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생애

 



1. 집안 배경과 성장기
2. 정계 입문
3. 1차 내각
4. 총리직 사임 뒤 재기
5. 2 · 3 · 4차 내각 시절
5.1. 2012년: 재집권
5.2. 2013년: 도쿄 올림픽 유치 성공
5.3. 2014년: 3차 내각 성립
5.4. 2015년: 아베 담화
5.5.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 등장
5.8. 2019년: 역대 최장기 집권 기록 수립
5.9. 2020년: 길었던 아베 시대의 끝
6. 두 번째 사임 이후
6.1. 2021년


1. 집안 배경과 성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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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는 1954년 아베 신타로와 기시 요코의 둘째 아들(사진의 왼쪽 아이)로 태어났다. 이 집안은 무척 화려한 정계 집안이다. 외할아버지는 자민당 체제를 확립한 쇼와의 요괴 기시 노부스케, 외종조부는 기시의 친동생이자 7년이 넘는 장기집권에 비핵 3원칙으로 유명한 사토 에이사쿠다. 할아버지인 아베 간도 중의원을 지냈고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는 외무장관을 지내다가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됐다.
다만 친가와 외가가 보이는 행적이 반대다. 아베의 외고조부는 일본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로, 이 자는 청일전쟁 이전 고종과 당시 왕세자 이척이 있던 경복궁을 불법으로 기습하여 점거한 전적이 있는 일본 육군 대장 출신이다.[1] 아베의 외조부는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기시 노부스케로 1930~1940년대 만주국에서 주요 요직을 지내며 일본 군국주의를 최전선에서 주도하던 '''A급 전범'''이며, 전후 총리대신을 역임하기도 했다.
반면에 친할아버지인 아베 간은 야마구치현의 대지주 출신으로, 오슈(奥州, 지금의 이와테현)에 근거를 둔 아베노 무네토의 후예라고 하는데, 외조부와는 상반되는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1942년에 대놓고 전쟁 반대를 외치며 도조 히데키를 정면 비판했으며, 대정익찬회의 공천도 거부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될 정도로 반골정신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1946년 총선을 준비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해 전후 일본 정치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베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도 본인이 아베 간의 아들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으며 '기시 노부스케의 데릴사위'라고 부르면 매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아베 신조는 친가 쪽보다는 외가 쪽의 정치적 사상에 어렸을 적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외할아버지에 대한 애정 등 감정적인 요소가 아베 신조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2][3]
아베는 학생 시절부터 자신을 아베 간이 아닌 '기시 노부스케의 손주'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정한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으로 꼽았다.[4] (이토 히로부미에게 '조슈 번 번영을 위한 일본 황권 내란 수모자'라고 비난주며, 조선계 러시아인 최재형과의 히로부미 암살 공모를 꾸몄다는)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 말한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의 언행을 두둔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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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찍은 걸로 추정되는 어릴 적 사진[5]
1972년 고등학교 졸업사진
아베 신조는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계열학교까지 입시를 치르지 않고 자동으로 입학하는 체계(일관교육)를 가진 사립학교인 세이케이(成蹊) 소학교에 입학, 세이케이 중학교, 세이케이 고등학교를 거쳐서 세이케이대학[6]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에 미국에 건너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 정치학과를 다녔지만 1979년에 중퇴했다.[7] 외조부와 작은 외조부, 거기에 모자라 친조부와 부친까지 죄다 도쿄대 법대 출신이었던지라 아베 자신도 집안 안팎에서 도쿄대 진학을 압박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기사 아베 신조의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 신타로가 '우리집에서 대학은 도쿄대 밖에 없다!'고 말하며 두꺼운 책으로 신조의 머리를 때리는 일도 있을 정도로 좀 심하게 강요했고, 이는 역효과가 나서 오히려 신조는 반항심에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한다.
참고로 미국 USC 유학 경력에 대한 허위의혹이 존재한다. 1998년의 아베신조 홈페이지 경력란에는 USC 정치학과에 2년간 유학했다고 기재되어 있었으나 2016년 시점에서는 삭제된 상태였다. 2004년 '주간 포스트(週刊ポスト)'의 보도에 의하면 아베는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 정치학과에 재적한 적이 없고, 이수한 코스 절반이 외국인을 위한 영어코스였으며, 실제로는 유학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기사 다만 2015년에 대학 캠퍼스를 방문해서 총장과 이야기한 것이 홈페이지에 보도된 것으로 보아서 동문 취급은 잘 해주는 듯. 대학교 기사 신타로는 아들의 부족한 스펙을 커버할 목적으로 신조를 외국에 유학을 보냈는데, 신조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자주 국제전화로 고국의 지인과 이야기를 했고, 국제 전화요금이 엄청나게 나온 것이 아버지에게 들통나서 강제로 귀국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교에선 아베노 무네토(헤이안 시대 선조), 모리 모토나리처럼 양궁을 배웠다고 한다. 후지TV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양궁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2. 정계 입문


