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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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리브해의 중앙에 있는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섬[3] 서부에 위치한 국가이며 해당 섬을 도미니카 공화국과 공유한다.
'아이티'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선주민인 타이노인 말로 '산이 많은 땅'이라는 뜻이며, 이름 그대로 국토의 3/4이 산이다. 아이티(Haïti)라는 국명도 이를 프랑스어식으로 옮긴 것이다.
수도는 포르토프랭스(Port-au-Prince)로, 1706년에 한국어로 왕자라는 뜻인 프랭스 호(Le Prince)라는 배가 정박한 항구라는 뜻에서 그 선장이 붙인 이름이었다. 하지만 1680년에 이미 그 연안의 섬들이 왕자의 섬들(Les îlets du Prince)이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아메리카에서 비백인종, 즉 노예였던 흑인들이 주도한 최초의 독립국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오랫동안 외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고, 지금은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아주 형편없는 최빈국이다.
2.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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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히스파니올라 섬을 도미니카 공화국과 공유하면서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카리브 해 연안 국가 중에선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섬의 서쪽 1/3과 인근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에 산지가 많고 열대 우림이 우거져 국가 기반 산업이 벌목산업일 정도였으나 이러한 열대림들과 섬 한가운데의 고산지대 등에서는 다양한 생물종의 서식이 확인되어 국제 환경단체에서 환경보호에 열심히 노력 중이다. 벌목산업을 관광산업으로 바꿔가려 한 것은 국가경제지표도 어느 정도 올라가고 한 면에선 좋은 모습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메리카 전체에서 문맹률이 가장 높은 나라라 성공적이진 않은 편이다. 거기에 글을 아는 사람도 잘 아는 것도 아니라 UN에서 준 에너지바의 제조일자를 유통기한으로 착각해 기한이 지났다면서 버리라고 난리쳐서 사람들이 못 먹고 심지어 밟아버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숲이 파괴되기를 거듭해 전 국토의 2%에 불과하며, 옆 동네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삼림 비교를 통해 저개발국과 중진국을 비교할 때 흔히 쓰이기도 한다.
아이티 북부에 있는 라바디(Labadee)이라는곳은 아름다운 휴양지로 인기가 많다.[4]
최북단의 작은 섬이 알게 모르게 유명한데 캐리비안의 해적의 무대였던 토르투가 섬(Tortuga)이다. 론리 아일랜드의 노래 '잭 스패로우'에 나오는 그 아일랜드 토투가 맞다. 스페인어로 '거북이'라는 뜻. 처음 섬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거북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실제로 17세기 해적들의 본거지로 쓰였던 곳이다. 현재는 지명이 바뀌어 프랑스어인 라 토튀(la tortue) 섬으로 개명되었다.
헤이티안 브라운 버드이터, 헤이티안 자이언트 센티페드는 모두 아이티에서 유래한 동물들이다.
3. 역사
3.1. 근세사
아이티는 1492년 12월 5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훗날 카리브 해로 불리게 되는 서부 대서양의 히스파니올라 섬을 발견한 이후 그 막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히스파니올라 섬에는 토착민인 타이노 족이 50만 명가량 살았으나 섬의 원주민이던 타이노족과 아라와칸족 등 카리브 인디언들이 스페인인들이 묻혀 온 각종 전염병[5] 으로 인해 99%가 몰살되었고 남은 원주민들도 학살당했다[6] . 이에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스페인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인 노예상들에게서 흑인 노예들을 사와서 기니비사우, 앙골라, 상투메프린시페 출신의 노예들을 대거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데려와 일하게 했는데, 이들이 현재 아이티인들의 선조이다. 물론 아이티에 원래 살고 있던 토착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려 오늘날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혼혈 타이노는 극소수 남아있다.
그렇게 토착민들은 스페인이 16세기 초반 점령한 이후 반 세기만에 멸종했고, 16세기 말 프랑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반부를 차지하여 생도맹그(Saint Domingue)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동반부는 여전히 스페인령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로, 같은 말이지만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로 구분되는 지역 명칭을 갖게 된다. 이 구분이 지금의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의 구분으로 이어져 오게 된다. 또한, 도미니카인과 아이티인과의 차이도 매우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7년 전쟁으로 캐나다와 루이지애나의 광대한 식민지를 영국과 스페인에게 내주어 이후 아메리카에 있는 식민지가 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를 비롯한 소앤틸리스 제도의 일부 조그만 섬들+기아나 정도밖에 안 되어 아이티를 무척이나 아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안정적으로 보일만큼 가난한 부실국가로 전락한 지금을 생각해 보면 당혹스럽지만, 아이티 혁명 이전만 하더라도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 농업을 기반한 아이티는 당대 최대의 설탕, 커피 생산지였다. 1780년대까지 당시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약 40%, 커피는 약 60%가 바로 생도맹그 산이었다. 유럽 국가가 아메리카에서 경영하는 단일 식민지 중 가장 부유한 곳으로, 프랑스 국부의 4분의 1을 조성했다. 한때는 무려 70퍼센트를 차지한 통계도 있다. 아이티의 인구도 대단했는데, 노예만 70만 명에 이르러 오늘날 도미니카 공화국 지역의 7배에 달했다. 반면 18세기 당시 도미니카 공화국은 평방킬로미터 당 인구밀도가 5명 남짓했을 정도로 인구가 희박했으며 주민들은 소떼를 쳐서 소가죽을 수출하는 안습한 동네였다. 물론 아이티 인구의 90%는 그냥 노예일 뿐이었고 부는 몽땅 프랑스로 돌아갔으며 돈줄은 프랑스인 이주민들의 손에 있었다.
3.2. 아이티 혁명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립 분위기가 일찍 불거졌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자유 흑인들은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미국 독립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자유 흑인들은 군에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지위가 계속 떨어지는 것을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프랑스 혁명 초기 혁명주의자들이 만든 국회에 아이티도 의원을 보내게 되자 자유 흑인들은 자신들도 더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요구하여 백인 농장주 및 백인 빈곤층과 대립하였다.오늘날까지도 아이티 학생이라면 누구나 루베르튀르가 프랑스로 끌려가면서 남긴 마지막 말을 암송한다. “내가 무너진다면 생도맹그의 단 하나뿐인 자유의 나무는 쓰러지고 말리라. 그래도 자유의 나무는 다시 살아나 땅 속 깊이 수많은 새로운 뿌리들을 내리리니.”
- 노엄 촘스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중
그리고 결국 혁명이 시작하기도 전에 자유 흑인 vs 백인 농장주 vs 흑인노예 vs 백인 빈곤층이 내전을 일으켰다. 또한 이를 배경으로 노예들도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본격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정부, 그리고 1799년 이후는 나폴레옹과 전쟁 중이던 영국과 스페인군까지 자메이카와 산토 도밍고에서 아이티를 침략한 결과 자유 흑인, 백인 농장주, 백인 빈곤층, 프랑스군, 영국군, 스페인군이 진흙탕 전쟁을 시작한다. 흥미롭게도 이 세력들은 국가/인종에 기초한 대립 구도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필요할 때는 아이티 혁명군과 손을 잡고, 아닐 땐 싸웠다. 백인 농장주와 백인 빈곤층도 마찬가지. 게다가 자유 흑인들과 흑인 노예들도 자주 싸웠다. 심지어 같은 노예들끼리도 싸울 때도 있었고. 아이티 흑인들은 나폴레옹이 대군을 보내 "모든 흑인을 모조리 죽이고 다시 시작하자!"라는 제노사이드를 선언하고 나서야 힘을 합치게 된다.
