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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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도농복합시이다. 북쪽으로 김제시와 완주군, 동쪽으로 임실군, 서쪽으로 부안군과 고창군, 남쪽으로 장성군과 순창군에 접해 있다. 면적은 전북의 시군중에서 4위이며, 1998년 10월 31일의 행정구역 조정 이후 기준으로 1개의 읍, 14개의 면, 8개의 행정동으로 구성된다.
인구는 1960년대 중반에 한때 25만명을 넘은 적도 있었으나 이후 점차 인구가 줄어들었고, 2012년 인구조사 때는 11만명대까지 추락했다. 그렇긴 해도 전주시, 익산시, 군산시에 이어 전라북도에서 인구가 네번째로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호남의 양대 도시인 광주광역시와 전주시의 중간점이다.
2. 역사
삼국시대 이전에 마한의 고비리국, 구소국, 첩로국, 초산도비리국이 위치해 있었다고 하며, 백제 때에는 정촌현, 대시산군, 고사부리군의 3개 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라 경덕왕 때 전국의 행정단위 명칭을 개정하면서 정촌현→정읍현으로, 고사부리군→고부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고려 시절에는 고부군이 중심이 되고 정읍현은 그 속현이 되었다.
조선시대 초에 태산군이 인근의 인의현과 통합되어 태인현이 되었다. 조선 중기인 1589년(선조 22년)에는 고부군의 속현이었던 정읍현이 정식으로 독립된 현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독립된 정읍현의 초대 현감으로 '''이순신'''이 부임한다. 더군다나 이순신이 정읍현감으로 있던 시절에는 태인현감이 공석이어서 이순신이 태인현감 업무까지 겸직으로 다 처리했다. 사실상의 초대 정읍시장이라고 할 만 하다. 이순신이 승진하여 떠나갈 때 백성들이 훌륭한 사또를 데리고 간다며 승진반대 청원까지 냈다고 한다.
이후 행정구역의 개편없이 이어지다가 갑오개혁 이후 1896년에 행정구역 명칭이 정읍군으로 바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태인군과 고부군이 정읍군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 4월 1일 정읍면이 정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33년 용북면이 신태인면으로 개칭되고 1940년 11월 1일 신태인면이 신태인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 정주읍이 정주시로 승격되어 정읍군과 분리되었고 1983년 2월 15일 내장면 전역과 등이 소성면 일부, 덕천면 망제리, 북면 일부가 정주시에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전국 도농통합 정책에 따라 정주시와 정읍군이 다시 합쳐져 현재의 정읍시가 된다.
여기서 '정주(井州)'라는 이름은 정읍면이 읍으로 승격될 때, 그대로 '정읍읍' 이 되면 '읍(邑)'자가 중복되어 발음상 불편하다 하여 지명에 흔히 쓰이는 글자 중 하나인 고을 주(州)자를 써서 '정주읍'으로 이름을 바꾼 것인데, 이것이 훗날 정주읍이 시로 승격될 때도 그대로 시 명칭으로 이어져 '정주시'가 되었다가 1995년 정읍군과 통합하면서 원래의 명칭인 '정읍'시로 돌아간 것이다. 상당히 오랜기간 정주로 통하다가 되돌아간 게 이제 20년 남짓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정주라 해도 대부분 알아듣고, 아직도 정주가 정식명칭인지 아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참고로 이름이 정주였던 시절에는 '전주(全州)'와 '정주'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같은 전라북도에 있는데다가 발음까지 비슷하기 때문.[7]
2.1. 정읍사
현재까지 가사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백제 가요인 '정읍사'가 있다. 고등학교 문학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수능에도 자주 나온다.
전주의 속현인 정읍에 한 장사치가 있었는데, 어느날 행상을 떠난 뒤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내가 산 위 바위 위에 올라가 달빛 아래로 뻗친 길을 바라보며,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해를 입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진흙에 빠지는 것에 비유하여 노래한 것이다. 이는 망부가(望夫歌)의 하나로 남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노래이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정읍 등점산에 망부석이 있다고 전해진다.
3. 지리
3.1. 자연지리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가 제대로 나누어지는 곳이다. 노령 산맥의 고개인 갈재(한자어로 노령)을 넘으면 전남이다. 실제로 과거부터 전남과 전북이 교류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현재는 갈재 아래에 뚫린 호남고속도로의 호남터널로 전남북을 왔다갔다한다. 실제로 이 노령산맥이 전남과 전북의 문화적 차이를 구분지었으며, 장성군과 붙어 있어도 정읍 사투리는 전남의 사투리와 많이 다르며 여느 전북지방 방언과 별 차이 없다. 또한 전남권의 대도시 광주광역시보다는 전북권의 대도시 전주시를 더 가깝게 생각한다. 대학입학 학력고사 시절에 정읍 출신 수험생들은 모두 전주에 가서 시험을 봤다고 한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오는 것이 특징. 매년 한두 차례는 폭설 때문에 기상 특보에 등장할 정도이며, 단기간 강설량 기록도 눈 많이 오기로 유명한 강원도가 아닌 정읍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렸다하면 강원도나 울릉도처럼 1m 이상 눈이 쌓이는 일이 허다하진 않지만 어쨌든 많이 내리긴 한다. 이는 지리적으로 정읍이 노령 산맥 끝자락 북쪽에 위치하는데, 시베리아 고기압 세력이 확장하면서 서해 바다를 지나면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구름이 노령 산맥을 넘지 못하고 정읍에 눈을 쏟아 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조금만 차를 달려 전주나 익산만 가도 눈이 안오는 경우가 허다하며, 비슷하게 고창 역시 눈이 많이 오는 편에 속한다고. 최대 적설량은 2005년 12월 21일의 45.6cm로 하루만에 온 적설량으로는 전국적인 수준. 그리고 2014년 12월 1일 밤부터 2일 밤까지 시원하게 24.2cm를 뿌렸다.적설량 2위.(1위는 부안으로 26.8cm가 왔다. 고창은 23cm이 내려 3위.) 그리고 오랜만에 하루만에 36cm(.....)의 눈이 오는 대기록을 세웠다..
