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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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홈페이지
2014년 12월 17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로 부산광역시에 있는 국제시장을 배경으로 하여 황정민, 김윤진, 오달수가 주연을 맡은 휴먼 드라마 영화이다. 《해운대》를 연출하고 퀵을 제작한 윤제균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으며. 1950년대 6.25 전쟁부터 현대까지 살아온 산업화 세대인 덕수(황정민 분)를 주인공으로 그 시대를 이겨낸 산업화 세대들을 조명한 영화이다.'''그 때 그 시절, 굳세게 살았던 우리들의 이야기'''
2. 예고편
3. 줄거리
엄마, 아빠, 세 명의 동생들과 함경남도 흥남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소년 윤덕수. 하지만 그 행복은 1950년,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전쟁을 하게 되면서 끝나버린다. 덕수네 가족을 비롯한 흥남 주민들은 서둘러 짐을 챙겨 피난길에 올랐지만 이미 모든 퇴로는 다 막혀있고 믿을 수 있는 퇴로는 미군들이 철수시키려는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가 유일했다. 배에 타고 있던 미10군단 통역관 현봉학 씨가 제발 난민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한 것을 미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이 승인 하여 무기를 모두 버리고 난민들을 태우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가장 평범한 아버지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
하지만 배가 아무리 크다고 한들 10만이나 달하는 난민들을 모두 태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제때 배에 오르지 못한 난민들은 밧줄에 매달려서라도 올라오고 있었다. 덕수 역시 여동생 막순이를 들쳐 업고 밧줄을 잡아서 올라오고 있던 도중, 누군가 팔을 뻗어 막순이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겨 버렸고 배에 오른 뒤 뒤가 허전한 걸 깨달은 덕수는 곧바로 동생을 찾아 밑을 내려다 봤지만 동생은 흔적을 감춘 뒤였다. 딸아이가 없어진 걸 알게 된 덕수의 아버지 윤진규는 이제부턴 네가 가장이니 가족들 잘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 없어진 딸아일 찾기 위해 다시 밑으로 내려간다. 그 순간, 멈춰있던 배는 출발해버렸고 그렇게 덕수는 여동생과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게 된다.
이후 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덕수가 온 곳은 부산에 사는 고모가 꾸리는 '꽃분이네'라는 잡화점. 주정뱅이와 사는 고모 역시 남돌볼 처지가 못됐지만 급작스럽게 굴러온 덕수네를 내쫓기는커녕 네 식구(엄마, 덕수, 막냇동생 끝순, 남동생 승규)가 더부살이할 방 한 칸까지 내준다. 그리고 덕수 또한 임시 천막 학교에서 만난 부산 소년 달구와 죽이 잘 맞는 친구가 되며 낯설기만 하던 부산이라는 곳이 익숙해져 간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청년이 된 덕수는 아버지의 말대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기쁜 소식이 날아든다. 공부에 매진하던 승규가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덕수네 형편으로 그 비싼 대학 등록금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친구를 위해 달구는 아주 좋은 일거리를 추천해줬다. 바로 파독 광부모집. 머나먼 독일까지 날아가 석탄을 캐는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지만 고수입이란 말에 결국 면접과 체력 검사를 통과하고 독일로 날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부들과 나란히 파독 간호사일을 하고 있던 영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고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결혼식을 치른다. 이후 해양대에 합격하며 오래전부터 꿈이었던 선장의 길을 걷나 싶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막냇동생 끝순이 혼수자금 문제로 엄마와 말다툼하는 걸 우연히 들은 것이다. 결국 덕수는 눈물을 머금고 선장의 꿈을 접곤 이번엔 베트남에서 기술자 일을 하겠다고 했다. 당시, 베트남은 전쟁이 한창이었기에 철없는 여동생만 혼수자금이 생긴다며 좋아라 할 뿐 엄마는 물론이고 영자조차도 과부만들 샘이라며 강한 반대를 드러내는데....
과연, 평범한 아버지는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4. 등장인물
영화의 주인공. 1939년생이다.[1] 즉 영화가 나온 시점의 나이는 70대 중반.
어릴 때는 외항선 선장이 되는 게 꿈이었다. 흥남 철수 당시의 혼란 속에서 등에 업고 있던 여동생 막순을 잃어버리고, 아버지는 막순을 찾기 위해 덕수를 놔둔 채 배에서 내린다. 그러나 배가 출발하고 이때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고 이러한 책임을 맡았기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오직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게 된다. 그후 고모가 사는 부산으로 오게 되고 고모의 가게인 '꽃분이네'[2] 에 얹혀 살면서 어린 나이에도 달구와 함께 구두닦이를 하며 돈을 번다.[4] 여기서 달구가 미군에게 쇼를 하고 초콜렛을 얻어먹으려 하자 3명의 힘센 동네 아이들에게 걸려서 쫓기다 결국 붙잡혀서 밟히고 얻어터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소련, 미국, 중국과 같은 한반도 주변의 초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전쟁에 한반도가 고통받는 모습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대학에 진학할 나이가 된 덕수. 처음엔 직접 돈을 벌어 공부해서 진학하고 국내에 취직할 생각을 했던 듯하다. 검정고시 학원에 멋대로 침입해서(...) 도둑 공부를 하다가 들켜 책가방도 내동댕이쳐지고 본인도 머리끄덩이를 잡혀 내쫓기는 장면이 나온다. 머리 좋은 남동생이 먼저 서울대학교에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자신이 일해서 남동생부터 공부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지만, 대학 입학금이며 등록금 등 형편이 형편이라서 고뇌 중 달구의 파독 광부 지원 제안을 받아들여 광부 선발에 참여한다.
이후 면접에서 투철한 애국심을 보여[5] 결국 서독으로 가게 된다. 서독에서 이후 일생의 동반자가 되는 오영자를 만나 연애도 하지만, 사고를 당해 갱도에 매몰당하기도 하는 등 죽다 살아날 위기를 겪는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입원하던 도중 병상에서 비자가 만료되어 귀국한다. 귀국 직전에 작별인사 격으로 영자의 기숙사에 침입해서 영자에게 마지막으로 같이 귀국하자고 설득한다. 영자의 기숙사에서 만나는 모든 장면이 덕수의 침입이다. 마지막(?) 인사 때도 덕수는 인사를 마치고 창문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영자는 귀국 대신 속도위반(...)을 시전하고, 이걸로 혼전 임신이 되어 간호사 일에서 해고 당해 영자 역시 귀국을 하게 된다(...)
영자는 덕수를 찾아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이때 영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줄 알고 아이의 성이 어떻게 되냐고 묻다가 싸대기를 맞는 건 덤.[6] 이후 부산에서 둘이 결혼하게 된다. 늙은 고모는 수입상 '꽃분이네'를 덕수에게 물려주겠다고 하는 등 평온한 노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고모가 죽자 알코올 의존증자인 고모부가 꽃분이네를 멋대로 팔아치우려 한다.
덕수의 아버지는 헤어지기 전 고모의 가게인 '꽃분이네'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걸 기억하기 때문에 덕수는 꽃분이네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고, 결국 일생의 꿈이었던 선장이 되기 위한 해양대학교 진학도 포기하고 무리해서 가게를 자신이 인수한 다음, 그 돈을 메우기 위해서 베트남 진출을 모색한다. 가족들의 반대를 뒤로 하고 베트남으로 간 덕수는 대한상사에서 일하게 되는데, 당시의 실존사례를 고려하면 이는 한진상사, 오늘날의 한진그룹을 모티브로 삼은 걸로 보인다. 인천의 듣보잡 운송사였던 한진은 월남 특수를 계기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민간 기술자라서 전쟁에 휘말릴 일은 없을 거라며 가족들을 설득했으나, 베트남 전쟁은 전선이 따로 없는 게릴라전이라서 2번이나 전쟁의 참화에 노출된다. 덕수는 달구와 함께 그때 서독 광부시절 만큼의 엄청난 온갖 개고생들을 또 한 번 겪게 되고 어느 날 건설 동료들과 함께 미군도 철수해버린 한 정글 지역에서 베트콩들한테 죽을 뻔한 걸 남진이 분대장으로 있던 해병대원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 남는다. 그후 현지 마을에서 마을 주민들이 베트콩들에게 몰살 당할 위기에 처해있자 덕수는 지역 주민들을 구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과거 흥남 철수에서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결단했듯이 물자를 전부 버리고 주민들을 구하기로 한다.
배로 철수하는 도중 베트콩들의 기습을 받아 아이가 물에 빠지게 되고, 물에 빠진 여동생을 애타게 부르짖은 남자아이를 보고 자신이 막순이를 잃어버린 과거를 회상하는 듯하더니 여자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로 뛰어든다. 아이를 구해 배에 오르던 중 허벅지에 총을 맞게 되고 다시 물로 떨어지는데 이때 남진에게 다시 한번 구조되며 살게 된다.[7]
이로 인하여 덕수는 평생 다리를 절면서 살게 된다. 이후로 조용히 꽃분이네를 운영하면서 살다가,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시작되자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서울로 올라가 여동생과 아버지를 찾는다. 방송에도 출연하지만 결국엔 아버지를 찾는 데는 실패한다. 중간에 같은 지역에서 헤어졌다는 노인을 만나긴 했는데, 역시 아버지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덕수와 같은 윤씨가 아닌 유 씨였다.
그러나 긴 시간의 노력 끝에 마침내 미국으로 입양되어 자라난 여동생과 연락이 닿아 겨우 다시 만나게 된다. 너무 어릴 때 입양되어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헤어지기 얼마 전에 여동생에게 말하던 '여긴 운동장이 아니다' 라는 말을 떠올린 덕에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현재 파트에서는 엄청 고집쟁이에 툭하면 화를 내는 골치 아픈 영감 님이지만 외국인 노동자 혹은 이민자를 인종차별하는 학생들에게 화를 내며 외국인을 편들어주기도 하는 등 근본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스리랑카인[8] 이 고급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자, 교복을 입은 불량학생 무리가 "너는 너네 나라가 가난해서 잘 사는 외국에 돈 벌러 왔으면서 이런 데서 커피를 먹냐" 라며 시비를 건다.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걸 그 스리랑카인이 패기 있게 '''부산 사투리로''' 받아친다. 그걸 듣고 불량학생들은 "너도 꼴에 부산 사람이란 거냐 풉 ㅋㅋ" 하고 조롱하는데, 스리랑카인은 "'''내도 부산사니까 부산 사람이다!'''"라며 받아친다.
이 때 자신도 외국인 노동자였던 시기가 있었기에 불량학생들이 열이 받아서 일어서는 걸 늙은 덕수가 막아서며 불량학생들을 마구 훈계한다.[9] 그런데 덕수의 회상을 보면 (그리고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역사를 배웠다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돈 벌려고 외국에 사람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보내진 사람들도 외국인 노동자로 현지인 일자리 뺏는다는 소리 듣기는 매한가지. 즉 '''그 양아치들은 덕수 본인을 조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인종차별 당하는 동남아시아 노동자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해서 나서주는 덕수를 보고, 달구는 덕수의 손녀 서연이에게 "니네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어서 저런가 보다 ㅋㅋㅋ 곧 있으면 벽에 그림 그릴 거다. 똥으로."라고 뒷담을 까지만...
이는 윤덕수 본인이 바로 "부자 나라에 가서 돈 벌어오는 가난한 나라 출신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이며, 바로 그가 겪었던 과거로 연결되는 장치이다. 극우의 끝이 파시즘/나치즘에 연결되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재미있는 묘사이다. 일반적으로 노인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보수/극우로 표현되는 것에 비해 영화에선 다른 문화와 다른 인종의 사회 구성원들을 배척하는 건 진보가 많은 젊은 세대이고, 오히려 보수가 많은 기성세대가 그들을 보호하는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영화 내에서 덕수가 서독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고생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것을 겪어보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니.[10][11]
다만 성질이 좀 꼬인 데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거의 이해 받지 못하고 가정에서도 소외 당하는 편. 엔딩에서는 마침내 '꽃분이네'를 팔기로 함으로써 과거의 짐과 이별하고 홀가분해지는 듯하다. 방 안에서 꽃분이네 가게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거실에 있는 가족들이 뒷담하는 말들을 듣다가, 방 안에 걸어둔 아버지 사진[12] 이 "지금까지 잘 살아 온 거야, 나 대신 가족들을 돌봐줘서 고맙다" 비슷한 말로 '''어린 시절의 자신'''을 격려하는 환영을 본다.
