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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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시. 군산, 여수와 함께 호남 3대 항구의 하나로 개항 이후부터 항구 도시로 발전해왔으며, 호남선 철도의 종착역이자 서해안고속도로의 시점으로 호남권 교통의 시발점 역할 또한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만 해도 부산광역시, 인천광역시, 원산시와 함께 인구 7만으로 '''조선 4대 항구''' 중 하나였고, 1950년대 10만을 훌쩍 넘는 인구 증가(11만)로 한때 '''남한 6대 도시'''에 속했으나, 목포항은 군산항과 함께, 내해 수심이 얕아 현대적 대규모 무역항으로 쓰기에는 입지가 나쁜 탓도 있지만, 목포항을 통해주는 교통 인프라의 부실이 영향이 커서, 결국에는 해운으로 통하는 화물들이 교통 인프라가 좋은 부산항과 인천항으로 집중되었고,[7] 목포항은 군산항과 함께 화물 운송량이 급속도로 줄게 되며, 목포항에 의지하던 목포시의 경제에 큰 타격을 받아, 대도시로 성장하지 못했다. 흔히 목포시가 산업화 시절때 소외되었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나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난영 노래
그래도 목포시는 전남 서부권의 중심 도시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며, 전라남도청이 남악신도시 내인 근방의 무안군 삼향읍으로 이전하면서 전라남도청의 배후 도시 역할도 하고 있다.[8] 목포시의 인구는 전라남도의 지자체 중 여수시, 순천시에 이어 3위이지만, 읍면을 제외하고 동 지역 인구만 비교하면 목포가 이 둘을 앞선다. 그리고 여수, 순천[9] 은 도농복합시이고 목포는 아직 도농통합이 안 된 것을 감안해 목포+무안으로 계산하면 32만 명이고, 신안까지 합치면 36만 명대, 말이 영암이지 목포 생활권이나 다름없어 줄기차게 목포로의 편입을 요구하는 영암군 삼호읍 지역까지 합치면 사실상 인구 40만명 급의 도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다만, 행정과 정치 분야에서는 전남 동부의 여수시, 순천시보다 월등하지만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넘사벽으로 밀린다. 참조 전남 내 수출액이 목포 0.3%, 순천 2.2%, 여수 74.4%로 1/100도 안 되며, 2015년 9월 기준 재산세는 목포시는 114억원으로 여수시 220억 원, 순천시 182억 원, 광양시 143억 원에 이어 '''4번째'''다. 더군다나, 2016년 예산에서는 인구 15만 명의 광양시의 6667억 원보다 낮은 6483억 원의 예산을 기록했다. 그보다 한참 낙후된 나주도 5618억을 받는데. 그러나 목포는 자체 경제력은 부족하나, 강 건너 삼호읍이 목포 생활권인지라 거기 있는 현대삼호중공업과 대불산단을 목포의 산업기반으로 봐도 무방하다. 단지 거기가 행정구역상으로 '목포시'가 아닐 뿐이다. 참고로 대불산단이 소재한 영암군의 전남 내 수출액은 10.4%.
개항 이후 무안군에 속했던 지역을 야금야금 편입시키기는 하였으나, 그나마도 1987년 옥암리와 대양리를 마지막으로 편입시킨 이후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 실시될 때 도농통합을 이루지 못해 발전의 희망이 끝나 버렸다. 면적이 서울특별시 서초구나 수원시 권선구와 엇비슷하다. 비수도권에서 가장 면적이 작은 시이다.[10] 시골의 웬만한 읍면 면적 수준이다. 멀리 안 보고 목포 생활권인 영암군 삼호읍만 봐도 목포시 전체 면적보다 넓다.
목포는 옛날 일제 강점기 때부터 커온 도시라서 도시 구획이 잘 되어있다. 대성동과 유달산 아래쪽은 난개발 지역이지만 일제가 도시구획을 잡고 개발해서 그런지 목포역 남쪽과 동쪽 도시구획들이 사각형 형태로 뻗어있다. 옛날엔 목포역 근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도시가 바다를 매립한 곳이다. 나머지 구도심과 하당과 남악도 다 바다를 매립하여 이루어진 지역. 인구도 80년 때의 수준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전설적인 노래 목포의 눈물이 이 지역을 소재로 해서 만들어졌다.
2. 역사
본래 행정구역상으로는 무안군의 일부였다. 백제 때는 물아혜군(勿阿兮郡)이라고 불렀으며, 신라 경덕왕 때 무안군으로 바뀌었다. 이후 그대로 가다가 구한말에 목포가 개항하면서 도시로 발전, 무안에서 독립한다.
목포라는 이름은 후삼국시대에 최초로 등장한다. 태봉시대의 일인데 궁예 휘하의 장수였던 왕건이 태봉 수군을 끌고 목포라는 포구에 도착해 현재 전라남도 서남부 일대를 복속하여 현 광주광역시인 후백제의 거점도시 무진주를 위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목포시가 아니라 나주시 내라는 설도 있다. 이후 목포라는 이름이 영산강유역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해 조선 태종 때 현재의 목포시 지역에 목포진(木浦鎭)을 설치하여 지명이 확정되었다. 한편 목포 일대는 무안군의 일부였으며, 고을의 행정 중심지 역할은 목포가 아닌 현 무안읍내 지역이 했다.
오늘날과 같은 항구도시로서의 시작은 1897년 10월 1일 대한제국의 목포항 개항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무안군이 '''무안부'''로 승격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외국과의 조약에 의한 개항이 아닌 정부의 자발적인 개항으로는 첫 번째였다. 유달동, 만호동에 해당하는 목포의 구도심은 일본 등 외국자본에 의해서 간척된 계획도시이기에 도로가 바둑판처럼 잘 형성이 되어있다.
1910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무안부가 '''목포부'''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개항장(현 유달동, 만호동, 대성동, 목원동)을 제외한 목포부의 나머지 지역을 무안군으로 분리하였다. 무안군청은 목포부 내에 두었다. 1932년에는 무안군 이로면의 죽교리(유달산과 뒷개라 불리는 해안지역 모두 포함), 산정리(산정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목포에서 남으로 북까지 쭉 뻗은 목포 구도심의 1/3을 차지하는 법정동), 용당리(목포시청과 목포상고 인근)를 목포부에 편입하였다. '''1944년 인구 6만9천명으로 당시 한반도 10대 도시 중 하나였다. '''
해방 직후에는 인구가 불어났으나, 이후 중국 및 일본과의 교역이 단절된 목포는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이 당시 전국(남한) 6대 도시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영산강으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토사에 의해 목포항의 수심이 얕아지는 것은 목포의 발전에 악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에 목포시는 1962년 현 동명동사거리에서 대삼학도 서측을 잇는 방조제 공사를 시작으로 하여, 삼학도 전체를 육지화시켜 외항을 건설하였다. 또한 대삼학도 북측에서 현재 제일중학교까지를 방조제로 연결하여 생긴 땅에 차관을 빌려 4차주택단지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삼학도는 현재까지도 공원화가 되어 있긴하나 완전 복원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삼학도의 흑역사
1963년 무안군 이로면(석현리, 대양리, 옥암리 제외)[12] 이 목포시에 편입되어, 목포시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부산이 동래군의 면을 몇 개씩 편입하고, 서울특별시가 부근 군(당시 광주군이었고 현재는 성남시,하남시,광주시 등이다.)의 면을 몇 개씩 편입하는 동안, 목포시는 무안군의 1개 면을 그것도 완전히 편입한 것도 아니었다. 이로면의 잔여 지역은 삼향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에 석현리를, 1987년에서야 대양리와 옥암리를 편입하게 된다.
