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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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대군 시절
아버지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이듬해인 1418년에 세종이 왕위에 즉위하였지만 5세 무렵까지 사저에서 자랐다. 이유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세종의 즉위 이후 잇따른 국상 등으로 적절한 시기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인 문종은 일찍이 입궐했고, 바로 밑의 동생인 안평대군부터는 세종의 즉위 이후 출생하여 태어날 때부터 궐에서 자랐기에 그와 형제들의 가장 큰 차이를 사저에서 지낸 기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 곁에서 떨어져 뛰놀며 자란 것이 그의 탁월한 체력과 운동 신경, 자유분방한 성품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입궐한 후 1428년 대군에 봉작되었고, 진평대군(晉平大君)[1] → 함평대군[2] → 진양대군[3] 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최종적으로 받은 군호는 '''수양대군'''[4] . 그래서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수양대군이라 흔히 불리지만, 왕자 시절은 진양대군으로 불린 시절이 1433년 이래 12년간으로 제일 길었다. 수양으로 군호가 바뀐 건 한글 반포 1년 전인 1445년(세종 27년). 그리고 왕위에 오를 때까지 10년 동안, 수양대군으로 불리게 된다. 휘나 묘호보다도 왕자 시절의 군호가 더 유명한 임금.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1417년 태어나 1418년 세종 즉위 이후 1441년 세손이 태어날 때까지, 그는 조선 왕위계승 서열의 '''잠재적 2순위'''였다. 즉 1421년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위계승 서열의 절대적 1순위가 된 형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뜨거나 혹은 후계자가 될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그 다음 왕위는 세자의 형제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고, 그 경우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은 서열상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물론 형제계승의 경우 양녕대군-효령대군-충녕대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열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나, 병치레가 잦고 결혼 후 세자빈만 두번 바꾸고 후궁을 셋이나 (귄씨, 홍씨, 정씨)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14년 동안이나 아들을 보지 못한 형을 보면서, 적어도 '''수양대군 본인'''은 내심 왕좌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만 24세가 되던 1441년 세손(후일의 단종)이 태어나면서 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한참 혈기왕성하던 시기에 겪은 이 경험은 그의 이후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형과 동생 사이에서
성군에게서 나온 '''무인 기질의 문인 아들'''로 평가받지만 세조는 문(文)에도 뛰어났다. 활쏘기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책을 다 읽기 전에는 활을 잡지 않겠다'라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와 형이 워낙 걸출해서 상대적으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피리를 상당히 잘 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이 궁궐에 나타나 피리를 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문종과 같이 있던 수양대군이 "이 아우(수양대군 본인)의 피리 실력이 조선에서 제일이라 자부함에도 저리 잘 불지는 못합니다. 이는 필히 귀신이 부르고 있음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단순한 자뻑은 아니었는지, 악기를 연주하자 세종이 크게 칭찬했다는 실록의 내용도 있다.#
다만 수양의 재능을 곧이 곧대로 믿기도 어려운게 사실 수양의 재능을 칭찬하는 기사는 대부분 세조 실록에 나와있는 기록으로 이 기록을 믿는다면 13살짜리 애가 노루를 7마리나 잡는 등[5] 상식선에서 믿기 어려운 기록들이 너무 많다. 더불어 그 기록에 실록에서 가장 과정이 많은 총서부분에 그 실록중에서도 가장 왜곡이 많다는 세조실록이라는 것도 문제다. 오히려 세조실록 기록과는 반대로 세종실록에는 도리평에서 낙마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등[6] 세조실록에 나오는데로 엄청나게 무예에 뛰어났다고 보기는 사실 힘들다.
그러나 능력 측면에서 보자면 예술적 능력에서는 동생 안평대군도 뛰어났으며, 형 '''문종'''의 경우 아버지에 버금가는 완전체로 '''측우기와 화차를 설계한'''데다, 화포 전문가에 직접 진법을 만들 정도로 상당한 군사 전문가였다. 세종대왕이 와병 중일 때는 대리청정을 맡아서 국정을 잘 처리했을 뿐 아니라 세종 사후에도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의 글씨도 컴퓨터로 프린트한 듯 정갈하지만 글씨를 잘 쓰는건 형과 동생 안평도 마찬가지였고 안평은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워낙 명필로 유명했다. 여러 면에서 뛰어났지만 칼질 외에는 뭘 하든 형은 한 수 위에서 놀고, 동생들도 거기에 버금갔던 안습한 둘째.
그런데도 결국은 이 사람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꽤 존재감이 있는 입지를 굳힌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나 한비자가 극찬하는 이상적인 군주형에는 크게 미달했던 게 사실.
1.2.1. 애매한 위치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같은 반열에 놓는 견해도 일부 있으나, 몇 가지 면만 보더라도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을 잃게 된다.
최측근조차 필요하다면 가차없이 쫓아냈던 태종과는 달리 수양대군은 일방적으로 자신의 측근들을 감싸고 도는 경향이 몹시 강했다. 할아버지의 방식이나 한고조 유방의 토사구팽에 대해 몹시도 큰 반감을 품었던 게 원인이었다지만, 바로 이런 점이 그가 큰 차원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식견은 태종보다 훨씬 떨어졌음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면. 빈틈없이 숙청하여 깔끔하게 후환을 없애놓은 할아버지와는 달리 세조는 충분히 숙청을 할 수 있었음에도 공신들과의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연산군 시절에 사화가 터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고야 만다.
공신 숙청에 머뭇거릴만한 사정[7] 은 있었다지만, 그러한 상황은 다름아닌 그가 만든 것이다. 더군다나 정난공신 중에서도 양정은 말 한 번 잘못해서 세조에게 가차없이 숙청당한 걸 생각하면 세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신 숙청이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8][9]
설령 단종이 폐위되지 않고 병이나 사고로 자식도 없이 요절함으로써 세조가 쿠데타 없이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해도, 세조가 자기 측근들을 철저히 보호하는 건 실제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정통성 문제만 없었을 뿐, 오히려 세조에게 간언을 하던 양심적인 신하들(김종서, 사육신 등 실제 역사에서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단종의 충신들)만 숙청당하고 세조의 다른 실책들(특히 군사적 실책)도 실제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면서, 해당 대체역사의 세조는 증손자인 연산군처럼 정상적인 즉위를 통해 얻은 충분한 정통성을 각종 실책으로 날려먹은 암군이 되었을 것이다.[10]
세조는 형제가 모두 비범한 인물이었다. 증조부인 태조의 자식들은 이방과(정종)와 이방원(태종) 외에는 인물감이 없었고[11] 정종도 동생한테 양보하면서 스스로 물러났다. 조부 태종의 경우는 양녕대군이 도저히 옹호할 수 없을 만큼 문란했을 뿐더러, 충녕대군(세종)이 워낙 비범하여 충녕으로 세자를 바꿔도 반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능력있는 아들이 세자가 되는(택현론) 두 선례를 보면서 수양대군 스스로도 자신이 노력해 뛰어난 능력만 갖춘다면 한다면 세자가 될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12] 하지만 시기가 너무 안맞았다. 태조나 태종은 조선 초 불안했던 정국에 맞물려 명분보다는 실력으로 나설 수 있었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왕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세종 대부터 나라가 안정되고 그동안 후계자 문제 때문에 동생을 죽이고 형을 내치는 사례가 두 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세종은 자신의 대에서는 그런 비극을 끊으려고 노력했다.
1.2.2. 그저 그런 재능
거기에 시기도 시기지만 수양의 능력이 형제들 가운데 각별하게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진짜 능력이 각별하게 뛰어났던 인물은 큰형 문종으로 장자이면서 세종 못지않은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13] 수양이 잘한다는 무예 부분도 화포전문가에 직접 진법을 만들 정도로 상당한 군사전문가였다. 셋째 안평대군도 정무를 담당하는 과정 속에서 훌륭한 실력을 보였다. 세종의 다른 아들들도 모두 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체격은 뛰어났지만 능력 부분에서는 형과 동생보다 딱히 뛰어나지 않았다. 잘했다는 무예 부분도 개인적으로 무술을 잘했다 수준이지 지도자로서 군사를 다루는 능력은 왕자시절에는 두각을 드러낸 게 없었고 왕이 된 후에도 세조의 군제개편으로 조선군이 심각하게 약체화된 사실을 생각하면 그냥 군사적으로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후술할 여진족 정벌도 세조 본인의 군사적 무능함을 신숙주, 남이 등의 실무자들이 커버해준 것에 가깝다.[14] 결국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장자(문종)가 능력마저도 모든 부분에서 가장 뛰어나다보니 애초에 수양대군이 거기에 끼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두고두고 조선의 왕권이 신권에게 견제를 당하게 되는 큰 빌미를 제공해준 실책을 범하게 된다. 본인의 의도와는 반대로 후대에 소위 군약신강의 상황을 연출한 것.
