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군밤의 왕/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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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 페이지, 조아라, 리디북스에서 연재되고 있는 대체역사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 등장하는 조선을 소개하는 문서.
2. 왕실
2.1. 왕사
귀남이 아무리 주변에서 강하게 권하여도 자영 외에 다른 비빈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아 후궁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완친왕과 의친왕이 태어나지 않았다. 반면 원 역사에서 몸이 약했던 세자 이척, 군호를 짓기도 적에 요절한 민비의 3남과 4남은 세자 척이 태어나기 전에 두 자녀를 잃은 귀남이 내의원을 엄히 질책하여 조선의 의학이 개화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결과 건강히 자라고 있다. 경양대군의 경우에는 어렸을 때부터 개화식, 즉 양식을 즐겨 먹어 태조의 환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다. 그리고 원 역사에서 성불구자라는 의혹이 있는 척이 나이 스물에 벌써 자식이 둘이다.
2.2. 궁전
1875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1886년에 중영의 대업을 마쳤다. 처음 설계를 할 때만 하더라도 심심찮게 존재하던 유럽식 전각은 그래도 명식의 나라의 법궁인데 국초의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기 저어된다 하여 경무대만 남기고 경운궁으로 넘겼다.
정전(正殿).
편전. 기무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안에 있는 서양 기물은 천장에 달린 전등 하나 뿐이다. 일월도 병풍 앞에 용평상 놓였고, 어떤 나라가 어디 붙어있는지 아무리 들어도 잘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 귀남을 위해 용상 앞에 좌우로 늘어선 서안들 뒤편에 새로 그린 천하전도와 신증동여도가 서 있다.
- 경무대(景武臺)
후원에 위치한 전각. 양옆에 청기와 올린 행랑채를 끼고 있는 복층 전각으로 귀남이 저의 기억 속에 경무대, 즉 청와대 있던 자리에 반쯤 장난삼아 세웠다. 편전과 침전을 겸할 수 있도록 큼직하게 지었으며, 입식과 좌식 두 방식대로 차린 방이 각각 따로 있다. 서양식 난방 기능이 구비되어 있어 겨울에는 사정전 대신 경무대에서 모임이 또 하나의 상례가 되었다.
경복궁이 복원되기 전까지 사실상 조선의 정궁이었다. 원 역사보다 경복궁 중건이 늦어져 먼저 전구가 설치되었다.
편전. 귀남이 오페르트를 접견한 곳이다.
침전. 철종이 숨을 거둔 곳이다. 철종 사후 민자영이 처소로 사용했다.
동궁. 귀남이 왕세자 시절 침소로 사용했다. 민자영이 간택된 곳도 여기다.
편전. 귀남이 박규수에게 자신의 뜻이 개화에 있음을 알려준 곳이다.
전각. 흥선대원군과 벨로네 백작이 이곳에서 을축양요를 어떻게 수습할지 논의하였다.
누각. 귀남이 경연장으로 애용했다.
- 춘당대
후원에 위치한 석대. 원래 경복궁에 지으려던 양관 하나를 축소하여 이곳에 올려 기무회의 장소로 사용했다.
창경원을 기억하고 있는 귀남이 경복궁이 중수된 김에 창경궁 한 곳 정도는 백성들이 즐길 수 있는 공원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신료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없던 일이 되었다.
침전. 서태후가 조선으로 파천했을 때 처소로 사용했다.
경복궁 중건할 때 더불어 고쳐 지었다.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부지이다 보니 국격을 고려하여 여차하면 행궁 정도는 될 수 있도록 고치고 남은 터는 나라의 큰 행사가 있을 때 쓸수 있도록 유럽 양식으로 전각과 정원을 두었다. 세자 척의 가례가 이루어진 곳도 경운궁의 유럽식 전각이다.
3. 정치
3.1. 국제
'''제1조: 대조선국은 자주지방으로,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제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2조: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3.1.1. 전제정치?
국제 1조에서 대놓고 전제정치를 명언하였으나 바로 2조에서 '만백성을 이롭게 하기 위해' 라는 제한을 걸어버려서, 군주의 위엄과 권세가 신의 뜻이나 당연한 전통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보장되고 제약된다는 해석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작중에서도 외국인들은 이게 도대체 전제군주정인지 입헌군주정인지를 혼란해하는 상황. 조선 측에서는 글귀 그대로라며, 당신네 정치체제 구분을 어찌 유교적 전통에 따라 구성된 조선의 국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느냐고 해명했다.
조선시대에 전제(專制)라는 단어는 오늘날 쓰이는 것과 정반대의 뜻으로 쓰였으며 오늘날의 쓰임새는 근대에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작중 시점에서의 전제정치란 사실 입헌군주제를 뜻한다는 팬들의 해석이 있으나 그런 경우라면 1조와 2조의 해석에 충돌이 없이 바로 입헌군주제로 해석되므로 외국인들이 '조선은 도대체 전제군주국인지, 입헌군주국인지'를 물으며 혼란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단어는 오늘날의 쓰임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국제를 외교관 등에게 소개하는 과정에서 '전제정치'가 'despotism'으로 번역되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2. 행정부
3.2.1. 국제 제정 이전
3.2.2. 국제 제정 이후(총리직선제 이전)
- 의정부
- 육조
- 기타
3.2.3. 역대 총리대신 및 내각
3.2.3.1. 최익현 내각
3.2.3.2. 민태호 내각
3.2.3.3. 김옥균 내각
3.3. 입법부
국회를 참의원, 국회의원을 참의대부라고 부른다. 참의대부는 종4품이며 각 군현에서 추거로 총 300명이 뽑힌다. 임기는 4년이다. 참의대부 추거 출마는 진사 이상의 사람 중에서 실직에 있지 않은 자들만 가능하다. 조선에서 출생한 사람만 가능하다는 제한은 없어서, 프랑스 망명객이 출마하여 당선되는 혁신적인 정치체계가 되어버렸다. 참의원 건물은 작중 묘사 상으로 운현궁 건너편 마당에 이삼층짜리 양관을 지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3.3.1. 정당
- 유당(儒黨)
참의원 개원 초기 기정진을 구심점으로 삼남과 기호 지방의 선비들이 뭉친 파벌. 천진 교안 때 청과 합수단을 꾸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동요하는 민심을 위무했다.
- 산당(山黨)
참의원 개원 초기 전 아오지 만호 이백능을 구심점으로 차마 선비라고 하기 어려운 북부 출신 진사들이 뭉친 파벌. 유당에서 저쪽은 그저 북변 산속에서 올라온 산척 무리들이라며 비꼬며 붙인 이름이다.[1] 수로 따지면 유당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세만은 높았다.
- 개화당(문명과 진보의 당)
박규수가 창당한 조선 최초의 정당. 안동 김문 등 문벌에서 재벌로 거듭난 명문거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부르주아 정당이다.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외교적으로 유학생 출신이 많아 친유럽 성향이 강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도중(노조)들과 불편한 사이다. 제1회 참의대부 추거에서 대패 후 당내 중진들의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와중 김옥균이 김문 세력과 당내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하였다. 이후 경화시보를 설립하며 민족주의를 당론으로 내세우고 있다.
- 만민공산당(인민의 공산당)
흥선대원군이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친 공산당 선언을 정강으로 채택하여 창당한 반세도가 정당이다. 당 실세 오경석이 역관 출신이라 중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과거 시험이 고시로 개편되면서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여 이대로라면 장차 공산당 대부의 씨가 마를 지경이라 줄기차게 참의대부 요건 완화를 외치는 중이다.
군비 증강을 반대하는 전봉준의 기고문과 여학 설립 등의 정책 공약 덕에 백성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제1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2회 추거에서는 개화당의 약진과 지방 토호의 외면 때문에 원내 1당 자리는 뺏겼으나 대신 어부지리로나마 총리대신 자리를 가져왔다.
세족 중에서는 여흥 민씨 일부가 왕후 민씨와 대원군의 관계를 이용해보려고 참여중이다. 유럽 진또배기(?)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로 독일 사회민주당이 원내 5당을 지켰다고 만족할 때 첫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어 만민공산당처럼 체제 내부에서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온건파와 만민공산당은 애초에 공산당이 아니라는 진영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군비 증강을 반대하는 전봉준의 기고문과 여학 설립 등의 정책 공약 덕에 백성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제1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에서 단독 과반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2회 추거에서는 개화당의 약진과 지방 토호의 외면 때문에 원내 1당 자리는 뺏겼으나 대신 어부지리로나마 총리대신 자리를 가져왔다.
세족 중에서는 여흥 민씨 일부가 왕후 민씨와 대원군의 관계를 이용해보려고 참여중이다. 유럽 진또배기(?)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 같은 존재로 독일 사회민주당이 원내 5당을 지켰다고 만족할 때 첫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어 만민공산당처럼 체제 내부에서의 투쟁이 필요하다는 온건파와 만민공산당은 애초에 공산당이 아니라는 진영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고 있다.
- 자유당
총리대신 추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 최익현이 얼치기 청년 제국주의자들의 모임 '자강사'를 흡수하고 반세도가 유림파 관료들을 모아 창당한 제3정당. 사실상 최익현 1인 정당이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실용주의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안인수가 대범하게 거액을 희사하여 광통교 옆 인적 많은 곳에 당사를 차렸다. 최익현이 제1회 총리대신 추거에서 승리하여 창당 1년만에 대권을 잡으면서 만백성의 선비화를 목표로 삼는다.
3.3.2. 추거
4년을 주기로 총리와 참의대부 선거가 동시에 전국적으로 실시되며 총리대신의 경우 연임이 제한된다. 일정 규모 이상의 부세를 내는 자, 향시를 통과한 생원 또는 진사만 투표권을 가진다. 개표 절차는 각 군현에서 미리 개표를 한 뒤 결과를 도성으로 보내어 한성 5부의 개함과 함께 발표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해 국왕이 개함례에 참석하는 관례가 굳어질 듯하다. 이리하면 선거조작은 따로 정할 것도 없이 군주를 속이는 기군망상이 되어버린다. 전통적으로 기군죄는 '''반역'''과 동등하게 처벌한다.
