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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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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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서태지와 아이들의 리더이자, 싱어송라이터.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혁명'''을 불러온 댄스뮤직, 힙합 장르[22] 의 선구자로서 '''문화 대통령'''이라 불린다.
한국 엔터테인먼트 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타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전문가 100명 가운데 가장 많은 19명이 서태지를 꼽으며 “사회적인 신드롬을 만들어낸 최고의 스타이자 아직까지 그를 뛰어넘는 스타는 없었다”고 언급하였다. 그가 주도한 그룹인 서태지와 아이들 역시 9표를 받으며 최상위권에 위치하였다. 기사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독보적인 인기를 누려,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가장 큰 아이콘으로 인정받는 뮤지션이다.
2. 상세
댄스 음악의 경우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이전인 1980년대에도 나미, 김완선, 소방차, 박남정 등의 댄스 가수들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모든 노래들이 현재 한국에서의 댄스음악과는 다르게 트로트와 같은 성인가요풍(소위 뽕삘)의 리듬과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고전 유로비트를 섞은 리듬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서태지의 등장 이후로 팝뮤직과 힙합을 기반으로 한 리듬의 댄스 뮤직 즉 '''현 시대의 한국 대중음악 스타일을 완벽히 정의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힙합의 경우 서태지가 힙합크루를 만들고 활동한 정통 힙합래퍼는 아니지만 서태지의 랩으로 인해 '한국어로도 랩을 만들 수 있다', '한국에서도 흑인 음악 장르가 성공할 수 있다.'라는 생각이 전 국민적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뮤직이 전 국민적으로 크게 성공한 이후 랩과 힙합을 전문적으로 다룬 가수들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 후반 경부터 PC통신 유저들이나 교포출신들 사이에서 힙합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발전한 것이 현재 한국 힙합계의 시작이다. 타블로도 하여가 노래를 듣고 영향을 받았음을 무릎팍도사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즉, 한국 힙합계에선 서태지가 일종의 뿌리이자 자양분이 되어준 셈이다.''' 비유하면 비틀즈가 하드록이나 메탈 밴드는 아니지만 그들이 남긴 헬터 스켈터라는 명곡이 1970~80년대 하드록, 메탈 장르의 프로토타입을 개척한 것과 같은 거라고 볼 수 있다[23][24] . 대표곡은 '난 알아요', '하여가', '교실 이데아', '컴백홈' 외 다수.
1990년대 초부터 다양한 장르의 음악 활동을 통해 한반도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청소년 팬덤을 거느렸으며, 이 힘을 밑거름으로 삼아 군사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던 당대 권위적인 한국 사회에 음악적, 비음악적으로 전방위적인 영향을 끼치며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대중매체에서 이 아티스트를 소개할 때 들어가는 수식어 중 첫머리에 오는 머릿말은 단연 '''문화 대통령.'''[25] 시대에 파란을 몰고 온 서태지와 아이들이 공식 은퇴를 선언한 1996년 이후 2013년 평창동에 정착하기까지 18년 동안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 기자들을 피해 해외에 거주해 왔다. 하나의 활동기가 끝나면 잠시 휴식하며 영감을 얻고, 음악작업을 하고, 귀국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솔로 활동을 했다. 앨범 간의 텀이 수년씩 되는 것은 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 때문에 습득하고 체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음악작업에 있어서 지독한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26]
80년대 메탈키드의 롤모델이었던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시스트로 아티스트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1992년 3인조 랩 댄스 트리오 서태지와 아이들로 오버그라운드에 데뷔하였다. 당시 이태원 클럽 음악으로 천대받던 댄스 뮤직을 대중에게 알리며 1집 타이틀곡 '난 알아요'로 17주 동안 가요 차트 1위를 수성한 전설적인 뮤지션. 이후 3인조 활동을 통해 힙합, 발라드, 일렉트로니카, 스래시 메탈, 갱스터 뮤직 등 매우 넓은 스펙트럼의 장르를 소화하며 음반을 발표하는 족족 사회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1998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에는 얼터너티브 락, 하드코어 펑크, 이모코어 등 본인의 전공인 록 위주의 밴드 사운드 활동에 매진해왔다. 이후 2008년부터는 고난도의 작법과 자신의 뿌리인 두 장르(록, 일렉트로니카)를 접목시키는 연구에 대한 성과물을 발표하고 있다.
작곡, 편곡 및 작사의 완성도와 음향 퀄리티, 공연장 사운드와 콘서트 무대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깐깐한 완벽주의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음악쪽을 보면 녹음을 마친 음반의 마무리 믹싱을 위해 6개월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로 쌩고생을 하는가 하면 이미 발매한 음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앨범 활동이 끝나자마자 새로 녹음해 버리지를 않나, 또 아토모스 싱글 땐 자연의 소리를 잡겠다고 장비를 바리바리 싣고 산골 흉가를 찾아가 녹음 작업을 하질 않나, 또 그게 믹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정규음반 발매의 기회를 노리고 미국 스튜디오로 날아가 버리기도 하는 등 음악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국내 아티스트 중에 손에 꼽힌다.
앞서 짚은 대로 여러 장르의 크로스오버를 통해 만들어진 독특한 음악적 색채와 올라운드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또한 '가수 서태지'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서태지는 음향 엔지니어링에도 조예가 깊다. 갓 20살 나이에 데뷔할 때 세션을 부르기엔 가난해서 1집의 엔지니어링과 프로그래밍을 도맡아 했는데,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이 습관이 되어서 후엔 한국에 있는 자기 회사와 저택 안에 본인이 작업할 전용 스튜디오를 차리고 음악에 관한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27] 현재는 자신의 일은 A부터 Z까지 모든 과정이 자기 손에서 이루어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되었으며, 콜라보레이션도 특별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외부 인물을 섭외하지 않는 한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편.
또한 초상권 등을 포함한 가수들의 권리 안정과 수입 배분을 이끌어내는데 앞장섰던 가수인데, 서태지 이전에는 가수들의 음반이 아무리 많이 팔리고 TV에 많이 나와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자신의 수익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고 음반회사 및 기획사가 주는 대로 만족해야 했다. 연예인인데 차가 없어? 한 대 뽑아줘라, 수고했으니까 집 좀 좋은 데로 사줘라 이런 식(...). 가왕 조용필과 마왕 신해철조차 이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지만, 생 초짜 신인 서태지가 이런 고일 대로 고여있던 기획사들의 횡포를 깨트리고 정당한 자신의 몫을 챙겼고 그 후 너도 나도 그런 행보를 따라가며 가수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신비주의를 언급하면 반자동적으로 따라나오는 이름의 주인이 바로 이 사람. 데뷔 초에는 여러 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말도 안 되는 몸개그를 선보이거나 음악방송에 출연해 간단한 토크를 하는 등 여느 가수들과 다를 바 없는 활동을 했지만 커리어 초반인 '''20살'''의 어린 나이부터 '''사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캐며 자택을 24시간 포위하는 수백 명의 소녀 팬'''과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는 기자들''', 음악밖에 모르는 방구석 청년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방송국 관계자들'''의 등쌀에 나가떨어져 점차적으로 신변잡기에 대한 입을 아예 닫아버리고 만다. 이것이 악순환의 단초가 되어 팬과 기자, 방송국 관계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슈퍼스타 서태지의 뒤를 캐거나 어떻게든 연락해 출연을 닥달하고 결과적으로 서태지는 더 꽁꽁 숨어야만 하는 무한루프를 만들어버렸다. 이 문제는 결국 그가 24세의 한창 어린 나이에 눈물의 은퇴를 선언하며 돌연 출국하고 세상에서 아예 증발해버리는 잔혹동화로 끝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내성적인 방구석 아티스트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인기를 떠안았을 때 개인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고통을 겪을 대로 다 겪은 백전노장.[28]
3. 성장 과정
1집 활동 당시 출연한 인간시대. 그의 성장 과정과 데뷔 당시 일상, 활동 모습이 담겨있다.
4. 가창력
흔히 김나박이로 불리는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이는 가수는 아니다. 하지만 서태지 본인이 가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기 위해 가사 한절 한절에 발음을 어떻게 할지 등을 깊게 연구했다. 그래서 서태지 음악에 빠지면 그 목소리에 질리지 않게 된다. 본인의 목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잘 알고 이를 활용한다.
4.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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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정현철. 어린 시절 사진들은 눈이 작고 어쩐지 지금과 다른 모습이라 최수종 쇼에서 본인이 스스로 성형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회동에서 어머니 강명숙 씨와 아버지 정상규 씨 사이의 1남 1녀 중 둘째이자 막내로 탄생. 누나로 정혜원 씨가 있다. 청와대 근처의 소격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29] 청와대와 아주 가까운 지역이라 민방위 훈련 때는 군인과 탱크까지 쫙 깔리는 살벌한 동네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 탱크를 따라다니면서 놀기도 했다고...
어린 시절부터 RC카나 인형을 좋아했는데, 문구점에서 상습적으로 인형을 40개나 훔쳤다가 너무 대놓고 훔치는 서태지의 모습을 어이없이 지켜보던 문구점 주인이 참다 못해 서태지의 어머니께 사실을 알리게 되면서, 집에서 된통 혼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 뮤직비디오에 묘사되었다.
4.2. 학창시절과 스쿨밴드 '하늘벽'
재동초등학교 재학 시절 음악보다는 과학을 좋아했고, 발명대회나 과학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여서, 주변에서 발명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본인 말로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빠지면서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30]
대동중학교[31] 재학 시절 처음 음악에 입문하게 되었는데, 음악 그 자체가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길을 걷던 중 악기점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폼을 재고 싶고 그룹사운드라는 이름이 뭔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음악에 심취하면서부터 학교 교사들의 체벌과[32] 음악하는 것을 삐딱하게 생각하는 학교 내 시선 때문에 점점 학교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고 학업과 학교 생활에서 점점 멀어져가다 결국 몰래 담배 피우고, 땡땡이나 치는 학생이 되었다.[33] 이 시절의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 인터뷰에 나와 있다. 중3 때는 담임 선생님의 단체 기합에 반항하여 교실을 뛰쳐나갔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담임 선생님은 체벌을 없애셨으며 졸업할 때까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이끌어 주셨다고 한다. 서태지가 인생에서 가장 고마웠던 선생님으로 기억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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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학창시절 서태지가 컴퓨터로 그린 밴드 '하늘벽' 로고.)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을 꼬드겨 5인조 스쿨 밴드 '하늘벽'을 결성하면서 최초의 밴드 사운드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결성 당시 제대로 된 악기를 가진 멤버는 악기를 산 본인뿐이라 나머지 멤버는 통기타, 피아노, 집에 있던 의자와 선풍기 날로 급조한 드럼(...)을 악기로 사용했다고 한다. 멤버들의 연주 경력도 그 나이 꼬마들답게 리더이자 리드 기타를 맡은 안준범 씨가 친형에게 기타를 배운 것과 건반을 맡은 멤버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것이 전부였던, 소꿉장난에 가깝게 시작한 밴드였다.
다만 서태지가 베이시스트로 진로를 정하게 된 계기가 이 밴드였다는 점에서 이 치기 어린 밴드가 언급될 의의를 갖는다. 어린 서태지는 당시 통기타로 음을 짚어내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음을 짚어내는 것이 베이스 연주자'라는 친구의 말에 베이스 연주자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34] 또한 당시 작사, 작곡, 편곡, 베이스, 보컬을 서태지가 모두 전담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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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하늘벽 멤버들과 찍은 사진.)
많은 시간이 흘러 서태지 15주년 기념관에 처음 공개된 '하늘벽' 사진에 따르면 활동 중 어느 시기엔가는 악기를 모두 구해서 그럴싸한 밴드 구성을 갖춘 듯. 하늘벽 데모 테이프에 들국화의 음악이 실려있던 것으로 봐서 들국화 카피 밴드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태지는 데뷔 당시 국내 밴드로 들국화를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으며 어린 시절 전인권을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35] 이 외에도 학창시절 당시 인기 있던 머틀리 크루, 신데렐라#s-2.1, 본 조비 같은 메탈 밴드를 좋아했다고 한다.[36]
그중 머틀리 크루는 서태지가 최근까지도 언급하는 밴드이다. 네이버 뮤직에 서태지가 추천한 5장의 앨범 중 하나로 포함돼 있으며링크, 2019년에는 머틀리 크루의 뮤비를 보며 동경하던 바이크를 타기 위해 바이크 면허를 땄다고 밝히기도 했다.링크
2004년 이티피 페스트에서는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였던 타미 리를 초청하여 성덕이 됐다.