미국 유학 뒤 고베 제강이란 회사에서 일하다가 1982년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1987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8]의 주선으로 모리나가(森永) 제과(일본 최초 제과 주식회사) 마쓰자키 아키오(松崎昭雄) '''회장의 딸'''인 마츠자키 아키에[9]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다.
아버지 아베 신타로는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지내며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로 꼽혔으나 췌장암 선고를 받고 1991년 사망했다. 아베 신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1993년 아버지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 제1선거구에 출마해 당선하며 국회에 입성했다.
호소다 히로유키의 후임으로 모리 요시로 총리 시절에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 내각관방 부장관에 임명되었고 고이즈미가 총리로 취임한 뒤에도 유임했다. 참고로 내각관방은 총리 비서실 겸 내각 대변인실로 총리 집무실 바로 옆방에 사무실이 있으며, 내각총리대신을 총괄, 보좌해서 내각의 조정 업무를 담당한다. 대변인 으로 언론에도 매일 나오기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보통 정치세력의 차세대 에이스들이 내각관방장관으로 경험을 쌓은 뒤에 총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후임은 시오자키 야스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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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에서 북한에 대한 대북 강경파로 주목을 받았고 북한에게 무력 사용과 경제제재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해 인기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2002년 10월 22일에는 북한에 의한 납치 사건에 관련하여 아베가 민주당의 간 나오토 간사장과 사회민주당의 도이 다카코 당수를 얼간이 의원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다카키 요시아키 의원이 아베를 비판하였다.
그 인기 덕인지 2003년 자민당의 간사장을 맡았다. 3선 밖에 안 되는 젊은 정치인인 그에게 간사장직을 맡김은 2003년 11월 중의원 선거의 승리를 위해서였는데, 실제로 11월 총선에서 자민당은 과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재선확률이 50%에 못미쳐 3선쯤 되면 중진이 되는 한국에서야 이해가 안 될 수 있지만, 아베에게 간사장을 맡긴 것 자체가 소위 '고이즈미식'의 엄청난 파격으로 여겨졌다. 지역 기반이 확고하고 자리를 잡은(혹은 세습을 받은) 의원이 자동으로 연임하는 일이 매우 흔한데다가 잦은 의회해산으로 인한 조기총선도 많은 일본에서는 3선 의원 정도는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파벌의 입김인사가 강한 자민당 내부에서는 파벌간의 불협화음을 방지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당선 횟수 주의"가 상당히 중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간사장은 7선 의원부터 가능한 자리이며, 3선은 정무차관 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이즈미는 자민당의 파벌을 반쯤 해체시킨 사람이라 이런 인사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간사장으로서 아베 신조는 당내 개혁 조치를 폈지만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목표치 51석에 못 미치는 49석을 확보하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그러나 후임 간사장의 요청으로 간사장의 밑인 간사장 대리를 맡는다. 어쨌든 간사장 대리로서 아베 신조는 우정개혁으로 촉발된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반고이즈미파 낙선을 위한 소위 ‘고이즈미의 자객’으로 불린 미녀 후보들을 공천하는데 역할을 했고 큰 성공을 거뒀다.

2005년 우정 해산 직후에 발표된 차기 총리 여론조사에서 아베 신조는 53%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보였다. 고이즈미가 차기 총리로 낙점해 둔 부분도 있었지만, 일본 국민들로부터 이미 자생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다는 부분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아베 신조라는 정치인이 납북자 문제와 북한에 대한 강경 스탠스를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강력한 지지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3. 1차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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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대 총리 취임 공식 사진
2006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해 경쟁후보인 아소 다로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상을 물리치고 자민당 21대 총재에 당선됐다. 선거에서 이긴 다수당 대표(총재이자 간사장)가 총리를 맡는 일본의 관례에 따라 제 90대 일본 총리에 올랐다. 당시 나이가 만 52세로, '''전후세대 이후 첫 총리, (전후) 최연소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총리 취임 후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경색한 한일관계, 중일관계 회복을 위해 2006년 10월 8일 중국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중일정상회담을, 10월 9일에는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한일정상회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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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 당시 우익 색을 드러내지도 않고, 국립현충원에 일본 총리 사상 최초로 참배하며,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해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다른 행보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자의에 상관없이 끌려간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하는 등 현재의 아베 모습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아베가 지금처럼 우익적인 성향이 강해진 건 2010년 이후로 알려져 있는데, 일각에서는 한국에 저자세로 일관하던 일본에게 이명박 정부가 천황 사죄 발언 및 A380 독도 시범비행 등 일본에 상당히 공세적인 외교 스탠스[10]가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분석을 내놓았으나, 진실은 본인만이 알 길. 이에 대해서는 한일관계 항목의 일본의 입장 항목을 참조. 하지만 저래놓고 국회에선 일본의 위안부 강제연행 사실을 부정하는 등, 이때부터 싹수가 노랗긴 했다. 해당 발언 영상. 그리고 이때는 자민당 안에 리버럴이 많아 상당히 보수색이 약한 정당이었고, 당 내의 논의 때문에 원래 우익이었지만 뜻을 어느정도 접을 수 밖에 없었더라던 평가도 있다. 실제로 아베는 대 한국 스탠스는 2차 정권보다 온건했지만 대중 스탠스는 전형적 우파의 입장을 띄기도 했고.
그러나 아베 총리의 첫 재임기간은 내각의 각종 스캔들로 얼룩졌다.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상이 사무실 재정운영 문제가 불거져 사임했고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상이 각종 비리 의혹으로 자살했으며 규마 후미오 방위상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었던 일[11]이라는 일본인에게 매우 민감한 발언으로 결국 주의 처분을 받고 사임했다. 후임 방위상은 고이즈미 총리가 2006년 자객후보로 공천한 고이케 유리코가 선임되었다.
이런 악재 가운데 열린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37석에 그쳤다. 자민당이 36석을 확보하는 데 그친 1989년 참의원 선거 이후 사상 최악의 성과를 거두며 연립여당인 공명당과 더해도 과반의석을 못 얻은 역사적 참패를 겪었다. 자민당이 83석,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20석으로 모으면 103석, 여당계 무소속 2석을 더해 105석인데 민주당이 단독으로 확보한 의석 109석에도 못 미쳤다. 거기에 일본 공산당과 사민당이 7석, 5석을 확보했고 국민 신당과 신당 일본이 4석, 1석을 확보하고 야당계 무소속까지 모으면 139석이어서 자민당의 입장에서는 기록적 참패였다. 아베 총리는 내각을 계속 유지할 것임을 시사했지만 새로운 아베 내각에 국민들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렇게 되자 아베 총리는 2007년 9월 10일부터 열리는 국회에서 '테러 특별조치법'(テーロ特別措置法)을 연장시키지 못하면 내각이 총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인 9월 12일 총리 사퇴를 선언해 무책임하다는 비판만 받았다. 사임의 이유로는 아베 총리가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 대표와 협상을 가지고 테러 특별조치법 연장을 위해 노력했으나 오자와 대표가 이를 거부해 사퇴를 결심했다고. 물론 건강이 안 좋아진 것도 원인이지만 자민당 안에서 아베 총리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계파간 밀실 합의로 밀려났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퇴임 뒤 수상 관저에서 나와 바로 병원으로 향했는데 이를 두고 영국 BBC는 '수상 관저에서 체크아웃해서 병원에서 체크인했다' 라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추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정말로 건강이 안 좋았다고 한다.[12] 그가 걸린 궤양성 대장염은 심하면 음식 먹은 지 5분 뒤에 대변으로 나올 만큼 심각한 병으로 그를 압박했으며, 아내 아베 아키에는 "총리직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며 울면서 그를 설득했다고 한다.
이 당시 그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골골거리는 "도련님(봇짱)"이었다.