3.3.2.1. 1874년 재보궐 추거
- 선거 지역 : 한성 서부, 남부, 북부
- 추거일 : 음력 1874년(갑술년) 1월 2~6일
- 개함일 : 음력 1874년(갑술년) 2월 1일
- 추거 결과
- 한성 서부
전 통리아문 회계고문 백래(약 2900인) - 전 교서관 정자 김병건
- 한성 남부
전 중추부첨지 최한기(약 3200인) - 전 부호군 이원규 - 선달 김신묵
- 한성 북부
3.3.2.2. 역대 추거
3.4. 사법부
형조와 사헌부의 기능 일부를 분리하여 국제 제정과 함께 사법원을 새로 설치하였다. 감영과 개시를 둔 전국 각 도시에 지방법원 격인 판심청(判審廳)을 설치해 각종 민형법에 관한 재판을 진행하며, 그 위에 최고법원인 평리원(平理院)을 두었다. 민간에서는 판심청을 지방 관아인 '동헌'의 서쪽 부지에 주로 지어졌다 하여 '서헌'이란 속칭으로 부른다. 법과 고시를 통해 법관을 선발한다.
3.5. 외교
서양 열강들조차 조선을 총칼로 깨우쳐야 할 비문명 야만인이 아니라 나름의 원칙과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는, 대화와 협력으로 서로 이롭게 해줄 수 있는 상대로 여긴다. 조선에서도 실역사의 서양문화추종이 아닌, 자신감과 여유를 가지고 서양과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당연스레 생각하고 있다. 또한 조선의 제안을 따르면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는 인식이 있기는 한데, 동시에 '그런다고 우리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는' 이상한 짓을 많이 한다는 이미지도 박혀있다.
동양 국가들도 대체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이며, 청나라에는 조선을 본받자는 개화론자도 많다. 청 조정에서도 조선의 '조언'은 '적어도 손해는 안 본다'라고 생각하는지라 조선을 통해 청 조정에 로비를 시도하는 서양 외교관도 있는 듯. 반면 일본은 조선의 번영을 바라보며 자신들이 먼저 개화했는데 왜 이렇게 차이가 났는지, 이 번영이 일본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았는지 질투하기도 한다. 조일동맹을 통해 조선이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는 국민감정이 발생할 정도.
전반적으로 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들 사이에서는, 조선(특히 조선의 국왕)이 전쟁을 꺼린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전쟁이 나면 세자가 최전선에 서겠다는 발언을 듣고서, 그것을 전쟁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나라 안에서 누가 함부로 전쟁하자고 하면 곧 세자를 위험한 최전선에 세우고 싶다는 말이 되니 전쟁하자는 소리를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라고 받아들일 정도. 그리고 귀남이 언로를 육조거리 수준으로 넓힌 탓에 국제 1조에 떡하니 조선은 전제군주정으로 적혀 있는데 유럽에서는 조선은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소굴이라는 소문이 돈다.
3.5.1. 아시아
- 조선-청 관계
1868년, 조청수호조규를 체결하여 기존의 조공책봉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를 자주국으로 인정하는 새로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대신 조선은 청을 같은 자주국이되 '대국'으로 존중하기로 했다. 청은 조선이 길림 일대를 경영하는 것을 허용하고, 조선은 청과 열강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 나서서 적절히 중재하는 등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 계층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조선을 배우자는 논의도 일어나고 있다. 특히 광서제가 조선에 지극히 우호적이다. 북경 외교가에서 천자가 조선의 말은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홍장 등 일부 대신들은 소국이라 무시하고 있었던 조선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경계하고 있으며 청이 다시 천자국에 걸맞는 힘을 되찾으면 기존의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다만 이홍장도 조선이 열강보다야 믿을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 조선-일본 관계
1867년, 수신사를 파견하여 도쿠가와 막부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그 후 초대 주조선일본공사로 카츠 카이슈가 부임했다. 대체로 우호적이다. 양국의 군사력이 평행을 이루고 있고 의회에서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동국 세력의 좌장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와 조선의 우호 관계를 자신의 치적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정한론이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1880년의 조일동맹 체결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비록 지금은 태평하기는 하지만, 일본보다 작은 나라인 조선에 의지함이 옳은 길인가 의문 던지는 이들이 하나씩 나오고 있다. 결국 조일동맹을 파기하고 각각 조러, 영일동맹을 체결하되 직접적인 충돌은 없도록 합의했다. 그리고 조선은 영국에 '이러이러해서 일본이 우리와 동맹을 해소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고자 하니 잘 부탁한다'는 문서를 보냈고, 동맹국은 커녕 중립국이 돌아서려는 기미만 보여도 불바다를 만들던 영국은 일본에 대해 적대적인 묘사 하나 없이 참으로 친절하고 자세하게 소개해 주는 조선에 대해 '또 이상한 짓 한다'라고 생각했다.
- 조선-류큐 관계
1872년에 귀남이 몸소 일본의 류큐 병합 시도를 저지하여 매우 우호적이다. 류큐 왕국이 청에도 보내지 않은 공사를 조선에 파견할 정도이며, 청은 명목상 상국이고 조선이 실질적인 상국이라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 조선-베트남 관계
친구의 친구 정도의 관계다. 양헌수를 공사로 파견하였다. 아직 국제법도 제대로 모르는 월남의 관리들을 가르치고 있다.
- 조선-연해주 관계
경제가 완전히 조선에 종속되어 있다. 조선에서 이를 빌미로 갑질한 적은 없지만, 연해주 지주들은 언제나 노심초사하는 처지다. 일부 고약한 조선인들은 이곳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이 아니라 연해도 해삼위도호부라는 농을 치기도 한다.
3.5.2. 유럽
- 조선-프랑스 관계
1865년, '조불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초대 주조선프랑스공사로 앙리 드 벨로네 백작이 부임했다. 프랑스 입장에서 비합리적인(즉 거의 평등한) 조건의 조약으로 나라의 문을 열어준 덕분에 조선이 이웃 나라들에 비해 훨씬 관대한 조건으로 문명화된 세계의 변방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러한 관대한 조건은 프랑스가 다른 열강을 엿먹이는데 사용된다.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말하길 자신들이 올라갔다고 사다리를 차는 격이라고(...). 조선과 동맹을 맺는다.
- 조선-영국 관계
1865년, 조불수호조규 체결 직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초대 주조선영국공사로 해리 파크스가 부임했다. 똑같이 도덕외교를 추구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 내각과 긴밀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글래드스턴이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그저 데면데면한 관계로 우호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다.
- 조선-러시아 관계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 영국에 이어 유럽 열강 중에서 3번째로 조선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초대 주조선러시아공사로 예프게니 뷰초프가 부임했다. 한 때 서로 경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만큼 반목하기도 했으나 이내 관계를 회복하여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한 축으로 조선을 끌어들이려 시도하고 있다. 자유주의를 탄압하지 않고 러시아에 우호적이라는 소문이 돌아 시베리아에서 유배중인 사상범들이 조선으로 도주하기도 한다.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할 때 조선의 철도 점령을 걱정하는 등 꽤 신경쓰고 있다. 조선과 동맹을 맺는다.
- 조선-독일 관계
공사로 윤태준을 파견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는 조선공사가 진상한 바둑판과 바둑돌을 마음에 들어하기도 하고 조선이 쓸만한 패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등 꽤 우호적이고 비스마르크도 체스판 위에서 신경을 기울일 정도로 크지는 않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조선의 침술에 안 좋은 기억이 있고 꿈에서 조선이 암운을 몰고오는 것을 보아 개인적으로 싫어한다.
3.5.3. 아메리카
- 조선-미국 관계
제너럴 셔먼호가 아이즈 번 존황양이파 낭인들의 테러로 침몰한 '요코하마 사건'을 계기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초대 주조선미국공사로 찰스 들롱이 부임했다. 정치인들은 조선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산업계에서는 기회의 땅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 조선-하와이 관계
흥선대원군의 회갑연 때 아시아 순방 중이던 칼라카우아 국왕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아직 상호 공사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조선이 황란으로 고생할 때 국왕이 내탕을 털어 깃털 하나 만큼의(...) 지원은 해주었다.
4. 문화
4.1. 언론
- 순보(旬報)
현재 신보의 전신. 개혁 초기, 신법에 대해 온갖 이유로 꼬투리잡는 상소문이 올라오자 제대로 알고서 반박하라는 뜻에서 통리아문이 개혁안의 절목과 문답을 정리해 내었다. 종이는 매일같이 올라오는 상소문을 씻어 사용해도 충분했다고 한다.
- 익정신보
도성 최초의 신문. 민승호가 흥선대원군의 지원 을 받아 발행하기 시작했다. 한문과 언문을 섞어 써 백성들까지 보고 읽을 수 있다. 초기에는 성상의 일거수일투족을 찬양하는 왕실 어용 신문이었다. 매일같이 충군애국 운운하는 내용 때문에 재미없다는 오명이 있었지만 도평을 최초로 실으면서 판매부수를 늘릴 수 있었다. 지금은 만민공산당의 정파지 노릇을 하고 있다.
- 해동일보
원래 산당의 정파지 해동신보였으나 산당이 해산된 이후 안인수가 인수하며 이름을 해동일보로 고쳤다. 찍어내는 횟수를 늘리면서 기삿거리를 찾기 위해 채사(취재)하는 사람을 따로 두게 되었고, 안인수의 탄탄한 자본 덕에 천진과 대마도까지 기자를 파견하였다. 심지어 샌프란시스코까지 기자를 보내기도 했다. 초기에는 중립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안인수가 세도가에 반감을 품게 되며 반 개화당 성향을 갖게 된다.
- 청구시무
유당의 정파지. 유당이 해산된 이후에도 계속 발행되어 다른 신보 보기 꺼려하던 보수적인 선비들이 애독한다. 선비로 이름높은 최익현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청구시무를 통해 만민공산당에 맞서 자신들의 뜻을 알리려 하고 있다. 언문을 쓰는 다른 신보들과 달리 어차피 학문과 거리 있는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글이 없어 진서로 써내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젊은 서생들 사이에서 이제라도 갈아탈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강남 만인소 사건을 계기로 조선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청나라의 식자들이 진서로 적혀 능히 읽을 수 있는 청구시무를 수입해가다 보니 그런 주장이 쑥 들어갔다.
