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리그/역사
1. 개요
이 문서에서는 한국 프로야구 리그 자체의 역사에 대해서 다룬다.
2. 역사
2.1. 1970년대~1981년
아래는 1983 프로야구 연감 등을 통해 알려진 내용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고교야구가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1970년대 고교야구는 준준결승부터 이미 매진이 되는 등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이후 1982년 한국 프로야구 리그 출범 후에도 한동안 프로야구 못지않게 인기 있었다. 프로야구 초창기에 고교야구 보도 및 중계를 억지로 줄이면서[2] 그 폭발적 인기를 일부러 눌러버릴 정도였다. 사실 프로야구도 프로축구처럼 리그 출범을 너무 급하게 추진했다는 점은 야구계에서도 공감한다. 프로축구가 고작 2프로팀과 3실업팀으로 리그를 만들고, 정상적인 연고밀착 운영을 하지 않았던 잘못이 있다면, 프로야구는 정상적인 고교야구의 인기를 억지로 죽여가면서 프로야구를 홍보했다는 과오가 있다는 것이다. 2006년에 재창간되었다가 1년도 못 가 폐간된 '월간 야구'지 컬럼도 프로야구의 출범시의 아쉬운 점으로 이 점을 언급할 정도였다.
고교야구의 인기와는 별개로 1970년대 중반 야구의 프로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표면 위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5년 재미교포 사업가인 홍윤희가 한국을 방문하여 야구협회 관계자, 감독들을 규합하면서 프로야구 창설에 대한 의견을 타진했고,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미국에서 약 20만 달러의 프로화 비용을 마련하여 재입국, 프로야구 창설 준비위원회를 발족하며 리그 운영계획서 등을 작성하는 등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되었다.[3] 당시 대한야구협회 김종락[4] 회장은 프로 출범에 찬성하는 입장 이었지만 다른 야구협회 이사진들이 시기상조론을 내세우며 관심을 두지 않았고, 당시 경제개발에 올인하면서 국민들을 옥죄던 유신 정권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프로화 움직임은 좌초되고 홍윤희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어서, 이때 홍윤희를 중심으로 논의했던 계획안은 수 년 뒤 고스란히 한국 프로야구 리그 창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제5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인 19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민들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프로 스포츠 창설의 논의가 이루어졌고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명분은 국민정서와 여가선용을 위함이지만 실제로는 3S정책의 일환이었다. 특히 경남고 출신으로 정권의 실세였던 이학봉 민정수석은 그 전에도 사석에서 프로야구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고 박영길 전 감독이 전했다. 하지만 여가선용이란 말이 꼭 명분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별 다른 여가가 없던 당시 국민들의 가장 큰 여흥거리가 바로 '''정치 얘기'''였기 때문에 정권 차원에서도 건전한 여가거리를 제공할 필요성은 있었다. 공개된 장소에서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건 틀어막았지만 대학에서 한창 최루탄 맞고 화염병 던져봤던 이들이 회사원이 되면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낼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가족 단위로 즐길만한 여가거리가 정말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다. 야구는 이미 프로화를 위한 기반을 민간 차원에서 갖춰놓았으므로, 전두환 정부가 정치적 이유에서 야구의 프로화를 추진하자 MBC의 역할과 의지 및 국민들의 호응이 겹쳐 성공적으로 프로리그가 열렸다.
그리하여 이상주 교육문화비서관이 대한야구협회와 대한축구협회에 프로화 검토를 의뢰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축구계에서도 프로화를 추진하였는데 축구협회에서는 운동장 야간조명 설치 등을 이유로 139억의 막대한 정부 도움이 필요하다고 정부에게 보고를 올렸다. 반면, 야구협회 전무를 지낸 이용일과 운영부장 출신 이호헌이 주도하여 수립한 야구 프로화 계획서는 정부의 지원금 한푼 없이도 프로화가 가능하다는 골자의 내용이 있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어서 우선 프로야구 부터 출범시키기로 낙착을 지었다.
정부 보조가 없는 방법 이라는 것은 바로 '''대기업 들이 야구단을 하나씩 맡도록 한 것'''이다. 지금 KBO 팬들 입장에서는 기업이 구단 맡는 게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하겠지만 당시 구기종목 최초의 프로구단인 할렐루야 독수리만 해도 기업구단이 아니었다.[5] 스스로 프로에 참여한 기업도 있었고 반 강제적으로 시작한 기업도 있었다. 물론 정착을 위해 야구단을 만든 기업들에게 운영 및 세무 면에서 혜택을 주기는 했다.
- 청와대 보고 기획안
흥미롭게도 청와대 보고 이전 이용일, 이호헌의 계획안의 기업들은 사뭇 달랐는데 아래와 같다.
- 1순위
- 서울특별시 - 롯데 자이언트: 이호헌과 한국 프로야구를 계획했고 주도했던 이용일 前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실업야구 최강이었던 "롯데 자이언트"가 서울에 오는 것이 프로야구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고, 일본에서 이미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어 프로 구단 운영 능력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었다고 한다.
- 부산·경남 - 럭키금성그룹: 바로 LG 트윈스의 전신이다. 창업주 구씨 일가의 고향이 경남 진주였고 럭키금성의 뿌리인 ㈜럭키가 부산에서 창업했기 때문에 부산·경남 연고 1순위 기업으로 거론되었다. 실제로 럭키금성은 프로야구에 뛰어들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출범 논의 단계에서 그룹 고위층은 해외에 있어서 제대로 접촉을 못했다.[* ] 당시 구자경 회장이 귀국하여 자초지종을 듣고 프로야구 출범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한다.[6][7] 여하튼 출범준비를 하면서 럭키금성을 데려올 수 있다고 믿었기에, 나중에 롯데가 서울을 내놓으라고 나오자 '롯데를 대신해서 부산 경남을 대신 줄 그룹은 얼마든지 있다'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다.
- 대구·경북 -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현 삼성그룹의 모태이자 최초 설립회사인 삼성상회를 대구에서 창업하였고 구미,경산 등지에 제일모직과 삼성전자 등의 생산 공장이 밀집했던 연고와 더불어 프로야구 출범 당시 대구경북 지역야구는 극강 수준으로 거의 대표팀급이었기에 삼성 특유의 1등주의 또한 발동하여 대구·경북을 연고로 프로야구에 참여하는 것을 최초로 확정 지었다.[8]
- 인천·경기·강원 - 현대그룹: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 강원도 통천이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서울 올림픽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9] 연감의 내용에서는 전 대통령이자 당시 현대건설의 이명박사장이 1988 서울 올림픽에 전력투구해야 하여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 전라도 - 삼양사: 호남권이 경제개발에서 소외되었기에 지역 연고 기업 중에 뚜렷한 대기업이 없었다. 그나마 거론된 게 식품 업체 삼양사와 고속버스업체 광주고속, 보험 회사인 교보생명 정도로 다른 지역에 비하면 명백하게 규모가 작은 기업들이었다. 이후 2007년에 스포츠 2.0과 가진 인터뷰에서 삼양사가 "아무리 전두환이가 시키는 거라지만 우리가 무슨 스포츠냐"라며 난색을 표했고 자신들의 먼 친척이 운영하는 동아일보에 제안서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측에서도 거절하며 파토날 뻔 했는데 해태그룹의 참여로 6개구단이 참가할수 있었다고. 고속 경제성장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호남권이라서 지역 연고 기업들도 몇 개 없었고, 그나마 규모가 있는 기업들이 모조리 외면했기에 심지어 호남지역 관가에서는 전남도민구단 이야기까지 나왔었다고 한다.
- 충청도 - 동아건설: 창업주 최준문 명예회장의 고향이 대전으로 동아건설도 충남토건으로 창업했다가 훗날 이름을 바꾼 것이다.
- 2순위
- 서울특별시 - 대우그룹: 창업주 김우중 회장은 대구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이사와서 초중고대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은 유명한 축빠인지라, 프로야구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프로축구 이야기가 나오자 바로 부산에 대우 로얄즈(현 부산 아이파크)를 창단했다.
- 부산·경남 - 럭키그룹
- 대구·경북 - 포항제철: 당시 포항제철은 한국실업야구의 명문팀이었던 포항제철 야구단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회장 역시 열렬한 축빠여서 야구단을 창단하지 않고 포철 축구단을 프로팀으로 전환시켰다.
