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선)/업적
1. 서론
임금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매,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롭고,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에 있을 때부터 배우기를 좋아하되 게으르지 않아,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일찍이 여러 달 동안 편치 않았는데도 글읽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태종(太宗)이 근심하여 명하여 서적(書籍)을 거두어 감추게 하였는데, 사이에 한 책이 남아 있어 날마다 외우기를 마지 않으니, 대개 천성이 이와 같았다. 즉위함에 미쳐, 매일 사야(四夜) 면 옷을 입고, 날이 환하게 밝으면 조회를 받고, 다음에 정사를 보고, 다음에는 윤대(輪對)를 행하고, 다음 경연(經筵)에 나아가기를 한 번도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두고 글 잘하는 선비를 뽑아 고문(顧問)으로 하고, 경서와 역사를 열람할 때는 즐거워하여 싫어할 줄을 모르고, 희귀한 문적이나 옛사람이 남기고 간 글을 한 번 보면 잊지 않으며 증빙(證憑)과 원용(援用)을 살펴 조사하여서, 힘써 정신차려 다스리기를 도모하기를 처음과 나중이 한결같아, 문(文)과 무(武)의 정치가 빠짐 없이 잘 되었고, 예악(禮樂)의 문(文)을 모두 일으켰으매, 종률(鍾律)과 역상(曆象)의 법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에는 알지도 못하던 것인데, 모두 임금이 발명한 것이고, 구족(九族)과 도탑게 화목하였으며, 두 형에게 우애하니, 사람이 이간질하는 말을 못 하였다. 신하를 부리기를 예도로써 하고, 간(諫)하는 말을 어기지 않았으며, 대국을 섬기기를 정성으로써 하였고, 이웃나라를 사귀기를 신의로써 하였다. 인륜에 밝았고 모든 사물에 자상하니, 남쪽과 북녘이 복종하여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살아가기를 즐겨한 지 무릇 30여 년이다. 거룩한 덕이 높고 높으매, 사람들이 이름을 짓지 못하여 당시에 해동 요순(海東堯舜)이라 불렀다. 늦으막에 비록 불사(佛事)로써 혹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한번도 향을 올리거나 부처에게 절한 적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만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 2월 17일 첫 번째 기사.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여기서 '하늘이 내리신 성인'의 원문은 天縱之聖(천종지성). 이 말은 공자나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관용구이다. 딱히 세종에게만 쓰인 독특한 표현은 아니지만[1] 정인지는 물론 당시 신하들이 세종에 대해 가졌던 공통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 농사직설: 조선 풍토에 맞는 농서 편찬 지시.
- 대마도 정벌: 이종무 장군에게 명해 왜구를 토벌.[2]
- 4군 6진 개척: 최윤덕 장군(4군)과 김종서 장군(6진)에게 명해 두만강까지 영토를 확장.
- 집현전: 정책, 학문 연구 및 국왕자문기구 설립.
- 고려사 편찬.
- 훈민정음: 세종대왕 최대의 업적이자, 민족 역사상 최대의 업적.
- 정간보: 박연이 음악 정리, 새로운 악기 개발.
- 속육전, 등록 등의 법전 편찬 및 정리.
-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 등 발명.
- 유교 사상 발전.
- 전세 제도 확립.
- 총통, 신기전, 화차를 비롯한 각종 화약 무기 대대적 개발, 개량.
-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인 칠정산 편찬.
- 찜질방 발명
사실상 신하와 왕의 학술 토론회인 경연도 고려 예종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상설화 된 것은 조선 세종부터다. 상설화된 것은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는지 세종은 경연 때마다 신하들 공부 안 했다며 잘 굴려댔다(....). 재미있는 점은 세종 시절이면 왕권이 충분히 강화된 시점인데 왕권 강화책을 강조하지 않으며 신하들과 나라를 어떻게 꾸려갈지 매주 이야기 했다는것. 이것으로 이 분이 왜 성군이고 어떻게 이 치세 때 좋은 인재들이 나온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중에서, 전세 제도의 확립 과정에서 토지 질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세법인 '공법'을 제정하려 할 때에는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행하기도 했다. 1430년 전국의 17만여 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반 년 남짓 소요되었는데 공법 찬성은 9만 8천여 표, 반대는 7만 4천여 표였다. 또 추가로 반대표가 더 많았던 지방에 대해 어떤 점에서 반대했는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했다고 한다.[3]
과학 기술의 경우, 1983년 이토 준타로를 비롯한 일본 도쿄대 연구진이 편찬한 ‘과학사기술사 사전’에 따르면 1400년 ~ 1450년 사이의 세계 과학 기술 주요 업적으로 올라온 건수가 한국 21건이나 되는데 거진 세종 시대의 업적들이다. 동시기 중국은 4건, 일본 0건, 동아시아 이외 전 지역 19건이다.기사관련 포스팅. 글 밑부분 참조
백성들을 사랑하고 신하를 존중하며, 학문을 장려하고 재사를 등용하는 이상적인 유교적 성군으로 꼽히며 당대에 이미 고대 중국의 성군인 요와 순에 비견되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부르며 칭송을 받았다.[4] 일반적으로 태조 시절은 신권이 강하고, 태종 시절은 왕권이 강하며, 세종 시절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때로 여겨진다.
다만, 세종대왕 집권 후기에는 왕권 강화 - 종친에게 적극적으로 정책을 맡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사실 왕권 / 신권 대립 문제가 애초에 존재 자체부터 문제시 되는 떡밥 중 하나. 예컨대 신권의 대표자였던 정도전은 막상 태조가 없으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태종의 방식은 정도전 방식보다 특권층의 권한을 확장시켜주는 식이었다. 세종 중기를 거치며 특권층이 짝짓기를 시작하면서 세종의 정책에 반발할 세력을 키웠기에 세종도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열거하지만,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 일부에서 가림토나 신대문자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환빠와 일빠의 드립이고,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소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5] 에게 주는 묘호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원래는 정인지 등이 문치에 공덕이 있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인 "문종(文宗)"으로 묘호를 정하자 하였으나 나중에 그 묘호를 받게 되는 아들이 반대하면서 "4군 6진의 업적이 있으므로 세종으로 묘호를 정해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렇게 세종이 되었다.[6] 아무튼 세종은 대내외적으로 전성기를 이끌어 낸점이 인정받아 아들 문종이 세종이란 묘호를 올렸다.