분지지역이라 같은 분지지역인 대구광역시처럼 여름에는 엄청나게 더워 비공식 최고기온이 40도를 넘은 적도 있었으며 2011년 여름에도 하루 400mm의 비가 내려 9시 뉴스 메인을 장식했었다. 정읍 기상관측 이래 최고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상황이 어떠했냐면 정읍천 상류쪽은(내장산 저수지부터 시작해 정읍역 근교까지) 벚꽃 터널 둑길을 불과 1m 좀 넘게 남겨 놓고 범람할 위기에 처했으며 실제 하류 쪽과 상류의 일부 지역은 범람해 마을과 도로가 물에 잠겼을 정도였다. 심지어 정읍천 상류 쪽 금붕동에 자리한 정주고등학교는 학교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음에도 버스가 올라오는 언덕길까지 물이 무릎 아래로 차올랐고 그보다 좀 더 아래긴 하나 역시 상류와 인접해 있던 정읍고등학교는 아예 허리 높이까지 물이 차기까지 했다. 단, 이쪽은 하천이 범람해서가 아니고 하천보다 낮은 지대에 느린 배수 등의 악조건이 겹쳐 침수되었다.[8]
사실 시 외곽의 천이 비에 넘치는 일은 비교적 자주 일어났었지만 시내를 관통하는 구간까지 범람할 위기에 빠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가뜩이나 둑길 아래에는 주택가가 밀집해 있어서 범람시 주택가는 꼼짝없이 침수당할 판이었다. 다행히 대규모 침수는 면했지만 지대가 낮고 배수가 취약했던 몇몇 곳은 침수되었고 시내 곳곳에서 맨홀이 넘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이 폭우로 정읍천도 많이 망가졌는데 청소년 물놀이장의 난간이 휘어진 것은 기본이고 각종 운동기구들이 뿌리째 뽑혀나갔으며 심지어 상동의 어느 다리가 무너지기까지 했다.(지금은 새로 지었다.)
좌우간 기상과 관련하여 한줄로 요약을 하자면... 여름에는 폭염이, 겨울에는 폭설이 내리는 어마무시한 동네이다.
3.2. 2개의 시가지
정읍에서 시가지라고 부를 만한 지역이 두 군데 있다. 구 시가지는 시기동의 명동의류[9] 앞에서 연지동의 정읍역사 앞까지 이어지는 2차선 도로변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위치하고 있어서 유동인구가 많다. 시내 지역에서 점포가 가장 많은 지역[10] 으로 예전에는 그야말로 정읍시내의 중심지라고 부를만한 지역이었으나, 신시가지가 생기면서 아무래도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일단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농산물 도매시장[11] 이 이전한 것과 주변 상가들의 반대로 도로 확장을 못하고 있는 점 때문에 사람이 많이 줄었으며, 이 때문인지 문을 닫는 가게들이 종종 보인다.
신시가지는 수성동 지역에 IMF 이전부터 조성을 시작한 택지지구 쪽이다. 한 때 시에서 신시가지 활성화를 위해 여러가지 지원을 하려던 차에 하필이면 IMF 사태가 터지면서 현재까지도 개발은 지지부진하며, 지금도 군데군데에 빈 야지가 보이고 있다. 그래도 최근에는 원룸이나 상가들이 상당히 들어섰으며, 수성주공아파트~샘골터널까지는 술집과 식당가가 다수 들어선 나름대로의 먹자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상동쪽 개발 제한이 풀리면서 건물들이 줄을 이어 올라오고 있다. 정읍시의 많은 인구수를 차지하고 있고, 학교와 아파트가 밀집된 곳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다만 아직까지는 시기동과 수성동이 다져놓은 기반에는 미치지 않아 옷가게 같은건 볼 수 없고 주로 식당, 카페, PC방, 노래방 등의 1차적인 편의시설만 올라오고 있다. 즉, 학생과 아저씨의 거리.
실질적으로 자녀들의 학업문제나 생활편의등의 이유로 베드타운인 전주시 등지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고, 젊은층의 인구대비 노년층의 인구가 많아지고 일반주택들이 점점 사라지는 추세라서 아파트는 잘 나가는 편. 아무리 전주가 베드타운이라고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도 2016년 현재까지 고급 아파트가 계속 지어지고 있다.[12] (...)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현재 철도가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효과, 예를 들면 교통성이 좋아져서 베드타운으로 인구 유입이 늘어난다든가 하는 현상을 노린 것일 가능성도 있다.
예외인 직업은 공무원 계열이며 실제로 교사들은 집이 광주, 전주권인 경우도 많다.
3.3. 읍면지역
이러한 정읍의 안습한 상황은 읍면지역이라고 해서 딱히 별반 다른 것도 아닌데, 농촌의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딱히 특산물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한때 참외를 특산물로 민 적이 있었으나, 지력(地力)도 생각하지 않고 농사를 지은 점과, 농민들이 기준 미달인 상품을 섞어서 출하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보니 아예 정읍 참외의 수매 자체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져 결국 참외 농사 전체가 망해버린 뼈아픈 역사도 있다. 이후 한동안 이렇다 할 특산물도 브랜드도 없었으며, 몇 년 전부터 단풍미인이라는 브랜드로 쌀이나 복분자 제품 등을 출시하고는 있으나, 그 지명도는 별로 높지 않다. 쌀은 바로 옆동네에 넘사벽인 김제시가 있는데다, 주로 토질 문제로 그렇게까지 좋은 수준의 쌀도 나지 않는다. 이는 정읍 현지민들도 인식하고 있어 스스로가 정읍쌀은 맛없다고 디스(...)를 할 정도이지만, 쌀을 대체할 만한 농산품을 개발할 만한 여력도 없는 농민이 대부분인데다 지자체에서도 그리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복분자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옆동네 고창군 복분자의 인지도가 워낙 높은 탓에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실 복분자 재배의 원조는 정읍시 내장산 일대로, 고창군이 그 뒤를 따라간 것인데, 지금은 역으로 정읍산 복분자가 고창 브랜드를 달고 출하되는 형편이다.
