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평가

 


1. 개관
3. 사후 조선에서
4. 현대 한국에서
4.1. 권위주의 정권
5. 일본에서
6. 북한에서
7. 중국에서
8. 서양에서
9. 인터넷에서
9.1.1. 일본어 위키백과의 왜곡
9.1.1.1. 장문포 해전, 영등포 해전
9.1.1.2. 명량 해전
9.1.1.3. 순천 왜교성 전투
9.1.1.4. 노량 해전
9.1.1.5. 충무공 동상
10. 정치적 견해에 따른 폄하
11. 능력 저평가와 반박
12. 무예에 대한 평가


1. 개관


社稷威靈 粗立薄效 寵榮超躐 有踰涯分 身居將閫 功無補於涓埃 口誦敎書 面有慚於軍旅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 내린 평가.[1]

자기 자신한테 가장 엄격하고 비판적이었던 겸손한 이순신 본인이 들었다면 쑥쓰럽겠다 싶을 정도로 칭송과 찬양을 거듭하고 있지만, 이순신은 패전으로 기울어진 전장의 판도를 완벽히 뒤집은 만큼 그것이 전혀 아깝거나 부풀려졌다고 할 수 없는, 실로 하늘이 내린 성웅이다. 본인이 듣는다면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오늘날 사람들이 내린 평가는 너무 추켜세운 것도 아니고, 너무 깎아내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직 깎아내리는 존재들이 있어 제대로 평가받기가 힘들다. 그런데 최소한의 평가만 해도 성웅이니, 오늘날 성웅이란 단어는 사실상 이순신만을 위해 있다고 봐도 될 정도다.
세계사를 통틀어 많은 명장이 있지만 '''23전 23승의 빛나는 전승''' 내내 단 1척의 배도 적에게 격침되지 않는[2], 세계 역사상 손꼽히는 신화를 가진 명장은 드물다. 이러한 '전장의 신화'를 가진 사람이 이순신 하나뿐인 것은 아니지만[3] 이런 신화를 이룩한 이들은 전부 만전의 태세를 갖춘 정복군이었기에 수비하는 처지였던 조선군과 확실히 다르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입었지만 당시 이순신은 지지는커녕 물자가 부족해 자급자족 해야 했으며[4], 선조에게 심한 견제를 받고 조정대신들에게 온갖 트집을 잡혔다.
또한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처분을 받을 때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나간 전장에서 얻은 승리이니만큼, 세계의 어느 전쟁과 비교해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 전과이다.[5]

2. 각종 기록에서



이순신 장군 사후 조선에선 이순신 장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정리한 문서이다.

3. 사후 조선에서


이순신은 죽기 전부터 이미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선조를 제외한 왕이나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이자 중국의 명사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고 있었다.
이순신 이전까지 군사를 논할 때 비교 기준은 중국이었다. '손빈, 한신의 계책', '송나라 악비'와 같이 중국의 장수들의 사례를 제시하며 비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사후 조선의 군사 문제 비교 기준은 이순신이 되었다. 실록에서 대놓고 신하들이 군사를 논할 때 "이순신의 계책에 따르면..."이라 할 정도. 중국 역사에 능통한 조선의 사대부가 보기에도 이순신만한 인물이 중국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31년 / 1598년 11월 27일의 사관 논평[6]


상께서 말씀하셨다. "전조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ㅡ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자에 실린 인조이원익의 대화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7]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후략)

이항복, 《충민사기》


수군 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 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ㅡ 《달천몽유록》, 1600년경 쓰여진 소설.[8]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류성룡, 《징비록》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9]

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 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 분뿐이다.

ㅡ 김육, 『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큰 사람(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이서평(李西平 :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10]

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윤휴, 《백호전서》 중 통제사이충무공유사[11]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12]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효종, 《조선왕조실록》 효종 11년 / 1659년 윤 3월 30일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숙종현충사 제문》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ㅡ 원중거, 《승사록》[13]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정조, 《홍재전서[14]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정약용, 《경세유표

전후 선조는 이순신을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했으나 선조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주위가 모두 반대했음에도 '''선조 혼자 우겨서''' 이뤄낸 어이없는 성과(?). 그러나 당장 선조 사후부터 원균은 먹튀의 대명사가 되었고,[15]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는 조선의 성웅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왜곡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이순신의 시호 '충무공'을 선조가 붙인 걸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시호다. 정확히는 1643년(인조 21년)에 내려진 시호라서 공이 죽은 후 꽤 오래 뒤에 붙여진 셈이다. 애당초 이순신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선조가 원균을 1등공신으로 만드는 꼼수를 썼을지언정 결국 이순신이 1등공신이 된 것만 봐도 그 누구라도 이순신의 공을 가릴 수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조선시대만 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경우가 있다.[16] 순조 시대까지도 통영 백성들은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의 운구 행렬 때 백성들의 통곡만 봐도[17]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순신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하였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ㅡ 영조, 《조선왕조실록》 영조 20년 / 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 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다만 조선 후기에 '''이순신 같은 명장이 조선 왕조 장수들의 모범'''이 되다 보니 정말 사정이 어려워도 '''이순신은 했는데 넌 왜 못해?!'''라고 갈굼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중 한 예가 바로 '''어사 박문수(...)'''. 박문수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시절 중국 선박들이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숱하게 행하자 이를 단속하기 위해 함선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예산 지원을 조정에 건의했다. 하지만 영조로부터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대를 만들었는데? 네가 알아서 해봐"라며 퇴짜를 맞았다. [18]
이순신의 후손들은 너무 위대한 무장을 조상으로 두어 소질, 적성 무시된 채로 무과로 가야했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는 조선 최고의 무반 명가로 자리잡았는데 무려 이순신 아래로 '''267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 문과 급제자는 '''단 1명''' 그것도 1875년 고종때에 배출했다.[19] 장남 이회 계열에서 114명, 차남 이열 계열에서 151명, 여기에 후사를 이어가지 못한 서자 이훈과 이신까지 267명으로 특이하게도 선조~경종때까진 몇명 안되다가 영조 시기부터 급등해 고종 시기에만 93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순신의 장남 이회, 조카 이분, 이완, 이봉은 임진왜란때 아버지와 숙부 곁에서 의병 신분으로 종군했다. 이완은 정묘호란 당시 끝까지 싸우다 여의치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서자 이훈은 이괄의 난때 전사, 서자 이신은 종제 이완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서 이인좌의 난 때 이순신의 후손이었던 5대손 충민공[20] 이봉상은 처조부가 윤휴였던 이인좌의 거듭된 설득에도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항거하다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윤휴가 등장한 이유는, 다름아닌 자기 서형의 반려자가 이순신의 서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9대손 이용희는 병인양요에 참전했다. 심지어 충무공의 13대손과 14대손은 독립운동가로서 신흥 무관 학교에 입교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한 그 유명한 삼도수군통제사에도 역대 208명의 통제사 중 13명이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는 전주 이씨, 전의 이씨 다음으로 많다. 덕수 이씨와 앞의 두 성씨의 인구수 차이를 고려하면 놀라운 저력이다.
후손들도 이런 내력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는지, 이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혼란스러워 했던 당시 실각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대원군에게 이순신의 8대 후손인 이문영이 배알했다. 흥선 대원군이 일본을 물리칠 방안을 물어보자 이문영은 거기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를 물어보자 '''자신도 이렇게 못났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도 어찌 잘났겠는가'''하고 대답했다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을 이끈 구로다 기요타카가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실없는 대답 같지만, 사실은 흥선 대원군이 먼저 놀리기 위해 꺼낸 질문에 이문영이 맞받아친 농담에 가깝다.
구한말일제강점기에도 이순신의 후손 중 12명이 독립 운동을 하였고, 10명이 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2013년 1월의 이달의 독립 운동가 이민화도 이순신의 후손이다. # 이민화는 김좌진의 부관으로 김좌진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종친회 내부의 알력 다툼 속에 충무공 유물이 암시장에 나오는 사건이 일어났다. #

4. 현대 한국에서


"지금 이순신전을 선택해 고통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에게 양식으로 삼게 하노니,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

- 신채호, 이순신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직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다 보다.'''[21]

"실로 하늘이 내린 인물.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리라...(중략).. '성웅'이란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인물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후기 中[22]

  • 한국인에게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십중팔구 "이순신"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사를 대표하는 성웅(聖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위인 이순신의 위상은 독보적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최고의 명장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며,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으로 세종대왕과 함께 늘 1위를 다투고 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서 있는 두 동상이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인데, 광화문 광장의 사회 문화적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세종대왕, 이순신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 위인은 없다. 물론 이 두 인물이 또한 서울 출신이고 생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23]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이 장소에 이 두 인물과 같이 상징성을 지닌 인물들도 또 없을 것이다.
  •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역사상 위인들은 후대의 연구로 드러난 크고 작은 오점[24]들이 발견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순신의 경우는 인지도 때문에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는데도[25]전혀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단 거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이우혁, 김경진, 윤민혁으로 성웅으로 떠받드는 충무공이지만 분명 인간인 이상 부풀러진 면이 있을거다라는 생각에 세세히 이순신 장군에 대해 파고들었으나, 파고들면 들수록 알려진 것보다 더 위대한 분이다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는데도, 발견된 오점이라고 해봐야 '부하들의 군기에 대해서 처벌이 엄격했다'인데, 이마저도 당시의 기강이 허술[26]하고 엉망이었던 시대적인 요건이나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해야 하고, 그게 아니었어도 전쟁이 없는 평시일지라도 필요했던 조치였다. 무엇보다 현대에도 전쟁 중에 탈영하거나 민간인을 약탈한다거나 하는 것은 최고 사형까지 갈 정도로 큰 죄이다.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해군의 다짐