그 다음 창밖을 내다보며 사색에 잠기더니 꽃분이네를 팔고 국제시장에서 퇴거하기로 결정한다. 가게의 ㄱ자만 나와도 욱하는 것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맞다. "꽃분이네" 가게 이름으로 가족들에게마저 뒷담을 들으면서도 이름을 굳이 바꾸지 않는 이유나, 동료 상인들에게도 손가락질을 들으면서까지 알박기를 시전하는 이유가, 흥남 철수 당시 아버지가 '''살아서 꽃분이네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이산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는 가족(후손)들과는 당연히 충돌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고... 영화의 종영까지 덕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제사는 지내지만, 덕수의 나이로 보아 아버지는 돌아가셨을 텐데도 아버지의 제사는 지내지 않고, 가게를 팔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거라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도 나이가 드셔서 못 오실 거라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캐릭터 이름은 #윤제균 감독의 아버지 성함에서 따 왔다고 한다. 영화 전반적인 메시지도 그렇고, 이를테면 아버지 세대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인 셈이라고. 아래 나오는 천달구와 함께,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서도 윤덕수라는 인물은 나온다. 실제 생방송 이틀째 날 아침에 출연하는 KBS 정치부 기자 이름이 '''윤덕수'''(...)인데 이 기자는 남북분단과 남북대화 연혁을 리포트하기 위해 나왔다. 그러나 워낙에 현장이 난리법석이라 여러 번 리포트가 중단되다가 흐지부지되다시피했지만 끝까지 준비한 내용은 말 다 하고 들어갔다.(...)
거실에서 재롱잔치에 가족들이 신이 나있을 때 혼자 방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떠올리며 흐느끼는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여담으로 영자는 독일어에도 능통한, 당시 기준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덕수가 석탄 캐고 있을 때 영자는 간호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독일어로 책을 읽고 독일어로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덕수 일행이 갱도에 매몰되었을 때 무너진 갱도를 통제하고 있는 독일인 관리자에게 독일어로 따지는데, "가스가 다 빠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 지금 들어가 봤자 그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느냐" 라고 할 때 그 말에 흥분해서 딱 1번 한국어로 쏘아붙인 것 이외에는 독일어로 전혀 막히지 않고 말싸움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꽃분이네'를 지키며 어느새 평범한 부산 아지매가 되어버린 게 아쉬운 부분.
결혼 전엔 내성적이었던 듯, 전통혼례 잔치 때 달구가 덕수를 묶어놓고 발을 때리며 영자에게 "노래 한 곡 안 하면 덕수는 계속 맞는다"고 위협(?)을 하자 자긴 노래 잘 못 한다고 엄청 빼다가 결국 한 곡 부른다는 게 '''Die Lorelei'''. (...)[14] 그래도 파독 시절 기숙사에 한국 요리를 싸 들고 온 덕수에게 "눈은 제 가슴을 훔쳐보고 계셨지만 귀는 제 말을 다 듣고 계셨군요" 라고 정곡을 찔렀던 것이나, 광산 관리인에게 독일어로 대들었던 것, 그리고 덕수 귀국 전날 밤의 거사(...)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할 말은 다 하고 사는 성격이었던 듯하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자상한 엄마/할머니로 많은 사랑을 받는 듯. 그리고 아무래도 남편이라 그런지 가족들 중 거의 유일하게 덕수를 챙겨주는 사람이기도 하다.[15]
1939년 10월 20일 생.[16] 덕수가 부산에 왔을 때 임시 천막 국민학교에서 처음 만난 친구. 처음에는 북에서 왔다며 덕수를 빨갱이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이후 곧 의기투합해서 같이 구두닦이를 한다. 편모가정 맏아들이라 시종일관 진지한 성격인 덕수에 비해서, 영화관 집 아들인 달구는 아는 것도 많고 노는 걸 좋아하는 성격. 서독에 광부로 간 것도 딱히 돈이 궁해서라기보다는 순전히 백마 한번 타보자는(...) 음란한 욕망 때문이었다. 현지에서 디스코 파티 중 오영자의 기숙사 사감인 독일 중년 여성에게 껄떡댔다가 단호한 거절을 받고, 덕수가 영자의 기숙사에 침입을 시도할 때 사감을 만나러 같이 따라가서 사감을 만난다.
약속을 잡고 간 것이 맞다. 파티 때 달구가 사감에게 귓속말을 받는 장면이 있었고 덕수가 영자의 방에 들어갔을 때 영자가 "달구 씨는 어디 갔냐"고 물을 때 덕수가 "달구는 어디 따로 약속이 있어서 갔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서는 사감이 귓속말로 밤에 만나자고 약속을 잡은 것이 맞는 듯. 그리고 사감이 그녀의 방에서 “입 닥쳐”라고 말하며 달구를 덮친다 .[17]어쨌든 덕수의 좋은 친구인 덕분인지 베트남에도 함께 가고, 그 와중에 베트콩과 미군 양쪽으로부터 위협받던 현지 주민들을 구출해주면서 그곳 여성과 플래그를 세워 결혼에도 골인한다. 국제 결혼 1호 커플로 신문에도 난다(…). 이후 덕수의 이산가족찾기도 같이 따라다녀 주는 등 이제는 거의 형제 같은 사이. 영화관 자리에 멀티플렉스를 세워 달구 본인은 여유롭게 은퇴한 삶을 즐기는 듯. 가족이 별로 없는지 덕수네 가족 모임에도 자연스럽게 같이 끼어 있다. 덕수의 어머니 제사 때도 같이 제사 지낸다.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항목을 보면 천달구라는 캐릭터에 왜 오달수를 캐스팅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다.(...)
1910년생. 덕수의 아버지. 흥남 비료공장 노무부 주임으로 재직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려던 중, 장남 덕수가 장녀 막순이를 잃어버리자 덕수에게 가족을 맡기고 자신은 막순을 찾기 위해 배에서 내려버린다. 그 후로 다른 가족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정작 막순이도 미군에 의해 발견되어 미국으로 입양된 것을 보면 찾으려고 했던 막순이도 찾지 못한 듯. 흥남 철수 항목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때 뒤에 남겨진 피난민들은 대부분 반동분자로 몰려 고생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실종되었다고 하니, 그 역시 무사히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18] 덕수에게 맏이로서 가장의 책임을 강조하며 주지시킨 바람에 덕수는 이후로 모든 것을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긴 하지만, 덕수에게 더 나은 삶의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바람에...[19] 이산가족 상봉 때 등장하는 줄 알았지만 덕수를 자기 아들 "유덕수"로 잘못 알고 나온 다른 이산가족 할아버지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방안에 들어와 앉아 "아부지, 내 열심히 살았지예?"하고 한탄하는 덕수의 앞에 나타나 "내가 못한 것 네가 대신 해줘서 고맙다"며 어린 덕수를 꼭 안아준다.- 윤승규 (이현)
덕수의 남동생. 그렇게 출연씬이 많지는 않은 공기캐릭터긴데, 먼저 엄마에게 "막순이가 그립지 않냐"면서, "어떻게 막순이 얘기는 한번도 안 할 수가 있냐"면서 나무라는 어린 덕수에게 엄마가 "나도 막순이 생각에 마음이 아프지만 막순이만 그리워하느라 너랑 다른 동생들을 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간접적으로 첫 등장. 2번째 등장은 학비가 없어 고시 학원에 무단 침입해서 공부하던 덕수를 제쳐두고 뜬금없이 서울대를 덜컥 붙는 장면이다. 이 남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덕수가 진학의 꿈을 접고 서독에 다녀오게 된다. 이 때문에 가족 내에서 갈등이 있었다. 승규가 "내가 독일에 가면 되지 않냐"는 이야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국 술에 취한 덕수가 그런 소리 말라며 소리지르고 파독 광부가 된다. 3번째는 덕수가 파독 광부로 파견을 나갔다 귀국했을때 가족 전체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참고로 마지막에 고모 라미란이 업히다 넘어진다(...) 4번째는 덕수가 베트남 전쟁에서 귀국후 꽃분이네의 간판을 새롭게 교체했을때 주변 상회 사람들과 가족들과 같이 박수를 치며 축하하는 장면. 참고로 이때 결혼을 했는지 딸을 손에 안고있다. 5번째는 막내 끝순의 결혼식에서 어머니 뒷좌석에서 우는장면, 6번째는 가족들과 함께 이산가족 찾기를 볼때 어머니 옆에 앉아있는 장면이다.[20] 6번째 등장은 돌아온 막순이 어머니께 인사드릴때 뒤에서 가족들과 서있는 장면. 그리고 이만기의 씨름을 보며 이만기를 응원할때.[21] 이만기가 이기자 덕수를 붙잡고 환호한다. 마지막은 덕수가 늙어 가족 모임할 때 잠깐 지나가는 역할로 형인 덕수에게 빨리 가게를 처분하라고 말하며 나오고 후에 함께 제사를 지낼때, 그리고 손자들이 재롱잔치를 할때다. 이게 다다. 막내 끝순이도 결혼식이 나오는데 승규는 결혼식도 생략당하고 아이가 늘어난다(...) 스토리 자체가 역동의 시기에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데, 힘들게 일한 가족을 발판삼아 보장된 엘리트 코스를 밟는 동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건 주제 일탈이라 생략된 것일 듯하다. 그 때문인지 가족 전체가 나와야 하는 장면에서만 잠깐잠깐 나오고 인물 전체의 단독 이미지가 나오는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가 않는다.
후반부 이산가족찾기 장면에서도 제대로 못 나오는 등 비중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다. 그냥 가족들에 껴서 나오는게 다다. 그리고 실제로도 친척들은 다같이 고생하는데, 자기 혼자 성공해서는 밑에서 고생하는 친척들에게 입 씻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도 한다. "밑에서"란 표현은 저렇게 입 씻고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의 마인드에서 서술한 표현이지, 고생하며 살아온 분들을 비하하는 표현이 아니다. 물론 작중 승규가 그런 유형의 인간임을 나타내는 장면은 없다. 애초에 가족 모두가 이산가족 찾기에 힘을 보탰다는 설정은 없다. 당장 같이 스튜디오에 따라간것도 잃어버린 가족 자체가 없는(...)[22] 달구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보면, 영리한 형제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뼈빠지게 고생하며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주는 형제의 이야기가 거의 반드시 나온다. 워낙 없이 살던 시대에 형제는 많다보니, 영리하고 대성할 것 같은 자식 한명을 위해 모든 가족들이 발벗고 나서던게 흔하던 시대였고, 당시 대학을 우골탑[23] 으로 부를만큼 등록금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1963년에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으니 64학번, 재수를 안 했다면 1945년생이니 윤막순과 쌍둥이여야 하는데 언급이 안 되는 걸로 보아 작중 오류인 듯... 이 아니라 당시엔 전쟁 통에 학년을 꿇거나 하는 일이 많아서 나이에 맞춰 진급하는 건 매우 힘들었다.
- 윤막순 (스텔라 김/아역: 신린아)
덕수의 여동생. 흥남 철수 시 배를 타던 큰 오빠 덕수에게 업혀 있다가, 뒤에서 누군가 잡아당겨 떨어지게 된다. 이를 알게된 아버지는 딸아이를 찾기위해 다시 내려갔으나 배가 출발해버리면서 부녀는 행방이 묘연해진다. 떨어진 이후의 행방은 훗날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에서 출연하면서 밝혀진다. 떨어진 막순은 미군들에게 구조됐고 이후 부산에 있는 고아원에서 지내다 미국에 입양됐다. 그리고 줄곧 로스앤젤레스에서 살면서 미국인과 결혼해 아이를 낳은것이다.[24] 너무 오랫동안 미국생활을 해온탓에 한국말, 한국이름, 고향 등등을 모두 잊어먹었고 당연히 통역사 없이는 제대로 된 소통도 힘들었다. 하지만 귀 뒤의 사마귀, 흥남 철수 때 덕수가 해 줬던 "막순아, 여가 운동장 아이다!! 우리가 놀러나온 게 아이다!! 정신 차려라!! 오빠 손 꽉 잡아라!! 꽉 잡아라!!"라는 뜻은 까먹었을지언정 기억은 하고 있던 말, 그리고 결정타로 막순이가 가지고 있던 찢어진 저고리를 보여줌으로써 여동생임이 판정났다.[25] . 이때 왜 자신을 버리고 갔냐며 울부짖는 막순이를 통해, 그녀가 겪었던 과거와 심정을 여러모로 느끼게 한다. 가족들과 재회하던 당시 이미 미국인과 결혼한 것으로 보이고, 매년 어머님 기일에 남편과 아이들 을 데려와 덕수 가족과 제사도 지낸다. 재회 이후 가족 모임에 꼬박꼬박 나오는 걸 보면,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 하다.
