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시대/비판/역사왜곡 및 고증오류
1. 개요
무리한 김두한 미화, 무비판적인 자서전 내용 수용, 드라마의 친 우익적인 성향 등으로 인해 드라마 내 왜곡되거나 말도 안 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뭐, 원래 배우들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쉽고도 빠르게 전달되거든. 모든 게 영락없는 진실처럼 들리고 말이야. '''그래서 대중의 인기는 정말 무서운 거야.'''" - 야인시대 64화, 문영철
주의할 것은, 김두한의 노변야화 방송이나 자서전, 혹은 야인시대 소설판이나 다른 김두한을 다룬 미디어들과 야인시대 내용이 다르다는 이유로 고증오류라고 이야기하는 예가 있는데, 그 점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소재들 역시도 고증오류가 한 두가지가 아니며, 김두한이나 김두한 주변 사람이 직접 이야기한 바가 있는 내용 역시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거나 미화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신뢰할 만한 자료로 교차검증하지 않고서는 주먹들이 직접 한 말이든 야인시대나 다른 미디어들이든 사실로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다만 설명에 앞서 드라마의 친 우익 성향을 명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는데, 야인시대는 어디까지나 해방 이후 백색테러와 정치깡패를 미화해서 친 우익적인 것이지,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을 우호적으로 그려서 친 우익 드라마는 아니라는 점이다.'''[1][2] 애초에 김두한 자체가 극우 활동을 했던 것도 몇 년 정도고 자유당 탈당 이후로는 대부분 기간을 야당 인사로 지내다보니 자연히 이승만과 박정희가 김두한에 우호적인 포지션으로 그려질 리는 없기 때문이다.
2. 역사적 관점의 왜곡
친일 변명, 상인들한테 가한 횡포 실드, 백색테러 정당화, 김두한의 범죄 왜곡, 마지막회에서 나온 김두한에 대한 평가 등, 온통 김두한 행적 미화로 가득 찼다. 가장 심각한 악영향은 현재 유튜브로 야인시대를 보는 사람들은 1부야 지나치게 판타지성이 강하니 코웃음치며 넘어간다 쳐도, 진짜 2부처럼 김두한이 김좌진의 유지를 이어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공산당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쓴 걸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으로[3] 위와 같은 왜곡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김두한이 잘못한 일까지도 모조리 정당화시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는, 암울했던 민족의 수난기와 격동기의 역사를 살다가 갔던 영원한 야인, 김두한의 삶을 극화한 것이다. 본 드라마에 소개되는 사건과 인물은 본인의 회고록과 취대록, 자료수집 등, 대부분 실화에 그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드라마의 완만한 진행을 위하여, 시대와 역사적 상황을 운영하는 인물 일부분에서는 픽션을 가감했으며 실존 인물의 개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당부분의 생존인물에 대해서는 가명을 사용하였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2.1. 일제강점기
2.1.1. 항일 주먹 김두한?
이 드라마에서 김두한은 애국심이 투철하고 일본인에게서 조선 상인을 보호해줬으며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에게 협력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나마 안재모가 연기한 김두한은 총독부에 협력한 일을 자아비판하기도 했으나, 김영철이 연기한 중년 김두한은 일제와 맞서 싸운 행위로 포장하였다.
하지만 김두한이 미군에게 한 증언을 보면 실체가 다르다. 또한 당시 조선 주먹패들이 일본 야쿠자와 싸운 것도 어디까지나 폭력조직간 이권 싸움이었고, 합의되자 더 이상 싸우는 경우가 없었다. 오히려 이들 행동은 '''일본 식민지 통치시대의 먹고 살기 힘든 조선 상인들을 착취한 것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에 내는 세금도 감안하면 세금을 두 번 내는 셈이니 정당성은 없다.
더욱 가관인 점은 김두한 패거리가 '힘없는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란 의미를 부여하는데 싸움질하며 상인들 가게나 물건들을 깨부수는 장면이 여럿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과하거나 보상하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종로 이정목 털보 패거리는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종로회관에서 정진영을 구타하면서 테이블에 놓은 술과 안주들을 모조리 박살내버렸건만, 업체 측에 사과조차 하지 않고 2차 술을 마시러 나가기까지 했다.
만약 정말 상인들을 생각하였다면 아무리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왔다 해도 장터에서의 싸움은 최대한 피하거나 좀 더 넓은 장소에서 싸워야 할텐데 꼭 가게 앞에서 싸운다. 이런 행위는 상인들에게 상당한 민폐다. 가게 깨부수는 것도 그렇지만 오던 손님까지 내쫓는 행위이니 말이다. 극중 김두한 일당에게 호감을 보이는 재래시장 상인들의 모습은 사실상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심지어 마루오까가 김두한 졸개들에게 세금을 왜 걷냐고 까자 한 상인이 '''"저 사람들은 아무 잘못 없고 우리가 좋아서 주는거니 그러지 마라"'''며 실드를 치기도 한다. 김두한 이전에 구마적 패가 세금을 걷어 갈 땐 한숨을 푹푹 쉬며 이거 어쩌나 하고 탄식만 하던 것과는 정 반대의 반응.
게다가 "거리의 독립군" 미화도 묘사가 어정쩡 해서 김두한 패거리들이 도대체 왜 싸우는지에 대한 정당성을 제대로 부여하지 못하였다. 혼마찌가 종로에 진출하는 순간 조선 상인들이 끝장이라고 하지만, 일본 상인들이 조선 상권을 잡아먹는다는 내용도 자세한 횡포 묘사없이 단 몇 마디 언급으로 퉁쳐버린다. 오히려 같은 조선인인 구마적 패거리들이 세금 걷겠다며 상인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장면이 더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그렇다고 혼마찌 세력이 조선인들 상대로 횡포를 부리거나, 주도적으로 온갖 악행을 저리는 것도 아니다. 종로에 진출한 나미꼬나 시바루 일행만 해도 일반적인 악역과 거리가 멀다. 이들은 말 그대로 장사를 한 것 뿐이고 심지어 나미꼬는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주도적으로 뭔가 이뤄내려난 명석한 여성이며 이들의 지적(왜 일본인은 여기서 장사를 하면 안 되는가?)은 시대상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시바루는 가장 신사적이며 정의로운 주먹 중 하나다. 게다가 하야시는 무력이나 뒷배를 이용해 종로의 상권을 빼앗거나 헐값에 강탈하기는 커녕, 수많은 자금을 조선 상인들에게 지불하고 정당하게 상권을 사들였다.(김두한이 없는 틈을 노리긴 했지만)[4] 그런데 여기 맞서는 김두한의 논리는 단지 '조선의 심장인 종로에 일본인은 들어올 수 없다'였다.
그 외에도 작중에서 김두한이 독립운동을 하려고 만주로 가려다 좌절되어 조폭이 되는 걸로 나오는데, 정말 독립운동이 하고 싶었다면 조폭 두목이 된 이후 부하들을 이끌고 국내에서 과격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할 수도 있었으나, 실제 김두한은 그런 행적 자체가 보이질 않는다.[5] 아래 서술되는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등의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도 '아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데'라는 탄식은 해도, 행동은 하지 않는다. 딱 하나 비슷하게 한 거라고 해봐야 친일 연극에서 뱀을 풀어서 방해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하려면 할 수 있는 힘과 충성심을 가진 조직을 갖고 있음에도 하는 것이 이런 장난질에 가까운 행위라는 점에서 '''과연 김두한이 독립군 운운할만한 자격이 되는가''' 라는 의구심이 든다.[6] 바로 이 부분이 야인시대가 조폭미화물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가장 큰 점이며, 영화 장군의 아들과는 주먹패의 본질 자체가 많이 다른 특징을 보인다. 야인시대는 건달들이 거리의 독립군이며 상인을 보호하고 그 명목으로 세금을 걷는다라는 주먹패의 활동에 대해 정당성을 상당히 부여한다.
장군의 아들과 비교해볼 때 장군의 아들 같은 경우는 그저 본인들의 생활을 위해 주먹을 쓰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걷는 주먹패들을 묘사했다. 장군의 아들 2부 초반에는 상인들이 세금 문제로 인해 원성이 자자하다는 묘사를 했으며, 3부에서는 종로 주먹패 몇몇이 강제로 삥을 뜯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다는 표방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적이 되는 존재는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대립하여 싸우는 식으로 표현하였다. 즉, 야인시대와 장군의 아들의 주먹패는 판이하게 그 본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 장군의 아들 원작 소설에서도 '이들은 그냥 야쿠자였다'는 작가의 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당시 김두한이 자기 친구 정진룡을 죽였을 당시 미군에게 한 증언이다.
사실은 "일본인을 위한 합법적인 테러리스트 겸 정보제공자"를 하다가 종전 때문에 "실업자"가 된 테러리스트다. 오히려 김두한 자신은 그 탓에 "모든 지위를 상실"했다고 한다.나의 오랜 친구 정…김두한의 이야기는 한국에 대한 일제 강점기까지 되돌아간다.…김의 제일 친한 친구는 정진룡인데 '''그는 그 들이 일본인에게 고용되어 경방단(Police Assistance Association)을 조직 운영하기 전까지는 그와 더울 일본 정부당국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경방단에 가입한 후 김과 정은 일본인을 위한 합법적인 테러리스트 겸 정보제공자가 되었다. 종전과 더불어 실업자가 되면서 모든 지위를 상실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큰 고려 없이 청년들로 모아서 정치 정당의 돌격대로 고용되었다. 유일한 문제는 정은 남로당을 위해서 일하는 조선전위대를 택했고, 김은 우익주의자 장덕수의 정당에 고용되었다. 그때부터 김은 "나에 오랜친구 정"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정에게는 불행하게도 김은 한국 전체의 싸움 왕이었다. 처음에 김은 서울의 거리에서 정과 정의 부하 두 명을 때렸다. 다음에 정이 김에게 권총을 겨누었으며 김 역시 정에게 권총을 겨누고 정의 권총을 떨어뜨린 후 정의 무릎에 총을 쏘았다. 1947년 4월 우익 한국인들이 그들 국가의 미래의 국부로 간주하였던 이승만의 귀국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 동안, 좌익도 나름대로 그들의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진용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 팜프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을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햇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History of the Counter Interlligence Corps, pp.92-94, 김봉진, 미군정기 김두한의 '백색테러'와 대한민주청년동맹, 대구사학 97, 2009, 56쪽에서 에서 재인용.
2.1.2. 부민관 폭탄의거 왜곡
이 드라마에선 김두한이 부민관 폭탄의거에 간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 묘사되었다. 정확히는 몇몇 노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를 달라고 하자, 김두한은 마치 안전 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그냥 폭탄을 주었고, 그게 부민관 의거에 사용된 것으로 묘사되었다.(물론 김두한은 그 폭탄이 의거에 쓰인 것은 몰랐다.) 의거를 주도했던 조문기는 그걸 보고 매우 분노하였다.