  • 해전에서 활약한 인물이므로 당연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장보고와 함께 엄청나게 좋아하고 밀고 있는 위인이다. 훈련병들은 기본적으로 정훈으로 이순신에 대해서 배우며, 훈련병용 교재에서도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해군 훈련소의 건물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어록들이 적혀있다. 대표적으로 명량 해전 당시 장계로 올린"今臣戰船 尙有十二"가 제7기동전단 본부에 당당히 걸려있다. 해군의 다짐 또한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로 시작하며, 군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자존심의 대상이다. 또한 해군 사관 학교에 거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이순신 제독 동상도 있다.
참고로 해사의 연구자들은 다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비해, 이순신에 대한 분석 및 연구를 오랫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순신과 관련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서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장교들의 지식 수준은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면 정색하며 제독이라 부르라고 하거나, 명색이 충무공 리더십 센터 교관 출신 장교가 전역 후에 조선은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환빠가 되고, 충무공 리더십 센터에서 나왔다는 장교가 훈련소 정훈 시간에 날조된 칭기즈 칸 어록을 다시 날조한 이순신 어록을 가지고 강의하고,[27] 해군정보단 앞 비석에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왜곡된 문구를 정보전의 중요함을 강조한 충무공 어록이라는 주석까지 달아 새겨놓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짤막한 이순신 영화를 만든 적도 있는데 명랑 철쇄설(…)을 지지하고 참수리보다 작은 판옥선이 주 무장으로 승자 총통을 쓰는, 그야말로 발로 만든 한심한 작품이다. 아무리 학계가 따로 있다지만, 충무공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치고는 한심한 수준. 그러다보니 한국 해군은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그저 이순신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존 인물 이순신이나 조선 수군사를 연구하는 데는 쥐뿔도 관심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더 나아가 소설 불멸에서 이순신을 사실과 관련 없이 매우 부정적으로 그린 김탁환을 군 복무를 해사에서 교수 사관을 했다는 이유로 SBS에서 남희석과 출현. 해사를 방문할 때에 해사 생도들이 동원된 장면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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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H-975 충무공 이순신함'''
  • 대한민국 KD-2 구축함 1번함인 DDH-975 충무공 이순신함은 당연히 충무공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후 동일함급은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이 된다. 하지만 밀덕들은 충무공이라는 상징성 강한 명칭을 구축함에 사용한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28] '항공모함은 무리겠지만, 이후의 이지스함에다 쓸 수도 있었는데 좀 참지…' 정도의 뉘앙스. 이지스함은 결국 세종대왕급으로 진수되었고, 이중 3번함에 이순신의 조력자였던 류성룡의 이름을 딴 '서애 류성룡'이 붙여졌다.[29] 뭐 거함인 한국형 이지스함에 대왕칭호가 붙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 못지 않게 존경을 받는 세종대왕을 붙이는 것도 어울리는 건 마찬가지이고 또 이순신 장군 성격이라면 구축함이라도 불만이 없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오히려 이순신 장군이었다면 선왕보다 높은 함급에 자기 이름이 붙으면 불충하다고 할수도 있다.
# 뭐, 혹시 모른다. 2016년 들어 최근 거론되고 있는 대한민국 해군 핵 잠수함 건조 추진이 이루어 진다면.... 심지어 2017년 12월에는 F-35B 도입을 통한 항공모함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기대해보자.[30]
  • 해군이나 해군 출신자 등 일부에서 해군의 장성 계급 호칭인 제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공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에서 올렸고 외국에서는 전부 Admiral Yi Sun Shin이라고 부른다.[31][32]
  • 해병대 내에서는 "1.북방에서 육상에서 근무했다. 2.제독이 아니라 장군이라고 부른다. 3.결정적으로 신고 있는 군화가 세무워커다라고 말하며 '이순신은 해병대였다"란 이야기가 있다. 물론 우스갯소리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 특히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많이 존경했다고 한다.[33] 그 존경 덕에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크고 아름답게 증축되었고,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현재 사용되는 원화 중에 100원 주화의 앞면[34]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고, 그 전에도 구 500원권 지폐에 등장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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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제 서울시는 광복 전 일본인들로 넘쳐나 왜색이 짙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를 누르기 위해 경성부 본정목에 충무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다만 이 때문에 이순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띄워준 것이라고 왜곡되기도 하는데, 이미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에서 숭배하던 인물이었다. 전국에는 크고 작은 이순신 사당이 있었고 민중에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다. 물론 추숭도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때에 특별히 더 유난히 평가가 올라갔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없다.역대 추숭을 찾아서 정리한 글 이를테면 중국 민중의 관우 신앙과 비슷하다.
  • 효종, 숙종, 영조 대(代)에 이순신에 대한 추숭 사업이 여러 번 진행되었고, 숙종 대에는 현충사를 확장하고, 거기에 숙종이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했으며, 정조 대에는 이충무공전서를 내는 등 조선 왕조 후반기 동안 꾸준히 추숭 사업이 이뤄졌다. 특히 정조는 평소에도 이 충무공에 대해 대단한 빠심(?)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는 인쇄비용을 자기 사재인 내탕금에서 보태고,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에서는 아예 "이 충무공의 집안이야말로 가히 조선의 명족(名族)이라 할 만하다"라고까지 평한 바 있다.
  • 무속 신앙에서는 용장군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참조. 용장군이라는 것은 흔히 물에서 싸우던 무인들을 영령으로 모시는 것[35][36]이라고 한다. 무당의 신앙은 무당 개인적으로 신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충무공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존재한다. 특히 호남 지역에서는 민간에서 이순신을 신으로 섬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수의 '영당 풍어굿'. 풍어굿은 원래 물고기가 잘 잡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인데, 여수의 '영당'이라는 곳은 충무공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다. 물론 이 사당에 모셔진 신은 충무공 뿐만 아니라, 최영, 정운 등도 모셔져 있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속이나 민간 신앙에서 충무공이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참고로 여수의 영당은 여수시 남산동 어항 단지에 위치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방문해서 이 굿을 보는 것도 좋을 듯. 전통적으로 매해 정월 대보름에 이틀에 걸쳐 벌였는데, 오늘날에는 지역 행사처럼 벌인다. 이 굿을 하다 보면 무당이 "여수는 이순신 장군님 덕택에 나갈 적에 빈 배로~ 올 적에 만선하야~"라고 외친다.
  • 일반인들에게 이순신은 지장의 이미지가 강하고 유독 용장의 이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장만이 아니라 용장의 덕목도 확실하게 갖췄다. 녹둔도 전투에서 이일의 부장으로 종군할 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남아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조선 백성들을 구출해내는 등 무예를 발휘했으며[37], 명량 해전 때는 아예 미적거리는 부장들을 뒤로 하고 홀로 일본군에 맞서 싸워 전세를 뒤집었다.
  • 풍어(豐漁)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은 부하들을 시켜 청어 잡이에 열중했다. 한산도에 개간한 둔전만으로는 병사들과 피난민을 위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청어잡이로 군량을 때우려 했던 셈.[38] 그리고 비범하게도 명량 해전 이후에는 부족한 군량을 모으기 위해 '해로 통행첩'을 발급해 백성들에게 군량을 거두는 대신 말 그대로 바닷가를 통행할 수 있는 통행 허가증 비슷한 것을 내줬는데 이 결과 군량을 모으는 원 목적을 달성했고 조선 백성이면 통행첩을 가지고 있으니 없는 놈은 일본군이란 소리가 되어 간첩선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징비록에서 이 해로 통행첩을 언급한다.
  •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위치하고 있다.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아가는 김에, 묘소가 현충사 경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방문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충사와 이순신의 묘소는 떨어져 있다. 현충사는 아산 염치읍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 이순신의 업적이나 가지고 있는 비중만 보면, 임진왜란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며, 근래 들어 임진왜란의 다른 전투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에는,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은 이순신이 벌인 전투들의 일대기와 몇몇 유명한 육전들을 다루는 수준에서 머무를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룬 책들은 이순신이 반드시 언급되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경우 아예 주인공급의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임진왜란하면 이순신을 떠올린다.
  • 수많은 업적으로, 한산도 대첩 축제 등 그와 관련된 축제를 여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여수엔 이순신 대교로 불리는 다리가 있는데, 그 유래는 그 다리의 길이가 1,545m로 1545년생이신 이순신의 생년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참고로 이순신 장군이 해전을 벌인 모든 남해 지역에는 승첩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현대에는 무략이나 전술, 충심만이 아니라, 전란 속에서 사람들을 이끈 리더십과 철저한 관리 능력에 대해서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 원불교의 창시자인 박중빈(소태산 대종사)은 생전에 설법에서 이순신에 대해 "이 충무공은 그 마음 쓰는 것이 도(道)가 있었도다. 그는 높은 위치에 있으나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이 모든 군졸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고. 권세를 잃어 일개 마졸이 되었으나 또한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이 말 먹이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 말을 살찌게 했다. 때로 말에게 이르기를. '네 비록 짐승일지언정 국록(國錄)을 먹고 이만큼 자랐으니 국가 존망의 시기를 당하여 힘을 다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오직 위를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고 아래를 거느림에 사랑을 다하였으니. 과연 그는 '지(智)와 덕(德)을 겸비한 성장(聖將)'이라 할 만하다."고 평가하였다고 한다.참조 재미있게도 원불교에서는 박중빈이 깨달음을 얻어 교단을 연 날을 대각개교절(大覺開敎節)이라 부르며 기념하는데 이 날이 4월 28일충무공탄신일과도 같은 날이다.
  • 워낙 유명하고 유능한 군인의 대표이기 때문에 상당수의 군인 장교들이나 간부들이 이상형이라고 꼽는 인물이다. 물론 괜히 군대에 이런 말이 팽배한 것이 아니듯 대부분이 똥별 행각이나 하면서 쓸데없는 군기만 빡세게 잡는걸 좋아할 뿐 진짜 이순신의 모습은 조금도 본받을 생각이 없는게 대부분이다.
  • 2015년 이순신의 후손인 해군사관학교 생도 2명이 소개되어 화제가 되었다.[39]#

4.1. 권위주의 정권


일설에는 이순신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 국민들을 단합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악용된 바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다. 실제로 박정희가 쿠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띄워진 위인이다. 밑의 이야기처럼 교과서에 이미 등장했던 실제 유명했던 위인이라 하더라도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이순신'이 문화 산업 안에서 캐릭터로서 주인공으로서 다뤄지기 시작한 건 사실이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 문화 사업 중 가장 첫번째가 바로 이 성웅 이순신 홍보이다. 실제 성웅 이순신이란 뮤지컬도 만들어졌고 특히 정권에 비위맞춰야 했던 주류 연극계에서는 이순신 관련 작품이 그야말로 쏟아졌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시즘 성향의 국가가 과거의 전쟁 영웅이나 위인을 프로파간다로 악용한 사례는 상당히 흔하고, 한국 역시 그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심지어 이순신 장군이 듣보잡은 아니어도 생각만큼 유명하진 않았는데, 과거 군사 정권이 이순신을 띄우는 프로파간다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주장을 한다.그런데 사실 이런 시각은 극히 일부다. 그 보단 하술 할, 군사 정권이 이미지 및 사상 교육을 위해 문관을 띄웠다는 시각이 오히려 일반적.
당연한 말이지만 이순신 장군은 이 페이지에서도 나와 있듯이 임진년 첫 해전에서 승리한 이후 줄곧 한국사 내내 칭송받던 위인이다. 어디까지나 이미 널리 퍼져있는 이순신의 명성에 군사 정권이 편승해서 더욱 부풀리고 다른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멸사봉공과 충성의 이미지만을 강조해서 국민 교육의 이름하에 이용한 것이다. 시절에 이를 이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이 그전부터 존경받던 인물이 아니거나 유명한 인물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 '이 분도 뭔가 오점이 있겠지' 라고 연구를 시작했는데 오점은 커녕 아직도 미담만 나오는게 현실이다.
물론 멸사봉공이란 문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전체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멸사봉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 길들이기에 자주 사용하면서 등장한 단어로써 멸사봉공이라는 단어에서의 '공'이란 다름아닌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가리킨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일본 측 위키피디아 설명에서는 <전국책>의 진책에서 따온 단어로 패전 이전까지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교육으로써 도입됐으며, 일본 기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기업 내 (마치 봉건 시대 주군과 가신 사이의 관계나 다름없는) 상하 관계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하고, '''과도하게 강조될 경우 자신의 희생이 요구되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출처 : 이윤옥 저 <오염된 국어사전> 27쪽 ~ 32쪽 및 일본어 위키피디아 '멸사봉공' 설명)
그러나 당시는 지금 같은 천부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백성[40]은 왕을 섬기는 게 당연한 것이고, 왕과 국가[41]를 구분할 줄도 몰랐다. 같은 나라 안에서 왕이 바뀐다면 몰라도 외세에 의해 왕이 살해 당한다면 그건 나라가 망했음을 의미한 게 그 시절이었다. 그 둘이 나뉘게 된 것은, 즉 ''''시민'이란 개념이 생긴 건 프랑스 혁명 이후다.''' 당연히 파시즘이란 개념도 민주주의의 대척점으로 생겨난 것. 따라서 이순신의 언행을 두고 전체주의 운운하는 건 온당치 않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순신은 파시스트였던 게 아니라 당시 충효사상을 강조하던 유교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 자체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순신은 당시 시대를 감안해도 충분이 괜찮은 인물이었다. 지장, 용장, 명장일 뿐만 아니라 덕장의 면목도 충분히 갖췄다. 이순신과 대비되는 원균의 경우 수급을 얻겠다고 죄 없는 백성들 목까지 벴다는 것이나 이순신이 죽자 남도 백성들이 통곡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러한 반발로 인해 민주화 이후에는 역으로 '이순신은 조선 왕조가 아닌 백성에게 충성했다'라고 주장하며 이순신을 민본주의적 영웅으로 표현하는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무리하게 이순신의 성향을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랬다면 역성혁명 혹은 자살 의혹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5. 일본에서


[image]
옛날 일본에서는 대략 이런 식의 맹장 이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1854년 일본의 출판사 금행당에서 발간한 《조선정벌기》라는 책 속의 이순신. 이 책은 임진왜란 전까지의 조선 역사를 서술하고, 전쟁 진행 상황을 일본 처지에서 그림으로 서술한 책이다. 한반도 모양에 맞춰 그린다랍시고 고증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지만, 제법 무섭게 그렸다. 특히 들고 있는 방천화극. 《징비록(懲毖錄)》이 일본에서 발행되면서 처음 알려졌지만,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김시민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고, 이후 메이지 시대의 해군 연구에 의해 일본 내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평가들로 인해 일본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여진다. 기사 넷우익들중 일부 "이순신? 누구?"라고 까내리려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도 모르오"는 일본인 반응도 볼 수 있다.

李舜臣單騎にして胡虜の賊兵を破る。和兵の至るに及んで全羅水軍節度使となる。龜甲船を造る。忠勇鷄林に冠たり。[42]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43]

의 으뜸이었다.'''

[image]
이 그림 역시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으로, 이 그림은 사천 해전 때 부상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위의 텍스트 내용도, 싸움 중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했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무인다움을 찬(讚)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이순신은 대개 류성룡의 《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영웅다운 인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44]
1908년 발행된 일본 해군의 사토 테츠타로 제독의 저서 《제국국방사론》에서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에 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덕분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古来ノ戦将ニシテ奇正分合ノ妙用ヲ尽シタルモノ必ズシモ一二ニ止ラズ。「ナポレオン」が「全ヲ以テ其ノ分ヲ撃テ」ト云ヒタルモコノ意義ニ外ナラナヌノデアル。サリナガラ海軍将官トシテ之ヲ看レバ、先東洋ニアッテハ韓将李舜臣、西洋ニ在テハ英将「ネルソン」ヲ推サナケレバナラヌ。李舜臣ハ実ニ蓋世ノ海将デアル、不幸ニシテ生ヲ朝鮮ニ享ケタレバコソ、勇名モ智名モ西洋ニハ伝ラヌノデアルガ、不完全ナガラモ征韓ニ関スル紀伝ヲ看レバ実ニ立派ナル海将デアル。西洋ニ於テ之レガ匹敵者ヲ求ムレバ聢カニ蘭将「デロリラル」以上ト謂ハナケレバナラヌ。「ネルソン」の如キハ其ノ人格ニ於テ到底比肩スルコトガ出来ヌ。此ノ李将軍ハ実ニ裝甲艦ノ創造者デアル、三百年以前ニ於テ既ニ立派ナル海軍戦術ヲ以テ戦ヒタル戦将デアル。

Throughout history there have been few generals accomplished at the tactics of frontal attack, sudden attack, concentration and dilation. Napoleon, who mastered the art of conquering the part with the whole, can be held to have been such a general, and among admirals, two further tactical geniuses may be named: in the East, Yi Sun-sin of Korea, and in the West, Horatio Nelson of England. Undoubtedly, Yi is a supreme naval commander even on the basis of the limited literature of the Seven-Year War, and despite the fact that his bravery and brilliance are not known to the West, since he had the misfortune to be born in Joseon Dynasty. Anyone who can be compared to Yi should be better than Michiel de Ruyter from Netherlands. Nelson is far behind Yi in terms of personal character and integrity. Yi was the inventor of the covered warship known as the turtle ship. He was a truly great commander and a master of the naval tactics of three hundred years ago.