4남매 중 막내. 막순이보다 더 나이 어린 여동생이다. 이산가족 상봉에서 극적으로 막순이를 찾자 TV 화면에 대고 "언니" 라며 울부짖는 장면이 나온다. 나름 착실하게 사는 큰 오빠 덕수, 작은 오빠 승규와는 달리 날라리로 뺀질뺀질한 남자만 만나며 극장에서 덕수에게 귀를 잡혀 오기도 하는 사고뭉치. 자기 결혼 자금을 위해 덕수에게 베트남을 다녀오라고 압박을 주며 덕수의 아내인 큰 올케가 베트남에서 죽으면 어쩌냐고 하자 "그럼 여긴 과부촌이네~~[26] " 같은 패드립까지 치는(...) 철없는 여동생이다. 인간성이 영 아닌 것 치곤(...) 남편과는 잘 살면서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 [27] [28][29]
6.25 전쟁 이전부터 부산에서 꽃분이네라는 작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던 덕수의 고모. 6.25 때 미국인들을 상대했던 경험 때문인지(수준급까지는 아니지만) 영어도 어느 정도 통하는것으로 묘사된다. 김봉남의 영어 패션 용어가 난무하는 만연체를 똑바로 알아듣고 물건을 내온다.[31] 작중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 영어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이북에서 피난 온 덕수 가족을 거두어 들이고 계속 같이 산다. 남편(즉, 덕수의 고모부)이 일은 안 하고 맨날 술만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였기에 신뢰하지 않았고, 자신이 죽으면 덕수에게 가게를 물려 줄 생각이었다. 이후 덕수가 독일에서 돌아온 뒤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덕수는 멋대로 가게를 처분하려는 고모부한테서 가게를 사게 된다. 만약 그녀가 고모부보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덕수가 베트남에서 다칠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막순과의 재회 때 의사소통도 어느 정도 쉬웠을지도 모른다. 윤꽃분을 연기한 라미란은 황정민보다 4살 연하다.
덕수의 어머니. 흥남 철수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이후 바느질을 하며[33] 시누이와 함께 손잡고 아이들을 키워왔다. 덕수가 베트남에 가겠다고 할 때 극구 반대했고, 이후 큰딸 막순을 만났지만 1년 후 남편은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 윤서연 (이예은)
덕수의 손녀. 영화의 도입부가 늙은 덕수가 꼬마 서연이와 산책을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면서 본인의 인생역정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초반에 이렇게 스피커 역할로 등장하고, 후반에 덕수네 가족 잔치에서 노래 선곡을 잘못해서 덕수의 화를 돋구는(...) 역할로 다시 등장한다. 부연설명 하자면 서연은 나이대에 맞지 않은 노래(아마도 덕수가 가르쳐준 듯한) <굳세어라 금순아>를 불렀고, 서연의 아버지(즉 덕수의 아들)가 덕수에게 "애한테 이상한 노래 가르친다"고 타박하면서 덕수의 화를 돋우었다. 영화의 주제가 주제인 만큼 당연하지만 극적 장치로서의 비중이 아닌 독립된 인물로서의 비중은 거의 없다.(할아버지 세대 사람들이 지난 삶을 회상하는 영화에서 유치원생 꼬맹이가 자기 이야기 하면서 끼어들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은가?)
- 덕수의 고모부 (홍석연)
아내가 일하는데도 술만 퍼마시는 알코올 중독자.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 가게를 파는 파렴치한 짓을 하여 덕수가 베트남에 가게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덕수가 개고생을 하고 다리를 절게 된 만악의 근원.
또 한편으로 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서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심신이 폐인이 된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첫 등장 시 군복 입은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에 적어도 낙동강 방어 전투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34] 당시 나라 사정상 갑자기 입대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 후유증으로 오직 술을 낙으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부인인 윤꽃분을 포함한 덕수네 가족도 그런 고모부를 받아주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당시 전쟁 통에 많은 것을 잃은 참전 군인들의 대한 상징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서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심신이 폐인이 된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첫 등장 시 군복 입은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에 적어도 낙동강 방어 전투에 참전했을 가능성이 높다.[34] 당시 나라 사정상 갑자기 입대한 사람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 후유증으로 오직 술을 낙으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부인인 윤꽃분을 포함한 덕수네 가족도 그런 고모부를 받아주는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당시 전쟁 통에 많은 것을 잃은 참전 군인들의 대한 상징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4.1. 실존인물
영화 《포레스트 검프》와 비슷하게 유명인들이 등장해서 주인공과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이 들어가 있다. 차례대로...
- 현봉학 (고윤[35] ) 10군단 민사부 고문(통역관), 미 육군 10군단장 육군 중장 에드워드 알몬드,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레너드 P. 라루 선장[36][37] . 흥남 철수 장면에서 현봉학이 철수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에게 부탁하여 미군들이 배에 실려 있던 무기들을 버리고 대신 피란민들을 태워 철수할 수 있게 한다. 이들은 스탭롤에도 맡은 역할이 가상의 인물이나 대명사가 아닌 실명으로 등장한다. 현봉학 박사는 2000년 4월 그리고 2013년 7월에 호국 인물로 지정되고 2014년 12월에 국가보훈처에서 이달의 6.25 전쟁 영웅으로 뽑히기도 하였다.[38] 다만 현봉학 혼자 9만8천명을 구한 것 까지는 아니고, 당시 한국군의 한국군 1군단장인 김백일 장군등(우리가 아는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반민족 행위자 맞다.) 한국측이 지속적으로 알몬드 소장을 설득하여 한국인들을 데려가달라고 한 것이고, 10군단의 군수 책임자로 상륙을 담당한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 중간의 가교 역할을 하며, 결정적으로는 알몬드 군단장의 결단이 있었다. 이에 국가보훈처에서는 2018년에 '1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포니 대령을 선정 하였다. 즉, 김백일 장군과 같은 거물의 설득과, 포니 대령이라는 실무자의 역할, 최종 책임자인 알몬드 장군의 고뇌와 결단이 합쳐져서 이루어 진 것이지, 영화에서처럼 20대의 어린 통역관이 옆에서 몇마디 했다고 해서 알몬드 장군이 즉석에서 마음을 돌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대의 어린 통역관은 영화 처럼 알몬드 장군에게 우리 국민들을 살려 달라고 몇 마디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를 설득하기 위해 포니 대령과 함께 동분서주 하면서 열심히 뛰어 다녔다. 즉 흥남철수 작전에서 한국민 9만 8천명을 구한 공로는 알몬드 군단장, 김백일 군단장, 포니 대령, 현봉학 박사가 각자 1/n만큼 역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메리더스 빅터리호의 라루 선장 같은 사람들이 실행한 사람이고.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군사작전에 관해서는 천하의 등신으로, 미국 역사상 최대의 패전이었던 장진호 전투로 미국 내 평판도 안 좋다. 게다가 맥아더의 참모장이자 그가 뒤를 봐주는 심복이었기에 전쟁사 서적 등에서 그 자신 뿐만 아니라 맥아더의 실책까지 대타로 나서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게다가 국군 3군단이 와해된 현리 전투 패주의 단초를 제공하기까지 해 국내외로 똥별 취급을 받는다. 그래도 흥남철수를 승인하고 지원한 것 때문에 한국 한정으로 위인급 평가도 받는다.
구두 닦는 어릴 적 주인공들에게 조선소 이야기를 한다.[39] 이 때는 이름이 직접 나오진 않고 '정 사장님'이란 대사와 함께 정주영이 몰고 가는 트럭에 써 있는 現代建設 글자가 잡히는 식으로 나온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어록도 말한다. 하지만 어린 애들에 불과했던 (그리고 전쟁으로 나라가 가난한 걸 잘 알던) 주인공 아역들은 그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한다. 심지어 천달구는 '왜? 자동차도 국산으로 만든다 카제?'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뭐 다들 아시다시피,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훗날(주인공의 성인 시절) 정육점에서 고기 싸는 장면에서, 고기 싸는 신문에 현대 조선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씨름 선수 이만기 (엄보용)
고깃집에서 중학교 씨름부원들이 회식하는 가운데 가장 어린아이. 중학교 씨름부 잠바를 입고 고깃집에서 고기를 구워먹는 모습을 보며 씨름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면서 좆문가질을 시전하는 달구에게 빡쳐서(정확히는 그 옆에 앉아있던 애가 빡쳐서) 고기를 먹다 말고 가게를 나가는 장면으로 나온다.[40] 고깃집에서 달구가 "씨름은 그래 마이 쳐묵는다고 되는 기 아이고 뒤집기, 잡치기" 라며 훈계질을 할 때 이만기 역을 맡은 소년은 다른 소년들보다 상대적으로 달구의 말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제로 이만기는 선수시절 130kg에 육박하던 씨름 선수들 사이에서 날렵한 체격과 화려한 기술 을 바탕으로 한라급(85~95kg)으로 출전하여 백두급(무제한) 선수들을 이기고 천하장사에 오른 적이 있는 걸 보면 아마 노린 장면인 듯하다. 이후 이산가족찾기 후 온 가족이 다 모인 80년대 장면에서 TV로 경기 모습이 나온다. 그가 이기자 온 가족들과 심지어는 애들까지 무슨 월드컵에서 역전 골 넣은 것처럼 환호하는 장면에서 굉장히 시대적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달구의 소개로 덕수네 가게인 '꽃분이네'에 뻬부뤽을 찾으러 서울에서 온 디자이너 . 작 중 주인공 덕수의 모친은 가족들이 입는 옷 소매에 일종의 가족 표시처럼 꽃과 나비 모양 수를 놓았는데, 이제 막 의류 디자인 사업을 시작한 앙드레김은 원단을 보러 왔다가 덕수 고모의 옷소매에 수놓은 꽃과 나비 문양을 보고 큰 영감을 얻고 간다. 이 때 천달구가 "김봉남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장면과 앙드레 김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게 말해도 한번에 알아듣고 패브릭을 꺼내는 고모의 모습이 이 장면의 백미(이그죠틱한 걸 찾았는데 물건을 들고와서 '이거좋다'라는 쩌는드립은 덤). 이 꽃과 나비 문양은 80년대 이산가족찾기 장면에서도 주요 요소로 등장한다. 훗날 흑백 TV속에서 국내 최고의 디자이너로 성공한 앙드레 김이 한번 더 나온다. 참고로 작중에서 앙드레 김 역시 정주영과 비슷한 방식으로 비아냥을 듣는데, "다가오는 줴너레이션에서는 남녀의 영역 퐈아괴가 토퓍이 될거구요"라며 유니섹스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앙드레 김의 말에, 앙드레 김이 떠나자 꽃분이 할머니가 "왜 남자가 애를 낳는다고 하지 그러냐" 라면서 비아냥거리는 장면.
베트남 정글에서 주인공들을 구해주는 해병대원. 작중 주인공 덕수의 생명의 은인이다. 2번이나 구해주는데 한번은 베트콩에게 사로잡히려는 찰나에 베트콩들을 사살해 구출해줬고 물에 빠진 베트남 소녀를 구하려다 베트콩이 쏜 총에 맞고 강물에 빠졌을 때 이를 구해준 것도 남진이었다. 이 때문에 현재 장면에서 나훈아 팬인 부인한테 "가수는 남진!"이라 주장하며 언쟁한다. 끝순이 남편이 나훈아와 닮아서 더욱 질색하는 듯 하다.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의 멤버 유노윤호가 70년대의 아이콘이자, 당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가수 남진의 베트남전 참전 시절을 연기했다. 작중에서는 전투 기술 면에서 상당한 베테랑인 것으로 나온다. 능숙한 전라도 사투리와 털털하고 정감있는 캐릭터로 영화에 활력을 더했다는 호평을 받았다.[42] 실제로 윤제균 감독의 초청을 받아 국제시장을 직접 관람한 남진은 자신을 연기한 유노윤호의 "괜찮소?"라는 대사가 참 괜찮았다고 말했다. 남진에게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이 있는데, 남진이 엘비스를 많이 연구한 창법을 사용해서[43] 이기도 하지만, 둘 다 최고의 인기가수 상태에서 군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엘비스의 경우 냉전의 최선봉이었던 서독에서 근무하였다.
