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대체역사
1. 개요
6.25 전쟁에서 파생되는 여러 대체역사를 논하는 문서.
2. 적화통일
2.1. 김일성 정권의 운명은?
2.1.1. 김일성 독재 방지
6.25 전쟁에서 국군이나 유엔군이 패해서 철수해버렸다면 한반도는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적화통일이 된 한반도는 현재의 북한처럼 완전히 막장이 되진 않았을 가능성이 큰데, 적화통일로 인하여 남로당, 연안파, 소련파들이 김일성과 권력쟁탈전을 펼치고 서로 독주를 견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잘 되면 김씨 일가의 세습독재국인 현재의 북한이 되기보단 평범한(?) 공산국가가 되었거나, 심지어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받아들인 약간 개방적인 공산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중국의 마오쩌둥이 그랬듯이 김일성이 전쟁에서 이겨 통일을 완수하고 개선장군으로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가능성도 충분하나, 적화통일이 된 한반도는 남북이 대치할 때처럼 외부세력을 구실로 권력을 강화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1] 특히 남로당파와 연안파, 소련파 등이 적화통일 과정에서 세운 나름의 공로를 내세운다면 8월 종파 사건때 패배하고 망명하는 쪽이 김일성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랬다면 스탈린 사후의 소련이나 동유럽 국가들처럼 공산당 내 집단지도체제가 형성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김일성이 개선장군으로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더라도 진즉에 개혁개방에 나섰을 것이기에 이 정도로 폐쇄적인 체제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탈북민 기자 주성하는 아마 폴스카(폴란드)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피력한 적 있었다.
다만 현재의 폐쇄적인 김씨 왕조보다는 나을 뿐, 사적 소유가 철폐되었는데 생산력은 자본주의 최고 수준(즉 생산력이 사적 소유를 더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체제의 특성상 지금의 경제대국인 선진국 한국이 되지 못하고 경제력 등 모든 부문에서 그저 그런, 빈약한 중소 후진 농업국가 선에서 발전이 정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일성이 실각하거나 최소한 이 정도로 폐쇄적이지는 않고 평범한 공산국가가 된 공산 한반도라면 아마도 지정학적으로 인접해 있는 중국, 베트남, 라오스를 따라서 80년대 말엽에 경제운영의 자본주의적 요소와 외국 자본의 진출을 받아들이긴 했겠지만, 생산력 부족과 국유경제 사이의 모순을 경험한 뒤 급성장하는 후발주자 신세고 중국이 이미 거대한 경제대국으로 커버린 후라 성장 과정에서 상당히 불안정한 시기를 거쳤을 것이다. 아마 현재의 베트남이나 라오스와 비슷한 중견 개발 도상국이 되어 있을 듯. 물론 '''어찌되었든 지금의 북한보다는 더 풍요롭고 더 개방적인 사회이고 지금의 대한민국보다는 덜 풍요롭고 덜 개방적인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2.1.2. 김일성 독재의 공고화
다만 김일성이 숙청을 성공했을 경우는 위의 결과물은 어림도 없고, 현재 북한처럼 해외가 더 나은 왕국에 버금가는 막장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2]
실제로 휴전 이후 김일성의 권력장악이 그렇게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정적들에게는 패전이나 다름없는 휴전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무수히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를 하나하나 적반하장격으로 상대에게 덧씌워 절대권력을 구축했던 게 김일성이었다.[3] 우선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파는 초반 남한 내 좌파봉기가 없었던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숙청이 확정되어 있다. 소련파도 고려인 2, 3세가 주축으로 국내 기반이 없는 태생적인 한계로 북한에서 정권을 잡기가 어려우며 오히려 소련파 유력인사인 남일이 한국전쟁 시기부터 김일성 딸랑이(...)가 되어 있던 것을 보면 김일성에 대한 견제는 언감생심이다. 그나마 위협적인 요소가 군부에 포진한 연안파 정도인데, 전쟁의 승리는 이 군부 내의 세력균형을 김일성에게 기울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중공군의 개입 없이 적화통일을 완수한다면 국공내전 당시 중공군을 적극 지원했던 김일성은 중공에 대해 막대한 외교적 채무를 지울 수 있게 되며, 이를 토대로 간도라도 뜯어낸다면 그 위상은 상상을 초월한다.[4] 승전으로 인한 대중적 인기와 지지, 그리고 군부에 대한 장악력은 김일성에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가 될 턱이 없다.
적화통일은 오히려 미국의 매카시즘 광풍을 부추겨 관계개선의 여지를 차단할뿐더러, 나아가 미제가 남조선을 탈환하려 일본군을 끌고 온다고 선동함으로써 미제+일제의 콤보로 더욱 심각한 공안정국을 조성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전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마르고 닳도록 써먹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아이템일 뿐더러,[5] 한반도가 완전히 적화된다면 미국으로써도 일본의 방위를 고작 자위대 따위로 때울 수가 없고 그 악명높은 '''일본군'''이 본격 부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한민국조차도 일본의 참전에 대해 '''공산군보다 일본군에게 먼저 총부리를 돌리겠다''' 운운하며 극력 반발했을 정도인데 북한이야 말 할 것도 없다.
2.2. 대한민국의 운명은?
낙동강 방어선마저 붕괴할 경우를 대비하여 월튼 워커 미8군사령관은 대한민국 정부를 서사모아로 이전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했는데, 이때 정부 이전 후보지 중에 제주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 제주도는 면적이 너무 좁고 농경, 식수 환경이 척박하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결국 후보지에서 제외되었다. 이 역시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그저 제안으로만 끝났다.
냉전 종결 후 기밀 해제된 미국 비밀문서에 따르면, 1951년 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에서 다시 한 번 이보다 더 체계적인 한국 정부 망명 계획을 준비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완벽하게 패하는 상황이 아니라 중공군이 금강 - 소백산맥 방어선을 넘어오기만 하면 바로 실행한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2.2.1. 서사모아로의 정부 이전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의 공세로 낙동강 방어선이 위기에 처하자 미국 정부는 '''서사모아 제도'''에 한국 망명정부를 구성하려고 계획했었다.
한국의 정부 요인 및 피난민을 합친 62만 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당시 뉴질랜드령이었던 서사모아 제도 내 어느 섬으로 이주시키고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계획. 단, 정부만 안전하게 이동시킨다는 것이지 한반도 인근 일부 도서는 대한민국의 통치 영토로 남겨놓는 세부적인 사항도 있었다. 제주도는 인민군이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 패배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영토로 남을 수 있는데, 제주도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차후 서사모아 망명정부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는 최전방 군사 기지로 활용할 가능성이 생겼던 것.
이 계획은 이른바 '''New Korea Plan'''으로 당시 미국 정부가 미8군사령관을 통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이승만 대통령과 서사모아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는 충격과 공포의 제안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참조 항목 다만 이 사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한국의 정부 인사와 군 관계자들에게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계획에 불과했다. 일단 제주도의 대만화는 제주도가 식수가 부족하고 척박하다는 이유로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일본의 경우는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우기에는 반일감정 및 일본 내 극우 세력의 테러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한국 정부가 재일교포들을 한국 국민으로 편입시켜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 들 텐데 과연 일본이 그걸 용인하겠느냐는 문제도 존재했다.
비밀 문서 해제에 따라서 일정을 보면 국군 고위 장교 및 그 가족, 정부 인사 및 그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아직 전투력을 보전한 한국군 약 몇개 사단을 주축으로 한다는 것이다. 민간인은 서사모아에 정착하고 군인들은 미군 지휘 체계에 통합한 다음 아시아 방위에 이용한다는 내용.
이 경우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으로 경비를 하면서 일부 자유진영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정식 국가로서 존속하는 것이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말이다.''' 그야말로 한민족 역사상 졸지에 신세계로 떨어진 셈이 되는데, 하지만 서사모아 정착도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게 문제는 서사모아에도 원주민이 있다는 것이니 필히 민족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한국 민간인을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단위로 정착시키면 당연히 기존 원주민들은 대만 원주민인 양 밀려날 수밖에 없고 이후 양측의 마찰은 상당할 것이 분명하다.[6] 수십만~백만여명의 한국인이 밀려온다면 서사모아 섬은 물론이고 그 이외 섬 지역들까지 한국 난민들을 정착 안정시키는 것부터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6.25 이후 수십여년간 한반도와 별개의 역사를 걸어온 망명 대한민국과, 적화통일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관계 문제도 상당히 골치아픈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일단 상당기간 상호 국지전, 게릴라전 등을 벌이는 적대관계일 것은 확실하고, 위에 나온 예상처럼 1990년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개혁 개방화되어 망명 대한민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관계 수립이나 통일을 논의한다 해도, 망명 대한민국은 서사모아에서 사모아 원주민과 40여년간 섞여 살면서 아무래도 사모아인과의 혼혈, 문화 혼합 등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재 중공 출신 중국인이랑 중화민국 출신 대만인, 그리고 남베트남 패망에서 탈출해온 남베트남 이민자 커뮤니티와 베트남 개방정책 후 이민온 공산베트남 이민자 커뮤니티가 서로 원수지간인 걸 보면 두 한민족 국가의 문화적 재통합은 현실의 대한민국-북한 문화적 재통합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의 한민족과 제주도의 한민족이라면 그나마 통일은 가능하겠지만 사모아섬의 한민족의 경우에는 둘의 민족적 문화적 차이뿐만 아니라 지리적 거리마저 너무 멀어서 관계가 양호해져도 통일은 사실상 무리라 인도 본토의 인도인 및 모리셔스나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수리남, 프랑스령 기아나, 피지의 인도 이주민처럼 멀리 떨어진 먼 나라 교민 관계가 되어 완전히 다른 개별 국가로써 별개의 역사로 갈라질 것이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른 민족으로 분화되었을 가능성까지 있다.
2.2.2. 제주도로의 정부 이전
가상 지도
전쟁 당시 남한 본토를 포기하고 제주도로 대한민국 정부를 이전하게 되었다면 '''남한은 현대판 탐라국이자 제2의 대만이 되었을 것이다.'''
