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일생
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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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2] 하지만 5대조부터 벼슬길이 끊겨 이미 몰락한 집안이었다. 이승만은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 김말란(1840년 ~ 191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1877년에 서울 남대문 밖 우수현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다. 이승만의 호인 '우남'이 우수현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어린시절엔 서당을 다녔고 그 당시 유생들이 그러했듯 이승만도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다만 선접 군과 거벽, 사수로 대표되는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과 부패를 생각하면 이승만이 자력으로 합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과거시험은 갑오개혁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20살에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뛰어난 웅변으로 유명하였으며 서재필 등의 계몽 운동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원래는 영어를 배우러 입학했으나 이곳에서 그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처음 배우게 된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집회인 만민공동회에서 23살의 이승만은 연사로 나서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규탄했다. 이를 통해 그는 젊은 리더로 부상하게 된다.
1898년 4월에는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했다.[3]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외국 소식과 개화 문명에 대해서도 실었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대한제국 정부에 대하여 토지와 탄광에 관한 이권을 요구해 온 외교문서를 폭로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매일신문의 자금난 해결을 두고 갈등이 발생해 유영석과 이승만은 해임당하게 되는데 그 뒤 이 둘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국신문을 창간했고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과 항일을 계속해 나갔다.
독립협회의 남궁억과 이상재 등이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한다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한 고종에 의해 남궁억 등과 함께 중추원 의원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한달만에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899년 1월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되었는데 그 전단지 내용 중 일부가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4] 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협회 시기 이승만은 박영효 계파와 연결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박영효 내란 음모 사건에 연결되었다.[5] 투옥되었을 때 같은 독립협회 동지였던 주시경이 몰래 넣어준 육혈포로 탈옥(...)을 했다가 도중에 잡혀 종신형이 내려졌다. 홍종우가 그를 취조하였고 아들의 구명을 위해 아버지가 이리저리 부탁하면서 목숨은 건졌지만 고문은 피할 수 없었다. 이 때의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서 이로 인해 평생 후유증을 얻고 살았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인 안면근육경련이 바로 이때 생겼다는 말도 있다.[6]
그는 감옥에서 학문연마 및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선교사들을 통해 성경을 들여와 읽으면서 간수 및 동료 죄수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했고, 많은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사상을 학습하고 발전시켰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감옥 내 도서관을 만들 정도였다.[7] 미완성이지만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비롯해서 여러 저술들을 남겼고, 제국신문과 신학월보에도 계속 논설을 썼다.
이승만은 러일전쟁 이후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정세에 밝은 인물을 원했던 민영환과 한규설의 끈질긴 주청으로 29살이었던 1904년 8월에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끝으로 특별사면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 요청이라는 임무와 함께 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미국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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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선교사로 있었던 미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도움으로 1905년 2월에 존 헤이 미 국무장관을 만나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나 존 헤이는 몇달 뒤 사망하고 만다.
1905년 8월 5일에는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독립보전을 위한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루즈벨트는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문서로 절차를 갖춰 제출하면 검토해보겠다"며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은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시기라 공식적인 절차로 제출하라는 말은 그저 외교적 수사일 뿐 애초에 그런 요청을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 루즈벨트와의 면담소식은 국내에서도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황성신문에서는 "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전자요,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라"라며 극찬했다.
이 때 이승만을 취재한 8월 4일자 뉴욕 데일리 트리뷴 기사에 이승만이 "우리는 황제의 대표가 아니라 일진회의 대표로 루즈벨트를 만나러 왔다"고 한 내용이 실려있다. 일진회는 친일단체로 알려져있기 때문에 이승만이 친일파였다는 논리로 쓰이곤 하는데, 일진회가 본격적으로 친일단체가 된 것은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11월부터다. 실제로 동일한 기사에서 이승만이 다음처럼 말했다고 나온다.
라며 일본을 막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친일과는 정반대되는 발언이다.미국이 도와주지 않으면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인들을 맷돌에 깔려 있는 곡식처럼 갈아버릴 것이다.
The Corean people feel that unless the American government continues to be their friend the Russians and the Japanese will grind them to pieces like grain between the millstones.
뉴욕 데일리 트리뷴 1905년 8월 4일 기사에서 이승만이.
이후 '''미국에서 공부하며 학·석·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8] 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여 35살인 191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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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이 미국으로 데려온 자신의 친아들 이봉수가 1906년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1908년 3월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일어나고 재미 교민들이 장인환, 전명운의 법정 통역을 맡아 달라고 하자 3천 달러의 보수를 요구하였다.[10] 교민들이 그 돈을 모아 줬으나 자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인다. 상황으로 보아 애초에 의뢰를 완곡히 거절하려고 나름 거액을 불렀는데 실제로 모아오자 당황스러워했을 공산이 있다. 당시 이승만은 하버드에 재학 중이라 동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캘리포니아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당시 그는 가난으로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했고 아들은 돈이 없어 병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사망했다. 이런 이승만에게 학업을 중도에 때려치고 서부까지 날아와 재판의 통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은 무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미국 내 여론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 이승만은 철저히 외교독립 노선을 주장하던 사람이었고 이 저격사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의 입장에서는 친일파를 제거한 의거였을지 모르나 미국인들의 입장에선 자국의 외교관이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이런 미국의 고위 공관을 듣도 보도 못한 조선이란 나라의 두 명이 사살했다니 미국 내 여론은 조선인을 처벌하라며 들끓었고 당시 미국내 언론들에선 조선인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라는 기사들이 실렸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 암살은 엄청난 외교적 문제가 되는 사건이고 이 사건은 미국내 조선의 입지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이런 사건은 여론을 악화시켜 독립에 오히려 해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한 것도 그로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2. 일제강점기
한일병합 이후 이승만은 1910년 10월 10일 한국으로 귀국했다. 황성 YMCA 청년회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기독교인들에게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한다는 거짓 누명을 씌워 700여명을 체포한 105인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선 저항운동이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고 하와이로 건너간다.