4.3. 고등학교 자퇴
서울북공고 진학 후 스쿨밴드 하늘벽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음악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음악을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된다. 중학교 시절보다 늘어난 학업량[37] 때문에 도저히 학교를 다니면서 음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서태지는 스스로 학교를 자퇴하기로 한다. 장장 2개월 동안의 설득 끝에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38]
이로써 서태지의 최종 학력은 군대도 못 가는 중졸이고 고등학교 중퇴다.[39] 사족으로 꽤 그럴싸한 명문으로 출처가 없이 회자된 '서태지의 자퇴서'는 본인의 입으로 자신이 쓴 글이 아니라고 밝혔다.#
5. 뮤지션 커리어
5.1. 17세 저니맨
17세에 학교를 자퇴하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잠깐 머물렀지만 멤버의 군 입대로 별 활약 없이 해체되어 버렸다. 이후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소개로 락의 대부 신중현이 운영하던 클럽 '우드스탁'에서 연주할 기회를 잡게 되었으며, 우연히 이 모습을 본 신중현의 아들이자 시나위의 리더인 신대철의 눈에 띄어 픽업되면서 마침내 시나위 4집의 베이시스트로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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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1990년 당시 시나위. 왼쪽부터 베이시스트 서태지, 리더 신대철, 보컬 김종서, 드러머 오경환[40] .)
서태지 본인의 말대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신대철에게 돈과 함께 픽업 제의를 받았지만 돈을 마다하고 함께 활동하게만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기뻐했고, 시나위의 멤버가 된 후 우드스톡에서 매일 하루 반나절을 함께 연주 연습만 하며 살면서 바로 4집 앨범 작업에 착수해 베이스와 드럼 편곡을 담당했다.[41]한 아이가 매일 우드스탁으로 와선 몇 시간씩 제가 기타 치는 모습을 보곤 했죠. 처음엔 의식하지 않았죠. 내심 눈에 띌 만큼 머리가 긴 소년이 뚫어져라 공연에 몰두하는 걸 보고 헤비메틀 지망생이거나 팬이려니 했어요. 그렇게 1달 정도 계속되고, 말수가 적은 저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말을 걸어보자는 심산으로 기타를 칠 줄 아느냐고 물었죠.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타를 잡았어요. 거침없이 연주하는 모습은 요즘말로 '장난'이 아니었죠. 그 자리에서 바로 '시나위'에서 활동을 해보자고 제의했고 그는 무척 기뻐했어요. '''- 당시를 회상하며, 신대철'''
그러나 활동 기간 동안 신대철, 김종서, 서태지 3명의 음악적 견해 차이[42] 로 서서히 멤버 간의 팀워크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팀 해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제작자에게 공연 사기를 당했는데, 88체육관에서 예정된 공연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던 시나위 멤버들이 막상 공연장에 도착하니 공연 2시간 전까지 허름하게 무대 짜는 망치 소리가 들리는 등 말도 안 되는 무대가 서있었다고 한다. 크게 화가 난 신대철은 공연 주최 측과 거하게 싸운 뒤 술을 마시고 뛰쳐나가고, 미처 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공연장에서 줄이 안 보일 정도로 기다리는 팬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던 김종서와 서태지는 결국 단 둘이 엉성한 공연장에서 안습의 공연을 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시나위는 해체되고 서태지는 실직하게 된다.[43]
이후 김종서와 함께 '캔기획'에 찾아갔으나, 김종서만 영입되고 본인은 불발되었다고 한다.[44]
그 후로도 계속 밴드를 알아보거나 직접 멤버를 모집해 밴드 결성을 시도하기도 했고, 한국에 비해 음악시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도 했다.[45]
그러던 중 시나위 시절부터 쭈욱 들어오던 랩 음악에 심취해, 새롭게 뭔가 획기적인 그룹을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하며 기행을 벌이기 시작한다. 전 매니저 최진열이 서태지 부모님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한때 어머니가 차려서 방에 넣어주는 밥만 먹으면서 6개월간 방 밖에 나오지 않고 랩 연습과 컴퓨터 음악 작곡 공부에만 몰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무궁화 밴드'라는 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용돈을 벌었고[46] , '마이하우스'라는 클럽에서 일하다가 양현석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양현석과 팀을 꾸리기로 하고 제3의 멤버를 물색하며 이리저리 멤버를 갈아치워보다가 마지막으로 이주노를 선택하며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했다.
사족으로 서태지라는 이름은 자신이 좋아하는 한자인 '태' 자와 '지' 자로 이름을 짓고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성씨인 '서' 씨를 합해 '서태지'로 지었다고 한다. 2009년 서태지 본인이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출연해 이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는데, 전 매니저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서태후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공연장이라는 뜻의 영어 'STAGE'를 줄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었다.[47] 그중에서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였던 'TAIJI(타이지)'에서 따왔다는 설(서쪽의 TAIJI - 서TAIJI)이 주류였는데 시간이 흘러 서태지 본인이 별생각 없이 그냥 글자가 멋져서 지었다고 밝혔으나, 최근에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은 자서전에서 서태지는 타이지에서 따온 게 맞다고 주장했다. 타이지처럼 실력 좋은 베이시스트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서쪽의 타이지를 줄여 서태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95년에 공개된 공식적인 인터뷰를 보면 신대철의 주장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대중음악이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신대철의 주장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지만, 이름에 관한 주장은 이름을 지은 본인의 주장이 공식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출간된 이동연의 저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에서 저자 이동연이 서태지에게 예명 작명에 관한 질문을 했었다.
2001년 6집 활동을 마치고, 음향 전문 잡지 '''사운드 온 에어'''와 인터뷰를 가졌을 때도 예명에 관한 질문을 받았고 이에 대해 해명했다. 현재는 없어진 웹진이라 웹 아카이브 링크를 통해서 볼 수 있다.이동연: 말 나온 김에 예명에 대해 질문드리겠는데, 당신의 예명인 '서태지'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추측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영어 '스테이지'의 음차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일본 그룹인 'X'의 전직 베이스 연주자였던 Taiji의 예명을 본떴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서태지: 제가 일단 이름을 과격하게 짓고 싶었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고, 거꾸로 이름같지 않은 이름을 짓고도 싶었어요. 아까 말한 것은 관계가 없고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글자가 '''태'''자와 '''지'''자인데, 그렇잖아요. 보통 남의 이름 중에서 좋은 글자 있으면, 한 번 써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태'''자와 '''지'''자를 합성해서 이름을 지엇고요, 성은 여러 개를 붙여 봤는데, 그중에서 '''서'''자가 제일 잘 어울리더라구요. 그래서 아무 뜻 없이 '''서태지'''라고 지었죠.
여담이지만, 서태지는 타이지보다는 히데를 더 좋아했다. 히데 사후 히데의 솔로밴드인 hide with spread beaver를 etp페스티벌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히데의 부모님은 서태지에게 히데가 실제로 연주하던 히데의 시그니처 기타인 옐로하트를 서태지에게 선물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는 서태지의 대경성 뮤비와 히데의 핑크스파이더 뮤비 감독이 동일인물이다.SOA : 예전 X-JAPAN 의 베이시스트 TAIJI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태지씨의 이름도 거기에서 모티브를 얻는 건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서태지 : 전에도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X-JAPAN의 TAIJI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엑스저팬은 즐겨 들었지만 베이시스트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어요. 시나위 들어갈 때 그냥 본명보다는 멋있는 이름을 만들려고 해서 만들었던 거죠. 개인적으로 태자를 좋아서 썼고. 다음에는 지를 붙이고 이름에 어울리는 서자를 사용해서 이름을 만들었죠...
5.2. 서태지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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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메탈밴드 장발 베이시스트에서 소년계 댄스 가수로 변신한 모습.[48]
결성 후 방송, 라디오 등 각종 매체 활동을 하다가 92년도 MBC 쇼 프로그램 <특종 TV연예>에 출연하며 전국의 청소년층에게 폭발적인 충격을 안겼다.[49]
작곡·작사가들이 신인 가수들을 평가하는 짧은 코너에 출연해 '''난 알아요'''를 불렀는데[50][51] 그 당시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이러했다. 박한 평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참신하지만 리듬은 좋으나 멜로디 라인이 약하다.(8점) '''- 밴드 '다섯손가락' 멤버 겸 작곡가 하광훈'''[52]
음악은 새로운데 가사의 내용이 진부하다.(7점) '''- 작사가 양인자'''[53]
노래는 섬세한데 과격한 댄스동작에 묻힌 거 같다.(8점) '''- 방송인 이상벽'''[54]
결국 평균 '''7.8점'''으로 '''신인무대 첫 회 출연자이자 최저점 득점자'''라는 불명예를 기록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출연한 신인가수 중에 평균 8점 이하의 가수는 한 팀도 없었기 때문이다.[56][57] 하지만 당시 평가는 위에 언급된 심사위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새 장르를 열었다는 점에 관심을 표하지만, 평가는 시청자에게 돌리겠다.(8점) '''- 가수 전영록'''[55]
랩 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에 당시 매니저를 맡고 있던 최진열의 증언으로는 방송국에 홍보용으로 CD를 줘도 들어보고는 "그런 판데기는 이태원 클럽에나 걸어라"라며 집어던지기도 했고, 주변 선배 매니저들도 망할 것이 뻔하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지만, <특종 TV연예> 출연을 계기로 당시 세계 음악 트렌드와 한참 격리된 트롯트, 발라드 위주의 대중가요에 염증을 느끼던 당시 청소년, 대학생 층에게 이 곡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난 알아요를 필두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큰 '''폭풍'''이 시작되었다. 유튜브 관련 영상 댓글에 적힌 저 방송을 직접 봤다는 사람들이 증언을 보면 "주말이 끝나고 학교를 가니 서태지 이야기밖에 없었다", "다음날 학교 앞에 복사테입장사가 판을 깔았는데 금방 동이 났다", "방송 이후 최고가 되는데 단 하루가 걸렸음" 등으로 당시의 해일같은 반응을 알게 해준다. 그 뒤로 시대의 변화를 자각한 <특종 TV연예>는 신인에 대해서 관대한 평가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특종 TV연예> 최저점 득점자로 영원히 남게 되었고(...)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로서 활동한 2집, 3집, 4집에 대해서는 디스코그래피를 참고.
5.3. 솔로(서태지 밴드)
은퇴 기자회견을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미리 마련된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절차를 밟았다. 경유지인 괌에서 세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서태지는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렸으며, '미국 유학설', '결혼설', '컴백설' 등이 나돌았고, 신문과 잡지도 이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심지어 역술가 오재학이 낸 예언서 <국운>에서 서태지가 1997년 컴백한다고 예언까지 했는데, 이마저도 틀렸다.
1998년 7월 7일 갑작스레 5집을 발표하였다. 당시 세계적 추세인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한 원맨밴드 앨범인데, 5집 앨범 발매 후 기자회견은 언론 기자들과의 이메일 문답으로만 기자회견 인터뷰를 대신하고 일체 얼굴조차 비추지 않고 5집 노래 외의 미네뜨 CF에서 목소리만 들려주었을 뿐 국내에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다가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귀국하게 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서태지/세션''' 문서 참조.
6. 개인사
6.1. 비밀 결혼과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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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1월 20일, 일간지 <스포츠서울>은 '은퇴한 서태지가 미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1996년 12월 24일 재미동포 여대생 김모 양[58] 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특종기사를 냈으나 서태지 측이 적극 부인하고 명예훼손 소송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세간의 흔한 오보인 것처럼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나 그런 강경 대응이 무색하게 기사에 딱 들어맞는 상대와 1997년 전격 비밀 결혼을 한다. 이후 1998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결혼설의 사실 여부를 묻자 "낭설이다" 라며 거짓말로 딱 잡아뗀다. 기사 원문 이를 두고 부인(이지아)과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란 의견도 있고, 어차피 결혼 사실을 밝혔어도 생활적으로는 바뀔 게 없었기 때문에[59] 팬들을 기만한 비겁한 변명일 뿐이란 의견도 있다.
다만, 처음부터 '''아니다'''라고 강경하게 나오면, 언론이 사생활 관련 질문을 꺼내는 것을 어느 정도는 차단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실제로, 위에 언급된 동아일보 인터뷰 내용의 대부분은 음악에 대한 것이어서 사생활에 관한 질문은 독자들의 뇌리에 남지 않았고, 자연스레 대중들의 관심은 음반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때 결혼 사실을 밝혔다면, 인터뷰의 내용은 주객이 전도되어 모든 매스컴에 부인에 대한 추측과 뜬소문이 도배되었을 것이다.[60]
2000년 6집으로 다시 얼굴을 드러낸 기자회견 당시에도 결혼 계획에 대한 질문에 본인이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해 미혼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때에는 이미 2년 반 정도의 짧은 결혼 생활 끝에 별거에 들어간, 사실상 이혼을 앞둔 상태였다. 따라서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훗날 상당수의 팬들이 이 당시의 발언에 대해서 서태지가 자신들을 기만했다고 여기고 등을 돌리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또한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없다, 서류에 도장 찍는 관계가 싫으며,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냥 동거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당시 파경에 이른 상황을 반영한 발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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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2008년에 방영된 서태지 컴백 특집 프로그램 '북공고 1학년 1반 25번 서태지'에서는 '''(여자 친구가)설령 있더라도 밝힐 수 없다'''고 에둘러 표현했다.
