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역사

 





1. 개요
2. 고대
2.1. 헬레니즘 제국의 지배
2.2. 기마 유목민 스키타이의 정착
2.3. 토하라인의 정착
3. 중세 초
4. 이슬람의 도래
4.1.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
4.2. 타지크-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
5. 몽골-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
5.1. 카르트 왕조
5.2. 티무르 제국
5.3. 무굴 제국의 카불리스탄 지배
6. 파슈툰인의 발흥
6.1. 파슈툰인의 인도 수르 제국
6.2. 사파비 왕조의 헤라트 지배
6.3. 호타키 왕조
6.4. 아프샤르 왕조의 지배
6.5. 두라니 왕조
7. 바라크자이 왕조
7.1.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8. 현대
8.1. 왕정 시대
8.2. 공화정 시대
8.3. 공산정권 시대
8.4.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8.5.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8.6. 제3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8.7. 제4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8.8.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8.9. 현 이슬람 공화정 시대
8.9.1. 쇠퇴 원인
8.9.2. 전망
9. 참고문헌
9.1. 전근대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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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민족국가아프가니스탄역사를 다루는 문서.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왕조와 국가들에 대해서는 개별 문서들에 충실히 설명된 경우가 많으므로 본 문서는 근대사 항목까지는 아프가니스탄의 종교 변천 및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민족들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현대 아프가니스탄은 군주제(1919–1973), 공화제(1973–1978), 공산주의(1978–1992), 공화제(1992–1996), 탈레반 신권 정치체제(1996–2001), 이슬람 공화제(2001–)를 채택한 국가이다. 다양한 정치체제를 근 30년 간 경험한 셈이다.

1.1. '제국의 무덤'


강대국이 국력만 믿고 여기를 쳤다가 좋은 꼴 본 일이 거의 없다. 쿠샨 왕조,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티무르 제국 정도가 대부분의 영토를 직접 지배했고, 이런 왕조들은 애당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된 왕조이므로 이 땅을 직접 지배한 '외세'는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제국몽골 제국뿐이지만 헬레니즘 제국 내에서는 아프간 산지 내 주둔한 그리스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독립해 버렸고, 몽골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를 정복하는 것은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 몽골 세력은 나중에 4칸국 분할 후 금방 망해서 차가타이 칸국 출신의 티무르가 세운 티무르 제국으로 대체한다.

1.1.1. 몽골


사실 그 몽골조차 기병이 기동하기 어려운 지형을 벗삼은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아프간 전토를 완전히 통제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는 아프간의 지리적 환경과도 연관이 깊은데 나라 전체가 거대한 산지인 데다 그 험준함도 무시무시한 수준이라 점령군이 적은 비용으로 장기적인 주둔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이는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나오는 문제점으로 현대에서 과학 기술을 믿고 쳐들어 온 소련도 결국 산세의 험난함으로 버티며 기습을 하는 게릴라들의 저항에 질려버려 떠나버렸다.

1.1.2. 영국


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4500명의 영-인도군 병력은 12000명의 민간인과 함께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후퇴하려다가 포로로 잡히거나 자살하거나 전멸, 의사 1명만 간신히 살아왔다. 나중에 다시 쳐들어간 영국은 이기긴 했지만 절대로 직접 가서 주둔하고 지배하지 않고 전투만 이긴 뒤 물러나서 허수아비 왕조를 조종하는 것으로 만족했다.[1]

1.1.3. 소련


그러나 이와 달리 직접 지배하려 든 소련은 오랜 개입 끝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여러 내부 문제까지 겹치며 아예 체제가 붕괴했다.

1.1.4. 미국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탈레반과의 전면전은 역시 손쉽게 승리했으나 영국과는 달리 이곳을 점령하려 들었으므로 피해가 막심해지고 있다. 또한 잡으려던 알 카에다도 못 잡고 탈레반은 다시 강성해지는 등 지금도 엿먹고 있다. 그나마 미국은 2011년 5월 2일, 10년만에 오사마 빈 라덴을 죽이는데 성공했으나 정작 파키스탄에서 해냈을 뿐이며 여전히 탈레반 세력은 건재하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영국은 2014년 12월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모든 전투병력을 철수시키고 있다. 결국 이라크처럼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국은 공연히 '''10년 이상''' 막대한 전비를 퍼부어 국고에 구멍나게 만들고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엄청나게 일으켰을 뿐, 탈레반 제거나 민주주의의 정착 같은 목표의 달성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나마 빈 라덴을 잡아 체면치레에는 성공했지만 그마저도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파키스탄에서 해냈기에 이러자면 뭐하러 여기로 와 전쟁하느냐 볼멘 소리가 많았다.
결국 미군은 완전철수와 같이 전쟁 종결을 선포하면서 러시아로부터 늬들도 결국 똑같았다는 비웃음을 받으며 물러나야 했다. 베트남 전쟁 때처럼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으나 그들도 결사적으로 항전을 외치진 못했다.

2. 고대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경로였던 터라 여러 민족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이 말은 이 지역의 주민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복자의 군대들과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든가, 아니면 자기들이 정복을 하든가'라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그리스계 왕조와 페르시아계, 북인도계 왕조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이슬람 도래 이전에는 불교가 매우 흥했던 지역으로[2] 중국이 불교화하는데 이 지역 출신 승려들이 많이 공헌하였으며, 이슬람 시대 이후에는 이 지역의 불교 대학 시스템이 이슬람 사회에 도입되어 이슬람 대학교(마드라사) 시스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대 이 지역의 역사는 그리스인의 유입 이전에는 역사 기록이 부족하여 베다 편찬 시기를 통해 추정하거나 고고학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대 역사를 재구성하는 수 밖에 없다. 캅카스 지역에서 발흥한 인도유럽어족 계열 아리아인이 기원전 2200년경부터 1700년경까지 고대 박트리아 유입되어 청동기 문화를 전파하였다. 초창기 박트리아 지방은 안드로노보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박트리아 지방에 정착한 아리아 유목민은 인더스 문명을 침공하여 멸망시킨 후 이후 천여년 동안의 확장 과정에서 갠지스 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Aryan Migration, 1700 ~ 700 BC) '''이들은 인도아리아인[3][4]의 기원이 된다.'''
기원전 700년경부터 기원전 550년경 박트리아는 소아시아에서 이란 고원에 걸친 메디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박트리아의 자리아스파라는 도시에서 자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가 출현했는데 그가 설파한 종교 교리는 이후 고대 페르시아의 국교 조로아스터교가 되었다.[5]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악마를 데바(Deva)라고 칭했는데 반해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서는 신을 데와(Deva)라고 칭했다. 서로 연관이 있되 적대하는 사이였다는 추정이 가능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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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아 왕국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발흥으로 멸망하고, 다리우스 1세가 박트리아 지역을 접수하였다.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은 기원전 500년대부터 330년대까지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는동안 사트라프라고 불리는 총독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아리아(Aria) 주, 박트리아(Bactria) 주, 아라코시아(Arachosia) 주로 나뉘어졌다.

2.1. 헬레니즘 제국의 지배


이 지역은 과거 페르시아인도 문화권 지역의 경계 지역인 박트리아로 불렸다. 고대 마케도니아-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 과정에서 이 지역은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제국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 역사도 그리스어로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지방에 그리스인 군인들을 정착 주둔시키기 위해 오늘날의 헤라트, 칸다하르, 베그람, 후잔드(타지키스탄) 등의 기원이 되는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의 내전 과정에서 셀레우코스 1세가 제국의 아시아 영토를 장악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건설했으며, 이 지역에 주둔한 그리스인 군인과 그 후손들은 향수병 때문에 여러 차례에 걸쳐 폭동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마우리아 왕조를 세우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인더스 강 유역을 탈환하고, 이후 그의 손자 아소카 대왕이 힌두쿠시를 넘어 박트리아 상당 지역을 정복하였다. 아소카 왕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라그만 주에 아람어로 자신의 정복 사업을 기록하는 석조 기록을 세기고 칸다하르에는 그리스어로 자신의 정복 사업을 기록하는 석조 기록을 세겨놓아, 마우리아 왕조의 아프간 정복 증거를 남겼다. 자라투스트라의 고향 자리아스파는 아소카 왕의 불교 전파 이후 자리아스파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 바할리카의 이름을 따서 발흐 시로 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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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카스피해 일대에 스키타이계 유목민 다하이족이 남하하여 셀레우코스 제국 영토의 동부를 공격하고, 파르티아를 건국하면서 박트리아가 셀레우코스 제국과 분리되었다. 박트리아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자체적인 독립 왕국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리스 박트리아인들은 쇠퇴기에 접어든 마우리아 제국을 공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식으로 통치자의 초상과 연도가 그려진 주화를 제조하는데, 이는 후대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이후 인도 여러 왕조에 주화 주조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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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의 그리스인들은 대개 박트리아 현지인들로부터 조로아스터교 풍습과 신앙을 받아들였다. 과거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이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위치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를 계승한 인도-그리스 왕국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이 중심지였고, 인도 문화와 더 밀접하게 연관을 가졌다. 인도 그리스 왕국의 메난드로스 왕은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여기에 자극받은 인도-그리스인들은 불교로 개종하고 간다라 불교 미술 형성에 직접 기여하였다. 브라만교 사제들은 요바나인(인도-그리스인)들이 브라흐민을 존중하지 않고 베다에 입각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북서부에서 이주한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그리스인들에게 수드라 카스트를 부여했는데 ,이에 반발한 인도-그리스인들은 대거 불교로 개종하였다. 인도 그리스 왕국의 멸망 이후에도 그리스인들은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여러 왕조에서 주화를 주조하고 그리스 조각상을 제작하는 방식으로 불상을 주조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리스어가 사용된 주화는 심지어 서기 9세기 무렵까지 주조되었다.

