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문화
이 문서는 소련의 문화에 대해서 다룬다.
1. 언어
소비에트 연방의 언어 정책은 시기별로 차이가 많이 났는데, 크게 보면 초기의 민족어 평등 정책과 대(大)러시아 주의에 입각한 러시아어 동화 정책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소련의 초기 언어정책은 러시아 제국의 언어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의 문맹률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1879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9~49세 사이 전체 인구들 중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구는 24%에 불과했다.[1] 특히 농촌과 비러시아계 민족들의 문맹률 문제는 더욱 심했는데, 농촌은 인구의 19%, 중앙아시아의 경우 남성의 10%, 여성의 3%만이 문맹을 벗어난 상태였다.
일반 대중에게 공산주의와 혁명의 당위를 설파하려면 당연히 문맹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프롤레타리아니 공산 혁명이니 하는 복잡한 개념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초창기의 언어 보급 정책의 방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소련의 국부인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레닌은 자신부터가 순수한 러시아계 혈통과는 거리가 멀었고[2] 개별 민족의 자유에 우호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레닌의 사상은 언어 정책에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1.1. 민족어 평등 정책
1918년~1920년은 비러시아 민족에 대한 언어 교육의 평등권이 확립된 시기이다. 레닌은 문맹 퇴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언어 보급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어떤 언어도 국가 언어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선언하고, 모든 민족은 평등하다는 평등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언어 보급 정책의 핵심은 물론 학교였다. 학교 일선에서 민족어의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소련 영토에 산재한 다양한 언어들은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대단히 막장스러운 상황이었다. 혁명이 일어난 시점에서 약 130개 이상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추산되는데 반해 단 13개 언어만이 문어(文語)로서 기능하고 있었고, 19개 언어만이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족어의 표준화 정책 및 보급은 성공적이어서 1934년에는 무려 104개의 민족언어로 교과서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소련의 민족정책을 일컬어 '코레니자치야(коренизация)'라고 한다. 코레니자치야는 '토착화', '현지화'라는 뜻. 코레니자치야는 그 이전의 대(大)러시아주의 성향의 러시아 제국의 민족정책에 반대되는 정책이었다.
문자 개혁 또한 활발히 진행되어서, 문자가 없는 민족들과 쓸 문자가 없어 자신들 종교의 문자인 아랍 문자를 쓰는 민족에게는 슬라브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표기하기 힘든 문자인 키릴 문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자를 언어에 맞게 변형하여 제공하고, 고유의 문어 전통이 확립된 지역에는 그들의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키릴문자 대신 로마자를 보급한 이유는, 로마자가 익히기 쉽고 보다 국제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코민테른이 세계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고... 또한 로마자의 보급이 꼭 민족어 존중의 측면에서만 이루어진 건 아니라서, 당시 아랍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이슬람계 민족과 몽골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민족들의 경우 이를 계기로 소비에트 영향권 바깥의 외부 세력과 결탁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기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3] .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정권의 문맹 퇴치 정책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1897년 당시 문자 해독률은 24%에 불과했지만 1959년이 되면 97.9%에 이르게 된다.
1.2. 대러시아주의
이오시프 스탈린 이후 소비에트 정권은 일관되게 대러시아주의에 입각한 러시아어 동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1920년대 말에 '라티니자치야(Латинизация)'라는 이름으로 아랍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권(아제리어, 우즈베크어 등)에 라틴 문자를 보급하였고, 라틴 문자를 사용하던 언어들도 1939년경이 되면 키릴 문자로 죄다 전환한다. 그루지야어나 아르메니아어같이 고유의 문어 전통이 있는 언어나 독일어, 이디시어 같은 언어에는 그렇게까지 못 했지만 나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다른 지역에는 그냥 키릴 문자를 강요한다. 이런 식의 키릴 문자 강요는 상당수 민족언어에 문제를 일으켰는데, 비슬라브계 언어들의 경우 민족어의 음운구조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 키릴 문자로 언어를 표기함으로써 언어 사용에 심각한 문제점이 발생했다[4] .
1938년에는 비 러시아계 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의무가 되었다. 사실 1938년 쯤이면 민족언어의 보급과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별개로, 이미 러시아어의 상층언어 지위가 공고해진 상태였으므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각 가정에게 민족어 교육을 의무화하지 않고, 자녀에게 '''러시아어와 민족어 중 하나를 선택'''하여 배울 수 있게하는 정책을 발효했다. 얼핏 생각하면 선택권을 주면 민족어 교육 면에서 좋을 것 같지만 비러시아계 민족 또한 러시아어를 선호하게 되었다. 중앙어와 지방어가 병용되는 상황에서는 중앙권력이 강해질수록 중앙어 구사 능력이 계층의 척도가 되는 경향이 강하며, 소련처럼 중앙정부의 정책에 지방 공화국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고,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소련의 경제적 자원은 대부분 러시아에 있었다. 요컨대 러시아 민족이 주류로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소련 정부의 지배를 받는 이상 러시아어 구사 능력 없이는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힘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을 받는 청소년들이나, 그 청소년의 부모 세대로써는 '''당연히''' 러시아어 교육을 더 중시하게 된다. 전통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조부모세대는 오히려 민족어 교육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쉽지만, 교육 문제에서는 당연히 러시아어 구사자가 실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1968년에는 소련 교육과학 아카데미 산하에 민족학교에서의 러시아어 교육을 위한 연구소가 설립되어, 교과별 단어 수준 선정에서부터 교사 교육에 이르는 광범위한 러시아어 교육 및 교수법 연구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75년에는 모든 중등학교 이상에서 러시아어를 선택과목으로 채택하고, 1979년에는 '최소화'라는 슬로건 아래 러시아어 교육 정책이 유치원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러시아어 사용 장려 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어를 버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문학이나 언어 교육의 매개어는 여전히 민족어 비중이 높았고, 민족어 교육 시수도 그렇게 낮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타타르나 카자흐, 우즈벡, 키르기즈 같은 튀르크계를 주축으로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비동화 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사회/경제적 조건이 급변하기 시작하여 비동화그룹의 인구가 차츰 동화그룹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좀 더 구체적인 데이터를 살펴보자.
