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목록

 


1. 개요
2. 한국사
3. 국외


1. 개요


테러 사건이나 제노사이드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작성시 시대순으로 정리할 것.

2. 한국사


한반도 역사상에도 학살은 적지않게 일어났다
  • 여요전쟁 거란군의 민간인 학살
  • 무신 정변 당시 문벌 귀족 학살
  • 진주 민란 시기에 벌어진 정방의 일당의 학살[1]
  • 목호의 난 당시 제주도민 학살[2]
  • 여몽전쟁 당시 몽골군의 민간인 학살
  • 홍건적의 난 고려인 학살
  •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 동래성 전투 후 민간인 학살[3]
    • 제2차 진주성 전투 후 민간인 학살
    • 남원 전투 후 민간인 학살
    • 히데요시의 민간인 학살 명령
    • 귀무덤
  • 정묘호란, 병자호란 청군의 민간인 학살
  • 홍경래의 난 직후의 관련자 집단처형
  • 동학 농민 운동 당시 관군, 일본군, 민보군에 의한 동학농민군 학살
  • 신축민란 당시의 가톨릭 교도 학살
  • 남한 대토벌 작전[4]
  • 제암리 학살사건
  • 1931년 화교배척폭동
  • 북한 정권 성립 직후 토지개혁에 저항하는 지주,유산가 학살.
  •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 제주 4.3 사건
  • 여순사건
  • 6.25 전쟁
    • 보도연맹 학살사건
    •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 파주군 두포리 학살 사건: 1950년 10월 파주군 두포리 장깨다리 근처[5]에서 있었던 철수하던 인민군에 의하여 자행된 민간인 학살.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중에는 애국청년단과 장깨다리 근교 마을 주민들이 대다수였다. 생존자는 오직 한명이었고,[6] 매우 참혹한 사건이지만 다른 학살극에 비해 제대로 알려져 있는 정보가 매우 적은 편이다. 인민군들이 용의주도하게 증거를 말살하려 했지만 생존자가 남아있었고, 마침 인민군을 추격하던 호주군이 파주를 지나가면서 기록한 매체들이 남아있어서 세간에 그나마 알려질 수 있었다.
    • 신천·재령군 봉기[7]
    •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8]
    •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 6.25 전쟁 학살/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
    •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9]
    • 거창 양민 학살사건
    • 해주시 학살 사건[10]
    • 국민방위군 사건[11]
  • 4.19 혁명 당시 경찰이 저지른 시위대 학살
  • 5.18 민주화운동 - 광주 학살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 송림제철소 학살 사건
  • 정치범수용소/북한
  • 창평 정치범수용소 학살 사건

