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몽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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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몽골'''
1. 개요
2. 단순 비교
3. 상세
5. 과거, 고려몽골 제국
5.1. 항복으로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얻다
5.2. 고려, 원 황실의 영지(領地)
5.3. 문화 교류
6. 조선시대 이후
7. 근현대
8. 북한과 몽골
9. 몽골과 한국의 정체성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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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몽관계(韓蒙關係)
대한민국몽골의 관계.

2. 단순 비교


항목
대한민국
몽골
면적
100,401km²
1,564,116km²
인구
51,833,175
3,121,772
1인당 GDP
$31,940
$4,151
명목 GDP
$1조 6,556억 (11위)
$127억 2,400만 (131위)
국방비
391억 달러

IMF 분류
선진국
개발도상국

3. 상세


몽골에서는 의외로 한국에 대해 역사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건 몽골의 전성기인 몽골 제국 때 유일하게 제대로 된 우호국이라고 할 만한 나라가 고려뿐이었던 것에 기인한다. 당시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은 칭기즈 칸 때부터 시작되어 쿠빌라이 칸 시기까지 계속됐기 때문에 주변국이 거의 흡수되어 주변국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 끽해야 러시아 쪽의 공국들과 서유럽이 있겠지만, 이들 역시 몽골이 무서워 벌벌 떨었으니 제대로 된 우호국이라기에는 애매하다.
물론 이런 역사적 호감은 몽골 제국 쪽에만 해당하는 것이, 정작 그 당시의 고려는 말이 우호국이었지 인적, 물적 자원을 죄다 몽골에 뜯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려 매가 유명하다는 말을 듣고 매부터 시작해서 비단, 금, 수달 가죽에 심지어는 여자까지 바치라고 해서 많은 고려 공녀들이 몽골로 끌려갔다. 이것만 봐도 당시 몽골 제국은 고려를 사실상의 준식민지 취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죽을래? 정복당할래?''' 정도의 선택지밖에 없던 대부분의 나라와는 달리 고려는 그나마 나은 케이스였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에야 굴욕이라고 까이지만, 몽골의 부마가 되는 것도 고려 왕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왕권 강화 수단이었다.
여타 아시아 국가들이 대체로 그렇기도 하지만, 몽골인들은 한국인들의 생각보다 더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도가 높고, 한식을 즐기며, 한국을 선진국으로 인식한다. 특히 자국의 열악한 경제상황 때문에 한국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상당히 많고, 한국을 기회의 땅으로 여겨 한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다. 경찰관이나 서비스업 종사자들 중 의외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꽤 많다.
고려 당시 몽골 제국속국은 엄청나게 많았다. 그냥 먹힌 곳으론 러시아 대부분, 미얀마, 루마니아, 파키스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페르시아, 이라크 지역이 있다. 완전 속국이 된 곳은 노브고로드 공국, 스몰렌스크 공국 등. 또 조공이나 상납금을 바친 나라는 2차 불가리아 제국, 트레비존드 제국, 안티오크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 같은 십자군 나라도 있고, 베트남, 참파 왕국, 크메르 왕국, 말레이시아 부족 등등... 엄청나게 많다. 동로마 제국조차 황녀와 공물을 킵차크 칸국의 노가이 칸(정확히는 청장 칸국)에게 보냈을 정도. 다만 이 나라들이 비록 조공은 바쳤을 지라도 과연 고려처럼 몽골과 우호적인 관계(적어도 정치적으로는)였냐면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정복은 당했으나 타타르라고 경멸, 중국은 반란, 이란도 뭐(...), 베트남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러시아와 중국은 나중에 몽골의 도시들을 철저히 파괴한다. 서달의 카라코룸 불태우기 + 이반의 타타르 대학살.
물론, 우호국이란 건 어디까지나 몽골인들의 처지에서고 여몽전쟁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된 한국인 처지에서는 당연히 좋은 기억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고려는 그나마 끈질기게 몽골에 항쟁한 그 상징성 때문에, 항복 이후의 고려는 몽골군에게 그냥 짓밟히고 멸망당했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독자정부도 꾸리도록 허락받고 때때로 고려 왕족에게 만주 지역까지 공식적으로 통치하게 맡기는 등 꽤 후한 대접을 받은 편이었다. 어쨌든 침략자인 건 변함없지만, 어차피 당나라청나라 같은 중국 통일왕조들도 한반도 처지에서 침략자였던 건 마찬가지인데다 그리고 나중에는 함께 일본도 치러가고 동고동락했던 점, 몽골은 그나마 현재 한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옛날보다는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 편이다. 사실 동고동락이라기에도 할 수 없는 것이 여몽연합의 일본 원정 자체가 쿠빌라이 칸의 일본 정복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몽골족이 유목민족인 만큼 배를 운용해본 적이 없다 보니 일본 정벌에 필요한 함선과 수군을 모조리 고려에서 충당하라고 했던 것. 이 때문에 고려는 수많은 나무를 베어 함선을 만들고 안 그래도 부족한 재정을 쥐어짜서 군사 편성하느라 죽어났다. 게다가 몽골에서 파견한 병사들은 배멀미 때문에 해전에 제대로 도움도 안 된 데다가 지휘관들도 해전 경험이 거의 없어 훈둔(忻都, 忽敦)과 같이 뻘짓만 하다가 태풍에 군대를 다 날려먹는 등 그야말로 뻘짓이 다름없었다. 후에 쿠빌라이 칸이 훈둔을 해임하고 다른 장수를 투입하긴 하지만 수전 경험이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다 보니 재정과 병사들만 꼬라박는 뻘짓이 되어버렸다.
원나라 시절만이 아니라 전쟁으로 일관해온 몽골의 역사에 우호국이라고 할 만한 나라는 머나먼 유럽 국가 몇 개 빼고는 고려가 유일하다시피 하니 한국에 대해 좋게 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듯하다.
어쨌든 아래에 나오는 이런 저런 정치 사정과는 별개로, 몽골인들이 딱히 고려와 고려 사람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면 가졌지, 악감정을 품을 이유가 없다는 점은 명백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봐도 될 것이다.