이 때 프랑스군은 훨씬 더 좋은 무기를 가졌고 훈련도 잘 받았지만 흑인들의 게릴라전과 황열병을 이기지 못 한다. 당시 아이티에 프랑스 견제를 목적으로 파견된 영국군 23,000여 명 중 15,000여 명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프랑스군의 경우 65,000여 명 중 55,000여 명이 병사했다. 결국 식민지 전쟁에서 참패하고 프랑스인들은 흑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죄다 본국으로 가거나 근처의 루이지애나 식민지로 배 타고 야반도주했다. 남아있는 백인들은 일부 의사나 폴란드인[7] 포로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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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인물인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1743년 5월 20일 ~ 1803년 4월 7일)는 아이티의 혁명가, 흑인 독립운동가 중 하나로, 노예 제도를 끝내고, 프랑스로부터 아이티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프랑스군의 장군 및 생도맹그의 식민통치자로도 지냈다. 그의 노력으로 흑인 독립군은 아이티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결국 무찔렀다. 그러나 투생은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군의 비열한 함정에 걸려 프랑스로 끌려가 옥사했다. 프랑스군 사령관이 투생에게 협상을 제안하자 투생은 우리 힘을 보여줬으니 프랑스도 협상을 제대로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프랑스군 진영으로 갔다가 갇힌 것이다. 대단히 비열한 짓거리였지만 투생이 흑인이라서, 그리고 프랑스에서 아이티에서 일어난 백인 학살을 과장해서 선전한 덕택에 비난하는 여론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티 혁명군 수뇌부들도 자신들과 달리 투생이 아이티의 완전한 독립을 바라지 않아[8] 어느 정도 대립하는 상황이라 함정인 걸 알면서도 프랑스군 진영에 가는 걸 안 말렸다.
투생이 죽고 난 후 후계자인 장 자크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에 의해 1804년에 독립하였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다음으로 가장 빠른 것으로, 흑인이 수반이 된 흑인 주도의 근대적 정부가 구성된 것으로서는 최초의 사례이다.
아이티의 독립은 당초 나폴레옹의 계획이였던 '''북아메리카를 다시 식민지화하기'''를 수포로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아이티에 노예제를 다시 도입하여 예전처럼 돈을 벌고 그 돈으로 7년 전쟁에서 잃은 퀘벡 주 등 북아메리카 식민지 전체를 재정복할 계획이었지만 오히려 아이티를 잃은 후 그나마 남아있던 루이지애나 식민지까지 포기하기로 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은 이때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린다. 아이티 혁명이 미국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셈이다. 아이티나 퀘벡 등 북미 식민지를 수복하기에는 너무 방어하기가 불리했고 루이지애나도 신생국 미국, 적성국가인 영국과 스페인 등에 둘러싸여서 방어가 곤란했다.
3.3. 독립과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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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데살린(Jean-Jacques Dessalines 1758년 9월 20일 ~ 1806년 10월 17일).
1804년 데살린은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선언하여, 종신 총독직을 맡았다. 1804년 10월 6일 나폴레옹 1세의 황제 즉위에 대항한다며 데살린은 나폴레옹을 흉내내어 스스로 자크 1세라 칭했다. 1805년 5월 20일 제국 헌법이 공포되고 농민 군국주의적 국가로 돌아섰는데 알렉산드르 페시옹과 앙리 크리스토프 등의 경쟁자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스스로 황제를 지칭했던 데살린은 옛 동지였던 공화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그는 1806년 10월 17일 포르토프랭스 북쪽의 한 도시에서 반란군에게 붙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시체는 잘려져 근처에 묻혔다.
이후 반란의 주역인 알렉상드르 페시옹(Alexandre Pétion)과 앙리 크리스토프(Henry Christophe)가 반목하면서 아이티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페시옹과 크리스토프는 국가원수 자리를 놓고 대립하다가 각각 남부와 북부에서 아이티 공화국과 아이티국을 선포하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들이 세운 정부는 최초의 흑인 근대 공화정라는 의의가 있었으나 두 개의 정부, 두 명의 대통령이 등장하여 남북 분단이 야기되었다.
이후 1811년에 앙리 크리스토프가 스스로를 앙리 1세라 칭하고 왕으로 즉위하면서 아이티국은 아이티 왕국으로 전환되어, 북부의 왕국과 남부의 공화국이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앙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하며 왕 노릇을 했고, 프랑스의 침공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라페리에르 요새를 건설하며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자신이 세운 공화정부를 스스로 뒤엎고 왕국을 건설한 행위는 다수의 민중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남부의 공화국을 지지하는 현상을 야기했다. 그리하여 말년의 앙리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백성들이 언제 남부와 손잡고 반기를 들지 두려워하며 살다가 1820년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후 그의 아들 자크 빅토르 앙리 크리스토프가 왕위를 계승했으나, 불과 며칠만에 남부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에게 살해당했고, 남부의 대통령 장 피에르 부아예가 통일 아이티의 대통령이 되었다.[9]
한편 이렇게 남북으로 분단된 동안에도 아이티는 누에바 그라나다 독립운동을 하던 시몬 볼리바르에게 병력을 지원하면서[10] 뜻밖에 남아메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겨우 안정화된 아이티는 설탕과 커피 등 수출길이 막혀서 계속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혁명 과정에서 아이티에서 설탕과 커피 등을 수출하던 백인들이 거의 다 죽거나 도망갔는데, 아이티 독립 운동 세력은 농장을 운영하는 법은 알았지만 생산품을 수출하고 거래하는 법에 미숙했다. 그리고 서구 국가들이 이들과 순순히 정직하게 무역을 해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이티는 독립하자마자 가난한 나라로 주저앉으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흑인들은 자유를 쟁취했지만 당시 서구 국가들은 이들이 자유를 만끽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를 노리고 과거 식민지 지배국이었던 프랑스가 1825년 1억 5천만 프랑[11] 에 달하는 이른바 '근대화 배상금'을 청구하고 나섰다. 아이티가 독립하면서 프랑스인 농장주들의 재산인 농장과 흑인 노예들을 '도둑질'했으니, 독립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배상금을 내놓으라는 소리이다. 프랑스가 수도 포르토프랭스 앞바다에 함대를 박아둔 채 협박하고 다른 열강들 모두 프랑스와 결탁하여 아이티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아이티는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해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건으로 배상금을 줄 수밖에 없었다. 1838년 프랑스와 아이티는 아이티가 프랑스에게 배상금 9천만 프랑을 30년에 걸쳐 지불하기로 합의하였다. 프랑스는 아이티의 국가재정을 한 세기 이상 탈탈 털어갔으며 매년 아이티 국가예산의 80%가 배상금 지불 명목으로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1893년 프랑스는 아이티에게서 받을 배상금을 최종 9천만 프랑으로 확정지었으며 아이티가 이자까지 쳐서 프랑스에게 배상금을 완전히 청산한 연도는 프랑스가 배상금을 청구한 지 '''122년'''이 지난 1947년이었다. 이마저도 프랑스가 이자를 멋대로 늘려서 연장하려 든 것을 아이티에 손을 뻗던 미국이 막은 것이다.
아이티는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며 간신히 무역로를 뚫었으나 19세기 중후반부터 설탕과 커피 재배생산지가 카리브해 각지에 늘어나고 설탕 가격이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아이티에서는 과거 프랑스 식민시절 농장 경영 방법을 그대로 물려받아 투생 시절 노예제를 사실상 부활시킨데 반해,[12] 영국의 바베이도스 등등의 카리브해에서는 생산성에 한계가 있던 노예제 대신에 중국계/인도계 임노동자들을 데려와서 설탕을 경작시켰는데 이런 지역들이 아이티보다 생산성이 훨씬 더 높아졌다. 맞기 싫어서 대충 눈치보고 일하는 것과 빚 갚으려고 이 악물로 일하는 것의 생산성 차이이다. 아이티는 생각만큼 설탕 수출에서 이익이 나지 않자 배상금을 내기 위해 미국과 독일, 갓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각국 등에서 돈을 빌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아이티는 노예제 완전 청산에는 실패했고, 농업은 몰락했고 경제는 피폐해졌다. 또한 이후에도 황제를 참칭하는 작자들이 잊을 만하면 등장했다. 그리고 옛 주인 프랑스나 머리 위의 신흥 초강대국 미국, 카리브에서 껌 좀 씹던 영국 같은 대국들의 압박 등은 아이티 사람들의 등골을 휘게 했다.
