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조선)/평가

 



1. 개요
2. 긍정적 평가
2.1. 정치적 역량과 인재 등용
2.2. 전쟁 대비
2.3. 전후 처리
3. 부정적 평가
3.1. 이순신에 대한 의심과 박대
3.2. 명나라로의 도주 계획
3.3. 전쟁으로 떨어진 권위
3.4. 공신 책봉 문제
3.5. 망한 자식농사
3.6. 말년의 인재 실패
4. 논란
4.1. 선조와 이순신
4.2. 방계승통 열등감 논란 (?)


1. 개요


선조는, 왕보다는 '''CEO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국가 원수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자리지만, 기업총수는 사원과 그 가족을 전부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고 냉철하게 손익 따져서 손해본다 싶으면 구조조정으로 잘라 버리며 극단적으로 이익을 추구해도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고 할 순 없다. 경영자 출신들이 정재계 진출해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도 이렇게 전혀 다른 지향점 때문에 정치외교에선 중요하나, 기업경영에선 필요없는 무형의 가치를 놓치기 쉬워서인데 선조는 전반적으로 큰 하자는 없었고 오히려 능력만큼은 유능했으나 임진왜란이라는 큰 위기에서 이익을 중시하는 경영자 스타일다운 인성 문제가 터지며 비판거리가 매우 많아진 왕이다.
서로 다른 당파 출신이라서 근간이 되는 사상과 성향이 다른 신하들을 다루는 용인술, 국내외에 걸친 정세 판단력, 인재보는 안목에서는 조선에서 손에 꼽을만한 왕으로서 임진왜란 시기에도 무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기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닌 왕이다. 국책 전반에서는 40년 중의 33년 동안 치세와 임진왜란 7년 이후 8년의 여민휴식이라는 국가회복 기간 동안 당대 신하들은 반대하고 무시했지만 오히려 후대에는 재평가 받는 정책과 인재를 계속 선보이는 현명함을 보였다.
평화로울 때에는 이익과 안녕을 쫒는 성향이 총명함과 맞물려 장점으로 작용해 국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도덕성에 흠결이 있지만 유능한 지도자 즉 '똑똑한 경영자'로서 평가 받았다. 반면에, 전쟁 같은 국가적 위기상황에선 지나친 이기주의로 나라와 백성을 포기하는 선택도 서슴치 않는 '''왕보다는 사업가로서만 너무 확고한 장단점'''을 가진 왕이 바로 선조였다. 쉽게 생각해 경영능력 좋아 막대한 이익을 내고 회사를 키웠지만 큰 위기가 터지면 직원 몰래 해외로 튀어버리곤 혼자 잘 살다가 나중에 억울하다면서 귀국해 법정에서 휠체어쇼를 벌이고 돈으로 용서받는 수많은 사업가와 정치인을 생각하면 된다.
선조는 능력만 보면 출중했지만 책임감이 부족했기에 왕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 그 덕분에 선조는 대중에게 유명한 임진왜란 7년의 쓰레기 악당 같은 모습, 그리고 40여 년의 탁월한 통치라는 명암을 혼재하는 왕이었다. 다만, 인터넷에서는 가히 문서 훼손에 가까운 수준으로 찌질이 캐릭터로 비하당하고 있는데, 이는 후대인들의 선악관에 비춘 시선으로는 국가를 버릴 수 있는 국가 수령이라는 선조의 인간성이 비하 캐릭터가 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기만 생각하는 인물이 기업인이 아닌 국가 수령이 되면 일어나는 장단점을 모두 보여준 역사적 선례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중적인 이미지는 임진왜란의 사악한 암군이지만, 선조의 역사적인 실체를 이해하려면 전란시대의 선조와 평화시대의 선조를 아예 카테고리로 나누는 것이 편리할 수도 있다. 전쟁에서는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국가와 백성을 장기말로 거래하는 사악한 암군이지만, 똑똑한 인물답게 선견지명에 가까운 능력으로 국가를 다스려서 명군과는 동떨어진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능력과 업적만은 유능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상반된 선조의 행보를 관통하는 특성은 두 가지인데, 바로 '높은 지능'과 국가수령에 걸맞지 않는 '이기주의'이다. 흔히 공부는 잘 하지만 공감능력이 떨어지다 못해서 약한 자를 멸시하는 이기주의자를 생각해보면 된다.[1] 임진왜란과 평화시대의 선조는 극과 극처럼 다른 인물처럼 보이지만, 선조라는 인물의 본질은 언제나 똑같다. 바로 '''자신의 입장에서 항상 승리에 가까운 포지션'''을 독차지 하려는 도덕성에 비하여 너무 높은 지능이다. 공감능력 떨어지고 스펙에만 관심있는 흔한 전교 1등. 즉, 선조의 인간성은 인재를 죽을 때까지 잘 빨아먹고 교체하는 얍삽한 경영인 타입이라는 요약을 이해하면, 어떤 왕인지에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조는 희소한 타입의 국가수령에 대한 반면교사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득만 추구하는 기업 경영자들과 유사한 인간을 국가대표 수령으로 뽑으면 국가적 위기 사태에서 어떤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교훈을 보여준 인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다수의 역사를 보면 '''선조처럼 사회를 충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기업처럼 이득만 따지는 이기주의자가 국가를 대표하면 벌어지는 현상'''은 대게 선조의 케이스와 유사한 국가적 위기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어떤 평가를 내리든지 간에, 선조의 교훈은 책임감이 낮고 이득주의를 내세우는 경영자 타입의 장단점이 국가 위기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파악하는 객관적 지표일 것이다. 일종의 경영자가 대통령이 된 케이스로 역사 적으로 대개 그런 인물들은 자신의 이득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호평을 받지 못했다. 무형의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 정치와 이익 중시의 경영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던 셈. 관중은 백성을 부강하게 함을 우선으로 했으나 선조는 자신의 이득을 우선시함으로서 조선 성리학의 기본적 토대를 무시한 셈이다. 탄탄한 정신적 가치로 무형의 위계를 형성했던 상당히 뛰어난 조선 통치시스템에서 선조의 경영자적 마인드는 결코 백성의 동의를 얻을 수 없었다. 사실 백성들을 위한 숭고한 희생정신이 필요한 사태만 아니었다면 약간의 교활한 이득중심주의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으나, 선조는 백성을 생각해야할때 그들을 버렸다.[2]
참고로, 현대의 평가는 선조의 업적을 아예 숨기고 바보 왕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능력이 좋다지만 국가위기를 하청업제 돌려막는 식으로 처리하고 책임감은 하나도 없는 국가수령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사회유지 혹은 교육적으로 악영향이 크고 턱없이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만 아니었으면 평가가 나쁘지 않았겠으나 사회적 책임감 측면이나 인간적 행보에서는, 평등과 평화, 통합 및 공존의 완성형 사회로 나아가고자하는 현대 민주주의적 이념에서는 위인이라 하기엔 찬양할 건덕지가 없는 인물이다. [3]
서애 류성룡은 전란 중 고려의 현종을 본 받을 것을 간언했지만 선조가 전쟁에서 보여준 행동은 부족했고 심지어 류성룡이 양위를 권하려다 포기하기까지 한다. 반면에, 율곡 이이 등의 다수의 명신들은 선조에게 성군의 자질이 있다고 평가했으며 [4] 대체로 40년이라는 기나긴 통치기간과 임진왜란 이후에 통치 현안에서는 후대에도 비전을 남긴 인물로 평가를 받는 등등 모든 기록에서 매우 확고한 장단점과 낮은 인간성을 지닌 사업가 스타일이 매우 일관적으로 나타난 타입이다.
최근에 미국의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선조와 유사한 평가를 받는다. CEO 출신의 뛰어난 경영력을 살려 나라 경제를 살렸지만, 위기가 닥치자 이기적 행보로 나라를 말아먹은 것이 유사하다 평받는다.

2. 긍정적 평가



2.1. 정치적 역량과 인재 등용


선조는 재위 직후 분열된 사림 신하들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식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등 출발은 나쁘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는 붕당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상호 견제(이간책)를 통한 신권 억제에 성공하여 상당히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그리고 이 성공적인(?) 치세의 기간이 자그마치 조선 왕들의 평균 재위를 상회하는 '''25년이다.''' 그러나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는 역으로 후에 이어진 임진왜란과 그로 인해 노출된 한심한 조선의 상태를 고려해볼 때 자그마치 25년에 이르는 그 긴 치세동안 조선의 내실을 다지지 않고 뭐했냐는 비판도 가능하다.[5] 나쁜 평가에 대한 과도한 올려치기인지 혹자는 3대 명군(...)이라는 소리를 하나 태종, 세종, 문종, 성종, 영조, 정조 등 국가사에서 선조만큼의 흠결은 보이지 않으면서 훌륭한 치적을 쌓은 왕은 많다.
선조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으나 의심 많은 성격과 별개로 머리 나쁘거나 안목 없는 사람은 절대 아니라서 뛰어난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가까이 두어 총애했다. 기본적으로 명종 때부터 채워진 우수한 인재들 덕에 선조 시기는 세종과 정조에 비견될 만큼 우수한 인재 풀을 가지고 있었다. 류성룡, 이이, 이황,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이순신, 권율, 정인홍, 정문부, 정탁 등이 모두 선조 시대의 인물이다. 임진왜란 전 이순신의 파격적일 정도의 승진도 류성룡의 추천이 있었다고는 하나 대간에서 전례 없는 고속 승진을 거세게 반대했음에도 '조까 필요한 일이다.'라며 선조가 밀어붙여 나온 결과이다. 이전까지 최고 자리가 종 4품 자리에,[6] 현직으로는 종6품 정읍 현감이라는 낮은 직책에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전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능한 장수들을 중요 거점에 배치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책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하나의 반증이 될 수 있다. 허준을 지원하며 동의보감 작성에 기여했던 사실 역시 그가 제법 안목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인재들은 결코 자신의 재능이 썩혀지진 않았다. 이황이야 워낙에 벼슬을 사양해서 그렇다지만 나머지는 그런대로 벼슬 생활을 하면서 적재적소에 앉아 활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앉힌 건 바로 왕인 선조였다.
흔히 여기다 류성룡을 거론하는데, 실록에서 이순신을 파격 승진을 결정하고 대간의 반대에도 이를 강행한 사람은 엄연히 선조다. 류성룡은 이 과정에서 뭐 했는지 기록이 없다. 징비록에서는 자신과 이순신이 친하여서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했다고 어필을 하는데 가장 큰 후원자는 엄연히 선조다. 그리고 이순신의 승진 속도 또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선조가 정말 의욕적으로 밀어주는데 대간이 이런 빠른 승진은 전례가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었다. 인사라는 것이 일단 자리가 나야 들어가는 건데 이미 이순신의 승진 속도는 대간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매우 빨랐다. 종6품 현감을 정3품 수사인 전라좌수사 자리에 올리는 것 자체가 당시로선 비정상적인 행위였다.[7] 이건 오늘날 대한민국 행정조직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날로 치면 중대장 정도인 대위에게 하루아침에 별을 달아준 정도의 파격 인사이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원래 인재와 영웅은 난세에 나온다는 점이다. 선조의 인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유독 선조 치세에 인재가 많아보이는 건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활약할 인물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능력을 보일 기회가 많았다는 것. 당장 구국지사들만 해도 한 둘이 아니며 사실 이순신 도 전쟁이 없었다면 인재라기보다는 지나가는 1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선조 시기에는 구국지사들만 나온게 아니란 걸 보면 임진왜란이 없었어도 충분히 인재를 적당히 잘 굴려먹었겠고 실제로 초반 재위 25년동안 그랬다.
당대의 인선 사항과 관련해서 화담 학파의 박순, 허엽, 퇴계학파의 류성룡, 김성일 등은 물론 서인인 정철 등이 명종 때에 출사한 점을 들어 명종 대에 이미 사림계가 정국을 장악했고 선조는 그것을 이어받았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윤씨 척신을 쳐내고 또 다른 척신 이량을 들여오던 명종의 정치를 생각하면 이들을 정치 전면에 나서고 근본적인 사회 개혁이 논의될 수 있게 된 건 분명 선조의 공이 맞다. 선조가 역량을 발휘해서 급작스럽게 사림이 득세하고 인재들이 쏟아진 건 아니지만, '''그 인재들을 제대로 쓴 건 분명 명종이 아니라 선조다.''' 명종은 제대로 써보고 말고 할 거 없이 죽어 버렸고, 선조는 임진왜란 전까지 25년에다 임진왜란 7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총합 41년 동안 그 인재들을 아주 잘 써먹었다.

2.2. 전쟁 대비


임진왜란 중의 대처는 왕으로서의 기본조차 지키지 못했기에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책임 자체를 선조에게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임진왜란의 원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적 마찰이나 분쟁이 있어서, 조선이 빌미를 제공한 전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임진왜란의 성격을 앞에 두고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았어야 했다는 주장은 일본에 대한 내정 간섭이나 정복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이다.[8]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할 수 있는 것은 전쟁 준비밖에는 없다.[9] 그리고 실제로 선조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양반들과 백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선조가 통신사 파견 이후 대책 논의 과정에서 낙관론을 주장한 김성일[10]을 신뢰했다는 에피소드 때문에 전쟁 대비가 미흡하여 피해를 자초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591년부터 축성 및 전력 증강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실록, 징비록, 난중잡록 등 여러 사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11] 오히려 지방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이 방위 태세 정비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다.[12][13] 일단 당시 백성들의 전쟁 대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시궁창이었는데, 명종 때는 을묘왜변도 있었고 옆 동네 사정을 뻔히 봤으면서도 전쟁대비에 매우 부정적인 백성들과 유생들은 결국 임진왜란 때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다.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 유생들까지 축성 작업에 동원시키는 등[14]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다 지역 사족층과 충돌하고 민심을 이반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전라감사 이광은 전쟁 준비 과정에서 쌓인 불만이 전쟁 발발 후 근왕병 모집 과정에서 터져버리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왜군이 쳐들어온 와중에 반란군 진압부터 해야 했다. 선조 역시 과도한 전쟁준비가 민심을 이반케 한 점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렸다.

(중략) 내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비록 인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세상 물정에 밝지 못하여 국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본심인 즉 근년에 북방 국경의 많은 변고가 있었음에 비추어 군정이 해이함을 알고 '''성지를 높이고 호를 깊이 파고 병갑을 굳게 해서 외환外寇을 막는다고 하여,''' 중외에 명령하여 감독을 엄히 하였더니, 실지로는 '''성이 높아지니 국세가 날로 약해지고, 성지의 호가 깊어질수록 백성의 원망도 깊어져서 끝내 와해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고,''' (중략)

정만록. 이호응 역주.


(중략)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중략)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무자) 기사.

