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역사

 


1. 1910년대 ~ 1930년대
1.1. 개인 창작의 시대
2. 1940년 ~ 1945년
2.1.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탄생
2.2. 순수 영상매체로의 변화
3. 1945년 ~ 1963년
4. 1963년 ~ 1973년
4.1. 주간 연속 TVA 등장
4.2. 토에이의 경영 개혁
4.3. 거대로봇물 장르의 등장
4.4. 제1차 애니메이션 붐 <춘추전국 시대>
4.5. 무시 프로덕션의 흥망성쇠
4.6. 업계의 구조 정립
5. 1974년 ~ 1984년
5.1. 제2차 애니메이션 붐 <군웅할거 시대>
5.2.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최전성기
5.3. 제1세대 오타쿠의 출현
5.4. 애니메이션 전문잡지 창간
5.5. SF 붐의 절정기
5.6. TVA의 재편과 OVA의 시작
5.7. 작가주의의 대두
6. 1985년 ~ 1991년
6.1. 애니메이션 산업의 침체기
6.2. 애니메이션 작화의 절정기
6.3. 스튜디오 지브리의 설립
6.4. 대작 영화의 실패와 제작위원회 체제
6.5. 그리고 주목할 만한 작품
7. 1992년 ~ 1999년
7.1. 제3차 애니메이션 붐 <상전벽해 시대>
7.2. 신세대 아니메 붐과 미디어믹스
7.3. 세기말의 작가주의
7.4. 1990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
7.5. 기타 인기를 얻은 작품
7.6. 세계화와 디지털화
8.1. 명작 애니메이션의 감소
8.1.1. 반론
8.2. 게임 회사로 이적하는 애니메이터
8.3. 작가주의의 쇠퇴와 불씨
8.4. 심화된 경쟁에 따른 분량의 축소
8.5. 4차 애니메이션 붐 도래
8.6. 거대로봇물의 쇠퇴
8.7. 넷플릭스 등 해외 OTT 서비스의 일본 진출
8.8. 새로운 장르의 등장
9. TPP/일본-EU EPA 발효(2019년) ~ 2020년대
10. 대표적인 작가들
11. 참고 자료

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years_in_anime

1. 1910년대 ~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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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인 창작의 시대


일본에 애니메이션 영화가 처음 소개된 건 1914년인데, 영국 애니 <Isn't it Wonderful>이 '개구장이 신화첩(凸坊新畫帖)'으로 소개되었다. 1916년경에 당대 인기 만화가 시모가와 오텐(下川凹天)[1]이 영화사 덴카츠의 의뢰를 받아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관련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시행착오 끝에 칠판 애니메이션 <문지기 이모가와게이조(竿川 三 玄關番の卷)>를 만들었고, 1917년 1월 도쿄 아사쿠사 키네마클럽에 공개했다. 아쉽게도 현재 필름은 남아 있지 않고, 당시 증언에 의하면 움직임은 부자연스럽고 캐릭터가 걷는 속도도 안정이 되지 않았지만 기념비적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후 시모카와는 작품 몇 개를 만들었지만 작화 도중 전등 투과광으로 시력이 안 좋아져 1919년에 출판만화계로 돌아가야 했다.
같은 해 5월 서양화가 기타야마 세이타로(北山淸太郞)는 해외 애니메이션을 연구한 끝에 컷 아웃 애니메이션 <원숭이와 게의 싸움>을 도쿄 아사쿠사 오페라극장에 공개했고, 6월 고우치 준이치(幸內純一)는 영화사 고바야시상회의 발주를 받아 <무딘 검: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なまくら刀 塙凹内名刀之巻)>[2]를 만들어 도쿄 아사쿠사 제국관에 공개했는데, 당시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기타야마는 닛카츠에서 독립해 '기타야마 영화촬영소'를 세워 주로 오락 및 교육작품을 계속 만들었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애니 인프라 자체가 무너짐에 따라 조기 은퇴했고, 고우치도 스미카즈 영화제작사를 세워 제작을 지속했다가 1930년에 출판만화계로 복귀했다.
간토 대지진 후 기타야마의 제자 야마모토 사나에와 기무라 하쿠잔, 그리고 무라타 야스지가 정부로부터 발주받아 교육/관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으며, 특히 무라타는 뛰어난 컷 아웃 제작실력을 바탕으로 모터 촬영기술을 활용해 다작을 하기도 했다. 고우치의 제자 오후지 노부로는 1927년 '지요가미'라고 하는 일본 전통 색종이로 <마구다 성의 도적>을 만들고, 1929년에 일본 최초로 레코드식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만들었다. 1932년에 실사영화계 출신 마사오카 겐조는 최초로 광학녹음방식 셀 애니메이션 <남자와 여자세상>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미국 애니메이션이나 <시오바라 다스케>나 <노인을 버리는 산>처럼 일본의 옛날 이야기나 우화에서 소재를 따온 것,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상당수는 전쟁 및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필름까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럿 작품은 무사히 남아있다. 유튜브를 봐도 1920~30년대 일본 애니들이 올라와있는데 미국 애니메이션 영향이 큰 경우도 많다.
일본 애니 탄생 초기에는 너무 신기한 나머지 관객이 많았고 제작자에게 막대한 개런티가 주어졌으나, 1930년 들어 일본에도 발성영화 시대가 개막되고 디즈니 등 해외 애니메이션들의 무차별 상륙으로 점차 극장에서 퇴출당했다. 이미 분업방식 제작시스템을 도입한 디즈니와 달리 일본 애니계는 전근대적 가내수공업이라 비싼 녹음설비나 기술혁신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고, 컬러화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행정기관 홍보나 교육용 애니메이션을 수주하거나, 영화사로부터 실사영화 타이틀 등을 하청 제작해야 했다.

2. 1940년 ~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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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탄생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 군부의 지원을 받아서 전쟁 프로파간다 영화가 제작되는데, 마사오카 겐조(1898~1988)의 제자 세오 미츠요(1911~2010)[3]가 만든 일본 최초 국산[4] 애니메이션 《모모타로의 바다독수리》(1943년 3월 25일 개봉, 37분)유튜브 영상와 자매편인《모모타로 바다의 신병》(1945년 4월 12일개봉)이다.[5] 오후지 노부로도 <말레이 만 해전>(1943)을, 야마모토 사나에도 <스파이 격멸>(1942)이란 전쟁 찬양 애니를 만들었다.[6] 당시 필름 확보가 어려워 전쟁찬양 작품 외에는 배급이 안 됐고, 애니업계만이 아니라 전쟁 소집에서 제외된 작가들도 전쟁 찬양에 나서야 했다. 대표적으로 <후구쨩의 기습>,

이 영화를 대동아전쟁하의 소국민(少國民, 어린이)에 바친다.

제작 스탭으론 문학가 사토 하치로(1903~1973)가 기용됐고, 전래동화인 모모타로오니 퇴치를 베이스로, 바다독수리는 진주만 습격을 찬양하는 내용이고, 모모타로와 바다의 신병은 일본의 낙하산부대가 연합군을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상황과는 달리 전투적인 장면의 묘사보다는 서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섬세하게 이야기를 풀어 가는 작품이었다. 원숭이인 모모타로가 다른 동물들에게 아이우에오 노래를 부르면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장면도 있는데, 아무리 봐도 당시 대일본제국이 동남아시아를 침략 지배하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미명하에 피지배지의 어린이에게 일본어 교육을 시킨 것을 미화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개봉 당시 주 관람층인 어린이들은 강제피난을 떠나 도시엔 관객이 없었다.
다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데즈카 오사무는 쇼치쿠 극장에서 해당 작품을 보고 '잘도 일본도 이런 퀄리티가 높은 작품을 만들고 있구나'라고 감동을 받았다고 눈물을 적셨다고 TV인터뷰나 자서전 <나는 만화가>를 통해 고백했다. 이때의 경험은 데즈카가 좀더 클 때 애니 제작자로 길을 걷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아무튼 평생에 1작이라도 좋으니까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2.2. 순수 영상매체로의 변화


또 하나는 전쟁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애니메이션 《거미와 튤립(くもとちゅうりっぷ)》(1943년 4월 15일 개봉. 보러가기)이다.
동화작가 요코야마 미치코의 동화집 <착한 아이 강한 아이(よい子強い子, 1939)> 수록 동화를 원작으로 했으며, 마사오카 겐조가 감독을 맡았다. 비가 오는 어느 날 한 마리의 귀여운 무당벌레거미 아저씨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튤립 아줌마가 살짝 보듬어 주며 비와 거미로부터 살아났다는 단순한 스토리로 되어 있다. 전쟁색이 하나도 없어 군부로부터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다'며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으나,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명작이다. 2001년에 일본 잡지 아니메쥬 또한 전 기간 중 최고의 명작이라고 밝혔으며,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다.[7]
마츠모토 레이지데즈카 오사무도 어릴 적 같은 영화관에서 감명깊게 보았기에 세월이 지나 그가 참여한 독립 애니 <벌레의 숲> 2부에서 이 애니 장면을 많이 그대로 오마주했다. 다만 장편 애니치곤 15분 30초 정도밖에 안해서 2년 먼저 나온 중국 애니 《철선공주》가 72분에 이르는 장편이기에 중국에서는 이게 장편이냐고 비웃는다. 이 때문에 송락현도 스튜디오 붐붐 진행 당시 장편으로 보기에는 시간이 미흡했다고 언급했다. 때문에 74분에 이르는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이 일본에서는 첫 장편 애니로 주로 인정받는 편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공습으로 스튜디오 등 인프라가 파괴돼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 폐허 속에서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위한 싹은 죽지 않았다.

3. 1945년 ~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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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토에이 동화의 시대


전쟁이 끝나자 애니메이션 창작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1946년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야마모토 사나에, 무라타 야스지, 마사오카 겐조 등 일본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자 1백여 명을 모아 '신닛폰동화사'를 설립했다. 마사오카 겐조는 <벚꽃(1946)>, <버려진 고양이 도라쨩(1947)> 등 서정적 작품을 만들었으나 상업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주력 멤버들이 '일본만화영화사'를 세웠다. 이후 야마모토와 마사오카가 퇴사하고, 유일하게 남은 무라타가 쇼치쿠를 떠난 세오를 불러서 <임금님의 꼬리(1949)>를 만들게 했으나 배급사 토호가 내용에 딴지를 걸어 미공개되었다. 이후 일본만화영화사는 파산했고, 세오 미츠요는 '세오 다로'로서 만화가가 되고 무라타도 병으로 애니 업계를 떠났다.
반면 야마모토와 마사오카는 1948년 닛폰동화를 세워 야부시타 다이치와 모리 야스지, 후쿠이 에이이치[8] 등을 애니메이터로 합류시켜 준비를 했고, 1952년 토호 관계사들을 흡수해 '니치도영화'로 바꾸고 1955년 토에이의 위탁을 받아 컬러 단편애니 <흥겨운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토에이 교육영화부 산하가 되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전전시대 애니 제작자들은 패전으로 인한 충격과 격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퇴장하였다. 전전파가 물러간 빈 자리를 이후 전후파가 채우게 된다.
전후 영미문화를 악으로 규정해서 금지됐던 서양 영화와 미국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상영되기 시작해서 큰 인기를 얻었다. 프랑스의 《왕과 새》, 소련의 《곱사등이 망아지》, 《눈의 여왕》도 개봉해서 데즈카 오사무와 토에이 애니메이터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디즈니 최초 장편애니 <백설공주>가 1950년 일본에 수입되어 전쟁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었고, 이듬해 나온 <밤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진 기술과 화려한 영상을 내세운 서양의 애니메이션들은 극장에서 상영되며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대중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업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즈음 토에이 실사영화 회사는 주로 칼싸움하는 무협 찬바라, 야쿠자 싸움 영화, 에로 영화 노선으로 극장으로 찾아와서 돈을 뿌려주는 성인 대상의 대중 오락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는데, 텔레비젼의 방송이 시작되면서 집에서 전기세만 내고 보면 되는 가족 대상 드라마와 오락물이 인기를 얻고, 극장으로 오는 손님은 점점 줄어드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서양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남녀노소 가족 단위로 극장에 연일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고 만화영화가 이렇게나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당시 토에이 그룹의 CEO 오카와 히로시(大川博)는 매년 1편씩 만들어서 극장 개봉을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만화영화라면 디즈니처럼 현지 언어로 더빙을 한다면 해외로도 수출해서 상영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토에이는 니치도영화를 인수해 '토에이 동화'로 새로 출범시켰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디즈니 등지를 둘러보며 선진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을 배우고 1957년에 도쿄도 네리마구 오이즈미에 콘크리트로 된 3층짜리 규모에 냉난방 완비 스튜디오를 준공했다. 초기 멤버는 야부시타를 비롯해 모리 야스지, 후루사와 히데오, 다이쿠하라 아키라 등 니치도 시절 멤버 23명이었으며, 추가로 토에이 시대극 영화를 연출하던 연출가들 중 일부를 데려와 인원을 충원했다.(ex. 카츠마타 토모하루) 제작방식은 디즈니의 1초 24콤마의 1/2인 1초 12콤마였다.
토에이 동화는 《새끼 고양이의 낙서(こねこのらくがき)》(1957년 개봉 보러가기)와 최초의 장편 극장용 컬러 애니메이션인 《백사전》(1958년 개봉)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제작하는 중심축이 된다. 《새끼 고양이의 낙서》는 제목대로 새끼고양이가 벽에 낙서를 하면서 벌어지는 자그마한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남의 집 벽에 자동차와 기차를 그려 넣는 고양이와 그걸 바라보는 , 그리고 집주인 이 등장하는 13분짜리 단편이다. 짧은 작품이지만 고양이가 너무 많은 기차를 그려 교통이 혼잡해지자 그림 속에 경찰이 불쑥 나와 교통정리를 하는가 하면, 구경하던 쥐가 고양이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그림 속의 기차를 사고 사라지는 등, 고양이가 그린 이차원의 그림4차원으로 변하고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교차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토에이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예고편 (1958~1963)
1958년작 《백사전》은 동명의 중국 민화를 소재로 한 러브스토리 애니메이션이다. 중국 송나라 허선이 귀여워했던 백사가 아리따운 여인인 백랑으로 환생하여 만나게 되는데 이 둘의 파란만장한 인연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베네치아 아동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으로서 일본 애니 매니아들 사이에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고, 미야자키 하야오 등 애니메이터 지망자를 양성시켰다.
이후, 토에이 동화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서유기》, 《안쥬와 즈시오마루》 등 매년 꾸준하게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 개봉했다. 디즈니가 서양의 전래동화를 소재로 삼은 것에 대항해서, 토에이는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아시아의 소재를 영화화했다. 초창기 토에이는 디즈니를 본받아 실사 영화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중시했고, 스토리는 일본 고전놀이 '스고로쿠' 방식 및 왕복 전개[9]를 차용했으며 제작방식은 오오츠카 야스오나 후루사와 히데오 같은 유력 애니메이터들에게 맡겨 경쟁을 유도하며 연출자가 체크토록 했다.
토에이는 TV 애니메이션이 방송되기 시작한 1963년부터는 A급 대작영화와 TVA 소품(20분) 몇 편을 동시상영했고, 이것이 호평을 얻어 '토에이 만화대행진'(이름은 계속 바뀐다)라는 이벤트 형식으로 방학기간에 상영하고 어린이 관객을 불러모았다. 경쟁 영화사인 토호도 같은 형식으로 고지라 시리즈와 특촬, TVA 소품을 엮여서 상영하면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토에이동화의 경영상황은 모회사 토에이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을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렸고, 당시 애니의 지위는 실사영화의 들러리이며 아직 인기 주인공이 배출되지 않았다.
수익이 나는 분야는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광고물 제작이었고, 극장용 영화는 만들기만 하면 적자를 보는 상태였다. 2차 시장 상품인 가정용 비디오테이프라든가 DVD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고, 관련 캐릭터 상품도 개발되지 못한 상황에서 극장 흥행에만 의존하던 시절인데도, 지금처럼 멀티플렉스로 상영 스크린이 많지도 않았고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먼저 개봉하고 이윽고 지방의 소도시를 옮겨가면서 프린트한 개수가 한정된 필름을 돌려가며 틀어주는 로드쇼 상영 방식이었다. 관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일반적인 실사영화에 비해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어가서 그걸 다 걷어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디즈니처럼 전세계적으로 배급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어서 국내 관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4. 1963년 ~ 1973년


TV시리즈가 시작되며 만화영화 작업의 중심이 시나리오와 연출 콘티로 이동했고, 애니메이터는 지시받은 것을 그려, 그림을 움직이게만 하는 직업이 되어갔다. 책상 앞에서 끙끙대며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웃고 흥분하고 때로는 엎어져 울던 애니메이터들은 이렇게 퇴장한다. '만화영화'란 단어가 빛을 잃고 ‘애니메이션’이 되어 ‘아니메’가 되었다 - 미야자키 하야오