2011년 4월 21일 <스포츠서울>의 보도에 의해 서태지가 최근 인기배우 정우성과 열애중인 이지아와 이혼했으며, 이미 그녀가 제청한 위자료 및 재산분할 소송이 진행 중인 것이 밝혀졌고 연예가 전반에 핵폭탄급 파동을 일으켰다.[61] 서태지의 이야기라는 특성상 정보가 극도로 제한된 만큼 수를 세거나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루머가 트럭 단위로 대한민국 인터넷을 휩쓸고 다녔다.당시 '감금설'에 대한 반박 이후 서태지는 본인이 설립한 소속사를 통해 이혼 사건에 관련된 일반 대중에의 아래와 같은 해명 자료를 발표했다. 해명 자료가 실린 기사는 여기에서 읽을 수 있다.[62]
이 소송은 이지아가 소송취하를 신청하고 서태지가 반려했다가 결국 합의서를 제출함으로서 마무리 되었다. 소송에 대한 개략적인 과정은 이 글에 정리되어 있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고 참고해도 나쁘지 않다.(전략)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태지 씨는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상대방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 후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연락을 하며 서로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96년 서태지 씨의 은퇴 이후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 10. 12.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격과 미래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 2년 7개월 만인 2000. 06 경 양측은 별거를 시작했으며 결국 헤어지는 수순을 밟고 다시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별거 초반에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바 있으나 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서로 완전히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략)
그리고 2년이 약간 지난 2013년 5월 15일 배우 이은성과 결혼한다는 발표가 언론을 탔는데,# 다음 해인 2014년 8월 11일 이지아가 SBS 힐링캠프에 전격 출연하며 지난 결혼생활에 대해 서태지를 언급하며 디스를 날렸다. 그런데 이혼합의서에 따르면 지나간 결혼 생활에 대한 상호 공개적 비방 등이 있을 경우 일일이 위자료를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서태지가 소송 취하를 반려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가려 했음을 되짚어보면 이지아의 발언 수위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 방송 직후 디스패치에서는 발 빠르게 관련 기사를 내보냈는데, 오히려 이지아에게 불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 사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뒷조사는 디스패치를 설립한 기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직후부터 끈질리게 매달려 온 일이었기에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디스패치의 정보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서태지가 대중의 온갖 비난으로 점철된 십자포화를 감내하고 KBS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이지아에게도, 일반 대중에게도, 팬에게도 모두 미안하다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면서 사실상 '''장장 14년에 걸친 이슈 종결.'''
6.2. 은둔하'''던''' 슈퍼스타
결론부터 말하면 활동이 뜸하고 주변인들도 서태지의 얼굴을 보기 힘든 것은 사실이나, 이것이 '신비주의'로 이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과장이 많이 섞여있다.
요약하면 8집까지의 서태지는 '''연예인들의 연예인이었다'''. 사실, 1990년대~2000년대를 비롯해서 현재까지 활동했던 가수들을 포함한 연예인들은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 팬 출신이 정말 많다.#
활동기에는 이런저런 소식이 나오지만, 비활동기가 되면 공적인 일과 개인사를 구분하는 웬만한 해외 아티스트도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게 세상에서 '''증발'''해왔다. 얼굴 보기 어렵기로 이야기가 나오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던 인물.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은퇴 직전까지는 국내에 살아서 그나마 조금씩 정보가 있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로 8집까지는 지구에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진짜 살아 있기는 한 건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본인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 '서태지닷컴'에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본인의 여행 사진이나 RC카 등의 사물을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근황을 전하는 것이 팬덤에 전하는 유일한 생존 신고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과거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넬도 서태지와의 관계를 "친하기는 한데 얼굴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 정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양현석과 이주노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 시절 당시 레코딩 작업에 들어갈 때도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이 잠수하면 대책이 없었다고 하니 서태지의 타고난 성격인 듯. 실제 양현석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서태지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에 남아있고, 자기는 한국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나고 서태지 사망설이 나오자 실제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때에도 특히 연락이 안 되어서(...). 로밍이 안 됐던듯 하다.[63]
그래도 다행히 '''재혼과 9집 활동을 기점으로 국내에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이며,''' 그간 본인조차 의도하지 않아왔고 수시로 부정했던 '신비주의'의 오명을 이제나마 벗어던질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김종서도 2014년 서태지와 함께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서 "아버지가 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장 해제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사실 아티스트나 예술가들 중에는, 외부 환경으로 인해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자기만의 작업 공간을 만들어 활동하는 사람들도 꽤 된다. 특히 서태지와 같은 원맨 밴드 레코딩을 지향하는 뮤지션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팬들의 오버 및 안티들의 루머로 서태지 혼자서만 신비주의니 뭐니 하는 이미지가 생긴 것뿐이지, 서태지의 성격은 이런 아티스트들의 여러 스타일 중 하나로 봐도 그냥 무방하다.
후에 매 앨범 발매 때마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비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 곤혹을 치르는데, 그에 대해 서태지는 매번 "신비주의라는 것은 마법, 주술 등의 이미지와 같이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것을 뜻하며, 일과 사생활을 조금 엄격하게 구분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과는 다르다."라는 답변을 했다.
예를 들어 자타공인 신비주의 뮤지션인 Sopor Aeternus와 같은 경우엔 서태지와는 달리 생년월일은 물론 본명까지 숨기고 다닌다. 평소 자신의 취미 생활까지 만천하에 공개한 서태지가 과연 신비주의의 발끝에라도 다다를지 의문이다. 거기다가 '''연예인/유명인에 대한 사생활 존중'''에 시끄러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유독 자신의 사생활 공개에 대한 권리를 지킬 대로 지키고 있는 서태지가 신비주의로 오해 받은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심지어는 한국에만 해도 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TV 출연 횟수를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으며, 또 TV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활동 자체를 거의 안 한다. 오죽하면 '''집 앞 커피숍에서 더 보기 쉽다'''고 하겠는가(...). 가끔 TV에 나온다해도 노래 요청에서는 '콘서트 가서 들으라'는 식으로 대응하니... 그래도 새 앨범 발매하면 TV에 몇 번 출연해 노래도 부르고 자신의 단독 콘서트를 제때 못 온 팬들을 위해 지상파에 종종 송출까지 해주는 서태지는 이에 비하면 굉장히 개방적인 사람이다.[64]
그리고 서태지가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공개를 꺼린 것 또한 '''새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각 앨범에 대한 이미지 컨셉을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서 알아서 공개하겠다'''는 것이었는데[65] , 이게 또 신비주의라고 언론에 뭇매를 맞은 셈이다.
엄밀히 말해 서태지는 자신의 권리를 지킨 것이고, 물론 팬들과의 커뮤니티를 위해 공개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의 타이밍에 맞춰 공개한 셈이니 자신을 완벽하게 숨긴 적은 없다. 한마디로 서태지 본인이 공개하기 싫어서 또는 공개할 타이밍이 아니라서 안 한 건데[66] 그걸 못 참고 난리친 언론이 문제다. 연예인이 모든 걸 다 드러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당연히 서태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일본의 뮤지션 GACKT 역시 한 TV 방송에서 자택공개를 했는데, 유독 녹음실만 공개 거부를 하였다. 때마침 신곡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작업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것. 방송 스탭이 이 경고를 어기고 몰래 촬영하려다가 각트에게 들키자 각트는 그 자리에서 스탭에게 화를 내며 방송 스탭들을 전원 내쫓아버렸다.[67]
몇몇 지인들이 예능에서 서태지와의 친분 관계를 알리기도 하지만 다소 과장된 발언인 측면이 짙어, 활동하면서 마주치는 것을 넘어 실제 인간적 친분이라기엔 신빙성은 없는 듯.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도 다른 멤버들과 거의 개인적으로 어울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하며, 친구 1명을 만나기 위해 매니저에게 부탁한 것을 제외하고는 활동 내내 아무도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국민MC도 서태지와 말까지 놓는 사이지만 왠지 아직은 그렇게 친하지 않아보인다.
그나마 가장 친한 관계로 알려진 사람이 이종 육촌 지간인 신해철[68] 과 시나위 시절 친분을 맺은 가수 김종서인데 이 둘은 2006년 겨울쯤에 같이 스키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알려질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한다.
김종서의 경우는 서태지가 시나위에 있었을 때 인연을 맺었다고 하며,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당시 록 밴드들이 마약에 탐닉하는 등 비뚤어진 길로 쉽게 틀어지던 때였는데 자신이 그런 잘못된 길로 안 갈 수 있었던 건 김종서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회고했다. 또 서태지의 취미 중 하나인 캠핑카 여행을 둘이서 자주 떠났다고도 하며 서태지와 아내 이은성과 함께 스키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2014년 9월 15일 디스패치가 김종서, 박신혜와 빵집에 있는 서태지의 사진을 공개하는 등 김종서와는 꾸준히 교류 중인 듯 하다. (박신혜는 아내 이은성의 절친이라고 한다.) 9집 공개 전 해피투게더에 출연해 서로가 발언한 멘트를 보면 자주 만나 음악 얘기 외적인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등 아주 친밀한 교류가 있는 듯.
2014년 9월에는 라디오 스타에 신해철이 출연, 서태지와 비슷한 시기에 음반을 내놓으며 누가 흥하냐 내기를 걸었다는 발언 중 서태지를 '몇 달에 한 번씩은 꾸준히 본다'고 언급해 친척 관계는 원만한 듯.
또한 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에서 밝히기로는 며칠 전에 이승환, 윤상과 함께 이자까야에서 만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방송에선 편집되었다.
한때 서태지의 상업주의 루머와 더불어 음악 스타일이 바뀌는 부분에 대해서도 안티들이 다른 아티스트와 서태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루머를 퍼뜨리곤 하는데, 대부분이 믿을 것 없는 헛소리들이다.
대표적으로 서태지와 크래시의 안흥찬이 중간에 서태지의 행보로 인해 서로 간의 사이가 나빠졌다느니 하는 루머가 생기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들은 "좋은 뮤지션으로서 좋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서태지)"라거나 "쿨한 관계(안흥찬)"라고 하며 서태지의 컴백 공연에 안흥찬이 다시 게스트 뮤지션으로 나오는 등 루머를 일축시키기도 했다.
후에는 이 루머의 바톤을 NELL이 그대로 받았는데, 서로 간의 아티스트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이런 루머들을 섣불리 믿지는 말자. 멀쩡히 서로 잘 지내는 당사자들 가지고 이상한 루머 만들지 말고.
7. 한국 음악사에 남긴 의의
7.1. 총론
'''지금 발매중인 K-POP의 상당수의 뿌리가 서태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이는 2020년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서태지가 닦아놓은 형식을 깰 수 있을 만한 새로운 형식이나 제도, 음악적인 시도가 한류열풍을 통해 국제적인 인기와 명성을 얻은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69][70] 이는 인기의 높낮이, 국제적인 명성과는 별개로 봐야하며, 쉽게 비유하자면 현재 BTS, 엑소와 같은 아이돌들이 현재 가장 세련되고 잘 나가는 스마트폰 기종이라면 서태지는 최초의 스마트폰이자 스티브 잡스가 야심차게 내놓은 iPhone처럼 스마트폰이란 개념을 사람들에게 퍼뜨린 역사적인 첫 브랜드인 셈.
본인은 그저 랩 뮤직을 비롯해 그냥 하고 싶은 걸 했다고 비교적 겸허하게 말하고 있지만,[71] 반은 정답이긴 하다. 하지만 후술되는 것처럼 스스로 기획사를 운영하면서 여러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모습 등을 보면 서태지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도, 최고의 성공을 거머쥐고자 했다.
3~40대 이상 연령대의 팬을 지지층으로 하던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3년 연속 가수왕 먹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나방처럼 오버그라운드에 뛰어든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가요판은 10대가 강력히 지지하는 댄스, 랩, 힙합 음악이 점령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다양한 연령대의 음악들이 순위 프로에 나왔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할 무렵인 1996년도에 이르러서는 온갖 기획사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을 모티브로 삼은 청소년 가수들을 양산해내면서 X세대[72] 를 기수로 삼은 젊은 세대가 가요계의 주 소비층이 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기획사에서 훈련한 그룹형 아이돌(젝스키스, god, H.O.T. 등)을 통칭 1세대 아이돌이라고 묶어 부르기도 한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 이전에도 댄스가수들은 있었으나, 서태지급의 팬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성장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 댄스 뮤직의 태동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73] 당장 서태지 이전과 이후의 댄스가수들 출현빈도는 차원이 다를 정도이다.
또한 이러한 흐름은 단지 대중음악에 그치지 않고 당시 대중문화의 거의 전 부문에 걸쳐서 10대~20대가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전반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그 모든 게 서태지 한 명의 존재로 인한 것은 아니고 따져보면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일어난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해야겠지만 서태지는 분명 그 흐름을 중심에서 주도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 흐름들은 많은 부분이 서태지로부터 파급, 파생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존재, 더 나아가서는 시대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한 거대한 임팩트와 영향력을 남겼다. '''문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또한 기획사-소속가수 간의 노예계약 문제를 행동으로 격파해낸 첫 스타이기도 하다. 사실 서태지가 단지 그 시대에 가장 인기있었던 가수의 차원을 넘어서 시대의 변혁을 가져왔다고 일컬어지며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 음악이나 인기 이상으로 파격적인 행보에 있었다.
