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1. 개요
정치인 문재인과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 문서.
2. 범민주/진보계 정치인
2.1. 친문
문재인을 지지하는 그룹이다. 친노 - 범친노를 넘어 2021년 현재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주류로 떠올랐다.
그동안 민주당의 주류 세력은 친노계와 친노와 가까운 '범친노계'라는 그룹들이라는 게 대체적인 주장이었다. 사실, 친문이라 불리는 그룹이 있는 것은 맞지만 새누리당의 친박계처럼 실체가 뚜렷한 그룹은 아니었다. 한나라당의 주류였던 친이에서 친박으로 바뀔 때 공천학살이라고 불릴정도로 잡음이 심했다. 하지만 친노에서 친문으로 당내 주류 계파가 바뀔 때는 그런 거 없이 수장이 바뀌고, 몇몇 인원이 들어오고 나가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계파 이동이 되었다.
그런데 20대 총선을 거치면서 친노에 속하지 않지만 문재인을 지지하는 이들이 대거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친문'이라는 세력에 본격화 되었다. 다만 문재인을 비롯한 친문계의 의원들은 본인들 스스로의 정책 노선을 추구하고 따르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계파논쟁을 하는 것을 싫어하고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前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 추미애가 있다.
2.2. 비문
친문과는 달리 문재인 대통령과 다른 계보에 속한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일컫는 명칭이다. 더불어민주당 잔류파와 민생당 소속파, 국민의당 합류파, 국민의힘 전향파로 나뉘며 일부는 반문이 된 경우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후 친문 세력이 강해지면서 비문에서 친문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많아졌고 비문이었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인사로 임명하면서 친문이 된 경우도 있다.
2.3. 노무현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그리고 적당히 도우면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치열함이 나를 늘 각성시켰다. 그의 서거조차 그러했다. 나를 다시 그의 길로 끌어냈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문재인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 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듯이 노무현과 문재인은 '''말이 필요없는 서로의 인생의 동반자이자 소울메이트였다.''' 유명한 친노계 전현직 정치인들을 보면 '친노계의 좌장'이라거나, '노무현의 적자'라고 불리는 정치인은 여럿 있지만 문재인만큼 노무현과의 인연이 긴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친노계 정치인들은 노무현이 정계로 들어온 후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지만, 문재인은 노무현이 정계로 들어오기 전부터 동료 변호사로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저는 제가 아주 존경하는, 나이는 저보다 적은 아주 믿음직한 친구 문재인이를 제 친구로 둔 것을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대통령 감이 됩니다! 나는 문재인을 친구로 두고 있습니다! 제일 좋은 친구를 둔 사람이 제일 좋은 대통령 후보 아니겠습니까?"'''
본인 자서전에 따르면 노무현과 인연의 시작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당시 어떻게 할까 사무실을 고민하고 있을 때 검사로 발령나서 본래 노무현과 같이 사무소를 차리기로 했다 못하게 된 변호사의 주선으로 만난 것이었다. 당시 노무현은 나이도 1946년생이라서 문재인보다 한참 위였고 변호사 경력도 훨씬 위로, 당시만 하더라도 세무 • 경제 쪽으로 잘나가던 변호사였다고 한다.
처음 만날 당시 노무현은 문재인이 대학생 때 운동권이었냐면서 놀랐다고 하며, 문재인은 노무현이 경력이 아득히 위임에도 다른 변호사들과 달리 콧대가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당시 사무소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마음 편히 변호사 일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애초에 노무현이 전문적인 여러 변호사들의 분업 시스템을 생각하고 사무실을 만들어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시 노무현은 인권변호사가 아니었지만 인권문제에 이미 관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얼마 후 노무현은 정의감으로 하나둘씩 도와주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인권변호사이자 노동변호사로서 운동권에 투신하게 되었고, 문재인 또한 덩달아 부산과 울산 전역을 누비면서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노무현은 잘나가던 당시의 연들도 모두 청산하고 생활도 무척 힘들어졌지만 자신과 함께하는 후배 변호사를 위해서 늘 모범적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 노동운동가로서의 노무현은 아직 풋내기였던 문재인의 친구이자 선배, 형으로서 정말 많은 귀감이 되었는데, 노무현은 아무리 사정이 어려워도 반드시 수입의 절반을 문재인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의 소송을 맡아서 어떻게 이들을 도와줄까 같이 고민하면서 문재인의 변호 능력도 급상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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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법무법인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노무현이 통일민주당에 입당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한 이후 그의 충실한 참모이자 보좌관 역할을 맡았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는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선 캠프의 부산 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노무현이 대선에서 승리하고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청와대 비서실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청와대 민정수석[2] , 비서실장#s-4을 역임했다.
하지만 무리해서 몸이 많이 상하자[3] , 민정수석에서 사퇴하고 히말라야 산맥을 트래킹하며 여유롭게 지내던 중, 외신 신문을 통해 노무현 탄핵소추가 벌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트래킹을 그만두고 급히 귀국한 뒤 정치인을 그만둔 상태였던지라 급하게 변호사 자격을 되찾고 변호인단을 꾸려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을 이끌어냈다. 여담이지만 이때 맞붙었던 사람이 바로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소추위원) 김기춘.
노무현이 퇴임한 뒤 시골인 봉하마을에서 농부로 지내고 있자 본인도 변호사로 돌아갔고 자주 놀러오면서 친분을 쌓았다. 그러다 노무현이 비리 수사를 받고 있을 때 그의 변호를 맡기도 했고, 2009년 5월 23일 세상을 떠난 후에는 병원에서 공개 기자회견을 열어 사망 소식을 전하였으며 발표 영상 일부 화장 후 노무현의 장남인 노건호와 함께 고인의 유골을 빻는 일도 하는 등 정치적 상주 역할을 하였다. 노무현 사후에 설립된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현재도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노무현에게 있어서 문재인이라는 사람은 '''가장 필요한 순간마다 함께 했던 동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력 정치인이 잘 나갈 때는 그의 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편을 들어주지만, 그의 인기가 떨어지고 정치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하면 손바닥 뒤집듯이 단호히 선을 긋고 떠나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우리나라 정치 세계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나는 문재인이란 친구를 두고 있으니 대통령감이 된다"던 노무현의 연설에서 볼 수 있듯이, 노무현에게 문재인은 '''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문재인이 노무현 당시 후보의 부산 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고 있었고, 이 연설을 부산에서 했던 것을 미루어 보면 그냥 립서비스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은 대권을 잡은 후에도 문재인을 계속 중용하였고, 퇴임 이후에도 계속 그를 곁에 두었다. 이것을 보면 '''진심으로 믿었던 사람인 셈이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실 노무현은 성품이 직설적이라서, 립서비스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만큼 노무현이 직설적으로 칭찬해 준 사람은 문재인을 제외하고는 단 한 사람, 유시민뿐이라고 한다. 대통령의 친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지가 대통령의 자질과 무슨 관계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말의 논지를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노무현이 이 말을 꺼낸 것은 유유상종이란 말이 있듯이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므로 궁극적으로 '''"나 노무현은 이런 훌륭한 친구를 두고 있기에 나 역시도 훌륭한 사람이며 나는 대통령 감이 된다"'''는 뜻이다. 즉, (친구 문재인은 물론) 본인이 능력 있는 인물이라는 걸 간접적으로 어필하는 내용이란 뜻으로, 이 영상에서 노무현과 문재인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노무현은 '''적어도 내가 뼛골까지 신뢰하고 나를 뼛골까지 신뢰하는 깊은 우정을 가진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이상 존재한다'''라는 것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으므로, 사람의 마음은 얻기 상당히 힘든데 노무현은 문재인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여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김어준은 노무현 사후 문재인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 대선 후보로 적격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무현이 자살한 후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일처리를 잘해서[4] 호평을 받았는데, 그건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여준 모습이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어찌나 심했는지, 부인 김정숙이 저러다 남편이 크게 상하지 않을까 걱정돼서 119를 불렀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인 '문재인의 운명'의 도입부는 문재인이 봉하마을에서부터 소식을 듣는 장면에 할애하고 있는데, 책 내용을 보면 문재인은 2009년 5월 23일 새벽에 김경수 당시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이 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을 급히 찾아갔지만, 이미 노무현은 호흡기만 떼면 바로 숨을 거둘 사실상 사망 상태였다고 한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그토록 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매우 의욕적으로 집필 중이던 책도 손에서 놔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치 멀리 떠날 사람처럼 인사를 하는 등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문재인 본인은 그런 징조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였고 노무현이 언제부터 유서를 머릿속에서 쓰기 시작한 걸까, 그것이 제일 견디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책에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일순간에 그런 문장을 다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전부터 내용을 고려하고 있었을 거라고. 그리고 18대 대선 회고록인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자신은 저렇게 노무현을 보내주지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무현의 비극적인 결말로 인하여 오랫동안 현실 정치와 단호하게 선을 긋고 살았던 문재인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대업까지 이루게 됐다. 그의 저서 '사람이 먼저다'에 따르면 "시민으로서 참여할 수 있는 정치의 영역도 무궁무진하게 많이 있는데, 꼭 직업 정치만이 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평생의 친구이자 선배 형님이면서 도반(道伴)[5] 이었던 노무현의 비극적인 죽음에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두 민주정부 10년간 이뤄진 성과와 가치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문재인 본인이 자서전에 쓴 바에 따르면 자신에게 있어 노무현은 나이도 훨씬 많고 변호사로서도 한창 선배였던 사람인 데다 후에는 직장상사 같은 위치로서 대면했기 때문에 친구라는 그의 말은 자신에 대한 예우로 받아들였고 자신은 늘 자신보다 높았던 분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권위적이었던 것과 별도로 매우 예우를 갖추었기 때문에 문재인에게 늘 존댓말을 사용했고 호칭도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2.4. 송철호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된 송철호 변호사와 문재인은 30년 지기 벗이었다. 사석에서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그리고 송철호 울산시장은 모두 1980년대에 부울경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3인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은 부산광역시에서 송철호 시장은 울산광역시에서 주로 활동하며 노동자 인권 문제에 크게 힘썼다.