4. 고대


몽골의 뿌리인 몽올실위는 실위의 부족인데, 실위족은 고구려에서 철을 수입했다.

5. 과거, 고려몽골 제국



한국과 몽골이 가장 깊은 관계를 맺었던 시대.

5.1. 항복으로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얻다


몽골 제국의 '부마국'이라는 고려의 독특한 지위는 당시 몽골 내부의 권력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쿠빌라이 칸은 남동생 아리크부카와 왕권 분쟁 도중에 훗날 고려 원종이 되는 고종의 태자 왕진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고려로서는 신의 한수라고 할 수 있는 항복 타이밍이었는데, 쿠빌라이의 처지에서 보자면 오랫동안 저항하던 고려가 라이벌인 아리크부카가 아니라 쿠빌라이 칸 자신에게 항복했다는 것은 곧 쿠빌라이의 명성과 권위를 드높여 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막내가 가독을 잇고, 손위 형제들은 자기 몫을 상속 받은후 독립해 나가는 막내상속제였고, 당시 아리크부카는 몽골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있었고, 쿠빌라이 칸송나라를 정벌 중이었다. 때문에 정통성에서는 오히려 쿠빌라이 칸이 밀리는 판국이었다. 이때 외국의 사신이 자기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곧 외국에서 자신을 정통 군주로 인식한다는 뜻이므로 부하들에게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울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때문에 쿠빌라이는 "고려는 그 옛날 당태종이 침공했어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이다. 이제 그 나라의 왕자가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무척 기뻐했다. 자치통감 등의 중국 사서에도 7세기고구려는 '고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즉 고구려-당 전쟁고구려의 국호가 '고려'였기 때문에 쿠빌라이는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나라로 알고 있어서 이렇게 이야기 한 걸지도. 혹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기에 이렇게 이야기한 듯 하다. 다만 카다안의 침입 때는 '''"고구려 때는 강했다면서 왜 이렇게 지금은 비실거리냐??"'''고 의아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왕진 태자는 쿠빌라이 칸(원 세조)으로부터 중요한 약속을 받게 된다. 항복을 하는 대신에 고려의 왕실과 제도, 영토와 주민 그리고 풍속을 유지해도 좋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 등의 약조를 받아낸 것. 이를 달리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도 한다. 즉 고려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1].
이때부터 고려국왕의 이름에 충(忠)자가 들어가는데 일반적으로 임금의 이름에 충을 붙이는 건 말이 안 된다. 임금은 가장 높은 사람이라 충성할 필요가 없기 때문. 이는 고려가 독립과 자치는 하였지만 원 제국으로부터 부마국으로서의 대접과 간섭을 받았다는 걸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다.
그리하여 원종 다음 대의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황제의 사위가 된다. 몽골 풍습에서 딸을 내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씨족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지, 감시를 위한 정략결혼 수준으로 격하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고려 국왕은 쿠릴타이(족장회의)에 원 황실의 일원으로 참가해 원나라 왕위 계승 문제에 발언권을 행사'''하는 등 만만한 직위가 아니었다. 쿠릴타이에서는 주로 대세와 본가를 따르는 쪽인데 이는 칸을 선출될 때 마다 반복되어, 대세를 따르다 보니 새로 선출되는 칸마다 고려왕이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새로 선출된 칸은 자신을 지지해 준 고려 왕에게 고마워하며 항상 무언가를 베풀어주게 되었다.
또 국사책에는 원나라 관리인 다루가치의 횡포 식으로 알려져 있긴 한데, 고려가 부마국이 된 뒤로 다루가치는 찍소리도 못하고 본국으로 쫓겨난다. 실제 다루가치가 고려에 있던 기간은 20년이 채 안 되고, 충렬왕 4년에 완전히 철수한다. 재벌로 따지자면 원 황제가 회장이고, 다루가치가 본청의 부장급이라면 고려 왕은 하청업체 사장이긴 하지만, 선대 회장의 외손자이자 현재 회장의 사위인 셈이니.
초창기에는 수탈을 했다. 응방, 결혼도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원나라고려의 해동청(매)과 젊은 여성을 요구했고, 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피해로 돌아갔다. 2차례의 일본 원정도 원정금의 일부를 원에서 대긴 했지만 거의 고려가 원정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명나라-조선의 조공관계처럼 바뀌어 갔으며, 원나라에 빼앗긴 자비령과 제주도의 탐라총관부를 끈질기게 졸라서 다시 고려 땅으로 찾아오기도 했다(충렬왕 16년, 27년). 그렇지만 탐라총관부는 없어지지 않았고 탐라만호부로 이름을 바뀌어 이어지다 공민왕 5년에 가서야 폐지된다.
그래도 원나라가 고려에 일본 원정을 위한 군선 제작 비용을 저화(지폐)로 지불했다는 내용이라든지, 고려가 일본 원정용으로 제공한 군량미가 12만 3,000석이었는데 나중에 고려가 흉년이 들었을때(1291년) 원나라에서 10만석을 지원해 주기는 했다. (정작 딴 데로 새어서 문제지...)이후로도 고려에 흉년이 들때마다 원나라에서 몇 차례씩 양곡을 지원받았다. 이런 내용이 모두 고려사에 기재되어있다. 그 밖에 원나라의 반란군인 합단군이 고려에 침입해서 원주충주가 함락되고, 국왕이 강화도로 피난가는 등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로선 심각한 사태였다. 이 때 고려군과 원나라군이 함께 싸워 물리쳤다는 내용 등도 남아 있다. 물론 득실을 따졌을 때 실이 훨씬 크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원나라가 그냥 무작정 뜯어가기만 한 건 아니었다.
또한 고려시대 공녀라며 원나라가 고려 여자들을 공출해서 데려간 것은 잘 알려져 있으나, 반대로 몽골 여성이 고려에 시집온 경우 역시 많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표적으로 계국대장공주, 노국대장공주 등 고려 국왕에게 시집온 몽골 공주들.