6.25 전쟁 당시 북한은 광복절인 8월 15일 이전까지 최종 목표인 부산을 점령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선언하고자 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제주도를 점령대상지역으로 고려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조선인민군 해군은 영해를 무조건 동해, 서해로 나눠서 방어해야 하는 핸디캡을 가지고 있으며, 1950년 당시에도 주력인 육군에 비해서 전투력이 미비했다. 당장 전쟁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발한 남북한 해군 사이의 첫 교전이었던 대한해협 해전에서도 신생 한국 해군에 패전했던 북한 해군은 이후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 해군 때문에 남한 후방의 해안으로 침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18인치급 전함을 가진 일본 연합함대를 잡은 미 해군을 이길 수 있는 해군은 당시 전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2. 제주도가 한반도 본토에서 90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조선인민군이 제주도를 점령하려면 해협을 극복해야 하며, 보급선 역시 최대한 길게 하여야 한다.
3. 굳이 제주도를 점령하지 않더라도 부산으로 피난한 대한민국 정부를 무너뜨리면 제주도 역시 자연스럽게 북한 측의 실효지배 영토로 접수할 수 있었다.
4. 제주도는 4.3 사건으로 인해 좌익 세력이 완전히 말살되어버려 당장 호응세력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제주도에는 조선인민군이 굳이 접근하지 않았으며, 실제 육군 제1훈련소가 서귀포시 모슬포 일대에 '강병대'라는 별칭으로 창설되어 약 50만 명에 달하는 신병을 배출하기도 했다.[7] 또한 직접적인 전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기간 동안 본토의 방송 인프라가 파괴될 것을 대비한 KBS제주방송총국의 전신이 개국하는 등 어느 정도 인프라 건설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본토 바로 아래에 큰 섬 제주도가 있어 유사시 대한민국 정부의 거처로 삼을 수 있는 여러 이점이 있다.
1. 군사적으로도 적화통일이 일어날 정도면 대한민국 육군 전력은 궤멸되었을 것이지만, 전력 자체가 북한 해/공군 보다 기본적으로 강력하고 장거리 이동이 자유로운 대한민국 해/공군 전력은 큰 어려움 없이 제주도로 이동하여 집결할 수 있을 것이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금문도 포격사건의 경우처럼 북한 해/공군 전력의 공격을 격퇴해낸다면 북한 육군 전력이 제주도로 상륙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2. 제주도는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섬인데, 제주도의 해군 기지에서 동해, 서해, 남해로 즉시 함대를 파견할 수 있으며, 해병대 역시 늦지 않은 시간에 상륙이 가능하다.
3. 단순한 남북한관계를 넘어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로 확대해 봐도, 제주도는 한반도 본토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급변 상황이 일어나도 어느 정도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장소다.'''[8]
4. 제주도 자체가 면적이 좁긴 하지만, '''동북아시아 전체로 봤을 때 꽤 큰 편에 속하는 섬이다.''' 서울특별시의 3배 면적으로, 동아시아에 제주도보다 면적이 넓은 섬은 혼슈, 규슈, 홋카이도, 시코쿠, 사할린 섬, 타이완 섬, 하이난 정도밖에 없다. 이 이유로 인해 제주도에도 관광업으로 대표되는 경제적 인프라가 존재하며, 특별자치도로서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 받고 있다.
5. 제주도는 지진으로부터도 안전한 측면이 있다. 당장 본토는 신갈단층, 양산단층 등 위험한 단층 지대가 있으나 제주도에는 이 정도로 위험한 단층 지형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한라산은 활화산임에도 불구하고 '''지진을 동반하지 않고''' 용암만 조용히 나오는 화산이라 '''용암을 막아서 바다로 빼낼 수만 있으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실제로 제주도 본섬과 인근 해역에서 관측된 지진은 대부분 규모 3.0을 넘지 않는다. 물론 언제까지 지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 뿐이지 태풍과 집중 호우, 그리고 지진 해일의 직격탄을 제일 먼저 맞는 곳이 제주도라서 자연재해 자체로부터 제주도가 안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질학계 최대 떡밥인 백두산 폭발이 일어났다고 가정할 때, 역대 최강의 폭발 자체의 위력과 천지의 물로 인한 추가적인 화산 분출물까지 더해져 한반도 본토와 중국, 일본까지 화산재의 피해를 입을 것이라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아예 화산재가 도달하지 않거나 도달하더라도 타 지역보다는 현저하게 적은 피해를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제주도 자체가 활화산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임에도 불구하고 화산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제주도 본섬 및 더 낙관적으론 낙동강 전선에 처박혀 있던 때까지 경찰이 점유하고 있던 전라남도의 일부 군소도서를 대한민국이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라남도가 대만령 푸젠 성의 한국판이 되는 것. 경상도에서 피난한 군대와 완도 등지로 후퇴했던 경찰이 합세하여, 경찰 또한 차지하지 않고 있었고 인민군도 진입하지 않았던 가거도, 만재도 등의 외곽도서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맹골도 일대의 점령도 가능했을 수 있으며 흑산도와 태도군도도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9] 그리고 보길도와 그 이웃한 섬인 소안군도들은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유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완도 본도와 이웃한 섬들의 경우 전선에 쳐박혀 있던 때까지 경찰이 점유하고 있었지만, 너무 가깝기에 인민군의 총공세에 넘겨주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문도와 백도, 손죽도 등은 대한민국이 점유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전쟁 당시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무안군, 진도군의 일부(만재도)와 완도군 대부분, 여천군 일부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이 경우 망명 도청은 소안군도(보길도 일대)에 둘 수도 있고,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원래는 전라도 땅이었던 추자군도에 두었을 수 있다. 도지사 및 군수는 폐지할 수도 있고, 흑산군도(가거도 일대) 쪽이나 여천군의 경우 면장이 겸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상남도의 일부 도서(거제도 등)를 유지하였을 수도 있다.
다만 제주도는 섬 지역이긴 해도 그나마 국토 면적이 좀 넓은 대만[10] 과 달리 영토 면적이 너무 작은데다 자체 생산이 어려운 조그마한 도서 지역이라 현재 대만 하나만 겨우 지배하고 있는 중화민국이나 남명 시대 정씨왕조처럼 원활히 섬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나마 대만이나 남명 당시 정씨 대만 지역은 일본이 대만을 지배할 당시 일본이 세우고 간 제조업 등 산업이나 자체 생산이 가능한 농토라도 있었지만, 제주도와 울릉도는 농토도 척박하고 제조업 등 주요 산업과 국가를 굴릴 수 있는 인력도 대부분 남한 본토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 지역에는 거의 없다. 결국 중국 대륙과 화북 지역을 중국 공산당과 청나라에게 잃고 대만으로 달아난 뒤에도 경제적인 부익부를 어느 정도 유지했던 현재 중화민국이나 남명 시대, 청나라 초기 연평왕국보다 더 나쁘게 가난한 빈국 상태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설사 달아난다고 해도 한반도 전역을 석권한 북한이 제주도로 도피한 대한민국을 냅둘지는 의문이다. 당장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버리고 대만으로 도망갔던 중화민국에게 하나의 중국으로 미승인국를 만들어 버린 것을 고려하면[11] 한반도 본토 전체를 석권한 북한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육지 본토를 잃고 섬나라 소국으로 전락한 대한민국에게서 한반도 정통 정부의 지위를 강탈함과 동시에 대한민국과 수교한 국가들과의 단교 요구 등을 강경하게 밀어붙이며 북한이 일방적으로 뺏어 먹어가면서 외교적으로 고립시켰을 공산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멸망하지 않은 채 남한 본토를 버리고 제주도로 정부를 이전해 섬나라 소국이 되었다고 해도, 적화통일에 성공한 북한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자신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임을 강조하여 자국과의 수교조건으로 해외 여러 국가들에게 대한민국과의 단교를 강요하며 현재 중국이 대만에게 하듯이 대한민국을 정치적,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고 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갈등이 내전으로 촉발되어 결국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부패와 민심 이반으로 패전한 국민당이 대륙 영토를 버리고 대만 섬으로 달아남으로써 종전에 중화민국이 지니고 있던 중국 정통정부로서의 지위와 국격을 스스로 훼손시키고, 후에 중화민국의 국제사회 고립의 빌미를 초래한 양안관계와 남북한관계는 그 성격이 다르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 발발 전,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12] , 주권국가로서 승인받았던 상황이었고, 북한은 남한을 침략하면서 일으킨 6.25 전쟁으로 인해 야만적인 공산주의 침략국으로 낙인 찍혀 정부로서의 정통성 자체가 훼손된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국제사회에서의 정통성은 대한민국이 쥐고 있었다.'''
결국 1970년대 중국이 대만에게 하듯이 적화통일을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반도 본토를 상실하고 제주도나 인근 도서 지역 영토만 지배하는 섬나라로 전락한 대한민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켜 국제사회로부터 한반도 정통 정부 지위를 강탈, 독점할 가능성은 희박하다.[13]
그러므로 북한이 설사 전쟁에서 이기고 한반도 전역을 석권하였다고 해도,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인정하되 제주도와 인근 도서 지역만 남은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라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가 역으로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중국과 대만, 현재의 남북한처럼 분단 주체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특수한 상태의 분단국가가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반도 남부만 차지하고 제주도 합병을 포기하여 제주도만 남은 대한민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정식 수교관계까지 맺는 등 앙숙인 이웃나라의 관계처럼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주도가 비록 한반도 본토와 가까이 위치해 있어 섬의 방어에 어려움이 있다는 반론이 존재하지만, 만일 미군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지원군이 주둔하며 군사적인 대치를 계속하게 된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입장에서는 국제사회의 압박을 고려해서라도 군사적인 적대관계를 일단 중단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 항목에 나온 것처럼 북한 정권이 김일성 1인독재 대신 동유럽식 공산당 내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었다면 동독과 서독 관계처럼 서로를 인정하고 제한된 교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이 되고도 대한민국 정부가 멸망하지 않고 장악당한 한반도 본토를 포기한 뒤 제주도나 울릉도 등 기타 도서 지역으로 정부를 이전하게 될 경우, 남한과 북한을 부르는 국제적 명칭도 한반도 본토를 석권한 북한은 '노스 코리아' 대신 '코리아', 대한민국은 '사우스 코리아' 대신 '제주 및 탐라'란 명칭으로 불려지게 될 가능성도 크다. 쉽게 말해 인터넷상에서 ‘타이완 넘버원’ 대신 ‘제주 넘버원’이라는 밈이 등장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한자 문화권에서 朝鮮과 韓國은 명백하게 표기가 다르므로 자유진영에서는 한반도의 북한은 조선, 제주도의 남한은 한국으로 불려지게될 가능성도 높다. 즉 '한국'의 로마자 표기가 Jeju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제주도에 본진을 차렸다면 대만 같이 역시 한반도에서 밀려내려온 이승만 휘하 한반도 본토인 들이 주도권을 쥐고 제주도 본도인 들을 통치하며 상당기간 대립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제주 역시 2.28 사건의 대만 때처럼 전쟁 이전 4.3 사건이 터졌단 걸 상기한다면 많은 진통이 예상될 것이다. '''전쟁 당시에도 진행 중이었던'''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민 일부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만일 정부가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로 이전했다고 해도 여론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지역갈등이 극심해지고 분단이 길어진다면 분리주의가 고조되어 탐라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제주 방언은 중화민국에서의 대만어와 객가어 수준으로 위상이 급상승(?) 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제주 방언으로 유세하는 광경을 봤었을지도 모르겠다.