1843년부터 1915년까지 22명의 대통령이 재임했는데, 이 중 21명이 암살당하거나 쫓겨나는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나 통일신라 말의 왕위 쟁탈전 못지 않은 개막장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13] 물론 그 동안 아이티는 있는 것도 다 말아먹고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나라꼴은 엉망이면서도 의외로 19세기 독립 이후에는 한동안 어설프게나마 지역 열강 행세했던 적도 있다. 옆동네 현재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된 당시 스페인령 아이티를 집어 먹어 수십년간 통치하며, 바다 건너 스페인령 쿠바/푸에르토리코나 영국령 자메이카의 식민지 당국이 한동안 아이티가 쳐들어와 자국 내 노예들과 함께 싸그리 다 죽이고 먹어 버리는게 아닐까 겁먹기도 했다. 신생국 멕시코도 유카탄에 자꾸 아이티인들이 드나들자 경계하여 해안선 방어를 강화하기도 했다.
독립 직후부터 빚잔치에 권력 투쟁으로 엉망이었던 나라가 지역열강 흉내낼 역량은 또 어디에 있었냐 하면, 이 때만 하더라도 당장 돈은 없지만 어쨌든 세계 최강의 나폴레옹의 군대에 맞서 싸우며 단련되었던 강력한 군사적 재원은 있었기 때문이다. 페티옹, 앙리 크리스포트, 보예르 같은 뤼베르튀르와 데살린의 후계자들은 정적에 맞서 싸우려면 군대가 필요하니 경제 상황은 파탄이면서도 군대 하나만은 강력하게 유지하려고 들었고, 스페인령 아이티의 수도인 산토도밍고는 당시만 해도 아이티 인구의 1/8 정도 수준 밖에 안됐기 때문에 어쨌든 당장 주어진 여건만 보면 한주먹거리였던 상황이었다. 이래서 도미니카 공화국을 처음에는 어느 정도는 자발적인 연합형태로 먹었는데, 막상 알맹이를 까보니 아이티 측은 못된 짓은 그대로 배웠는지 프랑스가 악랄하게 아이티에 물린 빚을 갚기 위해 도미니카인들을 착취하여 뜯어 내려고 했고, 이에 반발한 도미니카에서 10여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아이티를 몰아내는 걸로 끝이 났다. 그리고 도미니카를 상실하자 안 그래도 악조건에서 시작했던 국가 역량이 그대로 폭싹 무너졌다(...)
그러던 중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하게 된다. 미국은 아이티의 채무불이행을 구실로 미합중국 해병대를 파견하여 점령했는데[14] , 채무불이행은 구실에 불과했고 실은 미국의 뒷마당인 카리브 해에서의 미국의 이익을 지키고 대서양에서의 독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건국 후 한 세기 반 가까이를 빚쟁이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1915년부터 1934년까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 통치를 펼쳤다. 아이티는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대항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수십 만 명의 아이티인들이 쿠바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의 경우 유럽 국가와 달리 빚 받으려고 아이티를 두들겨 패거나 하는 짓은 덜 했고, 오히려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의 빚쟁이 놀이를 막았기에 평가 면에서 유럽 국가들보다는 약간 낫긴 하다지만, 그래도 침략자는 침략자라 지금도 미국과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다. 미국과 영토 분쟁 중인 몇 안 되는 나라이다.
미국은 1934년까지 아이티를 군정통치하면서 미국식 헌법과 정치, 경제, 군부를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아이티는 군부의 입김이 강한 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물론 그 시절에 어느 정도 재정이 안정되고 국가 체제 정비와 산업화는 이루었지만 쿠데타와 군부 독재라는 혹도 덤으로 딸려왔다.(...) 그리고 산업화도 얼마 가지 않아 완벽하게 붕괴되어 사실상 나라 자체가 최빈국으로 전락.
미국의 점령 이후 아이티는 흑인이 아니라 소수인 혼혈 물라토가 집권하면서 다수 흑인과의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 쿠데타가 발생하여 흑인인 뒤마르세 에스티메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다수 흑인의 권익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등록박람회인 1949 포르토프랭스 엑스포도 개최하였다. 개발도상국으로는 사상 최초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는 미군정기동안의 집권층인 소수 물라토와 흑인 지식인층의 저항을 받았다. 결국 에스티메가 50년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하려하자 물라토와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에스티메를 축출하였다.
그리고 이후 흑인 지식층의 지원을 받는 폴 마글루아르의 군부정권이 탄생한다. 이 정권도 마글루아르의 권력욕심으로 인해 1956년 일어난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1957년 군부의 통제 아래 선거가 실시되어 흑인 다수파를 대표하는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하였다.
3.4. 현대사
긴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반 세기만에 문민대통령으로 당선된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집권 초기에는 선정을 펼치며 국가 발전과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몇 년 되지 않아 이디 아민 뺨칠 정도의 최악의 독재자 "파파독(Papa Doc)"이 되어 나라를 철저히 거덜냈다. 뒤발리에 독재 정권은 아들에게까지 세습되었고[15]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민중 봉기로 쫓겨나는 1986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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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좌파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 Bertrand Aristide)가 선거로 집권했다. 그러다 반 년 만에 군사 쿠데타에 쫓겨났으나 UN과 미국 지원을 받아 돌아와서 1년 동안 국정을 수행했다.[16] 그 뒤 2002년에도 선거로 집권, 군부를 억누를 목적으로 군을 해체했으며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견제하고 IMF의 차관 제의를 거부했다. 결국 2004년 반정부 무장 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나[17] 아리스티드는 2년만에 다시 해외로 쫓겨났다.
이 아리스티드는 워낙 민감한 인물로 여러 음모론과 억측이 난무하는데 이 사람에 대한 논란은 후술한다.
더 이상 털어봐야 털릴 것도 없는(...) 철저한 몰락 끝에 결국 UN이 나서서 평화유지군이 투입되어서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지금도 브라질군이 주축이 된 UN 아이티 안정화 작전(United Nations Stabilization Mission in Haiti/MINUSTAH)이 계속되고 있다.
워낙 국가 막장 테크를 충실하게 탄 덕에 어린 세대에게 개판국가로 알려진 그 베네수엘라보다 더 처참한 지경이 되어 미국 국무부는 아이티를 파탄국가(failed state)로 선언한 지 오래이다. 2014년 취약국가지수도 120점 만점에 104.3점으로 9위를 기록했다. 비교하자면 이라크가 102.2점으로 13위를 차지했고 북한이 94.0점으로 26위에 올랐는데, 전쟁도 없이[18] 이라크보다도 높은 걸 고려하면 이 나라 경제와 정치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만하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에는 대규모의 지진이 국토를 강타했다. 이 때의 혼란은 극에 달해 지진이 반영된 2011년[19] 에는 108.0점으로 5위를 기록하여 아프가니스탄보다도 순위가 높았다. 덕분에 잠시 아이티의 인지도는 올라갔지만 그 답이 없는 참상도 금방 잊혀져 버렸다. 사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아이티가 그렇게 큰 나라가 아닌데다가 자원이 많은것도 아닌지라 내전이 벌어져 몇백 만이 죽건 어떻게 되건 국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게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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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인기가수 출신인 미셀 마르텔리가 농민행동당(Repons Peyizan)을 창당하고 대선에 출마하여 2011 4월 20일 제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2011년 5월 14일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통령궁 앞 광장에서 국내외 주요 인사 1,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아이티 대통령직에 공식 취임했다.