2.2. 기마 유목민 스키타이의 정착


둔황 서쪽 지역에서 지내고 있는 토하라인들이 흉노 연맹의 공격을 받아 상당수가 서쪽으로 도망쳤다. 샤카족들은 이렇게 밀려오는 토하라인들의 침입에 못 이겨 박트리아로 이동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정복했다. 이렇게 박트리아에 정착한 샤카족을 인도-스키타이라고 한다.[7]
그리스인들의 뒤를 이어 인도 북부에 침입, 정착한 샤카족들은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비롯해 인도-그리스인들보다 더 방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통일된 세력을 구성하지 못했으며, 이후 토하라인들이 아스윈에 밀려나 이주하는 과정에서 다시 박트리아 일대를 정복하고, 파르티아의 제후 중 한 명인 곤도파레스가 사카스탄의 인도-스키타이인들을 정복하면서 인도-파르티아 왕국으로 흡수당했다. 이후 토하라인들이 쿠샨 왕조를 세워 이들을 정복, 흡수하는 과정을 통해 인도-스키타이, 인도-파르티아 세력은 인도인에 동화, 흡수되었다.[8]
중국에서 기마 유목민의 영향으로 바지를 입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인도 스키타이인들과 인도 파르티아인 및 이들을 흡수하는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인도인들도 승마에 편한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안장, 고삐, 단추 달린 외투, 장화가 서서히 도입되고 우수한 기병 육성이 가능해지면서 이후 인도에서는 고대 전차의 운용은 점차 도태되었다.

2.3. 토하라인의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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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연맹과 오손에게 밀려난 토하라인의 5개의 일족이 박트리아에 정착하는데, 이를 계기로 박트리아는 중세 이루 토하라인의 땅이라는 뜻의 토하리스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쿠샨 족의 왕 쿠줄라 카드피세스가 토하리스탄의 다섯 부족을 통합하고 인도로 진출하여 제국을 세우는데 이를 쿠샨 왕조라고 부른다. 한편 마우리아 왕조가 기원전 2세기 중엽 붕괴되면서 북인도 지역은 여러 소국들이 할거하는 형태가 계속되었다. 쿠샨 왕조는 이러한 소국들을 통합한 후 동서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다. 쿠샨 왕조는 영토를 남쪽으로도 확장하여 인더스 강 입구에 이르렀고, 로마와 무역하던 부유한 해상 무역 도시들을 장악했다. 이 해상 무역 도시들이 쿠샨 왕조에 막대한 이익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또한 쿠샨 왕조는 무역을 통한 세수 증대를 목적으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해안 지방, 인도 북부를 아우르는 도로망을 건설하고 안전하게 관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호라산, 트란스옥시아나와 인도 북부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였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트란스옥시아나 남부의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같은 도시들이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관개 시설을 확충하여 농업 생산량을 늘리고 인도 문화를 받아들이며,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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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샨 왕조는 불교가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중국으로 퍼져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브라만교에서는 외부인이 브라만교로 유입될 경우 낮은 카스트를 부여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인도 입장에서는 외부세력인 그리스인들과 인도-스키타이인들, 쿠샨의 토하라인들이 불교로 개종하면서, 중앙아시아로 불교가 급속히 전파되었다.
서기 1세기부터 3세기까지는 로마 제국의 경제력이 절정이 달하면서 인도산 수입품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다. 쿠샨 왕조의 지배를 받는 구자라트와 신드 지역의 항구도시들은 인도양과 홍해를 항해하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 무역상인들을 통해 물산을 수출하고 구매 대금으로 로마 은화를 받으며 부흥했다. 무역으로 쌓인 부는 다시 도회지 상인들이 주로 믿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특히 발흐의 불교 순례지 나우바하르에는 많은 무역상들의 시주가 쌓이고 승단이 생기면서 초기 형태의 대학 기관이 설립되기도 했다.[9]
토하리스탄에서는 불교의 새로운 종파가 번성하는데, 바로 대승불교이다.[10] 오늘날 파키스탄 및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교 국가이지만 쿠샨 왕조의 영향으로 아직 불교 유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3. 중세 초


쿠샨 왕조가 붕괴된 후 토하리스탄 일대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 치세 때부터 페르시아에서는 오늘날 파슈툰족의 기원이 되는 산악 민족들을 아브간(Abgân)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국명의 기원이 되었다.''' 서기 5세기 무렵 백흉노 이른바 에프탈이라고 하는 유목민족이 발흥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를 근거지로 둔 에프탈족은 튀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토하라계 혈통의 유목민으로 추정된다. 트란속시아나부터 인더스 강 일대까지 장악했던 에프탈인들은 이전의 유목 왕조들과 다르게 여러 도시들을 건설하고 소그드인들로부터 체계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등 중앙집권을 추구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458년 페로즈 1세가 사산 왕조의 왕위에 오르도록 도운 후에 484년 헤라트 전투에서 페로즈 1세를 전사시키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동부 호라산 지역 일대를 장악하는 듯 했다. 그러나 서기 557년 돌궐과 페르시아 연합군이 부하라 근교에서 에프탈족 대군을 포위 공격해 섬멸하면서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해진다. 에프탈족이 사산 왕조와의 전면전에 국력을 소모하는 사이에 서돌궐 제국이 에프탈족의 중앙아시아 영토를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중앙아시아의 에프탈 왕국은 여러 소국으로 쪼개지며 멸망하였다.
오늘날의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지역으로 이동한 에프탈인들은 인도에서 "후나스Hunas"나 "투르슈카스Turushkas"라고 칭해졌으며, 인도를 여행한 중국인, 한국인 승려들은 이들의 왕 미히라쿨라가 불교 승려들을 학살하고 여러 사찰을 파괴하여 불교의 교세가 많이 꺾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트라 신의 아들"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미히라쿨라 왕은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시알코트에 해당하는 사갈라를 근거지로 하여, 520년 신드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의 불교 사원들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했다 한다. 중국인 승려 현장 법사는 카슈미르간다라 지방을 정복하고 승승장구하던 미히라쿨라 왕이 굽타 왕조의 저항에 막히면서 인도 아대륙 정복에는 실패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미히라쿨라 사후 신드,간다라,카슈미르에 있던 에프탈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불교로 개종하고 인도인들과 동화되었다.
이슬람 도래 이전 토하리스탄 일대에는 불교&힌두교로 개종한 에프탈족의 후예 카불 샤히 왕조 (Kabul Shahi, 565 ~ 879)가 들어섰다. 중심지는 카불을 중심으로 한 카불리스탄이었으며, 호라산의 자불리스탄 및 간다라 일대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카불 샤히 왕조는 아랍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의 정복으로 쇠퇴 후 북인도의 라자스탄으로 남하하여 힌두 샤히 왕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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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미안 석불[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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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에게 파괴된 후의 모습

그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불리스탄이라고 부른다. 토착인은 소그드인과 같으며 왕과 군사는 돌궐(에프탈)인이다. 이들은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고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법이 행해진다. 의상과 풍속, 물산은 간다라 지방과 비슷하고 언어는 각기 다르다.

- 자불리스탄 편, 왕오천축국전 / 혜초

자불리스탄에서 이레를 가면 바미얀에 이른다. 이 나라 왕은 토착인과 같으며 다른 나라에 귀속되어 있지 않다. 강한 군사가 많아서 다른 나라들이 감히 내침하지 못한다. 의상은 모직 옷과 가죽 외투, 펠트 웃옷을 입는다. 이 땅에서는 양과 말, 모직물 등이 나며 포도가 대단히 많다. 이 땅은 눈이 오고 매우 추우며 사람들은 다분히 산에 의지해 살아간다. 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를 매우 공경하고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대승법과 소승법이 행해진다. 이곳의 말은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 바미얀 편, 왕오천축국전

범인국에서 스무 날을 가면 토하리스탄에 이른다. 왕이 사는 도읍은 발흐인데, 지금은 아랍 군대에게 점령되어 왕은 할 수 없이 동쪽으로 한 달 걸리는 바다흐샨에 가서 살고 있다.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며, 가죽 외투와 모직 옷을 입는다. 위로 국왕에서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죽 외투를 겉옷으로 입는다. 이 땅에는 낙타, 노새, 양, 말, 모직 천, 포도가 많으며 빵만 즐겨 먹는다. 추운 고장이라서 겨울에는 서리와 눈이 내린다. 국왕과 수령 및 백성들은 삼보를 매우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고기와 부추, 파 등을 먹으며 외도는 섬기지 않는다. 이 땅에는 산이 많다.

토하리스탄 편, 왕오천축국전

신라의 고승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에는 이슬람화 직전 및 직후의 아프가니스탄 사회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아프가니스탄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4. 이슬람의 도래


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한 정통 칼리파 시대 아랍 무슬림들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전역을 정복하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아프가니스탄 서부 호라산 지역도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초창기 아랍인들은 아프간 산악 지대의 여러 부족들을 정복하는데 실패하였으며,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문 치세 서기 9세기에 카불이 정복되었다 한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화는 최종적으로 튀르크계 가즈나 왕조에 의해 완료된다.
이슬람이 도래한 후 이슬람 제국인 가즈니 칸국, 델리 술탄 왕조 등의 지배를 받았으나, 칭기즈 칸의 침공으로 몽골 제국, 일 칸국의 지배를 받는다.

4.1.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


서아시아의 이슬람이 정복 및 상업 활동을 통해 퍼지면서 호라산 일대는 이슬람 문화권이 되었다. 호라산의 불교 사회 지도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 지역의 불교 신자들은 급속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다른 한편 불교의 출가자(승려)와 재가자 시스템이 이슬람 사회에 도입됨으로써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 시스템이 세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슬람 신학이 발달한 지역 부하라,발흐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 도시들은 이전에 불교 대학으로 유명하던 곳이었다.
호라산에 진출한 아랍인들은 개종한 호라산 현지인들과 급속히 동화되었으며, 광산 운영 및 중앙아시아 소그드인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했으나, 근거지를 예루살렘다마스쿠스에 둔 우마이야 왕조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이에 호라산을 근거지로 둔 아바스 가문과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하심 가문이 손을 잡았다. 아바스 가문은 튀르크계 유목민과 계속 전투를 벌이며 국경을 확장해왔던 터라 노련한 정예병을 보유하고 있었고, 하심 가문은 정통성을 이용해 무슬림 세계에서 동조자들을 확보하였다. 압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킨 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는 압바스 칼리프국을 건설한다.
압바스 왕조는 자신들의 근거지 호라산 일대를 지원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 일대는 이슬람 제국 무역과 학문의 중심지로 거듭났다.[12]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일대가 번영을 누렸음은 물론이다.

