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일생
1. 성장
여운형은 조선 말기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서인 소론 여씨 양반 집안[1] 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태양을 치마폭에 품는 꿈을 태몽으로 꾸었다고 하여 아호를 몽양(夢陽)이라 하였다. 여운형 이전에 3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다 죽어버려서 아버지는 입양도 생각했으나 어머니가 극구 반대했다. 그러다 어머니가 33세가 되어서 여운형을 낳았고 여운형은 집안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총명하게 생겨서 할아버지는 그를 보고 왕재(王材 : 왕이 될 인재)라고 했다 한다. 집안 분위기로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동학의 북방 포교를 위해 제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는가 하면 작은할아버지는 열렬한 동학 신자이자 동학 조직의 고위급 간부였고 작은아버지 또한 동학 도사로 집안 대부분 사람들이 동학교도가 되어 동학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단양의 산골로 피신하기도 했다. 서인 집안이어서 그런지 할아버지는 청나라 조정으로부터 한족을 해방시키자며 북벌을 모의한 죄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2] 사실 같이 모의했던 사람들 중에 처형당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관청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유배형으로 감면되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 여운형은 할아버지로부터 "오랑캐들이 불합리한 요구를 자꾸 하므로 중국을 쳐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며 후에 여운형이 중국 유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성질이 불같아서 버선이 발에 안 맞으면 자리에서 찢어버렸고 모험을 하기보다는 소극적으로 집안에 안주하는 성격이었으며 양반 의식으로 똘똘 뭉쳐서 상민을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았는데 아버지의 성질이 어땠는지 예를 들자면 이러하다. 여운형이 어렸을 적 상민 집에서 몰래 앵두를 따먹다가 들켜서 개구멍으로 튀어나오다가 얼굴이 긁혔더니 아버지가 사실을 알고 자식을 꾸짖기는커녕 앵두나무를 몽땅 찍어버려 상민에게 미안했다거나 집이 부자는 아니어서 일반 평민들처럼 보리밥을 먹었는데 자신을 귀여워했던 여종이 장사하는 남편의 돈으로 쌀을 사서 흰 쌀밥을 지어 먹였더니 아버지는 노비가 양반집 자제한테 흰 쌀밥을 먹인다고 나무라서 화가 났다거나 노비가 여운형한테 농담을 걸었는데 아버지가 노비에 몰매를 때려서 화가 났다고 한다. 한편 어머니는 힘이 세고 체격이 우람하였으며 남자들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여장부 성격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닭이 이웃집 닭이랑 싸워서 지면 닭을 삶아 먹고 힘센 닭을 사서 이기게 했다거나 자신의 종이 남의 집에서 얻어맞고 오면 힘센 종을 불러와서 보복하게 했다. 그래서 별명이 '호랑 마님'.[3] 단양 산골로 피난하고 나서 아버지가 여기서 계속 살자고 하자 어머니는 어떻게 자식들을 외진 곳에서 교육시키냐고 그렇게는 못하겠다 하여 자기 혼자서 자식들과 종들을 이끌고 양평군으로 가버렸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결국 어머니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로 기가 셌다고 한다. 기가 센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서 자란 여운형은 부부 싸움을 자주 지켜보았는데 자신도 성격이 불같았고 반골 기질이 있었지만 장남이니까 집안을 위해 화가 나도 억지로 참고 성질을 죽이는 것을 습관으로 했다고 한다. 친구랑 놀러 다니며 운동하고 사람 만나러 다니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해서 옷이 성한 날이 없었고 창호지에는 늘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한다. 또한 남한테 주기를 좋아해서 용돈을 받고 며칠 지나면 동생 여운홍은 그대로 있는데 여운형의 주머니에는 돈이 남아나지를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평범한 어린 아이였고 그가 격동의 세월을 보내기 시작하게 된 것은 과거 제도가 폐지되어 더이상 성리학을 공부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고 출세를 위해 신학문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부터이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친척 여병현[4] 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 최초의 신식 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배재학당은 월요일에 예배를 빠진 사람을 조사하고는 했다. 한 번은 친구들이랑 남산으로 놀러 갔는데 다음날 자기 자신만 솔직하게 손을 들었더니 1시간 남아서 자습하는 벌을 받자 1년만에 그만 다니고 17세 무렵 '흥화 학교'로 전학하게 된다. 민영환이 세운 흥화 학교는 1년 정도 다녔는데 우등생이 되어 상까지 받았으나 아내가 죽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직업을 갖기 위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통신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우무 학당'에 입학했다. 당시 우무 학당 졸업은 고임금 전문 직종이라는 우무국 기술관[5] 으로 채용되는 것이 보장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일전쟁이 발발했는데 여운형은 안팎으로 무능했던 황실이 무너지는게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고 러일 전쟁을 동양과 서양의 대결 구도로 여겨 일본과 조선이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선전포고해야 한다고 정부에 진정서를 냈다. 미래에 있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조선인들은 일본이 조선에게 합병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내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해주는게 없는 무능한 조선 황실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였으며 당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서양 국가들에게 갈라먹히는 것을 본 조선인들 사이에 서양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극에 달했다.[6]
그 상황에서 일본은 아시아 대표를 자처하고 동양을 서양으로부터 보호하는 '성전(聖戰)'을 치른다고 선전하였고 대부분 조선인들이 이를 믿고 있었다. 독립협회가 친일적 성향을 띤 것 또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열거했을 때도 이런 내용이 나왔으며 그의 '동양 평화론' 또한 당대 조선 지식인이 믿어왔던 한중일 연대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7] 이러한 사상을 아시아주의라고 부른다. 하지만 전후에 나라가 일본에 먹힐 것이라는게 기정 사실화되자 여운형은 "이리 무서운 줄은 알고 여우 무서운 줄 몰랐다!"며 국제 질서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느낀 뒤 자신의 우둔함을 뉘우치고 항일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자신이 모시던 스승이었던 민영환이 자결하고 1달 후에 모친상을 당하여 충격을 받게 되었으며 그 무렵 도산 안창호의 시국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은 뒤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서 술과 담배를 끊고[8] 시국 연설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무국 통신원이 일본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자 여운형은 우무 학당을 졸업 1개월 전에 그만두고 동창들을 모아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일본에서 채용하겠다고 통지가 날아왔으나 거절한다. 아버지는 채용을 받아들이라 했으나 여운형은 "나더러 일제에 협력하라고 하는 거냐"고 길길이 날뛰고 어머니 무덤으로 가서 "어머니가 계셨으면 내 이야기를 들어 주셨을텐데!"하고 통곡하는 소동을 피웠다고 한다.
2. 개신교 입교
당시 명성황후 민씨가 아꼈던 무당이 관우의 영혼이 깃들었는데 여씨 집안을 관우를 죽인 여몽과 같은 성씨쓰는 집안이라고 저주하는 일이 발생한다. 안 그래도 정계에서 멀어진 여씨 집안은 출세길이 막혀버려 정치 문제에 신경이 크게 곤두서버리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구습을 타파하는 일에 주력하였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여운형은 어려서부터 미신을 믿지 않는 성격이라 여씨 성을 가진 사람이 관우 사당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미신이 퍼져 있었는데도 예전부터 관우를 모시는 사당에 출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기독교는 종교 차원을 넘어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에 예배를 빠지고 놀러 다녀서 배재학당을 자퇴했던 그가 신학문 수용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기독교 중 개신교파의 장로회에 입교한다. 이 무렵 아버지까지 열병에 걸려 돌아가시자 나이 20세에 아내를 비롯해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 버리고 이때부터 일련의 방황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부친상 기간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개신교에 입문하고 신문물을 받아들인다. 당시 그는 이러한 개혁을 몸소 실천하여 상투를 자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버리며 신주라거나 미신을 상징하는 터주 인형을 모두 묻고 태워버렸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때문에 주변에 살던 양반들이 그를 야단치고 백안시하였다고 한다. 노비들이 해방되고 나자 여운형한테 반말하면서 대들었는데 그는 웃으며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들이 받았구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열성적인 크리스찬이었는데 새벽 기도나 수요일 예배는 기본이고 묘꼴 마을에 교회를 세웠으며 가족들을 교인으로 만들었다. 백정들이 주요 신자여서 '백정 교회'라고 불리었던 민중 교회인 '승동 교회'에서 7년간 사역하면서 최고 전도사가 되었는데 설교와 전도 실력이 뛰어나서 신자가 4,000명이나 늘어나자 외국인 선교사들이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1908년 아버지의 상을 마친 여운형은 서울로 거처를 옮겨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 목사의 조사 일을 하며 20원의 봉급을 받았다. 클라크는 보수 정통파의 완강한 성품으로 여운형이 기독교 전도 사업에만 열중하기를 바랐으나 여운형은 국민 계몽과 교육 사업에 투신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해 두 사람은 작은 갈등을 빚기도 했었다. 1910년 봄 강릉에서 서른이 넘은 청년 유생들이 찾아와 여운형에게 청년들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강릉읍 근처 초당리에서 “초당의숙”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사업에 전념하지만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일어난 이후 독립운동가나 애국계몽가들에 의해 세워진 학교는 폐교 처분되기에 이르고 1911년 학교가 폐교되자 그는 강릉에서 추방된다. 이후 그의 신앙 활동은 당시 조선의 개신교 중심지였던 평양의 평양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도 이어지는데 여운형은 클라크 목사를 다시 만나 교회 전도 사업에 열중하며 평양 신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에서 개최한 100만인 부흥회[9] 에서 찬송가를 부른 사람 중 하나였다.[10] 질레트가 설립한 황성 YMCA 야구단[11] 의 운동부장이 되어 11명 일원 중 1명이 되었고 도쿄에서 열리는 야구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도 한다. 그의 신앙 활동은 종교를 단지 개인 구원 차원이 아닌 사회적 구원 차원으로 여긴 여운형의 신앙관과 관련이 있다. 여운형은 조선 민족을 일제로부터 하나님이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조선을 기독교적인 낙원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서양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신학을 강요하는 태도에 반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일제가 종교를 탄압[12] 하여 기독교가 친일 보수 성향으로 가게 되자 이에 실망하고 조선의 기독교계에서 물러나서 해외에서 신학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측면을 볼 때 이승만도 같은 입장이었는데 앞으로 둘은 상당한 노선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는 여운형과 이승만의 활동 무대 차이에서 기인하였는데 여운형은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중 혁명이 일어난 중국이 주요 무대였고 이승만은 제국주의 국가이자 자본주의의 정점에 있었던 미국이 주요 무대였으며 그들은 그 곳에서 경험한 것들을 통해 사상을 정립해 나아갔기 때문이다.