심지어는 제작진이 미리 고증을 위해 조문기를 찾았는데, 그런데도 고증 오류를 낸 것은 고의로 볼 수밖에 없다.몇 년 전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이 폭탄을 건네주는 것으로 나와. '''유 동지가 얼마나 고생하며 구한 폭탄인데 말이지.'''
야인시대라는 드라마는 첫화부터 마지막회까지 김두한에 관한 스토리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여러 사건들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부터)을 종합 선물세트처럼 모두 보여주고 싶어하는 느낌이 상당히 든다. 단지 김두한 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담고 싶어하는 경향이 보여서 ('그랬다~' 로 시작되는 내레이션은 덤.) 가끔 보면 이게 드라마인지 역사스페셜인지 구분이 안 갈때가 있다. 아무튼 그런 시대적 여러 사건들을 드라마에서 보여주려면 김두한과 엮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다보니 무리수를 둔 것이 상당히 많다. 장르 자체는 드라마인데 만약 부민관 사건을 따로 구성해서 보여주면 다큐멘터리가 될수밖에 없고 드라마 전개의 특성상 그 사건을 김두한의 스토리와 연계시켜 보여주다보니 그런 역사 왜곡마저도 서슴치 않게 하는것이다. 야인시대를 보면 그런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 초반 2화때 김두한과 나석주가 엮이는것도 그렇고 대부분의 역사적 굵직한 사건들이 사실 알고보면 김두한과 관련이 실제로 전혀 없는 내용인 것들이 많다. 원만한 드라마 진행을 위해 픽션을 넣는다고는 하지만 이게 역사 왜곡이 되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잘못된 정보를 심어주게 되니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야인시대 담당 PD가 드라마와 관련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다며 조문기를 찾아온다. 조문기도 그를 꼭 만나고 싶던 참이었다. 김두한을 항일애국지사로 부각시키는 것이 가당치도 않았고, 역사를 온통 거짓 투성이로 왜곡하는 것이 언짢기도 했지만 부민관 폭파사건에 관련해 크게 걱정되는 일이 있었다.
이환경씨가 쓴 소설 ‘야인시대’에서 부민관 거사에 사용한 폭약은 김두한이 건네준 것이고 그것이 발각되어 김두한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생하다 감옥에서 8.15 광복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그 소설가 이환경씨가 곧 드라마 작가이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기에 그렇잖아도 걱정하던 차였다.
조문기는 담당 PD에게 부민관 거사를 그런 내용으로 왜곡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건만, 드라마는 소설 원작 그대로 방영되었다. 연구소에서 그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더니 그 PD는 “그냥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주세요.”라고 하더란다.
2.2. 광복 이후
2.2.1. 김두한
김두한은 자기 옛날 친구였던 정진룡과 그 일행들을 불법 납치고문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진룡을 죽이게 된다.
김두한이 미군에게 한 말을 따르면 "정진룡과 그의 무리들은 이승만을 사기꾼이고 자기중심적인 정치인이라고 비방하는 팜플렛을 배포하기 위해서 동원되었다. 4월 20일, 김두한은 이 시점이 그의 오랜 친구를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는 부하들을 보내서 반 이승만 유인물을 배포하는 사람들을 잡아오게 했다. 김의 부하는 극장과 서울의 시장 거리를 배회하면서 정과 그의 부하를 잡아들였다. 김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이 그들의 과거의 잘못을 인식하기를 희망하면서 이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은 길고 단단한 일본 단풍나무로 만든 몽둥이로 행해졌다. 정은 박헌영 부재 시 남로당의 대표였던 허헌에게서 명령을 받았다고 했고 그는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모든 명령에 복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심지어 이승만을 역적이라고 말했다. 이 순간에 김이 이성을 잃고 정의 가슴을 찼다. 그는 그의 오랜 친구에게 철회를 요구했지만 정은 거절했다. 김은 또 한 방을 더 때렸고 그것으로 인해 정은 체내 출혈이 시작되었고 곧바로 죽었다." 고 한다.[7]
그런데 이 내용이 드라마에선 정진영 측이 김두한 측을 공격하려다가 반격을 당해 납치를 당했고, 김두한이 살려주려 했는데 김두한을 죽이려하니 김두한이 쏴죽인 것으로 왜곡을 해놓았다.
2.2.2. 이승만
6.25 전쟁 때 이승만이 갑자기 나는 서울에서 죽겠다며 도망치던 열차를 돌렸다가 곽영주가 애원복걸해 그만둔다거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낙동강 전선이 무너졌다면, 난 자결을 선택했을 것이네"라고 말한다던가, 각종 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며, 장기집권을 한 것에 대해서도 이승만의 잘못보다는 곽영주와 자유당이 이승만을 감싸고 돌면서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정보를 차단하는 모습으로 각색되어 나타나 있다고 하여 이게 왜곡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도 상당히 부합한다.
실제 역사상으로 6.25 전쟁 때 이승만은 26일에 측근들의 피난 권유를 거부하고 27일 새벽에도 피난 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다가 몇시간 뒤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거짓보고를 받고서야 어쩔 수 없이 피난을 떠났다. 가는 도중에도 대구까지 갔다가 이승만이 서울로 돌아가야한다고 고집하여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상행하던 중 대전역에서 다른 각료들의 만류로 내려서 대전에 임시수도를 세웠다. 그리고 이승만은 피난 전 전쟁 발발 초기 2 ~ 3일간 육군본부를 방문하여 상황을 살피고, 주한 미대사 무초를 만나서 필요한 무기의 지원을 요청하고, 맥아더에게도 전화를 걸고, 피난을 떠나기 직전인 27일 새벽까지도 주미대사 장면에게 전화를 걸어 미대통령을 만나라고 지시하는 등[8] 분주하게 대응했으나 드라마 상에선 이런 것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다가 피난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게 고증오류나 왜곡이라면 왜곡이다.
그리고 당시 자유당이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던 것도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예를들면 3.15 부정선거 같은 경우도 당시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승만은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확실히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드라마 상에서 이승만은 해방 당시만 해도 검소함과 인자함을 중시하였으나,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에는 전형적인 꼰대의 모습을 보이고, 6.25 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으로 여론이 나빠지자 이미지 관리를 할 생각은 하긴 커녕, 오히려 자유당에 가까운 제2대 국회의원들을 끌어모아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할 생각이나 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간신배(이기붕, 곽영주)들의 아첨만 듣는, 전형적인 전근대 시대의 암군으로 묘사되는 걸 보면 딱히 미화라고 보기도 힘들다.
2.2.3. 백색테러 정당화
김두한, 이화룡의 경우 광복 이후 건국 수립 전까지 좌익들에게 백색테러를 저지른 것이 무조건 정당하다는 것 마냥 각색한 점이 광복 이후의 역사 왜곡 중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는 미군정이 정치를 잘 못했고, 이에 공산당이 날뛰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우익들이 백색테러를 일으키는 식으로 묘사했다.
또한 당시에는 사상과 이념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것을 김두한 본인이 애국이라고 말하는 태도는 정당화 될 수 없을 것이다.[9] 비록 '공산당의 만행 때문에 김좌진은 공산당을 혐오했고 그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김좌진을 암살했다'라는 염동진의 설명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잘 한 것 없는 극우세력은 흑백논리로 미화하고 있다. 김좌진 문서에 나오지만, 애당초 김좌진이 암살된 것은 그의 만행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의견도 있는 판이다. 게다가 김두한 패거리를 봐도 '왜 공산당이 나쁘냐, 그렇다고 극우 세력은 정당하냐'에 대한 고찰이나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10] 그저 처음에 김두한의 조선청년전위대 대장 취임식에 가선 박수 쳐주다가 김두한이 김좌진의 죽음을 알고 반공으로 전향하자 '두목이 공산당이 나쁘다면 나쁜거고 죽이라고 하면 죽이는거다'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설득력이 부족한 이유로 백색테러를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을 애국이라 하며, 자신들은 '독립군'이라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들을 현 시대적인 관점에서 보든 당 시대의 관점에서 보든 결국은 '''백색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김두한이나 이화룡을 미화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이 속했던 백의사나 대한청년단은 물론 한국 극우 백색테러계의 끝판왕인 서북청년회도 미화가 되어 나왔다. 특히 서북청년회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다신 나와선 안될 조직이란 점에서 매우 잘못된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화룡이 4. 3 사건 한복판에서 서북청년회에게 학살당한 제주도 도민들을 조직원들과 보면서 안타까운 듯 한탄을 하는 장면은 정말 일품이다.
드라마 상의 창작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심지어 김두한 패거리가 악질 공산당도 아닌 중도 좌익(여운형)이나 중도 우익(김규식)을 협박하고 린치한 행위까지 미화했다. 명백한 악행임에도 불구하고 여운형은 철없는 청년의 행동이라고 덮어두었고, 김규식도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며 사건을 덮어버린다. 김구는 이 사건 때문에 김두한에게 한 소리 했으나, 김두한은 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11]
작가 딴에는 국군준비대 사건 이후 묘사, 김무옥 사망 후 최동열과 김두한의 대화 장면 등을 통해 나름 균형을 맞추려고 했으나, 워낙 백색테러를 미화하다보니 결과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았다.
2.2.4. 주인공 보정으로 점철 된 반공 드라마
드라마 야인시대는 1990년대 근현대사 사극들보다도 더 낡은 반공 선전극 수준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이는 작가인 이환경이 본인의 사상과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철저한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드라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제주 4.3 사건 해설 중 1947년 3.1 발포사건이 좌익들의 경찰서 습격 때문이라느니, 제주도민 중 8할이 좌익이거나 행정기관장들 대다수가 좌익 인사라는 등 왜곡된 내용 때문에 4.3 유관단체들로부터 항의를 받았고, 공산주의자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는 1부 일본인 악역/라이벌들[12] 보다도 못하다. 실제 공산주의자인지 의견이 분분한 김원봉 같은 경우도 남한 적화에 매우 관심이 많은 인사로 등장시켰고, 정진영을 제외한 나머지 캐릭터들은 전형적인 골수 빨갱이들로 묘사되며, 무능하게 우미관 패거리들에게 당하기만 하다가 대책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인다. 아예 작중 대사부터가 '나 전형적인 악당이요'라고 보여주는데, 가령 신불출은 박헌영에게 김두한을 정진영과 더불어서 철저하게 끌어들여 세뇌를 시키도록 하겠다는 등, 악당이 쓸 법한 표현을 쓴다. 용산 파업 사건에서 공산당 측은 금강이 김두한에게 패배했음에도 약속을 어기고 김두한에게 사격을 가하는 쓰레기 짓거리까지 했다. 그나마 공산당측 인물중 정진영과 금강은 이를 반대했으나 막질 못했다.
