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지명/서울특별시
서울특별시의 서울은 수도(首都)를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서울은 백제 사비(소부리(소벌)), 고구려 졸본(솔빈) 그리고 신라 서라벌에서 유래되었고, 어원은 "새 벌(New Field)"으로 모두 같다. [1]
1. 강남구
- 새말(신사동): 새 마을, 즉 새말을 한자로 쓴 것이 신촌이고, 신촌과 모래내(사천)가 합쳐져 신사동이 되었다.
- 모래내(신사동): 모래가 많은 냇가라는 뜻으로, 모래내를 한자로 쓴 것이 사천이고, 신촌과 합쳐져 신사동이 되었다. 서대문구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
- 한티(대치동): 대치동의 대치를 나타내는 토박이말. 큰 언덕이라는 뜻이다. 분당선 한티역의 역명을 지을 때 차용되었다.
- 언구비(논현동): 논현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 어느 광주유수가 나라 산의 진터를 개간하여 동민의 생계를 열어주었으므로 동민들이 그 유수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반고개(율현동): 율현동에서 세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고개 주변에 밤나무가 많아 '밤고개'[2] 라고 불리던 것이 '반고개'로 변형된 것이다. 율현(栗峴)동의 동명이 이 고개 이름에서 나왔다.
- 대청(일원동): 딱 보면 한자(大淸이라던가...)같은 지명이다만, 멀리서 보기에 마을의 모습이 대청(大廳)마루 같다 하여 대청마을이라고 하였다. 헌데 '대청'을 누구도 한자로 인식하지 않았고, 그것이 그대로 지명으로 굳어졌다. 실제로 중국어 병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대청역은 한자 이름이 없었다.
- 개패(개포동): 개포동의 순 우리말 지명으로, 마을 앞에 양재천 갯벌이 있어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개펄'이라고도 불렸다.
- 한여울(개포동): 개포동에 있던 마을로서,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여울이 세게 흐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갯바닥에 마을이 있어 한자어로 '반곡'이라고도 불렸다.
- 한여울(대치동, 대청동): 양재천 하류와 탄천이 만나는 곳의 옛 이름. [3]
- 갯둘(포이동): 포이동의 순 우리말 이름으로, 이 마을에 큰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들'이 되었는데 '갯들'을 '갯둘'로도 부르면서 이를 한자명으로 옮겨 적을 때 ‘갯’은 포(浦)로 ‘둘’은 이(二)로 하여 그 뜻을 따서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 청숫골(청담동): 청담동의 순 우리말 지명으로, 현재 청담동 신동아아파트 쪽의 한강물이 잔잔하게 흘러 마치 연못과 같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 할미산(일원동): 대모산의 옛 이름. 산의 모양이 늙은 할미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 헌릉이 생긴 이후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모산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 중의벌(삼성동): 조선 명종때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를 이 곳에서 실시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승과평'이라고도 했다.
2. 강동구
- 방아다리(길동): 강동구 길동에 있던 다리이다. 지형이 방아다리와 같은데 놓인 다리라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현재의 동남로가 도로명주소 개편 이전에는 방아다리길이었다.
- 굽은다리(천호동): 두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가 굽어 이 일대를 '굽은다리' 또는 '고분다리'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곡교리'라고 불렀다. 지하철 수도권 전철 5호선 굽은다리역의 유래가 되기도 한 지명이다. [4]
- 벌말(강일동): 강일동 일대[5] 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마을이 벌판 한가운데에 위치해 붙은 이름이다. 마을의 규모가 꽤 커서 '큰말'이라고도 하였다.
- 게내(강일동, 상일동): 게가 많이 잡히는 냇가라는 뜻으로, 한자로 '해천'이라고 했다. 고덕천의 옛 이름.
- 가래여울(강일동): 강일동 한강 여울가에 있는 마을. 마을 앞 한강의 물살이 급하고, 가래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가려울'이라고도 불린다. 한자어로 '추탄'이라도고 했다. [6]
- 고더기(고덕동): 고덕동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조선 태조가 이양중(李養中)의 높은 덕을 생각하여 이 마을을 고덕리라고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고더기', '고데기'라고 불렀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능골(강일동): 현재의 강명중학교, 고덕리엔파크 3단지 자리에 있던 마을로, 현재는 능곡교라는 고덕천을 넘는 교량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 새능말(암사동): 암사동에 있던 마을로서, 원래 산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넘말'이라 하였는데, 인조 때 수찬을 지낸 임숙영(任叔英)(1576~ 1623)의 묘를 크게 쓴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둔굴(둔촌동): 둔촌동 뒷편에 있는 바위로 된 굴의 이름으로, 고려 말 은사(隱士) 이집(李集)이 이 곳에 은거하면서 호를 '둔촌'(遁村)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둔촌동 동명의 어원이 된다.
- 밖둔굴(둔촌동): 지금의 둔촌주공아파트(2단지)에서 강동대로 건너편까지 이어져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둔굴'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자리에는 현재 둔촌주공아파트 2단지, 보성고등학교, 올림픽선수촌아파트 3단지가 있다.
3. 강북구
- 소귀(우이동): 강북구 우이동과 도봉구 쌍문동에 걸쳐있던 마을로서, 마을 뒤에 있는 삼각산 연봉 중에 소귀 같이 보이는 봉우리가 있으므로 쇠귀봉 · 우이봉이라고 불렀는데 그 봉우리 아래에 있던 마을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쇠귀마을이라고도 하였다.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우이천을 경계로 삼아 동쪽은 도봉구 쌍문동, 서쪽은 강북구 우이동으로 나뉘었지만, 두 마을을 모두 소귀 · 쇠귀 · 우이동이라고 불렀다.
- 빨래골(수유동): 수유동 일대에 있던 마을로서, 삼각산 동쪽 골짜기에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맑아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고 인근 주민의 쉼터와 빨래터로 이용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대궐의 궁중 무수리들도 빨래터와 휴식처로 이용하였다는 일화도 있으며, 지금도 다리 등의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는 지명이다.
- 무너미(수유동): 수유(水逾)동의 순 우리말 지명으로, 물이 넘친다는 뜻의 이름이다.
- 솔샘 (미아동) : 소나무 밑에 샘물이 있다고 해서 솔샘이 되었고 지금도 솔샘로 등의 도로명칭과 솔샘역 등 지하철역 명칭으로도 쓰인다. 또한 한자로 바꾼 행정동인 송천동이 있다.
4. 강서구
- 마결(마곡동): 마곡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삼을 많이 심었던 곳이어서 마결이라고 하였다.
- 삽다리(염창동): 염창동에 있던 다리이다. 옛날 이곳에는 소금을 저장하는 창고인 염창(鹽倉)이 있었고, 이 염창에 딸린 다리를 삽다리 또는 '삽교'라고 불렀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 부석이(개화동): 마을 뒷산에 바위 두개가 상하로 서로 덮쳐있었는데 그 사이로 실이 빠져나갈 만큼 공간이 떠있는 바위라는 뜻으로 '부석이', '부석이말'이라고 하였다. 현재 개화동 새마을회관 일대에 있었다.
- 새터말(개화동): 위에 서술된 부석이 마을이 커지자 마을 사람들 일부가 그 보다 남쪽으로 내려와 새로 마을을 형성했다. 이 마을을 부석이 사람들이 '새터말'이라 부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7]
- 허가바위(가양동): 가양동 탑산 아래 절벽에 있는 자색을 띤 구멍 뚫린 바위로서,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 바위에서 나왔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허가바위굴', '공암'이라고도 하였다.
- 서낭댕이(등촌동): '서낭당이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 공장말(방화동): 일제 말기에 벽돌과 옹기를 굽던 공장이 생겨 이로 인해 100여 세대가 모여 살면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장터꼴(공항동, 과해동): 지금은 김포공항의 활주로로 뒤덮혀버린 과해동의 옛 이름으로, 이 동네 일대에 시장이 형성되어 붙은 마을 이름이다.
- 소배미(공항동): 옛날에 이 일대에 밤나무가 많이 자생했는데 그 사이에 예닐곱집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 '소율리'라고도 하였다.
