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스페인어: República del Paraguay
과라니어: Tetã Paraguá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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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라과이 공화국''' 또는 '''파라과이'''는 남아메리카 중앙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국명은 국토를 관통해서 흐르는 파라과이 강(Paraguay River)에서 유래한다. 우루과이와 똑같은 과이(Guay)가 들어가는데 과이는 과라니어로 강을 뜻한다.[5]
수도는 아순시온(Asunción)으로 이 나라에서 사실상 대도시는 여기 하나뿐이다.
국토 면적은 40만 7,000km²로 내륙국에다 큰 나라들에 둘러싸여서 크기가 작아 보이지만 이래봬도 독일보다도 큰 면적이다. 인구는 2015년 CIA 기준 6,783,272명.
남아메리카 대륙 남부의 사바나 대평원인 그란차코(Gran Chaco)가 국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원국가다. 공용어는 과라니어와 스페인어다. 화폐 이름도 과라니일 정도인데 아메리카 원주민 과라니족의 피가 많이 섞였기 때문이다. 종교는 기독교가 절대 다수[6] 이며 2013년 기준으로 대부분[7] 이 가톨릭을 믿고 있다.[8]
파라과이 국기는 잘 보면 네덜란드 국기 가운데에다가 문장을 새겨놓은 듯한 모양인데, 국기 가운데 문장의 앞/뒷면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앞뒤를 구별해서 걸어줘야 한다.
2. 자연
남아메리카 중앙 한복판에 위치해 볼리비아와 함께 둘밖에 없는 내륙국이다. 국토 전체가 라플라타 강 수계에 속하며, 국토의 정중앙을 파라과이 강이 가로지르며 서쪽 국경으로는 필코마요 강이, 동쪽 국경으로는 파라나 강이 흐른다. 파라과이 강 동쪽으로는 언덕들이 많은 반면 파라과이 강 서쪽은 광활한 그란차코 대평원이 펼쳐져 있다. 파라과이 강은 수운을 통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다.
수도 아순시온은 파라과이 강과 필코마요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남쪽으로 아르헨티나 포사다스와 접하고 있다. 2018년 기준 아순시온 시에는 52만 명이, 그리고 아순시온 외곽 지역을 포함하는 수도권인 센트랄 주에는 207만 명이 거주해 인구의 약 37%가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 외국은 대게 행정구역을 무시하고 생활권으로 도시를 구분하기에 207만 명의 센트랄 주 인구를 아순시온 인구로 간주한다.
파라과이 강 동쪽은 대체로 해발고도가 낮지만 브라질 고원의 맨 끄트머리라서 여러 언덕들과 몇몇 산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최고봉인 세로 트레스 칸두(Cerro Tres Kandú) 봉은 해발 842m이다. 한편으론 동부 지방엔 이과수(Yguazú) 댐이나 야시레타(Yacyreta) 댐을 비롯한 여러 댐들이 위치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규모가 제일 큰 것으로 세계 최대의 수력 발전소인[9] 이타이푸 댐이 브라질 국경을 흐르는 파라나 강에 위치해 있다. 워낙 댐의 규모가 크다보니 전력 생산량이 엄청나서 공급이 소비를 한참 뛰어넘어서 전력 생산량의 85%를 브라질에 수출할 정도다. 다만 전력 자체는 풍부하지만 공급망이 좋지 못해서 정전 등은 빈번히 일어난다. 진짜다. 아순시온 대정전 사태가 가끔 뉴스에 나오고는 한다.
수도 아순시온을 포함해 파라과이 인구의 97%는 파라과이 강 동쪽에 거주하고 있다.
파라과이 강 서쪽은 차코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인 그란차코 평원이 펼쳐져 있으며, 대체로 평평하고 여러 강들이 흘러 습지가 많은 편으로 람사르 협약 등록지인 리오 네그로 습지(3,700km²)나 티푼케 습지(2,800km²)처럼 매우 큰 습지들도 분포한다.# 파라과이 강 서쪽의 그란차코 평원은 한반도보다 넓은 파라과이 국토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으나,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해 인구가 극히 희박하다.
파라과이의 기후는 파라과이 강 동쪽은 주로 아열대기후(Cfa)를, 서쪽은 주로 사바나기후(Aw) 내지 스텝기후(BSh)를 띈다.
수도 아순시온의 경우 연평균기온은 22.7℃로 동아시아에서는 대만 타이베이와 비슷한 정도이며, 7월 평균기온은 17.6℃, 1월 평균기온은 27.5℃로 여름이 더운 편이고 겨울 기온도 15도 안팎의 홍콩, 마카오, 타이베이보다 훨씬 높고 가오슝과 비슷하다. 서쪽 사바나 그란차코 지역은 기온이 좀 더 높은 편이다. 강수량은 겨울보단 여름이 많은 편으로, 지역별로 편차가 있다. 파라과이 동쪽의 강수량은 대체로 1,000mm를 넘는 편으로 수도 아순시온의 경우 연강수량이 1,401mm 정도이지만, 서쪽의 그란차코 지역의 강수량은 500-1,000mm 정도로 적은 편이다.
3. 역사
파라과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라니족 인디언의 후손이라 하여 과라니라고 부르고 있으며 과라니어를 사용하면 물건 값을 깎아주기도 한다나. 하지만 진짜 과라니족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이고 인구의 대부분은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독일인 혈통 백인과 과라니족의 혼혈인 메스티소인데도 국민의 90%가 과라니어를 할 줄 안다. 이는 파라과이가 독립 당시 자국민의 혈통 전반에 섞인 과라니 부족들의 정체성을 국가 정체성으로 띄운 덕이다.
