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사례
1. 개요
천도한 사례에 대해 정리한 문서.
2. 동아시아
2.1. 한국
2.1.1. 고조선
본래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하 혹은 요동에 있다가 연나라의 침공으로 요동을 상실하면서 대동강 유역의 왕검성으로 옮기게 되었다는게 통설이다. 하지만 기록이 많지 않고 이때 정말 수도를 옮겼는지에 대해서도 명문화된 기록이 없으며[1] 그저 추측이나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존하는 수준.
2.1.2. 고구려
졸본성[2] →국내성(유리왕)→평양[3] (장수왕)
사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를 읽다 보면 고구려의 도읍이 중간에 여러 번 옮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현대적 의미의 천도는 장수왕 대의 평양 천도이며 이를 제외한 다른 천도는 대략 '천도 미만, 이궁(移宮) 이상' 정도의 뉘앙스라고 볼 수 있다. 왜냐, '''고구려는 평지성 - 산성을 동시에 쓰는 이중수도 체제였기 때문.''' 삼국사기에 의하면 198년(산상왕 2년)에 환도성을 축조한 뒤 209년에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46년 고구려의 서안평 공격에 대한 응징으로 위나라의 관구검이 대대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침공하면서 함락되어 파괴되었는데 동천왕은 환도성의 백성들을 보기 부끄럽다고 하여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다만 대체로 환도성은 평지의 국내성 인근에 있는 산성자산성으로 보는게 정설이며 여기에서 언급된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환도성 인근'''의 성으로 보는데 삼국유사에서 안시성을 평양성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정확치는 않다. 어쨌든 이후 국내성으로 다시 돌아왔다가 고국원왕 때 전연의 침략에 대비해 환도성을 다시 수축하고 도읍을 옮겼지만 342년 전연의 침공으로 함락당하고 만다. 보면 외적의 침략으로 국내성, 환도성을 오간것으로 보이는데 국내성은 평지성이고 환도성은 인근의 산성이기 때문에 크게 보아 국내에서 수백년간 도읍했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이후 국내성으로 옮겼다가 장수왕대에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장수왕은 평지성인 청암리토성, 산성인 대성산성, 왕궁인 안학궁을 지었는데 이후 평원왕이 안학궁 서쪽에 나성을 두른 장안성을 건설하고 그곳으로 천도하여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장안성을 도읍으로 삼게된다.
즉 졸본-국내성-평양이란 고구려 역대 수도의 변천은 큰 줄거리를 말한 것이고 국내성 기간중에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을 오갔으며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에 안학궁+대성산성, 청암리토성 체제였다가 평원왕이 안학궁 서쪽에 나성을 두른 장안성을 축조하고 수도를 옮겼다고 볼수 있다. 장안성 이전까지는 고구려 특유의 평상시에는 평지성, 전시에는 산성으로 옮기는 체제에 따른 것이며, 장안성을 축조한 이후부터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원화된 도성 체제가 구축된 것.
2.1.3. 백제
위례성→웅진성[4] (문주왕)[5] →사비성[6] (성왕)
건국 당시 초기 수도는 서울특별시의 풍납토성 이었지만 근초고왕 때 '도읍을 한산으로 옮기다.'란 기사가 있는데 이 기사로 말미암아 한성(위례성), 한산(북한산성)으로 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무왕 때 전라북도 익산시로 천도하려 했다는 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패했거나, 일시적으로 천도했다 해도 곧 사비로 환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쌍릉이 있다.
삼국통일전쟁의 시기 백제멸망전의 최후반부에 의자왕은 수도 사비성에서 방어에 유리한 웅진성으로 파천하였고 그곳에서 항복한다.
2.1.4. 신라
지금의 경주시인 서라벌에서 건국해 1천여년간 수도를 옮기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세부적으로 보면 초기에 정확한 위치 불명의 금성에서 경주 월성으로 옮겼고, 자비 마립간 때인 475년부터 12년 간 명활성으로 옮긴 적이 있다. 기간도 짧고 금성이나 명활성도 모두 지금의 경주시 영역 안쪽에 있는 곳이고 해서 신라의 수도 변천사에서는 보통 언급을 생략하는 편이다.