1집 활동의 거대한 수입 대다수가 기획사에 넘어가는 것을 보고 서태지는 이러한 불공평 계약을 깨뜨린 후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설립하고 매니저를 기용해 활동하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진 일이었지만 서태지에게는 1집 활동에서 얻은 엄청난 인기와 음악적인 작업은 물론 안무와 컨셉까지도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큰 모험이었지만 보기좋게 대히트를 기록하며 전무후무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물론 판매량으로 보면 동시대의 김건모, 신승훈만 해도 서태지와 비등하거나 오히려 더 많았지만 조금 속되게 말하자면, 똑같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해도 자신들이 작사 작곡 안무 짜고 기획사 사장까지 다 해먹는 서태지(와 아이들) 쪽이 훨씬 많이 벌 수밖에 없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데뷔한 지 1년된 젊은 가수가 거대한 자본의 벽이나 업계의 관행을 자신의 음악과 인기만으로 모두 타파하고 거대한 성공을 거머쥔 셈이고 당시 서태지 이전의 아티스트들이나 비슷한 시기의 가수들이 여전히 소속사로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던 상황이었기에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는 이후 가수들이 자신의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게 하는 등, 소위 '딴따라'로 낙인찍혀있었던 연예인의 입지를 상승시키는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문화 평론가 강헌은 당시 서태지의 이러한 행보가 당시 유착관계였던 음반제작사, 방송사, 언론 모두에 밉보이게 되는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1990년대 초로부터 2011년 이혼소송 때까지 진행형이었던 언론매체의 '서태지 죽이기'에 대해 강헌과 진중권은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꽤 긴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록은 이어지는 링크를 참조하자.# # 내용이 길기 때문에 간단히 요약하자면...
또한, 서태지의 문화적 파급력은 10대 청소년이 향유하는 문화에서도 음악성과 예술성을 추구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실제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 이후 대중가요의 중심이 된 아이돌 그룹 H.O.T.는 그 대중적 인기와는 별개로 끊임없이 음악적 역량과 개별 멤버의 예술성을 보여줄 것을 요구받았고, 나름의 작곡 활동 등으로 어필하였지만, 계속해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비교를 당하며 해체 이후 꽤 긴 시간동안 개별 멤버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강타가 당시의 스트레스를 이야기하기도 했다.'''우리[74]
가 어린 놈 하나 키워줬더니 기어오르고, 우리 밥 그릇을 깨려고 들어? 어디 죽어봐라.'''
'''한 마디로, 당시 대한민국의 문화계에서는 서태지를 "질투"하거나 "존경"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7.2. 공연윤리위원회와 '시대유감'
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심의제도에 마지막 펀치를 날리고 KO를 시킨 결정적 인물이기도 하다. 사전심의제도란 당시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 제16조에 의거 새로운 노래가 나왔을 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이 있는지 공윤에 사전'''검사'''를 받는 제도인데 여기서 시대유감의 가사 중 일부가 지적을 당하자 이에 반발한 서태지가 수록곡 '시대유감'에서 가사를 아예 통째로 들어낸 상태로 앨범을 발매함으로써 사전심의제도에 항의를 한 것.
그런데 공윤과 트러블을 일으킨 곡은 <시대유감> 한 곡만이 아니었다. <컴백홈>, <필승>,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75] 는 앨범 발매 후에 문제가 되었는데, 앨범에 실린 가사가 사전 심의 때 제출한 가사와 다르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이 때문이 공윤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서태지는 <미디어오늘> 1995년 11월 15일자 백승권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가수들도 심의 뒤 수정을 하지만, 왜 유독 내 4집만 문제삼는 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면서도 "4집에 대한 공륜의 태도는 우리 때문에 자기 위상이 실추된다고 해서 보복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표했다. 백승권 기자도 "정태춘 씨도 사전심의 거부 중인데?"라고 묻자 그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해 정태춘 씨에겐 부끄럽지만, 그래도 팬들을 위해 대중적 토대를 버릴 순 없다"고 답했다.[76] 당시엔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 자체에 제동이 걸릴지도 모르는 큰 사건이었으므로 팬들이 받은 충격은 컸으며, 이를 계기로 팬들 사이에서 사전심의 폐지 서명 운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본래 알던 사람들끼리 조용히 논의하던 사전심의제도의 부당함과 폐지안의 통과에 대한 당위성이 서태지 팬덤의 힘을 등에 업고 사회 전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던 사전심의제도 폐지 이야기는 당시 서태지를 좋게 보고 있던 김대중 야당 총재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수면 위로 급격히 끌어올려졌고 해당 법률은 공론화를 통해 힘을 얻어 초안대로 깔끔히 폐지되었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정태춘 등 선배 가수들이 긴 시간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화제가 서태지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통해 사회 전반에 급격히 각인됨으로써 부당한 법률의 숨통을 끊는 결정적인 피니시 블로우가 된 셈이다.
물론 시대유감이 해당 사건에 공헌한 부분은 폐지에 관한 법률상 세부적, 실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사전심의의 부당함에 대한 이미지를 대중에게 침투시키고 국회에 해당 법안 통과에 대한 지대한 압박을 주는 대형 선전의 성공에 그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률이란게 여당이 통과시키기로 의중을 모았다고 해서 쾌속으로 처리가 될지, 또는 당내 반대표로 인해 여러번의 칼질을 당하며 절름발이 폐지안으로 전락할지, 혹은 의지 부족으로 몇 년을 표류하게 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터에서 아군의 희생을 딛고 최후의 깃발을 꽂은 병사가 조명을 받는 것에 누가 함부로 어떤 비난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한 것 뿐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사전심의제를 주제로 SBS에서 토론 방송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반대 측 패널로 출연한 한국 록 음악계 원로 신중현 씨는 '''창작자가 더 나은 표현을 쓰고 싶어서 바꿀 수도 있는데, 공윤 제출본이랑 다르다고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다'''라며 서태지를 옹호했다.
8. 비평
8.1. 1라운드: 음악적 변신과 과열된 논란
1집, 2집까지는 청소년 팬들이 가볍게 좋아할 만한 사랑, 우정, 이별, 젊음에 대한 가사를 담으며 이렇다 할 사회적 잡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1994년 공개된 3집에 교육 제도를 비판하는 <교실 이데아>, 통일을 노래하는 <발해를 꿈꾸며>를 수록하며 성숙한 이미지로의 변신, 이전보다 자신이 담아두었던 이야기 등을 꺼내려는 등의 노력이 표면화되는데,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의 언론은 성숙하고 난해한 가사와 무거운 헤비메탈을 들고 나온 서태지를 온갖 논조로 사골처럼 달달 달여내서 서태지라는 인물상에 대한 거품을 엉망진창으로 부풀렸다. 수록곡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틀면 '피가 모자라'라는 악마의 절규가 들린다는 괴담이 언론지를 통해서 마치 사실처럼 유포되었고, 서태지가 그 보도를 접하고 "오, 그렇게 들려? 신기하네."라고 무신경한 웃음을 짓던 때[77] 이미 세상에서 그는 '''사탄 숭배자이면서 게이[78] 또는 심지어 남장여자'''라는 등 검증할 수도 없고, 검증되지도 못할 해괴한 루머에 기반한 괴물로 왜곡되어 있었다. 아마 나름 메이저급 일간지를 '''임신설[79] '''로 장식한 '''남자'''연예인은 서태지가 한국 역사상 유일할 것이다. 그래서 서태지도 이런 왜곡보도를 우습게 생각하면서 '''"아니, 내가 무슨 임신을 했대요 ㅋㅋㅋ 남을 임신시킨게 아니고 ㅋㅋㅋㅋ"'''라면서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의 황색언론으로서의 작태는 대중들에게 서태지라는 인물에 대해 금기를 넘는 혁명가나 사탄의 이미지, 또는 과도한 천재상을 부여할 만큼 지나쳤다. 확실히 대중의 호응으로 먹고 사는 스타로서는 이것 이상 없을 정도로 대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대중음악 예술가 서태지의 담백한 부분은 이런 노이즈를 겪으며 대중에게서 잊혀지게 되었고 이 또한 오늘날 서태지 특유의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과도한 루머와 허위에 이질감과 두려움을 느낀 팬들이 이탈하는 등 처음 안티가 생겼다.
8.2. 2라운드: 서태지 깎아내리기
그 다음 안티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 시점은 옐로 저널리즘이 극치를 달리던 2000년대 초반 솔로 2집 시점부터다. 사생활과 음악 활동을 철저히 분리하기로 한 서태지가 졸졸 따라다니며 꼬치꼬치 캐묻는 기자들에게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자, 곧 무지막지한 수준의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보복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콘서트, 음악 방송 등등 활동시기에 세션으로 인디밴드의 연주자들을 규합해 공연을 다니자 인디 씬에서도 댄스가수 출신인 서태지가 돈을 벌려고 인디밴드 흉내를 낸다고 대거 반발 성명을 내고 안티 서태지 공연을 하는 등 다양한 악재가 겹치며 안티가 대거 양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언론이 만든 서태지에 대한 엄청난 거품을 그들 스스로가 남김없이 꺼뜨리고 오히려 쓰레기 아티스트로 매도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가짜 천재 서태지'에 대한 마녀사냥에 가까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때는 인터넷에서 서태지를 까는 것이 일종의 트렌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대표자로서는 서태지 인형 뱃속에 순대를 넣어뒀다가 배를 갈라 뽑아 먹고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해 주목받았던 인디밴드 노브레인이 있다. 노브레인 이외의 안티 서태지 운동을 하던 인디밴드들은 서태지가 저항을 상품화 해 돈을 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사회에 대한 저항을 내세우는 자신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한다. 이후 노브레인이 사실상 상업적 펑크로 방향을 틀었고, 닥터코어 911은 이정현 무대 뒤에서 핸드싱크를 시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우스운 면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노브레인은 멤버의 탈퇴와 교체로 밴드의 방향성이 달라진 경우에 속하고 닥터코어 911의 경우는 원 기타리스트가 서태지의 라이브 서포트멤버로 발탁된 것을 계기로 비슷한 처지(?)에 있던 크로우와 함께 서태지의 오프닝 공연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안티 서태지와는 상관없는 밴드다.
이런 시기에 서태지 팬들은 안티들이 말하는 대로 서태지가 사기꾼이자 비참한 음악적 역량을 가지고 있는 국수용인지, 아니면 한국을 벗어난 범주의 평론가에게도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지 좀 더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 자비를 들여 어떠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데 바로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소포를 보내 해외웹진에 리뷰를 의뢰하는 프로젝트였다. 이런다고 서태지의 음악성을 객관화하고 서태지 음악의 수준을 부정하는 시각을 설득할 수는 없겠지만, 서태지 리뷰팩이라고 하는 이 소포에는 6집을 포함한 서태지의 모든 앨범과 가사번역본, 뮤직비디오, 연혁 및 소개가 동봉되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결국 해외웹진에서 서태지 6집에 대한 리뷰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평가도 꽤나 다채롭게 나왔다. 단순히 좋은 앨범이라는 평가에서부터 보컬이 매우 인상깊다, 콘과 림프 비즈킷보다 뛰어나다는 극찬까지 있었지만 거의 모든 리뷰에서 Korn의 음악 스타일과 공통점이 있다는 언급이 있었다.
당시 리뷰들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1, 2, 3, 4, 5, 6, 7, 8
훗날 2004년 1월 29일에는 그 Korn을 Fear Factory와 함께 초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공연상황
8.3. 3라운드: 떡밥 실종, 빠와 까의 대리전
2000년대 중반 7집 활동 즈음에는 서태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서태지 팬 외의 음악팬들이 지나친 서태지 팬들의 서태지 신격화 내지는 후한 평가에 반발하여 소위 '빠가 까를 만든다'라는 식으로 안티가 된 경우도 상당수 있다.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유난히 극성스럽다, 자부심이 강하다는 지적 또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다. 이 인식이 때때로 강조되어 서태지 팬들이 광신도처럼 인식되는 경향도 있지만 이는 특정 표본 등을 중심으로 설정된 과장된 인식이다.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서태지 팬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터넷 등에서의 민간 차원의 갈등 외에도 대형 언론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보도 등, 외부에서의 이런저런 형태의 지속적 공격을 받아온 서태지의 팬층이, 반대로 유독스러운 결속력과 방어심리를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른바, 까가 빠를 만드는 것이다. 팬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나 곡해된 해석에서 기인한 비판이 주어진다면, 매우 의견이 다른 팬의 입장에서는 항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사전심의제 폐기 운동, SBS '한밤의 TV연예'에 대한 광고철회운동, 황색언론반대연합, 대중음악판바꾸기위원회, 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 등의 활동에 서태지 팬들이 참여하게된 동력의 원천은 서태지와 관련되어 있는 불합리였다. 이로 인한 사회적 성과는 작지 않다고 서태지 팬덤은 말한다.
