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관련 기록

 



1. 개요
2.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2.1. 전투 및 병력 파병국
2.2. 의료 파견 지원국
2.3. 물자 지원국
2.4. 물자지원 의사 표명 국가
2.5. 공산측 남침국 및 북한지원국
3. 주요 전투
4. 주요 작전
5. 주요 사건/사고
6. 휴전 이후의 주요 사건/사고/전투
7. 관련 인물
7.1. 국군 및 UN
7.1.1. 대한민국
7.1.2. 미국
7.1.3. 터키
7.1.4. 프랑스 제4공화국
7.2. 공산군
7.2.1. 북한
7.2.2. 중국
7.2.3. 소련
8. 사용 장비


1. 개요


6.25 전쟁과 관련된 기록들을 모은 문서다.

2. 6.25 전쟁 참전국 및 지원국


[image]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지원해 준 국가들.[1]
'''6.25 전쟁은 역대 전쟁 중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하나의 국가를 위해 지원한 전쟁이다.'''
다만 이후 공산화해 관계가 틀어진 국가들도 있었는데, 일단 쿠바의 경우 공산주의 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뒤 대한민국을 적으로 간주했고, 월남 역시 북베트남에 의해 공산통일당해 사라졌고, 북배트남과의 관계는 90년대까지 냉랭했었다. 에티오피아 역시 공산 혁명이 일어나 황제가 살해당하고 파병부대원들도 핍박당했지만 정권이 무너진 지금은 관계를 회복했다.
부산광역시에 있는 UN기념공원에 2,300명의 각국 UN군 전사자가 모셔져 있다.
2012년 5월에 6.25 전쟁 당시 참전국 명단이 새로이 공개되었는데 정확히는 '''63개국'''으로 밝혀졌으며, 기존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물자지원 및 물자지원 의사 및 표명 등을 밝혔던 국가가 추가로 공개되었다.

2.1. 전투 및 병력 파병국


파병 국가
파병인원
전사자
실종자
부상자
포로
미국
1,789,000명
36,940명
3,737명
92,134명
4,439명
영국
56,000명
1,078명
179명
2,674명
997명
캐나다
25,687명
312명
1명
1,212명
32명
터키
14,936명
741명
163명
2,068명
244명
호주
8,407명
339명
3명
1,216명
26명
필리핀 제3공화국
7,420명
112명
16명
229명
41명
태국
6,326명
129명
5명
1,139명
-
네덜란드
5,322명
120명
-
645명
3명
콜롬비아
5,100명
163명
-
448명
28명
그리스 왕국
4,992명
192명
-
543명
3명
뉴질랜드
3,794명
23명
1명
79명
-
에티오피아 제국
3,518명
121명
-
536명
-
벨기에
3,498명
99명
4명
336명
1명
프랑스 제4공화국
3,421명
262명
7명
1,008명
12명
남아프리카 연방
826명
34명
-
-
9명
룩셈부르크
83명
2명
-
13명
-
터키타흐신 야즈즈 소장의 지휘하에 미국과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도 터키는 한국에게서 혈맹국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호주가 UN군의 일원으로 최초로 참전한 전쟁이 6.25 전쟁이다.
필리핀 제3공화국은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상륙하였으며, 필리핀 前대통령 피델 라모스는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태국은 한국 전쟁에 육, 해, 공군을 모두 파병한 8개국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는 과거 식민지였던 남아메리카 수리남(1975년 독립) 등 속령지역 용사들도 동원하여 참전했다.