- 인천·경기·강원 - 대한항공: 대한항공이 속한 한진그룹의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고향이 인천으로, 해방직후 조중훈이 인천에서 트럭 1대로 한진상사를 차린게 한진그룹의 시작이었다.
- 전라도 - 금호그룹 or 해태제과 or 미원
- 충청도 - 한국화약그룹: 창업주 김종희 회장의 고향이 충남 천안이며, 이미 천안북일고등학교 야구부도 지원해왔다. 결과론이지만, 창단과정에서 한국화약에는 접촉도 하지 않았다. 당시 충청권은 연고기업이 없어서 창업주 고향이 경기도 광주인 두산그룹의 참여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한국화약에 먼저 접촉했다면, 두산은 참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처음의 연고지안부터 최종 안까지 공통점으로는 그룹 오너의 고향지역이거나 그룹이 위치한곳 혹은 처음 시작한곳 같은 각 그룹에 있어 중요한 지역을 맡긴다는 원칙을 내세워 계획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그룹 회장들의 애향심을 이용하려던 것이다. 이렇게 염두에 두었지만, MBC와 삼성그룹, 롯데그룹을 제외하고는 연고권 문제와 프로야구라는 생소한 사업에 진출한다는 불안함과 부담감을 표출하며 대부분 고사하는 걸로 인해 출범은 어려움을 맞았다.
삼미의 참여는 결과적으로 기적이라고 묘사되지만, 어쩌면 결과론일지도 모른다. 현대가 경기 연고를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된 두산이 경기 연고를 요구했다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데, 이걸 막은 것은 이용일 등 KBO에 충청권에 참여할 기업이 마땅치 않아서 두산에게 충청권을 맡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래 2안에서는 충청권 연고의 기업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화약이다. 실제로 한국화약도 오너 일가가 야구 팬들이었기 때문에[11] 만일 제의했으면 받았을 것이란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하지만 출범 당시 한국화약의 상황 상 김종희 회장이 후계자를 정해두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사망하였고 이 때문에 김승연-김호연 형제간에 재산분쟁이 터진 상황이었다. 결국 어느 정도 정리된 후 프로야구에 뛰어드는데 그 팀이 빙그레 이글스. 만일 이것이 성사되었다면 빙그레는 원년 기업일 수도 있었고, 두산이 인천 연고 구단으로 출발했다면 인천 연고 구단의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결과론적 이야기다. 인천야구의 문제점은 단순히 모기업 클래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인천은 서울 위성도시의 성격을 털어내지 못하고 권역 거점으로 성장하는 데 실패했다는 데 진짜 문제가 있다. 인천-경기권이라고 하지만 경기도 내에서 인천을 중심 도시라고 여기는 지역은 '''단 한 곳도 없다'''. 그리고 인천의 도시 구조 자체가 명확한 중심을 가지지 못하고 이후의 성장도 저마다 중구난방식으로 서울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것도 문제. 수원의 경우 경기 남부의 확실한 거점 도시지만 규모가 문제였다.
충청, 인천·경기·강원권과 더불어 연고 기업의 물색에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은 호남이었다. 호남지역 연고 기업으로 금호측에 제의를 했지만, 금호그룹 입장에서는 광주고속을 빼곤 당시에 내세울 만한 소비재 계열사가 없었고[12] , 기업 지원 방침도 예술 쪽에 비중을 좀 더 두고 있기도 해서 스포츠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명목상으로는 오너인 박인천 회장은 아들들이 자기와 상의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고 '나가리'시켰다. 이상주 수석의 이야기는 이와는 다른데, 언론에 금호가 거론되자 박성용 부회장이 직접 찾아와서 노조와의 분쟁으로 골치가 아픈 데다 적자까지 겹쳐 정신 차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 기업을 우선 살려 놓고 봐야 한다며 프로야구 참여를 거절했다고 한다. 금호가 거절한 다음 호남 연고 기업으로 접촉한 곳은 대한교육보험이었다. 대한교육보험 자체는 호남 지역과 연고는 없으나 설립자인 신용호 회장의 고향이 전남 영암이었다. 그러나 대한교육보험 역시 프로야구 참여를 거절했다.
이 때 프로야구 창단 소식을 들은 박건배 해태제과 사장이 프로야구 준비위에 전화를 해서 "호남지역 창단을 우리가 하면 안 되느냐"고 나서게 되었다. 사실 해태는 기업 규모가 작아서 프로야구단 창단 기업으로 고려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남 연고로 후보에 있던 기업들이 줄줄이 고사하던 상황에서 해태가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요컨대 알려진 것처럼 해태 회장을 청와대에 불러 협박한 것이 아니라, 박건배 회장이 야구를 좋아해 직접 나서 야구팀이 생긴 셈. 사실 삼미 슈퍼스타즈, 쌍방울 레이더스, NC 다이노스처럼 한국프로야구 팀의 확장은 야빠 사업가들의 공이 컸다.
다만 이 부분에는 이견이 있는데 해태의 초대 감독이자 당시 유명 야구인인 김동엽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김동엽이 MBC의 프로야구 창설 계획 극초창기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후에 광주지역을 맡을 기업이 나타나지 않자 본인의 연줄을 이용 해태를 청와대에 추천했다. 그리고 청와대에서는 김동엽과 박건배 회장을 부르는데 이 자리에서 정부는 프로야구 참여를 권유한다. 이때 박건배 사장이 정부 인사 앞에서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참여를 결정했다는 것이 김동엽 본인의 자서전에 나온 내용이다. 본인이 청와대에 연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김동엽을 감독으로 하게 해 달라는 부분은 1983년 프로야구 연감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해태가 프로야구 창단에 끼어들자 롯데가 반발했는데, 이는 프로야구 창단 당시 동종업계 회사는 참여를 배제 시킨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룰이 생긴 이유는, 당시 기업들이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유는 다름 아닌 기업 홍보 효과였는데, 동종산업의 기업들이 야구에서 경쟁한다면 광고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롯데 입장에선 제과 업계 라이벌인 해태가 갑자기 들어온다고 하니 펄펄 뛰었던 것이다.
더구나 두산그룹의 서울연고권과 겹치면서 문제가 더 심화된다. OB는 대전·충청권과는 연고가 없었던 데다 대전·충청권의 선수층은 두터운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OB는 서울을 요구했었다. 그러다가 현대가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포기하고 삼미가 들어서자, 이번에는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구했다. 창업주 박승직이 경기도 광주시 출신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두산그룹 역사의 시작은 현재의 서울 두산타워 건물 위치이기도 한 청계천 인근에서 이루어졌다. 연고 요건으로 따지면 이 부분이 더 당위성이 있고 적합했지만 결국 이 두 가지 요청은 구단주 회의에서 모두 '''거부되었다.'''
이렇게 OB가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서자 이번에는 롯데는 해태 참가의 거부와 롯데의 서울 연고를 주장하고 나섰다. 롯데는 유일하게 실업야구팀 롯데 자이언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당시 실업야구는 지역 연고가 없었고 대부분의 경기가 서울에서 열렸기 때문에 대부분의 팀이 서울에서 운영되고 있었고 롯데 자이언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시 롯데그룹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롯데 오리온즈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요미우리 자이언츠 처럼 수도권이 아니면 흥행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3] 당시 운영 중이었던 실업야구팀 이름을 자이언트라고 지은 이유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뒤늦게 해태가 참여하게 된 것도 문제였다. 동종 산업에 있는 회사는 프로야구에 넣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는데 해태가 들어오면서 제과업계 라이벌 구도가 된 것이다. 이것이 좋은 구실이 되었다. 게다가 롯데는 무슨 배짱인지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서울로 가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근자감을 부리기도 했다.
서울 연고를 주장하는 팀을 해결하기 위해서 중재안이 나왔는데, 우선 롯데는 힘으로 눌렀다. KBO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데 바로 럭키그룹이었다. 2015년 현재 롯데그룹의 재벌 순위는 5위로 4위 LG를 턱 밑까지 쫓아온 상태이지만, 1980년대 초반 롯데는 재계순위 10위권 안팎을 들락거리던 수준으로, 1980~90년대 꾸준히 재계순위 3~5위권에 있던 럭키금성보다 재계순위가 낮았다. 더구나 당시의 LG는 지금의 GS그룹, LIG그룹, LS그룹 등이 분사되기 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롯데가 서울로 가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당랑거철을 행할 처지가 아니었다는 것.