잉카문명이 발달한 안데스 산맥 일대가 아닌 대부분의 남아메리카 변방지역이 그렇듯 대항해시대와 스페인인들의 식민지 개척 이전에는 뭐하고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536년경부터 스페인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 때 스페인 왕실이 이탈리아인 탐험가들로 구성된 원정대를 과라니 부족 지역을 탐사하는데 활용했다. 그러나 과라니족은 백인들의 통치를 전면거부했으며 1607년에는 과라니족 인디언들의 계속된 반란에 지친 스페인 제국 정부는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 파라과이의 통치를 맡겼다.
예수회는 1609년 가톨릭으로 개종해 정착한 원주민들의 마을인 '레두시온(reduccion)'을 세우고, 원주민들의 강제 노역과 노예 제도를 폐지했다. 콘키스타도르와 노예무역 상인들의 반대를 극복한 뒤, 예수회의 레두시온은 강력한 '''원주민 민병대의 비호'''를 받으며 마테[10] 의 수출로 국제무역의 강호로 떠올랐다.
이런 파라과이 경제의 번영은 차츰 지역의 독립성 강화로 이어졌고, 이런 경향이 달가울 리 없었던 스페인 정부는 1750년 레두시온 제도를 금지했다. 이에 과라니족이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예수회까지 이에 동조하자, 스페인 정부 역시 무력진압으로 맞서 1756년까지 피로 점철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끝내 스페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11]
비록 짓밟히긴 했지만 예수회에 의한 17세기~18세기의 레두시온 체제는 신앙을 통해 토착민족인 과라니족을 보호하고 생존하고, 심지어 국제무역체제에서 한 몫을 챙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토착민이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스페인의 다른 식민지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매우 극적이며, 스페인 식민 역사상 매우 드문 예에 속한다.[12] 그래서 실제 주민들은 메스티소임에도 인디언 언어인 과라니어가 아직도 널리 쓰인다. 아즈텍, 마야 인디언이 원주민인 멕시코에서 스페인어만 쓰이고 역시 잉카문명 인디언이 원주민인 페루, 칠레, 콜롬비아 등에서도 아이마라어 등 잉카 언어는 소멸 직전까지 갔으며 미국과 캐나다 등 앵글로아메리카도 인디언 언어 대부분이 유실되고 영어가 국어로 쓰이는 걸 생각해보면 아메리카에서 보기 드문 사례이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식민지 생활이 계속되던 중, 1811년 5월 14일 파라과이는 스페인에 대해 독립을 선언했다.
3.1. 3국 동맹 전쟁
3국 동맹 전쟁 (Guerra de la Triple Alianza) (1864~1870)[13] 은 해당 항목 참조. 이 작은 나라가 대담하게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의 3국 동맹군과 맞장뜬 전쟁이다. 앙숙이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파라과이 뭉게는 데 적극 협조했을 정도로 파라과이가 노골적으로 두 나라를 자극하여 자초한 일이었고 당연하지만 국력 차이가 커서 밟혔다.
이 전쟁 후반기에 아순시온에 있는 파라과이 국립 기록 보관소가 브라질 제국군에게 죄다 털려서 모든 문서, 역사서 기록들이 리우데자네이루 도서관 지하창고에 150년이 넘도록 짱박혀 있다. 이거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절,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의 레두시온 체제, 파라과이 건국사, 3국 전쟁 이전 파라과이 대통령 등 정치사,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파라과이 전쟁까지의 역사 기록이 꽤 부실하며 연구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파라과이 현지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14] 에서 배우는 파라과이사는 객관적이 아닌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한 걸 감안해서 봐야 한다. 양쪽을 모두 비교해가면서 볼 경우 곳곳에서 역사 왜곡, 프로파간다, 흑색선전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사실 이걸 해결하는건 현 브라질 정부에서 저 문서를 공개하고 파라과이 정부에게 넘겨주는 거밖에 없는데 문제는 브라질 국립박물관이 화재로 불에 타 버리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이제 파라과이의 옛 역사는 영영 알 수 없게 된 셈이다. 그나마 부분적으로는 용케 칠레 등으로 빼돌린 것들이 조금씩 있어[15] 칠레 대학들이나 멕시코 UNAM대학 등이 연구하기도 한다.
3.2. 그 후
3국 동맹 전쟁 패전 이후 파라과이의 경제와 사회는 초토화되었으며 돈이 없었던 파라과이 정부가 재건을 위해 국가소유였던 토지를 팔아 넘기면서 불평등이 매우 심각해졌다.
