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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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홈페이지
한국일보와 자회사 '글로벌 E&B'가 공동 주최하는 대한민국의 미인대회로 1957년부터 시작했다.
글로벌 E&B는 2015년부터 설립된 한국일보의 자회사로, 미스코리아 당선자는 글로벌 E&B와 계약하여 글로벌 E&B 소속으로 활동하게 된다. 처음엔 이름이 '한주미디어네트워크'였으며 2016년 한주 E&M, 2018년 한국일보 E&B, 2021년 글로벌 E&B 순서로 이름이 변경됐다.
학력(고졸 이상), 연령(한국나이 19~27세), 기혼 유무(미혼) 등의 제한 요소가 있으며[2][3]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미스코리아 지역 대회에서 입상해야 한다. 미스코리아에서 입상하면 , 미스 인터내셔널, 미스 어스 등 국제 미인대회에도 나갈 수 있다.
한국의 미를 대표하는 사절로서 과거에는 꽤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 미스코리아 입상 경력을 바탕으로 연예인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심사과정에서의 뇌물 수수 사건이 터지고, 대중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함량미달 미모의 입상자들이 난무하면서 최고권위의 미의 제전이라는 위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주최사인 한국일보의 위상도 함께 떨어졌다.
그리고, 수영복 심사에 대한 논란과 여성계의 비판 때문에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4] 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결국 1972년부터 지상파에서 생중계되었던 미스코리아 본선 중계 방송이 2002년부터는 지상파에서 중단되었고,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19년 대회는 TV 중계 없이 유튜브, V LIVE 등 오로지 온라인으로만 중계를 하게 되었으며 수영복 심사도 폐지했다.[5]
최근 미스코리아 인지도가 굉장히 많이 떨어져 심지어 아는 형님 8회에서 가짜 미스코리아를 찾는 진실게임을 진행했는데 단 1명만, 그것도 찍어서 맞힐 정도. 슈퍼모델 1명 외엔 모두 2015 미스코리아 진선미였는데 아무도 몰랐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본선대회 입상자에게만''' 붙이는 말이다. 지역대회 수상자로 본선대회에 출전했다고 해서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2. 미스코리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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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미인 대회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다. 1931년 국경의 밤을 쓴 시인 김동환이 창간한 잡지사 삼천리가 개최한 '반도의 대표적 려인(麗人) 미쓰 코레아 삼천리 일색(一色)'으로, 사진응모를 통해서 선발하였다. 심사위원이 의외로 화려한데, 이광수, 염상섭, 김억, 안석주, 이승만(李承萬)[6] , 허영숙, 나혜석, 김원주, 최승희가 심미안을 갖췄다라는 이유로 선발되었다. 총 326명의 응모를 받아서 14명이 입상했다. 그중에서 1등을 특상이라고 불렀는데, 당대 여류문인 최정희의 여동생인 최정원(崔貞嫄)이 선택되었다[7] . 최정원은 이후 카프 소속인 이갑기[8] 와 결혼했는데, 결혼 몇 주만에 이갑기가 카프 참여 혐의로 체포되는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이후 언니 최정희처럼 소설 <낙동강>을 발표하면서 문인으로도 데뷔.
다음은 1940년 8월 일본 잡지사인 <모던 니뽄>이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미스 조선을 선발하였는데, 전남 목포 정명고등여학교를 졸업한 김영애(19)가 선발됬다. 그리고 김영애는 화가였던 문재덕과 결혼하였는데, 이쪽도 운수가 좋지 못했는지 6.25 전쟁때 남편이 납북되게 된다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미인대회는 1949년 월간잡지 <신태양>이 미스 대한 선발 대회를 한 것이 기원이다. 신태양은 사진응모로 후보를 추린 다음에 명동에 그 사진을 걸어놓고 지나가는 사람의 투표로 미인을 선발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고등학생이나 사무직 여직원 등 47명의 사진만 도착하였다. 그나마 영 아니다 싶은 경우를 추리자 7명만 남았고, 이 7명 역시 잡지에 실을 수준은 아니었다. 결국 기자들에게 나가서 외모가 되는 미인들을 찾아오라고 했으니, 주 대상은 '''다방 마담들과 요정 직원들이 주가 되었다'''[9] . 이렇게 20명을 채웠으니, 우승자도 역시 명동 지역 다방 마담이었던 임현숙이 선정된다. 이후 임현숙은 나름대로 연예계 생활을 좀 했다.
