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이 되어보세!/개변된 역사/3부
1. 개요
슈타인호프 작가의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의 3부에서 작중 세상에 생긴 변화들을 소개하는 문서.
2. 대아주
- 동아시아의 종교관 변화
대아주 각국의 종교관이 상당히 달라졌다. 대한은 천주교를 최초로 받아들인 장조의 유지에 따라 태황 본인은 종교를 가지지 않고 중립을 취하지만 종친, 사대부들을 포함해 80만이나 되는 천주교 신자들이 있다. 불교 또한 원역사와 달리 성리학 교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탄압받지 않아 천주교와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원역사보다 교세가 강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 후송, 서는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박해하고 있으며 때문에 대유주 국가들과의 제한적인 교류도 모두 신교 국가들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대칸 본인이 천주교도인 후금은 대유주와 쉽게 교류하겠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개종한 것이기에 공식적으로 천주교 국가임에도 백성들을 개종시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천주교도의 수는 20만 정도에 그친다.[1] 청의 경우 우호국인 후금, 대한의 영향으로 천주교를 공인해서 5만 정도의 신자가 있으나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에게 천주교의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교세 확장의 여지는 거의 없다고 한다.
- 동아시아 세계관 변화
명나라의 천자를 중심으로 한 조공 책봉 체제가 몰락하고, 대한, 청, 후금, 후송, 서의 무려 5개국이 각자 칭제건원을 하는 혼란기가 도래했다. 일본, 아모국, 유구국은 칭제를 하고 있지는 않으나 다른 황제국에게 칭신하지도 않아서 조공 책봉 체제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후송만은 여전히 중화 사상을 내세우며 한족을 중심으로 한 중원일통과 천명 회복을 주장하지만 다른 네 황제국들은 칭제를 함에도 중원의 천자와는 무관한 고유의 천하관을 내세우고 있다. 대한은 청과 후금에 대해서는 혈맹 관계의 동생 국가 정도로 대우하지만 근본이 오랑캐라며 무시하는 시선도 남아 있고 후송에 대해서는 그 근본이 도적떼라면서 중화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으며 때놈[2] 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있다.[3]
- 동아시아의 경제적 변화
대한, 후송,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해상의 교역 루트를 활성화하면서 원 역사에 비해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적 포텐셜 자체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원역사에서 해상 교역에 소홀했던 가장 큰 이유가 청나라가 원톱인 동아시아 정세에서 굳이 교역을 통해 국가 경쟁력을 제고할 필요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작중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로 고만고만한 수준이므로 유럽이 그랬듯이 확장 경쟁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2.1. 조선 → 대한(大韓)
2.1.1. 정치
1632년, 2부에서 원손이었던 선조 건원제 이연이 명이 멸망한 후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국왕을 태황[8] 으로 승격한다. 이에 맞춰 보통 4대조를 추존하는 법칙에 따라 인종, 명종, 장조, 경종도 태황으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도 종에서 조로 바뀌었다. 단종도 복권되어 원역사처럼 단종 묘호를 받았다. 공식 명칭은 태황이지만 황제라고 부를 때도 있고 여전히 임금이라고도 불린다. 임금의 정실 부인은 중전, 황후[9] 호칭이 구분 없이 혼용되고 있다. 중전은 단지 임금의 정실부인의 거처인 중궁전을 줄여 부르는 말이기 때문. 황후 소생 황자는 친왕, 후궁 소생 황자는 군왕 봉작을 받는다. 대유주 국가들은 아직도 조선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쓴다고 하며 태황은 왕, 친왕은 대공으로 대우하고 있다. 또한 복속받은 하와이 대추장 마우이에게 하와이 군왕을 책봉한다.
태황의 적자는 친왕, 서자는 군왕 봉작을 받으며, 두 왕의 아들은 공작 칭호를 받는다. 친왕의 딸은 군주 작위를, 군왕의 딸은 현주 작위를 받는다.
태황의 적자는 친왕, 서자는 군왕 봉작을 받으며, 두 왕의 아들은 공작 칭호를 받는다. 친왕의 딸은 군주 작위를, 군왕의 딸은 현주 작위를 받는다.
- 묘호 인플레이션
원역사의 조선도 지나치게 '조' 묘호를 남발했다는 지적을 받는데, 작중의 대한은 그 이상으로 '조' 묘호를 남발하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면 일단 1부 시작 이전인 태조, 세조는 원역사와 동일하다.[10] 그런데 무종 이후로 인조-명조-장조-경조-선조-열조-숙조, 무려 7대 연속으로 '조' 묘호를 받게 되었다. 이 중 장조는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라 할만한 위업을 세웠으니 '조'를 받는 것이 적절하며, 선조는 칭제건원을 했으니 대한의 개국시조이므로 '조'를 받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인조, 명조, 경조는 원래는 평범한 '종' 묘호였으나 선조의 칭제건원 이후 관례에 따라 4대조를 추존하며 '조'로 레벨업한 것이니 적절하다. 문제는 이후 열조와 숙조의 경우인데, 각각 경신대기근과 을병대기근을 이겨냈다는 이유로 '조' 묘호를 받았다. 이 둘은 그냥 '종' 묘호를 줬어도 문제가 없었을 듯 한데, 이전의 군주 다섯이 연속으로 '조' 묘호를 받았기에 상대적으로 '조' 묘호의 희소성이 낮아진 상황에서 정통성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조'를 올리기가 쉬워진 것으로 보인다.[11] 만일 3부의 건흥제 또한 사후에 '조' 묘호를 받는다면 이후로도 대한 황조는 어지간하면 관례적으로 '조' 묘호를 올리게 될 수도 있다. 애초에 묘호 자체가 처음에는 받을 만 한 황제에게만 붙고 심지어는 박탈(!)까지 되었을 정도로 깐깐하게 관리하는 프리미엄 옵션(...)이었다가 그냥 폐위만 안 되면 주는 기본사양이 된 역사의 연장선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 국기 개정
장조 시절에 제정한 태극 팔괘기를 칭제건원 하면서 개정하여 건곤감리 4괘만 남긴 태극기를 국기로 하고, 태극 팔괘기는 군함기로 사용하고 있다. 군함이 아닌 관선은 관(官)이라고 쓰인 관기를 계양한다.
- 오등작 제도
황제국으로 승격됨에 따라 대신들이 받던 작위도 조선 개국 직후까지 쓰이던 오등작 제도가 재도입되었다. 삼정승(내각승상, 좌승상, 우승상)과 황태자의 장인에게는 후작, 친왕의 장인에게는 백작이 주어진다.
- 성씨 보편화
본래 천민들은 대부분 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군적을 정리하면서 천민들도 모두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 궁성
서양 건축술이 들어와 한양에 2,3층 건물들이 늘어나자 궁궐의 보안 문제를 우려한 열조가 각 궁궐 담장을 4m 높이에 순찰로와 여장을 갖춘 제대로 된 성벽으로 개축한다. 창덕궁 돈화문이 숭례문보다 더 큰 성문으로 개축되었을 정도. 이 조치가 후일 예왕의 난 때 궁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용산별궁
80여년간 지속된 중원의 혼란과 심각한 가뭄으로 예산이 부족해 터만 잡아놓고 공사는 시작도 못 했다. 재석이 건흥제로 즉위한 후 공사를 시작한다.
- 양화당
선조 시기 내달인 후궁이었던 원빈을 위해 지은 대한 최초의 서양식 전각. 전각만이 아니라 네덜란드식 정원도 그대로 유지,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춥디 추운 대한의 겨울 날씨에서 지내기엔 마땅치가 않아 현재는 태황이 여름에 집무 혹은 휴식을 위해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 3성 6부제 개편
태황이 된 재석이 2부 장조시절 화두를 꺼냈지만 실천하지 못한 6부를 개편하기로 했다. 기능별로 분리하고 원역사 대한제국의 명칭을 따서 이부는 국무부[12] 와 내무부, 호부는 탁지부, 예부는 예무부, 학무부, 보건부, 외무부, 병부는 군무부, 형부는 법무부, 공부는 상공부, 농림부, 건설부로 나누자는 개편안을 제시했고, 여기에서 우승상 이형준이 서양의 사례대로 병부를 육군부와 수군부[13] 로 나누자고 의견을 추가로 제시했다.
- 과거시험
장조 시절부터 주인공이 열심히 노력하였던 수학시험의 과거제도 채택이 이루어졌다. 시험에 정식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연가제 시기라고 하니 들인 노력에 비해 무척이나 오래 걸렸다.
2.1.2. 지역
- 영토의 변화
3부 시작 시점에서의 대한의 강역과 동아시아 판도: 지도[14]
하와이 복속 후의 대한의 강역: 지도
3부 시작 시점 조선의 영토는 내지 13도와 외지 9주로 이루어져 있다. 외지 9주는 2부에서의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구주총관부, 대남주에 더해 영락주[15] , 남미주, 북미주[16] , 요동주[17] 로 구성된다. 또한 시베리아로 진출, 루스국과 조약을 맺어 레나 강을 국경으로 삼고 바이칼 호도 조선령이 된다. 조선이 배후에서 조종하던 규슈 중부 진서대장군부가 도쿠가와 막부에 귀부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은 상실했으나 친한성향의 다이묘들은 유지되면서 영향력은 남아있다.
하와이 복속 후의 대한의 강역: 지도
3부 시작 시점 조선의 영토는 내지 13도와 외지 9주로 이루어져 있다. 외지 9주는 2부에서의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구주총관부, 대남주에 더해 영락주[15] , 남미주, 북미주[16] , 요동주[17] 로 구성된다. 또한 시베리아로 진출, 루스국과 조약을 맺어 레나 강을 국경으로 삼고 바이칼 호도 조선령이 된다. 조선이 배후에서 조종하던 규슈 중부 진서대장군부가 도쿠가와 막부에 귀부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은 상실했으나 친한성향의 다이묘들은 유지되면서 영향력은 남아있다.
- 지방행정
외지 9주 중 본국과 가깝고 인구가 많은 부여주, 연해주, 속말주, 요동주, 영락주, 대남주는 정 2품 도독이 관할하는 도독부가 설치되어 통치한다. 도독부 지역의 군사는 병마절도사가 관할한다. 미주는 본국과 거리가 멀고 인구가 적어 행정구역상으로는 남북으로 나눠져 있지만 종 2품 미주대총관이 함께 관할하며 군사도 속오군으로 편제되어 대총관이 관할한다. 구주총관부는 일본에서 위탁받은 영토라는 명분 때문에 관찰사나 도독을 보낼수 없어 역시 대총관이 관할한다. 새로 얻은 하와이에도 관리사를 본토에서 파견하기로 한다.
- 주산군도
2부에서 양응룡의 난 토벌 이후 조선이 관리하게 된 주산군도는 관리만 맡은 것일 뿐 공식적으로 할양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 상태로 명이 멸망해버리자 주산군도는 대한군이 관리만 하되 대한의 영토는 아니고 이미 멸망한지 오래인 명의 관리들의 자손들이 대대로 조상의 관직을 이어받고 있는 이상한 땅이 되었다. 주둔하는 대한 해군은 주산군도 근처에서 직접적으로 약탈행위를 벌이는 해적을 제외하면 어떤 것도 건들지 않기에 주산군도는 잠상과 해적이 들끓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적대국인 대한과 송나라 사이의 밀무역도 이곳을 통해 이뤄진다. 대한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최소한의 치안만 관리하면서 밀무역하는 잠상들에게 상납을 받는 것이 주산군도를 합병해서 밀무역 수입도 끊기고 군비만 몇 배로 들어가는 것보다 이득이라고 판단해 주산군도를 계속 무법지대로 놔두고 있다.[18] 적두도와 광동 연안을 지배하고 있는 정지룡 세력과도 공존 관계로 정지룡 일당이 후송 해역을 털고 잡아온 묘노들을 이 곳에서 처분한다.
2.1.3. 인구
- 인구의 변화
내지 인구 1630만, 외지 인구 837만[19] 으로 총 인구는 2467만이다. 30년간의 대흉년, 그리고 경신대기근으로 인하여 인구 성장세가 꺾이고 4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지만, 2부 장조대제 시점에서의 내지 13도 인구는 1200만, 외지 9주 인구는 200만명 도합 1400만명에서 약 70년간 인구가 거의 2배로 불어난 셈이다. 현실의 조선은 좁은 영토로 인한 인구압으로 인해 전근대 시대에 한반도의 수용한도는 19세기 말에도 1000만명 후반대지만, 명군 세계관의 대한은 17세기에도 만주 5주와 거대한 미주로 인하여 인구 포텐셜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다만 만주 5주와 구주는 쉽게 통제할 수 있어서 완전한 본토화가 가능하지만 거리가 먼 대남주나 미주는 완전한 통합이 이뤄질지 분리독립 요구가 나올지 지켜봐야 한다. 미주에 철광이 없으므로, 철을 전부 본국에서 수입하게 해 틀어쥐고, 미주야인들 중 장조 대에 입조해 충성을 맹세한 5부족은 동등한 대한 백성으로 대우하며, 조정에서도 미주에 향교를 많이 세워 동화에 힘쓴다. 미주야인 중 무과에 급제해 강무관에 입교한 사람도 있다.
- 다민족화
- 유주계 : 대유주 각국에서 이주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기존 이주민들의 후손들도 번성하여 2400만 인구 중 백인계 인구가 만 단위가 넘게 되었고 도성에서 백인이 돌아다녀도 딱히 주목을 받지 않는다. 선조 이연은 사이에서 자식을 보지는 못했으나 내달인 후궁[20] 을 들이기도 했고 이 외에도 백면나인[21] 출신 후궁이 몇 명 있었다고 한다. 백인들 중 내달인들과 체코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조선인과 거의 통혼하지 않지만 잉글국, 수코국, 불랑국 이민자들은 조선인과 거리낌없이 통혼했고 많은 혼혈아가 생겼다.[22][23] 내달인들은 대미주에도 상단 지사를 세워 대미주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기빈이 데려온 슬라브계의 후손들의 경우 남자는 백룡인, 여자는 백면나인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정교회 신앙을 유지 중이다. 백면나인들은 주로 백인 역을 맡기 위해 정도극단, 반촌극단에서 여배우로 일하며, 통혼하는 백룡인과 달리 밥줄인 백인의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끼리만 통혼한다.
100년 가까이 지나니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집단 내에서만 통혼하고 종교라는 매개체로 결속된 네덜란드계, 체코계, 슬라브계는 당연히 모국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혼혈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고급 기술자라는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계, 고향을 매개로 뭉친 스코틀랜드계 역시 모국의 영향이 드러나나, 동래에서 제철소를 경영하는 영국계는 혼혈로 인해 외모도 별 차이 없어지고, 영어도 거의 쓰지 않는 등 거의 완벽하게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후세에는 문화인류학 연구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 흑인 : 딱히 눈에 띌만한 인구 영입은 없고, 2부에서 이기빈이 데려온 이들의 후손이 한인들과 섞여 살고 있다. 한양에 모스크까지 지어놓고 있는 걸 보면 독자적인 문화는 유지중인 듯. 그러나 체격은 혼혈화 되면서 한인들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고 한다. 과시욕 있는 양반들이 시종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도성에서 흔히 보인다.
- 일본계 : 구주총관부는 2부 시점에 철저한 인종청소를 거쳐 인구의 대다수가 조선계였으나, 3부 시점에는 오히려 왜인계가 약 절반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일본 내 천주교 탄압으로 천주교도 난민이 대량 유입되었고 빠른 대남주 개척을 위해 구주에서 조선인 인구를 빼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주 왜인들은 천주교 박해 때문에 에도 막부를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 중국계 : 2부에서 사르후 전투에 패전하고 명나라로 돌아갈수 없게 되어 조선으로 온 명나라 패잔병들의 자손 5천호는 대구 대명동에 모여살며 명나라 황손인 대명공의 개인 식읍으로 주어져 있다. 대명동 외에도 인천의 소명동에도 수만이 살고 있다. 이들은 태반이 산둥성 출신으로 명이 멸망하는 혼란기에 조선으로 넘어온 사람들이며 때문에 대명동 사람들과 달리 명이라면 이를 갈고 있다.
- 여진계 : 요동과 만주에 살던 여진족들 중 조선의 지배를 거부한 자들은 모두 건주로 넘어가 대륙에 정착했으며, 남아 있는 자들은 오도리나 조선 사회에 흡수되었다. 다만 우데게나 나나이족 등 조선의 지배에 순응한 소수부족들은 대체로 정체성이 유지되며 보호받고 있다.
- 미주야인 : 장조 대 입조한 5대 부족 야인 약 4만명은 여전히 대한 백성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 물자나 기술과 관련해 많은 지원을 받지만 이주한 본토인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고, 자원이 많은 땅은 본토인들에게 반강제로 넘겨주는 등 대한 본토인들에 비해 불이익을 보는 부분도 있다.
- 자혜원
2부에서 장조(재석)가 사망한 후 홀로 남겨진 상빈 이씨(상희)가 이태원(梨泰院)에 세운 고아원. 백인과 조선인의 불륜 관계에서 태어나 버려진 혼혈 사생아들과 불륜녀들, 기근으로 생겨난 수많은 조선인 고아들을 모아 천주교 신부들의 도움을 받아 길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이 수천 명에 이르며 외국인 신부들이 키우다보니 외국어를 배우기 좋아서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역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곳을 이태원(異胎院)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다.
2.1.4. 군사/치안
- 수석총
2부에서 기병용 권총으로만 쓰이던 수석총은 보편화되어 군용 총기는 모두 수석총이 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화승총 사용이 보편적이다. 수석총에 쓰이는 부싯돌은 소모품이기 때문에 민간인 입장에서는 유지비가 화승총보다 높으므로 당연한 일. 탄약은 다시 종이탄포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 육군력
3부 시작 시점의 대한 육군 상비군 '고병'(고립병의 줄임말)은 14만 6600명. 2부 시점에 비해 영토가 크게 늘어났음을 생각하면 상대적으로 군사력이 감소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74년간 전면전을 벌인 적이 한번도 없었고 거의 내내 가뭄이 지속되었으므로 군축은 불가피했다. 18세에 1년간 입대하는 의무 병역인 정군은 약 20만 명 규모로 유지되고 있으나 사실상 국민의무교육을 병역을 통해 수행하는 수준이며, 속오군은 30세 이하는 2주, 30~40세는 1주만 훈련받으면 되며 그 이후는 매년 은 1냥의 병역세로 면제받을 수 있다. 가난해서 병역세를 낼 수 없다면 노역으로 대체한다. 이러한 제도가 한 세기 가까이 유지되다보니 남자라면 군대는 당연히 가야 한다는 정서가 퍼져서 명백한 이유 없이[24] 군대를 가지 않으면 병신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5년의 의무복무 기한을 가진 직업군인 상비군인 '고병'은 여전히 유지 중이며 지원자가 부족할 시 고을별로 인원을 할당해서라도 채운다. 원래 장조 시절 고립병들은 20년간 복무했으나 병력 고령화, 기강 해이 등의 문제가 생겨 선조 시절부터 5년 단위로 재계약하도록 변경되었으며, 60세 이하까지는 계약 연장이 가능하지만 60세가 넘었거나 체력시험에서 떨어지면 계약 연장을 할 수 없다. 체력시험은 들돌 들기, 달리기, 팔굽혀펴기 등이며 나이와 무관하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여 18세나 58세나 같은 시험을 치기 때문에 60세까지 복무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고병의 계급은 이등병-일등병-삼등병의 3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5년 복무를 마치면 보통 상등병까지는 진급하고 취재에 성공하면 종9품 참교로 임관할 수도 있다. 또한 군사 시스템 자체는 화력전과 중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장조 시대의 개혁이 잘 유지되고 대유주 주재관들로부터 유럽의 군사 동향도 계속 전달받아 업데이트하는 중이다. 병기창과 조선소에서 운영하는 증기기관도 67기나 된다. 장조 말기에 잉글랜드 기술자들이 강철을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옛 오도리의 후예인 강철군, 윙드 후사르의 후예인 비호군은 철갑 무장을 그대로 유지하고, 정규군 경기병은 가죽 갑옷인 버프코트를, 정규군 보병은 강철 투구와 파란색 누비옷 군복을 착용한다. 중앙군의 핵심전력인 오군영은 오군대총관 아래 종2품 부장이 총관이 되어 지휘하며 총원 6천 명으로 보병연대 2개, 기병연대 1개, 포병대대, 본부대와 지원부대로 구성되고, 각 보병연대는 3개 보병대대와 수색대 역할의 1개 경보병대대, 직접화력지원을 맡는 1개 보병포중대로 구성된다. 무인지변에서의 묘사를 보면 전력이 크게 떨어져서 오군영 병사들에게 조롱받는 한성부 나졸들도 생전 처음 겪는 포화가 쏟아지는 전장의 양익을 맡아서 겁은 먹을지언정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 돌격하는 것을 보면 전반적인 육군력의 수준도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무인지변 이후에는 오군영 중 반란에 가담했던 수어청이 해편되어 무위영으로 바뀐다.