4.1. 주간 연속 TVA 등장


당시 최고 인기만화가 데즈카 오사무는 1961년 6월 도쿄 네리마구 후지미다이 사저에 사카모토 유사쿠, 야마모토 에이이치 등과 함께 '데즈카 오사무 프로덕션 동화부'를 만들고 이듬해 '무시 프로덕션'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리고 자신의 인기만화를 원작으로 한 일본 최초의 20분짜리 매주 주간 연속 TVA철완 아톰》을 선보였다. 1963년 1월 1일부터 1966년까지 후지 테레비에서 방영되어 최고 시청률 40% 이상이 나오는 인기 프로가 되었다.
아톰 이전에도 수입애니 《뽀빠이》(1959년부터 방송)나 《톰과 제리》(1964)가 방송되었고, 일본산 중에 《오토기 만화 캘린더(1961)[10]》 등 짧은 에피소드 위주 애니메이션이 TV에서 방송하고 있었지만 아톰만큼의 인기는 없었고, 당시에도 TVA 제작을 검토하는 스태프들도 있었으나 비용 문제 때문에 주저했다. 기존 도에이식 제작방식으로 만든다면 1편당 스태프 수 100명, 제작기간 6개월에 최소 예산 3천만엔으로, 당시 30분짜리 프로그램 제작비 50~60만엔보다 더 비쌌다. 설령 구미권처럼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써서 24콤마를 8콤마로 줄여서 제작해도 600만 엔이 든다.
본래라면 도에이처럼 거대 기업이 거대 자본을 투자해서 디즈니처럼 많은 제작비를 들인 풀 애니메이션이 만화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무시 프로덕션이 만든 '테레비 망가'는 리미티드 기법이라 흑백화면에 움직임도 없고, 입만 벙긋벙긋 하고 몇 번이고 똑같은 장면을 재활용(뱅크신 시스템)하는데도 당시 최고 인기만화 원작의 애니화라서 그 스토리의 재미로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다.[11] 방학이 되고 극장에다 용돈을 갖다바치고 겨우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매주 공짜로 볼 수 있는데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철완 아톰은 캐릭터를 이용한 여러 상품이 만들어지고, 캐릭터 사용료만으로도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였다. 일본 방송국은 수요가 폭발하는 '테레비 망가'를 제공해 줄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찾았고, 각 방송국들은 아톰의 성공을 보고 우후죽순처럼 창립한 신생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와 전속 관계를 맺고,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했다.
TCJ(에이켄), 타츠노코 프로덕션, 도쿄 무비, 즈이요 엔터프라이즈, A 프로덕션(신에이 동화), 나크 등이 이 무렵 새로 형성된 TV 애니메이션 시장에 뛰어들었다.
1963년에 로봇물 장르 《철인 28호》, 《에이트맨》, 65년에는 《요괴 Q타로》(첫 개그 애니메이션), 66년에는 《요술공주 샐리》(첫 소녀 대상이자 첫 마법소녀물), 스포콘(스포츠 근성물) 장르인 《거인의 별》(68), 《어택 넘버 원(アタックNo.1)》(69),《내일의 죠》(71), 《에이스를 노려라!》(73), 요괴 호러 장르인 《게게게의 키타로》(68), 《요괴인간 벰》(68), 닌자 무협 장르인 시라토 산페이 원작 《사스케》(68), 《닌풍 카무이 전》(69), 하이틴·성인 대상의 《선인부락(仙人部落)》(63),《루팡 3세》(71), 시대극 형사물로 이시노모리 쇼타로 원작의 《사부와 이치의 체포조(佐武と市捕物控)OP&ED》(68), 가족일상물인 《사자에상》 (69)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내일의 죠>와 <닌풍 카무이 전>은 1968년 야스다 강당 사건 등 당시 과격한 학생운동이 성행하던 시대상황과 맞물려 '아웃사이더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애니메이션 평론가는 이 시기 1963년부터 1968년까지를 제1차 아니메 붐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60년대 중반부터는 《울트라맨》을 시작으로 가면라이더 시리즈로 이어지는 특촬 드라마 '괴수' '변신' 붐이 일면서 애니메이션 인기는 한 풀 꺾였다.
그리고 무시 프로덕션은 방송국에 낮은 제작비로 납품하기로 하고, 다른 애니 제작사에도 그 금액 이상은 주지 말라고 해서, 무시 프로의 저가격 덤핑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TV 방송업계의 기준이 되는 바람에 가뜩이나 영세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적은 제작비로 경영에 힘겨움을 겪어야 했다. 도쿄 무비처럼 한 작품을 만들고 도산한 경우도 발생했다.

4.2. 토에이의 경영 개혁


한편 토에이도 1963년 《늑대소년 켄》(오프닝)으로 TVA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설립된 회사였기에 TV용 '테레비 망가'에 어린이 손님을 빼앗기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디즈니 영화같은 A급 대작 노선과 《사이보그 009》 같은 인기만화 원작에 제작비를 줄인 B급 리미티드 노선을 병행하기로 했는데, 어린 관객들은 자신들이 즐겨 읽는 만화 원작의 B급 영화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많은 예산과 시간을 투자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은 흥행에서 실패하고 토에이 동화는 한번 망할 뻔할 정도로 흔들렸다. 같은 시기 내수 영화시장의 사양화로 모기업 토에이도 경영이 악화돼 한시라도 빨리 암을 도려내야 했는데, 적자 경영으로 불량자산이 돼버린 토에이 동화와 프로야구단 토에이 플라이어스가 그 타겟이었다.
이 즈음 동양 최대의 노사분규라고 불린 대규모 노동쟁의 운동이 발생했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믿고 그 동안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진을 밀어주던 토에이 동화 제1대 사장 오카와 히로시가 1971년에 병으로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서 새로 취임한 제2대 사장 토이시 슌이치는 제작 편수를 줄이고, 회사를 록아웃하고 반발하는 종업원 320명 중 절반을 희망퇴직시키는 대대적인 인력 정리를 감행했다.[12]
그리고 제3대 사장 이마다 치아키는 1974년에 토에이 동화의 방향성을 제작비를 줄인 B급 극장용 영화와 인기 만화 원작의 TVA화, 해외 수출을 염두한 작품 선정으로 정한다. 캐릭터 상품 판매와 상품화 저작권 판권 영업, 작품의 해외 방영권 수출에도 눈을 돌려, 《마징가 Z》, 《UFO로보 그렌다이저》(프랑스에서 인기), 《강철 지그》(이탈리아에서 인기), 《초전자머신 볼테스 V》(필리핀에서 인기) 등이 해외에 소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이리하여 토에이는 약 3억 엔의 누적 적자를 해소했다. 같은 시기에 컴퓨터 전문가 요시무라 지로를 불러들여 애니제작의 전산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4.3. 거대로봇물 장르의 등장


일본에서는 그냥 로봇물이라고 부르지만, 《철완 아톰》과 《철인 28호》 이후로 한동안 잊혔던 로봇물은, 《마징가 Z》의 히트에 힘입어 로봇 장난감 제작회사가 스폰서로 나서면서, 일대 장르로 발전한다. 토에이는 마징가 시리즈, 겟타로보 시리즈와 마그네로보 시리즈(강철 지그, 마그네로보 가킨, 초인전대 바라타크)를, 선라이즈도 로봇 장르물에 참전해 나가하마 다다오 감독의 낭만 로봇 시리즈로 일본 로봇물의 클리셰를 완성했고, 토미노 요시유키는 《무적초인 잠보트3》(77)에서 시리어스한 스토리를 선보이고 곧이어 《기동전사 건담》을 내놓고 일대 선풍을 일으킨다.

4.4. 제1차 애니메이션 붐 <춘추전국 시대>


발생 원인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1963년 제작된 철완 아톰을 기점으로 평가하는 의견이 많다.
철완 아톰 제작 이후, 몇몇 회사들을 시작으로 TV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활성화돼 일본 어린이들이 오후나 저녁 시간이 되면 텔레비전 앞으로 이동해 애니메이션을 보는 풍경도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미 이 시절부터 일본 방송시장이 세계 2위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었기 때문에[13] TV 애니메이션은 적지 않은 제작비에도 충분한 수익을 냈기 때문에(물론 방송사 한청이고 제작사는 완구 수입으로 제작비를 벌충해야했다.) 여타 방송사에서도 애니메이션을 잇따라 방영하면서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의 명성을 닦게 되었다. 이 시청자들은 성장해 이후 2차 애니 붐의 발생에서 간접적으로 기여했으며, 이시노모리 쇼타로, 나가이 고, 요코야마 미츠테루, 아카츠카 후지오, 후지코 후지오, 데즈카 오사무 등등 1세대 일본 만화가들의 작품이 애니메이션화되면서 그들을 전국구급 인기 만화가로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시의 메이저급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도쿄무비, 토에이 애니메이션, 무시 프로덕션, 타츠노코 프로덕션이 있었다. 이 와중에 일어난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노동조합 파업과 1973년의 무시 프로덕션 파산으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사실상 대규모로 재편성되는데, 무시 프로덕션 출신 스태프 중에선 선라이즈나 매드하우스를 창립한 애니메이터들도 있었고, 이때 해고되거나 일자리를 잃은 무시 프로덕션, 토에이 애니메이션 출신 스태프들은 도쿄무비신샤로 향했다.
다만 철완 아톰 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60년대 중후기의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방송사들로부터 제작비용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완구 관련 상품으로 적자를 보충하고 있었으나 완구 업계에서 상품화에 미지적거린 반응을 보여 이로 인한 제작비 조달이 부족해지자 TV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수를 줄이기도 했었다고 한다.[14] 이 시기에 발표된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프레임을 살펴보면 현재의 일본 애니메이션보다 더욱 원동화 프레임이 경직된 작품들이 수두룩한 것을 알아낼 수 있다.

4.5. 무시 프로덕션의 흥망성쇠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을 기반으로 승승장구하던 무시 프로덕션은 60년대 말부터 다른 회사와의 경쟁과 데즈카의 인기 원작이라는 밑천이 떨어지자 하락세로 들어갔다. 1966년부터 일본 만화계는 극화 붐이 불면서, 기존의 토키와 장 출신의 동글동글 만화체 작화는 시대에 뒤 떨어지는 스타일로 인식되어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는 인기가 폭망한 것이다.
애당초 1편당 50만 엔[15]이라는 저가 덤핑 작전으로 TVA시장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했지만[16], 그것이 오히려 자승자박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스폰서한테서 제작비는 적게 받아도 좋았고, 낮은 가격으로 방송국에 공급하고 대신 캐릭터 상품의 로얄티로 수익을 올렸는데, 인기작이 나오지 않으니 로얄티 수입이 없고, 인건비와 제작비로 빚이 쌓여갔다. 또 데즈카의 독단적 제작지휘방식 역시 문제가 되어 사카모토 유사쿠(坂本雄作), 스기이 기사부로, 데자키 오사무 등 초기 멤버들이 회사를 떠났다.
1968년에 데즈카가 독립 프로덕션을 설립해 1971년 사장직을 떠난 후 무시 프로덕션은 데즈카와 무관한 작품만을 만들어 왔으나, 1973년 들어 은행 차입도 못 받고 방송사 발주마저 끊겨 그해 11월에 도산했다.[17]

4.6. 업계의 구조 정립


기존의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사도 방송국에 작품을 납품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제작비를 건질 수 없었기에, 각종 캐릭터 상품 전개가 되는 작품과, 아동문학을 원작으로 하거나, 일본색을 지운 무국적성 작품으로 해외 수출을 염두해 둔 작품을 만들었다. 닛폰 애니메이션세계명작극장 시리즈와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무국적성 작품은 그 예다.
1960년대에 이미 최초로 미국에 수출되어 방영된 《철완 아톰》이나, 미국 방영을 위해 컬러로 제작한 《정글대제》, "Speed Racer"라는 타이틀로 미국에서 인기를 얻은 《마하 GoGoGo》라는 선배격 작품이 있었는데, 더욱 더 해외수출에 힘을 실어서 《타이거 마스크》,《과학닌자대 갓챠맨》, 《캔디캔디》, 《얏타맨》, 《공룡대전쟁 아이젠보그》, 《미래소년 코난》, 《은하철도 999》, 《보물섬》, 《캡틴 퓨쳐》, 《베르사이유의 장미》 등 수많은 작품들이 해외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얻게 된다.
토에이 동화도 무시 프로도 창립 초기에는 전 직원이 정직원 월급제였지만, 딱히 기술이 필요없는 채색같은 작업은 비정규직 임시직 여성 사원을 채용했다. 이윽고 1973년에 무시 프로덕션이 인건비를 감당 못하고 도산하고, 토에이 동화도 임금인상으로 촉발된 노사분규로 회사가 한 번 망할 정도로 휘청거리자, 이후 동화(動畵)와 원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는 1장 당 얼마씩 받는 성과급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다른 작업들도 인건비를 줄이려고 정규직은 뽑지 않고 하청과 그 하청의 하청업체로 돌리면서, 한 때는 일본 항공사 조종사급의 월급을 받으면서 잘 나가던 애니메이터라는 직업은 이제는 거의 5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저임금 노동자 신세가 되었다.
※ 2017년 기준으로 동화를 그리는 애니메이터 평균 연수입이 111만 엔이다. 2015년 일본 문화청 자료에 의하면 애니메이터의 70%가 프리랜서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4대 보험이 적용이 안 되는 프리터 아르바이터나 마찬가지다. 애니메이터중 월수입 18만 엔 이하가 37%에 달한다. 동화 한 장 그리는데 150엔으로 15년 전과 똑같다. 그러면서 소비세는 10%로 올라서 개인 부담은 더 커진 것이 지금의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의 현실이다.
그리고 더 인건비가 싼 곳으로 눈을 돌려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일본 애니메이션 단순한 하청 작업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 전에 《황금박쥐》(67)와 《요괴인간 벰》(68)은 일본인 애니메이터 직원이 직접 한국에 파견와서 기술을 전수해주면서 만든 합작(겸 하청)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이런 식의 기술전수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한국 방송사들이 만화영화 제작에 돈이 많이든다며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해버리거나 미뤘기 때문이었다. 덕택에 당대에도 많은 항의를 받았음에도 결과적으로 한국 최초 TV만화영화가 나올때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어린이 시간대를 미국과 일본만화영화가 차지해버린건 덤.
무시 프로의 도산과 토에이의 인력 정리를 기점으로, 유출된 무시 프로 출신 인력과 토에이 출신 인력이 모여든 곳이 당시 진취적인 성향의 명물 사장 후지오카 유타가가 CEO였던 도쿄 무비(→ 도쿄 무비 신사 → 현 TMS)였고, 적은 동화(動畵) 장 수에서 연출력으로 승부하는 무시 프로와 캐릭터의 움직임을 중시하는 토에이 출신이 서로의 장점을 융합해서 만든 작품이 《감바의 모험》(1976)이었다.[18] 그리고 이런 연출은 토에이와 무시 프로 출신 인력이 다른 애니메이션 회사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연출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 타츠노코 프로에서도 인력이 유출되어, 무시 프로 출신의 선라이즈(1972), 매드하우스(1972), 토에이 출신 톱 크래프트 - 지브리의 전신 회사(1972), 타츠노코 프로 출신 아시 프로덕션(1975), 스튜디오 피에로(1979) 등의 새로운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설립되었다.

5. 1974년 ~ 1984년


1973년 이집트시리아이스라엘을 협공하였다.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직후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 금수 조치를 내렸다. 오일쇼크의 시작이다. 원유 가격이 상승하고 소비자물가는 1974년 1년 만에 30%가 상승했다. 그 여파로 일본 경기(經氣)는 한동안 위축되었다. 어린이 관객에게 절대적인 인기를 끌던 특촬 드라마· 영화 시리즈(울트라 시리즈, 가면라이더 시리즈, 고지라 시리즈)는 제작비가 많이 드는 탓에 스폰서가 투자하기를 주저했고 이 장르의 작품들은 TV 브라운관과 극장 상영목록에서 줄어들고 1980년에 경기를 회복할 때까지 휴식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작비로 만들어지는 '테레비 망가'와 '만화영화'가 대체하게 되었다. 이른바 '''아니메 붐'''이 재래한 것이다.

5.1. 제2차 애니메이션 붐 <군웅할거 시대>


발생 원인으론 1970년대 중반 우주전함 야마토의 재조명으로 인한 극장판 제작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하다.
어렸을 적 1차 붐 시절에 애니메이션을 시청한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그들 중에 애니메이션을 취미로 즐기고 분석하려는 오타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우주전함 야마토 열풍을 확산시킨 주축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1980년대에 기동전사 건담으로 인한 리얼로봇물이 인기를 끌어 그와 관련된 프라모델, 비디오, 동인 창작물 등을 생산, 판매하는 2차 창작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점부터다.
1970년대를 거치며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고, 애니메이터들의 발전된 연출로 인해 사회비판적인 성인적 취향의 애니메이션들이 속속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들 중 토미노 요시유키, 미야자키 하야오, 오시이 마모루 등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970년대 후기부터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장르 또한 로봇 애니메이션 위주에서 벗어나 다양화되었으며, 업계는 작품의 분위기에 호응하는 시청자, 상품 구매자들을 유혹하는데 주력하게 된다.
더불어 이 시기 A 프로덕션의 독립으로 인해 신에이 동화가 설립되었으며, 초대 사장의 사망으로 인하여 타츠노코 프로에서 독립한 스탭 중 일부는 이후 스튜디오 피에로, 프로덕션 IG를 설립하였다. 1980년대 중기엔 일본 애니메이션에 막대한 영향을 남긴 스튜디오 지브리, 가이낙스가 설립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 애니 작화 변화에서 빠뜨릴수 없는 카나다 요시노리가 활약했던 바 있었다.