1969년 무안군에서 신안군이 분군되면서, 목포시 내에 있던 기존 무안군청은 신안군청으로 전환되고(이후 압해도로 이전), 새 무안군청은 무안군 무안면(이후 무안읍)에 설치되었다.
1970년대 목포는 나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1호광장-2호광장-3호광장으로 이어지는 광로가 이때 개통된 것이다. 이전에는 대성동-산정초등학교-전남제일고앞 작은 길-이로시장-굴다리로 이어지는 도로가 목포의 간선도로였다. 1972년에는 상동에 최초의 현대적인 공업단지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그 규모는 매우 작았고 그나마 호남고무나 행남자기와 같은 경공업 위주로 구성되었다. 1974년에는 옛 일본영사관에 있던 목포시청이 현 용당동 청사로 옮겨가고, 그 옆에는 목포마리아회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현 초원관광호텔 자리에 있던 경찰서, 소방서와 기업은행 맞은편 교회자리에 있던 법원 등도 이 시기에 용당동 청사로 이전하였으며, 현 유달산우체국 자리에 있던 목포우체국과 유달산 기슭에 있던 MBC가 각각 1987년, 1989년에 용당동으로 이전을 완료한다. 비슷한 시기에 시역을 넓혀나간 다른 경쟁도시들이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이러한 변화를 마친 반면, 목포는 이러한 변화를 1980년대 말에서야 마무리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목포시는 1990년대 초반까지 별 다른 변화없이 전혀 발전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지시에 의해 목포와 마주한 영암군 삼호에 대불공단이 세워지고, 1995년 한라조선소가 건설되면서 도시의 정체된 발전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93년에는 20년 이상 끌어오던 하당지구 개발이 완료되었고, 하당지구는 목포의 대표적인 신도심으로 성장하였다. 2001년에는 서해안고속도로 전면개통, 2004년에는 KTX가 목포까지 운행되면서 수도권과의 이동시간이 대폭 단축되었다. 2006년에는 인접한 무안군 삼향면 남악신도시에 전남도청이 개청하고 2007년에는 영암에 있던 목포공항을 폐쇄하고 무안국제공항이 개항하게 되었다.
항구도시답게 대한민국 해군의 주요 기지 가운데 하나였고, 한국전쟁 초반에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정부 인원들이 이곳을 통해 해군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철수했다. 휴전 이후에도 해군이 계속 주둔해 목포해역방어사령부를 해군 제3함대사령부 휘하로 두고 있다가, 2008년 3함대 사령부가 강 건너 삼호읍으로 옮겨 오면서 목방사를 해체했다.
2.1. 인구 추이
3. 지리
한반도 서남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동북쪽으로 무안군 삼향읍과 경계하고 서쪽으로는 서해와 그 건너 신안군 압해읍 압해도와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하구둑 건너로 영암군과 경계하며 본토에서 떨어진 직할 섬지역으로 율도, 달리도, 장좌도, 외달도, 고하도, 허사도가 있다. 이 중 고하도와 허사도는 신외항 조성으로 인해 두 섬 사이를 매립하여 하나의 섬이 되었고, 고하도 바로 밑에 장구도라는 섬이 있었으나 매립으로 사라졌다.
무안반도에서도 가장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반도(半島) 지역으로 경계 대부분이 무안군에 인접해있고 하구둑 건너로 영암군과 인접해있기 때문에 군(郡) 지역 사이에 끼어있는 중소도시이기도 하다.
도시구조는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부산보다도 위도가 아래 있는 곳임에도 겨울에 눈이 자주 오는 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강설일수는 많아도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눈이 많이 쌓이진 않는다고 하지만 2010년도 이후 부터 조금씩 눈이 더 쌓이기 시작해 2014년엔 성인 종아리 중간 높이까지 눈이 쌓인 적도 있다.
또한 해양성 기후, 그것도 남해안과 같은 기후를 받는곳이라 최저기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고 밤낮의 일교차가 적은 편인데, 이것이 겨울이나 봄, 가을 환절기엔 장점이 되지만 여름엔 단점이 된다. 실제로 목포는 여름 폭염이 심하지 않지만, 일교차가 적은만큼 낮기온이 30도를 넘지 않는날에도 다음날 아침 최저기온이 25도 이하로 떨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7~8월 열대야가 많다.[13]
4. 교통
도로와 철도 교통 이용이 모두 괜찮은 편이다. 서해안고속도로와 호남선 철도의 종점이며, 전남 서남해안권 도서지역으로 가는 여객선의 모항이 된다.
5. 경제
어항이자 항구도시였던 과거의 영화와는 달리, 현재의 목포시는 소비도시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물론 과거보단 못하지만 일정 규모의 수산업은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목포시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웃 영암군 삼호읍에 있는 대불공단과 무안군 삼향읍에 있는 전남도청 및 관련 기관들이다. 문제는 두 곳 모두 행정구역상으로 목포시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목포시의 재정에 도움을 주는 것은 미비하며, 근무자와 그 가족이 목포 혹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면서 파생되는 소비 활동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는 점이다. 거기에 도내 유관기관으로는 광주에서 살면서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아서 효과가 크지는 않다. 최근에는 조선업계가 불황이라 많은 기업들이 파산하였고, 이에 따라 목포시의 인구는 정체된 상태이다. 그리고 목포시의 인구가 무안군에 위치한 남악 신도시로 이동하면서 점점 도심이 구도심(목포역 인근)에서 하당 신도시로, 하당 신도시에서 남악으로 이동하고 있다.
5.1. 금융
*아래는 목포시에 위치한 제1금융권 금융기관 및 우체국 금융점포들의 상세정보로 순서는 지점 개설 역사순.
SC제일은행 목포지점은 목포시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 지점으로 1906년에 목포 개항 후 약 10년 뒤에 개설되어 오늘날 하당에 이전하여 100년이 넘도록 지속되어 영업하고 있다.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 뒤, 광복 후에는 산업은행이 인수하지 않고, 제일은행이 승계하여 영업을 계속하였다.
원래는 제일은행의 전신인 조선저축은행[14] 이 1936년에 목포에 지점을 내었지만 광복 후, 폐점되었다가 다시 한국저축은행으로 개편된 시절에 인수한 것이다. 조선식산은행 시절에는 제1대 목포부 금고를 맡기도 했으며, 유달출장소 개설 후 하당 이전 전까지는 조흥은행 목포지점과 목포우체국(현.유달산우체국)과 더불어 선창의 터줏대감으로 불리기도 했다.