- 해군력
해군의 정원은 7만으로 전원 직업군인. 수군 도제조가 해군장관, 삼군부 도총사가 해군 총사령관이며, 3개 수군통제영으로 편제되어 있다. 서도통제영은 한반도 서해 수역부터 대남도까지 동중국해 지역을 담당하며 그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최강의 전력을 갖고 있다. 남도통제영은 일본 견제가 주임무이며 따라서 등선군 병력의 비중이 크다. 동도통제영은 유귀국과 대미주 방면 해상교통로 유지를 맡는다. 기함으로 2천 톤급 갈래선이 있는 등 대규모 갈래선 함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대미주 식민지 유지에 집중하느라 대유주와의 교역은 대부분 대유주 상선을 통해 이루어진다. 직접 대유주에 갈래선을 보낸 사례는 7차 견서사 정도. 후송과 해상에서 지속적으로 교전을 벌인다고 하는데 정크선 위주의 후송 함대와 전면전을 벌이면 압승하지만 후송 해군이 수적으로 압도해서 상당히 골치거리인 듯 하다. 증기선 군함도 20여척 있으며, 그 중에는 외륜까지 장갑을 씌운 600톤급 장갑함인 '기갑선'도 5척 보유하고 있다. 바람이 불지 않아 갈래선이 출항할 수 없을때를 대비해 판옥선도 80척 정도 유지하고 있다. 성친왕이 하와이를 정복하자 삼군부 직속의 하와도 수군별영이 신설된다.
- 포도청
명 멸망 이후 영토가 넓어지고 잠상이 증가하고 기근으로 민란이 빈발하자 경찰력 강화 필요성때문에 한성부만 관할하던 포도청의 관할권이 대한 전국으로 확대된다. 포도청의 병력은 2만으로 무장은 경무장 수준이지만 기동력이 필요하여 전원 기병으로 구성된다. 군과 포도청 사이에 라이벌 의식도 생겼다. 또한 포도청과 별도로 한성부 및 각 지방관아에 방범순찰 등을 담당하는 나졸들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무인지변 이후 반란에 가담한 한성부 나졸이 폐지되면서 우포도청은 전국 치안을 담당하며 천하포도청으로, 좌포도청은 한양 도성 치안을 전담하면서 수도포도청으로 재편되었다.[25]
원역사보다 경제가 활성화된 사회인 탓에 조직폭력배인 검계도 원역사보다 더 크게 날뛰고 있었다. 한양대화재 후 포도청이 검계에 대한 일제소탕을 벌여 많은 조직원들을 잡아들였지만 잔당이 다시 조직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속오군 제도 또한 유지 중이며 일반 징병 대상자들은 40세까지 소집되지만 고병 전역자들은 50세까지 소집된다. 반면 이렇다 할 분쟁도 없고, 정규군이 주둔하지 않는 미주에서는 교범대로 훈련을 하지 않는 등 나사가 풀려진 상태. 적이 접근하기 전에 쏘아죽이면 되는 거 아니냐는 안이한 사고방식으로 활과 조총 사격 훈련[26] 에만 매진할 뿐 근접전 훈련은 하지 않는다[27] . 더구나 장기간 소집을 꺼리는 편. 마치 실제 역사의 임진왜란 직전 조선군과 비슷하게 변질된 상태다. 그래서 오히려 미주에서는 원주민 전사들이 더 쓸만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 무묘
장조 사후에 왜란과 호란중에 활약한 무인들이 다수 배향되었다. 장조 이전에는 고작해야 유순정과 이장곤 두명뿐이었고, 장조 재위중에도 김지와 신립이 추가된 정도였지만 그 후에 대규모의 배향자가 배정되었다. 이순신, 권율, 임꺽정, 황진, 정발, 김시민, 김응서, 사노부, 정충신 등이 새롭게 배향되었다. 그리고 박지, 안우, 김득배, 이방실을 제외시키고[28] 박위, 이지란, 배극렴, 최무선이 배향되었다. 현 무묘 배향자는 총 34명. 강태공과 관우를 제외하면 실질적으로는 32명이다.
- 족친위
3부 대한이 2부 조선보다 유일하게 퇴보한 부분.[29] 장조 때에 비해서 규모가 1/3으로 줄고 전력도 약화 되었다. 봉급도 없고, 훈련도 고되고, 장비도 자신의 돈으로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능력 있는 이들은 필사적으로 공부해서 과거, 무과, 의과 응시, 금군 및 포도청 입대 등으로 빠져나가고 무능하거나 게으른 이들만 남았다. 그래서 예왕이 벼슬과 재물을 약속하자 황족과 그 가족들, 명문가 양반 출신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난에 가담해버렸고, 난이 진압된 후 가담자들은 장형 100대를 맞고 시베리아로 귀양을 보내면서 부대가 유명무실화 되었고, 결국 해체되어서 남은 병사들은 금군 및 오군영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 군기총관부
장조시절 때만 해도 군사경찰 역할에 불과했는데 이후 금위사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대대당 군기담당관이 한명씩 배치되어서 전통적인 군사경찰 업무 및 정치장교 역할을 하는데, 금위사와 달리 책임자가 겉으로 명백히 드러나 있어서 포섭되는 경우에는 답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 승병
승병 제도와 그 지휘관인 도총섭 직위는 유지되고 있으나, 장조 시절 승병이 맡았던 의무, 공병 등의 특기가 정규군으로 점차 넘어가면서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건흥제 즉위 후 천축행 성지순례가 시작되며 순례단 호위라는 임무가 생긴다.
- 파천군(派天軍)
무인지변 때 예왕군에 가담했던 하급 군관 250명, 그리고 무일푼으로 전역했어야 했으나 자원한 병사 1000명으로 구성된 인도 파견군. 혼란스러워지는 무굴 제국의 상황을 살피고 총관부를 지키며 초석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게 제일 중요한 임무며, 덤으로 현지 분쟁에 개입해서 대한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재석은 현지 용병들을 고용해서 규모를 불려서 인도 라자들 간의 분쟁에도 개입해서 궁극적으로 풍요로운 벵골 지역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이들이 간만큼 파견 후부터 봉급은 가족들에게 주되 본인들에게는 용돈 정도만 지급하고, 혹시나 군무를 이탈하면 지급된 봉급을 몰수하고 가족들을 대남도 전기사변에 보내게 되 있는등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구사했다.
대한군의 군령권을 가진 조직으로, 삼군은 '모든 군대'를 뜻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경군, 향군, 수군을 지칭한다. 삼군부 도총사 휘하에 오군대총관, 북방군을 지휘하는 대한북병사, 지방군을 지휘하는 대한남병사, 대한수군통제사를 두고 있다.
대한이 동아시아의 패권을 쥔 대제국이 되면서 해외 정보를 담당하는 익문사의 비중과 활동 범위도 커졌는데, 심지어 필리핀에 중국인으로 위장한 첩보원들을 심어서 정보를 수집해왔을 정도로 노련해졌다. 대한-스페인 전쟁 개전 직전 이 첩보원들이 대한 외교관들과 합류하여 철수할 때까지 스페인 측은 이들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30]
재석이 건흥제로 즉위한 후 전쟁에서 세운 공에 대해 매번 승진이나 상금을 내릴수는 없다고 판단, 신사년(1701년) 제정한다.
훈장의 이름은 자응장으로 하고 훈 1등에서 8등까지 등급을 정하지만 아직은 옷에 부착하는 금속제 훈장은 만들지 않고 훈위와 증서만을 내린다. 대한-스페인 전쟁이 벌어지고 첫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남도수사 홍하명이 훈 2등으로 첫 수훈자가 된다.
훈장의 이름은 자응장으로 하고 훈 1등에서 8등까지 등급을 정하지만 아직은 옷에 부착하는 금속제 훈장은 만들지 않고 훈위와 증서만을 내린다. 대한-스페인 전쟁이 벌어지고 첫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남도수사 홍하명이 훈 2등으로 첫 수훈자가 된다.
2.1.5. 경제
- 재정
대한의 1년 세입은 은 3000만 냥으로 원 역사에서 강희제 시대 청나라 1년 세입과 거의 같고 동시대 프랑스 1년 세입보다 약간 많은 수준이다. 그 중 토지에서 걷는 전세가 50%인 1500만 냥이고, 나머지 50%는 여러 산업과 교역으로 얻는 세입이다. 특히 주세 수입이 은 4백만냥에 달한다고 한다. 동 시대에 존속했던 국가중에서는 재정 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고 경신대기근으로 인하여 한반도와 만주 지방의 세율이 상당히 낮아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정적인 퍼텐셜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허나 전세 등 직접세 대신 간접세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 근대적 조세체계라는 것을 감안할 때, 역설적이게도 대기근이 조세 개혁의 유인이 되어 보다 근대적인 재정 구조를 확립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대한통보
3부 초기까지도 은본위제는 실시되지 못했고 쇄은의 무게를 달아서 쓰거나 교역으로 들어온 스페인 은화, 일본 은화를 그대로 쓰는 정도였으나, 미주에서 서호은광을 비롯한 여러 은광이 발견되며 은본위제가 실시되어 최초의 은본위제 주화인 대한통보가 발행된다. 단위는 1냥이 순도 95% 은 37.5g이며,[31] 10전이 1냥, 10푼이 1전이다.[32] 동전은 잔돈 역할을 하며 1푼, 5푼, 10푼의 3종류가 있다. 앞면에는 태극문[33] 과 '대한통보'[34]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화폐의 가치와 발행 연도가 써있다. 직공들이 직접 망치로 두들겨서 만든다.[35]
- 보험
몇몇 상단들이 화재보험 사업을 운영하다가 한양대화재 때 큰 손실을 봤다. 역으로 이에 가입한 업체나 개인의 경우에는 피해가 줄었을 것이다.
- 해운
송상을 비롯해 본토의 일부 상단들이 대형 범선을 보유하고 미주와 대남도, 필리핀, 천축 등을 왕래하며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다. 당연히 해적들에게도 타겟이 되고 있는 중.
- 산업 발전
명이 멸망하며 중원이 혼란에 빠진 이후 중국의 차와 자기의 품질이 크게 떨어졌고 대신 조선산 차와 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프랑스에서도 대남도산 홍차를 조선제 다기에 즐기고 있다. 프랑스 왕궁에서 쓰는 찻잔조차 해삼위에서 생산된 물건일 정도. 특히 선조 건원제 때 경신대기근 극복을 위해 수출 장려 정책을 펴면서 공업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 농업 발전
경신대기근을 겪으면서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해 아모국에서 어비를 수입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선조의 수출 장려 정책 덕분에 대남도에서 재배하는 차와 커피가 장조 시대의 스무 배 가까이 늘었다.
- 포경업
재석이 1부에서 정해놓은 제한이 대기근을 거치며 해제되었다. 다만 기름만 뽑고 상어 좋은 일 시키는 서양식 포경과 달리 잡은 고래는 허투로 버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고래 고기가 선호되지 않는 것은 여전하기에 고래 고기는 보통 해체에 참여한 토인 노동자들에게 보수로 주어진다.
- 열기창
증기기관을 담당하는 부서. 경조는 부왕 장조의 유지를 받들어 증기기관을 철저히 비밀로 유지하려 했으나, 선조 때 경신대기근이란 현실적 문제에 부딪쳐 산업 발전의 일환으로 증기기관의 민간 사용이 허용되었다. 이로 인해 산업 전반, 특히 면직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면포 수출량이 4배나 늘어났다. 민간용 증기기관의 소유와 정비를 열기창에서 전담하고 증기기관을 개량해 성과를 낸 장인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는 인센티브제를 통해 활성화되어 건복 원년인 1678년 시점에선 전국의 공장에서 가동하는 증기기관 473기, 기관을 단 수차 119기, 병기창과 조선소에서 운영하는 기관 67기로 늘어났다. 양인들은 증기기관의 비밀을 캐내고 싶어하지만 염탐을 시도한 양인들은 모두 태형 후 추방을 당했고 아직 기술 유출은 일어나지 않았다[36]
을병대기근 시기에 들어와서 기근에 시달리자 미주대하에서 쌀을 재배해 철도를 깔아 증기기관으로 지선성에 옮겨 배에 싣자는 계획을 공부상서가 진지하게 주장하는데, 당연히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좌초됐지만 저런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현직 상서가 진지하게 주장하고 또 먹힐정도로 열기창의 기술력은 굉장히 뛰어난 듯하다.
을병대기근 시기에 들어와서 기근에 시달리자 미주대하에서 쌀을 재배해 철도를 깔아 증기기관으로 지선성에 옮겨 배에 싣자는 계획을 공부상서가 진지하게 주장하는데, 당연히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좌초됐지만 저런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현직 상서가 진지하게 주장하고 또 먹힐정도로 열기창의 기술력은 굉장히 뛰어난 듯하다.
- 증기선
장조 시절 개발만 된 증기선은 연안항로와 내륙수로 한정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그 수량은 민간에서 운용하는 것이 84척, 수군에서 운용하는 것이 14척이다. 아직 기관출력이 모자라 기범선은 만들 수 없어 저탄소에서 멀리 떠날 수 없기에 서쪽으로는 청, 동쪽으로는 북구주까지 가는 항로가 끝이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유구에는 저탄소를 설치하지 않아서 대남도까지는 가지 못한다.[37] 대유주에도 그 소문이 퍼져 조선에는 연기를 뿜으며 움직이는 배가 있다고 알려져있다. 유구에서는 비밀도 아니라 유구 조정 차원에서 저탄소 유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판국이다. 한편 내수면에서도 증기선 사용이 늘어가는데 한강 마포나루를 건너는 나룻배도 판옥선 크기의 증기선으로 바뀌었다.
2.1.6. 외교
- 상주 외교관
청, 후금, 일본, 유구는 조선에 상주 외교관을 둔다. 청과 후금의 관원은 서평관, 일본 관원은 동평관, 유구 관원은 유구관에 머무른다. 대일 외교는 원래 오사카에서 행해졌으나 두 차례 기근으로 대일관계가 중요해지며 상주 관원이 생겼다. 그러나 한양대화재로 동평관이 전소되어 제물포로 옮겨간다. 잉글국, 불랑국, 내달국 등은 외교 사절을 상주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벽란도에 각국의 동인도회사 상관장이 상주하며 총영사 역할을 겸한다. 이 외에도 서, 아모국 등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상주 관원은 없다. 이후 남만 사신들을 위한 남평관과 루스 및 북변 야인 부족들을 위한 북평관이 만들어진다.
- 견서사
2부에서 재석은 죽기 전 유훈으로 반드시 7년마다 견서사를 보내라고 지시했으나 오래 지켜지지 않았다. 18년간 재위한 경조는 유훈대로 재위 중 5, 6차 견서사를 7년마다 파견했으나 이후 선조 때 지속되는 가뭄 때문에 견서사 파견은 중단됐고, 이후 대유주와의 교류는 전적으로 민간 상선에 의존했다. 7차 견서사는 북방에서 루스국과의 국경분쟁이 벌어진 후, 열조가 1658년 국경을 확정짓고 루스국에게 조선의 위엄을 보이겠다며 갈래선 4척의 대함대로 파견한다. 그러나 루스국에게 항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보내는 바람에 대함대는 수배국에 정박하고 막수구파까지 육로로 이동해서 국경을 확정짓고 온다. 현재의 8차 견서사는 예왕의 고자질로 건복제에게 찍힌 성친왕 이현을 유배보내기 위한 명목상의 견서사이다. 각국 군주들에게 보내는 친서가 있기는 한데 봉인되어 있어서 재석은 내용도 모르고 전달하고 있다. 어쨌든 대유주와의 교류는 여전히 활발하며, 종4품의 익문사 관원 셋이 각각 카디스, 암스테르담, 베네치아에 주재하며 대유주 소식을 보내고 있으니 견서사가 더이상 필요 없어져서 중단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동아시아
청과 후금과는 형제 국가로 여길만큼 사이가 좋다. 실제 루스국과 국경이 확립할 때도 후금에게 영토를 떼 줄 정도.[38] 한족 국가인 후송과 관계는 험악하지만, 그래도 주산 군도를 두고 밀거래는 하고 있는 모양. 대리국의 후신을 자처하는 사천의 서나라는 고려와 대리국 간의 관계를 되살리자며 먼저 접근해와 왕래하는 관계. 일본은 진서막부가 폐지되었지만, 장조 시절에 대차게 데인 경험 탓인지 친한파 번주들은 그대로 유지되는 등, 절대 대한을 자극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유구는 대한에 매년 2회씩 왕자나 왕제가 입조하며 사실상 피보호국이 되었으나, 매년 입조 때마다 받는 칭신 요구는 과거에 같이 명의 제후국이었던 것을 들면서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대한 측에서도 거의 포기해 버렸다.[39]
필리핀의 드 에체바리 총독이 대한과 내통할 수 있다는 의심 하나만으로 마닐라에 거주하던 화교 3만명을 학살하자, 이를 빌미로 필리핀 전체를 점유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 서양인들이 동양인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도탄에 빠뜨리니, 이들을 토벌해 몰아내고 덕으로써 직접 다스리며 성현의 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국구인 좌승상 민성윤도 건복제 시절 입조한 하와이인들을 가르치면서 유자로써 당연히 져야 할 짐이라고 표현한 것 처럼, 사대부 사이에 이미 널리 퍼져 있는 사고방식으로 묘사된다. 박해받는 모든 민족을 부조리에서 해방해야 한다는 이상론으로 흐를 수도 있는데, 이건 초강대국인 현재 미합중국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재석은 유자의 짐이 적절한 선에서 멈추도록 잘 관리하려 한다.
2.1.7. 사회
- 도시의 발전
유럽과의 교류가 늘어나며 한양 도성의 중심대로인 종로와 태평로에는 목제 레일을 깔아 철도마차가 운행하고, 도성 내 모든 도로는 벽돌로 포장되었다. 상가 건물들은 유럽식 석조/벽돌조 2층 집으로 지어진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일반 한옥도 창호지 대신 유리창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한강을 건너는 노량진, 마포, 한강진에서 사용하는 나룻배도 판옥선 크기에 증기기관을 장착한 대형선박으로 바뀌었다. 한양 외에도 지역 물류의 중심지인 평양, 개성, 인천에도 철도마차와 포장도로, 유럽식 주택들이 즐비하다. 한양의 인구는 무려 70만[40] 으로 늘어났다.
- 시헌력
경조시절 관상감에서 완성한 대한제국의 공식 역법. 시헌력이라고 이름 붙였다. 도래인들이나 천주교도들도 있기에 그레고리력도 어느 정도 사용되나 공식적인 날짜는 시헌력을 사용하며 이것을 통칭 국력이라고 표시한다. [41] 장조시절 부터 역법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 것 치고는 꽤나 오래 걸린 편이다.
- 도로망
한반도 본토에서는 호남대로, 영남대로 및 각 감영 소재지를 연결하는 간선도로 등 국가 주요 간선도로는 벽돌을 이용해 전부 포장도로로 만들어 마차가 다니는 데 전혀 불편이 없고, 그외 지선도로들도 지속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북방영토에서는 후금으로 가는 도로만 포장되어 있고 그외에는 아직도 흙길로 되어있다.
- 가마의 쇠퇴와 마차 보급
선조 시절 인마의 통행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벽제가 금지된다. 가마 자체는 아직도 합법이지만 길을 열 수 없으면 느려터진 가마를 탈 이유가 없게 되어 곧 사대부들은 가마를 타지 않게 되고 대신 마차를 타게 된다. 어릴적의 성친왕이 가마를 타봤다는 것을 보면 오락용으로 소수 사용되기는 하는 듯. 태황은 코끼리가 끄는 상거, 황태자나 황태제는 8두마차, 친왕과 군왕은 6두마차, 당상관과 후작 이상은 4두마차, 당하관은 2두마차, 일반인은 1두마차로 마차의 말 숫자가 법제화되어 있다. 따라서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말 자체의 품질과 마차의 장식으로 재력을 과시하는 문화가 생겼다. 조선 전통 솟을대문은 마차가 통과하기에는 작기 때문에 별도의 마차용 차문을 만들게 된다.
- 우측통행 정착과 차도와 인도의 구분
마차가 보급된 후 우측 통행이 법제화된다. 마차의 마부가 오른손에 채찍을 들기 때문에 우측통행을 하지 않으면 마주오는 마차의 마부가 채찍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차도도 확실히 구분되었는데, 이게 가마가 느려서 방해된다는 이유로 쇠퇴한 것과 합쳐지면 지정차로제로 연결될 수 있다.
