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1. 역대 성적
- 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28위
1.1. 역대 득점
2. 1954 스위스 월드컵
1회 대회인 1930 우루과이 월드컵부터 3회 대회인 1938 프랑스 월드컵까지는 일제강점기였던 관계로 월드컵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1950 브라질 월드컵 당시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다. 그렇게 1~4회까지 내리 불참한 이후 5회 대회인 1954 스위스 월드컵에야 처음으로 출전 신청을 했다. 당시 대회는 16개국 출전이었는데 이 중 1장은 개최국 스위스의 몫으로 돌아갔고 또 나머지 1장은 전 대회 우승국인 우루과이의 몫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14장을 놓고 예선을 치르는데 아시아에도 1장의 출전권이 부여되었다.
당시 아시아는 지역예선 13조에 편성되었는데 이 때 출전 신청을 한 나라는 대한민국, 일본, 대만이었다. 그러나 예선 경기를 치르기 직전에 대만이 돌연히 기권을 선언하면서 결국 예선전은 한일전으로 압축되었다. 본래 예선전은 홈 & 어웨이로 치러야 했으나 반일주의자였던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13] '''"왜놈들이 이 땅을 밟게 할 수는 없다!"'''고 강경하게 맞서 결국 2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4] 그리하여 월드컵 출전을 놓고 한국과 일본의 승부가 펼쳐졌다. 당시 예선 경기가 열린 때는 1954년 3월이었는데 광복을 맞은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터라 식민지 시절의 한을 풀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정도로 엄청 뜨거웠다.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예선 1차전 경기에서 한국은 정남식과 최정민이 각각 멀티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한 끝에 일본을 무려 5 : 1로 대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2차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15] 한국은 전반 16분에 이와타니 토시오에게 실점하며 어려운 출발을 했지만 전반 24분에 터뜨린 정남식의 동점골과 43분에 터진 최정민의 역전골로 승부를 뒤집었다. 후반 15분에 다시 이와타니에게 실점했지만 남은 시간 동안 일본의 공세를 잘 막아내며 2 : 2 무승부를 거두어 1승 1무의 성적으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1938 프랑스 월드컵 때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가 출전한 이후 아시아 국가로선 16년 만에 2번째로 독립국을 기준으로는 최초로 월드컵 무대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에 데뷔한 한국에 월드컵이란 곳은 정말 너무나도 냉혹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한국은 헝가리, 터키, 서독과 함께 2조에 속했다. 한국 대표팀 사령관 김용식 감독은 이 조 편성을 보고 상당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3팀 모두 유럽 팀이고 한국이 속된 말로 비벼볼 만한 팀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승점자판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 감독과 선수들은 1골만이라도 넣어서 전쟁에 헐벗고 굶주린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자는 각오를 다지고 스위스로 향했다. 심지어 대표팀은 대회 엔트리 22인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20명의 선수만으로 출국길에 나서야 했다. 이렇게 한국의 시련어린 첫 번째 월드컵 도전이 시작되었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감독 : 김용식
2.1. 조별리그 헝가리전 - 0 : 9 패
한국전쟁이 끝나고 불과 11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1954년 6월. 한국의 첫 번째 월드컵 도전은 그 때 이루어졌다. 안 그래도 정부가 수립된 지 겨우 6년밖에 안 된 신생국인데다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치렀던 탓에 축구 대표팀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와중에 축구 같은 스포츠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선수단 단복 맞출 돈조차 없어서 대한축구협회 임원 중에 양복점을 운영하는 지인이 있어 그 사람한테 사정사정해서 외상으로 겨우 맞춰 입었을 정도라고 한다.[16] 비행기 표도 못 구해서 1진, 2진이 나눠서 스위스로 향했고 그나마 1진 선수들 표도 2장이 모자랐는데 사정을 들은 영국인 신혼 부부가 자신들 표를 양보해준 덕분에 간신히 스위스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때는 킥오프 불과 '''10시간 전'''이었다.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시차 적응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옷과 신발만 유니폼과 축구화로 환복하고 경기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월드컵 첫 상대는 당시 매직 마자르로 불리던 세계 최강 헝가리였다. 김용식 감독은 헝가리의 수준이 수준인지라 어려운 경기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다 져도 좋으니까 1골만 넣자. 그래야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며 토너먼트 진출도 1승도 아닌 '''1골'''을 목표로 대회에 나섰다.
하지만 헝가리의 전력은 한국의 그 소박한 목표조차도 철저하게 무산시킬 만큼 강력했다. 전반 10분 동안은 그런대로 잘 버텼고 의외로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자 헝가리 선수들이 서로 남탓하며 분란을 일으키는 모습까지 연출되었다. 그러나 전반 12분에 페렌츠 푸스카스가 첫 골을 성공시키면서 헝가리의 일방적인 골 폭죽이 이어졌다. 헝가리 선수들은 90분 동안 100개가 넘는 슈팅을 퍼부으며 한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골밖에 안 내준 건 순전히 골키퍼 홍덕영의 맹활약 덕분이었다. 시차 적응도 못한 상태에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경기에 나섰으니 선수들이 쥐가 나서 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에 부상으로 경기를 못 뛰게 되면 그 인원이 빠진 채로 경기해야 했다.[17] 그리하여 경기가 끝날 때엔 7명만이 그라운드에 남아 있었다.
결국 우리의 선배 태극전사들은 월드컵 데뷔전에서 헝가리에 0 : 9로 대패하며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최소 '''20 : 0''' 이상의 스코어가 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 예측을 깨고 한 자리 수 점수 차로 선방하였기에 모든 이들이 한국의 선전을 칭찬했고 오히려 헝가리를 향해 9골밖에 못 넣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헝가리 대표팀의 구스타프 세베슈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사자처럼 용맹했다. 쥐가 나서 쓰러지는 데도 끝까지 투혼을 발휘했다."며 한국 선수들을 칭찬했다.[18]
유럽 축구팬들은 중계나 뉴스 등을 통해 헝가리를 상대로 눈물겨운 투혼을 선보인 태극전사들의 열악한 사정을 알고는 숙소를 찾아가 각종 의류나 식품, 현찰 등의 물자를 잔뜩 선물해 선수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화려한 선방 쇼를 선보인 홍덕영 골키퍼에게 사인까지 받아갈 정도니,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유럽 축구팬들에게 적지 않은 임팩트를 선사했음을 엿볼 수 있다.
2.2. 조별리그 터키전 - 0 : 7 패
대한민국의 월드컵 2차전 상대는 바로 터키였다. 이 조에 속한 팀들 모두가 한국보다 몇 수 위의 팀들이라 상당히 빡센 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터키는 어느 정도 해볼 만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이 대회가 있고 7년 뒤 1961년에 치른 평가전에선 상당히 선전해서 0 : 1 석패를 할 정도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1차전에서 세계 최강 헝가리를 맞아 워낙 진을 뺀 탓에 그나마 좀 해볼 만한 상대라는 터키를 맞아서도 한국은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이고 말았다.
전반 10분에 수앗 마마트에게 선제골을 내준 것을 시작으로 레프테르 퀴취칸도니아디스에게 추가골을 내주었고 30분에 또 마마트에게 1골을 내주었다. 그리고 7분 뒤에 브루한 샤르힌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전반전을 0 : 4로 뒤진 채로 마쳤다. 그리고 후반전에도 브루한 샤르힌에게 2골을 더 내주어 해트트릭을 허용했고 후반 31분에 에롤 케스킨에게 마지막 골을 허용해 0 : 7로 대패해 결국 2전 2패, 무득점 16실점이란 성적으로 첫 번째 월드컵 도전을 마무리했다. 소박하기 그지 없는 1골이란 목표를 이루기에도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도 컸고 또 전쟁 직후라 돈이 없어서 대회 준비도 제대로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이 대회 조별리그는 특이하게 '듀얼 리그'제를 도입했는데 상위 시드를 받은 2팀과 하위 시드를 받은 2팀으로 나누어 같은 시드에 속한 팀과는 서로 대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조 추첨 당시 1번과 3번 시드가 상위 시드였고 2번과 4번 시드가 하위 시드였는데 이 조에선 헝가리와 터키가 각각 상위 시드였고[19] 대한민국과 서독이 하위 시드였다. 대회 규정 상 같은 시드에 속한 팀들 간 대결은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한국과 서독은 서로 같은 조에 있었지만 두 팀 간 대결은 없었다.
3. 1958 스웨덴 월드컵~1982 스페인 월드컵
첫 번째 월드컵 도전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던 한국 축구는 1956년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차지해 아시안컵 초대 챔피언이란 영예를 얻었다. 이에 자신감도 상승하여 다시 한 번 월드컵 무대에 나서려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1958 스웨덴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어이없는 사건이란 대한축구협회 직원의 신청서 분실 사건이었다. 이 양반이 신청서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월드컵에 못 나서게 된 것이다. 그만큼 1950년대의 한국은 모든 것이 후진적이었다.[20]
1962 칠레 월드컵은 FIFA의 노골적인 대륙 차별이 극에 달했던 월드컵이었다. 당시 대회는 16개국이 출전하는 대회였는데 이 중 절반인 8장을 유럽에서 가져간 것도 모자라 플레이오프 0.5장을 2개나 얻어갔다. 그리고 그 플레이오프 상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였다. 그리고 나머지 티켓 중 5.5장을 남미가 가져갔다. 그리고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을 통틀어 1.5장이 부여되었다. 즉, 유럽과 남미 단 둘이서만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다. 아시아 지역예선에선 한국이 예선 10조 B에서 일본과 같이 들어 있었는데,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2-1역전승[21] , 이후 일본 원정에서도 2-0 완승을 거둔다. 이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맞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인도네시아가 돌연 기권하면서 한국은 부전승으로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대륙간 플레이오프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플레이오프 특성 상 홈&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야 했는데 문제는 예선을 치르기 몇 달 전에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일당이 정권을 잡았다는 것이다. 반공을 국시로 걸고 나온 군사정권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권 국가라는 이유로 공산권 국가와 시합하는 것을 거부하고 월드컵 불참을 종용했다. 대한축구협회는 박정희 정권을 설득시켰고[22] 결국 1차전 베오그라드에서 경기를 했으나 1 : 5로 대패하였다[23] . 2차전은 서울의 효창운동장에서 치러졌는데 이 경기에서도 1 : 3으로 패배해 결국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역시 FIFA의 노골적인 대륙 차별이 이어진 대회였다. 전체 16장의 티켓 중 무려 10장을 유럽이 독식했고 나머지 6장 중 4장을 남미가 가져갔다. 그리고 북중미에 1장이 돌아갔고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묶어서 1장을 준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프리카 팀들은 대대적으로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런데 당시 아시아 축구에선 북한이 신흥 강호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과의 맞대결을 부담스럽게 여겨 결국 불참을 선언하게 했고 그 대가로 FIFA에 5,000달러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결국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예선은 북한과 호주의 맞대결로 압축되었고 이 경기에서 북한이 합산 점수 9 : 2로 호주를 격파하고 본선에 올랐다. 그리고 다들 잘 알다시피 그 대회에서 북한은 조별리그 1차전에서 소련에 0 : 3으로 패배하고 2차전에서 칠레와 1 : 1 무승부를 거두며 탈락 위기에 몰렸으나 3차전에서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1 : 0으로 격파하고 조 2위로 아시아 최초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8강에서 흑표범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포르투갈을 맞아 전반 22분까지 3골을 넣으며 3 : 0으로 리드했으나 결국 에우제비오에게 4골을 연달아 헌납하며 3 : 5 역전패를 당했다. 이런 북한의 호성적에 한동안 박정희 정권은 배가 아팠는지 시덥잖은 사창가 루머나 퍼뜨렸다.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아시아는 오세아니아와 묶여서 겨우 1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한국의 1차 예선 상대는 호주와 일본이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일본과 2 : 2로 비긴 뒤 호주에 1 : 2로 패배하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다시 3차전에서 일본을 2 : 0으로 이기며 불씨를 살린 한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반드시 호주를 이겨야만 2차 예선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호주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1 : 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국 지역 예선에서 또 탈락하고 말았다. 이 때 경기 막판에 호주 수비수의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얻었다. 이 킥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는데 킥커 임국찬이 실축하며 결국 최종예선 진출권을 호주에 넘기고 말았다.[24] 이로 인해 임국찬은 만고의 역적으로 전락하였고 결국 그는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25]
1974 서독 월드컵에서도 아시아는 오세아니아와 묶여서 1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이 때 지역예선은 A지역, B지역 2개로 나누어서 진행했으며 각 지역의 우승자끼리 결선 라운드에서 승부를 가리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은 A지역에 속해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2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태국을 4 : 0으로 격파한 한국은 이후 말레이시아, 이스라엘과 각각 0 : 0으로 비기며 조 2위로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4강에서 홍콩을 3 : 1로 꺾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전 상대는 이스라엘이었는데 이 경기에서 1 : 0으로 승리하며 결선 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B지역 우승자는 호주였다. 시드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양 팀은 0 : 0으로 비겼고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2 : 2로 비겼다. 그래서 중립 지역인 홍콩에서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그러나 한국은 호주에 기습적인 선제골을 허용하며 0 : 1로 끌려갔고 결국 또 호주의 벽을 넘지 못하며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역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두 대륙을 묶어서 1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이 대회에서의 예선 방식은 1차 예선에서 1위를 한 팀이 최종 예선에 진출하여 1장의 출전권을 놓고 겨루는 방식이었다.[26] 대한민국은 이스라엘, 일본, 북한과 함께 2조에 속했다. 그런데 대회 직전에 북한이 돌연 기권을 선언하면서 이스라엘, 일본과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한국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각각 0 : 0 무승부, 3 : 1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을 상대로도 각각 0 : 0 무승부, 1 : 0 승리를 거두어 2승 2무로 조 1위를 차지해 가볍게 최종예선에 올랐다. 최종예선에선 이란, 호주, 쿠웨이트, 홍콩과 한 조에 속해 홈 & 어웨이 방식으로 치렀다. 그러나 한국은 3승 4무 1패의 전적으로 조 2위를 하는데 그쳐 6승 2무로 조 1위를 차지한 이란에 출전권을 헌납해야 했다.
1982 스페인 월드컵은 편파판정 때문에 억울하게 탈락한 대회였다. 이번 대회에선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두 대륙을 묶어서 2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3조에 속했다. 대회는 전 경기 모두 쿠웨이트에서 열렸다. 한국은 1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2 : 1로 꺾었고 2차전에서 태국을 5 : 1로 이겼고 쿠웨이트 역시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잘 살려 태국을 6 : 0으로 이겼고 뒤이어 말레이시아를 4 : 0으로 이겼다. 각 조 1위 팀만이 최종예선에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3차전 쿠웨이트와의 경기는 운명의 경기였다. 그런데 이 때 쿠웨이트가 오일머니로 더러운 뒷공작을 자행했다. 당시 콜롬비아 국적의 주심을 오일머니로 매수하여 쿠웨이트에 유리하게 판정하도록 조작질을 한 것이다. 쿠웨이트에 매수된 심판은 초반부터 석연찮은 판정을 남발하며 한국의 기세를 꺾었다. 결국, 후반 6분 대한민국은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쿠웨이트를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마침내 이태엽이 세트피스 찬스에서 완벽한 헤딩골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 콜롬비아인 심판은 수비수를 방해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영상을 확인해본 결과 '''이태엽과 쿠웨이트 수비수는 몇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에 이태호가 나서서 항의했지만 이 주심은 도리어 이태호를 퇴장시켜버렸다. 멘탈이 흔들린 한국은 끝내 종료 직전 한 골을 더 허용했고 쿠웨이트가 2 : 0으로 승리해 최종예선에 올랐다.[27]
4. 1986 멕시코 월드컵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30년이 넘도록 월드컵을 남의 나라 잔치로 보냈던 대한민국은 1986 멕시코 월드컵에야 다시 월드컵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자그마치 32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이 때에도 결코 쉽게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이 대회에서 드디어 아시아는 단독으로 2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말레이시아, 네팔과 함께 A조에 속했다. 그런데 1차전 조 최약체 네팔을 상대로 2 : 0 진땀승을 거둔데다[28] 2차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 0 : 1로 패배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칼을 뽑아 문정식 감독을 경질하고 김정남 감독을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다행히도 김 감독이 팀을 잘 추슬러 남은 2경기를 모두 이기고 조 1위를 차지해 2차 예선 진출에 성공했다.
2차 예선에선 인도네시아와 홈 & 어웨이로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열린 1차전에서 2 : 0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 자카르타 원정 경기에서도 4 : 1 대승을 거두어 합산 점수 6 : 1로 가볍게 누르고 최종예선에 올랐다. 최종예선에 오른 4팀은 한국, 일본, 이라크, 시리아였다. 추첨 결과 한국은 일본과 이라크는 시리아와 맞대결을 통해 2경기의 승자가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한국은 도쿄 원정 경기에서 2 : 1로 이겼고 서울 홈 경기에서 1 : 0으로 승리해 합산 점수 3 : 1로 일본을 물리치고 드디어 32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한국에는 참혹한 시련만이 마주했다. 조 추첨 결과가 지지리도 불운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슈퍼스타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동유럽의 다크호스 불가리아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인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와 함께 A조에 편성되었다. 사실상 톱 시드 팀이 2개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어쨌든 태극전사들의 두 번째 월드컵 도전이 시작되었다.
- 대회 최종 엔트리
감독 : 김정남
4.1.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전 - 1 : 3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슈퍼스타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섰고 한국은 사력을 다해 수비로 버티며 역습을 노렸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매우 강력한 팀이었다. 전반 6분 만에 호르헤 발다노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였고 전반 18분에 오스카르 루헤리에게 추가골을 허용해 전반전에만 0 : 2로 끌려갔다. 김정남 감독은 진돗개라는 별명을 가진 미드필더 허정무에게 디에고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하도록 지시했고 익히 알려진대로 허정무는 이른바 '태권축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마라도나를 막았다. 덕분에 마라도나한테 골을 먹히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 말고도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또 발다노에게 1골을 더 내주며 한국은 0 : 3으로 뒤지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후반 28분에 한국의 주장 박창선이 골문 밖 20m 지점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렸고 이게 마침내 골로 연결되어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드컵 첫 골을 성공시켰다. 결국 경기는 아르헨티나의 3 : 1 승리로 끝이 났지만 32년 동안 염원해 왔던 월드컵 첫 골을 성공시킨 태극전사들은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다음 경기에서의 선전으로 이어졌다.
4.2. 조별리그 불가리아전 - 1 : 1 무
한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동유럽의 다크호스 불가리아였다. 물론 당시 불가리아도 한국보다 한 수 위의 전력이었지만 그래도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에 비해선 해 볼만한 상대였다. 그래서 내심 첫 승을 기대하기도 하였다. 당시 경기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대비가 퍼붓던 수중전이었다. 우리의 태극전사들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싸웠지만 의외의 변수 하나 때문에 불리한 경기를 하게 되었다. 전반 11분, 상대 슈팅을 골키퍼 오연교가 힘없이 펀칭하는 바람에 그 볼이 멀리 가지 않고 플라멘 게토프의 발 앞에 떨어졌고 게토프가 지체없이 리바운드 볼을 낼름 줏어먹으며 선제골을 터뜨렸다. 오연교의 어이없는 펀칭 미스 때문에 한국은 0 : 1로 뒤진 채로 경기해야 했다.
이후 태극전사들은 객관적 전력으로 열세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며 공격했으나 좀처럼 불가리아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후반 25분, 컴퓨터 링커[29] 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조광래의 킬 패스를 대표팀 막내 김종부가 받았고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슈팅을 했으나 그것이 골로 연결되며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후 한국은 사정없이 불가리아를 몰아붙였으나 골 결정력 부족으로 더 이상의 추가골은 터뜨리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1 : 1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아쉽게 첫 승엔 실패했지만 그래도 첫 승점을 따낸 것에 만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은 월드컵 도전 4번째 경기만에 첫 승점을 따냈다.
4.3. 조별리그 이탈리아전 - 2 : 3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3차전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경기 전 모든 이들은 이탈리아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래서인지 이 경기를 찾은 관중의 숫자는 고작 2만 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는 지난 대회에서 전차군단 서독을 완벽한 경기력으로 3 : 1 압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지만 한국은 32년 만에 본선에 올라온 아시아의 듣보잡 약체 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2차전까지 2무에 그치며 위태위태한 경기력을 보였고 또 아시아 팀을 상대로 묘하게 약세를 보이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20년 전인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선 북한과 맞붙어 박두익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 : 1로 패배해 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팀이란 불명예를 안은 데다 4년 뒤인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이스라엘과 졸전 끝에 0 : 0 무승부를 거두었을 정도다.
과연 뚜껑을 열어보니 경기는 예상과 달랐다. 경기 초반엔 이탈리아가 아주 수월하게 풀어갔다. 전반 17분, 한국의 골키퍼 오연교가 또 치명적인 펀칭 미스를 범했고 그 세컨드 볼을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낼름 줏어먹으며 가볍게 선제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1골을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기력은 더욱 올라갔고 오히려 이탈리아가 라인을 끄집어내리고 수비하기에 급급했다. 그런 이탈리아에 구세주로 등판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 경기의 주심 데이비드 소차였다. 데이비드 소차는 노골적으로 이탈리아를 위한 편파판정을 남발하며 태극전사들의 플레이를 위축시켰다.
전반 33분, 이탈리아의 살바토레 바그니가 주심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손으로 허정무의 얼굴을 쳐서 쓰러뜨리는 파울을 범했는데 주심은 허정무가 뭔 할리우드 액션이라도 하고 있는 양 빨리 일어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관중들은 주심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고 그제야 분위기가 안 좋다는 걸 느꼈는지 허겁지겁 바그니에게 경고를 주었다. 그리고 2분 후, 데이비드 소차 주심은 한국의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하던 알토벨리가 '''자기 혼자 스텝이 꼬여서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반칙을 선언하며 페널티 킥을 주었다. 당연히 한국 선수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데이비드 소차는 항의하던 수비수 박경훈에게 경고를 먹이며 쿨하게 씹었다. 다행히도 이 페널티킥은 골대 맞고 안 들어갔다.
전반전을 0 : 1로 마친 대한민국은 후반전에 심기일전하여 다시 공격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 17분, 이탈리아의 페널티 박스 좌측 외곽 지역에서 최순호가 벼락같은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렸고 이것이 그대로 빨랫줄처럼 이탈리아 골문으로 날아가며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최순호의 동점골이 터지자 데이비드 소차의 편파판정은 더욱 심해졌다. 한국 선수들의 파울은 엄격하게 잡아내면서 이탈리아 선수들의 파울은 관대하게 넘어갔고 한국 선수들이 볼을 잡을 때마다 호각을 불어서 리듬을 딱딱 끊었다. 결국 후반 28분, 이탈리아의 역습 찬스에서 알토벨리에 또 1골을 허용하며 1 : 2로 다시 끌려 갔다.
같은 시각 아르헨티나와 불가리아의 경기는 아르헨티나가 2 : 0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동점골을 넣어 비기기만 하면 승점과 득실 차 모두 불가리아와 동률이지만 다득점에서 앞서서 3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30] 그러나 데이비드 소차 주심은 곧 죽어도 한국이 16강 가는 꼴을 못 보겠다는 듯 계속해서 편파판정을 일삼았고 한국 선수들의 멘탈은 점점 흔들렸다. 그리고 후반 37분, 알토벨리의 슛이 수비하던 조광래의 손에 맞고 들어가 자책골이 되면서 스코어는 1 : 3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태극전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근성으로 맞서 싸웠고 모두가 절망하던 후반 43분에 허정무가 극적으로 만회골을 터뜨리며 스코어를 다시 2 : 3으로 좁혔다. 16강에 올라가기 위해선 1골이 더 필요했고 마지막까지 골을 넣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카테나치오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는 노골적으로 라인을 끄집어 내리고 잠그기에 들어갔고 결국 이대로 경기가 종료되며 한국의 월드컵 도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를 맞아 1점 차로 분전했기에 멕시코 현지 언론은 한국의 선전을 극찬했으며 오히려 이탈리아를 향해 "심판의 편파판정 덕에 겨우 이겼다."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5.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회택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은 지역예선에서 엄청나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대회 역시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에 2장의 출전권이 부여되었다. 한국은 1차 예선에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 인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그런데 대회 직전에 인도가 기권을 선언하면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과만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 때 대한민국은 6전 전승, 25득점 무실점이란 후덜덜한 성적을 거두며 최종 예선에 진출했다. 최종 예선 상대는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북한이었다. 경기는 모두 싱가포르에서 풀리그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이 때 한국은 1차전에서 카타르와 0 : 0으로 비긴 뒤 2차전에서 북한을 1 : 0으로 이겼고 3차전에서 중국을 1 : 0으로 이기며 단숨에 조 1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4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도 2 : 0 승리를 거두며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 아랍에미리트와 1 : 1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총 전적 9승 2무, 30득점 1실점이란 성적으로 2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런 예선전의 좋은 성적으로 인해 이회택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팀은 꿈에 부풀었다.
외신들의 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신들 역시 한국의 지역예선 성적과 또 지난 대회에서 아르헨티나, 이탈리아라는 세계 최강팀들과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맞선 모습을 참고하여 조용히 한국의 '황색 돌풍'을 예상했다. 조 편성도 지난 대회와는 다르게 수월했다. 실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이상하게 좋은 성적을 못 거두고 있는 스페인,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그다지 강호라고 불러줄 수 없는 벨기에 그리고 초대 월드컵 챔피언이지만 이젠 쇠락할대로 쇠락한 우루과이와 함께 E조에 편성되었다. 하지만 이 때 한국인들과 외신들은 이 조 편성이 달콤한 함정이었을 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대회 최종 엔트리
감독 : 이회택
5.1. 조별리그 벨기에전 - 0 : 2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벨기에였다. 벨기에는 지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반짝 4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그 대회를 제외하면 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팀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를 치르자 한국의 플레이는 심히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경기 초반부터 벨기에에 완전히 압도당해서 뭐 이렇다 할 플레이를 보이지도 못하고 아예 쌈싸먹혔다. 정말 경기를 준비하긴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골키퍼 최인영의 선방이 아니었으면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을 정도로 정말 형편없었다.
전반전은 어찌어찌 0 : 0으로 버텨냈으나 최인영도 인간이었고 그도 후반전까지 버티긴 무리였다. 결국 후반 8분에 마르크 데그리서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후반 19분에 미셸 더 볼프에게 추가골을 내주며 0 : 2로 패배하고 말았다. 점수 차야 겨우 2점밖에 안 났지만 내용이 원체 형편없었기에 한국 대표팀을 향해 세계구급 혹평이 쏟아졌다. 가장 심한 혹평은 "한국, 돌아가서 패스 연습부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태극전사들의 플레이는 심히 형편없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부터 한국과 벨기에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이 경기 이후로도 다른 유럽이나 남미 강팀을 만나면 매번 펄펄 난다고는 못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데 이상하게 벨기에와만 만나면 뭔가가 잘 안 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5.2. 조별리그 스페인전 - 1 : 3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당시에도 축구 강호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상하게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4강 진출에 성공한 걸 빼면 늘 실력에 비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1차전 상대 벨기에보다 더 강한 상대였기에 쉽지 않은 경기가 전망되었다. 한국의 경기력은 1차전보다는 그래도 조금 나아졌지만 스페인을 상대로 전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전반 22분 만에 호세 미첼에게 선제골을 헌납하며 어려운 경기를 풀어갔다.
시종일관 끌려다니던 한국은 전반 42분에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고 최순호가 옆의 황보관에게 짧게 패스했는데 황보관이 무려 시속 114km/h의 대포알 슈팅을 날렸고 이것이 그대로 스페인의 골문으로 빨랫줄처럼 날아가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렇게 전반전을 1 : 1로 마쳤다. 후반전은 어느 정도 스페인과 대등하게 맞서긴 했지만 후반 16분과 36분에 호세 미첼에게 잇달아 실점하며 결국 1 : 3으로 패배해 2패로 주저앉고 말았다.
2패를 기록하긴 했지만 아직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대회는 24개국 출전이었기 때문에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4위 이내에 들면 와일드카드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으로선 남은 선택이 없었다. 마지막 상대인 우루과이를 반드시 3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만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4위 이내에 들어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
5.3. 조별리그 우루과이전 - 0 : 1 패
반드시 3골 차 이상의 대승이 필요했던 대한민국은 초반부터 우루과이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객관적 전력에서 열세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기는 한국이 주도했고 우루과이가 노골적으로 라인을 끌어내리며 버티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한국은 좀처럼 우루과이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이번 경기에서도 한국은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고 황보관이 지난 스페인전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대포알 슈팅을 날렸지만 이번엔 우루과이 골키퍼 페르난도 알베스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한국은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하며 우루과이를 몰아붙였고 조금씩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한국의 실낱 같은 희망을 꺾어버린 건 바로 이 경기의 주심 툴리오 라네세였다. 이탈리아 국적의 툴리오 라네세는 마치 우루과이 사람처럼 보였다. 초반부터 석연찮은 판정을 남발하며 한국에 무더기로 파울을 선언했다. 덕분에 이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기록한 파울이 무려 '''40개'''였다. 그러면서도 우루과이 선수들의 파울은 아주 관대하게 넘어갔다. 0 : 0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후반전에 최순호가 페널티 박스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지만 우루과이 수비수의 거친 태클에 쓰러졌다. 명백히 페널티킥이 주어져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 심판은 모른 척했다. 그렇게 우루과이 선수들의 반칙에는 관대하면서 한국 선수들의 반칙은 칼 같이 잡아냈다. 후반 4분, 한국 수비수 윤덕여가 우루과이의 엔조 프란체스콜리에게 턱을 받히는 파울을 당했는데 툴리오 라네세는 오히려 윤덕여에게 옐로카드를 들이미는 어이없는 짓거리를 했다.[31] 그리고 후반 25분에 윤덕여가 최인영 골키퍼와 백패스를 주고 받았는데 '''시간 지연을 했다는 이유로 또 경고를 먹여 2회 경고로 퇴장시켰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계속 불리한 판정 때문에 플레이가 위축되었던 한국 선수들은 이제 10명이 뛰어야 하는 더욱더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그래도 0 : 0으로 잘 버티고 있었기에 최소한 지난 대회처럼 승점 1점은 챙기고 대회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후반 45분, 우루과이가 프리킥 찬스를 얻었고 이 때 다니엘 폰세카가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었다. 하지만 '''폰세카의 위치는 명백히 오프사이드였다!''' 링크된 영상의 1:09에서 멈추고 확인하면 알 수 있다.
우루과이 선수가 프리킥을 찬 시점에 폰세카는 분명히 우리 최종 수비 라인보다 앞쪽에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골킥이나 스로인, 코너킥 상황에서 볼을 직접적으로 받아 득점한 경우는 오프사이드에서 제외되지만 프리킥은 그렇지 않다. 상대 진영에서[32] 프리킥을 찬 시점에서 상대편 골키퍼 포함 2번째 수비수보다 앞에 있으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프사이드다. 그런데도 당시 선심이었던 가봉 국적의 장 피델레 디람바(Jean-Fidèle Diramba)와 튀니지 국적의 네지 주이니(Neji Jouini)는 모두 고개를 돌리며 못 본 척했고 툴리오 라네세도 페널티 박스에서 다 보고 있었는데도 그냥 우루과이의 득점으로 인정했다! 그 과정에 무슨 짓을 하던 어떻게든 한국 골문에 공이 들어가기만 기다렸던 것.[33]
이렇게 어거지로 우루과이의 1 : 0 승리를 안겨주면서 이 덕에 우루과이가 16강에 오르게 되었고 한국은 3전 전패로 대회를 마감하게 되었다.[34] 비록 벨기에전과 스페인전은 졸전이었지만 우루과이전은 그야말로 10 : 14의 불리한 수적 열세 속에서 고군분투하다 패배한 것이다. 이 경기에서 툴리오 라네세는 우리 선수 1명과 우리의 승점 1점을 날린 그야말로 자질 미달, 함량 미달의 쓰레기였다. 오라시오 엘리손도나 마크 가이거, 루쥔, 호엘 아길라르, 밀로라드 마지치 등 편파 판정으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온갖 어그로를 끈 쓰레기 심판들이 있지만 이 중 악질이 바로 이 툴리오 라네세다. 단지 28년이나 지난 과거의 인물이라 너무 오래되어 잊혀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 양반이 자질 미달의 쓰레기 심판이었다는 건 칼초폴리 스캔들로 더욱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담으로 이 때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이 바로 현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인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이다. 이 감독은 20년 후인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한국과 다시 만나 2 : 1 승리를 거두었다. 위에 링크된 영상을 보면 짤막하게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타바레스 감독의 젊은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6. 1994 미국 월드컵
김호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부터 대표팀 전임 감독제를 시행하였다. 그 전까지는 프로축구 팀 감독이 겸임하는 시스템이었다. 이번 대회의 지역예선은 1차 예선 6개 조에서 1위를 차지한 팀이 최종예선에서 풀리그 형식으로 경기를 치러 2위 이내에 든 팀들만이 본선에 진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최종예선은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열리도록 결정되었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바레인, 레바논, 홍콩, 인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7승 1무, 23득점 1실점이란 준수한 성적을 거두어 조 1위로 가볍게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에 올라온 팀은 한국을 포함해 북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일본이었다. 카타르 도하에서 이 5팀과 풀리그 형식으로 겨루어 2위 안에 들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이란을 가볍게 3 : 0으로 격파하며 순조롭게 출발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계속해서 가시밭길이었다. 2차전 상대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막판에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하며 2 : 2 무승부를 거두었고 3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도 또 막판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하며 1 : 1 무승부에 그쳤다. 4차전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본선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이 운명의 한일전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러나 후반 15분,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일격을 당하며 결국 0 : 1로 패배하고 말았다.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시점에서 최종예선에 진출한 팀들 간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위는 2승 1무 1패(승점 5점)를 기록한 일본이었고 2위는 1승 3무(승점 5점)를 기록한 사우디아라비아였다. 3위는 1승 2무 1패(승점 4점)를 기록한 대한민국, 4위는 한국과 승점은 같으나 골 득실에서 2골이 뒤진 이라크였고 5위는 2승 2패(승점 4점)로 역시 승점은 같으나 골 득실에서 밀린 이란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6위는 1승 3패(승점 2점)인 북한이었다. 북한은 마지막 경기에서 대승을 해도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승점을 넘을 수 없기에 탈락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모든 팀들은 본선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경기는 한국 VS 북한, 일본 VS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VS 이란으로 정해졌다.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 모두가 본선 진출의 가능성이 있기에 사전 담합 및 승부 조작 방지를 위해 3경기 모두 다른 경기장에서 동시에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한국으로선 반드시 북한을 2점 차 이상의 점수로 꺾고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둘 중 한 팀이 무승부 이하의 성적을 거두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즉, 진인사대천명을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전반전에 0 : 0으로 북한의 골문을 여는데 실패한 한국은 후반전에 심기일전하여 고정운과 황선홍, 하석주가 나란히 골을 터뜨리며 3 : 0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 다른 구장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경기는 사우디의 4 : 3 승리로 끝이 나면서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 건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 결과 뿐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일본이 2 : 1로 리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일본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 만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하고 있던 순간 90분이 다 지났고 추가시간이 적용될 때 이라크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움란 자파르 선수가 극적으로 헤더 동점골을 터뜨린 것이다. 그리고 30초 후 경기가 그대로 종료되면서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는 2 : 2 무승부로 끝이 났다.
이로서 대한민국과 일본은 2승 2무 1패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한국이 +5, 일본이 +3이어서 골 득실에서 2골이 더 앞선 한국이 극적으로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이 사건을 한국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 부르고 반대로 일본에서는 도하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막판 1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대표팀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은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과 함께 C조에 속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이어 8년 만에 또 다시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과 한 조에 속했고 지난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이어 또 스페인과 한 조에 속했다. 그러나 독일과 스페인이란 막강한 상대와는 달리 누구보다 확실한 1승 제물인 볼리비아가 한 조에 끼어 있었기에 16강 진출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장밋빛 희망이 있었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감독 : 김호
6.1. 조별리그 스페인전 - 2 : 2 무
대한민국은 4년 전에 이어 또 다시 스페인과 한 조에 속했다.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은 날카로운 설전을 주고 받았다. 스페인의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은 "한국을 5 : 0으로 이기겠다."며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러자 김호 감독은 "그럼 우리는 딱 1 : 0으로 이기겠다."며 응수했다. 그렇게 양 팀의 리턴 매치가 열렸다. 이 날 텍사스 주 댈러스의 코튼 볼 스타디움은 무려 43℃까지 오르는 미친 듯한 폭염이 이어졌다.[35] 그 때문인지 스페인 선수들의 몸놀림이 상당히 무거웠다. 반면, 더위에 익숙한 한국 선수들은 상당히 활발하게 경기장을 누볐고 이에 당황한 스페인 선수들은 거친 파울로 한국의 공격을 차단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이런 스페인의 거친 플레이는 화를 자초했고 전반 25분, 스페인의 주장 미구엘 앙헬 나달[36] 이 적토마 고정운을 향해 거친 파울을 범하며 즉시 퇴장당했다. 수적 우세를 등에 업은 한국은 계속해서 스페인을 몰아붙였지만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족으로 인해 전반전을 0 : 0으로 마쳤다.
