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1. 상도동계
상도동계는 김영삼의 자택이 상도동에 있다 해서 '''김영삼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상도동계 원로들이 현역이었던 시절엔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쌍벽을 이루던 계파였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교동계나 상도동계나 단순히 양김의 집이 거기 있던 것만으로 이름이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정부의 탄압과 감시를 매우 심각하게 받던[1] 시기에 비밀 이야기를 할 곳이 각자의 집밖에 없어서 거기서 주요 당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일이 많았었고, 신변의 위협까지 받던 시기에는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인원의 비서(훗날 주요 정치인사가 된 사람들)[2] 들이 아예 그 집에서 돌아가며 숙식을 한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집은 하나의 사무실이나 회사급이었다. 그래서 기자들이건 정부 주요 인사들이건 그곳 근처에서 기웃거려야 하기 일쑤였고, 그런 사람들끼리 정보를 나누는 대화를 할 때 "어디가?" 하면 "상도동 간다!" 혹은 "동교동 간다!" 등의 표현을 자주 쓰게 되면서 그 곳에 안 갈 때도 계파 사람을 표현할 때, "상도동 사람 만난다!" 혹은 "동교동 쪽 사람 만난다!" 하는 일이 많아지며 아예 계파명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먼 훗날의 유명 신흥 정치세력이라 불리는 친노나 친문 등이 김해파나 거제파 등으로 불리지 않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상도동계, 동교동계와 생성 및 발전 메카니즘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상도동계나 동교동계는 한 명의 절대 지도자의 카리스마 속에 그야말로 함께 먹고 자고 정부의 감시를 피해 비밀회의도 하여 혈육 같은 친밀감을 늘리면서 접착력이 강하게 생성된 계파이나, 신흥 정치세력들은 정치적 성향과 소신, 혹은 정치인에 대한 호감으로 뭉친 일종의 팬덤 형태라서 사적 친분의 영향력이 크게 강조될 수 없다.
김영삼 본인이 하나회 인물들을 쓸어버린 후, 한나라당의 뿌리 역할을 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명박 정부 때까지도 한나라당의 원로급을 맡고 있었으며,[3] 대표적인 현역 정치인으로 김무성[4] , 서청원[5] , 정병국[6][7] , 김영춘[8] , 박재호[9] 등이 있다. 은퇴한 이로는 김수한, 최형우, 김동영[10] , 서석재, 김덕룡[11] , 박종웅, 강삼재, 신상우, 박관용, 황병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김영삼의 천거로 정치를 시작한 정치인으로 한나라당계에는 '''이회창'''[12] , 이인제, '''이명박'''[13] , 손학규[14] , 이재오, '''홍준표''', 안상수, 정의화, 김문수, 이방호, 심재철, 박형준, 김태호 등이 있고, 민주당계는 '''노무현''', 안희정 등이 있다. 다만, 이들은 상도동계로 분류되진 않는다. 김영삼과 함께 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아 김영삼 직속(또는 비서)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 다만 'YS키즈'라는 표현은 언론에서 사용된다.
1984년 말,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반으로 신한민주당 창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추협 세력과 기타 세력 간 인적 지분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 김영삼 계열과 김대중 계열의 의견이 나뉘면서 김영삼 계열 정치인들을 분류하기 위해 상도동계로 불렀던 것이 시초다. 이후 대체로 연합하며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으나 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며 뜻을 달리하게 됐으며, 3당 합당을 계기로 동교동계와는 완전히 갈라졌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영삼 퇴임 후, 이회창이 당권을 차지하여 한나라당이 보수정당으로서 색을 더 갖추기 시작하였고, 이해타산에 따른 이합집산을 거듭하여 상도동계라는 정치 계파가 무색해졌고,[15] 멤버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 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친이, 친박, 친노, 친문 같은 새로운 구심축의 등장에 따라 여기에 속하면서 현재 상도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16]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영삼까지 사망함에 따라 상도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2. 이승만
이승만 정부 시절, 김영삼은 장택상 前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만 25세의 나이에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초선 의원인 김영삼은 경무대에서 이승만 前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2009년 시사 주간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3선 개헌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하던 무렵 이 전 대통령에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화가 난 듯 손을 떨더니 말없이 나가버렸다”라고 말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으로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개헌안이 통과되자, 김영삼 의원은 이에 분개하여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그의 탈당은 6년 뒤엔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17]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인물이며 실질적인 국부이고 건국의 아버지이다.1960년의 3.15 부정선거 전까지의 이승만은 정통이다. 김구는 정치적 감각이 없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치인이며, 정치적 판단도 김구는 이승만을 못 따라간다.
