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군밤의 왕/등장인물

 




1. 아시아
1.1. 조선
1.1.1. 왕실
1.1.1.1. 종친부
1.1.1.2. 외명부
1.1.2. 조정
1.1.2.1. 문관
1.1.2.2. 무관
1.1.3. 참의원
1.1.3.1. 개화당
1.1.3.2. 만민공산당
1.1.3.3. 자유당
1.1.4. 명문세족
1.1.5. 기타
1.2. 일본
1.2.1. 정부
1.2.2. 국회
1.2.2.1. 애국공당
1.2.2.2. 입헌정우회
1.2.2.3. 일본공산당
1.2.3. 기타
1.2.4. 훗카이도 공화국
1.3. 청
1.3.1. 황실
1.3.2. 중원
1.3.2.1. 북양군
1.3.2.2. 남양군
1.3.2.3. 보국회
1.3.2.4. 기타
1.3.3. 외번
1.3.3.1. 신강
1.3.3.2. 몽골
1.3.3.3. 티베트
1.4. 류큐
1.5. 태국
2. 유럽
2.1. 프랑스
2.2. 러시아
2.3. 영국
2.4. 독일
2.5. 기타 유럽 인물
3. 아메리카
3.1. 미국
3.2. 하와이 왕국
4. 아프리카
4.1. 트란스발 공화국
5. 기타


1. 아시아



1.1. 조선



1.1.1. 왕실


조선의 제25대 국왕. 권신 하옥대감 김좌근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계해년에 흥선군, 박규수와 손을 잡고 명복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세자로 지명하여 안동 김씨의 권세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당시 이미 중증 간경화을 앓고 있었기에 계해년 겨울에 숨을 거두었다. 그래도 말년에 입궁한 귀남과의 우정으로 약간이나마 구원을 받았다. 죽기 전에 팔자에 없던 임금 노릇을 하게 되어 고민하는 귀남에게 욕심과 체면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소중한 사람들은 잃지 말라는 조언을 했다. 그리고 원 역사에서는 듣는 이가 없어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던 강화도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1] 여담으로 이 작품에서는 원범의 첫사랑이라고 구전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양순'이 실재하는 인물이었으며 원범이 용상에 올라 안동 김문과 힘싸움을 벌이는 동안 역병으로 죽었다.
조선의 제26대 국왕.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조선의 세자. 원 역사의 순종. 본작에서는 완친왕이 태어나지 않아서 장남이지만 명성황후의 다른 아들들이 조졸하지 않아 유일한 적자는 아니다. 귀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며 교육담당인 홍순목의 표현을 빌리자면 좀 둔하기는 해도 사람은 착하다. 지금 자신에게는 대원군도 있고 중전도 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렇게 많지만, 얘를 그냥 왕위에 올렸다가 이완용 같은 놈이 나오면 큰일나겠지 싶은 귀남의 아버지 마음으로 조선에 헌법(조선국 국제)이 생기고 삼권분립이 이루어진다.[2] 이 작품 굴러가는 게 대충 이렇다.
영특하지는 않다 해도 독차 사건이 없어 바보는 아닌지라 스승들에게 20년 전 귀남옹 즉위 당시 조선이 얼마나 말기였는지 듣고 이해해, 인재 많기로는 선조 대 이상이라고 하는 지금 그 수많은 인재를 다루어[3] 이 정도까지 나라를 되살린 부왕을 존경하며 동시에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박규수와 더불어 한글전용의 물꼬를 텄다. 자식을 보지 못했던 원 역사와 달리 슬하에 아들과 딸이 1명씩 있다. 그리고 남자는 군대를 가야 사람 구실한다는 귀남의 강한 믿음 덕분에(?) 원자를 보고 학사장교로 임관하여 현재 한양에서 참위(=소위)로 복무하고 있다.[4] 편한 집 근처가 근무지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기에 청나라에서 북양군과 남양군이 갈등이 격화되자 귀남에게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자신에게 선봉을 맡겨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 안양대군(安陽大君) 이규(李邽)
원 역사에서 태어난지 보름만에 사망한 고종과 민비의 3남.[5] 본작에서는 내의원이 일찍 개편된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이척과는 연년생으로 아빠보다 엄마 자영을 더 많이 닮아 영특하지만 은근히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 미복잠행을 즐긴다. 어느 날 마포로 미복잠행을 나갔다가 조별단[6]이라는 아이와 만나 연을 맺게 되었고 1년 동안 인연을 이어가다 끝내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별단이 천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가의 자제도 아니라서 형 이척의 옆구리를 찔러 귀남의 반응을 살폈고 나쁘지 않자 자신이 대군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대원군에게 이 사실이 딱 걸려서 별단을 만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아무리 형이라도 감히 세자를 그렇게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들었다. 결국 귀남과 영상 김옥균의 도움으로 조별단과 결혼했다.
  • 경양대군(慶陽大君)
원 역사에서 군호를 짓기 전에 요절한 고종과 민비의 4남.[7] 안양대군과 마찬가지로 내의원이 일찍 개편되어 죽지 않았다. 세자보다 4살 어리다. 개화식을 즐겨 먹어서 그런지 덩치가 태조대왕 닮아 거대하다고 한다.

1.1.1.1. 종친부

고종의 친부. 권위적이고 자신의 권력욕을 사직과 전주 이씨 왕실을 위한 것이라고 자기합리화하며 종실의 부흥이 곧 조선의 부흥이라고 생각한다. 장남 이재면의 등과를 청탁하러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 찾아갔다가 모욕을 당한 날, 귀남이 일종의 뇌물로 준비한 군밤을 먹고 부모님께 바치겠다고 없는 손재주로 성심성의껏 이토록 맛있는 밤을 준비했다고 감동한 것을 계기로 작은 아들(사실은 귀남)과 원 역사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원 역사처럼 섭정 노릇은 못했지만 정권의 2인자로 롱 런하고 있으며, 일인지하일지언정 만인지상인데다 국운은 창성하고 종실의 권위는 드높아지며, 평생 숙원이었던 경복궁 재건까지(역사보다는 늦은 시점이지만) 눈으로 보았으니 본인도 만족하고 있다.
현재 만민공산당의 실질적인 영수이며 조선판 국가 헌병대격인 공안서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참고로 아버지 흥선군이 세운 당명을 들은 귀남은 당연히 경악했지만 다들 좋은 의미라고 해석하고 귀남에게는 공산당이 왜 나쁜지 설명할 능력이 없는지라 바꾸지 못했는데, 얼마 안 가 공산당 내부에서 과격파벌이 나오는 등의 사건이 일어나 아들의 선견지명에 재차 놀라게 되나 이후에 어떻게든 해결한 이후로는 흥선군이 류큐로 갈 때 자신의 부재에도 자기 밑에서 일하는 공산당이나 공안서가 있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직하게 생각하고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아들에 대한 평가가 점점 믿음직해지는 것도 볼거리. 어차피 자신의 사후 일이겠지만 현재 조선엔 지모 뛰어난 군주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인데 안양대군에게 자신을 닮은 재질이 보이자 혹시 주상 자리를 노려 파국을 불러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흥선대원군의 셋째형. 병학 형제의 청탁을 받고 동생을 찾아가 안동 김문의 여식을 간택해야 종실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적장자. 귀남이 명복의 생을 시작했을 때 이미 혼례를 치르고 별채에 머물고 있던 터라 별로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186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있다가 1866년에 도승지로 승진했다. 자영과의 결혼을 고민하던 귀남에게 정순왕후 김씨의 야사를 들어 품성을 시험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1.1.1.2. 외명부

효명세자의 정비. 철종이 승하하기 전에 당시 흥선군에게 명복의 즉위를 승인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철종의 정비. 병학, 병국 형제와 사촌지간이다. 철종이 승하한 후 임금의 양모로서 약 1년 동안 수렴청정하였다.
조선의 왕비. 원 역사의 명성왕후. 귀남이 간택 때 던진 질문인 '자신이 군밤 장수의 아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옆에서 같이 고구마라도 구워 팔겠다'라는 명답을 남겨 왕비로 간택되었다. 원 역사의 명성황후처럼 권력욕이 무척 강하다. 본인 왈 "한 번 있는 젊음을 불태워 닿는 데까지 달려나가고 싶다." 하지만 본작에서는 귀남의 변함없는 애정(첩 없음) 및 적당한 수준에서 권력욕을 발휘할 길을 터준 덕분에 성질이 많이 가라앉아, 여흥 민씨를 끌어들여 이렇다 할 패악질을 저지른 것도 없고 시아버지와의 사이도 양호해서 흥선대원군이 자신이 죽은 뒤 종실을 뒤에서 받칠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물론 만만치 않은 권력욕의 화신인 흥선군인데다 중전도 아직 젊은 만큼 권력을 간단하게 내주고 있지는 않으나 천천히 흥선군에게서 정보자산 등을 물려받고 있는 중이다. (자청한) 일의 산에 파묻혀있을거라고 류큐로 유람간 대원군이 평했을 정도. 물론 조선국 국제 제정에서도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데 반대하면서 운현궁에 연락하는 등 원 역사처럼 러시아와 같은 제정국가를 원하고 있지만 귀남이 강경하고 대원군도 간신이 나와 종실을 흔드는 것을 방지하는데 동의하면서 실패하기도 하는 등 권력욕은 여전한 것 같다.
엘리노어 마르크스 사건으로 여권 신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자 '감고당 문문(門文)씨'라는 필명으로 몰래 한 신보에 선비들의 고루한 여성관을 규탄하는 논설을 투고하였는데 귀남에게 딱 걸렸다. 귀남에게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이 글을 자신이 썼다는 것을 모를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글쎄? 문문은 자영의 성씨 민(閔)을 파자한 것이고 '감고당'은 자영의 생가다.
운현궁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일이 넘어오고 타국의 공사 부인들을 통한 소식을 정리하는 등 많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다보니 부쩍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기도 하고 나이 마흔 먹었는데 그냥 만족하고 물러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왕세자빈 김명숙(金明淑)
조선의 세자빈. 광산 김씨 가문의 방계 집안의 영애이다. 원 역사에서는 여흥 민문의 민태호의 여식이 세자빈이 되었지만 여기서는 외척의 자리가 가문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아는 민태호의 은근한 반대로 다른 사람이 세자빈의 자리에 올랐다. 세자와 금슬이 좋은지 결혼한지 5년만에 군주와 원자를 낳았다.
고종의 친모.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본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다. 대원군과 함께 국비로 류큐 관광을 가는 등 행복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 창녕부부인(昌寧府夫人) 조별단
원 역사 이화학당의 2호 입학생. 마포 사는 변변치 못한 집안의 여식이다. 딱 부러진 성격으로 가족들과 함께 자육원에서 일하면서 때때로 수업을 듣고 있다. 말하자면 자육원의 근로장학생이다. 1889년에 자육원 옆에 위치한 다방 겸 빵집 유월당에서 안양대군과 만났다. 안양대군을 그저 반가의 자제로만 알고 때때로 만나면서 서로 좋은 감정을 키웠고 서로 알고 지낸지 1년이 지났을 때 자신이 왕족이라는 안양대군의 커밍아웃을 들었다. 일부 종친들이 별단의 신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귀남과 총리가 된 김옥균의 도움으로 안양대군 이규와 무사히 결혼했다.