전반전에 수세에 몰렸던 스페인은 하프 타임 이후 심기일전하여 대반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10명이 뛰는 악조건 속에서도 후반 6분에 훌리오 살리나스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활기를 불어넣었고 불과 4분 후에 고이코에체아가 추가골을 터뜨리며 2 : 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그러한 활약도 잠시 40℃를 넘는 댈러스의 폭염에 다시 스페인 선수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후반 막판에 들어선 아예 노골적으로 라인을 끌어내리고 2골 차 승리에 만족하겠다는 듯 잠그기에 돌입했다. 그러자 다시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가 살아났다. 후반 40분, 스페인 수비수의 파울로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이 프리킥 찬스에서 이영진이 홍명보에게 짧게 볼을 건넸고 그 볼을 받은 홍명보가 대포알 슛을 날려 만회골을 뽑아냈다. 그리고 점점 경기 종료가 임박해 오던 후반 45분에 홍명보의 킬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극적으로 동점골을 터뜨려 승부를 다시 2 : 2 원점으로 되돌렸다. 당시 서정원은 군인 신분이었기에 한국의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득점한 군인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4년 만에 다시 만난 스페인과의 대결에서 2 : 2 무승부를 기록했고 세계는 한국 대표팀의 놀라운 뒷심을 극찬했다. 반면, 막판 5분을 못 버텨서 무승부에 그친 스페인 선수들은 망연자실하여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주저앉아버렸다. 난적 스페인과의 무승부는 대표팀의 자신감을 크게 상승시켰고 이제 16강 진출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선수들 뿐 아니라 국민들 모두가 이제는 정말 16강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6.2. 조별리그 볼리비아전 - 0 : 0 무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남미의 볼리비아였다. 볼리비아는 1950 브라질 월드컵 이후 무려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팀이었다. 지역예선에서는 브라질에게 최초의 지역예선 패배를 안겨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명높은 홈 구장인 해발 3,600m에 위치한 라파스의 에스타디오 에르난도 실레스에서 거둔 성과이기에 어느 누구도 볼리비아를 다크호스로 여겨주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해외 배팅 사에서는 한국에 정배당을 주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정배당을 받은 것은 이번이 최초였다.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볼리비아를 이겨야만 했다. 앞선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2 : 2 무승부를 거둔 덕분에 선수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번에야말로 월드컵에서 첫 승을 거두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경기는 잘 풀리지 않았다.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각오가 부담을 낳은 것인지 이상하게 한국 선수들은 경기를 시종일관 지배했으면서도 문전 앞에서 허둥지둥하며 골 찬스를 수시로 날려버렸다. 특히 원톱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수시로 문전 앞에서 헛발질을 작렬하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 때 황선홍의 별명이 ''''이완용 다음으로 최고의 역적\''''이었을 정도였고 수시로 ''''똥볼\'''', ''''홈런볼\''''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후반 37분에 볼리비아의 수비수 루이스 크리스탈도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며 수적 우세를 등에 업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좀처럼 볼리비아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경기 막판에 하석주가 단독 골 찬스를 맞았으나 그 역시도 허무하게 그 찬스를 날려버렸다.[37] 그리하여 경기는 0 : 0 무승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난적 스페인을 상대로는 2골이나 넣었으면서 정작 반드시 잡아야 할 볼리비아를 상대로는 1골도 못 넣은 것이다. 10경기 만에 월드컵 최초의 클린시트를 기록했다는 것 외에는 의미를 둘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한국이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최종전 상대인 독일을 잡아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6.3. 조별리그 독일전 - 2 : 3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3차전 상대는 전차군단 독일이었다. 독일은 디펜딩 챔피언이었으나 통일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이번 대회에서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개막전에서 조 최약체 볼리비아를 상대로 위르겐 클린스만의 결승골로 겨우 1 : 0 신승을 하는데 그쳤고 2차전 스페인을 상대로도 시종일관 끌려다니다 겨우 1 : 1 무승부를 거두어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자존심이 크게 구겨져 있었다. 한국이 16강에 오르려면 반드시 독일을 잡아야 했다. 무승부를 거두면 경우의 수가 복잡해지고 패배하면 그 즉시 탈락이었다. 그렇게 운명의 한독전이 열렸다.
독일이 이번 대회에서 아무리 고전했다고 해도 그들은 정말 막강했다. 전차군단이란 별명에 걸맞게 정말 육중한 전차처럼 한국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전반 12분, 독일의 스트라이커 위르겐 클린스만이 순수하게 자신의 개인기로 오른발로 가볍게 볼을 튀긴 다음 왼발 발리 슛을 날려 선제골을 뽑아냈다. 그리고 전반 20분에 칼 하인츠 리들레가 추가골을 뽑아내 점수를 더욱 벌렸다. 그런데다 전반 37분에 한국의 골키퍼 최인영의 펀칭 미스를 클린스만이 낼름 받아 추가골을 터뜨리며 스코어를 3 : 0으로 크게 벌렸다. 전반전은 그렇게 독일이 3골 차로 앞선 채로 끝이 났다. 이제 많은 이들은 독일의 승리를 기정사실화 했고 관건은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독일이 몇 골 차로 이기느냐가 되었다. 그렇게 독일이 간만에 대승을 거두며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자존심을 살리는 듯했다.
하지만 후반전에 한국은 경천동지하게 만들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호 감독은 부진했던 골키퍼 최인영을 불러들이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운재를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댈러스의 코튼 볼 스타디움은 다시 40℃를 넘는 폭염이 이어졌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댈러스의 폭염에 당시 팀 평균 연령이 만 31세에 달했던 독일 선수들이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다. 태극전사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대반격을 감행했다. 후반 7분, 박정배의 킬 패스를 받은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아크 왼쪽에서 칩슛으로 가볍게 찍어 차며 독일 수문장 보도 일그너의 키를 넘기며 만회골을 터뜨렸다.[38] 그렇게 점수를 1 : 3으로 좁혔다.
그리고 후반 18분,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홍명보가 독일 진영 페널티 박스 외곽 지역까지 전진했고 이 때 홍명보의 앞을 독일의 전설적인 수비수 로타어 마테우스가 막아섰다. 홍명보는 자신의 개인기로 그 마테우스를 가볍게 제치고 중거리슛을 날렸고 이것이 그대로 독일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며 점수를 2 : 3으로까지 따라붙었다. 이제 선수들은 다시 희망을 되찾았고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노장 선수들이 즐비했던 독일 선수들은 폭염에 지쳐 점점 체력이 떨어지며 극단적으로 수비에만 급급하는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한국 선수들이 펄펄 날면서 독일 진영에 아예 상주하다시피 하며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독일의 이 같은 무기력한 플레이에 실망한 관중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이 때 독일 수비형 미드필더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관중들을 향해 Fuck You를 날리는 대형사고를 쳐버렸다. 안 그래도 대한민국에 쩔쩔 매고 있어서 빡쳐 있던 베르티 포그츠 감독은 더욱 열불이 터져서 즉시 에펜베르크를 불러들였고 경기 후 아예 대표팀에서 퇴출시켜버렸다.
이후로도 한국은 계속해서 독일 진영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고 독일은 스트라이커 위르겐 클린스만까지 적극 수비에 가담하는 극단적인 전원 수비로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골 찬스가 계속해서 독일의 보도 일그너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며 좀처럼 동점골을 넣지 못했다. 그렇게 경기는 2 : 3 석패로 끝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최종 성적은 2무 1패, 4득점 5실점. 2002년 이전까지 최고의 성적이었고 최초로 조 3위를 차지했다. 와일드카드를 노려볼 수도 있었지만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6위에 그쳐 16강 진출이 무산되었다. 볼리비아를 1 : 0으로만 잡았어도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39]
하지만 독일과의 경기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한국의 플레이는 전 세계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독일 방송국의 아나운서는 "비록 독일이 경기를 이겼지만 정신력과 내용 면에서는 한국에 진 경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고 독일의 베르티 포그츠 감독 또한 "스피드와 체력을 무기로 한 한국의 공격에 크게 고전했다."며 한국을 칭찬했다. 한국을 상대로 2골을 넣었던 위르겐 클린스만 또한 "만약 한국이 처음부터 후반전과 같은 경기력을 보였거나 후반전에 시간이 5분만 더 있었더라면 정말 우리가 졌을 것이다."고 하며 제대로 혼쭐이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7. 1998 프랑스 월드컵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독일이라는 두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을 했던 것과 달리 그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은 심각한 부침을 겪었다.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한 박종환 감독과 선수들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대표팀 내부에 파벌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그 절정이 바로 1996 AFC 아시안컵에서 있었던 이른바 '식스 투 참사'였다. 이란을 상대로 알리 다에이 한 사람에게만 무려 4골이나 허용하며 2 : 6으로 대참패를 당했는데 이 때 한국 선수들이 거의 태업에 가까운 졸전을 펼쳤기에 이런 의혹이 더욱 크게 불거진 것이다.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박종환 감독을 전격 경질하였고 후임 대표팀 감독으로 분데스리가 슈퍼스타 출신이었던 '차붐' 차범근을 선임했다.
이 대회는 최초로 32개국이 출전하는 대회였고 아시아의 출전권은 3.5장으로 확대되었다. 1차 예선을 치르는 36개 팀을 10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위를 차지한 팀이 최종예선에 오른다. 그리고 최종예선은 5개 팀이 한 조를 이루어 홈 &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리하여 최종예선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팀이 본선에 직행한다. 그리고 2위를 한 팀끼리 대결하여 승자는 본선에 직행하고 패자는 오세아니아 1위와 대결하여 승리해야만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태국, 홍콩과 함께 6조에 속했다. 한국은 3승 1무, 9득점 1실점의 성적으로 조 1위를 확정해 가볍게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에선 일본, 아랍에미리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B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한국은 카자흐스탄을 3 : 0으로 가볍게 제압했고 2차전에서도 우즈베키스탄을 2 : 1로 제압해 일찌감치 2승으로 조 1위로 치고 나섰다. 그리고 3차전 상대가 바로 숙적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은 1승 1무를 기록하여 2승 1무를 기록한 아랍에미리트, 2승을 기록한 한국에 이어 조 3위에 처져 있었다. 즉, 이 경기 결과에 따라 일본이 조 1위로 치고 나갈 수도 있고 반대로 한국이 조 3위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분수령이나 다름 없었다. 홈 관중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은 일본은 후반 22분, 야마구치 모토히로의 선제골로 앞서 나갔다. 가모 슈 감독은 후반 35분을 넘어서자 승기를 굳히기 위해 수비를 강화하며 지키기에 돌입했는데 이것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일본이 라인을 내리자 한국의 공격력이 살아났고 결국 후반 38분, 서정원이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리고 후반 41분에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이민성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려 극적인 2 : 1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도쿄 대첩이다.
도쿄 대첩으로 한국은 3승을 기록해 조 1위 자리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4차전에서 2점 차이로 순위 경쟁을 하던 아랍에미리트를 3 : 0으로 대파하며 4연승으로 파죽지세를 달렸다. 그러나 5차전 카자흐스탄 원정 경기에서 1 : 1 무승부에 그치며 살짝 기세가 주춤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 6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무려 5 : 1 대승을 거두어 5승 1무(승점 16점)의 성적으로 2경기 남은 상태에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원시원하게 치른 예선전이었다. 그런데 7차전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0 : 2로 패해 '져주기 논란'이 일어 차범근 감독을 향해 일시적인 혹평이 있었다.[40] 하지만 8차전 아랍에미리트 원정 경기에서 3 : 1 승리를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6승 1무 1패(승점 19점)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예선을 마무리 했다.
4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본선에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 원조 붉은 악마 벨기에와 함께 E조에 속했다. 이번 대회는 한국이 ''''처음으로 역대 월드컵 우승국과 한 조에 속하지 않은 월드컵\''''이었다. 이전까지는 꼭 1~2팀 씩 월드컵 우승국과 한 조에 편성되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국이 아닌 팀들과만 한 조에 속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다시 16강 진출에 관한 장밋빛 희망이 이어졌다. 언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장밋빛 보도를 뿌려대며 당시 세계 축구 정보에 대해 어두웠던 한국 축구팬들의 눈과 귀를 가리며 현혹시켰다. 이러한 장밋빛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줄은 이 때까지 그 누가 알았으리오?
- 대회 최종 엔트리
감독 : 차범근
7.1. 조별리그 멕시코전 - 1 : 3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였다. 조 추첨 직후 한국에서는 멕시코를 강력한 1승 제물로 지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습기 그지 없지만 당시 한국 언론들이 보도한 멕시코는 누가 보면 듣보잡 약체 팀인 줄 알 정도로 철저하게 저평가하고 있었다. 그에 현혹된 한국 축구팬들 역시 멕시코를 정말 듣보잡 약체 팀으로 생각하고 드디어 44년 월드컵 도전 만에 첫 승을 거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상함이 감지된 것은 선발 명단에서부터였다. 지역예선 득점왕 최용수가 빠진 것이 아닌가? 황선홍이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으로 실려나간 이상 공격을 책임질 선수는 최용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차범근 감독이 최용수를 빼버리다니. 여기서부터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멕시코는 초반부터 거칠게 한국을 밀어붙였다. 한국은 골키퍼 김병지의 선방으로 점수를 내주지 않고 버틸 뿐이었다. 이렇게 수비로 버틴 후 역습을 통해 조금씩 득점 기회를 만들어 가던 한국은 전반 27분,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멕시코의 주장 가르시아 아스페가 노정윤을 향해 거친 파울을 범한 것이다. 주심은 곧바로 가르시아 아스페에게 경고를 주고 한국에 프리킥 찬스를 주었다. 킥커는 왼발의 달인 하석주였다. 하석주가 감아찬 볼은 멕시코 수비수 머리에 맞고 굴절되었고 키 168cm의 단신이지만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최고 골키퍼 반열에 오른 멕시코의 명물 호르헤 캄포스도 굴절된 볼에 반응을 못하며 속절없이 골을 내주고 말았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선제골이 터졌다. 지금까지 동점골과 만회골만 많이 넣어봤지 선제골을 단 한 번도 못 넣어봤던 대한민국이었다. 드디어 12번째 경기만에 선제골을 기록한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상대 팀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첫 승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불과 2분 후의 일이었다. 멕시코의 역습 상황에서 하석주가 백태클로 저지했다. 그런데 당시 대회에선 백태클 제재를 강화하라는 지침이 있었고 재수없게 하석주가 시범타로 걸려들고 말았다. 주심 귄터 벤쾨는 곧바로 하석주에게 레드 카드를 부여했다. 이렇게 하석주가 허무하게 퇴장당하면서 그 때부터 한국은 10명이 뛰어야 하는 수적 열세를 짊어지게 되었다. 전반전은 어찌어찌 1 : 0으로 리드한 채 마무리 지었다. 이제 이기려면 남은 45분을 작정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후반전이 되자 멕시코의 기세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멕시코 선수들의 현란한 개인기에 한국 수비진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특히 콰우테모크 블랑코는 이른바 '개구리 점프'로 불리는 그의 전매특허 기술 콰우테미나(Cuahtemina)로 한국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이렇게 점점 균열이 가던 한국 수비진은 결국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후반 6분 만에 리카르도 펠라에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였고 뒤이어 후반 29분과 39분에 연달아 루이스 에르난데스에게 실점하며 결국 1 : 3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하석주의 선제골이 터질 때까지만 해도 환호성이 달나라까지 들릴 정도로 분위기가 끓어올랐으나 역전패로 끝나버리자 욕설이 전국을 뒤덮었다.
퇴장으로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하석주는 순식간에 영웅에서 역적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 뿐 아니라 차범근 감독에 대한 성토 여론이 줄을 이었다.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던 최용수를 왜 선발 라인업에 포함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경위를 따져묻는 여론이 주를 이루었고 그 밖에도 고종수를 갑자기 교체아웃시킨 이유와 부진했던 이상윤을 끝까지 빼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특히 이상윤은 경기 시작 전 워밍업에서 관자놀이를 공에 맞아 속된 말로 정신이 나간 상황이었는데도 끝까지 교체를 하지 않았기에 더욱 비판 여론이 일었다. 대회 전에 시작된 장밋빛 희망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막에 불과했고 진짜 비극은 그로부터 1주일 뒤에 터지게 되는데...
7.2. 조별리그 네덜란드전 - 0 : 5 패
이른바 '''마르세유의 치욕'''이라고 부르는 그 경기다. 경기를 앞두고 한국의 차범근 감독은 바둑에서 흔히 쓰는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를 인용해 선수비 후역습 작전을 쓸 것임을 암시했다. 한편,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역시 1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0 : 0 무승부를 기록해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41] 조 1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2차전에서 대한민국을 큰 점수 차로 꺾어야 했다. 만약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도 비기거나 혹은 만에 하나 진다면 네덜란드로서는 탈락 위기에 몰리게 된다. 때문에 네덜란드는 한국과의 경기에서 대승을 다짐하고 경기에 임했다. 과연 한국이 아생연후살타에 성공할 것인지 아님 예상대로 네덜란드가 대승을 거두게 될지 이제 운명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역시 아생연후살타 어쩌고 한 건 어디까지나 작전이 그렇다는 것일 뿐 전혀 현실에 구현하지 못했다. 김도훈의 슛이 골문 옆 그물을 때려 일시적으로 골이 들어간 걸로 착각했던 그 장면을 제외하면 한국은 네덜란드를 향해 전혀 유효타를 날리지 못했고 오히려 네덜란드에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골키퍼 김병지의 선방으로 간신히 실점만 하지 않으며 버티던 중이었다. 그렇게 위태롭게 0 : 0 스코어를 지키던 대한민국은 결국 전반 38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필립 코쿠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이 때 경기를 중계하던 KBS 해설위원 이용수는 "에이, 37분까지는 잘 개겼는데...."라고 말하며 조곤조곤한 말투로 해설하던 평소 그의 모습답지 않게 비속어를 써가면서까지 아쉬움을 표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다. 불과 5분 만에 플라잉 더치맨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전반전을 0 : 2로 마쳤다.
4년 전 독일전에 이어 또 다시 2점 차 이상의 리드를 허용하며 전반을 마치게 된 것이다. 4년 전 한국은 독일에 전반전에만 0 : 3으로 끌려갔지만 후반전에 대반격을 감행해 2골을 따라붙어 매운 맛을 보여준 바 있었다. 과연 네덜란드를 상대로 또 같은 경기력을 보일 수 있을지 아니면 더 큰 악몽을 경험하게 될지가 주목되었다. 결국 결과는 후자였다. 한국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좀처럼 반격을 펴지 못했고 시종일관 그 기세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한국은 결국 후반 26분, 데니스 베르캄프의 개인기에 속절없이 당하며 또 1골을 내주어 0 : 3으로 점수 차가 벌어졌다. 그리고 9분 후, 피에르 판호이동크에도 추가골을 헌납해 점수는 0 : 4로 벌어졌다. 이 때 한국은 19세의 신예 이동국을 교체 투입했다. 이동국은 비록 골을 넣지 못했지만 강력한 중거리슛을 선보여 답답했던 경기력에 한가닥 청량제를 선사하긴 했다. 그리고 3분 후에 로날트 더부르에게 또 한 골을 헌납하며 점수는 0 : 5로 벌어졌고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이 날 경기의 패배로 인해 한국은 2패로 조기 탈락이 확정되었다.[42][43]
한국이 월드컵에서 5골이나 실점한 것은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44년 만의 일이었고 5점 차 대패를 한 것 또한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44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44년 전보다 더 참혹했다. 그 때는 실력 차이도 실력 차이였지만 나라 사정이 어려워 스위스까지 가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여독도 안 풀린 상태에서 경기를 치러 그렇게 대패를 당한 것이고 외려 헝가리에 9점 차 패배를 한 건 전력에 비해 매우 선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때는 전 대회에서 스페인과 독일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치러 어느 정도 유럽 강팀과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쌓여 있던 상태에서 이런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44년 전과 비교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나마도 김병지의 선방 덕에 5골만 내준 것이지 김병지의 맹활약이 아니었다면 10골 이상 내줬을 뻔했다. 실제로 경기가 끝난 후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 골키퍼 김병지가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우린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음에도 5골밖에 못 넣었다."고 김병지를 칭찬했다. 그랬다. 결국 대회 전 장밋빛 보도는 모두 말쟁이들의 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 축구의 현실을 깨달았을 때엔 이미 모두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 상황이었다. 결국 이 경기가 끝난 후 차범근 감독은 전격 경질되었고 남은 벨기에전은 김평석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의 자격으로 치르게 되었다. 한국 축구의 영웅이었던 차범근 감독은 이렇게 쓸쓸하게 퇴장하게 되었다.
7.3. 조별리그 벨기에전 - 1 : 1 무
16강은 이미 물 건너가버렸고 차범근 감독은 대회 도중에 경질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 1승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태극전사들은 벨기에전은 반드시 승리해서 다음 대회의 희망을 살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한편, 벨기에는 1차전에서 난적 네덜란드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2차전에서 멕시코와도 비기는 바람에 계산이 복잡해졌다. 자력 진출을 위해선 반드시 한국을 3점 차 이상으로 꺾어야만 했다. 비기거나 지면 탈락이었고 2점 차 이하로 이겼을 경우엔 반드시 네덜란드나 멕시코 둘 중 하나가 이겨야 했다. 한마디로 한국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었고 벨기에는 '너만 죽고 나는 살자.'는 입장이었다.
갈 길이 급했던 벨기에는 초반부터 강하게 공격했다. 결국 경기 시작 7분 만에 루크 닐리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해 불리한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이 경기마저 지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태극전사들은 더 이상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쉽게 무너질 줄 알았던 한국이 강하게 저항하자 벨기에 선수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경기 중 수비수 이임생이 공중볼 경합 도중 이마가 깨져 출혈이 나는 부상을 당하였는데 붕대를 감고 끝까지 뛰는 투혼을 발휘하여 심금을 울렸다.
0 : 1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후반 26분, 한국의 프리킥 찬스에서 하석주가 전방으로 볼을 띄웠고 그걸 유상철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해 슬라이딩하며 천금 같은 동점골을 성공시켜 다시 스코어를 1 : 1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탈락하는 벨기에는 다시 반격을 시도했으나 한국의 골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맹공에 우왕좌왕하며 역전패를 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지역예선 득점왕으로 기대를 모았던 최용수가 잇달아 득점 찬스를 놓쳤고 그 역시 아시아용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90분이 다 가고 추가시간이 적용될 때 벨기에가 마지막 세트피스 찬스를 얻었다. 비기면 끝장인 벨기에는 어떻게든 골을 넣겠다고 골키퍼까지 골문을 비우고 공격에 가담하게 했다.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키퍼가 골문을 비우는 극단적인 전술을 쓴 건 벨기에가 최초였다.[44] 그만큼 그들 역시 절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득점 기회를 날렸고 볼을 잡은 서정원이 벨기에의 빈 골문을 향해 질주했으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며 경기는 1 : 1 무승부로 끝났고 한국과 벨기에의 동반 탈락이 확정되었다. 비록 탈락했고 또 다시 1승에 실패했지만 벨기에전에서의 선전은 다음 대회를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8. 2002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은 이 대회 개최국이었기에 지역예선을 면제받아 자연스럽게 5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차범근 감독이 경질된 후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허정무호 역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에선 조별리그에서 쿠웨이트에 패배해 탈락 직전까지 갔다가 3차전에서 인도네시아를 꺾고 간신히 8강에 올랐다. 8강전에선 지난 대회 때 2 : 6 대참패를 기록한 이란을 맞아 연장 혈투 끝에 2 : 1로 꺾고 4강에 올랐다. 그러나 이란과 씨름하느라 진을 다 뺀 한국은 4강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 무기력한 경기 끝에 1 : 2로 패배해 또 다시 우승에 실패했다. 3위 결정전에서 중국을 1 : 0으로 꺾고 간신히 3위를 했지만 라이벌이자 공동 개최국 일본이 우승을 차지했기에 상처만 남고 말았다.
결국 허정무 감독 역시 경질되었고 개최국으로서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 이왕이면 거물급 외국인 감독을 섭외하자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대한축구협회는 1순위로 지난 대회에서 프랑스의 첫 월드컵 우승을 안겨준 에메 자케 감독과 접촉했다. 그러나 자케 감독은 어떤 팀 감독도 맡고 싶지 않고 쉬고 싶다며 거절했다. 2순위로 접촉한 인물이 바로 지난 대회에 마르세유에서 우리 대표팀을 울렸던 적장 거스 히딩크였다. 히딩크 역시 한국 측의 제안에 썩 매력을 느끼지 않았으나 프랑스 월드컵 이후 그도 커리어에 하락세가 와서 터닝 포인트가 필요했던데다 한국에서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은 요구사항까지도 다 들어주겠다고 하니 결국 한국의 제안을 수락했다.
하지만 이렇게 출범한 히딩크호도 처음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월드컵의 예행 연습과 같은 대회인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개막전에서 한국은 프랑스에 0 : 5 참패를 당했다. 물론 이후 멕시코를 2 : 1로 이기고 호주를 1 : 0으로 이겼지만 턱도 없이 프랑스가 호주에 0 : 1로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멕시코는 3전 전패로 탈락이 확정되었고 한국, 프랑스, 호주 3팀이 모두 2승 1패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이 -3에 불과해 결국 조 3위에 그쳐 탈락했다. 반면 공동 개최국 일본은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문에 히딩크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컨페드컵 이후 유럽 원정 평가전을 떠났는데 이 때 당시 황금세대가 즐비했던 체코를 상대로 또 0 : 5 참패를 당했다. 이 때 히딩크 감독에게 붙은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바로 오대영이었다.
계속되는 졸전으로 인해 점점 히딩크 감독을 경질하라는 여론이 솔솔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외국인 지도자들에게 배타적이었던 한국의 원로 축구인들이 불을 지폈다. 조광래 감독은 칼럼을 통해 베스트 11을 빨리 정하여 전술 조직력을 다지지 않고 매일 체력훈련만 하는 히딩크 감독을 강하게 비판했다. 박종환 감독은 아예 히딩크 감독을 사기꾼이라고 거칠게 비난하며 자신이 감독을 맡으면 8강까지 진출시킬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이렇게 점점 여론이 악화되었지만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시계는 2002년 6월에 맞춰져 있다고 받아치며 기다려줄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축구협회장 정몽준이 히딩크 감독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흔들리지 않게 다 잡아 주었다.
거기다 2001년 12월에 있었던 조 추첨은 한국을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한국은 폴란드, 포르투갈, 미국과 함께 D조에 속했다. 폴란드는 그 빡센 유럽 지역예선을 가장 먼저 통과해 본선 진출에 성공한 나라였다. 포르투갈은 당시 루이스 피구, 파울레타, 세르지우 콘세이상 등 황금세대 슈퍼스타들이 즐비했던 우승후보였다. 미국 역시 북중미의 강호로 마냥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속담에 남의 떡이 더 커보인다고 했던가? 공동 개최국인 일본은 유럽에서도 중위권 정도 실력에 불과한 벨기에, 러시아 그리고 약체 팀인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와 함께 H조에 속해 한국보다 훨씬 더 수월해서 부럽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흔들리던 히딩크호가 다시 희망을 찾게된 건 2002년 3월에서였다. 유럽 원정 평가전에서 튀니지, 핀란드, 터키와 맞붙어 1승 2무의 성적을 거두며 서서히 여론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4월에는 2002 CONCACAF 골드컵 4강전에서 1 : 3 패배를 안겨주었던 코스타리카와 다시 맞붙어 2 : 0 승리를 거두었다.[45] 그리고 5월에 스코틀랜드를 4 : 1로 대파하였고 뒤이어 마이클 오언, 데이비드 베컴 등이 버티던 잉글랜드를 상대로 1 : 1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년 전 0 : 5 참패를 안겨준 프랑스를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으로 맞서다 2 : 3 석패를 당했다. 1년 사이에 이렇게 팀이 강해지면서 한국 축구팬들은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 그리고 용기를 얻었다. 이번에야말로 첫 승과 16강이 가능하리라 보았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감독 : 거스 히딩크
8.1. 조별리그 폴란드전 - 2 : 0 승
2002년 6월 4일,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 위치한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한국의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와의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를 앞두고 먼저 열린 다른 아시아 팀들의 성적은 심히 형편 없었다. 아시아 대표 4팀 중 가장 먼저 경기를 치른 사우디아라비아는 전차군단 독일에 힘 한 번 못 써보고 0 : 8 대패를 당했다. 그리고 이 날 오후 3시 반에 광주에서 중국이 코스타리카와 맞붙었으나 역시 무기력한 경기 끝에 0 : 2 참패를 당했다. 6시에 열린 일본과 벨기에의 경기도 2 : 2 무승부로 끝나며 아시아 팀 모두 1승도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한국도 이 날 경기에서 초반엔 이상하게 몸이 무거운 듯한 모습을 보이며 기세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초반 밀리던 기세는 전반 15분, 대표팀 주장 홍명보의 중거리슛 한 방으로 반전되었다. 비록 홍명보의 슛은 상대선수를 맞고 골문을 벗어났지만 선수들에게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 때부터 한국은 기세를 잡고 경기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반 25분, 미드필더 이을용이 폴란드 좌측 진영에서 낮고 빠른 크로스를 올렸고 이걸 백전노장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왼발 발리킥으로 연결해 선제골을 뽑아냈다. 1 : 0으로 앞서가기 시작한 것이다. 실점한 폴란드는 다시 공세에 나섰지만 한국의 수비진은 찰거머리 같이 폴란드를 압박했다. 경기 전 경계령이 내려졌던 폴란드의 공격수 엠마누엘 올리사데베는 한국의 압박수비에 꽁꽁 묶여 볼 터치 한 번 제대로 못했다.
전반전을 1 : 0으로 마친 한국은 후반전에 더욱 공세를 높였다. 그리고 후반 8분, 폴란드의 페널티 에어리어 외곽에서 유상철이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렸고 폴란드 수문장 예지 두덱이 펀칭했으나 워낙 슈팅이 강력해서 그대로 손 맞고 골문 안으로 들어가 2 : 0으로 점수가 더 벌어졌다. 이제 그토록 기대하던 첫 승이 눈 앞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폴란드가 맥을 못 추자 히딩크 감독은 추가골을 넣어 아예 철저하게 박살을 내버리겠다는 의지로 안정환, 이천수, 차두리 등 공격수를 잇달아 투입했다. 그러나 새로 투입된 공격수들은 마음이 너무 급했는지 부정확한 슈팅을 남발하였고 좋은 슈팅도 두덱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버렸다. 2골의 벽을 넘는데는 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한국의 2 : 0 완승으로 끝이 났다. 월드컵에 도전한지 무려 48년 만에 기록한 첫 승이자 6번째 대회 15번째 경기만에 거둔 첫 승이었다. 특히 골을 넣은 선수가 황선홍과 유상철이라는 두 백전노장들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노장들의 마지막 불꽃을 찬란하게 피운 경기였기 때문이다. 첫 승을 거둔 대한민국 대표팀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16강에 갈 것이라는 장밋빛 희망이 이어졌다. 이제 다음 경기인 미국전에서 승리하면 즉시 16강 진출이 확정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운명은 꼭 우리의 예상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다음 날,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미국과 포르투갈의 경기가 열렸다. 당초 예상대로라면 포르투갈이 이겨야 마땅한 경기였다. 그런데 포르투갈 선수들은 준비가 덜 된 것인지 지나치게 몸이 무거웠다. 그리고 예상을 깨고 전반 5분만에 미국 수비수 존 오브라이언이 선제골을 넣더니 전반 29분엔 조르주 코스타가 자책골을 넣어 버렸고 전반 36분엔 브라이언 맥브라이드가 쐐기골을 넣으며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미국이 3 : 0으로 앞서가기 시작한 것이다. 3골 차까지 벌어지고 나서야 정신차린 포르투갈은 다시 반격에 나섰고 전반 39분에 베투가 1골을 만회했다. 그리고 후반 26분에 미국 수비수 제프 아구스가 자책골을 넣으며 점수를 또 1점 따라붙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경기는 예상을 깨고 미국의 3 : 2 승리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다음 경기인 한미전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룰 운명의 경기가 되고 말았다.
8.2. 조별리그 미국전 - 1 : 1 무
2002년 6월 10일, 대구광역시 수성구 대흥동에 위치한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의 조별리그 2차전 미국과의 경기가 열렸다. 한국과 미국 모두 1차전에서 나란히 승리를 거두었는데 골 득실에서 한국이 +2로 +1인 미국보다 1골이 더 앞서서 조 1위에 있었다. 한국으로선 16강 상대로 막강한 이탈리아를 피하기 위해선 반드시 조 1위를 차지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운명의 한미전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그렇게 오후 3시 반에 폭염으로 뜨겁게 달궈진 대구 분지가 더욱 달아오르게 만드는 한미전이 열렸다.
한국은 초반부터 미국을 강력하게 공격했지만 미국은 1차전 상대 폴란드보다 더 짜임새 있는 조직력으로 한국의 맹공을 분쇄하며 경기를 어렵게 꼬았다. 그러던 중 전반 22분, 백전노장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미국 수비수 프랭키 헤이덕과 충돌하여 이마가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황선홍이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면서 일시적으로 한국이 수적 열세 상태가 되었는데, 이 틈을 미국이 놓치지 않았다. 미국의 공격수 클린트 매시스가 번개 같은 역습으로 전반 24분에 선제골을 터뜨리며 1 : 0으로 미국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한국은 동점골을 넣으려 사력을 다했지만 이상하게 폴란드전에 비해 무거운 몸놀림을 보이며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전반 38분, 미국 수비수 제프 아구스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황선홍을 잡아 넘어뜨리는 파울을 범했고 주심 위르스 마이어는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동점골을 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킥커로 이천수가 볼을 만지작거리며 욕심을 냈다. 그러나 본래 페널티킥 찬스가 생기면 1순위 킥커로 이을용을 배정했기 때문에 박항서 코치는 이을용이 차도록 지시했고 결국 이을용이 나섰다. 이을용은 왼발로 살짝 감아 찼는데 그만 발 동작이 미국 수문장 브래드 프리델에게 읽혀버렸고 결국 득점 기회가 무산되었다.[46] 그렇게 전반전은 한국이 0 : 1로 뒤진 채로 마무리했다.
후반전이 되자 한국은 부상을 당한 황선홍을 빼고 안정환을 교체 투입해 공격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갈았다. 그러나 아무리 두들기고 두들겨도 미국의 골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특히 설기현은 여러 차례 좋은 골 찬스를 날려버려 1994년 대회 볼리비아전 때 황선홍보다 더 심한 욕을 퍼먹었다. 이렇게 패색이 짙어지던 후반 33분, 한국이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킥커는 40여 분 전에 페널티킥을 실축했던 이을용이었다. 이을용이 높이 전방으로 볼을 띄웠고 그걸 안정환이 헤더로 연결해 천금 같은 동점골을 넣었다. 다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한국은 계속해서 남은 시간 동안 공격을 퍼부었지만 더 이상의 골이 나오지 않았다. 특히 종료 직전에 미국의 좌측 진영을 쇄도해 들어간 이을용이 페널티 박스 좌측에서 최용수에게 패스했고 이 때 프리델 골키퍼는 이을용의 크로스를 잡으려다 실패해서 골문이 비어 있었건만 어이없게 '독수리 슛'으로 공중으로 띄워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경기는 1 : 1 무승부로 끝이 났고 한국과 미국은 1승 1무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앞선 한국이 여전히 조 1위를 유지했다.
