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
1. 개요
백제의 역사를 다룬 문서이다.
2. 역사
2.1. 건국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재취처인 소서노의 아들인 온조왕이라 하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의 건국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비류와 온조 형제가 함께 남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인천)과 위례(경기도 하남 추정)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서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그의 나라는 동생 온조에게 병합되었거나, 또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보면, 고구려 왕비였던 소서노가 남하하여 건국했다고도 한다. 《주서》를 비롯한 중국 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고구려의 주몽이 아닌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2]貴須王者百濟始興第十六世王也
귀수왕(근구수왕)은 백제가 처음 일어난 때로부터 제16세(16대) 왕[1]
입니다.
《속일본기》 연력 9년 7월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 계층이 부여 직계였거나, 혹은 고구려에서 갈라져나왔다고 해도 그 고구려도 이제 막 부여에서 나온 집단이었던만큼 백제의 지배 계층은 넓은 의미의 부여계에는 포함되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이 한반도로 남하해서 마한의 지배 세력과 융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지배 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떡밥도 있지만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건길지 항목 참조.
2.1.1. 명칭
고려시대의 《제왕운기》에 따르면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아예 부여로 나라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백제를 부여의 계승국으로 생각한다면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 호칭은 성왕 시절에만 잠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성왕 때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자칭한 건 당시 백제의 최대 적국이자 고토회복전쟁 대상이었던 고구려 또한 부여의 일파이므로, 즉 백제가 정통 부여라면 고구려는 곁가지라고 간접적으로 아래에 두는 선언으로 보인다.
후삼국시대로 접어들 무렵 견훤이 신라에 반란을 일으킬때 명분을 주기 위해 백제를 부흥한답시고 국명을 백제(후백제)로 지었고, 이 지역을 계속 백제로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는데[3]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학설이 공존하고 있다.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일본의 모 교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로 '''"큰 나라"'''라는 한국말이 '쿠다라'의 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동영상 그리고 웅진(熊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얼추 쿠다라와 '''곰나루'''의 발음이 비스무리한 거 같기도 하다.[4] 한편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을 장소로 여겨지는 하구 지역이 해당 지역의 노년층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구드래'''[5][6]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이 또한 연관이 있을 공산이 없지는 않다. 구다라의 어원 추정
참고로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나아가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평야(百濟平野)’ 같은 '구다라'라는 명칭의 행정지명들이 널리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한 후, 백제와 관계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들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서 ‘백제’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은 지금 현재 일본에서 단 두 군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지명 두 곳은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7] 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8] 이 두 곳 뿐이다. 하지만 이 두 곳의 지명 또한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 ##
2.1.2. 건국 연대 논쟁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제외한 사료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중국 사서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며, 여기서는 "백제(伯濟)"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외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명은 그보다도 10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으로서, 370년에 최초로 중국의 동진 왕조 및 열도와 수교를 맺었다고 하며,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는 바로 이 시기에 백제에서 열도로 넘어간 것이라는 설이 일단 다수설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사기 자체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이다 보니 편의상 초고왕 이전도 백제라고 기술하였다. 항상 삼국사기가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라는 걸 염두에 둬야만 한다. 고구려 건국연대만 하더라도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12세손으로 기술하였다. 삼국사기보다는 당연히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의 기록을 신뢰하는건 당연하다.
이런 이유로 8대 고이왕 이전 임금들에 대해서는 계속 의문이 제기된다. 특히 5대 초고왕 대 이전의 다루, 기루, 개루왕의 경우 즉위 연대 자체도 비현실적으로 길며 《삼국사기》 내용에서도 당대 일로는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노중국 교수는 그의 백제 정치사 연구에서 5대 초고왕을 현실적으로 백제의 첫 왕으로 본 바 있다.
풍납과 몽촌 양 토성의 발굴은 이를 논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발굴로 여겨진다. 2000년대까지는 일단 이러한 건축물이 지어지려면 백제가 상당히 체계화된 국가임이 분명하고, 그 시기가 기원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보아(2001년의 논문, 2002년의 논문) 고이왕 이전 백제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시각이 늘어났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중국계 유물에 대한 연대관이 정리되면서 풍납 토성과 몽촌 토성의 주요 부분이 축조된 시기가 주로 3세기 ~ 4세기에 걸쳐 있다는 의견이 다수가 되면서(2012년의 논문) 백제의 고대 국가로서의 진정한 출발에 대해선 《삼국사기》의 연대를 그대로 믿긴 어려워졌다. 다만, 발견된 중국계 유물을 봐선 백제는 4세기 말이 아닌 3세기 초에 중국의 국가와 교류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최근 고고학적인 발전으로 탄소 연대 측정법으론 일부 성벽의 일부 누층의 축조 연대를 기원전으로 내릴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축조가 이뤄진 구간은 아니며, 따라서 어쨌든 풍납 토성의 일부 하층부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층이 있기에 이를 최초의 백제 유적이라고 보고 3 ~ 4세기에 체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대대적인 증축이 되었다고 볼 수는 있게 되었다. 석촌동 고분군의 초기 고분 또한 대략 기원후 200년 전후에 축조되어 이 지역에서 중요한 발전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건국년도는 약간의 오차가 있는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는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의 최초 건설 연대는 기원전이고, 이후 대대적으로 증축, 개축, 재건축 등 여러 건설 사업을 벌리면서 4세기에 완성된 걸로 볼 수 있다. 현대의 건축물도 시간이 지나면서 증축, 개축, 리모델링, 재건축 등을 반복하니 풍납토성의 건설 이력이 여러차례 나타나는 것은 절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역사학계의 결론은 "백제는 약 250 ~ 300년 사이에 국가 단계에 들어서서 대외 교류가 시작되었다" 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시기는 율령 반포로 유명한 8대 고이왕의 후기 치세 및 9대 책계왕 치세와 일치한다. 즉, 그 이전에 (2세기 ~ 3세기) 소국 형태로 존재했던 백제는 3세기 말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며 어느 정도 주위 지역에 비해 우위에 올랐으며 4세기 들어 대 대방 교류 및 흡수, 마한 정벌을 통해 전성기를 맞이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때 전남 지역까지 남하하여 마한 세력을 완전히 멸망시켰다는 입장이 정설로 주장되었으나, 이후 문헌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근초고왕 시기 직접 통치설을 주장하는 학자는 문헌사학자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가 전남 지역까지 직접 통치를 시작한 시기를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으로 보는 편이 대세[9] 이며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6세기 중엽이 되어야 백제가 진출했다 보는 입장이다. 사실 백제는 마한 연맹체 구성국가들 중 하나로 출발했으니 정벌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긴 하다.
2.2. 발전
백제는 초기부터 강성한 국가가 아니었다.[10] 백제는 건국 초기에 북쪽으로는 낙랑군에, 남쪽으로는 마한에 휘둘리며 어려운 시기를 꽤 길게 보냈다.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시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 유역을 포함한 곳은 마한의 영향권이고, 마한 지역에서 목지국[11] 이 그 패권을 쥐고 있었는데, 목지국의 왕은 삼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서 그 왕이 진왕[12] 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백제는 마한과의 대립경쟁 속에서 성장했다. 사실 마한과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백제 자체가 마한 연맹체의 구성국가였고, 이로부터 출발하였다. 온조왕 때부터 신생 국가 백제는 마한, 말갈, 낙랑 등과 마찰을 빚었다. 백제는 이렇게 시작부터 사생결단의 전쟁을 하거나 주변 세력을 회유하면서 병합하는 방법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엔 한강 유역에 머물렀으나 점차 팽창하며,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고이왕(재위 234년 ~ 286년) 때 율령 반포 및 중앙 집권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313년, 314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는데, 8대 고이왕 시절부터 낙랑군, 대방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백제는 10대 분서왕(재위 298년 ~ 304년) 때 낙랑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마한 지역에 대한 정복 과정은 현재 일치된 설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문헌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별도의 문단이 존재한다. 하여튼 고고학적으로 확실한 것은 3세기 말까지 백제가 경기도 지역을 석권했으며, 13대 근초고왕 때인 4세기 중반에 걸쳐 북쪽으로는 황해도 일부 지역과 남쪽으로는 금강 유역까지, 5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전북 지역까지 직접 통치를 시행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한성 백제기 동안에 전남 지역까지 영역 지배를 실시했다는 해석이 있었으나, 이는 현재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의해 부인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활발히 진행된 전라남도의 고고학적 연구 결과 6세기 중반까지 전라남도 전역에 걸쳐 토착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를 놓고 고고학자들은 6세기 중엽에는 이르러야 백제의 진출이 이뤄졌다는 입장이고 문헌사학자들은 대체로 4세기 후반~5세기 이후 간접통치를 실시하다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직접 지배로 넘어갔다는 입장이다.
