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철도가

 

1. 개요
2. 가사
3. 각주


1. 개요



원제는〈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로, 1908년최남선[1] 일본의 철도창가를 멜로디와 가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든 곡이다. 실질적으로 녹음된 기록은 현재 한국과 외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가사로만 구절로써 전해지고 있다.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원본이 전시되어있다.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박물관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저 영상이 아마 이 곳인 듯.
총 67절로, <밀밭에서> 곡조에 맞춰서 부르면 된다.
자매버전(...)으로 경인철도가, 호남철도가, 경원철도가, 경의철도가, 마산행진곡, 경주행진곡이 있다.

2. 가사


'''경부텰도노래'''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 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친소 다같이 익혀 지내니 /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관왕묘[2]

와 연화봉[3] 둘러보는 중 / 어느 덧에 용산역 다달았도다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 집 / 이천여 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

서관(西關)가는 경의선 예서 갈려서 / 일산수색 지나서 내려간다오

옆에 보는 푸른 물 용산나루니 / 경상 강원 웃물배 뫼는 곳일세

독서당(讀書堂)의 폐(廢)한 터 조상하면서 / 강에 빗긴 쇠다리 건너나오니

노량진역 지나서 게서부터는 / 한성(漢城) 지경(地境) 다하고 과천땅이다.

조조양양 흐르는 한강물소리 / 아직까지 귀속에 쳐져있거늘

어느 틈에 영등포 이르러서는 / 인천차부산차 서로 갈리네

예서부터 인천이 오십여 리니 / 오류 소사 부평역 지나간다네

이 마음에 틈을 타 다시 갈 차로 / 이번에는 직로로 부산가려네

관악산의 갠 경 우러러보고 / 영랑성[4]

의 묵은 터 바라보면서

잠시동안 시흥역 거쳐 가지고 / 날개 있어 나는 듯 안양이르러

실과 같은 안양내 옆에 끼고서 / 다달으니 수원역 여기로구나

이전에는 유수도(留守道) 지금 관찰부(觀察府) / 경기도관찰사 있는 곳이라

경개 이름 다 좋고 서호(西湖) 항미정(杭眉亭) / 그 옆에는 농학교(農學校) 농사시험장[5]

마음으로 화령전(華寧殿) 첨배(瞻拜)한 후에 / 대성인의 큰 효성 감읍(感泣)하도다

달 바라는 나각(螺閣)은 어찌되었나 / 물 구경 터 화홍문 변이 없는지

운담(雲淡) 풍경 때맞춰 방화수유정(訪花隨柳亭) / 양어(養魚) 상연(賞蓮) 겸하는 만석거(萬石渠)[6]

로다

광교산을 옆하고 떠나나가서 / 잠시간에 병점역 이르렀도다

북(北)에 뵈는 솔밭은 융릉 뫼신 데 / 이름높은 대황교(大皇橋)[7]

거기 있다오

이다음에 정차장 오산역이니 / 온갖 곡식 모이는 큰 장거리오

그 다음에 정차장 송탄역이니 / 물새사냥 하기에 좋은 터이라

서정리를 지나서 평택이르니 / 들은 늦고 산낮아 들만 넓도다

묘한 경개 좋은 토산(土産) 비록 없으나 / 쌀 소출은 다른데 당하리로다

게서 떠나 성환역 다달아서는 / 해가 벌써 아침때 훨씬 겨웠네

오 십 년 전[8]

일청전 생각해보니 / 여기 오매 옛일이 더욱 새로워

일본사람 저희들 지저귀면서 / 그 때 일이 쾌하다 서로 일컬어

얼굴마다 기쁜 빛 가득하여서 / 일본남자 대화혼(大和魂) 자랑하는데

그 중에도 한 노파 눈물 씻으며 / 그 때통에 외아들 잃어 버리고

늙은 신세 표령(飄零)[9]

해 이 꼴이라고 / 떨어지는 눈물을 금치 못하니

말말마다 한이오 설움이어서 / 외국사람 나까지 감동되거늘

쓸데없는 남의 공 자랑하기에 / 저의 동포 참상을 위로도 없네

척수루의 빈 터는 볼 수 있으나 / 월봉산의 싸움터 자취 없도다

안성천의 다리를 얼른 건너서 / 순식간에 직산역 와서 닿았네

백제국의 첫 도읍 위례성 터는 / 성암산에 있으니 예서 삼십리[10]