전쟁 준비에 골몰했던 시기가 왜관에서 왜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래에도 거론되는 전시를 대비한 인재 채용이나 김수가 전쟁 준비 심하게 한다고 욕 들어먹은 시점은 보다시피 '''임란으로부터 단 1년 전이다.''' 통신사가 일본에서 복귀한 시점을 고려하면 일단 전쟁 준비를 하긴 했다. 다만 그해 11월 김성일이 일본이 안 온다니까 왜 불필요한 일을 해서 소요를 일으키느냐는 논지의 시폐 10조를 상소했고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그 후 축성건은 흐지부지 되었다.[15] 이 사실들을 놓고 보면 관점에 따라 선조가 전쟁 준비를 미흡하게 했다고도 볼 수 있을 치명적이었던 요인은 준비를 했다 안 했다가 아니라 '''선조가 벌인 그 준비 시간이 택도 없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단 1년 만에 전국이 축성 작업하고 알맞은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의 작업을 해야 했다는 것인데 이게 1년만에 가능하다면 그건 현대적 국가 수준의 시스템이나 아니면 정복 전쟁을 한창 벌이는 제국마냥 맨날 전쟁만 하고 사는 게 아니면 힘들다. 더군다나 조선은 전근대에도 유난히 작은 정부로 버티던 나라였음에도 저렇게 급하게 벌이니 무조건 탈이 날 수밖에.
이 급박한 전쟁준비는 당연히 상당한 민심 이반을 불러왔는데 조선 남도 민심이 굉장히 흉흉해져셔 경상감사 김수는 지역유림과 크게 부딪쳐서 뒷날 곽재우가 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소리치는 지경이었고,[16] 이광이 파견된 전라도에서는 개전 직후 왜적에 맞서야 할 군병들이 소요사태를 일으켜 관리를 공격하고 성을 점거하는 바람에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전에 이들부터 진압해야 했다. 게다가 개전 직전 경상좌수영의 진포 이동 현황과 개전 직후 경상도 내 조선군의 움직임을 추적해보면 분명히 왜군의 침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고,[17] 각 군현의 군사들이 어디로 모이고, 이동하고, 방어 중심은 어디인지 대응 매뉴얼 자체는 이미 세세하게 짜여져 있었다. 다만 원균이 초기에 자기 휘하의 함대로 일본군 저지를 막지 않고 육지로 도주해 버린 것이 큰 오점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우수영은 조선 수군 중에서 최대 규모였기에 원균이 나가 싸워서 지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혀줬을 것이고, 이겼다면 우리가 오늘날 임진왜란 때에 찬양하는 영웅으로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을 꼽았을지도 모른다.[18]

의병장들을 숙청해 의병 활동이 위축되었다는 주장도 실제론 사실이 아니다. 실록의 해당 구절은 선조수정 실록에서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죽은 김덕령의 죽음을 동정적으로 서술하며 나온 구절이다. 이런 주장은 의병 활동을 내세운 북인이 임진왜란 이후 집권당으로 확고히 지위를 굳혔다는 점을 무시한다. 실제 조선에서 의병 활동이 줄어들게 된 가장 큰 요인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물자 부족으로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던 점이 크고, 그 다음으로 의병장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의병장들은 무관이든 문관이든 지역 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재산을 소유하고 인맥을 형성한 사람들이었는데 계속된 전쟁으로 대장급 인물들이 대부분 전사(고경명, 조헌, 김천일, 원호 등) 혹은 병사(김면의 경우)하여 세상을 떠나거나 물자 부족으로 사실상 와해되거나(김덕령) 관직 제수받아 관군에 편입되어(곽재우, 정문부, 권응수, 김덕령 등) 이미 의병 부대가 아니게 되었다.[19] 의병 활동이 소강 상태에 빠진건 이 때문이지 선조가 의병장을 숙청해서가 아니다. 선조가 죽인 의병장이라고 해봐야 이산겸, 김덕령 둘 뿐인데 이산겸은 군사를 모아 놓고 왜군을 토벌하러 움직이지 않아 송유진의 난 전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고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 가담자 다수로부터 공통적으로 이름이 거론되어 같은 당파인 서인에서조차 극형을 주장했다. 게다가 이산겸과 김덕령 이 둘은 의병이랍시고 세운 공도 없었다.[20] 애초에 의병이라는 존재는 용인 전투로 대표되는 조선 정규군의 와해와 직후의 군령권 부재 상황, 다시 말해서 '''싸울 장정은 있는데 지휘할 지휘부가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꽤나 특수한 존재였다.[21] 이건 비단 의병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비정규군이 마찬가지다. 당연히 영토가 수복되고 행정력이 복구되면 정규군으로 편입되거나 해산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특히 조선은 전선이 안정되자 정규군조차 17만의 대병력을 2만 ~ 3만으로 줄여 나머지는 생업 전선으로 복귀시켰는데 의병은 말 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조선 관군은 국가에서 먹이고 재워 주지만 의병은 당연히 의병장 개인의 재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건 물론 곽재우처럼 정규군에 편입된 게 아닌 이상 의병에 소속된 이들 대다수가 어제까지 농민이었다가 무기 잡은 케이스니 좀 안정되고 나면 차라리 농사짓게 하는게 더 이득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징비록에 따르면 조선은 군량마저 모자를 지경이었으니 어차피 명군이 지원 온 거 군축을 하여 군량을 아끼고 황폐화된 농지나 다시 복구하는 게 이득이었을 것이다.
선조가 단순히 도망쳤다고 해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결국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라는 점이다.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의도야 어떻든 마냥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선택이었다. 도망을 안 치고 왕이 사로 잡히면 '''그 전쟁은 진 거다.''' 실제로 이렇게 도망을 치려다 실패하여 붙잡혀서 패전한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이고, 옆나라인 명나라가 이렇게 망했다.[22][23]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했으나 정작 목표였던 왕의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오로지 한양만을 위해 진격하느라 외면했던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튀어나오며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왜란이 터지고 빠르게 명나라로 향해 원군을 요청한다는 선조의 선택지는 사실 그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행히 그 선택지가 먹혀들었고, 명의 원군을 얻어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관군과 의병이 일어날 시간도 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침략을 당한 전쟁에서 승전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결론은 적어도 사실이다.[24] 더군다나 북인계는 기축 옥사로 많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에서도 의병장이 된 사람이 있는데, 이는 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 아무리 명망 있는 선비들이 뜻을 세워본들 왕이 "과인은 항복했다. 너희들도 항복해라" 하면 누가 그를 대신해서 왕위에 앉지 않는 이상 판을 접어야 한다.[25] 설령 사로잡힌 선조가 일본에 비협조하다가 죽는다고 한들, 남명의 경우처럼 후계(를 주장하는) 왕들의 교통 정리와 지휘 체계조차 확립되지 않을 가능성도 낮지 않다. 명나라로 가려고 했던 것만 제외하면, 피난 자체는 잠깐의 굴욕을 견뎌낸 현명하고 유익한 결단이였다고 할 수 있다.[26]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에서 해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주변 모든 인물들에게 인망을 잃어 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써 군림하고 세금을 받는 것은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러면 보안관은 끝이죠. 하지만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왕이 전쟁을 포기하고 제 할 일을 안했느냐, 이 기준으로 왕의 잘못을 판단해야지, 피난 간 것이 비겁하다고 말할 순 없는 거예요.'''[27]

임용한 교수. 토크멘터리 전쟁史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다만 피난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나라를 버리고, 요동을 넘어가려 했기 때문에 이 피난은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냥 아주 적극적인 선조의 행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그건 누가 봐도 조선이 망해도 상관없으니 나는 살겠다는 제스쳐였다. 국내에서 피난을 하며 버티는 게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로 튄 왕이 난이 평정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확률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다(...) 몽골의 침입 때 고려가 강화도에 짱 박혀있음에도 어쨌든 나라를 유지한 건 그래도 그것이 국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기를 쓰고 신하들이 반대했고 명나라는 처음에는 선조를 일본의 첩자라고 의심했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선 기가 차 했으며, 조선의 명맥을 유지할 왕이라는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신하들이 양위를 해서 '왕'의 권위를 광해군에게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하들이 왕을 적대하는 지경까지 간 것(...) 물론 영약했던 선조였기에 조선의 명맥자체가 망하지는 않게 구심점을 삼도록 자기 딴에는 버리는 패인 광해군을 던졌는데, 선조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 모드였던 것 같은 데 예상 외로 광해군이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선조가 쩌리가 되는 효과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선조는 자신의 실책으로 잃은 권위를 내내 광해군을 갈구면서 회복할 생각을 한다. 이는 난중에 멀쩡한 왕을 버려두고 칭왕을 했음에도 대계적 관점에서 아들을 인정하고 기꺼이 상왕으로 물러난 당 현종과 너무나 대비되는 누가봐도 근시안적이고 한심한 일이었다. 당 현종은 권력에 집착했고 자식에게는 상당히 잔혹한 인물이었음에도 배포는 컸고 아직 총기는 남아있었는지 나라의 통합을 위해서 자식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왜란 당시에 선조는 도망만 쳤고 이순신권율이 잘 해서 전쟁을 이긴 것이란 판단은 굉장히 짧은 이해다. 전술했듯이 우선 그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군주가 바로 선조이고, 도성까지 점령당한 판국에 국가 원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인 외교적 방법으로 명군의 파병을 얻어낸 것도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오히려 명군이 주력이었고 병농 일치제 국가인 조선이 군사 숫자를 줄여 전후 처리에 나설 수 있게끔 국제 외교적 지형을 만든 것도 결국엔 선조다.[28]

2.3. 전후 처리


은근히 가려지는 사실인데 전후 부흥 과정도 후계자인 광해군에 비하면 상당히 괜찮았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적어도 선조는 광해군처럼 무리하게 수없이 궁궐을 짓는다 수선을 떨지도 않았고 검소하게 살며 기껏해야 승하 1년 전에 창덕궁에 대한 재건 공사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대공수미법을 처음 시행하고[29] 여민 휴식을 내걸었으며, 전후 토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양전(계묘양전)을 실시하여 전결 확보를 시도했고 납속책을 확대하는 등 전후 정비를 하였다. 왜란 발발 이후 1년만에 한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 도입 및 개량도 시행했고 여진에 대한 견제도 계속 실시하여, 여진 노토 부락을 정벌하기도 하였고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건주 여진이 세력을 확장하는 기세를 보이자 정보를 염탐했으며 여진의 상황을 명 조정에 알려 대신 처리하게 하는 모습도 보였다.
여민 휴식에 대해 설명하자면 1600년 9월에 비변사는 12개조를 선조에게 제출했고 본격적으로 전후 복구 사업을 실시했다. 조정에서도 더이상 민간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고 왕조 재건의 주체는 조선의 민간 사회와 백성이며 이들의 경제적 성장의 안정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그러면서 농민들의 부세 부담을 3분의 1로 낮춰주는 과감한 경세 정책, 산림과 천택의 전면 개방과 형벌 완화 등의 제도를 펼치기 시작했다. 선조는 대신들이 건의한 이 사안들의 대부분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시행하였으며 조선은 임란이 끝난지 10년 만에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불안감 감소와 인구 증가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또한 선조는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30]이 이혼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 여인들은 절개를 잃었다고 볼 수 없다."'''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실드쳐줬다. 후에 병자호란을 겪은 손자도 '''"그 여인들이 원해서 간 것은 아니잖은가?"'''라고 옹호하였으며, '홍제원'에서 몸을 씻도록 했다는 전설이 춘원 이광수의 글에도 언급되어 있다.

3. 부정적 평가


"한산을 고수하여 호표(虎豹)가 버티고 있는 듯한 형세를 만들었어야 했는데도 반드시 '''출병을 독촉하여 이와 같은 패배를 초래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말해도 소용이 없지만 어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한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은 배만이라도 수습하여 양호(兩湖) 지방을 방수(防守)해야 한다."

선조 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 기사


"흉적이 조금 물러가고 종묘 사직이 다시 돌아왔으니 '''이는 참으로 대인(양호)의 공덕이라 감사함을 무엇으로 말하겠습니까. 절을 하여 사례하겠습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가 무슨 공이 있습니까. 이러한 예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상이 굳이 청해도 따르지 않았다. 상이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니, 경리가 말하기를,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戰船)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말하기를,

"대인에 있어서는 그렇지만 과인에 있어서는 참으로 미안합니다."

선조 실록 93권, 선조 30년 10월 20일 정축 1번째 기사[31]

[32]


"지난날 내가 국세가 위급함을 지나치게 걱정하여 풍진(風塵)의 경보가 뜻밖에 생겨나고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이 조석 사이에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거듭 경들을 번거롭게 하면서 망령되이 물은 일이 있었는데, 끝내 방비책을 진달하지 않았다. 만약 적변이 갑자기 발생하면 팔짱을 끼고 앉아서 기다릴 것인가. '''지난 임진년에 김성일(金誠一) 등이 망령되게 사설(邪說)을 주창하여 ‘왜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을 기롱하였고, 변방 방비에 뜻을 둔 사람들까지 배척하였으며, 심지어는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파견하는 것까지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다가 왜적이 깊이 쳐들어오자 유성룡(柳成龍)·김응남(金應南)은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서도 가지 않았고, 신립(申砬)은 시정의 건달 수백 명을 거느리고 행장(行長)의 10만 대군을 막다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이제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선조 수정 실록 35권, 선조 34년 2월 1일 경오 1번째 기사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나라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殘賊)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權栗)은 행주(幸州)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義州)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勳名)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

선조 실록 135권, 선조 34년 3월 14일 임자 8번째 기사 [33]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 2백 년 이래 여대(麗代)의 문장에 미치지 못한다. 이것으로 보면 문장과 무략이 모두 고려 때만 못한 셈이다.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 밖에 결진하여 포휘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자고로 국세가 이와 같으면 반드시 이적(夷狄)의 화를 받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일이 실로 염려된다. 무략만 강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재집(宰執)들 중에도 병법을 아는 사람이 없고 신진 문사들은 전연 무사(武事)를 모르고 있다. 내가 조신(朝臣)들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세(時勢)를 알지 못하여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인가? 무신은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반드시 독서한 연후에야 고금 성패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열 가지 일을 알아도 한 가지 일을 시행하는 자 또한 드문데 하물며 전연 옛글을 모르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 고사(古史) 뿐 아니라 병가(兵家)의 글을 아는 자 또한 전무하다."