콜롬비아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전투 병력을 파병한 국가이다.
그리스 왕국은 한국과 같이 공산주의에 위협을 받았고 미국의 도움으로 이 상황을 벗어났다. 그 후 6.25 전쟁에 기꺼이 군대를 파병했다.
뉴질랜드마오리족까지 참전했다.
에티오피아 제국하일레 셀라시에 1세 황제가 특별히 자신의 친위대를 내줘서 파병했다. 단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 제대로 된 상비군이 친위대 밖에 없었다고 한다.
벨기에룩셈부르크는 벨기에-룩셈부르크 연합으로 파병되었다. 룩셈부르크는 80명 남짓한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이는 룩셈부르크군 자체가 1000명 내외의 소규모 군대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병력이다. 또한 병력 대비 사상자의 비율은 전체 유엔군 중 가장 높았다.
프랑스군 중에서 랄프 몽클라르 중장은 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시키고''' 참전했다. 하지만 미군으로부터 그대로 중장 대우를 받았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아프리카의 잊혀져버린 6.25 참전국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과 국내 매체들도 에티오피아만을 아프리카 유일의 6.25 전쟁 참전국으로 기억한다. 남아공이 에티오피아와 달리 6.25 참전국에서 빨리 잊혀진 것은 1950년대 당시 영연방 국가였고, 다른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다르게 소수의 네덜란드, 영국계 백인 이주민들이 국민 대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배제, 억압하며 20세기 말까지 백인 통치를 자행하는 등 사실상 백인 국가 마냥 취급받던 나라였던 점이 크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남아공이 참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르트헤이트에 항의하는 뜻에서 공식 수교를 단절했을 정도였다. 또한 전쟁 당시 군대 파병 인원의 규모도 적었고 공군 병력만 파견한 것도 주요 이유이다.
사실 대만도 3만명대의 병력을 파병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영국에 이어 3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 미국은 대만의 참전이 중공군의 개입[2]으로 인한 3차 세계대전이 터질 가능성, 중공군이 대만에 빈집털이를 시전하는 것 등을 두려워해 대만을 뜯어말려 물자 지원에 그쳤다고 한다.#

2.2. 의료 파견 지원국



  • 덴마크
  • 스웨덴
  • 이탈리아 - 당시 UN 비회원국 자격으로 지원했다. 다만 이는 2차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으로 패전 후 UN에 가입하지 못한 이탈리아의 전범국 이미지를 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 인도 자치령

