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일생

 



1. 정치 입문 전
1.1. 출생 및 유년시절
1.2. 학창 시절 : 1953년 ~ 1964년
1.3. 청년기 : 1965년 ~ 1974년
1.4. 법조인 시절 : 1975년 ~ 1988년
2. 정치 입문 후
2.1. 국회의원 시절 : 1988년 ~ 2000년
2.2.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 2000년 ~ 2001년
2.3.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 2002년 12월 19일
2.3.1. 관련 문서
2.4.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시절 : 2003년 ~ 2008년
3. 퇴임 후


1. 정치 입문 전



1.1. 출생 및 유년시절


노무현1946년 9월 1일 일요일 (음력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아버지 노판석(盧判石, 1900~1976)과 어머니 이순례(李順禮, 1914~1998) 사이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외에 이복누나 노명자와 이부누나 김선밀 이 각각 한명씩 있다. 이때 아버지 노판석은 1900년생, 즉 나이가 무려 45세였다고 하니 늦둥이다. 유년시절은 평전에 따르면 가난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노판석은 일제강점기 때 타이어 제조 관련 사업가였으나, 사기로 재산을 잃었고, 노무현이 태어난 때는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안 되어 어머니 이순례가 일을 하여 집안을 간수했다고 말한다. 그의 형 중 큰 형 노영현(盧英賢, 1932~1972)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일찍이 떴고, 노건평(盧建平, 1942~)은 둘째 형이다.

1.2. 학창 시절 : 1953년 ~ 1964년


1953년 진영대창국민학교를 시작으로 학창시절이 시작되었고, 6학년 당시인 1958년에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1959년에 진영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돈이 없어 외상 입학을 했다. 1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이승만 생일 기념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백지 동맹'을 일으켜 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2학년 때 부산에서 시험을 통해서 당시 부산일보의 사장 김지태가 만든 장학회인 부일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1]을 준비했는데,[2] 첫째 형의 권유로 당시 부산에서 꽤 좋은 학교였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도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공부만 하지 못하고 방황도 하고, 숙소도 제대로 없었고, 졸업도 21살 즈음에야 했다. 이 때문에 대학교 진학은 하지 못한 채 학력이 고졸로 마무리되었다.[3][4]

1.3. 청년기 : 1965년 ~ 1974년


고등학교 졸업 즈음 농협 입사시험을 쳤고, 떨어졌다. 한 달 반쯤 개인 회사를 다녔으나, 너무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도 되지 않아 퇴사하고 고시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집 근처의 산자락에 토담집을 만들어 공부했지만, 공부에 필요한 책을 살 돈이 없어 울산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이때 잠시 사고로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예비시험에 합격한 소식을 병상에서 듣게 된다. 당시 고졸 출신이 사법고시를 보기 위해서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해야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그런데 또 반전이 생겼는데, 합격 후 사법고시 학력 제한이 없어진 것이다. 예비시험 합격의 보람이 없어진 것. 그 후에는 계속 고시에 매달렸다.
중간에 34개월(2년 10개월) 쯤 현역병(상병계급으로 제대)으로 12사단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복무 기간은 1968년 3월 ~ 1971년 1월. 2019년 현재 현역 일반병 출신 대통령은 노무현과 문재인 둘 뿐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은 장군 출신이고(육군 대장 예편), 다른 대한민국 대통령들을 보면 이승만, 윤보선은 구한말~일제시대 사람인지라 군대를 안 갔고, 최규하는 일제말에 공무원으로 일해서 군대를 안 갔다. 김영삼은 학도의용군 출신이며, 김대중은 병역사항에 대해 확인이 필요, 이명박은 면제, 박근혜는 병역 대상이 아닌 여자라서 군대를 갈 필요가 없었다. 여튼 상병 전역으로 나오는데,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서 귀환한 병장이 많았기 때문인 데다가 노무현은 분대장을 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병장은 분대장에게만 주는 계급이었는데, 파병 문제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 특별 케이스로 병장 계급을 달아줬다. 전역 이후에는 사법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73년 즈음, 약혼자가 결혼 적령기를 넘어 고시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고, 아이(건호)도 낳았다. 이때는 위의 두 형이 세무 공무원으로 취직해 경제적 사정이 나아졌다고 한다.
1973년부터 사법 시험을 보기 시작해 3번째인 1975년, 30세의 나이사법시험(17회)에 합격하였다.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중 유일한 고졸 출신이었다. 7기 연수생으로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 60명 중 47등으로 수료하였다. 당시 7기 연수생 출신 중 유명인으로는 안대희 전 대법관, 진영 국회의원 등이 있다. 이중 노무현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인 인사들을 모은게 참여정부 이후 알려진 일명 '8인회'이다. 공식적으로 '8인회'라는 조직을 만든 것은 물론 아니고 그만큼 8명이 가까운 사이였다는 뜻. 그는 을 벌 수 있는 변호사를 희망했지만, 형과 어머니의 권유로 판사 임용을 신청한다. 이때는 성적순으로 판사 검사 변호사가 임용되던 시기였다. 1977년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다. 그의 판사 시절을 회상한 기록에 따르면 자신에게 맞지 않은 일이 많았다고 한다.