김영삼의 평
3.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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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이후 야당 정치인 김영삼은 반(反)군부 투쟁에 나섰다.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었다. 1969년에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할 뻔했다. 다만, 김대중 납치 사건처럼 직접적인 지시가 청와대가 내렸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여간 그야말로 김영삼은 항거하려고 목숨까지 걸었다.박정희는 민주화를 후퇴시킨 역적이며, 박정희가 없었어도 장면 내각이 경제 성장을 잘 이룩할 수 있었다.[18]
박정희 정권은 기본적으로 부패정권이고 도둑정권이라 본다.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을 바로 볼 수는 없다. 누가 뭐래도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바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을 숨 못 쉬게 했는데, 이 사실을 국민들이 잘 모른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미화를 배제하고 공과를 따져야 한다.
김영삼의 평
사실상 박정희 정권에게 종언을 고한 사건이었다는 소리를 듣는 1979년 8월 9일 YH 사건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 이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간단히 설명하자면, 가발 회사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당시 김영삼은 신민당 당사를 에워싸고 까칠하게 굴던 경찰 간부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 8월 11일엔 경찰 2,000여 명이 투입되어 YH무역 노동자 전원을 연행했다.
이 시기에 조일환 등 3명의 신민당 의원은 평소 이철승의 지지도가 높았는데. 선거에서 결과가 뒤집힌 점을 들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총재직무중지"를 요청하였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모두 중단해야 한다는 언급을 하고, 이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국회의원의 품의가 없는 망발로 규정하고, 무술경위들을 동원해 날치기로 통과되어 신민당 총재직에 이어 10월 의원직까지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김영삼 의원 제명은 10월 13일 야당 의원들의 전원 자진사퇴를 제출하며 공화당은 사퇴를 모두 받아들일 수 없으니 이 중 선택해 받아들이겠다는 입장을 내놓았고, 이는 신민당 의원들의 본거지이자 지지층이었던 부산과 마산을 자극해,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의 부마항쟁으로까지 발생한다.이에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투입되었다. 군에 의한 진압으로 진정되었을 무렵, 10.26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2009년 인터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다.'''[19]
4.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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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제일 어색한 사진 1.[20]
박정희의 뒤를 이어 신군부의 지배자로 올라선 사람이 전두환이었으니, 80년대 김영삼이 민주투사였던 시절엔 당연히도 둘은 정적 관계였다. 이 영상에서 보듯 그 서슬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부터 툭 하면 자신을 가택연금시킨 전두환을 가열차게 디스했을 정도다[21] . 이 기간 동안 벌어진, 목숨을 내건 23일 단식투쟁은 유명하다. 게다가 김동영, 최형우 등 양김의 측근인 야당(신민당) 인사들이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숱하게 고문당하기도 했다.전두환은 반역자다. 선거를 치르지 않고 대통령에 올랐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며,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
김영삼의 평
다만,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지면서 군사정권 관련 인사들이 내건 조건이 처벌의 감형이었다. 이는 집권하자마자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현직(?) 하나회 척결 외엔 집권 3년째인 1995년 전반기[22] 까지만 해도 여론의 질타를 받은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못한다'라는 검찰의 괴상한 논리에서 볼 수 있듯 전직에 대한 처벌이 자제되면서 어느 정도 지켜지는 듯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에서 '성공한 쿠데타 역시 처벌할 수 있다'라는 판결이 나오고[23] ,1995년 10월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이었던 박계동이 노태우의 비자금 존재를 폭로하면서[24] 노태우에 대한 구속 수사가 이뤄지고 국민들의 5-6공 비판 여론이 최고조에 이르자, 이를 계기로 김영삼은 뚝심있게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을 처벌하는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재판 회부를 이끌어낸다. 이는 군사 독재를 펼치고 국민들을 억압하던 자들의 뒤통수를 친 셈이었으니,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다[25] .
