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일생

 





1. 출생 및 성장
3. 정계 입문
6.1. 재임 시절 주요 사건
7. 퇴임 후
7.4. 수감 생활


1. 출생 및 성장


이명박의 부모가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하던 중,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마을에서 4남 3녀 중 3남[1]으로 태어났다. 이때 지어진 일본식 이름이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고 전해진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자수성가로 조선에 있던 친척도 불러오는 등 나름대로 괜찮게 생활했던 걸로 보인다.
만 3세(한국나이 5살)이던 1945년에 해방되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가 친척의 목장 일을 봐주게 되어 경상북도 영일군 곡강면 덕성동 덕실마을(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리 덕실마을)[2]에 살았다. 현재 그곳에 '이명박 대통령 고향집'이 있다. 그러다가 포항시내로 이사했다.
초등학교 재학 시기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해 누나와 남동생을 잃었다고 한다.
야간 상고인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3] 출신으로 이후 어느 한사람이 고려대학교의 원서를 넣는 모습을 보고 본인도 고려대학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해 고등학교 졸업 후 1년 간의 입시 준비 끝에 1961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4] 경영학과에 합격했다.[5] 한편 이 입시 준비라는 것이 낮에는 일당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노동자 합숙소 구석에서 작은 불을 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같이 일하는 다른 노동자들에게 "밤에는 불 끄고 잠좀 자자."며 호통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여담으로 고려대학교로 선택한 것도 운이었다고 한다. 본인은 대학교가 좋고 나쁜 것은 큰 신경을 안썼기 때문에 얻어걸리는 곳에 넣으려고 했다고 한다. 하필 이명박이 본사람이 고려대학교에 지원하는 사람이기에 고려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모르고 홧김에 고려대에 지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합격 당시에는 대학교 중퇴 학벌을 만들기 위해 등록만 해놓고 자퇴할 생각이었으나 1학기 이상 다녀야 학적이 생긴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좌절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시장에다가 이명박의 사정을 말하고 다녔고, 다행스럽게도 시장 전체에 소문이났다. 이후 시장 상인들이 모여 이명박에게 등록금을 선불로 주고, 시장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을 줬다. 그 돈으로 이명박은 처음 의도와 달리 대학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명박은 이때의 경험이 너무 고마워, '이런 사람들이 없어도 누군가가 이런 역할을 대신 해주길 바라는' 이유로 서울시장 재직 시절 '하이서울 장학금'을 신설하고, 대통령이 된 후 '든든학자금'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는 이명박의 자전적인 회고록에 기재된 내용이라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 수 있다. 이명박의 형인 이상득의 발언으로 보면 앞뒤가 맞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과거 이상득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형제의 아버지가 동지상업고등학교 재단의 이사로 있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다만 이명박은 교회 간증에서 밝히기를 당시 악질같은 중학교 선생님이 동지야간상고를 추천했고, 선생은 그의 어머니에게 계속 설득했다고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없는 형편에 돈이없기 때문에 명박이한테 계속 1등을 해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라고 했고, 2등만 해도 장학금을 받지못하기 때문에 학교에 못다닐거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이 밝히기를 사람들은 이명박이 3년동안 전교수석을 했다기에 머리가 되게 좋을줄 알았다고 하는데 수석한 이유는 학교가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에 운좋게 3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다고 한다. 그 학교에는 대학교를 가고자 할 학생이 한명도 없었고, 모두 공부에 손을 놓았다고 한다.이명박 간증# 이상득의 발언 역시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지만 정말 순수히 가난했던 집안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 있는 대목이다.
고려대 재학 시절에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하다 체포 당해 투옥되었고, 소요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시기에 박근혜 캠프가 상대 후보인 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것을 최초로 주장하였으나, 그에 대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고, 대선 후보 등록시에 전술한 전과를 누락하여 전과는 없는 것으로 신고하여 허위신고 논란이 있었다. 체포된 해 12월 15일, 어머니는 심장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된다.
2018년 3월 23일에 검찰은 이명박의 전과기록을 확인하였다. 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범죄전력 란에 11회의 전과기록을 기재하였다. 여기서의 '전과'는 죄의 갯수가 아니라 형사처분을 받은 수를 말하며, 여러 개의 죄를 지어도 하나의 선고로 확정되어 벌을 받으면 한 개의 전과가 되는 것이다.
한편, 한일 협정 반대 시위 때 함께 운동했던 인맥들은 6.3 동지회를 결성해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며, 그 중 당시 중앙대 학생이었던 이재오와 경기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손학규가 있었다. 참고로, 이명박과 이재오, 손학규는, 후술하겠지만 모두 김영삼 대통령이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한 인물들이다.
병역은 기관지 확장증으로 인하여 면제받았는데, 어차피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징역 2년을 선고 받아서 몸에 이상이 없었더라도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6]