1.1.2. 조정



1.1.2.1. 문관

원 역사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 불어에 능통하여 을축양요 때 통역을 맡았다. 귀남이 베르뇌 주교의 기리는 학당을 세우자고 제안하자 감동하여 눈물을 보였다.
을축양요 때 벨로네를 상대했다. 벨로네가 허튼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정운구에게 소란이 일어나면 데려온 병사들을 단속하면서 문수산성으로 물러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프랑스군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 정운구가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후 외인들과 교섭한 경험이 있다고 수신사의 정사로 나서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조일 양국은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자립국이지 자주국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흘러나가 아이즈 낭인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다.
원 역사에서 영의정을 역임했고 최익현과 함께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중신. 여기서는 박규수 다음의 통리기무아문 2대 총리대신이 되어 징병제를 비롯한 이런저런 개화 사무를 담당한다. 전임자가 그 환재 대감이다보니 구관이 명관 소리도 듣고, 어째 도맡은 개화 사무가 죄다 군무와 관련된 것이어서 세간에는 대장 총리로 유명하다. 이후 육조와 통리기무아문을 합치는 관제개혁을 제안하고 본인이 그 영의정 겸 총리대신이 되려고 했지만 육조의 견제로 오르지는 못하였다.
원 역사에서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일으킨 그 오페르트다. 홍콩에서 사업을 말아먹고 조선으로 건너와 크게 해먹을 건수를 찾던 중 운산 금광의 존재를 확인한 오페르트는, 영국을 견제할 심산인 벨로네 공사를 빽으로 삼아 운산 금광 채굴권을 획득, 한 밑천 잡아볼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벨로네 공사의 소개장을 들고 호기롭게 대원군에게 접근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ㅡ 19세기 조선에서 자본주의의 생리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귀남에게 코가 꿰이어 졸지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색목인 당상관이 됐다. 프랑스와 이권을 나눠먹자고 해놓고서 졸지에 프랑스와 영국을 뒤통수 친 모양새가 되었고, 영프 양국으로부터 경계를 받게 된 오페르트는 이제 기댈 구석이 조선밖에 없으니 벗겨 먹을 생각을 포기하고 '이광도감'의 '오배'로서 금광 개발에 전력을 다하게 됐다.
개발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지금은 이광도감이 국영 광업회사라고 할 수 있는 광무총국으로 승격되었으며, 그곳의 사장이 되었고 따로 오씨양행이라고 무역회사를 하나 차렸다. 자기 사업에 집중하고 싶어서 계속 사직을 청하고 있으나 번번히 윤허되지 않는 중으로, 결국 수염이 산신령 수염이 될 때까지도 사직하지 못하고 조정 원로가 되어버렸다.
본인 심정이야 어떨지 모르나 대외적으로는 조선에서 성공한 외국인으로 이름이 꽤 알려졌으며, 어쨌든 극동을 본진으로 두고 있다보니 원래 인도 철학 및 드라비다어를 전공하던 동생까지 동아시아 전공으로 반강제로 바꿔놓았다.
드레퓌스 사건 즈음 해서 집안이 파리의 랍비 명문가인 드레퓌스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게 사건의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것으로 소문이 퍼지면서[8] 이를 도우라는 뜻에서 조정에서 사직을 시켜버린다. 정작 그 사돈댁은 드레퓌스 대위 집안과는 이름만 같지 전혀 관련없다. 물론 사건 자체가 심각해서 사돈댁에서도 같은 유대인으로서 드레퓌스 대위를 지원해 달라고 오페르트에게 요청했고, 결국 조선 측과 오페르트가 여론전에 가담한다.
여론전과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수사로 드레퓌스 대위가 풀려난 후 테오도르 헤르츨과 나눈 대화에서 "오스만의 부채를 해결해 주기라도 하지 않는 한 우리네들이 팔레스타인에 눌러 앉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가 알래스카나 루이지애나처럼 팔레스타인을 당당하게 사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헤르츨이 유대 복지재단을 세우는 계기를 제공했다. 김홍집을 통해 사건 전말을 전해들은 귀남은 마침 궁방전을 매각하고자 했으나 민간에서 사들일 금력이 부족해 팔지 못했던 상황이니 유대인들에게 그 땅을 빌려주자 제의하고, 농사일에 익숙하던 동유럽 유대인들이 이민을 와 궁방전에서 키부츠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키부츠는 근처의 공산당원들에게 소개되어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는다.
주프랑스공사. 최익현을 도와 파리 코뮌 구성원들을 조선으로 탈출시켰다.
이완용의 양부. 원 역사처럼 대원군의 사돈으로 겉으로 군자 노릇하면서 상대 비위 맞추기가 장기다. 1876년에 친조선파를 육성하라는 대원군의 명을 받고 주영공사로 부임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규장각 제학을 제수받았다.
원 역사 대한제국의 군부·탁지부대신. 대원군이 부리는 보부상들로 이뤄진 익문사가 공안서로 이어졌는데 보부상 출신인 그도 공안서에 근무하게 되었다. 상업의 재능은 여전해서 은 소동때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팔아 손해를 보지 않았고 관광붐이 일어날 때 금강산에 여각을 짓기도 하였다. 베델과 함께하는 사업도 진행중이라고. 김가진이 방황하던 시기 잡아서 대원군에게 데려갔던 이력 때문에 김가진의 직속부하취급 받는 중. 역사에 남은 대로 발도 빠르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경에 파견나가 있다.
김응균의 서자. 대원군이 북벌을 목표로 은밀히 육성하고 있는 무관들과 어울리다 병학, 병국 형제에게 찍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게 됐고 그곳에서 세상에 대한 울분을 토하다가 한 순간 말실수로 러시아의 스파이 노릇을 하게 됐다. 그러다가 민자영이 구축한 정보망에 그 사실이 적발되었고 대원군의 눈에 띄어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의 수족이 됐다.
인민의 의지를 따라 조선을 방문했던 레닌과는 묘한 우정을 쌓게 되었다. 레닌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속으로 잘 가다듬으면 난세를 일으키고 마무리 짓는 천하의 효웅이 되든, 후대에 길이 그 가르침 남기는 철인이 되든 할 것이라 평하였다.
원세개를 축출하려다 역으로 함정에 당할 뻔한 후 심기일전하여 대원군과 협의 후 정식으로 공안서의 직책을 맡게 된다. 1894년 정초를 기해 공안서 총관 자리에 오른다.
주독일공사. 베를린 회담에 참석해 프랑스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조선의 발전을 도왔는지를 세세하게 증언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에게 바둑판을 진상했고, 사교장에서 농반진반으로 자신이 동방의 고대 비법 침술을 쓸 줄 안다고 자랑했다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황태자비의 부탁을 받고 당시 황태손이었던 빌헬름 2세의 팔에 침을 놓기도 하였다.

1.1.2.2. 무관

  • 천덕만
천하장안 천덕기의 조카. 실존 인물이 아니다. 총각 시절 운현궁 옆골목에서 군밤을 팔던 중 우연찮은 계기로 귀남과 우정을 쌓게 됐고 그가 개똥이가 아니라 조선의 임금 이형이 된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귀남이 즉위한 후 최한기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무과에 급제하였고 을축양요에 참전했다. 이후 최한기의 딸과 결혼했다. 1887년 기준으로 조선군 참령(소령)이다.
  • 정운구(鄭雲龜)
원 역사에서 최제우를 체포한 선전관이다. 을축양요 때 문수산 싸움에서 운칠기삼으로 공을 세워 명장으로 소문이 나 무관으로 출세한다. 관제개혁 후에 새로운 병조의 첫 판서로 취임했다. 판서가 될 서열은 아니었지만 실무에 밝다는 평으로 판서가 됐다. 판서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군부에 몸을 담고 있다. 세자의 군 입대 문제가 불거지자 군부의 논의 끝에 학사장교 제도를 만들게 된다.
병인양요 문수산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른 무관. 을축양요 때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나 정운구를 구했지만, 연줄이 많지 않았기에 그리 영달하지 못하다가 엄익관 교수 자리를 얻었다. 이후 정축년에 공친왕이 난을 일으키자 1만에 달하는 북벌(?) 원정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아사 직전의 난민을 구휼하고 산적 무리를 토벌하는 등 동삼성의 민심을 수습했다.
원 역사의 을미사변 때 일본군을 막다가 장렬히 사망한 무장. 엄익관 장교 과정을 마치고 참령(소령)으로 진급한 뒤 무위영에 부임했다. 대원군이 이끄는 북벌 사조직에 참여하였고 정축년에 공친왕이 난을 일으키자 한성근이 이끄는 원정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후에도 군부의 인물들과 함께 세자의 군 복무 문제를 논의하는 등 얼굴을 비치고 있다.
원 역사의 대한제국 군부·법부대신. 소속은 무위영이고 계급은 참장(소장)이다. 통리기무아문에서 정운구 다음으로 군무사 당상을 맡았다.

1.1.3. 참의원



1.1.3.1. 개화당

개화당의 초대 영수. 할아버지 연암 박지원의 영향을 받아 철종이 승하하기 전부터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다.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끝난 후 원 역사보다 일찍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의 초대 총리대신으로서 귀남이 미래 지식을 토대로 제안한 정책을 한데 모아 신법을 제정하고 척화파의 왕안석 납시었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이를 뚝심 있게 추진함으로써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고 1871년에 자기가 만들어낸 성공의 그림자가 언젠가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들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다가 1873년에 2년간의 휴식을 마치고 한성 참의대부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치과병원 건설을 공약을 내세워 오경석을 꺾고 정계에 복귀했다. 그리고 대부 자리를 얻자마자 개화당의 재결성을 선포하고 '문명과 진보의 당'이라고 당명도 멋지게 프랑스어로 옮기고는 홍보 책자를 공사관에 돌렸다. 유작으로 거의 대부분의 글이 한글로 적힌 '遠國과 隣國의 事情을 論함'을 남겨 한글전용의 토대를 닦았으며 한글에 띄어쓰기 및 여러 문장부호를 도입하였다. 병으로 쓰러진 상태에서 노씨권학상 유학상을 수상하고는 귀남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원래 1877년에 죽는데 당시에도 나이는 많았지만(1807년생)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평을 받았고 여기서는 마음 고생이 덜해서인지 원 역사보다 7년 더 살았다.
부고가 나자 문인 사족들뿐만 아니라 거리의 장삼이사들 입에서도 나라의 큰 어른이자 일세의 명재상이었노라는 추앙을 받으며 작중 가장 명예롭게 퇴장했다. 워낙 명성이 높아 이완용이 세도가의 부패를 공격할 때 그의 가문 반남 박문은 제외했을 정도이다. 사후 문관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라고 할 수 있는 문충(文忠)을 받았다.[9]
개화당의 서기. 박규수, 오경석과 함께 조선 개화를 위해 오랫동안 움직여왔다. 초기 개화당 3인방 가운데 모사 역할을 맡았다.
박규수의 먼 친척. 원 역사에선 박규수 밑에서 수학하고 온건 개화파의 일익으로 초대 총리 김홍집 다음의 2대 내각총리도 지낸 인물. 여기서는 재능을 눈여겨본 박규수가 반남 박씨 문중의 사업과 개화당에서의 위치를 뒤이을 후계자로 점찍어 키우고 있다. 거기에 박규수가 책을 낸 이후 한글전용 관련 업무를 주관하는 국문교정청을 만들도록 한 것도 이 사람의 노력. 박규수 사후 반쯤 떠밀려 개화당 대표가 됐다. 제2회 총리대신 추거에서 낙선한 뒤 당 대표 자리를 내려놓는다.
원 역사처럼 왕실의 부마로 작위는 금릉위. 여기서는 갑신정변은 없지만 개화당과 함께 행동중이다. 아직 어려 "영문 모르고 설친"다고 디스당하는 역할.
김좌근의 조카. 병국의 형. 귀남이 즉위한 후 개화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해외 열강에 사절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듣고 청나라에 "조선이 대국 몰래 양이에 사절을 보내려고 한다."라고 밀고했는데 딱 걸려서 멸문지화를 당할 뻔했지만 귀남이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결국 그로 인해 직접 사절에 참가하여 서양 각국을 순방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으로 현실을 알고 친유럽파로 성향이 바뀌었다. 원래 1879년에 죽는데 박규수가 세운 서양식 의원에서 내린 처방에 따라 담배를 끊고 운동을 하기 시작해 아직까지 잘 살아있다. 덤으로 바이올린 연주 감상에 재미를 붙였다.
김좌근의 조카. 병학의 동생. 원 역사처럼 형보다 개화에 우호적이다. 경복궁 재건을 주장하다가 꼬여 안동 김씨가 전국의 도로를 맡아 확충하는 건설재벌로 탈바꿈해가면서 그에 도움이 되는 공조판서등의 관련 실직을 도맡아 하고 있다. 개화당이 부르주아 위주의 정당으로 변모해가자 형 병학과 같이 개화당과 함께 행동한다. 파리 세계박람회에 참여하면서 에펠 탑을 보게 되는데 이를 보면서 복층건물 건설이 국토가 좁은 조선의 미래라고 말하며 감탄한다.
원 역사 안동 김문의 마지막 거물 정치인. 집안 위세 대신 스스로 얻는 것으로 현달하고자 하는 자세는 원 역사와 같지만 본작의 김병시는 수구적인 척화파가 아니다. 관제 개편 이후 호조판서를 맡고 있다. 참의원 개화파의 신임을 받아 영의정 자리를 차지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모든 권력을 혼자 쥐고 흔드는 세도정치에 익숙한 안동 김문의 원로들은 이런 그를 보고 '그릇이 작다'는 평을 남겼다. 제1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 개화당 후보로 나섰으나 최익현에게 밀려 낙선했다. 이후 최익현이 내각의 첫 공조판서로 발탁했다.
김좌근의 조카 김병기의 양자. 나폴레옹 워너비. 정학 등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를 근대화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원 역사대로 여자 관계가 아주 복잡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본처가 적자를 낳았다는 것. 귀남이 추구하는 온건한 개혁과 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에 서태후의 조선파천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월권이었고 조정의 정책기조와도 어긋난 행동이었기에 반쯤 타의로 사직해야 했다. 이후 귀남의 추천을 받아 서태후의 보좌관 겸 동철의 이사로 일하면서 여러 인간군상을 접해 정신적으로 조금은 성장했다. 유학은 이미 쓰임이 다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박규수 사후 그저 벌열가의 모임이 된 개화당을 쇄신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벌열가의 자제인 만큼 반공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만민공산당의 실체를 밝히겠다고 이완용을 이용해 공작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귀남에게 어떤 일이든 깊이 생각한 연후에 행하고 사람을 좀 가려서 사귀라는 조언(?)을 들었다. 이후 자신의 부족한 점이 공산당, 자유당의 경쟁자들과 같은 대의가 없음을 깨닫고 대의를 고민하던 중 민족주의를 생각해낸다.
제2회 전국 추거를 앞두고 개화당과 척을 지게 된 이완용이 자유당에서 자신의 입지를 만들기 위해 명문세족들의 부정부패를 기삿거리로 만들었는데, 귀남이 이를 해결하고자 김옥균에게 결자해지 겸 대미지 컨트롤 수단으로 가문의 잘못을 스스로 폭로하라 지시한다. 이에 이를 기회로 돈을 풀어 민심을 잡으면서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 벌열가 원로들을 뒷전으로 밀려나게 하고 개화당의 권력을 잡아 민족주의를 기치로 신분의 벽을 허물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초석을 다지려 한다.
박정양이 당 영수 자리에서 물러난 뒤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민태호의 사임으로 치뤄진 총리대신 보궐 선거에서 경제 공약을 내세워 당선, 영상의 자리에 오른다. 역대 총리대신 중 가장 급진적이고 재기넘치는 인물인만큼 기무회의에서 귀남이 흔히 도맡던 참신한 발상 내놓는 역할을 채갔는데, 이 일을 소소한 보람으로 여기던 귀남은 부럽기도 하고 못내 질투나기도 하는 모양.
원 역사 독립협회의 창립자. 본작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지 않아 개화당의 당원으로 유유자적 지내고 있다. 석전을 대체할 스포츠로 야구를 밀었으나 장렬히 실패했다. 하와이에서 국왕 친위대와 호놀룰루 총병대가 충돌하는 사건이 터진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허스트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밑밥을 던져줬다.
홍순목의 아들. 원 역사에서는 개화파로써 한국 우정국 제도를 만들었고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사망한다. 여기서는 갑신정변은 없어서 개화당의 일원으로 지내는 중이다. 안태훈이 차린 정동구락부에 자극을 받아 장동구락부를 만들었다.
관직 생활 초기에 김옥균, 김홍집, 김윤식과 더불어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귀남의 총애를 받게 된다. 김옥균을 제외한 다른 경연관들처럼 관직생활이 탄탄대로라 최익현 내각에서는 호조판서를 맡았다. 이후로도 계속 호조 일을 도맡아 보면서 동문들 중 가장 강한 업무강도를 감당하는 중이다. 김옥균 내각에서 좌의정으로 영전했다.
관직 생활 초기에 김옥균, 어윤중, 김윤식과 더불어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귀남의 총애를 받게 된다. 서태후가 베이징의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광서제를 데리고 피신하였을 때 김옥균과 함께 청나라에 파견되었는데, 김옥균이 월권으로 서태후의 조선파천을 주도하자 이해는 하면서도 계속 근심한다. 귀남과 이 일에 대해 논의하던 와중에 교린삼장의 뜻을 세울 것을 청하게 되었다. 최익현 내각에서 예조에 발탁되었으며 그중 외무를 맡고 있는 외무참판이다. 민태호 내각에서는 예조판서 자리에 오른다.
김옥균 내각에서 단행한 세대교체 겸 개각 때 판서직에서 물러나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하필 드레퓌스 사건과 얽히고 만다. 처음에는 성품대로 이치를 따져 설복시키려 했으나 반유대주의의 광풍에 전혀 효험이 없자 독이 올라 "반유대주의는 카이저의 음모다! 여기 독일 간첩단 300명의 명단이 있다!" 는 오페르트 명의의 선동 논설을 발표해 사태를 해결할 실마리를 잡는다.
관직 생활 초기에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과 더불어 경연관으로 있으면서 귀남의 총애를 받게 된다. 최익현 내각에서는 예조판서를, 민태호 내각에서는 이조판서를 맡았다. 김옥균 내각의 개각 때 세대교체 이야기가 나오자 몇년 쉬겠다며 사임한다.
윤웅렬의 아들. 서재필과 함께 석전을 대체하여 스포츠를 전파하려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체육활동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여, 한강변에 사격장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1.1.3.2. 만민공산당