전쟁 이후 파라과이에선 콜로라도당과 자유당의 양당이 등장하게 된다. 처음에는 보수당인 콜로라도당이 집권했으나 1904년 반란으로 자유당이 집권한 이후로는 자유당이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다만 자유당 집권기 동안에도 내란이 빈발하면서 정치가 안정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이때 파라과이는 인구구조도 막장이었는데 '''전국민의 90%가 여성'''인 엄청난 여초국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길거리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강간이 일상다반사처럼 벌어지고 있었으며 파라과이가 정부차원에서 남성인 볼리비아 등 주변국 출신 노동 이민자들에게 자기네 나라로 귀화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런 후유증으로 인해 파라과이는 1950년대까지 일부다처제를 '''해야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파라과이는 1932년~1935년 간 볼리비아와 그란차코 지방[16] 일부인 차코 보레알 지방[17] 을 두고 차코 전쟁(Guerra del Chaco)을 벌이게 된다. 이 전쟁 당시 국제적으론 볼리비아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압도적이었다. 볼리비아는 인구도 3배가 더 많았으며 극단적인 여초국가가 되어버린 파라과이를 감안하면 병력은 아예 넘사벽으로 볼리비아가 더 많았으며 땅도 훨씬 넓고 미국의 강력한 지원 아래에 장비와 무기도 더 우수했으며 1차 세계 대전 및 여러 전투에서 경험이 많은 독일 장군 한스 폰 쿤트(1869~1939)가 군사고문으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파라과이군 지휘관인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1880~1940)는 차코 보레알 지방에 '''석유가 많은 것 같으니''' 해외 석유기업들의 자본 지원을 요청했고 바로 네덜란드 쉘이 이 지역 석유 개발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장비 자금을 제공했다. 미국도 질세라 록펠러 그룹의 스탠더드 오일은 볼리비아를 지원하면서 같은 조건을 요구해 이른바 정유업체 전쟁이라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에스티가리비아는 우선 저지대 늪지가 많은 차코 보레알 지방 특성을 이용하여 현지에서 대대로 살아온 이들을 군인으로 고용했으며 지리적 특성을 이용한 전술로 전투를 벌여 큰 효과를 거뒀다. 또한 파라과이군은 볼리비아군의 무선 감청과 암호문 해독을 막으려고 스페인어 대신 과라니어로 무선 통신을 진행하고 암호문도 과라니어로 작성하며 심지어 병사들의 대화도 과라니어로만 쓰게만들었다.
결국 3년이 넘는 전쟁 끝에 파라과이가 전술적 승리를 거둔다. 사실 볼리비아도 고전했지만 전쟁 말에는 반격에 성공하면서 전쟁이 더더욱 길어질 가능성이 컸는데 전쟁을 피하고자 차코 보레알 지역 난민이 아르헨티나로 계속 오는 통에 신경쓰던 아르헨티나가 전쟁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는 겉으론 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서면서 만약 전쟁을 안 끝내면 아르헨티나도 전쟁에 끼어들어 두 나라 다 묵사발 내겠다고 으름장을 내놓았는데 이 당시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으뜸가는 경제 및 군사 최강국[18] 이기에 두 나라 모두 아르헨티나에 맞서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휴전협정을 맺는다.
전투는 1935년에 끝났지만 여러 번의 회의 끝에 전쟁은 1938년에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종전선언 및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종결된다.
파라과이는 차코 보레알의 3/4을 손에 넣었으며 볼리비아는 파라과이 강 유역 및 푸에르토카사도 지역을 얻어서 어느 정도 땅을 확보했지만 전쟁 피해가 훨씬 컸기에 전쟁 중에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나고 사령관도 여럿 교체될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결국 전술적 승리및 이득은 파라과이가 더 컸기에 볼리비아는 전후 처리에 골치를 겪는다. 볼리비아는 안 그래도 칠레에 안토파가스타 주를 뺏겨 내륙국으로 전락했고 브라질에는 고무 생산지 아크레 주를 털린 데 이어 최약체인줄 알았던 파라과이에까지 털려버려 '''싸움 더럽게 못 하는 나라'''로 완전히 찍혀버렸다.
몇 번의 쿠데타 끝에 치러진 1939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스티가리비아가 자유당 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와 당선되었지만 겨우 1년만에 영토 순방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파라과이에선 자국 화폐에 그의 얼굴을 넣으며 그를 기렸다.
그런데 웃기게도 전쟁이 끝나서 가장 좋아라하던 이들 중 하나인 쉘은 얼른 차코 보레알 지방에서 석유가 진짜 나오는지 탐사를 시작했지만 '''끝내 석유는 전혀 없던 게 드러나버리면서''' 실망해야 했다. 에스티가라비아가 원조를 얻고자 뻥을 친 것이었다.
암튼 에스티가리비아의 사망으로 국방부장관 이히니오 모리니고가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모리니고는 콜로라도당과 손잡고 당시 전세계를 휩쓸고 있던 파시즘 또는 나치즘식 독재정치를 추구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헌법을 정지하고 자유당의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이 모리니고 대통령의 독재에 저항하는 총파업과 학생들의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에 모리니고 대통령은 완화책으로 1946년 정치활동을 합법화하여 야당인 2월당과 여당인 콜로라도당으로 구성된 내각을 조직했다. 하지만 2월당원은 1947년 초에 모리니고에 반발하면서 연립내각을 파기했고, 그러자 이에 격노한 모리니고 대통령은 콜로라도당만을 지지하면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되었다. 이에 2월당원은 자유당 및 파라과이 공산당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차코 전쟁 후 쿠데타로 잠깐 집권했던 라파엘 프랑코를 리더로 하는 반란군으로 내전을 일으켰는데 이를 파라과이 내전이라고 부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전부터 대통령에게 충성하던 군대도, 해군의 거의 전체와 육군 일부가 반란에 가담했다. 육군사령관이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콜로라도당을 지원하면서 모리니고는 반격에 나섰고, 결국 압도적으로 1947년 8월에 반란군을 해산시키며 승리했다.