1.3. 야심만만한 왕자
1.3.1. 공신 이유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때에는, 왕자들 가운데 문종 다음으로 공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했고, 석가모니의 공덕을 <석보상절>을 한글로 지어 아버지에게 바치자, 세종은 감동하여 <월인천강지곡>을 짓게 되었다. 특히 무예에 무척이나 능하여 무예에 비교적 서투른 형에게 우월감을 느꼈는데, 아버지의 전례를 생각해서 자신이 세자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듯.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왕자 시절의 대표적 일화를 소개하자면, 겨울날에 사냥을 갈 때 가벼운 여름옷 차림으로 사냥을 했다고 하며 일부러 늙고 병든 말을 골라타서 말이 지쳐서 넘어지려 하면 '''말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하는''' 묘기를 부왕과 형 앞에서 일부러 보여줬다고 한다. 자기 딴에는 그것이 멋지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소맷자락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양팔을 크게 휘둘러 소매를 펄럭거리며 걸어다녔다고 한다. 부왕 세종대왕은 이를 두고, "너 정도의 힘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런 옷을 입어야 될 거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걸 두고 '너는 힘이 세니까, 이런 행동에 불편한 옷을 입어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이 기록은 세조실록의 총서에나 나오는 거고 정작 세종실록에는 낙마한 기록이 그대로 나온다.
아무튼 문무겸전의 인상이 강하기 때문인지, 세종의 뒤를 이어 문약한 문종 대신에 문무를 겸비한 세조가 즉위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자주 나오는데, 사실 '''문종은 절대 문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문종이 학문을 중시하고 무예 면에서 세조보다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문종의 기록을 읽어보면 '''건장한 체격에 무예에도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마저도 확실치 않다. 문종이 유약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건 그저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몇 년만에 병사했다는 이유 하나 뿐이지, 그 외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절대 학문 하나에만 몰두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문종의 무예가 세조보다 딸렸다는 게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이는 개인적 무력만 보고 말한 것이지, 문종은 군사적 측면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이었다. 병법서인 '동국병감'이 쓰여진 건 문종의 지시였으며, '문종화차'라 불리는 화차의 개량도 문종이 '''직접''' 설계한 것이며 당시 중구난방이던 환도의 규격을 법으로 제정한 것 또한 문종이었다. 또한 진법에도 조예가 깊어서 고려 때의 진법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오위진법' 또한 문종 때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과학 기술과 화약에 박식하여 장영실의 도움을 받아 측우기도 제작하는 등 성리학에만 관심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15]
그리고 왕은 중앙이나 후방에서 백성과 군사들을 통치하고 지휘하는 역할이다. 학식과 정략이나 지혜가 풍부해야 하고 냉철함과 신료들의 의견을 듣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자리이다. 단순히 무예가 뛰어나 적들을 쓰러뜨리는 무장형 존재가 아니다.
1.3.2. 찬탈을 위한 처세
문종이 세종 후반기에서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결국 즉위 3년만에 사망한 것은, 당뇨가 심각하여 몸이 너무 쇠한 아버지 세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맡은데다 양친상을 너무 충실하게 지내는 등 무리했기 때문으로 원래는 병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종이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았던 데다, 문종마저 일찍 사망을 할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웃어른(대왕대비, 대비)이 없는 상태인데[16] 손자는 너무 어리므로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다.
게다가, 세종대왕은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장유유서의 순서를 거슬러 왕이 된 자신에 이르기까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약한 것을 매우 걱정하여, 장자 계승을 통해서 왕위 정통성을 강화하기를 절실하게 원했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에서 적장자 계승 원칙이 초반부터 그것도 왕실에서부터 계속 지켜지지 않는다면 조선이라는 국가의 명분과 건국 철학은 흐지부지되며 싸그리 무너지는 것이다. 세종은 왕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회 질서를 우려하여 문종에게 왕위를 승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문종은 아버지의 생각을 단지 자기 아들이 왕이 된다는 것 말고도 조선 전반에 걸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했지만, 수양대군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후계자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종도 병 치레가 잦았던 것 이외에는 국왕으로서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었고, 세종의 치세 마지막은 사실상 문종의 치세에 가까울 정도로 8년간의 대리청정으로 실무 경험도 풍부했다. 의외로 간과하는게 대리청정은 단순히 업무대행 정도가 아니라 '''세자를 사실상 다음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에 가깝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종이고 사도세자의 경우는 예외에 가깝다. 그리고 세종의 입장에서는 명분뿐만 아니라 능력을 보더라도 굳이 세자를 갈아치울 이유가 없었다. 세종은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대리청정을 위한 첨사원을 설치하고 남면하고 앉아 조회를 받으며 1품 이하 관리는 모두 신(臣)이라 칭하도록 하였다. 나중에는 아예 군사권까지 형이 전담하는 등 수양대군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정통성과 아버지의 신뢰를 받았다.
'''게다가 수양대군은 사극에서와는 다르게 문종이 살아있었던 시절에는 거의 존재감을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 정말 영화, 드라마에서처럼 만만해 보이는 형이었으면 조카인 단종에게 했듯이 형을 압박하여 옥좌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심지어 단종 즉위 때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올 정도로 저자세였다. 영화 관상이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오만방자하게 굴었다면 김종서와 대신들이나 단종이 수양대군을 살려둘 리는 없었다.[17] 다만, 아주 찍소리를 못낸 것은 아니어서 이미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을 몇 차례 말했던 바도 있고, 도첩증이 없어서 체포된 승려를 멋대로 풀어주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형인 문종이나 단종의 권위에 대놓고 도전하는 미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적어도 절대 남한테 자기 속을 보이다가 화를 자초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고, 그 반대로 수양대군의 성격은 자신 스스로를 숨기고 교활하고 음흉했다고 봐야한다.
앞에 언급한 사건들 역시 문종이 "형으로서 야심 많은 동생의 신세 한탄 한번 들어주지 뭐..." 정도로 관대하게 넘어가준 것이 컸다. 이때 문종이 작정하고 끝장내려 했으면 수양대군은 얄짤없이 숙청당했을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돌발 행동들은 자신의 세력 과시나 야심 표출보다는 적당히 사고를 쳐서 자신이 문종의 권위에 도전할 마음이 없다는 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인 양녕대군의 사례와 막강한 왕권을 구축하고 있었던 문종을 보면 상당히 설득력있다.
그리고 문종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울고불며 단종을 보필하는 김종서와 그외 대신들에게 우국 충정의 절대 충신인양 온갖 위선과 가식을 다 떨었는데 사실 수양대군의 충신 코스프레는 실제로 저렇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높다. 문종이 오래 살아 있었더라면, 수양대군은 자신과 형 사이의 관계만 생각했으면 됐다. 말하자면 자기가 계속 나대고 다녀도 형인 문종이 오케이 하고 넘어가면 늙어죽을 때까지 마음편하게 유유자적 보낼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아버지 항렬 대였던 세종과 양녕대군간의 관계를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사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져버렸다. 가시적으로 어린 조카와 야심만만한 삼촌이라는 관계로 설정될 수 있었고 여기서 수양대군이 조금만 야심을 보여도 바로 중신들의 견제를 받는 형국으로 발전되는 상황이었다. 다른 왕자들도 마찬가지다.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첫째 아들, 즉 장자이기 때문에 세종이 장자 계승을 바랐던 것과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그 이전에 단종이 즉위한 상황에서 함부로 야심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왕에 대한 역모인 것이다.
1.4. 문종 독살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문종의 종기 또한 수양대군이 키웠다는 말이 있다. 전순의라는 문종의 어의가 종기 치료법과는 정반대의 치료법을 쓰고, 활쏘기 등 혈기가 들끓는 활동을 삼가지 않게 하는 등으로 문종의 죽음을 재촉했다. 그래서 어의가 무능했냐고? 전혀 아니다. 그 유명한 <의방유취>의 공저자이며, 그가 지은 <식료찬요>[18] 에서는 지금 보아도 매우 선진적인 온실을 설명해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게 문종 독살설이며,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신에 올랐다는 것 때문에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조선 시대 임금의 치료를 전담하던 의관들은 왕이 사망하면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죄목으로 탄핵되는 것이 관례였다. 전순의와 함께 ‘의방유취’를 저술한 노중례도 중궁과 수양대군의 질병을 잘못 다스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위가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고, 효종(1619년 ~ 1659년)이 사망하자 의관 신가규는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단종 원년에 관례대로 의금부에서 전순의의 죄를 논했음에도 그에 대한 단죄는 그야말로 솜방망이였다.