정리하자면, 어쩌다 왕의 운명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마치 왕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집권할 때의 상황 또한 정말로 '''하늘이 내린 군주'''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세종이 선정을 펼치기에 좋았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혼란기에서 안정기로 접어들었으며, 선대 왕이던 태종의 엄청난 왕권 강화로 무리 없이 정책을 집행하며 정치를 할 수 있었던 점,[7] 신생 국가답게 진보적인 인재들이 재야에 많았던 점, 빼어난 인용술로 개성넘치는 관료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점, 젊은 세대들 또한 고려 때 태어나 자라난 세대들에서 조선 건국 이후 태어나 자란 세대들로 교체되어서 백성들이 사실상 조선으로 동화되었다는 점, 대외적 / 대내적으로는 국가급 스케일의 큰 위협이 될만한 요소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죽은 후에도 조선왕조가 끝날때까지 모든 왕과 문무백관 그리고 백성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고, 조선 왕조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존경받고 있다. 세종 정도로 왕조내내 존경받았던 군주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8] 과 고려의 현종대왕 정도이다.[9]
2. 상세
2.1. 농업 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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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조선 세종 때 경작 면적은 약 150만 ~ 170만 헥타르인데 이 수치를 최초로 뛰어넘은 것은 1910년 ~ 1918년 동안 진행된 일본의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토지 조사 사업 때로, 이때 조사된 토지 조사량이 약 200만 헥타르가량 된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면 교과서에서 조선의 농업을 다시 한 번 보자. 조선 세종 때는 조선 후기에 등장한 농업 개혁들과 이앙법이 없는 상당히 뒤떨어지던 시대였는데도 저런 수치가 나온 것이다.[10] 쉽게 말해서 '''조선 세종 대의 농업량을 이기는 데 걸린 시간은 약 500년이다!'''
다만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세종 시기의 생산량이나 토지 결수가 조선 중후기보다 많았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11] 실제 생산량은 분명히 조선 후기가 조선 초기 세종대왕 치세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 실제 역사에서 나타난 인구 / 토지의 경우 진짜 인구 수가 아니라 국가 권력에 의해 파악된 것이다. 즉 세종처럼 이렇게 파악된 것은 그만큼 세종 대의 '''호적과 세수가 제대로 파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 세종대왕의 진정한 업적은 생산량의 증가가 아닌 철저한 토지 관리로 인한 세수의 증가인 것. 특히 숨겨놓은 토지인 은결을 세종 시기에는 전수조사를 해서 제대로 장부에 표기해 놓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양안에 표시되지 않는 결수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실제 수세 결수와 전체 결수가 차이나는 것은 내수사나 지방 관아, 그리고 서원 소유의 토지 때문으로, 이들은 중앙 정부에서 수세 대상 토지가 아니었다. 지방 재정 운용을 위해서 지방 수령들이 운용하는 토지들이 필요했기 때문. 특히 대동법이 시행된 인조 ~ 정조 시기의 수세 결수가 늘어나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물론 농사직설 등의 편찬과 더불어 긴 평화기였음을 감안하면 농업 생산량이 어느 정도 증가세를 그렸음은 추론할 수 있다.
2.2. 교육 분야
유명한 일화
세종의 자상함을 설명할 때 주로 드는 '훈훈한' 일화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공부하던 세종대왕의 학구열을 증명하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입장을 바꾸어 신숙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왕은 일어나서 책 보고 있는데 자기가 먼저 곯아떨어졌으니 오싹한 이야기다. 내리갈굼이 뻔히 보이니... 물론 일하다 일하다 결국 정신 놓고 자 버릴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그랬겠지만...
워낙 공부벌레다 보니, 세종대왕은 경학에도 뛰어나서, 본래는 왕이 신하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경연을 되레 신하들이 왕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자리로 만들어버린 초인이기도 했다. 그 관리들이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조선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사람들임을 생각해보자. (세종 이후 이런 식으로 경연을 한 조선 임금은 정조. 그래서 농담삼아 조선의 왕들 가운데 이과 1등은 세종, 문과 1등은 정조라고..). 그래서 여태껏 일단 과거에 붙어서 관리가 되면 당연하게 관리들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지만, 세종 때에는 왕의 높은 학구열 때문에 계속하여 공부해야 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관리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본인들은 물론 국가를 위한 노력이었다. '''한 국가를 이끄는 공무원들이 감히 게을러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나라 최상부에 면학의, 면학에 의한, 면학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 불꽃 튀는 경연이 툭하면 벌어졌다. 당시 경연은 정책 토론장의 역할도 겸했는데, 세종대왕의 정책 수립방식은 대단히 복잡했다. 예시를 들자면, 간식으로 롯데리아와 맥도날드 중 하나를 선택을 하려면 두 업소의 메뉴판을 늘어놓고 각 메뉴의 칼로리를 계산하고 영양학적 분석, 맛, 포만감, 가격대 성능비, 재료의 산지, 소화 불량 가능성, 먹어본 사람의 의견, 법적 근거 등의 생각해 낼 수 있는 관련된 사안들을 다 검토한다. 그리고 길고 복잡한 검토를 마치고 간식을 선택하면 때는 '''이미 저녁밥 먹을 시간이다.''' 이런 식으로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정책을 시행하다 보니 금방 시행되는 국정은 지극히 드물었고, 의심가는 고칠 점이 보일 때마다 재검토하다 보니 국정을 완성하고 시행하는 데 연 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결과를 거쳐 나온 정책들의 완성도는 당연히 매우 높아서 세종 대 입안된 거의 모든 정책이 세종 후의 조선을 지탱하는 제도가 되었다. 예를 들어 농지개혁은 입안에서 시행까지 13년이 걸렸지만, 대한제국이 근대 양전사업을 시행하기 전까지 400년 넘게 조선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오히려 18세기 ~ 19세기에 가서 수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성리학자(+실학자)들이 '도대체 이거 어떻게 만들었지?' 하고 경탄했을 정도였다. 이런 신중함과 철저함은 현대보다도 더 나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격무를 전부 도맡아서 했으니 당연히 몸이 안 아프고 배길 리가 없었다.'''[13]
이뿐만 아니라, 왕자 시절 하루종일 책만 읽어서 건강을 해칠까봐 우려한 아버지 태종이 충녕 대군 방의 책들을 모두 치우게 했는데, 우연히 딱 하나 남은[14] <구소수간(歐蘇手簡)>[15] 을 주야장천 읽어댔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며, 밥을 먹으면서까지 손에서 책을 뗄 줄을 몰랐다고 한다. 또한 명이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신하가 있으면 가기 전에 꼭 이들을 불러들여 "일본에 뭔 책이 있다는데 오는 김에 좀 구해보시오.", "명나라에 국내에 없는 뭔 책이 있다는데 갔다 오는 김에 겸사겸사 좀 알아보시오." 이런 식으로 구매대행을 시켰을 정도였다.음운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세종은 실제로 배울 수 있는 것은 극한까지 배우려고 했다'''. 그것은 현명한 임금의 배움이라기보다도 '''거대한 한 지성으로서의 영위'''라 할 만한 것이었다.