이 다음은 더욱 가관이다.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달리던 1953년 5월 피난 수도였던 부산시청 강당에서 미인대회가 열렸다. 중앙일보 주최[10] 였던 제1회 여성 경염대회(競艶大會)로 미스 유니버스에 파견할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제1회라고 하지만 어차피 2회는 없었다. 이 대회의 1등은 숙명여자대학교 재학 중에 부산으로 피난온 강귀희가 차지하였는데, 이 과정도 골치아프다. 원래 강귀희는 참가자 명단에도 없었는데, 심사위원들의 요청으로 후보가 되었다. 이 본선은 수영복 심사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수영복 심사는 비공개로 진행하고 나머지는 공개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미인대회에서 수영복 심사한다는 소리를 듣고 인파가 많이 몰렸기 때문에 결국 모조리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다만 본선 진출자 10명으로 모아놓고 발표회만은 공개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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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표에서 당연히 심사위원이 초빙한 강귀희가 1등으로 발표되었는데, 이 때 명칭을 미스코리아라고 했기 때문에 강귀희를 최초의 미스코리아라고 부르는 사람도 가끔 있으나 이 대회는 공식적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포함되지 않는다.[11]
이후 강귀희의 앞날도 그렇게 순탄하지 않아서 유명세로 몇 년간 공부를 못하질 않나, 이후 프랑스로 건너가서 한국 음식점을 여네 디자인을 하네 하다가 결국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단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의 고교 1년 선배라는 이유로 KTX의 시스템 및 열차 도입 과정에서 프랑스 알스톰사의 TGV의 로비를 담당하였고[12] , 개신교계 유명 목사와 프랑스 나비부인과의 관계를 주선하는 인물이라서 이후의 소송에서 참여했다.
그리고 1957년 5월,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 한국일보 주최로 세계대회에 파견할 한국대표를 뽑는 최초의 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리게 되었다.
3. 역대 대회 및 입상자
한국일보 제공 역대 미스코리아 명단
1963년 진 김명자는 한국이 지지리도 못살던 시절, 별다른 스폰도 없이 미스 유니버스에서 5위 입상했다. 당시 미국 측에서도 김명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연예계 활동을 제안했으나 김명자 측에서 가족의 반대로 거절. 1960년대에 의외로 단아하고 복스러운 전통미인들이 미스 유니버스, 미스 월드에서 성적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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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미스 유니버스에서 김명자가 5위 입상한 모습. 이 당시 1위는 아르헨티나의 노르마 놀란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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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미스 유니버스 5위, 미스 월드 Top14, 미스 인터내셔널 5위의 성적으로 지지리도 못사는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를 코리아 이름을 알린 공로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위원장에게 초대받은 모습.
4. 참가자
5. 지역 대회
6. 논란
미인대회 그 자체에 대한 논란은 해당 문서 참고.
6.1. 국제대회 출전권 박탈
미스코리아는 1980년대가 지난 후 유난히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않다. 아마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태닝된 구릿빛 피부에 근육으로 다져진 당당한 이미지의 미인을 선호해서 다소곳하고 순수한 이미지의 여성을 선호하는 미스코리아와는 코드가 안 맞는거라 보기도 한다. 미국, 일본도 국내대회인 미스 아메리카, 미스 재팬은 엄친딸 속성인 사람을 뽑고, 미스 유니버스 대표 선발전인 미스 USA, 미스 유니버스 재팬에서는 태닝한 파티걸 스타일을 뽑는다. 2015년도 미스 유니버스 재팬에서는 흑인 혼혈 참가자 미야모토 아리아나[72] 가 우승하기까지 했다.