하니,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들과 병법을 논한 적이 있었는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장(武將)은 활을 당기고 말을 달리는 일밖에 다른 기능이 없고, 문신은 오직 시구(詩句)의 연마만을 힘쓸 뿐이다.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에게 숨기지 않고 다 말하는 것뿐이니 말로 본의를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왜적은 한당(漢唐)의 성세에도 당해내기 어려웠으나 북적(北賊)에 이르러는 하나의 양장(良將)이면 충분한 것인데도 이처럼 어려우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축적이 많은 후에야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이 부국 강병(富國强兵)이라고 하였으나 부강만을 위주로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축적이 있은 후에야 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런데 '''천하에 어찌 이처럼 가난한 나라가 있겠는가. 흡사 여염의 궁핍한 집과 같아 하나의 진보(鎭堡)[34]

를 경영하기도 이처럼 쉽지 않다.''' 내가 보건대 전조에는 매우 부유하였는처럼 가데 우리 나라는 어째서 이처럼 가난한 지 알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지역이 수천 리가 되지만 산천(山川)이 많이 차지하고 있어 생산되는 곳이 없다. 산에는 나무만 있고 물에는 돌만 있을 뿐이라서 중원(中原)에 비하면 1도(道)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원의 1도는 극히 부성(富盛)하여 우리 나라의 물력으로는 미칠 수가 없다. 왜국 역시 우리 나라처럼 가난하지는 않다. 그런데 왜국은 몇 개의 도로 나뉘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 기사


3.1. 이순신에 대한 의심과 박대


'''사실상 선조가 대중들에게 평가가 나쁜 가장 큰 이유.''' 예나 지금이나 조선, 한국인들에게 신성불가침 영역인[35] 이순신에게 했던 일련의 행위들은 인간 대 인간을 넘어 신하 대 임금으로 봐도 많이 심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국가를 존망의 위기에서 구한 구국의 영웅이며 현재 진행형으로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장수를 "왕의 말을 거역했다."는 억지 죄를 만들어서 파직하고 고문했으며,[36] 그 자리에 능력없는 자를 앉혀서 조선 수군이 괴멸 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국가를 다시 한 번 전란으로 내몰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무서울 게 없어진 일본군은 임진년엔 발을 들이지 못한 전라도를 마음껏 유린한다. 이때 남원성과 진주성이 일본군에 함락되면서 수천의 백성과 군사들이 죽었고, 조선은 다시 한번 더 아비규환에 빠진다.[37]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선조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으나 정유재란이 일어난 것은 결코 선조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38]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선조는 전란 직전 원균을 전라 좌수사에서 경상 우수사로 영전시켰고 이후 원균의 허풍을 믿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하고 부산포로 진격하라는 명을 내려서 칠천량 해전의 참패에 일조하게 된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되지도 않는 억지와 모함으로 이순신을 모함하여 파직시키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지휘로 말아먹은 원균에게 돌아가겠지만,[39] 원균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원균을 그 자리에 임명한 최종 책임자가 선조인 만큼 선조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21세기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이 이랬어도 책임을 피하기 힘든데 하늘에서 벼락이 쳐도 임금이 부덕해서 그렇다던 조선 시대다. 그래서 선조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다.[40]
특히 이순신이 파직되고 백의종군하게 된 것이 모두 선조의 의지였단 것을 기억해야한다. 긍정적 평가로 언급된 선조의 인재 등용은 선조가 류성룡의 추천이 있었든, 없었든 선조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서 행해진 일이었지만, 이순신의 파직 역시 선조의 강력한 의지였다. 원균에게 책임여부를 묻기에 앞서 인사권을 가진 국왕인 선조가 죄 없는 장수를 파직하고 그 자리에 무능한 장수를 올려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으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차라리 무능한 장수를 자기가 맘에 안 들어서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르고 자기 마음에 드는 유능한 장수로 앉혔다면 결과는 좋았다나 사실은 인재를 보는 엄청난 눈이 있어서 그랬다고 쉴드라도 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선조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는 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을 위협할거라고 생각하며 이상하리만큼 경계했고, 이미 이순신을 파직시킬 마음을 강하게 먹고 있었고 전쟁도 조선군에 승기가 있다고 생각해 팽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대체자로 원균이 선택했다. 실제로도 전한에서 천지를 뒤덮을 공을 세운 장수 한신도 황제가 버리겠다고 마음먹어서 참수당한 사례도 있다. 실제 전적은 막장 그 자체였어도 원균은 올라온 장계만 보면 상당히 우수한 장수였고, 당시 조선 수군은 일본과 비교해볼 때 어느정도 우위였다. 거기다가 당시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를 차도 살인지계로 죽이려 들었을 정도로 단합력이 개판이었다. 이 정도면 이순신이 없어도 다음 지휘관이 어지간히 병신이라도 평타 정도만 칠 줄 알면 무난하게 일본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볼만 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원균이 어지간한 병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애초에 승기가 보이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상대를 얕잡아보고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낙관만으로 유능한 장수를 팽한 것은 답이 없는 하책이다. 위에서 똑같이 유능한 신하를 팽한 한고조 유방이 비정하다는 소리를 들은 지언정 욕을 먹지 않는 것은 전쟁이 확실히 끝난 뒤에 뒤끝없을 때 토사구팽했기 때문이다. 특히 토사구팽은 토끼 사냥이 끝난 후에 사냥개를 삶아 죽이는거지, 토끼 사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사냥개를 삶는 게 아니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의 9할 이상을 말아먹은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이 크게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했으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을 수 있었던 만큼 중대한 실패라고 봐야 한다. 한 마디로 이순신이 없었으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다.
원균의 진면목을 몰랐던 것은 백 번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칠천량 해전을 겪었으니 원균이 어떠한 인물인지 이제 만천하에 다 드러났다. 그런데도 선조는 칠천량 해전이 선조 자신의 책임이 아닌 엉뚱한 하늘의 잘못이라고 끝까지 책임을 회피했고, 명량해전에서 믿을 수 없는 승전을 거둔 이순신을 전사하는 그 날까지도 경계하고 시기했다. 일례로 원균이 이후 이순신, 권율과 동일한 선무공신 '''1등'''으로 서훈된 것도,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시기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나마 원균에게 권율, 이순신과 동일한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가 아닌 종1품 숭록대부가 추서된 건 아무리 그래도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동일 반열로 대우하는 건 지나치다고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 애초에 신하들은 그나마 선조 눈치봐서 2등으로 올려놨으니 신하들 입장에서 보면 원균이 1등인 것조차 못마땅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이 잡혀간 정유년은 이순신 개인에게 매우 불행한 해였다. 아들이 압송되었다는 소식에 83세의 노모가 아들을 보려고 무리하게 여수에서 올라오다가 배 위에서 숨을 거두었으며,[41] 애써 길러낸 최강의 조선 수군이 한 순간에 궤멸되었다. 기적적인 명량의 승첩을 거두었으나 여기에 대한 임금의 포상은 없었다.[42] 더구나 아끼던 셋째 아들 이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과 싸우다 죽었다.[43] 다만 이렇게 시기했음에도 정유년 12월에 선조는 이순신이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여 그에게 고기 반찬을 하사한다. 어찌 보면 신하의 건강을 염려한 자비로운 왕의 선물로 볼 수 있으나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는 선조가 내린 고기 선물을 과연 순수한 의도에서 볼 수 있을까? 이 날 난중일기에 이순신은 선조의 고기 반찬 하사를 “비통, 비통하다”라고 적었다.[44]

3.2. 명나라로의 도주 계획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상이 세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정철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워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45]

선조실록(선조 25년) 6월 13일 기사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선조실록(선조25년) 6월 13일 기사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여 그 때를 당해서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4일 임자 1번째기사

신잡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46]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47]

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48]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49]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분명히 국왕을 비롯한 전쟁을 책임질 사령부가 적군에게 생포되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고, 때문에 됭케르크 철수작전처럼 후대에 크게 인정받는 철수 작전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선조의 행보는 전쟁 수행을 위한 일시 후퇴와는 전혀 무관한 도주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선조의 후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후퇴 이후 다시 병력을 모으고 방어선을 재정비하는 등, 일본군에 맞서 조선을 지키려는 행보가 있었어야 하는데 선조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매우 부족했다는 평가를 듣는다.[50] 만약 한반도 내에서만 도주를 하며 병력을 모으고 반격할 계획을 짜는 등 노력했다면 실드를 쳐줄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장 군사적 대응은 당시 겨우 10대였던 세자 광해군에게 모두 떠넘겨 버렸고, ''' 국왕인 선조 자신은 전쟁을 완전히 포기하고 최종적으로는 조선을 포기하고 명나라 요동으로 도주할 계획'''만 잡고 무리수를 둬 가며 강행했다. 차라리 반대로 했다면 욕이라도 안 먹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이 요동 도주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선조가 막판에 나라를 버릴 수 없다고 마음을 돌려서가 '''아니고''', 명나라 측에서 일국의 왕이 전쟁 중에 왜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오냐며 받아주지 않아서 도망을 '''못''' 친 것이다. 선조가 어찌나 빠르고 간단히 나라를 버렸는지, 명나라 조정에서 사실 도주는 계략이고 몸을 피하는 척 일본과 내통해서 명나라를 치려는 음모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51] 본인이야 "안남국도 멸망당한 뒤 입조하니 전쟁이 끝나고 회복시켜줬다."라며 다시 돌아올 마음을 밝혔지만, 안남국의 사례는 정말 운이 좋았던 하나의 고사일 뿐, 왕이 나라를 떠나고 멸망한 사례는 훨씬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었다.
거기에 신하들의 반대도 거셌다. 8월에 신잡은 대놓고 요동을 건너는 순간 왕이 아니라 필부가 된다고 평하면서, '''필부가 되기를 원하면 이 땅에서도 피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쉽게 의역하자면, 너 요동갈꺼면 그냥 왕 자리 놓고 여기서 평민으로 살아라 였다. 실제로 선조의 행적에 대해서 실망한 명과 조선의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움직임까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진짜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가면, 선조를 폐위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했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가 한반도 왕조들 중에서 왕이 강력했다고 하나, 이 시기 선조의 권위는 그의 실책들로 인해 밑바닥이었다.
만에 하나 선조의 목적대로 요동 망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미 해외로 도망간 국왕을 위해서 상술했던 의병이나 명나라의 원군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변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52][53] 오히려 명나라에서 선조를 일본군의 앞잡이가 된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고, 파병 온 이여송을 일국의 국왕인 선조가 버선발로 나가 맞이한 사실 등은 선조가 국격을 얼마나 가볍게 해서 실추시켰는가를 가늠하게 하며, 그 절박함이나 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전쟁 내내 이여송을 비롯한 명군 장수들로부터 면박을 당하는 단초가 되었다.[54][55]
더불어 도주과정에서 임진강에서는 배를 불태우고 평양성에서는 앞에서는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백성을 속이고는 밤에 몰래 도주하는등 백성들의 피난을 방해하는 행보도 욕을 먹고 있다.[56]
게다가 병법에 대해서도 무지해[57] 전과의 보고에 대하여 사실관계 확인을 명확히 하지 못해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실적을 부풀린 장수[58] 그 자리에 앉혀서 조선의 모든 함대를 괴멸시켜버린 사건을 초래했으며 일본 육군의 육상 보급선을 흔들어놓은 의병 지휘관들에게 이후 공신들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행한 하대는 옹호할 거리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 사례를 들 때 이승만과 함께 나쁜 예시로 빠짐없이 등장한다.[59] 그래서 선조나 이승만이나 각각 '''런조, 런승만''' 소리를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일단 왕이든 대통령이든 적에게 잡힐 경우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점은 분명히 사실이므로 이승만이든 선조든 피난 자체로 비판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일단 왕이 붙잡힐 경우 '''최선의 경우'''가 인조가 청나라에게 당했던 수모. 좀 나쁜 경우가 원나라의 부마국, 속국이 된 고려 말기의 경우이며, 최악의 경우가 식민지가 되어서 나라가 사라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60] 대통령의 경우도 그 정치적 파급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고, 전쟁은 공산군의 승리로 그대로 끝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나라를 버리려고 했고, 결국 그것을 보다못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명과 신하가 합심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상황까지 만든 것은 선조였다.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왜적이 따라올까봐 임진강의 배를 모두 불태워 백성들마저 도망칠 수 없게 했으며, 평양성으로 도주 후 평양을 지키겠다고 선언해놓고 야반에 몰래 도망친 점은 도저히 옹호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3.3. 전쟁으로 떨어진 권위


선조가 붕당의 상호 견제를 통해서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고는 하나 숙종의 환국, 영조의 척신정치와 마찬가지로 선조가 택한 왕권 강화 시도의 방식이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국가 관점에서는 유익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 받는다. 그리고 가족관리 측면에서 평가가 좋지 못한데, 일찍부터 여색을 탐한다는 비판을 들었으며 특히 후궁들의 횡포가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몽진 도중 인빈의 가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도 했다. 특히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은 선조의 총애를 받는 척신이었고, 이산해와 결탁해 정철을 실각 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김공량은 내수사 별좌 시절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유명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그의 탐학질로 인해 폭동을 일으키자 강원도로 도망가야 했다. 이런 사례는 인목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일 때도 나타난다.
전쟁을 거치면서 권위가 너무 떨어져 평시라면 반역에 버금가는 '''하야 요구'''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 자체보다는 임진왜란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선조의 이기적인 모습과 찌질함 때문이었다. 선조는 왜란 이전에는 이순신을 비롯한 인재들을 잘 등용했으나, 왜란이 터지고 이몽학의 난이 발생한 이후로 생긴 의심병과 타고난 이기주의로 인해 나중에는 이들을 모두 숙청하기에만 바빴다.
게다가 세자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왜구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동안 어떻게든 일본군을 막을 생각은 안 하고,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도망갈 생각이나 하고 있는 선조의 모습은 대체 누가 왕인지 헷갈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대신들 입장에서도 임진왜란 시기에 보여준 선조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었다. 선조 25년 6월 18일 기사를 보면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서인인 정철과 남인인 류성룡이 양위를 요구하러 갔다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나왔을 정도다. 남이순, 송희록 등의 유생들 또한 ''''동궁에게 양위하라'''' 며 상소를 올리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선조가 반정당한 왕들 급의 정치적 입지에 몰렸다는 것이다. 양위 비슷한 대리를 요구당한 경종의 입지를 생각해 보자.
하지만 자신의 권력 유지에 노련했던 선조는 이 양위 파동을 자신의 떨어진 권력 기반을 다시 다지는데 이용했다. 선조는 선위를 가장 많이 하겠다고 한 조선 임금인데, 알다시피 그 선위 파동은 전부 쇼였다. 이로 인해 전쟁 중에도 신하들은 선조를 말리며 자신의 충심을 보여야 했고, 세자인 광해군 역시 쉴 새 없이 대궐 뜰에 엎드려 어명을 거두어 달라며 빌어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선조의 양위 파동과 세자 홀대는 후계자 교육의 실패로 이어졌고''' 이후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 닥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옹호론자 중에는 광해군이 선조의 잠재적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견제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광해군은 라이벌 이전에 선조의 대를 이어야 하는 아들이자 후계자였다. 당현종당숙종에게 한 것처럼 제위를 평화롭게 물려주지는 못할 망정, 정식으로 세자 책봉이 되지 않은 것을 빌미로 광해군의 지위를 흔들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심지어 선조는 전쟁 후에 태어난 영창대군을 이용해 광해군의 입지를 위협하고, 형제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사실 전쟁 직후 선조는 59세, 아들 광해군은 29세였는데 선조의 경우 평균 수명이 짧았던 당시의 시대를 감안할 때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게다가 이 때부터 선조는 건강까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미 능력이 검증된 장성한 세자가 존재했기에 보통 이 때가 되면 세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거나 대리청정을 시키는 게 상식이다. 당장 조선 초기의 태종이나 세종의 경우 세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대리청정을 시켰다.
하지만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긴 커녕 전쟁이 끝나자 마자 보란듯이 새 중전을 들여 적자를 낳는 것에 열중했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대리청정과 양위도 절대 하지 않았다. 당시 선조에게는 정비인 의인왕후가 사망한 이후로 왕비가 없었기에 중전을 새로 들이는 것은 조선의 법도 상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선조는 대놓고 적통대군의 탄생을 대놓고 노리며 기어코 영창대군을 낳아 후계 구도를 개판으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계속 권력을 독점하며 영창대군을 빌미로 광해군을 견제하는 등, 파국의 씨앗을 남겼다.
이러한 선조의 쓸데없는 욕심과 견제는 광해군과 그의 지지세력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고, 그들이 영창대군을 숙청 대상 톱으로 세우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는 선조 사후 광해군의 즉위 이후에 벌어진 계축옥사로 현실화 된다.[61] 또한 그런 광해군의 견제에 휘말려 애꿎은 인목왕후(영창대군의 친모)와 정명공주(영창대군의 친 누나)마저 사실상 폐위되어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62]

3.4. 공신 책봉 문제


전란이 종료되면 의례 공신 책봉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공신 책봉에도 많은 문제가 있어 전후 선조의 평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는데 바로 선무공신 책봉문제이다. 선조는 전란 후 전란에서 공을 세운 장수에게 주는 선무공신[63], 왕을 따라 호종한 자들에게 주는 호성공신,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자들에게 내려준 청난공신을 선정하였는데 문제가 되는 부분이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이다. 아래는 선조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애초 등급이 확정된 호성공신과 달리 고작 18명을 선정하는 선무공신은 선정 과정에서 추가 혹은 누락이 계속 발생하고, 심지어 등수까지 변경이 일어난다.