'''목포금융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과거에 비해서는 위세와 이용객 및 영업이 많이 줄었지만 한때는 광주지점의 영업실적도 넘을 만큼 위력이 컸다.(제일은행30년사 본문 기준)
위 지점의 건물이 행복동2가 2번지에 현대까지 남아있었으나, 철거로 인해서 사라졌다.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밑의 조흥은행 목포지점처럼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았을 지도 모른다. 연식도 조흥은행 목포지점보다 더 오래되었기도 하고. 안타까운 부분.
위에 SC제일은행 목포지점을 이은 목포 금융의 터줏대감으로, 1920년에 향토은행인 호남은행 목포지점으로 개점하였고 본점의 역할을 하였다. 후에 동래은행 등. 같은 민족계자본은행을 지속적으로 합병하고 영업한 결과 중형은행급으로 전남(장성, 담양, 광주, 순천 지점)은 물론 부산과 경남지역까지 지점이 있을 정도로 준수한 편이었으나, 총독부에 의해서 동일은행으로 강제합병 후 동일은행이 조흥은행으로 편입되면서 2006년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으로 행명을 변경할때까지, 조흥은행의 역사를 함께 하였다. 신한은행으로 개편뒤에도 2년이 넘도록 영업하였으나, 기존 위치가 중심도로에서 먼다는 점이 지적되어 목포역 근처인 목포역지점과 통합을 결정 후, 목포지점으로 재출범 하였다. 호남은행 시절부터 조흥은행 시절까지 목포시 금고를 맡았으며, 1961년 기업은행 출범후 기업은행에 넘겨주게 된다. 목포대학교, 법원 등 목포시에 위치한 많은 공공기관들의 주거래 은행을 맡았거나 맡고 있으며, 그 만큼 조흥은행 시절부터 목포시에 있어서는 중요한 은행이었고 시민들도 많이 쓰는 은행으로 시중은행 중에서는 가장 지점이 많은 은행이기도 하다.
한국은행이 설립될때, 같이 개업한 지점으로 목포시의 한국 금융에서의 위치를 보여주는 부분이자 지점이기도 하다. 본래는 한국은행 목포지점으로 개업했으나, 후에 직제변경으로 목포본부로 개편되었다. 원래는 선창에 있었다가 지금의 목포역 앞으로 이전한 것인데 원래는 이 자리가 목포공업고등학교 자리로 공업고가 유달경기장 부근으로 이전 후에, 목포시청이 용당동 이전 전에 잠시 임시로 쓰인 부지에 건립한 것으로, 전국의 여타 한국은행들과 비슷한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해남군에 해남분실(구.해남사무소)가 있었다가 외환위기 직후 몸집 줄이기로 폐쇄되었다.
별명이 '''목포 금융의 맹주'''이다. 50년이 넘도록 목포시금고를 담당한 매우 향토성이 강한고 짙은 은행으로, 그만큼 기업은행이 목포시에 투자한 곳은 굉장히 많다. 유달산 가로등, 고하도 조명, 낙조대 등. 건립비석을 보면 하나같이 기업은행 목포지점장의 이름이 새겨져있을 정도이다. 1961년에 중소기업은행이 창립하면서 같이 세워졌으며 그 후 정부에 의하여 목포시금고로 지정되었다.[15] 목포시청이 구. 일본영사관과 명륜동에 위치할때는 굳이 출장소를 개설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워서 목포시청 출장소는 목포시청이 용당동으로 이전 후에 세워진다.
이외에도 목포시청, 대성동사거리, 용해동주민센터, 구 청호시장, 2호광장, 영흥중고입구 정류장 옆 등. 시내 곳곳에 ATM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우체국에서도 통장/카드로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에, 목포시에 거주할 일이 있으면 농협과 기업은행 통장을 만드는 것이 훨씬 좋다.2호광장과 3호광장 사이 500m 에는 산정동우체국, 동부시장 앞, 목상고 입구, 목포우체국 총 4곳의 ATM이 있을 만큼 기업은행을 이용하기 편한 도시구조이다. 참고로 2019년 이전에는 구.홍익금고 앞에도 있어서 총 5곳의 ATM기가 있었다. 왠만한 사람들도 기업은행 계좌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고, 사업체도 상당히 많기 때문. 반면 , 광주은행은 목포시민 입장에서는 계륵이기 때문에, 광주광역시에 연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전라남도에서 살아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한국무진(지금의 상호금고 또는 사채)의 목포지점으로 개설되었다가, 1963년 국민은행법에 의하여 국민은행 목포지점으로 승격출범되었다.(제1금융권 편입) 원래는 오거리 근처인 상락동2가에 위치했다가 우리은행이 하당으로 통합 이전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여 목포역 앞에 목좋은 곳으로 이전하였다.[사실] 반면 하당지점은 원래 국민은행 지점이 아니라, 한국주택은행 하당지점으로, 목포지점이 국민은행 중심으로 통합한 반면에 하당지점은 주택은행 중심으로 통합하였다. 건물도 산업은행 바로 옆에 건물이다. 그 외에 용당동 지점이 용당동에 위치해 있었다가 용당동 금융가의 쇠퇴로 인해서 시중은행들 중 용당동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하였다. 두 지점 다, 주택은행 시절 코드번호를 사용한다.
전국에서 농협은행과 단위농협을 포함한 갯수가 가장 많은 곳이 목포시이다. 그 만큼 농협을 쓰는 사람도 정말 많다. 원래는 농업협동조합중앙회가 1961년에 창립하면서 시군지부를 설치할때, 유독 목포시지부만이 설치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안군청이 당시에는 목포시에 있었기 때문에 무안군 지부가 목포시내에 이미 설치 되었기 때문이다. (구. 신안군청 자리가 무안군청이었다.) 그 후. 무안군청이 면성면(현.무안읍)으로 이전하면서 1969년에 목포시신안군지부로 처음 설치되었고, 차례로 2호광장, 자유시장, 동명동 지점이 개설되면서 세를 확장하였다. 축협중앙회는 목포지점이 있었다가 2000년 농협축협간 통합으로 인해서 폐점하였다.
광주은행의 본점이 광주에 있을만큼, 전라남도 목포시에 지점을 설치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 그러나 광주은행을 쓰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오히려 기업은행과 신한은행을 쓰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 실제로 광주은행이 기업은행을 제치고 시금고에 되자 많은 시민들이 의문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목포시내의 다른 은행과는 달리 광주광역시와 그 주변지역 밖에 유용성이 없어서 목포시민들 입장에서는 계륵이다. 때문에, 광주광역시에 연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전라남도에서 살아도 만들지 않는 것이 좋다. [16] 물론, 광주에 살면서 목포에 직장을 두거나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광주은행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하나은행 목포지점은 본래의 1991년에 창립한 하나은행의 지점이 아니라 서울은행이 1971년에 세운 목포지점을 모태로 하고 있다. 후에 한국신탁은행과 합병하면서 서울신탁은행 목포지점으로 변경하였고, 다시 서울은행으로 다음에 하나은행과 합병하면서 하나은행 목포지점으로 변경되었으며 외환은행까지 잡아먹고 목포금융센터로 변경되었다. 서울은행은 또한, 목포시내 영업 확장에 큰 관심을 두어서 하당이 없던 시절에 용당동까지 지점을 설치하였으며 이 기반으로 많은 고객을 유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업은행과 한일은행보다 목포시 입성시기가 10년 정도 빨라서 지금도 왠만큼 쓰는 사람이 많다. 하나은행 목포금융센터의 사용고객의 50%는 서울은행, 나머지는 외환은행 출신 계좌들이다.