미스코리아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면, 청순하고 다소곳한 이미지보다도 위에도 언급되었듯이 태닝된 피부에 거침없고, 당당하고, 솔직한 매력이 통통 튀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래야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까 말까하는 상황이 반드시 온다. 모든 미코들의 롤 모델이자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4위를 한 이하늬를 예로 들어보자. 이하늬는 국악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73] 솔직하고 당당한 매력을 거침없이 어필할 뿐 아니라 글래머러스한 가슴에 11자 복근을 바탕으로 한 몸매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끌 수 있었다.
거기다 동양적 마스크에 서구적 몸매, 차분하면서 관능적인 목소리가 이하늬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이게 해줬다. 덕분에 그 결과 2007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우승은 못하더라도 최소 4위를 기록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74] 그러나 최근의 미코 대회를 보게 되면 이러한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보다도 아련하고 청순한 이미지에만 집착하다보니 국제 성적과는 더욱 더 멀어져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결국 미스코리아 대회는 2011년에는 미스 월드의 출전권을 상실하더니,[75] 2016년부터는 국제 양대 미인대회 중 하나인 '''미스 유니버스에 나갈 한국 대표를 뽑을 권리를 상실'''하게 되어버렸다.
이로써 미스코리아 대회는 미스 월드에 이어서 미스 유니버스라는 국제 양대 미인대회의 출전권을 모두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2015년 이후 미스코리아 선, 미 당선자 중에서 남은 국제대회인 미스 인터내셔널, 미스 어스에만 출전하게 되어 미스코리아 진이 국제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2019년에는 일본 상품 불매운동에 편승해 일본에서 개최하는 미스 인터내셔널에는 후보자를 출전시키지 않아 국제대회는 미스 어스만 출전했다.
현재 미스 유니버스, 미스 월드 출전권은 미스퀸 코리아 입상자에게 있다.
6.2. 대회 관련 비리들
사건사고가 많이 터졌고, 뒷말도 엄청나게 많은 것이 현실이다.
공식적으로 이야기가 나온 것만 해도 1990년 대회에는 한국일보 임원과 미용실 원장이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되었다.
1993년 미스코리아 선 역시 뇌물의 결과로 드러났고 역시 관련인물들이 구속되었다.
1998년 대회에서는 기술상 문제로 점수가 잘못 산정되는 오채점 문제가 나타나서 희대의 재투표가 벌어졌다. 정확하게는 특정 후보들에게만 심사위원 1명의 점수가 합산이 되지 않은 것이 밝혀진 것. 이에 대해서도 뇌물 받아먹은 것이 꼬여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미리 점수를 맞춰놓은 것이 아니면 이 총점이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거니와, 현장에서 관련인들 사이에서 욕설과 몸싸움이 벌어졌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결국 1998년 대회는 방송없이 원래 방송일로부터 5일 후에 비공개로 결과 발표만 나왔다.
2012년 대회에서는 후보자의 모친이 해당 언론사 팀장을 통해서 심사위원들에게 뇌물 총 4,000만원을 전달했다가 결국 입선하지 못하자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심사위원들이 거부하면서 대형논란으로 발전했다. 이쪽과 관련된 것이 소위 말하는 미스코리아 미용실들로, '''미스코리아 당선 소감으로 나오는 어느 어느 미용실 원장님에게 감사하고'''라는 이야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평이 많다.
지역대회의 경우는 정말 관련된 악명이 자자한 편으로, 원래 심각하던 지역대회의 비리가 이젠 지상파를 타지 못하는 본대회까지 퍼졌다는 식의 이야기도 많다. 심사위원 매수금만 억단위라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기사까지 있었으니...