이후 이 3인방은 정치에 입문하게 되는데 모두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노력했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듯이 3당 합당 이후 민주당계 정당에는 사지가 되어버린 부산광역시에서 3번의 총선과 1번의 지선에서 무려 4번이나 낙선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송철호 변호사 역시 국회의원 선거 6번, 울산시장 선거 2번까지 무려 '''8번'''이나 낙선한 경험이 있다. 그야말로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내리치던 바보들인 셈이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은 일찍이 송철호 시장에게 "내 대통령 퇴임하고 나서 우리 선거 또 나가자." 이렇게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송철호 시장이 "떨어지면 어떡하시렵니까?"라고 묻자 "떨어지더라도 계속 해야지."라고 했다고 하니..... 이후 송철호 시장은 5번의 선거에서 낙선한 후 본인도 지쳐서 이제 정치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남으려고 울산을 떠나 이사를 갔는데 문재인이 그 사실을 알고 "형 이사했다메? 다시 이사 가소!"라고 하며 울산으로 돌아갈 것을 강권했다고 한다. 그러자 송철호 시장은 "내는 내 마음대로 살도 몬하나?"라고 묻자 문재인은 "그게 운명인데 우짭니꺼?"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송 시장은 다시 울산으로 내려가 3번의 선거에 도전하게 되었다. 2014년 7월 30일에 실시한 재보궐선거에서 전임자 김기현의 울산시장 선거 출마로 남구 을이 궐석이 되어 재보궐선거 실시가 확정되었는데 당시 송 시장은 무소속 후보로 박맹우 전 울산시장과 겨루게 되었다. 당시 문재인은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송 시장은 새정치민주연합 소속이 아니었는데도 문재인 의원이 송철호 후보의 선거사무원으로 활동하며 선거 유세를 지원했다.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하게 점쳐졌던 문재인 의원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송철호 후보는 결국 박맹우 후보에 패배하였고 이후 2번의 선거에서 계속해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드디어 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되며 9번째 도전 끝에 첫 당선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문재인은 한때 실의에 빠졌던 송 시장에게 지역주의 타파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을 다시금 각성시켜준 인물인 셈이다.
다만 현재 울산시장 하명수사 논란으로 송철호 본인과 전 청와대 인사들 등이 검찰 수사를 받고있음에 따라 앞으로 둘의 관계가 희극 또는 비극이 될지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2.5. 정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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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에게 있어서 친문을 제외하면 '''가장 든든한 정치적 동맹이자 협력적 경쟁자'''라고 할수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친노계의 좌장 역할을 했고, 범친노계의 좌장인 정세균은 19대 국회에서 종로구로 지역구를 이전해 당선되면서 정계 및 친노계의 중진으로 자리잡게 됐고, 문재인은 그 당시에 사상구의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둘은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맞붙었는데, 문재인이 1위, 정세균이 4위로 탈락했다(...).
이후 20대 국회에서도 정세균은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재선에 당선되면서 그 동안의 넓은 인망을 바탕으로 20대 상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하게됐고, 친노계의 좌장이었던 문재인은 2017년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2017년에는 대통령과 국회의장이라는 신분으로 마주하게 됐다. 2020년에는 문재인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정세균은 문재인에게 웬 책을 읽어보라며 선물로 줬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친노계의 일원인 정세균도 노무현 前 대통령의 8주기에 봉하마을로 초청받았는데, 정세균 또한 그 초청에 응해, 앞으로 노 대통령이 생전에 그리던 사람사는 세상을 저희가 만들어 가겠다고 연설했다.
정세균은 범친노 최대계파인 정세균계를 이끄는 거물이면서도 좌우를 가리지않는 폭넓은 인망과 다양한 관직을 겪은 경험으로 전국적인 인지도와 계파적인 포용성이 모두 뛰어난 정치인이다. 과거 친노계가 동교동계에게 강한 비판을 받을때도 친노계에 손을 들어주었던 인연이 발판이 되어 문재인과는 대선후보 경선에서 붙었던 것처럼 항상 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나 든든한 친노계의 지지자가 되어주었다.
결국 정세균 본인도 참여정부시절 산업부 장관에 이어서 친문의 지지를 바탕으로 20대 국회 전반기 의장에 당선되더니 국무총리 지명까지 받은 상황이 되었고 문재인 역시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있으니 현시대의 정치인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동맹,경쟁,협력의 관계라고 보아도 될정도다.
다만 개헌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는 편이다. 정세균은 강력한 의회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총리의 국회추천 등의 의회 우위적 요소를 도입하길 바라는 반면, 문재인은 청와대 개헌안을 통해 총리 국회추천제는 반대하고 대신 더 실무적인 영역에서 행정부와 국회의 역할을 재분배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친노에서 파생된 타 계파의 각 수장인 문재인이나 박원순보다는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차이점도 있다. 아무래도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 어느 정도 이상으로 좌파(진보)적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2.6. 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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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 시절 동기였고, 깊은 친분이 있다. 나이는 문재인보다 박원순이 2살 아래다. 그래서 박원순은 문재인을 형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그리고, 박원순 시장 본인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었고, 문재인을 비롯한 여러 친노 진영 정치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며, 박원순 시장 자신도 친노를 자처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박원순 시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도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한때 원래 친분이 있는 사이었지만, 박원순이 이명박 정부에서 벌였던 적대 세력 사찰 등을 문제삼아 반MB 기치를 내걸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반대 진영에 서게 되었다.
박원순이 서울시장으로 정계에 화려하게 입문했을 때 친노 진영 인사들도 박원순 시장에게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문재인도 박 시장에게 호의적이기도 하고. 상호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기도 하면서 서로를 비판할 때도 있었지만, 둘의 관계는 돈독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박원순은 198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변호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살이했던 시절에 직접 노무현의 변호인을 맡아 도와줬던 인연도 있었다.#
둘의 관계가 가장 삐걱거렸을 때는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시즌으로, 이때 촛불 혁명으로 조기 대선이 현실화 되는 와중에 국민적 개혁 요구와 박원순의 캐릭터가 영 어울리지 않아 유의미한 지지율을 가지지 못하자 박원순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앞두고 문재인 쪽을 '청산돼야 할 기득권 세력'이라고 공격한다거나, 호남에 내려가 '참여정부가 호남을 홀대했다'고 주장한다거나 더불어민주당의 대선 후보를 뽑을 대선 후보 경선의 룰을 정하는 일에도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의 네거티브 전략을 선택하면서 문재인을 지지하는 지지층 사이에서는 박원순의 이미지가 크게 나빠졌다. 결국 네거티브 효과를 보지 못하고 역풍만 맞고 대선 출마를 중도에 포기했다.
이후 박원순 시장은 언론이나 방송에 등장해서 왜 그랬냐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선선히 자신의 실책이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이후 문재인의 포용력을 칭찬하면서 '''역시 맏형은 맏형이다''' 하고 추켜세우는 모습을 보여줘 문재인 지지자들 역시 다시 좋게 보고 있다.
한편, 문재인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된 뒤 청와대에 박원순 시장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여러 명 중용됐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지냈던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문재인과 손을 잡았으니 잠시 논외로 치더라도 하승창 청와대 사회혁신수석[6] ,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 조현옥 청와대 인사수석 모두 박 시장과 함께 일한 경력이 있다. 이를 두고 조선일보는 문재인 & 박원순 공동 정부냐는 내용의 짤막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기사
물론 박 시장과 함께 일했다고 모두 '박원순계'라는 그룹으로 묶어 부를 수는 없다. 서울시는 우리나라의 수도인 만큼 시장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무척 많다. 서울시의 시정을 지휘하는 박원순 시장 처지에선 비록 자기 사람이 아니더라도 쓸 만한 인재라고 판단되는 사람을 데려다 쓸 수 있고, 이는 문재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문재인이 참여정부에서 국정 경험을 쌓았다고 해도 민주당계 정당이 9년간 국정운영 경험이 없는데, 여기서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지자체인 서울특별시에서의 시정 경험을 한 인사들은 소중한 인적 자원이다. 그리고 서울시의 중요성과 상징성을 고려하면 정부도 서울시와의 공조를 잘 유지해 나가는 걸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원활하게 풀기 위해서 이러한 인사를 단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문재인과 박원순의 다른 공통점도 있는데 바로 지독한 일 중독 증상(...). 박원순도 이미 참여연대 시절부터 워커홀릭으로 악명높았으며 서울시장이 된 뒤에도 여전하다. 서울시 공무원들이 과로로 줄줄이 병원행이라는 하소연이 나올 정도라서 그나마 일을 줄인게 그 정도라고.