어쨌든 백제의 강성해진 국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초고왕(재위 346년 ~ 375년) 시대로, 이 시대의 백제는 동진에 사절을 보냈고 앞서 언급했듯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따르면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내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백제는 이로서 국제적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사서인 송서와 양서에는 근초고왕 때 백제인들이 요서까지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이전까지 고구려와 별다른 충돌이 없었으나 근초고왕 대인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치양을 공격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2년 후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황해도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371년)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근초고왕 만년에는 국력의 쇠퇴가 시작되어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던(369년) 수곡성[13] 을 고구려 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다시 빼앗겼고(375년), 신라의 국력이 점점 강해져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373년)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근구수왕 시기에도 고구려와의 대립은 이어져서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 역사 상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 때까지 백제의 전성기가 유지되었다.
2.3. 위기 및 혼란
침류왕(재위 384년 ~ 385년) 때 불교를 수용했다(384년).[14] 근초고왕의 사후 이어지는 근구수왕(재위 375년 ~ 384년), 진사왕(재위 385년 ~ 392년),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대를 거치면서 국세가 현격히 약화되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으나 국력이 크게 소모된 반면 영역화한 지역이 적었다. 근구수왕 대 평양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진사왕 원년에 청목령(개성)에 방어성을 축조하고 관미령(한강 또는 임진강 연안?)에서 전투하는 등 백제의 방어선은 이미 예성강 선으로 후퇴해 있었다. 예성강 방어선도 진사왕 말년에 광개토대왕에 의해 갈려버렸다. 백제는 외부로부터 고구려 압박뿐만 아니라 내부의 끊임없는 정쟁과 권력 암투로 혼란한 시기를 보냈다.
야심과 집념의 소유자였던 아신왕(재위 392년 ~ 405년)은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할 왕위를 가로채간 진사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본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후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아신왕은 왕위에 오른 후 고구려 땅이 된 관미성을 차지하기 위해 수 차례 고구려를 공격(393년 정월, 394년 7월[15] , 395년 8월, 395년 11월)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고구려의 반격으로 영토와 병력을 계속 상실하면서 백제의 국력이 상당히 소진되었다. 아신왕의 계속된 공격에 분노한 광개토대왕은 396년 백제 원정을 단행하여 한강 이북의 58성 700촌을 점령하고 백제 수도 한성을 포위했다[16] . 수도가 함략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신왕은 성문 밖으로 나와 광개토대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그러나 이같은 굴욕적인 패배 이후 아신왕은 복수에 집착하여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더욱 강도 높은 전쟁 준비에 매진했다. 아신왕은 397년 5월 왜의 군사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태자 영(전지왕)을 일본에 볼모로 보냈다. 아신왕은 백성들을 수시로 군사 훈련과 축성 공사에 동원했다. 398년 마침내 고구려 정벌을 위한 대규모 징집을 실시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군사 훈련과 징집에 지친 백성들이 이웃나라인 신라 등으로 대규모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백제의 인구가 감소하면서 결국 고구려 정벌은 취소되었다. 백성들이 대거 신라로 도망가자 아신왕의 분노는 신라로 향하기 시작했다. 399년 아신왕은 가야, 왜와 연합하여 대규모로 신라를 공격하지만 신라와 동맹 관계에 있던 광개토대왕이 출병하는 바람에 패했다. 404년 고구려가 후연과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아신왕은 왜와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의 대방을 공격했다. 후연과의 전쟁 중에 있던 광개토대왕은 급히 친위부대를 이끌고 나타나 왜와 백제 연합군을 섬멸했다. 왕에 대한 국내의 불만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에서 405년 아신왕은 정쟁으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사망 즈음 백제의 국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17]
왜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던 아신왕은 즉위 후 왜와의 우호 관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왕인, 아직기 같은 석학들을 보내어 선진 문화를 전파시켜 줌으로써 일본의 발전과 선진화에 크게 기여했다. 또 아신왕 대의 대규모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본으로 도망친 유민들의 행렬도 일본이 한 단계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아신왕은 태자(전지왕)[18] 를 일본으로 보내 장기 체류시키기도 했다. 전지왕의 경우 일본에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되었는데, 볼모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진짜 볼모라기보다는 백제 국제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해외 유학을 보내놓은 것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19] 하지만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노객이 되겠다고 말하는 굴욕을 당한 직후 일본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면서 태자를 보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볼모의 성격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신왕 사후 태자 영(전지왕)이 일본에 있었던 까닭에 아신왕의 동생 훈해가 섭정이 되었으나 아신왕의 막내 동생 설례가 정변을 일으켜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폐왕 설례)이 되었다. 왜와 해씨 세력의 도움을 받은 태자가 내분에서 승리하여 왕위(전지왕(재위 405년 9월 ~ 420년))에 올랐지만, 즉위 후 해충, 해수, 해구 등 그를 왕위에 올려준 외척 해씨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왕권이 크게 약화된다. 한편 송서에 의하면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전지왕 때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땅을 거점삼아 백제군을 두었다고 한다.
전지왕 이후 고구려가 장수왕(재위 412년 ~ 491년)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는 동안 백제는 계속해서 어린 왕이 즉위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는 일이 반복되었다.[20] 이 시기 백제는 잦은 섭정으로 외척 세력인 해씨 등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를 둘러싼 권력 암투 등으로 왕권이 약해지며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구이신왕(재위 420년 ~ 427년)과 비유왕(재위 427년 ~ 455년) 모두 정변으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변란으로 선왕이 살해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즉위한 개로왕(재위 455년 ~ 475년)은 즉위 후 내분으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기를 겪어야 했다.[21] 백제 조정이 어수선한 틈을 타 456년 12월 고구려 장수왕이 침공해 왔으나 신라의 원군으로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막아내었다. 오랜 내분 끝에 개로왕이 마침내 내분을 수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22] 고구려의 위협에 압박감을 느낀 개로왕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협공을 가하자고 제안했으나 사신이 고구려에 발각되는 바람에 오히려 장수왕의 분노를 초래하고 말았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 원정을 단행했다. 개국 이래의 수도였던 한성이 다시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족들이 고구려군에게 비참하게 처형되는 등 거의 파멸상태에 이른다(475년).[23]
이때 나제동맹 관계에 있던 신라가 보낸 지원군과 백제 귀족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성이 함략되었으며, 백제 귀족 지원군보다 신라 지원군이 오히려 먼저 도착하는 안습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신라에서 지원군을 얻어 돌아오던 개로왕의 동생[24] 또는 아들[25] 이었던 문주는 한성이 함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신라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는 웅진(공주)에 새로 도읍을 정하고 문주왕(재위 475년 ~ 477년)에 즉위한 후 즉각 고구려에 대한 항전 태세에 들어갔다.[26] 한편 고구려 장수왕은 한성을 점령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충청도에 남성골산성[27] 을 구축하고 대전 월평 산성을 점령하여 주둔하였으나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하였다.[28]
하지만 이미 왕권이 크게 실추되어 각지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조정에서는 좌평 해구 등 외척 세력인 해씨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진로 등 진씨 세력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수시로 정변을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문주왕이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려고 곤지를 중용했으나 이에 반발한 해구에 의해 문주왕이 암살되고 만다. 이어 문주왕의 장남 삼근왕(재위 477년 ~ 479년)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러나 어린 왕은 실권이 없었으며, 권신 해구가 섭정을 위임받아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479년 해씨 세력과 정쟁을 벌이던 진씨 세력이 마침내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이때 삼근왕도 죽음을 당했다.
2.3.1. 끊임 없는 정쟁과 왕들의 시해
백제는 왕비족 가문들간의 끊임없는 정쟁과 정변이 연이어 터지며 이러한 난리통 속에 수많은 왕들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제 명에 죽은 왕이 거의 없을 정도인데 역사적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근초고왕 이후를 보면 15대 침류왕, 16대 진사왕, 17대 아신왕, 폐왕 설례, 19대 구이신왕, 20대 비유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24대 동성왕이 모두 정변으로 시해되었거나 또는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최후를 맞았고, 21대 개로왕과 26대 성왕은 각각 고구려 장수왕과 신라군에게 대놓고 전장에서 참수당했다. 이후 27대 위덕왕, 태자 아좌, 28대 혜왕, 29대 법왕도 정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시해로 추정되는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원래 고대 시대 왕과 귀족은 부족장에서 시작되어 가장 강한 부족이 왕족이 되고, 그 다음으로 강한 부족이 왕비족이 된다.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귀족(부족장)들은 사병을 거느린 봉건 제후나 마찬가지다. 백제의 경우 왕비를 독점적으로 배출한 왕비 가문(대성8족)의 세력은 거의 왕족에 근접할 정도로 막강했다. 이들 왕비족의 세력을 얼마나 빨리 억제시키느냐가 진정한 왕권 강화인 동시에 중앙 집권화가 되는 것인데[29] , 백제 왕족인 부여씨는 왕비족을 누르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백제 왕비족들은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벌 왕을 시해한 후 정권을 차지해 새로운 왕을 앉히는 것을 반복했고, 이렇게 해서 즉위한 왕들은 자신을 왕위에 올려준 귀족 세력들에게 권력을 내주고 마는 악순환이 백제 시기 내내 반복된다. 백제의 경우 왕족인 부여씨가 고구려로부터 이주해 온 세력이었기 때문에 인구 등 규모에 있어서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했고, 이 때문에 한성 토착 세력이었던 '진씨'와 '해씨'의 도움 없이는 국가의 유지가 대단히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백제에서는 토착 세력인 진씨와 해씨가 오히려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건국 때부터 진씨와 해씨라는 두 개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대등한 세력의 왕비족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 어쩌면 이러한 연이은 비극의 씨앗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제는 건국기부터 '해씨', '진씨'가 왕비 가문으로서 왕권 못지 않은 권세를 누려왔다. 이 두 가문은 정쟁을 통해 자신들끼리 정권 교체를 이루며 권력을 양분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정권 교체란 바로 왕의 시해다. 왕이 죽어야만 자체 가문 출신의 왕비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웅진 천도 후 동성왕 시대부터는 충청남도계 토착 세력인 '사씨', '백씨' 등이 왕비족으로 가세하면서 왕비 가문은 대성8족으로 확대, 정사암 회의를 지배하게 된다.