-노마 히데키 저, <한글의 탄생>에서
사실은 신숙주도 '''책을 읽고 싶어서 당직을 다른 사람과 바꿔 자기가 대신 근무를 서 가면서 독서'''를 하고 아무리 술을 퍼먹고 놀았어도 조금만 술이 깨면 '''다시 일어나서 책을 읽을 정도로''' 지독한 책벌레였지만, 세종대왕은 더 심했으니 신숙주가 먼저 뻗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종대왕 본인도 '''"내가 궁궐에 있으면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다."'''라고까지 말하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2.3. 사회 복지 분야
세종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서도 특히 '''애민(愛民)''' 정신이 강했던 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여러 기록에서 그에 관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국조보감》의 기록에 의하면, 왕자 시절부터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있다는 사정을 알면 반드시 태종에게 아뢰었다고 한다. 조회에서 태종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굶주림이 없도록 벼슬 자리를 두었는데, 죽게 된 백성이 왕자를 보아야만 먹을 것을 얻는다면 도리가 아니고 관리들의 일 처리가 잘못되었다면서 주관하는 자에게 벌을 주었다.'''영민하고 총명했으며 강인하고 과감했다.'''
'''무거우며 굳세였고 점잖고 후덕했다.'''
'''크고 너그러웠으며 어질고 사랑하였다.'''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은'''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였다.'''
'''(英明剛果, 沈毅重厚, 寬裕仁慈, 恭儉孝友, 出於天性)'''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총서
- 노비
당시, 관청에서 일하는 여자 노비(즉 관비)들이 출산을 할 때 산후 휴가가 1주일이었는데, 세종대왕은 출산이 예정된 달을 포함해 출산 후 100일을 쉴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고 (1426년 4월 17일)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시켜 주는 조치를 취했으며(1430년 10월 19일), 또 산모만 쉬게 하면 누가 산모를 돌보겠느냐며 그 관비의 남편에게도 산후 1개월간 쉬게 해 주었다.(1434년 4월 26일)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우리에겐 출산 휴가도 제대로 안 주시는데 천것들에겐 왜 주십니까?"라고 불평을 늘어놓자 "니들은 집에 마누라랑 애 돌봐줄 사람들있잖은가?"라며 철저하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현재 한국의 근로기준법으로는 출산 휴가는 총 90일 이상, 그 중 산후 휴가는 45일 이상을 주게 되어 있으니 어찌보면 요즘 사회보다도 출산 휴가에 대해서는 관대한 셈이다.[16]
또한 노비의 인권 향상에도 힘썼는데 1427년 8월 24일, 집현전의 응교였던 권채가 여종이 자신들의 허락도 없이 병든 할머니를 문병했다는 이유로 집안에 가두고 구더기가 섞인 똥과 오줌을 강제로 먹였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권채와 그 아내 정씨는 형조판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반성하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양민과 천민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며 권채 부부를 형벌로 심문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후 1444년 7월 24일엔 "노비는 비록 천민이지만, 다 같이 하늘이 내린 백성이다. 노비가 죄를 지었는지 유무와는 별개로 관에 알리지 않고 구타 및 살인을 한 자는 옛 법령에 따라 엄중하게 처단하라."라는 지시를 내린다.
다만 노비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의 아쉬운 점이 남아있긴 하다. 노비가 자식을 낳으면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17] 에 따라 아버지가 양인이라 할 지라도 어머니가 노비이면 그 자녀도 노비가 되었다. 태종이 이를 폐지하고 "양민과 천민이 아이를 낳으면 아비의 계급에 따른다"는 노비종부법(奴婢從父法)을 시행하려 했다. 그러나 세종 대에 종부법은 무산되고 다시 노비종모법으로 돌아갔는데, 애민 정신으로 유명한 세종 대에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이러니하다.출처들[18] 허나 임진왜란 이후 개판이 된 신분 기록과 더불어 너도나도 군공을 내세우거나 양반 자리를 구매하는 등 이런 저런 사건들로 인해 양반만 엄청나게 많아지자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국가 운영에 큰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더욱이 세종 대의 노비종모법은 종친과 관료들과 40세 이상인 백성들의 자손에게는 예외 규정으로 적용되었음으로, 노비 인구가 급속도로 늘지 않게끔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제재 장치를 걸어놓은 셈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당시에는 신분을 변경할 수 있는 소송 제도가 존재했었다. 노비종모법은 이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를 예방하는 측면도 있었다. [19] . 지금의 인권 시각에서는 노비종모법은 부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급과 그 역할이 구별되어 있던 시대상, 무조건 양인이 늘어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양인의 수만큼 세수가 그대로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이 시기 사노비가 아닌 공노비는 관청에 고용된 계급으로 잡무를 처리하는 인력이었기에 무작정 그 수를 줄일 수는 없었다.
- 노인
> "양로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 뇌물죄)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10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나라에서 쌀과 옷을 내려 주었다. 한번은 강원도 감사가 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00세가 된 김씨 노인에게 주는 쌀 10석을 5석으로 줄이자고 청하자 세종은 "100세가 넘은 노인은 세상에 항상 있지 않으므로 의리상 당연히 후한 구휼이 필요하다." 하며 요청을 기각하고 그냥 종전대로 쌀 10석을 주도록 했다.(1436년 7월 27일) 그리고 고봉현의 107세 된 노인에게도 옷과 양식을 하사했는데, 이 노인은 당시 병석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옷과 양식이 도착하자 감격해서 세종이 하사한 옷을 몸 위에 덮고 눕더니 곧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1420년 4월 26일). 나랏님도 어른 대접을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 죄인
더위가 심한 날에는 유배형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토록 지시했으며, 석방되지 않은 죄수가 불편함이 없도록 잘 돌봐주라며 죄수의 인권을 챙겨주기도 했으며[21] , 1488년 8월 25일자 실록에는 4월부터 8월까지는 냉수를, 5월부터 7월 10일까지는 목욕 시간을 따로 배정하라고 지시했으며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텁게 쌓아 추위를 막아주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죄수들의 자식 중 보살펴줄 사람이 없는 아이는 국가가 나서서 이들을 부양해줄 사람을 지정해주기도 했다.