두 사람 모두 권력 무대에서 퇴장한 이후에도 김영삼은 그 특유의 직설적 화법으로 전두환을 디스했다. 2010년 광복절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주최한 전직 대통령 정모에 초청을 받았을 때 전두환도 참석하자 전두환이 듣는 와중에 '''"전두화이는 와 불렀노? 대통령도 아이데이. 죽어도 국립묘지 몬 간다."'''라고 폭풍 디스를 했으며, 와인을 찾는 전두환에게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어 전두환이 화를 참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 일화가 있다.[26]
사실 김영삼은 인터뷰를 할 때도 전두환은 뻔뻔하고 치졸하다며 엄청 까댔다. 정권을 잡았을 때는 폭압적인 모습을 보였으면서, 문민정부 출범 후 잡혀들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이를 양김이 감형시켜주니 후에는 낯짝 두껍게 굽실거리는 게[27]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28] . 김영삼은 차라리 노태우가 인간성이나 성격 면에서 더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는데, 이 이야기는 노태우 단락에서 후술한다.
전두환이 속으로 얼마나 사무쳤으면 201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조문은 왔지만, 화해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끝까지 대답을 안 했을 정도다.
5. 노태우
노태우는 하나회의 2인자였고, 전두환과 더불어 신군부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뒤 처음으로 치러진 대선이었던 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에 힘입어서 당선되기야 했지만 어찌되었건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민주적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김영삼도 이를 인정하였다.노태우는 나쁜 사람으로 본다. 노태우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전두환이며, 전두환이 백담사에 가지 못하도록 노태우가 막았어야 했다. 부정축재가 너무 심해서 내가 대통령이 되고 감옥에 넣었다. 그러고 싶어서 감옥에 넣은 게 아니다. 기업인들로부터 수천 억 원의 부정한 재산을 모았고 무능과 부정의 극치다. 노태우는 항상 정보정치를 통해 나에 대한 견제에만 골몰했다. 전두환의 후신이라는 출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김영삼의 평
노태우는 집권 후, 쿠데타를 통해 국민의 반발을 무시하고 체육관 간접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던 전두환과 달리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되었다'는 명분도 있었고, 여소야대 정국 때문이기도 했지만 야당과도 원만한 관계를 구축하고 협의해서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전두환을 백담사로 귀양보내고 정, 관, 군 내의 전두환계 세력 일부를 경질조치하는 모습도 보였다. 당시 전두환이 노태우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본인이 상왕 행세를 하려는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전두환 세력의 위세가 약화됐다.[29] 실제로 현 대한민국 헌법 상 전직 대통령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의장으로 둘 수 있다고 되어있는데 이 국가원로자문회의가 바로 전두환이 퇴임한 후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고 자기가 국가원로자문의장으로서 상왕 대통령으로 뒤에서 조종하려고 만들어 둔 자리인 것이다. 하지만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고 난 뒤 이를 설치하지 않고 본인의 대통령 행보를 이어나간다.
더욱이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김영삼을 상당히 가까이 하고, 야당대표들과 자주 만나서 국정현안을 소개하고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더욱이 3당합당 이후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표를 지낼 때에는 매주 만나서 김영삼에게 국정현안을 알려주고 현안을 의논했다. 노태우가 권좌를 차지한 뒤부터는 양김과 더 많이 교류했고, 이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 박태준은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을 통합했다. 이게 3당 합당인데, 여기서 태어난 정당이 민주자유당이고 이 계보가 (2020년 7월 기준으로) 미래통합당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3당합당 이후 김영삼을 결코 믿을 수 없다며 김영삼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反YS 민정계 출신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태우는 차기는 김영삼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명확히 했다. 하지만 자신의 후임 대통령인 김영삼 역시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를 떠나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재임중이던 시절 문민정부를 맹비난하고 김영삼을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묘사하며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밝힌적도 있는 등 원만한 관계만큼은 결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
그래도 김영삼은 생전에 노태우를 인정하고 제법 호평했다. 물론 하나회라는 악연 때문에 훗날 김영삼은 전두환과 함께 노태우를 감옥에 보내기야 했지만, 노태우는 반발하던 전두환과 달리 그런 와중에도 별 탈 없이 묵묵하게 모든 걸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30] 그야말로 '''과도기'''라는 말에 정말로 적합한 인물이 노태우였다는 것이다.