이후 파라과이는 야당이 불법화되면서 1당 독재 국가가 된다.
그렇게 파라과이 내전은 끝나고, 콜로라도당의 집권체제가 이어졌는데 당시 최고 지휘자였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는 1954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페데리코 차베스 대통령을 축출하고 콜로라도 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는 파라과이의 경제개발을 추진함과 동시에 반대자에 대한 인권탄압과 권력기반 유지를 위한 막대한 비용지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후안 페론[19] 과 소모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니카라과에서 축출되고 미국에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을때 받아들이기도 했고 1970년대-1980년대 더러운 전쟁이 펼쳐졌을 당시에 미국 CIA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농지 문제에 있어서는 말로는 토지개혁을 한다해놓고 사실상 지지계층에게 차별적으로 농지를 나눠주다시피해서 빈농들과 원주민들을 외지로 쫓겨나게 만든 결과를 낳았으며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미국이 애써 모른 체 하면서 35년간 장기집권하였고 1980년대 남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민주화 열풍이 불었을 때에도 1988년에 8번째 대통령직에 오른 스트로에스네르는 1989년에 오른팔 안드레스 로드리게스에 의한 쿠데타로 축출되어 브라질로 망명했고 거기서 죽었다. 2006년에 브라질에서 사망한 그의 시체는 파라과이 정부가 인도를 거부하여 지금도 브라질의 공동묘지에 있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의 유산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파라과이의 대표적인 문제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소수의 지배계층이 토지를 거의 독차지하는 문제도 스트로에스네르와 관련이 있고, 민주화 이후로도 해결이 전혀되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로도 장기집권한 콜로라도당의 의원들 상당수가 이러한 토지문제와 관련이 있는데다가 그나마 토지개혁을 중점에 둔 루고 대통령도 임기 1년을 앞두고 탄핵당하는 일까지 겹쳐져서 앞으로도 해결하기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콜로라도당의 횡포가 어찌나 심했는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과거 스타플레이어인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20] 는 1999년 자국에서 코파아메리카가 열렸을 때 '''우리나라에는 미국 거지보다 못사는 550만 인구가 살고, 미국 부자보다 잘 사는 20만명 부자가 산다. 그런 부자들 이득을 대변하는 오비에도 정권을 찬양할 결과를 만들고 싶지 않다.'''라며 보이콧을 선언해 출전조차 안 했을 정도였다.
4. 경제
산업이 목화와 콩, 동물 사료 생산, 축산업 등 대부분 1차 산업인 농업에 치중되어 있는 개발도상국이다. 특히 파라과이에서 농업은 GDP의 21%, 전체 수출의 64%를 차지할 정도로 높다.
기본적으로 과일의 질은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파라과이의 한겨울에도 식지 않는 뜨거운 태양열 때문인 듯 하다. 기본적인 농사법이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라 기후가 비슷한 대만에서 농사법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기초적인 공업품도 수입하는 그런 나라로 너무 높은 수입품 의존도를 지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거야 공업이 주산업이 아닌 홍콩,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 같은 몇몇 선진국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나라는 개발도상국 그것도 후진국에 가깝다는 게 문제고 이것이 고스란히 서민경제에 부담이 된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을 잘 살리면 앞으로 남아메리카 대륙의 물류허브가 될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위치한 접경국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등이고 앞의 두 나라는 특히 남미 경제의 양대축이다. 그렇지만 1차 산업면에서 소수의 대지주들이 토지를 독차지하다시피하는 바람에 소작농들이 빈곤하게 살고 있어서 꼭 해결해야 할 문제점으로 손꼽히고 있다.[21]
GDP $308억, 1인당 GDP $6,229, 인구 702만명인 개발도상국으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와 동급이고 태국, 말레이시아보다도 못 사는 나라다. 하지만 의외로 공식 최저임금 수준은 남미 기준으로는 나쁘지 않은 수준인데 1인당 GDP가 1000달러 이상 높은 에콰도르와 비슷하고, 1인당 GDP가 1만 달러 중반 수준에 달해서 칠레와 우루과이와 비교해도 차이가 별로 크지 않다. 물론 이는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의 최저임금 수준이 2015년 이후의 화폐가치 하락으로 떨어진 영향도 크다. 거기에 베네수엘라는 그럭저럭 사는 나라에서 최빈국으로 수직낙하했다. 그러나 공식 최저임금 수준과는 별개로 1인당 GDP 수준이 남미에서도 낮은 건 여전해서 실제로 농민들이나 빈민층의 경우에는 최저임금도 못받고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심각한 사회문제이다. 그러나 2018년에는 아르헨티나의 화폐가치 추락에 힘입어 드디어 아르헨티나의 최저임금을 추월했다. 그리고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볼리비아의 최저임금도 아르헨티나를 추월할 듯 하다.
최근 2~3년간에는 한국과의 경제협력이 급속도로 증진되고 있는 나라 중 하나다. 원래부터 한인 이민자들 즉 교포의 세가 다른 남미 국가들보다 강한 면도 있지만, 최근 파라과이 정부는 각종 사회인프라 확충[22] 사업을 적극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라과이 현지 기업들 입장에서는 인프라 쪽 핵심기술이 부족한 면이 있기에 경제 파트너를 적극적으로 찾고 있고, 한국이 상대적으로 잘 맞는 파트너인 것이다. 포털에서 파라과이라고 검색해 보면 한국의 각종 정 관계 단체나 지자체와 업무협약을 맺은 사례가 쏟아지고 있다.