이런 비리의 온상으로 유지가 되는 것은, 미스코리아라는 것이 아직도 소위 '스펙'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쉽게 생각하게 되는 결혼시장, 취업관련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문대학원에서도 '''미인대회 입상은 예체능 특기자로 취급'''해서 특차입학의 조건이 된다. 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려고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에 뇌물썼다가 돈으로 분쟁이 벌어진 사건이 2011년 경기지역에서 이미 벌어졌었다.
이 문제를 특히 열심히 뒤지는 프로그램이 시사매거진 2580으로 2010년에는 '놀랍고도 추악했던 미스코리아', 2013년에는 '돈 주고 사는 미스코리아'라는 취재로 비리가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했다. 2010년 당시의 관련된 블로깅 내용과 그 댓글들을 보면 참 답이 없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미디어오늘이 2019년 5월 22일에 미스코리아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 ‘63회 한국일보 미스코리아 대회’ 잡음 여전를 냈고, 한국일보 측에서 허위사실을 통해 기사를 작성했다며 6월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를 냈다. 2020년 4월 23일, 한국일보 측이 일부 승소하여 미디어오늘 측이 손해배상금과 함께 기사 중 일부 부분을 삭제할 것을 명령받았다.#
6.3. 예전보다 못한 참가자들의 미모와 성형 논란
미스코리아가 뽑혔다는 기사의 댓글에 많이 달리는 내용은 '어떻게 저런 얼굴로 미스코리아가 되었냐?', '아니, 미인대회라면서 왜 이렇게 미인들이 없어?' 라는 등의 내용들이다. 즉, 미스코리아 주제에 외모가 별로라는 평으로, 원인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위상이 점차 떨어짐과 동시에 지원자의 수준도 떨어지면서 미스가 아니라 '''미시'''같은 지원자가 미스코리아가 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요즘에는 대회 이후 방송에 나온 미스코리아 참가자들이 중소 기획사의 걸그룹이나 댄스팀 멤버들의 미모보다 부족한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의느님들이 너무 일이 많고 바빠서 성형수술을 못 시켜준 게 아니냐?" 같은 혹평까지 나온다. 왜냐하면, 성형수술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졌다고 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외모와 성형때문에 말이 많아지자 자체 인증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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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우는 샤크라의 이니와(본명 임선홍),함소원이 출전했던 1997년 대회에서 이니와 같은 미스코리아 미에 뽑힌 정은주.[76] 물론 본명인 임선홍으로 출전한 이니와 함소원은 미인이 맞지만 정은주는 상태가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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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미스코리아 진 김민경, 김지유라는 가명으로 탤런트로 활동하였으며 파스타 싸다귀로 유명해진 아침 드라마와 영화 <함정>으로 최근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당선 당시 대구지역 미인대회 우승자 배출의 산실 송죽미용실의 원장인 어머니의 배경으로 우승을 했다는 루머와 성형전 사진등의 인터넷을 떠돌아 안티 미스코리아 카페의 붐이 일기도 했다. 무엇보다 김민경(164cm)은 선과 미로 당선된 서현진(172cm)과 백명희(174cm)에 비해 단신인 키로 인해 더욱 논란이 일었다.
2008 미스코리아 진 나리와 여자 진행자 박정아. 시청자들은 차라리 박정아가 진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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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13년 미스 울산 지역의 진, 선, 미 당선자들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선착순으로 뽑힌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을 정도. 진, 선, 미 모두 키도 그렇고, 얼굴도 그렇고 타 후보들에 비해 현저히 수준이 떨어졌다. 화장법이 별로여서 그렇게 보였다는 의견도 있긴 하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 대회인 2014년부터 부산과 통합해 대회를 치르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까지도 몇몇 지방 지역대회에서는 80~90년대 스타일의 메이크업이나 사자머리 헤어스타일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6.4. 그 외
영상에 언급되는 여자는 한성주.