UM은 비동화 그룹으로 민족어만 사용, UB는 비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민족어를 제 1언어로, 러시아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B는 동화 이중언어그룹으로 러시아어를 제 1언어로 민족어를 제 2언어로 사용, AM은 동화그룹으로 러시아어만을 사용한다. 1970년대 이후 민족어만을 사용하는 비동화 그룹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들고 러시아어만을 사용하는 동화그룹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소련의 언어 정책은 소련 해체 이후에도 구 소련 국가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해당국의 모국어가 아닌 러시아어만으로 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고, 정치적으로도 민족 정체성과 직결되기때문에 예민한 문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5]
2. 종교
빠르면 18세기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 및 유럽 사회에서 국가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국교는 평화적이든 강제적이든 심각한 위신과 권력의 손실을 겪었다. 성직자 역시 일단 신분제 사회에서 전 계층을 어우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귀족이거나, 혹은 지배층에 속했으므로 시민혁명 등이 발생하면 일단 숙청 대상이 되었다. 구소련 이전의 러시아 제국의 경우, 영국의 성공회처럼 차르가 국교의 수장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는데, 각 지역색이 강한 정교회 특성상 거의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 있는 수준이었다. 모스크바 총주교(러시아 정교회 총주교) 또한 차르의 승인 하에 착좌하는 방식이었으므로 차르를 상대로 하는 투쟁이 발생하면 교회도 기존의 지배권력을 내려놓고 종교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탄압당하고 권력을 빼앗기는 과정이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것이 소련에서는 극단적으로 종교를 배척하는 무신론적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방법으로 구현되는 바람에, 소련 치하에서 정교회는 그야말로 대재앙을 맞았다.
소련 혁명 이전의 상황을 보면, 종교개혁이나 군주들과의 대립에서 많은 마찰을 겪은 가톨릭, 개신교와 달리, 러시아 정교회는 대대적으로 교회구조를 완전히 청산해야만 하는 중대한 사회적 폭발은 없었다. 이 덕분에 정교회는 기독교의 전통을 보존하고 수호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대신 시간이 쌓여오면서 '''부패''' 수준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교회는 각국의 교회가 거의 개별적인 총대주교 휘하에 속해 있는 구조였고, 만약에 교회가 군주의 권위에 굴복하거나 둘이 합을 맞춰버리면 개혁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농업국가에다 문맹이 태반인 러시아 제국 내의 백성들이야 그렇다 쳐도 정교회가 가진 심각한 부패와 세속화 문제는 당대 지식인이나 귀족들이 이미 공공연하게 인지하고 혐오했던 상태였다. 레프 톨스토이나 니콜라이 고골과 같은 많은 러시아 문호들의 문학 속에서 성직자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상태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혁명까지는 아니라도 백성들의 교육수준이 향상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정교회는 어떤 수단이었어도 시련을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7]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우선적으로 한 것은 종교에 의해 주도된 제도들의 부정과 종교, 무종교의 자유 보장이었다.
로마노프 왕조까지만 하더라도 관혼상제는 러시아 정교회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고 혼인의 경우 종교혼주의를 민법상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종교적 이유로 이교도간 혼인은 금지되고 가문간의 정략혼이 유행하였는데 볼셰비키는 이를 모두 청산하였다.
그러나 정교회에 관하여는 소련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이것은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대체로 사실이다. 명목적으로는 인정됐으나 종례 종교가 주관하는 제도들은 전부 철폐시켰고 이를 위반하는 성직자들은 잡혀갔다. 박해를 받던 러시아 정교회를 부흥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오시프 스탈린.
스탈린은 레닌, 트로츠키와 달리 일국사회주의, 즉 세계혁명이 아닌 단일 국가에서의 사회주의체제 구축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는 마르크스의 이론과도 반하는데 적백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타격으로 인해 차악으로써 취한 방향이었다. 따라서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러시아 민족적 모습을 지닌 러시아 정교회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신앙을 가질 것을 장려하였다.[8][9] 물론 스탈린 본인은 무신론자였다.
레닌은 "신을 말하는 자들은 어리석다." 라고 말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다.[10] 애초에 마르크스 부터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 했으며[11] , 공산주의의 주요 철학적 기반인 (변증법적) 유물론부터 관념론인 종교를 완전히 배격하는 이론이다. 소련은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러시아 정교회의 특권을 박탈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에서 정교회는 존속되었고[12] 헌법으로도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긴 했다.
다만 시기에 따라 종교 탄압의 강도의 차이는 있었는데, 레닌-스탈린 초기 시기까지는 종교에 대해 극심한 탄압을 자행하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대조국전쟁 초반 소련이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국가적 단합을 위해 잠시 정교회를 장려하기도 했다. 물론 정교회 이외에 개신교나 가톨릭 등 타 종파의 경우는 그런거 없었고[13] 목회자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을 감옥이나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괴롭히는 등 가혹한 핍박이 계속되었다. 또 존립을 허용한 정교회의 경우도 종교성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주일을 노동일로 정하거나(그것도 성찬예배 시간에 맞추어 노동을 부과하는 등의 술책으로 신자들이 종교의식에 가는 것까지 막는 경우도 많았다) 성직자들과 평신도의 접촉을 방해하기도 하고 교회가 운영하는 자선 기관을 폐쇄하거나 기독교 출판물의 발행을 금지하는 등 다양한 탄압책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영화 등의 일상적인 미디어에서 종교적인 표현이나 연출이 나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아무리 행정력이 강했던 소련이라도 개개인민의 신앙을 단속할 수는 없었고, 종교를 하나의 '문화'로 보는 시각이 흔했다. 대표적으로, 브레즈네프 집권 당시 공산권에서 대 히트를 친 코미디 영화 <<슈릭의 모험>> 시리즈는 종교적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한마디로 종교적 목적을 가진 표현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단 얘기.
