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생애
1. 개요
윈스턴 처칠의 생애에 대한 다룬 문서이다.
2. 집안 내력
17~18세기의 영국의 명장이자 초대 말버러 공작이었던 존 처칠의 9대손이다. 존 처칠의 외아들은 슬하에 자식 없이 일찍 죽어 큰딸인 헨리에타가 2대로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헨리에타 역시 남자 상속자가 없어 3대 공작 작위는 여동생의 아들인 5대 선덜랜드 백작 찰스 스펜서가 계승했다(이후 선덜랜드 백작 작위는 말보로 공작과 합쳐졌다). 참고로 3대 공작의 조카인 존 스펜서 백작은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7대조. 당시의 가문명은 그냥 스펜서였고, 성을 스펜서-처칠로 바꾼 건 그 손자인 5대 공작 때부터이다. 참고로, 스펜서-처칠(스펜서 가문과 처칠가문)가문은 말버러 공작, , 선덜랜드 백작, 스펜서 백작, 처칠 자작, 얼스롭 자작, 워믈리턴의 스팬서 남작, 야턴 준남작, 오프레이 준남작의 작위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 블레넘 궁전의 말버러 공작이 수장이다. 즉 윈스턴 경은 굉장한 명문가 출신.
윈스턴 처칠의 아버지는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대정치가 랜돌프 처칠이다. 7대 말보로 공작의 차남[1] 으로 대학 시절에 뒷골목 사창가의 늙은 창녀와의 성관계에서 옮은 매독 때문에 발작하면서 46살 젊은 나이에 참혹하게 사망했다. 그 발작 증세가 어느 정도냐면 길거리에서 벌거벗은 채로 날뛰거나, 아내를 죽이려고 늘 총을 가지고 다녀서 하인들이 총알을 죄다 빼두었을 정도였다. 매독은 뇌를 비롯한 중추신경계를 손상시키기 때문에 이런 정신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랜돌프가 죽을 당시 윈스턴은 21세였는데, 당시만 해도 매독이 유전병이라고 여겨서 그 자신도 매독에 걸려있으리라 믿고 한동안 금욕했다. 이후 윈스턴은 뒤늦게 얻은 아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지어주며 아버지를 기렸다.[2]
어머니는 월 가의 유명한 플레이어자 금융인이었던 레너드 윌터 제롬의 딸 제니 제롬이다.[3] 공식적으로는 제니가 잦은 파티와 사냥 참가로 인해 7달 반에 처칠을 조산한 걸로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속도위반으로 결혼 당시 임신 중이었고 그래서 정상적으로 날을 맞추어 태어난 것으로 본다. 때문에 아버지의 매독과 어머니의 임신 시기는 함께 도시전설이었는데, 의외로 사실로 생각되는 증거가 꽤 많다. 물론 처칠은 매독설을 부정하지만. 영화 《젊은날의 처칠》에서 불경스럽게 어느 기자가 처칠의 어머니에게 매독 이야기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제니는 그 당시의 귀족 부인들이 대개 그러했듯 남편을 정치적으로 보조하느라 매우 바빴기 때문에 윈스턴을 직접 돌볼 여유가 없었다. 윈스턴은 어머니를 동경했고 더 자주 만나고 싶어하였지만 제니가 거절한 탓에 둘 사이의 교류는 주로 편지로 이루어졌다. 제니는 사교계와 여러 내연관계서 얻은 인맥을 통해 윈스턴의 초창기 정계 시절을 많이 도와주었고, 결과적으로 제니와 윈스턴간의 관계는 모자 관계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가까웠다.
이렇듯 명문가 출신이지만, 아무도 그를 귀족적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7대 말보로 공작 부인인 처칠의 할머니조차 '''"윈스턴 같이 막돼먹은 놈에게 공작위를 줄 수는 없어!"'''를 외치며 손자며느리인 9대 말보로 공작 부인[4] 이 아들을 낳을 때까지 갈궜다고 한다. 당시 처칠의 사촌형인 9대 말버러 공작 찰스(1871~1934)가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 윈스턴이 '''10대 말보로 공작'''이 되기 때문이었다. 8대 공작이었던 큰아버지 조지는 아들을 찰스 하나밖에 낳지 못했고, 그 다음 서열인 둘째 큰아버지 프레드릭은 아들은커녕 다 크기도 전인 4살 때 죽어버려서 다음 서열이 윈스턴이었던 것이다. 만약 윈스턴 처칠이 공작이 되었다면 상원의원[5] 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9대 말보로 공작부인은 결혼한 지 2년 만인 1897년, 처칠이 23세일 때 계승자가 될 아들 존(1897~1972)을 낳았고 다음해에는 예비 계승자인 둘째아들 이보르 찰스(1898~1956)도 낳아서 처칠이 공작이 될 일은 없게 되었다.
3. 학창시절
해로우 스쿨,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공부를 엄청나게 못했으며, 해로우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기적으로 선배들이 후배들을 조지는 압박적인 기숙사립학교 생활을 못 이겨내고 심각한 정신질환[6] 을 앓고 휴학했을 정도이며, 샌드허스트도 그나마 3수 끝에 겨우 들어갔으니 학교에서는 계속 낙제생이었던 듯하다. 참고로 이 때 처칠을 갈궜던 선배인 레오 애머리는 후일 처칠이 수상이 되기 직전 처칠의 지지자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애머리의 아들이 골수 나치 인사였다는 것이다.