사신은 논한다.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행사이다. 막중한 행사인데도 사람들에게 가볍게 시행하였으니 어찌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호종한 것을 녹공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육지(陸贄)가[64]

일찍이 말하였다. 가령 육지가 조금이나마 공로에 보답하는 방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시에 호종한 신하들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더구나 요리나 하고 말고삐나 잡던 천한 자들까지 모두 익운의 반열에 참여시켜 이름이 맹부(盟府)[65] 에 들어 있는 자가 35인이나 되게 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정왜(征倭)의 공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비록 중국 장사(將士)들의 공이라고는 하나 대진(對陣)하여 승전한 공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호종한 신하들은 많이 참여시키고 싸움에 임한 장사들은 소략하게 하였으니, 공에 보답하는 방도를 잃었다고 할 만하다.'''

- 선조 36년 2월 12일 기해 5번째기사

이순신의 장계에, 이름이 일등에 든 사람은 권준이순신(李純信) 두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운(鄭運) 같은 사람에 있어서도 이름이 1등의 셋째 번에 들었고, 본디 역전(力戰)한 사람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상께서 수효가 지나치게 많다고 경계하셨습니다. 정운이 이미 녹공되지 않았으니 배흥립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합니다.[66]

- 선조 36년 4월 28일 갑인 2번째기사

비망기로 이르기를,

"원균을 2등에 녹공해 놓았다마는, 적변이 발생했던 초기에 원균이 이순신(李舜臣)에게 구원해 주기를 청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자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왜적을 토벌할 적에 원균이 죽기로 결심하고서 매양 선봉이 되어 먼저 올라가 용맹을 떨쳤다. 승전하고 노획한 공이 이순신과 같았는데, 그 노획한 적괴(賊魁)와 누선(樓船)을 도리어 이순신에게 빼앗긴 것이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되어서는 원균이 재삼 장계를 올려 부산(釜山) 앞바다에 들어가 토벌할 수 없는 상황을 극력 진달했으나, 비변사가 독촉하고 원수가 윽박지르자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환히 알면서도 진(鎭)을 떠나 왜적을 공격하다가 드디어 전군이 패배하게 되자 그는 순국하고 말았다.[67]

원균은 용기만 삼군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아니라 지혜도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68]

나는 원균이 지혜와 용기를 구비한 사람이라고 여겨 왔는데, 애석하게도 그의 운명이 시기와 어긋나서 공도 이루지 못하고 일도 실패하여 그의 역량이 밝혀지지 못하고 말았다. 전번에 영상이 남쪽에 내려갈 때 잠시 원균을 민망하게 여기는 뜻을 가졌었는데, 영상이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늘날 공로를 논하는 마당에 도리어 2등에 두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정운(鄭運)은 배흥립(裵興立)의 일 때문에 삭제하였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구원하러 가기를 의논할 적에 정운이 극력 찬동했었고, 왜적을 토벌할 때에도 정운의 공이 많았었다. 결국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으니 이는 정운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배흥립이 범람하다는 것 때문에 마땅히 녹공해야할 정운까지 아울러 삭제할 수는 없는 일이니, 정운을 녹공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다.[69]

하니, 회계하기를,

"이번의 공신은 원수(元數)가 너무 많으니,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70]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위 헌공(衛獻公)이 망명했다가 위나라로 돌아올 적에 교외에 이르러 수종했던 사람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준 다음 들어오려 하자 유강(柳莊)이 말하기를 ‘만일에 모두가 사직을 지켰더라면 누가 고삐를 잡고 따라갔을 것이며, 모두가 따라갔더라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임금께서 나라에 돌아와 사정(私情)을 쓰려 하시니 불가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나누어 주지 않았었다. 환시는 나라 임금의 가노(家奴)로서 녹훈한 일은 고찰해 볼 데가 없다.'''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 선조 36년 6월 26일 신해 2번째기사

공신(功臣)들의 명칭을 정하여 대대적으로 봉(封)했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始終) 거가(車駕)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 공신(扈聖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왜적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奏請)한 사신(使臣)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으로 하여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이 있게 명칭을 내렸고,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여 평정한 사람은 청난 공신(淸難功臣)으로 하고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

호성 공신 1등은 이항복(李恒福)·정곤수(鄭崐壽)인데(중략)모두 86인인데 내시(內侍)가 24명, 이마(理馬)가 6명, 의관이 2명이고, 별좌(別坐)와 사알(司謁)이 또 2명이다.

'''선무 공신(宣武功臣) 1등은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원균(元均) 세 대장인데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71]

2등은 신점(申點)·권응수(權應銖)·김시민(金時敏)·이정암(李廷馣)·이억기(李億祺)인데 효충장의협력선무 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3등은 정기원(鄭期遠)·권협(權悏)·유사원(柳思瑗)·고언백(高彦伯)·이광악(李光岳)·조경(趙儆)·권준(權俊)·이순신(李純信)·기효근(奇孝謹)·이운룡(李雲龍)인데 효충장의선무 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君)으로 봉했는데 모두 18인이다.'''

청난 공신(淸難功臣) 1등은 홍가신(洪可臣)인데 분충출기합모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合謀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2등은 박명현(朴名賢)·최호(崔湖)[72]

인데 분충출기적의청난 공신(奮忠出氣迪毅淸難功臣)이라 하고, 3등은 신경행(辛景行)·임득의(林得義)인데 분충출기청난 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이라 하였다. 각각 관작을 내리고 군으로 봉했는데 모두 5인이다.

사신은 논한다. 국가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종사(宗社)가 전복되고 승여(乘輿)가 파천했으며 원릉(園陵)이 화를 입었고 생령들이 해독을 받았으니, 말하기에도 참혹한 일이다. 다행히 황은(皇恩)이 멀리 미침을 힘입어 팔도(八道)가 다시 새로워졌으니, 임금의 도리에 있어 논공 행상(論功行賞)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특전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호종신(扈從臣)을 80여 명이나 녹훈(錄勳)하였고 그 가운데 중관(中官)이 24명이며 미천한 복례(僕隷)들이 또 20여 명이나 되였으니, 또한 외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이르러서는 주군(州郡)에서 불러 모은 도적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토평한 것이 어찌 공이 될 수 있는 일이겠는가.

- 선조 37년 6월 25일 갑진 7번째기사

이상이 실록에 기록된 공신 책봉 과정이다.
선무공신은 1등에 이순신과, 권율, 원균을 포함하여 총 18명인 반면 호성공신은 80명이 넘어가며 그 신분도 다양하다.[73] 1602년 4월 공신도감이 공신록에 들 만한 장수 26명을 추려 올린 기사를 보면 선조는 선무공신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꺼린 정황이 분명하다. 일단 선무공신에 원균이 1등으로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의지였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 원균옹호론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74] 애초 원균은 신하들이 2등에 놓았으나[75] 선조가 원균의 공이 작지 않다며 1등으로 강제로 올렸으며, 그래도 이순신의 공을 부정은 못해 이순신을 1등 중에서도 원훈에 봉했다.[76]
이 선무공신 가운데 대다수는 이미 죽어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호성 공신과 비교했을때도 그 수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이전에는 선무공신 가운데 의병장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처음은 의병장으로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관군이 된 사람들로서 선무2등공신 권응수이정암이 있다.[77] 대표적인 의병장인 곽재우는 1600년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경상좌병사직을 내버리고 낙향해 대놓고 왕의 권위를 무시했는데, 공신도감에선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넣어주려고 했기 때문에 이때 선조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면 이름을 올렸을 가능성이 높다. 김천일, 고경명, 김면, 조헌, 이정형, 이수일 등 이때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의병장들은 사후 추증이건, 생전에 중용되건 어떤 식으로든 대우를 받긴 했다. 별도로 이몽학의 난 진압으로 선정된 정난공신에 최호 등 일부 무장들이 들어가기도 했고.
사실 공신 책봉 관련해서 '''진짜 할 말 있는 쪽은 의병이 아니라 관군 특히, 이순신 밑에서 활약한 수군 장수들이다.''' 소소한 전과는 꾸준히 세웠지만 큰 공은 없는 고언백도 들어갔는데[78] 정운, 우치적, 배흥립, 안위, 김응함은 공신도감에서 들어갈만 하다 했음에도 선조의 견제로 전부 못 들어갔다. 정운은 선조가 공신수가 너무 많다고 경계하는 바람에 기각,[79] 임진년부터 정운과 함께 활약한 배흥립도 같은 이유로 기각, 1594년에 거제현령으로 제수되어 임진년 해전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안위는 임진년에 공이 없다고 기각. 전공 많은 수군 장수들을 이런 식으로 다 자르고 무의공 이순신과 권준 둘만 위에서 뚝 잘라서 집어넣었다.[80]
선조의 공신 책봉이 비난 받는 이유는 원균에 대한 무리한 1등 공신 책봉과 전란으로 선정된 공신임에도 갖은 이유를 들어 선무공신은 그 수를 줄인 반면, 자신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호성공신은 그 수가 선무공신의 4배 이상이 되는데 있다. '''한마디로 자신과 함께 의주까지 도망친 관료들 위주로 공신을 책봉한 것.'''
원균을 1등으로 강제로 올리기 위해 선조가 한 발언을 보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 공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비록 도성을 버리고 도망은 쳤으나 결국에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선조 자신 역시 똑같은 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이른바 재조지은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호성공신(선조를 호송한 공을 세운 신하들, 그러니까 피난길 식구들)은 86명인데(내시가 25명이다), 선무공신(무장 혹은 대명 외교의 성과를 거둔 자)는 18명이다. 이 중에는 원균도 포함된다.

3.5. 망한 자식농사


그리고 자식 농사도 영 좋지 않았다. 특히 선조의 아들들 가운데 인품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왕자가 몇 안 된다. 장남인 임해군부터 시작해 순화군, 정원군 항목을 보면 절로 어이가 없어진다. 당장 왕의 피난과 임해군 등 일부 왕자들이 저지른 만행이 항전하는 백성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임해군과 순화군을 일본에 넘겨버리는 반역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큰 처벌을 면했다.
다만 알아둬야 할 것은 조선시대에는 '''역모가 아닌 비행 저질렀다고 종실의 일원, 그것도 왕의 아들을 중형에 처하는 임금은 거의 없다는 거'''다. 이건 명군, 성군 소리 듣는 태종, 세종, 문종, 성종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조차 왕실은 철저하게 특별대우 받아야 함을 당연하게 여겼고 과실을 저질러도 최대한 보호하고[81] 왕족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사실 이는 단순한 법적,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전근대 전제왕조 국가들에서 왕실의 힘과 위신은 곧 국왕 자신의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역모가 아닌 이상 신하들의 말에 따라 왕자를 처벌하는 선례를 만들 임금은 없었다. 예외라고 해야 영조 정도인데 성격이 굉장히 유별난 데다 성년이 될 때까지 남은 왕자가 사도세자 뿐인데 그 세자와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세손이라는 확실한 대체재가 존재했다는 점들을 생각해야 한다. [82]
그나마 임진왜란 당시에 분조를 이끌며 활약하여 대신들의 인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차남 광해군조차도 의심이 많고 권위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이어서 정작 왕위에 오른 후에는 암군이자 폭군으로 흑화했다. 조선 왕 가운데 친국(親鞫) 실행 기록 2위이라는 업적을 세웠을 뿐 아니라[83] 재위 기간 내내 궁궐 공사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 민생 붕괴 직전까지 몰아 넣어 끝내는 의심병과 궁궐병 때문에 끝끝내 망하기에 이르렀다.
재위 중반 들어 슬슬 후계자를 선정하자는 움직임이 나왔는데,[84] 서장자 임해군은 워낙 자질이 개판이라서 차순위이자 광해군에게 시선이 쏠렸다.[85] 왕조국가에서 후계자 선정은 필연적으로 왕의 권위와 연결되는 문제라 전쟁 이전의 선조는 세자선정에 적극적이지 않다가 전쟁 이후에 도저히 책봉을 미룰 수 없게 되자 광해군을 책봉한다.
그리고 광해군은 세자로서 임무를 잘 해냈지만, 오히려 이로 인해 이 사이 왕으로써의 권위가 심각하게 추락한 선조의 가장 큰 정적이 된다. 차라리 자신의 권위를 일정부분 포기하고 차라리 태종처럼 대계를 위해 양위를 하거나, 세종처럼 대리청정을 맡겨보거나, 하다못해 왕으로서 촉망받는 아들에게 신뢰를 보여 주든지 하며 아들을 자랑스러워 하고 포용하여 우군으로 삼았으면 좋았겠으나[86], 선조는 권력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있는 왕이어서 끝까지 권력을 양보해 주지 않고 광해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티를 계속 냈다. 이는 선조의 비정상적인 자기애를 보여주는 면모로 모자란 자식들에게는 애정을 쏟았으나 조금이라도 자질을 보이는 자식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냉정했다.
결국 광해군을 몰아낼 명분은 없지만 견제는 해야하는 불편한 관계를 10년 이상 지속해야 했다. 광해군이 원래부터 폭군기질이 있었는지, 아니면 이런 기나긴 전란과 정쟁으로 흑화했는지는 역사서의 기록만으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이런 기나긴 정치적 긴장과 정쟁의 연속이 광해군이 결국 폭군이 된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것뿐이 아니다. 처벌을 할 수 없다면 교육이라도 시켜야 한다. 아무리 왕족은 특별해도 왕의 자식이라고 개망나니짓만 골라서 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곤란하다. 후손인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무조건 욕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왕의 아들이 개망나니면 백성들은 "왕이 이 모양이니 왕자도 저 모양이지!" 라고 말할 수도 있는 문제다. 게다가 그것을 넘어서 애당초 왕족은 사고쳐도 되고 나머지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왕족을 처벌하는 데 신하들은 왕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즉 왕족이라도 사고를 쳤다간 논란거리에 오르고 신하들이 처벌하라는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선조는 이것에도 제대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임해군, 순화군의 행동은 영 엉망이었지만 선조는 이를 단속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이 때문에 결국 임해군과 순화군이 일본군에 붙잡히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후는 더 막장이었던 게 선조는 그 후에도 방치했다. 임진왜란 때 아들들의 악행이 어떤 꼴을 불러 일으켰는지 알면서도 말이다. 제정신이라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악행에 대한 처벌은 차치하더라도 아들들에게 악행을 하지 말라고 당부라도 해야 하건만 안 했다. 결과적으로 임해군은 광해군 즉위 후 역모 혐의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지만 영창대군 때와는 달리 이항복, 이덕형 등 일부 이들이 은전론[87]을 펼친거 빼면 당파를 가리지 않다시피한 채 임해군을 처벌하라고 주장했다. 순화군의 경우엔 그 패악이 얼마나 지나쳤는지 결국 선조도 더는 봐줄 수 없었고 신하들의 처벌러쉬에 못이겨 순화군을 폐서인하여 가택연금시켰다. 당대에 순화군의 악행이 어찌나 극심한지 순화군으로부터 아버지를 살린 자식이 효자로 인정받았을 정도다. 게다가 임화군은 그래도 남의 재신 뺏는 짓만 주로 했지 사람을 죽였던 건 아닌데 순화군은 걸핏하면 사람 죽이는 살인마였다. 아무리 조선시대에 막장 왕족도 많았어도 순화군같은 개망나니는 정말 드물다. 기껏해야 순화군보다도 더 심했다고 전해지는 정원군이나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정도.