1.4. 법조인 시절 : 1975년 ~ 1988년


대전지방법원에서 7개월간의 판사 생활을 하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사임했다. 이는 1992년명예훼손과 관련되어 서울민사지방법원 판결을 통해 사실임이 인정되었다. "원고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으나, 7개월만에 판사직을 사임한 주된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세 전문 변호사로,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한마디로 승률이 높아 돈 잘 벌었다는 이야기다.[5] 다른 변호사들과는 달리 상고(현 개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 세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법은 회계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기에, 일반 변호사들이 파고들기에는 수월하지 않은 분야이다.[6]
'''변호사 시절의 모습'''
개업 초기에는 형사사건을 조금 맡다가 이후 민사사건을 주로 맡으며, 등기업무를 취급하여 부산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부산에 개업한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심지어 노무현까지 불과 3명이었다는 설까지 있던 시절에 법무사들의 밥줄인 등기업무를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미웠을 것이다.[7] 다만 등기업무 자체는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1981년, 우연히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변론을 맡게 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는데, 이 사건을 위해 그는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한다. 하지만 담당 검사 최병국이 변호에 참가하면 공범으로 함께 기소해 변호사 자격을 정지시키겠다고 협박하자 변호인단에서 빠졌고, 자신을 대신해 노무현에게 변호인단 참여를 부탁한다. 당시 변호인단으로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총 5명이었다. 이는 노무현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동지인 문재인은 사법 연수원을 1982년 8월 수료했으므로 부림사건 변호에는 참여한 적이 없다.
이때 선배 변호사인 김광일의 권유로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 두기는 했으나, 재판에 들어가기 전까진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 사고를 친 것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이 사건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고 한다.
재판에서도 변호인단 중 가장 서열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림 사건 피해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본인도 피고인인마냥 열성으로 나서서 변호를 했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도 재판 초반에는 변호사가 저렇게 흥분해서 변론을 해도 되나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상. 그리고 일부 피고인들이 '''완전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재야의 스타가 된다.
이후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주거나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혹은 담배 몇 갑에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한다. 각종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유명했던 표현 중 아스팔트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노무현이 당시 만든 말이라 한다. 그는 연설을 하다가 전경의 최루탄을 맞고 기절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마이크를 놓지 않고 시종일관 꾸짖는 연설을 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와 관련된 이미지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검찰은 그를 구속하였고, 안기부(안기부는 국정원의 전신)는 변협에 압력을 넣어서 그의 변호사 면허를 강제 정지시키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등 불법으로 수시로 감시를 했지만, 직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변호사 시절 부산 서구에 노동법률사무소를 열어 운영할 때 만나서 의기투합한 사람이 문재인이다. 노무현의 고시공부 동지이자 연수원 동기 박정규가 문재인을 노무현에게 소개시켜준 것이 인연이다. 이 둘이 훗날 대통령이 됐다는 걸 알면 말 그대로 기연.