2016년 11월 20일에 아이티에 있었던 선거에서 집권 여당 후보인 조브델 모이즈가 당선되었다.# 하지만 여당 후보인 모이즈가 당선되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2017년 7월 12일에 아이티 정부는 20년전에 해산된 군대를 재건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같은 해인 2017년 9월 경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 국경지대의 대형 화산이 폭발하여 아이티 동부 주민들의 대피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화산 폭발은 도미니카 공화국에도 영향을 주었다.
2018년초에는 아이티 대지진당시 옥스팜이라는 구호단체에서 아이티에서 성매매를 했다는 옥스팜 스캔들이 일어나면서 아이티는 반발했고 영국과 EU는 재원중단을 검토하는 등 파문이 커지고 있다.#
2018년 7월 8일에 아이티는 기름값이 오르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항의데모를 벌였다.# 휘발유값을 1리터에 5달러로 올려버렸는데 인구의 상당수가 극빈층인 아이티 경제사정을 감안하자면 차라리 나가 죽으라는 소리인 수준인지라 항의시위가 대규모로 벌어졌고 결국 현 총리는 사퇴하게 되었다.# 7월 20일에 국경없는의사회는 아이티에 세워졌던 산부인과병원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2018년 10월 6일에 아이티에서는 규모 5.9의 지진이 일어나서 최소 11명이 숨졌다.# 안 그래도 8년전 대지진 복구마저 삽도 못뜬 상태인데 거기서 또 지진이 터졌으니 이제는 국가가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보일 정도. 그 뒤 2018년 10월 17일에 아이티에서는 베네수엘라가 창설한 석유 원조 프로그램의 자금 유용 스캔들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되었다.# 그리고 아이티에서는 정부가 부패했다는 주장에 항의하는 시위가 아이티 전역에서 이틀째 계속돼 사실상 모든 활동이 마비되고 2018년 11월 19일에 경찰 1명이 사망하고 외국인 2명을 포함한 3명이 부상당했다.# 2019년 2월 10일에도 반정부시위가 발생되었다.# 게다가 반정부시위도중에 아이티 남부의 아퀸이란 도시에선 교도소에서 수용된 78명이 탈옥하는 사태까지 발생되었다. # 그리고 2019년 2월 18일에 아이티에서 일어난 반정부시위에서 불법무기를 소지한 혐의로 미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7명과 아이티인 1명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불법무기를 소지한 혐의를 가진 외국인들은 미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에도 개판은 계속되어 9월중순부터 모이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격렬해지면서 17명이 숨지고 200명 가까이 다쳤고 빈민들의 지원도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되었다.#
2021년 2월 7일에 아이티 정부가 대통령 암살과 쿠데타 시도를 적발했다며, 야권 성향 대법관 등 20여 명을 체포하자 야권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야권측은 법관을 임시 대통령으로 삼는다고 밝혔다.#
3.4.1. 아리스티드에 대한 논란과 반론
2010년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아이티인들을 돕겠다는 개드립을 펼치며 아이티에 돌아와 한동안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는데, 정작 아리스티드는 2011년 3월 20일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남아공 대통령 주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리스티드를 아이티에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했으나 주마는 이를 무시하고 아리스티드를 아이티로 돌려보냈다. 일부 미국 역사가들이 민중봉기로 쫓겨났다고 주장하는 전 대통령 아리스티드는 공항에서 아이티인 수만 명의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아리스티드를 지지하는 정당은 선거 참여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뒤발리에도 오자마자 고소당한 상태긴 하지만 정치활동을 못 하는 아리스티드보단 정치적인 면에서는 사정이 나았다. 그러나 장 클로드 뒤발리에는 저 설레발을 친지 4년만인 2014년에 사망했다(...).
당국은 아리스티드를 부패와 돈세탁 혐의라는 죄목으로 엮으려 하고 있으나 "아이티 국민을 대변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의 이름은 아리스티드이다", "만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티는 문을 닫게 될 것이다"고 말하면서 버티기 때문에 아리스타드를 잡아 가두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자료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축출된 쿠데타 당시에 미 해병대와 CIA가 쳐들어와 자신을 납치했다고 한다. 미국인 역사학자 스키드모어는 미국 국무부 설명을 충실히 따라 아리스티드가 국민봉기로 쫓겨났다고 주장한다. 반면 아이티에서 NGO 및 자선 의료 활동을 했던 의료인류학자 폴 파머(현재 하버드 대학 사회의료대학 석좌교수 겸 학장)에 따르면 미국의 공화당 세력이 쿠데타 뒤에 있었다고 한다.[20]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은 아리스티드 축출 쿠데타 뒤에 미국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티드는 그가 쓴 《가난한 휴머니즘》에서 자신이 IMF 정책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비판한 것이 강대국의 미움을 샀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아리스티드가 세웠던 의과 대학은 아리스티드가 쫓겨난 뒤 "미군" 기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리스티드 귀환을 다룬 기사
반면 쿠데타 정부는 아리스티드 본인이 쓴 '가난한 휴머니즘'이라는 책과는 달리 아리스티드 자신은 전혀 가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니, 가난하기는 커녕 수천만 달러의 자금이 예치된 역외은행의 비밀계좌를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고 한다. 실제 계좌를 추적해서 드러난 사실이라고도 주장한다. # 더불어 이런 엄청난 재산이 정상적인 대통령 월급으로 채워졌을리는 만무하고, 부정축재와 기금횡령으로 거둬들인 재산이며 그가 쓴 책과는 달리 얼마나 아이티인들을 위한 정치가였는지는 의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옹호자들은 이런 의혹은 정작 앞에서도 말했듯이 쿠데타 세력이 일으킨 정부가 발표한 것이며, 그걸 밝힌다고 미국에 넣은 소송은 2006년에 중지되었다고 말한다.[21] 한 마디로 "밝혀진 것"이 없다는 주장. #
물론 쿠데타 세력은 아리스티드 정부시절 받은 수표와 계좌가 밝혀진 것은 사실이라고 아직도 주장한다. 그 사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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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티드의 옹호자들은 이 수표가 왜 비밀도 아니고 훤히 드러나는 아이티 국립은행 것인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다. 금액도 수천만달러가 아니라 60만달러이며, 단지 저 수표에 서명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바로 부정축재 증거가 된다고 보기엔 적혀 있는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다. 출처 반면 현 정부 옹호자들은 스위스 은행에서는 아리스티드의 자산을 동결했다고 밝혔고, 프레발 대통령은 아이티 경제가 어려워지자 이 동결을 해제하여 현금화할 것을 고려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스위스 은행가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아리스티드의 자산을 만들어내서 아이티에 지원할 만큼 천사들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연합뉴스 다만 이 기사는 프레발 대통령이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동결된 재산을 가져오려 하겠다고 "말했다고" 스위스의 '한 TV'가 말한 것을 전한 것이다. 또한 위 링크에 나온 취재기자 Lucy Komisar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이 기자는 아이티 쿠데타에 찬성한 아이티의 거물 부로 집안(Boulos family)과 미국 우파 단체 Haiti Democracy Project (HDP)의 고용원으로 일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쿠데타 정부와 한 편이라는 주장[22] . # Lucy Komisar가 증언자의 말을 왜곡했다는 기사도 있다. # 다른 아이티 소식지 또한 아리스티드가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
위의 인용자료들을 정리하자면, 한마디로 '''한 쪽은 아리스타드를 대책없이 쉴드치고 다른 한 쪽은 그의 축출을 정당화하려 무리수를 두는 과정에서 양측이 서로 근거없는 음모론과 억측을 제기한다'''라고 보면 된다.