문재인은 19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박원순을 아세안 특사로 임명했으며 이에 박원순은 특사 자격으로 동남아를 순방하면서 각국의 정상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박원순 시장이 퇴임한 이후부터 문재인 정부의 내각으로 입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간간이 나왔다. 일단 박원순 시장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특별시장 3선에 도전하여 당선되었으므로 입각 가능성은 높지 않다[7] . 그리고 2020년 7월, 박원순의 자살로 오랜 인연은 비극적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2.7. 유시민
유시민 작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학연, 지연, 경력 등 모든 면에서 접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정치적 지지 하나만으로 함께 한 인사이자 대표적인 친노계 정치인들 중 하나였다. 문재인을 제외하면 유 작가는 친노계의 적통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였다. 만약 유시민 작가가 2013년 정계를 떠나지 않고 계속 정치 일선에 남아 있었다면 문재인과 가장 끈끈하게 협력하면서도 '친노 적자'의 정통성을 두고 경쟁하는 라이벌로 만났었을 지도 모른다.[8]
하지만 의외로 두 사람이 정계에서 함께 활동하거나, 반대로 라이벌로서 충돌한 사례는 거의 없다. 두 사람의 공식적인 접점은 참여정부 뿐이다. 당시 문재인은 청와대 비서실장,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으로 있었고 유시민 작가는 여당 의원이자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있었다.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하기 전부터 동료로 함께 일했던 사람이고 유시민 작가는 노 전 대통령이 정계로 발을 들여놓고 한참 뒤에 인연을 맺은 사람이니 둘의 접점이 참여정부인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뒤에는 문재인은 부산·양산 지역으로 내려가 한동안 본업인 변호사일을 하면서 정치권과 거리를 두면서 지내다, 2012년이 돼서야 제19대 총선 출마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정계에 입문했고, 유시민은 노 전 대통령 퇴임 후에도 계속 정계에서 활동하며 국민참여당-통합진보당-정의당을 거치다가 2013년에 정계에서 공식 은퇴하였다. 참여정부를 빼면 이 둘이 정계에서 무엇인가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를 결코 남남으로 보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친노라는 하나의 틀이자 접점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시민 본인이 표현(썰전 218회)한 것처럼 문재인의 대통령 취임은 '노무현의 정치적 복권'이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친노계 적통인 유시민과 문재인이 전혀 접촉도 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문재인의 오른팔이라 불렸던 양정철 전 비서관의 말에 따르면, 문재인이 정계에 입문하기 전 "유시민 같은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온다면 나는 밀고 싶다."고 말했고, 되려 부침을 겪고 있던 유시민은 문재인의 정계 입문을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양정철은 유시민이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에 대한 책임도 있는 사람이라며 적절한 시기에 문재인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민들, 특히 친노-친문 지지자들은 두 사람의 공식적인 협력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다. 두 사람의 지지층도 거의 대부분이 겹치는 편이다. 문재인이 야권의 유력 인사로 등극하고 장외 인사들을 대규모로 영입하자 곧바로 유시민의 정계 복귀 떡밥이 나돌기 시작하고, 문재인 정부의 수립 이후 국무총리나 장관 등 내각의 주요 인사에 유시민의 이름이 계속해서 언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명 '(유시민을)산 채로 잡아와라'라는 밈도 이 때 생겼다. 유시민을 강제로 납치(?)해서라도 문재인과 함께 일하게 하고 싶다는 지지자들의 기대감을 표현한 것이다. 지지자 중에서는 유시민의 정계 복귀를 반대하거나 그 가능성을 낮게 본 여론도 적지 않았지만, 이 역시 유시민이란 인물 자체를 반대하는게 아니라 자유로운 장외 활동을 존중해주는 것이 유시민과 문재인 모두에게 이롭다는 의견에 가까웠다. 즉, '유시민이 정계에 복귀하든 장외에서 활동하든 간에,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두 사람은 반드시 협력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지자들의 중론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썰전에 문재인이 출연했을 당시 위에 나온 사진처럼 '유시민 작가가 언젠가는 정계에 돌아오시지 않을까 합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 자체는 단순한 덕담 수준에 가까웠지만 이조차도 문재인과 유시민의 관계를 두고 굉장한 관심을 일으켰다. 유시민이 반 농담으로 '이건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죠!'라고 비판(?)한건 덤. 2017년 12월에 유시민이 초등학교의 일부 빈 교실을 아동 육아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청와대 국민청원 글을 올리자 곧바로 상당한 규모의 지지 서명이 모인 것은 물론이고 '제안자를 당장 데려다가 책임자로 임명해서 직접 시행하게 하라'라는 내용의 댓글이 쏟아진 것 또한 이렇게 관심이 큼을 나타내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급기야 유시민은 19대 대통령 선거 직전 '저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다'(김어준의 파파 이스 144회)라고 말하며 문재인 정부의 내각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물론 정계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했을 뿐이지, 유시민은 방송 및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면서 자칭 '진보 어용 지식인'이라는 용어까지 만들며 문재인 정부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위치에 서 있다. 영향력 자체도 장외 인사 중에서는 손에 꼽힐 정도로 커졌다.
3. 범보수계 정치인
3.1. 강삼재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직계 후계자 중 한 명으로 불렸던 상도동계 핵심 멤버 강삼재 전 의원과는 대학교 동기이자 친구였다. 그 덕분인지 김영삼 전 대통령과도 안면을 트게 되었으며 그가 별세한 이후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사이가 틀어져 있었지만 문재인은 인정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덕분에 문재인의 지지층의 폭이 더욱 넓어지는 이점을 얻게 되었다.
19대 대선 때는 김덕룡을 비롯한 상도동계의 주요 인사들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 고려대학교 지속발전연구소 연구교수도 문재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다.[9] 여담으로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대부분의 상도동계는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였으나,[10] 강삼재는 이명박과 사이도 나쁜 편에 가까웠고, 이명박이 아닌 무소속 신분이었던 이회창을 지지했다.
3.2. 김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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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공사관계가 180도 다른 경우다.[11]
자유한국당의 김무성 의원과 경남중 동문이었다. 이 두 사람이 중학생이었던 시절 경남중은 부울경 지역에서 최고로 쳐주는 명문 학교였는데, 두 사람은 선후배 지간이었으며 문재인이 후배였다. 그래서 지난 2015년 2월에는 경남중 동문회에서 만나기도. 서로 정치를 떠나서 개인적인 면에선 케미가 잘 맞는 듯하다. 심지어 정책 문제로 서로 으르렁댄 다음 날 총동문회에서 만나 서로 간지럽히며 장난치는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위의 동영상 속 시간은 둘 다 당시의 여당과 제1야당의 수장이었던 때로, 재미있게도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당시 새정련 대표 모두 자신과 반목하고 있었던 상대 국민의당, 친박의 견제와 발목 잡기 때문에 험난한 당 대표 시절을 보내야 했다. 둘이 공식적으로는 정적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라가 많지 않은 자리에서는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싸늘한 분위기를 연출하지 않았던 건 서로의 처지에 동병상련을 느껴서일 지도(...).
그 밖에도 문재인은 김무성 의원의 차녀인 김현경 씨의 결혼식에도 깜짝 등장해 덕담을 전하기도 했다.# 문재인과 김무성은 서로 반대 진영에 있었고, 김무성은 박근혜 대선 캠프의 총괄선대본부장이었던 2012년 18대 대선 때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논란을 꺼내들어 문재인을 공격했던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사적으로는 상당히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어 김무성의 경우 일가 행사 때 같은 당 사람들은 공사 구분을 해야한다는 명분으로 부르지 않았지만, 문재인은 사적으로 연락해서 초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3.3.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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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과 전전임 대통령인 이명박 전 대통령의 관계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실제 관계가 어떤지는 두 사람만이 알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관계를 한마디로 '불구대천' 혹은 '와신상담'이라고 말한다.
2009년 5월 29일에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중 백원우 당시 통합민주당 의원이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어디서 분향을 해, 이명박!", "정치 보복으로 살인에 이른 정치 살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죄하십시오!"라고 외치며 항의다가 청와대 경호원들에게 저지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상주 역할을 맡고 있었던 문재인 당시 변호사 등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했는데 그때 찍힌 사진이다.#
훗날 인터뷰에서 문재인 자신도 백원우 의원과 같은 심정이었으나, 이명박은 문상객이었으니 상주로서 그에 맞는 예의를 지킨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당시부터 문재인과 이명박이 어떠한 관계가 될지는 보나마나였던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과 박연차 게이트 책임 유무에 대해서는 논란과 의견이 엇갈리지만,[12] 이명박 정부 당시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을 대상으로 했던 수사는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는 것에는 의견이 일치하는 편이다. 털다 털다 못해 아예 노 전 대통령의 단골 삼계탕집에까지 세무조사가 들어갔을 정도였고, 측근이던 강금원은 검찰에서 뇌졸중 치료를 사실상 막았으며, 노무현 사후에는 국정원을 동원해 심지어 간첩잡을 돈인 대북공작금까지 횡령해 뒷조사를 하기까지 했다. 이러고도 정작 나온 것은 1도 없어서 후폭풍이 심한 외교 기밀문서까지 동원한 게 바로 NLL 발언 사건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측에 대한 수사 당시, 오죽했으면 불안감을 느낀 당시 여당 한나라당에서조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지적하였을 정도인데, 검사 출신으로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던 박희태 당시 한나라당 대표조차 "이런 수사는 처음 본다."며 검찰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13] 심지어, 나중에 자유한국당의 대표가 되는 홍준표마저 "구속을 하려고 했다면 신속히 결정해야지, 전직 대통령 수사를 하면서 모욕만 줘서 전 대통령의 목숨만 잃게 만들었다."고 검찰을 질타했다. 또한 당시에는 친이계에 속했던 남경필 前 경기도지사[14] 도 "검찰이 노무현을 모욕준 것은 문제가 있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망신주기식 수사와 검찰의 압박이 노 전 대통령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로서 함께 대검찰청에 들어갔었던 문재인은 자신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이명박 정부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의 배후에 노무현 전 대통령 측이 있을 거라 단정짓고 이에 대한 정치 보복에 나선 것 같다고 저술했다.
이명박 정부는 더 나아가서 친노 진영을 확인사살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참여정부와 비교되는 권위주의적 행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났고, 이는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한명숙, 이광재, 김두관 등 친노 진영이 부활하는 계기가 됐다.[15] 그리고 범친노계로 분류되는 박원순 당시 변호사도 2011년에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누르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었으며,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문재인과 이해찬 전 총리가 각각 부산 사상구, 세종시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중에 국회의장이 되는 정세균 당시 의원 또한 이명박 정부 심판이란 구호를 내세우며 전북의 지역구에서 서울 종로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면서 정계의 중진으로 입지가 급상승했다. 그리고 문재인은 같은 해에 있었던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선을 압도적으로 승리했고, 본선에서 48.0%의 득표율을 올리며 석패했지만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16]
그래서 정치권의 호사가들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2008년 한나라당의 친박계 공천 학살로 인하여 이명박 측과 원수지간이 되었던 박근혜가 2012년 새누리당의 공천 독재권을 거머쥔 당 비대위원장으로 추대됐을 때 친이계가 이렇다 할 반항을 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박근혜가 19대 총선 시즌에 정적이었던 친이계를 공천 학살했으면서 대권을 잡은 뒤에는 친이계의 심장인 이명박에게 이렇다 할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던 점을 근거로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민주통합당이 다수당이 되느니 새누리당 내에서 친박이 주류가 되더라도 새누리당이 다수당이 되는 게 낫고,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느니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국가정보원을 이용하여 여론조작을 실시한 거 아니냐는 추측을 내어놓았다.