미국 감리회 소속의 한인중앙학원 교장직을 거쳐 5년만에 남녀공학제 교육기관인 한인기독학원을 만들어서 한인 학생들의 교육에 힘썼다. 1913년에는 순한글 월간지인 "태평양잡지"도 창간했다. 당시 박용만과 이승만은 둘 다 하와이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박용만은 대표적인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박용만은 군사를 양성하고자 했는데 그 군사 양성소에는 막대한 운영비가 필요했고 이승만은 그 돈으로 교육과 외교에 투자해야한다고 하여 독립운동 노선에 따른 갈등이 일어났다. 이 때 하와이 교민들의 중심이었던 국민회에서 국민회관 건축비를 유용하는 사건이 터졌고 그 결과 국민회 회장이던 김종학이 파면되었고 이승만과 그 지지자들이 국민회를 장악했다.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재미 한인사회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고 파견을 갈 대표에 이승만과 정한경이 뽑혔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안창호를 직접 만난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가서 파리행 여권을 빨리 발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이승만에게 여권 발급을 거부했고 그의 파리행은 좌절됐다.[A] 이후 파리 강화 회의에는 김규식이 대표로 참석하러 갔으나 회의장에서 문전박대 당했다.
원래는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안도 바로 이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려고 했던 문건이었다. 정한경이 이승만에게 찾아와 이 위임통치안을 제의했고 이승만도 동의했다. 결국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이승만과 정한경은 미국 대통령에게 이 문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서 안건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위임통치안 문서에 서명하여 1919년 3월 3일에 백악관에 전달했다. 이것이 위임통치 청원 사건이다.[11]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고 국내외 각지에서 임시정부들이 선포되었는데 그 중 8군데의 임시정부[12] 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급 이상의 자리에 추대했다. 특히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와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임시정부들이 스스로 이승만을 추대한 것인데, 이승만의 당대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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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추대된 후 이승만은 워싱턴에 Republic of Korea 본부를 설치하고 외교선전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president'''로 번역하여 president 명칭으로 각국 정부에 공문을 보내서 임시정부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president라는 표현 때문에 임시정부의 다른 요인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3][14]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라는 명칭을 영어로 번역하려면 적절한 용어가 president라고 주장했다.[15]
2.1.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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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통령제로 개정하고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방문 횟수를 근거로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소홀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추대된 직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현지 교민들에게 받은 독립자금을 구미위원부가 거의 독점하면서 이승만은 비판을 받았다. 이승만은 계속 미국에서 활동을 했기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서도 그에게 빨리 상하이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했고, 1920년 11월 이승만과 비서 임병직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중국인들의 시신을 실고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타고 밀항을 하여 상하이로 갔다.
앞에서 언급했던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한 반대파들의 비난과 1920년대의 임시 정부의 자금난과 독립노선 차이, 기타 여러 갈등 등이 겹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하와이에서 노선 차이로 이승만과 정적이 된 박용만 계열이 문제 삼으면서 임시 정부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반대파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지세력도 있었는데 1921년 3월 이승만은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노백린 등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여 그들에게 임시정부를 맡긴 뒤 위싱턴 군축회의에 대비하기 위해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한국대표에게 발언권을 줄 것을 요청하고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영문 문건도 제작하여 각국 대표단과 언론에 뿌렸다. 그러나 열강 대표들은 이를 묵살했고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임시정부 내에서도 반(反)이승만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승만은 안창호파에 의해 '''1925년 3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탄핵되었다.''' 탄핵 사유는 아래와 같다. 사유라고 적힌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임시정부 내의 반(反)이승만파들이 이승만을 바라본 시각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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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이 가결되자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향한 재미교포들의 자금 지원을 차단하는 등 거리를 두었으며,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하와이로 돌아간 이승만은 1925년 동지회 회원들에게 주식을 발행해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했다. 나무를 벌목해 가구용 목재를 만들고 농지를 개간해 동지촌을 건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가구용으로는 목재 재질이 적합하지 않아 숯가마에서 화약 제조용 목탄을 생산했다. 이 목탄을 미 해군에 공급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하지만 1930년 10월 자본부족과 운영미숙으로 동지식산회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1928년 박용만이 의열단에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언론을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당시 이승만은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 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하며 평가 절하했다.[16][17]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 일어나면서 정세는 다시 급변했다. 이승만은 만주사변 발발 후 1931년 12월 스팀슨 미 국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이 장차 미국의 적으로 부상할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리고 1932년 11월 뉴욕동지회보에도 광복의 기회는 미일 충돌에 있으며 만주사변으로 미국의 친일주의가 변화할 것이고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글을 실으며, 구미위원부의 임무는 미국의 친일정책이 실책이고 한국인을 응원하는 것이 미국에 도움이 됨을 깨닫게 하여 비공식 동맹을 맺는 일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 총회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1933년 국제연맹총회가 열리는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인 독립 문제를 회의 의제로 채택해 줄 것을 호소했다.''' 처음엔 직접 상정시키려 했으나 거부당한 뒤 성명서를 작성하고 국제연맹 사무국과 회원국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만주문제와 만주에 있는 한국인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한국이 극동문제의 열쇠이고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승인한다면 그것은 연맹의 기본 정신인 민족자결주의에 위배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각국 대표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현지 언론들도 우호적이었다.
실제로 이 국제연맹 총회에서 만주국 불승인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순전히 이승만 덕분에 그런 결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성명서가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점과 국제사회에 다시한번 한국 문제를 상기시켰다는 점이 중요했다. 이승만은 "The Koreans in Manchuria(만주의 한국인들)"이라는 책자도 만들어서 배포하며 일본의 영토야욕과 학살, 약탈에 대해 고발하고 간도 참변과 관동대학살에 대해서도 알렸다. 이 국제연맹 일로 스위스에 머물던 중 한 식당에서 이승만은 미래의 아내가 되는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게 된다. 그 후 이승만은 소련 모스크바에도 갔는데 일본의 방해로 가자마자 쫓겨났다.
