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서양
1. 개요
서양의 철학사를 다룬 항목. 즉 고대 그리스부터 내려온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전통을 다룬다.
2. 서양철학사의 주요한 질문들
그냥 무작정 철학사를 읽어내려가기 보다는 "서양철학사의 주요한 질문들은 무엇인가?", "철학자들이 답하고자 했던 문제는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는 것이 더 유용하다는 견해가 있다. 어떤 시각에 따르자면 철학사의 가장 주요한 세 가지 질문은 다음 세가지다.
- 형이상학 - 존재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세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 인식론 -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
- 윤리학 - 올바른 행동은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가?
- 논리학 - 올바른 추론이란 무엇인가?
- 미학 -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 정치철학 - 더 나은 정치 체제는 무엇인가?
- 언어철학 -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 과학철학 - 과학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방법론을 추구해야 하는가?
- 심리철학 - 마음이란 무엇이며, 신체와 마음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등등
특히 역사주의적인 전통 하에서 철학에 접근하는 사람들, 즉 철학사란 것이 사상사 혹은 지성사와 무관한 것이 아니며, 그러한 컨텍스트 하에서만 옛 철학자들의 저작을 온당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현대적인 철학의 분과에 맞춰서 철학사를 읽으라는 것은 부적절한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다만 이러한 입장에서도 여기서 이러한 철학사의 전통적 질문들을 제시하는 까닭을, 온당한 이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이제 막 철학사에 입문하려는 사람들이 '철학은 무엇에 답하고자 해 왔는가?'에 대해 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라 이해해볼 수 있다.
3. 철학 이전의 시대
현대의 많은 철학자들은 탈레스가 서양 최초의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 철학사를 저술할 때 탈레스부터 저술하는 책은 드물다. 왜냐하면 탈레스의 철학에 대한 자료가 거의 전무하며, 또한 고대 철학이 탄생한 바탕을 먼저 다룰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철학사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진 호메로스에서 시작된다. 호메로스가 철학과 관계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플라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소피스트들의 저술 중 어느 저작을 보아도 호메로스에 대한 언급은 빼놓을 수 없다. 그 철학자들이 호메로스에게 동의하는가, 아닌가는 이미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당시에는 '''호메로스 외에 접할 텍스트가 없었으니까.'''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고대 철학을 주도한 학자들은 모두 호메로스를 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는 '''모든 그리스인, 나아가 모든 서양인들의 스승'''인 것이다. [1]
다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헤시오도스인데, 그는 카오스, 가이아, 에로스 등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 당대인의 세계 인식 방법을 후대에 전했다. 더불어 철학사에서는 종종 오르페우스 교단과 디오니소스 교단이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된다.
때때로 아주 집요한 사람들은 호메로스를 넘어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 신화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이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철학 이전의 시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철학 이전, 즉 이성(logos) 이전의 시대란 바로 신화(mythos)의 시대를 뜻한다. 재미있게도 이성과 신화라는 단어는 모두 '말'이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는데,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두 단어는 공통점을 갖는다. 신화란 이성적 세계관이 자리잡기 이전의 고대인들이 세계, 자연, 법칙을 설명하던 방식인 것이다. 철학사가들은 자연 앞에서 무력했던 인간이 자연에 대해 거둔 첫 승리가 바로 신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를 공부하는 자가 바로 철학하는 자라고 표현했으며, 아도르노는 계몽사상의 근거를 신화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신화가 '구전되어 오는 말'을 뜻한다면 이성은 '따져서 묻는 말'을 뜻하며, 두 세계관은 결국 결정적인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4. 고대 철학
흔히 고대 그리스 철학의 발생은 '''"뮈토스(Mythos)에서 로고스(Logos)로의 이행"''', 즉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이성에 기대어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 시도의 탄생이라고 여겨진다. 예를 들어 "왜 파도가 치는 걸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델피 무녀한테 들었는데 포세이돈 님이 화가 나신 거래"가 아니라, 나름의 합리적이며 보편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설명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자연적인 것과 인간이 만든 것 사이에 구분이 생겨났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의 질서(physis)와 인간의 규범(nomos)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유를 처음 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은 에게 해 그리스 식민지 폴리스인 밀레투스에 살던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이다. 