- 경화시보
김옥균이 개화당에서 운용하던 자잘한 신보사 여럿을 통합하여 발족한 신보. 영문판으로 '서울 타임스'가 있다. 개화당이 민족주의를 기치로 걸자 논설을 실어가며 민족에 대한 개념을 설파하고 있다.
4.2. 교육
4.2.1. 교육기관
조선의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 고시 소과 급제자들이 관직으로 나아가기 전 거쳐가는 곳이다. 프랑스의 그랑제콜과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할 듯하다. 노씨권학상의 심사가 이곳 명륜당에서 이뤄진다.
- 엄익관
군제개혁과 함께 1872년 무관 육성을 위해 세워진 사관학교. 중국, 서양의 여러 병서들을 들여와 가르치고 있다.
면세 혜택을 잃었지만 제수를 내려준 덕분에 오히려 그 수가 늘어나 일종의 중등교육기관으로 거듭났다. 정축년 북벌을 통해 군졸마다 서원에서 배운 내용이 달라 소통이 어렵다는 문제점이 발견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조에서 교육과정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향시가 서원 졸업시험에 가까워졌고 이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재산 규모와는 별도로 선거권을 부여했다.
- 경일학당 (리세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
을축양요 때 선종한 베르뇌 주교를 기리기 위하여 조선과 프랑스가 협력해서 세운 학당. 인천에 있다. 청,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많이 온다. 손문이 현재 경일학당에서 의학을 배우고 있다. 한편 전봉준과 가타야마 센이 이곳 대동사라는 모임을 통해 공사론을 공부하던 곳이기도 하다. 전-마르크스 부부가 경일학당 바로 바깥에 야학 등을 세워 이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파해나가고 있다.
- 공학원
숙련공을 육성하기 위한 학교. 안동 김문이 인천 제물포에 세운 공학원이 대표적이다.
- 대학원(大學院)
이항로와 기정진의 제자들이 차린 화서학원과 노사학원 등 각종 학원들이 고등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른 학원들과 구분하기 위해 앞에 큰 대가 붙었다. 유럽의 학위제도를 본따 저작(=석사), 박사 과정을 두었다. 하지만 제자들은 박사과정을 밟으라고 하면 식겁하며 도망치는 듯.
- 화서학원
- 노사학원
- 한주학원
한주 이진상의 호를 붙여 세운 대학. 원래 이진상이 자신의 서재 '조운헌도재'에서 이름을 따온 운도학원이었으나 최근화를 보면 이진상 사후 이름을 바꾼 듯하다. 경상도 성주 성산리에 있다.
- 여학
- 안정여숙
북촌 과부와 대갓집 며느리들이 한두 푼씩 모아 세운 여학교.
- 자육원
민자영이 루이즈 미셸의 말을 듣고 마포에 세운 고아원 겸 여학교이다. 원 역사에서 이화학당을 창설한 감리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교사로 일하고 있다.
4.3. 종교
1865년(을축년), 교첩제의 시행과 함께 나라의 금령이 풀리면서 빠르게 세를 불리고 있다. 김옥균 내각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외치며 교첩제를 폐지하면서 집안 눈치보던 이들도 대거 세례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각 교당에는 일괄적으로 종교세를 부과했다.
정식으로 종교로 인정받았지만 워낙 가톨릭의 교세가 강해 포교에 어려움을 겪던 중에 원 역사와 달리 목숨을 부지한 최제우가 차라리 해외로 진출하자고 하여 길림성과 연해주 일대에서 세를 구축하고 있다.
선교사들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워낙 천주교 위상이 두터워 공략에 난항을 겪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든든한 후원 덕분에 전국의 수령들이 사찰에 함부로 트집잡지 못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화와 함께 신도들이 당당하게 사찰을 오가며 시주도 늘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몇몇 유대인들이 왕실 사유지였던 곳에 정착했다.
4.4. 시설
- 예휘각
베베르가 러시아 황실 재정 반절, 조선 왕실 내탕 반절로 꾸린 박물관.
- 열음정
5. 경제
5.1. 산업
- 농업
나라의 근간으로서 아직까지 가장 중요한 산업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동삼성과 연해주의 자유로운 왕래가 허용되면서 벼농사를 중심으로 활발한 식민개척이 이뤄지고 있다. 연병법 실시 이후 북변으로 가지 않고 삼남지방에 남은 병력을 활용해 제언 확충에 힘쓴 결과 1880년대 후반 기준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민간에서는 정미소가 세워지고, 신촌향약을 통해 농촌 환경 개선도 점차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 이후 정착한 유대인들의 키부츠가 농협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소개되었다.
- 경공업
박규수가 반남 박문의 가산을 그러모아 스위스 포목상 쥘 브리너와 협력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제지공장을 세웠다. 비싼 닥종이가 대량의 값싼 양지로 대체되며 신보, 상소문, 서책의 양도 훨씬 늘어났다. 인천 제물포의 공장들에서는 방직업이 발달하여 인천목이 청과 일본을 상대로 주요 수출품으로 떠올랐다. 청국 내륙까지 조선이란 나라는 몰라도 인천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자전거가 도입된 뒤에는 안인수가 코뮌 사람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자전거 부품 제조업까지 가업을 확장하였다.
- 중공업
- 토목/건축
개화기 접어들며 전국에 도로와 다리, 양식 건물 등이 활발히 지어지고 있다. 이에 김병학·김병국 형제가 창립한 광통이도국(廣通理道局)이 대표적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작로 건설을 주도했고 이를 위한 시멘트 공장과 기술자를 육성할 학교까지 운영 중에 있다. 이외에 경복궁 중건과 같은 대규모 건축 사업도 도맡은 바가 있다. 독자 참여한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에펠탑에 영향을 받아 고층 건축물에도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전차 선로 공사도 주도하였다. 조선의 현재 기술력은 한강 교량을 독자 기술로도 거뜬히 지을 정도의 수준까지 이르른 상태이다.
- 전기/통신
1881년, 전영(특허)에 관한 법을 제정함으로써 미국, 유럽의 첨단기술 관련 특허가 다수 유입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맥안전기공행의 사례와 같은 각종 기술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맥안전기공행은 안인수가 에디슨의 전구를 모방하여 원시적인 전구를 개발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발생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기술협력을 전제로 미국 내 특허권을 국내에서도 보장해주는 법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하이럼 맥심과 손을 잡아 기계와 기술자들을 들여와 제대로 된 전구를 생산 중에 있다. 발전기와 노명등 등 다양한 전기설비를 생산하고 있지만 복잡한 기계는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숙련도에 따라 이는 점차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881년 창덕궁 앞 거리에 노명등이 켜진 이래로 전등의 보급이 급속히 이루어져 한성 각지에서는 발전기를 하나씩 들여오고 있다. 조만간 발전소를 지어 발전기 없이도 요금만 내면 전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 한다. 전화는 특허법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이후 민간에 먼저 널리 퍼져 조정에서도 왕명 출납을 제외한 사무에 한해 사용하기로 하였다.
- 조선/화기
은 사백만냥으로 청국 강남에서 여러 숙련공들을 데려와 조선 공인들에게 기술을 전수받도록 하였다. 그렇게 세워진 선정국에서 함선을 건조하고 있으며, 동맹국인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 알프레드 노벨이 설립한 다이너마이트(낙씨작약) 공장이 가동되어 비군용 목적 하에 판매하고 있다. 공조 소관의 공기업 융비총국과 맥안공행이 병기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고, 맥심이 발명한 기관총 등의 무기들을 생산해 트란스발 공화국을 비롯한 약소국들에게 공공연하게 판매하고 있다.
- 철도/제철/광업
동아시아철도회사에 의해 1876년(병자년) 경인선이 개통되어 운영을 시작하였고, 1891년 기준 경부선에 이어 경의선도 개통이 되었다. 이들 노선을 연결하기 위해 한강철교가 독자기술로 건설되고있다. 황해도 재령에는 동철의 자금으로 세운 제철소 철정국이 완공되어 철강을 생산하고 있다. 이광도감의 후신 광무총국은 조선국 내 금은광을 주도적으로 개발하는 중이며 운산금광의 막대한 금이 금본위제를 위해 쓰이고 있다.
- 서비스업
- 금융
조선,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아시아개발은행에 지분을 가지고 있으며, 식주공회라는 이름의 증권거래소가 운영되고 있다. 1890년, 아르헨티나가 원 역사대로 밀 흉작과 공원혁명의 실패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미국을 통해 투자를 진행하던 유럽계 자본들이 국운 융성한 조선으로 모여들고 있다.
- 무역
세도가 중에서는 풍양 조씨가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오페르트의 사기업 오씨양행 또한 대표적 무역회사이다. 조선 상인들은 청국 지주들과 친분을 맺고 결탁하며 수출루트에 있어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있다.
- 관광
옛적부터 산천유람을 즐겨하던 민족답게 대원군이 유구국 유람을 다녀온 뒤로 관광업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부자들은 대원군 따라 유구, 또는 청국 강남으로, 중산층은 국내 관광을 떠났다. 노동자들도 이를 보고 휴가를 제공해달라며 요구할 정도. 이런 흐름에 맞춰 이용익으로 대표되는 부보상들과 여러 거족들이 손탁 호텔을 모방하여 성대하게 빈관, 여각을 세웠다. 북경에도 조선인이 세운 서양식 호텔 '경사대반점(그랜드 페킹 호텔)'이 운영되고있다.
6. 군사
프랑스 군사 고문단의 교육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근대화가 진행됐다. 징병제를 실시하며 총 병력은 약 20만이다.1896년 기준으로 이중에서 전투병력은 15만명이다. 그리고 동원령을 선포하면 최대 '''60만명'''까지 소집할 수 있다.[3] 징병 초기에는 7만이 실질적인 전력이고 나머지는 제방 같은 중요 인프라 건설에 투입하였다. 장교는 군관, 부사관은 사관, 병은 군졸이라 부르며 장교의 계급은 정부참, 부사관의 계급은 상중하 체계이다. 장교는 더 이상 무과로 취재하지 않고 '엄익관'이라는 무관 학교를 세워 체계적으로 선발하고 있다. 부사관은 징병된 양반가의 자제들이 맡는다. 복식은 서양식이지만 아직 단발령이 내려지지 않아 군모 대신 전립을 쓰고 다닌다.