신라에서도 천도 시도는 있었다. 신문왕이 달구벌로 천도를 추진했으나 서라벌의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딛혀 좌절되었다.
2.1.5. 발해
오동성→중경→상경→동경(3차례 모두 문왕)→상경(성왕)
큰 줄기로 보면 중경-상경-동경-상경이나 세부적으로 볼 시 위와 같이 동모산 오동성(698~741) -> 중경(742~755) -> 상경(755~785?) -> 동경(785?~794) -> 상경(794~926) 순이 된다.
고왕 대조영이 동모산(오동성)에 698년 12월 발해를 건국한 후 문왕 5년(741)까지 44년간 수도역할을 한 후 문왕 6년(742)에 중경현덕부로 천도, 중경현덕부가 안사의 난이 발발한 755년까지 발해의 수도로서 자리잡았다. 안사의 난이 발발하자 요동 정세가 불안해진 것을 감지한 문왕은 중경에서 동쪽에 위치한 상경용천부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785년 무렵, 문왕은 다시 동경용원부로 천도하는데 동경용원부로의 천도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원의 혹은 흑수말갈 복속, 일본과의 무역과 관련된 일로 추정된다.
문왕의 족제이자 발해의 4대왕인 대원의가 살해당한 후, 문왕의 손자인 대화여가 즉위하였고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재천도하여 발해 멸망때까지 지속된다.
2.1.6. 태봉
송악→철원(905년)[7]
2.1.7. 고려
철원[8] →개경(919년)[9] →강화도(1차 여몽전쟁이 끝나고 최우의 주도 하에 천도)[10] →개경(원종)[11]
2.1.8. 조선
한양→개경(정종)[12] →한양
한양 재천도는 태종이 점을 쳐서 했다는데, 점괘는 천도 반대파를 누르기 위한 단순 빌미에 불과했다. 개경은 이전 왕조의 수도인데다 고려 말 고려 왕조조차 한때 남경(사실상 한양)으로의 천도를 끊임없이 검토했고 실제로 우왕과 공양왕대에 각각 5개월 정도 남경으로 천도한 바 있을 정도로 개성의 지리적 조건이 한양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13]
2.2. 중국
- 북위: 효문제의 한화 정책을 위해 만리장성 인근의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 이 때 효문제는 송을 정벌하는 척 페이크를 써서 군대를 동원해 낙양에 진주한 뒤,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통해[15] 천도에 성공한다.
- 금나라: 희종 때까지는 만주에 위치한 상경회령부에 수도를 두었으나, 해릉양왕이 한화 정책을 시도하기 위해 연경으로 천도하고 그 이름을 중도로 고친다. 이후 몽골 제국의 공격을 받고 선종 때 카이펑으로 수도를 옮긴다.
- 중화민국/국민정부: 국부천대 문서로. 중일전쟁에서 난징이 함락되자, 충칭으로 옮기고 이후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난징을 다시 수도로 했지만, 얼마 안지나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륙에서 밀어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공산당은 베이징을 수도로 하였다. 대만으로 대피한 국민당은 사실상 타이베이가 수도가 되었다.
2.3. 일본
- 헤이안 시대: 간무 덴노가 나라현에서 교토로 천도. 다만 이후 막부가 들어서면서 실질 수도는 막부가 있는 곳들이 된다.
-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막부가 가마쿠라시에 있어서 교토에서 천도.
- 에도 시대: 명목상 교토, 에도 막부는 에도(지금의 도쿄)가 본거지라 실질적으로 수도였다.
3. 동남아시아
3.1. 인도네시아
자바 섬 자카르타에서 보르네오 섬으로 천도 준비 중.