역관 출신의 개화파 중인. 상당한 애처가이자 공처가다. 천덕만의 군밤을 계기로 원 역사보다 이르게 고종과 연을 터서, 용상에 오르기 전 글공부 스승 노릇을 했다. 아이 글공부 가르치는 요령은 명성 자자한 맹공서당(孟孔書堂)에서 배워온 모양. 원래는 박규수 밑에 있었으나 명문거족 출신인 박규수와 중인 출신인 자신의 입장과 위치가 달라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흥선대원군파로 갈라섰다. 그러다가 1874년에 치러진 한성 참의대부 재보궐선거에 박규수와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다. 마타도어까지 해가며 옛 동지인 박규수를 공격했지만 결국 낙선하고 만민공산당의 녹사(서기)가 됐다. 그래도 박규수 말년에는 옛정 생각에 섭섭한 마음 접어둔 채 알던 역관들에게 수소문해 유작 짓는데 필요한 서양서적들을 모아다 건넸다 하니 어느 정도 화해는 한 셈이다.
원 역사에서 아내를 앗아간 콜레라에 걸려 1879년에 사망하지만, 본작에서는 서양 의술의 도입이 상당히 조기에 이루어져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일 없이 1888년 총리대신으로 당선된 최익현의 지명을 받아 형조판서에 오른다. 그리고 영수에서 물러난 최한기의 뒤를 이어 만민공산당의 영수가 됐다.
원 역사에서 지구전요를 남긴 실학자. 천덕만의 장인어른이다. 원 역사에서는 죽을 때까지 어떤 벼슬도 하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였지만 본작에서는 벨레의 행보에 자극을 받아 한양 남부 참의대부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였고 당선됐다. 그리고 동문수학하던 대원군의 부탁으로 만민공산당의 영수를 맡게 됐다.
원 역사 민족대표 33인의 일원. 오경석의 아들이다. 공산당의 정론지 '익정신보'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호는 해몽. 원 역사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그 녹두장군 전봉준이다. 원 역사와 달리 동학에 마음을 두기 전에 먼저 공산주의에 심취했다. 그래서 만민공산당이 '보완'하여 내놓은 공산당 선언이 순 사이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이를 바로잡고자 가타야마 센와 손잡고 공산주의 스터디 그룹 '대동사'를 꾸려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프롤레타리아 독재 따위의 무엄하기 짝이 없는 말이 유행하게 됐을 때 이를 저지할 조선식 공산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대원군에게 발탁되어 '마씨(=마르크스)를 비롯해 고금의 여러 학설을 망라하여 제대로 된 공산론을 펼처보라'는 임무를 받고 마음의 스승(?) 마르크스가 있는 런던으로 유학을 가게 됐다.
영국에 도착하고 나서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 간다는 생각으로 마르크스가 있는 메이틀랜드 파크 41번지로 달려가 아시아 사정에 맞는 사회주의 이론을 만들고자 하니 많은 가르침을 달라며 용감하게 하숙 겸 사사를 청하여 그의 제자가 됐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러노어와 결혼하여, 마르크스 사후 아내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사회주의 학파를 세운다.
현재 만민공산당의 브레인을 맡고 있으며 해동일보에 익명으로 기고문을 투고하여 군비 증강을 저지했다. 이후 대표로 영전한 오경석을 대신하여 만민공산당의 녹사가 됐다. 제2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에서 인천부의 참의대부가 된다.
칼 마르크스의 막내딸. 유학 온 전봉준과 눈이 맞아 결혼했다. 봉준에게 배워 조선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아버지 사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정착했다. 조선에 입국한 바로 그날 자신에게 수작을 부리는 조병갑을 원펀치로 KO시켰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남편 봉준이 추구하는 '제도 내에서의 개혁' 노선을 돕고 있다.
원 역사 조선일보 제4대 사장. 박정양의 문객으로 있다가 개화당 돌아가는 모양새에 실망하여 낙향하고서는 자신의 고향 서천군의 참의대부로 뽑혀[10] 역대 최연소 참의대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원 역사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승호와 달리 공산당에 붙는 쪽을 선택하였다. 제1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 만민공산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최익현 내각 출범 이후 원내 1당 배려 차원에서 좌의정으로 발탁되었다. 원 역사에서는 세자 척의 장인이지만 조선이 반쯤 입헌군주국으로 전환된 본작에서는 외척이 돼도 딱히 좋을 게 없겠다 싶어 나서지 않았다. 선택이 옳았는지 제2회 영의정 겸 총리대신 추거에서 개화당 영수 박정양을 누르고 4대 영의정 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조선에 공황이 터지자 이에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테니 걱정말고 해결하라며 총리 자리를 내놓는다. 자신은 어차피 팔자에도 없는 총리자리까지 한 번 올랐으니 만족한다고 한다.

1.1.3.3. 자유당

원 역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화서학원에서 공부할 때 '흥국부도'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에 심취하여 팽창주의자 모임 '자강사'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세미나를 열어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마씨잡변'이라는 책을 발표해 가타야마 센과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다.
그 후 고시 준비에 매달리다 한양에서 우연히 만난 황현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황현처럼 산학이 나오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타입이지만 이쪽은 그래도 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현 참의대부 제도의 폐단을 알고 독자 정당을 꾸리고자 고민하던 중 때마침 총리 출마를 결심한 최익현과 만나 실용적 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자유당을 차렸다.
원 역사에서 매천야록을 남긴 그 황현이다. 꼬장꼬장한 성격이다. 징집되어 경흥에서 상사로 복무를 하던 중 녹둔도 영유권 문제로 러시아 제국군과 갈등을 빚었다. 전역하고 나서 유학생 신분으로 영국으로 갔다. 이때 군대에서 독학한 영어 실력으로 스펜서에게 도전장을 내민 전우를 옆에서 도왔다. 이후 노사학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청운의 품을 꿈고 상경했건만 고시 과목에 산학이 있고 황현이 수포자라서[11] 거듭 낙방 끝에 나라를 돕는 길이 벼슬 뿐이겠냐며 공부 때려치고 자유당 당직자가 되었다. 참고로 원 역사의 황현은 생원시 복시에서 장원 급제를 했다(...).
기자조선의 행적을 찾기 위해 민간의 기부를 받아 평양 유물 발굴에 나선다. 몇몇 유물이 나오긴 했으나 기대했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자동래가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 사실이 미칠 파급력을 우려해 침묵을 지켰다.
원 역사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집안이 반남 박문과 악연이 많아 개화당에 몸 담고 있기 무엇하여 자유당으로 넘어왔다.

1.1.4. 명문세족


하옥대감. 안동 김문의 수장이었으나 귀남의 효자율이 불러온 나비효과 때문에 고종이 즉위하기도 전에 권세를 잃고 만다. 대원군의 근왕파를 견제할 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박규수의 배려로 패가망신은 면했지만, 이때의 충격이 워낙 커서 원 역사보다 3년 빠른 1866년에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죽고 나서도 이완용이 주도한 명문 벌열 공격에 시범타로 걸려서 그 유명한 나주 합하 일화가 까발려지는 등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 김문 내부에서도 김좌근은 욕먹어도 싸다는 분위기라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김좌근의 양아들. 안동 김문의 실세였지만 문중내 정치싸움에서 재빨리 흥선대원군 라인으로 갈아탄 병학, 병국 형제에게 패배하여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박규수의 할아버지.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이다. 박규수가 노환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깜짝 등장했다.[12] 이때 기특한 손자에게 "원래 네가 연암의 손자로 남아야 하는데 이제 내가 환재의 할아버지로 남겠구나."라고 말하였다.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아버지. 아들이 친 사고 때문에 음독자살한 원 역사와 달리 여기서는 무탈히 지내고 있다. 조정에서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립적인 행보를 보여 국제가 선포된 후 이유원 대신 영의정 겸 총리대신이 됐다.
원 역사에서 김옥균을 암살한 것으로 유명한 온건개화파의 일원. 원 역사에서는 명문가 말예로 가정 사정이 좋지 않아 나이를 많이 먹고서야 자비로 프랑스에 유학을 갔는데 여기서는 조선이 수교를 할때 유학생을 보낸다는 사실을 듣고 20살에 홀로 상경하였고 그걸 기특하게 여긴 귀남이 유학에 포함시켜줘서 프랑스 유학을 가게 된다. 도착하고 얼마 안돼서 프랑스어를 익혀 신문을 김병학에게 번역해주기도 했다. 나중엔 호조정랑에 올라 특허관련 사무를 본다. 이후 최익현 내각에서 호조의 재무참판으로 발탁되었다. 유학가서 배워온 학문으로 가난한 집안을 일으킨 인물이다보니 서민경제에도 정통하고 경제이론가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재무관료로 활약중이다.
원 역사처럼 개화를 규탄하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다가 나이 스물에 목이 달아날 뻔했지만 귀남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한다.
자영의 의붓오빠. 어떻게든 대원군을 실각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음모를 꾸미지만 항상 실패하는 허당이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잔챙이라 대원군이 견제할 필요가 없어 원 역사와 달리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귀남과 자영의 첫 자식이 사망하자 대원군이 서양 무당을 데려와서 아이가 죽은 것이란 식으로 소문을 퍼뜨렸는데 정작 양의를 직접 부른 귀남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려 바짝 엎드리게 되고 대원군에게 끌려가 어용 신문을 만들게 된다. 마지막으로 나올 땐 동삼성에 진출한 조선인들을 감독하라는 지시를 받고 변발을 해야하나, 가짜 천주교인이 되어야 하나 고민하는 지경에 이른다.