3. 중국 유학
여운형은 조선 내부에서 기독교를 통한 구원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해외 유학을 결심하는데 동생 여운홍을 미국으로 유학보냈고 자신도 해외 유학의 길을 모색한다. 그는 1913년 5월 클라크 목사 일행과 함께 만주를 방문하고 자신의 족속인 여준이 교장으로 있던 신흥학교(후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를 방문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별개로 지리적으로 고립된 지역에서 배움을 키우고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았다. 대신 신해혁명이 발발하였던 중국행에 의지를 갖게 되었고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으로 유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영문학을 공부한 것은 금릉대학의 학부가 통합되면서 신학부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금릉대학 유학 시절에도 YMCA 건물을 빌려 기도 모임을 열었는데 그 지역에 살았던 조선인은 거의 모두를 참여하게 만들었다. 이후 중국 장쑤성에 소재한 남경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난징 및 상하이 지역의 조선인들을 사귀었고 중국으로 유학을 오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입국을 도와주면서 신망을 얻어[13] 그 지역 조선인 거류민 담당자가 된다. 그는 외국인이 경영하였던 서점이었던 '협화 서국'에서 일하였는데 영어를 잘했기 때문에 월급을 배로 받았다고 한다.[14] 그런데 그는 '남 도와주기'를 좋아해서 당시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유학생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그들의 학자금에 월급을 퍼주어서 자신 돈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어땠느냐하면 오전에 서점에서 일한 뒤 오후에는 담배나 양말을 팔아 용돈을 마련했는데 그와 함께 유학 생활을 한 적이 있는 한 사람은 여운형이 남을 주느라 귀가할 차비조차 없어서 걸어 다니자 그 모습이 불쌍해보여서 '최소한 차비는 남기고 퍼주라'고 말했다고 회고록에 적어둔 적이 있다.
4. 항일 독립 운동
4.1. 신한 청년당 당수
비록 대인배적 측면은 있었지만 그는 보통 평범한 유학생에 지나질 않았는데,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가로서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소식을 듣고 나서 주중 미국 대사와 같이 면담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조선 독립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얻은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이라는 정당을 문서상으로 조직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 측 대표로 영어를 잘하는 친구인 김규식을 파견했고, 조선 쪽에는 장덕수를 파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8년에, 당시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한 독립 청원서는 신규식과 연서해 한국 공화 독립당 명의로 제출된 것임이 미국 정부 문서고 자료로 확인되어 신한 청년단과는 무관하다. 김규식은 동시에 사명에 보탬이 되도록 조선 내부의 사람들이 움직여달라 부탁하였고 장덕수도 조선 지식인들이 규합하는데 노력하였다. 이러한 청년들의 활발한 활동은 3.1 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4.2.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 및 외무부 차장
3.1 운동 실패 후 독립 운동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독립 운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그때 임시 정부를 수립하자는 안건이 나왔는데, 여운형은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복잡한 일이어서 많은 정력이 소모되고 권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동지들끼리 세력 다툼의 소지가 있어 독립 운동에 쏟을 힘을 정부 내치에 쏟는 비효율적 결과를 초래한다고 생각하여 반대하였으며, 정부가 아닌 당의 형태로 독립 운동을 해도 충분히 효율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 대다수가 정부 수립에 손을 들어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정부 수립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후 그의 생각대로 운동 및 사상 방향과 임정 재건의 방법론에 대한 의견차로 분열이 거듭되었으며 이광수, 윤치호와 같은 회의적 지식인이 등장하는 데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한국 독립 운동사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 외에도 대한이라는 국호가 망한 나라의 국호이므로 사용을 반대했고, 나라를 망쳐놓은 원인인 조선 황실에 대한 우대도 반대했지만 반대 의견 쪽의 사람들이 더 많아서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비록 임정 설립 시에 여러 가지를 반대했지만 여운형은 임시 정부에서 의정원, 외무부 차장으로 취임하였다.
특히 외교 부분에서 여운형은 자신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3.1 운동을 혹독하게 진압한 것이 드러나면서 일본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여론이 극히 안 좋아지게 되자, 일본의 코가 척식국 장관은 여운형을 도쿄에 초대하여 국빈으로 예우하고 그가 조선 합방을 수긍하도록 끈질기게 설득한다. 이는 임정 중심 세력인 여운형을 일본 편으로 만들어 임정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때 임정 사람들이 '가면 죽을지도 몰라, 가면 변절할지도 몰라'라면서 막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안창호는 대인배스럽게 "몽양은 그럴 리 없다"며 여비로 30원을 들려보냈다고 한다. 이에 여운형은 코가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도리어 '일본이 만용을 부리고 3.1 운동을 진압한 것은 흡사 타이타닉이 작은 빙산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가라앉는 것과 같은 것'이라며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코가 장관을 설득시킨다. 코가 장관은 대화를 하면서 여운형의 기개와 인품에 감탄하여 여운형이 떠날 때 '''"여운형 만세!"'''를 외쳐서 여운형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운형은 육군 대신 다나카 기이치, 조선 주재군 사령관 우츠노미야 다로,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 미즈노 렌타로, 체신 대신 노다 우타로 등을 만나 조선 독립의 당위를 설득했다.
곧이어 여운형이 도쿄 호텔의 연사로 초대되어 조선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게 되었을 때 합방에 대한 친교적 발언은커녕 수많은 기자들이 모인 앞에서 대놓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폭탄 발언을 한다. 이 때문에 여운형을 초대한 일본 의원들로 구성된 하라 내각이 불령선인 1호 인물을 일본 땅에 불러들이고 독립을 외치게 만들었다는 책임을 지라는 압력에 의해 하라 타카시 내각이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 내각을 일컬어 '''여운형 국회''' 혹은 '''여운형 내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4.3. 고려 공산당 활동
또한 그는 조선 독립을 지원하는 세력이라면 그 대상이 어느 누구든 간에 편을 가리지 않고 접근했다. 1921년 임시 정부 국무 총리 이동휘가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이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약소 민족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여운형은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고 김규식, 박헌영, 김단야 등과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되는 공산당 주최 동방 피압박 민족 대회에도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 밀정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동차 + 마차 + 썰매를 타고 야숙과 얻어 자기를 병행하면서 몽골의 고비 사막을 횡단했다.''' 당시 몽골은 미치광이 남작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와 볼셰비키군, 몽골군이 피 터지게 싸우고 전황이 정리된 지 2달 정도 밖에 안 되어 도적 떼와 야수가 들끓는 곳인데 치안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야숙을 하는데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품속에 권총을 끼고 잤다.