2.3. 물자 지원국


한국전 당시 병력을 파견한 16개국, 의료지원을 파견한 5개국 외에 국내 사정으로 물자나 재정지원만을 한 39개국도 있다.
물자지원은 초기에는 CRIK(한국민간구제단)을 통해 레바논, 리히텐슈타인, 멕시코 등 초기 19개국이 지원하였으며 이후 UNKRA(유엔 한국 재건단)을 통해 중화민국, 과테말라 등 13개국이 지원, 기타 ERP(유엔긴급 구제계획)을 통해 서독 등 3개국이 지원하였다.
지원국가
지원액(USD$)
지원기관
지원 시기
지원물품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3,616,446
CRIK
~1952.5
재정,미곡
중화민국[3]
634,782
CRIK
~1952.5
석탄,미곡,연료
아르헨티나[4]
500,000
CRIK
~1952.5
식량,의약품.비누
파키스탄 자치령
378,285
CRIK
1951
재정,소맥
멕시코
348,821
CRIK
1951
식량
스위스
313,954
UNKRA
~1953.6
재정,물자
도미니카 공화국
275,200
UNKRA
~1953.6
재정
쿠바[5]
270,962
CRIK
~1951
미곡,의약품
우루과이
250,780
ERP
~1953.12
재정
칠레
250,000
UNKRA
~1954.8
재정
베네수엘라
180,842
CRIK
~1951
재정,의약품
인도네시아[6]
143,706
UNKRA
~1952.12
재정
에콰도르
99,441
CRIK
1951
미곡
이스라엘
96,600
CRIK
1951
재정
헝가리 인민 공화국
58,877
CRIK
1951
물자
페루
58,723
ERP
~1954.8
군화
레바논
50,000
UNKRA
~1952.12
재정
연합군 점령하 일본[7]일본국[8]
50,000
CRIK
1951
물자,재정
버마
49,934
CRIK
1951
식량
서독
47,619
ERP
~1952.8
물자
아이슬란드
45,400
CRIK
1951
식용유(Cooking Oil)
이집트 왕국
28,716
UNKRA
~1953.12
물자
캄보디아
27,419
CRIK
1951
재정,미곡
자메이카
25,167
CRIK
~1953.12
미곡
사우디아라비아
20,000
UNKRA
~1952.12
재정
라이베리아
15,000
CRIK
1951
생고무
베트남국
11,943
UNKRA
~1952.12
재정,물자
바티칸
10,000
UNKRA
~1956.12
재정
파라과이
10,000
UNKRA
1951
재정
과테말라
7,704
UNKRA
1951
재정,목재
이란 제국
3,900
CRIK
~1952.8
미곡,직물
시리아
3,650
UNKRA
~1953.6
재정,물자
아이티[9]
3,000
ERP
~1954.8
물자
파나마
3,000
UNKRA
~1952.12
재정
온두라스
2,500
UNKRA
~1952.12
재정
코스타리카
1,400
CRIK
1951
물자
모나코
1,144
UNKRA
~1954.8
재정,물자
엘살바도르
500
UNKRA
~1953.12
재정
리히텐슈타인
485
UNKRA
~1956.6
재정
  • 과테말라
  • 도미니카 공화국
  • 서독
  • 라이베리아
  • 레바논
  • 리히텐슈타인
  • 멕시코
  • 모나코
  • 미얀마(버마)
  • 바티칸 교황청
  • 베네수엘라
  • 베트남국
  • 사우디아라비아
  • 스위스
  • 시리아
  • 아르헨티나
  • 아이슬란드
  • 아이티
  • 에콰도르
  • 엘살바도르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 당시 추축국 측에 참전한걸로 간주되어 연합군의 군정 치하에 놓여 있었다. 군정 치하의 오스트리아는 꽤 많은 물자를 지원하였다.
  • 온두라스
  • 우루과이
  • 이란 제국
  • 이집트
  • 인도네시아
  • 연합군 점령하 일본[10]일본국[11] - 패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한국을 도울 여력도 별로 없었기에 물자 지원국에 해당하기 어려워 보일 수 있으나, 실은 오히려 미국의 후방 군수공장역할이었기에 가장 중요한 유/무상 물자지원국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사실 없어도 별 상관없는 형식적인 지원 정도였다면, 일본은 6.25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활약한 미군의 후방 군수공장 역할을 담당해서 미군이 필요한 물자를 그때그때 신속하게 조달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미국과 UN군 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요시다 시게루 당시 내각 총리 대신의 결정으로 서해와 동해의 주요 항구들에서의 소해와 초계 작전을 위한 1200여명의 소해 병력과, 공산군이 점령한 적지에서의 정보 수집을 위한 후방 침투 병력을 포함해 추정 총 8천여명 내외의 인력이 6.25 전쟁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해 작전 도중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나 한미일 삼국 모두 해당 사안에 대해 쉬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코쿠리코 언덕에서의 주인공 우미(메르)의 아버지가 기뢰에 의해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전후 일본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유사시 한국과 대만, 미국을 지원하기 위한 군수기지 역할을 맡으며 경제 개발을 위한 산업 지원과 자본 투자 그리고 미국의 정책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한국이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해 미국의 산업 및 관련 정책 원조를 받고 경제 개발을 위한 기초 자본을 확보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 또, 일본의 민간인 남성 60명을 미군이 대동하고 그 중 18명이 전투에 참가했던 것이 미 국립 공문서의 미군 작성 일급 비밀 문서에서 밝혀졌다.#
  • 자메이카
  • 중화민국 - 물자 지원 외에도 전쟁 초기에 3개 사단을 파병하겠다고 하였으나 누가 봐도 본토 탈환을 목적로 한 의사가 강한데다가[12] 파병한 군대를 재정비하느니 그냥 한국군을 재정비하는게 더 낫다는 결론이 나와 무산되었다.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정 참전하고 싶으면 하이난 섬을 탈환해서 제2 전선을 만들라라고 주문했는데 이는 사실상 완곡한 거절이나 마찬가지였다.
  • 칠레
  • 캄보디아
  • 코스타리카
  • 쿠바 - 이때는 피델 카스트로 집권 이전 시기라 국가가 아직 공산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 파나마
  • 파라과이
  • 파키스탄 자치령
  • 페루
  • 헝가리 인민 공화국 - 헝가리는 공산주의 국가인데도 지원을 해줬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 반소 감정이 격화된 상태였다. 이후 소련, 폴란드를 위시한 바르샤바 조약군이 진주하여 개박살을 내놓지만...