2. 정치 입문 후



2.1. 국회의원 시절 : 1988년 ~ 2000년


인권 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당시 실세였던 민주정의당 허삼수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 일설에는 이 때 노무현이 김영삼에게 쎈놈과 붙게 해 달라 해서 허삼수와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설이 사실이면 진짜로 노무현은 간이 큰 셈.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5공청문회)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5공 청문회 때 발의자로 등장해 증인으로 참석한 정주영을 상대로 질의에 앞서 한 말이 매우 유명해졌다.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현대그룹의 수장이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타공인 대한민국 대표 기업가였다.[8] 게다가 특유의 뚝심있는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정치권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기도 힘든 인물이었는데, '''그런 정 회장이 일개 초선 의원, 그것도 겨우 40대 초반의 정치 신인 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뚝심 어디 안 가서 여타 증인들과는 달리 곧 지지 않고 잘 맞받아쳐서 노무현의 "의회는 '''바지저고리'''에 불과하고요?" 라고 물으니 "뭐 그런 것도 있죠." 식으로 대담하게 답했다.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 동안에 34억 5천만 원이라는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 주려고 일하다가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천만 원을 주느냐, 8천만 원을 주느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답변하십시오!"
-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 시절 제5공화국 비리 청문회 中에서.'''

전두환과의 청문회 이후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던진 것도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노무현 명패 사건을 참조하면 된다.
이 청문회에서 5공 시절 억눌려 지내던 국민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통쾌한 추궁으로 유명해지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 유명세로 인해 시간이 흘러서 대통령 선거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평가를 받게 되는 큰 자산이 되었다. 이러한 활약상으로 이 무렵에 김영삼은 노무현을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image][9]

'''"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 3당 합당에 반대하던 당시 노무현 초선의원.[10]


'''3당 합당에 분개한 노무현 당시 의원의 발언. 6분 50초부터'''
'''그리고 당시 초선의원이었던 노무현은 5공 비리 청문회를 비롯해, 3당 합당을 야합이라 비판하며 거부하고 정치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던 김영삼의 곁을 떠나면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꼬마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대변인과 부총재를 지냈다.
제13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 후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구에 재출마했으나 재선에 실패하면서 낙선하였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 역시 낙선했다. 또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지만, 이명박, 이종찬 등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 후 김원기, 김정길, 이부영, 박계동, 김부겸 등의 민주당 내 반 이기택 성향 지구당위원장들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일명 '통추')를 결성했으나, 1997년 대선을 앞두고 통추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여부를 놓고 분열되자 한나라당행을 선택한 이부영, 김부겸 등과 달리 쿠데타와 3당 합당의 원죄가 있는 당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며,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다. 1997년 대선 당시 노무현의 TV 찬조연설
이후 이명박 의원이 1998년 초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려서 국회의원 직을 자진사임했고[11] 노무현은 그해 7월의 보궐 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장직에 출마 선언을 한 상태였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고건 전 총리[12] 영입에 따라 출마를 포기하고 대신 종로구에 공천된 것이다. 이 때 역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던 동교동계 한광옥과 달리 노무현이 시장 후보 자리를 쿨하게 포기하자, DJ는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해야 한다"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지만, 2년 뒤인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에 출마한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전부 반대했다. 총선 이후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노무현을 취재했는데, 권양숙 여사와 딸 노정연씨가 '''"종로에서 한 번만 더 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부산에 내려가자고 얘기했다."'''는 언급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고집은 확고했다. 참고로 출마한 선거구는 북구·강서구 을이었는데 선거운동 초반에는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결국 막판 한나라당 표심이 결집하며 허태열[13]에게 밀려 35.2%의 득표율로 낙선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계속 이어갔던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낙선 후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낙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2.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 2000년 ~ 2001년



