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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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약자로 DDR, 문화어로 독일민주주의공화국, 혹은 동독(東獨))은 소련이 점령한 동부 지역 독일 영토 중 오데르-나이세 선 서부 지역에 수립된 사회주의 공화국이었다. 1949년 10월 7일에 선거를 통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고, 1990년 10월 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으로 흡수 합병될 때까지 존속했다. 수도는 동베를린. 독일인(서독)들은 옛부터 동독을 동독일(Ostdeutschland)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DDR이라는 약자를 쓰고 있다.
2. 설명
면적은 108,333km²로 남한보다 면적이 약간 넓고 북한보다는 약간 좁았다. 인구는 합병 당시인 1990년에 16,100,000명으로 서독의 인구가 63,300,000명으로 4배 정도 많았다. 북한의 인구에 비해 남한의 인구가 2배 정도인 것에 대비된다. 수립 당시인 1949년 이래 인구가 계속 줄어갔는데, 이유는 인구 상당수가 서독으로 꾸준히 빠져나간 데다, 출산율이 상당히 저조했기 때문. 동독에서의 인구조사는 4번이 있었으나, 그 중 대외로 발표된 경우는 1964년의 인구조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추정치이다. 통일 후에는 더 심해서 동독의 출산율이 통일 전의 절반으로 떨어져서, 1994년에는 합계 출산율 0.77명, 인구의 0.51% 출생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통일 초 혼란이 주 원인이라 사회가 안정되고 나서는 출산율이 서독보다 높아졌고, 인구 유출도 베를린과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나름 개선된 편이다.
동독의 국기는 서독과 구별하기 위해 깃발 가운데에 국장이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국장을 안 그려서 서독 국기와 똑같았지만 1959년 국기에 국장까지 덧붙여 서독과 구분을 짓게 되었다. 국장은 망치, 호밀, 컴퍼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망치는 노동자를, 컴퍼스는 지식인을, 호밀 고리는 농민을 의미한다. 1950년 제정 당시에는 컴퍼스 없이 망치만 있는 단순한 형상이었다. 현재 알려져 있는 국장은 1953년에 개정된 것. 올림픽의 동·서독 단일팀 깃발은 처음에는 그냥 흑적금 삼색기를 썼었다. 그러다가 동독이 국기에 국장을 덧댄 이후 동·서독 단일팀은 흑적금 삼색기에 흰색으로 칠한 오륜을 덧붙인 깃발을 썼다#. 단일팀의 국가는 환희의 송가를 썼다.
이름에 '민주'가 들어가서 이 쪽을 자유주의 진영 독일(서독)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9]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 진영 독일(서독)의 정식 국명은 독일 '연방' 공화국. 북한(자칭 정식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그렇고 북베트남(베트남 민주 공화국. 통일 후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개칭) 공산 국가들은 으레 국명에 민주국가라는 표현을 넣는 게 있는데 동독도 같은 케이스이다. 당대 공산 국가들은 자기들이 '민주진영'이고, 미국 등 서방 제1세계를 '제국주의 진영'이라 불렀다.[10][11]
3. 국호
대한민국(남한)이 스스로를 '남조선'이라고 부르지 않고 북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칭하지 않으며, 북한이 스스로를 '북한'이라고 부르지 않고 남한을 '대한민국'으로 칭하지 않듯 서독과 동독도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과 상대국을 부르는 이름이 서로 달랐다. 서독(통일 이전의 독일연방공화국)에서는 동독을 중앙 독일(Mitteldeutschland)이라 불렀다. 동부 독일에 해당하는 Ostdeutschland는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옛 프로이센 땅을 의미했다.[13] 동독이 국가가 아니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칭 독일민주공화국(sogenannte DDR)과 소련 점령지역(Sowjetische Besatzungszone, SBZ)[14] 등도 쓰였다. 명목상으론 그러하였으나 실제 서독의 각종 문서에선 독일민주공화국(DDR)이란 말도 많이 보였다. 반면 동독인들은 자국을 일컬을 때 독일민주공화국(DDR)이라 하였고 그냥 독일(Deutschland)이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1970년대부터는 자본주의 민족국가 서독과는 별개의 사회주의 민족국가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정책적으로 도이칠란트라는 이름을 몰아냈을 정도다. 그래서 동독이 서독을 부를 땐 그대로 독일연방공화국(BRD)으로 불렀다. 통일 의욕이 거의 없었고 그냥 다른 나라로 취급하고 싶었던 듯. 동베를린에 대해서는 그냥 베를린이라고 했고, 동베를린이라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4. 역사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얄타 회담에서 2차 대전 전후 처리를 의논할 때 독일 지역의 분할 점령이 합의된 게 비극의 시작이다. 이미 2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인만큼 연합국들은 이번 기회에 독일을 단단히 손봐줄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독일을 지리적인 요건을 고려하여 정해진 경계선에 따라 미군, 영국군, 소련군이 독일을 3분할했는데, 이 와중에 얄타 회담에서 배제된 자유 프랑스가 자기 몫도 내놓으라고 고집을 부려서 미국과 영국 점령지의 일부를 떼어서 프랑스에게 주는 걸로 달랬다. 프랑스는 이미 전쟁 초기에 독일에게 점령당해 전쟁 내내 뭔가 할 건덕지가 거의 없어서 연합국 측에서도 철저히 무시했다. 그나마 샤를 드 골이 나름대로 망명정부를 구상하고 있는 활약 없는 활약 죄다 쥐어짜내 겨우 발언권을 얻은 것. 이 경험 때문에 프랑스는 자신들을 무시했던 미국의 처사를 잊지 않고 이후 미국에게 훌륭한 개김성을 유감없이 선보이게 된다. 미국의 경고를 씹고 핵 개발을 강행하는 등...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은 점령 직후부터 각자 자신들과 가까운 정치 세력을 지방행정에 투입하면서 전혀 다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은 나치에 협력하지 않던 세력을 기용해서 지방행정 실무를 맡겼다. 대표적인 게 전후 서독 총리로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끄는 콘라드 아데나워. 대표적인 가톨릭계 보수정당인 가톨릭 중앙당의 정치인이었으나 나치 집권 이후 시골에 은거하다가 미군 점령 후 쾰른 시장으로 전격 발탁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몇몇 나치 관계자들과 독일국방군 출신 군인들도 은근슬쩍 공직에 진출한다. 소련은 자신의 점령지에서 전통적 경쟁 관계이던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강제로 합병시켜서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를 만들어서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스탈린식 체제를 도입한다. 이 사회주의통일당이 바로 동독의 집권당이다. 이 당은 통일사회당으로도 불렸으며, 통일 후 민주사회당으로 개편되고 2006년 오스카어 라퐁텐과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이 연합하여 2007년 좌파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냉전으로 인한 이념 대립이 심해지자 과거 연합군들은 미군+영국군+프랑스군 대 소련군의 도식으로 사실상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엔 자유주의 국가라는 유대관계가 있던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아예 자신들의 관할지를 하나로 합쳐 반쪽이나마 통일된 독일을 탄생시키니 이것이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이 되었다. 이는 공산국가와의 최전선에 놓인 서독의 특성상 하나로 뭉쳐놓는 게 그나마 공산국가의 영향력의 침투를 막는 방패 역할을 맡기 더 유리했기 때문. 이에 소련은 반발하여 동독의 영토 안에 남아있던 서독 측 베를린에 무력 시위를 벌이는 베를린 봉쇄를 펼치는 등 양측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베를린은 비록 지리상으로는 동독의 한가운데에 있었지만, 오랜 기간 독일의 수도였다는 상징성 때문에 미영프도 베를린만은 포기하지 않으려 하였고 결국 베를린도 미-영-불-소가 나눠서 관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결과 동독 땅 한가운데에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이 생기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이러한 군사적인 대립은 그래도 양측이 2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으며 전쟁에는 학을 뗀 탓에 실제로 무력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평화롭게 잘 마무리되었으나, 같은 시기 급격한 스탈린식 체제 도입에 반발한 동독 지역 주민들이 계속 서독/서베를린으로 이주하거나 망명하면서 다른 면으로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1961년에 서기장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지시로 동서독 국경에는 철책선 강화가, 서베를린 주위에는 베를린 장벽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국경선에는 도망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국경수비대를 증강하고 지뢰를 촘촘하게 매설했고, 장벽에도 전기 철책과 군견, 감시탑 등 온갖 보안 병력과 장비를 배치했다.