교통 외에도 소방 분야에서도 협력이 증진되어 불용물자화된 국산 구급차를 파라과이 적십자사에 무상 원조해주거나 한국의 각 지역 소방본부 소속 119구조대가 파라과이 소방대에 각종 인명구조 기술을 전수해주고 장비도 지원해주기도 한다. 파라과이 소방당국도 연수를 보내 한국 각 지역 소방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현지에 보급하기도 한다.
5. 정치
파라과이/정치 문서 참조.
6. 스포츠
여느 남미 국가답게 축구가 가장 인기 좋다. 국대에 관한 것은 파라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문서 참조.
한국에서 나름 인지도가 있는 파라과이 사람으로는 다혈질에 골넣는 골키퍼로 유명한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23] 와 미수다에 출연한 아비가일 알데레떼 등이 있다. 그리고 잘생긴 로케 산타 크루즈도 포함한다. 사실 어린 세대에게는 칠라베르트는 좀 옛날 사람이고 산타크루즈가 더 인지도 있기도 하다.
2010년 6월 29일, 11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월드컵 16강전 파라과이 vs 일본 경기 때[24] . 한, 일 양국 네티즌 사이의 키워 때문에 '''주한 파라과이 대사관 사이트가 다운되는 일이 발생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병림픽이다. 라리사 리켈메라는 파라과이인 여성 모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는데 리켈메의 화끈한(...) 공약 덕분이었다. 항목 참조. 여담으로 1999년에 코파 아메리카에 특별참가한 필립 트루시에 체제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을 4-0으로 박살낸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월드컵에선 승부차기로 간신히 승리했는데 이 때 한일 양측 기량이 좋은 편이기는 했다. 한국의 경우만 해도 우루과이를 만나 거의 이길 뻔하였다가 그놈의 물회오리슛(...)으로 모든 걸 날려먹었다.
그러나 이후 파라과이를 월드컵에서 볼 수는 없었다. 2014년에서는 꼴등으로 지역예선 탈락했고, 2018년 월드컵도 영 신통하지가 않았다. 메시가 사라진 후 기량이 급저하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이외의 모든 팀들에게 고전했다. 그나마도 아르헨티나전은 두 경기 모두 리오넬 메시 없을 때 치르는 행운이었다. 애매한 순위와 승점들로 인해[25] 이례적으로 지역예선 마지막 라운드가 모조리 다 같은 시간으로 배정되었고 거기서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이 천적인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아주 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었는데다가 페루와 콜롬비아가 비기기 작전을 시전하고 있었던지라 7위였던 파라과이는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이기기만 하면 5위로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통해 본선에 올라갈 수 있었지만 되려 베네수엘라에게 패했다. 결국 칠레가 패해 6위가 되었는데 파라과이도 패해서 7위를 기록하면서 러시아 월드컵도 본선 진출도 실패 확정. 되려 6위였던 아르헨티나가 에콰도르를 잡으면서 3위로 치솟아 본선에 직행했다.
확실히 기량저하가 보이는데 칠라베르트와 산타크루즈 이후 이렇다할 스타플레이어 자체가 없어져서 그런 게 크다. 최약체로 그간 비하되던 베네수엘라 축구 국가대표팀은 오히려 토마스 링콘이라는 스타의 등장으로 최근 파라과이, 볼리비아보다도 기량이 좋아지는 판에 있다.
7. 문화
파라과이는 한국인 이민 1세대가 정착한 곳이라서 한국인들이 많다.
1960년대 농업이민에서 이주가 시작되었으며 최근 건설업계 쪽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장기간으로 근무하고있는 케이스도 꽤 늘고 있다. 노래방도 흥행하고 있고[26] 전국노래자랑도 다녀갔을 정도이며 사시장에 가보면 한국인이 주인인 곳이 많다. 일본계 브라질인이 동양계 주축인 브라질이나 화교들이 주축인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비해서 훨씬 한국계 이주민들의 목소리가 크고 존재감도 큰 편이다. 파라과이 자체가 동양인들이 별로 없던 나라인지라 그런 게 크다. 이 나라에도 화교들은 쿨리 출신으로 들어갔지만 대부분 돈이 더 잘 벌리는 이웃 아르헨티나로 이주해버려 파라과이는 동양계 메인이 한국계가 되어버렸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의 교민들이 매우 조용한 데 비하여, 파라과이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소 발전이 더딘 곳이라서 한국인 교민들이 쉽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 교민들이 소주나 삼겹살, 한인 청년들의 주말 축구 등 한국문화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현지화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다 보니 현지인들도 한국에서 만든 것이면 좋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인종차별이 강해 한국계에 대해 무시하고 차별하는 성향이 강한 반면 이 나라는 그렇지 않다.
파라과이는 전통문화, 과라니족 인디언 고유의 문화가 꽤 많이 남아있다. 수공예 (Artesania)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전통 특세품이 파라과이를 대표하는 특산품 중 하나로 소개된다. 대표적인 수공예작으로는 냔두띠(Ñanduti) 가 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이 파티(fiesta)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굉장히 즐기는 나라이다. 진짜다. 매주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에는 항상 노랫소리가 동네동네마다 들린다. 새벽 3시까지 틀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정도로 흥이 겨운 사람들이다.