'''"많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현재보다 미래가 있는 부처입니다. 우리 어깨 위에 한국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노력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하십시오. 자신 있게 일하십시오. 일을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십시오. 반대의견이 있으면 직을 걸고 반대하십시오. 현장에 가서 보고 판단하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는 한 팀입니다."'''
- '''2000년 8월 7일, 노무현의 해양수산부장관 취임사.'''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낙선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부터 해양수산부장관을 8개월 동안 역임했다.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직원들과 같이 이메일로 대화를 하고 수평적 토론 문화를 새로이 정립했고, 다면평가를 비롯한 인사평가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공직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공무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탈권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특유의 성격답게 장관에게 주어지는 특별 대접 같은 의전도 모두 없앴다고 한다. 장관 출근시간에 맞춰서 현관에 수위장과 비서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용차가 도착하면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문을 열어주던 관행도 중단시켰다고 한다. 또한, 지방 출장에서 지역공관장이 좋은 차를 빌려서 마중을 나오던 관행도 못 하게 했다고 한다. #1, #2
노무현 스스로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를 저술해서 장관으로서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2.3.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 2002년 12월 19일


'''대선 후보 시절 유세하는 모습'''
2001년 12월,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때 노무현은 행정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은 아니었고 당내의 다른 대권주자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지지율은 미미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과,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경선과정에 대해서는 제16대 대통령 선거#s-3.1 문서에서 다룬다.
이때 처음으로 유시민을 비롯해 훗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비서관, 실장으로 근무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당시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새 시대가 찾아올 것 같기는 한데, 그 때가 되면 자신은 없을 것 같다 말했다고 한다. 그걸 들은 유시민은 새 시대의 첫 파도에 올라탄 거라서 자신이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지만 그 시대는 분명 온다 말했고, 노무현은 "새 시대가 오기만 한다면 내가 없어도 어때"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노무현 본인도 그렇게 인생을 마무리할 줄은 전혀 몰랐겠지만,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보면 굉장히 섬뜩하게 들릴 지경.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이회창 후보와 맞붙게 되었다. 노무현 측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회창 측은 부패 정권 심판, 정권교체 등의 공약을 내세워 치열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도 제기되었던 아들 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재차 인터넷에 퍼져나가자, 그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후에 이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은 의혹에 불과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국은 정치공세에 불과했던 셈.[14]
초반 기선은 노무현이 앞서는 듯했지만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나서 선거악재가 터진 데다가 2002년 한일월드컵에 관심이 쏠리면서 투표율이 낮게 나왔고 결국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이 큰 타격을 입고 이회창이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당시 제3 후보로 떠오르던 정몽준노무현을 완전히 압도할 기세는 아니었고, 이미 1987년 대선의 선례도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는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인기가 올라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기로 했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단일화 진행 후에는 이회창 후보를 여유있게 앞섰지만 대선 전날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래서, 노무현 후보가 직접 정몽준의 집으로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서 분노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불러모으는 효과를 낳았다는 분석이 있다.

결국,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 후보가 48.9%를 얻으면서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민주당계 정당에서 최초의 영남 출신, 즉 지역주의를 타파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2.3.1. 관련 문서