서독과의 대립 관계는 1980년대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국제연합의 공동 가입이나 국제 스포츠 경기의 단일팀 구성, 문화 예술 분야의 교류는 제한적이나마 지속되어 평화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다. TV 매체도 통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15] 서독 쪽 경계선이 문제가 아니라 영토 한가운데인 서베를린 시내에서 ARD, ZDF(80년대 중반 들어서부터는 RTL, SAT1 등 민영 방송도 포함)가 전파를 쏘는지라 어찌 할 방도도 없었다.
하지만 동-서독간 대립이 극에 달했다던 냉전 시기에도 남북한관계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일례로 서독 시민이 직접 차를 몰거나 기차를 타고 동독을 가로질러 서베를린까지 가는 것도 가능했고 절차도 간편했다. 그 대신 고속도로에서 조금이라도 과속하거나 도중에 차를 세우거나 하면(이유가 어찌되었든) 바로 벌금 딱지.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 따르면 이것도 동독 정부의 큰 수입원 중 하나였다 한다. 물론 이는 바로 서베를린으로 갔을 때 얘기고 동독을 직접 방문했을 경우 까다로운 절차를 감수하는 건 기본이고, 국경 검문소에서 하루 25마르크 정도의 강제 환전을 해야 했다. 서독 마르크를 내면 비자 수수료를 떼고 동독 마르크를 주었다. 고급호텔에 묵을 경우에는 이 규정에서 면제지만 이 경우에는 하루 숙박비가 25마르크를 훨씬 초과했기에 별 의미가 없었다. 서독과 경제적 격차가 점점 불어난 동독의 외화 조달법이었다고 한다. 동독 국민에게도 같은 권리가 있긴 했는데... 1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돈만 가지고 갈수있는 식이라서 물가가 싼 공산권이라면 모를까 물가 비싼 서독이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다, 벨기에 등지로 나갈려면 야영아니고서는 답이 없었기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서독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모른 체한 건 아니라서,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여행올 경우 일정 수준의 여행 경비를 지불하긴 했다. 그리고 간간히 동독에서 서독으로 수학여행 가는 경우도 있긴 했다. 호네커(자를란트 주 노인키르헨)나 마르크스(라인란트팔츠 주 트리어), 엥겔스(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부퍼탈)의 고향 같은 곳을 주로 다니긴 했지만... 다만 노인들은 서독에 가는 게 쉽게 허용되는 편이었다. 노인들은 노동 인구도 아니며 서독에 가 있는 동안에는 연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서쪽으로 보내는 게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독 시민들이 휴가 삼아 헝가리나 소련 등 동구권 국가를 여행하는 일도 꽤 잦았다고 한다. 물가가 쌌으니... 북한 주민들은 휴가도 못 받고, 바로 이웃인 중국 여행은커녕 자기 나라 동네를 건너는데도 통행증을 요구하고 옴싹달싹 못하게 하니 역시 차원이 다르다.
독일의 분단기는 신성로마제국 시기 당시 수많은 공국들로 쪼개져 있던 역사가 길었기에 통일기보다 좋지는 않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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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10월 7일 동독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열병식 광경. 동독에서는 이 날을 국경일 '공화국의 날(Tag der Republik)'로 지정했다.
1989년 11월 9일 동유럽 혁명의 여파에 따른 베를린 장벽 해체에 이어서, 자유 선거가 1990년 3월 18일에 치러지고, 여당 독일사회주의연합당(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은 동독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상실하였다. 그해 8월 23일, 동독 의회는 정권 수립 초반에 폐지했던 5개 주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하였고, 8월 31일 베를린에서 통일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9월 12일에는 4+2 조약을 통해 연합국 4개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통일을 승인받고 국제법상으로 연합국의 점령지였던 베를린의 주권을 반환받였다. 이에 1990년 10월 3일을 기해 동독 정부는 해체되며 동독을 구성하던 5개 주가 개별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하였다.[16]
구 동독 지역은 현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브란덴부르크,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엔인데, 통일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구 서독 지역의 경제 수준을 쫒아오지 못하고 머물러 있어 큰 골치라고 한다. # 한때 독일의 국민소득이 4만 달러를 넘는 데 반해, 구 동독 지역은 3만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물론 이 자체도 아주 낮은 건 아니지만, 서유럽에서는 그 수준이 낙후된 이탈리아 남부(북부 소득의 절반, 2만 달러 이상)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라고. 물론 폴란드보다야 훨씬 낫지만. 현재 한국 기업들은 폴란드나 체코에 공장을 짓는 경우가 많은데, 물건 팔아먹을 서유럽과의 거리 및 인건비 메리트 때문. 만약 독일이 통일 안 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분리독립처럼, 즉 체코와 슬로바키아처럼 따로 노는 루트로 갔더라면 한국 기업들이 공장을 여기에 지었을 수도 있다. 위에서 말했듯 1980년대 말 경기 침체로 한국에 경제적으로 따라잡혀서 인건비 부담이 덜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최대의 경제 대국인 서독이 바로 옆에 있으니... 그리고 동유럽 언어에 비해 독일어는 한국에서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리고 통일된지 30년이 넘었지만, 구 서독과 구 동독은 지금도 임금격차가 여전히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리 구 동독 지역이 가난하다고 까여도 어디까지나 독일 내에서나 그렇지, 구 동구권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옛 자본주의 진영에서도 동독보다 가난한 지역은 널려 있다.[17] #[18] 어쨋든 독일에서 가난한 지역이고 이로인해 근래에 들어 반난민주의를 앞세운 네오나치즘이 일어나 타 독일 지역 주민들의 걱정을 사고 있다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처음으로 연방헌법재판소에서 동독 출신의 재판관이 나왔다.#
코로나19로 인한 피해에서 구 동독 지역의 피해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5. 역대 국가원수
6. 역대 정부수반
7.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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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8일 우리의 투표를 위해" 1986년 동독 총선 포스터.
