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철도 환경/역사

 


1. 조선 말기(1877~1910) : 개화의 상징, 철도
1.1. 연표
1.2. 설명
2. 일제강점기 초기(1911~1939) : 전쟁을 위한 철도의 시대
2.1. 연표
2.2. 설명
3. 한반도의 격동 속에서(1940~1962) : 한국철도 최대 암흑기
3.1. 연표
3.2. 설명
4. 경제 발전기(1963~2003) : 자동차교통의 시대로 돌입했어도 나름 최선을 다해 투자했던 시기
4.1. 연표
4.2. 설명
5. 현재(2004~) : 고속철도의 개통과 , 광역·도시철도 위주로의 개편
5.1. 연표
5.2. 설명
6. 한국 철도 차량의 종류
6.1. 관련 문서

이 문서의 내용은 철도주요연표[1]를 많이 참조하였음을 밝힌다.
1899~1945▼

1945~현재▼

이 블로그도 참고.[2]

1. 조선 말기(1877~1910) : 개화의 상징, 철도


[image]
한국 최초의 기관차 모갈이다.
[image]
처음 지어질 당시의 인천역

1.1. 연표


연도
일자
일어난 일
1877년
2월
수신사 김기수가 일동기유에서 처음 일본철도 시승기를 소개
1882년
1월 1일
영국, 일본의 회사들이 한국의 철도 부설권을 요구
1889년

이하영이 철도 모형을 고종과 백관들에게 소개하며 철도의 필요성을 역설
1892년
3월 25일
한국철도 건설을 위해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 초빙
1894년
7월
의정부 공무아문에 철도국 신설.
일본 외상의 사절과 함께 경부선경인선 철도 부설에 관해 논의
1895년
2월
청일전쟁 중 '''진평선 평양~진남포 간 개통'''[3]
이후 평남선이 계승
1896년
3월 29일
경인철도특허조관 체결. 제임스 모스가 경인선 철도 부설권 획득
7월 3일
프랑스 피브릴르(Fives Lile) 사가 경의선 부설권 획득
7월 15일
국내철도규칙 7조 재정 및 공포. 궤간을 영척 4척 8촌 5분[4]표준궤로 확정
1897년
1월 15일
국내철도규칙 개정. 표준 궤간을 5척의 광궤로 변경
3월 22일
우각동역에서 경인선 철도 기공
8월 24일
일본 회사가 경부선 부설권을 획득
1898년
5월 10일
제임스 모스가 경인선 부설권을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에게 양도
9월 8일
경부선 부설 최종 허가
9월
표준 궤간을 표준궤로 환원
1899년
5월 17일
'''서대문~청량리 간 서울전차 개통'''
6월 17일
경원선함경선 부설권을 국내 회사가 획득
6월 18일
경인선의 완공 구간에서 모갈 탱크(Mogul Tank) 기관차가 최초의 시운전
6월 19일
건설열차 최초 운전
6월 30일
프랑스 피브릴르 사의 경의선 부설권이 소멸
7월 8일
국내 회사가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
7월
모가형[5] 기관차를 인천공착장에서 최초로 조립
9월 13일
궁내부 내장원에 서북철도국 설치
9월 18일
'''경인선 노량진~인천 구간 개통'''
1900년
7월 8일
'''한강 교량 준공. 경인선이 서대문역으로 연장'''
12월 4일
한국철도 최초의 운전규정 제정
12월 11일
한국철도 최초의 신호규정 제정
1901년
6월 25일
일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
8월 22일
영등포에서 경부선 북부구간 기공식
9월 21일
초량에서 경부선 남부구간 기공식
1902년
3월
경의선 서울~개성 구간 착공
12월 18일
영남지선철도회사에서 마산선 부설권 획득.
1904년
1월 3일
마산선 착공
4월 9일
경의선 개성~평양 구간 착공
6월 25일
경의선 평양~신의주 구간 착공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전 구간 개통'''
5월 26일
'''마산선 개통'''
9월 11일
'''부관연락선 운행 개시'''
1906년
1월
'''남대문정거장 준공'''
4월 3일
'''경의선 완전 개통'''
4월 16일
초량~서대문 간 최초의 급행열차 운행
1907년
4월 20일
융희호 운행 개시
1908년
4월 1일
경부선경의선융희호 직결 운행 및 부산정거장 영업 개시
1909년
12월 20일
'''부산전차 운행 개시'''
1910년
1월 1일
호남선 착공
8월 29일
경술국치
10월 15일
경원선 착공
10월 16일
'''평남선 개통'''

