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연수원 기수

 


1. 개요
2. 사법연수원 개원 전 유명인물(1963~1969 사법시험 합격자)
3. 사법연수원 기수별 유명 인물
4. 변호사시험 횟수별 유명 인물
5.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에서는 법조인들끼리(아니, 일반인을 상대할 때에도) 관등성명을 묻거나 답할 때 사법연수원 몇 기인지를 거론하는 관행이 있다. 동성동본끼리 서로 몇세손이냐고 묻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관행인 듯하다.
사법연수원이 생기기 전에는 사법대학원이 있었고, 법학전문대학원이 도입된 후로는 사법연수원을 나오지 않은 법조인들이 배출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사법연수원 출신이 대한민국 법조인의 다수이다 보니, 한국 법조계에서 '기수'라고 하면 보통 사법연수원 기수가 문제된다.
어느 정도로 문제되냐면, 군사정권 당시 육군사관학교 기수와 똑같다 보면 된다. 물론 공군사관학교 출신 민항기 조종사도 기수를 따지긴 하나[1] 사법연수원 기수에 비하면 약과이며, '''해병대 기수 따위는 소꿉장난으로 보일 정도로 기수를 따지는 곳이 법조계다.''' 물론 물리적인 구타 등 똥군기는 없지만 그런 구타보다 더욱 강력한 똥군기가 얼마든 나올 수 있다. 법조계에서도 기수열외, 왕따 등의 방식으로 당연히 나온다. 평검사 시절 홍준표가 왕따를 당해서 검찰 수위조차 인사하지 않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사법시험 몇 회 합격인지는 굳이 묻지 않는 것이 일반인데(그런데 이는 후술하는 로스쿨 체제의 경우에도 같다),[2]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대체로 '사법시험 회수-10'이 그 사람의 사법연수원 기수에 해당한다. 졸업, 병역 등으로 합격 이듬해에 바로 사법연수생 임명이 되지 않은 경우 등이 그러한 특별한 사정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경우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듬해에 사법연수생으로 임명되지만, 학업, 병역 등의 이후로 나중에야 사법연수원에 들어가는 예도 가끔 있다. 사법연수원이 2년제이므로 연수생으로 임명되고서 2년 후에 연수원을 마치게 되지만, 휴학을 하거나[3] 정직을 당한(...) 경우는 예외이다.
고위직 판사나 검사, 특히 검사의 경우에는 연수원 기수가 사실상 일종의 계급정년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이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되자 야당에서 이를 반대하면서 내세운 중요한 논거 중 하나가 '김 후보자보다 더 '''기수가 높은''' 현직 판사가 수두룩하다.'였고, 법원 내에서 "변시 1회·사법연수원 42기 누가 선배?"라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는 한국 법조계에서 '기수'가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지는가 하는 사실의 방증이다.[4]
'합격자 300명 시대' 이후에는 인원이 많다 보니 기수가 같다고 해서 특별히 면식이 있거나 어떤 유대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수를 따지는 정도도 개인차가 있어서, 아는 사람이나 유명인의 기수가 몇 기인지를 귀신같이 다 기억하는 법조인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 알아서 뭣하느냐는 식으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법조인도 없지 않다. 다만, 다른 법조인의 약력을 찾아보면서 그 사람의 '기수'가 몇 기인지 전혀 궁금해 하지 않는 한국 법조인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법조인의 경우에도 '로스쿨 기수'나 변호사시험 회수를 따지는 것이 관행이 되어 있다(대학원이랍시고 학번을 따지지는 않는다). 2009년에 로스쿨에 입학한 사람이 로스쿨 1기이다. 변호사시험 회수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응시를 연기하거나 재수를 하는 등으로 나중에 합격한 예들도 있어서, 다소 혼선이 있다.
하여간 기수를 따지는 것이 관행이다 보니, 사법연수원의 '기수문화'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면 로스쿨은 그런 게 있느냐 없느냐에 관해 논란이 있으나, '기수문화'의 개념 자체가 모호하다 보니 논의가 겉도는 것을 볼 수 있다.
왠지 동명이인 구분에 사용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한변호사협회서울지방변호사회 등지에서 동명이인을 구분할 때에는 생년월일을 활용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기수에 동명이인이 있는 예가 있다.
사법시험 폐지에 따라 49기가 이론적으로 마지막 기수여야 하나, 50기로 입소해야 하는 인원이 아직 1명 남아 있어서, 사법연수원 측이 연수를 어떻게 할지 고심하다가,# 결국 마지막 연수생인 조우상[5][6] 씨를 50기 연수생으로 입소시키기로 하였다.