천오동에 놓았던 구리 기둥은 / 돌 주초만 두개가 남았다더라

이편저편 보는 중 모르는 틈에 / 어느 덧에 천안역 다달았도다

온양온천 여기서 삼십리이니 / 목욕하러 가는 이 많이 나리네[11]

인력차교자가 준비해있어 / 가고 옴에 조금도 어려움 없고

청결하게 꾸며논 여관있으나 / 이는 대개 일본인 영업이라니

이런 일은 아무리 적다하여도 / 동포생업 쇠함을 가히 알리라

그네들이 얼마나 잘하였으면 / 이것 하나 보전치 못하게되오

백제 때에 이 지명 탕정(湯井)[12]

이라니 / 그 때부터 안 것이 분명하도다

수천년간 전하던 이러한 것을 / 을 주고 객(客)되니 아프지 않소

소정리전의역 차례로 지나 / 갈거리(葛居里)[13]

를 거쳐서 조치원오니

낙영산(落影山)의 그림자 멀리 바라고 / 화양서원 옛일을 생각하도다[14]

내판역을 지나서 미호천건너[15]

/ 몇십분이 안되어 부강역이니

충청일도 윤내는 금강가이라 / 소금의 장터로 유명한데오

사십리를 격조(隔阻)한 공주 고을은 / 충청남도 관찰사 있는 곳이니[16]

내포(內浦) 일판 너른 뜰 끼고 앉아서 / 이 근처의 상업상 중심점이오

계룡산(鷄龍山)의 높은 봉(峰) 하늘에 닿으니 / 아(我) 태조(太祖) 집 지으신 고적(古蹟) 있으며[17]

금강루의 좋은 경(景) 물에 비치니 / 옛 선비의 지은 글 많이 전하네

마미(馬尾)[18]

신탄(新灘) 지나서[19] 대전 이르니 / 목포(木浦)가는 곧은 길 예가 시초라[20]

오십오 자(五十五尺) 돌미륵(彌勒)[21]

은진(恩津)에 있어 / 지나가는 행인의 눈을 놀래오

증약지나[22]

옥천역 다달아서는 / 해가 벌써 공중에 당도하였네

마니산성 남은 터 바라보는중 / 그 동안에 이원역 이르렀도다

속리사(俗離寺)[23]

가 여기서 삼십리라니 / 한번 가서 티끌 마음 씻을 것이오

운연(韻連) 죽던 양산(陽山)[24]

이 육십 리(六十里)라니 / 쾌남아(快男兒)의 매운 혼 조상하리라

고당포를 바라며 심천이르니 / 크지 않은 폭포[25]

나 눈에 띠우고

그 다음에 영동역 다다라서는 / 경부사이 절반을 온 셈이라[26]

이십사번(二十四番) 화신풍(花信風)[27]

불어올 때에 / 때 좋다고 꽃피는 금성산인데

정든 손을 나누기 어렵다하여 / 꽃다운 혼 스러진 낙화대(落花臺)로다[28]

미근[29]

황간 두역을 바삐 지나서 / 추풍령의 이마에 올라타도다

경부선 중 최고지(最高地) 이 고개인데[30]

/ 예서부터 남쪽은 영남이라오

얼마 안가 김천역[31]

다달아보니[32] / 이전부터 유명한 큰 장거리라[33]

사통하고 팔달한 좋은 덴 고로 / 이 근처에 짝 없이 굉장하다네

그 다음의 정차장 금오산이니[34]

/ 이름 있는 도선굴 있는 곳이라

산 아래 지었던 길재 사당은 / 지낸 세월 오래라 저리되었네

금오산성(金烏山城) 너른 곳 지금 어떠뇨 / 세 연못과 한 시내 그저 있는지

무릉도원 깊은데 역사(役事) 피하듯 / 이전부터 그 근처 피란(避亂) 곳이라

약수역[35]

을 지나면 왜관역이니 / 낙동강의 배편이 예가 한이요

삼백년전 당하던 임진왜란에 / 일본군사 수천명 머무던 데라

왜관 지나 신동에 신동 지나면 / 영남천지 제일 큰 대구군이라[36]

경상북도 모든 골 작고 큰 일을 / 총할(總轄)하는 관찰사(觀察使) 여기 있으니

부하(府下) 인구 도 총합 사만오천에 / 이천이백 일본인 산다하더라

산 이름은 연귀(連龜)이나[37]

거북 못 보고 / 집 이름은 영귀(詠歸)나[38][39] 관원 있도다.