8.4. 4라운드: 아주 뒤늦게 알려진 이혼, 그리고 재혼
결혼조차 알려지지 않은 슈퍼스타의 이혼과 재산 분할 소송 피소, 그리고 재혼 소식은 데뷔 연차에 비해 의외로 큰 출렁임 없이 일정 규모를 유지하던 팬덤에서 일부 팬들은 극심히 분노했다. 분노의 요점인즉 사생활에 대해 팬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재혼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
팬사이트 별로 팬덤 규모는 두 토막 세 토막이 났으며, 이번에는 어이없게도 서태지를 가장 좋아하고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가장 극렬한 안티로 돌아섰다. 이들은 각종 기사에 팬이었던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을 댓글로 달고 있다. 문제는 그 댓글 중에 사실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악의적인 시선으로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느 아이돌 팬덤이나 마찬가지지만, 안티로 돌아선 팬은 무섭다.
서태지의 개인사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팬들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저러고 있나, 몸은 늙고 머릿속은 아직도 학창시절 오빠부대인가' 한다며 이탈한 팬들을 극렬히 혐오한다. "아무리 팬들을 마누라라 불렀다지만 정말 그대로 믿었냐"는 것인데, '''이 마누라 호칭은 애초에 남성까지 포함한 팬 서비스 발언이었다(...)'''
이혼 문제는 서태지가 부부 사이를 제외한 어느 누구에게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공개적으로 모두에게 사과했다. 따라서 더 이상의 언급이 역효과를 낳으므로 이 이슈로 만들어진 안티들은 서태지로서는 그냥 남은 평생 동안 짊어져야 할 짐인 듯.
이외에도 8집~9집 휴지기 동안 위 이슈뿐만 아니라 팬덤 내 자체갈등 여러 개까지 더해져 은근히 소동이 있었던 편이다. 9집에 실린 8번 트랙 '비록'은 이런 상처받은 팬들을 서태지의 입장에서 위로하는 곡. 가사를 곱씹어 보면 진심을 더하고 뺄 것 없이 꾹꾹 눌러 담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9. 표절 논란
서태지는 PC통신, 다음카페 시절부터 표절 혐의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한 서태지 옹호자들은 "그냥 그렇게 들릴 뿐 완전 다른 곡이다"라고 반격하고, 비판자들은 '스타일을 빌려온 것'과 '표절'은 천지 차이라고 반격하는데, 유사성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 보니 회전문 같은 논란만 되풀이되고 있다.
표절 의혹이 제기된 곡은 다음과 같다. (출처 : #)
표절 논란에 대해 서태지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서태지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레퍼런스한 것은 사실이지만, 표절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요."라고 말했다.
9.1. 표절 논란에 대한 반론
표절논란은 서태지에게만 제기된 것이 아니며, 최근에는 한 유튜버가 모든 뮤지션들을 상대로 마구잡이로 표절 의혹을 제기하여,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사실, 표절 의혹 자료라는 것이, 전체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 짜깁기하는 방식이 많았기 때문에 이미 PC통신 시절부터 많은 비판이 있었으며, 그중에는 표절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곡들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난 알아요에 대해서는 나무위키에 다음과 같은 반론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하여가는 논란이 된 부분이 외국 민요를 인용한 것이라고 당시 그 부분을 애드립으로 연주해던 기타리스트 이태섭이 해명한 바가 있다.
컴백홈은 Cypress Hill 측에서 직접 표절이 아니라고 확인을 해 준 바가 있다.링크
교실 이데아에 대한 반론은 이곳을 참조할 것.
스매싱펌킨스를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5집 수록곡 Take Five에 대해서는 빌보드닷컴에서 1998년도의 위대한 곡 98곡 중 74위로 꼽았다. 링크
평가는 다음과 같다. 참고로 결코 케이팝 중에서만 선정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기자가 언급했듯이, 차트에 없는 곡임에도 선정되었다.
Korn 과 Deftones 와 Limp Bizkit 에게 각자들의 인터뷰에서 서태지의 노래들을 들려주었는데, "우리들이랑 비슷한 쟝르이지만 우리들과 똑같지는 않고 그(서태지)만의 독특한 색깔이 묻어나오는 음악들이다." 라는 식의 긍정적인 말들을 언급하였다.74. Seo Taiji, "Take Five" (Did not chart)
Seo Taiji remains South Korea’s “Culture President” for a reason -- he pioneered the industry’s embrace of diverse genres.
“Take Five” marked another sonic transformation, one that eschewed the rap-rock of his prior group Seo Taiji and Boys. While his self-titled album was coated in the heavy metal of his early days, this track takes on a sunnier disposition with flahses of late-’90s college rock. After all, “Take Five” was a message to fans that he’d return to music after retiring in 1996. -- CAITLIN KELLEY
또한 의혹이 제기된 곡들 중에는 7집 앨범의 수록곡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나 정작 해외의 평가 사이트인 올뮤직닷컴에서는 별 4개를 주며 높게 평가했다. 링크 이 문서도 참조할 것. 물론 올뮤직닷컴의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리뷰어들이 본문에서 비교 대상으로 언급한 뮤지션이 그 나라에서도 그리 대중적인 인물이 아님을 참작한다면, 그 장르에서 저명한 The Used, Finch, blink-182의 음악을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모아이의 경우, 비슷한 부분이라고는 반주로 깔리는 리듬 뿐이다. 직접 들어 보면, 아예 다른 곡임을 알 수 있으며, 효과음의 음색도 매우 다르다. 링크 모아이
10. 최근의 행적
- 2012년 12월 27일 청담동 클럽 엘루이에서 20주년 기념 파티를 개최했다. 본인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게임행사 및 공연, 그리고 깜짝 전화연결을 하기도. 클럽 안에 모인 2천여 명의 매니아들은 열광했다.#
- 2015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토요일 헤드라이너로 확정 되었다. 당연히 팬들은 난리가 났지만 일부 락 커뮤니티에선 온갖 야유와 분노가 쏟아졌...었는데, 공연 이후 분위기가 반전되고 역대급 라이브였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 2014년~2016년 3년 연속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인생에 큰 불행이 찾아왔다. 2014년 말에는 이종 6촌형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고 2015년 말에는 자신과 같이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 오랜 친구인 이주노가 서태지의 이름을 빌려 최모 씨에게 1억 원을 빌렸다가 갚지 않아 소송당했다.#[81] 2016년 7월에는 이주노가 성추행(...) 혐의로 입건되었다. 팬들은 이번엔 도저히 봐줄 수 없다는 반응. 본인은 혐의를 일체 부인했으나 결국 실형을 선고 받았다.
- 9집 활동 종료 후 가족과 함께 떠난 미국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이용한 다이어리를 출시해 생존신고를 했다. 가격은 25,000원.
- 2016년, 자신의 곡으로 만든 알베르 카뮈 원작의 쥬크박스 뮤지컬 페스트의 공연장에 약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은 VIP DAY로 서태지 이외에도 GOD, 로이킴 등 다양한 가수들이 참석했다.
- 2017년 9월 2일, 데뷔 25주년 기념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2007년 15주년 당시 본인은 콘서트에 참여 하지 않고 짧은 영상으로만 출연했던것과는 대조적. 그리고 후배들과 같이 음원 리메이크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음반 목록을 참조할 것.
- 2018년 10월 22일 25주년 콘서트 SEOTAIJI 25:TIME TRAVELER를 기존과 동일하게 블루레이와 DVD 합본으로 발매한다. 잠실주경기장에서 공연한 본 공연만 수록되며 앵콜공연은 풀 공연이 수록되지 않는 듯. BTS와 함께 꾸민 무대들은 전곡이 수록된다. 발매 전날인 2018년 10월 21일 전야제 겸 상영회를 개최하며 400여석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입장료는 단돈 천원이며 티켓 소지자에 한해 블루레이를 하루 일찍 구매할 수 있다.
- 2019년 12월 24일 오후 8시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9집 Quiet Night 공연 실황 풀 버전 및 평창동 원정대 팬미팅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 2020년 3월 23일부터 서태지의 음저협 탈퇴로 인해 노래방에 수록되지 못했던 8집과 9집, 데뷔 25주년 기념 리메이크 곡들, 8집 이후 콘서트의 라이브 버전들이 금영노래방과 TJ미디어에서 서비스된다.# 저작권 복수 단체로 인정받은 '함께하는음악저작인협회'(함저협)가 도입한 신탁범위선택제를 통해 공연권 징수가 가능해졌다고. 금영과 태진 모두 곡이 꾸준히 추가되고 있다. 2020년 4월 7일 기준 노래방 업데이트 목록
- 2020년 9월 27일 유튜브 주노가중개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JXtZCIthCNk 무한도전 이후로 서태지의 평창동 집을 최초로 공개하였다. 물론 서태지는 집이 너무 많이 알려진 탓에 2019년 하반기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지만, 아직까지 그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 2020년 10월 27일 오후 3시, 텀블러+투명 포토카드 굿즈를 발매하며 생존신고를 했다. 가격은 25,000원. 이는 2017년 12월에 출시한 2018년 다이어리 이후 무려 3년 만의 굿즈다(...) 때문에 판매가 시작되자마자 그동안 말라비틀어져 있던 매니아들이 순식간에 몰려들며[82] 약 6분 만에 품절되는 기염을 토했다. 워낙 빠르게 매진되었으며, 공지도 전날 밤에서야 etpshop과 인스타그램에만 올라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데다 모바일로 etpshop에 접속한 경우에는 공지와 상품이 뜨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매니아들은 텀블러를 사지 못하고 원통해했다. 이후 서태지컴퍼니에서 이 사실을 인지했는지 10월 30일부터 4일간 예약판매를 진행했는데, 1차와 2차로 배송을 나눠서 해야 할 정도로 주문량이 폭주했다. 긴 공백기 도중 하도 오랜만에 나온 떡밥인지라 매니아들은 신이 나서 10집 컴백과 관련된 다양한 궁예질을 하고 있다.
11. 여담
- 외가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한다. MBC 인간시대에서 다룬 서태지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서태지의 외증조부가 구한말 고종 황제를 보필했던 육군 대장이었다고.링크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로는 독립 운동을 했다는데, 전처였던 이지아가 친일파의 후손이었던 탓에 어떤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결별을 '독립 투사의 후예와 친일파 후예의 이별'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다뤘다고도 한다.#
- 반면 친가 선조에 친일파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서태지의 셋째 할아버지인 정희석이 해방 전에 소속되었던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이라는 이유로 그런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2008년에 친일인명사전 명단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었는데, 검색해 보면 이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이는 친일의 기준이 지속성, 반복성, 자발성인데, 정희석의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희석은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냈으며 국내에서 오케스트라를 맨 처음 만든 음악가로, 1944년에 재편성된 경성후생실내악단(京城厚生室內樂團)의 이사장 현제명(玄濟明) 아래 김원복·윤기선·이흥렬·이규용·나운영·정영재·김영애·이종태 이상의 단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만약 자발성이 있는 친일이었다면, 비밀리에 항일 운동을 펼쳤던 절친 김순남을 일제에 고발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오히려 해방 이후에 김순남과 함께 활동하였다. 당시, 정희석은 20대였는데, 저 당시에 20대였던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자발적으로 이러한 단체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물론 민족문제연구소의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일각에서는 있지만, 인터넷상에 나도는 친일파 명단의 신뢰성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본 분이 김수환 추기경. 이분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강제징집이었고, 단순히 일본과 관련된 기관에 몸담았다는 이유로 친일파라면 대한민국에 남아나실 어르신들이 없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작성한 명단은 무려 수 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올라 있어, 일각에서는 친일의 기준을 너무 넓게 잡았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즉, 명단을 확대했으면 확대했지, 좀처럼 축소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 서태지가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최연소 운전면허 취득자라고 한다. 서태지는 '그냥... 빨리 면허 따고 싶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당시 긴머리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긴머리를 하고 대중교통을 타면 사람들의 시선이나 어른들의 한마디가 불편해서 빨리 자동차를 몰고 싶었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당시 서태지는 필기와 실기를 먼저 통과한 후 도로주행 시험을 1990년 자신의 생일, 즉 2월 21일 아침 첫 시험자로 미리 예약했다. 그리고 한 번에 통과해서 서태지는 만 18세가 되는 생일 아침에 운전면허에 최종합격하였다.[83]
- 영화 가필드에 출연하였다.#
- 2008년 GM대우 토스카광고를 찍어 컴백 전에 소소한 이슈를 끌고 다녔다. 그런데 2015년 초에 있었던 9집 마무리공연에 람보르기니 디아블로[84] 를 끌고와 토스카는 그새 팔아 치운 거냐(...)는 의견이 많았으나...아직까지 잘 타고 다닌다고 한다.[85][86]
- 1980년대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 중 한 에피소드에 '서태지'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연기한 사람은 박영규이며, 겁탈을 당한 부인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다. 이곳에서 다시 볼 수 있다.
- 가수 원미연의 3집 수록곡인 '그대 내 곁으로'는 서태지에게 받은 노래다. 2014년에 소격동을 부른 아이유와 더불어 서태지가 곡을 준 단 둘뿐인 여자가수. 다만 아이유는 일종의 콜라보레이션이었으니 조금 경우가 다르긴 하다. 다만 원미연은 생각만큼 그 노래가 히트하지 못해 서태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데 반 농담삼아서 자기가 무리하게 랩까지 소화해서 잘 안 된 것 같다고 언급했다. 당시에는 방송여건상 랩도 본인이 직접 전부 불러야 했었다고.
