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실존인물/동양
1. 개요
실존인물 중 한국사를 제외한 외국인들 중 동양의 유언을 정리한 항목. 인물들의 사망 시점을 기준하여 국적, 시대순.
한국사의 인물에 관해서는 유언/실존인물/한국 문서를 참조.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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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자서의 형[2] 오자서의 아버지. 오자서가 무사히 도망갔다는 소식을 듣고 남긴 말. 이 이후 오상과 함께 처형된다.[3] 冠[4]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가 제자 자공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 이 말을 남기고 일주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이 말은 흔히 자신이 죽으면 은나라의 예법대로 장례를 치르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5] 이후 소진이 사망하고 황제가 그의 말을 따르자 정말로 소진을 찌른 범인이 나타나서 자신이 그를 죽였다고 밝혔다. 물론 그 범인은 곧바로 처형당했다.[6] 전국시대 진나라 명장. 장평 전투에서 조괄의 40만 조군을 발라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유언에 남긴 것처럼 장평에서 생매장한 현장이 발굴되었으며 최소 수십만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진나라 소양왕의 명을 받고 자결하는데, 자결하기 직전 남긴 말.[원문] 我思用趙人[7] 간신 곽개의 농간으로 위(魏)나라로 망명 후 다시 초나라 옮기지만 중용되지 못하고 죽으면서 한 말이다.[8] 근데 유언을 듣고있는 사람들이 조고, 이사라서 망했어요. 참고로 저 둘은 진시황이 사망하자마자 유서를 위조해 몽염과 부소를 자결시키고 둘째 호해를 황위에 앉혔다. 이후 진나라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된다.[9] 長城[10] 地脈[11] 하지만 그 직후 사마천은 "몽염의 진실된 죄는 무리한 장성 축성을 시황에게 간하지 않고 그의 명에 부합했던 것이었기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혹평했다.[12] 黃犬[13] 上蔡: 이사의 고향[14] 오강의 마지막 전투에서 옛 친구이자 한군의 대장이었던 여마동을 보자 그를 보며 한 말. 이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을 쳐 자결했다.[15] 그 직전에 "지금의 정무는 소하에게 전권을 주고 그 다음은 조참에게, 그 다음은 왕릉에게 맡기시오. 그러나 왕릉이 고지식하므로 진평이 돕도록 하는 것이 좋소. 진평은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혼자 큰일을 맡는 것은 어렵소 그 다음은 주발에게 맡기시오. 주발은 글재주가 없으나 강인하여 유씨 왕실을 안정시킬 자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여태후가 계속 '''그러면 다음은요?'''이라고 묻자 유방이 대답한 말. 과연… '''훗날 여씨 일파가 왕릉을 숙청하고 전횡을 일삼자 과연 진평과 주발이 여씨 일족을 쓰러뜨리고 유씨 왕조를 다시 세웠다.'''[16] 刀筆之吏[17] 전한의 명장. 한의 비장군(飛將軍)이라는 이명으로 흉노인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인물로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궁이기도 하며 여포의 별명인 한 '비장'의 유래이자 수호지의 명궁 화영의 별명 '소이광'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뛰어난 용맹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나 평생 운이 정말 없었는데, 흉노를 토벌하려 가던 도중 한무제의 밀명을 받은 대장 위청 때문에 부서를 옮긴 데다가 그 때문에 행군 방향이 바뀌어 길을 잃은 바람에 약속기일 내에 합류지점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문책을 받게 되자 자결했는데, 자결하기 직전 남긴 말이다.[18] 德[19] 한의 신하로 제위를 찬탈하고 신(新)을 세웠으나 온갖 뻘짓으로 일관. 결국 자신이 기거하는 궁궐에 반군이 몰려오자 한 말. 