2.4.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시절 : 2003년 ~ 2008년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당 분당이란 초유의 사태 속에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뒤이은 17대 총선 결과 헌정 사상 최초로 개혁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상황이 연출되며 기대를 모았다.[15]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하였으며, 2007년 10월 2일 ~ 4일까지 북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7년 12월 11일에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서둘러 대처를 했으며, 대일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재임 기간 내(2003년 ~ 2008년)에 있던 업적과 실책 그리고 사건사고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대한민국 대통령 문단 및 이하문단참여정부 참조하길 바란다.
정부의 명칭은 참여정부이다. 정부 출범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들로는 아래와 같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4대 악법이라고 칭했다.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사고는 사회에 영향을 끼쳤거나 매우 큰 사건들만 서술한다.
  • : 사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작 정확히 1주일 전인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말기인 2003년 2월 18일 일어난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하기 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임기가 절묘하게 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여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뿐만 아닌 노무현 대통령까지 싸늘한 시선으로 대했으며, 공식 석상으로 사과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2008년의 숭례문 방화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
  • 한미 FTA 사태: 임기 내내 농민 및 노동자들과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극렬 대립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 노동자들은 분신자살, 음독자살까지 택하면서 "한미 FTA 절대 반대!"를 외쳤으며 농민들은 해외 원정 시위에 나섰다. 시위로 인해 부산 APEC에선 명박산성의 원조인 무현산성이 등장하였으며 여의도 농민 집회에선 강제 해산 과정 중에 두 명의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협상 장소 중 하나였던 제주도에선 4.3 사건 이후로 최대 규모의 공권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 전염병 사스 유입: 2003년 4월 23일, 관계차관 대책회의를 열어 보건복지부는 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가동시키겠다고 보고 하였다. 보건원의 사스 전담 인력은 4~5명에 불과하였지만 현장 간호사에게 그 당시 국무총리인 고건 총리가 사무실 팩스로 직보하면 바로 처리하는 빠른 대응책과 이 뿐만이 아니라 상위 부처인 국무조정실이 나서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하고 사스방역도 국가방어하는일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로 군의관과 군 간호 인력이 공항 사스 방력에 투입되었으며 민간에도 협력을 구하여 대한병원협회장, 대한의사협회장,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장 등 민간 의료단체 대표를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그렇게 사스방역은 전쟁처럼 치뤄졌으며 의심 환자는 있었지만 확진 환자는 1명도 내지 않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WHO는 우리나라가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내놨으며 2003년 7월 31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주례 오찬에서 '한국판 CDC(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가 필요하다는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의 건의를 전달했는데 받아들여져 다음 해인 2004년 1월 19일 질병관리본부가 정부 직속산하로 정식 출범하였다. 링크.

3. 퇴임 후


손녀 노서은과 자전거를 타고 봉하들판을 산책하는 노무현. 이는 귀향 후 노무현의 서민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으며 이 후 노무현재단 로고에도 이 모습이 들어갔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분들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발췌-