외환은행은 1980년에 목포지점을 최초로 2호광장에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기업금융에 있어서는 목포에서는 신성불가침이었다. 한라중공업의 주거래가 외환은행이었을 만큼 많은 노동자들이 외환은행을 이용하였고, 2호광장에 있었던 시절에는 동부시장의 일부 상인들과 소상공인들도 물론 이용하였기 때문에 용당동 시민들 또한 서울은행과 마찬가지로 외환은행을 많이 이용하였다. 산정출장소는 목포지점이 하당으로 이전 후 대책으로 남겨둔 지점으로 6년이 지나 폐쇄된다.
현재, 하나은행 목포금융센터는 전국은행연합회 전산상으로는 개점일자가, 서울은행 용당동지점 상으로 되어 있다.
쉽게 말해, 하나은행 목포금융센터는 이 둘을 먹어 손 안대고 코 푼격이다.
우리은행 목포지점은 본래 한국상업은행 목포지점으로 1982년에 개점하였다. 우리은행의 오랜 역사에 비해서 상업은행이 들어선 시기가 굉장히 느린데 이는, 조흥은행이 목포에서의 위세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상업은행 목포지점은 외환위기 직후 한일은행 목포지점과 통합하였으며, 2000년대 중반에 목포역 앞의 현재의 국민은행 목포지점으로 이전하였다. 하당지점은 당시에 상업은행의 하당지점이 없었기 때문에 한일은행 하당지점이 한빛은행 하당지점으로 바뀌었다가, 우리은행으로 영업을 지속하였다. 2015년에 목포지점이 건물에서 쫓겨나면서[17] 하당지점과 통합하여 목포금융센터로 변경되었다.
많은 산업은행 지점들이 조선식산은행을 모태로 하지만, 조선식산은행 목포지점은 제일은행에 인수당하고 목포에서의 산업은행은 산업은행이 한참 점포 개설을 할 때인 89년에 개점하였다. 대불공단의 몇몇 기업들이 산업은행과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되는 지점으로, 현대삼호중공업과 보해양조등의 채권은행을 맡고 있어 개인보다는 기업 금융이 좀 더 많은 편이다. 원래는 지금 시내의 KT목포지사 건녀편이자,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옆 건물에 위치하였으나, (ABL생명이 있는 곳.) 하당신도심을 분양할때 쯤, 하당으로 이전하였다. 365코너는 설치되어 있지 않다.
수협은행은 1992년에 남교동에 목포지점을 최초로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목포수협이 수산업협동조합이 창립할 때부터, 있었던 반면에 수협중앙회는 상당히 늦게 들어온 편이다. 2015년에 하당으로 이전하였다.
사실 우체국은 제1금융권 분류에 속하지는 않으나 편의상 기재되어 있다. 한국씨티은행을 제외하고는 모두 있으며 가장 가까운 지점은 광주로, 목포에서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렇게 먼 편은 아니다. 사실 씨티은행과 제휴되어 있는 우체국에서도 이용할 수 있으니, 크게 걱정은 안해도 될 판이다. 목포시 금융가는 크게 3가지로 변화 되었는데, 선창(1단계)-시내(2단계)-하당(3단계)로 구분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6. 문화
개발도 많이 안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꽤 잘나가던 항구[19][20] 라서, 일제강점기에 지은 건물이 많이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의 건축물+근대건축물의 산실로 일본인 구역이었던 유달산 아래 목포여자중학교 근방과 구시가지에는 눈에 띄는 건물들이 다 준문화재급으로 오래된 건축물들이다. 그러나 이는 보존하려고 해서 보존한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이 그 이후로 거의 개발되지 않아서이다. [21] 예를 들어 경성, 부산, 대구, 대전 등지에는 목포보다 훨씬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했지만 개발의 물결을 타고 일제의 잔재가 전부 사라졌다. 반면 목포는 해방 이후 개발이 더디어 이런 건축물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일제의 잔재로는 목포해양대학교 근처의 해안가에서 볼 수 있는 건너편 섬들에 웬 동굴들이 여러개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이 미군을 막겠다며 군수물자나 군인들을 폭격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현재까지도 슬픈 역사의 상징이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한편, 유달초등학교 내부에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로 알려진 호랑이의 박제가 전시되어 있으며 운동장 쪽에 공중폭격에 대비한 대피땅굴이 파져있다. 현재는 입구를 막아놔서 들어갈 수 없지만 목포문화원? 에서 대략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것이 있다. 장군의 아들의 종로를 목포에서 찍었다.
광주와 목포의 유력한 한국인 자본가 24명이 참여한 호남은행의 목포지점 건물이 있는데, 해방 후 조흥은행 목포지점으로 사용하였다. 목포에 현존하는 유일한 금융계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9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현재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도 1-2호선 기점 비석 인근의 구 일본영사관 건물은 1900년에 완공된 건물로 일제 때는 목포부청으로 사용되었고 해방 후에는 1974년까지 목포시청으로, 그 후 1989년까지는 시립도서관으로, 1990년 이후로는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다가 2014년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사적 제286호로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높은 개화기의 근대 건축물이다.
목포근대역사관은 총 두 개의 건물로 운영중인데, 구 일본영사관이 1관, 인근에 있는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 2관으로 1관에서 관람료를 내고 관람한 다음 2관까지 다 보면 된다. 유물보다는 당시의 서류 자료나 사진을 주로 전시해 놓았고 일제강점기의 목포 거리를 일부 재현해 놓기도 했다. 단, 2관에 있는 독립군을 처형하는 사진의 경우 정말 적나라하게 시체가 드러나는 사진이 일부 있기 때문에 관람에 주의를 필요하다.
쌀수출항에 일본인 거주구역이 많았던지라, 일제강점기에 젊은 시절을 보내신 구시가지 지역의 어르신들은 거의가 다 일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는 특이한 동네이다.
다우치 치즈코라는 일본 여성이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남편과 함께 공생원이라는 고아원을 세우고, 해방 후를 거쳐 1968년 타계할 때까지 평생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통영과 함께 최고의 다도해 경치를 자랑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저녁에 유달산에 올라 석양에 붉게 물든 다도해의 바다는 정말 천하일품.
현재 전국에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프리머스시네마가 있는 도시였다. 2016년 1월 31일까지만 프리머스시네마로 운영하였고, 이후에는 메가박스로 운영되고 있다.
도서관은 목포시립도서관과 목포공공도서관, 목포어린이도서관, 전라남도립도서관[22] 이 있다. 목포시립도서관의 경우 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책 읽으러 가다가 뻗는 학생들이 부지기수.