6.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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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씨는 대단히 어려운 일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김대중[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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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김의 한 축. 김대중과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동지이자 최강의 라이벌. 어려울 때는 서로 의기투합했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는 대체로 협력관계였다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대립, 적대관계였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기에는 서로 야권을 이끌어가며 '''서로를 지지하고 의지하던''' 관계였다. 재야의 민주화 운동가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사람마다 양김에게 들이미는 잣대가 다르지만, 한국 민주화의 현대사에서 양김은 중요한 존재이기에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지역감정의 원인은 김대중이다. 1971년 선거 무렵까지는 지역감정이 없었으며 유진산, 양일동, 정성태 등이 신민당 안에서 호남 출신이었으며 이들의 찬조연설을 내가 하러 가곤 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이용했다. 김대중은 입만 벌리면 숨쉬는 것 제외하고 전부 거짓말이다.
김영삼의 평
정치 계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민주당의 계파에서 김대중은 장면 신파의 적자로, 김영삼은 조병옥-윤보선 구파의 적자로 자리잡아 정치 세력을 이끌었다. 또한 이들은 지주, 자본가 계급의 일부를 대변하던 한민당-민주당 계열의 체질 개선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한국을 권위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만들었고, 또 재야 민주화운동가 그룹에서 새로운 인적자원을 수혈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서구의 진보적 정책을 받아들여 '반 박정희-전두환' 정치결사체 성격이 강했던 신민당의 스펙트럼을 넓힌 것 역시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정당 족보를 따지면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격이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에 대항할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에서는 김영삼이 이겼으나,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승리하며 김대중이 대선 후보가 되었는데, 김영삼은 결과에 승복하며 '김대중 후보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기 때문에 김대중 후보의 선거를 적극 돕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대중이 사실 이때 3등 후보였던 이철승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 후보 당선이 유력했던 김영삼을 이기게 된 것인데, 김영삼은 고민 끝에 김대중을 돕기로 하였고 김대중의 당선을 위해서 열심히 선거를 뛰었다.
이후 두 사람의 신민당 내 입지상 서로 맞서는 위치에 서서 대결하기도 했으나,[33] 궁극적으로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동일했다. 5공에서도 역시 온갖 정치 탄압과 규제를 받으면서도 협력하여 민추협을 만들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하는 등 민주화 운동의 정계 구심점으로 맹활약했다.
이들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로 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김영삼이 제안한 '''범국민 천만 서명 운동'''이 있다. 이때 김대중은 '정권의 감시가 서슬퍼런데 현실적으로 천만이 가능하겠냐’며 ‘백만도 어려운데 그냥 백만 서명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김영삼은 '어차피 둘 다 안 될 거면 통 크게 천만 지르자'고 설득해 결국 천만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34]
어쨌든 이들을 포함한 민주화 인사들의 노력으로 한국은 민주주의의 희망을 가지며 전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의 결실인 1987년 대선에서 둘의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사이가 완전히 멀어졌고, 전두환의 친구이자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부지리로 당선되고 만다. 이 때 상도동계에서는 1971년 대선에 YS가 양보해주었는데 1987년에 DJ가 독자 출마한 것에 대해서 두고두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별도의 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90년 3당 합당을 하자 그 둘의 간격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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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권을 차지한 김영삼은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대선에서 다음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때 차남 김현철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사면복권#s-2[36] 이 거론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으나, 여론을 거스르지 못한 DJ는 자신의 임기 동안 김현철 씨의 사면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김현철 씨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노무현 정권 말인 2007년. 둘의 관계는 YS가 김대중에 대해 '착한 척 하면서 내 뒷조사를 엄청 한다'거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라 비난했을 만큼 아직 거리가 있는 상태였다. 2003년 대북송금 특검 때는 "이적행위로 국민을 핵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김대중씨는 마땅히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사법처리돼야 한다"고 하였다.# 김영삼은 이후 DJ가 서거할 때까지 두고두고 DJ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이 시기의 이 둘의 관계에 대한 일화 하나만 소개하겠다.