이후에 밝혀지듯이 럭키그룹도 분명히 프로야구 참여 의사는 갖고 있었다. 다만 하필이면 그룹 오너이던 구자경 회장이 당시 해외 출장을 나갔는지라 프로야구 참여 여부에 대한 확답을 내지 못했고, 아무튼 KBO는 럭키그룹이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롯데)당신들 아니더라도 창단 후보는 얼마든지 있다"''' 라며 롯데를 압박할 수 있었다. 당시 출장 중이던 구자경 회장 대신 이헌조 그룹 기획조정실장이 부산 연고 프로팀 창단 제의를 받고 "지금 오너가 부재중이니 돌아오신 후에 협의 후 확답하겠다" 라며 답변을 미뤘지만 결국 더 이상의 객기를 부릴 여력이 없었던 롯데는 조건 없이 부산 연고를 받아들임으로서 무산되었다. 이후 구 회장이 귀국하여 그런 일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자 무릎을 치며 '''"이 문디야, 그냥 하겠다고 받아 들였어야 안카나!"''' 라며 이 실장을 눈물이 빠질 정도로 호되게 나무랐다고 한다. 사실 기업 내 실무진 입장에서는 구단 창단과 같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될 안건을 오너의 확실한 재가도 없이 받아 들였다가는 월권 내지는 하극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중대한 일임에 틀림 없지만, 이 실장이 원칙적으로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이 그를 질책한 것으로 보면 상당히 아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프로야구의 구조는 구단주 회의로 대표되는 재벌들의 카르텔 수준인지라, 한번 때를 놓치면 마음대로 참여할 수도[14] 없다. 그래서 LG가 MBC를 인수한 다음에나 참여가 가능했고, 현대는 타 구단들이 전부 대놓고 반대하는 바람에 현대 피닉스를 통해서 외부 전쟁 비슷하게 가다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MBC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애초에 MBC에게 서울을 준 이유 자체가 홍보를 해 달라는 것과, "비서실과는 별도로 프로야구 창설을 기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서울로 정해져있었고 심지어 이진희 사장이 내심 총재를 노리기까지 했던 전력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팀들이 OB는 3년간 대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다는 공증문서에 도장을 찍을 때 MBC가 서울연고를 나눌 수 없다고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이상주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이학봉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이 이진희 MBC 사장을 겨냥해서 압박한 것이다. 특히 이학봉 민정수석은 전두환 정권의 실세였는데 창립총회 전날 결국 윽박을 질러서 MBC 이진희 사장에게 도장을 받아냈다. 사실 전두환은 MBC를 뺄 것이냐 말 것이냐도 잠깐 고민한 장면이 있다. MBC가 친정부 언론이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MBC에 힘을 실어줄지도 모른다는 것이 싫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여차하면 프로야구를 때려치울 수도 있다는 협박까지 굴러다닌 끝에 MBC도 굴복을 하게 된다. 서울은 MBC와 두산의 공동 연고로 하고, 두산은 3년간 대전에 있다가 올라오며, 이 동안 드래프트는 MBC와 두산이 2:1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원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MBC는 김재박과 이해창을, OB는 박철순을 각각 지명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당시 신군부 세력을 포함한 정치권의 연줄 등을 총동원하여 협상을 한 결과, 광주에 해태그룹이, 두산그룹이 연고지인 충청도에 선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3년후 서울연고 이전을 약속받고 충청권에 들어왔다. 그리고 창립총회 직전 거의 기적적으로 삼미그룹이 인천직할시 연고기업으로 프로야구 참여를 확정지었다.
이상이 기존 프로야구 창설에 관한 정설이었다. KBO에서 1983년 발간한 연감[15] 에서도 위와 비슷하게 창설 과정을 설명했고 과거 유명 야구 기자인 홍순일 기자 역시 같은 내용을 연속 기고하기도 했다.홍순일의 야구이야기 - 프로야구 탄생 비화
다만 어느 자료를 참고하더라도 MBC의 참가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것은 같았는데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는데 그것이 아래의 내용이다. 실제로는 당시 MBC사장이었던 이진희 사장이 "'MBC만 프로야구팀을 만드는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4팀이 참여하는 리그를 구상하라'"고 지시를 내려 MBC TF팀에서 그걸 기획한 다음 이진희 사장에게 보고하고, 이진희 사장이 그걸 청와대에 들어가 전두환에게 보고했는데 전두환이 깜짝 놀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 뒤에 전두환이 한 이야기가 "난 프로축구인 줄 알았지". 사실 전두환은 과거 육군사관학교 시절 골키퍼 출신일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그래서 축구때문에 전두환과 인연이 된 연예인들도 제법 많은 편[16] ,. 박종환 감독이 다른 건 집어치고 축구에 관해서만은 전두환을 존경한다고 말한 것도 괜히 그런 게 아니다.'''"어, 뭐야. 야구야?"'''
다만 MBC의 참가와 관련해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다는 언급과는 달리 프로야구 출범 직전, 즉 1981년 말 기사를 보면 문화방송에서 프로야구를 주도했으며 서울연고를 확정했다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김재박이 실업야구 8관왕이었으나 현재는 7관왕이라 불리는 것 처럼[17] ,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기사가 잊히는 과정에서 MBC의 역할이 묻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당대 기사를 찾아보면 문화방송에서 시작한 단일팀 기획이나 프로원년 6개팀 구상 모두 MBC의 주도로 보도되고 있다.[18][19]
즉, 프로야구는 대중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전두환이 기획하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실과 MBC라는 두 곳에서 동시에 시작된 별개의 기획이 어느 순간 하나로 합쳐져 형태를 갖추고 출범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도 청와대 비서관들 선에서 논의가 나오고 야구계와 접촉해 진행을 한 것이지 전두환이 직접적으로 프로야구 창설을 지시했다는 증언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정부가 개입을 하긴 했는데, 이건 주도를 한 것이 아니라 연고지등의 조정 등에 관련한 것이었다.
당시 정부가 프로야구를 3S정책에 이용하려 하기는 했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마침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우승한 상황이라 야구 쪽으로 시선이 쏠려있었기에 나름대로 시기 적절한 상황이긴 했다.네이버 스포츠 박동희 칼럼 매거진S 하일성-허구연 대담 "마이크가 나를 불렀다." 지역연고 역시 윗 각주에서 보듯이 지역감정 조장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용일의 아이디어로, 되려 5공은 초기에 지역감정 심화를 우려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1년뒤에 시작한 K리그는 각 팀에게 권역을 나눠주긴 했지만 전국 순회 경기를 하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연고지와 홈원정 경기를 바탕으로 한 리그 운영을 하지 않아서 초창기 충성도 높은 팬을 못만들었고, 1987년부터 지역연고제를 도입했지만 이미 프로야구와는 격차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인데다가 그나마도 '''연맹 사무국의 부재로 인해''' 구단들이 각자 사업 거점으로 옮겨가며 각자도생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미 각 지역별 대도시를 중심으로 두터운 지역 연고 팬층을 형성한 프로야구와 지역 연고 정착에 뒤늦게 뛰어든 프로축구의 격차는 넘사벽으로 벌어진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프로축구의 지역연고 부재는 단순히 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KBO리그가 원년부터 지역밀착 속에 흥행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고교야구'''라는 강력한 지역기반 컨텐츠가 성업중이었고, 그 기반을 적절히 승계, 활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구는 국가대항전이 거의 없이 고교야구 등 국내 컨텐츠를 소비하는 형태로 발전하면서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토대가 착착 쌓인 반면, 축구는 국가대표인 화랑팀이 매년 국가대표 및 클럽팀을 상대로 수십경기를 치르고 수십일씩 전지훈련을 떠나는 등 사실상 국영클럽화되다보니 국내 컨텐츠가 성장할 공간이 없었다. 당장 지역별로 명문 고교야구팀과 고교축구팀, 주요 고교야구 대회와 고교축구 대회의 인지도만 생각해봐도 쉽게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전두환 정부는 쿠데타로 인해 세워졌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어 대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뉘앙스를 띄면 정권 유지에 지장이 생긴다. 실제 해태가 예상과 달리 강세를 띄면서 삼성과 영호남 대립 구도를 형성하자 당시 5공 정권은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다. 해태를 중심으로 호남인들이 결집해서 정치적인 행동을 할까봐 우려했던 정권은 매년 5월 중순이면 해태는 원정 경기만 다니도록 외압을 가했다. 5월 18일이나 그 즈음 광주에서 홈 경기를 하면 야구장에 모였던 관중들이 시위 군중으로 돌변할까봐 우려해서 내건 조치였다.[20] 그 정도로 광주 민심은 5공 내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5공은 심지어 프로야구가 다 자리를 잡은 1984년에 느닷없이 프로야구의 전국순회경기를 추진하기도 했다. 지금은 보편화된 중소도시 제2구장도 원래 이 전국순회경기 구상의 일환이었고.