물론 좌우합작에서의 여운형과 김규식, 진보당의 조봉암은 극렬한 공산주의자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여운형은 김두한 패거리들에게 납치되어서 린치당한 뒤에도 린치당한 사실을 함구해버린다. 사실을 함구한 이유가 병맛인 것이, 여운형은 김두한의 행동을 국가를 위한 행동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진보당 사건의 경우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끝났다.
좌익 쪽은 너무나 허망하게 박살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드라마 속 좌익은 말 그대로 털리는 게 일이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고, 굴욕이란 굴욕은 다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훈련을 받은 사병 조직인 국군준비대가, 반나절 사격 훈련 받은 조폭들에게 일방적으로 박살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설정 상에서도 무능한 집단이면 모를까, 조역들의 입을 빌려서 전위대 무섭다, 크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볼 수 있다.
3. 고증오류 및 옥의 티 또는 각색된 부분
3.1. 전반적
- 실존 인물들과 배우들의 극 중 외모 차이가 좀 있다.[13] 일단 주연인 김두한과 이정재, 시라소니부터 그러하다. 실제 김두한은 상당히 체구와 외모가 후덕했으나 극중 김영철은 도리어 보통 중년 남성보다 약간 마른 체형이고 실제 김두한보다 이목구비의 선이 뚜렷하다. 쌍꺼풀이 뚜렷하게 져 눈이 부리부리하게 큰 실제 이정재와 달리 김영호는 눈이 굉장히 가늘다. 또한 시라소니 역의 조상구는 머리가 길고 콧수염이 있지만 실제 인물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약간 머리가 벗겨졌고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조연들을 보면 김영태는 2부로 넘어오면서 콧수염이 났지만, 이는 나이든 것을 표현하는 장치일 뿐, 실제 인물은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또한 김관철이 날렵한 몸매로 나오는데, 실존인물 김관철은 120kg 가까이 되는 거구였다. 그리고 실제 신영균은 단신이었지만 극에서는 나름 장신 축에 속하는 윤용현이 맡았으며, 유지광도 역시 단신인데 여기서는 186cm의 상당한 장신 배우인 유태웅이 연기했다. 유진산은 극에 처음 등장한 시기인 1945년 말에 이미 안경을 쓰고 있어야 하지만, 마지막회까지 쓰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실제 인물과 상당히 비슷하긴 한데 1970년대 후반 모습과 흡사하며 등장한 시점인 1960년대 중반과는 사뭇 다르다. 황병관은 실제로 60kg 이하 경량급 레슬링 선수로 사진을 보면 그렇게 덩치가 크거나 둔해보이는 스타일이 아니나, 극에서는 레슬러에 대한 선입견답게 덩치가 크고 살집이 있는 인물로 나온다.
- 실제보다 일찍 죽은 사람들이 있다. 김무옥과 김두한의 친할머니, 신영균이다. 김무옥은 원래 정부 수립 이후 꽤 지난 뒤에 사망했으나[14] 배우 이혁재의 스케줄 문제로[15] 1946년 파업 진압 때 사망한 것으로 일찍 하차시켰다. 또한 김두한의 친할머니는 1949년 10월 22일에 사망했으나[16] 극에서는 김두한이 막 우익 청년활동을 시작하는 1946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처리했는다. 아무래도 1부에서 이어진 캐릭터들 중 앞으로 이어질 스토리와 별 연관없는 인물들의 원활한 퇴장을 위해 일찍 하차시킨 듯 하다. 신영균은 1987년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한 기사가 있는 것을 보아 최소 그 이후에 사망했으나, 극에서는 김두한이 오물사건으로 수감 중이던 1966년에 죽은 것으로 나왔다.
- 플랜카드나 띠, 종이 등에 쓰인 글씨에서도 오류가 발견된다. 일제강점기 ~ 유신시대라는 극 중 배경에 맞게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쓴 경우가 많지만 몇 몇 부분에서는 컴퓨터 글꼴 궁서체나 HY백송B체가 나온다. 이건 2000년대 이후 근현대사를 다룬 작품들에서 종종 보이는 오류이다. 그 전에 있던 드라마들은 그런 오류가 덜하거나 없었지만, 한국 근현대사 드라마 중 100부작이 넘어가는 장편으로 방영된 것은 야인시대가 처음이기 때문에 아마도 극에서 필요한 분량을 전부 손으로 쓰기엔 무리가 있어 부분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한 듯 하다. 그러나 그 것이 사실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 김두한이 싸울 때 늘 정장을 입고 싸운다. 실제로 대부분은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편한 활동복을 입고 싸웠다.[17] 사실 정장이라면 야인시대 조폭들 대부분이 고정적으로 입긴 했다.
- 옥의 티에 가깝지만, 극 중 역사적 사건의 계절 배경이 뒤죽박죽이다. 나석주 의사 폭탄 투척은 실제로는 12월 한겨울인데 드라마상에서는 한여름으로 나오고 반대로 부민관 의거와 경성에 미군 전투기가 날 때는 7월이라고 자막까지 써놓았는데 등장인물들이 코트를 입고 있다. 또 1월 한겨울에 일어난 단성사 저격 사건도 여름에 벌어진 걸로 나오며 아이스께끼 장수까지 보인다. 김두한이 사망한 날인 11월 21일은 늦가을 ~ 초겨울인데 가로수 나무가 낙엽이 져 앙상하기는커녕 나뭇잎이 단풍도 들지 않은 채로 무성하게 달려 있다. 또한 8월 15일 당연히 여름이어야 할 광복절이 극중에서는 눈이 내리고 모두 긴팔에 긴옷, 배우들 입김까지 오류가 있다. 촬영상 스케줄 문제인데 그래도 시청자 입장에선 이질스러울 수밖에 없다.
- 관점에 따라 옥의 티일 수도 있는데 일제강점기 경성 거리와 해방과 6.25 이후 서울 거리가 달라진 게 없다. 단순히 세트만 같은 것이 아니라 간판도 똑같다. 즉 극 중 서울의 1930년대 ~ 1960년대 모습은 동일하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면 일본식 간판은 대거 사라지고 또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들이 파괴된 뒤 새로 복구하는 과정에서 한자식 간판도 대부분 한글 간판으로 바뀐다. 그러나 야인시대에서는 이런 시대 흐름을 세트에 반영하지 못했다. 물론 시대별로 일일히 맞게 짓는 것이 무리일 수 있으나[18] 적어도 상대적으로 제작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간판만은 변화를 주었어야 했다. 그리고 일본어로 된 전차 정거장 표지판 역시 1950년대를 다룰 때에도 보이는데 이건 그냥 구석에 치워놓기만 해도 되며 당연히 비용은 한푼도 안 든다. 그러나 그대로 냅둔 것을 보아서는 제작진이 거리의 시대 변화 반영을 태만하게 다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 종로 패 중 김두한에 이어 넘버 2인 종로꼬마 이상욱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것은 유족이 반대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19] 그 다음 서열인 망치와 김무옥 중에서 망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위와 마찬가지 이유로 보여지고 오히려 유지광 부하로 망치라는 같은 별명을 쓰는 주먹이 등장하는데, 망치라는 별명을 쓰는 주먹이 그만큼 흔하다. 그 다음 위치의 부하주먹인[20] 문영철이 좀 더 비중있게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사람이 빠진 결과로 보인다. 다만 김두한은 자서전이나 노변야화같은 회고에서 종로꼬마 이상욱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당장 장충단 공원에서 하야시와 싸운 이야기에도 등장한 부하가 자서전에서는 '내 왼팔 오른팔인 김무옥과 문영철' 을 데리고 셋이 싸웠다고 되어있으며[21] , 노변야화에서는 김무옥과 문영철 등 자신 포함 6인으로 언급되어있다. 그리고 노변야화에서 해방 후 정치깡패질 하는 이야기를 할 때 조 동지, 신 동지 등 성으로 말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상욱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22] 당시 김두한 패가 연루된 정진룡 살해사건도 이상욱의 이름은 보이지 않으며, 1980년대 경향신문에서 신영균과 박용직의 증언에도 이상욱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23] 이상욱이 우미관 패 2인자였다는 증거 자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김두한의 증언만 따르자면 문영철과 김무옥은 야인시대에 나온대로 김두한의 왼팔과 오른팔이 맞다. 우미관 패 2인자이자 고문 격으로 나온 김영태 정도가 버프가 된 편이다.
- '서대문형무소'가 해방 이후에도 그 이름인 걸로 나온다. 실제로는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서울형무소'로 바뀌고 1961년에 '서울교도소'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1967년에 지금 이름인 '서울구치소'가 되었다.[24] 즉, 해방 후부터 5.16까지는 '서울형무소', 그 뒤에는 '서울교도소'로 나와야한다.[25] 등장인물들이 익숙한 '서대문형무소'로 부른다고 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종종 그렇게 부르기는 했는데 아예 감옥 정문에 대놓고 '西大門刑務所(서대문형무소)'라고 붙여놓은 것이 문제.
- 김영태는 실제로는 김두한보다 2살 어리다. 그리고 김두한 부하들 가운데 고보 학력 이상인 사람이 그 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고문이자 조직 내 2인자인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실제로 그 정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26] . 그리고 김두한이 처음 주먹 세계에 입문했을 때부터 만났으나, 실제로는 김두한이 청년단 활동을 했을 시기인 1943년에서 1944년경에 만났다.
- 총격전 시 사용된 총기에 고증오류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베레타 92 모델이 사용된 것이 있다. 해당 모델은 1972년에 공개되고 1985년에 미군 제식 총기로 체택되어 1985년 이후에서야 대중에게 알려진 모델이므로 야인시대 배경과는 고증이 맞지 않는다. 6.25 전쟁과 김동진 습격 장면에 등장하는데 그 당시라면 M1911을 사용해야 맞다.
- 가공인물들이 너무 많다. 이와 반대로, 누락된 인물이 존재하는데, 단적인 예시로 유일한과 김춘삼 정도가 있겠다.[27]
3.2. 1부
- 김두한 어머니 박계숙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죽었다.
→ 거짓말이다. 김두한이 어릴 때 어머니와 아들을 두고 가출한 것이다. 김좌진이 가정을 책임지지 못하자 어려워진 형편 때문이었다. 나무위키 김두한 항목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아무래도 김두한을 드라마틱한 주인공으로 포장하려고 바꾼 듯하다. 그리고 실제 이름은 김계월이다.
- 1부 메인 악역인 미와 와사부로가 어린 김두한을 쫓았으며 젊은 시절 김두한을 늘 괴롭히면서 1945년까지 종로경찰서 경부로 있다가 자살하였다.