샌드허스트를 들어갈 때 아버지는 병과를 보병으로 받길 원했으나, 처칠은 수학을 하지 않고 입학 커트라인이 낮은 기병을 원했다고 한다. 당시 기병은 발라클라바 전투 이후로 위상이 추락한 데다, 말 관리에 돈이 많이 드는 병과라서, 머리에 든 거 없지만 집에 돈은 많은 것들이나 가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래도 입학 후엔 기병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여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군인+종군기자 신분으로 인도 토후국과의 전투나 옴두르만 전투 등 이런 저런 전쟁에 참전했다. 심지어는 휴가중에 스페인군이 (당시 식민지였던) 쿠바 반란 게릴라와 싸우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끼어 가기도 했다. 훗날 처칠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강의 전쟁>이란 책을 썼으며, 영국 육군이 기관총으로 수단 독립군을 학살한 옴두르만 전투에 대해서 "야만인을 상대로 한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평했다. 그리고, 영국령 인도에서 복무 중 토후국 반군과 싸우느라 절벽을 기어오르다가 오른쪽 어깨를 다치는 바람에 어깨관절에 습관성 탈구가 생겨 기병도를 크게 휘두를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옴두르만 전투 참전 직전 기병도 대신 쓰려고 당시 최신형 권총이던 마우저 C96을 개인적으로 구매해서 무장했는데, 마우저 권총 덕분에 이 전투에서 살아났다고 후일 회고록에 적었다.
4. 보어 전쟁 종군 기자와 탈출기
제대 후 보어전쟁에서 종군기자이자 장교로 참전했다. 당시 처참한 전황 등을 생생히 본국에 전달했다. 원래는 민간인 신분으로 종군기자 역할만 했지만 몇몇 모험을 겪은 뒤 군인으로 동시에 복무하기도 한다.
전쟁 도중 보어인 코만도(게릴라 부대)에 붙잡혔으나 기상천외한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지독하게 운이 좋았다. 홀로 탈출은 했지만 남아공의 지리를 몰라 당황해하다가 "에라이 모르겠다"며 어느 집에 들어가 문을 두들기며 "난 영국인인데 좀 도와주시오" 라고 말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집은 그 지역에서 유일한 영국인 이주자인 존 하워드란 사람이 살고 있었고 하워드는 조용히 처칠을 안으로 들여보내 식사를 대접하고 처칠을 보어인처럼 위장시키고 말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처칠에게 먹을 것이나 물을 싸준 다음에 길도 가르쳐줬다. 처칠은 이렇게 보어군인 척 위장하고 태연히 초소를 통과한 후 기차의 대차(바퀴축) 부분에 몸을 동여매고서 그곳을 탈출했고 중립지대인 포르투갈령 모잠비크까지 무려 480km를 걸어가서 완전히 탈출에 성공했다. 나중에 처칠이 정부 요직을 차지한 뒤에도 그는 이 은혜를 잊지 못하고 남아공을 방문하는 길에 하워드를 만나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그 사람의 남아공 농장이 어려움을 겪자 자비로 도와주기도 했다고. 이후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일설에는 그가 귀족의 아들이고 종군 기자여서 석방할 것을 보어군이 고려했는데, 석방 명령이 내리기 전에 먼저 탈출했다고 한다.
사실 포로로 잡히고 탈출한 이후에는 민간인에서 군인의 신분으로 전환했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본토로 복귀하지 않고 총사령관인 불러 장군에게 부탁하여 남아프리카 경기병 (South African Light Horse) 연대에 장교 보직을 얻어 직접 레이디스미스 탈환 작전에서 싸웠다. 앞서 올라온 처칠이 보어전쟁에서 군복을 입은 사진도 이때 찍은 것이다. 그 이후에 콜렌조 전투, 스피온 콥 전투, 발 크란츠 전투 등 아주 치열한 전투에서 직접 싸우면서도 종군기자와 군인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했다.
영국군의 대 삽질인 스피온 콥 전투 당시 지휘관인 찰스 워렌 사단장에게 '상황이 막장인데 뭐라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가 끌려나간 적도 있다고 한다. 워렌 사단장은 잭 더 리퍼 사건 당시 경찰 총책임자로 멍청한 행동을 일삼아 그 사건이 영구미제로 남는 데 일조했고, 또한 장군으로서는 영국 왕립군사학교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손꼽힌다. 게다가 처칠이 바른 말을 했다고 체포하는 바람에 악명이 더 높아졌다. 다만 스피온 콥 전투 당시에 처칠은 남아프리카 경기병의 장교로 임관한 후여서 군인의 신분이기도 했으니 워렌 장군은 일개 초급장교가 자기에게 쓴소리를 하는 걸 괘씸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었고 처칠이 이미 국민영웅이었으며 종군기자와 군인 활동을 하면서도 이 전투에서 직접 싸웠던 데다, 일선에서 처참한 상황을 다 목격하고 많은 부하들도 전사한 상태였기 때문에 여론은 처칠을 동정했다. 게다가 총사령관인 레드버스 불러(1839~1908) 장군도 워렌 장군을 아주 싫어했다. 그럼에도 이 작자는 1908년 68세 나이로 정년퇴직하고 편히 살다가 1927년 1월, 87번째 생일을 18일 남겨두고 86살 나이로 죽으면서 장수했다. 참고로 워렌은 편히 살다가 가긴 했지만 살아 생전 지겹게 욕먹은 게 억울한지 자서전에서 보어전쟁 당시 스피온 콥 전투에 대해 변명하다가 곱배기로 욕을 처먹었다.
5. 정계 입문
초기에는 영국 보수당 소속이었으나, 당의 정책이 자신의 주장과 반대라는 이유로 탈당하여 영국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6. 제1차 세계 대전
처칠은 육군 출신임에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 장관의 지위에 있었는데, 1914년 7월 27일 당시 영국의 동맹국이던 오스만 제국이 영국에 발주해 취역을 준비 중이던 2척의 12인치포 탑재 드레드노트급 전함 술탄 오스만 1세(배수량 3만 톤, 12인치 주포 14문, 후에 HMS 애진코트)와 레샤디에(배수량 3만 톤, 13.5인치 주포 10문, 후에 HMS 에린)를 포함한 40척 해군 전투함을 강탈하여 영국 해군에 편입시켰다. 이후 전함 2척 외에는 오스만 제국에 인도되었다고도 한다.