4. 총리직 사임 뒤 재기


한동안 몸을 챙기다가 2008년부터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13]#자민당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인물임에도 반성은 전혀 없이 자민당이 캐몰락한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도 당당히 자기 지역구에 출마해 당연히 당선했다. 이후 고이즈미의 우정개혁에 반발해 탈당했던 히라누마 다케오를 자민당으로 복당시키고 총재선거에 출마하려 했지만 히라누마가 거부해, 자신의 측근인 니시무라 야스토시를 밀었지만 실패했다. 아마도 니시무라를 당선시켜서 막후에서 자민당을 이끌어보려고 했던 듯하지만 자민당 안에서는 니시무라의 총재선거 출마 선언에 웬 듣보잡이라는 반응이었다니...
보수 정치인답게 민주당 각료들은 단 1명도 참배하지 않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했고,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시진핑이 일본을 방문할 때 천황을 예방하자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는가 하면 중국을 나치즘에 비유하는 등 반중국 활동을 벌인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간 담화에 대해서도 당시 일본 내각을 무지하고 경솔한 사람으로 비난 하는 등 일본 우익 지지기반을 차근차근 다지고 있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에 대해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자 예의를 잊은 행동'이라고 맹비난했다.
한편 자민당은 다니가키 사다카즈 대표의 후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아베 전 총리를 투표없이 대표로 추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은 자신의 보수신당에 아베의 참여를 요청하고 있어서 느닷없이 다시 일본 정계의 태풍의 핵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본인은 자민당에 남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11월에 열릴 듯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단독 과반 확보까지는 못 가더라도 제1당일 가능성이 유력한지라 차기 당대표로 거론받는 아베 입장에선 다시 총리를 할 절호의 기회이고 자신이 다루기 어려운 하시모토와의 연대보단 이쪽이 훨씬 낫기도 할 테니...

5. 2 · 3 · 4차 내각 시절


2012년 12월 26일 96대 총리 취임으로, '''전후 요시다 시게루 이후 처음으로 총리직을 공백기(5년 3개월)를 두고 2번 재임하는 총리'''가 됐다. 공백기가 길기로는 역대 4위로 1923년 9년 5개월 만에 정권을 찾은 야마모토 곤노효에 이후로 89년 만에 최초다.(참고로 일본 총리직의 역사가 고작 130년이다) 이보다 조금 짧은 게 이토 히로부미의 1차, 2차 내각의 격차가 4년 3개월,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4년 1개월. 야마모토 이후로 아베 이전 공백기가 가장 길었던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4년. 참고로 역대 최장 공백은 15년 5개월의 오쿠마 시게노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베처럼 잊혀졌다가 완벽하게 부활한 인물은 '''전무후무하다'''. 공백 뒤 2차 내각이란 기준으로 이번 중의원 임기 중 사임하지 않는다면 (같은 조슈 번 출신으로의) 이토 히로부미(4년), 가쓰라 다로(3년)을 빼면 가장 긴 임기로 잔류할 수도 있다. 물론 공백이 아닌 단순한 2차 내각의 임기는 전후에도 긴 총리가 많다.

5.1. 2012년: 재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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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대 총리 취임 공식 사진
2012년 9월 26일 자민당 총재로 당선하고 11월 16일에 중의원이 해산해 2012년 12월 16일 치른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공명당이 320석[14]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압도적인 승리로 96대 총리 및 아베 신조 내각이 재탄생했다. 총리 정식 취임일은 2012년 12월 26일로 결정했다.
선거철인 2012년 11월, 일본에서 무제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기사. 그러면서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총재를 제일 먼저 짤라버리겠다는 공약은 덤. 그리고 총리에 당선되자마자 '''제일 먼저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한테 파면을 통보한다'''. 이에 대해 시라카와 마사아키는 물러나기 전에 후임자 결정때까지는 자리를 보전할 수 있다는 규정을 이용해 버틴다. 결국 일본은행 총재 시라카와 마사아키를 굴복시키고 무려 10조 엔에 달하는 1차적 양적완화를 폈다. 뉴스. 2013년 3월 31일까지 임기인 시라카와 총재를 곧이어 물러나게 하고 아베 신조의 측근을 심어서 양적완화를 하겠다는 뜻을 더더욱 밀어붙일 듯하다.
96대 총리로 당선하자마자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는 일본 땅'이라고 발표했다. 기사.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총리 임기 동안 반드시 참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기사.
대체적인 분석이, 아베 내각의 출현은 한국 입장에선 달갑지 않다. 과거사 문제나 독도 문제야 차치하고라도 무제한 양적완화를 내세운 탓에 한국과 일본이 환율 전쟁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우려가 있다. 한편으로는 아베 내각이 한중과의 관계 개선을 안하면 일본 경제에 악영향이리라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동아시아 외교에서는 매우 강경한 공약을 내건 아베인지라 한중과의 관계 개선이 썩 쉽지는 않으니 문제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베가 과연 일본을 부흥시킬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외조부 때부터 긴밀한 연을 맺던 박근혜 정부가 탄생했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친밀성으로 한일관계가 호전하라는 전망도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당선이 확정되자 아베는 박 당선인과 조속한 시일에 만나겠다는 의사도 보였다. 기사. 대놓고 "다케시마의 날 지정을 자기(아베) 임기 중에는 유보하겠다" 는 것으로 봐서 관계 개선의 의지가 정말 강한 듯 했다. 부인 아베 아키에의 한류 드라마 시청 재개 역시 관계 개선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걸 보여주는 듯. 중국을 자극할 우려가 큰 센카쿠 열도 공무원 상주 공약 역시 유보했다. 그야말로 집권하자마자 외교정책 관련 공약을 하나도 지킬 생각이 없음을 천명하는 똘끼를 보였다.
12월 21일에 아베는 박 당선자에게 직접 친서를 보내고 누카가 후쿠시로 전 재무상을 특사로 파견하겠다는 발표를 했지만 박 당선자측에서 주말이고 해서 일정이 안 맞으니[15] 아베가 총리에 정식 취임하는 12월 26일 이후에 일정을 조율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아베가 일방적으로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서서 박 당선자 측이 부담을 느꼈냐는 분석이 나왔으나 박 당선자 측은 일정이 안 맞았을 뿐 정치적인 이유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12월 26일 이후에 아베의 특사가 박 당선자를 방문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1월 4일에 공식 방문하였다.
12월 25일 내각 주요 인사를 내정, 한국에 각종 망언을 한 바 있는 아소 다로 전 총리가 재무부총리에 내정되는 등 극우 인사들을 대거 기용해 앞으로의 한-일 관계가 미궁 속에 휩싸였다. 하지만 12월 27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가 밝혔던 무라야마 담화를 이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기사. 이로써 선거할 때 내놨던 외교 공약은 전부 폐기처분 확정. 다만 고노 담화 수정 검토라든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추진하겠다고 밝혀 이것이 앞으로 한일 관계에 암초일 가능성은 있다.
그 밖에 탈원전 노선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혀 사실상 원전 재가동을 밀어붙일 개연성이 높아졌다.
일본 국민들은 '닥치고 경제나 살려' 라는 여론이 큰 편이다. 평화헌법 개정에는 약 5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고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30% 정도가 반대의사를 나타냈다. 이것은 우경화 바람에 반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경제가 어려운데 쓰잘데기 없는 데에만 신경 쓴다는 쪽에 더 가깝지만, 아베 내각은 연립여당인 공명당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이런 국민적 여론을 의식한 듯 우경화 정책을 보류하거나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갔다.
물론 아베 내각의 행보가 우경화를 절대 포기하지는 않으리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분석에 힘을 싣는 상황이 나왔는데 12월 31일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는 적절한 시점에 역사 문제에 입장표명을 하리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을 언제 발표할지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대체적인 분석으로는 무라야마 담화는 그대로 두고서 새로이 아베 담화를 발표해 '침략전쟁이 피해를 준 것은 반성하겠지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임을 드러내리라는 이야기가 있다. 발표 시점은 당장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본 여론도 좋지도 않고 한국박근혜 정부, 중국시진핑 정권 등 새로 출발하는 정권들과 구태여 초장부터 각을 세우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담화의 발표 시점은 일본 패전 70주년이 되는 2015년일 공산이 커보인다고. 2015년은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한 지 20주년인 해이고 한일 기본조약(한일협상) 체결 50주년이기도 하다.[16] 장기집권 기반을 구축해놓은 뒤에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드러내겠다는 복안으로 보여 우려를 낳는다.
제2차 아베 내각이 처음 성립되었을 때 아베 총리가 다시 일본 경제의 부흥기를 가져오겠다고 하자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아베 총리가 심도있는 경제 정책을 펴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고 실은 경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고 비판하여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다.