>옥에 갇힌 죄수 가운데 홀아비와 과부의 어린 자식들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이 굶주리고 추워서 죽음에 이를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는 (죄수들의 어린 자식들을) 그 친족들에게 주고 젖먹이 아이는 젖 있는 사람에게 주어라 또 친족이 없으면 관가에서 거두어 보호하고 기르도록 하라. 잘 돌보는지 서울에서는 사헌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규찰하라.
>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 7월 28일
또한 현재의 귀휴 제도와 유사한 제도를 시행토록 지시했으며 귀휴 일수를 복역 기간에 포함시키는 교지를 하달하기도 했다.
>주상께서는 일전에 유배 중인 도형수 가운대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들에게는 휴가를 줘서 1년에 한 번씩 만나보게 허락하고, 그 휴가 일수는 모두 복역 일수에 통산하라고 하셨습니다.
>
>《세종실록》 세종 26년(1444) 7월 12일
2.4. 음악・제례 분야
이날 기록을 보면 원경하가 선조 때의 인재들(이순신, 류성룡, 이원익 등)을 열거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가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냐?" 물었다. 이에 대한 원경하의 대답.영조: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는가?
원경하: 영묘조(英廟朝)[23]
[24] 땐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시절이었기 때문에 최고의 선비들만 배출한 게 아니라 예법과 음악을 만들고 정비하던 시대였습니다. 비상한 재능을 가진 박연 같은 기술 인재들도 이 시대에 태어나 경쇠[25] 도 그때에 나왔고, 법율을 만드는 기장도 그 시대를 타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원경하,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 1월 9일 원문
개인적으로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적 소양은 꽤 되었고 악기도 나름대로 잘 다룰 줄 알았는지 양녕 대군에게 악기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절대음감에 가까운 음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박연이 만든 편경을 시험할 때의 모습을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KBS <한국사 전>에서 실험해보니 편경 음의 차이는 지극히 미세해서 일반인이 그냥 귀로 듣고 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알기가 어렵다. 어쩌면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이 음감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세종 본인의 이런 음악적 감각은 정간보 간행이나 조선의 음악 정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아예 종묘제례악 중 몇 곡과 여민락 등은 세종이 '''주장 막대를 땅바닥에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쟝 바티스트 륄리가 서양 바로크 음악에서 처음 지휘봉을 도입했을 때의 사용법과 유사하다. 아무튼 인류 고금을 통틀어 흔치 않은 '''군주이자 작곡가.'''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자 작곡가인 다른 사례로는 독일인들이 존경하는 왕 프리드리히 대왕과, 오스만 제국 후기의 개혁군주 셀림 3세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의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원문
2.5. 언어학 분야
오늘날《훈민정음》을 창제한 공로는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업적 가운데 하나이지만, 사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기 이전부터 언어와 음운학 분야에 관심이 많아 이 부분을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훈민정음》이 아직 기밀 사안이었을 시절에도 중국어 관련 서적을 탐독하자 신하들이 "전하, 중국어 책은 왜 자꾸 보십니까?"라고 질문한 적이 있으며, '내가 지금 새로운 글자를 만든다'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던지[26] , "중국어 공부를 좀 해놔야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질문을 했을 때 미리 답변을 생각해 놓지 않겠는가?" 라며 핑계를 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지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매우 크게 분노하면서 일갈을 하였다.
이처럼 이례적으로 반대하는 신하들을 처절하게 면박줬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니들이 음운학에 대해 뭘 아느냐는 소리다. 니들이 나보다 음운학을 잘 알아? 아는 거 없으면 빠져, 라는 말을 우아하게 한 것. 당대 한반도 최고의 언어학자라고 보아도 무방한 만큼 학문적 성취에 대한 프라이드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 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 26년(1444)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난 뒤. 원문
말을 하다가 보니 열이 받았는지 이어서 위와 같이 명했는데, 쉽게 풀어 쓰자면 "내가 그냥 상소 몇 가지 좀 물어보려고 불렀는데 니들 꼴을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며 정창손을 제외한 모두를 하루 동안 '''의금부에 투옥한다.''' 김문은 투옥에 추가로 감히 임금 앞에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죄로 의금부도사의 심문을 받게 되었고, 정창손은 '''파직당했다.'''..."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變)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하고, 드디어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직제학(直提學) 신석조(辛碩祖)·직전(直殿) 김문(金汶),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부교리(副校理) 하위지(河緯之)·부수찬(副修撰) 송처검(宋處儉), 저작랑(著作郞) 조근(趙瑾)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석방하라 명하였는데, 오직 정창손만은 파직(罷職)시키고, 인하여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김문이 앞뒤에 말을 변하여 계달한 사유를 국문(鞫問)하여 아뢰라."
세종 26년(1444) 2월 20일. 김문, 정창손 등을 비판한 뒤. 원문
- 김문은 이전에 세종이 "말 소리를 그대로 나타내는 글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안될 것 없지요"라고 대답했던 사람인데, 이번 상소에서는 언문 제작을 반대했으니 그걸 기억한 세종에게 찍혀서 일종의 괘씸죄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 참고로 정창손만 파직된 이유는,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인군자는 타고나는 것이라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27] "는 요지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현대는 물론이고 당대의 유학자라도, 아니 공자 이후로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발언이었다. 유학의 핵심은 한마디로 "수양을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 시대 내내 명목상 천민(노비 등)만 아닌 양인 남성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문반, 무반을 합쳐 양반이라며 계급화된 것도 양란 이후의 일이고 조선 전기에는 농사꾼 출신 과거 응시자, 합격자도 있었던 바 있을 정도였으니 철저한 유학 군주 세종이 대노할만했다. 만약 정창손의 말대로라면 빈민이던 안회나 양아치 출신의 자로를 제자로 삼아 가르친 공자는 헛짓거리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유학 최고의 성인이자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공자 자신이 직접 "가르치는 데 있어서 부류란 없다(有敎無類)"(논어 위령공편)고 말하고 있는데도 저러한 소리를 한 것이다. 이때 세종대왕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28] 한 선비"라며 정창손을 강하게 비판했다.[29] 여담으로 정창손은 후에 김질과 함께 사육신을 고변했다. 세종의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된 일에서 세종은 이전보다 훨씬 신하들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데, 신하가 반대한다고 감옥에 가두거나 파직까지 시키는 과격한 대응을 한 것은 다른 사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 군주로서 유교적 명분론을 완전히 어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경하게 나가서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집스럽게 강하게 나간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문자를 새롭게 만들어낸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발현된 결과로도 보인다. 오랫동안 연구해서 시간과 노력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가면서[31] 고생한 끝에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서 반포하려고 하는데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으니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났을 것이다. 그나마 최만리 등은 기술적 문제, 사대 문제 등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근거라도 꺼냈지만, 정창손은 그 와중에 유학자로선 해서는 안되는 말까지 해가며 반대를 했으니 더욱 화가 났을 것이다.