5.2.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최전성기


이 시기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판을 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원작자에게 비싼 판권료를 지불하고 인기 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판권 사는 데에 돈을 들이지 않고 기발한 작품을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 제작진들은 더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을 처음 시도한 곳은 마츠자키 켄이치, 미키모토 하루히코, 이시구로 노보루, 카와모리 쇼지, 히라노 토시키 등이 소속되어 있던 스튜디오 누에(スタジオぬえ)라는 스튜디오로 1982년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기존의 스페이스 오페라아이돌, 로맨스 같은 타 장르를 접목시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린 민메이는 희대의 대스타로 떠올랐으며 이같은 히트는 1984년 극장판인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제작의 발판까지 마련했다.

5.3. 제1세대 오타쿠의 출현


오일 쇼크 직후인 1974년 10월 6일, 《우주전함 야마토》가 첫 방송되었다. TVA는 《철완 아톰》에서 10년의 세월이 흘러, 어린이였던 시청자들도, 중고생으로 자라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팬층이 형성됐다. 그리고 《우주전함 야마토》는 이제까지 애들이나 보는 황당무계하고 유치한 작품이 아니라 어느 정도 머리통이 굵어진 하이틴이 보기에도 그럴싸한 작품이었다. 매년 20편 가량 방송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에서 중학생 이상 하이틴을 겨냥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야마토는 저시청률로 고전하다 방송기간이 단축되고 조기종영하고 말았지만 재방송을 거듭하면서 인기를 얻고 열렬한 야마토 팬이 생겼다.[19]
야마토 팬들은 모임을 조직,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고, 감상과 논평과 설정 연구 글을 실은 회지를 만들었다. 이른바 제1세대 오타쿠의 출현이었다. (참고로 최초의 동인지 판매 모임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1975년)으로 주로 10대 소녀들의 모임이었다.) 이런 팬 활동으로 1977년에는 야마토 극장판 편집본이 개봉되었다. 공개 첫 날에는 많은 팬들이 몰려 철야를 하는 광경은 매스컴에서 "아니메 붐 도래"라고 소개한 결과, 전국에 아니메를 보는 중고생 이상의 팬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정밀 프라모델, 레코드, 잡지와 서적이 나와서 팔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아니메 붐"이 다시 온 것이다. 연구가들은 1977년부터 1984년까지를 제2차, 혹은 제1차 아니메 붐으로 본다.
야마토 팬들이 만든 회지는 1977년 서브컬처 잡지 'OUT'에 야마토 특집 기사로 실리고, 1978년에 창간된 아니메쥬 같은 애니메이션 잡지의 원형이 되었는데, 회지를 만든 아니메 팬들이 자유기고가로 참여, 이후 잡지 편집자와 평론가, 연구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이제까지 '테레비 망가(TVA)' '만화영화(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라 부르던 것이 '아니메'라는 단어가 대중에게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마토의 흥행 성공의 여파로 TV에서 방송한 기존 작품을 극장용으로 편집한 버전을 상영하는 추세가 생겼다. 아직 세상에 가정용 비디오데크(VCR)라는 기계와 비디오샵이 세상에 흔치 않던 시절의 일이었다. 애니메이션팬은 극장안에 카메라를 들고가서 스크린에 비추는 여성 캐릭터의 서비스씬 장면 등을 사진으로 직접 찍어서 컬렉팅을 했다고 전해진다. VCR이 보급된 후에야 극장판은 오리지널로 따로 기획되고, OVA처럼 오리지널 작품을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5.4. 애니메이션 전문잡지 창간


젊은이의 잡지를 만들려고 했던 월간 OUT은 우주전함 야마토 팬클럽을 운영하며 회지를 낸 적이 있던 히카와 류스케에게 부탁해 우주전함 야마토 특집호를 발간했는데 이게 엄청나게 팔리자 몇 번 간을 보고나서 완전 애니메이션 잡지로 전향하였으며 1980년대까지 꾸준히 팔렸다. 애니메이션 소개와 일러스트뿐 아니라 애니메이터나 감독과 독자의 소통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이 잡지는 지금도 온라인에 자료가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후 <아니메쥬>(1978~), <아니멧크(AniMec)>(1978-1987), <마이아니메>(1981-1986), <아니메디아>(1981~), <뉴타입(잡지)>(1985~)같은 전문잡지가 차례차례로 창간되었다. 정작 <월간 OUT>은 도쿠마서점, 반다이카도카와 같은 미디어 회사를 등에 입은 잡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각종 정보공개에서 우선순위가 뒤로 밀렸고 1995년 5월호로 휴간(사실상 폐간)되었다.
애니메이션 전문잡지가 등장하면서, 작품 자체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연출가와 애니메이터가 소개되고 관심이 모아지고 주목하게 되었다. 이 시절 가장 주목받는 감독은 데자키 오사무였다. 《내일의 죠》 TVA부터 시작한 영화적인 화면 연출과 '데자키 연출'이라 불리우는 독창적인 연출 수법은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9년 개봉된 극장판 《에이스를 노려라!》는 데자키 연출의 총집대성이다.
토미노 요시유키도 아니메 팬들에게 지지를 받는 스타 감독이었다. 작가성을 마음껏 발휘한 《기동전사 건담》과 《전설거신 이데온》으로 애니메이션은 문학, 영화 못지않는 표현 장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1981년 2월 22일 신주쿠 서쪽입구역 앞 알타 앞에서 열린,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공개 기념 행사 '아니메 신세기 선언 대회'에는 1만 명이 넘는 팬들이 모여들었고 신문에도 보도되면서 아니메가 어린이들만의 것이아니라 청년 문화의 하나라고 인지되는 계기가 되었다.
카나다 요시노리도 이 시절 주목받은 스타 애니메이터였다. 기존의 애니메이션의 표현 문법을 깨뜨리고 개발한 독특하고 신선한 표현 기법을 선보였는데, 이것은 그 기법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애니메이터 추종자 집단을 낳았다. 글을 웃기게 쓰는 걸로 유명한 아시다 토요오도 잡지 코너로 인기를 얻었고 화려한 미사일 발사 장면으로 이타노 서커스라는 별명을 얻은 이타노 이치로 역시 주목받는 애니메이터 중 한 명이었다. 이타노 서커스란 이름부터가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편 린타로 감독의 은하철도 999 극장판은 애들이나 보는 줄 알았던 만화영화가 그 해(1979년) 개봉된 극장 영화 흥행수입 1위를 차지해서 화제가 되었고, 같은 해 개봉한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작년에 미래소년 코난도 연출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신인 감독에게 아니메 팬들이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5.5. SF 붐의 절정기


1960년대부터 데즈카 오사무, 토요타 아리츠네(豊田有恒), 코마츠 사쿄(小松左京) 등의 작가들에 의해 일본 SF라는 장르가 정립된 이후 SF 붐이 이어져 애니메이션도 SF 테이스트 작품이 선호받았다. 이런 아니메 붐과 SF 붐에 동조해서 공영방송 NHK에서도 애니메이션 방영타임을 만들어서 1978년에 《미래소년 코난》과 《캡틴 퓨쳐》를 제작 방영했다.
1979년에는 토미노 요시유키의 《기동전사 건담》이 방송되었다. 1977년 《야마토》의 성공과 《스타워즈》의 영향을 받아 아동용이 아닌 하이틴을 대상으로 기획된 작품으로, 이 전까지 로봇 애니의 왕도였던 권선징악 스토리가 아닌, 주인공도 열혈소년이 아닌, 젊은이들이 피부로 공감할 수 있는 진지한 청춘의 전쟁 군상극이었다. 이 작품 역시 조기종영당했지만 열렬한 팬의 지지와 건프라인기로 이후 장수 사골 시리즈가 되었다.
1978년부터 시작한 마츠모토 레이지 원작의 《하록 선장》및 관련 시리즈와 《SF 서유기 스타징가》, 《은하철도 999》같은 낭만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도 인기를 얻었다.
이후 1982년에 극장 개봉한 《블레이드 러너》와 1984년작 《터미네이터》의 영향으로 시작된 사이버펑크 붐은 일본 애니메이션업계에서도 OVA로 《메가존 23》(1985), 《버블검 크라이시스》(1987), 시로 마사무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블랙매직》(1987), 《애플시드》(1988), 《공각기동대(극장판)》(1995)와 오토모 카츠히로가 자신의 인기만화를 직접 감독한 《AKIRA》(1988) 등이 만들어졌다.

5.6. TVA의 재편과 OVA의 시작


기동전사 건담의 히트로 1980년대 초까지 하이틴 대상(J9 시리즈, 태양의 엄니 다그람, 장갑기병 보톰즈)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향을 보였지만, 1984년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극장판 이후로는 그런 움직임이 줄기 시작했다. 아류작이 흉작으로 완구나 로봇 장난감이 잘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스폰서(물주)는 역시 만화영화는 어린이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TVA는 저학년을 대상으로 겨냥된 작품이 기획되고 만들어진다. 토리야마 아키라 원작의 《닥터 슬럼프》(1981)가 큰 히트를 기록했고, 마법소녀물인 《마법의 프린세스 밍키모모》(1982)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도라에몽 2작》(1979~2005), 《은하표류 바이팜》(1983), 《근육맨》(1983), 《드래곤볼》(1986)을 거쳐 8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이렇다 보니 사라져버린 하이틴 대상 TVA의 대상인 하이틴과 대학생, 성인 아니메 팬들은 허기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점을 보완해줄 매체가 등장했다. 또한 당시의 거품경제로 애니메이션 산업이 급격하게 떠올랐고 이로 인해 업계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인력은 충분한데 일할 일감은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고심하던 제작사들은 극장판을 만들기는 리스크가 너무 크고, 차라리 시리즈물 형식을 노려 보자라고 해서 OVA라는 형식이 고안되게 되었다.
1983년 말에 비디오데크(VCR)의 보급율이 높아지면서, 비디오테이프 판매와 렌탈을 전제로 한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OVA)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념비적인 1호작은 달로스, 반다이가 판매했다. TVA는 아동용 만화영화가 주류이고 좀 더 높은 연령인 하이틴과 성인을 타겟으로 한 작품은 OVA로 만들어지는 이분화 현상이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시끌별 녀석들을 기점으로 여러 미소녀가 나오고 오타쿠의 소비 패턴을 읽은 상업적인 작품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는 크림레몬 시리즈, 로리콘 붐에 편승한 야애니도 발빠르게 발매하기 시작했다.

5.7. 작가주의의 대두


1984년에는 오시이 마모루 감독작 《우르세이 야츠라2 뷰티풀 드리머》가 개봉. 이듬해 OVA 천사의 알을 출시했으나, 평단의 호평과 판매 실적의 실패를 동시에 얻었다. 카도카와 쇼텐의 《소년 케냐》(1984)는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감독작으로 기존의 애니메이션 문법을 무시하는 《슬픔의 벨라돈나》(1973)예고편와 맞먹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가주의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작가성을 드러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를 개봉하고 호평과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리고 TV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제1세대 오타쿠 집단 스튜디오 누에 기획의 극장판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역시 호평과 흥행에 성공하면서, 작가주의와 상업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터전이 마련됐다. TVA에서는 《고깔 모자의 메모루》(1984)는 토에이가 모처럼 내놓은 오리지널 작품으로 작품성에서 호평을 받았다.
1982년부터 NHK가 방영한 《인형극 삼국지》의 인형을 제작한 카와모토 키하치로(川本喜八郎)는 일본을 대표하는 인형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그의 작품들은 애니메이션은 셀 애니메이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6. 1985년 ~ 1991년



6.1. 애니메이션 산업의 침체기


1985년을 시점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침체기에 들어간다. 80년대 중반부터 일본은 경제 호황으로 들떠 있었지만, 오히려 애니 업계는 역풍을 맞았다. 일본 애니 제작사의 짭짤한 수입원은 해외와의 합작[20]이었는데,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일본 엔의 가치가 올라가니 결과적으로 인건비가 높아지게 되고, 제작비가 상승하면서 합작품의 기획이 줄어들면서 일거리도 줄어들게 되었다.
일거리가 줄어들자 일자리도 줄어들었고, 호소다 마모루도 자신이 입사했던 1991년에는 대기업이었던 토에이조차 망해가는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안노 히데아키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지구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 설정은 이 시기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 상황의 메타포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애니 업계가 위축된 사이에 게임 업계는 대호황이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1983년에 닌텐도가 발매한 가정용 게임기 패밀리 컴퓨터가 보급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유행하면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시간보다 드래곤 퀘스트를 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TVA는 오리지널 기획은 포기하고 저학년을 대상으로 안전빵 인기 만화 원작으로 한 캐릭터 상품 전개에 용이한 작품과 30분짜리 로봇 장난감 선전 방송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 1983년 3분기 39편이었던 TVA는 1984년 1분기 32편, 1985년 1분기에는 26편으로 제작 편수가 줄어들었다. 이 와중에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 6권 중 3권은 휴간(사실상 폐간)을 했다.

6.2. 애니메이션 작화의 절정기


반면 이 시기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의 질이 매우 크게 상승하게 된다. 그동안 해외 합작 작품에 참여하던 TMS 엔터테인먼트 소속 애니메이터, 토모나가 카즈히데, 마사유키 같은 유명 일본 애니메이터들이 한 순간 일을 잃고 대량 방출되어 어쩔 수 없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또한 1960년대 생 1세대 오타쿠 애니메이터들이 본격적으로 업계에 풀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하며, 2010년대 이후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때의 애니메이터들이 책임질 정도가 되었다.
흔히 이때의 애니메이션이 버블 경제라 돈이 많이 들어서 작화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때는 애니메이션이 별로 돈이 된단 인식이 없어서 경제가 호황이었다고 해도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는 오히려 지금보다 적었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의 질과 돈은 그렇게 크게 비례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은 결국 인재에 의존하는 예술의 영역이라 좋은 인재가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들여도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예로 너의 이름은을 들 수가 있는데 이건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안도 마사시오키우라 히로유키 같은 애니메이터를 투입해 그에 뒤지지 않는 영상미를 뽑아냈다. 돈이 다가 아니란 것이다. 너의 이름은 2분의 1의 제작비인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3분의 1의 제작비인 퍼펙트 블루 같은 작품도 작화가 뛰어나단 소리를 듣는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것.
물론 버블 경제라 이후의 애니메이션보단 동화를 많이 사용해 AKIRA(1988)처럼 거의 풀애니메이션 수준의 동화를 사용한 작품이 나오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90년대 이후 작품보단 동화가 많이 사용되었다. 이 당시의 애니메이션의 제작비 평균은 지금보다 적었지만 당시는 엔화 가치가 정점을 찍은 시기였고 한국이나 중국의 동화 하청사의 인건비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쌌기 때문.

6.3. 스튜디오 지브리의 설립


주로 해외합작으로 하청을 하던 톱크래프트도 애니업계에 불어닥친 한풍을 제대로 맞았고, 결국 1985년에 재창업을 하는 형태로 스튜디오 지브리로 거듭났다.
하지만 1989년작 《마녀 배달부 키키》가 흥행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개봉만 하면 적자 상태라, 한 작품 한 작품 이번 작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정작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웃집 토토로》를 만들면서도 어차피 손님 안올거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었는데 진짜로 관객이 없더라는 인터뷰를 남겼다.
《키키》의 성공으로 지브리는 정규직 월급제를 실시해 직원들의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했다. 여성 직원을 위한 보육원 시설이나 직원 복지에도 신경써 과거 토에이에서 노조 운동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를 이뤘다. 이후 착실하게 퀄리티와 작품성이 높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발표하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스튜디오로 발전해간다.
그 밖에 이 무렵 창립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AIC(1982), 가이낙스(1984), 교토 애니메이션(1985), J.C.STAFF(1986), STUDIO4℃(1986), 프로덕션 I.G(1987) 등이 있다.

6.4. 대작 영화의 실패와 제작위원회 체제


거품경제돈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던 물주(스폰서)들은 이 돈을 제작위원회라는 방식으로 극장용 대작 영화투자했다.
왕립우주군》(1987)과 《AKIRA》(1988)는 당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일본 애니메이션 기술을 최고 수준을 보여준 작품이지만, 그 내용과 각색의 부실함으로 흥행에서는 처참히 실패하고 만다.[21] 하지만 왕립우주군의 스태프들은 훗날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같은 명작들을 만들게 되고 AKIRA는 수많은 업계 후배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등 나름의 업적과 영향을 남겼다.
1989년에 개봉한 《리틀 네모》도 도쿄무비신사의 진취적 성향의 후지오카 유타카 사장이 1978년부터 추진한 프로젝트로 세계시장 진출을 노리고 만든 초대작이었는데, 45억 엔+10억 엔의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흥행에서는 대실패라는 쓰디 쓴 결과를 낳았다.
다만 이런 것은 일부 특이 사례일 뿐이다. 이 시대의 애니메이션은 제작비가 많아서 작화가 좋다고 한국 애니메이션 팬들이 많이 잘못알고 있는데 이때는 애니메이션이 별로 돈이 된단 인식이 없어서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한 작품들은 오히려 나중보다 못한 돈으로 제작을 해야했다. 버블 경제 당시의 일본은 주식이나 부동산을 사면 배로 뛰는 시대였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를 하면 했지 애니에 투자를 할 이유가 없었다. [22] 그리고 AKIRA는 10억엔, 왕립우주군은 8억엔으로 당시로는 획기적인 투자를 받았지만 대부분은 그거보다 못했고 이후에 스튜디오 지브리스팀보이가 몇십 억 엔의 제작비를 쓸 정도로 투자를 많이 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 시기 애니메이션이 돈을 많이 투자받았다는 건 낭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작화가 좋은 건 위에 말한대로 뛰어난 실력의 애니메이터가 업계에 많이 방출되어서 그런 것이다.