3. 국외


한국인이 학살을 당했거나 학살을 주도한 경우 ☆자로 표시.
  • 로마군유대인들의 반란을[12] 진압했을 때 저질렀던 잔인한 학살들 #1, #2
  • - 교체기 학살[13]
  • 2.28사건[14]
  • 2차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
  • 9.11 테러[15]
  • 30년 전쟁 당시의 독일인 학살
  • 9월 대학살
  • T-4 프로그램[16]
  • 가자 학살
  • 경신 참변[17]
  •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 갈근묘 사건(Gegenmiao massacre)
  • 갈리아 전쟁 당시의 갈리아인 학살
  • 과테말라 내전 당시에 원주민 학살
  • 관동 대지진/일본군의 학살
  • 글렌코 학살(Massacre of Glencoe)[18]
  • 난징 대학살 사건
  •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 니콜라예프스크 사건☆[*A ]
  • 노르웨이 연쇄 테러
  • 다르푸르 학살
  • 다하우 강제수용소 경비병 처형 사건(다하우 해방 후 보복): 대전 말기 미군과 수용자들에 의해서 다하우 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와 수용소 직원(무장친위대) 대략 500명이 구타 밎 총살 등으로 사망한 사건. 수용소의 비극적인 참상에 충격을 받은 미군에 의해서 사건이 일어났고 지휘관들이 제제하는 것이 늦어져서 사망자가 좀 있었다. 물론 미국은 상식이 통하는 나라였기에 이 사건을 일으킨 미군들은 법정에 기소되었으나 형식적으로 재판에 송치만 되었지 실제로 처벌을 받은 병사는 없었다. 엄밀히 전쟁범죄는 맞지만 사실상 자업자득이라 학살 중에서는 동정적인 시선을 받는 편.
  • 대숙청[19]
  • 대약진 운동 당시의 대기근[20]
  • 둘리틀 특공대 보복 학살: 둘리틀 특공대를 보호해줬다는 이유로 중국인 25만 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학살 규모가 난징 대학살과 비슷하지만 엄연히 별개다.
  • 라스쿨라치바니예: 스탈린 시절 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농촌으로부터 무자비한 공출로 인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포함
  • 르파라디 학살: 2차대전 프랑스 침공 당시 본대로부터 낙오되어 적에게 포위된 영국군 왕립 노포크 연대 2대대가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한 뒤 항복하자 2대대를 사로잡은 제3SS사단이 이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사건. 99명 중 2명만이 살아남았다.
  • 리디체 학살
  • 르완다 학살
  • 레오폴 2세의 콩고 학살
  • 마긴다나오 학살
  • 마오쩌둥토지개혁 당시 저항하는 지주,유산가들에 대한 학살.
  • 마녀사냥
  • 마닐라 대학살
  • 마루타[A]
  • 말메디 학살
  • 몽골 제국의 정복전쟁 중 벌어진 학살
  • 칭기즈 칸[21]
  • 문화대혁명[22]
  • 뭄바이 연쇄 테러
  • 민생단 사건☆[*A ]
  • 밀리환초 학살사건☆[*A ]
  • 바비야르 학살
  • 발렌타인 데이 학살[23]
  • 방데 학살
  • 버마 대학살
  • 베트남 전쟁
    • 쩌우독 학살
    • 후에 학살
    • 미라이 학살
    • 김종수 소위 학살 사건[24]
  • 벨라루스 초토화
  • 비스카리 학살(Biscari massacre) [25]
  • 북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 서부개척시대
  • 사브라,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사건 [26]
  • 산악 베이스 사건 / 아사마 산장 사건 [27]
  • 삼보의 난
  • 소련의 1921-22년 사이의 대기근
  • 수정의 밤
  • 숙칭 대학살: 싱가포르 화교 학살.[28]
  • 슈노뉴 학살[29]
  • 시리아 정교도 학살
  • 신멸작전
  • 서주 대학살
  • 시리아 민주화 운동
  • 시마바라의 난 때 벌어진 기독교인, 농민 학살.
  • 신안대학살
  • 십자군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들.
    • 셈린 학살: 군중 십자군이 헝가리에서 저지른 학살.
    • 안티오키아 학살: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행한 대학살.
    • 예루살렘 학살: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행한 대학살.
    • 에데사 학살: 장기가 에데사 백작령을 점령하고 서유럽 기독교도들은 물론, 원주민인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들도 모두 학살한 사건.
    • 리처드 1세의 포로 학살: 살라딘이 약속한 몸값도 지불하지 않고 포로와 성유물도 돌려주지 않자 리처드가 2000여명의 포로들을 학살한 사건. 그러나 살라딘도 약속을 어겼기에 당시 관점에서는 부정적인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
    • 안티오키아 학살: 바이바르스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자행한 학살.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구교도인들의 신교도 학살)
  • 아르헨티나의 원주민 말살 작전(사막 정복작전)
  • 아르메니아 학살
  • 아시리아인 학살
  • 연해주 4월 참변[30]
  • 알제리 전쟁 (프랑스 측이 저지른 것이 더욱 많지만 알제리 측도 프랑스인에 대한 학살들도 있었다.]
  • 암리차르 학살사건
  •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 우서 사건
  • 원폭 및 민간인을 고의적으로 노린 무차별 폭격[33]
    • 폭격을 가한 쪽이 전범국인 경우 : 이쪽은 전범국의 잘못임은 명백하다.
    • 폭격 당한 곳이 전범국인 경우 : 이 경우 선행하는 원인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전범국에게 있다. 평가가 갈릴 수는 있으나 한가지 명백한것은 먼저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폭격을 맞을 상황도 없었을 것이란 점이다. 지금도 학살이다 아니다 의견이 다양하며 전쟁당시 기준 국제법에 따라 전쟁범죄가 아니라는 주장과 현대기준 국제법을 바탕으로 학살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다.
      • 드레스덴 폭격 - 본래 목표는 군수공장 등 산업시설이었으나 기상악화와 부정확한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도 컸다.
      •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31]
      • 도쿄 대공습[32]
      • 원산폭격
  • 우스타샤세르비아인 대량학살
  •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포로 및 민간인 학살
  • 운디드니 학살사건
  • 이라크 내전[34]
  •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지역민에 대한 학살[35]
  •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의 학살[36]
  •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 에스파냐 콩키스타도르의 남미 원주민 학살
  • 장검의 밤
  • 장평대전
  • 제 3차 포에니 전쟁중의 카르타고인 학살
  • 죽음의 철도
  • 준가르 학살
  • 첼레 학살(Celle massacre)[37]
  • 체트니크의 크로아티아인/무슬림 대량 학살[38]
  • 체첸 전쟁 중의 체첸인 학살
  • 천안문 학살
  • 카비앵 학살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같은 편인 독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 카틴 학살
  • 쿄애니 방화사건
  •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교 발포 사건
  • 킬링필드
  • 칸다하르 학살 사건
  • 카니카티 학살[39]
  • 칼라공 학살[40]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에서 벌어진 학살.
  • 파리 코뮌
  • 파키스탄방글라데시인 학살
  • 프랑스 혁명[41]
  •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
  • 핑딩산 학살[42]
  • 하마 학살
  • 해란강 대학살 사건[43]
  • 훈춘 사건[44]
  • 홀로도모르
  • 홀로코스트
  • 훌라 학살
  •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에 의한 학살