5.2. 고려, 원 황실의 영지(領地)


그렇지만 절대 고려와 원은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까진 아니어도 속국적인 요소가 다분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원 황실과 혼사를 맺으면서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라는 지위를 유지했고, 이 탓에 원 간섭기 시절의 고려왕은 '''독립국가 고려의 국왕'''이 아니라, '''원 황실의 일원으로서 고려를 영지, 봉토로 다스리는 제후왕'''이었다.
원 황실과의 혼인은 고려가 독립을 유지하는 데 주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속국화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왕과 결혼한 원 황실의 공주가 받은 시호는 왕후가 아니라 공주였고 원 황실의 공주로서 고려왕실과 별개의 권력체로 존재했다. 사실 왕후로서 받은 시호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고려에선 왕후로서의 시호를 올렸지만, 이후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와 합쳐지면서 최종적으로 정식 시호에선 시호의 직위 부분은 공주로서의 명칭만 남았다. 이 탓에 왕후로서 받은 시호가 기록에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다.
충선왕심양왕의 지위를 얻은 후로는 더욱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다. 충선왕 때에는 고려-심양이라는 두 지위를 한 몸에 지녀서 명목상 한반도와 요동을 동시에 다스리는 엄청난 권위를 지녔으나, 충선왕이 고려왕위를 아들에게, 심양왕위를 조카에게 물려주면서 고려 왕실이 계승권을 가진 왕위가 '2개'로 늘어난다. 이건 오히려 왕실 내에서 분쟁의 원인이 돼버리고 원 황실은 고려 왕실을 제어하는데 심양왕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왕은 원의 자의대로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기도 했다. 충선왕, 충렬왕, 충숙왕, 충혜왕이 그 예이다. 이것도 원나라의 시각에서 보면 좀 다른데, 고려왕은 '원나라 황제의 사위'로서 '고려를 영지로 다스리는 왕'이므로 제대로 정치를 못하면 교체하는 것이 문제될게 없었다. 재벌 회장이 사위라고 (합병한) 자회사 사장 자리에 앉혀주었는데 제대로 일을 안하면 교체하는 것과 비슷하다. 근현대 세계 열강이 식민지 총독 갈아치우듯 한 건 아니었다. 교체를 한다고 해도, 일단은 고려 왕실의 혈통으로 이어가야 했다. '''그리고 충혜왕의 경우는 오히려 교체해버린 것이 백성들에게는 매우 나았다.'''
이러한 점들은 고려와 원이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5.3. 문화 교류