벨로네 백작과 로즈 제독의 책임 회피용 언론 플레이 덕분에 대외적으로 '의외로 강한' 준문명국의 군대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철도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군의 점령 가능성을 고려할 정도이다. 병조는 조선군의 전력을 대마도를 무력으로 병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사실에 가깝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귀남이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조금 있는지라 30년 이상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없었던 태평성대인데도 군축은 커녕 지속적인 무기 국산화와 개발, 군비 정예화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전생에 사용했던 M1 개런드를 만들라고 신하들에게 꾸준히 지시하였으나 기술력 부족 등으로 이루지는 못하고 있다.
6.1. 육군
서양과의 수교 이후 기관총, 라이플 등 신무기 도입과 징병제 실시로 원 역사의 대한제국군보다 더 진보를 이룬 상태이다.
- 미니에 라이플 → 드라이제
- 개틀링 기관총(회륜포)
1871년,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아도는 무기를 팔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무기 상인의 말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신헌이 혹해 몇 문 사들였다.
맥심이 개발한 기관총. 맥안공행에서 제작해 귀남에게 진상했다.
6.2. 해군
원 역사에서는 열악한 환경 탓에 제대로 된 해군을 육성하지 못하였던 것과 달리 작중에서는 목선이 기선으로 대체되고 징병제를 도입하여 수영(水營)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함대의 편제는 제도적 관성을 따라 통제영(경상+전라), 통어영(경기+황해+충청) 체제로 운영된다. 상황에 따라 통솔권한이 옮겨지던 충청수영이 통어영 예하로 들어갔고 함경·강원 양 도의 수군을 합쳐 덕원수영을 두었으며 유사시에는 통제영에서 관할한다.
1894년 기준으로 운용하는 함선의 총 톤수가 일본 해군에 버금간다.
- 비연호
훈련함으로 구매한 퇴역 무장상선. 조선군이 개화 초기에 보유하고 있었던 기선 2척 중 하나이다.
- 제연호
개화 초기 조선군의 유일한 철갑선.
- 건제
- 양연호
덕원수영에서 운용하는 코르벳.
7. 인물
8. 개변된 역사
- 계해환국
효자율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철종이 승하하기 전에 귀남을 자신과 철인왕후의 양자 '완정군'으로 입적시켜 세자로 책봉했다. 그 결과 안동 김문이 원 역사보다 일찍 권세를 잃었다. 만약 조선이 칭제건원을 한다면 장조, 정조, 순조, 철종 4대조가 황제로 추존될 것이다.
귀남이 강하게 밀어붙여 철종이 서삼릉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가 아니라 강화도가 보이는 김포시 문수산에 묻혔고 이에 따라 문수산 일대의 성보와 해안 각 진의 화포들이 정비되었다. 덕분에 을축양요 때 조선의 방어력이 더 높았던 데다 하필 프랑스와 싸운 곳이 예릉이 있는 문수산성이었기에 조선군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프랑스군과 싸웠고 이후 프랑스측은 타국의 왕릉을 공격한 꼴이 되어 엄청난 도의적 감점을 당하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 서원 확충
서원이 철폐되지 않았다. 못 배운 것에 한이 맺힌 귀남이 서원의 폐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억울하게 무식쟁이 소리 듣는 사람이 줄어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지원금이라고 할 수 있는 제수(祭需)를 늘려주는 대신 면세 혜택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서원 확충을 추진했다. 그 결과 폭발적인 기세로 증가한 서원이 자연스럽게 근대의 학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그리고 서원 철폐를 통한 세수 확충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계획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 익문사 조기 설치
원 역사보다 무려 38년이나 먼저 익문사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익문사(益聞社)가 아니라 익문사(益文社)다. 작가 왈 "작가의 말장난일까요, 아니면 역사의 억지력일까요?" 서원 확충이 결정된 직후 대원군이 새로 지어진 서원에 제때 경전을 내려줘야 한다는 핑계로 보부상 무리를 결집해서 만든 사조직인데 대원군은 수족으로 쓰려고 만든것이지만 핑계로 삼은 경전 배부라는 명분에 개화파가 올라타 개화사상 듬뿍 넣은 서원 보급용 교과서(?) '격몽신편'이 배포되어 세간의 여론이 개화에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사실상 제국익문사처럼 비공식 정보기관이다. 한편으로 고을 안에서 이간질을 하며 각종 대립을 일으키고 다니던 전적이 있다. 이후 급격한 개혁정책에도 큰 반발 없이 조용했던 것은 이 덕분.
- 을축변법
귀남과 박규수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어 짜낸 신법. 오래전부터 개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박규수가 귀남이 미래 지식을 토대로 내놓은 '이러이러하면 좋겠다' 수준의 엉성한 방안에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였다.
내용을 보면 우선 사람의 목을 쌓아올려야 설 수 있는 나라라면 차라리 망해 없어지는 것이 옳다는 귀남의 신념에 따라 국가에서 관리하는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는 조건으로 가톨릭 신앙을 허용하였다. 이로 인해 병인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 위법한 일을 저지르거나 이를 고변하지 않으면 그 고을의 모든 교인들을 함께 벌하기로 했다.
두번째는 개항이다. 자유 구역으로 지정한 제물포 한 곳에서 이양선과의 교역을 허용했다. 이는 원 역사의 제물포 개항보다 11년이나 빠른 것으로, 이후 병인년에 경흥, 원산, 동래가 추가로 개항지가 됐다. 또한 양물(洋物)에 관세를 부과하고 이양선 단속의 법제를 마련함으로써 나라의 부가 새어나가는 폐단을 시정했다. 끝으로 동원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민보군을 조직했다.
이항로를 비롯한 일부 보수적인 선비들은 어찌 사학을 허통하고 양이와 통교할 수 있냐며 거세게 반발했으나 개화당이 익문사를 통해 널리 설파한 변이개화론을 신봉하는 선비들과 밀무역으로 피해가 막심한 개성상인들의 지원사격 덕분에 왕안석의 신법처럼 좌초되지 않았고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내용을 보면 우선 사람의 목을 쌓아올려야 설 수 있는 나라라면 차라리 망해 없어지는 것이 옳다는 귀남의 신념에 따라 국가에서 관리하는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등록하는 조건으로 가톨릭 신앙을 허용하였다. 이로 인해 병인박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 위법한 일을 저지르거나 이를 고변하지 않으면 그 고을의 모든 교인들을 함께 벌하기로 했다.
두번째는 개항이다. 자유 구역으로 지정한 제물포 한 곳에서 이양선과의 교역을 허용했다. 이는 원 역사의 제물포 개항보다 11년이나 빠른 것으로, 이후 병인년에 경흥, 원산, 동래가 추가로 개항지가 됐다. 또한 양물(洋物)에 관세를 부과하고 이양선 단속의 법제를 마련함으로써 나라의 부가 새어나가는 폐단을 시정했다. 끝으로 동원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 민보군을 조직했다.
이항로를 비롯한 일부 보수적인 선비들은 어찌 사학을 허통하고 양이와 통교할 수 있냐며 거세게 반발했으나 개화당이 익문사를 통해 널리 설파한 변이개화론을 신봉하는 선비들과 밀무역으로 피해가 막심한 개성상인들의 지원사격 덕분에 왕안석의 신법처럼 좌초되지 않았고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원 역사에서 태극기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탄생했지만 본작에서는 상술한 을축양요 때 귀남이 우리가 아는 그 태극기를 조선의 국기로 결정했다.
- 통리기무아문 조기 설치
원 역사 1880년보다 14년 빠른 1866년에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됐다.
조선의 개항이 앞당겨져 발생하지 않았다. 해당 선박은 일본에서 변을 당했다.
통신사 파견을 조공으로 왜곡한 '야도 마사요시'[4] 를 규탄하고 다시는 이런 망령된 말로 두 나라의 신의를 해치는 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촉구하기 위해서 수신사 파견이 원 역사보다 9년이나 빠른 1867년에 이루어졌고 이와 함께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알려진 '조일수호조규'가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독소 조항 없이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서 체결됐다. 그런데 조일수호조규에 '조일 양국은 자립국이되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므로) 자주국은 아니다.'라는 문구가 들어가서 이에 격분한 아이즈 번 존황양이파 낭인들이 테러를 감행하였고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수신사가 타고 온 제너럴 셔먼호가 침몰했다. 이로 인해 조약 재개정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결국 일본은 대외적으로 자'주'국이 아니라 자'립'국이 됐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 X & 운산 금광 조기 개발
오페르트가 생각은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대신 운산 금광 채굴권을 얻을 생각으로 왕실에 접근했다. 그런데 고종 안에 있는 사람이 자본주의 매운맛을 무척 잘 아는 귀남이었기 때문에 채굴권을 얻기는커녕 생각도 못한 '이광도감'의 '도청'이라는 광산 개발 총책임자로 임명돼 졸지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색목인 당상관 타이틀을 얻었다. 게다가 금광 개발이 나라의 공식 사업으로 추진됨에 따라서 이권을 챙기려고 할 때마다 조정의 관료들이 매의 눈으로 달려들어 결국 남 좋은 일만 하는 꼴이 됐다.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해 유상매입 무상분배를 골자로 한 토지개혁 '명전법(名田法)'을 시행했다.
- 의회 설치
1868년 귀남이 홍재학의 상소를 읽고 '세력 있는 자들의 핍박 없이 견식 있는 선비들이 거리낌 없이 생각을 나누고 중의를 모아 건안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고 하교하여 각 군현에서 추천을 받아 종4품 '참의대부(參議大夫)'로 임명된 자들이 한양에서 정기적으로 회동하여 국정의 특정사안을 논의토록 하는 '참의원(參議院)'이 탄생했다. 참의대부는 진사 이상의 사람 중에서 실직에 있지 않은 자들만 가능하다. 이 조건만 충족한다면 외국인이라도 참의대부가 될 수 있다.