이웃 나라들과 비교해 보자면, 고구려의 경우 왕비족이 절노부 하나여서 왕비족들 간의 정쟁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 신라의 경우 건국 초기 왕비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6개 성씨(이씨, 정씨, 최씨, 손씨, 배씨, 설씨)가 있었다. 그러나 이 6개 성씨들은 서로 엇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특정 가문이 왕비족으로 부각되지 못했다. 이후 신라 왕족 김씨는 아예 성골끼리 통혼하는 관습을 만들면서 왕비족 자체가 형성되지 못했다.
대성팔족으로 상징되는 중앙 귀족들과는 별도로 지방 세력 역시 독립적인 힘이 상당히 강했다. 마한의 소국들이 순차적으로 백제에 병합되면서 마한의 기존 부족장들이 백제의 지방 귀족화되었는데, 이들 지방 세력들은 백제 병합 후에도 독자적인 권력을 상당기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백제가 위기 상황을 겪을 때 일부 지방 세력은 사실상 독립하여 자체 국호로 외국에 사신을 보내기까지 했다. 백제 지방 세력은 잘나갈 때도 왕권의 발목을 잡는 것은 기본이고, 나라가 망할 지경일 때도 대립 양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개로왕 때 수도 한성이 함락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도 백제 귀족들의 지원군은 늦장을 부리다 출동해 신라 지원군보다도 늦게 한성에 도착했다. 장수왕에게 한성을 함락 당한 후 천도한 웅진 시대에도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백제의 멸망 시기에도 이 대립이 결정타가 되었다.[30] 그래서 국왕들은 조금만 국력이 회복되면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31] 지방 세력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왕 한 명을 몰아내는 데 더욱 주력하였다.[32]
2.4. 중흥기
백제의 중흥기는 동성왕(재위 479년 ~ 501년), 무령왕(재위 501년 ~ 523년)과 성왕(재위 523년 ~ 554년)으로 이어지는 5세기 말 ~ 6세기 중반기 시기였다.
개로왕의 죽음과 웅진 천도 이후 왕권이 땅에 떨어졌고, 외척인 해씨 세력이 문주왕과 삼근왕을 거치는 동안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또다른 유력 외척 세력인 진씨 세력이 해씨 세력에 대항하면서 정변이 연이어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마침내 진씨 세력은 정변을 일으켜 해씨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 삼근왕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고, 진씨 세력은 일본에 있던 왕족 모대(동성왕, 재위 479년 ~ 501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33] 진씨 세력은 해씨 세력이 그랬던 것처럼 동성왕을 허수아비왕으로 앉힌 후 권력을 휘두르려 했으나, 동성왕은 진씨 세력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사씨, 연씨, 백씨 등을 중용하는 등 실추된 왕권을 다시 강화하고 국가의 재건을 시도했다. 정권이 안정된 후 동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의 일부를 다시 수복하고 남쪽으로는 마한 세력을 공격했다.[34][35] 또 신라 소지왕과 혼인 동맹을 통해 나제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 남조와 국교를 재개했다. 그러나 지나친 토목 공사와 만년으로 갈수록 왕 본인의 사치와 향락으로 인한 불만이 커지면서 해씨 세력 등 반대파의 힘이 커졌다. 결국 좌평 백가가 난을 일으켜 동성왕을 시해하고 만다.
백가의 난으로 동성왕이 시해된 후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의 이복형인 무령왕[36] (재위 501년 ~ 523년)이 동성왕 반대파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37] 즉위 후 백가의 난을 진압한 무령왕은 기록상으로 다시 한강 유역, 심지어는 북한강 중상류, 예성강 유역까지 올라가 고구려와 싸웠다고 되어 있으며 무령왕이 한성을 순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다시 학설에 따라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다. 일단 이때 한강 유역을 온전히 수복했으면 성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가 한강을 뺏기는 구구절절한 사건이 생길 일도 없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이 기록이 모두 맞으며 백제가 이 지역을 일시적으로나마 점령했었지만 안장왕이 일으킨 오곡원 전투 이후 다시 이 지역을 상실했다는 설, 무령왕 대까지 이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는 설, 한성을 잃은 이후 경기도 ~ 황해도의 지명이 옮겨 갔다는 설, 아예 이전 시기의 기록이 잘못 옮겨졌다는 설 등이 모두 존재한다.
고고학적으로 살펴보면,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것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지 오래되었다. 일단 몽촌 토성에서는 고구려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앞서 소개했던 세종, 대전 인근에도 고구려 요새와 토기들이 발견 된 상황이다. 참고로 고구려 토기와 백제 토기는 상당히 달라서 원저계가 주류인 백제와 달리 고구려 토기는 평저가 주류를 이루며 대상파수 또는 교상파수라고 불리는 손잡이는 고구려 토기의 특징이다(이 파수는 지금의 항아리에도 남아있다). 다만 사비기 백제 토기의 경우 4세기 ~ 5세기 고구려계 토기가 갑자기 6세기 백제 수도에 등장하는데, 이는 최근 들어 무령왕 또는 성왕 대의 영토 회복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백성들을 사비 건설을 위해 사민 정책을 펴면서 이런 토기들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남부여라고 국명을 고친 것도 사실 이런 주민들을 전부 그대로 흡수하기 위한 성왕의 계책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는 앞서 언급했던 전라남도 지역에 있던 마한 세력에 대한 정복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5세기 중후반부터 백제계 석실묘와 문제의 한반도 전방후원분이 등장하는데, 대체로 이는 백제와 백제가 끌어들인 일본계 세력이 침투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전방후원분은 1세대가 넘지 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일본계 세력은 사실상 용병에 가까운 세력이었거나 빠르게 정체성을 잃고 현지 지배 구조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동성왕 대 '탐라'가 복속해 왔다는 기술은 제주도[38] 의 복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39] 무령왕 대에는 이를 기반으로 섬진강 지역을 정복하여 소위 대가야(반파국)의 해안 출구를 끊었으며, 해외에도 이를 알려 <양서> 백제전에 백제에 복속된 소국들이 기록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사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으로, 당시 백제는 신라 사신의 파견을 알선해 주기도 했지만 이상의 사실로 보아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무령왕 때 오경박사인 단양이(513년)와 고안무(516년)를 일본에 파견하여 한학, 유학 등 각종 문명을 전파하여 일본의 선진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왕 때는 오경박사 왕유귀를 비롯하여 역박사, 의박사가 파견되었다.
2.4.1. 북위와의 전투
양나라의 소자현이 쓴 남제서에 의하면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동성왕 12년(490년)에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니 목간나 등을 파견하여 크게 무찔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495년에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린 벼슬을 남제국에 승인해달라 하였다. 《삼국사기》의 백제 본기에서도 488년 위나라가 백제에 패하였다고 하였으니(十年魏遣兵來伐爲我所敗) 이를 통해 당시 백제의 강성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걸로 백제의 요서경략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고 보기엔 갈 길이 멀다. 일단 요서 지역에서 백제와 연관이 있는 고고학적 유물의 증거가 없는데다, 북위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를 쳤다고 해석해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기 때문.
때문에 북위가 고구려와의 서신 교환 중 고구려에게 속아 백제를 지나치게 과소 평가한 나머지 서해를 건너와 백제를 쳤다가 연안 지역에서 크게 패했다는 설, 백제가 흡사 백제 - 왜의 관계가 그러했듯 남조 측에 지원 병력 즉, 용병을 파병했다는 설 등이 경쟁하고 있으며 확고히 결론난 건 현재 시점에선 없다.
일단 백제는 동성왕 때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다가 고구려에게 저지된 적이 있고,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고구려가 자꾸 방해해 자주 올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사료가 존재한다(<송서> 왜국전의 왜왕 무 상표문). 그러나 이는 반대로 해석하면 백제가 어쨌든 힘든 상황에서도 (아마도 연안 항로를 거쳐) 사절을 보낼 여력이 있었거나 적어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이 이외에도 백제가 중국에 사절을 보낸 사료는 충분히 많으며, 백제로부터 항로를 빌렸을 왜국의 경우에도 결국 중국에 도달해서 보고를 올렸기 때문에 저 기록이 남은 것이다.