1930년대 들어서 임시정부에서 반(反)이승만 세력이 약화되자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
2.1.1. 태평양 전쟁 시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고한 일본 내막기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초기에는 별 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실제로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한인 사회 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이승만의 명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1차 대전을 비롯하여 이 시기 이전까지는 미국과 일본이 우호관계였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하는 이 시점이 바로 한국에겐 기회라 생각했다. 그는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부를 다시 열고 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이 '''이 시기부터 가장 주력한 것은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이었다.'''
이승만은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적국인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42년 2월 9일 프랜시스 비들은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일선 군 지휘관들에 의해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같이 적성국민 취급하는 일이 발생하자 1943년 3월 30일에 이승만은 미 육군장관 스팀슨에게 시정을 요구했고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한국인들을 보호하였다.
이승만은 1943년 5월 15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긴 미국의 책임을 묻고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에 미국이 손놓고 있었던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져서 현재 미국이 엄청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를 공식 인정하여 한국이 참전하게 하라고 설득했다.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날 한국에 행한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1905년과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움으로써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건 미국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팽창을 거듭한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은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다. 서양 정치인들이 일본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며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련이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대일 전쟁에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한다.
이렇게 이승만은 루즈벨트를 비롯하여 미 국무부 등을 상대로 임시정부를 공식 인정 받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았고, 한계를 느낀 그는 미국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미국 지도층을 중심으로 한미협회를 발족했다. 스태거스 변호사,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더글라스, 호머 헐버트, 윌리엄스 기자, 로버트 올리버[18] 등이 한미협회에 참여했다.
이승만은 6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독립 운동을 격려하고 국제사회의 소식을 알리는 방송활동을 했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처음 방송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항일단파방송 사건 참조.
1943년 이승만은 미국에게 반(反)소련전선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해 11월,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한국을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시킨다는 것을 발표했다. 비록 이승만은 '적당한 절차'가 신경 쓰였으나 미국 정부에 요청해도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수 없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탁통치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긴 했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미국의 전략첩보국 OSS 부국장인 굿펠로우를 만나서 '''대일전쟁 첩보부대에 한국인들을 참여시키고자 했다'''. 이 OSS 대원이 된 인물에는 유일한[19] , 장기영[20] , 장석윤[21] 등이 있다. OSS는 김구의 광복군과 협력해 한인들을 선발하는 독수리 작전을 세웠고, 미국에서 직접 소수의 한인 특공대원을 뽑아 한반도에 투입하는 냅코 작전도 실시했다. 이 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가담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다.[22] 그러나 이 모든 작전들은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 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실제로 투입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유엔 창립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독립 보장을 받으려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무산되자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 라는 미·영·소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또다시 비밀 협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국은 부인했지만, 실제로 그 당시 신탁통치를 미국이 찬성했고, 소련에 대일참전을 요구하여[23] 3달 후 만주 작전이 실행됨으로써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음이 밝혀졌다.[24]
3. 해방 정국
광복 직전인 1945년 8월 8일 이승만은 미 정부에 귀국 요청 편지를 보냈으나[A] 미 국무부는 소련과 정책협조를 해야했기 때문에 반공주의자인 이승만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 때 같은 반소련주의자인 맥아더의 도움으로 이승만은 도쿄에 가서 그를 만난다. 소련은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면서 불과 일주일만에 한반도 북부를 점령했다. 8월 27일에는 한반도 북부 지역 대부분에 소련군이 배치되었다. 소련의 급속한 남하에 놀란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38선을 그었고 9월 8일에 미군이 뒤늦게 한반도에 도착했다.
그 후 이승만은 맥아더와 함께 10월 4일 귀국했다. 이승만의 이름은 기존에도 한국내에 널리 알려져있었기 때문에 그는 귀국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다. 정적인 '''여운형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였다'''. 이승만은 모든 정치세력의 단결을 호소하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는 통합 기구를 조직했다. 이후 독촉중앙회는 이승만 세력의 정치적 모태가 된다.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재건파를 이끄는 박헌영을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서로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고 독촉중앙회를 좌우 통합 조직으로 만들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한다.
11월 23일에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했다. 그 뒤 김구는 박헌영 측과 합작을 추진했으나 12월 13일 박헌영이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합작은 실패로 끝났다.
12월 29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김구의 임시정부에서도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도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몰래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던 '''박헌영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온 뒤 1946년 1월 3일 좌익세력들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기 시작했다.'''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정식 국회 수립전까진 과도정부를 만들고 이를 위한 결정권은 자신과 이승만에게 일임할 것을 주장했다.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가 비상국민회의에 참석했던 인물들을 모아 회의를 개최하고 이들을 미군정 최고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올랐다. 이후 이승만은 사무엘 돌베어라는 미국인에게 100만 달러를 받고 광산고문이라는 직함과 채굴권을 주었다는 스캔들로 인해 의장직을 사퇴했다고 알려져있다.[25]
그러나 해당 스캔들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들이 발간하던 '독립'지에서 1946년 1월 23일 보도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단 이승만이 1945년 3월 5일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돌베어를 임시정부의 광산고문으로 임명했고 광복 후 존 하지에게도 돌베어를 미군정 고문으로 추천한 것은 사실이다.[26] 그러나 그 댓가로 100만달러를 받았다는 것은 저 기사의 주장일 뿐 '''아무런 근거도 없고 입증된 바도 없다'''. 이 '독립'지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발행하던 신문인데 단체 이름만 봐도 알겠지만 김원봉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계열 단체였다. 그리고 해당 기사를 쓴 사람은 한길수라는 사람으로 당시 '''이승만과 적대관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이 기사는 소련공산당 기관지인 'Pravda'에 인용되어 보도되었고 이것이 다시 뉴욕 타임즈에 인용되었다. '독립'지의 기사 말곤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을 보면 반대파에서 이승만을 음해하기 위해 만든 가짜뉴스였을 것으로 보인다.이승만이 미국에 있을 때 중경에 있는 김구 주석에게 요구하여 미국인 돌베어(Samuel H. Dolbear)를 조선의 광업고문으로 임명케하여 조선의 광업권에 대한 광범위한 권리를 돌베어에게 양여한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그 대가로 돌베어는 이승만에게 미화 100만달러를 주기로 약정되었다. 그리고 1944년 8월 15일에 로스앤젤레스에 전해진 중경 통신에 의하면 중국 국민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폐기한다는 것을 발표한 중국과 임시정부와의 9개조 밀약이 있었고 그 내용으로서 조선이 독립된 뒤에 그 외교정책의 지배권을 중국에 부여한다는 약속과 그 대가로 조선이 열강의 승인을 받을 때까지 중국은 임시정부에 매월 중국화로 3백만원을 지불하기로 협정이 되어있었다.
