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황해도'''
黃海道
Hwanghae Province
}}}
<colbgcolor=#ffc663><colcolor=#ffffff> '''도청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비봉길 64 (구기동)[1]
'''하위 행정구역'''
3 17 (미수복)
'''최대도시'''
[image]사리원시
'''면적'''
16,743㎢
'''인구'''
약 500만 명 (추정)
'''인구밀도'''
238.91명/㎢ (추정치 기준)
'''도지사'''
박성재
'''명예시장·군수'''
20석
'''도가'''
황해도가
'''홈페이지'''
이북5도위원회
1. 개요
2. 역사
3. 기후
4. 지역 특성
4.1. 전통적 지역구분
5. 산업
5.1. 1차 산업
5.2. 2차 산업
6. 교통
7. 특산물
8. 관광지
9. 출신인물
10. 남북통일 후 전망
11. 둘러보기
12. 관련 문서
13.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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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한반도 중북부에 있는 도(道). 이북 5도 중 하나. 황주(黃州)와 해주(海州)에서 그 이름을 땄던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황해에 접해 있어서 황해도인 줄 안다. 남쪽에 경기도, 동쪽에 강원도함경남도, 북쪽에 평안남도와 접경하고 있다. 2008년 추정 인구는 대략 400만명으로 전라북도와 인구밀도가 비슷했다.
1950년 6월 24일 이전까지는 대한민국옹진반도, 연백평야 등 황해도 본토 지역을 일부 실효지배하고 있었고, 6.25 전쟁 중에는 황해도 전역을 잠시 실효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는 황해도 본토는 전부 북한 치하로 넘어 갔고 서해 5도만이 남게 되었다.[2] 기존의 황해도 지역은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에 의하여 1945년 경기도 옹진군을 거쳐 1995년부턴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편제되어 있다.(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중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전라도를 호남, 경상도를 영남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황해도 또한 이러한 호칭이 있는데 '해서(海西)'라고 부른다. 수도인 개경-한양을 기준으로 서쪽(북서쪽)에 위치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참고로 이북 5도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황해도는 분도되지 않았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 기준으로는 황해남도황해북도로 분도되었는데 황해남도해주가 있고 황해북도황주가 있다.