다만 오랜 민주화 동지였기에 서로 투닥투닥하다보니 YS의 비판 수위에 비해 사이가 아주 험악하지는 않았다. 양 진영 간에 사이가 급격하게 벌어졌던 1987년 대선 이후 치러진 1988년 총선에서 등원한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의원들은, 서로 팽팽하게 설전을 하면서도,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대 진영에 있는 JP까지 끌어들여[37] 논의를 하는 대범함을 발휘했으며, 운동시합을 통해 단합을 다지기도 했다.2000년 6월 전직 대통령 입장으로 김영삼이 청와대 오찬장에 들어섰을 때 김대중은 화해를 요청했지만 YS는 IMF 문제에 대해서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화해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거절했고, 김대중 역시 더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제5공화국 시절의 비리를 추궁하는 청문회에서는 갓 등원한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이 예리한 질문을 던지며 전두환 및 비리 기업인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 DJ가 노무현 의원을 극찬하기도 했다.[38] 훗날 YS가 'DJ와 노무현은 공산주의에 가까운 정권, 나쁜 정권으로, 나중에 심판받을 것이다', 'DJ는 내가 광주로 유세를 가면 깡패를 동원한 나쁜 사람이다', '거짓말만 한다', 'DJ는 독재자다' 등 2000년대 들어서도 막말 수준의 발언을 종종 했지만 사람들은 'YS가 또...'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이는 독재정권 당시 각자 맡은 캐릭터에 따른 것인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맡은 포지션은 강골 센 캐 였던 것에서 기인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적으로 분석가적이고 전략가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강인하게 할 말 하면서 치고 나가는 캐릭터 이는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둘 다 필요한 이미지였다. 그 독재의 와중에 센 캐릭터를 맡으려면 앞뒤 안 재고 일단 세게 말해서 언론의 주목을 끌어 기사가 한 줄이라도 나가게 해야했다. 당시 독재 언론이 어떤 상태였냐면 김영삼 총재가 단식을 시행했을 때 김영삼이 단식을 하고 있다는 기사는 보도허가를 받지 못해서 쓰지 못하고 '어느 야당 의원의 식사문제가 대두되었다'라며 기사가 나가던 시절이었다... 이게 제도적 민주화가 정착된 이후에는 불필요하게 과하면서도 왜곡도 일삼는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
나중에는 서로 간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수준이었다. 여담으로, 이 시기 김영삼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수한 악평을 가하긴 했지만 그들과도 정작 만나선 별 충돌 없이 잘 지냈고, 특유의 친화력 덕에 험악한 관계까지 가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2000년대에도 티격태격하던 둘의 사이는[39] 결국 2009년 위독하여 사경을 헤메는 김대중에게 김영삼이 병문안을 가면서 말년에서야 화해의 움직임으로 나아가게 된다. 당시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이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때 김대중은 의식이 없었지만 김영삼은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를 위로했고, 김대중 사망 후 측근인 동교동계 정치인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며 양 계파 간 화해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후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때,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조문을 오고 상도동계 정치인들을 위로하면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40]
7. 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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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더불어 3김시대를 이끌어 간 정치지도자로, 정치적으로는 대립했던 시기가 많았다. 특히 김종필은 5.16 군사정변의 설계자로 불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거론될만큼 박정희 시대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1990년 3당 합당을 계기로 서로 정치적으로 연대하기도 했지만, 정작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민주자유당 내 민주계 출신들이 JP를 집중견제하였고, 이에 반발한 김종필은 1995년 자유민주연합(약칭 자민련)을 창당하여 YS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41]
이후 JP는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자민련 50석을 거두며 정치적 돌풍을 일으켰으며, 1997년에는 DJ와 손을 잡고 DJP연합을 통해서 정권교체를 일구어낸다.
이처럼 YS와 JP는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기간이 길어보이지만, 의외로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다. YS가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하더라도 JP에 대해서는 비판한 적이 없었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은 JP와는 "첫 만남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장으로 YS를 찾아온 JP가 민주공화당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때 YS는 JP가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군인 같지 않게 부드러웠다고 한다. 물론 YS는 JP의 영입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지만 두 사람은 기분좋게 술 한 잔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역 시절이나 퇴임 이후에도 골프 회동을 자주하면서 우의를 나누었다고 한다. 2015년 11월 25일 YS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휠체어를 타고 조문한 JP는 그를 "신념의 지도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애도하기도 했다.
8.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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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로서의 행보를 눈여겨본 김영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일민주당으로 입당시키며 노무현을 정계에 입문시켰다. 이후 노무현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리는 등 주가를 높이기 시작했고, 김영삼도 사적으로 노무현을 무척 아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한다[42] . 하지만 이런 좋은 관계는 노무현이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하자 크게 틀어지고 만다.