4. 경제
위 문단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건국 이래로 빚이 많았고 그것이 이 나라 빈곤의 첫번째 원인이었다. 그래도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대에는 식량 자급률이 80%였지만 미국의 원조 식량이 들어오고 나서부터 농산물 가격이 급락, 현재 식량 자급률은 45%대에 불과하다. 그런데 경제활동 인구의 2/3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데도 이 꼬라지 인것이다.
이런 현상을 '원조의 함정'이라고 부르는데, 원조를 받으면 당장은 식량 가격이 폭락하고 기근이 종결되어 당장은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더욱 원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원래 인구 전체의 필요식량의 20% 정도가 부족하면, 5% 정도는 굶어죽고 40% 정도는 굶어죽지는 않지만, 여성의 경우 임신 출산 시 사망률이 무척 높아진다. 따라서 생식활동을 하는 인구 비율이 제한되면서 인구는 유지된다. 문제는 원조물자를 받다보니 인구의 대부분이 생식활동에 참여한다. 따라서 인구가 유지가 아닌 배로 늘게 된다. 결국 더 많은 원조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1960년대 아이티 인구는 400만이었는데 지금은 천만이 넘는다. 그나마 국토에 미개척지라도 있으면 많은 노동력을 바탕으로 개척해나가면 되겠지만 아이티는 애초에 플랜테이션으로 빼곡하게 가득 차있는 섬인데다가 인구밀도도 엄청나게 높은 섬이라 개척할 땅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원조식량으로 인구만 두배 이상 늘었으니 원조가 끊기면 반이상 굶어죽는 건 기정사실이다. 게다가 정부 인사라는 자들은 하나같이 답이 안 나오는 무능력을 자랑하며, 그게 잘못된 줄도 모르는 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 결과 전 국민의 80%가 절대빈곤 상태에 처한 절망적인 상태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적인 방책은 다름아닌 전염병과 전쟁이었다. 인구과잉이 비위생적인 환경과 면역력 저하를 부르며,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갈등이 높아지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재앙들이지만, 다른 편으로는 인구를 효과적으로 조절하는 확실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즉 이런 게 한번 지나가면 인구의 절반쯤은 사라지면서 축적된 문제가 해결되지만, 전염병은 WHO가, 전쟁은 UN평화유지군이 막아놓고 있고, 그렇다고 이런 걸 막지 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사실상 그 누구도 해법을 제시할 수 없는 상태이다.
거기에다 2008년에는 폭풍 4개가 나라를 갈아엎는 바람에 이 나라의 명물이자 특산품(...)으로 지금도 유명한 진흙쿠키가 나돌 정도로 식량난이 고조되고 있다. MBC 프로그램이던 W에선 한국인 취재진[23] 이 아이티 보건부장관한테 국민들이 진흙 쿠키를 주식으로 먹는다는 사실을 물어보자, "건강에 진흙 쿠키가 유해하다는 증거는 없으며, 앞으로 그런 게 외국인들 눈에 보일 경우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다가 기생충이 많은 진흙[24] 이라는, 초등학생이라도 손쉽게 떠올릴 법한 반박거리를 꺼내어 이야기하자 말문이 막혔는지 바쁘다면서 퇴장해버렸다. 2010년에는 대지진까지 일어나 가뜩이나 빈곤하던 이 나라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완전 엉망진창이다.
이 나라가 속한 북아메리카는 물론 아메리카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경제 수준이 열악한 나라로, 부양력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서 삼림마저 모조리 벌목/개간한 탓에 황폐화가 가속되고 있다. 현시점에서는 기후 빼면 화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실제 구글어스로 아이티를 보면 왜 화성 취급을 받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애초에 섬은 농경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지만 그나마 해안가에 플랜테이션이 풍부하게 가능했던 것은 배후 삼림이 존재했기 때문인데 목재와 개간지를 구하기 위해 그걸 다 베어버렸으니 그나마 되는 플랜테이션 농장도 가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주요 외화수입원은 커피 열매에서 나오는 원두와 해외에서 일하는 아이티인들의 송금, 그리고 해외원조(...)로 특히 해외원조의 비중이 너무 크다.[25]
또한, 물가도 비싼 수준이다. 근로자들의 평균 수입은 적은데 기본적인 생활용품부터 수입해오기 때문에 최빈국답지 않게 물가가 비싸다. 원래 후진국일수록 나라 자체는 쓰레기인데 수도에만 쓸데없이 초호화건물이 늘어선 삐까뻔쩍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특권층 등 그 나라의 돈줄을 쥔 1%만이 몰려 사니까 그렇다. 그리고 이들은 자국이 워낙 형편없는 허접이라 공업 따위는 발전하지도 않아 생필품을 100% 수입하고 당연히 이러면 물가는 따블로 비쌀 수밖에 없다.
물가가 어느정도인가 하면, 그 진흙쿠키가 하나당 30원, 밀가루+기름(마가린)+소금으로 만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쿠키가 100원을 좀 넘는데, 들어가는 재료를 생각하면 선진국인 우리나라 입장에서 봐도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 애초에 우리 주변에 쉽게 볼 수 있는 불량식품들의 가격이(지금은 좀 올랐지만) 소매상을 통해 구매해도 정말 싼 건 100원인 걸 생각해보자. 아이티의 1인당 GDP는 우리나라의 1.5%가 조금 넘는다. 더불어 빈익빈 부익부가 우리나라와 비교가 민망할 수준으로 심각하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밀가루 쿠키가 100원을 좀 넘고, 무기물을 제외한 영양소가 거의 없는 진흙쿠키조차 30원이니 아이티에서 진흙쿠키조차 거의 사치에 가까운 음식인 것이다.
물가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IMF와 세계은행등 에 따르면 2019년 물가상승률이 무려 20%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한심한건 경제성장률이 0.9%라는 사실이다. 경제가 고도성장 중 일때야 인플레이션은 어쩔수 없다지만 그것도 아니면서 물가는 허구헌날 천정부지로 치솟기만하니 이건 생지옥이 따로 없다. 외교부 국가정보
그래도 유튜브 등지에 수도인 포르토프랭스를 검색하면 항구를 건축중인 영상이나 수도를 돌아다니는 영상들이 있는데, 최소한 수도는 사람 사는 동네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수도'만 말이다. 그 영상들에서도 수도 한가운데인데도 겨우 차선 구분도 제대로 안된 비포장도로가 나오거나 무너진 건축물이 아직도 수도 한 구석을 차지하는 등 포르토프랭스 역시 그다지 정비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술했듯 아무리 쓰레기 같은 형편없는 나라도 그 나라의 돈줄 쥔 놈들은 죄다 수도에 몰려사니 놀랍지는 않은 일이다.[26] 당연한 말이지만 시골로 내려갈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해지며 북한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아이티에 속한 섬중에 라바디라는 섬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않는 인기많은 휴양지이긴한데 문제는 이섬은 아이티에 속해있으나 로얄캐리비안이라는 크루즈사의 사유지라 관광객들이 아무리 많이 찾아온들 정작 아이티 경제에는 별다른 보템이 안 된다.
사실 지진이나 허리케인은 열대 섬 지방 + 불의 고리 특징상 그 지역에서는 툭하면 일어나는 흔한 재앙인데다 아이티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주변 국가들 모두 똑같은 상황인데다 지형 핑계를 댈 수도 없게끔 같은 섬을 공유하는 다른 나라[27] 도 있다.(...) 그럼에도 독보적인 피해를 입는 것은 경제적으로 답이 없을 정도로 빈곤한데 인구는 넘쳐나기 때문이다. 온 나라에 바람만 세게 불어도 쓰러질 가건물만 가득 차있고 인구도 가득 차있는 상황에서 그 인구를 부양하려고 수해를 막아줄 삼림도 다 베어버렸으니 지진이나 태풍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쓸려나가는 게 당연해지는 것이다. 지진이던 태풍이던 그 자체보다는 그로 인한 토양유실, 산사태, 홍수 등이 문제인데 식수를 구하기 쉽고 그나마 어로를 하겠다고 치수대책도 안된 강변과 해안가에 가건물로 주택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상태이니 답이 없는 상태다. 나라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보니 그 사람들을 다른 곳에 옮길 땅도 없고 어떻게 옮긴다한들 강변과 바닷가처럼 물과 식량을 공급할 대책도 있을리 없고 결국 쓸려 내려갈 때마다 원조물자로 가건물을 다시 짓는 게 대책의 전부다.