그 직후 그의 목에 눈이 뒤집힌 폭도들에 의해 죽음.[20] 후한의 대신으로 번풍의 모략에 의해 태위직이 박탈되자 짐독을 마시고 자살하기전에 남긴 말이다.[21] 양기의 모함으로 옥에 갇히자 죽기 직전에 호광과 조계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22] 죽기 전 여포에게 남긴 말. 출전은 자치통감.[23] 삼국지연의에서 보면 알겠지만 화웅의 지나가던 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실상은 역으로 화웅이 호진의 부장이다.[24] 사실 관정은 아부을 잘해 주변에게 미움을 받을 정도의 간신배이다. 다만 군자라는 단어를 언급한 걸로 보아서 비록 학자 출신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도 나름대로 유교적/전통적인 미덕을 의식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5] 꿀물을 찾지 못하고 좌절하면서 죽는 말이다.[26] 죽기 전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출전은 정사 오서 손책전.[27] 연의과 달리 순우경은 원소에게 팀킬을 당하지 않고 오소에서 조조에게 저항하다가 코가 베인 채로 생포되어 항복을 거절하고 죽음을 맞이했다.[28] 유수구 전투때 함선으로 진군 중에 폭풍에 휩쓰려 죽기전에 말한 말.[29] 정사에서 관우의 마지막 말. 유언은 있겠지만 관우전에서 죽기전에 관우가 남긴 말이 이것 뿐이라 유언이라 봐도 무방하다.[30] 斂[31] 마초에게는 성도에 와서 새로 가정을 만들어서 마승과 유비의 아들 유리에게 시집간 딸도 있다. 다만 그들이 엄청나게 어려서인지 마대가 제사를 맡은 모양이다.[32] 부첨의 아버지로 이름이 오역인 부동으로 알려진 그 인물.[33] 명심보감과 소학에서도 나온 구절이라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다.[34] 연의과 달리 사마의가 장합에게 제갈량의 추격을 명령하여 장합이 반대하지만 어쩔수가 없이 추격하다가 제갈량의 매복에 걸려 사망한다.[35] 하지만 사마의의 유언과 달리 사마사와 사마소는 '''황제를 폐위하고, 죽였다.''' 애초에 이들의 목적 자체가...[36] 사실 이 유언은 252년이전의 251년에 남긴 말인데, 이때 손권이 이궁의 변 이후에 약간 정신차리고 말한 말이지만 손노반등 반 손화파에게 반대당해 사실상 유언라고 무방하다.[37] 제갈각전 본전에서 출처[38] 오력 출처[39] 이후 제갈각은 손량의 명을 받은 손준에게 살해당한다.[40] 제갈각을 죽인 손준의 사촌동생. 손준이 일찍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손량을 폐위하고 제갈탄의 난 때 멋대로 퇴각하여 전투에서 패하는 졸장에 간신이다. 결국 자신이가 옹립한 손휴가 정봉을 이끌고 손침을 처단한다. 손침이 이렇게 말하자, 손휴는 "경은 어찌하여 등윤과 여거를 유배보내지 않았는가?", "경은 어찌하여 등윤과 여거를 관가의 노비로 만들지 않았는가?"라고 답하고 바로 손침을 처단했다.[41] 술자리에서 같이 있던 후궁 장귀인에게 한 말. 취중 농담이었지만 장귀인은 이걸 진담으로 알아들었고, 연회가 끝난 후 취해서 잠자리에 든 효무제를 질식시켜 죽여버렸다.[원문2] 壞汝萬里長城[42]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명장. 병법 36계의 창안자라는 설이 유력한 인물이다. 지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이를 경계한 유의륭에 의해 제거되었다. 참형되기 직전에 유의륭을 노려보며 한 말.[원문3] 願後身世世 勿復生天王家[43] 이 인물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망국군주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감한 발언이다.[44] 정작 교살당해 사망. 원래 목을 베려고 했다.[45] 고구려 출신으로 당에서 활약한 장수. 참형당하기 직전에 한 절규. 이 절규를 들은 병사들은 일제히 "왕(枉: 중국어로 '억울하다, 원통하다')!"이라고 따라 외쳤다고 한다.[46] 죽기 직전 아들 흥종 야율지골에게 남긴 말. 무리한 정복전쟁보다는 송나라와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 힘쓰라는 소리다.[원문4] 過河! 過河![47] 송의 장군. 북송 멸망 직후에 금과의 싸움에서 맹활약한 인물로 악비와 한세충도 그의 휘하에 있었다. 임종을 앞두고 황하 이북의 금을 정벌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며 남긴 말.