5. 흥행
한국 영화 중 2번째로 1억 달러를 돌파했다.
'''역대 한국 박스오피스 관객수 4위 '''
'''역대 한국 박스오피스 매출액 7위 '''
5.1. 2014년
- 12월 17일 첫날 18만 4,972명을 동원하며 2위로 출발했다.
- 12월 18일에는 같은날 개봉한 《호빗: 다섯 군대 전투》보다 4만 6천여 명 앞선 19만 8723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일일 흥행 1위에 올랐다.
-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당일 5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리고 26일 300만 고지를 넘었다. 《변호인》보다는 느리지만 《광해》보다는 빠른 속도.
- 12월 29일, 개봉 12일만에 420만 관객을 돌파하며 확실한 연말 흥행영화로 굳히게 되었다.
5.2. 2015년
- 1월 2일에는 650만 관객을 돌파,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180억 제작비를 모두 회수하였다.
- 1월 6일 관객 수가 800만을 돌파함으로서 2015년 최초의 천만 관객 돌파가 확실시 되고 있다.
- 1월 13일, 15만의 관객을 동원하여 개봉 28일만에 천만 관객 돌파 영화에 등극했다. 이로써 윤제균 감독은 대한민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 영화를 두 편이나 감독한 주인공이 되었다.
- 1월 25일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6위로 올라섰다. 현재의 페이스라면 1362만명의 아바타를 꺾고 역대 2위가 될 수 있을 지가 관전 포인트.
- 2월 7일 1,300만 관객을 돌파하여 역대 3위까지 올라섰다.
- 2월 20일 설 명절특수에 힘입어, 아바타를 누르고 역대 박스오피스 2위에 등극했다. 이어 설연휴 마지막 날인 22일 1,400만 관객마저 돌파하였다.
- 2015년 1월 9일 북미 개봉을 시작으로 해외에서도 개봉을 시작했다.
6. 평가
평론가들과 관람객의 평점이 차이가 난다.'''사람냄새와 쉰내 사이에서 슬렁슬렁.'''
- 이동진 (★★☆)
관람객 평점은 9점대인데 평론가 평점은 '''5.81'''점에 머무른다. SBS 영화 프로그램인 접속 무비월드 "영화는 수다다" 코너에 출연하는 주성철 기자는 '''별 5개 만점 중 2개 반'''을 주었다. 진중권 동양대학교 교수 역시 '''10점 만점에 5점'''을 준 것을 보면 대체로 평론가들 평점은 '''별 5개 만점 중 2개 반'''으로 평준화된 셈. 평론가들이 주로 비평하는 부분은 윤제균 감독 특유의 신파적 스토리와 연출 부분. 지나치게 평면적인 대사와 연출, 감동을 강요하는 듯 보이는 일부 장면에서 마이너스를 받았다. 영화가 역사 속 덕수의 삶을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내기보다는 단순히 덕수의 고생만을 1차원적으로 강조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반면 관객들은 대체로 호평했다. 신파조의 스토리와 뻔한 얘기를 뻔하지 않게 하는 법을 모르는 밋밋한 연출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관객들도 있었다. 즉,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게 너무 뻔해 예술이라기보다는 웅변같다는 것. 그러나 윤제균 감독의 전작인 《해운대》같이 감정에 호소하는 영화에 비하면 덜하다는 게 중평. 일단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부모 세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 어필했고, 그 시대를 겪어본 사람들에게는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는 점이 어필한 듯하다.
물론 국제시장에 혹평을 내린 관객들도 많았지만 일부는 적어도 국제시장 보다도 개연성과 고증, 현실성이 엉망인데다 마지막에 악역이 끝까지 처벌/작중에 비판 받지 않고 예승이의 아버지의 누명은 풀리지 않은 결말로 끝난 7번방의 선물과 애초에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려고 신파를 넣을 필요가 없는데도 영화에 줄곧 때려박은 신과함께 죄와 벌 보다는 낫다는 반응이 대다수다.
흥남 철수라든가 파독 광부 및 간호사들의 이야기, 베트남 전쟁, 이산가족찾기 등 한국사의 굵직한 이벤트를 와이드샷으로 현장감있게 잡아내서 볼거리는 풍성한 편이다. 주인공이 베트남전에서 국군 전투원으로 참전하는 것은 아니고 게릴라전 위주였던 베트남 전쟁의 특성상 전투를 경험하기는 하지만 비전투원인 민간 업체 직원이다.
5.18 민주화운동이나 6월 항쟁 등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그것은 영화가 민주화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기보다는 영화에서 초점을 맞추는 덕수의 인생과 해당 사건들이 시·공간적으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 부산에 사는 덕수와 연계할 구석이 있는 정치적인 사건이라면 영화의 배경인 국제시장에서 펼쳐진 부마민주항쟁 정도가 유일한데, 이 장면을 집어넣으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이 깨질 우려도 있고 오히려 어설픈 알리바이 정도의 역할밖에 안 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덕수가 뜬금없이 베트남에 가서 사업하는 거 자체가 더 부자연스럽다. 80년대 초에 있었던 중동 건설 사업 진출이 생략된 것이 아쉽다면 모를까... 하지만 40년대 초반 태생인데다, 베트남에서 다리에 총 맞아 불구가 되었는데 40줄에 접어들고 자기 가게까지 있는 주인공이 중동 건설 사업에 뛰어드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1983년 이후에 있었던 굵직한 이벤트들이었던 1988년 서울 올림픽이나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7년 외환 위기 등과 관련된 장면이 전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다는 의견도 있다. 원래 이들과 관련된 장면들도 넣으려고 했었으나 러닝타임을 고려하여 취소됐을 가능성도 있다.
문제점 중 주인공의 행보가 너무 뜬금없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이 시기에 겪은 이들 중 정부 관료가 아닌 이상은 파독 광부와 베트남 파견을 둘다 겪을 일이 웬만해선 없었기 때문인데, 가난한 사람들이 돈 벌러 간 경우 하나만 갔다 와도 웬만한 벌이는 충분히 하고도 남았는데 굳이 베트남까지 갔다는 게 정황상 다소 어색한 부분이다. 덕수의 경우 꽃분이네를 멋대로 팔아치우려는 고모부에게서 가게를 빼앗다시피 인수하며 생긴 갑작스러운 지출 때문에 베트남에 가게 된 것이다.[44] 작중 연출을 보면 '''이미 거래가 성사되었는데''' 덕수가 난입해서 그 가게가 어떤 가게인지 아냐며 역정을 내며 가게를 인수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미 성사된 거래를 갑자기 취소당하는 그 상대방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도 비상식적인 가격으로 가게를 인수[45] 해야 하는 데다가, 고모부가 저 가게를 팔아서 돈을 마련하지 않으면 노후에 자기 생활할 돈도 없다고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게 인수 명목과 별도로 고모부의 생활비 명목으로도 막대한 돈을 또 지불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소 설명이 부족했는지 이 부분을 헷갈려하는 관객이 많았다.[46]
아버지 세대를 위한 영화라곤 하지만 영화상 주인공의 나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현재 기준으로는 할아버지 세대다. 최소 60 중반 정도는 되어야 영화상 일들을 겪을 수 있고 평균 30대 아들 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80년대가 대부분. 하지만 아버지라는 말이 틀렸다고도 할 수 없는 게 윤제균 감독이 자기 아버지 세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영화의 영문 제목이 Ode to my Father이고 손석희와 함께 한 인터뷰를 참고하면 맞는 이야기일 듯 하다. 흔히 말하는 민주화 세대보다 반 세대 앞서고, 한국전쟁을 아주 유년기에 겪었거나 겪지 못한 세대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실제로도 황정민이 작중에서 연기했던 1942년대생 이상의 세대는 큰공감을 받으며 일부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영화가 아버지 세대에 전하는 쓰디쓴 충고라는 의견도 있다. #
다만, 기성세대의 '''고생'''을 그린 영화라고 해놓고서, '''정작 그 고생을 하는 그 시절의 장면은 개그색으로 묘사해 놓고서는''' 나중에 그걸 회상하는 가족 잔치 장면에서는 고생스러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게 매우 어색했다는 감상도 꽤 있었다. 다만 그 어려운 시절의 세대들이 경험한 고생은 사회 전반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공유되고 있으므로 개그 장면이 몇 장면 들어간다 하여 그들의 고생이 미화되거나 가볍게 되는 식의 연출이라고는 볼 수 없다. 조선 시대의 백성들의 고된 삶을 다루는 구비문학에서도 해학은 많이 들어간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게다가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의 과거 씬은 대부분 비극적이고 희생적이며 고생스럽다. 이 의견은 사람에 따라선 개그색이 있었다=오달수가 개그 배우니까 그 사람 나오면 다 개그씬인가?싶을 정도. 개그색이라봐야 주인공이 아내를 만나는 서독 광부 부분 정도인데 사상 초유의 비극을 다룬 인생은 아름다워조차 연애 장면은 밝고 유머러스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편 《세친구》, 《마리이야기》, 《장화, 홍련》,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왕의 남자》, 《분홍신》, 《연애의 목적》, 《괴물》, 《호로비츠를 위하여》, 《해운대》, 《마더》 등의 영화음악으로 호평을 받아온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음악 감독을 맡아 감동적인 스코어를 선사한다. 그간 한국 영화는 열악한 작업 조건과 후반작업 예산 분배 문제 탓에 음악 수준이 미비하여 세계 영화시장에서 뛰어난 각본과 인상적인 비주얼, 명배우들의 놀라운 연기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병우의 수준 높은 영화 음악은 이에 희망을 던져준다 할 수 있겠다. 마지막 엔딩 크레딧 테마가 이병우의 아름다운 클래식 기타 연주로 시작하는데 인생의 희노애락을 표현한 해학적인 브라스 밴드와 서정적인 관현악을 적절히 조합하는 부분은 엔니오 모리코네의 “피아니스트의 전설” 스코어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영화 속 과거 회상이 아닌 현재 시점에서 젊은 사람들은 덕수의 손녀를 제외하면 전부 다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덕수의 아들은 가족들을 위해 고생한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아들로 그려졌고, 영화 속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10대 학생들은 70대 노인인 덕수에게 밀어내쳐기 까지 할 정도다.
주인공 덕수는 아버지 세대에 힘들게 산 인물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베트남 전쟁 이후에 겪은 일들이 하나도 없다.
윤제균 감독답게 이 영화도 비슷하게 굵직한 근현대사를 주제로 다룬 포레스트 검프를 표절한 의혹을 제시한다. 특히 흑인 차별, 전쟁미화, 보수주의를 담은 우편향 영화라 비난 받은것도 이 둘 영화과 똑같은 평가를 받은 점이 있다.
CJ 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로 기획된 영화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근대 대한민국의 역사에 청년 시절의 덕수가 겪게 된 사건들은 이산가족 상봉 티비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파독 근로자와 베트남 전쟁 밖에 없다. 그런데 이 두 이야기는 전부 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업적들이다.
7. 논란
7.1. 정치성 논란
변호인 때처럼, 이 영화에도 별점 테러나 정치적 곡해 등 별반 다르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더구나 특정 인터넷사이트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포털사이트 영화평 키배가 이어지면서 이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국제시장》이라는 영화 자체는 탈정치적 성격을 가진 영화로 영화 안에는 명백히 드러내놓고 정치적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인 덕수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가 철저히 개인적인 시각에서 조명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봉 후 주변에 벌어지는 양상 때문에 '국제시장의 상영'이라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정치적인 찬성과 반대라는 대결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TV조선은 문재인이 《국제시장》 대신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봤다면서 왜 국제시장을 보지 않았냐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은 《국제시장》을 두고 "지금 시점에 꼭 필요한 영화로 다가온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국제시장' 일베영화 아닌 이유 '변호인'서 찾기
감독 말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 광부들과 만난 부분도 넣으려고 하다가 말았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시끄러워질까 봐 그랬다고 하는데, 정말 그 장면이 있었으면 영화에 대한 논란이 지금보다 당연히 더 커졌을 것이다. 잘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언급 자체를 잘라낸 것을 알 수 있다. 부마 사태까지 넣었으면 제작비가 남아났을지...