- 전국 도로 정비
안동 김문이 경복궁 증건 사업을 맡아 흥선대원군에게 잘 보여 권세를 되찾으려고 수작을 부리다가 귀남 본인이 빌딩을 하도 많이 보고 살아서 큰 궁전에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지라 경복궁에 손을 대기 전에 팔도의 대로를 닦게 됐다. 이리하여 안동김문은 가세를 쏟아붓게 되었고, 19세기의 토목건축 기술력으로 전 국토의 가도를 중대한 사고 없이 정비하는 데 성공한다면 어마어마한 재벌이 될 가능성이 생겼다.
- 간도 진출
서태후가 원 역사보다 대략 10년 빨리 조선의 길림성 일대, 즉 간도 개척을 허용하였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경작권을 인정해주는 대신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 징병제 시행 및 군제개혁
1871년에 이필제가 전쟁 무서운 줄 모르고 북벌 운운하며 청국 공사관에 뒤집어 엎은 사건이 발생하자 귀남이 역시 사내는 군대를 가야 전쟁 무서운 줄을 알고 철이 든다고 생각하여[5] '연병법(練兵法)'이라는 이름으로 징병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통리아문에서 옮긴 서양 병서를 교재로 사용하는 사관학교 엄익관(嚴翼館)을 설치하였고 군관과 군졸 사이에 양반 사족이 복무하는 부사관 계급을 신설했다.
- 프랑스 난민 대거 유입
1871년에 최익현의 활약으로 파리 코뮌의 구성원 천 명 정도가 프랑스 제3공화국의 박해를 피해 조선으로 임시 망명했다. 이 난민들 태반이 은행 직원, 학교 교사, 배관사, 회계사 등등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전문직종이라 조선의 국력 증진에 큰 도움이 됐다. 곁가지로 공산주의가 원 역사보다 빨리 조선과 일본에 전파되었다. 물론 이후 파리 코뮌에 대한 사면이 실시되자 대부분 사람들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물 떠놓고 승은이 내려지길 기도하는 궁녀가 한둘이 아니지만 귀남이 썩 여색에 마음이 없는 관계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1890년 기준으로도 중전과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보아서 대신들도 후궁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기에 태어날 일도 없을 듯 하다.
- 근대 신문의 태동과 성장
대원군이 민승호에게 압력을 넣어 '익정신보'를 발행케 하여 원 역사보다 12년 빨리 조선땅에 근대적인 신문이 탄생하였고 뒤이어 참의원의 각 정파들이 '청구시무' 등 정론지를 발매하기 시작했다.
- 조선적십자사 창설
- 노비세습제 폐지 & 우정총국 설치 & 자전거 도입
노예제를 폐지하면 차관을 주겠다는 글래드스턴 행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역사 보다 훨씬 더 빨리 노비세습제를 폐지했다.[6] 덤으로 노비가 없으면 서찰은 어떻게 부칠 것이며 가마는 누가 메냐고 투덜거리는 사대부들을 달래기 위해 원 역사보다 일찍 우정총국을 설치하였고 프랑스에서 자전거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귀남이 말하기를 "백성 중 종복이 없으면 거동할 수 없는 자들은 내 내탕을 털어서라도 자전거든 인력거든 사 주겠노라."
- 조러수호조약
공식적으로 확정된 바 없던 조·러 간의 국경을 확실히 하고, 두 나라 백성의 교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 하에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내륙을 통한 교역을 허용하고 조·러 백성들이 양국 접경지대에서 통상, 이동, 거주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협상을 주도한 무라비요프 백작은 조러수호조약을 앞세워 함경도 일대를 차근차근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조선 농민들의 개척 러시 때문에 오히려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황급히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지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럼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농기구 장사를 하기 딱 좋다고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서양인들이 당당하게 조선 호패를 들고 나는 조선인입네 하며 장사하러 드나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하지 않으면 고용할 수 없게도 해 봤지만 지방 행정이 어설프다 못해 중세적인 구석까지 남아있는 러시아의 지방관들에게 어지간한 평민들도 여차하면 관청에 소장을 쓸 줄은 알 정도로 관을 대하는 데 익숙한 조선인들은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물론 조선의 반응은 "어찌 나라간에 맺은 조약을 한 해도 되기 전에 바꾸겠는가. 시간을 두고 논의해 보자."
이에 황급히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지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럼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농기구 장사를 하기 딱 좋다고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심지어는 서양인들이 당당하게 조선 호패를 들고 나는 조선인입네 하며 장사하러 드나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하지 않으면 고용할 수 없게도 해 봤지만 지방 행정이 어설프다 못해 중세적인 구석까지 남아있는 러시아의 지방관들에게 어지간한 평민들도 여차하면 관청에 소장을 쓸 줄은 알 정도로 관을 대하는 데 익숙한 조선인들은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물론 조선의 반응은 "어찌 나라간에 맺은 조약을 한 해도 되기 전에 바꾸겠는가. 시간을 두고 논의해 보자."
- 참의대부 추거 실시
참의대부는 향회의 추천으로 뽑게 되어 있는데 한성에서는 그 제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1874년부터 한성 5부에 한해 참의대부를 선거로 뽑기로 하였다. 유권자가 후보자의 이름을 적는 자서식 투표이며 돈을 주고 추거단자(투표용지)를 사야 한다.
- 명문거족의 부르주아화
정치권력을 잃은 벌열·거족들이 개화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둘씩 문중의 가산을 털어가며 각종 사업에 뛰어들어 자본가(재벌)로 거듭났다. 예컨대 안동 김문은 '광통이도국'이라는 회사를 차려 건설업, 풍양 조문은 무역업, 반남 박문은 연해주로 진출해 제지업으로 목돈을 만지고 있다. 원 역사의 삼성과 LG 등도 양반가들이 세운 대기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 있다. 참고로 1866년 서얼허통이 이루어지자 명문가의 서얼들은 과거 대신 자발적/강제적으로 상업에 뛰어들게 된다.
- 만민공산당 출범
흥선대원군이 명문거족의 부르주아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백성의 9할은 될 자잘한 백성들, 즉 무산계급을 근왕파로 육성하기 위해서 자기 입맛대로 뜯어고친 공산당 선언을 정강으로 채택한 칼 마르크스피셜 사이비 공산당을 창당했다. 일례로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체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이 문구를 '이처럼 위정의 도가 어그러지면, 잃은 것은 쇠고랑뿐인 가련한 백성들이 천하를 뒤엎고자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만국의 빈궁한 이들이 장차 함께 반민이 될 것이니 천하의 대란이 일어날 근원은 여기에 있도다!'로 옮겼다. 이때가 1874년으로 원 역사의 고려공산당 창당보다 무려 45년이나 빠르다. 참고로 수장이 흥선군이라 같은 흥선군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안서의 비호를 받고 있다.
- 전보 체계 구비
원 역사보다 11년 빠른 1874년에 팔도에 전보 체계를 갖추었다. 전선이 들어오고 상술한 것처럼 길이 닦이면서 봉수대와 역참에 묶여 있던 양민들 중에서 머리 좋은 이들은 전신국, 몸 멀쩡한 이들은 우정국의 직원으로 임명됐다.
- 월남 평화유지군 파병
제2차 사이공 조약 체결을 두고 원 역사와 달리 프랑스와 힘싸움을 벌이던 청국이 병력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자 자칫 잘못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수가 있으므로 숙고 끝에 지전보평군이라는 이름으로 평화유지군을 월남에 파병하여 두 대국의 갈등을 중재했다. 이에 따라 제2차 사이공 조약의 내용도 원 역사와 달라졌다. 월남 문단을 참고할 것.
- 조청 철도사업
월남 문제가 끝난 뒤 서태후의 자기 정치로 조선 내에서 반청 분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어떻게든 유혈 사태를 피하고 싶었던 귀남이 조청 양국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하고자 '선의'로 동삼성 철도 공동부설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런 월척을 내버려둘 수 없었던 이홍장이 판에 뛰어들면서 단순히 만주에 공동으로 철선과 전신을 깔자는 정도였던 제의가 양광(兩廣)[7] 에서 경상도까지 철도를 놓는 넉넉잡아 50년간 추진할 일대 대사업으로 확장됐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공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여기던 시절이니 당초 '만주 철도사업' 입찰에 뛰어들었던 영프독 삼국의 철도회사들이 난색을 표했으나, 사업의 타당성은 떨어져도 장기적으로 수익성이 천장을 뚫고 치솟을 것이 너무나 명백하므로 결국 청과 조선 양국에 제철소 건설, 기술학교 설립, 설비 국산화 지원 등 대규모 기술이전을 감수하고 공사에 착수했다. 참고로 조선측 제철소는 해주 인근에 짓게 된다.[8] 작중에서 장지동이 30년 정도면 양광에서 경상도까지 노선이 완성될거라고 말하는걸 보면 순탄하게 진행하고 있는 듯 하다. 처음 예정대로 부분부분 개통한 철도에서 이익을 창출해 재투자하기 시작했다고. 이는 청국의 내정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 도중(都中)[9] 결성의 자유 인정
1874년, 장승업의 신보도중(신문노조) 결성을 계기로 안 그래도 이리 치이고 저리 처이는 것을 서럽게 여기던 고공들이 너도 나도 우리도 나랏일을 한다며 도중을 결성하여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대규모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에 6.25 전쟁 때 경험으로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귀남이 처음에는 강경진압을 생각했으나 아무리 빨갱이라도 백성은 백성이니 마음을 바꿔 고공들을 '존중'할 것을 지시하였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모이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모든 공장과 국의 고공들에게 관아에 신고하여 도중을 꾸리는 것을 허여했다.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노동삼권 중에서 단결권을 인정한 셈이다.