2. 현대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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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설 신입 사원 시절 증명 사진
1965년, 현대건설의 재정/경리과에 입사하였다.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운동 전력으로 취업길이 막막해져 현대건설 필기시험에 합격 했는데도 최종입사가 불가능하게 되자 청와대에 탄원서를 넣어, 박정희 대통령이 민정 비서관 이낙선을 보낸 자리에서 청와대에서 현대건설에 최종합격을 통보했다고 한다고 하는데, 후에 공개된 위키리크스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오히려 정주영 회장에게 '이명박을 조심하라' 라고 경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정주영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말을 오해(잘 봐줘라)하고, 전격 지원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카더라 통신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직접 청와대에 탄원서까지 보낼 정도의 배짱을 눈여거 보았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면접에서 건설이 뭐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창조입니다."라고 했다.
입사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30세에 이사, 37세에 사장, 48세에 회장까지 올랐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일화 중 하나로, 이명박이 부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현대건설 사장 조성근의 아내와 가수 태진아가 간통한 혐의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 덕분에 사장이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하여 대통령까지 했으니 태진아나비효과를 일으켜 대통령을 만든 셈이라는 말이 넷상에서 떠돈 적이 있었다. 하지만 태진아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이명박의 사장 취임은 사건이 발생한 후 2년이 지난 1977년에서야 이루어졌으며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는 건 매우 일반적인 일이므로 그 사건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조성근은 박정희와 같은 쿠데타 동지로, 건설부장관을 지내다가 낙하산으로 현대건설에 와서 5년 채우고 다시 대하건설 사장으로 옮겨갔다. 즉, 회장 정주영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위치가 조성근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감독했다. 그는 자서전인 <신화는 없다>에서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인 공사가 아니었다. 전투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당시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북한의 건설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인명사고가 많이 발생했다.#
임기 내 이라크 건설 수주에 주력하였다. 당시 현대 건설은 중동에서 터졌던 연이은 전쟁으로 막대한 공사 미수금이 쌓였고 대금 회수에 차질을 빚던 상황이었다. 이명박은 공적 자금을 투여받은 후 각종 국내외 공사를 무난히 진척시키며 위기를 극복했으나, 이라크 정부로부터 공사미수금 2억 달러(당시 1조 703억 원)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7], 2000년의 현대건설 부도의 원인이 되었다. 이는 이명박 본인도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나의 전쟁은 패배로 끝났고, 원인이야 무엇이든 회사가 손해를 봤다면 관련 당사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조직의 냉엄한 생리"라며 책임을 느끼는듯이 기술했다.
1990년 KBS 2TV 주말 연속극 야망의 세월이 방영됐는데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극화한 내용이였다. 문제는 주인공이 이명박이었고 이명박이 '''중소기업이었던 현대를 대기업으로 키웠다'''라는 내용이였다.[8] 당시 야망의 세월의 시청률은 최대 '''시청률 50%'''를 도달할 정도로 대인기였고 회를 거듭할 수록 국민 모두가 인정하는 샐러리맨의 신화가 되어갔다.
정주영 회장은 야망의 세월에 대해 “작가[9]의 장난” 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자신과 다른 직원들이 주도했던 일까지 전부 이명박의 치적으로 극화됐고, 이명박이 하지 않은 일도 이명박이 한 것처럼 묘사돼있거나 과장돼있었다는 것이다. [10] 이명박의 현대건설 입사동기이자 미국 건설회사 벡텔의 부회장을 지낸 이상백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건설은 자신들이 입사할 때부터 이미 국내 5대 건설사 중 하나였고, 현대건설의 성장은 전적으로 정주영 회장 덕분이며 모든 아이디어, 전략, 결단은 정 회장에게서 나왔고 그 외의 사람은 모두 스태프일 뿐이라며 "이명박 신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평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이명박을 "그 스태프 중의 수장"에 비유했고, 부지런함이 세계 금메달감이었으며 그 근면성실함으로 정주영 회장의 신임을 받았다는 등, 기업 입장에서 훌륭한 직원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는 정주영 회장 역시 "그런 면이 인정되어 승진이 빨랐다"며 높이사는 부분. 회사 일을 하면서 사적 이익을 취한 적도 없고 직원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정주영 시사저널 회고록
이명박과 정주영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멀어진 것은 정주영의 통일국민당 합류 요청때부터 였다. 이명박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기업에 남으시라고 하며 정주영의 정치 참여를 반대했다고 한다. 정주영은 1991년 12월 이명박에게 '함께 정치를 하던지, 현대를 나가든지'의 양자택일의 선택지를 줬고 이명박은 사표를 내고 그길로 현대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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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계 입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통일국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시 이명박은 경제 관련 전문가 영입이라는 명목으로 김영삼에게 발탁되어[11]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에 출마함으로써, 정주영 일가와 관계가 결국 틀어진다. 이명박은 해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95년 국회의원 임기가 1년 남았지만, 같은 해 지방자치가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치러진 제1기 민선 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민주자유당 경선에 출마하였다. 최종경선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정원식에게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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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서울 종로에서 11~14대 종로구 국회의원 이종찬, 그리고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12] 그러나 그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그가 선거비용을 거짓 신고했다고 언론에 폭로하고, 이명박의 측근들은 그를 외국으로 도피시켰던 사실까지 밝혀지자, 이명박은 추세를 보다가 형이 내려지기 직전 자진 사퇴하였다. 이렇게 하여 해당 지역구에서는 1998년 재보궐선거가 실시되었고, 노무현 후보가 다시 도전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3월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이명박은 2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이어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400만원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4월 대법원은 선거법 위반 혐의와 이명박의 범인 김유찬 도피 혐의에 대한 유죄를 확정하고 7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13] 이로써 이명박은 그 해 3년 전에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박탈당했지만, 1년 후 광복절 특사사면복권되었다.