[원문5] 天日昭昭, 天日昭昭。[48] 진회의 손에 죽기 직전 악비가 벽에다가 손가락으로 써 놓은 말.[49] 金樂光福大夫[50] 祖宗[51] 애종은 수개월째 채주성에서 몽골군에게 포위된채 갇혀 있었다. 절망한 애종이 채주성 함락 직전, 자신을 따르는 신료들을 모아놓은곳에서 자신의 인척(혹은 아들)인 완안승린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채주성 탈출을 부탁하면서 한 말이다. 제위를 물려준 애종은 목을 메어 자결했다.[52] 애종의 자결 소식을 들은 후 유언을 남기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원문6] 吾事畢矣[53] 남송의 마지막 황제로 몽골 제국과의 애산 전투 패배 이후 바다에 뛰어들며 남긴 말. 이 말을 남길 당시 나이는 겨우 8세에 불과했다. [54] 제자들이 유언으로 남길 말이 있느냐고 묻자.[55] 목을 메어 자결하기 전, 자신의 도포에 써 놓은 유서. 이 글을 읽은 이자성도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56] 유언을 하고 바로 죽진 않았고, 눈을 감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서 하루 정도 더 살아있었다고 한다. 주위에서 "공이 이루지 못한 것을 저희가 이루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 한다.[57] 위안스카이가 말한 '그 놈'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불명확한데, 위안스카이 일가는 홍헌제제를 부추긴 장남 위안커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58] 죽기 바로 전에 남긴 말. 정치적 유언은 1914년 신약법 29조에 의거하여 리위안훙을 대총통으로 삼는다는 내용이었다.[59] 병석에 누웠을 때 선통제가 어의를 보내자 남긴 말. 이 말을 남기고 바로 죽지는 않았고 잠시 회복되는 듯 하다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60] 이건 죽기 직전에 한 말이고 따로 유언을 남겨 두었다.[61] 반봉사건 실패 후 총살 직전에 남긴 말. 함께 처형된 아내의 유언은 '남편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 나는 그 남편을 위해서 죽는다.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여한이 없다.' 였다.[62] 황고둔 사건 당시 중상을 입고 후송된 병원에서 남긴 말. '쇼와 육군'에 의하면 여섯째 아들을 불러오라는 말이었다고도 한다.[63] 사형 집행 직후 옷자락에서 발견된 절명시.[64] 문화대혁명 당시 옥사하며 아내에게 남긴 말.[원문7] 反功大陸…解救同胞…反功大陸…救中國…反功大陸…救中國…[65] 저우 총리의 뼛가루는 유언대로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중국 대륙 전역에 뿌려졌다. 이 작업을 이행한 사람이 덩샤오핑이다.[66] 화궈펑은 마오쩌둥의 기대대로 4인방을 숙청하지만, 덩샤오핑에 밀려 5년만에 모든 실권을 내주게 된다. 이후 화궈펑은 마오의 생일인 12월 26일과 기일인 9월 9일에는 항상 마오의 묘를 찾았으며, 개혁개방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은 채 2008년에 숨을 거두었다.[67] 유서이다.[68] 와룡생은 생전에 필명을 매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목 참조.[69] 동생.[70] 외래어표기법에 따른 이름 표기는 '저우다관'이나, 후술하는 '내게는 아직~'이 '주대관' 명의로 발매되었으므로 이를 따른다. 1987년 대만에서 태어나 만 아홉살에 소아암으로 짧은 생을 마쳤다. 대관은 이 말을 한 바로 다음 날 새벽 사망하였다. 대관이 암과 싸우면서 쓴 시들은 <내게는 아직 한쪽 다리가 있다(我還有一隻脚)>는 이름의 시집으로 출판되어 현재 세계 여러 나라의 어린이에게 읽히고 있다.[71] 죽기 3개월 전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다. "아빠, 엄마, 동생아. 내가 죽으면 내가 온 힘을 다해 암과 싸웠다는 것을 암에 걸린 다른 아이들과 그 부모들에게 전해 주고, 그들에게 용기와 강한 의지를 갖고 암이라는 악마와 맞서 싸워 달라고 전해 주세요."[72]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제독들이 반드시 내년에는 항모를 취역시키겠다고 약속하자 그제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원문8] 好好活下去。