4.2. 타지크-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


전성기를 누리던 압바스 왕조가 제 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 사후 분열되고 힘이 약해지자 정교한 관료제가 흔들리게 되고, 이를 틈타 페르시아인들이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 반독립적인 나라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일명 "호라산의 진주"라고 불리던 동서 무역의 중심지 헤라트를 중심으로 순니 이슬람-페르시아(타지크) 문화가 아프가니스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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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 왕조
최초의 타지크계 왕조 타히르 왕조는 압바스 칼리프국 동부 영내에서 사실상 반독립 상태의 왕국으로 존속하였으며, 사파르 왕조에게 주요 무역 거점 헤라트를 점령당한 이후 몰락한다. 사파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 거의 전역을 최초로 정복한 이슬람 왕조이지만, 군사력 외에 기반이 취약하여 창건자 1세대 이후 금방 붕괴되었다. 뒤를 이은 사만 왕조는 순니 이슬람-페르시아 문화를 중앙아시아에 뿌리내리는데 성공했으며, 행정 용어에서도 아랍어가 밀려나고 페르시아어가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프간 산악 민족 상당수가 불교와 힌두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도 이 무렵이다.
사만 왕조의 튀르크계 지방 군벌 정권으로 시작했던 가즈니 왕조는 사만 왕조가 카라한 칸국의 공격으로 쇠퇴하자 아프가니스탄 가즈나를 근거지로 술탄 마흐무드 치세에 북인도를 여러 차례 침략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하고 오늘날 북인도와 파키스탄 일대의 여러 힌두 사원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술탄 마흐무드는 카불 샤히의 잔존 세력이던 자불리스탄의 아프간 불교도 귀족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으며, 자신의 치세에 카불 샤히의 후신 국가 힌두 샤히와 계속 전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힌두 샤히를 멸망시키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가즈나 왕조 시대를 기점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기원한 불교 & 힌두교 왕조들은 모두 이슬람 왕조에 흡수되며 멸망하였다.
가즈니 왕조는 호라산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다른 튀르크계 왕조와 격돌하였다.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서 발흥한 오우즈 튀르크계 셀주크 제국이 가즈니 왕조와 전쟁을 벌여 1040년 헤라트를 점령하였다. 1175년에는 가즈니 왕조에 정복되었던 타지크계 고르 왕조가 세력을 키워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헤라트를 정복하였다. 당시 헤라트는 동방의 페르시아 문화의 중심지로 무스타우피의 기록에 따르면 359개의 마드라사와 6천여 개의 목욕탕, 1만 2천여 개의 상점들이 가득했으며 특히 금속 제품 가공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사실로는 당시에도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있었다 한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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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 왕조'''는 타지크계 왕조이지만 오늘날의 파슈툰족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왕조이기도 하다.[14] 9세기 말 창건된 고르 왕조는 가즈나 왕조술탄 마흐무드의 침략 이후 1011년 불교에서 순니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 아부 알리 이븐 무함마드라는 무슬림 왕이 통치하게 되었다 한다. 이후 힘을 키운 고르 왕조는 1186년 역으로 가즈나 왕조의 수도 라호르를 정복하여 신종을 받아냈다. 구르 왕조는 사만 왕조에 이어 페르시아 문학을 부흥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후 고르 왕조는 호라산 대부분 지역에서 벵골에 이르기까지 북인도 전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였다. 고르 왕조는 이후 호라산 동부의 교역도시 헤라트로 천도하였으며, 페르시아-타지크 문화를 흡수하였다. 고르 왕조는 짧은 전성기를 마감한 채 호라산 일대의 영토는 호라즘 제국에, 그리고 북인도 영토는 노예 왕조에 정복당하며 1215년 멸망하였다.

5. 몽골-튀르크계 왕조들의 지배


1212년부터 1230년까지의 아프가니스탄은 칭기즈 칸이 이끈 몽골 제국호라즘 제국 침공으로 많은 도시가 잿더미가 되고 아프가니스탄 대부분 지역이 초토화되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호라즘 제국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몽골군에게 직접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상자는 대부분 도회지 주민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기아나 전염병으로 사망한 사람도 많았음은 물론이다.
호라즘 왕조 무함마드 2세의 아들이던 잘랄 웃 딘이 바미안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1222년 칭기즈 칸손자무투겐이 이 전투 와중에 전사한다. 분노에 찬 칭기즈 칸은 바미안 왕조 도성인 샤흐르 에 조아크 성을 차지하면 성 안 모든 살아있는 것을 다 죽인다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몽골군은 1년이나 고전하다가, 잘랄 웃 딘의 딸인 릴라 하툰 공주가 배신하는 바람에[15] 결국 바미안을 불바다로 만들고 공언대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다 죽이며, 이후 페샤와르와 가즈니를 비롯한 곳을 차례로 점령했지만, 막판 죽길 각오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잘랄 웃 딘 왕에게 막혀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 점령을 포기한다.
이후로 몽골군이 점령지에 남아 거주하면서 가즈니나 페샤와르를 비롯한 지역민들과 혼혈을 이룬 게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몽골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골인(Moghol)이라고 한다. 이걸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일 국가, 외세 지배보단 지방 각 부족 국가나 부족들로 나누어진 작은 나라들이 이 나라 오랜 역사를 차지한다.''' 몽골인의 약탈 이후 사막화가 심해진 아프가니스탄 서부에는 타지크인 농민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유목을 하면서 아이마크인(Aimaqs)이 되었다.

5.1. 카르트 왕조


이후 아프가니스탄 북서부는 일 칸국, 남동부는 할지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후 고르 왕조의 후신인 타지크계 카르트 왕조가 일 칸국의 몽골계 잔당들을 무찌르고, 니샤푸르, 메르브 및 발흐, 카불, 헤라트를 장악하였다. 전임 고르 왕조와 마찬가지로 카르트 왕조에서도 파슈툰족들이 폐쇄적인 산악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페르시아-이슬람 문화를 수용하였다.

우리는 과거 대도시였던 카불을 여행했다. 카불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프간족이라 부르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산지를 장악한 강성한 산악 민족이었다. 산악지대에서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관습법을 지켰으며 그들은 이 법이 예언자 술레이만이 자신들에게 직접 전수해 준 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이븐 바투타 여행기, 1333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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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파슈툰족의 직계 조상이 되는 아프간족 중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거부했던 이들은 이후 이스마일파로 개종한 후 슈그니족, 와키인, 사리콜인 같은 파미르족이 되었다.

5.2. 티무르 제국


일 칸국이 무너진 후에는 차가타이계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티무르의 후계자인 무굴 제국은 아예 여기서 일어났으며 무굴의 제1도시는 수도였던 아그라, 제2도시는 현재 파키스탄의 라호르 그리고 제3도시가 이 곳의 헤라트였다. 그러다가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이 쇠약해지면서 페르시아의 전투기계인 나디르 샤가 쳐들어와 다시 이란에 편입되어 버린다. 현재의 아프간은 이란 치하의 영주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하여 시작된 곳이다.
14세기 말 북쪽에서 내려온 티무르는 카르트 왕조를 큰 저항 없이 정복한 이후 티무르 제국에 호라산 지방을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천산 산맥 일대의 키르기스인과 오늘날의 우즈베크인의 조상이 되는 차가타이어파[16] 튀르크족이 남하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하였다.
1405년 티무르 사후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과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둘로 쪼개졌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에 해당하는 당시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은 티무르의 후계자 중 천재 천문학자이기도 했던 울루그 벡( Ulugh Beg 1394~1449)의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의 철학과 과학의 중심지로 부흥하였다. 울루그 베그는 음악가, 시인들을 후원하였으며 거대한 천문대를 건설하고 직접 천문학을 연구하였다. 또한 부하라에서 수피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달래기 위해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 마드라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오늘날에 아프가니스탄에 해당하는 티무르 제국의 남부 영토는 헤라트가 중심 도시였다. 울루그 벡과는 다르게 매우 엄격한 무슬림이었던 통치자 샤 루흐(Shah Rukh 1377~1447; 제위 1405~1447)의 영향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수피즘에 입각한 상당히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 문화가 확립되어갔다고 한다. 인도의 수피들이 힌두교와의 화해와 평화를 추구했던 것과는 반대로 파슈툰족 수피들은 근본주의를 추구하게 되면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 근본주의가 주류화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티무르 제국 하에서 아프가니스탄은 사본삽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화면을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장면 하나하나를 독립된 작품으로 구성하는 방식으로 삽화를 그렸으며, 그림에서는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구도가 더 중시되었다. 이는 후대 무굴 제국 궁정 세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티무르 제국은 오늘날 우즈베크인의 형성에 영향을 준 부하라 칸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샤이바니 칸은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16세기 초 발흐와 헤라트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상당 지역을 점령하였고, 티무르 치세에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차가타이어파 튀르크족은 우즈베크 부족 연맹에 합류하였다. 우즈베크인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9% 정도를 구성하며 해외에서 우즈베크인들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나라도 바로 우즈베크인 380만여 명이 거주하는 아프가니스탄이다.