여행 중에 여운형은 몽골 횡단과 소련 방문에 대한 여행기를 남겼고 이를 후에 조선중앙일보에 기고하였는데, 당시 몽골, 중앙아시아, 소련 민중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 되고 있다. 안습의 검은 빵과 도끼 일화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고 모스크바로 회의 장소가 변경된 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 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 독립 운동에 대한 대담을 나누고 볼셰비키의 입장을 확인했다. 이때 여운형은 트로츠키의 연설에 매우 감명받았고 레닌과의 회담에서 그가 표명한 입장에 만족하였다 한다. 여운형은 대회 의장단 중 한 명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런데 임시 정부는 얼마 안 가 연통제, 교통국이 발각되어 국내와의 연락이 끊기면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로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져 고려 공산당 멤버인 김립이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임정 내부의 공산당원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국민대표회의가 열리면서 좌익 세력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이 임시 정부에서 대거 이탈, 임시 정부는 백범일지에 나와 있듯 '방세도 제대로 못내는' 단체로 축소되어 버리고 만다. 이는 김구가 좌익 세력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해방 이후 정국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공산당은 크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분열되었다. 여운형은 조봉암, 조동호, 김찬 등과 조선 공산당 해외부(임시 상해부)를 조직하고 민족 협동 전선을 주장했다.
한편 여운형은 개혁적 성향을 지닌 임정 2세대 창조파에 속하는 인물이었던 데다가 정치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임정 활동보다는 다른 쪽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특히 상하이에서 창당된 중국 공산당 초기 멤버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여 쑨원, 마오쩌둥, 호찌민을 만나는 한편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 중국 공산당에 우호적이었던 왕징웨이와 교류하기도 했다.[15] 그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 성공이 조선 독립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보고 자신이 근무하였던 신문사(타스 통신사)를 통해 혁명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여러 차례 내기도 하였고, 장제스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 신변에 위협을 받기도 했다. 새벽에 집에 와서 밥을 먹다가 중국군이 들이닥치자 담을 넘어 도망가는 등.
4.4. 체포와 국내 압송, 수감 생활
그 와중에 자신과 교류하고 있었던 왕징웨이가 체포되고 공산당 자금 사건 등의 일련의 사건으로 독립 운동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중국 푸단대학 체육학과 교수로 취직한다. 1927년 푸단 대학 남양 원정 축구단을 데리고 동남아시아를 순방한다. 여운형은 동남아시아에서 험난한 나날들을 보냈는데 싱가포르에서는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다가 추방되는 한편 필리핀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 민족 해방을 촉구하는 '혁명자 대회' 개최를 시도하다 쫓겨났다. 여운형이 억류당했던 필리핀 중화 기독 청년 회관
1929년 동남아 순회를 마친 뒤 상하이로 요동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관람하다가 영국 경찰의 협력을 얻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조선으로 압송되었다. 중국 경찰은 여운형이 무죄라는 사실을 주장하며 감옥에다 가두면 안 된다고 했지만, 영국 경찰과 일본 경찰은 중국 경찰의 요청을 무참히 씹어버리고 조선으로 체포한 것이다.[16] 여운형은 일본 경찰이 공동 조계에서 자신을 체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경기를 관람한 것인데, 일본 경찰들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첩첩이 포위했다. 그 과정에서 심한 몸싸움이 벌어져서 여운형의 한쪽 귀 고막이 상해버려 한쪽 귀가 안 들리게 되었다.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이 소식의 진위를 의심했다. 이는 이 전에도 여운형 체포설이 심심할 때마다 신문에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체포가 사실로 확인되자 조선 독립 운동의 거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여운형의 이름이 조선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조선에 도착할 무렵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으로 몰려들었는데, 사실 서울역에서 내릴 예정이었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자 경찰이 만일의 사태를 우려하여 용산역에서 미리 내리게 했다.[17] 당시 신문사들은 이를 '여운형 사건'이라 하여 관련 보도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였고, 공판 과정을 관람하기 위해 새벽부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섰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한편 여운형은 본국에 송환되던 날 오랜 여정의 피로로 신경이 약해졌고 유난히 더운 날씨에 찬물을 많이 마셔서 소화 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의 형량은 3년 징역으로 최종 확정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여 독방 생활을 하게 되자 평소 활발하게 돌아다녔던 몸이 적응을 못하여 신경통에 시달리더니 그 결과 털이 허옇게 드문드문 쉬어버렸고 이전에 몸무게가 80kg 대에서 60kg 대로 줄었다. 특히 수감 생활 중에 수인들이 가장 많이 걸리는 질병 중 하나인 치질 때문에 엄청 고생했다고 한다. 밥 먹다가 돌을 잘못 씹어서 이도 상했다고 한다.
여운형은 인내심이 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어서, 목 뒤쪽에 혹이 나서 수술을 한 적 있었는데, 굳이 마취를 안 하겠다고 하고 팔짱을 끼더니 입을 꾹 다물고 참았고 팔 근육에 힘을 줘서 수술 후에 팔에 일시적으로 마비 증세가 왔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한 그가 신경통과 치질로 너무 고통스러워서 밤새 신음할 정도로 병세가 심화되고 겨울이 다가오자 서대문 형무소보다는 그나마 대접이 좋고 날씨 좋은 대전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그때부터 건강이 호전되었다. 책 읽기와 그물 뜨기로 소일하다가 출옥 4달 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치질 수술을 4번 받아서 증세는 간신히 호전될 수 있었지만 출옥 후에 후유증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4.5. 조선중앙일보 사장
석방 뒤 그는 중앙일보[18] 의 사장에 취임하였고, 신문 이름을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었다. 그의 활약으로 망하기 직전이었던 중앙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겨루는 3대 일간지가 되었다. 조중동 경쟁, 당시 언론사에서 나돈 유행어로 '3증 경쟁'의 대열에 합류한 조선중앙일보는 사옥을 더 넓은 곳으로 옮기고 지면을 계속 늘려갔으며, 월간 잡지 《중앙》을 창간하는 등 무섭게 성장하였다.
여운형은 주식 회사를 설립하여 자본을 늘리고 사옥을 증축, 윤전기를 늘리고 회사 전용 경비행기를 사서 백두산을 탐방하기도 했다. 당시 중앙 일보의 논조는 일본의 조선인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중도 좌파적 논조를 지닌 신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장 시절에 '''일제 강점기 중에 최초로 이순신 장군 묘소를 정돈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가히 용자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행적 때문에 다른 유력한 신문사들에 비해 수익 구조가 그렇게 좋은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사장인데도 걸어서 출근하여 세간에는 이런 말장난이 나돌았다.
그러나 결국 신문사는 폐간되었다. 1936년에 터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휴간하게 되었으며, 여기에 일부 경영진들의 내부 알력에 따른 내홍을 수습하지 못하고 1937년 11월 폐간하고 말았던 것.조선일보 광산왕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걸어서 뚜벅뚜벅
일장기 말소사건과 관련하여, 조선중앙일보가 한 발 빨랐다는 주장이 있지만, 당시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13일자 서울 판 기사와 날짜가 동일한 동아일보의 1936년 8월 13일자 지방판 기사가 발굴되면서 이 원조 설은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채백 부산대학교 신문 방송학과 교수는 저서 <사라진 일장기의 진실>(커뮤니 케이션 북스 펴냄)을 통해 조선중앙일보가 가장 먼저 손기정의 우승 사진에서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널리 알려졌지만 동아 일보도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날 이 사진을 보도했다고 말한다. "8월13일자 동아일보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서울 판)가 게재한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실었는데 서울 판이 당일 새벽에 인쇄하던 반면 지방판 조간은 그 전날 인쇄하던 관행에 비춰, 손기정의 우승 사진은 동아일보가 먼저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진실은?
그리고 조선중앙일보의 폐간의 실상은 조선총독부의 1936년 극비 문서와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소화 11년(1936년) 8월 13일자 지상에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 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 받은 우리 손 선수’라는 제목 아래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전기 동아일보와 같은 모양의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있는 일장기 마크는 물론, 손 선수 자체의 용모조차 잘 판명되지 않는 까닭에 당국으로서는 당초 졸렬한 인쇄 기술에 의한 것이라 판단했으나 일단 관할 경찰 당국을 시켜 조사한 결과 동아 일보처럼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일장기 마크를 손으로 공들여 말소시킨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동사(同社) 사장 여운형 이하 간부는 전연 그 사실을 부인하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하는 수 없이 근신의 의미로 같은 달(9월) 4일에 이르러 당국의 처분에 앞서 ‘근신의 뜻을 표하고 당국의 처분이 있을 때까지 휴간 한다’ 운운의 사고(社告)를 게재함과 동시에 휴간 수속을 이행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조선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극비 문서 <조선 출판 경찰 개요> 1936년 119쪽 ~ 120쪽
소화 11년(1936년) 9월 5일, 동업 동아일보가 같은 사건으로 경무국으로부터 발행 정지의 처분을 받자, 중앙일보는 자진 휴간의 거조(擧措)에 출(出)하야 1개년간이나 경무 당국의 속간 내락을 얻기에 진력을 하였으나 사태 불순하야 한갓 헛되이 일자를 끌어오다가, 만 1년을 지나 또 제 9조에 의한 2개월간의 기한까지 지나자 11월5일에 저절로 낙명(落命)하게 된 것이다. 같은 사건으로 처분을 받았던 동아일보는 그래도 그 제명(題名)을 살려 다시 속간함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야 당국의 정간 처분도 아니오 자진 휴간한 말하자면 경미한 중앙일보만 낙명하게 되었느냐 함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잠재하여 있었던 것이다. (중략) 휴간 중에 현 사장(呂運亨) 지지파와 신 사장(成元慶) 지립파(持立派)의 알력이 있어 호상 대립이 되어 중역회에서나, 주주 총회에서나 분쟁이 늘 끊이지 않아(不絶)왔으며 거기다가 8만원 공(空) 불입 같은 것이 튀어나와 주식 회사 결성 중에 큰 의혹을 남긴 오점까지 끼쳐놓았음이 후계 간부가 사무국을 이해시킬만 한 공작을 1년 내내 끌어오면서도 이루지 못한 등 여러 가지의 실수가 원인이 되어 파란 많은 역사를 남기고 끝내 무성무취(無聲無臭)하게 마지막 운명을 짓고 말았다.