이러한 개판 덕분에 2010년 비슷한 시기에 지진이 난 칠레는 막상 피해가 적었는데 이 나라는 혼자 무슨 거대괴수라도 습격한 양 개발살났다. 칠레는 피해를 금방 복구했으나 이 나라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피해복구는 엄두를 못 내는 판이다. 물론 칠레도 아주 잘 사는 나라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최소한 아이티보다는 넘사벽급으로 잘 사는 나라다.(...)
5. 군사
아이티군 참조.
6. 문화
부두교와 좀비가 이 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통계상으로는 대부분의 주민이 가톨릭으로 나오지만, 아이티 주민들 절대다수가 사실상 부두교와 가톨릭을 이중 신앙으로 믿고 있다.
과거 아이티가 프랑스 식민지였던 시절 아이티인들은 가톨릭 성화에 나오는 성인들이 누군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28] , 아프리카 토속 신앙의 신들로 생각하고 백인 농장주들 몰래 아프리카 토속 신앙 방식으로 숭배하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부두교는 "몰래 가톨릭을 믿는 척하며 실제로는 아프리카에서 원래 자신들이 믿었던 신들을 섬기는" 이중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현재도 부두교가 가톨릭에 빌붙는(...) 이중신앙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며, 심지어 캐나다에 난민으로 들어온 아이티인들도 가톨릭과 부두교 이중신앙을 준수하고 있다. 어느 정도인지 몬트리올에서 택시를 탈 때 아이티 출신 기사의 택시를 타면 부두교 부적이 걸려있는 걸 볼 수 있다.
6.1. 언어
사용하는 언어는 프랑스어와 아이티 크레올어. 하지만 프랑스어가 많이 섞인 아이티 크레올어가 주 생활 언어이다. 이 심히 괴이한 프랑스어의 변형 발음은 프랑스어와 비슷한데, 정작 프랑스인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따라서 교육받은 식자층에서는 프랑스에서 정통 프랑스어를 공부한다. 쓴 걸 보면 예를 들면 봉주르(Bonjour)을 봉주(Bonjou)라고 쓴다. 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아프리칸스어나 영국식 영어와 독일어가 섞인 파푸아뉴기니의 톡 피신과 비슷하다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냥 '''다른 말'''이다.
그 외 나라가 워낙 엉망이라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에 의존이 불가피해서 스페인어도 자주 쓰인다. 원래부터 도미니카 공화국과 접한 국경에서 쓰이고 있지만, 외국계 기업에 취직을 위해 중요시되고 있고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머리 위에 있고 영향력이 아주 강한 미국, 그리고 카리브에서 짱먹는 영국의 영향으로 영어도 스페인어와 함께 중요시되고 있다.
7. 사회
치안이 매우 나쁜데 폭동, 무장한 조직폭력배 등 범죄조직들의 납치 사건, 그리고 민생치안을 해치는 강력범죄인 강도, 강간, 살인이 자주 발생하는 나라다. 진짜 문자 그대로 한마디로 '''헬게이트''' 맞다. 그냥 헬게이트도 아니고 제일 비참한 헬게이트다. 사실 무슨 거창한 테러조직 그딴 게 있는 건 아니고 갱단이 화끈하게 무장했고 도둑들이나 강도들도 불법무기를 소지한데다 경찰들의 수도 모자라고 역량도 아주 형편없어 수습이 안 되는 것이다.
론리플래닛으로 유명한 토니 휠러는 이 나라를 여행한 다음, 여기에 견주면 쿠바는 천국이며 다른 나라들도 최소한 선진국이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심지어 그 악명높은 윗동네 북한도 이딴 곳보다는 평균 수명이 훨씬 높다.
평균 수명은 41.2살로 북미에서 최저를 자랑(?)하며 전세계적으로도 최하위이다. 그 비참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이 정도로 막장스러운 국가는 극히 드물 정도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의 평균수명이 깎이는 가장 큰 이유는 에이즈고 그게 없는 나라는 다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인데, 아이티는 에이즈와 내전 문제가 아프리카 급으로 심각하지 않음에도 이 정도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어느정도 회복되어서 60대 중반을 찍고 있는데 이것도 중남미 일대에서 여전히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뿐만 아니라 감옥의 수용가능 인원대비 실제 수감인원 비율만 해도 세계 최고인데, 무려 '''417%'''다. 이는 수용인원 1000명인 감옥에 4170명이 수감되어 있다는 뜻이다. 물론 감옥이 초과 상태인 국가는 굉장히 흔하지만[29] 아이티의 경우는 교도소의 시설도 매우 열악한데다 과포화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치라 문제가 정말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티의 상황이 얼마나 막장인지는 구글 어스를 통해서도 바로 알 수 있다. 구글 어스로 수도인 포르토프랭스의 중심가 아무데나 골라서 확대해 보면 지진이 일어난 지 4년 후 찍은 사진인데도 복구가 되어있지 않은 곳이 굉장히 많다. 또한 도로 상황은 아예 신호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차가 중구난방으로 움직이고 있고 심지어 차선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도 특히 개발이 덜 된 나라들만 고르고 골라서 그 수도를 구글 어스로 살펴봐도 이 정도의 막장성을 보이는 도시는 극히 드물다. 게다가 7년동안 콜레라와 전쟁 중이고 아이티 국민의 7%가 콜레라에 감염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매우 가난해서 돈이 없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래도 한 때는 이 나라에서 등록박람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물론 아주 오래 전 이야기긴 하지만.
여성 대통령이 나온 적이 있다. 엘사 파스칼 트루이요(Ertha Pascal-Trouillot)이다. 비록 선거로 선출된 것이 아닌 반란 때문에 일시적으로 대통령직 권한을 대행한 것이지만 법무장관까지 오를 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현재는 아이티 백과사전 전기를 저술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8. 종교
국교가 없는 세속국가이지만 전 식민통치국인 프랑스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90% 가량 차지하고 있다. 그 중 개신교가 16%이고, 가톨릭은 거의 80%에 달한다.
그러나 미묘한 게,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부두교와 관련된 주술을 행하거나, 주술사를 찾거나 관련 비밀결사에 가입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가톨릭 신자이지만 간소하게나마 무속신앙을 따르거나 제사를 지내는 격이다. 즉, 이에 따르면 아이티 최대의 종교는 시각에 따라선 기독교가 아니라 부두교로 봐도 될 정도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거의 가톨릭+일부 개신교의 기독교 위주의 국가로 보는 것이 맞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아이티가 아닌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기독교를 보면 순수 전래된 기독교 자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 전래되면서 전통신앙, 부족신앙 등 원시종교들과 엮여서 교리나 예배 방식이 조금 달라진다거나 성향이 섞이는 경우는 있는 만큼 아이티만 예외로 볼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과달루페의 성모만 해도 멕시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적 원시종교의 믿음이 기독교와 결합된 사례인데 성모발현이 일어난 곳이 원래 아즈텍의 만신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적으로 멕시코는 급속하게 가톨릭이 퍼져 기독교화되었다. 기적을 목격한 사람도 기독교로 개종한 후안이라는 세례명의 인디언이었다.