→ 역시 거짓말이다. 실제 미와 와사부로는 1884년 생으로 1920년대 이후 승진을 거듭해서 1934년에 충청남도 경찰부 고등과장이 될 때까지만 종로경찰서에서 근무했다. 최종 계급은 경시, 이후 함경도 일대에서 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하다 은퇴했다. 즉 김두한이 종로에서 주먹 좀 쓴다며 설치고 다니던 시절에 미와는 50 ~ 60대 나이로 이미 종로경찰서를 떠난 지 한참 지났던 것. 다만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공식자료인 매일신보 1944년 3월 27일자에 '종로총궐기위원회(鍾路總蹶起委員會)' 특별위원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퇴임 이후 종로에서 머물면서 이런 저런 활동을 한 듯 하며, 김두한이 그 동네 건달이었던만큼 1940년대쯤에는 어느 정도 안면을 텄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후술할 징용 문제에서 깡패들이 하도 사고를 쳐 조선총독부 촉탁이던 미와가 건달들을 징용보내라고 해서 실제로 사이가 안 좋았을 가능성이 크긴 하다. 그래도 어쨌든 계속 고위층이었던 사람[28] 이 다른 거물급 독립운동가들 놔두고 깡패 두목 하나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다만, 어쨌든 '독립군 김좌진 아들인 조직 두목'이란 점 때문에 다른 건달들보다는 더 눈여겨보고 경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 1929년부터 1957년까지[29] 종로경찰서였던 곳이 1920년대 초중반에도 경찰서로 나온다.
→ 야인시대 촬영장에서 재현한 경찰서 세트의 모티브는 원래 대한제국 평리원 건물로 이후 경성복심법원과 경성지방법원이 사용하였다가 1929년 8월부터 종로경찰서로 사용하였고, 1957년 3월에 신신백화점을 지으면서 헐었다. 1920년대 초중반 종로경찰서는 옛 한성전기회사 사옥[30] 으로 1936년 헌 뒤 그 자리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장안빌딩을 세웠다. 4.19 혁명 당시인 1960년을 다룰 때에도 이 세트가 종로경찰서로 나오는데 그 때의 실제 자리는 SK 재동주유소다.[31]
- 작 중 대부분의 결투, 특히 1부에서는 거의 90%의 싸움이 우미관 앞에서 일어나고 또 군중들이 주위를 둘러싸서 구경한다.
→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그 일대 길도 사람 세네 명이 겨우 지나갈만할 정도로 좁았다. 더군다나 일제강점기에는 해방 이후보다 훨씬 폭력에 대한 단속이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 깊은 밤에 으슥한 골목에서 몰래 싸웠다.
- 종로 최고의 주먹들의 아지트가 우미관이다.
→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미관을 주 무대로 활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드라마처럼 반듯한 사무실을 두고 그 곳 직원처럼 행세하진 않았다.
- 김두한이 원노인 사후 거지촌에 잠시 있다가 쌍칼의 부하가 되었다.
→ 실제로는 이문설농탕[32] 과 조선극장 등에서 여러 잡일을 했었고 이후 우미관 매점에서 일을 하다 구마적 부하가 되었다.
- 2화에서 김두한이 원노인과 경성으로 귀환했을 때 우미관 앞에 만국기를 걸어 놓은 모습이 나오는데, 그 중에 단풍잎이 있는 캐나다 국기와 나이지리아 국기가 있다.
→ 현 캐나다 국기는 1965년에 제정한 것이다. 그리고 저 때 나이지리아는 독립국이 아니었다.
- 1925년 ~ 1926년 경[33] 인 4회에서 만해 한용운이 YMCA에서 "여러분! 개성에 송악산이 있어요! 그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만월대의 티끌을 씻을 지 몰라도, 선죽교에 어려있는 충혈들의 피는 결코 씻을 수 없습니다!" 의 연설을 한다.
→ 실제로는 1921년 12월에 있었던 일이다. 단, 이는 한용운의 애국심 일화를 보여주기 위한 각색이다.
- 5회에서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폭파시켰고 이후 조선식산은행 쪽으로 가서 들어가지도 않고 유리창을 깬 뒤 폭탄을 던졌다. 그 때 폭탄은 불발했으며 출동한 경찰들과 시가전을 벌이다 총알이 떨어져 일본 경찰들의 총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순국했다.
→ 오류가 많다.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던진 폭탄은 실제로는 불발했다. 그리고 순서도 다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경비 현황을 먼저 탐색한 후에 조선식산은행 실내로 들어가 폭탄을 투척하고[34] 그 다음에 다시 동양척식주식회사로 가서 직원들을 쏘고 불발한 폭탄을 던진 것이다. 또한 순국 과정도 사실과 다르다. 실제론 총알 22발이 남았고 나석주 의사가 체력 한계로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다. 이후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순국한 것은 사실이다.
- 6회에서 김두한이 원노인을 만나고 거지촌에서 나와 새 옷을 사 입고 나오는 건물이 화신백화점 서관이다.
→ 이 건물은 1935년 화재로 불탄 3층 화신백화점 자리에 1937년에 지은 것이며, 그 때 김두한은 이미 주먹패였다.[A]
- 김좌진의 어머니와 본부인이 만주에서 경성으로 올 때, 인촌 김성수가 손을 써서 그들이 고문을 당하지 않고 그나마 무사하게 정착했다.
→ 김성수가 도움을 주고 안 주고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또 애초에 아무리 '1급 불령선인' 가족이어도 혐의도 없는데 무작정 막 잡아가지는 않았다.
- 최동열의 집에 김좌진이 가서 애국 헌금을 걷을 때 대학생인 최동열에게 "경성제대에 다닌다지?"라고 한다.
→ 경성제대는 1924년에 세워졌다. 최동열은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시대일보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좌진은 1918년 만주로 망명한 이후 두 번 다시 살아서 조선에 들어오지 못했다. 즉, 저 장면은 최소 1918년 이전으로, 김좌진이 경성제대를 언급하는 것이 오류.
- 11화에서 구마적이 하야시에게 자신의 이름을 고희경이라고 말한다.
→ 실제 이름은 고시형(또는 고시경)이다. 김두한 회고담 《노변야화》에서 김두한의 발음이 잘 들리지 않은 것이 잘못 전한 것.
- 16화에서 수표교 거지들이 구역이 다른 숭례문에 동냥하러 갔다가 그 쪽 염천교 거지들에게 걸려 도망간다.
→ 아마 서울역 근처 염천교로 설정한 것 같은데[35] 실제 일제강점기 당시 거지들이 있던 염천교는 남산에서 발원해 지금의 방산시장 근처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들던 묵사동천에 있었다. 사족으로 서울역 염천교는 인왕산 무악재 부근에서 발원한 무악천에 있던 다리에서 이름만 따온 것.관련 기사.
- {{{#2E674E 16화에서 거지들이 염천교에 구걸하러 갈 때 철로를 지나는 기차[* 철도 건널목 경보기를 잘 보면 경보등에 고장정지표시기가 달려 있다. 이설 전 휘경4 건널목, 현재는 폐쇄된 경원선 초성3 건널목, 학답2 건널목과 동일한 장치다. 그리고 도망가는 장면이 나올 때 전차선에 철도 건널목을 지나는 자동차가 등장한다!]와 23화에서 김무옥, 문영철이 개성 깡패들과 싸우고 간신히 탄 열차[36] , 그리고 24화에서 구마적이 만주로 떠나면서 탄 열차[37] 와 48화에서 마루오까를 피해 도주한 다나까가 타려던 열차가 전부 통일호다.}}}
→ 통일호가 처음 생긴 것은 1955년, 8.15 광복 이후이다.
- 21화에서 김두한이 아버지 노름 빚으로 팔려 갈 위기에 처한 애란을 구하려고 하야시 집을 찾아가 도둑질하였다.
→ 김두한 회고에 나온 것으로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실제 김두한 증언에 따르면, 부하 몇 명과 같이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술지게미를 뿌리고 폭행해서 돈을 갈취했다.[38]
- 22화에서 김두한이 구마적 패거리의 눈을 피해 작은 암자에 숨어있을 때 최동열이 김동삼 장군의 옥사를 언급한다.
→ 실제 김동삼 장군은 1937년 4월에, 그러니까 이미 김두한이 극 중에서 우미관을 차지한 후에 옥사했다.
- 23화에서 김두한이 구마적과 대결하기 하루 전, 개성역에서 김무옥과 문영철이 경성으로 가는 기차표를 끊을 때 뒷 편에 '조선철도 12년 계획수립' 현수막이 있다.
→ 이 때가 1936년[A] 인데 조선철도 12년 계획은 1927년부터 시행한 것으로 저 때 굳이 있는 것은 어색하다. 마치 청계천 복원 사업 광고판이 2020년대 현재 기준으로 시내 한복판에 붙어있는 느낌이다.
- 24화에서 구마적이 김두한에게 패한 후 만주로 떠나 사라졌다.
→ 당시 기록을 보면 1942년까지만 해도 김두한의 두목으로 있었으며 도리어 김두한 소개로 친일단체 시천교와 친일 단체 대동일진회 분쟁에 개입하여 대동일진회에 소속했었다.[39]
- 25화 ~ 41화에서 김두한과 박인애가 풋풋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랑을 한다.
→ 김두한이 노변야화에서 회고한 이야기를 각색한 것. 김두한의 회고에는 그냥 박씨인 여성으로 나온다. 드라마에 등장시킬 때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작가가 임의로 지은 것. 그리고 극 중에서는 전문학교 학생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타자치는 일을 배웠다.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흔하지 않았다.[40] 드라마처럼 김두한이 구해주고 사귄 것은 맞지만[41] , 김두한의 회고에 따르면, 김두한의 힘 자랑과 그로 인한 실수 때문에 정이 떨어졌고[42] 결정적으로 헌병대와 붙은 사건으로 박씨 여성 집안에서 서둘러 결혼시켜 헤어졌다. 즉 회고를 보면 김두한의 마음이 일방적인 건데 극 중에서는 정말 서로 영화같은 사랑을 한 것으로 각색한 것. 그러니 33화 ~ 34화에 나온 박인애 납치 사건 누명으로 감옥에 간 적도 당연히 없다. 그리고 박씨 여성 집안도 친일파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잘 대해 줬다고 본인이 증언했다. 이를 이환경이 극적 전개를 위해 왜곡시킨 것. 만약 실제 박씨 여성 집안에서 알았다면 충분히 고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김두한 증언에 따르면 그 여성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더 있었는데 첫 데이트하는 날 자기는 박씨 여성과 짝을 맺었고 문영철에게 그 여동생을 붙여주려고 했다고 한다.
- 26화에서 와싱턴이 처음 등장하면서 우미관 패에게 자신의 명함을 주는데 전화번호를 'Tel. 6853. 6854', 주소를 'Kongphyungdong 8. Jongro2jeongmok kyungsungbu'로 적었다.