아버지 태종도 신랄한 독설가였는데, 세종대왕 또한 이런 아버지의 습성을 잘 물려받은 듯 하다. 실제로 이때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의 달인'''으로 천부적인 방대한 자신의 지식과 매우 논리적인 언변과 화술로 논쟁에서 신하들을 꼼짝 못하도록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경연이나 정책회의 등에서 준비도 안 하고 대충 참석했다간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이 먹은 갈굼처럼 처절하게 논박을 당해야만 했다.
또한, 세종대왕의 저 꾸짖음에 가까운 논박은 그의 화술 능력을 나타내는데, 원래부터 세종대왕 본인은 경연, 즉, 토론의 달인이었다. 거기다가 본래 세종대왕은 한 번 적재적소에 썼던 인물이라면 그대로 데리고 쓰는 이른바 종신 고용에 가까운 인재 사용을 보여주는데, 황희 정승의 사위사건이나 박연의 부정 축재 등 생각보다 규모가 큰 사건이라도 적당히 덮어주거나 하는 등의 사례를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이 신하를 다룰 때 웬만큼의 상소문 같은 건 오히려 논쟁을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훈민정음에 대한 논박은 열린 마음으로 대하던 것에 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평소 화법은 신하들의 의견에 제대로 경청을 하였다가 유교 경전이나 고사 등을 인용하여 학문적 우위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면, 저 논박은 주요 논점을 슬며시 회피하면서 피장파장의 오류와 권위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인다. 흔히 권위주의라고 하면 민주적인 현대적 사고 방식으로는 매우 찝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나, 조선시대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위엄과 위협 모두를 드러내는 제왕식 화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평소 세종대왕의 화법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만리의 상소문 6개항 중 4개항이 모두 중국에 사대를 해야 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도, 잘 보면 세종대왕은 중국에 대한 사대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이두와 구결도 어차피 한자로 만든 오랑캐 문자인데 니들은 퍽이나 오랑캐 문자 안쓰고 중화 운운하냐? 그래서 내가 니들이 못하는 음운학 마스터해서 그거보다 편리한 발음기호 좀 만들었는데 그게 그렇게 아니꼽냐?" 라는 식으로 억지를 쓰고 있다.
즉 '중국에 대한 사대'라는 논점을 건드리면 최만리를 비롯한 상소문을 올린 자들을 처벌하더라도 다른 선비들의 반감을 사게 되고, 이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함을 알고 있는 세종대왕이 다소 억지를 써서라도 일부러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구사한 걸로 추정할 수 있다. 화도 잘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정말 무섭듯이 세종대왕이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써서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것을 본 신하들은 깨갱 할 수밖에. 세종대왕이 신하들에게 화를 낸다는 건 아버지의 주특기인 숙청 스킬이라도 발동하겠다는 뜻이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형을 열 번 구형 가능한 수준의 뇌물 수수죄를 저지른 조말생을 끝까지 보호하고 귀양만 보냈다 재등용했을 때이다.
흔히 세종대왕이 집현전에다가 '''"너희들, 새로운 문자를 좀 만들어 봐라."''' '''라고 명령을 해서 집현전에서 뚝딱뚝딱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32][33] 오히려 집현전의 높은 학자들 중에서도 훈민정음을 창제해서 반포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집현전 출신도 많았다. 실제로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이었다. 또한 신숙주 등 젊은 집현전 학자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도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 때문에 시중에 유포된 많은 세종대왕 위인전에서는 집현전 학자들한테 훈민정음을 만들라고 해놓고, 집현전 학자들이 항의하니 다시 잡아가두는 모순적인 모습도 자주 보인다.
때문에 젊은 집현전 학자들조차 훈민정음 창제에선 한 일이 없다. 흔히들 신숙주가 세종의 어명을 받아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를 만나러 중국에 건너갔다는 기록을 보면서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줬다고들 하는데 사실 신숙주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년 6개월 뒤이고 언어학자를 만난 이유도 중국어 음운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간 것이다. 그렇다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세종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가 글자 28자를 만들어 놨으니 그것의 쓰임새와 해설을 좀 달아봐라."''' 라고 명령한 것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즉 《훈민정음》의 해설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자체는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왕이 직접 한글을 창조한 증거로 한글의 완성도를 들기도 한다. 만약 신하를 시켜 한글을 만들었을 경우, 기한에 맞추어 최대한 빨리 내기 위해 한글을 꼼꼼하게 만들기 힘들었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세종대왕이 언제부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자 마음을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자 창제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결단 중 하나로 남아있다.
2.6. 역사 분야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우리의 문물이 신라를 계승했으니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 지내죠."라는 편협된 역사관을 주청한 상소에 대해 '''세종 본인이 몸소''' 삼국이 나란히 서서 서로 막상막하였는데 어떤 건 버리고 어떤 것만 신경을 쓸 수는 없음을 언급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모두를 조선의 옛 조상으로 인식했던 세종의 균형 잡힌 역사 감각과 혜안을 보여주는 대목. [34]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 3월 13일
또한 재위 기간 내내 《고려사》 편찬에 직접 개입하여 퇴짜와 수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결국 죽을 때까지 《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려사》의 초기 버전은 고려가 제후국이었다는 이유로 고려 왕들이 쓴 태조, 현종 같은 묘호를 전부 왕으로 격하시켜 태왕, 현왕 하는 식으로 쓰여 있었고, 짐, 태후, 태자 등의 용어도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여 과인, 대비, 세자 등 제후의 용어로 고쳐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편찬자들에게 "그 시대 역사는 그 시대에 실제로 쓰던 말로 써야 한다"며 다시 만들도록 했고, 이렇듯 꼼꼼한 과정을 거친 탓에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1년(1451)에야 완성할 수 있었다. 과연, 이런 역사관을 왕조 초기에 실록에다 명시해놓으니 나아가 고종 때 삼한을 합쳐 대한으로 하자는 의견이 쉽게 취합될 수 있었으리라.
