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해외파 선수들

 

1. 해외파 선수 명단
1.1. 현역 미국 진출 선수
1.1.1. 메이저리그
1.1.2. AAA,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1.1.3. AA
1.1.4. 하이싱글A & 싱글A
1.1.5. 루키리그
1.2. 현역 일본 진출 선수
1.2.1. NPB 리그
1.2.2. 독립리그
2. 과거의 해외파 선수들
2.1. 국내리그(군경팀, 독립리그 포함)로 복귀한 현역 선수
2.2. 기타 리그로 복귀한 현역 선수
2.3. 해외에 진출했던 은퇴, 방출선수
2.3.1. 미국 진출
2.3.2. 일본 진출
2.3.3. 대만 진출
2.3.4. 호주 진출
2.3.5. 중남미 및 유럽리그
3. 미국 진출의 역사
3.1. 박찬호 이전
3.2. 박찬호와 황금의 90년대 세대
3.3. 소강기
3.4. 마이너리그 진출 버블시대
3.5. 2011년 이후 : 포스트 류현진 시대
4. 일본 진출의 역사

(2021년 2월 23일까지의 변화를 반영)

1. 해외파 선수 명단


이하는 해외리그에서 활동 중에 있는 선수들 명단이다. 2020년 정규시즌의 미국 / 일본 / 및 기타 지역의 프로리그와 독립리그 명단이다. 참고로, 2018/19 시즌 이후 한국인으로만 구성되는 호주리그 구단인 질롱 코리아 는 제외하며 이는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MLB: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로스터 소속>
이름
소속팀
팀 레벨
비고
'''류현진'''
토론토 블루제이스
메이저리그(2013~)

'''최지만'''
탬파베이 레이스
메이저리그(2016~)

'''김광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메이저리그(2020~)

'''김하성'''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메이저리그(2021~)

<MiLB: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이름
소속팀
팀 레벨
비고
양현종
텍사스 레인저스
?[1]
1년차, 스프링캠프 로스터외 초청
박효준
뉴욕 양키스
AAA[2]
7년차, 40인 로스터 외 초청선수
배지환
피츠버그 파이리츠
A+ [3]
4년차, 40인 로스터 외 초청선수
진우영
캔자스시티 로얄스
루키
3년차, 40인 로스터 외
최현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루키
3년차, 40인 로스터 외
이지태
필라델피아 필리스
루키
1년차
<일본독립리그>[4]
윤신근(전 시나노 그랜드 세로우즈)[5]
이시카와 밀리언스타즈
독립
주혜성(제주국제대 졸업)
카가와 올리브 가이너스
독립
<참고: KBO 드래프트 대기자>
국내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마친 뒤 KBO 리그를 거치지 않고 미국 마이너리그 및 일본 리그와 계약한 자만 해당된다. 중학교 이전에 미국이나 일본으로 건너간 경우나 미국 및 일본 독립리그, 대만 리그, 호주 리그에서만 뛴 선수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권광민: 2021년 3월 17일 유예 기간 만료 예정. 2021년 열리는 2022년도 신인 2차지명에 본인 의사에 따라 참가 가능.[6]
최지만, 박효준, 배지환, 최현일, 진우영, 이지태 등은 MiLB 최종 소속 팀 계약 만료 이후 2년 경과 시점에서 드래프트 참가 가능.

1.1. 현역 미국 진출 선수



1.1.1. 메이저리그


한국인 메이저리거 문서도 참고할 것.
토론토 블루제이스 좌완 선발투수, 1987년생.
한화 이글스에서 2006년~2012년까지 통산 98승을 기록한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역대 한국인 포스팅시스템 최고금액을 보유하고 있다.[7] 진출한 이후 13, 14시즌 LA 다저스 3선발로 자리매김하며 활약했다. 15~16시즌 어깨 및 팔꿈치 부상으로 거의 뛰지 못했으나 17시즌 이후 다시 로테이션에 들어갔다. 2018시즌 복귀 후 후반기 뜨거운 활약을 보이며 시즌 후 퀄리파잉 오퍼를 받아서 수용했다. 2019년까지 다저스 소속으로, 마지막 해에는 무려 1790만달러에 이르는 연봉을 수령한다. 2019년 다저스 개막전 선발로 출전하며 선발진의 중축을 맡는 등, 부상 문제 등에도 불구하고 팀의 원투펀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5월 7-8-9-8-7이닝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이달의투수를 수상한 이후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 최초 방어율 타이틀 획득과 동양인 최초의 사이 영 상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커리어 하이 시즌을 기록하였다. 2019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은 뒤 토론토와 4년 8천만달러 거액에 계약했다.
템파베이 레이스 1루수/지명타자[8], 1991년생.
2000년대 중반 이래 KBO 리그를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진출한 선수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수.
2009년 3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 2010 시즌 포수로 하이싱글 A에 도달했다. 이후 허리부상으로 1루수 전향 후 2013년 AAA로 올라갔다. 2014년 약물 검사 결과 스테로이드 계열 약물인 Methandienone이 소량 검출되어 50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2015년 3월 시범경기에서 오른쪽 종아리 골절상을 입어 지명할당. 2016년 오리올스와 마이너계약 이후 룰5드래프트로 LA 에인절스에 지명되어 메이저리그에 데뷔했고 지명할당 후 마이너리그 이관과 MLB 승격을 반복했다. 2017년 뉴욕 양키스 스플릿 계약 후 7월 보름여 간을 제외하고는 AAA에서 뛰었다. 2018년 밀워키 브루어스 스플릿 계약 후 6월 초까지 개막일 포함 12경기를 제외하고는 AAA에서 뛰었다. 6월 10일 트레이드로 템파베이 레이스로 이적하였으며 7월 이후 지명타자 우투수 플래툰으로 뛰면서 처음으로 MLB에서 25인 자리를 반시즌 유지했다. 2019년 초에는 1루수로 뛰었으며 후반기 이후 우투수 상대 플래툰으로 1루/지명타자를 번갈아 맡았다. 2020년에도 비슷한 포지션을 유지하였으나 성적은 하락했고 포스트시즌에서는 그럭저럭 활약을 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좌완투수, 1988년생
류현진의 뒤에서 KBO 2인자로 군림하였으며, 통산 136승을 거둔 베테랑 좌완선발투수. 2019년 시즌 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하였다. 세부적인 내용은 항목 참고. 4-5선발 자리를 놓고 경쟁 내지는 서로를 보완할 한 그룹의 선발투수에 들어가고 있다.
예기치 못하게 시즌을 마무리투수로 시작하였으나, 선발진 줄부상과 코로나 감염 문제 등으로 선발로 전환하여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냈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2루수/유틸리티[9]
이종범 이래로 KBO에서 20대 초중반 젊은 나이에 최고의 성적을 거둔 유일한 유격수이자, 전직 메이저리거 강정호 의 후계자로서 로서 미국에서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다. 2020시즌 이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로 이적하였다.
미국 아버지와 한국 어머니를 둔 혼혈 2세 선수. 스탠포드 컴퓨터과학과 출신의 수재로, 입단당시에는 프런트로 써먹으려고 데려온거 아니냐는 수준의 평가를 받았지만 예상외의 성과를 거두며 스위치 히터 백업 유틸리티 선수로 메이저리그 승격이 이루어졌다. 현재 한국계 2세 선수 중에서는 가장 유망한 선수. 201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하였다. 2020시즌 초에는 주로 3루수로 활약 하였다.
2019 최종 성적: MLB 92경기 349타석 타율0.304 11홈런 OPS 0.850 / AAA 49경기 218타석 타율.305 7홈런 9도루 OPS.869
2019년 11월에 시카고 화이트삭스 40인 명단에 포함이 되었고, 마이너에 있지 않고 계속해서 1군에서 몸을 만들었다. 액티브 로스터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가 2020년 8월 19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에서 4⅓이닝 3자책점을 기록하면서 데뷔전을 치렀다. 11일 만에 이뤄진 두 번째 등판인 8월 31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와의 홈 경기에 선발 등판해 5이닝 1볼넷 7탈삼진 무실점으로 활약하면서 완벽투를 선보였다. 9월 10일 시즌 4번째 등판인 피츠버그전에서 6이닝 3피안타 1사사구 3탈삼진 무실점 호투로 메이저 리그 데뷔 첫승을 거두었다.

1.1.2. AAA,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마이너리그 소속 선수들은 2020시즌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마이너리그 시즌 전체가 취소되면서 실전을 치르지 못했다.
텍사스 레인저스 비로스터 초청선수 좌완투수, 1988년생
뉴욕 양키스 AAA 스크랜턴/윌크스-바레 레일라이더스 2루수/유격수. 1996년생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당대 고졸 내야수 최대어로 꼽히며 kt wiz 우선지명, SK 와이번스 1차지명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나 일찌감치 양키스의 제의를 받고 마음을 굳혔다. 계약금은 116만 달러다. 첫해 루키리그 상위팀을 거쳐 다음 해 로우싱글A에 배치되어 유격수/2루수 멀티플레이어가 되었다. 2016 시즌 시작은 좋았는데 이후 부진하였으나, 30개가 넘는 도루와 두자리수의 3루타 등 놀라운 스피드가 장점이다. 2017 시즌에는 싱글A 타율 0.262, 6홈런 34타점을 기록하며 2017년 8월 2일 하이싱글A로 승격해 시즌을 마쳤다. 2018 시즌을 하이싱글 A 탬파 타폰스에서 보냈다. 시즌 중반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부상과 후반기 부진, 마이너리그 로스터 관리문제 등으로 승격이 좌절되었다. 2019년 마이너리그 5번째 시즌을 맞으며, AA에서 앞으로 MLB의 백업 선수를 노릴 수 있을지에 대한 최종 평가가 시작된다. 기대치에 비해 성장세가 더딘 터라 2019년이 더욱 중요하게 됐다. 스프링캠프에서는 메이저리그 캠프에서 대수비 등으로 2경기를 출전하고 마이너리그 경기에 출전했다. 초반 마이너리그 예비 로스터에 빠져 있다가 2019년 4월 9일 뒤늦게 AA 로스터에 등재되었다. 2019년 시즌 유격수/2루수 유틸로서 절호조의 타격감을 뽐내면서 메이저리그 승격 가능성에 다시 조금이나마 불을 지폈다. 6월 초~중순 부진해 성적이 좀 떨어졌던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공격 면에서는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다. 하지만 8월 중반 이후 무안타 행진이 지속되며 다시 평균으로 회귀하기 시작했고 결국 하위 레벨에 비해 약간 나은 정도로 시즌을 마쳤다. 2020년 스프링캠프에서 초청선수 신분은 아니지만 시범경기 후반 2루수로 조금 출전하고 있다. 2루수를 중심으로 정착해 AAA에서 주로 뛸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졌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시즌이 취소되었으며, 60인 로스터 역시 탈락하여 한 해를 통째로 쉬게 되었다. 2021년 스프링캠프 초청선수에 이름을 올려 사실상 마지막 MLB 데뷔 기회를 노리게 됐다.
  • 한국계 선수 : 코너 조 (Connor Kok-Wy Joe),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AAA 1루/3루/좌익수, 1992년생
이 선수는 한국계 어머니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피츠버그 1라운더 선수인 그는 2015년 싱글 A 1루수, 2016년 하이싱글 A 3루수로 뛰며 점점 성적이 발전했다. 2017년 더블 A에서 트레이드를 통해 애틀랜타, 다저스로 이적했다. 2018년 다저스 AA/AAA에서 활약했으나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했고 40인로스터 포함도 되지 않아 룰5 드래프트에서 전체 6순위로 신시내티 레즈로 향했다. AAA에서 좋은 타격을 보여주었으며, 수비력이 좋지는 않지만 내야와 외야 여러 포지션에서 뛰어 본 적이 있으며 아마추어 시절 포수로서의 경력도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얻었다. 레즈는 개막 직전 호세 이글레시아스 등을 영입하며 25인 로스터 자리가 필요하자 그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였다. 시즌 초반 좌익수로 기용되며 메이저리그에 드디어 데뷔하였으나 케빈 필라가 트레이드되어 오면서 2019년 4월 7일 지명할당 처리되었고 4월 13일 다시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어 AAA에 배치되었다. 전형적인 4A형 선수. 2020시즌 스프링캠프 비로스터 초청선수로 등록되었으나 '개인적인 이슈'를 사유로 캠프에서 이탈하였다. 2020년 3월 18일 자신의 SNS에 고환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2019 시즌 최종 성적: MLB 8경기 15타수 1안타 타율 0.067 / AAA 105경기 360타수 108안타 타율.300 15홈런 68타점 OPS 0.929
  • 한국계 선수: 롭 레프스나이더(Rob Refsnyder, 한국명 김정태, 미네소타 트윈스 예비로스터), 1991년생
1991년생의 서울 출생 입양아 출신 선수로 양키스에 2012년 5라운드로 지명. 타격 능력에 비해 수비 포지션을 잡지 못하고 내외야 유틸리티로서 뛰어왔다. 양키스에서 데뷔 한 후, 토론토, 인디언스, 레이스 등에서 내외야 유틸리티로 저니맨 생활을 하고 있다. 2018시즌 중반 지명할당 이후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했다. 이후 FA로 풀려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신시내티 레즈등 여러 팀을 떠돌아다녔으며 2020년 텍사스 레인저스가 좌익수 후보로 시험대에 올리고자 영입하였으며, 6월 28일 자로 60인 로스터에 포함되면서 메이저리그의 마지망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승격에 성공하면서 로스터에 2시즌 만에 합류하였으나 부진한 성적을 보인 끝에 8월 24일 DFA 처리되었고 27일 다시 초청 선수로 신분이 바뀌었다. 시즌 종료 후 미네소타 트윈스와 마이너 계약을 했다.

1.1.3. AA



1.1.4. 하이싱글A & 싱글A


피츠버그 파이리츠 하이싱글A 브래던튼 머러더스. 1999년생
경북고 출신의 유격수로, 애틀랜타 국제 계약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계약이 취소된 후, 2018년 3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계약금 125만달러에 입단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게임에 출전하는 등 관심을 모았지만 2018년 4월, 여자친구를 폭행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을 빚었고 일시 귀국해 수사를 받기도 했다. 루키리그 팀인 GCL 파이리츠에 배치되어 마이너리그 정식 데뷔하여 한 시즌을 마쳤다. 1년차로서 낮은 필딩율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평가자들을 만족시켰다. 2018 시즌후 데이트 폭력 건이 검찰의 약식 기소와는 별도로 MLB 사무국의 조사 대상이 되기도 했다. 현재 팬그래프스, MLB 파이프라인 등을 비롯한 유망주 평가 사이트는 배지환을 팀내 20위 내외의(MLB.com 16위) 유망주로 보고 있다. 2019시즌 로우 싱글 에이에 데뷔. 유격수와 2루수로 활약 중. 시즌 개막 5경기가 경과한 시점인 4월 17일 데이트 폭력에 따른 30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5월 23일 징계가 풀려 복귀했다. 복귀 이후 무난한 성적을 보여주는 중이다. 2루수로 높은 출장 빈도를 보이고 있으며 수비 역시 2루에서 더 좋다. mlb.com 유망주 순위에서도 괜찮은 평가를 받는 등 (2루수 10위) 전망은 좋으나 빈약한 장타력이 걱정거리. 2020년 스프링캠프에서 초청선수 신분은 아니지만 시범경기 후반 유격수로 조금 출전하였으며 승격이 유력했으며 2020년 6월 말 발표된 60인 로스터에 포함되면서 메이저리그 대기 선수로서 피츠버그 선수단에 합류하였다. 시즌 후 하이싱글A로 승격되었다. 2021시즌 공식적으로 비로스터 초청선수에 포함되어 스프링캠프를 시작한다.
이외 한국계 혼혈인 노아 송(Noah Song)이 보스턴 레드 삭스 소속으로 데뷔하였으며, 사관학교 출신자로서 미해군에 복무 중에 있다.

1.1.5. 루키리그


  • 최현일(Hyun-Il Choi) , LA 다저스 루키리그 AZL 다저스2 우완투수, 2000년생
당해 서울 권역 내 3~5위권 투수로 평가받았으며, LA 다저스와 계약금 30만 달러에 사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별다른 입단식 없이 계약하였다.[10] 2019년 루키리그 6월 17일 개막전 선발로 데뷔하여 루키 팀 1선발로 맹활약했다.
  • 진우영(Woo-Young Jin), 캔자스시티 로열스 루키리그 AZL 로열스 우완투수, 2001년생
신예 야구부이자 영어수업 학교인 글로벌선진학교 에이스였다. 고교 특성상, 에이스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고 신인 2차지명 가능성은 비교적 낮았으며, 결국 캔자스시티 로얄스와 계약금 15만 달러에 계약을 완료하였다. 윤정현, 손호영 같이 대학을 중도에 그만 두고 진출한 사례를 제외하면, 이 정도 계약금의 진출은 2009년 대규모 러쉬 당시의 하재훈, 김재윤 이후 처음이다. 2019년 6월 18일 루키리그에 데뷔하였다. 경기 후반부에서 긴 이닝을 던지기도 하지만 불펜투수가 육성 목표인 듯 하다. 성적은 매우 좋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빠른 풀 시즌 데뷔가 점쳐진다.
  • 이지태 ,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1년생
고교 졸업 후 미지명 된 다음, 독립리그를 거쳐 미국에 진출하였다. 구체적인 계약 현황이 나오지 않은 것을 봐서 계약금은 없거나 미미한 정도로 추정된다.

1.2. 현역 일본 진출 선수



1.2.1. NPB 리그


2017년시즌부터 현재까지 NPB 리그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는 아무도 없다.
이미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수많은 재일교포 선수들이 일본 리그에 진출해 왔다. 하지만 재일교포 3-4세 선수들은 이미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은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거나 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역시 옅은 상황이라 해당 문서에 세부적으로 기재하지 아니한다. 현 시점에서 한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현역 NPB 선수로 확인된 것은 야쿠르트의 우에다 츠요시(한국명 주강사)가 유일했으나 2020시즌을 끝으로 방출되었다.