게다가 대회의 인지도가 갈수록 떨어지며 정말 미스코리아에 걸맞는 출중한 미모의 소유자들은 쓸데없이 시키는 것도 많고 고생하면서 경쟁해야되는 미스코리아 대회를 외면하고, 바로 연예인 쪽으로 도전하는 경우가 많아서 양질의 참가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지고 있다고 한다. 유튜브, 아프리카TV 심지어는 SNS 포스트로도 얼굴을 알리기가 더 쉬운 상황이니 연예계 등용문으로서의 파워도 낮아졌고.
게다가 미스코리아 대회의 인지도가 떨어지고 있는 중이며, 입상을 하고 난 이후에 각종 포털사이트에 미스코리아, 미스코리아 진 이름 등이 실검 1위 혹은 상위권을 장악힌다 하더라도 거기까지... 이후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실검에서 점점 추락, 평상시의 일상생활로 리셋되면서 잊혀진다. 그만큼 예전같은 인기나 존경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미모가 출중한 인재들의 참여 욕구를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다. 미코에 대한 인지도가 옛날같이 높았으면 수많은 지상파 프로그램이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은 물론, 연예 기획사로부터 연예인 제안을 받고 연예계쪽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77]
6.5. 원인
미스코리아가 미인대회로서 평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하락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대회의 비리는 지상파 방영하던 시기부터 계속되어 온 오래된 문제였고 미스코리아 미용실과 주체사와의 관계도 문제도 많았다. 실제로 여성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인 1980년대에는 이런 문제가 없었느냐 하면 그럴 리가 없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비리 사건이 1990년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비리사건의 형성과 폭로의 유형을 보면 1980년대에는 이미 완전히 일반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성 상품화 운운은 이런 미스코리아 대회의 평가 하락에 대외적 명분을 달아준 사건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제대로 된 미스코리아의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대략적 합의는 '''1977년 미스코리아 김성희'''까지 올라가는데, 이 때부터 대략 20년 동안은 여성의 성상품화 운운은 존재하지도 않던 시기였다. 여성권 운동이 호주제 폐지 단계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공공연해지는 것은 토요타 미국 지사 성추행 사건부터 시작해서 한국에서 여성가족부가 생기는 1998년 즈음해서, 한국에서도 성추행 같은 단어가 사회적으로 일반화 되는 시기에서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1990년대 후반부터 여성단체쪽에서 여성의 성상품화라는 이유로 미스코리아 퇴출운동이 벌어졌고[78] , 이에 따라 지상파에서 생중계되던 미스코리아 대회가 케이블로 쫓겨난 이후로는 관심도나 인기가 급하락[79] 하였다. 그만큼 예전 수준만큼의 지원자도 모이지 않게 된 것.
이런 현상은 서유럽에서는 더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어 미인대회는 그냥 모델, 연예인 지망생들의 경력 쌓기, 그들만의 스카웃 현장 정도로 위상이 낮아졌으며, 그런 현상은 미국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미인대회 참가하는 이유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늘리기 위해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
이렇게 미인 대회가 위상이 낮아지는 현상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가난한 여성이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 미인대회 입상자가 되는 것뿐인 나라라면 미인대회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레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반대로, 누구든 노력만 하면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직장을 얻을 수 있다면 굳이 불안정한 연예인의 길을 걷기 위해 돈까지 들여 미인대회에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다. 미인대회의 위상이 높은 국가들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발전이 뒤쳐지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못한 나라들이다. 인도, 베네수엘라, 필리핀에서의 미인대회 위상과 서/북유럽 선진국에서 미인대회 위상이 어떤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이미 90년대에 이원복도 현대문명진단에서 당시 미스 스위스 일화를 그린 적이 있다. 미스 스위스에 참가하려는 후보들이 그야말로 미모에선 한숨나올 상황이었고 사진담당하던 사진 작가는 내가 모델을 찍으면서 본 무수한 미인들이 많은 이건 대체 뭐하려고 여는 대회냐? 라고 투덜거릴 정도였다고. 결국 미스 스위스가 된 여성은 유부녀, 그것도 아이들을 여럿 둔 여성이었다.