미국이나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같이 낀세아녜라라고 여자아이의 15살 생일에 하는 큰 파티도 있다. 스윗 식스틴(Sweet Sixteen)으로도 알려진 것인데 미국에서도 원래 서부 캘리포니아에 원래 살던 멕시코계 미국인들의 영향을 받아 들어온 것이다.
7.1. 언어
공용어는 스페인어과 과라니어이다. 파라과이의 스페인어는 과라니어의 영향을 받았고 과라니어에서 유래된 어휘,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파라과이 주민들이 과라니어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편이다. 그러나 현실은 스페인어를 좀 더 세련되게 인식한다. 두 언어 외에 단연 많이 쓰는 언어는 브라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어이고 국제 공용어인 영어도 최근 미국 영향으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배우는 사람이 많다. 이 나라의 백인 부유층은 십중팔구 자녀들을 미국에 유학보내고 어지간한 한인 유학생들에 비해 잘 사는 애들이라 한인 유학생들 중에 박탈감을 느끼는 애들도 있다.[27]
과라니어는 한때 브라질, 아르헨티나를 주름잡던 과라니족 인디언들이 쓰던 언어이다. 학교에서 파라과이 학생들이 배우는 과라니어(Gurani Ñe’ê) 와는 차이가 있다. 파라과이의 시골 쪽에 사는 주민들은 스페인어 보다 과라니어 를 유창히 구사하는 편이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순시온에 사는 젊은이들은 스페인어를 세련되게 여기고 과라니어를 배우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을 비친다. 과라니어를 수준 낮은 언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제로 시골에 살수록 과라니어를 유창히 구사하게 되는 언어적 특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파라과이 정부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과라니어는 파라과이 초중고 교육과정중 필수과목이며, 의학계열을 공부하고싶은 의대생 에게도 과라니어 구사자들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최근 필수과목으로 채택하였다.
그리고 몇 안되는 아메리카 내 인디언 언어 보존국가인지라 과라니어는 파라과이 문학에서도 많이 등장한다. 많은 파라과이 문학작품에서는 과라니어 로 이루어진 시와 노래들이 존재한다. 과라니어는 파라과이 문학의 필수요소이며, 파라과이에서 과라니어는 공용어인 만큼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7.2. 음식
대부분 남아메리카 대륙 나라들이 그렇듯 육류 특히 쇠고기가 굉장히 싸다. 대체로 쇠고기를 통째로 구워서 먹는데 이것을 아사도(Asado)라고 한다. 처음 먹을 때는 마치 원시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사도는 가우초 문화권의 공유물로 브라질에도 슈하스코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돼지고기보다도 쇠고기가 쌀 정도다.
주식은 만디오카(Mandioca)라고 불리는 감자 같은 채소인데, 이걸 밀가루처럼 가루로도 만들고 그냥 고구마처럼 쪄서 아사도를 먹을때 함께 먹는다.
그 외에도 전통 빵인 치파(chipa)가 있는데, 주 재료는 파라과이 치즈(queso paraguaya)와 만디오카 가루로 이것이 밀가루 반죽보다 빵을 더 쫄깃쫄깃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하며 집에서 만들어먹을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 그 밖에도 로미토(romito), 베주(mbeju) 등의 음식이 있다.
의외로 파라과이에서 한식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 수도인 아순시온의 센트로에 자리잡은 모 한식당은 줄을 길게 서야 할 정도다. 특히 김밥은 파라과이 주민들 사이에서도 먹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일반 동네 마트에서도 김밥을 만들 수 있는 방법과 함께 포장된 김을 볼 수 있는데, 스시라고 적혀 있다. 김밥 자체가 노리마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뭐라 하기도 그렇다.[28] 심지어 김치는 우리나라의 짠 맛이 아니라 단맛이 대단히 강하게 개량되었다. 현지인 입맛에 맞추어 로컬라이징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여하튼 파라과이에선 갈비찜[29] 이나 불고기가 굉장히 유명하고 심지어 한국식 중화 요리인 탕수육, 짜장면까지 이미 훌륭한 한식으로 알려져 있어서 덕분에 한인들의 파워가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현지인들도 몇몇 한국어 단어를 알 정도라고 한다. 한식이 알려진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일식집과 중식집마저 파라과이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다.
순수한 전통적인 한식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한식의 세계화'''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기다. 중화 요리나 멕시코 요리, 이탈리아 요리 등의 세계화도 사실 나라마다 환경에 맞춘 돌연변이에 관대해 그런 면이 컸는데 유독 한식이 배타적이긴 했다. 멕시코의 텍스멕스나 미국식 피자/ 파스타, 미국식 중화 요리 등을 보면 한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다.
8. 외교
9. 가는 법
한국에서 직항으로 가는 항공편은 없다. 그러나 대신 2017년 아에로멕시코가 서울에 취항해서 이제 멕시코를 경유하는 게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다.