그나마 내세울 것은 10년 전부터 조성한 산외한우마을로 전주, 김제, 부안, 순창을 비롯한 주위 지역에서 찾는 사람들이 꾸준히 있다. 전북 일대에서는 가장 알려진 한우 거래장터로 손꼽히는 덕분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에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지만, 수입산 쇠고기의 가격이 내려가면서 매출이 점점 감소하고 있어서 이것마저도 경기가 매우 좋지 않다. 시에서도 이를 인지했는지 점점 쇠락하는 한우마을 대신에 산내면의 구절초 축제를 홍보하면서 지역 경제를 살려보려 하지만, 효과가 아직까지 크진 않다.
북쪽에 신태인읍이 있는데, 소읍치고는 꽤 큰 편으로 기차역(신태인역)도 따로 있을 정도이다. 사실 원래 아무것도 없던 한적한 농촌이었지만, 일제강점기 호남선 철도를 놓을 때 옛 태인현 소재지인 태인면을 거칠 경우 노선이 지나치게 굴곡지게 되는데다 부안군에서의 철도 접근성도 제고하기 위해 지금의 신태인을 지나도록 하였고, 이에 태인을 대신하여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호남선과 전라선, 경전선을 비롯한 호남의 철도 교통이 단선 운행과 여객열차의 긴 배차간격으로 인해서 쇠퇴했으며, 그리고 경부ㆍ경인라인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신태인읍은 1960년대 이후 성장이 멈춰버려 지금은 읍내라고 보기도 민망할 정도로 많이 쇠락한 상황이다. 1960년대에 2만 5천명이던 인구가 지금은 7천여명에 불과하다.
일제시대 이전에는 고부군이 정읍현보다 더 큰 고을이었으나, 지형상의 이유로 호남선 철도가 고부를 통과하지 못하고 정읍으로 가게 되었고[13] 1914년 일제의 부군면 통폐합 때 고부가 철도 요충지로 성장하기 시작한 정읍에 병합되면서 현재 고부는 정읍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단, 이런 배경이 있었던 탓에 고부쪽에도 작긴 하지만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정읍과는 별개로 부안, 고창 등지와 연결되는 버스망을 가지고 있다.
'''만약이지만 고부로 철도가 부설되었다면''', 고부면이 인구 증가하고 발전해 읍이 될 수 있는데다 정읍(이 경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정읍군'이 아닌 '고부군'으로 통합되었을 것이므로, 엄밀히는 '고부')은 지금보다는 더 큰 도시로 남아있었을 지도 모른다. 정읍 시내의 지형도와 고부 지역의 지형도를 살펴보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정읍시내는 호남평야와는 거리가 있고 온갖 고개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정읍역의 동쪽으로 형성된 시가지는 확장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이야 도로가 뻥뻥 뚫려있고 대중교통도 좋아져서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 6~70년대만 해도 상권이 형성되고 주민들이 모이면서 도시가 성장했을 것이고, 이 때 중요한 것은 넓은 평야의 확보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또한, 고부가 중심지가 되었다면 부안이나 고창에서의 접근성이 더 좋아지기 때문에 도시의 성장에서 더 유리했으리라 짐작해본다.
4. 금융
5. 교통
'''정읍시 시내버스 요금 : 2019.1.1 ~ (단일요금 시행)'''
* 교통카드로 하면 모두 '''50원''' 할인이다. 그냥 '''카드'''만 대자.
하단의 내용은 2018년까지의 내용이다.
단순 과거의 정보로써만 참고하자.
'''시내버스 요금 : 2017.1.16 ~ 2018.12.31 '''
시내버스 운임은 회차점 이전까지는 주로 '''탑승시 지불'''이며, 회차점 통과 이후 '''하차시 지불'''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환승 제도가 없기 때문에 시내 방향 탑승인 경우 탑승시 지불이고, 회차점[14] 을 통과한 이후엔 시내 외곽으로 향하게 되므로 하차시 지불이 되는 것. 단, 시내순환노선인 277번은 예외이다.
기본운임 거리는 북면, 태인행은 정읍시청 2청사와 덴마크우유 공장까지, 덕천행은 1공단까지, 내장산행은 정주고등학교까지 , 입암행은 대흥리, 칠보행은 3공단까지, 산외·산내행은 3공단 혹은 정주고까지가 기본운임이다.
택시가 기를 못 펴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읍 시민들의 소득이 그리 높지 않고 정읍이 시내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상당히 좁아 어지간하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라[15] 시내 지역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은 굳이 택시를 타야 할 일이 별로 없는 등 그 수요가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지역 규모나 인구수에 비해 택시 대수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 이 때문에 시내 곳곳에서 차를 세워둔 채 반쯤은 놀고 있는 택시들을 간간히 볼 수 있으며, 일부 택시들이 정읍역 앞 등지에 불법 주정차를 해놓고 호객행위를 하거나 일부 택시기사들이 모여 조폭택시 같은 행태를 보여주는 등의 일이 자주 벌어졌다. 현재는 정읍역이 신 역사로 바뀌면서 불법 주정차를 하기 어려운 구조로 바뀌었고,[16] 단속을 빡세게 한 덕분에 저런 경우는 많이 줄어든 상황. 하지만, 역으로 좁은 시내라는 점을 생각하면 택시비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고, 정읍 버스의 단점[17] 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의외로 중고등학생이 서너명 모여서 택시로 등교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학생 네명이 버스비를 모으면 택시를 타고도 돈이 남거나, 넘더라도 큰 차이가 안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배차와 불합리한 코스로 인해 손실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서 꽤 많은 학생들이 등교수단으로 택시를 이용한다.