- 하마비마을(가양동): 마을에 하마비가 있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
- 범머리웅뎅이(방화동): 범의 머리처럼 생긴 산줄기 끝에 있던 웅덩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있었을 때, 다른 곳은 범람 후 물이 빠졌지만, 이 웅덩이의 물은 빠지지 않아 자연적으로 물이 고인 못이 되었다고 한다.[8]
- 분동산(염창동): 분가루같은 백토가 나오는 산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
- 까치산(화곡동): 까치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산 이름이다. 봉제산이라고도 한다. 까치산역 역명의 유래가 이것이다.
- 볏골(화곡동)
5. 관악구
- 까치고개(봉천동): 봉천동과 남현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가추개'라고도 하였고, 한자로 '작현(鵲峴)'이라고 하였다. 이 고개에는 숲이 울창하여 까치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한다.
- 당골(봉천동): 현재 보라매삼성아파트 남쪽 주변에 있던 마을로, 이 골짜기에 무당이 제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던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한자로 '당곡(堂谷)'이라고 하였으며, 재넘이라고도 했다. 이 주변 새주소는 '당곡 X길'로 시작한다.
- 문성골(신림동): 신림동에 있던 마을로서, 강감찬 장군을 비유한 문곡성이 비친 좋은 마을이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박지궁(봉천동): 봉천중앙시장 근처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재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어로 '박재궁(朴齋宮)' 또는 '박자궁'이라고도 불렸다.
- 밤골(신림동): 관악산 중턱에 있던 동네인데 옛날에 밤나무가 많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자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
- 복은말(신림동): 보그니말이라고도 한다. 신림동 108번지(난곡15길 30-21번) 일대로, 옛날 이 일대 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복이 숨어있는 동네라 하여 이 이름이 붙었다. 한자로는 복은촌(福隱村)이라고 한다.
- 쑥고개(봉천동): 원래 숯을 굽는 고개라 해서 숯고개라 불렀는데 변해서 쑥고개가 되었다.
- 야지고개(남현동): 남현동과 경기도 과천시의 경계가 되는 고개로서, 옛날 이 고개에 여우가 있어 '여우고개'라고 한 것이 사투리로 '여시', '야시고개'라고도 하였고 '야시고개'가 변하여 '야지고개'가 되었다.
- 합실(신림동): 신림10동 중서북부에 있었는데 지형이 큰 조개 모양을 하고 있어 합곡(蛤谷)이라 불렀던 것이 점차 바뀐 이름이다.
6. 광진구
- 으능정이(광장동): 광장동에 있던 마을로서, 은행나무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명려궁터(군자동): 군자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둥하다가 마침 이곳 길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 날 밤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고 하여 동네의 이름을 '군자동'이라 하고 이곳을 '명려궁터'로 부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모진동네(화양동): 조선시대 이 일대의 살곶이벌에 양마장이 있었는데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 근처의 수렁(현재의 일감호)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수렁 위에 널빤지를 띄워 놓고 들어가 말을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 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동네의 여인들을 보고 ‘모진여인’이라 부르고, 모진 여인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모진동네’로 불렸다고 한다. [9][10]
7. 구로구
- 구루지(구로동): 구루지마을. 구로구 권역에서 가장 오래된 옛 지명. 現 구로본동 일대가 구릉을 끼고 형성된 작은 원시부락 형태일 적의 지명.[11]
- 방아다리(고척동): 고척1동 일대와 중앙로[12] 가 만나는 자리에 있던 다리. 이 일대는 김포평야의 일부로서 옛날부터 대부분 논 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방앗간이 있었다. 방앗간 앞에는 지천이 있었는데 비가 오면 물이 불어 건너에 있는 논에 다닐 수가 없자 방앗공이를 엮어 다리를 놓았다고 전한다. 괴목(槐木)으로 된 방앗공이가 튼튼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건너다니게 되자 이 다리를 '방앗공이다리'라고 불렀고, 줄여서 방아다리로 불렀다. 현재는 이 일대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지천들은 모두 복개되어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 보름뫼(온수동): 온수동에 있는 산의 이름. '까치산'이라고도 불렸다.
- 항골(항동): 항동에 있던 마을로서, 동명의 어원이 되는 지명이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마을의 형태가 배 모양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13]
- 궁골(궁동): 궁동에 위치했던 마을의 이름으로, 선조의 7녀인 정선옹주가 부평부에 속해 있던 이곳의 권대임(權大任)에게 시집을 오게 되자 선조가 이 일대를 정선옹주에게 사패지로 내려주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부마와 옹주가 사는 집이 크고 으리으리하였기 때문에 궁궐 같은 집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궁마을'이라고도 하였다. 궁동이라고 하는 지명의 어원이 된다.
- 텃골(오류동): 현재 오류초등학교 서쪽 일대에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오류동에서 가장 안쪽에 있어 '안동네'라고도 하였다.
- 부누꿀(개봉동): 개봉동 북쪽에 있던 마을[14] 의 이름.
- 가녈봉(고척동): 고척동에 있던 산의 이름으로, 원래 이름은 '갈탄봉'이었으나 점차 변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가린열봉'이라고도 했으며, 인접한 마을의 이름을 따 '부누꿀산'이라고도 불렸다.
- 가는골(고척동): 상술된 '가녈봉'의 남서쪽에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좁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15]
- 개웅개울(개봉동, 구로동): 목감천의 옛 이름.[16]
- 잣절고개(개봉동): 잣절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잣절은 잣나무가 많고, 절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잣절 마을은 백사(栢寺)리라고도 하였다.
- 고잘마을, 능골(고척동)
- 모이안밭, 벌뚝, 숫돌고개(천왕동)
- 버들이마을, 보름외, 주막거리(오류동)
- 갈매, 댓골고개, 삭새고개(궁동)
8. 금천구
- 말뫼고개(독산동): 시흥대로변에 있는 고개로서, 고개 마루턱에서 내려오는 지세가 말과 비슷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마산고개' 또는 '두산고개' 라고도 하였다.[17]
- 말미(독산동): 위에 서술된 말뫼고개 옆에 있던 마을 이름. 시흥대로와 범안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의 이름도 이 지명에서 따와 '말미사거리'라 명명하였다.
- 박미고개(시흥동): 지금의 시흥성당 앞에 있던 고개의 이름.
9. 노원구
- 방아다리(하계동): 하계동/용동 앞들에 있던 다리이다. 두 개의 개울물이 합해지는 모양이 방아다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당고개(상계동): 수도권 전철 4호선의 당고개역이 있는 고개로서, 옛날 성황당이 있었고 또 미륵당이 있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당현(堂峴)이라고 하며, 이 일대를 지나는 하천의 이름도 당현천.
- 마당바위(상계동): 노원구 상계동 수락산유원지에 있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로서, 모양이 마당만큼 크고 넓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로 '장암'이라고 불렸는데,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암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 용사촌(공릉동): 구 경춘선 화랑대역 앞에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한국전쟁 이후 보훈대상자와 군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0. 도봉구
- 봇들(방학동): 방학동 일대에 펼쳐진 들을 일컫던 옛 지명.
- 다락원(도봉동): 도봉동과 의정부시 경계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한 원이 있었는데 원집이 다락으로 되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누원'이라고도 하였다.
- 쌍갈무늬(쌍문동): 쌍문동에 있던 마을로서, 이 마을 앞의 쌍갈래 길에 이문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쌍문동 동명 유래 중의 하나가 되는 마을인데, '쌍갈문이', '쌍문'이라고도 하였다.
- 성고개(방학동): 방학동에 있던 마을로서, 이곳에 있던 바위가 성과 같은 모양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18]
- 꽃동네(쌍문동): 쌍문동 내시묘 주변에 1970년대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이 동네 노인들이 마을 입구에 '꽃동네'라고 쓰여진 아치를 세우고, 화단을 설치하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19]
- 바라기들(창동): 지금의 창동초등학교 남쪽 주변에 있던 들판의 이름으로, 농사 짓는데 물이 부족하여 물만 늘 바란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 창골(창동): 위에 서술된 '바라기들' 뒷편에 큰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붙은 마을 이름으로, 창동 동명의 어원이 된다.