성호 긋는 씬
이슬람-타타르 문화인 일부다처제와 처녀 납치, 명예 살인 등의 요소가 들어있다.
소련의 명작으로 꼽히는 영화 <스토커>에는 기독교 성화는 물론 여러 성경의 구절이 인용됐다.
소련의 종교활동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시대에 들어서서야 페레스트로이카가 실시되면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시작했다. 소련 말기의 종교 분포는 무신론 60%, 러시아 정교회 20%, 이슬람 10%. 개신교 7% 등이었는데 수치상으로만 그렇고 실제로는 과반 이상이 정교회 신자였다. 한 예로 소련 비밀경찰 KGB 간부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은 사실 정교회 교인이었고 그 외 수많은 소련 공산당 출신 정치인이 러시아 연방 건국 이후 정교회 신자임을 어필하며 정교회 신앙을 회복하는데 팔을 걷어 붙였다. 결국 소련 붕괴 후 집권당인 통합 러시아당과 주류 기득권이 주도하여 러시아 정교회를 다시 거의 준 국교화하는 데 성공했다.
2.1. 소련의 이슬람
소련에서는 이슬람 신학교를 딱 두 개만 허용하고 운영하였는데, 이는 이슬람 사회주의를 보급할 목적 겸 역사적 상징성을 홍보할 목적이 강했다. '''공교롭게도 소련의 영토 중에는 중세 초에 하디스 분류학이 발전했던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일대[14] 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힛 알 부카리"[15] 가 편찬된 부하라에는 역사적 상징성을 감안하여 전시용으로 이슬람 신학 대학교 운영되었고, 당시 투르키스탄 최대도시였던 타슈켄트에도 이슬람 신학교가 운영되었다. 이런 이슬람 신학교들은 소련 내 무슬림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목적 외에도, 제3세계의 이슬람 사회주의, 아랍 사회주의 세력과 소련 내 무슬림 학자들간의 교류와 홍보를 돕는 목적이 있었다.
물론 소련의 대 이슬람 유화정책은 무슬림 인구가 밀집한 중앙아시아나 볼가 강 일대에 한정되었고, 무슬림 인구 비율이 소수라서 봉기할 가능성이 적었던 지역[16] 에서는 이슬람도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탄압을 당했다.
3. 제복
매체에서 흔히 표현되는 공산주의 국가의 모습은 거의 전체주의나 파시즘적 특징을 지니며, 그 이미지는 열병식이나 퍼레이드를 즐기고 제복을 많이 지급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한다. 특히 소련은 존재할 당시에도 서방세계(서유럽이나 미국 등)의 국가들에 상당한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였으며 특유의 군사적인 이미지 때문에 지금도 소련식 제복은 세계적으로 나치 독일, 미합중국과 더불어 제복 상징성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소련은 초기에는 제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국가였다. 20세기 초반까지는 아직까지 관료 권위주의 문화가 지배하던 시대였으므로 유럽도 제복은 비교적 흔하게 사용했고 멋을 중시했는데, 동양(대한제국, 청나라 일본 등)에서조차 이런 서구식 제복뽕을 한 사발씩 들이키던 때이다. 그래서 소련의 경우는 당시 서양의 시대상으로서는 미국과 더불어[18]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본디 전근대 시기부터 제복이라는 것은 예복이나 다름이 없었고, 당연히 화려한 금자수 등이 사용되는 귀족적 상징으로 통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념 하에서는 상극이었다. 현대 중국 같은 공산주의 이념의 국가들이 인민복이나 기타 간소한 복제를 고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인데, 과거 부르주아, 귀족의 제국에서의 탈피를 국시로 건 소련에서도 당연한 이념적인 결론이었으므로 소련 공산당은 혁명을 완수한 이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내려오던 각종 전통을 완전히 단절시키면서 제국의 제복 또한 모조리 폐기했다. 물론 소련도 철도, 선박 등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본적인 분야의 제복들을 새로 제정하긴 했지만, 그것은 제국 시절의 것처럼 화려한 자수가 들어가 있다거나 멋드러진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초기 노농적군의 군복과 마찬가지로 농민이나 노동자의 작업복에서 채용한 복제에 간소한 계급장만 붙인 수준에 불과했다. 스탈린 하면 보통 회색이거나 백색의 원수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이것조차도 스탈린이 전시에 원수 계급을 받은 이후부터 입기 시작했다. 스탈린도 원래 인민복을 입었고 이는 레프 트로츠키 등 다른 정치인이나 기득권 인물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초기 각료나 정치인들이 입던 인민복도 정해진 공통적인 형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색만 맞춘다면 제복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 예전에도 인민의원(장관)같은 고위관료들은 단정한 인민복에 표식 정도만 단 옷을 제복처럼 입곤 했다. 단지 유럽처럼 계급장을 다는[19] 제복을 쓸 필요가 없는 소련은 제복을 제정하는 행위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데 초기 소련 정권에서는 사회주의 원칙에 따라 관등과 같은 계급이 없었으며 직책만 있었기 때문이다.[20] 그런데 소련 내부 사정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공무원의 제복 제정에 대한 문제는 외교무대에서 두드러지게 된다. 소련은 성립 초기에는 세계에서 비정통정부 취급이었고 열강들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끄는 국가도 아니었거니와 국제 왕따였다.[21] 당연히 처음에는 격식 딱딱 차리고 외교를 할 일도 거의 없었지만 소련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연합국의 일원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고, 결국 1941년에 소련 최고회의는 '소련 국외주재 외교공관 및 대표부(상주외교사절단)' 관등을 제정하게 된다. 이때는 국제법상의 형식만 갖춰 대사, 공사, 대리대사 수준의 계급만을 만들었고, 군대처럼 체계적으로 외무부의 관등을 나눈 것은 1943년에 제복을 제정하면서이다.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소련을 완전히 개조해버린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동안, 소련의 군복은 변경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나치 독일을 꺾으면서 소련이 제2세계의 수장,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설 것을 알았고, 당연히 그에 걸맞는 권위를 보이길 원했다. 소련군은 과거 열강이었던 러시아 제국의 영광, 위엄을 재현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군복들을 그에 맞춰 개정했다. 소련은 원래 군복도 러시아 제국과의 단절을 뜻하여 노동자의 작업복과 비슷한 형태로 간소하게 제정해 두었고, 계급장마저도 금빛이 번쩍이는 전통적인 견장을 최대한 지양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에 이르러(1943년)서는 러시아 제국식의 커다란 견장을 다시 도입하는 동시에 고전적인 수려한 예복들을 제정하기 시작했는데 소련의 제복정신도 여기서 시작한다.