남조가 정치적으로 백제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록을 날조했다는 가설도 있으나 이 가설은 근거가 좀 미흡하다고 평가되는 요서 경략설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동서고금 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어떤 관계성을 강조하는 날조나 견강부회는 있어왔지만, 그걸 위해 있지도 않은 정복 기사를 날조해서 자국의 역사서에 끼워넣는다? 물론 정복 기사를 날조하는 짓은 있었으나 그런건 타국을 지배하거나 정복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남조와 백제 사이에선 성립하지 않는 얘기다. 이런 건 중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봐도 사례가 없다.
그외 내용은 동성왕 문서도 참고.
2.5. 대신라 전쟁
성왕(재위 523년 ~ 554년)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현 부여)로 옮겨 왕권 강화와 수도의 방어력 강화를 꾀하였다. 또 동쪽의 신라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가야연맹의 재건을 꿈꾸었으나,[40] 결국 신라의 대가야 유화 정책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551년에는 신라 진흥왕과 협력하여 한강 하류 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한강 하류 지역 세력의 반발, 고구려 및 신라의 군사적 압박 등으로 한강 유역에서 철군하고 말았고, 이에 무주공산이 된 한강 유역을 신라 진흥왕이 접수하고 말았다.[41] 이에 성왕은 한강 하류 수복을 위해 귀족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제동맹을 깨고 관산성 전투(554년)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신라군[42] 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결국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좌평 4명을 비롯해 3만 명의 군사가 전멸[43][44] 하고, '''"말 한 마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국왕이 전사하고 주력군이 전멸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태자 창(위덕왕, 재위 557년 ~ 598년)은 귀족들의 반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것은 귀족들의 무수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산성 전투 출병을 주장했던 이가 바로 태자 창이었고, 관산성 전투에서 주력군을 지휘했던 이도 태자 창이었기 때문이었다. 관산성 전투가 참패로 끝나면서 출병을 반대했던 귀족 세력들은 태자 창에게 선왕의 전사와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태자 창은 반성과 자숙의 의미로 절에 들어가는 등의 퍼포먼스를 펼친 끝에 성왕 사후 3년만인 557년에야 가까스로 즉위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왕권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고 실권은 대성팔족 귀족 가문들이 행사했다. 위덕왕의 재위 초기는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정쟁으로 혼란한 정국이 이러진다. 이러한 혼란 속에 고구려와 신라의 잇따른 침공으로 더욱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초기의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위덕왕은 신라와 고구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왜와의 동맹을 강화한다. 이어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몇 차례 쳐들어갔으나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하고 말았고 오히려 신라 진흥왕의 반격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백제는 관산성 전투 이후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에 562년 위덕왕은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왜와 연합[45] 하여 신라를 공격했으나 신라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진흥왕을 자극하였고, 신라는 가야 전역을 완전히 병합하게 된다(562년). 위덕왕은 젊은 시절 관산성 전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호전적인 강경파였지만 연이은 패배를 겪은 후, 재위 중기 이후에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 방어에만 치중하는 수동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위덕왕은 신라와 고구려로부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왜, 중국과의 외교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때문에 그의 치세 후반기에는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 백제가 더 이상 호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왜, 중국과의 동맹을 강화하자 신라도 이를 의식하여 더 이상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위덕왕은 589년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한다면 백제가 돕겠다고 제안했다. 597년 위덕왕의 병환이 심해지자 그 틈을 타 위덕왕의 동생인 부여계(훗날 혜왕)가 권력을 장악했다. 598년 수문제가 고구려를 침공(1차 고구려-수 전쟁)하자 약조대로 백제도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며 수나라를 도왔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나라를 격퇴했고, 고구려가 보복으로 백제를 침공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처럼 나라가 혼란스러운 와중인 598년 위덕왕과 태자 아좌가 동시에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었고[46] ,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부여 계(季)가 왕위에 올라 혜왕(재위 598년 ~ 599년)이 되었다. 혜왕은 즉위한지 1년 만에 죽었고 법왕이 즉위했다. 《일본서기》와 《수서》에는 법왕이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데[47] , 이 기록이 맞다면 법왕이 정변을 일으켜 혜왕에게 복수하고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법왕 역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즉위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죽음을 맞는데, 정변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위기는 7세기 초반의 무왕(재위 600년 ~ 641년) 대에 이르러서야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무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대외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무왕은 재위 기간 중 신라와 10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렀다. 한편 무왕은 북쪽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수나라와 당나라에 계속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침공해 줄 것을 요청하며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무왕은 수도를 익산으로 옮기려는 구상을 하기도 했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자왕(재위 641 ~ 660년)은 백제 역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호전적인 군주였다. 그는 즉위 이듬해인 642년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전략 요충지인 대야성(합천)을 함락시키는 것을 비롯해 여러 성을 함략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의자왕은 재위 기간 동안 총 10차례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김유신이 활약하는 신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일진일퇴의 소모적인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의자왕의 끊임없는 신라 공격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신라는 백제 말고도 호전적인 연개소문의 고구려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자왕은 고구려와 신라가 싸우는 와중에 신라의 배후를 공격하여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외교적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선대 무왕 시절부터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던 당나라에 대한 의리를 깨버렸고, 그 결과 당태종의 분노를 사서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48]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백제, 신라와 모두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신라와는 몇 가지 분쟁으로 껄끄러웠던 반면[49] 백제와는 무왕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645년 의자왕의 배신으로 당태종은 백제와 단교했고, 대신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648년 나당동맹이 체결된다. 또 의자왕의 지나친 호전성은 신라를 자극했다. 대야성 전투 때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한 대야성주 김품석 일족을 굳이 모두 처형했는데, 이는 결국 김품석의 장인 김춘추를 자극했고, 결국 김춘추에 의한 나당동맹이 결성되게 된다.
2.6. 멸망
645년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의자왕이 당나라와의 약조를 깬 후, 648년 나당동맹이 맺어졌고, 660년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에 의해 멸망했다.
멸망 직전 백제는 의자왕의 과도한 전쟁과 향락으로 인해 내부적으로 심각한 와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의 향락에 대해서는 승자 입장에서 기록된 《삼국사기》에서 사실을 왜곡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이 있다. 현대 사학계에서 삼국사기와 중국 문헌들과 철저한 교차 검증이 이루어지면서 삼국사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정확하고 공정한 사서라는 점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사실상 문헌 자료를 참고할 수 없는 건국시기에 관해 어쩔 수 없이 일부 구전 전설을 참고한 것을 제외하면 역사 시대 이후에 대해서는 중국과 당시 한반도에 존재하던 각종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상당히 공정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 인정되고 있다.[50] 사실 향락은 중국 역대 사서에서도 전왕조가 멸망했을 때마다 주로 첫순위로 꼽히는 원인이기 때문에 다소 의례적인 측면이 있다.
의자왕의 빈번한 전쟁과 공포정치로 인한 백제 지배층의 분열도 멸망의 중요한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전쟁은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의자왕은 삼국시대에서도 첫손에 꼽힐 정도로 많은 전쟁을 일으킨 왕이었다.[51] 의자왕의 빈번한 전쟁은 필연적으로 백성들과 귀족 층의 많은 반발을 불러왔다. 문제는 의자왕의 잦은 전쟁의 결과가 성과를 논하기 애매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관산성 전투처럼 아예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면 왕권이 심각하게 제한을 받았고 귀족들이 장악한 조정에 의해 당분간 전쟁 자체가 안일어났을 것이고,[52] 무왕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보일 경우 오히려 왕권이 강화될 수 있다. 의자왕은 아버지 무왕보다 더 많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그 성과는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조바심을 느낀 의자왕은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과도한 전쟁과 위에 나온 향락의 결과 내부 반발은 심각해져갔다. 이에 의자왕은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의자왕은 조선시대의 사화와 비슷한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반대파 중신들을 제거한 후 공포 정치를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은 656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숙청을 통해 조정의 반대 세력들을 제거했고 태자 부여융을 폐세자하고 부여효로 태자를 교체했다. 숙청 과정에서 성충, 흥수 등 충신들까지 제거하자 민심과 귀족 세력의 지지를 크게 잃게 되었으나 의자왕은 오히려 공포 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물론 백제 지배층의 분열과 권력 암투는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다. 백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외척 세력 등 권세를 가진 귀족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았고 그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치룬 것이 거의 일상에 가까울 정도로 빈번했다. 정쟁으로 인해 수많은 왕들이 암살당했고, 외척 세력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허수아비 왕들도 많았다. 이런 시절들과 비교한다면 의자왕은 백제 시대를 거쳐간 31명의 왕중 유능한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의자왕 시절의 정쟁과 지배층의 분열이 이전 시대보다 심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백제가 멸망한 것은 결국 나당연합군의 규모 자체가 과거의 위협들과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었다.[53]
2.6.1. 멸망 과정
7월 9일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과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 간의 황산벌 전투가 시작되고, 같은 날 당나라군이 기벌포에 상륙한다. 흔히 나당 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백제의 계백 장군은 남은 군사 5천 명을 전부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백제 전군이 5천 명이 다였던 것은 아니다. 《구당서》 등을 참고할 때 기벌포에서 당나라군을 방어한 병력과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존재한다.[54]
《구당서》 소정방전(참고 링크)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 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더구나 여기에는 백제군의 전멸을 암시하는 말[55] 이 없으므로 실제 백제군의 규모가 몇만 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싸움에 5천 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도 동일한 기록이 실려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구당서》의 내용이 신뢰성이 있다고 본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흥수는 당군과 신라군을 각각 좁은 길목인 기벌포와 탄현에서 막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의자왕 및 백제 수뇌부는 당군과 신라군이 좁은 길목을 통과한 직후에 공격해서 섬멸시키자는 작전을 채택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는 신하들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작전 내용과 실제로 요격하는 데 동원한 군대의 규모를 고려해 보면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그 이외의 해석도 있을 수 있다.이때 대신들이 이를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당나라 병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해서 강물을 따라 배를 나란히 가도록 할 수 없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에 병사를 풀어 공격하면, 그것은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삼국사기》 의자왕 본기 20년(660년)조
- 첫번째는 백제군은 내선의 이점을 살려 먼저 계백이 소수의 군사로 신라군을 저지하는 동안 전력을 기울여 당군을 격파하고 군을 돌려 다시 신라군을 격파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군을 요격한 백제군의 숫자가 신라군을 저지한 계백의 부대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단, 이 해석대로라면 수도 가까이에서 결전이 벌어진 것은 백제의 작전대로였다는 의미가 되므로, 계백이 출전할 때는 아직 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처 자식을 죽여야 할 정도로 비관할 필요는 없었을 게 의문으로 남는다.