도성 거리에 고래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가로등이 도입되었다. 다만 비용 문제로 통금이 시작되는 시간까지 켜 두다가 자정이 되기 전에 소등한다.
원역사와 마찬가지로,[42] 1650년부터 1682년까지 33년 동안 흉년이 아닌 해가 단 7년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경술년과 신해년[43] 에 정점에 이르러 국내에서만 40만 명의 아사자가 나왔다고 한다.[44] 이에 백만명 이상의 백성이 새로 생긴 요동주와 영락주, 대남주, 대미주로 이주한다.
- 시보
민간신문. 관영신문인 조보와 달리 민간에서 운영하는데, 정론을 내세우면서 구독료를 받는 부류, 명문가에서 세력 과시용으로 사재를 털어 찍어내는 부류, '참보'라 하여 각종 찌라시를 싣는 황색언론같은 부류가 있다. 사회 소식 전달뿐만 아니라 예전의 상소를 대신해 어떤 주장을 세상에 알리는 창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조정에서는 이것도 언로를 여는 것의 일부로 여겨 세금만 걷고 내용을 사전 검열하진 않는데, 참보들은 종종 혹세무민이나 음담패설로 소송을 당하거나 관아에 잡혀가기도 한다. 이런 시보들은 대부분 지역 신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김인황의 병균학 창시 후 병균학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대한의보라는 시보를 창시했고 전국의 의원들이 구독하기에 최초의 전국 단위 시보가 되었다. 병균학 찬반과 무관하게 거의 모든 의원이 이 시보를 구독하며 13도 9주 전체에 배송된다고 한다. 사실상 대한 최초의 학술정기간행물이 되는 셈으로, 재석은 귀국하면 과학자들을 위해서도 이런 학술정기간행물을 만들자는 생각을 한다. 시보에서 오보를 내는 경우에 대비해 형전에 해당 규정을 명문화했다. 오보가 확정되면 지면에 오보로 낸 기사와 같은 면적의 정정보도문을 싣고, 오보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경우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한다. 조보에 오보가 올라오는 것은 곧 조정의 권위에 흠집이 가는 것이기에 조보에는 철저하게 사실임이 확인된 진실만을 기재해서 보도가 아주 늦는 경우는 있어도 오보를 한 적은 없다.
정보의 유통이 자유로워진지 한세기가 흘러서인지, 원역사와 달리 반란이 일어나 진압했으며 태황이 와병중이라는 중대한 정보가 외국으로 흘러나가고[45] 지방에서 이와 관련된 시보 기사들[46] 이 범람하는데도 큰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정도로 정보에 대한 의식이 변화했다.
정보의 유통이 자유로워진지 한세기가 흘러서인지, 원역사와 달리 반란이 일어나 진압했으며 태황이 와병중이라는 중대한 정보가 외국으로 흘러나가고[45] 지방에서 이와 관련된 시보 기사들[46] 이 범람하는데도 큰 일이라고 여기지 않을 정도로 정보에 대한 의식이 변화했다.
- 노비제 축소
경조 시절 노비 소유주에게 노비 1인당 은 1냥의 노비세가 부과되었다. 이는 상식적인 수준의 세금이었으나 선조는 지속되는 가뭄과 명 멸망으로 인한 안보 불안을 이유로 이를 10배 인상해버린다. 장조 초기 노비 값이 은 1냥, 후기에 3냥이었으니 사실상 노비제를 중단하라는 것과 같은 조치였다.[47] 결국 사노비 대부분은 주인집의 소작농이 되는 형태로 면천되었고 일부 대갓집의 시종 정도만이 남는다. 그러나 대책없이 면천만 되었기에 오히려 노비 시절보다 생활 수준이 나빠진 이들도 많다고 한다.
- 전문 법률가(판관, 율관, 대송인) 제도
장조가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기 위해 사법권을 지방 수령에게서 순회판관으로 이관했는데, 판관들은 대부분 성균관을 갓 졸업한 유생들이라 법률 실무에 약해서 양반들이 경조에게 판관제도를 폐지할 것을 주청했으나, 경조는 부왕의 뜻을 바꿀 수 없다며 전문 법률가인 율관을 판관의 보좌 역으로 배치하도록 한다. 율관은 율과 시험을 통해 매년 300명씩 뽑으며 판관의 보좌 및 검사 역할을 맡는다. 퇴직한 율관들은 변호사에 해당하는 대송인으로 개업하는데, 양반들은 대송인들이 재판을 부추겨서 쓸데없는 소송이 늘어난다고 싫어하지만 법을 잘 모르는 백성들은 대송인을 통해서 재판을 할 수밖에 없어 유명한 대송인은 큰 돈을 벌수 있다. 율과 합격자가 아니면서 사이비 대송인 활동을 하다 걸리면 시베리아로 추방당한다.[48]
- 혹형의 폐지
잔인한 처형방식이 사라지고 독살형, 교수형과 참수형만 남았다. 거열형도 옛날과 달리 목을 자르고 사지를 자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49] 결국 조선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능지형을 당한 인물은 임해군이 되었는데, 무인지변 후 태황이 밝힌 바에 따르면 혹형을 폐지한게 백년쯤 되었다니 장조가 행한 혹형이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총살형은 화약 낭비라고 도입되지도 않았다. 대신 영토가 넓어진 덕분에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는 식으로 유배형은 더 독해졌다. 경인왜란록과 을미동정록이 퍼지면서 유럽에도 당시 전범들이 받은 혹형이 알려졌는데, 그래서 조선이 혹형을 일삼는 나라라는 오해가 퍼지게 되기도 한다. 필리핀 정벌전 때 항복을 권유받은 총독 드 에체바리도 알고 있을 정도이다[50]
- 의무교육
선조가 18세가 되는 모든 양인 남성이 1년간 정군으로 복무하는 제도를 정비하면서 전반기 6개월은 국문 교육과 충성심을 주입하는 정훈교육을 실시하게 하는데, 이것이 점차 국민 의무교육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유[51] 없이 군복무를 하지 않으면 따돌림받는 사회 분위기상 거의 모든 남성이 군대에서 국문과 충성심 교육을 받으면서 문맹자가 거의 없어지고, 그 영향으로 시보, 소설 등 출판시장도 함께 커지게 되었다.
- 금화도감→소방도감
도성의 방화를 담당하는 조직이며 2부 장조 시절에 세워진 것이 여전히 유지 중. 금화군의 정원은 총 2400명으로 3조 2교대로 일하는 정규 관원 800명, 군역을 금화군으로 대체하는 800명, 민보대라는 의용소방대 800명이다. 금화차는 멸화차로 이름이 변했다. 하지만 한성대화재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데다, 이 때문에 처벌받을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무인지변에서 반군 측에 가담하는 흑역사를 남겼고, 재편되면서 소방도감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멸화차 또한 소방차로 변했다.
- 벽돌집 보급
한양대화재 이후 한양을 재건하면서 3층 벽돌집을 짓기 시작한다. 급수가 안되고 화장실이 외부 공용 화장실이란 점만 빼면 현대식 빌라와 거의 같은 구조이다. 공동주택이며 각 층에 1호씩 3가구가 입주한다. 다만 무게 문제로 온돌을 1층에밖에 설치하지 못했으며 2층과 3층의 난방 수단은 쪽구들과 화로 뿐이다. 때문에 겨울에는 3가구가 다같이 1층에 모여서 지내는 사례도 있다.
2.1.8. 문화
- 복식의 변화
대외 교류가 늘어나며 호복, 양복의 영향을 받아 개량한복처럼 통이 좁아지고 옷고름이 없어지고 단추를 사용하고 옷깃과 소매에 장식을 붙이는 등 복장에도 변화가 생겼다. 또한 열기창이 설립된 후 면포 생산이 늘어 아무리 가난한 이라도 아주 헐벗은 이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궁중 복장은 칭제 후 대례복이 변한 것을 제외하면 2부 때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형준처럼 꼬장꼬장한 이들은 74년 전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군인들의 군복에는 후금에서 수입한 양털로 만든 펠트를 많이 사용한다.
원역사에서 남자의 귀고리 착용을 금지시킨 하성군이 이 세계관에서는 왕이 되지 않았기에 남녀노소 모두 귀고리를 하는 풍습이 유지되고 있다. 천주교인들은 십자가 귀고리를 한다.
- 온돌
165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에 접어들어 기후가 추워지자, 2부 시점만 해도 따뜻한 삼남 지방에는 없던 온돌이 거의 모든 집에 보급된다. 이에 장작과 석탄을 보다 많이 보급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탄광이 30개가 열렸다고 하며, [52] 잦은 장작과 석탄의 사용으로 금화군의 일도 늘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유세도
승경도와 비슷한 보드게임. 성균관에서 세계지리를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주사위를 굴려 세계일주를 빠르게 끝내는 순서를 겨루는데 도착하는 국가마다 해당 국가에 대한 퀴즈를 내서 맞추면 식량과 돈을 얻을 수 있다. 틀린다고 가진 걸 잃진 않지만, 식량은 매 턴 일정치 소모되고 돈은 호위 용병을 고용하거나 선물을 사는 등의 이벤트에 소모되므로 퀴즈로 추가하지 못하면 중도에 게임오버 당한다. 용병 없이 해적이나 산적을 만나면 돈을 모두 잃기도 하고 랜덤으로 양매창 등 질병이 발생하기도 한다.
- 연극 문화 활성화
2부 시점에서 시작된 연극 문화는 크게 활성화되어 70여년간 수많은 연극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공연되었다. 여전히 인기 투톱은 고다지전과 홍희동전. 2부 시점에 만들어진 의인황후의 정도극단과 상빈 이씨의 반촌극단은 대한 최고의 두 극단으로 라이벌 구도이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두 극단의 인기는 엄청나서 종종 북경, 상도까지 가서 공연하는 일도 있다. 반촌극단은 상빈 이씨 시절 색수피어와의 독점 계약으로 색수피어 번안 작품은 도성에서는 오직 반촌극단만 공연 가능하기에 이를 주 무기로 삼는다. 이 둘 외에도 십여개의 극단이 생겼으며 그 중에는 왜인극단도 있는데 이들은 양대극단이 확고히 자리잡은 도성에는 잘 들어오지 못하고 주로 지방에서 순회공연을 한다. 반촌극단의 색수피어 작품 독점은 도성에서만 유효하며 지방에서는 해적판으로 공연된다. 색수피어의 작품들은 한국 정서에 맞게 결말이 해피엔딩으로 바뀌었는데, 햄릿은 복수에 성공해 왕위를 되찾고 리어왕은 제정신을 차리고 효녀 코델리아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맥베스는 괴력난신을 믿던 찬탈자의 몰락을 다뤘기 때문에 유교 정서에 맞아서인지 그대로 공연된다. 색수피어가 상빈 이씨에게 헌정한 2개 작품 중 <하프 보관실에 불을 질러라>는 상연 중이지만 <피투성이 고뇌>는 무려 제1차 왕자의 난을 연극화한 것이라서 공연되는 일 없이 바로 왕실 서고에 처박혔다. 태종이 옳다는 내용이긴 하지만 백성들에게 왕자의 난을 상기시키는 것부터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 슬라브계의 후손인 백면나인들은 양대 극단인 정도극단과 반촉극단에서[53] 유주인 역 전담 여배우로 활동하며 유주인의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혼인도 자신들끼리만 한다. 지방 극단들은 백면나인 배우를 구할 수 없어서 노란 가발과 분칠로 분장하거나 아쉬운대로 유주계 혼혈인 배우를 쓴다.
- 담배
장조 시절엔 내수사 전매였으나 3부 시점에서는 국내외 소비량이 늘면서 민간에서도 재배를 허용했다. 단 가장 비옥한 땅에는 심지 못하게 하며[54] 사전에 신고하고 고액의 세금[55] 을 낸 자에게만 재배를 허용한다. 밀재배하다 걸리면 포도청에서 와서 태워버리는데, 이때 포도청에서 보고만 태웠다고 하고 몰래 가져다 파는 경우도 종종 있는 듯. 의학계에서는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논란이 있는 듯 한데, 병균학 지지자들은 담뱃진이 병균을 죽인다는 것 때문에 담배를 약재로도 사용하는 듯 하나 열조 시기 의원 김의진이 흡연자의 시신을 부검하여 흡연자의 배가 검어진다는 것을 입증하였기에 병균학 반대자들은 담배를 유해하다고 보고 있다.
- 양화
2부에서 조선에 눌러앉은 안토니오는 자기 아들을 비롯해 여러 제자를 키웠고 이들에 의해 서양식 화풍이 퍼졌으며 도화서 화법에도 원근법 등 서양식 기법이 일부 도입된다. 그러나 임금의 어진은 여전히 전통 기법으로만 그리며, 서양식 초상화는 종종 그리기만 하고 공식 어진으론 쓰지 않는다. 도화서 내에 양화원이라는 양화를 그리는 부서가 생긴 듯. 재석은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의 그림 야경을 비롯하여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56] , 프란츠 할스, 요하네스 베르메르 등 당대에는 저평가되었으나 후대에 명화로 인정될 작품들을 다수 구매한다. 하지만 이 명화들 중 4점은 무인지변 도중 불타서 소실된다.
- 다점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반촌다점은 3부 초반까지도 성업 중이었으나 무인지변 도중 반군의 방화로 전소되고 이후 벽돌 구조로 재건된다.. 그 외에도 반촌다점을 모방한 다점들이 생겨났다. 다만 술을 팔지 않고 다녀를 희롱하거나 동석하는 것도 금지하는 반촌다점과 달리 이런 다점들은 주류도 판매하며, 다녀와 동석하거나 그 이상도 한다. 때문에 사실상 색주가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 출판업
식자 층이 늘면서 소설의 판매와 수요가 늘어났다. 저작권과 판권도 어느 정도 선에서 지켜지고 있다.
김만중은 원역사에서처럼 구운몽을 집필했는데[57] , 그 내용은 달라졌다. 주인공 양소유는 당이 아닌 남송 사람이며 8명의 히로인들 또한 남송, 금, 거란, 일본, 달단, 천축, 고려, 서역 출신이다. 양소유는 대송의 부활을 꿈꾸는데, 명 부활은 칭제한 대한이 다시 명의 조공국 조선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되기에 명이 아닌 송의 부활을 꿈꾸도록 설정했다. 양소유는 결국 송을 재건하고 송나라 승상이 되어 2처6첩을 거느리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매우 인기있는 소설이라서 본토는 물론 미주에까지 출판본과 필사본이 유통되고 있다.
- 올렝카전(가칭)
폴수국왕의 서녀 올렝카가 성친왕과 사랑에 빠졌고, 성친왕이 올렝카의 아버지 얀 3세 소비에스키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공을 세워 결국 올렝카와 이루어졌다는 소식[58] 이 대한으로 퍼졌는데, 이 게 전형적인 로맨스 판타지 플롯과도 같았기에 이를 소재로 한 로망스 소설과 야설들이 많이 출시된다. 황족을 소재로 삼는만큼 법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주인공의 이름은 성친왕이 아닌 다른 가상의 친왕으로 변경되어 나온다. 개중 올렝카를 소재로 야설을 쓴 이들은 이름을 바꾸거나 말거나 모두 재석에게 너 고소를 먹고 북변으로 전가사변되는 인실좆을 당했다. 로망스의 경우 현실과 다르게 올렝카가 성친왕의 측실이 아닌 정실이 되는 결말을 맞으며, 개중에는 성친왕이 천주교로 개종한 뒤 폴수국왕의 부마가 되어 대유주에 눌러앉거나 심지어 아들이 없는 폴수국왕의 후계자가 되는 버전도 있다. 재석 빙의 이전 망나니 시절을 모르는 세대는 이 로망스를 통해서 성친왕을 접했기에 성친왕을 정인을 위해 목숨을 거는 멋진 남자라고 인식하게 되었으며 성친왕은 수많은 소녀들의 동경의 대상이 된다.
본차이나. 해삼위에서 생산되며 대부분 대유주로 수출되지만 일부는 내수용으로 유통된다.
2.1.9. 식생활
요리에도 쓸 수 있고[59] 과학 실험이나 의료에 필요한 도구를 소독하는데 쓸 수 있고 연료도 아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대한에 전파하기 위해서 재석은 압력솥 개발자 파팽[60] 에게 압력솥 제조에 대한 권리를 샀다. 하지만 재석이 귀국한 후 예왕과 계승권을 놓고 싸우는 입장이 되자 장사로 돈벌이나 한다고 공격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압력솥 장사는 시작도 못하고 재석의 일가족만 쓰고 있었다가 재석이 건흥제로 즉위 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해서 업소용으로 상당히 잘 팔리고 있으며, 개를 통째로 삶을 정도로 크기도 커졌다. 가격은 비싸지만 연료를 아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몽골에도 수출이 이뤄지고 있다. 재석은 전생 때처럼, 태황이 되지 못할 자식들에게 하나씩 물려줄 생각으로 사업체는 민성윤 명의로 만들었다.
피자는 유주전(遺洲煎)이라고 불리며, 2부에서부터 반촌주점에서 팔고 있었다. 테두리가 거의 없고 젓가락으로 집어먹을 수 있게 파전처럼 썰어서 내놓는 형태. 유럽에 체류할 때는 앙투안이 만드는 프랑스 요리를 먹었기 때문에 요리에 별 관심이 없던 재석이가 미주에 온 이후 피자(披蔗)라는 이름을 붙이고 피자 화덕을 만들었다. 아직 토마토 소스가 없기 때문에 꿀과 치즈를 기본으로 고구마 무스를 올린 형태. 멕시코에서 파인애플이 싸다는 걸 알게 된 재석은 시험삼아 파인애플을 토핑으로 사용해서 하와이안 피자도 만들어 본다. 콜라와 같은 탄산음료는 아직 만들지 못해 샴페인으로 대체 중. 다만 새로 만든 피자들은 현재 주인공들만 먹을 뿐, 2부의 부대탕처럼 널리 퍼지진 않았다.
- 술의 참나무통 숙성
유주에서 하는 것 처럼 술을 참나무통에 숙성시키고 있다. 한반도와 만주에 자생하는 신갈나무도 유럽 품종인 로부르참나무나 북미 동부 품종인 화이트 오크처럼 목재 내에서 수분의 이동을 막아주는 타일로시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술의 숙성에 적합하며, 매우 우수한 향미를 줄 수 있다. 신갈나무통에 술을 숙성시키면 술이 부드러워지고 바닐라향이 강해지므로, 와인이나 위스키, 브랜디처럼 전통주에도 바닐라향과 탄닌에 의한 바디감이 추가될 것이다.
- 당밀주
럼.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드는 싸구려술.
포도주의 양조에 적합한 남미주를 점유함에 따라 성모곡(원 역사의 나파밸리)에서 예수회에 의한 미주산 포도주의 양조가 시작되었으며, 포도주를 증류한 화주도 많이 퍼졌다. 원역사 기준 17세기 초반에 세계 최초로 양조 중에 동일 원료의 주정을 넣어 발효를 중단시키고 보존성을 강화시킨 주정강화 청주 과하주를 만든 한인들답게 원역사의 포트나 셰리, 마데이라 같이 양조중인 포도주에 화주를 넣은 주정강화 와인인 성모주도 양조되고 있으며, 재석이 미주시절부터 즐겨 마신다. 기근 와중에는 곡식을 소비하는 막걸리와 청주, 과하주, 소주, 호주(보드카) 대신 주로 포도주와 성모주, 화주, 당밀주가 소비된다.
바나나. 대한에 존재는 알려졌지만, 운송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본토까지는 거래되지 않는다. 태황도 맛보지 못하는 귀한 과일이지만 주산군도에서는 접할 수 있다.
팝콘. 본국에서는 거의 먹지 않으나 대미주에서는 서민들의 간식으로 널리 퍼져있다. 아직은 소금간만 하는 정도라 맛이 요즘 팝콘처럼 다양하지는 않다.
샌드위치. 재석이 발명했고 손님들에게도 대접한다. 성친왕이 만든 과자라 하여 전하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대한의 식사 문화는 밥과 반찬으로 제대로 차려먹어야 식사로 간주하기에 예법을 중시하는 본국 출신들은 식사 대용품이 아닌 간식으로만 취급한다.
- 단팥죽
전통적인 팥죽에는 소금을 쳤지만, 대남도에서 설탕 생산이 늘면서 부잣집에서는 설탕을 넉넉히 넣은 단팥죽을 먹는다고 한다.