1.2. 설명


아무리 역사상에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이지만 철도가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것까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신식 문물을 접하고 온 사람도 꽤 있었고. 하지만 잘 알다시피 이 시기 조정의 재정 상태는 거의 파탄 직전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철도 부설을 추진하지는 못하고 부설권을 미끼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6]
마침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후 현재 인천에 위치해있는 제물포가 개항장으로 변하자, 서울과 제물포를 잇는 철도를 부설해보고자 한다. 슬슬 일본이 위협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조정은 어떻게든 미국의 모스에게 이 구간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맡겨 보려 했으니, 이 노선은 바로 경인선. 하지만 농간 끝에 결국 일본이 경인선의 부설권을 쥐게 된다. 뒤이어 경부선경의선의 부설권도 일본에게 넘어가며 한국의 철도는 시작부터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영향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자면,
  • 경부선의 선형 : 전통적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최단 경로는 영남대로(혹은 동래로)라 불리는, '서울-용인-이천-충주-문경-대구-밀양-부산'의 루트였다. 하지만 러일전쟁으로 급하게 철도가 필요했던 일본은 청주와 추풍령을 정말 애매하게 지나가는 루트를 선택한다. 이에 대해, 충주와 상주의 유림들이 반발해서라는 설과, 조령의 공사 난이도가 높아서라는 설, 다른 열강들의 대체 철도 부설을 막기 위한 설이 있다. 아마 정말 절박했던 일본은 유림들의 반대도 귀찮고, 공사가 힘들며, 이미 영향권 아래 들어온 조선에 또 다른 열강들이 뻗치는 것은 더더욱 싫었을 테니 셋 다일 가능성이 높다. 덕분에 영남대로상에 위치했던 전통적인 도시들은 경부선이 지나가는 대구 정도를 빼면 모조리 몰락해버렸다. 이 때문에 천안과 충주의 운명이 뒤바뀌었고, 희대의 철도도시 대전이 탄생하는 떡밥이 되었다. 밀양은 특이 케이스로, 경부선이 지나가는데도 몰락해버렸다.
  • 서울역 : 원래 경인선의 서울 쪽 시종착역은 연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노량진역이었다. 하지만 경성을 대도시로 키우려던 일제는 도시 중앙에 거대한 철도역 하나쯤은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한강을 건너는 철교를 지나 남대문 앞의 작은 정거장이었던 곳으로 서대문역을 통합하고 그곳에 경부선을 종착시키니, 이 것이 바로 현재 서울역 위치에 있는(정확하게는 문화역서울 284로 쓰이는 구 서울역 건물)인 경성역이다.
  • 경의선의 시종착역 : 본래 대한제국의 경의선 부설 계획에서 경의선의 시종착역은 마포였다. 하지만 일본이 부설권을 가져가면서 일본군 주둔지였던 용산으로 경의선을 끌어오게 된다. 이후 경성역을 거점역으로 만드려는 계획에 따라 수색에서 분기해서 경성역으로 가는 노선을 만들고 이쪽을 경의선 본선으로, 용산 방향을 용산선으로 분리하게 된다. 그런데 수색~서울 간 선형이 억지로 경의선을 끌어오려다보니 급곡선이라, 당대의 최대 난구간이 되었다. 바로 현재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의 서울~신촌 구간이며 심지어 이 구간은 현재도 서행을 한다.
  • 표준궤와 좌측통행 : 일본은 열도에선 협궤를 쓰는 주제에 한반도에는 표준궤로 노선을 깔았는데, 이것은 경의선과 직결되는 남만주철도를 염두에 두고 한 설계였다. 후대 사람들 입장에서는 참 다행. 그리고 일본이 좌측 통행을 하고 있던 터라 한반도에서도 당연히 철도는 좌측 통행이 정립되었다. 훗날 도시철도법 덕분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게 좀 문제기는 하지만.

2. 일제강점기 초기(1911~1939) : 전쟁을 위한 철도의 시대


[image]
익산역 개통당시의 열차의 모습(1912)