그 최초의 인물인 탈레스는 "모든 것의 근본(Arche)은 물이다"는 설명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게 포세이돈을 들먹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철학사가들은 의인화된 신인 포세이돈을 들먹이는 것과 달리 탈레스는 어떤 하나의 항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근본을 세계의 원리로 제시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즉 우리가 관찰하는 자연현상을 더 이상 '신의 변덕' 탓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탈레스에게 붙였다.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을 물, 즉 규정성(peras)을 갖는 구체적 개별자에서 찾았다면, 아낙시만드로스는 만물의 근원을 규정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무규정자(apeiron)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수한 무규정자에서 만물의 근원을 찾는 것은 공허한 것으로, 구체적인 개별자에 관한 문제와 종합될 필요가 있었으며, 이를 이루어낸 것이 이후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본에 대해 각각 제시했다고 알려진 답은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지만, 둘 모두 이후 서양철학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파르메니데스는 만물의 근본이 "존재"이며, 곧 만물이 다양한 것으로 이루어지며 또한 변화한다는 것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와 상반되게 "같은 강에 두번 들어갈 수는 없다"는 말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만물유전(萬物流轉)")고 주장하였다. 두 입장 모두 언뜻 보기엔 매우 기이해보이지만, 많은 철학사가는 이 두 상반된 사유가 이후 서양철학 전체를 가로지르는 큰 두 흐름이 된다고 본다.
한편 본토 그리스의 유망한 폴리스였던 아테네#s-2에서는 민주정이 발달하여 영향력 있는 정치가가 되고 싶으면 말솜씨가 뛰어나야만 했다. 이런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변론술과 수사학 등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지혜로운 자들" 즉 소피스트들이 등장했다. 오직 '실리'에만 매달릴 뿐인 소피스트들의 행태는 당시 아테네에서 종종 경원시되었지만, 현대의 철학사가들은 소피스트들 덕분에 철학의 관심이 자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으로 넓혀졌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런 소피스트들의 행태에 반기를 들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른바 '4대 성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소크라테스였다. "지혜로운 자(소피스트)"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philo-sophia) 자"라고 자처했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고라와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며 지혜롭다고 알려진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고, 생전 단 하나의 저작도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철학'이 무엇인지, '철학자'는 어떠한 사람인지에 관한 표본이 되었다. 이를테면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같은 격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30인 참주정 시기 등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아테네의 부조리한 면모를 꼬집는 '아테네의 등에'로 활동했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사형 선고를 받고 독약을 마셨지만, 그의 유산은 그의 위대한 제자들에게 이어졌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상대가 자신의 모순을 깨닫게 하는 '''변증술'''을 처음으로 고안했으며, 또한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화두이면서도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들을 제시했다.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경우가 없으며, 책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언제나 미궁(aporia)의 상태에 빠지면서 끝난다. 이 미궁은 인간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그 해답은 주어질 수 없는 난제들로, 현대 철학에서까지 이른바 '실존의 부조리'로 언급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직계 제자 중 하나인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을 비롯한 이전 철학자들을 계승하여 앎, 우주, 그리고 인간 등에 관하여 방대한 철학적 사유를 남겼다. "서양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화이트헤드의 어록에서 나타나듯 이런 방대한 사유는 플라톤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이후 서양철학 전반의 기틀이 되었다. 귀족 집안 출신으로 젊은 시절엔 정치에 투신하기도 했던 플라톤은 교육기관 아카데메이아를 설립하면서부터 많은 '대화편'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풀어냈으며, 스승 소크라테스가 종종 등장하기도 하는 그런 플라톤의 대화편은 철학뿐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이른바 '이데아론'은 플라톤의 중기 철학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개념 중 하나이다.
이데아론은 참된 존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으로, 플라톤은 극단적인 실재론자로서 사물의 속성까지도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개의 이데아'나 '고양이의 이데아'뿐만 아니라, '필연성의 이데아'나 '무거움의 이데아' 또한 실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형이상학의 질문 중 하나인 '사물과 속성의 관계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해서, 플라톤은 '사물이 특정한 이데아에 관여하는 것이 사물의 속성'이라고 답한 셈이다.