시 분위기 상 자전거 이용을 많이 장려하는 편인데다 실제로 도로도 잘 닦여 있어 자전거 이용률이 매우 높다. 정읍 천변에 자전거 길을 잘 닦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시청 앞 대로의 보도는 아예 보도블록이 아니라 평평하게 만들어 놓는 등 시에서 신경을 많이 써 준 편이다. 특히 자전거 헬멧을 구입할 때 6만원 이상을 구입하면 시에서 보조금으로 3만원을 준다(!) 다만 신청서를 넣더라도 한꺼번에 모아놨다가 분기별로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린다.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시청 앞에는 공짜로 쓸 수 있는 공기주입기도 설치되어 있을 정도. 자전거를 이용하게 되면 도보로 40분이 걸리는 거리를 20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전거가 있는 사람들은 짐이 많지 않은 이상 택시도 버스도 이용하지 않고 자전거를 많이 탄다.
6.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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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자가 '''400m'''이니, 산으로 둘러싸인 시내 면적이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다. 그나마 개발로 인해서 도로가 많이 생겨서 이 정도 되는 것. 북쪽에 보이는 수성동 시가지는 개발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내에서도 언덕길 하나를 넘으면 논밭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농지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시내도 번화가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지만 2005년 이후로 시내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정읍이 전주와 가까운 상태로 1시간 이내면 도착할 수 있게 된 까닭이 크다. 또한 다른 업종들도 가게의 수가 적어 상대적으로 독과점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보니 어지간한 것들은 주위 지역보다 비싸다.[18] 1990년대만 해도 이웃 고창에서 정읍을 주 생활권으로 삼았기 때문에 괜찮게 나가는 편이었는데, 고창담양고속도로 개통으로 광주로 가는 길이 좋아지면서 영 좋지 않게 됐다.
지방 중소형 극장으로 성림극장, 유림극장, 정읍극장, 현대극장, 중앙극장의 5곳이 있었으나, 이 중 성림극장, 유림극장, 정읍극장은 2000년 이전에, 현대극장은 2008년 9월쯤 폐관하여 중앙극장만이 중앙시네마(1,2,3관)라는 이름으로 토종 복합상영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영화관 사장님의 근성으로 운영된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상태다. 앞서 언급되었듯 정읍에는 다른 번화가가 없고, 전주나 익산 등으로 손쉽게 갈 수 있기 때문에, 주 고객인 젊은이들이 전주나 익산가서 쇼핑도 하고 볼거리도 구경하고 영화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 그나마 사람이 많은 때는 중고등학생들 영화 단체 관람이나 명절 때 정읍에 내려오는 사람들이 영화볼 때 정도이고, 명절 때도 시간대만 잘 맞추면 재벌처럼 영화관에서 혼자 아주 편하게 영화감상을 할 수 있다. 참고로 1박 2일 시즌1의 마지막회 촬영지. 40년 전통의 극장이지만 2014년 1월 17일 고별상영전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한편 CGV가 시내에 건설되었고 중앙시네마는 CGV별관이 되었다. 2014년 1월 26일에 정식 개관이 되었다.[19] 과연 CGV라는 브랜드가 정읍시에서도 먹힐지 의문이었는데 2014년 5월 현재 영화보러 전주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인지 꽤나 흥하고 있다.
이처럼 번화가가 없는 정읍이었지만 과거형으로 현재는 많은 시설들이 건설되었다. 시설들은 다음과 같다.
6.1. 대형마트
6.2. 영화관
6.3. 패스트푸드
- 버거킹 정읍중앙점
- 맥도날드 전북정읍DT점
- 맘스터치 시기점
- 롯데리아 시기점
- 굽네치킨 수성점
- 멕시카나 신태인점
- 페리카나 상동점[22]
- BBQ치킨 정읍수성점[23]
- BHC 정읍수성점[24]
- 네네치킨 수성점[25]
- 처갓집양념치킨 정읍수성점
- 도미노피자 정읍점
- 피자마루 정읍점
- 뽕뜨락피자 정읍점
- 피자스쿨 정읍수성점[26]
- 피자나라 치킨공주 정읍수성점
6.4. SPC
6.5. 커피
- 스타벅스 전북정읍DT점
- 투썸플레이스 정읍상동점
- 탐앤탐스 정읍점[29]
- 이디야 정읍수성점[30]
- 공차 정읍상동점
- 더리터 정읍시기점 [31]
- 빽다방 정읍터미널점
- 메가커피 정읍점
- 요거프레소 정읍수성점
- 바빈스커피 정읍수성점 [32]
- 토프레소 정읍점
- 아가페 정읍시기점
- 콩샌 정읍점
7. 관광
동학혁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고부면과 덕천면 등지에 관련 유적지가 상당수 있다.
주위에 유명한 관광지로 내장산이 있는데, 최근 전남에서 내장산-백암산 국립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자고 청원, 정읍 측에서는 "그럴거면 입암산도 같이 넣어서 내장산-백암산-입암산 국립공원으로 하자"라고 하는 의견까지 내며 반대하고 있다. 사실 최근에는 내장산쪽보단 백양사쪽으로 가는 관광객이 느는 추세이며, 단풍관광 자체도 고창에서 애기단풍이라는 광고를 시작하면서 관광객을 어느정도 뺏긴 상황이다. 그 외에 시내에 충무공 이순신을 모시는 충렬사가 있다. 이순신 장군과 정읍이 무슨 관계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분이 정읍현의 현감을 맡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의 충렬사 및 충무공원은 해방 이후에 조성된 것이며, 원래는 시가지 남쪽의 과교동에서 모셨다고 한다.
사실 정읍시는 관광객들이 머물만한 숙박시설이나 즐길만한 오락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33] 하므로 내장산을 관광하러 온 사람들은 고창 등지에 숙소를 잡는 일이 허다하다.
자세한것은 내장산 국립공원참고.
8. 교육
전라북도 전주시의 일반계 고등학교 개수가 모자라는 관계로 김제와 함께 신태인, 태인지역에 많은수의 일반계 고등학교가 있다.[34] 전주시내에서 떨어지면 이쪽으로 가는 것.