1.1.5. 기타


  • 천하장안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전에 어울렸던 중인 신분의 4인방. 각자의 성을 따서 천하장안이라고 부른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하지 못하는 궂은 일을 도맡아했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수족으로 쓰이다가 다들 편안한 노후를 보내다가 1892년 기준으로 장천동을 제외하고 모두 천수를 누리고 갔다.
  • 천덕기
천덕만의 숙부. 중인이다. 그런데 장사나 손재주 부리는 일에 영 재주가 없어 천하장안에서 주먹질을 담당하게 됐다.
  • 하일평
일명 족제비. 도성 색주가를 꽉 잡고 있다. 도성 안의 소문이라면 익문사만큼이나 훤히 알고 있다.
  • 장천동
재간꾼. 구름재댁이 운현궁이 되면서 어엿한 문객이 되었다.
  • 안동수
바람잡이. 시람 마음을 잘 읽는다. 그래서 대원군을 대신하여 익문사를 지휘했다.
산림의 거두. 최익현의 스승. 귀남이 즉위한 후 대원군의 부탁을 받고 조정에 출사하여 동부승지가 됐다. 척화파로 '개화소'의 신법에 거세게 반발했으나 "밤은 알맹이가 없는 쭉정밤이 아니고서야 전부 잘 구우면 맛있다. 지금 조선의 상황은 집에 노모가 계신데 포대자루에 밤이 몇 톨 안 남은 것과 같다. 맛있게 구워서 양껏 드시게 해 드려야지 두어 톨만 바칠 수 있겠느냐."는 귀남식(?) 흑묘백묘론과 자신을 벌하거나 정치적 희생물로 삼지 않고 진지하게 설득하려는 그 태도에서 정학을 경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고 감화되었다. 하지만 본인이 이해하는것과 받아들이는건 별개라 개화의 흐름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정학의 도를 지킬 수 있는 제자 최익현에게 뒷일을 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후에 제자들이 호를 딴 화서학원을 세운다. 그의 문하생들이 훨씬 현달한 덕분에 원역사보다 십수년 앞서 문경공(文敬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최익현의 사형. 명석한다는 소리를 못 듣지만 우직하면서도 마음씨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최익현이 출사한 이후 화서학파의 좌장이 되었다. 개화 초기 그토록 열심히 힘써 배웠건만 선비가 필요 없는 세상이 왔다고 좌절하였으나 안동 김문의 후원을 받아 세운 화석학원을 운영하고 제헌 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했다.
최익현의 후배. 화서학원에서 서양사를 가르치고 있다. 명전법이 시행되면서 처분한 전답값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철저한 복고주의자였던 원 역사와 달리 젊었을 때부터 개화의 뜻을 두었고 서양사를 공부하면서 여러모로 개방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신촌향약 문제로 문중 어르신들이 집결했을 때는 우리도 백성들에게 양보할 거는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 최영조 & 최영학
최익현의 장남과 차남. 화서학원에서 학문을 닦고 있다. 둘 다 흥국부도라는 이름의 제국주의에 심취하여 아버지 속을 썩였다.
원 역사 의병장. 화서학원의 학생이다. 유인석의 태서통사(서양사통사)를 수강하고 있다. 제1회 전국 추거를 앞두고 유인석에 어느 당을 찍을지 여쭈었는데 정말로 듣고 싶다면 박사 과정까지 밟으라는 대답이 돌아오자 황급히 자리를 떴다.(...)
원 역사에서처럼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유학자. 원 역사에선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참의대부로 추천되어 도성으로 상경한다. 나중엔 톈진 교안[13]의 후처리를 위해 텐진에 의회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참의대부 제도가 조광조현량과에서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는 제도라고 높이 평가하는 중. 사후에 제자들이 호를 딴 노사학원을 세운다.
원 역사에서 조선의 마지막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 원 역사처럼 이항로와 기정진의 논설을 모두 비판하는 논설[14]로 양쪽 제자들한테 찍혀 영국에 도피성으로 유학왔다가 스펜서와 헉슬리 등 당대 다윈의 추종자들과의 논쟁과 토론에 참여했다. 이후 진화론의 사문난적(...) 프랜시스 골턴과의 공개 토론회에서 2승 1무를 기록하였다. 이때 활약으로 청나라 강남 향신들 사이에서도 명성을 떨치게 됐다. 조선에 귀국한 이후 1889년에 최익현의 부탁을 받고 취푸에서 열리게 된 국제 유교 학술대회의 운영 총책을 맡게 됐다.
원 역사 조선 말의 유학자. 경북 성주군에 위치한 성산에 대학원을 차렸다. 제헌 과정에서 임금이 자신이 세운 법을 자신이 따름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며 입헌군주제를 옹호했다.
원 역사 조선 말의 유학자. 노씨권학상 정하는 일로 한주학원 대표로 위촉되어 간만에 상경하였다가 가로등 아래서 남녀가 부끄럼 없이 상종함을 보고 대경하여 남녀가 유별함을 강조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후 전우를 도와 취푸에서 열린 국제 유교 학술대회의 사무를 맡았다.
원 역사에서 이필제의 난을 일으킨 그 이필제다. 국뽕에 취해(...) 북벌의 때가 왔다며 사람들을 선동하여 청국 공사관을 뒤집어 엎는 사고를 쳤다. 심지어 친국을 받는 와중에도 천하의 무도한 자들을 정벌해야 한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놔 귀남을 분노케 하였고 귀남이 "역시 사내는 군대를 가야 전쟁 무서운 줄 알고 사람이 된다."고 확신하게 되어 조선의 징병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필제 역시 징집되어 갖은 욕을 다 먹어가며 길림성에서 뺑이쳤다.[15] 전역하고 나서도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길림성에서 살고 있다. 천도교에 입교하면서 이름도 바꿨다.
조선 후기의 화가. 오경석을 부탁을 받고 익정신보에 박규수를 공격하는 만평을 실었다. 이후 1874년에 오경석의 갑질에 분노해 홧김에(...) 뜻이 통하는 이들을 모아 신보도둥(신문노조)를 결성하였고 이를 계기로 도중 결성붐이 일었다. 그런데 영혼이 자유로운 장승업은 막상 소요가 길어지니 지루하다며 슬쩍 뒤로 빠졌다(...).
원 역사에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은 무당. 본작에서는 주영공사로 부임한 이호준이 영국 귀부인들 사이에서 심령주의가 유행한다는 것을 알고 요샛말로 표현하면 민간 외교관으로 써먹기 위해 유학생으로 데려와 사교계에 풀어놓았다. 현재 '신령의 참 주인(Mistress of Spirits)'을 자처하며 귀부인들의 강령회에 단골로 끼어들고 있다. 독일의 황태자비 빅토리아도 황태자의 수술 문제로 상담을 청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는 듯 하다.
  • 안인수(安仁壽)
안중근의 조부. 한미한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재주가 좋아 싸전을 경영하며 틈틈이 땅을 사들여 족히 천석꾼 소리 들은 법하게 되었고 명전법이 시행되고 나서는 곳간 헐어 고을의 환심을 두루 사 해주의 참의대부가 되었다. 이후 시류를 읽고 이런저런 기물의 작은 부속 따위를 만드는 공방을 차렸는데 꽤 성황을 이루어 도성에서 세도가 우두머리들 다음 가는 부를 쌓았다. 그러나 돈만 가지고 거족들에게 대우받을 수는 없었고, 김병학의 회갑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욕을 본 이래로 거족들이 하는 일이라면 우선 팔 걷어붙이고 훼방부터 놓고 있다.
  • 안태훈(安泰勳)
안인수의 아들. 안중근의 부친. 원 역사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 유학이 좌절되어 은거했다가 동학농민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본작에서는 안인수의 의지로 과거 대신 해외 유학을 다녀오고 사업 감각을 기르고 있다. 안인수가 신흥 재벌이라 명문가들이 무리에 끼워주지 않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사상을 전파시키기 위해 정동에 건물 하나를 세내어 조선 최초의 클럽 정동구락부를 차린다.
원 역사의 독립운동가. 조선의 신흥 재벌가의 대명사 순흥 안문의 장손이다. 한창 사춘기라 서원을 빠지고 윤치호가 운영하고 있는 실탄사격장에 가서 총을 쏘곤 한다. 할아버지인 안인수가 개화당, 즉 명문세족들을 증오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다.
너무나 유명해서 귀남옹도 알고 있는 그 사람.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규장각 직각으로 일했다. 딱히 나라 팔아먹을 행동을 하지는 않고 있지만 이름 들었을 때 식겁했던 귀남옹이 뭐 하나 걸리기만 하면 바로 쳐내겠다고 경계하고있다. 원 역사의 이완용처럼 거창한 이상이나 도의를 추구하지 않는 철저한 보신주의자다.
김옥균의 부탁을 받고 만민공산당이 개최한 인터내셔널 대회에 방청객으로 참가해 분란의 씨앗을 뿌렸는데 큰 효과는 없었다. 이후 '이완용'이 '일본인'이 대거 참가한 '공산당 대회'에 참석한 것에 기겁한(...) 귀남이 무슨 이유로 그런 곳에 참석했냐고 직접 추궁하자 곧바로 김옥균이 시킨 짓이라고 불어버렸다. 그 결과 옥균이 주도화는 개화당과 척을 지게 됐다.[16] 자평하기를 복수심을 품지는 않았지만 출세욕은 여전하여 자유당의 줄을 잡아 출세할 생각으로 안인수를 꾀어 명문세족들의 부정부패를 해동일보를 통해 기사화했다.
원 역사에서 고부 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탐관오리. 인천 부두에서 유명한 망나니다. 막 조선에 입국한 엘러노어에게 수작을 부리다가 엘러노어의 주먹에 맞아 인천 부두 한복판에서 널부러지는 개망신을 당했다. 조선에서도 엘러노어의 아버지 칼 마르크스가 유럽의 큰 선비(...)로 유명하여 따지자면 이항로나 이진상의 여식을 건드린 것과 진배가 없어 법적 조치는커녕 어디가서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유인석의 조카며느리. 유인석이 차린 정미소를 대신 운영하고 있다. 제1회 참의대부 추거 때 정 뽑을 당이 없으면 여학을 널리 세운다는 공산당이나 뽑아달라 부탁한다.
동학의 교조. 원 역사에서는 나이 마흔 하나에 순교하였으나 본작에서는 귀남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여 사면을 받았다. 그리고 동학이 어엿한 종교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서양이라는 뒷배가 있는 천주교와 달리 딱히 내세울 것이 없어 교세 확장에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운 신도들을 찾아 조선인들이 속속 정착하고 있는 만주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간판을 천도교로 바꿨다.
원 역사 동학의 제2대 교주. 연해주 대접주 구실을 하고 있다.
원 역사의 의병장. 징병된 장병들이 조선 팔도의 호랑이 씨를 말려 연해주 일대에서 포수 생활을 하고 있다.
원 역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2~4대 주석. 현재 안씨 가문에서 식객으로 있으면서 또래인 안중근과 어울려 다니고 있다.
원 역사의 을사오적. 궐석인 공조 상공참판을 대신하여 기무회의에 들어온 참의다. 영국의 동맹인 일본과 짜고 가짜 분쟁을 벌여 동맹인 프랑스와 러시아에게서 경제개발 오개년 계획 추진 자금을 얻어오자고 제안한다. 우발적 교전으로 독도 주변에서의 분쟁이 규모가 커지자 덜컥 겁을 먹고 사실 이 계책은 이토가 사적으로 제의한 것이라고 자백한다. 이것만이면 모르겠으나, 공안서 뒷조사로 이토에게 돈 받은 것도 걸린 모양이니 사실상 관직 생활은 다 한 셈이다.
원 역사 민족대표 33인의 일원. 아직 계를 받지 못한 화계사의 불목하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에 1895년에 가출하여 절간에 들었다. 이왕 가출한 거 세상을 더 보고 싶어 서울 근처 삼각산을 택하였다.

1.2. 일본



1.2.1. 정부


원 역사 유신삼걸의 일원. 류큐를 복속시키는 데 실패한 사이고가 실의에 빠져 낙향한 이후 내무경에 취임했다. 서남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원 역사처럼 벌건 대낮에 낭인들 칼에 맞고 죽는 일은 없었지만, 그 대신 요시노부가 이끄는 옛 좌막파에게 시달리며 개혁을 추진해야 했다. 하지만 영일동맹을 계기로 신식무기들을 속속 들여오고 있고 산업 또한 조선을 따라잡았기에 만족하고 1대 총선거를 계기로 은퇴를 결심한다.
원 역사에서 막부의 중역이었으나 보신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다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설득하여 에도성 무혈 개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도 웅번에서도 조심스러운 존중을 보이는 거물인데 조일수호조규 체결 당시 꼬여버린 자주국 자립국 문제를 해결하라며 막부에서 주조선초대공사로 보내버렸다.
원 역사 일본 제국 제5대 외무대신. 이토 히토부미와 절친한 사이다. 조선에서 수신사를 파견했을 때 길잡이를 자처했다. 이후 가쓰 가이슈 다음의 주조선 일본 공사로 부임한다. 조선 공사라 하면 공사들 중에서도 특히 윗줄이지만 중앙 정계에서 밀려 아쉬워하고 있다. 이토의 부탁으로 예조판서 김윤식과 연결해준다.