4. 제32대 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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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 당시 선거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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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선거권이 회복된 것을 계기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서울특별시장 선거 후보로 선출되어 출마하였다. 당시 여당의 후보는 당시 떠오르던 청년 정치인 김민석.[14] 여론조사에서는 오차범위 내로 상당히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김민석으로부터 과거의 여러 의혹을 제기받아 이때부터 과거 비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사업'과 '대중교통 체계 개편'을 공약으로 내걸어 일찌감치 분위기를 잡았고, 후보토론에서도 판정승을 거두며 52%의 득표율로 당선에 성공했다. 이명박은 1941년 생, 김민석은 1964년 생이니 완전히 조카뻘인 상대와 싸워서 이긴 셈이다.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생겨난 별명은 '''불도저 시장.''' 특유의 추진력으로, 그리고 현대건설 CEO 경력을 살려서 토목·건축적인 정책을 밀고 나가 서울 외관을 바꿨다고 해서 생겨난 별명이다.
좌파나 진보적 성향 정치평론가도 "대통령 이명박"의 행적을 비판하지 "서울시장 이명박"의 행적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특히 당시에 야당 쪽 인사임에도 이 시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의외로 괜찮았다. 오히려 노 전 대통령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행정력을 신뢰해서 팍팍 지원해줬고 이 시장도 노 전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하는 등 대통령-야당 주요인사로서의 관계는 이상적이었다고 평가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 이명박을 욕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후술할 몇몇 사건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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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히딩크 기념사진 사건.''' 이명박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거스 히딩크 감독에 대한 명예 서울특별시민증 수여식을 하기 위해 히딩크를 서울시청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히딩크의 얼굴 한번 보려고 오는 서울시민들을 경찰력으로 차단한 뒤 한다는 짓이 바로 자기 아들 이시형과 히딩크를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게 했다. 이 당시의 이시형의 복장도 참 가관인데 '''공식석상임에도 불구하고 반바지에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굉장한 결례다. 특히나 그 자리에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도 있었던 자리였다.
또 하나의 잘못은 이명박의 서울특별시장 선거 유세에 동원된 아르바이트생들의 급여를 착복한 일이었다. 물론 아르바이트생들과 소송이 붙었고 그로 인해 착복한 급여를 정상적으로 지급 조치했다.
게다가

서울특별시 전체를 여호와 하나님께 모두 다 바치겠습니다.

라는 발언을 해 서울시민들 중 불교 신자들을 분노하게 했다.#[15]
취임 후, 공약대로 청계천 복원 사업을 시행하여[16] 우여곡절의 과정 끝에 공사는 마무리를 짓는 데 성공하였다. '''이명박의 서울 시장 대표적인 커리어이자 그를 대통령으로 진화시킨 최대의 교두보'''로 화자되지만, 임기 내에 끝내려는 무리한 시도 때문에 이런저런 도 많은 공사였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서울특별시 대중교통체계 개편 역시 주요 커리어로서 교통 카드 티머니도 이때 도입되었고 버스의 번호는 지역에 따라, 색은 종류에 따라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으며 이용 요금은 환승 횟수가 아닌 이동 거리 비례로 바꿔 당시 어려웠던 버스 회사의 재정을 높이는 데 한몫했다. 또한 중앙버스전용차로제를 도입하여 대중 교통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2007년 타임지에서는 위 2가지 정책을 높이 사 '환경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이 인정하는 성공적인 정책이지만, 반대편은 지랄염병 버스라고 비난한다.
이 외에도 뉴타운 사업 및 서울숲 조성, 숭례문 개방 등을 통해 대선을 향한 고지를 밟아간다. 아리수 브랜드화[17]도 이명박 시장의 성공적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잘 언급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서울 시내에 많았던 경유버스들을 천연가스 버스로 전면 개편하기 시작한 것도 이명박이다. 오세훈 시장에 와서 완성된 이 사업도 미세먼지가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재와서 다시 호평을 받는 사업. 실제로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보면 미세먼지가 늘어나는 국내 요인 중 노후한 경유차에 의한 부분이 꽤나 크다는 결과가 많다. 또 실제로 경유 버스가 줄어드는 기간에는 매년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가 감소하기도 했고.
청계천서울특별시 시내버스 개편 이미지가 컸지만 그 외에도 '''서울특별시장으로서의''' 이명박은 김형민 시장 이래 시정능력 면에서 따지면 으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대단히 우수했다. 시장이 2번 바뀌고 대통령도 3번이나 바뀌었지만 이명박 시장의 흔적은 아직도 여러 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청계천은 서울특별시를 넘어 세계인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고 버스체계 개편은 이후 경기도와 인천광역시까지 수도권 통합 요금에 참여함으로서 수도권 주민들의 교통비 부담이 대폭 줄었다. 서울숲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치원, 어린이집, 초중고등학교 소풍 장소가 되었다. '''서울시장으로서 성공했기에 대통령이 된 것'''이므로 서울시장 이명박은 가히 '''이명박의 리즈 시절 2기'''이자, 그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다.