5.3. 무굴 제국의 카불리스탄 지배



티무르의 5대손이자 시르다리야 강 상류 출신 토호였던 바부르우즈베크 칸국의 샤이바니 칸과의 전투에서 두 차례에 걸쳐 패배한 이후 부하들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 산지로 도주하였다. 1504년 카불을 점령하여 근거지를 마련한 바부르는 우즈베크 칸국과 바로 맞서 싸우는 대신 먼저 부유한 북인도 지방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부유한 북인도에서 풍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충성스런 전사들을 더 많이 확보해 우즈베크 칸과 다시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다.
모험가 기질이 강했던 바부르는 아프간족이 다스리던 델리 로디 왕조를 공격하였다. 로디 왕조는 힌두교도 신민들을 지나치게 박해했을 뿐만 아니라 델리 시민들을 지나치게 착취하여 민심이 이반하고 있었던 것. 1526년 바부르는 델리 근처에서 벌어진 파니파트 전투에서 로디 왕조 군대에게 대승을 거둔 후 델리아그라 지역을 접수하였다. 이렇게 무굴 제국이 시작되었다. 바부르는 북인도 내 다른 파슈툰계 왕조 및 힌두 라지푸트계 왕조들과 싸우며 1529년 우타르 프라데시, 비하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바부르는 사후 자신이 좋아하던 도시인 카불[17]에 매장되었고, 무굴 제국의 카불리스탄 통치는 18세기 나디르 샤의 침략 전까지 계속되었다.

6. 파슈툰인의 발흥


아프가니스탄 내 주요 거점 도시들은 우즈베크 계열의 칸국들 및, 무굴 제국 혹은 사파비 왕조의 통제를 받았으나 이들 역시 점과 선 형태의 통치 형태만 유지할 뿐 아프간 산악 지대의 파슈툰족을 완전히 다스리지는 못하였다. 근세에는 많은 아프간인들이 북인도 일대로 남하하여 델리 술탄국을 계승하는 여러 왕조들을 건설하였고 아프간 왕조들은 이후 팽창하는 무굴 제국에 차례로 흡수되었다. 당시 인도인들은[18] 파슈툰족들을 파탄인(Pathans)이라고 칭했으며 상당수의 이웃 민족들은 이들을 에프탈족이라는 뜻의 압달(Abdal)이라고 칭했다. 근세 동안 아프간 내 여러 산악 부족들은 외세에 침입에 맞서 함께 투쟁하며 파슈툰족으로서의 통일된 정체성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6.1. 파슈툰인의 인도 수르 제국



파슈툰계 수르 왕조(Sur Empire, 1539∼1555)의 시르 샤는 군사와 내치 모두 유능했던 명군[19]이었으나, 그의 사후 수르 제국은 금방 몰락해버리고 대신 무굴 제국이 수르 제국의 통화 체계와 우편 체계를 비롯한 내치 시스템을 상당부분 계승한다. 이는 무굴 제국 2대 황제 후마윤의 치세 말부터 6대 황제 아우랑제브 치세 초까지 이루는 무굴 제국의 성세에 이바지했음은 물론이다.

6.2. 사파비 왕조의 헤라트 지배


티무르 제국을 멸망시킨 우즈베크족들은 여세를 몰아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을 장악하고 1507년 헤라트[20]를 점령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이스마일 1세가 이끄는 이란 쉬아파 사파비 왕조 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스마일 1세 사후 우즈베크인들이 헤라트 순니파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 다시 도시를 탈환하였으나 도시는 1528년 타흐마스프 1세의 사파비 군대에게 다시 점령당했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아바스 1세는 헤라트에서 총독 역할을 수행하던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다. 사파비 왕조 지배 시기 타지크계 아이마크인과 산악 민족 파슈툰인은 사파비 제국의 강제 개종 시도에도 순니파 이슬람을 유지했지만 도회지에 살던 하자라족은 쉬아 12이맘파로 개종하였다.

6.3. 호타키 왕조



1704년 사파비 제국은 조지아 카르틀리 출신 봉신인 기오르기 11세[21](구르긴 칸)을 칸다하르 일대 총독으로 파견했다. 기오르기 11세는 잔학무도한 성격으로 악명 높았는데 바로 그 때문에 사파비 제국 동부의 반항적인 파슈툰족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총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기오르기는 칸다하르 내 반항적인 파슈툰 부족민들을 감금하거나 처형하기를 즐겼는데 이 과정에서 칸다하르의 유력자 가문 구성원 중 한 사람이었던 미르와이스 호타크가 이스파한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미르와이스는 사파비 샤가 관용을 과시하기 위해 방면되었지만, 이스파한을 오고 가는 과정에서 다른 순니파 율법학자들의 자극을 받아 고향에서 봉기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르와이스 호타크는 먼저 기오르기 11세를 성 밖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연회를 베푸는 과정에서 끔살한 뒤 잽싸게 칸다하르를 장악하고, 다시 칸다하르를 탈환하기 위해 출동안 조지아계 사파비 군대를 격퇴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사파비 제국은 키질바시조지아인, 체르케스인 맘루크로 이루어진 병력을 파병하였으나 파슈툰인들은 이들을 모조리 격퇴하고 파병된 전력 중 겨우 700여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파슈툰인들은 미르와이스 호타크의 지도 하에서 사파비 제국군을 무찌르고 독립을 쟁취한 상황이었으나, 미르와이스가 1715년 자연사하자 일부 파슈툰인들이 다시 사파비 제국에 신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미르와이스의 아들 마흐무드 호타크는 친사파비파로 의심되던 삼촌 압둘 아지즈 호타크를 제거하고 자신이 직접 파슈툰인들의 아미르로 등극하였다. 사파비 왕조가 다른 나라들과 전쟁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마흐무드는 페르시아 내 순니파들과 조로아스터교 신도의 협조를 얻어 1721년 사파비 왕조의 동부 영토를 점령하고, 이듬해 3월 이스파한 근방 굴른바드에서 프랑스인 포병 장교를 대동한 사파비 제국의 4만 2천 대군과 격돌하였다. 호타키 군대는 수가 1만여 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거의 기병이었고 대포 100여대를 낙타 등에 실어 운반하여 기동력이 훨씬 우월하였다. 굴른바드 전투는 마흐무드의 전술과 호타키 군대의 기동력에 힘입어 아프간 측의 대승으로 끝났다. 굴른바드 전투 대승의 여새를 몰아 마흐무드는 사파비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샤한샤로 등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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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무드 호타크는 1725년 암살당하고 대신 그의 친척 아슈라프 호타크와 후세인 호타크가 각각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을 맡았다. 아슈라프 호타크는 1727년 오스만 제국과도 한 차례 싸워서 승리했다. 이후 하마단 조약을 통해 정전 협정을 하는 과정에서 호타키 왕조는 당시 순니파 이슬람의 종주국으로 인정받던 오스만 제국에게 이란 서부 영토를 떼어주고, 대신 오스만 제국 술탄으로부터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공인받으며 권위를 더했다. 그러나 과거 파슈툰인들은 사파비 제국 시절 이란 12이맘파에게 순니파라는 이유로 박해받았던 경험 때문에, 시아파를 혐오했다. 호타키 왕조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들과의 타협점을 찾는데는 실패했으며, 시아파 성직자들이 이란 각지에서 폭동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6.4. 아프샤르 왕조의 지배





6.5. 두라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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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라니 왕조 (Durrani, 1747 ~ 1826)
18세기 이란에서 반란을 일으켜 독립에 성공한 자체적인 왕조인 두라니 왕조가 세워지나 내분으로 멸망하고 시대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 때 인도 대륙을 식민지로 삼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도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으나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끝에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대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영향을 받으며 서구화 및 근대화된다.
아프간의 자체적인 첫 통일 국가로 파슈툰인 역사상 최전성기에 해당하는 시대이다. 당시 두라니 왕조는 준가르 칸국을 점령하고 신장 지역을 정복한 중국 청나라와 사절을 교환하고, 인도 무굴 제국을 위협하던 신흥 강자 마라타 동맹을 격파하는 위엄을 보이며,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큰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두라니 왕조는 아프가니스탄 내 다른 민족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으며[22] 장기 지속하지는 못하고 내분으로 멸망하였다.

7. 바라크자이 왕조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Emirate of Afghanistan, 1826 ~ 1919) - 바라크자이 왕조 초기
  • 영국령 아프가니스탄 (카불 인근 한정, 1881 ~ 1919)
당시 러시아 제국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대영제국히바 칸국코칸드 칸국, 부하라 칸국을 복속시키며 남하하던 러시아 세력에게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로인해 미리 아프간을 자신의 구역으로 삼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7.1.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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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부터 1919년 독립까지 쓴 영국 치하의 국기.
원래 그 이전엔 아예 문양 없는 검은색이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가 되자 아프가니스탄은 러시아영국의 완충지가 되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으려 하였지만, 세 차례에 걸친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영국군은 오랫동안 고전하였다. 결국 제3차 영아전쟁 끝에 1919년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성립시키고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다.[23]
이 때 영국은 '듀런드 라인'이라는 선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 사이의 국경을 지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이 되었다.[24]

8. 현대


  • 아프가니스탄 왕국 (Kingdom of ~, 1919 ~ 1973) - 아프가니스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였다. 부유하진 않았어도 매우 풍요롭고 현대화가 되어있었다고 한다.
  •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Republic of ~, 1973 ~ 1978)
  •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1978 ~ 1992)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 (Islamic Emirate of ~, 1996 ~ 2001)
    • 탈레반(이슬람 아미르국) - 북부동맹(통일 이슬람 구국전선) 간 내전 (1996 ~ 2001) - 사실상 아직까지 탈레반의 지배와 내전은 이어져 오고 있다.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Islamic Republic of ~, 2001 ~ 현재)
    •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 ~ 2014)
    • 과도 정부 (2001~2004)
    • 하미드 카르자이 행정부 (2004~2014)
    • 아슈라프 가니 행정부[25] (2014~)