김영삼의 평
노무현은 특유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김영삼의 행동을 야합으로 여기고 이에 실망하여 민자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하였고,[43] 이후 92년 대선에서 통일민주당의 이기택, 노무현 등의 잔류파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합당해 민주당이 탄생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44] 노무현도 김영삼에 대해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45] "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다만, YS의 경우 그래도 기존 동지들의 힘이 있었던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는 평도 함께 남기며, '''"개혁이 혁명만큼 또는 혁명보다 어렵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 후 노무현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는데, 김대중이 지역간 고른 권리를 행사한다는 요지의 지역등권론을 주장한 역풍을 맞아,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 등과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당하여 DJ 지지로 다시 돌아가긴 하지만, '김대중 역시 김영삼 못지않게 지역감정을 이용한다' 고 평가, 양김이 모두 지역감정의 수혜를 입고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노무현은 YS를 비판하며 뛰쳐나와 DJ 밑으로 후에 들어가긴 하나, 결국 호남 기반의 세력들이 차지한 새천년민주당에서 비주류였고, 나중에 진짜로 김영삼이 군사정권을 쫓아내고 구속시키며 호랑이굴에서 호랑이를 잡겠다는 김영삼의 약속이 이루어지자 YS를 비판했던 노무현은 입장이 난처해지며 YS와 DJ 세력 양쪽에서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찬밥 신세를 겪는다.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떠오른 것도, 김대중 정권이 본인+아들 비리 및 국정원을 이용한 도청 등의 스캔들로 김대중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김대중 세력이 호남을 제외하고 지지율을 잃을 때,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그나마 유일한 카드로 판별났었기 때문이었다. 경남 기반 YS 밑에 있었기에 호남 기반 DJ세력에게서 외면받으며 찬밥 자리였던 영남의 민주당 후보로 끊임없이 도전하다 바보 타이틀을 얻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노무현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김영삼을 예방하고 서로 덕담을 나누는 등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때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 정을 언급했다가 호남 지지층으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졌다고 한다. 이때는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김영삼이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호남 측에서의 역풍도 있었지만 노무현-이회창이 '''3김/지역주의 청산'''을[46] 외치던 시기 3김 중 하나인 YS에게 노무현이 접촉하는 건 당시 너무 큰 리스크였다.
노무현이 대통령 시절 탄핵소추를 당했을때도 "사필귀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09년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자 표면적으로는 장례에 참여하였으나,[47] 노무현에 대한 '국민장'에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48]
여담으로 MB도 김영삼이 정계에 입문시켰다. 그리고 김영삼은 박근혜나 정주영을 골탕먹이는 카드로서 이명박을 자주 밀어주었다. 훗날 공천에서 상도동계가 무수히 떨어지자 거리감이 생긴 감은 있지만.
그리고 이 인터뷰가 논란이 되자 김영삼 측은 사석에서 한 발언이 일본 잡지에 보도된 것에 대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영삼의 김기수 비서실장은 28일 오전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도시오 회장이 일본 사람 여럿과 함께 각하를 만나고 갔지만, 그분이 기자도 아니고 정식으로 인터뷰한 것도 아니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
9.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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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을 정계에 발탁한 인물이 바로 김영삼이다. 김영삼은 생전 이명박의 실력과 재주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면서 그를 아꼈다. 김영삼은 현대건설의 사장이었던 이명박을 영입하여, 총선과 대선에서 보수 표를 놓고 경합했던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을 공격하기도 했다. 김영삼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을 지지했고, 이명박 또한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김영삼을 매우 깍듯하게 예우했다.이명박은 불통의 대통령.
김영삼의 평
상도동계의 몇몇을 제외한 거의 전부가(예외적으로 강삼재는 이회창을 지지했고, 서청원은 박근혜를 지지했으며, 김무성도 당시에는 친박으로 분류됐다.)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부터 친이계로 편입돼서 이명박을 지지하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은 홍준표, 김무성, 안경률, 김덕룡, 정의화, 정병국, 이재오, 이상득. 김형오, 박희태[50] 등 김영삼계 출신인 다른 친이계 정치인들과 함께 항상 김영삼과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적으로도 매우 가깝게 지냈다.[51] 특히 이 중 김덕룡은 상도동계 직계인데, 이재오, 이상득, 박희태와 더불어 친이 6인회에 들어가기도 했다.[52]
이명박의 고향인 포항과 본관인 경주는 비록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에 소속되어 있지만, 부산과도 지리적으로 멀지는 않기 때문에 실 생활권상으로 PK과도 가까운 지역인데다가[53][54] 이명박의 고향이기도 해서, 박근혜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지역이기도 하고(압도적인 이명박 지지를 보였다.), 이명박과 친이계 자체가 김영삼의 후계임을 표방하는 만큼, 정치상으로 PK 계열로 분류된다.