7. 관광
광주광역시처럼 빛의 도시를 목표로 한다고해서 불꽃놀이를 자주 한다든지, 유달산에 가로등 설치 같은 삽질을 하고 있다. 축제한답시고 불꽃놀이는 새벽까지 해대는 터라 인근 주민에게는 죽을 맛인데다가 , 멀쩡한 산을 가로등으로 덮어놓는 건 환경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매우 좋지 않다. 게다가 바닷물을 끌어와서 해상분수를 만든다는 프로젝트를 시에서 세웠는데 문제는 물을 높이 뿜을수록 소금물이 주변으로 퍼져서 주변 토양에 염해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 때문에 시민단체들에서도 염해피해 대책을 이유로 해상분수를 반대하고 있고 목포대학교의 실험결과에서도 염해피해가 우려되었으나 시에서는 무슨 일인지 무작정 밀어붙이고 있다. 때문에 추적60분에서도 격하게 까였다.
그런데 2010년 여름 실제로 해상분수가 완공되어 해양문화축제 때 선보이자, 까던 말들이 사라져 버렸다. '''예상 외로 이쁘다''' 는 것.[23] 해양분수는 "춤추는 바다분수"로 명명되었고, 3~11월 동안 비가 오거나 강풍이 부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공연을 한다. 중간 중간 쉬는 타이밍에 사연과 신청곡도 들려준다. 인근 주민들은 몇 번 보니까 식상해하기도 하는데, 외지에서 오는 사람은 보고 뻑 가는 듯. 실제로 목포에 방문하는 '''내일러'''들에게도 필수 방문코스.
주요 관광지로 유달산이 있으며 바다를 면한 박물관 밀집지역인 문화의 거리가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구 국립해양유물전시관[24] ), 목포자연사박물관, 남농[25] 기념관 등이 가깝게 붙어 있으며 목포문화예술회관도 그 근처에 있다. 이 근처에 있는 갓바위#s-3는 2009년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볼 것은 없지만 유달산과 가까운 연안여객선 터미널을 통해 흑산도나 홍도와 같이 관광지로 유명한 섬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인근 횟집들에서 서울에 비해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수산물을 즐길 수 있다. 여름 민어가 유명.
유달산 관광사업으로 케이블카를 추진하고 2018년에 완공을 목표로 하였으나 2018년 6월 1일 오후 12시 경에 케이블카 기둥이 무너지는 일이 발생해 완공이 미뤄졌고, 약 1년 후인 2019년 9월 6일 목포해상케이블카가 개통되었다.
개통 후, 총 길이 3.23km의 압도적인 탑승거리와 볼거리로 베트남 빈펄케이블카를 능가하는 아시아 최고의 노선으로 평가를 받은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서 목포케이블카를 타려고 몰려들어서 지금은 목포의 대표 관광코스로 지정되었다.
도시 크기가 크지 않아 주요 관광지들이 한곳에 다 모여있어 짧은 이동거리로도 거의 다 쉽게 볼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다.
7.1. 관광지
- 유달산
- 목포케이블카
- 목포근대역사문화거리
- 목포근대역사관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전시관
- 목포자연사박물관
- 목포문학관
- 고하도
- 목포해상분수
7.2. 대표 축제
- 유달산 꽃 축제 (매년 4월 초 개최 /유달산 일원)
- 목포항구축제 (매년 7월 말 또는 8월 초 개최 / 삼학도, 평화광장 일원, 舊 목포해양문화축제[26] )
- 목포시민의날 (목포 덕인고 출신 개그맨 배동성이 지상파에서 개그 소재로 활용한 적이 있다. )
8. 스포츠
대한민국 3부 축구리그인 K3리그에 참가하는 FC 목포의 소재지이다.
9. 교육
9.1. 현황
9.1.1. 대학교
종합대학교는 목포대학교[27] , 목포해양대학교, 목포가톨릭대학교가 있고, 전문대학은 목포과학대학교가 있다.
9.1.2. 고등학교
고등학생들의 수준은 대체로 타 지방 중소도시의 평균만큼은 한다. 그런데 인근에 있는 광주광역시가 전국 1위라서 목포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타지 광주의 고등학교로 가는 학생도 있고, 전남외국어고등학교 전남과학고등학교 로 가는 학생들도 많다. 수시 지혁 균형으로 서울대에 합격은 하나 최저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다른 지역에 비해서 공립학교가 고등학교에 한해서 굉장히 적고, 사립학교가 많은 편이다. 고등학교는 1920년에 도립 목포상업전수학교 현. 목상고등학교가 목포시내 모든 고등학교 중에서 최초로 개교했고[28] , 40년대에 목포고등학교의 전신인 목포중학교가 개교, 40년대 후반에 목포여자고등학교가 개교되면서 본격적으로 인문계 교육의 양성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5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 영흥고등학교, 문태고등학교, 홍일고등학교로 위시되는 사립학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공립학교를 세울 조건도, 땅(...)도 마련되지 않아 목포제일여자고등학교를 이후로 공립학교는 더이상 세워지지 않고 있다. 공립학교는 현재 목상고등학교, 목포고등학교, 목포여자고등학교, 목포제일여자고등학교가 인문계로서 운영중이고, 목포공업고등학교가 실업계로서 유일하게 공립으로 운영중이다. 반면, 사립학교는 남학교인 목포홍일고등학교, 목포마리아회고등학교, 목포덕인고등학교가, 여학교인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 목포혜인여자고등학교, 목포여자상업고등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영흥고등학교, 문태고등학교 등이 목포시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 중고등학교는 평준화 이후로 사립이 강세고, 공립은 굉장히 약하다. 2005년 이전 고교 비평준화 시절에는 거꾸로 공립이 강세, 사립이 약세였다. 이 시기에는 공립학교인 목포고등학교가 제일 위에서 군림하고 역시 공립학교인 목포여자고등학교, 사립학교인 영흥고등학교, 문태고등학교 및 전남제일고등학교가 그 뒤를 따르는 형세였고 목포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었으나 대학들이 수시를 통해 내신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뽑기 시작하면서 영흥고, 문태고, 홍일고를 필두로 하는 사립 고등학교들이 같은 재단의 사립중학교에서 우수학생들을 유치하여서 [29] 좋은 내신점수를 만들어 주어 수시로 대학들을 보내기 시작하자 목포고의 위상이 흔들리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학생들을 정시로 뽑던 시기에는 정시를 통해 명문대 입학생을 많이 배출하며, 위세를 유지하다가 2005년 고교 입학생부터 평준화로 학생들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망했어요. 결국 비평준화 마지막 세대인 2007년 수능의 응시생인 2004년 입학생에서 인문계 광주전남 수석[30] 및 자연계 광주전남 수석을 배출한 것을 마지막으로 망했어요(...)