(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과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다. 이순신과 비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덜란드미힐 더라위터르(Michiel de Ruyter)보다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호레이쇼 넬슨은 이순신에 비해서 인간성과 성실성의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졌다. (또한)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장갑 전함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A Military History of the Empire (Japanese: 帝國國防史論), p. 399, by Admiral Tetsutaro Sato of the Imperial Japanese Navy)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또, 1929년 해군소좌 출신 작가 가와타 이사오(川田功)는 그의 소설 <포탄을 뚫고서(砲弾を潜りて)>에서 주인공인 한 해군 병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당연히 세계 제1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솔능력, 그의 모계(謀計), 그의 용기, 하나라도 칭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김준배 2018, 104에서 재인용) 출처

한편으론 1891년 강경한 확장주의자 가와사키 시잔이 쓴 위인전 <일본백걸전(日本百傑傳)>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 정운(鄭運)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수군을) 한산도에서 대패시켰다. … (중략)… 옛날 나폴레옹 1세가 산을 뽑고 바다를 뒤짚어엎을 세력을 갖고도 영국을 무찌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넬슨의 해군에게 제압 당하였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의 쇠약함과 영국의 부강함은, 날을 같이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동서의 영웅(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는 동일하다." (김준배 2017, 243. 재인용 및 일부 편집.) 출처

또한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진상된 뒤 전국 중학교로 배포되었던 <제국해군사론(帝国海軍史論, 1898)>을 쓴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의 글 중에서 언급되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진왜란 같은 것을 사실대로 씀(直筆)으로 그 진면목을 기술하는 것은 자못 불쾌한 감이 있으나, 만일 해상권력을 쥐는 것의 필요성을 말하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실패한 사적(事蹟)을 들어 은감(殷鑑, 거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히데요시(秀吉)는 동양에 둘도 없는 영걸(英傑)로서 부하 장수도 모두 천군만마 중 뛰어난 인물들이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평양에서 북진할 수 없었다. (중략) 이것은 우리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해전 전술에 졸렬(拙劣)하여 순신 때문에 시종 해상권력을 장악당한 죄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행동을 할 때도 우세한 해군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됨'''은 만세불변의 원리로서 또한 성공의 기초이다" (김준배 2018, 94-96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추가로 오가사와라의 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순신 연구를 추가한 <제국국방사론((帝国国防史論, 1907)>을 쓴 해군대학교 교관 사토 테츠타로(佐藤鉄太郎)의 글 중 다음 대목은, 지금도 종종 인용되고는 한다.

"(본인은 현재 일본의) 제국 국방의 방침이 과연 국가가 어려울 때 이에 응할 방법인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어 조선의 명장(名將) 이순신의 사적을 조사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가) 우리 수군을 격파한 것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공적은 격렬히 나의 정신을 일깨웠고, (나는) '''공세적 국방'''의 의의(意義)에 관해 더욱 각성하는 바가 있었다.

이순신은 실로 세상을 뒤덮을(蓋世) 해군 장수로서, 불행히도 조선에서 살았기 때문에 용명(勇名)도 지명(智名)도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불완전하지만 임진 왜란에 관한 전기를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서양에 있어 이와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수 드 로이터(Michiel de Ruyter) 이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넬슨 같은 자는 인격에서 도저히 비견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실로 장갑함(裝甲艦)의 창조자로서, 3백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 싸운 장수이다." (김준배 2018. 103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참고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와 사토 테츠타로(佐藤鉄太郎) 두 사람 모두 훗날 전시총리까지 올라가는 스즈키 간타로의 동기들이다.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군 해군 사관 생도들이 방문했는데, 한 후보생이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장군을 가장 존경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도고 제독은 "나는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한다네. 그 분에게 비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하고 대답했던 일화가 전해지나[45], 출처들이 하나같이 신빙성이 없는 서적들로,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46] 그러니 굳이 진위가 불분명한 도고의 어록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사적(私的)으로 도고 역시도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신뢰성이 부족하다.
일단 흔히 퍼져 있는 도고의 어록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최초의 출처는 박정희 때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전 수상이자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의 중계자 역을 했던 만주국 관리 출신의 친일파였던 사업가 이영개로[47] 자신이 직접 "지인에게 들었다"면서 한말로 이는 그저 당시 한일 협정 반대가 극심하자 반일 감정을 누그려뜨리려 만들어낸 말이라게 정설이다. 기실 도고는 일본인에게도 엄청나게 존경 받는 인물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한 말이라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말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은 전무하다.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 않은 '도고의 어록' 같은 것을 굳이 인용할 이유는 없다.
이종락이란 사람이 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란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한다. 이 책에는 1905년 일본 연합 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당연 일본 측의 어떤 기록에도 이러한 말은 없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48]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 전쟁에서 일본 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49][50]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51][52]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53]

그러나 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라는 책은 왜성을 직접 탐방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높지만 아마추어 연구가 한계상 사료 해석에 한계도 있고 학술 논문도 아닌지라 출처 표기나 사료 비평적인 면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도고가 노부인께 했다는 이순신 관련 발언의 경우 해당 책에는 저 문단 하나만 있고 인용 출처나 참고 문헌 목록같은 믿을만한 근거는 적혀있지 않다.
실제로 도고가 '이순신은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구절 역시 한국인 실업가 이영개에게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 일본 해군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도고 정도 되는 인물이 그렇게 발언했다면 일본 측에도 관련 기록이 남았을 법한데,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즉, 도고가 실제로 저런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제로 도고 제독이 이순신을 추앙했다는 일화들은 전부다 출처가 불분명 하며 전해들은걸 옮겨 적은 "카더라"수준이다. 일본에서는 역사적 사실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며 반일 프로파간다에 의한 이순신 띄우기를 위한 창작 정도로 보고 있다.
사실 일본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게 다름아닌 역보정 관련 때문인데, 만약 자신들이 이순신을 폄하할 경우 '''그 이순신에게 박살이나서 결국 몰락한''' 전국 3영걸 중 한명이자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외 일본의 수 많은 장수들이 말할 것도 없는 졸장이나 잡장 수준으로 전부 격하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당시 도요토미 정권 하의 무장들 같은 경우는 전국시대를 거쳐온 이름난 장수들이 많았기에 더 더욱 그 차이가 벌어져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 일본이 이순신을 영웅화한 이유는 크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화 하기 위해서 그리고 '육주해종(陸主海從)'의 국방노선을 '해주육종(海主陸從)'으로 바꿈으로써 해군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내려던 당시 일본 해군의 주요 인물들이 이순신의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이론에 지역적 색채를 가미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면서이다. 메이지 일본과 이순신, 그 애증의 역사
실제로 이순신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팽창의 정당화를 꾀하던 당시 일본 해군의 노력에 관해, 후대의 문필가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순신을 발견한 것은 메이지 일본해군이었다. (중략) 1904, 5년경의 일본 해군사관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학교에서 배우고, 책으로 읽어서 잘 알고 있던 것이다." (김준배 2018 재인용) 출처

  • 구루시마 미치후사에 관련된 일화 중 "이순신 장군이 번개를 다뤘다"라는 이야기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이순신과 싸웠던 적장들 <2006-03-23>
이순신 일본 기록중에 이런 거 있던데 <2017-11-23>
이순신 목 따러간 왜장 최후의 결전 만화.manwha <2017-11-23>
그러나, 이 일화는 출처가 없다. 인터넷에 나오는 글에는 그냥 두루뭉실하게 '일본 측 기록' 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그 기록이 어딘지 적어 놓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 '일본 측 기록'에도 구루시마는 그냥 전사했다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게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순신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일본인들에게 빌미가 될 우려가 있다.
  • 그리고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간접적으로 도요토미 가문을 몰락시켰다는 의견도 있다. 조선출병을 보낸 군사들 대부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인 서군파들이었고 당시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군파였는데, 임진왜란 초기에 승승장구하다가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수군이 해상 수송로를 장악해 버리고 지원군과 물자 보급까지 차단시켜버리니 출병간 서군 내에서도 전사자 외에 전염병으로 인한 사상자와 탈영병까지 속출했고 나중에 뒤늦게 후회해서 히데요시가 후퇴하라고 했지만, 온전히 퇴각하려던 병사들마저도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수군이 결사를 다짐해서 노량 해전때 아주 두들겨 패놓았기에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에서 세력을 많이 잃어버린 탓에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고 결국, 직속계가 무너져 가문이 멸망한다. 물론, 이순신뿐만 아니라 이름도 모를 백성들과 승려들이 모여 의병을 조직한 것과 이순신처럼 나라를 위해 싸운 관군들의 활약도 있기에 이순신만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문을 몰락시켰다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그래도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에 간접적으로 일조한 조선의 구국의 영웅들 가운데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6. 북한에서


이북에서는 두음법칙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리순신" 이라 쓰인다.

리순신 장군은 량반 출신으로 봉건 지배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봉건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조국 해방 전쟁 시기에 사회주의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가슴으로 적 화구를 막아 부대의 직격로를 열어놓은 애국자들과 비길 수 없다.출처

요약하자면 인민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했다는 뜻이다.
1967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도''' 이순신은 명장으로 큰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1967년 김일성 우상화가 시작되면서 김일성을 능가하는 영웅이 있다는 것은 북한 처지에서 좋은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폄하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온 게 상기한 여러 망언들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선 이순신이 희대의 애국자요, 천재적 지략가로 세계 해전사에 이름을 떨친 명장이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고 있다. 다만 김일성만 못하다고 할 뿐이다(...).김일성의 이순신 평가
아래는 1967년 이전 이순신에 대한 북한의 평가이다. 북한이 이순신에 대해 비교적 박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북한의 위치 또한 한몫한다. 이순신이 충성한 조선 왕조는[54] 남한 수도인 서울에 기반했고 ,이순신 개인 역시 남한 영역인 서울에서 태어나 충남 아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다시 서울로 상경해서 자라 전라도에서 보직을 역임했고 경남 통영에서 전사했다. 북한땅에서는 함경도에서 잠시 여진족 토벌하는 임무 맡았을 때 빼곤 밟을 일이 없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북한 영역과는 크게 인연이 없는 남한계 인물이라 냉랭한 것이다. 당장 북한땅에서 활약한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등에 대한 북한의 평가와 비교해 보면 된다.[55]

임진 조국 전쟁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전쟁에서의 리순신 장군의 역할의 평가에 대하여 반드시 언급하여야 하겠다. (...) 당시 최대의 애국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천재적인 군사 지휘관인 리순신 장군의 임진 조국 전쟁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그가 임진 전쟁을 조국 보위의 인민 전쟁으로 인식하고 인민에 의지하고 인민의 역량을 발휘시키고 인민의 역량을 굳게 결집하여 적을 대항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임진 조국 전쟁 과정에서 리순신 장군의 활동을 그 시대에 있어서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전 동양에 있어서 가장 열렬한 애국자이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의 한 사람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리순신 장군의 투쟁은 애국 인민의 산 표본으로 되었으며 그가 군사 예술의 우수한 정수로 되었으며 그의 전략 전술은 애국 투쟁의 영광스런 상징으로 되였다.

리청원, 임진 조국 전쟁 1592년 ~ 1598년 (1955년)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이며 탁월한 전략 전술가였던 리순신 장군에 의하여 우리 수군 연합 함대가 지휘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순신 장군은 전쟁 전부터 왜적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함선 건조, 함선 수리 특히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 무기의 제작, 군량 준비, 병사들의 훈련 등 모든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백방으로 군비를 강화하였다. (...) 장군은 또한 탁월한 전략가로서 적아간의 력량 관계를 정확히 타산하고 이에 립각하여 격멸전을 용감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전반적 전국에 대한 전략적 견지에서 이를 분석하고 여기서 제기되는 과업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방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하루 속히 원쑤들을 우리 강토로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또한 잘 알고 시기적절한 대책을 취하곤 했다. 이와 같은 리순신 장군을 자기들의 지휘관으로 모신 우리 수군 병사들은 장군을 무한히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며 전체가 단결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원쑤들을 격멸하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였다. 제 아무리 우수한 무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리순신 장군과 같은 위대한 지휘관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와 같은 승리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길성, 임진 조국 전쟁 시기 우리 수군의 투쟁

이렇게 이순신을 고평가하던 북한 학자들은 유물 사관을 신봉하였단 이유로 반종파분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image]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인민대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다른 전근대 위인들처럼 김일성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즉각 평가절하되었다. 여담으로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남한에서 제작된 이순신 관련 드라마와 영화가 북한으로 전해지고 주민들에게 유포되었다. 탈북자들에 의하면 북한내 최고위층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에 간 남측 기자들의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북측 관계자가 '우리민족을 구한 영웅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7. 중국에서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56]

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57] 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 '''진린'''

중국에서도 장웨이린 교수 등의 일부 인물들이 호평을 내리고 있으며 그는 제갈량, 항우, 손자#s-3, 관우 같은 인물들이 서양과 일본에 패한 말기의 청나라에 있었어도 청나라는 역사 속의 그 결과를 피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순신은 다르다고 언급했다.

8. 서양에서


영국 해군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58] 은 그의 저서인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에서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라 쓴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航跡圖)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ㅡ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pp. 66-67.[59]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인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한 브리핑에서 이순신 장군을 언급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강력한 연합군 함대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중에서. 1944년 10월 10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에서 인용.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순신 장군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 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60]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 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 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Extra Credits[61]에서 이순신 이야기를 연재했었다. 좋아요가 평균 8천에 1만을 넘으며 다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반응. 한국어 자막도 있고 고증도 충실하니 시간이 나면 감상해보자. 테마곡도 있다. 시리즈 마지막까지 보면 고증 담당자가 나와서 관련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있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찾아본 자료 중 '''난중일기 가 제일 이순신에게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62]
미국 해군 역사가 조지 해거만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300년 동안 멈추게 한 인물’, 미국 리더십 전문가 짐 프리드먼은 ‘일본이 영국처럼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만들 기회를 빼앗은 인물’, 미국 UCLA대학 역사학과 마크 길버트 교수는 ‘히데요시의 범(汎)아시아 야망(Pan-Asian ambitions)을 좌절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군사잡지 암체어에서 선정한 위대한 장수 100인에서 54위를 차지했다. 해군 순위로는 3위.