3.2. 미얀마
2005년 양곤에서 핀마나(지금의 네피도)로 천도.[17]
4. 중앙아시아
4.1. 몽골
몽골 제국 시절 쿠빌라이 칸의 치세에 남송을 멸망시킨 후, 카라코룸에서 대도로 천도하고 원나라의 건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명나라의 흥성으로 인해 중국 대륙을 잃고 카라코룸으로 재천도한다.
4.2. 카자흐스탄
1997년 알마티에서 아스타나(지금의 누르술탄)로 천도.
4.3. 우즈베키스탄
우즈베크 SSR 시절 초기 수도인 사마르칸트에서 1930년 타슈켄트로 천도.
5. 서남아시아
5.1. 사산왕조 페르시아
아르다시르 1세가 파르티아를 멸망시키고 에스타흐르에서 크테시폰으로 천도한다.
6. 유럽
6.1.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또는 행정 중심지였던 메디올라눔과 니코메디아)에서 비잔티움으로 천도.
6.2. 서고트 왕국
507년 프랑크 왕국과의 부예 전투에서 국왕이 전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어 아키텐(남프랑스)에 있던 툴루즈를 포기하고 히스파니아의 톨레도로 옮겨간다.
6.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크라쿠프에서 바르샤바로 천도.
6.4. 사르데냐 왕국
본래는 사보이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프랑스 사부아에 수도를 두었으나, 이후 나라가 팽창함에 따라 수도를 토리노로 옮겼다. 그 후에 이 나라가 이탈리아의 통일을 주도해서 통일에 성공하자 수도를 지금의 로마로 이전했다.
6.5. 스페인
톨레도, 바야돌리드, 마드리드 순으로 천도했다.
6.6. 독일
수도 이전(정확히는 부분 이전)을 결정하여 서독 시절 임시수도였던 본에는 환경 등 6개 부처만 남기고 외무 등 핵심 10개 부처를 현재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이전했다. # 하지만 베를린은 1871년의 독일 통일 이후 독일 국민국가의 수도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수도의 '이전'이 아니라 '복귀(환도)'로 볼 여지가 많다.
6.7. 네덜란드
'''제2차 세계 대전의 교훈'''에 따라 1949년 암스테르담에서 헤이그로 왕궁, 정부청사, 의회, 중앙은행 등 모든 정부기관을 이전했다. 네덜란드 헌법에는 암스테르담을 수도로 두고 있지만 실질 수도는 1949년 이후 헤이그이다.
6.8. 러시아
러시아 제국 시절대북방전쟁에서 승전한 후 표트르 1세의 계획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천도하였다.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 페트로그라드(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풍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바꾼 이름)에서 모스크바로 천도.
6.9.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SSR 시절 초기 수도인 하리코프에서 1934년 키예프로 천도.
6.10. 그리스
그리스 독립 전쟁 중에는 나플리오가 수도 역할을 하다가, 열강들로부터 그리스의 독립을 공인받은 후에 아테네로 공식 천도한다.
6.11. 터키
- 오스만 제국: 건국 후 1335년까지는 쇠위트, 1335~1363년 동안엔 부르사, 발칸 반도로 진출한 후 1453년까지는 에디르네, 1453년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후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천도한다.
7. 아메리카
7.1. 미국
미국은 천도를 2번 했다. 독립 직후 수도는 뉴욕시였으나 1790년 필라델피아로 천도했고, 1800년에 현 워싱턴 D.C.로 천도했다.
8. 중앙아메리카
8.1. 벨리즈
본래의 수도이던 벨리즈 시티가 태풍으로 개박살나는 바람에(...) 독립 직전인 1960년에 벨모판으로 천도한다.
8.2. 영국령 몬트세랫
위의 벨리즈와 유사한 사례로 이쪽은 화산폭발이 원인이었다. 섬의 화산인 수프리에르 힐즈의 분화로 인해 수도인 플리머스를 포기하고 임시수도인 브라데스로 천도한다.
8.3. 브라질
헌법을 통해 언젠가 내륙으로 수도를 이전하기로 하다가 결국 196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브라질리아로 천도.