1.2.2. 국회



1.2.2.1. 애국공당

에도 막부 제15대 쇼군. 덴노에게 조적으로 찍혀 맥없이 항복했던 원 역사와 달리 여기서는 조선에서 파견한 수신사가 불러운 나비효과로 인해 보신전쟁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막부를 해체하고 쇼군 자리에서 내려왔음에도 동국(현재의 동일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국회가 설치된 지금은 옛 쇼군이 대정봉환의 큰 뜻을 짓밟으려 한다는 경계심을 살까봐 민권운동 세력을 포섭하여 창당한 애국공당의 일개 평의원으로서 신정부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다수결로 재집권하기 위해서 군권(君權)과 민권을 함께 높일 것을 주장하고 있다.

1.2.2.2. 입헌정우회

원 역사 일본 제국의 초대 총리. 사이고가 낙향하고 다카요시가 병으로 쓰러지자 약삭빠르게 그 빈자리를 노려 신정부의 이인자 자리를 얻어냈다. 그런데 요시노부를 무너뜨릴 계략을 냈다가 그 악명을 기억하는 귀남에게 역으로 당해 권력을 잃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하와이에서 일어났던 유혈 사건을 두고 허스트와 퓰리처가 황화론 공방을 주고 받았을 때 경서와 칼이라는 칼럼을 투고하여 동북아 전문가로 입지를 다졌다. 이때 얻은 명성과 영일동맹을 이끌어낸 공으로 정계 복귀에 성공했다. 일본이 이대로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선의 선의(?)에 물들어 정한론이나 전쟁을 그저 골치아픈 것으로 여기고 있다.[17]

1.2.2.3. 일본공산당

원 역사 일본 제국 제12·14대 내각총리대신. 류큐 문제가 불거졌을 때 사이고 다카모리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파리 코뮌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공산당 선언을 읽고 일본에 일본공산당을 세운다. 전봉준이 연 인터내셔널에서 일본 쪽 상황을 알리는 등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듯 하다.
원 역사 일본 사회주의자. 원 역사에서는 활자공을 하며 모은 돈으로 미국에 유학갔는데 여기서는 동국과 서국 사이에 어정쩡한 쿠니 출신이라 일본이 아닌 조선을 유학지로 선택하고 인천의 경일학당(리세 베르뇌)에서 수학하면서 공산주의에 감화되고 전봉준과 사형사제관계가 된다. 이후 정통 마르크스 이론을 설파하다가 대원군에게 끌려가 어떻게 맑스의 이론만이 옳고 동방의 이론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지적받아, 일단 조선식 공산주의(...)를 연구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는 언론계에 투신한 긴모치를 대신하여 일본공산당의 실질적인 총책을 맡고 있다.

1.2.3. 기타


조슈 번의 유신지사. 일본에 들어오는 조선 인삼의 물량을 늘어 원 역사보다 조금 더 살았다. 조선에서 수신사를 파견했을 때 동지들에게 막부가 아니라 조정이 카운터파트로 나서면 서로 같은 급을 인정하는 꼴이 되니 에도로 올려보낼 것을 제안했다. 신사쿠는 꿈에도 몰랐지만, 이 선택으로 인해 보신 전쟁이 무승부로 끝났다.(...)
원 역사 일본 제국 제3·9대 총리. 이토의 일본책략 계획에 가담했다가 망하자 이토를 팔아넘겼다(...). 원 역사에서 일본 육군의 창설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인데 여기서는 해군 육성을 조슈 번이 맡게 되면서 일본 해군의 아버지가 되게 생겼다. 조일동맹이 파기되면서 입헌정우회 주도로 육군 육성에 들어갔고 이 또한 야마가타가 맡게 될 듯 하다. 원 역사와 달리 국수주의에 심취할 일이 없어 '황군의 무적 정신력' 따위는 헛소리로 여긴다.
원 역사 유신삼걸의 일원. 원 역사대로 사이고가 낙향할 무렵 쓰러져 병환으로 사망했다.
원 역사 유신삼걸의 일원. 대만 점령과 류큐 병합을 꾀하였으나 조선의 개입으로 둘 다 실패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낙향한 뒤 병환으로 사망한다.
탈아론을 주장한 일본의 사상가. 유영복 국제사법재판에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국학자들이 청나라에서 열린 유학 만방대회에 참여하자 국학자들이 일본의 명예에 누를 끼칠 것 같아 그에 대항해 참여한다.
원 역사 신센구미의 국장. 조선에서 수신사을 파견했을 때 길잡이를 자처하며 에도를 방문한 이노우에 가오루를 상대했다.
원 역사에서 일본에 루소를 소개한 자유주의 사상가. 원 역사에선 기인으로 유명해서 나카에 초민 기행담이 발간되었을 정도인데 여기서는 유학 만방대회에 속으로는 감격했으면서 겉으로는 성현 집안에 내려오는 가주를 맛보려 왔다는 핑계를 대고 참석한다.

1.2.4. 훗카이도 공화국


원 역사 에조 공화국 초대 총재(대통령). 가이슈를 대신하여 육군총재직을 차지한 야미오카 텟슈를 설득하여 에도성 사수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보신전쟁이 원 역사와 달리 교토 공경들의 중재로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요시노부가 의회가 설치되면 피를 보지 않고 합법적으로 집권할 수 있다고 여겨 신정부와 타협하자 이에 반발하여 하급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홋카이도로 건너가 에조 공화국을 건국했다. 처음에는 욱하여 독립 운운하였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자치권을 얻는 데 만족했다. 이 과정에서 국명을 훗카이도 공화국으로 바꾸었고 대선을 치러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신선조 3번대 대장. 무사도를 잇겠다며 신선조를 떠난 뒤 북해도 공화국에 정착하여 자신의 검술과 다른 이들 기술 이것저것을 섞어 검 한 자루와 권총 한 자루를 사용하는 '일도일포류'를 개창했다. 이후 문하생들로 보안업체 그러니까 용병단을 꾸려서 명성을 떨치던 중에 조선의 중매로 하와이를 넘어가 칼라카우아 국왕의 친위대 노릇을 하게 됐다. 그런데 수상 깁슨이 왕명을 잘못 전달하여 백인 지주들의 무장단체 호놀룰루 소총대 대원 네 명을 직접 처단했다.

1.3. 청



1.3.1. 황실


  • 광서제 아이신기오로 자이티얀 (=애신각라 재첨)
청나라 제11대 황제. 원 역사에서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캉유웨이량치차오를 등용하여 변법자강운동을 실시했지만 서태후가 주도한 수구 만인 세력의 쿠데타로 유폐되고 결국 암살당한 비운의 황제다.[18] 막 용상에 올랐을 때는 연소하여 그 이후에는 이홍장이 정권을 잡아 저를 부르는 사람도, 의지하는 사람도 없어 그저 서책을 벗삼고 있었는데 강남에서 끝도 없이 올라오는 절절한 상소문을 보게 됐다. 그 글에 자신에게 간청하는 글귀 들어있는 것이 진심은 아니요, 그저 겸양하기 위한 뜻임을 모르지 않았건만, 그럼에도 울컥하는 마음에 드는 것은 금할 수 없어 비밀리에 조선국으로부터 신하를 설득(?)하는 방법을 배워 이홍장을 직접 설복시키고 의회 설치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친정에 나섰다. 이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이후 1889년에 중국 대륙을 넘보는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음모에 대항하기 위하여 표현의 자유 인정과 시장 전면 개방을 뜻한 '백가쟁명 백문제개'의 윤음을 내렸다. 이러한 행보가 쌓여 중국의 젊은 황제가 조선의 조언이라면 가볍게 흘려듣지 않는다는 소문이 북경 외교가에 파다하다. 서태후가 자금성을 나가게 되어 원 역사와 다르게 자금성 내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되었다. 손덕명과 원세개를 측근으로 끌어들였으며 이로 인해 이홍장은 사직하였고 독살 미수 자작극을 벌인 서태후는 사실상 광서제 밑으로 들어왔다.
원 역사의 각순황귀비 타타라씨. 원 역사에서 후궁이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광서제의 정비인 황후가 됐다. 원 역사처럼 섭영(사진)에 관심이 많아 기술자들을 불러 섭영술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원 역사 청말의 황후, 황태후, 섭정. 서태후로 유명하다. 권력욕은 여전한데 원 역사에서 의화단 운동으로 대표되는 반서구파를 지원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는 장지동의 말에 넘어가 '동아철도회사' 일명 '동철'의 최대 주주가 되며 개화에 동참한다. 당시 댓글에서는 이것만 해도 중화 중흥의 주역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난리가 났다.
공친왕이 일으킨 정변을 이홍장과 그의 회군이 막아내긴 했지만 군사력이 집중된 이홍장에게 권력이 집중되었고, 결국 불만을 품고 베이징에 1700년대부터 존재하던 러시아 정교회 성당으로 피신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일이 꼬여 조선으로 쫓겨나듯이 와야 했고 현재 조선 왕궁에 거주중. 대신 쫓겨나면서도 동철 지분은 챙겨와서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고 실제로 조선왕이 자신에게 붙여준 김옥균을 이용해서 동철 대주주로서의 업무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업무를 위해 한양보다 감시가 적은 온양으로 내려오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1888년에 옥균의 조언을 받아들여 가지고 있는 동철 지분 절반을 독일에게 넘겨주고 얻은 화포와 군함을 가지고 북경으로 화려하게 돌아왔다. 이어 북양군을 견제하고자 그 화포와 군함을 이홍장과 대립하는 장지동에게 넘겨주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황권에 기댄 권세를 부질 없다는 것을 깨닫고 대원군이나 도쿠가와 요시노부처럼 민심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권력을 누리려 한다. 흠정당과 국민당 내 반서태후 세력을 제거하려 자작극을 벌였으나 이를 광서제에게 들켰고 이로 인해 광서제가 천하를 우롱했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칠 수 있게 되어 광서제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된다.
원 역사에서 종친을 대표하여 이홍장 등과 함께 동치중흥을 이끈 함풍제의 이복동생. 국제 인식은 정확하나 실무능력이 떨어진다. 서구 열강에게 디저트로 전락한 청나라의 현실을 못 본 척 시간만 보내는 조정에 회의를 느끼던 중 새로운 왕이 즉위함과 동시에 빠르게 문명국으로 발전하고 있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문공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태후의 빠른 피신과 서구의 선진 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진압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란이 성공한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때 조선의 중재로 목숨을 건져 청의 발흥지라고 할 수 있는 동삼성, 즉 만주총독으로 임명된다. 사실상 만주로 유배를 가게 된 것이고 본인도 이를 알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청이 완전히 무너진다면 중원에서 쫓겨난 만주족의 나라가 필요할 때가 올테니 지금 만주에서 기반을 다지는 것도 썩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만주가 생각보다 빠르게 발전하여 때때로 대청의 부흥이니 뭐니 집어치우고 동삼성만 떼어 독립해 칸 노릇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현 황제이자 조카인 광서제가 친정과 신정을 선포하자 그가 청을 다시 세우는걸 도와 청사에 남기를 원하고 있다.
광서제의 친부. 공친왕의 동생. 재주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천하의 대국을 바라봄은 공친왕만 못하고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서태후만 못하다는 소릴 듣는다. 원 역사대로 1891년에 병으로 작고했다.
원 역사의 청나라 초대 내각총리대신. 병으로 작고한 순친왕을 대신하여 자의원의 총재를 맡고 있다.