- 가수 허니의 'X라는 아이'라는 곡이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전 극비리에 작곡한 곡이란 이야기가 있으나, 전혀 아니다. 원래 따로 작곡된 노래에 서태지가 약간의 조언과 가이드용 랩 데모 8마디만 만든 것.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서태지의 음성이 실린 버젼은 이 데모 테이프에서 유출된 것이다.# 허니의 기획사 직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매니저였던 최진열을 비롯해 전부 서태지와 연관된 사람들이어서 극비리에 도와줬다고.
- 서태지와 아이들로 활동할 때, 그의 매니저가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당시로서는 일반인은 홍콩 영화에서나 보던 수백만 원대의 비싼 초창기 휴대폰을 직업상 사서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된 서태지가 호기심에 그게 얼마냐고 물었다. 특별히 자신에게 말을 먼저 걸거나, 뭔가 일 외적으로 다른 일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던 서태지의 이례적인 행동에 장난기가 발동한 매니저는 서태지에게 "야, 이거 만 원도 넘어... 살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없이 웃던 서태지는 일주일 뒤 그 다음 번 매니저와 함께 차에 타게 되자 매니저에게 진짜로 만 원을 주면서, "그거는 나 주고 형은 이걸로 새 거 하나 사"라고 말했다고 한다.
- KBS의 토크쇼인 해피투게더에 출연했을 때 가장 친한 지인으로 알려진 락커 김종서도 함께 출연했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치약을 쓸 때 치약을 돌돌 말아 쓰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치약의 속을 열어서 잔여 분량까지 모조리 쓸 정도로 검소하다고 한다.
- <컴백홈>을 패러디한 <컴배콤>이란 곡이 있었다. 음치가수 컨셉으로 데뷔한 개그맨 이재수의 작품(?)이었는데, 망했다. 패러디로서도 후진 데다가 서태지한테 고소까지 당해 데꿀멍. 서태지가 음악 저작권 협회를 탈퇴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코믹한 컨셉으로 패러디한 것 때문이 아니라, 원작자의 동의 없는 발매. 즉 저작권 침해 문제 때문이었다. 이재수 문서에 언급되지만, 서태지에 대한 오마쥬라는 기획사 측의 주장이 어그로를 끈 탓도 있다.
- 서태지는 리메이크곡이 없는 이유에 대해 자신의 음악을 팬들과 자신만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혔다. 가끔 YG엔터테인먼트나 서태지컴퍼니 소속 가수들이 라이브나 방송에서 서태지의 곡을 리메이크하다가, 최초의 레코딩 버전 리메이크로 빅뱅이 서태지와 아이들 4집의 '필승'을 빌렸다. 후에 응답하라 1994 OST에서 리메이크가 성사되어 성시경이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너에게를 불렀다. 발라드곡을 발라드 가수가 부른 격. 성시경은 내레이션에 특히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그리고 2016년 4월에 우리동네 음악대장이 복면가왕에서 하여가를 리메이크 해서 불렀는데 이 역시 정말 이례적으로 리메이크를 허락받았기에 성사되었다.
- 스튜디오에서 보드 장갑에 보드복을 입고 노래를 하는 등으로 우리 나라에 생소하던 스노보더의 복장과 문화를 소개하여 스키장에서 마이너였던 보더들이 스키를 누르고 대세로 올라게는 계기가 되게 하였다. 심지어 스노보드 종목인 프리스타일이란 이름의 곡도 있다. 세계적인 스노보드의 유행이 서태지가 등장한 때와 겹친 영향이 더 크지만, 서태지와 아이들도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실제로 서태지와 함께 시나위에 있던 김종서, 이주노[87] 는 우리 나라 스노보드와 스케이트보드 쪽에서 거의 1세대다.
- 노래 가사에서 알 수 없는 가사[88] 가 많이 나온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에는 그래도 몬더그린 수준이었지만 솔로 데뷔 이후에는 음악 스타일 자체가 연주의 비중을 보컬과 비등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중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자연스레 가사가 잘 안들리는 경향도 더 강해졌다. 가사를 외우거나 가사집을 보지 않고 그냥 노래만 들으면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 정도. 그래서 한때 팬들에겐 그런 구절들이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 해석하는 것도 유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자면 좀 많은데, 2집의 죽음의 늪 후렴구 가사 중 '피하지 않겠어' 뒤에 나오는 가사나, 3집의 교실 이데아에서 '그걸로 족해 족해'이후 가사집에 적혀있지 않은 목소리[89] , 6집 인터넷 전쟁에서의 후렴구의 코러스로 들어가는 스크리밍 등, 심지어는 5집의 Take 3처럼, 가사집을 보지 않으면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곡까지 있다. 게다가 Take 1의 경우 15년 일겅 남탕 콘서트에서 의미 불명 가사[90] 에 관한 팬의 질문에 서태지 본인이 직접 답을 했는데 원래 우리 말로 녹음을 하였으나 외계어(...)로 바꿔서 불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의미는 자신만이 알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안 알려줄 거라고.(...)[91]
- 데뷔 초기부터 위천공(위에 구멍이 나는 병. 원인은 여러 가지다. 과로, 과음 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식이나 술자리에선 술은 그냥 혓바닥에 할짝거리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고. 공개적인 행사에서 샴페인을 마실 때도 샴페인 거품을 앞니로 깨물기만 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92] 너무 힘들 때는 한 끼 식사를 우유로 떼워야 했다고 한다.
- 병역에 관해서는 여러 말들이 많은데, 94년말 연예인 병역 비리 파동에 따른 수사결과로 94년에 검찰에서 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서태지는 성격장애[94] 로 면제, 이주노는 피부과이상(문신)과 정신장애로 면제, 양현석은 병명미상으로 의병제대'이며,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다만 서태지는 인터뷰 등을 통해 면제 사유를 위장 질환이라고 밝혔고 여기에 학력 미달이라는 설도 떠돌고 있다. 이는 실제로 고등학교 중퇴자들이 대기를 타다가 보충역(5급) 판정을 받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 이는 1970년대에 태어난 2차 베이비붐 세대의 면제율이 높은 것을 그 다음 세대들이 오해하여 나온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군 입대 정원은 청년 인구수와는 무관하게 60만 명으로 항상 정해져 있었고, 이들이 20대였던 90년대 초에는 지금 기준대로라면 현역을 가야 할 사람들이 방위병으로 전출되거나 그것도 넘쳐나면 군면제 받는일도 흔했다.[93] 90년대 초 방위 유머가 유행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실제로 통계청 자료에서도 1972년 출생자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많다고 나와 있다. 소위 '평발이라 면제됐다.', '시력이 너무 안좋아서 방위됐다.'가 현실이었다는 것.
- 하지만 서태지는 지금 기준으로도 병역 면제 대상이다. 왜냐 하면 그 사유가 서태지 본인이 인터뷰 등을 통해 면제 사유를 위장 질환이라고 밝혔는데 이게 그냥 위장질환 수준이 아니라 위천공이다. 즉, 위에 빵꾸가 난 것이다. 실제로도 이게 서태지의 가족력이며 친척 형인 신해철 역시 이게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 2020년대에 들어서는 이해가 안 갈 일이지만, 1990년대까지는 청년인구의 비율이 높았던데다가 복무기간도 2020년대 비하면 길었던 시절이라 신체적, 정신적인 조건을 까다롭게 따져서 군대를 내보냈기에 2020년대 기준으로는 2급이나 3급 판정을 받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방위병이나 상근예비역, 공익근무요원으로 선발되는것이 일반적이었고, "서류면제"라고 해서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면제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장애인이 아님에도 근시라서 면제된 경우도 있었다. 이렇다 보니, 학력 미달이나 빈곤, 삼대 독자에 해당되는 사람이 면제가 되었다면 그려려니 하고 넘어갔고, 외아들이라도 특정 조건을 총죽하면 6개월만 방위복무하는 경우도 엄연히 존재했기에 세부적인 면제 사유는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이유로 19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의 범 베이비붐 시대 출생자들은 병역 비리 여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5급 판정이라고 해서 신체나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저 당시 5급이면 지금은 3~4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청년 인구가 감소한 2020년대에도, 과거 방위에 해당되는 사회복무요원이 대기를 하다가 면제 판정을 받는 일이 간혹 있다. 2018년 12월에 나온 이 기사에 따르면, 병무청 신체검사 4급 보충역 등급을 받고 사회복무요원 소집을 기다리는 청년은 기사 작성 당시 시점으로 5만 8천 명인데, 지방자치단체, 소방서, 경찰서 등 공공기관이 내년에 소집할 사회복무요원은 3만 5천 명에 불과해 어쩔 수 없이 2만 3천 명은 2019년도에 소집되지 못하고 자동 면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역 가기엔 애매한 사람들을 예전에는 방위로 돌렸는데, 방위도 수요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남아도는 사람들이 면제가 되었던 것이다.
- 약 4년 후 수사 당시 상황을 회고한 1998년 6월 29일자 국민일보 이경희 기자에 따르면, "가수 서태지가 만성위염으로, 탤런트 배용준이 약시로, 영화배우 박상민이 교통사고에 의한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면제대상자로 인정됐다."라고 언급했으며, 1994년 당시 수사는 사전조사 불충분과 특혜와는 거리가 먼 대상자를 문제삼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고 설명했다. 기사 어느 기사가 맞는지는 각자 판단하도록 하자.
- 지금이야 이런 논란이 있으면 진단서가 공개되지만, 저 당시에는 병무청 자료 보관부터가 허접해서 수사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수사 상황을 보도한 기사만 봐도, 컴퓨터에 입력한 자료가 없어 병무청이 난색을 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게다가 병무청에 보관된 징병 관련 서류의 보관연한이 겨우 3년이라 자료 확보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경찰이 끈질기게 수사 협조를 요청하자 마지못해 협조를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기사를 작성한 기자도 경찰 수사가 변죽만 울리다 끝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탓에 같은 시기에 나온 보도라 하더라도 매체에 따라 면제 사유가 다르게 나온 경우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심지어 어느 연예인의 경우, 자신이 그런 이유로 면제되었는지 몰랐다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고(...).
- 여담으로, 당시 병역 비리 수사는 당시 민주당 소속이었던 강창성 의원의 국정 감사 발언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이뤄졌다.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이미 보관 연한을 넘겨 자료가 폐기된 상황에서 80년대 말 자료까지 부랴부랴 찾는 소동이 빚어진 게 이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강창성 의원 본인의 아들도 저 당시에 병역 면제를 받았다. 이는 김대업의 폭로로 불거진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논란을 계기로 밝혀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김대업이 조작을 한 것으로 드러나 이회창 아들의 병역 비리는 무혐의로 결론이 났고, 자연히 다른 정치인들 아들의 병역 논란도 묻혔다.
- 주위 인물과 팬들의 성화로 지금은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한다. 중2 때 흡연을 시작했다가 고1 때 끊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완전히 끊지는 못한 것 같다. 자신의 컨텐츠에 대해 철저하게 관리하는 성격탓에 흡연장면이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8집 뮤직비디오의 촬영과정을 담은 다큐에서 자신의 테이블에 담배를 올려놓은 모습이 아주 잠깐 나오는 등 약간의 정황이 확인되었고, 이번 남탕, 여탕, 혼탕을 주제로 한 클럽공연(일겅) 때 전자담배를 피우는 퍼포먼스를 시전하여 팬들에게 충공깽과 심쿵을 선사하였으나 수년 전에 완전히 끊었으며 전자담배 연기는 단순 수증기라고 밝혔다. 최수종쇼에서도 담배 피우는 모습을 주변 사람들이 보기 싫어한다고 말했는데, 사실은 건강에 나빠서(하희라의 질문)가 아니라 뻐끔거리기 때문이라고[97] .
- 고종 사촌동생 강현구는 강개토라는 예명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서태지의 영향인지 강개토 역시 본인 음악의 작사, 작곡, 편곡, 연주, 엔지니어링 등 모든 작업을 혼자서 소화한다. 본래는 서태지가 6집 발매 직전 강현구도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던 상태라 서태지가 귀국하면 베이시스트를 맡기로 했으나, 귀국 날짜가 달라진 탓에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서태지에게서 베이스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98] 개토네이션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디지털 싱글을 중심으로 7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중이다. 초창기에는 얼굴이 공개되면 괜히 서태지와 엮여 오해를 살까봐 가면을 쓰고 활동했으나[99] 현재는 가면을 벗은 상태. 결혼식 때는 서태지가 그에게 축하화환을 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매 하는 음악 대부분은 음원 순위 10위권에 랭크 되었으며, m.net 및 곰 tv 뮤직비디오 실시간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삼성, 웅진, 두산, 신한, 우리 등 다수의 기업체 음악작업을 진행했으며, '광고음악의 장르가 신세대들의 소비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여러 음악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활동은 물론 대학교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 심지어 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게임화도 되었다. 정확히는 '컴백 태지보이스'라는 제목의 국산게임인데,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이후 서태지의 컴백을 바라는 시대적 흐름(?)을 타고 개발된 게임이다. 게임성 자체는 흔한 횡스크롤 액션게임이고 출시전 화제가 된것과 달리 금새 잊혀졌지만, 지금보면 어설픈 3D 프리렌더링 그래픽이나 발상은 상당히 괴악해보인다.