2. 사법연수원 개원 전 유명인물(1963~1969 사법시험 합격자)


'''횟수'''
'''시험연도'''
'''주요 합격자'''
1회
1963년
이건개, 오유방, 정경식
2회
1963년
김기수, 김영무, 정성진
3회
1964년
김종구
4회
1964년
김태정#s-2, 심상명, 조무제
5회
1965년
변정일#s-2, 유지담, 이원성, 이진강, 현경대
6회
1966년
이재상
7회
1967년
심재륜
8회
1967년
김중권, 김평우, 김효종, 안강민, 이강국#s-2
박철언
9회
1968년
강신욱, 손지열, 신승남, 신영무, 최병국
10회
1969년
이상경, 주선회

3. 사법연수원 기수별 유명 인물


'''기수'''
'''입소연도'''
'''임명인원'''
'''주요 수료생'''
1기[7]
1971
32
김경한, 김용담, 오탄, 이치호, 진형구, 채이식
2기[8]
1971
49
강재섭, 김승규, 김일수, 양승태, 이종찬, 정호영, 조준웅, 황산성
3기
1972
81
김상철, 송광수, 서석구
4기
1973
79
김황식, 이경재, 이범관, 이영애[9], 이홍훈, 장윤석, 정홍원, 최연희
5기
1974
59
김종빈, 박일환, 윤재기, 이동흡
6기
1975
58
김성호, 박주선, 양창수, 이사철, 임내현
7기
1976
58
김능환, '''노무현''', 송훈석, 안대희, 안상수, 이종백, 이종왕, 전효숙, 정상명, 정인봉, 조대현, 진영, 차한성
8기
1977
58
고영주, 김인규, 김희옥, 신영철, 전수안, 정동기, 천정배, 홍경식 ,홍석조
9기
1978
74
김이수, 윤진수, 임채진
10기
1979
98
고조흥, 권재진, 김용원, 김회선, 목영준, 민일영, 박영수, 여상규, 이상수, 이주영, 이진성, 조용호, 황우여
11기
1980
112
경대수, 고영한, 김영란, 김준규, 박상옥, 서기석, 이승구, 이인복, 이인제
12기[9]
1981
150
고승덕, 김창종, '''문재인''', 박병대, 박원순, 박정규, 송두환, 심장수, 이귀남, 이한성, 이진성, 임호영, 조배숙, 조영래, 조재연, 천성관, 함승희, 황찬현
13기
1982
273
강금실, 김문석, 김창석, 김학근, 김형태, 문석호, 박한철, 성윤환, 신평, 안홍렬, 유남석, 윤형모, 이광범, 정기용, 조대환, 조희대, 최성준, 최재형, 한상대, 황교안, 허익범
14기
1983
311
강일원, 권순일, 김영한, 김제식, 김진태[10], 김태천, 김학의, 신기남, 안창호, 엄호성, 옥영보, 이기문, 이범래, 이상권, 이상열, 이석태, 이인규, 이인기, 정종섭, 주호영, 채동욱, 추미애, 홍일표, 홍준표
15기
1984
301
곽상도, 권영세, 김기현, 김명수, 김상도, 김용철, 김학원, 김홍일, 남기춘, 석동현, 소병철, 송철호, 안철상, 양승부, 양재호, 유기준, 윤석만, 이원영, 이종석, 이중환, 이창세, 정종복, 주철현, 최교일, 하창우
16기[11]
1985
307
강희락, 국민수, 김선우, 김수남, 김중확, 김학배, 김현웅, 노태악, 박보영, 박상용, 송강호, 신현수, 윤경식, 이득홍, 이성재, 이정미, 임종헌, 정장현, 조영곤, 최인석
17기
1986
309
강경필, 권성동, 김경수, 김삼화, 김선수, 김수천, 박성재, 박승환, 박요찬, 박주현, 박충근, 오세훈, 이동원, 이상인, 이석연, 이승채, 이용삼, 이충범, 임무영, 임성근, 정형식, 조성욱, 최거훈, 최용규, 최재경, 한문철, 홍만표
18기
1987
297