가장 편수가 많은 노선을 이용하는 방법으로는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아에로멕시코로 간 뒤 상파울루에서 아무 브라질 비행기나 잡아타고 가는 게 효율적이다. 어차피 파라과이는 나라 특성 상 거의 국제선 항공로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가는 것이 대다수이며 상파울루-아순시온 간 비행시간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과거에는 유럽이나 아라비아 반도 국가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에서 이중환승하기도 했으나 아에로멕시코 취항 후에는 같은 라틴아메리카이고 쭉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을 거치는 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되었다. 멕시코는 입국도 그리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한가지 문제는 아에로멕시코의 고질병인 그 놈의 지연운항(...)이다. 이거 피하고 싶으면 에미레이트 항공으로 두바이 국제공항을 거쳐 상파울루로 간 후 다시 이중환승하는 기존 방법을 써도 된다만 가격 면에선 아에로멕시코가 확실히 경쟁력이 더 있다.
중국, 일본의 경우 중국 쪽에서는 닥치고 홍콩 국제공항에서 캐세이퍼시픽+아메리칸 항공 조합을 이용하고 일본 쪽에서는 일본항공+아메리칸 항공 혹은 아메리칸 항공의 도쿄-달라스 노선으로 달라스를 거쳐 환승하는 게 보편적이다. 남아메리카에 갈 때 유럽을 거치거나 중동을 거치는 루트는 동쪽에 있어 태평양에 맞닿은 일본에선 상상도 안 하는 루트이고 그냥 편하게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거친다.
10. 나무위키와 파라과이
나무위키의 운영사인 umanle S.R.L.의 본사가 수도인 아순시온에 있다. 이로 인해 한때 나무위키에서 파라과이가 유명세를 탄 적 있다. 리그베다 위키와의 소송, 법인세, 저작권, 명예훼손 등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함이다. 해외 도메인인 한국계 사이트 대부분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이로 인해 나무위키 토론창 등에서 나무위키는 위키피디아처럼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위키이지 대한민국 국적의 위키가 아니므로 대한민국 법률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등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국적 위키인 것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양상이 자주 나타나게 되었다. 헌법 문서에 파라과이 헌법을 작성해야 한다거나, 사건의 시간대를 파라과이를 기준으로 기재해야 한다는 등의 도발성 토론도 자주 열리기 때문에 토론창에서 파라과이가 언급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사용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낭설이고 사실이 아니다. 운영사만 파라과이에 있지 대한민국 국적자가 사용하는 만큼 대한민국 법률을 절대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파라과이 경찰이 단순 명예훼손 등으로 협조해줄리가 전무하기 때문에 비로그인 사용자로 활동하지 않는다면 어느정도 대한민국 법률에서 안전하다.
참고로 대한민국 법은 속인주의와 속지주의를 모두 채택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이든 파라과이에서든 '''대한민국 국적인 사람이 한국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면 처벌받는다'''. 이는 법인뿐만 아니라 파라과이 경찰과 사법공조를 거치면 개인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그래도 회사가 파라과이에 있어 사이트 분위기가 자유롭다는 점 때문에 아카라이브에서는 "우리나라"라는 드립이 자주 나온다.
11. 여담
볼리비아와 벌인 차코 전쟁 당시, 상대적으로 고지대라 모기가 없는 지역에서 살던 볼리비아 병사들은 저지대인 파라과이로 내려왔다가 '''모기와 말라리아에 시달렸다'''. 그리고 파라과이가 반격을 가해 볼리비아로 진격한 뒤에는 이번엔 산이 없는 나라인 파라과이 병사들이 '''고산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볼리비아는 아마조니아 내 저지대인 산타크루즈만 빼면 대부분이 고원 지대로 수도 라파스는 아예 대놓고 알티플라노 고원 상에 올려져 있어서 모기는 켜녕 바퀴벌레도 못 본다. 바퀴벌레가 살기엔 기온도 너무 낮고 기압도 낮아 환경이 부적절하다. 애초 라파스의 연 평균온도는 한국 중부지방의 10-11월 수준으로 1년 내내 쌀쌀하다. 따라서 대부분 사바나인 그란차코의 더위와 해충이 고역이었고 이게 패배로 이어졌다.
파라과이 시간대는 PYT라고 불리며 평상시에는 UTC-04:00를 사용하며 일광 절약 시간제 때는 UTC-03:00을 사용한다. 평상시 시간대는 이웃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하고 똑같다. 그래서 한국시각에서 낮/밤만 바꾸면 바로 이쪽 시간대라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든다.
파라과이 국경 모양이 이천시를 닯았다.
최수종 부모님이 학업 문제로 고등학생이던 최수종과 누나만 한국에 남겨놓고 전 가족이 파라과이로 이민가서 사업을 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 니체가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던 적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니체와 결혼한 백인 우월주의자 베른하르트 푀르스터는 유대인의 영향이 없는 순수한 독일인들의 이상 낙원을 건설하겠다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여동생 포함(!) 일부 추종자들을 데리고, 1888년 파라과이로 이주하여 누에바 헤르마니아(Nueva Germania)라는 도시를 건설했으나 푀르스터 본인이 빚에 시달려서 89년 음독자살하고, 농사가 망하면서 기근과 질병이 창궐해서 추종자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독일계 인구의 정착은 실패했으나(니체의 여동생은 5년 정도 머무르다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도시 자체는 중소 도시로 성장하는데 성공했다.
12.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파라과이인
가나다 순
- umanle: 나무위키의 소유자
- 델핀 베니테스 카세레스
- 라리사 리켈메
- 로케 산타 크루즈
- 마누엘 플레이타스
- 마리오 아브도 베니테스
- 아르세니오 에리코
- 아비가일 알데레떼
- 아우렐리오 곤살레스
-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 어거스틴 바리오스 망고레
- 오라시오 카르테스
-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 후안 아파라
- 후안 이투르베: 아르헨티나와 이중국적자인데, 여자친구의 권유로 국가대표는 파라과이를 택했다.