6.5. 그리고 주목할 만한 작품


TVA로는 《터치》, 《드래곤볼》, 《세인트 세이야》, 《날아라 호빵맨》, 《마신영웅전 와타루》, 《용자 엑스카이저》를 시작으로 한 용자 시리즈, 《마루코는 아홉살》, 《금붕어 주의보!》,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등이 나름 인기를 얻는 한편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도 애니메이션화되었다.

OVA 분야에서는 《에어리어88》,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로봇 카니발》, 《미궁 이야기》, 《톱을 노려라!》, 《요수도시》, 《노인 Z[23]같은 작품이 발매되었다. 《바람과 나무의 시》도 OVA로 출시되어 은밀한 세계팬들을 유혹했다.

6.6.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


1989년에 발생한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의 여파로 오타쿠에 대한 편견이 생겼다. 오타쿠로 몰아간 것은 기자의 조작이고 그 진실은 한참 뒤늦게야 밝혀졌지만, 1990년대 중후반까지 오타쿠, 애니메이션 팬들은 사회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성인이 된 사람이 같은 오타쿠 동지가 아니라면 타인이나 지인 앞에서 감히 매주 《나디아》를 보고 있다고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타쿠는 곧 변태라는 누명을 벗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7. 1992년 ~ 1999년


일본의 애니 평론가들은 1992년부터 1998년까지를 '제3차 아니메 붐'이라고 분류하기도 하고,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 방영 이후를 '제2차 아니메 붐'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많은 인기작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떤 평론가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캐릭터 붐'이었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예: 포켓몬스터)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부르고 춤이 엉망이어도 노랫말이 뭘 말하는지 따위는 개의치 않고 멤버 개인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모닝 무스메의 팬처럼 2000년 이후에 몰아닥친 캐릭터 모에 붐에 빠진 아니메 오타쿠들이 자라나는 시기였다.

7.1. 제3차 애니메이션 붐 <상전벽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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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애니메이션 그랑프리 제18회(1995년)~제19회(1996년).
1992년에 제작한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과 1995년에 제작한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주축으로 3차 애니메이션 붐의 발생원인으로 보는 경향이 대체적인 중론이다. 물론, 《에반게리온》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작품인 《슬레이어즈》, 《천공의 에스카플로네》, 《기동전함 나데시코》, 《바람의 검심》, 《사쿠라 대전》, 《공각기동대》, 《카드캡터 사쿠라》, 《포켓몬스터》, 《카우보이 비밥》 같은 명작들이 1995년 이후 등장하게 되면서 지속적으로 붐이 상승되었다.
특히《신세기 에반게리온》은 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자랑하며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대변혁을 앞당긴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때부터 애니메이션의 디지털화와 컴퓨터 회로의 발전으로 인해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지면서 제작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줄어드는 긍정적 효과가 발생하였으며, 《에반게리온》 이후로 제작위원회 시스템이 본격화되는 출발점으로 작용했다.
1990년대 후기부터 나타난 일본의 저출산 현상으로 인해 제작사들은 1차 붐과 2차 붐 시절 애니메이션을 감상한 연령층을 겨냥하는 작품들을 발표하는 경향도 생겨나게 된다. 이에 DVD피규어OVA의 미디어믹스 생산품들이 증가하면서 전체적인 수익 구조가 변화되었다.
이전에 중소규모 제작사이던 매드하우스, 교토 애니메이션, 프로덕션 I.G 등이 메이저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데뷔하는 시점 또한 3차 붐이 발생한 1990년대부터이다.
그리고 3차 붐 이후에 성인 대상 애니메이션 제작이 점차적으로 증가하면서 끝내는 2007년 부터 성인층을 타겟으로 잡은 심야 애니메이션의 활성화가 나타난다. 그 이전인 1990년대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과 성인 취향의 오타쿠적 요소를 삽입했고 보다 더욱 자극적인 표현을 강화하는 작품으로 예전보다 극단적으로 시장이 갈리게 되었다.

7.2. 신세대 아니메 붐과 미디어믹스


1990년대초에 소련이 붕괴되는 등 냉전이 종말을 고하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거품경제가 꺼진 1992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시리즈는 국민적 히트작이 되었다. 기존의 마법소녀물클리셰전대물 요소를 섞은 하이브리드 작품이었다. 주요 타겟인 소녀뿐만 아니라 10대 남성에게도 인기를 얻고, 일본 PC통신 게시판에서는 모에(萌え)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관련 캐릭터 상품이 엄청나게 팔리면서(추정치 5년간 약 5천억 엔) 망해 가던 토에이 동화에게 새로운 빌딩을 세워 줄 정도로 효녀 노릇을 했다. 이 작품이 나오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안노 히데아키 연출의 《신세기 에반게리온》(1995)도 종래의 거대로봇물거대괴수 특촬 드라마의 클리셰오마주하면서도 복잡한 설정속에 참신한 아이디어를 버무린 수작으로, 팬들은 직소 퍼즐을 맞추는 재미로 작품을 즐겼다.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아서 설정이 복잡난해한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극장판이 공개된 후에는 그 해석을 둘러싸고 아니메 오타쿠들 사이에서 찬반 양론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고, 관련 상품이 많이 팔렸다.
《세일러 문》시리즈도 그렇고 《에반게리온》도 그렇고 열렬한 매니아층만으로도 비즈니스가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애니메이션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미디어 믹스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에반게리온》은 테레비 도쿄에서 재방송을 하면서 심야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 CG 기술이 발전하며 여러 작품들이 CG를 이용해 여러 가지 실험적인 연출을 해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시작했고 이는 아날로그 형식의 셀 애니메이션의 쇠퇴로 이어지게 된다.

7.3. 세기말의 작가주의


고스트 인 더 셸(1995)은 1989년에 발표된 원작 만화가 영향을 받은 영화《블레이드 러너》처럼 개봉 때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뒤늦게 작품성에서 재평가를 받고, 이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오시이 마모루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감독의 반열에 올랐지만, 그의 작가주의 작품들이 항상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프로덕션 I.G의 CEO인 이시카와 미츠히사는 "감독 중의 감독이지만, 돈을 벌어다 주지 않는다. 빚진 돈 좀 갚게 해달라."고 평했다.
1997년 7월부터 1998년 7월까지 롱런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첫 번째 은퇴선언작 모노노케 히메는 역대 일본 영화 흥행 1위를 갈아치운 흥행 대작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도 감독이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브리 브랜드와 감독의 명성으로 의무적으로 봐 줘야 하는 분위기로 흥행에는 대성공했지만, 이 작품부터 감독과 관객 사이에 괴리감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밖에 오토모 카츠히로가 참여한 미궁 이야기(1987)와 메모리즈(1995), 카와지리 요시아키수병위인풍첩(1993), 콘 사토시의 감독 데뷔작 퍼펙트 블루(1997), 호소다 마모루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1999), TVA로는 기동전함 나데시코(1996), 카우보이 비밥(1997), 소녀혁명 우테나(1997), serial experiments lain(1998) OVA에서는 이마가와 야스히로자이언트 로보 THE ANIMATION(1992~) 등이 작품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훗날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9기 어른제국의 역습(2001)을 연출하게 되는 하라 케이이치도 1997년부터 극장판 짱구 시리즈 연출을 시작했고, 유아사 마사아키도 1993년 극장판 짱구 시리즈 1작부터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개성 있는 연출로 주목을 받았다.

7.4. 1990년대의 일본 애니메이션


1987년대에 새로이 설립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의 작품들을 필두로 하여 1960년대의 거대로봇물 범람과 1980년대의 SF 붐을 잇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존의 장르 간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시장 개척이 시도되었고 그러한 도전 정신은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을 부흥하게 만들었다. 다만 1990년대에 이루어진 재패니메이션의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 세기말의 문화적 번영을 이룩했고 2007년까지 그 흐름이 이어졌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침체기가 오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7.5. 기타 인기를 얻은 작품


※ 현재도 방영중인 작품은 ☆ 표시

7.6. 세계화와 디지털화


위에서 소개한 작품들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세계적으로 지명도를 높였다. '재패니메이션'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미국 비디오 샵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을 취급했고, 한국 영화잡지에도 소개가 되고 관심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TV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일본 문화 개방 덕분에 《수병위인풍첩》을 시작으로 극장에서 상영하기 시작했다.
일본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대하는 시선이 바뀌면서, 1997년부터 일본 정부가 주관한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에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부문에 상이 만들어지면서, 산업이자 예술이라는 대접을 받았다.

일본 애니업계는 1997년을 기준으로 디지털화를 추진해서, 그해에 토에이 동화가 먼저 <게게게의 키타로> 4기를 디지털로 전환하고 본격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스(3DCG)과 셀화(2D)를 합성한 《청의 6호》(1998)를 선보였고, 21세기가 되기 전에는 《사자에상》을 제외하고 셀화와 그림물감이 사라졌다. 디지털화가 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이 쉬워지고 인건비를 줄일 수 있어서 소규모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늘어났다. 기존방식이라면 종이와 셀, 그림물감 등의 재료비 뿐만 아니라 그 동화를 트레스해서 셀화로 옮기고 그 셀화를 또 한 장 한장 채색해야하고 또 그 셀화를 한 장 한 장 사진 촬영해서 필름으로 만드는 공정 뿐만 아니라, 그 많은 종이과 셀과 재료를 옮기고 나르는 운반비와 인건비까지 제작비에 포함되었다. 특히 한국같은 외국에 하청을 주는 경우 자료와 원화를 비행기편으로 보내주고 다시 동화를 받고하는 이런저런 주고받고 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과 돈이 소모됐다.
위성방송, 케이블 TV 등의 배급업체도 많아져서, 1998년에 1년에 47편으로 과거 최대였던 TVA은 2000년 이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8. 2000년대 ~ 2010년대



8.1. 명작 애니메이션의 감소


Q. 요즘에는 왜 1980년대·1990년대 같은 고전명작이 될 만한 작품이 안 나오나?

A.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지금 애니메이션 제작가들은 애니메이션에만 빠져 있어서 다른 분야를 공부하지 않는다.''' 그러니 선배들을 뛰어넘을 수 없다. 애니메이션 전문 학교를 나온 학생들이 얼마나 좋은 작품을 만들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그냥 깨끗하고 보기 좋다는 거? 그건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번듯하게 잘 그린 애니가 시대를 창출하나? 아니다. 1980년대 고전들을 뛰어넘을 작품이 언제 나오냐고? 한 10년쯤 지나서 지금 상황에 염증을 느낀 사람이 이건 아니라며 새로 내놓든지, 나처럼 나이를 먹은 사람이 세태에 반기를 들고 나오거나.

2010년 씨네 21 8월호, 부천영화제에서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과의 인터뷰 일부에서 발췌.[24]

(한국어 해석본)

A. 이런 건 말이야, 실제로 어린애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그런 관찰을 못하면 못 그리지. 이걸 안 하고 아무것도 안 보고 자기 자아밖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일상만 보내고 있고...

(리포터: 인간을 좋아하는지 어떤지에도 관련된 건가요?)

A. 일본 애니메이션은 말이야, 대부분이 인간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그리고 있지를 않아. '''인간에 대한 관찰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런 걸 그리고 있다는 소리지. 그러니까 오타쿠 소굴이 되는 거야.'''

(일본어 원문)

A: こういうのってさ、実際の子供をありありと思い浮かべられるかどうかなんだよ。そういう観察してないと描けない。これしてない、 何も見てない。自分の自我しか関心がないそういう日常生活を送っている。

(レポーター: 人間が好きかどうかっていうことにも繋がってくるんですか?)

A: 日本のアニメーションはね、観察によって基づいてない ほとんど。'''人間の観察が嫌いな人間がやってんだよ。だからオタクの巣になるんだよ。'''