2.2. 1982년~1997년[21]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독재자 프레임이 씌워진 전두환은 이러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고심을 한 끝에 3S 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청와대에서 최초로 프로야구 설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기업들을 불러들여 투자를 유치하였고 이에 참여하는 기업들에게 각종 세제 혜택과, 행정적, 법적, 제도적 지원을 파격적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논의한지 불과 1년만인 1982년 프로야구가 만들어지게 된다. OB 베어스, MBC 청룡, 해태 타이거즈, 롯데 자이언츠, 삼성 라이온즈, 삼미 슈퍼스타즈 등 7개 팀으로 시작했다.'''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젊은이에게는 낭만을, 국민들에게는 여가선용을!'''
-한국프로야구의 초기 캐치프레이즈.
1982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시구와 함께 시작된 프로야구 개막전과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나온 드라마같은 만루홈런 두개[22] 로 인하여 "이 홈런으로 앞으로 10년은 족히 먹고 살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1982년에는 OB의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고, MBC의 백인천이 4할 타율을 기록했으며, 해태의 김성한은 투타를 겸업하며 3할 타율에 13홈런, 10승을 기록[23] 하는 등의 진기록이 세워졌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해당 문서 내용에서 보듯 국가대표 출신 한 명 없는 철저히 무명 선수들로만 구성된 약체 팀으로 팀내 좌완투수가 없어서 삼미특수강 직장야구팀에서 뛰던 감사용[24] 을 영입할 정도였다. 1982년 1할대 승률과 특정 팀 상대 전패(OB)라는 세계 야구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달성하게 되고, 1983년 시즌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의 맹활약으로 반짝 상위권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후 제자리를 찾은 팀성적과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1985년 청보 핀토스, 1988년 태평양 돌핀스,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구단 운영주체가 바뀌며 활동을 이어갔지만 2007년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결국 해체하게 된다. 넥센 히어로즈는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한 후 현대 유니콘스의 선수를 중심으로 창단한 신생구단이다. 1985년 잠시 충청도에 연고지를 두던 OB 베어스가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그 자리를 빙그레 이글스가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90년에는 전라북도를 연고로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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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전라남북도를 아우르던 해태 타이거즈는 1980년대 프로야구 열기의 견인차였다. 선동열과 이종범 등으로 대표되는 스타 선수들의 존재감과,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시작으로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1986~1989년)기록 등, 통산 한국시리즈 9회 우승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8개구단 체제가 본 궤도에 오른 1993~1996시즌은 동원관객수가 4년 연속 400만을 돌파하여, 20세기 야구 열기가 가장 뜨거웠던 시기로 꼽힌다.
당시에는 전통의 인기팀인 엘롯기 팀이 모두 플레이오프 이상의 성적을 기대할 수 있던 시절이었고 만년 약팀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도 가을야구를 하는 등 순위싸움도 예측할 수 없는 혼전양상이었다. 프랜차이즈 스타도 다량 배출되어 화제성에 있어서는 2000년대 후반에 뒤지지 않았다. 당시 1995년에 수립했던 540만 관중 돌파 기록은 2009년에야 다시 달성하게 된다.
단 이 시기가 오래가지 못하게 된 데엔 아래 단락에서 후술할 1997년 경제위기로 인한 팬들의 소비심리 위축과 구단들의 재정 위기, 비슷한 시기 해외무대에서 박찬호가 거둔 호성적 등으로 팬들의 관심이 그쪽에 쏠린 것 등이 한몫을 했다. 1998 시즌 직전에는 팬들의 관심 환기와 위기 타개의 일환으로 시범경기 스케줄을 대체한 토너먼트 경기를 기획, 실시하기도 했다. 8개 팀이 대진을 편성해 라운드별 단판으로 우승팀을 결정짓는 방식이었다. (우승팀 : 해태 타이거즈)
2.3. 1998년~2006년
1997년 말에 터진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해태 타이거즈와 쌍방울 레이더스가 경영난으로 정상적인 구단 운영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쌍방울은 2000년 해체가 되었고, 해당 팀 선수들을 주축으로 SK그룹이 구단을 새로 창단하여 SK 와이번스가 되었다. 해태는 2001년, 자동차 회사인 현대자동차그룹이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면서 KIA 타이거즈가 된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소비 축소와 1999~2000년 2년간 시행한 매직, 드림 리그 양대 리그 체제의 흥행 실패,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는 미국과 일본에 진출한 선수들의 활약과 더불어 TV 중계를 통해 해외파의 출전 경기를 보면서 국내리그와 수준 격차를 보여줘 그로 인한 국내야구 외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삿포로 참사, 2002년 한일 월드컵 열풍,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등 연속적인 악재로 인해 흥행 암흑기를 맞았다. 1993~1996시즌이 4시즌 연속 400만 관중을 넘긴 황금기였다면, 2000-2004시즌은 5시즌 연속 200만명대 관중을 기록하는 데 그친 흑역사였다. 야구팬들이여 야구장으로 돌아오라.
2002년에는 축구 열기에 완전히 잠식되어 8개구단 체제 이후 최저 관객인 230만 관객이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이듬해 이승엽이 오 사다하루의 아시아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인 55개를 뛰어넘어 56개를 기록하면서 이슈몰이를 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26] , 이승엽의 홈구장인 대구구장의 작은 구장규모로 인해 관중 파급효과는 크지 않았다.[27] 이듬해인 2004년 이승엽이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인기는 다시 시궁창으로... 이후 국내 양대 인기구단인 롯데와 기아의 동반 부진등으로 2002~2004년은 프로야구 총체적 암흑기였다. 다만 2005년부터는 약간의 반등이 이루어졌다. 총 관중수 면에서 보면, 2005년에 전년 대비 100만명가량이 증가하여 300만명을 돌파하였고 2006년 잠시 감소했지만 이후 2012년까지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인기 하락에 관해 개별팀을 살펴보면 최고 인기팀 해태는 이종범이 일본으로 진출하고 임창용을 삼성에 보내는 등 스타의 부재현상이 생겼고 팀 성적도 추락했다. 돌풍을 일으킨적이 있는 쌍방울은 애초에 전주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을 연고로 하였는데 모기업의 문제로 선수까지 죄다 팔고 성적도 바닥으로 떨어지자 팬이 다 떠나게 되었다. 1999년 준우승 이후 롯데는 2000년대 초반 최악의 경기력으로 관중이 100명도 안가는 사례가 나올 정도로 망가졌다. 매년 우승부터 꼴찌까지 순위가 갈라지는게 당연한 프로리그지만 팀이 단순히 성적하락이 아닌 진짜 망가져버렸다는 인식을 주어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태가 되었던것.
그나마 긍정적으로 볼 수 있던 부분으로는 TV 시청률 부분에서는 암흑기 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는 거다. 또 2006년 시즌 시작 직전 2006 WBC에서 4강에 오르며 국민의 관심을 끌어내었다. 다만 막상 2005년보다 관중이 줄기는 했다.
2.4. 2007년~2012년
현재의 인기로 이어진 본격적인 프로야구의 중흥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의 선전이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WBC의 선전은 2000년대 중반 열기가 식었던 야구팬들의 눈을 다시 야구장으로 돌렸던 것. 물론 2005년에 비해 2006년 관중이 줄어들어서 효과가 없는것도 같지만 야구 재밌더라 라는 말이나오게 된것은 분명하다. 2006년 시즌 끝나고 도하참사가 있었는데도 2007년 관중이 크게 늘어난것을 보면 암흑기가 끝난것은 분명해 보였다.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이미 동기간의 2007년 관중을 뛰어넘는 흥행에 성공을 하였고 시즌 중 9전 전승으로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을 획득하며 야구에 관심없던 사람들(특히 월드컵 세대)의 관심을 다시 끌어오는 데 성공했으며[28] 2009년에는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우승과 인기팀 KIA의 12년만의 우승,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꾸준히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흥행의 가장 큰 이유로 2008년부터 시작된 전 구장 동시 케이블TV 중계를 꼽기도 한다.