→ 전부 오류. 컴퓨터 글꼴인 것은 제쳐두더라도 내용 면에서 문제가 많다. 우선 일제강점기 전화번호는 분국명을 앞에 쓰고 그 다음에 번호를 적었다. 예를 들어 광화문 분국이 관할하는 동아일보 전화번호는 '光1900番(광(화문) 1900번)' 이런 식이기에 명함 속 같은 번호가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주소도 문제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동(洞)'들을 일본식 행정구역인 '정(町)'으로 바꿨기 때문에[43] '공평동'이 아닌 '공평정'으로 적어야한다. 또한 '정목(丁目)'을 'jeongmok' 으로 적었는데 'ㅓ'를 'eo'로 쓰는 것 자체가 해방 이후에 생긴데다가 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54년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을 제정한 후이다. 한국어 발음대로 쓰려면 차라리 'jongmok' 으로 쓰는 게 맞았다.
- 26화에서 독립운동가 이재유가 미야케 교수 집에 숨었다가 미와가 들어닥치기 직전에 학생으로 변장해 탈출하고 미야케는 경찰들을 보고 웃으며 시치미를 뗀다.
→ 전부 오류. 이재유가 미야케 교수 집에 굴 같은 걸 만들고 숨어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나 탈출 과정이 실제와 다르다. 이재유 은신 도중 미야케 교수가 경성제국대학 적화공작 사건으로 체포당했고, 고문을 견디며 이재유 신변에 대해 증언거부를 하는 사이에 이재유가 도망가고 나서야(즉, 시간을 벌어주었다.) 저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 것.[44] 드라마같이 이재유는 쏙 빠져나가고 증거없는 상태에서 미야케 교수가 미와를 비웃으며 실실 웃는 여유있는 분위기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는 백발의 늙은 교수로 나와 미와에게 늙은이 소리를 듣지만 실제로는 미와보다 15살 어린 30대 중반의 젊은 교수였다.
- 36화에서 김두한이 나미꼬를 희롱한 일본인 축구선수들과 싸웠다.
→ 이 역시 김두한 회고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실관계는 확인할 수 없다. 회고에 따르면 상대는 평양 출신 조선인 축구부였다. 싸운 이유도 다르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인기있던 더비인 경성 vs 평양 축구경기에서 평양 팀이 이긴 날 경성 팀 팬이었던 김두한이 종로 어느 바에 술마시러 갔다가 하필 옆 자리에서 축하연을 즐기던 평양 팀을 보고 시비를 걸어 싸웠다고 한다. 한마디로 훌리건 짓. 그리고 평양축구팀은 숭실전문학교, 대성학교[45]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 학교 학생들 항일 의식은 남다른 수준이었다.[46]
- 37화에서 최동열은 일본군의 행진을 본 뒤, 조선총독부의 우민화 정책을 언급하면서 일본이 '학도병'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의 학생들을 총알받이로 밀어넣으며, 조선인들이 말이 자원이지, 실상은 무언의 압력을 받아서 군대에 입대한다고 현실을 비판한다.
→ 물론 조선인 지원병 제도에서 자발적인 입대보다 관의 종용이 더 많았던게 일제 기록에도 보인다. 그러나 조선인들을 만주에 배치한 것은 1941년부터고, 이 때 시점이 중일전쟁이 막 벌어지던 1930년대 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묘하게 고증에 맞지 않는다. 조선인 지원병제도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시행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를 섞은 것으로 보인다.
- 김두한 패 5명과 하야시 패 40명이 장충단공원에서 싸워 김두한 패가 이겼다.
→ 장충단 결투는 물론 하야시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김두한과 하야시 결투는 사실인가? 참조. 하야시를 조선인 선우영빈으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설에 따르면, 선우영빈은 야쿠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별개 인물이라는 것이다.
- 40화에 등장한 신불출의 만담에서 그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나온다.
→ 실제로는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그리고 '구로다 큐이치(玄田牛一)'는 일본 욕설인 '칙쇼(畜生)'를 파자한 것으로,[47] 이를 빗대서 창씨개명을 까는 드립 차원에서 나온 이름이다.
- 41화의 부민관 뱀 소동 사건 직후 ~ 김두한과 황병관과 만난 시간대
→ 묘하게 꼬여있다. 사건 직후 정진영이 김두한에게 신문(작중 시점으로 어제자 신문)을 읽어주는데, 오늘을 기해 국민징용령을 실시한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리고 최동열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정간되었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오며, 김두한 친척들이 김두한의 친할머니에게 김두한에게 창씨개명을 하라고 청을 넣다가 퇴짜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국민징용령은 일본 본토에서 1939년 7월부터 실시되었으며, 창씨개명은 1940년 2월부터 시작되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40년 8월에 정간되었다. 한 회만에 1939년 ~ 1940년으로 시간이 지나간 것일 수도 있겠으나, 작두가 황병관을 소개시켜준다는 언급 이후에 저 장면들이 나왔기에, 거의 비슷한 시간대 라고 봐야 한다. 42화 ~ 44화에서 김두한이 일본 헌병에 붙들린 시간대도 묘하다. 분명 진주만 공습 이전임에도(김두한이 풀려나고 설향과 관계를 청산하는 장면 이후에 태평양 전쟁 발발 장면이 나온다) 벌써부터 조선인들, 심지어 주먹패마저도 징용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두한이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1943년도에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44회에 1941년 ~ 1943년을 압축시켰다고 봐야 한다.
- 41화에서 김두한이 황병관을 소개받고 술을 마시다가 일본 헌병 2명에게 죽을 뻔한 황병관을 구해주었다.
→ 이 역시 김두한 회고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태릉선수촌 선수들 인터뷰를 담은 책에서 황병관이 한 이야기를 보면, 유명한 싸움꾼인 김두한과 식당에서 시비가 붙었고[48] 그가 발차기한 것을 그대로 잡아서 쓰레기통에 거꾸로 쳐박았으며 나중에 김 모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 패 줬을 걸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사실 관계야 전혀 알 도리가 없지만, 여기서 핵심은 실제 자신을 구해 준 사람에 대해서 저렇게 말하지는 못할 거란 점이다. 그래서 김두한 회고 및 그것을 바탕으로 한 극 중 내용이 거짓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건달인 김두한이 헌병대 대위를 팼다는 건, 요즘으로 말하면 조폭이 검사를 반 죽도록 팬 일과 마찬가지다. 그런 대사건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리는 없고, 설령 맞은 게 쪽팔려서 외부에는 덮었다고 쳐도, 어떤 일이 있다하더라도 김두한이 살아서 나올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었다.
- 44화 ~ 45화에서 김두한을 처음 본 신영균이 애송이라면서 무시한다.
→ 실제 신영균은 김두한보다 불과 1살 많은 1917년 생으로 그런 말할 입장은 아니었다. 물론 초면이니 만큼, 나이를 몰랐을 수도 있다.
- 45화 ~ 46화에 등장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단게 국장과 만나 담판을 짓는다.
→ 전부 거짓이다. 극 중 김두한이 단게 국장에 대해 증언한 것이 실제 인물과 전혀 맞지 않다. 단게가 65세 ~ 66세 정도인 노인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1899년 생, 그러니까 저 당시 40대 초반에서 중반 넘어가는 나름 젊은 나이였다. 만약 진짜 만났다면 어지간한 노안이 아닌 이상은 저렇게 증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준영이란 사람이 조선총독부 보안과장 야기와 우미관 패를 연결시켜 로비를 했고 이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니시히로가 징용에서 벗어나게 봐준 것이다. 단게가 개입한 흔적은 전혀 없다. 하나 더하자면 극에서 단게는 순사부터 올라간 인물이라 하는데 실제로는 도쿄대학 졸업에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출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식 관료제가 말단 출신들에게 절대 만만하지 않다.
- 50화에서 미와가 김두한을 완전히 죽이지 못하면서 "건국동맹이나 체포하라고!"라고 한다.
→ '건국동맹' 이란 용어 자체가 해방 후에 생겼다. 보안을 위해 이름없는 비밀결사로 있다가[49] 광복 후 제대로 활동을 할 때 필요해서 지은 이름이 '조선건국동맹' 이다.
- 50화에서 8.15 광복 당일 군중들이 거리에 태극기와 플랜카드를 들고 만세를 부른다.
→ 명백한 오류. 실제론 별 일 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서서히 알기 시작했다. 애당초 35년을 일제 지배를 받았는데 일본 항복 소식을 들었다고 곧바로 태극기와 그럴듯한 플랜카드를 만들어 나올 수가 없다. 다만 상술한 오류들과 달리, 시대가 변하고 드라마도 2부로 넘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로 여길 수 있다. 자세한 것은 8.15 광복 참조.
3.3. 2부
3.3.1. 군정기
- 해방 이후 김두한이 절에 몇 달 있다 돌아올 때, 아직 김을동은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을동이 태어난 후에 미군이 들어왔다.
→ 김을동은 ''' 1945년 10월 10일 생[50] 이다. 그러니까 해방 이후 두 달도 채 안지났을 때 태어났다. 그리고 미군은 김을동이 태어나기 한 달 전에 들어왔다. 다만, 극 중 배경은 초가을인데 촬영 당시가 한겨울이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설정한 듯 하다.
- 김두한 패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자경단 일파로 멋대로 칭하고 활동하던 중, 경성에 있던 일본 해군 무관부라는 곳을 습격한다.
→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해군이라면서 죄다 일본 육군 옷을 입었다.
- 김두한이 박용직과 김후옥을 해방 이후 처음 만났다.[51] 그리고 박용직이 김후옥보다 서열이 높다.
→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52] 그리고 실제로는 김후옥이 나이도 세 살 많고 사회적 지위도 더 높았다. 박용직에게 형님 운운하며 굽히는 건 오류.
- 삼수가 김두한의 지시를 받고 YMCA 회관에서 나오는 박용직을 자동차에 태우고 우미관으로 간다.
→ YMCA(현재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 69)와 우미관(현재 주소: 서울 종로구 종로14길 4)은 종로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마주보고 있으며, 직선거리로 140m 정도로 걸어서 2분(...) 걸린다.
- 시라소니가 김두한을 만나러 우미관에 갔다가 김두한 부하들과 싸우는데, 중간에 우미관과 옆 건물 사이 틈으로 타워크레인(...) 이 보인다.
→ 당연히 저 당시 우리나라에 타워크레인은 없었다.
- 해방 공간에서 활약한 조선공산당 산하 청년 단체가 '조선청년전위대'이다.
→ 전위대는 김두한이 책임자였다가 1945년 말에 우익으로 전향하면서 곧바로 사라졌으므로 고증오류다. 극 중에서는 김두한이 탈퇴, 해체 선언을 했으나 공산당측에서 이를 무시하고 새 전위대장에 정진영을 임명하여 활동을 계속 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 단체는 '조선민주청년동맹'이다.
- 김두한이 우익 진영에서 활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야쿠자들과 아편 밀매를 시도한다.
→ 실제 있던 일을 각색한 것이다. 중앙신문[53] 1946년 2월 15일 기사를 보면 김두한과 부하들, 그리고 일본인 몇 명이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는데 무죄 판결로 석방되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단, 이 때 조병옥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것은 드라마의 각색.
- 대한민청 결성 이후 심영을 습격했다.