단종 1년(1453년) 1월 4일 전순의, 조경지, 전인귀 등은 방면되고, 전순의는 내의원에 다시 출사한다. 탄핵된 지 채 7개월도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에 불복한 신하들은 방면과 내의원 출사가 불가하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절됐다. 그럼에도 상소가 끊이지 않아 전순의에 내린 처벌은 ‘내의원에 출사하지 말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특히 전순의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으로 가산을 몰수, 처자를 관노로 영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2년에는 고신과 과전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전순의는 완전히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19]
이후 전순의의 출세는 더욱 놀랍다. 세조 1년 계유정난과 더불어 개국공신이라 하여 원종공신 1등에 녹훈(상호군(上護君)으로 제수)되고 세조 2년에는 첨지중추원사로 임명된다. 세조 3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이 처벌되면서 적몰된 가산(家産)을 받았으며 세조 7년에 행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세조 10년에는 종 2품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반면, 여기에 반론이 존재한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없고, 본인의 스트레스 + 건강 악화에 따른 결과라는 것.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계유정난 편에서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삼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훙하여 다시 삼년상[20] 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고.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삼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항우장사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종 역시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으나 총 6년이나 상주 노릇을 이어서 한다는 건 누구라도 몸에 무리가 갈만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양자(전순의 등의 잘못된 처방 + 6년상의 강행군)가 모두 결합한 결과일 수 있다.
1.5. 계유정난과 즉위
(세종대왕이 재위하던) 왕자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냈다. 만약에, 문종이 오래 살았거나 하다못해 수렴청정할 어른이라도 있었다면 정변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고 태종 때의 이화처럼 어디까지나 종친의 수장으로 정치 생명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종의 죽음 후에는 그의 일반적인 정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세조는 한명회나 홍윤성, 권람 등을 심복으로 삼은 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못지 않게 야심찬 동생 안평대군도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물론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도 하나의 세력이다.
이렇게 3각 구도를 이뤄서 대치하던 상황에서, 엽기적이게도 안평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세력과 연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1대 1대 1의 구도가 이제는 1대 2의 구도가 되어버렸다. 사실 고명대신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평대군과 김종서, 황보인 세력이 더 강했다. 만약 고명대신-수양대군-안평대군의 과두제 구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단종이 친정을 하면서 기존 세력을 흡수, 와해시킬만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단종의 재위는 안정적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접근한다면 유력 종친인 안평대군은 스스로 과두제적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제 명을 재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 측에 가까웠던 소장파 세력들이 수양대군 세력에 암중 협력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실질적 저력으로 보면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그런 상황을 극적을 타개할 필요성이 느껴졌고, 급기야는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척살하고[21] 동생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몰아서 죽인 후에 정권을 잡았으며, 2년 뒤인 1455년 윤6월에 단종에게 선위받는 형식을 취해 조선 제7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일각에서는 "세력에서 뒤쳐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라고 너무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포장하지만 근거없는 얘기다. 할아버지 태종이 피바람을 일으키면서까지 금지한 사병을 기르고, 한명회 등을 심복으로 삼아 일을 추진한 것을 생각해보면 궁지에 몰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이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과 5번째 동생 금성대군이 꾀한 단종 복위 운동이 있었으나, 결국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단종도 죽음을 맞게 되어서 그의 권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아무리 능력있는 왕이었다고 하더라도, 피로 얼룩진 군주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사에서 친족을 가장 많이 죽였던 왕이다. 기본적으로 이복 형제들과 조카는 물론 동복 형제들까지도 죽였다. 폭군 연산군과도 비교가 안 된다. 광해군이 이복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했다고 인조반정이 발생한 것을 생각해보면 비교가 안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 꽤 친했다는 사실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성삼문은 정난공신으로 3등 공신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수충정난공신으로 사간원 좌사간 대부에 임명된다. 이 때는 1등공신 12명, 2등공신 11명, 3등공신 20명이다. 이렇게 43명이다. 또 세조가 즉위하는 좌익공신에도 3등 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떨거지들이 포함된 경우에는 머리수를 튀기기도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가지치기를 한 경우에는 1등 7명, 2등 12명, 3등 25명 해서 44명밖에 안된다. 어느 정도냐면 정인지가 2등공신이고, 정창손과 이징석 등이 3등공신이다.
성삼문이 단종의 입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수양대군을 지지했다는 말도 있지만, 같은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성원이 공신 책봉문을 쓰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숨어있다가 들키는 바람에 억지로 써야했다는 야사(남효온의 소설 육신전에 수록된 내용) 등을 보아 당시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소장파'들을 공범으로 만들기 위한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실제로 즉위 후에 또 한 번 공신을 책봉했는데 3등공신이 2천명 이상이다. 거기다가 박팽년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그를 회유하려고 많이 노력했다지만... 그 결과는 모두들 아는대로...
2. 치세
2.1. 즉위 당시
즉위했을 때 39세였다. 이는 건국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던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와 2대 정종(42세)에 이어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3번째로 고령이다. 4번째는 37세에 즉위한 형 문종(3살 터울)으로 이후 태종(34세), 광해군과 경종(33세)이 뒤따른다.
2.1.1. 법전 편찬과 공신의 부상
조선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명하여 시작하였다. 경국대전은 이미 세조 치세에 호전과 형전은 이미 완성이 되었으나 그 외 법전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느라 성종 즉위 후 15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반포될 수 있었다. 전 왕조 고려가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한 바가 한번도 없음을 고려해 보면, 한반도 왕조 최초의 국가 공인 성문 법전인 경국대전 편찬은 '''세조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무방하다.[22] 한편으로는 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여러가지 제도를 재정비해서 국가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그 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 폐지하고, 집현전도 문을 닫아버리고 대신 왕의 직속 기구인 예문관을 강화시켰는데, 이는 단종 복위 운동의 후폭풍이었다. 그래서 집현전의 기능이 예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성종 대에 부활되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이다.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반대급부로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탓에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게 된다. 이것은 정조의 경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돼서 오히려 친위 세력들이 권신이 되어 도리어 왕권을 제약하게 된 것이다.
2.1.2. 악법 폐지
폭군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민생에 꽤 관심이 깊었다.
세종대왕 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 고소 금지법"이 폐지가 된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금지법을 시행한 근본적인 이유는 지방 토호들을 견제하고 중앙 집권을 시행하기 위함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관들이 토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있을 정도로 토호들의 세력이 강했으며 중앙에서 나온 지방관을 트집 잡아 고소하는 경우가 허다했다.[23] 그러나 이 즈음에는 호족들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유향소를 폐지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을 쓰려한 것으로 보인다. 행차 때마다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은 것도 이때였다. 스스로 롤 모델로 삼은 당태종처럼.
그러나 민생은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부리는 측근 세력들인 한명회, 봉석주, 홍윤성 같은 이들의 패악질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가서 민심을 살피면 무엇하는가? 자신이 부리는 측근들의 온갖 부정 부패와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는데, 이들은 예사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았고,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쳐 냈어야, 이들의 수탈이 멈추고 민생이 좋아질텐데, 정작 이들의 비리를 다 눈감아 주면서 나가서 민심을 살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2.1.3. 정통성 취약과 그로 인한 결점
하지만 훈구대신들을 쳐낼 수 없었던 건 세조의 정당성이 너무나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단종이 후일의 연산군 급 막장이었다면 모를까 뭔가 평가를 하고 싶어도 할 건덕지가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어린 나이였던 걸 뚜렷한 명분도 없이 무리해서 쳐낸 것이라 세조는 정당성의 취약함에 늘상 시달려야 했으며[24]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지해주는 훈구파만이 유일한 버팀목이라 쳐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2.1.4. 진관 체제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 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 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경진북정庚辰北征)[25] ,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태종-세종대왕 시대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정해서정丁亥西征)
정해서정과 관련한 기록 일부의 내용은 이렇다. 토벌작전 당시 세조는 이만주가 몸을 숨겼을 가능성이 높은데 괜히 서둘렀다가 명나라에게 조선이 실수를 해서 놓쳤다는 트집을 잡힐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그렇기에 조선군이 출동에 신중을 기할 것을 명했다. 세조의 명대로 조선군은 진격속도를 늦춰 이만주의 소굴에 신중하게 진입하였는데 정작 당시 이만주는 본인의 병력을 타지로 원정보낸 상태였고 본인은 참모 이하 일족들과 함께 무방비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조선은 태종 시절부터 조선 국경에서 악행을 일삼던 이만주를 제거하는 대성과를 매우 손쉽게 거둘 수 있었다. 작전 종료후 강순은 장계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이만주 이하 2백명을 죽이고, 이후 명나라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으므로 철군합니다"였다.