연년마다 춘추로 열리는 (場)은 / 우리나라 셋째의 큰 교역이니[40]

대소 없이 안 나는 물건이없고 / 원근없이 안 오는 사람이었네

누구누구 가르쳐 팔공산인지 / 일곱 고을 너른 터 타고 있으되

수도동의 폭포는 눈이 부시고 / 동화사의 쇠북은 귀가 맑도다

달성산의 그윽한 운취 끼고서 / 경산군을 지나서 청도이르니

청덕루의 불던 피리 소리가 없고 / 소이서국(小伊西國)[41]

끼친 예(禮) 그림자도 없네

성현터널[42]

[43] 빠져서 유천다달아[44] / 용각산을 등지고 밀양이르니

장신동의 기와집 즐비한 것은 / 시골촌에 희한한 경광이러라

밀양군은 영남의 두서넛째니 / 예전에서 도호부 두었던 데라

상업상에 조그만 중심이되어 / 상고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네

객관(客館) 동편(東便) 영남루(嶺南樓) 좋은 경개는 / 노는 사람 지팡이 절로 멈추고

만어산에 나는 돌 쇠북과 같이 / 두드리면 쟁쟁히 소리난다네

그 다음에 있는 역 삼랑진이니 / 마산포로 갈리는 분기점[45]

예서부터 마산이 백 리 동안에 / 지나간다네

원동역을 지나서 물금에오니 / 작원관(鵲院關)을 찾으며 낙동강 끼고

머지 않은 임경대 눈앞에 있어 / 천하재자(天下才子) 고운(孤雲)을 생각하도다

통도사가 여기서 육십 리인데 / 석가여래 이마뼈 묻어있어서

우리나라 모든 절 으뜸이 되니 / 천 이백 칠십년 전 이룩한 바라

물금역을 지나면 그 다음에는[46]

/ 해육운수 연하는 구포역이라

낙동강의 어귀에 바로 있어서 / 상업 번성하기로 유명한 데라

수십분을 지난후 다시 떠나서 / 한참 가니[47]

부산진 거기로구나

우리나라 수군있을 때에는 / 초선두어 요해처(要害處) 방비하더니

해외 도적 엿봄이 끊이었는지 / 남의 힘을 빌어서 방비하는지

해방함 한척 없이 버려 두었고 / 있는 것은 외국기 날린 배로다

수백년전 예부터 일인(日人) 살던 곳 / 풍신수길 군사가 들어올 때에

부산으로 파견한 소서행장의 / 혈전하던 옛 전장 여기 있더라

범어사 대찰이 예서 오십리 / 신라 흥덕왕시에 왜관 십만을

의상이란 승장이 물리치므로 / 그 정성을 갚으려 세움이라네

삼십리를 떨어진 동래 온정은 / 신라부터 전하는 옛 우물이라

수 있으면 도상의 피곤한 것을 / 한 번 가서 씻어서 뉘기리로다

영가대(永嘉臺)[48]

의 달구경 겨를 못하나 / 충장단의 경배야 어찌 잊으리

초량역을 지나선 부산항이니 / 이 철도의 마지막 역이라 하네

부산항인천의 다음 연 데니 / 한일 사이 무역이 주장이 되고

항구 안이 너르고 물이 깊어서 / 아무리 큰 배라도 족히 닿네

수입 수출 통액이 일천여만 원 / 입항 출항 선박이 일백여만 톤

행정 사무 처리는 부윤이 하고 / 화물 출입 감독은 해관이 하네

일본사람 거류민 이만 인이니 / 얼른 보면 일본과 다름이 없고

조그마한 종선도 일인(日人)이부려 / 우리나라 사람은 얼른 못하네

한성 남산 신령이 없기전부터 / 윤산 신령 없은 지 벌써 오래니

오늘날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 강개함도 도리어 어리석도다

검숭하게 보이는 저기 절영도 / 부산항의 목쟁이 쥐고 있으니

아무데로 보아도 요해지이라 / 이충무의 사당을 거기 모셨네

인천까지 여기서 가는 동안이 / 육십시간 걸려야 닿는다는데

일본 마관[49]