- 익문사 혁파 및 공안서 설치
1874년, 익문사를 폐하고 그 대신 조선식 국가 헌병대 '공안서'를 설치하였다. 대원군의 사병이라는 점은 크게 다를 것 없지만, 일단 겉으로는 총관을 따로 두었고 기무회의 의결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였다. 대원군의 사병이기에 대원군의 정당 만민공산당에게 우호적이다. 팬덤에서는 '공장주가 노조를 때려잡으면 비밀경찰이 공장주를 잡아간다', '암행어사 아냐?'라는 농담이 돌았다.
- 명성황후의 대군 출산
원 역사처럼 명성황후의 첫 아들이 사망했을 때 귀남에게 호되게 질책당한 내의원이 허겁지겁 서양 의학을 받아들여 원 역사와 달리 세번째, 네번째 대군은 죽지 않고 생존했다. 그러므로 본작에서는 세자, 즉 미래의 순종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동아들이 아니다.
- 사법부 설치
귀남이 양이의 기물이 들어오면서 정도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들이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최익현의 이야기를 듣고 배운 사람들 할 일 중 세인의 존중도 받을 일이라면 역시 판검사라며 일자리 정책의 일환으로 행정권력에서 벗어난 근대화된 사법부를 설치하였다.[10] 전국 팔도 감영과 개시 둔 도시에 형송의 일을 다루는 판심청을 두었고 그 위로 최고법원 평리원을 두었다.
- 화서학원 & 노사학원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의 제자들이 각각 안동 김문과 대원군의 후원을 받아 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화서학원과 노사학원을 차렸다.
- 한성-제물포 철도 부설
동철에서 몇 리 쯤 미리 놓아서 시범을 보일 심산으로 제물포부터 한성까지 가는 철도를 놓았다.
베베르의 조선 부임이 앞당겨지면서 원 역사보다 빨리 손탁호텔이 세워졌다. 공친왕의 심복 마신이의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는 임시 호텔이었다고 한다.
공친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홍장과 미리 합의했던대로 동삼성에 나가 있는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병력 1만을 파견하여 제일 먼저 입국신고부터 한 뒤(...) 아사 직전의 난민을 구휼하고 산적 무리를 토벌하는 등 민심을 수습했다. 규모로 따지면 전조 이래 처음이라 하여도 얻어낸 땅덩이는 없고, 일만 명 장졸을 먹이고 또 구휼까지 하였으므로 고스란히 그 해 재정은 곳간 헐어 충당할 지경이 됐다. 하지만 도성의 신보란 신보는 모두 박규수와 대원군의 손아귀에 있고 두 사람이 이번 출병을 아주 잘 한 일이라고 만족하였으니 감히 얻어낸 것 없이 국용만 축냈다고 글로 비방하는 이는 없었다. 호조판서 김병시는 전비를 너무 많이 썼다며 이를 갈았지만.
- 노씨권학상 제정
노벨상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귀남이 다이너마이트의 군용 판매를 허락할 수 없다는 알프레드 노벨을 설득하기 위해 판매 기금으로 매년 전 인류의 번영과 평화에 기여한 우수한 학술적 성과에 대해 표창할 것을 제안하여 유럽 학계의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가운데(...) 원 역사보다 23년 빨리 탄생했다. 조선에서 심사하고 수여하기에 수상 분야에 유학이 추가되었다. 현실 노벨상과 같이 노씨권학상 역시도 살아있는 사람[11] 에게 수상되고 있다.
- 무인년 은 소동
개화당에서 은본위제 실시를 강하게 주장함에 따라 소문이 빠른 이들이 너도 나도 쌈짓돈을 털어 은을 구매했다. 그런데 공산당이 강하게 반대하여 은본위제 도입이 없던 일이 된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이 돌면서 도성 저자에 끼었던 거품이 순식간에 터져 은값이 폭락하고 만다. 그로 인해 비록 수는 적으나 패가망신하여 거리에 나앉은 이들이 나왔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마땅히 구휼해야 하는 가를 놓고 논의가 이어졌고 귀남이 생각 끝에 민자영의 제안대로 세곡을 풀어 저자의 은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어윤중과 김옥균에게 이렇게 백성들에게 사들인 은 사백만냥을 들고 청국으로 가 제조국을 돌면서 병기든 사람이든 도움 될 이들을 모두 데려오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훈련함 비연호를 타고 상해로 간 윤중과 옥균은 강남제조총국을 포함해 양강 일대의 공창을 후원하는 조건으로 재주 있는 공인들을 대거 스카웃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 대조선국 국제(國制) 제정
3년간에 걸친 논의 끝에 원 역사의 대한국 국제보다 21년 빠른 1879년에 제정되었다. 무한하고 불가침한 황권,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 정치'를 강조한 대한국 국제와 달리 삼권분립을 명시했다. 이를 근거로 통리아문을 의정부 이하 육조와 통합하여 행정부를 구성했고, 참의원의 자리를 입법부로 공식화하였으며, 삼사를 떼어내고 산림의 선비를 채용해 사법부를 설립했다. 그리고 국왕에게 인사권, 법률안 제출권, 위헌여부 심판 등의 권한이 있음을 선포했다. 또한 교육권, 평등권, 언론의 자유 등 백성의 기본권을 보장했다.
법으로써 군주의 위엄과 그 한도를 정하면 사람은 착한 세자가 용상에 올랐을 때 어지간한 일은 신료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외척이나 권신이 발호하여 왕권을 대신 휘두를 작정을 하게 되면 이를 막을 성벽과 같을 터이니 귀남은 이상의 내용에 만족하였지만, 신료들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과분하다 할 만큼 내어주는 면이 있으므로 적어도 군주의 위엄을 앞에서라도 세워야 한다는 데 당색 막론하고 합의가 이루어져 국제 1조가 "대조선국은 자주지방으로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가 됐다. 그런데 그 다음 조항이 다음과 같다.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 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이에 대체 조선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급진적인 개혁노선을 천명하고 있다고 보느냐 연일 물어보는 외국 언론사 기자들에게 시달리던 뒤냥이 "그래서 이 나라는 입헌군주국인가, 전제군주국인가?"라고 묻자 최익현이 말하기를 "둘 다 아니다. 애초에 그 둘의 구분은 서양에서 나온 것인데 임금과 백성의 도의가 다른 조선에 끼워 맞추려 하니 가당한 이야기인가? 굳이 따지자면 오직 나라 안 만백성의 이로움과 덕을 위해서 그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전제군주국이다." 이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며 이 이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결국에는 유학 경전 이야기 없이는 말할 수 없은 것이라 유럽인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법으로써 군주의 위엄과 그 한도를 정하면 사람은 착한 세자가 용상에 올랐을 때 어지간한 일은 신료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고 외척이나 권신이 발호하여 왕권을 대신 휘두를 작정을 하게 되면 이를 막을 성벽과 같을 터이니 귀남은 이상의 내용에 만족하였지만, 신료들 사이에서 백성들에게 과분하다 할 만큼 내어주는 면이 있으므로 적어도 군주의 위엄을 앞에서라도 세워야 한다는 데 당색 막론하고 합의가 이루어져 국제 1조가 "대조선국은 자주지방으로 항만세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가 됐다. 그런데 그 다음 조항이 다음과 같다. "대조선국 국왕께서는 무한하신 위엄과 권세를 향유하옵시나니, 이는 무릇 이륜을 크게 일으켜 만백성을 이롭게 함이니라. 이에 문무 백관을 거느리시고 소임에 따라 맡기시느니라."
이에 대체 조선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급진적인 개혁노선을 천명하고 있다고 보느냐 연일 물어보는 외국 언론사 기자들에게 시달리던 뒤냥이 "그래서 이 나라는 입헌군주국인가, 전제군주국인가?"라고 묻자 최익현이 말하기를 "둘 다 아니다. 애초에 그 둘의 구분은 서양에서 나온 것인데 임금과 백성의 도의가 다른 조선에 끼워 맞추려 하니 가당한 이야기인가? 굳이 따지자면 오직 나라 안 만백성의 이로움과 덕을 위해서 그 무한한 권력을 행사하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전제군주국이다." 이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이며 이 이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결국에는 유학 경전 이야기 없이는 말할 수 없은 것이라 유럽인들은 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 기묘년 경제공황
위에서 설명한 '조선국 국제'에 영국의 입김 닿았다고 확신한 이그나티예프 백작이 한반도 주도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국제를 지금보다 '진중한 내용'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는데 조선이 이를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거부하자 아시아개발은행의 조선 및 조선인 보유 자산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를 무기한 유보하는 경제제재를 실시했다. 그리하여 그 동안 호황 일변도였던 조선에 공황이라는 달갑지 않은 객이 방문했다. 사실 아무리 조선이 경제를 개방하고 산업화 발 걷어붙이고 나섰다고 한들 여전히 그 근본은 농사짓는 데 있으니 외국에서 들어오는 투자가 끊겼다 하여 당장 나라가 끼니를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허나 이 정도로도 지금까지 성공의 열매만 취해오던 조선의 풋내기 산업가와 자산가들에게는 심대한 충격이었다. 이에 대원군은 연해주에 나가있는 상고와 공인들을 일제히 철수케 하면 저들 역시 사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조치를 물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민자영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개화당을 반자유주의 친러파로 코스프레시켜 화해의 거간으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귀남은 고심 끝에 두 사람의 계책을 모두 취해 조선인들이 먹여살리는 연해주 전역의 유지들로 하여금 최근 조선이 반포한 자유주의 한법에 서구식 조항을 넣기 시작한 것은 만민공산당인데 이그나티예프의 경제제재는 헌법 초안을 합리적이고 보수적으로 방향으로 수정한 친러파인 개화당을 곤경에 빠뜨렸다며 이로운 이들을 버리고, 그 반대되는 이들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됐으니 부디 치명적인 오해가 러시아의 국익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리게 만들었다. 차르의 기대를 받고 있는 연해주의 러시아 국민들이 이 청원을 극동 바깥으로 꺼내게 되면 러시아의 입지를 제 손으로 삽질해 파헤쳐놓았다는 모함이 자신을 덮칠 것이 눈에 선했던 이그나티예프는 결국 아시아개발은행의 경제제재를 해제했다.