5. 제17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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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살림을 사는 당대표를 뽑는 게 아닙니다. 나라를 살릴 대통령을 뽑는 선거입니다, 여러분! 저 이명박은 여러분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

한나라당 내부 경선 연설 中

퇴임 뒤 그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으나, 성공적인 시장 경력을 계기로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자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당시 상황은 참여정부의 민생, 경제 파탄과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는 정권 심판론이 매우 우세했고, 노무현 정부의 임기 후반 ~ 말기(2006년 ~ 2008년)의 지지율 저하와 민주당 정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및 당시 분열과 막장을 보여주던 여당 대통합민주신당의 바닥을 찌르는 지지율로 인해 후보선출 이전부터 보수계 정당인 한나라당 소속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기정 사실화될 정도였다. 이 때문인지 사실상 한나라당 경선만 뚫으면 사실상 17대 대통령이 된 거라는 말까지 나오는 등 대선 본선보다도 한나라당의 경선이 더 치열해지는 양상이 발생했는데,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박근혜 후보와의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발생했다. 이명박은 여론 지지도, 박근혜는 당내 지지도가 우세했는데, 경선 룰에 따라서 승부가 뒤집어질 수 있는 그야말로 초접전이었다.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네거티브로 인해 둘의 과거 비리는 이때 대부분 드러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며[18], 여담으로 유명한 발언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와 "저거 어떻게 쥐어박고 싶었어"도 이때 생겨난 것이다. 그러다 북핵 실험 등 박근혜에게 불리한 사건이 하나둘씩 터지기 시작했고, 혈투 끝에 우세했던 여론 지지율을 앞세워 경선에서 승리하여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본선은 거의 이명박의 독주체제였다. 이회창의 한나라당 탈당 및 후보 독자출마라는 변수가 있었지만 정동영후보의 지지율은 이명박의 절반수준, 이회창은 정동영 후보의 절반의 양상으로 흘러갔다.[19] 정동영후보와 이회창 측은 BBK 주가조작 사건을 내세우며 이명박을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이명박은 747 공약대운하 공사를 내세워 마이페이스를 걸어갔고 결국 지지율은 득표율로 그대로 연결되어 이명박은 정동영 후보를 무려 531만표차로 꺾고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표차가 가장 큰 선거가 되었지만[20], 정동영과 이회창 외에도 권영길, 문국현 등의 유력후보가 난립한 선거였기에, 과반 득표율은 달성하지 못하고 48.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21] 특히 이명박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부활 이후 '''서울에서 이긴 유일한 보수정당 후보'''이자 '''서울에서 가장 큰 득표수 차로 이긴 후보'''[22][23]가 되었다.
제17대 대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자가 얻은 득표율도 압도적으로 과반수를 달성했지만, 당시 유력 대선 주자로 이명박 외에도, 손학규, 고건, 이회창, 이해찬, 박근혜, 정운찬[24], 이재오 등이 있었는데, 이재오와 정운찬은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면서 친이계에 합류하였고, 유력 대선주자 설문 조사 당시, 후반부로 갈수록 이 유력대선주자 모두를 합한 지지율을 이명박이 차지하게 됐다. 또한, 당시 이명박의 강력한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손학규와 고건이 경선에서 탈락하거나 불출마 선언을 했고, 그나마 대선에 나와 이명박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이회창마저도 이명박의 득표율에 4배 정도로 밀리면서 13대 대선에서 노태우가 김영삼과 김대중을 밀어 버렸던 득표차 이상으로 압도적인 득표차로 당선된다.