[73] 부인인 류샤에게.[74] 입원 중 언론 인터뷰에서[75]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처음으로 외부에 알린 의사. 향년 33세[76] 위의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사남으로, 헤이케의 실질적인 총사령관. 단노우라 전투의 패전 후 이 말을 남기고 물 속으로 뛰어든다.[원문9] 当方滅亡[77] 무로마치 시대의 무장. 오오기가야츠 우에스기가를 섬기며 에도성을 축성한 인물이다. 문무를 겸비한 무장이었으나 그를 질투한 데다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가의 모략에 넘어간 주군 우에스기 사다마사에 의해 참살당하며 남긴 말인데, 자신을 죽이면 주군 가문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던진 말이다. 위의 단도제의 유언과 비슷한 어감의 유언이다.[78] 정확히는 '유언이라고 알려진 말'. 정확한 표현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이렇게 영지를 지키는 것에 힘쓰라는 요지의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79] 첫 번째 말은 사세구, 두 번째 말은 가신 야마가타 마사카게에게 했다는 말. 영화 카게무샤에서는 두 번째 말을 하고 죽었다.[원문10] 是非に及ばず。[80] 나니와는 지금의 오사카를 말한다.[81] 죽는 마당에 물을 달라고 하자 형리가 대신 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미츠나리가 "감은 몸에 좋지 않다."라고 거절하자 "곧 죽을 자가 무슨 건강을 걱정하느냐?"라고 형리가 되물었고, 그 대답.[82] 이에야스[83]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야 도쿠가와에 충성하게 된 도자마 다이묘(外様大名)들은 도쿠가와 쇼군가에 의해 일본의 서쪽 지역에 영지를 하사받았다. 즉 죽어서도 이들을 경계하겠다는 의미. 비슷한 동기의 유언으로 클레망소의 유언이 있다.[84] 죽기 직전 아들 이에미츠에게 한 말.[85] 이 유언대로 이에미츠는 이에야스의 무덤 근처에 묻혔다. 위험했던 후계자 자리를 지켜줘서 그랬는지 실제로 할아버지 이에야스를 대단히 존경했다고 한다.[원문11] おもしろき こともなき世を おもしろく[86] 이미 일격을 받아 이마에 자상을 입은 상태에서 남긴 말. 정말로 칼을 찾은 것이 아니라 같이 있던 나카오카 신타로를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가명으로 외친 것이다. 나카오카는 중상을 입은 채 토사 번에게 구조되는데 성공했지만 이틀 뒤에 사망했다.[87] 사이고 다카모리가 당시 서남전쟁을 일으켜서 일본은 이 때 내전상태였다. 다카모리에게 직접 한 말은 아니고 그냥 병상에서 죽기 직전에 한 말.[원문12] 晋どん、晋どん、もう、ここいらでよか。사츠마벤으로 표준어로 고치면「 もうここらでよかろう。」다.[88] 서남전쟁에서 허벅지와 복부에 총탄을 입고 자결을 결심하기 직전에 카이샤쿠를 맡은 벳푸 신스케에게 내뱉은 유언. 이후 덴노가 있는 동쪽을 향해 정좌를 하고 할복했다.[89] 암살자들에게 습격당할 때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암살자들에게 마차에서 끌어내려지자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그러나 곧 전신에 16군데의 자상을 입고 현장에서 즉사. 칼을 거의 머리에 맞아서 시신이 매우 참혹한 상태였다고 한다.[90] 대역 사건에 연루되어 고토쿠 슈스이와 함께 처형당한 무정부주의자. 아버지에게 남긴 유언으로,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91] 마지막 말은 잠옷의 가슴을 풀어 헤친 채 외친 "여기에 물을 뿌려 줘. 죽으면 곤란하니까"였다고 한다. 하지만 4녀 아이코가 울자 그것을 아내 쿄코가 주의를 줄 때 소세키가 달래며 한 이 말이 사실상의 유언으로 여겨진다.[92] 아들 나쓰메 신로쿠의 저서 '아버지 소세키와 그 주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문득 눈을 뜬 아버지의 마지막 한 마디는 '무언가 먹고 싶다'라는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식욕에 대한 절실한 바람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의사의 조치로 포도주 한 숟갈을 드리게 되었는데, '맛있다.' 