한국도 과거에는 여성이 명문대를 나와도 괜찮은 직업을 얻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미의 기준도 획일화되어 있었는데다가, 미스코리아 입상 경력은 결혼 시장에서도 중요한 자산이 되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미인대회 수상을 하고 싶어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옛 한국 남성들은 배우자의 조건으로 과거에는 예쁘고 집안일 착실하게 잘 하고 애 잘 키우는 것만을 내세웠지만 여성도 얼마든지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참여를 할 수 있게 된 2000년대 이후 한국 남성들은 여성의 직업이나 가치관, 자신과 잘 맞는 성격인지의 여부를 배우자 선택에 있어 더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연예시장의 규모도 다양한 취향의 소비자 욕구를 정확히 맞추어 프로듀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외모, 끼와 재능이 있는 인재들은 자기 스타일에 맞는 소속사 문을 두드리는 게 훨씬 승산이 있다. 따라서 미인 대회의 입지는 앞으로도 서유럽 선진국들처럼 계속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7. 녹원회
홈페이지
1987년에 설립된 미스코리아 수상자들의 모임으로 봉사단체로 이루어져 있다. 2013년엔 사단법인이 출범되면서 공익성을 더욱 강화했다.
7.1. 역대 회장
회원들이 직접 선거를 통해 회장을 선출한다.
사단법인 출범 전
- 초대: 이다나 (1961 선)
- 2대: 김성희 (1977 진)
- 3대: 임미숙 (1983 진)
- 4대: 김재키 (1977 미)
- 5대: 최영옥 (1984 진)
- 6대: 권정주 (1990 엘칸토)
- 1대: 권정주 (1990 엘칸토)[80]
- 2대: 김미숙 (1994 미)
- 3대: 장은진 (2000 갤러리아)
- 4대: 이정민 (1998 미)
8. 관련 문서
[1] 1966년 제 10회 대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유호 작사, 손목인 작곡이다.[2] 예전에는 키도 포함되었으나 현재는 빠졌다.[3] 미스코리아 참가자격은 미스 유니버스 참가자격과 비슷한데 이는 미스코리아 당선자를 미스 유니버스에 참가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4] 여성계뿐만 아니라 여성 국회의원들도 적극적으로 미스코리아 TV 중계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는데, 이 안티 미스코리아 운동을 도운 국회의원 중 한 명이 바로 현재 국토교통부 장관 김현미다.[5] 대신 VCR 영상으로 대체했다. 수영복 심사는 2004년에도 한번 폐지를 했다가 2005년에 다시 부활한 바 있다. 2004년 때도 VCR 영상으로 대체했으며 상반신만 나왔다.[6]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는 다르다.[7] 인터넷에는 이걸 최정희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좀 있다.[8] 이효석이 조선총독부에 취직하자 '''"너도 개가 되었구만"'''이라고 발언해서 이효석이 조선총독부를 그만두는 원인이 된 인물로 유명하다.[9] 덕분에 심사가 가관이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후보들이 담배를 꼬나물거나 치마를 걷어서 올리고 노려보는 등, 업소 분위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라고.[10] 현재의 중앙일보와는 별개의 단체다.[11] 강귀희는 미스 유니버스에 사정이 여의치 못해 나가지 못했다.[12] 결과적으로 KTX 대상열차는 노태우가 아닌 김영삼 정부 시기에 선정되었으므로 로비는 실패.[13] 국회의원 오위영의 딸.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불문과 학생이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베드로 주교의 막내이모. 미스 유니버스에서 한국인 최초로 인기상, 포토제닉상, 스피치상 등을 수상했다. 2010년 숙환으로 선종.[14] 배우 김정은의 이모이다.[15] 원래 김지연(본명: 김정혜)이라는 사람이 진으로 당선됐었으나 결혼을 했던 사실과 실제로는 풍문여고 중퇴임에도 숙명여자대학교 가정학과에 재학중이라고 학력까지 속인 것이 드러나 당선이 취소되었다. 