→ 실제 심영 습격은 1946년 3월이고, 대한민청 결성은 한 달 뒤인 4월이다.
- 신불출이 1946년 6.10 만세 운동 20주년 기념주간 행사에서 태극기 4괘를 강대국으로 묘사하면서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만담을 하다가 극장에서 김두한 패 습격을 받고 납치되어 다리 한 쪽이 부러졌으며 이후 바로 월북했다.
→ 부분적으로 사실과 다르다.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김두한과 그 부하들에게 총맞은 것. 총탄은 왼쪽 어깨와 왼쪽 팔 옆구리를 뚫었으며 신불출은 도망가다가 과다출혈로 쓰러졌다. 직후 김두한과 그 부하들이 쫒아가 죽이려고 했으나 주변 목격자들 때문에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저 드립친 걸로 치안 교란, 연합군 비방 등의 죄로 구속당한 뒤 재판을 받아 1년 징역 살다가 1947년에 출소한 후 월북했다.
- 김두한과 대한민청대원들이 극좌 군대인 국군준비대를 습격해 해산시켰다.
→ 완전 거짓. 애초에 국군준비대는 극좌도 아니었고 김두한 쪽에서 해산시킨 것도 아니다. 물론 기본 성향은 좌익 쪽이었는데 신탁통치 반대노선이었으며 구 일본군에 만주군 출신자까지 있는 등 생각보다 다양한 계열이 구성원으로 존재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반탁 중도파". 또 당시 상황을 보면 해방 직후 남한에는 국군준비대를 비롯, 학병동맹 등 무려 아흔 여섯 무장 단체들이 난립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러한 단체들의 움직임을 용인하지 않았으며 1946년에 문제가 있는 단체들을 해체하였다. 이후 '사설군사단체 해체령'을 발포함과 동시에 '남조선 국방경비대 설치법'을 마련하였다. 이에 온건한 군사 단체는 남거나 국방경비대로 흡수되었는데 이런 흐름 속에서 국군준비대 역시 해체했던 것. 다만 1946년 2월, 우익 요인 암살을 위해 우미관 부근에서 밀회하던 국군준비대원들을 종로경찰서에서 체포한 것을 보아 국군준비대 중 김두한 패를 노린 대원들이 있었다는 건 추측할 수 있다.#
- 개코가 파업 현장에서 성추행 누명을 쓰고 김두한에게 사살당했다.
→ 역시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개코 자체가 이환경이 만든 인물이다. 이 에피소드는 김두한이 얘기한 일화에서 딴 것이다. 부하들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탓에 책임을 물으려고 부하들을 창고에 가둔 뒤 불을 질렀다는 것.(...) 현실성도 없고 내용도 썩은 이 따위 이야기를 '성추행으로 오인받자 일벌백계'로 바꿔 묘사한 것이며 극 중에서 이 부하들을 한 인물에 투영한 것이다.
- 대한민청 사건 당시 정진룡 살해 정황.
→ 전체 왜곡됐다. 자세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부분을 참조. 그리고 김천호의 죽음도 오류이다. 실제 인물은 이 때 기적적으로 살았다.# 다만 기사에서 중상이라고 나온 것을 보아 얼마 뒤에 죽었을 가능성도 크다.
- 정진룡 살해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김두한이 법정에서 할복 소동을 일으켰다.
→ 실화이다. 중앙신문 1948년 2월 13일 기사를 보면 군정재판을 받을 수 없다며 깡통 조각(...)으로 배를 3번 그었다고 한다. 하지만 피만 좀 났을 뿐 큰 상처는 아니었다고.(...)#
- 대한민청 사건으로 수감당한 김두한이 오키나와 형무소로 옮겨가 미군 병사와 킥복싱을 했다.
→ 역시 거짓. 당시 신문자료나 청년운동 관계 기록을 보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태원동 미군 형무소로 옮겼다가 형 확정 이후 다시 대전형무소로 옮긴 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이나 10월에 가석방된 것으로 보인다.# 간 적도 없는 오키나와에서 결투를 할 리가 없으니 명백한 거짓. 그리고 킥복싱 등장은 1960년대다.
3.3.1.1. 심영 습격 사건 관련
- 김두한 패가 중앙극장에서 심영의 공연을 방해한 뒤 연막탄을 터트렸고, 상하이 조가 도망가는 심영을 향해 총을 쐈다.
→ 실제 1946년 3월에 일어난 심영 저격과 4월에 일어난 중앙극장 습격 사건을 합친 것. 심영은 국립극장[54] 에서 연극 '님'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광통교에서 김두한이 직접 쏜 총에 맞았다. 중앙극장 습격은 심영 저격과 별개로 좌익 세력이 한 중앙극장 공산당 홍보 영화 상영을 방해한 사건으로 야인시대 심영 저격 초반부(극장 습격 부분) 에피소드로 들어갔다. 장소가 중앙극장인 점, 연막탄을 터트려 영화 상영을 방해한 점, 연막탄을 터뜨릴 때 수류탄 터트린다고 외친 점, 마무리로 좌익 홍보 영화 필름을 파기하기 위해 영사실을 폭파시켜버린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김두한이 스스로 테러했다고 한 사람들 중 친일 행위를 저지른 것은 심영이 유일하기 때문에, 두 사건을 섞어 극적으로 각색하고 심영을 극단적으로 비참하고 웃기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심영 습격 사건 당시 김두한이 극장에 들어가기 전 문영철과 대화하면서 "도대체 심영이나 문예봉이란 배우가 저렇게 인기가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한다.
→ 그 시대에 유명했던 배우들을 마치 처음 알 듯이 말하는 것은 좀 어색하다. 실제 심영이나 문예봉은 습격 사건 때에는 약간 주춤했어도 엄연히 탑스타였던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김두한은 극장(우미관)을 무대로 활약했으며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당시 최고의 인기배우 중 하나였던 김승호를 데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정도로 연예계 발이 넓었다. 2010년대 중후반으로 비유하면 연예계 지인이 많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치매라도 걸린 듯이 "와, 대단한데? 송중기와 아이린이 저렇게 인기가 많냐?"하는 느낌이다. 단, 이 대사는 64화 타겟으로 등장한 심영[55] 과 그 동료 문예봉같은 배우들 위상을 방영 당시 잘 몰랐던 시청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넣은 극적 허용이다. 하지만 그럴 거였으면 문영철과 김두한 대사를 서로 바꾸거나 '역시 심영이구만...' 하는 정도로도 충분했다는 점에서 확실한 오류.
- 심영이 고자가 되었다.
→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하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그리고 고자설은 드라마 제3공화국을 집필한 정치인 출신 이영신 작가가 책 《비밀결사 백의사》에서 처음 언급한 것이다. #
- 심영이 총 맞은 이후 입원한 병원이 백병원이다.
→ 실제로는 김성진 외과.『高協(고협)』 沈影氏(심영씨) 拳銃怪漢(권총괴한)에게 被襲(피습) 백인제의 병원 이름은 당시엔 '백인제 외과의원' 이었고 백병원으로 정식 출범한 것은 1946년 12월이다. 단, 백병원 입원설은 김두한 증언에 따른 것.
3.3.2. 정부 수립 이후
3.3.2.1. 자유당 정권기
3.3.2.1.1. 6.25 이전과 6.25 당시
- 전쟁이 일어난 다음 날 문영철 생일이라고 다같이 놀자고 할 때, 김두한이 "이번에 죽다 살아왔으니 한 번 제대로 놀아보자." 고 한다.
→ 아마 대한민청 사건으로 수감되었다 풀려나온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그런데 그 사건과 6.25는 2년 차이가 있으므로 새삼스레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어색하다. 아마 극 중에서 대한민청 사건과 6.25 발발 사이 회차가 2 ~ 3회 정도라서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냥 그러려니 넘어갈 거라 생각한 듯 하다.[56]
- 한국전쟁 개전 직후 이승만이 6월 26일 대국민 담화를 녹음하고 6월 27일 새벽에 서울을 떠나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는 라디오를 듣고 침울해한다.
→ 명백한 오류. 이승만은 6월 27일 피난 이후 도착한 대전에서 서울로 담화를 올려보냈다.
- 최동열이 중앙방송국에 가서 녹음 방송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노해 방송용 테이프를 뜯어내 방송을 중단시킨다.
→ 실제로는 혼란 속에서 그래도 방송인으로서 사명을 가진 일부 직원들이 방송국에 남아 임시 새벽 방송을 계속 하면서 자연스럽게 끝났다.
-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면서 차 안에서 이기붕에게 라디오를 틀라고 할 때 '라지오'라고 한다.
→ '라지오'는 일본식 발음으로, 구한말부터 미국에서 쭉 살았던 이승만이 일본식으로 발음할 리가 없다.[57] 즉, 고증에 맞게 한다면 '레이디오'라고 발음해야 한다.
- 인민군 군관이 김두한 집에 들어왔다가 김좌진 사진을 보고 경례를 올리고 갔다
→ 김좌진은 공산주의자들과 다툼 가운데 암살되었고 김좌진이 공산주의 진영에 저지른 테러들도 만만치 않다보니 북한에서 김좌진은 민족 영웅과는 한참 먼 이미지였다. 특히나 저 군관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갑산파 출신이었다면 현실에서는 남은 김두한 가족들이 죄다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 황병관이 1950년 8월에 김두한 패와 함께 노동자들 권익을 보호하려다 부산 깡패 고사이마찌(고영구)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58]
→ 실제로는 1952년에 사망했다. 그것도 적산가옥 문제로 시비가 붙어 패싸움을 벌이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고사이마찌 원래 별명은 마사이찌이고 이름도 고영목이다.[59]
- 김두한이 6.25 전쟁 중 부산 항만 파업을 이끌었다
→ 파업 자체는 사실인데 이끈 게 김두한이라는 주장은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있었던 그 유명한 4달러 에피소드는 김두한이 DBS 라디오 《노변야화》에서 한 이야기를 기반으로 각색한 것이다. # 당시 김두한은 100원이었던 임금을 400원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원래는 800원을 불렀다가 400원으로 타결했다고 하니, 협상 개연성상으로는 실제 김두한 발언이 훨씬 낫다. 물론 김두한이 노변야화에서는 허세와 허풍을 잔뜩 섞어서 썰을 푼게 많지만 말이다. 이후 1987년 발간된 홍성유의 소설 《장군의 아들 김두한》에서는 달러로 협상 통화를 바꾸어 놓았다. ##
- 김두한이 부하들과 학도병을 데리고 영천 전투 등에 참전했다.[60]
→ 이는 김두한 회고에만 나오는 내용이 아니며, 당시 참전한 군인들 중 증언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기록은 현재 확인이 안 된다. 당시에 우익청년단체원 중 일부가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단지 김두한이 참여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
- 88화에서 국민방위군을 설치하고 장정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경찰들 차에 붙어있는 권고문에 '...(생략) 중공 괴뢰군이 압록강을 넘어 지금 평양을 지나고 있습니다. (생략)...' 로 적혀있다.