3.6. 말년의 인재 실패


상기한대로 전쟁 전 선조의 인사정책은 세종에 준하는 명군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위가 떨어지고 권력욕을 너무 부린 탓인지, 나이가 들어 사람 보는 눈이 떨어지기 시작한 건지 인사에서 무리수를 상당히 많이 두었다.
대표적인 예가 선조 말기 영의정을 독점했던 재상 유영경인데, 선배들인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등 명신들에 비해서 이렇다할 능력이 없고 왜란 중에도 보신주의적인 행태를 보이며 썩 제대로 된 신하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윗사람의 심기를 잘 읽고 그걸 그대로 청하는 아첨꾼의 능력이 뛰어나서 줄을 잘 대고 승진하더니 북인 파벌의 영수에 영의정까지 올라간 것. 문제는 그 다음인데, 당시 선조가 세자 광해군을 싫어하고 영창대군을 밀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정치적 생명을 영창대군에 미는 정치적 도박수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광해군에 대한 조정의 압박이 심해졌고, 결국 광해군 즉위 후에는 제 업보를 그대로 되받는다.
인목왕후 또한 실패한 인사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흔한 "광해군 명군설"만큼 악랄한 여걸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사람답게 탐욕이 많았다.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이미 왜란 당시 충분히 활약해서 자리를 굳힌 것이나 다름없는 세자가 있음에도 영창대군이 벌써 세자가 된 양 설레발을 많이 쳤다.
그 외 유영경을 비롯한 탁소북이 워낙 유영경의 거수기 체제다보니 "유영경당", 유당(柳黨)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질이 좋지 못한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장악하는 등[88], 여러모로 적절하지 못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말년의 세자에 대한 견제 등을 볼때, 왜란 중에 끝도 없이 박살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친위 세력만을 조성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4. 논란



4.1. 선조와 이순신


'''전라좌수사 시절까지만 해도 이순신과 조선군에게 선조는 은인이었다.''' 선조는 의외로 국방 및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지식도 제법 갖춘 임금이었다. 우선 '북쪽 변방에서 오랑캐가 중요한 농토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니 해당 책임자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을 징계할 것을 요청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탄원서가 두 사람의 상관이었던 이일에 의해 올라온 데 대해 다음과 같이 전교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 곤장)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선조실록, 20년 10월 16일자

이는 이전에 여진족 침입 당시 전장에서 도주한 죄목에 대해 현장에서 참수하라는 왕명이 내려졌고 그 사례의 예에 해당하지 않으니 사형은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순신'''과 동료 장수는 삭직 및 백의종군 처분에 처해졌다. 이후 1589년에 하삼도 병사 및 수사 선발에 대해 비변사에서 올라온 목록에서도 확인된다.

"아뢴 대로 하라. 서득운을 전라 병사로, 이혼을 우수사로, 신할을 경상 좌수사로, 조경을 제주 목사로 삼고자 한다. 이옥과 이경은 본처(本處)를 고수해야 하고 이빈은 범한 죄가 가볍지 않으니 경솔히 수용(收用)할 수 없다. '''또 이경록(李慶祿)·이순신(李舜臣)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議啓)하라."'''

ㅡ 선조실록, 22년 7월 28일자

전라좌수사 임명엔 당시 진급이 지나치게 빠르다는 이유로 사간원에서 체차(遞差)[89]를 청하자 감싸주기도 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ㅡ 선조실록, 24년 2월 16일자

위의 이야기대로 평화로웠던 시절엔 원균을 쫒아내고 이순신을 앉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을 보는 눈이 아주 날카로웠음을 알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균은 후에 경상우수사로 다시 부임했기 때문이다.[90][91] 선조는 원균도 상당히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아마 이순신과 함께 왜군들이 침공해올 바다를 방어하게 시킬 생각으로 자신이 신뢰하는 두 인물을 수군에 앉혔을 것이다. 자기 딴에는 투톱으로 생각한 셈. 선조가 야심차게 그려낸 이 큰 그림은 훗날 '''절반'''만이 옳았음이 아주 참혹하게 드러난다. 아무튼, 해당 사간원의 말을 선조가 씹어버린 후 이틀 후 다시 사간원에서 이순신을 쫒아내라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나주(羅州)는 남쪽의 거진(巨鎭)으로 본시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로 이름난 곳인데 변경(邊境)에 일이 생기면 원수(元帥)는 영(營)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웃 고을 수령과 본주(本州)의 판관들이 모두 무변(武弁)인 만큼 군대를 이끌고 적을 방어하는 데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체차하고 재략이 있는 문관을 각별히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 나주 목사는 천천히 발락(發落)하겠다."

하였다.

ㅡ 선조실록, 24년 2월 18일자

이리저리 길게 말을 늘어놓으면서 이순신을 끌어내리라고 아우성치는 사간원의 상소를 일축하면서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깊은 신임을 보였다. 선조는 종친도 아니고 나라에 명망높은 사대부도 아니었던 이순신을 사간원이 경악할 정도로 엄청나게 빠르게 승진시켰는데 당시 이순신의 벼슬의 변동을 살펴보자면 이렇다.

1589년 12월,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종6품]

으로 부임함.

1590년 8월, 임기 1년을 채우기도 전에 조정에서 이순신을 고사리진, 만포진 첨사[종3품]

로 임명하려 했으나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무산됨.

1591년 2월, 선조는 이순신을 진도군수[종4품]

으로 승진시킴.

같은 달, '''군수로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종3품]

로 전임시킴.

다시, '''가리포에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정3품]

로 전임시킴.

이순신 입장에선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벼슬 생활이었다. 현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수로 승진했으니 짐싸서 부임할 준비를 하라는 교지가 와서 준비를 하고 있었더니, 다시 첨절제사로 승진했다는 교지를 받아서 '''읽고 있을 무렵에''' 다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겠다는 교지가 날아온 것이었다. 수군절도사는 정3품으로서 당상관에 드는 직책이었고 타인으로부터 '''영감'''으로 불리며 존대받는 위치였다.[92] 종6품으로서 지방의 현감에 불과했던 이순신이 품계로 무려 '''9단계'''를 2년만에 건너뛰어 전라도 수군의 절반을 다스리는 수군절도사로 초고속 승진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살 떨릴 정도로 빨랐던 승진에는 이순신을 지켜보던 선조의 강력한 후원에 그 배경이 있던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해 이순신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론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93]고 갑자기 모르는 사람 대하듯 물어보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진짜 믿을 수 있는 인물인지 의심스러워서 의문을 가지는 거지 선조가 바보라서 진짜 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94]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초반까지만 해도 선조는 이순신이 승리할 때마다 승진시켜주기 바빴다.[95] 그도 그럴 것이 전란 발발 후 육지에서는 번번한 승전이 없는 반면 바다에서는 싸우는 족족 대승을 거두니 의주까지 도망가 있는 선조 입장에선 이순신의 승전 장계가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선조는 당시 속속 날아오는 이순신의 승전보와 왜군의 수급을 보고 뛸듯이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직접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고 치하하라는 명을 많이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의 명성이 너무 올라가버린 임진왜란 중반에 가면 선조가 이순신을 정말 싫어한 것이 확실하다. 파직 건에 대해서는 누가 봐도 무리인 게 뻔히 보이는 데도 잡아온 후 임금과 조정을 기만했다고 고문[96]을 한 것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결국 백의종군으로 끝나긴 했지만 이원익정탁이 총대 메고 나서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어났을지는 상상에 맡긴다.[97] 여기서 신하들도 이순신 조지기에 반대하지 않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선조가 대놓고 "얘 잘못 없는건 지나가는 개도 알지만 내 마음에 안들어. 이새끼 조질건데, 반대하는 놈은 같이 조져지고 싶은 놈으로 알거임" 수준으로 밀어붙여서였다. 물론 이원익과 정탁이 나섰을 때 이순신을 백의종군하게 하고 이 둘에게도 뭐라 안한걸 보면 정말 그랬을 리는 없었겠지만 그럴거라는 분위기 정도는 조성되었을 것이다.
선조는 실제로도 의병장 이산겸김덕령이 '''죄 없음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산겸과 김덕령을 때려죽인 예가 있다.'''[98] 이순신이 전사했을때 선조의 반응도 가관인데 이순신의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전해들은 선조는 무덤덤하게 '''뒷일은 내일 비변사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답해 소식을 전하는 신하가 도리어 놀랐다는 반응이 적혀있으며 훗날 명나라 장수가 선조를 마주하여 이순신 장군의 명복을 기리는 언사를 하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기도 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구국의 영웅이 죽었는데 보인 반응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차가운 반응이였다.
즉 선조가 이순신에 냉대한 것은 인간적으로 미워서라기 보단, 왕정 체제의 운영자인 군왕으로서, 난세의 유력 무신인 이순신을 경계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이순신이 전선에서 선조의 출격명령을 여러번 어기자 선조는 '무신이 조정을 가벼이 여기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발언과 함께 이순신에 대한 징벌을 행했던 것으로 볼 때, 조선 왕국 자체가 전쟁영웅인 이성계가 건국한 국가이자 문치주의 왕국인만큼, 제2의 전쟁영웅의 출현과 무신정권의 탄생을 경계하는 전통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행동은 일견 이해는 가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위기상황에서 이를 안가리고 숙청을 시도한 결과 칠천량 해전이라는 임란 최대의 비극을 초래했기에 아무리 옹호적으로 봐줘도 근시안적이라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다.[99] 오늘날에 선조의 행동은 마치 춘추전국시대 장평대전 당시 백기염파가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조나라명장인 염파를 경질하고 경험부족의 조괄을 후임으로 세워 파국을 초래한 조나라의 군주 조효성왕이 보였던 판단착오와 동일한 관점에서 보곤 한다. 특히, 착각하면 안되는 점이 선조는 멍청해서 이런 짓을 벌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안위를 위해서 일부러 꼬장을 부린 것이며, 따져보면 이순신의 처벌 이외에도 조정과 심지어 명나라한테도 꼬장을 부리면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데 뛰어난 계산을 보였다.
또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주려 해도 구체적인 조건들을 따지고 들면 힘들다. 이성계는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전쟁 영웅으로써의 명망뿐 아니라 당장 기용가능한 육군 병력을 전부 쥐어짠 5만여명의 통솔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100] 이순신이 직접 통솔하던 부대는 수군이라 그 숫자가 훨씬 적었다. 조선 수군의 전성기에도 수천명에 불과했고 칠천량 해전 이후론 수백명까지 전락했다가 나중에야 다시 수천명 수준을 회복한다. 또한 병사들 대부분이 육상전 경험이 없었다. 이순신을 포함한 휘하 장수들은 육군과 수군의 보직을 오가서 육상전투 지휘 역량도 있었다곤 해도, 이순신이 통솔권을 쥐고 있는 부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건 어불성설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다른 수만명의 육군을 이끄는 장수들이 적극 동조할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이성계가 배극렴, 박위 등 자신과 비슷한 계급의 장수들에게까지 전장과 조정에서의 교분으로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이순신은 다른 육군의 장수들에 대한 개인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설령 이순신이 쿠데타를 일으킬 마음이 진짜 있다고 치더라도 조건을 곰곰히 따져보면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크게 경계할 일이 아님에도 선조의 편집증적인 피해망상에 가까웠다.

4.2. 방계승통 열등감 논란 (?)