9. 인터넷에서



9.1. 일본


일본의 연구자들 역시 이순신의 능력과 그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63] 실제로 일본에서 해군사 및 일본 전국사와 관련된 연구자 / 학자들 중 본좌급중 한 명인 키타지마 만지 교수의 경우 KBS 다큐멘터리에까지 나와서 이순신에 대해 뛰어난 평가를 내릴 정도. 그러나 현실과 달리 인터넷상에서는 우익 경향이 강한 특성 때문에, 특히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들 중에서도 이순신 관련 문서는 그 왜곡의 범위가 상당히 큰데, 사서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장의 대목만을 짜깁기해 자국의 역사에 유리한 결론을 내기로 악명 높다. 아래는 위키를 제외한 이순신 관련 왜곡사례나 수법들이다.
  •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등 전과(戰果)의 폄하.
    • 일본 우익들이 전투에선 졌지만, 전략 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는 명량 해전으로 일본의 서해 진공은 완전히 좌절했으며, 수군력의 약화로 이후 큰 공세를 하지 못하고, 왜성에 의지한 수비전,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 노량 해전에서는 마치 이순신이 전쟁 범죄라도 저지른 듯이, 퇴각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추격하다가 역관광 당했다는 식으로 써놨으며,[64] 조선군이 괴멸당하고 일본군이 전력을 온존하여 승전한 것처럼 써 놨다. 참고로 퇴각과 항복은 완전히 다르며, 현대전에서도 퇴각하는 군대를 공격하는 것은 전쟁 범죄가 아니다! 애초 퇴각 자체가 병력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다시 공격할 기회를 노리기 위한 전술적 군사행동중 하나다. 말하자면 "졌지만 항복하지 않고 너희들의 적으로 계속 남겠다. 나중에 다시 붙으러 올 테니 목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행위로, "꼴 떨지 말고 지금 당장 붙자" 하면서 떡이 되도록 두들겨서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게 당연하다. 일단 뇌물 먹이고 살려달라고 해봤지만 이순신이 안돼. 죽으면 되는 것이다.라고 단칼에 거절해서 답이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피해 없이 집에 가고 싶으면 이기던가 정식으로 종전 협정이라도 했어야 했다. 군대의 퇴각은 민간인의 피난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65] 거기에 거짓 퇴각하면서 적을 끌어들여 단번에 격파하는 전술도 있으며 그 전술로 승리한 예가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 도요토미, 도쿠가와 양대 세력이 큐슈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둘 다 시마즈를 분쇄하지 못한 채 강화를 맺었을 정도로 막강한 다이묘였던 시마즈 가문은, 임진왜란 참전 이후 천하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몇 천도 안 되는 병사 밖에는 동원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이유가 주로 거론되나, 노량 해전에서의 피해 역시도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진지하게 적어보자면 노량 해전 이후 2년 뒤 가중내란이 있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할 의사 자체도 적었기에 시마즈는 서군에 1500명을 보낸 것이다.
  • 노량 해전이 종전 전에 벌어진 엄연한 전투 행위라는 점도 무시하고 있다. 노량 해전은 조명 연합군의 마지막 대공세였던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벌어졌다. 더구나 순천의 왜성을 바다에서 포위하다가 응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벌어졌으므로, 위와 같은 시각은 당시 전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 조선과 일본의 기록들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태도.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 측 사료는 군충장과 진지표, 전황 보고서 등 신뢰도가 높은 1차 사료들을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수치적인 면에 있어서, 총 참전 인원 십수 명 수준의 전투에서도 보고를 위한 군충장을 작성했던 전국 시대의 특성상, 부대 배치와 병력 현황, 일본군의 병력 흐름 등을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일본군 장수들의 가문 기록은 조선의 족보 기록과 비슷하게, 가문의 공은 부풀리고, 피해를 축소하여 명예를 치장하는 면이 있어,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66] (예컨대 있지도 않았던 명군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과 마찬가지로 당대인이 남긴 1차 사료라서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기록의 신뢰도만 따지면 조선 측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67] 또한 조선 측 기록, 일본 측의 행정 문서와 교차검증을 통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추론해낼 수 있다.
  • 문제는 이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료들을 적당히 입맛에 맞게 추려내고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적당한 사실이 배합됨으로써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일본 수구 세력이 자학사관(自虐史觀)을 극복하고,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새 역사 교과서에서는 일부러 이순신을 뺐다. 기존 대부분의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이순신의 초상까지 실려 있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부 사용자들도 이순신 항목을 왜곡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9.1.1. 일본어 위키백과의 왜곡



이론적으로 위키위키가 기반인 모든 사이트는 누구나 언제든지 편집이 가능해서, 근거가 없거나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출처도 제시 않고 집어넣는 게 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위키에서 어떻게 언급하고 있다는 내용은 위키백과에서도 내세우는 원칙에 의거하여 적지 않는 게 원칙이나, 이건 워낙 파장이 커 별도의 문서로 만들어두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몇몇 사용자들이 이순신 문서를 왜곡한 사건. 대부분 일본이 이겼다 식으로만 왜곡 서술하며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죄다 왜곡, 날조 뿐이며 일본이 선전한 것마냥 조금씩 통계치 등을 바꾸는 건 기본이고 아예 '''일본군이 개박살 난 전투조차 모조리 조선, 명의 장수들과 대규모 병력이 손실된 것으로 왜곡해 놓는다'''.
일본 혐한들에게 충무공은 주요 왜곡 대상 1위로, 그 왜곡의 범위가 크고 심각하다. 특히 일본어 위키백과의 대부분 사용자들이 이순신 항목을 왜곡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매우 심해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용자들이 나서줘야겠다. 반대로 일본에 대해 그리 감정이 좋지 못한 중국의 바이두 백과의 사용자들은 이순신 장군에 대해 꽤 호의적으로 적어 놨다.

9.1.1.1. 장문포 해전, 영등포 해전

장문포 해전, 영등포 해전, 제2차 장문포 해전은 원균의 인척인 좌의정 윤두수의 주도로 계획되어 조선 육군, 수군이 협력하여 진행된 전투로, 6일 동안 전투를 치뤘으나 일본군이 응전하지 않음으로 왜척 2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을 뿐, 그 외에 아무런 성과를 올리지 못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을 비롯한 일부 장수들이 작전의 내용 등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에게 주도권이 없는 전투였으며, 비록 조선 육군과 수군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으나,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토벌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한 전투였다.
일본 위키는 이에 대해 그저 수차례의 공격이 실패하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이순신이 격퇴되었다고만 써놨다.
<원문>

李舜臣は休戦交渉期の1594年3月に水軍で巨済島を攻撃(第二次唐項浦海戦)したが日本軍に撃退され、開戦後に戦争を指導する明より和平交渉の妨害となるため交戦を禁じられた。また、同年9月から10月にかけて朝鮮陸水軍により再び巨済島を攻撃する作戦が発動されたが数次に渡る攻撃も失敗し、李舜臣は福島正則や島津義弘により撃退された(場門浦・永登浦海戦)。この結果、朝鮮王朝では査問を行い、李舜臣は留任となったが上司で体察使の尹斗寿は責任を問われて更迭された。

이순신은 휴전 교섭기인 1594년 3월에 수군으로 거제도를 공격(제2차 당산포 해전)했으나 일본군에게 격퇴 당하고, 개전 후에는 화평 교섭에 방해당한다는 이유로 전쟁을 주도하던 명에 의해 교전을 금지 당하게 된다. 또한, 같은 해 9월부터 10월에 걸쳐 조선 육군, 수군에 의한 거제도 공격 작전이 다시금 발동되었으나 수 차례에 걸친 공격도 실패하고, 이순신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격퇴 당한다.(장문포. 영등포 해전) 그 결과, 조선 왕조에서는 조사를 실시, 이순신은 유임되었으나 상사인 체찰사 윤두수는 책임을 묻고 경질 당했다.


9.1.1.2. 명량 해전

명량 해전에 대해서, 충무공은 일본 수군을 조류가 빠른 명량 해협으로 유도하여 선진을 공격, 승리를 거두었지만 일본 위키백과에는 자세한 설명없이 왜군의 후속 부대가 강대하기에 후퇴하여 적의 침공을 허용한 것으로 왜곡 서술되어있으며,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전술에서 패배하고 전략에서 승리했다는 자위성 기술을 하고 있다.
명량 해전에 13척의 대형배와 기타 100여척이 참전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본문에서도 '병력을 과장하기 위해 피난민의 배 수백척을 동원했다'라고 분명히 설명해 해당 병력이 전투병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정말 왜곡의 극치를 달리는 부분. 사실 전략적 승리라고 자위질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본이 승리했다는 식으로만 왜곡 서술을 해놨다.
<원문>

韓国では鳴梁大捷と呼ばれ、李舜臣率いる少数の朝鮮水軍が日本軍に勝利を収めた戦いとして名高い。しかし実際には、朝鮮水軍は日本水軍の先鋒と戦った後は、彼我の戦力差を鑑みたためか、それ以上の無理な攻撃を行わず、根拠地および制海権を放棄し、遠方まで撤退している。これにより戦場の制海権は日本側のものとなったため、朝鮮水軍の基地である(全羅道)右水営や対岸の珍島の攻略を許し、結果として日本水軍の侵攻は成功している。

한국에서는 '명량 대첩'이라고 불리며, 이순신이 통솔한 소수의 조선 수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로서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 선봉과 싸운 후 적군과 아군의 전력차를 가늠해서인지 그 이상의 무리한 공격을 실시하지 않고, 근거지와 제해권(制海權)을 내버려두고 멀리 철퇴한다. 이로써 전장의 제해권은 일본이 쥐게 되어, 조선 수군의 기지인 (전라도) 우수영과, 명량 해협 반대쪽의 진도에 대한 공략을 허용하고, 결과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침공은 성공했다.

日本陸軍によって全羅道や忠清道が掃討されつつある中、壊滅直後の残存艦隊を収容しながら後退した李舜臣の艦隊は、朝鮮半島西南端の潮流の激しい鳴梁海峡で日本水軍を誘導し、突入してきた日本水軍の先頭部隊に一撃を加えて勝利した(鳴梁海戦)。しかし後続の日本水軍は強大なため、海戦の夜には戦場海域からの後退を行い、日本水軍の侵攻を許した。

일본 육군에 의해 전라도나 충청도가 토벌되고 있던 중, 괴멸 직후의 잔존 함대를 수용하면서 후퇴한 이순신의 함대는, 조선반도 서남안의 조류가 격심한 명량 해협으로 일본 수군을 유도하고, 돌입한 일본 수군의 선두 부대에게 일격을 가해 승리를 거둔다(명량 해전). 하지만 뒤에 있는 일본 군대가 강대하기 때문에, 해전이 벌어진 밤에는 전장 해역으로부터 후퇴하여, 일본 수군의 침공을 허락한다.


9.1.1.3. 순천 왜교성 전투

순천 왜교성 전투에 대해서, 조선, 명, 일본 3군 모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나, 조명 양군만 피해를 크게 입고 패한 것으로 왜곡되어있다. 실제 이 전투에서 조선군 130명 전사, 명의 전선 30척 격침,[68] 명 수군 2000명이 전사하였으며 일본군은 전선 11척을 나포당하고 30척의 전선이 격침, 3000명이 사상당해 사실상 일본군이 개박살 난 전투였다.
<원문>

1598年、明・朝鮮軍が日本最西端の拠点である小西行長等が守る順天城を攻撃しだすと、李舜臣は明水軍の指揮下に入って水陸共同の順天攻撃作戦に参加し同時に順天城の海上封鎖を行った。しかし、水陸両面で明・朝鮮軍は損害を出しつつ苦戦し、厭戦気分が蔓延して攻撃は頓挫、海上封鎖を解いて古今島に後退した(順天城の戦い)。

1598년, 명, 조선군이 일본 최서단의 거점인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지키고 있는 순천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순신은 명 수군의 지휘를 손에 넣고 수륙군 공동의 순천 공격 작전에 참가하는 동시에 순천성의 해상 봉쇄를 행한다. 하지만, 수륙 양면으로 명·조선군은 피해를 계속 내며 고전하고, 사기가 떨어지자 공격은 좌절, 해상 봉쇄를 풀고 고금도로 철퇴한다. (순천성의 전투)


9.1.1.4. 노량 해전

노량 해전에서 조선, 명 수군이 일본군에 패퇴, 조선의 주요 장수들이 다수 전사하고 큰 피해를 입어 일본 수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수군이 무사하게 일본으로 퇴각했다고 왜곡 서술되어있다.
허나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83척, 명은 63척의 전선을 갖추고 있었고 일본군은 도합 500척의 전선을 배치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50여척만이 겨우 퇴각하는데 성공했으며 오히려 조선군은 충무공을 포함한 조선군 삼백여 명, 명군은 오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을 뿐이었다.
<원문>

この露梁海戦では夜半からの戦闘が長時間続き、混戦の中で李舜臣が戦死し、他に明水軍副将を初めとする明・朝鮮水軍の主たる将が多数戦死し大きな被害を出したため、後退する島津水軍を追撃することは出来なかった。 一方、孤立していた小西行長は明・朝鮮水軍の出撃により封鎖が解けたので海路脱出に成功し無事日本へ帰国することができた。李舜臣はその死後に忠武と謚(おくりな)された。

이 노량 해협에서는 야밤부터 전투가 장기화되어, 혼전 중에 이순신이 전사하고, 다른 명 수군 부장을 시작으로 명. 조선 수군의 주요 장수들이 다수 전사하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기에, 후퇴하여 시마즈 수군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한편, 고립되어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 조선 수군이 출격함으로써 봉쇄가 풀렸기에 해로 탈출을 성공,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순신은 사후 충무의 시호를 받았다.


9.1.1.5. 충무공 동상

아예 충무공의 동상이 군사 정권의 권력과 힘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있기 때문에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올라와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동상이다.
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사항은 "일제 시대 때 변형된 조선 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변형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 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였다고 한다.
목적이 실제 일본의 기를 억누르기 위한 것은 분명하나, 군사 정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 이순신 장군 동상 및 몇몇 애국선열상의 철거가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한다.
<원문>

韓国ソウルの官庁街である世宗路には、李舜臣の銅像が建てられている。これは軍事政権下の力の象徴として設置されたと言われる。なお、外にも釜山龍頭山公園や木浦など、数多くの朝鮮半島南海岸に李舜臣の銅像が建てられている。

한국 서울의 관청가인 세종로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이것은 군사 정권의 힘의 상징으로 설치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더불어, 그 외에도 부산 용두산 공원이나 목포 등, 다수의 조선반도 남해안에는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9.2. 대한민국


반일 감정이 높은 편인 한국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이쪽은 정반대로 출처가 불분명한 사료나 검증으로 왜군의 피해를 지나치게 부풀리는 식. 한국어 위키백과도 출처가 불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꽤 보인다.
불멸의 이순신》 등,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사극에서도 일본군의 규모를 늘리는 오류를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상기한 위키백과의 '명량 해전에서의 일본군 1만 사상' 기재는 다름 아닌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나레이션'''이 출처였다.
사실 이는 드라마 제작진만의 잘못은 아니다. 한산도 해전 8,980명, 명량 18,000명 사상 등등의 과장된 자료 출처는 옛날 일본 선박이나 함대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을 때, 대선 - 아다케, 중선 - 세키부네, 소선 - 고바야로 잡고, 일괄적으로 200명, 100명, 40명씩 대입해서 계산한 것으로, 제법 그 역사가 긴 설이고, 여러 반론들이 있었지만 이 설이 가장 널리 퍼져서, 되려 넷상에서는 정설 비슷하게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이를 무조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문제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이순신역사연구회가 발행한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내용을 인용해, 명량 해전일본군 사망자를 "일본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라 기술하고 있다. 90명씩 승선하는 대 세키부네는 존재하지만, 기함용이나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 혹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규모가 커진 것이 대다수고, 이 시기에는 승무원 50명 ~ 60명 내외의 세키부네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므로, 이를 일괄적으로 100명으로 계산하는 것은 희생자 수를 2배로 늘리는 결과를 낳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순신이 지금까지 칭송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같은 일부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 비록 인원수에서 일본군에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늘 적절한 인력배치로 개개의 싸움 현장에서만큼은 자신의 병력을 적군의 병력보다 많게 유지하였던 뛰어난 전술적 식견에 있다. 따라서 이순신이 항상 '압도적인 열세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라는 과장은, 오히려 이순신의 주된 장점을 깎아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오히려 명량이 어떠한 의미[69]인지도 모르는 족속이니 주의할 것.
한국 인터넷 상의 자료에도 왜곡된 부분이 있으며, 이는 해당 인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역사상의 인물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기록에 따른 올바른 사료 검증이지, 무의미한 과장과 미사여구는 아닐 것이다.