오스만 제국과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간호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로 유명한 크림 전쟁 이래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칠의 이러한 아전인수격의 행동으로 동맹국 영국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얼마 뒤 영국 및 프랑스 해군을 피해 오스만령으로 피신한 독일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 괴벤과 경순양함 브레슬라우가 오스만 제국에 무상인도되는 것을 계기로 중립을 버리고 동맹군 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아울러 브레슬라우는 훗날 처칠이 골치를 썩이게 한 U보트 지휘관 카를 되니츠 제독이 초급장교 시절 복무한 배이기도 했다. 빌헬름 2세 황제의 선포에 의해 오스만 제국에 공여되었고, 이름도 미딜리로 바뀌었다. 이에 관한 더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다음의 포스팅을 읽어보길 권한다.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 과정 요약하면, 오스만 제국이 전함 2척을 강탈당한 이 사건조차도 시작에 불과했고 처칠 및 영국 내각이 알아서 자폭질을 연달아 하고 독일은 독일대로 이걸 이용해 오스만을 압박해서 결국 외통수에 걸린 오스만이 1차 대전에 친독 국가로 참전하게 된 것이다.
전함 두 척을 아까워한 이 행동 덕분에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군 3백만, 영국군 250만(전체 동원 병력의 약 28%), 러시아군 100만(전체 동원 병력의 약 8%)이 동원되어 3백만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하고 최대 150만의 아르메니아인, 40만의 쿠르드인, 15만의 시리아인이 학살당하는 중동 전선이라는 '''블랙홀'''이 만들어지고, 더 나아가서 수백만의 병력이 빠져나간 만큼 주요 전장인 서부전선의 연합군 전력이 약화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이 더 장기화되는 요인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초기 중동 전역에서 영국군은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이 바그다드에서 포위되어 항복하는 등 연패를 거듭했고, 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처칠은 다시 갈리폴리 전투를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영-프-식민지군 포함 25만명이라는 병력 피해를 내며 영국군 역사상 최대의 실패를 기록한다. 원래 육군 쪽에서 무리라고 말리던 작전을 해군, 그것도 해군 수뇌부조차 반대했음에도 장관 권한으로 단독으로 실행하다가 그렇게 된 것으로 이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역사상 단일 작전 중에서 가장 큰 실패를 본 작전'''이 되었다. 갈리폴리 실패 후 처칠은 해군장관에서 해임되고 랭커스터 공작령 부(副) 대법관이 되었으나 이는 의전직에 가까웠다. 이에 낙담한 처칠은 1년도 채 안되어 이 자리를 사임하고 자신이 젊은 시절에 있던 육군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육군에서도 처칠을 골칫덩이로 생각했으며, 처칠은 여단장 지휘를 원했지만 중령 계급만을 받고 지휘관에게 천대받았다. 처칠은 전선에 담배나 브랜디, 안락한 야영 장비를 가져갔지만 지휘관이 그것을 금지시켜 근무시간에는 양말 한 켤레와 면도기 말고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 갈리폴리 작전의 실패는 죽을 때까지 정적들에게 비난거리였고, 그의 앞에서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였다.
1916년 5월에는 전쟁터에서 떠나 집으로 돌아와 하원 의원이 된다. 이 당시에는 로이드 조지가 새 영국 수상이 되어 있었으며, 1917년에 처칠은 군수상이 된다. 이 기간 동안 역사상 최초의 전차인 MK 시리즈의 개발을 지지하기도 했다. 단, 처칠의 주장은 거대한 육상 전함을 만드는 것이라서 결국 이쪽은 기각되었고 다른 안이 나온 결과가 'Tank'라는 암호명을 받은 장갑차였다. 전차에 쓰이는 용어에 해군 용어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당시 육군 장관이었던 키치너는 전차를 장난감 취급하며 "이런 걸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독일 제국 육군의 루덴도르프 장군은 "전차에 졌다"고 말했으니 그나마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운 셈이랄까? 근데 따지고 보면 해군 예산으로 육군한테 장난감 사준 꼴이다. 그래서 당시 몇몇 사람들은 "육군 출신이 해군 장관하면서 해군을 엿 먹여댔다"고 욕했다.
7. 전간기
1918년 말의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19년 1월에는 영국 육군상 및 영국 공군상이 되어 이전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한다. 한편 그가 속해있던 자유당이 몰락하고 영국 노동당이 새롭게 떠오르자, 그는 다시금 보수당으로 복귀한다. 이 때문에 철새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은 당의 정책이 자신의 주장과 반대될 때만 당을 옮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신에 굉장히 능수능란했던 듯.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 대해 부과한 천문학적인 전후배상금 징수를 반대하며, 이 것이 새로운 전쟁을 불러올 것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전후배상금으로 인해서 독일 경제가 피폐해진 것이다.[8] 그러다가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자 태도가 돌변, 평화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네빌 체임벌린 수상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히틀러의 야망을 경고하며, '나중에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자체 의용대를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으나 호전광 취급을 받으며 정치판에서 가라앉기 시작한다. 거기다가 인도의 독립을 인정하는 편으로 기울어지던 영국 의회에서 처칠이 결사적으로 인도의 독립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나치'''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오히려 독립을 못한데 불만을 품은 인도인중 일부는 독립을 위한답시고 '''추축국'''에 가담해 버린다. 하지만 소련군은 소련군대로 물량으로 압도하면서 전선을 지켜 초기 독일군은 인도까지 전선을 확장하는데 실패했고, 후반기 가장 가까이 온 일본군은 무타구치 렌야 장교가 임팔 작전을 제대로 말아먹는 바람에 2차대전 중의 독립은 실패했다.