미야자키 하야오, 2013년 다큐멘터리 '꿈과 광기의 왕국 (夢と狂気の王国)' 중

상업성이 2000년대 초반부터 대세가 되었다는 것은 2000년대부터 시작되어 고착화된 현상을 말하는 것이지 2000년대부터 상업성만을 위시한 작품이 대다수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부터 2010년 사이에 투니버스 등의 더빙 로컬라이징 애니메이션 방영 시장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25] 애니메이션의 팬이 많고, 추억보정도 있어[26] 의문점을 표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각하고 볼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도 이 시기에 애니메이션 케이블 채널이나 보급이 활발해서 1990년대 이후 출생 애니메이션 오타쿠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어 이 시기에 대한 평가가 '''최고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이다. MyAnimeList 같은 곳을 가보면 이 시기 애니메이션들만 과대평가가 붙어있다.[27] 그러나 각 시대의 작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다보면 문제가 표면화되는 시대임은 분명하다.
토미노 요시유키는 이 시대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에 빠져 있는 시대로 평가했다. 그의 말대로 작품성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 시기에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대에 나오는 작품들은 심각하리만큼 주제와 내용을 비롯해서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고, 그저 선정적인 작품이거나 그냥 여캐만 잔뜩 나오는, 그나마 얼마 없는 내용조차도 스토리의 개연성이 없는 말도 안 되는 작품들이 많았다. 그래도 2010년대 중반부터는 시장이 확대되고 수익도 늘어나게 되면서 대중적인 작품이 다시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또한, 해외 수익은 이전 시대에 비해 더 높다. 작품성과 별개로 상업적으로는 잘 팔린다는 것인데, 다른 의미로 해석하자면 충성도가 높은 오타쿠 위주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재편되었고 접근성이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28][29]
이 시기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품성 정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몇 가지만 짚어보자면, 우선 21세기 들어서 미국발 경제불황으로 세계 경제가 악화된 데다가 특히 일본은 헤이세이 불황이라 불릴 정도로 경제 침체가 장기화되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경제적,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만 자아성찰을 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위 말하는 어두운 작품들이나 심오한 작품은 머리 아픈 작품이라고 기피되기 시작했으며 오덕후들에게 단순하게 보면서 소비하는 질 낮은 작품들이 대세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전반적인 질적인 능력치가 하락한 것'''이다. 나쁜 쪽으로 세대교체가 일어난 셈인데, 우주전함 야마토, 기동전사 건담 등 명작의 영향을 받고 그것을 목표로 정진해왔던 1세대 오타쿠 세대들은 오타쿠이면서 일본에서 생산된 서브컬처외에는 관심을 별로 두지 않긴 했지만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오타쿠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라 정보를 얻으려면 동호회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사회 경험을 가진 뒤에 애니메이션 업계에 들어온 경우가 많아 인간 관계나 인간 관찰에 있어서는 그 윗세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세대 제작자들은 사회생활 경험 자체가 거의 혹은 전혀 없으며 일반 세상이나 인생에서는 격리, 해리 분열된 오덕후들이나 학창시절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에만 빠져 직장까지 애니메이션만을 목표로 달려온 사람들이 대다수다. 즉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되었고 그림도 잘 그리게 되었지만 정작 그 소재가 될 "현실 세계"에 대해서는 백치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현재도 평가가 좋은 신세대 작가인 신카이 마코토오모토 타츠키[30] 같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과거사를 들어보면 풍부한 인생 경험을 쌓아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게 다 작품에 도움이 되는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현세대 작가 중에선 극소수이다.
굳이 사회생활 경험까지 가지 않더라도, 애니메이션 외의 인간관계인문학, 사회적 주제, 시사문제 등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아니 그런 것들이 아니어도 주옥(珠玉) 같은 세계 명작 작품들을 잘 읽고 재료로 삼았으면(이런 건 시작 단계일 뿐이다.) 이 정도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일본 젊은층의 정치적 무관심화와 "사토리 세대"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소소한 일상 생활과 취미생활만 추구하고 세상의 문제에는 관심 없어지는 현상이 보편화되었고 이것이 사회의 문제가 된 지 오래되었으며, 일본 사회를 장기적으로 침체시킨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 상황으로, 애니메이션 업계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물론 애니메이션 작가들의 질적인 하락은 분명히 심각한 사항이다.
물론 당장은 큰 문제가 없고 지금 애니메이션도 괜찮다는 주장도 충분히 일리는 있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기술도 꾸준히 발전되고 있으니 발전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2010년대가 끝나갈 때까지 1세대 오타쿠 세대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특히 사람의 표정과 행동을 묘사해야하는 연출 스탭의 경우는 1960~70년대생 애니메이터나 연출가들이 여전히 전담하고 있으며 후계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고 있다. 1980~90년대에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사람들이 세대 교체 없이 지금도 업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40대 이하 세대에서 제대로 인간을 묘사할 수 있는 연출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게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2000년대와 2010년대에도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 명작 애니메이션은 분명 있다. 근데 그걸 만든 사람들이 신인이 아니고 1980년대의 그 사람들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이야 별 문제가 없더라도 현재의 연출가들이 10년 뒤 나이로 물러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문학도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써야 명작이 많이 나오는데[31] 애니메이션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막말로 예를 들자면, 연애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봤어야 인물들의 감정묘사부터 해서 제대로 된 연애물을 만들 텐데 그럴 리가 없으니 현실성과는 백만 광년 떨어진, 연애물의 탈을 쓴 말도 안 되는 작가만의 판타지만 범람하는 것이다. 그럼 그걸로 유사연애를 하며 성장한 오타쿠들이 작가가 되어 더욱 말도 안 되는 작품을 만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32]
이렇게 경험없는 사람들이 쓰는 각본과 그림에 혼이 실려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고, 현실성 있는 내용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당장에 작품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 없이 최근에 방영된 연애물 애니메이션 중 상당수가 포함된다.
같은 미소녀 동물원 작품에서 친구들끼리 밖에서 만나는 상황을 예로 들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독자들이 어느 정도 공감될 만한 대화를 나누거나 코스를 따라가는데 반해서, 현세대 작품들은 이상하게도 속옷가게에 들어가서 서로 옷을 벗기고 노는 등(?!) 도저히 실제 세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행동을 한다. 다른 예시로는 백합물이나 BL물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는데, 과거에는 그러한 동성연애의 주제인 사회적 금기를 넘어선 사랑에 대해 조금이나마 다루었지만 현세대 백합물들이나 BL물들은 그런 거 없이 해피한 연애일 뿐이다.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져서 애니메이션 오타쿠나 아싸, 히키코모리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엉터리 같은 스토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동성애 외에도 금기시되는 장르를 다룬 작품으로는 남매 간의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도 종종 나온다. 물론, 금기시되는 걸 다루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회적 금기를 소재로 쓴다면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고찰을 더하여 작품성을 높이던지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도 없이 오타쿠층의 환상만 가득한, 오타쿠층만을 위한 작품이 되어버린다. 대표적으로 라이트 노벨 원작인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가 있다.
결론적으로 시대가 흐르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필요한 기법들은 발전한 반면, 그에 비해 여러 요인들로 인해 애니메이션의 근간이 되는 "주제 의식"의 수준은 극단적으로 퇴보했고, 지금 현 일본 애니메이션의 문제는 이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만화에서는 들어가는 자본이 많지 않기 때문에 쏟아져나오는 양산형 작품속에서도 빛나는 명작들이 나올 수 있지만 모든 게 돈인 애니메이션 시장에선 그런 소소한 저항과 대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요즘 애니메이션들이 오리지널 작품이 적어지고 원본이 있는 작품을 애니화 하는 건 최소한의 인기를 보장받으려는 것도 있지만 각본가, 감독의 수준 저하 또한 원인이다. 원안이 있으면 잘못될 가능성도 줄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3차 애니메이션 붐 때 메이저로 데뷔한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나 《데스노트》 같은 신선한 작품을 내면서 흥행하고, 선라이즈, AIC, 가이낙스, Production I.G, 교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딘, 사테라이트, J.C.STAFF, feel., P.A.WORKS 등의 약진도 있었으나, 이전과 같은 '애니메이션 붐'이라 부를 만한 임팩트는 없었고 새로운 '붐'의 계기도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마저도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애니메이션의 대중적 저변을 확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오타쿠 층을 중심으로 흥행하여 오타쿠 중심의 시장을 강화시킨 작품이라는 한계점도 있다. 게다가 현재에는 언급도 잘 되지 않는 작품으로 전락하여 "한순간 반짝한 원 히트 원더 애니메이션일 뿐이다"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도라에몽과 같은 국민들이 잘 아는, 전연령층이 공감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흥행한 것이 아니라 오타쿠층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만 흥했다는 것이 되므로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이 오타쿠 층만을 겨냥한 애니메이션이 대다수인 시장으로 변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하루히 애니메이션을 기점으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더 매니아를 겨냥하게 되었다는 평이 있다.
1980~1990년대 때 유명했던 유아, 아동, 소년 애니들은 계속 남아있고 건재하지만 그 이후에 만들어진 애니들은 주로 연령층이 높은 애니들을 자주 만들어내고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하는 다소 선정성이 강한 애니를 많이 만들어냈다. 대표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몇몇 작품들이 있다. 물론 "최근 작품 중 선정성과 모에 요소가 적고 스토리 전달을 하는 애니가 없다"라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신작 애니들은 선정성이 강한 애니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판매량도 계속 힘들어지는 추세라 요즘은 여성향 애니가 생각보다 잘 팔리자 여성향 애니도 많이 보이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노래하는 왕자님이라는 큰 히트를 한 여성향 애니메이션이 있다.
사실, 나가이 고가 전성기를 유지했던 1960~1980년대에도 선정성의 문제점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수위로만 따지면 1980년대 거품경제 시기의 작품이 더 심했다지만, 그 시절에는 PTA 소속 학부모들의 입김 등 여러 가지로 규제 압력도 심했고 자극적인 요소 없이 작품성으로만 승부하는 수많은 명작들도 생각보다 많이 나왔었다. 마징가 시리즈를 비롯한 도라에몽, 사자에상, 슬램덩크, 드래곤볼이나 신세기 에반게리온, 포켓몬스터가 대성공했던 이유는 선정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정성이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명백하게 여체 묘사나 관능 묘사에 있어서 예전보다 질이 떨어지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건 카와지리 요시아키, 니시지마 카츠히코, 우메츠 야스오미, 우루시하라 사토시, 요시모토 킨지 같이 야한 작품을 만들던 과거 감독과 비교해봐도 차이가 나며, 지금도 야한 애니메이션은 이 사람들이 만들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런데 이런 시기가 계속되자 시대를 잡았던 애니메이션들의 리메이크,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는 시리즈물, 아동용 애니메이션들도 문제점을 벗어나지 못했고, 대표적으로 1990년대 대히트작 에반게리온의 신극장판 시리즈, 드래곤볼, 디지몬, 그리고 포켓몬스터, 유희왕, 명탐정코난, 원피스 등도 좋게 보면 재해석과 인기가 있어서 제작을 하고, 나쁘게 보면 설정을 조금씩 바꾸고 새 캐릭터를 만드는 것을 빼면 재탕을 지속적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TV방송사의 프로그램 대개편은 일본 애니메이션에 악영향을 주었는데, 1990년대만 해도 심야 애니메이션은 많지 않았고, 주로 6~7시대의 프라임 타임 애니메이션이 많았는데,[33] 2000년부터 후지 TVTV 아사히가 6~7시에 방영하던 애니메이션을 폐지하고, 아니면 일요일 오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덕분에 16세 미만들이 보던 애니메이션이 줄어드거나 소수로 전락했고, TV 도쿄마저도 2006년까지는 6~7시 프레임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방영하다가, 2007년부터 심야 애니메이션을 늘리고, 아동용 애니메이션 신작 수를 줄이고 있다. 결국 2019년에 포켓몬스터가 일요일에 옮긴데 이어 짱구와 도라에몽이 무려 '''20여 년'''만에 토요일로 옮겨지면서 사실상 평일에 방영하는 프라임타임 네임드 애니는 전멸할 뻔 했으나, 2020년 10월 9일 부터 포켓몬스터W가 금요일로 옮기면서 유일한 평일 장편 애니메이션이 되었다.[34]
작화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라노벨 애니만 꾸준히 양산하다 돌아온 각본가들의 실력에 대한 문제도 불거지면서 수준 낮은 스토리텔링에 대한 비판도 증가하는 중이다. 심지어는 라이트 노벨 원작자가 실력도 형편없는 주제에 애니메이션 각본이나 연출을 담당한 사례가 생겨나기까지 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자신이 집필한 라노벨과 그를 애니화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흥행한 것에 고무된 한 저자가 또 다른 라노벨을 쓴 뒤 그 라노벨을 애니화한 작품의 연출과 각본을 자신이 담당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고, 자신의 평판과 애니메이션 업계의 이미지까지 깎아먹는 사태를 초래하고 만다. 다시 말해서 라이트 노벨 하나로 성공한 원작자가 제대로 된 실력을 가진 각본가도 아니면서 함부로 애니의 각본과 연출을 담당하다가 망한 사례이다.
이처럼 스토리 작가와 감독, 그리고 제작 환경의 질 하락이 겹쳐지면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퀄리티 하락도 2010년대를 기점으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특히, 20세기를 주름잡았던 로봇메카물의 경우 장르의 쇠퇴와 상기한 문제점이 합쳐져 《혁명기 발브레이브》, 《알드노아. 제로》,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 《달링 인 더 프랑키스》 등 나오는 작품마다 혹평이 쏟아지고 있으며, 그나마 아동·청소년용 메카물 또는 《중신기 판도라》, 《플래닛 위드》같은 왕도적인 메카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안 좋은 소리를 들은 발브레이브나 철혈의 오펀스, 달링 인 더 프랑키스도 대부분 나이있는 베테랑 스탭들이 만든 작품이며 연출과 작화는 오히려 괜찮은 편에 속하고 '''각본이 망한''' 경우라 경험없는 젊은 애니메이션 스탭이 만들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등 신작이 영 힘을 쓰지 못하자 2010년대 후반에는 세일러문, 드래곤볼, 디지몬 어드벤처, 봉신연의, 꼭두각시 서커스 등 기존의 인기가 많았던 만화나 애니를 리메이크하거나 후속작을 내는 사례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전 작품에 대한 이해 없이 낮은 품질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들이 나오자 오히려 '''원작을 모독한다'''며 불만스러운 반응이 많다.
한때 미국 애니메이션도 타겟으로 잡은 연령층이 제한적인 것과 더불어 내부적으로 낮은 퀄리티, 아동 친화적인 내용의 TV 애니메이션들이 범람했던 문제점들이 있었지만, 1980년대 후기부터 업계 자체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내 이런 문제점들을 많이 극복했다.[35] 한국 애니메이션 또한 미국 애니메이션보다 좀 늦은 감이 없는 게 아니지만 한국 애니가 내재된 문제점이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반대로 1970년대 중기부터 내외적인 변화와 향상을 거친 일본 애니메이션계가 2010년대 들어 과거의 미국 애니메이션와 일부 비슷한 문제점을 겪으며 정체되었다.

8.1.1. 반론


각본가의 질이 하락하는 문제도, 일본 애니메이션 전체를 본다면 21세기로 넘어오자마자 급격히 질이 낮아지고, 분위기가 딴판이 되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전전(戰前)의 애니와 전후(戰後)의 애니를 분리할 수 있듯이 21세기 이후 애니들을 "다른 문화"로, 어느 정도 분리된 문화로 본다면, 범위를 21세기 이후로 좁힌다면 이상할 것이 없다. 탄생한 지 20년 정도의 매니악한 문화라면 지금으로썬 새로 배출된 작품과 각본가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수 없다. 단지 20세기의 제작진들이 대거 합류해 상대적으로 작화와 연출쪽의 질이 좋은 것뿐이다.
한국 영화계만 봐도 쉬리 이전에는 한국 영화는 킬링타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고, 게임계 또한 하프라이프의 등장 이전까지는 "게임의 스토리는 포르노의 스토리와 같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명작들이 여럿 나오면서 나름의 주제의식을 갖추기 시작했다.
2010년대 후반의 작품들을 보면 비록 20세기의 일본 애니메이션만큼은 아니지만 2000년대 초반보다는 확실히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약속의 네버랜드》, 《귀멸의 칼날》, 《메이드 인 어비스》,《일곱 개의 대죄》등 나름 주제의식을 갖추고 좋은 각본으로 "오타쿠"들의 주목을 끌었다.
즉, 이 시대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은 20세기의 찬란했던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의 깊이와 각본의 질은 향상되고 있다. 따라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지는 않다. 후술하듯 오히려 해외 수출액은 북미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흥행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의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작품은 안 만드는 게 아니라 못 만드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오타쿠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제작자들이 나태해진 게 아니라, 그저 20세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버블 경제 붕괴와 함께 일단락됐고, 살아남기 위해 변했다.
특히나 거액을 쏟아부은 《왕립우주군》이 흥행을 대차게 말아먹는등 20세기 말의 고전적 작품들의 흥행 실패[36]는 '''더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맥조차 유지할수 없다'''는 냉혹한 시장의 반응을 의미했다.
또한 21세기는 셀 애니메이션 자체의 침체기이기도 했다. 그 디즈니 조차 21세기 이후 제작된 셀 애니메이션들이 신세대들의 새로운 흐름과 맞지 않아 저조한 성적을 보여주면서, 3D로 그 방향을 선회하였고, 지금은 디즈니에선 셀 애니메이션을 거의 만들지 않는다.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은 셀 애니메이션을 유지하면서, 그 내용을 바꿔 성장했다.
결국 남은 방향은 20세기의 작화진이 점진적으로 애니메이션의 깊이를 더욱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채되어 결국 한, 미의 애니메이션에 추월당할거란 주장도 있지만, 한콘진이 제시한 2016년 통계[37]에 따르면 2009년 침체기 이후 6년간 전체 시장 매출은 오히려 증가했으며, 특히 성인용 애니메이션[38]은 점점 비중이 증가하더니 2015년에는 세계 최초로 성인용 애니메이션이 가족·아동용 애니메이션의 매출 규모를 추월했다. 오히려 가족, 아동용 애니메이션 매출액은 2012년부터 침체기를 겪었다. 즉, 가족·아동용 애니메이션은 타국과의 경쟁에서 밀릴지는 몰라도 모에풍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은 애시당초 타겟이 달라서[39] 타국 애니메이션에 애초에 추월당할 일이 없으며,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시장 자체가 달라서 서로의 파이를 뺏어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타국(일본 외 국가)의 애니메이션 성장이 우려된다면 오히려 성인용 애니메이션에서 입지를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성인용 애니메이션은 성인용 애니 안에서도 또 성격이 매우 달라서 분야가 다르다고 봐야하고, 한국 애니메이션중 성인 애니메이션은 규모가 작고, 그중 일부는 일본에 의존하는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현 일본 모에풍 애니메이션 업계가 성장하는건 몰라도 붕괴하는건 예상하기 힘들다. 정체라면 몰라도 큰 경쟁자 없이 순항중인 산업이 아예 자체붕괴 하려면 이정도 막장은 나와야 하는데, 아직 그정도는 아니다.[40]
요약하자면, 결국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아동물이라는 레드 오션을 버리고 청소년/성인물이란 블루 오션을 취하는 일본 시장 특유의 흐름을 따라간다고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드러나 있는 일본 애니 업계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다시 '재패니메이션(아니메)'의 명예을 회복하는 데는 전적으로 업계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2. 게임 회사로 이적하는 애니메이터


1990년대~2000년대 중반에 방영한 애니메이션의 질 낮음의 큰 원인 중 하나가 게임 회사로 이적한 애니메이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도트 그래픽과 단순한 움직임으로 게임을 표현해서 애니메이터가 활약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슈퍼 마리오의 스태프로 일세를 풍미한 코타베 요이치같은 사례도 있었으나 이때는 게임업계로 옮기는 애니메이터가 많지 않았다.[41] 그러나 1990년대 중반 플레이스테이션의 보급으로 부드러운 2D 도트 그래픽 애니메이션, 3D 그래픽에 표현의 자유도가 늘어나고 파이널 판타지, 코지마 히데오 게임 같은 연출과 그래픽을 중시하는 게임이 늘어나게 되자 게임 회사들. 특히 닌텐도, 코나미, 스퀘어 에닉스 같은 대형 회사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2D 그래픽을 만들고 3D 그래픽의 구도와 레이아웃을 잡아줄 인재로 애니메이터를 대량으로 스카웃했다. 이제는 움직임이 중요한 시대인데 움직임에 있어서는 애니메이터들이 최고의 전문 인력이다. 당연히 애니메이션 회사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말이다.
이때 카나다 요시노리, 코즈마 신사쿠, 이나노 요시노부, 니시무라 노부요시, SUEZEN 등 정말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게임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계로 들어갔어야 할 연출계의 인재들이 대부분 게임 회사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대표적인 예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료치모도 원래는 게임 회사 직원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당연히 애니메이션의 작화와 연출이 구려진다. 가뜩이나 4쿨 애니로 중심으로 되는 시기였고, 세대교체로 불안불안하던 1990년대~2000년대 중반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성기이면서도 동시에 작화의 암흑기라 할만한 시기였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PS3가 심각한 매출 부진에 빠졌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연출을 중시한 게임을 만들던 일본 게임 회사들은 대형 게임 제작을 축소하고 구조조정을 하면서 다시 애니메이터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게임 회사는 오히려 모바일 게임 제작에 용이한 일러스트레이터를 영입하는데 더 비중을 두기 시작해 많은 게임회사 직원 애니메이터가 실업자가 되었고, 많이들 애니 회사로 이적하게 되었다. 여기에 2007년부터 4쿨 애니의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서, 2010년대에 애니메이션의 작화가 다시 개선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8.3. 작가주의의 쇠퇴와 불씨


"예전에 퍼스트 건담을 만들 때는 사상이라든가 내용같은 걸 넣어서 만들었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는 애니메이션은 엔터테인먼트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토미노 요시유키, PiFan의 인터뷰에서

앞서 열거한 미야자키, 토미노, 안노, 오시이 등은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작가주의 시대는 저물었다. 내막이야 많은데, 쉽게 말하면 이렇다. 애니메이션이 산업으로 바뀌면서, 누군가가 업계 전반을 휘어잡는 수준을 넘었다.
뒤에 후술한 이런 극단적 시장주의를 좋아하는 애니메이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전히 작품성을 추구하는 '''포스트 미야자키 세대'''도 존재한다. 일본에서도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대표적인 예로 신카이 마코토는 앞으로 설명할 내용을 역행하는 애니메이터이다. 그가 처음에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원화, 동화, 스토리, 성우를 모두 혼자서 해내면서 높은 퀄리티의 영상물을 뽑아냈기 때문이며, 지금은 그런 식의 1인 제작은 하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그의 모든 작품은 스타일리시하고 지극히 개인적이다. '풍경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것으로 인물의 심정을 대변하는 그의 기법은 일본의 하이쿠가 가지는 시적 전통을 애니메이션에 접목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작품들의 과반수가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대중적이지 않고 모두 원패턴이라는 비판이 있다. 그래도 '포스트 미야자키'라는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등장했던 그는 아직도 젊기 때문에 장차 더 많은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되었으며, 실제로 2016년에 《너의 이름은.》으로 호평을 받으며 흥행 기록을 새로 썼다. 그 외의 대표작으로는 《별의 목소리》, 《초속 5센티미터》 등이 있다.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도 《핑퐁》이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 등 모에와 오타쿠 문화의 시장성과는 적잖게 거리가 있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 특유의 영상미와 재미와 메시지를 모두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인기와 평가를 모두 잡고 있는 정말 희귀한 사례이다. 또한 《진격의 거인》 등도 오타쿠 문화의 성향과는 거리가 있는 독특한 세계관과 강한 센세이션, 선명한 주제의식으로 작가주의적 성향과 가능성이 상당히 스며들어있다.

