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역사
1.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2년 원년부터 2001년 전반기까지의 역사는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2. KIA 타이거즈의 탄생
2.1. 감당하기 힘든 연봉
KIA 타이거즈의 탄생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1980년대의 야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프로야구 출범 초기에는 각 구단들이 연고지의 지역연고 선수들을 '''무제한 지명'''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연고 1차지명은 점점 축소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는 신인 육성의 개념이 딱히 없었고 즉시전력감 선수를 뽑아 시즌에 바로 써먹는 풍조가 확실했다. 이 풍조 덕분에 해태 타이거즈는 리그 초창기부터 강호로 발돋움하고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왕조 구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당대 학생야구 팜 중 최고의 유망주 양산지 중 한 곳이던 호남지역 팜의 최상위권 유망주들을 싹쓸이했던 것과[1] 실력과 개성을 두루 갖춘 선수들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한 김응용 감독의 지도력, 전국 각지에서 열성적 응원을 보내주던 팬들의 지지가 하나로 융합된 것이 영향을 미쳤다.
다만 당시는 이름만 프로야구일 뿐, 경기력, 리그 운영, 신인 육성, 피지컬 트레이닝, 스카우트 등 전반적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후진적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가 성적으로 꼭 직결되지는 않았다.[2] 거기에 FA 제도도 없고 각 구단들의 담합에 따른 연봉 인상 제한[3] 등으로 각 구단별 예산의 격차가 크지도 않았다.
하지만 당시 재벌 중에서도 하위권이었던 해태그룹은 자금력 측면에서 다른 재벌 구단에 비해서 현저하게 뒤진게 사실이었고[4]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해태는 선수단 연봉을 지나치게 짜게 준다는 불만이 노골적으로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이에 관해서는 해태 타이거즈의 부실 지원 문제를 참고. 그리고 1990년대 접어들면서 프로야구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자금력이 취약했던 해태와 여타 구단의 격차는 날이 갈 수록 벌어지기 시작했다.[5]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야구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진원지는 당시 야구단을 창단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현대그룹이었다. KBO는 프로야구 출범을 준비하면서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었던 정주영 회장한테 인천·경기·강원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제안하였지만 서울올림픽에 집중하고 싶다면서 거절당했다.[6] 그리고 인천/경기 지역 연고에는 인천에 공장을 가지고 있던 삼미그룹이 자진해서 나서면서 결국 삼미 슈퍼스타즈가 창단되었다. 하지만 프로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하자 1990년대 들어서 현대도 프로야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던 다른 재벌들의 견제로 진입이 쉽지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현대라는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신생팀 제 9구단 창단도 힘들고, 다른 팀을 인수하려고 해도 신통치 않자 현대그룹은 현대 피닉스라는 실업야구단을 창단해서는 기존 프로야구단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고 KBO와는 별도의 리그 창설을 구상하는 등[7] 당시 아마야구 유망주들을 말 그대로 싹쓸이 해버렸다. 프로에서 족히 4~5년은 뛰어 지명도를 얻어야만 가능했던 꿈의 액수라고 알려진 1억대의 연봉이 프로 데뷔를 하지 않은 젊은 선수들에게 뿌려지자, 타 구단들은 유망주들을 모셔오고자 현대의 에스컬레이터식 금액을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 KBO 구단들과 현대그룹은 정면충돌하였고, 아마야구계는 선수확보를 둘러싼 양자의 이전투구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결국 이 갈등은 현대그룹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름을 바꾸는 방식으로 프로야구에 진입하면서 봉합되었다. 하지만 현대 유니콘스 창단 이후에도 기존 현대 피닉스 소속 선수들의 보유권을 인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기존 구단들과 현대그룹이 또 충돌했다. 참고로 1982년 프로야구 출범때는 기존 실업야구팀들의 선수보유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어찌하던 이 문제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현대의 막강한 위세에 밀려서 어정쩡한 타협이 이루어졌고 롯데 자이언츠는 애초에 자신들의 연고 선수였던 문동환을 위약금을 전액 탕감하는 대신 전준호를 현대 유니콘스에 내주는 형식을 통해서 데려와야만 했다.
그리고 재계 서열 1위의 현대가 야구판에 등장하면서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이라는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은 야구판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다. 두팀은 신인 계약금과 선수단 연봉으로 고액을 책정했고, 그 외에 승리 수당과 각종 보너스도 건네줬다. 거기에 2군 전용 훈련장, 외국인 코치, 트레이닝 시설 등 시설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선수들을 들여올 때도 현찰 박치기를 하는 등 야구단에 거액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다른 구단들도 최소한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계약금과 연봉을 훨씬 높여줄 수 밖에 없었고, 야구단 운영비가 치솟기 시작했다. 이제 KBO 리그에도 본격적인 '''머니게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자금력이 취약했던 호남 연고의 두 구단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는 야구단 운영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다.
2.2. 닥쳐온 경제 한파
돈싸움은 시작 되었고 마침 1997년 외환 위기가 슬슬 터지려고 해서, 구단의 모기업인 해태그룹의 경제가치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애초에 제과 사업이라는 업종 자체가 큰 돈을 벌기는 어려운 사업 구조였고 해태그룹도 문어발식 사업 확장의 여파로[8] 위기가 감지되던 시기였다.
해태와 상당한 친분이 있던 대우그룹이 인수를 시도했지만, IMF로 사이좋게 재정위기가 오자 GG치고 포기하였다. 거기에 대우그룹 오너였던 김우중 회장은 대한축구협회 회장까지 지냈을 정도로 열혈 축빠였기 때문에 야구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대우가 한참 잘 나가던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삼성그룹과 럭키금성그룹 등 다른 재벌 기업이 프로야구단 운영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자 대우그룹 임원이 "회장님, 이참에 우리도 야구단 하나 만드시죠"라고 제안했지만 김우중 회장은 야구단 창단을 제안한 그 임원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을 정도.
결과론이지만 만약 대우가 야구단을 창단했다고 해도 얼마 안가 모기업이 망해 현대, 쌍방울의 길을 밟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대우도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 사업장을 두거나[9] 딱히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10] 해태의 뒤를 이을 호남 연고팀을 창단하려 해도 KBO나 지역 팬들이 그렇게 달갑지 않게 볼 수도 있다. 프로야구가 왜 창단되었는지, 또 정치인들이 이걸 어떻게 써먹었는지를 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다.