또 다른 공립고등학교인 목포상고는 일반계인 전남제일고등학교[31] 로 바뀐 뒤 더 망했어요...[32] 이고, 목포고 역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최근 하향세. 평준화 이후 목포영흥고등학교, 문태고등학교, 목포덕인고등학교, 목포홍일고등학교 등의 사립고들이 잘 나가고 있다. 평준화 후부터 2012년 즈음까진 영흥고가 홍일고와 함께 명문대 배출자를 두고 우위를 겨누다 교내에서 안 좋은 일(?)로 인하여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상태고 그 틈을 타서 홍일고가 성장하여 14년 현재 가장 명문고로 언급되고 있다. 13년에 수능 자연계 만점을 맞 모 학생도 이 홍일고 출신이다. 이후 14년도 입시 성적도 일반고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였다. 15년에 수시에서 말도 안 되는 포텐이 터지고 수능 성적으로는 전남 문과 수석 이과 차석이 배출되어 전남권에서는 명문 사학으로 자리매김을 했으나...[33]
목포 지역 중학생들은 학교를 잘 생각하자. 참고로 고교평준화 지역이므로 뺑뺑이다. 물론 일부 사립중학교에서 자교의 성적 중하위권 학생들은 절대로 같은 재단 고등학교를 못 쓰게 하고, 공립고등학교인 목포고나 목상고(구, 전남제일고)에다가 다 몰아줘 버린 다음에 일부러 미달 혹은 정원에 가까운 인원 정도만 지원하도록 만든 후 타 중학교 상위권 학생들에게도 이러한 점을 어필해서 상위권 학생들을 끌어모으는 식의 '장난질'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34] [35]
9.1.3. 도심 공동화
현재 목포시 교육의 문제는 원도심 공동화에 따른 학생 수 편중 문제이다. 목포시의 구도심+하당신도심+전남도청의 인구는 하당신도심을 거쳐 남악신도시까지 지속적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를 못 따라가고 있어서 원도심 학교들의 학생수 감소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다. 서부초등학교는 북항의 버프를 받아 현재까지 약 1000명 가까이인 850여 명의 학생수로 살고있다. 원도심이야 이미 심각한 지 한참 되었지만 남악신도시가 개발된 2010년대에 들어서는 여파가 퍼지고 있다. 유달, 산정, 연동, 남, 중앙, 북교 등 원도심 초등학교는 학년당 한두 학급 겨우 유지하는 수준이고, 서산초등학교는 한 학년당 인원이 10명 이내로 거의 섬 초등학교 수준이고,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미어터지는 수준으로 열심히 교사(校舍)를 증축하고 신설학교를 추가로 개교시키던 하당신도심이나 북항지역 초등학교들마저 교실이 남아돌고 있다. 게다가 단순히 신도시 개발뿐만이 아니라 출산율까지 떨어지며 남악신도시를 개발하는 동안 초등학교 신입생수가 1천여 명 이상 감소해서 더욱 학생수 감소현상은 심화될 전망이다.[36]
초등학교야 통학거리 등의 문제로 소규모 학교라도 유지시켜야겠지만 중, 고등학교는 신도심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학교 신설만 하고, 기존 학교 정리나 이전 등의 대책은 세우지 않아서 원도심 학교 진학 기피 현상으로 인해 구도심 학교들이 여파를 입고 있다. 게다가 고교평준화의 영향으로 사립중학교들이 새로이 명문고가 된 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발판 등으로 인식되면서 지원률도 떨어져 애꿎은 공립중학교들만 미니학교가 되가고 있다. 목포 버스 13-1번이라는 전용 통학 노선까지 만들어가며 유치한 목포여중의 2014년 신입생수는 특수학급 제외 2학급 54명이다. 거기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원도심 공립 3개 남학교(제일, 유달, 청호)들도 학급감소가 심각하다. 제일중학교의 경우 한때 목포시 인구 1/4가 하당지역에 있던 유일한 남중이었던 영흥중학교가 1999년부터 남녀공학이 되면서 하당중학교가 개교한 2005년까지 남학생이 갈 수 있는 학교가 0.5개뿐이라 신도심 근처에 위치한 관계로 미어터졌지만 이마저도 이제는 학급이 줄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수요 불균형에도 일단 원도심 학교들이 학급수를 줄여서라도 유지는 되고 있는데 뺑뺑이 추첨에서 운 나쁘면 누군가는 신도심에서 원치 않은 원도심 중학교로 진학하게되니 이에 대한 신도심이나 남악신도시 옥암지구 주민들의 불만도 많고, 해마다 구도심으로 진학하게된 학생들이 대량으로 위장 전입을 써서 무안군 관내인 남악신도시 남악지구의 남악중학교로 전학신청을 하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이에 또 2013년에는 남악중학교 교사들이 과밀학급으로 교육의 질 저하가 우려된다며 관할 교육청에 배정중지 요청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기사참조 거기에 원도심 고등학교들도 평준화로 인한 사립학교로의 학생 쏠림 및 도심 공동화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결국 학생 수 감소를 버티다 못한 청호중학교는 용해지구의 새로운 택지개발지구를 따라 학교를 이전하였다.# 기사참조 위에서 언급한 목상고등학교 역시 옥암지구로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기사참조 ~그런데 옥암지구의 학교 부지들이 워낙 콩알만 해서 옥암지구로 가면 교지 면적이 1/4~5로 줄어든다(...).~ [37]
9.1.4. 유학생
목포 근처의 타 지역에서 목포로 유학오는 경우도 있다. 특히 목포 근처의 지역이 대부분 섬과 같은 지역이라 섬 내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아예 목포로 오는 경우도 있고, 질 좋은 교육이나 체육특기생 등의 이유로 목포로 오기도 한다. 목포가 죽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전남 서남부에서는 목포만 한 도시가 없기 때문. 이렇게 시내로 들어오는 많은 학생들이 목포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숙사 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애초에 시내로 '''유학'''오는 이유가 잘나가는 학교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으니, 하지만 평준화 이후 망했어요 평준화 이후 목포고등학교는 기숙사 방이 남아돌아 4인실을 3인실로 바꿨다.
9.1.5. 장학 제도
목포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광주로 올라가기 때문에 이를 잡아두기 위하여 목포시에서는 목포시내 고등학교 출신자가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면 4년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실력이 있는 학생은 노려볼 만하다!
9.1.6. 특수목적고
특수목적고로는 전남예술고등학교와 전남체육고등학교가 근처에 있기는 하지만, 전남외국어고등학교 및 전남과학고등학교 등 특목고를 노리는 목포권 중학생들은 무조건 나주시로 가야한다.
9.1.7. 기타
전라남도의 22개 시군 중 유일하게 '읍과 면 지역 및 도서와 벽지지역 교육진흥법'의 적용이 되지 않는 지역이다. 동부권의 순천시, 여수시, 광양시 등이 인구도 소득수준도 목포시보다 높음에도 위 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데 반해, 목포시는 상대적으로 인구도 적고 경제수준이 낮은데도 도농복합시가 아니기 때문에, 즉 '''읍과 면이 없고 동만 있기 때문에'''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근데 여순광 지역이라 해도 읍면 지역이 적용 받지 시내 지역은 어차피 적용 안 받으니 그게 그거.