몽골에서는 많은 공녀, 환관이 고려에서 몽골로 끌려와서 저절로 고려양이 유행했고, 고려에서는 몽골풍이 유행했다. 고려에서 몽골풍이 공민왕에 의해 폐지되기는 했지만 한복에 몽골 복장인 델의 영향이 상당히 남아 있게 되었으며 고기 요리에도 몽골 요리의 영향을 상당수 받았다. 반대로 고려풍이 몽골에 영향을 끼치면서 몽골 요리와 몽골 델(의복)에 고려복장과 한국 요리의 영향이 남아있게 되었다. 원궁사(元宮詞)에는 "가장 유행하는 옷은 고려 여인이 황제 앞에서 입는 고려옷이라네. 궁중 여인들이 다투어 고려 여인의 옷을 구경하러 가네."라는 말이라든지 연하곡서(輦下曲序)에는 "보초 서는 병사들은 고려어를 배우네. 어깨동무하며 나지막이 노래 부르니 우물가에 가 익어가네" 같은 말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몽골 풍속이 남게 되고, 특히 폐쇄성이 강한 왕실 용어에서는 몽골어가 오랫동안 잔존하게 된다.

6. 조선시대 이후


몽골은 내몽골북원이 들어서고 외몽골에 할하 부족과 오이라트 부족이 자리 잡으면서 통일성이 깨졌다. 거대 제국이었던 원나라가 사라진 탓이다. 이후 내몽골은 명나라오이라트 쌍방과 고비 사막과 만리장성을 경계로 각각 대립하다가 후금이 들어선 이후 북원의 후계인 차하르부가 청태종에게 귀부하여 원의 옥새를 바치면서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고, 혼인 동맹으로 사실상 만주족과 일체화되었다. 그리고 외몽골의 경우 할하 부족이 정착하였으나 곧 등장한 오이라트의 후신 준가르에 복속되었다.
내외몽골 둘 다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사실상 한몽교류는 끊겼다가 정묘호란병자호란만주족과 일체화되어 팔기군의 일원으로 등장한 내몽골 기병들이 한성을 약탈하면서 최악의 형태로 돌아왔다. 조선으로서는 대몽항쟁의 악몽을 떠올릴 만했다. 한성 약탈을 자행한 팔기부대는 분명히 몽고병, 즉 내몽골군으로 청병이라 표시된 만주군이나 한병이라 표시된 중국군과는 구별된다. 또 삼전도의 굴욕 당시에 항복 문서는 몽골어한문으로 적히기도 했다.
이후 조선에 우역이 돌자 몽고에 사절단을 보내 를 대거 수입해오기도 했다.
외몽골은 자연스레 교류가 없어 말 그대로 남이 되었고, 외몽골이 1921년 소련의 원조로 독립해 아시아 최초 공산국가가 되면서 대한민국과는 적대관계가 된 반면 북한과는 우방이 되어 6.25 전쟁 당시 군사원조까지 해 주었다. 이후 1992년 한중수교로 내몽골은 자연스레 중국, 1990년 한소 수교로 부랴티아는 자연스레 러시아의 일원으로 교류를 재개했고 1990년 한몽수교로 외몽골인 몽골국까지 수교 국가가 되어 한몽교류가 복원되었다.