사회주의통일당이 유일 집권당이었고, 그 위성정당으로 기독교민주연합, 자유민주당, 독일국가민주당[20] , 민주농민당이 있었다. 기독교민주연합은 서독에도 같은 이름의 정당이 있었는데, 통일 이후에 기독교민주연합과 민주농민당은 서독의 기민당에, 자유민주당과 국가민주당은 자민당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동독 기독교민주연합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이들 5개 정당 외에 자유독일청년단,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 독일민주여성동맹, 동독문화협회 등의 외곽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동독 인민의회에서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 127석
- 자유독일노동조합연맹 (FDGB)[21] 68석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CDU) 52석
- 자유민주당 (LDPD)[22] 52석
- 독일 민주농민당 (DBD) 52석
- 독일 국가민주당 (NDPD) 52석
- 자유독일청년단 (FDJ) 50석
- 독일민주여성동맹 (DFD) 35석
- 동독문화협회 (KB) 22석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악명이 높아서, 흔히 미국 경찰, 한국 경찰, 중국 공안 하면서 셋 중 가장 무식하게 때려잡는 중국 공안(...) 유머의 원형이 바로 CIA, KGB, 슈타지 셋을 비교한 유머다. 해당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겠지만, 동독 전체가 대단히 치밀한 감시체제 하에 있었다.
다만 북한이나 중국 같은 경우에 비교하면 언론의 자유는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부터는 집에 안테나 달고 서독 방송을 시청하는 것도 사실상 묵인받았다. 사실 아예 국토 한가운데인 서베를린에서 전파를 쏘는데다가 컬러 TV 송출 방식이 서독은 PAL, 동독은 SECAM으로 다르긴 했어도 어쨌든 남한의 NTSC, 북한의 PAL처럼 아예 호환이 되지 않는 건 아니라서 흑백으로 볼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방해전파를 쏘려고 해도 채널번호가 같아서 방해전파 쏘기가 힘들었고, 또한 서독 TV 보도 프로그램 이 동독 TV 보도 프로그램보다 훨씬 신뢰성이 높아서 고위 관료들이나 상당수 당원조차도 서독 TV를 보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판이니 기껏 안테나 단속을 해봐야 허튼 일에 불과했다. 결국 1970년대 들어 서독 TV 시청을 방해하는 행위를 중단했고, 1980년대부터는 아예 합법화해 버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동북부, 동남부 지역 같이 서독에서 쏘는 전파가 닿지 않아 서독 TV를 못 보는 지역도 있긴 했다. 동독 사람들이나 서독 사람들이나 이 지역을 '''무지의 지역'''이라고 불렀다(...).
또한 평소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항의 편지를 쓰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내부 개혁파였기 때문. 영화 굿바이 레닌을 보면 평소부터 열성당원으로 활동하던 사람이 배급티켓으로 받아온 옷의 사이즈가 엉터리라면서 '''만약 우리의 체격이 당의 충직한 일꾼으로써 부적절한 것이라면, 시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비아냥거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거 실화 맞다. 북한이 심하게 개막장인 것이지 웬만한 공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이랬다. 정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나 지도자에 대한 공격은 용납하지 않아도 이번 달 배급에 문제가 있다~, 우리 동네 공장 돌아가는 것이 개판이더라~ 라는 식의 지엽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대한 비판은 허용되었고 언론에도 실렸다. 다만, 언론의 자유고 뭐고 악명높은 노동강제수용소는 이 나라에도 있었다. 요컨데, 가벼운 불평불만자 정도는 터치하지 않았지만 정말 정권에 도전했다가는 개박살이 났다는 것. 그리고 고문의 경우, 육체적인 고문보다는 취조실의 환경을 이용하여 심리적으로 나약하게 만드는 등 정신적인 고문이 주로 행해졌다.
과거 나치 독일에 대해 서독은 반성의 입장을 밝혔지만 동독도 나치 시대의 만행을 인정하고 전범들을 처벌하는 등 청산하긴 하나 사죄와 배상에 대해서는 '''"우리 세대가 한 게 아니다"'''라면서 모르쇠 배째라는 식의 입장을 보였다. 정확히는,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나치 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이것을 사회주의통일당의 정당성으로 연결하는 식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책임 의식이 단절되는 양상을 보였다. 거기에 일본의 전쟁범죄를 옹호하기도 했다. 통일 이후 구 동독 지역에서 네오 나치 활동이 상대적으로 활발한 것도 이런 책임 의식의 단절이 작용한다는 해석이 있다. 물론 여기엔 아직까지도 개선되지 않는 구 동독과 서독의 경제적 격차 문제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다. 바이에른이 나치가 처음 생겨나고 성장한 곳이기는 하나 대공황 이후부터는 동독이 자리잡은 구 프로이센 지역이 나치의 총본산이 되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기 직전 치른 총선에서 나치의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곳이 바로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노이마르크 일대를 위시로 한 구 프로이센 지역이다. 동독은 서독처럼 "바이마르 공화국 → 나치 독일 → 군정기 → 분단"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 공산주의자들의 반나치 투쟁기 → 군정기 → 분단" 이렇게 가르쳤다.
동독 정부 청사는 동베를린에 위치한 '공화국 궁전'(Palast der Republik)이었다. 이 건물은 본래 베를린 성이 있던 자리에 지은 것이다. 베를린 성은 옛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궁궐이었는데, 1949년 동독 정부가 수립된 직후 이 건물을 철거했다. 그리고 1976년 공화국 궁전을 완공해서 정부 청사로 활용했다. 독일 통일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2006년부터 2년 동안 철거 작업에 들어가서 사라졌으며 베를린 성을 복원했다.