- 두번째는 반대로 백제군이 당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먼저 신라군부터 격파할 작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라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탄현을 넘은 것과는 달리 당군은 강어귀에서부터 백제군의 요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백제군은 강어귀에서 당군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실제로 했던 것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당군이 백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오히려 신라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에 백제군의 작전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백제군은 신라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다가, 신라군의 위협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당군과의 갑작스러운 전투에 휘말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 의자왕이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과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 중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된 점도 설명가능하며, 계백이 황산벌로 출전할 때 이미 처 자식을 자기 손으로 벨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과도 부합된다.[56]
7월 18일에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과 태자 부여효 또한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망하게 되었다.
예식진 및 예소사 묘지명에 따르면 웅진 방령으로 있떤 예식진이 의자왕을 당군에게 바치고 항목한 것으로 되어있어 그간의 갑작스러운 의자왕의 항복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예식진 항목 참조. 예군 항목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의자왕과 장자 부여융[58] 을 비롯하여 약 1만 명의 백제인을 당나라로 압송했다(660년).
2.6.2. 백제부흥운동
백제 멸망 후 당나라의 폭압적 통치에 저항하여 백제 유민들이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백제부흥운동 문서 참조.
나당동맹 체결시(648년)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는 대동강을 경계로 국토를 분할하기로 약조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은 약조를 깨고 백제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통치에 나섰다. 백제 땅에 5도독부를 세운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서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이에 백제의 장수 출신인 귀실복신, 도침 등이 백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왜 왕에게 요청하여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귀국(662년 5월)시켜 풍왕으로 추대했다.
한편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태자 부여융은 당으로 귀화하여 당나라 장수 신분으로 돌아와 당군을 이끌고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 부흥 운동을 토벌했다. 신라 역시 당나라의 지원 요구에 응하여 백제 부흥 운동 토벌에 나섰지만, 신라는 유화정책을 펼치며 당나라와는 다르다라는 인식을 백제 유민들에게 심어줬다. 신라군은 당군과 가급적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치며 토벌된 지역을 직접 신라 영토에 귀속시켜 나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백제 부흥 운동의 1차적 대상은 당나라'''였다는 점이다. 당나라가 5도독부를 설치한 후 행한 무자비한 통치가 현지 주민들에게 커다란 저항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는 몇 년 후 나당전쟁이 일어나자 백제 유민들이 신라 편에서 당나라와 싸우는 것을 택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와중에 백제 부흥군 지도부 내에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데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663년 9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과 유인궤, 부여융 등이 이끄는 당군이 백제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포위했고, 당군의 170여 척의 배가 주류성 입구인 백강을 둘러쌌다. 백제 부흥군의 지원 요청을 받은 왜가 2만 7천 대군과 1000척의 대함대를 파병하여 백강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나당 연합군에 궤멸됐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다. 이어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이 단계에서 실패가 분명해진다.
본진인 주류성이 함략된 후에도 아직 임존성에 백제 부흥군 잔여 세력이 있었지만, 그간 부흥 운동을 이끌던 흑치상지가 돌연 부흥군을 배반하고 당나라군에 투항한 후 당군을 이끌고 나타나 임존성을 공격했다. 결국 임존성의 지수신이 패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종결되었다(664년). 임존성 함락 직후 664년 4월 사비성 봉기가 일어났지만 진압당했고 이를 끝으로 옛 백제 왕족이 주도하는 백제 부흥 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2.6.3.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의 백제 유민
당나라의 무자비한 통치를 경험했던 백제 유민들은[59]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당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신라 편에서 싸웠다. 백제 유민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 개시 1년여 만에 구 백제 영토에서 당군을 모두 축출할 수 있었다. 나당전쟁은 신라만의 전쟁이 아니었으며, 옛 고구려인, 옛 백제인, 옛 가야인 심지어 고구려에 있었던 말갈족까지 함께 당과 맞서 싸운 전쟁이었다. 나당전쟁이 끝난 후 구 백제 지역은 평화를 맞이했으며 그 지역의 백제 유민들은 한동안 백제계 신라인으로 만족하며 살게 된다.
전통적으로 신라는 포용정책을 실시하며 피정복 지역에도 강등 조치 없이 원래의 지위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금관국의 왕족(김해 김씨)과 고구려의 왕족인 안승에게 왕족의 지위를 인정하여 진골에 편입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신라의 포용 정책은 백제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백제가 망한 후에도 큰 강등 조치는 없었고 673년 문무왕이 모든 백제인에게 백제 때와 견주어 이에 상응하는 신라의 벼슬과 관등을 주고 신라의 성씨를 부여했다. 이러한 조치가 내려진 673년은 나당전쟁에서 당군에게 밀리고 있던 위기 상황이라 문무왕은 '삼한일통'의 기치를 내세우며 백제계와 고구려계를 규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 최정예군인 서당에서 백제, 고구려 출신들은 신라 출신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백제계가 받았던 관등의 최고 관등이 주로 5두품이었는데 비해 고구려계는 6두품이었다는 점 때문에 백제계가 차별을 받았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상기했다시피 문무왕은 백제계에게도 고구려계나 가야계와 마찬가지로 백제 시절의 지위와 벼슬을 상당수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다만 백제계가 6두품을 받은 기록이 아주 적은 것은 백제 멸망 후 왕공족 중 상당수가 당나라로 압송되었거나 왜국으로 도피했거나 혹은 전란 중 멸족했거나[60] 무엇보다도 백제와 원수였던 신라의 조직적인 보복과 탄압을 우려한 구 백제 귀족들의 대대적인 '신분 세탁' 때문에 진골, 6두품에 해당하는 고위 귀족이 사실상 남아있지 않았던 탓이 큰 것으로 보여진다.[61] 특히 의자왕 직계는 전부 끌려갔는데 때문에 백제부흥운동 당시 귀실복신, 도침 등 지도부는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을 불러와서 왕으로 추대해야 했다. 의자왕의 장자 부여융의 경우 웅진도독이 되어 다시 한반도에 돌아오기도 했는데 웅진도독부가 밀려나자 다시 당으로 끌려가 거기서 죽었다.[62]
신문왕 때는 지방 제도 정비로 9주 5소경 제도가 확립되었으며, 구 백제 지역에는 3주가 배분되었고, 서원경(현 충주시)과 남원경(현 남원시)이 설치되었다. 특히 남원경에는 주변 지역민들 뿐만 아니라 보덕국에 있던 고구려계 유민과 금성(현 경주시) 수도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대도시로 성장시켰다.