소련은 외교관 제복의 제정 필요성을 금방 실감한다. 지금은 그냥 외교관들이 평범한 정장만 입고도 회담을 잘만 하지만 20세기 초반에만 해도 테일코트라든가 실크 햇은 공식석상에서 필수적인 복장 예절에 속했다. 그러나 소련에서 프록 코트나 실크 햇은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착용하는 것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에서 외교관 제복 제정에 관한 문제는,
'''이렇게 해결했다.'''1. 이제 국제적으로 나설 일도 많은데 부르주아 스타일은 불법이라 할 수 없다.
2.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스타일로 하자니 가오가 안 산다.
3. 그럼 일단 깔쌈하게 만들고 프롤레타리아의 기운이 오는 옷이라고 한다.
4. ????
5. 우왕ㅋ굳ㅋ
독소전쟁으로 흥이 깨져버린 소련은 제복뽕에 맛을 들이고 군복을 제외하고도 나치 독일이 했던 것과 '''똑같이''' 각종 정부부처의 공무원들까지도 제복을 입게 하는데에 열을 올렸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제복 문화는 세계적으로 사장되고 있었는데, 얘네들은 '''역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스탈린 시절에 소련은 제복의 천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국가가 되어버린다.[22]
철도, 선박 등의 기본적 분야의 제복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무원 제복들이 1943년에서 1953년까지의 10년 사이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제복들을 '스탈린식 제복'이라고 칭한다. 소련은 초기에(1943년) 제정한 외교관과 검찰제복의 경우에는 나름 금자수 등의 디자인도 공을 들이는 등 여러모로 장인정신을 보였지만 그 이후부터는 복붙 수준으로 구색만 맞추어 그냥 만들기 시작해서 많이 만들게 된다. 이것은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복이 딱히 필요없는 기관에까지도 제복을 제정하다보니 일어나는 문제였고, 소련 성립 초기부터(대략 1918년) 있었던 기존의 제복들도 군복처럼 특정 형식 아래 개정하려 했기 때문이다.[23] 이러다보니 당연히 제복들은 형식이 거의 동일했고 그냥 옷의 색깔만 다른 수준으로 찍혀나왔다. 그러다가 스탈린이 죽고 소련의 새 지도자가 된 게오르기 말렌코프는 1954년에 이 스탈린식 제복들을 전부 손보아 형태를 간략화하거나 혹은 폐기해버리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끝내 (심지어 지금 러시아 연방을 포함해 독립국가연합의 많은 국가들에게도) 강철의 대원수가 피워놓은 제복의 꽃은 지지 않았다. 말렌코프는 대부분의 제복을 폐지했으나 기존부터 있었거나(철도, 우편 등) 혹은 스탈린식 제복의 시작이 되었고 퀄리티가 잘 뽑혔던 검찰과 외교관 제복 정도는 폐지하지 않았고, 이것은 니키타 흐루쇼프 치세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에 많은 제복들은 차츰차츰 부활하기 시작했고,[24] 그 영향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나탈리아 포클론스카야 등이 입고 있는 러시아 연방의 검찰 제복은 소련의 1988년형 검찰 제복을 기원으로 하며, 기타 많은 독립국가연합 소속 국가들의 중앙행정기관 제복들도 마찬가지로 많은 개정이 있긴 했지만 원류가 소련 제복인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원래 정부기관이었다가 공기업 등이 되거나 민영화된 조직들, 이를테면 루스키줴데 등은 상황이 반대라 전통을 많이 상실했다. 여기도 제복이 거의 코레일 수준으로 잡탕이 된 상태.
소련의 특성상 군사조직이었던 국가안전위원회, 내무부와 그 휘하 조직인 국경군 등은 표에 없고, 소방과 경찰도 제외한다. 스탈린 시대 이후에 제정된 제복의 경우에도 제외한다. 예를 들어서 소련 법무부(Министерство юстиции СССР)의 경우 1971년에 제복이 제정되었으며, 소련 교육부(연방공화국계몽부)에서 학생제복 통일령을 내린 것도 스탈린 시대 이후이다. 국제조직(적십자 등)도 제외되어 있다. 소련 해체 시점까지, 그리고 모든 분야의 제복으로 범위를 늘린다면(소년단 등) 소련의 제복 종류는 위 표보다 훨씬 많아진다.