애당초 이런 식으로 치면 다른 가톨릭이 다수인 국가들 중 아이티처럼 가톨릭과 개신교를 믿으면서 다른 민속/토종 원시종교와 민간신앙이 일정 부분 섞여 있는 나라들은 죄다 비기독교 국가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한 교회에 나가는 아이티 사람들 중 부두교 주술을 행하거나 관련 비밀결사에 가입되어 있는 것도 정말 진지하게 하는 것인지 그래도 사회적으로 전통이 깊은 부두교라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아주 무시하고 배척하기가 어려워 형식상 재미로 이름만 걸어놓고 가입한 것인지 등을 봐야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에서도 교회 다닌다면서 무당을 찾고 집에서 제사 지내는 사람이 그렇게나 많다. 진짜 독실해서 무당 따위 손절하고 제사를 안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런 나이롱 부류들도 상당수다.
즉 저 아이티 종교인구 중에서 같이 믿더라도 그 중 가톨릭/개신교 등 그리스도교를 더 중요시하는지 부두교를 더 중요시하는지 비율을 따져봐야 한다.[30]
9. 스포츠
9.1. 축구
2013년 1월에 피파 랭킹 38위까지 올라가 사람들이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축구를 잘 하는 나라는 아니다. 이조차 역시나 반짝돌풍으로 몇 달 안 가 피파 랭킹이 60~70위권으로 내려갔으며 2021년 1월 기준 84위. 그래도 웬만한 아시아 국가들보다 순위가 높다.(...)
사실 1970년대에 잘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북중미 수준에서 잘했다는 것일 뿐이다. 북중미 대륙 챔피언십[31] 에서 1973년 자국 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1971, 1977년 대회를 준우승한 적이 있으며, 카리브컵 전신인 CFU 챔피언쉽에서 1979년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도 참가했으나 3전 전패하고 탈락했다. 1974년 월드컵에서 당시 1142분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던 이탈리아의 디노 조프의 기록을 깬 것도 아이티의 스트라이커 에마뉘엘 사논이다.[32]
2007년에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개최된 카리브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 대회는 중미 대회에서 중하위 나라들이 참가하는 대회이기에 아이티의 우승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참고로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최다 우승 8번이며, 자메이카가 5번 우승했고 축구랑 거리가 먼 쿠바나 마르티니크도 아이티처럼 1번은 우승했던 대회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선 일찌감치 예선 탈락했지만 2013년 스페인,[33]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에선 각각 1:2, 2:2로 선전했다. 하지만 2013년 7월에 열린 골드컵에선 온두라스, 트리니다드 토바고, 엘살바도르와 맞붙어 1승 2패를 거두며 조 꼴지로 토너먼트에서 탈락했다.
2013년 9월 6일 인천축구전용경기장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34] 와 평가전이 성사되었다. 유럽과 남미 팀들이 여전히 월드컵 예선 진행중이라 대진 상대를 구하기 힘든 상태에서 축구협회는 이란, 쿠웨이트와 평가전을 추진했으나 모두 불발되고 결국 나름 강팀을 상대로 선전을 보인 아이티를 상대로 잡은 듯. 항간에는 축협의 무능을 탓하기도 했지만 같은 시기 일본 역시 대진 상대를 못 구해서(...) 과테말라와 친선전을 가졌다. 결국 아이티는 한국에게 1:4로 패했다.
역시 언어적으로 같은 프랑스에서 아이티 선수들이 여럿 뛰고 있으며 거기서 뛰는 유망주들이 많다. 프랑스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카옌의 수비수 장 자크 피에르, 낭시의 제프 루이스와 르망의 켈벵스 벨포르 등이 아이티 선수이다.
이 외에 월드컵, 대륙간컵, 골드컵 등의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아이티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물론 전적은 아주 형편없고 국제무대에서 어지간하면 얘네는 볼 일도 없다. 오히려 이웃 자메이카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도 나가보고 이래저래 더 강호이다.
9.2. 야구
인기는 옆동네에 비하면 없다. 호세 페르난데스가 이 나라로 귀화했다.
10. 아이티 출신 인물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아주 쓸데없이 유명하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아빠)의 친아버지 토마알렉상드르 뒤마가 아이티 섬 출신이다. 뒤마의 친할아버지는 프랑스 출신의 귀족이었고 친할머니는 흑인 몸종이었다. 뒤마의 아버지는 원래대로라면 노예가 됐어야 하나 출생 이후에 부친을 따라 프랑스로 건너가 자유인이 되었고 프랑스군의 첫번째 흑인 장교가 된다. 즉 뒤마(아빠)의 아버지가 아이티 출신의 물라토이고, 뒤마(아빠)는 1/4가 흑인인 셈이다. 결국 뒤마(아빠)의 아들인 춘희를 쓴 뒤마(아들)는 1/8이 흑인이다.
그 와 록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의 멤버인 레진 사샤뉴[35] 하고 퓨지스의 와이클레프 쟝[36] 이 유명하다.
현재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외국인 타자인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는 쿠바를 탈출한뒤 아이티 국적을 따 해외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픽션에서는 미국 드라마 히어로즈의 캐릭터 중에는 통칭 헤이션, 즉 아이티인(Haitian)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본명은 불명이고 그냥 이게 이름이다. GTA 바이스 시티에서도 아이티계 갱단이 등장하는데, 돌려 말하지 않고 대놓고 미션 목표에 "아이티인들을 죽여라!"라고 써버려 락스타에게 거대한 고소크리를 안겨주었다.[37] 이 가운데 와이클레프 장은 최근 아이티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지만 국적상 미국인이라서 불가능하다. 다른 예로 오버워치의 바티스트가 아이티 출신이다.
아이티인은 아이티 밖에 상당히 많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에는 120만 명, 캐나다에 20만 명, 그리고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100만에서 200만 사이의 수가 거주하고 있다. 프랑스에도 9만 명이 거주하며, 바하마에도 8만 명이나 거주한다.
미국에는 아이티인들이 너무 많아서 아이티인들의 이주가 제한되고 있다.[38] 미국에선 주로 프랑스어권이고 바다로 맞닿은 루이지애나나 카리브 이민이 많이 들어온 플로리다에 흔하며 아이티 흑인은 타 미국 흑인과 달리 프랑스식 성명을 써서 금방 구분된다. 유명한 아이티계 미국인으로는 Jason Derulo가 있다.
도미니카 공화국의 경우는 주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아이티인들을 써먹는다. 진짜다. 당연히 도미니카인들은 이들을 대놓고 짐승 취급한다.
특이하게 캐나다에도 많은데 퀘벡에 상당수가 거주하고 있으며 레진 샤사뉴와 캐나다의 전 총독이었던 미카엘 장(Michaëlle Jean)이 퀘벡 아이티인이다. 아무래도 같은 프랑스 문화권이고 미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차선책으로 캐나다로 많이 이주한 듯. 한편 옆집 흑백혼혈 위주인 도미니카 공화국에선 흑인인 아이티인에 대한 인종주의가 팽배하여 아이티 이주 외노자를 대상으로 착취랑 능욕이 난무하다고 한다.
오버워치의 바티스트.