2.4. 물자지원 의사 표명 국가



2.5. 공산측 남침국 및 북한지원국


'''북한 내에서는 6.25 전쟁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북한을 도와준 것을 은폐해 버리는 한편 UN군의 참전으로 북한군이 크게 박살난 상태에서 다른 공산국가가 북한 대신 주체가 되어 수행한 모든 전투를 김일성의 업적으로 날조하고 있다.'''
  • 소비에트 연방 (물자 지원, 비공식 파병) - 소련 공군에서 당시 최신예기였던 MiG-15 운용 부대를 파병했다. 소련은 미국을 자극해서 3차 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했지만 아예 손을 떼기는 찜찜했는지 파병했으나 확전을 우려한 까닭에 이 사실을 비밀로 하기 위해서 MiG-15에 중국 공군, 북한 공군 라운델을 그려 넣었고 초기에는 통신도 중국어로 하게 시켰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로 소통이 잘 될 리가 없다보니 조종사들의 반발로 러시아어 사용을 허가했다. 결국 미군의 무전 도청 담당자와 전투기 파일럿들에게 이 사실이 들통났지만, 미국 또한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가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서 모른체 했다. 지휘관은 무려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최다킬수(공인 62킬)을 자랑하는 이반 코제두프.
  • 중화인민공화국 (파병)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의료 지원)
  • 폴란드 인민 공화국 (의료 지원)
  • 헝가리 인민 공화국 (의료 지원) - 6.25 전쟁 한국어 위키에서 UN측, 공산측 지원국 양쪽에 모두 포함되어있다.출처
  • 독일 민주 공화국 (의료 지원)출처
  •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의료 지원)
  •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의료 지원)
  • 몽골 인민 공화국 (물자 지원)
  • 인도 자치령 - UN측 의료지원국이면서 공산군 물자도 지원했다.

3. 주요 전투


'''1950년'''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 : 6월 25일
미국, UN 안보리의 즉시소집을 요구 : 6월 25일
유엔, UN 안보리가 인민군 침공 중지 결의안을 채택 : 6월 26일
유엔, UN 안보리가 한국 원조 권고 결의안을 채택 : 6월 27일
유엔, UN 회원국 36개국이 한국에 군사지원을 성명 : 7월 2일
한국, 정부를 대전에서 대구로 임시 이전 : 7월 16일
유엔, UN 안보리가 한국 내 민간인을 보호하기로 결의 : 7월 31일
한국, 정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임시 이전 : 8월 18일
한국,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탈환 : 9월 28일
한국, 국군이 38선을 회복 및 국군의 날 지정 : 10월 1일
유엔, UN 총회에서 38선 이북 진격과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설치를 결의 : 10월 7일
한국, 국군이 평양을 점령 : 10월 19일
중국, 중공군 제1차 공세 : 10월 25일 ~ 11월 7일
한국, 정부를 부산에서 서울로 이전 : 10월 27일
유엔, UN군 총공세 : 11월 24일
중국, 중공군 제2차 공세 : 11월 25일 ~ 12월 15일
유엔, UN 총회에서 한국재건단의 설치안이 가결 : 12월 1일
유엔, UN 총회에서 이란, 인도, 네덜란드 3국으로 이루어진 한국정전위원단 설치를 결의 : 12월 14일
중국, 중공군 제3차 공세 : 1950년 12월 31일 ~ 1951년 1월 24일
'''1951년'''
한국, 정부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다시 임시 이전 : 1월 3일
중국, 중공군 제4차 공세 : 1월 25일 ~ 2월 18일
유엔, UN 총회에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 : 2월 1일
유엔, UN총회에서 중공군의 철수를 요구 : 2월
한국, 국군과 UN군이 서울을 재탈환 : 3월 14일
한국, 국군과 UN군이 38선을 재회복 : 3월 25일
미국, 맥아더 원수 해임 및 리지웨이 장군 임명 : 4월 11일
중국, 중공군 제5차 공세 : 4월 22일 ~ 4월 30일
중국, 중공군 제6차 공세 : 5월 16일 ~ 5월 22일
소련, 말리크 소련 UN대표 휴전회담 제의 : 6월 23일
쌍방, 휴전회담이 개성에서 시작 : 7월 10일
쌍방, 휴전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이전 : 10월 25일
쌍방, 군사분계선 설정 합의 : 10월 28일
쌍방, 휴전회담에서 30일 간의 잠정적 군사 경계선 확정 및 전 전선에 30일 간의 공격 중지령을 합의 : 11월 27일
쌍방, 휴전회담에서 군사분계선이 최종 확정 : 12월 7일
쌍방, 포로명단 교환 : 12월 18일
'''1952년'''
쌍방, 휴전협정이 가조인 : 6월 8일
유엔, UN 총회에서 한국전쟁 포로 중립국 이송안(인도안)을 가결 : 12월 3일
'''1953년'''
쌍방, 부상병과 포로 교환 : 4월 20일
쌍방, 포로교환협정이 체결 및 포로 교환 : 6월 8일 ~ 8월 5일
한국,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를 석방 : 6월 18일
중국, 중공군 제7차 공세 : 7월 13일 ~ 7월 20일
쌍방, 휴전 협정 판문점에서 체결 : 7월 27일

4. 주요 작전



5. 주요 사건/사고


전쟁 중 일어난 주요 사건/사고들.