13. 외부 링크
[1] 양면이 다른 국기를 사용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다. 앞뒷면의 문장 모두 2013년에 새로 지정되었다. 하나만 써야 한다면 앞면을 쓴다. 그 외 오리건 주 주기도 양면이 다르다.[결함있는민주주의] 6.18점[2] 임기: 2018년 8월 15일 ~ ''2023년 8월 15일'' (예정)[3] 황색경보 지정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4] 산페드로주, 콘셉시온주, 아맘바이주[5] 애석하게 우루과이는 남미 대륙에서 선진국 반열에 든 반면 파라과이는 그딴 거 없는 후진국이다.[6] 96%로 사실상 절대다수다.[7] 약 88%[8] 이 나라도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처럼 복음주의 성향 교회들과 성공회를 중심으로 개신교의 성장세가 대단히 크다. 무려 8%가 개신교인이 되었다.[9] 싼샤 댐이 완공되면서 2014년 세계 최대 자리를 넘겨준 적도 있었으나 2015년부터 다시 발전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10] 우려내서 마시는 찻잎을 말한다. 다이어트 차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11] 영화 미션이 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12] <최초 인류의 후예들> 63~64쪽에서 인용.[13] 파라과이 전쟁(Paraguayan War)이라고도 한다.[14] 특히 3국 동맹 전쟁 당사국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15] 아르헨티나의 앙숙인 칠레는 파라과이에 유일하게 우호적인 나라였다. 게다가 파라과이도 칠레처럼 볼리비아를 박살내기도 했다.[16] 그란차코 지방을 모두 합치면 60만 km² 가 넘는다. 차코 보레알을 빼면 나머진 아르헨티나와 볼리비아의 땅이다. 그리고 그란차코 지방의 과반수가 아르헨티나의 영토이다.[17] 25만 9,000km² 넓이로 한반도보다 더 크다[18] 그 거대한 브라질 제국을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놨고 그래서 우루과이라는 나라가 건국된 바 있다.[19] 국내에서는 좌파 표퓰리스트라고 알려졌지만 그건 후안 페론이 공산주의자를 때려잡은 경력이나 1950년대 중반 축출 이후에 우파 정권이 집권한 국가에서 장기간 망명한 사실은 빼고 한 얘기로 후안 페론 1기 집권기 이후부터 1990년대 이전까지는 페론주의 정당이 집권한 기간이 의외로 길지 않다. 여하튼 그래서 파라과이 내전 당시에 콜로라도당을 대놓고 지지하며 전함을 지원보내주기도 했다. 물론 파라과이 내전이 끝나고 나서 자유당원들을 망명객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하간 그러한 공적(?)덕택에 아르헨티나에서 강제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을때 파라과이에서 한 동안 망명생활을 보내기도 했다.[20] 나무위키 유저 주축인 저연령층 어린 세대는 잘 모를 사람인데 무려 '''골 넣는 골키퍼'''로 유명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이 돌아이 기행을 선보인 후 재미들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번 더 선보였다.[21] 2019년 11월에 발표된 공식 통계에 따르면 인구수의 약 1.9%가 개인 사유지의 94%를 갖고 있다.[22] 특히 철도, 고속도로 등 교통 분야[23] 필드골을 넣는다는 건 아니고, 페널티킥과 프리킥으로 30~40골 정도를 득점했다. 1990년대 후반(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유명해진 선수다. 골 넣는 골키퍼인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파라과이 축구의 황금기를 열은 선수로써, 최후방 수비수 역할까지 하면서 맹활약했다. 그 1998년 프랑스 대표팀과 반코트 경기를 하면서도 로랑 블랑의 결승골이 터지기 전까지 전후반 90분, 연장전반까지 무실점으로 버티는 괴물같은 활약을 했다. 은퇴 후에는 정치에도 뛰어들기도 했고, 해설자로도 전업해서 2010년 6월 29일 vs 일본전을 해설하는 등 여러모로 활동 중이다.[24] #, #.[25] 3위와 7위의 승점차가 고작 2점에 불과한 데다가 4위 콜롬비아와 5위 페루가 자기들끼리 맞붙는 형국인지라 3위인 칠레가 삽질하지 않는 한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탈락인 형국이라서(그러니까 칠레, 콜롬비아, 페루 중 하나는 무조건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기면 무조건 뒤집는 것'''이었다.[26] 일본식 가라오케가 아니라 한국에서 운영되는 노래방과 같다[27] 유학 항목에 언급된 중국인이나 기타 유색인에 대한 비하드립을 하는 못된 아이들은 사실 이러한 박탈감 때문에 온 면이 있다. 물론 원체 개념없는 애들이 더 그러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파라과이 출신 유학생들의 경우만 해도 이 나라 금수저는 물론 사회 지도층들이라 파라과이 따위 우습게 보던 보통의 한국인 어린아이들이 인지부조화를 느끼기 쉽다.[28] 근데 사실 외국에서는, 특히 한국문화가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의 경우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김밥을 대체로 스시라고 부르고 그렇게 알고 있다.[29]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에 온 칠라베르트는 갈비찜을 먹어보고 두 그릇이나 비웠다고 한다. 심지어 아욱국도 잘 먹었다고.#하니 말 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