다만 그럼에도 백제 유민들이 전반적으로 고구려 유민들에 비해 유민 의식과 신라 왕조에 대한 반발이 강했던 이유로는, 고구려계의 경우 패서 지역은 너무 멀어 중앙정부의 힘이 잘 미치지 않아 반쯤은 자치적이었으며 그렇게 큰 현 황해도·경기도 일대에 주가 겨우 한주 하나뿐이라 압박이 덜했지만 옛 백제 지역은 신라의 중심지와 가까운 데다 물자, 인구도 풍족해 행정 구역이 많이 설치되어 도독, 군수, 현령 등 중앙 귀족이 직접 맡은 관리들이 많아[63] 중앙정부의 통제와 압박이 강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신라 정권이 딱히 의도적으로 백제계를 탄압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 수록 성장하는 지역 세력의 역량에 비해 대우는 그만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옛 백제 지역에 불만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 세력의 역량이 성장한 통일신라 후기에도 아무리 잘나봐야 백제 지역 토착세력은 주로 겨우 촌주밖에 못 되었고 계속 중앙 귀족의 직접 파견 및 통치가 이어졌다.[64]
또 단순히 위 기록만 단면적으로 보고 신라의 백제 지역 및 백제계에 대한 차별이 일관적으로 없었다고 단정하는 건 위험한 게 태종 무열왕계가 밀려나고 내물왕계가 다시 왕통을 차지하면서[65] 진골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열왕계 왕실에서 적극 등용했던 가야계와 6두품 등은 크게 밀려나 버렸고 내물왕계 진골 귀족의 배타적인 독주가 벌어지게 된다. 심지어 전성기엔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던 그 무열왕계 진골 귀족도 중앙에서 아예 밀려나 명주의 토착세력으로 전락하게 되어(강릉 김씨) 후에는 대놓고 신라를 증오한 궁예의 든든한 협력자(왕순식)가 된다.[66] 이런 상황 속에서 백제계로서 신라 정권에 등용되었던 인사들이나 불만이 쌓일대로 쌓였던 백제계 토착 세력이 동요할 정황은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통일신라~후삼국의 인구에 대해서도 지리적 특성상(대략 현 한강 이남~전북 일대) 백제계가 다수를 점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논농사 경작지가 풍족해 각종 소국들이 많았던 구 마한 및 가야 지역(대략 현 전남~경남 일대) 또한 인구가 많았으니 구체적으로는 이견이 있을 수는 있으나,[67] 구 백제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남부의 인구 밀도가 높아 고구려가 장수왕 대부터 이어진 전성기에도 한반도 남부 세력들의 연합에 백제와 신라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했었음을 회고하면,[68] 대체로 아무리 대대적인 전란이 벌어져도 인구의 대다수가 그대로 이어졌던 전근대시대의 특성상(ex:페르시아) 옛 백제의 인구 또한 상당수가 남북국 및 후삼국시대로 이어졌을 정황은 충분하다.
2.6.4.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의 여러 유력 씨족들은 당나라의 폭압적인 지배와 약탈을 피해 우호가 깊던 일본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했다. 아직 신라에 의해 가야 방면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던 항해 루트가 완전히 막히기 전, 백제가 결국 멸망할 정황이 보이자 광개토대왕의 가야 정벌 때 대대적으로 일본으로 도피했던 가야인들처럼 전란을 피해 진작에 일본으로 도피한 백제인 수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유민이 왜국으로 건너갔던 당시 백제 남부에서 큐슈로 향하는 루트는, 백제와 왜국의 교역이 자주 이뤄졌고 왜국의 사신이 중국에 조공할 때 이용하던 경로기도 했다. 양잠 기술 등 고급 기술을 지닌 씨족이나 학문, 과학 분야의 씨족 등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떠났고, 야마토 조정은 이 횡재를 맞아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그 능력을 흡수하여 국력과 왕권을 강화했다.[69] 고구려 유민 일부도 이러한 길을 걸었다. 이렇게 조정에서 대우를 받은 부류는 유용한 기술을 갖고 있던 운이 좋은 집단이었고, 굴러들어온 돌을 위해 이미 기반을 잡고 있던 기존 기득권의 세력을 떼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 출신을 불문하고 애매한 부류는 대부분 당시로선 미개척지였던 관동 지방 개척을 위해 이주된다. 지금은 관동이 중심지가 된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또한 한문 지식이 풍부했던 백제 유민들은 일본 고대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백제 멸망 직후인 671년 갑자기 국호를 바꾸고 이어 수도를 새로 짓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급작스런 변화와 발전을 겪게 되는데 이를 백제 유민들이 몰려온 충격파의 영향인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유민들에게 나름의 굴곡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扶餘豊)은 일본에 체류하고 있다가 달솔이었던 귀실복신과 도침에 백제로 귀국하여 백제 부흥군에게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보검도 떨어뜨릴 정도로 급박하게 고구려로 도망쳤다. 백제의 무령왕이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때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낳은 먼 후손인 황후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가 낳은 간무 덴노는 모계가 상대적으로 천한 직급에 있어 일본 황실의 많은 반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덴노로 추대되었다. 이를 보면 당연히 망국 유민의 설움이 없었던 건 아니며, 《일본서기》에 의하면 멸망 전 도래한 백제인 또는 백제에 파견되어 체류하던 왜국의 관리 등은 높은 벼슬도 한 것으로 보이나 멸망 후 도래한 백제인의 직급은 생각보다 꽤 하급이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정복 직후 통일신라의 백제인 대우가 더 괜찮았던 걸로 보인다.
일단 부여풍의 형제인 부여선광(扶餘善光)의 자손은 쿠다라노코니키시(百済王, 백제왕)씨라는 성을 일본 황실에서 부여받았고, 《일본서기》에 의하면 4세기말 백제계로 추정되는 도래인 씨족인 하타(秦)씨의 시조 유즈키노키미(弓月君)가 한반도에서 왜국으로 도래하였다고 한다.[70] 현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 미사토정 미카도신사(神門神社)에 백제 왕족 부여정가(扶餘禎嘉)가 숨어살았으나 신라의 자객에게 결국 피살되었다는 '정가왕 전설'이 있다.
2.6.5. 당나라로 압송된 백제 유민
태자 부여융은 사비성과 웅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가 멸망(660년)한 후 생포되어 신라 태자 김법민에게 굴욕을 당한 후 당나라로 압송(660년)되었다.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압송된 부여융은 당나라로 귀화한 후 당의 장수가 되어 당군을 이끌고 돌아와 동생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 부흥군을 토벌했다(...). 부여융은 663년 백강 전투에도 참전하여 백제 부흥군과 왜군을 궤멸시키고 주류성을 함락했다.
한편 백제 부흥 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라군이 진압한 영토들이 신라 본토로 직접 귀속되면서 당나라는 기존의 5도독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웅진도독부로 단일화한 후 나머지 네 개의 도독부를 폐지했다. 부여융은 665년 통합된 웅진 도독부 도독에 임명되었고, 괴뢰국 백제 왕을 자처했다. 그러나 곧 나당전쟁이 발발했고(669년), 전세가 신라 쪽으로 기울자 결국 당나라의 장안성으로 돌아갔다.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고, 백제 전역을 완전히 편입했다.
당으로 돌아간 부여융은 나당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676년 요동의 건안성에 웅진 도독부를 세우고, 백제 멸망(660년) 당시 당나라로 압송된 약 1만 명의 백제 유민들을 모아 지배했다. 이를 소백제라고 부른다. 당나라에서 부여융에게 내린 작위는 대방군왕. 옛 백제 왕들과 같은 동일한 직위였다.
부여융 사후 부여융의 손자인 부여경이 측천무후 대에 대방군 왕으로 임명된 것을 끝으로 작위 세습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것을 보면 8세기 초에 소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009년 이도학 교수는 건안성의 백제 유민들이 소백제를 형성한 것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구당서 현종본기 개원 13년(725년) 기록에서 '''당나라의 내신'''으로 고려 조선국왕과 함께 백제 대방왕이 기록된 점으로 보아 독자적인 국가 형성을 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8세기 초 활동한 사타충의, 부여준, 흑치준, 물부순, 부여태비, 예인수나 예인사 정도를 빼면 백제계 유민들을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71]
당의 역사서 《구당서》는 이 건안성이 발해에게 흡수된 것을 백제의 멸망이라고 보고있는데, 이는 건안성으로 이주한 백제 유민들을 염두한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리고 2009년 괵왕 이옹과 그의 부인 합장묘가 발굴이 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화제의 이유는 그녀의 성이 '부여씨' 백제 왕족이라는 점이었다. 일명 부여태비로 불리는 인물은 의자왕의 증손녀로 밝혀졌다.
2.6.6. 후백제
서기 900년, 견훤이 옛 백제를 계승한다며 세운 나라이다. 자세한 내용은 후백제 문서 참조.