같은 날 밤 8시 반에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포르투갈과 폴란드의 경기는 끝까지 이 조의 향방을 3차 방정식 수준으로 꼬아버렸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졸전 끝에 2 : 3으로 패배하며 체면을 구겼던 포르투갈은 폴란드를 상대로는 마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속담처럼 1차전의 패배를 화풀이 하듯 골을 퍼부었다. 원톱 파울레타가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괴력을 발휘한 끝에 4 : 0 대승을 거둔 것이다. 폴란드는 2패로 탈락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3팀은 모두 16강 진출이 가능했다. 한국에 놓인 경우의 수는 다음과 같다. 이기거나 비기면 16강에 진출하지만 패배할 경우엔 반드시 폴란드가 미국을 이겨주어야만 했다. 16강 가는 길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8.3. 조별리그 포르투갈전 - 1 : 0 승
2002년 6월 14일,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에 위치한 인천문학경기장에서 한국의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가 열렸다. 현재 D조의 중간 순위는 한국과 미국이 나란히 1승 1무를 기록했지만 골 득실에서 앞선 한국이 1위, 미국이 2위였으며 그 뒤를 이어 1승 1패를 기록한 포르투갈이 3위, 4위는 2패를 기록한 폴란드였다. 최하위인 폴란드는 이미 탈락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3팀은 모두 16강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승점 1점이 앞선 한국은 포르투갈과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포르투갈은 반드시 한국을 이겨야만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제 양 팀의 운명이 걸린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포르투갈은 초반부터 거친 플레이로 파울을 하나하나씩 적립하고 있었다. 한국도 이전과는 달리 상대의 거친 파울에 밀리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다. 좌우 풀백인 이영표와 송종국은 철저한 압박 수비로 포르투갈의 플레이메이커 루이스 피구를 아예 그라운드에서 삭제해버렸다. 한국의 압박 수비에 우승후보라는 포르투갈 선수들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이 끈적한 압박 수비로 포르투갈의 공격을 분쇄하자 점차 탈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싹 튼 포르투갈 선수들의 플레이는 점점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전반 26분, 드리블을 시도하던 박지성을 향해 주앙 핀투가 프로레슬링의 드랍 토 홀드 기술과 흡사한 백태클을 걸어 쓰러뜨렸다.[47] 지난 대회에 이어 이번 대회 역시 백태클 제재를 강화하라는 FIFA의 지침이 있었기에 주심 앙헬 산체스는 곧바로 주앙 핀투에게 퇴장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포르투갈 선수들이 떼로 몰려와서 주심에게 항의를 했고 거기다 주앙 핀투 본인은 분노를 못 참고 '''주심의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하는''' 미친 짓거리를 자행했다. 그러자 주심 앙헬 산체스도 폭발하여 주앙 핀투와 맞짱이라도 뜰 기세로 달려들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선수들이 말린 덕에 집단 난투극으로까지 번지지는 않았다.[48]
그리고 4분 후, 한국의 코너킥 찬스에서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최진철과 포르투갈 수문장 비토르 바이아가 공중볼 경합을 했는데 이 때 최진철과 바이아 골키퍼가 충돌하며 볼이 흘렀고 그 흐른 볼을 설기현이 잽싸게 왼발로 밀어넣어 선제골을 넣었지만 앙헬 산체스 주심은 골키퍼 차징을 선언하며 득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한국은 우승후보라는 포르투갈을 맞아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경기력을 선보였고 전반전은 그렇게 0 : 0으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같은 시각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폴란드와 미국의 경기에선 2패로 탈락이 확정된 폴란드가 뒤늦게 저력을 발휘하며 전반 3분 만에 엠마누엘 올리사데베가 선제골을 넣었고 불과 2분 후에 파베우 크리샤워비치가 추가골을 터뜨리며 2 : 0으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물론 거스 히딩크 감독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선수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고참급 선수인 주장 홍명보와 부주장 유상철에게만 넌지시 이 사실을 알리며 함구하도록 지시했다.
후반전이 되자 홈 관중의 열렬한 응원 + 수적 우세까지 등에 업은 한국은 포르투갈을 사정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플레이메이커 루이스 피구는 수시로 동료들에게 자신에게 패스하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송종국의 찰거머리 같은 압박에 볼 터치 한 번 제대로 못 해보고 꽁꽁 묶였다. 이렇게 0 : 0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중 후반 21분, 베투가 이영표를 향해 파울을 범하자 경고를 받았는데 문제는 베투가 이미 전반 22분에 경고를 받았기에 경고 누적으로 또 퇴장 당하며 이제 포르투갈은 9명만 뛰게 되는 불리함을 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같은 시각 대전에선 폴란드의 마르친 제프와코프가 또 1골을 넣어서 폴란드가 3 : 0으로 앞서갔다. 이제 9명만 그라운드에 남은 이상 포르투갈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무승부라도 거두는 것밖에 없었다. 한국과 비기기만 해도 미국과 승점은 1승 1무 1패로 동률이지만 골 득실에서 포르투갈이 +3, 미국이 -2가 되기 때문에 16강에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올리베이라 감독은 후반 24분, 과감하게 원톱 스트라이커 파울레타를 빼고 수비수 조르즈 안드라드를 기용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올리베이라 감독이 보낸 메시지는 "여기서 우리끼리 피 터지게 싸울 필요 없이 사이좋게 같이 16강 가십시다."는 의미였다.[49]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이런 올리베이라 감독의 간절한 메시지를 묵살했다.
1분 후인 후반 25분, 포르투갈 좌측 진영에서 드리블을 하던 이영표가 반대쪽으로 길게 크로스를 올렸다. 그리고 그 크로스를 박지성이 가슴으로 받았고 그 볼을 오른발로 가볍게 트래핑하여 수비하던 세르지우 콘세이상을 벗겨냈다. 그리고 왼발로 땅볼 강슛을 날렸다. 이 볼은 비토르 바이아 골키퍼의 가랭이 사이를 지나갔고 그대로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결승골이 터진 것이다. 이제 급해진 것은 포르투갈이었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무조건 탈락이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남은 20분 동안 동점골을 넣어야 했다. 남은 필드 플레이어 8명 전원이 공격에 나설 정도로 계속해서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운재 골키퍼가 지키는 한국의 골문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누누 고메스가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잡았으나 골대를 맞추는 불운까지 겪었다.
그리고 후반 45분이 모두 지나고 추가시간이 적용될 때 포르투갈이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포르투갈 코치는 비토르 바이아 골키퍼에게 공격에 가담하라는 지시를 했고 지난 대회의 벨기에와 마찬가지로 이번 대회의 포르투갈도 골키퍼가 골문을 비우고 공격에 가담하는 극단적인 전술을 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보람도 없이 포르투갈은 골을 넣지 못했고 순식간에 한국의 역습으로 이어졌다. 골문은 텅 비어 있었기에 바이아 골키퍼는 죽을 힘을 다해 다시 골문으로 허겁지겁 복귀했고 한국이 쇄도해 들어갈 때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그렇게 경기는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한국의 1 : 0 승리로 끝이 났다. 2승 1무의 전적을 기록한 한국은 D조 1위로 6번째 도전 끝에 드디어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8.4. 16강전 이탈리아전 - 2 : 1 승
2002년 6월 18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은동에 위치한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의 16강전 경기가 열렸다. 16강 진출에 성공하자 거스 히딩크 감독은 국민 영웅으로 급부상했고 국민들의 분위기도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그 유명한 "I'm still hungry.(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란 말로 분위기를 다잡았다. 즉, 16강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한편, 한국의 16강 상대는 불행하게도 G조 2위를 차지한 전통 강호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를 피하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조 1위를 했건만 그런 보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그만큼 이탈리아가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이 기대 이하였다는 뜻이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1차전 남미의 첫 출전국 에콰도르를 상대로는 스트라이커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원맨 쇼로 가뿐하게 2 : 0 승리를 거두었지만 2차전에선 발칸 반도의 복병 크로아티아에 제대로 당하며 1 : 2 역전패를 당했다. 그리고 3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도 졸전 끝에 1 : 1 무승부를 거두며 간신히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별리그에서 고전했다고 하더라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강팀이었다. 본래 이탈리아란 팀 자체가 조별리그에선 고전하지만 토너먼트에 진출하기만 하면 펄펄 나는 팀이었다. 언제나 늘 금방이라도 탈락할 듯하면서도 좀비처럼 꾸역꾸역 올라가는 팀이 바로 이탈리아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조별리그에서 고전했다고 해서 쉽게 볼 만한 팀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경기가 열리기 5시간 전에 일본과 터키의 16강전이 열렸다. 그 경기에서 터키가 전반 12분에 넣은 위미트 다발라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으로 승리하였고 일본은 탈락했다. 공동 개최국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한/일 간 성적 비교가 극에 달한 때였는데 일본이 일찌감치 떨어져주었기에 태극전사들은 심적 부담을 덜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16강전 마지막 경기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가 열렸다. 경기를 앞두고 붉은 악마들은 아주리 군단을 향해 놀라운 심리전을 개시했는데 그 심리전은 바로 카드 섹션이었다. 이 날 카드 섹션은 'AGAIN 1966'이었다. 즉, 36년 전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1 : 0으로 격침시킨 북한의 이변을 그대로 재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이탈리아 축구계에선 금지어이자 오랫동안 잊고 싶은 흑역사였다. 이렇게 자신들의 아픈 상처를 후벼파낸 붉은 악마들의 카드 섹션에 이탈리아 측은 노발대발했고 주최 측에 카드 섹션을 중지하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탈리아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들은 이미 이 때부터 평정심을 잃은 채로 경기에 나섰다. 그렇게 한국과 이탈리아의 8강 티켓을 놓고 벌인 단판승부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선수들은 초반부터 한국을 향해 거친 파울을 남발하며 기를 죽이려 하였다. 그 때문에 전반 4분 만에 프란체스코 코코가 경고를 받았고 이탈리아 우측 진영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그리고 송종국이 프리킥을 찼는데 그 때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이탈리아의 라이트백 크리스티안 파누치가 설기현의 유니폼을 잡고 씨름하듯이 넘어뜨리는 파울을 범했다. 주심 비론 모레노는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한국은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넣을 절호의 기회를 잡았고 킥커는 안정환이 나섰다. 그러나 안정환의 얼굴은 뭔가 잔뜩 긴장한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정환의 킥은 어정쩡한 높이로 날아갔고 이탈리아의 수문장 잔루이지 부폰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놓쳐버린 것이다. 기회 뒤에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이탈리아는 계속해서 거친 플레이로 한국 선수들의 기를 죽이며 반격에 나섰다. 덕분에 센터백 김태영이 크리스티안 비에리의 팔꿈치 공격에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기까지 했다.[50]
그렇게 조금씩 밀리는 경기를 하던 중 전반 18분, 이탈리아가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킥커로 플레이메이커 프란체스코 토티가 나섰고 센터백 최진철이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철저하게 마크했으나 비에리의 피지컬은 정말로 천하장사였다. 비에리는 그 괴물 같은 피지컬로 한국 센터백 최진철을 기어이 날려버리고 헤더로 골을 우겨넣었다.[51] 그렇게 경기는 이탈리아가 1 : 0으로 앞서갔다. 이렇게 1점 앞서가자 이탈리아는 서서히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카테나치오를 발동하며 잠그기에 돌입했다. 한국 선수들은 이탈리아를 맞아 주눅들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으나 악명 높은 이탈리아의 빗장에 가로막히며 좀처럼 골문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났다.
후반전이 되자 한국은 계속해서 볼을 소유하며 공격을 펼쳤고 이탈리아는 수비로 버틴 후 간헐적으로 역습에 나섰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는데 이탈리아의 굳게 닫힌 빗장은 부서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승부수를 띄웠다. 우선 후반 18분에 부상을 당한 수비수 김태영을 빼고 공격수 황선홍을 투입해 공격수 숫자를 늘렸다. 그리고 후반 23분, 역시 부상을 당한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 역시 불러들이고 공격수 이천수를 투입했다. 마지막으로 후반 36분엔 수비의 핵이자 대표팀 주장인 홍명보마저 빼고 공격수 차두리를 투입했다. 이렇게 공격수만 5명을 투입하는 총 공격 폭격 작전을 시행한 것이다.[52] 하지만 이 작전을 단순히 닥공으로만 치부해선 안 되는 것이 위 참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수비 밸런스를 유지하면서 공격을 강화하는 교체 카드였다. 즉, 히딩크 감독의 철학인 '멀티 플레이어 육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패색이 짙어지던 중 후반 43분, 이탈리아 진영의 아크 정면 외곽에서 박지성이 우측의 황선홍에게 짧은 패스를 건넸고 황선홍이 중앙으로 짧은 패스를 했다. 그런데 그 때 이탈리아의 라이트백 크리스티안 파누치가 치명적인 볼 처리 미스를 범했다. 이렇게 흘러나온 볼을 페널티 에어리어에 있던 설기현이 놓치지 않고 왼발 슛을 날렸고 그게 이탈리아 골문 우측 구석으로 빨려들어가며 극적으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다시 승부는 1 : 1 원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불과 1분 후에 선제골의 주인공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다시 끝내기 펀치를 시도했다. 반대쪽에서 함께 쇄도하던 젠나로 가투소가 대지를 가르는 크로스로 반대편의 비에리에게 볼을 건넸고 그걸 비에리가 받았으나 다행히도 오른발에 맞으며 하늘 위로 높이 떠버렸다. 비에리는 왼발의 달인이었지만 오른발엔 약했기에 참으로 다행인 일이었다.[53] 뒤이어 후반 종료 직전에 공격수 차두리가 정석에 가까운 바이시클 킥을 선보였으나 아쉽게도 잔루이지 부폰 골키퍼 선방에 막히며 득점이 무산되었다. 그렇게 후반전은 1 : 1로 마쳤고 이제 승부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으로 이어지자 승부는 다시 팽팽하게 이어졌다. 당시는 골든골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1골을 넣어야만 경기가 끝났다. 특히 이탈리아는 지난 월드컵에서 3번 승부차기를 해서 3번 모두 패배한 바 있었기 때문에 악몽 같은 승부차기를 피하기 위해선 반드시 골든골을 넣어야 했다. 그렇게 1 : 1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중 연장 전반 13분, 프란체스코 코코가 자기 진영에서 한번에 길게 전방으로 볼을 띄웠고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헤더로 받아 페널티 박스 부근에 있는 프란체스코 토티에게 떨어뜨려 주었다. 토티는 곧바로 문전으로 쇄도했고 송종국이 달라붙어 밀착 마크했다. 그 때 토티가 페널티 킥을 유도하려고 다이빙 동작을 했는데 그만 비론 모레노 주심에게 적발되고 말았다. 결국 모레노 주심은 “시뮬레이션 액션 제재를 강화하라.”는 당시 FIFA의 지침에 따라 토티에게 즉시 경고를 주었다. 그런데 이미 토티는 전반 22분에 김남일에게 팔꿈치로 치는 반칙을 범해 경고를 받았으므로 결국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토티에게 레드카드가 내려지자 파올로 말디니와 비에리, 안젤로 디 리비오 그리고 토티 본인까지 모두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모레노 주심은 단호하게 판정을 번복하지 않고 그대로 토티에게 퇴장을 명령했다.[54] 그리하여 이제 이탈리아는 10명이 뛰게 되었다. 연장 전반엔 득점이 나지 않았고 이제 승부는 연장 후반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연장 후반에도 양 팀은 팽팽한 접전을 벌였으나 양 팀 모두 기회를 아쉽게 놓쳤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은 흘러갔고 스코어는 여전히 1 : 1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 연장전도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조심스럽게 승부차기를 예측하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던 연장 후반 12분, 한국 진영 우측에서 송종국이 다시 전방으로 길게 패스를 했는데 이 때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안정환을 대놓고 미는 반칙을 했으나 비론 모레노 주심은 파울 콜을 불지 않았다. 어쨌든 송종국의 긴 패스는 이탈리아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외곽에 있던 이천수가 받았고 이천수는 뒤의 이영표에게 백패스를 했다. 그리고 볼을 받은 이영표는 곧바로 전방으로 볼을 띄웠고 안정환이 높이 솟구쳐 헤더 슛을 날렸다. 안정환의 헤더 슛은 그대로 이탈리아 골문 우측 구석으로 빨려 들어가며 골든골이 터졌다. 117분 간 피 말리는 접전 끝에 결국 경기는 대한민국의 극적인 2 : 1 역전승으로 끝났고 1966 잉글랜드 월드컵 때 북한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로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렇게 우리에겐 영광스러운 승리로 기억된 경기였지만 이탈리아에는 치욕적인 패배로 남게 되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이탈리아는 1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구질구질하게 심판 판정 탓을 하며 패배를 승복하지 않는 추태를 보이고 있다. 프란체스코 토티와 당시 이탈리아의 주장 파올로 말디니는 여전히 비론 모레노 주심이 한국에 유리하게 편파판정을 했다고 하면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패배를 승복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몇 가지 판정 문제가 불공정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탈리아 역시 저지른 파울에 비하면 페널티를 덜 받은 편이었다. 우선 한국 수비수 김태영을 팔꿈치로 쳐서 코뼈를 부러뜨린 비에리는 레드 카드는커녕 옐로우 카드 1장도 안 받았다.[55] 또 후반 13분에 크리스티아노 자네티가 경고를 받았는데 사실 그 경고는 그 때 파울을 범한 선수가 프란체스코 코코였으므로 본래 그에게 가야할 것이었다. 모레노 주심이 착각하고 엉뚱한 선수에게 경고를 준 것이었다. 그런데 코코는 이미 전반 4분에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제대로 판정했다면 이탈리아는 이미 후반 13분부터 10명이 뛰어야 했다. 모레노 주심이 실수를 해준 덕분에 그래도 100분 넘게 11명이 온전하게 뛸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이탈리아가 이 경기에서 마냥 불리한 판정을 받은 건 아니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승부에 승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과연 이 팀이 월드컵 챔피언으로서의 자격과 품위가 있는 팀인지 심히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현재까지도 이 경기로 인한 한국과 이탈리아 양 측 축구팬들 사이 감정의 골은 아직도 깊은 편이다.[56][57]
8.5. 8강전 스페인전 - 0 : 0 무(PSO 5 : 3 승)
2002년 6월 22일,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에 위치한 광주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의 8강전 경기가 열렸다. 한국의 8강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이었다. 정말 지지리 복도 없는 대진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이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치르느라 진을 다 빼버린데 반해 스페인은 한국보다 이틀을 더 쉬어서 체력적으로 더 유리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스페인은 이전 상대 이탈리아와 다르게 조별리그부터 계속 쭉 한국에서 경기했기에 이동으로 인한 페널티도 전혀 없었다. 홈 그라운드란 것 하나만 빼면 전혀 유리한 점이 없었던 것이다. 한국과 스페인이 월드컵에서 만난 건 이번이 벌써 3번째였다. 첫 번째 대결에선 스페인이 3 : 1로 이겼고 두 번째 대결에선 2 : 2로 비겼다. 과연 이번엔 한국이 승리할 수 있을지 아니면 스페인이 또 다시 한국을 꺾고 1950 브라질 월드컵 이후 52년 만에 4강 진출에 성공할 것인지 운명이 걸린 경기가 열렸다.
역시 체력적으로 지친 한국은 전반전 내내 스페인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전반 32분에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이 부상으로 빠지고 이을용이 들어오고 수비 압박이 헐거워지면서 스페인의 신예 미드필더 호아킨 산체스가 날뛰게 된 게 아주 컸다. 골키퍼 이운재의 맹활약이 아니었다면 벌써 대량실점했을 정도로 정말 스페인의 공격력은 무서웠다. 반대로 스페인 입장에선 경기를 지배했지만 골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유효슈팅이 이운재 골키퍼의 선방에 틀어막히거나 몇 cm 차이로 빗나가거나 살짝 위로 뜨며 골망 위에 살포시 얹어지거나 하는 장면이 나오면서 좀처럼 한국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정말 속된 말로 골대에 귀신이라도 붙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상하게 골이 들어가질 않았다. 한국 입장에선 매우 다행인 순간들이었고 스페인 입장으로서는 애간장이 타들어가다 못해 열불 터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전반전은 0 : 0으로 마쳤다.
후반전이 되자 한국은 유상철을 빼고 발 빠른 이천수를 투입하며 공격의 강도를 높여 서서히 페이스를 되찾아 갔고 다시 어느 정도 대등하게 겨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과 스페인 양 쪽 모두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놓치며 계속해서 0 : 0의 스코어를 깨뜨리지 못했다. 그렇게 후반전 45분도 헛심 공방으로 끝나며 승부는 연장전으로 흘러갔다. 이 때 결정적인 오심이 터졌다. 연장 전반 1분에 한국 진영을 쇄도하던 호아킨 산체스가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 외곽에서 크로스를 올렸고 이걸 모리엔테스가 헤더로 연결해 골든골을 터뜨렸다. 그러나 부심은 볼이 골 라인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고 판단했고 주심 가말 간두르 역시 부심의 의견을 받아들여 골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오심이었다.[58] 스페인 입장으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연장전 30분도 양 팀 모두 치열하게 맞붙었지만 결국 헛심 공방으로 끝났고 0 : 0으로 비기며 이제 승부는 승부차기로 가리게 되었다.
승부차기 추첨 결과 한국의 선축으로 결정되었다. 한국의 1번 킥커는 백전노장 스트라이커 황선홍이었다. 황선홍은 골문 오른쪽(=골키퍼의 왼쪽)으로 낮고 빠른 슈팅을 날렸고 스페인의 수문장 이케르 카시야스도 방향을 읽었으나 슛이 워낙 강했기에 카시야스의 겨드랑이를 파고 들며 골인이 되었다. 스페인의 1번 킥커 역시 백전노장인 주장 페르난도 이에로였다. 이에로는 이운재 골키퍼의 눈을 속이며 가볍게 골을 성공시켰다. 뒤이어 한국의 2번 킥커 박지성과 스페인의 2번 킥커 루벤 바라하도 나란히 골을 성공시켰다. 한국의 3번 킥커 설기현과 스페인의 3번 킥커 차비 에르난데스도 골을 성공시키며 3 : 3으로 승부차기에서도 여전히 팽팽한 승부를 이어갔다. 그리고 4번 킥커의 차례가 되었다. 한국의 4번 킥커 안정환은 과감하게 가운데로 슛을 날리며 성공시켰다. 그리고 스페인의 4번 킥커는 오늘 경기에서 제일 잘 했던 호아킨 산체스였다. 하지만 왠지 그의 얼굴은 긴장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호아킨 산체스는 킥을 하기 전에 이운재 골키퍼의 움직임을 뺏기 위해 한 번 주춤했는데 그게 오히려 악수가 되었다. 이운재 골키퍼는 미리 방향을 읽고 움직이지 않았고 킥이 날아오자 정확하게 왼쪽으로 몸을 날려 펀칭했다. 드디어 팽팽하던 승부의 균형이 깨졌다. 그리고 마지막 5번 킥커는 대표팀의 주장 홍명보였다. 홍명보가 골을 성공시키면 그대로 승부는 끝나고 실축하면 다시 승부가 이어진다. 평소에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홍명보는 승부차기에서도 포커 페이스를 유지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홍명보가 찬 킥은 정확하게 골문 오른쪽 상단을 출렁이며 골이 되었다.
승부차기까지 이어지는 접전 끝에 한국이 승부차기 5 : 3으로 스페인을 제압하고 아시아 최초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유럽과 남미 이외의 대륙 팀이 준결승 진출에 성공한 것은 1930 우루과이 월드컵 때 미국이 4강에 오른 이후 무려 72년 만이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월드컵 때는 지역예선 없이 참가 신청만 하면 누구나 출전할 수 있었던데다 출전국 숫자도 겨우 13개에 불과했다. 그 때 미국의 성적과 이번 대회 한국이 거둔 성적은 전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난 대회까지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팀이 이번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오르는 기적을 발휘한 것이다. 마치 8년 전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불가리아가 일으킨 이변의 스토리를 그대로 한국이 재현하는 듯했다. 이렇게 한국의 돌풍은 4강까지 이어졌고 이제 서서히 우승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별리그 3차전부터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상대들과 악전고투를 벌이고 연장전 및 승부차기까지 가는 씨름을 한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체력은 이미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 있었다.
8.6. 4강전 독일전 - 0 : 1 패
2002년 6월 25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한국의 4강전 경기가 열렸다. 한국의 4강 상대는 전차군단 독일이었다. 정말 산 넘어 산이라 할 정도로 불운하기 짝이 없는 대진표였다. 하지만 이번 대회의 독일은 그래도 이전과는 달리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였다. 지역예선부터 심각하게 나사가 빠져서 잉글랜드에 홈에서 1 : 5로 대패하는 굴욕을 당하며 플레이오프까지 밀려났다가 간신히 본선에 올라온 상태였다. 그리고 본선에서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로만 8 : 0 대승을 거두었을 뿐 나머지 경기에서는 1골 차 진땀승을 거두며 겨우겨우 4강까지 올라온 팀이었다. 그래서 대회 전만 하더라도 독일을 우승후보로 지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미 한국 선수들은 우승후보로 지목되었던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모조리 물리치고 4강까지 올라왔기에 자신감이 충만될 대로 충만되어 있었다. 이제 독일만 넘어서면 꿈의 무대인 결승전이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 경기는 누가 야신상을 수상하느냐를 가리는 중요한 경기이기도 했다. 8강전까지 한국 골키퍼 이운재는 5경기 2실점을 했고 독일 골키퍼 올리버 칸은 5경기 1실점을 했다. 브라질 골키퍼 마르쿠스는 5경기 4실점, 터키 골키퍼 뤼쉬튀 레츠베르는 5경기 3실점을 기록한 상황이었다. 즉, 4강 진출국 골키퍼 가운데 올리버 칸이 가장 적은 실점을 기록했고 그 다음이 이운재, 그 다음이 레츠베르, 브라질 골키퍼 마르쿠스가 가장 많은 실점을 기록한 것이다. 4명의 골키퍼 모두 야신상 후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올리버 칸과 이운재가 가장 적은 실점을 기록했기에 사실상 이 한독전이야말로 야신상 수상자를 가리는 중요한 경기인 셈이 되었다. 결승 진출권과 더불어 야신상 수상을 놓고 한국과 독일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상암벌에서 펼쳐졌다.
한국 선수들은 8년 전과 마찬가지로 독일을 맞아서 전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그러나 지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국이 폴란드 - 미국 - 포르투갈 - 이탈리아 - 스페인으로 이어지는 막강한 상대들과 연달아 씨름한데다 경기도 상대 팀보다 하루 내지는 이틀씩 늦게 치르는 바람에 체력 회복을 위한 텀도 짧았다. 반면, 독일은 사우디아라비아 - 아일랜드 - 카메룬 - 파라과이 - 미국 등 비교적 수월한 상대들과 경기를 치렀고 또 한국과는 반대로 상대 팀보다 먼저 치러서 체력 회복을 위한 텀이 길었다. 이 경기에서도 한국 선수들보다 하루를 더 쉬고 경기에 나선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한국 선수들은 점점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의 골문은 야신상 후보인 올리버 칸이 지키고 있었다. 올리버 칸이 지키는 독일 골문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특히 전반전에 차두리의 기가 막힌 스루 패스를 받은 이천수가 논스톱 발리 슛으로 연결했지만 올리버 칸은 괴물 같은 반사 신경으로 그걸 막아냈다. 이 부분에서 축구 좀 봤다는 사람들은 이기기 힘들겠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철저하게 수비 후 역습으로 나서며 독일의 공격을 잘 방어해냈다. 지칠 대로 지친 한국과 대결하는데도 좀처럼 한국의 골문이 열리지 않자 독일 선수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전반전 내내 방패와 방패 간 대결이 이어지며 지루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0 : 0으로 마무리했다. 이제 남은 45분의 결과에 따라 한국의 결승 진출 여부가 결정될 것이었다.
후반전이 되자 거스 히딩크 감독은 백전노장 스트라이커 황선홍을 빼고 안정환을 투입했고 이탈리아, 스페인 선수들과 연달아 씨름하면서 탈진해 버린 센터백 최진철도 불러들이고 이민성을 교체 투입했다. 이후로도 독일이 계속해서 공격하고 한국은 압박 수비로 버틴 후 역습하며 득점 기회를 만들어 갔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독일의 공세를 잘 방어했지만 순간 집중력 미스 한 번에 모든 것이 뻐그러지고 말았다. 후반 30분에 수비수 김태영이 치명적인 패스미스를 범했고 이 패스미스를 올리버 뇌빌이 가로챘다. 뇌빌은 중앙으로 쇄도하던 미하엘 발락에게 패스했고 발락이 오른발 슛을 날렸으나 이운재 골키퍼가 쓰러지면서 주먹으로 볼을 쳐냈다. 위기를 넘겼다 싶었으나 불행하게도 볼이 다시 발락의 발 앞에 갔고 발락은 다시 왼발로 슛을 날려 기어이 결승골을 뽑아냈다. 히딩크 감독은 동점골 획득을 위해 주장 홍명보를 불러들이고 공격수 설기현을 교체 투입해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경기 막판에 박지성이 좋은 득점 기회를 잡았으나 제대로 슛을 쏘지 못해 하늘 위로 떠버렸다.
결국 경기는 이렇게 독일의 1 : 0 승리로 돌아갔고 한국의 행진도 여기서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4강까지 올라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데다 아무리 지역예선에서 나사 빠진 모습을 보였어도 여전히 세계 강호 중 하나인 독일을 상대로 대등하게 맞서 싸운 태극전사들의 선전에 모두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체력이 조금만 더 버텨주었다면 결승 진출의 대업을 이룰 수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불운한 대진운 때문에 막강한 상대들과 연달아 겨루게 되었고 그 때문에 힘이 부친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한편, 독일은 이 경기에서 어느 정도 심판 판정의 이익을 보기도 했다. 위에 기록된 주심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경기 주심 위르스 마이어는 ''''독일계 스위스인\''''이었다.[60] 한국과 독일이 시합을 하는데 독일계 스위스인을 심판으로 배정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전까지 독일은 각 경기 20개 이상 파울을 했지만, 이 경기에선 독일이 8개, 한국이 16개였다. 이런 불공평한 심판 배정을 두고 당시 정몽준 축구협회장이 제프 블래터 당시 FIFA 회장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 날 붉은 악마들은 카드 섹션으로 '꿈★은 이루어진다'를 내걸었다. ★은 우승을 의미하는 것인데 실제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팀은 유니폼에 ★을 달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브라질의 유니폼엔 ★이 5개, 독일과 이탈리아의 유니폼엔 ★이 4개가 있다. 이 별의 개수는 월드컵 우승 횟수이다.[61] 즉, 우승을 노리는 야심이 담긴 카드 섹션이었다. 사실 이 당시에는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 약발이 약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최대 규모가 동원된 카드 섹션이었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4강전에서 벌인 카드 섹션이라 그런지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8.7. 3위 결정전 터키전 - 2 : 3 패
4강전에서 독일에 0 : 1로 패배하면서 태극전사들의 요코하마 행은 무산되었고 대신 다시 대구로 내려가서 경기를 하게 되었다. 3·4위전은 2002년 6월 29일 20시 30분에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다. 3·4위전 상대는 바로 터키였다. 터키와 월드컵에서 만난 것은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무려 48년 만의 일이었다. 월드컵 당시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터키인 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이 월드컵을 보러 한국에 왔는데 모두 "형제의 나라인 한국과 터키가 결승전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비록 결승전은 아니지만 3·4위전에서라도 만나면서 결국 형제국 간 대결이 성사되었다. 한국으로서는 48년 전 0 : 7 대패에 대한 빚을 갚을 절호의 기회였고 히딩크 감독 개인으로서도 이전에 자신이 거둔 성적인 4위를 넘어서는 성적을 거둘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마지막 경기라 긴장이 풀린 것인지 한국 선수들은 초반부터 우왕좌왕했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고 한국의 선축으로 킥오프를 할 때 유상철이 홍명보에게 백 패스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홍명보가 볼을 끌며 우물쭈물했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터키 공격수 하칸 쉬퀴르가 재빨리 볼을 가로채 선제골을 터뜨렸다. 골이 터진 시간은 경기 시작 후 불과 '''11초'''였다. 종전까지는 1962 칠레 월드컵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바츨라프 마세크가 멕시코를 상대로 15초 만에 득점한 것이 최단시간 득점 기록이었는데 하칸 쉬퀴르가 40년 만에 그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초반 실점에 한국 축구팬들은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다시 심기일전하며 반격에 나섰고 마침내 전반 9분, 터키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 외곽 지역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킥커는 이을용이 나섰다. 이을용은 멋진 왼발 감아차기로 동점골을 성공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골은 한국의 월드컵 최단시간 득점 기록이기도 했다. 즉, 한 경기에 최단시간 실점과 최단시간 득점을 모두 기록한 것이다. 그렇게 다시 1 : 1로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으나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한국 선수들은 이전과 달리 계속해서 수비에 허점을 노출했고 그 틈을 터키가 놓치지 않았다. 전반 13분에 터키의 미남 스타 일한 만시즈가 다시 앞서가는 골을 넣으며 스코어는 1 : 2로 벌어졌다. 그리고 전반 32분에 또 다시 일한 만시즈에게 쐐기골을 허용하며 스코어는 1 : 3으로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전반전이 마무리 되었다.
후반전이 되자 거스 히딩크 감독은 전반전 선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주장 홍명보를 빼버리고 김태영을 교체 투입해 수비의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동점골의 주인공 이을용도 후반 20분에 빼고 공격수 차두리를 투입해 공격의 강도를 높였고 후반 34분에 설기현을 빼고 최태욱을 투입했다. 이렇게 공격의 강도를 높이며 만회골을 노렸지만 2골 차로 앞선 터키는 잠그기에 돌입하며 지능적으로 시간을 질질 끌었다. 그렇게 어느 새 90분이 모두 지나고 추가시간 4분이 적용될 때였다. 후반 추가시간 3분에 터키 진영으로 쇄도해 들어가던 송종국이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렸는데 이 슛이 차두리의 엉덩이에 맞고 굴절되었다. 볼이 왼쪽으로 날아올 줄 알고 그 쪽으로 자세를 잡고 있던 터키 수문장 뤼쉬튀 레츠베르는 차두리의 엉덩이에 맞고 볼의 방향이 오른쪽으로 바뀌자 그대로 속절없이 실점하고 말았다. 드디어 만회골이 터졌지만 너무 늦었고 결국 경기는 터키의 3 : 2 승리로 끝이 나며 한국은 대회 4위가 확정되었다.
경기가 끝나자 터키 선수들은 패배로 망연자실해 있던 한국 선수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일으켜 세우며 어깨동무를 하며 나란히 관중석으로 다가가 관중들에게 인사했다. 경기 시작 전 한국 관중들도 터키 국가가 연주될 때 터키에도 없는 초대형 터키 국기를 꺼내며 함께 응원해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였다. 터키 수비수 투가이 케리몰루는 경기를 관전하러 온 자신의 아들을 그라운드로 데려와 감동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고 레츠베르 골키퍼와 알파이 외잘란은 나란히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돌며 관중들에게 화답했다. 이렇게 경기 후에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나란히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은 FIFA에도 역시 인상적으로 보였는지 이 경기를 ''''가장 페어플레이하고 모범적인 경기\''''로 선정해 월드컵 때마다 이 경기처럼 하라고 교과서처럼 반복해서 영상을 틀어주고 있다.
9. 2006 독일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거스 히딩크 감독이 계약만료로 대표팀을 떠난 후 한동안 공석이었던 대표팀 감독에 포르투갈 출신의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부임했다. 그러나 새로이 출범한 코엘류호 역시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사실 출범 초기에 맞붙었던 상대들과 결과를 보면 아주 나쁜 성적은 아니었다. 우루과이를 상대로 0 : 2로 패했지만 슈팅 수는 한국이 10개나 더 많았고 볼 점유율도 더 높았다. 며칠 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도 매우 선전해 0 : 1로 석패했다. 그런데 문제는 4강 신화의 기억이 너무도 진하게 남아서 한국 축구팬들의 눈이 높아질대로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코엘류 감독은 급속도로 인기를 잃었다.[63]
그런데다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예선에서 베트남에 0 : 1로 패배하고 뒤이어 오만에 1 : 3으로 패배하는 이른바 오만 쇼크로 코엘류 감독에 대한 여론은 마치 화산 폭발 직전과 같았다. 간신히 재신임을 얻은 코엘류호는 우여곡절 끝에 이 대회 예선에 돌입했다. 이 대회에서 아시아는 4.5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우선 예선 참가국 중 FIFA랭킹이 가장 낮은 14개 팀끼리 홈 &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치른 뒤 살아남은 7개 팀과 부전승으로 2차 예선에 올라온 25개 팀과 함께 32개 팀이 8개 조를 이루어 각 조 1위 팀만이 최종예선에 오른다. 그리고 최종예선에 오른 8개 팀은 2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 2위 팀은 본선에 직행하고 3위 팀은 3위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그리고 그 경기 승자는 북중미 지역 최종예선 4위 팀과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거쳐 승리하면 출전권을 확보한다.
2차 예선에서 한국은 레바논, 베트남, 몰디브와 함께 7조에 속했다. 1차전 레바논과의 홈 경기는 2 : 0으로 가볍게 승리했다. 그러나 2차전 몰디브 원정 경기에서 0 : 0 무승부를 기록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른바 몰디브 쇼크였다. 결국 이 사태로 인해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은 전격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네덜란드 출신의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이 부임했다. 이렇게 출범한 본프레레호는 베트남과의 홈 경기에서 2 : 0 승리를 거두며 일단 한숨을 돌렸다. 2승 1무로 조 1위 자리를 지키긴 했지만 2위 레바논과의 승점 차가 겨우 1점이었다. 4차전 베트남 원정 경기에서도 박진섭이 자책골을 넣으며 불리한 경기를 했지만 2 : 1 역전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레바논 역시 몰디브를 5 : 2로 이겼기에 여전히 1점 차로 불안한 1위를 했다. 이제 5차전 레바논 원정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레바논과의 승점 차를 4점으로 벌려서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 중요한 경기에서 1 : 1 무승부에 그치며 결국 최종전까지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6차전 몰디브와의 홈 경기에서도 상당히 고전했다가 후반 중반에야 김두현의 선제골과 이동국의 쐐기골로 2 : 0 승리를 거두며 4승 2무로 조 1위를 지켜 최종예선 진출에 성공했다.