선조에 대해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방계 출신으로 즉위한 것이라 정통성 문제 때문에 콤플렉스를 느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왕실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주장이다. 종법에 따라 선조의 정통성은 떨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명종에게 정통성있는 아들이 있었다면 또 모르겠는데, 애당초 명종의 후계자인 순회세자는 일찍 죽었다. 선조는 서손이지만 이미 명종 살아생전에도 신하들도 알 정도로 후사로 거론되었고, 명종이 사망하자 '''명종의 정실 왕비인 인순왕후가 직접 선택해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를 시비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선의 왕실 법도에 따르면 혈연 관계보다 종법 계통이 우선이었다. 법적인 아버지는 엄연히 명종이었다. 양자로 입적된 이상 생부는 친척에 해당하며 덕흥군은 신하의 지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따라서 선조는 추숭은 커녕 덕흥대원군 제사에 절할 수도 없었다. 즉위 초에 덕흥군 봉사손(자신의 큰형)을 1품 세습으로 하려다 신하들 반대로 무산되고 한참 지난 즉위 39년차에 잠깐 얘기만 나왔던 게 전부였다.[101] 혈연 관계로만 따져도 중종 7남 덕흥대원군의 3남인 선조는 중종 아들 명종의 3촌 조카로 매우 가까운 촌수다. 서자 후손이라거나 혹은 혈통상 멀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져야 한다면 이후 국왕들 중에선 훨씬 더 먼 사람들도 많았다.[102] 선조보다 훨씬 먼 방계였고 조정의 상황도 훨씬 열악했던 고종조차도 방계 컴플렉스의 흔적이랄 건 그다지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왕권을 행사한 편이다.[103]
서자를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자기의 생부를 적극적으로 추숭하려 하지도 않았던 사람이 적자가 아니라서 열등감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 왕실은 사대부와 달라서 서자라도 승통이 가능했고[104] 따라서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적자로 입적'''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서자나 서손 출신이라서 열등감을 느낄 일이 없었다. 열등감을 느끼려면 선조보다 종법질서상 앞서는 대체 왕실 후손이 있어야 하나, 전혀 없었기 때문에[105] 즉위 초반에 그 흔한 역모 사건도 찾아볼 수 었다.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려면 쿠데타로 왕이 된 태종, 세조, 중종, 인조 같은 케이스에나 해당 한다.[106]
51세 때 19세의 인목왕후를 계비로 들이고 영창대군을 총애한 걸 방계 콤플렉스의 증거라 주장도 있는데 내명부 수장인 왕비가 죽으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종 이후의 왕들은 모두 그렇게 했다. 1 2 외려 그렇게 하지 않은 문종은 결국 계유정난 당시 단종의 보호자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새 왕비 간택은 일종의 보험이다.
무엇보다 선조는 단 한번도 그 혈통적 명분 때문에 역모가 일어난 적도 단 한번도 없었으며, 선조가 임진왜란 몽진 길에 올라 호종하는 군사들의 수가 적었음에도 이보다 훨씬 강한 군사력을 지닌 장수들과 의병장들도 감히 왕권에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오히려 선조의 안위를 걱정할 정도로 왕권이 강력했다. 이는 물리적 무력을 압도하는 그 어떤 정신적 사상이 당시 조선 지배층을 지배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107]
[1] 하지만, 선조가 기득권층의 대변자라는 낭설은 매우 유치한 역사왜곡이다. 선조가 발탁한 인재 중에는 천민에서 면천된 인물이 많으며, 당시 천시받던 의학 방면의 허준 같은 케이스만 보더라도 기득권 따위의 현대정치 떡밥에 엮일 건덕지가 없는 왕이다. 애초에 선조라는 인물부터 조선의 병폐를 개혁하는데 많은 관심을 지닌 왕이었기에 다양한 계층에서 출신 배경을 무시하고 파격적인 인재를 뽑았고, 다양한 방면에 관심이 많다보니 어느 한쪽 당파에만 매몰된 정치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선조의 나쁜 성격마저도 도리어 간신들을 적당히 쳐죽이면서 정치의 균형을 맞추는데도 사용되는 등 좋은 면으로 활용되었다. [2] 자꾸 선조가 위선자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으나 선조는 오히려 명분을 등한시 하는 지극히 냉소적인 합리주의자였다. 당장에 전쟁 도중에 선조가 보인 모습만 보더라도 얼마나 명분을 개무시하는지, 얼마나 소름끼치도록 합리적이기만한지 알수있다. 말그대로 희생정신 없는 기업가 혹은 이완용이 왕이 된 케이스.[3] 난세일수록 오히려 이런 인물이 지도자일 경우 위험하다. 임진왜란에서 보여줬듯이 이익 문제가 갈리면 국가와 국민의 안전 따위는 고려대상이 아니란것을 보여준 기업가적 정치가의 전형이기 때문.[4] 선조가 10만 양병설이나 온갖 실용적 사상이나 정책에 대해 관심이 많았으므로 사실 평화기의 모습을 보면 율곡 이이의 관점에선 그렇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5] 선조한테 조금 부당한 평가일 수도 있는 게 일본의 침입은 몇몇의 통찰력과 식견이 뛰어난 이들을 제외하고는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위아래를 다 방어하기엔 조선의 역량이 달리기도 했다. 다만 이전 25년이란 긴 기간이 선조의 치세였고, 일본의 침입을 견제하고 내실을 다지는 것 또한 왕의 역량이며, 대비적 측면에선 그렇다 쳐도 일단 침입했으면 그 후의 대처가 좋으면 되는데 선조는 요동 가고싶어를 외치기 시작한다(...)[6] 만호 직을 두 번 역임했는데, 한번은 전라좌도수영 휘하 발포 만호, 다른 한번은 함경도 북병영 휘하 조산보 만호였다.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임명되기 전까지, 이순신은 종4품 이상 직책을 역임한 적이 없었으며, 조산보 만호에서 파직된 뒤 백의종군을 마친 이후에는 한직을 전전하고 있었다.[7]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고속 승진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 한명 더 있는데 바로 조광조다. 하지만 조광조는 같은 유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라는 강력한 기반이 있었지만 이순신은 지지는 커녕 그를 눈엣가시로 여긴 상사들의 모함과 견제를 받던 상태였다.[8] 당장에 조선이 '자국이 침공을 당하는' 전쟁 대비에 미흡했다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타국을 침공하는' 전쟁에는 더 어려울 수 밖에 없다.[9] 태종 때 대마도를 정벌했는데 그 후에 재정벌을 하지도 않았고, 태종 생전에는 다음엔 10만 대군으로 초토화시켜버리겠다는 등 열심히 협박만 했다. (물론 협박은 잘 먹히긴 했다. 대마도도 조선의 공격이 현실이 되는것에 기겁했고 마침 중국에서도 왜구를 작살을 내버려 깨갱했기 때문.) 그러다가 계해약조를 맺어 문제를 종결시켰다.[10] 김성일도 낙관론을 주장할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통신사로 일본에 도착할 당시 토목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등 오랜 전란의 상처를 회복하는데 바빠서 도무지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있는 나라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거라 생각하는 건 교통사고를 당해 겨우 고비를 넘기고 재활을 갓 시작한 격투기 선수가 당신을 샌드백으로 삼을 거라 두려워하는 거나 다름 없이 무리한 가정이었다. 심지어 징비록에는 통신사들이 왔음에도 도요토미가 정벌을 나가 있어 통신사들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결국 그 때까지의 일본 정치는 불안정했다고 볼 수 있다.[11] 다만 너무 급하게 하면서 작은 읍성 위주로 수용 인원을 늘리는 쪽으로 축성했기에 임진왜란 같은 국가간 전면전 상황에서는 효율이 떨어졌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1592년 4월 이전까지 10만 이상 대규모 침공을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는 것도 맞다. 류성룡 본인부터도 그런 예상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조선 건국 이래 10만의 군대가 쳐들어 온 적도 없고 명이 임진년에 5만, 정유년에 10만을 파병하면서 명과 조선이 부담해야 했던 엄청난 인적, 물적 지출을 감안하면 바다 건너 남의 나라에 20만을 몰아넣는 국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는게 당연했다. 그것도 얼마 전까지 분열되어 있던 나라에서 말이다. 나라를 통일시킨 지 1년, 2년이 지난 나라가 바다 건너 나라에 대규모 침공을 할 거라고 누가 예상하겠는가? 동아시아 역사상 10년 만에 요와 송 두개의 제국을 무너뜨렸던 금나라가 그나마 예외지만(거기다가 이건 금나라가 유목 제국으로 시작했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다.) 대부분은 일단 몇 년씩 준비를 했다. 사실 일본의 국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인 것이 10만 명이 오로지 배만 타고 쳐들어 온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상상이나 가는가? 일본은 둘째 치고 유럽 최상의 국력을 자랑했던 프랑스 제국이나 전격전으로 모두의 뒤통수를 쳐버렸던 나치 독일조차 실패한 일이다.(다만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해군이 맨 땅에서 시작해야 할 정도의 수준에서 겨우겨우 회복 중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어쩌면 조선 조정은 전쟁 징후를 감지한 후 '일본이 쳐들어 오겠지만 몇 년쯤 걸리겠지? 그러면 우리는 준비할 시간이 있다.' 라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조와 조선 조정이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상식적인 인간이 결코 아니었고,''' 아직 나라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불과 1~2년 만에 조선과 명나라를 정벌하겠답시고 쳐들어왔다.[12] 징비록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어떤 관리는 "요 앞에 물길이 있는데 어떻게 왜놈들이 오나요?" 라고 했다는데, 이에 류성룡은 바다도 건너는데 작은 물길 하나 못 건너겠냐고 서술하는 것으로 응수했다.[13] 여기서 징비록을 비롯한 현대 사극의 문제점이 나오는데, 조정이 했던 전쟁 준비는 일부러 무시하면서 백성들과 지역 양반들의 안보 불감증에는 너무 쉽게 면죄부를 준다는 점이다.[14] 유생들까지 동원한 건 의외에 가까웠는데, 유생은 양반 계층이라서 원래는 군대 가고 성 쌓는 일에 동원되는 것이 정상이지만 "나라를 위해 공부한다!" 라고 하면 아무도 뭐라 못했다.[15] 그나마 다행인 건 이걸 모두 받아들인 건 아니라는 점인데, 시페 10조에서 문제를 삼은 것 중 하나는 이순신 등의 장수들의 특진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16] 그러자 김수는 역으로 곽재우가 위험한 놈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17] 본래 왜구의 침입은 섬이 많은 전라도나 경상 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섬이 거의 없고 해안선이 단조로운 경상 좌도는 방어 중심에서 다소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전에는 경상좌수영 관할하에 포항, 울산, 경주, 기장, 영덕 등지에 흩어져 있던 진포 7개를 모두 남동해안 주방어선인 부산-동래 인근으로 재배치 시켰으며 경상좌수군은 지상군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진지하게 침입을 생각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조치였다.[18] 이 경우 원균이 적을 이긴 후 "얘네들 막 병력 몰고 쳐들어 오는데요?" 라고 알리면 조정에서는 미리 짜놓은 메뉴얼에 따라 병력을 진격 루트가 될 경상도의 병력들을 제승방략에 따라 모아놓을 테고, 더 좋은 점은 원균이 적을 막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한결 여유가 있어 상주 전투와 같은 어이없는 졸전은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나도 병사는 다 흩어지고 어제까지 농민이던 사람들로 싸우는 수준의 안습한 일까지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원균이 이 정도 수준이 되었다면 여기에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좌수영 등에도 소식을 알려 "지금 왜놈들 쳐들어 왔는데 빨리 와주셈" 이라고 하면 이순신, 이억기 등의 모든 수사들이 당연히 왔을테니 일본군 입장에선 조선 수군의 대규모 함대와 해전에서 맞붙어 이기는 것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아예 해전에서 진 것 때문에 전쟁 자체를 포기하거나 설령 수군을 격파했다고 쳐도 이미 그 뒤엔 부산진성, 동래성에서 준비해 두었을 것이며 그걸 또 격파해도 제승방략으로 모인 조선군이 상대할 것이다. 그러니까 해전에서 좀 더 대응만 잘 했어도 일본군의 임진왜란에서의 난이도는 훨씬 더 상승했을 것이다. 일본군도 한번에 10만을 밀고 온 게 아니라 1군, 2군, 3군 이런식으로 릴레이 방식으로 왔기 때문에 첫 1군쯤이야 원균에게 능력과 의지가 뒷받침 되었다면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규모 때문에 상당한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시간은 최소한 이순신과 이억기를 불러올 시간은 된다. 어쨌든 원균이 싸우기만 했다면 조선은 2중 3중 방어망을 구축하고 조선 수군이 결집해 일본군을 개발살낼 수 있었다는 것. [19] 특히 계사년에 거병한 김덕령 부대는 거병 시점부터 이귀, 이정암 등 관리들의 권유를 받았고 조정에서 인증을 해줬다. 즉 처음부터 관군에 가까웠다. 그러다 갑오년에 군량 부족으로 3천의 병력 중 호남 출신 500여 명만 남기고 해산시킨다. 정문부는 의병장이 함경도 관군을 지휘한 케이스고 권응수는 의병 부대가 관군 지휘관(경상 좌병사 박진)의 지휘를 받아 싸운 케이스다.[20] 그렇지만 김덕령은 늦게 일어난 점도 컸다.[21] 첫 의병으로 꼽히는 곽재우의 사례를 보면 일본군이 한양을 노리고 북상하면서 서부 경남 지역은 개전 후 한 달 가까이 소규모 정찰대나 수송대를 제외한 일본군의 침입을 받지 않아 향촌 거점과 병역 자원은 있는데 전쟁 공황으로 수령들이 대거 이탈하고 군 지휘체계가 무너지다 보니 이끌 사람이 없었다. 곽재우만 해도 초유사 김성일의 도움을 받아 이끌 사람 없는 병력과 물자를 합법적으로 인가받고 본인이 분투를 벌이며 의병을 지휘했다.[22] 숭정제는 남경으로 천도할 수 있음에도 끝까지 하지 않아 명나라는 정통정권이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에서 붕괴되어 버리는 바람에 대를 이으려던 남명도 여러 정권이 난립하며 교통 정리조차 안 되었고, 그래서 청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23] 청나라의 경우 도망을 안 쳐서 망한 점은 명나라와 비슷하나, 이쪽은 특정 권신배신할 가능성을 배제한 탓에 그 권신 때문에 망한 케이스다. 명나라(남명 제외)가 신하의 배신이 아니라 순수하게 반란군에 의해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24]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시간이 다소 지난 뒤 고구려의 왕이었던 보장왕을 안동 도호부의 도독에 앉혔는데, 이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옛 왕이 우리를 섬기고 통치하니 너희도 충성해라''' 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조선에 비하면 지방 분권적인데다 이미 멸망한 나라의 옛 군주에게 모여들 민심이 이 정도였는데, 중앙 집권제 국가인 조선의 현직 왕은 어떻겠는가.[25] 일제시대에 고종과 순종 이하 대한제국(조선) 왕실이 이왕가, 왕공족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신분체계에 편입되어 독립운동을 하지않고 호의호식하기만 하자 그에 반비례해서 대한제국 왕실에 대한 민중의 배신감과 분노가 커져서 복벽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목소리가 줄어든 것도 이와 같은 효과다.[26] 이런게 안 통할려면 선조가 토낀 후 누군가가 나서서 "왕은 튀었다. 그럼 이제는 내가 왕이다." 라고 하는 것 뿐인데 이렇게 되면 너나없이 "너가 왕인데 내가 왕을 못 할 쏘냐?" 라고 나선다든가 가장 좋게 봐도 "네 까짓 게 뭔 놈의 왕이냐" 정도. 더욱이 명나라도 조선에서 여러 왕이 난립하여 혼란스러운 상황은 외교적으로 복잡할 테니 싫어할 것이다.[27] 상술한 다른 사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선조를 사로잡기 위해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하삼도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하려 하지 않고 곧바로 한양을 향해 쾌속진격을 했다. 이로 인해 전쟁 자체가 꼬이게 되었고, 그것의 원천은 바로 선조의 도주였다. 근현대는 아닐지 몰라도, 근대 이전까지는 적어도 '''왕이 사로잡히면 그걸로 전쟁은 끝'''이었다.[28] 사실 명군이 별 활약도 없이 민폐만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명군은 존재 자체도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적을 둘이나, 그것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니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더 컸다.[29] 조선 중기 이이, 류성룡 등이 공납제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제안한 재정 정책. 대동법 (大同法)의 선구가 된 제도이다.[30] 환향녀. 보통 우리는 환향녀 하면 병자호란을 떠올리지만, 엄연히 임진왜란 때도 포로로 끌려간 여인들이 있었고,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라는 이유로 일부는 배척당했다. 