2.3. 팔고 팔고 또 판다
팀의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해태가 선택한 방식은 선수의 재판매였다. 팀의 핵심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선동열과 이종범을 일본에 팔아[11] 스카우트 머니로 어찌어찌 일년은 버텼지만 모기업인 해태그룹이 1998년에 부도가 나버려서 있는 선수, 없는 선수 모조리 팔아치우는 상황에 직면했다.
반대로 삼성 라이온즈와 현대 유니콘스가 이 시기에 경쟁적으로 선수를 대량으로 세트 덤핑 구입을 하는 통에[12] '돈성', '돈대'라는 이름을 굳히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FA가 생긴 이유도 돈으로 선수를 쉽게 사기 위한 삼성의 계략이였다. 당시 지역연고제가 아직까지 남아있었고, 트레이드의 경우 선수의 의견과 상관없이 기업이나 감독이 하는 거기 때문에 구단이나 감독이 "나 얼마 이상 아님 이 선수 안 줌" 이래버리면 그 선수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림의 떡이 된다. 그러나 FA가 시작되면서 선수가 가고싶은 구단에 갈 방법이 생겼고, 자금을 바탕으로 "그 구단보다 이정도 더줄 테니까 그냥 와라" 라고 하면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와서는 상황이 반대로 돌아가고 있지만.
2.4. 제발 저희 좀 데려가주세요
'''이 시기에 1999년의 해태 타이거즈는 210홈런을 치면서 팀 홈런 신기록을 세우는데, 팀 성적은 종합 7위로 꼴아박았다.'''
선수를 팔아 치우기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리그 운영을 하는 것도 한계에 직면할 즈음, 프로야구가 4팀 양대리그로 운영된다는 사실이 대두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한 팀만 빠져도 전반적인 밸런스가 엉망이 되는 상황에 빠진다는 것. 프로야구 관계자들은 해태 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리그 판이 박살난 상태였고, MLB붐으로 인한 프로야구의 상징성이 약화되어 인수처는 나타나지 않았다.
포스코가 전라남도 광양시에 제철소를 가지고 있어 연고지 조건을 아슬아슬하게 갖추었기에 인수시도가 있었으나 당시 포스코의 재정이 개판이었던 데다 포스코의 대주주들이 손해보는 행동을 하려고 한다며 업무상 배임으로 고발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기본적으로 포스코의 대부인 박태준 회장이 야구보다는 축구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시에도 대구·경북지역 연고구단으로 포스코가 거론되었으나 거부했던 역사가 있다.[13] 그리고 IMF 이후 외국 펀드들이 주식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서 별다른 수익도 없고 생산재 기업으로 뚜렷한 홍보효과도 기대하기 힘든 프로스포츠 투자에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14]
광주 시민들은 광주를 발판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인수하기를 원했으나 거부하였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호남 기업이란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걸 내심 꺼려했다. 또한 클래식 애호가였던 그룹 2대 박성용 회장의 영향으로 스포츠보다는 음악 등 문화 예술 분야에 후원을 집중하였다.[15] 예전 KBO 창설 때도 삼양사, 교보생명과 함께 호남권 구단 1순위 기업이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거부했던 전력이 있다.[16] 그리고 만약 인수가 되었다면 2010년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쇠락과 함께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을 것이다.
2.5. 탄생, KIA 타이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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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의 새 주인을 구하느라 하루하루 속을 태우는 와중에 구원의 손길이 갑자기 나타났다. 2001년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오늘 내일 할 즈음,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둘째 아들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카드,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 일련의 계열사를 분리시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을 설립하는 속칭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는 금융법상 사소한 절차가 무시되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는데 정부가 OK 사인을 내주어 왕자의 난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은 돌연 '''해태 타이거즈의 인수를 선언'''했다. 참고로 당시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기아차 측에서 인수를 거절했으나 이후 마음을 바꿔 인수하기로 결정 내린 사항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그룹 설립 과정에서 사소한 절차가 무시된 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정부에서 해태 타이거즈 인수를 요청했다는 카더라가 있지만,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인천을 떠나 수원에서 유랑 생활을 하던 자신의 동생 구단인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접근했다고 한다. 허나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는 그야말로 오늘 내일 하던 상황이라 인수 대금으로 현대 유니콘스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했을 때보다 훨씬 높은 가격이었던 '''900억'''을 불렀는데, 이것에 정나미가 떨어진 정몽구 회장은 현대 유니콘스를 바로 포기하고 비교적 싼 가격을 부른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현대-기아 자동차 그룹이 지불한 인수대금은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에 180억 원, KBO 가입 기금 30억으로 총 210억 원이었다. 광주광역시에 기아자동차 공장(구 아시아자동차 본사)[17] 이 있어서 지역 연고 요건을 갖추었다. 이에 따라 1사 1팀 정책 때문에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농구단은 현대모비스로 이관되어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로 탈바꿈했고 현대자동차는 전북 현대 모터스 축구단만 전담하게 되었으며, 현대자동차 배구단[18] 은 현대캐피탈로 이동, 현재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로 탈바꿈했다.
일부팬들의 경우 KIA 타이거즈의 출범을 놓고 '''어째서 KIA가 해태의 V9를 가져가려고 하는거임? KIA가 우승하면 V1 아님?''' 이라는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KIA 타이거즈의 출범 경로는 SK 와이번스나 넥센 히어로즈가 각각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들과 계약해서 '''신규 창단한 것이 아닌 과거 LG그룹이 MBC 청룡을 인수해서 창단한 전례를 따르고 있어, 당연히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계승한다.''' 게다가 삼청태와 베어스나 이글스[19] 와는 달리 타이거즈라는 '''닉네임을 유지하는 것은 역대 최초'''[20] 즉, KIA 타이거즈는 해체 후 신규창단이 아닌 '''인수 형식'''이기 때문에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를 '''그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 한마디로 KIA가 V1이라면 MBC나 삼청태를 모조리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21] 삼성의 경우 제일기획으로 팀의 의사결정이 이관되었지만 제일기획 역시 삼성그룹의 계열사이며, 아직 삼성전자가 삼성 라이온즈의 주주이기 때문에 다르다.
그런데 창단 30주년이 되는 2011년에 구단에서는 창단 10주년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했다. KIA로 이름이 바뀐 것만을 기념하면 10주년이 맞지만, 엄연히 해태를 계승한 구단이기에 의아하게 생각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MBC를 인수한 LG가 홈페이지 역사관에서도 전신 시절 언급을 하지만 창단 30주년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고로 2021년 기준 KIA 타이거즈는 20년이지만, 타이거즈는 40년이 맞는 이야기다.