1.2.2. 독립리그


독립리그 항목은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때문에 (다른 미/일 프로리그 경험 없이) 일본 독립리그에서만 뛴 선수의 경우 "국내로 복귀한/은퇴한 해외 진출자" 란에는 소개되지 않으며 이 문단 역시 많은 경우 불완전한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2018 시즌 뛰었던 선수들(시즌 도중 퇴단한 선수 제외) 중 하재훈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SK의 지명을 받았고 김정택(전 LG,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 이영현(전 백송고, 무사시 히트 베어스) , 김선호(전 한화,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 권현규(동아대 졸업, 도야마 선더 버즈 외야수), 김진웅(전 넥센, 도야마 선더 버즈 외야수), 한성구(전 KIA, 고치 파이팅독스), 이상학(전 삼성, 고치 파이팅독스) 등은 선수단에서 사라졌다. 4년차를 맞은 임태훈(전 두산)은 2018년 10월 24일자로 FA 공시되었다. 박민정(전 두산, 오션 시가 블랙스 투수)은 2020년 10월 15일 임의탈퇴 형식으로 퇴단했다.

2. 과거의 해외파 선수들



2.1. 국내리그(군경팀, 독립리그 포함)로 복귀한 현역 선수


삼성 라이온즈 외야수/지명타자. 1990년생.
한화, 현대에서 활동한 포수 김상국의 아들. 2009년 3월 시카고 컵스와 55만 달러에 계약했다. 어깨 재활로 1년을 날리고 우투에서 좌투로 바꾸었으며 그로 인해 2011년에야 데뷔. 그 이후에도 순탄치 못한 선수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2013년 6월 방출되었다. 군 복무 후 재도전한다는 설이 있었으나 귀국 후 모 인터뷰에서 자신이 직접 아니라고 밝혔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SK 와이번스에 9라운드로 지명되었다. 거포 타자로 꽤나 주목받으며 정영일에 이어 해외파 드래프트의 연이은 성공을 거두게 되고 이는 SK가 이후 드래프트에서 김성민(데뷔 직후 넥센으로 트레이드)[11], 남윤성, 하재훈, 김성민과 같은 해외파 드래프트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8년 12월 7일 삼성, SK, 넥센의 삼각 트레이드[12]로 삼성으로 이적했다.
키움 히어로즈 우완투수. 1991년생.
세광고 재학 중이었던 2009년 4월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2012년 쇼트시즌에서 출발했으나 미들싱글A로 도중에 승격되었다. 150km 정도의 직구를 포함한 4개의 구질을 구사한다고 한다. 성적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2013년 깜짝 승격되었다. 중계투수로 2013년에 전환해 평균자책점은 7.00으로 심각한 수준이나 K/9가 8~9에 육박하며 꽤 많은 삼진을 잡고 있다. 스프링캠프는 AA에서 뛰며 뛰어난 스터프에 대한 구단의 믿음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다시한번 하이싱글A에서 메이저리그를 향한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2014년 들어 부진을 보이면서 미들싱글A로 내려갔다. 일단 미들싱글A에서는 안정감을 찾긴 했지만 상위 단계에서 부진하고 하위 단계로 내려와서 회복세를 보이는 양상이 반복되면서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다. 결국 2015년 4월 7일 방출되었다. 이후 별다른 근황이 알려지지 않다가 2015년 10월 23일 발표된 상무 서류전형 합격자에 포함되었다. 고양 원더스 시절의 정영일, 남윤성이 교류전 출전이 불허되었던 예를 봤을 때 최종 명단에 들어가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으나 11월 25일 발표한 최종 합격자에 들어갔다. 이로써 복귀 해외파들이 상무나 경찰청에서 병역을 이행할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KBO는 상무 입대와는 별개로 유예 기간은 그대로 적용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2016년 1월 12일 열린 KBO 이사회에서 KBO 리그 팀을 거치지 않고 외국으로 나갔다가 귀국해 군경 팀에 입대한 복귀 해외파 선수의 퓨처스리그 출전을 불허했지만 그 이전에 상무 행이 결정된 김선기는 이를 적용받지 않는다. 퓨처스리그에서는 초반에 원 포인트 릴리프로 기용되다가 선발로 보직을 변경했다. 퓨처스리그에서의 성적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지만 이닝이터로서 좋은 모습과 함께 현장 평가가 좋은 편이고 이전까지 복귀한 해외파들과는 달리 꾸준히 실전 감각을 이어간다는 이점이 있어서 2017년 9월 11일에 있을 2018년도 신인 2차지명에서 상위권 지명이 예상되었으며 예상보다는 약간 뒷순위인 2차1라운드 8순위로 넥센(당시 구단명)에 지명되었다.
kt wiz 투수 [13]. 1990년생.
2008년 세계 청소년대회 우승 당시 주전 포수였다. 2009년 1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해 미국으로 진출했다. 2012년 시즌 중 방출되었다. 이후 강원도 원주에서 의장대로 군복무를 마치고 2015년도 신인 2차지명에서 KT 특별지명에서 KT 위즈에 지명되었다. 2015년 동계훈련을 기점으로 투수로 전향했으며 kt 불펜의 필승조로 자리잡았다.
한화 이글스 우완투수. 1992년생.
2010년 2월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계약금 120만 달러를 받았으나 기대에 못 미치는 편으로, 2012년에는 중계투수로 나왔다. 2013년 4월에 퇴단했으며 사회복무요원 복무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2013년 10월부터 이행 중이다. 그의 귀국 소식이 알려진 뒤 한동안 2016년도 신인 1차지명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나왔으나 규약상 불가능하다.(야구규약 105조 2항과 3항, 107조 3항 참조) 고로 2차 지명으로 가야 한다. 귀국 사유는 부상 및 아버지의 건강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도 신인 드래프트 2차 지명 대상으로 알려졌으나 귀국이 2013년 4월이었던 반면 컵스와의 계약 해지가 8월 이후로 늦어지면서 결국 1년 공백기를 더 보내고 2017년도 신인 드래프트 2차지명에 나오게 됐다. 2차1라운드에서 당시 가장 유망한 고교선수 4명이 지나간 직후 바로 한화에서 지명되었다. 2019년 현재 1군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고 퓨처스리그 등판도 극히 적다가 뒤늦게 1군 등판에 나섰다. 아무리 포텐셜이 좋아도 루키리그 이상 레벨로 올라가지 못한 선수들은 거의 성공하지 못하는 선례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2020년에 한화 이글스 불펜진에서 새로운 한 축으로 떠오르는 데 성공해 위의 평가는 조금 바뀌었다.
LG 트윈스 좌익수/1루수, 1988년생.
한국야구 드래프트 미지명자 (신고선수) 출신으로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메이저리그 FA 계약을 맺게 되었다. 25인 로스터의 끝자리에서 시작해 플래툰 이상의 좌익수로 대박을 내고 있다. 그럼에도 팀에서 중용하지 않는 아쉬운 모습. 17시즌 후 자유계약선수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 2017년 7월 29일 논웨이버 트레이드 마감 시한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볼티모어에서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되었다. 애매한 성적을 거두면서 KBO 복귀 가능성이 꽤 올라가 시즌 후 거취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가 2017년 12월 19일 LG와 계약했다.
SK 와이번스 1루수. 1991년생.
2009년 6월 LA 다저스와 계약했다. 2012년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부진했다. 결국 2013년 6월 싱글A를 넘기지 못하고 방출되었으며 귀국 후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 중이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예상을 깨고 kt wiz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되었다. 2016년 1군 데뷔도 성공했지만, 포텐셜만 보고 뽑는 루키리거의 한계를 보여준다. 단순히 유망주라는 사실에 취해서 고평가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 지 보여주는 예가 되어가고 있다. 2018년 12월 4일 전유수와 맞트레이드되어 SK로 이적했다.
키움 히어로즈 내야수. 1991년생
충암고 재학 중이었던 2009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계약했다. 이 해에 건너갔던 7명의 선수들 중 가장 인지도가 낮았고 실제 계약금도 가장 적었으나 의외로 오래 살아남았다.(최지만 다음으로 오래 뛰었다.) 주로 유격수 수비를 보는 내야 멀티플레이어. 2012시즌 중 잠시 하이싱글A로 승격되었으나 좋은 활약은 보이지 못했다. 타격보다는 수비로 좋은 평가를 받는듯. 신인들한테 밀려 2013년 시즌은 쇼트시즌으로 시작. 여기서도 성적은 평균 수준이다. 2014년에는 미들싱글A로 복귀했다. 그런데, 팀원 중에 가장 고참급이다. 6월에 다시 하이싱글A로 올라갔다. 2014 시즌에는 하이싱글A 리그에서 지구 우승도 하고, 주로 유격수로 뛰면서 유격수 유망주의 위치를 회복했다. 시즌 후에는 호주리그에서 뛰면서 우승했다. 나름대로 반전의 계기를 잡긴 했지만 그 이상 올라갈 수 있을 지는 미지수. 2015년 더블A 승격에 이어, 승격 후 1주일만에 트리플A까지 올라갔으나 이는 임시 승격이었고 5일만에 다시 더블A로 돌아갔다. 야구 실력에 비해서는 스마트한 플레이와 팀 내에서의 전략적인 태도 등이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 그러나 2016시즌 시작은 부진하다. 코레아에 이어 브레그먼 때문에 마이너리그에서도 포지션을 못 잡고 이리저리 치이는 중. 트리플A에 1주간 올라가기도 했으나 역시 임시 승격이었고 다시 더블A로 내려갔다. 브레그먼 메이저 콜업과 함께 AAA에 3번째로 입성해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였지만 MLB 승격은 사실상 힘든 모습. 시즌 후인 2016년 11월 7일 마이너리그 6시즌이 지나 마이너리그 FA가 되었지만[14] 새 팀을 찾지 못했다. 이후로 소식이 도통 알려지지 않고 있었으나 2020년도 신인 2차 지명 참가 신청을 한 후 2019년 8월 5일 실시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2017년 10월에 뒤늦게 사회복무요원으로 입소했던 관계로 2019년도 신인 2차 지명 참가 신청을 할 수 없었으며 팔꿈치 수술을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2019년 8월 26일 열린 2차 지명에서 키움에 6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키움 히어로즈 1루수. 1986년생.
2015년 12월 2일, 4+1년간 옵션 포함 총액 1850만 달러에 미네소타 트윈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다. 시즌 초에는 트윈스 주전 지명타자로 활약했으나, 낮은 타율로 인해 현지에서 서서히 비관적인 시선이 나오는 중. 결국 AAA로 내려가게 되었다. 부상으로 사실상 시즌아웃, 지명할당조치. 2번째 시즌은 스프링캠프의 밝은 활약으로 초청선수 중 가장 주목받았으나 약간의 이해하기 힘든 개막 로스터 구성으로 AAA로 들어갔다. 이후 부상자명단 등재를 거쳐 늦게 시즌 시동을 걸었는데 활약은 미진했고 1년 내내 AAA에 머물렀다. 도전을 계속 이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2017년 11월 27일 넥센(현 키움)으로 복귀했다.
LG 트윈스 내야수 1994년 생.
2014년 4월 28일(한국시간)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2013년 충훈고를 졸업하고 홍익대에 진학해 주전 유격수로 뛰었으나 하계리그를 마치고 자퇴한 뒤 방황하다가 미국행을 결정했다. 계약금은 거의 없는 수준. 2년간 2루수/유격수로 뛰며 쇼트시즌 A까지 진행했으나 타격의 한계를 느끼고 2016시즌 루키리그에서 불펜투수로 다시 시작한다. 2016시즌은 별 활약 없이 마쳤고 2017년 스프링캠프 직후인 3월 22일에 방출되었다. 방출 이후의 근황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2019년 4월 16일 열린 경기도독립야구연맹리그 연천 미라클:고양 위너스 경기에서 연천 미라클의 5번 지명타자에 이름을 올리면서 병역을 마친 뒤에 곧바로 연천 미라클에 합류했음이 확인되었다. 연천 미라클에서는 내야와 외야를 겸하고 있다. 2020년도 신인 2차 지명 참가 신청을 했으며 2019년 8월 5일 실시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8월 26일 열린 신인 2차 지명에서 LG에 3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롯데 자이언츠 우완투수. 1980년생.
경남고 재학 시절인 1999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1999 신인지명 때 롯데 자이언츠에 1차지명을 받았지만, 이 지명권은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어 국내에 복귀할 때도 롯데에 복귀했다.
두산 베어스 내야수. 1990년생.
덕수중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한 케이스로, 2008 신인지명 때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4순위로 지명되었다. 김무영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단에 지명된 선수가 되었으나 1군 데뷔조차 못하고 2013시즌 종료 후 히로시마에서 방출되었다. 외국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나온 관계로 바로 국내 프로 팀 입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2015년도 신인 2차지명 전까지 머무를 곳을 찾다가 고양 원더스에 합류했다. 교류전에서 꾸준히 중용되었으나 2014년 6월 7일 고려대와의 연습 경기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해 재활만 6개월이 소요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2015년도 신인 2차지명 신청을 했지만 부상 재활 중이라 트라이아웃에는 불참해야 했고 결국 지명받지 못했다. 고양 원더스 해체 후에도 계속 재활에 매달리다가 김성근 감독이 새로 팀을 맡은 한화 이글스 육성군에 합류했고 2015년 5월 27일 정식 선수로 등록되었다. 2017시즌 도중 두산으로 트레이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우완투수, 1982년생.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클로저. 단국대학교, 삼성 라이온즈와 한신 타이거즈를 거쳐 2016시즌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팀과 계약했다. 셋업 우완 불펜투수로 계약했으나 마무리 트레버 로젠탈의 부진으로 후반기에는 마무리 투수가 되어 김병현 이후 최초로 15세이브를 넘긴 한국 투수가 되었다. 2017년은 조금 부진하면서 다시 셋업맨 겸 임시마무리로 활약했다. 2017/18 오프시즌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피지컬 문제로 인한 FA 계약 무산을 겪었으며, 결국 2월 말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하였다. 승리조 계투 및 셋업맨으로 활약하면서 7월 26일 콜로라도 로키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시즌 70경기에 출전하면서 2019년 팀 옵션이 활성화되었다. 2019년에 고액의 마무리 웨이드 데이비스와 스캇 오버그 등과 로키스 불펜의 중심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부진에 빠져 있다가 6월 중순 왼쪽 복사근 염좌로 IL에 올랐고 7월 16일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기로 결정함에 따라 사실상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마감했다. 2019년 7월 23일 DFA 공시되었고 8월 6일 삼성에 복귀했다.
키움 히어로즈 좌완투수. 1993년생.
201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롯데에 8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동국대로 진학했다. 2012년 대학야구에서 그런대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1년만에 중퇴했다. 2013년 7월 16일 정식으로 입단 기자회견을 열었다. 계약금이 3만달러로 이 명단의 선수 중 드래프트된 선수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하재훈 선수의 10%수준이며 드래프트 15라운더인 강경덕 선수의 절반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사실상 로또를 긁은 것과 마찬가지. 2014년 4월 초에 가벼운 부상이 있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4년 루키리그 개막 때에는 로스터에 들지 못했다가 8월 하순에 뒤늦게 포함되었다. 좌완선발이라는 이점 때문인지, 2016시즌 쇼트시즌 싱글A에 올라오기는 했지만 6경기(2선발)에 등판해 1승 2패 평균자책 6.75에 그쳤고 시즌 종료 후인 2016년 11월 3일 방출되었다. 2019년도 신인 2차지명 참가 대상이 되며 신청 마감을 약 20일 정도 앞둔 2018년 7월 23일에야 비로소 근황이 알려졌는데 모교인 세광고에서 개인 훈련 중이라고 한다.(정확히는 방출 후 곧바로 현역 입대해 휴가 때 틈틈이 모교에서 훈련을 한 정도) 2018년 8월 9일 신인 2차 지명 참가 신청서를 냈다. 최고 150km를 던졌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는 트라이아웃에서 본인 피셜로 드러났다. 트라이아웃 직후부터 1라운드 지명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으나 싱글 A 이하에서 한계를 드러낸 뒤 복귀한 다른 선수들이 그랬듯 위험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결국 넥센 히어로즈의 선택을 받아 1라운드 4순위 지명되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138km/h 클럽에 가입하면서 2군으로 내려갔다.
kt wiz 우완투수. 1989년생.