- 튀김집
무종 시절 기름 공급이 증가한 이후로 튀김 요리는 백성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게 된다. 가죽신도 튀기면 맛있다는 속담까지 나올 정도. 그러나 일반인이 기름을 대량으로 구해서 직접 튀김을 하기는 어렵기에 전문적으로 튀김 요리를 만들어 파는 튀김집들이 많이 생긴다. 한양 대화재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핫초코. 마닐라 갈레온을 통해 수입되어서 서반아에서 온 검은 차라는 뜻의 서현차라는 이름이 붙었다. 코코아가 전량 수입품이고 수요도 별로 없기 때문에 한 잔에 은 1냥[61] 정도로 매우 비싸며 반촌다점에서는 한 잔에 은 2냥을 받고 팔고 있다. 그래서 아무 때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중전인 상희 한 명 정도밖에 없으며 후궁인 올렝카조차 상희가 따라줄 때에나 마셔볼 수 있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 재석이 태황이 된 후 현대에 먹던 중화요리가 그리워 소명동에서 산동 출신 중국계 요리사에게 지시를 내려 수개월의 시행착오 끝에 오래 묵은 첨면장을 이용해 그럭저럭 현대 짜장면과 비슷한 흑장면을 개발했다. 초탕면과 탕수육은 레시피를 대강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만들게 했다. 주로 업무 중 중신들과 함께 먹는데, 태황과 같은 메뉴를 선택하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재석이 흑장면을 고른 날은 모든 중신이 초탕면을 고르고 재석이 초탕면을 고른 날은 모든 중신이 흑장면을 고르는 특이한 암묵의 룰이 생겼다. (다만 이는 혹시나 모를 독살 위험에 쉽게 대처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태황요리만 1개로 지정해서 시도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일수도 있다) 탕수육의 경우 재석이 찍먹을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따라서 찍먹을 하며, 대한 전체에서 탕수육을 부먹하는 사람은 재석 눈치를 보지 않는 상희 단 한 명이다.
2.1.10. 과학
현미경. 열조 재위기에 천리경을 갖고 노는 취미를 가졌던 인천의 의원 김인황이 광학과 경면 연마기술을 스스로 배워 내달국제 유리로 제작했다. 원역사의 레벤후크 현미경과 비슷한 성능이라고 하며 원역사보다 20여년 앞섰다. 원역사에서 레벤후크가 자신의 현미경 제작법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아 레벤후크 사후 한동안 현미경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는데 김인황은 특허 제도 때문인지 세치경 제작법을 공개하여 이진원도 하나 갖고 다닐 정도로 보편적으로 퍼졌다고 한다.
- 미생물학
세치경 발명자 김인황이 세치경을 이용해 1656년(연가 7년) 적혈구를 발견한다[62] . 원역사보다 19년 빨랐다. 그 후 머리카락, 피부, 정액 등을 관찰하여 정자도 발견한다. 뒤이어 1663년(연가 14년) 건강한 사람과 달리 역리 환자의 변에서만 병균(시겔라)이 발견되고 이 병균을 먹으면 역리에 걸린다는 것을 발견하여 병균학이 확립된다. 이질균 발견은 원역사보다 234년 빨랐다. 그러나 모든 병에서 병균이 관찰되지는 않았으므로[63] 병균학에 대해서는 찬반이 갈린다. 이에 대한 해석으로 모든 병이 병균 때문은 아니라는 해석과 일부 병균은 너무 작아서 세치경으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으로 나뉜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맞지만 아직 소설 세계관에선 밝혀지지 않은 내용.
- 해부학
2부에서는 유럽에서 해부학을 도입하여 교육은 했음에도 유교 정서적인 문제로 직접 인간을 해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널리 퍼지면서 관아에서 행려병자들의 시신을 모아 의원들이 해부해볼 수 있도록 제공하고 있다. 이 때문에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시신을 비교해 담배가 폐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서학당
성친왕이 된 주인공이 프랑스에서 모집해 대한으로 보낸 학자, 기술자들과 프랑스 아카데미, 영국 왕립학회 등에서 얻은 학술자료들을 활용하기 위해 태황 건복제가 세운 학교.
- 의학
동의보감으로 대표되는 독자적으로 발달한 한의학에, 재석과 상희의 미래지식에 더해 서양의 양의학까지 들어오면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의학 기술을 자랑한다. 아무리 최고의 의사들만 선발했겠지만 몸이 허약한 건복제를 21년이나 재위할 수 있게 해주었고 야전에서도 다리 절단 수술을 하고 사람을 살려놓을 수 있을 정도이며, 대한에서도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철저히 비밀을 지키는 반면 의학기술엔 그런 제약을 두고 있지 않아서, 주변국에서 유학생들도 받고 있다.
- 광혜원
한양대화재 때 기존의 혜민서 등 의료시설만으로는 부상자 치료에 역부족임을 명분삼아 세운 국립의료원. 의원 50명에 환자 1천명을 입원시킬수 있는 대형 병원으로 3층 벽돌건물로 지어지고 소의 힘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했다. 자기들의 밥그릇을 뺏어가는 것으로 오해한 의원들이 병균학파 비병균학파 할것 없이 단합해 반대 상소를 올리고 대한의보를 통해 여론전을 펼쳤으나 재석이 강행한다.
- 조피(양매창갑, 좆껍데기)
콘돔. 돼지 창자를 명주실로 묶어 만든다. 1670년대부터 사용되었다는데 의원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발명자가 누구인지는 불명이다. 양매창을 막는 물건이라 하여 양매창갑이라고도 불리며 상민들은 그냥 좆껍데기라고 부르는데 이를 점잖게 부르는 조피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졌다. 처음에는 양매창 예방용으로 색주가에만 보급되었으나 피임용으로 사용되며 소비량이 폭증한다. 이에 조정에서 '정교는 자식을 낳고자 하는 것인데 이를 막는 것을 옳지 않다', '돼지 창자도 음식인데 한 번 쓰고 버리긴 아깝다', '양매창을 확실히 막을 수도 없다', '간통자들이 임신을 피하기 위해 악용한다' 등 많은 논란이 되었고 숙조는 조피를 색주가에서만 쓸 수 있도록 정했다. 이후 법적으로 색주가에서 조피 사용량을 관아에 보고하고 소모분만큼만 보충받도록 되지만 창기들이 관계하는 횟수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기에 빼돌려서 시중에 유통되는 양도 상당히 많다.
2.1.11. 동식물
- 응방
매나 사냥개를 돌보던 응방은 3부 초기 시점에는 코끼리, 대왕자라, 원숭이, 악어, 코뿔소, 사자, 물소, 호랑이, 불곰, 반달곰, 멧돼지, 사슴 등 온갖 동물을 키우는 거대 동물원이 되었다. 민간에도 개방되어 있으며 관람료로는 육식동물 먹이로 주기 위한 동물을 받았다. 인기가 가장 많은 동물은 코끼리와 대왕자라[64] . 결국 너무 비대해져서 한양대화재 이후 홍제동에 새로 전문 동물원 홍제원을 지어 그 곳으로 동물 대부분을 옮기고 기존의 응방에는 원래대로 매와 사냥개를 돌보는 기능만을 남겼다.
- 홍제원
응방에서 동물들을 옮겨서 새로 지은 전문 동물원. 대한이 정복한 넓은 강역을 과시하는 목적으로 회색곰, 재규어, 퓨마 등 미주의 진귀한 동물들도 모아와서 전시할 예정이다. 또한 천축국을 통해 사자도 수입해오기로 한다.
양응룡의 난 토벌 중 이항복이 잡아왔고 외래 동물 중 가장 널리 퍼졌다. 관상용과 약용으로 쓰이며 닭처럼 흔하진 않지만 행세깨나 하는 집마다 몇 마리는 키운다고 한다.
쓸모도 없는 주제에 개체수만 엄청나게 불어나서 악어 먹이로 줄까 했지만 너무 끔찍하다고 기각, 다 풀어줘버렸다. 이후 인왕산에 눌러앉아 개체수를 불리며 민가에서 음식을 훔쳐먹는데 영물이라고 죽이지는 못하는 골치덩어리가 되었다. 추후 경신대기근 때 굶주린 백성들이 모조리 잡아먹으며 해결되었고 이후 응방에서는 원숭이 개체수를 12마리로 유지하고 있다.
응방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동물. 3부 시점에 전시중인 개체는 선조의 칭제건원 때에 샤 자한이 선물로 보내준 개체인데 장조가 타던 코끼리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그외에도 유구에서 자주 코끼리를 바쳐 태황의 수레를 끄는데 사용한다.
- 고양이범
퓨마.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민무늬범이라 불렸다. 아무래도 표범보다 작고 그다지 사납지 않다보니 만만하게 취급되는 듯. 인가 근처로 와도 대개 몽둥이찜질로 쫓아낸다.
- 대표
재규어. 대표는 미주 조선인들 거주지에는 없으나, 일단 알고 있다는 걸 보면 인디언들에게 이야기를 들었거나, 그들이 거래하러 가져온 가죽 등을 본 모양.
미주에서 호랑이 포지션이다. 크고 사납다보니 생포할 엄두도 못 낸다고. 배에 태우는 것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고 하는 걸 봐서 본국의 응방으로 보내진 개체는 없는 듯 하다.
칠면조. 조선에서는 머리 피부가 붉어서 사람들이 화계(火鷄)라고 부른다. 서반아계라고 불리는데, 맥시코에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65] . 덩치가 큰 만큼 고기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서민들에게 널리 퍼졌지만, 조리하기가 영 쉽지 않은 듯[66] .
하와이에 재배되고 있는 게 확인되었다.
원역사에서는 1768년경 멸종되었지만, 서식지를 손에 넣은 조선이 사냥금지령을 내려 멸종을 피했다[67] .
2.1.12. 종교
2.1.12.1. 불교
원역사와 달리 박해가 없기에 여전히 교세를 유지하고 있다. 신도의 수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승려의 수는 대략 5만이다. 혜비 진씨, 황태후 이씨 등 황실에서도 불교를 믿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상류층 내에서는 여전히 천주교보다 인기인 듯.
- 도사
불교계의 수장으로 모든 사찰과 승병을 제외한 승려들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선조 건원제 대에 만들어졌다.
- 도총섭
승병들을 총괄하던 도총섭은 그 직책명은 남아있으나 승병이 유명무실화 되었기에 사실상 불교계 원로를 위한 명예직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건흥제 즉위 후 천축행 성지순례가 시작되며 순례단 호위라는 임무가 생긴다.
승병이 담당하던 특수병과가 정규군으로 넘어가서 거의 유명무실해진다. 그래도 본토에서는 존재는 하는데 미주와 대남에는 절이 있음에도 승병은 필요하지 않아 조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건흥제 즉위 후 천축행 성지순례가 시작되며 순례단 호위라는 임무가 생긴다.
재석의 명령으로 석가모니의 출생지와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 등 천축국에 위치한 불교의 성지에 순례단을 보내도록 했고 그 순례단의 호위를 승병이 맡도록 한다. 재석이 굳이 불교 성지순례단을 조직한 이유는 원역사의 유럽에서 여행 산업이 성지순례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을 참고하여 대한에서도 해외여행 산업이 시작될 기반을 만들기 위함이다. 수입을 더 늘리기 위해 일본이나 중국의 불교계에도 동반 성지순례를 제안할 것도 고려하고 있다.[68] 또한 만일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불교 성지가 파괴되거나 순례단이 피해를 입을 경우 불교 보호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성지 인근을 점거하여 천축에서의 세력 확장 명분으로 삼겠다는 제국주의적인 계획도 있다.
- 주요 사찰
3부 초기까지는 황실 원찰로 유지 중이었으나 한양대화재로 전소되었고 석탑도 무너진다. 화재 복구 과정에서 재석은 이 참에 도성 밖 왕십리로 이건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능가하는 초고층석탑을 지어 랜드마크 겸 파수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불교계는 도성 밖으로 밀려나는 것에는 불만이 있다.
- 대명사
대구 대명동에 위치한 절. 명 유민들이 주로 찾는 곳으로 보인다. 무인지변 이후 아들이 역적이 된 뒤 사사당하자 절망한 혜비 진씨가 이 곳으로 들어간다.
양주에 위치한 절. 원역사에서 언제인지도 모르게 사라진 것과 달리 유지 중이다. 황태후 이씨가 자주 방문한다.
2.1.12.2. 천주교(남만도)
1680년대 대한의 천주교 신자 수는 약 80만명. 이 중 상당수는 구주의 일본계, 북방의 여진계 신도이다. 예수회는 여전히 조선에 독점적인 포교권을 가지고 있어 조선이 차지한 북미 서부까지 예수회가 담당하고 있다. 사대부나 관료들 중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늘어났으며, 전국에 수십 개의 성당이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황실에서도 덕비 허씨가 천주교에 귀의하며 신도가 생겼다. 천주교를 낮잡아 부르는 남만도라는 비칭도 생겼다.
- 마포 대성당
앙리 4세가 보내준 기술자들이 건설하기 시작한 마포 대성당은 1666년 완공된다. 전근대 성당들이 건축에 수십년씩은 기본적으로 걸린 것을 감안하면 60년은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은 셈. 대성당으로서의 기능 외에도 마포나루를 방어하고 한양의 서쪽 통로를 지키는 요새 역할도 한다. 완공 직후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루스 사절단 방문 기간 동안 루스 사절단에게 주 1회 임대하여 정교회 미사도 진행하고 있다.
2.1.12.3. 정교회
장조 시절 이기빈이 데려온 백룡군, 백면나인 등 슬라브인들이 조선 최초의 정교회 신자들이며 그 후손들 중 약 300여명이 3부 초기까지 정교회 신앙을 이어오고 있었으나 정교회 성직자나 교회는 없었다.
이후 루스국 사절단과 함께 정교회 사제가 입국하며 본격적으로 대한 정교회 역사가 시작된다. 대한에 정교회 성당이 없기에 재석이 토마스 주교에게 부탁하여 주 1회 마포 성당을 루스 사절단에게 빌려주도록 하여 정교회 미사가 열리기 시작한다. 이 소식을 듣고 대한에 남아있던 300여명의 정교회 신자들이 이 미사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자체 성당도 없고, 유일한 정교회 사제가 루스 사절단 소속이기에 5년 후 사절단이 귀국하면 미사를 진행할 성직자가 사라지며, 태황인 재석 본인이 관리해야 할 종교 하나가 늘어나는 것을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이 문제이다.[69] .
2.1.12.4. 반주교
개신교. 천주교가 먼저 알려졌고 개신교는 그에 반대하는 종교라는 의미로 반주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일부 외국인 외에 신자는 전혀 없으며 선교 또한 금지되어있다.
개신교의 독선적 성향에 대해 현대인이었을 때부터 부정적이었던 재석은 위그노인 달레 대령과 대화해본 후 그의 강경한 종교관에 학을 떼고 반주교의 독선이 어느정도 줄어들고 반주교와 천주교의 악감정 또한 희석되는 근대 이전까지는 절대 대한에 반주교를 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2.1.12.5. 회회교
이기빈의 모카 약탈 당시 유입된 아프리카 출신 흑룡군의 후예들이 여전히 믿고 있다. 회회당은 도성에만 하나 있다. 흑룡군 대다수가 음주와 돼지고기를 즐기는 나이롱 신자들이라 선교에 적극적이지도 않고 여러 이유로 회회교의 이미지가 좋지도 않아서 한인들에게 전도되지도 않은 듯 하다. 성직자가 있는지는 불명.[70]
2.1.13. 연도별 주요 사건
'''스포일러가 될 정도로 자세하게 기술될 경우 문피아 측의 이의제기로 항목이 삭제될 위험이 있으므로 지나치게 자세한 기술은 자제 바람.'''
- 하와이 복속 - 1692년
태평양 제해권 확보를 위해 재석은 하와이로 항해해 하와이를 발견하고, 하와이 원주민을 복속시킨다. 대한 본국에서 관리사가 파견되고, 하와이는 대한의 지원을 받은 마우이가 정권을 잡는다.
- 아파치 토벌 - 1693년 ~ 1694년
재석은 자신의 은광을 약탈한 아파치를 토벌하기로 마음먹고 본국에 원군을 요청해 토벌을 시작한다.[71] 길잡이 역할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던 파이우트족은 자신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미주 속오군을 함정에 빠뜨려 살해하는 바람에 7개 부락이 초토화되고 복속되며, 근처에 살던 유트족은 대한의 군사력을 목격하고 스스로 신종한다. 애리조나 일대의 푸에블로족(과 그 일부인 호피족)과는 처음에는 오해로 싸웠으나 그 후 우호관계를 맺었다. 아파치족 부락을 습격해 아파치에 납치된 원주민, 스페인인들은 구출하고 아파치 일부를 포로로 잡는다. 포획한 아파치족의 일부는 교화를 목적으로 본국으로 강제로 데려가고, 나머지는 경고를 위해 돌려보낸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과는 일단 콜로라도 강을 경계로 하기로 잠정 합의하고 콜로라도 강에 보루를 건설해 아파치를 경계한다.
전투 외적으로도 나비효과를 불러왔는데, 이때 재석과 함께 전투를 치르면서 장희재가 성친왕의 진면목을 알고 무인지변 때 예왕의 편으로 넘어가지 않는데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전투 외적으로도 나비효과를 불러왔는데, 이때 재석과 함께 전투를 치르면서 장희재가 성친왕의 진면목을 알고 무인지변 때 예왕의 편으로 넘어가지 않는데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 을병대기근 - 1695년 ~ 1697년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대기근이 발생해 아사자가 첫 해에 50만명이, 두번째 해에 10만명이 발생하지만, 경신대기근의 경험과 청금연합군과의 교전 중 대한의 참전을 두려워한 후송의 교역 유지로 쌀 수입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대미주로의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도 많아 7년 동안 인구의 19.1%인 141만 6274명이 아사한 원 역사보다 훨씬 양호하게 극복한다. 3년차부터는 아사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고, 5년 동안 기근을 겪은 원 역사와 달리 4년차인 1698년 부터는 본래의 사회 분위기로 돌아간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한양에 올라온 수만명의 난민들이 남산 기슭에 움막촌을 짓고 살다가 한양대화재 때 피해를 키우게 된다.
- 한양대화재 - 1698년 10월 20일(양력 11월 22일)
세종대왕 시절의 한양 대화재보다 훨씬 심각한 대한 역사상 최악의 대화재. 한양의 남부 7개 방, 중부 2개 방이 전소되었고, 집계된 피해는 사망자 5천여명[72] , 실종자 1천여명, 가옥 1만8천여채 전소다. 재석이 공을 들여 원역사보다 200여년 더 유지된 원각사도 석탑까지 붕괴되고 전소된다. 발화점은 피맛골에 위치한 전문 튀김 요리집. 재석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출에 공을 세우고, 건복제가 실신하면서 황태제로 가책봉되어 대리청정에 나서 후계자로 확정되는 계기가 되고 이는 후술한 무인지변의 원인이 된다. 피해 복구를 위해 도성복건도감이라는 임시 기구가 설치되었으며, 전소된 가옥은 재석의 주도 하에 용적률을 높인 3층 벽돌집 위주로 재개발되며 한양은 보다 근대적으로 재설계된다. 특히 관공서 건물들의 피해가 커서, 알려진 것만 해도 병부, 금위사[73] , 의금부[74] , 전옥서[75] 건물이 전소되었다.
- 무인지변 - 1698년 10월 29일(양력 12월 1일)[76]
진행상황: #
성친왕이 황태제로 가책봉 되며 대리청정에 나서 확실한 후계자가 되고 예왕이 보낸 암살자였던 김종건이 살아서 성친왕에게 보호받고 있음을 알게 되자 이대로 성친왕이 즉위하면 숙청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빠진 예왕과 한양대화재 책임을 져야 할 대신들이 뭉쳐 조급하게 일으킨 난. 그러나 준비가 부족했고 내부 의견 조율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기에 하루만에 진압된다. 피해는 관군 전사자 85명[77] , 반군 전사자 1081명[78] , 민간인 사망자 약 40명[79] . 그리고 성친왕저에서 시작된 불길이 성친왕저와 동촌 일대를 전소시켜 재석이 수집한 대유주 서책들과 렘브란트의 것을 비롯한 명화들도 불타버렸고 반촌 다점, 주점, 극장도 모두 전소한다. 예왕은 마포나루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생포되어 사사당했으며 남대문에서 전사한 김희준[80] 을 제외한 나머지 수뇌부와 대대장 이상 장교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병사들은 무보수 노역형 후 보상 없이 불명예제대, 하급 군관들은 인도 파견, 성친왕저를 습격해서 금군 및 민간인들을 살해한 수어청 2대대 및 반란에 참여한 족친위는 장 100대 후 북변 노역에 처해졌다.