3. 김성한 체제
2001년 8월 1일 공식적으로 KIA 타이거즈로 출범하였다. 출범과 동시에 농구팀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서 경험을 쌓은 프런트를 대거 이동시키며 해태 타이거즈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훗날 타이거즈에게 최하위를 선사하고 해임된''' 정재공 전 단장이 처음 부임한 것도 이 시기.
그 다음 날 인천 도원구장에서 KIA 타이거즈의 이름으로는 '''첫 경기'''를 가졌다. 상대는 SK 와이번스. 그리고 이 경기는 이종범이 타이거즈로 돌아오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채종범의 맹활약으로 2:6으로 패배했다. 덧붙여 지금 저니맨 외인구단의 구단주로 있는 최익성이 그날 홈런을 때리며 최익성은 해태를 제외한 KIA 구단 역사상 1호 홈런 타자가 되었다. 그리고 8월 7일에 KIA의 광주에서의 첫 경기 겸 이종범의 광주 복귀경기가 펼쳐졌고 이 경기에서 '''광주 구장이 2001시즌 첫 매진'''[23] 되었다. 2001년 시즌은 유례 없는 4강전쟁의 해였다. 삼성, 현대, 두산의 3강은 일찌감치 굳혀졌고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5개 구단이 싸움을 벌이던 해였다. 타이거즈가 해태 유니폼을 입을 때는 6월까지 두산과 엎치락 거릴정도로 선전했으나 7월이후 급격히 힘을 잃었다. 장성호와 김종국. 그리고 해태의 마지막 4번타자 산토스에다 이종범이 돌아온 타선은 강했으나, 선수층이 얇았던 투수진이 과부하에 걸림으로써 10점을 내고도 11점을 내주며 지는 경기가 많아졌다. 결국 한화와의 마지막 2연전 중 첫 게임에서 패배, 그 다음 경기에서 이겼지만 0.5게임 차이로 한화에게 포스트시즌 티켓을 넘겨주며 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쯤에 삼성에서 버려진 선수들이 대거 KIA소속이었다. 95년 신인왕 이동수[24] , 97년 20-20을 기록한 최익성과 97년 .326에 이종범과 같은 .581의 장타율의 기록함과 99년 20-20을 기록한 신동주,[25] 근데 삼성은 2001년 당시 자원이 강했다. 말이 필요없는 이승엽과 99년 .372를 기록했던 마해영이 3-4번을 받치고 있었고, 20-20을 기록한 마르티네스가 5번타자였다.
2002년부터 일본에서 돌아와 3할 20-20을 바라봤던 이종범, 한참 전성기에 돌입하며 타격왕에 오른 장성호,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그 시즌 도루왕을 했던 김종국 등이 팀의 주축이 되며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에 랭크되며 잘 나갔다. 투수진에서는 7억 신인 김진우와 용병 듀오 다니엘 리오스, 마크 키퍼, 암흑기 에이스였던 최상덕, 삼성에서 돌아와 타이거즈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 이강철이 있었다. 4월부터 5년만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리기며 계속 승승장구했으나 9월 들어 폭풍 연패를 하며 결국 '''삼성 라이온즈'''에 1위를 내주고 페넌트레이스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26] 무엇보다 투수진의 방어율이 전년 5.01에서 3.93으로 급감하였는데 이것은 '''무려 33승+13세이브를 올린 키퍼-리오스 원투펀치의 공이 컸다.''' 문제는 용병타자였는데.. 워렌 뉴선과 루디 펨버튼이 지명타자 또는 좌익수로 리그평균정도도 못하고 워낙에 민폐를 끼쳤다. 이전년의 산토스, 아니 이해의 LG의 매니 마르티네스가 기아에서 뛰면서 김창희를 대신했어도 정규시즌 1위는 KIA의 몫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김성근 감독이 지휘하던 LG 트윈스에 2승 3패로 패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김성한 감독은 고질적인 마무리 문제 때문에[27] 선발 요원이었던 김진우를 마무리로 돌렸는데, 이는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말았던 것. 11월 1일에 열렸던 마지막 5차전이 압권인데, 장성호의 투런으로 앞서가던 KIA는 김진우가 구원으로 올라와서 폭풍처럼 두들겨맞으며 패배한다. 김진우는 마운드에서 불을 질렀고,[28] 박용택에게 홈런 맞은 후에 열받은 KIA팬 아재들은 관중석에 진짜로 '''불을 질렀다.'''
2003년 시즌을 앞두고는 정성훈과 현금 10억을 현대 유니콘스로 보내면서 광주 출신의 박재홍을 영입하였고, 이 트레이드가 성사된 '''다음날''' 은퇴 파동을 일으킨 손혁과 김창희를 두산 베어스에 내주고 진필중을 영입하는 등 스토브리그의 큰 손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해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어째 시즌 초반에는 엇박자를 내며 중위권에 랭크되었다. 재계약한 마크 키퍼의 부진이 두드러졌고, 박재홍 역시 시즌 초반에 당시 인조잔디였던 대구에서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며 썩 페이스가 좋지 못했던 것. 허나 반전이 일어났다. 마크 키퍼를 두산으로 넘기고 대체 용병으로 들어온 마이클 키트 존슨이 후반기에만 8승을 거두며 팀의 상승세를 주도했던 것. 그 덕분에 당시 승승장구를 달리던 현대 유니콘스를 잠시 제치고 1위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0.5게임 차로''' 선두를 뺏겼다. 흔히 KIA가 이 시즌 막판에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해서 선두를 빼앗겼다고 아는 팬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시즌 자체가 순위는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를 택한 시즌으로 기아는 손해를 보았다.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SK전에서 승리하면 승률에서 현대를 앞설 수 있었지만 다승제였기 때문에 승리에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그해 전경기 출장이었던 이종범도 결장했다.[29] 현대에게 대역전패를 당했던 경기는 5월 27일 경기였다.[30] 오히려 막판에는 맹추격으로 올라갔으나 결국 반 게임차의 2위가 되어 버린 것.