신일고 재학 중인 2007년 6월 6일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당초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민갔다는 얘기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토미 존 서저리 이전 상당히 촉망받는 유망주였으나, 수술 후 후유증을 크게 겪고 있다. 복귀 초기에는 구속이 수술 이전과 차이가 없어서 희망이 많아 보였지만, 2012년 80마일 중후반대의 구속을 보여주면서 팀내 유망주 30위권에서도 밀렸다. (Baseball America 기준). 현재는 평균 구속 89마일, 최고 구속 92마일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체인지업(일본에서는 포크로 분류된 구종으로 보임)은 항상 좋은 평가를 듣고 있다는게 장점. 2013년 시즌은 안정적으로 시작했으나, 어깨 부상으로 인해 부상자명단에 등재되며 시즌 절반 정도를 날렸다. 그래도 시즌 후반부터 2014시즌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3점대의 ERA를 유지하며 건강하게 로테이션을 지켰고, 만 1년간 약 150이닝을 소화하며 충분히 검증을 받았다. 2013시즌 후 마이너리그 FA 자격을 얻었고, 시카고 컵스팀과 재계약을 맺었다. 2014년 7월 7일 트리플A로 승격했다. 구속이 떨어지지만 구위나 브레이킹 볼은 괜찮은 편으로 알려져 있으나 제구가 문제로, 제구가 정확해야 메이저리그 승격이 가능해 질 것으로 보였지만...... 시즌 후 팀과 재계약하지 않고 일본행을 모색하다가 지바롯데에 입단한다는 기사가 스포니치 11월 22일자로 떴고 한 달이 지난 12월 25일이 돼서야 계약이 공식 발표되었다. 연봉 5,400만 엔으로 추정. 구속이 최고 154km 까지 나오고 있으며 시즌 개막 후 4월 말까지 4승 무패, 평균자책 3.16으로 겉으로 드러난 성적은 좋아 보이지만 일본 프로야구가 현저한 투고타저임을 감안하면 그리 낫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5월 1일 니혼햄전에서 3이닝 5자책점을 기록하며 평균자책이 4.19로 치솟았고 엔트리에서 일시 제외되었다. 5월 21일에 1군에 복귀한 뒤 2승을 더하며 6승 1패를 기록 중이지만 세부 지표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며 결국 불펜으로 내려갔다. 불펜으로 내려간 뒤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모습이지만 애초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하는 편이다. 7월 30일에 선발로 복귀해 호투를 펼치며 시즌 9승째를 했지만 이후 더 이상 승리를 추가하지 못하고 내리 7패를 쌓으며 9승 9패로 시즌을 마쳤으며 팀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출전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9월 8일 발표된 2015 WBSC 프리미어 12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며 10월 7일 발표한 최종 엔트리에도 들어갔다. 소속 팀에서 보인 들쭉날쭉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프리미어 12 대표에 뽑히는 등 운이 따라 주기는 했지만 2016시즌에도 전년도와 같은 모습이 반복된다면 쉽지 않을 듯. 2016시즌 시범경기에 전혀 등판하지 못하고 개막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2군에서 출발하게 되는 등 팀내 입지가 여전히 확고하지 못한 상황이다. 2016년 4월 13일 1군에 복귀했으나 부진한 투구 내용을 보인 끝에 하루 만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2군에서도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여전히 기복이 심한 투구 내용을 보였으며 7월 말 ~ 8월 초 잠시 1군에 올라온 것을 제외하면 계속 2군에 머물렀다. 병역 문제가 코 앞으로 다가 왔지만 상무나 경찰청에 합격하더라도 퓨처스리그 출전은 못하기 때문에 이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2016년 10월 13일 열린 KBO 이사회에서 주요 국제대회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경우에 한해 퓨처스리그 출전을 가능하게 하기로 결정하면서 원활한 국내 복귀 길이 열렸지만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경찰청 2차 선발에 응시했지만 이번에는 문신 때문에 면접 및 신체검사에서 탈락했고 재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오락가락 행보를 보인 것이 드러난데다 특혜 논란이 일고 있다. 10월 31일 치바롯데에서 공식 퇴단했다. 결국 특혜 논란이 계속된 가운데 3차 선발에 응해 12월 14일 최종 합격이 결정되었다.[15] 2017년 1월 12일 입대했다. 논란 끝에 2017년 WBC 대표팀에 선발되었지만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으며 퓨처스리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국내 무대에 선을 보였다. 2017시즌에는 2점대 평균자책에 볼삼 비율이 좋기는 하지만 여전히 기복이 심한 투구 내용을 보이고 있다. 2018년 시행되는 2019 KBO 드래프트에서 논란 끝에 1순위로 KT 유니폼을 입었다. 시즌 시작부터 선발투수로 등판했으나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이어진 내구성과 제구력 문제, 심한 기복이 여전히 반복되었고 두 차례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되는 곡절을 겪은 끝에 불펜투수로 전환했다. 마무리 투수로 기용된 뒤로 표면상의 성적은 좋지만 깔끔하게 막은 경기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2020시즌에도 마무리 투수로 낙점되었으나 시작부터 부진한 투구 내용을 보인 끝에 2군으로 내려갔고 복귀 후에도 반전을 이루지 못하면서 팀의 첫 포스트시즌에서도 등판 기회를 잡지 못했다.
롯데 자이언츠 1루수/지명타자. 1982년생.
한국 야구 역사상 최고의 1루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선수로 그 동안 포지션과 운동능력의 한계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정상으로 군림함에도 메이저리그에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경남고-롯데 자이언츠-오릭스 버팔로스-소프트뱅크 호크스를 거쳐 시애틀 매리너스와 2016년 연봉 100만, 옵션 포함 최대 400만달러의 스플릿 계약에 합의하였다. (약 200만달러 조금 넘는 돈을 결국 수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좌완 상대 1루수 플래툰 포지션으로 나서고있으며, 두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는등 쏠쏠히 활약중. 그러나 후반기 이후 부진으로 가치가 많이 떨어지며 AAA로 내려갔다.
8월28일 다시 콜업되어서 이후 무난한 성적으로 시즌 마무리. 오프시즌 한국/일본/미국의 구단들을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2017년 1월 24일 친정팀 롯데로 복귀했다.[16]
삼성 라이온즈 내야수. 1990년생.
충암고 재학 중인 2008년 4월 17일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2011년 맷 가르자 트레이드 당시 탬파베이로 트레이드되었다. 많은 유망주 평가에서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다. 이학주에게 있어 최대의 장점은 수비능력인데 이미 탈 아시아급의 메이저리그 상위권 수비를 보여준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2012년 룰5 드래프트를 앞두고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2013년 4월 상당한 타격실력을 선보였으나 경기 중 전/후방십자인대 파열 부상으로 시즌아웃되면서 커리어가 꼬이기 시작했다. 재활은 성공적인 편으로 2014년 초에도 팀내에서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이후 타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며 4년의 옵션이 지난 이후 지명할당 처리되었다. 시즌 종료 후 마이너리그 FA가 되었고 샌프란시스코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에이전트와 손발이 맞지 않았는지 일본 진출설까지 흘렸으나 트리플A에서 도전을 계속 이어가게 됐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유격수(브랜든 크로포드)와 2루수(조 패닉) 자리가 워낙 굳건한 데다 백업진까지 갖추어진 팀으로 이학주는 보험용 마이너리그 선수일 뿐. AAA에서 유격수로 줄곧 기용되고 있으나 콜업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결국 6울 3일(현지시간 6월 2일) 옵트아웃을 행사했는데 72시간 내에 샌프란시스코가 액티브 로스터에 넣지 않으면서 자유계약 신분을 얻었다. 이제는 메이저리그 도전을 지속하거나 일본/한국리그로 가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결국 귀국을 결정했으며 부상으로 인한 병역 면제 상황이라 군경팀 등에서 뛸 수도 없는 상황이라 여러 독립구단을 떠돌았다. 11월 만들어진 야구학교(스포츠투아이, 총감독 김응용) 플레잉코치, 저니맨 외인구단 등에 합류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2017년 3월 2일 일본 독립리그 팀인 도쿠시마 인디고삭스에 입단했다. 주로 2루수로 뛰었고, 후반기 시즌 직전인 7월 25일 도쿠시마에서 퇴단했다. 2019 신인 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1라운드 2순위로 지명되었다. 무난하게 주전에 안착하면서 그나마 2019 해외파 복귀선수 중 성공사례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초반에 비해 실책 수가 줄어든 것을 제외하면 모든 공수 지표가 하락세를 보였다. 2020시즌에는 수비는 안정되었지만 타격은 6월 중하순을 제외하면 부진으로 일관하면서 8월 초 주전 자리에서 밀려났다.
삼성 라이온즈 우완투수. 1988년생.
2007 신인지명 때 연고팀인 한화 이글스로 1차지명을 받았지만, 입단하지 않고 상무에 입대했다. 전역 후 2008년 10월 LA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계약했다. 많은 한국인 유망주들의 고민 중 하나인 군문제를 이미 해결한 상태지만 다른 선수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 2012년 방출되어 미국의 독립리그인 페코스 리그 소속 라스크루시스 바케로스에 입단했으나 그곳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2013년 겨울에 호주 프로야구 리그 퍼스 히트에 입단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2경기만 등판한 채 팔꿈치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었고 토미 존 서저리 후 재활에 들어갔다. 야구규약 105조 2항에서 언급한 외국 프로구단에 그가 거쳐간 미국 독립리그와 호주 프로야구 리그가 포함되지 않음에 따라 2015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로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되었다.
SK 와이번스 우완투수. 1990년생.
부산고 재학 중인 2008년 8월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아쉽게도 계약 이후 네 시즌 동안 루키-싱글A 사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심지어 2011년 이후에는 불펜 자원으로 분류되어 있다. 공이 빠르나 제구에 문제가 있고 정신적으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듯 하다. 결국 2013년 3월 24일자로 방출되었으며 귀국 후 현역으로 입대했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1라운드로 지명되었다. 2019 시즌 종료 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SK로 이적했다.
SK 와이번스(2014~2015년은 상무 소속) 우완투수. 1988년생.
2007 신인지명 때 KIA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2006년 7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 계약했다. 입단 후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 과정을 거쳐 기대보다 활약하지 못했다. 결국 2011년 5월 30일 팀에서 방출되었다. 2012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와 계약했지만, KBO의 결정에 따라 프로야구 2군 팀과의 교류 경기에는 출전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고양 원더스를 나왔다. 이후로 간간이 사회인 야구에서 활동하다가 2013년 3월 6일 일본 독립리그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즈에 입단했으나 거기서마저 거의 등판하지 못했다. 국내 복귀 유예기간이 지난 7월 1일자로 독립리그를 떠나 신인드래프트 2차지명에 응하기로 했으며 2013년 8월 7일 KBO에서 주관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다. 8월 26일 실시한 2차지명에서 SK에 5라운드에 지명되었다. 정식으로 KBO 소속 선수가 되어 제약이 사라지자 상무에 지원했으며 11월 19일 최종 합격하여 군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신세계 야구단 지명타자/좌익수/우익수, 1982년생.
부산고 재학중인 2000년 8월 롯데의 1차지명을 받았으나 결국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했다. 현재는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로 인해 SK 와이번스가 KBO 내 보유권을 가지고 있다. 2005년 4월 메이저리그 데뷔 후 2008년 후반기부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주전 우익수로서 클리블랜드의 핵심선수가 되었다. 2012년 FA를 1년 앞두고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되었다. 2013년 레즈의 1번타자 중견수로 역대급 활약을 펼친다. 시즌 이후 FA 자격을 얻어 7년 1억 3000만 달러의 초대형 계약으로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했다. 하지만 이적한 2014 시즌 이후 부진 추세이며, 2017시즌 이후부터 대부분의 경기를 지명타자로 나서고 있다. 2019년 헌터 펜스가 가세하면서 두 베테랑이 좌익수와 지명타자를 서로 번갈아 맡았으며,,, 수비적 공헌도는 떨어지지만 훌륭한 타격으로 타선의 베테랑 리더 역할을 했다. 2020년에는 커리어 로우를 기록하며 FA 기간을 마무리했다. 2021년 2월 23일 SK 와이번스를 인수하게 되는 신세계 야구단과 연봉 25억에 계약했다.
SK 와이번스 우완투수. 1990년생.
용마고 재학 시절인 2008년 7월 29일에 시카고 컵스와 중견수로 계약 사실을 알렸다. 고교 시절에는 포수였으며 미국에서 외야수로 전향했는데 처음에는 작은 계약금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내 이학주 다음으로 가장 평가가 좋은 한국인 타자 유망주가 되었다. 애초에 타격에 재능이 있었는데다 발도 빠른 편. 또한, 짧은 경험에도 곧잘 수비를 잘 소화해내고 있다. 하위 마이너에서는 출루율을 등한시한 타격을 보였지만, 상위레벨에서는 타율보다 1할가까이 높은 출루율을 보여주고 있다. 2012시즌 퓨처스게임(마이너리그 올스타전)에 비-미국 팀으로 출전. 중견수 수비는 같은 팀 마이너리그 선수 중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2012년 Baseball America가 팀내 최고라고 인증). 다른 주전 포텐셜 유망주에 밀리면서 (브렛 잭슨, 현재 백업인 맷 셔저, AAA 유망주로 올라온 알버트 알모라) AAA가 한계로 남았다. 애초에도 4외야수 실링으로 평가받았으며 외부 유망주 평가에서는 외면받는 존재기도 했다. 2010년을 정점으로 타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2014시즌 들어서 급격한 부진을 보였다. 후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심한 손 부상으로 인해 타격이 거의 불가능 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2015년에는 부상으로 트리플A 로스터에서 제외되어 루키리그 AZL컵스에 재활차 내려간 뒤 투수로 전향했다. 직구 92마일에 커브를 던질 줄 안다고 한다. 6월에 쇼트시즌 싱글A로 올라갔다. 시즌 종료 후인 2015년 11월 6일 마이너리그 FA가 되었으나 새 팀을 구하지 못했으며 우선 일본 시코쿠 독립리그를 거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보결 외국인선수로 계약을 추진하는 중이다. 현재 스왈로스는 발렌틴이 타자 용병으로 제 몫을 해 주고 있으나 나머지 3명의 외인은 모두 투수이고, 아주 인상적이지 못한데다 팀 중심타선이 부진에 빠져 있어 비싸지 않고 타격에 도움이 되는 우타 외야수 한 명을 구하려 한 듯 하다. 라쿠텐 등도 관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016년 5월 26일 입단이 확정되었다. 6월 8일 1군에 등록되어 8경기 동안 22타수 6안타(2루타 1), 타율 0.273, 2타점을 기록했지만 열흘만에 2군으로 내려갔다가 7월 10일 1군에 복귀해 주로 대타로 출전하다가 7월 31일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시즌 종료 후 야쿠르트에서 퇴단했으며 더 이상의 해외 활동 없이 신인 드래프트에 나설 것으로 보였으나 2017년 2월 15일 다시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에 입단했다. (일본독립리그 경력은 2년 금지 규정에서 제외된다) 2018년도 2차지명 대상이 아님에도 2017년 8월 22일 실시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논란이 됐는데 자신은 2015년 말 마이너리그 FA가 된 시점부터 유예 기간이 적용된다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그러나 아래에 서술한 신진호와는 다른 경우라 일단 트라이아웃 참가는 허락받았지만 지명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17] 신경학적 문제로 병역은 면제가 됐다. 다만 낭설처럼 알려진것과 달리 불치병이 아닌, 중학교때부터 꾸준히 관리하면서 야구를 할 수 있는 수준의 경미한 질병인듯 하다. 2018년에도 계속 도쿠시마에서 뛰었으며 드래프트로 KBO에 복귀하였다. KBO 리그에서는 투수로 뛰면서 마무리투수로서 의외의 특급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9 해외파 드래프트에서 가장 저평가 받았으면서, 최고의 성공을 보여준 선수. 그러나 2020시즌에는 2019시즌에 무리한 여파로 부진했고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접었다.
kt wiz 3루수, 1987년생.
현대 - 넥센 - 롯데를 거쳐가며 리그 중위권 3루수에서 최고 수준 선수로 서서히 성장해나간 선수. (KBO 시절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2017시즌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했는데, 메이저 보장 계약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2016년의 이대호처럼 스프링캠프 초청선수 계약의 또 하나의 대박 사례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시작은 AAA에서 3루수/1루수/좌익수 멀티플레이어로 했다. 3루 유망주 승격과 내야 유틸리티 적응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 콜업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7월 경 계약 조건이었던 옵트아웃을 발동할 예정이었으나 먼저 콜업되었던 3/1루수 코너 길라스피가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극적으로 기회를 잡았다. 6월 29일 콜로라도와의 홈 경기에서 세 번째 타석에서 솔로홈런을 날리며 메이저리그 데뷔 신고를 했다. 7월 23일 AAA로 내려갔다가 29일 다시 콜업되었으나 8월 3일 다시 AAA행을 통보받았다. 9월 1일 지명할당처리되어 40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었으며 그대로 AAA에 남았다. 2018시즌 한국 복귀를 선언했고 2017년 11월 13일 kt wiz와 4년 88억에 계약했다.