1.3.2. 중원



1.3.2.1. 북양군

원 역사에서 청말의 북양대신으로 양무운동의 핵심. 여기서는 서태후가 개화에 동참하게 되면서 원 역사에서 서태후의 물밑 지원을 받는 반 개화 청류파의 견제를 받았던것과 달리 서태후와 손을 잡게 된다.
서태후 편에서 공친왕의 정변을 막아내며 단독으로 집권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남아있던 청류파를 솎아내기도 했지만 그에 불만을 품은 만주인 고관들과 서태후의 조선파천 과정에서 친러 만인 정권이 들어서며 살짝 밀린 상태. 대신 북양함대에 대한 지원은 끊기지 않아 강력한 군권은 유지중이다. 국제적인 위상이 날로 상승하고 있는 조선을 경계하고 있으며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의회 설치 등 기존 중국의 전제군주정을 위협하는 요소는 일절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
결국 의회의 문이 열리자 서태후의 국민당에 대항하여 국론일치를 외치는 흠정당을 차렸다.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때 광서제가 원세개를 측근으로 삼아 그에게 북양대신직을 내리면서 하직하게 된다.
이홍장의 막료. 원 역사와 달리 유학 경험은 없지만 그 능력은 여전하다. 장수나 책사는 아니로되 군대에 꼭 필요한 참모다.
원 역사 북양정부 초대 대총통. 이홍장의 부관으로 일하다가 의회 설치가 확정되자 눈에 띄는 북양군 대신 의화단을 이용해 여론몰이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타고난 모략가 기질을 발휘하여 반 조선 여론을 형성하였지만, 청국 입장에서도 충분히 수용할만한 정책에도 태클을 걸어 이홍장으로부터 적당히 하라는 꾸중을 들었다.
이홍장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두텁게 하기 위해 의화단을 통해 국민당을 겁박하여 세를 누르려 했지만 전봉준의 계략(?)[19]으로 의화단의 구호 '양이를 몰아내자!' '일을 달라! 땅을 달라!' 라는 조선식 공산주의(...)에 영향을 받아 의화단의 트란스발 공화국 진출에 본의 아니게 말려든다.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때 손덕명과 함께 광서제에게 발탁되어 북양대신이 되었다. 그리고 변법에 대한 반발을 총칼로 억누르고 있는 데 아이러니한 게 이러한 반발 세력이 지주 세력이라 이들과 교역하던 조선인들이 난데없는 공황에 빠진 게 함정.
아무튼 신식무기를 앞세워 남양군의 군권을 회수하고 토지개혁에 반발하는 몽골 왕공들을 진압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 과정에서 북양군의 힘에 취해 조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강남 기기창에 손을 뻗었다. 이에 조선이 경고하고 만주 동삼성 지역까지 중립을 선언하자 오히려 더욱 폭주하여 광세제를 자금성에 사실상 유폐하고 계염을 선포하였다. 조선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끽해야 3만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저지른 행동인데 이에 조선은 총동원령을 내려 60만 대군을 소집하고 최소 9만에 달하는 병력들이 수 차례에 걸쳐서 압록강을 도하하는 것으로 응답하였다.
원 역사 북양삼걸의 일원. 저들 영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북양군의 젊은 군관들과는 달리 여전히 대청의 부흥을 꿈꾼다. 그리고 조선을 얕잡아보는 다른 군관들과 달리 지금 조선의 왕은 송양공이 아니라 진문공에 가깝다고 평하였다. 그래서 풍국장과 자주 충돌한다.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들고 일어난 몽골 왕공들을 소탕하여 북양군 첫 실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마지막까지 재고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결국 북양군의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하였다.
원 역사 북양삼걸의 일원. 조정이 대청이 되었든 대탁이 되었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출세만 생각하는 야심가. 그래서 나름대로 조정에 충성하고 있는 단기서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단기서의 승전보에 몸이 달아올라 전공을 세울 생각으로 원세개에게 조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기기창을 압수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조선이 격분하자 아예 군무는 군부인 우리가 잘 안다며 이 기회에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선동하였다.
원 역사 북양삼걸의 일원. 조용히 할 일을 하는 이로 군관들 중에서는 명망이 높다. 조선이 북양군에게 경고장을 던졌을 때 보국회 학사들 말처럼 변법 속도를 늦추자고 제안하였다.

1.3.2.2. 남양군

원 역사에서 양광총독, 호광총독으로 양무운동의 대표인물. 원 역사에서는 외세를 배격하긴 했지만 부국강병을 내세우고 철도, 병기창[20]등을 통한 근대화를 지향했는데 여기서도 서태후를 설득하여 동철에 투자하게 만들었고 조선의 은 소동때 기술자와 바꾼 은으로 한양병공창을 만들었다. 현재는 남양대신을 맡아 강남 지방의 최고 권력자. 서태후가 가지고 있는 동철 지분 절반을 처분하여 독일로부터 받은 각종 병기와 함선을 건네받아 북양군에 꿀리지 않는 병력을 가지게 됐다. 이홍장에 비해 의회제도에 우호적이다. 남양대신이기에 사실상 강남 세력이 주축인 국민당의 후원자다.
장지동의 막료. 원래 청류파의 일원이었으나 원 역사와 달리 세를 굳히기도 전에 이홍장의 모함으로 파벌이 풍비박산나 장지동 아래로 들어갔다.

1.3.2.3. 보국회

원 역사의 중화민국 임시정부 초대 임시 대총통. 동생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형 손덕창의 억지 때문에 하와이 유학을 강제로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전통적인 중국적 삶에 만족하지 못해 가출하여 홍콩을 경유해 인천으로 왔다.[21] 현재 경일학당에서 의학을 배우고 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일학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하와이 유학생 하쿠올레의 부탁을 받고 통역자로 나섰으나 영어에 유창한 황현이 중간에 끼어들어 큰 활약은 없었다.
의회가 설치되자 곧바로 귀국하여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유영복을 대신해서 자의원 의원이 된 고홍명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다. 국민당 내에서 보국회라는 청년 조직을 이끌고 있다. 서태후 독살 미수 사건 때 광서제가 변법의 뜻을 밝히자 원세개와 함께 광서제의 측근이 된다. 그리고 소위 변법공자들과 함께 변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강유위의 제자. 손덕명이 이끄는 보국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손덕명이 광서제를 따르기로 하자 그를 따라 광서제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변법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할 말은 하고 보는 성격이며 보다 온건한 변법을 추구한다. 군비 늘리는 태세가 무서운 조선을 경계하고 있다.
원 역사에서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했던 사상가 중 1명. 보국회의 일원이다. 덕명과 비슷한 수준의 급진적 변법을 추구한다.
강유위의 제자. 이른바 변법공자의 일원으로 그중에서 말석이다.

1.3.2.4. 기타

공친왕의 심복. 1866년에 흠차치리조선사무대신, 즉 주조선청국공사로 파견되었다. 누구 하나 내치지 않고 나아가는 귀남의 리더십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홍장의 사주를 받은 장문상의 총에 맞았으나 원 역사와 달리 인천에 있는 양의들이 발 빠른 조치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공친왕을 따라 동삼성에 정착하여 사실상 재상 노릇을 했다.
  • 장문상(張汶祥)
조선에 파견된 마신이와 공친왕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던 한인. 마신이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22] 원 역사처럼 마신이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원군이 뿌려놓은 정보망에 걸려 청으로 압송된다.
태평천국을 물리치며 나름대로 명망을 쌓은 만주족 대신. 자주국-자립국 논쟁이 벌어졌을 때 청나라 대표로 파견되었다. 원 역사와 달리 청일수호조규 체결을 승인했다.
이홍장의 스승. 기정진이 이끄는 조사단의 도움으로 천진 교안을 원 역사보다 무탈하게 수습할 수 있었다.
삼구통상대신 재임 시절 조선의 도움으로 천진 교안을 수습한 이후 모창희에 이어 조선에 흠차대신으로 파견되었다. 원 역사에선 야쿱 벡의 난 이후 러시아와의 리바디아 조약을 잘못 맺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조정에 대량의 상납금을 내고 풀려났는데 여기서는 조선에 흠차대신으로 파견되어 비슷하게 호구잡히고는 있지만 마음은 편안한 상태다.
마신이의 후임으로 온 흠차치리조선사무대신. 부임한 지 석 달 정도 지났을 때 이필제가 주도한 모화관 습격으로 곤욕을 치뤘다. 속으로야 수모를 겪게 만든 자들 머리통에 저자 높이 걸리기를 바랐지만, 모창희가 처신을 얼마나 잘못했으면 선량한 나라 조선에서 저런 봉변을 당하냐고 공격당할 것을 우려하여 적당히 사건을 묻고 넘어갔다.
신강에서 공친왕과 함께 야쿱 벡의 난을 진압하였으나 공친왕이 동삼성으로 유배아닌 유배를 당하자 공을 세웠음에도 실각했다.
청류파의 우두머리. 이홍장이 자신이 벌인 마신이 암살 사주를 덮어씌워 처리했다.
  • 장유재
장작림의 아버지. 정축년 북벌 때 영모개라는 도적의 산채가 있는 곳을 말해주었다가 해꼬지 당할 뻔했지만 때마침 조선군이 들이닥쳐 변을 피했다.
청나라의 군인. 흑기군의 우두머리. 청의 지원으로 프랑스군에게 원 역사 이상의 피해를 입혔다. 이후 국제사법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동철에 채용되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중국 시골의 미신적인 사람들에게 철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일[23]을 하며 느긋하게 지내고 있다. 딱히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종종 부추기러 오는 인간들이 있어서 곤란해하는 중. 서태후가 국민당을 세우자 강유위와 함께 국민당의 인재로 언급된다. 의원으로 추대되었지만 이에 부담을 느끼고 대리로 측근인 고홍명을 보낸다.
원 역사 청말 문인. 중국인-포르투갈인 혼혈이다. 혈기왕성한 24살 때 유영복을 찾아가 흑기군의 모사가 됐다. 유영복이 흑기군을 해산하고 나서도 그의 측근으로 활약하고 있다. 광서제가 의회를 설치하자 과도한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유영복을 대신하여 국민당의 의원의 됐다.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사상가. 인과 예를 버리지 않으면서 분란 없이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하고 있는 조선을 보고 자극을 받아 '조선변정고'[24]라는 책을 냈는데 의회 설치를 주장하며 인용한 구절이 문제가 되어 투옥당했다.[25] 이후 광서제가 친정을 선포하며 사면했다. 조선의 제의로 곡부에서 동아시아 유학 만방대회가 개최되자 거기에서 원 역사보다 공자개제고를 일찍 선보여 파란을 일으킨다. 자의원이 설치되자 국민당에 입당하여 자의원의 의원이 된다.
모택동의 아버지.[26] 장사만인소에 이름을 올렸다.

1.3.3. 외번



1.3.3.1. 신강

원 역사대로 난을 일으켰으나 공친왕과 좌종당에게 진압당헀다.

1.3.3.2. 몽골

원 역사의 복드 칸. 이홍장이 몽골족의 자치권을 훼손하는 번부 폐지 정책을 추진하자 이를 계기로 주권 회복을 꿈꾸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몽고 왕공들이 중앙에서 밀어붙이는 토지개혁에 반발하여 칼을 들었을 때 끝까지 말렸다. 그러나 내몽골 왕공족들은 이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결국 북양군의 조선제 맥심 기관총에 쓸려나갔다.

1.3.3.3. 티베트

아직 나이가 어려 집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티베트 독립을 꿈꾸고 있다.
달라이 라마 13세의 스승. 부랴트인이다. 이홍장이 번부 폐지 정책을 추진하였을 때 공친왕에게 간접적으로 티베트의 자치권을 회수하려고 한다면 '너희 칸'이 아니라 러시아 차르에게 붙겠다고 경고했다. 이후 이홍장이 실각하고 광서제가 친정에 나섬에 따라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지만 급격한 토지개혁으로 인해 민심이 요동치자 강남의 실권자 장지동을 찾아가 청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1.4. 류큐


류큐 왕국 제2 쇼씨 왕조 제19대 왕. 원 역사에서는 류큐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었지만, 코치웨카타의 활약으로 독립국의 군주로 남을 수 있게 됐다. 신정부가 류큐 병합을 시도하였을 때 체념하여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주권을 회복한 뒤에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조선과 일본에 공사를 파견하고 류큐의 새로운 먹거리 산업 육성을 꾀하는 등 진지한 태도로 국정에 임하고 있다.
  • 코치웨카타 초조 (=쇼 토쿠코)[27]
원 역사에서 중국으로 밀항해 청 조정에 류큐 왕국 독립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한 인물이다. 본작에서는 조선으로 건너가 귀남의 지지를 이끌어내 류큐 독립 보장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후 초대 주조선 류큐 공사로 부임하여 비지니스 외교에 열중하고 있다.

1.5. 태국


짜끄리 왕조의 제5대 국왕. 맥심 기관총을 조금 헐한 값에 들여올 궁리를 하던 차에 조선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하여 국채를 발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금 일부를 국채 매입으로 대신하여 조선제 기관총과 연발소총을 사들였다.