또한 이명박은 김영삼에게 본인과 친한 저명 인사들을 김영삼에게 소개하기도 했고,[55] 재임 중에도 김영삼뿐만 아니라 기타 상도동계 주요 인사들에 대해서도 매우 깍듯이 대접하였다.[56] 또 문민정부의 핵심 인사들 중에서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맡은 한승수와 문민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57] , 그리고 문민정부에서 청와대 제2부속실장을 지내고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병국이 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 당시에는 '''김영삼 - 이명박 동거정부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김영삼과 이명박의 인간 관계 및 친분은 매우 각별했다.'''
이명박은 밑의 사람들 혹은 노무현, 손학규[58] , 박근혜를 비롯한 경쟁자나 정적들에게는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정략적이면서 냉정했지만 김영삼에게만큼은 매우 고분고분하면서 집안 어른을 대하듯이 깍듯이 대했기 때문에 충돌할 일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인지 서거 후 굉장히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 그래도 마른 체형인데 서거 후 며칠동안 심각하게 운 것인지 살이 눈에 띄게 더 빠진 모습이었다.
10.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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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가장 어색한 사진 2. 게다가 표정도 상당히 떨떠름하고 악수도 심히 어색해 보인다. 퇴임 후에도 1997년 외환 위기, 한보사태로 인한 김현철 구속으로 웃을 일도, 웃을 사진도 없었다.[59]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김영삼은 신변이 심각하게 위협받았으며, 반정부 투쟁과 민주화의 중심이었으므로 그 투쟁의 대상이었던 이의 여식인 박근혜와도 당연히 껄끄러운 관계일 수밖에 없다.
김영삼의 평
퇴임 후인 김대중 정부 당시 김영삼은 1999년 5월, 서울 수유동 4·19 국립묘지를 참배한 자리에서 퇴임 후 처음으로 시국 성명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았으며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이에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근혜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김영삼에게 반격을 날렸다. 김영삼으로서는 민주화의 동지이자 라이벌이고, 어쩌면 더 큰 고초를 겪었을 김대중이 집권한 이후 오히려 지난 권위주의 정부의 공로를 드높이는 등, 김영삼 정권의 적폐청산 행보와 달리, 화해 행보를 택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했던 발언이었다. YS “박정희 정권 결코 미화하면 안 된다."
그러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박정희 정권과 싸운 사람이고 그 정권이 자신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아버지와 딸은 다른 법'''이라며 선대(先代)의 일과 연관짓는 비난에 시달리는 박근혜 측에 대해 매우 유효한[60] 지원사격을 해주기도 하였다. 2006년 박근혜가 면도날 테러를 당했을 때는 직접 병문안을 가서 질산 테러를 당한 자신의 과거를 언급하며 뼈있는 위로를 하기도 했다. # 이토록 미묘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김영삼이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박근혜와 치열하게 경쟁했던 이명박의 손을 들어주면서 완전히 멀어졌다.
2011년엔 "18년 장기 독재를 한 박정희가 이 나라 군사독재 정권의 원흉"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영삼은 2012년 7월 대선을 앞두고도 박근혜를 '''“유신시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사실상 유신의 2인자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기사.
이러한 두 사람의 악연은 2012년 선거 정국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해 총선 공천이 유력했던 차남 김현철 여의도 연구소 부소장이[61] 모종의 이유로 공천에서 탈락하자 새누리당 수뇌부를 비난했으며, 7월에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김문수를 만난 자리에서 박근혜를 겨냥해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칠푼이'''라는 희대의 독설을 날린다[62] .
물론 이 '''칠푼이라는 발언이 박근혜가 최태민 - 최순실 부녀에게 휘둘려 가며 한심한 행보를 보였다는 사실을 예견하는 것이 되었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칠푼이라는 말이 박정희에게 쌓인 감정을 박근혜에게 퍼붓는 비난으로 볼 수 있고, 실제로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는 이런 해석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최씨 가문에게 꼭두각시나 다름 없이 휘둘리는 박근혜를 한심하게 바라본 중의적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당시 김영삼을 비롯하여 정치계에서 원로격인 주요 인사들이나 정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이미 최태민 일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최순실 사건이 나오고 나서 김영삼의 칠푼이 발언 역시 재조명되었다[63] .