6. 이명박 정부


재임 당시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은 이명박 정부 문서를 참고할 것.

6.1. 재임 시절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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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연설하는 이명박.[25]
  • 노무현 정부 말기(2008. 2. 10.), 숭례문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26]
  • 2008년 교육과정을 바꾸며 참여정부수능 등급제를 점수제로 환원시켰다.
  • 2008년 일련의 정부의 행태들과 한미 FTA광우병 논란 등으로 인해 대규모 촛불집회가 벌어졌다.
  • 2008년 7월 11일, 박왕자 씨 피살사건이 발생하였다.[27]
  • 2009년 신종플루가 한국까지 퍼져 많은 감염자 및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 자원외교가 시행되었다.
  • 한반도 대운하 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반발이 심해 포기했고 4대강 사업을 추진하여 완공하였다.
  • 2010년 3월에 천안함 피격사건이 있었다.
  • 2010년 4월에 셧다운제가 입법 발의되어 시행되었다.
  • 2010년 11월에 연평도 포격 사태가 터졌다.
  • 2010년 11월 11일 제 5차 G20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 2011년 교과부에서는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다는 집필지침을 고수하였다.
  • 2011년 12월 1일에 종합편성채널 TV조선, 채널A, JTBC3사가 개국했고 MBN은 보도전문채널에서 변경되었다.
  • 2012년 3월 26일 제 2차 핵안보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되었다.
  • 2012년 이명박 대통령 독도 방문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일본 측에서 문제를 삼은 적이 있다.
  • 2012년 개정된 아청법[28]이 시행되었다.
  • 택시대중교통으로 인정하고자 각종 지원을 확대하는 법률(속칭 택시법)에 대해 2012년 버스 운행 중단 사태 등이 촉발되자, 2013년 1월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 2011년 한미 FTA를 두고 여러 논란이 발생했다.
  • 2011년 7월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었다.