그렇게 직행한 플레이오프에선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2승 무패로 관광보내 버리고 올라온, 신임 조범현 감독이 지휘하던 돌풍의 팀 SK 와이번스에 '''0승 3패'''로 쳐발리며 또다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였다. 이렇게 캐발린데에는 김성한 감독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한 몫을 했다. 김봉근 투수코치를 의견 충돌로 잘라버리자, 조범현 감독은 '''짤린 김봉근 투수코치를 낼름 영입'''했던 것. 그덕에 KIA 투수들의 약점이 속속히 조범현 감독에게 들어갔고 그 덕에 조범현 감독은 KIA를 농락하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31]
2004년에는 FA로 풀린 마해영을 영입하며 또다시 스토브리그에서 총알을 소비하여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안겨줬다. 허나 마해영은 삽질을 거듭했고, 김성한 감독이 경질되는 등[32] 어수선한 시즌을 보내다 페넌트레이스 4위로 마감하고 가까스로 가을야구에 진출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 2전 전패로 탈락했다. KBO 리그 최대의 미스터리'''였던''' 전설의 빵 사건이 바로 그 해의 플레이오프에서 나온 것.
'''그러나 극악의 2차 암흑기가 도래할 줄 누가 알았으랴...'''
4. 유남호, 서정환 체제
2005년 시즌 들어서는 팀 케미스트리를 저해하던 박재홍을 SK 와이번스로 보냈고, 2003년 시즌 후반기에 활약했던 마이클 키트 존슨을 다시 데려오는 등 의욕적으로 시즌을 맞이했다. 그리고 소소경과 이원식을 내주고 홍현우를 다시 데려오는 트레이드도 했는데, 이 트레이드는 훗날 KIA팬들이 LG팬들에게 '''사랑해요 LG'''라고 놀리는 신호탄이 되고 말았다. 홍현우 덤으로 껴온 선수가 바로 이용규.
하지만 시즌 초반부터 영 좋지 못하더니 결국 5월에는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FA로 영입했던 선수들은 '''죄다 실패작으로 남았고''', 그나마 LG에서 트레이드 된 이용규와 전년도 부진(AVG 0.260)에서 벗어난 이종범이 3할-20도루를 하며 분전했지만 붕괴된 투수진은 어찌 막을 도리가 없었다.[33] 결국 유남호 감독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 서정환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2005년 시즌을 꾸려갔다. 이 와중에 '''다니엘 리오스'''를 두산에 넘겨주고 전병두를 받은 후 '''세스 그레이싱어'''를 새 용병으로 데려오기도 했다.[34]
팀은 개박살난 상황에 그나마 얻은 수확은 우익수 자리를 꿰찬 이용규, 중간에서 노예질을 하던 윤석민(투수)이었다.[35]
2006년 시즌엔 서정환 감독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고, 서정환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골칫거리였던 마해영[36] LG 트윈스로 보내는 데 성공했으며[38] 10억 신인 한기주가 입단하는 등 나름대로의 기대를 품게 했다. 상대적으로 약한 공격력[39] 을 투수력[40] 으로 상쇄하며 시즌 내내 4, 5위를 왔다갔다 하다가 시즌 막판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을 모두 승리하면서 4강행 막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 이글스에 1승 2패로 패하며 탈락하였다.[41]
2007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 메이저리그에서 최희섭이 돌아왔으나[42] , 투수진의 줄부상과 공격력 약화로 인한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서정환 감독의 '''서머리그 우승'''이라는 무의미한 목표를 향한 선수 혹사 및 부상이 겹쳐, 최하위의 원인이 되었다. 대들보였던 장성호의 3할 커리어가 끊기는 등 경기 외적인 악재도 수더분하였으며, 이 당시 성난 팬들은 단장인 정재공의 퇴진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정재공 단장이 보낸 용역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기도 했다. '''급기야 훗날 LG 프런트들이 쌍둥이마당을 닫아버린 것처럼 호사방을 폐쇄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르고 말았다.''' 2004년 이후 롯데가 4연꼴 사슬을 끊자마자 2년 간격으로 LG와 꼴찌를 나눠먹기 했는데, 결국 이로 인하여 야갤과 디씨. 엠팍에서는 '''엘롯기'''라는 고유명사가 생겼다.[43]
그야말로 한국프로야구 최다 우승팀으로서는 씻기 힘든 불명예. 결국 정재공은 2007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당했고, 후임으로 김조호가 취임하게 되었다. 시즌 후 서정환 감독 역시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이 시기의 성적은 '''848'''. 가을야구를 했던(2004년, 2006년 시즌) 이듬해에 최하위를 찍은 양상이 반복되었다.
정말로 저 3년의 시즌동안 기아의 야구하면 이종범, 김종국(야구선수), 이용규, 이재주, 장성호, 김상훈, 윤석민(투수), 신용운, 한기주 이렇게 된다.
5. 조범현 체제
2008년 시즌에는 서재응이 팀에 합류하고, 조범현이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일찌감치 선수층이 무너져버린 터라 팬들도 좋은 성적보다는 리빌딩이나 잘 하길 기대하였다. 출발은 좋지 못했다. 시즌이 시작되자 최희섭이 뇌진탕 후유증으로 인한 두통으로 삽을 들었고, 장성호 역시 지난 시즌 무릎 부상의 여파로 인해 잔부상에 시달렸다. 게다가 김상훈 역시 큰 부상을 당해 차일목이 주전포수로 나서야하는 등 팀에 먹구름이 잔뜩 꼈고, 팀은 5월 초까지 쭉 꼴찌를 달렸다. 하지만 5월 중순부터 최희섭을 대신해 이재주가 4번타자를 맡기 시작하고 윤석민이 에이스로 등극, 유망주 수준이었던 이범석이 호투를 펼치며 선발진에 진입하며 점점 순항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5월 말부터는 우리 히어로즈와 LG 트윈스를 제치고 5-6위권을 형성했다. 심각하게 부족했던 공격력을 투수력으로 상쇄하는 야구를 펼치며 4위를 내다보나 했으나, 올림픽 브레이크 이후 힘이 떨어졌다. 시즌 막판에는 무리한 4강 싸움 대신 1.5군을 돌리면서 경험을 주는 형태로 운영하였고 6위로 시즌을 마쳤다. KIA로 바뀐 이후 2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하지만 손영민, 양현종이 급부상했고 전반기에 부진했던 대졸신인 나지완이 후반기에는 맹타를 휘두르며 팀에 가세했으며 고졸신인 김선빈이 그간 공백이었던 키스톤 자리[45] 를 메울 유망주로 기대받기 시작했다.