가만히 문명개화를 추진하던 나라가 한 고관의 마음대로 위기에 처할 뻔 하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젊은 서생들에게 깊이 새겨졌고, 다른 한편으로 극동의 작은 나라가 친러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시베리아 곳곳의 정치범 유형수들 중 몇몇은 연해주로 탈출할 방법을 고심하게 됐다.
귀남은 고심 끝에 두 사람의 계책을 모두 취해 조선인들이 먹여살리는 연해주 전역의 유지들로 하여금 최근 조선이 반포한 자유주의 한법에 서구식 조항을 넣기 시작한 것은 만민공산당인데 이그나티예프의 경제제재는 헌법 초안을 합리적이고 보수적으로 방향으로 수정한 친러파인 개화당을 곤경에 빠뜨렸다며 이로운 이들을 버리고, 그 반대되는 이들에게만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됐으니 부디 치명적인 오해가 러시아의 국익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리게 만들었다. 차르의 기대를 받고 있는 연해주의 러시아 국민들이 이 청원을 극동 바깥으로 꺼내게 되면 러시아의 입지를 제 손으로 삽질해 파헤쳐놓았다는 모함이 자신을 덮칠 것이 눈에 선했던 이그나티예프는 결국 아시아개발은행의 경제제재를 해제했다.
가만히 문명개화를 추진하던 나라가 한 고관의 마음대로 위기에 처할 뻔 하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젊은 서생들에게 깊이 새겨졌고, 다른 한편으로 극동의 작은 나라가 친러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시베리아 곳곳의 정치범 유형수들 중 몇몇은 연해주로 탈출할 방법을 고심하게 됐다.
- 고시(考試) 실시
근래 학도들 사이에서 '국경을 넘어 무산계급을 결집시키기 위한 연대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유자의 짐을 지어 천하 만방에 참된 개화를 베풀어야 한다' 따위의 편벽한 잡설을 유행한다고 하여 귀남이 "그런 소리할 시간에 공부하게 만들면 되겠네."라는 논리로 과거에서 보는 과목에 시무의 대책, 양이의 학문, 거기에 산학까지 추가한 새로운 시험 제도 '고시'를 실시토록 하였다. 게다가 학도들이 엄한 짓을 할 때마다 말 없이 고시 과목을 늘리거나 난이도를 올리는 악마같은 개정을 하고 있다. 심지어 갈수록 업무는 늘어나고 새로운 지식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지는데, 이미 중노년이라 새로 뭘 배울 여력이 없는 중신들이 앞다투어 이것저것 죄다 시험에 추가하자며 한마음으로 응원중이다.
- 조일동맹 체결
이토 히로부미가 친조노선의 선봉장 요시노부를 실각시키기 위하여 원교근공으로써 정한을 이룩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책자 '일본책략'을 유포하였다. 그런데 새로 만든 국제(헌법)에 따라 대책회의를 참관하던 귀남이 듣자하니 사건 수괴가 '나쁜놈' 이등박문이라, 혹시 그놈이 나쁜놈인 것 아니냐고 묻고 신하들도 간신이 권력을 잡기 위해 타국과의 마찰을 유발하는 일이 있을 법하다고 생각해 뭔지 몰라도 생각대로 안되게 진행하는 방안을 떠올린다. 그것이 조일간에 군사동맹을 맺는 것. 이는 결박동맹이라 하여 가상적국간에 군사동맹을 맺어 서로의 군사활동을 감시함으로서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 중 하나다. 물론 자신의 군사활동도 제약되지만 애초에 전쟁할 생각 자체가 없는 조선에게는 전혀 손해가 없고, 현재 조선의 육군은 20만 명으로 일본의 세 배나 되니 알려져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그리고 거절할 명분이 없었던 오쿠보 내각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조일동맹이 성립되었다. 그러고나자 이번엔 극동의 양대 개화국이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에 청국과 러시아가 기겁을 하지만. 한편 불장난이 거하게 실패한[12] 이토는 행동을 같이 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조슈 번에게 해군을 넘겨주겠다는 오쿠보의 약속에 넘어가 자신을 팔아버려 권력을 잃고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됐다.
- 교린삼장
귀남이 서태후의 파천을 계기로 마련한 조선의 외교독트린. 약육강식의 시대에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를 꾸준히 지켜온 이래 많은 나라들이 조선의 '선의'를 알고는 있다.
- 대조선국은 다른 나라를 대함에 오직 예와 의를 지켜 함부로 벗어나지 않는다.
- 대조선국은 다른 나라로 말미암아 이익을 얻게 되면 필히 그 나라도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 대조선국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나라가 도움을 청하면 힘닿는 한 돕는다.
- 전구 설치
원 역사보다 6년 빠른 1881년에 전구를 도입했다. 작중 조선의 근대화가 빨리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구를 도입할 때 덤으로 창덕궁 돈화문 앞 각사까지 이어지는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궁궐 근처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기도 설치했으며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시점에서 한양 주점 등에서는 자비로 발전기와 전구를 사서 사용하면서 한양 중심으로 통금이 없어지면서 남녀간에 밤에 만나서 부적절한 짓을 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는 형편이다. 조선 조정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인지하고 일단 발전소를 짓고 한양을 중심으로 한 송전망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참고로 작중 조선에서는 맥심과 안인수가 합작한 회사에서 전구를 생산하고 있다. 에디슨이 조선을 우습게 보고 배상금 지급 요구를 한 뒤 조선의 공문을 배상급 협상하자는 내용이겠거니 하고 무시했는데, 그게 '조선에 특허권을 등록하면 인정해주겠다'는 공문이었기에 응답이 없자 조선은 다른 전구 특허를 가진 맥심 쪽에 연락해 특허를 사들인 것이다. 그리고 에디슨은 지가 공문 읽을 필요도 없다고 내친 주제에 내용을 알리지 않았다고 비서를 해고했다.
- 지적재산권법 제정
에디슨과 안인수의 전구 특허권 분쟁을 계기로 조선 조정 차원에서 지적재산권법을 마련했다. 그 내용은 미국 내 특허권자가 나선다면 조선에 기술협력을 하고 공장을 세운다는 전제 하에 그 권리를 보장하고 아시아 시장 진출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특허가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참고로 이러한 제정에 큰 기여를 한 안인수와 에디슨간의 특허분쟁은 별도의 전구 특허를 가진[13] 맥심과 안인수가 합작하는 걸로 끝났다.
- 커피
어느 정도 개방이 된 시점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은 한 숙수가 귀남옹이 전생에 마시던 커피를 재현해내자 주인공이 좋아했다는 언급이 나왔다. 귀남옹 전생 시기의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감안하면 자판기 커피 혹은 커피믹스일 것인데, 그걸 19세기에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해당 작품의 첫 광기를 19세기에 자판기 커피 혹은 커피믹스 맛 커피를 만들어낸 숙수의 등장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이 커피는 파리 박람회에까지 출품되었다. 여담으로 아메리카노도 퍼졌는 데 전생에 먹던 커피보다 저렴해서 계사황란 이후 귀남옹이 마시는 장면이나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호조[14] 에서 자주 마시는 모양인지 항간에는 아메리카노를 호조탕약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 한글전용 도입과 국문교정청 설치
1884년부터 경서를 모두 언해로 옮기고 시권을 언문으로 써서 내도 가감 없이 그 내용만으로 판단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국문교정청을 두어 나랏말의 이치를 궁구하고 널리 알리기로 하였다.
- 정동구락부 & 장동구락부
안인수의 아들 안태훈이 원 역사에서는 구미인들의 사교단체였던 정동구락부를 차렸다. 그리고 이에 질 세라 전 영의정 홍순목의 늦둥이 홍영식이 한양 제2의 구락부 장동구락부를 꾸렸다. 정동구락부는 말만 클럽이고 실제로는 다점에 불과하지만 장동구락부는 양주, 연초, 당구도 있는 곳이라 그런 여유를 즐길 만한 자제들 사이에서 꽤 입소문이 났다.
- 遠國과 隣國의 事情을 論함[15]
박규수의 유작.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먼나라 이웃나라의 패러디다. 내용을 보면 둥근 이 세상에 가운데가 있을 수 있냐고 지적하면서 중원 땅의 문물만이 가장 뛰어나며 이는 문헌으로 증험할 수 있다고 하는 의론이 어찌 우활하면서도 무서운 말이 아니겠냐고 통렬히 비판했다. 동시에 대서 땅에도 이와 비슷한 의론이 있으니 저들이 옳고 우리가 그른 것도 아니요, 저들이 그르고 우리만 옳은 것도 아니므로 화이를 가름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고 억만 백성이 함께한다면 능히 만천하가 문명으로 가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글이 언문이고 띄어쓰기 및 여러 문장부호를 도입하여 한문을 몰라도 읽을 수 있어 백성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청국에 '만국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 경복궁 재건
대원군의 조바심으로 당백전 발행 등 온갖 무리수가 동원되었던 원 역사와 달리 조선이 충분히 강성해지고 공사가 진행되어 원 역사보다 19년 느린 1886년에 경복궁이 재건됐다. 처음 설계할 때 서양식 전각도 하나쯤 세우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창덕궁에 이미 하나 있기도 하고 명색이 나라의 법궁인데 국초의 제도로 함부로 변경하기 저어된다고 하여 불발되었다. 그리고 사정전에 전구 하나 설치한 것이 끝일 정도로 서양 기물을 들이는 것을 최대한 배제했다. 대신 후원 한 구석에 조선과 서양의 공법이 어우러진 전각 '경무대', 즉 청와대를 만들었다. 당연히 귀남이 이 기회에 미리 만들어두면 좋겠다고 밀어붙인 것이다.
- 환관 채용 중단
1885년 가을부터 환관만을 내시로 선발하는 제도를 폐하였다.
- 안정여숙(安貞女塾)
엘러노어가 일으킨 사건으로 여권 신장에 대해 고민하게 된 북촌 과부와 대갓집 며느리들이 한두 푼씩 모아 안정여숙이라는 여학교를 차렸다.