11. 동대문구
- 방아다리(제기동): 제기동에 있던 마을로서, 경동시장과 오스카극장이 있던 곳이다. 기름진 땅으로 이름이 났으며 채종답(採種畓)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이 동네 일대에서 난 토란이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종묘장이 있었고 정릉천이 마을 복판으로 내려와 수원이 좋았다. 현재는 이 자리에 아파트가 세워졌다. 현재 제기동 주택가의 어린이공원 이름으로 남았다.
- 떡전거리(회기동): 회기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부근에 떡을 파는 가게(전)이 많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왕산로와 제기로, 전농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의 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떡전교사거리'이다.
- 미나리꽝(용두동): 지금의 경동시장 일대로, 이 일대가 전부 미나리 밭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우산각골(신설동, 보문동): 신설동과 보문동에 걸쳐있던 마을로, 조선 세종 때에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한 정승인 유관(柳寬)이 이곳에 살면서 비 새는 집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보았다고 전하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재 동대문도서관 앞의 작은 공원 이름으로 남았다.
- 텃골(전농동): 전농동에 있던 마을로서, 전농동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며, 왕이 친히 갈던 밭인 '동적전'이 있던 곳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톳구리', '기곡'이라고도 하였다.
- 탑골(신설동, 보문동): 앞서 나열한 동네에 걸쳐있던 마을로, 이 마을에 있던 '미타사'라고 하는 절의 탑이 있는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했다.
12. 동작구
- 거북고개 · 모자원고개(신대방동): 봉천동 당곡사거리에서 동작구 신대방삼거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옛날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연령군신도비가 있었는데 이 비석의 받침인 거북을 당시 관악산에서 조각하여 운반할 때 수백 필의 소가 넘었던 고개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후 1954년 정부에서 한국전쟁 미망인과 그 자녀를 위해 이곳에 64가구의 주택단지를 지어 살게 하였다고 하여 '모자원고개'라고도 불렀다. 인근 주민들은 모자원고개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한다.
- 검은돌(흑석동): 지금의 은로초등학교 운동장 남쪽 자리에 돌이 유난히 검은빛을 띄어 붙여진 마을 이름.
- 꽃말(노량진동): 노량진동 50~54번지 일대[20] 에 있던 마을로서, 일제강점기 '후까이'라는 일본 사람이 약 5천여 평의 꽃밭을 만들고 꽃을 심어 서울 시내 꽃 도매상들에게 판매하였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높은절이(노량진동): 현재의 노량진동 산10번지의 높은 언덕에 청련암(淸蓮庵)이라는 절이 있던 데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다. 한자로 고사리(高寺里)라고 라기도 했다. 이 마을은 부군면 통폐합 때 대방리에 흡수되었다.
- 노들나루(노량진동): 현재 쓰이는 노량진(鷺梁津)은 노들나루를 음차한 것이다. 노들역의 역명을 지을 때 차용되었다.
- 독막(노량진동): 지금의 동작구청 자리(노량진초교 맞은편) 있던 마을로 옹기를 굽던 가마가 두 개 있었다고 전해지며 과천현(지금의 서초구, 강남구, 과천시 등)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1950년대 말까지 있었으나 그 후 사라졌다.
- 동재기나루(동작동): 현재 쓰이는 동작(銅雀)은 동재기를 음차한 것이다. 정확한 위치는 동작대교 남단 부근이며, 현재는 이 부근을 동작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동작구는 동작동에서 유래하였다.
- 배나무골(사당동): 옛날 이 마을에 배나무를 많이 재배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배나무굴', '이목동(梨木洞)'이라고도 불렀다.
- 빙수골(상도동): 빈수골, 찬우물이라고도 한다. 항상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빨래골(노량진동): 노량진동에 있던 마을로서, 아낙네들이 관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해서 빨래를 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살피재(상도동): 숭실대학교와 봉천사거리 사이에 있는 언덕으로 과거에 이 언덕 부근에 산적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도둑질당하지 않게 잘 살피며 다니라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 서달산(흑석동): 흑석동 남서쪽에 있는 산이다. 재강굴산이라고도 하는데, 돌이 많이 난다고 한다.
- 성대굴(상도동): 성대시장 입구부터 국사봉까지 걸쳐있던 마을로서, 옛날 이 마을에 신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죽어 묏자리를 구하여 땅을 파헤쳐 보니 복숭아꽃이 한 아름 나왔다고 전하는데 그때부터 '성도화리(成桃花里)'라고 부르다가 성도아리→성도리→성대리로 변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구한말까지 지금의 상도1동을 제외한 모든 상도동의 영역이 성도화리였다가 부군면 통폐합으로 옆동네 상도리와 합쳐지고 해방 후 상도동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수라간(사당동): 사당동에 있던 우물로서, 예전 임금이 역로에서 수라를 들었던 우물이라고 전한다.
- 아차고개(노량진동): 사육신묘 마루터기에 있는 고개의 이름으로, 세조 2년(1456년)에 단종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의 모의가 발각되어 죽음에 처하게 될 즈음 영등포 이남에 살던 한 선비가 사육신을 처형함은 부당하다는 것을 간하기 위하여 도성을 향하여 말을 달려오다가 이 고개에 이르러 육신이 이미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차! 늦었구나!”하고 한탄했던 고개라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장승배기(상도동): 상도동 · 노량진동에 걸쳐 있던 곳으로서, 장승이 서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재 서울 지하철 7호선 장승배기역 위 사거리 위에 표석을 세우고 다시 장승을 만들어 세웠다.
- 정검마을(동작동): 경문고등학교 근방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정씨 성을 가진 감사가 살던 마을, 또는 감사가 살던 모퉁이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해서 '정감몰', '정감우', '정가우'로 불렀다고 전하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21]
- 한증막(상도동): 상도동에 있던 마을로서, (구주소)상도동 288번지 일대에 한증목욕탕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22]
13. 마포구
- 풀무골(성산동): 성산동에 있던 마을로서, 시영아파트에서 불광천 건너 상암동으로 가는 길목으로 풀무간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밤섬(창전동, 당인동): 창전동 · 당인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한강 가운데에 있어 밤처럼 생긴 섬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광복 후에는 율도동이라고 하였다가, 1968년 밤섬이 폭파됨으로써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옮겨졌다. 밤섬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조그만 섬으로 되어 있다.
- 애오개, 떡전고개(아현동): 서대문네거리에서 충정로삼거리를 지나 마포구 아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아기고개 · 아이고개 · 애고개 · 애우개, 한자명으로 아현(兒峴) · 아현(阿峴) · 아이현(阿耳峴)이라고도 했으며, 떡전고개 · 병시현이라고도 하였다. [23] 이 지명은 현재 수도권 전철 5호선 애오개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 무쇠막(신수동, 구수동): 신수동과 구수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무쇠솥이나 농기구 등을 만들어 팔거나 국가에 바치는 공장이 많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메주무수막(신수동, 구수동): '무쇠막'과 마찬가지로 신수동과 구수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궁중이나 관아에서 필요한 메주를 다량으로 쑤어서 바치는 일을 하던 곳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바탕거리(신수동, 구수동): 신수동과 구수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솥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기계의 하나로 주물틀을 만들었는데, 이를 우리말로 바탕이라 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위에 서술된 '무쇠막'과 연관있는 지명이다.
- 와우산(서강동): 서강동 뒷산으로 서교동까지 걸쳐 있는 산이다. 산 모양이 '소가 누운 것'처럼 생겼다고 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몰미산'이라고도 한다. [24]
- 삼개(마포동): 마포동의 순 우리말 옛 지명.
- 잔다리(동교동, 서교동): 동교동 및 서교동의 기원이 되는 지명으로, 지금은 복개되어 찾아볼 수 없는 창천에 있던 작은 다리를 말하며 한자로 '세교(細橋)'라고 하였다. 동세교리, 서세교리가 일제강점기 때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세'자를 떼버리고 동교정, 서교정이 되었다가, 해방 이후 동교동, 서교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 저잣거리(창전동): 지금은 무인도가 되어버린 밤섬에 있던 거리의 이름으로, 조선시대 해운의 발달로 인해 이 거리에 시장이 형성되어 불려졌던 이름이다.
- 덜머리(합정동): 절두산 성지의 순 우리말 이름이다. '가을두'라고도 불리웠으며, 누에가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잠두봉'이라고도 불리웠다. 절두산이라고 불리우게 된 사정은 해당 항목 참조.