강지원, 김영덕, 김재형, 김주현, 김종필, 김진태[12], 문무일, 문병호, 문형배, 민유숙, 박세환, 박형상, 변찬우, 송기헌, 심규철, 오세인, 위철환, 이석수, 이영렬, 이용복, 이재명, 정성호, 조응천, 최원식
19기[14]
1988
305
강영수, 김상헌, 김수창, 김소영, 김재경, 김진모, 노정희, 봉욱, 신광렬, 우병우, 윤갑근, 이은애, 이창현, 이춘석, 전해철, 조은석, 조희진, 주성영, 최재천, 황철규
20기
1989
304
김상환, 김영선, 김오수, 김준곤, 김회재, 박정식, 박정화, 안태근, 오시영, 은진수, 이금로, 이명규, 이영규, 이종걸, 이춘석, 전현준, 정점식
21기
1990
300
김경진, 김기동, 김외숙, 김인원, 김정훈, 김진욱, 노승권, 박경춘, 박균택, 안상돈, 양재식, 유상범, 이선애, 이용철, 진경준
22기
1991
297
권오성, 권익환, 김기영, 김영대, 양부남, 양정숙, 우윤근, 이규철, 이동열, 이상경, 이영진, 이현주, 이흥구, 전병관, 최윤수
23기
1992
289
강남일, 강용석, 고기영, 구본선, 김귀찬, 김두식, 김신호, 김영종, 박범계, 박성수, 변창훈, 배성범, 백승호, 송삼현, 송옥렬, 여운국, 오인서, 윤석열, 이용구, 이유정, 이정렬, 이중희, 조상철, 조윤선, 조진래, 주광덕, 이성윤
24기
1993
293
강인철, 금태섭, 김귀옥, 김용남, 나경원, 노관규, 박성진, 박준선, 여환섭, 원희룡, 유영하, 이상민, 이용주, 장영수, 정한중, 조남관, 조의연, 차맹기
25기
1994
284
곽규택, 김도읍, 김세윤, 김종률, 김진동, 김형준, 김후곤, 노정연, 박민식, 박형철, 성창호, 송기석, 안호영, 윤대진, 이두봉, 이두아, 정수봉, 정준길, 최기상
26기[15]
1995
292
권순호, 김동성, 김명주, 김재원, 노정환, 도진기, 문유석, 박찬호, 송영길, 안귀옥, 오민석, 이미선, 임관혁, 천종호, 최강욱
27기
1996
315
박민수, 박재영, 양승조, 최유정, 오덕식, 한동훈
28기
1997
496
김승원, 박기억, 손범규, 이재범, 이재화, 전현희, 정미경, 진선미, 이정희[16]
29기
1998
592
권순정, 김병준, 김웅, 김형연, 박길배, 박정길, 백혜련, 서기호, 손영배, 오기형, 이명신, 이언주, 정영훈, 조재빈
30기
1999
694
구희승, 김종천, 김택수, 손금주, 양소영 엄태준, 이찬희, 임은정, 한상혁
31기
2000
717
권영국, 김관영, 김정일, 김한규, 박훈, 부상일, 송호창, 이수진, 황희석
32기[17]
2001
800
강부영, 고영일, 권성중, 김한주, 서향희, 하귀남, 한정석, 황재선
33기[18]
2002
976
권은희, 맹준호, 박성훈, 백동흠, 서지현, 손영택#s-2, 송행수, 이정문, 현근택
34기
2003
972
김미애, 김진규, 민병덕, 박춘희, 서동용, 이영욱, 이인철, 이탄희, 정관주, 진혜원, 최수진#s-4
35기
2004
887
김용민, 김정철, 김형동, 나승철, 박주민, 박준영, 안미령, 이성문, 이재정, 장덕천, 장승수, 정인국
36기
2005
998
김대환#s-1, 노영희, 변환봉, 장진영, 전성, 채명성, 최단비
37기
2006
977
고영권, 김태현, 손정혜, 신광은, 윤우혁, 임윤선
38기
2007
971
김동욱, 조원룡
39기
2008
1,001
송한섭, 전효진, 정준호
40기
2009
969
나태근, 양지열, 강윤경
41기
2010
986
김해영, 도태우, 이소영, 최건
42기
2011
974
홍성균, 홍정민, 황성욱
43기
2012
723