- 『오호, 중앙일보 逐 폐간, 이십여년의 언론 활약사를 남기고』, 삼천리, 1938년 1월 1일 신년호
5. 광복 이후 정치활동
5.1. 광복 직후 치안 유지 활동
중앙일보가 폐간되고 할 일이 없어진 여운형은 결혼식 주례사로, 각종 행사 연사로 소일하다가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이에 대해 자신의 아들이 일본 호세이대학에 입학하는 관계로 일본행을 결정했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중일전쟁이 터진 뒤 일본이 조선에서의 독립 운동 활동에 대해 탄압을 강화하여 활동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고, 중일 전쟁과 관련해 일본 고위급 관료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1937년 일본이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을 때, 여운형은 그때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다. 여운형은 "중일전쟁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원료 및 소비시장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의 각축 과정에서 일본이 정치·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중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써 중국에서 일정한 이권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중국 독점을 절대 허용할 리 없고, 미국과 영국은 어떻게든 일본에 대항할 것이며, 일본은 양국의 공동 공격 앞에 결국 자멸할 것"이라고 봤다.[20]
일본으로 건너간 여운형은 일본 유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들을 만나 조국 독립의 필연성을 역설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면서 그들의 유학 생활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한편 일본 고위급 관료들과도 만나 중국에서 일본군을 서둘러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고 일본의 극우 지식인 오카와 슈메이와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
오가와 슈메이는 일본의 극우 이론가인데, 이 시기 오가와는 일본 정부가 중일 전쟁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보았다. 이 점 때문에 오가와는 당시 중일 전쟁에서 일본군이 중국군에게 패배했다고 깔끔히 인정하고 중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한 뒤 모조리 일본으로 돌아오라고 주장하는 여운형과 의견이 수렴된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은 오가와 슈메이와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 반대, 중국과의 친선 및 영구 혈맹 추진'을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입장에서는 서로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다. 대표적인 예로 오가와 슈메이가 당시 보호 관찰 하에 있던 무직의 여운형을 '사회적으로 자리 잡도록 하겠다.'며 추천으로 만철(滿鐵)의 다른 단체인 '동아회' 고문에 취임시킨 것을 들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근거로 '여운형이 친일 단체에 협력했다'고 앞뒤 다 잘라버리고 그냥 결정짓는데, '동아회'라는 것은 만철의 동아 경제 조사국이 1928년 조직한 단체로,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의 실태에 대해 분석하고 논책하고 제언하는 잡지 『동아』를 발행하고 있었던 단체다. 이 단체 집필자는 외부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애당초 그 목적이 '중국 관련'에 대한 학술적 색채가 짙은 논고가 많았었다. 즉, 다시 말해 '동아회'라는 단체는 '내선일체'를 주창하는 친일 단체와 거리가 전혀 멀다.[21] 하지만 군부 인사들은 이미 시작한 일이니 물러설 수 없다면서 듣지 않아 성과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고 미군 공군 전투기들이 도쿄 시내를 공습하고 폭탄을 투하하는 모습을 본 여운형은 중일 전쟁 때부터 예견했던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고, 군부 쪽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회담을 하였다. 특히 고노에 후미마로는 중일 전쟁 초기에 여운형의 제안을 거절한 바가 있었는데 국공합작이 전개되고 중국 전황이 매우 좋아짐과 동시에 일본 전황이 매우 나빠짐으로 여운형에게 중국 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휴전 협상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여운형은 이미 늦었다며 거절하였다.
1942년 4월 18일 일본 도쿄에서 '두리틀 대원 공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 여운형은 도쿄에서 목격한 미군 공군 전투기들의 공습 상황을 자신의 친구들에게 설명하였고, 일본 패망을 예언하는 말을 주변인들에게 흘렸다가 일본 헌병대에까지 귀에 들리게 되었다. 1942년 12월 21일, 일본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로부터의 회담을 마치고 귀국하려는 길에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 또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제는 여운형을 다치게 하면 파장이 클 걸 염려하여 90시간 동안 잠을 못 자게 깨우는 고문을 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신경 쇠약에 걸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또한 옥살이 중 기력이 많이 떨어지고 머리가 하얗게 셌으며 일제의 징병 부분에서 협력을 하지 않은 대가로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1943년 7월 2일 석방되었다."지난 4월 18일 미국 비행기의 동경 공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미국기의 성능은 일본기 성능보다 우수해 일본기가 미국기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경에서 미국 방송을 들으니 미국도 전쟁 준비에 광분해 최후의 승리는 미·영에 있게 될 것이며, 미·영이 승리하면 조선의 독립이 확실히 가능하고, 전쟁이 끝나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은 독립운동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인데, 내 생각에는 일본의 물자 부족 때문에 뜻밖으로 빨리 종결될 것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이 미국과 함께 일본에 선전을 포고했고, 나도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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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이 친구 오건영에게 전한 말, 사상휘보 속간 26호, 1943년
석방 후, 극도로 신경 쇠약에 시달려 경성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7월 5일 일본인 검사 2명이 전향서 쓸 것을 협박, 여운형은 재차 거절했지만 경성 지방 법원 판사 백윤화가 '전향하지 않으면 집행 유예를 취소하고 다시 형을 집행한다.'고 협박한다. 그러자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여운형은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던 가족들이 자기 대신 전향문에 도장 찍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고 말았고, 결국 협박 분위기 속에서 가족들에 의해 전향문이 날인당하게 된다. 이 강제 전향문으로 인해 여운형은 훗날 해방 후 수많은 정적들로부터 비판의 명분을 받게 되어 명예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전향문 날인 이후에도 가택 연금을 당하고 총독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당하게 되었고, 일본 고위급 정치인들이 계속 협력을 요구하면서 공갈 협박을 했기 때문에 살과 뼈가 마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운형은 그 와중에도 해방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해방 후 조선 민족의 자력에 의해 세워진 조직을 구상하여, 1944년 8월 10일 현우현의 집에 모인 측근과 조국 건설에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조선건국동맹이라는 지하 조직을 만들었다. 사실 '건국 동맹'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만들어진 이름이고, 당시 조직 이름은 없었다. 이는 건국 준비 위원회도 마찬가지여서 나중에 단체를 명명하기 위해 이름이 붙은 것이지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이는 이름이 있으면 임원 1명이라도 체포되었을 시에 죄다 까발려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의 원칙은 삼불(三不)이었는데, 즉 말하지 않는다(不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不文),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不名)였다.
1944년 10월, 인근 용문산에서 13명의 청년들이 여운형을 찾아 만나서 경기 북부 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들이 모여 비밀 결사 단체인 '농민 동맹'을 결성한다. 농민 동맹은 용문산을 거점으로 일제의 강제 징병을 피해 도피한 청년들을 보호하는 역할과 일제(日帝)의 공출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를 막으려 노력했었다. 이후에는 보광당, 조선 민족 해방 협동단, 산악대 등 여러 조직과 직간접 접촉을 통해 건국 동맹의 기반을 다져나아가게 된다.
1945년 3월에는 건국 동맹의 산하에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후방 교란과 노농군 편성을 계획하면서 경기도 주안 조병창의 채병덕 중좌와 접촉하고자 당시 은행원으로 지내던 손기정을 보내 채병덕 중좌에게 전갈을 보냈고, 채병덕 중좌와 두 차례 접촉해 유사시에 무기 공급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945년 4월에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회담과 관련해 조선 독립 동맹(중국 화북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 의용군을 산하에 둔 독립 운동 단체)과 구체적인 연계를 위해 이영선을 파견하고,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최근우를 베이징에 파견하여 연락을 시도했다. 그리고 8월 초에는 부민관 사건 등의 여파로 총독부 경찰에 의해 그 존재가 드러나게 되어 건국 동맹의 간부 이걸소, 황운, 이석구, 조동호 등이 검거되었고, 이에 따라 최근우, 김세용, 이여성, 이상백, 김기용, 이만규 등을 중앙 위원으로 선출했다.