5.2. 2013년: 도쿄 올림픽 유치 성공


2013년 3월 구로다 하루히코일본은행 총재에 지명하고 4월 1일부로 앉혀서 아베노믹스 기조를 본격화했다.
2013년 7월의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참의원 선거에서 이겨보기 위해 일본 엔화를 더더욱 떨어뜨리는 엔저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각종 양적완화 및 경기부양책을 시행하는 것은 물론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서 지속적으로 미국 달러유로화를 사들였다. 이에 따라 엔-달러 환율은 20% 넘게 올랐고(엔화 가치 하락) 일본외환보유고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심지어 닛케이지수는 30% 뛰어올라 14000 포인트를 찍었다.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낙승이 예상됨에 따라 아베 신조 정권에서 우익 성향을 조금씩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2013년 2월, 일본 유신회다함께당 등에 제안하여 헌법 개정안 발의 요건을 중의원, 일본 참의원 2/3 서명에서 과반수 발의로 바꾸자는 개헌안을 내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기사.
심지어 안보 법제 간담회의 야나이 슌지 위원장은 집단적 자위권에 ''''한국과 호주도 들어간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즉, 한국과 호주에 대한 공격도 일본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서 자위대를 파병하겠다는 것. 다만 일본이 한미일 동맹체제에 들어가 있음을 감안하면 이전부터 추진중이던 것이기는 했고, 무엇보다 두 나라 모두 일본의 육상자위대라면 모를까, 해자대와 공자대는 필요한 입장이다.
미일관계 복원을 외치면서도 도쿄 전범재판을 '승자의 판단으로 단죄한 재판'이라고까지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한 마디로 저 말은 '미국이 이겼으니까 지들 마음대로 처단했지?'라는 뜻이라서 일본 안에서도 미일 관계에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2013년 3월 15일 TPP 협상에 정식으로 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노다 요시히코총리가 참가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보류한 뒤 다시 참가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2013년 4월 23일 기사.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전 세계적으로도 확실치 않다며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말해 논란이다. 이런 극우적 발언에 일본 안에서도 '외교 관계가 가뜩이나 나쁜데 제정신이냐'며 비판했다.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침략이 아닌 '진출'로 여기는 극우파의 역사인식을 대놓고 까발린 셈. 극우파 정치인들의 대규모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함께 외교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듯하고 이미 한국과 중국은 '이게 무슨 개소리야?'라며 격렬한 반응이다. 아사히 신문은 '지지율 70%에 취해서 국제관계를 까먹었냐?'며 우려했다. 중의원 선거 이전에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할 의사는 없다며 눈치를 보다가 압승이 확실하자 강공으로 나섰다는 분석도 있다.
4월 24일에는 '서울대 교수가 일제시대에 인구가 증가했다는 연구를 내놓은 바 있다'라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어 일제 통치의 정당성을 설파하냐는 논란이 있다. # 그리고 4월 28일 미군정이 끝난 날을 기념해 '''주권 회복의 날(主権回復の日)'''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기념식을 거행하리라고 밝히는 등 우경화 폭주를 이을 기세다. [17]
끝내 미국까지 나서서 비공식적으로 일본의 우경화 폭주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한중일 3국 재무장관 회담까지 취소된 데다가 일본 내에서 심지어는 보수적 언론인 요미우리 신문까지 신중론을 제기하자 아베도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4월 26일, "역사 인식문제가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통해서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 것. 그러나 이런 행보는 일단 한 발 물러서는 척해서 현재의 국면을 타개하려는 제스처일 가능성이 높고 적당히 시기를 봐서 다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일본 안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니 아베가 폭주를 이으리라 생각해도 좋을 듯.
4월 27일, 니코니코 동화[18]가 주최한 박람회인 '니코니코 초회의 2'[19]를 찾아 "반드시 강한 경제를 되찾겠다. 지금 일본 영해와 영토에 도전이 이어지지만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20] 이어 자위대와 주일미군 부스에 방문해 군복과 헬멧을 쓰고 육상자위대 최신 전차 10식 전차 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전차에 탄 총리는 아베가 전후 최초'''라고 한다. 당연히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한국과 중국의 유감, 우려가 한층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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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식 전차에 오른 모습
모두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있다.
반대로 천황 내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4월 28일, 주권 회복의 날 행사를 강행했다. 심지어 천황 부처까지 동원해서. 이때 한 기념사가 가관으로 "일본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전세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하자". 게다가 행사 말미에는 패전 이후 공적인 장소에선 금기시하던 "'''덴노 헤이카 반자이'''(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도 외쳤다. 그러나 우경화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알려진 아키히토 덴노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나가서 불쾌감을 표현했다.[21][22]
'침략'의 정의가 나라마다 다르다는 발언에 내각 차원에서 표현부족으로 벌어진 오해라고 국회에서 야당이 질의하면 해명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개헌을 앞두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행보란 분석이다.
