아들이다. 지위뿐만 아니라 나이로도 박씨가 연산군의 어머니뻘이라는 걸 생각해보자면 아무리 연산군이 막장이었다고 해도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3명이나 있는 상황에서 큰어머니 박씨를 범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게다가 박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자 외지에 나가 있던 박원종을 급히 불러다가 간호하게 했는데 연산군이 정말 박씨를 능욕했다면 일부러 박원종을 부를 이유가 없다.
따라서 연산군이 큰어머니인 박씨를 예우하면서 이것저것 신경을 써준 것 뿐인데 이걸 황색 선전한 것이 박씨 능욕으로 발전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연산군은 어려서 친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헤어져 잔병치레가 많아 주로 월산대군의 집에서 자랐는데 성품이 자상하고 온화했던 월산대군과 부인 박씨가 연산군을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챙겼다고 한다.[62] 그래서 연산군은 아버지인 성종과 양어머니인 정현왕후보다 큰아버지 큰어머니를 더 따랐는데 연산군이 궐 밖에 나갈 때면 반드시 월산대군 집에 들러서 문안 인사를 드렸고 왕이 되어서는 큰어머니 박씨를 대비 준하게 대우 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박씨에게 곡식과 면포 등의 물품을 매년 많이 하사하였고 대간들이 지나치다고 문제 삼고서 여러 번 간하였는데 연산군은 말을 듣지 않으며 "한때의 은혜에서 그런것이다."라고 했었다.
또 연산군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 뿐만 아니라 월산대군의 외아들이었던 서자 덕풍군에게도 많은 물품들을 하사하였다. 덕풍군은 월산대군의 정실부인이였던 박씨 소생이 아니라 측실 소생의 서자였다. 하지만 박씨가 월산대군의 아이를 낳지 못하였기에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유일한 아들이자 적자로 인정해주면서 덕풍군으로 봉해주고 종친부의 정2품 승헌대부로 직급을 올려주기까지 했다. 아버지인 성종도 친형인 월산대군과 형수인 승평부대부인 박씨에게 평생을 각별하게 대하면서 은혜를 자주 베풀었는데 연산군이 성종의 행동을 보고 답습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적장남인 폐세자 이황을 아예 궁중이 아니라 대궐 밖에 박씨의 집에서 양육하게 한 것은 그만큼 큰어머니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씨가 초파일 때 다른 사대부 여인들과 함께 집에서 관등 행사를 하는 등 불교를 가까이 하자 신하들이 숭유억불에 따라 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연산군이 월산대군의 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며 거절한 적도 있었다. 또 박씨의 작위는 승평부부인이었는데 중간에 대자를 더 붙여 승평부대부인이라 높여주고 도장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박원종이 사실은 연산군이 예우했던 박씨의 덕을 봐서 출세한 면도 없지 않은 것을 보면 누님의 명예를 위해 반정까지 일으켰을 가능성은 그렇게까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박원종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연산군과 누님의 친밀한 관계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 관계 때문에 반정을 일으켰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연산군에 의해 출세하고 연산군과 가까운 사이였던 박원종의 배신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 실상은 연산군의 권력이 슬슬 무너져가는 조짐을 읽어내고, 미리 빠져나간 쪽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위에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박원종뿐만 아니라 중종반정을 일으킨 주요 공신들 중에는 본래 연산군과 가까운 관계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애초에 연산군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성관계를 강요하는 정신 나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고작 '사이가 좋은 정도'로 저런 소문이 나돌 리가 없었을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이 그냥 눈에 띄는 여자는 기분 내키는 대로 범하는 행태를 보이다 보니 이걸 제대로 묘사하면 사극이 아니라 아예 AV가 될 지경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까이 지내는 여성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이 누가 되었건 연산군과 성추문이 나도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신봉승이 저술한 소설판 《조선왕조 500년》에선 이런 야사를 사실로 받아들여서 박씨와 연산군 간의 검열삭제 묘사를 상세히 해놓았다. 원래 야사이기도 하고 이 소설에서는 연산군 연간에 박씨의 나이가 30대 후반이라고 하는 오류도 있는 등 그냥 소설적 각색으로 보는 게 좋다.
어쨌든 월산대군 부인과 연산군의 관계는 남녀간의 그것보다는 큰어머니와 조카의 지극한 가족애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냥 연산군의 평소 행실 탓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던 것 뿐.
6.3. 자기 죄를 알았던 폭군
'''반정 1주일 전인''' 연산 12년 8월 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나인들을 데리고 잔치를 벌이던 중에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는 시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잔치중 갑자기 뜬금없이 연산군이 울자 영문을 모르는 나인들은 몰래 비웃었으나 왕의 총애를 받던 장녹수와 전비는 따라 눈물을 흘렸다. 이에 연산군은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만은, 만일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는 필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위로하며 물건을 하사하였다.
즉 연산군도 자신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반란이 일어나 자신이 쫓겨나고 장녹수와 전비는 몰살당할 미래를 예측하고 있던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크게 놀라 당황하였으나, 후일의 광해군과 달리 도주하려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반정 세력이 옥새를 내놓으라 요구하자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여라.”라고 순순히 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에도 저항하거나 자기 죄를 변명하려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사극 등에서는 보통 마지막까지 현실을 부정하며 발광하는 것으로 묘사되나 실제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를 보면 연산군은 폭군이긴 했지만 여러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단순히 권력욕에 미쳐 날뛴 미치광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도 자신이 잘못된 길로 빠지고 있단 자각은 있었으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했던 인물일 수 있다. 폭군은 폭군인데 스스로 폭군인 것은 자각했던 특이한 케이스다. 재위 전반 10년에 달하는 기간동안은 보통 이상의 임금 노릇을 했던 군주인 만큼[63] , 과거와 비교했을 때 밑바닥 맨틀까지 추락한 행실의 낙차를 인지하긴 어렵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