2. 역사


삼국유사에서는 고기(高記)를 인용하여, 단군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웠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천 5백년을 다스렸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아사달(산)을 황해도에 소재한 구월산에 비정하는 등 황해도 일대를 평안도 지역과 함께 단군의 고적지로 보는 견해가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3] 이에 구월산 부근에는 삼성사(三聖祠), 단군굴 등 단군 관련 유적이 산재(散在)해 있다.
어째 평양서울, 개성 등 당시의 대도시에 끼여서 치이는 경향이 있다. 근초고왕고국원왕의 대결이라든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구려계 호족들의 중심지인 패서 지역(지금의 평안도)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했고 고려가 들어선 이후엔 개성의 주변지(서해도)였다. 때문에 국사 교과서 등에서는 거의 궁예의 점령지, 임꺽정의 활동지 등으로 경기도 등과 묶여서 나올 때만 설명된다. 기껏해야 방곡령(함경도 방곡령은 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정도만 좀 유명하고 마는 정도. 그러니까 존재감이 별로 없다. 조금 더 보태자면 임진왜란 당시 연안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고, 김구가 여기서 동학군의 접주를 맡았고, 안중근 일가가 여기서 지주로 살았다는 정도. 하여튼 긴 역사 동안 역사의 주무대였던 적이 없다고 보면 된다.
국내성, 평양성과 함께 고구려 3경 중 하나인 한성재령군에 있었고 고구려 멸망 직후 검모잠, 안승이 이곳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이끌었다.
신라 때는 한주에 속했다가, 후기에는 패강진이란 특수 행정구역을 두어 황해도 지역을 다스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패강진 문서 참조. 신라 말에는 이 지역의 호족들(왕건 가문의 연고지 송악은 훗날 경기도로 소속되지만 신라 말 때는 황해도 쪽과 함께 패서로 묶어 분류했으며, 황주 황보씨, 평주 박씨, 정주 유씨 등이 초기 왕건을 보좌하였다.)이 주축이 되어 고려를 건국하였고, 태조 왕건후삼국 통일에 가장 많은 공신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고려가 통일한 이후 초창기에는 정계의 패권을 잡은 지역이었으며, 광종 대 호족 숙청으로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이 지역 가문들이 고려시대를 내내 휘어잡았다.
행정구역으로서의 연혁으로 통일신라기엔 한산주 소속이었고, 고려 성종10도 체제에서 관내도가 되었다가 현종5도 양계 중 서해도로 개편되었다. 문종경기 지역이 늘어나면서 동부 지역을 뺏긴다. 이는 공양왕 때까지 이어진다. 조선이 개국한 후에는 8도제에서 명칭이 풍해도(풍천(豊川)해주(海州)에서 그 이름을 땄다.)로 바뀌었다가, 태종 대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후 현재의 구역과 이름을 얻게 되었다. 광해군 때 명칭이 일시적으로 황연도(黃延道)[4]로 바뀌었지만 인조 대에 명칭이 환원되었다.
6.25 전쟁 이전에는 옹진군연백군의 대부분, 장연군벽성군의 각 일부분이 38선 이남에 위치해 대한민국의 실효지배 하에 있었다.[5] 그 후 임시 행정조치로 실효통치 하의 장연군과 벽성군, 해주시를 옹진군과 연백군에 편입하고, 이들을 경기도 관할로 두었다. 한때 38선 이남에 잔류한 연백, 옹진, 남벽성 지역(총 면적은 제주도(濟州道)보다 좀 넓은 정도였을 것이다.)만으로 황해도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6], 한국전쟁 휴전으로 옹진군 소속의 서해 5도[7]를 제외한 육지에 접한 전 황해도 지역이 북한 치하로 넘어간 결과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전쟁 전 여흥 민씨 일가 중 한 종파가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던 곳이다. 관노비보다 개인 일가의 노비가 몇 배가 더 많을 정도로 부를 누리고 있었으며 신분 해방 당시 성을 많이 물려줘서 현재 타 종친회에 속하지 않거나 혹은 용인 일대의 땅 소유권이 없는 후손들 중 일부는 황해도 출신이라 보면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세력이었는지는 역사에 남아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 때 황해도 도청 소재지는 해주시 상동. 현재 북한 치하에서 황해남도, 황해북도로 갈리어 황해남도는 해주, 황해북도는 사리원도인민위원회(도청)가 있다. 헌데 다른 도들(평안도, 함경도 등)과 다르게 '''황해남도/황해북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다. 아무리 봐도 동서로 나눠놓은 것이지 남북으로 나눠놓은 게 아닌 것.'''[8] 충청도와 비슷하다. 다만 도명 명명 기준을 도인민위원회(도청) 소재지 기준으로 본다면 사리원이 북쪽, 해주가 남쪽에 있어 알맞긴 하다.
북한에서는 소위 신천 대학살[9]의 현장으로 반미 교육의 중요 스팟으로 이용하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산지가 엄청나게 많은 윗동네 특성상, 황해도를 주요 곡창지대로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1976년도에 북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다. 그리고 2012년도에도 봉기가 일어났다.기사

3. 기후


해안 지방은 황해 해류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화하고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기온의 교차가 커진다. 해안 지대의 연평균 기온은 10 ~ 11도인데 내륙 지방은 9 ~ 10도가 되고 연교차는 전자가 29 ~ 31도인데 비해 후자는 34도 이상이 되는 곳도 있다. 강수량은 평균 900mm 정도로서 소우지대에 속한다.