2013년 5월, 미국 의회조사국이 아베의 견해에 침략을 부정하는 수정주의자의 견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미국의 국익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아베 내각이 침략사실을 부정한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며 사태 수습에 나섰다고 한다.
5월 5일에는 도쿄돔에서 프로야구 시구[23]를 하면서 등 번호를 96번을 달고 시구를 했는데 이는 일본 헌법 96조의 개헌 발의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라 어그로라는 비판을 받았다. 아베 총리가 96대 총리이기 때문에 썼다는 해석도 있어 당시에는 과민 반응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개헌 의지로 보는 것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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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번 훈련기에 오른 모습
여기에 더해서 2013년 5월 12일, 아베 총리가 미야기현의 항공자위대 기지를 방문해서 블루 임펄스 곡예비행단을 시찰했다. 이때 그는 훈련기 조종석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 비행기의 번호는 '''731'''이다. 관련 기사. 이게 얼마나 도발적인 행위인지는 731 부대 항목 참조. 당장 중국은 명백한 도발이라고 맹비판했고, 한국에서도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달린 비행기를 타는 일과 같은 행위라는 맹비판이 쏟아졌다. 우연히든 의도적이든 도발적 행위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후의 폭주 행각들을 살펴보면 의도적인 도발임이 기정사실이 되었다.
2013년 5월 14일,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가 문제가 되고 있으니 새로운 시설을 만들어야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서 야스쿠니 신사에 전범들을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다.
2013년 5월 19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알링턴 국립묘지가 뭐가 다른가라는 망언을 했다. 한국과 중국에도 비판의 날을 세웠는데 몇 년 사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별다른 항의를 하지않다가 갑자기 이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가운데 치른 5월 21일 지방선거에서 자민-공명 연합이 6개 선거구에서 3개 선거구 당선에 그쳐서 자민당 내에서 충격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자민당은 사이타마 시장 선거에 아소 다로 부총리와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까지 지원유세에 투입하면서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홍보했으나 자-공연합이 내세운 후보가 현직 시장에게 패배했다. 아오모리나고야에서도 현직 시장들에게 패배했다. 득표 결과를 보면 공명당 지지층의 80%가 자-공연합에 투표했으나 자민당 지지층의 55%만이 자-공연합에 투표했다고 드러났다는 점에서 공명당이나 자민당이나 크게 우려하는 실정. 물론 이런 결과는 자민당이 고령의 지역 본부장이나 간사장을 공천해 비교적 젊은 현직 시장들에 맞서기에는 신선미가 떨어졌다는 지적이 많으며, 아베노믹스의 성과가 지역까지 못 퍼졌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6월 23일 도쿄도의회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이 '''전원 당선''' 기록을 세웠다.
2013년 7월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아베 신조의 높은 지지율를 의식해서인지 아베와 부인 아베 아키에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을 대거 공천했는데 이를 두고 정실 공천이라는 논란이 있다. 공천을 받은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가관인데 에이벡스 소속 가수인 이토 요스케,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 츠카하라 미츠오, 개훈련 전문가 다나베 히사토 등은 모두 아베의 부인 아베 아키에가 추천한 인물들로 알려졌다. 이토 요스케는 아베 아키에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었던 모리나가 제과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고 츠카하라 미츠오는 아베 아키에와 술친구라고 하며 다나베 히사토 또한 강아지를 좋아하는 아베 아키에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공천에 총리 부인이 개입한 모양새라 뒷말이 무성한 듯하다. 심지어 이토 요스케는 자민당 간사장인 이시바 시게루조차 "그게 누구지?"라 했다고 아베 또한 자신의 고향 친구인 기타무라 츠네오를 공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럼에도 상대당인 민주당은 인지도가 부족한 노조 출신들을 대거 공천했고 그나마도 공천을 포기하고 사퇴하는 인물들이 속출했다고 알려졌다. 개나 소나 공천해도 자민당의 승리가 유력하니, 일본 정치가 얼마나 혈연, 연고, 학연으로 돌아가나 그 낙후성을 짐작할 만하다.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첫 번째 유세지역으로 후쿠시마를 선택하였다. 이 부분에서 방사능 유출 사고가 터졌을 때 자기 지역구인 이와테를 버리고 도쿄로 도주한 오자와 이치로 생활당 대표와 더욱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기사. 이후 참의원 선거에서 65석을 확보, 민주당의 17석보다 크게 앞서나가는 결과가 나오면서 장기 집권이 유력해졌다.
9월 7일, 아베 신조를 비롯한 내각과 유치 위원회가 총출동한 결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개최된 IOC 총회에서 도쿄가 경쟁 도시인 스페인마드리드터키의 이스탄불을 제치고 2020년 하계 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개최 도시 발표 영상 일본 내부는 물론 대축제 분위기. 56년 만의 하계 올림픽 개최 결정으로 내각 지지율도 폭등하였다.
2013년 11월 15일 일본의 주간문춘에 올린 기고문에 '한국을 어리석은 나라'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아베 본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한 상태. 자세한 내용은 아베 신조 한국 비하 발언 논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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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5일 악명 높은 특정비밀의 보호에 관한 법률(特定秘密の保護に関する法律)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으며, 12월 26일,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했다.