2.2. 기타 리그로 복귀한 현역 선수



2.3. 해외에 진출했던 은퇴, 방출선수


양쪽 모두 진출했던 경우 미국 진출쪽에 소개. 이 중 미국 진출 중 메이저리그에서 뛴 선수는 '''굵은 글씨'''로 표시.

2.3.1. 미국 진출


  • 강경덕(K. D. Kang)
전 파고-무어헤드 레드호크스 우익수. 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더블A 좌익수 및 지명타자. 1988년생.
고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드래프트된 케이스. 뛰어난 유망주는 아니지만 무난하게 팀의 기대만큼 성장하며 차근차근 마이너 팀을 거쳐 왔다.[18] 다만 탬파베이 마이너리그 내에 외야수가 많다는 점과, 수비에서 어필하지 못해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워낙 유망주 뎁스가 두터운 팀이다보니 2013년 탬파베이 팀이 많은 외야 유망주를 보강하며 오히려 마이너리그에서 한 단계 내려가며 시작하는 굴욕도 겪었다.(물론 금방 다시 승격) 메이저리그 팀에서는 특별한 재능이나 특징이 없어서인지 관심 밖이었고, 2013시즌 종료 후 마이너리그에서 6년을 보냈기에 FA 자격을 갖춰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스프링캠프는 AAA에서 보냈지만 결국 더블A에서 승격을 노리게 되었다. 2015시즌 애틀랜타로 다시 이적했으나 2016 스프링캠프 직후인 4월 1일 방출되었다. 독립리그에서의 2017년 성적은 .270 11홈런 OPS .792로, 특출난 상황은 아니었다. 참고로 해당 리그는 KBO 보다 약간 낮고 싱글 A보다 약간 높아 보이는 수준의 리그. 야구 규약 107조에 따른 제약을 적용받지 않으므로 언제든 드래프트 참여가 가능한 선수였고, 2017년 경 드래프트 참여 의사를 한 기사에서 우회적으로 밝히기도 했으나 결국 드래프트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 뒤로는 뚜렷한 근황이 알려지지 않고 있어 사실상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 강인균
전 미네소타 트윈스 내야수. 1989년생.
배명고 재학 시절 파워히터로서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고교 재학 중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 미국으로 진출했지만 2년만에 방출되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 3루수, 유격수.[19] 1987년생.
넥센 히어로즈에서 2014년까지 활약하고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을 맺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리그로 직행한 2번째 선수이자, 야수로서는 첫 번째 선수. 15시즌 기대 이상의 타격과 수비로 주전으로 자리매김+신인왕 후보까지 올랐다. 2016시즌에는 성추문에 휩싸였으나 100여경기에 출전하며 시즌 20홈런을 돌파했다. 시즌 후 음주운전 상습적발로 인해 비자 발급이 취소되면서 2017/18 시즌 도미니카리그 아길라스 사비에나스 출전을 제외하고 야구선수 활동이 중단되었다. 2018년 비자문제와 마이너리그에서의 부상 때문에 시즌 막바지 2경기에만 출장할수 있었다. 시즌 종료 후 피츠버그 구단에서 옵션 행사를 거절했으나 11월 8일 1년 최대 550만 달러(연봉 300만+인센티브 250만)에 재계약했다. 3루수 자리에서 유망주 콜린 모란과 함께 타석을 나누어 맡으면서, 최종적인 주전 자리를 한 명이 차지하는 경쟁에 직면하였으며, 많은 팬들의 예상과 달리[20] 심각한 부진에 빠지면서 퇴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부상 이후 AAA에서 재활 후 6월 9일 메이저리그로 복귀했다. 복귀 이후 3루수/유격수 백업을 맡고 있으나 부진이 끝날 기미가 없다. 200타석 출장 타석 옵션의 발동을 앞두고 방출설이 새어 나왔고, 결국 메이저+마이너 합계 199타석을 뛴 8월 2일 DFA 처리된데 이어 8월 4일 공식 방출되었다. 8월 15일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AAA 팀인 샌안토니오 미션스에서 훈련 중인 모습이 포착되었고 8월 16일 마이너리그 계약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비자 발급 문제 때문에 계약이 사실상 무산되었다. 2020년 한국 복귀를 선언하였으나 여론은 싸늘하다.
한화 이글스, 뉴욕 메츠, 오릭스 버팔로스, 시드니 블루삭스 등 좌완투수. 전 질롱 코리아 감독. 1969년생.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활약하다 미국 진출을 타진했었다. 처음에는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2005년 1월 9일 결국 뉴욕 메츠와 계약했다. 메츠에 있을 당시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친 것은 전설의 레전드급 일화. 하지만 이 때문에 부상을 얻어 1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은퇴한 후 새로 생긴 호주리그에서 마무리 투수로 2년 활동 후 2012-13시즌에는 중간계투로, 13-14시즌엔 12-13시즌에 마무리를 보던 선수가 팀을 옮김에 따라 다시금 마무리로 자리 잡았다. 시드니 블루삭스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세이브왕 3회, 최고구원투수 상 2회에 빛나는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2015년에는 재활로 인해 등판하지 못했고 로스터에서도 제외되어 있으나, 은퇴 선언은 하지 않았다가 결국 2016년 지도자로 전환하였다. 2019년 질롱 코리아 감독으로서 한 경기에 등판하기도 했다. 질롱 코리아가 2019-20 시즌을 KBO 리그 연합 팀(정확히는 LG, 롯데, 키움 세 구단 연합)으로 치르기로 하고, 현지 출신 감독을 선임하면서 (질롱지역 출신의 메이저리거 그램 로이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시카고 컵스 산하 루키 AZL 컵스 좌익수/우익수, 1997년생
116만 달러(또는 100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고 진출한 장충고 출신의 선수이다. 2학년 때 어마어마한 성적을 내며 3학년 초부터 이미 가계약이 이루어진 듯. 파워에서 강점이 있어 강타자를 기대하고 데려간 자원. 3년간 좌익수/우익수 유망주 자원으로 분류되어 루키 리그와 쇼트 시즌 싱글 A 리그 등 가장 아랫 단계의 팀에서 훈련 및 경기에 나서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프로에서 뛸 수 있는 완성도를 갖추기 어려운, 툴만 있는 유망주로 취급받고 있다. 2년 연속으로 A-에서 시작했다가 루키리그 강등, 강등 후 성적 급감이라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과거의 유망주로서의 가치를 많이 잃어버렸다. 2018/19 오프시즌에 한국인 독립리그 및 FA 선수 등으로 이루어진 질롱 코리아 에 임대되어 뛰었다. 질롱 전체의 15홈런 중 6개의 홈런을 혼자 기록할 정도로 장타 면에서는 좋았으며 에러밭이였던 질롱 코리아에서 에러 하나 없이 40경기 전 경기 출전을 한 유일한 선수였다. 하지만 시즌 중후반 이후 타격 슬럼프가 심해지면서 타율.215 OPS.685의 비율 스탯을 기록한 점은[21] , 미국에서의 부진했던 컨택 능력에 대한 의심을 지속하게 하고 있다. 결국 이듬해 스프링 캠프가 마무리 단계로 들어간 2019년 3월 18일 방출되었다. 유예기간 만료 후에 열리는 2022년도 신인 2차지명에 참가할 예정이다.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1979년생.
동산고 재학 시절부터 포수 유망주로 유명했다. 인하대 재학 시절인 1999년 11월에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가 무릎부상으로 2005년 퇴단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해설자로서 활동하다가 다시 야구선수로서 복귀를 꿈꾸며 국내팀 입단을 타진했다. 그러나 1997 신인지명 때 현대 유니콘스에 고졸우선지명된 지명권은 해외진출로 소멸되었고 또한 불과 몇 개월 차로 국내 복귀 2년간 입단 금지 조항에 걸리며, 그 때문에 법정 절차를 거치는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겨우 2007 신인지명에 참가했다. KIA 타이거즈에 2차 5라운드로 지명되었지만 결국 무릎부상 때문에 그 다음해에 은퇴했다. 은퇴한 후로는 KIA에서 스카우트로 일하고 있다. 스카우트로서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
  • 김병일
피츠버그 파이리츠 우완투수. 1976년생.
동국대 재학 시절에 손꼽히던 대어 투수였으나, 1999년 9월에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계약했다. 이후 몇 년만에 은퇴했다.
멜버른 에이시즈, KIA 타이거즈 우완투수. 1979년생.
성균관대 재학 시절인 1999년 2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 1997 신인지명 때 해태 타이거즈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지만,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으로 인해 소멸되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현대 유니콘스에 지명되며 현재는 넥센 히어로즈가 그 지명권을 계승[22][23]했고 2012년 국내 복귀했다. 2014년 4월 10일 KIA 타이거즈의 신인 투수 김영광과 맞트레이드되었다. 2016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독립구단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무산된 듯 하며, 사실상 은퇴로 보아야 할 듯 하다. 그러던 와중. 17-18 오프시즌 도미니카 윈터리그 진출을 선언하였지만 시즌 중 로스터에는 들지 못하고 강정호와 같은 팀에서 훈련만 하다가 돌아왔다. 이후 모교인 광주일고의 전훈 때 동행했으며, 2018-19 오프시즌에는 다시 한번 호주리그 멜버른에서 재기에 나선다. 질롱 코리아와의 대결에서 데뷔, 구속은 떨어지지만 노련한 40대 투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최종적으로 9경기 9.2이닝 1세이브 9삼진 5볼넷 1피홈런 1실점 ERA 0.93을 기록하였다.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 MBC 스포츠플러스의 메이저리그 중계에서 객원 해설을 맡는 등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LG 트윈스 우완투수. 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 1977년생.
고려대 재학 시절인 1997년 11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1996 신인지명 때 OB 베어스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아, 이후 OB를 계승한 두산에도 지명권이 유효해 별다른 절차 없이 국내에 복귀했다. 2013시즌 종료 후 구단의 코치 연수 제의를 거절하고 합의하에 방출되었으며 LG로 이적했다. 2014년 11월 17일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 되었다.
SK 와이번스 내야수. 1993년 생.
대형포수감으로 2011 신인지명에서도 상위권 지명이 가능했지만, 야탑고 재학 중인 2011년 3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계약을 맺었다. 2012년 볼티모어와의 부정계약으로 물의를 빚은 김성민과는 동명이인이다. 루키리그에서 2012년 12경기, 2013년 10경기 출전에 그쳤고 2014년에도 일단 루키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이전 두 시즌과는 달리 4할대 타율과 20경기도 안되어서 홈런 3개를 치는 등 타격에서 이미 루키 수준을 한참 지나친 것으로 보여져 바로 싱글A 진입. 그러나 2014년 쇼트싱글A에서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타율 0.192, OPS 0.576) 2015시즌에는 초반에 무난한 출발을 보였지만 시즌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타율이 0.204로 떨어지면서 루키리그로 강등되었다. 성적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상위 레벨로 올라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였고 결국 2015년 12월 16일 방출되었다. 2018년도 신인 2차지명에 나올 것으로 보였으나 신청을 하지 않고 1년 뒤를 기약하게 됐다. 2018년 새로 창단한 독립리그 팀 성남 블루팬더스 에 들어갔다. 2019 신인 드래프트에서 5라운드에 SK에 지명되었다. 2019시즌 퓨처스리그에서는 포수를 사실상 포기하고 내야수로 주로 기용되었고 2020시즌에는 투수로 전향했으나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채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한화 이글스 우완투수. 현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1980년생.
2001년 3월 6일 대학 동기인 이승학과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했다. 부상으로 2003년 방출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1998 신인지명 때 삼성 라이온즈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지만,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국내 복귀 후 2년이 지나고 신인지명에 참가했지만 부상 경력으로 부르는 팀이 없었고 결국 2007년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2012년 시즌 후 롯데에서 방출당했다. 그 후 한화 이글스에 입단하였으나 여기에서도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 김재영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1979년생.
중앙고에 재학 중이던 1997년 10월 6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1999년 4월에 방출되었으며 2000년 대불대(현 세한대)에 진학해 졸업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군 복무를 마친 뒤 헬스 트레이너, 대한야구협회 심판을 거쳐 2018년 2월 미국 마이너리그 심판 시험에 합격했다.
롯데 자이언츠 플레잉코치. 1991년생.
덕수고 재학 중인 2009년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24] 2011 시즌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012년 싱글 A, 더블 A, 트리플 A를 모두 경험했고 대체로 대수비로 출전했다. 수비 평가는 매우 높았으나 타격은 별로였다. 팔꿈치 부상으로 2013년 3월 24일 방출되었으며 귀국 후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2013년 11월부터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했으며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에서 롯데 자이언츠에 2차 3라운드로 지명되었다. KBO에서는 주로 백업 외야수 대수비로 뛰고 있다. 2019시즌 종료 후 플레잉코치가 되면서 사실상 현역 은퇴 준비에 들어갔다. 2020시즌 초 육성선수 명단에서도 삭제되면서 명목상 플레잉코치이지 사실상 은퇴로 보인다.
SK 와이번스 좌완투수. 1987년생.
2005년 있었던 2006 신인지명 때 두산 베어스에 1차지명을 받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메이저리그 행을 꿈꿨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06년 5월이 되어서야 텍사스 레인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어쨌든 남윤희의 진출 이후 다시 고졸 유망주들의 미국행이 가속화되었으나 10년이 지나도록 단 한명도 MLB 무대를 밟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넥센 히어로즈김상수(투수), 두산 베어스김현수, 삼성 라이온즈모상기, KIA 타이거즈임한용 등과 고교 동기. 여담으로 남윤성의 입단 거부로 김현수가 지명을 못 받았다는 얘기가 있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 이 때 김상수(투수)(삼성), 모상기(삼성), 박진원(두산) 등 다른 동기 3명은 지명받고 입단했다.[25] 즉, 그냥 당시 스카우트들이 김현수를 높게 평가하지 않은 것. 진출 초반만 해도 빠른 메이저리그 승격이 기대되었으나 부상, 수술 등이 겹치며 실전 공백이 길어졌고 결국 2011 시즌 후 방출되었다. 2012년 독립 야구단인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지만, KBO의 결정에 따라 프로야구 2군 팀과의 교류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새로 부임한 이상훈 코치가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2013년 3월 경 원더스를 떠났다. 퇴단 후는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8월 7일 KBO가 해외 출신 선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트라이아웃에도 불참했다. 이유인즉슨 그가 아직 군 미필이라 7월에 육군훈련소에 입소했음이 뒤늦게 알려졌다. 훈련소 퇴소 후 김포시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했다. 2016년도 신인드래프트 2차 지명 대상이었지만 몸을 더 만들기 위해 트라이아웃에 불참하면서 2017년도 2차 지명을 기약하게 됐다. 나이가 30줄이고 수술을 받은 후 실전 공백이 5년이 넘어가는 터라 지명 가능성은 불투명했으나 예상을 깨고 정영일, 김동엽 등으로 해외파 재미를 본 SK가 6라운드에서 지명했다. 입단 후 줄곧 퓨처스리그에 머물다가 2018년 5월 25일 처음으로 1군으로 올라왔다. 5월 30일에 첫 1군 등판을 했는데 얄궂게도 그 상대가 다름 아닌 두산이었다. 시즌 종료 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스카우트 팀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LG 트윈스 우완투수. 1983년생.
덕수정보고 재학 중인 2001년 5월 29일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이후 탬파베이 데블레이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텍사스 레인저스를 거쳤으나 눈에 띄는 활약을 못하고 부상 때문에 결국 방출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0년 중반부터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LG 트윈스에 지명되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월 31일 LG에 입단했다. 13시즌 10승을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국내 복귀 후 첫 시즌을 마쳤다. 2019년 8월 23일 일련의 사유로 은퇴를 선언했으나 공식적으로는 은퇴 처리가 되지 않았다가 2019년 10월 23일 선수단 정리 때 정식으로 은퇴했다.
한화 이글스 우완투수. 1973년생.
1994년 1월 LA 다저스와 계약. 원래는 1999년 전에 진출한데다 신인지명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 국내 복귀시 신인지명 절차를 받아야 했지만, 2011년 말 국내 복귀를 하며 다른 구단의 양해를 얻어 별다른 문제 없이 연고팀이라 할 수 있는 한화에 입단했다.[26]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 등의 기록을 세웠다. 명예의 전당 후보에 한국인 최초로 올랐다.(5% 미만 득표로 바로 제외되긴 했지만.) 2012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 미국 124승 일본 1승 한국 5승 통산 130승 기록.
OB 베어스 투수. 1954년생.
연세대 중퇴 후(재학 중 성무(공군) 야구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 2년간 활동하며 더블 A까지 승격되었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귀국했다.
  • 차승 백[27]
오릭스 버팔로스 우완투수. 1980년생.
참고로 백차승 등의 미국 진출 후 무분별한 유망주들의 해외진출을 막기 위해 해외 진출 선수가 국내 복귀시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이 완전히 종료된 시점으로부터 2년 이내에 복귀할 수 없음"이 규정화되었다.[28] 2년간 독립리그에서 활동하다가 2012시즌 일본 오릭스와 계약했다. 2군에서도 성적이 좋지 않아 시즌 후 방출되었으며 이후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가 2015년 2월 4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입단 테스트에 참가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으나 결국 테스트에서 탈락했다. 이후 7월에 치바 롯데 마린즈 2군에 합류했으나 1군 등판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시즌 후 팀을 나와 한신 타이거스의 테스트를 받았으나 탈락했다. 법적으로 KBO 리그에서 뛰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나(그가 받았다가 풀린 징계는 대한야구협회에서 내린 것으로 KBO와는 무관하다.) 미국 시민권자이기에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만 입단이 가능한 상황인데다 병역법 위반 문제(국적 때문에 법적인 처벌은 못 하지만)가 걸려 있는 터라 한국에서 더는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2016년에 국적 회복 신청을 했다가 법무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8년 5월 14일 병역기피가 명백하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2018년 4월부터 2군 투수 인스트럭터로 있으나 병역기피 건 때문에 논란을 빚었다.
LG 트윈스 좌완투수. 현 KBS N SPORTS 해설위원. 1980년생.
신일고 재학 시절인 1997년 10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 1999년 전에 진출한데다 신인지명 절차 없이 복귀해 2007 신인지명 때 LG 트윈스의 1차지명을 받고 국내에 복귀했다. 기나긴 현역 생활을 마치고 21년 만에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 후 KBS N SPORTS 해설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뉴욕 메츠, 템파베이 레이스, KIA 타이거즈 우완투수. 현 KIA 타이거즈 투수코치. 1977년생.
인하대 중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거로 활약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국내 복귀 이후에는 기아 타이거즈에서도 좋은 기록을 쌓았으며 미-한 통산 1350이닝 70승을 기록하였다. 2016년 스프링캠프 도중 은퇴했으며 2년 동안 SBS Sports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있다가 2017년 말 KIA의 코치가 되었다.
  • 서재환
뉴욕 메츠 외야수. 1975년생.
서재응의 친형. 서재응과 같이 1997년 11월 뉴욕 메츠에 입단했다. 1998 신인지명 때 연고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2차 10라운드로 지명될 정도로 그리 실력 있는 선수는 아니었고, 사실상 동생 덕에 미국 땅을 밟은 택이었다. 입단한지 1년 만에 은퇴했다. 이후 서울고, 속초상고, 송원대, 성남서고, 충장중, 안산공고 등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 서정민
롯데 자이언츠, 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1974년생.
경남고 시절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으며, 199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 롯데에서 활약하다 방출되자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1년만에 퇴단, 은퇴했다.
LG 트윈스 투수, 전 키움 히어로즈 감독. 1973년생.
2004년 두산 베어스에서 은퇴하고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며 2006년 11월 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부상으로 1년만에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넥센 히어로즈 투수코치, MBC 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을 거쳐 2017시즌 종료 후 SK 와이번스 코치로 옮겼으며 2019 시즌 종료 후 키움 히어로즈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나 2020시즌 말미 자진 사퇴를 빙자해 경질되었다.
NC 다이노스 투수. 1991년생.