2008년에 무리하지 않고 유망주들에게 경험을 주는 식으로 시즌을 마무리한 다음, 2차 1지명으로 '''안치홍'''을 지명하고 구리본즈였던 '''김상현'''[46] 을 트레이드로 데려오면서 전력이 급상승, 1997년 이후 12년, KIA 타이거즈로는 처음으로 7차전까지 간 끝에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2010년에는 16연패라는 수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4강을 놓고 다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2011년에 윤석민이 투수 4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고, 전반기에는 전년도 1위 팀 2위팀 SK와 삼성을 제치고 리그 1위를 달성했다. 그러나, '''손영민'''[47] 을 제외한, 유동훈, 곽정철, 박경태 등등 여러 불펜들이 불을 지르면서 후반기 4위에 그치면서 3위팀 SK에 1승 3패로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고, 구단은 그 책임을 물어 조범현 감독을 경질하고 후임으로 전년도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선동열'''을 선임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대재앙이 찾아오는데...'''[48]
6. 선동열 체제
조범현 감독이 '''16연패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롯데와 4강을 두고 다투는 뒷심을 발휘'''한 반면, 선동열은 '''선수단을 아예 새로 짜는 수준의 개혁'''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암흑군주'''라는 평만 듣고 말았고, 재계약을 확정지었다가 팬덤에 밀려 3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7. 김기태 체제
588이라는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선동열과 재계약을 추진하자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선동열 감독은 자진 사퇴라는 모양새로 퇴임하고, 그 자리에 김기태 전 LG 감독을 선임하였다. 첫해에는 7위를 기록하는데 리빌딩 시즌이라고 해서 순위는 다들 이해하는 분위기.[49] 그리고 2016시즌은 구단에서 이범호 잡아준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분위기이고[50] 2017시즌은 양현종 등 거물급의 FA가 기다리기 때문에 어차피 외부 FA를 못잡는 관계로 김기태 감독을 동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신인 드래프트에서 삽질을 거듭한데다 '합리적인 선' 운운하며 스토브 리그에서 손을 놔버린 프런트에 대한 팬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근접한 상황인줄 알았는데 무려 최형우 영입. 일본행이 유력했던 양현종까지 붙잡는 데 성공하면서 지금은 갓런트로 불리는 중.[51]
2016년 시즌은 양현종-헥터 외에는 사실 상 땜빵선발로 시즌을 치뤘다. 잘 던지던 지크가 날이 더워지며 난타당했고, 전반기 잘 던지던 홍건희도 후반기부터 폭락. 젊은 선수 위주로 구성된 불펜은 여전히 불안했지만 최영필, 김광수 두 베테랑이 분전하며 승리를 지켰고 7월부터 가세한 41세의 임창용이 힘을 보탰다.
2016년 8월 31일, 4위로 9월을 맞이하게 되었다. 잔여경기가 30경기도 채 남지 않은 상황. 남은 경기에서 5할 승률만 유지해도 높은 확률로 가을야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5일, 타지인 대구에서 삼성을 잡아내며 '''5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비록 와일드카드에서는 5위 핸디캡 때문에 1승 1패를 하고도 LG에게 밀려 탈락했지만, '''히 드랍 더 볼'''로 한 경기만에 허무하게 끝나버린 작년 와일드카드와는 달리 1차전을 잡아내며 KBO리그 첫 와일드카드 2차전을 열었고[52] , 두 경기 내내 수준높은 경기를 보여주며 팬들을 설레게 했다. 엠팍, 디씨 등 주요 야구 커뮤니티의 팬들 반응은 그야말로 '''장밋빛 물결'''. 서정환 감독 시절이나 조범현 감독 시절에도 하위권 팀이 다음년도에 바로 가을야구[53] 에 진출했던 전례가 없던 것은 아니나 2군 선수들에게 골고루 기회를 제공하면서 두터운 선수층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전임 감독들 시절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올 시즌보다 내년 시즌이 더욱 기대되는 팀'''이 되었다는 점에서 김기태 감독과 코칭스텝 + 프런트에게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을 듯.
또한 2020년까지 최고의 명문구단이 되자는 TEAM 2020이라는 계획을 선언했는데 당시 팬들은 비웃었지만 실제로 현대-KIA 자동차그룹에서 엄청난 지원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재평가받기도 했다. 나유리 기자의 말에 따르면 모기업 지원이 엄청나서 현장에서 부담을 느낄 정도라고. 실제로 2015년에 1,2군 경기장에만 110억을 투자했으며, 기아 챌린저스 필드에 최첨단 재활센터도 건설했으며, 야간 경기가 가능한 신축 2군 경기장을 신설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그리고 16시즌 종료 이후 FA에서 팬들의 우려와는 달리 프런트가 최형우를 영입하고 양현종과 나지완을 잔류시키는데 성공하면서 2015년까지 조용했던건 이 FA를 위함이었다는 프런트의 큰 그림이라고 팬들의 찬양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 FA로 인해 선동렬 시절 한화보다도 답이 없었던 팀이 드디어 팀 구실을 하게 되었다는 평이 많으며, 불펜진이 그렇게 좋진 않아서 우승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3~4위권에는 들거라는 예상이 많은 편이다. 그렇게 시작한 2017 시즌, 선발투수들의 연이은 호투와 조용하다가도 결정적일 때 점수를 내는 응집력있는 타선, 탄탄한 수비가 더해지며 전반기를 1위로 마감했다. 이후 고질적 불펜불안에 선발진 붕괴로 위기를 맞지만 1위 자리는 놓치지 않았고 10월 3일 마지막 정규시즌 경기를 승리로 페넌트레이스 1위를 확정짓고 KS로 직행했다. '''그리고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단 근본적인 습자지 수준 선수층은 나아졌지만 해결된 수준은 아니다. 2군 전력, 특히 타격이 약해도 너무 약하다. 기아에서 키운 선수들중에서 그나마 1군 가능성이 보이는건 류승현, 김석환, 최승주 정도고, 외야에서는 2군인데도 OPS 8할이 거의 전무하다. 뭐 2군 전력의 전부나 다름 없던 이정훈, 이진영, 황대인이 군대를 간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심각하다. 구단과 감독이 트레이드에 목매는 걸 알만도 한 상황. 그나마 투수는 조금 더 상황이 낫지만, 여기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 150km/h를 던지는 선수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150km/h를 뿌리던 원석들이 가득했던 2000년대 중후반 기아 투수 팜을 생각하면 참 한숨이 나오는 상황. 다만 유승철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황인준, 문경찬이라는 그래도 쓸모있는 투수가 나타났으며 임기준이 각성하고 김윤동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돌아온 박준표도 성장한 모습이 보여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김기태 감독 체제에 접어들면서 KIA 선수단에도 변화가 일어났는데, 최형우와 이명기, 김민식을 위시로 하는 좌타자를 많이 영입하고, 한국 유소년 야구풍토 역시 우투좌타 야수를 많이 양산하는 체제로 오게 되면서 수많은 좌타자들이 많이 양산되면서 과거 왼손 수난사에 시달렸던 해태 타이거즈 시절과 달리, 오히려 '''우타자 품귀현상'''이 심해지는 특징이 도드라지게 되었다. 이범호와 김주찬 등 노장 우타자의 자리를 채울 유망주들이 황대인을 제외하면 전부 좌타자이고, 외야의 경우에도 2019년 현재 나지완과 유재신, LG에서 영입한 문선재를 제외하면 전부 좌타자라는 것이 특징인데, 특히 2017~2018 시즌에는 모든 주전 외야수들이 전부 좌타자로 도배되었을 정도였다.