4년제 대학은 아예 없고, 전북과학대학교라는 전문대학이 하나 있는 정도이다. 이 때문에 대학진학을 위해서는 어떻게 되든지 시 밖으로 나가야 하는 형편으로, 대형 대학교가 없는데다가 한 번 대도시로 나간 젊은이들은 거의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정읍시의 인구에서 젊은이들의 비율은 특히나 낮다. 정읍시 말고도 대부분의 중소도시의 경우 일자리가 매우 부족하고 생활환경도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는 관계로 대학이 여러개 있어도 대부분 졸업생들이 타지역으로 나가서 일하니 졸업 이후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2007년 말에 신활력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동'단위에 있는 학교들도 농어촌학생으로 특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전주 쪽에서 내신을 노리고 전학오거나 입학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 신활력사업은 2008년~2010년까지밖에 효력이 없었기에, 2015년 현재 시점에선 더 이상 시내지역 고등학교에 농어촌전형을 노리고 오는 학생은 없다. 물론 대체로 학생들 성적이 전주 쪽 보다는 낮은 편이기에, 내신만으로 대학에 가려 한다면 최상위권을 유지할 자신이 있다는 전제 하에 현재도 상당히 좋은 조건이기는 하다.
2014년 봄에 정읍천 너머 산 중턱의 언덕 위에 있던 시립도서관이 상동으로 이전을 했다. 이용의 가치에 비해 규모가 작았던 데다 가는 길이 멀고 언덕 위에 있었던 탓에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이전을 하면서 완전히 탈바꿈했다. 덕분에 이용이 매우 편해지고 책 수도 많이 늘어났다. 기존의 시립도서관 건물은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운영하고 있다.
상권의 중심지가 연지동이라면 교육의 중심지는 상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상동에 학군과 학원들이 몰려있다. 초등학교만 두 개가 있고 중학교 하나에 특성화고가 하나, 거기에 일반계고도 하나가 있고 상동에서 멀지 않은 금붕동에 일반계(인문계)고 하나가 추가로 있다. 거기에 다리하나만 건너면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하나씩 있기에 상동에는 아파트도 많고 주택가도 제법 크다. 그만큼 다양한 학원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마트, 은행 등 다양한 종류의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거기에 시립 도서관이 이전을 해버렸으니 자타공인 교육의 중심지이라고 할만하다. 다만 그탓인지 땅값이 다른 동보다 비싸며 특히 상가 부지가 비싸다는 듯.
8.1. 초등학교
8.2. 중학교
8.3. 고등학교
8.4. 대학교
- 전북과학대학교
- 전북대학교 약학대학의 일부 교육과정을 입암면 신정동에 위치한 정읍 첨단과학산업단지 국책 연구기관과 협력하여 실시할 예정이다.
9. 정치
'''해방 당시의 정읍'''은 전국에서 손꼽을만큼 많은 인구가 있던 우리나라의 주요 지역이었다.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지만 이 농촌 지역에서만 인구가 무려 '''20만명''' 이상으로 지금의 두 배나 될 만큼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았다. 그래서 이승만이 미군정 시절에 '남쪽만이라도 투표를 해서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정읍발언이 화두가 되었다. 이런 발언을 주요 도시에서 하지 않고 농촌 지역인 정읍에서 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읍의 위상이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39]
결국 남북이 각각 따로 정부가 수립되어 분단이 고착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지면서 전국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었다. 정읍 또한 1950년 7월 말~9월 중순까지 북한군에 점령되어 모진 고초와 민간인 학살을 겪었다. 이 때문에 반공주의와 동시에 한강 다리를 끊고 피난을 간 이승만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게 자라났다. 아무런 대책 없이 통으로 호남을 북한군에 내주었을뿐만 아니라 다시 수복한 이후에 빨갱이를 적출한다는 명분으로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픔 때문인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수많은 부정선거를 저질렀음에도 정읍에서 49.14%를 얻어 조봉암의 50.85%에 근소한 차이로 밀렸다. 박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봉암의 완승이었다. 전북 전체에서는 이승만이 60% 이상의 득표율로 크게 승리했을뿐만 아니라 당시 선거는 전국이 여촌야도 구도로 치뤄졌고 농촌에서는 이승만에게 몰표가 쏟아졌던 시절이었기에, 정읍발언이 있었던 정치적 상징성이 있던 지역으로서 충격적인 결과였다.
결국 4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은 하야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면 내각정부가 들어선지 불과 1년만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계엄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치뤄진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 박정희가 49.96%를 얻어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에 10% 가까이 앞서 승리를 거두었다. 7년 전 조봉암이 이승만을 꺾은 것은 정읍이 딱히 진보적이어서가 아니라 이승만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음이 확인된 선거 결과였다. 반면에 같은 해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민당 후보가 2%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했다. 4년 뒤 총선거에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대통령 선거는 윤보선이 50.91%, 박정희가 40.65%를 얻어 10%의 격차로 반전이 일어났고, 국회의원 선거는 민주공화당이 59.9%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처럼 당시의 정읍은 딱히 이념에 좌우되지 않는 스윙보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지역주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남 신안 출신의 김대중이 신민당의 젊은 기수로 등장하면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고, 김영삼을 꺾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박정희와 1:1 구도로 붙게 된 것이다. 당시 양쪽 후보가 각각 경상도,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각 당에서는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선거 전략을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그 결과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정읍에서 69.27%를 얻어 26.86%에 그친 박정희를 매우 큰 격차로 압도했다. 김대중 득표율은 전북 전체 평균보다 10% 앞섰고, 이리시[40] 다음으로 높은 수치였다. 정읍이 전주와 광주의 중간에 있어 광주전남에 정서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게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지역 구도가 드러나게 되었지만, 간발의 차로 당선된 박정희가 유신 헌법을 선포하고 직선제를 폐지하면서 완전한 독재의 길로 들어서면서 지역주의가 드러날 출구가 사라지게 되었다.