2.1. 연표


연도
일자
일어난 일
1911년
6월 1일
한강 교량 준공
6월 10일
군산선 이리~군산 구간 착공
7월 11일
호남선 대전~연산 간 부분 개통
10월 15일
경원선 용산~의정부 간 부분 개통
11월 1일
압록강철교 준공
11월 10일
최초의 국제열차 운행 시작
1912년
3월 24일
'''군산선''' 개통
1913년
4월 1일
최초의 야간열차 운행
7월 9일
전남선 송정리~광주 구간 부설 허가
8월 21일
경원선 원산 이북 구간 착공
1914년
1월 22일
'''호남선''' 전 구간 개통
3월 17일
전라선 이리~전주 구간 부설 허가
8월 16일
'''경원선''' 전 구간 개통
10월 1일
함경선 착공
11월 17일
전라선 이리~전주 구간 부분 개통
1915년
8월 1일
함경선 원산~문천 구간 개통
10월 15일
남대문역 증축. 경성역으로 개칭 영업 개시
1916년
7월 21일
함경선 문천~영흥 구간 개통
11월 15일
함경선 청진~창평 구간 개통
1917년
7월 31일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한국철도 위탁 경영 시작
11월 1일
경동선 대구~하양 구간 개통
11월 25일
함경선 풍산~회령 구간 개통
1918년
10월 31일
하양~포항 구간 개통
11월 1일
경동선 영천~경주 구간 개통
1919년
함경선 함흥~영흥 구간 개통
1921년
10월 10일
진해선 진해~창원 구간 착공
11월 1일
충북선 조치원~청주 구간 개통
1922년
6월 1일
경남철도 천안~온양 구간 개통
6월 10일
안성선 착공
7월 1일
전남선 송정리~광주 구간 개통
12월 21일
'''전남선 ''' 전 구간 개통
1923년
12월 1일
경남철도 온양~광천 구간 개통
1925
경남선 개통.
1929
광려선 착공.
1930
광려선 개통.
1934
특급열차 하카리 투입.

2.2. 설명


그나마 이때는 일제가 좀 먹고 살 만한 시기였고, 일본 정부가 미쳐 돌아가기까지는 좀 시간이 남아있던 터라, '전쟁은 보급! 보급은 철도!'라는 걸 잘 인식하고 있던 시기였다. 덕분에 일제는 한반도 여기저기에 신나게 철도를 깔기 시작했다. 물자 보급과 더불어 호남 지방의 쌀을 수탈하기 위한 철도들도 많이 지어졌다. 뭐 하여튼 이때 현재 한국의 간선망이 거의 완성되었다. 이 당시에 지어진 노선들이 경북선, 경원선, 경전선, 동해선, 장항선, 전라선, 중앙선, 충북선, 함경선, 호남선 등. 현재에도 굉장히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있는 철도가 많다.
그리고 질적인 성장도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데, 특급열차가 투입되고 국제열차가 돌아다니는 등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게 많던 시기였다. 시기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와 거의 비슷하며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가장 집중하는 시기이기도 하나, '''일제가 한반도의 백성들을 위해 이걸 깐 게 절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앙선은 기존의 경부라인과는 전혀 다르게 부설했는데 이유는 전쟁 중에 경부선이 제 1타격임을 인지했던 일제가 대비용으로 부설한 것이 중앙선이다. 현재 중앙선은 충분히 그 역할을 하다못해 선로용량이 터질 지경에 이르러,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었음에도 끝내 복선전철화와 준고속화를 진행 중에 있다.
단적인 예로, 호남선의 초기 선형은 일제 기준에서 일본 본토 방향(한반도의 경우 부산역 방향)을 상행으로 잡아 호남선은 대전역에서 현재의 대전선을 타고 나가는 지선 형태로 놓았다. 애초에 호남선의 목적이 호남 지방의 곡물들을 일본으로 빠르게 수송하기 위함이었으니..이 때문에 서울을 오가는 호남선 열차는 대전역에서 기관차 방향을 바꾸는 불편을 겪었다.

3. 한반도의 격동 속에서(1940~1962) : 한국철도 최대 암흑기



3.1. 연표



3.2. 설명


일단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가 급해진, 아니 정말 있는 것은 박박 긁고 없는 것도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물자가 궁했던 일제는 결국 철도에 손을 댄다. 이 시기 안성선, 전남선의 광주 이북 구간, 경북선 예천~안동 구간 등을 '''그냥 통째로 뜯어가버렸다'''. 이게 다 경부.경의선 등을 복선화할 때 쓸 레일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고. 경북선의 경우 결국 영주를 경북 내륙의 터미널로 만들어 효율성 측면에서 전화위복이 되었지만, 전남선의 폐선 구간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그냥 광주선으로 남아있다. 그나마 전남선은 달빛내륙철도 계획이 있다.
이렇게 최악의 암흑기를 지나 광복이 돼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나 했건만 결국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 시기는 정말 개판으로, 증기 기관차 돌릴 석탄조차도 없어 '''경부선이 하루 1왕복으로 축소될 지경이었다'''. 그렇다. 그 경부선이![7] 더 심한 경우로는 그렇게 하루 1왕복으로 운행하던 경부선마저 운행이 중단되어 경성역에서 출발하던 열차가 경인선 1왕복 밖에 없던 시기도 있었다. 거기다 당시 철도 종사자들의 증언을 보면 정말 개판 5분 전이었던 게, 운전할 줄 아는 사람도 몇 없고, 신호는 사람이 신호기에 횃불 들고 올라가서 직접, 폐색은 모두 수신호와 통표로 처리했을 정도로 답이 없었다. 운행속도도 느려진 것이, 일제강점기에 특급 아카츠키호가 서울 ~ 부산 간을 6시간 대에 주파하던 것이 해방 이후에는 최속달 열차인 조선해방자호가 9시간 걸려 운행하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다 광복이 된 지 얼마 안 돼 남북이 분단되어버렸다. 당장 사람으로 치면 경의선은 머리만 남은 셈이 됐고, 그나마 상태가 나은 경원선도 허리가 잘렸으며, 동해북부선은 발목만 남기고 온몸이 절단된 셈이 되어 끝내 현재까지 복구되지 못했다. 그나마도 한국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있던 것까지 모조리 날아가버렸다. 그나마 남한에 있던 철도는 덜 손상을 입었지만 북한의 경우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이 신나게 불바다를 만든 탓에 있던 철도까지 모조리 날려먹었다.
오늘날의 한국 교통이 도로 중심으로 짜여질 수밖에 없었던 건, 철도의 황금기였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던 인프라들을 중반에 허망하게 날려먹었기 때문인 점이 크다. 그래도 1960년대 이후 산업화시대로 돌입하면서부터 국가에서 철도에 열심히 투자하기 시작했지만 그 때는 이미 자동차교통의 시대로 돌입했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었다.