8.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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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멸망 후 독일 분할 지도. 미국·영국·프랑스 관할 지역을 합쳐 서독이 되었다. 서베를린은 본래 소련 점령 지역의 일부였으나 수도라는 상징성 때문에 미·영·불 3개국이 압력을 넣어서 분할한 결과 월경지가 되었다. 지도에서 프랑스가 점령한 파란색 땅 서쪽으로 옅은 노란색(거의 흰색으로 보임)으로 칠해진 땅이 있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자를란트 주이다. 프랑스의 요구에 따라 1947년 독일에서 분리돼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자르 보호령이 되었다가 1956년 서독으로 겨우 복귀해 자를란트 주가 되었다. 동독보다 더 동쪽에 있던 지역들은 각각 폴란드와 소련(그 중에서도 러시아) 영토로 합병됐다. 이 중 소련에 합병된 지역은 쾨니히스베르크를 비롯한 북부 동프로이센으로, 합병 이후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소련이 해체된 오늘날도 같은 이름으로 러시아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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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당시 동독(빨간색)·서독(파란색·연두색)과 자르 보호령(보라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지역은 서베를린이다. 이 지도에서는 동·서독 각 주(Land, 복수형: Länder; 영어: state)의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2차 대전 이후 새로 그은 것이라 그 이전과 차이가 있다. 5개의 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1952년 이후 행정구역이 구(Bezirk)로 개편되어 폐지된다. 동독의 베를린(동베를린)은 '주'가 아니라 특수 지역으로 간주됐다. 상술했듯이 베를린은 명목상 동/서독 정부가 권한을 행사할 수 없는 연합군 4개국의 관할지역이었기 때문.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Land Mecklenburg-Vorpommern) - 북부의 주
- 브란덴부르크 주(Land Brandenburg) - 베를린를 끼고 있는 주
- 작센안할트 주(Land Sachsen-Anhalt) - 브란덴부르크 주의 서쪽
- 튀링겐 주(Land Thüringen) - 가장 서부의 주
- 작센 주(Land Sachsen) - 남부의 주
자를란트 주의 서독 복귀 이후 동독(빨간색)과 서독(파란색·연두색)의 영역. 동독은 땅이 크지도 않은 데다가 중앙집권형 국가가 되어서 주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다. 그래서 이 지도에서는 동독의 주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 동독은 대신 주보다 크기가 작은 행정구역들을 사실상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두었다. 동독의 주는 통일 직전에 부활했고 주로서의 기능은 통일 이후에 회복되었다. 2차 대전 이후 그어졌던 다섯 주 그대로 부활했으나 경계선은 변동이 있다. 별도의 특수 지역이었던 베를린(동베를린)은 통일 후 서독의 베를린(통일 전 통칭 서베를린)에 합쳐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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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이 주의 기능을 정지한 시기 최상위 행정구역인 '구(Bezirk, 복수형: Bezirke)' 경계선. (동)베를린은 명목상 소련군이 관할하며 동독 정부가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구를 설치하지 않았지만 동독 정부 수립 이후부터 사실상 동독 정부가 권한을 행사하며 수도로서 기능했다. 베를린 장벽을 친 1961년 5월 31일부터는 공식적으로 '독일민주공화국 수도 베를린(Berlin, Hauptstadt der DDR)', '베를린 구(Bezirk Berli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동독 정부는 동베를린을 베를린이라 부르고 서베를린은 서베를린이라고 따로 불렀다. 하지만 이때도 (동)베를린만의 특수 지위를 보유한 상태였으나 1968년에 헌법을 고치면서 삭제했다고 한다.
- 구(Bezirk) - 14개
- 로스토크 구(Bezirk Rostock)
- 노이브란덴부르크 구(Bezirk Neubrandenburg)
- 슈베린 구(Bezirk Schwerin)
- 포츠담 구(Bezirk Potsdam)
- 프랑크푸르트 구(Bezirk Frankfurt)
- 마그데부르크 구(Bezirk Magdeburg)
- 코트부스 구(Bezirk Cottbus)
- 할레 구(Bezirk Halle)
- 라이프치히 구(Bezirk Leipzig)
- 에어푸르트 구(Bezirk Erfur)
- 드레스덴 구(Bezirk Dresden)
- 카를마르크스슈타트 구(Bezirk Karl-Marx-Stadt)
- 게라 구(Bezirk Gera)
- 줄 구(Bezirk Suhl)
- 군(Kreise)
- 시(Stadtkreis)
9.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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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베를린 중심가의 1977년 모습.
동독은 전세계 공산주의 국가들을 통틀어서 제일 잘 사는 나라였다.
공산권의 전성기였던 1968년 즈음에는 1인당 GNP가 1801$였으며, 이는 서독의 2206$보다는 적지만 세계적인 기준으로는 선진국 수준이었다. 통일 직전인 1989년에도 1인당 국민소득이 9,679$로 서독의 15,300$와 상당한 차이를 보였으나 여전히 잘사는 수준이다. # 이렇게 보면 당시의 남한보다도 잘 살았던 것이 되지만.....
일단 명목상 1인당 국민소득 격차는 겨우 실질 기준으로 1.5배뿐이었기에 서독 국민들이 '동독? 거기도 좀 사는 나라네. 통일해도 먹고 사는데 별 차이 없겠군' 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당시 동독의 환율은 공식 환율과 비공식 환율이 따로 있었다. 동독 정부에서 동독 상품의 낮은 경쟁력과 서독이나 프랑스 등 서방 제품의 높은 경쟁력으로 인해서 공식 환율대로 환전을 했을 경우에 외화 유출이 대대적으로 벌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사치품 수입을 했을 때나 일반인이 서방으로 여행을 간다든가 했을 때에는 비공식 환율대로 환전을 시켜 주었고, 그러다 보니 공식 환율은 생필품과 연료 수입, 동독 기업들이 외국에서 자재나 설비를 들여놓았을 때 같은 상황에서나 적용을 받게 되었고, 일반인들 대상으로는 사실상 비공식 환율만 사용했다. 그래서 동독은 서방에서 수입해온 상품들의 가격이 최소 3배 이상씩은 높아지는 효과를 낳았다. 그래도 커피같이 필수품으로 여겨졌던 것들은 공식환율대로 수입[23] 했으며 바나나 등 수입 과일의 경우도 일부는 공산주의권에 우호적인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비교적 저렴하게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어쨌든 불법 암시장 환율도 따로 있었고 이 때문에 명목상 수치와 실질 구매력 수치간 격차가 상당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월급이 낮았기는 했지만 기초생필품 값과 공공요금은 그 이상으로 매우 쌌기 때문에 구매력 자체로만 한정한다면 공식환율 그대로라고 봐도 큰 문제는 없었고, 서독에서는 부동산 임대료가 상당히 비쌌던지라 구매력 자체로만 본다면 1.5 배이기는 했는데 문제는 서독은 세계 최고수준의 공업력을 갖추웠지만 동독은 공업력이 떨어졌기에 동독제품의 품질이 떨어졌고, 또한 무역역조 현상을 막기 위해 수입품을 구매하는데 제한이 따랐기에 동독인들이 '''구매력에 비해 실질 소비수준이 그리 높지 못했다는것이 정확하다.'''
암시장 환율은 비공식 환율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암달러상들이 수수료를 많이 떼 가서(동독 주민 입장에서) 환율이 좀 더 높게 책정되었고, 운 나쁘게 단속이 벌어졌을 때 벌금을 거하게 물거나 감옥에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따랐다는 차이점은 있었다. 그래도 비공식 환율대로 환전한다 해도 환전 규제가 적용되는 것이 보통인지라 서독을 갈 일이 생기거나 사치품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들 애용하기는 했다. 특히 동독 마르크-서독 마르크 간의 '공식적' 교환비가 1:1이었지만 실제 암시장에서는 공식 환율의 1/3 이하 비율로 통용되었다. 이는 미국 달러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러다보니 동독 마르크의 경우 서유럽 어느 은행에서도 환전이 불가능했다.