9.2. 공립유치원
- 단설 목포서부유치원, 목포옥암유치원, 목포백련유치원
- 병설: 목포북교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산정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중앙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유달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동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이로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남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서산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대성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용호초등학교병설유치원,목포삼학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연동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임성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대연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상동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부영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하당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연산초등학교병설유치원,목포신흥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청호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한빛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미항초등학교병설유치원,목포서해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용해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석현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항도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애향초등학교병설유치원, 목포부주초등학교병설유치원
9.3. 초등학교
9.4. 중학교
9.5. 고등학교
9.6. 특수학교 / 평생교육시설
- 사립: 목포인성학교(특수학교), 목포제일정보중·고등학교(평생교육시설)
- 공립 : 목포고등학교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평생교육시설), 목포중앙여자중학교부설목포방송통신중학교(평생교육시설)
10. 정치
현재로서는 전남에서도 비중이 크게 축소된 중소도시에 머무르지만, 한때 전국 7대 도시 및 3대 항구에 속할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곳이었기에 목포시의 정치 역사는 광주광역시 못지 않게 호남 정치사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목포를 기반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있으며, 최근까지도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이 지역구를 차지한 곳이기도 하다.
11. 하위 행정구역
목포시/행정 참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목포시의 도시구조는 크게 네 지역으로 나뉜다.
12. 행정구역 통합 문제
목포는 예전부터 좁은 부지의 한계로 재개발 말고는 더 이상 개발할 곳이 없어, 주변 지자체들(신안군, 무안군)과의 통합을 추진해왔었다.
13. 출신 인물
- 강성만
- 강준만 : 학자, 現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 권노갑 : 정치인, 前 국회의원. 출생지는 경북 안동시이다.
- 권아솔
- 김경호 : 가수
- 김기수 : 코미디언
- 김문옥
- 김미희(정치인)
- 김부용
- 김승현 : 프로게이머. 오메킴 김승현.
- 김영후 : 전 병무청장, 육군 중장.
- 김우진 : 작가
- 김정균(배우)
- 김정수(해군)
- 김종수(가수)
- 김주하 : 배구선수, 수원 현대건설 소속
- 김지하 : 시인
- 김홍일(1948) : 김대중 前 대통령의 장남.
- 김희중(종교인) 대주교 :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 남진 : 가수
- 노래하는코트 : 인터넷 방송인
- 동해 : 가수, 슈퍼주니어 멤버.
- 민영삼
- 박나래 : 코미디언. 목포상동초 - 항도여중을 나왔다.
- 박성수
- 박영수(법조인)
- 박용운
- 박재복(군인)
- 박진주 : 배우
- 박화성
- 배동성 : 코미디언.
- 서기호 : 前 판사, 19대 국회 정의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여담으로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 손정수 : 전 농촌진흥청장
- 손종환 : 성우.
- 송상엽 : 공인회계사, 웅지세무대학 설립자
- 심건 : 프로게이머.
- 아놀드홍
- 염혜선 : 배구선수, 대전 KGC인삼공사 소속
- 영재 : 가수, 갓세븐 멤버
- 오정해 : 배우
- 오지호 : 배우 오지호.
- 오현민
- 유남석
- 이경제
- 이계식 : 전 제주도 정무부지사
- 이기호 : 前 노동부 장관, 경제수석비서관
- 이난영 : 가수, 목포의 눈물을 부르신 그분. 2006년 3월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던 묘를 목포로 옮겼다.
- 이남규
- 이상준
- - 前 국회의원. 헌정사상 최초로 내란선동죄로 처벌받은 종북주의자.
- 이윤아 : SBS 아나운서
- 이주석 : 오버워치 리그팀 샌프란시스코 쇼크에서 활동하는 프로게이머.
- 이호성
- 이효경 : 여자 축구선수
- 이훈평 : 정치인, 前 국회의원.
- - 사기꾼.
- 장하연 : 경찰청 차장
- 전윤철
- 전해철 : 제19~21대 국회의원[38]
- 정만식
- 정영식(정치인)
- 정재훈
- 정종득
- 정현호(축구) : 축구감독
- 젤로 : 아이돌 B.A.P의 前 멤버
- 조상기(정치인)
- 조여옥 :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간호장교였다.
- 조용인 : 프로게이머. 출생지는 전남 신안군 증도면이다.
- 조훈현 : 바둑기사, 자유한국당 20대 국회의원
- 주무열
- 진경준
- 최대집 : 現 대한의사협회장
- 최서현(DooYoung) : 고등래퍼 시즌1 출연
- 최영철
- 최진혁
- 최준영 : 작곡가
- 최향남 : 야구인
- 추규호
- 황영희 : 배우
- 황현산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 황희 : 정치인, 제20, 21대 국회의원[39]
- XYZZY
14. 무대탐방
- 롱리브더킹: 만화
-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 영화. 만화 롱리브더킹을 영화화한 것.
- 목포는 항구다: 영화. 그러나 목포 토박이들은 정작 이 영화를 보고 눈이 뒤집혔다고 하는데, 영화 로케가 전혀 현실에 맞지 않았던 점(...). 서울로 비유하면 바로 전 장면에서 압구정이던게 그 뒷 장면에서는 종로가 되는 격이었다나.
- 목포의 눈물: 이난영의 노래
- 정년이: 웹툰
15. 기타
이 도시에 있는 오거리문화센터는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가진 건물이다. 원래 일제강점기에 히가시혼간지의 말사인 '목포별원'으로 세워졌다가, 해방과 6.25 전쟁을 거친 뒤 1957년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포중앙교회가 사들여 안에 있는 것들을 없애고 교회로 개조해서 2007년까지 사용했었다. 2008년 목포중앙교회가 옥암동으로 이전한 뒤에는 목포시에서 다시 사들여 현재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제주도 출신들이 많이 살기도 한다. 특히 4.3사건 이후 이주자가 많았다. 일례로 박영수나 부좌현이 있다. 따라서 제주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성씨들도 목포시에서 유의미하게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세월호가 거치될 곳이 목포시 달동에 있는 목포 신항이다.
도시가 면적이 매우 좁아서 택시를 탈때 굳이 동 단위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 대부분의 목포시민들은 택시 탈 때 목적지 주변 건물 이름으로 말한다.