4. 경제 발전기(1963~2003) : 자동차교통의 시대로 돌입했어도 나름 최선을 다해 투자했던 시기



4.1. 연표



4.2. 설명


KTX 등장 이전의 한국 철도는 도로교통에 밀려 쇠락해가고 있었을 뿐이라는 많은 이들의 오해와는 달리, 20세기 후반 자동차가 대세가 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꾸준한 투자 덕택에 꾸준히 양적 질적인 성장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철도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빨랐음에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예상보다 공업화를 급속하게 진행시키자 1963년부터는 매년 4~5월이면 철도 파동[8]이 일어났다. 1966년 우리나라의 철도는 총 2586만톤의 화물 중 2517만톤밖에 수송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69만톤의 화물이 수송되지 못하고 쌓이자 이를 보관하기 위한 보관비/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중소기업까지 생겨날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심지어 대한민국 철도청은 원활한 화물 수송을 위해 철도를 이용한 학생들의 수학여행 자제를 호소할 정도였다. 이는 1966년 10월 절정에 달해, 철도청은 당시 전국 무연탄 공급의 71%를 차지하던 황지역, 고한역, 도계역 등에는 하루 평균 840량의 화차[9]를 투입해 무연탄 파동을 막기 위해 애를 썼으나 석탄에 치중한 나머지 시멘트, 방직 수송이 막혀 시멘트 공장이 멈추고 방직 공장의 가동률이 급락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현대에도 물류와 교통의 중요성을 설명할 때 예시로 자주 등장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10]
특히나 이 때에는 급속한 경제 발전과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던 시기인 만큼 산업선의 부설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무연탄 수송을 위한 황지선, 동해북부선, 무연탄 수송을 위한 망우선 외에도 산업단지 인입선들도 부설되어 전주공단인입선, 여천선, 포항제철에서 생산하는 철강 수송을 위한 동해남부선 효자~영일 구간 등이 건설되었다.
1963년 교외선 개통을 시작으로, 65년에 경인선 복선화, 68년에 경전선이 완전 개통되었으며, 산업선인 중앙선, 태백선의 전철화가 74년에 완료되어 강원도 탄광에서 채굴한 석탄과 시멘트를 서울까지 원활하게 수송할 수 있게 된다.[11] 80년에는 충북선이 복선화되었는데, 당시 서울행 노선도 아니고 '''지방-지방 사이 바이패스 노선이었던 충북선을 복선화시켰다는 것'''을 보면 결코 당시의 국가당국이 철도교통을 푸대접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호남선이 78년에 대전조차장-익산구간 1단계 복선화, 88년에 익산-광주송정 구간이 2단계 복선화가 완료되어 서울에서 광주까지 복선철도로 쭉 달릴 수 있게 되었으며 여기에 85년에 시행한 주요간선 고속화(새마을호 140km/h, 무궁화호.통일호 120km/h로 증속) 덕분에 서울 ~ 부산 간 새마을호 운행시간은 4시간 10분, 서울 ~ 광주 간은 3시간 50분으로 단축되었다.
물론 이 시대 몇몇 로컬선은 수요저조로 여객영업을 중지하거나 폐선하는 일이 있었지만, 이러한 현상은 농촌인구 감소 등으로 인해 철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국가들에서도 있는 일이고, 주요 간선에 있어서는 도로교통의 발전으로 인해 이전보다 수송분담률 자체는 떨어졌을지언정 수송량 자체는 꾸준히 증가하며 한국철도는 성장해가고 있었다.
70년대 초 고속도로의 개통에 따른 고속버스의 등장이 잠시 간선철도 여객수요를 감소시키기는 했지만, 꾸준한 철도 인프라 개선을 통한 고속화와 운행시간 단축 덕택에 철도 승객은 다시 꾸준히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80년대 후반부터는 고속도로와 간선국도의 교통체증이 심해지면서 오히려 고속버스는 철도에 수요를 뺏겨 승객이 줄어드는 반면 빠르고 정시성이 보장되는 철도의 승객 수는 더더욱 급증하게 된다.