사실이 밝혀지자 김씨는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에 입상자들의 순위가 한 단계씩 상승. 그래서 선이었던 임현정(본명: 임희선)이 진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임씨는 숙명여대 영문과에 실제로 재학중이었다.[16] 고전적인 미인으로 아직도 4, 50대 이상 어르신들에게는 최고의 미스코리아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 매력, 세계는 친구 등의 노래를 히트시키며 가수 활동도 잠시 했다.[17] 골프선수 미셸 위 어머니.[18] 미스 유니버스 2위 입상으로 이것은 이하늬의 4위 입상보다 높은, 현재까지 역대 대한민국 최고 기록이다. 참고로 1988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렸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1988년 미스 유니버스는 대한민국이 아닌 대만 타이페이에서 개최되었다. 대한민국에서 개최한건 1980년이다.[19] 84년 진 최영옥의 동생이다.[20] 2002 한국일보. 김연수의 첫째언니[21] 1993년에 미스코리아 당선 과정에서 뇌물 수수 의혹이 검찰에 의해 드러났다. 그때까지 미스코리아 산실로 명성을 날리던 마샬미용실 원장에게 서정민의 어머니가 3천만원을 건넸고, 마샬미용실 원장은 한국일보 사업본부장에게 9천만원을 건넨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뉴스를 타면서 연예계에서 사실상 은퇴, 이후 재판에서는 무혐의로 종결되었으며, 결혼 후 현재 캐나다에서 거주 중이다.[22] 전 KBS 아나운서,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이혼.[23] 1990년대 말까지 연예계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대학원에서 사회학 공부를 시작해 2002년 이화여대에서 석사, 2009년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24] MBC 공채 27기 연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스코리아 대회 참가자가 공채 연기자로 들어간 상당히 드문 경우.[25] 연예계로 진출해 연기 및 MC를 맡았으며 특히 SBS 달려라 코바 MC를 맡아서 연기 활동보단 MC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하지만 결혼 후 간통 및 방송에서 거짓사연 언급으로 논란을 빚고 방송계에서 은퇴하였으며, 지금은 식품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26] 2002 한국일보. 김연수의 셋째언니[27] 배우 한고은의 언니.[28] 이병헌의 동생.[29] 배우이자 이세창의 전 부인.[30] 샤크라 초창기 멤버로 이니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었다.[31] 2008년 원광대 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32] 사상 초유의 재심 사건으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33] 심재학 MBC SPORTS+ 해설위원의 아내.[34] 가을동화의 유미로 주목을 받았으나, 이 후 어른의 사정으로 은퇴.[35] 1996년 선 설수진의 동생.[36] 전 축구 선수 안정환의 아내.[37] 배우 손태영의 언니.[38] 2006년 혈액암으로 투병 중 사망.[39] 전 MBC 아나운서, 2014년 프리랜서 선언.[40] 백민희라는 예명으로 배우로 활동했었다. 하지만 배우 생활은 단기로만 활동하여 기억하는 사람들은 잘 없다. 그뒤 연예계에서 은퇴하고 진로를 변경. 대한항공 승무원에 합격하여 #근무하다가 퇴사.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41] 골퍼로 활동하였다가 현재는 트레이너로 활동중. 박근혜 최순실 비선게이트때 늘품체조건으로 논란이 거론되었다.[42] 경북대 의대 의예과 재학 중이어서 외면 내면 모두 갖춘걸로 유명했다. 그 후 하버드대 의전원에 가겠다며 의대를 자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생화학과를 다녔으나, 의전원 입학에는 실패하고 진로를 수정해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에서 영양학으로 학위 취득 후 동국대학교 식품생명공학과 교수가 됐다. 