그러나 박근혜는 언론통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정윤회 문건 파동,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공권력을 통한 살인,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등 각종 논란으로 반발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역대급으로 보수정당 역사에 남는 참패를 기록, , 20대 국회는 여소야대 정국으로 전환되었고 같은 해 10월 24일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을 뉴스가 JTBC 뉴스룸을 통해 드러나면서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결국 이는 보수 진영 전체가 몰락에 가까운 치명타를 입혔고, 노무현 정부가 끝난 지 9년 만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 이젠 대통령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2017년 19대 대선 투표날 이명박 부부의 표정을 보면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개 평사원으로 현대건설에 입사해 최고 경영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신화'[17] 와,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서울시장 시절에 보여주었던 성과,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 상도동계라는 지지세력과 反노무현 정서에 힘입어 대선에서 압승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하의 검찰 수사로 인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초특급 사건이 일어났고 또 본인의 실정으로 인한 이미지 실추가 더해지면서 노무현에 대한 향수, 그리고 친노 진영의 부활이라는 역효과만 불러오고 말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이 간접적으로 살해한 것이나 다름 없는 전직 대통령의 후배이자 최측근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기에 이른다.
이명박 측이 정권을 잡은 5년 동안 이렇다 할 의혹거리를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더라도 이렇게 집권 초반부터 공격 거리를 만들어주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요, 인과응보인 셈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명박의 최대 실책은 대통령 선거 당선 및 집권 당시의 지지율을 각종 논란거리로[18] 다 깎아먹어서[19] 결국 당내 정적이자 보수 진영의 또 다른 유력한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에게 당권을 빼앗겨 친이계의 집권 연장을 불가능에 가깝게 만든 것이 아닐까.[20]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흘러가면 흘러갈 수록 더더욱 들끓었던 反이명박 정서, 6.2 지방선거 패배, 그리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한나라당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그리고 홍준표 대표 체제를 만들어낸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으로 인하여 친이계 쪽에선 다음 대선에서 먹힐 만한 대선 주자가 없는 상황이라 친노 쪽에 정권을 넘기지 않으려면 싫든 좋든 당시 보수 진영 최고의 차기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에게 대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지만[21] 그 박근혜가 그런 결말을 맞이할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만약 박근혜가 나라를 그런 대로 잘 이끌었다면 계속해서 보수 정권을 유지시켜 이명박 측도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설령 정권 교체까지는 못 막았더라도 최소한 조기 대선까지는 막았을지도 모른다.[22][23] 그러나 박근혜는 떡잎부터 글러먹은 폐급이었고, 언론통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정윤회 문건 파동,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박근혜 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 공권력을 통한 살인,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등등 온갖 실책을 남발한 것도 모자라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스캔들까지 드러나면서 본인은 물론이고 보수 진영 전체와 동귀어진하는 최악의 팀킬을 저질러 버렸다.
그리고 휘하 그룹에 친이계 정치인들이 여럿 포함돼 있어 '이명박의 아바타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던 국민의당의 안철수 측도 각종 논란거리를 만들며 보수 표심을 흡수하지 못했고, 당시 보수 진영 대선 후보 여론조사 1위였고 역시 친이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반기문 측에서도 여론조사 결과와는 달리 각종 논란거리를 만들다가 결국 반 전 총장 본인이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며 대선 레이스를 그만두었다.
거기다가 친이계가 포함된 비박계가 만든 바른정당과 친이계가 주축이 되어 창당한 늘푸른한국당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이렇게 친이계가 포함된 비박계가 문재인과 1:1 구도를 만드는 데 실패한 반면,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후보 측에서는 촛불 민심의 적통이라는 아이콘을 흡수해 대권으로 정석적으로 나아가면서, 마침내 19대 대선에서 압승해 정권을 되찾아왔다.[24][25]
문재인 대통령이 대권을 잡은 뒤 박근혜 정부가 제대로 밝혀내지 않았던 이명박 정부 시절의 적폐들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을 위해 이명박의 4대강 사업에 대한 감사를 지시하는 등 이명박 측을 전방위적으로 조금씩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측근이었던 원세훈은 국가정보원·국방부·국군사이버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경찰청 여론조작 사건,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사건,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덮고 넘어갔던 것으로 추측되는 이명박 정부의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 블랙리스트, 국가정보원·국방부·국군사이버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경찰청 여론조작 사건, 국가정보원 대북공작금 유용 사건,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이명박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등이 하나 둘 세상 빛을 보기 시작했다.[26] 게다가 다스 실소유주 논란이나 BBK 주가조작 사건 등의 개인비리까지 재조명되면서 갈수록 궁지에 몰렸고 결국 구속됐다. 게다가 30조, 50조, 70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초대형 비리는 건드리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를 두고.당연히 보수 진영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이명박 비리 의혹 수사에 대해 정치 보복이라며 반발했지만, 정부가 나서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충분히 의심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단서과 정황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데 수사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특히 국정원은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그 막강한 정보력과 대공 수사권을 애꿎은 곳에 휘둘러 온 적이 많아서 손을 봐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터였다.
무엇보다도, 2012년에 행해졌던 국정원 대선 개입의 직접적 피해자가 지금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그 당시 수사 최전선에 있다가 정부에게 찍혀서 좌천되었던 검사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수사를 이끌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최측근인 원세훈이 쫓아낸 당시 국정원 3차장은 문재인 정부에서 초대 국정원장으로 임명되기까지 했는데(...)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자유한국당은 이를 정치 보복으로 규정했으며, 친이계가 상당수 포함돼 있는 바른미래당과 친이계의 좌장인 이재오도 반발하고 있다. 보수 야권에서는 국정원의 폭주 or 과잉 충성으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며 모든 정권의 행동을 재조사 해야 한다는 논리로 반발하고 있다. 물론 문재인도 사람인 만큼 이들에 대한 복수심이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복수라고 하여도 명백하게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처벌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물론 국민의 정부 시절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같이 민주화 운동의 대부가 민주 사회를 배신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며 참여정부에도 개인의 일탈이라는 결론이 났지만 이명박 당시 후보 사찰로 직원이 징역을 선고 받기도 했다. 썰전의 보수 패널로,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던 박형준이 이를 지적하자 유시민도 일부 수긍했다.
하지만 유시민이 반박한 것처럼 당시에 이런 국정원의 이탈은 언론을 통해 드러났으며 이미 재판 과정을 걸쳐 처벌을 받았다. 현재 재판 진행 중인 원세훈 사건과 1:1 대응과 옳지 못하며 물증 없이 우리만 더럽지는 않았을 거라는 주장은 친이계의 희망에 가깝다. 그리고 (이 역시 물증은 없으나) 민주당 지지층은 지난 보수 정부 9년 동안 국정원이 광범위하게 여론을 조작해 민주당, 문재인 죽이기에 나섰는데 이 둘을 훅 보낼 수 있는 내부적인 자료가 있었다면 진작에 사용하지 않았겠냐며 반박하고 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위협한 지도 오래 되었으나, 김관진 전 장관이 구속이 되었어도, MB측으로부터 어떠한 폭로도 나온 게 없다. 내용을 떠나 문건 유출 자체가 논란이 됐을 게 뻔한 NLL 대화록 사건을 보면 문재인 지지층의 반박이 어느 정도 타당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시나 반격의 카드로 꺼낸 것이 박연차 게이트다.[27]
허나 사자방과 원세훈의 예에서 보듯이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부정한 방법으로 국정을 이끌었고, 후일을 도모 했다는 의심을 가능케 하는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데다,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국정원과 군이 정계를 어지럽히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정황이 계속 걸려들고 있는 만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사정을 단순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정치 보복이라고 평가 절하 하는 건 설득력이 부족한 주장으로 들리지 않겠는가.
이제는 너무나도 많은 정황 및 증거가 드러났으며 판이 점점 커지고 있어 더 이상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수사를 중단 혹은 어영부영 마무리 지었다가는 정권 성립의 명분과 지지자의 기대도 사라질 판이다.[28] 여론조사 등을 살펴보면 이명박도 수사해야 한다는 반응이 기본 60~70%를 넘길 만큼 이번 수사에 대한 여론의 호응도 좋은 편이다. # [29]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수사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지난 2012년 18대 대선 시즌 때부터 불이 붙은 문제였고, BBK 주가조작 사건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캠프 측도 꺼내들었던 무기였다. 그리고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하여 이헌수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박근혜한테 돈을 상납했다는 진술로부터 시작한 사건이다. 처음에는 박근혜의 측근인 문고리 3인방과 최경환을 중심으로 특활비 수사가 진행됐지만, 검찰이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명박에게도 그 칼날이 닿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자행된 국정원과 군의 정치 개입 등에 대한 대한민국 검찰청의 수사는 계속 성과를 내어 (위의 각주에서도 이미 설명되어 있듯) 이명박 정부 시절 국방장관을 지냈고, 박근혜 정부에서도 유임돼 국방장관과 국가안보실장을 지냈던 김관진이 11월 8일 검찰에 소환돼 "이명박의 지시를 받았다"고 결국 시인한 뒤 구속되기에 이르렀으나 구속부적심 심사로 불구속으로 석방된 상태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명박 측 입장으로 보면 상당히 떨리는 상황이 이어졌던 셈이다. 그래서 그간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인들을 통해서만 반발 입장을 내비쳤던 이명박이 11월 12일 두바이로 출국하면서[30] 직접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정책이 개혁인지, 정치 보복인지 의심된다면서 경제 위기와 안보 불안을 야기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
그런데 발언을 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상당한 초조함을 느끼는 듯한 모습을 몇 번 내비쳤고 "김관진의 진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기자에게 "상식에 벗어나는 질문하지 말라"며 발끈하는 등 과거의 다소 여유 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나중에는 국정원 특활비 사건 때문에 측근들이 구속당하고[31] 수사망이 조여오자, 본인이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까지하는 초강수를 두었다.[32]
또한 상술하였듯이 "노무현 정부에 대한 5년치 자료를 꺼낼 수도 있다"는 식의 반격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 및 문재인 지지층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몰릴 때까지 몰렸다는 반증"이라고 받아들였다. 마찬가지로 상술하였듯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격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위력 있는 자료를 손에 쥐고 있었다면 문재인이 집권하기 전에 터뜨렸어야 납득이 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민주-진보 진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친노계의 수장이었고, 정계에서 무시하기 힘든 거물이었다. 초선으로 국회 입성한 뒤 대통령 후보-제1야당 당 대표에 올랐을 정도로 당내에 탄탄한 지지 세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보수 정당에서는 반드시 쓰려뜨려야 할 상대였다. 국회 입성 후 언론에 노출되는 양도 많았으며, 충분히 정치 생명에 타격을 줄 시간은 많았을 것이다. 설사 지금 파급력이 높은 자료를 꺼낸다고 해도, 이제는 대통령기록물법 위반이라는 덫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33]
자신들도 참여정부에 관한 비밀을 쥐고 있다는 말을 꺼낸 지도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이명박 측은 카드 한 장 보여주지 않았고, 검찰의 수사는 점점 이명박을 향하고 있으며, 이제는 국정원 특활비 사건이라는 확실한 건수까지 확보하게 됐다. 이명박 정부의 개국공신이었지만 이상득과의 문제로 버림 받았던 정두언 전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 간의 비사를 방송 등에 흘리며 이명박 측에게 "소총도 없으면서 미사일을 든 정부에게 맞설 수 있을 것 같냐"고 조롱하기도.