7. 근현대



7.1. 일제강점기 ~ 1980년대


의사 및 독립운동가였던 이태준일제강점기 때 몽골로 건너가 활동했다.
화북분리공작의 일환으로 내몽골일본 제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내몽골이 독립하면서 세워진 국가인 몽강연합자치정부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다. 몽강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가 대추축국 선전포고를 때리며 잠시 적대 관계가 되었으나 몽강국은 소련만주 작전으로 해체된다.
외몽골적백내전에서 소련위성국몽골 인민 공화국이 되었고, 이후 공산국가로 남았다. 1948년북한과 먼저 수교하여 북한 단독수교국으로 있었고, 그 때문에 징기스칸 같은 독일 노래도 공산국가 찬양곡이라며(...) 금지되었다.
그러나 냉전이 해빙되면서 1988 서울 올림픽 때 자국 선수, 임원단을 파견하고 2년 후인 1990년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7.2. 냉전 종결 이후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대한민국-몽골 간의 교류가 많아졌다. 대한민국의 15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인 1999년 몽골을 방문하였다.
몽골인들의 한국 체류가 많다. 재한 외국인 문서 참고.
한국인의 경우도 몽골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아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한글이 뚜렷이 써진(개별용달 등등; 중고차가 몽골로 온 사례) 자동차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늘고 있다. 몽골국영방송과 UBS, TV5를 비롯한 주요 방송국에서도 한국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을 대거 수입해서 틀어주며 작품에 따라 시청률이 오락가락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꽤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다. 몽골의 인구가 300만, 중국이나 러시아에 살고 있는 몽골족까지 합해도 1000만 안팎으로 시장성이 별로 크지 않은데 반해 방송국들은 250개에 달할 정도로 난립하고 있기 때문에 자체제작 기반이 약해서 방송사들이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을 수입해서 틀어주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더더욱 한류현상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몽골에서 이전에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아주 낯선 건 아니었다. 공산시절에 상당수 북한영화가 수입되면서 사극류를 중심으로 꽤나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라나. 이 중에서 가장 히트한 작품은 홍길동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한국노래도 많이 들을 수 있다. 또한 한국 음식점도 주요도시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있고 한국 상품을 파는 상점이나 마트들도 있기 때문에 몽골인들에게 한국문화가 생활 속 깊이 자리잡았다. 한국 음식의 경우에는 몽골 기준으로는 가격대가 비싸서 일반 서민들이 자주 즐겨 먹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외식 메뉴로는 인기가 많다. 특히 몽골도 비만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채소 요리가 많은 한국 요리가 크게 인기를 끄는 측면도 있고, 그러면서도 몽골인들의 입맛을 끌 육류 요리도 가득하다.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버스들도 한국 중고버스를 수입하는 경우가 많고 교통카드 시스템도 한국의 것을 도입했기에 더더욱 그런 면이 두드러진다. 현재도 거리에 널린 게 한국음식점, 한국상점. 한국인이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김치의 인기가 상당히 많아서, 몽골 전통 음식에 김치를 활용한 요리도 상상 이상으로 많다.
또한 한국어에 능숙한 몽골인들이 많아서 과장 조금 보태서 한국말만 해도 생활 가능할 정도. 실제로 영어하는 통역/가이드보다 한국어 통역/가이드를 더 찾기 쉽다. 다른 나라 같으면 한국인보고 "저펜? 차이나?" 이러는데 몽골에서는 택시 같은 곳에서 한국인을 보면 기사가 먼저 '''한국어로''' "한쿡사람, 킴치치게, 닥도리탕?" 이러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이 한국에서 체감하는 것 보다, 몽골에는 한국에서 일하다 온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대한민국에서 이삿짐 업계에 몽골인들의 진출은 상당한 편. 체격과 힘이 좋아 짐 나르기에도 좋고, 순수하고 성실한 편이라 이삿짐 센터에서 중요한 도난 사고 등의 문제가 없어 급여적인 면이나 능력적인 면에서 한국인에 비해 출중하기 때문. 또한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한국인과 비슷하게 생긴 외모 덕에 의뢰인들이 부담을 가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만 이삿짐 파손은 한국인보다 좀 더 많다고 한다. 이거 말고도 물류센터 택배상하차, 건설현장, 대형마트 창고일 등 힘을 많이 쓰는 직업에서 몽골 출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몽골인들이 한국에서 저지르는 범죄도 늘었다. 불법체류자도 상당하며, 강력범죄율은 한국에 체류 중인 외국인 중에 2위다(2016년 조사. 러시아가 인구 10만 명당 범죄자 검거 건수로 4837명으로 1위, 몽골은 4678명으로 2위#). 몽골인들이 순수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유목 생활을 하는 시골 초원 사람들의 이야기고 도시 사람들은 많이 다르다. 게다가 순수한 사람이라고 해도 순수하기 때문에 오히려 말보다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이것도 범죄로 이어진다. 이로 인해 한국인들의 몽골인에 대한 반감도 늘어날 듯하다. 하지만 언론에선 동남아 사건이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아직까진 반감은 덜한 편.[2]외국인 노동자 범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이밖에 TMR(몽골횡단철도)이 중국을 거쳐 한국 철도와 연결될 경우 세계적인 항구도시, 그리고 한반도에 있는 다양한 항구도시들과 철도로 연결되는 만큼 몽골의 자원개발에 탄력이 붙을 것을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특히 몽골과 이웃한 중국은 자원 수출에 필수적인 항구를 몽골에게 내어주지 않고 있고 러시아도 마찬가지라 몽골로서는 한반도의 항구를 이용하는 것이 급선무인 상황. 