최종예선에 오른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A조에 속했다. 1차전 상대는 쿠웨이트였다. 2005년 설날에 치른 이 경기에서 한국은 이동국과 이영표의 골로 가볍게 2 : 0 승리를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2차전 상대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그런데 한국은 1989년 이후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이기지 못하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우디의 담맘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그만 졸전 끝에 0 : 2로 패배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본프레레 감독이 경기 후 선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인터뷰를 하여 더욱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며칠 후 홈에서 열린 3차전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도 상당히 고전한 끝에 2 : 1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A조의 중간 순위는 한국이 2승 1패로 조 1위, 사우디아라비아가 1승 2무로 조 2위, 쿠웨이트가 1승 1무 1패로 조 3위, 우즈베키스탄이 1무 2패로 조 4위에 있었다. 4차전은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였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한국은 우즈베키스탄에 선제골을 내주며 또 불리한 경기를 했다. 경기 막판에 당시 떠오르는 신예였던 박주영의 천금 같은 동점골로 간신히 1 : 1 무승부를 거두게 되었다. 4차전 직후 A조 순위는 사우디아라비아가 8점으로 1위, 한국이 7점으로 2위, 쿠웨이트가 4점으로 3위, 우즈베키스탄이 2점으로 4위였다. 그러므로 5차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면 본선 진출이 확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한국은 쿠웨이트를 무려 4 : 0으로 대파하여 6회 연속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마지막 경기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홈 경기였다. 이미 본선 진출은 확정되었지만 한국으로선 이 경기가 5개월 전 담맘에서 겪은 치욕을 설욕할 기회였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한국은 또 사우디아라비아에 0 : 1로 패배하고 말았다. 2005년 동아시안컵에서 2무 1패라는 졸전으로 꼴찌를 한데 이어 또 사우디아라비아에 패배하자 여론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본프레레 감독 역시 본선 진출에 성공하고도 해임되었다.
그 뒤로 대표팀 감독에 부임한 사람은 역시 네덜란드 출신이었던 딕 아드보카트였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4년 전 4강 신화를 함께 했던 히딩크 사단의 일원인 핌 베어벡 코치와 압신 고트비 비디오 분석관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이렇게 출범한 아드보카트호는 본선 직전까지 열린 평가전에서 조금 기복이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코엘류호, 본프레레호 때 모습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기에 본선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일으켰다. 그리고 조 추첨 결과 한국은 프랑스, 스위스, 토고와 함께 G조에 속해 나름 최상의 조 편성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4강 신화 재현의 꿈을 안고 태극전사들은 결전의 땅 독일로 떠났다.
- 대회 최종 엔트리
감독 : 딕 아드보카트
9.1. 조별리그 토고전 - 2 : 1 승
한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아프리카의 처녀 출전국 토고였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아프리카 팀과 맞붙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경기를 앞두고 먼저 열린 다른 아시아 팀들의 성적은 심히 좋지 못했다. 아시아 팀들 중 가장 먼저 경기를 치렀던 이란은 멕시코와 맞붙어 1 : 3으로 패배했고 뒤이어 경기를 치른 일본 역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호주를 상대로 전반 26분, 나카무라 슌스케의 선제골로 앞서갔지만 후반 39분부터 8분 동안 내리 3골을 헌납하며 1 : 3 역전패를 당했다. 아시아 팀들의 성적이 전체적으로 부진한 가운데 대한민국과 토고의 경기가 열렸다. 한편 이 때 토고 대표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오토 피스터 감독이 감독을 사퇴한다고 했다가 다시 번복하는 등 혼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사상 첫 원정 대회에서의 승리가 눈 앞에 왔다는 설레발 보도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에마뉘엘 아데바요르를 앞세운 토고는 생각보다 그리 약한 팀이 아니었다. 오히려 흑인들 특유의 탄력적인 기술을 앞세운 빠른 공격에 한국 수비진들이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상하게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그 동안 연습해 왔던 포백 수비를 버리고 갑자기 스리백 수비를 세우는 바람에 더욱 포지션에 혼란이 생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한국이 우왕좌왕하며 뭔가 혼란에 빠진 모습을 보인 틈을 토고가 놓치지 않았다. 아데바요르의 패스가 어정쩡하게 왔으나 쿠바자는 자신의 넓적다리로 받아서 볼을 떨구며 그대로 오른발 땅볼 강슛을 날렸다. 슛이 그대로 이운재 골키퍼 오른쪽을 지나가며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 토고가 1 : 0으로 앞서갔다. 쿠바자의 선제골이 터지자 토고 선수들은 여럿이 모여 흥겨운 민속춤 셀레브레이션을 하며 첫 골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렇게 전반전은 0 : 1로 뒤진 채로 마무리 되었다.
후반전이 되자 아드보카트 감독은 스리백을 버리고 다시 포백으로 전환해 분위기 반전을 꾀했다. 그리고 후반 9분, 토고 진영 페널티 박스를 향해 쇄도하던 한국의 미드필더 박지성을 토고의 주장 장 폴 아발로가 발을 걸어 쓰러뜨렸다. 주심 그레이엄 폴은 곧바로 장 폴 아발로에게 경고를 주었는데 아발로는 이미 전반 23분에 경고를 받았기에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고 결국 토고는 10명이 뛰게 되었다. 페널티 박스 외곽 지역에서 반칙이 일어났기에 주심은 프리킥을 주었고 킥커로 이천수가 나섰다. 이천수가 절묘한 오른발 감아차기로 동점골을 터뜨리며 다시 스코어는 1 : 1 원점이 되었다. 이 때 골을 넣은 이천수는 대회 2달 전 부상으로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이동국의 골 셀레브레이션을 따라하는 재치를 보였다.
수적 열세를 짊어진 토고는 점차 체력적으로 지친 듯한 모습을 보였고 한국은 더욱더 공세를 강화했다. 1 : 1의 스코어가 계속되던 후반 27분, 토고 우측 진영에서 이천수와 송종국이 패스를 주고 받다가 송종국이 전방의 박지성을 향해 패스를 했는데 박지성이 옆에 안정환이 오는 것을 보고 볼을 잡지 않고 재치있게 흘려주었다. 안정환이 뒤로 돌아 볼을 잡으면서 노마크 상태에서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렸다. 이 슛이 그대로 빨랫줄처럼 날아가 토고 골문 좌측 구석에 정확히 꽂히며 역전골이 터졌다. 이 골로 인해 안정환은 아시아 선수 최초로 월드컵에서 3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스코어는 2 : 1로 다시 한국이 앞서가게 되었다. 이후 후반 막판에 들어서 한국은 지키기 모드에 돌입했고 시간을 지연시켰다. 결국 경기는 그대로 한국의 2 : 1 승리로 끝이 났다. 월드컵 도전 52년 만에 처음으로 원정 대회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고 이 대회에서 아시아 팀 최초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하지만 상대 선수 1명이 퇴장당한 상황에서 1점 차 신승을 거두었던 것이 나중에 두고두고 독이 될 것이란 걸 이 땐 미처 알지 못했다. 아마도 프랑스가 조 1위로 치고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점수 차에 관계 없이 이기는 것에만 염두에 두었던 듯한데 그 누가 알았으랴? 이 대회에서도 프랑스가 조별리그에서 부진하리란 걸. 이 경기가 끝나고 몇 시간 뒤에 열린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기에서 반드시 프랑스가 이겨야만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대회에서 충격적인 조별리그 무득점 탈락의 수모를 겪었던 프랑스는 이번 대회 스위스전에서도 무득점으로 침묵해 4경기 연속 무득점이란 굴욕적인 기록을 이어갔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기가 예상과 달리 0 : 0 무승부로 끝나버리면서 점점 한국의 계산이 꼬여가기 시작했다.
9.2. 조별리그 프랑스전 - 1 : 1 무
1차전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둔 한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이 조 톱 시드 팀인 프랑스였다. 그런데 지난 대회에서 프랑스가 심히 부진한 모습을 보인데다 선수들 평균 연령도 무려 만 29.5세에 달해 ''''늙은 수탉\''''이라고 조롱받고 있었다. 한국으로선 이 경기에서 프랑스를 잡으면 남은 스위스와의 경기에 관계 없이 16강 진출이 확정된다. 하지만 아무리 늙고 쇠잔했다고 하더라도 프랑스는 여전히 강팀이었다. 그렇기에 이 경기가 마냥 쉽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한편, 프랑스로서도 16강 진출을 위해선 반드시 이 경기에서 한국을 잡아야 했다. 만일 이 경기에서 비기거나 질 경우엔 3차전까지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수월하게 16강에 가려면 이 경기에서 한국을 이겨야 했다. 그렇게 양 팀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아무리 프랑스가 강팀이라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보인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용병술은 굉장히 아쉬웠다. 지난 대회에서 프랑스 못지 않은 강팀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등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맞서 싸웠으며 불과 1년 6개월 전엔 친선 경기에서 독일을 3 : 1로 이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기에서 보인 아드보카트 감독의 전술은 마치 무승부를 염두에 둔 듯 굉장히 소극적인 전술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은 계속해서 내려 앉는 플레이를 했고 프랑스의 일방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그렇게 시종일관 난타당하는 플레이는 결국 화를 불렀고 전반 9분 만에 티에리 앙리에게 선제골을 실점하고 말았다. 프랑스로서는 5경기 만에 맛보는 첫 골이었다. 1골이 뒤지게 되자 그제야 어느 정도 반격을 시도하는 듯했지만 프랑스의 압박에 막히며 중앙선을 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급부로 프랑스의 공세는 계속해서 치열해졌다. 전반 32분엔 파트리크 비에이라가 기가 막힌 헤더 슛을 날렸는데 카메라 각도가 희한하여 골이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골 라인을 넘기 직전에 이운재 골키퍼가 극적으로 쳐내며 추가 실점을 막았다. 그렇게 전반전은 프랑스가 1 : 0으로 앞선 채로 끝이 났다.
후반전에서도 경기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프랑스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붓고 한국은 수비로 버틴 뒤 역습을 시도하는 식으로 경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프랑스는 계속해서 추가골을 노렸지만 한국의 수비가 생각보다 촘촘한데다 골키퍼가 한국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인 이운재였기에 추가골을 넣지 못하고 계속해서 1 : 0 불안한 리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스 입장으로서는 골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좀처럼 한국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후반 중반을 넘어서자 평균 연령이 만 30세에 달했던 프랑스 선수들이 점점 체력적으로 지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의 플레이가 점점 살아났다. 그리고 후반 36분, 안정환이 중앙에서 우측의 설기현에게 패스를 했고 설기현은 스피드로 에릭 아비달을 제치며 전방의 조재진을 향해 길게 크로스를 올렸다. 그 볼을 조재진이 프랑스 골문 왼쪽에서 헤더로 받아 밑으로 떨구어주었다. 그리고 그 볼을 프랑스 진영 페널티 박스로 진입한 박지성이 오른발로 가볍게 찍어 찼고 볼이 높이 뜨면서 파비앙 바르테즈 골키퍼의 키를 넘겼고 골문 옆에 붙어서 수비하던 윌리엄 갈라스가 끝까지 수비를 시도했으나 볼이 지면에 맞고 튀어오르며 골 라인을 살짝 넘어가 우측 골망을 흔들었다. 드디어 동점골이 터진 것이다.
승부가 1 : 1 원점으로 돌아가자 한국 선수들은 더욱 힘이 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프랑스 선수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남은 10여 분 동안 계속해서 한국이 공격을 하였고 이 때 프랑스의 바르테즈 골키퍼가 스로인 미스를 범해 역전골을 넣을 수도 있었으나 불행히도 그 때 아무도 없어서 역전골을 넣진 못했다. 그렇게 경기는 1 : 1 무승부로 끝이 났고 한국은 지난 대회에 이어 2차전까지 1승 1무의 성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아직 스위스와 토고의 경기가 열리지 않았기에 이 때까지는 여전히 조 1위 자리를 유지했다. 한편, 프랑스는 2무에 그쳐 마지막 토고와의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16강에 진출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승 1무로 조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에 이제 2개 대회 연속 16강 진출이 거의 눈 앞에 온 듯했다. 그 날 조간 신문 1면이 '16강 청신호'였으니 선수들은 물론이고 한국 축구팬들 모두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 희망이 사그러들기 시작한 건 한국 시각으로 바로 그 날 밤 10시에 있었던 스위스와 토고의 경기에서였다. 이 경기에서 한국 축구팬들은 모두 토고의 선전을 기원했다. 그러나 토고는 이런 한국 축구팬들의 염원을 무참히 배반했다. 전반 16분에 알렉산더 프라이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스위스가 일찌감치 앞서갔다. 그렇게 1 : 0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중 후반 중반에 토고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반칙을 당했다. 페널티킥이 주어져야 했던 상황이었으나 주심은 못 본 척 그대로 넘어갔다. 이 경기에서 스위스는 그렇게 주심 판정의 이득을 보았다. 그리고 후반 43분에 트란퀼로 바르네타가 추가골을 터뜨리며 스위스가 2 : 0으로 승리했다. 그리하여 2차전까지 경기 결과 한국과 스위스는 1승 1무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 득실에서 스위스가 1골이 더 앞서 1위로 올라갔고 한국은 2위로 내려왔다. 그리고 3위가 2무를 기록한 프랑스였고 4위는 2패로 탈락이 확정된 토고였다. 토고와의 경기에서 1골 차로 이긴 게 두고두고 독이 되고 만 것이다.
9.3. 조별리그 스위스전 - 0 : 2 패
이제 16강 진출의 운명이 걸린 조별리그 3차전 스위스와의 경기가 열렸다. 한국에 놓인 경우의 수는 이랬다. 스위스를 이기면 다른 경기 결과에 관계 없이 무조건 16강에 진출한다. 반면, 비기거나 질 경우엔 좀 계산이 복잡해진다. 비기거나 지게 되면 반드시 토고가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해 주어야 했다. 토고가 프랑스와 무승부를 거두거나 혹은 지난 대회 세네갈처럼 아예 이겨주어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즉,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2차전까지 성적이 1승 1무인 건 동일한데 그 때는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갈 수 있었다면 이번엔 비긴다고 해도 16강에 간다는 장담이 없다는 게 다르다. 그만큼 지난 대회에 비해 불리해진 경우의 수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토고와의 경기에서 1골을 더 넣어서 3 : 1로 이겼다면 한국과 스위스는 골 득실이 같아도 다득점에서 한국이 스위스보다 2골 더 앞서기 때문에 한국이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을 것인데 참 두고두고 아쉽게 만들었다.
한편, 이 대회에 출전한 다른 아시아 팀들은 모두 바닥을 기는 성적을 기록했다. 이란,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3나라 모두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1무 2패, 해당조[65] 에서 꼴찌로 탈락했다. 이란은 1차전에서 멕시코에 1 : 3[66] 으로 패배하였고 뒤이어 2차전에서도 포르투갈에 0 : 2로 패배해 일찌감치 2패로 탈락이 확정되었다. 3차전 상대는 아프리카 처녀 출전국 앙골라였는데 이란은 그 앙골라도 못 이기며 1 : 1 무승부에 그쳤다.[67] 일본 역시 1차전에서 호주에 막판 8분 만에 3골을 내리 실점하며 1 : 3 역전패를 당하더니 2차전 크로아티아와의 경기에선 이른바 신칸센 대탈선슛이란 희대의 개그슛을 난사하며 0 : 0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리고 3차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웬일로 선제골을 넣으며 세상을 놀라게 하는가 싶더니 4골을 내리 먹히며 1 : 4 대패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1차전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를 상대로 막판 1분을 못 버티고 동점골을 먹으며 2 : 2 무승부를 거두었고 2차전 우크라이나와의 경기에선 막장스런 경기력을 보이며 0 : 4로 대패했다. 3차전엔 2진 선수들을 투입한 스페인을 상대로도 아무것도 못하며 0 : 1로 패배했다. 이제 한국이 속한 G조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데 유일하게 한국만이 1승 1무로 선전하고 있었기에 이 경기는 아시아 팀들의 자존심이 걸린 경기가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은 이 날 심판을 잘못 만났다. 아르헨티나 국적의 주심 오라시오 엘리손도는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스위스를 위한 편파판정을 했다. 스위스의 센터백 파트리크 뮐러가 이 날 경기에서 핸드볼 파울을 무려 3번이나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페널티킥을 주지 않았다. 물론 핸드볼 파울을 판단하는 것엔 고의성 여부가 중요한데 이걸 판단하는 기준은 팔이 몸쪽으로 붙었느냐 떨어져 있었느냐이다. 그런데 뮐러는 적어도 2번을 대놓고 팔을 뻗은 상태에서 핸드볼 파울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페널티킥 선언이 없었다. 그런데다 주심이란 자가 한국의 패스 진로를 방해하는 것도 여러 번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그 정도로 교묘한 편파판정을 했다. 그렇게 조금씩 경기는 한국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반 23분, 이번 대회에서 처음 선발 출장한 박주영이 대형사고를 쳤다. 가만히 있어도 될 상황에서 괜히 수비를 돕는답시고 스위스의 트란퀼로 바르네타에게 거친 태클을 범했다. 주심은 곧바로 프리킥을 선언했고 킥커로 하칸 야킨이 나섰다. 하칸 야킨이 전방으로 띄운 볼은 정확히 공격에 가담한 스위스의 센터백 필리페 센데로스에게 연결되었다. 대표팀의 맏형 최진철이 끝까지 공중볼 경합을 했고 그 과정에서 센데로스와 충돌해 두 사람 모두 출혈이 발생했으나 그런 보람도 없이 결국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선제골을 실점한 한국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스위스의 단단한 수비 조직력에 막히며 결국 전반전을 0 : 1로 마쳤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각 쾰른에서 열린 프랑스와 토고의 경기는 아직 0 : 0으로 비기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대로 점수가 유지된다면 스위스에 지더라도 한국은 조 2위로 16강 진출이 가능하다. 그리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계속해서 동점골을 넣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장신 떡대들로 이루어진 스위스의 수비 조직력은 정말 단단했다. 연초 칼스버그컵에서 한국은 스위스와 스타일이 유사한 덴마크를 상대로 고전하다가 1 : 3으로 패배했는데 그 때 모습이 오버랩되는 듯했다. 그런데다 설상가상으로 타 구장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후반 10분에 프랑스의 파트리크 비에라가 선제골을 넣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시간 순위에서 한국은 프랑스에 승점 1점이 뒤져 3위로 밀려나게 된다. 반드시 남은 시간 동안 2골을 넣어서 스위스를 이겨야만 16강에 갈 수 있다. 그리고 6분 후인 후반 16분에 쾰른에선 티에리 앙리가 쐐기골을 터뜨려 프랑스가 2 : 0으로 앞서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토고의 선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은 점점 더 불리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후반 18분, 수비수 이영표를 빼고 공격수 안정환을 교체 투입했고 후반 21분엔 부진했던 박주영을 빼고 설기현을 투입해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하지만 한국 공격수들의 골 결정력 부족은 계속해서 안 풀리는 경기를 더욱 안 풀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던 중 후반 32분, 숱한 논란을 일으켰던 알렉산더 프라이의 오프사이드 골 사건이 터졌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건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라이의 골 자체는 온사이드였지만 이미 그 전 상황이 오프사이드였다. 그 골 장면 이전 스위스의 역습 찬스 당시 이미 2명의 스위스 선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었다. 오프사이드는 패스를 받는 시점이 아니라 패스가 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미 그 상황에서 선심이 오프사이드 선언을 해야 했다. 그런데 정작 선심 로돌포 오테로는 그 때 깃발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패스가 가자 오프사이드 트랩 안쪽에 있던 2명의 선수들이 트랩을 빠져나왔고 혼전 상황에서 볼이 오고 가다 프라이에게 패스가 갔는데 그 때에야 선심이 오프사이드 깃발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이 때 프라이의 위치는 온사이드였다. 왜냐하면 골키퍼를 포함한 2번째 수비수였던 김진규의 뒷다리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68] 그러므로 부심이 오프사이드 선언을 해야 할 때 오프사이드 선언을 하지 않았고 온사이드일 때 오프사이드 선언을 했던 것이다. 물론 프라이의 골보다 이전 상황이 이미 오프사이드였기 때문에 이 때 오프사이드 선언이 정확하게 내려졌으면 뒤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므로 프라이의 골은 정당한 골이라 보긴 어렵다. 다만 아쉬운 건 선심의 깃발에 현혹되어 플레이를 멈춰버린 한국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인플레이 상황이라는 기본적인 걸 망각한 것이다. 이 점은 심히 아쉽다.
이렇게 어이없게 추가골을 먹으면서 이제 한국은 3골을 더 넣어야 하는 불리한 입장에 놓이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이렇게 0 : 2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2승 1무를 기록한 스위스가 조 1위, 마지막 경기에서 간신히 승점자판기 토고를 꺾고 1승 2무를 기록한 프랑스가 조 2위를 차지해 나란히 16강에 올랐다. 그리고 선전했던 한국은 1승 1무 1패에 그치며 조 3위로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조별리그 3차전까지 최종 성적이 승점 4점인 팀은 한국과 멕시코, 호주까지 총 3팀이었다. 그런데 멕시코와 호주는 모두 16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한국만 불운하게 16강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한국의 최종 성적은 32개국 중 17위로 조별리그 탈락한 나라들 중에선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한편, 이 경기가 끝난 후 스위스는 두고두고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 이 이후로도 스위스는 매 대회마다 꼭 1~2경기씩 심판 판정의 이익을 얻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한국 축구팬들은 FIFA 회장이 스위스 사람이라서 그 덕을 본다고 질타하고 항상 스위스의 실력을 평가 절하하고 있다. [69] 그리고 갖가지 석연찮은 판정으로 온갖 어그로를 끈 이 경기 주심 오라시오 엘리손도는 두고두고 까임의 대상이 되었다.
10. 2010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아쉬웠던 독일 월드컵이 끝난 후 대표팀 감독 딕 아드보카트는 러시아의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감독으로 떠나버렸고 새 대표팀 감독으로 수석코치 핌 베어벡을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이렇게 출범한 베어벡호는 '생각하는 축구'라는 슬로건을 표방했다. 거스 히딩크와 딕 아드보카트라는 두 명장을 훌륭하게 보좌했던 베어벡 감독이었기에 한국 축구팬들이 거는 기대가 내심 컸으나 정작 베어벡호의 모습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무색무취의 전술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그런데다 베어벡 감독은 어떤 면에선 왕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정말 불운했다. 2007 AFC 아시안컵 직전부터 주력 선수들인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EPL 3인방은 부상으로 이미 엔트리에서 대거 이탈하였고, 다른 공격 옵션들인 박주영, 안정환 등은 리그에서 부진, 그나마 믿고 뽑았던 이동국은 미들즈브러에서 최악의 시즌을 보낸 후 잔부상에 시달려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등 주전 공격진은 사실상 전멸당한 상태였다. 그럼 이제 K리그에서 새 얼굴들을 뽑아야 했는데 문제는 K리그 감독들이 줄줄이 선수차출을 거부했다는 것이다.[70] 그렇기에 베어벡 감독은 선수 선발에 심각한 제약을 겪었다.
이렇게 쓸 수 있는 자원이 극단적으로 한정된 상황에서 베어벡 감독이 취한 길은 '극단적인 수비축구'였다. 물론 조별리그 2차전에서 바레인에 1 : 2로 덜미를 잡히는 이른바 바레인 쇼크를 겪기도 했지만 3차전에서 조 최약체 인도네시아를 1 : 0으로 간신히 꺾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8강 상대 이란을 맞아 120분 동안 걸어 잠그는 질식 수비로 0 : 0으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4 : 2 승리를 거두어 4강에 올랐다. 그리고 4강에서도 당시 화끈한 공격 축구를 구사했던 이라크를 맞아 또 120분 동안 걸어 잠그는 질식 수비로 0 : 0으로 버티며 승부차기로 끌고 갔으나 이 때는 3 : 4로 패배했다.[71] 그리고 3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상대로도 또 120분 동안 걸어 잠그는 수비 축구로 일관하여 3연속 승부차기로 끌고 갔고 6 : 5로 승리하며 3위를 차지했다. 순위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성적이 1승 4무 1패(승점 7점), 3득점 3실점이어서 국민적 비난이 폭발했다. 결국 베어벡 감독은 '포백 수비의 완성'이란 업적을 남겼으나 여론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 사퇴했다. 베어벡 감독이 떠난 후 몇 달 동안 공석으로 유지되었던 대표팀 감독은 허정무 감독이 차지하게 되었다.[72]
이번 대회에도 아시아는 4.5장의 출전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지역예선은 이렇게 치러졌다. AFC 소속 46개 팀 중 43팀이 지역예선에 출전했는데 지난 대회 본선에 진출했던 한국, 호주, 일본,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 5개국은 무조건 3차 예선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나머지 38개 팀은 1차 예선을 치러야 하는데 19개 팀씩 A, B 두 그룹으로 나누어 A그룹 팀과 B그룹 팀을 무작위로 추첨해 홈 & 어웨이 방식으로 겨루어 합산 점수를 따져 점수가 높은 쪽이 이긴다. 그리고 1차 예선 생존자 19개 팀을 피파랭킹 순으로 정리했을 때 상위 11개 팀은 3차 예선에 직행하고 하위 8개 팀은 2차 예선을 치른다. 예선 방식은 1차 예선과 같다. 그리하여 3차 예선에 직행한 5팀 + 1차 예선에서 생존한 11팀 + 2차 예선에서 생존한 4팀까지 총 20개 팀은 5개 조로 나누어 홈 & 어웨이 방식의 리그제로 경기하고 각 조 1, 2위가 최종예선에 진출한다. 최종예선에 오른 10개 팀은 다시 2개 조로 나누어 홈 & 어웨이 방식 리그제로 경기하고 각 조 1, 2위는 본선에 직행한다. 그리고 3위 팀은 3위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그 승자가 오세아니아 지역예선 1위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 이겨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한국은 3차 예선부터 시작하는데 북한, 요르단,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3조에 속했다.[73] 1차전에서 한국은 투르크메니스탄을 4 : 0으로 대파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2차전 북한과의 경기에선 북한의 밀집수비에 고전하며 0 : 0으로 비겼다. 3차전 요르단과의 홈 경기에서도 2 : 0으로 앞서가다가 수비 실책으로 2 : 2 무승부에 그쳤다. 그러나 4차전 요르단 원정 경기에서 고전했으나 1 : 0으로 이겼고 5차전 투르크메니스탄 원정 경기도 3 : 1로 승리하며 한 경기 남은 시점에서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했다. 한편, 북한도 한국과 같은 승점을 기록해 역시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했다. 6차전 북한과의 경기에선 또 0 : 0 무승부에 그쳐 3승 3무로 3차 예선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죽음의 조에 걸리고 말았다. 한국은 북한,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과 함께 B조에 속했다. 심히 껄끄러운 상대들만 잔뜩 있었던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1차전 북한과의 경기에서 또 1 : 1 무승부에 그쳐 2008년 동아시안컵부터 4연속 북한전 무승부의 늪에 빠져버렸다. 출발부터 삐끗한 것이다. 그러나 2차전 아랍에미리트와의 홈 경기에서 4 : 1 대승을 거두며 다시 본 궤도를 찾아갔다. 그리고 3차전 사우디아라비아 원정 경기에서 기어이 19년 간 이어온 사우디 무승 징크스를 깨고 2 : 0 승리를 거두며 선두로 치고 나갔다. 4차전은 아자디 징크스로 악명 높은 이란 원정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선제골을 먹으며 불안한 출발을 했지만 후반 막판, 주장 박지성의 극적인 동점골로 1 : 1 무승부를 거두었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중간 순위는 2승 2무(승점 8점)을 기록한 한국이 1위였고 예상 외로 북한이 2승 1무 1패(승점 7점)를 기록하며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1승 3무(승점 6점)를 기록한 이란이 4위는 1승 1무 2패(승점 4점)에 그친 사우디아라비아가 5위는 1무 3패(승점 1점)에 그친 아랍에미리트가 차지했다.
5차전 경기는 북한과의 홈 경기였다. 한국으로선 반드시 이 경기를 이겨야 조기에 본선 진출을 확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밀집수비를 깨뜨리는데 또 애를 먹으며 고전했고 오히려 북한 에이스 정대세에게 실점할 뻔했으나 이운재 골키퍼가 라인을 넘기 직전에 쳐내며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렇게 또 0 : 0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중 후반 41분에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었다. 킥커 김치우가 왼발로 감아찬 것이 북한 주장 홍영조 손에 맞고 굴절되며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고전 끝에 북한을 1 : 0으로 이긴 한국은 북한보다 1경기 덜 치른 상태에서 1위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6차전 아랍에미리트 원정 경기에선 양 팀이 서로 1명씩 퇴장당하는 거친 경기 끝에 2 : 0으로 승리해 4승 2무(승점 14점)의 전적을 기록하며 2경기 남은 시점에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아시아 팀으로선 최초로 세계에서 6번째로 7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7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홈 경기에선 크게 무리하지 않고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0 : 0 무승부를 거두었다. 이 경기 결과로 남은 경기에 관계 없이 한국은 조 1위가 확정되었다.
이제 최종 예선도 각자 1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A조는 이미 호주와 일본의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고 B조에서도 한국의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 직행 티켓은 B조 2위 자리 단 하나 뿐이었다. 7차전까지 B조의 순위는 한국이 4승 3무(승점 15점)로 1위, 북한과 사우디아라비아가 3승 2무 2패(승점 11점)로 동률이었으나 골 득실에서 북한이 +2, 사우디아라비아가 0이어서 북한이 2위, 사우디아라비아가 3위였다. 그리고 이란이 2승 4무 1패(승점 10점)로 4위였고 아랍에미리트는 1무 7패(승점 1점)로 5위였다. 이미 본선 진출이 확정된 한국과 탈락이 확정된 아랍에미리트를 뺀 나머지 3팀 모두 본선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남북한이 같이 본선에 가는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북한이 본선에 진출하는 경우의 수는 이랬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이기면 무조건 본선에 간다. 만약 비기게 되면 이란의 승점이 13점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한국이 이란과 최소한 비기기라도 해야 한다. 만약 이란이 이길 경우 플레이오프 진출이 확정된다. 만약 지게 되면 한국이 이란을 반드시 이겨야만 플레이오프라도 갈 수 있다. 먼저 한국 대 이란의 경기가 열리고 뒤이어 사우디아라비아 대 북한의 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도 한국은 후반 초반에 선제골을 내주며 불리한 경기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장 박지성이 한 건했다. 침대축구로 시간을 끌던 이란을 향해 후반 36분에 또 다시 천금 같은 동점골을 뽑아냈다. 그리고 경기는 1 : 1 무승부로 끝이 났다. 이로서 한국은 최종예선을 4승 4무(승점 16점)로 마치며 20년 만에 무패로 끝냈다. 이 경기 무승부로 이란의 승점이 11점에 묶이면서 북한이 크게 유리해졌다. 최종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 골키퍼 리명국의 신들린 선방쇼와 질식 수비를 앞세워 0 : 0 무승부를 기록했다. 북한과 사우디아라비아는 3승 3무 2패(승점 12점)로 동률이었으나 골 득실에서 북한이 2골이 더 앞서며 B조 2위를 차지해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44년 만에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분단 국가가 월드컵 본선에 동반 진출한 건 서독과 동독이 함께 진출했던 1974 서독 월드컵 이후 36년 만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서독이 개최국이었고 나란히 지역예선을 치러 통과한 건 이번이 최초였다.
그리고 조 추첨 결과 한국은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스와 함께 B조에 속해 비교적 무난한 조 편성을 받았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희대의 졸장 디에고 마라도나의 엉성한 지휘로 인해 지역예선에서 무려 6번이나 패배하며 겨우겨우 본선에 올라왔고 그리스와 나이지리아는 세대 교체 실패로 하락세를 타고 있던 팀이었으며 한국이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팀이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는 좀 어렵지만 그리스와 나이지리아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같이 본선에 올라온 북한은 조 추첨 복불복에서 최악의 패를 받아들여야 했다. 브라질, 포르투갈, 코트디부아르와 함께 죽음의 조인 G조에 속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한국도 16강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어려운 난이도인데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북한에는 너무도 가혹하기 그지 없는 조 편성이었다.
- 대회 최종 엔트리
감독 : 허정무
10.1. 조별리그 그리스전 - 2 : 0 승
사상 첫 원정 대회 16강 진출을 노리는 허정무호의 조별리그 첫 상대는 바로 그리스였다. 그리스는 1994 미국 월드컵 때 한 번 본선에 오른 적이 있었지만 나이지리아에 0 : 2로 패배했고 불가리아와 아르헨티나에 각각 0 : 4로 대패해 3전 전패를 기록하며 24개국 중 24위를 기록한 바 있었다. 그 이후 16년 만에 ''''오토 대제\''''라는 별명을 지닌 독일 출신의 백전노장 오토 레하겔 감독의 지휘 아래 본선에 올랐다. 조 추첨 당시부터 한국 축구팬들과 언론들은 그리스를 강력한 1승 제물로 지목했다. 그도 그럴 것이 3팀 중에서 가장 전력이 처지는 팀이 바로 그리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 배팅 사이트에서는 그리스에 좀 더 낮은 배당률을 책정하여 그리스의 승리에 좀 더 무게를 실었다. 아무래도 당시 피파랭킹이 한국은 47위였고 그리스는 13위였기에 그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한국과 그리스의 운명을 건 한 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경기 초반엔 그리스가 잠시 경기를 주도하며 좋은 찬스를 얻었다. 전반 3분에 그리스가 코너킥 찬스를 얻었고 요르기오스 카라구니스가 중앙으로 띄운 볼을 바실리스 토르시디스가 논스톱으로 왼발 슛을 날렸으나 허공으로 높이 떴다. 위기 뒤에 바로 기회가 왔던 전반 7분, 공격에 가담한 좌측 풀백 이영표가 그리스 진영 좌측 코너 플래그 가까이까지 치고 올라갔고 수비하던 그리스의 우측 풀백 유르카스 세이타리디스가 손으로 밀어 쓰러 뜨렸다. 주심은 곧바로 한국에 프리킥을 주었다. 킥커로 기성용이 나섰다. 기성용이 중앙으로 볼을 띄우자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이정수가 그리스 수비수들 뒤에 숨어 있다가 쏜살같이 튀어나와서 오른발로 그대로 받아 차 넣어 선제골을 터뜨렸다. 이것은 한국의 ''''월드컵 최단시간 득점\''''이었다. 8년 전 이을용의 기록이 갱신된 것이다.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넣은 한국은 1 : 0으로 앞서가며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선제골 이후부터 경기는 완전히 한국의 페이스였다. 전반 중반에 박지성이 센터 서클에서 전방의 박주영에게 기가 막힌 스루 패스를 넣었고 박주영이 발이 느린 그리스 수비수들을 따돌리며 골키퍼와 1 : 1 찬스를 만들었고 슛을 날렸으나 그리스 골키퍼 알렉산드로스 초르바스의 왼발에 맞고 볼이 굴절되며 나가버리는 바람에 추가골 득점에 실패했다. 그리스로서는 한바탕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이었다. 전반 막판에 그리스의 센터백 루카스 빈트라가 전방의 테오파니스 게카스를 향해 롱볼을 띄웠고 게카스가 골문을 향해 쇄도했으나 한국 골키퍼 정성룡이 안전하게 잡아냈다. 이 때 정성룡은 햇빛 때문에 시야가 가리는 악조건 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방하며 실점을 막았다. 그렇게 전반전은 한국이 1 : 0으로 리드한 채로 끝이 났다.
후반전에도 경기 양상은 한국이 지배하며 공격하고 그리스가 수비 후 역습으로 기회를 노리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는 단순무식한 롱볼축구로만 일관하여 전혀 한국을 향해 유효타를 날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후반 7분, 그리스의 레프트백 바실리스 토르시디스가 센터백 루카스 빈트라에게 패스했는데 그만 빈트라가 볼을 잘못 터치하며 흘려버렸고 이를 한국의 주장 박지성이 놓치지 않았다. 박지성은 폭발적인 스피드로 빈트라를 따돌리며 그리스 진영 문전으로 쇄도해 들어갔고 센터백 아브람 파파도풀로스의 태클마저도 이겨내며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왼발 땅볼 슛을 날렸다. 초르바스 골키퍼가 각도를 줄여 선방하려고 나왔으나 자신이 예측한 방향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슛이 가면서 그대로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스코어는 2 : 0으로 벌어졌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상대 팀을 2골 차로 리드하는 건 2002년 폴란드전 이후 8년 만의 일이었다. 박지성은 아시아 선수 최초로 3개 대회 연속 득점한 선수라는 기록과 함께 안정환에 이어 2번째로 월드컵에서 3득점을 기록한 아시아 선수가 되었다.