8.1. 왕정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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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부터 1973년까지 쓴 아프가니스탄 왕국 국기.
흑-적-록의 전통색을 사용하게 된건 1928년부터다.
아프가니스탄은 왕국으로써 역사를 이어가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냉전 시절까지도 왕국을 유지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아프가니스탄은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안정기를 맞았다. 아이러니한건 이 시기에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죽고 죽이는 전쟁터였는데 아프가니스탄은 이 시기가 아프간의 근현대사상 최고로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던 시절이었다는 점이다. 70년대 초반까지의 아프가니스탄과 한국의 1인당 GDP를 비교해 보면, 1965년까지는 한국이 앞서다가 1966~67년 아프가니스탄이 한국을 근소하게 추월했다. 그러나 1968년 한국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추월한 이래 두 나라 사이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지게 되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낸 국왕 아마눌라 칸은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반발한 세력으로 인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그러나 아마눌라의 사촌인 나디르 샤 왕자가 이를 진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가 죽은 후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왕위에 올라 40년간 왕국을 다스렸다. 이때 아프가니스탄은 안정기를 맞았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전성기는 바로 이 시절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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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의할 것은 이런 모습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걸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위 사진과 같은 모습은 어디까지나 수도인 카불에 국한된 것이었고 나머지 지역은 100년전 그대로의 모습이고 현재도 딱히 변한 것은 없다. 즉 카불에서는 저러한 모습이 흔하였지만, 지방의 경우는 지형이 험준해 서로 교류가 없는데다 자연히 문물 등이 늦게 들어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근대화를 추진하는 국가의 당연한 사회상이기도 하다. 한국도 해방 및 종전 후 1950년대까지도 서울시내에서 한복에 갓 차림의 시민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시골은 거의 구한말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사진을 보면 시골들은 아직도 조선 시대를 살고 있었으며 현대식 군대의 전투 자체를 생소하게 여겼다.
자히르 샤 국왕은 사촌인 모하마드 다우드 칸을 총리로 기용하였으나 다우드 칸은 급진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고, 여론을 의식한 자히르 샤는 다우드 칸을 해임했다. 자히르 샤는 입헌 군주제 도입, 정당 설립 자유화 등 민주화를 추진하였으며 냉전 체제에서 중립 외교를 고수하였다. 반면 다우드 칸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자히르 샤 국왕이 해외순방을 하던 도중 사촌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히르 샤 국왕을 몰아냈다. 다우드 칸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26] 그리고 여기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8.2. 공화정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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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부터 78년까지 쓴 공화국 시대의 국기.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쿠데타를 통해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포한 다우드 칸은 새 공화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 겸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보수적인 이슬람교의 영향력의 지배하에 있었던 아프간 사회를 바꾸고자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고 외교적으로 친소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친소련 정책을 펼쳤던 다우드 칸 대통령은 정작 자국내에 있던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정치 세력들을 탄압하였다. 더욱이 다우드 칸은 공산주의자들 이외에도 이슬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치를 펼치면서 국내의 불만을 키웠다.
결국 1978년 좌익계 군인들과 아프가니스탄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인민 민주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 칸 대통령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은 다우드 칸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사직했다고 거짓 발표를 내보냈고 이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당수였던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인민 민주당 1당 공산 독재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공산정권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

8.3. 공산정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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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부터 80년까지 국기.
공산 독재 정권을 세운 인민민주당은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주의 체제를 심는 급진적인 공산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민주당의 급진적 공산화 정책은 보수적인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반발을 키웠고 특히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종교의 영향력이 상당히 미쳤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이슬람교 세력들을 탄압하면서 보수적인 이슬람교 지도자들의 공산정권에 대한 반감은 나날히 커져갔다.
결국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공산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소위 '무자헤딘(مجاهدين)'이라는 이름의 이슬람 주의 반정부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정부군과 무자히딘 간 충돌로 나라 전역이 내전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인민민주당 내부에서도 심각하게 여러 파벌들로 분열되어 매우 취약했다. 이듬해인 1979년 당내 권력 투쟁에서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가 살해당하고 하피줄라 아민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를 죽이고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하피줄라 아민은 이슬람 세력들과 반공 세력, 당내 정파 세력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민의 정책은 오히려 아프간의 분열을 더욱 고착화시켰고 이로 인해 아프간 공산 정권은 붕괴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혼란상에 인접국이었던 소련은 아프간 내부의 정치적 불안이 이 지역에서 쌓아온 소련의 영향력 상실과 이슬람 인구가 밀집된 소련 남부의 공화국들로까지 그 여파가 미칠 가능성을 판단해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개입 가능성을 슬슬 보이기 시작했고 1979년 12월 27일 소련은 육,공군 전체 병력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해 수도 카불을 점령시켜 아민 대통령을 사살하였다.

8.4.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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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국기.
한편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하피줄라 아민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소련은 인민민주당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해 체코슬로바키아 영사로 밀려나다시피한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여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군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인접한 소련 내 공화국들의 정치적 혼란을 우려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 개입을 하였고,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과 소련군의 전쟁터가 되었다. 무자헤딘은 친소 카르말 정부군도 공격하였고, 무자헤딘은 산악지대가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을 이용해 산악전과 게릴라전 형태의 전투 방식으로 소련군과 카르말 정부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소련은 막대한 양의 돈을 전비로 쏟아붓고 병력을 추가 증파하였지만 상황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고 1985년에 접어들면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개입 중단을 고심할 무렵,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 내부에서도 카르말이 물러나고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대통령이 되는 권력교체가 일어났다. 한편 대통령이 된 모하마드 나지불라는 무자헤딘을 비롯 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정 수립 등의 유화 정책을 제시했지만 무자헤딘은 이런 나지불라의 제안에 반발하여 결국 나지불라의 유화 정책은 실패했다. 한편 이때 소련은 1988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철수를 시작했고 이듬해인 1989년 마지막 주둔 소련군 병력마저도 철수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군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8.5.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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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부터 92년 멸망까지 쓴 국기.
소련이 퇴각한 후 이슬람 세력인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부를 공격하였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군간의 유혈 내전으로 변질되었다. 내전 초기에는 소련군의 철수 이후에도 소련의 꾸준한 무기 지원과 주둔 소련군이 두고 간 전투기와 전차, 장갑차, 헬리콥터 같은 화력 강한 무기들로 무장한 나지불라 정부군이 우세했었고 강력한 정면전 구사로 무자헤딘 세력에 어느 정도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전면전에서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워낙 열세였던 무자헤딘들은 다시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산악지대를 거점삼아 나지불라 정부군에게 저항했고 정부군은 무자헤딘의 게릴라 전 공격에 수도 카불과 일부 평야 지대만을 장악한 채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게릴라전을 펼치는 무자헤딘에게 밀리다시피했다. 더욱이 무자헤딘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시작된 정부군의 공군폭격으로 애꿏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고 민간 산촌 마을에 대한 약탈과 강간, 방화 등을 일삼으면서 나지불라 정부는 국민들의 민심마저 잃고 말았다.[27] 결국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지불라 정부군은 패퇴에 패퇴를 반복했고 정부군 내에서도 무자헤딘에 투항하거나 탈영하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늘어났으며, 더욱이 1991년 소련마저 붕괴되면서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자헤딘은 카불을 제외한 아프간 전역을 장악하였다.
드디어 1992년 4월 무자헤딘은 나지불라 정권의 최대 거점지자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위한 대대적인 무력 공세 작전에 돌입하였고, 치열한 전투끝에 마침내 카불 도심지 진입에 성공하여 대통령 관저와 국회 의사당, 방송국등을 장악하고, 나지불라 정부군이 무자헤딘 측의 거센 시가전 공세에 항복하면서 결국 나지불라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 결과 아프가니스탄은 부르하누딘 라바니,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아흐마드 샤 마수드, 압둘 하크 등 무자헤딘 출신 인사들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8.6. 제3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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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헤딘의 국기.
UN에 의해 2001년 탈레반 패망 때까지 정식 국기로 인정되었다. 현 이슬람 공화정의 국기는 2002년을 기해 바뀐 것으로 이후로는 국장 도안만 조금씩 바뀌었다.
그러나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트리고 아프가니스탄 정국을 장악하다시피한 무자헤딘도 각기 다른 여러 무장군벌파벌들로 이루어진 엉성한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다. 아흐마드 샤 마수드 같이 몇몇 걸출한 무자헤딘 지도자들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소련군 철수 후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사이에서 벌어진 유혈 내전 와중 서로 다른 파벌들을 통합시켜 단일 조직체로 만들려는 노력을 했지만 거의 실패했고, 결국 나지불라 붕괴 후 무자헤딘들끼리 전후 처리와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서로 전투를 벌이면서 무자헤딘은 혼란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내분으로 찢겨지고 말았고 그 가운데 악명 높은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 탈레반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내전의 혼란속에서 이슬람 성직자였던 몰라 모하마드 오마르가 여러 이슬람 학생들을 규합하여 1994년, 탈레반이라는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조직을 결성하였고 탈레반은 내부 분열로 약화되다시피 한 무자헤딘 세력들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탈레반나지불라 정권 붕괴 후 군벌 세력들의 횡포와 약탈에 지치다시피한 아프간 일반 민중들의 지지까지 얻어내어 그 영향력을 부풀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탈레반은 수도 카불에 입성하면서 이후 아프가니스탄탈레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탈레반1996년 들어 수도 카불에 입성하였고, 내전의 혼란에 지친 주민들 역시 초기에는 탈레반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이 집권한 뒤로는 전후 과부들이 많은 현실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여성의 사회 활동과 텔레비전과 영화 상영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남성이라도 면도나 축구를 하면 최고 사형까지 시켜버리는 극도로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는 등 시급한 전후복구보다 문화탄압에 더 집중하는 모양새를 보이며,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였지만 탈레반은 이를 공포정치로 억눌렀다.