10. 정치적 견해에 따른 폄하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 사회에 헬조선 담론을 위시로 한 자국 혐오와 탈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다 보니, 이런 두 가지 성향을 따르는 사람들이 탈민족주의 시각이 강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나 진영논리에 함몰된 사람들도 이순신을 폄하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박정희를 싫어하는 한국 강성 좌파 운동권에서는 이순신을 띄워준 박정희를 싫어하다 보니, 진영논리로 그 이순신의 대척점에 있는 원균을 띄워주고 "사실 원균은 용맹한 장군이었는데 이순신 성웅화 작업을 주도한 박정희 때문에 억울하게 간신이 되었다."라는 원균명장설을 내세운 바 있었다. 심지어는 "이순신이 원균을 질투해서 그의 공을 가로챘다."라거나 "이순신의 능력은 사실 별거 아닌데, 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가짜 영웅이다!"라든지 "이순신은 조선 시대에 전혀 인정을 못 받았고 아무도 알지 못한채 그대로 묻혀 버렸는데, 박정희가 집권하면서(혹은 일제가 이순신을 찾아내서) 다시 발굴해서 띄워준 엉터리 영웅이다!"라는 식의 역사왜곡마저 서슴치 않는다. 원균명장설이 꽤 열풍을 일으켰던 1990년대에 나왔던 이순신이나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 중에는 이런 식의 이순신 폄하론을 실은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1994년 4월 출간된 고정욱의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과 1998년 10월에 출간된 김탁환의 소설 <불멸>과 1999년 9월에 출간된 신봉승의 소설 <권율> 또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순신의 전공은 하층 계급, 즉 일반 병사들과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인데, 이런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근대 이전의 역사나 문화 유산들은 모두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만든 나쁜 것이므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홍위병이 되기에 딱 알맞다. 다만 NLPDR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국내 좌파 운동권에서 쪽수가 많은 정파의 특성이 특성이다보니, 과거 운동권 출신치고 맑시즘 사관에 취해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편이고 지금도 그렇다.[70] 문제는 어설프게 맑시즘을 경도된 인물들은 상당히 많으며, 젊었을 때 구축된 사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이 원균명장설을 지지하는 경우도 꽤 많다.
또한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이 박정희 집권 무렵에 세워졌다고 해서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다소 특이한 경우지만 진보 진영 인사이자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은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철거를 긍정하는 주장을 한 일이 있었다.# [71] 2014년 개봉된 영화 명량을 둘러싼 반응을 언급한 기사를 두고 '진보인 사람들이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해석한 의견도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인 진중권도 그의 책인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권에서 "왜 초등학교에 이순신 동상을 세워놓고, 아이들한테 이순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가르치는가?"라는 내용을 적어 이순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낸 바 있다. 아울러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1권에서는 이순신을 다룬 오페라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왜 명나라 장수 진린이 극중에서 이순신 찬가를 세 번이나 부르냐고, 원균은 간신으로 묘사했느냐고 비평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이순신 찬양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한 박정희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순신에 대한 비판을 연결시켰다. 사실 이런 시각이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이순신을 비판하는 진짜 이유다. 박정희가 이순신으로 상징되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요한 것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이순신을 폄하하고 그와 사이가 나빴던 원균이 억울하게 간신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조사도 못 하는 꼴통이다.
그러나 이런 예로 '''한국의 모든 진보 성향 시민들이 이순신을 폄하한다고 판단하면 매우 곤란하다.''' 애당초 포털사이트 같은 대형 사이트의 정치 성향을 무 자르듯 툭툭 자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보통 서구권은 대부분 보수 진영에서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비교적 강하게 드러나는 것과 반대로, 한국에서 민족주의 성향은 오히려 보수 진영보다 진보 진영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편이다. 그 연장선에서 진보 성향인 사람들 중에서도 나라와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을 고평가하는 사람은 매우 많다. 당장에 위에 언급된 박시백 화백부터가 강성 운동권 출신 인사기도 하고, 위 링크에서 황교익의 의견에 반대하는 유시민의 정치적 성향을 생각해 보자. 물론 그 가문을 생각하면 조상의 위선을 가려야 하려는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위에 언급했듯이 더 나아가서 진보의 민중 사관에 입각해서 이순신을 민본주의 성향의 영웅으로 재해석하는 주장들과 이를 반영한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또한 진보 인사라 알려진 사람들만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보수 우익이지만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잡지인 미래한국에서는 영화 명량을 두고 "이순신은 엄연히 명량해전에서 패배했는데, 왜 영화 명량은 그런 이순신이 명량에서 이겼다고 역사왜곡을 했느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애당초 '''이순신 폄하의 가장 큰 결정체인 원균옹호론'''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좌우 구분이 없다. 원균의 후손 되시는 한 유명 정치인정당이 어딘지만 봐도 진보는 이순신을 폄하하는데 보수는 이순신을 존경한다 운운하는 건 얼토당토 않은 소리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짜로 진영논리에 찌든 논리.
또한 보수 우익이면서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가인 백지원도 그의 책인 조일전쟁에서 이순신을 다분히 폄하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아이러니하게도 백지원은 박정희를 가리켜서는 우리 역사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을 하면서도 그런 박정희가 찬양한 이순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낮게 평가한다. 다만 이 인간은 원균명장론을 신봉하는데, 출판사 사장과 친분을 이용해 출간한 사이비이기 때문에 공신력 있는 인물이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어찌됐건 진보, 보수 할 거 없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입을 모아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사 최고의 위인인 것은 공통된 생각이다.'''
다만 탈민족주의와 자국혐오일뽕 성향이 강한 네티즌들이 활동하는 일베나 디시 역갤 같은 사이트들에서는 이순신이 굉장히 폄하당하고 있다. 한 예로 2005년 지금은 없어진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루XX[72]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티즌이 "한산도 대첩은 날조다",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가 자신의 책에서 이순신을 찬양한 일이 없다. 내가 그 책을 갖고 있어서 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순신을 마구잡이로 폄하하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여러 사료들에서 찾아낸 제각기 반박을 하는 등 한국 인터넷의 여러 게시판들이 한동안 매우 시끄러웠다. 또다른 예로 위와 같은 정치 성향을 가진 유튜버 우리가 만약 손을 잡는다면원균옹호론을 주장했다. [73]
그러나 결국 루XX의 주장은 거짓임이 드러났는데[74], 어느 네티즌이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가 쓴 책인 <일본의 정치사에 대한 바다의 영향>을 직접 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내어 그 책 54, 55, 66, 67페이지를 직접 사진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는데, 발라드가 이순신을 영국의 해군 제독인 넬슨보다 더 훌륭한 장군이라며 열렬히 찬양하고 있는 내용을 분명히 적어 놓았던 것이다. 이 사실로 인한 충격이 매우 컸던지, 루XX는 자신이 쓴 글들을 모두 지우고 인터넷상에서 사라졌으며, 루XX가 활동하던 사이트도 폐쇄되었다(...) 이 사건은 민족주의 뿐만 아니라 탈민족주의도 얼마든지 역사 왜곡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11. 능력 저평가와 반박


이순신의 승리에는 일본 수군 병력이 의외로 대단하지 않았다는 점과 당시 조선의 기술과 무기(화포 등)의 영향이 컸으므로, 이순신의 전투에서의 공적이 모두 이순신의 능력에 의해서였다고 평가하기에는 무리라는 의견도 있다.
인원은 조선 수군과 비슷하였다. 선박 수가 많은 이유는 아타케부네 같은 대형함 대신 코바야와 세키부네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론적인 면에서는 조선 수군이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 수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일본 수군은 중소형 함선이 주력이라 조선 수군을 상대로 사실상 공성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백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패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시이 켄지에 의하면 코바야선은 화포를 장착할 수도 없었으며, 세키부네는 선박 하나당 화포를 1문, 그것도 경량포인 불랑기 밖에 달고 다니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이 칠천량 전투 등에서 승리하더라도 주요 요지에 대한 수송 작전이나 혹은 전쟁의 목표물(주요 도시, 왕)을 공격하기 쉬운 지점에 대해 기습 등을 감행했다는 기록이 별로 없는 이유는 일본 수군 사령관들이 무능력하거나 멍청해서가 아니라 일본 수군의 능력이 본질적으로 허접해서 그랬던 것이다.[75] 심지어 선박 건조도 자국 기술자들이 아닌 중국인 기술자들에게 의존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이러니 일본군의 방침 역시 주로 부산포처럼 한정된 지역을 통해서만 들어오는 보급을 제외하면 현지 조달이 원칙이라 조선 백성들을 동원하거나 약탈해서 성을 쌓고 물자를 얻었다. 그래서 적의 수도를 손쉽게 점령한 일본군이었지만 지리적으로 수전 경험이나 수군이 좀 필요한 강화도나 한강 지역의 적 세력 등은 요지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잡아서 되도록이면 싸우지 않고 항복시키기 위해 그냥 놔둔 것이다. 물론 당시 화기는 아주 절대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고 특히 아가리 파이터들이 많아서 엄청난 졸전도 많이 벌인 조선군과 다르게 실전 경험이 많고 사기도 높아 용인 전투 같은 결과를 내기도 했던 일본 수군 은 그 나름 전력이 되었지만 당시 조선 수군의 그 전력을 가지고도 허접하게 패한 원균 등은 아무리 봐도 특출나게 형편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마치 도미나가 교지 같은 케이스라고 할까?
기본적으로 이순신의 전략이 조선 수군의 우수성에 기반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요소들을 잘 활용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순신의 능력이다. 당장 역대 최강의 해군 전력을 인계받은 원균이 저지른 삽질만 봐도 단순히 템빨로만 이겼다고 보는건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일본 수군이 정말로 마냥 약체였다면 왜 김완이 세키부네 2척에게 배를 빼앗기고 본인은 생포당했는지, 어째서 이억기와 최호의 분함대가 전멸당하고 두 장수들도 전사했는지, 배설이 한산도를 불태우고 도망칠수밖에 없었는지, 경상좌수군은 전쟁 내내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못했는지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조선 수군을 띄워주고 일본 수군을 깎아내릴수록 이순신을 폄훼하기 쉽게 때문에 만들어진 논리로 본다면, 이순신 과대 평가설, 이순신 범장설 등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설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억기는 임진년부터 이순신과 함께 우수군을 이끌고 수없이 전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이며 최호 역시 의주를 방어하고 북방을 안정시킨 백전노장이었다. 이순신급의 명장까지는 아니지만 원균과는 궤가 다른 평균 이상의 지휘관들임에도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할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 수군의 저력이었다.[76]
밑에도 자세하게 나올 것이지만, 당시(16세기 말) 함포와 같은 화기가 갖는 우세는 아주 절대적이진 않았다. 유럽의 예만 보아도, 레판토 해전이나 칼레 해전 등등에서 함포 같은 화약 무기가 어느 정도 활약한 것은 맞지만, 두 전투에서 모두 기본적인 전투 방식은 포격을 가하면서 접근한 뒤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함포가 해전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시 유럽에서의 배는 크게 범선갤리선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당시 범선은 함포를 탑재하기 유리했던 반면, 갤리선은 기껏해야 뱃머리 쪽에 다는 게 고작이었으므로 포격전에 불리했다. 만약, 당시 함포가 정말 엄청난 우세를 가져다주는 무기였다면, 갤리선은 함포의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 16세기경까지만 해도 갤리선은 범선에 비해 아주 압도적으로 밀리지는 않았으며, 어느 정도 공존할 수 있었다. 즉 16세기 당시의 대포는 유럽에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은 무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이순신의 승리를 기술과 무기의 덕으로 돌리기는 힘들다. 16세기 영국이나 스페인 모두 반동 제어 포가를 완성해서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또 재장전 시간은 서유럽 쪽이 현재 사료로서는 월등하다.
  • ① 당시 판옥선의 화약 무기는 폭발성 무기가 아니다. 중세기 화약 무기답게 완벽하지도 못했고, 그 당시 포라는 개념 자체가 폭발하는 탄환이 아니라, 쇳덩이를 날려서 적의 배를 깨부수는 목적으로 쓰는 건데, 이는 포를 정확히 상대 배의 흘수선 밑으로 여러 발을 맞춰야 배가 격침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화포는 톱니바퀴 식으로 괴어서 전후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정확한 조준 사격이 쉽지 않은 화포를 흔들리는 선상에서 방포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대포는 유효 사정거리가 그리 길지 못하다.