8.4. 심화된 경쟁에 따른 분량의 축소


애니메이션이 세계로 퍼지면서 전체 시장의 파이는 커졌지만, 회사가 난립하고 애니메이션 작품 수가 급증하면서, 개별회사의 채산성을 맞추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를 숫자로 확인하면, 2001년 일본 애니 DVD 최대 판매작은 《마호로매틱》으로 14,000장 정도이지만, 2014년의 《러브라이브 세컨드 시즌》은 DVD, 블루레이를 합쳐서 65,000장을 팔고 있다. 세계 시장에서 그 이상의 확장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애니메이션 제작 사업은 꽤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회사와 연간 작품 수 또한 급증하였기 때문에 과거와는 달리 안 팔리는 경우는 100장 단위의 판매량을 보이고 그야말로 폭망하는 사례가 넘쳐난다. 지금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나 넷플릭스의 스트리밍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대작이여도 DVD/BD 판매량이 1~2만 장 대로 하락하였다. 하지만 애니의 흥행 추이에 판매량이 들어가는 건 여전했다.
또한 회사는 대부분 주주의 입장을 따르는데, 주주들은 대개 단기 이익에 초점을 다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미국 CEO들이 사기를 쳐서라도 이익을 확보하려고 안달하다가 사법처리되는 사태가 자주 벌어졌던 건 이것과 비슷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도 결국 주식으로 돌아간다. 주주들이 당장 돈 안 되는 철학적인 영화 만드는 감독, 그리고 그걸 그대로 두는 회사 경영진의 명줄이 남아날 리 없다. 결국 모든 부분이 돈으로 돌아갔다.
많아진 경쟁자와 작품들 속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팔리는 작품이 이기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타쿠라는 확실하고 충성스러운 팬층을 대상으로 하는 미소녀물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게 되면서 현재의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이로 인해 작품성이 저하되고 국제 시장도 잃게 되었다는 비판들도 많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 주인공들에 대해 얼마든지 지갑을 열었으므로, 산업적인 측면에서 이들을 타기팅하는 것은 안정적인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대상 타겟팅도 축소되고 한 분기에 방영하는 작품들이 많아지면서 업계 자체의 상황이 좋지 않아[42] 현재는 길어야 2쿨, 짧으면 1쿨도 되지 않는 작품이 주류가 되어 있다. 매년 신작 중에 3분의 2 이상이 그렇다. 1990년대에는 총 148화의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소년탐정 김전일도 2010년 이후로 제작된 리턴즈 애니는 2쿨짜리 시즌 2개로 끝났다. 심지어 2010년대 후반부터는 2쿨 애니들이 아예 '''사전에 2쿨이라는 걸 먼저 광고를 한다.''' 그만큼 2쿨 제작도 리스크가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 그렇다 보니 새로운 문제점도 생겼는데, 2000년대까지는 한 번 방영이 시작되면 최종화가 방영될 때까지는 모두 한 시리즈 작품군으로 분류했는데, 2010년대 들어 분할 시즌제가 대세가 된 탓에 가시적인 시리즈 구분이 매우 복잡해졌다는 것이다.[43]

8.5. 4차 애니메이션 붐 도래


하지만 위의 부정적인 상황 및 작품성 문제와는 별개로 수익성과 매출에서는 오히려 과거 어느 때보다 호조를 보였다. 일본 내에서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라고 해도 해외 인기는 한때 과거에 비하면 줄어들고 있었으나 2010년대 이후 해외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자본적인 측면으로 봤을때는 제 4차붐의 도래라고 불리고 있다. '''질과는 별개로 양적인 측면에서는 확장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장의 확장세를 견인하는 것은 해외 매출의 상승이다. 최근 이러한 상승세로 인해 일본동화협회에서는 4차 애니메이션 붐이 도래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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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일본애니 해외 계약 체결수를 보여주는 표인데 2015년 기준 전년대비 배 이상 증가한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계약국가 1위는 미국이며 그 다음이 중국, 캐나다, 한국, 대만 순으로 이어지고 유럽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적극적인 해외진출로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매출은 2015년 기준 2000억엔을 돌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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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때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장규모도 다시 증가해 2015년 기준으로 1조 8000억 엔을 돌파하였다. 이 성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 역시 해외수출인데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의 해외 매출은 '''2019년에 원화로 10조'''를 돌파했다. 해외 영향력이 감소하고 갈라파고스화되어가고 있다고 비판받는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식과는 반대로 오히려 크게 증가하고 있는것이다. 물론 갑자기 애니메이션의 질이 극적으로 향상된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이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로 경로를 모색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일본의 인구가 줄어들면서 이제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자국의 시청자와 오타쿠만으로는 시장을 유지할 수 없기에 해외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향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제성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실제로 해외 수출이 급증한 시점부터 기존의 오타쿠 취향이 아닌 기존의 문화, 대중적 취향의 애니메이션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아래 적힌 대로 1쿨 2쿨에서 끝나는 애니메이션 숫자는 더 이상 많아지지 않고 3쿨 이상의 장기 애니메이션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한국이나 일본과 다르게 장편 애니를 선호하며, 넷플릭스 같은 정액제 OTT에 가입해서 애니메이션을 시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는 편수가 많은 게 수익에서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리스크를 줄이겠다고 1, 2쿨만 만들고 튀는 수법이 반대로 안 먹히게 되었다.
2019년에 2011년 이후 매출액 성장률 최저치 기록을 세웠다. #

8.6. 거대로봇물의 쇠퇴


1960년대에 생겨나 1970~1990년대를 거치며 크게 발전해왔으나 2007년을 기점으로 2010년대에 와서는 가뭄에 콩 나듯 나올 정도로 장르가 완전히 쇠퇴해버렸다. 심지어 그나마 나오는 오리지널 거대로봇물 애니메이션들도 작품성이 하락하는 등 거대로봇물 장르를 만들 수 있는 환경과 역량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자세한 건 거대로봇물/애니메이션/일본 문서를 참고.

8.7. 넷플릭스 등 해외 OTT 서비스의 일본 진출


한편 2010년대 후반 들어 미국의 넷플릭스쿄토 애니메이션, 본즈 등에 투자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일본동화협회에서 발간하는 아니메 산업 리포트 2016에 따르면, 2015년 아니메 산업 추정 규모는 1조 8255억 엔(19.2조원). 이 중 모든 애니메이션 제작 기업의 매출을 합한 시장 규모는 겨우 2007억 엔(2.1조원)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규모가 큰 회사인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2015년 매출이 336억 엔에 불과하다.[44]

넷플릭스 교토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바이올렛 에버가든

넷플릭스 본즈 오리지널 「A.I.C.O. -Incarnation-」,
관련기사에 따르면 발표된 라인업이 바키 애니화 세인트 세이야 처음부터 재제작, 스튜디오 본즈 오리지널 「A.I.C.O. -Incarnation-」, 등등... 그리고 지금까지는 시장이 일본 팬층의 취향 위주였다면, 이제는 해외 팬들의 취향과 요구에 맞춘 작품들 위주로 시장이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해외 판권 판매로 제작비 절반 이상을 때우는 작품도 있다고 한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라인업[45]에는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일상물모에물이 전무하고, 액션, SF작품 중심으로 되어있는데, 국제 시청자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앞으로 일본에서는 제작하기 힘들었던 장르의 작품이 만들어질 것이며 단순히 투자뿐만 아니고 스태프들도 국제화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유아사 마사아키의 제작사 사이언스 SARU는 다국적 기업이라 할 정도로 다양한 나라의 애니메이터가 소속되어 있다.
이러한 넷플릭스의 진출에 대해서는 세간에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기대가 많지만 업계의 평가는 엇갈렸다. 넷플릭스라는 대형 외부자의 진출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체질과 관계자들의 처우를 개선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부터, 일개 대기업이 업계의 수익 구조와 한계로 인한 시장 상황 자체를 바꾸는 데 기여는 할 수 있어도 한계가 있다는 중도적 의견, 미국 자본의 업계 장악에 대한 경계심, 넷플릭스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있었다.[46]
실제로 2020년 7월에 올라온 애니메이터 니시이 테루미[47] 의 인터뷰에 따르면 넷플릭스의 진출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악한 제작 환경에 큰 변화까지는 주지 못한 모양이다. 인터뷰 기사, 번역 1, 번역 2
특히 백수왕 고라이온, 세인트 세이야 같이 넷플릭스의 의향으로 PC를 지나치게 강조해 원작의 주제와 캐릭터성이 훼손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넷플릭스의 진출이 마냥 긍정적이라 보기는 힘들다.
또한 넷플릭스 애니메이션들은 블루레이 판매량이 매우 안 나온다. 이건 당연한데 BD와 동일한 1080P 해상도 그대로 넷플릭스에서 제공하는데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든 넷플릭스에서 가입해서 틀면 볼 수 있고 넷플릭스 한 달 가격이 블루레이보다 훨씬 저렴한데 살 이유가 없다. 하지만 넷플릭스 내부 조회수로 충분한 수익을 내었다.
한국에선 넷플릭스만 유명해서 부각되고 있지만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Hulu, 크런치롤, 비리비리도 마찬가지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스폰서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 대형 스폰서의 증가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질이나 애니메이터의 처우에 대해서 약간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이들의 참여로 일본 애니메이션이 지금의 작품성 면에서 부족하다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론이 많다. 넷플릭스는 서양 애니메이션 팬덤에서 작화나 영상미로 유명한 감독, 제작사 위주로 스폰서를 하고 작품 내용에 대해선 그다지 터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비리비리는 카도카와 이상으로 선정적인 미소녀 애니메이션이나 이세계물의 스폰서를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48] 이들도 작품성의 개선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고 화제성 위주로 스폰싱을 하는 등 철저하게 돈벌이에만 중시하였다.
2019년에 마침내 동영상 스트리밍 시장(595억엔)이 비디오 시장(587억엔)을 제쳤다.

8.8. 새로운 장르의 등장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만 써있지만 세대 교체가 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해도 실력파 연출가나 애니메이터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2000년대 시기에 애니메이션 계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2000년대 후반부터 4쿨 애니의 제작 편수가 감소되었지만, 대체재가 많았으며 출판계는 오히려 호황이었기 때문에 만화쪽에서 애니화 하기 좋은 명작이 많이 나와서 원작이 좋은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의 작품이라고 다 망작인 것은 아니며 괜찮은 작품도 꽤나 존재한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부터 1~2쿨 애니들을 중심으로 재편이 되어서 다시 좋은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TVA로는 《베리베리 뮤우뮤우》, 《머메이드 멜로디 피치피치핏치》 등이 인기를 얻었으나 2007년 이후에 벌어진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감소로 정통 마법소녀물은 완전히 사장되었고 마법소녀물을 가장한 호러물등이 마법소녀라며 열을 올리고 있으며[49] 그나마 비교적 정통에 가까운 마법소녀물라고 할 만한 건 TV 아사히토에이 애니메이션프리큐어 시리즈가 유일하게 남은 상태다.[50] 그 외에 그나마 마법소녀라고 부를만한 전희절창 심포기어 시리즈는 노래를 부르며 싸우는 미소녀 컨셉으로 '''마법소녀+아이돌+배틀물'''의 복합장르를 만들어냈으며 심야애니라 어느정도 수위가 있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심야애니임에도 5기까지 나오는 등 그 인기가 유례없는 수준이다.[51]
아이돌물이라는 장르가 등장했다. 본래 이 분야는 아케이드 게임인 THE iDOLM@STER가 그 시작이지만 이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인 《아이돌 마스터》가 성공을 거두면서 후발 주자로 처음부터 애니를 비롯한 미디어믹스 프로젝트로 기획한 러브라이브!가 등장하는 등 애니에서도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았다. 이는 오타쿠 시장 뿐만이 아니라 아이카츠!, 프리파라 등 '''아동을 위시한 장르'''로써도 재발굴되었다. 하지만 큰 성공의 반동인지 2019년이 다가오는 시점에선 수익과 인기가 수그러들고 있다. 오히려 여성향 아이돌 애니메이션의 수익은 증가하는 추세인데 이는 커져 있던 팬덤이 더 커진게 아닌 외적 아이돌물 취급을 받던 남자만 나오는 아이돌물의 팬덤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이돌물의 소비자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간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는 별도로 마법펫/마법나라물 장르가 태동했다. 바로 코코타마, 리루리루 페어리루이다.
소년 만화 원작 작품들인《강철의 연금술사》,《이누야샤》, 《나루토》, 《나루토 질풍전》, 《은혼》 등이 제작 및 방영되어 일본 및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기도 했다. 《진격의 거인》또한 충격적인 세계관과 강렬한 연출로 많은 센세이션을 받기도 했다. 진격의 거인 말고 2010년대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작품들은 앞서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원펀맨》 정도가 있다. 2019년에 애니화된 《귀멸의 칼날》이 신드롬급 인기를 끌며 2010년대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전통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는 중세 유럽물이 매우 빈약한 처지였다. 세계명작극장은 죄다 근대 유럽이고 중세 유럽은 전멸이다. 북미 대륙을 무대로 한 작품들은 논외로 한다. 끽해야 아서 왕, 엘 시드, 로빈 훗 등 소수 작품 정도였다. 오히려 삼국지도 그보다는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지경이다. 현대 를 무대로 하지 않을 경우 일본 애니메이션의 3분의2 내외는 전국시대물이라고 본다. 전국 3영걸이나 전국시대가 아닌 막부 말기는 논외로 한다. 그만큼 다케다 신겐을 비롯한 전국무장의 인기가 상당히 높았던 것이다. 최근에 비로소 늑대와 향신료 등 중세 유럽풍의 몇몇 수작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참고로 Fate 시리즈에서 중세 유럽 인물들이 더러 등장한다.
한편 장기 방영 애니메이션이 강세인지 10위권 안에 들어가는 작품 대부분이 방영을 시작한지 수년 된 것들인데 원작의 인기에 편승하여 제작된 화제작들 중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이나 《히로아카》 등은 제작사를 잘 만나서 크나큰 캐붕이나 작붕 없이 원작의 인기와 별개로 팬덤을 형성하기도 했다.