6.25 전쟁이 벌어지던 1950년대 당시 제주도는 관광업조차 육성되지 않은 그저 깡촌에 불과한 섬이었기에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원이 없으면 국가로서의 존속이 불가능했을 것이다.[14][15] 제주도는 남한 없이 자체 식량 생산만으로는 인구 30만 유지도 매우 힘들다. 여기에 산업단지 만들어봐야 그 규모가...
허나 위의 상황처럼 대한민국 정부가 아예 북한군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았으나, 한반도 본토와 서울, 대구, 부산, 광주 등 남한 본토 내 주요 도시들을 북한에게 빼앗기고 제주도나 울릉도, 마라도 같은 섬 지역 영토만 지배하는 섬나라 소국이 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에 처한 대한민국이 현재의 대만처럼 순순히 체념하며 이를 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적다. 결국 남한 수복을 외치며 한반도를 전역을 장악한 통일된 북한과 더 크게 대립할 가능성도 있고, 자급자족조차 안 되는 조그마한 대한민국 섬 지역들의 특성상[16] 대한민국은 장개석 시기 반공대륙을 역설했던 중화민국처럼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남한 수복을 외치며, 아니 '''한반도의 완전한 수복을 외치며''' 한반도를 전역을 장악한 통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더 크게 대립할 가능성도 있고 자급자족조차 안 되는 조그마한 대한민국 섬 지역들의 특성상 이 상황까지 간다고 해도 섬나라 소국으로 전락한 상황을 인정할 리 없다. 오히려 유엔군과 힘을 합쳐 본토 수복에 나설 가능성이 더 크다. 이럴 경우 적화통일된 북한은 반도 남부를 내주고 다시금 북쪽으로 쫓겨가거나 반대로 아예 백화통일될 가능성도 있다.
2.2.3. 기타 이전 후보 지역들
- 일본: 소위 NSC 101/1(국가안전보장 문서)에서 만약 제주도가 안될 시에 거론한 후보들. 일단 해당 문서는 제주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데 만약 제주도가 아니면 최대 100만명의 이주를 상정한 제주도 계획보다도 적은 인원을 일본으로 옮기는 계획이 있었다. 만약 일본 계획이 성사된다면 그 수는 2만명도 안되었을 것이다. 일단 극동사령부는 한국 정부의 일본 이전을 반대하였으나 1952년 합동참모본부는 일본과 오키나와가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 하지만 이 논의에서도 인종적 차이가 우려되니까 사이판과 티니안이 그런 면에서 낫다고 여겼다. 미국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6.25 초반에 최악의 경우에 야마구치 현으로 옮기는 것이 논의된 적은 있는 수준. 결정적으로 일본 측에서조차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폐기됐다고 인정. 실제로도 야마구치현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그 초등학교 건물을 대한민국 정부청사 건물로 사용한다는 이유로 책상, 의자, 교탁등을 모조리 운동장으로 빼내는 등 전부 비우기도 했다. 실현되었다면 조선적이나 조총련 등의 문제가 복잡해졌을 것이다.
오키나와 역시 동일 문서에서 일본의 본토와 부속도서도 안된다면 옮길 곳으로 거론한 곳. 오키나와는 잔존한 한국군을 주둔시킬 기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 사이판, 티니언, 괌: 1951년 3월 미국 극동사령부가 계획한 Operation Plan CINCFE 4-51에 따른 계획. 소련군이 대거 참전해 3차 대전이 발생할 시에 한국 정부, 한국군, 선별된 포로 등 50만명을 이송한다는 계획이었으며 정부가 고려하던 일본 이전 계획에 대한 반대 제안으로 나옴. 하지만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군대와 민간인을 소개하기에도 바쁜 미 육군이 이를 반대하였으며. 정부와 피난민을 수용할 공간은 있지만 너무 멀어서 고려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이후 1952년 합동참모본부 계획에서 티니안과 함께 유력 후보지로 재론되었다.
2.2.4. 울릉도와 독도의 운명은?
적화통일이 벌어질 경우 울릉도와 독도가 문제가 되는데, 북한 해군은 미일에 비해 넘 빈약한데다가 동해를 건너 두 섬을 접수할 전력이 되질 못하기에 북한군이 울릉도 및 독도로 진격하긴 쉽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남한의 월경지 형태나 심지어는 일본의 영토, 미국의 조차지로 남았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제주도나 서사모아에서 어쨌든 살아있다면, 미국 맘대로 독도를 아예 멋대로 일본에 넘겨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제주도에 망명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에 독도에 레이더 기지 등을 설치할 수 있도록 사실상 미국에 조차하는 협정을 맺고, 주일미군이 주둔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울릉도 주민뿐 아니라 재일 한국인 중 제주도로 망명한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는 자원입대자로 구성된 부대가 미국의 군사비 지원을 받아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는 상황도 생각할 수 있다. 제주도로 망명한 대한민국 장병들이 직접 울릉도를 지키러 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 한국 정부가 미군에 사실상 조차해서 미국 조차지가 될수도, 원래 한국 땅인 섬인 울릉도, 독도만을 명목상 통치하는 망명정부로 남았을 수 도 있다.
다만 완전 적화통일이 일어날 경우 미국 입장에선 이미 없어져버린 대한민국을 배려해줄 필요가 사라지는데다 공산 북한보단 일본, 혹은 미국이 직접 두 섬들을 접수하는 편이 오히려 더 유리하여 독도, 심지어 울릉도까지 일본이나 미국에 넘어갈 확률이 크다.
현재의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는 실질적 점유인 한국 대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간의 관계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북한, 대한민국,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끼어들은 4파전으로 완전히 바뀌어 훨씬 더 복잡해질 양상이 될 것이다.
3. 현재보다 남쪽에 휴전선이 그어졌을 경우
3.1. 낙동강 방어선 경계 휴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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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는 더욱 극단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경계로 휴전선이 그어진 시나리오다. 충분히 이 시나리오도 고려해 볼 가능성이 있는 게, 낙동강 방어선 당시 북한군의 전력은 국군과 유엔군 측의 지연 작전에 말려 고갈된 상태였다. 심지어는 낙동강 전선 최대 위기라고 알려진 마산 전투와 영천 전투 당시에도 방어선을 뚫는가 하다가 이내 격퇴당했다. 말 그대로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지 않고 그 상태로 휴전협정을 맺었으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지도는 저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한국의 수도는 여전히 부산일 것이고, 제주도 역시 여전히 실효지배했을 것이다. 다만 산업화가 이루어져도 한국의 외교상의 입지는 현재보다 좁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저렇게 소국으로 전락하더라도 부산항의 입지를 통해 무역으로 먹고살 길은 있다는 것이다. 즉 바레인이나 카타르, 쿠웨이트, 지부티, 북마케도니아, 엘살바도르 같은 해외 소국들 비슷한 수준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가능성이 전무한 건 사실인데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반격의 여지없이 이 안을 연합군이 받아들일 일이 없다고 봐도 된다. 인천상륙작전이 아니더라도 반격작전을 구상했을 것이다. 낙동강 전선은 국군과 유엔군이 '''의도적으로 방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연 장애물을 이용하여 구축한 신뢰도 높은 전선이었다.''' 즉, 북괴군에게 연전연패만하다가 궁여지책으로 끙끙대며 세운 방어선이 아니라는 얘기.[20]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한군의 공세를 지연시키고, 북한군 측에서 전투력을 최대한 소모하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인천 상륙작전이 개시될 때까지 정부가 피난해있는 임시 수도 부산을 지켜내는 것이 낙동강 방어선의 존재 의의였다.(즉 북한의 공세종말점) 결국 북한군은 낙동강을 계속 도하하며 마산 전투, 영천 전투 등을 통해서 전선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했지만 이미 전투력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라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결국 9월경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보급선이 끊기며 북한군은 제대로 역관광당하게 된다. '''정말 낙동강 방어선이 사수해 낼 가능성이 적은 불안정한 전선이었다면, 그냥 애초에 서사모아나 제주도 정부 망명안을 구체적으로 세워서 대한민국 정부는 피난하고, 미군과 유엔군 역시 진작에 철수해버렸을 거다.'''
3.2. 1.4 후퇴 이후 기준 휴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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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에서의 휴전보다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1.4 후퇴 당시의 전선이다. 중공군 침공 직후 중공군은 북한을 순식간에 재점령하고 더 남침하여 37도선까지 진격하고 연합군 역시 재차 대한민국 정부 이주를 고려하기까지 몰아붙이고 있었다. 만약 모택동이 여기서 만족하고 휴전하여 경계를 공산군 점령지 및 37도선이나 한강 이북까지 휴전선을 그어버렸다면 대한민국은 경기도, 강원도 상당수를 상실하고 3남 지역을 중심으로 보유한 상태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이 경우 '''서울이 북한의 전방 대표 도시 심지어는 북한의 수도'''로 떨어져버리며 전후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을 미수복지로써 헌법상의 수도로 환도를 포기하고 당시 임시수도이자 최대도시인 부산을 수도로 삼았을 것이다.
이 당시 '''UN측에서는 휴전을 원했기에, 모택동만 협정에 제대로 응했으면 실제로 벌어졌었을 가능성이 컸었던 상황'''이나, 한국 측에서 서울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모택동도 중공군의 기대 이상의 활약에 고무되어 정전요청을 무시하였기에 실제 역사가 되지는 못했다.