1946년 3월 20일부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두 달간 삼남 지방을 순회했다. 이 '남선순행'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지방까지 확대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다. 그와중에 북쪽에서는 1946년 2월에 이미 '''북조선인민위원회라는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공산체제를 굳히고 있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미국과 소련의 입장 차로 무기한 휴회되자[27] 6월 3일 정읍을 방문하던 중 이른바 정읍발언을 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이승만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기위한 권력욕 때문이라는 시각과, 앞서 언급했듯이 이북지역엔 이미 사실상의 정부가 수립되어 단독 국가가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만은 막아야한다는 신념 때문이라는 시각이 공존한다.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 때문에 소련과의 정책협조가 방해받는다고 생각하여 이 두 명을 퇴출시키고 김규식, 여운형 같은 중도적 인물을 키우려고 했다.[28] 미군정은 좌우진영의 위법행위를 강력히 처벌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를 발행한 조선공산당 본부를 수색하고,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정간시키고, 극우신문인 대동신문을 정간시켰다. 그리고 중도세력을 중심으로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기로 하고 1946년 12월 12일에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했지만 민선의원 선거결과 우익이 압승했다. 당황한 존 하지는 재선거를 지시하는가 하면 관선의원 대부분을 좌우합작위원회 인물과 용공인사들로 선발했다.[29]
존 하지는 이승만을 축출하려고도 했는데 당시 수도 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의 증언에 의하면 존 하지가 자신을 찾아와 김규식 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이승만을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면 안되겠냐고 요구했으나 자신이 사표를 내밀자 화를 내며 방을 나갔다고 한다.
이런 존 하지의 좌우합작조치와 편파적 조치에 분노한 이승만은 이때부터 공개적으로 하지에 반대하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굿펠로우 대령, 스태거스 변호사, 임병직, 로버트 올리버 등으로 구성된 전략협의회를 구성하고 '한국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건의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 건의서를 미 국무부 동아시아국장 존 빈센트와 국무장관 조지 마셜에게 제출했다. 건의서는 남쪽에서 과도정부가 선거에 의해서 수립되어야 하고 이 과도정부가 유엔에 가입되어야 하며 미국,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어야 하고 미소 양군이 동시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반드시 남쪽에 주둔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현지 언론에 "미 국무부 내 일부 인사들은 공산주의에 기울어져 있고, 존 하지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가운데 관선의원 상당수를 공산주의자들로 채웠다"라고 맹비난했다. 이런 비판은 때마침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반소반공 여론과 맞물려 미 의회, 언론계, 종교계에서 호의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방미 중에 때마침 그리스 내전이 일어나고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 3월 12일 발표되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이 이승만이 취해오던 노선과 완전히 일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은 힘을 얻게 된다.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1947년 4월 21일 귀국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아무 진전은 없었다. 이 시기에 이승만은 그가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미군정에 의해 사실상의 가택연금을 당했다. 이화장에 있는 전화기도 철거됐고 주간 라디오 연설을 비롯한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이 차단되었다.[30] 미소공동위원회 보이콧을 선언한 이승만과 달리,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선언했고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미군정 관계자들은 좌우가 호각을 이루고 있는 남한 지역과 달리 38선 북쪽은 좌익과 소련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가 세워진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가능성이 컸다. 결국 미소간 입장차를 좁히지 못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됐고 소련 대표단은 철수했다. 한국 문제는 UN으로 이관되었고 1948년 1월 8일 UN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입국했다. 그러나 '''이북지역은 UN한국임시위원단의 이북방문을 거부했다'''. 이에 이승만은 이북이 UN한국임시위원단의 방문자체를 막고 있으니 이남만이라도 단독 선거를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했다. UN도 이남지역의 단독 선거를 통해 자주적인 민간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이북으로 갔다. 이승만은 김구의 이북행을 묵인했다. 그러나 "30살 김일성과 얘기가 통하겠는가? 아예 러시아에 가서 스탈린과 얘기하세"라고 한 걸로 봐서 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와 김일성은 미소 군대의 즉시 철수와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연석회의에 불참한 정당과 단체는 통일임시정부 구성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북한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목적은 당연히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였기 때문에 그는 5.10 총선거를 막고, 남한 건국을 반대하는 세력과 힘을 모아 한반도 전체의 (공산)통일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결국 UN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에 의해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5.10 총선거를 저지하고자 남한 지역에 있던 공산세력들이 반란과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그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이 제주 4.3 사건이다.[31]
5.10 총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32] 에 출마하였는데, 상대 후보는 경찰관 출신 최능진이었다.[33] 결국 최능진은 이승만을 추종하는 서북청년회의 물밑 공작[34] 으로 후보 등록은 무효화되었고, 이승만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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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 자격으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제헌국회의 간접선거로 진행된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출석의원 196명 중 180명의 표를 얻어 승리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됨과 함께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물론 이승만이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운이 좋았던 것도 있었지만 단순히 운으로 대통령 자리를 얻을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 후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김구조차 따라잡을 수 없는 '''국내외, 좌우를 막론하고 최고의 정치적 명망가'''였다. 이승만의 명망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이나 그의 적대 세력이었던 한민당이 모두 아직 귀국도 하지 않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할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지도력을 모든 정파에 부과할 만한 조직적 기반을 갖지 못했고, 정파들 사이의 이해관계는 그의 명망 밑에 조화되기에는 너무나 치열하게 대립되었다. 각 정파는 그의 명망을 업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했지, 그를 따르려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려 하지는 않았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그것은 그의 개인적 명망에 의한 것이었지 그의 정치세력의 반영은 아니었다.[35]
4. 대한민국 시기
사람들의 막연한 인식과 달리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은 친일파가 없었다.[36] 그리고 초대 내각에는 다양한 당파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한민당은 자기 당 출신이 내각에 2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이윤영을 초대 국무총리에 지명했다. 이윤영은 이북 출신이고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이끌었었기 때문에 후에 남북통일을 위해서 이북동포들의 힘을 얻기위해서 지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헌국회는 이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부결되었다. 그 후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자신과 반대되는 좌익 인사인 조봉암을 임명했다. 이는 지주계급인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민들의 시급한 문제인 토지개혁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북한이 시행한 토지개혁에 남한의 농민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회주의가 퍼지는[37] 것을 우려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3월에 '''한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38] 하여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토지를 뺏아서 옆집 빈둥거리는 녀석이랑 똑같이 공짜로 나눠주겠다는데 어떤 농민이 환영할까. 그리고 국민 절대다수가 농민인 이 시기에 농심은 곧 민심이자 여론이었다. 한마디로 농지 개혁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이기도 했다.