2. 유럽



2.1. 프랑스


병인박해 때 선종한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일원이다. 본작에서는 원 역사보다 1년 먼저 발생한 병인양요(엄밀하게 말하면 을축양요) 때 프랑스 극동 함대 선발대의 오인 사격으로 선종했다. 이후 귀남의 제안에 따라 그를 기리는 경일학당, 뤼세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가 인천에 설립된다.
원 역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 베르뇌를 명을 받고 상경하여 대원군과 밀담을 나누었다. 을축양요 때 베르뇌 주교가 실수라고 하지만 조국 프랑스의 공격으로 선종하자 허망해 한다. 이에 귀남이 베르뇌를 기려 경일학당을 세우자 감동한다.
  • 앙리 드 벨로네(Henri de Bellonet)
프랑스의 외교관. 을축양요-원 역사의 병인양요-가 원 역사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출세 코스에서 밀려나 졸지에 최초의 주조선 프랑스 공사가 됐다. 을축양요에서 있었던 사건사고를 어떻게든 은폐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조선에 거의 평등한 조약을 맺어주어 프랑스의 국익을 해쳤고 십 년 가까이 눌러앉아 있어야 했던 등 한탄이 많았지만 간신히 복귀. 이후 국제정세가 조금 더 명분에 신경쓰는 방향이 되자 '준문명국에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던 것을 장점으로 삼아 '극동 문제는 극동 전문가에게!'를 주장한 끝에 외교부 장관에 오른다. 후에 극동 문제보다는 러시아 문제가 더 중요해지면서 교체된다.
원 역사에서 병인양요를 주도했던 프랑스 제국 극동 함대의 제독. 본작에서는 병인박해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벨로네가 주도한 조선 정벌에 크게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문수산성 공방전에서 패배한 이후 이제라도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자고 벨로네에게 압력을 넣었다.
  • 작은 파리
최익현의 인도로 조선에 망명 온 파리 코뮌 구성원들과 그 가족들이 꾸린 일종의 난민촌이다. 몇 년 뒤 프랑스 정국이 안정되자 대부분 프랑스로 돌아간다. 베를린 회담 때 조선, 프랑스 양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정고문단으로 알려진다.
작은 파리의 주민. 조선 땅으로 피난 온 코뮌 사람들 중 최연장자다. 원 역사에서는 스위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객사했다. 1873년에 치러진 참의대부 선거에 자서전에 쓸 에피소드나 하나 만들 생각으로 입후보하였는데 노인 공경 정신 투철한 한양 서부 주민들이 표를 몰아주어 당선됐다.
작은 파리의 주민. 원 역사에서는 코뮌이 무너지고 누벨칼레도니로 유배를 갔다. 교묘한 말발로 명성황후를 꼬여내 마포나루에 고아원 겸 여학교를 새로 세운다.
프랑스 제4대 대통령. 조선 탓에 식민지 경영에서 프랑스의 국익이 줄어들자 이를 어떻게 보충할까 하다가 우리가 줄었으니 다른 열강들의 식민지 경영 수익도 줄여주자는, 나만 당할 수 없지! 라는 발상으로 외교정책을 진행한다.
  • 에멜 플루랑스
러시아와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벨로네 백작 후임 외교부 장관이 된다. 조선에게는 누명을 쓸 뻔한 코뮌 사람들을 도와주어 고마움을 느낀다. 러시아와 함께 조선에 동맹을 제의한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 김홍집과 오페르트의 대활약 덕분에 원 역사보다 훨씬 빠른 반년만에 대위 계급장을 돌려받았다.

2.2. 러시아


러시아 제국 제12대 차르.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선방하는 등 원 역사보다 더 많은 업적을 쌓았지만 1886년에 결국 인민의 힘이 저지른 테러로 사망했다.[28]
러시아 제국 제13대 차르.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인민의 의지가 조선에서 내부분열로 와해된 것을 보고 일단 양지로 유도한 다음 서로 싸움 붙이는 방식으로 자유주의를 억제하고 있다. 원 역사대로 열차 사고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러시아 제국 제14대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조선의 총선 개최를 실수라고 생각하는 등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선량하다고 할 수 있는 성품이지만 결단력이 없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공식이 앞당겨져 원 역사보다 1년 빨리 극동을 방문한다. 실론, 자바, 싱가포르, 남중국을 거쳐 일본에 갔던 원 역사와 달리 중간에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간다. 조선에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많다고 걱정했으나 딱히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본에서도 반러감정이 약해 오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지막 일정으로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을 때 연해주가 조선인 이민자들에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특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다가 천도교가 주도한 단체 읍소에 마음이 동해 운터베르거 군정장관에게 온건책을 시행할 것을 지시했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열차 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제위에 오른다.
  • 예프게니 뷰초프
러시아의 외교관. 공사대리. 원 역사에서는 일본 하코다테에서 업무 역량을 쌓지만 본작에서는 조선의 개항이 앞당겨져 한양으로 오게 됐다.
러시아의 외교관. 러시아령 에스토니아 타르투 출신의 발트 독일인. 원 역사에서는 뷰쵸프처럼 일본에 먼저 파견된 외교관이고 그 후 파견된 미국에서 다기 컬렉션과 워싱턴의 문화계 중요 인물로 유명했다. 뷰초프의 후임으로 조선에 왔는데 여기서도 찻잔과 도자기를 모으는 게 취미라서 조선 도자기로 컬렉션을 만드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던 중 녹둔도 분쟁이 터져 마음 고생을 했다.
  •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 (=무라비요프 백작)[29]
블라디보스토크의 최대 후원자. 원 역사에서 동시베리아 총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러시아 역사와 전통의 공갈외교로 '조러수호조약' 개정을 이끌어냈으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조선 농민들의 개척 러시로 인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일대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원 역사처럼 19세기 말의 러시아의 외무장관. 차르의 제일가는 일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원 역사에서 그레이트 게임 관련 사무를 담당한 외교관. 히바부하라를 합병하는데 공을 세웠다. 고르차코프의 후임이 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조선의 꾀에 번번히 당하는 중. 사실 자유주의자인 알렉산드르 2세와는 성향이 맞지 않아 딱히 희망은 없다.
러시아의 외교관. 청에 공사로 파견된 이그나티예프의 부하로 조선에 친러파 육성을 명 받고 조선에 왔다. 역사에서처럼 조선과 조선 문화에 애정을 가지고 있어 대원군에게 석파란을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면모도 보인다. 나중엔 슈트루베 남작의 후임으로 조선에 부임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 제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김홍집에게 조선은 더이상 중립국으로 놔두기는 너무 커졌다고 말하며 유럽국과 손을 잡는 편이 좋을 거라고 충고한다. 1894년에 다시 조선에 공사로 파견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인민주의 테러조직. 원 역사에서는 러시아 당국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차르를 암살한 그 다음해 와해되었지만 본작에서는 일부 인원이 조선으로 도주하여 함경도 원산에 정착했다. 그런데 도주 과정에서 직면한 냉엄한 현실과 정치범들에게 해명 기회를 준 조선 정부의 질문 ''당신들은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로 인해 대대적 내부 노선투쟁이 일어나 사실상 조직이 붕괴한다. 그리고 러시아 당국은 이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 불온세력들을 양지로 끌어올린 뒤 적극적으로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대 불온세력 정책을 바꿨다. 이 정책은 점점 러시아 서쪽으로도 퍼져가고 있으며, 물론 조선은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부. 원 역사보다 늦게 터진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당시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하여 러시아 당국의 추적을 피해 동지들과 함께 조선에 정착했다. 인민의 의지의 내부분열에 실망하여 과연 혁명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인민의 의지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한 방에 내부분열로 흔들리는 동안 자의반 타의반으로 인민의 의지와 조선 공안서(김가진) 사이 대화창구를 맡다가, 대원군의 오른팔 김가진과 묘한 우정을 쌓았다. 인민의 의지가 사실상 와해된 이후에는 한동안 전봉준의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출국했다. 여담으로 김가진과 아라사 장기로 알려진 체스를 두는데 몇 번이나 김가진이 패배하여 한 수만 물려달라고 부탁함에도 거절한다. 그래서 김가진이 레닌에게 그렇게 마음 못되게 쓰다간 대머리(...)된다고 일침을 날린다.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저자 및 나로드니키주의 사상가로 레닌이 존경하던 인물이다. 조선의 헌법이 자유주의란 말을 듣고 시베리아의 유형지를 탈출하여 조선땅 원산으로 왔다.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이후 적잖은 수의 인민의 의지 당원들이 조선 땅에 합류했는데 귀남이 제시한 "당신들은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말려들어 내부노선투쟁이 일어나 사실상 조직이 붕괴하는 최악의 결과를 맞는다.
주프랑스 러시아 대사.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조선에 조러불동맹을 제의한다.
니콜라이 2세의 연해주 방문 당시 군정장관으로서 사실상 조선인에게 종속된 연해주의 상황에 불만을 품고 니콜라이 2세에게 정해진 길이 아닌 조선인 구역으로 가길 권유하여 연해주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고발한다. 그 뒤 니콜라이 2세에게 강경 대처를 권유했지만 천도교를 앞세운 조선인들이 관청 앞으로 몰려와 읍소하자 우유부단한 니콜라이 2세가 주저하다 온건책을 지시하면서 계획이 실패하게 된다.

2.3. 영국


영국의 외교관. 공사대리. 조선의 개항이 빨리 일어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원 역사와 달리 조선으로 발령됐다. 나중엔 주 선양 영사로 파견되어 동삼성총독 공친왕과의 협상을 담당한다.
가장 위대한 평민이라는 별명과 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으로 유명한 영국의 총리. 시종일관 도덕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조선에게 호감을 느끼고, 조선 유학생들이 결성한 반침략 연대를 후원하기도 했다. 물론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니만큼 대놓고 내각의 의론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2기 내각 출범을 전후하여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다. 고든이 수단에서 전사하지 않아 원 역사보다 오래 집권하고 있다. 이후 1886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을 밀어붙여 기어코 통과시켰으나 이 과정에서 자유당 내부에 균열이 발생하여 내각불신임 표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총리직에서 사퇴했다.
제국주의 정책을 밀어붙여 대영제국을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영국의 총리. 원 역사처럼 글래드스턴의 정적이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조선을 미끼로 던졌는데 반침략 연대의 활약과 더비 백작의 폭로로 반전 여론이 높아져 오스만 제국의 자유화를 채권단이 강제하는 방향으로 동방문제를 매듭지었다.
원 역사처럼 디즈레일리 2기 내각의 외무장관. 원 역사에서도 디즈레일리와 성향이 맞지 않아 결국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는데 여기서는 디즈레일리와 달리 고립주의자로 반침략 연대의 활약을 보고 이때다 싶어 영국와 러시아의 밀약을 언론에 폭로하고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사회진화론의 창시자. 전우와 논쟁하면서 동양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다.
원 역사에서 다윈의 불독이라고 불린 인물. 스펜서와 행동을 같이하며 다윈의 정적을 물어뜯듯 자유당의 정적을 물어뜯고있다.
우생학의 아버지. 전우에게 진화론의 뜻을 더럽히는 사문난적이라고 저격당했다.
영국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저자다. 본작에서는 조선의 기묘한 헌법에 흥미가 동해 조선을 방문하였다.
원 역사처럼 디즈레일리 다음의 보수당 영수. 더비 백작의 후임 외무장관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찰스 고든이 수단으로 보내지지 않았고 그 결과였던 글래드스턴 정부 붕괴가 일어나지 않아 아직 총리가 되진 못한 채로 야당 당수를 하고 있다. 이후 1886년에 아일랜드 자치법 통과로 자유당이 분열하자 내각불신임 카드를 던졌고 표결이 이루어지기 전에 글래드스턴이 사퇴하여 총리직에 올랐다.
원 역사처럼 상승군을 이끌고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는데 공헌한 영국군 장군. 원 역사에서는 수단에서 마흐디 반란이 일어나자 그를 수단으로 보내자는 여론이 일었지만 글래드스턴 정부는 트랜스발에서 철수하는 등 문제가 커질것 같은 식민지에서 발을 빼는 정책을 시행중이라 무시하다가 결국 여론에 떠밀려 수단으로 보내졌고 결국 고든은 거기서 죽고 마는데, 여기서는 마침 영국 입장에서 더 중요한 아프가니스탄에 일이 터져 그곳으로 파견된다.
원 역사의 대한매일신보 발행인. 아버지 토마스가 요코하마에 더해 인천을 사업 무대로 선정하여 원 역사보다 15년 빨리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앞으로 조선에서 운송업이 히트칠 거라고 생각하여 인천에서 지게 배달꾼으로 일하고 있다.
정치가. 네빌 체임벌린의 아버지. 자유당이 쪼개지고 나서 원 역사보다 빨리 솔즈베리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일하고 있다.