다만 이러한 세조의 북방민족 강경책은 이전부터 수많은 여진족들이 자진해서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던 여진족 관리체계를 크게 뒤흔들었고[26] 또한 실전을 통해 다듬어진 정예 병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여 조선의 병력이 방치된 채 쇠퇴의 길을 걸었다는 한계도 보인다.[27] 덧붙여 진관체제는 지방 군사력 통제로 인한 부작용이 심했으며 적군의 대규모 침공에는 불리했던 허점이 많은 군사 체제였다.
2.1.5. 모범
자신 스스로의 꿈이자 정통성이 아닌 자신의 의지만으로 된 임금으로서의 책임감과 열정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 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술 파티를 아주 좋아했는데, 자신은 술은 좋아하나 한 여자만, 중전 정희왕후 윤씨만 끔찍히 사랑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신하들이 "전하, 이제는 후궁 좀 들이시는게 어떻겠사옵니까?" 하고 청하자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실제로 세조의 여자는 중전 정희왕후와, 후궁으로는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와 소용 박씨 뿐이다. 근빈(謹嬪) 박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본관이 다르다고 하니 박팽년의 누이일 가능성은 없다.[28] 대신 후궁이 적어서 그런지 자식도 적다.
2.1.6. 소용 박씨 일화
그런데 그 후궁들 중 소용(昭容) 박씨는 덕중이라는 이름의 여인인데 아들도 일찍 죽었고 중전인 정희왕후만 바라보는 애처가 세조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외로워진 그녀는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연달아 구애하다 사단을 낸다.[29] 임금의 후궁이 보낸 구애 편지[30] 에 기겁한 구성군이 2번 다 바로 달려가서 세조한테 보고하였고, 분노한 세조에 의해 편지를 배달한 내시 둘과 소용 박씨 모두 죽임을 당한다.[31] 또 기생관도 독특하여, 기생들을 아예 여자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기생들이 술자리에 나올 때는 아예 얼굴에 분칠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2.1.7. 기타 치적
교과서나 두산 백과, 위키 백과 등에 나오는 공식적인 주요 치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의정부의 정책 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시켰다.[32] 특히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6조의 권한이 세조 이후 크게 상승하였고, 귀신도 부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던 삼정승의 위세를 경계하여 도승지와 삼정승이 서로를 견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중국처럼 왕까지 유린할 수 있는 강력한 권신이 나타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 이시애의 난(1467년)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조선의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 국방력 신장과 신무기 개발에 지속적으로 힘써 호적(戶籍), 호패제(戶牌制)를 강화하고 최초의 조직적인 지방 군사 지휘 체계인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처음으로 방위 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군제(軍制)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을 설치했다.
- 북방 개척에 힘써 1460년(세조 6년) 북정(北征)을 단행, 외교에 매우 유능한 신숙주와 특출한 군사 능력과 특유의 잔인성(?)을 가진 홍윤성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을 토벌케하고, 1467년(세조 13년)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 남이, 어유소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33] 백성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2.1.7.1. 직전법 실시
세조 12년 경제 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현전직 관료에게 모두 사전(私田)와 급료를 지급하는 과전제를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 수입을 크게 늘렸다.
세조 이전까지는 은퇴, 퇴직한 사람과 그 유가족에게도 현직 관료와 똑같이 토지를 주었으나 이로 인해 조선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자 세조 12년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직전제를 밀어 붙였으며, 자신이 아끼고 비호하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만은 철저히 따르게 했다. 이때 전직 관료를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관료의 과부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도 폐지하였으며[34] 그 지급액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성종 대에 또다시 직전법의 단점을 시정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고 이 2번의 개혁 과정을 거치며 조선의 재정이 크게 안정화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조선의 재정이 불안해진 것은 세조가 자신의 쿠데타를 도운 공신들에게 공신전을 남발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을 따르게 했다고는 하지만, 남발한 공신전은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거두어지지 않고 조선의 경제력, 잠재성을 영구적으로 깎아먹고 말았음을 감안하면 이를 치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2.1.7.2. 잠실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왕비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농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훈민정음으로 번역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잠실(蠶室)이란 지명은 세조가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했다. 그때 누에를 키우는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고 한다.
2.1.7.3. 역대병요
즉위 전에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을 편찬했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 제도를 개혁했다.
1465년(세조 11년)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시행해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번역 활동에도 전념하여 여러 불경과 운회(韻會)를 직접 번역했다. 법전의 세분화로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은 기존 관습법을 주로 사용하던 전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조선이 중세 국가를 넘어 근세 국가로 평가받는 중요한 도약점이다.
2.1.7.4. 불교 관련
2.1.7.5. 면리제의 시작
- 면리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면리제는 한국의 땅과 마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연구하여 만든 지방 행정 체계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에도 우리 나라의 주요 행정 구역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2.1.7.6. 한글과 서적 보급 활성화
명실상부한 세조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정통성 면에서 세조는 왕위찬탈자라는 꼬리표가 언제나 따라붙으며 비판을 받는 군왕이지만 해당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용상에 앉을 자격이 있는 군주였다는 해석도 또한 가능하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세종대왕이지만 그 훈민정음, 즉 한글이 조선의 공용문자로 탄탄하게 자리잡도록 기반을 닦은 것은 세조였다. 조선이라는 왕국이 현대 한민족(대한민국/북한)에게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이 한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은 세조의 업적으로써 후대에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위해 창제된 것이긴 했으나 세종의 의도와는 달리 보급은 부진했고, 이러한 훈민정음이 조선팔도에 널리 보급된 것은 다름아닌 세조 치세에 들어서이다. 세조 이전에 훈민정음은 단순히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한 보조적인 문자의 역할을 했다면, 세조 시대 이후부터는 한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선의 공용문자의 위치로 올라서게 된다. 세종대왕의 소망을 이루어 준 인물이 왕위찬탈자이자 그의 아들이기도 한 세조였던 것이다. 세조 치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민족은 한국 고유의 문자를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세조 치세는 서적의 보급이 확산된 시기이기도 했다. 한명회와 권람, 신숙주가 지방의 서원들에 썩혀두던 서적들을 몰수해서 성균관의 도서관을 장려했으며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고대의 고조선과 고구려의 후손이라는 국가 의식, 민족 의식을 고양시켰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한글 갑인자인 '''갑인자병용한글활자'''를 만들게 하여 양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였다. 고려왕조 시대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인 직지심체요절은 시기상으로만 세계최초일 뿐 실제로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은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와 비교하여 전무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렇게 300여년이 지나 조선 세조 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킨 진정한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정비 등 일련의 편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밖에도 오륜록(五倫錄),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동국지도(東國地圖),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등의 편찬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특히 신미(승려) 등을 기용해서 훈민정음 번역 및 보급업무를 맡게했는데 그 결과로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전국에 유통되었고 세조가 직접 불경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특히 월인석보의 경우 최초의 한글 불경이자 최초로 한글 금속활자로 쓰여진 책이라는 의의가 있다.
이렇게 한글서적의 발행량이 늘어나기 시작되면서 한글이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2.1.7.7. 기타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빛나는 종묘제례악의 개념이 이때 바로잡히고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세조가 직접 기보법인 오음약보(五音略譜) 등을 창안하기도 했으며 대악후보와 같은 책을 통해 세조의 높은 음악적 치적을 살펴볼 수 있다.
-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대군 시절 세종대왕 대에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제조에 참여하였고, 이후 세조 시기에 정축자(丁丑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중 갑인자와 을해자는 조선 초기, 중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시대 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2.2. 철혈 통치
조선은 전제군주제 국가로서 왕권이 신권보다 강한 것이 지극히 정상인 시대였다. 이러한 전제군주제 특유의 철혈 통치는 세조 때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황제에게만 허용되는 원구단을 세워, 이전에는 정통제 몰래 실시하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행위도 대놓고 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도성 한복판에 큰 부지를 확보하여 불교 건축물인 원각사를 지었을 당시에는 신하들이 반발하지 않고 되려 좋은 기운이 감돈다는 찬사를 했을 정도로 세조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다.