4. 지역 특성



'''황해도(해서)'''
黃海道(海西) | Hwanghae Province(Haeseo)

【한반도 전도에서 위치보기】

'''위치'''
대한민국(한반도) 중서부 / 남한 서북부 / 북한 서남부
'''면적'''
16,743㎢
'''인구'''
약 400만 명(추정)
'''도지사·광역지자체장'''
박성재(황해도), 박남춘(인천광역시)[A]
'''인구밀도'''
238.90명/㎢
'''행정구역'''
[image] 황해도
[image] 인천광역시[A]
'''최대도시'''
사리원시
'''별칭'''
해서
대한민국과 접경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8도 중에서 특히 대한민국 사람들에겐 가장 존재감 없는 지역 중 하나다. 일단 북한에 있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게 당연하고, 북한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지역이 평안도, 함경도이다 보니 황해도 사투리는 물론이며, 황해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게 당연한 일. 게다가 대한민국이 실효지배하는 유일한 황해도 지역인 옹진군 일부 도서가 행정적으로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까닭도 크다. 현재는 휴전선 이북의 북한에 속한 지역이지만, 지역 구분 상으로 멸악산맥 이남인 해주, 연백 등)은 본래 중부지방의 일원이었으며 경기도와 지역적 특색도 비슷했다. 만일 황해도권이 남한 치하에 있었다면 충남이나 강원도 못지않게 경기도색이 짙은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황해도를 표기한 지도가 선교사들에게 서해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지면서 Yellow Sea의 어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설이 있으나, 다수설은 아니다. 다만 발해(潡海), 창해(蒼海)와 달리 황해란 단어가 시기적으로 한참 늦게 등장한건 분명한 사실이다. 거꾸로 19세기에는 외국인들이 황해도를 황해에 인접해서 붙였다고 이해한 경우도 있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넓은 평야를 끼고 있고, 특히 덤으로 대한민국과 가까운 최전방 지역이기 때문에 산업 면에서나 군사 안보 면에서나 중요한 요충지라고 볼 수 있다. 통계를 보면 황해도의 군지역에서는 도시화율이 50%를 넘는 곳이 없어 많은 인구가 농촌에 묶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이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향신료라는 고수를 즐겨 먹는 지역이다. 60년대에 시장 채소전에 가서 "고수 주세요"라고 하면 "이분 황해도에서 오셨군"이라 할만큼 황해도(정확히는 황해도 남부 지역) 사람들은 고수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출처
평야가 주로 많고 높은 곳이 많지 않지만 여기도 신계군과 곡산군 등에서는 반쯤은 고원인 언덕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를 신계곡산용암대지라고 부르며, 함경도나 강원도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높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4.1. 전통적 지역구분



5. 산업



5.1. 1차 산업


무엇보다도 황해도는 농업을 빼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산지가 많은 북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평야지대가 많은 곳으로, 한반도의 No.2 평야지대인 재령평야, No.3인 연백평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 당시 황해도의 경지율은 34%로 전국 최고였고, [10] 생산량은 지금도 북한 전체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이다. 나머지 생산량의 대부분도 평안남도평안북도 해안 일대에 걸쳐있다. 경의선 라인이 아니면 쌀 재배는 거의 언감생심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제대로 된 논농사 곡창지대란 평도 있다. 또한 광복 당시 , 겨울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 황해도였다. 또한 일교차. 연교차가 매우 크고 강수량이 적어 과일 생산에 있어서는 한반도에서 제일 적합한 지역이다. 이 때문에 사과, 포도, 복숭아와 같은 과일 생산량이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또한 황해바다와 접하는 지역이어서 수산업도 발달했다. 또한 동부 산악의 신계군, 수안군, 곡산군은 임산자원이 풍부하여 임업도 행해졌다. 이렇듯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부해,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6.25 전쟁 당시에 북한이 이 지역을 상실했으면 고난의 행군을 못 넘기거나,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고 붕괴했을 거라고 한다.

5.2. 2차 산업


해주시사리원시를 중심으로 경공업이 발달했다. 이례적으로 송림시에는 옛 겐지호 제철소를 기반으로 한 제철공업이 발달했다. 옹진에는 금광, 재령군에는 철광이 있어 광업도 성행했다. 곡산군의 백년광산에서는 텅스텐이 산출된다.
안습인 게 북한 치하에서도 이렇다 할 발전소가 없다(...)