즉, 실제 동독과 서독 간의 생활수준 경제적 격차는 사치품을 구매했을대 바가지를 써야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높았다. '도이치 현대사'에 따르면 세계은행에서 1970년대 말에 한시적으로 영국병에 걸린 영국을 국민소득에서 추월했다고 나와있는데 이것 또한 고정환율발이다. 이러한 실제 가치를 토대로 통일 당시 동독의 1인당 국민소득을 계산할 경우 잘 쳐봐야 4,500달러 정도밖에 안되었고, 거기에다가 동독은 1980년대에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에 불어닥친 심각한 경제 불황까지 겹쳤다.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의 원조가 큰 역할을 했던 데 비해, 동독은 소련에 280억 달러 상당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과거부터 내려오던 많은 산업기반들(본사, 생산 시설, 인적 자원)이 서독으로 대거 유출됐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달성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수 있었다. 다만 소련도 바보는 아니라, 이 배상금을 동독이 망하건 말건 뜯어낸 건 아니고, 몰로토프 플랜으로 지원한 후 경제가 발전한 뒤 분할 상환의 형태로 받아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서방이나 소련이나 2차대전 패전국 독일을 그야말로 알거지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냉전이 본격화하면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였기에 국민들 전반이 풍요롭게는 살지 못해도, 그런 이유로 제법 넉넉하게는 살 수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은 석유, 가스 등 에너지 자원을 공산주의 형제국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였는데, 통일 후 전기와 가스, 수도 요금이 개편되어 가격이 급상승하자 동독 주민들이 물을 아끼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덧붙여서 통일 이전을 그리워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산주의 표방 국가가 대부분 경공업보다 중공업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계획경제 때문에 생필품 부족현상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치약이나 비누, 의류, 가공식품 같은 경공업 제품의 경우 종류가 한정되고 질도 낮은 편이었다. 또한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자주 발생했다. 돈은 있는데 가게에 물건이 없어서 못 산다거나,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것. 그래서 당시 동구권 주민들의 저축률이 높았다. 다만 모든 것이 국가 소유였으므로 은행의 저축금을 필요로 할 사유 기업은 없었고, 이렇게 저축한 돈은 국영 산업 육성과 군대에 투자되었다. 즉 풍요로운 건 아니고 그냥저냥 주민들이 먹고 살만한 정도였다. 국산 밀이나 아프리카산 바나나[24] 는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미국산 자동차나 일본산 가전제품은 구하기 어려운 나라였다. 종합해보면, 국민들은 분명 모두가 기본 의식주에 지장이 없음에도 국산품의 낮은 질[25] 과 선택의 여지 부족으로 행복지수는 높지 않았다고 한다. 종종 불편한 경우는 있지만 살지 못할 지경은 아닌 정도의 생활 수준이었다. 외국 사치품의 경우에는 인터숍(Intershop)에서 취급했는데 사실 처음에는 동독인들이 외화를 소지할수 없었기 대문에 고위간부나 외국인 관광객 전유물이었고, 이후 1975년부터 외화소지가 합법화되면서 동독인들도 서구의 사치재에 접근할수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역시 서독 마르크나, 프랑스 프랑, 미국 달러같은 외화를 지녀야 물건을 살수있었던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서독에 친적이 있거나 외국에 나가서 일을 했다던가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진것이 아니라면 접근이 쉬운것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서방 관광객을 대상으로 밀거래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통일 이후에는 '가게에 물건은 많은데 돈이 없어서 못 사는' 경우가 생겼고, 입장료가 비싸져서 동독 시절에는 거의 공짜로 매주 1~2번은 관람하던 음악회나 공연 등을 보기 힘들어졌다고 하고 각 동네에 한 곳 정도는 있던 도서관과 문화회관 역시 폐관하는 경우도 잦아졌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보려면 멀리 걸어다녀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통일 이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로 예산업무가 넘어갔는데 서독 정부에서 예산을 많이 줄 처지가 아니고 동독 내의 지방정부도 인구유출이나 실업난 등의 문제로 재정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지라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예산을 확 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회관이나 도서관을 폐관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공산주의 국가 특성상 예술은 어디까지나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인민대중을 위한 위로의 매개로서 예술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연은 입장료가 없었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국가에 소속되어 월급을 받으며 대중을 위해 창작하고 공연한다.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공연이 없었던 것. 그래서 당시에는 노동자들이 오페라나 관현악 공연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장점이라고 한다. 게다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잘 사는 축에 속한 동독이었기에, 지역마다 도서관이나 미술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동독 출신의 사람들이 통일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먹고 사는 건 지금이 더 나은데, 문화적으로는 그 때가 오히려 더 풍요로웠다"는 것.
또한 공산당 일당독재 때문에 부패가 심각했다. 통일 직전에 동독 체제가 와해되면서 공산당의 부패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다른 공산국가들보다는 물론 나았으나 결국 동독 주민들의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폭락하고 통일에 대거 찬성하면서, 개혁된 공산주의 국가로서 동독을 유지하려는 일부 원탁회의에 참여한 동독 지식인들의 구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경제의 상당수를 서독에 의존했다. 정치범을 석방시키거나, 언론을 조금 풀어주거나, 아니면 국경에 설치된 미사일을 제거하는 등 전향적인 태도를 동독이 보여줄 때마다 서독은 지원금을 보냈다. 이는 70년대 이후로 침체되가던 동독 경제를 한창 발전하던 것으로 위장시켜 주었다. 사실 적어도 외채위기는 겪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폴란드나 루마니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같은 국가에 비하면 침체의 정도는 덜했다. # 이 때문에 서독은 소련에 이어 동독의 두번째 교역 상대국이었다. 서독을 통해 당시 유럽공동체(EC) 회원국들에 관세 장벽 없이 상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일부 EC 회원국들은 이를 지적했으나 서독의 묵인 속에서 별 탈 없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1980년대에는 동독의 교역에서 서방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에 달했다.
10.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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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군은 국가인민군('''N'''ationale '''V'''olks'''a'''rmee, '''NVA''')으로 부른다. North Vietnamese Army(북베트남군)과 약칭이 같으므로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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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슈타지 예하 프리드리히 엥겔스 근위연대의 모습이다.
1989년 건국 40주년 기념 국가인민군의 열병식
육해공군 및 슈타지 정복이 나치 독일 시절의 군복과 많이 닮은 편에 속하며, 실제로 동독군 정복을 나치 독일군 군복으로 개조하기도 한다. 철모도 나치 독일군의 슈탈헬름과 얼핏 보기에는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철모는 나치 독일군이 도입하려다가 망하는 바람에 도입하지 못한 신형 철모를 개량한 것이었다. 원래는 동독군도 나치 독일군이 사용했던 슈탈헬름을 도입하려 했으나 소련측이 용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정복까지만 그렇고, 전투복 쪽은 완전히 냉전 당시 소련군의 스타일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래도 전투복의 위장무늬나 철모만큼은 소련군의 것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동독 고유의 독자적인 것을 대신 사용했으며, 특히 철모는 나치 독일 시절의 슈탈헬름을 개량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동독군의 군복은 러시아식과 독일식이라는 두 가지 양식이 하나로 혼합된 독특한 인상을 주는 복장이 되었다. 무장 면에서도 소련제 AK-47, AK-74 등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였는데, 독일의 뛰어난 과학 기술과 공업 능력을 바탕으로 원본보다 많은 점이 개선된 뛰어난 무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것은 인적자원 측면에서도 비슷하였는데, 동독군이나 서독군 모두 전직 나치 독일군 장교들이 상당수 영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각각 소련군식-미군식의 조직을 따랐지만, 1950년대 창군 당시 양국의 영관급 이상 장교들의 거의 대부분은 모두 나치 독일 시절의 독일 국방군 출신이었다.