8.9. 일본 영화 시장 장악


2010년대 들어서는 일본 영화 시장일본 애니메이션 또는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원작 실사영화들이 장악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2012년 늑대아이2013년 바람이 분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안 그래도 2013년 이후로는 일본에서도 블루레이 시장 자체가 줄어들고 IPTV VOD로 대체되거나, 넷플릭스, 훌루와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진입했다. 이런 상황은 일본의 TV 방영 → 블루레이 판매 루트를 침식했다. 결국 이제는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들이 '''일본 영화 시장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면 기껏 확보한 IP를 활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2010년대 들어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으며, 2018년 들어서는 일본 영화 시장 박스오피스 Top 10 순위 중 5~6개를 애니메이션들이 싹쓸이하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현상이 되었다.
일본 영화 시장에서는 이전에도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다른 국가의 영화 시장에 비해서 강세를 띠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전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본 영화 시장 박스오피스는 일종의 '''옵션'''이었던 반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이제는 "조금만 뜨면 '''무조건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든다'''"는 '''필수코스''' 수준으로 바뀐 것이다. 극장판을 만들든, 독립 애니메이션을 만들든 하지 못하면 일본 내에서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가 없다.
이러다보니 기존 TV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방영 중단된 지 한참 이후에 갑자기 뜬금없이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가 튀어나오는 상황이 생겼다. 소드 아트 온라인소드 아트 온라인 -오디널 스케일-이나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극장판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 Reflection과 같은 작품들이 2016년 이후로는 쏟아져나오고 있다. 영화관 극장 흥행수입이 없으면 전체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돈을 회수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2020년에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에서 심야 애니메이션으로써 유례도 없는 대흥행으로 앞으로 애니메이션 시장이 극장에만 집중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이다.
그래도 이렇게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쏟아져나오면서 장점이 하나 생겼다. 기존의 일본 영화들과 달리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워낙 전 세계에 오타쿠들이 있다보니 어느 정도 해외 개봉이 일본 실사영화에 비해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것이다. 한국 영화 시장('''세계 6위''')이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일 많이 받아주며, 대만 영화 시장('''세계 14위''')에도 자주 개봉한다. 2015년부터는 중국 영화 시장('''세계 2위''')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개봉하여 수익을 챙기는 경우도 자주 보이며 2017년부터는 베트남 영화 시장, 태국 영화 시장, 말레이시아 영화 시장, 인도네시아 영화 시장 등 동남아시아에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개봉하기 시작하더니, 2018년에는 브라질 영화 시장, 아르헨티나 영화 시장, 심지어 베네수엘라 영화 시장같은 남아메리카 영화 시장에도 와이드 릴리스로 개봉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직 미국 영화 시장('''세계 1위''')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제대로 와이드 릴리스 개봉되지 못한다. 제한적 상영 이후 훌루, 넷플릭스로의 전환이 일반적인데, 이 때문에 세계 1위 영화 시장인 미국 영화 시장에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제대로 공략을 못하는 것이다. 본래 미국 영화 시장이 자국 영화의 엄청난 강세로 인해 다른 나라 영화를 잘 안 받아주는 경향이 있기는 하나, 정작 1999년 포켓몬스터 극장판 뮤츠의 역습을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이 미국 영화 시장에서 비영어권 국가의 영화로 미국 영화 시장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경험이 있음에도 세계 1위 영화 시장에 3,000개 이상의 영화관을 확보하여 미국 영화들과 직접 맞서 싸운다는 과감함이 없다. 또한 영국 영화 시장, 프랑스 영화 시장, 독일 영화 시장 등 유럽 영화 시장에서도 와이드 릴리스를 못한다. 다만 최근 개봉된 드래곤볼 슈퍼의 경우 제한적 상영임에도 북미 박스오피스 3위까지 기록하고 유럽권에서도 1~3위를 기록했다.
아직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대부분 아시아권이나 남아메리카 정도에만 와이드 릴리스 개봉하였다. 이전보다 수익은 늘어났지만, 세계 영화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한편 실사 영화 중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원작인 영화의 비중이 매우 커지면서 다른 문제들이 생겨났다. 이 부분은 일본 영화 문서 참조.

9. TPP/일본-EU EPA 발효(2019년) ~ 2020년대


2018년 12월 30일부터 일본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발효되었다. 실제 적용은 2019년부터. 또한 2019년 2월 1일부로 일본유럽연합 간 EPA가 발효되었다. 기사
기존에 일본보호무역을 따랐으나, 아베 신조 정부에서 TPP와 일본-EU EPA를 강행하며 '''2019년부터 급격히 자유무역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에 대한 진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일본 외의 시장에 적극적으로 수출 활로를 개척하는 효과를 불러왔다.
이 때문에, 일본 애니메이션들도 TPP 역내국과 유럽연합 위주로 대규모 수출을 타진하고 있다. 또한 TPP 발효에 발맞춰서 일본 정부에서도 저작권법 규정을 대폭 개정하고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들과 도호, 쇼치쿠, 도에이, 애니플렉스애니메이션 영화 관련 영화 배급사들한테 수출 매뉴얼을 나눠주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활발한 수출뿐 아니라 작품의 질도 2000년대에 비해 발전되었다. 특히나 기존 양산형 작품들에 질린 여론이 제작자 에게도 영향을 미치면서[52] 기존의 클리셰와 분위기를 완전히 파괴한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창단! 짐승의 길》, 《즐겁게 놀아보세》, 《학교생활!》 등의 작품들 또한 돋보였으며, 장르 내에서 여러 개성적인 시도나 참신한 주제를 통한 작품들 또한 등장하였다. 일부 작품들은 고전 명작들 만큼은 아니지만 진지한 주제의식을 갖춘 작품들도 여럿 등장했다. 소비층의 연령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케모노 프렌즈》,《도우미 여우 센코 씨》같이 지친 직장인이나 사회인들을 달래기 위한 작품들 또한 등장하였다.
그러나 케모노 게이트로 대표되는 카도카와의 지나친 시장 독과점은 비록 제작진들의 제정상황을 해결한 공로가 있었지만, 애니메이터들의 열역한 사정과 맞물려 많은 우려를 자아내었다. 다행히도 최근 비슷하게 제작진에 대한 투자자들의 간섭이 심해지는 영화계보다는 제작과 각본에 그나마 간섭이 덜하지만, 언제든지 카도카와가 원하는 방향으로 수요를 거스를수 있다는 불안을 증폭시켰다. 쿄애니 처럼 의존도를 줄여가는 시도도 있지만, 카도카와의 규모는 일본 문화계를 완전히 장악했기에 지속족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9.1. 수출 확대


TPP/EPA 발효로 일본 애니메이션들의 TPP 가입국 수출에서 비관세장벽이 철폐되고 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캐나다, 멕시코, 호주, 뉴질랜드 등 TPP 가입국과 일본자유무역협정에 준하는 EPA(경제협력협정)이 발효된 유럽연합에 수출을 타진하고 있다.
2019년 들어서자마자 드래곤볼 슈퍼: 브로리일본 국내에서는 고작 3,000만 달러에 그쳤으나, 미국에서 3,000만 달러를 벌고,[53] 라틴아메리카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우루과이 등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쓸었다. 또한 뉴질랜드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이탈리아 박스오피스 1위, 프랑스 박스오피스 2위'''에 오르는 등 선전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들은 TPP와 일-EU EPA의 발효로 인해 스크린 쿼터제가 상호 철폐[54]되어 대규모 수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TPP/EPA 발효로 인해 2019년 1월 ~ 3월 1분기에만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유럽연합 역내국 위주로 일본 애니메이션 수출 확정 건수가 2017년의 '''5배'''까지 급증했다. 또한 미국 달러화로 집계되는 수출 액수도 '''2018년 전체 합계를 2019년 1분기만에 뛰어넘는''' 급성장을 거두고 있다.
2019년 일본영상협회에서 집계한 자료를 보도자료로 만든 기사가 나왔다.

NHK가 16일 일본동영상협회 '애니메이션 산업 리포트'를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일본 애니메이션 관련 업체 150여곳이 작년 한 해 동안 올린 매출은 전년도와 비교해 190억엔(0.9%) 늘어난 2조1천814억엔(약 23조원)을 기록하며 6년째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작년도 매출 가운데 46%인 1조92억엔(약 10조810억원)이 영화와 게임 판매 등을 통해 해외시장에서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연간 해외 매출이 1조엔선을 돌파한 것은 처음이다.

주요 영역별로는 DVD 등 비디오 패키지 부문 매출이 전년 대비 25%가량 감소한 587억엔에 그쳤다. 반면에 해마다 늘고 있는 온라인 부문의 작년 매출은 595억엔으로, 비디오 패키지 부문 매출을 추월했다.

보고서를 발표한 마쓰다 히로미치(增田弘道) 일본동영상협회 편집총괄은 "최근 3~4년간 증가한 연간 해외매출이 1조엔을 넘어서면서 일본 내수 시장 전체와 비슷한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에서 비디오 패키지와 온라인 부문 매출 규모가 역전하는 등 성장하고 쇠퇴하는 영역이 확연하게 나뉘는 양상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애니메이션 해외시장 연간 매출 10조원 첫 돌파", 연합뉴스(도쿄), 박세진. 2019-12-16 작성, 2019-12-16 확인.


9.2.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 사건과 그 여파




9.3.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그 여파


2020년에는 첫 분기부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애니 제작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세한 건 이 문서를 참고.

9.4.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일본 영화 시장 기록 경신


2020년 10월 14일 일본 영화 시장에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이 '''일본 박스오피스를 10주 이상 석권'''하면서 2001년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치고 '''역대 일본 영화 흥행 성적 1위''' 기록을 '''19년만에''' 갈아치웠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뿐만 아니라 일본영화 시장마저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귀멸의 칼날은 개봉을 강행했고, 승부수가 통했다.
귀멸의 칼날 극장판 흥행 성적은 2020년 전체 '''전 세계 개봉 영화 중 Top 5''' 안에 들어가는 대기록이다. 수퍼 소닉(3억 2천만 달러)을 6위로 밀어냈다. 2020년 세계 영화 시장 기록. 참고로 2020년코로나19때문에 미국 영화 시장이 '''멸망당해서''' 중국 영화800이 1위를 하고, 나와 나의 고향(我和我的家乡, 아화아적가향)이 2위를 할 정도로 시장이 격변한 해였다.

10. 대표적인 작가들


일본 애니메이션 붐을 주도했던 유명감독들이다. 해외에서 상을 수상하거나 해외영화제에 초청받은 적이 있을 정도의 감독만 선정하였다.

10.1. 타카하타 이사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년 방영), 《엄마찾아 삼만리》(1976년 방영), 《빨강머리 앤》(1979년 방영) 등의 TV용 시리즈물과 《판다와 아기 판다》(1972년 개봉), 《차린코 치에》(1981년 개봉), 《반딧불이의 묘》(1988년 개봉)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러한 여세는 도시에서 회사 다니던 어느 여자가 휴가 때 시골에 내려갔다가 그 곳에서 살게 된다는 《추억은 방울방울》(1991년 방영), 삶의 터를 잃은 너구리들이 요술을 부려 인간 사회에 도전하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년 개봉), 이시이 히사아치의 4컷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홋케쿄 옆집의 야마다군》(1999년 방영) 등의 90년대 작품으로도 이어진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양맥인 다카하타와 미야자키 가운데 다카하타는 미야자키의 그늘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의 인터뷰나 해외로 수출될 때 주로 미야자키가 대표로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카하타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2대 감독은 물론이고 70~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짊어진 거장으로서 고유한 작품세계를 확고히 구축하고 있다.

미야자키의 작품이 인류애나 환경문제를 비롯하여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장대한 테마' '기상천외한 모험극' '초인간적 능력을 지닌 주인공' 등의 설명이 필요하다면, 다카하타의 그것은 '바로 내 이웃의 이야기' '일본적인 정서' '판타지의 거부' 등의 설명이 필요하다.

'바로 내 이웃의 이야기'의 경우는 《홋케쿄 옆집의 야마다군》과 같은 작품이며, '일본적인 정서'는 전쟁고아가 되어 굶어 죽은 남매를 통절한 내용으로 그린 《반딧불의 묘》에서 엿볼 수 있다. 《반딧불이의 묘》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애니메이션으로서 요즘도 8월 15일 패전기념일이 되면 TV에서 늘 방영되곤 한다.

'판타지 거부'는 거의 전 작품에 흐르고 있는데 다카하타의 지론은 "현재 우리들 주변에는 게임이나 텔레비전, 영화 등 판타지가 일상에 너무도 근접해 있다. 판타지에 심취하여 그 세계로부터 사랑과 용기 그리고 감동을 받거나 곤란한 문제를 해결한 뒤 쾌감을 맛보는 것은 작품을 보면서 얻는 것이지 현실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라는 식이다. 판타지는 오히려 현실 감각을 상실케 한다는 입장이다.

2018년 4월 5일 타카하타가 세상을 떠나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듯 하다.


10.2. 미야자키 하야오


앞서 서술했듯이 미야자키는 토에이 동화에 입사하여 타카하타 감독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을 도왔고, 1978년 TV용 시리즈인 《미래소년 코난》으로 감독 데뷔한 이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진출한다. 첫 작품은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1979년 개봉)이며 두 번째 작품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 개봉)의 대히트로 '미야자키 아니메'라는 장르를 구축하게 된다.

타카하타와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 것은 《나우시카》가 성공을 거둔 그 다음해(1985년)이다.

제 3 탄은 《천공의 성 라퓨타》(1986년 개봉)이고 제 4 탄은 중년들로 하여금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했던 《이웃집 토토로》(1988년 개봉)이다. 이 작품이 성인들로부터도 호응을 얻게 되면서 미야자키는 국민적 애니메이션 영화 작가로 추대된다.

바로 이듬해에는 마녀 소녀의 성장기를 다룬 제 5 탄 《마녀 배달부 키키》(1988년 개봉)을 발표했고, 이후 제 6 탄 《붉은 돼지》(1992년 개봉),[55] 외전 1편 《Chage & Aska - On Your Mark》(1995년 개봉) 제 7탄 《모노노케 히메》(1997년 개봉), 제 8 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년 개봉) 외전 2편[56]고양이의 보은》(2002년 개봉) 제 9 탄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년 개봉) 제 10탄 《벼랑 위의 포뇨》(2008년 개봉) 제 11탄 《바람이 분다》(2013년 개봉) 등 21세기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

10.2.1. 타카하타와 미야자키의 관계



1968년, '토에이 동화'의 제 1탄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을 연출한 다카하타와 미야자키는 '도에이 동화'를 나와 A프로덕션(現. 신에이 동화)이나 TMS 엔터테인먼트 등 여러 회사들을 옮겨 다니게 된다. 그러다 '스튜디오 지브리'로 독립하게 되는데 그 사이 두 사람은 TV용,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다.

두 애니메이터는 분명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형성해 나가면서 일본 애니메이션계를 이끌어 나갔다.

하지만, 서로에게 좋은 비판가이자 응원자였다. 흔히 다카하타는 이론적이고 비판적인 데 반해 미야자키는 이론보다는 감성과 실력으로 작품을 그려 나아간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가령, 다카하타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년 상영)과 미야자키의 《이웃집 토토로》(1988년 상영)의 '숲'의 묘사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인간과 이웃해 있는 을 축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미야자키의《이웃집 토토로》가 1950년대 일본 시골의 정겨운 숲으로 묘사되어 있다면 다카하타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숲은 아름답지만 현대의 환경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다카하타의 작법은 미야자키에게 영향을 미쳐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과 같이 숲과 환경을 다룬 《모노노케 히메》에 의식적으로 반영하게 된다.

그 타카하타가 2018년 4월 5일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 미야자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10.3. 토미노 요시유키



지브리의 두 거장처럼,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중요한 사람이 토미노 요시유키다. 그 유명한 '건담의 아버지'다. 대부분의 작품이 로봇과 그 파일럿의 이야기를 다룬 거대로봇물이며 저연령층 대상 작품이 많다는 이유로 앞의 두 감독들보다 상대적으로 저평가받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야자키와 함께 70~80년대의 애니메이션 붐을 이끈 또 하나의 주역이었으며 또한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사회비판과 체제의 모순에 대하여 그리기 시작한 것도 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64년, 데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에 입사한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3년 후인 1967년에 회사를 나오고 1972년, 《바다의 트리톤》의 감독을 맡으며 디렉터로 데뷔하게 된다. 《용자 라이딘》과 《무적초인 점보트3》의 연이은 성공에 이어 그는 1979년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기동전사 건담》을 만듦으로써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전의 거대로봇물이 단순히 강력한 로봇으로 을 무찌르는 단순한 얼개였다면 《점보트3》, 《건담》, 《이데온》 등의 충격적인 전개와 어두운 배경은 이후 수많은 후배 감독들에게 영향을 끼쳐 리얼로봇물이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주류로 접어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애니메이션의 작품성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린 이들 거장들 덕택에 재패니메이션은 이후 90년대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고, 아래에서 설명할 안노 히데아키 등의 신세대 감독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2019년 G레코 극장판 제작 중이며 언론 출연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10.4. 오시이 마모루


1980년대 시끌별 녀석들의 연출에 영화에서만 사용된 기법을 다수 사용하면서 인기를 끌었고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2부터는 난해한 새로운 연출기법을 시도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감독이다.
구체적인 설명방식을 회피하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열려진 이야기 구조를 선호한다. 작품에 깊이가 있으며 철학적이다. 그의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모두 오락보다는 진지한 철학적 질문에 경도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진화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등등. 오시이는 우리가 결코 안전하지 않고, 결코 평화롭지도 않고, 결코 선하지도 않은 인간과 야수의 중간쯤이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꿈,공상 사이의 부조리한 융합을 자주 묘사했었다. 거대한 물고기 그림자가 벽을 기어다니는 폐허의 거리, 그 거리에서 방황하는 어느 소년과 소녀의 만남, 그리고 그 소녀가 안고 있는 알을 둘러싼 작은 사건을 그리고 있는 《천사의 알》(1985년 제작)이 그것인데 상대적으로 느린 템포에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매우 관념적이다.

이후 오시이 마모루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1989년 방영)를 시작으로, 인기만화가 시로 마사무네의 원작 중 일부분을 발췌하여 만든, 일본 사이버 펑크물의 대명사 《공각기동대》(1995년 방영) 등은 개인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간과 기계의 융합, 분열을 잘 그리고 있다.