- 박석거리(구수동): 구수동에 있던 거리 이름으로, 이 거리 주변에 살던 부자가 비만 내리면 질퍽해지는 땅 때문에 가죽신이 상한 것을 못마땅해 한 나머지 하인들을 시켜 박석을 깔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샛골(아현동): 애오개 주변에 있던 마을로, 애오개 주변 산 사이에 있던 마을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큰 은행나무가 있어 '큰행화동', '큰행화리'라고도 불렸다.
- 너른마당께(도화동): 도화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에 동네 앞에 너른 마당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똥골목(당인동): 현재 서울화력발전소의 자리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한마디로 마을이 너무 더러워 붙여진 이름. 화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석탄 등을 쌓아놓아 항상 시커먼 먼지가 날리는 데다가 발전소 굴뚝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로 온 동네가 더럽다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25]
- 아가나무말(신수동): 위에 언급된 '메주무수막' 옆 마을 이름으로, 아가위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 복사골(도화동): 도화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복사꽃이 많이 펴 붙여진 이름이다. 밤섬에서 보면 쪽빛 한강물과 분홍빛의 복사꽃이 어우러져 절경이었다고 전한다.
14. 서대문구
- 가재울(북가좌동): 북가좌동에 있던 마을로서, 경티말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가재가 있고 산이 둘러싼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한 고을에서 먼 곳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설도 있다. 한자명으로 가좌리(加佐里)라 하며, 이계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연희방(성외) 가좌동이었는데, 인구가 늘어나자 가좌1 · 2계로 나누었으며 다시 남가좌동 · 북가좌동이 되었다.
- 경티말(남가좌동): 남가좌동에 있던 마을로서, 정토사(淨土寺)가 있었으므로, 정토말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경티말이 되었다고 한다.
- 모래내(홍제동): 종로구 구기동 · 평창동에서 발원하여 홍제동 · 남가좌동 · 마포구 성산동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으로서, 세검정의 맑은 냇물이 홍제동에 이르면 모래가 많아서 물이 늘 모래 밑으로 스며 내려간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홍제천의 옛 이름.
- 길마재(봉원동): 안산의 옛 이름.
- 굴레방다리(북아현동): 북아현동 일대에 있던 다리 이름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큰 소가 길마는 무악에 벗어 놓고, 굴레는 이곳에 벗어 놓고,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명으로 늑교(勒橋)라고 하였다.
- 돌다리(영천동):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에 있던 다리이다. 돌로 다리를 놓았으므로 돌다리 또는 석다리라고 하였으며, 한자명으로 석교라고 하였다.[26]
- 독박굴어귀(홍은동): 홍은동에 있던 마을로서, 독바윗굴로 들어가는 어귀에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27]
- 눈바위물(천연동): 천연동에 있던 우물의 이름으로, 누워있는 바위 밑에서 물이 나와 우물이 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맛이 매우 좋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와암천'이라고 불리기도 했다.[28]
- 거북골(북가좌동): 북가좌동에 있던 마을로서, 위에 서술된 가재울 북쪽 고개 너머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의 손자 화산군(花山君) 이곤(李滾)의 묘소가 있어서 '능안말'이라고도 하였고, 화산군 묘 앞에 큰 거북 받침의 신도비가 있으므로 '거북골' 또는 '거북굴'이라고도 하였다.
- 꼬리우물(미근동): 경찰청 민원봉사실 앞 화단에 있던 우물의 이름으로 초리우물이라고도 불렸으며, 꼬리우물보다 이 이름이 더 유명하다. 물이 많이 나서 늘 넘쳐 흘러 우물에 꼬리가 있던 것 같아보여 이름 붙여졌으며,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았다고 한다. 차가운 물이 염색하기 좋아 염색공들이 근처에 많이 살았다고 전한다.[29]
- 미나릿골(충정로2가, 충정로3가, 미근동, 합동): 미나리밭이 유명하여 붙은 마을이름. 한자어로 '근동'(芹洞)이라고 불렸다.[30]
15. 서초구
- 서릿개(반포동, 서래마을): 개울이 둥글게 감싼다는 의미로 이 개울은 반포천을 의미한다. 서릿개를 훈차하면 반포(蟠浦)가 된다. 이 이름은 구반포역의 역명이 될 뻔 했으나 지역주민들의 반대로 어그러졌다[31] .
- 바우뫼(우면동): 범바위라는 바위가 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우암초등학교 부근이다. 범바위는 코리아 그라비아 사옥 뒷편에 있다.
- 도구머리(방배동): 서울의 들머리(입구)에 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정확한 위치는 도구머리공원(새우촌공원) 부근이다.
- 서리풀(서초동): 서초(瑞草)동의 순우리말. 서리풀이 무성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방배동과 서초동 사이에는 이 이름을 본딴 서리풀공원이 있다.
- 말죽거리(양재동): 한양으로 가는 길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 곳에는 역참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말에게 말죽을 먹였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로 유명하다.
- 염통골(염곡동): 마을이 염통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 달래고개(원지동): 달래내고개로도 불리는 곳이다. 원지동과 관악구 신원동의 경계가 되고 성남시로 통하는 포장도로 상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에는 삼남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영남대로 또는 동래로)이었다. 달래고개를 넘으면 너더리(판교의 옛 지명)를 거쳐 용인시나 수원시로 갈 수 있었다.
- 박석고개(내곡동): 내곡동 헌인마을 서쪽 헌릉로에 있는 고개로서, 일명 '덕영고개'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헌릉과 인릉에 참배하는 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고개에 네모난 돌을 깔아 놓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솔배(원지동): 원지동에 있던 들로서, 예전 술바위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새원(신원동): 원지동과 신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에 새로 이곳에 원(院)을 설치하였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자명으로 신원(新院)이라고 하였다. [32][33]
- 게리(양재동): 양재동에 있던 마을로서, 이곳 지형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게의 형국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게리라고 불리던 것이 '거여'로 음차되어 '거여리'라고도 불렀다.[34]
- 왕촌(서초동): 현재 남부순환로와 반포대로가 만나는 곳 일대에 있던 마을로, 고려가 망하고 난 뒤 왕씨 일가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룬 곳이어서 '왕촌'이라고 불리웠다.
- 홍씨마을(내곡동): 현재 새주소 '홍씨마을길'의 근원이 되는 지명으로, 홍씨마을 어린이공원 주변에 홍씨 성의 집성촌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안골(내곡동): 내곡(內谷)동의 순 우리말 지명으로, 마을이 본 마을의 안쪽에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안말'이라고도 불렸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양지말'이라고도 불렸다.
- 치골(방배동): 방배동에 있던 골짜기 이름.
- 용의눈(서초동):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의 위치가 용의 눈에 해당하는 논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도구머리(방배동): 남태령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길 어귀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관악경찰서 주변에 있던 마을로, '도구두'라도고 불렸다.
- 성뒤고개(방배동): 방배동의 옛 자연마을인 성뒤마을로 넘어가던 고개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35]
16. 성동구
- 무수막(금호동): 무쇠솥, 농기구를 생산하는 대장간이 많았던 동네로, 무시막, 무쇠막이라고도 불렸다. 이것을 한문으로 수철리(水鐵里)라 불렀고 철(鐵)은 금(金)으로, 수(水)는 호(湖)로 글자가 바뀌어 금호동이 되었다.
- 도장골(행당동):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행당동의 한진타운이 도장골 한진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고 행당로의 도로명 개편 전 이름이 도장골이었다는 데에서 행당동 지역에 도장골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뚝섬(성수동): 옛 성수동에 치우천왕의 사당인 둑신사(纛神祠)가 있었는데, 사당의 치우천왕의 깃발에서 따와 군기를 뜻하는 독(纛), 섬을 뜻하는 도(島)를 써서 '둑도(纛島)'라고 했다. 훗날 둑이 뚝으로 바뀌고 도를 섬으로 부르면서 뚝섬이 됐다. 둑신사는 1920년 경에 사라졌다고 한다. 여기에서 따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지금의 성동구 동부와 광진구, 중랑구 면목동, 송파구 잠실 일대를 관할하던 면의 이름을 '뚝도면'(고양군 소속)으로 명명하였다.