한국은 고속철도 건설 이전까지 도로 위주로만 투자하여 철도는 쇠망해가고 있었다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는데, 실상을 보면 70년대 이후 자동차시대에 돌입했음에도 국가에서는 도로 못지 않게 철도에도 균형있게 투자하고 있었다. 진짜로 한국이 산업화 시대에 도로에만 편향적으로 투자했다면 강원도 탄광 및 시멘트 광산 지대에 건설된 산업선도 고속도로와 고속화 국도 건설로 대체했을 것이며, 간선철도 고속화를 통해 서울 ~ 부산 간 440km가 넘는 거리를 4시간 10분만에 주파하게 된 새마을호는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또한 산업화시대에 도로보다 철도를 오히려 고스펙으로 건설한 사례'''로서 '''안산선'''과 '''충북선'''이 있는데 '''안산선'''의 경우 80년대 후반 당시 '''서울에서 안산시를 잇는 광명로47번 국도가 왕복 2차로로 매우 열악하여 확장이 시급했음에도 이를 미루고 복선전철부터 우선 건설해버렸으며,[12] 충북선과 경합되는 청주 ~ 충주 ~ 제천간 국도 전구간 4차로 확장은 복선철도가 개통된지 무려 20년 뒤에나 이뤄졌고[13],''' 이마저도 평면교차가 있는 일반도로라서 철도에 비해서 형편없이 느리다. 최근에야 평택제천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충청내륙고속화도로 사업이 추진되어 도로사정이 많이 나아지고 있을 지경인데 과연 이 두 사례를 보고서도 산업화 시대에 철도를 푸대접하고 도로교통만 일방적으로 밀어줬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굳이 이 시기 철도의 어둠을 찾는다면 이렇게 건설한 신규 철도 노선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몇 십년도 지나지 않아 영업중단, 폐선 크리를 맞았다는 것. 주로 무연탄시멘트 수송에 맞춰 건설한 산업선들은 대한민국 산업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서 석탄 산업이 활황에서 순식간에 인공호흡기 신세로 바뀌면서 지역 경제 침체와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가은선은 폐선, 문경선교외선은 사실상 동결되었고, 태백선영동선도 과거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주로 지역 로컬선과 벌크화물 중심의 노선으로 전락했다. 이는 당시 정부가 무능했다기보다 아예 당시로서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와 주요 산업이 빠르게 변화한 것이 원인이다.
또한 지하철을 비롯한 도시철도는 이 시기에 태동하여 급격히 발전하였다. 지하철 건설을 시작한 1970년대에는 승용차 보급이 그리 많이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지만 버스 교통은 발달되어 있었는데, 이 때의 버스는 말 그대로 수요가 넘쳐나 러시 아워 시간 대에 버스를 타면 말 그대로 상상 이상으로 콩나물 시루를 겪었다. 여기에 철도의 특징인 대량 수송 능력이 주목받았고 수요 분산을 위해서라도 도시철도의 건설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더해 1980년대부터 자가용의 보급도 눈에 띌 정도로 늘어나 도로 정체 문제가 본격적인 골치거리가 되기 시작했고(물론 이 때까지는 아니었다.)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까지 겹쳤기 때문에 대대적인 대중교통 확충이 필요해져 대량 수송과 정시성 확보 모두 가능한 도시철도망의 확충은 절실한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1974년 수원, 인천까지 연결되는 수도권 전철의 개통을 시작으로 1980년대 중반 들어 1기 지하철의 건설이 마무리 되었으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를 거치며 승용차가 대중화되어 주요 대도시와 그 근교 일대의 도로교통은 말 그대로 포화상태에 다다랐다. 부산 도시철도의 시작도 1980년대에 이뤄졌고, 그 뒤를 이어 1990년대 후반에는 대구 도시철도의 개통으로 이어져 지하철이 지방 대도시로 퍼져 나갔다. 수도권의 경우에도 1기 신도시 건설이 겹치며 신도시와 서울을 잇는 광역철도의 건설이 시급해져 경원선, 분당선, 일산선, 과천선, 안산선의 개통으로 이어졌다. 거기다 1977년에는 전동차가 국산화되고 열차집중제어(CTC) 시스템이 도입되는 등 다방면에서 성장을 이루었다.