성친왕이 황태제로 가책봉 되며 대리청정에 나서 확실한 후계자가 되고 예왕이 보낸 암살자였던 김종건이 살아서 성친왕에게 보호받고 있음을 알게 되자 이대로 성친왕이 즉위하면 숙청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빠진 예왕과 한양대화재 책임을 져야 할 대신들이 뭉쳐 조급하게 일으킨 난. 그러나 준비가 부족했고 내부 의견 조율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기에 하루만에 진압된다. 피해는 관군 전사자 85명[77] , 반군 전사자 1081명[78] , 민간인 사망자 약 40명[79] . 그리고 성친왕저에서 시작된 불길이 성친왕저와 동촌 일대를 전소시켜 재석이 수집한 대유주 서책들과 렘브란트의 것을 비롯한 명화들도 불타버렸고 반촌 다점, 주점, 극장도 모두 전소한다. 예왕은 마포나루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생포되어 사사당했으며 남대문에서 전사한 김희준[80] 을 제외한 나머지 수뇌부와 대대장 이상 장교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병사들은 무보수 노역형 후 보상 없이 불명예제대, 하급 군관들은 인도 파견, 성친왕저를 습격해서 금군 및 민간인들을 살해한 수어청 2대대 및 반란에 참여한 족친위는 장 100대 후 북변 노역에 처해졌다.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1701년 ~
카를로스 2세의 후계자인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종두를 맞고 생존해, 프랑스가 스페인에 선전포고하여 개전된다. 스페인은 견서사 시절 루이 14세와 친분을 다진 건흥제가 필리핀과 누에바 에스파냐를 공격할것을 우려해 1702년 여름 필리핀에 불법체류중이던 한인들을 학살하고, 대한의 참전 분위기가 고조된다.
- 대한-스페인 전쟁 - 1703년 ~
스페인의 필리핀 한인 학살사건에 대해 시보, 참보들의 과장보도로 대한의 여론이 들끓고, 남도순변사 김만중이 필리핀 총독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교섭이 결렬되자 1702년 12월 말 대 스페인 개전이 결정되고, 1703년 3월 24일 대한 원정군이 출정한다.
2.2. 한족
명이 멸망한 후 한족계 국가로 송나라와 서나라가 건국됐다. 그러나 대한에서는 진정한 중화의 후계는 천명을 이은 우리 대한이라며 후송과 서는 도적떼로 간주, 대놓고 때놈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중화로 인정하지 않는다.
2.2.1. 명(멸망)
1368~1630.
원역사와 비슷하게 정묘년을 전후로 전국 각지의 농민반란에 시달렸고, 원역사와 달리 2부에서 황태자 주상락이 독살당하고 욕심많은 주상순이 태창제로 즉위한 바람에 농민반란이 원역사보다 좀더 빨리 터졌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청했으나 당시 막 즉위한 선조는 장조의 유훈을 기억해 국상과 가뭄을 핑계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연만이 아니라 다이샨 역시 개입하지 않았고, 결국 대차게 멸망했다.
하다못해 원역사에서는 사실상 청과 이자성군의 협격에 가까운 모양새[81] 였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그냥 농민반란 하나로 망했다. 원역사에서도 존재하는 기근, 그리고 원역사를 능가하는 폭정의 콤보. 덕분에 원역사에서는 반란 진압 과정에서 일찌감치 전사한 고영상이 생존하여 화북지역 반군 지도자로 활약했다. 고영상은 귀부를 명목으로 모문룡을 통해 태창제 주상순에게 뇌물을 바치려 시도했고, 이를 눈치챈 웅정필이 모문룡을 처형했는데 이걸 자신에게 들어올 뇌물을 끊었다며 주상순이 길길이 날뛰며 웅정필을 처형했다.
덕분에 웅정필군은 허무하게 붕괴하고 고영상 군은 웅정필 군까지 흡수하여 그대로 북경을 들이쳤고, 주상순은 황궁을 탈출해 조선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붙잡혀 살해당하고 그것으로 명은 멸망한다. 이 시기가 1630년으로 원역사보다 14년 일찍 멸망한다. 주상순은 살이 져며지고 고깃국이 되어 고영상군에게 잡아먹힌다.
이러한 농민반란 과정에서 폭정에 시달린 농민들의 분노로 명의 황족은 사실상 멸족, 황족이고 뭐고 할 거 없이 주씨 성을 가진 사람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당했다고 한다. 명의 황족 중 유일하게 제대로 생존이 확인된 주상락의 아들 주유교만이 겨우 일가족을 이끌고 조선으로 탈출하여 대명공에 봉해지고 대구 대명동의 명나라 유민 5천호를 식읍으로 받고, 본인이 직접 건축한 대명묘에서 명나라 황실의 제사를 잇고 있다. 대명공은 황족도 할 수 없는, 대한에서 유일하게 세습 가능한 작위로 남아 있다.
명은 멸망한지 오래이지만 대명동의 인구 5천호, 그리고 대륙에서 흘러온 명나라 유민들이 모인 소명동에서는 여전히 그 언어와 풍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상 차이나타운인 셈. 주산군도에서는 멸망한 명의 유신들이 대대로 관직을 이어가면서 그 잔재를 이어나가고 있다.
2.2.2. 후송
1633~.
송 공종의 후손을 자처하는 농민반군 지도자 조승복이 강남 일대에 세운 나라. 후송은 편의상 명칭이고 공식 국호는 대송이다. 소금 잠상 출신인 조승복이 건주군이 북경을 함락한 고영상 반란군을 진압하고 화북을 장악하는 2년 사이 강남에서 일어난 수많은 반란군 세력들을 규합하여 1633년 건국했다. 건주군의 공격으로 장강까지 밀려났으나 건주가 화북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반격하여 회수까지 밀어냈고 회수 선에서 국경이 교착되었다.
- 인구
추정 인구는 약 7천만.
- 외교
한수, 회수를 사이에 두고 청과, 강남일통의 욕심으로 상강을 사이에 두고 서와, 해상에서는 대한과 대치 중이다. 청을 회수 이북으로 밀어낸 뒤 기가 살아서 대한을 도망친 종놈 취급하며 건방지게 칭제한 것을 그만 두고 신종하라고 요구하고 일본, 유구, 안남에도 신종할 것을 요구했으나, 후송의 위상은 명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에 모두 무시당했으며 유구는 사실상 대한의 보호국이 되었고 일본은 거리가 멀어서 관심이 없어 무시했으며 안남은 후송보다 가까운 서에게 칭신하기로 결정했기에 주변에 우호국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때문에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강남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리적,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상황이 좋지 않다. 때문에 숙조 사망 후 조문 사절을 보내서 청과의 결전을 앞두고 청의 뒷배를 봐주는 대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꾀한다. 대한의 주산군도 영유를 인정하는 대신 후송 상선이 출항하고 입항할 때마다 출항세와 입항세를 납부하겠다는 조건을 제안한다. 또한 서나라에 많은 재물을 주고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개국공신에게 내린 칭호가 위국공이고 친왕들에게 연왕, 제왕이란 칭호를 내리는 것을 보면 중원일통의 꿈을 포기한 것은 아니며 3면 전선을 끝내고 청과의 전선에 집중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 육군력
화북이 청에게 넘어갔고 화약과 달리 말은 밀수도 어려워서 군마 수급에 어려움이 커졌기에 기병 전력이 매우 부실하다. 대신 화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많은 인구를 이용해 소변으로 초석밭을 만들어 초석의 9할을 자급하기에 화포 전력만은 청군 이상이다. 군사들이 붉은 모자를 써서 적모군이라 불린다.
- 해군력
해군의 대부분은 정크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적으로는 많지만 대한과의 기술적 격차를 알고 있기에 유주인 기술자들을 초빙해서 장강 상류에 조선소를 짓고 서양식 범선 함대를 건조 중이다. 이 서양식 함대는 장강 안에만 머물 뿐 절대로 나오지 않는데, 배는 있어도 숙련된 선원이 없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대한과 국교 정상화를 이룬다면 후송 함대가 바다 경험을 쌓아 전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 상공업
경덕진이 전란기 중 초토화되어 대한제보다 질이 떨어졌지만 차와 도기를 계속 생산하고 있으며 대유주에 수출도 하고 있다. 주변 3국이 죄다 적대국이지만 밀무역이 성행하고 있으며 후송 조정에서 이를 적극 지원해서 화약이나 말 등도 밀수입하고 있다.
3부 초기에는 주변에 우호국이 단 하나도 없이 모든 나라와 싸우는 모습 때문에 독자들에게 동네북 호구 국가로 취급되어 애기공룡 둘리를 패러디 한 애기공룡 대한이라는 팬픽까지 나왔다. 하지만 연재분이 진행되면서 그런 사면초가 상황에서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까지 해내면서 서양 기술까지 도입하려는 모습 때문에 상남자 국가로 이미지가 변했고, 직접 등장이 없음에도 3부 세력들 중 가장 인기가 많다. 2부 시절 독자들이 우려하던 청나라 라이징을 막아냈고, 호구스럽던 2부의 만력제 시절 명과 달리 반쪽자리임에도 천자국다운 긍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듯. 3부 초기 후송의 호구 이미지는 수군은 아예 없는데다 내륙 민란도 진압을 못 해서 대한에 원병을 요청하는 청에게로 옮겨갔다.[82] 후송 현 황제인 조형서가 즉위한 후 청의 배후가 되어주는 대한을 청과 떼어놓고 대한의 해상봉쇄를 풀어 무역을 진흥시킬 목적으로 대한 측에 먼저 국교 정상화를 제안한다. 대한 측은 형제국인 청과의 신의 및 실리를 생각해 답을 보류했지만, 1702년 스페인이 필리핀의 한인 불법체류자를 학살하자 필리핀을 칠 뜻을 굳힌 건흥제가 해상보급로 안정화를 위해 후송과 국교 정상화를 결정한다. 양측은 서로를 대등한 황제로 인정하고, 후송 측 3개 항구[83] 를 개항장으로 지정해 대한 수군의 봉쇄를 푸는 대신 배의 규모에 따라 출입항세를 대한 측에 내는 것으로 결정된다.
2.2.3. 서
1635~.
명을 멸망시킨 농민반군 지도자 고영상이 건주군에게 죽고 세력이 와해된 후 고영상의 부장이었던 장헌충이 그 잔당의 절반을 규합해서 1635년 사천 지방에 세운 국가.
- 영토
강역은 사천과 운남, 광동 지역이라고 언급되었지만 이들 지역에 둘러싸인 귀주와 광서 지역도 서나라의 강역이다. 마카오는 아직 포르투갈이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홍콩. 서나라의 영토이지만 선조의 작위 박탈에 반발하여 전선 11척과 부하 2000명을 이끌고 탈주하여 해적이 된 정지룡(정종훈)이 점거하고 소굴로 삼았다. 그 위세가 막강해서 30여년이 지난 1680년대에는 정가군의 수가 1만명이 넘으며 보유 선박은 300척이 넘고 인도네시아 쪽에도 지부를 두어군데 두고 있다고 한다. 구성원의 8할이 중국계이며 대한계의 수는 500여명에 불과하다.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 홍콩을 '붉은 콩'으로 연상해 누군가 적두도(赤豆島)라고 불렀으나 침입자의 머리를 칼로 찍어 피로 붉게 물들게 하는 정지룡 일당의 관습 때문에 赤頭島로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 서나라에게서 수군대도독 작위를 받고 세력을 말레이 해역까지 넓였지만 바로 옆 광서 해역에는 적대하는 왕가군 해적 무리가 있어서 계속 분쟁 중이다. 주로 서의 적대국인 후송을 상대로 해적질을 벌이며 공식적으로는 대한 배는 노리지 않는다. 해적질 외에 밀수와 밀항도 주 수입원인 듯 하다. 정지룡 사후 후계자인 정명완이 숙부들의 반란으로 적두도에서 축출된 후 내란을 시작한다.
- 외교
태조 장헌충 재위기에는 중원 천자의 계승을 주장하며 중원일통의 명분 아래 청, 후송과 여러차례 싸웠다. 그러나 1656년 동정호 전투에서 후송을 대파한 직후 장헌충이 진중에서 급사하고, 장헌충을 따라왔던 4황자 장형운이 모계가 사천계라는 것을 이점으로 중원일통 따위 집어치우자고 전쟁에 지친 사천 출신 병사들을 선동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난을 일으켜 형들을 모두 죽이고 황위에 오른다. 이후 전쟁에 지친 사천 지방 민심을 달래기 위해 스스로 파촉, 대리국의 후계라 주장하며 중원일통에는 관심이 없고 현재 판도의 유지에 만족한다고 선포하여 사실상의 중립국을 만든다. 이후로 중원일통을 노리고 공격해오는 후송과는 여전히 적대하지만 대한, 청과는 관계를 회복한다. 후송과의 관계는 적대적이긴 하나 후송의 주적은 청이기에 최근에 심한 분쟁은 없었으며, 오히려 후송에게 재물을 받고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잠재적 적성국 정도의 관계. 명이 멸망하면서 종주국이 사라진 안남에게 후송과 동시에 칭신을 요구했는데, 안남의 실권자인 정씨 가문의 결정으로 후송이 아닌 서에게 조공하기로 하여 안남을 제후국으로 두고 있다. 다만 정씨 가문의 정적인 완씨는 조공을 끊고 대한처럼 칭제할 것을 주장하고 있어 관계가 악화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준가르와도 우호적이어서 외교 관계는 전반적으로 안정적이다.
- 인구
추정 인구는 약 5천만. 민족 구성은 한족, 바이족, 쓰촨인, 장족 등이다. 원역사와 달리 강남의 후송 때문에 화북 너머로 진격할 여력이 없던 건주군에게 토벌당하지 않았고, 때문에 궁지에 몰리지 않은 장헌충이 싸이코 살인마가 되어 사천 지방 인구를 학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의 현대 사천 지방 주민들은 원역사의 장헌충이 학살을 벌인 후 화북에서 이주한 이들의 후손이다. 그러나 작중에서의 사천 지방은 중원과 다른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서 조정에서도 대리국의 후계라 주장하며 후송, 청과 정체성에 선을 그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 구도가 근대까지 유지된다면 서와 후송은 민족적으로도 같은 한족이라는 정체성을 갖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다.
- 육군력
별도로 언급된 적은 없으나 후송이 청을 공격하기 전에 서에게 막대한 재물을 바치고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을 보면 후송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전력은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 수군력
원역사의 오스만 제국처럼 수군을 직접 양성하는 대신 해적들에게 벼슬을 주고 회유하여 수군으로 삼는 일종의 아웃소싱을 하고 있다. 광동 해역은 대한 출신인 정지룡의 정가군의 영역이며 광서 해역은 왕가군의 영역인데 이 둘은 서로 적대 관계로 피터지게 싸우고 있다. 이들이 주로 후송 선박과 해안가를 약탈하니 일종의 사략선인 셈. 대한 출신 정지룡이 함대를 이끌고 서에 망명했으니 유주식 범선을 일부 보유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후송과 다르게 직접 건조하는 기술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룡 사후 정가군이 내부 분열을 일으키면서 왕대수가 이끄는 왕가군이 승기를 잡고 있다.
- 경제
준가르를 경유하여 루스국에 차와 비단을 수출하고 있다. 또한 화교들을 통해 필리핀과도 교역 중이다.
2.3. 건주
누르하치의 건주는 1622년 와라부와 동맹하고 할하부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그 직후 다시 와라부와 적대 관계가 되었으나 누르하치가 1623년 폐암으로 사망한 관계로 즉시 전투를 벌이지는 않는다.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건주를 계승한 다이샨은 이 대치 관계를 핑계로 고영상의 반란 때 명에 원군을 보내지 않고 명이 멸망하도록 방치하다가 태창제가 살해된 후에야 뒤늦게 근황을 명분으로 화북으로 진군한다. 원역사처럼 원숭환이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지만 남쪽으로 병력을 차출당하고 황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찾아온 건주군을 막을 명분이 없어 그대로 통과시켜주며 건주군에 흡수된다. 산해관을 넘은 건주는 고영상 반군을 쓸어버리고 원숭환을 내세워 명군 패잔병을 흡수하며 약 2년에 걸쳐 화북을 모두 장악하고, 강남에 건국된 후송을 공격하여 장강까지 밀어붙였지만 다이샨이 산서성과 섬서성에서 농민들을 추방하고 목장을 만들려 하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 반격한 후송에게 회수 선까지 밀려난다. 화북 반란을 진압하는 사이 후송과 서의 방어가 단단해지자 강남을 공격할 여력은 없어서 회수 이북 장악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강남을 잃어 식량 자급이 어려워지자 인구를 줄이기 위해 대도시 4곳을 초토화시켜 총 2백만명의 한족을 학살하고 한족 1천만명이 강남으로 도망치게 한다.
그 후 밀약을 지켜 대한에 요동을 할양했고 다이샨은 화북, 홍타이지는 몽골을 분할하여 통치한다. 다이샨과 홍타이지가 모두 사망한 뒤 두 나라는 각각 청과 금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각각 황제와 대칸을 칭한다.
- 양국관계
건주여진 외의 여진들은 모두 2부에서 멸망했기에 여진계 국가 둘을 묶어서 건주라고 부르게 되었다. 두 국가 모두 대한과 형제 국가로 동맹 관계인데 양쪽 모두 건주 일통의 꿈은 있지만 실행할 여력은 없어 동맹을 유지 중이라고 한다. 어쨌든 대칸과 황제가 서로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 혼인동맹 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을병대기근 때는 연합군을 구성해서 후송에 약탈원정을 갈 정도로 양국의 관계는 좋다.
특이한 점은 후금은 연합 원정을 벌일 때는 약탈로 얻은 곡식과 가축은 본국까지 가져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현지에서 바로 청에게 넘기고, 귀국할 때 북경에서 같은 양을 받아가는데, 청에서는 이 거래에서 장난을 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양국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긴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후금은 연합 원정을 벌일 때는 약탈로 얻은 곡식과 가축은 본국까지 가져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에 현지에서 바로 청에게 넘기고, 귀국할 때 북경에서 같은 양을 받아가는데, 청에서는 이 거래에서 장난을 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만큼 양국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긴밀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할 수 있다.
- 대한관계
청과 후금 모두 대한을 형의 나라로 대하며, 태자와 대패륵이 조상인 장조대제의 능에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대한에 와서 태황에게 입조하는 행사를 한번씩 치르며, 건복제가 병상에 눕자 쾌유를 비는 사절단과 의원들을 보내겠다고 청할 정도로 대한과의 관계를 중시한다.[84]
- 전쟁기록 조공
장조 시기 경인왜란록과 을미동정록, 양응룡의 난 관련 기록을 명나라 만력제에게 바친 것은 더 많은 군비를 받기 위해서였는데, 이후 전쟁기록을 바친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관습으로 정착했다.[85] 청과 후금은 주변국인 후송, 서, 준가르, 러시아와 전투를 벌일때마다 전쟁기록을 만들어서 진상했고, 대한에선 귀중한 정보원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적절한 답례를 내렸다.
2.3.1. 청
명 멸망 이후 화북을 장악하여 통치하던 다이샨이 사망하고 왕위를 계승한 다이샨과 희정옹주 이혜원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요토가 1648년 국호를 청으로 변경하고 칭제했다.
- 외교
후송과 적대 중이며 혈연관계인 후금, 대한과 동맹 관계이다. 서와는 적대 관계였으나 장형운이 고립주의로 전환한 이후 큰 충돌은 없는 듯 하다 .중원일통을 위해 후송, 서와 피터지게 싸웠으나 청 세종 아이신기오로 요토가 1663년 사망한 후 확장정책을 중단한다. 이후 을병대기근을 맞아 후금과 연합군을 구성, 오랜만에 후송에 약탈원정을 벌이고 후송이 1700년 보복 원정을 벌이는 등 다시 충돌을 하고 있다. 형제국인 대한에 크게 의존하는 듯한 형국이기에 대한과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큰 문제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 수도
수도는 북경, 대명부, 제남 3곳을 두고 황제가 순회한다. 자금성은 그대로 남아서 청의 정궁으로 사용된다.
- 인구
인구는 약 3천만. 만주족이 한족에게 동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원나라 수준의 한족 탄압 정책을 펼치고 있다. 건국 초기부터 한족을 대량학살했고 3부 시점에서도 한족들을 형제국 후금에 노예로 팔아넘기고 있다. 조정의 한족 문관들, 입관 이전부터 건주를 섬기던 한군팔기 등 일부 특권층 한족들이 있긴 하나 그 외 한족들은 철저히 피지배 민족이며 한족에게 군권을 넘길 수 없다는 이유로 수군은 육성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원나라 만큼 크게 박해하지는 않아서 고위직에 한족도 있긴 하다.