- 살곶이벌(사근동, 성수동): 태종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자 뚝섬에서 기다렸는데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화살을 쏘면서 나무에 화살이 꽂혔다는데서 유래. 살곶이다리로 지명이 남아있다. 다른 설화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사냥을 하던 중 나무에 화살이 꽂혔는데 나무가 피를 흘렸다고 하기도 한다. 후자의 설화는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화살을 쏘기 전부터 그 지역 이름이 살곶이였다는 것.
- 토끼굴(도선동): 도선동에 있던 마을로서, 토끼의 굴 같이 생긴 지하도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수리재(하왕십리동, 행당동): 하왕십리동에서 행당동으로 가는 고개로서, 옛날에 수레가 많이 다녔던 데서 '수레재'라고 일컫던 것이 와전되어 불려진 이름이다.
- 선골(하왕십리동): 하왕십리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선못'이라 불리던 연못 근처에 마을이 위치해 있어 불려진 이름이다. '선못골', '입지동'이라 불리우기도 했다.
- 뼈다리께(성수동): 성수동2가에 있던 마을로서, 전차가 흥인지문에서 광나루까지 운행되던 때, 광진구 광장동으로 나가기 위해서 이곳을 흐르는 개천을 통과하기 위해 철로를 놓았는데, 그 모습이 하도 앙상하여 마치 살을 다 뜯어먹고 난 생선 가시 같다고 하여 뼈다리라 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왕심리(하왕십리동): 하왕십리동에 있던 마을로서, 도성으로부터 십리 떨어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왕십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고, 이를 소리 나는 대로 '왕심리'라 하여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박석고개(상왕십리동): 상왕십리동 일대에 있던 고개의 이름. 고개 주변의 마을 이름도 같았다.
- 두물개(옥수동): 옥수동 주변 한강변의 옛 이름. 응봉을 좌우로 둘러싸고 있는 동호와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멧개', '두뭇개'라고도 하였고, 한자로 '두모포'라고 하였다.
17. 성북구
- 돌곶이(석관동): 석관동에 있던 마을로서, 인근 천장산의 한 맥이 수수팥떡이나 경단을 꽂이(꼬챙이)에 꽂아 놓은 것처럼 검은 돌이 박혀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자로 '석관(石串)'이며, 서울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 아리랑고개(돈암동):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에는 정릉으로 가는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라 하였으나 1926년 나운규가 이 고개에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뒤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다. [36]
- 꿩바다(성북동): 성북구 성북동에 있던 마을로서, 예전에 이 지역은 삼각산 줄기로 울창한 나무와 암석들로 둘러싸여 있어 꿩을 비롯한 새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다릿굴고개(상월곡동): 상월곡동에서 장위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서, '월곡'을 '다릿굴'이라고 하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장위고개', '장위현', '우장현'[37] 이라고도 하였다.
- 모랫말(종암동): 종암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정릉천이 마을 한가운데로 흘러서 비가 많이 오면 마을 주변이 모래밭으로 변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보토고개(성북동): 성북동 북쪽으로 뻗은 삼각산의 봉우리 중에 마치 개가 쭈그리고 앉은 모양을 하고 있는 구준봉 뒤쪽에 있는 고개로서,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이 서울 도읍터의 입수목이 되어 잘록한 형상이라 그 약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하여 해마다 흙을 보태고 떼를 입혀서 '보토고개' 또는 '보토현'이라고 하였다.[38]
18. 송파구
- 새내(신천동(서울)): 현재의 한강 본류는 원래는 본류가 아닌 작은 냇길로, 새로 난 냇길이라 하여 새내라고 불렸다. 이것이 신천으로 바뀌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천역이 잠실새내역이 되면서 지명이 부활했으나, 정작 신천동에는 없고, 잠실동에 있다.(...)
- 부리도(잠실동): 현재의 잠실이 섬으로 있을 때 이름으로, 한강가에 있어서 큰물이 지면 사방에 물이 들고, 오직 이곳만 남아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는데,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것이다.[39]
- 돌마리(석촌동): 마을 인근에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한성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고분이 많아 마을 사람들이 여기서 나온 돌로 담을 쌓았다고 전한다. [40] 한자로 '석촌(石村)'이 되었다.
- 바람드리(풍납동): 동네 이름인 '풍납(風納)'의 순 우리말로, 처음에는 '배암드리'라고 불리던 것이 변하여 '바람드리'로 불리워졌다. [41]
- 돌무더기(마천동): 마천동에 있던 마을로서, 온 마을에 돌무더기가 많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겜리(거여동): 거여동의 순 우리말 지명으로, '거암'이라는 사람이 살아서 '거암리'로 불리다가 음이 변하여 '김이', '겜리'라 하였다.
19. 양천구
- 신트리(신정동): 신정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신을 삼았던 마을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설과, ‘새로운 터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터리-신틀이-신트리로 변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설이 존재한다. 조선시대 지도에도 신기(新機)라고 표기될 만큼 역사가 깊은 마을이었으며, 위치는 금옥여자고등학교 근처 정랑고개 아래였다고 한다.
- 정랑고개(신정동): 양천구청에서 금옥중 · 금옥여고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옛날 조정에서 이 근처에 왕릉을 정하려 했다는 데서 정릉(定陵)고개라 한 것이 음이 변하여 된 이름이라고 전하는 설과, 옛날 한성백제 시절 바다로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고구려와 세력다툼을 하던 곳이어서 '원수 적(敵)'자와 '고개 령(嶺)', '적령고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정넝고개 · 정년고개라고도 하였다.
- 곰달내(신월동): 옛 지명은 고음월리. 이 이름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있다. 신원초등학교 뒷산 동쪽에 발달한 동네에 달빛이 맑고, 곱게 비친다 하여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42][43] 또 동네 앞에 있는 큰 들에 내가 흐르고 있어서 큰 들의 내라는 뜻인 감들내라고 한 것이 변하여 곰달내 · 곰달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또 백제 시대때, 음소와 음월이라는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44] . 곰달래라는 이름은 곰달래로에 남아있다.
- 용왕산(목동): 목동에 있는 산으로서, '엄지산', '역산', '왕령산', '왕재산'[45] 이라고도 한다.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죽어서 왕으로 환생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 쪽박산(신정동): 신정동에 있던 산으로, '당산'으로도 불렸다. 지금의 신정산[46]
- 칼산(신정동): 산 모양이 칼처럼 뾰족하다고 해서 칼산으로 붙여졌다. 칼이라는 이름이 억양이 좋지 않아 갈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달걸이(목동): 북쪽에서 본 용왕산이 떠오르는 달 모양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월촌(月村)이며, 이 이름은 월촌초등학교, 월촌중학교에 남아있다.
- 오금이(신정동): 칼산과 안양천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모양이 사람 오금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름은 오금교에도 남아있다.
- 오목내(목동): 안양천을 부르던 이름이다. 골이 오목하게 파여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목교와 오목교역 둘다 이 오목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20. 영등포구
- 샛강다리(신길동): 신길동에서 옛 여의도비행장으로 들어가는 샛강 어귀에 놓여있던 다리의 이름이다. 1955년 장마로 인해 유실되었다.[47]
- 양말산(여의도동): 여의도에 있던 산의 이름으로, 조선시대 이 곳에서 말을 길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자리이다.
- 돼지마을(도림동): 도림2동 일대에 있던 마을로, 마을 사람들이 돼지를 많이 키워서 붙여진 이름이다.
- 너벌섬(여의도동): 여의도의 다른 이름으로, 장마철이 지나면 여의도의 맑은 모래밭이 육지에 연속되던 지형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 괭이산(양평동): 양평동에 있던 산 이름으로, '고양이산', '선유봉', '저주봉'이라도고 하였다.
- 고추말(영등포동): 영등포역 뒷편에 있는 고개 이름으로 겨울철 바람이 고추처럼 몹시 차고 맵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영등포 푸르지오 아파트앞 버스정류장 이름은 꼬추말로 되어 있다.