직선제가 폐지된 16년 사이에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정읍을 포함한 모든 호남 지역의 정치에 거대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총칼을 휘두르고 수많은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정읍은 광주로 통하는 북쪽의 입구 역할을 하였다. 호남고속도로가 호남터널에서 군부에 의해 막히고, 열차는 정읍역이 회차점이 되면서 서울 경기 지역의 많은 광주 및 그 이하지역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정읍에서 택시를 타고 광주로 향했으며, 이로 인해 당시 정읍의 택시기사들에 의해 광주의 실상이 많이 전해졌다[41] . 또한 1986년 당시 천주교 시기성당등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이 담긴 비디오가 속속 상영되는 등 전두환 정권의 악랄함을 광주광역시 바깥에선 그나마 가장 잘 아는 도시였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6월 항쟁으로 본격적으로 5.18의 진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이 항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우세했다.[42]
하지만 이 사건으로 전라도 출신 전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뒤집어씌우게 되고, 정읍민들 역시 타지에 나가면 갖은 차별과 냉대를 당하고 인사에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영문도 모른 채 차별을 당해야 했던 정읍 사람들은 역시 대구 출신이었던 당시 전두환 독재정부에 강한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호남 출신이었던 김대중의 영향력이 크게 상승하게 되었다. 설상가상 6월 항쟁으로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5.18에 관한 정보가 알려지면서 민심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쏠려, 지역 기반의 4자구도 속에 치뤄진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각각 86.49%(정주시), 84.35%(정읍군)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었다.
이듬해 열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평민당 후보가 64.29%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광주전남만큼 압도적인 스코어는 아니지만 대선 80%, 총선 60% 이상의 득표율로 몰아주는 구도가 이후에도 꾸준히 유지되어, 민주당계 정당이 갈라진 2004~2007년, 2016년 이후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보수정당의 지지도는 꾸준히 떨어졌다. 대선의 경우 1987 대선 13.99% → 1992 대선 6.74% → 1997 대선 5.25% → 2002 대선 4.95%, 총선에서는 1988 총선 28.49% → 1992 총선 15.90% → 1996 총선 14.99% → 2000 총선 2.48%(...)로 꾸준한 감소세를 보였다. 민주화 직후에만 해도 언론의 말을 철썩같이 믿던 보수성향 유권자들이 많았으나, 독재시절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의 진실이 알려지고 김대중 후보가 번번히 낙선하면서 동정론이 일자 그나마 남아있던 보수 유권자들이 점점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민주정당의 지지도는 대선에서는 1987년 86.48% → 1992년 91.43% → 1997년 93.65% → 2002년 92.81%, 총선에서는 1988년 65.41% → 1992년 74.74% → 1996년 80.59% → 2000년 57.58%를 기록하여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였다. 특히 김대중이 4번째 대통령에 도전했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IMF 사태까지 겹쳐 전례없는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개발 시대에 소외되어 경제력이 바닥을 기는데다 같은 호남인으로서 대통령 한 번 만들어주자는 염원이 총결집된 사례였다. 이 이후 민주당 지지층은 다소 이완되기 시작하여 총선 및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득표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지지층이 크게 분열된 것은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및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읍에서는 압도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2004년 4월에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김원기 후보가 49.56%를 얻어 새천년민주당 윤철상 후보를 27.31% 차이로 누르고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고, 비례대표 역시 열린우리당 63.29 : 16.96 새천년민주당으로 무려 네 배의 격차를 보였다. 이후 여당이자 과반수 정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개혁정책을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하고 표류하자 지지도가 크게 떨어져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반대로 대참패를 당했는데, 정읍이 속한 전북은 열린우리당이 성공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도지사 선거에서 정읍은 50% 가량을 열린우리당 후보에 몰아주었고 시장 선거에서는 31.77%를 얻어 23.68%에 그친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앞섰다[43] .
이후 민주당계 정당이 모두 지리멸렬해지면서 다시 하나로 봉합되었고, 갈등의 불씨를 살린 채 10여년 가까이 하나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의 분열을 겪은 양쪽 지지자들은 쉽게 융합되지 못했고, 정읍에선 이전같은 민주당 지지율을 회복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18대 총선 비례에선 65.74%를 얻어 17대 총선의 80.25%(열린우리당+새천년민주당 합산)에 비해 크게 떨어졌고, 무소속 유성엽 후보가 61%의 압도적인 표를 얻어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4회 지선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도지사, 시장 모두 당선되었으나 시장 선거에서는 불과 33%의 득표율에 그쳐 두 명의 무소속 후보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다시 2년 뒤 열린 19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유성엽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을 만큼, 민주당에 대한 불신 성향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결국 아슬하게 이어지던 친노 + 비노 연합체제는 2015년에 폭발하여 비노 및 동교동계 세력은 안철수와 연합하여 국민의당을 창당, 다시 민주당계 정당이 둘로 찢어지게 되었다.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했던 유성엽 의원도 국민의당에 합류하였고 이들은 호남 홀대론 및 친노 심판론을 외치며 주야장천 호남에 읍소하였다. 기존 민주당에 환멸을 느끼던 정읍 유권자들을 자극하여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국민의당 유성엽 의원이 57.08%, 비례표에서 47.84%를 얻어 더민주의 지역구 28.64%, 비례표 30.48%를 큰 격차로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 대표가 비박의 동의를 얻어야 탄핵이 가능하다면서 한 발 빼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정읍의 유권자들이 크게 분노하여 국민의당은 정읍을 포함한 전북에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재보궐선거로 치뤄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62.61%를 얻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모든 읍면동에서 55% 이상 과반 득표를 한데다 정읍에서 유일하게 젊은층이 몰려사는 수성동에선 65% 이상을 기록했다. 반면에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27.43%에 그쳐 문재인에게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대패를 했다.[44] 이로서 3선을 기록한 유성엽 의원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끼게 되었고, 결국 국민의당 분당 사태 이후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바른미래당, 민생당 등으로 사분오열된 끝에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 윤준병 후보에 7:3으로 더블스코어 이상으로 깨져 유성엽 전 의원은 정계에서 밀려났다.