또한 플라톤의 사상은 초기 기독교 교리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을 믿었으며, 또한 낭만적이고 초월적인 철학을 설파했다. 중세철학은 때 플라톤 사상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으며 교부철학의 이론적 토대는 플라톤주의가 주축을 담당했다.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하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후 아카데메이아에서 나와 플라톤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철학적 탐구를 개진해나갔다. 예컨대 실제 자연에 대한 탐구를 보다 중시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문학 등 그야말로 다양한 학문 분야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과 윤리학에서 현대까지 계승되는 주요한 관점들을 제시하였다. 논리학을 실질적으로 창시한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풍은 그가 아테네에 설립한 교육기관 뤼케이온에서 이어지게 된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와 및 고대 로마 시대 동안 아카데메이아와 뤼케이온 등에서 양성된 철학자들을 비롯하여 이전 철학자들의 영향을 계승한 다양한 철학자들 및 철학 사조들이 등장하고 번성하였다. 헬레니즘 시대 철학의 특징은 그 이전보다 더욱 개인적인 윤리의 형태로 발전했다는 것이며, 폴리스의 붕괴와 제국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이에 영향을 끼쳤다.
에피쿠로스로부터 비롯된 에피쿠로스학파는 '절제'를 기초로 한 독특한 쾌락주의를 이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제시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이끌어냈다. 반면 스토아 학파는 격한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연의 순응하는 삶의 방식을 권하였고, 이러한 스토아적 삶의 방식은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로마의 여러 유력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스토아 학파는 또한 논리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있다. 더불어 플로티노스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플라톤 철학의 신비주의적인 면모로부터 비롯된 관념론적 세계관을 개진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지형도 가운데 발전해나갔다.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학파 및 스토아 학파와 논쟁하였다는 사도행전의 일화, 그리고 로고스 개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려 한 요한 복음서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영지주의와 교회학자 간의 대립 과정 등에서 당대의 여러 철학 사조가 미친 영향은 중세 철학으로 이어지게 된다.
4.1. 더 읽어볼 만한 글
한국어로 저술/번역된 대표적인 서양 고대 철학 관련 저작은 다음과 같다:
- 원전:
- 2차 서적:
- W. K. C. 거스리, 『희랍 철학 입문 - 탈레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박종현 역 (서광사): 표준적이며 고전적인 서양 고대 철학 입문서. 철학책으로서는 분량이 그다지 두껍지 않으며, 거스리 또한 명성이 높은 학자일 뿐 아니라, 번역자가 한국어를 대단히 능숙하게 사용하였다. 다만 책 후반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책의 분량상 맛보기 이외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 강철웅 외. 『서양고대철학 1 - 철학의 탄생으로부터 플라톤까지』, 『서양고대철학 2 -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보에티우스까지』 (길): 소장 한국 철학자들이 함께 저술한 서양 고대 철학 교과서. 여러 철학자들의 논문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한 권의 책으로 낸다는 제대로 된 기획이 있었기 때문에 통일성을 갖춘 편이다. 서문에서는 입문자와 전문가 사이를 위해서 쓰여진 책이라고 목표를 밝히고 있다.
4.2. 관련 문서
5. 중세 철학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아가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국교로 선포되면서부터 그리스 철학의 유산은 기독교 안으로 실질적으로 포섭된다. 물론 상기한 바처럼 기독교는 극초창기부터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였지만[2] , 이런 제도적 변화로 인하여 철학의 주된 임무는 곧 기독교의 교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중세 철학의 특징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어록으로 알려진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다만 많은 철학사가들은 '철학이 시녀'라는 말이 곧 "중세는 그래서 암흑시대다!"라는 결론을 입증한다는 추론에 반대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항목 참조.
흔히 "'''교부'''"라 일컬어지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들이 이끌어간 초기 기독교 철학은 상기한 바처럼 기독교의 정체성 및 하느님에 대한 철학적 설명, 그리고 영지주의 같은 이단이나 이교와의 논쟁 등에 많은 힘을 기울인다. 서기 2세기 교부인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는 본래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 쓰던 '알레고리아' 개념을 성경 해석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이런 흐름은 계속 이어져 갔으며, 대표적으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립된 삼위일체론이 그리스 가면극에서 쓰던 용어인 페르소나(위격) 개념을 차용한 점을 들 수 있다. 그런 교부들 가운데서도 신플라톤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은[3]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은 비단 기독교만이 아니라 형이상학, 심리철학, 윤리학 등 이후 서양철학의 흐름에 큰 궤적을 남긴다. 하지만 반달족의 침략 가운데 선종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모습이 잘 대변하듯, 서로마 제국이 이민족에 의해 멸망함에 따라[4] 고대 그리스로부터 계승된 지적 유산은 큰 타격을 입게 된다[5] . 반면 동로마 제국의 경우 굉장히 안정적인 질서가 자리잡았기에, 제국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고 교회에서 이단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존재론 등이 발전하게 된다.