또한 동독군은 붉은 프로이센군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튜브에서 동독군의 퍼레이드 영상을 보면 프로이센 시절의 행진곡에 맞추어 행진하는 영상도 볼 수 있다. 서독군은 나치 독일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독일제국군과도 완전히 단절을 선언했지만, 동독군은 근대적 군대의 모델이 되는 프로이센 총참모부를 만든 샤른호르스트를 기려 샤른호르스트 훈장까지 만들었을 정도로 프로이센군의 전통을 이으려고 노력했다.
동독군은 통일 시기였던 1989~1990년간의 행동으로도 유명하다. 동독은 당시 인민의 혁명을 우려하고 동독군을 동원한 진압을 고려했으나 투철한 공산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동독군 초급장교 및 사병들이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공격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터라 포기했다. 심지어 동독군은 1990년 초까지 국가인민군은 인민의 군대로서 인민을 위해 존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이 통일되어 동독군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해체 전날(!)까지 평시대로 근무했다. 이후 독일연방군이 재교육을 실시할 때도 연방군 이념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등 통일 기간 동안의 동독군은 여러모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26][27]
11. 문화
흔히들 생각하듯 북한이나 중국처럼 막장 국가는 당연히 아니었고, 언론의 자유도 약간은 인정이 되었고 개개인의 자유에는 국가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물론 종교의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하는 등 일부 억압은 당연히 있었으나 이때의 동독은 그나마 타 공산 국가들에 비해선 숨이라도 돌릴 수 있던 나라라고 보면 된다.
1950년대에는 로큰롤 밴드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수감되는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암시장에서 몰래 서구의 음반을 구할 수 있었고, 외국 물건도 알게 모르게 다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동독은 어쨌든 서구와 맞닿아 있는 첨병 역할을 했고, 남한과 북한이 완전히 막혀있는 것과 달리 민간부분의 교류나 교역은 꾸준히 이뤄졌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서구의 음반이 상당히 많이 들어왔고, 해적판도 더러 제작되어 유통되었으며, 80년대에는 비디오테이프도 복사본으로 많이 돌았다고 한다.
서구의 팝 음반들은 주로 불가리아나 부다페스트를 통해 들어왔는데, 불가리아에서는 서구권 음반들을 라이센스로 발매했고, 부다페스트에서는 아예 원판을 직접 수입해서(!) 판매했다고 한다. 다만 가격은 험악했는데, LP 1장에 대략 250 동독 마르크로 평균 한달 월급의 절반 가까이였다. 다른 방법으로는 서독으로의 여행이 자유로웠던 연금수령자 친척에게 부탁해서 들여오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LP 계(...)"'''를 조직해 대여료를 받고 서독에서 들여온 음반을 카세트에 녹음하게 한 다음 그 LP를 판매해 다음 LP를 살 돈을 마련하는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했다고.# -
동독 록밴드 카라트(karat)의 82년곡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
로큰롤 초기에는 동독 정부가 나서서 규제했지만, 이후 록 음악이 전 세계 대중음악계에 대 성공을 거두면서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1960년대에는 싸이키델릭 록 밴드도 생겨나고 70년대에는 펑크 록 밴드들까지 생겨난다. 아니, 생겨나기만 한 수준이 아니라 푸디스(Puhdys)나 카라트(Karat)와 같은 록밴드는 '''서독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동독의 락을 가리키는 오스토록(Ostrock)이란 단어까지 생겨났다. 카라트의 82년 앨범 푸른 행성(Der Blaue Planet) 같은 경우는 동서독에서 동시에 한 해에 가장 많이 판매된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서독 출생(동독 성장)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카라트의 팬이라고 밝혔다.
어쨌든 개개인의 사적인 부분은 규제하지 않았고, 서방의 인스타일, 부르다, 보그에 대응하는 지빌레, 프라모 같이 패션잡지가 있을 정도. 물론 이 패션잡지들은 편집장부터 직원들이 당과 슈타지의 요원이거나 정보원들이었으며 체제에 협조하는 대가로 발행하긴 했지만... 어쨌든 정치에 대들지만 않으면 전체적으로 내버려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는 중앙유럽 국가들의 거의 대부분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 정도의 수준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그 대신에 슈타지에 의한 감시 체계는 철저했다. 대신 1961년 전까지는 반체제인사들을 물리적으로 고문하였으나, 이후 지상감옥으로 옮기면서는 정신적으로 고문하였다.
게다가 성문화는 오히려 동독이 서독보다 자유로웠다고 한다! 어떤 영상에서는 '''남녀의 성기를 모자이크 없이 드러내놓고 있으며''', 심지어 해수욕장,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이 남녀노소 다 벗고 있는 경우도 있다.''' 서유럽은 제한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매춘이 창궐하고 성산업이 늘어난 반면, 동독에서는 1960년대 당시 한 여자가 3~4명의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한다. 심지어 누드비치도 성업중이었고, 위 영상을 보면 46분경에 나체주의자들이 행진하는데 에리히 호네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심지어 이 행사는 1987년 베를린 성립 750주년 퍼레이드 행사였다. 아마도 동양권 공산주의 국가와 서양권 공산주의 국가의 차이로 보여지는데, 동양에서는 특유의 엄숙주의와 유교적 문화 때문에 성에 대한 공식적 언급이 금기시된 반면, 서양에서는 어디까지나 이것을 사적인 영역으로 취급하여 "국가가 건드려서는 안 될 어떤 것"으로 취급했다고 한다. 그와 별개로 포르노물이나 성인잡지같은게 창간되는 일은 없었으며 서구의 성인잡지나 포로노물의 수입도 공식적으로는 금지였다. 다만 슈타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불법적으로'''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포르노 영상물을 만드는 건 불법이었기에 용돈벌이용으로 만든 수준이기는 했지만. 반입했을 때는 압수하였으며 섹스용품 가게의 개업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통일 당시 정작 가장 적극적인 통일 반대론자들은 바로 여성들이었다고 한다. 서유럽의 여성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점. 그리고 서독에선 낙태가 '''불법'''인 점을 들어 반대했다고 한다. 동독에선 임신 12주까지의 낙태가 이미 자유였던데 반해 서독에선 통일 직전에도(...) 낙태가 형법 218조에 의해 엄격히 제한되었고, 특정 사유없이 낙태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정확하게는 빌리 브란트 정부 시기에 낙태를 합법화했지만 1975년 연방대법원이 이 낙태법에 대해 빠꾸(...)를 먹이면서 재불법화되었던 것. 그래서 서독 여성계에선 낙태를 합법화하기 위한 시도를 벌였지만 1980년대 기민련/기사련이 집권하면서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리고 동독 여성들의 경제활동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특성 상 대부분의 기업체가 공기업인데다가 동독 정부에서 노동력 유출을 메꾸기 위해 여성의 사회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이를 위해 여성들의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에 때문에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비율이 상당히 높았고 보육시설도 잘 마련되어 있다. 이에 비해 사기업이 대다수를 차지했던 서독에선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경우가 적었고, 보육시설이 잘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국토는 지금의 한국보다 조금 더 큰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인구도 지금의 루마니아보다 적었지만 매우 강력한, 특히 70~80년대에는 소련과 함께 세계를 주름잡는 스포츠 강국이었다. 하계 올림픽에서 2위를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0 모스크바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 3차례나 기록했고, 3위도 1972 뮌헨 올림픽에서 한 차례 기록했다. 첫 분리 출전이던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종합 5위. 동계올림픽 역시 첫 출전했던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에서 10위를 기록한 것을 빼면 계속 소련에 이어 종합 순위 2위를 유지했다. 심지어 1984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는 아예 소련까지 제치고 종합 우승까지 차지했다. 서독과 분리해서 출전한 이후로 단 한번도 종합순위 10위 밖으로 밀린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기록의 소유국. 그나마도 70~80년대에는 아예 종합 순위 2~3위에서 계속 내려오지 않았다.