2009년 3월 캔자스시티 로얄스와 계약했다. 루키리그에서는 좋은 성적을 보여주어 시즌 중 싱글A로 승격되기도 하였으나, 그곳에서는 별 활약이 없이 다시 루키리그로 돌아왔다. 수비 재능은 좋다고 하는데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으며, 타격이 문제인듯. 2013년 다시 싱글A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성적은 평범한 수준이었다. 2014년 5월 7일 자진해서 방출을 요청해 팀을 나왔다. 그런데 이게 방출이 아닌 임의탈퇴여서 계약 관계가 2016년 4월이 돼서야 끝나는 바람에 당초 나올 예정이었던 2017년도 신인 2차지명에는 나올 수 없게 됐다고 한다.[29] 자신의 인스타그램이 2016년 8월 2일에 시행하는 트라이아웃에 참가한다는 글을 남기면서 구제 여부 논란이 있었는데 서울지방법원 심리에서 '신인 2차지명 참가는 받아들이되 MLB 사무국에서 계약 종료 시점을 방출이 아닌 실질적인 계약 실효(失效)일로 볼 경우 최종 지명 대상이 된다'는 판단을 함에 따라 일단 조건부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며 8월 18일에 최종 지명 대상이 된다는 결정이 나왔다. 2년간 급여를 받지 않고, 선수 활동을 하지 않은 점이 실질적인 계약 실효로 인정되었다고. 병역은 한동안 미필로 알려졌으나 면제로 확인됐다. 김태군의 군 입대가 코 앞에 다가오면서 포수 보강이 시급했던 NC 다이노스에 2차 1라운드 지명을 받았다. 1년차인 2017시즌은 부상에 시달리며 퓨처스리그에서도 제대로 뛰지 못했으나 시즌 막바지에 1군으로 올라왔고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았다. KBO에서도 역시 부진한 타격력을 보여주며, 마이너리그 시절의 고평가되던 수비력도 실제 예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2019년 7월 들어 투수 전향설이 돌았고 9월 26일 퓨처스리그에서 투수로 공식 등판을 했다. 2020 시즌 퓨처스리그에서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으나 구단이 젊은 투수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하면서 2020년 6월 24일 방출되었다.
  • 심현석(Eric Sim)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우완투수/포수. 1989년생.
미국에서 대학교를 나와 드래프트로 지명된 강경덕 선수와 유사한 경우. 원래 포수였던 그는 2013년 A+와 싱글A 사이를 움직이다가 2014년 잠시 AA 팀에 등록되었다가 싱글A로 내려왔다. AAA까지 잠시 올라간 적은 있으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타격은 2할대 초반의 타율과 장타력 부재를 보여주지만 좋은 수비로 팀 내에 자리잡았었다. 2014년 시즌 말미에 투수로 2차례 등판 후 정식으로 투수 전향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다. 2015시즌은 쇼트싱글A에서 보냈으나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2016년 독립리그에서 잠시 뛴 후 9월에 완전히 은퇴하여 개인사업을 시작하였다.
  • 안병학
시카고 화이트삭스, 롯데 자이언츠 투수. 1980년생.
원광대 재학 시절인 2001년 1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한 후 2004년 방출되었다. 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9 신인지명 때 해태 타이거즈에 2차 4라운드로 지명받았지만 원광대학교로 진학했으며, 이 지명권은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에 복귀한 후 2년이 지나고나서 신인지명에 참가했지만 지명받지 못했고 2008년 롯데 자이언츠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하지만 재기에 실패하고 2008년 4월 신고선수 계약이 해지되어 롯데 자이언츠에서 방출당했다.
롯데 자이언츠 우완투수. 1990년생.
부산고 재학 중 2008년 8월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2012년 시즌 개막 전 방출되었다. 2012년 가을 현역으로 군에 입대했으며 2014년 7월 전역했다. 2015년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로 롯데 자이언츠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1군에는 한 번도 올라오지 못했고 퓨처스리그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면서 2017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 엄종수
한화 이글스 포수. 현 경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1973년생.
1998년까지 한화 이글스에서 활동하다 방출된 후, 사이버대에서 코치로 활동하다 미국 진출을 꾀한 특이한 케이스. 2001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했지만 1년 만에 방출, 은퇴했다.
  • 오철희
보스턴 레드삭스 외야수. 현 진흥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81년생.
진흥고 재학 시절인 1999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이미 고교 시절부터 큰 체격에 파워히터로 알려진 유망주였으나, 2할2푼대의 타율 등 프로 무대에서 적응을 못 하였다. 2002년 군 문제를 이유로 귀국하였으나 상무 입대에도 실패하고 현역 입영하였다. 이후 몇 차례 신인 드래프트에 지원해 복귀를 노렸으나 지명받지 못하고 결국 은퇴하였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광주화정초등학교 코치를 역임했으며, 시즌 도중 모교인 진흥고 감독으로 부임했다.
  • 유선우[30]
두산 베어스 우완투수. 현 MBC SPORTS+ MLB 담당 해설위원. 1979년생.
2001년 두산에서 방출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의외로 하이싱글A까지 초고속으로 올라갔으나 이내 한계를 드러내며 싱글A, 쇼트싱글A로 떨어졌고 결국 방출되었다. 귀국 후 야구교실을 열다가 2015년 MBC 스포츠플러스의 메이저리그 담당 해설위원으로 합류했다.
KIA 타이거즈 우완투수. 1986년생.
KIA 타이거즈에서 2005년~2013년까지 뛴 후, 2014년 FA자격으로 마이너리그 트리플A의 노포크 타이즈에 입단했다가 1년만에 KIA로 복귀했다. 2019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LG 트윈스 좌완투수. 전 LG 트윈스 코치. 현 MBC SPORTS+ 해설위원. 1971년생.
주니치에서 계약이 끝날 무렵인 1999년 12월 24일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했다. 2년간 활동하고 다시 LG 트윈스로 복귀했다. 사실 1997년 말에도 미국 진출을 꾀했으나, 당시 LG 프런트에서 현재의 타 리그 선수가 MLB에 진출할 때에 적용되는 포스팅 시스템이 아닌 트레이드 방식으로 진출시키려다 메이저리그 타 구단이 그에 대해 반발하고 MLB 사무국도 포스팅 시스템이 아닌 진출 방식에 대해 거부해 LG 프런트는 망신살만 샀다. 다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공개입찰을 받았지만 이번엔 보스턴이 태도를 돌변해 싼값을 부르며 결국 이상훈은 메이저리그 대신 일본 주니치를 선택했다. 문서 참조.
두산 베어스 우완투수. 전 kt wiz 코치. 현 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9년생.
2001년 3월 6일 대학 동기인 김일엽과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했다. 2006년 퇴단해 국내에 복귀했다. 1998 신인지명 때 롯데 자이언츠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았지만, 해외진출로 소멸되었다. 2007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때 두산 베어스에 지명되었다. 애초에 두산보다 순번이 빨랐던 롯데는 같은 연고 출신인 송승준과 이승학 사이에서 고민했었다. 이승학은 군 면제에 보다 즉전감인 반면 부상경력이 있었고, 송승준은 보다 젊었지만 군 문제가 걸려 있었다.[31] 결국 롯데는 송승준을 선택했고 두산은 남은김병현, 이승학, 채태인 중 당시로선 그나마 제일 쓸만했던 이승학을 뽑았다. 2009년 부상으로 방출, 은퇴했다. 2014년 신생팀 kt wiz와 계약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2014시즌 종료 후 상무 피닉스 야구단 투수 코치가 됐으며 2015시즌 종료 후 kt의 3군(빅또리)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2016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실패했으며 2017년부터 모교인 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다.
  • 이시몬
시카고 컵스 우완투수. 1983년생.
2002 신인지명 때 LG에 2차 3라운드에 지명되었지만 인하대에 진학했다. 대학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해 지명권이 풀렸고 2006년 12월 뜬금없는 시카고 컵스 행을 발표했다. 입단한지 2년만에 은퇴했다. 90마일 이상을 던질 수 있으나 소위 말하는 새가슴으로 인해 좋은 공을 못 던졌던 것이 원인이라고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혔다. 미국에서 사회인야구를 하다가 2012년 고양 원더스 트라이아웃에도 참여했으나 탈락했다.
전 멕시칸리그 우완투수. 1949년생.
고교 졸업 후 1966년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 백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 선수들의 견제로 2년만에 귀국했다. 그리고 1968년 초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몬트리올 엑스포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의 마이너 팀을 전전하며 트리플 A까지 승격되기도 했으나 끝내 메이저리그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1972년 중순에는 멕시코로 가서 멕시칸리그에서(당시 AAA수준) 사비나스 파이레츠, 포사리카 등의 팀에서 11년간 활약하며 최우수선수상, 철완투수상을 수상하며 멕시코리그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기록은 <한국야구사>와 멕시코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에 차이가 있는데 전자는 통산 150승 85패, 후자는 149승 128패 1126탈삼진 154완투 33완봉 통산방어율2.81(멕시칸리그 역대 6위기록)이라고 한다. 어느쪽이나 어마어마한 기록. 1979년에는 무려 270이닝(270이닝 이상 던진 투수는 1970년대 마이너리그에 여섯명 뿐이란다.) 19승14패 방어율 2.53을 기록하기도. 윈터리그인 멕시칸퍼시픽리그에서는 통산 16승 23패 방어율 2.97 161탈삼진을 기록했다. 본래 미국에 가정을 꾸렸으나. 1983년 MBC 청룡의 요청으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기후 부적응, 김동엽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1년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때는 사비나스의 단장으로 2년간 근무하다가 현재는 건축사업가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멕시칸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두산 베어스 우완투수. 1986년생.
개명 전 이름은 이준휘로 2005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었다. 2008년 방출된 후 2009년 5월 LA 다저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2011년 말 귀국해 다시 롯데에 입단했다. 2012년 시즌 후에 신고선수로 신분 변동되었다가 정식 선수로 복귀. 2013년 드디어 1군 무대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보였지만 2014시즌부터는 1군 마운드에 서지 못하고 있다. 2016년 9월 4일 경찰 야구단에서 전역한 전준우, 김사훈, 신본기의 등록을 위해 웨이버 공시되었다. 이후 일본 독립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에 속한 무사시 히트 베어스에서 뛰다가 2017년 8월 2일 퇴단했으며 2017년 12월 두산에 육성선수로 합류했다. 그러나 1군에는 올라오지 못했고 퓨처스리그도 세 경기 등판에 그친 채 2018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전 두산 베어스, 야쿠르트 스왈로즈, NC 다이노스, 애들레이드 바이츠, 멜번 에이스 좌완투수.
2015-2016, 2016-17 윈터 시즌 호주 프로야구에서 뛰었다. 팀은 애들레이드 바이츠. 2017-18시즌에는 멜번 에이스와 계약했으나 시즌을 다 채우지 못하고 퇴단 후 은퇴했다.
KIA 타이거즈 사이드암 투수, 1977년생.
해태-삼성-야쿠르트-컵스를 거쳐 2014년 국내복귀. 기나긴 커리어는 해당 항목을 참조. 대한민국 14번째 메이저리거. 불명예스럽게 은퇴... 하는가 싶었는데 KIA 타이거즈와 계약했다. 2018 시즌 이후 방출되었고 2019년 3월 11일 은퇴를 선언했다.
  • 장재형
미네소타 트윈스 포수. 1986년생.
2007년 8월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 사실이 알려졌다. 2010년 방출되었다.
  • 데릭 정(Derrick "Byung-jo" Chung)
토론토 블루제이스 산하 더블A 포수. 1988년생.
10살 때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인 1.5세대이다. 대학시절 포수 유격수 등 상식 파괴 수준의 멀티포지션을 뛰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럼에도 좋은 교타자로서 또한 포수로서 평가를 받았다. 결국 하위라운더로 지명되었고, 그럼에도 좋은 성적을 보이며 꾸준히 로스터에 살아남았다. AA 레벨 이하의 마이너리거로서는 굉장히 많은 나이인데 (AA 수준에서 28세 이후에 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팀에서 수비적인 면이나 유망주를 이끌어가는 면에서 가치가 있는 선수였던 듯. 2015~16년 내내 부상으로 거의 경기에 나오지 못했는데, 16시즌 후 방출. 한국인 메이저리거 김현수의 통역관으로 활약했다. 스포츠 관련 사업에도 참여하는 중. 지금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국제 스카우트로 근무 중. (https://www.linkedin.com/in/derrick-chung-530baa128)
  • 정석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우완투수. 현 서울대학교 야구부 감독. 1973년생.
1997년 12월 LA 다저스와 계약했다. 2년 만에 퇴단, 은퇴했다. 현재는 사업가 겸 서울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 정성기[32]
NC 다이노스 사이드암 투수. 현 순천효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9년생.
동의대 졸업 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 입단, 애틀란타 산하 마이너팀에서 활동하며 메이저 콜업을 기다렸으나, 매번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고배만 마시다 결국 2009년 방출되었다. 그리하여 국내 복귀를 꾀했지만 국내 복귀 후 2년 동안 입단 금지 조항이 걸린데다 나이가 많아 지명받지 못했다. 2011년에는 일본 진출도 타진했지만 실패했고, NC 다이노스에 트라이아웃에 합격했다. 한때 병역비리에도 연루되어 구속된 뒤 국내로 돌아와 현역으로 복무한 후 다시 애틀란타에 입단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한 그 열정도 대단하지만, 또 그런 선수를 다시 받아준 애틀란타 구단도 대인배. 2012년 퓨처스 리그에서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2013년 들어 시즌을 앞두고 실시한 해외 전훈에서 제외되었고 시범경기에서도 부진을 보였다. 이후 줄곧 2군에 머물다가 8월 7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뒤늦게 1군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2014년 들어서는 계속 2군에 머물면서 상당히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으며 그나마 5월 9일 이후로는 등판 기록이 없고 별다른 소식이 없어서 사실상 전력 외 판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시즌 종료 후 결국 방출되었으며 이후 울산공고 야구부 코치가 됐다. 2016년에는 다시 덕수고등학교로 이적. 2020년에 모교인 효천고 감독을 맡았다.
  • 정영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내야수. 1977년생.
1999년 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계약했지만 1년 만에 방출, 은퇴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SK 와이번스, 삼성 라이온즈 투수. 현 삼성 라이온즈 BBArk 투수코치. 1975년생.
1998년 3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1998 신인지명 때 쌍방울 레이더스에 1차지명을 받아 2002년 보스턴에서 방출되고 지명권을 계승한 SK 와이번스에 입단했으나 2004년 병역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뒤 방출되었다. 공익요원으로 복무를 마치고 2008년 삼성에 입단해 두 시즌을 더 뛰고 은퇴했다. 은퇴 후 성남고를 거쳐 대전고에서 코치를 하다가 2014년 삼성의 코치가 되었다.
SK 와이번스 1루수. 1982년생.
부산상고 재학 시절인 2000년 6월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 부상으로 퇴단한 수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받았다. 하지만 사실 채태인은 해외선수특별지명 대상이었던 다른 선수들과 달리 보스턴과의 계약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상태라 굳이 특별지명을 통해 구제를 해주지 않아도 무방한 상태였다. 즉 KBO의 구색 맞추기, 사람수 맞추기로 넣어진 셈.[33] 여담으로 2001 신인지명 때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았지만, 이미 채태인은 보스턴과 계약한 상태. 못 먹는 감 찔러보기 식으로 지명한 것. 결국 지명받은 선수가 해외진출하면 지명권이 소멸되는 규정에 따라 두산의 지명권도 소멸되었다(…). 이후 넥센에 김대우와 트레이드되어 이적하였다. 2018시즌 FA 계약에서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롯데에서 두 시즌을 보낸 뒤 2차 드래프트를 통해 SK로 이적했으나 2020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두산 베어스 코치. 1972년생.
1995 신인지명 때 LG 트윈스에 2차 5라운드로 지명되지만, 1994년 10월 5일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계약하며 한국인 타자 중 처음으로 미국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끝내 메이저리그를 밟지 못하고 멕시코리그까지 강등되자 국내로 복귀하였다. 2000년 LG 트윈스의 1차지명을 받으나 2년 만에 방출되었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는 두산 베어스에서 주전 외야수로 나름 쏠쏠한 활약을 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를 거쳐 2008년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였다. 팬들이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3루타를 치고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순간. 2009년 우승 후 은퇴를 하였고, 이후 KIA 타이거즈의 코치를 시작으로 지도자로서 활동 중이다.
  • 최은철(Choi Eun-chul)
볼티모어 오리올스 선수. 1983년생.
여타 선수들과 달리 아마야구 경험이라곤 대구상고(現 상원고) 시절에 2개월간 야구부 활동이 전부. [34] 이후 2007년부터 미 독립리그, 멕시칸리그에서 활동했다. 한때 국내팀 입단도 타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2011년 말 정대현의 통역으로 미국 진출을 돕다 정작 본인만 볼티모어와 계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전 출전은 없었으며 2012년 스프링캠프 직후 은퇴. 루키리그 코치 및 극동 담당 스카우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윤정현 투수의 볼티모어 영입으로 스카우트 경력을 시작. 2015년에 인천에서 야구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이름은 Choi's Elite Baseball Group으로 야구 교육, 재활, 체력센터 등을 운영 중이다.
  • 최창양
삼성 라이온즈 우완투수. 1973년생.
중앙대학교를 중퇴한 후 1994년 12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했다. 하지만 진출한지 1년 만에 트레이드로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이 때문에 유망주 빼돌리기[35] 등의 뒷말이 많았으며, 결국 신인지명 절차 없이 해외에 진출한 선수는 복귀시 신인지명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조약이 신설되었다. 그럼에도 미국행 러시를 이루자 2년 유예 규정이 추가된다. 1996년 4월 21에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2실점 완투승을 기록하였고 이어 26일에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기록하여 팬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이후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2000년 은퇴했다.
기아 타이거즈 우완투수. 1971년생.
2005년 11월 24일 클리블랜드와 계약했다. 이전에 프로에서 활동하다 MLB로 진출한 이상훈, 구대성이 있었지만 이들은 KBO가 아닌 NPB에서 활동하고 간 것이라, 순수 KBO 출신 중 미국 진출을 한 건 최향남이 최초. 하지만 메이저리그 승격 조건을 두고 팀과의 협상이 결렬되어 1년만에 한국으로 복귀했다. 2008 시즌 중 다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계약했지만 별다른 활약 없이 방출, 이후 LA 다저스에 입단했지만 역시 방출되었다. 일본 독립리그까지 갔다가 다시 롯데로 복귀했다. 2012년-2013년 기아 타이거즈에서 뛴 후 다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렸으나 어디에서도 오퍼가 들어오지 않자 단념하고 고양 원더스로 옮겼다. 고양 원더스가 2014년을 끝으로 해체함에 따라 사실상 은퇴할 것으로 보였으나, 2015년 3월 오스트리아 리그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에 입단했다. 오스트리아 리그 생활을 1년만에 끝내고 글로벌선진학교 야구부 코치로 합류했다가 전임 김혁섭 감독이 사임하면서 감독이 되었으나 몇 달 만에 사임했다.
  • 최현욱
전 미네소타 트윈스 외야수. 1989년생.
2007년 8월 고교 동기인 최형록과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했다. 국내 스카우트들은 둘의 계약이 의외라는 반응. 신인지명에 참가했으면 하위 라운드 지명이나 아예 미지명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었다. 2010년 방출되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코치 활동 중이며 2016년 8월 2일 실시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지명을 받지 못했다.
  • 최형록
두산 베어스 내야수. 1989년생.
2007년 8월 고교 동기인 최현욱과 함께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했다. 김상수, 안치홍, 오지환, 이학주, 허경민 등 드래프트 동기들 중 내야수 인재가 많아 프로입성이 여의치 않자 미국으로 간 케이스. 최형록의 경우 최현욱보다 미네소타 팀내 평가는 좀 더 나았다. 2011년 시즌 중 방출.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8라운드로 두산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1군에 올라오지 못한 채 2015시즌 종료 후 선수단에서 제외되었다. 2016년 12월 28일 열린 독립 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입단은 하지 못했다.
KIA 타이거즈 1루수. 현 KIA 타이거즈 ]] 타격코치. 1979년생.
고려대 재학 시절인 1999년 시카고 컵스와 계약. 1998 신인지명 때 해태 타이거즈에 1차지명을 받았지만, 미국행으로 인해 지명권이 소멸되었다. 2007 해외선수특별지명 때 KIA 타이거즈에 지명되어 국내에 복귀할 때도 KIA에 복귀했다. 2015시즌을 끝으로 은퇴해 2019년 초까지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메이저리그 중계 해설을 맡았다. 2019시즌 종료 후 KIA 타이거즈 코치로 합류했다.