스코어가 2점 차로 벌어지자 승부는 한국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고 그리스 선수들은 전의를 상실한 듯 무기력한 플레이를 펼쳤다. 일찌감치 3장의 교체 카드를 모두 쓰며 공격의 강도를 높였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그리스는 세밀하게 경기를 풀어가기보다는 계속해서 단순무식한 롱볼만을 고집해 효율적인 대응을 전혀 하지 못했다. 한국은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으며 추가골을 노렸다. 그러나 박주영의 결정적인 헤더 슛은 골문 위로 떠버리고 김정우의 슛은 골대를 맞았으며 이청용의 슛은 '소녀슛'이란 별명답게 너무 약했다. 이번에도 '2골의 벽'은 너무도 높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리스 입장에선 일방적으로 밀린 경기였고 자칫 잘못했으면 4~5점 차로 대패할 뻔하기까지 했으나 초르바스 골키퍼가 몇 개의 결정적인 슈팅을 선방해준 덕분에 더 큰 점수 차로 벌어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경기 막판에 김정우가 날카로운 오른발 슛을 날렸으나 골문 왼쪽 옆 그물을 때리며 노골이 되었다.
결국 경기는 한국의 2 : 0 승리로 끝이 났다. 이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에서 첫 승을 기록한 한국인 감독'이 되었다. 이 경기 이전까지 한국은 월드컵에서 총 4승을 거두었으나 모두 네덜란드인인 거스 히딩크 감독과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기록한 것이었고 한국인 감독이 월드컵에서 1승을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뒤이어 열린 같은 조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의 경기는 전반 5분에 터진 가브리엘 에인세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킨 아르헨티나가 1 : 0으로 승리했다.[74] 그로 인해 한국과 아르헨티나는 나란히 1승을 기록하며 동률을 이뤘지만 골 득실에서 한국이 +2, 아르헨티나가 +1이었기에 한국은 단숨에 조 선두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이것은 불안한 1위였다.
10.2.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전 - 1 : 4 패
한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아르헨티나였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선수로서 맞대결을 했던 허정무와 디에고 마라도나는 24년 만에 감독으로서 재회하게 되었다. 사실 이 기묘한 인연 때문에 대회 전부터 여러 말이 많았다. 조 추첨에서 한국과 한 조가 되자 마라도나는 "한국 감독 허정무를 기억하느냐?"는 언론의 인터뷰에 "물론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 뒤 "1986년 당시 한국은 우리를 상대로 축구를 했다기보다는 태권도를 했다."며 독설을 날렸다. 24년 전 허정무 감독이 자신을 향해 이른바 태권축구를 했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마라도나의 독설에 허 감독은 "태권도 한 적 없다."며 일축했다.[75] 24년 전 한국은 아르헨티나와 맞붙어 박창선이 한국의 월드컵 첫 득점을 쏘아 올렸으나 경기는 1 : 3으로 패배했다. 과연 그 때의 패배를 후배들이 설욕할 수 있을지가 주목되었다.
당초 한국 축구팬들과 언론들은 이 때 아르헨티나를 좀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무조건 이긴다는 식의 반응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당시 아르헨티나가 지역예선에서 심히 맛이 간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지대 원정이라는 페널티가 있었다지만 그 핫바리 볼리비아 따위한테 1 : 6으로 대패를 당하였고 그 밖에 브라질, 파라과이,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에도 내리 패배를 기록하며 무려 6번이나 패배를 당하고 겨우 본선에 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맛탱이가 갈대로 가버린 아르헨티나였기에 해볼 만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미처 몰랐다. 예선 때 맛이 갔던 팀이라고 해서 꼭 본선에서도 그런 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경기가 시작되자 아르헨티나는 한국의 오른쪽 라인이 약점이라는 걸 간파한 듯 줄기차게 오른쪽 라인을 털었다. 왼쪽의 박지성 - 이영표 라인에 비해 오른쪽의 이청용 - 오범석 라인은 너무도 허약했고 경기 내내 뚫렸다.[76] 거기다가 아르헨티나를 리오넬 메시 원맨 팀으로 착각한 듯 계속해서 메시만 집중적으로 마크했고 다른 선수들은 자유롭게 풀어놓는 실책을 범했다. 그 때부터 경기 양상이 점점 꼬여가기 시작했다. 어렵게 실점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으나 전반 17분, 아르헨티나의 프리킥 찬스에서 킥커로 리오넬 메시가 나섰다. 메시가 중앙으로 볼을 띄웠는데 운이 지지리도 없게 수비에 가담한 박주영의 무릎에 볼이 맞고 굴절되며 골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한국은 이렇게 어이없는 자책골로 1골을 실점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경기는 아르헨티나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전반 33분, 막시 로드리게스가 김정우를 피해 좌측에서 띄운 얼리 크로스를 수비수 니콜라스 부르디소가 백헤더로 전방으로 패스했고 이걸 곤살로 이과인이 다시 헤더로 연결해 추가골을 터뜨렸다. 더 아쉬운 건 수비수 조용형이 이과인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쳐서 이과인이 노마크 상태로 프리 헤더를 했다는 것이다. 점수는 0 : 2로 벌어졌다. 경기는 이렇게 점점 더 꼬여갔다.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던 중 전반 종료 직전 다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골키퍼 정성룡의 골킥이 길게 전방으로 날아갔고 스트라이커 박주영이 아르헨티나의 레프트백 가브리엘 에인세의 마크를 이겨내며 공중볼을 따냈다. 볼은 페널티 박스 쪽으로 흘렀고 이걸 센터백 마르틴 데미첼리스가 잡았는데 그만 시끄러운 부부젤라 소리에 동료와 사인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던 사이 슬금슬금 아르헨티나 진영으로 침투한 이청용이 볼을 가로채 페널티 박스로 들어갔고 세르히오 로메로 골키퍼가 각을 줄여 선방하려고 전진하자 한 발 먼저 찍어 차 만회골을 터뜨렸다. 이렇게 전반전은 1 : 2로 아르헨티나가 앞선 채 끝이 났다. 비록 2골을 아쉽게 내주긴 했지만 그래도 전반전이 끝나기 전에 1골을 만회했기에 어느 정도 희망이 생겼다.
1점 차로 따라붙으며 희망이 생긴 한국은 후반 초반부터 동점골을 넣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후반 12분에 이청용이 아르헨티나 수비진을 초토화시키며 염기훈에게 기가 막힌 스루 패스를 넣어주었고 염기훈은 세르히오 로메로 골키퍼와 1 : 1 찬스를 얻었다. 그런데 오른발로 찼으면 분명히 골이 들어갔을 것인데 염기훈은 그 상황에서도 주로 쓰는 발인 왼발 슛을 고집했고 결국 골문 밖으로 슛이 벗어나며 동점골 기회를 놓쳤다. 그 때문에 경기 후 염기훈은 두고두고 국민적 비난을 받아야 했다. 동점골 기회를 놓친 뒤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사실상 한국의 최후의 펀치가 헛방으로 끝난 후 그 때부터 경기는 다시 아르헨티나가 일방적으로 주도했다. 후반 31분, 리오넬 메시와 앙헬 디 마리아가 중원에서 패스를 주고 받으며 한국의 우측 진영을 쇄도해 들어갔는데 한국 수비수들의 시선은 오로지 메시에게만 쏠려 있었고 뒤에서 들어오는 곤살로 이과인의 움직임을 또 놓치는 실책을 범했다. 메시가 슛을 했으나 정성룡 골키퍼가 발로 막아냈다. 그러나 볼은 다시 메시의 발 앞에 굴러갔고 메시가 다시 슛을 했는데 골대를 맞고 굴절되며 이과인의 발 앞에 갔다. 그리고 이과인이 노마크 찬스에서 왼발로 잽싸게 밀어넣으며 스코어를 다시 3 : 1로 벌렸다.[77] 그리고 4분 후인 후반 35분, 메시와 세르히오 아궤로, 곤살로 이과인이 3자 패스를 주고 받으며 한국 진영으로 밀고 올라갔는데 이 때 또 한국 수비수들이 메시에게만 우르르 몰려가 뒤에 있던 이과인의 움직임을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이과인은 이번에도 노마크 찬스에서 아궤로의 짧은 크로스를 프리 헤더로 연결해 해트트릭을 성공시키며 스코어는 4 : 1로 벌어졌다. 결국 경기는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난 후 허정무 감독의 용병술은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가장 비판을 받은 것은 1차전 그리스전에서 잘했던 우측 풀백 차두리를 대신에 왜 오범석을 투입했느냐는 것이다. 오범석은 어리버리한 모습을 보이며 한국의 우측 라인 붕괴에 크게 일조했다. 선수들도 무지막지하게 까였다. 그 오범석과 더불어 후반 초반에 결정적인 동점골 찬스를 어이없는 개발슛으로 날려먹은 염기훈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 두 사람은 아예 ''''오염 라인\''''이란 멸칭을 받았고 염기훈 개인으로도 ''''염의족\'''', ''''염발\''''등 온갖 멸칭을 받았다. 물론 이런 과도한 비난은 자제해야 했지만 염기훈이 결정적인 동점골 찬스를 날린 것은 분명 비판 받아 마땅했다. 그 골이 들어갔더라면 경기 양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맞붙었던 아르헨티나는 역대 최약체 수준이었지만 전술적 실패와 불운하게 들어간 자책골, 골 결정력 부족으로 인해 1 : 4 대패의 수모를 당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4실점을 한 건 1998년 마르세유의 치욕 이후 12년 만의 일이었다.
뒤이어 열린 같은 조 그리스와 나이지리아의 경기가 그리스의 2 : 1 승리로 끝이 나며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흘러갔다.[78] 이 때문에 2승을 기록한 아르헨티나도 16강 진출을 확정짓지 못했고 2패를 기록한 나이지리아도 탈락이 확정되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또 복잡한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했다. 한국이 최종전에서 나이지리아를 잡으면 다른 경기에 관계없이 16강 진출이 확정된다. 만약 비길 경우엔 반드시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이겨주어야 했다. 만약 아르헨티나도 그리스와 비길 경우엔 그리스와 다득점을 비교해야 하고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그 즉시 한국은 탈락한다. 나이지리아에 패배할 경우에도 역시 가차없이 탈락이었다. 깔끔하게 16강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3차전에서 나이지리아를 잡아야 한다.
10.3. 조별리그 나이지리아전 - 2 : 2 무
한국의 16강 진출이 걸린 조별리그 3차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가 열렸다. 한국이 아프리카 팀과 월드컵에서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나이지리아는 카메룬과 함께 검은 돌풍의 1세대에 해당하는 팀이지만 이 당시는 그 전성기에서 조금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도 1차전에서 아르헨티나에 0 : 1로 석패했지만 2차전 승점자판기 그리스를 상대로도 10명이 뛰는 수적열세를 짊어진 끝에 1 : 2 역전패를 당했다. 다행히도 아르헨티나가 한국을 4 : 1로 잡아준 덕에 아직 탈락이 확정되진 않았다. 나이지리아가 16강에 가려면 다른 선택이 없다. 반드시 한국을 1골 차로라도 이기고 동시에 아르헨티나가 그리스를 이겨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한국, 그리스, 나이지리아 3팀 모두 1승 2패 동률이 되지만 나이지리아는 골 득실이 -1 이상이 되고 한국과 그리스는 -2 이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나이지리아가 조 2위로 16강에 올라갈 수 있다. 그렇게 양팀의 운명이 걸린 경기가 열렸다.
허정무 감독은 여론의 비난을 의식한 듯 아르헨티나전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던 오범석을 빼고 다시 차두리를 출전시켰다. 그런데 전반 12분, 한국의 좌측 진영을 파고 든 나이지리아의 라이트백 치디 오디아가 김정우의 마크를 이겨내고 땅볼로 깔리는 크로스를 올렸는데 차두리가 뒤에서 들어오고 있던 칼루 우체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고 칼루 우체가 잽싸게 골을 밀어넣으며 선제골을 터뜨렸다.[79] 4년 전 스위스전의 악몽이 슬금슬금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두 번의 실패는 없다는 것인지 한국 선수들은 다시금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하지만 슈팅이 아쉽게 살짝살짝 빗나가면서 땅을 쳐야 했다.
그러던 중 전반 38분, 활발하게 오버래핑을 하던 한국의 좌측 풀백 이영표를 나이지리아의 미드필더 치네두 오바시가 발을 걸어 쓰러뜨렸다. 1차전 그리스전 선제골 당시 프리킥을 얻었던 그 위치에서 또 다시 프리킥을 얻었다. 프리킥과 함께 주심은 오바시에게 경고를 부여했다. 킥커는 이번에도 기성용이 나섰다. 기성용의 프리킥은 문전으로 향했고 이번에도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이정수가 마무리하며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 때 이정수는 헤더를 시도했으나 높이가 맞지 않았고 떨어지는 볼을 재빨리 오른발로 차 넣었다. 이 때문에 네티즌들로부터 '헤딩 + 발차기'란 뜻으로 ''''헤발슛\'''', 혹은 골 넣기 전에 상대한테 먼저 인사를 하는 것 같다고 하여 ''''동방예의지국슛\''''이란 별명을 얻었다. 만 28세 늦깎이로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던 이정수는 이번 대회에서 2골을 터뜨리며 홍명보, 안정환에 이어 3번째로 한 대회에서 2골을 터뜨린 한국 선수가 되었다. 이후로 치열한 공방전이 오간 뒤 전반전은 1 : 1로 끝이 났다. 한편, 폴로콰네에서 열리는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경기는 여전히 0 : 0으로 비기고 있었다. 현재 실시간 순위는 아르헨티나가 2승 1무로 조 1위였고 한국과 그리스가 1승 1무 1패, 골 득실 -1로 동률이지만 다득점에서 한국이 4득점으로 2득점에 그친 그리스보다 앞서서 조 2위, 그리스가 3위였고 나이지리아는 1무 2패로 조 4위였다. 이제 점점 16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후반전이 되자 한국은 다시 공세를 높였고 3분 만에 좋은 골 찬스를 잡았다. 공중볼 경합 도중에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외곽에서 나이지리아의 센터백 대니 시투가 한국 공격수 박주영을 손으로 밀어버리는 반칙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주심은 즉시 한국의 프리킥을 선언했다. 킥커로 박주영이 나섰다. 킥커 박주영은 수비진을 우회하는 절묘한 오른발 감아차기 슛을 했고 잇단 선방으로 2경기 연속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던 빈센트 엔예아마 골키퍼는 방향 예측에 실패하며 역동작에 걸려 그대로 골을 실점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역전골이 터진 것이다. 경기는 다시 한국이 2 : 1로 앞서갔다. 한국이 다시 앞서가자 나이지리아의 라르스 라예르베크 감독은 백전노장 공격수 은완코 카누를 빼고 오바페미 마르틴스를 교체 투입해 동점골을 노렸다. 한편, 허정무 감독은 공격수 염기훈을 빼고 수비형 미드필더 김남일을 투입해 수비를 강화하며 굳히기에 들어갔다.
한편 이대로 경기가 끝날 경우 조별리그에서 탈락할 뿐 아니라 역사상 최초로 '3전 전패'라는 치욕을 뒤집어 쓰게 되는 나이지리아도 더 물러설 수 없었다. 나이지리아에 남은 선택은 오직 공격 뿐이었다. 어떻게든 남은 시간 동안 2골을 넣어서 승부를 뒤집어야 했다. 그렇게 나이지리아는 점점 더 공격적으로 나왔다. 그리고 후반 21분, 선제골의 주인공 칼루 우체가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외곽에서 전방의 아일라 유수프에게 스루 패스를 넣었고 유수프는 차두리의 태클을 피해 중앙의 야쿠부 아이예그베니에게 패스했다. 이 때 센터백 조용형과 이정수는 야쿠부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고 골키퍼 정성룡은 유수프의 낮게 깔리는 크로스를 잡으려고 몸을 던졌지만 실패했다. 골문은 완벽하게 열려 있었고 볼은 정확히 야쿠부의 발 앞에 갔다. 그런데 야쿠부의 슛은 어이없게도 골문 왼쪽 바깥으로 벗어나버렸다. 이런 어이없는 슈팅으로 결정적인 동점골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다. [80][81] 한국으로선 행운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불과 3분 후에 다시 찾아왔다.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김남일과 치네두 오바시가 볼 경합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김남일이 오바시를 태클로 쓰러뜨리면서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킥커로 3분 전 결정적인 골 찬스를 놓쳤던 야쿠부가 나섰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다. 정성룡 골키퍼의 눈을 속이며 반대쪽으로 차 넣으며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다시 스코어는 2 : 2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경기는 뜨거워졌다. 20분 남짓 남은 시간 동안 양 팀은 계속해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펼쳤다. 하지만 한국도 나이지리아도 숱한 골 찬스를 얻었지만 아쉬운 마무리 능력을 보이며 모조리 날려먹었다. '2골의 벽'은 여전히 높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경기는 2 : 2 무승부로 끝이 났다. 같은 시각 폴로콰네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 그리스의 경기가 아르헨티나의 2 : 0 승리로 끝나면서 1승 1무 1패를 기록한 한국은 3전 전승을 기록한 아르헨티나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해 사상 최초로 원정 대회에서 16강 진출에 성공하는 감격을 누렸다. 2002년 대회에 이어 8년 만에 다시 한 번 16강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10.4. 16강전 우루과이전 - 1 : 2 패
B조 2위로 16강에 오른 한국은 A조 1위 우루과이와 맞붙게 되었다. 우루과이는 월드컵 초대 챔피언이었지만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2번째 우승을 차지한 이후로 점점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1970 멕시코 월드컵까지는 4강에 2번 올랐고 8강에도 1번 오르며 아직은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1970년에 4강에 오른 이후로는 예선 탈락을 한 것만 5번이나 되었고 1970년 대회에서 소련을 이긴 것을 끝으로 2002년까지 32년 동안 단 1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그 경기가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전이었다. 그러나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경기도 제 실력으로 이긴 것도 아니었고 주심 툴리오 라네세의 편파판정을 등에 업고 간신히 1 : 0으로 이긴 것이었다. 그래서 우루과이는 쇠락한 강호로 전락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 우루과이는 달랐다. 남미 지역예선에선 5위에 그쳐 북중미 4위 코스타리카와 플레이오프를 치러 간신히 본선에 올랐지만 본선에서 우루과이는 영 딴판이었다. 첫 경기에서 전 대회 준우승국 프랑스와 0 : 0으로 비긴 뒤 개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3 : 0으로 대파하고 뒤이어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마저 1 : 0으로 격파하며 2승 1무, 4득점 무실점이란 준수한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했다. 서서히 옛날의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에서 한국과 우루과이가 만난 것은 1990년 대회 이후 20년 만이다. 과연 후배들이 그 당시 심판의 편파판정 덕에 억울하게 패배했던 선배들의 한을 씻어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경기 시작 5분 만에 한국은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얻었다. 우루과이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외곽에서 우루과이의 라이트백 막시 페레이라가 한국의 주장 박지성의 발을 걸어 쓰러뜨리는 반칙을 범했기 때문이다. 주심 볼프강 슈타르크는 즉시 한국의 프리킥을 선언했다. 킥커는 박주영이 나섰다. 그러나 이번 박주영의 프리킥은 수비벽을 절묘하게 넘겼으나 아쉽게도 골대를 맞고 튕겨나오고 말았다. 기회 뒤에 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전반 8분, 우루과이의 주포 디에고 포를란이 한국 우측 진영에서 개인기로 김정우를 따돌리며 중앙으로 낮은 크로스를 했는데 이걸 골키퍼 정성룡이 무리하게 몸을 던지며 잡으려 했다. 그러나 볼의 스피드가 빨라 잡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 수비수들의 시선은 포를란 쪽으로 쏠려 있어 뒤로 돌아오던 루이스 수아레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놓쳤다. 정성룡이 다이빙 캐치에 실패하자 수아레스는 노마크 상태에서 곧바로 쇄도해 들어가 낼름 줏어먹으며 선제골을 터뜨렸다.
또 다시 선제 실점을 했지만 이번엔 아르헨티나전처럼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은 그 때부터 쉴 새 없이 우루과이를 향해 공격하며 동점골을 노렸고 오히려 우루과이가 라인을 내리며 수비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박주영의 대포알 슛도 차두리의 회심의 중거리슛도 모두 골문을 외면하고 말았다. 우루과이 역시 간간이 좋은 득점 찬스를 얻었지만 한국의 육탄방어에 막히며 추가골을 넣지 못했다.[82] 그렇게 양쪽 모두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놓친 채 전반전은 우루과이가 1 : 0으로 리드하며 끝이 났다. 8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상대에게 먼저 골을 내주고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과연 이번에도 극적으로 승부를 뒤집었던 이탈리아전의 감동을 재현할 수 있을까?
후반전에도 경기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한국이 우루과이 진영에서 볼을 점유하고 공격하며 득점 기회를 만들어갔고 우루과이는 자기 진영에 잔뜩 웅크리며 버틴 후 역습을 노렸다. 그리하여 후반 초반 한 때 볼 점유율이 '''70% : 30%'''까지 벌어졌다. 놀랍게도 한국이 70%였다. 그렇게 쉬지 않고 우루과이의 골문을 두들겼기에 우루과이 선수들은 하프라인을 넘는 것조차 어려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두들기고 두들겨도 우루과이의 골문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몰랐다. 후반 중반에 접어들자 우루과이의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은 1골 차 리드를 지키려는 듯 잠그기로 전환했다. 우루과이가 골문을 더욱 굳게 걸어잠그자 한국의 득점 기회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후반 16분, 허정무 감독은 우측 윙어 김재성을 빼고 공격수 이동국을 투입해 4-2-3-1 포메이션을 4-4-2 포메이션으로 전환하여 공격의 강도를 높였다. 공격수 숫자를 늘려서 우루과이의 굳게 닫힌 골문을 부수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던 중 후반 23분, 우루과이의 센터백 디에고 루가노의 반칙으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킥커 기성용이 전방으로 볼을 높이 띄웠고 우루과이의 센터백 마우리시오 빅토리노가 이정수를 제치고 공중볼을 따냈으나 볼이 지면 아래로 떨어지며 다시 튀어올랐고 그걸 좌측에 있던 이청용이 디에고 루가노보다 먼저 점프하여 다시 헤더로 연결했다. 우루과이의 페르난도 무슬레라 골키퍼가 앞으로 달려나왔지만 볼은 그의 키를 넘겼고 다시 지면으로 떨어져 바운드가 된 뒤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루과이의 레프트백 호르헤 푸실레가 끝까지 걷어내기를 시도했지만 이미 골 라인을 통과한 뒤였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동점골이 터지며 스코어는 다시 1 : 1이 되었고 한국은 다시 희망을 되찾았다.[83] 이청용 역시 이 대회에서 2골을 기록하면서 홍명보, 안정환, 이정수에 이어 4번째로 한 대회에서 2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다. 이후 한국은 역전골을 넣기 위해 더욱 공세를 강화했고 2분 후, 동점골의 주인공 이청용이 다시 좋은 득점 기회를 잡았으나 또 그 특유의 '소녀슛'으로 역전골 기회를 놓쳤다. 동점이 되자 더 이상 잠그기만 할 수 없게 된 우루과이도 다시 공세를 취했다. 그리하여 경기는 다시 치열하게 불타올랐다. 경기 내내 흐린 날씨가 지속되던 포트엘리자베스엔 어느 새 장대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이어지던 중 후반 35분, 우루과이가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우루과이의 코너킥을 수비에 가담한 박주영이 헤더로 잘 걷어냈으나 그 볼이 애석하게도 지면에 맞고 바운드가 되면서 페널티 박스 외곽에 있던 니콜라스 로데이로에게 갔다. 로데이로는 마크맨 김정우보다 한 발 먼저 헤더로 공을 잘라먹었고 이 공이 페널티 박스 좌측 외곽에 있던 수아레스에게 흘러갔다. 김정우가 끝까지 수아레스의 슈팅 길목을 잘 막았지만 수아레스는 오른발로 파 포스트를 향해 감아찼고 그것이 기가 막히게 골대를 맞으며 안쪽으로 휘어 들어가고 말았다. 또 수아레스에게 골을 실점하며 스코어는 다시 2 : 1로 우루과이가 앞서갔다. 가히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허 감독은 후반 40분, 두 번째 교체 카드로 기성용을 빼고 염기훈을 투입해 공격수 숫자를 늘려 다시 골을 노렸다. 그리고 후반 41분, 박지성이 중원에서 전방의 이동국을 향해 절묘한 스루패스를 했고 이동국이 그 볼을 받았으나 그만 그 유명한 '카페베네 슛'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이동국의 슛은 페르난도 무슬레라의 옆구리를 스쳤는데 그 때 속도가 죽어버리면서 데굴데굴 힘 없이 굴러갔고 그게 골 라인을 넘기 직전에 우루과이의 센터백 디에고 루가노가 걷어내며 동점골로 연결되지 않았다.[84] 결국 경기는 그대로 우루과이의 2 : 1 승리로 끝이 났고 한국의 8강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외신들은 이 경기에서 보였던 한국의 수준 높은 플레이를 극찬했으며 특히 ZDF에서 해설을 했던 독일의 전설적인 골키퍼 올리버 칸은 "한국이 이겨야 마땅한 경기였다. 그러나 멍청한 골키퍼의 실책 때문에 승리를 내주고 말았다."며 한국의 선전을 칭찬함과 동시에 골키퍼 정성룡을 강하게 질타했다. 이 경기의 승장 오스카르 타바레스 감독 또한 "상당히 힘든 경기였다. 경기 내내 중원을 한국에 지배당했다. 우리가 운이 좀 더 좋아서 이길 수 있었다."며 한국을 칭찬했다. 패장 허정무 감독은 "우리가 경기를 지배했고 좋은 플레이를 했지만 골을 넣어야 할 때 못 넣어서 지고 말았다."며 아쉬움을 삼켰다. 우루과이의 주포 디에고 포를란 역시 훗날 이 대회를 회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경기를 바로 16강전 대한민국과의 경기였다고 밝혔다. 이렇게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를 맞아서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더 앞선 경기력을 보였으나 허 감독의 말대로 골을 넣어야 했을 때 골을 넣지 못한 것이 패인이고 아쉬운 점이었다. 어쨌든 한국이 우루과이에 접전 끝에 석패하며 우리의 행진도 여기서 막을 내렸다. 2002 월드컵 4강 멤버가 선수생활 마지막으로 뛴 월드컵이기도 하다.
11. 2014 브라질 월드컵
첫 원정 16강을 달성했던 허정무 감독이 계약 만료로 물러나고 새 감독으로 조광래 감독이 부임했다. 조광래 감독은 당시 스페인이 선보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점유율 축구를 한국에도 도입하겠다고 나서며 한국 축구 스타일을 바꾸겠다는 야심을 밝혔다. 하지만 이렇게 야심차게 출범한 조광래호는 '왕의 귀환'이란 슬로건으로 우승을 노리고 출전했던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서 4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연장 혈투 끝에 2 : 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3명이 내리 실축하는 이른바 삼연뻥으로 인해 또 우승에 실패하고 3위에 그쳤다. 첫 원정 16강 진출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될 대로 고조되어 있었는데 이같은 성적은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이 대회를 끝으로 오랫동안 왼쪽 라인을 든든하게 지켰던 박지성과 이영표가 국대에서 은퇴를 했고 이제 그 대체자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얼토당토 않은 그의 포지션 파괴 실험으로 인해 좀처럼 대체자를 찾지 못했다. 이후 6월에 치른 가나, 세르비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1승 1무의 성적을 거두며 다시 여론을 반전시키는 듯했지만 8월에 일본과의 친선 경기에서 있었던 이른바 삿포로 참사로 인해 조광래호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다운된 상태에서 한국은 2014 브라질 월드컵 지역예선에 나섰다. 예선 방식은 지난 대회와 동일하게 진행되었고 한국은 3차 예선부터 치렀다. 다만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경우 남미 지역예선 5위와 치른다는 게 다르다. 3차 예선에서 한국은 레바논,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와 함께 B조에 속했다. 1차전 레바논과의 홈 경기에선 박주영의 해트트릭과 지동원의 2골에 힘입어 무려 6 : 0 대승을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2차전 쿠웨이트 원정 경기에서 한국은 졸전 끝에 1 : 1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3차전 아랍에미리트와의 홈 경기에서도 답답한 경기력을 보인 끝에 2 : 1 신승에 그쳤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B조의 순위는 한국이 2승 1무(승점 7점)로 조 1위, 쿠웨이트가 1승 2무(승점 5점)로 조 2위, 레바논이 1승 1무 1패(승점 4점)으로 조 3위, 아랍에미리트가 3패로 최하위에 있었다. 4차전 아랍에미리트 원정 경기에서도 한국은 90분 내내 답답한 경기를 하다가 막판에 이근호와 박주영의 골로 2 : 0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박주영이 경고를 받아 경고 누적으로 다음 경기에 출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5차전 레바논 원정 경기. 이 경기를 앞두고 한국이 3승 1무(승점 10점)로 조 1위, 레바논이 2승 1무 1패(승점 7점)로 조 2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이 레바논을 상대로 이기면 남은 경기에 관계 없이 최종예선 진출이 확정된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한국은 무기력한 경기 끝에 레바논에 1 : 2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른바 레바논 쇼크. 이로 인해 한국과 레바논의 승점은 10점으로 같아졌고 설상가상으로 쿠웨이트가 아랍에미리트를 2 : 1로 이기면서 승점을 8점으로 추가해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최하위 아랍에미리트만 5전 전패로 탈락이 확정되었을 뿐 나머지 3팀 모두 마지막 경기에 따라 최종예선 진출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조광래 감독을 전격 경질하였고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이었던 최강희를 차출 형식으로 빼왔다. 그러나 조 감독을 경질한 것도 절차에 맞지 않는 밀실 행정이었고 최 감독을 선임한 것도 K리그 감독을 억지로 빼앗은 것에 가까워 축협은 이런 후진적인 일처리 방식 때문에 두고두고 까였다. 그런데다 최 감독은 "나는 최종예선까지만 맡겠다."며 스스로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진퇴를 못 박아버렸다. 사실 이 말은 곧 거절하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지만 당시 축협 회장 조중연은 무식하게 그대로 최 감독 임명을 강행했다. 이제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6차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최강희호는 쿠웨이트의 강한 공격에 전반 내내 고전했지만 후반전에 이동국과 이근호의 릴레이 골로 2 : 0 승리를 거두어 4승 1무 1패(승점 13점)의 성적으로 조 1위를 차지해 최종예선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하마터면 최종예선도 못 가고 떨어질 뻔했으나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호주와 함께 톱 시드를 받았다. 한국은 이란, 우즈베키스탄, 카타르, 레바논과 함께 A조에 속했다.
최종예선 1차전은 카타르 원정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선제 실점하는 불운을 겪었지만 이근호의 멀티골과 센터백 곽태휘, 공격수 김신욱의 골을 묶어 4 : 1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2차전 레바논과의 홈 경기에서도 3 : 0 대승을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3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기성용이 자책골을 넣는 불운한 경기를 한 끝에 2 : 2 무승부에 그쳤다. 그리고 4차전 아자디 징크스로 악명 높은 이란 원정에서 마수드 쇼자에이의 퇴장이라는 호재에도 불구하고 0 : 1로 패배하고 말았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A조의 순위는 한국과 이란이 2승 1무 1패(승점 7점)로 동률을 이뤘으나 한국의 골 득실이 +5, 이란의 골 득실이 0이어서 한국이 1위, 이란이 2위를 차지했다. 뒤이어 1승 2무 1패(승점 5점)를 기록한 우즈베키스탄이 3위, 카타르와 레바논이 1승 1무 2패(승점 4점), 2득점 5실점으로 공동 최하위였다.
5차전 카타르와의 홈 경기에서 한국은 카타르의 밀집수비와 침대축구 콤비에 시종일관 고전했다. 후반 15분에 이근호가 어렵게 선제골을 넣었으나 불과 3분 후에 또 세트피스 상황에서 실점하고 말았다. 1 : 1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중 후반 45분이 다가고 5분의 추가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주심 니시무라 유이치는 카타르의 의도적인 시간 지연행위 때문에 5분이 지나도 경기를 끝내지 않고 추가시간에 추가시간을 또 적용했다. 그리고 추가시간 6분에 이동국의 슛이 골 포스트를 맞고 튕겨나왔는데 그 리바운드 볼을 신예 손흥민이 골문 밖 50cm 거리에서 잽싸게 밀어넣으며 극적인 결승골을 터트렸다. 그리하여 카타르를 2 : 1로 간신히 꺾고 승점 3점을 추가했다. 이 경기 승리로 한국은 1경기 덜 치른 상태에서 우즈베키스탄과의 승점 차를 1점으로 좁혔다.
그리고 6차전 경기는 한국은 레바논 원정 경기였다. 2년 전 레바논 쇼크의 치욕을 씻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한국은 이번에도 또 전반 12분 만에 선제 실점하며 어려운 경기를 했다. 패색이 짙어지던 한국은 후반 추가시간 7분에야 김치우의 프리킥 동점골로 간신히 1 : 1 무승부를 거뒀다. 이 경기로 인해 레바논의 탈락이 확정되었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은 승점 11점으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앞서 다시 1위를 탈환했다. 그러나 이란이 카타르를 1 : 0으로 이겨 승점을 10점으로 추가해 불안한 1위였다. 뒤이어 7차전 우즈베키스탄과의 홈 경기에서도 한국은 답답한 경기력을 보이다가 상대 수비수 쇼라흐메도프의 자책골 덕에 간신히 1 : 0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뒤이어 이란도 레바논을 4 : 0으로 이기면서 카타르의 탈락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3팀은 마지막까지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예선전을 1경기 남긴 시점에서 A조의 순위는 이랬다. 1위는 4승 2무 1패(승점 14점)를 기록한 대한민국이었고 2위는 4승 1무 2패(승점 13점)의 이란, 3위는 3승 2무 2패(승점 11점)의 우즈베키스탄이었다. 4위는 2승 1무 4패(승점 7점)의 카타르, 5위는 1승 2무 5패(승점 5점)를 기록한 레바논이었다. 당시 레바논은 이미 모든 경기를 다 치렀고 나머지 4팀이 각각 1경기를 남겨둔 상태였다. 4팀 중 이미 탈락이 확정된 카타르를 뺀 나머지 3팀은 모두 본선 진출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사전 담합 및 승부조작 방지를 위해 최종전 한국 VS 이란과 우즈베키스탄 VS 카타르는 동시에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경기를 앞두고 최 감독과 이란의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은 지독한 신경전을 벌였다. 그 때문에 경기는 시작 전부터 불 타올랐다.
8차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한국은 시종일관 경기를 지배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족은 계속해서 발목을 잡았다. 이란 선수들이 하프 라인을 넘지 못할 정도로 쩔쩔매는 데도 도무지 이란의 골문은 열리질 않았다. 그렇게 전반전이 0 : 0으로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후반전에도 한국이 계속해서 공격을 펼쳤으나 계속해서 끈적한 이란의 늪 수비에 막히며 고전했다. 그러던 중 후반 15분, 한국 수비수 김영권이 치명적인 수비 실책을 범했다. 이 볼을 레자 구차네자드가 잽싸게 가로채 이 경기에서 이란의 유일한 슈팅을 날렸는데 그게 골로 연결되었다. 결국 이 중요한 경기에서 이란에 0 : 1로 패배했다. 경기가 끝난 후 이른바 케이로스의 주먹감자 사건까지 터졌다. 같은 시각 우즈베키스탄이 카타르를 5 : 1로 크게 이겼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승점은 14점으로 같았으나 골 득실에서 1골이 앞서 간신히 조 2위를 차지해 8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라이벌 일본이 탄탄대로를 걸으며 본선에 간데 반해 한국은 살얼음을 디디며 통과를 해 본선 진출을 하고도 최강희 감독은 욕만 잔뜩 퍼먹었다.[85] 그런데다 기성용의 최 감독 조롱 파문으로 대표팀 분위기는 점점 쑥대밭이 되었다.