6. 휴전 이후의 주요 사건/사고/전투



7. 관련 인물



7.1. 국군 및 UN



7.1.1. 대한민국


  • 이승만
  • 김석원
  • 김신
  • 김영환
  • 김정렬
  • 김종오
  • 김홍일
  • 박정희
  • 백선엽
  • 백인엽
  • 손원일
  • 송요찬
  • 신성모
  • 신현준
  • 심일 - 중위계급으로 제6보병사단 대전차소대 소대장으로 참전. 춘천-홍천 전투당시 특공조 5명과 함께 자주포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려 대위로 특진하였다. 이후 충북 음성지구 전투, 영천전투에서도 활약을 했으며, 이후 제7보병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임무 수행중 북한군의 흉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소령으로 추서됨과 동시에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참고로 강원도 원주시 현충탑에는 심일 소령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고, 7사단 수색대대에도 이와 비슷한 기념물이 있다.[14]국방부 심일 소령 공적확인 최종 결과 보고서[15]
  • 유재흥
  • 이성가
  • 이응준
  • 이종찬
  • 이한림
  • 이형근
  • 임부택
  • 장도영
  • 채명신
  • 채병덕
  • 최석
  • 한신

7.1.2. 미국



7.1.3. 터키



7.1.4. 프랑스 제4공화국



7.2. 공산군



7.2.1. 북한


  • 김일성(전범)
  • 박헌영(전범)
  • 강건 - 개전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으로 전쟁 중 전사하였다.
  • 김광협
  • 김무정
  • 김책
  • 남일
  • 리승엽
  • 리학구
  • 방호산 - 한국전쟁에서 최고의 기동전을 구사한 팔로군 출신의 북한군 지휘관이다. 후퇴 당시에도 부대편제를 유지하면서 북으로 귀환하여 드물게 이중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전후엔 연안파에다 반김일성 성향 때문에 영웅칭호와 군적을 모두 박탈당하고 숙청당했다.
  • 정봉욱 -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1사단에 투항. 이후 한국군에서 장성으로 활동하며 육군훈련소장 및 육군3사관학교장을 역임하였다.
  • 최용건
  • 최현

7.2.2. 중국



7.2.3. 소련



8. 사용 장비


6.25 전쟁/사용 장비 문서로.
[1] 다만 저 사진은 잘못된 점이 많다. 이란 국기에 있는 문장이 파괴되어 있고, 저 당시 베트남은 월남(베트남) 임시 중앙 정부베트남국이 된 후였다. 또한 헝가리, 이집트, 미얀마, 시리아, 에티오피아, 남아공의 국기가 당시의 국기가 아닌 현재의 국기로 되어 있다.[2] 사실 러시아와 중공이 짜고 전쟁에서 북괴군이 밀려 북괴의 패색이 짙어진다면 중공군을 대량 투입할 계획을 미리 만들어놓고 있었기에 의미없는 걱정이긴 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게 되었고.[3] 대만이 아니라 중화민국이라고 한 이유는 당시에는 아직 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4] 당시 후안 페론 정권이었다.[5] 쿠바 혁명으로 바티스타 정권이 물러나기 전이었다.[6] 수카르노 집권기 시절이다.[7] ~1952[8] 1952~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9] 우리가 알고 있는 대지진이 일어난 그 아이티 맞다![10] ~1952[11] 1952~[12] 이게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전쟁 초기에 진먼다오 연안을 대거 폭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13] 다만 인천 상륙작전 이후에야 공세가 본격화되어서 사람에 따라 15일로 치기도 한다.[14] 하지만 심일 소위의 전공이 조작이라는 주장이 최근 나왔다. 참조바람.[15] 그러나 이 보고서는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의 공청회 진행이 심일이 전투에 없었다는 증언과 같은 특정 증언의 삭제 등 불공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비판을 받는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