→ 당시 맞춤법으로는 '읍니다'가 맞다.
3.3.2.1.2. 6.25 이후
-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두한 기호가 1번이다.
→ 실제로는 3번이었다.#
- 건중친목회를 운영하는 위치에 섰지만, 똑똑한 홍영철에 열등감을 느낀 김관철을 김두한이 정신 개조하려고 그가 보는 앞에서 허공에 총을 쏘았다.
→ 김관철 살인미수사건을 저렇게 묘사했다. 실제론 밀가루와 설탕 입찰, 즉,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배경이며 김두한이 열받아서 권총으로 위협사격을 한 사건이다. 참고로 김두한은 대질심문 중에서조차 또 한 차례 김관철을 패버렸다고. 즉, 드라마처럼 계몽(?) 목적은 전혀 없었다.
- 자유당이 김두한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독재를 싫어하는 김두한이 거절했다. 그러자 김관철 살인미수 사건으로 협박하여 김두한은 할 수 없이 입당했다. 그리고 반독재 활동으로 제명당할 상황에서 탈당했다.
→ 역시 거짓. 현실은 자유당 공천을 받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이에 깽판쳐서 제명당했고(...) 이후 일단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한 다음 다시 들어간 것이다.[61] 당시 자유당에 돈보따리 들고 공천시켜달라는 사람들이 즐비한 상태에서 굳이 김두한을 공천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나중에 탈당한 것도 이범석 및 족청계 세력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이 이들을 대거 토사구팽하였고, 이범석과 가까운 김두한 역시 숙청 1순위에 들어갔기에 위기감을 느낀 김두한이 스스로 나온 것이다.
- 자유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영입하려 했으나 김두한 본인이 거절했다.
→ 실제로는 정반대로 둘 다 꺼렸다. 상식적으로 테러로 악명이 높고 나이까지 상당히 어렸으며[62] , 배운 것도 하나 없는 건달 출신에 각종 범죄 및 깡패들과 엮인 관계가 현재 진행 중인 사람을 환영할 곳은 거의 없다. 단, 야당 의원들과 가깝게 지내기는 했고 10년이 지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드디어 민주당 후신이자 제1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 이기붕이 김두한이 자신들과 뜻을 달리한다고 아쉬워하면서 이승만이 내무부 장관 직까지 맡기려 했다고 언급한다.
→ 이 역시 김두한의 허풍에서 비롯된 거짓. 아무리 이승만이 망령났다 해도 이런 제의를 했을 가능성은 없다.
- 홍영철은 김두한에게 끝까지 우호적이었고 유지광에게 자신들과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으나 거절했다.
→ 실제로는 홍영철도 유지광과 함께 반공청년단에 활동했고 군사정권때 수감되었다.[63][64]
- 동대문 패에 10공주파 두목 이영숙이 소속했다.[65]
→ 이영숙은 가상인물이다. 원래 같은 작가가 썼던 무풍지대에서 주인공 유지광과 멜로를 위한 창작 캐릭터였는데, 야인시대 2부 후반이 무풍지대를 사실상 베끼면서(...) 같이 딸려온 것. 단, 야인시대 주인공이 김두한이기에 유지광과 러브 스토리는 빠졌다.
- 시라소니 린치 사건 당시에 시라소니가 야외에서 동대문파 습격을 받았다.
→ 실제로는 실내에서 당했다고 한다.
- 동대문파 린치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바로 백병원에 입원한 시라소니에게 이석재가 찾아와 쇠절구공이로 다리를 부러뜨리는 등 2차 린치를 가한다.
→ 이석재가 백병원에 들이닥쳐 2차 가해를 시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 전에 시라소니는 종로 5가 반도병원에 입원했다가 옮겼는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한 실제로는 방심한 틈을 타서 시라소니가 깁스로 이석재 얼굴을 쳤으며 그 소란을 들은 간호사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
- 이승만의 종신제 집권을 위한 개헌을 추진할 때 김두한이 장경근 의원을 때리고 경무대에 불려가 이승만 면전에다 "손문(쑨원) 선생도 장개석(장제스) 선생에게 정권을 물려주었고요" 라고 말한다.
→ 실제로 쑨원은 권력을 물려주기는커녕 장제스를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쑨원 사후 후한민,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과 경쟁하면서 정권을 쟁취했다.
- 사사오입 개헌 당시 김두한이 자유당 계략으로 감금당해 국회에 못갔다.
→ 실제로는 멀쩡히 국회에 가서 개헌안 투표를 했다. 改憲案表決(개헌안 표결) 이 날 議事堂 內外表情(의사당 내외표정) 기사 참조. 한편 원작격인 무풍지대에서는 김두한도 표결에 참가하여 반대표를 행사했다.
- 김기홍이 자유당 몰락을 예견하고 자유당과 관계를 끊자 하지만 이정재가 듣지 않아 동대문 사단을 떠났다.
→ 이 역시 각색으로 진짜 이유는 알 수 없다.[66] 그리고 시기도 실제와 다르다. 극 중에서는 이정재가 자유당에게서 지령받은 제3요인 암살을 김동진에게 맡겼으나 배신당한 이후에 김기홍이 떠났지만, 실제로는 그 전이며 저 암살요인 명단에 김기홍도 있었다. 要人暗殺陰謀(요인암살음모)했다[67]
- 사사오입 개헌안을 부결에서 가결로 바꿔 선포할 때 이기붕이 바로 나간다.
→ 실제로는 이기붕이 퇴장은 커녕 국회의장으로서 이후 회의를 본인이 진행했다.[68] 애초 통과 선포로 회의를 끝낸 게 아니었고 여야 의원들끼리 사사오입 적용에 관해 격렬하게 토론을 했다. 이외의 국회의원들끼리 다툼 및 방청석 내 소란은 사실이다.
- 이전에는 영락없는 까막눈으로 나왔던 김두한이 국회의원이 된 후 자신의 사무실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이 나온다.
→ 설정 미스나 고증오류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실제로 김두한은 정치인 시절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글은 깨쳤으며 이후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응시해 합격하였다.
- 1955년에 일어난 단성사 저격 사건 당시 권력의 뒷배로 수사 도중 담당 검사가 바뀌고 원래 해당 사건 담당이었던 김윤도 검사가 분노해 한격만 검찰총장에게 바로 사표를 낸다.
→ 현실에서는 그 후에도 검찰에 있으면서 다른 사건들을 맡다가 지방으로 전보받자, 그 해 말에 사직하였다. 그리고 실제로는 한격만이 김윤도보다 먼저 검찰에서 나왔다. 김윤도 검사 한자 이름도 원래는 '金允燾'인데 극중에서는 '金閏道'로 잘못 나왔다.
- 시라소니와 이정재가 직접 맞붙었다.
→ 실제로는 그런 적이 없다. 현실에서 이정재 싸움 실력은 시라소니, 김두한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편이다. 이 장면은 시라소니 역 조상구가 이정재 역 김영호와 한 번 붙게 해달라고 PD에게 이야기를 해서 넣은 것.
- 김희갑 구타 사건이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1956년에 일어났다.
→ 김희갑 구타 사건은 1959년의 일이다. 단, 야인시대에서는 1956년 선거 당시 자유당과 동대문 일파 만행을 세세하게 다뤘고 이런 분위기를 확실하게 나타내려고 시간대를 바꾼 듯 하다.
- 1956년 7월 27일에 국회의원들이 지방선거운동 탄압을 규탄하며 거리에서 시위할 때 저지하는 경찰 수십 명을 김두한 혼자서 때려 눕혔다.
→ 실제 시위에서 몸싸움이 있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극중 묘사는 김두한이 동아방송 프로그램 노변야화 76회[69] 에서 과장한 것을 더 부풀린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다룬 1956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따르면 지방자치법안 문제로 야당 의원들이 가두시위를 할 때 사복경관과 무장경관들이 몰려와서 김선태 의원을 잡아가자 행진을 시작했는데, 그 때 선봉에 서서 경찰들하고 몸싸움했던 인물이 김두한과 이철승이었다. 그리고 경찰에서 이 시위에 야당 책임을 묻겠다면서 경찰 14명이 다쳤다는 이유로 김두한 등 5인에게 소환장을 보냈는데 김두한은 이를 무시했다. 그걸 가지고 김두한이 14대 1로 싸웠으며 다시 자기를 소환한 경찰들을 팼다고 과장한 것. 현실적으로 저게 말이 될 수가 없다. 저걸로 소환이 안 될 일이었다면 그 동안 김두한이 경찰로 끌려간 건 더 센 놈이 있어서였겠나? 물론 독재에 맞선 시위에서 일어난 일이었기에 오히려 김두한이 잘했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나 무쌍과는 좀 거리가 있는 사건이다. 그리고 김두한 복장도 오류이다. 극 중에서는 모자에 작업복을 입고 워커를 신었으나 실제로는 반팔 와이셔츠에 양복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실제 당시 사진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직후 충정로 도끼 사건이 일어났다.
→ 실제 두 사건은 전혀 관계없다. 시기상으로도 1년 4개월이나 차이난다. 장충단 집회 방해 사건은 1957년 5월, 충정로 도끼 사건은 1958년 9월.
- 충정로 도끼 사건때 정팔과 맨발의 대장도 참여했고 이후 구속당했다.
→ 저 둘은 애당초 피고인이 아니었다. 당시 정팔은 손을 씻고 사업하고 있었고, 맨발의 대장은 저 사건을 다룬 기사에 피고인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삼우회 일원이었던 아오마스 심종현이 그 때 명동파 편에서 싸우다가 같이 들어갔는데,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들을 보면 모두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두한이 '노동당' 후보로 나왔다.
→ 실제로는 '노농당'이었다. 아마 '노동당'이 일반적으로 익숙해서 '노농당'을 오기로 본 모양인데, 당시엔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지나 사회에 레드 컴플렉스가 극심해서 대놓고 '노동당'을 걸었다가는 아마 국가보안법으로 철퇴를 맞았을 것이다.
- 경찰이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이전에 첫 발포를 했고 4.18 당시 깡패들이 대낮에 습격했으며, 김주열 시신 발견 후 2차 시위가 벌어진 마산에 최인규가 직접 내려와 지켜봤다.
→ 고대생 습격 사건은 저녁에 일어났다. 그리고 최인규는 저때 마산에 가지 않았다.
- 122화에서 이기붕 일가가 단체로 사망하는 장면에서 이기붕 둘째 아들이자 이강석 남동생인 이강욱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으로 나왔다 → 실제 이강욱은 1940년생이였으며 1960년 사망당시 막 성인이 된지 얼마 안된 21살(만 19세)였다. 물론 작중에서 중요한 역할이 아니여서 그런지 대충 캐스팅했을수도 있다. 일단 이강욱 역은 당시 12~15살 정도였을것으로 보인다.