그런데 부산항은 지금 포화상태라 전라선을 이용해 광양항, 여수항을 이용하거나 장항선, 장항화물선, 군산화물선을 이용해 장항항이나 군산항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철도가 연결되려면 남북통일이 우선인데[3] 통일 이후라면 굳이 전라도나 경상도까지 가지 않고 현 라선특별시청진시를 개발하여 이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덕분에 몽골은 잘 드러나진 않지만 북한의 개방과 한반도 통일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국가들 중 하나다. 가장 열렬하게 지지한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몽골 대통령이 평양 한복판에서 대놓고 민주화를 외쳤을 정도다.. 더불어 서로가 껄끄러운 6자회담 당사국들과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에게는 몽골이 나름 편한 회담 개최지로 주목받고 있어 최근 들어서는 '''울란바토르를 아시아의 제네바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몽골에서도 한국에 호감을 가지는 사람과 반감을 가지는 사람이 나누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몽골에서 한국 요리가 맛있고 채소도 많이 들어간다면서[4] 엄청나게 인기를 끌고 있으며 좋은 품질의 한국 제품들과 한국 노래나 TV 프로그램도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에 대한 반감으로 지식인층이나 기성세대의 경우에는 몽골 방송국들이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영화 등을 틀어재끼다 보니 몽골 문화가 한국 문화에 잠식되고 더 나아가서 한국의 막장드라마가 몽골의 이혼률 증가 등 사회 문제점에 기여한다면서 한류에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있고, 젊은층의 경우에는 국제결혼으로 몽골의 처녀들이 한국으로 시집가서 짝이 없다든지 한국 기업에서 당한 여러가지 부조리한 점 때문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니까 사람마다 케바케라는 것이다.
2005년에는 관련글 몽골 대학에서 한국인이 현지 여성을 고용해 헤어 누드를 찍다가 적발되어 여권을 압수당했다고 한다. 몽골 현지에서는 이 사건으로 대소동이 일어나고 반한감정이 치솟았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일부 인터넷 언론만 보도하고 잊혀졌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금도 몽골에서 두고 두고 회자된다.
2012년에는 대한민국에서 편의점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욕설을 한 몽골인을 한국인이 폭행해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해당 기사의 댓글을 보면 알겠지만, 몽골인이 맞아 죽을 짓을 했다는 식의 댓글이 상당수였으며, 며칠 후에 보도된 모 아이돌 그룹의 실언에 묻혀 버렸고 현재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아이돌 그룹의 경우 과거의 실언이 두고두고 거론되며 비난받는 것과는 대조적인 반응이다.[5]
IRI의 2017년 여론조사에 의하면 몽골인 응답자 중 73%는 한국에 대해 호감이 간다고 응답했으며,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답변은 20%였다.
2014년 10월 6일 퇴임 후 한국에서 병 치료를 받고 있던 남바린 엥흐바야르 전 몽골 대통령이 한국으로 망명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다. 사실이라면 전현직 외국 국가원수의 한국 망명은 사상 최초의 일.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대통령을 지냈으며 후에 부정부패로 구속되어 2013년 8월에 사면받은 전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 10월 29일 남바린 엥흐바야르가 몽골에 일시 귀국, 현지 인터뷰에서 망명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몽골 영자 신문).
중앙일보 역시 망명 기사는 오보였다고 정정 기사를 내보냈다. 엥흐바야르 전 대통령은 잠시 몽골에 머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명목상은) 한국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2017년 대선에서도 한국 교회에게 돈 받았다는 네거티브가 나올 정도로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KT SAT가 몽골 최대 위성 방송 사업자 DDISH TV(디디쉬티비)와 위성 중계기 임대 계약을 2016년 3월 2일 체결했다. 올해 말 동경 113도에 발사예정인 KOREASAT-5A(무궁화 5호 대체 위성)의 중계기 4기에 대한 임대 계약으로, KT SAT은 오는 2017년부터 위성 수명에 해당하는 17년 동안 몽골에 위성 방송 서비스(DTH)용 중계기를 제공한다. KT SAT, 몽골에 위성 중계기 임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고려사(寺)라는 한국식 불교사찰이 있다. 2000년대 초중반에 한국 불교 단체에서 지원 형식으로 지은 것. 몽골 인구의 절반 이상이 불교(주로 티베트 불교)를 믿는 지라 별 거부감은 없고, 양국의 불교 교류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2019년에 몽골 헌법재판소장이 여성 승무원 성추행 벌인 사건이 있었는데, 면책특권이 있다는 거짓말을 쳐서 돌아가다가 논란이 커지자 스스로 돌아와 체포되었다.# 700만 약식 기소로 마무리되었다.#
몽골 한인사회에서 이태준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대암장학회를 발족했다.#
유한킴벌리는 몽골에서 숲을 조성하는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GS25가 베트남에 이어 몽골에 진출한다.#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가 몽골에 코로나19 진단 키트를 기부했다.#
한국의 편의점업체 CU가 2년만에 몽골에서 100 점포를 돌파했다.#
대한전선은 몽골 보건부로부터 '건강정보 교환 플랫폼 구축 사업'을 수주했다고 밝혔다.#
코이카는 울란바토르에 있는 몽골국립과학기술대에 코로나19 방역품과 장학금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한국철도공사와 코트라가 대한민국-몽골수교 30주년을 맞아 울란바토르에서 몽골 철도학교 행사를 열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몽골수교 30주년을 맞아 세종학당재단에선 몽골에서 한국어 수업 확대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2021년부터 한국산 굴착기 등 일부 품목에 대해 몽골의 관세가 낮아지면서 우리나라도 몽골산 의류와 광물 관세를 낮추게 될 예정이다.#
반크가 대한민국-몽골수교 30주년을 맞아 몽골의 역사와 문화를 국내외에 알리는 카드 뉴스를 제작해 SNS에 배포한다고 밝혔다.#
2021년 1월 15일에 중소벤처기업부는 몽골 식품농업경공업부와 중소기업·스타트업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7.2.1. 탈북 루트