6. 교통


  • 철도
    • 경의선(京義線) : 경기도에서 예성강을 건너 황해도 금천군으로 이어진 선로는 금천, 평산, 신막, 사리원, 황주를 경유하여 평안남도로 이어졌다.
    • 토해선(土海線) : 경기도에서 예성강을 건너 황해도 연백군으로 이어진 선로는 배천, 연안, 청단을 거쳐 해주에서 종착한다.
    • 해옹선(海甕線) : 해주에서 시작하는 선로는 취야, 신강령을 거쳐 옹진에서 종착한다.
    • 사해선(沙海線) : 사리원에서 시작하는 선로는 재령을 거쳐 동해주에서 종착한다.
    • 사장선(沙長線) : 사리원에서 시작하는 선로는 재령, 신천, 송화를 거쳐 장연에서 종착한다.

7. 특산물


대표적인 지역 유명 음식은 해주비빔밥, 사리원냉면이 있다. 과일도 유명 특산물인데, 그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황주 사과, 사리원 포도, 재령 복숭아 정도. 바다가 많기 때문에 꽃게, 바지락, 조기 등의 해산물도 유명하다고 한다.

8. 관광지


해주의 부용당, 석빙고, 사미정, 백세청풍비, 멸악산, 구월산, 장산곶, 몽금포 코끼리바위, 구미포해수욕장, 성불사, 장수산, 안악 고구려 고분, 석담구곡, 옹진온천, 배천온천, 달천온천 등이 있다.

9. 출신인물


위대한 독립운동가와 해방정국을 주도했던 2명의 거인을 비롯, 은근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황해도 출신이다. 다만, 분단 이후에는 존재감이 급락. 탈북자이거나 1953년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출생한 인물만 추가할 것.
그 외에 황해도 출신은 아니지만 황해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으로는 양주동(경기도 개성시 출신. 유년을 황해도 장연군에서 보냈다.)이 있으며,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이 월남에서 피난을 와 정착한 곳이 황해도 옹진군 북면의 화산동이다. 관련 유적으로는 망국단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개성(송악) 출신의 호족이지만 패서(황해도) 지역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고려 태조 왕건도 넓게 보면 경기북부와 이 황해도와 관련이 깊다고 말할 수 있다.

9.1. 실향민


일제강점기에는 일자리를 찾아 가까운 인천광역시 일대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고 혼란한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많은 사람들이 월남하여 실향민이 되었다. 황해도 출신 실향민들은 해안지역이 많은 지리적 여건으로 육로로 피난하기보다는 미군의 함선을 써 피난한 경우가 많았기에 고향과 가까운 도서지역이나 인천광역시서울특별시 등 근방 대도시에, 멀리는 전라북도 일대[12], 부산광역시(실향민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 등지에 정착했다. 황해안 따라 쭉 내려오면 닿는 경기도, 충청남도의 서해안에 정착한 수도 어느정도 있다. 그 중 인천의 경우 황해도 실향민들이 몰려와 일종의 파워그룹을 형성하여, 인천의 지역유지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천 토박이 아니면 황해도 출신의 집안이다. 사실 실향민이 피난하여 정착한 지역에서 파워그룹을 이룬 경우는 많다. 대표적으로 김화라든가.
인천 지역 학교에서 한 반에 실향민 후손을 한두 명 정도는 볼 수 있을 정도로 수가 많다. (참고로 경기도계 실향민(개성시와 그 인근)도 꽤 있지만, 그쪽은 인천 본토보다는 강화도 쪽에 많다. 그리고 경기도계 실향민들이 가장 많은 곳은 서울이다. 당시 파주는 한창 전쟁터였던 까닭에 피난민 수가 많지 않다.) 하지만 황해도의 인식은 개인차가 있어서, 황해도에 관심이 많아 황해도 사투리도 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고, 황해도는 단순히 조상님의 고향일 뿐 자신과는 상관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서해 5도는 논외이다. '''거긴 원래부터 황해도였으니까.'''
옛날에는 인천 토박이들이 황해도 38따라지니 뭐니 하면서 지역감정도 있었지만, 지금은 황해도 실향민 1세들도 인천 사람일 정도로 인천에 살아온지라.
이들은 또 알게 모르게 인천 특유의 말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0. 남북통일 후 전망