한국 프로야구의 중흥은 전통적 인기 팀들의 부활도 한 몫을 담당했다. 2001년 부터 8888577이라는 눈물나는 비밀번호 성적을 받았던 롯데 자이언츠는 2008년 로이스터 매직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했고, 사직구장은 2002년 암흑기의 한해관중 13만에서 2009년 130만 관중돌파로 무려 10배가 넘는 관중몰이에 성공하면서 야구 열풍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2009년에는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을 달성, 명가를 재건하며 흥행에 큰 몫을 하였다.
이러한 흥행 돌풍에 힘입어 2009년에는 포스트 시즌까지 합치면 600만명으로 역대 최대 관중수를 기록했고, 2011년에는 정규시즌 관객으로만 680만 관중을 넘기는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2012년에는 710만 관중을 넘기며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이는 야구의 첫 황금기로 불리던 1990년대 중반에 비해서도 2배 가까이 파이가 커진 것이다.
이러한 열풍 속에서 롯데 자이언츠는 경우에는 한국 프로야구단 사상 첫 흑자 구단의 탄생을 볼 수 있게 되었고, 프로야구단에 경영의 개념을 강조한 넥센 히어로즈는 2012시즌 괄목할만한 관중 수 증가를 이뤄내고, 2013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도 성공하며 대기업 스폰서 없이도 프로야구단을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로서 활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사회 전반에 야구 열풍이 불어 사회인 야구단이 무더기로 탄생하기 시작했으며, 리틀야구단 또한 두배로 숫자가 늘어나고 중학생 이상의 아이들을 위한 리틀야구단인 시니어 리틀야구단의 출범까지 이야기가 오갈 정도로 야구계의 발전을 위한 발판이 만들어진 한 해였다. 2009년의 흥행에서 나온 인기와 사회적인 요구에 맞춰서 인프라의 확장에 나서면 더 큰 전성기를 불러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큰 기회로, 야구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리고 2011년 창원을 연고로 하는 NC 다이노스가 제9구단으로서 공식 출범하였고(1군 경기 참가는 2013년부터) 2013년 kt wiz가 제10구단으로 창단했다(1군 경기 참가는 2015년부터).
이 시기에는 스타들도 많이 탄생했는데 그중 일부는 과거 선배들이 미국에 가보지도 못한 MLB(or 마이너)에 진출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진출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도 성과라 할 수 있다.
2.5. 2013년~2018년
2008~2012년까지의 프로야구 황금기를 거치며 신규 팬들이 많이 유입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팬들의 경기를 보는 눈도 올라가면서[29] 그간 묻혀있던 문제점들이 하나둘씩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가 두 가지인데 바로 프로 선수들의 실력이 저하되고, 고교 야구에서 유망주가 나오지 않는 문제다. 특히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타이중 참사가 일어나면서 프로야구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말이 큰 나왔다. 물론 류현진, 추신수 등의 해외진출 선수도 불참하였고 각 구단에서도 병역혜택도 없는데다가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선수차출에 매우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는 문제다.
스타급 선수가 배출이 안 될수도 있는 상황에서 맞이한 "프로야구 경기력 저하 논란"은 프로야구계에 큰 이슈로 떠올랐다. 특히 2000년대 중후반에 비해 성적이 침체된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한화 이글스쪽에서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반면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넥센 히어로즈 등의 팀은 오히려 성적이 급등하였으므로 말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당시 SK 한 팀에게 엘롯기 세 팀이 승리를 조공하던 시절이라 이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결국 본인 팀의 성적이 떨어져서 나오는 볼멘소리로 매번 결론이 난다.
또한 2013년부터 2년간 9개구단으로 운영되어 3일동안 한 팀은 쉬어야 하는 비정상적인 스케쥴로 인해 선수들의 경기감각과 집중력 등을 비롯한 내적인 요소들이 불안정해져 경기력에 문제가 있다는 말도 있다.
다만 이런 경기력 논란을 불지핀 사람은 김성근과 김정준이 자신들이 현장을 떠나고 얼마 뒤, 앞장서서 하향 평준화를 외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웃긴건 '''김성근 현역으로 복귀한 이후 하향 평준화 논란이 싹 사라졌다는 점이다.''' 현역 복귀후에는 KBO 리그 수준이 메이저리그에 다가갔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그 외 경기력 하향의 원인들로 주장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유망주 감소가 제기되기도 한다. 2002년, 한국축구가 한일 월드컵 4강이라는 전대미문의 호성적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한국에 축구 붐이 일어나며 운동 좀 한다는 유망주들이 대거 축구쪽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프로야구의 유망주들이 크게 줄어들어 당시에 운동을 시작한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본격적으로 성인으로서 뛰기 시작할 시점인 2010년 초에 들어서면서 유망주 부족+유망주들의 질적 저하 문제로 지적하는 의견이 있다. 다만 이러한 주장만 마냥 내놓기엔, 초등학교 야구부는 매년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으며 2007년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리틀야구단의 수가 늘어났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허나 리틀야구단이나 사회인 야구단에 비해 중고교 야구부의 증가세가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 또한 감안할 필요는 있다. 야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기는 했으나, 거기에 취미 활동 이상의 의미를 주지는 않는 사람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엘리트 체육과 사회 체육의 간극이 상당히 벌어져있다는 점 또한 고려할 부분.
- 유망주 수도 문제지만 사실 유망주를 육성할 시스템이 아직도 부실하다는 문제점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는데, 매년 꾸준히 지적된 혹사 논란과 코치들의 조련 능력 부족 등등이 그 예. 그리고 예전부터 논란이 이어진 2004년 봉황기부터 적용된 나무배트 문제 등으로 인해 지난 몇 년 사이에 홈런 갯수가 크게 줄고 국제대회에서 청소년 대표팀이 부진한 면을 보여 알루미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많았지만... 규정대로 만들어야 할 공인구를 양모의 비중을 속여 제조 판매한 업체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나무배트가 원인이 아님을 밝혀졌다.백구(白球)안에 숨겨진 검은 진실
그러나 아마야구의 하향화가 나무배트에 있음을 다시 한번 기사화가 되어 나무배트의 논란에 불을 지폈다. #
2012년은 투고타저의 시즌이었고 타자들의 실력에 대해 많은 야구인과 팬들이 비판을 하였지만 막상 나중에 이시기에 활약했던 타자들이 KBO에서 MLB로 직행하는 사례들을 여러개 만들었다. 시즌 종료 후 공인구의 반발력이 기준 이하라서 제조사가 징계를 먹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야구관람이 일종의 유행이 되고, 분위기를 타며 박찬호의 한화입단 등으로 매스컴에서도 많이 다뤄지다 보니 2012년은 전해보다 더 많은 관중이 찾아와 KBO 유일한 1.3만 이상의 평균 관중을 기록했다. 그 이후에는 매년 경기당 1만에서 1.1만을 기록 중이다. 2013년에 평균관중이 하락한 이유를 살펴보면, 이슈를 만들던 박찬호가 은퇴하게 되었고, 리그의 슈퍼스타 류현진이 MLB로 떠나서 그의 LA 다저스 선발 등판이 매번 지상파로 중계되다 보니 관심을 많이 빼았긴 것을 들수 있다. 또 9개 구단 체제가 되어서 3연전을 쉬는 팀에 매번 생겨서 흐름이 끊기는 것도 있고, 애초에 끝도없이 증가만 하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설득력이 있다.
물론 KBO와 KBA도 손가락만 빨고 있는 것은 아니고, 1차지명 부활과 2차 드래프트 제도 도입[30] , 고교야구 창단시 지원 등 프로야구의 전략적 우위를 위해 다양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구단이 10개팀으로 늘어나면서 정읍 인상고, 시흥 소래고, 수원 장안고, 의정부 상우고 등 신규 야구단 창단이 줄을 잇고 있고, 새로 창단하는 서울 디자인고 야구부 같은 케이스들이 등장했으며 경기양산에서도 야구부 창단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kbo에서 고교야구 활성화 대책을 위해 기존의 팀들에게 10억 6천만원을 지원해주는 것을 시작으로 신생팀 창단시 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실로 율곡고등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하고, 2008년을 마지막으로 해체했던 경주고가 부활하면서 한국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고교야구팀이 60개를 돌파했으며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고교야구 선수는 역대 최다를 2012년부터 갱신하고 있다.기사(2014년 7월 기준 60팀, 2066명)
허나 10구단 체제는 결과적으로 프로야구의 저변을 늘리는 판이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60개밖에 안 되는 고교야구 인재층 중에 실력이 미달되는 선수까지 프로층에 유입될 수도 있으며, 대학야구에도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전망도 있기 때문에 좀 더 아마야구 저변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 많다.