한편 흔히 "암흑시대"로 알려진 초기 중세에[6] 서유럽의 기독교 철학자들 및 성직자, 수도자들은 사회의 유일한 지식인으로서 얼마 남지 않은 옛 지적 유산을 보존하였다. 로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고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던 도중, 동로마 제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섬기던 고트족 궁정에서 처형당한 기독교인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유럽이 전화에 휩싸여 있을 동안 아일랜드의 수도자들이 많은 고대의 문헌들을 보존해냈다는 것이 그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다. 이런 혼란은 카롤루스 대제 때 문예 부흥이 일어나고 교회의 힘이 세지면서부터 비로소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고전 그리스 학문이 발달한 곳은 서유럽이 아니라 동로마 및 이슬람 문화권이었다.[7] 실질적인 로마 그 자체였던 동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이슬람 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알고리즘"으로 알려진 알 콰리즈미, 알 파라비 등을 비롯해 뭇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출현했다. 논리학, 형이상학 등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이븐 시나는 이후 유럽 철학에 큰 유산을 남겼다. 비록 이븐 시나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부딪히는 점 등으로 인하여 알 가잘리 등 여러 이슬람 철학/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이후에도 이어져 "(아리스텔레스의 유일무이한) 주석가"로 불리기도 하는 이븐 루쉬드 같은 철학자[8] 를 통해 알안달루스를 거쳐 결국엔 서유럽에도 도달하게 된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서유럽에서도 본격적으로 수도원 학교 및 "3학4과" 등으로 대표되는 초기 대학교가 서유럽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찌기 보에티우스가 생전에 라틴어로 번역하였던 저작들의 대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포르피리오스의 논리학 저작들이었기에, 당시 대학에서 주로 연구되던 철학 분야는 논리학이었다.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으로 알려진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그리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로맨스로 유명한 아벨라르두스 등이 이 시기의 논리학자이자 철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이후 형이상학의 주된 문제 중 하나가 된 '''보편 논쟁'''도 이 시기에 촉발되었다. 안셀무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에서의 유(genus)와 종(species)[9] 에 해당하는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본 '실재론#보편자 실재론'을 취했다고 짐작되는 반면, (콩피에뉴의 로스켈리누스를 사사한) 아벨라르두스는 그런 보편자란 이름 혹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없다고 주장한 '유명론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런 전문적인 학자들 간의 논쟁은 곧 본격적인 '''스콜라 철학'''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13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번역 되어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당대 서유럽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다시 한 번 충격에 빠진다. 논리학으로만 알려졌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가운데 많은 부분, 특히 자연철학이 기독교 교리와 상당히 이질적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나벤투라 등에 의하여 파리 대학]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이 여러 차례 금서 처분을 받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로저 베이컨, 대 알베르투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작업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10] 가운데 상당 부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비로소 보편교회의 교리와 조화롭게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다. 이후 아퀴나스 식의 실재론과는 차이가 있는 둔스 스코투스의 실재론 및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오컴의 윌리엄의 유명론 또한 뚜렷하게 제기되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이후에도 가톨릭의 가장 유력한 철학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렇듯 알베르투스 등 후기 스콜라 철학자들의 성과는 철학과 신학을 분리시키고, 곧 자연철학 즉 후대 자연과학의 원형이 되는 학문의 출현에 기여하였다.[11] 그리고 이런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스콜라 철학의 구도 가운데 철학은 신학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신학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5.1. 더 읽어볼 만한 글