- 종교
천주교 신자의 수는 약 5만명이다. 태창제는 교회에 무거운 세금을 물렸고 고영상군이 천주교도들을 학살해서 건주의 입관 과정에서 천주교도들이 건주군에게 적극 협력했기에 청 황실은 이들을 적극적으로 우대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한족 민중들에게 천주교도들이 배척받는 결과를 낳아서 교세 확장의 여지는 별로 없다. 변경지대에 사는 회족들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대신 군복무를 시키고 있다.
- 육군력
육군은 총 70만으로 주력인 팔기 40만, 보조전력인 녹영병 30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확장정책을 중단하면서 구성한 녹영병은 한족 중에 모병되며, 국경지대 도시나 요새를 지키는 수비대는 대부분 녹영병에 속한다. 초창기에는 반란을 일으키거나 후송으로 망명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팔기만큼은 아니지만 보수도 후하게 주고 취급도 좋아서 사기도 꽤 높다. 내륙에서 반란이 나는 경우 정치적인 이유로 직접 진압하지 않고 대한에 원군을 청해서 진압한다.[86]
- 수군력
수군은 한족에게 군권을 맞길 수밖에 없기에 의도적으로 양성하지 않고 대한 수군의 제해권에 의존하며 해안포대만 운용한다.
- 대운하
명이 강남의 곡물을 화북으로 수송할 때 쓰던 대운하는 잘 관리하며 유지 중이고 많은 포대와 쇠사슬로 철저하게 방어 중이다. 후송 입장에서는 대운하만 장악하면 화북으로 병력과 치중을 쉽게 운반할 수 있어 청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 있어 대운하 공략을 위해 전력을 다 하고 있다. 청이 대운하를 유지하는 이유는 후송을 정벌한 후에 강남의 곡물을 운송하기 위해서라고 공언하는데, 실제로는 후송의 공격이 대운하 방향으로만 집중되도록 하는 목적이 더 큰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가 여유롭지 못한 청은 대한과 교역할 때 은이나 비단을 지불하지 못하는 대신 가축 혹은 사람으로 지불한다. 그러나 사람을 노예로 파는 것은 아니며, '한공'이라는 이름의 2년 기한부 계약 노동자로 파견한다. 이들은 모두 한족이며, 대한으로 보내져 노역하는 것이 황제에게 치르는 세금이다. 주로 항만 공사, 도로 보수 등 힘든 노역에 종사하는데, 노예는 아니기에 험하게 다룰 수 없고[87] 규정에 따라서만 다뤄야 한다. 노역 중 사고를 당하면 청 조정에서 보상을 책임진다.
2.3.2. 후금
1636년을 기점으로 건주에서 독립하였다. 명이 멸망하고 다이샨의 건주가 화북을 장악한 후 나라를 분할하여 화북은 다이샨이 통치하고 홍타이지는 몽골 칸이 되어 와라부를 상대한다. 홍타이지가 사망한 후 홍타이지와 희연옹주 이혜연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호오거가 1648년 국호를 금으로 하고 칭제한다.
- 외교
혈연관계인 청, 조선과 동맹 관계이며 러시아, 준가르에 맞서고 있다. 청과는 을병대기근 때 연합군을 구성해서 약탈 원정을 가고, 이후 후송의 보복에 따른 보복전에도 연합군을 구성하며, 약탈한 곡식과 가축을 본국까지 운반하기 번거로우니 현지에서 청나라에 주고 대신 귀국길에 북경에서 같은 수량을 받아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다. 형님 격 나라인 대한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기 싫어서 내준 영토를 할양 받을 정도로 가깝다.
- 수도
- 인구
인구는 약 3백만이며, 몽골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땅에 비해 인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형제국 청에서 추방하는 한족 농민들을 노예로 데려오고 있으며, 청나라 못지 않게 한족을 탄압했으나 이후 완화되었다.
- 종교
천주교 신자였던 홍타이지와 희연옹주의 자손들이 통치하는 나라이지만 홍타이지는 애초에 정치적 목적으로 세례받은 나이롱 신자였고 왕위에 오른 후 이 사실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서 후금이 공식적으로 천주교 국가가 되진 않았다. 그래도 이후 후금 황실은 모두 명목상은 천주교 신자이며 청보다는 많은 20만명 정도의 신도가 있는데, 절반은 정치적 목적으로 개종한 나이롱 신자들이다. 백성들에게는 천주교 신앙을 강제하지 않지만 예외로 각 팔기의 기주들만은 형식적으로라도 천주교를 믿도록 강제하고, 팔기병들의 군기도 십자가 군기를 사용한다. 그래도 '기독교 군주'라는 타이틀은 신자들에겐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천주교가 매국 종교로 탄압받는 후송과 서에서는 물론이고 청에서도 신자들이 귀순한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는 아시아에 기독교 군주가 생겼다며 환호하며 청과 후금을 묶어 카타이 교구를 신설하고 상도에 주교좌 성당을 건설했다.
- 군사력
정확한 규모는 나오지 않았으나 청나라와 연합원정에서 몽골 기병 4만, 만주 기병 1만을 동원했다는 것을 보면 기병 규모만은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녹봉을 주어서 기병을 양성하는 주변국과 달리 유목민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는지라, 동북아시아 최강의 기병이라고 할 수 있다. 보조전력인 보병은 노예로 끌려온 한족들 중에서 반항심이 덜한 이들을 쓰기 때문에 불안 요소일 수 있다. 경포가 중심인 포병은 만주인들로 쓰고 있다. 언급은 없었지만 내륙국이기 때문에 당연히 수군은 없을 것이다.
2.4. 일본
중원에서 명이 멸망하고 무려 5개국이 칭제하는 혼란기가 도래하자 일본도 그 영향을 받는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친손자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외손자라는 엄청난 정통성을 지닌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3대 쇼군으로 즉위하면서 에도 막부의 권력이 강해지고, 실질적 군사력은 전무하면서 명의 일본국왕 책봉이라는 명분과 조선 주둔군의 군사력으로 유지되던 진서대장군부는 명이 멸망하고 중원 정세의 혼란과 가뭄으로 대한이 개입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 되자 에도 막부의 압박에 1644년 스스로 폐위를 선언하고 합병된다. 이로써 대한령인 구주총관부를 제외한 규슈 전체가 다시 에도 막부에게 넘어갔다. 에도 막부는 대한과는 적대할 뜻이 없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진서대장군이 매년 50만석씩 대한에 쌀을 보냈는데 자신들은 100만석씩 보내주기로 했고 친한 다이묘인 사나다, 타치바나 가의 영지는 건드리지 않는다. 대한 측에서는 안 그래도 여력이 없는데 진서대장군부가 구원을 청한 것도 아니고 에도 막부에서도 숙이고 들어오니 개입하지 않았다.
이후 막부는 천주교 탄압을 시작, 규슈 내의 많은 천주교도들이 학살당했고 천주교도 다이묘들은 영지를 몰수당한다. 이에 10만 단위의 반란군이 일어나자 20만 대군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했다. 이 때 일본에 귀순한 아이신기오로 아민(마츠다이라 이에토시)의 기병대가 대활약한다. 이후 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시마즈 가의 영지 3국 중 사츠마를 제외한 2국을 몰수한다. 학살을 피한 천주교도들은 대한령이라 천주교가 혀용되는 구주총관부 영역으로 많이 도망쳤다고 하며 대한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까지 추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편 불교는 교세를 유지 중이지만 승병들은 경인왜란과 을미동정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
규슈에 있던 몇몇 개항장들은 폐쇄했지만 쇄국정책을 펴는 것은 아니고 대신 오사카를 개항했으며,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으므로 신교 국가인 영국, 네덜란드가 주 교역 대상이다. 해군은 재건되었지만 해적을 억제하는 수준의 연안해군이며 전선도 경인왜란 시대 수준의 왜선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다테 가는 양선도 상당수 건조했는데 막부의 해군금지령을 지켜서 형식적으로만 에도 막부가 소유하도록 하고 다테 가가 사용하고 있으며 남만, 미주까지도 직접 상선을 보내서 교역하고 있다. 군용 양선은 있기는 한데 극소수이다.
구주총관부를 제외한 일본 전역을 통일한 에도 막부는 대한과 적대할 의사는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신대기근 때에는 쌀을 50만석 추가로 더 보내주는 등[88] 대한과 적극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3부 시기에는 구주총관부를 두고 일본과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설령 분쟁이 일어난다 해도, 구주총관부에 사는 왜인들은 천주교 박해 때문에 에도 막부를 철천지 원수로 여기고 대한에 충성심이 깊어 앞장서서 막부군과 맞서 싸울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외교적으로도 아모국과 유구국으로부터 오는 사신을 일본에 입조한 조공 사절로 선전하면서도 대한에서 오는 특사를 상대로는 감히 뻥칠 엄두도 못낼 정도로 대한을 상대로는 일단 저자세로 나오고 있다.
진서대장군부가 폐지될 때 허울뿐이던 일본국왕 작위는 엄밀히 말하면 에도 막부에게 양위된 것이 아니라 폐위되면서 사라진 것이기에 에도 막부는 일본국왕을 자칭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한 등 외국에는 이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고 일본국왕위가 양위된 것으로 알려져서 정이대장군을 일본국왕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대한에는 왜국산 춘화가 밀수되어 유통중이라 하니 작중에서도 일본의 특기는 변하지 않은 듯. 2부에서도 그랬지만 평화가 1세기 쯤 이어진 3부 시점에서도 왜병들의 인기는 여전해서, 마치 동아시아의 스위스 용병 같은 느낌으로 많은 나라들이 애용하고 있다.
2.5. 유구국
대한에 매년 2회 세자나 왕자, 왕제가 입조하며 조공도 바치는 등 사실상 대한의 보호국이지만, 대한이 칭제하며 칭신을 요구하자 만약 대한에 칭신할 경우 대한에서 왕을 갈아치우는 등 내정에 간섭할까봐 두려워해 과거 함께 명의 번국이었고 조선을 형님으로 모셔왔다는 이유를 겉으로 내세워 공식적으로 대한의 번국이 되진 않았다. 대한 내에서도 이에 대해 괘씸하게 여기는 여론은 있으나 응징은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조공도 대한 수군이 유구에 주둔하여 지켜주는 보답으로 드리는 선공이라는 명목으로 바치고, 대한에서 따로 답례품을 받지는 않고 있다. 유구에서는 대한 수군의 저탄소를 유구에 설치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으나 대한 측에서 기술 유출과 비용이 많이 들것을 예상해 거부하고 있었으나, 재석이 주산진을 지키기 위해선 필요하다고 건의해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유구국 세자 쇼준이 재석과 만남에서 취중[89] 에 밝힌 바로는, 칭신하게 될 경우 기존 왕실을 폐하고 대한 황족을 보내서 완전히 속국으로 삼을까 두려워서 거부하는 거라고 한다. 정식 신하국이 되면 칙서 한 장으로 왕실을 뒤흔들어 버릴 수 있는 게 무섭다는 듯. 물론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밀어버리려고 하면 저항도 못하는 건 마찬가지라 유구국은 최대한 대한에 굽신거리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 일본 이외에 청, 서, 서반아와도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6. 아모국
대한의 교역 대상으로 기근이 닥친 대한에 어비(생선으로 만든 비료)를 수출한다. 대한과 우호적이지만 을미동정 후에 중립국이라고 못박아놓은 탓에 대한과 일본 어느 나라에도 번국은 되지 않고 있으며 사절을 보내더라도 신하를 칭하지는 않는다. 인구는 대략 10만. 수도는 서해안에 있는 가장 큰 마을인 '오타올내'로 이곳에 추장들이 모여 추장회의에서 뽑힌 종신직 수령이 국가원수를 맡는 일종의 귀족공화제 체제이다.
특이하게도 대한에 사절을 보낼 때는 조복을 입혀 보내고 일본에 사절을 보낼 때는 화복을 입혀 보낸다.
2.7. 안남
2부 시절 재석이 국왕이던 여씨를 몰아내고 보위를 찬탈한 막씨에 대항해 싸우는 완씨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후 조선-대한은 완씨 가문과 동맹 관계에 있다. 이후 계속 완씨 가문에게 철재를 수출하고 쌀을 수입해오는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완씨는 조선의 지원을 받아 막씨를 몰아내고 다시 여씨 왕조를 복위시키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곧이어 완씨의 동맹이었던 정씨 가문에서 여씨 왕가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장악한 뒤 완씨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조선, 유구와 함께 명의 조공국이었던 안남은 명이 멸망하면서 잠시 조공 책봉 체제에서 벗어난다. 이후 서와 후송이 건국된 뒤 서와 후송 각각에서 안남에 사신을 보내 칭신하기를 요구한다. 친대한파인 완씨는 대한의 사례를 따라 둘 다 거절하고 칭제건원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실권을 잡은 정씨는 서에게 입조하기로 결정하여 안남은 서의 제후국이 된다. 한편 후송은 완씨와 접촉하여 안남을 자신들의 편으로 돌린 뒤 안남과 함께 서를 양면에서 협공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2.8. 서반아령 필리핀
대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지만 재석은 태평양 패권을 위해 어떻게든 필리핀을 강탈할 계획을 갖고 있고, 대한에 악감정을 품은 신서반아 부왕대리 몬타네스 주교가 어그로를 끌어서 서반아와 대한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 인구 구성
- 서반아인
정치와 군사를 장악한 지배 계층이지만 극소수이다. 일본인도 용병으로 쓴다.
- 원주민
필리핀의 피지배계층. 루손 섬 북부에 정착하면서 싸우게 된 한인 불법체류자들과 감정이 좋지 않다.
- 화교
중국계 수만 명이 필리핀에 거주 중이며 필리핀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서나라와 교역하며 상선, 밀수선, 해적선 가릴 것 없이 필리핀을 오가며 이들과 교역을 하고 있다. 화교의 대부분은 서나라 영토인 광동 출신이지만 이들은 서나라를 고향이 아닌 단순한 교역 대상으로만 여기며 서와 후송 어느 쪽에도 소속감은 가지지 않는다. 반면 총독부에서는 이들을 골칫거리로 여기고 주기적으로 학살하는데, 후송과 서 둘 다 항의는 하지만 보복할 능력도 없고 하지도 않아 형식에 그치고 있다. 대한은 첩자들을 중국인으로 위장해서 침투시켜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정식으로 총독부에 선전포고를 하고 첩자들을 데려가면서 들통나자 총독부는 후방 안정이라는 목적으로 수만의 중국인들을 학살한다.
- 한인
대한에게 티크 목재 확보 목적으로 섬 몇 곳을 임대해줬으나 목재 확보 목적이기에 한인이 이주하지는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한인의 이민을 금지하고 있다. 필리핀 내에 한인 비율이 늘어나면 나중에 거리상으로 가까운 대한에서 한인이 많다는 이유로 필리핀을 합병하려고 시도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 하지만 대남도 이주민들은 의무적으로 호부 농장에서 해야 하는 5년간의 고된 노동을 못 견디고 밀항해서 필리핀에 정착하는 이들이 많다. 정지룡의 사업들 중 하나가 이들을 밀항시켜주는 것. 이런 한인 불법체류자들은 주로 루손 섬으로 가서 필리핀 토인들과 싸워 땅을 뺏고 마을을 세워 벼농사를 지으며 살고있다. 인구는 10만명이 넘으며, 을병대기근 기간에 이들에게서 밀수한 쌀이 30만석이나 된다. 결혼하려고 사들인 중국인이 10% 가까이 되고 일본인들도 수천명 정도 있고, 원주민 여성들과도 통혼하고 있다. 이렇게 다국적 집단으로 이루어져서인지 특유의 방언이 섞이면 통역 없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한다.
서반아 총독부는 한인들의 밀입국과 정착을 예의주시하긴 했지만, 변방이고 원주민들과 싸우는 것을 빼고는 총독부에 정면으로 대들지 않는데다가, 가끔 국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형식으로 세금도 내고 있기 때문에 대한의 개입을 우려해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에 악감정을 품은 신서반아 부왕대리 몬타네스 주교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루이 14세와 친한 건흥제가 스페인을 선제공격할 것을 우려해 한인 마을을 다 행정망에 편입하고 개종시킨 후 국왕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방침을 내리고, 새 총독인 드 에체바리가 이에 찬동하여 무력을 동원해 강제 개종 정책을 펴고 거부하는 한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 일이 터져서, 대한과 전면전으로 이어진다.
서반아 총독부는 한인들의 밀입국과 정착을 예의주시하긴 했지만, 변방이고 원주민들과 싸우는 것을 빼고는 총독부에 정면으로 대들지 않는데다가, 가끔 국왕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형식으로 세금도 내고 있기 때문에 대한의 개입을 우려해서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에 악감정을 품은 신서반아 부왕대리 몬타네스 주교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루이 14세와 친한 건흥제가 스페인을 선제공격할 것을 우려해 한인 마을을 다 행정망에 편입하고 개종시킨 후 국왕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방침을 내리고, 새 총독인 드 에체바리가 이에 찬동하여 무력을 동원해 강제 개종 정책을 펴고 거부하는 한인들은 잔인하게 학살한 일이 터져서, 대한과 전면전으로 이어진다.
2.9. 준가르
준가르(구 와라부)는 누르하치 시절의 건주와 동맹하여 할하부를 함께 멸망시켰고 이후 다시 건주와 적대관계가 된다. 이후 홍타이지에게 몽골 일대를 빼앗기고 그를 계승한 후금과 적대 관계이다.
본래 조선에게 화약을 수입했기에 우호적이었으나 중원 분열 후 서나라, 루스국과 우호 관계가 되어 중계무역으로 화약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자 바로 대한을 배신한다. 주로 후금과 적대 중이며 종종 대한까지도 약탈을 온다고 한다.
와라부의 일파였던 토르구트부는 북상하여 루스국의 속민인 칼미크족이 된다.
2.10. 천축국
이기빈 이후로 여전히 조선 공관이 상주 중이다. 이기빈이 천축국 공관에서 일하며 교역으로 번 돈, 자한기르에게 선물받은 돈, 해적들에게서 뺏은 돈 등이 무려 은 천만냥이나 되어[90] 이기빈의 가문은 조선 최고의 부자 중 하나가 되었고, 그 후로 천축 공관은 모든 관리들이 가장 부임하고 싶어하는 인기있는 자리가 되었다. 하지만 성친왕에게 뇌물을 바쳤다가 건복제에게 찍힌 조기철이 부정축재한 재산을 몰수당하고 전가사변당한 뒤로는 천축 공관도 그렇게 대놓고 축재를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원역사와 동일하게 아우랑제브가 친이슬람 정책을 펼치며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다. 재석은 어차피 곧 망할 무굴 제국이니 무인지변에 가담한 군관 300여명 파천군이란 이름의 용병으로 보내서 그 혼란 속에서 한 몫 챙겨보기로 한다. 파천군[91] 은 도적떼와 군벌들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뒀으며 혼란에 빠진 천축 조정은 파천군의 활동을 방관한다.
2.11. 돌궐국
이기빈의 모카 습격사건 이후로 78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대한과는 냉랭한 관계이다. 어차피 커피 자체 재배도 가능한 시점에 굳이 관계를 개선할 이유가 없으니 관계 개선을 시도하지 않은 듯. 그래도 전쟁까지 벌이는 사이는 아니다.
제2차 빈 공방전에 대한 황제(皇弟) 성친왕이 참전해서 돌궐군 총대장 천막을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웠는데 아직 이 돌궐 측에서는 성친왕이 참전한 것을 알지도 못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관계가 더 악화될 수도 있다. 한편 대한 측에서도 모카 습격사건 당시 모카 태수의 만행에는 아직도 분노하고 있어 언제든 전투를 벌일 불씨는 남아있다.
3. 대유주
- 대유주 각국 명칭 - 2부 시점에서는 음차 없이 그냥 들리는대로 국문으로 적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 대유주와 교류가 이어지며 한문 명칭들이 정착되었다. 원역사의 각국 한문 음차 명칭들이 일본 혹은 중국에서 음차한 것을 들여와서 원어 발음과는 거리가 먼 것과 달리 각국의 원어 명칭에 좀 더 가까운 음차어들이 쓰이고 있다.