정읍 출신의 유명 인물은 노무현의 정치적 스승인 김원기 전 국회의장, 정읍에 연고를 둔 유성엽 의원, 문재인 정부의 국토교통부 장관을 맡은 김현미 장관이 있다. 김원기는 정읍에서만 6선을 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17대 국회의 전반기 국회의장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18대부터는 정읍시장을 역임한 유성엽이 19대까지 '''무소속'''으로 재선에 성공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나 했더니..안철수와 함께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였으며, 20대 총선에서도 3선에 성공하였다. 김현미 의원은 연고를 일산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고향인 정읍 출신 인물 중 사상 최초로 여성 장관직을 맡은 3선 중임의원으로 문재인 정부 들어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2020년 6월 9일 정읍시 지방의원들이 정읍시 집라인 설치를 하기 위해 군산에 현장방문 오전부터 횟집에서 1인 4만원짜리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셔 군산의 집라인을 탈려고 했다. 당연히 직원은 말렸지만 막무가네로 탔고 직원은 술냄새 났다고 증언했다. 사건이 뉴스에서 다뤄지자 정읍시의회의 주장 집라인 설치 계획이라는게 알려지자 정읍시 관계자는 집라인 설치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현장방문 맞아?…술 마시고 놀이기구 탄 시의원들
9.1. 관련 문서
10. 하위 행정구역
11. 기타
2015년 SBS ‘영재발굴단’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영재발굴단 역사퀴즈 대회'에서 1등을 한 학생은 김용현(당시 정읍동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거주하는 곳이다. 정읍동초 김용현군, 영재발굴단 역사퀴즈대회우승
입암면 신정동에 위치한 정읍 첨단과학연구단지에 철도, 의료 클러스터를 조성한다고 해, 도시의 발전이 기대된다. 실제로 각종 연구기관과 기업체들이 들어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다원시스의 지하철 공장이 건설 중이고, 전북대 약학대학의 일부 정규 교과과정을 이곳에서 실시한다.
12. 관련 인물
- 정읍 출신의 인물
- 前 국회의장 김원기
- 김현미: 現 국토교통부 장관, 前 국회의원[46]
- 유성엽 (정읍시·고창군 18~20대 국회의원)
- 김원주: 가수.
- 안두희 암살범 박기서
- 일진그룹 창업주 허진규 , 태인면 출신
- 강광
- 강상섭
- 강요식
- 강일순
- 강팔문
- 국승록
- 김기동
- 김동욱: 보배드림 성추행 판결 논란 판결을 내린 판사.
- 김명균(군인)
- 김병관[47]
- 김생기
- 김승수: 現 전주시장
- 김영삼
- 김유빈: 정읍이 낳은 천재
- 김종구
- 김종문
- 김철규
- 김택술
- 나용균
- 남정집 - 공무원 학원 강사 겸 단국대학교 교수. 입암면 마석리 출신
- 노영국
- 박근형
- 박기남
- 박병엽
- 박수천
- 박실
- 배진교 - 정의당 인천광역시 남동구 지역위원장을 맡았으며 現 제21대 국회 원내대표이다.
- 백정기 - 건국독립 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 선우 훈
- 소강원
- 소진(나인뮤지스)[48]
- 송대관 - 가수
- 송상현
- 송완용
- 송월주 - 前 조계종 총무원장
- 송정애 - 치안감
- 송현섭
- 신경숙
- 오승환 - 야구선수
- 이동영 - 現 정의당 서울시당 위원장, 관악구 지역위원장
- 이수혁(정치인) - 現 주미대사
- 이정기(군인)
- 이천환 - 초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
- 임수정(가수)
- 임오경 - 前 배구선수. 제21대 국회의원[49]
- 양수빈
- 유재길
- 유종근 - 前 전라북도지사
- 유진섭 - 現 정읍시장
- 윤미라
- 윤준병 - 前 서울특별시 행정1부시장, 제21대 정읍시·고창군 국회의원
- 윤철상
- 윤흥길
- 은수미 - 제19대 국회의원, 現 경기도 성남시장
- 이동진 - 現 서울특별시 도봉구청장
- 이석연
- 이승로 -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청장
- 이원배
- 이정훈
- 이청(1957)
- 임대홍 - 미원(현 대상그룹) 창업주
- 임익근
- 장영하
- 장자연
- 정승조 - 육군대장으로 제37대 합동참모의장 역임
- 정진섭(군인)
- 정흥진
- 조희연 - 사회학자, 現 서울특별시교육감
- 차경복
- 최요삼 - 前 권투선수
- 최종문 - 경찰공무원(치안감)
- 탁명환
- 한영대 - BYC 창업주
- 하정열
- 한명규 - JTV전주방송 대표이사, 전라북도 정무부지사
- 한병옥
- 황덕연 - SPOTV 축구 해설위원, 대한민국 U-23 축구대표팀 킷 매니저
- 홍은희
- 홍성대 - 수학의 정석 저자이자 상산학원 이사장[50]
- 기타 정읍 관련 인물
- 서브컬쳐 등장인물
[1] 2021년 1월 주민등록인구[2] 정읍 1경 내장산단풍터널, 2경 옥정호구절초지방정원, 3경 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공원[3] 정읍 4경 무성서원과상춘공원, 5경 백제가요정읍사문화공원, 6경 피향정연꽃[4] 정읍 7경 정읍천벚꽃길, 8경 정읍쌍화차거리, 9경 백정기의사기념관[5] 2007년 9월~2016년의 9경은 내장산, 옥정호,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정읍사공원, 정읍천, 김동수가옥, 전봉준공원, 백정기의사기념관, 충렬사공원이었다. [6] 정보: 유튜브 데이터다람쥐 [7] 유사한 예로 충청북도 청원군(현 청주시 읍면지역)과 충청남도 천원군(현 천안시 읍면지역)이 있었다. 이들은 관할 도는 달랐지만, 대신 행정구역 경계를 직접 맞댔다![8] 당시 경험자의 말에 따르면 학생들이 스티로폼으로 배 만들어 타고 놀았다는 말이 있으나 뻥이다. 놀기는 놀되, 기숙사 물뺀다고 말도 안되는 짓을 했다.[9] 다만 현재는 폐점한지 꽤 오래되었고 현재는 Y-teen이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정읍-정주의 경우처럼 꽤나 오랫동안 있었던 점포라 현재도 명동의류 앞이라고 하면 의외로 잘 통하는 편. 