아무튼 이러한 문제점들이 불겨지며 한국 제1의 프로스포츠의 자리가 위험해질수 있다는 위기론이 KBO와 야구관계자들이 가지게 되었고 선수협에서도 이러한 위기의식에 동참해서 2014년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수를 3명으로 늘리는 방안이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특히나 3명 보유에 2명 출전이 가능하며 3명 다 한 포지션에 집어넣는 것이 불가능하게 적용될 것으로 보여지며 이로 인해 팬들이 원하는 외국인 거포들도 맞이할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2013년 11월 5일 외국인 선수 제도를 '3명 보유/3명 1군 등록/ 한경기 외인선수 2명 출전/ 투타 동 포지션 3명 올인 금지' 로 변경했다. #
또한 리그 종료 후 스토브리그 기간 동안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의 몸값 거품 논란이 2012년보다 더 말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2012년보다 FA 선수들의 이름값이 컸다고는 하지만 2011년 시즌 후 이택근의 50억 계약을 시작으로 2012년 시즌 후 김주찬도 역시 50억 계약을 맺었고 이에 더불어 스토브리그 이전 대놓고 FA 영입을 선언한 한화와 NC로 인해 선수들이 자신들의 몸값에 대한 대우를 더 받고 싶어한다는 분위기가 흘렀다. 선수들의 전체적인 기량이 나아지지 않고, 실력이 검증된 선수들은 희소하다보니 FA의 거품이 증가하는 추세를 피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수들은 두터운 대우를 받기를 원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FA로 인한 선수이동이 대거 일어나 FA 영입비용이 총 523억이 나왔다. 이번 FA 빅4로 평가받은 강민호, 장원삼, 정근우, 이용규의 몸값만 272억 합계였다.
판이 작고 선수수급이 메이저리그나 일본야구보다 부족한 국내야구에서 이렇게 몸값이 과열될 경우 그 나비효과가 좋지 않게 작용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반면 슈퍼스타들이 나와서 몸값이 올랐고 나머지 쩌리 선수들이 몸값 상승의 효과를 같이 봤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게다가 고연봉은 운동 유망주들이 야구로 들어오게하는 유인 요건이 되며, 해외로 바로 가려는 고교 유망주들이 한국에 남을 이유가 될 수 있다. 이재국 기자트윗 참조.
2013년은 분명 프로야구에게 있어서 위기의 메시지를 던져준 해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가 가장 큰 고민거리로 남게 되었다.
2014년부터 눈감고 아웅이었던 "외국인 선수 연봉 상한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유명무실했던 30만 달러 상한선 폐지.
다만, 단순히 타고시즌이라서 투수들보고 못한다고 하고, 투고시즌에 타자들 못한다고 하면 욕 안먹을 시즌은 거의 없다. 게다가 이 당시 국내에서 뛰던 선수들이 선배들이 못해내었던, 결과야 어쨌든 '메이저리그 진출'을 해보기라도 하면서 최소한 스타급들에서는 절대실력이 상승한게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2015년부터 한국야구선수권대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KBO 리그'''라는 브랜드로 바뀌며 구단을 운영하는 한국야구위원회는 KBO(사무국)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10구단 kt 위즈가 정식으로 1군에 합류하게 되면서 포스트 시즌에 와일드카드 제도를 도입했다. 해당 문서 참조.
또한 KBO B SAFE 캠페인이 벌어지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31] 나 일본프로야구의 일부구단들 처럼 입장시 음식물 및 음료의 반입 금지를 처음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구단들의 배를 불리는게 아니냐는 비판부터 해외의 사례를 들어 구단의 매출액이 올라가며 구단의 자립을 위해 지지한다는 의견으로 나누어 져 있다. 참고로 메이저리그는 음식물 반입 및 알콜 반입을 제한하고 경기장 내에서 소비할수 있도록 권장하기 때문에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구장 내에서 소비하는 금액이 큰편이다. 2013년 기준 4인기준 경기장에서 쓰는 금액이 입장료 포함해 23만원을 쓰는 것으로 밝혀졌고, 2014년 다저 스타디움은 1인당 경기장에서 사용한 금액은 56달러(한화 5만 6천원)라고 한다.기사. 강명호가 LA 다저스의 홈구장인 다저 스타디움의 맥주 반입과 관련된 [[http://sports.news.nate.com/view/20150417n17048?mid=s1012&isq=6004를 쓴 것도 참조.
2015년 KBO리그 객단가가 공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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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5년 말을 크게 달구었던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 이후 수많은 사건, 사고들이 터지면서 리그 전체의 도덕 수준에 대한 의심이 높아지고 있다. 2016년에는 승부조작의 검은 그림자가 다시 야구계에 드리운 것으로 밝혀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 밖에도 음주운전,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 등 수많은 사건사고가 터지면서 다사다난한 한 시즌이 이어졌다.
반면 그 와중에도 호재는 있었다. 사상 처음으로 800만 관중을 돌파하면서 KBO는 800만 기념 엠블럼을 발표하고 남은 기간동안 선수들 모자에 해당 엠블럼을 부착하고 경기에 출전하게 했다. 스포츠 산업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객단가는 여전히 압도적인 프로스포츠 1위를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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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건사고의 마수는 2017년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 예년보다는 줄어드는 듯 했으나 사기업이나 방송사와의 유착 등 KBO의 수많은 비리들이 밝혀지고, 급기야 최소 4개 구단이 심판과의 금전거래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초대형 스캔들이 터지면서 결국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이후 처음으로 리그 전체가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최형우의 100억 FA부터 시작해 FA거품의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는데 마침내 4년 88억을 받은 황재균에 이르러 팬들이 대폭발하여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다만 이부분은 지나치게 특정 팬덤의 여론몰이도 한몫하는 편. 특히 강민호, 손아섭, 민병헌도 각각 80억, 98억, 80억이라는 금액에 도장을 찍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가 다수이며, 포털사이트 댓글의 분위기도 상당히 다르다. kt wiz 갤러리에서도 이 점에대해서 강한 불만을 드러내는 편.
2018년에는 강백호 등 대형 신인들의 등장과 한층 치열해진 순위경쟁으로 흥행 가도를 달릴 것으로 보였으나,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국가대표팀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무엇보다 특정 선수들의 병역 면탈 논란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특히 그 동안 보여준 리그 운영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다가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터져나오면서 흥행도 주춤했다. 결국 2018 시즌은 4년 만에 처음으로 관중 수가 감소한 시즌이 되었고, 도핑 전력이 있는 김재환이 기자단 투표로 시즌 MVP를 수상하면서 끝까지 팬들의 거센 반발을 산 시즌이 되었다.