함상에서의 화약 무기 운용, 특히 대포의 운용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따른다. 적 함선 뿐만 아니라 대포가 거치된 아군의 함선도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상에 떠있는 선박은 롤링(rolling), 요잉(yawing), 피칭(Pitching) 등 다양한 흔들림(동요 動搖)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흔들림 현상은 지상에서보다 함상에서의 화약 무기 명중률을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천자총통(天字銃筒)에서 대장군전(大將軍箭)을 발사할 경우, 탄도 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천자 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사각 5도일 때 사거리는 152m, 10도일 때는 289m, 20도일 때는 525m라고 한다. 이러한 사거리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사각(射角)에 따라 상당한 사거리 차이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5도 ~ 10도 수준의 롤링은 황천이 아닌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교수의 계산 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나 된다. 단거리라면 표적이 되는 선박의 크기가 있으므로 롤링에 따른 오차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사격 시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라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천자 총통에서 대장군전 사격 시, 계산 결과를 보면, 사각 10도에서 대장군전 비행 중 최고 고도는 13m다. 이 정도 비행 고도라면, 어느 정도 사거리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표적 선박의 높이가 13m 이내라면 어떻게든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에 명중할 수 있다. 하지만 사각 20도면, 대장군전의 비행 중 최고 고도가 50m, 사각 30도면 최고 고도 100m, 사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200m에 달해서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 수군이 10도 ~ 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도 ~ 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도, 20도, 25도, 30도로 변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사거리 오차는 둘째 치고, 대장군전의 비행 고도 자체가 50m ~ 10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높이라면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射角)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 때문에 20도 이상의 사각으로 사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잉 등에 따르는 좌우 오차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체 길이가 30m 정도인 일본의 대형 아다케 정도라면, 배의 중심부를 겨냥했을 때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의 각도 차이는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사거리 100m일 때는 그 절반 정도인 17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거리 100m일 때는 17도,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이상의 요잉이 발생하지 않는 한 오차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잉은 롤링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
박혜일 교수는 천자 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와 비행 고도를 계산했지만, 롤링과 요잉, 피칭 등에 따른 오차 문제는, 천자 총통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총통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 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射角)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것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발사체인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므로, 이 경우에는 사거리 오차가 발생해도, 좌우 조준만 정확하다면 어떻게든 표적이 되는 선박을 맞힐 수 있다.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흔들림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 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 수평에 가깝게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砲架)는 사각(射角)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 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諸元)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 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 무기 운용 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 않는 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근대 해군들이 상대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사각으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이 같은 롤링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나 비행 고도 오차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박혜일 교수는, 이렇게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 처지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 총통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아무리 크게 잡아도 이상적 사각은 20도 미만, 유효 사거리는 400m 이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피차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에서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9몬메 이상의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 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 무기 운용상의 제약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接舷戰)의 경우에도 화포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동일하거나 더 높다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화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接舷) 시에 하향 사격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 사격 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 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 시대 화약 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포가(砲架)의 형태가 동거(童車)라고 가정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 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接舷)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는 질려포통(疾藜砲筒)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 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投射) 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선군의 화포에 몇 차례 맞는다고 안택선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77] 그 화포가 빠른 속도로 연사가 되는 것도 아니며, 조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발사하여 명중하더라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수군이 모두 죽는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이 바보도 아니고, 화포에 몇차례 당했으니 기를 쓰고 노를 저어서 판옥선에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 다민 이는 조선 수군의 화포 운용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조선 수군의 화포는 적의 배를 파괴하는게 아니라 산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조란환 등을 사용하여 전투원을 살상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전투 양상을 일단 화포를 이용하여 적을 대충 쓸어버리고 화살세례를 퍼부어 정리한 다음 왜선으로 건너가서 남은 적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개개인의 백병전 능력이야 조선군이 왜군에게 밀린다지만 산탄으로 한번 쓸려나가고 화살 세례를 맞아 갑판위가 피바다가 되버린 상태의 왜군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상기한 설명은 선상에서 화포 운용의 어려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위의 내용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 '대포는 이순신의 기적적인 승리 행진과 별 관계가 없다'고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상에서의 고민과는 별개로, 이순신의 전투에서 대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대포의 화력은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유리했으며, 이를 이용한 것이 이순신의 전술의 핵심 중 하나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대포가 있으니까 이긴 것이지, 이순신의 존재가 승리의 요인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엄청난 왜곡이고 오류라는 것이다.[78] 애초에 임진왜란의 해상전은 동아시아의 해상전이 함포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이며, 이러한 개념을 체계화하고 실전에서 응용하고 조선군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례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이순신 이전에는 어디까지나 화포는 거들 뿐이었다. 결코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일본 전선들이 터져나간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화포 운용의 측면이 강조되다 보니 아예 이순신이 화포를 주력으로 활용해서 이겼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은데,[79] 이순신에게는 화포를 마구 쏴도 될 정도로 물자가 넘치질 않았으므로 원거리 포격으로 왜적을 때려잡은 장군님! 같이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난중일기의 전투 기록들에 적힌 전과에서 '얼마를 불태우고 적 얼마를 죽였다'라는 식으로 계속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이순신 함대의 주된 화력 투사 방식은 궁시와 소구경 화포[80]의 사격을 통한 인명 살상 및 화공의 형태였다. 게다가 위에서도 서술했듯 목선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포격만으로 적선을 깨부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므로, 화공을 펼치는 게 훨씬 효율적인 전투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만 보아도 이순신이 조선 수군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선상 백병전을 가능한 피하고,[81] 조선군의 전통적 강점이었던 사격전을 적극적으로 벌여 적군을 압살한 훌륭한 전술가라는 점이 드러난다. 어떤 면에서는 해상 포격을 선보인 전술적 선구자로서의 면모보다는 당대에 활용할 수 있었던 해전 전술을 극한으로 연마해서 선보인 완성형 전술가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기도 하다.
  • ② 왜선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날래고 또 수가 많았다. 판옥선은 무겁고 둔중하다. 이것은 조금만 잘못하면 금방 접근당해 일본군의 특기인 백병전에 말려들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적을 분산시키고 적의 접근을 막으며, 반대로 우위에 설 수 있게끔 아군에게 유리한 위치로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승전으로 꼽히는 한산도 해전의 경우도 틀어박힌 적을 유인해 쌍학익진으로 적을 단숨에 격멸한 것이다.
  • ③ 왜선에 타는 조총수 및 보병들은 대부분 아시가루로 조선과 비슷하게 농민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100년이란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역전의 숙련병들인데 비해, 조선 수군의 병졸들은 태반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농민 출신들이었다. 2번 문단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거나 군율이 흐트러져서 접근을 허용하면, 그건 아주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82]
  • ④ 이순신에게 보급이 끊기기 전의 왜군들은 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출병했으나,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조정으로부터 쌀 한 톨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 조선 수군은 군자금, 군량, 화약, 금속, 배를 수리할 목재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83][84]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朝廷)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공물을 바쳐야했는데, 심지어 공문서 쓸 종이조차 없어서 이순신이 그 종이를 지원해주는 상황이었음에도 조정에서는 늘 공물이 부족하다고 닦달했다.(…)[85]

전쟁에는 군량이 필수인데, 한산도 진영을 잡을 때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경지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선 조정에 건의까지 하였다. 결국은 어렵사리 한산도 군량 생산 승인을 얻었다. 백성들은 이순신 옆에 있으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고, 백성들은 편히 농사를 짓고 그런 군량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바치기도 했다.
  • ⑤ 정보전과 탐색전도 항상 철저히 하여, 단 한 차례도 왜군의 기습이나 야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군이 야습을 시도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 ⑥ 일본도 전란 중반에 밀폐형 층루선(層樓船)과 대조총(大鳥銃)을 일부 투입하는 등 전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선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안정감이 있는 함선이 아닌데다, 선상 백병전에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포 계통 무기를 조선군처럼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이 화포를 사용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군의 제일 큰 화약 병기는 오오츠츠(大筒)라고 하는, 단순히 구경을 늘린 화승총이었다. 그나마도 위력에 비해 다루기 까다롭고 화약 소모가 많은 등의 문제로, 널리 사용되진 않은 걸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는, 대구경 조총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등의 공식기록을 사실상 찾을 수 없는 것과, 칠천량 해전과 관련된 자료들 중에도 일본 측 기록에 '판옥선 한척에 대해 서너 척의 배로 포위하고 선상 백병전으로 가야 승산이 있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다. 일본에서 사실상 제대로 된 화포가 실전에서 선을 보인 것은 전쟁의 원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인 오사카 전투 당시.
  • ⑦ 아무리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86] 개전 초기, 이순신이 있던 전라 좌수영에 비해 큰 덩치를 자랑하던 경상 우수영의 원균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모든 무기를 없애 버린 것이라든지,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온갖 노력으로 간신히 마련한 조선 수군을 한큐에 말아 먹어버린 궁극의 팀킬을 자행한 것을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하게 무기의 차이로 조선군이 이겼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군은 상술했듯이 병사들의 낮은 숙련도와 사기를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보완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실제로 칠천량의 조선군은, 후대의 박문수가 지적했듯이 원균 같은 무능한 자가 지휘관이 되자, 그런 우수한 무기 체계와 전술로 승전을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듯이, 말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패전했다.
재밌게도 이순신의 전공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근거인 '조선 수군이 가진 우수점'은, 영국의 전설적인 제독 호레이쇼 넬슨을 칭송하는 근거인 '영국 해군의 강점을 이용한 과감한 전술 운용'과 완벽히 동일하다. 넬슨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기존 해군이 잘 사용하지 않던 중앙 돌파를 시도한 근거는 영국 해군이 더 많은 항해 경험으로 인해 난전에 돌입할 시 독자적 전투 능력이 뛰어난 영국 해군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고 이 판단력이야 말로 넬슨 제독이 칭송받는 부분이다.