9. 아프리카
9.1. 나이지리아
본래의 수도는 라고스였으나,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으로 인해 인구 격감을 위해 1991년에 아부자로 천도하였다.[18]
9.2. 부룬디
2019년 부줌부라에서 1966년까지의 구 왕도(王都) 기테가로 재천도.
9.3. 적도 기니
본토 바타에서 비오코 섬의 말라보로 천도. 말라보에서 다시 본토 시우다드데라파스(육지)의 신도시로 천도 중.
10. 오세아니아
10.1. 뉴질랜드
1865년에 오클랜드에서 웰링턴으로 천도했다.
10.2. 팔라우
1865년에 코로르에서 응게룰무드로 천도했다.
11. 취소, 실패, 논의 등의 사례
11.1. 동아시아
11.1.1. 한국
11.1.1.1. 백제
무왕이 익산 지역에 천도를 시도했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한다. 다만 무왕이 익산을 정식 수도로 삼으려 한 것인지 수도에 버금가는 수도에 버금가는 별도(別都)로 삼으려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무왕 치세에는 사비에 버금가는 중요한 도시로 격상된 것은 확실하며 학설에 따라서는 실제로 천도를 실행에 옮겨 수도로 삼았으나 다시 사비성으로 환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있다. 이때 왕궁으로 삼은것이 익산 왕궁리 유적이라고 비정한다. 왕궁리 유적 발굴 조사결과 수도를 뜻하는 '首府'(수부)라는 글자가 적힌 명문기와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익산에는 왕궁리 유적 뿐만 아니라 미륵사와 제석사지, 익산토성, 미륵산성,[19] 오금산성, 쌍릉[20] 등의 여러 백제 관련 유적들이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에 공주, 부여의 유적과 함께 등재되었을 정도이다.[21]
11.1.1.2. 신라
신문왕 때에 지금의 대구광역시인 달구벌로 천도하려 시도한 바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11.1.1.3. 고려
정종은 서경#s-1.1.1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으며 인종도 묘청을 중심으로 서경#s-1.1.1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서경 천도 운동을 시도했었다.
숙종 재위기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22] 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비기(秘記)인 도선기(道詵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하여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1104년에 남경 별궁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정식 궁궐은 조성'''을 했는데, 그게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터를 둘러보곤 그 남쪽에 궁을 지으니, 그 당시 사람들은 설마 이 때 찍어 놓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김위제가 이런것 까지 보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쨋든 그의 풍수지리학적 분석처럼 조선시대부터 남경이 수도가 되고 해방 이후에는 남경 별궁의 자리가 청와대가 되었으니 어쨋든 결과적으로 맞기는 맞음 셈이다.
무신정권기의 끝무렵이었던 김준 집권기인 1260년에는 여몽전쟁 항전의 한 방법으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을 파견해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별초의 난보다 11년 앞선 일이었다.
공민왕은 수원(水原), 평양(平壤), 남경(南京)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다. 수원같은 경우는 왜구의 침략이 심한 시기라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며[23] 차라리 훨씬 더 내륙에 위치한 청주가 낫다고 주장하였다.
우왕 대에는 남경#s-1.1으로 천도를 시도했으며 왜구를 피해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는것도 고려하였으나 최영이 반대하였고 실행되지 않았다.
공양왕 대에는 연주(漣州)와 한양 천도가 검토되었으나 모두 무산되었다.
11.1.1.4. 조선
광해군 때 풍수관 이의신, 시문용[24] 의 말에 따라 교하(구 교하군,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운정동, 교하동과 탄현면 일대 지역) 천도설이 불거진 바 있다. 그러나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결국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실패하였다.
11.1.1.5. 대한제국
고종은 수도를 한양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는 구상이 있었던듯 보인다. 실제로 이를 위해 어진을 평양으로 옮기고 수도이전을 위한 자금을 위해 세액을 증대하며 평양에 어느정도 공사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풍경궁이 이 계획의 흔적이다. 고려 왕조에 이은 제2의 서경 천도 운동이라 할 수있다.