1988 서울 올림픽은 동독이 체밀레를 시전하여 '''미국도, 서독도 아닌 동독이 2위였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동독이 소련에 이어 종합 2위를 차지, 만년 우승후보 미국을 3위로 밀어내며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참고로 동독 스포츠가 발군이었던 이유의 하나는, 코치들이 이 학교 저 학교 돌아다니며 재능있는 아이들을 마구 찾아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28] 공산주의 국가라는 특성상 체육계도 중앙정부가 꽉 쥐고 있어 체육인 육성 산업에 중앙정부가 지원을 할 수 있어서 가능했던 현상. 참고로 학생들에게도 스포츠 선수는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외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수 있으며 우수한 성적이 나오면 국가 입장에서는 선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기에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는 비단 동독 뿐만 아니라 소련이나 대부분 공산권 국가에 해당하는 얘기다. 육상 여자 400m의 마리타 코흐가 1985년 기록한 47초 60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우수한 선수들을 선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국가적 차원에서 이 선수들에게 스테로이드 등의 약물을 대량 투여했다는 것. 선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먹여댔기 때문에, 여성 선수가 자신의 '''목소리가 쉬고 어깨가 넓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비로소 트레이너가 자기에게 스테로이드를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독으로 망명한 적도 있다. 그리고 안드레아스 크리거(Andreas Krieger)라는 투포환 선수도 여자면서 아예 여자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등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고, 이로 인해 나중에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여성이었을 때의 이름은 하이디 크리거(Heidi Krieger)였다.
모든 종목에서 서독보다 우세했던 동독도 서독보다 못한 몇 안 되는 종목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축구. 그렇다고 동독이 지금의 산마리노나 지브롤터처럼 그렇게 못한 것도 아니다. 월드컵도 8강까지 진출해본 적도 있었다. 그것도 서쪽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게다가 조별리그에서는 서독과 한 조였기 때문에 서독과 경기를 치루기도 했다. 그리고 1-0으로 이겼다. 이 경기가 성인 대표팀에서 동서독 대표팀이 서로 맞붙은 처음이자 마지막 경기였다. 바꿔 말하면 친선 경기 한 번 없었다는 소리. 때문에 동서독 간의 전적은 동독의 우세로 종결. 올림픽 금메달 하나도 따는 데 성공했다. 이 때 딴 금메달이 현재까지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이다. 그럼에도 동시대 서쪽의 동포들이 이룬 성과를 생각해보면 그저 안습.
12. 국가
구 동독의 국가는 Auferstanden aus Ruinen(폐허에서 부활하여)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을 참고하기 바람.
13. 외교 관계
수교국은 1970년대 이전에는 서독의 할슈타인 원칙에 따라 주로 공산권 내지 친공 국가들에 국한되어 있다가, 1970년대 이후 서방 진영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일본과 관계가 깊었다. 이밖에 팔레스타인과 북키프로스랑 교류하기도 하였다.
13.1. 남북한과의 관계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국에 의해서 동서 분단이 되자 동독은 1949년 북한과 단독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1955년 남한이 서독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면서 동서독과 남북한 두 분단 국가간의 정치적 이념과 대립이 시작되었다. 그래서인지 1969년에 건설된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세계 시계탑에는 건설 당시에는 UTC+9 지역에 야쿠츠크, 평양, 도쿄밖에 없었다. # 그 자리에 서울이 새겨진 것은 독일 통일 이후인 1997년 보수 공사 이후였다. 그러나 1988년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1988 서울 올림픽 때는 서독과 함께 한 자리에 참가하였다.
북방정책에서 동독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지라, 1990년 3월부터 루마니아와 함께 본격적인 수교 협상이 시작되어 1990년 5월 워싱턴 주재 양국 대사관 간의 비공식 접촉을 통해, 독일이 통일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수교에 합의하였지만 그 해 10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며 최종 서명은 이뤄지지 못했다. 한편 동독과만 수교한 북한은 1990년 10월 통일이 되면서 관계가 한때 단절되었다가 2001년 통일 독일 정부와 외교관계를 복원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공백기에는 중국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외교 관계만 유지했다.
13.2. 에른스트 텔만 섬 떡밥
1972년 에리히 호네커가 쿠바를 방문했을 때, 피델 카스트로는 동독에 대한 우호의 뜻으로 자국의 무인도 'Cayo Blanco del Sur' 섬을 'Cayo Ernesto Thaelmann' 섬으로 개칭하고 동독에 넘겨주었는데... 서독과의 통일조약에서 이 섬이 언급되지 않아서 동독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떡밥이 제기되기도 한다. 마이크로네이션인 몰로시아 공화국은 아직도 동독과 전쟁중임을 자칭하는데, 없어진 지 30년이 되어가는 동독과의 전쟁 상태를 이 섬의 존재를 이유로 이어가고 있다(...) 주독일 쿠바 대사관에서는 그건 할양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동독 입장에서도 솔직히 서독과 똑같이 나치의 만행으로 인해 더이상 현재 독일 영토 외의 영유권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저 제스처로만 넘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4. 분리주의는 없지만...
과거 분단국가였던 베트남이나 예멘과는 달리 과거 동독의 체제를 수복하려는 분리주의 운동 같은게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부 동독인들 사이에 Ostalgie (오스탈기)라는, 독일 통일과 그로 인한 급격한 변화로 인해 과거 동독 시절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은 존재한다. 심지어 이들은 극우화, 또는 극좌화되는 경향을 많이 보이기도.
15. 미디어에서
- 통일 직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독일 영화 굿바이 레닌에는 동독 주민들이 향수를 느끼는 필수요소들이 여기저기 박혀있다. 트라반트라든가 별장이라든가 악투엘 카메라[29] (...)라든가.
- 1984년작 ZAZ사단의 특급비밀!(Top Secret!)에서 비록 코미디 영화이지만 동독군에 대한 고증이 그럭저럭 된 편이다.
- 게임 Workers & Resources: Soviet Republic에선 공산권 차량들 중 우수한 성능의 차량을 구매할 수 있다. 다만 서독에 비해선 확실히 밀리는 편.
16. 창작물에서의 동독인
작품의 파생외전 캐릭터도 포함한다. 단 동독군이지만 타국가 출신은 제외.
작품의 처음에는 서독군으로 나오지만, 동독 태생이다.