사육신의 하위지는 세조가 추구하는 6조 직계제에 반대했다가 격노한 세조에게 사모 째로 머리를 잡힌 채 끌려나가기도 했다. 당시 세조는 그를 참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2.2.1. 술자리 일화
공신들도 예외가 없어서 대신의 수장 중 하나인 정인지도 세조에게 숱한 분노를 산 적이 있는데, 한 예로 연회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논하다가 정인지가 평양과 개성이 어째서 한양만 못한 도읍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풍수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갔다간 전하께서 잘 모르시니 못 알아들으실 겁니다."'''라고 말했다가 '''"이게 원로 대신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혼내주고 싶지만 술 취해서 그런 거니 한 번 봐준다"'''#[37][38] 라고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게다가 세조는 세종대왕, 소헌왕후, 문종, 의경세자의 장례에 깊이 관여하여 장지를 잡는데 일조하는 등 풍수지리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자존심과 권좌심이 높은 세조에게 "너 이거 모르지?" 라고 대놓고 무시했으니 취기에 눈이 돌아가 버린 것. 그 외에 "너" 라고 부르거나 말년에는 "상왕"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정인지 외에도 병조 판서를 지낸 이계전 역시 술 자리의 피해자다. 이 사람의 조카가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 그래서 사극 왕과 비에서 이개가 죽기 직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이계전을 쳐다보자 이계전이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인 이색이다. 술 자리에서 이계전이 세조에게 "술이 과한 듯하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권하자 격분하며 병조 판서의 머리를 붙잡고 사정없이 곤장을 친 뒤, 애정을 담은 행동이였다라는 식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실록의 원 표현은 이렇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세조 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16일 기사
야사에 나올 법할 스케일로 신하를 욕보인 이 이야기는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2.2.2. 강맹경과 권람
그의 철권 통치의 또 다른 희생자로는, 강맹경과 권람이 있는데 갓 영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우의정에 임명된 권람이 잔치를 벌이는 세조에게 '''"술을 마시고 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간했다가 세조가 분노하면서 '''"야, 우리가 술먹고 논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껏 내가 못마땅했다고 그런거냐?"''' 식으로 말했다. 경악한 두 대신은 허겁지겁 하면서 해명을 했으나, 세조는 이들을 갈아치워서 좌의정 신숙주를 영의정에 앉히고, 이인손을 우의정에 앉히니 강맹경과 권람이 정승에 임명된 지 고작 5일 만이었다. 역대 영의정 중 최단임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강맹경과 권람을 파직했음에도 녹봉만은 정승으로 일하던 때처럼 지급할 것을 명했고,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궐밖에서 엎드려 사례했는데 이에 마음에 약해진 세조가 그들을 불러 '''"경들이 옳은 말을 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켜주니 영의정 신숙주는 4일 만에 좌의정으로 돌아가 신기록을 갱신하고, 이인손도 우의정 자리를 내놔야 했다.[39]
심지어, 야사 용재총화에는 예문관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백성들의 고충을 느끼고 큰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이다.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 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때는 '''한여름'''이었다.[40]
이 외에도 신하들을 장난으로나 왕권에 도전할 시 구타하거나 욕보이는 일화는 꽤 많다. 신하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이 사례들은 모두 신하들이 함부로 왕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잡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2.2.3. 비판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한 삼정승은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냥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덜컥 날려버리고 며칠 만에 다시 원상 복귀 시키는 등의 행위는 다시 말해서 세조가 국가 통치 체제를 스스로 무시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신하들을 막 대한다고 왕권이 강해지는게 아니다. 저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무제와 당태종을 유난히 좋아했으며, 한 고조 유방과 송태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41] 유방의 경우는 공신을 멋대로 토사구팽시킨 인물이라 배울 게 없는 인물이라고 깠고, 송태조 조광윤은 뭔가 우유부단하고 화끈한 맛이 떨어지는 카리스마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 [42] 그래서 조광윤이 도끼 자루로 자기 공신을 깐 신하의 이빨들을 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양반 재위 기간 동안 자기가 화끈하게 결단한 것은 그게 유일하구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43]
다만 한고조 유방의 경우 신하들과의 의를 저버린 행동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했지만 정치적, 군사적인 능력은 꽤 칭송하였다. 1462년에 세조가 직접 저술한 병법서인 병장설 유장편 서문에서 직접 군사적인 측면에서 수양제를 비판하는 반면[44] 한고조는 띄웠다.
군사들을 다스릴 때 일일이 귀에다 대고 명(命)할 수 없기 때문에, 형명(形名)의 분수를 받들어 나아가고 물러남과 합치고 흩어짐을 미리 정하고, 싸움에 임할 때 한 가지 형세만을 항상 고수할 수 없기 때문에 변칙을 내어 새로운 명령을 기별해 통하고, 기회를 틈타 정도를 쓰거나 기계(奇計)를 쓰는 것이다. 만약 산천이 가로막혀 있으면 꿰뚫어보기 어렵고 100리 길에 군진이 잇달으면 말을 통기하기 어려우므로, 한 부대가 적의 공격을 받을지라도 일제히 대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병법을 아는 자는 고개를 숙이며 적합한 장수에게 군율을 맡기는데, 한나라 고조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반면에 병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군신을 믿지 못해 여러 군사들을 움켜쥐고 직접 다스리는데, 수나라 양제가 바로 그러한 제왕이었다. 병법가의 대요는 이것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마음으로 국가의 대계를 체득해서 사졸의 마음과 힘을 얻어 위기에 임해 적변을 제어하고 사방에서 승리를 얻는 방법과 같은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지 병법에 달려 있지 않다. 그렇기에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 유장편 희유제장 서문 중(세조)
2.2.4. 권람의 시
언젠가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를 올리자 '''"뭐? 유방? 공신을 파리 잡듯이 죽여버린 배울 게 없는 양반을 감히 나랑 비교해? 과인은 공신들이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이 발언만 보더라도 그의 체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세종과 문종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45] '''세조는 이 말대로 토사구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세조 최대의 실책으로 남은 것을 잘 생각해보자.'''[46]
2.2.5. 재정의 분리
아버지인 세종은 고려 시대의 분할적 재정 운용의 폐해를 문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왕실에서 쓸 돈은 왕실에서 걷고 개경부에서 필요한 돈은 개경부에서 걷는 방식. 때문에 고려 시대에는 중앙에도 세원을 파악하는 호부와 회계 출납 같은 거 해주는 삼사가 따로 있고 또 세금 걷는 건 일선에서 또 따로... 때문에 세종은 왕실 재정을 따로 안 챙기고 전부 중앙 재정으로 편입시켜서 현대와 같은 이른바 '국용전제'를 완성시켰다.
반면 세조는 절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조 산하에 내수사를 설치하여 다시 왕실 재정을 분리시켰다. 결국 쉽게 말해서 왕실을 위한 딴주머니를 찼다는 소리다. 아무튼 내수사는 고종 때까지 혁파됐다가 부활했다가 계속 반복되지만 중요한 것은, 세조 이후 왕실이 호조에 손 안벌리고 따로 왕실을 위해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관둔전이라는걸 설치해서 고려 시대와 똑같이 관청이 따로 자기들 경비를 세금으로 걷기 시작해서 결론적으로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고쳐놨던 조선의 재정 제도는 간단히 박살나버렸다. 이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이러한 분할 재정의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6년 독립협회 만민 공동회에도 재정 일원화는 중요하게 논의된 개혁안이었으니 뒤집어 보면 분할 재정이 조선 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내수사 자체가 세조 이전까지만 해도 있던 것으로[47] 세종 12년인 1430년에 궁중의 특수 물품을 조달하던 내수별좌를 내수소라 명칭으로 개칭한 이후 단종 때까지 기록이 있었으며 이때 당시에 내수소에 별도의 토지와 노비가 다수 배정되었는데, 특히 함경도에는 내수소 소속의 해척(海尺 : 해변 어부)·응사(鷹師 : 매 사냥꾼) 300호가 지정되어 있어 하나의 관서라기보다는 국왕 직할의 궁방이나 다름없었다.