2.7. 수학・과학 분야
과학 기술 발전에도 힘썼는데 이순지,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해 대간의, 소간의, 혼천의 등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고 물시계인 자격루와 옥루도 만들어 흠경각을 세워 그곳에 설치하였다.
또한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교 등을 만들어 설치를 담당하게 했다. 의학에도 관심이 많아 집현전 학자였던 김예몽, 유성원 등에게 명해 의방유취 초본을 만들게 하였고 이후 김문, 신석조, 이예, 교리 김수온에게 명해 의관을 모아 편찬케 하였으며 세종 27년인 1445년에 365권으로 이루어진 조선 최대의 의학 백과 사전 '의방유취'를 편찬케 했다. 이게 얼마나 자료가 많았냐면 성종 8년 때 30부가 편찬되었다.
금속활자도 새로이 만들어 이전 이천에게 명해 불편하던 활자를 개량하여 '경자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하루에 30부씩 찍어 낼수 있는 '갑인자'와 세계 최초의 납 활자인 병진자를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천문, 역법을 연구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직접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의 세종 12년(1430)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계몽산이라는 중국의 옛 수학 서적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정인지가 세종이 산학계몽을 공부하는 자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세종이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한 질의를 받았다고 한다. 정인지가 세종의 특별 과외 선생이었던 셈이다. 정인지의 주요 업무는 역법 등의 계산이였고 이 분야에서 정인지의 역할은 독보적이였기 때문에 수학 실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34세였던 정인지는 우리 나라 최초의 독자적 역법서 ‘칠정산 내편’에 참여했던 탄탄한 실력의 수학자였다. 정인지는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역법을 개정하였으며 새로운 조세 징수 체계인 공법(貢法) 시행을 위해 삼남 지방의 모든 토지를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한 사람이기도 하다.“上, 學 <啓蒙算>, 副提學鄭麟趾入侍待問, 上曰: “算數在人主無所用, 然此亦聖人所制, 予欲知之.”
“임금이 계몽산(啓蒙算)을 배우는데, 부제학 정인지(鄭麟趾)가 들어와서 모시고 질문을 기다리고 있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산수(算數)를 배우는 것이 임금에게는 필요가 없을 듯하나, 이것도 성인이 제정한 것이므로 나는 이것을 알고자 한다.’”
세종실록 12년(1430) 10월 23일
세종 25년 11월 17일 기사를 보면 신하들에게도 수학 공부를 시키려고 승정원에게 "산학을 예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집현전에 상고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기도 했으며, 결국 세종 30년 1월 23일 기록을 보면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커리큘럼과 이들의 관리 서용 기준까지 직접 짜서 승정원에 전교한 기록이 있다.
결국, 세종 26년 이순지에게 명해 정인지 등과 함께 칠정산 내편과 외편이라는 역법서를 편찬시킨다. 이게 《세종실록》 부록에 내편, 외편 두 개 다 실려 있다. 덕분에 《세종실록》 두께는 대단히 두꺼워졌다. 그 오차는 1년에 -1초. 거의 140년 뒤에 나와 현재까지 쓰이는 그레고리력의 오차가 1년에 +26초다. 참고로 이 칠정산 내편과 외편의 역법서의 역법 대신 태양력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레고리력의 날수가 매우 규칙적이고 일정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력 이전까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비교해보자. 칠정산이 나올 때 쓰던 양력인 율리우스력은 1년에 11분 14초, 그러니까 '''674초'''라는 어마어마한 오차이다. 칠정산의 정확도가 대충 짐작될 것이다.
2.8. 군사 분야・영토 확장 사업
세종대왕 시기의 치적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바로 병기 공학에 대한 투자이다. 세종은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 등을 기용하여 화약 무기에 대해 연구하게 하였다. 다만 정작 최해산은 전쟁에 대한 수행 능력이 매우 부족했는데, 아버지인 최무선이 여러 전투에서 직접 활약한 것과 비교하면 참담한 수준. 후일 북방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꾀를 피우다가 세종에게 걸려 오히려 최북단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화포를 설비하였다가 적이 침입하거든 시기(時機)에 응하여 쏘면 열 사람이 적 1백 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실록 세종22년 음력 5월 13일 기사 중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화포의 수를 조사하여 아뢰도록 전지하다
이미 태종 대에 '''일발 다전법'''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기술이 부족해서 이뤄지지 못했는데, 이 당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높여 연사력을 높이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을 때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독자적으로 기술력을 확보해 일발다전법을 1433년에 완성한다.''' 초기 화약 무기의 발사체는 1발의 화살이었으나, 세종대왕 시기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로 1445년에는 이총통, 삼총통, 잘전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등 구경이 8.1mm ~ 29mm의 소형 화기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었고, 세총통을 직접 시험해 그 위력을 확인 한 후 평안도 일대에 보낸다. 이때 세종이 직접 사용해보고 평가를 내린 뒤에 북방에 보낸다. 동시에 일발 다전법이 수립되어 1개의 발사체가 2개 ~ 12개로 증가했다. 여기서 발사체는 화살 즉 피령목전으로써 철환이 아니다. 초기의 화약 무기들은 강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중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화살대와 화살 깃을 이용해 안정적인 궤적을 그리면서 날아가도록 하였다. 철환이 본격적으로 탄환으로 이용된 것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 화포의 개량과 체계적인 생산 체계가 충분히 이뤄지는 단계에 도달했을 때다.
또한, 세종대왕은 화기 운용 부대를 증편하고 화기 사격술을 개량했는데, 1441년 6월에 세종은 '''사수는 사격만 맡고, 다른 사람이 많은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수에게 연속적으로 보급하는 방법을 도입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투원의 수요를 폭증시켜, 세종은 다시 1447년 11월에 총통군을 오단위로 편성, '''사수와 장전수를 분리해 운영하는 사격술 개혁'''을 실시한다.