5. 현재(2004~) : 고속철도의 개통과 , 광역·도시철도 위주로의 개편


[image]
2004년 3월 30일 경부고속선 1차 개통식
[image]
2004년 4월 28일 광주 도시철도 1호선 개통식
[image]
2005년 10월 18일 대구도시철도 2호선 개통식

5.1. 연표


연도
일어난 일
2004
한국 최초의 고속철도인 '''경부고속선''' 개통 및 경부고속철도 운행 시작.
통일호 완전 퇴역.
'''광주 도시철도 1호선''' 개통.
호남선 전 구간 복선전철화 및 호남고속철도 운행 시작.
2005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부산 도시철도 3호선''' 개통.
'''수도권 전철 중앙선''' 개통.
수도권 전철 1호선 천안 연장.
영동선, 충북선 전 구간 전철화.
경인선 전 구간 2복선화.
2006
'''대전 도시철도 1호선''' 개통.
수도권 전철 1호선 소요산 연장.
경부선 전 구간 전철화.
2007
장항선 군산~장항 구간 개통으로 군산선장항선에 편입.
남북철도연결사업에 따라 '''동해선''' 제진~감호 구간 연결. '''인천국제공항철도''' 구간 개통.
수도권 전철 분당선 죽전 연장.
수도권 전철 중앙선 팔당 연장.
인천 도시철도 1호선 계양 연장.
대전 도시철도 1호선 반석 연장.
2008
장항선 신창까지 구간이 복선전철화되고 수도권 전철 1호선 신창 연장.
수도권 전철 중앙선 국수 연장.
부산 도시철도 2호선 양산 연장.
광주 도시철도 1호선 평동 연장.
2009
'''서울 지하철 9호선''', '''수도권 전철 경의선''' 개통.
수도권 전철 중앙선 용문 연장.
2010
'''수도권 전철 경춘선''' 개통. 경부고속선 부산 연장.
서울 지하철 3호선 오금 연장.
인천국제공항철도 서울 연장.
경전선 마산까지 복선전철화 및 경전선 KTX 운행 시작.
2011
한국 최초의 경전철인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개통.
한국 최초의 무인운전 노선인 '''신분당선''' 개통.
'''부산김해경전철''' 개통.
수도권 전철 분당선 기흥 연장.
전라선 전 구간 복선전철화 및 전라선 KTX 운행 시작.
2012
한국의 마지막 스위치백영동선 스위치백 이설.
'''수도권 전철 수인선''', '''의정부 경전철''' 개통.
경원선 백마고지 연장.
서울 지하철 7호선 부평구청역 연장.
수도권 전철 경의선 공덕 연장.
수도권 전철 분당선 왕십리망포 연장.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영남대 연장.
2013
'''용인경전철''' 개통.
수도권 전철 분당선 수원 연장.
2014
'''스카이큐브'''개통.
수색직결선 개통 및 인천국제공항철도에 KTX 운행 시작.
수도권 전철 경의선수도권 전철 중앙선이 직결운행을 시작하여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탄생.
2015
경부고속선 대전, 대구 도심구간, '''호남고속선''', 평택선, '''대구 도시철도 3호선''' 개통.
건천연결선 개통 및 동해선 KTX 운행 시작.
서울 지하철 9호선 종합운동장 연장.
2016
'''수서평택고속선''' 개통.
'''경강선''' 서원주-만종, 판교-여주 구간 개통.
'''동해선''' 부전-일광 개통.
인천국제공항 자기부상철도 개통.
'''인천 도시철도 2호선''' 개통
신분당선 광교 연장.
원주강릉선 KTX 운행.
2017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용문역~지평역 개통.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신평역~다대포해수욕장역 개통.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신설동역 개통.
2018
수도권 전철 서해선 소사역~원시역 개통.
서울 지하철 9호선 중앙보훈병원역 연장.
2019
김포 도시철도 개통.