최근에는 다른 면에서 몽골이 한국에게 중요해지고 있다. 탈북민들의 탈북경로 상당수가 동남아 혹은 몽골 경유 루트로 바뀌고 있기 때문. 몽골은 중국 인근 국가 중 태국과 함께 탈북자를 인도적으로 대우하는 얼마 안 되는 나라들 중 하나라서 중국 내 한국 대사관 진입이 어려울 경우 몽골 밀입국을 시도하기도 한다. 일단 몽골 경유 루트는 동남아 루트에 비하면 중국의 인구밀집지대(=감시망 밀집지대)를 빨리 벗어날 수 있고 탈북루트의 시발점인 베이징이나 선양에서의 거리도 압도적으로 가까워 인기가 높다. 몽골 루트의 경우 국경만 넘으면 북송 걱정은 없고 일단 몽골 국경수비대와 만나기만 하면 한국행은 약속되어 있다.
문제는 그 몽골 진입 방식이라는 게 '''철조망을 돌파해 어떻게든 국경을 넘어 몽골 국경 수비대에게 발견된다'''는 것이라 물도 식량도 고갈된 상태에서 몽골 국경 수비대를 만나지 못한 채 밤을 맞으면 건장한 남성이 아닌 이상 얼어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몽골로 가기 위해선 몽골의 모래사막을 지나야 하는 문제가 있다. 영화 크로싱이나 경계(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길도 없는 모래사막에서 몽골 국경수비대에 우연히 발견되기라도 하지 못하면 죽기 딱 좋은지라 대체로 동남아(라오스-태국) 루트를 많이 선택한다. 다만 태국까지 가다가 중간에 라오스에서 잡히면 북송되기 십상이라는 것이 문제.[6]
또 다른 문제로는 한국 대사관에 인도받는 과정이나 출국 허가가 나는 과정이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로서도 각종 인력이나 시설 등의 문제로 이들을 무작정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여러가지로 난감한 문제가 있다. 때문에 민간단체들을 중심으로 탈북민들을 위한 정착촌 등을 몽골에 건설하는 방안이 제기되고 있다.