44기
2013
509
정진섭[19]
45기
2014
298

46기
2015
221

47기
2016
161

48기
2017
114

49기
2018
61[20]

50기
2019
1
조우상[21]

4. 변호사시험 횟수별 유명 인물


사법시험-사법연수원 체제가 법학전문대학원 체제로 전환되면서, 법학전문대학원 출신 유명인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변호사시험 출신은 '변호사시험 횟수+40'에 해당하는 사법연수원 기수와 같은 해에 법조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12년에 첫 로스쿨 변호사가 배출되어 아직까지는 나무위키에 등재된 인물이 몇 사람 없으므로, 일단 편의상 이 문서에 함께 기재한다. 토막글을 면할 정도로 인물이 늘어나면 문서 분리 요망.
'''횟수'''
'''시험연도'''
'''합격인원'''
'''주요 합격생'''
1회
2012년
1,451명
김남국, 김웅, 박상혁, 손수호, 정소연, 천하람
2회
2013년
1,538명
신장식
3회
2014년
1,550명

4회
2015년
1,565명

5회
2016년
1,581명
김소연
6회
2017년
1,600명
김소정, 박한희
7회
2018년
1,599명
킴변
8회
2019년
1,691명

9회
2020년
1,768명

10회
2021년
-


5. 관련 문서


[1] 이것 때문에 사고가 자주 났다(...)[2] 굳이 묻지는 않으나 약력 기재 시 병기한다. 즉, 연수원 출신 법조인은 제XX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OO기라고 쓰고 로스쿨 역시 마찬가지로 XX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A기, 제O회 변호사시험 합격이라고 병기한다[3] 왠지 "휴직"일 것 같지만, '사법연수원 운영규칙'에는 "휴학"으로 되어 있다.[4] 이 논란이 벌어지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법연수생은 2월에 연수원 수료를 마치고 바로 변호사로서 (수임을 포함한) 모든 업무를 할 수 있지만 변호사시험 합격자는 4월 2~3째주에 합격발표가 난 후부터 변호사 자격이 주어지고, 6개월의 실무수습 기간을 거치지 않으면 수임, 접견, 재판출석 등 변호사로서의 업무를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국가기관이나 공공기관에서는 연수원 출신들과 변시 출신들의 임관을 따로 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군법무관이 그러하다. 변호사자격 취득연도만 따지면 연수원 41기와 변호사시험 1회가 같은 연도이지만, 업무를 시작하는 월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5] 게이오대 법률학-도쿄대 로스쿨 졸업 후 일본의 신 사법시험 합격[6] 단 기사에도 언급하기로는 아직 2명의 유예자가 남아있다. 한 명은 한인섭 형사정책연구원장(59)이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1981년부터 사법시험 최종시험(면접)에서 두 차례 낙방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한 원장의 최종시험을 다시 치르라고 권고했다. 한원장은 법무부가 실시한 최종 시험에 합격했다. 한 원장은 “명예 회복을 하기 위해 최종 시험에 응시했지만 합격 당시 서울대 교수였기 때문에 연수원에 입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예자는 개인 사정으로 입소가 어려운 것으로 확인됐다. [7] 사법대학원 14기생(제11회 사법시험 합격자)을 사법연수생으로 임명하였다.[8] 제12회 사법시험 합격자를 사법연수생으로 임명하였다. 