이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39]
1948년 10월 19일에는 여수와 순천에 주둔 중이던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제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제주도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남한 단독 정부를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중국 대륙도 공산화되면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노선을 지향하였다.
1949년 초 반민특위가 출범했고 반민족행위자 7000여명 중 682건을 조사해 305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반민법 반대 관제 데모들이 벌어졌다.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위원 35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반민특위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국내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친일 전력이 있는자들조차도 등용하였다.[40] 한반도를 반소반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던 미국에게도 친일파 청산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41][42]
그러나 일본 자체에 대해서는 '''이승만 라인(평화선)'''으로 대표되는 독도와 이어도, 대한해협의 해양주권 절대 사수라는 초강경 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6.25 전쟁 시기에는 맥아더가 일본군 파병에 대한 의중을 떠보는 것이 귀에 들어오자,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총부리를 공산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겠다며 절대 반대하는 등 임기 내 일본에 대해서는 초강경 태세를 유지하였다.
1950년 5월에 있었던 2대 총선에서 이승만 계열 정당은 210석 가운데 개헌 저지선에도 못 미치는 57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대 참패를 겪었고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남북협상파 역시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곧 이승만의 대통령 생활 최대 위기가 터진다.
4.1. 6.25 전쟁 시기
이승만은 미군이 철수하면 분명 전쟁이 날거라고 얘기했으나 1949년에 결국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한다. 그리고 1950년 1월에 미 국무부 장관 애치슨이 한국을 제외하고 애치슨 라인을 설정해버림으로써 북한이 오판할 수 있는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버린다. 이승만이 평소에도 북진통일을 외쳤기 때문에 한국에 군사지원을 해주면 전쟁이 일어날까봐 미국이 군사지원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국군의 무장상태를 강화시켜주지 않은 건 그렇다치더라도 미군이 철수한 것은 설명하지 못한다. 이승만이 미군 지휘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어도 이승만이 걔네들을 이끌고 북으로 처들어가진 못한다. 실제로 2006년에 김대중을 만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침공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에겐 같은날 오전 10시나 되어서야 보고가 되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날 이승만은 무초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서 한국은 더 많은 무기와 탄약 그리고 특히 더 많은 소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43] 무초는 이승만과의 회담이 끝난 뒤 미국에 "부산으로 10일치의 탄약들을 즉시 보내라"[44] 고 전문을 보냈다.
6월 26일 새벽 3시에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맥아더에게 전화를 했다. 맥아더는 자는 중이었으나 이승만은 부관에게 "지금 전화를 받지 않으면 한국 내 미국인들이 하나씩 죽어나갈 것이다"라며 다그쳤다. 결국 전화를 받은 맥아더에게 이승만은 "지금 이 사태가 일어난 건 누구 책임이냐. 내가 여러번 경고했지 않느냐. 빨리 한국을 도와라"라고 말했다.[45] 무초가 미국 국무장관에 보낸 전문에 따르면 이승만은 폭탄을 실은 F-51 전투기 10대와 바주카를 한국군 조종사들이 이륙준비를 하고 있는 대구로 보내 달라는 긴급요청과 함께 105밀리 야포 36문과 75밀리 대전차포 36문, 155밀리 야포 36문을 원한다고 요청했다.
6월 26일에 북한군은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각료들은 이승만에게 피신을 권고했으나 그는 이때까진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6일 오전 11시에 신익희 의장의 사회로 국회 본회의가 열렸고 이승만도 여기에 참석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오후 2시에는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했다.
6월 26일 밤 9시에 김태선 치안국장이 이승만에게 피난을 건의했으나 이승만은 듣지 않았다. 6월 27일 새벽 1시에 이승만은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장면[46] 에게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군사원조가 시급함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라고 지시했고 장면은 3시간 뒤인 새벽 4시(미국 현지시각 26일 오후 3시)에 트루먼을 만나 회담을 했다. 이승만이 장면과 통화하고 1시간 뒤인 새벽 2시에 신성모 국방장관과 조병옥, 이기붕 서울시장이 경무대로 와서 빨리 피난 갈 것을 다시 권유했으나 처음엔 듣지 않다가 잠시 후 김태선 치안국장에게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보고[47] 를 듣고서야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비서 황규면, 경호원과 함께 새벽 3시에 경무대를 출발해 서울역으로 갔고 새벽 4시에 기차를 타고 서울역을 출발했다.