만약 이 시나리오가 실제 역사가 되었다면 지도에서 보다시피 강원도/경기도 상당수와 그리고 '''현재 남한의 수도인 서울, 그리고 주요 도시인 인천''' 등이 모조리 북한의 땅이 되어 위의 낙동강 전선 시나리오만큼은 아니더라도 현재처럼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데에는 매우 큰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군사적인 측면에도 육/해에서 북한의 도발이 더 많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며 진도나 포항 등의 지역이 최전방으로 격상되어 이 지역의 게릴라의 침투를 막기 위한 병력이 증강되어 지역의 발전에 크나큰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4. 38선으로 원상복귀할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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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과 휴전선의 비교
6.25 전쟁에서 중국 및 미국은 전세가 영 좋지 않을 때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 경계를 원상복구할려고 했으며 특히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전쟁 이전대로 38선 경계로 되돌아갔다면 서부전선에서 북한이 강점하고 있던 경기도, 황해도의 개성시, 개풍군, 연백군, 옹진군 반도는 다시 한국이 찾을 수 있었겠으나, 반면 당시 UN군이 수복한 중부, 동부전선의 연천군, 포천시, 고성군, 인제군, 양구군, 화천군, 양양군, 철원군 등 경기도, 강원도 지역은 다시 북한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설악산 역시 북한땅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지리적으로 황해도 남부 지역과 남한 본토의 육로가 끊긴 채이기 때문에 전선 구축에 상당히 애를 먹고 북한의 군사도발이 매우 증가했을 것이다. 옹진반도는 설명할 필요 없겠고 사실상 북방 5도에 이은 제2의 섬인 옹진도(島)가 된다. 연백군 역시 예성강으로 남한 본토와 육로가 단절되어 있어 실질적인 연백도가 되어버린다. 실제로 6.25 당시에도 이 지점은 굉장히 빨리 점령당했다. 아니면 역으로 이 지역을 전략적 월경지로 이용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옹진반도와 연백군, 구 벽성군 남부를 중심으로 행정구역상 황해도를 다시 설치하거나 경기북도를 설치하자는 행정구역 개편 논란도 제기될 수 있다.
또한 북한강 상류 지역이 북한 영토가 되는데 현재의 화천댐, 평화의 댐, 소양강댐, 춘천댐 등이 38선 이북이나 38선 근처에 있기 곳이므로 수도권의 수자원이 대폭 감소하여 남한강에 수자원을 의지해야 하며 여름철 홍수 피해도 크게 증가할 것이다. [21]
개성시, 개풍군의 경우에는 옹진, 연백처럼 예성강-임진강을 낀 또다른 월경지 개성도가 되어버리는데다가 38선을 기준으론 대부분의 지역이 DMZ와 민통선 안에 들어와 도시로서의 가치는 없고, 제한적인 관광지[22] 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었을 의정부처럼 중추 군사도시로 바뀌었을 것이다. 한강 수계는 한강 하구 양안이 모두 대한민국 관할이 되어 다른 4대강 처럼 하굿둑이 만들어지는 등의 개발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서부전선에서 서울이 휴전선에 멀어진다는 이점이 생기는 반면 중부-동부전선은 북한이 남하하기 때문에 연천, 포천쪽 측면에서 서울이 위험해지게 되는 단점이 다시 생긴다.[23]
5. 현재보다 북쪽에 휴전선이 그어졌을 경우
5.1. 개성시-금강산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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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성강에서 시작해 송악산, 천마산을 넘어 예성강의 지류인 금천군의 구연천 일대까지를 서부전선으로 삼을 경우인데, 최소 개성 수복만 할 수 있어도 서울에 대한 보위력이 배로 증가한다. 맹조의 발톱 작전이 축소된 형태로 성공하였다면 고성군(북한)이 완전 회복되고 통천군 및 금강산까지 탈환하였을 것이다. 전쟁 막판 금성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면 금성이 한국땅이 되고 금성 돌출지역덕분에 휴전선 종심 설정(민통선도 포함)이 가능해진다.
만약 개성-원산 선에서[24]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경우, 미수복 경기도와 미수복 강원도 전부, 함경남도의 극남부, 황해도 일부(토산군)이가 남한령이 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전선이 비스듬해지는데 경기도 동북부와 강원도 중북부가 현재보다 더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6.25 전쟁으로 폐허가되어버린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은 종전 후 30여년 정도가 지났을 때 시 승격도 충분히 생각해 보았을 수도 있다. 북한이 원산상륙작전은 방어하지 못하지만 개성이나 예성강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하는 경우 개성-문천 혹은 영흥선에서 휴전선이 체결되었을 수도 있다. 만일 강원도 이천군이 대한민국령으로 남았다면 당시의 경기도 이천군과의 혼동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강원도 이천(伊川)군과 달리 경기도 이천(利川)시는 두음법칙을 무시한 북한말로 "리천"이다. 참고로 1950년 당시 기준으로 각 군의 중심지는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경기도 이천군 이천'''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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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서울과 평양 사이의 등거리선으로 휴전선을 정했다면[25] 황해도 벽성군 내성면 오봉리 부근에서 강원도 통천군 학일면 패천리 부근(시중호 바로 위)이 양 끝점이 되는데, 이 경우 미수복 경기도의 전부, 황해도 연백군 전부, 벽성군의 동쪽 일부[26] , 평산군 일부, 금천군 사실상 전부, 신계군 일부가, 미수복 강원도에서는 이천군, 평강군, 통천군 일부를 제외한 전부 , 삼방협과 철령을 포함한 함경남도 안변군 극일부까지 남한령이 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서부전선에서 서울 간의 거리가 100km 가까이 떨어지게 되어 북측의 위협이 크게 감소되는 것은[27] 덤이다. 한강 하구를 통한 수운도 완전히 가능해진다. 다만 이 시나리오의 경우 멸악산맥[28] 은 여전히 이북에 속하게 되어 대체로 평야 지대인 연백과 평산, 그리고 금천을 방어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옹진반도도 계속 북측이 갖게 되어 서해5도와 서해상에서의 위협이 계속 잔존하게 된다.
이 점을 감안해 방어 거리가 길어진다는 부담을 감수하고 이 서울-평양 간 등거리선을 더 연장해 멸악산맥과 해주를 확보하는 선에서 태탄까지 휴전선을 늘였다면 황해도에서는 옹진군과 평산군 및 금천군 전부, 벽성군 대부분, 신계군 대부분, 경우에 따라서는 재령군 일부, 봉산군과 서흥군의 극 일부[29] 마저도 들어와 황해도의 절반 가까이가 남한령이 되고, 강원도는 통천군과 이천군 일부를 제외하고 전부 남한이 차지하게 된다. 또한 옹진반도까지 남한이 차지하게 되어 북한이 서해상에서 수도권을 위협할 기회가 사실상 완전히 차단된다.[30] 또한 원산은 비록 북한령으로 남더라도 휴전선과 너무 가까워져 큰 개발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반대로 해주는 휴전선까지 거리가 불과 10여km에 지나지 않게 되어 관광 산업과 옹진과 연계되는 일부 수산업, 농업 외에는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역사적 정통성 측면에서는 고려 왕조의 수도인 개성을 남한이 차지했다는 점에서 당연히 지금보다 유리해진다. 반대로 북한은 지금 하는 것처럼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의 정통성 계보 왜곡을 하기가 난감해졌을 것이다. 만약 고려를 폄하한다면 고구려에서 바로 지금의 북한으로 정통성 계보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31] 아니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왕조는 인정하되, 서경 천도를 주장했던 묘청을 유독 띄워줬을 가능성도 있다.
5.2. 평양-원산만 이남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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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던 시나리오이다.''' 1.4 후퇴 이후 유엔군이 39도선까지 북진하는 것을 수차례 고려하였기 때문이다. 중국 또한 1950년 12월 유엔군이 평양-원산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지하는 전략을 예상하였으며, 실제로 방어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휴전 협상이 시작된 후에도 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동부 전선에서 북진하여 통천군, 금강산을 점령하고 한반도에서 가장 짧은(가장 잘록한 구간) 평양-원산선까지 북진한다는 맹조의 발톱 작전을 구상하였다. 실제로 평양-원산만선 또는 청천강-함흥만선은 38선 및 현재의 휴전선보다 방어선이 더 좁아지기 때문에 압록강-두만강에서 내려오듯이 중국군이 유엔군의 틈 을 노리는 것이 어려웠으며, 유엔군이 제때 병력 재건에 성공했으면 종전선에서 벌어질 고지 쟁탈전이 38선에서 39~40도선으로 북상해서 치뤄졌을 것이다.
실제로 중공군이 북진통일을 막으려고 전쟁에 개입한 이후로 한미 연합군은 중국이 예상한 것처럼 평양-원산선(혹은 청천강-함흥선)에서 방어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이 11월 대공세 당시 최종 목표로 한 것도 이 선이었다. 그렇기에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평양을 너무 빨리 포기하였다고 생각해 놀랐다고 한다.
만약 평양-원산만을 경계로 휴전 협정이 맺어졌을 경우, 황해도 대부분과 강원도 북부(현재 북한 강원도) 대부분, 그리고 평안남도 및 함경남도 일부가 남한령이 되었을 것이다. 개성특별시, 해주시에는 수도권 전철이 들어왔을 것이고[32] 현실 역사에서 별볼일없는 도시로 추락한 것과 다르게 엄청난 성장을 했을 것이다.
반면 북한은 연백평야, 재령평야 등의 주요 곡창지대와 서북권의 외항인 남포를 빼앗기고, 주요 도시인 평양과 원산은 비무장지대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불리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수도는 평양이 아닌 함흥, 신의주, 강계 중 하나로 옮겨졌을 것이고, 남포항의 부재로 서해를 통한 해상 무역은 반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이 지배하는 영역이라고 해봤자 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가 전부인데, 이 지역은 남한 지역에 비해 강수량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개마고원'''의 존재 때문에 쌀 생산이 가능한 토지가 평안도의 평야 및 함경도 동해안의 좁은 평야 지대 정도로 한정된다. 이 경우 그 이남의 황해도만큼 식량을 생산하기가 어려워 부양해야 하는 인구에 비해 식량이 부족했을 것이다.[33] 특히나 공산권 특유의 집단농장 제도 하에서는 생산성이 격감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교통 인프라에도 문제가 생긴다. 북한 동서간 교통의 핵심 노선인 '''평원선이 비무장지대에 닿고'''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는 평양, 황해도, 강원도, 원산을 지나니 애초에 뚫지도 못한다.(...) 그 결과 동서간의 인적·물적 교류에 지장이 생겨 국가 전체에 자원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동서간 지역 분권화, 심지어 지역 갈등이 심해질 가능성이 결코 작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 철도 노선이나 고속도로를 뚫으려고 해도, 북한 특유의 험한 산지를 통과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공사 난이도가 확 올라간다. 무엇보다 완공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때까지는 인력과 물자를 국도나 지방도 수준의 도로만으로 빙빙 돌아가며 힘겹게 옮길 수밖에 없으니 속수무책으로 데미지가 누적된다는 문제가 있다.