아버지는 마지막 바람을 이 한 숟갈의 포도주와 함께 맛보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93] 실제 최후의 말은 결국 총을 맞고서는 암살자들이 떠난후에 하녀가 달려왔을때 하녀에게 '''아까의 젊은이들을 다시불러와라 잘 이야기 해보겠다.''' 라고 말한게 최후의 말이라고 한다.[94] 함께 사형당한 청년장교들은 천황폐하 만세를 외쳤으나 안도 데루조는 천황에 대한 배신감으로 외치지 않은 듯하다.[95] 2.26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96] 함께 처형된 니시다 미쓰기가 '천황 폐하 만세 삼창을 제안하자 '아니, 나는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는 것은) 하지 않겠네.'라고 답한 뒤 처형대로 이동했다. 앉아서 총살 당할 수 있도록 형무소측에서 배려해주자 이에 대해 평한 것이 최후의 유언.[97] 사실 이오지마 수비대의 마지막 돌격은 반자이 돌격과는 거리가 있다. 쿠리바야시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반자이 돌격을 금지했고 마지막 돌격조차도 철저한 기습으로 실행했다.[98] 이오지마 전투의 일본측 지휘관. 마지막 야습 직전 남긴 훈시가 생환자의 증언으로 알려졌다..[99] 彌咤, 부처님 곁[100] 그는 항년 73세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챙기지 못한 부하들을 걱정하였다. [원문13] 私は悪くない、部下が悪い![101] 이게 얼마나 밑도 끝도 없이 뻔뻔한 말인지는 무타구치 렌야 항목과 임팔 작전 항목을 같이 참조할 것. [102] 정월 3일에 먹는다고 해서 3일 참마이다.[103] 난반즈께는 튀긴생선, 구운생선, 그밖에 야채를 난반지에 절인 음식물이다.[104] ゆき江[105] 幸栄[106]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107] 1964 도쿄 올림픽 육상 마라톤 동메달리스트.[108] 그가 남긴 유서의 내용 중 가장 화제가 되었던 문장이다.[원문14] '''もう だめだ!'''[원문15] '''あたま上けろ! あたま上けろ! パワ!'''[109] 일본 항공 123편의 기장.[원문16] '''上げてます!'''[110] 일본항공 123편의 부기장.[111] 이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했다.[112] 2000년은 20세기에 속하며 21세기는 2001년부터이다.[113] 미나미산리쿠의 동사무소 여직원. 도호쿠 대지진 당시 주민들을 위해 끝까지 대피방송을 하다가 실종, 안타깝게도 2011년 5월 8일 시신이 발견되었다. 2012년 4월에는 사이타마 현의 도덕교과서에 ''''천사의 목소리''''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실렸다.[114] 캔디즈 멤버[115] 남편[116] 2011년 3월 29일,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고 미리 녹음해둔 조문객들에게 보내는 인사말.[117] 70년대 일본을 풍미했던 아이돌 그룹 캔디즈의 멤버. 수우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118] 마지막으로 트위터에 남긴 말. 원래는 이사를 가게 되었다며 남긴 트윗이었으나, 이 트윗을 남기고 사흘 후 사망하여 '''세상과 이별'''하게 되었기에 안타까움을 더했다.[119] 상동. 역시 해당 트윗 내용 때문에 팬들에게 더욱 안타까움을 주었다.[120] 급성 폐렴으로 인해 병원에서 생일 파티를 해야 했던 상황에서, 생전 마지막으로 적었던 블로그 말미에 적혀있던 부분.[121] 戰前·통상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기 전 시기를 의미[122] 사망 몇시간 전인 9일 오후 4시께 출판사인 신초샤(新朝社)에 보낸 잡지 연재 마지막 원고의 말미에서.[123] 반딧불의 묘의 원작 작가[124] 아빠 말 좀 들어라!의 작가.[원문17] 令和きれいだー。[125] 급성 심부전으로 급사하기 4일 전 올린 마지막 트윗 내용. 트윗이 올라올 당시인 2019년 4월 1일은 일본의 새 연호이자 5월 1일부터 적용될 레이와가 막 발표된 시점이었다.[126] 자택에서 발견된 유서.[127] 1959년 가수로 데뷔했다가 1962년 가수직을 은퇴한 가수 출신 배우.[128] 차를 타고 가다가 이 말을 하고 바로 의식을 잃었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사망했다. 사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감염된 것이 밝혀졌다.