대통령이 잡히면 나라가 더 위험해지기 때문에 피난을 가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대한민국 부통령실, 국무총리실, 국회사무처 등에 통보를 했어야 하는데 이승만은 피난 간다는 사실을 공식으로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신성모 국방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은 본인들이 직접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을 피난 보냈음에도 왜 국회측에 대통령의 피난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국회는 이날 새벽 4시에 임시회의를 열어 신성모 국방장관의 피난 제의(당시엔 임시이동으로 표현)를 거부하고 서울사수를 결의하고 이승만에게 통보하러 찾아왔으나 이때는 이승만이 불과 조금 전 경무대를 떠난 다음이었다.
무초 미대사가 6월 27일 새벽 6시에 본국으로 보낸 전문에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갔다."고 나오고 2시간 후인 아침 8시에 보낸 전문에는 이렇게 나온다.
이걸로 보아 나머지 각료들도 이승만이 경무대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 피난을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나머지 각료들도 대부분 27일 아침에는 이미 상황을 알고 떠났다는 뜻이다.[48]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건 다음 날인 28일이다. 이시영은 다른 의원들이 피난간 것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28일까지 서울에 있다가 뒤늦게 피난을 갔다.Acting PriMin visited me 7 a. m. Confirmed President had left at 3 a. m. heading for Chinhae and Cabinet at 7 a. m. for south both travelling by special trains. (후략)
오전 7시에 신성모 총리서리가 나를 찾아와 대통령이 오전 3시에 진해로 떠났고 각료들은 오전 7시에 남쪽으로 출발했으며 모두 특별열차로 이동했다고 확인해줬다. (후략)
1950년 6월 27일 오전 8시에 무초 주한 미대사가 본국으로 보낸 전문 中#
이승만 일행은 처음엔 대구까지 내려갔으나 이승만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고자 했다. 대구(27일 오전 11시 대구 도착)에 잠깐 내려 조재천 경북지사와 유승열 제3사단장을 만난 뒤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올라가던 도중 대전에 도착했을 때(27일 오후 4시 반 대전 도착) 각료들의 만류로 대전에 임시수도를 세웠다.
6월 27일 밤 10시에 이승만은 대전 임시수도에서 다음과 같은 육성 방송을 했다.
이 방송에서 이승만은 적군이 서울 인근까지 진출했고 국군은 싸울 수 있는게 없다고 분명히 밝혔으며 보통 알려진 것과 달리 "국민 여러분 서울은 안전합니다.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같은 얘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26일과 27일 낮까지만 해도 이승만이 아닌 국방부나 다른 인사들이 서울은 안전하다는 둥, 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둥 하는 방송들을 했었기 때문에 듣는 국민들 입장에선 그 방송들을 다 한 맥락으로 듣고 '아, 피난 갈 필요 없구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일원화된 체계적인 방송을 하지 못하고 여러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제각각 떠들어 댄 것은 이승만이 정부수반으로서 국정을 제대로 통할하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은 안전하니 그대로 있으라고 방송 해놓고 정작 본인은 한강 다리를 폭파한 뒤 도망갔다'라는 말은 서로 다른 이야기 여러 개를 하나로 엮어 만든 거짓이다.지난 몇 달간 나는 미군의 군사 원조가 임박했다고 주장했으나 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한 원조를 실현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적군은 전차, 전투기와 전함으로 서울에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 국군은 싸울 것들이 전무한 상황이다. 이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여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현 상황을 설명했고, 마침내 나는 오후에 맥아더 장군의 전보(미군 참전)를 받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우리에게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 물자를 보내는 중이며 이는 빠른 시일에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한 우리의 용기와 투지를 증명해 보였고, 모든 우방국들이 우릴 지지하고 있다. 나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모든 용감한 군경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고 대한한국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다시 한번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그들을 공화국의 충실한 시민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Daily Report, No.125, Korea, June 28 1950, ccc 5(RG 263, Records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Foreign Broadcast Information Service DailyReports, 1941-1959, Box 330)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아직 피난가지 못한 서울시민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었으나 28일 새벽에 한강 인도교는 이미 폭파되어 끊긴 상황이었다. 다리를 폭파하는 것 자체는 군사작전 상 당연한 일이었으나 너무 이른 타이밍에 폭파했다는 점과 전쟁 초기에 서울시민들에 대한 피난 지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다리 폭파로 인해 다리를 건너고 있던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죽었다는건 사실이 아니다.[49] 폭파도 이승만이 지시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한강 인도교 폭파 참조.
대전 임시수도에 며칠간 있다가 북한군의 공세에 전황이 악화되면서 대통령 일행은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으나 일반적인 육로를 통해 추풍령을 지나면 남로당이나 공산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일행은 7월 1일 대전을 떠나 오후 3시에 목포에 도착했고, 목포에서 부산까지는 해군 514정을 타고 7월 2일 오전 11시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해군 309정이 호위함으로 함께 따라갔다.
다부동 전투 등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뒤 인천 상륙작전 이후 국군과 연합군은 38선 인근까지 밀고 올라갔고 그 상태로 전진을 멈췄다. 1950년 9월 30일 이승만은 군간부들을 불러 왜 38선을 넘어 북진하지 않느냐고 호통쳤다. 정일권의 회고록에 따르면 "38선이 어찌 됐다는건가? 무슨 철조망이라도 쳐 있다는 건가? 장벽이라도 쌓여 있다는 건가? 넘지 못할 골짜기라도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때를 통일의 기회로 생각했고 국군에 38선 돌파 명령을 내린다. 국군 3사단이 가장 먼저 38선을 넘었고 마침내 국군과 UN군은 1950년 10월 20일 평양에 입성했다. 그 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통일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중공군이 국경을 넘어 처들어왔다.
6.25전쟁 2주년을 맞아 1952년 6월 25일 충무로 광장에서 이승만이 연설을 하였는데 김시현의 사주를 받은 유시태라는 의열단 출신의 노인이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권총은 불발돼 이승만은 죽을 위기를 넘겼다.