취임 전 공언대로 최 감독은 최종예선이 끝나자 즉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났고 또 새 감독을 찾아야 했다. 축협은 마치 해외 유명한 감독을 선임할 것처럼 요란 뻑적지근하게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러나 이미 대다수의 축구팬들은 이미 그런 축협의 언플을 믿지 않았고 결국 예상대로 홍명보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홍명보호도 기대 이하의 모습만 보였다. 그나마 축협은 웬일로 지난 히딩크호 못지 않게 평가전 상대는 남부럽지 않게 잘 섭외해 주었다. 문제는 히딩크호는 강팀들과 부딪혀서 지면서 배워나가는 게 있었고 그를 통해 대표팀 내에 산적했던 문제점을 개선하였다는 거지만, 홍명보호는 지기만 했을 뿐 배운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산적했던 문제점은 전혀 개선된 것 없이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래도 조 추첨 결과라도 좋았기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조 추첨 결과 한국은 벨기에, 러시아, 알제리와 함께 H조에 속한 것이다. 이전까지의 조 편성과 비교해보면 이보다 더 최상일 수 없는 꿀조였다. 벨기에는 신흥 강호였지만 이제 막 뜨는 팀이라 중량감이 약했고, 러시아 역시 시드를 못 받은 유럽팀들 중에선 그리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과 더불어 전력이 처진다는 평가를 받았는데다 무엇보다도 러시아로 재탄생한 이후로 한 번도 16강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알제리는 지난 대회에서도 1무 2패에 그친 약체였다. 그러니 상당히 쉬운 조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간과했던 건 홍명보가 이 쉬운 조도 험난한 조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심각하게 무능한 졸장이었다는 것이다. 본인부터가 전술적 능력이 전혀 없어서 자기가 잘 아는 1가지 전술 이외엔 어떤 변화를 주지도 못했고, 그 점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또 선수 선발도 소속팀에서 잘 뛰고 있는 선수들을 배제하고 이미 폼이 떨어진 박주영, 윤석영 등을 발탁해 이른바 '의리축구' 논란이 일었다. 안 그래도 당시 한국은 2014년 4월에 있었던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인해 나라 전체가 우울했던 상태였는데, 이미 평가전 성적도 바닥을 기고 있어서 월드컵이란 분위기가 안 느껴질 정도로 일찌감치 국민들이 기대를 접어버렸다.[86] 그렇게 홍명보호는 결전의 땅 브라질로 향했다.
- 대회 최종 엔트리
감독 : 홍명보
11.1. 조별리그 러시아전 - 1 : 1 무
한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이탈리아 출신의 명장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지휘하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소련 시절엔 굉장한 강호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로는 이번이 겨우 3번째 본선 진출이었고 이전 2번의 월드컵에선 모두 1승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카펠로 감독에게 무려 한화로 '''115억 원'''이란 엄청난 연봉을 지급할 정도로 러시아는 이번 월드컵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차기 개최국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잇단 평가전에서의 졸전으로 국민적 비난을 한몸에 받아온 홍명보호로서는 반드시 이 경기에서 승리해야 터닝 포인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과연 4년 전 오카다 타케시 감독이 이끄는 일본 대표팀의 기적을 홍명보호가 재현할 수 있을지 주목되었다.
한편, 이 경기 이전에 열린 다른 아시아 팀들의 성적은 심히 좋지 못했다. 가장 먼저 경기를 치렀던 호주는 칠레의 공격축구에 사정없이 난타당하며 1 : 3으로 참패했다. 뒤이어 일본이 경기를 치렀다. 당시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이 지휘하는 일본은 지역예선과 평가전에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였기에 한껏 기대가 높아져 있었고 잊을 만하면 또 다시 등장하는 '4강 드립'을 쳐댔다. 그러나 1차전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혼다 케이스케가 선제골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디디에 드로그바가 교체 투입되자 잔뜩 쫄아버려서 순식간에 2골을 내리 헌납하며 1 : 2 역전패를 당했다. 그 다음으로 이란의 경기가 열렸는데 이란 역시 별로 좋은 모습을 못 보여주었다.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늪 축구로만 일관해 어거지로 0 : 0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러다 보니 졸지에 한국이 아시아의 자존심을 살려야 할 대표주자가 되어버렸다.
경기가 시작되자 두 팀 모두 라인을 내린 채 수비적인 경기 운영을 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 이전 평가전 때보다는 좀 더 보강된 수비로 버틴 후 역습을 통해 득점 기회를 만들어갔다. 그러나 팀의 에이스 손흥민은 좋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월드컵 첫 경기라 긴장을 했는지 슈팅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좋은 득점 찬스에서 홈런을 때려버렸고 원톱 스트라이커 박주영은 3년 간 소속팀에서 제대로 뛰지 못해 폼이 떨어졌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청용이 기가 막힌 스루 패스로 볼을 배급하며 득점 기회를 만들어 주었건만 정작 박주영이 제대로 패스를 받지 못하며 득점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 박주영 본인은 멋쩍었는지 이청용에게 따봉을 했다. 하지만 그 장면 이외에 박주영은 과연 경기장에 있긴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예 존재감이 없었다. 한국과 러시아 모두 엉덩이를 뒤로 빼고 내려 앉는 경기를 한 탓에 경기는 전체적으로 상당히 지루했으며 ''''이런 지루한 수비 축구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브라질 관중들은 양 팀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두 팀 모두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잡았으면서도 골 결정력이 좋지 못했고 제대로 된 유효타를 때리지 못하며 결국 전반전은 0 : 0으로 마무리 되었다.
후반전이 되자 결국 홍명보 감독은 부진했던 박주영을 빼고 발 빠르고 돌파력이 왕성한 이근호를 교체 투입했다. 교체 카드는 적중했다. 이근호가 들어오면서 한국의 공격이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후반 23분, 이근호가 중앙에서 볼을 몰고 가고 양 측면에서도 공격수가 돌진하며 3 : 3 역습찬스를 맞았다. 그런데 이근호가 줄 듯 줄 듯 하다 본인이 중거리슛을 때렸고 계속 공을 흘리던 이고르 아킨페예프가 기름손이 작렬해 결정적인 펀칭미스를 하며 선취골을 뽑아냈다. 이것이 이번 대회 한국의 첫 골이자 선제골이었다. 당시 이근호는 상주 상무 소속의 군인이었는데 1994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 당시 서정원에 이어 20년 만에 군인 출신 득점자가 되었다. 이렇게 한국이 1 : 0으로 앞서가며 2002년부터 이어져 온 첫 경기 승리 공식이 4연속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선제골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센터백 홍정호가 부상으로 빠진 후 황석호가 교체 투입되었는데 이 황석호가 제대로 사고를 쳤다. 후반 29분, 측면이 뚫리면서 러시아가 강한 슈팅을 했는데 골키퍼 정성룡이 선방했고 수비가 걷어냈지만 불행하게도 그 볼이 알렉산드르 케르자코프의 가슴에 맞고 그의 발 앞에 떨어졌다. 그런데 황석호는 케르자코프를 막을 생각은 않고 손을 들어 오프사이드 어필을 하기 바빴다. 주심이 휘슬을 불기 전까지는 여전히 인플레이 상황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8년 전에 그렇게 비싼 값을 치러서 배웠는데도 또 잊어버린 것이다. 결국 케르자코프는 노마크 상태에서 편하게 슈팅해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렇게 스코어는 다시 1 : 1 원점이 되었다. 경기가 열린 쿠이아바는 아마조니아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열대 지방이었는데 그 때문에 경기장은 고온다습의 찜통더위가 이어졌다. 그 때문에 한국과 러시아 양쪽 모두 선수들이 체력 저하를 드러냈고 결국 무승부에 만족하기로 한 것인지 소극적인 경기 운영을 했다. 그렇게 경기는 1 : 1 무승부로 끝이 났다.
비록 승리하지 못해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잇단 평가전에서의 졸전으로 사기가 저하된 상황에서 지역예선에서 강호 포르투갈을 플레이오프로 떨구고 본선에 직행한 데다 대회 전 벨기에와 조 1위를 놓고 경합할 것으로 예측되었던 러시아를 상대로 선전해 무승부를 기록했기에 다시 자신감과 희망이 생겼다. 홍명보 감독 본인도 자신감이 생겼는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직전 평가전에서 가나에 0 : 4로 대패한 것에 대해 "가나전은 전혀 우리에게 중요한 게임이 아니었고 우리는 오늘 이 경기에만 집중했다."고 심히 우쭐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3전 전패가 예상된다 할 정도로 여론이 극도로 좋지 못한 상황에서 패배를 하진 않았기에 잠시나마 그런 우쭐한 모습에도 관대히 넘어가고 여론이 조금씩 좋아졌다. 하지만 16강에 가려면 이제 2차전에서 반드시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걸 모두들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때 얻은 희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1.2. 조별리그 알제리전 - 2 : 4 패
한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사막여우란 별명을 지닌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였다. 알제리는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서독을 2 : 1로 잡아내는 파란을 일으켰던 팀이었다. 그러나 히혼의 수치로 인해 2승 1패를 기록하고도 억울하게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때를 제외하고는 월드컵에서 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거기다 당시 알제리 대표팀 감독이었던 바히드 할릴호지치는 그 특유의 불 같은 성질머리 때문에 여기서도 협회 수뇌부와 척을 지며 하루가 멀다 하고 대판 싸움을 벌여댔다. 그런데다 1차전에서 벨기에에 1 : 2 역전패를 당해 탈락 위기에 몰려버렸다. 그러자 알제리 축구협회 측에선 할릴호지치 감독에게 경질 압박을 넣기에 이르렀다. 이런 알제리 대표팀의 내분은 시시각각 한국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다.[87] 그래서일까 알제리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점점 짙어졌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 축구팬들이 목도한 것은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 역사상 최악의 경기였다. 고사성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심각하게 처참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초반부터 알제리가 공격적으로 나서며 쉴새없이 한국을 두들겼다. 알제리의 맹공에 한국 수비진들은 정신줄을 놓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초반부터 내내 한국 수비진들은 계속 심리적 공황 상태에 놓인 것인지 혼란스러운 모습만 보였고 간신히 천운에 힘입어 실점만 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던 전반 26분, 알제리 진영에서 카를 메자니가 한국의 배후 공간을 향해 전방으로 길게 볼을 띄웠다. 볼은 전방의 이슬람 슬리마니에게 왔고 양 옆에는 한국의 센터백 홍정호와 김영권이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역할 분담이 안 되었는지 나란히 달리기만 하면서 전혀 슬리마니의 움직임을 제지하지 못했다. 결국 슬리마니는 아무런 방해 없이 페널티 박스까지 침투했고 골키퍼 정성룡은 슈팅 각도를 줄이려는 시도도 없이 멍하니 보고 있다가 그대로 실점하고 말았다. 그렇게 알제리가 1 : 0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경기는 급격하게 알제리 쪽으로 기울었다. 불과 2분 후, 알제리의 코너킥 찬스에서 압델무멘 자부가 띄운 코너킥을 수비수 라피크 할리시가 헤더로 잘라먹으며 추가골을 터뜨려 스코어는 순식간에 2 : 0으로 벌어졌다. 그 때 골키퍼 정성룡은 할리시 뒤쪽에서 펀칭을 시도하려다 헛손질만 했고 페널티 박스 안에는 8명의 한국 선수가 들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 하나 공중볼 경합을 하지 않고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며 그대로 프리 헤더 찬스를 내줬다. 선수들에게 지시를 하고 위치를 조정해주어야 할 홍명보 감독은 멘붕이 왔는지 아무것도 안 하고 벤치에 앉아서 깍지 낀 채 한숨만 픽픽 내쉬었다. 그리고 전반 38분, 다시 알제리 진영에서 전방으로 긴 패스가 날아왔다. 이 패스를 홍정호가 머리로 떨구었으나 공은 선제골을 넣은 이슬람 슬리마니의 발 앞으로 굴러갔다. 그런데 한국의 센터백 김영권과 홍정호는 모두 슬리마니에게 시선이 쏠렸고 그 결과 페널티 박스에 침투해 있던 압델무멘 자부를 등지게 되었다. 슬리마니는 잽싸게 자부를 향해 패스를 넣었고 노마크 상태였던 자부는 왼발 슛을 날려 손쉽게 골을 성공시키며 점수는 금세 3 : 0으로 벌어지고 말았다.
지난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도 전반전에는 1점 차로 대등하게 겨뤘던 태극전사들이었다. 그러나 오늘 경기에선 아르헨티나의 발 끝에도 못 미치는 알제리를 상대로 전반전에만 0 : 3으로 끌려간 데다 알제리가 12개의 슈팅을 날리는 동안 한국은 단 1개의 슈팅도 기록하지 못했다. 유효슈팅 개수가 0개가 아니라 '''슈팅 자체가 0개였다는 것이다.''' 알제리의 원톱 이슬람 슬리마니가 활발하게 움직이며 1골 1도움을 기록할 동안 한국의 원톱 박주영은 파울을 했을 때 외에는 눈에 띄지도 않아 경기장에 있긴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16년 전 마르세유의 치욕 그 이상으로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새벽잠을 설치며 이 경기를 시청했던 한국 축구팬들 모두 이런 목불인견의 대표팀을 바라봐야 하는 악몽을 겪었다. 그렇게 전반전이 끝이 났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몇 분간 탐색전을 거친 후에 5분 만에 한국이 좋은 득점 기회를 잡았다. 하프 라인 바로 아래쪽에서 기성용이 전방을 향해 한 번에 긴 패스를 넣었고 그 패스는 곧바로 전방의 손흥민을 향해 날아갔다. 손흥민은 그 볼을 등으로 받아 떨어뜨렸고 따라붙으려는 알제리의 주장 마지드 부게라를 간단하게 따돌린 뒤 왼발 슛을 날렸다. 손흥민의 슛은 알제리 골키퍼 라이스 음볼리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 들며 드디어 만회골이 터졌다. 손흥민의 개인기 덕에 1 : 3으로 일단 1점을 따라붙는데 성공한 한국은 다시 분위기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프리킥 찬스를 얻었을 때 구자철이 기습적인 슈팅으로 알제리를 위협했으나 골이 라인을 넘기 직전에 아이사 만디가 극적으로 걷어내며 3 : 1 스코어를 지켰다. 그리고 후반 10분에 기성용이 윤석영의 패스를 받아 멋진 중거리슛을 날렸고 거의 골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라이스 음볼리 골키퍼가 간신히 선방하며 위기를 넘겼다. 홍명보 감독은 후반 12분, 2경기 연속 부진하다 못해 존재감이 없었던 박주영을 빼고 김신욱을 투입했다.
하지만 기회 뒤에 바로 위기가 왔다. 후반 17분, 알제리의 야신 브라히미가 한국 진영을 쇄도하며 문전에 있던 소피앙 페굴리에게 패스를 건넸고 자신은 페널티 에어리어로 침투했다. 그런데 그 때 또 한국 수비수들은 페굴리에게 시선을 뺏기며 침투하는 브라히미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고 또 다시 노마크 1 : 1 찬스를 허용하였다. 페굴리는 잽싸게 브라히미에게 패스를 넣었고 뒤늦게 김영권이 달려가서 태클을 시도했으나 브라히미가 그 전에 이미 슈팅을 날려 추가골을 뽑아내 또 다시 3점 차로 벌어졌다. 수문장 정성룡은 이번에도 슈팅 각도를 좁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또 실점하였다. 그렇게 점수는 4 : 1로 벌어져 더욱더 경기가 꼬이고 말았다. 지난 대회 아르헨티나전에 이어 또 조별리그 2차전에서 4실점을 기록하고 만 것이다. 후반 19분, 홍명보 감독은 이청용을 빼고 이근호를 투입했다.
후반 27분, 하프라인 바로 위쪽에서 다시 한 번 기성용이 전방을 향해 긴 패스를 넣었고 196cm의 장신 공격수 김신욱이 알제리 수비수 2명을 제치고 높이 뛰어올라 공중볼을 따냈다. 세컨드볼을 페널티 박스로 침투한 손흥민이 받았다. 손흥민이 슈팅을 시도했으나 먼저 마지드 부게라가 태클로 걷어냈다. 그러나 볼은 좌측에 있던 이근호의 발 앞으로 굴러갔고 이근호는 우측의 구자철을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구자철이 왼쪽 종아리로 받아 넣으며 다시 1점을 따라붙었다. 이근호는 교체 투입으로만 2경기를 소화하고도 연속으로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2 : 4로 점수를 좁힌 후 한국은 계속해서 김신욱을 겨냥한 공중볼 위주로 알제리를 밀어붙였지만 슈팅 찬스가 빗나가며 득점 기회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알제리의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은 2골 차로 좁혀지자 그 동안 아껴둔 교체 카드를 쓰며 굳히기에 들어갔다. 후반 33분에 한국영과 교체 투입된 지동원이 알제리 진영에서 좋은 슈팅을 날렸으나 아쉽게도 골문 오른쪽으로 벗어났다.
90분이 임박해 갈 무렵 다시 한 번 김영권이 하프 라인 근처에서 길게 전방으로 볼을 띄웠고 그걸 김신욱이 헤더로 받아 떨구었다. 좌측의 지동원이 세컨드볼을 따냈고 지동원이 중앙의 손흥민에게 패스했다. 손흥민이 슈팅을 날리려 했으나 알제리의 센터백 카를 메자니가 손흥민을 밀어 쓰러뜨리고 볼을 따냈다. 그러나 주심 윌마르 롤단은 그 장면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페널티킥 선언을 하지 않고 그대로 인플레이를 시켰다. 경기 말미에 알제리 선수들은 시간을 끌기 위해 침대축구를 쓰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 그대로 주심의 종료 휘슬이 울렸고 경기는 알제리의 4 : 2 승리로 돌아갔다. 이 경기로 인해 한국은 1무 1패의 전적으로 순식간에 조 최하위로 떨어졌고 알제리는 단숨에 조 2위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1승 제물이라고 얕잡아 보았던 알제리에 정통으로 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경기를 ''''알제리 쇼크\''''라고 부른다.
이 경기와 후에 16강에서 알제리가 독일을 상대로 크게 선전하며 1 : 2 석패를 당했기에 한동안 알제리의 실력이 한국 축구팬들에게 좀 과대평가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당시 알제리가 승리한 팀은 한국 하나 뿐이었고 독일과의 경기에서 선전한 것도 상성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본래 독일이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제 3대륙 팀들 중 유난히 딱 2팀을 상대로 약세를 보이는 징크스가 있는데 그 2팀이 바로 한국과 알제리였다. 즉, 알제리가 유달리 독일만 만나면 강한 면모를 보였고 또 그 경기에서 독일의 요아힘 뢰프 감독이 당시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인 필립 람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면서 포백 라인을 모두 센터백으로 구성하는 이른바 '포터백 전술'이란 괴상한 실험 때문에 꼬였고, 거기에 더해 슈코드란 무스타피의 희대의 민폐 플레이가 한몫한 것도 있다.[88][89] 대회가 끝난 후 알제리는 다시 아프리카의 그저 그런 팀으로 전락해버렸고 다음 대회에선 아예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알제리가 그렇게 강한 팀이 아닌 것은 분명했고 충분히 이길 만한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처참하게 패배한 건 순전히 감독이 무능한 졸장인 홍명보여서 그렇다. 자신이 잘 아는 1가지 전술 외에는 어떤 변화를 줄 줄을 몰랐으니 상대가 그 전술의 공략법을 들고 나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이런 초보 감독 홍명보를 국대 감독으로 선임해 월드컵에 내보낸 대한축구협회에 있다. 장기적인 안목 없이 근시안적 행정으로 감독을 2번이나 갈아치우며 대표팀을 파행으로 몰고 간 주범이 바로 대한축구협회이다. 원래 그 전부터 사실 많이 까이고 있던 집단이었지만 이 날 경기의 참패로 인해 대한축구협회는 국민들 사이에서 완전히 악의 축으로 전락해버렸고 혁파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까지 그래도 별로 대국민적 비난을 받아온 적이 없었던 홍명보는 이제 완전히 국민 역적으로 전락해 버렸다. 20년 전 자신의 동료였던 황선홍이 받은 국민적 비난 그 이상으로 되돌아왔다.
11.3. 조별리그 벨기에전 - 0 : 1 패
한국의 조별리그 3차전 상대는 이 조 톱시드 팀인 벨기에였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선수로 맞대결했던 홍명보와 마르크 빌모츠는 16년 만에 감독으로서 월드컵 무대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1무 1패로 조 최하위로 내려 앉은 한국은 아직 탈락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16강 진출을 위한 경우의 수가 엄청나게 복잡했다. 알제리에 지더라도 1골 차로 졌다면 그래도 상황이 조금은 더 나았을 것인데 2골 차로 패배하는 바람에 경우의 수가 더 어려워진 것이다. 당시 H조 순위는 2승을 기록한 벨기에가 조 1위로 이미 16강 진출을 확정지었고 1승 1패를 기록한 알제리가 조 2위, 그리고 한국과 러시아가 나란히 1무 1패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러시아가 -1로 -2인 한국보다 앞서서 3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조 4위였다. 그러므로 16강에 가려면 골 득실을 고려할 때 벨기에를 이겨도 그냥 이기는 게 아니라 3점 차 이상으로 이겨야 하고 아울러 러시아가 알제리와 비기거나 적은 점수 차이로 이겨야 했다. 이 2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야 16강에 가는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이미 한국 축구팬들은 16강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렸고 그냥 유종의 미만 거두고 올 것을 주문했다.
한편, 이 경기를 앞두고 다른 아시아 팀들은 조별리그 3경기를 모두 다 마쳤는데 가장 먼저 경기를 치른 호주는 1차전에서 칠레에 1 : 3으로 패배한 후 2차전에선 스페인을 5 : 1로 쳐발라버린 네덜란드를 상대로 매우 선전했으나 2 : 3으로 석패했고 3차전에선 쇠잔할대로 쇠잔한 스페인에 0 : 3으로 대패하며 3전 전패로 대회를 마쳤다. 일본도 1차전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었으나 디디에 드로그바의 패왕색에 쫄아버리며 1 : 2 역전패를 당한 뒤 2차전 그리스와의 경기에선 주장 코스타스 카추라니스가 퇴장당해 수적 우세를 등에 업고도 오쿠보 요시토의 후지산 대폭발슛이 작렬하며 0 : 0으로 비겼다. 그리고 3차전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선 하메스 로드리게스에게 농락당하며 1 : 4로 대패해 1무 2패로 탈락했다. 뒤이어 이란 역시 1차전에서 나이지리아와 0 : 0으로 비긴 뒤 2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철저한 선수비 후역습으로 매우 선전했으나 리오넬 메시의 원샷원킬에 당하며 0 : 1로 석패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3차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에서 1 : 3으로 패배하며 1무 2패로 탈락했다. 이제 다시 마지막 한국의 차례가 되었다. 이 경기가 아시아 팀이 1승이라도 거두어 체면치레를 할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홍명보 감독은 여론을 의식한 듯 2경기 내내 부진했던 박주영을 벤치에 앉히고 김신욱을 선발 출전시켰고 알제리전에서 대량 실점하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골키퍼 정성룡 역시 벤치에 앉히고 김승규를 대신 선발로 내보냈다. 그 둘만 바꿨을 뿐인데도 경기력은 알제리전에 비해 훨씬 더 나아졌다. 골키퍼 김승규는 정성룡보다 훨씬 더 안정감 있고 뛰어난 순발력을 보이며 벨기에의 슈팅을 좋은 선방으로 막아냈고 김신욱 역시 본래는 처진 스트라이커 역할에 알맞은 선수이지만 그래도 공중볼 경합에서 크게 한몫을 한 데다 2경기 내내 있으나 마나였던 박주영보다는 그래도 나름 원톱 스트라이커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러나 문제는 골 결정력이었다. 반드시 다득점을 해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손흥민과 구자철의 슈팅은 번번이 벨기에의 골문을 외면했다. 전반전에 잠시 골이 들어간 것 같은 슛이 있긴 했으나 골 라인 판독 결과 라인을 살짝 물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득점으로 인정되지 않았다.[90] 그리고 전반 종료 직전에 벨기에의 미드필더 스테번 드푸르가 김신욱의 다리를 밟는 반칙을 범하였고 벤 윌리엄스 주심은 곧바로 퇴장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한국은 수적 우세라는 호재를 안았다.
후반전이 되자 10명이 뛰는 벨기에는 최전방에 한 명만 남기고 전원이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앉는 노골적인 선수비 후역습 태세로 전환했다. 한편, 한국은 수비형 미드필더 한국영을 빼고 공격수 이근호를 투입해 공세를 강화하며 득점을 노렸다. 하지만 안 그래도 골 결정력 부족이란 고질병을 앓고 있었던 한국인데 홍명보호는 그 중에서도 골 결정력이 단연 최악이었던 대표팀이었다. 쉴 새 없이 벨기에의 골문을 두들겼지만 좀처럼 골문이 열리지 않았다.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는 시점이라는 마의 65분을 넘어서자 한국의 공격 템포도 점점 무뎌졌다. 그런데다 홍명보 감독은 또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전방에서 잘 뛰고 있던 김신욱을 후반 21분에 빼고 김보경을 투입했고 후반 28분에 손흥민까지 빼고 지동원을 교체 투입했다. 여기서부터 경기가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김보경과 지동원 두 사람 모두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뛰질 못해 박주영 못지 않게 실전 감각이 떨어져 있었던 선수들이었는데 과연 이 둘은 후반 중반에 교체 투입된 선수라는 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헥헥거렸다. 누가 보면 풀 타임을 소화한 선수로 착각할 정도로 저질체력을 보였다. 특히 김보경은 중원에서 공만 잡았다 하면 질질 끌었다. 보다 못한 안정환이 "아니 어차피 패스로 전진할 루트인데 왜 공을 가지고 타이밍을 늦추나요?"라고 질타할 정도로 공을 잡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며 지동원은 예상대로 중앙에서 못 버티고 측면으로 빠지는 움직임을 보여줬는데 지동원이 측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의 공격 템포가 죽어버리자 벨기에의 마르크 빌모츠 감독은 드리스 메르턴스를 빼고 나세르 샤들리를 투입했고 또 신예 아드낭 야누자이를 빼고 공격수 디보크 오리기를 교체 투입해 공격수 숫자를 늘려 맞불을 놓았다. 그러자 벨기에는 과연 10명이 뛰는 팀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슬금슬금 한국 진영으로 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또한 김신욱이 빠지면서 대표팀의 공격 작업은 왜곡된 티키타카로 변해 실속없이 문전 앞에서 패스만 돌렸는데, 원톱에 선 박주영이 수비 뒤쪽 공간으로 침투하는 상황만 상정하고 연습했다는 것이 팍팍 티가 났다. 훈련할 때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김신욱 이근호 두 사람이 원톱을 볼 경우는 처음부터 생각조차 안했던 것이다. 이청용 또한 여전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안타까움과 분노를 동시에 만들어냈다. 부상 이후 몸빵은 더 약해지고 순간 가속력은 더 죽어버려서 수비가 한명 붙어버리면 뚫어 낼 재간이 없었다. 이청용은 애초에 기습적인 슈팅 같은 건 없던 선수다보니 수비를 벗겨야 되는데 벗길 방법이 없고, 최고의 장점이던 축구지능은 어느 정도 살아 있어 보였지만 몸이 안 따라주니 공격 전개 과정에서 볼은 많이 잡는데 오히려 본인이 볼을 잡는 게 팀에 비효율적인 공격 전개를 초래한다. 그럼에도 김신욱, 손흥민이 교체되어 나가는 동안에도 90분 풀타임을 소화하며 답답한 공격 전개를 가중시켰다. 그리고 역시나 경기 끝난 후 이미 방전된 게 눈에 떡하니 보이는 이청용을 끝까지 빼지 않은 것에 대한 전문가들의 질타도 이어졌다.
이처럼 실속없는 패스와 억지 슈팅만 날리는 동안, 벨기에는 후반 32분에 이근호의 패스미스를 끊어내 디보크 오리기가 슈팅했다. 그러나 김승규 골키퍼가 한 발 먼저 쳐냈다. 그러나 한국 수비수들은 뒤이어 쇄도하는 수비수 얀 베르통언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고 그걸 베르통언이 밀어넣으며 선취골을 뽑았다. 그러나 베르통언의 위치는 명백히 오프사이드였는데 주심과 부심 모두 이를 넘어가는 오심을 범했다. 엄밀히 말하면 오심의 피해를 본 것인데 워낙 경기 자체가 형편 없었던데다 0 : 0 무승부로 끝났다고 하더라도 승점이 2점밖에 안 되어 어차피 16강 못 가는 건 매한가지인지라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다 1골이 뒤지고 있으면 롱볼을 띄우든 속공을 하든 어떻게든 계속 전방으로 볼을 쑤셔넣고 봐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뭐가 그리도 여유로운지 천하태평으로 느릿느릿 패스를 주고 받고 있으니 축구팬들 입장에선 참으로 복장 터지는 순간이었다.
90분이 다 가고 추가시간 5분이 적용되었다. 이 때 벨기에는 측면 수비수 앙토니 반덴 보르가 이청용의 태클로 인해 부상으로 실려나갔지만 교체 카드를 모두 써버려 9명이 뛰게 되었다.[9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벨기에의 골문을 열지 못했고 결국 그대로 0 : 1로 패배하며 1무 2패 조 최하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한국이 월드컵에서 '수적 우세'를 지고도 패배를 기록한 건 이번이 사상 최초였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부터 매 대회마다 승전보를 전했던 대표팀이었건만 이번 대회에선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며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무승으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아울러 아시아 팀 전체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탈락한 것 역시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24년 만의 일이었다.[92] 그리고 이번에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면서 '''"월드컵에서 벨기에와 한 조에 편성되면 무조건 조별리그에서 탈락한다."'''는 징크스는 계속해서 이어지게 되었다.[93] 참으로 상처만 남은 월드컵이 아닐 수 없었다.
12. 2018 러시아 월드컵
브라질에서 대표팀을 시원하게 말아먹은 홍명보는 결국 사퇴 압박에 시달린 끝에 자진 사퇴했다. 그리고 새 대표팀 감독으로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가 부임했다. "변화하라."는 슬로건으로 출범한 슈틸리케호는 초반엔 굉장히 분위기가 좋았다. 2015 AFC 아시안컵에서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1988년 대회 이후 27년 만에 4강의 벽을 넘었고 또 몇 달 전 월드컵에서 졸전을 펼치는 바람에 잔뜩 먹구름이 끼어 있었던 대표팀에게 힘이 될 만한 사건이기 때문이었다. 또 같은 해에 치른 동아시안컵에서도 중국을 2 : 0으로 이긴 뒤 일본과 1 : 1, 북한과 0 : 0으로 비겨 1승 2무의 성적으로 7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면서 더욱 뜨거운 여론의 호응을 받았다. 그렇게 뜨거운 국민적 호응을 받으며 러시아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다.
이번 대회에서도 아시아의 출전권은 그대로 4.5장이었다. 이번 대회 지역예선부터 월드컵 지역예선이 AFC 아시안컵 지역예선을 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먼저 1차 예선은 AFC 가맹국 46개국 중 피파랭킹이 가장 낮은 12개 팀이 1차 예선을 치러 6팀의 생존자를 가려낸다. 그리고 나머지 34개국은 2차 예선에 직행하는데 1차 예선에서 살아남은 6개 팀과 함께 5개 팀씩 8개 조로 나누어 2차 예선을 치른다. 그리고 2차 예선에서 각 조 1위는 최종예선에 직행하고 2위 팀들 중 상위 4팀이 최종예선에 진출한다. 그리고 최종예선에 진출한 12개 팀은 6개 팀씩 2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 2위가 본선에 직행하고 3위 팀은 3위 팀끼리 대결을 하여 승자가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북중미 4위 팀과 대결해 승리해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한국은 2차 예선부터 경기를 치렀다. 2차 예선에서 한국은 미얀마, 라오스, 레바논, 쿠웨이트와 함께 G조에 속했다.
1차전 미얀마 원정 경기에선[94] 상대의 밀집 수비에 고전하며 2 : 0 신승에 그쳤다.[95] 그리고 2차전 라오스와의 홈 경기에선 주포 손흥민의 해트트릭과 신예 권창훈의 멀티골에 힘입어 8 : 0 대승을 거두었다. 3차전은 4년 전 레바논 쇼크로 유명한 레바논 원정 경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3 : 0으로 대승을 거두며 4년 전의 치욕을 설욕했다. 그리고 쿠웨이트 원정 경기에서도 상당히 고전했지만 전반 12분에 터진 구자철의 결승골을 끝까지 잘 지켜 1 : 0으로 승리했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G조의 순위는 한국이 4전 전승(승점 12점)으로 1위, 쿠웨이트와 레바논이 3승 1패(승점 9점)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9인 쿠웨이트가 +2인 레바논에 앞서서 2위를 차지했고 레바논이 3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미얀마와 라오스가 1무 3패(승점 1점)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 득실에서 -12인 라오스가 -13인 미얀마에 앞서 라오스가 4위, 미얀마가 5위였다.
그리고 5차전 미얀마와의 홈 경기에서 장현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하는 불운이 있었지만 그래도 4 : 0 대승을 거두었다. 6차전은 이미 탈락이 확정된 라오스와의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기성용과 손흥민의 멀티골을 앞세워 5 : 0 대승을 거두며 2경기 남은 상황에서 최종예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7차전 레바논과의 홈 경기에선 남은 2경기를 모두 이겨야 최종예선에 진출하는 레바논이 사생결단으로 나오는 바람에 상당히 고전했지만 경기 막판에 이정협의 결승골에 힘입어 1 : 0 신승을 거두어 전승가도를 이어갔다. 그리고 8차전은 쿠웨이트와의 홈 경기였는데 쿠웨이트 정부가 대표팀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면서 FIFA의 제지를 받아 출전이 정지되었고 결국 한국의 3 : 0 몰수승이 선언되면서 2차 예선을 '''8전 전승, 27득점 무실점'''으로 마무리했다. 최종예선에 진출한 팀들 중 2차 예선을 무실점 전승으로 통과한 건 한국이 유일했다. 최종예선에서 한국은 이란, 우즈베키스탄, 중국, 카타르와 함께 A조에 속했다. 최종예선에 가기 전부터 휘청거렸던 지난 대회 예선과는 달리 이번엔 시원시원하게 전승가도를 달리며 최종예선에 올랐기에 최종예선도 순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최종예선에 들어서자 초반부터 가시밭길을 걸었다. 공한증으로 이름난 1차전 중국과의 홈 경기에서 후반 21분까지는 정즈의 자책골과 이청용, 구자철의 릴레이 골로 3 : 0으로 크게 앞서 갔으나 70분을 넘어서면서 정신줄을 놓은 수비진 때문에 2골을 연달아 실점해 결국 3 : 2 신승에 그쳤다. 그리고 2차전 시리아 원정 경기에서[96] 손흥민이 경고 누적으로 빠지자 공격에서 답답한 모습을 보인 끝에 상대의 침대축구에 당하며 0 : 0 무승부에 그쳤다. 3차전 카타르와의 홈 경기에서도 부실한 경기력과 주심 모흐드 아미룰 이즈완 야콥의 편파판정으로 인해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3 : 2 신승에 그쳤다. 그리고 4차전은 또 다시 지긋지긋한 아자디 징크스로 악명 높은 이란 원정 경기였다. 당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으로선 반드시 이 경기에서 이겨야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는데 '슈팅 1개'에 그치는 졸전 끝에 0 : 1로 또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다 경기 후 슈틸리케 감독 본인이 "우리에겐 세바스티안 소리아 같은 스트라이커가 없다."며 선수 탓을 하는 망언을 하여 악화된 여론에 더욱 기름을 부었다. 5차전 우즈베키스탄과의 홈 경기에서도 전반 25분에 마라트 비크마예프에게 실점하며 어려운 경기를 했으나 후반전에 남태희와 구자철의 연속골로 간신히 2 : 1 역전승을 거두어 위기를 넘겼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A조의 순위는 이란이 3승 2무(승점 11점)로 1위였고 한국이 3승 1무 1패(승점 10점)으로 2위, 우즈베키스탄이 3승 2패(승점 9점)으로 3위, 시리아가 1승 2무 2패(승점 5점)으로 4위, 카타르가 1승 1무 3패(승점 4점)로 5위, 중국이 2무 3패(승점 2점)로 6위였다.
6차전은 조 꼴찌 중국 원정 경기였다. 현재 1~3위까지 승점 차가 겨우 2점에 불과한 상황이어서 반드시 이 경기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러나 한국은 졸전 끝에 중국에 0 : 1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른바 ''''창사 참사\''''였다. 이 경기에서 울리 슈틸리케는 은빛 여우 마르첼로 리피에게 전술적으로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러나 다행이라면 우즈베키스탄 역시 시리아에 0 : 1로 패배한 덕분에 순위가 역전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리아의 승점이 8점으로 올라와서 격차가 2점으로 줄어버려 여전히 불안한 2위였다. 그리고 7차전 시리아와의 홈 경기에선 전반 4분 만에 홍정호가 선제골을 넣었지만 여전히 막장스러운 경기력을 보인 끝에 간신히 1 : 0으로 승리했다. 국민들은 슈틸리케를 경질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재신임을 하며 결국 계속 슈틸리케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결국 이것은 크게 패착으로 돌아왔다. 이미 이란의 본선 진출이 확정된 상황이었고 우즈베키스탄과 승점 차가 1점, 시리아와 승점 차가 5점에 불과한 상황이라 8차전 카타르와의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승점 차이를 벌려서 본선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슈틸리케는 이 경기를 또 제대로 말아먹으며 2 : 3으로 패배했다. 참으로 운이 좋다면 좋은 게 우즈베키스탄 역시 이란에 0 : 2로 패배해 순위는 그대로 2위를 지켰다는 것이다.