- 모랫말(문래동, 신도림동 일부)
- 큰논배미, 모아래(가리봉동, 가산동)
- 도야미(신도림동 일부)[48]
- 부누꿀(개봉동)
21. 용산구
- 포방터(이태원동): 이태원동 군인아파트가 있는 곳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말까지 포방터로 이용되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일제가 1907년 4월에 신용산 일대를 군용지로 책정하면서 계속 사격장으로 사용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사격장으로 사용해 오다가 1963년에 군인아파트촌이 착공되면서 주거지역으로 바뀌었다.
- 새창고개(효창동): 효창동에서 마포구 도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 부근에 조선시대 선혜청의 별창고인 '만리창'[49] 을 이곳에 새로 지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신창고개'라도고 하였다.[50][51]
- 배다리(청파동): 현재 청파동삼거리 근처에 있던 징검다리의 이름으로, 숭례문에서 나오는 삼남대로 상의 중요한 다리였다. 현재는 다리가 위치했던 만초천이 복개되어 형체를 알 수 없으나, 원래 징검다리와 목교가 연결되어 있던 것이 통행량이 늘면서 석교로 다시 만들었다고 전하며, '청파배다리'라고도 불리었다.
- 두텁바위(후암동): 후암동에 있던 바위 이름으로, 동그랗고 두터웠다고 하며 자손을 얻기 위해 빌던 바위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두텁바위를 훈차하여 후암(厚岩)동이 되었으며, 도로명으로도 '두텁바위로'가 있다.
- 옻나무꿀(청파동): 청파동1가와 2가에 걸쳐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옻나무가 많이 있어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22. 은평구
- 연신내(불광동): 불광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연서역(延曙驛)(영서역(迎曙驛)) 주변을 흐르던 연천(혹은 연서천)이라는 개천 이름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수도권 전철 3호선,서울 지하철 6호선 환승역인 연신내역의 역명에 차용되었으며, 다른 이름인 '연서' 역시 이 일대를 지나는 도로명인 '연서로'에 차용되었다.
- 독바위(불광동): 은평구 불광동 수리봉 부근에 있는 바위로서, 모양이 장독과 같이 생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옹암'이라고도 하였는데, 인조반정 공신들이 이곳에서 모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 바위가 있는 마을을 독바윗굴 · 독박굴 · 옹암동이라고 했으며, 현재 서울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의 역명으로 차용되었다.
- 물치(수색동): 수색동에서 멀리 마포구 상암동과 성산동까지 걸쳐쳐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장마가 오면 한강의 물이 이 마을까지 들이쳤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자로 '수색(水色)'이 되었다.
- 산골고개(녹번동): 녹번동에서 서대문구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고개 석벽에 자연동(自然銅)인 녹반, 곧 산골이 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양천리고개(녹번동): 현재 은평구 통일로 642 일대에 있는 고개의 이름으로, 이 곳을 기준으로 의주까지 천리, 부산까지 양쪽으로 모두 천리가 되는 기점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 매바위(응암동): 응암동에 있는 매의 형상을 한 바위 이름으로, 동네 이름(鷹岩)과 서울 지하철 6호선 응암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 외딴섬(진관동): 진관외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 유래는 불분명하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기자들의 주거지를 조성하면서 '기자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상고개(구산동): 구산동에서 경기도 고양시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산고개'라고도 하는데 상꿀을 '산꿀'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52]
- 궁말(갈현동): 서오릉 부근에 왕릉을 관리하는 관청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 모자리(진관동): 마을 부근에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 큰 연못이 있어 '못절'이라고 불렀으나, 절이 없어지고 연못만 남자 '못절터'로 불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이름이다.
23. 종로구
- 황토마루(세종로, 신문로): 세종로와 신문로 · 종로가 갈리는 네거리 남쪽인 세종로사거리에 있던 야트막한 고개로서, 이 고개가 황토로 이루어졌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일설에 따르면 황토가 아니라 음양오행상 중앙을 뜻하기 때문이라 한다.# 황토현이라고도 하였다.
- 사모바위(구기동): 구기동 승가사 뒤에 있는 바위로서, 모양이 사모같이 생긴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새문안(신문로2가): 조선 세종 때 지금의 고려병원과 경향신문 사이에 새로 세운 돈의문, 즉 신문(新門) 안인 광화문 방향의 새문안길 좌우쪽이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 당고개(창신동): 창신동 일대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서일정보산업고등학교 자리에 옛날 도당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당현'이라고도 하였다.
- 치마바위(사직동): 사직공원 서쪽에 있는 넓고 평평하게 생긴 바위로,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와 관련된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 삼형제고개(홍파동): 홍파동에 위치한 언덕으로, 옛날 고개 밑에 주막을 경영하는 삼형제가 살았는데, 형제간에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이 세워졌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53]
- 연못(행촌동): 대신중고등학교 부근의 골짜기를 막아 못을 만들고 연을 심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 피맛길 또는 피맛골(청진동):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이 가마나 말을 타고 행차하는 행렬을 피하는 길이었던 데서 유래되었다.[54]
- 갯골(명륜1가): 명륜1가에 있던 마을로서, 성균관 서북쪽의 개천이 있는 곳에 있던 마을이었다. '포동'(浦洞)이라고도 불렀다.
- 중학다리(중학동): 지금의 한국일보 사옥 주변에 있던 다리의 이름으로, 조선시대 조정에서 운영하던 4부학당 중 '중학'의 앞에 있던 다리여서 중학다리 또는 '중학교'라고 하였다. 창덕궁을 출입하는 고관들이 다니던 다리여서 '양반다리'라고도 불리웠다.
- 경교다리(평동): 지금의 서울적십자병원 앞에 있던 다리로, 경기감영이 위치했던 곳 앞에 있던 다리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 조개전골(서린동, 종로1가): 조선시대 이 곳에 조개를 파는 가게가 몰려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 부침바위(부암동): 현재 천주교 세검정교회 주변에 있던 큰 바위로, 이 바위에 다른 돌을 붙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바위에 돌을 문질러 붙이던 것에 유래한 이름이다. 이 바위를 한자로 '부암'이라고 했고, 이 바위의 이름이 현재 부암동의 이름이 된다.
- 성제우물(삼청동): 현재 삼청동길 북쪽에 있던 우물로, 칠성당에 제사를 올릴 때 쓰던 우물이어서 붙은 이름이다.[55]
- 은행나무골(행촌동): 행촌동 일대에 있던 마을 이름.[56]
- 청석골(견지동, 관훈동): 조선 중기의 문신인 청성부원군 김석주(1634-1684)가 살던 동네라고 하여 '청성골'이라고 불리던 것이 변하여 '청석골'이라고 불렸다.
- 남이탑골(연건동): 연건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전기의 무신 남이의 집터에 '남이탑' 혹은 '남미탑'이라고 하는 탑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57]
- 영미다릿골(창신동, 숭인동): 창신동과 숭인동에 걸쳐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지금의 동묘 남쪽 청계천 하류에 놓인 다리의 이름이 영미다리라 불렸는데 이 다리의 이름이 마을의 이름으로 붙여진 것이다.[58]
- 샛골(창성동): 창성동에 있던 마을로, 동네 양 옆을 통하는 길 사이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 개천(창신동): 청계천의 원래 이름으로,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하천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 배오개(종로4가, 예지동, 인의동): 앞에 나열된 동에 걸쳐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예전에 숲이 울창해 짐승과 도깨비가 많아 '도깨비고개'라고 불렸는데, 이 고개를 대낮에도 넘기 힘들어 백명은 모여야 넘을 고개라 하여 '백고개', '백채', '백재'라고 불리다 음이 변하여 '배오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59]
- 진골(운니동): 운니동에 있던 마을로서, 어원은 불분명하다.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에는 익선동과의 경계가 되는 소로의 남쪽으로 표시되어 있다.
- 새말(교북동, 행촌동, 홍파동): 열거된 지역에 걸쳐져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이에 대한 두 가지의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 인근에 있던 모화관을 헐고 난 자리에 사람들이 이사해 살기 시작하면서 붙은 지명이라는 것과, 인근에 서대문형무소가 생겨나면서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이 이룬 마을이어서 '새말'이라고 명명되었다는 것이다.