고로 언론에서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는 날이 머지 않았다고 예측하며[34] '초읽기'라는 단어를 기사에 넣기 시작했다.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본인이 진행하는 시사 팟캐스트 방송 '청정구역'의 11월 14일자 방송에서 "(전직 대통령은 워낙 거물이므로) 검찰이 전직 대통령을 부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따라서 검찰이 이명박을 부른다면 모든 게 셋팅되었다는 뜻일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 검찰 수사팀은 사실상 이명박의 턱밑에까지 다다랐다. 국정원 특활비 상납 사건과 관련하여 한 측근의 배신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명박도 직접 기자회견을 하면서까지 정치 보복을 멈추라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보냈고 이에 대해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분노'라는 표현까지 곁들여가며 이명박 측의 여론전에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검찰도 이명박 측의 여론전에 아랑곳하지 않고 며칠 후 이명박이 정계 입문 이전부터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경제 비리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다스의 전현직 임직원들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였으며, 이명박의 친형 이상득의 자택까지 압수수색을 하면서 더욱 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칼을 가까이 들이대었다. 그 이후에도 이상득의 검찰 소환, 영포빌딩의 지하 2층 창고를 압수수색[35] 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마침내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하였으며 2018년 2월 5일에는 국정원 특활비 뇌물 사건의 주범으로 공개 지목했다.
그 와중에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청와대에서 이명박을 올림픽 개/폐막식에 공식 초청하였다. 그것도 한병도 청와대 정무수석이 직접 방문해서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명박도 이를 수락해서 개/폐막식에 공식 참석했다. 일단 표면적인 이유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의 초청'이라는 원론적인 사유이다. 현재 기준으로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들 중 전두환, 노태우 등은 이미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한 상태고, 박근혜는 구속 상태이다. 피의자 신분이기는 해도 활동이 자유로운 전직 대통령은 이명박만이 유일한 상태다. 인터넷 등지에서는 '감옥에 가기 전에 좋은 구경거리나 좀 보고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겠냐?'라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혹은 약간 더 진지한 주장으로 '최소한의 전직 대통령 대접은 해주겠다는 원칙주의적 행동을 통해 오히려 이명박 수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든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2018년 3월 6일, 오후 3시에 '''검찰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110억 원대 뇌물 수수, 조세 포탈, 횡령,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하여 3월 14일 오전 9시 30분에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으로 소환하겠다고 밝히면서, 결국 이명박은 검찰 포토라인에 서게 되었다.''' # 자신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검찰 포토라인에 세운 지 정확히 8년 10개월 14일 만에 자기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검찰에서 약 23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고 닷새 후인 2018년 3월 19일, '''검찰은 결국 이명박에 대한 구속영장을 대한민국 법원에 청구했다.'''## 그리고 사흘 후인 3월 22일, '''담당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박범석 부장판사가 "증거인멸의 우려가 상당하다"고 인정하여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이명박은 결국 구속, 수감'''되어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 중 구치소에 수감된 네 번째 전직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 '''3월 23일 자정에 서울동부구치소에 도착했으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8년 10개월'''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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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검사 송경호)·첨단범죄수사1부(부장검사 신봉수)는 2018년 4월 9일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기소하며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4번째로 구속기소당하는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2018년 5월 23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법정에서 첫 공판을 받게 되어 자신의 후임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첫 재판을 받은 2017년 5월 23일 이후 '''정확히 1년만에 본인도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고''', 더 이전으로 가보면 '''2009년 5월 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9년만에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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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5일 이명박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징역 15년 형·벌금 130억 원·추징금 82억 7,070만 3,643원을 선고받았고, 2020년 2월 19일 2심에서는 뇌물 인정 액수가 늘어 형량이 올라가 징역 17년 형·벌금 130억 원·추징금 57억 8천여만원을 선고받았다. 2020년 10월 29일에는 대법원은 이명박과 검찰 양측의 상고를 모두 기각해 원심의 판결을 확정하였다. 그 순간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전면 박탈되었다. 나흘 뒤인 11월 2일에는 서울동부구치소로 수감되면서 17년 형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출소 예정일은 2036년 11월 13일로 만기출소한다면 96세에 출소하게 된다.
3.4.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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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때는 2012년 4월에 치러진 19대 총선이었다. 당시 그는 부산광역시 사상구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그 때부터 이미 민주통합당의 유력한 대권 잠룡으로 거론되었다. 왜냐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원한 친구'''라는 그 이미지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노무현 탄핵 심판 당시에도 변호인단을 꾸려서 승소를 이끌어[36]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복귀를 이끌어냈고 2차례의 민정수석비서관과 대통령비서실장 등을 역임한 풍부한 경험 덕에 청와대 실무에 밝다는 점에서 또한 대권 잠룡으로 거론된 것이다. 특히나 이명박 정부의 잇단 실정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실상 이명박으로부터 정치 보복성 사법살인을 당했다는 인식이 친노 성향의 국민들 전반에 팽배해 있었기에 노무현의 정신을 계승한 문재인이 더욱더 대권 잠룡으로 거론되었던 것이다.[37]
당시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친이 정치인 중 한 명인 나경원이 박원순에게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패배하고, 디도스 의혹이 불면서 당권에 근접해있던 친이계 및 홍준표 대표가 당원들의 반발에 의해 사퇴하게 되고, 친이계의 실세중 한 명[38] 인 이상득이 부패 혐의로 여론의 질타를 받으면서 친이계의 세력이 급속도로 약해지게 되며, 반대급부로 친박계가 득세하였다. 2011년 말에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대표로 취임했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점차 당 내 계파 싸움에서 친박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친이계가 몰락하고 친박계가 득세하면서 사실상 여당에서는 박근혜가 유력한 대권 후보로 낙점된 때였다.
그리고 2012년 이 해는 바로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에 치러지는 해였다. 그 때문에 2012년 4월에 치러진 19대 총선은 사실상 12월에 치러질 18대 대선의 예비전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정권 교체 실현 여부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선거였다. 그렇기에 19대 총선은 사실상 여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인 박근혜와 야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였던 문재인의 맞대결로 굳어졌다. 당시 말기에 접어든 이명박 정부가 급속도로 레임덕을 맞았다고 분석됐기에 문재인을 위시로 한 야권의 승리로 전망되었으나 선거 막판에 터진 김용민의 막말 파문과 정통민주당의 고춧가루 공세 등의 악재가 겹치며 결국 새누리당의 단독 과반 확보로 결과가 나왔고 19대 총선은 사실상 박근혜의 승리로 돌아갔다.
박근혜와 문재인의 두 번째 진검승부는 바로 그해 12월에 치러진 18대 대선이었다. 정계 입문 14년차의 베테랑 정치인이었던 박근혜와 정계 입문 8개월차의 신흥 정치인이었던 문재인의 맞대결이 된 것이다. 당시 대선에 출마한 7명의 후보 중 원내 정당 소속의 후보는 박근혜, 문재인, 이정희 단 3명이었던데다 이정희마저 대선 직전에 사퇴하였고 박근혜, 문재인과 함께 제3세력으로 기대되었던 안철수 또한 사퇴하면서 결국 이 선거는 사실상 박근혜 vs 문재인의 맞대결로 압축되었다.
문재인은 대선후보였지만 정계에 입문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신참이었고 박근혜는 이미 정치 경력만 15년에 달하는 기성 정치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출구 조사 결과 50.1:48.9로 초박빙의 접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역시 정치 경력 1년도 안 된 정치 신인이 상대하기엔 경력 15년차 기성 정치인의 벽은 높았고 실제 개표 결과 51.6:48.0으로 출구 조사 때보다 표 차가 더 벌어져 108만496표 차이로 패배했다. 이렇게 두 번째 맞대결이었던 18대 대선 또한 박근혜의 승리로 돌아갔다.[39] 그래도 정치경력으로는 햇병아리라 할 수 있던 문재인이 대선후보로 거물급인 박근혜에 맞서 박빙의 결과를 낸 것만으로도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됐다.
대선 이후 박근혜는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문재인은 일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남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문재인이 다음 대권에 도전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갔다.[40] 그러나 2015년 연말에 당 내 주도권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던 안철수와의 갈등을 풀지 못했고 이는 결국 제 1 야당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20대 총선에서 야권이 대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문재인은 2016년 초에 폭풍 같은 인재 영입과 당 내 쇄신을 단행하며 더불어민주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희망을 이어갔다. 잇단 정부의 실정으로 20대 총선은 사실상 박근혜가 주문한 '''국회 심판론'''과 야당이 주문한 '''정권 심판론'''의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을 확보해 원내 제1당의 자리에 오르면서[41] 3번째 맞대결 만에 문재인이 박근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선거의 승리는 그가 다시금 대권 잠룡으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스캔들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 반사이익을 상대정당 소속이자 과거 대선에서 박근혜와 진검승부를 했던 문재인이 흡수해 박근혜 탄핵 이후 그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게 되었다.