병자호란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지만.[31] 위의 문장을 쉽게 해석하자면 명에서 온 경리인 양호에게 선조가 아부를 떨며 왜군을 무찌른 공적이 이순신과 같은 관군들과 의병들에게 있는데 엉뚱하게 그 공을 양호 덕분이라고 말한 것과 양호가 이순신이 명량 해전의 승리를 축하해 주기 위해서 백금과 각종 고급품들을 보내주었는데 선조는 그것이 원래 장수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짓인데 왜 보냈냐고 따진 것이다. 그리고 양호는 이에 맞서 "아니, 칠천량 해전 때문에 작살나버린 조선 수군을 다시 통합하고 적은 수의 함선으로 왜군들을 무찔러 나라를 구한 그런 충신에게 왜 그런 말을 하시오?"라고 따졌다. [32] 명량해전항목을 보면 양호는 이순신과 직접 만나고 싶었으나 돌아갈 길이 멀어 어쩔 수 없이 소소한 답례로 보내는 물건들이라도 이해해주길 바란다고 편지를 쓰고 갔다. [33] 요약해서, '''이번 전쟁이 이긴 것은 모두 명나라의 덕분이고 우리나라는 한 일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 명나라가 우릴 도와준 이유는 나와 함께 중국에 가서 명에게 호소한 대신들 덕분이기에 일본도 토벌하고 땅도 회복한 것이다.'''라는 말이다! 목숨바쳐 싸운 자국군들의 희생정신과 공적을 폄하하는 말이며 제 목숨 챙기기 바빠 백성을 버리고 함께 피난을 갔던 무능한 대신들을 공신으로 치켜세우는 발언이다. '''이걸 일개 신하가 아닌 한 나라의 수장인 왕이란 인간이 한 것이다!'''[34] 즉 변경의 군사거점.[35] 이런 이유는 이순신이 불패의 명장인 이유도 있지만 연구가 진행되며 그 세종대왕조차 깔 것들이 잔뜩인 상황에서 정작 이순신은 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한 몫 한다. 까고 싶어도 깔 것이 없는 사람이니 당연히 신성불가침 영역에 이를 수 밖에[36] 특히 이순신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가토는 이미 바다를 건너왔기에 정말로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이 일을 기획한 고니시가 자신과 가토의 널리 알려진 불화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려 했는지, 아니면 진짜로 조선에서 가토를 제거하길 바란 것인지 두 관점이 있고, 따라서 고니시와 가토가 짜고 친 고스톱으로 보거나 고니시의 예상과 다른 전개가 되었다는 것으로 갈린다.[37] 특히 이 시기 이순신 장군의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는 물론이고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까지 일본군에 넘어가다보니, 이날 이후 이순신은 자신의 본영인 여수에는 최후까지 가지 못했다.[38] 정유재란 자체는 이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말도 안 되는 중2병 급 협상안을 내놓은 순간부터 이미 징조가 보이긴 했으나,(그리고 애당초 조선 측도 강화를 싫어했다. 자국의 이익은 한 줄도 반영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인해서 정유재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만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이 대승을 거두거나 최소한 방어에 성공만 했어도 정유재란은 전면전이 아닌 사소한 국지전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충분히 막고도 남을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휘관이 원균만 아니었다면.[39] 원균의 허풍이 얼마나 말도 안되냐면 정작 그 자리에 올라간 원균도 현실을 깨달았을 정도[40] 물론 변명을 해주자면 현대인들이야 원균이 머저리이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지만 당대의 인물들은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큰 실책이 없던 원균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자. 개전 초기에 대규모의 경상 우수군을 날려먹은 것은 분명 큰 실책이지만 도망갔다고, 패했다고 죽이면 그 당시 경상도에 있던 관군 지휘관 중에 살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시민, 박진, 유숭인, 이광악, 박홍 등은 모두 자질을 인정받은 지휘관들이지만 임진왜란 초기에 패했거나, 전장공포에 휘말려 달아났다. 이런 정황 때문에 그냥 넘어간 것. 게다가 원균의 이미지 메이킹과 처세는 정말 기가 막혔다. 임금 뿐 아니라 당파불문 조정 중신들까지 전부 속여넘겼다. 칠천량 해전 이전에 원균에 대해 가장 부정적이던 중신이 이원익이었는데 '''원균에 부정적인 이원익조차 평시에는 못 쓸 인물이지만 용맹하여 전시에는 쓸 만하다'''는 지금보면 기도 안찰 오판을 했다. 원균은 장수로서의 역량과 인격을 자기포장과 처세술로 맞바꿈한 인간이었다. 물론 원균의 실체가 드러난 이후에는 선조 빼고 다 원균을 잘근잘근 씹지만...[41]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며 내려보낸 교지를 보면 당시 어머니 상중인 이순신이 통제사를 안 하겠다고 할까봐(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 못지않게 부모에 대한 효를 중요하게 여기는 조선시대 유교 사회에서 부모에 대한 상을 이유로 교지를 받들지 않아도 왕이 책임을 물을 수가 없었다.) 왕이 신하에게 자신의 잘못을 비는 문구가 적혀 있다. 어찌보면 파격적인 교지이긴 하나 선조는 이순신의 통제사 직책은 돌려주면서 품계는 돌려주지 않아 휘하 수사들이 맞먹어도 뭐라 할 수 없는 애매한 지휘권을 돌려주는 찌질함을 보인다.[42] 그나마 정2품 정헌대부로 품계가 복귀된 것도 명나라 경리 양호가 계속 압박했기 때문이다. 이를 소재로 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시기를 하며 무슨 상을 줘야할지 고민하던 중 윤두수가 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에 '사명을 걸고 싸웠으니 면사첩(지난 죄를 사하는 증서)을 줍시다' 라는 말에 동조하여 보내는 선조의 찌질한 전개로 나왔고 이를 받은 이순신은 조용히 책에 끼어 덮어 버리고 휘하 장수들은 13척으로 300척 이상의 일본군을 이긴 장수에게 이런 개망신을 주냐며 분개했다.[43] 정유재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순신 아들의 죽음도 없었다.[44] 정조 대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본에는 왕이 내린 선물을 비통하다고 한 표현을 그대로 옮길 수 없었는지 저 부분을 “감동, 감동이다”라고 수정했다. 사실 모친상을 당한 신하에게 고기 선물을 내린 사례는 세종도 있다. 황희가 모친상 당했을 때 그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은 선조가 아니었기에 결코 비판거리가 못 된다. 이쪽은 정말 순수하게 신하를 위해서 내렸다고 할 수 있기 때문. [45] 자신은 죽을 수 없기에 요동으로 가고 대신 아들을 두고 떠나겠다는 여느 아버지와는 다른 부성애를 보여준다. 오죽하면 그 정철이 저런 말을 했을까.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실상은 '''"아빠로서 아들 두고 떠난다는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다.[46] 요동으로 가겠다는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가면 너님 왕 아님을 시전한다.[47] 선조의 어가[48] 여기있는 군신들을 말함[49] 선조의 어가[50] 실제로도 선조의 도주 자체를 두고 태클을 거는 사람은 없다. 현대에도 국가 원수가 잡히거나 사망하면 거의 패배하는데, 과거는 특히 더했다. 당시 일본의 병법도 '''적장만 잡으면 끝'''이라는 논리 하에 전국시대가 행해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1순위 목표로 '''선조의 신변 확보'''를 두고 한성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선조의 도피로 인해 예상치않게 전쟁이 길어져 조선군이 재집결한 시간이 벌어지고 일본군은 각지에서 보급로가 끊기고 충무공의병의 활약 등으로 인해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선조가 결정적으로 까이는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조선의 승리를 위한 자신의 옥체 보전이 아닌, '''그저 일신이 살고 싶어서 튀었다'''는 게 문제시되는 것이다.(...) 하다못해 인조도 이렇지는 않았다. (지가 자초하긴 했지만) 이괄의 난 때는 호남으로 도주했는데 이때 신하들이 영남으로 도주하느냐 호남으로 도주하느냐 의견이 갈렸는데 김류는 충의로운 선비가 많으니 왕의 뜻에 따라 일어설 이들이 많을 거라며 영남으로 가자는 의견에 문을 숭상하는 영남보다는 무를 숭상하는 호남이 낫다고 해서 호남으로 갔다. 즉 반격을 위해서 호남으로 간 거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도주하긴 했어도 이 역시 이런 일에 대비한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으며, 병자호란 당시의 몽진 역시 제 목숨 하나 살겠다고 토낀 것과는 다르다. 인조 자신도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맞서긴 했으며 그 사이 왕을 지원하러 온 병력이 왔고 대체적으로는 숫자 때문인지 지는게 많았지만 광교산 전투 등 이긴 전투도 없잖아 있었다. 다만 선조도 나름대로 전시 대응체계를 마련하기는 했다. 임진강 방어선, 평양성 방어선 등 병력 모으고 방어선을 짜기는 했다. 문제는 둘 다 담당 지휘관의 삽질로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 그래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의병(조선이 의병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승리한 민중의 승리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조선은 의병들을 신속하게 정규 군사체계에 편입시키고 군권과 식량 조달을 위한 조세권을 주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을 소집, 즉 민방위 체계를 작동시키고 혹여나 자신이 잡힐 경우를 대비하여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권한 일부를 이양하여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다. 일본군의 진공이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여 오버를 한 경향이 있다. 결정적으로 의병장은 전부 양반이었다. 물론 그 양반들 밑에 자발적으로 모인건 결국 민중이니 민중의 힘도 없는건 아니지만...[51] 농담이 아니고 자국 원수가 싸움다운 싸움도 안 해보고 토껴서 "나 좀 살려주셈"도 아니고 "나 좀 도망치게 해 주셈" 하면 이상하게 볼 일이다. 게다가 일본군의 진군속도는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라 아무 전투도 없이 진격한 것과 거의 동일할 정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52] 좋은 예시로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에 협조하게 되고 일제의 특혜를 받아 호의호식하게 되자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나 독립운동이 약해졌고 동시에 복벽이니 군주제니 하는 것도 약해져 1919년쯤 되면 모두가 방향은 달라도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외치게 된다. 물론 이때야 공화국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새 왕조가 수립되었겠지만 어쨌든 진짜로 선조가 도망쳤다면 선조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거나 광해군이 어찌어찌하여 유지시켜도 귀국을 못하거나 귀국해도 탈문의 변같은 사건이 없는 이상은 다시는 왕으로 복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53] 망명 전에 선조가 폐위당하고 광해군이 즉위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명에서는 광해군으로 왕을 교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논의도 있었다.[54] 명나라에서 파병된 장수들은 상당수가 당대에 손꼽히는 명장들이었다. 마귀처럼 인성까지 괜찮은 장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변방 소국이 앞가림 못해서 귀찮게 되었다(당시 명나라 내부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불만을 가질만 했을 것이다)는 투로 조선 관리들을 하대하거나 모욕을 주고,(심지어 징비록에는 유성룡이 직접 그만두라고 했는데도 안 들은 장수도 있었다.) 전투에는 소극적이었으며, 휘하 병사들이 강간, 살인 등의 대민범죄를 저지르는 상황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특히 명군 경략인 송응창이 대민범죄를 참수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도 이랬던 것이다.) 또한 선조의 언행이나 명령에 대해서도 완곡하게 면박을 주면서 반론을 제시하곤 했다. 아무리 당시 조선에서 지나치다 할 정도로 떠받들던 상국 사람들 앞이었다지만 일국의 대표인 왕이 외국인 앞에서 스스로의 체면을 종이 구기듯, 걸레처럼 만든 것. 그나마 광해군, 이순신 등은 명나라 측 장수들에게서도 고평가를 받았는데 이름들을 잘 보라, 그렇다. 선조에게 찍힌 이들이다. 왜 찍혔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55] 다만 명군의 전쟁범죄 행위와 그들이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인데 먼저 명나라와 조선의 경제체제부터가 각각 은본위제와 사실상의 물물교환으로 차이가 심했다. 특히 명군은 중앙에서 보급품을 수송해줘서 먹는다는 개념이 아니라 중앙에서 식량이든 뭐든 그걸 구할 수 있는 만큼의 은을 가져와 현지에서 해결한다는 개념으로 보급을 해결했는데 이 2가지 때문에 조선에서 은을 가져왔는데 먹을 것과 보급품을 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즉 약탈만은 명군도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명군이 남는 식량은 조선에 주었다는 기록도 있으며(징비록에서 명군이 쌀 30가마를 주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명군이 못 싸웠거나 횡포부리거나 하는건 비판하면서도 이 때만큼은 명군을 칭찬했다.) 명군 그 자체로 인해 일본군은 부담감을 느끼게 되었다. 본 계획은 조선, 명과 각각 1:1 매치를 가지는 건데 명군이 오니까 이제는 1:1 매치가 어려워졌기 때문 전투에서는 분명 졸전을 치른적도 많고 대민범죄도 많았지만 명군은 잘 싸우느냐 마느냐가 아닌 있느냐 없느냐로도 밥값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고 대민범죄의 일부는 두 나라의 경제체제의 차이와 보급 개념의 차이에 돌릴 수도 있다. 결국 요지는 명군이 무조건적으로 악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단순히 삥뜯으려 보낸 것도 아니고 타국에 전쟁하러 파병하는데 오합지졸을 보내는 군대는 없다. 여러모로 열악했던 박정희 정부의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군한테 A급 군복 입혀 보냈듯, 해외파병군은 기본적으로 정예다. 당시 명군은 일본군과 최소 반반싸움을 해내며 전선을 안정시켰고, 기병대로 일본군을 야전에서 격파하고 천 단위의 화포로 평양성을 탈환하는 등 일본군에게 유효타를 가했다.[56] 아예 전자의 일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이 '1950년이 아무개를 닮았다.'라고 깠을 정도.[57] 육군과 수군에게 부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해서 명령했다. 당시 부산이 일본군의 상륙지점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 부산에 있는 일본군을 다 없애면 큰 타격을 줄 수 있는건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을 일본이 그냥 방치할리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건 육군이 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 육군과 수군 모두 선조의 명령대로 부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형편이 안되는데도 계속 공격하라고 닥달하여 육군 총사령관인 권율과 해군 제독인 이순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상륙작전은 왜 생각해보지 않냐고 하겠지만 일본 육군+수군을 육군의 협력 없이 조선 수군만으로 감당한다는 건 말이나 되겠는가? 오죽하면 이순신이 거듭 그럴려면 육군이 이쪽으로 와야 한다고 했겠으며 심지어 그 멍청한 원균마저 나중에는 이를 깨달았겠는가?[58] 물론 당시에는 실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오죽하면 나중에(칠천량 해전 후) 원균을 까던 신하들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원익 등 일부를 빼면 원균의 실체를 모른 채 그런대로 싸우는 장수 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원균이 허위보고를 올려도 알 길이 없던 당시 상황도 문제였던 셈. 하지만 그렇다고 선조를 실드칠 수 없는 노릇인게 아무리 원균이 공을 부풀리더라도 그게 이순신의 공을 능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잘하고 있던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원균을 세운다는 건 누가 봐도 삽질 오브 삽질이다.[59] 둘 다 강을 건너면서 적의 진격을 막기 위해 한쪽은 배와 배를 만들 수 있는 걸 제거, 다른 한쪽은 다리를 폭파했다고 알려져있지만 한강 다리 폭파는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 피난갔을 때로부터 24시간이나 지난 다음날에 일어났기 때문에 이승만이 피난가면서 폭파하고 간건 아니다. 선조는 그래도 전쟁에 대비한 준비는 나름 충실하게 했었고 일본에게 선공을 날리자는 주장도 하지 않았다.(반대로 이승만은 선조와는 달리 200년의 시스템을 물려받은 것도 아닌, 신생국의 지도자로서 메뉴얼에 없는 변을 당한 것이었고, 최소한 외국으로 튈려고는 하지 않았다.) 백성 / 시민들을 버리고 탈주하려고 한건 똑같기는 하지만.