5.3. 2014년: 3차 내각 성립


특정비밀보호법으로 여론이 나빠진데 이어 2월 9일로 예정된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에 대항하여 전 총리인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출마하고 아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호소카와를 지지함에 따라 리더십이 상당히 흔들렸다. 만일 호소카와가 당선하면 아베의 집권기반이 흔들려 조기 퇴진할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나왔을 정도.
민주당은 호소카와를 지원하기 위해 아예 후보를 안 내기로 했다. 게다가 고이즈미의 아들이자 정치적 후계자이기도 한 고이즈미 신지로 부흥정무관도 자민당이 지원하는 후보에 지원할 대의를 못 느끼겠다면서 반기를 들었다. 아베는 되도록 원전문제를 안 거론하면서 고이즈미-호소카와 돌풍을 잠재우려 했고 신지로를 앞세워서 고이즈미에 맞서려 했지만 신지로의 이런 반발에 결국 포기했다.[24]
그러나 마스조에가 야권의 표가 우쓰노미야 겐지와 호소카와로 19%씩 갈린 틈을 타 42.9%의 득표로 무난하게 도쿄도지사에 당선되었다. 한숨 돌린 셈.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3주년 행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엄격한 규제 기준을 바탕으로(적합하다고) 인정되는 원전에 대해서는 재가동을 추진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내각의 여성 각료들의 각종 스캔들과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임으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국면 돌파를 위해 기습적으로 중의원 해산을 내놓았다. 과연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전체 475석 가운데 절반을 훨씬 넘어서며 압승. 아베도 계속해서 총리직을 이어나가게 됐다. 일본 국민들이 아베와 자민당을 뽑았다기보다도, 사실상 무능의 극치인 제1야당 민주당을 뽑지 않은 것이라는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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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이전부터 뽑을 사람이 없으니 이번 투표는 제끼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이었고, 실제로 투표율은 태평양전쟁 이후 최저인 52~3% 정도로 집계되고 있다. 자민당도 민주당도 뽑고싶지 않으니 차라리 공산당을 뽑고 말겠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이 의석수를 2배로 늘린 공산당이었다. 8석에서 21석으로 2.5배 정도 의석을 늘렸다. 하지만 여당에 갈 표가 아닌 아닌 민주당표를 뺏어온지라. 결국 전반적인 국회의 구조 자체는 큰 차이는 없다.
대신 민주당은 정말로 죽쒔었다. 당시 민주당 대표 가이에다 반리와 전 총리인 간 나오토도쿄도 제1구도쿄도 제18구에서 떨어졌었을 정도. 간 나오토는 도쿄 권역 비례대표 끝자락으로 생환했지만 가이에다 반리 민주당 대표는 그마저도 실패해서 아예 낙선이 확정되었다. 이 둘은 2012년 제46회 총선에서도 지역구에서는 낙선했으나 석패율제로 생환한 상태였다.

5.4. 2015년: 아베 담화


중의원 선거로 한숨 돌린 2015년의 시작부터 아베 내각을 반기는 것은 일본의 신용등급 강등 소식들이다. 사실상 작년 11월 말에서 12월 중순에 결정 된 것이나, 보통 1분기까지도 추이를 더 지켜보면서 여유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란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무디스의 경우는 일본 국내외로 불만이 좀 있었다.
이미 무디스2014년 11월에 결정을 내려 같은 해 12월 1일부터 강등을 시행시킨 상태였고(Aa3 → A1), 또다른 주요 신평사인 피치의 결정이 주목을 받고 있던 시점에서 피치 또한 12월 15일에 일본의 신용강등을 한 차례 강등하기로 결정을 내려 2015년 1분기 동안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A+ → A) 만일 아베 내각이 불과 한달 전 중의원 선거에서 했던 공약을 깨고 2017년까지 미룬다던 소비세 인상을 즉각 몰아붙인다면 2015년 1분기가 끝나기 전에 강등을 모면할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2015년 6월 12일 중의원에서 일본판 국회 공성전이 일어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일본의 파견노동법[25] 개정안 처리가 자민 + 공명 + 유신 3당 연합 강행처리를 하기로 하고 민주 + 사민 + 공산 3당은 격렬하게 반발하여 국회에서 대치하고 있는데 그 장면에 아베가 온 것.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 대표 등이 아베한테 파견노동법 개정안 처리 연기를 요청했지만 아베 신조 총리는 가볍게 웃으면서 데리고 온 자민당 소속 후생노동위 위원장한테 날치기 강행처리를 지시했다.
당연히 민주당 등 야당은 격렬히 반발해서 회의장 봉쇄, 의장석 점거 등을 하고 자민당은 질서유지권과 경호권 발동으로 한바탕 난투극이 벌어졌다.
2015년 6월 17일 일본 참의원에서 선거권 연령을 만 20세 이상에서 만 18세 이상으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선거 연령 변화는 1945년 이후 70년 만의 일이며, 개정된 법은 내년에 있을 참의원 선거때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이번 개정이 아베 정권의 헌법 개정 수순 중 하나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일본 헌법 개정은 의회의 3분 2 이상 찬성에 의한 발의와 국민투표에서 과반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 행사연령도 18세로 낮춰 집권 내에 개헌을 이룬다는 계산이다.
2015년 7월 6일 처음으로 아베 신조 내각에 대한 반대가 지지율을 넘어섰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기사 다만 자민당 내에서도 대체자가 없고 자민당의 지지율도 확고한 상태라서 아베 신조의 정치 기반에 크게 흔들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5년 8월 14일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를 발표했다. 이전 담화의 핵심 표현을 모두 언급했다는 점에서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수준은 아니지만, 표현을 복잡하고 어렵게 하면서 이전 담화의 핵심표현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고 무라야마 담화 등 역대 총리의 담화보다 역사인식 면에서 훨씬 후퇴했다는 평가. 특히 을사조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러일전쟁에 관해 "러일전쟁은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라고한 내용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국가들에게 일본이 역사인식에서 후퇴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한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열강에게 위협받던 국가들이 일본의 사례로부터 용기를 받은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대표적으로 판보이쩌우가 이끌었던 베트남의 근대화 운동이 있다.), 그 본질은 일본이 서구 열강과 다를 바 없는, 혹은 그보다 더한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데 있었다는 것은 이후 다른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도 눈치챈 사실이었으며(네루3.1운동에 대한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본 국내의 역사학자들조차 인정하는 사실이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은, 쑨원의 말처럼, 동양의 간성(干城)이 아니라 서양 제국주의의 패도(覇道)를 잇는 번견(番犬)의 행위를 했을 뿐이다. '''그런 러일전쟁을 아베는 지극히 일시적이었던 긍정적인 측면만 부각한 것이다'''.
안보 문제를 이유로 집단자위권 법안 처리를 강행하려 하자 일본 내에서도 그동안 쌓인 불만이 폭발해 8월 30일 아베 신조 정권의 안보법 처리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전국적으로 30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의사당 앞에서의 시위대 규모는 10만이 넘었는데 일본에서 정치적 시위의 규모가 점점 축소되는 추세였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이례적인 사태였다. #
2015년 9월 16일 국제 신용평가회사 S&P에서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강등하였다. 이에 한국과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은 무디스, S&P, 피치 3사 모두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높아지게 되는 역전현상이 나타났다.기사
2015년 9월 17일 오후 일본 참의원(상원) 법안심사위원회에서 자민당 - 공명당 연립정부가 안보법안을 야당의원들이 의장석을 점거한 것을 국회 공성전 난투극으로 진압하고 날치기 통과시켰다. 아베 신조 총리는 9월 17일 심야에라도 본회의를 열어서 통과시키겠다고 했고 일본 야당은 이에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하는 국회 공성전 2차전에 돌입한 상태.
기어이 2015년 9월 19일 오전 2시 20분경 일본 참의원에서 안보 관련 법안이 가결되었다. 야당은 내각 불신임안 결의 등을 통한 필리버스터를 동원하며 최대한 시간끌기를 시도했지만 연립여당의 수적우세를 극복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 간사장은 내각 불신임안 결의안 때 2시간 가량 발언했다. 그는 “오늘(18일)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날”이라며 “아베 총리가 되돌리려고 하는 일본은 쇼와(昭和) 초기의 폭주하던 시대의 일본이 아닌가”라고 비판했다.
10월 5일, TPP가 타결되었다.
2015년 11월 2일, 3년 반 만에 한일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12월 8일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으로 인해 일제의 피해자들인 7, 80대 지지층조차 박근혜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결국 1년 뒤... 20대 총선여소야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결과를 낳았다.