황윤석 판사(고등고시 제3회) 이래 이 기수 전까지는 여성이 합격한 예가 없었다. 즉, 18년간 여성 법조인이 배출되지 못하고 있었다.[9]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사법시험 수석 합격자. [9] 유독 이 기수에서 인권 변호사 등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명망이 높은 인사들이 많은 이유가 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반대 세력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여기고 유화책을 폈는데 그중 하나가 정치범 전력이 있는 사법고시 합격자들에 대한 사법연수원 입학 규제를 해제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문재인과 조영래도 이 혜택을 받아서 사법연수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0] 제40대 검찰총장[11] 오늘날에는 실감이 안 나는 이야기이지만, 이 기수, 즉 사시 26회에 여성 합격자가 5명'씩이나' 나와서 당시 화제가 되었다. 이때까지 한국에는 여성 법조인이 18명(고인이 된 황윤석까지 포함하면 19명)밖에 없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법조인인 이태영도 '이제야말로 여성법우회를 조직할 수 있겠다'라고 반색했다고(동아일보 1984. 10. 30.자 참조).[12] 검사 출신 재선 국회의원.[13] 대법관, 헌법재판관, 검찰총장 등[14] 당시 보기 드물게 여성 수료생이 한자리수를 넘어 무려 '''11명'''이나 나온 기수. 2020년 기준으로 여성 법조계에서 장관급 최고위직[13]을 가장 많이 배출한 기수이기도 하다. 노정희 대법관, 이은애 헌법재판관, 김소영 前대법관이 그 면면이고, 검찰에서는 아직 여성 총장이 나오진 못했지만 여성 최초로 검사장을 지낸 조희진 변호사도 19기 출신이다. 반면 19기 출신 남성 대법관, 헌법재판관, 검찰총장 등은 나오지 않고 있다. [15]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피해를 입을 할 뻔한 기수이다. 마침 이 때는 삼풍백화점 인근인 서초구 법조타운에 사법연수원이 있었다. 우연히 사고 당시 다른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고에 휘말린 연수생은 없었다. # [16] 이정희 변호사는 한국법조인대관에는 29기로 나오나, 법무법인 홈페이지에는 28기로 나와 있다. 수료를 29기와 함께 해서 생긴 혼선으로 보이며, 기수는 28기가 맞다.참고 [17] 서울특별시 서초동에 있던 연수원에 입소하였으나 2년차 수습은 지금의 고양시 일산동구(당시는 일산구) 소재 연수원에서 하게 된 기수이다.[18] 지금의 고양시 일산동구(당시는 일산구) 소재 연수원에 입소한 기수이다.[19] 만 61세의 고령임에도 연수원에 입소했는데, 5공 시절에 사법고시 면접에 떨어졌다가, 2008년에 합격처리가 된 케이스. 17~18대 국회의원을 하다가 때 마침 19대 총선 공천에서 떨어지면서 공백기간에 사법연수원에 입소했고 변호사가 되었다.[20] 49기는 여성 연수생이 42.62%로 역대 가장 높은 비율이며, 평균 연령도 33.85세로 역대 가장 높은 연령대라고 한다.# [21] 유일한 사법연수원 50기이자 마지막 사법연수생이다. 최초로 한·일 양국의 사법시험에 모두 합격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2015년에 합격했으나 군복무를 하느라 늦게 입소한 것이다. 2021년 1월 12일 수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