그런데 당시 총독부 기록 보면 정말 여운형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총독부의 서열 2위인 경무 총감과 3위인 정무 총감의 회담 기록인데. 경무 총감은 여운형은 조선을 지배하는데 제일 방해되는 자니 당장 잡아 죽여야 한다[22] 고 했는데 정무 총감은 "지금 여운형을 건드렸다가는 조선 전체에서 폭동이 날 수 있다.''' 그는 고종이나 순종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지금 상황에서 여운형 체포는 무리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항복이 기정 사실이 되자 총독부는 항복 사흘 전 무렵부터 자신들을 포함해 조선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빠져나오도록 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는데, 여운형[23] 을 교섭의 파트너로 정했다. 이때 여운형은 조선 총독부에 5가지 요구를 한다.
[24][25]전국적으로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각 석방할 것
서울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할 것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이렇게 5개 요구 조항을 제출하였다. 엔도 총감이 여운형에게 "선생, 우리 일본인들이 무사히 일본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시오."라고 했고, 여운형은 "좋소, 당신네 나라 국민들을 무사히 본국으로 대피시키는 데 아낌없이 도와주겠소. 대신 조선인들을 대표하는 내 부탁도 들어줘야 하오!"라고 했다. 그리고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최종적으로 승인하였다. 원래 아베 총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여운형의 5개 조항을 승인하지 않으려 했으나 엔도 총감이 "총독,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하고 설득해서 결국 승인했다.
그런데 훗날, 한국민주당에서 총독부가 여운형과 만나기 전에 송진우에게 찾아가 치안권을 교섭했다는 등 주장을 펼쳐 이를 사실인 것 마냥 주장했는데, 1957년 정무 총감 엔도 류사쿠가 인터뷰에서 '송진우로부터 치안권 교섭 그딴 거 없었다!'라는 투로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여운형은 안전하게 빠져나가게 해줄 테니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치안 유지 행위를 막지 말 것, 형무소 죄수들을 석방할 것,[26] 서울에 3달치 식량을 준비하여 민심을 달랠 것을 요구하고 지속적으로 설득한 끝에 이를 관철시켰고, 그동안 몰래 운영해왔던 지하 조직 건국 동맹을 구체화하여 해방 이틀 만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하고 전국 각지에 건준 지부를 건설하여 치안을 통솔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이 패퇴한 후 보복성 범죄 밑 사회 혼란이 일어날 여지를 미연에 방지하여 사회를 안정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8.15 광복 참조.
그가 총독부와 교섭을 한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긍정적으로 보는 측은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해방 직후에 민중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사적인 감정에 기인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나 힘없는 사람들이 거기에 말려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로 중국 및 동남아 등지에서 그런 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에 제주 4.3 사건이나 6.25 전쟁같이 사회가 혼란할 때의 피해자들은 결국 '''힘없는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정작 여운형은 이 결정에 대해서 자기 변호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반면 비판하는 이들은 일본군 및 행정 관료들이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항복하여 짐승만도 못한 포로 대우를 받았던 점을 지적하며, 부적절한 처신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여운형 본인이 일제에 의해 인생 전반에 걸쳐 생사를 넘나든 최대 피해자였고 해방 직전 총독부로부터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으며 해방 이후에도 역시 가난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주당은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했다는 것을 구실로 여운형을 일본으로부터 돈 받아먹은 친일파라고 두들겨댔다. 여운형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얘기를 한민당으로부터 들었던 하지 중장은 그 말을 철썩처럼 믿고 여운형과 첫 접견 자리에서 "일본 놈들에게서 돈을 얼마나 받았소?"라며 폭언을 퍼부었고[27] 일본 관리들도 미군정을 상대하면서 '여운형과 건준이 공산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했다.'[28] 여하튼, 여운형은 조선인들의 안위를 걱정해 비폭력주의에 입각해 일본을 용서하고 보내줬다.[29]
5.2.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활동
여운형은 8월 15일 당일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을 발족시키고 장권[30] 의 치안대와 이정구[31] 의 식량 대책 위원회를 통해 민생의 안정을 꾀했다. 하지만 좌우익을 규합하는 통일적 기구로 조직되었던 당초의 뜻과는 달리, 송진우 등 동아일보계는 불참하고 임정 봉대를 선언했으며, 안재홍 등의 조선일보계 / 신간회 우파 세력은 사회주의 세력이 건준의 요직을 장악한데 불만을 품고 건준을 개조하고자 '전국 유지자 대회'와 '건준 확대 위원회'를 연달아 제안했으나, 모두 무산되자 건준을 이탈했다. 본디 여운형계와 박헌영계가 뒤섞였던 건준 좌파는 이후 박헌영계와 조공의 조직적인 침투에 점차 잠식됐다.
미군정 실시가 임박하자 여운형은 군정청을 상대로 협상력을 얻기 위해 건준을 모태로 일종의 과도 정부인 인민 공화국(인공)을 선포했으며, 지방 건준 조직을 인민 위원회로 개편시켰다. 그러나 미군은 군정 실시 이후 인공의 존재를 부인하고 협상을 거부했다. 군정 당국은 여운형도 불순한 좌익 정치인, 심지어 친일파로 인식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방의 건준 지부들은 많은 수가 지역 유지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대로 조직된 일종의 좌우 합작적 통일 전선이었는데, 인민 위원회으로의 개편을 전후하여 좌파에게 장악되고 말았다. [32] 또한 박헌영은 여운형이 서울을 비운 사이 인공의 정부 조직을 맘대로 발표했는데 이 과정에서 우파 인사의 명의를 도용해 우익의 비판을 받았다. 이로 인해 여운형은 정치적 권위는 크게 추락해 바지사장으로 전락하였다.
건준의 최후는 여운형이 의도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운형 쪽에서는 인공의 탄생에 대해 '자궁외 임신'이라고 표현했을 정도. 여운형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여운형을 박헌영과 같은 과격한 사회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 계열이라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쪽에 가까웠다고 평하고 있다. 《인민당의 신념》에서 그러한 그의 정치 노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운형은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유물론을 신봉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자 임을 천명했고 근로자와 인민 대중의 이해를 대변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마르크스주의에 찬동하지만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과 계급 독재에 대해서는 찬동치 않는다"[33] 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여운형은 뚜렷한 사회주의적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박헌영이 비록 과격할지언정 "마땅히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미완의 통일 조선 민주 국가 건설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34] 본디 구상이 어쨌든, 이는 궁극적으로 안재홍을 비롯한 우파 측의 이탈을 낳았고, 박헌영이 건준을 장악하는 발판을 만들어 줌으로서 여운형은 정치적인 자살을 하고 말았다.
9월에 미군정이 실시되고 나서 상황은 여운형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갔는데,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조선인의 정치 활동을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선언하였다. 이 때문에 인민 공화국과 인민 위원회는 지하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임시 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또한 미군정 인사들(존 하지 등)은 인민위원회를 공산주의 단체로 인식하여 모두 해체하도록 지시하였고[35] , 인민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치안을 맡았던 그 자리에 일제 강점기 때 경찰들을 80% 이상 복귀시켰다.[36] 이는 여운형의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입혔고, 후에 여운형이 수차례 테러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군정에서는 비록 사회주의 단체의 수장이라는 직함이 꺼림칙했지만 화려한 전적을 지녔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 여운형을 어떻게든 이용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여운형은 몇몇 부분에서는 미군정에 의존하지 않겠노라고 확실히 선을 그었기 때문에 미군정에게도 외면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군정에서는 여운형을 미군정에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라고 깠다. 그래서 별명이 'Silver Axe(은도끼)'였는데, 몽양 평전에서는 겉으로는 매력적이지만 이용하려니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 쓸모없다는 뜻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은으로 만든 도끼로 장작을 패면 은이 물러서 쓸모가 없으니, 언뜻 보기에는 대화가 통하고 영향력이 있으며, 은이라고 할 만한 실력자이기 때문에 미군정이 활용하기 좋아보여도, 실제로는 완고하고 미군정에 비협조적이라서 활용 가치가 없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만 해도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정치인이었고 좌우 갈등이 그렇게 표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운형은 '''노력만 한다면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38도선이라는 지리적 분단은 해소되어 통일된 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보았다. 1945년 10월 여운형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고 정파 간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민주당, 조선공산당 등과 함께 좌우 진영 요인 합작 회의를 개최한다. 인공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그는 민족 통합을 위해 인공도 해산할 수 있다며 회의를 주도했다. 그 결과 '각 정당 행동 통일 위원회'가 설립됐으나 10월 16일 이승만의 귀국으로 정국의 관심이 그에게 쏠리면서 동력을 상실했다. 10월 23일 각 정당 행동 통일 위원회가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로 전환되며 회의의 주도권이 이승만에게 넘어갔다. 오래지 않아 이승만의 편파적 태도로 좌파 세력이 독촉 중협을 대거 이탈했다. 여운형 역시 독촉 중협을 탈퇴한다.