- 홍덕이밭(동숭동): 낙산 아래에 있던 밭의 이름으로, 병자호란 때 효종[60] 이 청군에게 볼모가 되어 심양에 있을 때, 나인 홍덕(弘德)이 또한 포로가 되어 심양에 있으면서 김치를 담가드렸고, 본국에 돌아와서도 다시 김치를 담가서 나인을 시켜 효종께 바친다. 이를 효종이 감탄하여 상을 주고자 하나 홍덕이 사양한다. 이에 명을 내려 낙산 아래에 있는 밭을 주었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61]
- 수짓골(명륜동):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서울캠퍼스 동북쪽에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한자어로 '수지동'이라고도 불렸다.
- 바자다리(묘동): 단성사 앞에 있던 다리의 이름으로, 조선 초기 대나무를 얽어서 다리를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가설했기 때문에 '파자다리'라고 불렀고 한자명으로 파자교(把子橋)라고 했던 것이 점점 변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62]
- 가재우물(옥인동): 지금의 우당기념관 남서쪽에 있던 우물로[63] 석벽 밑에 가재 구멍같은 곳에서 물이 나오는 우물이라 하여 '가재우물'이라고 하는 이름이 붙었다. 세 개의 우물이 한자 품(品)자와 같이 모여있었다고 전한다.
- 두께우물골(종로1가)
- 두다리(종로5가)
- 비팟골(관수동)
- 웃잣골(혜화동, 동숭동)
24. 중구
- 버티고개(신당동, 약수동): 중구 신당동 끝과 약수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한남동에서 중구 장충단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통틀어서 버티고개 · 버터고개 · 번티고개 · 번도 · 번티〔번치(番峙)〕 · 부어터고개라 하고, 한자명으로 부어치, 벌아령이라 했으며, 약수동고개, 장충단고개라고도 하였다. 옛날에는 길이 좁고 무인지경이 되어 도둑이 많았으므로, 모양이 험악하고 마음씨가 곱지 않은 사람을 보면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라는 농담을 하였다. 옛날에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고 외치며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 · 번티고개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 · 버터고개 · 부어치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풍시장 위쪽에 있는 유명한 버티고개약수는 약수동 동명의 유래가 되었으며, 이 지명은 서울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에 차용되었다.
- 진고개(충무로2가): 충무로2가 전 중국대사관 뒤편에서 세종호텔 뒷길에 이르는 고개로서, 남산의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면서 형성된 이 고개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였지만 흙이 끊어질 정도로 질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이현(泥峴)이라고 하였다. [64] 이 일대를 '남산골'이라고 불렀으며, 가난한 선비들이 살면서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해서 '남산골 딸깍발이' 또는 '남산골 샌님(생원님)'이라고도 불렀다.
- 만리재(만리동2가): 만리동2가에서 마포구 공덕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세종 때 학자 최만리가 살았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만리현'이라고도 하였다.
- 팥죽골(무교동): 무교동에 있던 마을로서, 팥죽을 파는 집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팟죽골'이라고도 하였으며, 한자명으로 '두죽골', '두죽동'이라고도 하였다.
- 예장골(예장동, 회현동1가): 예장동과 회현동1가에 걸쳐있던 지역으로, 조선시대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무예장이 있었으므로 무예장을 줄여 예장 혹은 예장골이라 하였다.[65]
- 구리개(명동, 을지로2가, 충무로1가, 남대문로2가): 이 일대에 걸쳐져 있던 마을의 이름으로, 이 마을에 있던 야트막한 언덕이 매우 질어 누런색을 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구름재'라도고 불렸다.
- 마른내골(인현동1가): 현재 삼풍상가 서쪽에 있던 마을 이름으로, 이 지역을 흐르는 개천이 비가 오지 않은 날은 바닥이 말라붙어서 통행길로 사용되지만,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바로 물이 불어 냇가로 변하기 때문에 '마른내'라 했고, 이근처 마을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마른냇골'이라고도 하며, 한자명으로 '건천동'(乾川洞)이라 하였다.
- 대추나무골(장교동, 을지로2가): 마을 주변에 대추나무가 많이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대조동' 또는 '조동'이라고 불렸다.
- 벌우물(주교동): 주교동에 있던 우물의 이름으로, 벌판 한 가운데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로 '평정', '벌정'이라고도 했다.
- 무당고개 (무학동): 무학동 중부소방서 뒤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로서, 1960년대 말까지도 무당집이 여러 곳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1970년부터 이 일대가 정비되면서 사라진 지명이다.
- 뚜께우물골(의주로2가): 의주로2가에 있던 마을로서, 이곳에 뚜껑을 늘 덮어두고 있다가 망나니가 사람을 죽일 때 그 뚜껑을 열고 칼을 씻었던 '뚜께우물'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한자어로 '개정동'이라고 하였다.
- 왜놈들마을(남산 일대): 원래 조선시대에 청계천 이남 지역이어서 남촌이라 불렸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 일대에 일본인들이 모여살게 되면서, 비하의 의미로 마을 이름을 이렇게 바꿔불렀다 전한다.
- 타락골(회현동, 충무로1가, 명동): 조선시대 우유를 '타락'이라고 불렀는데, 이 '타락'을 팔던 마을의 이름이다.[66]
- 새창골(서소문동): 조선시대 선혜청의 새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마을 이름이다. '신창동' 또는 '사창동'이라고도 했다.
- 작은공주골(소공동): 조선 태조의 소생인 경정공주의 집이 있던 동네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자어로 소공동이라고 했으며, 이 이름이 지금까지 쓰인다.
- 풀무골, 풀뭇골(순화동)
25. 중랑구
- 먹골(묵동): 묵동에 있던 마을로서, 옛날 이곳에서 먹을 만들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67] '먹굴' 또는 '묵동'으로도 불렸으며, 서울 지하철 7호선 먹골역의 역명에 차용되었다.
- 미나리꽝(중화동): 중화동 서쪽 중랑천변에 있던 곳으로, 상습 침수지역이여서 미나리를 기르기에 최적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후에 금붕어를 이 일대에 양식하기 시작하면서 양어장으로도 유명해졌다.