- 국산 댄싱 리듬게임 펌프 잇 업 시리즈의 제작사 안다미로에서 서태지의 곡을 수록하려 했다. 난알아요/필승/하여가/우리들만의추억/울트라맨이야 등이 범주에 올라서 서태지컴퍼니 측에 연락을 넣었는데 수록은 하되 게임에 수록되는 사운드 부분을 직접 편집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펌프 잇 업에 수록된 서태지의 모든 노래는 모두 서태지가 직접 편집을 한 뒤 안다미로에 보낸 것이다. 그 대신 자기 노래는 제대로 된 속도에 제대로 된 노래여야 한다며 러쉬 모드는 인정하지 않았다. 대단한 프로정신.[100]
- 유머를 자주 구사한다. 그런데 그 유머들이 하나같이 썰렁하고 재미가 없다(...) 오죽하면 팬들도 장난반 진심반으로 노잼이라고 까고 있는 중. 그런데 더 심각한 건 본인은 개그를 좀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얼굴은 속여도 유머감각은 못 속이는 50대 아재답다.
- 데뷔가 워낙 오래된지라 서태지와 가까이 있어보고 싶어서, 닮고 싶어서 등의 팬심으로 연예인이나 방송계 직종 등에 종사하는 서빠들이 꽤 존재한다. 덕분에 메이킹 영상 등을 보면 스텝들 중에 싸인을 받거나 실물을 봐서 헬렐레한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연예인들에게도 "연예인들의 연예인'"소리를 들을 정도.
- 우스갯소리로, 서태지가 컴백하면 음악 평론가들도 같이 컴백한다는 소리가 있다.
-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 중에 서태지 본인의 목소리로 녹음되지 않은 광고가 있다. 당시 은퇴 후에 미국으로 떠난 뒤여서 미처 녹음을 할 수 없어 대역이 대신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 대역을 맡은 사람은 KBS 프로그램 스펀지의 권재영 PD로 스펀지에서 에피소드가 방송되었다.
- 자신의 단독 공연에 돈을 아끼지 않고 투자하여 매 공연마다 기록적인 수준의 물자가 투입된다. 공연 시장의 규모가 해외에 비해 많이 작은 편인 한국에서 전폭적인 투자 없이는 해보기 힘든 실험들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서태지가 컴백할 때마다 업계의 노하우가 새로 쌓인다고 할 정도. 비단 음향만이 아니라 연출에서도 황당한 요구를 해오는 클라이언트(...)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 어떻게든 만들어내는 경험이 공연 업계 전반으로 확산된다고.[101]
-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이다. 구한말 시절인 증조부 때부터 대대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에 살았다고 한다.[102] 그래서인지 다른 가수들과 다르게 특유의 단어(일명 서울사투리)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 과거 신해철과 스키장에 놀러갔는데 쉬고 싶다던 신해철을 부추겨 신해철은 스키를 탔고, 결국 신해철이 부상을 입게된 적이 있다. https://youtu.be/w8XrI7vY60M
- 굉장한 동안이다. 1972년생으로 현재 50대 초반으로 접어들었지만 양현석(1970년생)이나 이주노(1967년생)는 그 나이대에 비슷해[103] 보이는데 서태지만 아직까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보인다. 물론 40대에 들어서는 표정에 따라서 살짝 나이 든 모습이 나오기는 한다. 그래도 40대로는 절대 안 보인다. 이승환, 이선희와 함께 대표적인 동안 뮤지션 중의 한 명.
-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의 환송식에서 '발해를 꿈꾸며'가 송출되었다.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가사말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 좋아하던 노래 중 하나인 것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 동(東)태지의 모아이가, 서(西)태지의 Human Dream를 꺾어 패배를 안긴 적이 있다.
-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단편적으로 출연했다.
- 양현석과 마찬가지로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고 '틀리다'로 얘기한다.
- 1995년 2월에 문화 평론가 이동연 교수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에 전위주의가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전위주의를 따른) 전위음악은 기존의 음악적인 상식을 완전히 깨는, 화성이나 비트, 리듬 따위의 기본적인 음악의 구성요소들을 완전히 해체하는 형식이라 본다며,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자신의 음악을 포함한) 우리 대중음악에 온전한 전위주의는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앞으로 그러한 전위주의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은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105]
- 머틀리 크루, 스매싱 펌킨스의 성공한 덕후이다.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 토미 리는 서태지가 만든 록 페스티벌인 이티피 페스티벌을 통해 내한하기도 했다. 다만 머틀리 크루의 드러머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내한한 것이다. 또한 2019년에는 머틀리 크루의 'girls girls girls' 뮤비를 보고 동경하던 바이크 면허를 땄다고 밝히기도 했다.
12. 오타쿠
'''오타쿠다.''' 그것도 빼도박도 못하게(...) 아이들 시절부터 자기 기타에 닥터 슬럼프 코믹스 1컷을 붙여놓았고, 7집 당시 다큐에서 화장실에 원피스 만화책이 쌓여있었다. 심지어 이나중 탁구부와 괴짜가족을 좋아한다고.[106] 그외에도 시간나면 이것저것 보긴 하는 듯. 7집 당시 영상물을 보면 '''강 장관 절교해'''라면서 20세기 소년 대사를 패러디하는 모습도 나온다. 8집 수록곡 <틱탁> 프로모션 때는 마침 20세기 소년이 영화화되어 국내 개봉할 시기여서 공동 프로모션을 하기도 했다.
- 평소부터 RC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표현한거로 유명하다. 영상물을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RC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라 해도 될 정도.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부터 즐겨온 취미생활이며, 2004년 블라디보스톡 때는 배에서 원격조종으로 RC를 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은 육아 때문에 잠시 휴업 중이라고.
- UFO, 미스터리, 특촬물 덕후이기도 하다. 사실 80~90년대에 어린이용으로 많이 나왔던 책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이는 음악의 소재가 되거나 프로모션에 활용되기도 했다. 5집 수록곡 <테이크 1>은 외계유입설[107] 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곡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고, 장장 30분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까지 나왔다. 또한 6집 수록곡 <울트라맨이야>는 특촬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 이 세상의 모든 오타쿠를 위한 응원가이기도 하다. 서태지컴퍼니 내의 레이블인 괴수대백과사전 또한 80~90년대에 각종 괴수물에 대한 내용이 적혀 발매된 책자의 이름 괴수대백과에서 따온 이름[108] . 특히 8집은 모아이,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유명한 미스터리 떡밥을 집대성한 앨범이었다. 2000년 10월 딴지일보 인터뷰에서 레이블 설립 계획을 밝힌 바 있는데, 이후 넬, 피아, 디아블로, 코어 매거진을 발탁하였으며, 그중 넬은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다만 현재 이들은 계약 기간 만료로 이적했거나 밴드를 해산한 상태.
- 히데의 광팬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6집 태지에서 히데에게 영향을 받은 듯한 부분이 몇 개 보이며, 2002 ETPFEST를 개최할때 직접 히데를 섭외하면서 덕질의 최고봉에 다다랐다.[109] 물론 고인이 된 히데는 영상으로밖에 볼 수가 없었고 SPREAD BEAVER 멤버들이 공연을 펼쳤지만... 하여튼 이는 히데의 첫 해외 공연으로 남게 되었고 그에 따라 유족들은 해외 진출을 열망하던 히데의 꿈을 이루어준 서태지에게 최고의 선물인 고인의 메인기타였던 옐로우 하트를 하사했다. 일종의 바톤 터치의 의미라고도 하고, 박물관에 있느니 좋은 음악인에게 연주되길 히데도 바랄 것이라는 말과 함께.[110] 히데의 부모님은 리셉션장에서 서태지를 만났을때도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요시키가 LUNATIC FEST에서 진짜 옐로우 하트를 들고 나오면서[111] 돌려준게 확인되었다. 사실 서태지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스프레드 비버 멤버나 엑스 멤버들이 가지고 있는 게 훨씬 어울릴거라 생각한 듯. 아님 나중에 히데 가족과 주변인들의 히데 팔아먹기를 눈치채거나... 그 후에도 서태지는 스프레드 비버의 키보디스트 INA와 히데의 절친한 후배인 루나씨의 베이시스트 J랑 7집 때 협업을 하는등 히데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 사실 만화 말고도 RC, 자동차(본인 소유로 람보르기니를 가지고 있다), 오토바이, 음향장비, 장난감 등 재력과 덕력을 고루 갖추고 골고루 다 소화하는 능덕이다(...) 한번 손을 대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기질이 강한 데다 손재주도 좋은 편이라 타고난 훌륭한 오타쿠다.
- 7집 다큐에서 서태지의 일본 내 자택 촬영을 했는데, 서태지가 만든 프라모델들을 보고 촬영 스탭이 "만드는 걸 좋아하시나봐요?"라는 질문에 서태지는 "음악도 만드는 건데요, 뭘. 다를 거 없죠."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음악도 그렇고 창작활동 자체에 흥미가 많은 걸로 보인다.
-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중 가장 친했던 양현석 또한 이런 성향에 어느정도 물든 걸로 보인다. 힐링캠프 양현석편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공개했는데, 각종 로봇과 히어로물 피규어에 둘러사여있어 MC들이 당황하기도 했다.
13. 사회 참여
- 소셜테이너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소소하게나마 사회 현안에 대해 메시지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2003년에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문화연대를 비롯한 30여 개 시민 단체에서 반대 운동을 벌였는데, 당시 7집 앨범을 구상 중이던 서태지도 동참한 것. 서태지는 공식 홈페이지에는 덕수궁터 내 미대사관 신축 반대 배너를 띄워 서명 운동에 협조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 광화문 사거리에 열린 공연에는 당시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피아가 노개런티로 출연했는데, 여기에 서태지 컴퍼니는 회사 차원에서 거리 공연에 필요한 장비 등을 지원했다고 한다. 링크 결국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 2003년 3월에는 이라크전과 파병을 반대하는 서명 운동에 동참하고 성명서도 냈다. 기사 다만 활동 기간이 아니었으므로, 성명서는 원타임의 송백경이 대신 나와서 읽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우리는 이미 6.25전쟁을 통해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과 살아도 삶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수백만의 이산가족의 비극과 슬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사상 유례 없는 전 세계적인 반전여론 앞에서도 평화 및 외교적 해결을 버리고 행해진, 수많은 희생자를 남기는 이라크 전쟁은 전 인류에게 인간다움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앗아가고 있습니다.
어떠한 명분도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미국 행정부에게 죄 없는 이라크의 많은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부시 미국 행정부는 즉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단하여 이라크 국민들이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 세계 60억 인구에게 정의에 대한 믿음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는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인들의 행렬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부끄러운 전장 앞에 대한민국 젊은이의 파병을 반대합니다.
특정국가의 자국이기주의가 빚어낸 침략전쟁에서 대다수 국민의 여론과는 반대되는 한국정부의 파병계획에 반대합니다.
대한민국은 침략전쟁을 부인한다고 명시한 헌법을 준수하여 정부는 더 이상 국익을 명분으로 이라크전에 대한 굴종적인 지지를 통해 후손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단 한 사람의 대한민국 젊은이도 당당하지 못한 외교의 희생물로 내몰아서는 안 될 것이며 2002년 월드컵 당시 세계에 널리 보여준 우리 민족의 저력이 강대국의 침략전쟁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라는 부끄러운 현실로 가려지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지지 및 이라크 전쟁파병 계획을 즉시 철회하기를 촉구합니다.
저는 한국대중음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라크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며, 반전평화운동을 펼치는 문화인의 대열에 서서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2003년 3월 25일 서태지
- 이러한 행적 때문에 반미 가수로 인식되어, 2004년에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것을 그런 의도로 해석하는 기사까지도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영주권을 갱신하지 않은 것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굳이 미국 영주권을 갱신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 기사
- 한편 당시 정치권에서는 서태지가 어떤 정당을 반대하는지를 밝힐까 봐 걱정했다고 한다. 한나라당의 이재오 의원은 연예인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경고하면서 문화 전략을 잘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사
-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태지의 팬을 자처했다.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도 그가 붙여 준 것이며,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콘서트 당시엔 화환을 보냈다. 또한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까지 했으나 서태지는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이처럼 여러 번 만남을 거절해 오다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인 2004년에야 처음으로 만났다. 대통령 당선 전과 재임 시기에 만나는 것은 아무래도 민감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김대중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서태지를 곱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으로 허지웅이 있는데,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 3집 수록곡 <발해를 꿈꾸며>도 김대중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라고 의혹을 보냈다. 링크
- 이 때문인지 서태지는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발언도 홍보에 이용될 수 있다며 극도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다만 최근 들어서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감명 깊게 보았고 이를 계기로 원작 소설도 읽었다며 소설 파이 이야기를 추천하기도 했다.