5.2. 설명


한동안 도로에 눌려 급격히 쇠퇴하던 철도는 1990년대에 고속철도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그리고 2000년대 후반 들어 고속철도와 광역철도, 도시철도 위주로 발달하게 된다.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권에 지하철과 광역전철이 확대되며 통근 수요에서 철도의 중요도가 더욱 커지게 된다. 일반 철도에서도 폐선과 폐역만이 남을 것 같던 암흑기를 지나 새로이 철도의 중요성을 찾게 되었고 이는 한참동안 멈춰있던 신규 간선철도의 건설까지 이어지게 된다.
사실 1970년대 이후 정부의 교통정책은 철저히 도로 중심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1970년대 4만km대였던 도로 총연장은 2008년 104,236km로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철도 총연장은 1962년 3,032km에서 2008년 3,399km로 10% 연장에 그쳤다. 그러나 이런 꾸준한 주도종철[14] 정책의 결과로, 도로가 혼잡해져 낭비되는 사회적 비용을 뜻하는 교통혼잡비용은 1996년 16조원에서 2015년 33.3조원으로 20년도 되지 않아 배가 되었다. 처음에는 정체를 줄이기 위해 꾸준히 고속도로를 신규 개통하고 국도지방도를 확충 개량했지만 늘어나는 자동차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전국 어디서나 교통체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기에 넘쳐나는 자동차들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까지 지적되면서 철도의 특징인 대량운송, 정시성, 친환경성, 그리고 KTX를 비롯한 고속화의 장점이 부각되었다. 여기에 더해 화물연대 파업 등을 겪으며 도로 교통에 모든 것을 올인할 경우 비상 시 나라가 뒤집힌다는 점을 정부에서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도로 교통의 대체/보완재로서의 철도의 중요성이 커지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을 세워 중장기적인 철도 정책을 세우고 이에 맞춰 종전 철도의 개량과 신규 철도 노선의 건설에 나섰다. 지금까지의 철도 정책은 수요가 없는 곳을 정리하는 데 급급했다면 이제는 정리된 기본 인프라를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도로교통 수요를 빼앗아 올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새 판을 짜는 형태로 볼 수 있다.
먼저 수도권의 도시/광역철도는 분당선, 일산선, 과천선, 안산선 등이 1기 신도시 개발에 맞추어 개통되고, 1996년에는 2기 지하철 계획이라 할 수 있는 5, 6, 7, 8호선의 개통으로 도시철도가 서울의 주요 지역을 대부분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3기 지하철 계획은 IMF 사태를 거치며 백지화되고 9호선, 그리고 우이신설선 같은 경전철만 순차적으로 개통이 이뤄지고 있다. 서울 내부의 철도 확충은 9호선을 끝으로 지지부진한 대신 나머지 인천 도시철도의 개통과 경부선신창역까지의 전철화, 경원선의 일부 전철화,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의 개통으로 수도권의 철도 중요도는 점차 커지고 있다. 심지어 한 때 폐선된 수려선이나 수인선도 도시 권역의 확대에 따라서 도시철도로서 각각 수도권 전철 경강선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의 형태로 부활하였다.
지방 도시권에서도 도시철도 건설은 이어져 부산과 대구에 이어 대전광역시광주광역시에서도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여기에 더해 지방 대도시 역시 권역이 확대되면서 종전 철도망을 활용한 도시철도망 구축을 검토하기 시작했으며 먼저 부울경권에 동해선 광역전철이 개통하였다.
간선철도망 역시 2000년대 들어 대격변을 겪게 된다. 그 시작은 2004년의 KTX 개통. KTX의 개통은 철도 교통이 고속도로를 통한 이동, 심지어 항공 교통보다 시간면에서 더욱 우위에 설 수 있게 만들어 철도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바꿔 놓으며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게 된다. 2015년에는 호남고속철도 오송~광주송정 구간이 새롭게 개통되었고, 2016년에는 수서 ~ 평택 간 고속철도가 신규개통되어 KTX의 이용은 더욱 편리해졌다. 고속철도의 개통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경부고속철도 노선은 그야말로 매일 승객으로 터져나갈 정도로 철도 우위로 재편되었다. 호남고속철도 역시 극단적인 도로 교통 중심 도시였던 광주광역시에서 조차 고속버스를 크게 위협하고 항공 노선을 침몰시킬 정도로 성공했다.
고속철도 이외에도 일반 간선철도 역시 신규 노선 건설이 이뤄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2010년대 들어 빨라졌는데, 경강선수도권 전철 경강선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맞춘 원주강릉선 형태로 먼저 형태를 잡았고, 구 동해남부선과 삼척선 사이를 채워 하나로 합칠 동해선도 공사중에 있다. 나름대로 철도 불모지에 가까웠던 경기도 서해안 측에는 서해선, 역시 철도 불모지였던 경북 북부에는 경북선문경선을 일부 재활용하는 중부내륙선의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여기에 아직 공사 시작은 하지 않은 춘천속초선 등을 합하면 고속도로 못지 않은 철도 노선을 확보하게 된다. 중앙선, 장항선, 대구선, 동해남부선을 비롯한 종전 철도의 고속화 개량 사업도 이뤄지고 있어 철도가 도로 교통보다 느리다는 말도 점차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간선 철도의 신규 건설은 도로 교통 포화에 따른 여객 운송의 질적 불만과 물류 부담을 완화할 목적으로 산업과 인구 재편이 이뤄진 21세기의 환경에 맞춰 노선을 선정하고, 과거에는 기술력과 자본의 한계로 할 수 없었던 직선화를 터널과 교량의 적극적 적용으로 이룩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도로 교통과 연계하면서 이를 보완하는 형태로 건설되고 있는 것 역시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새로 건설되는 간선철도는 고속도로나 국도의 선형과 유사한 경우가 많은데, 경강선영동고속도로, 중부내륙선중부내륙고속도로, 서해선서해안고속도로의 선형과 비슷하다. 동해선은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준 고속도로 취급인 7번 국도의 노선을 기반으로 한다. 검증된 수요를 얻음과 동시에 도로 교통과의 연계와 수요 분산을 노리는 것.
그렇지만 꼭 희망찬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객철도가 가격이 비싼 고속철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종전의 새마을/무궁화호는 찬밥 신세가 되어 편성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이용하고 싶어도 이용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ITX-새마을이나 누리로 등 새로운 등급의 차량이 계속 투입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비 고속철도 공급량은 줄어든 상태. 그 이외에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철도포인트 제도의 개악, KTX 여승무원 비정규직 관련 문제 등은 철도의 오점으로 남았다.
한편, 2000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경의선과 동해북부선이 다시 연결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도라산역과 제진역이 각각 민통선 내부에 새롭게 생기게 된다. [15]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동해중부선 개통과 동해북부선 연장을 통하여 북한과는 상관없이 제진역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들어서는 수도권 도시와 서울을 연결하는 광역철도가 본격적으로 개통되기 시작했다. 2009년에는 지하철 9호선이 개통되고, 2011년에는 신분당선이 새롭게 개통되었다. 분당선 또한 왕십리에서 수원까지 연장되었으며 중앙선, 경춘선, 경원선 연장, 경의선, 수인선 광역철도가 개통하였다. 수도권 위성도시의 입장에서는 출퇴근 러시아워 때 막히는 도로교통보다는 정시성이 보장되는 철도가 훨씬 편리하기 때문이다.