독자 세력화의 필요성을 깨달은 여운형은 11월 12일 조선인민당을 창당했다. 당시 여운형은 박헌영 세력에게 잠식당한 인공과는 이미 거리를 두고 있던 상태였다.그러나 인민당에도 박헌영계가 다수 참가하면서 이후에 큰 사단을 일으키는 화근이 된다. 여운형은 조선 인민당을 창당하며 토지 개혁과 중요 산업 국유화, 친일 잔재 척결을 주장하는 등 자본주의의 바탕에 계획 경제를 도입한 사회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이를 위해 여운형은 파시즘, 친일파를 제외한 나머지 세력의 연합 전선, 인민 전선 결성을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인공 중앙 인민 위원회와 임시 정부 요인의 결합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적인 인기를 받고 있던 여운형은 송진우 등 우익은 물론 박헌영 등 좌익에게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김구 등 임시 정부 세력도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여운형을 경계했다. 여운형이 통합을 제안하자 임시 정부는 임정의 법통과 조직 인정을 요구했다. 좌익에게는 구색으로 2개 ~ 3개의 신설 부서만을 제안했다. 이로 인해 김구와 여운형의 합작은 무산됐다.
5.3. 신탁 통치 논란과 입장
그 해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를 접한 직후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던 김구는 격노하여 신탁 통치 결사 반대를 외치며 반탁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돌아온 극좌 정치인 박헌영은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여 각자 독선적인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우익 반탁 좌익 찬탁으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신탁통치 결정에 대해 온건 중도는 통일 임시정부 항목에 긍정적인 태도를 나타냈지만, 이승만, 김구를 위시한 강경 반공, 민족주의 우파 세력들은 극렬히 반대했다. 그나마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경교장에서 김구를 만났을 때 반탁 운동에 대해 신중론을 주문하는 견해를 밝혔는데, 그 날 백의사 소속의 한현우한테 암살당했다.
송진우 암살 이후로 좌우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중도에 가까웠던 김규식은 반탁 노선에 반대했다가 지속적으로 테러를 당하게 되었으며, 김구는 지속적으로 반탁 궐기 대회를 열었다. 한편 여운형과 인민당은 박헌영의 공산당과 함께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이른바 '반팟쇼 공동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여 반탁 운동에 나섰다가, 박헌영과 공산당이 돌연 3상 회의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사실상 등을 떠밀려 찬탁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여운형은 신탁 통치로 인한 좌우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인민당과 조선 공산당, 한민당, 국민당, 4당 대표 회담을 주선했다.[37] 이 자리에서 3상 회의에 대한 원칙적 지지, 합리적인 문제를 통한 신탁 통치 문제 해결 등의 내용을 담은 4당 코뮤니케가 발표됐으나 반탁 정신 몰각을 이유로 한민당, 국민당 등이 연이어 합의를 번복하면서 무산됐다.[38] 여운형은 이갑성이 이끄는 신한 민족당을 포함한 5당 회담을 통해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내려 햇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운형은 정치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실망하여 '''"우리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되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1차 시험에서 모두 낙제다."'''라고 실망이 역력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여운형이 구상했던 민족 통일 전선은 좌익 일색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으로 변질되면서 좌익 내에서의 인민당의 입지가 몰락하고 공산당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또한 이때부터 여운형은 지속적인 백색테러에 시달리게 됐다.
5.4. 좌우 합작 운동
한때 미군정은 여운형을 친좌익으로 인식해 멀리 했으나, 대화해보니 일단 영어가 되는 사람이었고[39][40] 또 그가 과거 인공 부주석 시절부터 계속해서 협조 노선을 펼쳤기 때문에 쿠데타를 기도했던 이승만, 김구나 친소파 박헌영 등에게 시달리던 미군정은 그나마 협력이 가능해보이는 여운형, 김규식 등 중간파를 합작시켜 정치 세력으로 키우고자 했다. 미군정의 자문 기관인 남조선 대한 국민 대표 민주 의원(민주 의원)을 대체할 필요가 있었다. 민주 의원은 대부분 이승만, 김구 등 반탁 세력으로 구성돼 있었다.[41] 지나치게 우경화된 성격으로 인해 민주 의원은 대중적 지지가 부족했고 소련과의 협상에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미군정은 여운형, 김규식에게 새로운 임시 입법 기구 설립을 맡겨 군정의 지지 기반을 넓히고 이승만, 김구 등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 좌우 합작 운동을 누가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는가는 학자에 따라 의견이 조금씩 갈린다. 이 문서에서는 거의 모든 것을 여운형이 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주로 우익 측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 아래에서 쓰인 칼럼이나 논문에서는 여운형에 대한 언급은 교묘하게 빼고 김규식이 합작 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일찍부터 여운형은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 등과 좌우의 협력 방안을 논의해 왔다.
1946년 7월 25일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 합작 운동을 좌우 합작 위원회를 조직화하는데 성공한다.[42] 외형 상으로는 조선 공산당과 한민당 등 좌우의 양극단까지 모두 포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틀 만에 박헌영은 토지 몰수, 군정 종식 등 우익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좌우 합작의 원칙으로 제시했다. 우익 역시 좌익의 주장되는 원칙을 제시하며 맞섰다. 박헌영 계열에서는 여운형을 친미 부르주아, 미 제국주의의 허수아비라고 비판하였고, 우파 쪽에선 좌우 합작이 조선을 적화시키려는 음모라고 평가했다. 박헌영 계열에서 볼 때는 자본주의 국가와 손잡는 여운형이 아니꼬운 것이고, 김구, 이승만 계열에서 볼 때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여운형이 공산주의자나 진배 다름없었으므로, 여운형이 양 파벌 모두에게 집중 포화를 받은 건 당연지사. 한편 북한에서는 이를 "미제의 놀음에 말려들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후 내놓은 좌우 합작 7원칙 또한 친일파 처단 문제에서 즉시 처단을 주장했던 박헌영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한 우파 계열에게 공격당했고, 토지 배분 문제에서도 당연히 무상 몰수 무상 분배로 할 것을 주장한 박헌영과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주장한 우파 계열에게 비판받았다. 분명 유조건 매수 무상 분배라는 안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재정 문제가 심했을 것임은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여운형이 단순한 이상론에 빠져서 좌우 합작 운동에 가담했던 건 아니었다. 좌우 합작 위원회가 개최되던 즈음 북한에서는 양대 좌파 정당이었던 북조선 공산당과 북조선 신민당이 북조선 로동당으로 통일되어 적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정판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던 박헌영도 좌익 세력을 결집시켜 무장 투쟁에 동원코자 좌익 3당 통합 운동이라는 것을 추진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이를 좌파의 주도권을 되찾아올 기회로 보고 미군정에 박헌영을 "경우에 따라서는 7월 29일에 있을 위폐 사건 재판에다 엮어 투옥하라고 암시”[43] 하는 한편 공산당과 신민당에 합당을 제의했다. 좌익을 중심으로 대중정당을 만들어 좌우 합작 운동에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처음에는 공산당 내부에서 이에 화답하며 이 기회를 이용해 박헌영을 몰아내고자 당대회 소집을 주장한 이른바 대회파가 출현하면서 여운형의 의도대로 박헌영의 주도권이 무너지는 듯 했으나, 박헌영은 대회파를 재빨리 탄압하여 출당시키고는 인민당과 신민당 내부의 박헌영파를 조종하여 즉시 흡수 통합을 요구하며 상황이 반전되었다. 여운형은 좌우 합작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중론을 내세웠으나, 인민당 내부 표결에서 48대 31로 합당이 가결되었고, 신민당에서는 당수였던 백남운조차 몰랐던 합당 결정을 거쳐 억지로 남조선로동당 (남로당)이 결성되고야 만다. 좌우 합작으로 인기가 높았던 여운형의 주도로 합당이 진행되어 통합 정당이 대중 정당으로 출범할 경우, 박헌영 등 조선 공산당이 쥐고 있던 주도권이 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발한 여운형은 합당의 인정을 거부하고 백남운, 공산당 대회파 등과 결탁하여 사회노동당 (사로당)을 창당하고 좌익 세력의 재통합을 추진했지만,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 이후 좌익 세력이 박헌영과 남로당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불발에 그쳤다.