1952년 7월에는 정치깡패와 경찰을 동원해 임시수도 부산을 포위한 상태에서 야당 의원들을 협박해 발췌 개헌을 일으켰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부담을 느낀 미국이 휴전협정을 추진하자 이승만은 "휴전협정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한국민에 대한 사형집행영장이다"라며 한국에 대한 안전보장 없이는 휴전을 할 수 없다며 극렬히 반대했고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켜 한미관계에 마찰을 불러오기도 하였다.[50]
이런 갈등이 지속되자 1953년 5월에는 미국은 필요할 시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 작전 계획까지 세웠다. 이승만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순순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 입장에서 이승만은 눈엣가시였고 그를 제거하고 대체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일전에는 1952년 8월 2일 진해 앞바다에서 미 CIA가 배에서 낚시를 하던 이승만에게 11발의 총을 쏜 사건까지 있었다.#[51]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을 비롯한 여러 초강수로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한다. 자세한 내용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 참조.
4.1.1. 일본망명시도 논란
서울에 남아있던 국방장관 신성모는 1950년 6월 27일 아침에 미국대사였던 무초를 찾아가서 여러가지 논의를 하는데 이 때 신성모가 일본에서 망명정부를 세울수 있는지를 물어본 것이 논란이 된다.Acting PriMin[52]
visited me 7 a.m. Confirmed President had left at 3 a.m heading for Chinhae and Cabinet at 7 a.m. for south both travelling by special trains. (중략) He despaired of saving anything and inquired possibility President and Cabinet moving to Japan as "government in exile." I made no commitment.오전 7시에 총리 대리인 신성모가 와서 오전 3시에 대통령 진해를 향해 남쪽으로 떠났고 각료들도 오전 7시에 남쪽으로 떠났으며 모두 특별열차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중략) 신성모 국방장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에 낙담하였고, 대통령과 내각이 일본으로 이동하여 망명정부를 세우는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27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의 보고서 중#
일단 신성모가 망명 가능성을 물어 본 것은 사실이지만 망명이 신성모 장관 개인의 질문인지,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뜻인지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이를 두고 망명시도를 부인하는 측에서는 망명건을 언급한 사람은 신성모 한 사람 뿐인데다가[53] 망명을 하겠다고 주장한게 아니라 망명이 가능한지 가능성(possibility)을 물어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망명을 요청했다는건 지나친 확대 해석, 추측이고 단지 신성모가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정부의 망명 가능성을 타진해본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망명시도를 인정하는 측에서는 당시 신성모는 서울에 남아있던 최고위직 정부인사였고 국방장관이었기 때문에 신성모가 독단적으로 이런 망명이야기를 꺼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신성모가 단순히 개인의 망명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자기 상관인 대통령과 내각의 망명을 주장한 것으로 보아 신성모의 독단으로 보기는 더 어렵다고 주장한다.
다만 망명시도 인정측 근거 가운데 야마구치현 내용은 근거가 부족하다. 일본에서 야마구치현사라는 책을 발간하는데 여기서 총류편 현대2(山口県史 史料編 現代2)에서 한국전쟁 당시 아마구치 현 지사였던 다나카 다쓰오(田中 龍夫)의 회고를 기록하면서 여기서 일본 외무성에서 야마구치 현에 한국인 망명을 위한 시설을 지시했고 이과정을 다나카 지사가 외무성과 갈등을 빚은 일을 회고하고 있다. 이후 언론에서는 현사가 쓰여진 90년대부터 이 망명 캠프를 두고 이승만이 망명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엮는데, 일단 이 망명캠프가 이승만의 부탁으로 만들어 졌는지부터가 불분명하고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망명하든 한국에서 죽든 적어도 반공시민들이 북한군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만의 경우처럼 한국인들을 피난시켜야 했는데 이것을 두고 이승만이 일본으로 망명하려 했다고 보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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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4일에 KBS에서는 단독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 망명 타진"이라는 뉴스 기사를 내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여기서 야마구치 현사에 '(1950. 6. 27)'이라는 문구로 원문에는 없는 날짜를 날조해서 넣었다. 후에 이걸로 징계도 받았다. 그리고 단독 보도라고 했지만 이미 일본의 산케이 신문에서 1996년 4월14일에 보도한 바 있으며 그 다음날 조선일보(1996.04.15/사회/37면)에서 를 시작으로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겨레 등도 교도통신 등을 인용해 보도하였다.
4.2. 전후
휴전 이후 1953년 10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속에서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미국의 대(對)한국 안보보장을 얻어내었다.
이승만은 교육이 최우선이라 생각하여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전후 대대적인 학교 건립에 나섰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따라 제한되어 있던 고등교육 기회[54] 를 개방시켜 전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다. 원래는 정부수립 직후부터 실시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인해 차질이 생겼다가 1954년부터 본격적으로 재개하여 1959년에는 전국 7세 아동의 95.3%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 인재 육성을 위해 한국외국어대학교, 인하대학교 등 여러 대학교를 세우는 데 투자했다. 그 결과 '''80%에 달했던 문맹률은 22%로 떨어졌고, 학교 수와 학생 수는 3 ~ 11배 이상으로 크게 늘었다.''' 광복 당시 초등학교 숫자는 2800여개였고 전쟁 중 대거 파괴되어 전후에는 이보다 훨씬 적었으나 1960년에는 4600여개로 늘어났다. 대학이나 전문학교 같은 고등교육기관도 광복 당시 19개에서 1960년에는 68개로 대폭 늘어났고 대학생 수는 10만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는 숫자다.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1954년 11월에는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고''', 1958년에는 진보당 사건으로 야당 후보인 조봉암[55] 을 상대로 사법 살인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원조금을 지원하면서 필요한 물품은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쓰기를 바랐다. 일본에서는 물품을 생산하게 하고, 한국에는 원조 자금을 지원하여 그 돈으로 일본으로부터 물품들을 사서 쓰게하는 것이 미국의 동북아 경제 구상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스스로 생산능력을 갖추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서 쓰는 대신 충주 비료공장과 문경 시멘트공장, 인천 판유리공장을 지으며 자체 생산을 시작했다.