2010년에 목포 여대생 살인 사건이 발생했으나, 근방 CCTV가 고장나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던 점, 발견된 피해자의 유류품들이 바닷물에 젖어[40] 국립과학수사연구원도 감정불가능한 점, 목격자의 제보가 전무한 점 등 때문에 2010년부터 계속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16. 둘러보기
[1] 2021년 1월 주민등록인구[2] 경기도에 속하지 않는 자치시, 행정시 중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 부산광역시와 비슷하고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 대전광역시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물론 언급한 예시들은 땅이 넓으며 그린벨트로 묶인 곳이 많고, 목포는 그냥 도시가 땅이 워낙 좁아서 포화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차이는 있다. 만일 다른 지역처럼 무안군 등과 통합된 도농복합시 형태였다면 목포시의 인구밀도는 400명/㎢ 정도로 크게 줄어든다.[3] 가선거구(해당 선관위에서 보궐선거는 실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4] 이외에도 맛의도시 목포, 대한민국 4대 관광도시 목포, 슬로시티 목포가 있다.[5] 가운데가 목포 시가지, 오른쪽이 남악신도시, 왼쪽은 영암군 삼호읍(대불국가산업단지)이다.[6] 해수욕장은 배 타고 외달도로 가야한다. 유달해수욕장은 2006년에 기능 상실로 인해 폐쇄되고, 유달유원지로 개명했다.[7] 여기에는 1960~1990년대에 이루어진 경제개발이 경부라인과 경인라인에 집중되었으며, 복선으로 이루어진 경부선과 경인선, 그리고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같은 좋은 교통 인프라가 영향을 주었다.[8] 사실 도청이 행정구역상으로 무안군 영역에 있기만 하지, 도청이 있는 곳은 행정구역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그냥 목포다. 위성사진을 띄운 다음 어디까지가 목포시이고 어디까지가 무안군인지 분간이나 해 보자. 할 수가 없다![9] 순천과 승주는 원래 한도시 였다가 흩어져, 1995년 다시 통합했다.[10] 전국적으로는 경기도 구리시, 과천시, 군포시, 광명시, 오산시에 이은 전국에서 6번째로 좁은 시. 게다가 군포, 광명, 오산, 구리는 읍이었고, 과천이 특수 목적시인 걸 감안하면(...)[11] 처음에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삼백련(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 으로 바꾸어 부르다가 광복 후 고쳤다.[12] 당시 이로면사무소는 현재 목포의료원 자리.[13] 이 때문에 숙면을 해야 컨디션이 좋은 사람들은 낮기온이 화끈하게 오르더라도 밤이면 기온이 확 떨어져 열대야가 드문 홍천군, 합천군같은 곳이 차라리 낫다고 느낄수도 있다.[괄호] A B C D E F G H I J K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광주] A B 지점이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대전] A B 지점이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하동] 지점이 가장 가까운 지점이다.[14] 처음으로 적금을 출시했으며, 조선식산은행이 자본금 일부를 대기도 했다.[15] 예전에는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중앙정부에 의해서 도와 직할시는 물론이고 일반 시 및 군의 금고은행을 선정해주곤 하였다. 농협은행이 가지고 있는 많은 군 지역들의 지점은 이것이 원인이기도 하다.[사실] LG목포빌딩이었다가 LIG로 분리되었고 LIG손해보험을 KB금융지주가 인수하면서 빌딩까지 매입한것이다. 실제로 KB손해보험과 KB손해사정 등. KB금융지주가 이 빌딩에 모여있다.[16] 빈말은 아닌게, 광주은행은 목포시 조차도 4개 지점 밖에 없으며, 진도군과 신안군 그리고 구례군에는 아예 지점이 없다. 심지어 있는 군들도 읍에만 1개씩 있을 뿐 지점망이 광주광역시를 제외하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라서, 전남에 거주하려거든 농협은행(중앙회) 통장을 만들자, 농협은행 통장으로 농축협도 거래가 가능하니 말이다. 또, 우체국이나 우체국에서 수수료 없이 거래가 되는 하나은행(ATM 한정)이나 기업은행, 산업은행도 답이 될 수 있다. [17] 원래는 LG목포빌딩이었는데, LG그룹이 LIG로 분리되면서 가져갔다가, LIG손해보험이 KB금융지주로 인수되면서 KB금융지주가 국민은행을 입주시키려 재계약을 안했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국민은행은 상락동에 있었다.[18] 농협은행과는 달리 수협은행 분리 이전에도 한동한 수협법에 의해 수협은행이라는 명칭으로 운영되었다.[19] 쌀과 면화 수출항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상도 지역의 쌀은 부산항을 통해, 충남, 전북지역의 쌀은 군산항을 통해, 그리고 전남 지역의 쌀은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기에 목포에는 많인 일본인 미곡상들이 거주하여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은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20] 지금의 목포를 보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광복 당시만 해도 전국 10대 도시 중 하나로 뽑힐 정도였다. 1966년 당시 인구 순위는 전국 8위였다. 10대 도시는 서울 -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 - 전주 - 목포 - 마산 - 수원 순. 대전까지 끊어서 직할시 승격 테크를 타고 목포는 과거에 비해 그 위세가 줄었지만, 마산은 통합을 통해 100만급의 창원으로, 수원은 통합 없이 100만급으로 커져 광역시드립을 날리고 전주도 과거보다 위세가 줄었지만 여전히 전북 최대 거점 도시로 호남 북부권의 대표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불균형개발의 큰 피해자 중 하나라 볼 수 있다.[21] 하당과 남악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이 지역은 더더욱 재개발의 꿈도 희망도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유달산 근방은 나름의 정취라도 있지만 7-80년대 주택들과 점포들이 위치한 삼학도 일대는 그저 안습[22] 행정상으로는 무안군. [23] 이전에 깠던 주변토지의 오염문제도 분수주변을 아예 해수에 강한 소재를 사용해서 공원으로 조성 해버린 건 덤.[24] 국립해양박물관 승격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어영구영 시간만 보내던 도중 부산에 국립해양박물관을 떡하니 지어버렸다.현재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개칭[25] 남농 허건(1907~1987) : 한국화가. 한국화에서 남화를 잇는 중요한 화가로 꼽힌다.[26] 시장이 바뀌면서 축제 이름도 바뀌었다. 목포대의 한 교수가 오래전부터 이름변경을 권고한 결과.[27] 이름은 목포대학교인데 대학본부가 무안군에 있다. 원래 용해동에 있던 목포교육대학에서 시작해 무안 청계로 이전한 것. 용해동에는 아직 목포캠퍼스가 있다.[28] 당시에 목포와 광주는 고등보통학교 유치전을 벌였는데 광주에 유치되면서 총독부에서 일종의 회유책으로 실업계 고등학교를 개교시킨 것. 그래서 한인과 일본인의 공동 재학 학교로 개교하였다.[29] 과거에 마리아회중학교가 있었으나 폐교됐다.[30] 이 학생은 이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다. 모종의 사태만 없었다면 공동 수석이었기에 사실상 수석 취급을 받기도.[31] 2014학년도부터 장사 상(商)자를 으뜸 상으로 재해석(?)한 목상고등학교로 교명 변경[32] 명색이 대통령을 배출한 학교지만 목포에서의 인식은 실업계와 동급 내지 그 '''이하'''이다. 일반계로 전환한 이후 서울대학교 합격생은 아직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였다.[33] 목포시의 고교 성적 평준화 이후 입학한 15년도 신입생들은 모의고사 성적에서 선배 학년에 비해 후달리는 모습이 보여 이러한 명성도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34] 하지만 이러한 장난질을 막기 위해 2015학년도 고입부터는 성적을 고려하여 목포시 전 고등학교의 입학생의 성적이 동일하도록 뺑뺑이를 돌리게 되었다[35] 예를 들면 100점이 10명이고 90점이 20명일때 학교가 10개면 한 학교당 100점은 한 명 90점은 2명을 배정하는 식.[36] 목포MBC보도에 따르면 2007년 3,729명이던 초등학교 신입생 수가 2013년 2,623명 까지 감소하였다.[37] 목상고 부지는 목포시내 학교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로 유명하다.[38] 지역구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갑[39] 지역구 : 서울특별시 양천구 갑[40] 하지만 사건현장은 바닷가와 꽤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