6. 한국 철도 차량의 종류


(폐지된 열차부터 현재 열차 전부 포함)
3등 객차 < 비둘기호 < 통일호 < 무궁화호 = 누리로 < 새마을호 = ITX-새마을 < ITX-청춘 < EMU-250 < KTX, KTX-산천, SRT
  • 도시철도(광역철도) 전동차는 제외하고 일반열차 종류만 서술함.
  • 1974년 열차 등급 개정 이전까지 노선마다 다양한 열차 명칭들이 있었는데 명칭만 통일되지 않았던 것일 뿐 차량은 비둘기호나 통일호 객차였다.
  • 1984년 열차 등급 개정 이후로 새마을호, 무궁화호, 통일호, 비둘기호의 4등급 체계가 정해진다.
  • 2000년 비둘기호 폐지, 2004년 통일호 폐지 및 고속철도 KTX 개통.

6.1. 관련 문서


[1] 2010년에 철도창설 제111주년을 기념해 한국철도공사에서 출간[2]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 철도의 구체적인 역사가 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다.[3] 청일전쟁 이후 영업이 중지되었다가 이후 평남선으로 다시 개통된다.[4] "영척"은 영국의 도량형, 즉 야드파운드법을 뜻한다. 따라서 4척 8촌 5분은 4피트 8½인치(=1435 mm)를 뜻한다.[5] 위의 6월 18일 기사에 있는 것[6] 이 때문에 1890년대에는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된 열강들이 청과 조선에서 이권을 침탈해가고 청과 조선에 들어와서 철로를 깔면서 청과 조선을 잠식해 나갔었다.[7] 이미 경부선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복선화'''까지 되어있었다.[8] 제 때 화물을 운송하지 못해 문제가 생기는 것. 대표적으로 무연탄이 제 때 수송되지 못하면 시민들이 추위에 떨고, 시멘트가 제 때 수송되지 못하면 건설현장이 멈춘다. [9] 2010년대 평균적으로 화물열차 1편성에 화차 20 ~ 30량이 투입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무려 매일 30여 편성의 화물열차가 운행한 것이다. [10] 출처 : <한국경제60년사> IV p.263~265 [11] 이를 통해 앞서 서술했던 철도 파동이 사실상 없어지게 된다. [12] 결국 저 도로들은 90년대 중반에야 확장을 하게 된다.[13] 청주 ~ 충주 구간만 따져도 충북선 개통 15년 뒤에야 4차로화가 완료되었다.[14] 主道從鐵, 도로교통이 주가 되고 철도교통이 마이너한 교통수단이 되는 체계. 대표적인 예로 미국이 있다. [15] 2007년 5월 남북철도 시범운행 및 2008년까지의 화물열차 운행을 제외하면 남북 간 철마는 아직 달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도라산역은 안보관광지로서 나름 이름값을 하고 있지만 제진역은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