또 하나 북한 입장에서 큰 손실은 '''대동강-원산만 이남에 거주하는 현재 북한 인구의 30% 정도에 달하는 인구'''이다.[34] 만약 평양-원산 경계선을 두고 휴전하였을 경우 한국은 '''개성, 황해도, 평안남도 일부, 강원도 북부 및 한반도 인구 7,500만명 중 약 5,800만명의 인구를 얻게 되어 잔여 북부 지방 인구 약 1,700만명과 세 배 이상의 인구 격차를 벌리게 된다.'''[35]
더 좋은 것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 미사일 등의 수단을 제외하면 장사정포 등 북한의 직접적인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이 군사적 전방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금의 충청 지역과 같은 군사적 입지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북한의 침공시 평안남도 및 강원도 일대에서 지금보다 짧은 전선으로 막아낼 수 있다. 무엇보다 '''코리안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은 국가 운영 및 경제적 측면에서 큰 메리트이며, 군사적으로도 지금처럼 조금만 잘못되어도 전면전이 되는 시나리오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만에 하나 전쟁이 다시 발발할 경우 인구 밀집 지역인 대동강-원산만 일대, 그리고 황해도 북부와 강원도 북부 지역은 수천~수만명 정도의 인명 피해를 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지금보다 북한과의 대치가 훨씬 수월해지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인구가 현재의 5,100만명 인구에서 현 한반도 인구의 약 75% 이상인 5,800만명 정도 인구로 하드웨어가 확장될 것인 반면 북한은 1,700만명 정도의 인구로 남한과 대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술한 인구와 관련된 예상은 지금의 인구 현황에 기반해서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지금의 휴전선 이북 지역의 인구가 대한민국 치하에서 더 크게 증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개성특별시, 해주시, 사리원시 일대는 통일 후에 발전의 여지가 매우 큰 땅으로 점쳐진다는 점에서 실제 역사보다 인구가 몇백만 정도 더 늘어났을 여지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서울/수도권 행정구역 개편을 현재와는 다르게 전개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강남, 과천 개발의 동력 중 하나가 남북분단에 따른 수도 방위 문제였는데, 이 시나리오에서는 그 문제가 존재하질 않게 된다. 따라서 서울 대확장이 고양군, 김포군, 인천권을 서울로 편입[36] 시키는 식으로 이루어졌을 수 있다.[37] 그리고 현 강남, 잠실, 과천, 분당 지역의 개발은 지금보다 더디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남한은 실제 역사보다 매우 유리해지고 북한은 매우 불리해졌을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북한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에 휴전 협상시 반발이 컸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겠지만, 중국과 소련 입장에서는 39도선 이북이면 완충지대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입지가 축소된 북한을 압박하여 휴전에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휴전 후에는 상기 언급한 북한의 내부 사정상 국가 운영에서 중소 의존도가 현실 역사보다 높아졌을 것이다.
내부 정치적으로는 땅도 많이 잃고 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는 점때문에 6.25 전쟁을 승전했다는 역사 왜곡은 못했거나, 혹은 새 수도를 '혁명의 수도'로 삼고 아예 북조선은 처음부터 39도선 이북이었다는 식으로 날조해서 미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조국을 지켜냈기에 승전했다는 식으로 이빨을 깠을지도 모른다. 전자의 경우 김일성 및 만주파의 입지 약화로 이어져 당내에서 친중파와 친소파가 득세하는 구도가 만들어졌을 것이고, 후자의 경우 패전의 책임을 돌리고자 숙청의 광풍이 불어 지금의 북한과 비슷한 흐름으로 역사가 진행됐을지도 모른다.
전자의 경우, 김일성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아예 실각하거나, 독재는 유지될지언정 지금처럼 지 아들과 손자에게 대대로 권력이 세습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의 마오쩌둥과 비슷한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절대권력을 확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핵 개발을 하고 싶어도, 중소의 경제제재가 두려운 당내 친중파와 친소파에게 견제를 받아 추진하지도 못했거나, 아니면 박정희처럼 몰래 시도하다 들켜서 중소의 압박을 받고 개발이 백지화되었을 수 있다.[38] (이 경우 한국은 지금과는 달리 '''북한의 핵 위협을 받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후 소련 해체로 인해 친소파가 완전히 힘을 잃고 친중파가 정권을 잡아 지금보다 더 확실한 중국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만약 이 시나리오에서도 8월 종파사건과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면, 북한은 지금 보이는 모습[39] 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5.3. 청천강-함흥만 이남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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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및 유엔군의 청천강-함흥만선 돌파는 중공군이 본격적으로 파병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중공군의 개입이 확인된 이후 UN군이 설정한 첫 방어선이기도 하다.[40] 이 선으로 휴전선이 결정되었을 경우, '''한반도의 곡창지대는 이 선 이남에 죄다 있으므로''' 북한에게 남은 거라고는 개마고원과 평북 일부 평야지대[41] , 함경도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평야뿐이다. 그리고 평안남도를 영원군, 대흥군 일대만 빼고 거의 다 대한민국이 수복했다면, 북한은 평안북도에서 자강도로 가는 것도 힘들어진다. 왜냐면 철도가 안주와 개천을 통해 이어지기 때문. 설령 청천강의 북안을 따라 철도를 놓는다고 하더라도 휴전선에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또한 양항이면서 주위에 안변평야 등이 있는 원산[42] 과 평안평야를 끼고 있는 대도시인 평양을 한국이 본격적으로 개발할 수 있게 된다.[43] 대중 무역의 전초기지로 기능할 평양-남포-사리원 삼각축은 한 약 700만~1,000만명 사이의 인구가 거주하게 되었을 것이므로 부울경권과 맞먹는 위상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또한 평남 일대는 넓은 농토뿐만 아니라 지하자원에 있어서도 개천, 덕천 등의 석탄지대 등 경제발전에 유리점이 많아 중공업이 크게 발전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청천강에서 함흥만, 최대 이원~단천까지 휴전선이 그어질 경우 남한의 예상 인구는 약 6,500만~7,000만명 정도[44] , 예상 지배 면적은 약 15만㎢가 되고 북한의 예상 인구는 약 800만~1,000만명, 예상 지배 면적은 약 7만㎢가 되는데, 이 경우 양측의 인구 및 지배 면적 격차는 잉글랜드(2018년 기준 약 5,600만명에 면적 약 13만㎢)와 스코틀랜드(2018년 기준 약 550만명에 약 8만㎢) 간의 차이와 비견되는 압도적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북한은 인구 관점에서 '''서울특별시 하나 정도로 한반도 거의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북한은 온갖 엄청난 핸디캡을 다 끌어안아야 하는데, 끌어안아야 하는 핸디캡은 위의 평양-원산만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심각해져 국가로서의 기능 부전이 매우 심해진다. 우선 경제 측면에서 보자면, 서부인 평북 지역의 경제가 신의주를 통한 대중 무역에 의존하는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휴전선과 중국과 심히 가까워지게 되는 서부 지역 대신에, 쓸 만한 항구와 중화학공업지대가 있는 함경도 동해안이 국가경제의 대부분을 지탱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 경제구조가 기형적으로 변한다는 단점이 생긴다.[45] 사실상 당장 존속을 걱정해야 할 수준. 그리고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면 국부로 떠받들어지는 김일성이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높은 확률로 실각했을 수도 있다. 제아무리 사실을 날조하고 이빨을 까려 한들, 저 정도까지 땅을 잃고 끝났으면 그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불가능하고 당연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제 밥그릇 챙기는 것만은 잘하는 인간이니 휴전 후 박헌영을 숙청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려 숙청하고 자리는 보전했을 수도 있지만, 그 입지가 안정적이지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에 따라 당내에서 친중파인 연안파와 친소파인 소련파가 힘을 얻게 되었을 것이며, 인민해방군이나 소련군의 주둔은 확실시되었을 것이다.
민족문화적으로도 맥이 끊겨버리는데, 그도 그럴 것이 고도인 '''평양, 개성, 서울'''이 모두 다 한국에 넘어가서 민족문화적 정통성을 내세우고 싶어도 내세울 수가 없다. 이 시나리오에서의 북한의 영역은 되레 고려 대의 '''여진족'''의 영역과 유사하다. 그나마 민족문화적으로 건질만한 게 있다면 고구려가 지배했고 고려 강동6주가 속했던 용천에서 박천까지의 평북 해안지대에 불과하며[46] , 함경도의 경우 동예부터 시작해 고구려, 신라 등 꾸준히 한민족의 영토였던 영흥 이남을 제외하면 정치문화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사항은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47] 과 옥저 정도에 불과하며, 발해 멸망 후 여말-선초 시기까지 근 4-500년이나 여진족의 땅이었다.[48] 결국 북한이 한민족의 정치문화유산으로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백두산[49] 정도밖에 남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향후 중국이 만주족과 청의 역사를 근거로 북한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데 이용되었을 수 있다.
이렇게 여러가지로 심각하게 불리할 것이 뻔한 걸 앎에도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완승을 거두게 된다. 압도적인 인구 및 지배 면적, 그리고 평양, 개성, 서울 등의 역사적 고도들을 모두 가진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 확실하게 인정받게 되었을 것이고, 기존에 관습적으로 남한이라고 불리던 범위보다 훨씬 북상한 영역을 지배하기 때문에 'Korea'라는 명칭은 대한민국만을 가리키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50] 반면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종속국 정도도 아닌 '''보호국''', '''군사기지''' 수준의 지위로 전락했을 것이며, 국제사회에서 'DPRK', 또는 키프로스/북키프로스의 예처럼 대한민국은 그냥 'Korea', 북한은 별도로 'North Korea'라고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후에 대한민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나라들이 늘어남에 따라 대한민국의 정통성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엔, UN에서 공식적으로 '조선로동당 점유 영역(Territory Occupied by Workers' Party of Korea)' 등으로 불리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에서의 북한의 운명은 다음의 셋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1. 위성국가로 존속[51]
2. 중국이나 소련으로 편입[52][53]
3. 대한민국 주도의 흡수통일
어찌되었건 북한이 지금처럼 존속하지 못했을 것은 자명하다.