7.1. 박흥식 대행 체제
그래도 3년째 가을야구를 했던 것은 다 잊어버린듯, 초반부터 참담한 성적을 냈다. 에이스 양현종이 대량 실점 및 연패에 빠지는 등 기존의 강점은 전부 날아가버리고 단점만 부각되면서 김기태 감독은 자진 사퇴했고 이대진 코치도 사임했다. 2군 감독인 박흥식을 불러서 감독대행직을 맡기는 한편 기존 1군 코치 상당수를 2/3군 담당으로 교체.
한 주는 위닝, 한 주는 스윕으로 심한 기복을 보이며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점은 아쉬우나 투수교체 타이밍이나 야수 기용 등에서의 실수를 깔끔히 인정하는 부분은 그래도 김기태보다는 낫다는 평을 받는 중이다.
8. 맷 윌리엄스 체제
2019 시즌을 7위로 마무리한 후 이종범이나 조계현 등 타이거즈 레전드 출신의 스타들을 감독으로 영입한다는 소문만 무성했으나 2019년 10월 15일 구단 역사상 최초로 전직 MLB 감독이었던 맷 윌리엄스를 영입했다고 밝혔다. 계약기간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이며 KBO 첫 외국인 감독으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롯데 자이언츠를 포스트시즌으로 이끈 제리 로이스터 감독과 유사한 계약으로 주목받고 있다. 박흥식 감독 대행은 다시 퓨처스 2군 감독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수석 코치로 전 삼성 라이온즈 외국인 코디인 마크 위드마이어를 선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삼성 팬들은 이 사람이 데려온 외국인들을 이야기하면서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팀타율 9위인 타자들을 개선하기 위해 1군 타격코치로 최희섭, 송지만을 영입했다. 이전까지는 전부 우타코치라서 좌타선수들을 잘 케어하지 못했다고 판단, 팀 레전드이자 메이저리그 경험도 있는 좌타자 출신 최희섭을 영입하고, 유망주를 잘 키우기로 유명한 키움 히어로즈에서 우타자 출신 송지만을 영입함으로서 공인구에 대한 적응과 좌우타자 전담 코치로서 개선을 보여줄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군 배터리 코치로 진갑용을 영입하기도 했다.
그나마 송지만은 전라북도 전주 출신으로서 타이거즈 연고지와 어느 정도 접점이 있지만 진갑용은 KIA 프랜차이즈나 호남과 접점이 전혀 없다. 무엇보다 진갑용은 은퇴 후, 삼성 프런트가 일본 코치 연수까지 보내주고 그 이후로도 삼성 코치로 활약하며 차기 삼성 감독후보로 유력하게 평가받았지만 허삼영이 감독으로 선임되고 재계약 불가 판정을 받으며 모두의 예상을 깨고 KIA로 오게 되었다.
체질 개선을 위해 마무리캠프 훈련을 3일 훈련 1일 휴식 사이클을 4일훈련 1일 휴식으로 바꾸었다. 일단 팀 베테랑 야수조인 김주찬, 최형우, 나지완은 훈련에서 빠졌고 프리미어 12 차출대상인 양현종과 문경찬도 훈련에서 빠졌다.
일단 감독과 훈련을 열심히 하는 선수들 간에는 큰 문제는 없어보이나 현재 프런트 안에서의 알력다툼이 언론플레이를 통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녀 별개로 모양새가 좋지 않다. 안치홍이 FA로 이적을 하게 된 이후 10일 정도 지난 뒤 단장이 잘못했니 구단 안에서 누가 잘못했니 이런 내용이 쓸데없이 과하게 기사로 많이 노출되어 팬들은 그냥 서로 싸우고 있다고 알려진 조계현 단장과 프런트 안에서 문제가 큰 2인방을 모두 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심해지는 상황이다. 가뜩이나 안치홍 놓쳐서 심란한 팬들 마음에 헬파이어를 피우고 있는 상황.
무려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코치가 5명이나 된다.