극본가가 공군부대 교양교육을 위해 순회할 때 한 말에 의하면 중립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 서독 방문 장면은 모르겠지만 새마을운동 장면을 넣으려고 했으나 한 대통령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기에 특정 정치 이념으로 흐를 수 있다고 판단, 해당 장면을 삭제하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부마민주항쟁도 같이 빼기로 했다고 한다.
캐스팅에 김무성 의원의 아들인 고윤(현봉학 역)이 포함되어 있어 논란이 될 소지가 있으나, 출연진 중에 오달수의 성향과 김슬기의 소속사 사장의 성향을 본다면 정치적 의도성을 가진 캐스팅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은 이 영화를 인용해 부부싸움을 하던 중에도 애국가가 나오니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며 애국심에 관한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실제 80년대까지 운동장에서 국기 게양을 하거나 내릴 때면 애들이 놀다가 멈춰서 경례를 하곤 했고, 당연한 줄 알았다. 허나 이는 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전체주의, 국가주의적인 행태인데, 이걸 갖고 애국심을 운운하자 크게 비판 받았다.[47]
게다가 해당 장면은 월남 파병으로 자신을 희생해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황정민과, 가족을 위해 자기 희생만 하는 건 틀렸다는 김윤진의 싸움이 나타난 부분이다. 두 부부간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을 때 애국가가 나오자 김윤진이 마지 못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장면은 황정민의 월남 파병이 가족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국민 개인의 희생을 은연히 비판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주인공의 아내가 대놓고 왜 '''남편만 희생하느냐고''' 화를 내다가 국기 하강식이 시작되는데 처음에는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표정을 잔뜩 찌푸린 채로 경례를 한다.
한마디로 개개인이 희생을 요구 받고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당연한 줄 알았던 '''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가정불화의 원인을 간접적으로 제공하면서까지 충성을 받는 당시의 국가'''에 대한 비판이라는 평론도 있다. 링크 오히려 애국심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는 없는 장면이었던 셈. 결국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청와대에선 영화를 본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또한 영화상 애국가가 나오는 장면이 하나 더 있는데, 주인공이 파독 광부에 지원하자 심사관이 광부 경력이 없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이에 애국가를 불러 애국심 투철로 좋은 평가를 받는 장면이다. 주인공이 다짜고짜 애국가를 부르자 다들 당황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나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개그성의 장면인데, 이걸 개그 소재로 쓴다는 것만 해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작중에서 애국가 제창 장면이 직접 나오는 건 전부 이런 식이다. 뜬금없이 국기 게양식이 열리고 뜬금없이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면 전부 뭥미 하면서도 결국엔 다들 '''마치 파블로프의 개라도 된 것처럼''' 기계적으로 따라 부르고 있다. '''같은 영화에서 독일 국가를 부르는 장면은 이런 식으로 희화화된 적이 없다!''' 즉 영화에서(개발시기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나 사회상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으나 약간의 비판적 뉘앙스는 풍기고 있다는 것.
영화계에서 바라보는 《국제시장》에 대한 시선 역시 일부 누리꾼들의 편 가르기와는 대조된다. 대표적으로 국제시장이 '''"세대 간 이해와 소통의 매개가 되길 바란다"'''는 영화 제작사와 양우석 감독의 발언을 보자. 이렇듯 영화계의 전반적인 반응은 인터넷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정치성 논란과는 무관한 모습을 보인다.
어쨌거나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영화계를 입맛대로 재단하고 한 영화를 정치성 다분한 영화라고 무차별적으로 몰아가는 일부 평론가들과 언론 및 종편의 행태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평점이든 작품성이든 간에, 이걸 '국민이면 꼭 봐야할 영화'라느니, '정치적인 영화'라느니하는 것은 되도록 지양할 필요가 있다.
2015년 1월 6일, 윤제균 감독이 JTBC 뉴스룸에서 손석희 앵커와 함께 영화 《국제시장》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 기사 보기 요약하면 감독 자신은 이렇게 정치논쟁으로 비화될 줄은 몰랐던 듯하다. 영화 제작의 계기는 자신이 아빠가 되면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연민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2004년부터 구상했던 모양.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거시적인 정치적, 사회적인 담론이 아닌 "가족"을 테마로 잡은 영화라고 재차 설명한다. 그리고 격동하는 현대사 중에 민주화운동에 관해서 넣지 않은 것은 영화의 흐름상 그것을 넣을 때 어설프게 넣으면 수박 겉핥기밖에 안 되기 때문에 차라리 하지 말자고 뺐다고 한다.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서 덕수네 가족이 민주화 운동 시대는 어떻게 살았을까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리고 "변호인은 정치 영화라 생각해서 함께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손석희의 말에는 흑백논리가 있는 것 같다"로 받아쳤다.
7.1.1. 평론가들의 정치성 개입 논란
"평론가들이 좌파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점수가 짜다"거나 《변호인》의 예를 들며 "아버지 세대가 운동권이었으면 더 높은 점수를 줬을 것"이라고 비판하는 등 평론가들의 낮은 평을 정치 사상과 연관시키는 주장 또한 있다. 평론가들이 민주화 세대가 아닌 산업화 세대에 중점을 맞춘 영화라서 《국제시장》을 비판한다는 의견이다. 예를 들면 평론가 박평식은 이 영화에 5점을 주었는데 만약 이 영화가 민주화 이야기였으면 5점 줬겠냐는 식의 주장이다. 참고로 박평식은《변호인》의 경우 7점을 줬다. 그리고 '''《천안함 프로젝트》에도 7점을 주었다(...)''' 그러나 반론을 하자면 박평식은 민주화 이야기를 담은 26년에 대해서는 5점을 주었다.
국제시장은 베를린 영화제에 공식 초청을 받았고, 빌란트 슈펙 파노라마 부문 집행위원장은 "국제시장"은 분단과 굴곡진 현대사를 딛고 전례 없는 발전을 이뤄낸 대한민국을 장엄한 영화적인 필치와 인간적인 차원의 이야기로 훌륭히 풀어냈다"며 초청 이유를 밝혔다. 때문에 국내의 평론이 짠 것이 정치적 이유 때문이 맞지 않느냐란 의견도 있으나, 국제시장이 베를린 영화제에 나갔다고 하더라도 경쟁 부문에 출품되지 않은 이상 대중적인 영화일지는 몰라도 영화적으로 좋은 영화나 잘 만든 영화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베를린에 출품되었다고 해서 경쟁 부문에 나오는 유명 감독들의 영화와 국제시장이 동일선상에 놓이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도 아무나 초청 받는 건 아니라서 최소한의 퀄리티는 인정받은 것이다. 이게 재미있는 점이 불과 몇 년 전에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외국에서의 평론이 논쟁이 된 것과 다소 비슷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과 '엄마를 부탁해' 모두 산업화 세대를 산 부모 세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고, 다소 신파적인 서술/묘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 같기 때문이다. 실제 '엄마를 부탁해' 영문판의 경우, 뉴욕타임즈로부터 "모성의 신비 그 자체에 대한 헌사"라는 극찬을 받은 반면 조지타운대 머렌 코리건 교수는 NPR에서 "눈물을 강요하는 싸구려 멜로 드라마"라는 혹평을 했기 때문이다(당시 국내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갈라졌었다).
평론가들의 평가 자체가 세간의 논란처럼 아주 '혹평'까지는 아니다. 네이버 평점 기준 별 5개중 3개로, 일반적인 한국영화 평점 수준이며 명작이라 할 정도로 높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낮지도 않다. 그럼에도 평론가들의 평가가 논란이 되는 것은 '국제시장'에 공감하고 호평하는 관객들이 "'''영화에 비해서''' 평이 짜다"라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평론가'라는 직책은 감정보다 객관적으로 영화를 평가해야 하기에 애초에 '국제시장'은 감정에 호소하는 느낌이 많은 영화이니, 이 영화에 감정적으로 호평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평론가들의 냉철하고 날카로운 평은 감정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이 들게 된다. 모든 평론가들의 평이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짠 것이 아님은 맞다. 이 작품이 감동을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대신, 신파적으로 이를 강요하고 가르치려는 게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가령 《마더》의 경우 대사를 통하거나 직접 연출이 아닌, 은유를 통해 우리 시대의 비뚤어진 모성애를 지적하지만,《국제시장》은 상당히 직접적인 화법을 사용해서 평론가들에게 좋은 시각을 주지 못했다. 예능 프로를 위시한 방송계의 억지감동에 대한 비판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당장 만약 평론가가 영화를 감정적, 주관적으로 보고 쓴다면 '''히말라야나 혹은 웃다가 눈물 나오게 만드는 한국식 저질 영화도 높은 별점을 줄 수도 있다.'''
물론, 일부 평론가들의 평가 중에 정치적, 세대적 선입견을 깔고 남긴 평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산업화 세대의 정치적 반동성을 탈색한 채 부르는 헌창"이라는 평이다. 여기서 산업화 '시대'와 '세대'는 엄연히 다르다. 산업화 '시대'였다면(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반동성이 있는 시대라고 보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독재 시대였다는 사실은 명백하고,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처럼 인권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 평론들은 '세대'를 지칭하고 있다. 즉, 산업화 세대는 정치적 반동 세대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대전제는 '''매우 공정하지 않다.''' 해당 세대들도 당시에 독재 정권에 저항했다. 4.19 혁명은 이들 세대이며 전태일도 해당 세대다. 심지어 이명박 전 대통령도 한일협정 당시에 대학생 신분으로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다 감옥 갔다 온 사람이다. 이는 히틀러 시대에 살았던 독일인이 모두 유태인을 학살하는데 적극 동참한 세대라고 생각하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 물론 국제시장은 산업화 시대의 정치적 반동성을 담았다고 하기 보다는 배제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시대'와 관련된 평론문제도 아닐 뿐더러 시대 문제에 대해서는 윤제균 감독의 인터뷰 기사들을 보면 애당초 시대의 정치적 문제를 배제하려 한 이유가 바로 이 정치 논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본 평론을 남긴 기자는 아예 대놓고 이 영화는 정치 영화라고 칼럼을 썼다(아래 외부 링크항목을 참고). 즉, 스스로 정치색으로 평가했다는 건을 인증했다. 참고로 해당평론가는 포화속으로의 칼럼을 작성하면서 '''남침유도설이 유력하다고 주장'''하는 희대의 병크를 저지른 적이 있다. 두 영화에 대한 칼럼들을 대조해 보면 90년대~2000년대 대학가에서 메가폰 붙잡고 대자보 붙이며 시위하던 한총련이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역사 인식임을 알 수 있다. [48]
이 외에도 젊은 세대에게 영 불편한 내용이라는 선입견과 아버지 세대에 주는 '''면죄부'''라는 드립이 있다. # 한 줄 평에서 모든 부분을 추측할 수는 없으나 산업화 세대로 지칭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고 그 세대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반동성 일부가 영화내에서 전혀 표현이 없다는 점을 20자평에서 지적한 것이기에 평론가의 대전제를 '정치적 반동 세대로 판단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보며, 해당 견해를 오류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덕수 세대를 '산업화 세대'라고 지칭하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정치적 반동성'을 연결하는 과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반동성을 지닌 것은 해당 '시대'였고, 당시 모든 세대가 이 반동성에 동의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해당 평론을 남긴 이의 경우 이후 칼럼들을 통해 산업화 세대가 정치적 반동의 세대라고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해당 평론가가 해당 세대를 그렇게 본다고 인증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치더라도 용어 및 표현의 신중한 선택은 평론가, 기자들, 정치인들과 같은 사람들에겐 기본 중에 기본인 덕목이다. 앞에 언급되었지만 시대와 세대의 용어가 주는 차이는 엄청나다. OO시대를 살았던 사람을 OO세대라 지칭할 수는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OO에 일맥상통한 세대로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 많은 비약이 있다. 일례로 나치 독일에 살았던 독일인이라고 나치의 성향을 지닌 세대라고 표현해선 안된다. 그러니까 해당 평론의 경우 정치적 반동성을 '시대'와 연결할지 '세대'에 연결할 것인지 신중을 기해야 하며, 해당 평론가는 '세대'를 선택했고, 그 선택을 한 근거를 칼럼에 따로 남겼다. 이 영화는 정치적 선동 영화라는 결론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명백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 국제시장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잘보여 주는 영화이므로 젊은세대들이 이런 말을 하기에는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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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웅은 이에 "국제시장의 이데올로기적 합의를 이야기한 것이고 그 흥행 추이가 우리 사회 현주소를 말해줄 거라 했잖아요", "남조선 인민공화국 국영 방송 aka 티비조선이 오늘은 또 전파 낭비의 어느 새 지평을 열었을까요. 아 오늘은 제가 하지도 않은 말에 제 사진을 붙였군요. 저게 티비조선에 해당되는 말이긴 하죠" 라며 반론했다. 이 발언에 대해 인터넷에서 논쟁이 벌어졌고, 일베저장소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지역드립성 비난이 쏟아지자 허지웅은 그에 대한 법적 절차에 나섰다고 밝혔다.참조기사,##허지웅이 위에서 언급한 "정말 토 나온다는 거에요, 정신승리하는 사회라는 게"라는 말에 대해 저마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말 한 것이지 토 나오는 영화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의견과 "정신승리하는 사회의 예시로서 영화를 언급해 놓고 말 바꾸기를 한다"는 상반된 의견이 존재한다.