12. 무예에 대한 평가


지휘 능력과 별개로, 무장으로서 이순신 개인의 무예에 대한 평가. 굳이 이러한 하위항목을 추가로 작성한 이유는 이우혁의 판타지 소설 왜란종결자의 영향으로 인해 이순신이 무예에 능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평균보다 떨어지는 수준이었다는, 소위 '''"이순신 약골설(?)"'''이 대중들에게 아직도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라이벌(?)인 원균이 배우보정과 역사왜곡으로 강건한 무골로 묘사되는 바람에 비교되어 이러한 인식이 더욱 퍼진 듯 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순신의 무예는 특출나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예가 낮다고 폄하될 만큼 떨어지는 수준도 아니었다.
흔히 이순신의 무예를 저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근거는, 활 50발을 쏘아 42발을 맞추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무과에 32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했고, 무과 성적이 29명 12등으로 중간 수준이었다는 점, 몸이 아파 고생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자주 나온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보면 이것들은 이순신의 무예를 저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먼저, 국궁에서 50발을 쏘아 42발을 맞추는 것은 오늘날을 기준으론 무척 잘 쏘는 편이지만[87] 활쏘기가 일반적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그렇게까지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다. 단, 이순신이 저 기록을 남겼을 때는 신체적 능력이 저하된 중년 시절이었음을 감안해야 하며, 각궁이 현대식 컴포짓 보우 등보다 열악한 장비인 것, 사람의 시력은 나이에 반비례하는 데 안경도 지극히 희귀하던 시대라는 것까지 감안하면 뛰어나지는 않더라도 심각하게 떨어지는 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나이 32세는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다. 당시 무과의 합격하는 평균 연령이 34세였음을 감안하면 오히려 평균보다 약간 빠르다. 29명 중 12등이라는 성적 역시, 당시 합격자 29인 중 25인이 현역 군인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88] 문과에서 무과로 전향한 사람이 현역 군인들과 경쟁해서 29명중 12등이면 그런대로 준수한 성적이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가 아닌 4년마다 치르는 정식 무과시험인 식년시에 응시했다. 애초에 무과가 무술고시 같은 시험인데 여기서 주변인들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일반적으로도 약하다고 볼 수 없다. 당시 조선에서 무과에 합격한 인간들보다 무예가 뛰어난 인간들이 얼마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몸이 아프다는 난중일기의 기록들 대다수는 백의종군 후 두 달간의 투옥과 고문에 의한 후유증이며, 그 전에는 사천 해전 때 입은 총상의 후유증, 업무로 인해 발생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잔병치레나 숙취로 인한 두통 정도였다. 즉, 체질적으로도 약골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89] 게다가 당시 이순신은 이미 50대였고,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무장으로선 적지 않은 나이였다. 즉 적지 않은 나이 + 전시 최고 지휘관이라는 막중한 부담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 + 고문 후유증 + 매일 술을 달고 사는 주당(...)임을 생각하면 이순신이 항상 멀쩡한게 더 이상하다.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 악화가 약골이라는 논리대로라면 북원 원정 중에 사망한 영락제나 후궁 하르졸의 사망 이후 실의에 빠져있다가 앉은채로 급서한 청태종, 아들이 반란 일으켰는데 병이 나서 누워있다가 속절없이 당한 이성계도 죄다 약골로 몰 수 있다.
그 외에는 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무과에 낙방했다는 점도 있는데, 이를 근거로 승마술이 뛰어나지 못했다고 보기도 하나 단순한 사고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차피 그 다음에 합격한걸 보면 적어도 과거에 합격할 정도의 승마술은 있었다고 봄이 옳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했을 때, 이순신은 당대의 신립처럼 무예가 아주 특출나게 뛰어난 장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무장으로서, 장군으로서 납득할만한 무예는 갖추고 있었다는 보는 편이 옳다. 당장 기본적인 무예조차 갖추지 못했다면 부하들에게 그러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명량 해전에서 대장선 한 척으로 수백 척에 달하는 적의 공세를 막아내며 부하들이 합류할 때까지 버텨낸 장수가 개인적인 무예가 형편없을 리 없다.
[1] Extra History 이순신 편에서 고증 자료를 찾는 과정을 다룬 영상에서 제작진이 '난중일기가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자료였다'는 의미로 언급한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었다(The person most critical of Admiral Yi was Admiral Yi)."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자평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교 사회에서는 자신의 공적을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고 겸양하고 낮추는 것이 기본적인 미덕으로 여겨지기는 했다. 타인한테 보여주는 식의 겸손까지는 크게 어렵진 않은데, '''보는 눈 없는 일기에서까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극히 실행하기 힘들다.[2] 수군 제독으로 한정한다면 단 한번의 패배는 커녕 단 1척의 배도 잃지 않은 수군 제독은 없다[3]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달마티아, 북아프리카 등 서로마의 거의 대부분을 수복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사막 유목집단에 불과했던 베두인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를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쫒아내 중동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확립시켰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중국 대륙에서 유럽까지 누비면서 총 65번의 회전을 경험하고 32개의 나라를 멸망시켰던 사준사구의 일원 수부타이 등.[4] 카르타고의 신화적인 명장한니발 바르카가 '전략의 아버지'로 칭송 받는 이유는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존재여서이기도 하지만, 이순신과 비슷하게 본국의 원조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급과 원조 없이 그쯤 했으면 진짜 잘 싸웠다는 것. 하지만 한니발은 "전쟁은 절대로 명장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뛰어넘지 못하고 끝내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배했지만, 이순신은 아예 이 대놓고 방해하는 와중에도 전쟁을 이끌고 마지막 전투까지 승리했다.[5] 압도적인 위업을 이룩한 세계사의 명장들은 대부분 정복군주이며 이들이 이뤄낸 전과의 동기는 현대 기준으로 좋게 보이지 않는 패권주의이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이들을 싫어하는 나라의 사람은 무진장 싫어한다.[6] 해당 부분은 졸기라는 것으로 죽은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실록을 편집할 때 수 많은 사초에서 사관들이 쓴 졸기 중 의미있는 인물의 것만 추려 그 중에서도 가장 객관적이고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대표로 등재한다. 즉 해당 내용은 조선 왕조의 가장 공식적인 평가인 셈. 아무리 뛰어난 사람도 보통 흠이 한두개는 들어가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찬사가 가득한 졸기는 보기 힘들다. 심지어 왕이나 왕후의 사망 기사에도 부정적 평가를 써 놓는 경우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이순신의 찬양은 그렇다 쳐도 칠천량의 대패를 원균을 쓴 조정, 즉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책임으로 대놓고 명시해버리며 까버렸다.[7] 링크를 한 것처럼 이 표현은 논어에서 이미 등장한 표현이다. 논어 자한 편에서는 '덕을 좋아하는 것을 마치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라는 구절이 있으며, 논어 학이 편에서는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할 때는 여색을 즐기듯이 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의미가 와닿게 설명하자면 '학업이나 직분을 게임하듯이 좋아하고 즐겼다'와 비슷한 느낌이다.[8] 어떤 선비가 꿈에서 임진왜란 때 싸우다가 죽은 영웅들(김시민, 송상현, 조헌 등)이 한자리에 모여 한 마디씩 하는 걸 목격하는 내용의 소설인데 여기서 다른 영웅들은 이순신을 '''가장 상석에 앉힌다.''' 전사한 원혼들에게 신립은 욕을 먹고 원균은 몰매를 맞는다.[9] 장순과 허원은 모두 당나라 안사의 난 때 활약했던 장수들이다. 함께 수양성을 지키며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전했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안록산이 이끄는 반군의 회유를 거부하고 처형되었다. 모두 충절을 지켰던 인물로 칭송받았으며 도교에서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10] 으뜸가는[11] 윤휴의 이복 형의 장인이 바로 이순신이다. 백호전서를 읽어보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질 정도로 이순신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12] 사실 명량 해전거북선은 1척도 없었다. 그냥 판옥선 가지고 다 때려부순 전투. [13] 계미사행(1763)의 수행원으로 조선 통신사를 다녀온 뒤 쓴 기행문이다. 그러나 이 기록이 쓰여진 지 불과 200년도 안 되어....[14] 윤휴와 더불어 조선 후기 이순신 팬덤(…)의 양대 산맥. 홍재전서나 실록 곳곳에서 이순신에 대한 칭송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15] 당장에 신하들은 선무공신 '''2'''등에 추천했고 그나마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진심이라기보다는 선조 눈치가 보여서 그렇게 올려놨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 추측이 맞다고 치면 아무리 왕 눈치가 보여도 신하들 입장에서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동급에 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로 취급했다는 거다.[16] 이게 한두 번이 아니다. 임란 직후 이순신 휘하에서 복무했던 병사들이 돈을 모아서 공적비를 세운 것부터 시작해 통영 백성들이 돈을 모아 사당을 세우기도 했고, 아예 통영 쪽으로 임관한 현감이 자비를 털어 공적비를 세운 것까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세워진 사당과 공적비는 10개 이상이며 대부분이 지금도 남아있다.[17] 운구 행렬마다 백성들이 "공께서 우리를 살려 주셨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고 어디에 가십니까?"라고 하면서 운구를 붙잡고 울고불고 하는 통에 운구 옮기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18] 농담이 아니고 군대가 자급자족하면서 함대 유지하는 건 둘째치고 전장에 나가서 싸우고 그것도 모자라 23전 23승 하는 건 웬만해서는 아예 '''절대 못한다.''' 이런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는 군대가 있긴 하다. 조선인민군이 딱 요 꼴인데 이순신 휘하 함대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이순신처럼 중앙에서 필요한 것을 갖다바치긴커녕(뇌물이라면 모를까) 자기네들 먹고 살기도 모자라는 지경. 그것도 전시가 아니라(명목상은 전시긴 하다) 평시인데도 이 모양이다.[19] 반대로 율곡 이이의 계열인 문성공파는 문과에만 줄줄이 급제했다. 이는 덕수 이씨의 특징이기도 하다. 문성공파 중심의 문골 세력과 충무공파 중심의 무골 세력으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20] 이게 붙은 이유로 좀 웃픈데 '충'자가 붙은건 어쨌든 충성했으니 충자가 붙은 거지만 '민'자가 붙은 건 충성만 하고 정작 한 건 없어서(...).[21]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장면에서의 해설. 그리고 이 해설은 과장도 허풍도 아니었다.[22] 박시백 화백은 조선왕조실록 완간 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조선의 인물로 세종과 이순신을 뽑은 적 있다. 인터넷상에서는 운동권 인사들이 이순신을 저평가한다는 이미지가 퍼져 있는데, 박시백은 1980년대 강성 운동권 인사였다.[23] 세종: 종로구 통인동, 이순신: 중구 인현동[24]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거나 등등. 심지어는 세종대왕만 해도 장영실에 대한 석연찮은 숙청이라든지, 화폐 사용을 무리하게 정착시키려다 많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한 일이나, 팔만대장경일본에 주려고 한 일,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수령 고소 금지법을 제정한 일, 백성들은 쇠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면서 정작 본인은 매 끼니 고기를 먹은 것, 고려 시대 군주들의 어진과 동상을 파괴한 일 등의 자잘한 오점(汚點)이 있다. 게다가 황희 정승을 죽을 때까지 단물 쪽쪽 빨며 부려먹었다거나...(비단 황희 뿐 아니라 많은 이들을 부려먹을대로 부려먹었다.) [25] 사실 그렇다고 할 수 없는게 2000년대까지 국내 사학 전공자 중에 순수하게 이순신을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임진왜란이나 임진왜란 해전 전반 혹은 선조 시기 정치사(政治史)와 연관 지어서 다뤘고, 해군은 충무공 리더십 센터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연구소를 만드는 등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인물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학자들에게 관심을 못 받은 경우라고 해야 맞는 것인데 더 연구해봐야 지금 상황에서 딱히 성과적으로 나올 거리가 없다고 여긴 것도 있다. 유명 수군 도독이 어떠한 의미인지, 20세기 내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26] 얼마나 허술했는지 장부상 오차에 화살이나 군량 정도가 아니라 군함이 비는 수영(水營)도 있었다!! 현실로 따지면 탄약이나 군장이 수량이 안 맞는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전차, 전함, 전투기의 수량이 안 맞는 부대가 있는 수준으로 심각한 일이다![27] 심지어 이 이른바 충무공 어록이라는 걸 일선 부대에까지 정훈교육자료로 뿌려놨다.[28]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대한민국 역사상 원탑 장군을 KD-2 구축함에다 함명을 사용했다고 불만인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당시 나라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이 나오기전까지 해군은 이순신 장군의 성함을 아끼고 아끼고 고이 간직해뒀는데 그 이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지스함에 그 영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IMF로 인해 KD-2사업이 위기에 처하고 이지스함 개발은 난황을 겪게 된다. 그래서 결국 KD-2 1번함 네임 쉽(name ship)에 충무공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29] 실제로 류성룡함으로 명명된 이유 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을 추천했기 때문[30] 독도급 강습상륙함의 후속인 경항공모함 CVX미 해군와스프급 상륙모함아메리카급 강습상륙함을 모델로 F-35B와 같은 수직이착륙 고정익기 운용까지 염두에 두고 건조될 예정이다. 이 CVX의 초도함이 진수될 때쯤이면, 현 충무공 이순신함은 거의 퇴역시기에 다다르게 된다.[31] 영어로 General은 육군 지휘관을 의미하고, Admiral은 해군 지휘관을 의미한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해군)의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Admiral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오히려 한국어의 '장군'에 해당하는 단어라는 이유로 General을 사용해 버리면 이순신을 잘 모르는 영어권 국가의 외국인이 봤을 때 이순신을 육군 지휘관이라고 생각하게 된다.[32] 그러나 , , 삼군 병립체제인 현대 대한민국 국군과 달리 당시 조선군은 육군과 수군이 별개 분리된 조직이 아니며, (본격적으로 육, 해군이 별개 운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군에서 대한제국군으로 바뀐 이후고, 그나마도 대한제국군에서 해군은 없다시피 했다.) 이순신도 엄연히 커리어를 육상과 해상을 번갈아 가며 쌓았기 때문에 육군 지휘관이냐 해군 지휘관이냐 무 자르듯이 구분하는 것도 문제가 있긴 하다.[33] 또한 각 지역마다 위인 한 사람씩 선정해 사당을 보수하고 그 행적을 널리 알리게끔 하는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장사(壯士) 김덕령, 홍의장군 곽재우 등이 이 무렵 부각된 위인들.[34] 보통 뒷면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초상화 있는 쪽이 앞면이다.[35] 사실 무속 신앙에서는 정말 별별 인물들을 다 신으로 모신다.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남이 같은 인물들도 '원한이 있기 때문에' 신으로 모셔진다. 이 외에도 맥아더관우 같은 외국인도 모셔지는 경우가 많다(다만 관우는 임진왜란 때 들어온 명군에 의해 도입된 까닭도 있다.), 하여튼 무언가 대중에 이름이 알려질만한 군인이면 신으로 모셔진다. 맥아더 장군은 아직 죽지않았을 시기 당시에도 신으로 섬겨졌다.[36] 무속의 관점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집이 아닌 외지에서 객사했고, 그것도 물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이러한 죽음 방식은 무속에서는 가장 처참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방식이라고 간주된다. 더구나 이순신은 죽기 직전까지도 "적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즉 적들을 모두 몰아내기 전까지 나는 죽지 않겠다는 강한 원념을 품고 있었고, 그의 원념과는 달리 일본 주력군은 전멸당하지 않고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죽을 당시의 상황이 비극적일수록, 그리고 생전에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은 인물일수록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특히 강하게 남게 된다는 것이 무속의 설명이며, 이 점은 한국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존재하는 신에 대한 관념이기도 하다.[37] 이 덕에 이순신은 이일이 모함을 했음에도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처벌이 끝났다.