2.6. 2019년~현재
2019 시즌이 시작되기 전 프로야구 뉴미디어 중계권 재계약 문제가 있었다. sky스포츠가 프로야구 중계를 포기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과도하게 높아진 중계권료라는 지적이 있었는데[32] , 올해는 프로야구 중계권을 둘러싸고 국내 스포츠 시장에 전례가 없었던 대규모 중계권 구매전이 치러지고 있다. 기존의 지상파 3사(KBS-MBC-SBS)와 SPOTV에 이어 통신3사+양대포탈+(다음을 자회사로 두고 있는)카카오라는 거대 연합체가 프로야구 중계권 구매에 뛰어든 것이다. 게다가 유튜브와 넷플릭스까지 한국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프로야구 중계권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이 기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SPOTV 등 기존 중계권 구매자를 중심으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통신3사를 모기업으로 둔 KBO 이사회의 3개 구단이 모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을 낼 수 있으니 이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인터넷에서는 이걸 중계권을 자신들이 가져오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결국 5년간 '''110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통신사+포탈 연합이 중계권 우선협상 자격을 취득했다. 역대 국내 스포츠 시장 최대 규모의 계약으로 리그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지상파 3사와 스포티비가 시범경기 중계를 보이콧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제2의 중계권 사태로 확산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윤세호 기자에 따르면 10구단 체제가 확립되고 뉴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방송사가 받는 광고료는 점점 줄어들었고, 특히 비인기팀 경기는 적자를 보면서 중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계약 조건상 담당 경기의 90%를 의무적으로 중계해야 한다. 그리고 뉴미디어들은 자체 중계를 할 능력이 없어서 결국 방송사에 의존해야 하는데, 방송사들이 자신들이 적자를 감수하고 중계를 지속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배려받지 못한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
'''그리고 관중수 폭락이라는 악재가 터졌다.''' 2018년에는 관중 수는 전년보다 줄었어도 어찌 800만선은 간신히 지켜냈지만, 바로 그다음해인 2019년에는 3년만에 700만대로 추락했고 이제 750만명도 넘기 힘들다고 KBO에서 스스로 인정할 정도며, 시청률도 떨어져서 5경기 합산 4~5%도 넘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33] 다만, 이게 지방 인기구단들의 부진때문에 올해 한정 일시적으로 폭락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기에, 내년 추세도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방출신들이 몰려있는 수도권 특성상 지방팀들이 잘해야만 수도권 구단 홈경기에도 지방원정팀의 관중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문제점을 고사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현재 '''KBO 리그의 인식이 굉장히 안 좋아졌다는 점'''이다. 그동안 KBO 리그에서 어처구니없는 장면이 나와도 예능쇼라며 좋게 포장되고, 팬들도 재미있어하고 웃어넘기는 경향이 있었지만, 2019년부터는 나종덕의 끝내기 낫아웃 폭투, 강민호의 잡담사, 배영수의 0구 끝내기 보크같은 실수에 리그 수준이 떨어졌다는 식의 비난이 네티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에 놓였다.[34] 더욱이 이걸 잘 포장해주던 언론들도 돌아서서 비판, 비난에 앞장서고 있을 정도. 여기에 리그 단위의 팬서비스 의식 결여, 천정부지로 오른 선수들의 몸값 거품, 도핑 전력이 있는 선수의 MVP 수상과 국가대표 발탁, 자질이 의심되는 심판들의 판정시비, 그리고 한 심판의 스캔들 등이 비난받으며 야구팬들은 오늘도 KBO 리그에 등을 돌리고 있는 데 반해, 이를 타개할 만한 마땅한 대책이나 희망은 보이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줄어드는 관중 수와 빈 관중석은 그동안 야구계에서 "야구는 라이트팬들로 넘쳐난다. 그저 여가로 모여서 놀고 먹고 춤추는데 야구장만한 곳이 없다. 이들은 성적이니 수준이니 따지지를 않는다. 온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곳이 야구장이다." 라고 자랑삼아 얘기하던 걸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어찌보면 이러한 자랑섞인 말들은 그런 라이트팬들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한 말이다. 분명 라이트팬들은 헤비 골수팬들보다는 따지는 정도가 약하고, 아무리 그저 재미있고 즐거우면 그만이다 하더라도 흥미가 떨어져 뒤돌아설 땐 주저없이 떠나버리는 이들이 라이트팬들이다. 특히 야구 말고도 대체제는 얼마든지 있는데다 소비시장과 인구는 한정적이라 한번 삐끗하면 바로 매출이 나락행이기 때문에 저 말은 베이징 올림픽 이후 10년의 황금기에 도취된 오만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야구 전문가들은 여태껏 리그에 만연해온 타고투저 현상이 타자들의 수준, 나아가 리그의 수준이 올라갔기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자랑해왔다. 하지만 2017 WBC, 2018 아시안 게임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 한국 타자들이 부진하는 모습에 야구팬들은 저 말에 점점 의구심을 품게 되었으며, 결국 2019년 공인구 반발 계수 조정에 타고투저 현상이 싹 해결되면서 여태까지의 타고투저 현상은 그저 일시적인 거품에 불과했다는 것이 온천하에 증명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경기의 질이 좋아졌는가? 눈뜨고 못 볼 플레이와 실책은 여전히 비일비재하고 심판들의 오심과 들쑥날쑥한 스트라이크 존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새로운 스타플레이어들은 나타나질 않고 경기의 질은 점점 떨어져 가기만 하는데, 선수들, 관계자들, 그리고 리그 전체가 오만함에 빠져 팬들을 등돌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막판 관중몰이로 어떻게서든 총관중 720만명 이하로 떨어지는[35]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이것도 막판 SK의 대삽질로인한 선두경쟁과 몇몇 팀들의 어거지성 이벤트와 똥꼬쇼[36] 를 벌이며 간신히 넘긴거라서 안심은 이르다.
2019 프리미어 12 대회에서 간신히 2020 도쿄올림픽 야구 본선 진출권을 얻어냈지만, 대회 내내 대표팀이 죽을 쑤는 모습을 보여줬기에[37] , 팬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하다. 특히 지난 해 아시안게임에 이어 도핑 전력이 있는 김재환을 또 발탁하여 논란이 됐고, 그마저도 미국전을 제외하면 그리 성적도 좋지 않아 비난을 받고 있다. 사실상 2020 도쿄 올림픽에 한국 야구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또한 2019 시즌이 끝나고 김광현의 MLB 진출 이후 양현종, 김하성, 이정후 등의 선수들도 연이어 해외 진출을 선언하면서 앞으로 스타 선수들을 얼마나 키워내느냐에 따라 KBO 리그의 성패가 달리게 되었다.
2020년 초 프로야구단 프런트를 다룬 드라마 스토브리그가 스포츠 드라마로는 역대급의 흥행을 거두면서 이에 영향을 받아 프로야구도 다시금 흥행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2020 시즌 프로야구 흥행에 비상이 걸리고 말았다.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시범경기가 취소'''되었으며, 결국 프로야구 개막이 '''1주일 연기'''되었다. 향후 상황에 따라 추가적으로 2주 연기될 수도 있지만, 포스트시즌 마지노선을 11월 말로 잡고 지나치게 길게 연기시키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정규리그 개막이 4월 20일 이후로 결정됐다. 다만 4월 7일부터 타 구단과 연습경기를 할 수 있게 했다. 타 구단과 연습경기는 KBO가 TV 생중계를 편성해 수개월간 KBO 리그를 즐기지 못한 야구팬들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 한편 2020 도쿄 올림픽의 연기로 2020년의 올림픽 브레이크 일정이 사라져 일정에 다소 숨통이 트였다.
2020년 3월 31일, 각급 학교 개학일이 재조정되는 등 상황이 크게 호전되지 않자 타 구단과 연습경기를 4월 21일로 늦췄으며, 시즌 개막은 4월 말이나 5월 초로 잠정 결정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실행위원회에서 다시 결정하기로 했다. #1 #2 이후 국내 코로나19 상황이 점차 호전되고, 4월 19일 확진자 수가 다시 한 자리 수로 접어들자 개막 준비를 위해 실무진 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먼저 프로야구를 개막시킨 대만의 사례를 참고하되, 무관중으로 진행할지 혹은 부분적으로나마 관중을 받아들일지 논의할 예정이다. 응원단 운영은 각 구단의 자율에 맡기지만, SK나 롯데, NC는 선수들의 사기와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볼 팬들을 위해 응원단을 운영하겠다고 방침을 정했다. 4월 21일부터 무관중으로 구단 간 연습경기가 치러지며, 그 중 일부는 지상파로 중계될 예정이다.
2020년 5월 5일, 이날 개막하는 KBO리그가 미국 ESPN과 일본 SPOZONE 등을 통해 해외 생중계가 확정됐다.[38][39] # 이 외에 9개국 17개 매체가 개막 경기들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1 #2 #3 #4 #5 #6 #7 #8 #9 #10
특히 미국의 ESPN에서 중계권을 획득, 미 전역에 방송하게 된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NC 다이노스의 경우 NC가 팀명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최애팀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차후 MLB에 진출 가능한 선수들을 찾아보기도 하고#1 #2, LG와 두산과의 라이벌전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등 미국팬들의 유입도 상당수는 아니어도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현재는 MLB가 시즌을 연기중이라 시즌이 시작되면 잠잠해질게 뻔하긴 하다. 이외에 트위치에서도 중계권을 따내면서 트위치에서 KBO 중계가 가능해졌다. 이로써 KBO 중계가 아프리카TV와 트위치 두곳 모두 가능해졌다. 트위치 링크
KBO가 2020년 6월 30일부터 관중 입장을 허락할지 정부와 함께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무관중 경기 장기화로 인한 구단들의 재정난이 심각해지고, 각종 야구 커뮤니티에서 관중 입장을 허락할 것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정부도 관중 입장을 검토한다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다만 처음부터 관중 입장에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한 문화체육관광부와 달리 코로나19 중앙대책본부가 관중 입장에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해 온 만큼, 관중 입장을 허용할 경우 어떻게 방역 체계를 정비할지가 숙제가 되었다. 일단 KBO는 구장 내 음식 반입은 금지하고, 육성응원도 진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도권 코로나19 확산 상황이 다시 악화됨에 따라 관중 입장 허용은 다시 없던 일이 되었다.