4. 문학
러시아 제국 시대와 비교하면 소련시대에는 문해율의 증가로 문학 작품을 즐기는 인구는 훨씬 더 증가했지만, 문학 작품을 쓰는 사람들은 훨씬 더 감소하였다. 러시아 제국 시대 말 번창했던 러시아 문학이 소련 시절 '''더 엄격해진 검열로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36] 혁명 당시 러시아에서 다른 나라로 망명한 작가들의 경우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에서 발표된 문학 작품들을 ''다 쓰레기''라고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다.[37] 물론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수준낮은 어용 작품만 있던 것은 아니고 소신있게 부조리에 저항하는 작품들도 꾸준히 발표되었다. 소설에서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막심 고리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시문학에서는 안나 아흐마토바,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등이 활약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소련이 러시아 시대 문학 자체를 중국의 문화대혁명 식으로 마구잡이로 탄압한 것은 아니고, 푸시킨이나 톨스토이 등 러시아 고전 문학 작품들은 소련인들에게 꾸준히 애독서로 사랑받았다.
5. 음악
러시아 문학이 소련의 검열로 직격탄을 맞았던 것과 다르게 음악은 검열에 의한 악영향이 훨씬 적었다. 당시 오늘날처럼 아이돌 댄스가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사가 없는 클래식이나 재즈 음악은 따로 무자비한 검열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서구 음악과 너무 흡사하다는 핑계로 비판이나 압박 등이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이마저도 각본가나 소설가 등이 처한 상황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소련 시절 활약한 유명한 작곡가로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유명한 피아니스트로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등등이 있다.
- 소련 등 제2세계 노래 모음 사이트. 영문 및 가사 지원 노래가 좋기로 유명하다. 여럿 문화 컨텐츠에서도 종종 활용 될 정도.
- 소련 음악하면 흔히 선전가요나 군가나 민요등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건 엄청난 오해로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어느정도 풀려서 재즈나 디스코, 록같은 음악이 성행했다. 유튜브 재생목록. 내래 인민의 락을 보여주갔어#s-4 항목에 잘 설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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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에서 라디오를 열심히 보급하고 음악 분야에 검열을 비교적 느슨하게 한 이유는 복지 차원도 있지만 정치 선전의 목적이 컸다. 물론 라디오에서 하루종일 정치 선전과 연설같은 것만 나오면 사람들이 라디오를 구입하기는 커녕 공짜로 줘도 받기 싫어했을테고, 이 때문에 소련 라디오 방송은 주로 듣기 좋은 음악을 계속 틀어주다가 중간중간에 뉴스나 정치 선전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라디오는 러시아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소수민족들에게 러시아어를 보급한다던가 혹은 지방 방언과 러시아어 표준어 사이의 간격을 줄여주는 역할도 수행했다. TV가 보급되기 이전에는 라디오가 방언을 약화시키고 표준어를 보급하는 첨병 역할을 한 점은 서유럽/남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6. 기타
-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의 축제로 여긴 올림픽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이르러서는 국격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냉전시기 체제 선전) 깨닫고 올림픽 등의 국제대회에 파견할 선수단을 신경써서 준비하고 국가적으로 엘리트 체육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물론 기본적으로 소련은 인민복지와 문화증진 차원에서의 체육을 많이 장려했고 스탈린 시절부터 노동과 국방을 위한 준비 같은 체력장 시스템을 도입해 인민의 체력관리에 주목했다.[38] 생활스포츠 수준도 높은 편이었으며, 도시에도 수영장이나 체육관, 운동장 같은 기본시설을 중요시하여 반드시 지었다. 이런 소련의 영향으로 지금도 러시아인들은 대체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데, 학교에서도 중시하는데다 많은 대학교에서도 체육이 중요 과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예체능을 경시하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곤 한다.[39] 스포츠에서 소련은 굉장히 선전한 편인데, 올림픽의 경우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이 각각 자국 홈에서 1위를 해본 것 말고는 미국의 1위 자리를 뺏어본건 소련, 독립국가연합뿐이었다. (6번,1번)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에도 소련의 기록이 체조, 레슬링, 역도, 카누, 배구, 핸드볼에서 아직도 1위 기록을 하고있다. 참고. 네이버 하계올림픽 우승국 참고
- 영화관련 인프라가 잘 구축되어있었다. 이는 소련 공산당이 영화를 이데올로기 설파의 첨병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문맹률이 높았던 러시아의 사정상 교육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문자보다는 보고만 있어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영상매체가 이념을 설파하는데 적격으로 여겨졌다.[40] 그리고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보급 또한 신경을 써서, 당대 세계 영화관의 절반 이상이 소련에 위치했을 정도로 숫자가 어마무시했다. 소련의 모든 도시에는 영화관이 한두곳 정도는 갖추어져 있었으며, 작은 시골 깡촌마을에도 도서관은 없었을지언정 영화관만은 꼭 있을 정도로 흔했다. 그 덕택에 1인당 영화관람 횟수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TV가 어느정도 보급된 1970년대에도 연간 영화관람객수가 50억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그 만큼 영화관수가 많았던데다가 영화표값도 쌌기 때문에[41] 부담없이 여가를 보낼수있는 수단으로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붕괴 이후로 영화관들이 경제난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로 문을 닫으면서 이러한 인프라는 죄다 날아가버렸다. 그나마 2000년대 이후로 추세가 반전되었지만 영화관수는 소련 시절에 비하면 한참 못미친다.