2008년 2월 25일, 대통령 5년 임기를 마친 당일 10시 30분에 청와대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한뒤 청와대에서 완전히 퇴장하였고, 후임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대통령으로서 모든 행보를 마친뒤 대통령 자리에서 완전히 퇴임했다. 이후 KTX를 타고 퇴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이 아닌 고향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했는데 퇴임 대통령이 고향으로 귀향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김경수, 양정철, 김정호 등은 노무현과 함께 귀농해서 그가 죽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다.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과 따뜻함 때문에 비서 및 측근들의 충성심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비서들과 측근들을 막 대하고 조금의 흠이라도 생기면 토사구팽을 하여서 구속 당시에 곁에 아무도 없었던 이명박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명예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은 공장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살리기 위해 봉하마을 주민 및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주우며 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화포천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거나 불법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화포천 지킴이'를 신설하여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죽은 하천이라 불리던 화포천은 2009년 2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으며, 멸종위기의 동·식물을 포함하여 600여 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 되었다. 훗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나고 수 년 뒤 이 화포천에 국내에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가 일본 도요요카 시에서 건너와 정착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참조.
친환경 농법인 '오리 농법'을 도입하고자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청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직접 비법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초기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리 농법이 성공을 거두자 현재는 거의 모든 봉하 마을의 가구들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한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장군차를 재배하여 마을의 특산물로 만들었고, 늘어나는 마을 방문객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 및 동물원의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에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방문객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마을 앞에 생태 공원을 조성하여 연꽃 등 각종 수생 식물을 심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격의없는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의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보면 30대 초반의 남성이 60대 나이의 전직 대통령에게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니 형님 합시다”고 제안하자 “형님 하려면 내 말 잘 들어야 하는데…”라며 유머로 응수하거나 “여기 좀 봐주세요”라며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에게 “(그 카메라는) 줌이 안 되네요. 그럼 그쪽으로 가서 서비스 할게요.”라고 응답하는 등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 또한 노무현은 관광객들과의 만남에서 이런저런 근황을 전하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열창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영상, 영상2, 영상3, 노래영상.
노무현 쪽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방문할 거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시절에는 욕하던 사람들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통령 시절에는 참여정부를 욕했지만 노무현이 만나고 싶어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환경운동을 하며 주민, 관광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외신에도 신선하게 비쳤는지 뉴욕타임즈에서는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낙향한 이후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 및 주요 매체들도 노무현이 하천에 나가 직접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진을 게재하며 "버젓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의 네티즌들도 "중국에서는 퇴직 후 몇 채의 호화 주택과 몇 백만 위안의 주식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한국의 대통령과 우리(중국)의 관리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하였다. #
귀향한 노무현을 보러온 관광객들 덕분에 김해시는 300억원 가량의 이익을 보았다. 봉하마을 인근의 주유소, 식당 등의 매출이 급증했고, 김수로 왕릉, 김해미술관, 김해박물관 등의 관광지들을 찾은 관광객들의 숫자도 덩달아 22% 이상 증가하였다. # 이 같은 관광객 증가 현상은 전국에서 노무현의 사저와 생가를 보러 온 관광객이 봉하마을을 둘러본 뒤 다른 관광지도 둘러보는 이른바 ‘전 대통령 특수’ 때문인 것으로 김해시는 분석하였다.
노무현을 찾으러 김해를 찾는 관광객은 평일에는 하루 3천명, 주말에는 1만명에 이르렀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노무현은 평일엔 6번 정도, 주말엔 10번 정도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아 왔는데, 무턱대고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찾아온 여성부터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노무현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법도 불사하겠다며 협박하는 남성들까지 찾아오는 등, 봉하마을이 '국민 하소연' 장소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노무현의 인간적이고 신선한 모습에 호감을 느껴 찾아온 것이다.# 노무현의 홈페이지엔 2008년 4월 15일까지 3만 6천건이나 되는 네티즌들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으며 대부분이 응원과 격려의 글이었다.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서 당시 노무현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아카이브에 보존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 노무현이 퇴임 후 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과 당시 네티즌들이 단 댓글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씩 보다 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송철호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된 후의 방송 출연 중의 언급에 의하면 노무현은 아직 지역주의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면서,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본인이 다시 총선에 나갈 생각이 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퇴임 대통령들은 정치인으로서 최종 목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므로 정치에서 은퇴하는 게 보통이지만, 대통령만 다시 못할 뿐 그 외의 선거에 출마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따로 없다.[17] 당시 나이도 60대 초반으로 정치인으로서는 고령이 아니었고, 이 주장에 따르면 퇴임 후 서울 사저가 아닌 봉하마을로 귀향한 것도 영남 지역구 기반 다지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정말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생각을 노무현 본인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후술할 수사와 일련의 사건으로 그의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다.