8. 북한과 몽골


1980년대까지만 해도 꽤나 교류가 있던 상황이었고 북한 영화가 꽤나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90년대 이후 몽골이 체제를 전환하고 북한 경제가 몰락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2013년 차이하깅 엘벡도르지 당시 몽골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으나 '''김정은이 만나주지 않아 정상회담을 하지 못했다.''' 이는 상당한 외교적 결례이다.
방문 당시 엘벡도르지 대통령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연설을 했는데 '''"어떠한 폭정과 독재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며, 이는 영원한 힘입니다."'''라는 등 평양 한복판에서 대놓고 독재를 비판하고 올바른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연설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북한은 몽골에 매년 꾸준히 자국의 노동자들을 보낸다. 2016년 기준 1,000여명 정도의 북한 노동자가 몽골에 있으며, 대다수는 광산에서 일하고 있다. 몽골은 최근(2018년) 몽골 내의 북한 노동자들의 계약이 6월에 끝난다고 밝혔고 북한 노동자들의 철수 작업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9. 몽골과 한국의 정체성


몽골어로 한국을 '설렁거스(Солонгос)'라 부르는데, 이 단어의 유래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 Солонго가 무지개란 뜻이라서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으로 이름붙였다는 설이 있고, '신라'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그리고 만주어로 한국을 솔호(Solho)로 부르는 것과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의해야 할 점은 영문 표기인 'Solongos' 때문에 '솔롱고스'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실 잘못된 발음이다.
황석영을 포함하여 '한-몽골 국가연합론'을 제안한 사람이 있으나, 양국의 상호 인식 수준이 너무 다르고 남북통일도 해결 안 된 상황이라 황석영 등의 '알타이 문화 제전' 개최 등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역사학/언어학계에서 한국어알타이 계통론은 이미 후퇴할 대로 후퇴한 상황이다.
우리가 역사자료로 최대한 추정할 수 있는 고조선의 시기엔 이미 완전히 분리된 민족이긴 하나 유전자 분석 등의 자료로 유추해볼 땐 그보다 훨씬 오래전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먼 동양인 관계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넓게 보면 흉노, 돌궐, 만주족 등 가까이 있었던 다른 북방계 민족들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언어 문제도 확실히 말 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 현대 한국어삼국시대의 언어가 그것부터 꽤 차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켈트족에 가까운 골족이 조상인 프랑스인들이 로망스어군계통 언어를 쓰는 경우도 생각해보자. 수 만년이 훨씬 넘을지도 모를 세월 속에서 언어로 혈통적 연관성을 찾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어디까지나 할 수 있는 일은 유전자 분석을 통한 추정 정도일 뿐이다.
최근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학교 교육에서는) 한국어는 (우랄-)알타이 계통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사이 알타이어족 자체가 거의 폐지되었고, 한국어는 계통 불명의 고립어로 본다. 즉 알타이 제어가 어족인지도 불확실하지만 어족이라고 해도 한국어가 거기 속하는가의 여부는 더욱 불확실하다. 알타이 제어 문서 참고.
다만 최근 중국의 성장세를 껄끄럽게 바라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 외 2007년 대선에서 경제공화당 후보 허경영이 국가 연합이 아닌 몽골과의 통일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다. 물론 몽골 정부와의 사전협의는 있었을 리가 없다. 2016년 총선에서도 한나라당이 한국-몽골-연해주-북한-만주를 아우르는 그랜드 칸(GRAND, KHAN, 대환국(大桓國))국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몽골인한국인은 외모가 꽤 비슷해 해외취업 등의 방법으로 한국에 많이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한 얘기로 동아시아에서 몽골인만 한국인과 비슷한 게 아니다. 일단 몽골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강호동이나 유퉁 같은 '건장하고 통통한 몸'에 붉그스름한 기가 얼굴에 도는 거친 피부인데 이건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국인은 현대 몽골인보다 일본인만주인, 멀리 보면 북중국인(북방 한족)과 혈통적으로 훨씬 더 가깝다. #
한국인은 남중국인(남방 한족)보다 북중국인(북방 한족)과 유전적으로 더 가깝다. 사실 북과 남으로 나누기는 했어도 절반으로 딱 나눈 게 아니라, 중국 대륙 전체로 보면 남중국인(남방 한족)이 있다고 보는 지역은 난링·우이 산맥 이남 지역으로, 매우 일부분이다. 난링·우이 산맥 이남 지역은 역사적으로 존재감이 없던 지역이었고(역사적인 중국의 주요 도시는 전부 이북에 있다), 이북 지역에서 북중국인이 매우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명확히 분류하고 비교하는 건 어렵다고 한다.
사실 중국 한족도 일본인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허름한 양복 상의(속칭 마이) 등으로 외적인 차별점을 다수 가지고 있지만 거주기간이 길어질수록 차이점이 줄어들면서 '입만 다물고 있으면' 중국인인지 모르는 정도까지 진입할 수는 있다. 특히 젊은 사람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결론적으로 몽골인은 혼혈이 아니면 분명히 한국인과 구분되는 점이 뚜렷히 존재한다.
붉거나 오렌지 계통의 엷은 빛깔 머리색을 가진 사람이 몽골 쪽에 더 많은 것도 한국인과의 차이 중 하나다. 빨간머리계통은 대중들의 인식과는 달리 켈트족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아시아 전체, 넘어서는 세계 전체에 골고루 분포해 있으므로 이는 붉은머리가 집중되어 있는 러시아계와의 혼혈 영향도 고려 해 봐야 한다.

10. 관련 문서


[1] 다만 이걸 고려에게만 준 특혜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독립성이나 자치성과 관련짓는 것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견해도 있다. 고려 뿐 아니라 다른 정복지의 풍습도 인정받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로, 실제로 일 칸국 같은 경우 정복지인 페르시아의 종교를 존중하다 못해 아예 이슬람을 국교로 삼기까지 했다.[2] 사실 몽골인들 범죄 양상을 보면 한국인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성범죄나 한국인 대상의 묻지마 살인 같은 것보다, 자기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그 과정에서 상대를 죽거나 다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몽골인들끼리의 문제다 보니 한국인이 관심 가질 이유가 적은 것.[3] 통일 없이 북한의 개방으로 인해 연결될 가능성도 있으나, 이렇게 되면 북한쪽 항구에 남한이 투자할메리트가 없다. 오히려 금강산이나 개성공단의 선례때문에 철도를 제외한 도시의 투자에는 소극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상술한대로 전라선을 통해서 내려오는게 더 나을 정도. 이래야 북한이 갑자기 철도를 막더라도 국제여론의 반발을 사도록 할 수가 있다. [4] 몽골의 음식 자체가 육류 위주인데다가 기름기가 많은 음식도 많아서 비만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5] 사실 네이버 뉴스 댓글창은 극단주의적인 사상이 횡행하기에, 이를 정상적인 여론이라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오죽하면 이미 연예 기사와 스포츠 기사에서는 댓글이 사라졌을 지경.[6] 2013년 라오스 탈북 9명 청소년 사건이 있었는데, 한국 정부와 외교관, 라오스 당국, 탈북자들 간의 공방이 이어졌는데, 결국 9명 모두 북송되어 라오스 루트가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