- 전국 참의대부 추거 실시 및 총리직선제 도입
참의대부의 임기를 정하지 않아 한 사람이 계속 연임하는 폐단을 발생하자 한성에서 제한적으로 실시했던 참의대부 추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영의정 겸 총리대신도 추거로 뽑기로 했다. 조정 대신들이 조금이라도 추거제를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가산에 따라 1인 1표 이상 던질 수 있도록 하자", "공개 투표로 하자" 등 이런저런 택도 없는 제안을 내놓았지만 그 옛날 전국을 뒤집어 놓은 부정선거를 기억하고 있는 귀남이 "그러면 벼락부자한테는 투표권을 주고 가난한 선비에게는 투표권을 안 주는 게 되지 않느냐", " 여기 있는 대신들도 내 앞에서 드러내놓고 반대의사를 내기 힘든데 일반 백성들은 오죽하겠느냐" 라며 전부 반려해 결국 평등선거 비밀선거가 도입됐다. 그리하여 전국 군현에서 추거를 하게끔 하고 그 참여할 수 있는 자는 나라에 내는 부세로 우선 거르되, 향시를 통과한 이들은 예외로 하기로 했다.
- 자유당 창당
참의대부 전국 추거 실시를 계기로 총리 출마에 마음을 굳힌 최익현이 박은식이 꾸린 자강당을 기반으로 실용적 자유주의를 채택한 자유당을 창당했다. 안인수의 도움으로 광통교 옆 인적 많은 곳에 당사도 차렸다.
- 신촌향약(新村鄕約)
국력을 기르면서도 동시에 백성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귀남의 기억 속 새마을운동과 최익현이 방도로 내세운 향약이 만나 시작된 사업이다. 그 내용은 초가지붕 교체, 민둥산 녹화, 종두법 보급 세 가지 중 하나만 우선 해줄테니 각 고을에서 알아서 한 가지 청만 정해 내놓으라는 것.[16]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다보니 의견도 제각각에 혼란의 도가니가 펼쳐졌고, 이 때문에 다른 고을보다 뒤처질 것을 걱정한 각 지역 사족들이 양민들에게 하나씩 양보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원시적인 형태의 지방의회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 단발
긴 시간에 걸쳐서 풍속의 변화가 일어나 단발에 대한 인식이 '꼭 할 필요는 없지만, 할 수도 있다'가 됐다. 그래서 나라에서 단발령을 내린 적은 없지만 도성이나 인천 부근에 단발하고 다니는 사내가 늘었다. 개중에는 망건으로 쓸어올려 상투 시늉은 낼 수 있을 만큼 절묘한 길이로 머리를 자르기도 한다. 동삼성과 인접한 의주에는 더 많다고 한다.
- 1889 파리 엑스포
원 역사와 달리 '해동문화각'이라는 독립적인 국가관을 차렸다. 왕실 레시피 인스턴트 커피와 서양 언어로 번역한 서적을 출품하고 자개와 옻칠로 꾸민 공장 기물을 전시해놓았다. 따로 자리얻은 광통이도국은 코닥 사의 협력을 얻어 조선의 명승을 주제로 사진전을 열였다.
- 학사장교 도입
모름지기 사내라면 군대를 가야 한다는 귀남의 신념에 따라 세자를 비롯한 대군들의 군입대가 현실이 되자 무품 종친들을 병으로 굴릴 만큼 담력이 강하지 못한 군내 인사들이 이 기회에 막료 체계를 가다듬자는 생각으로 향시를 통과하거나 대학원을 마친 이들은 참위(=소위)로 종군케 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 축첩제 폐지
귀남이 옥균의 제안을 받아들여 1890년에 축첩제를 폐지하였다.
- 궁녀의 결혼 허용
신정왕후 조대비가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궁녀들이 불쌍하지 않냐며 다른 곳은 몰라도 왕실은 축첩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귀남이 그렇다면 이제부터 궁녀들의 결혼을 허용하면 되겠다고 반응했다.
- 조일동맹 파기 및 조러불동맹 체결
파리 엑스포에서의 제의는 흐지부지 되었지만, 영국이 독일의 상황이 심상치 않아 위대한 고립을 끝내려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영일 동맹을 맺자 조선에 제의한다. 이에 귀남은 조선은 러시아에, 일본은 영국에 붙어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에 힘쓰고 만약 조일 간 싸울 일이 있다면 싸우는 시늉만 내자고 제의한다. 이토는 이에 동의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조선이랑 전쟁이 나면 이기든 지든 자신은 숙청되는지라 조일 간 전쟁이 나지 않도록 힘쓰려 한다.
- 세자의 국혼
세자 이척이 원 역사의 세자빈이었던 순명비 민씨가 아니라 광산 김씨의 영애 김명숙과 결혼했다.
- 무치춘일기(霧峙春日記)
김옥균이 세도가 징벌 여론을 달래기 위하여 대원군과 조력을 받아 내놓은 일종의 팩션. 경화시보에서 연재되고 있다. 상갓집 개라고 불리던 대원군을 모티브로 삼은 주인공 '이하영'이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세도가와 암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김동인의 작품 '운현궁의 봄'의 패러디다.[17] 조금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어디 산구석 촌부면 모를까 첫구절만 들어도 대원군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무치춘일기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운현궁의 봄은 그 문학적 성취와 별개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18] 무치춘일기는 작품 내적으로 대원군의 회고록이나 다름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메타적으로 생각하면 이 작품 대원군의 인생이 실제 역사보다 '운현궁의 봄'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광개토대왕릉비 발견
원 역사와 달리 조청 합동발굴단이 1892년에 광개토대왕릉비를 발견하였다. 청나라에서는 혹시 광개토대왕릉비를 근거로 만주 영유권을 주장할까 걱정하였지만 정작 조선의 학자들은 하남성에서 발견된 은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 양력 및 개국 기년 도입
조선 개국 500년을 기념하던 중 서양 문물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개화당이 제2회 전국 참의대부 추거에서 세도 늘었겠다 역법을 고치자고 제안했고 받아들여진다. 이를 주청 조선 공사 송헌빈이 광서제에게 알린다. 원 역사의 갑오개혁으로 인한 개국 기년 사용보다 약 2년 정도 빠르다.
- 계사황란
청나라에서 황제 주도로 토지개혁을 펼치면서 반발이 이어지자 군을 동원하여 이러한 반발을 억누르기 시작하는데 자연스레 조선의 상인들과 관계를 맺던 지주들이 피해를 입게되자 소비위축을 염려한 조선 주식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해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원 역사의 1893년 미국발 공황까지 겹치면서 이 여파는 조선 전체로 퍼져 다음 해인 1894년까지 많은 이들이 경제난에 시달린다. 이에 귀남은 상경한 백성 하나를 만나 어제 군밤을 내린 뒤 방책이 있으니 조정을 믿고 기다리라는 어지를 내리고 이를 신보에 싣는다. 해당 챕터의 이름은 겨울밤 화롯가, 그러니까 노변담화다.
- 독도 분쟁 및 실록 공개
황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는데 마침 유럽에서는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었기에 일본과 손잡고 가짜 분쟁을 벌여 유럽의 동맹국에게서 차관을 들여올 계획을 세운다. 그러던 중 일본 측의 실수로 독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학술적으로 해결하려던 중 학자들이 원할 시에 실록을 열람하는 것을 허가하게 된다.
- 경제개발 오개년계획
황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어윤중이 제안하고 귀남이 이름을 붙인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을 실행한다.
- 유대인의 조선 정착
- 조선군 동원령 선포 및 만주 출병
안그래도 청의 변법 때문에 경제적 피해가 만연한 와중에 북양군은 조선측이 투자한 한양조병창의 운영에까지 개입한다. 이를 거둬달라는 요구를 묵살하고 친조 인사인 광서제를 반조 인사인 원세개가 사실상 유폐시킨 뒤 계엄령을 선포하자, 이에 조선에서는 제1 번국으로서 유폐된 천자를 구출한다는 명목으로 동원령을 선포하여 60만 대군을 소집시키는 한편, 최소 9만명 이상의 병력들을 압록강 너머로 파견한다.
[1] 이 사정을 모르던 벨로네가 보고서에 산당을 산악파(La Montagne)로 번역하는 바람에 프랑스에서 웬 자코뱅들이 조선에 나타났는가 놀랐다는 후문이 있다.[2] '너나 가져라'라는 뜻에 한강 여의도의 이름을 따왔다.[3]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막대한 전비 부담을 각오하고 투입한 병력이 약 30~50만명이었다.[4] 원 역사에서도 같은 주장을 신문에 실었다.[5] 귀남 본인이 6.25 당시 징집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 그의 첫째형은 전사통지서 한 통이 되어 돌아왔고, 둘째형은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모두 잃고 집에 돌아왔다가 다시 나간 후 실종되었다. 본인은 전쟁 말기가 되어서야 징집되어 사지는 멀쩡히 돌아왔으나 빨치산과 지뢰·굶주림·추위에 시달렸고 돌아와 보니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먹고 살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왔다.[6] 원 역사의 고종은 서기 1886년에 노비세습제를 폐지하였다.[7] 광둥성과 광시성.[8] 해주 인근 재령군과 은율군 일대에는 상당한 규모의 철광이 있다.[9] 조선 중기 이후 육의전 상인의 조합.[10]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도 나오게 되나 헌법 제정은 이로부터 조금 뒤의 일.[11] 그 사람이 오늘내일하는 통에 정신이 없더라도 수상 가능.[12] 작중 묘사로는 불장난을 하다 보면 연기에 놀란 이웃이 대문 박차고 뛰어들어 물을 퍼붓기도 하는 법이다.[13] 당시 에디슨은 전구를 새로이 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전구의 효율성을 개선한 것이었다.에디슨 이외에도 이런 식의 전구 개선 특허가 비슷한 시기에 다수 있었다고 한다.[14] 오늘날의 기획재정부,한국은행 등을 모두 합친 기구[15] 먼 나라와 이웃 나라의 사정을 논함[16] 당연히 이런 말을 한 건 예산 부족 때문.[17] 제목 무치춘을 직역하면 '안갯재의 봄'인데 안갯재는 '구름재', 즉 운현궁이다. 그러니까 '운현궁의 봄'이 '안갯재의 봄'이 된 것이다.[18] 실제 대원군은 젊은 시절 상갓집 개나 파락호와 거리가 먼 모범적인 종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