아버지 랜돌프 처칠이 영국 보수당에서 굉장히 현실적이고 훌륭한 정치인으로 대접받았던[9] 데에 비해, 2차대전 이전까지 처칠은 그런 훌륭한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하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전시 총리가 되기 이전까지 요직인 해군 장관이나 재무장관을 지냈지만, 강력한 전쟁 추진파적 성향과 비타협 노선으로 정부 중요 직책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고, 정계에서도 그의 성향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그랬고 아돌프 히틀러도 조롱했듯이, 전쟁이 아니었으면 그냥 그저 그런 정치인으로 인생이 마감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편 당시의 안일한 흐름은 1938년 9월의 뮌헨 협정 체결 때 절정에 이른다. 독일과의 전쟁을 두려워하던 영국으로서는 뮌헨 협정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은 체임벌린 총리를 비판한 처칠을 좋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처칠은 "치욕과 전쟁,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서 둘 다 선택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연설에 영국 정치계가 무슨 반응을 보였을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8. 제2차 세계 대전, 전시총리(戰時總理)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라고.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육지와 하늘, 그리고 바다를 가리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승리,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승리, 어떠한 공포가 닥쳐올지라도; 승리,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전시 수상 취임 연설.
영국은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연안과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10]
됭케르크 철수작전 성공 직후 연설 中.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손에 완전히 짓밟힌 직후 곧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단치히 문제로 폴란드의 압박을 시작하자, 영국 정치계의 분위기는 뒤집히기 시작한다. 영국 내각은 프랑스와 함께 폴란드의 영토와 독립 보장을 선언하며 독일을 압박했지만, 히틀러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고 만다. 이것으로 처칠의 말이 옳았음이 입증되었고, 그는 다시금 정계에 복귀했으며 네빌 체임벌린의 전시 내각에 들어가게 된다. 참고로 이 전시내각에는 노동당이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실패로 체임벌린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면서 체임벌린은 총리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원래 노르웨이 전역의 실제 작전 입안자는 처칠이었으므로 처칠도 같이 내각에서 쫓겨나야 정상인데, 처칠은 노르웨이 패전에 따른 책임을 모조리 체임벌린한테 떠넘기고(…) 체임벌린만 쫓아낸 후에 자기가 영국 수상직에 오른다.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자, 윈스턴 처칠은 '''하루아침에 "잡소리나 해대는 귀찮은 늙은이"에서 "혜안을 지닌 예언자"'''로 급부상했다.
볼프 슈나이더, 박종대 역, 『위대한 패배자』, 서울: 을유문화사, 2006.
결국 이로 인해 노동당과 영국 자유당, 보수당을 아우르는 초당파 거국내각의 수반으로서 처칠이 총리직에 오른다. 이때 헬리팩스 경에게 제안이 들어간 총리 자리를 헬리팩스 경이 거부했다.[11] 처칠보다 유약했던 핼리팩스 경이 총리가 돼서 독일의 휴전 제의를 받아들이고 전쟁에서 이탈하여 히틀러가 독소전에 온전히 힘을 쏟는다는 떡밥이 What if 2권과 겁스 무한세계에서 수록되었다.[12]
이제 총리가 됨으로써 처칠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전시내각에 모두 참여한 영국 유일의 정치인이 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벌어진 프랑스 전역에서도 프랑스군의 무능함과 독일군의 빠른 작전에 영국군도 대패하고,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사실상 영국은 유럽에서 고립된 채 독일과 홀로 맞서는 상황에 처한다. 애초에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한테는 때렸다가 패배할 것이 확실해서 당장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이 됭케르크 철수 직후 연설 내용은 요약하자면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결사항전중 혹여 본토가 점령당하더라도, 식민령이 항전을 계속할 것이며, 때가 오면 막강한 힘을 숨겨두고 있는 신세계(미국)가 구세계를 해방, 구원할 것이다!” 라는, 잘 나가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솔직히 좀 구차해지는 내용이다. 처칠의 연설이 이런 내용이 된 이유는 국민들에게 현 상황의 급박함을 알려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한편, 당장 다급한 전황에 직면했음에도 "마지막에는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믿음을 약화시키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13]
그러나 이때 처칠은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애를 썼다. 처칠은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한 자신의 말대로 독일군의 공습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런던 지하에 대피소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위험하게도 그 위에는 정부 건물이 있었기에 500파운드 폭탄에 직격당하면 그대로 끝장이 나는 위치였다. 이렇게 처칠은 끝까지 영국에 남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도하며 독일군의 침공 위협에 맞서는 한편, 미국에 접근하여 무기 대여법을 통해 수많은 장비들을 받아냈다.[14] 전쟁이 끝난 후 독일 장군 룬트슈테트에게 소련인들이 "전쟁의 패배를 결정한 전투가 뭐냐?"고 묻자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을 들었다. 스탈린그라드를 기대하던 소련인들은 크게 실망했다고.
그러나 영국식 정실주의 인사정책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처칠의 군사적 역량은 1차대전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어서 기획했던 작전들이 연달아 실패했다. 그리스 전선, 배틀 액스 작전, 크루세이더 작전 등 영국군이 탈탈 털린 작전의 배후에는 언제나 처칠이 있었다. 게다가 별 보람도 없이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된 이탈리아 전선 역시 상당 부분 처칠의 입김이 작용했으며, 동쪽으로는 싱가포르 전투의 처절한 패전도 후퇴불가 명령을 내린 처칠이 반쯤 자처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군이 추축군을 탈탈 털어먹은 작전의 배후에도 그가 있었다. 허나 미국의 참전을 이끌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 데다가, 독일의 통상파괴에 빠르게 대처하는 데에도 실패하여 영국민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점차 인기가 떨어져 갔다.