11. 외교
[혼합된체제] 4.22점[1] 아이티 크레올어로는 Goud ayisyen.[2] 외교부 해외안전여행[3] 라틴어 식 발음으로, 스페인어식으로는 이스파니올라다.[4] 다만 이 지역은 아이티에 속해있긴하나 로얄캐리비안이라는 크루즈사의 사유지다.[5] 천연두, 수두, 홍역 심지어 그냥 감기(...) 등이었는데 이 중 천연두의 살상력이 가장 화끈했다. 지금은 평범해 보이는 감기도 인디언들은 면역력이 0에 수렴해 대거 폐렴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 번져 죽어나갔다. 스페인 사람들은 더운 나라인 이베리아 반도의 특성상 온갖 더러운 전염병에 저항력이 있었고 유럽인들이 원체 비위생(...)적이라 돼지 등 동물에게 옮는 전염병에도 면역력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심지어 '''19세기'''에 영국계 미국인들이 서부개척을 하던 시기도 마찬가지라 백인 선교사나 개척자들은 멀쩡히 돌아다니는데 원주민들은 천연두와 홍역으로 대거 쓰러져 나갔다. 그리고 미국 내 원주민 잔존부족들은 완전히 저항력을 잃고 사막이나 산 한가운데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쫓겨났다.[6] 그래도 카리브 인디언이 아주 DNA가 사라지진 않아서 일부 혼혈은 살아남았다.[7] 프랑스에서 폴란드 독립을 위해 싸우던 폴란드인 군인들을 아이티로 파병했는데, 이들도 돌아갈 모국이 없는 상황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동병상련을 느낀 흑인들이 죽이거나 추방하지 않고 생존자들은 아이티에서 현지 여성들과 결혼해서 정착하게 되었다.[8] 당시 식민주의와 노예제가 가장 극렬한 곳이 카리브 해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티가 프랑스와 완전히 연을 끊고 독립하면 다른 식민 제국들이 프랑스와 다를 바 없는 간섭을 펼칠 수도 있었다.[9] 남아이티의 초대 대통령이자 앙리 크리스토프의 라이벌이었던 알렉상드르 페시옹은 1818년에 사망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부아예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상태였다.[10] 볼리바르는 페시옹의 남부 정권에게 병력을 지원받았다.[11] 참고로 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북아메리카 대륙 중부의 광대한 루이지애나를 매입할 당시 매입 금액이 1,500만 달러, 약 7,500만 프랑이었다. 물론 당시 루이지애나는 인구가 부족해서 개발에 어려움이 많던 지역이기는 했다만...[12] 당시 프랑스군을 몰아내긴 했는데 영토 안에 제대로 돌아갈 만한 경제적 인프라가 사탕수수 농장들 뿐이었고, 이 농장들은 엄청난 양의 노동자들을 필요로 했다. 결국 노예제란 단어만 안 썼지, 강제노동법을 만들게 된다.[13] 그 중에서 포스탱 엘리 술루크라는 대통령은 1849년에 장 자크 데살린이 했던 것처럼 아이티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포스탱 1세로 즉위했다가 재위 10년만인 1859년에 축출되었다.[14] 이 때 미 해군 항공대는 항공지원을 명목으로 게임하듯 아이티인들을 기총으로 쏴죽였고 수많은 사람이 미 해병들에 의해 학살당했다.[15] 진짜 이쯤되면 카리브의 김일성이다. 적어도 타 라틴아메리카 국가 독재자들도 세습 따위는 안 했다.[16] 사실 '''쿠데타 배후가 미국의 CIA'''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공연한 비밀이었다.[17] 상당수는 바로 그 해체된 국군 출신들이었고 이후 이들에 의해 군이 재건되었다.[18] 그래서 집단 간의 갈등과 치안유지력 지수는 각각 7.0과 7.5로 상대적으로 낮다. 베네수엘라처럼 나라에 대통령이 둘이라던가 시리아, 이라크, 소말리아, 예멘처럼 내전 중이거나 한 것도 아닌데 나라가 이꼴인 것은 어딘가 문제가 있단 얘기다.[19] 왜 2010년이 아니냐 하면, 2010년에 '일어난' 지진이 2011년 지수에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 큰 일이 있으면 그 다음해에 지표가 급속히 나빠진다.[20] 관심이 있는 사람은 '권력의 병리학'이란 책을 참고하면 된다.[21] 다른 나라 이야기지만 칠레에서 1973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 정부는 아옌데의 인민연합 정부가 Z계획이라 하여 당일 예정된 신임투표에서 친위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제는 미국 극우들도 인정 안하는 이야기다.[22] 아이티 주간지의 기사[23] 이들이 직접 파는 진흙 쿠키를 사먹어봤는데 먹는 순간 흙이 씹혀서 도저히 더 이상 삼킬 수도, 씹지도 못하고 뱉어버렸다. 재료는 진흙 절반에 기름 약간, 밀가루 약간, 소금 약간. 이 정도로 넣고 굽는다. 1개당 우리돈으로 30원 정도. 그냥 밀가루와 기름, 소금만 넣어 구운 건 100원이 넘는데 이건 맛이 없다고 해도 최소한 먹을 수는 있었다.[24] 흙을 빵에 넣는다든지 양을 속인 건 과거 유럽에서도 있었는데 주로 흉년 때 이랬다고 한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흉년 속에 아이들이 굶주림에 못이겨 흙을 퍼먹는 게 나오며 우크라이나 대기근 때도 아이들이 이러는 것을 목격한 사례가 있다. 그래도 다들 오래 전 이야기인데 아이티는 이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문제다.[25] 이 탓에 위에 나온 취약국가지수(국가 불안정 지수)의 '외부 의존 및 개입' 지수가 10점 만점에 9.6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26] 그 소말리아나 예멘 등도 수도는 나름 사람 사는 꼴을 갖추고 있다. 북한도 평양만큼은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이 몰려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27] 물론 여기도 잘 사는 나라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아이티보다는 넘사벽급으로 잘 사는 나라다.(...) 한 국경 맞대고 이렇게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것도 참 신기할 정도다.(...) [28] 사실 가르쳐줬어야 이해를 한단 말이 맞는게 프랑스인들은 기독교를 전한다고 말만 그렇지 실제로 제대로 성경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나온게 다호메이 왕국의 만신전과 기독교, 타이노 인디언의 원시종교가 짬뽕된 부두교였다.[29]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만 해도 교도소는 포화 상태를 넘어 정원보다 6% 가량이 더 많다. 게다가 사회 전반적으로 엄벌주의가 득세하는지라 더 늘어날 것이다.[30] 단적으로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자기 종교는 기독교라고 하는 사람이 재미삼아 한번쯤 사주팔자나 타로 점 같은 것들을 보는 경우가 있고, 기독교인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아이티인들이 기독교 교회에 다니면서 부두교도 신경쓰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일 가능성이 있고 자세한 것을 알기 위해선 더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31] CONCACAF Championship, 골드컵의 전신이다.[32] 이 골과 역시 사논이 아르헨티나 전에서 기록한 한 골이 아이티가 월드컵에서 기록한 골의 전부이다. 다시 말해 사논은 아이티에서 유일하게 월드컵에서 득점을 기록한 선수였다.[33] 대결 이유가 재미있는 것이 컨페드컵에서 같은 조의 타히티와 대결하게 되자, 약팀을 상대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대진을 추진했다고 한다.[34] 당시는 홍명보호였다.[35] 가족이 아이티인이었는데, 뒤발리에의 폭압 때문에 캐나다로 망명했다고 한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1집에 수록된 'Haiti'는 이를 다룬 곡이다. "내 태어나지 않은 사촌들은 한밤중에 뒤발리에에게 사냥당했다" 등의 가사로 아이티의 독재를 비판한다.[36] 아이티 난민이며 미국 흑인들에게 차별받은 경험이 주요한 음악적 원천이 됐다고 한다.[37] 이 이후로 비디오 게임에선 (실존하는) 특정 국민이나 세력을 죽이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넣지 않게 된다. 제일 쉬운 예는 모던 워페어 2의 No Russian.[38] 아이티 외에 폴란드, 파키스탄, 엘살바도르 등도 이주를 제한한다. 문자 그대로 미국에 넘쳐흐른다(...). 한국인과 중국인/대만인은 이들보단 낫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영주권 추첨에서 제약받는 신세다. 싱가포르나 호주, 뉴질랜드, 유럽연합 등은 가장 우선순위지만 자국이 미국보다 더 잘 살아서 굳이 올려는 사람이 드물어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