2.4. 독일


독일 제국 제2대 카이저. 권위적인 아버지, 제국주의를 추종하는 아들과 달리 선량한 자유주의자다. 암을 방치하여 돌연 사망한 원 역사와 달리 후두 전체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하여 수명이 늘었지만 벙어리가 됐다.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자신이 죽고 자기 아들이든 비스마르크의 후임이든 누구도 독일의 앞날을 마음대로 망가뜨릴 수 없도록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강행하여 나라의 제도를 바꾸고자 한다. 그럼에도 빌헬름 2세가 제국주의적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자 하나의 카이저,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국민을 통해 카이저 개인이 아닌 독일인 전체가 원해야만 국가를 움직이도록 빌헬름 2세에게 가르침을 내린 뒤 1892년 안락사를 택한다.
독일 제국 제3대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아버지에게 속히 다른 강대국들이 깃발을 꽂지 않은 백지의 땅에 호엔촐레른의 독수리를 박아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머니 빅토리아가 자신의 팔을 고친답시고 주독일 조선 공사 윤태준에게 부탁하여 침을 맞았는데 효과가 없어 조선을 싫어한다. 황위에 오른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 개혁을 밀어붙이자 여론을 선동하여 영국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 역사와 비슷하게 악몽을 꾸고 황화론에 심취하였으나 은퇴를 앞둔 비스마르크에게 이상한 소리 그만 하라는 핀잔이나 들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죽고 황위를 이었는데 드레퓌스 사건 때 난데없이 프랑스 내부의 반유대주의를 선동한다는 누명을 썼다.(...)
그 유명한 철혈재상. 만주 철도사업을 훼방을 놓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조선의 '선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이런저런 나비 효과 때문에 프랑스가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일보 직전이라 말년에 마음 고생을 하고 있다. 현재 프리드리히 3세를 도와 자유주의 개혁을 주도하지만 외교와 달리 내정에는 범재에 가까워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결국 이런 자유주의적 개혁이 보수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반발을 불러 원 역사보다 조금 늦은 1892년 은퇴하게 된다.
근대적인 참모본부 제도를 정립한 주인공. 이토 히로부미가 먼저 일본을 북독일 연방처럼 대일본 연방의 형태에서 점점 프로이센이 권력을 쥐듯이 조슈가 권력을 쥐는 형태를 만들려고 구상할 때 언급된다.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가 양면전쟁을 언급했을 때 작고했다고 언급된다. 원 역사대로 1891년에 사망하였다.
원 역사와 같이 영국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파리 코뮌이 최익현과 뒤낭의 중재로 항복하자 배신자라고 비난했고 조선의 만민공산당 놀음에 기함하고 있다. 하지만 본인에게 직접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전봉준은 살림에 도움도 되고 심심함도 풀 겸 거두어서 가르치고 있었다. 이후 전봉준이 자신의 막내딸과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사망한다.

2.5. 기타 유럽 인물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사업가. 제물포가 동아시아 다이너마이트 거래의 허브로 성장하자 시장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조선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오페르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물포에 생산 공장을 차리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유럽 언론으로부터 전쟁상인이라고 공격을 받고 있던 터라 군용 판매는 허락할 수 없다고 나왔다. 이에 귀남이 어차피 생길 노벨상 지금 만들자는 생각으로 노벨에게 조선과 공동으로 출자해 기금을 만들고 이 기금에서 출연하여 매년 전 인류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한 우수한 학술적 성과에 대해 표창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의 양심과 회사의 명성을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제안을 받아들였다.
스위스인.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창시자.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최익현과 우정을 나누어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30] 파리 코뮌 사람들이 귀국할 때 유럽에 돌아간들 호구할 방도가 없어 따라가지 못하고 한양에 남아 적십지사 대표 겸 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
제2대 벨기에 국왕. 그 유명한 손목왕이다. 콩고 자유국을 '자신의' 나라라고 부르며 착취할 생각밖에 없었지만 명분과 도의를 무기삼아 마구 휘두르며 영국이고 일본이고 마구 내정간섭을 해대는(...) 조선과 그걸 이용해먹기로 작정한 프랑스, 회의장에서 전모를 파악하고는 곧바로 프랑스를 도와주려는 영국 등에 의하여 콩고를 가졌음에도 프랑스가 조선에 했던 것[31]처럼 식민지 운영에 문명개화를 지원하는 것이 의무화되어버리자 자기 돈을 뺏긴다며 펄펄 뛰었다. 게다가 이걸 거부하고 싶어도 이미 국제사회에서는 (의도적으로) 비문명국의 개화를 지원하기 위해서 사비를 털고 나선 훌륭한 왕이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려서 조금이라도 수탈하려는 낌새가 보이는 순간 전 유럽의 비웃음과 견제를 받을 판이다.
  • 요르요스 왕자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친척[32]인 니콜라이 2세와 함께 극동을 방문한다.
원 역사 이스라엘의 국부. 오페르트의 말을 듣고 미국이 루이지애나와 알래스카를 사들인 것처럼 자금을 모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구매하기로 결심했다.

3. 아메리카



3.1. 미국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퇴임하고 세계일주를 하던 중 조선을 방문하여 동양풍 물씬 느끼는 궁궐의 풍치에 찬탄하였다.
미국 제22·24대 대통령. 원 역사대로 식민지 개발이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신문에 프랑스가 놓은 덫에 제대로 걸려들어 콩고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퍼붓고 있는 벨기에를 예로 들며 식민정책의 불합리함을 강조하는 칼럼을 투고하기도 했다. 칼라카우아 국왕에게 미국은 하와이에 구대륙의 폭군들이나 할 만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외교관. 현 주조선미국공사. 아직 그 급을 따지면 이류와 삼류 사이의 애매한 나라에서 파견한 자신을 곰살맞게 대해주는 귀남에게 고마움과 정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식 먼로 독트린을 꿈꾸는 귀남에게 탁 터놓고 조선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미국이 도와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발명왕. 자신의 투자자 존 피어폰트 모건을 믿고 강짜를 부렸다가 조선 내 전구의 특허권을 놓쳤다.
맥심 기관총을 발명한 미국의 사업가. 에디슨 대신 조선 내 전구의 특허권을 획득한다. 인스턴트 커피조선왕실 레시피 커피믹스도 발명했다.
허스트의 창업주. 하와이 사건을 계기로 황인 혐오를 자극하는 기사를 쏟아내 재미를 보던 중 기사 청탁하러 온 서재필과 대화를 나눈 것을 퓰리처의 부하 기자들이 침소봉대하여 곤욕을 치뤘다. 하지만 황색언론 허스트의 창업주 답게, 서재필이 건넨 진심 어린 조언을 제멋대로 곡해해서 정치적 올바름을 짜넣은 찌라시 기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퓰리처가 반대로 곤욕을 치르는 중.
원 역사에서 하와이 공화국을 건설하여 대통령이 되었지만, 작중에서는 하와이 사건으로 4명의 호놀룰루 소총대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귀남옹의 선의와 조선과 일본에 적잖은 투자를 한 미국 본토 사업가들의 미적지근함으로 인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본인은 쿠데타까지 생각했지만 이미 인명 피해를 입은 안전위원회(Safety Committee)가 주저하면서 그것마저도 실패한다.
하이럼 맥심에게 조선에서의 전구 특허권을 뺏긴 에디슨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가자 자신은 에디슨 회사의 투자자지 에디슨의 후원자는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에디슨에게 다른 얼치기들이 선수 치기 전에 빨리 조선과 교섭하여 다른 발명품의 특허권이라도 인정받으라고 말한다.

3.2. 하와이 왕국


하와이 왕국 제7대 국왕. 섬에 백인이 너무 많으니 황인을 일꾼으로 데려다 써서 견제해볼 요량으로 아시아를 순방하던 중 조선에 들려 대원군의 회갑연에 얼굴을 내밀었다. 이후 원 역사대로 백인 무장단체 '호놀룰루 소총대'가 참정권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키자 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입헌군주제는 좋은 것이라는 귀남의 설득에 생각을 바꿔 선제적으로 유색인종의 참정권까지 보장하는 개헌을 추진하여 백인들을 견제하기로 하였고 조선의 중매로 하와이로 대거 넘어온 사이토 하지메 휘하 일도일포류 문하생들로 호놀룰루 소총대에게 꿀리지 않는 친위대를 구성했다.
칼라카우아의 총신. 실존인물이다. 호놀룰루 소총대가 무엄한 생각을 품지 않게 '경고'하라는 왕명에서 실수로 '경고'를 빼놓고 번역하는 바람에 일도일포류 문하생들이 호놀룰루 소총대 몇을 칼로 쳐죽이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 결국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제임스 하쿠올레(James Harbottle Hakuole)
경일학당의 하와이 유학생. 실존인물이다. 최익현에게 하와이가 돌아가는 사정을 설명해준다.

4. 아프리카



4.1. 트란스발 공화국


원 역사 트란스발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원 역사 트란스발 공화국의 3대 부통령.
원 역사 트란스발 공화국의 2대 부통령.

5. 기타


  • 북악산 산신령
말 그대로 북악산산신령. 북악산 산신령을 지낸지 천 년 정도 됐다. 귀남의 단골이었다. 자신이 산신령이라는 사실을 숨긴 적 없지만 귀남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2020년이 끝나갈 무렵 옆 동네에서 웬 어린놈이 원없이 군밤을 먹는 것이 소원이랍시고 비는 것을 보고 그간 군밤 맛나게 먹은 값으로 귀남과 그 어린놈, 즉 구름재댁 개똥이의 영혼을 바꾸었다.
[1] 이에 귀남은 순전히 '호의'로 강화도 보이는 문수산에 원범의 묘소를 조성하였는데 이 해동이 을축양요 때 나비효과를 불러와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2] 물론 이 전에 이미 초야에 묻혀서 여전히 유학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판사, 검사를 만들려고 했을 때 관료들이 반발하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법권 분리 및 헌법 제정을 언급한 바 있다.[3] 귀남옹의 생각이 어떻건, 숙청 없이 모든 파벌을 아울러 같이 가고 있으니 정답이다.[4] 피휘하기 위하여 서류상으로는 이척(李坧)이 아니라 이척(李陟)으로 되어있다.[5] 첫째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되지않아 사망하였기에 실지로는 둘째 아들이다.[6] 실제로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로, 스크랜턴 부인이 처음 이화학당을 열었을 때 입학한 학생 중 1명이었다.[7] 첫째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되지않아 사망하였기에 실지로는 셋째 아들이다.[8] 미국의 여배우인 줄리아 루이 드라이퍼스도 그렇고 메이저 곡물 기업 중 하나인 드레퓌스를 봐도 알 수 있듯 서양에서 드레퓌스란 유대인 성은 흔한 편이다.[9] 원 역사에서는 문익(文翼)이었다.[10] 이상재의 고향은 정확히는 한산군으로 원 역사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서천군이 되었다. 본작에서도 행정구역 개편이 있었다고 언급되었기에 한산군이 서천군에 합쳐진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합쳐지지 않았더라도 평소 인연이 있던 고향 이웃동네에서 출마했다거나, 아니면 한산군이 인구가 적어 서천군 선거구에 합쳐졌을 가능성도 있다.[11] 그래도 산가지로 셈 하는건 쉽다는 것을 봐서 방정식 등의 대수학 쪽은 괜찮은듯 한데, 기하학만 나오면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12] 박규수야 자기가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작품에는 산신령이 존재하므로 진짜 박지원의 혼령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13] 원 역사에도 있었던 톈진에서 서양 선교사와 상인에게 불만을 품은 중국인들이 뜬소문을 빌미로 일으킨 폭동.[14] 기정진의 "외필"을 반박하는 "외필변"과 이항로의 "화서아언"에 반박하는 "화서아언의의"[15] 정확하게 말하면 필제는 징집된 것이 아니라 형벌의 일종인 충군(充軍)에 처한 것이다.[16] 완용에게 좋은 감정이 조금도 없는 귀남이 옥균에게 곧바로 이완용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정작 완용은 저나 저의 아버지가 대원군이나 상감에게 누를 끼친 적이 없으므로 옥균이 처음부터 자신을 토사구팽할 생각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17] 사실 이 정한론과 전쟁을 혐오하는 것은 일본 고위층에 만연하게 자리잡았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물론이고 바로 아래의 야마가타 아리토모마저도 정한론을 헛소리로 치부한다. 작중 설명으로 유추해보면 일본이 조선을 의식하며 성장하다보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선의 혐전 성향마저도 닮아버린 것으로 보인다.[18] 그 때문인지 작중에서도 총명한 지재로 대청의 홍복이라는 말이 사분지일은 맞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19] 원세개가 의도적으로 의화단을 이용해서 반조선 여론을 형성했을 때 김가진이 여기에 휘말려 김가진뿐만 아니라 조선 전체가 골치 아프기 직전에 때마침 청나라에 전봉준 내외가 있다는 걸 깨닫고 그쪽으로 가서 도와달라 요청했다. 전봉준 내외가 청나라에 있던 이유는 서태후가 이홍장 견제 차원에서 초빙한 것이었다.[20] 한양 88식 소총류장군 소총으로 유명한 한양병공창이 이 사람의 작품이다.[21] 원 역사에서는 광저우로 갔다.[22] 원 역사에서는 마신이와 알던 사이인지 확실하진 않다.[23] 결국은 지방 명사들과 매일매일 연회하며 돌아다니는 일이다. [24] 원 역사에서는 '일본변정고'였다.[25] '천하흥망 필부유책(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 문장의 뜻은 좋은데 이 말을 한 사람이 명말청초에 오랑캐 천자를 모실 수 없다고 은거한 유학자 고염무다.[26] 모이창이 처음 작중에 나왔을 땐 아직 미출생.[27] 이름은 코치 초조이고 웨카타는 직위 이름이다.[28] 원 역사보다 5년 더 살았다.[29] 원 역사처럼 여기에서도 아무르 강 북쪽 땅을 청에게서 뜯어낸 아이훈 조약의 공로로 아무르스키 백작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30] 최익현보다 6살 많다.[31] 사실과 약간 다르긴 하나 조선이나 프랑스 모두 이를 알고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32] 요르요스 왕자의 외증조할아버지가 니콜라이 2세의 증조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다. 즉 6촌 사이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