2.2.6. 기타
다만 세조는 쿠데타 과정에서 대량학살 숙청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겉으로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정통성이 워낙 낮은 쿠데타였기 때문에 반정에 참가하지 않은 신하들을 계속 의심할 수 밖에 없는 불안한 처지였다. 대간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도 단순히 신하들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간의 힘을 키워주고 그들에게 매사의 옳고 그름을 논하게 하면 세조의 쿠데타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을 되새기고 공유할 신하들이 많아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느 정도 체제 안정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한 이후로도, 세조가 포섭했다고 생각했던 신하들 중에서도 계속 반정이나 이탈이 일어났다. 세조가 단순히 멍청해서 개인적인 취향만으로 반정공신들을 우대한게 아니라, 공신들을 숙청했다간 바로 세조에게 불만을 품은 다른 신하들의 쿠데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그의 불안한 정치적 입장의 한계도 컸다는 것이다. 아랫 문단에서 후술되듯이 실제로 세조 말년에는 반정공신들의 패악질이 세조 본인이 보기에도 도를 지나치게 커지고, 슬슬 공신들의 힘을 빼도 반정까지 일어나지 않을것 같다고 느꼈는지 구 공신들의 힘을 빼려는 시도도 했다. 그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 죽어버려서 묻힌 감이 크지만.
2.3. 왕족, 외척, 사림파의 등용
훈구 공신들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살인이나 월권행위가 심해지자 집권 중반 이후 세조는 나름 공신 견제를 위해 왕족과 왕실 외척, 그리고 사림파를 등용한다. 왕실 인사로는 구성군 준, 외척으로는 남이, 사림파로는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 그밖에 정몽주의 문하생[48] 등을 새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권한은 세조가 죽기 전까지 성장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이나 구성군 등은 훈구 공신들의 견제를 받아 제거된다. 그러나 사림파는 이 당시에는 훈구세력과 크게 부딛치지 않아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김종직은 세조에게 등용되었지만 세조는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긴 것 같다. 그가 김종직을 직접 만나보고는 완고하여 쓸모 없는 선비같다는 말을 하여 김종직이 그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설이 있다. 1463년(세조 9년) 여름 김종직이 그의 친불교 정책에 반발하여 불사(佛事)를 하지 말 것을 간언하다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464년(세조 10) 7월 김종직은 다시 세조에게 실무 잡학을 장려한다고 질타하여 그는 이때 크게 분노하였다. 김종직은 그에게 '사학과 시학은 본래 유자의 일입니다만 나머지는 잡학(雜學)이고 미신인데 문신에게 힘써 배워 능통하게 하라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라는 취지의 상소를 올렸으나 세조는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종직은 끝까지 비슷한 내용의 상소를 올려 그의 분노를 샀다.
"김종직은 내가 잡학을 장려한 까닭을 알 것인데, 참으로 경박하다"
세조는 분노했지만 김종직이 사림의 지도자였고, 지나치게 강성해진 훈구 공신들을 내심 두려워하여 김종직을 내치거나 크게 처벌하지는 않았다. 파직하기는 했다만.
2.4. 공신 우대 정책
2.4.1. 공신과 외척의 급부상
신하들을 '''더''' 죽이는 것만은 그만하자는 주의였는듯 하다.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 이상 죽여댔다간 능력 있는 인재들이 없어서였던 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당시 실학에 포함되던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의외로 살아남았고, 한명회와 신숙주도 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술에 과하게 취해서 세조 앞에서 세조를 '너'나 '상왕'으로 부르거나 신하들과 술 파티 때 그때 당시의 야자타임 놀이(?)를 하던 중 하면 안 될 말 실수를 ("이렇게 노는 게 좋으면 왕 때려쳐! ㅋㅋㅋㅋ" 이런 식으로 말 했다고)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마인드로 바뀌었던 데다 계유정난 때 목숨을 걸고 자신을 끝까지 따라준 킹메이커들인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 혜택을 마구 퍼주는 바람에''' (가장 문제가 심각한 것이 바로 이 토지 혜택 부분으로 '''세조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하였는데 이 공신전은 법제상으로는 몇대 지나고나면 회수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회수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세조 이후로는 지속적으로 조선의 고질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예종, 성종 때 의도치 않게 신권이 더 강해지게 되는데, 이는 핵심 공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외척 세력들과 공신 세력들의 힘을 최대한 억눌러서 모조리 토사구팽시키고 후대까지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그 외에도 다른 공신인 권람, 구치관, 정창손, 이사철, 김질, 박원형, 박종우 등도 큰 벼슬에 제수했다.
또한 외척들도 후하게 대했는데 자신의 아내인 정희왕후의 집안 형제였던 윤사분, 윤사흔 형제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고 또 한명회와도 사돈을 맺었으며 정인지와도 사돈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어머니의 외척인 심회에게도 정승 자리를 주었을 정도다. 그리고 예종의 장인인 한백륜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고 정희왕후의 인척인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등과 성봉조 등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다. 그 외에도 왕실의 인척인 윤사로와 윤필상 등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인수대비의 사촌오라버니인 한치형과 역시 왕실의 인척인 신승선에게도 큰 벼슬을 주었다. '''그리고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양정인데, 왜 죽었는지는 문서 참조.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의 의리를 중요시여겨 잦은 술 파티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왕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직접 가담자는 죽이고 연좌제로 친족을 노비로 삼는데, 세조는 그 노비들을 공신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김 장관댁 며느리가 그렇게 예쁜데 나 주라." "그럼 딸은 내가 가져간다?" 이게 약탈나온 도적떼가 아니라 실록에 기록된 공신들의 대화다. 물론 역적의 친족을 노비로 삼으면 노비들은 공신들에게 분배되는게 비단 세조 시절의 일만이 아니기는 하지만.
2.4.2. 뒤늦은 견제 시도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꽤 걱정되었는지 남이나 구성군 같은 신공신들을 이용해 한명회나 신숙주, 권람 같은 구공신들을 견제할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하였고[49] 그 탓에 입지가 더 더욱 강화된 구공신들이 권신들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시절에는 '''세조 본인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 할 정도로 너무 커져버리고 말았다.''' 예종도 구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잘 안됐고, 이에 성종도 구공신들을 견제하려고 사림파들과 친위 세력들을 등용했지만 이것마저 잘 안됐다.
대표적으로 성종 즉위 이후부터 시작된 '''원상(院相)'''은 조선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왕이 병이 났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부터 1476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서''' 왕권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원상(院相)
결과적으로 '''세조와 공신들의 대결은 공신들이 성종시절까지에도 상당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공신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과는 굉장히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5. 종교 정책
2.5.1. 호불(好佛) 군주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종 때는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일화는 그의 호불 성향 뿐만 아니라 야심을 드러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임금도 아닌 일개 왕족이 '취하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다른 마음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는가 하면,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한다. 아예 정부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 간행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세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태조 이성계와 말년의 세종 이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마지막 조선의 왕이다.
참고로, 이 때 간행된 월인석보 같은 불경들은 언문으로 간행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조선 시대의 한글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상원사 등 세조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절들이 좀 있다. 다만, 이 모든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세조 개인의 행동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호불 정책을 많은 인명을 살상한 세조의 속죄 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왕자 시절부터 호감을 나타냈었고 왕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외톨이 조카에겐... '''그런 거 없었다.''' 적어도 실록 속에 나타나는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이자 야심가' 유형의 인물 됨됨이를 생각하면 그가 과연 죄의식으로 고통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 불교였고 속죄 의식과 연결짓는 것은 세조를 비호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꽤 크다.