5.5.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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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0일 실시된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또 승리하였다.
8월 22일, 2016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닌텐도가 제작하였던 슈퍼 마리오 시리즈의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인 마리오로 분장해서 등장했다. 차기 올림픽 개최지의 대표로서 등장한 것이다.[26] 이 퍼포먼스 직후 내각 지지율은 다시 60%를 돌파하였다.

5.6. 2017년: 4차 내각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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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0월 22일,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통해 수상 4선에 성공했다. 11월 1일부로 수상 4선에 따라 4차 내각이 출범했다.
12월 26일, 아베 신조의 2, 3, 4차 연속내각이 취임 5년을 맞았고, 1차 내각을 합쳐서 '''6년''' 임기를 돌파하였다. [28]

5.7. 2018년: 오사카 엑스포 유치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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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3선 연임에 성공하였다.
11월 25일, 2025 오사카 엑스포 유치에 성공했다.

5.8. 2019년: 역대 최장기 집권 기록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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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통일지방선거7월 21일 실시된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또 승리했다. 이로써, 2012년 재집권 이래 '''전국 단위 선거 6연승'''[29]을 달성하였다.
11월 20일자로 가쓰라 다로[30] 전 총리의 기록을 경신하며, '''역대 최장기 집권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5.9. 2020년: 길었던 아베 시대의 끝




3월 24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으로 인한 도쿄 올림픽의 1년 연기가 확정되었고, 4월 7일, 감염증 확산 방지를 위해 전후 최초로 긴급사태를 선언했다.
8월 24일,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의 역대 최다 연속 재임 총리 기록을 경신했으나 그로부터 4일 뒤인 8월 28일, 궤양성 대장염 재발을 이유로 사임 의사를 표명하고, 후임 자민당 총재가 선출된 이후 물러나기로 발표했다.
9월 1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이 총재로 선출됨에 따라 국회 선출 및 나루히토 천황의 임명을 받은 9월 16일에 사퇴했다.

6. 두 번째 사임 이후



6.1. 2021년


2월 13일, 난데없는 가짜뉴스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후쿠시마현에서 강진이 발생하자 이번 지진이 아베 신조가 만들어낸 '인공지진'이라는 근거없는 루머가 한 때 트위터 등 일본 웹상에 확산했다.#