이 무렵 좌우 합작 위원회도 난관에 처해 있었다. 당초 미군정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지원할 때 군정을 뒷받침할 입법 기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의원의 절반을 좌우 합작 위원회가 추천해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미군정의 제안을 받아들여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고 그 안에 입법 기관 설립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44] 그러나 중간파를 제외한 좌익과 우익은 각각 입법 기관 설립과 토지 개혁을 문제삼아 좌우 합작 7원칙을 비판했다. 게다가 좌우 합작 위원회의 지지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선출이 진행되며 미군정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배신했다. 좌우 합작 위원회는 입법 기관 설립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추천권 뿐 아니라 정치범 석방, 행정 기구 개혁, 친일파 숙청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막상 선거가 확정되자 미군정은 좌우 합작 위원회가 내건 조건을 외면했다. 김규식 등 우파에서는 개혁 입법을 내세워 선거에 참여했지만 여운형 등 좌파는 선거 불참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1946년 12월 입법 의원 개원 이후 좌우 합작 위원회는 분열됐다. 게다가 조봉암, 홍명희, 김약수, 이극로 등 좌우 합작 위원회에 불참한 민족주의 세력이 독자적으로 '제3 전선'을 결성하면서 여운형과 좌우 합작 위원회는 또 다시 타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은 북에 있는 김일성과 조만식을 만나러 위험을 무릅쓰고 농부로 변장하여 5번이나 북한을 방문하는 등 갖은 노력을 하였다. 결국 여운형은 12월 4일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사로당을 포기하고 민전 의장직 사퇴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계 은퇴 선언 후 여운형은 고향 양평에 은거했다. 그러나 미소 공위가 재개될 조짐을 보이며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 여운형의 복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김일성도 여운형의 복귀를 후원했다.[45] 1947년 3월 인도에서 열리는 범아시아 회의 한국 대표로 임명되며 여운형은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재개한다.[46] 5월 24일 남조선 신민당 내 백남운 세력, 조선 공산당 내 반(反) 박헌영 세력과 함께 근로인민당 (근민당)을 창당하고, 중간파 결속을 위해 이른바 '시국 대책 협의회'를 결성한다. 그러나 근민당 창당 2달 뒤 여운형은 암살당했다.
5.5. 테러 위협과 암살
여운형이 당한 테러는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할 정도로 최다 기록 수준이었다.
사실 해방 이전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에도 임정의 본분을 벗어나 개인적인 명예를 추구하고 다닌다는 비판을 받아 괴한의 습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그것이 1925년 12월에 일어난 여운형 구타 사건)
그리고 해방 이후, 여운형은 우익 진영의 테러 1순위가 되었다. 지지자들은 우익이 지지 기반이 약했다고 하고, 비판자들은 그저 임정과 대립하면서 사회주의에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에, 다른 운동가들처럼 공격 대상이 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인간 관계가 좋았고 몸이 건장하였기 때문에 여러 차례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강원룡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송진우를 죽인 암살범인 한현우도 처음에는 여운형을 죽이려고 했다 한다. 만약 이것이 시행되었더라면 송진우보다 여운형이 먼저 죽었겠지만, 탑골 공원에서 죽이려고 다가가는데 여운형이 한현우를 알아보고 "어이, 현우군! 오랜만일세."라고 어깨를 툭툭 쳐주며 인사했기 때문에 도저히 죽일 수 없어서 송진우를 먼저 죽였다고 한다.
아래 예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 길 가던 중에 괴한들에게 곤봉으로 동생과 함께 구타를 당했다.
- 괴한들이 신당동에서 납치하여 차에 태워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서 재갈을 물리고 묶은 다음에 정치 활동 그만둔다는 문서에 서명하면 살려주겠다는 협박 했으나 그동안 갈고 닦던 운동 실력(...)으로 괴한들을 때려눕히고 산에서 굴러 내려왔다.[47]
- 벽돌이 날아와 머리를 맞아 기절했다.
- 괴한들이 그를 집 앞 소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묶었다.
- 불발 수류탄이 날아왔다.
- 계동 고택에서 아궁이에 설치되었던 폭탄이 터져서 집 반쪽이 날아갔다. 다행이 출타 중이어서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 혜화동 로터리를 차타고 지나가던 중 총격이 빗나갔다. 피살 1달 전에 똑같은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때는 다행히 차의 속력 때문에 총알을 피했지만 한 달 후에는 차를 멈춰세워 총을 쏜다.
결국 1947년 7월 19일 IOC가입 축하 기념으로 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 축구 경기가 열린 날, 당시 조선 체육 회장 겸 한국 올림픽 위원장이었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전에 옷을 갈아입겠다고 리무진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피신처로 머물던 명륜동 집에서 계동 자택으로 가는 길의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의 파출소에서 트럭 한 대가 나와 여운형이 탄 리무진을 가로막았다. 여운형의 리무진이 멈춰선 사이 배후를 알 수 없는 청년 한지근이 범퍼에 올라타 두 발의 총탄을 여운형에게 쐈다. 총알은 여운형의 심장과 배를 관통했다. 급히 근처 원남동의 서울대학교병원으로 호송했으나 차 안에서 2분 만에 사망하였다.
당시 옆에 앉았던 측근 고경흠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죽기 전에 최후로 내뱉었던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한다. 이전에 쓴 편지 중에서 좌우 합작 운동은 계속할 것이지만 공포에서조차 해방될 수는 없다는 요지의 말이 발견된 바 있다. 당시 입었던 옷이 아직 보관되고 있는데, 핏자국이 선명하고 총이 그야말로 정확히 관통한 흔적이 남아있다.
암살 당일 여운형은 경기 참관 후 창경궁에서 미군정 경제 협조처의 존슨과 만나 안재홍의 뒤를 이어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의 민정 장관(국무총리격)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을 예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존슨을 만난 후엔 고향인 묘골에 내려가 있을 생각이었다. 좌우합작운동의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시점의 죽음이었던 셈이다.#
한편 한지근은 개성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한국 전쟁 중에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하는데, 한겨레에서 접촉한바 일본에서 살아있다던 사람은 한지근이 아닌 송진우를 암살한 한현우였다.
5.5.1. 암살 배후는?
좌익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 일부 우익 세력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었다. 이정식 교수의 남로당 배후설, 한국논단이 주장하는 '김일성에 의한 암살 배후설' 등. 한국논단에서 제기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것이 박헌영의 비서였던 박갑동의 증언인데, 박갑동에 의하면 김일성이 박헌영을 견제하기 위해 여운형과 손을 잡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여운형의 역량이 박헌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자 이에 실망한 김일성이 여운형에게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고 한다. 이에 여운형이 김일성을 비난하자 모의 내용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김일성이 여운형을 제거했다는 주장으로 암살범 한지근을 위장 월남시켜 암살 지령을 내렸다는 소리. 이밖에도 일제 강점기부터 조선 공산당을 이끌던 골수 좌파였던 박헌영이, 합작을 하기에 여운형은 중도좌파에 가까운데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해 손을 써 처리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광복 이후 두 사람은 일단 손을 잡긴 했으나 상당한 노선 차이를 보였으며, 끝내 여운형은 남로당과 결별하고 근로 인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창당 딱 두 달 뒤에 암살을 당했으니... 좌익이 살해했다면, 그 배후는 평양의 김일성보다 박헌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대로 우익 세력이 암살했다는 설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몽양을 살해한 한지근은 표면적으로는 극우 인사였으며, 동시에 해방 정국에서 백색 테러로 명성을 떨치던 백의사[48] 요원 한현우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제기된 설. 이에 따르면 백의사를 해방 정국에서 임시 정부 계열의 무력 집단으로 활용한 김구, 백의사 작전에 중추적 지령을 내리던 신익희가 배후로 추정된다. 1974년 신동운, 김홍성, 김영성 등도 한국일보를 통해 자신들이 한지근의 공범이며 암살의 배후에 백의사와 양호단이 있다고 주장했다.[49] 이들은 양호단 단원인 자신들에게 백의사 사령 염동진이 여운형 암살을 지원했으며, 노덕술과 신동운의 합의를 통해 한지근의 단독 범행으로 발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두한은 여운형을 혼내주라는 장택상의 지시를 받고 한지근에게 권총을 내줬다고 증언했다. 여운형이 죽자 장택상은 "죽이지는 말라고 하지 않았나? 그저 혼만 내주라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시끄럽지 않은가"라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고 주장했지만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김두한은 1947년 '''4월''' 정진룡 살인사건으로 미군정에게 체포되어 재판에 섰기 때문이다. 당연히 조사를 받는 범죄자가 무장을 하게 미군정이 방치할리가 없다. 김두한이 주장한 자신의 여운형 암살 1차 시도는 맥락상으로 나름 아다리가 맞아서 최소한의 신빙성은 있지만, 여운형이 사망하게 된 저격건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김두한 특유의 허세부리기가 발동했거나 증언 당시로부터 20년전 기억이어서 다른 인물이랑 혼동되어 뒤섞인 기억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50]
한편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한지근의 신원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며 조병옥, 장택상이 이끄는 경찰이 배후에서 암살을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가장 유력한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형 암살 당시 축구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집으로 돌아가던 여운형의 차를 트럭이 막았고 저격이 있었다. 같이 있던 여운형의 비서가 저격범을 쫒으려하자 옆에 있던 경찰들이 그 비서를 암살범이라 붙들었다.