공부 관련 책도 몇 권 냈다.[43] 다이어트워 시즌5에 나와 충격적인 근황을 알렸으며, 중간에 탈락했으나 본인이 혹독하게 관리하여 다이어트에 성공했다#.[44] 5자매중 4명이 모두 미스코리아 출신. 김연수는 5자매중 막내. 이 중 넷째만 제외하고 모두 입상에 성공하였다.관련기사[45] 최명룡 전 대구 오리온스 감독(현 한국대학농구연맹 회장)의 딸.[46] 통일교 문선명의 4남 문국진과 결혼.[47] 남동생이 축구 선수 오범석.[48] 축구 선수 현영민과 결혼.[49]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수달 장군을 연기했던 배우 김시원의 양딸이다. #[50] 전 YTN 기상캐스터.[51] 포항MBC 아나운서.[52] 전 SBS 아나운서.[53] 배우[54] 전 야구 선수 최희섭과 결혼했으나 현재 이혼.[55] 배우. 과거 이효림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박지원이라는 예명으로 활동중이다.[56] 방송인, 배우로 활동중이며 농구 선수 강병현과 결혼했다.[57] 현 MBC 아나운서.[58] 축구 선수 황재원과의 스캔들로 엄청난 파문이 있었다. 결국 조직위원회에서 자격을 박탈하고, 뒤이어 누드 모델 파문을 일으킨 김희경과 함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정보가 삭제되었다. 이후 농구 선수 이지운과 연애 중이라는 얘기가 있었으나 2014년 이지운의 결혼기사 때 헤어졌음이 드러났다. (예비 신부는 다른 여자)[59] 2006년 '서마린'이라는 예명으로 누드 모델로 활동한 사실이 드러나 자격 박탈.[60] 유리아라는 예명으로 배우 활동했으나 현재는 다시 김주리로 활동. 본명은 '김리아'로 개명. 이쪽은 유인나를 닮은 외모로 알려져 있다.[61] 현재 서은채라는 예명으로 배우로 활동 중이다.[62] 현 MBC 아나운서.[63] 배우[64] 민서연이라는 예명으로 모델 활동 중이다.[65] 아버지 정한영은 탤런트 출신이고 여동생 정유리도 2012년 미스코리아 대회에 서울 미 자격으로 출전했다.[66] 전 MBC 기상캐스터.[67] 방송인[68] 미스코리아 출전하기 전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미녀통역사로 출연한 적이 있다. 미스코리아 입상 이후엔 미스코리아로 다시 출연했다.[69] 전 축구 선수 김진규와 결혼.[70] 브라질 진으로 혼혈이다. 2013년 미스 어스 대회에는 해외교포 출신인 최송이가 출전해 한국의 역대 최고 성적인 4위에 랭크되었다. 무한도전 응원단 브라질 월드컵 특집에도 출연. 본명은 카타리나 최 누녜스.[71] 1990년대 히트곡 제조기로 유명한 프로듀서 김창환(현 미디어라인엔터테인먼트 회장)의 딸이다.[72] 아버지가 미국인, 어머니가 일본인. 2살 때 부모가 이혼한 후,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살았다.[73] 보통 국악 전공자들은 대부분 청순하고 다소곳한 이미지가 있다.[74] 당시 1위는 김제니에게 망언을 퍼부은 미스 재팬의 리요 모리.[75] 미스 월드 측은 미스코리아 1위에 해당하는 진을 미스 유니버스에 내보내고 2위에 해당하는 선을 미스 월드에 내보내는 것에 불만이었던지라 국내 출전권을 다른 회사로 넘긴 것이다.[76] 이후 중앙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원광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다.[77] 2006 진으로 뽑혔던 이하늬 같은 경우, 그 당시에 미코에 대한 인지도는 떨어지기는 했어도 지금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거기다 2007 미스 유니버스에서 4위를 차지한데다가 김태희(이하늬 서울대 동기)와 박봄 등 연예인들과 친분이 있는 것은 물론, YG에서 가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연예계로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나름대로 착실하게 진행하고 있었던 셈. [78] 김신명숙著, '미스코리아 대회를 폭파하라' (1999) [79] 당시엔 지금처럼 케이블 채널 보급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방송에서 접하기 더욱 힘들었다.[80] 유일하게 연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