(묘하게도 두 사람이 향한 방향이 정말 극단적으로 다른데 선조는 중국과 가장 가까운 의주였던 반면 이승만은 (육지중에서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부산이었다. 이는 물론 적이 선조 때는 남에서 북으로 이승만 때는 북에서 남으로 밀고 나왔기 때문이겠지만.[60] 척화파로 알려진 김상헌이 출성항복을 끝까지 해선 안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이며 신하들도 강화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김상헌은 "지금이라도 결단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항복 하면 위태로울 확률 반 망할 확률 반이지만 항복 안하면 백이면 백 망하고 말 것입니다." 라고 했다.[61] 계축옥사에서 반역의 수괴로 지목된 영창대군은 폐서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갔고, 결국 그곳에서 만 8세의 어린 나이에 비명횡사 했다.[62] 오죽하면 광해군은 폐주인데도 백성들의 동정을 많이 받았다. 전시군주의 역할을 훌륭히 해낸 나름의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63] 처음은 왜적을 정벌했다는 뜻의 정왜공신이었으나 선무공신으로 최종확정된다.[64] 중국 당나라 시대 관료이자 학자[65] 공신을 기록한 문서[66] 충무공의 승전장계를 보면 알겠지만 장수와 병사에 이르기까지 그 공을 세세히 적어 보고했으며, 그 보고 과정에서 충무공은 1등, 2등, 3등이라고 순위를 매기지 않았다. 다만 권준과 무의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기간동안 충무공 휘하에서 경상우수사, 충청수사로 승진까지 하였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주요 요직을 맡고 있었다. 정운은 전란이 터진 그 해 너무 일찍 전사하였고, 배흥립은 끝까지 생존하였으나 어찌보면 수사로 승진은 못하다 보니 조금 묻힌 감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호성공신에 비하면 결코 선무공신의 수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내 정운과 배흥립은 선무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67] 선조의 책임 회피용 발언으로 부산 진격을 명한 것은 비변사도, 권율도 아닌 선조 본인이다. 비변사와 권율은 선조의 명을 전달하는 중간다리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애초 원균은 본인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을 공격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장계를 이미 올린 바 있다.[68] 어찌보면 원균옹호론은 현대가 아니라 당대에 이미 군왕인 선조에 의해 시작되었다.[69] 이미 선조는 선무공신의 수가 많다고 정운과 배흥립을 빼라고 했었고 다시 녹공하라고 말을 바꾸나 최종적으로 정운은 들지 못한다.[70] 이것이 소위 원균옹호론자들이 이야기하는 원균의 선무일등공신 근거이다. '그래도 공이 있기 때문에 1등에 선정되지 않았겠냐'는 것이 그 논리인데 실록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 원균은 2등이었다. 그마저도 선조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2등에 녹훈한 것인데 선조의 무한한 원균 사랑과 책임 회피용으로 원균은 결국 1등에 책봉되고 만다. 원균도 참 사람 잘 만났다.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과 판옥선 대부분을 가라앉혀놓고 이순신과 동급이 되었으니 선조의 질투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71] 원균이 비록 1등에 들었다고는 하나 이순신과 권율은 이미 정승의 반열에 올라 두 사람은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이며 원균은 그보다 한단계 낮은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 숭록대부로 차이가 있다. 또한 이순신은 선무 1등 공신 3인 중에서도 으뜸인 ''원훈''으로 선정되었다.[72] 최호는 칠천량 해전 당시 충청수사로서 전라우수사였던 이억기와 함께 끝까지 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몇 안되는 장수 중 한명이다. 공신에 선정이 되긴 했으나 최호는 선무공신이 아닌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청난공신에 선정되었다.[73] 문제는 호성공신 중에는 왕조안 신성군, 정원군 등도 있는 등 호성공신의 선정 기준은 굉장히 개판이었다. 호성공신을 봉해도 납득될 만한 사람들만 봉했다거나 최소한의 선을 보아가며 봉했다면 욕을 덜 먹었을텐데 이 신성군과 정원군이 선조가 가장 총애하는 인빈의 아들들임을 생각해보면 그 선정 기준은 굉장히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74] 역사저널 그날 시즌2에서도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포함되었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원균에 대한 되도않는 재평가에 들어갔다.[75] 그나마도 왕 눈치 봐서 올린 것. 즉 신하들은 누구나 원균을 1등으로는 죽어도 불가능할 것이라 본 거다.[76] 그리고 정작 추증이나 시호는 없었다. 우리가 충무공이라 부르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사 관련 실무자들에 대한 대우는 선조보다 인조가 더욱 답이 없었지만...[77] 권응수는 박진과 함께 경주성 전투에서 싸웠고 이정암은 연안 전투의 주인공(이 공으로 이정암은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78] 1602년 4월 공신도감에서 26명을 추려내며 대놓고 겨우 고언백도 들어갔는데 고언백 정도의 공을 세운 장수는 많으니 이대로면 섭섭하고 원통하게 여길 사람이 많을거라 보고했다.[79] 앞서 말했지만 선무공신은 호성공신의 반도 안 된다. 그럼 그렇다고 정운이 원균급 인물로 올라갈 자격이 없는 거냐면 이순신 휘하에서 맹장으로 활약할만큼 대단한 장군이었다. 그런데도 공신이 많다고 못 올려준다는 게 넌센스[80] 무의공 이순신과 권준의 경우는 이순신 밑에서 수사로 승진할 정도로 일단 눈에 두드러지는 공을 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전란 후 벼슬도 올랐으니 공신으로 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당시 원균 휘하에 있었으나 이순신 장군이 아껴 경상 좌수사로 승진까지 했던 이운룡 역시 3등 공신에 봉해졌으며, 수군 출신으로 공신으로 봉해진 마지막 인물은 정유재란 당시 전사한 기효근이 있다.[81] 유달리 세종은 형제와 자식에게는 넘어가줄 건 넘어가 주고 따듯하게 대할 대로 다 했는데 정종 그러니까 큰아버지의 자식들 즉 자기 사촌들에게는 엄격하고 냉정하게 대했는데 그래도 이들을 죽이지는 않았다.[82]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조의 이런 행보는 조선 왕실의 손이 극히 귀해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왔다.[83] 1위는 영조. 그러나 영조는 재위 기간이 조선 최장이며, 재위기간이 광해군의 3배 이상이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실제 1위는 광해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84] 임진왜란 터진 시기를 기점으로 보면 선조 나이 42세,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단명한 왕들을 빼면 보통 50대에 죽었음을 생각해보면(선조 본인도 50대에 죽었다.) 책봉할 시기가 된 건 맞았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85] 아무리 그래도 대체적으로는 장자 놔두고 차자에게 눈길이 쏠리는 건 드물다는 걸 생각해보면 임해군이 얼마나 개차반이고 광해군이 얼마나 번듯하게 보였는 지의 예시라고 할 수 있다.[86] 아무리 왕권이 떨어진다 해도 결국 광해군은 선조의 아들로 유교적 맥락 하에 아버지이자 왕인 선조에게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치적 술수가 뛰어난 선조의 패가 견제 하나만은 아니었다는 거다. 광해군도 써 먹으려면 어떻게든 다른 용도로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상책들을 제쳐두고 왕위에 집착이 강한 선조는 아들인 광해군의 활약을 그저 정적의 위협으로만 받아들였다. [87] '죄가 있는 놈이긴 한데 불쌍하니 은전을 베풀어주자'정도가 되겠다.[88] 당연하지만 1인 독재 당이 정권을 장악하면 비판을 할 수 없게 되니 건전성이 몹시 악화된다.[89] 동사,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다.[90] 전라좌수사보다 경상우수사가 격이 더 높다. 왜냐면 일본이 더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91]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던 유성룡의 천거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조판서시절 유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권율을 광주목사에, 원균을 경상우수사로 천거한다.이때문에 유성룡의 천거를 두고 "원균옹호론"의 논거로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종6품] [종3품] A B [종4품] [정3품] [92] 사극에서 흔히 다른 부하들이 이순신을 '장군'으로 지칭하는데 이순신은 1591년부터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의 품계였기에 영감으로 불러야 맞다. 제일 정확한 호칭으론 '''수사 영감'''. 이순신이 정헌대부가 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후로는 '''통제사 대감'''으로 불렸다.[93] 한문을 읽을 줄 아느냐는 뜻이 아니라 유학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묻는 것.[94] 이순신은 무관이다. 무관의 경우 유학적 소양을 문과보다는 덜 해도 되었는데(정작 이순신은 인상은 무관보다는 문관에 가까울 정도로 나름 배운 사람이다.) 선조의 경우 어쨌거나 혼란한 상황속에서 유교적 소양, 정확히 말해서 충효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류성룡에게 이순신이 글을 아냐고 물어보는건 적절한데 만에 하나 이순신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여태껏 승승장구해오던 이순신의 반란은 이몽학의 반란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할 수 있고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악재 속에서는 끔찍한 악몽이다. 그나마 충효라도 확실히 갖추고 있다면 반란만은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점을 다 떠나더라도 이미 역사상 힘 있는 무신이 나라 뒤엎는 일은 많았다.[95] 첫 승전인 옥포해전에서 가선대부로, 2차 출동 승전 후 자헌대부, 3차 출동인 한산대첩이 있은 후엔 정헌대부로 1차례씩 승진을 시켜주고 1593년 8월엔 삼도수군통제사 직을 신설하고 초대 통제사로 임명한다.[96]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출소 후 멀쩡히 말도 타고 사람들과 술을 마신 걸 보면 고문은 그래도 약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갖춰놓고 안했을 뿐이지 사실상 죄도 없는 사람을 파직한것도 모자라 붙잡아와서 가둬놓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한 것은 고문이나 다름이 없다.[97] 정유년 3월 13일 실록을 보면 이순신이 의금부로 압송되자 선조는 '참으로 역적이다.' '이젠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같은 표현을 사용하며 이제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하는 부분이 나온다.[98] 다만 이산겸은 북인의 수장 이산해의 사촌이므로 북인에 대한 견제 조치로서 죽였다는 시각이 많다. 비슷한 예로 거론되는 김덕령의 경우 류성룡을 비롯한 다른 대신들도 '혐의가 너무 짙어서 살리지 못한다' 는 말을 할 정도였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소지가 있다. 선조실록 29년 8월 4일자 기사, 선조수정실록 29년 8월 1일자 기사를 참조할 것. 그리고 이 둘은 별달리 공훈도 없고 정말 무고하기만 한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약간의 논란이 있다.[99] 일례로 토사구팽의 일화로 유명한 유방한신이 오만꼬장에 거의 항우초의제에게 했던 것처럼 난장을 피웠고 이것 때문에 크게 분노는 했지만 항우라는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는 호구같아 보일 정도로 한신을 어르고 달랬다. 즉 유방은 토끼를 다 잡은(더하여 염증날 정도로 대들고 개긴) 개를 삶은 반면 선조는 아직 토끼사냥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종일관 충성스러운 모습만 보인 개를 삶으려 한것 그나마 선조에게, 조선에게 다행이라면 아직 개를 삶기에는 아깝다고 여겼는지 정말 삶아버리지는 않았다는것[100] 조민수와 지휘권을 반으로 나눠놨다곤 해도 그간의 군공이 그저그랬던 조민수에 비하면 이성계는 화려한 전공으로 군영 내에서 실제 영향력 차이가 확연했다.[101] 훗날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자신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을 어떻게든 원종으로 추숭시켰는데, 비정상적 무리수였기 때문에 반정 공신 가운데도 이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인조가 명목상 인목대비의 양자였으나 실상은 조카 뻘이라 중간 다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명종의 아들 항렬인 선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102] 철종은 숙종 서자 영조의 서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적자(...)였다. 고종 역시 종법으로야 사도세자의 직계지만 혈연으로 따지만 인평대군의 후손이었다 그 왕들도 먼 방계 출신임으로 인한 정통성 컴플렉스를 크게 가지고 있진 않았다. 철종과 고종 역시 선왕이 승하한 당시에 남아있던 왕족들 중에선 가장 높은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애당초 계승 할 때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놨기 때문이다.[103] 물론 이에 대해서 선조는 첫번째라 그랬을 거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인조, 고종의 경우 이미 선조 다음으로 그런 자리에 올랐으니 "선조대왕께서도 했는데 내가 못할소냐" 라며 그랬을 거라는 거 하지만 선조의 군주로서의 권위도 임진왜란 전에는 이들과 비교해서 뒤처지는게 없다. 당장에 인조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을 결국은 모두 포용할 수 밖에 없던 반면 선조는 집권 기간동안 집권당을 계속 갈아치웠음에도 어느 누구 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104] 사대부조차도 정말 사정이 궁하면 서자도 제사를 받드는게 가능했다. 대표적인 예가 박원종의 서자 박운.[105] 기껏해야 자기 위의 2명의 형 정도[106] 서자나 서손 출신으로 승계하거나 세자가 된 왕, 왕세자가 조선 후기 영조, 경종,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 순조 철종등이 있다. 다만 경종의 경우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시에는 후궁인 소의라 서자라서 송시열이 태클 걸기도 했다. 애초에 인현왕후는 8년간 공주는 커녕 임신도 없었고 사랑받지 못해서 아예 자식 볼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이는 왕가의 특수성상 '왕위 계승=대종(왕가) 계승'이라는 논리를 통해 후궁 출신이든 어떻든 '왕위 계승자=왕실 적장자'로 만드는 게 왕가의 종법이었는데, 송시열은 여기에 반대되는 논리인 '왕위 계승≠대종 계승'이라는 특수한 주장을 펼쳤고 이는 전임 왕 때 예송논쟁으로 나타난다. 왕실도 일반 사대부가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는 왕위와 종통의 계승 절차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므로 아무리 대유학자 송시열의 주장이라 해도 왕가의 이러한 특수성을 무시한 주장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거기에 장(옥정) 소의 어머니의 옥교 사건으로 뿔이 나 있던 숙종 입장에서는 자신의 (당시에는) 외아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결국 송시열은 사약을 마시게 된다. 다만 이 또한 송시열의 '특수한 주장'이 아니라 종법 질서의 원칙에 있어서는 송시열 등의 견해가 일반론이고 오히려 윤휴 등 남인들이 정권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왕의 입맛에 맞는 주장으로 논쟁을 일으켜서 왕권에 기대어 자당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의도로 왕실의 특수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송시열이 아니라 오히려 남인쪽에서 '특수한 주장'을 했던 것이다.[107] 당장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를 무력으로 손에 넣었지만 그의 천하는 그가 죽기 전부터 불안한 조짐이 보이더니 그가 죽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사실상 남에게 넘어가고 결국 오사카 전투로 인해 완전히 무너진다. 임진왜란 내내 선조는 굴욕을 여러번 겪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딱히 굴욕이란걸 겪은 것 같지 않았으나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의 체제의 운명을 생각해 보면 선조는 임진왜란때 보인 행보로도 무너지지 않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직 그의 생존으로만 보장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