2.3.2. 일본 진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우완투수. 현 일본 환태평양대학 야구부 코치. 1985년생.
대신중학교(부산)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한 케이스로, 일본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독립리그에서 활동하다가[36] 2008년 신인지명 때 소프트뱅크에 6순위로 지명되었다. 위의 신성현과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단에 지명된 선수가 되었다. 오랜 독립리그와 2군리그 생활 끝에 2012년에 첫승을 기록하고 중계 투수로서 상당히 자리 잡은 모습을 보여 줬는데(데뷔는 2009년) 일본에서 처음 선수를 시작한데다 주목도가 떨어지는 추격조(패전조) 역할이라 한국에 쉽게 알려지지는 못하였으나 이승엽, 이대호와 상대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2014년 이대호와 같은 팀인 만큼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면 더욱 지명도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4월 30일 등판을 마지막으로 2군으로 내려갔으며 7월 중순에야 1군으로 복귀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군 미필이어서 2014년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예비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2015시즌 전 팔꿈치 수술을 받은 후 이후 계속 2군에 머물렀으며 2군 리그에서 17경기에 등판해 1패, 평균자책 5.68(19이닝 13실점 12자책), 5피사사구 16탈삼진의 부진한 성적을 남긴 채 2015년 10월 4일 방출되었다. 이후 라쿠텐의 마무리 캠프에 합류해 테스트를 받고 다시 기회를 얻게 됐다.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지 못하고 2군에서 출발했다가 1주 지나서 1군으로 올라왔으나 단 2경기 등판에 그친 채 다시 2군으로 내려갔고 2군에서도 부진한 성적에 등판 간격이 길어지는 등 자리를 잡지 못한 끝에 2016년 10월 1일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국내 복귀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거듭된 부상과 부진에 지쳤는지 결국 은퇴를 택했다. 2017년 1월 22일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 동안 알려졌던 '선배들에게 당한 폭력 때문에 일본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부인했다.[37] 은퇴 후 일본 독립리그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산하 팀인 도치기 골든브레이브스의 코치가 됐다가 2019년 1월 17일 사임한 뒤 환태평양대 야구부 코치로 옮겼다. 도치기 코치 당시 KBO 리그 사상 최초의 비선수 출신 프로 지명 선수가 된 한선태를 지도했다.
  • 김시철
MBC 청룡 투수.
재일교포 출신이지만 국내에서 중고등학교(배문중-배문고)를 졸업한 특이한 케이스(정확하게는 NPB 진출을 염두에 두고 고3 때 일본 하카타고로 전학). 197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부상으로 인해 1군에 얼굴도 못 내밀고 방출되었고, 이후 포항제철에 입단해 재활에 매달리다가 1982년 MBC 청룡의 창단 멤버로 합류했으나 단 1승 만을 남긴 채 시즌이 끝난 뒤 방출되었다. 통명은 이시카와(石川).
한화 이글스 1루수. 1982년생.
2009 시즌 종료 후 FA로 치바 롯데 마린즈에 입단했다. 원래는 3년 계약이었으나 2년만에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게 된 이유와 그에 대한 비판은 문서 참조. 2020시즌 종료 직전 은퇴를 선언했다.
  • 박봉수
재일교포 3세. 위의 김시철처럼 국내에서 고등학교(휘문고)를 졸업하고 고려대에 진학했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자퇴한 뒤 일본으로 귀화, 199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주니치 드래곤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1군에 한번도 올라오지 못한 채 2000년 방출되었다. 이 후 삼성 라이온즈 신고선수로 입단했으나, 여기서도 통산 7타수 무안타라는 흑역사만을 남긴 채 2002년 방출되었다. 통명은 아라이 타카히데(新井奉秀). 은퇴 후 다시 한국 국적을 회복, 현재는 교대역 인근에서 우동집을 운영하고 있다.
전 SBS 스포츠 NPB 전담 해설위원. 1943년생.
고교 졸업 후 실업야구단인 농협에서 활동하다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즈에 입단해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롯데 오리온즈, 긴테쓰 버팔로즈를 거치며 20년간 일본에서 활동했고 명구회 입성을 앞뒀음에도,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MBC 청룡의 창단 감독 겸 선수로 한국에 귀국했다.
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 전임감독. 1963년생.
한국 야구 사상 최고의 투수 레전드. 1983년 데뷔하였으나 FA가 없던 시대였기에 전성기가 약간 지난 1996년에야 겨우 임대형식으로 일본에 진출, 주니치에 입단해 마무리투수로 4년간 활약하고 은퇴했다. 은퇴 이후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국가대표 전임 감독을 맡았다가 2018년 말 사임했다. 2020년 양키스 마이너리그 연수 예정.
  • 송상훈
주니치 드래곤즈 코너외야수/코너내야수. 1993년생.
중학교 졸업 후 일본 고교로 진학해 2년간 유학을 했다. 팀의 4번타자 겸 에이스로 팀의 지역대회 우승이나 준우승을 여러번 이끌어 현 대표로도 뽑혔을 정도. 3학년 때 귀국해 신일고로 편입했다. 2012 신인지명 때 LG 트윈스에 지명되었으나 LG 입단 의사가 없어 LG에서는 교섭권을 포기, 그리고 같은 해 열린 일본 신인지명에서 주니치에 6순위로 지명되었다. LG에는 외야수로 지명되었으나 주니치에서는 투수로 활동한다고. 2012시즌이 끝난 뒤 기존 계약이 해지되고 육성선수(한국프로야구에서는 2014년까지 이에 해당하는 용어로 신고선수라는 말을 썼다.)로 신분이 바뀌었으며 다시 타자로 돌아왔다. 2014년 10월 1일에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으며 11월 말에 공식적으로 구단 홈페이지에서 삭제되었다. 2016년 8월 2일 실시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8월 22일 시행한 드래프트에서는 지명을 받지 못했다. 나이를 감안하면 육성선수 정도는 가능할 듯 했지만 어느 팀에게도 오퍼를 받지 못했다. 2014년 시즌 이후 일본 사회인야구로 팀을 옮긴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병역 이행을 위해 한국으로 귀국했다고 하며 이후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KIA 타이거즈 내야수. 현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 1981년생.
2009 시즌 후 FA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 원래는 2년에 추가로 1년이 옵션으로 붙었지만 여러 이유로 1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시절에 원 소속팀이었던 한화가 아니라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조.
LG 트윈스 외야수. 현 LG 트윈스 1군 타격코치. 1974년생.
2006 시즌 후 FA로 주니치 드래곤즈와 3년 계약을 맺고 입단. 3년 계약이 끝나고 LG로 다시 돌아왔다. 2016시즌 종료 후 은퇴. 2018시즌 LG 코치가 되었다.
삼성 라이온즈 1루수. 1976년생.
삼성라이온즈에서 시즌56홈런 등을 기록한 바 있다. 2003 시즌 후 FA로 지바 롯데 마린스(04,05)에 입단. 요미우리 자이언츠(06-10), 오릭스 버팔로즈(11) 등을 거치고 2012 시즌 국내 복귀.[38]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며 각종 누적 기록을 갈아치웠으며 2017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그 후 야구 해설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LG 트윈스 1군 코치. 1970년생.
"바람의 아들"로 불리며 90년대 압도적 야수로 활약하였다. 1997 시즌 후 임대형식으로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3년간 활동하고 국내에 복귀했다. 2012년까지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다가 은퇴했다. 은퇴 후 한화 이글스 코치, MBC SPORTS+ 해설위원, LG 트윈스 코치를 역임했고 국가대표 야구팀 코치로도 활동했다.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MBC SPORTS+ 해설위원. 현 한화 이글스 단장. 1972년생.
빙그레-한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한국야구 사상 최고의 레전드 중 한 명 (통산 161승(2위)) 이다. 2000년 최초로 FA로 일본에 진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팔꿈치 부상으로 2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에서 2009년에 은퇴. 코치직 등을 역임하였다.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 1970년생.
현대 유니콘스에서 활약 도중 2001년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지만 2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현대 유니콘스, 기아 타이거즈에서 뛰다가 2008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두산 베어스 투수코치. 1973년생.
대학 졸업 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7년간 활약하고 2002년 부상으로 은퇴했다. 방송인과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선수 복귀를 선언, 200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3년간 계투로 활동하다 은퇴했다. 참고로 조성민은 이전에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은 채 일본에 진출했기 때문에 2004년에 있었던 2005 신인지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지명받지 못해 신고선수로 한화에 입단했다.[39] 안타깝게도 2013년 초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3.3. 대만 진출


빙그레 이글스, 삼성 라이온즈 투수. 1962년생.
1994~5 시즌에 한국인 처음으로 대만프로야구 쥔궈 베어스에서 뛰었다. 문서 참조.
  • 이외에도 총 15명의 선수가 진출했으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윤경희(전 한화, 윤경영으로 개명), 김동호(전 해태, LG), 김형균(전 OB), 감병훈(전 삼성), 박인구(전 삼성), 김종국(전 삼성), 유병선, 이준[40](전 삼성), 최동진(전 현대), 김경태(현 SK 재활코치), 김제빈(전 롯데), 김덕칠(김도윤으로 개명, 2년간 13승 기록하며 그나마 활약한 케이스).
이들 중 감병훈, 김종국은 삼성 소속 시절인 1994년 경험을 쌓기 위해 파견되었다. 당시 대만팀 준궈 베어스(현 푸방 가디언즈)와 자매결연을 맺었기에 가능했던 일. 애초 한희민의 진출도 자매결연 맺은 후 준궈팀 사장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팀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선수는 미지명 또는 실업야구에서 뛰던 선수들이다. 대부분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자세한 정보는 링크를 참고할 것.
  • 그 외에 김대우청타이 코브라스에 입단했으나 부정계약 문제로[41] 인해 1군에 올라가지 못하고 2군에서 몇 번 뛰다가 방출당했다.

2.3.4. 호주 진출


호주 리그는 겨울리그와 지역 리그가 혼합된 특이한 형태로, 팀에 이중으로 적을 둘 수 있어 일종의 임대 형식으로 많은 비-호주 선수들이 리그에 참가한다. 한국 선수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앞서 나온 해외파 항목 선수들 가운데에서는 최지만, 김선기가 호주리그에 임대되어 1시즌 뛴 적이 있다. 이외에도 KBO 출신으로 (이정민, 진명호, 허준혁(우)), 야수 2명 (이승화, 문규현), 포수 1명(장성우)등 2010-11시즌 당시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이 캔버라로 임대되어 1시즌 뛴 적이 있다. 장필준은 마이너리그 방출 이후 복귀 이전에 잠깐 호주리그를 거쳤다.
시드니 블루삭스의 구대성은 오랜 기간 리그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활약했으며, 이외에도 KBO 선수들이 은퇴나 방출 이후 재기를 위해 ABL 무대를 찾기도 했다. 이혜천(전 두산, 야쿠르트), 임경완(전 롯데), NC 다이노스 고창성 , 윤기호(전 한화), 김병현 등이 그들이다.
2018-19 시즌 호주리그의 5번째 팀으로 한국 팀 질롱 코리아가 참가하면서 많은 한국선수들이 호주 리그에 참가하였다. 다만 질롱 코리아 선수단 대부분은 결국 이후 현역 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멕시코에 진출한 김진우, 뒤늦게 육성선수로 KBO 리그에 발을 디딘 노학준 (단 노학준은 1년만에 방출되었다.), 권휘 정도가 예외이고 그 외에는 몇몇 선수들이 국내 독립리그 팀에서 뛰고 있는 정도다. 결국 질롱 코리아는 2019-20 시즌부터는 KBO 리그 소속 유망주들을 파견하는 형식으로 바꿨다.
2019-20 시즌에는 SNS로 물의를 빚고 한화 이글스에서 퇴출된 김원석이 오클랜드 투아타라에 합류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여파로 2020-21시즌에는 질롱 코리아가 참가하지 않는다.
한화 이글스, 시드니 블루삭스 좌완투수, 1988년생.
2015년까지 한화에서 뛰었던 선수이다. 2018년 10월 호주야구 공식 홈페이지 사이닝 트래커에 시드니 블루삭스 소속으로 이름을 올렸으며,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시드니에서는 중계투수로 뛸 예정으로 알려졌으나 4주차까지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고 결국 로스터에서 삭제되었다.

2.3.5. 중남미 및 유럽리그


대부분의 중남미 겨울리그는 마이너리그의 임대 리그 형식이기 때문에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오프시즌 동안 교육적 목적이나 새로운 팀을 찾기 위한 선수들이 다수 참가한다. 한국에서도 하재훈, 최지만, 강정호 등의 선수들이 도미니카나 베네주엘라 겨울 리그에서 오프 시즌을 보낸 적이 있다.
유럽리그는 대개 세미-프로 수준이기 때문에 유럽 진출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2018시즌까지 한국인이 유럽의 주요 야구 리그에서 뛴 경우는 한손 손가락 수 안에 들어간다. 여기에는 다른 해외리그에서도 뛰던 최향남이 포함된다.
전 삼성 라이온즈, 부흐빈더(독일) 외야수, 1978년생.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에서 평범하지만 오랜 선수 생활을 했던 외야수. 은퇴 이후 1년간 독일리그 부흐빈더 레지언나레 에서 활약했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 코치.
전 기아 타이거즈, 질롱 코리아, 술타네스 데 몬테레이 우완투수, 1983년생
기아 타이거즈와 질롱 코리아를 거쳐, 36세의 나이로 한국 기업 스폰서의 도움을 받아 멕시칸리그에 데뷔하였다. 6경기 1승1패 ERA 6.12만을 기록한 채 . 스폰서의 중도 해지 문제와 맞물려 입단 6주만에 방출되었다. (공식 사이트에는 아직 Reserve list로 나와 있으나 그것이 해외 선수의 정확한 신분을 반영하진 않는다.) 국내 복귀를 위해 롯데 자이언츠에서 테스트를 받았으나 불합격했고 결국 2019년 6월 27일 은퇴를 선언했다.
SK 와이번스 투수. 1989년생.
2008년 SK에 1차 지명된 투수로 프로에서는 이렇다할 활약을 하지 못한 채 SK 1차 지명 흑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다가 2014년 군복무를 마치고 방출되었다. 방출 이후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퇴단하며 은퇴하는 듯 하였으나, 오스트리아 야구 리그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에 최향남과 함께 입단하였다. 2016년 2월 연천 미라클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며 3월 25일 최종 합격했다. 연천 미라클 입단 후 외야수로 전향했으나 2017년 투수로 복귀했다. 2018년에는 경기도 챌린지 리그 소속 성남 블루팬더스로 이적했다. 시즌 후 야구학교 코치를 겸하게 됐다.