[1] 해태의 역대 신인 1차지명 선수 중 이 시기에 뽑힌 주요 선수들로 문희수('84), '''선동열, 이순철'''('85), 김정수, 이건열, '''장채근'''('86), 박철우, 백인호('87), '''조계현'''('88), '''이강철'''('89), 정회열, ('90), '''이종범'''('93) 등이다. 이 명단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이 중에 한국시리즈 MVP만 무려 6명(김정수, 문희수, 박철우, 장채근, 이종범, 이강철)이다.[2] 이 때문에 전용 훈련장 경산야구장 건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의 제휴, 미국 전지훈련 등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던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을 하지 못하고 오랜기간 콩라인에 머물러 있던 것이다.[3] 1990년대 초반까지는 KBO 차원에서 매년 연봉인상률을 25%로 제한하였다.[4] 1982년 초에 팀을 창단하려고 할 때도 아예 정부를 향해 금융지원을 해달라고 읍소한 전례가 있다. 당시 정부가 이 읍소를 받아들인 것은 해태가 호남 연고팀을 맡아줄 유일한 해답이었고 호남 연고팀의 주인을 찾지 못하면 리그 출범 자체가 삐걱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5] 1996 고졸우선지명선수 서재응, 1997 고졸우선지명선수 김병현, 1998 1차지명선수 최희섭이 이 시기에 해태 입단을 거부하고 대학을 거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언했다. 또한 1996 시즌 개막 직전 1992 1차지명선수이던 박재홍을 갓 출범한 재벌구단 현대 유니콘스에 빼앗겼다.[6] 일단 정주영 회장 본인이 야구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씨름과 농구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으로 유명하며 현대 일가가 야구보다는 축구 쪽에 관심이 많았다.[7] 당시 아마야구의 선수층을 감안하면 현실성이 없었지만.[8] 해태그룹 문서에도 나오지만 본업이던 제과와 식음료 사업 외에도 별의별 업종에 손을 댄 흔적이 있다.[9] 전북 군산시에 대우자동차 공장이 있기는 했지만 이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1996년이었다.[10] 일단 오너인 김우중 회장부터 호남 출신이 아니었고 대우의 주력 사업장도 호남과 거리가 멀었다. 당시 운영했던 프로축구팀의 연고는 부산광역시였고 자동차 공장은 인천광역시가 본진이었으며 조선소는 경상남도 거제시에 있었다. 그나마 1980년대 중반부터 광주 하남산업단지에 있던 대우전자 광주공장이 유일한 호남지역 내 대우의 흔적이다.[11] 김응용 감독의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의 명언(?)이 여기서 나왔다.[12] 유독 해태와 쌍방울에서 팔아넘긴 선수들이 현대와 삼성으로 많이 갔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기태와 박경완.[13] 이때 포항제철 야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실업무대에 남았다.[14] 실제로 60%에 달하는 외국펀드 주주의 제동으로 포항 스틸러스에 점점 지원금이 줄어들고 행정도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도 더블을 달성한 황선홍이 놀라울 따름. 게다가 전남 드래곤즈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살림은 더욱 빠듯할 수 밖에 없다. 결국 현재까지도 포항은 중위권을 오가는 팀이 되었고 전남은 방치에 가까운 운영 끝에 2부리그로 강등당했다.[15] 한국 클래식계에 큰 의미를 갖는 금호아트홀이 2000년에 개관한다. 타이거즈가 최악의 위기에 몰려있던 시기다.[16] 2000년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을 창단하지만 투자는 하지 않았다. 결국 금호생명 여자농구단은 한국산업은행 산하 KDB생명으로 인수되어서 구리 KDB생명 위너스가 되었다가 산업은행이 운영권을 포기하면서 OK저축은행의 위탁 운영을 거쳐 부산 BNK 썸이 되었다. 2003년 서울 연고의 K리그 팀 창단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17] 아시아자동차는 1965년에 광주에서 설립되었으며, 1976년에 기아산업에서 인수한 이후에도 줄곧 본사를 광주광역시로 적어 왔다. 오히려 모기업이 된 기아자동차 본사를 '''서울사무소 취급'''할 정도였다.[18] 옛 현대차서비스 배구단.[19] 이 둘은 같은 혈족들끼리의 인수/인계인지라 새로운 구단을 인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20] 실제로 LG 트윈스의 1700승 기념 행사 역시 MBC 청룡의 역사를 이었기에 가능했던 것.[21] 단,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알면서도 일부러 지역비하를 위해 이런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런 악플러들은 어차피 자신의 댓글에 달리는 글들을 보며 "내 말 한마디에 이렇게 다들 낚이네"라며 우월감을 느끼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음부터 진실 따윈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 물론 진짜로 모르고 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KIA로서는 첫 우승인 2009년 부터 이런 주장이 있어왔기 때문에 10년도 더 지난 현재로선 알면서도 일부러 하는 경우가 더 많다.[22] 2001년 시즌 중에 팀 운영 주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전신 해태 타이거즈가 사용하던 캐치프레이즈를 썼고 2003년까지 옛 캐치프레이즈를 활용했다.[23] 참고로 그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만큼 광주 야구팬들의 기아에 대한 기대감이 확실히 드러났던 경기였다.[24] 무려 이승엽, 마해영을 제치고 얻은 기록이며, 이때 저 둘도 신인으로써는 범상치 않은 기록을 남겼다.[25] 전성기가 각각 다르지만, 전성기만 따지면 이 셋으로 클린업을 꾸려도 어느 팀에 꿀리지 않을 정도, 게다가 저 셋이 당시 만 나이로 20대후반이어서 20년이 지난 현재로 보면 한창 전성기를 누려야 할 시기다. 2019년도로 따지면 안치홍, 김선빈의 연배였다. 하지만 2001년에는 동기부여의 결여, 그리고 알 수는 없지만 해태 특유의 군기문화, 이게 아니라면 당시 부상선수들의 회복시스템이 낙후된 점 등이 작용하여 그들은 다시는 삼성시절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26] 이 때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KIA를 잡으려고 3선발 체제에 임창용을 그야말로 애니콜 체제로 투입했다.[27] 이때 KIA 불펜진에서 그나마 믿을만한 선수는 백전노장 이강철 뿐이었다.[28] 결국 그해 플레이오프에서의 부진 때문에 김진우는 고졸 신인으로 선발로테이션을 돌며 10승과 탈삼진 1위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인왕을 대졸 신인이었던 조용준에게 내주고 말았다.[29] KIA가 현대에게 선두를 아깝게 빼앗긴 것은 맞으나, 실제로 1위 결정전은 9월달에 있었던 광주 현대전에서 결정됐다. 초반부터 5-0으로 끌려다니며 현대의 투수진에 압도당하면서 싱겁게 끝났던 게임이었다. 사실, 2003년 당시 KIA는 전반기에 5위에 머물고 있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연승을 달리며 현대를 잠시 제친 것이었고, 그 뒤 연승의 부작용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1위를 내준 제일 큰 원인이다.