8.7. 제4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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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정권의 국기. 매우 심플하다. 그나마도 96년도에는 1년간 오로지 흰색 깃발이었다.
1967년
2007년[28]
위 비교 사진은 과거 아프가니스탄이 현재 보수적인 집단 지배 하의 아프가니스탄보다 얼마나 세속적이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아프간의 극단적 이슬람식 복장, 구식 문화라는 고정관념을 확실하게 깨는 사진이라 임팩트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했던 사람 말에 따르면 당시(1950~60년대)에도 마찬가지로 전통 복식 착용이 대세였다고 한다. 사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아직 인구의 90% 정도가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관련 통계. 1967년 신문기사를 보면 1958년경에 히잡 의무착용이 폐지되고 1965년여성 참정권이 주어졌으며, 1950년대말과 비교해서도 10년 사이에 인식의 변화가 크다고 전하고 있다. 관련 기사. 또한 위의 사진은 아프가니스탄의 개방 구역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서방에 대한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이 구역만 특별히 전통을 따르지 않는 복식과 생활 양식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던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서구의 문물들이 엘리트 청년층에서만 유행했다는 의견도 있다. 사진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다소 남용되고 있는 사진이라 잘 가려서 보아야 할 듯싶다.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당시 모하마드 자히르 샤 치세 아프간 왕정이 근대화와 세속화를 지향하고 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8.8.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가 발발하고 테러의 주모자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알 카에다가 아프간의 탈레반들과 연합했으며 그들이 아프간에서 신변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 지역은 다시 한번 뜨거운 감자가 된다. 미국은 탈레반에게 이들의 신변을 넘겨 줄 것을 요구했으나 탈레반은 이를 거부, 결국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이 아프간에 군사를 투입하면서 탈레반 세력은 카불, 칸다하르 등 주요지역에서 축출당하였다.
침공 자체는 한 달만에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금방 끝났고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반(反)탈레반 정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하는 이슬람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미군과 NATO군의 침공에 정권을 잃어버리다시피한 탈레반은 산악지대로 숨어들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에 항거하고 있고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내전상태에 놓여있다. 결국 미국도 나토도 견디질 못하고 2014년부터 치안권을 아프가니스탄 정부에게 넘겨주고 서서히 철수하고 있다. 즉 미국은 여전히 산발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는 상태이다. 전쟁이 언제 종전된다는 가망도 없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병력 지원에 대해 난색을 표하고 있다. 현지 정부의 치안 병력인 군대, 경찰, 민병대도 수틀리면 언제 정부군의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즉 미국에게는 2017년이 되어서야 공식 종전한 이라크 전쟁만큼이나 미국의 발목을 잡는 소모적인 장기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우익들은 베트남 전쟁을 굳이 언급하면서 아프가니스탄전 역시 미국이 진 게 아니라고 항변하지만 결국 "못 이기고 철군하는 게 진 거 아니냐?"라는 비아냥을 듣고 있다. 미국의 논객 토머스 프리드먼이 "결국 미국은 승자인 탈레반과 협상하는 게 전쟁 끝났다고 한 것이다."라고 비판하였을 정도이다.
사실 미국을 몰아낸 과정만 유사할 뿐이지 현재 처한 정치적 상황이나 여러가지들을 종합해서 비교해보면 오히려 베트남에게 모욕일 지경이다. 베트남은 종전 이후 국민 통합에도 어느 정도 성공하고, 베트남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와 경제를 다시 재건하고 이후 개혁개방 정책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신흥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그럭저럭 살 만한 나라가 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그리스 등 현재 자국내에 주둔 중인 서방 외국 군대가 철수하면, 다시 탈레반이 정권을 찬탈하여 탈레반 정권 1기 시절이던 1990년대 중후반와 2000년과 같은 지옥도가 재현되거나 아니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탈레반, IS와의 내전으로 죽고 죽이는 무주공산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29] 일각에서는 베트남군이 철수한 이후의 캄보디아처럼 미군이나 서방군대 철수 이후에 폐지되었던 바라크자이 왕조로의 왕정 복고 가능성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바라크자이 왕조가 복고되면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 거라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도 많다.

8.9. 현 이슬람 공화정 시대


문화적으로 그나마 자유로워졌다지만 새로 들어선 신정부 또한 부패하기 짝이 없어서 외국정부로부터 원조금을 대거 횡령하는 등 국가발전보다 이권창출에 열을 올리는 모양새이며[30] 탈레반 세력들이 완전히 소탕이 된 것도 아니라서 이들 세력이 수시로 테러를 벌이는 등 치안은 불안하여 전후 복구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판이라 신정부에 대한 염증이 깊어지고 있다.
아프간은 외국인 납치가 빈번하게 발생되고 2016년 12월 20일에 스페인 국적의 국제적십자위원회 직원이 납치되는 등 치안도 불안한 상황이다.#
그리고 아프간은 내전이 격화되면서 11개월만에 1만8천명의 군경사상자가 발생되고 아프간 정부가 통제하는 영토는 6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프간은 내전을 겪고 있으면서 사상자가 1만5000명에 달했고 이 중 30%가 어린이사상자였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면서 아프간에 ISIL 일명 IS가 진출하면서 아프간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IS는 탈레반에서 사람들을 빼오며 탈레반의 분노를 샀고 결국 탈레반과 IS가 서로에 대해 '''성전'''을 선포하기에 이르며 피의 보복이 지속되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니 오히려 탈레반이 점차 쩌리로 밀려나고 있다.
그리고 탈레반의 공세와 함께 다에쉬의 공세로 인해 적십자 회원들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되고 무차별 공격이 발생되고 있다.#
2017년 5월에 카불에서 테러가 발생하자 카불과 헤라트 등 아프간의 주요도시에서 테러를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테러가 자주 일어나면서 아프간에서도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되었다.#
그리고 아프간에서 일어난 테러로 150명이 사망하자 탈레반 정권이 붕괴한 이후 최악의 테러로 기록되었다고 2017년 6월 6일에 가니 대통령이 밝혔다.#
아프간은 상반기에 1,662명이 정부군과 반군의 교전, 테러로 인해 사망했다.#
거기에다 다에쉬에 의한 공격이 자주 일어나고 심지어는 다에쉬가 득세하면서 일부 탈레반 조직원들이 아프간 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하는 일이 발생되고 피란민 수천명도 발생되었다.##
그리고 아프간내 다에쉬 지부가 부상하면서 종파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아프간에서는 다에쉬, 탈레반에 의한 테러가 자주 일어나고 거기에다 치안도 불안정한 상황에서 아프간 주민들이 내전지역을 가로질러 평화요구행진을 진행했다.#
2018년 7월 1일에 아프간에서는 소수민족들을 노린 다에쉬에 의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아프가니스탄은 계속되는 테러로 인해 2018년에는 이라크를 제치고 세계에서 테러 관련 사망자가 많은 나라 1위를 차지했다.[31] 그리고 지난해 아프간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1만명을 기록했다고 유엔이 밝혔다.#
2019년초에 미국 측이 결국 아프간내 미군을 철군한다는 방침을 전하자 외신들은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하면서 미군철수 및 여러 문제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그러나 미군 철수가 18개월뒤에 이뤄진다고 하자 탈레반 대변인은 부인했다.#
하지만 지칠대로 지친 미국 측과 새 적수 IS에게 밀려나는 탈레반 측은 현실적 요구 때문에 결국 휴전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탈레반 측은 미군이 철수를 해도 아프간에서 권력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고 아프간 정부와 공존하는 방법을 찾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상원측은 아프간에서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예정을 보이고 있다.#
2019년 2월 6일, 탈레반은 미국측이 4월까지 아프간에서 미군의 절반을 철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2019년 2월 14일에 미국의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은 나토와 합의없이 철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러시아 정보당국은 아프간 북부에서 약5천명의 다에쉬 연계 무장조직원들이 활동중이라고 주장했다.#
위에 설명들을 보면 알겠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이렇게 나라가 불안정하다. 이래서야 헬게이트의 대명사 소말리아, 리비아, 수단북아프리카 몇몇 나라만 못한 신세다.
아프간 내에 불교 유적들이 많았었지만, 탈레반 정권당시에 파괴된 유적들이 많았고 심지어 바미안 석불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었다. 문화재 보존의 필요가 제기되면서 파괴된 불상유적 등은 아프간 국립박물관에서 미국 시카고 대학교와 협력해서 복원에 나섰다.#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한 교도소가 다에시 조직원의 습격을 받아 죄수와 치안 병력 등 21명 이상이 숨졌다.#