서울특별시의 관점에서 봤을 때 평양을 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며, 비교적 완만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기 때문에 발전이 용이하다고 볼 수 있다. 수도권에서의 거리도 충청도와 비슷하기 때문에 경기 북부지역이 발전하면서 같이 발전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하지만 충청도의 경우를 보더라도 1960년대~1990년대에 벌어진 경부ㆍ경인라인 중심의 경제 발전 영향으로 인해,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 버프로 발전된 지역은 수도권과 가까운 천안시와, 경부선호남선의 분기점으로 발달해 오랫동안 충남의 도청 소재지였던 대전광역시, 충북의 수부도시인 청주시, 그리고 최근 행정도시로 급속히 개발된 세종이 있지만, 주로 충청 내륙에 개발이 되어 있어, 충남 서부는 개발에서 소외가 된 채로 인구가 유출되고 있다.[13] 이를 들어 유추하면 황해도에서도 발전 가능성을 기대해 볼 만한 곳은 반경 90km 이내인 연백, 금천과, 일부 경의선 연선 지역인 신막, 남천 등(충청권에서는 조치원읍 같은 경부선 상의 소도시와 비슷한 입지다.), 전통적 중심 도시인 해주시사리원시(서울에서 해주는 세종시, 사리원은 대전과 비슷한 거리다.), 그리고 차라리 평양 도시권에 가까운 송림시 정도라 하겠다. 특히 경의고속도로경의고속철도가 개통되면 사리원시해주시를 위협하는 황해도 제1의 도시로 발전할 것이다. 이미 인구수에서 해주를 추월하긴 했지만.
현재 황해도는 북한의 중심인 평안남도와 남한의 중심인 수도권 사이에 끼어 있어, 제대로 된 지역발전정책이 수립되지 않으면 남북통일 이후에도 수도의 기능을 유지할 서울(및 그 영향을 받는 개성시)과 평양에 끼어 상대적으로 발전이 지체될 가능성도 크다. 보통 지역 발전은 지역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 사실 저 위에서 예시한 지역 이외에는 수도권평양/평남에 거주하는 도시 거주자들에게 공급되는 농업, 축산업이 주요 산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

11. 둘러보기




12. 관련 문서



13.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1] 이북5도위원회 소재지[2] 현재 중화민국 푸젠성진먼 섬과 비슷하다. 중화민국도 푸젠성 본토는 전부 잃었다.[3] 이 외에도 구월산과 관련된 단군의 일화로는 단군이 조선을 세우고 천여년을 다스리다가 기자가 오자 기자에게 선양하고 구월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4] 황주연안에서 그 이름을 땄다.[5] 사실 해주시 일부(정도역을 위시로 한 용당포 일대)도 38선 이남이라 원칙적으로 이 지역은 대한민국 치하에 있어야 했으나 이 지역만은 미소 양국이 예외로 해 북한 치하에 두도록 했다.[6] 다만 임시 도청이라고는 해도 옹진과 연백 중에서 어디를 중심지로 할지가 어려웠을 듯하다. 현실화되었다면 중화민국 복건성의 한국 버전.[7]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대연평도, 소연평도.[8] 전체적으로는 황북이 황남보다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 있다.[9] 1950년 10월 유엔군대한민국 국군이 북진할 당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미군 중대장 해리슨의 지시로 3만 5천명이 학살 당한 사건이라고 하나, 이는 북한의 역사왜곡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천군에서 궐기한 반공청년단, 반공유격대 및 보안대가 학살의 주체였다는 것이 통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A] A B 옹진군 일부[10] 대한민국 전국의 경지율은 평균 17%[11] 다만 출생 당시에는 경기도에 속했었다.[12] 군산시가 대표적이고, 전주시에도 황해도 출신 조부모를 둔 집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13] 그나마 당진과 서산에서 제철소와 석유화학단지를 얻으면서 회복 중이지만, 전라남도의 여수와 광양이 제철소나 석유화학단지를 유치하고 발달했어도, 교통 불편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되지 못한 것 처럼, 마찬가지로 충남 서부는 산업단지를 유치해가면서 발달하고 있지만, 교통 불편으로 인해 인구가 많이 증대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