2.6.6.1. 후백제와 백제부흥운동의 연관성
[1] 《삼국사기》 백제 본기 기준으로는 14대왕, 《속일본기》와 《제왕운기》에 따르면 근구수왕 이전의 백제의 왕계가 2대가 누락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이 기록은 사실 《속일본기》 연력 9년 7월조에서 극히 일부만을 인용한 것이고 생략된 부분에서 '도모(都慕)가 태양의 감응을 받고 부여를 세웠다'는 골자의 내용을 적어놓았다. 그렇다면 도모가 1대가 되고, 2대는 미상이다. 이는 주몽과 비류일 수도 있고, 동명이나 우태(구태)일 수도 있다.[2] 이강래의 《삼국사기》 주석에 따르면 구태는 부여왕 위구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쪽의 부여와 백제의 다른 이름인 남부여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KBS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근초고왕의 아버지로 그려진다.[3] 요즈음은 교과서 등에서 음독하여 ひゃくさい/はくさい(햐쿠사이/하쿠사이) 등으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くだら 쪽이 옛날부터 써오기도 했고 지금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사카 쪽 지명에 百濟(쿠다라)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사카 지역에 12세기경까지 백제군(百濟)이 존재했기 때문이다.[4] 일본어로 곰을 쿠마라고 부르고, 나루의 옛 발음은 나와 루 둘 다 똑같이 아래아로 되어 있다.[5] 종래까지 '구드레'라고 적혀 있었는데, 오기다. 충남 부여(옛 전라북도) 일원에서는 명확히 '구드래'라고 쓴다.[6] 현재도 구교리 금강 유역(충남 방언으로는 '백마강')에 구드래 조각 공원이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군에서 출하하는 농산품의 브랜드 '굿뜨래(Good + 뜰에)'의 유래가 바로 이 구드래다. 최근까지가 아니라 현재도 백제 마지막 도읍으로서 부여를 대변하는 고어(古語, 비정) 중 하나.[7] 이곳에는 2007년 11월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郵便局)’도 영업 중이다.[8] 이 이름은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사찰에서 비롯됐다. 이 사찰의 이름은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 일본에서는 ‘百濟寺’를 ‘구다라 데라’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른다.[9] 장창은, 「현행 중학교 역사 교과서와 역사 부도의 삼국시대 지도 검토」, 『선사와 고대』 제57호, 한국고대학회, 2018[10] 이는 신라나 고구려도 마찬가지. 그 강대했던 로마 제국조차 시작은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 있던 에트루리아한테 수백년간 휘둘렸다. 결국 로마가 에트루리아를 멸망시켰지만...[11] 현재 충청남도 천안에서 전라북도 익산에 이르는 지역 중 어딘가로 추정. 안성천 남쪽 금강 북쪽에서 크다 싶은 유적마다 '여기가 목지국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더러 있을 뿐 확실한 비정안이 없다.[12] 진왕이 백제 고이왕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라면 목지국은 백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그러나 이는 1970년대 나와서 지지하는 학자가 사실상 끊어진 설이다. 《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기리영 전투로 인해 '한(韓)을 멸망시켰다'(滅韓)고 한 이후 진왕에 대한 기록이 끊어지는 반면 백제는 이 근처 시기 사로잡았던 군현의 포로를 돌려주고 그 뒤로 성장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다.[13] 황해도 신계.[14] 이웃 신라에서 불교가 토착 세력의 반발 속에서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어렵게 수용된 후 곧바로 호국불교로 급속히 발전했던 것에 비해, 백제에서는 침류왕 때 수용된 이후 한동안 불교에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신라만큼 불교가 크게 융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5] 이때는 수곡성을 공격했다.[16] 광개토대왕릉비 2면 5행에 의거함. 다만 학계에서는 58성 700촌 중 일부는 이전에 아신왕의 관미성 침략 때 반격으로 빼앗은 것을 일괄 합산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17] 아신왕이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정말로 백제가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을 정도.[18] 재위 405년 ~ 420년[19] 애당초 백제가 보냈다는 볼모에 대해서는 그 속까지 파고 들어가봐야 하는 게, 정작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라는 백제삼서의 기록과 "내조하였다"라는 일본 쪽의 기록만이 있지, 볼모를 보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서도 '볼모'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오직, 한참 후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나오는 표현일 뿐이다. 오히려 이 당시 일본으로간 태자는 볼모가 아니라 외교관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으니, 지금 현재로서는 볼모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는 당시 태자를 맡길 만큼 백제 국왕과 일본 천황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음을 알 수 있다.[20] 고구려 장수왕 재위 기간(412년 ~ 491년) 동안 백제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을 거쳤을 정도이다.[21] 오랜동안 선왕 비유왕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아 수년간 개로왕이 제대로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을 정도로 심각한 내분이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22] 이 과정에서 권력에서 밀려난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고구려로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는데 475년 장수왕의 백제 원정 때 이들이 선봉에 선 것.[23] 《일본서기》에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국내 역사학자 중에서도 이때 백제는 사실상 멸망했고 웅진에 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중국사에서도 서진이 멸망하고 동진을 다시 세웠고, 북송이 망하고 남송을 다시 세우는 등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24] 《일본서기》의 기록.[25] 《삼국사기》의 기록.[26] 때문에 웅진 천도 시기를 서진 멸망 이후의 동진에 빗대는 사람이 많다. 둘 다 북방 세력에게 박살나서 군주가 죽었고, 남쪽으로 피신하였으며, 외적의 방어에 좀 더 쉬운 곳에 새로 도읍을 정했다는 것.[27]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28]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고구려의 공세 한계선에 다다랐다는 평가가 많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실제 이 지역에 형성된 고구려 성은 수십 ~ 수백 명이 주둔할 정도 규모밖에 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처럼 고구려가 점령에 소홀했던 양상은 초토화되었다고는 하나 왕성이었던 풍납 토성조차 예외가 아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주된 전선은 마침 물길#s-2이 활개를 치던 북쪽이었고 백제 지역은 수시로 건드려는 보지만 점령하고 주둔할 의지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한성 함락 후에는 구석에 알 박고 성 도배하면서 백제를 돕던 신라에 대한 공격이 훨씬 더 날카로웠던 편.[29] 참고로 왕권 버금 세력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처음 시기는 왕비족이 사라지는 신라 무열왕 대부터, 분권의 상징인 사병이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조선 태종 시기는 되어야 한다.[30] 계백에게 주어진 군대 숫자가 5천 명밖에 안 된 이유로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대다수 군대를 당군과 싸우게 하다보니 남은 군대가 5천 명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백제가 왕과 지방 세력 간의 대립이 이 당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높다.[31] 단적으로,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을 때, 문주왕이 이끌고 온 군대의 주력은 백제 귀족들의 군대가 아닌 신라군이었다. 다시 말해 신라로부터 원군 1만을 거느리고 한성 위례성에 도착하였으나 백제 귀족의 응원군은 오지 않은 채 수도가 점령되고 부왕은 시해. 웅진 시대에 국력 회복이 어느 정도 된 동성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결국 측근 세력으로 보았던 백가를 중심으로 한 세족들의 반란으로 사망. 의자왕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백제 귀족들의 지원은 뜨뜻미지근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제로 의자왕의 사망 역시 그 짧은 시간에 배반에 의한 것이었다.[32] 이러한 정황들에 근거해 백제가 점령 합병한 마한 세력의 유지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데 실패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백제의 주요 왕들이 상당히 뚜렷한 업적과 성과를 보였음에도 그리 크지 못한 나라로 인식되는 이유는, 나라가 팽창의 탄력을 받을 시기에 유독 지방 귀족들의 왕권에의 방해 견제 공작이 있었기 때문. 이는 백제의 지배 계층 내에서 왕족과 귀족 간의 상당한 이질감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국의 침략에 수도가 함락되는 상황에서조차 밍기적댄 백제 지방 귀족들의 모습에는 사실상 백제 왕실이 망하길 바라는 그들의 욕망이 엿보인다.[33] 문주왕의 형제인 곤지의 아들이 무령왕(장남)과 동성왕이다. 동생인 동성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진씨 세력이 더 어리고 고분고분해 보이는 모대를 왕위 계승자로 선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4] 상위 문서의 '마한 정복에 관한 논란' 문단을 볼 것.[35] 일설에는 이 때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하여 성왕 초기까지 유지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기록을 보더라도 꽤 가능성이 높으며 이러한 백제의 일시적 한강 유역 점유는 안장왕의 공격으로 끝이 난 것으로 보인다.[36]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이복형이자, 곤지의 장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의 생몰연대 상으로 동성왕의 형이라는 설이 유력하다.[37] 동성왕 생존 당시 무령왕은 동성왕 반대 세력에 가담해 있었다. 때문에 동성왕의 피살에 무령왕이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기록 미비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38] 일부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남 지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39]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으로 고구려에서 북위에 '우리가 부여산 금이랑 섭라(탐라로 추정)산 패물을 썼는데 부여는 물길#s-2한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가 처묵처묵해서 조공을 못합니다.'라고 변명한 기록이 있다. 북위는 이에 대해 '당신들이 잘하면 되지 왜 우리한테 와서 칭얼대냐, 잘 좀 해봐라'고 깠다.[40] 다만 이는 프로파간다에 가깝고 실제로는 가야 지역에 방 - 군 - 성 조직을 설치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간파한 이 지역 소국들은 사비회의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며 신라에서 관직을 타내는 모습까지 보인다. 당연히 성왕은 피꺼솟.[41] 임용한 등의 해석에 따르면 백제 왕실과 지방 세력 간의 분열로 인해 지방 세력이 왕권을 강화해줄 것이 뻔한 한강 유역을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고,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의 양측의 압박을 받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왕이 철군하자, 신라 진흥왕이 '잘 먹겠습니다'하고 한강 유역을 접수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라고 적혀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문서 참조.[42] 성왕의 목을 벤 자는 《삼국사기》에는 비장 고간 도도라고 되어 있다. 