까지는 불과 일시에 / 지체없이 이름을 얻는다하네

슬프도다 동래는 동남 제일현 / 부산항은 아국 중 둘째 큰 항구

우리나라 땅같이 아니 보이게 / 저렇 듯한 심한양 분통하도다

우리들도 어느 때 새 기운 나서 / 곳곳마다 잃은 것 찾아 들이여

우리장사 우리가 주장해보고 / 내나라 땅 내 것과 같이 보일가

오늘 오는 천 리에 눈에 띄는 것 / 터진 언덕 붉은산 우리같은 집

어느 때나 내 살림 넉넉하여서 / 보기 좋게 집 짓고 잘살아보며

식전부터 밤까지 타고온 기차 / 내 것같이 앉아도 실상 의 것

어느 때나 우리 힘 굳세게되어 / 내 팔뚝을 가지고 굴려볼거나

이런 생각 저생각 하려고 보면 / 한이없이 뒤대에 연적나오니

천리길을 하루에 다달은 것만 / 기이하게 생각되 그만둡시다

내용은 경부선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졌지만, 애석하게도 당시 한일합병과 일제강점기 전 노래이므로, 부국강병 내용이 많이 들어가있는 것이 일본 철도창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개통 당시 경부선을 어림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대전 대신 공주가 비중있게 등장하거나, 증약역, 미륵역, 초량역 등 지금은 폐지된 역이 대거 등장한다거나, 금오산역을 지나는 노선[50]이 등장하는 등 개통 초기 시대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3. 각주