한국의 경우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은 만큼 고려 및 조선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향후 대륙으로의 영향력 확대를 염두에 두게 될 텐데, 이에 따라 미수복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중소와 외교적으로 대결을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소련 모두 정치적·경제적 목적으로 대한민국과 수교하려 할 것이다. 즉 실제 역사보다 한중수교, 한소수교가 훨씬 빨리 맺어지게 된다.[54] 상임이사국의 만장일치를 얻어 UN 가입까지 조기에 이룰 수 있게 되는 건 덤. 그리고 더 잘 풀린다면 중소가 아무 힘도 없는 북한을 압박해서 중국 쪽으로든 러시아 쪽으로든 철도를 연결하는 것까지도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남북교류도 덩달아 따라왔을 것이고, 지금과는 달리 남북관계가 개선되었을 수 있다.[55]
반면 안보적으로는 좋지 않은데, 주북한 중국군, 소련군의 존재 때문이다. 유사시 이들이 휴전선을 넘어서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건 그 체감 위협 정도가 확 다르다. 또한 '''인민해방군 해군이 동해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될 경우''' 우리 영해의 안보에도 위협이 되었을 뿐더러 독도를 둘러싼 갈등이 복잡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상기 언급한 외교적 이득과는 별개로, 바로 이들 주둔군의 존재때문에 북한이 국가를 유지하지 못할 경우 소련 또는 중국에 편입될 확률이 높은데, 만약 대한민국이 이를 되찾으려 할 경우 이들에게서 외교적으로 양보를 받아내거나(= 그만큼 반대급부를 내어주든가) 최악의 경우 전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니 외교에서 여러모로 휘둘렸을 여지가 크다.
5.4. 함흥 교두보 유지
일부에서 제기되는 시나리오. 장진호 전투 이후 흥남철수 상황에서, UN군의 막강한 제해권과 보급능력을 활용해 함흥 일대의 교두보를 요새화해 유지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다. 대강의 범위는 함흥시+함주군 정도의 영역을 기반으로 주변 감제고지들을 포함하는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한국의 여력으로 이 지역을 통제할 수는 없을테니 1950년대 중반 38도선 이북 수복지역에 대한 군정이 해제된 이후에도 이 지역은 관타나모 만처럼 오랫동안 미군 혹은 UN군의 군정상태에 놓여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북한 입장에서는 엄청난 문제가 생기는데, 바로 함흥 이북 관북지역과 평양의 교통로가 완전히 차단된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함흥을 거치지 않고 함흥 이북과 왕래하려면 청천강축선을 따라 희천에서 낭림산맥을 관통해 장진, 부전을 경유하여 북청으로 연계하는 수밖에 없는데 하나같이 쓸 만한 고갯길 하나 없이 첩첩산중을 직관통해야 한다.
휴전 당시에 동해안 원산 지역과 서해안 구월산-옹진반도 지역을 남한을 지지하는 게릴라 세력이 점유하였기 때문에, 남한은 그곳을 획득하고, 북한은 역시 게릴라가 점유한 지리산 지역을 유지하는 휴전협상안이 제시된 적도 있다.
5.5. 38도선 이북 도서지역 유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까지도 한반도의 부속도서들은 모두 한국군 해병대가 주축이 된 UN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을 휴전협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해상봉쇄를 금지하기로 하면서 북위 38도선 이북 도서지역들은 북한에게 반환(?)된 것.[56] 물론 이들 지역이 북한에 반환되지 않았더라도 섬 간 교통 문제, 북한의 도발 가능성 때문에 서해 5도 이북의 경우 민간인이 올라가 살 가능성은 낮고, 디에고 가르시아처럼 유엔군과 미군이 요새화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 입장에서는 어쨌든 본토는 건지니까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섬이 있는 곳마다 해상봉쇄를 당하는 셈이기 때문에 이만한 호러가 없다. 우선 해주만과 옹진반도의 모든 도서가 한국령이 되면서 해주항은 항구 기능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고, 이 지역 북한 해군의 활동도 도서기지에서 철저히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경기만 일대를 노릴 방도가 완전히 차단된다. 대동강 하구 근처의 초도나 석도 역시 한국군을 비롯한 UN군 통제 하에 있기 때문에 남포항의 기능에도 제약이 생기며, 신포항(마양도)이나 라진항(대초도), 원산항(려도) 역시 인근 도서가 점령 상태면 기능이 마비된다. 여기에 섬이 많은 서해안의 연안 운수 혹은 북-중간 해양운송은 그냥 마비상태라고 봐도 좋으며 동해안도 원산, 신포 정도 되는 거점들이 이 지경이면 답이 없어진다. 무엇보다 북한 입장에서 뼈아픈 것은 연안의 섬들을 연결하는 간척사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6. 북진통일
북진통일이 성공했다면 김일성은 연변조선족자치주(당시에는 자치구), 장백조선족자치현 또는 연해주로 피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소련의 후견 하에 한반도 전체를 명목상 영토로 주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망명정부'''의 지도자로 남았을 수도 있다. 망명정부를 꾸리려면 해당 지역의 공관에 주재하거나 거점 삼을 땅을 양도받아야 할 텐데, 땅을 양도받는다면 예를 들어 연길 일대의 조그만 지역(20,000 km^2 정도) 또는 소련이 힘을 써주고 현지 조선족들이 호응해준다면 한족 위주의 돈화를 제외한 조선족 위주의 연변조선족자치구 정도만 얻어내 망명정부의 거점으로 삼는 식이 되었을 수 있다.
물론 소련 입장에서 김일성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6.25 전쟁 전후는 북한이 정말로 북괴였던 시절이고, 김일성도 지금처럼 김씨왕조의 수장이었던 것이 아니라 소련의 등빨을 받던 파벌 수장으로서 북한의 리더 자리에 앉아 있던 것에 불과했다. 망명정부가 생긴다고 해도 김일성이 여전히 승승장구 한다는 보장은 없다.[57] 김일성의 처리 문제와는 별개로, 중국과 소련은 결과에 승복하고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한반도 지배를 승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미군과 직접 국경을 맞닿는 아찔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미군이 38선 이북에 주둔하지 못하게 한다던가, 아니면 아예 완전 철수를 요구하고 한반도를 사실상의 중립국으로 남도록 협상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통일한국이랑 국경을 코앞에 맞댄 중국은 매우 경계했을 것이다. 즉 북진통일에 성공하였더라도 한반도 정세가 바로 안정화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통일한국의 경우 전후 북측에 남아있는 공산당 잔당들의 게릴라 저항이 있었을 것이며, 이미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간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컸기에 양측의 갈등이 다시 폭발하여 공산 반군에 의한 내란이 발발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한국 정부는 이를 진압하는 데 힘을 소모했을 테고 이는 국가 안정에 한동안 독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것도 미국이 얼마나 지원 의지가 있는가에 따라 시간이 단축될 수 있는데, 만약 통일한국을 자유진영의 교두보로 만들고자 한다면 빠른 안정화가 필요하니 공산 게릴라 소탕을 도울 것이며, 전후 경제 원조도 팍팍 해줬을 것이다. 스탈린이야 뭐 안 그래도 깨진 마당에 한반도 내 공산 게릴라따위 걍 모르쇠할 테니 별 문제도 없다. 통일한국과의 국경을 접하는 거야 모스크바에서 워낙 멀어서 감내할 만 했을 것이고, 애초에 이 양반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온갖 다단계를 다 들어놨을 정도로 주도면밀한 양반이니 이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인데, 무리한 조선 출병을 감행하여 대만 공략도 항미원조도 다 놓친 마오쩌둥은 반대파에게 탈탈 털려 실각하고 류사오치 등 친소파가 집권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각까진 안 가더라도 패전한 마당에 그나마 책임을 덜 지고 싶으니 펑더화이에게 책임 다 들씌워서 입 싹 씻고 모르쇠로 일관했을 것이다.