3.3.2.2. 군사 정권기
- 이화룡이 5.16 군사정변 이후에도 잡혀가지 않았다.
→ 실제로는 잠시나마 잡혀갔다. 얼마 안 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박치옥 대령이 같은 최고위원이자 이화룡의 소학교[70] 동창 송찬호 준장이 부탁해서 풀어주긴 했는데, 이러한 얘기를 들은 차지철 대위가 분노해 결국 중앙정보부로 찾아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 중령에게 자초지종을 말했고 이에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직할 부대를 동원해 이화룡을 다시 잡아들인다. 자세한 내용은 MBC 드라마 《제3공화국》 6회에 나온다.
- 이정재 및 정치깡패들이 혁명재판이 끝난 후 형무소에 나와 거리에서 조리돌림당했다.
→ 실제로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지 불과 5일 뒤인 1961년 5월 21일에 국토건설단이 있던 덕수궁에서 출발했다.
- 신정식이 돼지라는 별명답게 살집이 상당하며 1961년 12월 21일에 임화수, 곽영주, 최인규와 함께 사형당했다.
→ 실제로는 오히려 일반인들과 비교해도 꽤 마른 편이며 돼지란 별명은 성격 때문에 붙은 것이다. 또한 실제로는 이정재와 같은 날인 10월 19일에 사형당했다.
- 신정식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때, 재판장이 "신정식, 일명 돼지"라고 한다.
→ 당연한 거지만, 실제로는 그냥 본명만 불렀다. 단, 돼지의 이름이 극 중에서 거의 안 나왔기 때문에 시청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 저렇게 대사를 쓴 듯 하다.
- 1963년에 애국단을 조직한 김두한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최동열을 찾아갈 때 한일협정 반대시위를 목격한다. 그리고 저 때 최동열이 "(군사정권에서) 정보기관을 만들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감시할 것이다." 라고 한다.
→ 물론 저 당시도 한일간 물밑 접촉이 있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반대시위가 거세지기 시작한 것은 1년 뒤인 1964년이다. 또 중앙정보부는 그보다 2년 전인 1961년 5.16 직후에 생겼다.
- 국회 오물 투척사건 당시 김두한이 탑골공원 화장실에서 오물을 펐다.
→ 실제로는 자택 변소에서 펐다.
- 오물 사건 당일, 김두한이 검은 양복을 입고 국회에서 연설한다. 그리고 연설 도중 '국무위원들을 피고로 다루겠습니다! 죄를 지은 피고!' 라고 할 때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의원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 실제 그 대목에서는 의원들이 웃었다. 당시 속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두한이 똥물투척 직전에 연설을 늘어놓은 것은 사실이나, 진지하고 폼나는 연설은 아니었다. 도리어 장황한 횡설수설에 가까웠으며 자극적이고 풍자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이를 듣던 의원들은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또한 실제 당일 김두한 양복은 회색이었다.
- 오물 사건 이후 김두한이 조사받으면서 검사에게 "우리 안동 김씨 가문 조부님 되는 분이 김옥균"이라고 말한다.
→ 물론 같은 가문 할아버지 뻘 친척은 맞다. 하지만 둘은 친조손 관계가 아니다. 김옥균과 김두한은 12촌으로 촌수가 꽤 멀다. 그런데 저 말만 보면 자신의 친할아버지라고 오해하게 할 만 하다. 1부 40회에서도 김옥균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땐 일가, 조부 뻘이라고 제대로 언급하였다.[71]
- 1966년 12월에 김두한이 석방된 직후 차를 타고 가면서 이찬오 보좌관에게 '유진산이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실제 유진산이 신민당수가 된 것은 약 4년 뒤인 1970년이며 애초에 신민당 자체가 1967년에 창당되었다.
- 1967년 초에 김두한이 박정희를 만나 앞으로 다시는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다.
→ 실제로는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 번 더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 김두한이 절에서 그 동안의 잘못을 참회하다 거리에서 쓰러져 죽었다.
→ 사실과 다르다. 그 죽음에 대해서 말이 많기 때문에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저렇게 설정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1972년 11월 18일에 김두한이 주먹계 옛 후배였던 조일환을 만나고 헤어지던 중에 센트럴 호텔 객실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이 때 곧바로 숨을 거둔 것은 아니었으나 신원 미상의 누군가에 의해 고려병원으로 옮겨진 후 며칠이 지난 21일에 숨을 거두었다.
- 마지막에 김두한 장례 행렬 장면을 자세히 보면 멀리 현대에 볼 수 있는 아파트가 보인다.
→ 불멸의 크리넥스같은 장면이다. 사실 김두한이 사망한 1972년에 서울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을 가진 아파트들이 어느 정도 꽤 있긴 했다.[72] 하지만 10몇 층이 넘어가는 고층아파트는 아니었다. 즉, 아파트 자체는 나와도 되지만, 그게 고층이면 안 된다. 그런데 극중에선 고층이므로 고증 오류가 맞다. 사실 옥의 티로 봐야 하는 게 맞지만.
3.4. 문화예술 관련 고증
3.4.1. 음악
근현대사 시대극인만큼, 이따금씩 당시에 유행했던 가요들이 나온다. 그런데 실제와 연도가 맞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 4화에서 신마적이 종로회관에서 술 마시며 울분을 토할 때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사의 찬미》이다.
→ 극 중 아직 1926년 6월 10일에 일어난 6.10 만세 운동이 나오기 전인데, 《사의 찬미》 발매는 그 해 8월이다. 그리고 가사도 훗날에 달라진 버전으로 나왔다.
- 극 중에서 김두한이 종로 2정목을 거쳐 조선 주먹 황제가 되는 시기는 만 18세인 1936년이고 드라마상으로는 24화인데, 그 이전 회차에서 1936년 이후 발매된 노래들이 나온다.
- 15화에서 아직 쌍칼 부하였던 김두한이 신마찌 야쿠자들로부터 조선인 여성을 구하고 다방에서 부하들과 함께 그 여성에게 돈을 주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는 1940년에 나온 이화자의 《화류춘몽》이다.
- 16화에서 구마적을 지원하러 온 주먹패들을 구마적이 맞이할 때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왈츠 II》가 나온다. 이 음악을 발매한 시기는 1956년이고, 초연은 1988년에 했다.
- 25화에서 나미꼬와 김두한이 처음 만나는 장면[73] 과 35화에서 박인애가 결혼 직후 친구와 커피 마실 때, 그리고 41화에서 박인애 오빠가 김두한에게 박인애 편지를 전해줄 때 카페에서 나온 음악이 그리스 국민 작곡가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이다.
→ 이 곡은 애초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의 한 젊은 레지스탕스를 기리며 만든 노래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표하였다. 당연히 일제 치하 조선에서 나올 수 없다.
- 32화에서 와싱턴이 담배꽁초 버리면서 부르는 노래가 백년설의 《대지의 항구》이다.
→ 4회 차 뒤인 36화에서 우미관에 영화 《역마차》 간판이 걸려있고 같은 회차에 종로회관에서 가수가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을 부르는 것을 보아 36화 시간대는 1939년인 듯 한데[74] , 《대지의 항구》 발매는 2년 뒤인 1941년이다.
- 52화에서 우미관 패와 명동 패가 술을 마실 때와 68화에서 금강이 술집에 있을 때 흘러나오는 노래, 그리고 64화 첫 장면에서 시라소니가 공산당원들과 싸운 뒤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이다.
→ 앞서 말한 시기들은 김두한이 대한민청 사건으로 구속당하기 한참 전으로 최소 1947년 이전이다. 그런데 《가거라 삼팔선》 발매 시기는 1948년이다. 극 중 1948년은 76화 ~ 79화이므로 그 이후에 나와야 맞다.
- 마지막회에서 1966년 말, 김두한이 출소 후 차 안에서 보좌관들과 대화할 때 BGM이 《새마을노래》이다.
→ 이 노래는 1972년 처음 나왔으며, 새마을운동 자체도 1969년에 관련 법을 제정한 뒤 1971년부터 시행한 것이다. 고증오류이긴 하지만, 이는 한국 사회가 이제 본격적으로 경제개발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분위기를 나타내기 위한 극적 허용이다.
3.4.2. 영화
주먹 시절 김두한 주 무대가 영화관인 우미관이니만큼 극장 내외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오류가 많다.
- 일제 강점기 영화관 객석은 나무 의자였지만 극 중에서는 안락한 의자다. 하지만 당시 내부 촬영이 가능한 영화관들 중 일제때 모습을 하고 있는 영화관은 없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
3.4.2.1. 간판
- 극 중 1936년 경인 14회 ~ 17회에[75] 《임자없는 나룻배》[76] 간판을 걸어놓았다.
→ 이 영화는 1932년에 개봉한 작품으로, 한참 예전 영화를 메인으로 홍보할 리 없으니 오류이며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우미관이 아닌 단성사에서 상영했다. 사족으로 우미관이 철 지난 영화를 틀어준 적이 있긴 했는데, 그건 1959년 화재 후 YMCA 뒤로 옮겨 재개관 했을 때 이야기다.
- 김두한이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창단한 44화 ~ 46화에 1941년 개봉한 《반도(半島)의 봄》 현수막이 보인다.
→ 이 영화는 명치좌[80] 에서 상영했다. # 더군다나 이 《반도의 봄》은 해방 이후 장면에도 더 등장하는데, 특히 53화와 54화에서는 아예 메인 간판이다.(...) 그리고 42화부터 현수막으로 나왔다가 44화부터 47화까지 메인 간판으로 등장하는 《선라이즈》는 무려 1927년 영화이다.[81]
- 1945년 해방 전후를 다룬 50 ~ 51화에 《복지만리(福地萬理)》 현수막을 펼쳐놓았다.
→ 《복지만리》는 1941년작이며 보총극장[82] 에서 틀었다. # 그리고 이 영화는 조선인 만주 이민 장려를 위한 친일 영화로, 해방 이후에도 걸어놓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56화부터 60화까지 《자유만세(自由萬歲)》 간판과 현수막이 보인다.
→ 이 영화는 1946년 10월에 개봉한 것으로 같은 해 4월에 있었던 대한민청 결성(60화) 및 3월에 있었던 심영 습격 사건(63 ~ 64화)[83] 보다 이전 회차에 보이는 것은 고증오류다. 60화부터 보이는 《안중근 사기(安重根 史記)》는 3월에 개봉했으므로 시기상 적절하다.
- 김두한이 1954년 국회의원 당선 후 우미관 앞에서 종로구 구민들에게 감사 인사 퍼레이드를 하는데, 우미관 간판의 영화가 《성벽(城壁)을 뚫고》이다.
→ 이 영화는 1949년작이며, 당연히 저 시기에 걸려 있을 리가 없다. 사족으로 저 당선 인사를 할 때 드라마에서는 중절모를 썼지만, 실제로는 맨머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