8.9.1. 쇠퇴 원인



그래도 이 나라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1960~70년대에는 이란과 더불어 서구화 정책도 이뤄져서 미스 아프가니스탄[32]을 뽑고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도 나가던 매우 드문 이슬람권 나라였었으며 왕국시절인 1960년대까지는 '''다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땅이었다.''' 심지어 공화정인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현대식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 '과거와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땅' 다원주의의 성공모델이자 명상 명소였다. 1960년대 초에는 1인당 GDP도 우리나라보다 약간이긴 하지만 높았었다.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변한 것.
그러나 위와 같은 온건한 개혁을 이루어냈던 아프가니스탄은, 70년대 급진 공산주의 정당의 쿠데타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국가의 상황을 파악하지 않고 공산 정권부터 수립하려다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이는 소련의 개입을 초래하여 나라 꼴을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오죽하면 자히르 샤 왕이 2002년 거의 30년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탈레반이 물러난 칸다하르를 둘러보고 "30년동안 내 조국이 이렇게 폐허가 되었단 말인가?" 라며 서글퍼했으며 결국 그는 2007년 93살로 세상을 뜨면서 죽기 전 지인들에게 "난 죽어서 알라에게 혼쭐날거야. 아름다운 곳을 이렇게 되도록 방치했으니...." 라고 두고두고 한탄했을 정도이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터지기 전의 아프간 모습과 그 이후의 지옥도는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연을 쫓는 아이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역사란에서도 보듯 이 지역은 고대부터 서에서 동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며 현재도 미국러시아중국, 그리고 인도이란을 견제할 수 있는 거의 최적의 요충지이다. 이 지역은 그렇기 때문에 매우 큰 가치가 있다. 그러나 영토 대부분이 산지이니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피해가 크다. 비단길이 지나가는 경로였던 터라 여러 민족들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 그 말은 이 지역의 주민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정복자의 군대들과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든가, 아니면 자기들이 정복을 하든가 라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에는 그리스계 왕조와 페르시아계 왕조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이슬람이 도래한 후 이슬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칭기즈 칸의 침공으로 몽골 제국, 일 칸국의 지배를 받는다. 일 칸국이 무너진 후에는 티무르 제국, 사파비-무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등 정말 다양하게 지배당했다. 이렇듯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세계최강 대영제국을 상대로 세차례 싸워서 이겼고[33], 20세기 후반 초강대국 소련과 10년간 전쟁을 벌여서 승리했고, 21세기 지금 유일 초강대국 미국과 싸웠으며 결국 미국도 이기지 못하고 사실상 지고 나갔다. 무서운 나라다(…). 여기에 엮이고 나서 멀쩡한 나라가 없다. 몽골 또한 바미안 왕조만 박살내고 나머지 나라들은 항복을 얻어낸 것이지 여기에 머무르면서 지배하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근성과 투쟁의 역사.[34]
근성으로 외세와 싸운 역사가 있기 때문에 타국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며 산악지대에 고립 분포되어 있는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로 갈라져 있어 사람들도 상당히 배타적이다. 게다가 기나긴 내전을 겪으면서 부족들 간에도 계속 투닥대며 싸우고 있다. 어느 정도냐면 현지 정보원이 연합군에게 자기가 속한 부족과 적대하는 부족들을 테러 조직이라고 구라를 쳤다. 결과는 당연히 민간인 대량 살상... 인구의 다수인 파슈툰족 자체도 파슈툰어를 할 줄 아는 부족을 파슈툰족이라 통칭하는 것이지 부족 내에서도 여러 파벌이 존재하고 서로 투닥대는 상황이니 말 다 했다.[35]
게다가 이 모든 문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아프간과 파키스탄을 걸쳐서 분포한다는 점을 이용해 파키스탄을 근거지로 다시 부활하였다(…).[36]
더불어 하도 많은 역사적 침입을 받다보니 무수한 인종이 뒤섞여서 지방 곳곳에서 자기들끼리 이뤄 살고 있는 점도 골치다. 이를테면 미국-아프간 전쟁 중 터키가 미국에 여러 도움을 준 것에 대하여 이슬람 보수파들이 비난하자, 한다는 변명이 군벌 가운데 하나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이란 자가 튀르크계 형제라서 도왔다고 할 정도. 파키스탄에도 많이 살고 있는 파슈툰인, 오랫동안 아프간 산지에 살던 우즈베크인(우즈베키스탄의 원주민으로 주치의 후손), 투르크멘인(투르크메니스탄의 원주민인 오우즈 부족), 하자라인(몽골 제국의 원정 당시 따라온 튀르크계 군인들의 후손으로 완전한 북방 황인종이다. 몽골 제국의 군사력은 튀르크인이었고 그들의 후손으로 남은 자들이 하자라인이다) 등의 튀르크계나 소그드인(토카라인)의 후손인 이란계 타지크인 같이 언어와 문화까지 다른 이들이 뒤섞이면서 오랫동안 피튀기며 싸우고, 통합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이 막장상황에 기여했다.
사실 미국은 최소 두 번이나 이 나라와, 그리고 어쩌면 스스로를 구할 기회가 있었다.
1990년대 초반에 소련군이 물러나고 아흐마드 샤 마수드같은 친서방[37] 온건 이슬람 군벌들이 아프간의 정권을 확실히 잡았다면 탈레반이 득세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9.11 테러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21세기의 세계사가 크게 변했을 듯. 문제는 소련이 아프간에서 물러나고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아프간에 대한 지원과 관심을 끊어버렸고[38][39] 이는 아프간을 막장상태로 만드는 도화선이 되었다. 탈레반이 집권하는 결과를 낳았으니.
훼손전
폭파 당시(2001년 3월)[40]
훼손후
그리고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이 나라에도 어쩌면 희망이 보였을 수도 있었다. 2002년 말경엔 탈레반이 사실상 궤멸 직전까지 갔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어 탈레반이 완전히 와해되었다면 지금 처럼 아프간이 막장이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엉뚱한 데에 한눈을 파는 바람에 탈레반이 다시 세력을 모을 기회를 얻었고 상황은 또다시 막장으로 치달아 현재에 이르게 된다.

8.9.2. 전망


위와 같은 서술을 보면 이렇게 막장인 나라에도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2004년 첫 대선이 실시된 이후, 2009년, 2014년에 중단 없이 선거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카르자이가 힘 없는 정부, 막장 정부라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민주적 대표성은 최소한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 2009년 대선에서는 카르자이가 재선되었다. 2014년 대선의 경우, 결선투표 끝에 아슈라프 가니 후보가 당선되었다. 결선투표에서 낙선한 압둘라 압둘라 후보는 부정선거 의혹과 재검표를 주장했다. 무려 2달에 거쳐 재검표를 진행하였고, 선관위는 아슈라프 가니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두 후보가 만나 권력 분점에 합의함에 따라, 2014년 9월 29일 카르자이 정부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은 기존에 없던 직책인 최고행정관을 신설해 총리격으로 두고 그 자리에 압둘라 압둘라를 임명했다. 아슈라프 가니는 전 재정부 장관으로, 서방세계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관료 출신이다. 아프가니스탄 인사 중에서는 친서방 인사로 분류된다. 탈레반의 반발과 공격 속에서도 투표장으로 나온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있는 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예전의 위용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2016년 5월 30일에 아프간 정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1920년대에 지어진 옛 왕궁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016년 7월 23일, 다에시가 카불에서 자살폭탄 테러를 일으켜 8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정정불안이 야기되고 있다.# 게다가 다에쉬가 아프간에 영향력을 키우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아프간 북부에서 다에쉬로 추정되는 무장단체에 의해 적십자 회원 8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9월 30일. 탈레반 다음으로 큰 규모의 조직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반군 세력 '헤즈브-에-이슬라미 아프가니스탄'(HIA)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
2017년 6월 14일에 계속되는 탈레반과 다에쉬의 테러활동으로 미국측은 미군 4천명을 아프간에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토측도 아프간에 추가 파병을 결정했지만, 전투임무는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2017년 7월 14일에 미국 국방부는 지난 11일에 실시되었던 공습에서 아프간의 다에쉬 지부를 이끌던 아부 사예드를 제거했다고 발표했다.#
2017년 8월 28일에 퍼트레이어스 전 CIA 국장은 아프간 미군은 주한 미군처럼 장기 주둔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프간은 2018년 10월 20일에 총선이 있을 예정이지만, 다에쉬와 탈레반에 의한 테러가 발생되고 있다.# 그리고 아프간은 미군과 아프간 정부군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의 수가 급증했다.# 그리고 아프간에서는 총선이 시작되었지만, 탈레반에 의한 테러가 발생되고 후보자들도 탈레반에 의한 테러로 희생되면서 투표 시한을 오는 2018년 10월 21일(현지시간)로 연장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아프간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군을 감축한다고 발표하자 혼란을 빚었다.# 그리고 미국측은 결국 아프간내 미군을 철군한다는 방침을 전하자 외신들은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미국은 탈레반과 협상하면서 미군철수 및 여러문제에 대해서도 협의했다.# 그리고나서 미군철수가 18개월뒤에 이뤄진다고 하자 탈레반 대변인은 부인했다.# 하지만 미국측과 탈레반측은 휴전에 대해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 탈레반측은 미군이 철수를 해도 아프간에서 권력을 잡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고 아프간 정부와 공존하는 방법을 찾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프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미국 상원측은 아프간에서 미군철수를 반대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예정을 보이고 있다.#
2018년 12월 26일, 아프간 선관위는 대통령 선거를 2019년으로 연기한다고 밝혔다.#
2019년 2월 6일, 탈레반은 미국측이 4월까지 아프간에서 미군의 절반을 철수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9년 2월 14일에 미국의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은 나토와 합의없이 철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월 25일에 카타르 도하에서 미군과 탈레반측은 17년에 걸친 내전을 끝내기 위한 평화협상에 나섰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이 탈레반과 18년만에 휴전을 맺는 대가로 병력 수천명을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2019년 9월 7일에 카불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미군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되자 미국측은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중단시켰고 이에 반발한 탈레반은 더 많은 미군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워싱턴포스트는 2019년 12월 9일에 아프간 전쟁은 조작된 전쟁(!)이었고 온갖 거짓 정보로 포장해왔다고 보도했다.#
2월 29일에 미국과 탈레반은 도하에서 14개월이내에 미군을 철군하는 것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문제점이 생기고 탈레반이 재장악을 할 것이라는 우려도 낳았다.# 그리고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탈레반측이 아프간 정부와 불협화음을 드러내며 서명 이틀 만에 정부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자 미국 측이 공습으로 반격에 나섰다.#
3월 9일 대통령취임식에서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과 압둘라 압둘라 최고행정관이 각각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혼란이 생겼다.#
아프간내 평화합의타결 후 후속프로그램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좌초를 겪고 있다.#
6월 18일 미국 중부사령부 케네스 프랭크 매켄지 해병대 대장은 탈레반과 맺은 평화협정의 일환으로 아프간 주둔 미군수를 8,600명으로 감축한다고 밝혔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아프간 주둔 미군을 5,000명 미만이 되도록 감축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의 탈레반 포로 석방 결정이 나오자 평화협상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9월 9일에 카불에서 부통령을 노린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국제사회가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19년째 평화와 안정을 위해 분투 중인 아프간 재건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기로 했다.#