만약 마오쩌둥의 실각과 친소파의 집권으로 스탈린 격하운동에서 시작되는 중소간의 분쟁이 터지지 않는다면, 소련 견제를 위한 미중수교 같은 빅 이벤트가 좀더 뒤로 밀리든가, 오히려 미소 데탕트의 분위기를 타고 미중간의 화해와 수교가 더 앞당겨졌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마오쩌둥이 실각하지 않고 기어이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보다 더 심한 수준의 피바람이 불었을 수도 있다. 이러면 중국은 실제 역사보다 더 퇴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들이 동포 국가인 통일한국에 수만명 단위로 밀려들어왔을 것이다.[58]
이렇게 보면 패전한 중국이 한반도에 대해 뭔가를 시도할만한 여지는 적은 편이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면, 김일성 망명정권의 게릴라를 지원해서 월경전투를 묵인하거나 하는 정도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한국에게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는데, 이들은 중공이라는 스폰서가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시 못할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동북지방의 조선족. 연변 조선족들은 국공내전 당시 공산당을 열렬히 지원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배려해줘야 하는데, 문제는 연변 경제개발을 위한 필수요소가 바로 동해안 항구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놓고 김일성 반군을 지원해서 한국과의 관계를 개판으로 만들고 연변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면 조선족들의 여론이 나빠질 것이다. 결국은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패전을 빌미로 김일성을 숙청하고 대충 없었던 일로 해서 얼렁뚱땅 대한관계 개선에 나섰을 것이 뻔하다. 여기에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한국이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할 경우 조선족 사회에서 한국 편입 여론이 들끓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럴 경우 통일한국이 조선족에게 영향을 뻗칠 수 있게 되고, 구한말의 '''간도''' 문제가 다시 한중간 중요 영토 분쟁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간도 이외의 또 하나 중요한 영토 문제는 바로 '''백두산'''. 중국이 타 진영인 한국에게 조중변계조약 체결 때 북한에게 그랬던 것처럼 양보해줄 거라는 보장이 없고, 따라서 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양국간의 논쟁이 첨예화되어 국경 확정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의 이북지역에도 대도시들이 현재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직할시 제도가 도입될 때 부산과 함께 평양이 동시에 직할시로 승격되었을 수도 있다. 이후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되는 동안 이북에도 대도시들이 광역시 승격을 받아 함흥광역시, 청진광역시, 원산광역시, 사리원광역시같은 이름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미국의 경우 국공내전 지원의 실패로 인한 레드 컴플렉스를 한반도 북진통일의 성공으로 해소하면서 매카시즘의 광풍을 차단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제3세계 친공산국가들에 대한 무책임한 강경 행보가 수정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이랬다면 베트남 전쟁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59] [60][61] 그리고 이러한 북진통일->매카시즘 차단->대(對)베트남 유화정책이라는 시나리오 하에서는 68운동과 같은 신좌파 운동이 일어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결과 온건자유주의자들이 살아남은 사상계와 세계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7.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환도하지 않았을 경우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6.25 전쟁이 끝난 후에 수도를 서울로 환도하지 않는게 더 나았다. 현재 대한민국이 핵무기 외에는 모든 재래식 전력에서 북한을 압도함에도 안보 위협이 지속되고 주도권을 항상 북한에 내주고 끌려다니는 것, 20대 남성 인구가 줄어들어 지적장애인까지 징병시키는데도 병력 유지가 어려워 사단들을 해체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은 '''서울이 휴전선에서 너무 가까워 야포 포격 사거리 안에 들어가고 적에게 공간을 내주면서 시간을 버는 기동방어가 불가능하다는 지리적인 불리함''' 탓이 가장 크다. 그래서 판문점 선언 후 남북군사회담에서 북한측이 양측 병력을 뒤로 물리자는 제의를 했을때 대한민국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왜 한국인들은 수도를 옮기지 않았냐고 의아해했고# 박정희 대통령[62] 과 노무현 대통령[63] 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려 했던 것도 이런 문제점 때문이었지만 이미 서울이 너무 비대해져서 이제 와서는 수도 이전이나 행정수도 건설도 비현실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만약 전쟁 후에도 부산에 수도를 그대로 두었거나, 창원 등 후방지역에 새 수도를 설치하여 천도했다면 북한군의 재래식 포격은 큰 안보위협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설령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여 한강 이북을 북한군에게 일시 빼앗겼다 해도 기동방어를 통해 오히려 북한군을 끌어들여 섬멸할 공간의 여유가 충분했을 것이므로 안보적 리스크도 훨씬 줄어들고 북한이 무력도발할 경우 지금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고 이스라엘처럼 보복공격도 가능했을 것이며 현재처럼 군복무가 불가한 청년까지 억지로 징병해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훨씬 더 여유를 갖고 대북 군사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현재의 경인공업지대와 남동임해공업지대로 2원화된 공업지대와 달리, 수도가 남부권에 있기 때문에 공업단지는 남동임해공업지대 하나로 1원화되었을 것이며, 인천과 경기도 일대는 농어촌지역으로 남았을 것이다. 서울 지하철과 경부고속도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서울양양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도 건설 필요성이 적어 아예 짓지 않거나 짓더라도 아주 늦게 건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부선, 중앙선, 경원선, 경인선, 경춘선 등의 간선철도도 지금도 단선으로 다니거나 복선전철화가 아주 늦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남해고속도로, 동해선, 경전선의 경우 지금보다 더 빨리 건설 및 복선전철화가 이뤄지고 창원~부산~울산 광역전철이 지금보다 더 빨리 다녔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해국제공항도 일찌감치 가덕도로 이전해서 커퓨타임 없는 24시간 국제공항이 되었을지도 모르고, 부산 지하철도 5호선 까지 지어졌을 것이다. 대구부산고속도로가 경부고속도로보다 먼저 개통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봤을때, 500년 수도인 서울을 버리고 후퇴하여 방어적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적어도 분단 상태가 오래 지속될 것을 예상하고 대비한다는 의미다. 이승만 정권 내내 정론으로 취급되던 북진통일론이 좀더 일찍 약화될수 있었다는 것.
한편 수도의 지위를 잃고 최전방에 놓이게 된 서울은 쇠락했을 것이며, 서울이라는 이름도 새로운 수도에게 넘겨져 어쩌면 다시 한양, 한성 등으로 되돌려지고 오늘날의 경주나 개성의 확대판처럼 한양 도성, 4대문 등 조선시대 건축물을 복원하여 옛 조선왕조의 수도라는 대한민국의 지역 중추지이자 군사+관광도시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64]
7.1. 수도를 부산에 그대로 두었을 경우
수도를 부산에 그대로 두었을 경우에는 부산항을 끼고 있어 원조 물자나 교역을 받아들이는데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 경우 유사 시 미국 증원군의 지원도 용이하다. 하지만 부산은 바닷가의 좁은 평지 외에는 대부분 산지로 이루어진 지형이라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현재도 도로망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태여서, 수도가 되더라도 현재 서울처럼 인구 천만명을 헤아리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인근 진해나 김해, 양산, 웅상까지 부산이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가 서울이 아니라 일본 바로 건너 부산이 수도이기 때문에 대북 리스크가 아니라 한일관계가 훨씬 더 중시될 것이다. 북한의 공세도 이 경우에는 간첩선이나 잠수함 등 바다를 통한 공세가 더 우려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보다 육군에는 약간 덜 투자되는 대신 해군력은 실제 역사보다 훨씬 강화되었을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부산에서 일본 방송 전파가 잡히기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도 일본 문화가 정식 개방되기 전에는 한국의 방송사들이 부산에서 잡히는 일본의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고 모방해서 프로그램을 만든 사례가 많았는데 부산이 수도로 있을 경우 일본 문화의 영향을 실제 역사보다 더 노골적으로 많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7.2. 수도를 기타 후방 도시에 천도했을 경우
수도를 부산에 두지 않고, 기타 후방 대도시에 설치하는 경우에는 부산의 단점인 지형상 확장이 어렵다는 점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유력한 곳은 서울에서 제일 가깝고 한강 지형으로 방어가 비교적 수월해지며 신도시 개발이 가능한 평지인 경기권의 한강 이남 지역, 현 서울 영등포 및 주변 일대와 항구도시 인천 지역이다.[65] 그리고 영남권에서 부산 다음가는 도시인 대구 나, 부산과 가깝고 항구가 있으면서 지형이 좀더 평탄해 확장에 유리한 창원이 가장 유력해진다. 호남권은 좋은 항구가 마땅히 없다는 단점이, 충청권은 경기권과 가까워 안보상 이점이 별로 없다는 점 때문에 새 수도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중 유력한 천도지는 대전이나 그 주변 교통 요지 공주시, 세종시 정도[66] 를 들 수 있다.