2020년 7월 26일부터 관중석의 10%만 채우는 제한적 관중 입장이 재개됐다. 다만 전 좌석 온라인 사전 예매, 경기장 입장 시 발열 확인 및 QR코드 촬영, 경기 중 마스크 착용 의무화, 큰 소리로 응원 불가, 좌석 내 취식 불가, 입·퇴장시 혼란 방지를 위한 전 출입구 개방 등의 방역수칙을 준수해야 한다. #1 #2 #3 #4 #5 #6 #7 #8 입장 3일째 서울 잠실야구장 모습 입장 첫날 부산 사직야구장 모습
2020년 7월 30일 방역당국이 이틀전 관중 입장 재개 당시 부산 사직야구장 관중석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제대로 지키지 않은 롯데 자이언츠 구단과 KBO에 강력한 경고와 함께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1 #2
2020년 8월 1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긴급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서울, 경기도 지역을 16일부터 2주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조정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 기간 동안 잠실, 고척, 수원 경기는 다시 무관중으로 진행된다. 뒤이어 인천, 광주, 부산, 대전, 대구 등 다른 지역들도 모두 무관중 경기로 전환했다.
2020년 8월 31일 한화 이글스 투수 신정락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2군 경기는 즉시 중단되었으며 최근 1군으로 콜업된 선수 2명도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 중으로, 결과에 따라 1군 경기 중단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1 #2
2020년 9월 1일 김경태가 신정락에 이어 KBO 리그 선수 중 2번째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대전 275번 확진자로 기록되었으며 신정락(264번)에게서 전파된 것으로 파악됐다.[40] KBO측에서는 1군 경기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 #2
2020년 10월 11일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 하향 조정을 발표함에 따라 13일 경기부터 최대 30%까지 관중 입장이 허용된다. KBO는 방역지침 준수 하에 관람 질서가 안정적으로 유지 될 때까지 우선 지난 8월과 동일한 수준에서 각 구장별로 20%대 초중반 규모로 관람석을 운영하기로 했다.#
2020년 11월 1일 포스트시즌부터 최대 50%까지 관중 입장을 확대했다. # 그러나 11월 중순 들어 확진자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11월 19일 0시부터 사회적 거리두기가 1.5단계로 상향됨에 따라 이후 열리는 한국시리즈 3차전부터는 다시 30%로 축소된다.# 11월 24일부터 수도권 지역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됨에 따라 한국시리즈 6차전과 7차전은 다시 10%로 축소된다.#
3. 역대 리그 BI
브랜드 아이덴티티(BI, Brand Identity)는 총 2차례 변경되었다. KBO 리그의 공식 엠블럼은 1982년 리그 출범 때부터 사용되었다.[41] 하지만 해당 엠블럼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다가, 2008년부터 해당 엠블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012년을 끝으로 KBO에서 브랜드 통합을 위해 BI를 변경하기로 결정, 2012 시즌을 끝으로 KBO의 공식 발표를 통해 기존에 사용되던 엠블럼을 활용한 새로운 엠블럼을 공개했다.
4. 역대 개막전 시구자
5. 역대 연고지 제도 변천
KBO 리그는 국내 4대 프로스포츠 리그 중 연고지 의식이 가장 뚜렷한 리그다. 프로 원년부터 전국을 권역별로 나눠 광역 연고제를 시행했고 뿌리 깊은 연고 의식은 리그 흥행의 기반이 됐다. 광역 연고제는 2000년부터 도시 연고제로 전환돼 오늘에 이른다. 아래는 시대별 변화에 따른 연고지 제도 변천사.'''제4장 연고권'''
'''제17조 [연고지역]''' ① 구단은 제2항의 연고지역 내에서 KBO 규약에서 정한 바에 따라 KBO 리그와 관련된 모든 이익을 보호받는 연고권을 가진다.
② 각 구단의 연고지역은 다음과 같다. (중략)
③ 어느 구단도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할 수 없다.
'''제18조 [다른 구단의 연고지역 사용]''' 어느 구단이 다른 구단의 연고지역에서 경기를 실시하거나 KBO 리그와 관련된 행위를 하 고자 하는 경우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사전 서면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제19조 [연고권 침해에 따른 제재 등]''' ① 구단이 제18조를 위반하여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한 경우 연고권을 침해 당한 구단이 총재에게 제재 신청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총재는 위반 구단에 대하여 적절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② 다른 구단의 연고권을 침해한 구단은 피해를 입은 구단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한다. 이 경우 보상금의 하한은 100만원으로 한다.
'''제20조 [구단의 준수 사항]''' 구단은 구단의 연고지역에 있는 전용구장에서 KBO 리그 경기 중 홈경기의 80퍼센트 이상을 실시하여야 한다. 다만, 총재의 사전 승인을 얻은 경우에 한하여 실시할 경기수를 변경할 수 있다.
'''제21조 [연고지역의 변경]''' ① 연고지역은 그 연고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구단의 의사에 반하여 변경 또는 합병할 수 없다. 다만, KBO 규약에 따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② 연고지역을 변경하고자 하는 구단은 전년도 10월 31일까지 총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2009.2.9 개정]
KBO 정관 제 4장 연고권
6. 기타
- 거의 대부분의 규격은 변함이 없는데 마운드는 매우 드물게 변화를 준다. 1980년대에는 마운드 높이 기준이 15인치였는데, 보통 마운드가 높으면 투수한테 유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1980년대에 대체로 투수들의 성적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1990년대에는 마운드의 높이가 10인치로 낮아졌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도 마운드 높이 규정에 대한 강제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구장마다 마운드 높이가 제각각이었고 구단별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마운드 높이를 조정하기도 했다.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 쌍방울 레이더스의 김성근 감독이 자기 팀에게 유리하게 전주 야구장 마운드를 아예 평지로 깎아버려서[49] 논란을 일으키는 등 마운드 높이로 인해 시비가 붙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8년 7월 11일 수원에서 열린 현대-쌍방울 전에서 김성근 감독이 수원구장의 마운드가 높다면서 경기를 거부하다가 퇴장당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구장의 마운드 높이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 2008년 설문 조사에서 선호구단 1위가 롯데 자이언츠, 2위가 KIA 타이거즈로 나왔다. 요즘 설문조사에서는 삼성이 1위하는 경우가 많다. 저 1,2위 조사가 의미가 있는지는 알아서 판단할것. 갤럽조사에 의하면 기아 롯데 삼성 등이 돌아가면서 인기 1위팀에 오르고 있다.
- 2011년,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한국프로야구의 경제 파급효과는 자그만치 1조 2,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같은 해 7,800억 원을 기록한 K리그와 2,000억 원을 기록한 한국프로농구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이다.###
-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팀당 133경기제,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팀당 128경기제로 바뀐 이후 2015년부터는 팀당 144경기 (총 720경기)로 확대하기로 확정되었다. 경기 숫자로만 보면 늘어나는거 같지만 실제로는 9구단으로 운영하던때와 리그의 기간은 차이가 없는데 왜냐하면 9구단 체제에서는 한 팀은 반드시 쉬어야만 하는데 10구단 체제에서는 쉬는 대신 경기를 하게 되므로 144경기를 하는데 걸리는 날짜는 동등하다. 숫자로 계산하자면 2013~2014 시즌의 경우 (128 * 9) / 2 = 576경기를 하루에 4경기씩 진행하니 총 144일이 든다. 10구단 체제에서는 144경기를 쉬는 팀 없이 진행하므로 같은 기간이 걸리게 되는 것이다.
- 2015년까지 각 구단별로 시합구를 지정했으나 타고투저 현상과 더불어 공인구의 반발력이 높다는 논란이 불거지자 2016년 부터 리그 통일구를 제정해 운영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