- 연극 , 발레 등과 같은 '무대예술'의 초강대국 중 하나였으며 지금의 러시아까지 이어진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안톤 체호프 등 전세계 연극계에 한 획을 그은 위인들이 많이 있으며, 현재에도 연극 관련 교육과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다. 발레 또한 소련 시절부터 현재 러시아까지 발레단들 하면 세계구급 발레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공산주의 국가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TV광고가 활발히 제작되었고 광고시장도 제법 컸다고 한다. 1967년부터 TV광고가 도입되었는데 네덜란드가 비슷한 시기에 TV광고가 시작되었고 북유럽 왕국들에 비하면 TV광고 도입시기가 월등히 빨랐다. 물론 아무시간에 광고를 방영하는건 아니고 특정시간에 한해 광고를 묶어 편성했다.[42] 다만 이들 광고중에서 보존되어있는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한다. 중국에서 1978년에 tv광고가 도입되고 북한에서 2009년에 도입된것에 비하면 월등히 빠르기는 했다. https://russiafocus.co.kr/opinion/2017/06/06/soryeoni-jonjaehajido-anhneun-sangpumeul-gwanggohan-iyu_777282 물론 이때는 상품의 가짓수가 몇종류 정도였던데다가 질좋은 상품은 빨리 매진되는것이 당연시되었고, 생산되지 않은 제품들도 광고를 내보내다보니까 소련 인민들에게 광고란 질 나쁜 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서 광고 효과는 적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된것은 1980년대 중후반의 고르바초프때 와서부터였다.
- 러시아는 아니지만, 라트비아 SSR과 에스토니아 SSR[43] 에서 제작된 광고가 한 때 유튜브에서 컬트적 인기를 끌기도 했다. 다만 저작권 문제로 인해 현재는 전부 삭제되었다. Harry Egipt란 감독이 돈맛을 알았는지 유튜브에 있는 자기 작품들을 모두 지우도록 한 뒤 DVD로 유료 판매하고 있다.(링크)
- 껌이 1970년대 초반까지 생산되지 않았고 껌이 있더라도 죄다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못 청소년들이 관광객들에게 껌 좀 달라고 구걸을 해대는 웃지못한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 돈에 깨인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서 돈벌이하는데 쓰이기도 했다는 후문. 다행히도 1970년대 중반부터 껌이 생산되면서 이런 풍경은 사라졌다나(...)
- 의외로 복권산업이 활성화된 국가였다. 원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사행성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복권이 금지되었지만 이후로 소련이 내전상태에 빠지면서 재정상황이 말이 아니었던지라 1921년부터 다시 발행을 시작했던 것, 이후로 일시적으로 발행하는 수준이었다가 1950년대 후반부터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복권이 생기기 시작했고, 소련에서 카지노같은것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도박수요가 복권으로 몰려들어서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급으로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정기복권 발행 초창기에는 주로 자동차를 우승상품으로 주는 복권이 인기였고, 이외에도 냉장고나 소정의 현금, 예술상품을 복권당첨상품으로 내거는 복권도 있었다. 참고로 로또 형식의 복권은 1970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44] 이처럼 복권산업이 활성화되어있다보니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열렸을때 재원의 절반 가량을 복권판매로 충당했다. 다만 복권 1등에 당첨되었다고 수십억대 자산가가 되는건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몇년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을 받았고 간혹 복권을 다발로 사서 십여년치 급여에 달하는 금액을 받아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소련시절 최대 당첨금은 1985년도의 6만 루블로 40년치 급여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다. 일정한 수준의 금액을 현찰로 받거나, 혹은 자동차, 가전제품 같은 현물로 지급했다. 1982년작 영화인 스포츠로또82(Спортлото-82)라는 코미디 영화도 제작되어서 크게 흥행한것을 보면 당시 소련에서 복권이 서민들의 소소한 여흥거리라는것을 알수있다. 참고로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돈으로 받기 보다는 자동차를 선택했다고 한다.
- 미국에 비해 경제력이 뒤쳐졌자고는 하지만 어쨌든 인구 대부분이 중산층이라서 구매력이 있던것에 걸맞지 않게 자동차 보급률이 비교적 뒤떨어졌던 편이라서 같은 공산권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에 비해서도 후달리는 자동차 보급률을 자랑했다고 한다. 이는 소련 자체의 자동차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던것과 관련이 있었다. 스탈린 시절이야 말할것도 없는 수준이고 흐루쇼프 이후로 자동차 생산량이 증가하는 추세였다고는 하지만 연간 생산량이 20만대를 겨우 넘기던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련내 자가용 수요를 감당하기에 터무니없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1960년대 후반에 라다가 설립되면서 자가용의 생산량이 연간 200만대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수요를 감당할수 있는 수준으로 늘어났기는 했지만 자동차 자체의 가격은 자동차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가장 싼 경차인 자포로저츠의 경우에는 1~2년치 봉급 수준인지라 일반인들도 그럭저럭 탈수있는 수준이기는 하나, 중형차인 라다 쥐굴리는 3~4년치 봉급, 대형차인 가즈 볼가는 구입하려면 5~6년치 봉급에 해당되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이 평범하게 구입하긴 힘들었다.[45] 사실 소련인들의 평균 저축률을 감안하면 보급이 안될 정도는 결코 아니었는데[46] 그럼에도 보급이 늦어졌던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청을 한 뒤 몇년 정도 순번을 기다려야 했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자가용의 보급이 늦어지는것은 당연지사였고 자가용이 완전히 대중화 된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공산주의 유머에서 자가용 1대를 구할려면 10년씩이나 걸린다는 식의 농담이 나오는것도 실제로도 어느정도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차를 빨리 구하고싶은 사람은 보통은 중고차를 구입해야했고, 소련 당대에 중고차 매매가 엄청나게 활성화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복권 당첨으로도 자동차를 받을 수 있었는데, 이 경우 순번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있어서 대부분의 당첨자들은 돈보다는 자동차를 받았다.
- 다만 오토바이는 일찍히 대중화되어있어서 1950년대 이래로 서민들의 교통수단 취급받았다.
- 소비에트 대백과사전을 펴내기도 했으며, 각 공화국별로도 백과사전을 편찬하였다.