[1] 미국, 일본, 중국, 소련 등 외국이나 내부 반공세력을 적대하면서 독재권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지만 대한민국이 존속해 있는 남북대치보단 효과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2] 이 경우 중국과 소련의 사이에 껴서 양측 지원을 노리다 아무 지원도 받지 못하는 역사가 재현될 수 있다.[3] 특히 박헌영은 재판 과정에서 김일성의 패전 책임을 조목조목 비판하기도 했지만 씨알도 안먹혔다.[4] 세간에 알려진것과 달리 북한은 중공군 참전을 이유로 영토를 뜯기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공내전 지원의 대가로 국경조정에서 중공의 상당한 양보를 받았다. 백두산정계비를 기준으로 명시한 기존 간도협약대로라면 백두산 천지는 고사하고 최고봉인 병사봉조차 중국 차지다.[5] 실제로 박헌영이 기를 못 편 이유 중 하나가 이미 일경에 체포된 경력이 있어 변절자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6] 1950년 당시 사모아 인구가 8만명을 겨우 넘는 정도였으니 60~100만이 몰려오면 전체 인구의 10%도 안되는 원주민들의 소수민족화는 당연지사다.[7] 이와 더불어 전쟁 당시 남한 피란민들이 부산에 이어서 제주도로 많이 피난 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피난민이 화가 이중섭.[8] 핵과 미사일이 등장한 현대전에서 세계 그 어느 곳도 전쟁의 안전 지대가 될 수는 없지만, 단순히 전쟁이라는 선택지를 제외하더라도 지정학적 위치 상으로 본토의 직접적인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된다.그러나 제주도 서귀포에 해군기지가 있어 미사일 공격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 없다.[9] 가거도의 경우는 당시 전쟁이 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전쟁이 거진 끝나고 나서야 전쟁이 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외지였다.[10] 경상도 정도 면적이다.[11] 당장에 해외에서 범죄를 저질렀던 대만인 범죄자들도 대만으로 인도되지 않고 중국으로 강제송환될 정도다.[12] 정확히는 "한반도에서 선거가 실시된 지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다. 그러나 6.25 발발 전에는 선거가 실시되지 않은 지역의 정부가 인정된 적이 없으니, 6.25 이전에는 사실상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이다. 역설적이게도 북한 정권은 6.25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셈이다. 그게 최악의 악명이었지만.[13] 그 중화민국조차도 1971년 UN (형식상) 자진탈퇴 이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에 외교적인 명분에서 앞서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물론 대륙을 석권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력이 넘사벽급으로 커지면서 그 명분마저 강탈해오긴 했지만. 북한이 남한 본토를 접수한다고 해도 애초에 1950년대 남한의 기반시설이라고 해봐야 북한보다도 못한 실정이었고, 설령 그당시 북한 수준의 기반시설이 있다고 할지라도 '''중국과 애초에 국력의 체급 자체가 달라서''' 국제사회에 나만 정통정부로 인정해 달라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처지는 될 수 없다.[14] 단, 중요한 것은 '''2024년 현재의 시점'''의 제주도를 가정하면 제주항, 서귀포항 및 관광 인프라가 탄탄하기 때문에 현재 제주도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못해도 아이슬란드 수준으로 국가 운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15] 다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이건 1960~70년대 산업화된 대한민국이 관광단지로 적극적으로 만들어 놓은 거고, 한국전쟁 이후 제주도만 남은 상황이면 암울 그 자체다. 지금 제주도는 식량부터 한국 본토에서 가져오는 판이고, 자체 산업도 거의 없지만 남한이 있기에 잘 살 수 있는 거다.[16] 제주도는 바베이도스나 도미니카 연방, 사모아 등 현존하는 남태평양이나 카리브 해의 섬나라 소국들의 섬 영토보다 토지 면적이 굉장히 협소하다.[17] 장제스가 개인적으로 임시정부 출신 인사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망명)한국군이 암묵적으로 중국 본토 회복 작전에 상정되었을 것이다.[18] 국방부 전략연구소에서 편찬한 이상호의 한국전쟁기 미국의 한국정부 해외 이전 계획, 군사 101호, 2016년.[19] 이 그림은 고증오류가 있다. 거제도 지역이 빨갛게 칠해져 있는데 낙동강 방어선 구축 당시 거제도는 '''국군 해병대가 단독으로 수행한 작전'''인 통영 상륙작전으로 인해 북한군이 진입하지 못했다.[20] 물론 유엔군은 울산-밀양-마산 동부를 연결하는 데이비스 선(Davidson Line)과 같은 낙동강 전선이 붕괴했을시의 제2 방어계획을 구상하고는 있었다.[21] 사실 지금도 북한강 발원지는 북한에 있고, 임남댐이 만들어지고 남한으로 공급되는 물의 양이 줄어들었다.[22] 개성의 유적지, 관광지는 대부분 38선 근처에 남북으로 걸쳐 있어, 38선을 기준으로 DMZ와 민통선을 만든다면 현릉, 공민왕릉같은 유적지가 DMZ 안에 들어오므로 관광에 제약이 많았을 것이다. 선죽교같이 민통선 안이면 그나마 낫지만.[23] 서울이 전쟁 발발 3일만에 함락된 이유는 북한군이 동두천-의정부 방면으로 쾌속으로 진격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휴전선은 약점으로 지적되던 연천, 포천 일대를 확보하고 전선이 내려간 개성, 파주 방면은 임진강이라는 방어선이 남아있기 때문에 전쟁 이전의 38선보다 오히려 서울 방어에 유리하다. 개성의 경우 송악산 등의 감제고지를 전쟁 이전부터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38선 이남의 개성이 있더라도 유사시엔 어차피 임진강으로 후퇴해서 싸워야한다.[24] 이 경우 예성강부터 시작해 중간에 구연천으로 가로지른 뒤 임진강을 경계로 하여 동북쪽으로 이어지다가 전탄강으로 이어져 문천이나 영흥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다.[25] 서울역과 평양역 기준[26] 분단 전 벽성군 동쪽에 있는 현 북한 청단군 덕달산에는 대량의 희토류가 매장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나리오에서는 덕달산은 남한 소유가 되면서 중국에 대한 희토류 의존도가 확실히 낮아졌을 것이다.[27] 현재 수도권 방어에 있어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이북의 장사정포 사정거리(대체로 40-60km 정도) 바깥에 놓여 수도권 방어에 큰 유리점이 된다.[28] 전통적으로 북부 지방과 중부 지방을 구분했던 지리적 표지물이기도 했다.[29] 이 경우 교통의 요충지인 경의선 신막역까지 점령지가 늘어난다.[30] 장연군이 있지만 이 경우 옹진반도 서안과 백령도 등지에서 차단 가능하다. 그리고 본토에서 서해5도에 대한 지원도 지금보다 훨씬 안전해진다.[31] 북한은 신라와 이씨 조선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32] 서울-개성 거리는 서울-송탄 거리와 비슷하고 서울-해주 거리는 서울-세종 수준이라 남한령이였으면 충분히 경의선, 토해선을 이용해서 수도권 전철이 들어올 수 있었다.[33] 현재 북한 내 식량의 약 7할은 황해도에서 나온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황해도를 잃을 경우(그에 따른 인구 감소를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3할 정도의 생산량만으로 천몇백만의 인구를 먹여살려야 한다는 뜻이 된다.[34] 대동강 이남 평양 인구 약 100만명, 황해남·북도 442만명, 강원도 148만명 → 총합 690만명, 북한 전체 인구 2,400만명 (2008년 기준)[35] 이는 서독과 동독의 인구 대비와 비슷하다.[36] 여기서 말하는 인천권은 인천시 자치구 지역, 부천시, 시흥시, 광명시 일대 + 현실 역사에서 서울로 편입된(1963년 서울 대확장) 경인권역 인접지역인 서울 강서구, 양천구, 구로구 서부, 금천구, 관악구 일대.[37] 특히 일산이 아예 서울의 부도심으로 편입되었을 경우, 현대의 일산 역할은 '''개성''', 운정(구 교하읍)이나 금촌, 혹은 문산이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38] 이 경우 대한민국처럼 전력 수급 목적으로 원자력을 활용해 최소한 지금의 북한같은 전력난을 겪진 않았을 수도 있다.[39] 권력 세습, 선군정치, 대남도발, 핵 개발, 국제 조폭짓, 불안정한 정권 안정성, 극심한 빈곤, 인권 침해 등[40] 헨리 키신저는 UN군은 이 선을 경계선으로 하고 더이상 북진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41] 용천평야, 박천평야 등. 신의주, 용천부터 정주, 박천까지 평북 서해안 일대의 인구는 지금도 150만명 가량으로, 의외로 인구가 있는 편이다. [42] 러시아와 일본 토호쿠 지방, 경우에 따라서 북미 지역(캐나다, 미국의 모든 도시로부터 원산 간의 거리가 부산보다 근소하게 더 가깝다)로부터의 물류와 인원이 서울 등 중부 지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이다. 여기에 갈마, 호도반도와 송도원해수욕장, 석왕사, 삼방협 등 지역 내 관광자원과 금강산-통천으로 관광 연계 가능한 입지상의 이점도 존재한다.[43] 전방이 될 평양도 청천강 하류에서 평양 시내까지의 직선 거리는 70km에 가까워 현재 한강 하류 휴전선 지점에서 서울 개화까지의 최단거리인 약 25km보다도 더 멀다.[44] 지금의 영국, 프랑스, 태국의 인구와 맞먹는다.[45] 쌀 생산은 평북 해안 지대 외 농사 지을 땅이 없으니 거의 불가능하고, 작물도 감자, 조 등 내한성 작물만 가능해져 식량 자급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함흥이 비무장지대에 인접하게 되면 최대의 중공업도시 하나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나마 단천부터 시작해 성진, 청진, 나진 등 남은 함경도 동해안에 공업단지를 지어서 산업 기반을 만들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신의주, 청진항, 나진을 통한 대중·대소 무역이 국가경제를 하드캐리하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다. 또한 동서가 개마고원으로 단절되므로 신의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제권과 동해안의 중공업지대를 위시한 동부 경제권이 따로 놀아 지방 분권화가 격심해지게 된다.[46] 이마저도 고구려의 중핵 지역도 아니었다. 고구려의 중핵지역은 평양이 속한 평남 남서부 일대나 압록강 너머 집안 일대 정도였다. 게다가 이 지역은 고조선 멸망 후 중국이 약 400년 동안 지배했던 낙랑군의 일부이기까지 하다.[47] 함흥도 고려 예종 때 윤관의 여진 정벌로 얻은 동북 9성 중의 하나라 발해 멸망 후에는 여진족의 영역에 속해있었다.[48] 당장 재가승 문화 및 육진 방언 모두 여진족과 관련이 있음을 고려하자.[49] 여진/만주족도 백두산을 성산으로 여긴 것은 한민족과 같다.[50] 실제로 'Korea'의 어원이 된 고려의 강역과 유사하다. 동아시아 문화권 내에서도 역사적으로 고려는 '삼한(三韓)'이라고 불렸기에 'Korea(문화권의 지칭이 아닌 나라의 통칭으로서) = 韓國·韩国·韓国 = 대한민국'이 문제없이 성립하였을 것이다.[51] 중공과 소련이 충분한 물자 지원을 해줄 경우. 단, 중소 국경 분쟁 등의 문제 발생시 지원에 목매인 북한의 입장으로서는 연안파나 소련파의 힘이 더 강해질 수도 있다.[52] 현실적으로 이대로는 한미연합군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한 북한 정권이 생존을 위해 독립을 포기하고 스스로 중국이나 소련에 편입되기를 원할 수도 있다.[53] 전쟁 직후가 아니더라도, 소련 해체 이후 중국에 의해 합쳐졌을 가능성도 있다.[54] 반면 중화민국과의 단교는 더 빨리 이루어지게 된다.(...)[55] 이 상황에서의 북한은 이걸 '''매우''' 바랄 가능성이 높다. 물자 부족을 거의 무역으로 해결해야 하는 입장상 생존을 위해서라도 한국에 파이프를 꽂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56] 북한이 NLL을 문제삼는 논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NLL이 사실상의 영해선으로 기능하면서 해주항의 직항로가 차단되었기 때문.[57] 오히려 한반도내 영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는 괘씸죄를 적용해 망명정부 내 쿠데타를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58] 실제로 마오쩌둥 시기 조선족들은 북한에서 식량을 얻어갔고 이 때문에 조선족 노인들은 지금도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59] 실제로 호치민은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했으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관계 개선을 매우 원했다고 한다. 본인부터가 항일빨치산 시절 OSS측과 접촉하기도 했었고.[60] 실제로 이런 예시가 있는데,비록 냉전시대는 아니지만 걸프 전쟁에서 자신감을 얻고 이라크를 괜히 털다가 망했다.[61] 베트남 전쟁은 차라리 미국이 자신감 있게 북진을 했으면 해피 엔딩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기껏 전쟁은 일으켜놓고 정치적 부담때문에 북진은 못한 채 게릴라와 북베트남 남파정규군만 상대하면서 시간만 잡아먹었다.[62] 박정희의 경우 1963년에는 공주에, 1980년대에 대전에 수도를 마련할 생각을 했는데 문제는 그걸 실행하기 전에 사망했고 실질적인 후임인 전두환이 박정희가 해오던 정책 상당수를 백지화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핵개발과 수도이전이 백지화되어 서울이 수도로 남은 것이다.[63] 수도이전은 헌법재판소의 태클로 실패하고 세종특별자치시가 세워져 일부 정부기관만 이전되었다.[64] 이는 실제 역사에서 베트남의 후에시의 운명과 비슷한데, 실제 역사에서 후에시는 수백년간 베트남 왕국의 수도였으나 프랑스의 식민지배하에 발전한 사이공(식민지배 하에 발전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부산하고 유사하다)과 전통적인 고도이자 통일 베트남의 수도가 된 하노이에 밀려 쇠락하고 경주처럼 역사관광도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물론 서울은 후에랑 달리 하노이랑 비견될 더 전통이 유구한 대도시였기 때문에 남북 최전방에 끼어 중부 일개 도시로 전락해버린 후에만큼 쇠퇴하지는 않겠지만. 후에라는 도시는 완조가 새로 건설한 행정도시이기 때문에 별거 없었고 지금은 다낭의 위성도시처럼 되어버렸으나, 서울은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라 그리 쉽게 없어지진 않았을 것이다.[65] 6.25 종전 직후 이승만 정권 때 부평-부천 일대로 천도하려고 했다가 전쟁 직후 극빈국가 한국의 당시 정세에서 비용이 너무 들어 무산됐다.[66] 박정희 정권 때 공주 주변에 신수도 및 천도계획을 세웠다가 불발되었고 세종시에 행정수도가 설치되었다. 또한 공주는 웅진시대 63년간 백제의 수도였던지라 역사성 또한 어느정도나마 충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