허지웅과 TV조선의 신경전이 벌어진 뒤 진중권은 트위터에 "국제시장 아직 안 봤는데, 그거 보고 비판하면 부모 은공도 모르는 개호로자식에 박통의 은공을 모르는 좌익 빨갱이 새끼가 되는 건가요? 겁나서 보지 말아야겠네"라는 글을 올렸다.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이 몇몇 대놓고 정치색 띤 평론가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분법적 편 가르기에 참가한 것이 맞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삽자루의 허지웅 디스 반대로, 진중권의 트윗이 종편 방송과 누리꾼들이 들고오는 논리를 비꼬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영화를 비판하는 것을 아버지 세대의 노고를 비판하는 것과 동치로 여기며 '비애국자'이자 '배은망덕'으로 몰고가는 논리는 마땅히 잘못된 것. 당장 위에 서술된 진중권의 발언을 보더라도 '국제시장을 보고 비판하면 은공을 모르는 호로자식에 좌익 빨갱이가 되는 거냐? 그럼 차라리 안 보겠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이지 국제시장이 다루는 덕수 세대의 노력을 비하하는 내용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 점을 생각하면 '진중권이 국비지원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왔고, 덕수 세대에게 혜택을 받았다'는 점이 왜 문제가 되는지 알기 어렵다는 입장 역시 있다. 평론가들의 평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다른 영화와 비교하는 수단으로 삼는 사례는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와 댓글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허지웅이 변호인은 칭찬하고 국제시장을 깐다는 일베의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 허지웅은 변호인도 비판해서 친노 네티즌들에게 비난을 당한 적이 있다.
한편 박근혜가 2014년 11월 CJ회장과의 독대에서 영화계가 좌편향되었다는 식의 압박[49] 을 가했음이 드러나면서 국제시장이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는 주장을 다시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영화 촬영기간이 2013년이다. 2015년에 촬영 시작한 인천상륙작전이면 몰라도 이 영화가 정치적 코드를 넣은 작품이라고 말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압력으로 만든 영화라면 당연히 새마을 운동이 핵심 소재나 하다못해 중요한 비중이라도 갖춘 모습이 보였을 텐데 영화는 그 시기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손경식 CJ그룹 회장은 박근혜 재판 과정 중에 박근혜 정부의 외압으로 인해 제작된 영화들 중에 국제시장이 있다고 폭로했다.# 설상 박근혜 정권에 압력 이전에 이미 제작된 영화인데도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 메모에서는 국제시장에 관련 대통령 지시 사항이 기록된 정황이 드려났다.#
결국에는 평론가들의 정치적이다 라는 비판이 맞는 말이 된 셈이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정치적 평과 별개로 종편 뉴스에 한 단지 일개 평론가의 개인적인 주장에 불과하는데 그걸 또 뉴스에서 보도하는 거 자체가 블랙 코미디 수준이다. 그만큼 박근혜 정부가 국제시장을 얼마나 많이 후원하는 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8. 여담
- 제목은 국제시장이지만 정작 국제시장에 대한 장면은 별로 안 나오는 게 함정(…). 국제시장 문서에 언급된 부산역전 대화재 사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국제시장이라는 제목은 어느 정도 중의성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주요 플롯이 국제적으로 돈 벌어오는 이야기. 윤덕수가 어디서 무얼 하며 헤매더라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 곳은 국제시장이라는 의미로 지은 제목일 가능성도 높다.
- 현인 선생의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에서 제목의 모티브를 따 왔을 가능성도 있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1절과 2절 가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노래의 화자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금순이를 잃고 남한으로 내려와 국제시장의 장사치가 된 사람으로, 금순이를 다시 만나고 싶어 그리워 하는 내용이며, 만나지 못하더라도 굳세게 살아달라는 당부의 말을 한다. 이는 영화의 주인공인 윤덕수의 삶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 자세히 듣기 전에는 알아차리기 힘든 부분이지만 등장인물들의 우여곡절이 펼쳐지면서 사투리가 변한다. 흥남에서 부산으로 넘어온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는 말투 때문에 빨갱이 소리까지 듣던 어린 윤덕수가 부산에서 살아가면서 부산 사투리를 쓰게 되고, 서울 말씨로 말하던 오영자도 노인이 된 시점에서는 부산 말투로 말하게 된다.
- 배우 황정민은 20대 시절부터 70대 노인의 연기까지 펼치는데 70대 중반 노인을 연기하려고 종로에 위치한 공원에서 찍은 노인들의 영상을 보며 장기를 두는 손, 담배 피우는 모습, 이야기하는 모습, 하루에 옷은 몇 벌 갈아입고(속옷, 양말, 신발 등 다) 하루에 몇 끼를 먹는지 까지 숙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분장술의 수준이 충분치 않는지 안면 근육이 실제 노인처럼 표정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지는 않는데도 얼핏 보면 황정민이 진짜로 감쪽같이 70대처럼 보인다.
- 배우 오달수는 지금까지 괴물, 도둑들, 변호인에 이어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에 4번이나 출연함으로써 최다 출연 배우의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만약 《국제시장》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면, 오달수는 1,000만 관객 돌파 영화 5번 출연으로 사실상 압도적인 위치를 점하는 셈이다. 그리고 2015년 1월 14일 국제시장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50] 오달수는 그 후로도 베테랑, 암살,신과함께-죄와 벌에 출연함으로써 천만 관객 돌파 영화만 8번이라는 공전절후의 대기록을 세운다.
- 한국 영화 중 최초로 기획 단계를 포함한 전 제작 과정에서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하였으며, 모든 스태프들에게 4대 보험 가입, 하루 12시간 촬영 시간 엄수, 초과 근무 수당 지급 등이 모두 지켜졌다. 윤제균 감독은 # 과거 "한국은 할리우드보다 인건비가 싸서 유리하다"는 말을 했다가 사정 없이 까인 적이 있었는데, 그 일 이후로 느낀 게 있었던 듯.
- 윤제균 감독의 페르소나 임창정은 이번 영화에서도 캐스팅 되지 않았다(...). 무릎팍 도사에서 또 다른 윤감독의 천만 관객 영화 해운대에 캐스팅 되지 않았을 때 설마 또 윤 감독이 천만 관객 영화를 찍겠냐면서 아쉬워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이번 국제시장으로 윤 감독은 대한민국 영화 사상 최초의 두 천만 관객 영화 감독이 되었다... 안습.
- 파독 광부와 간호사 간에 서로 맺어지는 경우가 현실의 역사에서도 생각외로 많았다고 한다. 크립테리아의 보컬 조지인의 부모도 바로 이렇게 연을 맺었다고 한다. 현실의 파독 광부들도 상당한 고학력자가 지원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는데, 조지인의 부친께서는 약학 석사 학위를 갖고 독일에 석탄 캐러 가셨다(...). 파독광부협회 회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국민 2,400만 명 중 실업자가 250만 명이었고, 고학력자들도 실업에 시달리고 있어 파독 광부 지원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박사 학위가 있는 사람들도 손이 하얗고 매끄러우면 안 뽑아줄지도 모른다며 일부러 석탄 가루에 문질러서 손을 거칠게 만들어 지원한 게 서독 광부 자리였고, 박사 학위가 있는 사람들까지 서독 광부 자리에 몰렸던 것이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반면, 광부처럼 검은 칠을 하는 게 일상인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씻어도 최소한 며칠은 손에 티가 남기 마련인데 데이트할 때에는 깔끔한 모습이어서 현실성이 좀 떨어지는 게 아쉽다.
- 그렇다고 해서 영화처럼 광부와 간호사간에 댄스대회가 열리고 하진 않았다. 실제로는 만날기회가 없었고 그냥 개인적으로 알음알음 커플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댄스회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독일에서는 해당 나이대의 남성이 씨가 마른 상태라 독일의 과부들과 댄스회가 열렸다고 한다.
- 2015년 8월부터 9월까지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특집 중 남해 독일마을의 언니가 독일에 살고 있는 동생에게 보내는 사연이 있는데, 해당 방영 분에 의하면 파독 광부들은 비자 갱신이 되지 않아 극중의 윤덕수처럼 귀국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비자갱신이 가능한 한국 출신 파독 간호사와 결혼하면 이러한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비자 만료가 가까워지는 광부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간호사들에게 구혼했다고 한다. 간호사들은 이걸 초인종 소리에 빗대 피아노 친다리고 표현했다고. 국제시장 영화에서 나오는 상황이 실제 사연들과 거의 비슷했다는 것. 물론 배달의 무도 방영 시에는 국제시장 영상을 자료 화면으로 마음껏 활용했다.
- 파독 광부의 실제 근로 상황이 잘 조명되어서 파독 광부들에게도 호평 받는다. 특히 "Glück auf(글뤽 아우프 / = Good Luck)"가 나오는 순간 파독 광부 출신 관객들이 눈물에 젖었다고... 이 부분의 고증을 최고로 치는 듯하다.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살아서 다시 만나자는 인사 정도로 나타나지만 당시 파독 광부들은 다음 순간을 기약할 수 없는 탄광 속에서 작업 전 진심으로 행운을 기원하고 염원하며 한 말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Glück은 행운을 의미하고, auf은 위/바깥을 뜻하나 광부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합성어라고 한다. 현재 파독광부협회의 공식 명칭은 "Glück auf회"이기도 하다.
- 작중에 등장한 촬영 장소인 꽃분이네는 이후 관광 명소가 되었는데 사람들이 방문만 많이 하고 물건을 사지 않아서 이래저래 피해가 많다고 한다. 주말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옆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할 정도. 설상가상으로 건물주가 유명해졌다고 5,000만원에 달하는 권리금을 추가로 요구하는 바람에 가게를 비워주고 나가야 할 형편이라고 한다. # 결국 보다 못한 부산시가 꽃분이네를 중심으로 관광 테마를 기획 중이란 입장을 밝혔다.
- 꽃분이나 끝순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노비들의 이름이다.
- 인터넷에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한 기획 창작 아카데미에서 한 기획자가 만든 기획안 '차붐'을 표절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콘텐츠분정조정위에서 차붐 원작자에게 보상하라는 조정안을 내놨는데 CJ 측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사실상 표절을 인정했다고 봐야 한다. 일단 좀 지켜보자.
- 2015년 대종상에서 다른 천만 영화들은 가볍게 무시하고 혼자 10관왕을 했다. 관련 내용은 2015 대종상 시상식 논란을 참고.
- 2015년 청룡영화상에선 미술상과 남우조연상(오달수)만 받았다. 똑같이 남우조연상을 받았지만 대종상엔 불참했던 오달수는 청룡영화상에선 참석하여 상을 받아갔다.