그렇게 독설까지 하며 경계했지만, 몇 달 뒤 끝내 새누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가 방문하자 위의 사진처럼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자세로 악수를 하며 불편한 심기를 보이기도 했다.
다만 그 해 대선 직전에 박근혜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했다는 얘기는 좀 미묘한 부분이 있다. 당시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는 주장은 김무성 의원 선거 유세에서 나왔고, 뒤이어 김영삼의 조직이었던 민주동지회가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지지 선언이 사실인 것처럼 알려졌다.[64] 그러나 얼마 뒤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한 상도동계 김덕룡 전 의원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역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을 했던 차남 김현철에 따르면, 박근혜(박정희 일가) 측에 대한 악감정은 그대로 남아있으나 보수 진영의 승리를 위해 경상도 정체를 대표하는 박근혜 후보 지지를 할까 말까 사적으로 상의한 적만 있을 뿐 공개적으로 지지 여부를 밝힌 적은 없으며, 현재는 엄정중립 상태로 부울경만을 대표하는 문재인 후보가 상도동에 방문해서 성의있는 모습을 보일 경우 김영삼이 공개적으로 누군가에 대한 지지 표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65] YS의 퇴임 후 대변인 역할을 맡은 박종웅 역시 김영삼이 공식적인 입장을 내보인 일이 없고 입장도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중립으로 행동을 같이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박근혜가 당선되고 대통령 취임식날이 되자, 측근들이 다 말렸는데도 불구하고[66] 그대로 취임식장에 갔지만[67] , 박근혜의 취임 연설에서 '''대놓고''' 조는 모습이 카메라에 비춰지기도 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활동이 있었으나, 그녀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몇달 안된 시점에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쓰러진 후 2년여간 투병 후 작고했으므로 박근혜의 대통령 활동 시기 동안은 사회적 활동이 딱히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김영삼은 박근혜 임기 중 사망하고 말았는데, 사망할 당시 박근혜는 해외순방 중이었고, 귀국 후 바로 빈소를 찾아가 헌화를 하긴 했다.
그러나 이후 일정을 소화하면서 피로 누적으로 인한 고열증세 때문에 주치의가 쉬라고 권유했고 영결식 당일 눈이 내리는 등 기상 상태마저 좋지 않아, 본인이 의도했든 아니든 장시간 진행되는 영결식에는 불참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운구차가 떠나는 7 ~ 8분간 예를 표한 것이 전부. 이로서 박근혜는 '최초로 국가장에 참석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기록 아닌 기록을 쓰게 되었다. 결국 둘의 고약한 악연은 마지막까지 풀리지 못한 셈이다. 어쨌든 고인이 된 김영삼과의 마지막을 좋은 그림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박근혜의 불참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68]
11. 문재인
1988년 총선에서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재야 인사 중 명성이 자자했던 변호사들이 통일민주당의 영입 대상에 올라왔는데, 그중 노무현, 문재인, 김광일 세 변호사가 YS에게 추천됐다. 친구였던 박종웅 前 의원이 문재인에게 부산 지역 국회의원 출마를 제안했지만 당시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문재인[69] 은 거절했다. 그 뒤로는 계속 접점이 없었다. 문재인이 참여정부에서 민정수석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을 당시 김영삼은 이미 정계은퇴를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문재인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2011년쯤에는 이미 고령으로 정치 활동이 예전만큼 활발하지 못했던 데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덕룡, 문정수를 비롯한 상도동계 일부가 문재인을 지지할 때도 별다른 발언을 안 하는 등 2015년 11월에 사망할 때까지 문재인과 특별히 이렇다 할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영결식 때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였던 문재인이 권양숙 여사, 안희정 충남지사 등과 함께 참석해 조의를 표하며 영결식 행사에 불참한 박근혜 대통령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영향인지 2017년 열린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의 아들인 김현철을 비롯해 김덕룡 등 많은 상도동계 출신 정치인들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아닌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문재인 후보가 1987년 직선제 부활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계 정당 후보로서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울산에서 승리하며 당선되어 김영삼의 남은 영향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