[1] 아직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기 전이었다.[2] 동관왕묘가 아니라 당시 숭례문 근처에 있었던 남관왕묘를 말한다. 1979년에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전했다.[3] 용산구 청파동의 다른 이름.[4] 안양에 있는 삼성산의 산성(山城).[5] 당시에는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으로 불렸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했으며 해방 이후로는 농촌진흥청이 위치해있었다. 현재 전북혁신도시로 농촌진흥청이 이전하면서 수원시에서는 해당 부지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6] 현재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만석공원이다. 정조 19년(1795)에 축조되었다. 이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화성 밖의 평야지대가 곡창지대로 변모하였다. 현재는 매립으로 인해 과거의 1/3 크기에 불과하다. 인근에 수원종합운동장이 위치해있다.[7] 이름이 제후국에 걸맞지 않은 이름이라는 중국 측의 태클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된 설화도 존재한다.[8] 청일전쟁은 1894년에 발발했다. 그 중에서도 성환전투는 동년 7월 29일에 있었다. 50년이 아닌 5~10년임에 유의.[9] 신세가 딱하게 되어 안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10] 이 당시는 몽촌토성 등이 발견되지 않았던 때라서 백제 위례성을 천안 인근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11] 장항선과 온양온천역은 1922년에 개업했기 때문에 이때는 온양온천에 가려면 천안에서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12] 탕정은 온양의 옛 이름으로, 여기서 유래된 탕정면에 설치될 탕정역은 경부선이 아닌 장항선에 지어질 예정이다. [13] 현재는 세종시에 해당하는 전동면 심중리. 1995년에 충남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갈거리는 청주 영역이었다. 전동역은 바로 옆 마을인 노장리에 있고, 1923년에 개업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지을 때는 역도 없었다.[14] 낙영산과 화양서원은 괴산군 청천면에 속한 지역으로 이 일원을 흔히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고 부른다. 본디 청주군 소속으로 송시열이 배향된 사액서원인 화양서원이 있었다. 여기에 있던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동묘'''. 흥선대원군이 집권 이전에 이 곳을 방문했을 때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동묘지기한테 봉변당했다 훗날 서원 철폐를 단행했다는 야사가 존재한다. 여기서는 유교 질서 치하의 조선 역사를 생각한다는 의미. 다만 조치원에서 이곳까지는 약 '''45km''' 거리이다. [15] 실제로는 조치원역에서 미호천을 건너야 내판역이 나온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내판역이 없었을건데 언급이 되어있다.[16] 1896년 충청남도가 설치되면서 도청이 공주로 들어왔다. 하지만 철도 연선에서 배제되고 그 사이 일개 리(里)단위 행정구역에 불과했던 대전대전역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하자 1932년에 대전부로 도청이 이전했다. 참고로 앞서 서술된 조치원에서 청주군의 화양계곡은 나와도 관찰사가 언급되지 않은 이유도 관찰사가 충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노래가 쓰인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08년에 도청은 현재의 청주로 이전한다. 그리고 부강 일대에서 충남 관찰사 이야기가 나온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이 노래가 만들어졌을 당시 부강은 문의군에 속해있었고, 문의군은 1896년부터 1914년까지 충남의 영역이었다! 1914년에 충북 청주와 통합되었고, 계속 충북 청원군 영역에 있다가, 2012년 세종시를 신설하면서 문의군 영역 중 부강만 세종시로 넘어갔다. 여담이지만 대전으로 간 충남도청은 이후 대전이 직할시(후에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현재는 홍성군예산군 사이의 내포신도시로 이전했다.[17] 조선 태조 이성계는 오늘날의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갖고 대궐을 지으려고 공사에 착수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산되었다. 이 떡밥은 훗날 조선 후기 정감록으로 되살아난다.[18] 마미는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순우리말로는 '말미'이다. 이 일대는 '말미' 혹은 '말목' 등으로 불렸는데 여기서 '말'은 크다<大>는 의미이다. 즉 '큰 고개' 혹은 '큰 여울목'이라는 뜻. 여기서 말목은 한자로는 마포(馬浦)가 된다. 이 마포가 변하여 현재의 매포(梅浦)가 된 것이다. 참고로 매포역은 해방 이후 1946년에 개업하였다.[19] 회덕역은 20년 후인 1930년에 개업하였다.[20] 처음 작사가 이루어진 1908년에는 아직 호남선이 개통하지 않은 시점이다. 즉 아직 계획만 나왔던 시점인 셈. [21] 국보 제323호인 논산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등학교 한국사에서 고려시대 대표적인 석조 불상으로 접해봤을 것이다. 머리 높이랑 몸통 높이가 비슷해 2등신(...)으로 놀림을 받기도 한다.[22] 증약역은 이 구간의 이설로 인하여 1977년 폐지되었으며, 세천역은 1922년 개업하였다.[23] 속리산과는 관련이 없다. 비록 속리산에 속리사가 있기는 하다만 이곳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40km 정도로 100리에 해당하기 때문.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이곳에서 12km(30리) 떨어져있는 영국사(寧國寺)이다. 