- 종두법
2부 외전 시점까지는 완전히 헛소리로 취급받았으나 조선을 방문해서 그 효과를 직접 목격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적극 옹호하여 서서히 퍼지고 있다고 한다.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은 물론 일부 천연두로 단명한 왕족들의 수명이 연장되어 각국 왕실 역사가 변화할 듯 하다. 프랑스 왕태자 그랑 도팽 루이는 예수회원의 권유로 종두를 맞았고 성친왕의 설득으로 자녀들에게도 맞히는데 원역사에서 그랑 도팽 루이 내외와 차남[94] 이 모두 천연두로 사망했으므로 이 변화로 이후 프랑스 왕실 역사는 크게 변화할 것이다. 폴란드 왕실에도 종두가 퍼져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 아델라이드 루드비케는 원역사와 달리 4살에 사망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러나 예수회의 주도로 퍼지고 있기에 예수회에 대해 적대적인 잉글국에는 1670년대에서야 처음 도입되었고 그나마도 거의 보급되지 않고 있다.
- 조선인 백인설
서반아나 법왕청 등보다 조선과 교류를 늦게 시작해 정보가 부족한 불랑국, 폴수국 등지에는 일부 귀족들을 중심으로 조선인은 사실 백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다고 한다. 사라진 열 지파의 후손이라는 설[95] ,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시아 원정대의 후손이라는 설, 파르티아에 잡혀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군단병들의 후손이라는 설 등 말도 안 되는 낭설들이 퍼져 있으며 얀 3세 소비에스키도 이 헛소문들을 반쯤 믿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소문이 퍼진 이유는 1, 2, 3차 견서사에 모두 참여하며 교류 초창기에 사실상 조선의 얼굴 역할을 한 이덕형이 피부가 흰 미남이었고, 8차 견서사의 성친왕도 피부가 희고 잘생겨서인듯 하다. 구한말 조선에 온 서양인들이 공통적으로 남긴 감상이 조선인은 중국인, 일본인보다 피부색이 밝고 체격이 훤칠하다는 것이었다.[96] 작중에서는 이런 이유 이외에도 대한이 대유주 국가들에 비해 결코 뒤쳐지지 않는 국력과 기술력을 지닌 비 백인 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백인이라고 하고싶은 백인우월주의적인 시각도 영향을 줬을 듯하다.[97]
유럽에 널리 보급되어 불랑국, 내달국에서 어렵지 않게 두부를 만드는 요리사를 찾아볼 수 있다. 불랑국에서는 금요일과 사순절에 먹으며 내달국에서는 동방의 신기한 음식이라며 즐긴다. 주로 간장에 찍어먹으며 요리에 무관심한 잉글국에서는 만들지 않는다.
두부에 뿌려먹는 소스로 쓰이며 대유주에서 직수입하는 몇 안되는 조선식품이다.
철저히 기밀로 유지한 기선과 달리 너무 눈에 잘 띄고 원리도 간단해서 금방 대유주에서 카피된다. 잉글국의 제임스 2세가 열기구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열기구 부대를 운용했는데 명예 혁명 때에는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활약할 수 없었다.
- 유학의 전파
장조 시절 한석봉을 시켜 번역한 조선 서적들로 인해 유학이 유럽에도 퍼졌다. 제임스 1세가 특히 깊은 흥미를 보이며 연구했다고 한다. 외국의 학문인만큼 국정에 반영하진 않았으나, 통치에는 유용해서 기본적인 개념은 상류층 중심으로 퍼진 모양. 명예혁명 이후 성친왕이 처음으로 윌리엄 3세를 만났을 때, 그가 맹자의 천명론을 들어 거사를 변명하는 모습이 나온다.
대한과의 교역이 늘면서 조선 풍속 중 일부가 한풍이란 이름으로 유럽에서 유행하게 된다. 주로 상류층들 사이에서 인삼과 도자기 외에 나전칠기와 유기, 차 종류가 유행하고 연회에서 조선 의상을 걸치고 나오기도 한다. 증류식 소주와 과하주 같이 상하지 않는 술도 일부 전파됐다고. 이 중 수출용 유기세트에 창숟가락이 포함되어 전해지면서 포크의 자리를 일부 대신하게 된다.[98]
3.1. 도이치
유럽을 초토화시킨 30년 전쟁은 '유주대란'이라고 불리며 개신교는 천주교에 반대하는 종교라는 의미에서 '반주교'라고 불리고 있다. 신에 반대한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으니 저쪽에서 들으면 불쾌할 만한 명칭. 유주대란 도중에 방문한 6차 견서사는 관전무관으로 황제군 측에 이괄과 군관 셋을 파견했고 이들은 발렌슈타인 밑에서 8년간 참전 없이 관전만 하다가 귀국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실은 북도이치 지역에서 신나게 약탈을 벌였다고 한다.
대유주에 대한이 친 천주교 국가로 알려져 있고 유주대란 당시 이괄이 벌인 약탈의 영향도 있어서 대한에 대한 정서가 좋지 않을 듯 하다.
3.2. 불랑국
대한과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한다. 공예품, 시계, 책, 견직물을 대한에 수출하고 도자기, 차, 모피, 면직물, 견직물을 수입하는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루이 13세 시절인 1642년 견서사처럼 대한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5년간 머무르다 갔다. 대한의 행정 체계와 성리학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제도에 적용시킨 것은 없다고 한다.
- 프랑스 동인도회사
내달국만은 못하지만 대한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며 벽란도에 주재 상관장을 두고 있다. 내달국이 가성비 좋은 물건을 주로 사가는 것과 달리 불랑국은 인삼, 비단, 유기, 가구, 도자기 등 대한제 최고급 사치품들을 주로 수입해간다.
3.3. 루스국
대한에서는 루스국(壘戍國)이라고 부른다.
- 대한관계
1642년 북방에서 조선과 처음 접촉하여 소규모 분쟁이 십여년간 지속된다. 1658년 7차 견서사가 막수구파까지 찾아가서 바이칼 호와 레나 강을 양국의 경계로 하는 국경조약을 맺은 후 충돌은 멈췄다. 하지만 이후로도 국경지대의 소규모 분쟁이 계속되어 좋지 않은 관계는 이어졌고 북변에서 접촉하는 루스인들은 대체로 야인이나 다름없는 카자크들이었기에 루스국은 사실상 '피부 하얀 달자'들이라며 무시했다. 그래서 차르 또한 왕도 아니고 수령이라고 칭한다.[99] 하지만 건흥제와 개인적 친분이 깊은 표트르가 즉위하며 서구화 개혁을 시작하고 장자를 정사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며 장자의 교육도 대한에 맡기는 등 관계 개선이 이뤄진다. 이에 대한에서도 수령이라는 호칭을 폐기하고 음차한 차르라는 호칭을 쓰며 다른 대유주 국가들과 동격으로 대우한다.
- 무역
대한과 육로로 직접 교역 중이며 바이칼호 연변의 이르쿠츠크와 북정진이 교역 중심지이다. 낙타, 말, 모우 등의 가축을 이용해 상품을 수송한다. 야쿠츠크에서도 교역이 일부 이루어진다. 준가르를 통하여 서나라와도 교역하고 있으며 서나라의 비단과 차 등을 수입한다. 후금과도 교역을 하나 그 양이 많지는 않다고 한다. 대한을 통해 감자 역시 전해졌다고 한다.
대한과 루스의 국경지대인 북변 일대에는 동북아의 온갖 인종이 섞인 다국적 마적단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단속하다가 대한과 루스군의 충돌이 종종 발생하며 개중에는 카자크들이 몰래 부업으로 마적질을 하다 걸리는 사례도 있다. 또한 밀수를 하는 잠상들도 많다.
3.4. 폴수국
재석의 첩인 올렝카의 고국이고 재석이 방문하여 기병 전술을 훈련받고 제2차 빈 공방전에 참전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고 가긴 하지만 원역사와 달라진 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빈 전투 후 전리품 중 214,528 두카트를 재석이 챙겨가게 되었다는 정도. 해양진출을 적극적으로 하던 국가도 아니었고 머지않아 멸망하게 될 국가인만큼 대한과 별다른 상호 교류를 할 일이 없을 것이다.
폴수국 왕실도 종두를 맞는다고 하며 원역사에서는 4살에 요절한 공주 아델라이드 루드비케가 살아남게 되는데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명.
3.5. 수배국
재석 일행이 11개월간 머물렀다. 수배국은 대한과 교류도 거의 없고 반주교 국가라서 별 관심이 없기에 푸대접을 받았다고만 언급되고 통째로 스킵된다.
3.6. 잉글국
- 색수피어 작품들
조선과의 교류로 셰익스피어가 원역사에는 없는 새로운 작품들을 집필했다.
- 미르클란트의 철퇴
제목은 미륵랜드, 즉 미륵(Meerk)의 땅이라는 뜻으로 태봉과 궁예 이야기를 기독교식으로 각색한 내용이다. 작중에는 스스로 대천사 미카엘의 계시를 받아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미르크가 메이스를 들고 죄인들을 때려 죽인다. 미르크는 터번을 쓰고 터키풍 옷을 입고 있다.[100] 결말에서 미르크는 반란군이 들이닥치자 미카엘의 가호가 나를 떠났다고 절규하며 자기 심장을 칼로 찔러 자살한다. 여담으로 재석이 눈치채기 전까진 같이 보던 조선인들도 이게 궁예 이야기인 줄 모르고 있었다.
사금갑을 각색한 소설. 거문고는 하프로 번안되었다. 자신을 후원해준 상빈 이씨에게 헌정한 작품으로 대한에서도 공연된다.
- 피투성이 고뇌
1, 2차 왕자의 난을 소재로 쓴 연극. 역시 상빈 이씨에게 헌정되었는데 조선사의 가장 심각한 치부를 다룬 거라 그대로 왕실 서고로 들어가고 공연은 되지 않는다.
- 열기구
제임스 2세가 적극적으로 도입한 조선의 문물. 해군 사령관으로써 경험으로 적을 조기에 발견하는 중요성 때문에 도입했다. 과거 네덜란드의 침공시 적 함대 조기발견으로 공을 세웠으나 재석이 있는 동안 벌어진 명예혁명 당시에는 발견은 했지만 동풍이 세게 부는 탓에 함대가 출격할 수 없어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증기기관과 달리 열기구는 조선 벽란도 항구에 들어오는 유럽인들에게 자주 목격되었고 큰 자루에 불만 때는 간단한 구조이다 보니 은폐할 수 없어 널리 퍼졌다.
- 레이디 이
대유주에 레이디 이라고 알려진 상빈 이씨(상희)의 미적분 등 수학적 업적들이 전해졌다. 당시 조선 수학계에는 증명이라는 문화가 없었기에 증명법 없이 결과물만 전해졌고, 증명은 아이작 뉴턴이 했다. 대유주에선 결과물만 만든 레이디 이보다 늦었더라도 증명을 해낸 뉴턴을 더 고평가하며 재석도 유감이긴 하지만 원래 주인이 누렸어야 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 잉글랜드 동인도회사
잉글랜드 동인도회사는 벽란도에 상주 상관장을 두고 있으며 대한과도 적극 교역 중이지만 내달국, 불랑국에 비해 성과에서 밀리고 있다. 대한에 주로 모직물을 수출하고, 대남도산 차와 커피를 수입해간다.
3.7. 내달국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벽란도에 상주 상관장을 두고 있으며 대한과 가장 적극적으로 교역하는 대유주 국가이다. 인삼 무역에서 가장 높은 지분을 차지한다. 대한의 증기기관을 이용해 쏟아져나오는 품질은 낮지만 매우 저렴한 면포를 대량 수입해서 신대륙의 대농장 노예용 옷감으로 판다.
3.8. 서반아
재석이 빙의하기 이전의 성친왕이 방문했으나 재석 빙의 후에는 방문하지 않는다.
원역사와 동일하게 중증 장애인으로 태어난 카를로스 2세가 통치하며 서서히 국력이 쇠하고 있다. 카를로스 2세는 원역사와 동일하게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원역사에서 1699년 천연두로 사망하는데, 작중에서는 대유주에 종두법이 보급되었기에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죽지 않고 호세 페르난도 1세로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전개가 달라지게 생겼다. 또한 대한에 우호적이던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호세 페르난도 1세의 반대파라는 명목으로 해임당하고 대한에 적대적인 인사가 부왕대리가 되면서 필리핀에 이주했던 한인들이 강제로 개종 및 스페인 신민 편입을 강요당하고 거부하는 자들은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나 대한-스페인 전쟁 분위기가 높아진다.
4. 대미주
4.1. 대한령 미주
3부 시작 시점에서의 미주 판도: 지도
하와이 복속 후 미주 판도: 지도
아파치 토벌 후 미주 판도: 지도
원미주 탐사 후 미주 판도: 지도
- 강역
대한령의 범위는 일단 명목상으로는 미주대령(로키 산맥)까지인데 실제로 행정력이 미치는 범위는 해안선 일대부터 미억산령(시에라네바다 산맥)까지만이며 미억산령 너머는 동방변경이라 한다.
- 통치
통치는 본국에서 파견된 종2품 대총관 아래에 북미주와 남미주를 각각 담당하는 종3품 지사가 있다. 빙주도 미주대총관 관할이지만 인구가 너무 적어서 지사가 없다.
- 인구
3부 초기 시점 인구는 약 40만이었고 이후 이주민이 늘어 약 100만이 된다.
- 이주
미주에 정착한 이들은 대부분 본토에서 살기 어려워 건너간 하층민들이며 사대부들은 미주 이주를 매우 꺼려 거의 오지 않는데, 육로로 연결된 북변과 달리 편도만도 4개월이 걸리는 미주에 가면 성묘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주로 이민 가기 위해서는 상단에 1명당 은 30냥 또는 쌀 15석이라는 거금을 삯으로 내야 하는데, 하층민들은 그만한 돈이 없어 보통 상단에 빚을 지고 이민한다. 이 빚의 부담으로 인해 정착 후에도 토호들의 노비나 다름없는 비참한 처지가 되거나 미주대령 너머로 야반도주하는 경우도 많다.
- 혼사
개척지답게 남녀 성비가 문제라서 혼처를 구하기 어렵다. 있는 집안들은 큰 돈을 들여서라도 본국 출신 한인 여자를 구하고, 그렇지 않은 집안은 본국에서 직송된 왜녀, 묘녀 등을 노비로서 구입, 결혼한 후 속량해주는 매매혼을 한다. 이것도 안 된다면 현지의 미주야인과 결혼하는 것이 가장 싸게 혼처를 구하는 방법이다.
- 자원
개척 70년이 지났지만 좋은 철광을 찾지 못해 철을 전부 본국에서 수입하고, 화약, 종이도 아직 자급하지 못한다. 제조가 은근히 어려운 화약과 종이는 둘째치더라도[101] , 금광은 첫 탐동사 때 바로 찾았는데 70년 동안이나 철광을 못 찾았다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북미대륙의 철광석 산지는 주로 오대호 연안에 몰려있고 태평양 연안은 금은 풍부하나 철광석 산지는 놀라울 정도로 없다는 점을 고증한 것이다.# 그러다가 재석이 중미주를 개척한 후 중미주에서 드디어 철광을 찾았다.
- 교육
이주민 중 사대부가 거의 없어 학문의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 한인 정체성 유지를 위해 향교와 사당을 많이 짓고 있으며 이형준이 국문으로 된 유학 서적인 수식독본을 집필하여 보급한다.
- 인디언들의 역량 강화
장조 시절 대한에 충성을 맹세한 오금족들은 원역사의 백인들 만큼은 아니지만 전염병 때문에, 그리고 한인들이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보호 의무를 방기해서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한인들의 발전된 기술로 만들어진 도구들을 제공받고 이를 농사와 사냥 뿐만이 아니라 사람 잡는데 활용해서 주변 부족들을 합치고 더 강한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사회 구조의 변화도 겪게 되었다. 걔다가 대한은 원역사의 백인들과 달리 이들을 야만족이지만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에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는데 차별이 없어서, 장기적으로도 인디언들의 역량이 강화되어 북미대륙의 역사를 크게 바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대한의 영향력 하에 있지 않은 부족인 아파치들이 유출된 총으로 무장해서 대한령 미주와 번호인 미웍족을 약탈하는 부작용도 생겼다. 아파치들도 총의 중요성을 알고 토벌 때도 도망치면서 다른 무기는 다 버려도 총은 꼭 챙기며, 대한산 면포로 지은 바지를 입은 아파치가 있을 정도.
4.1.1. 북미주
원역사의 시애틀, 캐나다 연안.
인구의 약 25만. 상대적으로 이주가 적었기에 원주민 세력이 유지되고 있다. 신욱족(치누크)이 이 지역에 있으며 조선제 무기로 여러 군소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성해진다.
신욱족과 결혼동맹을 맺은 원씨 일가가 북미주 일대의 권세가이다.
4.1.2. 남미주
원역사의 캘리포니아 일대.
인구의 약 70만. 이주민이 많았기에 이 지역의 원주민인 미억족은 한인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궤멸적인 피해를 입는다. 때문에 미억족은 신욱족과 달리 대한에 감정이 좋지 않다. 반면 올로내족은 국경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대한으로부터 무기를 얻어 군소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세력을 키웠다.
4.1.3. 빙주
원역사의 알래스카.
인구는 소수. 내강상단이 세운 3곳의 포경 기지가 주요 산업이다. 빙주토인(이누이트)들이 고용되어 일하는데 별도의 급료 없이 내강상단이 비싼 기름과 수염을 챙겨가고 남는 고기와 철제 도구들을 급료로 받는다.
4.1.4. 중미주
원역사의 오리건 일대.
인구 약 5만. 을병대기근으로 이주민이 늘어나자 남북미주 사이의 미개발 지역을 중미주라 하여 개척하고 있다.
4.2. 대한령 밖 미주
공식적 대한의 강역은 아니지만 대한령 미주에서 죄를 짓거나 빚을 지고 대평원으로 도망쳐 정착촌을 짓거나 원주민 종족에 합류한 한인들이 일부 있다. 대한에 복속했던 미억족을 약탈하는 아파치족을 원정으로 토벌했으며 그 과정에서 푸에블로 족과 우호관계가 된다. 이후 정호찬이 2년에 걸쳐 대평원을 돌며 원주민들을 회유하고 프랑스 식민지와도 접촉한다.
재석은 미주의 넓은 대평원을 영국/프랑스 식민지가 장악해서 미합중국같은 강대국이 생기는 것은 대한령 미주를 지키기 어렵게 될 것이기에 싫고, 반대로 대한령 미주가 대평원으로 확장하면 본국보다 강해진 대한령 미주가 독립하여 원역사의 미국처럼 본국을 압도하는 것도 싫은 딜레마에 빠진다.[102] 때문에 대평원 원주민들이 연합하여 아모국처럼 친한 성향의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할 구상을 하며, 정호찬이 모아온 대평원 원주민 부족들의 사자들에게 환독을 풀어 동질성을 주입시킨다. 하지만 제대로 진행되기 전에 재석이 귀국한다.
4.3. 서반아령 신서반아
본국인 서반아가 대한과 우호관계였기 때문에 대한령 미주와 충돌 없이 우호적으로 지냈다. 대한에서 남는 곡식을 정기적으로 누에바 에스파냐에 수출하고 있었을 정도. 부왕 대리를 잠시 맡았던 돈 후안 몬타네스가 대한 측에 식량 수출을 거부하고 무례한 서한을 보내는 사건도 있었지만 후임자가 잘 수습하여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몬타네스 주교가 다시 부왕 대리를 맡아 필리핀 도독령에 한인 불법체류자를 개종, 편입하고 저항하면 토벌하라는 지침을 내리는 바람에, 대한의 어그로를 끌게 되어 미래가 어둡다.
4.4. 하와이
하와이 제도. 8개의 섬을 모두 합친 하와이 제도는 하와이라고 불리며, 각각의 섬은 하와도(하와이, 빅 아일랜드), 마우도(마우이), 가홀도(카호올라웨), 몰로도(몰로카이), 라나도(라나이), 오아도(오아후), 가와도(카우아이), 니하도(니하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재석이 동변관리사 시절 태평양 패권 유지를 위해 지원자들을 모아 원정대를 구성해서 발견, 정복한다. 와이아케아 추장 마우이와 처음 접촉한 것을 시작으로 섬 전체의 족장들에게 형식적으로 복속 서약을 받는다. 이후 재석이 떠난 뒤 마우이 추장은 남겨진 원정대원들의 도움으로 당시 하와이 여왕이던 케아케알라니와하네를 몰아내고 유력자인 쿠아후이아도 처치한 뒤 그의 딸과 정략결혼하며 하와이의 통일을 이룬다.
이후 본국에서 건복제의 칙사가 도착해 마우이를 공식적으로 하와이 군왕으로 책봉하고 휘하 6개 부족장에게 세습 공작위를 내린다. 이로써 하와이는 칭제건원한 대한의 첫번째 번국이 되었다.
마우이 왕은 사조룡이 수놓아진 녹색 곤룡포를 입는 등 대한의 복식 문화도 전파된다.