[1] 정확히는 외고조부가 아니라, 아베 신조의 친할머니인 혼도 시즈코(本堂静子)의 외할아버지이므로 '진'외고조부이다. 오시다 요시마사(大島義昌)는 청일전쟁 당시 소장 계급으로 혼성 제9여단(제5사단 소속 2개 보병연대에 1개 포병대대, 1개 기병중대, 1개 공병중대 등이 증원되어 구성) 여단장 직을 맡아 용산에 주둔하다 동년 7월 23일 새벽에 경복궁을 기습 점령한다. 오시다 소장은 청일전쟁에서의 전공으로 남작 작위(후에 자작으로 승작)를 받고, 러일전쟁 뒤에는 육군대장까지 승진한다.[2] 교도통신 기자이자 정치평론가인 노가미 다다오키가 아베 신조가 어쩌다가 지금의 사상을 가졌는지를 추적해 그의 생애를 기록한 책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에 따르면 아버지인 신타로는 부모로서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아베의 할아버지인 아베 간이 일찍 이혼해서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이고 아베 간 본인도 바쁘게 산 영향인지 신타로는 자식을 대하거나 애정표현을 하는 법을 잘 몰랐고 아들인 아베 신조와의 갈등 및 불화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한 고참 비서의 증언에 따르면 두 사람의 사이는 갈수록 멀어져 갔다고 한다. 아베 간도 일찍 부모님을 잃고 이모 슬하에서 자랐다고 하니 가정환경이 3대에 걸쳐 영향을 끼친 걸로 보인다. 이 책은 아베 신조가 자신에게 정을 주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 강요했던 신타로에 대한 반항심에 자신에게 애정을 줬던 외조부 기시에게 기울었다고 추정하고 있다.[3] '아베 삼대'라는 다른 작가가 쓴 책도 있지만, 이건 아베가 어째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상보다 외조부인 기시의 사상으로 기울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득력있는 근거나 가설을 설명해주지 못한다.[4] 물론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 외의 다른 이론이나 능력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이중적인 인물이긴 하다. 요시다가 옥사당하였던 안세이 대옥(이이 나오스케가 주도)을 불러일으켰다는 안세이 5개국 조약의 불평등을 (조슈 번 출신으로의) 가쓰라 타로 총리가 러일전쟁에서의 일본 승리 직후부터 평등으로 완화하였다는 일본 정부 발전 장점을 바라보면서 지지하고 있기도 하다.[5] 좌측의 인물은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6] 도쿄무사시노시 소재. [7] 일본 최고 정치 명문가의 자제이자 스스로가 최고위직 정치인인 신분에는 꽤나 어울리지 않는 낮은 학벌이다. 세이케이 대학은 일본에서도 1류가 아닌 B급 정도의 2류 대학 정도인데 그마저도 중고일관제로 입학했으며, 미국 유학 경력도 도피 유학에 가까운 데다 (USC의 위상이 본격적으로 올라간 것은 1990년대부터의 일이다) 졸업은 결국 못했기 때문. 정치인으로서는 컴플렉스로 작용할 수도 있는 요소이다. 이런 이유로 아베의 무식함을 조롱하는 안티 세력도 존재한다. 하지만 당연히 정치인의 학벌이 정치적 유능함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아베 신조는 학벌은 일천해도 정치인으로서 어마어마한 집안 배경, 자민당 내부 각 파벌의 높은 지지, 스스로의 오랜 관료 수행 경험(역대 최장 집권 일본 총리에 연임 이전에 이미 총리직을 수행한 적이 있다.)으로 학벌을 커버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8] 재미있게도 아베의 후임으로 총리를 한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아버지다.[9] 당시 광고사 덴츠에 다니던 중[10]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문제로 유례없이 빠르게 찾아온 레임덕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해석도 있다.[11] 전문은 다음과 같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투하가 많은 인명의 희생을 야기했고 또한 일본 역사에서 비극이 아닐 수 없으나,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로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역사의 대 역률적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한 일이며, 또한 원폭 투하로 군부의 불필요한 전쟁의지를 억제하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켜 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지금의 일본의 밑거름이 된 데에 다행으로 생각한다.' 제3자의 기준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 말을 하필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당사자들 앞에서 했다는 게 문제.[12] 아베 총리의 장트러블, 다 나았을까[13] 현재 내각관방장관으로 재직 중인 스가 요시히데가 아베 신조의 정치 복귀 재개를 설득했다고 한다. 스가 요시히데는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지만 지금까지 오랜 기간 내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집권당인 자민당에 적을 두지 않으며 정치적 중립을 잘 유지하는 우리나라의 고건 총리와 같은 인물이자, 아베의 총리직 수행을 지지하는 그의 측근 중 한 명이다. 자민당 내 다른 유력 인사들은 은연 중에 아베를 제치고 스스로가 총리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진 인물들도 많다.[14] 중의원 2/3[15] 결정적으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구성을 아직 시작조차 않은 상태이다.[16] 여담으로 패전 60주년이었던 2005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답습, 계승하며 야스쿠니 신사에 (적어도 2005년 당일) 참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한중의 반응은 냉랭했는데 만약 "아베 담화" 가 강경어조로 나온다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격랑이 일 듯.[17] 이 발언으로 인해 오키나와 현민들의 민심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오키나와에서 내지(內地)라고 불리는 본토의 경우 이 날을 기점으로 미군정이 끝난 것이 사실이나, 오키나와는 그 후에도 한동안 미국의 점령하에 남아있었던 탓이다. 아베의 이 발언에 일부 오키나와 현민은 TV 인터뷰에서 "우리는 일본이 아닌 거냐?" 라는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18] 2ch와 같이 넷우익 성향이 강한 사이트이다.[19] 이날 같이 온 유명인사는 그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인들뿐 아니라 니시무라 히로유키(개최자), 빌리 헤링턴, moot, ZUN 등도 있었다.[20] 1차 중일전쟁은 청일전쟁[21] 이후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 퇴위 및 양위문제를 볼 때 총리를 비롯한 일본 극우 진영에 자신들이 이용당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여성 천황의 문제도 거론되는 이유 역시 현재 천황인 아키히토히사히토 황손을 낳은 차남 후미히토 친왕보다는 현재 천황과 정치적 성향이 같은 나루히토 황태자의 무남독녀인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22]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에 대해 아베 내각에서는 '특별 입법'을 통해 현재의 천황(아키히토)에 한해서만 생전퇴위를 검토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유는 생전퇴위를 제도화 할 경우, 미래의 천황이 정치적 압박을 받아서 강제로 퇴위되거나, 자기 마음대로 지위에서 물러나는 경우를 배제시키기 위함이다.[23] 이날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와 교진군을 거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양키스에서 맹활약하며 월드 시리즈 MVP 등의 업적을 남긴 마쓰이 히데키가 일본 국민영예상을 받는 시상식을 가진 날이다.[24] 자민당이 지원하는 마스조에 요이치 전 후생노동상은 2009년 자민당의 중의원 참패이후 자민당의 시대는 끝났다면서 자민당을 탈당했던 전력이 있던 인물이다. 당시 자민당은 그에 격분하여 마스조에에게 제명처분을 내렸었고 이런 마당에 마스조에를 후원하겠다는 아베의 행동을 당연히 신지로가 납득할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명분으로 고노 다로 부간사장을 비롯한 소위 탈핵파 의원들이 호소카와 전 총리의 지원을 모색 중이라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했다. 사실상 탈핵이라는 명분을 들고나온 호소카와-고이즈미 연대에 자민당내 탈핵파들이 동조하면서 자민당 자체가 휘청였다.[25] 대한민국으로 치면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해당한다.[26] 이 장면은 도쿄올림픽 공식 홍보영상에서도 등장한다. [27] 아베 기준으로 왼쪽에는 아소 다로, 모테기 도시미쓰, 스가 요시히데가 있고, 두 번째 줄의 맨 오른쪽은 고무라 마사히코, 그 왼쪽에는 니카이 도시히로가 있다. 두 번째 줄 중앙에서 손 들고 있는 사람은 기시다 후미오, 두 번째 줄의 왼쪽에서 두번째는 다무라 노리히사다.[28] 일본의 행정체제 상, 총리의 탄핵이 되지않는다. 따라서 본인이 내려오거나 중의원총선거를 통해 실패하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총리가 가능하다. [29] 2012년 중의원 선거 - 2013년 참의원 선거 - 2014년 중의원 선거 - 2016년 참의원 선거 - 2017년 중의원 선거 - 2019년 참의원 선거까지 전승. 중간의 2015년, 2019년 통일 지방 선거에서도 자민당이 승리하였는데, 이것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8연승이다. 이건 놀라움을 넘어서 불가사의한 수준의 연승이다.[30] 을사조약한일병합조약 체결 당시의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