결국 여론은 제대로 폭발했고 대한축구협회 역시 울리 슈틸리케를 전격 경질하고 소방수로 신태용 감독을 선임했다. 8차전까지 A조의 순위는 6승 2무(승점 20점)를 기록한 이란이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 없이 조 1위를 확정했고 뒤이어 4승 1무 3패(승점 13점)의 한국이 조 2위, 4승 4패(승점 12점)의 우즈베키스탄이 조 3위, 2승 3무 3패(승점 9점)의 시리아가 조 4위, 2승 1무 5패(승점 7점)의 카타르가 조 5위, 1승 3무 4패(승점 6점)의 중국이 조 6위였다. 슈틸리케가 중국 원정, 카타르 원정에서 승리하기만 했다면 이미 중국과 카타르의 탈락이 확정되었겠지만 둘 다 깨지고 오는 바람에 저들의 생명줄을 연장해준 것이었다. 9차전 이란과의 홈 경기에서 한국은 반드시 승리해야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슈틸리케호 시절보단 변화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골 결정력이 여전히 발목을 잡았다. 후반 초반에 상대 선수의 퇴장으로 수적 우세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0 : 0으로 비기고 말았다. 다행인 것은 우즈베키스탄이 중국 원정에서 0 : 1로 지는 바람에 여전히 2위 자리를 지켰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지난 대회 예선과 마찬가지로 조기에 본선 진출을 확정짓지 못하고 마지막 경기까지 지켜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조 2위는 승점 14점인 한국이었고 시리아와 우즈베키스탄이 승점 12점으로 동률이었으나 골 득실에서 시리아가 2골 더 앞서서 시리아가 3위 자리로 올라갔고 우즈베키스탄은 4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2위 한국과 승점 차가 2점에 불과해 매우 불안한 2위였다. 그리고 중국이 승점 9점으로 조 5위였는데 본선 직행은 물 건너갔고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할 가능성은 남아 있었다. 조 최하위는 승점 7점인 카타르인데 이들은 이미 탈락이 확정되었다. 중국과 카타르를 제외한 나머지 3팀이 모두 본선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최종전인 한국 VS 우즈베키스탄, 이란 VS 시리아, 카타르 VS 중국의 경기는 사전 담합 및 승부조작 방지를 위해 동시에 치러졌다.
10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도 한국은 시종일관 경기를 지배하며 밀어붙였으나 또 골 결정력 부족 때문에 땅을 쳐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전반 13분에 시리아의 타메르 모하마드가 선제골을 넣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전반 45분에 이란의 사르다르 아즈문이 동점골을 넣으며 다시 희망을 되찾았다. 후반전에도 한국은 계속해서 우즈베키스탄을 몰아붙였으나 좀처럼 우즈베키스탄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같은 시각 후반 19분에 이란의 아즈문이 역전골을 터뜨려 한국의 본선 진출이 점점 가시권에 들어왔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경기는 결국 90분 내내 헛심 공방 끝에 0 : 0으로 비겼다. 한국의 본선 진출 결과에 영향을 못 주는 카타르와 중국의 경기는 중국의 2 : 1 승리로 끝이 나며 카타르의 조 최하위가 확정되었다. 이란과 시리아의 경기에선 후반 추가시간 3분에 시리아의 오마르 알 소마가 동점골을 터뜨렸으나 결국 2 : 2 무승부로 끝이 났다. 그리하여 4승 3무 3패(승점 15점)의 전적으로 간신히 조 2위를 지킨 한국은 1994 미국 월드컵 때와 같이 24년 만에 남의 도움으로 간신히 9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 때는 이라크의 움란 자파르가 한국의 본선 진출을 도왔다면 이번엔 이란의 사르다르 아즈문이 한국의 본선 진출을 도운 것이다. 이 때문에 신태용호는 본선 진출에 성공하고도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다 10월 평가전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수비수 김주영이 자책골로 멀티골을 기록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 끝에 2 : 4로 참패했고, 뒤이어 2진이 출전한 모로코를 상대로도 힘 한 번 못 써보고 1 : 3으로 참패해 국민적 기대가 더욱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나 11월에 스페인 출신 명코치 토니 그란데 코치가 부임하여 신 감독의 전술 구상에 도움을 주면서 다시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콜롬비아와의 홈 경기에선 4-4-2 고속버스 축구로 2 : 1 승리를 거두었고 세르비아와의 경기에서도 주포 손흥민이 후반전에만 무려 4개의 유효슈팅을 기록했으나 골키퍼의 미친 선방에 막히는 불운을 겪은 끝에 1 : 1 무승부를 거두었다. 그 때문에 조금씩 기대가 올라갔다.[97]
이렇게 다시금 희망이 생기나 싶었으나, 이 희망을 단숨에 다시 꺾어버린 것은 12월에 있었던 조 추첨이었다. 당시 한국은 4포트에 속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 → 세르비아 → 모로코 → 호주 → 나이지리아 → 파나마 순으로 호명이 되어 한국과 일본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당시 F조와 H조가 비어 있었는데[98] , F조에 속한 팀들은 톱 시드 팀이 디펜딩 챔피언 독일, 2번 시드 팀은 북중미의 강호이자 매 대회마다 꾸준히 16강에 가는 멕시코, 3번 시드 팀은 북유럽의 다크호스이자 '''지역예선에서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를 떨구고''' 본선에 올라온 돌풍의 팀 스웨덴이었다. 반면에 H조에 속한 팀들은 톱 시드 팀은 한국의 월드컵 첫 승 제물이었던 팀이자 개최국 러시아에 이어 톱 시드 팀 중 최약체로 꼽힌 폴란드, 2번 시드 팀은 16년 만에 본선에 올라와 월드컵 경험이 부족한 세네갈, 3번 시드 팀은 4년 전에 비해 전력에 하락세가 온데다 남미 팀 중 보기 드물게 한국에 약세를 보이는 콜롬비아였다.
누가 봐도 F조보다 H조가 훨씬 쉬워 보였기에 한국과 일본은 이때 "니가 가라 F조!"라고까지 할 정도로 마지막까지 경쟁을 벌였는데, 얄궂게도 추첨자 파비오 칸나바로가 31번째로 호명한 국가는 한국이 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은 독일, 멕시코, 스웨덴과 죽음의 조를 형성하여 버리는 불운을 안게 되었다. 진짜 본선 조 추첨까지 운이라고는 더럽게도 없었다. 당연히 한국인들의 반응도 멘붕 그 자체. 한편 일본은 자동으로 폴란드, 세네갈, 콜롬비아와 H조로 들어가면서 한국에 비하면 꿀조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여튼 이런 최악의 조 추첨 결과 하나 때문에 축구팬들은 일찌감치 '3전 전패'가 유력하다는 소리나 해대며 기대를 접어 버렸다.
그나마 12월에 치른 2017 EAFF E-1 풋볼 챔피언십에서 중국과 2 : 2로 비기고 북한과의 경기에서도 리영철의 자책골로 간신히 1 : 0으로 승리했으나, 최종전에서 일본을 4 : 1로 대파해 7년 만에 한일전 승리를 안겨주면서 2회 연속 우승에 성공하여 또 다시금 기대감을 높였다. 그리고 이 신태용호가 지지리 복도 없는 것이 조 추첨 결과도 결과였지만, 설상가상으로 부상 악령까지 덮쳤다는 것이다. 팀의 주포 손흥민의 봉인을 해제해 줄 이근호, 공격의 만능키이자 신태용호 전술의 핵심 선수였던 권창훈, 왼발 스페셜리스트로 든든한 조커 역할을 할 염기훈, 주전 레프트백 김진수, 괴물 센터백 김민재까지 줄줄이 부상으로 실려나가며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정말 불운에 또 불운이 겹친 것이다.
이렇게 대표팀 주축 선수 중에서는 절반이 부상으로 아웃되었지, 같은 조의 상대들은 하나같이 빡세지, 평가전 성적들도 상당히 실망스러웠지... 이런 식으로 최악의 3박자까지 벌어지면서 국민적 기대는 식을대로 식었는데, 여기에 더해 2018년 당시 정치 상황과 국제 정세도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직전에 급작스럽게 북한이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 제스처에 호응하면서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기 시작해 2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고 거기에 문재인 정부가 역사상 최초로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대박을 치면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급작스럽게 평화 무드로 흘러가는 바람에 국민적 시선은 당연히 그 쪽으로 먼저 쏠렸고, 반면에 월드컵은 상대적으로 후순위가 되어버렸다. 특히 2018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날은 2018년 6월 12일로 월드컵 개막 불과 이틀 전이었고, 그 다음 날은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2018 재보궐선거가 열리는 날이었다. 박근혜 탄핵 심판의 여파로 그 어느 때보다 국민들의 투표 의지가 적극적인 상황이어서 더욱 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식어버렸다. 즉, 여러 가지 악재와 외부 상황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겹쳐서 일어나 신태용호는 ''''대표팀 역사상 가장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한 불운한 대표팀\''''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99] 그렇게 월드컵을 앞두고 있다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태극전사들은 결전의 땅 러시아로 향했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감독 : 신태용
12.1. 조별리그 스웨덴전 - 0 : 1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북유럽의 스웨덴이었다. 스웨덴은 2006 독일 월드컵 때 본선에 오른 이후 번번이 플레이오프의 벽을 넘지 못하고 2개 대회 연속으로 탈락했으나 이번엔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를 플레이오프에서 떨구고 12년 만에 본선에 합류했다. 두 팀이 월드컵에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 추첨 당시 3팀 중에서 그나마 가장 해볼 만한 상대로 지목된 팀이 바로 이 스웨덴이었다. 그래서 스웨덴을 아예 1승 제물로 취급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스웨덴에 비기거나 질 경우 16강 진출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다 신태용 감독이 볼리비아와의 경기를 마친 후 지금까지 평가전에서 보여준 모습에 대해 "트릭이라고 보시면 됩니다."라고 해서 뭔가 비책이 있는 것처럼 허장성세를 하여 도대체 그 비책이 뭔지 보기나 해보자 하는 심정이 만연해 있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신태용 감독은 그 동안 잘 써오며 연습해 왔던 4-4-2 포메이션이 아닌 4-3-3 포메이션을 선보이는 도박을 감행했다. 포백 수비 라인에 김영권 - 장현수 센터백과 레프트백 박주호, 라이트백 이용이 섰고 미드필더 라인에는 중앙에 기성용, 왼쪽에 구자철, 오른쪽에 이재성이 섰으며 공격 라인엔 센터 포워드로 김신욱이 왼쪽 날개로 손흥민, 오른쪽 날개로 황희찬이 섰다. 그리고 골키퍼는 서드 골리로 생각되었던 조현우가 나섰다. 전반전 초반에는 나름대로 스웨덴과 대등하게 경기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전반 20분을 지나면서 전방 압박 역할을 수행해야 할 센터 포워드 김신욱이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도통 스웨덴 선수들을 압박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1차 압박 역할을 수행해야 할 김신욱이 대책 없이 뚫리면서 점차 경기는 스웨덴이 일방적으로 주도하였고 한국은 간신히 골키퍼 조현우의 슈퍼 세이브에 의지해 실점만 하지 않고 버틸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반 26분, 센터백 장현수가 레프트백 박주호를 향해 쓸데없이 높이 띄우는 패스를 했는데 박주호가 그걸 무리해서 볼을 잡으려다 오른쪽 다리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이 장현수의 엉터리 패스로 인해 박주호는 부상으로 아웃되고 말았고 김민우가 교체 투입되었다. 신중하게 써야 할 교체 카드인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1장을 허비하고 만 것이다. 이 박주호의 부상이 바로 오늘 경기의 분수령이었다. 전반 중반 이후부터는 서서히 게임이 하프 코트 게임으로 전환되어 버리며 스웨덴이 계속해서 한국의 골문을 신나게 두들겨 댔고 한국은 조현우의 잇단 슈퍼 세이브로 간신히 0 : 0 스코어를 유지했다. 조현우의 슈퍼 세이브가 아니었다면 벌써 지난 대회 알제리 쇼크의 재림이 될 뻔한 아찔한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전반전은 0 : 0으로 마무리 지었다.
후반전에도 경기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센터 포워드 김신욱은 마치 지난 대회 박주영을 보는 듯 매우 적은 활동량을 기록하며 그라운드 위에서 조깅이나 하고 있었다. 스웨덴의 공격수 마르쿠스 베리와 올라 토이보넨이 골을 넣진 못했어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전방 압박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데 비해 김신욱은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고 안드레아스 그랑크비스트가 지휘하는 스웨덴 수비진에게 철저하게 지워졌다. 후반 6분에 구자철이 좋은 위치에서 헤더 슛을 날렸으나 옆 그물을 때리고 말았다. 그렇게 0 : 0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중 후반 17분에 센터백 장현수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걷어낸 볼이 멀리 가지 않으며 다시 스웨덴의 루드비그 아우구스틴손의 발 앞에 갔다. 아우구스틴손은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외곽에서 문전으로 볼을 띄웠으나 골키퍼 조현우가 펀칭으로 쳐냈고 한국의 레프트백 김민우와 빅토르 클라에손이 세컨드 볼 경합을 했는데 그 때 김민우가 태클로 걷어냈다. 주심 호엘 아길라르는 김민우가 먼저 공을 걷어낸 것으로 보고 정상적인 태클이라고 판단해 휘슬을 불지 않고 계속 인플레이를 했다.
스웨덴 선수들은 페널티킥이라고 항의했지만 주심이 휘슬을 불지 않았기에 경기는 계속 진행되었고 순식간에 한국의 역습으로 이어졌다. 한국 선수들은 금세 스웨덴 문전까지 치고 들어갔고 이제 슈팅하려는 순간이었는데 그제야 갑자기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아까 그 상황에 대해 VAR 판독을 한다는 것이다. 실컷 가만 있다가 이제 와서 비디오 판독을 한다는 것이다. 판독 결과 김민우의 발은 간발의 차이로 공에 닿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다. 결국 페널티킥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스웨덴의 주장 안드레아스 그랑크비스트가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결국 0 : 1로 뒤지게 되었다. 8년 전 나이지리아전에 야쿠부 아이예그베니에게 페널티킥 골을 내준 이후 2번째로 상대 팀에 페널티킥으로 실점하고 말았다.
신태용 감독은 부진했던 김신욱과 구자철을 빼고 정우영과 이승우를 교체 투입했다. 그러나 수비적으로 내려 앉는 전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 : 0으로 앞서나가자 스웨덴 선수들은 슬슬 그라운드에 드러누워 침대축구를 하며 의도적으로 시간을 지연했다. 여태껏 중동 팀의 침대축구에만 익숙해 있던 한국 축구팬들에게 북유럽 팀도 필요에 따라선 침대축구를 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주심 호엘 아길라르는 이런 스웨덴의 의도적인 시간 지연 행위에 대해 제대로 된 제지를 하지 않으면서 더욱 빈축을 샀다. 그리고 후반전 막판에 황희찬이 결정적인 프리 헤더 찬스를 얻었고 동점골을 넣을 절호의 기회였으나 쓸데없이 방향을 틀면서 골문 밖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그대로 스웨덴의 1 : 0 승리로 끝이 났다. 한국이 조별리그 1차전에서 패배한 것은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20년 만의 일이었다.
경기 직후 단 1개의 유효슈팅도 기록하지 못한 것과 지나치게 수비적으로 내려앉은 플레이 때문에 신태용 감독의 용병술에 대한 질타가 끊이질 않았다. 거창하게 트릭 운운하면서 뭔가 비책이 있는 것처럼 잔뜩 기대감을 부풀려 놓았지만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수비적인 경기 운영을 하여 플레이 전체가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진 것도 진 것이지만 수비적으로 내려 앉으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다 졌기에 더욱 분노가 커진 것이다. 하지만 이 때 신 감독의 전술은 후에 재평가를 받게 된다. 뚜껑을 열어보니 1승 제물이라고 생각되었던 스웨덴이 알고 봤더니 이 조 최강자였고 멕시코가 한국 축구팬들이 바라는대로 라인을 올리고 맞불을 놓았다가 스웨덴의 선수비 후역습 전술에 정통으로 당해 0 : 3 대패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내용이야 매우 불만족스러웠지만 나름 1실점으로 그것도 페널티킥 실점으로만 끝난 걸 보면 그나마 신 감독의 선택이 옳았을 수도 있다. 다만 몇 가지 불의의 사고로 인해 꼬여버린 불운한 패배일 가능성이 더 크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 참고 문서를 참고하도록 하라.
주심 호엘 아길라르에 대한 성토도 이어졌다. 호엘 아길라르는 구자철이 경기 중에 스웨덴 수비수에게 다리를 밟혔는데도 카드 1장 주지도 않았으며 우리 선수의 발이 넘어진 스웨덴 선수의 등에 걸린 행위를 보고 우리 선수에게 경고를 준 것, 스웨덴 선수가 손흥민의 턱을 가격했는데도 아무런 경고도 없이 넘어간 것 등 스웨덴에 유리한 판정으로 분노를 일으켰다. 단연 압권은 비디오 판독이었다. 물론 페널티킥을 줄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비디오 판독 시점이었다. 한국이 거의 슈팅하기 직전에 휘슬을 불어 비디오 판독을 한다고 득점 기회를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 언론에서는 "마침 페널티킥을 줄 상황이 맞았으니 망정이지 정상적인 태클이었다면 주심이 한국의 골을 빼앗아간 것이다."며 호엘 아길라르의 이 같은 늑장 대처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 밖에 침대축구로 스웨덴이 노골적으로 시간 지연을 했는데도 어떠한 제지와 페널티도 가하지 않은 행위 등으로 인해 한국 축구팬들에게 12년 전 오라시오 엘리손도와 동급으로 까였다.[100] 다만 FC 코리아들은 '유효슈팅 하나 못 날릴 정도로 못 했으면서 어디서 심판 탓이냐?'라며 대표팀을 신랄하게 깠다.
12.2. 조별리그 멕시코전 - 1 : 2 패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북중미의 제왕 멕시코였다. 양 팀이 월드컵에서 만난 것은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20년 만의 일이었다. 위 문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때 한국은 하석주의 프리킥 선제골로 앞서 나갔지만 그 하석주가 불과 2분 후에 퇴장당하면서 수적 열세를 짊어졌고 결국 1 : 3 역전패를 당했다. 16강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20년 전 역전패의 치욕을 설욕해야 한다. 하지만 멕시코는 1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이르빙 로사노의 결승골로 1 : 0으로 잡아내는 이변을 일으켜 자신감이 상승할 대로 상승한 상태였다. 과연 한국이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석패한 후유증을 잘 털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또 이 경기는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러시아에 정상회담을 하러 갔던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직관을 했다. 현직 국가원수가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 직관을 한 것은 이번이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이번 경기에서 한국은 다시 그 동안 연습해 왔던 4-4-2 포메이션으로 환원하고 주포 손흥민의 위치도 다시 투 톱의 포처 자리로 올라갔다. 손흥민은 레프트윙이 아닌 투 톱 포처 자리로 올라가자 그제야 맞는 자리를 찾은 듯 펄펄 날며 활발하게 멕시코를 향해 공격했다. 손흥민이 살아나자 대표팀의 경기력도 살아났다. 확실히 스웨덴과의 경기보다는 뭐가 나아도 나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그렇게 전반 중반까지 한국과 멕시코 양 팀 모두 결정적인 유효타를 때리지 못한 채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였다. 팽팽한 경기가 이어지던 중 전반 26분, 안드레스 과르다도가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진영에서 크로스를 하는데 센터백 장현수가 오른손을 높이 번쩍 든 채 슬라이딩 태클을 했다. 과르다도의 크로스는 장현수의 오른팔에 맞았고 주심 밀로라드 마지치는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킥커로 카를로스 벨라가 나섰다. 조현우 골키퍼가 일부러 물을 마시고 시간을 질질 끌며 집중력을 흐트러트리기 위해 별 짓을 다했으나 그런 보람도 없이 벨라가 조현우 골키퍼의 눈을 속이며 반대쪽으로 차 넣어 1 : 0으로 멕시코가 앞서갔다.
이후 한국은 동점골을 넣기 위해 계속해서 멕시코를 향해 공격했지만 좀처럼 멕시코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멕시코도 쉴새없이 한국 진영으로 밀고 올라오며 공격을 가했지만 조현우의 슈퍼 세이브에 막히며 불안한 1골 차 리드를 이어갔다. 지난 스웨덴전에 이어 골키퍼 조현우는 여러 차례 호선방으로 실점 위기를 막아내며 든든하게 골문을 지켰다. 오늘 경기에서도 조현우의 선방이 아니었다면 대량 실점을 할 뻔했다. 하지만 한국도 스웨덴전처럼 무기력하게 수비적으로 내려앉아 있지만 않았다. 틈이 나는 대로 반격을 하며 슈팅 숫자도 늘리며 대응했지만 슛이 족족 간발의 차이로 빗나가거나 상대 골키퍼 기예르모 오초아의 선방에 막히는 등 불운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전반전은 치열한 공방전 속에 멕시코가 1 : 0으로 앞선 채로 끝이 났다.
후반전에도 양 팀은 치열하게 맞붙었다. 후반 14분, 멕시코의 주장 안드레스 과르다도가 한국 문전에서 회심의 중거리슛을 날렸으나 조현우 골키퍼가 선방했다. 그러던 중 후반 21분, 한국의 공격 상황에서 라이트백 이용이 주장 기성용에게 패스했고 기성용이 볼을 받으려는데 뒤에서 멕시코의 엑토르 에레라가 태클로 쓰러뜨렸다. 분명히 파울이 선언되어야 했지만 주심 밀로라드 마지치는 파울을 불지 않았고 금세 멕시코의 역습으로 이어졌다. 주심이 파울을 불 줄 알았다가 뒤통수를 맞은 한국 선수들은 수비로 전환이 늦었고 순식간에 2 : 3으로 수비 숫자가 열세에 있었다. 단독 드리블로 한국 진영을 쇄도하던 이르빙 로사노가 왼쪽의 치차리토에게 패스했고 치차리토가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하자 장현수가 저지하러 나섰는데 또 엉터리 슬라이딩 태클을 했고 치차리토는 그런 장현수를 간단하게 피해 오른발로 슈팅을 날려 추가골을 뽑아냈다. 하지만 이미 치차리토의 득점 이전에 엑토르 에레라가 명백한 파울을 저질렀기에 VAR은 비디오 판독을 하라고 주심 밀로라드 마지치에게 권고했으나, 이 인간은 VAR의 권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하였으며 멕시코의 득점이 인정되면서 스코어는 2 : 0으로 벌어졌다. 가히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으며, 이 경기를 중계하던 KBS의 이광용 아나운서도 멕시코의 추가골 직후에 빡쳐서 리플레이가 흐르는 동안, 다음과 같은 멘트를 날렸다. ''''객관적으로 저 장면은 분명히 반칙입니다. 주심은 뭘하는 거죠?''''
하지만 한국도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동점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후반 29분, 라파엘 마르케스가 자기 진영에서 골키퍼 기예르모 오초아와 백패스를 주고 받았는데 그만 패스 미스가 발생했고 이걸 황희찬이 탈취하면서 1 : 1 찬스를 맞았다. 그런데 황희찬은 도대체 뭔 생각인지 갑자기 뒤의 손흥민에게 패스를 했고 패스를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손흥민은 갑작스럽게 온 패스에 당황하여 우물쭈물 볼을 끌었고 결국 수비에 빼앗겼다. 그리고 혼전 상황에 다시 볼이 이승우에게 흘러갔지만 이승우도 슈팅 타이밍을 놓치면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어이없게 빼앗겨 버렸다. 이 때문에 황희찬은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도대체 저놈이 왜 공격수로 있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비난이 들끓었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은 흘렀고 패색이 짙어졌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게 되면 2경기 연속 무득점이란 불명예를 남기게 된다. 90분이 다 가고 추가시간이 흘렀다. 추가시간 3분에 멕시코의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 외곽에서 볼을 잡은 손흥민이 왼발 감아차기 중거리슛을 날렸고 이것이 그대로 빨랫줄처럼 날아가 멕시코 골문 왼쪽 구석에 꽂혔다. 드디어 이 대회 첫 골이 터진 것이다. 스코어는 다시 1점 차로 좁혔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한국은 남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공격하며 동점골을 넣기 위해 애를 썼지만 멕시코는 지능적인 수비로 시간을 지연시키며 그대로 경기를 끝냈다. 결국 경기는 멕시코의 2 : 1 승리로 끝이 났고 한국은 2패를 기록하며 조 꼴찌로 주저앉고 말았다. 스웨덴전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장현수가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주심 밀로라드 마지치의 오심만 없었더라면. 황희찬이 1 : 1 상황에서 어이없는 백패스로 날려먹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들이 진하게 남았다. 그 다음 경기에서의 이변 때문에 더더욱...
한국이 비록 2패를 기록하긴 했지만, 멕시코와 우리나라의 운명은 바로 다음 경기인 독일과 스웨덴의 경기 결과에 따라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3시간 뒤에 소치에서 열린 독일과 스웨덴의 경기 결과를 통하여 완벽히 탈락하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상황에[102] 이 경기에서 독일은 이번에도 전반 32분에 스웨덴의 올라 토이보넨에게 선제골을 먹으며 불리한 출발을 했다. 후반 3분에 마르코 로이스가 극적으로 동점골을 터뜨렸으나 후반 36분에 수비의 핵 제롬 보아텡이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하며 수적 열세에 놓이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이 경기마저도 그르치면 끝장인 독일은 10명이 뛰는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스웨덴을 몰아붙였고 종료 직전에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 외곽에서 스웨덴의 우측 미드필더 지미 두르마즈가 독일의 좌측 윙어 티모 베르너를 향해 거친 파울을 범해 프리킥을 얻었다. 그리고 킥커 토니 크로스가 멋지게 성공시키며 극적으로 2 : 1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2차전까지 F조의 중간 순위는 멕시코가 2승으로 1위였고 독일과 스웨덴이 1승 1패, 2득점 2실점으로 승점과 골 득실, 다득점까지 동률이었으나 승자승에서 독일이 스웨덴을 이겼기 때문에 독일이 2위, 스웨덴이 3위였고 4위는 2패를 기록한 대한민국이었다. 그러나 독일이 스웨덴을 이긴 것으로 인하여 멕시코는 먼저 2승을 하고도 16강 진출이 확정되지 않았고, 대한민국 역시 2패를 기록했어도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되지 않았다. 8년 전 남아공 월드컵 B조에서 2승의 아르헨티나와 2패의 나이지리아가 겪게 된 상황을 8년 후인 이때 멕시코와 우리나라가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한국이 16강에 진출하는 경우의 수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먼저 3차전에서 독일을 가급적 2골 차 이상으로 꺾고 동시에 멕시코가 스웨덴을 이겨주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멕시코가 3전 전승으로 조 1위가 되고 한국, 독일, 스웨덴 3팀이 1승 2패로 동률이 되는데 한국이 독일을 2골 차 이상으로 이길 경우 한국의 골 득실은 0이상이 되고 독일은 -2 이하로 떨어지며 스웨덴 역시 -1 이하로 떨어지기 때문에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건 산술적인 가능성에나 불과해 보였다. 스웨덴과 멕시코에 진 팀이 이들보다 훨씬 강한 독일을 이기리라 보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대한민국을 맡아 예선 탈락 직전까지 몰고 가 놓고 경질된 울리 슈틸리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3전 전패할 것이다.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한다."며 악담과 저주를 퍼부어 한국 축구팬들의 혈압을 올렸다. 일본 언론들은 그들대로 "한국이 2차전까지 총 47개의 파울을 기록했다. 이 추세라면 3경기 62개의 파울을 기록한 모로코를 제치고 조별리그 파울 1위를 기록할 것이다."며 한국을 실력도 없이 거칠게 반칙만 하는 팀으로 비하하고 낄낄거렸다. 점점 상황이 절망적으로 흐르고 있었고, 축구팬들의 체념도 날로 깊어졌다. 정말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28년 만에 3전 전패라는 끔찍한 성적표를 받는 게 점점 현실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12.3. 조별리그 독일전 - 2 : 0 승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3차전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인 전차군단 독일이었다. 양 팀이 월드컵에서 만나는 건 이번이 벌써 3번째였다. 이전 2번의 만남에서 한국은 독일을 맞아 각각 1점 차 석패를 한 바 있다. 한국이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독일을 2점 차 이상으로 이겨야 하고 동시에 멕시코가 스웨덴을 1점 차로라도 잡아주어야 한다. 한편, 독일 역시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1차전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불의의 일격을 당해 0 : 1로 패배하며 출발이 꼬였고 2차전 스웨덴과의 경기에서도 선제골을 내주며 불리한 경기를 하다가 간신히 2 : 1 역전승을 거두는데 그쳤다. 그렇기에 독일로서는 반드시 한국을 큰 점수 차로 이겨서 분위기를 전환해야 했다. 객관적인 전력으로 볼 때 독일이 한국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래서인지 해외 배팅 사이트에선 '''한국의 2 : 0 승리보다 독일의 7 : 0 승리에 더 낮은 배당률을 책정했다.''' 그 정도로 독일의 압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편, 다른 아시아 팀의 성적은 한국을 더욱 조바심 내게 만들었다. 지난 대회에서 단 1승도 못하고 퇴장했던 것과 달리 이번 대회에선 아시아 팀이 매우 선전했다. 먼저 A조의 사우디아라비아는 개막전에서 개최국 러시아에 0 : 5로 참패했고 2차전에서도 우루과이에 0 : 1로 석패해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되었지만 3차전에서 이집트를 2 : 1로 꺾어 그래도 1승은 챙기고 갔다. B조의 이란도 모로코를 상대로 상대 자책골에 힘입어 1 : 0 행운의 승리를 거둔 후 스페인에 0 : 1로 석패했으며 포르투갈과도 매우 선전하며 1 : 1로 비겨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아쉽게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C조의 호주는 프랑스에 1 : 2로 석패했고 덴마크와는 1 : 1로 비겼으며 페루에 0 : 2로 패해 1무 2패로 탈락했다. H조의 일본은 1차전에서 콜롬비아를 2 : 1로 이기고 2차전에서 세네갈과 2 : 2로 비기며 세네갈과 공동으로 조 1위에 있었다. 즉, 한국만 현재까지 승점 0점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양 팀의 운명이 걸린 한독전이 열렸다.
이 날 부상으로 빠지게 된 주장 기성용을 대신해 손흥민이 주장 완장을 차고 나왔다. 그리고 엉성한 수비로 2경기 연속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장현수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올리고 대신 윤영선을 김영권의 짝으로 붙였다. 그리고 레프트백 역시 홍철로 교체하는 변화를 주었다. 갈 길이 급했던 독일은 초반부터 포문을 열고 한국을 향해 강공을 퍼부었다. 한국은 굳건한 수비로 버티며 역습을 노렸다. 전반 16분, 독일의 수비형 미드필더 사미 케디라의 반칙으로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킥커 정우영이 멋진 무회전 프리킥을 날렸는데 지난 대회 야신상 수상자인 마누엘 노이어도 캐칭에 실패했으나 간신히 펀칭으로 쳐냈다. 전반 38분에 독일의 공격 상황에서 원톱 티모 베르너가 페널티 에어리어 좌측에서 헤더로 떨군 볼을 공격에 가담한 독일 센터백 마츠 후멜스가 받았으나 슈팅 직전에 조현우 골키퍼가 안전하게 잡아내며 선방했다. 전반 종료 직전에 손흥민이 독일 문전에서 강력한 중거리슛을 날렸으나 골문 왼쪽으로 벗어나고 말았다. 전반전은 그렇게 0 : 0으로 마무리 되었다. 같은 시각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열린 멕시코와 스웨덴의 경기도 0 : 0으로 전반전을 마쳤다. 아직 이 때까지 실시간 순위로 독일이 조 2위에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독일 벤치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45분 후에 악몽을 꾸게 될 것이란 걸 그 때는 미처 몰랐다. 한국 벤치에서는 예상 외로 독일이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자신감을 얻었다.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후반 1분 만에 정우영이 독일의 플레이메이커 메수트 외질에게서 볼을 탈취해 멋진 중거리슛을 날렸으나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 정면으로 갔다. 뒤이어 후반 3분, 측면을 오버래핑한 독일 라이트백 요주아 키미히가 중앙으로 크로스를 했고 그걸 레온 고레츠카가 논스톱 프리 헤더슛으로 연결했지만 조현우 골키퍼가 극적으로 선방했다. 조현우의 이 선방이 이 경기의 분수령이었다. 당연히 골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이게 조현우의 선방에 막히자 독일 벤치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다. 뒤이어 후반 5분에 외질의 패스를 받은 원톱 티모 베르너가 논스톱 오른발 슛을 날렸으나 골문 왼쪽으로 벗어나며 독일은 땅을 쳐야했다. 한국은 지난 스웨덴전, 멕시코전과 다르게 굳건한 수비로 끈질기게 독일에 골을 내주지 않고 버티며 끝까지 애간장을 태웠다.
같은 시각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선 스웨덴이 선제골을 넣어 1 : 0으로 앞서갔다. 이로서 실시간 순위에서 스웨덴과 멕시코가 2승 1패로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고 독일은 1승 1무 1패에 그쳐 3위로 떨어졌다. 이대로 경기가 끝날 경우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되는 독일은 더욱 조급해졌다. 그리하여 독일의 요아힘 뢰프 감독은 후반 11분, 수비형 미드필더 사미 케디라를 빼고 공격수 마리오 고메스를 투입하고 후반 17분엔 레온 고레츠카를 빼고 토마스 뮐러를 투입해 공격 숫자를 늘렸다. 이에 신태용 감독은 후반 11분, 부상 당한 구자철을 빼고 황희찬을 투입하고 후반 24분, 문선민을 빼고 주세종을 투입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독일은 이렇게 공격수 숫자를 늘리며 시종일관 공격을 퍼붓고도 좀처럼 한국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같은 시각 스웨덴이 멕시코를 3 : 0으로 리드하면서 멕시코의 골 득실은 -1까지 떨어졌다. 이제 독일로서는 한국을 1 : 0으로만 이기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골키퍼 조현우가 지키는 한국의 골문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답답하게 0 : 0의 스코어가 이어지자 요아힘 뢰프 감독은 후반 33분, 레프트백 요나스 헥토르마저 빼고 공격형 미드필더 율리안 브란트를 투입했다. 한편, 황희찬이 교체 투입되었는데도 전방 압박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독일의 헥토르와 키미히가 활개치게 만들자 신 감독은 후반 34분, 황희찬을 다시 빼고 수비수 고요한을 투입해 수비를 보강했다.
그리고 후반 41분, 독일 플레이 메이커 메수트 외질이 우측에서 올린 크로스를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센터백 마츠 후멜스가 노마크 상태에서 헤더를 했으나 볼을 어깨에 맞추는 실수를 범하며 득점 기회를 날렸다. 후반 42분에는 토니 크로스가 문전에서 중거리슛을 날렸으나 조현우 골키퍼가 선방했다. 후반 44분, 토니 크로스의 빌드업을 라이트백 이용이 육탄방어로 저지하며 다시 역습 찬스를 얻었고 이재성이 문전으로 쇄도해 슛을 날렸으나 독일 센터백 니클라스 쥘레의 다리에 맞고 굴절되며 밖으로 나갔다. 한국은 코너킥 찬스를 얻었다. 그리고 정규시간 45분이 지나고 6분의 추가시간이 주어졌다. 추가시간 1분, 손흥민이 찬 코너킥은 장현수를 지나 토니 크로스에게 갔고 크로스는 쥘레에게 백패스를 했는데 그만 둘의 사인이 맞지 않아 쥘레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 골문 앞에 노마크로 서 있던 김영권의 발 앞에 갔다. 김영권은 볼을 침착하게 멈춰 세운 후 왼발 슛을 날려 선제골을 뽑아냈다. 그러나 부심이 오프사이드를 선언하였고[104] 경기 내내 독일에 유리하게 판정하던 주심 마크 가이거는 그대로 경기를 속개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 벤치의 격렬한 항의와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거센 야유, 그리고 VAR의 지속된 요청으로 결국 비디오 판독을 했다. 판독 결과 토니 크로스의 백패스가 그대로 김영권에게 간 것으로 확인[105] 되었고 결국 추가시간 3분에 득점 선언을 하면서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한국이 1 : 0으로 앞서갔다.[106]
이제 독일은 백척간두의 상황에 놓였다. 비디오 판독으로 인해 지연된 시간이 산입되면서 추가시간은 9분까지 늘어났다. 어떻게든 남은 시간 동안 2골을 넣어야 하는 독일에 남은 선택지는 오직 공격 뿐이었다. 그래서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까지 골문을 비우고 공격에 가담했다. 그만큼 그들도 필사적이었다. 추가시간 6분, 토니 크로스가 전방으로 띄운 볼을 마리오 고메스가 헤더로 떨구었고 리바운드 볼을 마르코 로이스가 슈팅하기 전에 먼저 조현우 골키퍼가 펀칭을 했다. 볼이 터치 라인 밖으로 벗어났기에 독일이 스로인 찬스를 얻었다. 그리고 율리안 브란트가 골문을 비우고 올라온 골키퍼 노이어에게 스로인 했는데 그 때 주세종이 달려들어 볼을 빼앗았고 전방의 손흥민에게 로빙 패스를 넣었다. 손흥민은 텅 빈 독일 진영을 홀로 질주하며 추가골을 터뜨려 스코어를 2 : 0으로 벌려놓았다.[107] 손흥민 역시 이번 대회에서 2골을 넣으며 홍명보, 안정환, 이정수, 이청용에 이어 한 대회에서 2골을 넣은 5번째 선수가 되었다. 독일은 남은 시간 동안 선수 11명 전원이 한국 진영으로 올라와 미친 듯이 슈팅을 날렸다. 추가시간 7분에 율리안 브란트가 중거리슛을 날렸으나 조현우 골키퍼가 이것마저도 선방했다. 추가시간 8분에 마츠 후멜스의 슛도 조현우 골키퍼에게 막혔다. 추가시간 9분, 독일의 코너킥 찬스에서 후멜스가 반박자 빠른 헤더 슛을 했지만 이것마저 허공으로 높이 떠버렸다. 최후의 몸부림마저 무위로 돌아가자 후멜스는 실소를 지으며 허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조현우 골키퍼의 골킥이 뜸과 동시에 주심 마크 가이거의 휘슬이 울리며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대한민국이 독일을 2 : 0으로 격파했다.