그런 큼직큼직할 실책 외에도 소소한(?) 군사적 실책도 많았다. 사실 말이 소소한 실책이지 다른 사람들이 뜯어말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패망했거나 지속적으로 영국군을 괴롭힌 문제를 만든걸 소소한 실책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싶기는 하지만, 결과가 재앙은 아니었던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경우. 전자의 경우 망해가는 프랑스 전선을 어떻게 좀 해보라고 스핏파이어를 포함한 영국 공군의 주 전력을 프랑스에 보내려고 하였다. 다행히도 이는 당시 영국 전투기 사령관이었던 휴 다우딩 대장이 "이미 끝장난 프랑스에 지원군을 보낸다면 우리는 우리 하늘을 지킬 전투기가 바닥날 겁니다"라고 서신을 보내서 막아냈다. 그러나 이러고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해협으로 물자를 수송하도록 시키는 바람에 수송선단을 호위한다고 영국 항공전 전까지 계속 영국 공군의 전력을 깎아먹었다.[15] 결국 이번에도 다우딩 대장이 더 이상 선단 호위를 못해준다고 나왔고 처칠에게 온갖 압력을 받으면서도 막아냈다. 후자의 경우는 막 개발되어서 양산을 해야 할 6파운더 대전차포의 생산을 미루고 시대에 뒤쳐진 2파운더 대전차포를 더 양산시킨다든가,[16] 그나마 어쩔 수 없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게 없지는 않아서 아군이었던 프랑스 해군이 독일 손에 넘어가는걸 막는답시고 영국 해군으로 공격하게 했던 경우가 있다(캐터펄트 작전). 물론 프랑스인들은 이걸 배신행위로 받아들여 크게 분노했고 오히려 절대다수의 프랑스군과 프랑스 식민제국이 비시 정부에 붙어버리게 되었다. 다만 처음부터 프랑스 함대를 공격하라는 건 아니고, 영국 함대에 합류하거나 타국에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보관하는 것을 제안했고, 그게 안 되면 격침시켜서라도 독일의 전력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프랑스 함대 사령관 장 슐 제독이 무장을 해제하겠다고 답했으나 전달이 늦어진 건지 이미 영국 함대가 공격을 시작해버렸다는 것. 프랑스 함대의 전력이 독일에 넘어갈 경우 매우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아주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17]
사실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 모든 것들이 실제로 실현되는 영역, 즉 군사작전에 직접 개입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하지만 전문성의 부족과 정치인과 군인의 입장 차이 등으로 인하여 정치 지도자가 손 댄 작전은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결국 몇 번 손 대서 신나게 말아먹고 난 다음 너무 늦기 전에 그나마 정신을 차린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유능한 참모들이 어떻게든 뜯어말려줬던 처칠 같은 경우가 그나마 낫고, 갈수록 맛이 가면서도 참모들이 맛이 가는 상황을 틈타 이권 다툼에 몰두하던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같은 경우에는 결과도 나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중화민국의 장제스도 일선 지휘관들에 대한 의심과 '군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무리하게 간섭을 하다가 2차 상하이 사변의 참패를 야기했고, 이후 버마 전투에서도 탱크 한대 한대까지 직접 통제를 하여 조지프 스틸웰과 큰 마찰을 빚었다. 물론 그렇다고 스틸웰이 잘했냐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본의 경우 조직 자체의 문제가 심각해서 무능한 인간들이 출세하고 유능한 사람들은 그 똥 치우기도 벅찼으니 논외. 중국 공산당은 항일보다 세력확장에 치중했고 팀킬까지 저지르고 다녔으니 패스. 그나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모든 작전을 군인들에게 맡기고 전폭적으로 지원하여 큰 실책 없이 존경받는 케이스다. 심지어 루즈벨트는 군사작전에 간섭했을 때에도 성공적인 결과를 이루어 내었다. 자세한 사항은 둘리틀 특공대 항목 참조. 이 작전은 군사작전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계략에 가까웠지만 일본 해군의 오판을 이끌어내어 미드웨이 해전이 일어나게 만든 하나의 요소로도 볼 수 있다.
한편 이 당시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지자 영국 국민들의 사기 진작이 필요하다 느껴, 전후에 영국 국민들이 살아갈 국가의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베버리지 보고서다. 그리하여 처칠은 사회복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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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윈스턴 처칠,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결국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유럽 전선 종전 직후 처칠은 영국 총선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때가 1945년 7월이었는데, 포츠담 회담(포츠담 선언)에서 '''중도 귀국당해야 했다'''. 해리 S. 트루먼과 이오시프 스탈린이 다 해먹고 있고, 핵무기를 개발한 사실을 숨기고 있던 트루먼과 스파이를 통해 다 알고 있던 스탈린의 밀당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사진 한 방만 찍고 말아야 했던 것. 이로서 전시총리 처칠의 임기는 끝이 났다. 포츠담 선언 뒤의 뒤이은 회담은 클레멘트 애틀리(#)가 마무리했다.
9. 2차대전 이후
이후[20] 매우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21] 을 한다. 이 연설은 냉전의 시작점이라고 평가받는다. 처칠은 이 연설에서 유럽이 반분될 것, 미국과 영국이 특별한 관계를 이어가며 자유진영의 보루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발트해'''의 슈체친부터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Iron Curtain)'''이 드리워졌습니다. 이 장막 뒤에는 동유럽과 중유럽 여러 나라들의 낯익은 도시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르샤바, 베를린, 프라하, 빈[18]
,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부쿠레슈티, 소피아. 그 도시들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고도(古都)들입니다. 많은 인구들이 그 도시들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곳을 모두 소련의 세력권(Sphere)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로 커져가는 모스크바의 힘이 단순한 영향력을 넘어서 그곳들을 조정하고 있으니 말입니다.[19]
또한 영연방이 미국과의 영구 방위조약을 체결해야한다며, 간접적으로나마 열강으로서의 영국의 영원한 퇴장과 미국의 독주를 인정했다.