- 주거문화의 경우에는 아파트가 주류였는데 시골이나 중소도시의 경우에는 당연히 단독주택에서 살았지만 주요 대도시나 신도시의 경우에는 아파트가 지배적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는 고무닐깐(공용아파트)가 지배적이라서 한 가정 당 방 하나를 쓰는것이 일반적이었지만[47] 흐루쇼프 이후로는 한 가구에 아파트 1호가 기본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아파트 참고.
- 소련의 외식문화나 간식에 대해서 얘기할때 아나스타스 미코얀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미코얀은 소련에서나 러시아와 아르메니아에서나 줄을 잘 선 정치인으로 유명하지만 1930년대에 무역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먹을거리 생산시설들을 외국으로부터 들여놓았고, 소련에 이미 잘 먹어왔던 음식 말고도 다른 음식들도 소련에 많이 도입했기때문이다. 1930년대 이전에는 소련에서 생소한 간식거리였던 도넛과 햄버거, 아침식사용 시리얼, 팝콘, 토마토 주스를 소련에 소개시키며 생산을 시작시켰으며 아이스크림 생산시설도 현대화시키면서 대량생산시스템을 확립시켜놓은건 물론 급식시스템도 확립시켰으며 요리책도 손수 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2차 세계대전만 아니었으면 맥도날드 이전에 미코얀 버거라는 체인점이 나왔을것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이며 스탈린도 미코얀을 보고 당신은 공산주의보다 아이스크림에 더 관심이 많다며 농담했을 정도였다. 미코얀이 들여놓은 급식시스템이나 요리책은 1980년대까지도 소련에 지대하게 영향을 끼쳐왔으며 소련 붕괴 이후로도 구 소련 15개국에서도 마코얀이 남겨놓은 유산이 지대하게 남아있다. 여담으로 그의 동생 아르툠 미코얀은 군용 항공기 설계국 미그의 창시자다.
- 라디오나 전축은 주로 라트비아에서 생산되었으며, 치즈나 버터, 초콜릿, 맥주 중에서 고급품은 주로 리투아니아에서, 홍차는 주로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 생산되었다. 러시아인들의 즐겨마시는 홍차의 경우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만 해도 계속 중국에서 수입하다가 1900년대 초 들어서야 조지아에서 고품질의 차를 대량 재배하는데 간신히 성공하였는데, 이 덕분에 소련에서 차를 어느정도 자급할 수 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러시아와 주변국에서는 조지아산 홍차, 리투아니아산 버터의 수요가 많은 편이지만 라트비아에서 라디오/전축을 만들던 Audiotehnika사의 경우는 소련 해체 이후 일본산 가전제품에 밀려 타 업종으로 변경을 거듭하다가 오늘날에는 수입 오디오 도매업체(...)로 업종을 변경했다.
- 66 ~ 74MHz의 OIRT FM이라는 별도의 FM대역이 있다.
- 흐루쇼프 이후로 직장생활에 여유로움이 넘쳤던 만큼 독서문화가 매우 잘 발달되어있었다. 문제는 서점에서 파는 책 자체는 가격이 싼데 사람들이 선호한 소설책은 일찌감찌 매진 되어서 구하기 쉽지 않을때가 많다는 것(...). 이럴때는 시장에 가서 비싼돈 주고 사야했다나 뭐라나...
- 1960년대 소련인들이 상상한 2017년의 미래상. 중간에 제국주의자들이 기상 조절을 통해 토네이도를 만들어 소련의 해안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의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싶다.
[1] Kaiser(1994), Lewis(1972)[2] 추바시(튀르크계)+칼미크(몽골계)+유대계+러시아계 혼혈이다.[3] 이 당시 사용한 로마자들을 일명 'Soviet Latin'이라고 하는데, 현재까지 유니코드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Proposal은 올라왔는데 몇 년 째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소식. 당시 로마자 표기법이 제정되었거나 프로젝트가 진행된 언어들의 목록은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있다. [4] 키릴 문자화 당시 같은 음운도 언어에 따라 다른 글자를 할당하여 일부러 이들이 뭉치는 걸 막았다는 썰이 있다.[5] 이상 소비에트의 언어정책에 대한 내용은 《유승만, 소비에트 언어정책의 이론과 실제, 러시아연구 Vol.18 No.2》을 참고하였음.[6]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1990년대 러시아에서 종교의 자유가 회복된 뒤 재건되었다.[7]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노골적으로 차르의 전제군주정을 옹호하고 개혁을 반대 하였으며 그나마 관심을 갖는 것도" 교회 첨탑 꼭지점에 천사가 몇 명이나 앉을까?" 같은 한심한 논쟁이나 하였다. 또한 기득권 회복을 위해서 외세와 결탁하는 등 교회 부패에 대한 비판은 심했다.[8] http://m.pressian.com/m/m_article/?no=178119#08gq[9]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인터뷰[10]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주도적으로 민중을 이끈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폰(Георгий Гапон)'에게 감명을 받은 레닌은 국내로 돌아와 그와 면담했지만, 가폰이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둥, '사제로써 해야 할 소임' 같은 이야기만 꺼내자 곧 관심을 끊게 된다.[11] 하지만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박해할 것 까지는 없다고 하였다.[12] 소련령에 남아서 활동하던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로 망명해서 활동하던 러시아 정교회와 구분되어 "살아있는 교회"로 불렸다.[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명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도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제수용소에서 혹사당하는 동료가 등장한다.[14] 원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는 불교나 마니교도들이 운영하던 종교시설 겸 학교들이 많았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면서 원래 있던 수도시설들이 중세 이슬람 대학교로 개조되었다. 