7. 퇴임 후


임기 막판의 급작스러운 독도 방문이 엇갈리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론 지지율을 올리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후 대선 과정에서 존재감이 희석되었다. 이유는 2012년은 연초부터 대선에 집중되었고, 당시 국민들은 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할것인지 관심을 쏟았기에 이명박은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18대 대선직후에는 거의 전직 대통령취급을 받았을 만큼 박근혜에게 관심이 모두 쏠렸다. 이명박은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 등에도 불구하고 자당 후보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이란 이야기가 있듯이 박근혜는 2012년 총선과 대선과정에서 꾸준히 노력하여 18대 대선에 당선되면서 보수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 등장한 이후 중앙정계나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있다. 지방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다가 기자들을 목격하고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퇴임 이후에는 크게 매스컴에 부각되길 원치 않는 듯.
퇴임 이후에는 사무실을 마련해서[29] 재단활동을 벌이는 등 개인적인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페이스북으로 간간이 근황을 알릴 뿐이다. 해외순방을 자주 다니며 여러가지 대외적인 행사에 참여하곤 하며 캄보디아 총리의 경제고문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30] 운동을하거나 자전거를 자주 타는 모습을 보여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비교적 정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4자방 (4대강 정비 사업, 자원외교, 방산비리) 비리 의혹 등 본인 임기 중의 사건과 검찰수사 여부가 여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자서전으로 '대통령의 시간 2008 ~ 2013'을 출판하였다.
2015년 10월 베트남벤처기업 세일즈 명목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조문을 오며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31]
2016년 8월 그의 측근이 월간조선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차기 정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하겠다고 최근 들어 누누히 강조해 왔다고 한다. 링크된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차기 정권 창출에 기여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배경에 대해 잡지는 "박근혜와 완전히 등을 대고 갈라선 친이 세력이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박근혜가 임기 중 자신을 박대한 데 따른 섭섭함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분석했다.[32] 또한 측근에 따르면 이명박이 염두에 두고 있는 차기 대권주자로는 반기문 UN 사무총장, 김무성새누리당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었다고 한다. 특히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직접 저울질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드러났'''었'''다. 나머지 2명에 대해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최근 들어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는 측근들과 같은 여러 인물들이 방문하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는 사실도 전했다. 또한 최근 들어 그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사실 또한 전했다.
다만 이명박 측은 이 보도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냈던 김두우KBS와의 통화에서 "우리가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알아봤지만 그런 발언을 했다는 사람은 없었고, 아마도 측근이라고 하긴 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자기 생각을 담아 과장한 것 같다”고 밝혔고, 이명박 전 대통령도 해당 보도에 대해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느냐"며 언짢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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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일, 청계천에서 열린 청계천시민걷기대회에 참가한 이명박의 모습. 퇴임 직전까지만 해도 나이에 비해서 상당한 동안이었는데 이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2016년 10월의 비공식적 인터뷰에서는 '''가장 먼저 박근혜박근혜 정부를 상당히 강한 어조로 비난함과 더불어,''' 문재인, 박원순도 싸잡아 비판하면서,[33]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하였다. '''다만, 한나라당 시절 유력인사로 같이 했던 6년 동생인 손학규에 대해서는 '그 사람도 참, 그 사람은 한나라당에 계속 있었으면 당 내 대통령 후보 경선은 물론 18대 대통령 후보로 대선에도 나올 수 있는 인재인데 괜히 옮겨다녀 가지고...'라면서 안타까워 하는 견해를 보였다.''' 기사에 따르면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경제신문과 가진 비공식 인터뷰에서 반기문 UN 사무총장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34][35]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행적을 봤을 때, 반기문을 높이 쳤다는 말은 그냥 립서비스였거나,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였다고 보여진다.
2016년 11월 21일, 김영삼 1주기를 불과 1주일 앞두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참배해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 씨를 만난 이후에, 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드디어 공식적으로 박근혜에 대한 견해를 표명했다.''' "부끄러운 일로 정말 참담한 심정... 박근혜가 국민의 뜻을 잘 받아줘야"라고 '''박근혜를 비난하는 견해를 확실히 밝히고, 박근혜 탄핵까지도 고려해봐야 한다면서 탄핵에도 동의하는 견해를 보였다.''' #
2017년 첫날부터 새누리당을 곧 탈당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사실 10월~11월 초에 탈당할 생각이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봐 잠시 동안 내색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반기문/개혁보수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36]
2017년 1월 11일, 늘푸른한국당이 창당식을 거행하면서 창당되었는데, 아직은 본인에 대한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창당식에 축하 인사차 나오지는 않았다. 추후에 늘푸른한국당을 겉보기에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언론에 근황을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37]
2017년 5월 17일, 박근혜 정부 시절 외부활동에 잠잠했다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갑자기 선행활동에 나서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링크 따라서 같은 정당이었으면서도 박근혜와는 불편한 관계가 계속되었음을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2017년 6월 2일, 이낙연문재인 정부의 사실상 첫 총리로 임명되면서 이낙연이 이명박의 사무실을 예방하였고, 거기서 이명박은 이낙연에게 "언젠가 이렇게 크게 될 줄 알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덕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허니문 기간은 얼마가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여러가지 논란들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 대선개입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하고, 공영방송에 대한 낙하산 인사와 언론인 탄압으로 언론환경을 초토화시키고,[38] 여기에 국정원, 사이버사령부, 기무사를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댓글을 달면서 대선과 총선에 직접적으로 개입했으며, 보수단체들을 동원하며 관제데모를 실시 및 야권 인사들에 대한 흑색선전을 주도했다는 의혹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다스 실소유주 논란을 비롯하여 , [39]캐나다 농협 사기대출 사건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비리 문제가 계속 제기되고 있는데 아직도 4대강 사업방산비리, 자원외교에서의 비리 등은 나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 정도로 수많은 문제들이 급부상하며 비판여론과 검찰수사가 점점 수위를 높여가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김어준의 파파이스 시청자 사이에서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진보 지지자들의 여론은 갈수록 험악해져서 '진정한 적폐청산은 이명박을 처단해야 끝이 난다'는 여론이 2017년부터 갈수록 확산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박근혜와 함께 문재인 정부로부터 수사 대상에 올라 그 결과 전직 대통령 2명이 동시에 수사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전두환노태우가 수사대상이 된 이후 두 번째이다.

2017년 11월 12일 바레인으로 출국하기 전 기자회견 장면.
2017년 11월 12일, 강연을 위해 바레인으로 출국하기 직전, 기자들에게 "지난 6개월간 적폐청산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보복냐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저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오면서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 "(하지만) 새로운 정부가 들어와서 오히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갈등과 분열이 깊어졌다고 생각해서 저는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등의 답변을 남겼다. #링크 여담으로 여기서 기자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 오기 전 영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를 마치 검찰 포토라인에 세운 것처럼 대하는 장면들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수많은 플래쉬 세례에 "눈이 부시니까 좀 꺼요"라고 말했음에도 기자들이 그냥 무시하고 계속해서 플래쉬 세례를 가했는데 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매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자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답변 이후 "김관진 장관이 구속되었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등을 물어보았지만 "상식에 벗어나는 질문은 하지 말라"며 짜증내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기자회견이 이어지기 전부터 청년민중당을 비롯한 좌파단체와 일부 시민단체에서 "이명박을 구속하라"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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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날 입장 표명에서 3분 40초 동안 총 7번 혀를 '낼름'거려서 신문기사화(중앙일보)되기도 했다.[40]

2017년 12월 19일에는 자신의 생일 잔치에 가기 전에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역시나 이전처럼 질문에 답을 회피했다. 한편 생일잔치에 따라온 시민들은 "이명박을 구속하라"라는 구호를 끊임없이 외쳤고 한 시민은 이명박에게 직접 달려들다가 경호원들에 의해 끌려나가기도 했다.