3.1. 사망



[1] 참고로 당시 행정고등고시는 3급 채용.[2] 1960년대 당대에는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터에서 일하거나 부모님 일을 돕는 청소년들이 많았고, 중학교 진학률도 40~50%대에 머물렀었기때문에 중졸이 특별히 낮은 학력은 아니었다. 중학교 진학이 대중화된 것은 1970년대 들어와서부터이며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진학이 대중화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3]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둘뿐인 고졸 출신. 단, 김대중은 건국대학 합격 사실을 대선 프로필 등에 적을 때가 있었으므로 확실한 고졸 출신 대통령은 현 시점에서는 노무현 한 사람뿐이라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역대 대통령과 비교되어서, 혹은 법조인 치고 학력이 낮아서 낮은 학력이라고 하는 것이지 당시에는 고졸자 수가 별로 많지 않았기때문에 고졸도 고학력자 취급으로 사회에서 귀한인재로 나름대로 대접받았다.[4]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1960년대의 중학교 진학률은 위에 언급되었고 고등학교 진학률은 상승하는 추이이기는 했지만 전체 청소년들 가운데서 1/3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거기에다가 대학 진학률은 이 보다 훨씬 낮아서 1965년 시점에는 대학생 수가 10만명인데 중퇴자 수까지 감안해도 대학진학률은 높아봐야 3% 이내에 불과했다. 이 정도로 학력이 처참했던 시절이었기에 고졸이라도 은행이나 중견기업 사무직같은 꽤 괜찮은 직장에 취직이 가능했던 것이었다.[5] 다만 당시엔 승률과 관계없이 변호사들은 다들 부자였다. 1년에 사시로 고작 100명을 선발했기 때문. 그나마 그 100명들 마저도 대부분 커리어를 국가 공무원(판,검사)으로 시작했기에 민간에 변호사가 희귀할 수 밖에 없었다. 베리타스 법학원의 헌법 강사 금동흠에 따르면 당시 부산에서 영업했던 변호사 숫자는 한 자리였다고.[6] 그런면에서 영화 변호인(영화)의 고증은 잘된편이다. 변호사는 그당시 한가지만 잘해도 돈을 잘벌던 시기였다.[7] 노무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변호인(영화)에서도 법무사들이 노무현을 모델로 한 주인공 송우석의 사무실로 찾아와 자신들의 밥줄을 빼앗는다고 시위를 하면서 항의를 하자 부당하면 고소를 하라면서 대응하는 모습이 나온다.[8] 지금이야 왕자의 난으로 쪼개졌지만 현대는 한때 현재의 삼성의 아우라를 초월하는 급의 '''압도적 재계 1위 그룹이었다.'''[9] 사진에서 주먹을 움켜쥔 가운데 인물이 노무현 前 대통령 (당시에는 초선의원) 이고, 그의 오른쪽에서 눈을 부릅뜨고 외치는 사람이 김상현 前 의원이다. 참고로 그 앞쪽에 앉아서 웃고 있는 사람은 김우석 前 의원으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건설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한테 뇌물을 받은 것이 폭로되면서 구속되었다.[10] 그의 격렬한 항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직후 "신당 창당을 위한 만세 삼창을 하겠습니다."가 나오고 사람들은 자화자찬을 하면서 만세를 부른다.[11] 1998년,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당선 무효형이 선고되기 전에 자진사퇴한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당선 무효형확정되면서 1998년 서울특별시장 출마에도 실패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이 된 것은 사면 복권된 2002년의 일이다.[12] 문민정부에서 총리를 지냈고,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두 번째 총리에 오른다.[13] 훗날 박근혜의 대통령비서실장[14] 이 사건에 대해 검찰은 2002년 8월부터 10월까지 수사에 착수하였지만, 혐의 없음으로 기소하지 않은 채 종결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나라당의 청구로 재판이 성사되어, 2005년 5월, 대법원은 정연씨의 병역비리 의혹이 사실무근이라 판결하였다. 2002가합40574 참조.[15] 엄밀히는 출범 직후엔 개혁진영이 근소하게나마 소수파였으며, 열린우리당 창당 후에는 여당 초유의 의석 제3당이었다. 17대 총선 이후 민주화 이후 첫 여대야소로 모든 것이 뒤집혔지만.[16] 이명박 재임 중 일어난 사건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2008년 2월 10일 발발한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 임기 종료 날짜인 2월 25일 이전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절묘하게 낀 시기였다. 본인도 사고현장에 등장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울특별시장 시절에 숭례문 개방을 진행했기 때문에 이명박도 관련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사후 처리도 대부분 이명박 재임 중에 진행되었고, 복원은 박근혜 정부 시절에 완료되었다.[17] 2020년 기준으로는 윤보선이 대통령 퇴임 후 다시 총선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유일한 사례다.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는 퇴임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될 시 임기기간 동안에는 전직대통령 연금이 지급되지 않는 규정도 있다.단 윤보선이 대통령을 맡은 때와 노무현 때의 대통령 관련 법이 달랐고 지위도 차이가 많이 났음을 감안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