그 때문에 하디스 분류학이 정작 아라비아 반도나 바그다드보다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있던 중앙아시아에서 발전했던 것[15] 이슬람 순니파에서 가장 권위있는 하디스 편집본[16] 이를테면 립카 타타르인들이 사는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일대[17] 좌측부터 공훈광부(почётный шахтёр), 석탄산업부 관료, 석탄산업부 고위관료(예복), 국가 광업기술시찰국 고위관찰관, 광공업대학 학생(예복)이다.[18] 미국은 정부기관의 제복이 거의 사용되지 않은 건 소련과 비슷했지만, 군인의 정복은 유럽의 그것에 유사했다.[19] 많은 국가의 제복에서 화려한 자수 등의 장식은 계급장을 겸한다. 당연히 높으신 분이 될수록 화려해진다.[20] 이건 심지어 군대도 마찬가지라서 장교도 직책만 있지 계급은 없었다. 그러다가 1935년이 되어 기강이 무너지고 군대가 무너지고 나라가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계급제도를 다시 도입하게 된다.[21] 미국은 혁명 이후 РСФСР의 성립이 공표된 이후에도 신생국가의 시장을 노리고 사업 등의 목적으로 출국하려는 자국민들에게 '''그런 나라는 없다'''며 금지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징 때문에 나온 견제책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러시아 내전이 끝난 이후엔 인정한다.[22] 소련은 연합국의 무기대여법 물자에 '''금/은사'''를 대량으로 요구했다. 소련의 경공업 수준으로는 금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전쟁하고는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이런 터무니없는 부탁에 미국과 영국은 어이없어했지만, 그렇다고 안 들어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수천톤의 금/은사가 소련에 제공된다. 사실 소련의 제복들이 1943년을 기점으로 금자수 떡칠을 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만큼 풍족하게 물자를 받아서'''이다.[23]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관등이 제정되기 때문에 새 계급장 도입에 맞춰 옷들이 비슷한 구조로 고쳐지는 것이다. 소련은 관등을 군대 계급과 거의 동일한 형식으로 제정했기 때문에 대게 비슷하다. 즉 군대처럼 위관, 영관, 장성의 구분도 존재한다.[24] 일례로 상기 예시된 석탄산업부의 경우 1954년에 제복이 폐지되었으나 1976년에 부활한다.[25] 1946년 이전까지 소련 장관회의의 명칭은 '소련 인민위원회의'였고, 부(Министерство)는 인민위원부(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의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소련의 헌법상 '국가위원회(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омитет)' 또한 중앙행정기관에 속한다.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국가안전위원회가 대표적.[26] 제복은 1943년에 제정되었으나 외교관 관등의 최초 제정은 1941년이다.[27] 초기에는 육해공 전부를 관할하는 부서였지만, 모두 분리되어 사실상 철도부가 된다. 제복 자체는 1918년부터 존재했다.[28] 제지산업도 총괄한다. 산림경비대는 1935년부터 별도로 제복이 존재했다.[29] 제복의 최초 제정년도는 1924년으로 해운부와 동일한데 원래 같은 부처 소속이었다.[30] 제복의 최초 제정년도는 1924년이다.[31] 국립은행(Госбанк)등의 은행원도 동일하다. 소련의 은행은 전부 국영이었다.[32] 직업교육을 잘 받지 못한 노인계층, 직업전문학교 학생 등을 관리했던 부서. 제복이란 것은 교복을 말하는 것이다.[33] 우체국의 우정공무원도 동일하다. 제복도 1918년부터 존재했다.[34] 부는 아니고 '소련 장관회의 산하 지리 및 지도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геодезии и картографии при Совете министров СССР)이었다.[35] 현재의 아에로플로트이다. 제복의 최초 제정년도는 1926년이다.[36] 소련 건국 이후 러시아 문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혁명 당시 가족과 함께 망명 후 러시아계 미국인이 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인데, 그마저도 처음에 러시아어로 소설을 쓰다가 나중에는 영어로 글을 썼다.[37]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러시아 문학사>>를 저술한 드미트리 미르스키 같은 경우가 있다.[38] 물론 국민의 체력은 전시에는 전투력과 연관된다는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39] 당연히 시험으로 체조나 턱걸이 같은 걸 해야된다. 상황에 따라서는 외국인이면 빼주는데, 체육시험은 대부분의 한국학생이 통과하기 힘들다. 그래도 수업 자체는 수강해야 하는 편.[40] 러시아 영화 항목에도 나와있듯, 소련 영화는 세계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41] 1982년 기준 영화표 한 장은 50코페이카였다.[42] 사실 독일에서는 공영방송에 한해서지만 그 잔재가 남아있고 이탈리아나 네덜란드등도 하루에 몇번씩 광고를 묶어 편성하는 식이었다.(블록광고) 한국에서도 1981년부터 90년대 중반까지는 kbs1에서도이런식으로 광고를 편성했지만 1994년에 KBS 1TV의 광고가 폐지되면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43] 하지만 현재는 소련 당시에 광고를 내보냈던 채널(ETV)에서 광고를 내보내지 않고있는데 에스토니아라는 나라 자체가 인구가 140만명 안팍으로 적다보니, 새로 출범한 민영방송들이 적자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2002년에 광고가 폐지되었고 그 이후로는 현재는 국가예산으로 재원이 충당되고 있다.[44] 한국에서 2002년에나 발행되었던것이 러시아에서는 1970년부터 발행을 시작했다는 얘기다.[45] 그래서 당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은 대부분 당의 간부거나, 혹은 해외 근무로 돈을 많이 벌어 온 사람들이었다.[46] 사실 한국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고급차 1대가 진짜 아파트 1채 값에 맞먹는 금액이었고, 서민차로 출시한 대우 티코도 첫 출시 당시인 1991년에 약 300만원~400만원대였는데 당대 저임금 노동자들의 1년 봉급보다는 조금 높은 수준이니 그리 큰 차이가 난다고 보기는 힘들었다.[47] 혁명 직후 귀족들이 버리고 간 대주택 안에 여러 가구가 방을 배정받은 경우도 흔했다. 비교적 운이 좋았던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