즉, 화기 사격수인 총통군은 5명을 1오로 편성, 4명은 사격을 담당. 나머지 1명은 장전만을 전담하게했고, 오 내에서 화약의 양, 발사체, 격목의 크기를 착각하지 않도록 병과별로 선정하고, 사수는 총통 외에 궁시와 도검을 들고 다니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극대화시켰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1448년에 총통등록을 저술해 화약 무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준화, 규격화 했으며 매화법 등 지뢰를 매설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했다. 매화법은 지뢰를 매설한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일반적인 매설 지뢰와는 다른 클레이모어와 유사하다. 개중에는 화학 물질을 이용해 생화학 공격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이때 개발된 화기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화살을 대신하여 철환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세종대왕이 개척한 일발다전법은 '''신기비결이 저술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사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포신 안쪽부터 화약 - 종이 - 격목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포탄의 구조로 대략 입구까지 꽉꽉 채우고 발사한다.
대체적으로, 세종대왕 집권 시기의 화약 무기를 문종화차로 압축하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대왕이 이뤄낸 진정한 화약 무기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화약 무기의 규격화, 일반화 시켰으며, 사격술과 부대 편성에 있어서 화약을 운영하는 부대를 수립하고, 그 부대의 운용 방법을 법제화시켰다는 것이다.''' 사실상 포병이라는 새로운 병종을 탄생시킨 것이다.
다만 이런 중세 화약 무기들은 근현대처럼 화학 대량 제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화약이 매우 비싼 상태에서 많은 화약을 요구했고, 때문에 야인들과의 실전에서 화력 덕후의 기상을 보여주기 어려웠다는 단점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화력전을 표방하기 시작한 사례는 임진왜란. 그 외에도 유황이나 초석은 조선에서 생산이 거의 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는 등의 문제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비중있게 쓰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막강한 과학의 힘은 매우 잘 구현되어 현대에도 남아있다.
2.8.1. 여진 정벌(제 1차·제 2차 파저강(婆猪江) 정벌)
태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세종은 새로운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당시 명의 요동 지역은 몽골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1423년(세종 5) 요동 방면으로 이주했던 오도리의 수장 동맹가첩목아는 몽골족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명과 조선의 허락을 받아 무리를 거느리고 옛 거주지인 두만강 유역의 아목하(阿木河, 지금의 회령(會寧)) 지역으로 돌아왔다. 또한 1424년(세종 6)에는 이만주(李滿住)가 이끄는 1천 호가 달단에 쫓겨 압록강 중류의 파저강(婆猪江)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임금의 도리는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데 있고, 장수의 충성은 적개심(敵愾心)이 귀하다. '''무지한 이 야인이 시랑(豺狼) 같은 마음으로 벌같이 쏘는 독기(毒氣)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 국경을 침략하고, 우리 백성의 생명을 살해하여, 고아(孤兒)와 과부(寡婦)가 원한을 일으켜서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니''', 이것은 과인이 불쌍하고 슬퍼함을 마지 않는 소이이며, 또한 경들이 가슴을 치고 이를 가는 바이다. '''군사를 일으켜서 그 죄를 성명(聲明)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에게 아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기를 명하노니, 모두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주장(主將)의 방략(方略)을 듣고 적을 쳐서, 꺾는 공을 이룩하여 변경 백성들의 소망에 보답하게 하라.'''"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3월 22일 을해 2번째기사 집현전 부제학 이선을 보내어 북정의 장졸에게 교서를 반포하다.
조선은 두 집단 중에 명과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이만주가 이끄는 집단을 이주 초기부터 경계하여 입조·교역 등의 접촉을 제한하였으며, 따라서 양측의 관계는 순탄치 않게 전개되었다. 또한 조선은 여진족이 부리던 노비가 도망해 오면 조선인은 원래 거주지로 보내고, 중국인은 요동으로 송환하였는데, 이것이 여진족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1432년(세종 14) 12월, 여진족 수백여 명이 여연(閭延) 경내에 쳐들어 와서 사람과 물건을 약탈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이만주는 홀라온(忽剌溫) 올적합(兀狄哈)이 조선인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던 것을 자신이 빼앗아 보호하고 있다고 조선에 알려 왔다. 그러나 세종은 여연 습격에 이만주가 관련되었다고 확신하고, 이만주 세력에 대한 정벌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1월 19일에는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최윤덕(崔潤德)을 보내어 사전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였다. 조정에서는 파저강 야인을 정벌할 것인지를 놓고 치열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정벌을 감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럼에도 세종은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밀어붙여 정벌을 단행토록 하였다.
최윤덕이 이끄는 1만 5천 명의 원정군은 4월 10일 강계에 모여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이순몽(李順蒙)에게 2,515명,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 최해산(崔海山)에게 2,070명, 우군절제사(右軍節制使) 이각(李恪)에게 1,770명,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이징석(李澄石)에게 3,010명, 김효성(金孝誠)에게 1,888명, 홍사석(洪師錫)에게 1,110명, 최윤덕 스스로 2,599명의 병력을 통솔하여, 7로로 나누어 4월 19일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여진인 267명을 죽이고 238명을 생포하였으며, 우마 177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귀국하였다. 기습을 당한 파저강 여진족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만주의 처도 사망했고, 이만주 자신도 상처를 입고 도주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반면 조선군은 사망자 4명, 부상자 25명의 비교적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제1차 파저강 야인 정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원정군의 철수 후 이만주 집단은 다시금 세력을 회복하였으며, 조선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수차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을 동원하여 조선의 국경을 침범하였다. 한편 제 1차 파저강 정벌이 이루어진 1433년 10월 두만강 하류의 여진족 추장 양목답올(楊木答兀)이 건주좌위(建州左衛)의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자, 건주좌위의 잔여 세력은 올적합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이만주가 있는 파저강 지역으로 이동하여 합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조선을 다시금 긴장시켰다.
1437년(세종 19) 5월 올량합(兀良哈) 기병 300여 기가 다시 조명간구자를 습격해 오고, 비슷한 시기에 건주좌위에 명 황제의 칙서를 전하기 위해 이만주가 두만강 하류까지 직접 내려오자, 세종은 김종서(金宗瑞)의 건의를 바탕으로 이만주를 토벌하자고 제의하였다. 신료들이 명과의 관계 및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를 대어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세종은 조정의 반대여론을 무시하고 측근 신료들과의 의논을 바탕으로 평안도도절제사 이천(李蕆) 등과 함께 가을을 목표로 실질적인 정벌 준비를 개시했다.