그의 불사에 관해 세종, 문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재밌는 차이가 있다. 세종, 문종 때는 작은 절 하나 세우는 것이나 작은 불사 하나 하는 것에도 온 조정이 거의 뒤집어 졌으나, 세조 때에는 신하들이 굽실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짓는 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합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료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 형과는 달리 세조 본인은 신료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세종이나 문종의 왕권 또한 상당히 강한 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세종, 문종이 '신하들이 간언하면 들어주는' 왕이었던 반면 세조 치세에는 왕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쉽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또 그랬기에 그렇게 불사를 벌일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2.5.2. 자연스러운 대간 견제와 재평가
실제로 유교 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간들의 힘을 바닥까지 끌어내린 임금도 바로 세조였다. 세조 집권 이전에는 신하들이 직접 왕에게 의견을 제의하고 정사를 논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와 그 근거를 왕이 함부로 묻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 세종이나 문종이나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 불사보다 더 큰 일을 벌일 때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조선의 국가적 이념이 유교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호불 정책은 국왕 스스로가 조선의 기초를 그냥 무시했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세조가 죄없는 조카를 함부로 왕위에서 쫓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조카에게 사약까지 내렸을 뿐더러 그 과정에서 또다른 무고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호불 정책과 별개로 세조 본인의 인간성은 불교 이념과도 영 떨어져 있던 셈이다. 세조가 수양대군이었던 문종 치세에 친형 문종을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 라고 평가했던 발언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조 본인에 대한 비판으로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겉모습(사찰, 불상, 불교의식 등)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불교의 가르침(생명을 소중히 함)은 가볍게 여겼으니 오히려 불교의 입장에서도 욕을 먹어 마땅한 군주다.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는 극도로 집착하면서도 정작 그 종교의 좋은 가르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극악무도한) 일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면 가차없이 무시해버린 점에서 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2.6. 한계와 비판
국가를 통치하는 능력 면에서는 명군이라는 탈을 쓴 채, 함부로 선왕이 구축해놓은 선진적인 조선의 국체를 파괴하여 장기적으로 후대에 악영향을 끼친 암군으로 정의지을 수 있다. 또한 윤리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폭군으로 평가받는다.[50]
세조에 대한 평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일 수 없는 이유는, 왕위찬탈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여 이외에도 장기적인 국가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던 탓도 있다. 세조는 후대에 큰 부작용이 따를 소지가 큰 정책들을 별다른 대안도 없이 실행에 옮겨버렸고, 그것이 민생에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도 세조의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다.[51]
아버지 세종이 가까스로 완성시켰던 혁신적인 정치 문화와 우수한 제도를 일거에 날려버린 세조의 행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들 중 하나다. 아버지 세종대왕과 형 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임금이었다.[52]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긍정적인 쪽으로 강화시켰다.
세종과 문종 치세에는 신하와 군주가 상하일치하여 신하들은 군주를 존경하고,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 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로 상생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세조는 조선의 정승이자 고명대신인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고 그 목을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는 실로 세종과 문종이 쌓아놓은 인의의 정치 시스템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2.6.1. 권신의 세력화
무엇보다 세조는 전제 왕권을 통한 독재 정치를 선호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왕에게 집중된 독재 스타일로 꾸준히 밀어붙였다. 주변 훈구 대신들의 왕당파가 있었긴 했지만, 이 훈구 대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세조는 태종, 세종과는 달리 훈구 대신들을 철저히 관리 및 감독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권력의 맛을 보자 차츰 타락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된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 권력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폭군 유형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것.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한 반대에 져주는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임금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과 김종서가 고명 대신으로 활동하고 황표 정사를 시행할 때 수양대군의 이러한 분노이자 배신감은 꽤나 커졌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직접 거뒀을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세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세종과 문종은 신권에[53] 농락을 당하고 늘 져주는 임금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 오히려 세종은 반대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설득하면서 끈질기게 자기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스타일의 임금이었다. 게다가 세조 측이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홍보했던 황표정사도 그리 오래 시행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직 제왕 수업을 받지 못한 단종을 합법적으로 후견인이 된 대신들이 일시적으로 보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히려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후대의 임금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치 싸움의 의도치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휘둘리는 왕으로 여긴 세조의 생각 자체가 매우 근시안적인 오착이었던 것.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필요한 난세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세종 - 문종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 난세가 아니었다.
2.6.2. 계유정난 미화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지만,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시대였다고 볼 근거가 꽤 되는 편이다. 단종이 섭정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선대 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흠결 낼 수 없는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황보인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결코 없었다. 수양 측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엄청난 전횡을 저질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딱히 그렇게 볼만한 근거도 부실할뿐 아니라, 김종서, 황보인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부여된 권력이었다. 애초부터 김종서와 황보인은 외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명문 세도가의 좌장도 아니었다. 당시 조선에서 중앙의 정치명문가라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명문귀족가문이 아니라면 개국공신이나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가의 후예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종서의 경우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승이 되었고, 그 정승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린 국왕의 보좌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그래서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단종이 성인이 되는 순간 무조건 반납되게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기반 없는 김종서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 > 왕의 총신 > 세도가 공식이 성립할 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세도가 > 왕 공식이 성립하는 훗날을 생각해보면...
때문에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 대군의 탁월한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즉 탁월한 판단력과 결단력은 좋은 군주의 자질이었을 지 모르나 그게 좋은 왕의 덕목이 아니었다는 것.
2.6.3. 역량 차이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세조의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고 있다. 특히 세조가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친족을 학살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얽혀 있었겠지만, 사실 수양 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었다.[54]
그렇다고 세조의 수많은 업적들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유난히 병 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을 가졌던 탓에 저지른 실책과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 남을 정도로 굉장히 심각하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무척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두드러진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제거하고,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냈던 반면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를 자신 인생의 참모이자 친구라는 명분으로 잘 대해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혼인 관계까지 맺어 외척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알 수 있다.[55]
2.6.4. 정통성 문제
이성계의 경우 그가 임명했던 세자 이방석은 막내 아들인지라 쟁쟁한 형들에 비해 정통성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태종이 방석의 목숨을 빼앗았을 때 대다수의 대신들도 이에 대해 반발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세조는 정통성이 확고한 단종과 그 대신들을 몰아냈기에 이징옥의 난, 사육신 사건 등 여러 차례 반발을 겪어야했으며 그 중에서도 중간파들이 일으킨 사육신 사건은 자칫 정권이 다시 전복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심과 의리에 기대야 하는 구도를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56]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해서,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 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시도하는 모습도 보였긴 하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질병으로 사망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 이것은 이후 남이의 옥사를 기점으로 신 공신은 소멸하고 구 공신을 필두로 "훈구파"로 명명되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되고 말았다. 또한 지방 유학자 출신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사림이라 명명하며 공신 그룹과 대립하게 되었다.[57]
2.6.5. 공신 견제 실패
게다가 세조가 실제보다 더 오래 재위했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나아졌으리라 판단하기는 꽤 어렵다. 구 공신 세력을 견제 하기 위해 신 공신 세력을 양성한 처사 자체가 크나 큰 실책이고, 이 실책이 그나마 그가 일찍 승하하여 이 정도에서 봉합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 세조가 양성하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 구성군 이준, 남이, 유자광 등등인데, 남이가 구성군을 질투하여 둘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는 점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유자광은 남이의 역모 사건을 고변했을 뿐 아니라 후일 연산군 대에 이르러 무오사화의 시발점이 되어 놓고는 연산군을 배신해 중종 반정에 참여하는 등 권력을 쫒아 박쥐와도 같은 행적을 보여주었다. 이쯤 되면, 이들이 과연 제대로 구 공신 세력을 견제할 신 공신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성장했다고 해도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갔을지도 의문이다.
구 공신과 신 공신은 성격 그 자체가 매우 달랐다. 세조가 구 공신 세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같이 계유정난을 일으킨 동지들이었고 매우 부패한, 약점이 많은 이들이었기에 세조가 그들의 약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귀 영화를 보장하고 그 반대 급부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얻어내어 왕권을 강화하는데 썼던 것이다. 마찬가지 의도로 예종에게 자신과 같은 친위대를 붙여준다는 의미로 신 공신 그룹을 양성했으나, 일단 신 공신 세력은 예종과 어떤 정치적인 동지적 관계를 형성할만한 인물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종은 거만한 성격의 남이를 매우 안좋아해 즉위하자마자 그를 병조 판서에서 해임하였고, 여기에 불만을 가진 남이가 역모를 꾀했다고[58] 처형당했으며, 구성군 이준의 경우 언제든지 왕권을 노릴 수 있는 종친의 위치에 있었으며,[59] 유자광은 서자라는 위치상 당대 조선 정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인물이기에 예종에게 충성을 바칠 지도 의문스런 인물이었다. 즉, 세조가 구 공신을 부려 왕권을 확립한 것처럼 예종이 신 공신을 부리거나, 구 공신을 견제하게 할 수 있을만한 세력이 전혀 아닌 이들이었다. 이런 이들이 세조가 더 오래 살아 더 많은 권세를 확보했다면 과연 예종의 왕권 확립에 기여할 수 있었을까? 오히려, 나이가 있어 성종 대에 이르러 점차 권세를 잃어가던 구 공신에 비해, 젊은 세대이기에 권력을 확보하고 왕권에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큰 인물들이다.
2.6.6. 후대에 끼친 악영향
애시당초 공신들의 목줄기를 틀어쥐고 이들을 이용하여 왕권을 확립한다는 상황 자체가 쿠데타 동지 + 약점이 많은 비리 정치인들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것이지, 전혀 이런 상황을 활용할 수 없는 예종이나 성종의 입장에서 신 공신을 수양처럼 부릴 수는 없는 일이고, 오히려 이들이 세력화 되었으면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그나마 그 시점에서 세조가 죽었기에 그만큼 수습이 된 것이지, 만약 이들의 세력이 더 강화될 때까지 수양이 살아남았다면 어떤 헬게이트가 열릴 수 있었을지 걱정스런 상황이었다.