4. 가공매체에서의 학살



[1] 1200년 신종(고려) 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공 사노비들이 향리들의 탄압과 착취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엉뚱하게도 이 난리통에 집이 불탄 정방의가 난의 주모자로 오해받아 옥에 갇혔다가 아우에 의해 구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형제는 노비 반란을 등에 업고 불평분자들을 끌어모아 진주 고을을 흽쓸고 다니며 무려 6400여명을 학살하였다고 전해진다. 기가 막힌것은 이때 정방의 일당에게 피해를 입은 진주 백성들이 국가에 도움이 아닌 도적떼 무리에게 의탁하여 정방의 세력과 대결하기까지 하였지만 패퇴해 전멸하였고 정방의는 더더욱 날뛰면서 경남 지방을 휘젓고 다니다가 이듬해 3월에 가서야 진주 사람들에 의해 제거된다.[2] 목호의 난공민왕 집권 당시의 고려에서 원나라와 관련된 '목호'들이 명나라에 말을 바치는 것을 반대하며 저항하자 최영, 염흥방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그러나 진압 와중에 목호들과 연루되어 많은 수의 제주도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고려판 4.3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더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 21세기에 동래성 유적지에서 한곳에 묻힌 다량의 학살 희생자 유골이 발견되 실체가 확인되었고 그 중에는 전투참여가 불가능한 여성과 어린아이의 유골도 발견되었다.[4] 1909년 일제가 의병 진압을 목적으로 한 민간인 학살 작전.[5] 현 파주시 파평면이다.[6] 당시 78세였던 주민이 언론에서 얘기하길,산속에서 한쪽 팔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이 내려와서는, 쇠스랑을 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되묻자 자신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인데,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자신의 처자식은 물론 마을 주민들과 청년들을 세워두고 기관총으로 사살했고,자기 자신은 운 좋게 팔 관통상으로 끝났고,확인사살을 피하기 위해 죽은 척 하고 살아남았다고 사정을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학살의 생존자가 알려준 지점으로 가보니 시체 썩는 냄새가 참혹하다 못해 코가 삐뚤어질 지경이었고 인민군의 잔혹함에 주민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고 증언한 기록이 남아있다.[7] 좌우익 대립에 의한 민간인 학살[8] 국군과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9]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10] 북한군의 자국민 학살[11] 군납비리로 인한 대형 참사. 의도적인 학살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대한청년단 간부들의 미필적 고의가 빚어낸 참극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학살에 비견할 만하다.[12]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대인들의 독립 전쟁이었다.[13] 양주에서만 80만 이상, 광주에서 70만 이상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변발을 거부했다가 학살당하기도 했다.#1, #2 물론 과장일 가능성도 있고, 상당수의 희생자는 명말-청초 사이의 혼란기에 발생된 희생자 전체를 포함한 것이다. 이 혼란기에 지역을 떠난 유민들의 많은 수가 명이 멸망한 뒤 청이 제대로 안정된 뒤에야 나타났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 시기 많은 명나라 유민이 조선과 베트남, 일본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14] 한국인 희생자가 발생했다.[15] 한국인 희생자 발생. 공식 사망자 1명, 비공식 사망자 28명.[16] 장애인에 대한 국가기관의 학살.[17] 다른 이름으로는 간도 참변이며, 강조하여 경신 대참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일제가 마적 토벌이라는 명분 하에 독립군을 소탕할 목적으로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을 대거 학살한 사건. 봉오동 전투에서 일제가 패배하자 일제는 이를 만회위해 훈춘 사건(중국 마적단과 내통하여 훈춘시에 있는 일본 영사관를 고의로 습격한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만주에 군대를 출동시켜 간도에 있는 조선인들을 학살한 사건.[18] 스코틀랜드의 글렌코 지역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의 맥도널드 가문 일원 78명을 학살한 사건이다.