이 역사적인 연설이 열린 곳은 미주리주의 풀턴이라는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대학이었는데, 냉전이 끝나가던 1990년 초, 로날드 레이건이 처칠의 손녀와 방문해서 베를린 장벽 조각으로 만들어진 기념물을 제막했다. 이 자리에서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92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풀턴을 찾았다. 그는 냉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로서 반세기에 걸친 수미상관에 마침표가 찍혔다. 냉전이 시작된 곳에서 냉전이 끝난 것이다."이곳 풀턴에서 자유 유럽의 길이 시작됐습니다. 트루먼 독트린, 마셜 플랜, NATO가 그 길을 걸었습니다. 9명의 미국 대통령과 장장 40년이 넘는 군사적 대비태세 속에서 말이죠."
전후 선거에서 밀려나고 1945년 조지 6세는 공적을 고려하여 '도버 '''공작''''(Duke of Dover) 작위를 수여하려 했지만,[22] 한 번 더 정권을 잡아보려는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아들 랜돌프도 정치인이 되려 했기 때문에 '''사절'''한다. 만약에 공작 작위가 수여되면 더 이상 하원 의원을 할 수 없고 총리도 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자기 자식도 작위를 물려받으면 역시 정치적으로 출세는 불가능했기 때문.[23]
결국엔 근성으로 꾸준히 재기를 노린 끝에 선거에서 승리,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 내각의 뒤를 이어 다시 보수당 내각을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24]
그리고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회고록을 썼는데, 이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사>이다. 출간 직후 불티나게 팔렸으며 195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글 자체가 노벨문학상을 탈 만한 것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아돌프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 인물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히틀러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물리친 것도 아니기에 노벨문학상을 줬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용이야 어찌됐든 처칠 본인의 작문 실력이 대단히 뛰어난 편이라는 점에는 거의 이견이 없다.
또한 그는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식에 '''현직 총리 자격으로''' 가서 훈장도 수여받고 기사 작위도 받았으며 , 1955년 4월 5일에 영국 총리직에서 은퇴하고 나서 엘리자베스 2세가 다시 한번 공작 작위[25] 를 수여하려 했지만[26] 또 거절하고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현역 최다 당선자에게 주어지는 '의회의 아버지' 호칭을 얻었고, 1963년에는 미국 명예시민권도 받았으며,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여겨졌다. 처칠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며 날아온 카드의 주소란에는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게. 런던'이라는 문구만 쓰여져 있었지만, 우체부는 그것을 처칠에게 정확하게 배달했다! 또 그림도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뽐냈는데 그게 다 풍경화 뿐이었다. "인물화는 왜 안 그리시나요?" 하고 누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무는 내 그림을 보고 '난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술, 담배를 실컷 하면서도 '''90세'''까지 살고 죽었다.
다만 그의 만년은 영광으로만 가득하지 않았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대영제국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20년에 걸쳐서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탄도 많이 했다고. 처칠은 독일의 항복 후에 잔존 독일군과 서방 연합군이 연합하여 소련군을 공격, 동유럽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언싱커블 작전을 벌여 소련의 뒤통수를 치려는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지 않았고, 영국 안에서도 "지겨운 전쟁 또 하자고?"라는 비난과 반대에 부딪쳤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부터 처칠을 이뭐병 보듯하며 "군사학의 제1법칙은 모스크바를 공격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스크바로 쳐들어가려다가 나치 독일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꼴을 재현하고 싶습니까?"라고 결사반대했다. 영국군 수뇌부도 "정밀분석하니, 영국 전군의 3배가 넘는 소련군과 본격적으로 싸우면 2차대전 이상의 희생자를 낼 것이므로 안 된다"고 결사반대하여 포기해야 했다. 사실 언싱커블 작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소련은 이미 동유럽 여러 나라 정계와 군사력을 동맹으로 휘어잡은 상태였고 소련군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희생을 필요로 하고, 그마저도 이길지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잔존 독일군으로 끌어들일 예정인 옛 나치 독일군 장군들은 이미 소련으로 쳐들어가 엄청난 희생을 한 아군을 봤는데 소련을 동유럽으로 몰아내자고? 말이야 쉽지. 결국 소련 내부까지 가야하는데 "그 생지옥같은 전선은 다시는 안 간다"며 무척 부정적이었다.
이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영국을 주축으로 소련을 견제할 기회"라고 여겼지만, 알다시피 미국이 주축이 된 유엔군에 영국군이 따르는 현실이 되었다. 이 전쟁이 휴전되고 3년 뒤, 제2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프랑스와 연합해 이집트를 잘 뭉개던 영국이 미국과 소련의 협박과 엄포에 물러나고 영국이 소유하던 수에즈 운하까지 이집트에 넘겨줘야 하는 걸 봐야 했다. 그리고 식민지들이 하나둘 독립하는 것도 보면서 이런 늘그막에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대영제국을 생생하게 봐야했기에 늘 한탄했다고 한다.