6. 사후
[image]
8월 3일에 열린 여운형 인민장[51] 으로 해방 후 최다 인파가 모였다. 민중들이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서 서울 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MBC 뉴스에 나온 영상 및 관련 포스팅). 영상에서 울려퍼진 봉도가(안기영 작곡)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그날따라 날씨가 굉장히 좋았는데, 관이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갈 무렵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아! 우리의 몽양 선생
위대한 지도자 인민의 벗
땅 위에 떨어진 거룩한 피는
여기 인민의 가슴에 뭉쳐있나니
고이 잠드시라 우리의 몽양 선생
우리는 기어코 원수를 갚으오리다[52]
당시 영결식 현장을 전하는 뉴스는 당시 현장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시신 처리 과정은 다소 호러인데 여운형이 통일된 조국에 묻히고 싶다는 말을 남겼으니 통일되면 다시 장사를 지내야할 것이고, 사람들 또한 시신을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하고 철제 관에 넣어 묻었다'''. 그런데 모 교수님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그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30년 안에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포르말린 유효 기간을 30년 정도로 잡아서 처리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선생은 모든 인민을 버리고 어디로 가셨나이까!
선생께서 흉탄을 맞으시고 쓰러지시는 그 순간,
선생의 최후의 얼굴에는 차마 이 민족을 버리고 가시지 못하시는 영원한 미소와,
그리고 최후의 말씀으로 "조선"
다음 말씀을 더 하시지 못한 채 그만 운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의 다음 말씀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최후를 비탄 말고 우리 민족의 명예를 노래하라고.
그리고 어서 행진을 계속 하라, 용감하게 나아가라, 나는 결코 죽지 않았다!
(...) 모두 선생의 영구(靈柩 : 관) 앞에 모였습니다. 선생이시여, 필히 안심하시라.
그가 죽자 좌우를 연계한 중도 운동, 남북한의 통일 정부 구성 운동은 구심점을 잃었고 그해 12월, 좌우 합작 위원회는 해체되었다. 김구는 남한 내 단독 정부가 거의 기정 사실될 무렵에 뒤늦게 통일 운동을 본격화하였고, 여운형의 파트너였던 김규식은 전형적인 학자풍으로 내성적이고 대중적인 정치가가 못되었다. 안재홍은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추진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여운형 이후로는 좌우 및 남북 연대 운동이 이전보다 역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런 내용을 볼 때는 북한의 통일 의지 문제 또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중도 세력이 사멸하고 좌파가 크게 탄압받으면서 좌익 측은 소멸 단계에 이르러 무장 게릴라 활동으로까지 전환하였으며, 4.3 사건,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끝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아직까지도 이 상처는 아물지 못했다. 존 리드 하지 중장의 정치 고문이었던 윌리엄 랭던은 그를 일컬어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비견할 만한 인물'''이라고 했다.[53]
묘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4.19 혁명 열사들이 묻힌 국립 4.19 민주 묘지(강북구 수유동)에서 멀지 않으며, 솔밭공원역 바로 앞에 위치해있다. 몽양 선생의 생가였던 계동 고택은 보존이 되지 못하고, 도로 확장 계획으로 1980년대에 헐려버렸다.
1948년 7월 19일에 여운형 1주기 추모식이 있었는데, 여기서 경찰들이 추도식 현장에 나타나 '''집회자 90여명을 검거'''하는 등 추모를 못하게 방해 공작 등을 엄청나게 벌였다.# 이는 단독 정부 수립 때부터 그에 대해 얼마나 철저히 금기시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때 5.16 군사정변 직후 우이동 묘소 땅이 어느 군인에게 불하받게 되어 시신이 오갈 데 없는 딱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는데,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의원이 법적으로 어떻게 해볼 길이 없으니 대통령 박정희한테 직접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그 분 사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독립 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면서 좋게 해결해주었다고 한다. 그가 일제 강점기 당시 여운형과 반대 입장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이 평가에서 말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여운형 선생은 당대 최고 명사였고 동시대 인물인 박정희가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해방 정국과 군사 정변 성공 이후 박정희의 행보를 생각했을 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박정희는 만주군 중위로 복무했으나, 동시에 일제 패망 후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광복 직후 군 경력자를 모집하던 광복군에 입대하여 광복군 제3지대 중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훗날 군부의 숙군 작업으로 박정희가 체포됐을 때, 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이 박정희의 구명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박정희는 독립 운동, 특히 임시 정부 계열에 격찬을 가했다.[54] 1962년, 광복 이후 처음으로 독립 운동가에 대한 대대적 건국 훈장 심사 및 서훈에서도 임시 정부 요인들이 건국 훈장의 핵심 수훈자들이었다.
1962년 서훈 이후에도, 숨은 독립 운동가의 사연이 소개되면 '대통령 하사금'이란 명목으로 현금이나 주택이 불하되곤 했다. 예컨대 한민구 국방 장관의 조부인 한봉수 의병장의 경우, 1962년에 건국 훈장을 서훈받지는 않았으나 이후 의병 활동이 알려지며 신축 주택을 청와대로부터 불하받았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 동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는 점도 있다. 박상희는 박정희가 아버지처럼 여기던 인물로, 그의 사망이 남로당 가입에 영향을 줬을거라고 공공연히 이야기되는 인물이다. 어쨌든 이런 과거 경력에 비추어볼 때 박정희가 여운형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긴 힘들다.
게다가 박정희는 당시 친일활동 및 남로당 활동 때문에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빨갱이로 몰리며 종북몰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일에 종북까지 엎친데 덮친격으로 정통성이 희박했다. 후자는 그렇다쳐도 전자로서는 어느 계파에서도 빼박으로 욕먹을 일이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친일파라서 독립운동가 천대한다는 소리 듣지 않으려면 잘 대해줄 수 밖에 없었다.
여운형의 동생인 여운홍과의 대담에서도 "그 분이 독립 운동에 열성을 바치신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분에 부정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으니 (건국훈장) 서훈은 지금은 어렵다. 그러나 추모식 거행이나 기타 활동에 대해선 막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이승만 정권 때 금지되었던 여운형 추모제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뒤 다시 열릴 수 있었다. 단, 유신 선포 이후 사회 분위기가 극도로 경직되면서부터 추모제는 다시 금지되었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 때인 1983년부터 재개되었다. 재일 작가 정경모는 이를 놓고 신군부가 여운형을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고 비난했다.
이러면서도 또 한편으론 부정적 도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신군부 시절인 1982년 '한민성'이라는 저자가 '추적 여운형'이라는 단행본을 발간했는데, 이 책은 정보 당국에 고용된 익명의 필자로 저자가 실존 인물인지 자체가 불명이다. 이 책의 구성을 보면 여운형에게 어떤 정치적 이미지를 고정하려는 목적(예를 들어, 그를 '친일파 - 기회주의자 - 공산주의자로 강하게 부각, 왜곡)으로 다른 잡다한 언설로 시종일관하고 있어, 사실에 관한 논의를 마녀 사냥 식 사상 논쟁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아주 강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여운형에 대해 '친일파 - 공산주의자 - 기회주의자'로 몰고 가려는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저 책을 출처로 삼고 있다고 보면 된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어느 정도 재평가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운형이 본격적으로 복권된 때는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전부터 사회주의 계열 인사라도 독립 운동에 기여했으면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참여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가보훈처에서 학계의 의견을 참고해서 사회주의 / 좌익 계열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훈포장을 진행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른게 여운형이었다.[55] 다만 이때도 보수 우파 계열 특히 조중동에서 국가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식의 비판을 가했다.[56] 이런 과정을 거쳐서 여운형은 2005년에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대통령장은 2급이어서 공적에 비해 너무 낮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건국 훈장에 등급이 있다는 걸 몰랐고 그냥 보훈처에서 잘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맡겼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며 1급으로 올리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한다. 그렇게 해서 노무현 대통령 '''퇴임 직전'''에 들어서야 간신히 건국 훈장 1급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어 정치적으로 완전히 복권되었다.
현재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가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기념 사업회 홈페이지
그리고 우연의 일치지만 여운형이 피습 사망한 7월 19일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사망한 날짜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높으신 분들 중에는 같은 날 국립 서울 현충원 묘지에서 이승만을, 우이동 묘소에서 여운형을 추모하게 되는 일도 생긴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인가.
양평에서는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여 현재 몽양 기념관을 통해 입장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