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뉴스파워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평양천도는 고종의 미군 20만 원병과 중국정벌 계획을 밝힌 이하영의 말에서도 고종의 의도로 확인 되는바이다.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17 이하영 대감의 영어(英語) 출세기 신동아 아카이브고종께서는 아직 사절 일행이 여장도 꾸리기 전 내게 ‘대조선 해륙군 대도원수(大朝鮮海陸軍大都元帥)’라는 교첩까지 내리셨다.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서는 쉰양강(潯陽江)[25]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황도를 옮길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아사건’, ‘신민’ 1926년 6월호)
11.1.1.6. 대한민국
한국전쟁 초기 부산으로 정부가 피난온 시절에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경상도까지 점령당하면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로 몽진할 계획도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강북)을 대신하여 한강 이남, 지금의 부평, 부천, 영등포 일대로 수도 이전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당시 경제 상황상 폐기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는 대전으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다고 공약하기도 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도 1977년부터 공주시 일대로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다가 1979년 10.26 사건으로 김재규에게 암살당하면서 무산되었다.
이 시기 가장 큰 이유는 국토의 균형발전과 함께 휴전선과의 거리문제였다. 서울은 장사정포 문제에 더해서 그게 아니라도 북한과 너무 가까워 전시 수도로는 문제가 많았다. 애초 대한민국은 건국한지 2년만에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아 단 사흘만에 수도를 내주고, 반격에 성공하는 듯 하다가 한번 더 수도를 잃은 적이 있었으니 이런 우려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 시기는 북한과 전쟁이 벌어지면 서울은 일단 포기하고 후방에 지휘본부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의 한남대교가 건설된 계기도 강남 개발 촉진보다는 강북 주민들의 전시 피난용이었다. 이렇게 남북 분단 상황과 전쟁 위협 속에서 서울이 행정수도로서 적합하지 못하다는 인식은 모두가 가지고 있었고, 이 때 논의된 수도 이전은 어디까지나 분단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통일이 되면 다시 서울로 환도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노무현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행정수도를 충청남도 연기(현 세종특별자치시)·공주 일대로 옮기려는 시도를 했다가 여러 이유에 부딪혀 실패했다. 헌법재판소에서 '''서울은 관습헌법적으로 수도'''라는 위헌결정을 받아 폐기되었으며,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안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이나마도 정권이 바뀌면서 성격이 바뀌어 세종특별자치시가 된다.
앞에 언급한 관습헌법론에 대해서는 논란이 컸다. 관습헌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1. 국가의 수도의 위치는 헌법 사항이어야 한다. 아니면 관습법이니까 신법이나 특별법 우선 원칙으로 자동 폐기된다.
2. 수도는 서울이어야만 한다. '지금 현재 수도는 서울이다'로는 안 된다. 이는 '사실인 관습'으로 법적인 의미가 전혀 다르다.
위와 같은 국민들의 법적 합의가 필요하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 이전 계획은 일단 무산되었지만 적어도 남북통일시 통일 한국의 수도는 서울시가 아닌 다른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간헐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이명박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서울특별시장 시절에 개성 통일수도론을 주장한 적이 있으며 고양시, 파주시, 철원군 등 여러 지자체가 통일수도로는 자기 지역이 적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남북통일/수도 문제 문서로.
11.1.2. 일본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 수도권이 쑥대밭이 되자 다이쇼 덴노 등을 비롯한 도쿄 시민들이 수도 이전을 검토했으나, 검토 11일 만에 다이쇼 덴노가 도쿄를 수도로 계속 둔다는 조서를 발표하며 논의가 흐지부지 끝났다. 그리고 나중에 1990년에 수도 이전 결정을 내리고 1999년에 후보지 3곳(기후·아이치, 미에, 도치기, '''후쿠시마''')을 정했으나 아키히토 덴노 등을 비롯한 도쿄 시민들의 강한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다만 2021년 현재 한국 만큼은 아니지만 일본도 도쿄나 인근 지역에[26] 인구가 과잉되는 바람에 간사이 지방 이나 도호쿠 쪽으로 천도 하자는 의견이 있다. 아니면 도쿄를 상징적 수도로 하고 다른 하나를 정하자는 얘기도 있다.