- 아이리스디나 베른하르트
- 리즈 호엔슈타인
- 아네트 호젠펠트
- 그레텔 예케른
- 발터 크루거
- 베아트리스 브레메
- 잉그힐트 브로니코프스키
- 오토 슈트라우스
- 하인츠 아크스만
- 프란츠 하임
- 쿠르트 그리벨
- 비비 슈바인슈타이거
- 홀저 한니발
- 마라이 하이젠베르크
- 유르겐 베른하르트
- 아벨 브레메
- 토마스 호엔슈타인
- 마레네 호엔슈타인
- 즈지 차프
- 마르틴 카렐
- 파르카 뮬렌캄프
정확히는 동독에서 미국으로 이주(내지 망명)한 독일계 미국인.
17. 나무위키에 등재된 구 동독 지역 도시
- 괴를리츠
- 구벤
- 글라스휘테
- 노이슈트렐리츠
- 드레스덴
- 라이프치히
- 로스토크
- 리자
- 마그데부르크
- 마이센
- 바이마르
- 비스마르
- 동베를린
- 슈베린
- 슈트랄준트
- 아이제나흐
- 에어푸르트
- 예나
- 오라닌부르크
- 켐니츠
- 코트부스
- 포츠담
- 프랑크푸르트 (오데르)
- 할레
[1] 이 국기는 1959년부터 쓰인 것으로, 그 이전에는 서독과 같이, 국장이 없는 것을 썼다.[2] 이 표어는 동독 뿐 만 아니라 많은 공산국가들이 사용하는 표어였다.[3] 중앙에 뻥 뚫린 구멍이 바로 서베를린이다.[4] 동독의 주들이 독일연방공화국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서독 연방제 국가에 흡수통일.[5] 동독 당국은 그냥 베를린이라고 불렀다. '사실상'이라고 붙은 이유는 명목상 베를린은 동/서독 정부가 아닌 미/영/프/소의 연합국 4개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질적으론 동/서독 정부가 관할했다.[6] 정권 수립 직후부터 동독 정부는 동베를린이 동독의 수도임을 선언하였고 소련을 위시로 한 공산권은 곧바로 이를 인정했다. 반면 서방국가들은 이것을 동독 정부의 월권 행위로 보고 동독이 소멸할 때까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가면 대사관을 동베를린에 두는 등 사실상 현실을 인정하긴 하지만.[7] 다른 공산국가들에 비하면 종교 탄압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이들도 교회를 폭파시키고 그 자리에 대학을 세우는 등 공공연하게 종교를 탄압했다.[8] 1990년에 자유선거를 실시하면서 다당제로 변경했다.[9] 이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공산주의의 반의어를 민주주의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10] 공산 진영 수장 소련도 다민족 국가다보니까 민족끼리의 통합을 위해 민주주의와 화합 등을 강조하기는 했다.[11] 민주 캄푸치아나 독일 연방 공화국/독일 민주 공화국, 베트남 공화국/베트남 민주 공화국,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등의 사례등을 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공식 국호에 '민주'(주의) 라는 단어가 직접 들어가는 사례는 공산권(제2세계)에서 더 흔히 찾을 수 있다. 비슷한 국호 두 개가 나란히 있을 때 그 중 '민주' 자가 들어간 국호가 있으면 그 쪽이 공산진영 국가의 국호라고 찍어도 대강 맞아떨어질 정도이다. 이는 일단 국호에 이념을 표현하는 단어를 넣어 강조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제2세계 국가들에서 훨씬 강했기에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화로 국체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국호를 채택하게 될 경우 이념을 상징하는 단어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12] [13] 한국에서도 '대한민국 북부 지방'과 '북한'이 지리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대한민국 북부 지방'은 사실 평안도(관서)와 함경도(관북)만 칭하는 개념. 이 구분에 따르면 황해도(해서)는 중부 지방에 들어가고 충청도(호서)는 남부 지방에 들어간다(그래서 충청도(호서), 전라도(호남), 경상도(영남)를 묶어 삼남(三南)이라고 한다.). 다만 분단 이후로는 황해도 역시 북부로 칭하고, 대신 충청도를 중부로 칭하는 경우도 꽤 늘었다.[14] 이는 연합군 점령하 독일의 소련군 점령지를 의미하는 용어였으나 동독이 수립되고도 소련의 통치를 받는 괴뢰국이라 하여 이 명칭을 계속 사용하였다.[15]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 참조.[16] 그래서 공식적으로 독일의 재통일은 서독의 일방적인 흡수통일이 아니다. 그냥 동독 정부가 공중분해되어 사라지고 그 잔해인 5개 주를 서독 정부가 흡수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이 동쪽으로 확장된 것.[17] 동독은 당시 공산권에서는 가장 잘 사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서독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였다.[18] 좀 더 자세한 통계는 유로스타트 지역별 GDP페이지를 보면 된다. 첫번째 지도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19] 1990년 4월 5일 신설된 독일민주공화국 헌법 제75조에 의하면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 그리고 선거에 대한 법률이 의결될 때까지 인민의회 의장단이 국가평의회를, 인민의회 의장이 국가평의회 의장을 대신한다." 원래 Präsident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국가원수로서 이 직책을 지낸 사람은 여성 한 사람 뿐이므로 여성형 명사인 Präsidentin이라고 쓴다.[20] 동독의 전향한 나치 잔당을 포섭하기 위한 정당이었다.[21] 사회주의통일당과 연계된 동독의 사실상 유일한 노동조합연맹이었다.[22] 서독·통일독일의 자유민주당(FDP)하고는 이름이 다르다.[23] 그렇지만 커피도 브라질에서 대부분 수입해왔기 때문에 브라질 커피농사가 흉작이었을때는 커피값 폭등으로 수입량이 크게 줄어들어서 한국의 "콩피" 비슷하게 대용품으로 때워야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과 따로 커피 수입계약을 맺으면서 오래가지는 않았다. [24] 열대 수입 과일은 아프리카에도 공산주의권에 우호적인 정권이 여럿 있어서 그런 나라들로부터 비교적 값싸게 수입할 수 있었다.[25] 물론 자본주의 서방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낮은 수준이지 제3세계 저개발 국가의 생산품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26] 다만 군 대응을 하지 못한것은 당시 동독 지도부가 호네커를 비롯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강경파가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것이 있으며, 설령 인민군으로 진압하지 않아도 과거 헝가리 봉기나 프라하의 봄처럼 동독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통해 진압할수 있었다. 당시 동독 주둔 총사령관인 보리스 스트네코프는 강경한 매파였으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하여 내정 개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동독 정부가 요청하면 소련군이 출동하여 진압할수 있었지만, 호네커가 실각되고 온건파인 에곤 크렌츠가 집권하면서 이러한 시도는 실행되지 않았다.[27] 이러한 정반대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 천안문 사태 당시의 중국이며, 당시 베이징 군구 사령관인 쉬친셴도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부리를 돌릴수 없다"'며 군 진압을 반대했지만, 당 지도부가 나뉘어 시위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동독 지도부와 달리 중국 지도부는 자오쯔양 같은 온건파나 반대파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을 비롯한 강경파가 우위였던 탓에 흔들리지 않았고 쉬친셴을 직위해제 하여 손쉽게 시위를 유혈진압 할수 있었다.[28] 출처 : 독일 프랑스 공동 역사 교과서 - 동북아역사재단[29] 동독 국영TV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