16강에 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조건을 이뤘으나 멕시코가 스웨덴에 0 : 3으로 대패하면서 아쉽게 16강 진출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독일을 상대로 2점 차 승리를 거두면서 승점은 1승 2패로 동률이었으나 골 득실에서 2골이 더 앞섰기에 한국이 F조 3위를 했고 독일은 F조 꼴찌로 떨어졌다. 이런 기적적인 승리를 일궈낸 한국을 향해 전세계적으로 극찬이 쏟아졌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며 아름답게 퇴장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던 상황에서 이뤄낸 승리였기에 이 경기는 ''''카잔의 기적\''''으로 명명되었다. 반면 패자인 독일은 이 패배로 인해 사상 최초의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다.[108] 게다가 자신을 탈락시킨 팀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세계 최강 팀도 아니고 몇 수 아래라고 본 아시아의 대한민국이어서 그 치욕은 배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경기를 ''''카잔의 치욕\''''(Die schande von Kasan)으로 명명했다. 한편, 스웨덴에 0 : 3으로 대패하며 하마터면 먼저 2승을 하고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할 뻔했던 멕시코는 한국이 독일을 잡아준 덕분에 간신히 16강 진출에 성공했고 낯 간지러울 정도로 한국을 향해 열렬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폴란드한테 1:3으로 졌으나 한국이 포르투갈을 1:0으로 꺾은 덕분에 행운으로 16강에 올랐던 미국의 입장과 거의 똑같은 셈이다. 한편, 4년 전 독일에 홈에서 무려 1 : 7로 대패하는 이른바 미네이랑의 비극이란 대참사를 겪은 브라질은 대한민국의 승리를 마치 자신들의 승리인 양 기뻐하며 독일을 마음껏 조롱했다.[109][110]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침공을 받은 역사적인 앙금까지 있었던 잉글랜드, 프랑스, 벨기에 등 다른 유럽 강호들도 마찬가지...
13. 2022 카타르 월드컵
독일을 상대로 승리하는 기적을 쓴 신태용은 계약만료로 대표팀을 떠났다. 이후 새로운 대표팀 감독으로 포르투갈 출신의 파울루 벤투가 취임했다. 벤투호의 초기는 굉장히 좋았다. 9월 평가전에서 코스타리카를 상대로 2 : 0 승리를 거두며 순항한 벤투호는 뒤이어 칠레와 무승부를 거두었고 10월 평가전에선 8번째 대결만에 우루과이를 2 : 1로 꺾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11월 평가전에선 호주와 1 : 1로 비기고 우즈베키스탄을 4 : 0으로 박살내며 2019년 아시안컵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이번에야말로 59년 만에 우승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막상 본선에 들어가니 1차전 필리핀과의 경기, 2차전 키르기스스탄과의 경기에서 상대의 밀집 수비를 깨부수는데 상당히 애를 먹으며 겨우겨우 1 : 0으로 승리하는데 그쳤고 3차전 중국과의 경기에서 2 : 0으로 승리하며 일단 3전 전승(승점 9점)으로 조 1위를 하긴 했지만 매우 불안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6강전에서 바레인을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2 : 1 신승에 그쳤고 8강에서 카타르에 0 : 1로 패배하며 15년 만에 4강도 못 가고 탈락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벤투 감독은 매우 심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후 카타르가 결승전에서 일본을 완전히 압도하며 3 : 1 완승을 거두고 첫 우승을 차지하면서 질 만한 상대에게 졌다는 평을 받으며 묻혔다. 그 이후로 벤투 감독도 절치부심하여 4-2-3-1 포메이션을 버리고 다이아몬드 4-4-2 포메이션으로 변화를 꾀하였고 볼리비아-콜롬비아 남미 2연전을 모두 승리로 끝냈다. 그리고 호주와 이란을 상대로도 1승 1무를 기록하며 다시 한 번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이번 대회는 지난 대회와 같은 방식으로 예선전이 치러졌다. 한국은 2차 예선에 바로 직행한다. 2차 예선 상대는 레바논, 투르크메니스탄, 북한, 스리랑카로 그들과 함께 H조에 속했다. 1차전 투르크메니스탄 원정 경기에서 한국은 4-1-4-1 포메이션과 4-1-3-2 포메이션을 혼용하며 상대를 압도했다가 후반에 오히려 날카로운 역습을 몇차례 허용하는 등 고전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의 밀집 수비에 애를 먹으며 전반 13분에 터진 나상호의 선제골과 후반 42분에 터진 정우영의 프리킥 골로 2 : 0 승리를 거두며 내용적으로는 불만족스러웠으나 결과적으론 순조로운 출발을 했다. 이후 스리랑카 홈 경기에서 김신욱이 무려 4골을 뽑아내고 손흥민이 2골을 기록하며 8 : 0으로 대승을 거뒀다.
3차전은 북한 원정 경기였는데 12년 전과는 달리 이번엔 정상적으로 평양의 김일성경기장에서 치러졌다. 그러나 이시기 남북관계는 다시 냉랭하게 변했고, 북한은 선수단 이외의 입국과 생중계를 불허 했다. 그리고 자체 무관중 경기를 진행하는 상식 밖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0 : 0 무승부를 기록해 조 1위 자리를 지켜나갔다.
4차전 레바논 원정에서도 일이 꼬였다. 레바논 현지의 혼란한 상황으로 대표팀은 레바논 입국을 최대한 연기했고, 결국 당일 무관중 경기로 진행이 되었다. 열악한 필드와 컨트롤이 안 되는 공인구[111] , 그리고 심신의 피로가 역력해 보이던 대표팀은 시종일관 졸전을 펼친 끝에 0 : 0 무승부로 마무리 했다. 다음날 투르크메니스탄이 북한을 이겨 승점 9점이 되어 조 2위로 밀려났다. 이로써 투르크메니스탄 9점 - 대한민국 8점 - 레바논 8점 - 북한 8점으로 대혼전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다행이라 할 만한 일은 레바논과 북한 원정을 패배 없이 넘겼다는 점이다.[112]
코로나19로 2차예선 잔여일정이 2021년으로 연기됐다.
14. 2026 북중미 월드컵
이 대회부터 참가팀이 48개국으로 확대된다.
[1] 1930년 월드컵 부터 1938년 월드컵까지는 일제강점기 시대였으므로 기입하지 않는다.[2] 첫 출전, 아시아 독립국 첫 출전, 역대 최다 점수 차 타이기록, 역대 최다 점수 차 패배팀[3] 당시 북한 국가대표팀이 워낙에 강해서 패하면 국가망신이란 높은 분들의 지시로 아예 기권. 남북 체제경쟁의 병림픽이 극에 달하던 시기다. 그리고 북한은 이 대회에서 아시아 최초 8강의 대업을 세웠다.[4] 첫 골 기록 (박창선, 대 아르헨티나), 첫 승점 획득 (대 불가리아)[5] 첫 퇴장 (윤덕여, 대 우루과이)[6] 첫 클린시트 (대 볼리비아)[7] 첫 선제골 (하석주, 대 멕시코)[8] 첫 승리 (대 폴란드), 첫 결승골 (황선홍, 대 폴란드) ,첫 2라운드, 첫 역전 승 (대 이탈리아), 첫 역전골 (안정환, 대 이탈리아), 첫 승부차기 (대 스페인), 아시아 최초 FIFA 월드컵 4강[9] 원정 첫 승리 및 원정 첫 역전승 (대 토고)[10] 원정 첫 2라운드[11] 16년만의 무승 및 조별 리그 최하위, 득실차 마이너스 1위[12] 아시아 최초 디펜딩 챔피언(독일)에 승리, 아시아 최초로 FIFA 랭킹 1위 팀(독일)에 승리, 역대 월드컵 조별리그 최다 탈락 타이기록[13] 이승만의 개인적 성향은 반일이었으나 다들 알다시피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하며 舊 친일파들을 적극 등용하고 친일 청산을 외면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14] 현대에는 이렇게 했다간 FIFA의 제재를 받아 출전권이 박탈된다. FIFA는 정치가 축구에 개입하는 것을 엄금하기 때문이다.[15] 당시에는 합산 점수제가 도입되지 않아서 스코어에 관계 없이 오로지 전적만 따졌다. 그래서 스코어와 상관 없이 1승 1패 동률이 되면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거기서도 무승부가 나면 추첨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후술하는대로 스페인이 터키에 막혀 예선 탈락했다.[16] 그나마도 천의 질이 좋지 못해 금방 닳아서 7부 바지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외신 기자들이 "당신네 나라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고 묻자 홍덕영 골키퍼가 "우리는 전쟁을 치른 나라라 가난해서 물자를 절약하는 게 애국이라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재치있게 받아쳤다는 웃픈 이야기가 있다.[17] 선수 교체 제도는 1970 멕시코 월드컵 때부터 시행되었다. 그 전까지는 출전한 선수는 무조건 90분 풀타임을 뛰어야 했다.[18] 이를 두고 축구 해설위원 박문성은 자신의 저서에서 세베슈 감독의 멘트를 '''립서비스'''라고 평가 절하하는 무식을 뽐냈다.[19] 터키의 전력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인 결과인데 사실 터키의 자리는 본래 스페인의 자리였다. 예선 1차전에서 스페인이 4 : 1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에선 터키가 1 : 0 승리를 거두었는데 당시엔 합산 점수제가 없었다. 순수하게 전적만 따졌기에 1승 1패 동률이 되었고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나 2 : 2 무승부가 되어 추첨으로 승자를 가렸는데 이 때 터키가 당첨되어 올라온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의 자리를 터키가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20] 당연하지만, 이 건으로 FIFA에서 대한축구협회에 벌금형을 때렸다. 참고로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때 귀국을 서두르느라 참여국들에게 지불하는 페이를 받지 않았는데, 이게 그대로 남아 있다가 이때 벌금으로 지불되었다고 한다.[21] 이때 전반에 일본의 기습에 선취골을 허용한데다, 우리 선수 한 명이 부상으로 이탈해서 10명으로 싸워야 했다. 이때는 선수 교체 규정도 없어서 고전했지만, 다행히 전반 말미에 연속골이 터지며 역전에 성공한다. 이때 한국과 일본은 아직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고, 정부나 국민들 사이에서도 반일감정이 강해서 일장기를 계양해야 하는 문제로 시끄러웠지만, 결국 허가 되었다.[22] 당시 협회 회장인 장기영(당시 한국일보 사장)이 군사정권의 일원이던 김동하 해병대 사령관을 찾아가 설득했고, 김동하는 이들의 뜻을 박정희에게 전달하여 사흘 후에 면담을 가졌다. 이때 장기영 회장은 "정치적인 이유로 중요한 국제경기에 대표팀을 출전시키지 않는다면 국제적으로 한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설득했고, 이에 박정희도 "스포츠에는 이념과 사상이 있어서는 안되지"라며 대표팀의 유고원정과 유고대표팀의 한국 입국을 허락했다. 별외로 박정희는 이때 대표팀 수문장이던 함흥철의 팬이었고, 장회장과 함께 온 함흥철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23] 당시 선수들은 37시간의 비행을 거쳐 유고에 도착했고, 3시간 차이의 시차도 힘들어 했다. 거기다 전반에 간판 스트라이커인 최정민이 발목 부상으로 이탈했다. 그나마 전반 42분까지는 버텼지만, 결국 선제골을 허용했고, 후반에는 수적열세와 피지컬, 개인기에 밀리며 4골을 더 내주었다. 한국은 후반 정순천이 한골을 만회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24] 결과적으로 호주가 최종예선에서 이스라엘에 패하며 이 1장의 카드는 이스라엘로 넘어갔다.[25] 위키백과엔 1974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의 일로 적혀있지만 1970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에서의 일이 맞다.[26] 다만 1조는 6팀이 한 조에 속했기 때문에 예외로 2위까지 최종예선에 올라갈 수 있었다.[27] 쿠웨이트는 본선에서도 프랑스에 실점을 하자 왕자새끼가 경기장에 난입하여 심판에게 항의하여 판정을 번복시켰다. 그러고도 졌다.[28] 물론 경기가 열린 곳이 해발 1,400m 고지대인 네팔 수도 카트만두였다는 것도 부진의 원인이었다. 볼리비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고지대가 홈 구장인 팀을 이기는 건 쉽지 않다.[29] 1980년대까지 국내축구계에서 중앙미드필더를 부르던 용어. 중앙에서 공을 이어주는 선수라고 해서 링커라는 정체불명의 콩글리시로 불렀으나, 조광래의 은퇴이후 사라진다.[30] 만약 이 때 16강 진출에 성공했다면 우루과이가 탈락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루과이가 2무 1패, 골 득실 -5였는데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간신히 4위를 차지해 16강에 올랐기 때문이다.[31] 정확히 말하면 윤덕여 역시 그 때 프란체스콜리와 몸싸움을 주고 받긴 했다. 적어도 쌍방 경고로 끝나야 하는 상황인데 툴리오 라네세는 오직 윤덕여에게만 경고를 주어서 편파판정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32] 오프사이드 룰은 무조건 '''하프 라인 너머 상대 진영에 있을 때만 적용된다.'''[33] 다만 아쉬운 것은 이렇게 억울하게 패배했는데도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이나 한국 선수들이나 모두 망연자실해서 적극적으로 항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심판들이 장난질을 하는데도 적극적으로 항의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판정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아직까지 개선이 거의 안 되고 있다.[34]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탈리아가 16강 상대로 만만한 우루과이랑 만나려고 억지로 우루과이의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설이 있다. 하필 라네세 이 자가 이탈리아인이었기에 더욱 그런 음모론이 잘 먹혔다. 만약, 이 때 우루과이가 한국을 이기지 못했으면 오스트리아가 16강에 가게 되고 이탈리아의 대진 상대는 콜롬비아가 되었을 것인데 이 당시 콜롬비아의 전력은 우루과이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는 평을 받았었다. 실제로 이 때 콜롬비아는 약체 한국을 상대로도 비실거리다 심판 편파판정 덕에 겨우 1 : 0으로 이긴 우루과이와 달리 이 대회 우승팀인 서독과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로 선전하기도 했다.[35] 다만 텍사스란 지역 자체가 건조한 곳이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고온다습한 찜통 더위는 아니고 중동 지역 같이 고온건조의 뜨거운 더위에 가깝다.[36] 그 유명한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의 숙부이다.[37] 이 때 하석주가 볼 찬스를 날린 것이 한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왼발을 단련하여 ''''왼발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38] 하지만 이 골을 터뜨리고도 황선홍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 때 황선홍은 가볍게 주먹을 쥐며 한 번 포효하는 것으로 골 셀레브레이션을 마쳤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심정은 기뻤다기보다는 '왜 이제야 들어가는 거야?'에 가까웠다고 한다.[39] 만약 당시 한국이 볼리비아를 1 : 0으로 이겼다면 한국이 16강에 진출하고 대신 이탈리아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되었다.[40] 져주기 논란이 있었던 것은 차기 대회 공동 개최국인 일본의 본선 진출을 위해 일부러 져준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당시 태극전사들의 플레이가 눈에 띄게 무기력했기에 더더욱 그런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차 감독은 당시 한국은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지만 일본은 이 경기마저 지면 탈락이었기에 사생결단으로 나왔고 그 때문에 진 것이라고 해명했다.[41] 게다가 1차전에서 주전 공격수인 파트릭 클라위버르트가 퇴장당하는 악재까지 겹쳤다.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는 8강전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오게 된다.[42] 참가국이 24개국이었던 1994년 미국 월드컵까지는 2패를 당해도 와일드카드 제도에 의해 16강 진출 여부에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부터는 참가국이 32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와일드카드 제도가 없어지게 되어, 최종 4위는 물론 최종 3위도 역시 무조건 탈락이 확정되게 되었다.[43] 참가국이 32개로 늘어난 이후의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무승부로 마친 경기가 1경기라도 있는 상태에서 한 팀이 2패를 당하면 이후 남은 1경기에서 아무리 큰 점수차로 이겨도 조 2위조차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조기 탈락이 확정된다. 당시 한국이 속했던 E조의 경우, 이미 네덜란드 대 벨기에 경기가 0:0 무승부로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1:3,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 0:5로 지면서 한국의 조기 탈락이 확정된 것이다.[44] 이후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도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 한국과의 3차전 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0:1로 뒤지자 골문을 비우고 공격에 가담했다가 주세종한테 공을 빼앗기고 결국 손흥민한테 추가골을 얻어맞는 치욕을 당했다.[45] 참고로 이 경기가 차두리가 데뷔골을 넣은 경기이다.[46] 이을용이 페널티킥을 실축하자 거스 히딩크 감독은 박 코치에게 "그냥 이천수가 차게 내버려두지 그랬냐?"고 엄청 성을 냈다고 한다. 박 코치로서는 매우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워낙 이 경기가 안 풀렸기에 히딩크 감독도 예민해서 그랬나보다 하고 이해했다고 한다.[47] 두 다리를 양발로 감아서 비틀어버렸기에 자칫 잘못했으면 이 때 박지성의 선수 생명이 끝장날 뻔했다.[48] 당시 주심이었던 앙헬 산체스는 아르헨티나 사람이었는데 이틀 전인 6월 12일에 조국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경기 전부터 심히 심기가 불편하고 예민한 모습을 보였는데 포르투갈 선수들의 이런 행동 때문에 더욱 크게 분노한 것이다. 이 때 산체스 주심을 적극적으로 말린 인물이 지금 현 한국 대표팀 감독인 파울루 벤투였다.[49] 특히 당시 한국에선 반미 여론이 극에 달한 시점이었고 포르투갈 대표팀도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이 사실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50] 문제는 이런 파울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보질 못해서 비에리는 카드 1장도 안 받았다.[51] 경기 영상을 다시 보면 알겠지만 포지션을 선점하고 있었던 사람은 비에리가 아니라 최진철이었고 최진철은 비에리의 유니폼을 잡아당기면서까지 비에리의 힘을 역이용해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공을 머리에 맞추지 못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에리는 최진철의 방해를 뿌리치고 헤더 골을 성공시켰다. 그만큼 비에리가 얼마나 괴물 같은 피지컬과 힘을 지닌 자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인지 최진철은 경기 후에 "비에리 그 선수 힘이 아주 천하장사더군요."라고 회상했다.[52] 실제 박항서 코치에게 전달한 교체 지시 사항에도 "공격수만 투입하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53] 비에리가 오른발을 잘 못 썼던 것도 있지만 급한 마음에 낮고 빠른 크로스를 무작정 발부터 갖다 대는 바람에 홈런이 되어버렸다. 이건 이탈리아에 있어 정말 결정적인 득점 찬스였는데 급한 마음에 이렇게 날린 것이다. 비론 모레노 주심 또한 "가투소의 패스를 하늘로 날려버린 건 내 잘못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판정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골 찬스가 왔을 때 골을 못 넣은 이탈리아 자신들이나 되돌아보라는 일침인 것이다.[54] 당시 모레노 주심의 표정은 상당히 압권이었는데 이 장면이 패러디 되어 배우 임채무는 모레노 심판 역으로 돼지바CF를 찍기도 하였다.[55] 특히 이탈리아 선수들은 이 경기에서 습관적으로 팔꿈치를 휘둘렀는데도 주심의 제지가 너무 약했다. 이렇게 팔꿈치 공격을 하던 이탈리아는 결국 적군과 아군도 구분 못하고 다미아노 톰마시가 한국의 세트피스 상황에서 같은 팀 동료 프란체스코 코코를 팔꿈치로 쳐서 부상을 입히는 촌극을 만들었다.[56] 그 밖에 당시 안정환의 소속팀 페루자 칼초의 구단주 루치아노 가우치는 "소속팀의 국가를 상대로 득점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했다."는 해괴한 이유로 일방적으로 안정환을 방출했으며 이탈리아 훌리건들은 현지에 있던 안정환의 자택을 습격해 박살을 내는 만행을 저지른데다 살해 위협까지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 이혜원이 대신 이탈리아로 가서 짐 정리를 하고 왔다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택은 물론이고 자가용 스포츠카까지 모조리 부숴놨다고 한다.[57] 당시 같은 페루자 소속 안정환의 동료 선수들은 안정환을 방출하는 게 말이 되냐며 하나 같이 자기 소속 구단을 깠다. 당시 안정환은 페루자의 핵심 선수 중 1명이었으며, 축구계 거물급 인사인 프란츠 베켄바워 마저 극찬한 선수를 비뚤어진 애국심으로 방출한다는 것 자체가 촌극이나 다름없었으니...[58] 다만 이걸로 모리엔테스의 골든골이 억지로 취소되었다고 보면 곤란하다. 골이 들어가기 전에 이미 주심의 휘슬이 울렸기 때문이다. 주심이 먼저 휘슬을 불었기 때문에 이운재 골키퍼도 딱히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59] 조별리그 2차전에서 만난 심판을 또 만났다.[60] 마이어라는 성씨는 독일어권에서 매우 흔해빠진 성씨 중 하나다. 뜻은 '골짜기'라는 뜻인데 독일어권 성씨들은 조상의 직업이나 거주지에서 유래한 것이 많다. 즉,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을 총칭해서 마이어라고 불렀고 그게 성씨가 된 것이다. 윗골짜기에 살면 '오버마이어', 아랫골짜기에 살면 '운테마이어', 뒷골짜기에 살면 '힌터마이어'가 된다. 성씨가 없던 시절에 한스라는 이름을 쓰는 독일인이 있고 그가 산골짜기에 살면 그를 '산골짜기 한스'라고 불렀고 그게 성씨로 굳어져서 '한스 마이어'가 되는 식이다. 16년 후 한국 VS 독일 경기에서도 심판이 독일계 미국인이었다.[61] 예외가 있다면 우루과이다. 우루과이는 월드컵 2회 우승국이지만 유니폼의 ★ 개수는 4개이다. 그 이유는 월드컵 우승 2회와 월드컵이 열리기 전 올림픽 축구 우승 2회를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62] 정확하게는 '''11초'''로 월드컵 최단시간 득점이다.[63] 이 남미 2연전 당시 얼마나 분위기가 가라 앉았던지 기초군사훈련 중이던 안정환까지 국방부에 협조를 구해 대표팀에 급하게 차출시켰을 정도였다.[64] 잉글랜드와 포르투갈의 8강전에서는 호날두의 고자질로 루니를 퇴장시켰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결승전에서는 연장후반, 지단에게 레드카드를 내보였으며, 독일과 코스타리카의 개막전에서도 주심을 본 인물이다.[65] 이란-D조 4위, 일본-F조 4위, 사우디아라비아-H조 4위[66] 1998년에 대한민국이 이 점수로 멕시코에 패배하였다.[67] 그나마도 이란이 선제골을 먹었다. 이 때 앙골라가 기록한 골이 그들의 월드컵 첫 골이었는데 앙골라 대통령은 득점자 플라비우에게 15만 달러 상당의 집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68] 많은 이들이 프라이에게 패스가 갈 때 이호의 발에 맞고 갔기 때문에 온사이드라고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틀렸다. 패스가 갈 때 상대 수비의 몸에 맞았느냐 안 맞았느냐는 오프사이드를 판단하는데 고려 대상이 아니다. 당시 상황은 이호가 의도적으로 백패스를 한 게 아니고 그냥 스위스 선수의 패스가 이호의 발에 맞고 프라이에게 갔기 때문에 프라이의 위치가 오프사이드였다면 이호의 발에 맞고 안 맞고는 아무 관계 없이 그냥 오프사이드다. 그러나 온사이드였던 건 앞서 말했듯이 김진규의 다리 하나가 못 빠져 나와서 프라이가 김진규보다 뒤쪽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카잔의 기적 때 김영권의 골은 뭐냐고 할 수도 있는데 그 상황은 손흥민의 코너킥이 토니 크로스에게 갔고 토니 크로스가 그걸 받아서 니클라스 쥘레에게 백패스를 하려다가 김영권에게 흘러간 것이기 때문에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른 상황이다. 즉, 프라이의 골은 스위스 선수의 패스가 그냥 이호 발에 맞고 지나간 것 뿐이고 김영권의 골은 토니 크로스가 의도적으로 백패스를 하다가 실수해서 나온 것이란 뜻이다. 상대 선수의 백패스는 역시 오프사이드 판단 대상이 아니므로 김영권의 위치는 어디에 있든 아무 관계가 없었다.[69] 하지만 2018-19 네이션스리그에서 스위스는 현 피파랭킹 1위 벨기에를 5:2로 도륙내며 더 이상 회장빨 축구가 아닌 이제는 오로지 실력으로 승리를 챙겨가고 있다. 거기다가 제르단 샤치리, 그라니트 자카, 리카르도 로드리게스, 하리스 세페로비치, 아드미르 메흐메디, 브릴 엠볼로, 데니스 자카리아, 마누엘 아칸지, 프랑수아 무반제 등 이민자 출신들이 증가함과 동시에 실력도 무럭무럭 자라남으로서 점점 상승세를 타고 있다. [70] 자세히 확인된 사항은 아니지만 핌 베어벡 감독을 불구대천의 원수 취급했을 정도로 싫어했던 조광래 감독이 이같은 선수 차출 거부를 주도했다는 설이 있다.[71] 이것이 이운재의 A대표팀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승부차기였다.[72] 당시 베어벡 감독은 국대와 올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사퇴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두 자리가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술위원회는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늑장을 부렸다가 결국 외국인 후보들에게 모두 까였고 결국 부랴부랴 당시 전남 드래곤즈 감독으로 있던 허정무와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있던 박성화를 각각 국대, 올대 감독으로 빼앗아갔다. 특히 박성화는 부산 감독으로 선임된지 불과 17일 만에 올대 감독으로 갔다.[73] 본래 북한 원정 경기는 평양에서 열려야 하는데 당시 남북관계가 극악이었던 이명박 정부 시절이라 북한 측에서 대한민국 대표팀 입국을 거부했고 결국 대한민국 VS 북한의 경기 중 북한 홈 경기는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다. 다만 대한민국의 홈 경기는 그대로 서울에서 열렸고 인공기도 게양되었고 북한 애국가도 정상적으로 연주되었다.[74] 그러나 이 골이 터질 당시에 아르헨티나 측에서 파울을 범했기 때문에 본래 이 골은 노골이어야 하는데 심판의 오심 때문에 득점으로 인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아르헨티나는 조별리그 1차전부터 16강전까지 매 경기마다 알게 모르게 심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75] 물론 태권축구 사진으로 유명한 그 사진 속 상황은 허 감독이 고의로 마라도나를 걷어찬 것이 절대 아니었다. 볼 경합 도중 공을 걷어내려다가 재수없게 마라도나가 맞은 것인데 마라도나의 엄살 가득한 표정과 오묘한 각도 때문에 허 감독이 마치 마라도나에게 날아차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다.[76] 오른쪽 라인이 허약했던 이유는 공수 양면에 크게 기여하는 박지성과 달리 이청용은 전혀 수비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오범석 혼자서 수비를 전담해야 했다.[77] 하지만 이 때 이과인의 위치는 명백히 오프사이드였다. 그러나 주심, 부심 모두 오프사이드 선언을 하지 않는 오심을 범했다.[78] 그래도 나이지리아가 선취골을 넣고도 이기지 못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나이지리아가 그리스를 잡았다면 대한민국의 경우의 수는 3차전에서 오직 승리뿐이기 때문이다.[79] 이 때 SBS에서 중계를 하던 부친 차범근 해설위원은 '''"아, 차두리. 사람을 놓쳤어요!"'''(....)라고 강하게 질타했다.[80] 하지만 야쿠부의 위치는 오프사이드였다. 그러나 선심이 오심을 범해 깃발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심이 페널티 박스에서 정확히 보고 있었기에 만일 야쿠부의 슛이 골망을 흔들었어도 아마 오프사이드로 득점 무효를 선언했을 것이다.[81] 한편, 영국 BBC 해설위원은 이런 야쿠부의 슛을 보고 '''"저건 할머니도 충분히 넣을 골인데 말이죠."'''라며 깠다.[82] 이 때 우리가 오심으로 이득을 본 게 하나 있는데 공격에 가담한 막시 페레이라가 문전에서 슛을 했고 그걸 기성용이 육탄방어로 막아냈는데 그 때 볼이 기성용의 팔에 맞았다. 보기에 따라서 고의성이 다분한 것으로 판단해 페널티킥을 줄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이 경기 주심이 거의 직무유기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나는 관대하다' 모드로 나갔기에 그냥 넘어가버렸다.[83] 여담으로 이것이 우루과이의 이번 대회 첫 실점이었다.[84] 이 때문에 이동국은 무진장 욕을 퍼먹었다. 그 때 그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이동국의 오른발이 공에 빗맞았다. 제대로 임팩트가 되지 않았기에 저런 힘없는 슈팅이 나온 것이다.[85]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승점은 7차전까지는 14점으로 동일했다. 다만 한국의 조는 이란과 우즈베키스탄도 차곡차곡 승점을 쌓아 끝까지 경쟁해야 했지만 일본의 조는 이상하게 호주가 비실거려서 전혀 견제를 못해줬기에 승점이 같았어도 극과 극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또 일본이 컨페드컵 참가를 이유로 자청해서 경기를 먼저 치르는 5번 슬롯으로 배정받은 것도 한몫했다.[86] 특히 월드컵 전 최종 평가전에서 '''월드컵 본선에 나가지도 못한''' 튀니지를 상대로 0 : 1 패, 그리고 가나를 상대로 0 : 4 완패를 당하며 기대치를 바닥까지 깔아버렸다. 심지어 튀니지전은 원정도 아니었고 '''상암에서 치렀다'''![87] 사실 정말로 당시 할릴호지치 감독과 알제리 축구협회 측의 알력이 심했던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독과 선수들까지 완전히 척을 지며 싸우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상황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그걸 필요 이상으로 많이 보도하면서 팬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현혹시킨 것은 언론이 책임져야 한다.[88] 이 경기의 졸전 때문인지, 독일은 8강 프랑스전부터 람을 다시 라이트백에 배치시키는 정상적인 포백을 가동했으며, 한층 나아진 경기력으로 대회에서 우승하기까지 한다. 특히 제자리로 돌아간 람은 그 다음 경기에서 2도움이나 기록하며 맹활약을 펼쳤다.[89] 다만 독일이 굳이 람을 수미로 기용한 이유는 당시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인 사미 케디라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풀컨디션이 아니어서였을 수도 있다. 둘 다 선발 라인업에 복귀한 8강전부터 람이 우측면으로 돌아간 걸 보면 그럴듯하다.[90] 축구에서 골은 라인을 완전히 통과해야 골로 인정된다. 라인에 공 일부분이 조금이라도 걸려 있으면 그건 골이 아니다.[91] 이 때 반덴 보르는 이청용의 살인 태클로 인해 전치 4개월치 부상을 입어 월드컵에서 중도 하차해야 했다고 한다.[92] 1994 미국 월드컵에선 사우디아라비아가 2승을 기록했고 1998 프랑스 월드컵 때에도 이란이 1승을 기록했으며 2002 한일 월드컵 때엔 한국이 3승, 일본이 2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2006 독일 월드컵 때에도 한국이 1승을 기록했으며 2010 남아공 월드컵 때에도 일본이 2승, 한국과 호주가 각각 1승을 기록해 5개 대회 연속으로 아시아 팀이 무승으로 끝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아시아 팀 전체 3무 9패에 그치며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93] 탈락 정도가 아니라 1승도 못 거둔 징크스다. 1986년 월드컵 이후, 조별리그에서 무승으로 짐을 싼 대회가 5차례였는데, 그 중 벨기에와 편성된 경우가 3번이다.[94] 당시 미얀마 국내 사정이 좋지 못해서 경기는 태국에서 치렀다.[95] 그나마 한국은 이기기라도 했지만 당시 일본은 '''홈에서 싱가포르와 맞붙어 0 : 0으로 비겼다.'''[96] 당시 시리아가 내전 중이어서 안전을 위해 경기는 말레이시아에서 치러졌다.[97] 하지만 신 감독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사대주의에 찌들대로 찌들었던 한국 축구팬들은 신태용 감독에 대한 공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고 ''''토니 그란데 감독\'''' 덕분이라고 할 정도였다.[98] 30번째로 호명된 국가는 파나마였는데, 순서대로라면 파나마가 F조로 가야 하겠지만, F조에는 같은 대륙의 멕시코가 있는데다 대륙별 안배 원칙에 따라서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들은 같은 대륙 국가들끼리는 한 조가 될 수가 없다는 방식 때문에 거기로는 갈 수가 없었고, 대신 G조로 가서 벨기에, 튀니지, 잉글랜드와 한 조를 형성하게 되었다.[99] 이때 분위기는 전 월드컵의 홍명보호 그 이상으로 쌀쌀맞았으며, '''대한민국 전체가 신태용호의 적'''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100] 사실 이전부터 호엘 아길라르 이 양반은 좀 자질 논란이 있었던 양반이었다. 즉, 본래부터 그다지 유능한 심판은 아니었던 셈이다.[101] 2017-2018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레알 마드리드 vs 리버풀) 주심을 맡았다.[102] 반드시 독일이 스웨덴을 이겨야만 우리는 나흘 더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만일 스웨덴이 독일을 이기거나 양 경기가 무재배로 끝나면 우리는 그냥 망했어요가 되어 버린다.[103] 앞서 B조 2차전 포르투갈 VS 모로코 경기를 맡았으며 경기 후 "호날두 유니폼 논란", "모로코 VAR 미판독 논란"으로 구설에 올랐다. 참고로 '''독일계 미국인'''이다.[104] 이 때 부심이 깃발을 내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는데 그 표정이 참 얄밉기 짝이 없었다.[105] 독일인이 찍은 이 동영상9분 대의 상황을 보면 골대 뒤의 관중들은 명확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판정은 오심이었다.[106] 김영권에게 온 패스가 우리 선수가 한 것이 아니라 상대 선수의 백패스였기 때문에 김영권의 위치는 어디에 있든 아무 관계 없었다. MBC의 서형욱은 2006년 스위스전과 비슷한 상황이란 식으로 설명했지만 사실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알렉산더 프라이의 골이 온사이드인 이유를 패스가 가는 중간에 이호의 발에 맞았기 때문으로 알고 있지만 패스가 갈 때 상대 선수 몸에 맞고 안 맞고는 오프사이드를 판단하는 데서 제외된다. 즉, 이호의 발에 맞고 안 맞고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의 골이 온사이드인 이유는 애초에 패스가 갈 때 김진규의 다리가 못 빠져 나와서 프라이가 김진규 뒤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호와는 아무 관계없다.[107] 주세종의 패스가 가는 시점에서 손흥민이 하프 라인 아래 우리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온사이드였다. 오프사이드 룰은 무조건 하프 라인 너머 상대 진영에서 패스를 주고 받을 때만 적용된다.[108] 1라운드 탈락 자체는 1938 프랑스 월드컵 이후 80년 만의 일이지만 그 때는 1라운드도 토너먼트였다.[109] 미네이랑의 비극 당시 호나우두가 해설위원으로서 중계를 하면서 조국 브라질이 1 : 7 대패를 당하는 모습과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자신의 득점 기록을 깨는 것을 목도했는데 불과 4년 뒤에 그 미로슬라프 클로제는 관중석에서 자신의 조국 독일이 대한민국에 0 : 2로 패배해 사상 최초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광경을 목도하는 묘한 데자뷰 현상을 일으켰다.[110] 다만 브라질도 그래놓고 8강에서 탈락하며 찝찝하게 대회를 마무리하긴 했다. 물론 독일에 비해서는 양반이었지만...[111] 예선전 공인구는 피파에서 정하는 게 아니라 경기 당사국에서 결정한다.[112] 2020년 2차 예선 원정은 스리랑카 밖에 없다.