도도가 노비라는 설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현으로, 정확하게는 도도가 노비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성왕이 도도를 꾸짖으면서 천한 노비라고 부른 것이므로, 노비라는 표현이 꼭 도도의 실제 신분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43] 정확히는 2만 9천 6백 명. 같은 신라의 자료를 인용한 김유신 열전에는 1만의 목을 베었다고 썼다. 김유신 열전부터도 과장이 심하다고 김부식부터 깠던 것을 고려하면, 본기의 과장이 의심되는 부분.[44]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군 패배의 결과로 성왕이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왕이 사로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에 백제군이 무너진 것이다. [45] 당시 왜는 가야와 무역을 통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때문에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할 절실한 필요성이 있었다.[46] 태자 아좌의 경우 혜왕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위덕왕의 경우 나이가 연로했기 때문에 암살인지 자연사인지는 불분명하다.[47] 《삼국사기》에는 법왕이 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백제 왕들의 가족 관계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틀릴 때가 많다.[48] 선왕인 무왕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에 많은 공을 들였다. 무왕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면 백제가 도와주겠다고 약조하면서 여러 차례 당나라에 고구려의 침공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당나라가 645년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의자왕은 약속을 깨고 당나라를 도와주지 않았다. 오히려 의자왕은 당나라의 또다른 동맹국인 신라가 당나라를 도와 고구려 원정에 나섰을 때 신라의 배후를 공격했다. 이에 당 태종은 분노하여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다. 당 태종이 죽고 당 고종이 즉위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와 관계 개선을 위해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당 고종 역시 냉담했고, 결국 652년 이후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49] 당나라는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에 대해 시비를 걸었고, 또 신라 왕이 여왕인 것을 비웃어 신라 조정을 화나게 하는 등 두 나라간의 외교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50] 물론 삼국사기에도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건국연대와 관련하여 광개토대왕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12세손으로 기술하였다. 이 경우 광개토대왕의 아들이 장수왕대에 쓰여진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이 맞고 삼국사기가 틀린 것으로 본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수세기가 흘러서 고려시대에 쓰여진 역사서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각종 중국사서와의 교차 검증 결과 오류는 거의 없었고, 차이가 있는 부분은 주로 당대에 한반도에서 쓰여진 1차 사료를 우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51] 물론 사서에 모든 전쟁이 기록된 것이 아니고, 삼국 시대 후대에 갈수록 기록이 자세해지기 때문에 의자왕이 삼국시대에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킨 군주인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다.[52] 패전의 책임으로 태자 위덕왕은 하마터면 왕위에 오르지도 못할 뻔 했다.[53] 이 시기가 바로 당태종 - 당고종으로 대표되는 당나라의 전성기로서, 비단 당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강력한 전성기 중 하나다. 또한 백제는 국가 총 동원 해도 병력 10만이 넘을 가능성이 희박한데 비해, 당은 여러 국가와 전쟁을 하면서 한 전선의 원정에만 적어도 수만 명 이상의 군사를 여러 차례 보낼 수 있는 국가였으며 백제 원정 당시 병력은 13만에 달했다. 기본 체급이 다른 국가와의 싸움이었다.[54] 5천 명이라는 수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 본기를 참고한 것인데 사실 신라 본기에도 5천 명이 백제군의 전부였다고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다. 신라 본기 태종 무열왕 편에는 의자왕이 계백에게 5천 명의 군사로 신라군과 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그 후 사비성이 함락될 때까지 백제군의 저항과 병력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의 기록으로 볼 때도 계백의 신라군 방어 병력 이외에 최소한 사비성 방어 병력이 별도로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55] '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등.[56] 또 다른 의문점은 당군이 어느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가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서 의자왕과 신하들이 작전을 논의할 때는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벌포를 막을 것인가를 논의했으며,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도 기벌포에서 백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및 백제 본기에는 '웅진강' 입구에서 상륙 작전으로 백제군을 격파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나오며, 상륙한 곳은 강의 동안(東岸)(《신당서》에는 좌안(左岸)으로 표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웅진강과 백강이 같은 강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강인가 하는 점이다. 강 이름의 차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웅진강과 백강을 서로 다른 강으로 생각한다면, 백제 측은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을 예상했는데 당군이 실제로는 웅진강을 선택함으로써 백제군의 의표를 찔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설은 백강과 웅진강은 모두 같은 금강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신라 본기에서 기벌포를 언급하고 있으며 기벌포는 금강 하구의 장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백제 부흥 운동 과정에서 마지막 결전이 이루어진 곳은 백강이며, 역시 기벌포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백강 = 금강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백강'이라는 이름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동진강과 금강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는 견해는 있다.) 그런데 통설을 따르는 경우 금강 하구에서 강의 동안은 기벌포와는 반대편인 군산 방면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아직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강 전투와 관련하여 백강이나 웅진강을 금강이 아닌 동진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참고로 《일본서기》 제명기에는 당군의 상륙 지점이 미자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자진이 곧 기벌포인지 혹은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57] 신라군이 합류한 것이 백제와의 결전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구당서》나 《삼국사기》 모두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한 다음날 사비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산벌 전투 이후 사비성 함락까지는 백제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도 백제군과의 결전 부분에 당군만이 언급될 뿐 신라군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신라군의 합류는 백제군과의 결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전이 벌어진 곳이 사비성에서 불과 20 ~ 30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당군이 후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해서 곧 사비성에 입성했다고 기술된 점에서 신라군이 그 전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군의 합류 시점이 백제와의 결전 이후라면, 당군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약속한 날짜에 도착했는데 신라군은 계백의 별동대의 저항을 처리하지 못해서 날짜를 지키지 못한 셈이 되므로 소정방이 격분해서 신라 독군의 목을 베겠다며 날뛴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58] 《삼국사기》를 제외하고 중국의 모든 사서와 삼국유사는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는 부여융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나중에 부여효로 태자가 교체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일단 다수의 사서에서 부여융을 태자로 기록하고 있는 만큼 부여융이 태자였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게 보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다면 이는 655년 정월에 발생한 친위 쿠데타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59] 흑치상지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소정방에 의해 수도 사비성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이 벌어졌다고 한다.[60] 백제의 멸망을 앞두고 처자식 등 일가를 죽인 후 전장에 나갔던 계백 일가의 사례가 있다.[61] 개성 왕씨가 고려 왕조 멸망 후 어떻게 되었나 참조해 보자.[62] 현 부여 서씨가 부여융을 시조로, 의령 여씨(여(성씨))가 부여풍을 시조로 하고 있다. 의령 여씨의 경우 부여풍의 후손인 여선재가 숙종(고려) 때 한반도에 다시 돌아온 케이스고 부여 서씨의 경우 부여융의 후손이 맞다면 당군의 납치를 피해 숨어 살았던 부여융의 후손에게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63] 토착세력은 주로 촌주를 맡았다.[64] 신형식의 신라 통사 참조. 고려 국가와 집단 의식 참조.[65] 이때는 이미 엄청나게 먼 친척이었기 때문에 그냥 같은 진골 김씨였다 뿐이지 사실상 프랑스 왕국의 카페 왕조-발루아 왕조-부르봉 왕조의 교체에 비견될 만한 세력 교체였다.[66] 다만 왕순식의 경우 그가 정말로 강릉김씨였는지 의문이 있다. 왕순식 항목 참조. 별개로 강릉김씨가 신라 하대 왕위쟁탈전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된 건 사실이다.[67] 또한 구 마한계 및 가야계 주민들의 각각 백제와 신라에 대한 동화 정도도 확실하지 않다.[68] 물론 고구려는 그때 후연, 북연 등 중국 세력과의 양면전선을 겪고 있기도 했다.[69] 물론 이걸 갖고 백제인은 대부분 일본으로 떠났으니 따라서 한국과 백제는 전혀 관련이 없다라고 보면 곤란하다. 당대의 기술로는 배를 통해 그것도 해상으로 대규모로 타국으로 이주하는 것에는 한계가 많고 더더군다나 국가 주도의 원정도 아닌 규모가 미약한 일개 가문들의 해상이동이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가는 가장 좋은 루트는 이미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신라에 의해 막혀 있었기에 국가 단위의 대규모 이동이었다면 당연히 신 국토 개간을 위한 노동력이 매우 필요하며, 수군이 건재한 신라가 그것을 보고만 있었을 리가 없다.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미 농경이 주류산업인 상태에서는 수렵시대와는 달리 인구가 매우 불어나 있기에 부양능력도 없이 대규모로 어딘가로, 그것도 바다를 통해 떠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애초에 백제인이 거의 안 남아 있었다면 백제부흥운동과 후백제의 발흥은 설명 자체가 안 된다.[70] 다만 유즈키노키미는 진시황의 후손을 칭했다. 이는 참칭으로 보인다.[71] 그나마도 구당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타충의, 부여준, 흑치준을 뺀 나머지 인물들은 금석문에서 그 행방을 알게된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