[129] 대반열반경에 따른 정확한 여운은 다음과 같다. "아난다(부처의 제자)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130] 그리고는[131] 이슬람교의 시조.[132] 유수프는 살라딘의 본명이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비오는 날 바깥을 시찰했다가 병이 악화되었다. 아픈 그를 두고 옆에서 성직자가 끊임없이 코란을 읽어주었다고 하는데 신이 신도를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대목에서 미소를 지었고 얼마 있지 않아 이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133] 출처는 위키백과 영문판(https://en.wikipedia.org/wiki/Osman_I). 아들이자 뒤를 이어 2대 베이가 되는 오르한에게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길이가 꽤 긴 탓에 정말 유언이라기보다는 훈요십조처럼 후대의 군주들에게 남기는 가르침으로 보는 게 옳을 듯 싶다.[134] 사망 수시간 전, 쉴레이만 1세가 평생을 기록했던 일기에 남긴 마지막 기록. 46년의 치세 동안 열 세 차례의 군사원정을 단행한 쉴레이만은 세상을 떠나는 1566년에 친히 군대를 이끌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고 있던 헝가리를 공격했는데(실질적인 지휘는 재상이 하고, 자신은 가마를 타고 갔다), 여기에서의 '요새' 는 시겟바르 요새를 일컫는다. 갑자기 병환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기에, 숨을 거둔 날의 일기가 남아있는 것. 시겟바르 요새는 쉴레이만이 사망한 다음 날에 함락되었으며, 그로부터 2년 뒤인 1568년에 체결된 에디르네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만 제국에 3만 두카토의 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강화를 체결했다.[135] 첫번째 말은 처형 집행인에게 자신을 처형하러 온 것이냐고 묻는 말, 2번째 말은 처형이 집행되기 직전에.[136]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자, 제2차 빈 포위 당시 오스만 제국군의 총사령관. 빈 공격을 주장, 주도하였으나 대패했고, 그 죄로 처형되었다.[137] 태국의 유명한 샴쌍둥이인 벙커 쌍둥이의 형. 팔과 다리는 따로였으나, 몸통이 붙어 있었다. 동생의 이름은 앵 벙커[138] 창이 죽은 것을 보고[139] 창이 죽고 3시간 후에 죽었다.[140] 필리핀의 독립 운동가. 처형 직전 여동생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애국시 '마지막 인사(Ultimo Adios)'의 첫 구절. 이 시의 첫 구절은 모든 필리핀 국민이 즐겨 읊는 대목이다.[원문18] Saat kaç?[원문19] He Ram! - 직역하면 "아, 라마여!"[141]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142] 터키의 정치가이자 총리. 1960년 쿠데타로 축출되어 재판 끝에 국고횡령과 낭비 및 부패 혐의로 교수형 당했는데 그 직전에 크게 외쳤던 유언. 세월이 지나 복권되면서 결국 터키에선 아드난 멘데레스 대학까지 세워져 그의 유언이 이뤄졌다.[143] 소신공양 전에 제자들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소신공양 중에 불길이 거세지자 쓰러질 듯 앞으로 기울어졌으나,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아 다시 가부좌 자세로 정좌하여, 결국은 뒤로 쓰러졌다.[144]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몇몇 공산국가들이 그렇듯이 그의 시신을 하노이 바딘(Ba Dinh)광장 앞에 묘를 짓고 안치하여 참배객들이 시신을 볼 수 있도록 했다. [145] 필리핀의 정치가, 민주화 운동가. 자신이 암살될 것을 예감하고 비행기에 동승한 카메라맨에게 이 말을 했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암살범의 총에 맞아 숨졌다. 카메라맨도 아키노의 말대로 계속 촬영해서 아키노의 암살 장면이 고스란히 녹화되었다.[146] 사담 후세인이 교수대를 보고서 한 말이다.[147] 아프가니스탄의 전 국왕.[148] 힌디어를 영어로 번역한 자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