- 상기 각주에 언급되지만, 프로듀스 101과 SIXTEEN에 출연했고 I.O.I의 센터 멤버가 된 전소미가 잠깐 스치듯 지나간다. 윤막순의 남편 역할로 나오는 백인이 전소미의 아빠였다고 했는데, 사실 막순의 남편 마이클 역은 르스타반 메드비기란 사람이 맡았고, 전소미의 아버지 매튜 다우마는 미군1 역할을 맡았다. 전소미가 나오는 건 단역 명단의 에닉 소미 도우마[51] 라는 이름으로 확인. 전소미는 막순의 큰딸로 나왔고, 소미의 여동생 에블린 매버릭 도우마는 막순의 작은딸로 나왔다.
- 인도에서 국제시장 리메이크 작을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배경 시간대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문제가 불거지던 1940~1950년대부터로, 제목은 바라트(Bharat. 인도를 뜻한다)로 결정. 2019년 6월 5일 개봉해 예산의 3배 이상인 약 $46,000,000을 벌어들이며 대히트를 쳤다.
- 훗날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셋이나 나온다. 당연히 라미란이 나오고, 성진주 역의 김설이 끝순이 아역으로 등장하며, 성진주의 어머니 김선영 역의 배우 김선영이 김윤진에게 남편 없다고 욕했다가 싸우는 조연으로 나온다. 배역명이 '오영자랑 싸우는 아지매'. 끝순이네 옆 가게 주인인 듯 하며 그 후로도 간간히 나오고 대사도 몇 마디 한다.
- 베트남에서 미군은 현지 어린이들에게 초콜렛을 던져주는데[52] 그에 비해 윤덕수는 초콜렛을 손에 직접 쥐어준다. 실제로 파월한국군은 과거의 기억이 있어서 인지 현지 어린이들에게 간식거리를 줄 때 던지지말고 직접 손에 쥐어주라고 지시했었다.
- 새터민들 상당수가 이 영화를 보고 남한 사람들과 남한에 대한 존경심이 높아졌다고 고백하는 일이 많다. 특히 흥남철수, 그리고 경제발전 과정 장면에서 눈물을 쏟았다는 언급이 많았으며 특히 파독 광부, 간호사들이 돈을 벌어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했던것이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에 "남쪽은 이렇게 해서 잘사는 나라로 발전시켰는데 왜 우리 윗동네(북한)은 같이 했는데도 저 모양인가?"라며 탄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 표절 논란으로 법정에 올라섰다.#
9. 고증 오류
조금만 찾아도 바로 나오는 현대사를 다룬 영화임에도 고증 오류가 상당히 많다. 특히 연도에 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흥남 철수 작전에서 미군이 선적하는 전차로 M48 레플리카가 나온다. 그것도 105mm M68 포를 장착한 M48A5 모델로.. 국내 월드 오브 탱크 등의 광고에서 등장했던 물건인데 로드휠 등을 보면 확실히 실물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M4 셔먼 레플리카[53] 가 없는 것도 아닌데 꽤 아쉬운 부분. 또한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쓰지도 않은 M18 헬캣이 나온다! 작중 등장하는 미군 장병들과 라루 선장의 상선사관 복장 고증도 대충 한 티가 난다. 또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철수 작전의 기함이 아니었기에 알몬드 장군과 현봉학 박사는 이 배에 탄 적이 없고, 라루 선장과 대면한 적도 없다. 그리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배 근처에 온 피란민들은 전부 태웠고, 작중에서처럼 중간에 사람들을 버리고 출항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간에 LST에서 트럭과 전차들을 도로 빼내고 피란민들을 태우는 장면도 있는데, 실제로는 실은 장비들은 도로 내리지 않고 여유 공간이 허락하는 하에서만 피란민들을 수용했다.
- 파독 광부 모집 최종 면접 때 달구의 응시 원서를 보면 체중이 55kg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파독 광부의 지원 자격은 체중 60kg 이상이었다. 또한 파독 광부들은 대부분 광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돈과 빽으로 간 것이다. 극중 주인공들처럼 맨땅에 헤딩하기 식으로 가기는 당시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다. 고학력자들도 있었고, 생전 육체노동을 한 번도 안 해본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다. 독일이 원하는 진짜 광부 출신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한국에서도 광부라고 하면 1970년대에는 '태백에서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돈을 잘 벌때라[55] 굳이 독일까지 가서 고생할 메리트가 없었다.
- 1963년 파독 광부들이 탄 비행기가 에어프랑스의 보잉 747인데, 747의 초도 비행은 1969년(...). 최초 취항도 1970년 에어프랑스가 아닌 팬암이었다. 거기다가 747-100이나 200이었으면 모를까, 1989년에 노스웨스트 항공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747-400이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서 기체 도장은 2009년 도입된 에어프랑스 신도장이다(...). 결정적으로 파독 초기 당시에는 직항편이 없어서 독일에서 루프트한자 소속 전용기를 한국으로 보내줬다. 고증을 맞추려면 DC-8을 보내야 한다.[56]
- 주인공과 파독 광부 일행이 독일에 간 것이 1963년이라고 나오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독일에 광부를 파견시키기로 협정을 맺은 날짜가 1963년 12월 16일이었으므로, 한국 측이 광부 선발을 2주 안에 마치고 보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다.[57] 극중 광부 선발 과정의 시점도 겨울같아 보이지 않으므로 적어도 1964년은 되어야 한다. 또한 시점은 정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한국 정부가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한 것도 1966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영자가 덕수와 비슷한 시기, 혹은 그 이전에 파견된 것처럼 묘사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오류다. 제대로 묘사하자면 1년은 늦어야 한다. 뒤의 월남전 관련 묘사도 그렇고, 아주 세세한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 같다.
- 주인공이 베트남으로 간 것이 1974년쯤인데, 미군은 1972년에 철수 시작, 1973년에 철수를 완료했고,[이때는] 한국군 역시 공식적으로는 1973년 3월에 후발대가 철수했다. 남베트남 패망 직전까지 2,500명이 잔류했다는 주장은 있다.[58] 다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해병대가 나타나서 도와줄 시기가 아니다. 게다가 남진이 복무했던 해병대 2여단 청룡부대의 마지막 부대는 1972년 초에 철수했고 맹호와 백마가 마지막으로 1973년 초에 철수했다. 영화처럼 미군 기지가 베트콩 테러로 폭파당하고 한국 해병대가 한국인 근로자들을 구해주려면 아무리 늦어도 1972년 초는 되어야 한다. 1975년 사이공 함락 직전에 남아있던 교민 등을 철수시키기 위해 급파되었던 대한민국 해군 LST 2척의 승조원들이 공식적으로 파병된 마지막 인원들이다. 단, 이분들은 참전용사 홀대의 희생자들이었는데, 공식적인 파병이 종료된 이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파병 인원으로 인정을 못 받다가 최근에야 겨우 인정받았다. 이들 역시 그 특성상 사이공에 입항해 교민들을 찾아다니며 구출하는 정도만 했을 뿐, 영화 내용처럼 정글에서 전투를 하진 않았다.
- 영화에서 등장한 남진은 1971년에 이미 전역한 상태였고, 해병대는 월남에서 1972년 초기에 이미 다 철수한 상황이었다. 위 사실과 종합해보면 제작진이 베트남전 종전이 1975년이라는 사실만 보고 그때까지 미군과 한국군이 남아있었다고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남진이 주인공들과 다니면서 "한국 돌아가면 발표 예정인 노래"라며 흥얼거리던 님과 함께 또한 1972년에 발표한 노래이다. 그나마 베트남전 당시 한국 해병대가 입었던, 덕헌터라 불린 무늬의 위장복의 재현도는 높은 편이다. 한국 해병대의 덕헌터 패턴 위장복은 제5공화국이나 그때 그 사람들같은 드라마, 영화에서 대량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영화 소품용으로 다량 제작되어 구하기 쉬운 편이다.
- 1983년 여의도 광장에서 이산가족을 찾는 사람 중에 태극기와 함께 인공기를 든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프로그램은 남한 내의 이산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무래도 제작진이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개념을 헷갈린듯 하다. 애초에 북한 때문에 가족을 잃은 이산가족인데 인공기를 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프로그램 성격과 맞지 않는 것과 별개로, 시대상으로도 인공기는 어울리는 요소가 아니다. 우선 1983년 당시에는 반공 교육물이 아니라면 인공기가 등장하지도 않아서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구하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해당 시기는 여전히 반공을 강력한 국시로 삼았던 서슬퍼런 5공 시절이다. 인공기는 요즘도 관계 기관의 허가 없이 게양 혹은 소지하면 처벌을 받지만, 5공 당시 영화 속 해당 인물처럼 공공장소에서 대놓고 인공기를 소지했다면 그 즉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되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을 것이므로 간첩이나 종북주의자가 아닌 이상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 정황에 비추어 볼 때 현실성이 매우 떨어지는 장면이다. 오히려 당시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태극기를 휘두르며 6.25 전쟁을 일으켰던 김일성에게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반적으로도 반공과 반북 감정이 굉장히 심했던 시기였는데, 누구 때문에 가족이 헤어지고 이 생고생을 하면서 가족상봉을 위해 애간장을 태워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저렇게 나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서에도 나오듯 영화상 등장하는 방송 스튜디오와 실제 방송 현장은 딴판이다(...). 물론 당시의 KBS 본관 공개 스튜디오를 그대로 썼기 때문에 재현도는 뛰어난 편이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실제와 다르며, 유튜브에 올라온 방송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산가족 찾기 방송 현장치고 너무 조용하다. 실제 해당 방송 현장은 당시의 성능 딸리는 음향 장비로도 백노이즈가 다 섞일만큼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도떼기시장(...)이었다. 원래 스튜디오 방송은 조용한 게 상식이지만 저때는 해당이 안 됐다. 방송 중에도 이산가족이 서로 만나는 장면이 터지면 그쪽(지방국이나 공개홀)으로 화면이 넘어갔다 돌아오고 출연자들은 실신하고 아나운서는 옆에서 같이 울다가 무대 뒤로 빠지고 하는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 영화상에서는 KBS부산의 진행 아나운서가 처음부터 덕수와 차분하게 1:1 인터뷰를 하는데, 이는 영화 주인공 보정이다. 실제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1:1 인터뷰는커녕 아나운서가 플래카드에 쓰인 기본 정보를 얼른 읊고 넘어가기 바빴다. 출연자 중 정보가 서로 맞아서 대조해 보려고 무대 앞으로 따로 모셨을 때에만 아나운서와 인터뷰를 했다. 각 지역 총국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지역의 출연자들을 내보내려고 아우성이었고, 그걸 KBS 서울에서는 냉정하게 잘라버리기 일쑤.