7.1. 2018년





7.2. 구속


2018년 3월 22일 밤 11시 7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이 인용되어 서울동부구치소에 구속된다.


7.3. 재판


2018년 4월 9일, 서울중앙지검이명박을 구속 기소했다.
2020년 10월 29일, 대법에서 원심의 판결을 확정하여 징역 17년 벌금 130억원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경호를 제외한 모든 예우가 박탈되었고 2022년 5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의 퇴임 이전까지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 중 예우를 받는 사람은 단 1명도 없게 되었다.
형기를 집행할 경우 95세가 되어야 출소가능하다.
재차 기술하지만 결론으로 이명박은 이날 이후로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더이상 받지 못하게 되었다. [41]


7.4. 수감 생활


2020년 11월 2일 서울동부구치소에 재수감했다. 이 곳에서 수형자 분류 작업을 거쳐서 교도소로 이감한다.
[1] 이 중 1남 1녀는 어릴 때 요절해 3남 2녀가 되었다.[2] 인근의 학천리와 함께 경주 이씨 집성촌이다.[3] 그의 친형들도 모두 이 학교를 나왔다. 여담으로 이명박은 가난한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이상득이 육사를 중퇴하고 대학 입시를 한 것 때문에 가정형편이 쪼들려 고등학교 진학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고 한다. 친형인 이상득의 언급으로는 포항고교가 더 나았지만 아버지가 동지상고의 재단이사로 있었기에 삼형제가 모두 동지상고를 나왔다고 한다.해당 인터뷰[4] 현재는 경영대학.[5] 당시 서울대 입시에서는 제2외국어 반영을 하고 있었는데 동지상고 야간반은 제2외국어를 가르치지 않았던 실업계였던지라 서울대는 생각조차 못 했다고 한다.[6] 김부겸, 안희정이 대표적인 사례다.[7] 이 대금은 2003년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한 후 '''일부''' 돌려받았는데, 이 전 대통령이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후세인 정권하 관료들의 매너 및 일하는 태도를 극찬한 일을 비춰본다면 아이러니한 일.[8] 이명박이 입사할 때도 이미 현대는 국내 5대 건설사였다.[9] 나연숙씨로 TBC시절 시작해 언론통폐합으로 KBS로 옮겨 방송된 달동네를 비롯해 이후 보통 사람들을 비롯, 70~80년대 소시민적인 정서를 다룬 달동네류의 드라마로 꽤 인기있는 작가였다.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에 거주하다가 2000년대 후반 귀국해 활동을 재개한 게 에덴의 동쪽(MBC)으로 조기종영되어버렸다. 그 걸 만회한다고 만든 작품이 폭풍의 연인(...) 결국 끝없는 사랑을 끝으로 다시 활동을 중단했다[10] 대표적으로 소양강댐 건설, 태국 건설 현장 폭동 장면[11] 정주영과 통일국민당이 총선이 다가올수록 인기가 늘자 정주영회장과의 관계를 생각해 통일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라는 설도 있다. [12] 지원유세단이 화려했는데, 전성기를 누리던 '''이경규''', 임채무, 김해숙이 지원유세를 했다. 흠좀무[13] 여담으로, 이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한 대법원 재판부에서 주심을 맡은 대법관이 바로 훗날 노무현 탄핵심판 대리인으로 활동하고, 노무현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이용훈 대법관이다. 유죄가 확정되고 나서 이명박은 이용훈에게 판결이 틀렸다며 편지까지 보냈다고 한다.[14] 386세대의 대표주자로서 이 당시도 상당히 스타 정치인이었다. 33세에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386세대 대표주자라는 위상을 밀어붙이며 서울시장까지 노렸으나 이명박에 밀려 낙선하였다. 제16대 대선에서 정몽준을 지지하며 당을 옮기면서 철새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이후 가출한 아들이 집에 돌아온 심정이라는 말을 남기며 민주당에 복당하여 제17대 총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훗날 친정인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하여 제21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20년만에 국회에 복귀하였다.[15] 이 발언 때문에 이명박은 대통령 취임 이후 불교계를 각별히 신경썼다. 또한 대선 때 이명박에게 맞선 후보가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노인 발언으로 크게 곤욕을 치렀던 정동영이었기 때문에 이명박의 이 발언이 대선에서 이슈화되지 못했던 행운도 있었다.[16] 정확히는 취임 1년차가 된 직후였던 2003년 7월 1일부터 시작하였다.[17] 단순히 이름만 붙인 게 아니라 품질관리를 도입한 계기가 되었고 오세훈, 박원순 시장 시기에도 아리수의 품질관리가 잘 계승되고 있다. 따라서 아리수 브랜드 런칭 역시 이명박 시장의 치적 중 하나로 인정받을 만하다.[18] 당장 다스 실소유주 논란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최초로 언론에서 언급된 게 이 시기다. 그것도 민주당 쪽에서 끄집어낸 것도 아니고 서로를 향한 네거티브로 사용됐으니...[19] 이회창이 이명박의 지지율만 흡수할 것이란 여권의 예상과는 달리 정동영 후보의 지지율도 상당수 흡수했다. 대통합민주신당한나라당도 좋아하지 않았던 20대의 표심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 이회창 지지율의 대부분은 이인제의 지지율을 전부 흡수한 것이라 볼 수 있다.