한국어로 저술/번역된 대표적인 서양 고대 철학 관련 저작은 다음과 같다:
- 원전:
- 2차 서적:
- 클라우스 리젠후버, 『중세 사상사』, 이용주 역 (열린책들)
- 요셉 피퍼, 『중세 스콜라 철학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와 갈등― 』, 김진태 역 (가톨릭대학교출판부)
5.2. 관련 문서
6. 근현대 철학
6.1. 17-18세기 철학
서양의 중세는 적어도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른바 "인문주의"의 부흥에 르네상스의 도래, 종교 개혁에 따른 공고한 가톨릭 질서의 붕괴를 기점으로 근대에 접어든다고 보는 편이 일반적이다. 근대철학이 탄생한 환경적 배경에는 (1) 르네상스와 문예부흥운동 (2) 과학혁명의 시작 (3) 인쇄술의 발전과 계몽사상의 대두 (4) 대항해시대와 신대륙의 발견 (5) 종교개혁과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관용[13] (6)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감 확산 정도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근대 철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르네 데카르트는 이전까지 쌓인 모든 지식, 심지어는 '내가 지금 컴퓨터/전자기기를 보고 있다', ''1+1=2'다' 같은 당연해 보이는 명제까지 모조리 의심하고 철저히 무너뜨린 뒤,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인식론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전회'로, 존재론에 집중했던 기존의 철학에서 탈피하는 변화였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사실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고, 따라서 최초의 태도가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로부터 다양한 형이상학적/자연철학적 결론을 도출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철학은 여러 측면에서 당시 대학교의 주류 학설이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내용과 충돌하였고, 곧 유럽 여러 대학에서는 데카르트의 추종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한 이러한 학풍은 이후 '''합리주의'''라 불리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적 철학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 중 하나는 바뤼흐 스피노자였으며,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은 당시 유대교 및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이단적인 내용으로 흘러갔다는 점에서 당시 지성계 가운데 큰 스캔들이 되었다. 유명한 데카르트주의자 니콜라 말브랑슈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방식을 계승하며 스피노자 철학의 문제점을 답습하지 않을 방식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합리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되 기존의 합리주의자들과는 매우 다른 독특하면서도 방대한 철학적 체계를 수립하여 이후 철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반면 합리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스콜라 철학에서 중시하는 논리학이 연역논증에만 치중하는 것을 비판하며, 실제 실험하고 관찰하는 경험을 중시하길 제언했다. 이는 곧 '직접 감각 혹은 지각한 경험적 내용만이 참된 지식의 토대가 된다'는 '''경험주의''' 원칙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으며, 존 로크에 의해 본격적인 철학적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로크의 뒤를 이은 조지 버클리는 로크가 제시한 바 경험주의 원칙을 더욱 일관적으로 적용할 경우, 감각 등이 속한 정신을 뛰어넘는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는 관념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 원칙을 충실히 따를 경우, 실체, 자아, 그리고 인과 그리고 귀납논증 자체의 정당성까지 의시하는 게 마땅하다는 매우 영향력있는 회의론 철학을 개진하였다.
이러한 두 인식론 전통은 이마누엘 칸트에 의해 집대성된다.[14] 칸트는 "흄의 책을 읽고 미망에서 깨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경험주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미적분학이 당시 고전역학을 통해 거둔 성공을 보며 흄 철학이 갖는 회의주의적 귀결을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그 해법으로 『순수 이성 비판』에서 우리 바깥의 '사물 자체'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지성(혹은 오성) 개념 등을 통해 객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론을 제시하였으며, 나아가 이런 틀에 기초하여 윤리학 및 미학 등 방대한 영역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칸트는 더불어 계몽주의에 긍정적이었으며, 결국 말년에는 프랑스 대혁명을 목도하게 된다.