- 새우고개(신내동): 신내동에서 경기도 구리시 갈매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고개의 지형이 등이 굽은 새우와 비슷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 철원(鐵原), 송악(松岳) 또한 쇠벌, 솔벌로 같은 어원이다. [2] 이 일대를 지나는 도로인 '밤고개로'도 여기에서 따와 명명하였다.[3] 이 일대를 '학여울'이라고도 했는데, 이 이름이 수도권 전철 3호선 학여울역에 역명으로 차용되었다.[4] 다만 동네의 위치가 굽은다리역과 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다.[5] 정확히 강일동 강일리버파크 2단지 아파트 주변[6] 남평 문씨의 집성촌이며, 1970년대만 해도 마을 앞 백사장이 유명해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나, 한강정비사업으로 인해 백사장은 사라졌고, 개발제한에 묶여 조금 을씨년스럽다.[7] 신대(新垈)라고도 하는데 택지정리가 된 곳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므로 모양새가 네모반듯하였다.[8] 근처에 있는 '범머리길'에 차용된 지명이다.[9] 한자어로는 모진동으로 현재 화양동에 속한 행정동으로 지명이 사용되고 있다.[10] 1977년 서울 지하철 2호선 1차구간 계획 당시 구의역의 역명으로 차용되어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11] 번외로, 구로구의 지명 유래 중에 아홉 노인(九老)이 이 지역에서 장수한 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라는 유래도 있는데, 음가가 비슷하므로 아무래도 이 구루지라는 고유어에서 변형된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12] 옛 강서로[13] 이름의 유래에 대해 다른 설이 존재하는데, '한골'에서 변형되었다는 설이다. '한'이 순 우리말로 '으뜸', '큰'과 같은 의미가 있는데, 이 마을의 규모가 꽤 컷고 역사가 오래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다.[14] 개봉노인정과 개봉1동 새마을금고 주변[15] 관악구 신림동과 종로구 구기동에도 같은 지명이 있다.[16] '개화천' 또는 '개봉천'으로도 불렸다.[17] 풍수지리학적으로 이 고개는 수말의 지기이기 때문에 암말을 타고 지나면 떨어져 다쳤다고 하며, 1년에 한 번씩 암말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실제로, 1980년대 초 시흥대로 확장공사 중 말뼈가 출토되기도 했다.[18] 그 밑에 있는 마을도 '성고개', '성고개말'이라고 불렀으며, 성과 같은 바위를 돌아간다는 뜻으로 '암회리', '회암리'라고도 하였다.[19] 매일 청소를 열심히 해서 깨끗한 동네로 꽤 유명했다고 한다.[20] 현재 동작구청 앞 주차장 일대[21] 또 하나의 설이 있는데, 조선 후기 이곳에 포방터(사격장)가 있어 여기서 훈련을 마친 뒤 나루를 건너기 전에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였다고 하여 '점검마을'이라 한 것이 와전되었다고도 한다.[22] 2009년에 발간된 사전에 정말 등재되어 있다.#[23] 이 고개 이름 유래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쪽의 만리재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이므로 ‘애고개’가 ‘애오개’ 또는 아현(兒峴)이 아현(阿峴) 등으로 변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옛날 도성에서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는데, 이 고개가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 하여 애고개 등으로 부르다가 애오개로 변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설은 풍수지리설로, 이수광의 지봉유 등을 참고하면 도성의 진산이 부아악(삼각산)인데 그 아이가 달아날 의사가 있으므로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 남쪽의 산을 벌아현(남산), 모악에서 서남쪽의 산을 병시현이라 이름 지어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중 벌아령은 아기를 못 나가게 막는 의미이고, 병시현은 떡으로 달래어 머무르게 하는 의미로 '떡전고개'라고도 하였는데, 곧 아기를 달래는 고개이므로 아현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24] 와우 아파트 붕괴사고의 그 와우산 맞다.[25] 또 하나의 설로는, 마을이 경성부로 편입되기 전 인근 일대가 모두 채소밭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인분을 비료 대신 사용했기 때문에 '똥통밭', 혹은 '분통밭'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똥골목'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26] 승정원일기에는 모화관석교(慕華館石橋), 대동지지와 동국여지비고에는 혁교(革橋)로 기록되어 있다.[27] 이 근처에 있던 산은 산 전체가 돌과 바위로 이뤄져 있다고 해서 '돌산'이라고 불리웠다.[28] 이 근처에 모화관이 있었다.[29] 이 부근 마을 이름은 훗날 미정동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가 미근동으로 바뀐다[30] 중구 의주로1가까지 포함되는 지명이다.[31] 다만 구반포역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맥락을 따져봐야 하는데, 현 구반포역이 위치한 반포본동(구반포)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포촌리(浦村里)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이후 일제시대에 동작리로 합쳐져 이름이 동작동 등으로 변하다가 동작동의 일부가 떨어져나와 강남구(이후 서초구가 분구됨)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으로 이름이 붙게 된 지역인데 조선시대부터 이미 반포로 불리기 시작한 반포 1, 2, 4동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조선 후기부터 이미 서릿개를 훈차한 蟠浦란 이름이 사라지고 훈이 변한 현재의 반포(盤浦)가 이름으로 굳은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구반포역 문서에 있는대로 지역 주민들의 '서릿개란 이름이 이 지역에 쓰인 적이 없다'는 반발이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32] 또한 벌판 끝에 마을이 있어 '벌말'이라고도 하였고, 신원동의 근본이 되는 마을이라고 해서 '본촌'이라고도 하였다. 1978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대부분 성남시로 이사 가고 지금은 원주민이 반으로 줄었다고 한다.[33] 김해김씨의 집성촌이었으며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였다.[34] 현재 양재2동 주민센터 주변이다.[35] 구전에 따르면, 남태령과 성뒤마을 사이에 성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36] 그 뒤 1935년경에는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급요정 '청수관'이 들어서면서 ‘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을 이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손님을 맞이했다고 한다.[37] 옛날에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쓰는 물품을 보관하던 곳[38] 동국여지비고 '보현봉 곁가지 산줄기가 곧 도성의 주맥이므로 총융청에서 보토소(補土所)를 설치하고 주관해서 보축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39] 양재천, 탄천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된 모래섬으로 '동잠실'이라고도 불렸다.[40] 일설에 의하면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군대가 이 곳 일대에 돌을 옮겨 진을 쌓아 붙여진 이름이라도고 한다.[41] 풍납토성의 순 우리말은 '바람드리성'이다. 이 이름이 성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42] 고운(곰) 달빛의 내 - 곰달내 - 곰달래[43] 한자로는 곱다(고움: 古音)+달(月) = 고음월. [44] 말하자면, 음소라는 청년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둥근 달이 뜨면 백제가 이긴 것이니 자신을 기다리고, 달이 지면 백제가 진 것이니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라고 했다. (...) 이에 음월이라는 여인이 달을 보앗을때, 둥근 달이었다가 먹구름이 껴서, 칠흙같은 달을 보고, 목숨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둥근 달이 뜨고, 음소라는 청년이 도착했을 때,여인을 보고 "음월의 목숨이 끝났구나" 하고 슬피 울었다는다는 이야기에서 고(古: 죽음/끝) + 음월(音月) = 고음월.[45] 간첩사건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46] 계남근린공원[47] 신길동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이 이름을 차용한 어느 서울 지하철 9호선의 역이 있다.[48] 참고로 도야미 옆 동네인 원지막은 지금의 대림동. 지금의 대림동 일대까지 도야미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주석을 참고용으로 붙임.[49] 만리창의 창고 규모는 진휼청에 소속된 창고가 35문, 해서 소속 3문, 호남 소속 20문 등 모두 58문이었다.[50]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군의 혼성여단이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청일전쟁 수행의 주요거점으로 삼았다 한다.[51] 이곳에서 이름을 딴 법정동 신창동(新倉洞)이 있으며, 도로명으로도 새창로가 효창동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다만 새창로는 신창동을 지나지 않는다.[52] 조선시대 현종이 경릉과 창릉으로 성묘하러 갈 때 백성들이 길가에서 향을 피우고 임금을 맞이했다고 전하는 데서 유래된 '향현'이라는 이름도 있다.[53] 현재는 사직터널과 성산로로 이어진 도로가 뚫려있다.[54] 2002년 서울특별시 새주소부여사업에 따라 소로 이름을 제정할 때 '피마동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55] 한자로 '성제정'이라고 하였는데, 이게 변해서 '형제정'으로 불렸다고도 한다.[56] 1960년대 이후 '개미마을'이라고도 불렸다.[57] 남이 장군이 유자광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후 원한 때문에 터가 세다하여 이곳이 폐가가 되어 순조 때까지 채소나 지어 먹는 빈터로 남아 있었는데, 하루는 이 집터 옆에 사는 사람의 꿈에 남이장군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자 그 사람이 장군을 위하여 원혼을 모시고 사당을 짓고 탑을 세웠다고 한다.[58] 영미다리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군으로 귀양갈 때 그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서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 혹은 '영영건넌다리'라고도 전해진다.[59] 이와는 약간 다르게, '도깨비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라는 설도 존재한다[60] 왕위에 오르기 전 봉림대군일 때 이야기이다.[61] 한자어로 홍덕전이라고도 하였다.[62] 승정원일기 영조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 다리의 이름이 '파자석교'로 기록되어 있어 창덕궁이 법궁이 되면서부터 돌다리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63] 구주소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64] 광무 10년(1906년)에 깊이 2.4m가량 파내어 높이를 낮추고 현대식 도로를 만들어서 높이 1.5m의 방추형태 하수도를 묻어 이 일대의 하수를 통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서울시내 하수구의 시초가 되었다.[65] 1885년 한양 내에 일본인의 거류가 허용되자 일본인들이 이곳 주변에 정착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며 이 곳을 '왜장', '왜장터', '왜성대'라고 부르기도 했던 적이 있다.[66] 한자어로 '타락동'이라고 했는데, 이를 줄여서 '낙동'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67] 일설에는 인근 월계동 마을 가운데 있던 연못 모양이 벼루와 같아서 벼루말〔연촌(硯村)〕이라 하고, 하계동을 붓골〔필동(筆洞)〕이라 하고, 이 두 마을과 먹골을 연결하면 삼각형이 되므로 마을의 이름을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인 먹과 관련하여 지으면 이 삼각형 지역 안에서 학문이 발달하여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