택시기사분들한테 명동의류 앞에 내려달라하면 와이틴 근처에 내려주고는 한다.[10] 그렇지만 다른 곳의 시내지역에 비하면 그 규모는 작은 편. 타지 사람이 시내에서 시내지역이 어디냐고 묻기에 여기가 시내라고 답했더니 '''"이런 게 시내냐."'''는 말이 돌아왔다. 거짓말 같지만 엄연한 '''실화'''.[11] 신시가지 외곽으로 이전하였다. 서울->광주 기준으로 정읍IC, 정읍역을 지나기 전에 논 사이에 떡하니 던져진 건물이 새로 지은 농산물 도매시장이다.[12] 앞서 서술한 만큼 정읍이 크게 발전여지가 없음에도 평당 700짜리 아파트가 버젓이 지어지고 거래된다.[13] 유지나 양반들이 반대를 했다는 의견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첫 계획부터 호남선은 고부를 지나가는 노선이 아니었다. 고부가 큰 고을이긴 했지만 호남대로가 원래부터 삼례-금구-태인-정읍-장성으로 넘어가는 길로 고부와 떨어져 있었으며, 호남선이 이리 경유가 선정된 이후에도 이리-김제-태인-정읍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계획되었다. 이처럼 고부군은 주요 교통로와 떨어져 있는데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철도를 놓기엔 매우 불리한 입지에 있다.[괄호] A B C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14] 잔다리목 사거리 혹은 상동 대림아파트 앞이 일반적[15] 시청 앞 대로와 정읍 천변 벚꽃길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길들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체력만 좋으면 가장 빠른 길로 40분 안에 시내권 어지간한 지역엔 걸어갈 수 있다.[16] 역 앞 광장 입구 옆에 파출소가 생겼다. 그 바로 옆이 택시 승강장(...)[17] 느린 표정속도, 환승제도 없음, 생각보다 높은 가격, 긴 배차간격, 불합리한 운영코스 등[18] 한 학원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교재를 복사해서 제본하는데 드는 비용이 전주에서 하는 것보다 20% 이상 비싸다고 한다.[19] 개관에 필수적인 부분만 지어진 채 개관되었으며, 이후로도 공사 자체는 3월경까지 계속되었다.[20] 매장 내에 롯데리아가 위치해 있었으나 현재는 도이첸 핫도그로 바뀐 상태.[21] 점장은 정읍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1박2일의 마지막 촬영지였던 중앙극장 사장님이다. 위탁점이라 안되는 할인쿠폰이 많고 매점적립도 안된다. 상영관의 영상 밝기가 매우 어두운데 영사기의 문제인지 스크린의 문제인지 오픈때부터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22] 페리카나는 신태인점도 있다.[23] 정읍상동행운점도 존재한다.[24] 신태인읍점도 존재한다.[25] 시기점도 존재한다.[26] 정읍상동점도 존재한다.[27] 이외에도 6개 점포가 존재한다.[28] 정읍상동점도 존재한다.[29] 정읍상행점도 존재한다.[30] 정읍중앙점, 터미널점도 존재한다.[31] 정읍상동점도 존재한다.[32] 정읍상동점도 존재한다.[33] 특히나 숙박시설의 경우 정읍역 근처의 모텔 몇군데와 내장산 국립공원 근처의 모텔 1~2개와 초라한 민박집들이 사실상 '''전부'''다. 괜히 '아파트와 슈퍼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다.[34] 이게 다 전북지역의 인구가 급감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주지역의 인구가 늘었음에 불구하고 이들 농어촌 지역 고등학교를 배려하는 바람에 도시지역인 전주, 익산, 군산의 고등학교 설립을 규제하고 있는 판국. 더구나 있는 학교 몇몇도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되는 판국에. 이들 도시에서 원거리 통학을 해야 하는 학생들만 안습.[35] 윤준병 후보의 고향[36] 유성엽 후보의 고향[37] 17.12.22 시장직 상실(선거법 위반)[38] 잔여 임기 1년 미만으로 재보궐선거 미실시[39]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는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40] 지금의 익산시 시내지역이다.[41] 영화 택시운전사의 배경이 된 본 도시라 할 수 있다.[42]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실상이 알음알음 퍼졌다 해도 종교 신자는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고, 무엇보다 군사독재의 강력한 탄압과 언론통제 그리고 1980년대 당시 정읍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한 시골(정주군)의 교통 및 교육수준은 타지에 비해 매우 낙후되어 겨우 포장도로가 깔리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에 다수의 시민들이 실상을 알기에는 너무나 많은 한계가 있었다.[43] 하지만 당선인은 무소속 강광 후보였다.[44] 그나마 이것조차 전북에서는 득표율이 가장 높은 편이었다.[45] 그 아비 조규순은 태인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조병갑은 이를 기리는 선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부 군민의 혈세를 걷어갔다. 그 선정비는 현재 태인면 피향정 경내의 비석들 사이에 있다.[46]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 : 경기도 고양시 정[47]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갑[48] 성장은 여기서 했지만 출생지는 舊 마산시다.[49] 지역구 : 경기도 광명시 갑[50] 태인면 출신으로, 실제로 태인면에 도로명으로 수학정석길이 있다! 흠좀무... 또한 명봉도서관이 있는데, '명봉'은 홍성대의 부친인 홍수표의 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