속리산 법주사 소속으로 홍건적의 고려 침공 당시 공민왕이 앞서 나온 마니산성에 머물며 이곳에 와 기도하니 나라<國>가 안녕<寧>을 되찾았다고 해서 영국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역사가 깊은 절이다.[24] 현재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운연은 전투를 이끌던 장군인 김흠운(歆運)의 오기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양산가」의 유래에 따르면 신라는 조천성을 얻기 위해 655년(무열왕 2년)에 장수 김흠운(金歆運)을 출병시켰지만, 야밤에 백제의 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양산가」를 지어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또한 김흠운이 전사하던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 을 매장한 무덤인 영동가곡리고분이 양산에 있다.[25] 영동군 심천면에 위치한 옥계폭포이다. 조선 초 세종 대에 아악(雅樂)을 정비한 것으로 유명한 난계 박연(朴堧) 선생이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전해진다. 인근에 국악박물관과 박연을 모신 사당인 난계사(蘭溪祠)가 있다.[26] 실제로 2016년 현재 경부선의 절반은 영동역보단 황간역에 더 가깝다. 이는 경부선이 지속적으로 노선 개량을 하면서 노선길이가 바뀌었음을 알 수있다.[27] 화신풍은 꽃이 핌을 알리는 바람, 즉 따뜻한 봄바람을 의미한다. 조상들은 이 화신풍이 24번의 '후(候)'마다 불어온다고 믿었다. '후(候)'란 소한부터 곡우까지 8개 절기를 각각 3등분한 것을 말하는데, 매 후마다 바람이 불면 매화부터 마지막 연화(楝花/멀구슬나무꽃)까지 24가지 꽃이 순서대로 핀다고 생각했다.[28] 여기서 꽃다운 혼은 신라화랑관창을 의미한다. 금성산 낙화대는 신라의 화랑이었던 관창(金官昌)이 황산벌 전투를 앞두고 아버지인 김품일과 머물렀던 곳이다. 당시 계백(階伯)의 결사대에 막혀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진 시점에서 김품일은 자신의 아들을 적진으로 보내 싸우도록 했다. 비록 용맹하게 싸웠으나 결국 백제군에 사로잡혀 전사한다. 이로 인해 신라군은 다시 사기를 충전해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을 이기고 사비성으로 진격한다.[29] 원래 명칭은 미륵역이 맞다. 1992년에 폐역되었다.[30] 오늘날까지도 추풍령역은 경부선 소재 역 중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한 역이다.[31] 이 당시에는 경북선이 없었다.[32] 신암역은 1937년 개업하였다.[33] 지금은 김천시가 그리 크지 않은 도시지만 당시에는 평양대구강경에 버금가는 장터로 유명했다. 비록 구한말에 급성장했기는 하나 대구에 이어 2등을 차지했을 정도로 번성했다. 감천 변의 황금동, 용두동, 감호동 일대가 당시 시장 터이다.[34] 눈치가 빠른사람은 알겠지만, 이 당시에는 경부선 철도가 구미를 지나가지 않았다. 이는 경부선 철도가 원래 금오산을 타고 넘어가는 노선이었으나, 기술력의 한계로 기관차가 산을 넘어가지 못하면서 현재 노선과 같이 금오산을 빙 둘러가는 노선으로 이설되었다. 이 결과 대신역, 아포역, '''구미역'''이 개업하게 되었다.[35] 약목역의 잘못인 듯 하다.[36] 대구는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때도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였다. 동대구역은 대구역 일대가 이미 개발되어 확장하기 어렵자 1969년 개업하였다. [37] 연귀산은 중구 봉산동 제일중학교 인근의 언덕을 말한다. 지금은 팔공산이 대구의 진산(鎭山)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연귀산이 대구의 진산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들은 이 언덕에 돌로 만든 거북상을 묻음으로써 지맥을 통하게 하여 앞산의 강한 화기(火氣)로부터 대구를 지키고자 하였다고 전해진다. 거북상은 현재 제일중학교 화단에 놓여있다.[38] 영귀정(詠歸亭). 영귀는 '읊조리며<詠> 돌아온다<歸>'는 뜻으로 본디 춘추시대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관직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쓰인다. [39] 영귀정(詠歸亭)은 당시 대구의 선비들이 시문(詩文)을 즐기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매입되어 '도수원(刀水園)'이라는 요정로 조성되었다. 한편 낮에는 유원지로 유료개방하여 대구 시민들이 조각배를 타고 둘러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도수원 놀이터'라고도 불렸다. 광복 이후 호수는 매립되었다. 오늘날의 칠성시장 인근에 있었으며 한때 대구역 기관차고가 있었고 지금은 칠성시장 가구단지가 들어섰다.[40] 서문시장은 조선시대 이미 서울의 시전, 평양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꼽혔다. 지금도 전국구적으로 큰 재래시장 중 하나.[41] 작은 이서국(伊西國). 이서국은 과거 청도에 있던 변한 출신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신라 초에 복속되었다.[42] 성현터널은 이설되었으며, 현재는 '''청도와인터널'''로 관광지화 되었다.[43] 삼성역은 1921년 개업, 남성현역은 약 10년뒤인 1919년 개업.[44] 신거역은 1967년 개업[45] 경전선(당시 마산선) 개통은 1905년에 이루어졌다. 물론 전구간 개통은 아니고 삼랑진-마산 구간만 개통한 것. 러일전쟁으로 이 구간이 우선 건설되었다. 현재와 같이 전 구간 개통된 것은 '''1960년대'''이다.[46] 화명역은 1999년 개업하였다.[47] 사상역은 1928년 개업하였다.[48] 조선 후기 통신사들이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원래 철도변 바로 옆에 있었으나 현재는 자성대공원으로 이전했다.[49] 馬関. 현재 下関이라 표기하는 시모노세키의 옛 명칭이다.[50] 구배가 너무 심한 관계로 1916년에 금오산 우회 노선이 개통되어 폐지되었다. 이 때 대신역, 아포역, 구미역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