[30] 이 경기 초반 현대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선발로 올라온 정민태가 난타당하며 KIA에게 1회 6점 2회 4점을 헌납하며 10-1로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현대는 김동수의 연타석 홈런과 이숭용의 홈런으로 추격했고, 9회말에 진필중이 3점차를 지키려 올라왔지만 2점을 내준 뒤 심정수에게 15호 끝내기 장외 쓰리런을 맞고 그만… 참고[31] 오늘날 유남호, 서정환, 선동열을 겪은 시점에서는 어이 없겠지만 김응용에 취해 있던 당시 KIA 팬들은 아무리 페넌트레이스 승률이 좋았어도 포스트시즌에서 광탈하는 자체를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32] 성적은 크게 나쁘지 않았으나 당시 단장이었던 정재공과 선수단 기용을 놓고 트러블이 잦았다. 프런트의 수장인 정재공이 선수단을 장악하고 흔들며 현장의 권한인 선수단 기용에까지 손을 뻗치며 김성한 감독과 마찰을 빚었기 때문. 그러나 김성한 감독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캐발린 것 때문에 뜬금없이 데이터 야구를 하겠다고 방동민을 줄창 올려서 불바다를 만든 것. 당시 KIA팬들은 진필중만큼이나 방동민이 올라오면 뒷목을 잡아야했다. 거기다 김지영을 폭행한 사건때문에 대외 이미지도 안좋았던 상황이였다.[33] 시즌 초에 유남호 감독의 구상은 리오스-김진우-존슨-강철민-최상덕 순의 선발진이었으나, 김진우가 스프링캠프에서 지나치게 체중감량에만 신경을 쓴탓에 훈련량 부족으로 1군에 오르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자 유남호 감독은 다니엘 리오스-존슨-'''강철민'''-최상덕의 '''4선발 체제'''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을 했다가 선발진이 와르르 무너진 것. 5선발로 이동현을 투입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안타깝게 최상덕은 저 이후로 다시는 1군에서 활약하는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불펜 난조로 이강철-조규제 듀오는 노쇠화와 부상으로 일찌감치 물러나고 신용운은 한남자의 실수가 트라우마가 되어 클로져를 못하게 돼버리는 총체적 난국이 도래했다는 거다. 상황이 이리되자 유남호 감독은 신인 투수 2명을 필승조로 삼았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윤석민이었다.[34] 당시 리오스가 KIA에서의 마지막 선발 등판 후 포수 김상훈과 포옹하는 장면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레이싱어는 2시즌간 나름 활약 후 NPB에 진출하여 꽤나 오랫동안 활약했다. 그 후 리오스를 일본으로 주선을 해줬다. '''그러나...'''[35] 첫 해 부터 80이닝을 던지고 이듬해도 100이닝에 근접한 투구까지 했다. 그리고 후배 한기주와 쓴맛 단맛을 다 겪었다.[36] 이 당시 FA 계약으로 한 20홈런 정도는 쳐 줄거라는 믿음으로 계약 했으나 꼴랑 2할 7푼에 홈런 10개 꼬라지로 먹튀화가 진행 중이었고 팀의 필요한 로스터 자리 까지 차지하고 있었으니 골칫거리 그 자체였다.[37] 그런데, 김진우와 노장진은 두 번 만난게 전부이고 상대적으로 인연이 없어 인사만 했던게 끝. 그러니깐, 누군가의 루머로 김진우가 폭망했다는 개소리를 하고 다녔다. 결국, 뜬금없는 노장진도 피해를 봤으니...[38] 사실상 양 팀 전부 폐품 처리 트레이드라고 봐도 무방한 트레이드였다. 마해영과 최상덕은 2006년 시즌 후 전력 외가 되었으며, 그 때 낑겨간 유망주 서동욱은 백업으로 활동하다 2013년 최경철을 상대로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가 2016년 11년만에 다시 친정 팀으로 돌아왔다. KIA로 넘어온 장문석은 2006년 시즌 초반 마무리를 맡았으나 똥줄 세이브를 계속 보여주며 중반 이후 윤석민에게 마무리 자리를 넘겨주고 방황하던 김진우에게 노장진을 소개시켜주며 김진우가 팀을 이탈하는데 엄청난 공헌을 했다.[37] 장문석과 함께 KIA로 넘어온 한규식, 손상정 역시 별 활약 없이 조용히 팀을 떠났다.[39] 2020년과 비슷하게 극단적인 상하위타선이 분리된 공격을 하였다. 이용규-김원섭-장성호-이재주가 버틴 상위타선은 2006년 시즌의 미친 투고타저를 감안할 때 리그 최상급 상위타선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5번을 맡아주거나 이재주를 밀어내고 4번을 차지했어야 할 용병이 전부 망했고, 이종범은 커리어 멸망의 신호탄을 쏘았으며, 그나마 손지환과 이현곤은 포지션 및 타순 대비 감내할 만한 수준의 성적을 냈다.[40] 2006년 시즌 기아의 젊은 투수진이 커리어가 폭발한 결과로, 그레이싱어와 장문석을 제외하면 30살이 넘는 투수를 찾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아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대들보들은 바로 다음 해에 감독의 혹사 및 무분별한 기용이 겹쳐 윤석민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가 박살이 난다.[41] 한기주의 10억 보크 사건이 바로 이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나왔다.[42] 여담으로, 홈 복귀전이 이 경기다. 9:10으로 KIA 승리.[43] 일단, KBO 내에서 팀 성적의 따라 이 팀들의 지분표로 인해 관중들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44] 원래 이현곤은 고교-대학 시절에 유격수로 활약 했는데 프로에 와서 김종국처럼 수비를 옮겼다.[45] 당시 홍세완은 부상병동을 들락거렸고 김종국은 서서히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손지환이나 이현곤[44] 등이 키스톤 알바를 뛰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유격수 용병이었던 '''윌슨 발데스'''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역시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46] 지금은... 선수의 이름 자체 흑역사가 되어버렸다.[47] 3년 내내 조범현의 남자로 불리며 많은 이닝을 굴렸는데 3년 연속 55경기 이상 출장 70이닝을 던지는 등 과부하가 일어났다.[48] 나중에 기아팬들이 조 감독과 선 감독의 행보를 보며 조 감독을 재평가했다는 썰이 있다. 한편, 조범현 감독은 신규 창단된 10구단 KT로 갔지만 팀의 최하위는 막지 못했다.[49] 애초에 기대도 안했는데 후반기 5위 싸움에 끼어들 정도로 팀을 이끈 것은 대단한 것이다.[50] 정우람과 박석민은 워낙 거액이어서 이 부분은 팬들이 이해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FA시장에서 구단이 가만히 있었던건 아니다. 손승락을 잡아달라는 김기태 감독의 요청으로 손승락에게 60억 베팅을 하였지만 그 이상을 원하는 손승락이 거절하여 구단에서 그 이상은 무리라 판단하고 포기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건 다른 FA선수들인 윤길현과 유한준조차 안 잡았다. 물론 윤길현은 기아와 안좋은 사건이 있었으니 이해하려면 이해할 수 있으나 유한준은 아쉬운 감이 있었다.[51] 다만 2016년 밝혀지길 FA 투자 대신 선수 육성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중이라고 한다. 현장에서 부담스러워 할정도로 투자되고 있다고.[52] 2024-12-10 13:30:36 현재까지도 유일한 와일드카드 2차전 경기다.[53] 심지어 09년엔 무려 우승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