3.5. 김영삼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8년 노무현과 함께 문재인을 정치에 영입시키려던 사람이다.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는 노무현 등 부산 지역 인권변호사를 정계에 영입시키려 했고, 일부는 국회에 입성했으나 문재인이 "자신은 정치할 생각이 없다" 며 거절했다고 한다.
3.6. 전두환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는 것으로 보이나, 문재인이 특전사 시절이던 1977년, 전두환 당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문재인에게 우수 병사 표창장을 수여한 바 있다.
3.7. 안철수
2012년 18대 대선 당시 야권 후보로서 둘이 맞붙었을 때부터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강력한 여권 후보였던 박근혜를 상대로 누가 야권 단일 후보로 나갈 것인가를 두고 기 싸움이 팽팽했었다. 결국, 안철수가 중도 사퇴하면서 야권 단일 후보로 문재인이 결정됐다. 그러나 대선에서 문재인은 박근혜에게 51.6:48로 패했고, 이때부터 20대 총선 이전까지 문재인은 대선 패배 책임론과 친노 패권주의 프레임에 갇혀 하락세를 이어갔다.
대선이 끝나고 문재인이 소속돼 있던 민주당과 안철수의 첫 번째 신당이었던 새정치연합이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이 창당되면서 둘은 한솥밥을 먹게 됐다. 그러나 이때 김한길과 함께 새정련을 이끌었던 안철수는 세월호 참사 정국 아래에서 치러진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을 상대로 무승부를 냈고, 이어서 치러진 7.30 재보선에서는 손학규, 김두관 등 제법 거물급 인사들까지 출마시켰지만 새누리가 내세운 '지역 일꾼론'에 밀리고 새정련 지도부가 주도한 전략공천이 실패하면서 새누리에게 무려 11:4로 완패하고 말았다. 안철수의 이미지도 이때를 기점으로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안철수가 가라앉자 반대로 문재인의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동지인지 적인지 모를 애매한 관계를 이어왔는데, 둘 다 당시 야권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로서 당내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며 견제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동지라기보단 '''적과의 동침에 더 가까웠다고 봐야할 것 같다'''.
2015년 2월 문재인 체제가 출범했지만, 두 달 정도 지나서 치러진 4.29 재보선에서 새정련이 4곳의 지역구 중 단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하면서 문재인 대표 체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문재인과 비노계의 갈등, 그리고 2016년 국민의당 창당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2012년에 이어 다시 완벽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안철수/정치#s-6 문서 참고.
일각에서는 안철수의 새정련 탈당을 당시 당대표였던 문재인의 잘못으로만 보는 시선이 있는데, 문재인/2015년 항목에 조금 더 자세히 쓰여 있지만, 문재인은 당대표로 있을 때 안철수에게 당 혁신위원장 자리와 '문·안·박 연대'[42] 가 손을 잡고 당을 이끌어나가자는 아이디어였다. 이 제안에 박원순 서울시장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긴 했지만, 광역단체장이라 당 운영에 직접 개입하는 건 법을 어기는 행위였으므로 상징적인 참여만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사실상 문재인과 안철수의 공동대표 체제를 문재인 측에서 제안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안철수와 비노계는 문재인이 2015년 9월 국민 여론조사와 당원 투표를 모두 실시해 둘 중 한쪽에서라도 사퇴하라는 결과가 나오면 물러나겠다#고 했을 때에는, 조기 전당대회 개최를 요구하며 이 재신임 투표에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신임 투표도 할 것 없이 그냥 무조건 물러나라는 거였다. 이러한 안철수 & 비노계의 행보는 문재인 측과 타협해서 좋게좋게 해결해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또, 무조건 많은 사람이 함께한다고 좋은 정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다르고 정책이 다르면 서로 다른 정당에서 경쟁하고, 국민에게 평가를 받는 것이 옳다.
실제로 안철수와 비노계가 민주당을 떠나 국민의당을 만든 뒤 민주당의 고질적인 질환이었던 계파 갈등 문제가 상당히 없어졌고, 민주당의 지지율 폭등에는 이러한 점이 상당 부분 플러스 효과를 가져왔다고 분석된다. 친문 성향의 민주당 지지층이 국민의당과의 합당이라든가, 국민의당 소속 정치인이 민주당으로 넘어갈 눈치를 살피고 있다 카더라는 소문이 조금만 들려도 예민하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6년 주요 기관 차기 대선 여론조사를 보면, 기복이 큰 안철수와 달리 문재인은 꾸준하게 20%대 지지율을 유지하며 당시 여권의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로 꼽혔던 반기문 UN 사무총장과 함께 선두권을 지켰다. 다만 호남권 지지율만 놓고 본다면 20대 총선에서 국민의당이 약진한 뒤부터는 안철수의 지지율이 계속 우세를 보였다.
그러던 중 2016년 6월쯤에 김수민 & 박선숙 리베이트 수수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새정치'라는 이미지에 심각한 훼손이 일어났고,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안철수와 국민의당이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는 바람에 안철수의 지지율도 점점 떨어져 결국 이재명 성남시장에 이어 황교안 총리에게까지 지지율이 뒤처지는 안습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반면 문재인은 비문 성향의 언론과 정치권의 집중 견제를 받는 상황 속에서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1위를 유지하며 '문재인 대세론'의 불을 살려 나가고 있었고, 호남권에서조차 안철수를 계속 앞지르기 시작했다.
19대 대선에 나갈 후보들이 모두 확정되고, 반기문과 황교안이 모두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에는 이회창, 이명박, 박근혜처럼 이른바 '깜냥이 되는' 보수 후보가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 보수 지지층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심리로 그동안 '문재인의 대항마', '반문(反文)의 얼굴'을 자처해 왔던 안철수에게 '전략적 지지'를 보내주면서 두 후보 간의 지지율 격차가 아주 좁아지기는 했다.
안철수가 유력한 2위 주자로 떠오르자마자 아내의 특혜 채용설, 딸의 호화 유학설 등 여러 논란이 분출되어 청렴한 이미지가 훼손되기 시작했고, 이어서 안철수 본인도 '대형 단설 유치원 설립을 제한시키겠다'고 하는 등 이미지 훼손에 스스로 일조했다. 이 논란들은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졌다. 특히 단설 유치원 제한 발언은 살인적인 수준의 공립 유치원 입학 경쟁에 시달리며 공립 단설 유치원 증설을 요구해왔던 학부모들을 격노케 하는 자충수로 돌아왔다. 다만, 단설유치원은 비용이 많이 들어 추경을 확보하지 않는 한 문재인 정부에서도 증설이 어려우며, 해당 발언과 함께 제시한 아이디어인 초등학교 빈교실 활용은 유시민이 국민청원하기도 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제가 갑철수입니까?", "제가 MB 아바타입니까?"'''라는 말로 대표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연거푸 보여줘 이미지 실추를 자초한데다, 홍준표가 일부러 보수 진영의 귀에 착 달라붙는 막말 퍼레이드로 안철수에게 붙었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다시 떼어가면서 결국 본인이 꿈꾸던 '문재인 VS 안철수'의 양자 대결 구도를 실현하지 못하고 41.1%의 득표율로 당선된 문재인, 24.0%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한 홍준표에 이어 21.4%의 득표율을 얻어 3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20대 총선 때 국민의당이 민주당을 제치고 정당 득표율 2위를 달성하고, 총선 직후 지지율 1위의 차기 대권주자라는 빛나는 결과를 따냈던 과거를 돌이켜보면 어두운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9대 대선에서 안철수가 입은 상처 중에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울 상처는 근거지였던 호남권에서 완패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선에서 문재인은 호남권에서 도합 62.0%의 득표율을 기록해 호남의 지지를 되찾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얻었지만, 20대 총선에서 호남의 새로운 맹주가 되었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안철수는 28.1%의 득표율 밖에 얻지 못했다.
대선 도중 국회의원직 사퇴, 호남 참패, 3위 낙선은 안철수의 정치 미래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지만, 그간 '문재인의 라이벌'이라는 이미지를 세상에 깊이 각인시켰으니 훗날 만일 문재인에게도 레임덕이 찾아온다면 그 이미지가 안철수를 정치적으로 다시 일으켜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런데 대선 선거 운동 기간 국민의당이 문재인의 아들 문준용 씨의 취업 특혜 논란을 집중 공격하면서 증거로 공개한 통화 녹취록과 카톡 화면이 사실은 국민의당의 전 최고위원이자 안철수의 청년 인재 영입 1호인 이준서, 그리고 안철수의 카이스트 제자이자 그의 정계 활동을 오랫동안 보좌해온 국민의당 당원 이유미에 의해 조작된 증거임이 드러나면서 '''국민의당과 안철수는 치명적인 이미지 실추를 겪게 됐다'''.
이유미는 안철수가 카이스트에 몸담고 있었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고, 이준서는 안철수가 직접 영입한 사람이라 이 증거 조작이 안철수의 지시 또는 묵인하에 이루어지지 않았겠느냐 하는 의혹이 나왔고 만약 사실로 밝혀질 경우 안철수는 정계 은퇴 수순을 피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국민의당 또한 사실상 몰락에 가까운 치명타를 입을 테니 민주당 지지층과 국민의당 지지층 모두 이 사건을 예의주시했다.
안철수에게는 다행히도 검찰에서는 이 사건을 이유미와 이준서의 범행일 뿐, 국민의당 상층부는 몰랐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지으면서 일단 안철수 정계 은퇴 언급은 사그라졌다. 다만, 안철수가 이 모든 일로부터 무관하다는 의심은 완전히 해소된 게 아니므로 앞으로도 그의 정치 행보에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닐 것으로 보인다.
대선 패배에 이어 대선 공작 사건까지 겹치면서 모두들 안철수의 정계 복귀는 보다 긴 시간이 걸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안철수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국민의당 신임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며 상당히 빠른 정계 복귀를 시도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27일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로 선출돼 '극중주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다시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였다. 그 후에는 김이수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는 등 문재인 정부에 대하여 적대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이 행보로 인해 안철수는 국민의당 내부의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를 중심으로 한 호남계 비안 성향 의원들과의 갈등을 빚게 되었고, 훗날 안철수는 바른정당과 합당할 때 호남계 대부분과 결별했다.