아들인 랜돌프는 경망스럽고 술 마시고 놀기 좋아해, 대학도 중퇴하고 사교계에서 놀기만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거기다 심각한 낭비벽도 존재. 이후 아버지가 등 떠밀어 24살에 국회의원 선거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총 7번을 출마했으나 6번이나 낙선, 1번의 당선도 무투표 당선이었다. 그 대신 아버지를 닮아 문학적인 재능은 탁월해 기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는 이브닝 스탠다드에서 <런던의 일기>를 편집했으며 Fleet Street에서 가장 보수가 많은 가십 칼럼니스트 중 하나였다. 한편 그는 한국전쟁에 영국군 종군기자로 참전해 낙동강 전선에서 다리부상을 입을 정도로 열정적인 취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술 때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3년 후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 장례식
1965년 1월 24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이미 처칠 이전의 영국 총리인 웰링턴 공작, 글래드스턴도 국장으로 자례를 치뤘으나, 처칠만큼 국왕과 왕실 일가가 직접 참여하고 이보다 더 대규모로 평민의 국장을 치룬 일은 없었다. 영국의 국장은 대개 state funeral로 불리는 국장과 ceremonial funeral로 불리는 국민장으로 구별이 가능하다. 둘은 모두 왕실의 재가를 거쳐야 가능하며 진행 과정이나 형식에서 큰 차이는 없으나 비왕실 인사의 국장과 국민장을 구분하는 기준은 대개 의회의 인준과 조문 사절 초청 유무로 가려진다.[27]
처칠 이전의 평민으로는 대개 공적이 큰 총리 말고도 총리는 아니었으나 처칠과 마찬가지로 왕실 일원이 안치되는 형식으로 특혜를 누린 아이작 뉴턴, 육군 원수였던 더글라스 헤이그 등의 장례식이 여기에 포함된다. 처칠의 장례식도 이러한 분류의 국장에 해당한다.
112개 국가[28] 에서 조문사절을 파견했으며, 영국에 주재하고 있던 150개국의 영사 및 대사 역시 국장에 참여했다. 대한민국도 박정희 대통령의 서한을 들고 당시 국무총리인 정일권이 조문을 갔다.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문하지 않았다. 많은 나라에서 장례식을 생중계, 혹은 녹화중계하여 3억 5천 만 명이 장례식을 시청한 것으로 추정한다.관련기사 특히 유럽에서는 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장례식을 생중계했다.
처칠의 장례식 모습을 담은 영상.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샤를 드골[29] 프랑스 대통령의 모습도 나타난다. 배경 음악은 영국의 '비공식 애국가'로 불리는 <내 조국이여, 그대에게 맹세합니다>(I vow to thee, my country).[30]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이 거행된 후 유해는 기관차 윈스턴 처칠 호가 이끄는 기차에 실려 런던을 떠났고, 아버지의 무덤 곁에 묻혔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정문에는 그를 기념하는 석판이 깔려 있다.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는 문구와 함께.
10.1. 조문 관련 국가별 반응들
10.1.1. 영국
국장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평민의 장례식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참석했다.[31]
10.1.2.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처칠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으므로, 조문단 파견은 물론 장례식 중계조차 하지 않았다. 처칠은 평소부터 아일랜드 독립을 매우 아니꼽게 바라봤기 때문이다. 거기다 독립 후에도 사사건건 딴죽을 걸며 아일랜드 비위를 계속 긁어대기까지 했으니 아일랜드 입장에서는 도저히 좋게 봐줄래야 봐줄 이유가 없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내전 기간을 배경으로 삼은 마이클 콜린스에서 당시 수상도 아니었던 처칠이 괜히 최종보스마냥 나오는 게 아닌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아일랜드는 10년 동안 유럽에서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10.1.3. 프랑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처칠의 죽음을 알고 "이제 영국은 더 이상 대국이 아니다"고 말했으며, 직접 군복 차림으로 처칠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32] 영국과 프랑스의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시절 처칠 수상의 배려로 영국에서 자유프랑스 운동을 지휘할 수 있었던 드골에게 처칠의 죽음은 옛 전우를 떠나보낸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물론 둘 다 자존심과 콧대가 높기로는 당대의 국가 지도자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서 여러가지로 충돌한 일도 참 많았지만, 그럼에도 드골로선 처칠은 매우 각별한 상대였다. 프랑스 라디오 방송사들도 이례적으로 정규방송을 모두 중단하고 콰이강의 다리 OST를 방송했다.
10.1.4. 미국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이 일로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장례식에 직접 오지 않고 당시 주영대사에게 조문 사절을 맡긴 것이었다. 원래는 국무장관이었던 딘 러스크와 대법원장이었던 얼 워렌을 파견하려 했는데 러스크가 몸이 아프다며 거부하는 바람에 영국 주재 미국 대사가 대신 조문사절이 된 것이다. 동맹으로서 영미 양국의 특수관계, 처칠의 역사적인 위상, 그리고 당시 타국에서 파견한 조문 사절[33] 들의 위상을 고려하면, 상당히 처지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문사절의 지위를 중시하는 영국은 장례식장에서 미국 대표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고, 당연히 미국 시청자들은 "우리 위대한 미국의 대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쳤으며 실상을 안 후에는 격노했다.
존슨 대통령은 "감기에 걸려서 가지 못했다."라며 변명했지만, 사람들은 "처칠이라면 감기 정도로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을 거다!"라고 응수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공교롭게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5년 임기에도 불구하고 아이젠하워 이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만나지 못한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34]
이에 존슨 대통령의 또다른 변명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평소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존경하던 존슨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례식 때 처칠이 조문하러 오지 않았으므로 자신도 처칠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그런데 루스벨트 대통령의 기일은 1945년 4월 12일, 장례식은 1945년 4월 14일이다. 이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는커녕 '''아직 서부전선조차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던''' 시점이므로[35] 처칠이 대서양 너머 워싱턴 D.C.에서 거행된 루스벨트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씨도 안 먹히고 되도 않는 변명 때문에 존슨 대통령은 더더욱 비난을 받았다.