이렇듯 프랑스 대혁명을 이끌어 낸 동력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흔히 근대 초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중세 기독교적 정치 및 국가관에 도전하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지고는 한다. 이런 흐름 가운데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통해 정치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철학의 효시가 되었고, 특히 이때 제기된 사회계약론은 이후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를 거치며 발전함으로써 이후 근대 민주주의 성립 및 현실 정치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중세 철학 등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초기 근대 철학은 결과적으로 앙시앵 레짐을 지탱하는 종교적/사상적 기틀을 논박하는데 성공했으며[15] , 많은 철학사가 혹은 역사학자들은 이런 흐름이 결국 종교나 미신 대신 인간과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인본주의 및 자유사상의 발흥을 돕고, 전제군주제 등 구시대의 유산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6.2. 19세기 철학
칸트의 철학은 역사적 격변기를 겪던 당시 유럽, 특히 독일의 학계에 큰 파장을 미쳤다.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자신이 칸트 철학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였다고 생각했으며, 피히테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셸링은 재차 피히테 철학의 난점을 극복한 철학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는 피히테, 셸링 등을 계승하여 방대한 철학적 체계를 이룩하였다[16] . 19세기 전반의 이런 철학적 흐름은 흔히 '''"독일 관념론"'''이라고 불리며, 19세기 후반 서양철학의 여러 조류는 이런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셸링 이후 독일 관념론은 낭만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되었으며, 이런 흐름은 헤겔의 체계적인 철학에 강력히 반발하였던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두드러졌다. 쇠렌 키르케고르 또한 헤겔의 체계성에 반발하여 실존주의 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처음엔 쇼펜하우어와 낭만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후 독창적이면서도 전위적인 철학적 작업을 남김으로써 이후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19세기는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자연과학이 본격적으로 철학으로부터 독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오귀스트 콩트 등 사회과학의 선구자 또한 그런 실증주의적 태도와 깊이 연관된다. 그리고 이와 다른 맥락에서 독일 관념론 및 실증주의 등 당대의 여러 철학적 조류가 칸트 철학의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신칸트주의 또한 발흥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세기는 산업혁명을 거치며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두드러진 시기도 하다.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또한 그런 사회적인 문제에 대응하는 윤리학적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조명은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여러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음으로써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등 '헤겔 좌파'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카를 마르크스는 철학자가 '세계에 대한 해석에서 머무르지 말고 세계를 변화시켜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철학계만이 아니라 전 지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6.3. 20세기 철학 및 그 이후
20세기 이후 철학의 향방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요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자연과학 및 기술 문명의 급속한 발전: 물론 이런 흐름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의해 신칸트주의가 큰 타격을 입는 등, 전통적 철학의 영역에 과학이 점점 더 개입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산업 혁명의 심화에 따라 유럽 사회의 삶의 방식 또한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 2차례의 세계대전 및 냉전: 다른 분야에서 그렇듯 철학자들은 이런 계기를 통해 본격적으로 인류 자체의 존망과 인류 문명 자체의 의의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에드문트 후설이 창시한 현상학은 "사태 자체로 돌아가라!"라는 기치를 중심으로 초월적인 형이상학과 동시에 과학만능주의를 모두 배척하는 대신,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만을 중심으로 철학을 개진할 것을 제안한다. 후설 이후에도 이러한 현상학적 방법은 모리스 메를로퐁티 등 여러 유력한 철학자들에게 계승되며 현재까지도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 더욱이 현상학은 아래 서술될 이후 여러 현대 철학 사조들의 성립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설을 사사한 마르틴 하이데거의 철학은 명백히 현상학에서 출발하였지만,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회의를 표하는 후기 철학으로 갈 수록 후설의 현상학과는 차이가 벌어진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해석학은 현상학 및 하이데거의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예시다. 더불어 하이데거 자신이 의도했건 아니건 하이데거의 철학은 쇠렌 키에르케고르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실존주의'에 큰 영향을 미쳐 장 폴 사르트르 및 알베르 카뮈 등 20세기 사회 및 문화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20세기 전반부터 앙리 베르그송 등 독창적인 철학자가 활동했던 프랑스의 경우, 사르트르 등 현상학의 영향, 정신분석학의 영향, 페르디낭 드 소쉬르 및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등 구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특한 지형도가 형성된다. 20세기 중반 가스통 바슐라르나 자크 라캉 등의 철학은 이후 미셸 푸코나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현대 철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고, 이런 현대 프랑스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17] 으로 불리며 문학 및 영화 등 많은 문화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불어 테오도르 아도르노를 시작으로 하여 위르겐 하버마스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빈 자리에서 여전히 사회철학의 영역 가운데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위와 같은 철학 사조들이 주로 유럽 대륙에서 이루어지며 많은 상호 교류가 있었던 반면, 20세기 중반 이후 영국, 미국 및 호주 등 영어권 국가들의 주된 철학은 위와 같은 소위 '대륙철학' 전통과는 상당부분 단절되어 발전하였다. 