현재는 안철수가 新 국민의당을 창당하고 서울시장에 야권 후보로 출마를 선언하며 중도보수 정도의 정치인으로 돌아서, 18대 대선 당시처럼 문재인과 같은 길을 걷는 일을 없을 것이다. 21대 국회에서 국민의당은 국민의힘과 같이 사실상 보수 야권으로 분류되고 있으니...
3.8. 김종인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후보의 선거캠프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대선에서 박근혜는 문재인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3년 뒤 더불어민주당의 당대표였던 문재인의 제안으로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되었고 이때부터 문재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0대 총선 때는 선거캠프위원장을 맡았는데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에서 참패를 하는 대신 수도권에서 의석 대부분을 가져가는 반쪽짜리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공천 과정에서 비례대표 공천파동으로 문재인과 불화설에 휩싸였고 2017년 3월 탈당하면서 비례대표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2달 뒤 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 후 입당하거나 정치활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야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3년 뒤인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미래통합당에 선거캠프위원장으로 영입되었다.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참패한 것을 계기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게 되었는데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면서 문재인 대통령과 대립하게 되었다.
3.9. 조경태
둘 다 친노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참여정부 당시 조경태는 유일한 민주당계 부산 국회의원으로서 원조 친노로 자리잡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 정치적으로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우선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유이한 부산지역 민주당 당선자이다. 특히 조경태는 이때 3선 부산 국회의원으로 입지가 상당했는데 지역구 관리가 기가막혔던 덕에 보수정당 후보를 모두 누르고 당선되었던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사상구에서 당의 많은 푸쉬를 받았던 덕에 당선되었다.
18대 대선 국면에서 조경태 의원은 컷오프되었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최종 후보로 정해졌다. 뭐... 여기까지는 그저 그런 경쟁 같을 수 있지만 본격적인 갈등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창당되고 난 뒤부터 벌어졌다. 조경태 의원은 부산 3선을 자임하면서 최고위원으로 당선되었지만 최고위원으로서 치른 제6회 동시지방선거와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면서 사퇴하게 되는데, 그 다음 대표가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두 사람이 다투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친노의 정통성 문제도 있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후계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정치 성향과 관계 없이 백이면 백 문재인을 꼽겠지만 조경태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조경태 자신은 진정한 노무현 대통령의 후계자를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일단 조경태 본인이 나이는 문 대통령보다 한참 어리지만 정치에는 훨씬 더 먼저 입문한 선배였다. 또 본인은 지역주의 타파라는 노무현 정신에 입각해 당시 민주당계 정당에 있어선 험지였던 부산에서 지역구 주민들과 살을 맞대며 도전한 끝에 3선 고지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조경태 본인이 봤을 때는 '노무현의 영원한 친구'라는 것 외에는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미지 하나로 정치에 입문한 그 순간부터 대권 잠룡의 자리에 오르고 전국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으니 조경태 불쾌할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조경태 자신은 진짜 노무현 정신에 따라서 험지인 부산에서 구르며 자신의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문재인은 그저 대중적인 이미지 하나로 순식간에 대권 후보까지 올랐으니 도대체 어딜 봐서 문재인이 노무현의 계승자란 말이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누가 진짜 노무현의 후계자인지를 놓고도 사이가 틀어졌다. 조경태 본인 말로는 문재인이란 사람 자체가 싫은 건 아니라고는 하지만 분명한 건 적어도 그는 문재인을 노무현의 후계자라고는 보지 않았다.
이 뿐만 아니라 자잘하게 새정치민주연합과 마찰이 있었고, (세월호 투쟁, 박근혜 대통령 국회 연설 당시 태도[43] ) 결국 더불어민주당으로 이름이 바뀐지 얼마 되지 않아 새누리당으로 복당했다.[44]
조경태가 새누리당으로 입당하자마자 흔한 보수정당 국회의원 1명이 되어버렸다. 차라리 부산 4선 민주당계 의원이었다면 몰랐을까, 보수정당 출신 부산 다선 의원은 희소성이 떨어진 탓에 자기 자산을 까먹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부산에서만 5명(재보궐선거 후 6명)까지 민주당이 가져가는 기염을 토했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해버리면서 탈당한 조경태의 입지가 무색해졌다. 19대 대선 출마선언을 했지만 돈만 날려먹은건 덤. 이때를 기점으로 그의 반문재인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경태는 자유한국당에서 민주당 경력을 조금씩 지워가면서 보수유튜브 방송에도 나가고 반문재인 프레임을 통해 완전히 보수 정치인으로 자리잡았고 최고위원까지 당선되었다. 특히 국회 기재위원장을 맡은것이 친박쪽 지지를 얻어서 된 탓에 더 이상 과거의 친노 조경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3.10. 손수조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현역의원과 주일대사 출신의 전직 의원이 불출마한 가운데, 말 그대로 정치 신인이었던 손수조가 사상구 지역구에 전략공천된다.
이는 문재인을 잡기 위한 자객공천이었으며 일부러 정치 신인을 내보냄으로써 문재인의 무게감을 폄하하기 위함이었다. 유세 기간동안 박근혜 키즈라고 불릴 정도로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원[45] 이 있었으나 결국은 문재인의 벽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거물급 정치인과의 맞대결로 손수조는 인지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후 SNS로 문재인 당시 의원에 대해 비판의 글을 자주 올리기도 했다.
[1] 문재인 뒤의 인물은 김경수다.[2]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이 민정수석직을 한때 아예 폐지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기조를 이어받은 참여정부 시절에도 우병우처럼 민정수석이 대한민국 검찰청과 대한민국 경찰청 전체를 장악하고 조종할 만큼 강력한 힘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한다. 그래서 참여정부 개국공신들 중 비리 혐의로 잡혀들어간 사람들은 문재인에게 원한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검찰을 통제하거나 장악해서 자신들에 대한 수사로부터 보호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말이다.[3] 치아가 10개나 빠져서 임플란트를 박았다고 한다.[4] 당시 장례식에 참석한 이명박에게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고 소리치는 백원우를 말리면서 사태가 진정된 후 이명박에게 가서 머리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서전에 따르면 당시 본인도 똑같이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상주로서 문상객에게 사과한 것이라고 한다.[5] 불교 용어로 "함께 불도를 닦는 벗"이라는 뜻으로 도(道)로써 사귄 친구라는 의미다. 종교를 떠나 두 사람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단어.[6] 하승창 수석도 박 시장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에 문재인이 후보였던 시절 더문캠에서 일했다.[7] 사실 굳이 입각할 이유가 없던 게 서울시장은 본인이 원한다면 국무회의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는데, 뭐하러 복잡한 과정을 밟아가면서 입각하겠는가? 시장 퇴임하더라도 국무위원보단 국회의원 한 번 해보는 게 본인에겐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8] 오히려 적통이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인권 변호사 시절부터 친구였던 문재인이나 국회의원 시절의 양팔이었던 안희정, 이광재보다 유시민이라는 평가도 있을정도로 친노계에서 유시민의 위상은 상당히 높다. 최근에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그저 과거 장관직을 지낸 평론가 정도로만 알고있지만 유시민은 대권주자 시절 노무현을 인물만 보고 적극 지원한 인물로 노무현과 깊은 친분이있었다. 문재인 입문 중에 노무현이 생전에 문재인을 극찬한 것이 큰 이유중 하나로 작용했는데 유시민 역시 노무현이 문재인과 함께 극찬했던 유이한 인물이다. 당장 자신과 학연, 지연, 경력에서 그 무엇도 접점이 없음에도 대선기간중에 자신을 위해서 당을 만들고 국회에 입성하며 정부인사로써 온갖 험한 욕을 먹었던 유시민에게 노무현은 자신이 가장 어려울때 지켜준 인물이라 이야기하며 극찬했고 이는 친노-참여계로 계파가 친문과 계파가 갈라졌음에도 친노들이 유시민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이자 유시민이 정계복귀를 극구 거부함에도 평론가들이 유시민을 대권주자로 이야기하는 이유다.[9] 또한 김현철 교수는 더불어민주당에 자진 입당하였다.[10] 예외적으로는 강삼재 외에도 당시 친박이었던 김무성, 현재까지 쭈욱 친박인 서청원, 열린우리당으로 이적한 김영춘과 박재호가 있다.[11] 정치인 중에서는 성향이 달라 국회에선 죽일듯 싸우더라도 실제 사이는 좋아 잘 지내는 경우도 있다.[12] 일단 문재인 본인도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서 권양숙 여사와 노건평, 박연차에 대해서는 범법 행위를 인정했다.[13] 특히 이 부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기 한 달 전인 4월의 상황이다. 물론 박희태 대표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편들었다기보다는 검찰이 하루가 멀다하고 노무현 수사 과정을 속속들이 언론에 뿌리고 이에 노무현 측에서 반박하는 것까지 공개되면서 정치권이 혼돈에 빠진 데 대한 불만을 제기한 것이었다. 게다가 일부 여권 인사들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면서 한나라당 입장에서도 마냥 노무현에 대한 수사를 반길 처지가 아니었던 것.[14] 당시에는 수원시 소속 국회의원이었다.[15] 참고로 이 선거가 천안함 피격 사건 발생 2달 반 만에 이루어진 선거여서 진보 진영이 상당히 불리했던 선거이기도 했다.[16] 정세균 국회의장도 이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4위로 탈락했다.[17] 다만 이명박은 현대건설을 도산 직전까지 위기에 몰아넣고는 도주했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오르게 된 과정을 평가한다면 모를까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줬던 것은 절대 아니다.[18]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용산 참사 등등.