[19] 숙청과 고려인 강제이주 과정에서 희생자 발생.[20] 터무니 없는 계획으로 일어난 의도하지 않은 참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마오쩌둥은 자국의 인민이 굶어죽어 감을 분명히 직시했음에도 이를 방관하고 오히려 자신의 체면을 위해 조기에 전국적으로 풀면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던 곡물을 수출하고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하지 않는 악행을 저질러 수천만의 인민을 굶겨죽였다. 저명한 역사학자 디쾨터 교수는 마오쩌둥 집권기의 기근 희생자들은 마오 정권에 의한 학살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A] 조선인 희생자 발생.[21] 유럽-아시아 대륙의 사람들의 1/4를 학살한 인물이다[22] 학살도 많았지만 정확히는 대반달리즘.[23] 1929년 2월 14일, 경찰관으로 위장한 알 카포네 파 조직원들이 라이벌인 조지 모런 파 조직원들을 살해한 사건.[24]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일으킨 학살인 것이 확인된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 이 사건 이외에 한국군이 저질렀다는 다른 학살들은 선전을 목적으로 한 조작이거나 증거는 없고 주장만이 존재하는 의혹 수준이다. 덧붙여 사건을 주도한 김종수 소위는 군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15년 형으로 감형)[25] 1943년 7월 14일, 시칠리 침공 당시 71명의 이탈리아군 포로와 독일군 포로 2명이 미군에 의해 사살된 사건.[26]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시기, 대통령 임기 시작일을 1일 앞두고 대통령 당선인이자 팔랑헤당이라고도 부르는 친미·친서방·친이스라엘 기독교 민병대 카타엡(Kataeb)당의 대표인 바시르 게마옐(بشير الجميّل, Bachir Gemayel)이 시리아 정보원에 의해 암살당하자 제대로 빡친 팔랑헤가 레바논에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봉쇄 후 학살한 사건. 목표는 테러리스트 제압이었다고 하지만, 이미 이 사건은 작전 수일 전에 노출되어서 남자들은 모두 탈출한 뒤였고, 부녀자와 아이들만이 남아있었음에도 3일간에 걸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이 학살을 이스라엘군은 묵인하다 못해서 조명탄까지 쏴주면서 부추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다시 국제적 비난이 쇄도하였다. 학살의 원인인 바시르의 암살을 일으킨 시리아는 아에 모른척 무시했다. 틈바구니에 끼인 나라의 비극이 어떤 건지 잘 알려주는 사건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27] 공산주의 테러집단인 일본 연합적군이 자신들의 멤버들 중 12명에 린치를 가해 살해한 사건[28] 肅清大虐殺.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29] 벨기에 슈노뉴 마을 근처에서 미군이 독일군 포로를 학살한 사건, 말메디 학살의 일로 역으로 보복한것이지만 상대상대인지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30] 조선인 희생자 발생[31] 조선인 희생자 발생[32] 조선인 희생자 발생. 추정치 약 1만명.[33] 단, 이 경우는 당시의 전쟁법을 기준으로는 전쟁범죄가 아니다.[34] 내전 초기 당시 한국인 희생자 발생. 또 한국인이 필리핀에서 ISIL 연계조직 아부 사야프에 의해 피랍되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35] 제노사이드 항목에 보다 자세히 언급된다.[36] 1960년대 수하르토의 쿠데타 이후 공산당 토벌을 빌미로 10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37] 2차대전 때 나치 독일에 의해 벌어진 학살.[38] 2차대전 때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학살. 체트니크 항목도 참조.[39] 1943년 이탈리아 카니카티에서 미군에 의해 민간인이 살해당한 사건.[40]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버마의 칼라공에서 벌인 학살.[41] 특히 방데 전쟁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은 근대적 학살, 제노사이드의 효시로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로 잔혹했다. 해당 항목 참조.[42] 1932년 일본군이 게릴라 토벌을 벌인다며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43] 조선인 희생자 발생[44] 조선인 희생자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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