제 2차 파저강 정벌은 9월 7일 개시되었다. 총 8천여 명의 정벌군은 3로로 나뉘어, 도절제사 이천은 여연절제사 홍사석(洪師錫)과 강계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772명을 거느리고 옹촌(甕村)·오자점(吾自岾)·오미부(吾彌府) 등지를 향해 강계에서 강을 건넜고, 상호군 이화(李樺)는 좌군 1,818명을 거느리고 올라산(兀剌山)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대호군 정덕성(鄭德成)은 우군 1,203명을 거느리고 올라산 남쪽 아한(阿閒)으로 향하여 모두 이산(理山)에서 강을 건넜다. 정벌군은 세 갈래로 나뉘어 여진족의 본거지를 습격하고 불태운 뒤 16일에 돌아왔는데, 적군 6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고, 조선군은 1명이 전사하였다.
제 2차 파저강 정벌은 여진족의 근거지에 타격을 주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제 1차 정벌보다 전과도 적었고, 이만주 포착에도 실패하였다. 이는 파저강 야인들이 정벌군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피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는 정벌의 성과에 대한 평가 및 이천을 비롯한 정벌군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둘러싸고 세종과 신하들 간에 논란이 있었으나, 세종은 적을 징계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단정함으로써 논란을 봉합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파저강 정벌을 통해 조선은 압록강 건너의 여진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를 이용하여 압록강 중류에 4군을 설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건주본위의 지휘자 이만주를 제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선으로서는 불만족스러운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이만주의 제거라는 목표는 결국 다음 세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2.9. 과로
지나치게 강한 학구열과 과로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시력이 많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결정적인 타격은 자치통감훈 편찬이었다. 세종은 이 작업에 굉장한 열의를 보이며 임했는데, 자치통감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의 양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런 책의 해설서를 만드는 작업이 작은 일일 리가 없다. 거기다가 완벽주의자 세종대왕은 사소한 문제점도 내버려두지 않아 결국 거의 모든 업무를 본인의 관할 아래 추진했다. 결국 책의 편집과 자신의 안과 질환을 맞바꾸었고, 말년에는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세종이 죽고 문종 2년(1452)에서야 겨우 완성된다.
세종실록에도 언급되었듯이 세종대왕이 소갈증(당뇨병)을 앓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합병증 중 하나인 당뇨성 망막증 등이 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고기를 매우 좋아하는 식성 때문이다.
결국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했으며, 실제로 세종대왕 말년의 업적 대부분은 문종의 손으로 이루었다. 그래서 신병주 교수는 조선의 황금시대를 세종과 문종이 함께 만들었다고 본다. 세종대왕이 죽은 원인도 과로인 듯하다.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자기가 다 했기 때문. 심지어 죽음을 맞기 3일 전까지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직접 정무를 보았는데 이때 '''"몸져누운 동안 밀린 정무를 물 흐르듯 한치 오차도 없이 깨끗이 처리하고 다시 병석에 누웠다."'''라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괜히 과로사한 것이 아니다. 《세종실록》해당 부분
이 정도라면 능히 성군이란 소리를 들을 만하다. 그 즈음 문종이 종기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세종실록》기사
한편 세종은 하루에 5시간 수면을 제외하고는 업무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왕이 이런데 신하들이라고 멀쩡할 리는 없다. 오죽하면 세종대왕님 좌우명이 '''"신하들이 고달파야 백성들이 편하도다."''' 라고 하겠는가. 말 그대로 휘하 신하들을 미친듯이 굴렸다.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버지 같은 나랏님이고 하늘이 내린 임금이었지만, 신하들에게는 도깨비 상사도 이런 도깨비 상사가 없었다. 물론 신하들은 좀 쉬고 싶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만인지상이자 한 나라의 지존께서 앞장서서 날밤 새워가며 일하고 있는데 쉬고싶어도 눈치보여서 쉴수도 없었을 것이고, 언변으로도 신하들위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반박도 못하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황희, 조말생만 봐도 죄를 짓고 파직되어도 다시 불러들려 굴리고 황희는 모친 삼년상 치른다고 낸 사직서는 죄다 반송 처리. 아예 3년상을 치르는 중에 고기를 보내서 3년상 중에 고기를 안 먹는다는 법도를 어기게 했다고 하니... 노년이 되어 치매가 온 것 같다, 귀가 안들리는 것 같다 등 온갖 사유를 들어 퇴직 요청을 해도 깔끔히 무시당했다. 아예 재택 근무 하라고 하고 짚고 다닐 지팡이에 출퇴근용 가마까지 하사하시며 알뜰히 부려먹었다. 황희가 사직한 건 세종대왕이 세상을 뜨기 넉 달 전이었다니 말 다한 셈. 그나마 황희는 90세까지 살기라도 했지, 조말생은 끝내 과로사까지 했다. [35]
2.10. 기타
현재 세종대왕의 어필로 전해지는 글씨인 '가전충효 세수인경'. 세종이 친히 전의 이씨 이정간에게 하사한 가훈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는 뜻이다. 다른 어필로는 2005년 10월 9일 서지학자인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공개한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世宗大王御賜喜雨亭孝寧大君訪問)'이란 제목의 친필 고문서첩이 있다. 세종 7년(1425) 4월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낸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합강정을 방문했을 때 쓴 글이라고.
독서와 토론, 공부는 광적으로 좋아한 임금이었지만, 의외로 시 짓기나 서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36] 그래서인지 조선 왕들의 어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세종대왕의 어필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세종실록》에서도 '예기(藝技)에 정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래 왕자들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나 화초 가꾸기, 바둑과 같은 잡기에 흥미를 갖도록 교육받기 마련이었는데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는 게 신기하다. 《세종실록》 곳곳에는 '사슴이나 화초 기르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언급하거나, '두시(당나라 두보의 시)와 같은 것은 풍월을 읊조리는 것이니 유자의 정식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이런 '잡기'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는 있었으나 취미로 삼지는 않았던 듯하다. 한편으론 실리를 추구하던 군주 답다.
덧붙여 뛰어난 추리력을 자랑했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맹사성이 관리 여럿과 짜고 황희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 사건을 은폐,[37] 조작한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건 정황에 의심을 느끼고 의금부에 명하여 진상을 규명해냈다.'''[38][39] 결국 황희, 맹사성은 파직 감사, 5현의 현감, 수사관원, 형조판서는 경중에 따라 처벌받았다. 당사자인 서달은 사형당할 뻔 했지만 형조판서의 아들이 서달 하나 뿐이라 낮은 등급으로 처벌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