9. 참고문헌



9.1. 전근대사


실크로드 세계사 / 피터 프랭코판
중앙유라시아 세계사 / 크리스토퍼 벡위드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 타밈 안사리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The Cambridge History of India / E.J. Rapson
인도 불교의 역사 / 에티엔 라모트
왕오천축국전 / 혜초 저, 정수일
[1] 을사조약처럼 외교권만 강탈하였다.[2] 아프간 국경에 위치한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즈(Termez)에 이 당시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3] 이란인과 인도인의 공통조상이던 아리아인은 원래 코카서스 근처에 기원한 인도유럽어족 유목민으로, 동진하기 시작하여 이란 고원쪽으로 내려가 이란 남서부 엘람인들을 정복한 이들은 메디아인의 기원이 되고, 그보다 더 동쪽으로 간 이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하고 인도아리아인이 되었다.[4] 인도아리아인 브라흐민의 발흥지 중 하나로 여겨지는 사라스와트 강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내 헬만드 강에 비정된다.[5] 자리아스파는 이후 불교 전파 이후 자리아스파에 불교를 전파한 승려 바할리카의 이름을 따서 발흐 시로 개명한다.[6] 다만 왕을 뜻하는 라자(Raja), 땅을 뜻하는 스탄(~Sthan) 같은 어휘는 서로 비슷했다.[7] 사마천의 기록에 나오는 월지는 고대 중국어로 토하라인에 해당하며, 오늘날 키르기스스탄 일대에 거주하던 오손은 아스윈(Asvin; 기마전사)이라 불리던 샤카족의 일파였다. 고대와 중세 타림 분지 서부의 호탄 왕국 역시 샤카족 계열 왕국이다.[8] 크샤트리야 계급에 흡수되었다.[9] 나우바하르 대학은 호라산의 이슬람화 이후 마드라사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이슬람권 신학 학교인 마드라사는 중앙아시아 불교 대학 건축 구조 및 교육 시스템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게 된다.[10] 부파 불교에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방식은 인도인들에게는 익숙할 지 몰라도, 그리스인이나 토하라, 스키타이, 파르티아인들에게는 지나치게 생소한 문화였다. 대승 불교는 출가자와 재가자에 대한 엄격한 구분 계율을 완화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에게도 불교가 보다 빠른 속도로 보급될 수 있었다.[11] 파괴되기 전에도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조금씩 부서져 왔다.[12] 압바스 칼리프들은 우마이야 칼리프들과는 반대로 예루살렘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13] 여담으로 같은 아프간 중세 도시 발흐에는 중세에도 유대인 공동체가 번성했었다.[14] 19세기에는 고르 왕조가 파슈툰계 왕조라는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이후 학자들이 고르 왕조 당시의 문학 작품 연구 결과 파슈토어는 고르 왕조 당시에는 아직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15] 릴라 하툰이 배신한 원인은 바로 잘랄 웃 딘 왕이 이웃 나라 가즈니 왕조 공주와 재혼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덕에 권력이 줄어들 것을 우려한 그녀는 아버지와 나라를 배신하고 칭기즈 칸에게 성으로 들어오는 방법과 척박한 이 땅에서 그나마 성을 지탱하던 길 위치같은 중요한 정보를 죄다 일러바치고, 자신을 이 곳 군주로 남기고 칭기즈 칸과 결혼하길 원했다. 이 정보로 금세 성을 함락시킨 칭기즈 칸은 약속을 깨고, 릴라 하툰 공주도 결국 이 성에 살던 생물이라고 병사를 시켜 돌로 머릴 깨뜨려 죽였다고 한다. 자업자득. 그런데 잘랄 웃 딘은 가즈니로 결혼하러 간 통에 이 참극을 피하고, 그 뒤로 몽골군을 상대로 10년 가까이 저항을 한다.[16] 카를룩카라한 칸국의 후예[17]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인 그에게 인도는 너무 덥고 습했다.[18] 펀자브 일대 포함[19] 중세 인도에서 한동안 잊혀졌던 체계적인 은화 주조 시스템을 재도입시켰는데, 그가 만든 통화 체계가 오늘날 인도 루피방글라데시 타카의 직계 기원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다![20] 티무르 제국 시절 페르시아어 문학 작품들이 헤라트에서 차가타이어(중세 우즈베크어)로 번역되었던 만큼 우즈베크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도시였다.[21] გიორგი XI, (Giorgi XI); 사파비 왕조 군인 상당수가 조지아에서 납치한 노예 및 사파비 왕조에 투항한 조지아 토호들로 구성되었다.[22] 아프가니스탄 내 하자라족, 누리스탄인, 우즈베크인 등은 후대 바라크자이 왕조 대에나 파슈툰인 정권에게 복종하기 시작했다.[23]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에서 왓슨이 홈즈와 만나기 전 바로 영-아 전쟁에 참전했다고 설정되어 있다. 그의 지팡이는 그 공로로 여왕이 하사한 것. BBC에서 셜록 홈즈를 재해석한 드라마 셜록을 만들었는데, 이때도 왓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상이군인으로 나온다. 이쪽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참전. '''200년 가까운 갭이 있는데도 똑같은 설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데서 이 나라가 겪은 막장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난다.'''[24] 듀런드 라인으로 '''아프간 족의 영토 및 인구 절반'''이 졸지에 파키스탄의 영토가 되어버렸다.[25] 압둘라 압둘라 전 장관과 공동 정부[26] 자히르 샤 국왕은 이탈리아에서 긴 망명 생활을 이어가다가 탈레반이 축출된 2002년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와 국부 칭호를 받았다. 2007년 사망.[27] 그렇다고 나지불라 정권이 아프간 국내에서 지지 세력이 없는 소련의 괴뢰정권 취급을 받으며 무자헤딘과 불리하게 전쟁을 벌였던 것만도 아니었다. 1989년 잘랄라바드에서 무자헤딘을 상대로 일으킨 전투에서 정부군이 승리하기도 했었고, 내전 중 무자헤딘이 자행한 전쟁범죄로 가족이 죽었거나 그들의 악행에 치를 떨던 아프가니스탄 주민들까지 정부군 지지 세력으로까지 포섭하여 정권을 유지했을 정도였다.[28] 구글 이미지검색에서 '1950s, 1960s afghanistan' 따위로 검색해 보면 동시기 이란처럼 엘리트층 여성들의 복장이 매우 자유분방했다는 걸 알 수 있다.[29] 실제로도 탈레반 정권 시절에 정치적 탄압과 피해를 받았던 사람들이 꽤 많기 때문에 그나마 차악에 가까운 아프가니스탄 현 정부를 지지하는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이 꽤 있다.[30] 아닌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 매년 60억 달러 가량의 원조금이 지급되었다고 하는데 아프가니스탄 1인당 국민소득이 600달러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프간 인구의 30%에게 한해 소득을 보전해줄 수 있을 수준의 '''엄청나게 큰 돈'''이다. 하지만 부정부패로 원조자금의 상당수가 빼돌려지면서 전후 복구 수준은 이에 못 미치고 여전히 대다수 아프간인들은 그 혜택을 베재로 받지 못한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수준의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다.[31] 그나마 이라크는 과거에 비하면 아프가니스탄보다는 다소 줄어든 편이다.[32] 1974년을 마지막으로 막장이 된 뒤로 사라졌던 미스 아프가니스탄은 2004년 30년만에 대회가 열렸으나 엄청난 반발로 정작 미스 아프가니스탄이 된 여성은 국적을 박탈당했다.[33] 사실 미국, 소련과 달리 영국상대로는 비긴거라 할 수 있다. 독립 전까지는 결국 보호국 신세가 되고 말았고 1919년에 독립한 것도 1차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독립당시 전쟁에서 오히려 아프간 쪽이 영국의 만만치 않은 반격으로 불리했다는 것.[34] 20세기 들어선 프랑스-일본-미국과 100년에 걸친 전쟁끝에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하고 역시 전쟁으로 중공의 영향력 마저 몰아낸 베트남 정도가 비교 가능할 듯.[35] 게다가 대부분의 파슈툰족은 탈레반을 증오하고 있으나 우습게도 탈레반 상당수가 파슈툰 족이다.[36] 사실 이 문제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과거 제국주의 시절 강대국들끼리 멋대로 그은 국경선이 문제이다. 파키스탄이 과거 인도의 일부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러시아 제국이 인도양으로 향하는 통로를 노리고 남하하자, 양쪽이 협정을 맺어서 세력권을 분할했는데 이때 파슈툰족 거주지역을 반으로 뚝 잘라서 남쪽은 영국이 인도 식민지로 먹고, 북쪽은 러시아 세력권의 아프가니스탄으로 정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듀런드 라인그레이트 게임 항목 참조. 현재 파키스탄은 카라치, 라호르를 중심으로 한 남부 펀자브 출신들이 주도하며, 북부의 파슈툰족들은 파키스탄인이란 정체성이 거의 없다. 따라서 분리주의가 팽배하며 국경선이 의미가 없고 파슈툰족들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양쪽으로 맘대로 오가면서 활동한다. 탈레반과 알 카에다가 여기에 묻어서 인력과 물자를 옮기는 것이다.[37] 딱히 친서방, 친미로 보긴 힘들다. 소련과의 전쟁기에 미국의 지원을 전혀 받지도 못했고. 하지만 탈레반처럼 무조건적인 반미도, 현 아프간 정권처럼 무조건적인 친미도 아니고 '도움이 되면 손을 잡는다' 정도의 유연한 성향이라 실제 집권을 했다면 미국과도 무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38] 사실 냉전이 끝나고 CIA도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은지라 도와줄 수 없었던 것으로 봐야겠지만.[39] 톰 행크스가 주연한 2007년작 <찰리 윌슨의 전쟁>이 이부분을 다루고 있다. 소련과의 전쟁기에 찰리 윌슨 하원의원은 동료 의원들의 전폭적인 협조로 수천만달러의 무기를 반소게릴라(무자헤딘)에 지원하는 예산안을 손쉽게 얻어냈지만, 막상 소련군이 철수하자 학교건설 지원예산 단 5만달러는 의회와 언론의 무관심속에 완전히 묻히게 된다. 마지막에 '우리가 그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으니 책임을 져야한다'는 톰 행크스의 이야기가 인상적.[40] 참고로 탈레반은 이 짓거리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욕을 처먹었다. 심지어 같은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게서도 문화재 훼손하지 말라는 공식 규탄을 받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