[20] 이 기록은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경신한다[21]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48.67%, 거의 절반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22]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예정보다 7개월여 앞당겨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도 '''서울지역 최다표차 기록을 경신하지 못했다.'''[23] 민주당계 정당은 13,14,15대 김대중, 16대 노무현, 18대 문재인 모두 서울에서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다.'''[24] 이 당시는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비노계의 대권 주자로 언급됐는데, 한나라당열린우리당에서 모두 언급되었다.[25] 2010년 3월부터는 백내장 수술로인해 안경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26]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2월 25일자로 종료되기 이전의 사건이긴 하나,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 숭례문을 개방했기에 직접적인 연관점도 많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후 처리는 이명박 재임 중 이루어졌고, 복원은 박근혜 정부에 이루어 졌다.[27] 남북관계를 완전히 냉각시킨 시발점으로서 의미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로 금강산에는 단 1명의 남한 관광객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28] 아동 포르노의 정의가 실제 아동 청소년에서 아동 청소년으로 인식되는으로 바뀌었다.[29] 사무실이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임대료 월 1,300만 원에 달하는 임대료에 퇴임 직전에 공사한 삼성동 자택 유지비용도 그토록 아방궁이라 공세를 벌였던 노무현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자택보다 높은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 특히 임대료와 자택 수리비용은 모두 다 국민 혈세로 충당된다는 사실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30] 사실 대통령 취임 이전에도 7년간 맡았던 적이 있었다.[31] 사실 그는 김영삼과 인연이 있는데, 김영삼이 "우리는 도덕적 선구자가 아닌 능력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정치계로 발굴해낸 인물이었다.[32] 다만, 이명박도 김영삼처럼 '''속으로는 박근혜를 맘에 안 들어했기 때문에, 정권 초에는 오히려 친박 계열들을 경선에서 대부분 쳐내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움직임 및 구실이 생기면 트집잡아서 박근혜를 쳐내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즉, 이런 의사표현은 박근혜에 대한 강한 불만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33] 다만, 박원순과는 MB 정부 시절 전, 서울시장~대선후보 시절까지는 상당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MB 정부 출범 직후 상호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대립하는 모양새로 변했다. 검색 엔진에서 찾아봐도 나오며, 박원순 문서를 참조해도 알 수 있다.[34] 반면 김무성은 어렵다고 평가했다. 개인적으로는 오세훈을 생각하고 싶으나, 오세훈도 아직 경쟁력에서 떨어진다고 평가했다.[35] 다만, 손학규에 대해서도 먼저 평가한 것과 아쉬워하는 평가를 남긴 것을 고려하면 손학규 같은 인사를 내세울 가능성도 충분하다.[36] 늘푸른한국당의 창당 예정일이 2017년 1월 내인데, 탈당 견해를 밝힌 시기와 창당 시기를 고려하면, 곧 탈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명박이 대통령 시절, 차기 대선후보로 염두에 두고 지지했던 인물은 이재오와 정운찬이었고, 이 두 인물 모두 이곳에 있다. 여러 가지로 시기를 고려해서 탈당 시기를 정했을 것 같다.[37] 다만, 이명박 대통령과 늘푸른한국당의 성격을 감안했을 때, 언론에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적극 지원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여겨진다.[38] 이 때문에 과거 공정성과 신뢰도에서 1위를 달리던 MBC가 극우 언론매체로 변질되며 정권의 어용방송으로 전락해버렸다. 훗날 MBC 블랙리스트 사태까지 터지면서 이명박 정권의 시궁창스러운 공영방송의 현실이 제대로 드러났다.[39] BBK 주가조작은 최종적으로 공소사실에서 제외됐고(#), 제2롯데월드 특혜 의혹은 문재인 정부 감사원의 감사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40] 참고로, 공범자들에서 최승호 PD에게 언론 장악의 책임을 추궁당할 때에도 혀를 '낼름'거렸다. 현 상황에 대해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상당히 초조해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41] 실형선고가 되었더라도 단지 전직 대통령의 예우 대상에서 대부분 하지 않기로 한것일 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재임하였던 역사적 사실까지 당연부정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