일본에선 주로 시끌별 녀석들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같은 코미디 작품의 거장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그의 난해한 후기 작품도 일종의 풍자, 블랙 코미디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유럽, 미국, 한국에서는 난해하고 철학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1995년 도쿄국제영화제의 판타스틱 영화제 부문에서 입상한 《공각기동대》는 오시이의 본격적인 국제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는데 이미 전작들로 주목받던 그는 《공각기동대》 제작비 중 3분의 1을 영국의 애니메이션 배급사인 '망가 엔터테인먼트'의 자본으로 충당했고, 미국과 영국 등 세계 각국에서 동시 개봉하여 화제를 모았다.

오시이의 독특한 연출스타일은 아기자기한, 혹은 뮤지컬 타입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익숙했던 서구인들에게는 낯설고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그는 단번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애니메이션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실적이고도 환상적인 배경묘사는 자체 개발한 DGA(Digital Generated Animation)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홍콩 현지 로케이션을 통해 배경지역을 작품에서의 카메라 앵글과 움직임에 맞춰 촬영된 필름으로 출력한 뒤 AVID 편집기로 편집한 결과이다.

완성도 높은 내용과 참신한 기술은 《인랑》, 《아바론》으로 일어져 호평을 받았다. 《공각기동대》 속편으로, 전편에서 다뤘던 인간과 로봇 사이의 경계에 관한 질문과 자아의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주제를 그린 《이노센스》(2004년 개봉)도 칸느 영화제에 출품되어 '미래에 대한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탁월한 그래픽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미국의 평론가들에 의해서도 2004년 최고의 애니메이션에 뽑혔다.

그러나 불친절하고 난해한 《이노센스》는 철저하게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2004년을 정점으로 오시이의 관객 장악력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다. 그리고 2020년 예전처럼 코미디 스타일로 돌아간 신작을 선보인다고 한다.
오시이의 문제는 의외로 나이가 꽤 된다는 것이다. 오시이는 대학 졸업 후 방황하던 시절이 있어 30대에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이가 꽤 된다. 그래서 앞으로는 적극적인 창작 활동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일단 본인이 운동도 하고 건강관리는 철저히 하는 것 같지만.

10.5. 안노 히데아키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에바현상'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 열도를 비롯한 전세계를 열광과 광란의 도가니로 만든 초대형급 걸작이자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남을 대작이다. 3차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킨 작품으로 꼽히며 제작된지 20년도 훨씬 지난 2010년대의 현재에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여전히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한다.

'에반게리온'은 독일어로 '복음' 또는 '절대 진리'를 뜻하는 말로 작품 중에 나오는 인간의 모습을 한 생체로봇인데 '에바'라는 약칭으로 불리고 있다. 전술한 대로 인간의 생체 메커니짐을 지닌 로봇이라는 점과 리리스를 복제한 점이다. 그리고 내부에는 조종사의 어머니의 혼이 내장되어 있어 조종사와 어머니의 혼이 동화될 때 인간의 혼을 지닌 로봇으로 탄생된다는 점도 특이하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끈 것은 이 에바가 구사할 수 있는 로봇으로서의 기술이나 전투력이 아니라 에바를 조종해야만 했던 14세의 내성적인 소년 신지의 내면심리와 정신세계를 치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지는 늘 혼자 세상과 맞선다. 고독하며 우울하다. 모든 것들이 그를 고립으로 몬다.

인류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어마어마한 결정이 이 어린 소년에게 주어지고 신지는 그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한 개체로 남게 된다. 신지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그리고 현실을 회피하고 있는 모습은 20, 30대의 오타쿠 문화를 추구하는 마니아층에 깊이 파고들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야기 구조는 1980년대부터 차용하기 시작한 '심리학적 변수'를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를 경계하고 어머니의 혼=모성을 부각시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대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90년대 이후 일본의 애니메이션계에서는 이러한 '심리학적 변수'를 캐릭터에 적용시켜 상품화하는 경향이 짙어졌고 그것에 수용자들도 중독되어 가고 있다.
다만 그의 작품 중 이런 색을 띄는 것은 어디까지나 에반게리온 뿐이다. 그 이외의 작품은 주로 여러 작품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짜깁기해서 세련되게 연출하는 콜라주 기법을 선호하는 감독이었으며 쿠엔틴 타란티노와 비슷한 작품 활동을 보였다. 또한 그가 연출한 작품들은 내용도 상당히 밝았다.

안노는 에반게리온 이후에는 명성이 많이 줄었다. 흔히 3대 애니메이션 감독이라 일컬어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토미노 요시유키와 달리 "에바" 이후로 장장 20년이 넘도록 이렇다 할 또다른 대표작이 없는 것이다. 그나마 하나 있는 신 고질라는 사실상 블록버스터 영화고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애니 쪽으론 계속해서 에반게리온만 리메이크하고 있을 뿐인데, 이 시리즈는 고정팬이 있기 때문에 쉽게 돈을 벌 수 있는지는 몰라도, 한 명의 작가로서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극장판이 마무리된 후 어떤 작품을 들고 나오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갈릴 것이다. 그런데 그 극장판이 마무리되는게 최소한 2020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작업에 들어갔다나. 2020년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을 완결하고 앞으로의 행보에 따라서 평가가 또 달라지겠다.

10.6. 그외 대표적인 작가들


대부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감독들로, 감독이 아닌 게스트 연출 참여라 할지라도 고용 감독들과 달리 고유 작풍으로 물들이는 게 특징이다.

11. 참고 자료


  •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 - 야마구치 야스오 저. 김기민/황소연 역. 미술문화. 2005.
[1] 시모카와 헤코텐이라고도 한다.[2] 2007년에야 필름이 발견되었다.(유튜브 공개 영상)[3] 1930년 도쿄 상경 후 '프로키노'라는 지하 사회주의 영화조직에서 비합법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다가, 군부의 탄압을 피해 마사오카 겐조 밑에서 일했다.[4] 아시아 최초 장편 애니는 바로 중국에서 1941년에 만들어진 서유기- 철선공주 (鉄扇公主)다. 쌍둥이 형제인 완라이밍(萬籟鳴)과 완구찬(萬古蟾) 감독이 만들었던 작품. 데즈카 오사무도 이 작품에 감명을 받아 '나의 손오공'이라는 만화를 그렸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을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5] 뽀빠이 캐릭터인 블루토를 미국 진영의 술취한 적국 병사로 그렸다.[6] 이들 작품은 이후, 일본 극우 세력에 의해 극우 미디어물로 계승되었다.[7] 다만 거미의 얼굴이 블랙페이스 논란이 조금 있다.[8] 1949년부터 만화가로 전업 후 1952년부터 <까까머리 소년>을 연재해 인기를 얻어 데즈카 오사무의 라이벌로 격상했으나, 1954년 <아카도 스즈노스케> 1화째에 요절했다.[9] 전개 방식은 주인공이 뜻을 세워 모험을 시작해 여러 마을이나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목적을 달성하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10] 오토기 프로덕션 제작. 해당 제작사는 신문만화 <후쿠쨩> 작가 요코야마 유이치가 세웠으며, 데즈카의 수하 야마모토 에이이치도 배출됐다.[11] 이런 리미티드 기법은 데즈카 오사무가 처음 시도한 것으로 장점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업계의 저임금화를 불러왔으며 이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데즈카 오사무를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데즈카의 장례식에서도 이를 언급하며 깠다.[12] 노조운동에 적극적이었던 타카하타 이사오, 코타베 요이치, 미야자키 하야오는 1971년 A 프로덕션으로 쫒겨나듯이 이적한다.[13] 물론 이때는 미국을 제외한 강대국이나 선진국들도 광고시장이 그리 크지 못했다는것을 감안해야되기는 할것이다. 영국은 광고가 허용된 TV채널은 단 하나뿐에, 서독은 하루 20분씩만 광고를 할수있었던 식으로 광고규제가 엄격했고, 소련, 프랑스나 이탈리아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14] 일본 애니 업계의 원로 각본가 중 1명인 츠지 마사키는 당시 TV 애니메이션은 망할 지도 몰랐을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15] 당시 실사 드라마 제작비가 1편당 50만 엔이었다.[16] 나중에 알고보니 한 편당 450만 엔까지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는 했다.[17] 도산 후에도 1979년에 노조원들이 이름만 그대로고 새로운 주식회사를 설립해서 주로 아동 대상의 소규모 상영회를 위한 교육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로 현존한다.[18] 2014년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팀이 해체되면서 《너의 이름은.》, 《이 세계의 한 구석》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퀄리티가 급상승한 현상과 비슷하다.[19] 우주전함 야마토가 조기종영한 이유는 작품의 문제라기보다는 경쟁 프로그램이 너무나 잘 나갔기 때문이다. 다른 방송국에서는 타카하타 이사오 연출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방송되고 있었는데, PTA의 추천으로 고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듬해는 같은 노선인 《플랜더스의 개》도 대히트를 쳤다.[20] 외국 회사가 기획하고 돈을 대면, 일본이 실제작을 하는 방식. 예:명탐정 홈즈, 톱크래프트[21] 그래도 AKIRA는 미국으로 수출하며 히트를 쳤고, 이는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해외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또한 AKIRA 이전에는 유럽 쪽에만 간간이 수출했지 미국으로 수출한 적은 거의 없어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대단해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냐"같은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AKIRA가 수출되고 AKIRA의 상당한 퀄리티에 놀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세대 양덕도 이 시기에 생겨났다.[22] 그 와중에도 버블 시대에 장기적인 안목을 두고 저작권 수익을 노리고 애니메이션에 투자를 한 게 카도카와이며 그래서 카도카와가 지금의 규모로 큰 것이다. 지금은 좀 상태가 이상한 기업이 되었지만.[23] 1991년 9월 14일 홍보를 위해 극장에서 개봉을 했지만, 원래는 OVA기획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출전: 미술설정으로 참여한 콘 사토시증언.[24] 토미노는 《기동전사 건담》을 만들 때 납기일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엘메스의 비트 움직임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3일 밤낮을 작업을 멈추고 고민하곤 했었다.[25] 이 문단의 다른 이 시기와 달리 2010년대 이전으로 한정된다.[26] 여기엔 한국 기준으로 12세 이하인 아동용 애니 제작 또한 활발했던 까닭이 있다. 사실 2010년대에도 2000년대 중반까지에 비하면 그 수가 감소해서 그렇지 다마고치!소년 아시베 같은 아동용 애니는 여전히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엔 수입이 안 되는 추세이다.[27] 여기엔 양덕들이 스토리나 연출보다는 그저 작화나 액션 위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도 한몫한다. 양덕후/유형 문서 참고.[28] 당장 일본 애니메이션 항목 100주년 영상만 봐도 플랜더스의 개, 독수리 오형제, 마징가 Z, 건담, 드래곤볼, 아키라, 사이버 포뮬러, 카우보이 비밥 등 걸출한 명작과 수작이 나오며 하다못해 2000년대에도 강철의 연금술사, 유희왕 듀얼 몬스터즈,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같은 인지도 있는 작품들이 나오다가 2010년대에 들어서자 아이돌 마스터, 러브 라이브, 시원그녀, 걸즈 앤 판처, 리제로, 소드 아트 온라인 같은 소위 말하는 '''미소녀 동물원, 하렘물, 아이돌물, 오덕후물, 이세계물'''의 비중이 높아졌다. 2010년대에 내세울 애니가 '''뽕빨물, 모에물 천지라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황금기였던 1980~90년대가 내세우는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 아닐수 없다.[29] 그럼 그 동안 중심급 IP 시리즈가 안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 된다. 많이 쳐줘서 3위까지는 변동이 거의 없고, 5위 이후로 새 작품이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오르락내리락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최상위권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원피스, 나루토, 드래곤볼 등이 완전히 문제점이 없는 만화가 아님에도 20년 전에 흥했던 매체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은 대중성을 상실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30] 이 두 사람은 같은 인디 애니대회인 CG 애니메이션 콘테스트 출신이다.[31] "죽음에 대한 소설을 쓰려면 죽어봐야 한단 말이냐"고 반문하며 어린 나이에도 명작을 쓴 레몽 라디게(1903~1923) 같은 천재 작가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특별한 예외다. 유명한 작가들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빨라야 30대, 보통 4, 50대를 넘어서 쓴 작품들이다.[32] 이는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되는 만화, 소설, 게임 등에서도 보여지는 현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라이트 노벨은 어떤 작품이 크게 성공할 경우, 그 작품의 플롯을 따온 양산작들이 우후죽순 발매되는 업계다.[33] 비록 이때도 폭력적이라니, 선정적이라니, 말이 많았어도, 이는 엄연히 아동이나 청소년이 주로 보는 애니메이션이었다.[34] 애니편성표를 보면 저녁에 방영하는 애니는 있긴 하지만 사실상 1~2쿨 애니를 제외한 장기간 방영 애니들은 없다.[35] 자세한 내용은 미국 애니메이션 문서의 역사 항목 참조.[36] 유튜브에서 자주 떠도는 "오래된 숨은 명작"이 많다는건 반대로 말하면 그런 명작조차 시장의 외면을 받는 슬픈 현실이란 뜻이다.[37] The asociation of japanese animation, "Anime Industry Report 2016(2016년 9월)".[38] 15세 이상의 모에풍 애니메이션을 포함하는듯. 성인, 즉 야애니 매출이 저정도로 클리는 없으니.[39] 한마디로 대체 불가능한 산업이라는거.[40] 사실 이 부분은 한국 게임도 비슷하다.[41] 이때는 하드웨어의 한계로 프로그램과 하드웨어의 한계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막 좋은 그림을 그려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인건비도 아낄 겸 프로그래머나 게임 기획자가 직접 게임 내 그래픽 도트까지 찍는 경우가 많았다.[42] 2011 ~ 2015년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적자 비율. #영어 기사[43] 예를 들어, 소드 아트 온라인 앨리시제이션소드 아트 온라인 앨리시제이션: War of Underworld는 각각의 작품군으로 보면 3기, 4기로 구분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3기 1부, 3기 2부'''다. 처음부터 분할 4쿨 구성이라고 발표했기 때문. 그런데 부제가 새로 생기고 화수마저 초기화되니 사전 지식이 없으면 누가 봐도 3, 4기로 착각하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44] 참고로 넥슨의 2015년 매출이 1902억 엔으로, 한국 게임회사 하나가 일본 애니업계 회사 매상 전체 수준.[45] 기존 방송사 판권작이 넷플릭스로 넘어온 작품목록에는 모에 애니메이션이 어지간한 애니메이션 전문 OTT 서비스들보다도 많고 심지어 일본에서는 프리즈마 이리야 같은 작품까지 전편 서비스되고 있다.[46] 한국의 드라마시장에서도 넷플릭스는 비슷한 평가를 받는데 기존 방송사 입장에선 잘팔리는 막장 드라마만 만들어야 했지만 넷플릭스가 한국 드라마 시장에 진출하면서 킹덤같은 작품성을 가진 드라마가 만들어지자 새로운 한류를 일으킬 거란 기대와 동시에 미국 자본에 의해 한국 드라마시장이 좌지우지 되는것을 경계하는 사람도 같이 생겼다.다만 일본 드라마는 경우가 좀 다른게 넷플릭스가 일본 드라마 시장에 진출하면서 "전라감독"같은 작품성을 가진 드라마가 만들어지며 해외에서 인기를 끌자, 아니메나 한국드라마와 다르게 해외경쟁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평을 들었던 수준인지라 기대하는 쪽이 많다. 특히 감독과 배우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반기는 분위기.[47] 돌아가는 펭귄드럼, 죠죠 4부 애니의 캐릭터 디자인 등을 맡은 프리랜서 애니메이터.[48] 비리비리 사장부터가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 팬으로 유명하고 사이트 이름도 거기서 따온것이며 최신작인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 T도 스폰싱하고 있다. 어과초는 대표적인 미소녀 동물원 애니이고 사장 취향이 이런쪽이라 당연히 미소녀물에 쏠릴수밖에 없다.[49] 이에 대한 루리웹 유저의 분석글이 있다.#[50]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Crystal은 90년대 만화를 원작으로 하므로 새로운 미디어라고 볼 순 없다.[51] 3기 이상으로 만들어지는 심야애니는 거의 없고 하이스쿨 DxD가 있긴 하지만 이건 뽕빨물 성격이 강하다.[52] 이 부분은 꽤나 의미있는 발전이다. 제작진이 소비자의 요구에 반응한다는 것은 문제가 생겨도 해결할 여지가 크게 늘어나기 때문. 우리나라의 게임계와 영화계, 블리자드의 몰락을 보면 소비자들의 여론보다는 흥행공식과 당장의 이득을 중요시하는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수 있다.[53] 미국은 tpp가입을 하지 않아 제한적 상영임에도 거둔 성과[54] 한국 영화는 한국 영화 시장스크린 쿼터제가 철폐되지 않아, 미국유럽연합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어 있음에도 '''보복조치'''로 제한적 상영만 가능하다.[55] 1995년 개봉한 《귀를 기울이면》은 콘도 요시후미가 감독한 작품이다.[56] 미야자키가 기획한 건 맞지만 감독은 모리타 히로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