11.2. 유럽
11.2.1. 동로마 제국
사산 페르시아의 카바드 2세의 공격으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인근인 칼케돈까지 점령되자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자신의 근거지였던 카르타고로 천도하려 했으나 총대주교의 만류로 포기한다.
11.3. 아메리카
11.3.1. 미국
1962년에 워싱턴 D.C.에서 시애틀로 천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 동부가 적국인 쿠바에서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시애틀로 천도를 했다면 시애틀은 뉴욕을 뛰어넘는 명실상부한 미국 포함 아메리카 대륙 최대도시로 우뚝 섰을 것이다.잘하면 옆의 밴쿠버와 하나의 도시권을 이뤄 더 커졌을 수도 있다.
11.3.2. 아르헨티나
라울 알폰신 대통령 시절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비에드마로 천도를 추진했으나, 1980년대 남미 전역을 휩쓴 경제 위기로 무산된 바 있다.
[1] 정사 삼국지 같은 중국의 문헌을 봐도 "연나라가 조선을 침공해서 영토 2000리를 확보했다" 정도로 추상적이다.[2] 공식적으론 동명성왕이 최초로 고구려의 터전을 잡은 성.[3]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천도했다.[4] 오늘날 충청도 공주시.[5] 5세기 장수왕의 남하정책때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개로왕이 전사하고 영토를 빼앗긴 것이 원인.[6] 오늘날 충청도 부여군.[7] 궁궐은 태봉국 철원성.[8] 태봉국 철원성.[9] 만월대.[10] 고려궁지.[11] 만월대(연경궁).[12] 1차 왕자의 난이 원인.[13] 한양은 삼남과 경기도, 강원도 세곡을 거둬들일 한강을 끼고 있어서 평안도와 황해도 세곡만 걷기 유리한 개경의 예성강보다 입지가 훨씬 좋았다.[14] 오(삼국시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일은 손권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로 보아도 신의 한 수에 해당되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건업은 당시 중국 최고의 꿀땅이던 형주에서 멀 리 떨어져 있어서 발전이 더딘 곳이긴 했으나, 그래도 미개발지가 대부분이던 양쯔강 이남에서는 그나마 가장 큰 대도시였던 곳이라서, 이후의 중국 남부의 개발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애초의 손오가 중국 경제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조위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다.[15] 정벌과 천도 중 어떤 것을 택할지를 물었고, 정벌보다 천도의 비용이 덜 먹힐 것 같았던 신하들은 천도를 지지했다.[16] 덤으로, 중국사에서 유일하게 명나라만이 강남에서 일어나 화북까지 통일한 유일한 왕조이다.[17] 천도라고 하기에 애매한 게 미얀마가 영국에 의해 양곤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수도가 만달레이 관구의 만달레이였다. 핀마나, 네피도 또한 만달레이와 함께 만달레이 관구에 현재도 속해 있고 이 때문에 네피도 천도가 간접 환도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18] 참고로, 라고스는 나이지리아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매우 빠르게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루었지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빈부격차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행정력에도 공백이 생겨 쓰레기를 관청의 청소행정 관련 부서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소각처리를 해서 해결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비아프라 전쟁의 중심지였으며 부족간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19] 기준성(箕準城) 또는 용화산성(龍華山城)이라고도 부른다.[20] 무왕의 묘로 추정된다.[21] 그중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것은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이다.[22] 한양부에서 남경 승격은 선왕인 문종(고려) 때이다.[23] 당시 수원은 화성까지 포함하였으며 중심부가 해안에 가까웠다.[24] 절강 시씨의 시조이다.[25] 양쯔강의 지류[26] 사아타마,치비,카나가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