시슬러 박사로부터 원자력 발전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이승만은 1956년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1958년에 원자력법을 제정하면서 원자력 발전소를 향한 연구를 시작했다. 1인당 6000달러가 드는 미국 알곤국립연구소 프로그램에도 150여명의 훈련생을 유학보냈는데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60달러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큰 투자였는지 알 수 있다. 1959년에는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도 만들었다. 이승만이 시슬러 박사에게 지금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묻자 시슬러는 20년 정도 걸릴거라고 대답했는데 실제로 우리나라는 20여년 후인 1978년에 한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준공에 성공한다.
1960년 3월, 4대 대선에서 이기붕이 출마한 '''부통령 선거에서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마산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항의 시위는 부산, 대구를 거쳐 서울로 확산됐다. 시위에는 경찰이 투입되어 무차별 폭행과 연행이 일어났다. 마산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사망했으며, 시신은 유기되었지만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56]
이승만은 자유당 강경파에 의해 정보가 차단되어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김주열 사건에 대해서 알게 된 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발생한건지 물어도 각료들은 제대로 말 해주지 않았다. 1960년 4월 12일자 국무회의록을 보면 각료들은 이승만에게 "불순분자들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 같다"[57] , "야당들이 선동하고 있는 것 같다"[58] , "학생들이 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59] 는 식으로 보고를 했다.
이승만은 다음처럼 묻기도 했다.
각료들의 답변을 들은 후 이승만은(전략) 어린 아이들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만큼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인바 이승만이[60]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일이 없는가?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
라고까지 말하며 만약 선거에 문제가 있었다면 자신이 사면(하야)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가기(可期)이방,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지금 말들 하는 것을 들어서는 안정책이 못된다고 보며 이 대통령이 싫다고 한다면 여하히 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나로서는 지금 긴급히 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면하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잘 연구하여 보라.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
그러나 주변에서 다들 이렇게 보고를 하니 이승만은 그 말을 믿었고 시민들을 향해 '야당에 의해 선동당한 국민들의 폭동, 공산당이 사주한 난동'# 이라는 다음과 같은 발표를 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생들이 시위를 하다가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받아 쓰러졌다. '''결국 4월 19일에는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되었고 분노가 폭발한 국민들은 친정부 언론사인 서울신문사를 불태우고 탑골공원의 이승만 동상을 파괴했다. 각계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교수들까지 참여해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부정선거 다시 하자'는 구호를 외쳤으며 주한 미국 대사관마저 재선거를 말했다. 시위대는 부정축재를 벌이던 이기붕의 집을 방화하였고, 경찰의 발포로 시위 기간 동안 180여명의 사망자가 나왔다.(전략)
지금 법을 다 폐지하고 난당의 행위로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며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선동하여 끌어내다가 혼동을 일으켜 위험한 자리를 이루게 되니 이것을 그냥 두고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내가 대통령 명의를 가지고 민심을 안정시켜서 모든 사람들이 다 안도가 되도록 하여야하므로 불법행위를 일체 중지하고 법으로 조처할 것이니 만일 누구든지 불만한 일이나 억울한 일이 있으면 다 각각 그 지방에 법을 맡아보는 사람들에게 호소해서 법리적으로 행하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중략)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잡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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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이제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실제 당시 촬영된 영상을 보면 이승만이 입원자들을 보며 울먹이는데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표정을 볼 수 있다.[61] 이런걸 보면 돌아가는 상황을 정말로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은 병원에서 다친 학생들을 보며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했다.[62]
이승만은 4월 26일에 시민대표단을 만났다. 그 중 한명이 이승만에게 "각하. 하야하셔야 합니다. 이게 국민이 원하는 겁니다"라고 말했고 이에 이승만은 "정말로 내가 하야하는 것을 국민이 원하느냐"고 물었다. 시민대표단은 하야해야한다고 다시한번 얘기했고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대답했다.[63] 그리고 그 직후 라디오로 하야하겠다는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위와 같은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당시 국회에서 이 부분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김선태 의원은 이 대통령의 말이 '국민이 원하니까' 사퇴를 한다는 것인지 '만약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를 하겠다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일부 의원들은 대통령의 진의를 확인하는 절차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국회가 대통령의 하야를 확인하고 권한대행 체제로 국정이 운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의지하여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고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를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있는 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둔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가 책임질 대안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해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들이 다 힘써 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갑론을박 끝에 국회 시국대책위원회는 미리 준비해 둔 시국수습 대책에 대통령 하야 문제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국회는 담화문이 발표된 그날 오후 3시 시국수습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함에 따라 다음 날 이승만이 국회에 제출한 사임서를 즉시 수리할 수 있었다. 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였으니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게 당연한 일이며, 애초에 집권 여당과 측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이 이승만 자신이기 때문.
1960년 4월 28일 아침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났다.
5. 하와이 망명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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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하와이 요양병원에서의 이승만 전 대통령 부부.
이후 한 달 간 이화장에서 거주하면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용돈이나 주며 지내다가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했으며[64] , 이승만은 오랫동안 활동한 하와이에서 옛 동지들도 만나고 좀 쉬다가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실상 허정이 출국을 허가한 이유는 그냥 추방[65] 이었고, 결국 이승만의 수차례 귀국 의사는 허정은 물론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계속 거절당했으며[66] 아내의 헌신적 내조로 고령의 나이에 비교적 건강하게 지냈던 이승만은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1964년 6월 말 갑작스런 급성 위장 출혈[67] 로 쓰러진 후 1965년 7월 19일 0시 35분 마우날라니 양로병원에서 향년 90세로 일생을 마쳤다. 이때 남긴 마지막 기도와 유언은 이렇다.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굳게 서서 국방에서나 경제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승만의 마지막 기도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이승만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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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1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유해는 전 주한 미군 사령관이자 친우였던 밴 플리트 장군이 마련한 특별기로 한국에 이송된 후, 3군 의장대에 의해 운구되어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7월 27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재임 기간 및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 대통령 일람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