3. 미국 진출의 역사



3.1. 박찬호 이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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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국(NPB출신)
박철순
한국 최초로 미국 야구를 경험한 선수는 도쿄 오리온즈 출신의 이원국이다. 1969년 미국으로 간 이원국은 싱글A와 더블A를 거쳐 1972년부터 멕시칸리그에서 11년간 활약하며 리그 에이스 수준의 피칭을 보여주었다. 당시 멕시칸리그가 AAA로 분류되며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던 것과 당대의 평가는 이원국이 메이저리그 수준에 약간 못 미치는 전형적인 4A 리거[42] 수준의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10여년이 지나 일본을 거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도전한 첫 선수가 나오는데, OB의 레전드로 알려진 박철순 이다. 박철순 역시 더블 A까지 진행하며 상당한 수준을 보여 주었지만, 대학(연세대 중퇴), 군대(대학 재학 중 병역 이행)를 거치고 데뷔한지라 이미 당시 25세로 노망주의 경계선에 서 있었으며 이 때문에 결국 국내 프로야구의 개막과 함께 복귀를 선언한다.

3.2. 박찬호와 황금의 90년대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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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최경환
최창양
'''김선우'''
'''조진호'''
서재환
'''서재응'''
정석
김재영
'''백차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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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중근'''
'''최희섭'''
'''김병현'''
'''이상훈'''(NPB출신)
송승준('''현 롯데''')
권윤민
오철희
김병일
서정민
정영진
그리고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한 박찬호가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성공시대를 열었다. 첫번째 타자 진출자는 최경환이었다. 12월에는 최창양도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1997~1998년 동안에 데뷔한 선수 중에서는 상당한 수가 메이저리그 경기장을 밟았다. 대표적으로 서재응, 김선우, 백차승[43], 조진호, 봉중근 등이 있으며 이외 마이너리그에만 머문 선수로는 정석(당시 최고 수준이었다고 평가되었으나 진출 전의 부상으로 경기에 거의 뛰지 못했다.), 서재환(서재응의 형. 한국 10라운드 지명 후 동생과 함께 미국행), 김재영(고교졸업 후 실험적 진출을 했다. 금방 돌아와 한국 대학 입학) 등이 있다. 1999년에는 해외 진출 붐이 최고에 달했는데, 한국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로 꼽히는 김병현과 추신수 이전 유일한 메이저리그 타자였던 최희섭이 이 해 미국땅을 밟았다. 주니치의 이상훈 역시 이 해에 미국으로 건너와 FA 계약을 맺었으며 이는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그 FA 계약이다. 이외 1999년 데뷔해 마이너리그에 머문 선수는 송승준[44] , 권윤민, 김병일(2차 1라운드급으로 예상되었으나 미국에서는 거의 경기를 뛰지 못했다.), 오철희(추신수와 동시대의 최고 타자 유망주), 서정민, 정영진이 있다. 설명에서도 볼 수 있듯 99년 경 부터 상당한 수준의 유망주가 별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오는 일이 꽤 늘어났다.

3.3. 소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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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제국'''
'''추신수'''('''현 텍사스''')
김일엽
'''구대성'''(NPB 출신)
이승학
안병학
엄종수(KBO 출신)
유선우(유병목,KBO 출신)
정진(정성기)
2000년대 초반 류제국, 추신수 등은 해당 메이저리그 붐의 마지막을 장식했으며 둘 모두 메이저리그 데뷔에 성공했다. 특히 추신수는 현재까지도 활약하며 HoF 급인 스즈키 이치로를 제외한 아시아 야수 중에서는 최고의 누적을 기록하고 있다. 2005년에는 일본에서 선발 투수로 성공을 거둔 오릭스 구대성이 메츠에서 1년간 활약하기도 한다. 하지만 명암이 갈린 선수도 많은데 대표적으로 김일엽이나 안병학, 이승학, 채태인 등이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KBO 리그 은퇴 선수 출신의 엄종수나 유선우(유병목) 등이 마이너리그에 도전하기도 했다. 2003년 정진(당시 이름 정성기)의 미국 진출이 있기는 했으나 2000년대 중반은 비교적 미국 진출자가 없이 한산했다.
2004년까지 도합 31명의 전직 프로 및 아마추어 선수가 미국에 진출했다. 그 중 아마추어 출신은 모두 27명이었으며 메이저리그 성공 비율은 프로-아마추어 출신 도합 31명 중에서는 12명. 아마추어 출신 27명 중에서는 10명이었다.

3.4. 마이너리그 진출 버블시대


(한국 고교 출신만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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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윤성
정영일 (SK)
장필준 (삼성)
이시몬
장재형
최향남(KBO 출신)
이대은 (KT)
강인균
강경덕
국해성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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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록
최현욱
이학주 (삼성)
하재훈 (SK)
김재윤(KT)
안태경
정수민(NC)
이지모(KBO 출신)
나경민(롯데)
문찬종 (키움)
52
53
54
남태혁(SK)
'''최지만'''(레이스)
신진호(NC)
2006년 이후 다시 마이너리그 진출이 시작되었다. 남윤성(당시 이름 남윤희)이 2006년에 미국에 진출하였고 그 1년 아래로 김광현과 함께 한 때 고교 좌완 트로이카로 불렸던 정영일, 장필준이 2006, 2007년 미국 진출을 선언하였다. 특히 남윤성과 장필준은 당시 각각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이를 외면하고 미국행을 택하면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셋은 모두 부상의 덫에 걸려 더 이상 올라가지 못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시몬, 장재형 등의 선수들은 제2의 기회를 잡기 위해 조용히 마이너리그 진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KBO 출신의 최향남은 구단의 양해 하에 포스팅 최저 금액인 101달러의 이적료로 AAA에 진출하는 도전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해외파로 집계하기는 애매한 경우지만 쿼터코리안 다윈 바니, 한국인 2세 행크 현 최 콩거와 미국으로 야구유학을 간 강경덕이 드래프트에 지명되기도 했으며 이들 이후로도 에릭 현석 심, 데릭 병조 정, 대니얼 세윤 오, 로버트 레프스나이더, 코너 곡위 조 등 1.5~2세 미국 선수들의 지명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행크 콩거("Hank" Hyun Choi Conger)가 잘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가 외국인 친척에게 양자로 들어가며 성이 콩거가 되었지만 한국 교포 3세로, 혼혈은 아니다.[45] LA 에인절스, 휴스턴과 탬파베이를 거치면서 메이저리그 생활을 했으나 빈약한 타격과 극악의 도루 저지율 때문에 방출당했고 멕시칸리그까지 흘러갔으나 거기서마저도 방출, 결국 일찌감치 은퇴해 고교 팀 코치를 하다가 2020년에 롯데 자이언츠 1군 배터리 코치로 합류했다. 그 외에도 2세 혼혈 제이크 더닝(전 시카고 화이트삭스 AAA 우완 투수)[46] 같은 혼혈 선수도 최근까지 뛰었다.
2008년에는 이대은을 필두로 강인균, 최형록, 최현욱 등 유/무명의 아마추어 선수들의 계약이 이어졌다. 현재 두산 베어스에서 뛰는 국해성이 컵스와 계약을 했다가 팔꿈치 상태를 이유로 계약이 파기된 뒤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는 이대은을 제외하면 국내 지명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였다. 이대은은 컵스에서도 주목받는 유망주였으나 팔꿈치 수술이 원인이 되어 성장이 늦어지다가 AAA에서 좌절했으며 이외 선수들은 모두 싱글A 레벨에서 멈추었다.
2009년에는 이학주와 하재훈, 김재윤, 안태경, 정수민 등 당시 아마추어 야구에서 내로라하는 선수 중 상당수가 미국 진출을 선언하였다. 당시 롯데 방출 선수 출신 이지모가 잠시 다저스 루키/싱글A에서 뛰기도 했다. 이학주는 BA 100위 안에 드는 등 유망주로서 가치가 상당했고 하재훈 역시 성실한 모습으로 구단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두 명은 AAA까지 올라갔지만 둘 모두 부상의 덫에 걸렸고 결국 일본 독립리그 및 NPB(하재훈)등을 거쳐 국내 복귀를 선언하게 된다. 김재윤은 애리조나에서는 포수로 뛰며 수비력은 극찬받았으나 타격이 싱글A에서도 통하지 않아 상위싱글A에서 멈추고 돌아왔으며 결국 한국에서 투수 전향을 하게 된다. 안태경은 루키리그에서 실패하였으며 정수민은 초반 싱글A까지 올라갔으나 제구력 문제로 오히려 퇴보하며 결국 국내로 복귀하였다.
2010년은 해외파 진출 최대이자 마지막 전성기였다. 동산고 최지만을 필두로 세광고 에이스 김선기, 강타자로 주목받은 김동엽, 덕수고의 대통령배 우승을 이끈 나경민, 문찬종, 신진호, 남태혁 등의 선수가 계약하였다. 대개 국내에서는 주목받는 선수였지만 미국 기준에서는 2-3라운더 또는 B급 해외계약인 50만달러 내외의 계약금이 대부분이었으며 대부분의 선수들은 초기부터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약물의 힘을 빌린 최지만. 그는 포수로서 데뷔해 타격까지 빼어난 모습을 보이며 주목받았으나 등 부상으로 1루수로 전향해 전망이 어두웠지만, 놀라운 타격을 보여주며 싱글A-호주리그-더블A를 순식간에 제패하게 된다.이후 AAA레벨에서 정체되었고 어렵게 메이저리그로 올라와서도 강등과 승격을 반복하다가 2018년에는 비록 플래툰이고 주로 지명타자로 뛰기는 해도 추신수 이후 최초의 마이너리그 출신 한국인 메이저 타자 자리를 차지했다. 김선기는 결국 시애틀 상위 싱글A에서 2년간 벽을 뚫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문찬종은 3년차에 루키리그까지 레벨이 떨어지는 와중에서도 절치부심해 6년차때 AAA 데뷔도 성공했으나, 결국 마이너리그 FA가 된 뒤 새 팀을 찾지 못한 채 귀국했다. 나경민은 수비력을 바탕으로 상위싱글A까지 올라갔으며 부상을 틈타 더블 A와 트리플 A에서도 두세경기 출전하기도 했으나 방출당해 일찍이 국내로 복귀, 수비 능력을 살려 KBO에서 전문적 제4외야수로 활약하고 있다. 나머지 선수들은 부상 등을 이유로 루키~싱글A만을 맴돌다 방출되었다. 이중 김동엽은 수비 문제와 부상, 컨택능력 미흡 등이 승격을 가로막았으나 국내에서 지명타자로 활약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한편 KBO는 국내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하고 나간 선수(예를 들어 2008년의 최형록, 최현욱, 강인균, 2009년의 김재윤이 이에 해당. 미국 진출을 하기 위해 지명을 포기해 달라고 한 경우 정도가 아닌 정말 국내 신고선수가 될 상황이었던 선수 의미.) 에 한해 국내 복귀 2년 유예 기간을 적용하지 않기로 했으나 7명이 한꺼번에 미국행을 택하자 이를 없었던 일로 해 버렸으며 2년 유예 후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 국내 팀과 계약할 시 계약금을 받지 못하고 최저 연봉만 받도록 하는 조항을 규약에 추가하게 된다.[47]
2005~2010년까지 (교포 및 미 고교 졸업자 제외) 21명의 아마추어와 2명의 프로출신 선수가 나간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 그 자체. 메이저리그에 올라간 선수는 최지만 단 1명이며 일본 프로야구에 이대은과 하재훈 2명을 더 보낸 것이 그나마 위안거리가 된다. 2010년까지 도합 54명의 선수가 미국 진출을 했으며 그 중 아마추어 출신은 모두 48명. 48명 중 메이저리거는 11명이 배출되었다. 불과 6년 전만 해도 성공률 40%의 미국 진출은 이제 성공률 20%대의 도박이 된 것이다.[48]
이 시점을 계기로 1차지명 부활 등과 맞물려 해외파 진출은 크게 감소하고, 소위 "국내 리그에서 커서 FA로 진출하자"는 인터넷 및 야구계 풍조가 생기게 된다. 다만 이 바람도 오래가지는 못하는데..

3.5. 2011년 이후 : 포스트 류현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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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한화)
'''류현진'''(블루제이스, KBO 출신)
김성민(SK)
'''임창용'''(NPB 출신)
최은철
60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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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민
'''강정호'''(KBO 출신)
박효준 (양키스 마이너)
손호영 (LG)
윤정현(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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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박병호'''(키움,KBO 출신)
권광민
'''김현수'''(LG,KBO 출신)
'''오승환'''(삼성,NPB 출신)
'''이대호'''(롯데,NPB 출신)
70
71
72
73
74
'''황재균'''(KT, KBO 출신)
배지환(파이리츠 마이너)
최현일(다저스 마이너)
진우영(캔자스시티 마이너)
'''김광현'''(카디널스, KBO 출신)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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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78
79
김하성 (파드리스, KBO 출신)
이지태(필리스 마이너)
양현종(레인저스 마이너, KBO 출신)


2011년 김진영, 2012년 김성민(포수) 등이 미국으로 진출했지만 마이너리그에서 실패를 맛보는 등 유망주 진출은 당시 크게 사그라들었다. 한편 건강 문제로 인한 2011년 정대현의 메이저리그 계약 실패를 딛고, 2012년 류현진이 한국야구 최초 메이저리그 직행에 성공하고,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게 되면서 2011~12년 경은 이전의 올림픽, WBC에서의 선전에 더해서 한국 야구에 대한 자존감이 가장 높던 시기가 되었다. 이후 KBO(혹은 KBO-NPB 출신) 선수들 다수가 미국 진출을 시도했는데, 2013년 임창용, 2015년 강정호, 2016년 박병호, 김현수, 이대호, 오승환, 2017년 황재균 등이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는 데 성공했으며 비록 마이너리그에 머물렀지만 2013년 윤석민 역시 미국 진출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길게 가지 못하고, 2019년 이후에는 오승환, 강정호 마저 사실상 빅리그 무대에서 밀려났다. 20시즌 시점에서 KBO를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 중 남은 것은 사이 영 상 2위에 빛난 류현진과 늦깎이 신인으로 들어온 김광현 둘 뿐.
2012년의 김성민 이후 약간의 소강기가 있었으나, 고교 출신 특급 야수 계약은 2011년 ~ 2019년 까지 9년 동안 총 4명이 존재했다. 2015년 고교야구 최대어 유격수 박효준이 110만달러에 양키스와 계약했으며, 2016년에는 장충고 외야수 권광민이 120만달러의 깜짝 계약을 맺었다. 2018년에는 역시 고교야구 최대어 유격수 배지환이 125만달러에 파이리츠와 계약했다. 반면 2011년 이후 고졸유망주 투수 진출의 명맥은 2018년까지 끊겼다.[49] 2019년에 이르러서야 투수 해외계약의 물꼬가 트였으나 야수들과 같은 특급 계약이 아닌, 30만 달러 이내의 계약이었다. (최현일, 진우영) 2020년 해외계약에서 장재영이 주요 빅네임 후보로 언급되고 있지만 가능성은 미지수. 이들 중 권광민은 3년 동안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헤메다가 결국 방출당했다.
또한 중-고교 야구부를 거치지 않고 미 독립리그로 데뷔한 최은철, 대학 야구부에서 중도 탈퇴 후 야구 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해 마이너리그를 택한 손호영, 드래프트 8라운드 지명 후 대학진학을 택했다가 중퇴한 윤정현 등이 2014~15년 경 미국 진출을 했던 바 있다. 이런 선수들은 계약금 역시 최대 수만 달러 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도 좋은 경력을 쌓지 못했다.
이와 같이 2019년 현재까지 한국 출생 마이너리거는 프로출신 포함 75명여, 아마출신 60명 정도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는 약 20명 배출되었다. (한/일 프로 출신과 아마추어 출신은 대략 반반) 관련 정보는 한국인 메이저리거 참조.
현재로서는 KBO/NPB를 통한 통로나, MiLB를 통한 통로 통틀어서 메이저리그 진출이 유력한 선수는 2019시즌 주목받는 김광현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
기존의 마이너리거인 박효준, 배지환을 제외하면 한국 출신으로는 김하성이 가장 유력한 메이저리거 후보로 거론되며, 이외 최근 수 년간 신인왕 출신으로 리그 스타의 반열에 이른 나이에 진입한 이정후나 강백호 같은 선수들이, 베테랑으로는 좌완투수 양현종이 있다. 경계선상의 후보로는 나성범, 조상우 등 몇몇이 거론되어 왔으나 최근 성적으로 보아서는 이들은 사실상 미지수.
2019 시즌 종료 후 스카우트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보였던 김광현이 포스팅 계약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했다. 김재환은 포스팅 도전 의사를 밝혔으나 불발.
2020시즌에는 지난해 각성하면서 KBO 타자 중 가장 기대를 받고 있는 김하성이 포스팅 도전을 시사했고, 양현종 역시 20시즌 후 FA 도전의사를 밝혔다. 이외에도 나성범 역시 메이저리그 진출의 의지를 지속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마추어 선수로는 덕수고 나승엽이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계약에 근접해 있으나 롯데 자이언츠가 지명하면서 미궁 상태이다.