더욱이, 주목할 것은 그나마 구 공신을 견제한답시고 한 신 공신 육성이 또 다시 새로운 공신 세력을 만든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통성 부족을 자력으로 메울 수 없었다는(혹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 왕들에게까지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예종은 그래도 나름 강한 군주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 공신 세력의 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요절해 버렸고, 사실상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성종은 그야말로 시달렸다. 성종이 세조와는 정반대로 유달리 유교적 도학 정치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세조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 연산군의 폭정이 성종 대 왕권 약화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고려해 보자.
2.6.7. 척신 정치의 성장
그리고 이런 식으로 구 공신들의 입김이 강화된 결과 왕실 종친들은 법으로 벼슬길이 막혀버렸고 정치적 세력으로서 왕실 세력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해 일각에서는 군약신강, 척신 정치와 외척 세력의 성장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60] 정작 종친들이 계유정난에 가담한 이유가 단종 즉위 후 종친 세력들이 김종서를 비롯한 원로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한다고 불만을 품었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자기 발등을 찍어버린 격.
게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은 후대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언제 왕 자리가 내부의 배신으로 찬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통치보다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주력하는 정치적 경향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여겨진다. 정리하면 왕권 자체는 분명 강화쪽으로 방향성을 잡은 면이 있으나 왕권의 안정성에는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게 왕권의 안정성이 약해졌기 때문에 왕권의 강화가 절실히 필요했고 그게 실패한 왕들은 상당한 골치를 썩게 되었다. 게다가 훗날 조선 왕조가 위기에 처하거나 부조리로 고통받는 상황을 만든 원인들의 상당수는 멀리 가면 세조가 귀찮다고 없애버린 시스템의 부재나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바꿔버린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정책 등이 원인으로 나온다. 한 마디로 조선 왕조 체제의 문제점 상당수를 본인이 만들어버린 셈.
2.6.8. 법 체계 파괴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조선의 법 체계였다. 이전의 법 체계에서는 법 조문이 있으면, 왜 이런 법이 만들어 졌는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이런 부분들이 먼저 기록되고, 이후 이에 대한 처리 등이 나열되는 방식이었는데, 세조는 이런 방식이 답답하다고 여겨, 이를 싹 잘라 버리고,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 죄는 무엇 무엇이고, 형량은 어떻다 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보이도록 정리했다. 하지만 이는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문제가 점점 생기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조항은 왜 생겼는지, 왜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지 이 부분을 전부 다 잘라 버려 오히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는지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업무 처리에 효율이 떨어지게 되는 문제를 가져왔다. 당장 자신의 시대에서야 사람들이 왜 법 조문이 만들어 졌는지 당사자들이니 알고 있으나, 이후 세대를 고려한 정보들을 모두 날려버림으로써 문제를 가져온 것. 당장, 세계의 황당한 법 조문이라고 만들어진 인터넷 문서를 봐도 시대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들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조문들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안다면, 현실에 맞게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쉬운데 이 부분들을 날려 버렸으니 법률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2.6.9. 집현전 폐지
또한 큰 병크 중 하나로 집현전의 폐지를 들 수 있다.[61] 물론 사육신을 위시한 자신의 반대파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이런 자문 기구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국왕 자문 기구의 역할은 뒤에 홍문관, 규장각등이 계승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끊어진 맥락을 연결 시키는 것도 어렵고, 문, 무, 잡학에 관련된 모든 국가 전반의 일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던 집현전에 비하여, 후대 자문 기관인 홍문관은 아무래도 문에 치우친 기관이었고, 덕분에, 성종조에는 문치적으로는 큰 치적들이 있었으나, 국방력 약화,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 흐름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운영의 브레인 집합소였던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수양은 자신 이후의 국가의 성장 동력을 없애 버렸으며, 그나마 문치 부분에서는 홍문관이 이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그 이외의 부분에서의 성장 동력은 멈취버리게 된 것이고, 이 덕분에 조선은 이후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2.6.10. 근시안적인 안목
또한, 그 자신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들 또한 얼마나 그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공신 문제. 평생 그가 싫어하고 비판했던 인물들인 한고조, 송태조와의 공신 처리 문제를 보면, 그가 갖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공신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운영에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군주에게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자신의 할아버지나, 한고조는 이를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였고, 그가 유약하다고 비판한 송태조는 배주석병권을 통해 그들의 부귀는 보장하면서 정치적 권력에서는 떼어놓는 온건한 방식으로 공신들을 처리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후대는 기존의 공신 세력에 대한 부담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고조는 부인 문제로 좀 골치를 썩었으나. 반면, 세조는 오히려 이런 공신 집단을 키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는데, 이들 집단이 제거되지 않아, 이후 아들, 손자 대에 왕권의 제약과 옥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안목이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명분없는 쿠데타를 한 것부터가 만악의 근원이지만...[62]
2.6.11. 성종 관련
혹자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악업은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어라'는 말을 똑같이 세조에게 적용시키며, 성종조의 태평성대가 마치 수양이 악업을 지어 준 덕분인 것처럼 말하나 전혀 사실이 될 수 없다. 태종이 말한 '악업'은 이방석, 이방간 등을 제거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력이 될 수 있는 민무구, 민무질 등의 외가 세력, 심온 등의 처가 세력 등을 제거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종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세조의 '악업'은 오로지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고자 일으킨 계유정난, 사육신의 옥사, 단종의 사사 등,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숙청이었지, 정작, 후대에 부담이 될 수 있을만한 외척과 공신 세력은 철저히 비호하면서 권력을 부여해주는 실책을 범했다. 즉, 태종의 저 말을 가지고 수양을 변호할 수는 없고, 성종이 왕권을 확립하고 치세를 만들어 낸 대부분의 공은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세조의 덕이 아니다.
2.6.12. 국방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
이 외에 군사적인 실책도 꽤나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64] 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서 화력을 약화시켜버린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63]
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2.7. 사후 간접 디스
세조의 통치 자체가 유학을 국시로하는 조선에선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방식이었고 비명에 죽은 어린 왕에 대한 동정심이 더해져 당대부터 김종직 같이 계유정난과 세조 본인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이들이 있었을 정도였으며 중종 대 쯤되면 단종과 이른바 사육신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사림은 물론 민간에까지 널리 퍼지게 된다.
숙종 집권기 때 묘호가 없던 정종에게 묘호를 추존함과 더불어 단종까지 복위시키면서 간접적으로 까였다. 이 때까지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 대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이후 다시 단종으로 복위시켰다. 이후 덤으로 세조가 처벌하였던 혜빈 양씨와 사육신까지 모두 복권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숙종 혼자의 뜻이 아니었으며 조선 팔도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더 의의가 큰 것.
단종, 사육신, 혜빈 양씨 관련 처벌은 세조가 직접 행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복권, 복위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세조가 잘못했음을 시인하는 것이다. 단종이 정식으로 복위되어 버리면 세조는... 조선시대는 상복을 몇 년 입는가에 대해 예송논쟁이란 아주 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예법과 정통성에 대해선 굉장히 민감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숙종 또한 정통성의 화신이기에[65] 대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을 일부 부정할 수 있음에도 이를 거리낌없이 행한 것이기도 하였다. 사실 자신과 같은 정통성의 화신인 단종의 몰락을 '구국의 결단' 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하는 것 자체가 숙종 본인의 정통성을 다른 의미에서 부정하는 꼴이라고 볼 수 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통성이 강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게 구국의 결단이면, 왕위에 오르고 싶어하는 어느 방계 왕족이 쿠데타를 일으켜 단종처럼 정통성이 강한 숙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그 왕족이 구국의 결단이라며 정당화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강한 왕권을 중시하는 숙종 본인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끔찍한 상황이 될 테니 말이다.[66] 단종 및 세조 사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조선 시대에 세조가 찬탈자이며 단종이 억울하게 왕위를 뺏긴 것이었다는 여론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를 기리기 위해 과거 시험이 치러지기도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갖가지 이유로 과거가 자주 치러지게 되므로 특기할 사항은 아니다.
2.8. 상왕
1468년 아들 이황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나 9월 23일 딱 하루 재위하고 사망한다. 다만 이 상왕 기간에 아무 일도 없던건 아니라서 예종이 양위받던 날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밀려났다. 이후 벌어진 남이의 옥사의 프리퀄적인 일이 터진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