[19] 실제로 그 당시 민주당계의 주요 인사였던 정세균, 문재인, 박원순 등이 급속도로 성장하고 친노계가 노무현에 대한 표적 수사 논란으로 부활하게 되면서, 민주당의 지지율이 올라간 상태였다. 그 상황에서 친이계가 당권을 계속 잡고 친박계와 분당이 된 상태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문재인이 나와서 보수계가 친이계, 박근혜로 갈리고 민주, 진보 정당 단일화 후보로 문재인이나 정세균이 나왔다면 한나라당에서 민주당계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거기다가 당시에는 '''진보 정당 세력들도 이명박 정부 심판으로 대의를 모으면서 2010년 후로는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의 세력과 민주당이 후보를 단일화해서 한나라당과 승부를 보는 경향이 강해졌으니, 친이:친박:민주/진보 단일화 후보 간의 대결이었다면 정권 교체가 확실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20] 박근혜와의 경선 당시 최태민과의 관계와 박근혜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고,(그 이전에 1970년대 기업인이었던 당시 최태민에게 돈을 갖다주는 등으로 다 알고 있었다) 최태민의 아들에게 상당한 분량의 자료도 넘겨 받았다. 이 치부를 풀어서 박근혜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경선이 이미 이명박 쪽으로 기울어서 그러지는 않았으며, 박근혜가 당의 콘크리트 지지율의 상당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나라당 국회의원 경선 당시 친박을 의도적으로 대거 경선학살하면서, 이후에도 구실을 대고 박근혜를 트집잡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정계에서 강제로 끌어내는 쪽으로도 생각을 기울인 바 있으나, 여러 가지 상황에 부딫혀 결국 실현에 옮기지는 못했다. 다만 이 최태민 공격을 아주 안 한 건 아니라서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 경선 당시 실제로 이명박은 최태민 일가로 인한 국정농단을 언급했고 박근혜도 최태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실토하는 등 당시에는 국민들만 눈뜬장님이었을 뿐 나올 만큼 나왔었다. 당시 박근혜도 이명박에게 다스, BBK, 도곡동 땅 문제를 공격하는 등 주요 치부는 사실 이 때 다 나왔다.[21] 그래서 친이계의 좌장이었던 이재오는 국방 & 외교는 국민이 뽑는 대통령이, 그 이외의 국무는 국회에서 뽑는 총리가 전담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로 개헌해야 한다고 이명박 정부 중기부터 줄기차게 외쳐왔다. 이재오가 이렇게 개헌을 외치는 것에는 문재인이 정권을 잡든 박근혜가 정권을 잡든 둘 다 이명박과 사이가 무척 나빴기 때문에 정적들에게 '제왕적 권한'을 모두 몰아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리고 박근혜 시절에는 잠잠하다가 2017년 5.9 대선 시즌에는 문재인의 정적, 국민의당 및 제3지대의 대권 주자(친이/비박계)들을 중심으로 이런 개헌 이야기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22] 2016년 8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드러나기 전 이명박은 "차기 정권을 반드시 내 손으로 창출하겠다"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되었다. 자신이 힘을 써서 친이계 주축인 보수 정부가 재집권할 경우 박근혜도 쳐내면서 자신을 둘러싼 각종 의혹까지 조용히 은폐하고 넘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 그러나 현실은...[23] 다만, 보수 정권을 대놓고 찬양하는 대표적 신문인 조선일보에서도 이미 최순실과의 관계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친이계 입장에서도 그 틈을 타 박근혜와 친박을 무너뜨리고 친이계 재집권을 노리려 했다는 평가도 있다. 조선일보가 공격하는 것을 당시 이명박 측에서 몰랐을 리 없으며 실제로도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를 중심으로 늘푸른한국당이 창당된 바 있다.[24] 특히, 반기문은 각종 논란거리만 키워서 공격받다 대선 불출마 선언을 했고, 안철수 역시 처음에는 촛불 민심을 흡수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 촛불시위에 나가지 않고 역시 각종 논란거리를 불러 일으키면서 지지율을 크게 깎아먹었다. 친이계가 주축인 늘푸른한국당의 경우도 촛불 시위에 참여했으나 보수정당계에 반감이 강한 사람들도 많다 보니 별 호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25] 사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박근혜 탄핵소추 가결 직후에도 타 정당들에 비해 촛불시위의 동력을 계속 유지하는 데 힘을 계속 기울였고, 그 결과, 득표율과 지지율에서 말해 주듯이 촛불 민심을 가장 많이 흡수한 정당은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되었다.[26] 국정원 댓글 사건은 더욱 규모가 커져 군까지 개입됨이 밝혀졌고 당시 국방부 장관인 김관진까지 소환조사를 받아 결국 구속되었다. 또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도 예상과는 달리 이명박 정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국정원을 동원해 은밀하고 치밀하게 방송 장악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27] 권양숙이 돈을 받은 것은 명백하기에, 재수사 요청은 할 수 있으나, 이미 이 카드만 가지고 여론을 뒤집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수사 과정에서 당시 국정원이 광범위한 언론 플레이를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반격은커녕 도리어 역풍만 맞았다.[28] 문재인 정부는 대선 전에 박근혜 게이트로 정부의 각종 치부들이 들어나 이를 청산한다는 적폐청산을 주요 공약으로 삼았다.[29] 다만, 이명박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면서 중도보수, 중도층 및 친 친재벌 성향의 유권자들의 반발이 있었는지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약간 하락하면서 동시에 반감도가 올라갔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 벌어진 악랄한 정치 공작이 드러나면서 친문 지지자들을 포함해 많은 시민들이 이명박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에 동참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기존에 친노계가 포함돼 있던 정의당까지 현 정부의 적폐청산 모토를 지원하면서 정치계와 시민사회를 통틀어 이명박 수사에 호응을 보내고 있다.[30] 전날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이명박의 출국을 금지해달라는 청원이 상당한 호응을 얻기도 했다.[31] 하지만 정두언 전 의원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 이명박이 걱정했던 것은 구속 당한 측근들이 아니라 구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검찰로 불려간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라고 한다. 김 전 실장이야말로 진정한 MB의 집사로서 오랜 세월 MB를 모셨지만 사실상 토사구팽을 당했던 터라 검찰이 불게 없냐고 접근하면 술술 불게 너무나도 많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라고.[32] 누구처럼 질문은 받지 않았는데, 기자회견 내용은 검찰 수사를 사법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로 이끌기 위함이라는 해석이 많다.[33] 외부자들의 진보 패널인 정봉주와 진중권은 이명박 대통령 측에서 노무현 대통령 등의 기록 자료를 모두 봤고, 표적수사에 가까운 노무현 수사를 했는데 터뜨릴 거였으면 왜 지금까지 안 터트렸는지 의문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정봉주는 한 발 더 나가서 아예 '뻥카'일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34] '외부자들'에서는 친이계 출신이자 보수 패널 역할을 맡은 전여옥과 안형환 모두 MB가 포토라인에 설 확률이 높을 것 같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다만, 이때는 친노계가 이명박에 대한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예측한 거긴 했지만.[35] 영포빌딩은 이 전 대통령이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건물로, 지하 2층은 건물 약도에도 드러나 있지 않은 비밀 공간이라고 한다. 이곳을 덮친 검찰은 BBK, 다스 관련 문건 뿐만 아니라 청와대 문건으로 보이는 서류도 발견했다. 다른 언론들도 이 지하창고 압수수색을 비중있게 다뤘다. 이런 중요한 비밀 공간을 검찰이 갑자기 덮친 건 아마도 검찰에 의해 구속된 이 전 대통령의 측근들 중 누군가가 이곳의 존재에 대해 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하지 않을까.[36] 당시 상대 측의 보스가 바로 그 '''유명하고도 악랄한 법꾸라지 김기춘'''이었다! 탄핵소추인단(탄핵을 주장하는 역할. 검사라고 보면 된다)은 법사위원들로 구성되는데 이 당시 법사위원장이 김기춘이었다. 즉 탄핵소추인단장이었단 소리. 이때 김기춘은 노무현을 사이코라고 지칭하는 막말을 하기도 했다. 결국 12년 후 정반대의 위치가 되어 김기춘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문재인은 탄핵된 박근혜의 뒤를 이어받는다.[37] 손학규가 이 당시 민주통합당에서 문재인과 경선을 거치긴 했으나, 손학규는 신한국당-한나라당의 보수정당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세력이 약했기 때문인지 결국 당시 친노의 좌장이었던 문재인에게 밀렸던 것으로 보인다. 손학규의 경우 대권 주자가 되려면 오히려 한나라당에 잔류해서 이명박 및 친이계와 같은 배를 타고 이명박 정부 시절 MB의 레임덕이 시작됐을 때 잽싸게 친이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친박과 혈투를 벌여 이기는 쪽이 오히려 대권 주자로 낙점됐을 확률이 높다. 실제로 홍준표는 뚜렷한 계파가 없이 정계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2017년에는 친박의 몰락으로 비박의 구심점에 있던 친이계의 지원을 받고 무주공산이 된 자유한국당의 대권주자로 올라섰고, 결국 자유한국당의 당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것을 감안하면 손학규의 선택은 늘 한발짝씩 박자가 안맞았다고 볼 수도 있다. 손학규는 한나라당에 잔류해 기회를 보지 않고, 민주당계로 이동했다가 이후 대권주자 경선 3번에서 모두 패배해 대권 주자로 낙점되지 못했다.[38] 다른 한 명은 당연히 이 분이다. 다만, 이 당시에는 이미 이상득의 권력이 약해지고 이재오가 친이계의 제일 실세가 된 시점이었다.[39] 이때 이슈가 된 사건이 2017년도에 다시 수사가 진행된 국정원 댓글 사건이다. 이후 박근혜는 당선되고도 상당한 후폭풍이 있었다.[40] 실제 문재인과 친노 세력은 2014년 중반까지 민주통합당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당시 당 대표는 비노 세력이었던 김한길이었고, 새정치민주연합 초기에는 김한길과 안철수가 당 대표였다.[41] 물론 나중에 새누리당이 무소속 당선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더불어민주당을 넘어 원내 1당이 되긴 했지만 이걸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42]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의 3대 유력 대선 주자였던 문재인&박원순&안철수를 말한다.[43] 이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을 비롯한 야당의원들은 다 앉아있는데 유일하게 서서 대통령에게 예의를 다했다. 이게... 문제인지 잘 모를수 있지만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새정치민주연합 당원들의 감정을 생각하면...[44] 원래 조경태는 통합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있었고 잠시 한나라당에서 있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으로 당을 옮겼던 것.[45] 텃밭으로 분류되는 부산에 전폭적인 지원을 한 것부터가 이례적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