4. 일본 진출의 역사


해방 전 10여 명의 한국인 야구선수가 일본 프로야구 무대를 밟았다고 전해진다. 박현명(1938) [50] 이 오사카 타이거즈(현 한신 타이거즈) 소속으로 처음 진출했고, 원래 이북사람으로 북한 야구계의 원로로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51] 그 외에도 유완식(야스다 노부오), 김영조, 이팔용 [52] 등이 1세대 일본리그 한국 야구인으로 불릴 수 있겠다.
이들 이후에 일본 야구계에는 현재까지도 수많은 재일교포들이 일본 리그에서 뛰었으며, 심한 차별 등으로 인해 대부분 귀화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그럼에도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히고 일본야구계의 레전드로 활약한 김경홍(가네다 마사이치, 일본 유일의 400승 투수), 장훈(하리모토 이사오, 3000안타 등을 비롯한 전설적 타격 기록), 김기태(재일교포)(가네시로 모토야쓰), 김소인(가네시로 아키히토), 김일융(전 삼성, 니우라 히사오) 등의 한국계 선수가 많으며 현재에도 많은 유명한 선수, 심지어 마쓰이 가즈오, 니시오카 츠요시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재일교포 3세, 4세 선수들이 존재한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해방 후 실업야구 시대의 일본 진출은 백인천이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진출하여 외야수로 장기간 활약한 사례가 있고, 이원국(Ernesto Carlos Won-Kuk Lee, 전 MBC)은 도쿄 오리올즈를 거쳐 멕시코리그로 진출해 통산 200승을 거두기도 했다. 프로야구 출범 후 최초 일본 진출은 1996년 선동열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FA제도가 없어서 임대 형식이었다. 1999년 FA제도가 생기면서 국내에서 실력과 명성을 쌓은 유명 선수들이 FA로 진출하는 것이 일본 진출 사례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고교, 대학 아마추어 선수가 일본에 진출한 것은 미국 진출보다 더욱 적다. 1996년 조성민이 최초의 선수이고, 고려대 출신 박봉수가 신인지명 7순위 지명으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기도 했으나, 박봉수는 재일교포였다.[53] 재일교포를 제외한 한국인 아마추어 선수가 일본 프로야구단에 최초로 지명된 것은 2008년 신인지명(김무영, 신성현)이 되어서였다.
일본에서는 외국인일지라도 일본에서 고등학교 혹은 대학을 나온(드래프트 당시 최종학력 기준) 아마추어 선수는 일본인 선수처럼 대우하기 때문에 정식으로 신인지명에 참가할 수 있으며, 외국인 선수 쿼터도 적용받지 않는다.(일본은 외국인 선수 보유가 무한대라서 쿼터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1군 등록은 4명까지 가능.) 그 때문에 2000년대 들어서 중학 야구선수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김무영, 신성현, 송상훈[54] 모두 그러한 케이스.[55]
한국프로야구를 거쳐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 크게 성공한 선수들은 투수, 그 중에서도 마무리 투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선동열로, 3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일본에 진출했는데 첫 시즌에는 부진했지만 절치부심한 2년차에는 세이브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며 맹활약하는 등 약 3년간 리그 탑 마무리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비슷한 위치인 선동열과 정반대 케이스 임창용이 국내에서 부진하다 30대의 나이에 진출하였는데, 일본에 진출한 이후 구위를 완전히 회복해 리그 정상급 마무리로 활약한 바 있다. 그리고 같은 팀 후배 오승환은 2014시즌-2015시즌 2년 연속 세이브 1위를 차지하는 등 또다른 한국인 특급 마무리의 위상을 일본에 보여주고 있다.
반면 정민태, 정민철 등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한국의 에이스 선발 투수들은 탈탈 털리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정민철의 경우는 여러 문제가 얽힌 복잡한 케이스인데 항목에서 보면 이해를 할 것이다. 정민태는 멘탈 자체에 충격을 먹고 2군에 짱박힌 채 역시 2시즌 만에 고향 팀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한다. 그나마 선발로 자리잡아 활약한 건 구대성 정도였고, 이상훈의 경우 혈행장애가 계속 괴롭혀 선발에서 내려와 불펜 투수로 보직을 바꾼 뒤에야 리그 우승으로 제 몫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진출로 야구계를 놀라게 했던 이혜천은 원포인트 릴리프로 뛰었지만 눈에 띄는 활약은 하지 못했고 2년 뒤 친정팀인 두산 베어스로 복귀했다.
타자들은 전반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한 경우가 많다.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5툴 플레이어로 꼽혔던 이종범이 그 예다. 초반에는 나름대로 잘 나갔으나 시즌 중반으로 향하면서 점차 하락세를 겪게 되었고, 유격수로서 공수 양면에서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평을 받던 와중에 팔꿈치 사구로 인해 하락세가 더욱 심해지면서 결국 외야수로 전향했다. 이후 호시노 감독과의 불화, 프로 의식 문제, 향수병까지 겹치며 결국 2001년 중반에 친정팀 해태를 인수한 기아 타이거즈로 컴백한다. 컨택 하나는 국내 1인자라고 평가받던 이병규 역시 3년간 출루율 3할을 넘긴 시즌이 단 한 시즌도 없을 정도로 고전하다가 2010년 친정팀 LG 트윈스로 돌아왔다. 주루능력 퇴화는 덤. 이병규를 뒤이어 2010년 치바 롯데 마린스에 입단한 김태균은 첫 해 개막전 5연타석 삼진이라는 어마어마한 삽질을 보여줬으나 이후 페이스를 끌어올리며 올스타전에도 뽑혔다. 이후 체력이 방전되면서 후반기에는 부진했으나, 어쨌든 21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팀도 우승했으니 이만하면 첫 시즌치고는 괜찮지 않느냐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11년에는 부상으로 몇 경기 나오지도 못하는 와중에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 등을 이유로 2년간의 일본생활을 마무리한 후 2012년 한화로 돌아왔다. 김태균과 같은 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입단한 이범호는 타격, 수비 모두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의 절반 이상을 2군에서 보냈다가[56] 결국 1년 만에 짐을 쌌고, KIA 타이거즈로 이적했다. '국민타자' 이승엽의 경우 3년 연속 30홈런을 날리는 등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장기계약 이후에는 부진만 거듭하다가 결국 오릭스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다보니 '빅보이' 이대호가 일본에 진출했을 때도 어렵지 않겠느냐는 여론이 많았는데, 이대호는 진출 첫 해부터 팀의 중심타자로 거듭났고 이후에도 꾸준히 3할 타율과 적절한 장타력, 높은 타점 으로 4년간 베스트나인을 두 번 수상했고 2015년에는 일본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한국프로야구 출신 타자 중 가장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한일 양국에서 홈런왕에 오른 선수가 타이론 우즈 뿐이라는 것은 넘사벽. 물론 홈런왕 타이틀 빼면 이대호 활약도 종합적으로는 밀리지 않는다.
이후 국내에서 고등학교 이상을 졸업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진출했다가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진출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대은하재훈이 대표적인 사례. 그러나 치바 롯데 마린즈와 계약한 이대은은 반 시즌만 제대로 활약을 보인 뒤 부진 및 2군 강등을 반복한 끝에 2년 만에 병역 의무 문제로 귀국했고, 일본 독립리그를 거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한 하재훈 역시 별 활약 없이 한 시즌만에 일본 독립리그로 돌아갔다. 남윤성 역시 NPB 입단 테스트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탈하며 쓸쓸히 한국행.
2017년은 약 20여년 만에 최초로 NPB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가 없었으며[57] 2018, 2019, 2020년에도 없었다. 향후 A급 FA가 수 년간 거의 씨가 말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KBO 출신 선수는 쉽지 않을 듯. 이는 최근 들어 급속히 폭등한 한국 FA 시세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 구단과의 자금 경쟁에서 이길 만한 구단은 요미우리, 한신, 소프트뱅크같이 일본에서도 빅마켓으로 분류되는 구단 정도. 최근 연간에는 오히려 데이비드 허프, 윌린 로사리오와 같이 KBO를 거쳐 아시아 시장에서 검증된 외국인 선수들이 NPB에 진출하는 사례가 더 많아졌다. 한국인 내에서 따져보더라도 오히려 최지만, 강정호 같은 메이저리그를 거쳤으며, KBO에서 4년 FA 계약이 불가능한[58] 선수들이 실력이 떨어진 이후 찾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을 것으로 보인다.

[1] 스프링캠프 초청선수[2] 스프링캠프 초청선수[3] 스프링캠프 초청선수[4]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2020년 2월 시점 명단.[5] 명인정보고등학교를 나온 비선수 출신.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사이트에는 그가 고양 원더스에서 뛴 경력이 있는 것으로 나와 있으나 고양 원더스에는 비선수 출신이 뛴 적이 없다.[6] KBO 리그 선수 등록 마감일 및 복귀 해외파의 유에 기간 마감 기준일이 매년 1월 31일이므로 그 날짜를 넘겨 방출된 권광민은 2020년에 열리는 2021년도 신인 2차지명 대상이 아니다.[7] 2,573만 7,737달러 33센트.[8] 좌익수로도 뛴 경력이 있지만 수비력 문제로 실험에 그쳤다.[9] KBO에서는 유격수였으나, 메이저리그에서는 포지션 변경이 유력하다.[10] 과거 언론 보도 등에서 계약시점을 밝히지 않은 때문에 계약 당시 계약 일자가 언제인지 의문이 있었는데, 현재 엠엘비닷컴에 나오는 공식 계약일자는 2018년 8월 24일이다. 계약을 앞두고 있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과 거의 일치한다.[11] 오클랜드 김성민과는 동명이인. 볼티모어의 불법 계약으로 인해 계약이 취소. 결국 미국행을 포기하고 일본 후쿠오카 경제 대학에 진학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의 해외파는 아니다. 그래서 계약금도 정상적으로 받았다.[12] 삼성이 SK로부터 김동엽을 받고, SK가 넥센으로부터 고종욱을 받고, 넥센은 삼성으로부터 이지영을 받는 트레이드.[13] 아마추어~미국 시절에는 포수였다[14] 한 기사에서 2016년 7월 11일 방출이라고 되어 있는데 미국 날짜 표기(월/일/연도)를 거꾸로 보면서 연도/월/일로 오독한 듯 하다.[15] 당초 TO는 1명이었으나 특혜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1명이 추가되어 박준표가 같이 합격했다.[16] FA 자격을 얻은 상태에서 일본으로 진출했기에(단, 규약 개정 전 규정 적용) 국내 복귀시 롯데에 우선권이 있었다. 이는 이승엽이 복귀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17] 신진호는 2014년 4월 캔자스시티를 떠난 뒤 2년 이상 공백기가 있었지만 하재훈은 일본 프로야구 팀 소속으로 2016년 1군 기록이 남아 있다. 하재훈 측은 컵스와의 계약이 끝나 마이너리그 FA가 된 시점부터 유예기간이 산정된다고 주장했지만, 주장대로라면 야쿠르트를 비롯한 일본 프로 팀들은 해외 프로 팀이 아니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성립하기에 자연히 가처분신청은 기각되었다.[18] 탬파베이 레이스는 유망주가 잘 한다고 바로 올리지 않고, 마이너리그 단계를 차근차근 밟게 해 실력을 확실하게 다지도록 하고 메이저로 부른다.[19] 기존 포지션은 유격수. 미국에서는 사실상 3루수로 전향했으나, 2019년 이후 백업이 되면서 3루와 유격수를 모두 맡는다.[20] 소위 "악마의 재능"론.[21]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미지명선수 노학준의 타율도 0.267이었다.[22] 히어로즈는 현대 유니콘스를 계승하는 팀이 아니라 새로 창단된 팀으로 당시 이 김병현의 지명권 계승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23] 그러나 쌍방울과는 별도임을 표방했던 SK가 쌍방울이 지명했다가 대학으로 진학했던 선수들(정대현, 박정권 등)의 지명권을 그대로 가져간 사례가 있었기에...[24] 당초 아시아 청소년대회에 참가하는 청소년대표팀에 들어 있었으나 이 계약으로 인해 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메이저리그 팀과 계약한 선수들은 예외없이 청소년대표에서 탈락시키고 있다.[25] 비슷한 경우로 추신수의 미국 진출 당시 부산고 동기인 정근우가 신인 2차지명 때 보복성으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정근우는 작은 체구 때문에 발전 가능성을 낮게 봤던 게 미지명 사유였다.[26] 이는 신인 특별 지명 당시 한화만 유일하게 지명하지 못했던 것이 작용했다.[27] 문서를 보면 나오지만 미국 시민권을 취득해 한국 출신 미국인이 되었다.[28] 이 기간 중 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역 일반병이나 사회복무요원으로만 복무가 가능하며 군팀인 상무와 경찰청 입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위의 김선기의 경우처럼 입대 자체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KBO가 퓨처스리그 출전을 공식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 2년 경과 후 복귀하는 선수는 반드시 KBO에서 주최하는 트라이아웃을 거쳐야 하며(다만 이 트라이아웃이 규약에 없는 임의 행사이고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는데다가 일부 구단이 사전에 미리 접촉했다는 의혹을 받는 등 잡음이 일고 있다.)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2차 지명에만 나설 수 있고 지명을 받고 입단하더라도 계약금을 받지 못하며 연봉도 신인 최저 연봉만 받는다.[29] 다시 말해 캔자스시티 구단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뜻이다. 야구규약에는 분명히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 관계가 완전히 종료된 시점부터 2년이 지난 뒤에 복귀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다.[30] 개명 전 이름 유병목.[31] 사실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선수가 이승학이었다. 미국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자 국내 복귀를 결심했지만 군 면제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2년을 꼼짝없이 날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32] 2014시즌 도중 '정진'으로 개명.[33] 다만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야만 하기에 근 1년을 더 쉬어야 했지만 그걸 좀 더 앞당긴 셈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고교 대선배인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34] 비 야구부 출신으로는 한선태가 LG에 입단하기 전의 유일한 프로급 선수였다![35] 게다가 그는 당시 롯데 연고였던 마산고등학교 출신이다.[36] 다이이치경제대-후쿠오카 레드와블러스[37]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반응이 우세하다.[38] 역대로 가장 오랜 기간 NPB에서 활약한 한국 선수이다. (8년) 일본 프로야구에서 1년만 더 뛰었다면 용병 신분을 벗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랜 기간. 리그의 경제적 규모가 좁혀진 것등을 감안하면 한동안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39] 신고선수로 입단하려해도 해당 연도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해야만 한다.[40] 이해창의 아들이다. 대만에서도 실패한 후 세미프로인 중국 리그까지 갔다.[41] 보유권이 롯데 자이언츠에 있는 상황에서 무단 입단을 한 것.[42] 즉, 지금으로 치자면 일본야구나 한국야구 외국인으로 뛰는 선수들 정도?[43] 백차승은 병역 기피 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법적인 처벌만 받지 않을 뿐 사실상 범죄자 신세가 되어버렸다.[44] AAA에서 감독이 선발 경기 후 승격 소식을 전하려고 했으나 해당 경기에서 손 부상을 당하며 김선우가 대신 승격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45] 국뽕이라는 이유로 최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고 행크 콩거라고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 존재하나, 최현은 엄연히 본명이며, 오히려 행크라는 이름이 별명이다. 정 정확히 말하고 싶다면 현 최 콩거라고 부르면 된다.[46] 아버지는 미국인, 어머니는 한국인.[47] 이에 대해 해당 규정이 삽입된 2009년 4월 이전에 해외로 진출한 선수들까지 최저 연봉만 받게 하는 것은 소급 적용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으나 KBO는 나간 시점이 아니라 돌아오는 시점이 기준이라고 못박았다.[48] 참고로 고교 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진출하려던 2012년 경의 오타니 쇼헤이를 설득하기 위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제시한 게 2005년~2009년 경 한국인 마이너리거들의 실패 사례들 일부였다. 2012년이면 아직 멀쩡한 유망주도 많아서 이학주는 Top 100 유망주였고, 이대은 하재훈 최지만 역시 백업급이나마 메이저 입성 가능한 속도로 성장하던 중이었는데 그 때 상황만 가지고도 오타니를 설득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면 당시 마이너리거들 대부분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몰락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49] 현대 야구의 흐름상 구속이 90마일 근처인 경우가 많은 아시아리그 투수들은 중남미 해외계약 유망주에 우선순위가 밀렸으며, 최근의 엄격한 해외계약금 제한 추세에 따라 아시아 지역 유망주들의 계약금은 대개 100만달러 이내로 머무르고 있다.[50] 박현덕, 박현식 선생의 장형[51] 동생들은 해방 전후 인천에 월남[52] 후지모토 히데오, 3세 때 도일, 거인군의 200승 투수, 일본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 투수, 단일시즌 최저 평균자책점 0.73 기록 보유.[53] 여담으로 박봉수는 고교 시절에도 쌍방울 레이더스에 지명을 받았기에 '''역대 최초로 한일 양국 신인지명에 지명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54] 2012년 LG 트윈스에서도 지명을 받은 적이 있다.'''역대 2번째로 한일 양국 신인지명에 지명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1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방출되었다. 그리고 2016년 KBO 드래프트에 다시 나갔지만 4년 전과 달리 어느 구단에서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2019년 현재 무직 상태이며 근황도 알려지지 않았다.[55] 송상훈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케이스이다. 일본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를 보면 외국인 선수가 일본인 대우를 받는 방법 중에 '''일본 학교를 다닌 적이 있지만 그 기한이 3년이 안 되는 선수는 드래프트로 프로에 입단해야 하나, 일본 학교를 다닌 시기+일본프로야구 등록 시기를 합쳐서 5년이 돼야 내국인 선수 대우를 받는다.'''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론상으로만 가능하지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일본프로야구에 간 선수는 아무도 없었는데 송상훈이 최초로 이렇게 입단했다.(송상훈은 일본에서 학교를 2년만 다녔기 때문에 일본프로야구에서 일단 3년을 뛰어야 일본인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 사실 이런 상황에 처한 선수는 꽤 많다. 왜냐하면 일본으로 고교유학을 간 후 2년만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고 3학년 때 한국으로 와서 KBO 진출을 노리는 선수들은 상당히 많기 때문. 이 선수들도 본인이 원하면 NPB 드래프트에 지원이 가능했다. 신청을 안 했거나, 드래프트 신청 후 지명받지 못해서 그렇지.[56] 이 때 2군에 가 있는 이범호의 빈 자리를 메웠던 선수가 로베르토 페타지니였다.[57] 김정후치바 롯데 마린즈 입단 테스트를 받기는 했는데 불합격하여 입단에는 실패했다.[58] 강정호는 미국진출 당시 포스팅으로 계약했기 때문에 키움 히어로즈가 보유권을 갖고 있으며 최지만은 당연히 KBO에서는 신인 취급인데다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 종료 시점부터 2년 쉬어야 하고 계약금 없이 최저 연봉으로 첫 시즌을 뛰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