1699년 일어난 하와국의 내란. 마우이 왕의 넷째 왕자인 하정위가 부왕의 비인 쿠아후이아의 딸 가비와 사통하여 왕위를 노리고 난을 일으킨다. 가비가 마우이를 독살하려 시도했으나 의식불명에 빠트리는 데에 그쳤다. 이후 일부 왕자는 하정위에게 붙고, 반군 진압 주도권을 두고 마우이파 왕자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났으며 대한 주둔군은 하정위파와 밀약을 맺은 것인지 움직이지 않아 내란은 수 개월을 지속되었다. 그러나 카우이의 활약으로 진압되었고 내란 도중 기존 세자를 포함한 왕자 6명이 전사하고 하정위에게 붙은 왕자 8명이 처형되어 형제 관계가 정리되어서 카우이의 계승이 유력하게 된다.
[1] 다만 현실에서도 선대왕이 정치적인 이유로 개종한 나이롱 신자였으나 그 후손 왕이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경우가 꽤 많았으므로 후금도 시간이 더 지나면 독실한 천주교 대칸이 등장해서 종교색이 짙어질 수도 있다.[2] 되놈이 맞는 표현이고, 떼놈이 주로 쓰이는 멸칭이지만 작중에서는 때가 많다고 때놈이라고[3] 촉한, 조위, 손오 삼국이 서로의 군주를 촉주, 위주, 오주라고 부르던 것 처럼 대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송나라 주인'이라는 의미로 송주(宋主)라고만 부르고 있으며, 그마저도 과분하다는 여론이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후송 태조 조승복이 소금 잠상을 한 것에 착안해서 아예 '소금 장수 집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건 대한 태황이 직접 부르는 멸칭이다.[4] 흑룡강 이북 외만주[5] 레나 강 이동 이르쿠츠크 주, 극동 연방관구[6] 워싱턴 주, 브리티시 컬럼비아[7] 네바다, 유타 주[8] 황제가 아니라 태황이라고 칭한 것을 보면 2부에서 발견한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밝혀진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즉, 대한 태황은 고려 태왕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9] 처음에는 태황비라는 호칭도 혼용하는것으로 설명되었는데, 비(妃)는 제후왕 부인의 호칭이고 천자의 부인의 호칭은 후(后)라는 독자 지적에 태황비 호칭은 황후로 수정하며 폐기된 듯.[10] 태조는 개국시조이니 '조'를 받는게 당연하고 세조는 정통성 없는 찬탈자 암군이었지만 그랬기에 예종이 정통성 강화를 위해 억지로 과분한 묘호를 밀어붙였다.[11] 사실 창업군주나 추존이 아니면서도 조를 받기 위한 업적을 쌓으려면 원역사의 영락제나 강희제 정도의 업적을 이루어야 가능하다. 이는 본작의 한국이 이미 묘호를 쓰던 국가가 칭제한, 동아시아를 통틀어 매우 희귀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저 '조' 붙은 추존황제들이 말 그대로 추존된 명예황제들이기 때문에 후대 군주들은 그냥 기존 법칙대로 '종'을 쓰는데 아무 부담이 없지만, 한국의 저 추존태황들은 실제로 즉위해 통치한 군주였고 실질적으로도 대한은 대내외적으로 조선의 국체가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 '종'을 쓰는것이 사실상 격하로 받아들여지기 쉬운 상황이다. 그나마 기회가 부자승계가 아닌 형제승계로 황위에 오른 건흥제가 형 건복제를 '종'으로 올리면서 스스로 열조의 적통을 자처하는 것이겠지만 건복제 역시 열조와 같은 이유가 적용되어 조가 붙어버렸으니 이젠 빼도박도 못한다.[12] 작가의 말에 의하면 내각승상 직속으로 잡다한 행정사무를 맡는, 현대의 국무조정실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13] 3부 시점에서는 육군과 수군 사이의 인적 교류가 드문데다가, 전시에 동원될 수운 및 민간선박, 조선소까지 관할하는 오늘날의 해양수산부에 가까운 조직으로 만들자고 제의하는 것.[14] 대역갤의 팬이 만든 것을 작가가 참고하라고 작중에도 올리는 것으로, 준공식지도나 마찬가지지만 실제 내용상의 지도와 다른 곳도 있다.[15] 사르후 전투에서 얻은 영락군에 주변 지역을 편입시켜 승격한 것으로 추정된다.[16] 남미주는 캘리포니아, 북미주는 시애틀 지역, 아직 로키 산맥은 넘지 못했다고 한다.[17] 명 멸망 후 건주에서 할양되었다.[18] 대외적인 명분은 주산군도는 한때 상국이었던 명의 영토인데 주인이 사라졌다고 낼름 집어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영토로 편입하고 싶었다면 명 황실을 계승하는 대명공을 내세워 명분을 확보하면 그만이다. 그저 실리 때문에 그냥 두는 게 이득이라 안 할 뿐.[19] 520만에 달하는 북방 5주(부여주/연해주/속말주/요동주/영락주) 인구가 대부분이고, 미주와 북구주는 도합 107만 정도이며, 대남도 인구는 대략 210만 즈음이다.[20] 부친이 내강상단 도방이었기에 가능했다.[21] 백면나인은 백인 궁녀를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슬라브계였던 관계로 백면나인 자체가 슬라브족 여성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변했다.[22] 조선 여인들이 백인 남자들의 큰 양물에 혹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혼혈 사생아를 낳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 경우 여인과 이런 혼혈 사생아들은 버려진다고 한다. 딱히 인종적인 차별이 아니라, 불륜 행위와 사생아에 대해서만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 정상적인 가정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은 별 다른 차별없이 살고 있다.[23] 이들은 태자가 혼인할 때 금혼령도 받아들이고, 간택단자도 낸다. 다만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확고히 지키고 이에 응하지 않고 있는데, 송시열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장조대제가 허용한 것이라며 3부 들어서도 특례를 인정 받았다.[24] 불구, 바보, 과거급제자, 3대 독자 등.[25] 재석과 상희는 현대의 기억을 떠올려서 수포대장이 이끄는 수포청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는데, 시중에서는 수포청에 대응해서 암포청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26] 말이 훈련이지 도박성의 유흥에 가깝다. 이런 건 실제 서부개척시대 미국 민병대도 똑같았다.[27] 미주 이민 1세대가 장조 시대 온갖 전란을 거친 도감군의 베테랑 퇴역병들인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 한 부분. 역설적으로 그만큼 미주는 평화로운 지역이라 할 수 있다.[28] 아무래도 고려시대 장수라는 점이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29] 견서사는 중단되었지만 그 목표였던 현지 주재원들을 통해 서양과 교류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퇴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30] 스페인 총독은 애꿎은 중국인들을 학살하여 분풀이를 한다.[31] 연재일인 2021년 1월 9일은 토요일이므로 그 전날인 1월 8일 기준 은 시세는 트로이온스(31.1034768 g) 당 24.58달러, 환율은 매매기준율 기준 1,092원으로 대한통보 1냥(37.5 g)은 30,743.3원이다.[32] 원은 추후 금화를 발행할 때 단위로 쓰기 위해 남겨둔다.[33] 대유주와는 문화가 다르기에 태황의 얼굴을 새기지는 않았다.[34] 다른 이름들 후보로는 고려때 쓰던 동국통보, 해동통보, 그리고 나라가 세졌더니 스케일도 커졌는지 천하통보도 있었으나,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것은 대한통보와 건흥통보였고 태황이 바뀔 때마다 화폐 이름을 바꿀 수는 없다며 대한통보로 결정된다.[35] 나중에는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조폐기를 만들 계획이지만 아직은 수작업으로도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36] 언급은 없지만, 비슷한 시기 증기기관 개발과 개량은 유럽에서도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이쪽은 아직 실험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대한에서는 민간에서 산업용으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로 앞서 가고 있는 상태. 더구나 증기기관의 활용에는 시장의 확대, 노예제도 폐지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산업혁명 초기만 해도 증기기관에 대해서 불티를 날려 화재를 유발한다는 둥, 악마의 기계라는 둥 좋지 않은 편견이 꽤 많았다.[37] 석탄 수송거리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북구주-나하, 제주-나하 항행거리는 벽란도-옌타이 항행거리의 2배에 달한다.[38] 후금 역시 루스와 맞닿는 만큼 충돌이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왕래가 힘든 만큼, 대한 측에 이 문제를 맡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39] 사실 마음만 먹으면 점령하는 게 어렵지 않으나, 어차피 대한에서 원한 것은 황제국에 어울리는 조공국이나 번국이지, 새로운 영토는 아니다. 더구나 대기근 시기에 재정이 빠듯한 상황에서 섬 몇 개 먹자고 군대를 움직이고, 주변국을 긴장시키며 자극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40] 실제 역사에서 서울 인구가 70만을 돌파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의 일이다.[41] 그레고리력은 양력.[42] 명군 세계관에서 기상현상은 실제 역사와 동일하다.[43] 역사를 어렴풋이 알고 있던 재석은 2부 장조 시절에 경신대기근이라는 대기근으로 조선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경술년과 신해년에 일어난 것이 아닌 경신년에 일어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장조 사망 시점에서 너무 먼 미래라서 잊혀질거라는 생각이 든 재석은 예언 같은거 안 하기로 결정했고 결과적으로는 실수 예언을 피하게 되었다.[44] 30년이 넘도록 기근이 이어졌으니 장조 대까지 쌓아놓은 보와 저수지도 거의 다 말라버렸을 것이고, 감자와 옥수수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나마 장조의 유언과 잘 정비된 국가 시스템, 여러 구황 작물과 식민지들, 타국과의 식량 교역 등을 통해 원역사보다 훨씬 더 양호하게 해결했다. 원역사의 조선에서는 경신대기근이 진행되는 2년 만에 100만 명이 아사했다.[45] 태황의 와병은 발표하지 않지만, 대리청정 사실은 보도되므로 행간을 읽을 줄 알면 태황이 와병 중이라는 걸 눈치챈다.[46] 큰 틀에선 맞지만 세부사항은 틀린데다가 성친왕의 활약을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 수준으로 묘사했지만 지방에서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지라 손을 못 쓰고 있다.[47] 재석은 경제적 이유 외에도 선조가 알라르콘에게 인간 평등 사상을 교육받은 영향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48] 실제 조선에는 외지부라는 변호사 비슷한 이들이 존재했다. 다만 조정에서는 이들이 수령의 권한인 사법판결에 개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지속적으로 탄압했고 결국 근대에 서양 사법체계를 도입하기 전까지 제도화되지는 못했다.[49] 다만 예왕의 책사 최신원은 사지가 먼저 잘리고 목이 잘린다.[50] 사실 유럽인들이 조선의 혹형을 운운하는 것 자체도 웃긴 일이다. 당장 마녀재판을 하면서 온갖 고문을 다 자행한 게 유럽이고, 화형은 물론 수레바퀴형에 거열형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51] 삼대독자거나 딱 보면 알 수 있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는 경우 등[52] 2부에서는 전국에서 2개의 탄광만으로 석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있었다.[53] 2부 시절에는 백면나인들이 모두 궁녀들이었기에 중전이 소유한 정도극단에서만 백면나인 배우를 쓸 수 있었다.[54] 당장 돈이 된다고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담배를 심으면 식량생산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55] 일반 곡식을 재배하는 논밭의 거의 5배 이상.[56] 현실의 그림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그림. 말년의 이혼 추기경의 도포와 갓을 입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57] 사씨남정기는 쓰지 않았다.[58] 재석이 빈 전투에 참전한 이유는 차르니에츠키의 도발 때문이 가장 컸지만 본국에는 그렇게 알려진다.[59] 재석은 이걸로 거위 무종계를 만들어 먹는다. 왜 닭이 아니라 거위로 했냐면 이동네는 닭도 맛없어서 그랬다고.[60] 영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 위그노 과학자[61] 연재일인 2021년 1월 5일 기준 은 시세는 트로이온스(31.1034768 g) 당 27.57달러, 환율은 매매기준율 기준 1,089원으로 은 1냥(37.5 g)은 36,198.2원이다.[62] 피를 붉게 하는 것이 그 안에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어떻게 해도 관찰할 수 없어 피와 비슷한 정도로 짠 소금물을 이용해 희석해서 관찰에 성공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생리식염수로 이어질 수도 있다.[63] 바이러스나 프리온은 광학현미경으로는 관찰이 불가능하고, 박테리아도 염색하지 않으면 관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본래 이질균도 염색을 해야 관찰되나 김인황의 시력이 매우 좋아 염색하지 않고도 이질균을 관찰하는데 성공했다는 설정이라고 작가가 설명했다. 물론 박테리아든 바이러스든 병원체가 원인이 아닌 병도 많다.[64] 이 동물들은 전통적으로 장수의 상징이기에 인기가 많을 만하다.[65] 야생 칠면조는 미국 서부 해안 일대에는 살지 않는다[66] 덩치가 커서 백숙을 한다고 해도 닭보다 더 오래 끓여야 한다. 더구나 칠면조는 삶으면 질겨져서 맛이 별로다.[67] 우애가 깊은 동물이라 유교적인관점에서 꽤 호평을 했을듯 싶다.[68] 불교도가 대부분 서민들인 대한과 달리 일본에서는 고위층도 불교를 많이 믿으니 당연히 이쪽이 더 수익성이 좋을 수밖에 없다.[69] 다만 과거 터키에 노예로 잡혀갔다가 대한으로 온 신자들의 후손이 100년 가까이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러시아 정교회에 알려지면 어떤식으로든 지원을 하려고 나설 것으로 보인다. 실제 카톨릭만 해도 조선에서 선교사도 없이 신자가 생겨났다고 하니 어떻게든 지원해 주려 애썼다.[70] 적대국인 돌궐에서 방문했을 가능성은 없지만 우호국인 천축에서 찾아왔을 가능성도 있다.[71] 물론 재석의 사유재산을 침범했기 때문만이 이유의 전부가 아니라, 아파치족이 대한령 미주의 번호인 미억족을 약탈하고 한인들까지 위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72] 그 중 482명은 융통성 없는 남대문 수문장이 성문을 뒤늦게 개방해서 남대문으로 탈출하려던 중 발생한 압사자다.[73] 그래서 예왕이 난을 준비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74] 형구들도 다 불에 타서 추국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 만들어야 했다.[75] 죄인들을 가둘 곳이 없어서 난의 수뇌부는 경복궁에 마련된 추국청, 병사들은 원각사 터에 임시로 수용해야 했다.[76] 2부에서 재석이 대남도 초대 관찰사가 된 정일한의 후손이 뒤늦게 자신이 왕족임을 알고 반란을 일으켜서 한양이 불바다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그 형태는 달랐지만 반란도 한양 불바다도 실제로 일어났다. [77] 그 중 60명은 성친왕저를 지키던 외금위 병력으로 성친왕저를 끝까지 지키다가 전멸한다.[78] 전사자의 대부분인 800여명 이상은 반군이 와해될 때 남대문으로 퇴각하다가 압사당했다.[79] 6명은 성친왕저에 고용된 하인, 29명은 성친왕저에 피난 중이던 이재민. 5명은 동촌 화재로 사망한 민간인. 사망자 중에는 보리스의 아내도 있다.[80] 대신 부관참시 당했다.[81] 양측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양측의 개별 플레이를 명이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82] 사실 청도 내륙 민란을 진압할 정도는 되나 정치적인 이유로 대한에 원병을 청하는 것이다. 물론 해군이 없는 등 국가 자체가 후송에 비해 손색이 있긴 하다.[83] 원래 상해, 항주만 개항하기로 했다가 후송 측의 요청으로 복주가 추가되었다.[84] 그러나 대한에서는 강한 상비군이 있기 때문에 건주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다.[85] 전쟁기록을 통해서 그 나라의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력과 국력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으니 이상한건 아니다.[86] 대한에게는 약한 척을 해서 자신들의 상국이라는 위신을 세워주고 청의 한인들에게는 대한과 청이 돈독한 동맹관계라는 것을 과시하여 반란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도로 추정된다. 대한에서도 이 반란 토벌전이 전쟁을 거의 겪지 않는 대한군이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대규모 육상전이라서 대한군의 실전 감각 유지에 도움이 되는데다가, 이에 따른 보상도 주기 때문에 응하는 것으로 보인다.[87] 이들을 험하게 다뤘다가 청 조정이 한족들에게 민심을 잃는 것도 곤란하다.[88] 일본도 1674~1675년에 엔포 대기근을 겪었고 당시는 전세계가 소빙하기를 겪는 와중이었으므로 일본이라고 식량사정이 좋았을 리는 없다. 하지만 이미 장조 시절 경인왜란과 을미동정 때 호되게 당하고 힘의 차이를 확인한 에도 막부로서는 막강한 군사력의 이웃 국가가 대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니, 눈이 돌아간 대한군에게 일본이 약탈당하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없는 살림에서라도 미리 숙이고 들어갔을 것이다.[89] 진짜 취해서인지, 취한척 하면서 속내를 드러낸 것인지는 불명[90] 실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소문은 그렇게 났다.[91] 빈손으로 전역해야 할 병사들 중에서도 자원을 받아서 총 1000여명 규모[92] 명의 번국이던 2부 시절에는 황제는 오직 중원의 천자 뿐이라며 황제로 칭하는데 거부감이 있어 카이저라고 음차해서 불렀으나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칭제하며 대한으로 바뀐 3부 시점에는 그럴 이유가 없어 그냥 황제로 부르게 되었다.[93] 잉글국과 동군연합이라 그래도 나라 취급인 숙호국과 달리 아란도는 나라도 아닌 잉글국의 지방으로 간주한다.[94] 엄밀히 말하면 천연두로 죽은게 아니라 피를 몇 리터씩 흘리게 하는 엉터리 사혈치료로 죽었다.[95] 안타깝게도 이런 주장이 현실에도 있다.[96] 원래 동아시아인이 황인 중에 가장 피부가 흰 편으로 남유럽 백인과 비슷한 정도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북방계인 예맥이 원류 중 하나이기 때문에 중국인, 일본인에 비해서도 체격이 크고 피부가 흰 편이다.[97] 실제 역사에서는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을 일으킨 오페르트가 유럽에 조선인은 백인 후손이라는 썰을 퍼트렸다.[98] 파스타를 먹던 이탈리아에서는 3부 이전부터 이미 포크를 잘 쓰고 있었으나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는 포크의 존재를 알고도 쓰지 않았다. 포크가 빨리 보급되지 않은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거나 이탈리아 놈들이나 쓰는 것이라는 문화적인 거부감이 주된 이유였는데, 작중에서는 조선산 고급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포크와 달리 창숟가락 사용은 세련된 것으로 여겨져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9] 당시 루스 차르국은 이미 차르를 자칭하고 있었지만 워낙 유럽에서 쩌리 국가인지라 다른 유럽국가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그냥 모스크바 대공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한에서는 그것도 아니고 그냥 도적떼 수령처럼 여기는 것. 순박한 원주민들을 수탈하고 여자들은 성노예로 삼고 있고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발전 수준이 떨어지니 조선인들 입장에선 천하의 개쌍놈들에 야만인들로 보일 만도 하다.[100] 실제로 셰익스피어는 작품의 고증에 전혀 관심이 없어서 클레오파트라가 당구를 치는 등 고증을 따지면 설명이 안 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사실 이 세계관에선 동양과 교류가 많이 이뤄진 편이지만 실제 역사에서 당시 유럽인들의 동방에 대한 이미지는 아랍 풍습이 고작이기도 했다.[101] 화약과 종이와 소금은 전근대에는 국가 전매 품목으로 삼는 일이 흔했을 정도로 노동집약적인 제조품이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사초마저 물에 씻어 재활용했을 정도로 전근대의 종이는 간단한 물건이 아니었다. 인구 100만명도 채 못 채운 미주에서 원주민 부족 말고 딱히 적국도 없는데 화약의 수요가 있을리도 없고. [102] 물론 현실의 미국과 영국처럼 모국과 우호적인 초강대국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이건 영국이 미국에 개길 정도의 국력이 전혀 안되는 것도 있거니와 미국 입장에서도 영국이 오대양 육대주에 걸쳐 구축해놓은 막대한 인적, 문화적 네트워크(특히 파이브 아이즈로 대표되는 앵글로색슨 운명공동체)가 매력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히려 모국과 식민지의 힘이 엇비슷하면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제국처럼 툭탁거리는 사이가 될 수도 있고, 실제 미국과 영국도 독립 후 반세기가 지나 또다시 미영전쟁이라는 개싸움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수십년간 왕노릇을 하며 조선-대한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게 된 재석은 대한의 강역이 줄어드는 것을 꺼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