- 방청객들이 들고 있는 플래카드가 죄다 커다란 흰색 도화지인데 실제로는 베이지색 혹은 연두색 마분지에 매직으로 쓴 손 글씨다. 실제 플래카드는 광화문역 앞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41년이 지나 이제 매직으로 쓴 글씨는 상당히 바래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종이가 작아서 스케치북 크기 수준밖에 안 된다. 1983년 당시 한국인과 현대 한국인의 신체 사이즈 차이, 물자 풍족도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59]
[1] 파독 면접 씬 당시 이력서를 보면 1939년생이라고 명시되어있다.[2] 부산광역시의 국제시장에 실제로 존재하는 가게다.[3] 국산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한다[4] 이때 정주영이 두 소년에게 청년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구두를 닦아달라고 하며 자신의 원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씬이 등장한다.[3] [5] 면접을 보던 중 면접관이 이력서에 이북 출생이라 쓰여있는 걸 보았는 지 체력도 필기도 모두 합격한 덕수에게 '광부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에 덕수는 재빨리 일어나 태극기를 향해 애국가를 불렀다. 주인공이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지원자들도 경쟁하듯 일어나고, 면접관들도 당황해하다 주춤주춤 일어나 따라 부르는 촌극이 당시 애국을 강조하던 시대상을 보여준다.[6] 헤어지기 전에 그렇고 그런 일이 있는 줄도 몰랐던 관객들은, 갑작스러운 속도위반 얘기가 좀 뜬금없게 느껴지긴 했다.[7] 영화에서 늙은 덕수와 영자가 시장 데이트를 하며 가수에 대한 실랑이를 벌인다. 영자가 "가수 하면 나훈아"라고 하며 옆에 있는 생선가게 아주머니에게도 그렇지 않냐고 맞장구 치는데, 덕수는 "가수는 무조건 남진!!"이라며 화를 낸다.[8] 엔딩 크레딧에 배역 이름이 스리랑카인이라고 나온다.[9] 이때 내뱉는 대사가 '''"남이사 커피를 마시건 숭늉을 마시건 니가 와 지랄이고?"'''[10] 사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다시 평가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최근의 예멘 난민 수용 문제 등 이민자들, 그것도 '''잘 사는 서구권이 아니라 제 3세계 출신의 이민자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대한민국의 인종차별적인 면'''에 일침을 던지는 장면이라 여러모로 시사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11] 물론 이 부분에 대한 반론은 '''그런 식으로 자기 세대의 죄책감/ 인류애를 가지고 난민을 받아들였던 나라들이 지금은 어떻게 됐더라?''' 만으로도 충분하고 넘친다. 게다가 현재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배척은, 당연히 인종차별적 요소도 있겠지만 그보다 한국인과 완전히 같은 인종 임에도 잠재적 위험분자 취급 받는 조선족 등의 경우를 보듯이 그들이 한국 땅에서 갖은 사고를 치며 스스로 위험분자라는 인식을 쌓아온 것이 크며, 난민의 경우 한국은 현 난민 사태에 단 1%의 책임도 없는 제 3자 입장이다. 어쩌다 한국 영토까지 들어왔으니 도의적인 책임이야 물론 있겠지만 이 사태를 만든 서구유럽은 뭐하고 우리보고 덤터기를 쓰란거냐며 한소리 할만한 입장은 충분히 있다.[12] 분명히 영정 사진은 아니다.[13] 이에 자극 받은 동료 광부들이 위험하다는 현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덕수와 달구를 구출해낸다.[14] 당연히 반응은 좋지 않았고 덕수도 체념하고 다시 발바닥 맞을려고 하자 결국 한국 노래를 부르게 된다.[15] 일단 같은 시대를 공유해왔고, 덕수의 가족애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에 그렇다.[16] 파독 광부 면접 당시 응시 원서에 합격 도장을 찍는 도중에 생년월일이 나왔다.[17] 기숙사 사감에게 먼저 껄덕대다가 오히려 자기가 호되게 당하는 개그 씬, 다만 역강간도 강간과 마찬가지로 성폭력이고 중범죄가 맞다는 점은 항상 명심하자.[18] 이 아버지가 살아있었더라면 막순이를 찾지 못했더라도 북한에 계속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봐야 가족들도 없을 테고, 또 시기가 시기다 보니 후에 따로 월남하려고 했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철수 이후에 월남한 흥남 피난민들이 몇몇 있었던걸 보면... 따라서 살아 있었더라면 별다른 상황이 없는 이상 모든 가족들이 있는 부산으로 갔을 가능성이 큰데, 그렇지 아니한 걸 보아 흥남 철수가 얼마 안 지나 사망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만약 이렇다면 이걸 모르고 아버지를 기다린 덕수는 그저 안습.[19] 이걸 마냥 이렇게만 보기도 그렇다.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덕수는 돈을 벌 수밖에 없었고, 특히 공부 잘 하는 남동생의 뒷바라지나 늙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덕수는 더욱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덕수는 남동생을 서울대에 보냈고, 여동생도 시집 잘 보낸 것을 보면 자신의 할 일도 잘 했고, 나름대로 그 시대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당장에 주위를 보면 본인이 학교를 못 나온 것은 둘째 치고, 동생이나 자식 학비까지 못 대줘 줄줄이 학교를 못 나온 사람도 많다. 덕수가 자신의 인생만 챙겼다면 덕수 본인은 영화에서 보다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동생들은 지못미..[20] 이때 심하게 우는 어머니를 힐끗 보는데, 이장면은 두번 사용됐다. 덕수가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과 대화하는데, 바로 전에는 흰 와이셔츠를 입고 어머니를 쳐다보다 바로 다음장면에서는 파란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있다. 아무래도 감독의 실수거나 장면 부족등이 원인인듯 하다.[21] 이때 전소미가 살짝 나온다.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다 이만기가 이기자 일어서서 환호하는 장면.[22] 그도 그런게 달구는 부산사람이다(...)[23] 소를 팔아서 그 돈으로 대학 보낸다고 하여 그렇다.[24] 여담으로 막순의 딸로 전소미가 살짝 등장한다.[25] 덕수는 헤어질 때 막순이의 소매를 잡고 있었기에, 찢어진 저고리 소매를 간직하고 있었다.[26] 자신의 엄마도 과부이므로[27] 윤덕수는 베트남에서 남진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났기에 남진의 팬이 되었는데, 끝순의 남편은 헤어 스타일이며 눈매까지 나훈아를 빼다 박았다(...)[28] 정확히 따지면 신세계가 더 먼저 나왔다.[29] 끝순의 남편 역을 맡은 배우 성낙경은 영화 신세계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과 대립관계인 이중구의 수하이다. 째려보는 장면 자체가 배우개그[30] 황정민의 고모로 나오지만, 실제로 황정민보다 5살 어리며, 조카며느리인 김윤진보다 2살 어리다.[31] 여기서 대본에는 있지만 영화에는 안 나오는 대사가 있다. 덕수가 앙드레 김한테 "남자가 창피하게 여자 옷이나 만들다니, 안 쪽팔려요??"라고 물으니까, 앙드레 김이 "다음 세대에는 남녀가 평등한 시대가 올 거야."라고 말하면서 간다. 그리고 덕수가 혼잣말로 "아예 여자 대통령도 나온다고 하지??"라고 하면서 비웃는다. 실제로 여자 대통령이 탄생하지만 지금은…[32] 참고로 아들로 나온 황정민보다 3살 어리고 며느리 김윤진하고 동갑이다.[33] 가족들의 옷에 바느질로 나비와 꽃을 장식했는데, 이를 반영한 건지 영화의 시작에 덕수네 가족을 상징한 나비가 날아오고, 영화의 끝에 덕수 부부의 주위 담벼락에 앉아 있던 나비가 다시 날아간다.[34] 굳이 낙동강 방어전투가 아니여도 기타 전투에서 참전했지만 거기서 부상을 당해 전역했을수도 있다. [35] 정치인 김무성의 아들.[36] 선장은 직책일 뿐 아니라 상선사관의 계급 명칭이기도 하므로 두 번 기재[37] 라루 선장은 한국전쟁 이후 가톨릭 베네딕토 수도회에 입회하여 '마리너스'라는 이름(수도명)의 수도자가 되었으며, 평생 흥남 철수와 관련된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리너스 수사는 2001년에 선종했고, 사후에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마리너스 수사가 지내던 미국의 수도원이 2000년경 경영난으로 폐쇄되려던 것을,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에서 지원해서 복구했다고 한다.# 이 사연은 공지영 마리아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38] 현봉학의 남동생 현시학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 멤버 중 한 사람으로, 그 또한 윤영하급 유도탄 고속함의 7번함 함명(PKG-718 현시학)으로 이름이 쓰이고 있다. 맏형이 되는 현영학은 민중신학을 이끈 성직자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윤치호의 사위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장기려의 제자라는 점은 이 역을 맡은 배우에게도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게 되었다.[39] 조선소 이야기 중 돈을 모아 땅을 사고 땅 사진을 보여주며 이 땅에 조선소를 지어서 배를 만들테니 니들이 이 배를 사가면 된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정주영 회장은 1972년 울산 미포 바닷가 사진과 유조선 도면 사업계획서만 들고 조선소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한다[40] 그냥 고기만 먹고 있을 땐 일개 엑스트라로 보이지만, 빡쳐서 나갈 때 껴입은 점퍼 뒤에 이만기 이름을 비추는 장면이 있다(...).[41] 본명이 김봉남이다.[42] 전라도 사투리가 능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 유노윤호는 광주광역시 출신이다.[43] 좋게 말해서 그렇고, 실은 창법부터 무대 매너, 복장, 머리 모양까지 엘비스를 따라 했다. 라이벌이던 나훈아는 톰 존스를 외모로 따라 한 느낌이었고. 그런데 이게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 엘비스는 무시무시한 미남에 영화배우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미남에 영화에도 많이 나온 남진이니까 따라하는 것도 되었던 것이다.[44] 그리고 여동생의 결혼 자금 마련도 한몫 했다.[45] 일반적인 관점에서도 보면 이미 성사된 거래를 깨려면 가게를 사려는 측이 이미 지불한 돈(보통 계약금에 중도금까지 있다면...)을 두배로 환불 해줘야 하고 팔려는 측에게도 성사된 거래에서 확정된 매매가보다 더 많이 줘야 한다. 최소한 1.5배 이상의 액수가 들 것이다.[46] 따지고 보면 파독 광부와 베트남 파견 두 번을 간 사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단 덕수와 달리 대부분은 베트남에 파견되었다가 나중에 파독 광부로 갔다고 한다. 파독 광부 프로그램은 극중 덕수가 베트남을 다녀오고 난 후로도 계속되어 1980년 종료되었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에서는 베트남 갔다가 번 돈 도박으로 다 날려먹고 중동으로 간 사람이 나온다..[47] 게다가 이 발언 이후 지금은 폐지된 국기하강식을 부활시킨다는 논란도 있었다.[48] 국제시장의 몇몇 플롯을 쪼개어 이게 친미 영화라고까지 주장하는 정치병 도진 인식은 이번 칼럼의 백미이다. 애초에 미국이 박정희의 경제성장 전략을 굉장히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지원을 안 했다는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은 듯 하다. 그래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들을 파견한 것이고, 대일청구권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미 기자가 칼럼을 통해 스스로 정치색으로 평가했다는 걸 자랑스럽게 인증해서 더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49] 즉, 정치 코드를 맞춘 영화를 만들으라는 압력[50] 그걸 넘어서 몇 달 전 개봉한 <명량>의 뒤를 이어 한국 역사상 2번째로 성공한 영화가 되었다.[51] 전소미의 영어 풀네임[52] 이때까지만 해도 미군에서는 장병들에게 후진국에서는 병이 잘 옮는다면서 음식을 줄때 손에 직접 쥐어주지 말고 멀리서 던져주라고 교육을 시켰다. 인종차별이 일부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던 셈.[53] 태극기 휘날리며, 효자동 이발사, 하류인생, 포화속으로에서 등장.[54] 사실 D레이션도 허쉬에서 만든 거긴 하다(...) 그리고 D레이션은 군용 비상식량이라 일부러 맛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애들 줄 물건은 아니다. 참고로 D레이션의 생산은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종료되었고, 파생형인 트로피칼 바는 좀 더 먹을만 했으며 한국전쟁에서 주력으로 쓰인 것도 이쪽이다.[55] 최소 교사 월급의 5배 정도[56] 보잉 707은 707-320B가 아닌 이상 독일에서 한국으로 직항 태우기엔 항속거리가 부족하다. 그러나 냉전 시절 소련 영공 통과가 안 되어 유럽 노선도 앵커리지 국제공항을 거쳐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57] 독일에 사는 교민이 개인자격으로 현지 업체를 상대로 협상하여 조국의 광부와 간호사들을 초청해서 일하고는 있었다. 이것이 확장되어 1963년에 국가 대 국가로 협정맺게 된 것이다.[이때는] 주월외국군 중 한국군이 제일 많았다.[58]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추가 증파하고 싶다고 미국과 남베트남에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협상이 결렬되어 철수한 것이다.[59] 현재 사무실이나 학교에서 쓰는 용지는 새하얀 210x297mm A4용지가 기본인데, 당시에는 그보다 작은 국판(150ㅌ 210mm 국정교과서 크기)크기 또는 A4보다 작은 46배판 누런 갱지가 표준이었다. 스케치북은 A3정도 크기였고, 그 이상 되는 크기는 미술 전공자나 사용하는 크기였다. 두꺼운 종이라면 누런 마분지가 가장 흔했고 한 면이 하얗게 코팅된 두터운 종이는 상대적으로 비싸고 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