- 1996년에 개원한 국내 최초의 장애인 전문 치과 병원에 기부한 사실이 20년 만에 알려졌다. 기사
14. 팬 사랑과 역조공
1993년부터 경호업체 'TRI인터내셔널'이 서태지를 경호하고 있다. 이 업체의 김성태 대표는 서태지를 경호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책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기사
그런데 이 책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도 경호와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들이 인터넷에서 회자되었다.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경호업체와 계약할 때 팬 경호 조항을 넣었다고 한다. '''절대로 팬을 폭행해서는 안 되며,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내용이라 한다. 콘서트 전날에 팬들이 밤을 새고 있는 것을 알고 경호 업체를 보내 지켜주기도 했다고. 이를 갈무리한 블로그 글
재산 목록 1호는 팬들이 보낸 종이학이라고 한다. 2015년 3월 1일에 열린 앙코르 콘서트에서 언급했다. 이미 2007년에 데뷔 15주년을 맞아 팬들이 보낸 종이학을 전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찍이 과도한 조공은 받지 않았다.
1995년도 3월, 잡지 인터뷰에서 20년 후에 팬을 만난다면 커피를 사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링크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데뷔 20주년이 되는 해에 커피 역조공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012년 12월에 영등포 CGV THX관에서 <서태지 특별 상영주간> 동안 서태지 공연 실황을 상영했는데 이 시기에 맞춰 6층 카페 건물을 빌려 '''서태지 카페'''를 운영한 것. 음반이나 티켓 등 서태지 팬이라는 증표를 보이기만 하면 아메리카노를 무료로 제공했다. 종이컵은 서태지 팬덤의 상징인 노란색이었는데, 서태지가 직접 그린 그림이 들어갔다. 카페 내부 인테리어에도 '''서태지의 일러스트'''가 들어갔다고 한다.#
이 이벤트는 서울을 비롯해, 대구광역시, 부산, 광주, 제주까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12월 3일엔 대구시민운동장 주변, 5일엔 광주무등경기장 주변, 7일엔 부산사직종합운동장 주변, 제주도는 3일부터 7일까진 제주도 조안스튜디오에서 커피 버스를 운영했다.
2014년 12월 24일에는 평창동 자택으로 팬 300명을 초대하는 '''평창동 원정대''' 이벤트를 열었다. 기사 팬들에게 손수 포장한 선물 주머니를 나눠 주었는데, 기본 아이템은 여러 종류의 과자와 홍삼액, 핫팩이며, 여기에 서태지 브릭, 케토톱, 기타 피크 등이 랜덤으로 들어갔다.
이 이벤트는 2016년 2월에 방영된 MBC 예능 프로그램 능력자들에 서태지 능력자로 출연한 김홍기 씨가 방송에서 언급했다. 해당 방송 동영상
방송에는 안 나왔지만, 팬들이 쓴 후기들을 보면, 집 앞에 푸드트럭을 세워 두고 율무차, 커피 등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인원이 많은 관계로 집 마당에서 팬들을 맞았기 때문에 마당 곳곳엔 난로를 설치했다. 즉, 자택 마당에서 진행한 팬미팅인 셈.
그런데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이를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팬들을 추운 데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꽁꽁 언 초코파이만 던져 주었다는 내용으로 둔갑했다. 사실, 당시에도 그리 화제가 되지 않은 일이었으나, 일부 어그로꾼이 뒤늦게 거론하기도 하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자기 블로그에 퍼 가 조회수를 올리려 하는 블로거도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일설에 따르면, 서태지의 팬이었지만 그가 결혼한 뒤 안티로 돌변한 일명 '''뭉클'''이 이벤트 당첨자 중에 포함되어 악의적인 왜곡 글을 인터넷에 퍼뜨렸다고 한다. 이 자는 나중에 익명제 사이트로 옮겨가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고 한다.
2019년 12월 25일에 서태지 컴퍼니에서 5년 만에 평창동 원정대 현장 동영상을 공개했다.
2008년 무렵 '''메이크어위시 재단'''에서 백혈병에 걸린 남자 고등학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서태지에게 연락을 취했고, 서태지가 이 소원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기사 서태지를 만난 고등학생은 백혈병이 완치되고 기타리스트가 되는 꿈을 이뤘는데, 그 소년이 현재 할로우 잰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서한필이다. 링크
15. 유명인들의 스타
90년대와 2000년대에 어마어마한 파급력으로 문화 대통령 소리를 들었던 사람이라서, 현재 활동하는 연예인들 중에서도 팬들이 매우 많다.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유명인, 셀럽, 공인들도 포함한다.
- 김남길 : 2014년 인터뷰에서 지금도 좋아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2020년 10월 현재 tvN 채널에서 방영중인 '바닷길 선발대' 2화에서 'Heffy End'가 최애곡임을 밝히고 'MOAI'나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를 들으며 가사 하나 놓치지 않고 부르는 등 팬심을 꾸준히 보여주었다.
- 김생민 : 연예가 중계에서 20년 동안 리포터로 근속하며 서태지와의 인터뷰를 전담했다. 스스로 밝히길 변치않는 팬이라고 한다. 서태지도 김생민과의 인터뷰를 선호하며, 김생글씨 라고 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김생민이 과거 성추행 미투로 인해 연예계 생활을 불명예로 마감했기 때문에 차후 서태지 리포터가 누가 될 지 의문이다.
- 김대중 : 서태지를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메신저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서태지 역시 그의 통일관을 지지하여서 교류가 있었다. 서태지가 주장하던 음반사전심의제 철폐 노력도 기울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당시에는 팬들이 김대중에게 청원들을 보내자 이를 달래는 글도 썼다. 2004년 서태지의 7집 앨범 활동기에는 김대중 도서관에서 만남을 가지고 서태지는 자신의 싸인 CD를 선물했다. 현재도 김대중 도서관에 가면 서태지의 싸인CD를 볼 수 있다. 김대중이 사망했을 때에는 음악인 서태지의 이름으로 조화 화환을 보냈다.
- 권상우 : 서태지가 공연했던 2014 MAMA에 참가했었는데, 레드카펫 인터뷰에서 서태지 선배님 무대 보러왔다고 밝힘.
- 낢 :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시절 출연한 인간시대를 보고 팬이 되었다고 밝혔으며, 자신의 만화인 낢이 사는 이야기에서 열성팬임을 여러 차례 인증[112]했다.
- 데니 안 : 자신의 팬이 서태지를 욕하자 정색하며 화냈다는 얘기가 유명.
- 문근영 :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팬이라 밝혔다.
- 박산다라 : 필리핀 떠나기전 한국생활 할때 '서태지'보고 부러워서 가수데뷔를 꿈꿔왔다. 자신의 꿈은 "여자 서태지 되고 싶다." 발언하였다.
- 성시경 : 매우 열렬한 팬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성시경 특유의 직설적이고 소신있는 성격을 보면 당연할지도. 이 인연으로 2013년 그의 명곡 <너에게>를 리메이크했다. 서태지 곡 중 최초의 케이스.[113]
- 성유리 : 서태지가 던지는 껌을 받기 위해 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한밤의 TV연예에서 밝혔다.
- 손호영 : 위에 소개된 데니 안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팬이다. 카뮈의 <페스트>를 원작으로 한 스토리에 서태지의 음악을 사용한 뮤지컬 <페스트>에 주연으로 나와 성공한 덕후가 되었다.
- 슈가(방탄소년단) : 방탄소년단 멤버들 중 가장 서태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본인 피셜로 인증했다. 2017년 9월 21일에 방송된 두시탈출 컬투쇼에서 언급했다. 해당 방송 20분 무렵부터 나온다. 신보 기자회견에서 최근 참여했던 서태지 25주년 콘서트에 대한 질문에 함게 할 수 있어서 너무나도 영광이었다고 밝히기도. 방탄소년단은 서태지의 데뷔 25주년 기념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대표곡인 'Come Back Home'을 커버하기도 했다. 멤버들 모두가 서태지 25주년 공연에 출연해 Come Back Home을 불렀고, 멤버 중 뷔와 정국은 서태지와 같이 하여가를 부르기도 할 정도.
- 신화 멤버들 : 신혜성은 2001년에 SBS 도전천곡에서 난 알아요를 불렀으며, 김동완은 자신이 텐텐클럽 MC를 맡았을 때 신화 멤버들과 아카펠라로 이 밤이 깊어가지만 리믹스 도입부를 재현하기도 했다. 이민우는 최근까지도 2014년 9집 컴백 콘서트, 25주년 기념 콘서트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심은경 : 서태지의 SHOW 광고에 함께 출연하였고 8집 활동 총정리 DVD인 398에서는 덕심이 가득한 내레이션을 맡았다.
- 안톤 숄츠 : 현 독일 공영방송 ARD 소속 기자. 90년대에 한국에 왔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을 알고 좋아했다고 한다. 링크 2019년 6월에 모 언론사에서 열린 외신 기자 포럼에서는 지속가능한 한류를 위해 <교실이데아> 같은 사회적 현상을 다룬 콘텐츠가 많이 나와야 한다는 조언도 했다. 링크
- 유아인 : 꽤 오래된 팬이다. 전국투어 때도 목격된 바가 있다.
- 윤진서 : 서태지의 7집 활동 뮤직비디오들에 출연했다(로보트, Heffy End, Live Wire). 뮤직비디오 비하인드를 보면 7집 앨범에 싸인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07년 15주년 기념 공연에서는 MC를 맡았다.
- 이은결 : MBC의 능력자들에 출연하여 팬심을 인증했다. 서태지 능력자로 나온 일반인도 기억을 못 하는 예전 TV방송에서의 율동도 기억하고 있었고,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수록곡 '너에게'의 엔딩 연호까지 알고 있었다.
- 이적 : 이적의 텐텐클럽을 진행할때 서태지의 신보가 임박하자 공개 출연 요청 게시판까지 개설하며 팬들에게 참여를 촉구하기도 했으며, 결국 서태지가 출연하자 신이 나서 진행했었다. 정말 만나뵙고 싶었다고 기쁨에 겨워서 진행.
- 이정현 : 연예계로 데뷔한 이유가 서태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 이준기 : 서태지의 8집 컴백때 특별 프로그램에서 인터뷰어로 나와 팬심을 과시했다. 미니 콘서트와 ETP에 초대해달라는 말에 서태지는 그래도 줄을 서야 하며 표를 사서 오라고 화답했다.
- 임형주 : 소격동에 대해 트윗을 올렸다. 링크
- 지코 : 롤 모델이었던 서태지와 한 무대에 섰다. 2014년 MAMA 때 서태지와 함께 <컴백홈>을 공연했고, 이때 일은 자신의 솔로 앨범 수록곡 가사에도 언급했다.
- 최강희 : 싸이월드 미니홈피 한켠에 서태지의 사진만 따로 올려놓는 게시판이 있었다.
- 최송현 : 자신의 SNS에 팬심을 과시해왔으며, 2008년 ETPFEST 기자회견에서는 사회를 맡아 '16년 만에 서태지를 만나게 돼서 꿈을 이루었다.' 라고 밝히기도 했다. 2012년에 팬들을 대상으로 서태지컴퍼니에서 주최한 클럽행사 '마지막 축제'에도 팬의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최태성 : 트위터를 통해 팬임을 인증했다. 후에 인스타그램에도 서태지와 관련된 내용을 올리기도
- 타블로 : 자신의 라디오에서도 서태지의 노래를 선곡하기도 했고, 미국 생활 당시 하여가를 듣고 다녔으며, 박명수의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는 "사전 심의제도가 아직도 있었다면 에픽하이는 앨범을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본인 라디오에서 서태지의 팬이 보낸 ETPFEST 섭외 축하 꽃다발을 자랑하기도 했다.
- 하현우 : 서태지가 최초로 방송한 V Live에 진행을 맡아 함께 출연했는데 방송이 아닌 개인 팬미팅(...)을 하고 갔다. 스스로도 팬심으로 진행해서 팬들의 말들을 잘 전해드리지 못한 거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2017년 9월 2일 진행되는 서태지 25주년 공연에 오프닝 게스트로 참가하기도 한다.
- H.O.T. : 멤버 전원. 특히 문희준은 서태지 콘서트에서 여러 차례 목격담이 존재하며, H.O.T. 해체 이후 록 음악을 시도한 솔로 초기 행보가 서태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이다.
- 젝스키스 : 멤버 전원. 심지어 이재진은 현재 양현석과 사돈관계인데도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서태지를 제일 좋아했다고 밝혔다.
- NELL : 멤버 전원. 이 때문에 서태지가 본인들을 서태지컴퍼니에 영입했을 때 서태지가 본인들의 우상이라 기뻤다고 밝혔다.
16. 수상 내역
- 2000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락 부문 상
- 2004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락 부문 상
- 2008 MKMF 남자가수상
17. 음반 목록
서태지/음반 목록 항목 참조.
여담으로, 서태지의 정규 음반들 중 트랙리스트가 10곡을 넘는 음반은 없다.[114] 그 때문인지 각 음반들의 러닝타임들도 생각만큼 길진 않다. 다만, 대중들과 평론가들의 평처럼 음반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18. 콘서트
서태지/콘서트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