넷플릭스의 더 크라운에서 존슨 대통령의 감기는 사실 핑계였다는 설을 제시한다. 영국의 베트남전 참전 거부에 불만을 가진 존슨이 의도적으로 참석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사실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처칠의 장례식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뭔가 공식적인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도 '''전직 미국 대통령, 5성 장군, 전승훈장 수훈'''이라는 으리으리한 이력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닌데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은 연합국의 지도자, 아이젠하워는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으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처칠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 자체가 이미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존슨 대통령 본인이 정 가기 싫었으면 그냥 처음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대리인 및 미국 대표를 맡기거나 당시 부통령이었던 휴버트 험프리를 조문 사절 대표로 보내면 아무 문제 없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상식적으로 존슨이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후대의 일반인들이 봐도 뻔히 보이는 사실을 명색이 미국 대통령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존슨 대통령은 뻔히 보이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악수를 둬서 안 먹어도 될 욕을 사서 먹은 것이 되는데, 그가 대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image][8] 사실 독일 경제가 피폐해진 이유는 전후배상금의 영향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경제공황이 컸다. 만약 전후배상금으로 인해 피폐해진 결과라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시간차이가 20년 가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9] 양심적인 보수파로 당론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비판한 소수파의 리더격이었다.[10]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11] 핼리팩스 경은 귀족 작위를 갖고 있는 상원의원이라 총리가 되어도 하원 회의에서 발언권이 없기 때문에 이 엄중한 시기에 총리를 맡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스스로 사양한 것이다.[12] 그런데 사실 노르웨이 전역은 처칠이 계획한 것이었다. 당시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노르웨이의 나르빅 항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면 스웨덴과 독일의 물자 운송을 손쉽게 끊을 수 있는 경로로서 주목받았다.[13] 다만 그의 정치적 계산은 들어맞았고, 미국은 결국 참전하게 된다. 그는 이전부터 공산권을 견재해 왔고, 제아무리 독일이 유럽을 재패하면 소련이 이이제이 하려고 덤벼들 것이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개입할 것이라는 그의 정치적 판단이었다.[14]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어서 이 대가로 영국은 카리브 해 연안의 지배력을 상실하고Destroyers for Bases Deal with Great Britain거액의 자금을 지불하는 등 많은 대가를 치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쇠락도 여기서 출발한다.[15] 이건 정확하게 독일이 원하던 상황이었고 영국 공군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처칠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 준 것.[16] 당장 독일군이 상륙할 것 같으니 기왕 생산 중인 2파운더를 계속 생산하고 6파운더 생산은 미루자는 것이었지만, 결과는 다들 알듯이 독일군은 포로들을 제외하면 영국 땅을 밟아 보지도 못했고, 영국 전차는 만성적인 화력부족에 시달려야 했다.[17] 물론 당시 독일은 프랑스 해군 함정들을 전력으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협정에 넣기는 했다. 그러나 국제법과 조약을 우습게 아는 나치 독일이 조약을 지킬 리가 없다는게 문제. 실제로 횃불 작전 이후 독일은 프랑스 함대를 강탈하기 위해서 라일라 작전을 발동시켰다. 다행히 다를랑 제독이 말한대로 프랑스 해군은 침략자에게 배를 넘겨줄 바에야 자침하는 것을 선택한다. 결과적으로는 독일이 배를 강탈하는데 실패했고, 프랑수아 다를랑 제독은 처칠에게 "이제야 내가 했던 말을 믿겠냐"고 전보를 보냈다.[18] 당시 오스트리아는 미, 소, 영, 프 4개국이 분할했던 상태였다. 고로 빈 역시 4분할.[19] 원문은 이것.[20] 종전 다음해.[21] 다만 최초는 아니고 패전 직전 이분이 하셨다.[22] 참고로 영국에서 비왕족에게 공작 작위가 서임된 건 1900년에 서임된 파이프(Fife) 공작이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초대 공작은 원래 파이프 백작이었는데, 에드워드 7세의 맏딸 루이즈와 결혼한, 즉 사위여서 공작으로 승급된 것. 그러니 공작 작위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23] 당시 영국의 귀족 체계에서는 작위 포기가 불가능했다. 작위 포기가 가능해진 것은 당시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이었던다가 작위 승계로 의석을 잃은 스탄스게이트 자작 토니 벤의 요구로 1963년 Peerage Act of 1963이 통과되면서부터.[24] 이후에도 설명하겠지만 이렇게 총리 자리에 복귀한 덕에, 현대 영국사에 큰 획을 남길 것으로 확실시되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현직 총리로서 참석할 수 있었다.[25] 아마도 런던 공작 Duke of London[26] 마거릿 대처도 10년 넘게 집권하면서도 인두세 문제에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당 내부의 지지 철회로 1990년 권좌에서 내려오자 남작 작위(세습불가능한 명예직)가 수여되었다. 남편에겐 준남작이 수여... 영국에선 총리를 좀 오래하고 은퇴하면 예우상 작위가 나온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에 글래드스턴의 경우 위대한 평민으로 남겠다며 거부한 경우도 있다. 처칠의 공적이 워낙 컸기에 공작 작위가 제안된 것.[27] 반대로 왕실 인사의 국장은 어디까지나 국왕이 받을 수만 있으며, 이 경우는 왕대비라도 ceremonial funeral인 국민장으로밖에 치뤄지지 않는다.[28] 조문단을 보낸 국가 수에 대한 출처: 기사1기사2[29] 군복을 입고 참석. 영상 2:32에 등장.[30] 구스타프 홀스트의 관현악곡 <행성>(Planets) 중 목성의 일부분에서 유래한 곡.[31] 2020년 현재 처칠 이후로 영국 국장으로 장례를 치른 평민은 존재하지 않는다.[32] 처칠은 "내가 져야 할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로렌의 십자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십자가는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의 상징이었고 그 지도자는 드골이었다.[33] 대부분 자국의 국가원수나 내각 수반[34] 사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낀다. 우선 존슨 대통령의 임기 초반은 전임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암살로 인한 수습과 선거 준비로 엄청 바빴고, 그 기간 앞뒤로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임신 등이 있어 여왕 스스로도 1957년부터 무려 1976년까지 미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캐나다는 2차례 방문했으나 이번엔 존슨 대통령이 시간이 없었다. #[35] 다들 알다시피 V-E Day는 5월 8일이다. 바다는 U보트가 여전히 출몰하고 있었고, 항공기편도 마땅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