영미권에서 발전한 이러한 흐름은 흔히 "분석철학"으로 불리며, 위와 같은 흐름과는 전혀 달리 고틀로프 프레게 및 버트런드 러셀 등이 개척한 현대 논리학, 그리고 논리 실증주의로 대표되는 과학주의를 그 역사적 뿌리로 삼는다. 세간에 유명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버트런드 러셀, 논리 실증주의 양자 모두와 관계하면서 분석철학사에 큰 영향을 남겼다. 또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저작들은 일상언어학파와 유사성을 보여주며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이후 분석철학은 언어철학의 범주를 벗어나 심리철학을 거쳐 분석철학적 맥락에서 형이상학의 문제들도 다루게 됐다. 이러한 확장과 적용으로 최근 분석철학은 미학, 윤리학, 정치철학의 문제들도 다루고 있으며, 소위 대륙철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에서도 분석철학적 관점, 문제의식을 다루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다. 분석철학의 보다 자세한 역사에 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6.4. 관련 문서
7. 철학 하위 분야의 역사
해당 항목 참조
[1] 다만 호메로스가 실재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유대교의 경우도 필론이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3] 다만 신플라톤주의는 영지주의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기에 여러 교부들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차용 과정에서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4] 과거에는 이러한 현상이 그리스도교 때문이라고 비판 받았으나 현대 사학계는 동의하지 않는다. [5] 그러나 이러한 막장 시대에서도 빛나는 유산들이 나왔는데, 오히려 시대가 막장이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사상들도 있었다. 일례로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경우, 오늘날로 치자면 미국이 멸망하고 뉴욕과 샌프란시스코가 외계인에게 점령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시대를 살았기에, '영원할 것 같은 도시인 로마도 멸망했는데, 과연 인간의 문명은 영원할 수 있는가?', '어째서 인간의 문명은 멸망할 수 밖에 없는가?', '인간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그것은 죄 때문인가?', '그 죄는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같은 사유들이 나오게 되었다. 마치 중국이 춘추전국시대라는 개막장을 보면서 멘붕을 겪으며 제자백가가 출현한 것 처럼, 서유럽은 문명의 붕괴라는 개막장을 맛보았기에 이러한 사유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중세에 대한 연구의 발전으로, 이제는 '중세는 늘 로마 시대보다 퇴보한 상태였다가 르네상스 이후로 다시 정신을 차렸다'는 식의 폄하는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서로마의 붕괴 당시에 엄청난 사회적 혼란에 한정한다면, 적어도 그 시기만큼은 암흑시대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7] 물론 서유럽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리스 문화를 유실한 것은 아니고, 언어의 문제 때문이다. 서방의 라틴어 문화권에서 고전 그리스 학문을 공부하려면 번역을 거쳐야 했기 때문. 오히려 이슬람 문화권의 경우, 해당 지역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았기에 이런 방면에서 제약이 적었다. 반면 서유럽은 라틴어 문헌의 보존에서 강점을 보였는데, 일례로 키케로의 국가론(De republica)은 현대에는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한 부분들 덕에 그 원본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8] 영어 식으로 "The Commentator".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일무이한) 철학자", 즉 "The Philosopher"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9] 현대 논리학 및 형이상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술어'로 갈음된다.[10] 보편 논쟁의 맥락에서 토마스주의는 "중도적 실재론"으로 분류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초월적인 보편자는 없지만, 그 대신 각 사물의 본질 속에서 객관적으로 보편적인 바(universale in re)를 찾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11] 자연과학에 대한 이 공로 덕에, 알베르투스 마뉴스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과학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는다.[12] 전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13] 물론 이 시기가 정말로 자유로운 시기였던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당한 것과, 그보다 훨씬 이후의 피히테나 헤겔조차도 무신론 논쟁에 휘말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최소한 중세보다는 사상적 다양성이 인정되었다는 것이다.[14] 사실 "합리주의", "경험주의"라는 축으로 데카르트부터의 철학적 흐름을 정리하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 바로 칸트 본인이다.[15] 다만 이런 결과가 근대 철학자들의 의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데카르트와 (이신론자라는 평가를 들을지언정) 라이프니츠는 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유신론자들이었으며, 버클리는 아예 성공회 주교였다. 또한 홉스 역시 사회계약론을 가지고 절대왕정을 옹호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16] 다만 칸트-피히테-셸링-헤겔로 이어지는 족보는 헤겔이 제시한 것이다. 칸트는 피히테를, 피히테는 셸링을, 셸링은 헤겔을 자신의 '계승자'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17]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