[38] 임진왜란 뿐 아니라, 조선 중기까지 조선에서는 청어잡이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청어는 명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며, 대마도에 보내 왜구들을 달래는 데도 유용하게 쓰였다.[39] 한명은 2013년에 입학한 해사 71기, 다른 한명은 2014년에 입학한 해사 72기다. 이중 72기생의 아버지 또한 해군 출신이며, 해사 40기로 최종적으로 해군군수사령부 참모장까지 지내고 대령으로 예편하였다.[40] 이 단어 자체가 어떤 뜻을 갖는지 알고 나면 이해가 더 쉽다. 해당 문서 참조[41] 사실 이때는 국가라는 개념 자체도 없었다. 적어도 현대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은 아니다.[42] 원 한문 텍스트 옆의 일본어 구두 표시(한국의 구결에 해당됨)까지 옮겨 일본어 어순으로 재배열한 것.[43] 鷄林. 원래 신라의 별칭이지만 '고려'와 함께 조선을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였다. 일본 본토에서의 무사나 상인들조차 조선 사발을 그냥 고려 자기라고 불렀다. '조선', '고려', '계림' 등은 애초에 서로 통용되는 말이었던 것. 일본은 조선의 국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온 외교관이 국서에 '고려'라는 말을 썼다가, "남의 나라 국호도 모르면서 외교를 하려 하느냐? 고려는 400년 전 망했다"라고 쫓겨난 적도 있다. 그리고 우리도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왜라고 불렀다. [44] 김시덕, 《그림이 된 임진왜란》[45] 다른 유명한 일화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에서 했다는 "넬슨과 나는 비교하되, 이순신과는 비교하지 마라" 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도고 제독에 관한 이런 일화들의 원전은 川田功이 쓴 《砲弾を潜りて》(博文館, 1925年)이며, 이 책은 전기 소설이다.[46]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몇 개의 서적에서 등장하는 모양이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은 모양.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라는 발언이 실려 있다는 《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라는 서적도 일본과 중국의 국교 회복 서명 운동의 실시를 도모함과 동시에, 한일 회담의 분쇄를 목적으로 한 서적인 듯하며, 그리 신뢰할 수는 없는 서적이라는 듯.(#).[47] 참고로 이영개는 평범한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군에 비행기를 갖다바치고 그 대가로 조선인에게 참정권이 없었던 일제 강점기 때에 무려 일본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만큼 거물급 친일파였다. 그러다가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일본으로 달아났는데, 대략 1964년 즈음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와 사업을 하려고 했을 때, 국내의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일부러 도고가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식의 거짓말을 지어내어 퍼뜨렸다는 것이 유력한 견해https://blog.naver.com/kc6731/120205408814[48] 사실과 다르다. 명량 등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 이순신 장군은 대부분 왜적보다 우세한 병역으로 전투에 임했다.[49] 이 부분도 정확치 않다. 일본 육군은 러일 전쟁 당시 203고지 등에서와 같이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 억지로 인원을 투입하여 겨우 우세를 차지했을 뿐 실상은 러시아에 비해 훨씬 많은 전사자를 보이는등 상처 뿐인 영광이였다.[50] 다만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은 임진왜란 초기의 조선군에 비하면 훨씬 선전한 편이었다. 적어도 수도가 털리진 않았잖는가(...)[51]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 장군은 보급을 현지에 둔전들을 개척해 스스로 조달하였기 때문에 보급이 끊긴다는 것은 근거지를 뺏기는 경우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다. 당연 무패의 이순신 장군은 보급량이 부족할지언정 끊긴적은 없다.[52] 그러나 이것이 정부 지원을 못 받고 되려 조정에 공물까지 갖다바쳐야 했던 상황을 말하는 거라면 얼추 맞다고 할 수 있다. 쓰시마 해전에 국운을 건 일본과 전폭적 지원을 받던 도고 제독에 비해 힘든 상황임은 사실이다.[53] 출처 :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 이종락 지음, 선인 출판, 2010년, pp.27 ~ 28[54] 북한에서는 "리(이) 씨 왕조"를 줄여 리조로 부른다.[55] 북한이 이순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남한에 비해 띄워줌이 덜하고 자기네 땅에서 일어난 인물들을 더욱 띄워준다는 것이다.[56] 하늘을 날줄로 삼고 땅을 씨줄로 삼음. 경과 위는 위도, 경도할 때의 그 경위다. 즉 천하를 재단할 만한 큰 재주를 말함.[57]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으로 대단히 큰 공로를 일컫는다. 여와가 하늘을 보수했다는‘보천’과 희화가 해를 목욕시켰다는‘욕일’의 전설에서 따온 사자성어.[58] 1862년생. 파쇼다 사건제1차 세계 대전등에 참전한 군인이면서 역사가를 겸했기에 알게된듯 하다.[59] 무슨 문헌을 참고하고 썼는지, 계속 'Yi-sun'이라고 이순신 장군을 호칭한다. First name이 '이순'이고 Last name이 '신'인 것으로 착오했을 수도...[60] 정확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활 쏘고 충각 전술에 백병전을 벌이는건 일본 수군의 전법에 가깝고(활과 충각은 좋은 성능의 국궁과 견고한 판옥선으로 인해 조선 수군에서도 사용했지만 조선 수군의 전법은 근접전보다 적선의 접근거부 & 포격전에 가깝다), 몽고메리가 아시아의 전반적인 해군 수준을 몰랐거나 하등한 수준으로 본 것이며, 한반도에선 이미 고려 말부터 해전에서 화포가 사용되었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도 해상 포격 전술은 왜구를 상대하는 데 주요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을묘왜변을 거치면서 해상 포격전에 특화된 배인 판옥선이 정걸의 주도하에 주력함으로 개발됐고, 이순신 장군은 이 판옥선의 장점을 극대화 시켜 왜적을 압살했다. 그 외 베트남도 비슷한 시기부터 화포를 장착한 함선을 이용했고, 인도네시아 군도 국가들 또한 카락선보다 큰 함선에 대포를 달아 포르투갈 원정군이 애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61] 게임 개발자가 진행하는 채널로, 주로 게임과 그 구성 요소들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한다. 그러나 별도로 'Extra History'라는 코너에서 역사 관련 영상도 올리고 있다.[62] 그도 그럴 것이(?) 이순신 자신은 난중일기에서 명량 해전도 천행이 뒤따랐다. 라고 평가하는데 현대인의 평가를 요약하면 "이순신이 있었으니 이긴거임"이다. [63] 가령 일본 측에서 일부러 이순신을 까내리면 역으로 '''그 이순신에게 먼지나게 털린 일본 측의 장수들'''은 더더욱 평가절하 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64] 그나마도 조선측은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 및 그 밑의 일부 지휘관 그리고 명군 지휘관 1명이 전사하고 진린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는 등 피해를 안 본건 아니었지만 일본군은 여기에 참여한 함선의 2/3나 바닷속에 가라앉아 이순신을 죽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피해를 많이 보았다. 더욱이 이 때 조선군은 60척이었는데 조선군만 놓고 보면 1:5였고 명군이 합쳐져야지 6:5로 일본의 열세인데 조선의 피해는 뚝 떼놓고 명군으로만 규모와 피해를 집계해서 보면 총 300척 중에 1척이 격침된 게 전부다. 명군의 피해를 놓고 보면 일본군은 명군이나 조선군에게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을 뿐 역관광을 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고 쳐도 전체 총 전력손실을 보면 조명연합군은 전체의 1/6만 타격을 입었을 뿐인데 일본군은 2/3나 박살났다. 아무리 병력면에서 조명연합군이 약간 유리했다 하나 아무리 (말이 안 되도록) 최대로 가정해도 1/6이 박살난 조명연합군과 2/3가 박살난 일본군을 비교해보면 일본군이 역관광시켰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65] 오히려, 이순신에게 복수하겠다며 해안 마을과 피난하는 민간인(어린아이조차 가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들을 한 명 남김 없이 몰살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행태가 바로 전쟁범죄다. 심지어 이순신 자신조차 일본의 보복으로 가족들이 죽을 뻔했고 그 와중에 둘째 아들 이면이 죽었다. 이러니 더더욱 노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을 최대한 많이 몰살시키려 할 수 밖에 없었다.[66] 한국 역사에서 그런 가장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으로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만 뚝 뗴놓고 보면 허구한 날 고구려에게 얻어터지고 백제에게 얻어터지는데 김유신 열전을 보면 진김유신무쌍을 찍는다. 이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김유신 가문에서 지은 행장을 참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행장과 실제 역사가 이렇게나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것 마치 한 나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67] 예컨대 원균을 배설보다 낫게 서술하여 개인 감정만 드러낸 《난중잡록》. 신뢰도가 높은 강항의 기록도 그의 처지 상 풍문이 상당수 섞여있고, 교차검증 시 틀린 부분이 있는 경우가 있다.[68] 참고로 명 수군의 함선은 그 체급이 일본의 소맹선보다도 약간 작은데다 화포 무장도 변변치 않아서 조선 수군은 많은 전투에서 명 함선을 아예 전투력에 넣지도 않았을 정도였다.(...)[69] 평소엔 이런 다구리 각개격파로 발랐는데 명량에선 '''아예 1척으로 발랐음'''[70] 하지만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을 강하게 따르고 있는 진보 성향 인사들, 예를 들어 박노자 같은 경우는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을 종종 드러낸다.[71] 이 사람은 진보 치고는 일뽕 경향이 상당히 진해, 해당 발언 공개 이후 이와 엮인 상당한 비난을 받았다.[72] 참고로 이 인물은 일본 웹사이트에서도 활동했는데, 일본의 극우 혐한에 열렬히 동조하면서 한국을 비하하는 게시물들을 집중적으로 올렸고, 그 때문에 혐한 성향이 강한 일본인 네티즌들로부터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다."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아울러 일본의 극우 혐한 인사한테 직접 혐한 자료들을 갖다 줄 정도로 활동력도 강했다.[73] https://www.youtube.com/watch?v=YHbUdtBg95k[74] 이것 이외에도 루XX는 일본 웹사이트에 자기가 군복무를 하면서 고시공부를 해서 서울대에 합격했다느니 자기 삼촌이 공군 참모총장이라느니 하는 식으로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선전했으나, 국내 네티즌들의 집요한 추적 결과 모두 거짓말로 드러나 신빙성이 완전히 없는 인물로 밝혀졌다.[75] 일본 전국시대 역사중 해전에 대한 내용을 찾기가 상당히 난해하다. 일본역사에 해상은 그저 보급품을 수송하는 곳이지 싸우는 무대가 아니였다는것.[76] 이순신은 이를 간파, 한산도 해전처럼 기만술로 적을 유인하거나 뛰어난 첩보를 통해 적이 숫적 우위로 밀어붙여 협공을 펼치기도 전에 색적후 격파하였다. 이에 예기가 꺾인 일본 수군은 엄청난 숫적 우위에 있음에도 아예 해전 자체를 하지 않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가 아닐 수 없다.[77] 누차 강조하지만, 당시의 포탄은 말 그대로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오늘날처럼 명중하는 순간 폭발하는 게 아니다. 맹꽁이 서당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조선군이 쏜 포탄이 일본군 진지에 떨어지자 일본군 병사 몇 명이 이리저리 굴리고 놀다가 폭발(…)해서 다 날아간다. 반대로 말하면 당시의 포탄은 터지는 게 아니라 그냥 굴리고 놀 수 있는 쇳덩이였다는 말.[78] 우리는 아주 훌륭한 반대 예시 하나이미 알고 있다.[79] 이 경우 이순신은 근대적 해전을 실전에서 가장 먼저 보인 선구자로서의 면모가 부각된다.[80] 화약 사용량 대비 사거리가 길고, 약한 화력은 산탄을 장전해서 인명 살상용으로 쓸 수 있다.[81] 물론 해야 한다면 마냥 피하지도 않았다. 아예 일부러 적선에 갈고리를 걸어 접근한 후 근접전을 펼치기도 했다.[82] 조선군이 백병전을 수행할 수 없었던 건 아닌데, 백병전으로 이행하면 순식간에 전투력이나 사기 면에서 밀리며 패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는 몇 배, 어떤 경우는 스무 배가 넘는(용인 전투 : 왜군 2,000명 미만 VS 조선군 4만여명) 수적 우위의 병력으로도, 왜군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는 것으로 일관했던 조선의 육지 전투에서 증명된다. 100년이나 되는 기간 동안, 말 그대로 사람을 때리고, 찌르고, 베고, 쏘아 죽이면서 훈련된 것이 당시의 왜군이었다. 그런 왜군을 상대로, 농사 짓다가 끌려와서, 변변치 못한 무기로 어영부영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만연한 부정부패와 비리로 군량도 부족해,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조선의 군사들을 백병전으로 붙인 결과가 전쟁 초반의 '간지가 철철 넘치는 반자이 어택모랄빵이 나서 제대로 싸우기도 전에 지던 당시의 조선 육군'이었다(...)[83] 실제로 《난중일기》에 병사들이 상륙해서 배 만들 목재를 조달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84] 이 행위는 왜군들도 자주 했다. 전장에서 자원을 모아서 무기를 만들어 싸우는, RTS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임진왜란 때는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바로 그 이순신 장군에게 보급로를 싹 털려서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일본 본토는 계속 보급을 해 줄 의지도, 보급품도 있었다. 물론 정작 중요한 이순신을 뚫을 수가 없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85]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이를 묘사했다. 극중 군졸인 대만이 도성으로 보내는 공물을 보면서,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이거 그냥 확 불 질러 버렸으면 좋겠다(…)'라고 하자, 영갑이, '누가 아니래냐? 총알에, 화포에, 피해가면서 전쟁하는 놈들 애쓴다고 곡물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둔전소에서 곡식 나오는 족족 도성으로 보내라, 명나라 놈들한테 보내라, 참말로(…)'라 대답한다. 그에 호응하는 군졸들이나 백성들은 덤. 실제로도 수군 간부 / 병사들이나 백성들 할 것 없이 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을 것이다.[86] 실제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지휘관의 역량이 그 가치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무기라는 것 자체는 그 나름의 특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는 것이지, 완벽하게 모든 면에서 상대방의 무기를 상회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즉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는 건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 그 예로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차는 미국 전차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것은 포의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장갑에서 뛰어났던 것이지, 속도나 양산 능력, 신뢰성, 정비성에선 미국에 한참 밀렸다. 그래서 독일의 높은 포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두꺼운 장갑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는 장거리 전투나, 매복 전투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반대로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물량이 많고 보급이 빵빵한 미국에 비해 불리했다. 당시 독일의 명장이라 불린 장군들은 이런 독일 전차의 특성에 맞게, 상대방을 자신에게 유리한 장거리전이나 장애물이 많아 매복하기 좋은 곳으로 이끌거나, 상대방이 지나갈만한 길목에 매복 부대를 배치해두는 등, 자신의 무기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고, 그에 비해 약점을 최소화하면서 운용하고, 독일 무기의 진가를 발휘할 상황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높은 전과를 올렸고 명장으로 불리는 것이지, 단순히 무기의 성능이 앞선다는 것만으로는, 수적으로 독일을 압도하는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독일 전차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받던 미국 전차도, 미국의 명장인 조지 패튼이 미국 전차의 우월한 기동성을 활용, 상대방의 주력 부대를 만나면 우회해 다른 길로 새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독일군 전선 깊숙이 들어가서 전선을 교란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운용함으로써 독일군을 궁지에 몰아버린 것을 보면, 무기는 그 자체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적과 아군의 무기 특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증명해준다. 실제로도, 한체급 떨어지는 T-34 전차 한대로, 비숙련 인원들이 모는데다 첫 출전이라서 전차의 특성도 파악이 안된 티거 2 전차 세대를 박살낸 소련군의 알렉산드르 오스킨 중위의 사례나, 저 위 패튼의 창끝이라고 불리며 역시 한체급 아래인 셔먼 전차들을 이끌고 중전차 대대 수준의 전적을 내고 다니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의 경우를 봐도 유능한 지휘관의 가치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현대전으로 봐도 에이브람스 전차를 갖고선 제대로 된 탱크도 별로 없던 IS에게 털린 이라크 군이 있다. 그리고 조선군의 무기가 비록 뛰어났을지라도 전쟁 준비가 잘 갖춰진 일본군은 더 많은 물량이 있었고, 여러모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보다 조건이 더 유리했다는 것을 유념해야할 필요가 있다.[87] 5시 1순의 방식으로 쏜다면 적어도 2번은 몰기(모두 명중)를 했다고 볼 수 있다.[88] 무과의 정원은 28명이지만 문과와 달리 무과는 합격 정원이 칼같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실제론 정원보다 많이 뽑는 경우가 많았다.[89] 애초에 병약=무예가 약하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오키타 소지처럼 폐병환자지만 최정예 치안조직인 신센구미의 최선봉에 설 수도 있다. 체 게바라는 천식 환자였지만 격오지를 누비며 게릴라전을 이끄는 군사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